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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멍청한 표정으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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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 누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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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는 외견만 보면 서란보다 어려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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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절대로 인간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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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단기 수도자에 버금가는 정순한 법력과 머리에 달린 나뭇가지처럼 생긴 사슴뿔이 그 증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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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가 고함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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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녀석이 훔쳐간 여의주의 주인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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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반사적으로 되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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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주라면, 혹시 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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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와 바람, 구름과 번개를 자유자재로 부리며 하늘을 고고히 떠도는 전설 속 영물이 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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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이 인계를 벗어나 온전히 승천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게 바로 여의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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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디로 여의주는 용의 내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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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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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이 몸이 바로 그 용이시다! 그러니까 빨리 여의주 내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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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더니 서란의 멱살을 열심히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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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캑, 캐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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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이 졸린 서란이 열심히 죽는소리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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깜짝 놀란 용이 손아귀에서 힘을 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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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혀 있던 호흡이 재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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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숨에 들어온 신선한 공기가 곧장 혈액을 타고 뇌로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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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즉시 지난 기억을 되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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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주라고 하니까 분명히 둥근 구체려니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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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는 과거의 풍경 속에서 어떤 형상이 툭 튀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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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흙탕에서 주웠던 수정 구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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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리셨다는 여의주라는 게 혹시 이 정도 크기를 가진 수정 구슬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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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에 다급하게 제 주먹을 쥐어 보이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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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아, 분명히 그 정도 크기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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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이 살짝 당황한 채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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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용이 생각했던 여의주 도둑 체포 현장은 이런 모습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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뻔뻔하게 발뺌하는 파렴치한에게 끔찍한 벌을 내려주는 게 도보 여행 도중 곱씹었던 계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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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주라는 천고의 보물을 훔쳐간 주제에 이토록 고분고분하게 실토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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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어떻게 된 일이냐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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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수정 구슬을 줍게 된 경위를 처음부터 끝까지 자세하게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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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은 일단 잡고 있던 멱살을 놓아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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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차분하게 서란의 해명을 경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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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모든 전후 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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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의 원흉은 용이 손수 만든 제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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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재주가 부족해서 약간 허술하게 마감된 건축물이 비바람을 견디지 못하고 부서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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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산을 대굴대굴 굴러내려간 여의주는 진창에 빠졌고, 표면을 감싼 진흙이 절연체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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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번개를 담지 못하고 그냥 불완전한 여의주로 남게 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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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이 털썩 주저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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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구나... 전부 내 잘못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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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크게 좌절한 용을 격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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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상심하지 마세요. 번개야 다시 담으면 되죠. 제가 상자에 잘 보관해 놨어요. 돌려드릴 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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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을 떨던 용이 고개를 번쩍 들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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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에서 주운 여의주를 다시 돌려 주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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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맞은 것이 아니라 실수로 잃어버린 것이라면 주운 사람이 여의주의 새로운 주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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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용은 다른 이의 여의주를 빼앗으면 영원히 승천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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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몰래 훔치거나 거짓말로 속여서 건네받는 것도 불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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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용은 솔직하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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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잘 모르는 모양인데 용이 실수로 흘린 여의주는 주운 사람이 임자다. 너는 신선이 되겠다고 수행하는 수도자가 아니더냐. 그런데도 돌려주겠다고? 여의주만 있다면 손쉽게 선계에 갈 수 있는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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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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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주를 만드는데 얼마나 걸렸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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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 육백 년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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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저도 필요 없어요. 아마 마음이 불편해서 수행에 방해가 될 것 같네요. 게다가 저는 천재니까 여의주 같은 거 없이도 비승할 자신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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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생에는 승천할 수 없을 거라고 절망하던 용이 눈물을 끌썽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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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정말로 고맙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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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어서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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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과 용은 사이좋게 오죽문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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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몇 걸음 걷다가 용이 철퍼덕 엎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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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평생은 물속에서, 나머지 절반은 하늘에서 살았더니 직립 이족 보행에 너무 서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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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서란이 만든 점토인형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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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강한 연민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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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주를 잃어버려서 날지 못하게 되신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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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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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주를 분실한 용은 더이상 날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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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잉어와 다를 바가 없는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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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수 있는 건 고작 튀어오르기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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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쪼그려 앉아 등을 보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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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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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은 입고 있던 거적때기 밑자락을 들추며 서란의 어깨 위에 올라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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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꼬마가 땅꼬마를 목말 태우는 진풍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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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의 목덜미에 차가운 살갗이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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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 뿔이 있길래 수컷인줄 알았는데 암컷이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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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의문을 해결한 서란이 근처에 추락한 석연화로 달려가서 냉큼 올라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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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문패 발급소 앞에서 서란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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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성함이 어떻게 되시나요? 방문패를 발급할 때 필요해서 그러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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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의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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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완전한 용에게는 이름 같은 건 불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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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그냥 용녀님이라고 부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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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좋을 대로 하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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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수대로 간 서란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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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분은 용녀님이십니다. 사정이 있어서 오죽문에 방문하실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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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곤에 찌든 담당자가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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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함이 용녀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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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별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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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없음. 그러면 종족은 사람입니까? 겉으로 봤을 때는 아닌 것 같은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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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잠깐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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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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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종족은 영물. 체류 기간과 방문 목적이 어떻게 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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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문 목적은 지인을 만나는 것이고, 체류 기간은 사흘 이내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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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에게 방문, 기간은 사흘 이내. 잠시 얼굴 좀 확인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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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무릎을 한껏 굽히자 용과 담당자가 시선을 마주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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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나 작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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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당자는 시답지 않은 감상과 함께 방문객의 특징을 기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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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에는 사슴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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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채는 엷은 청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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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장히 작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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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다음 열심히 서류를 작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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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문 기간, 체류 목적, 종족은 영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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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증인은 축기기 수사 류서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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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없음, 별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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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명이 뭐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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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녀 어쩌고였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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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아니라 어쩌고 용녀였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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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수 창구 밖으로 고개를 모로 내민 담당자가 용을 올려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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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녀, 조그마한 용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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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당자가 눈을 번뜩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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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다, 소용녀라고 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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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장 나무패에 소용녀라는 글자를 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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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담당자가 패를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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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용녀가 방문패를 받아서 자기 뿔에 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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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히 의미 있는 행동은 아니고 그냥 습성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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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용녀를 어깨에 짊어지고 귀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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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장 이층으로 올라가서 기념품 상자를 뒤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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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온갖 잡동사니가 쏟아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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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열매 씨앗, 금강호용자의 비늘, 발광석 두더지-인간 조각상, 금영영과 짝으로 구매한 삿갓 등등 많은 물건이 들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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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중에서 투명한 수정 구슬을 집어들어서 머리 위로 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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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있습니다, 용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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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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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용녀가 불완전한 여의주를 받고 기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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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법력을 불어넣어서 공명을 시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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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여의주가 소용녀의 혼원법력을 거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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깜짝 놀란 소용녀가 여의주를 유심히 들여다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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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한 수정 구슬 내부에 노란색 법력이 안개처럼 떠다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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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장 눈에 힘을 주고 내려다보니 정토법력으로 전신이 가득찬 서란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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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주가 새로운 주인에게 종속된 모양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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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용녀의 뿔이 찰나에 번쩍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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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은 천기를 읽을 줄 아는 영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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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 사슴을 닮은 그 뿔로 하늘과 교신해서 삼라만상에 관한 다양한 비밀을 내려받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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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비유하자면 피뢰침과 비슷한 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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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적으로 천기를 읽은 소용녀는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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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의 천부적인 영기 감응 능력이 원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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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까지 닿을 믿기지 않는 재능이 무의식적으로 여의주를 종속시킨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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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관점에서 보면 진창에 빠진 여의주를 서란이 발견한 것도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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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용녀는 금방 해결책을 떠올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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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다른 가능성도 함께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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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서란에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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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여의주를 돌려주겠다던 그 결심은 아직도 변하지 않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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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의문을 가지고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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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여의주라면 이미 돌려드리지 않았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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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주가 이미 너를 진정한 주인으로 선택했다. 그냥 평범한 물건 넘기듯 건네준다고 종속 관계가 바뀌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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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어찌해야 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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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주를 완전히 통제한 뒤에 소유권을 넘길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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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에 무슨 특별한 의미가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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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용녀가 진지하게 답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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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주를 다룰 수 있는 건 오직 용뿐이다. 반대로 여의주를 완전히 통제할 수 있다면 용이 될 수도 있지. 네가 나에게 여의주를 돌려준다는 건 용으로 다시 태어날 기회를 포기한다는 소리나 다름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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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히 용이 분실한 여의주를 이용해서 수행 속도를 가속하는 것과는 천지 차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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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주에게 자격을 증명하면 서란은 화신기 수도자가 아니라 용이 되어 승천할 수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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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자의 최종 목표인 영생을 손에 넣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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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용녀가 다시 한번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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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래도 결심이 변하지 않았느냐? 모든 수도자가 추구하는 영생을 포기하고 고작 작은 선행을 하겠다고? 너는 불멸의 존재가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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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침묵하던 서란이 되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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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녀님은 어째서 수행을 시작하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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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그저 본능적으로, 용이 된 뒤에는 오로지 승천을 위해서 수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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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역시 돌려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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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생을 마다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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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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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용녀의 용안이 서란을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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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의 눈은 진실과 거짓을 구분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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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지금 진실을 말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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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용녀가 멍하니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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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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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존귀한 사람이 되고 싶어서 수행을 시작했습니다. 용녀님의 꿈을 좌절시키면서까지 영생을 얻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그다지 내키지가 않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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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마친 서란이 쑥스럽다는 듯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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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용녀는 서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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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금이 찾아올 때까지, 세 예술가는 채석장을 떠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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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과 담청은 원래부터 하는 일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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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방 선생 호혜문도 요즘은 한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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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방학 기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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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목표는 거대인형 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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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의견이 나와도 제지하는 사람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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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 과정은 지나치게 순조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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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공 세 명이 열심히 노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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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급 재료가 부족하다는 현실적인 벽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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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이 합당한 지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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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지금 가진 소재가 너무 적구나. 얼마나 거대한 인형을 만들 것인지는 둘째치고 재료부터 구해야하는 것 아니냐? 이대로라면 기껏해야 머리 하나 완성하고 동이 날 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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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득도한 서란이 눈을 반개하고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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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 님, 어찌하여 그런 걱정을 하십니까. 좋은 소재가 없다면 덜 좋은 소재를 사용하면 그만인 것을... 돌이라면 이 채석장에 있는 것으로도 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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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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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란 담청이 숨을 크게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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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공 셋을 태운 배는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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흩어진 일행이 바위를 굴려 한곳에 모으던 중, 호혜문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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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석재들의 크기가 별로 만족스럽지 않군요. 거대인형을 만들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이것보다는 커다란 덩어리가 필요하지 않나요? 차라리 작은 돌산이라도 하나 깎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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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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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 또한 무의미한 욕심... 바위가 작다면 요철을 만들어서 서로 조립하면 됩니다. 마치 벽돌담처럼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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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법 한 번에 해탈해버린 호혜문이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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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어리석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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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 거센 물살을 힘차게 갈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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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재를 어느 정도 모은 일행은 일단 머리부터 시험 제작 해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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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작성한 설계도에 따라서 가공된 석재 블록이 사람 키보다 높이 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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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조립만 하면 머리가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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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괴한 형상의 바위들을 이리저리 조립하던 도중, 담청이 의문을 표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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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접착제는 사용하지 않는 것이냐? 아무리 딱 맞게 조립해도 결합부가 요철뿐이면 곤란할 것 같구나. 강한 충격이라도 받으면 맞물린 접합부가 파손되면서 연쇄적으로 분해될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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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력 접착제는 굉장한 고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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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폭 삭감당한 개발비로는 감당이 불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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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돈이 없어도 미학을 추구할 수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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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소 몰상식한 사람이 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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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을 버린 자, 류서란은 멈추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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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거대인형에게 접착제는 필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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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비상식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한 어리석은 용이 다시 한번 질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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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러면 내구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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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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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의 검지손가락 담청의 입술을 지그시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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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구성 같은 사소한 걱정을 하시다니. 담청 님 답지 않게 자꾸만 범인처럼 생각하시는군요. 중요하니까 반드시 기억해두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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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뜩 집중한 담청과 호혜문에게 서란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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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을 지키는 갑옷이란 화살이 두려운 범인에게나 어울릴 하찮은 물건입니다. 진정한 강자에게는 피격 상황을 상정한 방어 수단이 불필요한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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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혜문이 눈을 크게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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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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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습니다. 내구성이 부족해서 걱정이십니까? 애초에 맞지 않을 자신이 있다면 신경쓸 필요조차 없습니다. 할 수 있습니다, 저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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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맨몸 회피 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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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혜문의 얼굴이 발갛게 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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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갑자기 언변이 유창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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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코 외물에 의지하지 않겠다는 그 결연한 의지, 잘 들었습니다! 그야말로 가시밭길을 묵묵히 전진하는 구도자에게만 허락된 품격! 역시 저의 눈은 틀리지 않았어요! 류 수사가 품고 있는 권각술을 향한 무한한 사랑과 함께라면, 우리는 진리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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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능을 추구하는 권각술 애호가의 열렬한 반응에 담청도 약간 솔깃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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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생각해보니 접착제는 필요가 없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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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은 하하호호 웃으며 조립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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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 이미 육지에 도착했건만, 아무도 노젓기를 멈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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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 과정에서 무수한 문제가 속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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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머리, 몸통, 양팔이 완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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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꼽 아래에는 주요 추진 기관을, 양손에는 보조 추진 기관을 부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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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눈에는 광자포가 탑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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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 삼아 비행해봤더니 추진력이 부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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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격을 전부 피하기에는 속도가 좀 느리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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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팔을 여러 개 달아버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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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혜문은 적극 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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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먹이 무려 여섯 개! 완전 무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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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조 추진 기관이 세 배로 증가하자 최고 속도 역시 큰 폭으로 증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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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파괴광선의 명중률이 곤두박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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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준을 위한 머리의 회전 속도와 거대인형의 이동 속도 간의 월등한 격차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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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해결 방법이 마땅치 않다는 게 호혜문의 주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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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로서는 이 속도가 가장 최선입니다. 여기서 더 빨리 회전시키면 소재가 버틸 수 없어요. 즉시 목이 분리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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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전 속도는 변경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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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해결 방법은 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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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전 각도를 좁히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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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도 여러 개 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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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무이한 비인간, 담청은 감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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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가 세 개? 정말로 강해 보이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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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통 세 개가 뒤통수를 맞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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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정삼각형, 사각이 완전히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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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에 발사하는 화력도 세 배로 강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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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의미로 땅 짚고 헤엄치던 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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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인적인 노젓기가 배를 산꼭대기까지 올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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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공이 셋이나 있어서 벌어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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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두육비 거대인형은 그렇게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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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 기관을 일체 배제한 수동 조작 인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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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조작 방법도 끔찍할 정도로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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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작 설명서만 열 권이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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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상황이었다면 이쯤에서 개발이 중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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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류서란은 탈범인 초천재 일영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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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각기 좌우로 회전하는 머리, 세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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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좌우 따로따로 움직이는 눈알, 여섯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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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동작에도 서로 관절이 꼬이는 팔, 여섯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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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 닿은 오성이 끝내 조종에 성공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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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줄기 광채를 뿌리며 인형이 하늘을 날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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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거대한 가오리연을 보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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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석장에 도착하자마자 그 장엄한 광경을 목격한 이아금이 감탄사를 내뱉은 것도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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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제정신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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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상식적인 반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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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금은 삼두육비 거대인형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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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도대체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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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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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두육비 거대인형이야, 우리가 만든 걸작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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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쭐한 표정을 보니까 정말 쥐어박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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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리 아래는 왜 아무것도 없어? 아직 미완성이라서 그런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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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나는데 다리가 왜 필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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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반신이 없는 삼두육비 어쩌고는 팔 네 개를 다리 삼아서 지상에 착륙한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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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이랑 머리는 또 왜 이렇게 많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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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바로 미학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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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뒤를 돌아보자 자문 위원들도 동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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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아요, 저 선명하게 갈라진 팔 근육을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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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가 무려 세 개다. 족히 세 배는 강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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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금은 약간 후회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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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껏 얻은 휴일인데 그냥 방에서 쉴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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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 삼인조가 이아금에게 신제품을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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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 형태란 무엇인가? 낡은 상식을 버려야 한다, 아금아. 삼두육비라는 초현실적인 조형, 여기에 담긴 철학이 느껴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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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에 더해서 이것저것 같이 내려놓은 류서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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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세밀한 근육 묘사를 보렴. 비범한 목 근육은 또 어떻고. 신체 부위가 세 배로 늘어났다는 단순한 차이점에서 비롯된 이 압도적인 박력과 전율, 정말로 감동적이지 않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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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괴한 육체미에 심취해서 몽롱해진 호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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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 셋... 머리가 셋... 세 개의 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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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이상한 전파를 수신했는지 뿔을 번쩍이는 담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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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금도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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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귀가 사람을 어설프게 흉내낸 듯한 조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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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치게 세밀한 묘사로 도달한 불쾌한 골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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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이리저리 끼워맞춘 석재마다 색이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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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시체를 얼기설기 기워 붙인 누더기 괴물, 이아금에게는 그렇게 느껴질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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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서란은 수리와 개선에 효율적인 모듈 형식 디자인이라고 우길 테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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넋이 나간 이아금에게 서란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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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걸작을 가까이에서 감상한 소감은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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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금은 고개를 돌려 서란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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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감에 부푼, 확신 가득한 표정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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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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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예술은 잘 모르지만, 멋진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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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히 어떤 부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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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금은 황급히 말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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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그런데 저 구멍은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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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몸통에 빼곡히 난 구멍을 보곤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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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건 관측창이야. 저 안에 들어간 분신이 저 구멍을 통해서 외부를 관측하고, 나는 그 시야를 공유받는 방식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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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시를 보여주기 위해서 서란이 분신을 생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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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관측창 너머에 갈색 눈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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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공간에 원격 생성된 서란의 분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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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측수의 예리한 눈초리가 사방을 이리저리 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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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과 주인이 시야를 공유하는 고난이도 법술은 인형술 심화편에 도달해야만 습득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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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서란은 거기까지 공부하기가 귀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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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분신이라는 꼼수를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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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때? 이러면 사각도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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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수한 관측창 안에서 분신들이 무표정한 얼굴로 이아금을 지켜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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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한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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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반어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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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며칠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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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두육비 거대인형의 최종 완성이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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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마지막 단계만 남은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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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휴대를 위한 소형화 기능 탑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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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영영의 방천화극 법기나 금중패가 준 붓-구슬 법기에서 영감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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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두육비 거대인형을 구슬로 변신시켜서 휴대하고 다니는 게 서란의 장대한 청사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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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서란은 연기술 전문가를 찾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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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기 장인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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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조금 힘들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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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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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처 예상하지 못한 난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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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 없는 배가 가파른 산꼭대기에서 추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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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과 담청, 금영영은 외출 채비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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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참관 수업이 있는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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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영영은 하품을 하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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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 일어났더니 되게 피곤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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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과 담청의 눈매가 살짝 가늘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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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당장 출발해도 안 늦는다는 보장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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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영영이 하도 안 일어난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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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발 저린 금영영은 황급히 법용술을 운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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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찌의 쇠구슬이 번쩍이더니 방패 법기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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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호자 삼인방은 방패 위에 올라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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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도착한 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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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도에서부터 학생들 글 읽는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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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수업이 시작된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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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은 교실 뒷문으로 살금살금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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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먼저 온 학부모들과 눈이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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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눈인사가 오고 간 이후, 서란 일행은 학부모 무리에 합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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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관 수업은 무난하게 진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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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혜문이 먼저 경전의 글귀를 읽으면 학생들이 한 목소리로 따라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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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풀이가 끝나면 간단한 문제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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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혜문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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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을 아는 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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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손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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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연출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잠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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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묻은 어른이라서 어쩔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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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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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의 대견한 모습을 지켜본 학부모들은 만족한 얼굴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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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돈을 잔뜩 받은 학생들도 기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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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산대붕도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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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호자 삼인방 중 서란이 대표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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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붕아, 너무 펑펑 쓰면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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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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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친구들이랑 잘 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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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산대붕은 인사를 하고 친구들에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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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들 사이에 커다란 오목눈이가 끼어 있는, 뭔가 굉장히 생경한 광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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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자기들끼리는 마냥 즐거운 듯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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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모들과 인사를 나누던 호혜문이 삼인방 쪽으로 다가오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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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관 수업은 어떠셨나요? 혹시 건의 사항이 있다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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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적인 자리라서 그런지 평소처럼 친근한 말투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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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과 금영영이 차례대로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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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학 분위기가 참 좋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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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들의 학구열이 인상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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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혜문과 담청, 금영영의 시선은 자연스레 아직 대답하지 않은 서란에게 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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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거짓말쟁이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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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혜문 선생님의 글방에 대붕이를 입학시킨 건 최고의 선택이었던 것 같습니다. 아, 건의 사항은 딱히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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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의 탐정안이 번뜩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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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 그리고 거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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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건의하고 싶은 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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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오는 길에 담청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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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 사실은 건의 사항이 있었던 것 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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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아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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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그건... 너와 내 사이 아니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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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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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담청 님은 속일 수 없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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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건의 사항이었길래 그러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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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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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계속해서 망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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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옆에 있던 금영영도 거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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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속 시원하게 털어놔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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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서란은 시커먼 속내를 털어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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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학생들 권장 도서 목록에 인형술 입문서를 추가해 달라고 건의하려다가 말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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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영영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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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런 생각을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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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하면 혹시나 다음 세대에는 인형술이 비주류를 벗어날 수 있을까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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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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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짙은 아쉬움을 토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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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일영근자에게는 수도문파 운영에 관한 의결권이 없을까? 그것만 아니었다면 인형술을 필수 교육 과정에 넣었을 텐데... 왜 다들 이 좋은 인형술을 안 배우려고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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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영영은 구태여 대답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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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오죽문과 금작파가 합리적으로 운영되는 집단이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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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어도 삼환문 꼴은 안 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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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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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산대붕과 아이들은 개울가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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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돈은 벌써 다 쓴 지 오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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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들이란 원래 그런 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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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산대붕과 여자애들은 소꿉놀이를, 남자애들은 나무 타기를 하며 놀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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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애 한 명이 치맛자락을 걷어올리고 개울 안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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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납작한 돌멩이 하나를 주워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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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의 상상력이 약간만 가미되면 돌멩이도 물고기가 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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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부 겸 아빠 역할인 소녀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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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 나 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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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찬가지로 어부 겸 엄마 역할인 소녀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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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녀 오셨어요? 힘드실 텐데 어서 옷 갈아 입고 쉬세요. 저녁 차려 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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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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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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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이어 자식 역할의 소녀들과 식산대붕이 줄줄이 집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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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마다 손에 돌멩이를 하나씩 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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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와 마찬가지로 자녀들도 모두 어부라는 설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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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돌멩이)를 사이좋게 나눠 먹은 일가족은 일제히 수행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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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부가 웬 수행이냐는 질문은 무의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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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문파 안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다른 가족들도 으레 그렇게 사는 줄 아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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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애들이 굉장히 그럴싸한 무술 동작을 선보이고 있을 무렵, 남자애들은 열매를 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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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는 나무 위에서 열매를 던지고, 일부는 아래에서 열매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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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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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매를 받던 소년 중 한 명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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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 이거 덜 익은 거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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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위에 있던 소년이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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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야, 그거 다 익은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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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만 색이 녹색인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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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입만 먹어 봐. 달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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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어린 소년은 긴가민가한 얼굴로 손에 든 열매를 덥썩 베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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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오만상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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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덜 익어서 떫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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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이라 불린 소년은 박장대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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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이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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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웃어서 복근이 아플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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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소년은 중심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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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태롭게 허우적거리는 두 손, 당황한 시선, 뒤로 쏠리는 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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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다지 높은 나무는 아니었지만 떨어진다면 크게 다칠 게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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떫은 열매를 먹었던 소년이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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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혀, 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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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급한 외침에 아이들의 시선이 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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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나무 밑의 소년, 이내 나무 위의 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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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산대붕도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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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나의 순간, 식산대붕은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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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위의 소년은 완전히 중심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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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자세를 회복할 가능성은 전무, 남은 건 날개 없는 추락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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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이 아무리 좋아도 최소한 골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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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아래에서 열매를 받던 남자애들은 일제히 추락 예상 지점으로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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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소용 없을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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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상자 숫자만 늘어날 게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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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산대붕은 저도 모르게 날개를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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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에서 떨어지는 친구를 공중에서 받은 뒤, 자기 몸으로 보호하면서 착지할 계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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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특별 제작한 추진기가 울부짖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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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 새는 친구를 구하기 위해 두려움이라는 족쇄를 부수고 날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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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식산대붕이 미처 예측하지 못한 변수가 딱 하나 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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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위에 올라간 사람은 한 명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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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소년이 친구의 팔뚝을 냉큼 붙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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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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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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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심 좀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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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소년이 올라탄 나뭇가지 아래를 식산대붕이 바람처럼 스쳐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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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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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혜문은 자신의 제자들을 볼 때마다 어릴 적 헤어진 형제자매를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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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문이 트이자 마자 어머니와 떨어진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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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비슷해서 더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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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혜문의 아버지는 사소한 실수에도 가혹한 처벌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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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전을 암송하다가 잠깐만 버벅거려도, 글씨가 조금만 삐뚤어져도 용납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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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때마다 아이들은 벌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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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혜문의 아버지가 직접 매를 든 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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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너무나 병약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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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 하인에게 숫자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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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은 오십, 가끔은 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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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초리를 맞을 횟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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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인은 묵묵히 숫자를 세며 회초리를 휘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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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혜문도 셀 수 없이 벌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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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이 든 종아리, 눈물로 번진 시야, 매서운 회초리 소리, 순서를 기다리며 떠는 형제자매들, 아버지의 차가운 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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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십 년이 지난 지금도 그 기억만은 선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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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혜문의 아버지는 이십여 년 전에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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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약했던 것 치고는 오래 살았고, 온갖 명약을 복용했던 것 치고는 일찍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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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호혜문의 형제자매들은 여전히 불행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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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자신을 죽이거나, 남을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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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는 독약을 삼키고 자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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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는 칩거한 채 무기력하게 메말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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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는 칼을 휘둘러 하인들을 여럿 죽인 뒤에 저택 깊숙이 연금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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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더없이 총명했던 소년 소녀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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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 찬란하던 날개는 오래 전에 꺾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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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사자가 죽은 이후에도 아버지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는 족쇄가 되어 형제자매를 얽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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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중에 재녀 호혜문보다 못난 사람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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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하나같이 영특하고 재주가 넘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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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영근을 지닌 호혜문은 열 살에 왕도를 떠났고, 그들은 남았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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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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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들려온 소음에 호혜문은 깨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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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상 가득 보이는 서류 더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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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관 수업과 관련된 문서 작업을 하다가 깜빡 잠이 든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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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혜문을 깨운 소음은 점점 커져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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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문을 두드리는 듯한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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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젊은 사내의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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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지 알 것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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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혜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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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밤, 주변에 폐가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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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을 연 호혜문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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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이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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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사병을 앓는 사내가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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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문제아였던 소년이, 한때 호혜문의 제자였던 학생이, 어느덧 스물 중반이 된 청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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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밤중에 옛 선생이자 사랑하는 여인을 찾아와서 제 마음을 고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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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문제아였던 소년을 어째서 포기하지 않느냐는 누군가의 물음에 호혜문은 이렇게 대답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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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 필지 여부는 물을 주기 전까지는 모르는 법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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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모퉁이에서 그 대화를 엿들었던 그 순간부터 소년은 호혜문을 사랑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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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은 간절하게 애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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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순간부터 선생님은 제 전부였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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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가슴은 선생님을 향한 사랑으로 가득 찼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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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을 마친 청년에게, 호혜문은 그가 기억하던 선생님의 얼굴로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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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란 온전히 자신만의 것이란다. 그렇기에 남에게 휘둘려서는 안되지. 나는 잊거라, 그 대신에 나의 가르침을 기억해 준다면 그것만으로도 족하다. 스승이란 제자의 디딤돌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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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의 얼굴은 슬픔으로 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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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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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호혜문이 선생으로서 내리는 마지막 가르침일 것이라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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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내는 한참을 소리내어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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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발걸음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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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혜문은 나이 든 제자가 무사히 족쇄를 끊고 날아오르기를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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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산대붕은 친구를 구하기 위해 용기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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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용기를 냈다기보다는 뭘 생각하고 말고 할 겨를도 없이 날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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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정작 나무에서 떨어지려던 소년을 구한 건 옆에 있던 다른 소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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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처럼 나무를 스쳐 지나간 식산대붕은 자연스럽게 유턴해서 개울가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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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가 안 다친 건 다행이지만, 다소 허망한 결말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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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산대붕은 살짝 민망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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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이 죽은 듯한 오목눈이의 몸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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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행 중에서 최연장자(올해 10살)인 소녀가 가장 먼저 식산대붕의 기분을 눈치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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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는 얼른 막내(신장 3m)를 칭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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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를 위해서 몸을 아끼지 않다니! 대붕아, 정말 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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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 소녀는 팔꿈치로 옆 사람을 찔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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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른 자기처럼 칭찬하라는 비언어적 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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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구리를 찔린 사람도 눈치 빠르게 물개 박수를 치면서 칭찬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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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맞아! 대붕아, 진짜 다시 봤어! 물론 원래도 좋게 보고 있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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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아이들도 눈치 빠른 순서대로 칭찬 대열에 합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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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해, 대붕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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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최고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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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멋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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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들은 식산대붕을 둘러싼 채 연신 박수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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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가 생긴 지 어언 5년, 한창 칭찬 받기 좋아할 나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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쏟아지는 칭찬 세례에 식산대붕의 부리가 저절로 하늘을 향해 치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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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식산대붕은 멋진 비행으로 귀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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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호자 삼인방은 다채로운 리액션을 선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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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식산대붕은 더더욱 기분이 좋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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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 공포증 같은 건 이미 눈 녹듯 사라져 버린 지 오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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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비행에 성공한 다음 날부터 식산대붕은 저택의 고용인들 주위를 계속해서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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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을 쓸거나 가구를 옮기는 하녀들 옆에서 연신 기웃거렸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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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를 기다리는 모양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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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녀 중 한 명이 식산대붕에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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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붕아, 뭐 필요한 거 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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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산대붕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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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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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봐도 용건이 있는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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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본인이 아니라는데 계속 캐묻기도 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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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히 일하는데 방해되는 것도 아니기에, 하녀들은 그냥 업무에 집중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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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식산대붕이 간절히도 기다리던 순간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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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종일 계속되던 여름맞이 대청소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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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 도중에 너무 낡았거나 망가져서 못 쓰게 된 물건 역시 잔뜩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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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녀들은 내다 버릴 쓰레기를 모조리 마대 자루에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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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버리고 올 사람만 정하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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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자원자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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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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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깔끔하게 가위바위보로 정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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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조건 단판이다. 나중에 딴소리하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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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저번처럼 늦게 내면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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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요? 언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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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위바위보에서 지기 싫어 안간힘을 쓰는 하녀들 근처로 식산대붕이 유유히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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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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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산대붕의 헛기침, 효과는 그닥 시원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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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녀들은 뭘 낼지 고민하느라 바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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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패배하기라도 했다간 꼼짝없이 쓰레기장까지 갔다 와야 되는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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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하던 반응이 돌아오지 않자, 식산대붕은 좀 더 노골적인 신호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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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외출하고 싶은 기분이 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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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조건 보자기를 내겠다느니 하는 알량한 심리전을 주고 받던 하녀들의 고개가 일제히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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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녀 한 명이 설마 하는 심정으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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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붕아, 외출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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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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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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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산대붕은 마대 자루를 힐끔거리며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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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뭐... 들판 서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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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들판 서쪽에는 쓰레기장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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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 되면 모르고 싶어도 모를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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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놓고 티를 팍팍 내는 수준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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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녀 한 명이 밝은 미소와 함께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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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붕아, 그러면 혹시 가는 길에 쓰레기 좀 버려줄 수 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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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탁하는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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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언니들이 이렇게 부탁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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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산대붕의 부리가 하늘을 향해 치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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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부탁하시니 어쩔 수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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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산대붕은 쓰레기로 가득 찬 마대 자루를 두 발로 움켜쥐고 비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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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녀들은 한순간에 멀어진 식산대붕의 엉덩이를 가만히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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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내 식산대붕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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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녀들은 의견을 나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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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부름하려고 여태 우리 뒤를 쫓아다녔던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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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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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잘 난다고 자랑하고 싶었던 거 아냐? 왜, 어렸을 때 글방에서 뭐 하나 배우면 아는 척하고 싶어서 하루 종일 입이 간질간질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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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돌아오면 무조건 고맙다고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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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건 또 내가 전문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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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식산대붕이 저택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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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녀들은 잽싸게 달려 들어서 식산대붕의 전신을 마구마구 쓰다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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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 감사 인사와 칭찬을 연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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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워 대붕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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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대청소가 한결 수월해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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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진짜 빠르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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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 전광석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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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산대붕은 정말로 즐거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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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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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휴대전화를 꺼내 이아금의 번호를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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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연결음이 끝나고 전화가 연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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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에 사람이 많은 모양인지 시끌시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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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살짝 목소리를 높여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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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금아, 지금 어디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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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언니! 나 지금 친구 딸 혼인식! 방금 막 끝났으니까 금방 갈게! 먼저 먹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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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알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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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전화를 끊자, 금영영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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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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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딸 혼인식에 하객으로 참석했나 봐. 금방 온다고 먼저 먹고 있으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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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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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영영은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젓가락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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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오향장육, 한 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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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고기가 텅 빈 위장을 든든하게 채워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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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요리를 몇 점씩 집어 먹었을 무렵, 이아금이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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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해요, 제가 많이 늦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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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혜문이 웃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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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야, 딱 맞춰서 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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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이에요, 혜문 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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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은, 몇 번 통화했잖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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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금은 빈자리에 앉으며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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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 그래도 직접 얼굴 보는 거랑은 다르죠. 용녀님도 안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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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선 가시와 씨름하던 담청이 고개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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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반갑구나. 나야 뭐 항상 잘 지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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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삿말이 원탁 위를 몇 차례 왕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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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선 동아리 회원들은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점심을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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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의 주제는 이리저리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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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문득 장선화가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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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저 갑자기 궁금한 게 생겼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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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과 호혜문이 동시에 장선화를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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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교롭게도 장선화가 두 사람을 부르는 호칭은 선생님으로 동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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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매번 이런 상황이 벌어지고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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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선화는 보다 명확한 호칭을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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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호혜문 선생님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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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다시 오리고기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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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혜문은 옛 제자에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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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가 궁금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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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걔는 아직도 선생님 쫓아다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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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걔’는 상사병에 걸린 호혜문의 제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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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과 장선화는 나이 차이가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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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둘 다 같은 시기에 글방을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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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혜문은 쓴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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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안 그래. 얼마 전에 잘 타일렀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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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영영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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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쫓아다녀? 무슨 얘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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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떠올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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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혜문의 청혼자에 대한 얘기가 처음 나왔을 때, 금영영은 현장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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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렵이면 한창 부적 공방에서 비인간적인 잔업에 시달리고 있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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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짧게 요약해서 알려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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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살 이상 어린 옛 제자의 청혼, 호혜문 곤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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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얘기를 듣던 금영영은 고개를 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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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는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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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문은 어때요? 상대가 마음에 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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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중의 시선이 호혜문에게 집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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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혜문은 담담하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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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따지자면 좋아하는 편이죠. 몇 년이나 가르쳤던 학생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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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영영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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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청혼을 받아들여도 되는 거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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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얘기가 왜 그렇게 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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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좋아한다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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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혜문은 질색을 하며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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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로서 좋아하는 거랑 이성으로서 좋아하는 게 같나요? 그런 대상으로 바라본 적도 없어요. 애초에 상대는 선화보다도 나이가 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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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을 위해서 생선 가시를 바르던 장선화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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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과 이아금도 호혜문의 견해에 동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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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그래도 서른 살 연하는 좀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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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범인의 상식에 얽매이지 않는 자, 금영영의 의견은 좀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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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작 서른 살 차이잖아. 안될 거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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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진 식사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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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선화는 아무것도 못 들은 척, 잘 발라 놓은 생선 가시만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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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은 생선살 먹느라 방금 오고 간 대화는 안중에도 없는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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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혜문과 이아금은 말문이 막힌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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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서란이 나설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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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영, 서른 살 차이는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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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왜? 설령 나이 차이가 백 살이 넘어도 서로 사랑하기만 하면 그만 아니야? 어차피 축기기 수사가 되면 늙지도 않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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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아무리 그래도 백 살 차이 나는 상대랑 혼인하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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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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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없어, 너도 저번에 뵌 적 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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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누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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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22대조 조상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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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그래서 그게 도대체 누군데?’라는 물음을 던지려다가 멈칫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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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영영의 조상, 그 중에서 아직까지 생존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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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떠오르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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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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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금교월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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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그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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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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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조심스럽게 입을 다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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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말을 해도 말실수가 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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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해서라도 화제를 돌리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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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떠듬떠듬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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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식겠다. 마저 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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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 다시는 금영영 앞에서 이런 화제를 꺼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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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더위는 한층 무르익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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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일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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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토토서와 지암서가 결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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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다른 예식 절차 없이 관청에 신고만 하는 게 미궁언서들의 문화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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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서란도 축하 선물 정도만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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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장선화가 독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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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불화는 아니고 그냥 본가와 서란의 저택을 왔다 갔다 하기 귀찮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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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저택 객청에 머무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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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놀이 문파 대항전도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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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 해안 동맹 소속 십여 개의 문파가 참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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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은 나이 제한에 걸려서 감독 역할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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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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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마침내 사영근을 조화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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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대륙에서 화영근을 얻은 지 6년만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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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 수뇌부가 열광하고 모든 월간지가 서란의 소식으로 도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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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서란은 극심한 수행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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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구조 조정 때문에 하루 아침에 실직한 가장의 얼굴로 멍하니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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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뭐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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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치 수행 3시진(6시간)은 벌써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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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억지로 시간을 늘리는 것도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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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감각 유지를 목적으로 하는 것 이상의 긴 수행은 무의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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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영기의 해는 아직도 3년 정도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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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까지는 꼼짝없이 허송세월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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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한가함에 몸 비틀고 있는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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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서란의 일정이 텅 빈 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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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인형 시리즈 집필, 인형술 연구, 습관적인 명상, 대지모신 노릇, 식산대붕 돌보기, 친목 활동 등의 다양한 일거리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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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수면조차 불필요한 초인에게는 하루가 너무나 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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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지구였다면 영화라도 실컷 봤을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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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사진기조차 없는 세상에 오락용 영상 매체 같은 게 존재할 리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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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껏해야 소설이나 잡지를 읽는 게 문화생활의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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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최근 며칠 동안 서란은 소설과 잡지를 훑어보며 연신 투덜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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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식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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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혀 자극적이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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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것도 전부 핑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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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수행이 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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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력을 쌓고, 공법을 운용하고, 법문을 되뇌일 때마다 더 나은 존재로 한 발 한 발 나아가는 그 희열을 다시 느끼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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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장선화가 서란을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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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편지가 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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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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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 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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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선화는 편지를 두 통을 건네주고는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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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애완 토끼들 밥 주러 가는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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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하면서 기르던 동물을 몽땅 데려온 장선화 덕분에 저택 전체는 동물원이 된 지 오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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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편지 겉면을 차례로 살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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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교롭게도 두 통 모두 연구 용역 기관에서 온 편지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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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투부터 고급스러운 걸 보니 나름 격식을 차린다고 휴대전화 대신 편지를 보낸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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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첫 번째 편지를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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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로 법보의 연구 성과가 적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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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대한 내용이 담겨 있었지만, 요약하자면 여태 알아낸 게 거의 없다는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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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시간과 예산을 더 투입하기로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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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는 고대 원기둥을 연구하던 고고학자들이 보낸 편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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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찬가지로 연구 성과에 관한 내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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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앞서 읽은 편지와는 결과가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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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랍게도 고고학자들은 고대 원기둥의 정체를 밝혀내는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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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관련 내용을 편지에 상세하게 적을 수는 없다며 양해를 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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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안상의 이유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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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다 읽은 편지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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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심심했는데 잘 됐다는 심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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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국제 학회 본부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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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한가했던 담청도 따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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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공놀이 문파 대항전은 여전히 진행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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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담청이 태만하고 책임감이 없는 감독인 탓에 여기서 놀고 있는 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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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강에서 빛의 속도로 탈락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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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수처 근처에 있던 고고학자가 서란과 담청을 보고 인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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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오셨군요. 바로 가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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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학자는 앞장서서 연구 동으로 둘을 인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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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지까지는 금방 도착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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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멀리, 고대 문양으로 뒤덮인 원기둥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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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 총책임자는 굉장히 부자연스러운 미소와 함께 일행에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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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예산이 서란의 전낭에서 나오는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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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소에 가난한 학자의 비애가 한껏 배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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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책임자는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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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방문해 주셔서 정말로 감사 드립니다. 사실 저희가 찾아뵈었어야 하는데 보안상의 문제로 여의치가 않았거든요. 자, 저쪽으로 가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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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책임자는 연구실 여기저기를 가리키며 고대 원기둥 연구 과정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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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절반도 채 못 알아 들었지만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면서 호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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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도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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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고대 원기둥 앞에 도달한 총책임자는 그간의 연구 결과를 간단하게 정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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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디로, 이 고대 유물은 일종의 금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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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책임자가 처음으로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하자, 여태 침묵하고 있던 담청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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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고? 어째서 그런 결론을 내린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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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책임자는 다시 한번 전문가 이외에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난해한 소리를 쏟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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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상 굴절에 의한 시공간 왜곡이 어쩌고 하는, 당최 고고학이랑 무슨 연관이 있는지도 모를 전문 지식 강연은 한참이나 계속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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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외한들은 이번에도 기계적으로 대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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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던 서란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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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안에는 뭐가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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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 총책임자가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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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는 열어 보지 않았습니다. 주인도 아닌데 멋대로 금고의 내용물을 확인할 수는 없죠. 아, 물론 개봉 방법은 알고 있습니다. 지금 당장 열어 보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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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죠,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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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로서도 다행이군요. 사실 안에 뭐가 있을지 정말 궁금했거든요. 밤에 잠도 잘 안 올 정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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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부터 호기심이 왕성했던 연구 총책임자는 진심 어린 미소와 함께 유물을 조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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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한 절차를 거칠수록 고대 유물은 점차 밝은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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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고고학자들도 슬금슬금 고대 유물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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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봉 과정을 지켜보던 서란이 담청에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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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에 뭐가 들어 있을까요? 혹시 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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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공간을 다루는 힘은 오로지 신선만의 권능이지. 그렇다면 저 고대 유물 자체가 이미 법보와 다를 바 없는 셈이다. 무릇, 보관함보다 천한 보관물이란 존재할 수 없는 법이다. 분명 엄청난 법보가 잠들어 있을 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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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로 명쾌한 추리! 역시 담청 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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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부푼 기대를 안고 고대 유물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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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만원어치 현금을 보관하기 위해서 천 만원짜리 금고를 마련하는 사람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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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모든 금고는 자기 가격보다 비싼 내용물을 보관하는 게 당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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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보나 다름없는 금고 안에는 도대체 어떤 귀물이 담겨 있을지 빨리 확인해 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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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서란은 문뜩 우스운 생각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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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후, 후후후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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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 갑자기 왜 웃는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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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뇨, 웃긴 생각이 나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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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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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긴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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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저희가 지금까지 저 고대 유물을 어떻게 사용했는지 떠올려 보세요. 반쯤 난로 취급하면서 찻물 끓이는데나 썼잖아요. 그런데 저 유물이 사실은 보물 상자였다니, 이래서 세상 일은 모르는 건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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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그렇구나. 아참, 그러고 보니 감자랑 버섯을 구워 먹은 적도 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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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아요, 한눈 팔다가 약간 태웠었죠. 아직도 잘 찾아 보면 눌어붙은 자국이 남아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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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후, 기억 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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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후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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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후후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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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천지를 뒤흔드는 웃음소리가 울려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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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하하하하! 드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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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과 담청은 서로를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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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 중 어느 쪽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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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생처음 듣는 목소리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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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어떤 번뜩임이 서란의 뇌리를 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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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관물은 일반적으로 보관함보다 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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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정신이라면 황금으로 만든 상자에 장작이나 자갈을 보관하지는 않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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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딱 하나, 예외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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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감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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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과 금고는 공통점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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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 다 내부와 외부를 차단할 목적으로 제작되는 탓에 구조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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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보관 대상이 다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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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문파의 뇌옥도 마찬가지지만, 감옥의 건설 비용을 결정하는 건 죄인의 몸값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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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인이 지닌 위험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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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유물이 만약 감옥이라면, 그 안에는 얼마나 위험한 존재가 갇혀 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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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황급히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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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개봉을 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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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보다 먼저 고대 유물이 산산조각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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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풍처럼 매섭게 휘몰아치는 천지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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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틀린 시공간 너머에서 다가오는 존재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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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화염에 휘감긴 수도자의 원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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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인에서 깨어난 존재가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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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 만물이여, 경외하라! 이 몸, 등 진군께서 친히 하계에 강림하셨나니! 아하하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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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를 등 진군이라고 소개한 존재의 살기에 고고학자들이 우수수 기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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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과 담청은 동시에 법력을 끌어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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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명하게 느껴지는 적의, 도무지 싸움을 피할 방도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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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진군이 거만하게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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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계에도 인물이 있었구나! 아주 좋다! 똑똑히 목도하라, 준선경의 힘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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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진군은 서란과 담청에게 달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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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순식간에 진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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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진군은 선계 태생의 수도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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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초월의 계단을 차곡차곡 밟아 나간 끝에 마침내 준선경이라는 위치까지 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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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서 딱 한 발자국만 더 내디뎠다면 진정한 신선이 될 수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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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기억은 거기서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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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눈을 떴을 때, 등 진군은 난데없이 원통형 고대 유물의 내부에 갇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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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화 직전의 육신과 무한한 법력은 온데간데없고 원영 하나만 달랑 남은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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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진군은 형언할 수 없는 당혹감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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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황상 봉인을 당한 건 확실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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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것 말고는 모조리 의문투성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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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기억마저 온전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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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진군은 자기 자신에 관한 그 어떤 것도 떠올릴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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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은 물론이고 혈족 관계나 출신 수도문파, 하다못해 나고 자란 고향도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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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나는 건 성씨와 진군이라는 칭호, 수선과 관련된 지식들이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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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진군은 필사적으로 고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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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선 의식을 준비하던 것까지는 확실해. 그렇다면 의식이 실패한 건가? 아니야, 좀 이상해. 진선경에 도달하지 못한 거랑 봉인이 무슨 상관이야. 차라리 죽어서 윤회의 굴레에 묶였으면 묶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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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라리 누군가에게 패배하여 육신과 법력을 잃고 봉인됐다는 쪽이 더 그럴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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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 진군은 점차 원수의 존재를 확신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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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종의 수법으로 등 진군의 기억을 지워버린 것도 그 원수 녀석이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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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수 자체를 원천적으로 막기 위한 조치였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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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화한 등 진군도 화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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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움의 원인이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왠지 본인이 먼저 잘못했을 것 같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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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진군은 피의 복수를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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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의 대상이 누군지조차 모르지만 상관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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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계가 아무리 광활하다고 한들 준선경 수도자를 봉인할 정도의 강자는 많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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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시간은 넘쳐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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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진군은 주변의 화영기를 끌어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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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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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한 등 진군에게는 금단은 물론이고 육체마저 남아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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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우화등선의 목전까지 도달했던 초월자는 의지력만으로 기적을 일구어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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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진군이 발휘한 인력은 고대 유물의 봉인 능력마저 상회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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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대륙을 휩쓴 이상현상의 진정한 원인은 고대 유물이 아닌 등 진군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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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진군은 아주 조금씩 힘을 회복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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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봉인이 해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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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의 칼날을 갈던 등 진군은 즉시 뛰쳐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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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오랜 세월 갇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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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자신의 오갈 데 없는 분노를 불특정 다수에게 표출해 주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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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진군은 수수깡처럼 쓰러지는 약골들 사이로 법력을 끌어 올리는 두 소녀를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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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는 사영근의 원영기 수사였고, 나머지 하나는 여의주를 완성한 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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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계 수행자들 치고는 제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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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사발이 되도록 두들겨 맞기 전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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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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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란과 담청은 우정의 힘으로 등 진군을 손쉽게 쓰러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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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돌이켜 보면 구태여 협공을 할 필요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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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대일로 정정당당하게 싸웠다고 해도 등 진군이 이겼을 것 같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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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덜너덜해진 등 진군이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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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은 하계도 우습게 볼 게 아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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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담청이 버럭 화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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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는 도대체 누구이기에 이런 행패를 부리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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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 진군이 떠듬떠듬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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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요? 저는 등 진군이라고 하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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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군? 그것이 네 이름이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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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뇨, 진군이라는 건 일종의 경칭입니다. 그, 뭐냐... 신선을 높여 부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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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절한 고고학자들을 줄 맞춰서 잘 눕혀 주고 돌아온 서란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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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말은 당신이 신선이라는 뜻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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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신선은 아니지만, 얼추 비슷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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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 그래서 준선경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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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진군의 원영이 열심히 고개를 까딱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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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맞습니다. 준선경에 도달하면 수명의 한계가 사라지거든요. 그래서 선계에서는 그냥 신선인 셈 치죠. 등선 의식을 통과한 신선은 진선경이라고 따로 부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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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의식을 마치고 진선경에 도달한 다음부터 시공간을 다루는 권능이 생기는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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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미 알고 계시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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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의 대화를 가만히 지켜보던 담청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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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나 협조적으로 구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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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항적으로 굴면 죽거나 도로 봉인될 터이니 당연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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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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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과 담청은 이런저런 질문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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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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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성씨 이외에는 기억이 안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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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어디 출신이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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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선계 태생입니다. 고향은 마찬가지로 기억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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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선계 출신이 하계에는 어떻게 오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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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모르겠습니다. 정신을 차려 보니 고대 유물 안에 봉인되어 있었습니다. 최근까지는 여기가 하계라는 것도 몰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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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여기가 하계라는 건 어떻게 알았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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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봉인이 해제되는 순간에서야 깨달았습니다. 물고기가 난생처음 물 밖으로 나오면 딱 이런 기분이었을 겁니다. 천지영기가 이렇게나 희박한데 수행이나 제대로 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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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질문은 우리가 합니다. 어쩌다 봉인된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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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기억나지 않습니다. 저는 영문도 모른 채 갇혀 있었죠.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공허한 장소에서 복수의 칼날을 갈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봉인이 풀렸죠. 이제 원래 경지를 되찾는 날도 머지않았을 겁니다, 후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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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이 등 진군의 말허리를 뚝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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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담 좀 끼워 넣지 말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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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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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서란. 어디까지 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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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취조를 이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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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난동을 부린 이유는 뭡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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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오래 갇혀 있었더니 화를 참을 수 없었습니다. 깊이 반성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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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경지는 어느 정도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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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지는 원영기고, 아직 일영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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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생각으로 우리한테 덤빈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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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한때 준선이었던 몸, 이 정도 전력차는 손쉽게 극복할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오판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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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부터 우리도 복수 대상에 포함되는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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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닙니다. 결코 앙심을 품지 않겠습니다. 애초에 이번 일은 제가 잘못했죠. 한 번만 용서해 주시면 반드시 보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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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면 어떤 식으로 보답할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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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계에 대한 정보나 수행 관련 지식은 어떠십니까? 마침 운무기를 앞두고 계시니 새로운 공법도 필요하실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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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무기는 또 뭔가요? 원영기 다음 단계는 화신기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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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계에서는 화신기라고 부르는 모양이군요? 선계에서는 원영기 다음 경지를 운무기라고 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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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요? 운무기 다음에는 몇 단계나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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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무기 이후의 경지는 태성기, 광홍기, 은한기, 준선경까지 네 단계가 있습니다. 은한기와 준선경을 같은 단계로 봐야 한다는 의견도 간혹 있지만, 네 단계로 구분하는 방식이 정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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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그러면 준선경 위로는 어떤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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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선경 말씀이십니까? 두 단계라는 얘기도 있고, 세 단계라는 얘기도 있습니다. 여기부터는 저도 잘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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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등 진군에게 꼼짝도 하지 말라고 경고한 뒤, 담청과 몰래 얘기를 나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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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의식을 확장해서 등 진군이 엿듣지 못하도록 대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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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 님,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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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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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진군이 들려준 얘기요. 거짓말일까요? 사실 저런 건 마음만 먹으면 삼척동자도 당장 지어낼 수 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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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은 고민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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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의 눈에는 진실과 거짓을 가리는 권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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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상하게도 등 진군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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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준선경 어쩌고 했던 얘기가 진실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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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담청은 확답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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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나는 잘 모르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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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침묵하던 서란은 휴대전화를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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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 보니까 굳이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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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문제를 처리하는 조직은 따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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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화기 너머에서 기계음이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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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오죽문 금작파 공동 수뇌부 직통 회선입니다. 성함과 함께 배정받은 식별 번호를 말씀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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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류서란. 식별 번호, 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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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 서 란 수사님, 확인 되셨습니다. 용건에 해당하는 번호를 눌러주세요. 긴급 지원은 0번, 정보 조회는 1번, 단순 민원은 2번, 의제 제안은 3번, 심마 상담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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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3번을 꾹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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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연결음 이후, 의장이 전화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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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 수사님, 어쩐 일이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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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장님, 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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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진군과 관련된 모든 일을 의장에게 미주알고주알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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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장은 묵묵히 서란의 말을 경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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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조속히 수뇌부 회의를 소집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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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화가 끝나자 담청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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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됐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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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뇌부 회의에서 논의해 보고 등 진군의 처우가 결정되면 알려 주겠대요. 그때까지는 일단 저희가 감시하고 있으면 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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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정도야 어렵지 않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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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 영역을 도로 축소한 서란이 등 진군에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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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우리와 함께 갑시다. 자세한 처우는 좀 더 지켜본 다음에 결정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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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로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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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직한 자세예요. 일단 등 진군이 임시로나마 사용할 인형을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원영으로만 존재하면 불편할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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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진군은 기쁨을 숨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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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술사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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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요, 인계 최고의 실력자라고 자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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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몸을 만들어 주신다니, 정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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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진군의 원영은 활짝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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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도 마주 웃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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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뻐서 인형을 만들어 주는 게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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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만들 인형은 감시 겸 제거 수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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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진군이 조금이라도 수상한 행동을 하면 그 즉시 추진기가 최대 출력으로 작동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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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준선경이든 뭐든 눈 깜짝할 사이에 천공 결계 바깥으로 사출 시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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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명 ‘우자의 우화등선’ 작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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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진군은 오죽문으로 연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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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 수뇌부는 등 진군의 처우를 결정하기 위해서 기나긴 논의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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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동안 서란은 조수 장선화와 함께 등 진군이 빙의할 인형을 제작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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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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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진군은 자기 성별마저 잊어 버린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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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다행인 건 원영이 남아 있다는 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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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병아리 암수 감별과 유사한 방식으로 등 진군의 성별을 알아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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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본격적인 설계에 앞서 점토를 주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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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식간에 등신대 점토 인형이 완성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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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부터 등 진군의 요구 사항에 맞춰서 외형을 다듬을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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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점토 인형을 가리키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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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진군, 본인의 원래 외모는 잊어 버리셨다고 했죠? 혹시 원하는 외형이 있으신가요? 최대한 반영해 드릴 테니까 기탄없이 말씀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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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진군은 기다렸다는 듯 요구 사항을 쏟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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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쁘기는 하지만 너무 비리비리해 보이는군요. 이것보다는 건강미가 넘쳤으면 좋겠습니다. 신장도 평균보다는 좀 컸으면 싶고요. 혹시 어려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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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울 건 없죠. 선화야, 창고에서 점토 좀 더 가져다 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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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수 장선화가 잽싸게 점토 덩어리를 들고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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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점토를 덧붙여서 인형의 크기를 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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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사겸사 하체 비율을 늘려서 맵시를 살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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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신 성형을 마친 서란이 다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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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하시던 모습이 이게 맞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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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맞아요. 마음에 쏙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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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이 조형대로 제작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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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빠른 속도로 설계도를 그려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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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사 원본을 옆에 두고 베끼는 수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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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계도는 순식간에 완성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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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진군은 서란과 장선화의 인형 제작 과정을 넋 놓고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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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 선정부터 시작해서 가공과 조형, 조립 등의 전 과정이 더할 나위 없이 능수능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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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종다양한 재료를 깎고 다듬는 소리가 인형 공방을 가득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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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진군은 어쩐지 그리운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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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묵히 인형을 제작하던 서란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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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진군, 혹시 지루하지는 않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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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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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러시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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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진군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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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서란의 인형 제작 과정을 지켜보는 일은 즐거웠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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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서란은 예의상 하는 말이겠거니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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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조수에게 눈짓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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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진군이 지루해하는 것 같으니 어떻게든 해 보라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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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선화는 상급자의 시선에 담긴 복잡미묘한 의미를 당연하다는 듯이 알아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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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선화는 자연스럽게 손에 묻은 재료 부스러기를 털며 인형 제작대에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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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약간 떨어진 휴식용 탁자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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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진군의 원영이 앉아 있는 장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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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선화는 아이스 브레이킹을 시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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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등 진군께서는 선계 태생이라고 하셨었죠? 인계에 와 보시니까 어떠세요? 선계랑 많이 다르던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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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그렇지. 일단 천지영기가 너무 희박해. 세상이 좁아서 그런 건지, 뭔가 억압되는 기분도 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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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상은 어떤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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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진군은 잠깐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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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수선계와 범인의 사회가 분리되어 있다는 점이 신기했어. 속세라고 부르던가? 낮은 농도의 천지영기가 범인들이 내뿜는 탁기를 감당하지 못해서 생긴 현상이 아닐까 싶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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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계에서는 수도자와 범인이 함께 생활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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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이유가 없으면 다들 그렇게 살지. 중심부에 수도문파나 수도가문이 위치하고, 그 주변을 수많은 고층 건물이 둘러싸고 있는 게 일반적인 도시의 모습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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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선화의 질문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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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가문? 그건 수도문파랑 뭐가 다른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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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다지 다를 건 없어. 혈족 중심으로 운영되는 수도문파를 다르게 부르는 명칭일 뿐이지. 그냥 큰 규모의 집성촌이라고만 생각해도 무방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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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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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진군이 원영이 생긋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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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신기해서 그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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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그렇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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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한테는 하계가 더 신기하게 느껴지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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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선화와 등 진군의 대화가 끝날 무렵, 인공 피부 이식을 마지막으로 인형이 완성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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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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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진군이 막 만든 따끈따끈한 인형에 빙의하고 있을 무렵, 공동 수뇌부는 여전히 회의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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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유물에서 튀어나온 초장기수의 처우 때문에 모두가 골머리를 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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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이느냐 살리느냐, 그것이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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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험기피자들은 빠른 사형을 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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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굳이 모험을 감수할 이유가 있을까요? 문파비승이 확실시된 상황에서 등 진군인지 뭔지 하는 변수를 가만히 놔둘 이유가 있냐는 말입니다. 그냥 절차대로 처형시켜 버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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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맞습니다, 애초에 무고한 사람도 아니지 않습니까. 국제 학회 한가운데에서 유혈 사태를 일으키려던 위험 인물이라고요. 비록 미수에 그치기는 했지만 국제법을 한두 개 어긴 게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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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준선경이었다는 말이 사실이라면 더 위험합니다. 언제 경지를 되찾아서 우리의 통제를 벗어날지 몰라요. 지금이 위험을 제거할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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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기피자들의 논거는 간단명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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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죽문과 금작파는 곧 선계로 비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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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괜한 변수 만들지 말고 법대로 하자는 게 그들의 주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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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파비승이야말로 수도문파의 최우선 목표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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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가 엄중한 만큼 작은 위험이라도 피하자는, 지극히 합리적인 의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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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모두가 거기에 동조한 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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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는 확실한 안정보다 불확실한 대박을 훨씬 좋아하는 사람들도 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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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선호자들이 곧장 회의장의 균형을 맞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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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파비승은 결승선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선입니다. 선계에 도착했다고 수선 생활 끝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문파 구성원들을 건사하는 동시에 낯선 환경에도 적응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등 진군의 협조가 있으면 훨씬 수월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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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저 또한 같은 생각입니다. 미래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선계의 정보가 반드시 필요해요. 비단 적응뿐만이 아니라 문파 전체의 앞날과도 직결되는 문제입니다. 화신기는 물론이고, 보다 높은 경지에 대해서 저희가 아는 게 뭐라도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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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초에 등 진군을 위험 요소로만 바라볼 이유가 있을까요? 우리와 그쪽 사이에 뭐 대단한 원한이라도 있나요? 비승에 끼워주는 대가로 정보를 요구하면 되죠, 선계에 도착한 다음에는 서로 갈 길 가면 되는 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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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험선호자들의 주장도 일리는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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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계의 수도자들에게 선계는 미지의 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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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마득한 고대의 문헌과 천체 관측을 통해서 추측할 수 있는 건 극히 피상적인 부분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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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계에 관한 지식은 종류 불문, 다소간의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입수할 가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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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기피자와 위험선호자, 양측은 첨예하게 대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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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말로, 내일 당장이라도 등 진군이 원래 경지를 회복할지도 모르는 일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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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 수사님의 보고서에도 적혀 있지 않습니까, 모종의 안전 장치를 마련해 놓으셨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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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등 진군이 하는 말이 전부 사실이라는 보장은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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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령 모조리 거짓 정보였다고 할지라도 아예 없는 것보다는 백배 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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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동을 부리다가 류 수사님과 용녀님께 제압된 일을 가지고 앙심을 품지는 않았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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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졸렬한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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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 시간은 거듭 연장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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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업무를 모조리 제쳐두고 진행된 마라톤 회의는 자정이 넘어서야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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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투표 결과, 정보를 위해서 위험을 감수하자는 쪽이 근소한 차이로 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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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뒤, 약식으로나마 조약이 체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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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죽문과 금작파는 등 진군의 죄를 사면하고 비승할 때 끼워 줄 것을 약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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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진군 역시 신의 성실의 원칙에 따라 충실하게 정보를 제공하겠다고 맹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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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의 저택에 식객이 한 명 더 늘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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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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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계 출신 무명 강사, 등 진군의 수선 교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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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도 모르고 불려 온 담청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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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이 수업 들어야 하는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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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자료를 정리하던 등 진군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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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지 안 올리실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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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지? 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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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평생 태성기로 사실 건 아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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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의 싱글 코어 두뇌가 웅웅거리며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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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무기, 태성기, 광홍기, 은한기, 준선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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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계의 수선 경지 체계를 왜 용한테 가져다 붙이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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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은 고민을 그만두고 해답을 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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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성기는 수도자들의 경지가 아니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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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도 수도자입니다. 저위계에서는 약간 다르지만, 고위계부터는 일반적인 수도자와 체계를 공유합니다. 혹시 모르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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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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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이 수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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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말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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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의 뿔이 오랜만에 번쩍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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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강생 하나가 고장난 고양이처럼 움찔거리든 말든 등 진군은 신경 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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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그러면 예정대로 수업을 시작해 볼까요? 세세한 내용으로 들어가기 앞서 큰 줄기부터 잡아 봅시다. 연기기부터 축기기, 결단기, 원영기까지를 선계에서는 흔히 저위계라고 부릅니다. 반면에 운무기, 하계식으로 표현하면 화신기부터는 고위계 수사로 분류하죠. 물론 이러한 구분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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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진군은 선계의 수선 체계에 대해서 차근차근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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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중간 질문이나 농담을 통해서 분위기를 환기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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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능숙한 수업 진행에 서란은 내심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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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과 담청은 선계의 지식을 쏙쏙 흡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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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진군도 별다른 어려움 없이 하계에 적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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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3년이라는 시간이 흐르고, 어느덧 수영기의 해가 도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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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경의식, 화신기로 향하는 마지막 계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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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경 의식이 열리는 장소는 어인교단 본부에서 한참 떨어진 해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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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해 골짜기 어딘가에 존재하는 야광 호수가 수속성 비경의 정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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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의 발광 물질은 바닷물과는 조금도 섞이지 않은 채 고요히 물결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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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비경의 아름다움에 감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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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장관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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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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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그렇구나. 반짝거리는 것 좀 보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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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어두운 심해를 밝히는 건 야광 호수뿐만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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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의 뿔도 언제나처럼 발광하고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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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점에 따라서는 초롱 아귀처럼 보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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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진군도 꽤나 흥미로워 하는 눈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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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장히 독특한 형태의 비경이군요. 바닷속의 호수라니... 두 액체가 어떤 원리로 서로 섞이지 않는 건지 궁금해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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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관광객이 비경 근처를 구경하는 동안에도 의식 준비는 착착 진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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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죽문과 금작파, 그리고 어인교단의 전문가들은 시설 점검에 심혈을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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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한 실수도 용납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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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비경 의식 준비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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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물막이 결계 밖으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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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는 일각해마를 타고 제단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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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제단의 가장 높은 곳에 도달하자마자 비경 의식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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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종 진법이 작동되고, 막대한 수영기가 비경으로 몰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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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수 삶는데 걸리는 시간 정도가 지난 뒤, 서란은 다섯 번째 영근을 손에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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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광경을 지켜보던 등 진군은 어이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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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방 쉬는 시간도 이것보다는 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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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준선경이었던 등 진군이 비경 의식을 치러도 하루 이틀 정도는 걸릴 게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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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진군은 주변 사람들의 반응을 살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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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파비승에 한 발짝 가까워졌다고 기뻐할 뿐, 극단적으로 짧은 의식 시간에 주목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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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오랜 시간 서란과 함께 하면서 역치가 너무나 높아져 버린 탓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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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영근자가 되어 돌아온 서란에게 등 진군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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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 수사. 예전에 제가 가르쳐 드렸던 수선의 5요소, 기억하고 계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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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막이 결계 안으로 들어와 젖은 머리카락을 쥐어짜던 서란이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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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선의 5요소 말입니까? 당연히 기억하고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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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진군은 당연히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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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과 관련해서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잠깐 조용한 곳으로 가시죠. 아, 용녀님도 함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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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를 옮기던 도중, 담청이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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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선의 5요소가 뭐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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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이 낯설지 않은 걸 보니 배운 건 확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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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정작 기억나는 건 하나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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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오래 전에 배워서 다 까먹은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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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도 등 진군은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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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여나 잊어버리셨다고 해도 괜찮습니다. 제가 다시 설명하면 되는 일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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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은 졸지에 보충 수업을 받는 처지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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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의 3요소는 국민, 영토, 주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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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수선의 5요소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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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은 영근, 선골, 오성, 공법, 자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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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하계의 수도문파들이 아는 건 선골을 제외한 4요소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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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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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계에서는 선골이 본격적으로 중요해지는 경지인 태성기까지 도달할 수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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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기부터 원영기까지의 저위계 구간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단연코 영근 자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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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법과 수행 자원은 어차피 환경적인 요소이고, 오성은 공법을 이해할 정도면 충분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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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계의 수도문파들이 일영근 일영근 하고 노래를 부르는 이유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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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간혹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생기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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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히 영근 자질도, 오성도, 익힌 공법과 지원받은 수행 자원의 양도 비슷한 수도자들 간에 납득하기 어려운 격차가 발생하는 것이 그 예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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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히 드물지만, 이영근자가 원영기에 도달하는 경우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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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지가 한 단계나 차이 날 정도면 개인의 성실성만으로 빚어진 결과라고 보긴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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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디로 영근과 오성, 공법, 자원 이외의 또 다른 요소가 작용했다는 의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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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바로, 선골 자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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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하던 담청이 돌연 감탄사를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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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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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진군이 반색하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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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슬 배웠던 내용이 다시 떠오르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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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전혀 모르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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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시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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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진군은 씁쓸한 표정으로 설명을 계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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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영기가 되고 오채지심 수행을 시작하면 타고난 영근 자질의 차이는 점차 무의미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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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에는 너도나도 오영근자가 되는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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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화신기 이후, 즉 고위계 구간부터는 선골 자질의 중요성이 더욱 크게 부각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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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이 질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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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등 진군 그대도 선골을 타고 났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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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잃어버려서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분명히 있었을 겁니다. 선골보유자가 아니었다면 무슨 수로 준선경에 도달할 수 있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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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긴, 일리가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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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진군은 고개를 돌려 서란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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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갑자기 이런 얘기를 꺼낸 이유는 류 수사님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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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때문이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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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아무래도 류 수사님은 선골보유자이신 것 같습니다. 사실 예전부터 긴가민가하긴 했는데, 오늘 류 수사님의 비경 의식을 지켜보고서야 확신이 생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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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깜짝 놀라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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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선골보유자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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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도 엄청나게 희귀한 종류의 선골일 겁니다. 선계 전역을 이 잡듯이 뒤져도 류 수사님 또래에 화신기 목전까지 도달한 수도자는 열 명이 채 안 될 겁니다. 말 그대로 하늘이 내린 재능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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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후에도 등 진군은 서란의 재능에 관한 예찬을 줄줄이 쏟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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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고의 기재, 준선경 확정, 질투 수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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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정도 함께 지내면서 깨달은 사실인데, 등 진군은 의외로 칭찬에 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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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의 입꼬리가 서서히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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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 보면 이 정도로 호들갑 떠는 칭찬 멘트는 꽤나 오랜만에 듣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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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동안 역치가 높아진 탓인지 문파 식구들의 칭찬은 뭔가 밍숭맹숭해진 감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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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은 부러워 하는 눈빛으로 혼잣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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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골보유자라니, 참으로 부럽구나... 등 진군, 그대가 보기에 나는 어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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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녀님은 나이가 어떻게 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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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난 지 천 년이 좀 넘은 것 같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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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생각하던 등 진군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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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살에 여의주를 완성할 정도라면, 높은 확률로 용녀님께서도 선골을 지니고 계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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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정말이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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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하계의 용들은 여의주를 완성하는데 보통 수천 년씩 걸리거든요. 그리고 혹시 선골보유자가 아니라고 해도 너무 상심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선골도 영근처럼 후천적으로 보완할 수 있거든요, 물론 선계 한정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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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시즌 준선경 수도자, 등 진군(현 시즌 원영기)의 입에서 나온 호언장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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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과 담청은 급격하게 기분이 좋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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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진군을 향한 호감도 역시 급격하게 상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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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사람은 한층 사이좋게 용궁으로 입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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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과 담청은 예전에 했던 약속대로 한동안 용궁에 머무를 계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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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어인족 신도들에게 섬김 받으면서 마냥 놀기만 할 작정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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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각기 할일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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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과 등 진군은 전대 용신의 수집품 창고를 샅샅이 수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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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대 용신은 실종 직전까지 동반 승천에 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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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은 전부 챙겨 간 지 오래였지만, 다른 종류의 단서가 남아 있을 가능성도 없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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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에 운이 따라 준다면 전대 용신의 행방을 알아내거나, 동반 승천의 법술을 완성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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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당연하다는 듯이 수행에 매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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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시간은 오죽문의 비전 수속성 공법, ‘낙수천석’을 익히며 정수법력을 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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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해의 풍부한 수영기가 수행에 큰 도움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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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중간중간 결재 도장도 찍고, 소설도 쓰고, 악기도 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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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과 담청, 등 진군이 용궁에 틀어박혀 있는 동안 오죽문과 금작파 역시 바쁜 나날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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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신기 도달에 필요한 우화 의식 준비는 물론이고, 선계에 타고 갈 비행 선단도 건조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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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굉장히 바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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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근보유자 수색을 위해서 양나라 전역을 떠돌던 왕 수사는 오랜만에 문파 본산으로 복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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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곁에는 열 살 남짓된 여자아이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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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골짜기의 촌락에서 발견한 사영근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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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의 소매를 꼭 붙잡은 채, 소녀가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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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나중에 크면 하늘을 날 수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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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 수사는 자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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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그렇고 말고. 항상 바르게 살고, 어른들 말씀 잘 듣고, 수행도 열심히 하고, 다른 아이들과 사이 좋게 지내면 눈 깜짝할 사이에 그렇게 될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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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랑 나이가 비슷한 애들도 있어요? 마을에는 다 언니 오빠들뿐이었어요, 아니면 갓난애기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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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많아서 깜짝 놀랄 게야. 친구도 많이 사귈 수 있을 테니 기대하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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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난 소녀는 연신 조잘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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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을 태운 채 구름을 헤쳐 나가던 나룻배는 마침내 대결계 안쪽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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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해 사이사이에 치솟은 웅장한 산봉우리마다 미완성 선박들이 늘어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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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 수사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감동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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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시 3년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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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종이를 앞에 두고 고민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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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계로 비승하기 전에 끝마쳐야 할 일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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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자가 아닌 작가 류서란으로서의 과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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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바로 ‘인형술사 소년과 인형 소녀’ 시리즈를 완결내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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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인형인형 시리즈를 연재하기 시작한 이후로 어언 25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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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 해안 동맹의 결성과 지저 세계의 문물 교류 정책 덕분에 서란의 소설은 더욱 광범위하게 퍼져 나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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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술 좀 홍보해 볼 요량으로 쓴 책이 이렇게 많은 사랑을 받게 될 줄은 작가 본인도 몰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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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륙 각지에 분포된 인형인형 시리즈의 독자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소설이 영원히 연재되길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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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정말 안타깝게도 그건 불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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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언제까지고 인계에 머무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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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아직은 여유가 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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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영근을 조화시키고, 우화 의식도 치르고, 입구 막기를 시전 중인 독안룡도 치워야 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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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점차 바빠질 걸 고려하면 연재가 가능한 시간은 아무리 길어 봐야 5년 이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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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부터 슬슬 결말을 준비할 필요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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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주인공들의 이야기가 끝난다는 분위기도 풍겨 주고, 여태 쌓아둔 복선도 회수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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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야 독자들도 마음의 준비를 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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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집필 보조용 설정집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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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미회수 복선, 회수가 완료된 복선, 앞으로 뿌려야 할 복선, 중간에 폐기된 설정, 구체화가 덜 된 사이드 스토리 등을 점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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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과정도 실제 집필 못지 않게 중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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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말까지의 전개를 빠르게 훑어 본 서란은 다시금 시선을 종이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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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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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생각해 둔 결말은 다음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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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를 되찾은 세계, 마침내 생명을 얻은 인형, 그리고 서로를 사랑하게 된 소년과 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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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뭔가 아쉬운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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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팔짱을 낀 채 심사숙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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훨씬 더 괜찮은 결말이 떠오를 것 같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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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자의 고뇌는 한동안 지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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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에서 몸을 배배 꼬던 서란이 눈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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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원래 생각했던 대로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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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인형인형 시리즈의 결말은 ‘모험을 끝마친 두 사람은 알콩달콩 잘 살았답니다.’로 결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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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고민하기 귀찮아서 대충 정한 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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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이게 서란이 떠올릴 수 있는 최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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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인형 시리즈의 스토리는 현재 클라이맥스 부분에 다다른 상태라고 봐도 무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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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승전결 구조를 고려했을 때, 이제부터는 갈등을 해소하고 마무리 짓는 내용이 나와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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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디로 연착륙 단계라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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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상황에서 섣불리 반전을 추가했다가는 오히려 자충수로 작용할 확률이 높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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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그래도 속도를 줄여야 하는 상황에서 뭔가 보여 드리겠다며 풀악셀을 밟으면 필히 사고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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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인형인형 시리즈는 25년 간 연재된 초장편 소설, 이쯤 되면 사고가 아니라 재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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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이란 사람을 위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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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25년 동안 자기 작품을 사랑해 준 독자들을 고문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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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자기 때문에 장서각이 불타오르는 광경도 보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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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을 마친 서란은 붓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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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은 어인족이 꽤 마음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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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가급적이면 선계에 데려가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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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용궁에 머무르기 시작한 3년 전부터 동반 승천에 관한 연구를 시작한 이유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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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은 오죽문에 보관해 둔 전대 용신의 연구 자료를 다시금 용궁으로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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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비승 전까지 연구를 마치겠다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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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호기로운 마음가짐이 아닐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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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연구는 시작하자마자 난관에 봉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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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의 두뇌가 간발의 차이로 연구 작업의 최소 사양을 달성하지 못한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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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열 현상과 함께 극심한 두통이 동반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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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시녀처럼 따라다니던 등 진군이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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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사람을 부리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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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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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국제 학회에 연락해서 연구 인력을 요청하면 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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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은 소매에서 휴대전화를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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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곧장 국제 학회에 전화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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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도 용궁은 아슬아슬하게 통화권 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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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학회 관계자가 전화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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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국제 학회 사무처입니다. 전화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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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갑구나, 급한 볼일이 있어서 이렇게 연락을 했다. 어인족 동반 승천에 관한 연구를 위해서 용궁으로 연구원들을 파견해 줄 수 있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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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용궁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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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학회가 발칵 뒤집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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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의 존재는 대외비였지만, 동부 해안 동맹 소속 수도문파들에게는 어느 정도 공개된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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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국제 학회도 담청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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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학회 관계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담청의 요청은 대자연의 지엄한 명령이나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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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당사자는 딱히 그럴 의도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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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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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로부터 용이라는 영물은 신이나 자연 현상의 일종으로 받아들여지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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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실시된 설문 조사에 따르면 아직까지도 ‘용을 직시하면 천벌 받는다.’라는 미신을 믿는 사람이 7할을 넘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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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나이가 많은 수도자일수록 더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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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국제 학회 관계자들 정도 나이대의 집단이라면 9할도 우습게 달성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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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학회 관계자들은 심각한 얼굴로 논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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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견, 해야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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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벌려 놓은 일이 너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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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 수 있나요, 미뤄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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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정을 설명하고 양해를 구하는 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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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좀 불경하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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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녀님께서는 납득하셨다고 해도 혹여 하늘이 진노하시지는 않을까 염려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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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긴, 용이란 본디 천벌의 대행자... 일리 있는 고견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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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긍정적으로 생각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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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적으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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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그냥 공덕을 쌓는 셈 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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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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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투표할 필요도 없을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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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는 어영부영 끝났고, 국제 학회는 대규모 연구 인력을 용궁으로 파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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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은 그 날부터 하루에 두 번씩 꼬박꼬박 연구 총책임자에게 방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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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오늘은 성과가 좀 있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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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죄송합니다, 용녀님. 아직 실마리를 찾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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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구나, 알겠다. 조만간 또 방문하도록 하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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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따가 저녁 먹고 한 번 더 오겠다는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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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이언트와 한 지붕 아래에서 지내니까 정말 죽을 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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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이 떠난 뒤, 연구원들은 더없이 간절한 심정으로 전대 용신의 연구 자료를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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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대 용신은 상상 이상의 기록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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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안타깝게도 자신의 기록물을 타인에게 보여주길 즐기는 성격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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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전반에서 독자를 향한 배려라고는 손톱만큼도 찾아볼 수 없다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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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대 용신의 글쓰기 방식은 읽는 이로 하여금 고문당하는 기분을 느끼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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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대 용신은 수천 년을 넘게 살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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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살아온 세월만큼 방대한 지식을 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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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기를 읽는 능력까지 고려하면 인계의 그 누구도 전대 용신의 지식량을 따라갈 수 없을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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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천 년 축적된 지식량과 독자를 고려하지 않은 글쓰기 방식이 결합되자 지옥이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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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대 용신의 글에는 원인과 결과만 있을 뿐, 과정이라는 게 존재하지를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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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리 전개가 거의 층수 단위로 건물을 오르내리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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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대 용신이 폴짝 뛰어서 2층으로 올라가면 연구원들은 계단을 한 칸 한 칸 조립하면서 따라가는 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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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계단 한 칸, 즉 논리 전개를 연결해 줄 수 있는 적절한 지식을 찾는 것도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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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더미처럼 쌓인 전대 용신의 장서들을 하나하나 조사해야만 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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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다행인 건 연구원들의 전공 분야와 출신 성분이 굉장히 다채롭다는 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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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여 개국에서 집결한 온갖 학문의 달인들은 전대 용신의 무자비한 연구 자료를 차근차근 해석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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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승리가 따로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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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어느 날, 마침내 해석이 완료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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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영기의 해 이후로 6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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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인형 시리즈의 완결 편을 집필하던 서란은 부름을 받고 전대 용신의 수집품 창고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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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는 두 사람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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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한하게도 담청은 향로 법보를 끌어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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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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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 님, 그 향로는 왜 들고 오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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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향로 법보야말로 전대 용신이 완성한 동반 승천 법술의 비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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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잠깐만요... 그 연구가 성공했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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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내심 전대 용신의 연구가 실패했으리라 믿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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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아무리 여의주를 완성한 용이라 할지라도 한 종족 전체를 데리고 비승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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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반량이 산술적으로 증가할 때, 비승을 주도하는 자의 부담은 지수적으로 폭증하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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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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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성공했고말고, 지금 당장 보여 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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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사람은 전대 용신의 수집품 창고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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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동안 조금씩 정리한 덕분인지 내부를 돌아다니는 건 크게 어렵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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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은 산호로 만든 작은 제단 앞에 멈춰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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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제단의 홈을 바라보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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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로 법보가 원래 놓여 있던 곳이 여기였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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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여기서 가져왔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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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은 홈에 향로의 다리를 찰칵 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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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하단전에서 여의주를 꺼내 법문을 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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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로 법보는 밀려 들어오는 혼원법력을 흡수하며 덜그럭덜그럭 요동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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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동반 승천의 법술이 발동하며 둔중한 파동이 용궁 전체를 뒤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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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곧바로 이변을 감지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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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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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대 용신의 수집품 창고는 정리정돈을 열심히 했음에도 답답한 느낌이 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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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동사니를 하도 많이 모아 둔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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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지금은 오히려 들판 한복판에 서 있는 듯한 개방감마저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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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금방 원인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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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법보에 담긴 신선의 힘을 이용해서 공간을 확장한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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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맞췄다, 지금은 이 방만 크게 만들었지만 사전 준비가 갖춰지면 용궁의 내부 공간 전체를 확장하는 것도 가능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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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인족 전체를 용궁에 태운 채로 비승할 작정이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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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은 마저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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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 뿐만이 아니다. 용궁의 외부를 축소시키고 시간의 흐름을 왜곡시켜서 내부의 어인족을 동면 상태로 만드는 기능도 있었다. 아마도 비승 도중에 가해질 부담을 경감시키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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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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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보에 담긴 신선의 권능마저 활용하는 법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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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반 승천의 법술은 어인족을 향한 전대 용신의 애정이 빚어낸 기적이나 다름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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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문득, 의문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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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전대 용신은 왜 사라진 거죠? 동반 승천의 법술도 이미 완성됐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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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까지는 잘 모르겠구나. 연구 자료의 마지막 부분은 전대 용신과 함께 사라졌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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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전대 용신의 행방은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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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궁 체류 7년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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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대 용신 실종 사건은 미궁 속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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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행방불명된 지 백 년이 훌쩍 넘은 이 시점까지 전대 용신이 생존해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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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탐정 이인조는 끝내 자신들의 패배를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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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궁 체류 8년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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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해인 탓에 계절감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었던 가을, 인형인형 시리즈가 완결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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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평화와 행복을 손에 넣은 소년과 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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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할 것 없는 결말이었지만 30년 동안이나 두 사람을 응원했던 서대륙 독자들은 대만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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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궁 체류 9년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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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오영근 조화를 목전에 둔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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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르면 여름, 아무리 늦어도 겨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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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부터는 슬슬 떠날 준비를 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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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아직은 용궁에 남아 있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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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은 난데없이 종족 투표를 실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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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히는 대지모신과 이대 용신을 따라서 선계로 비승하고 싶은지에 관한 찬반 투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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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과 등 진군이 말려 봤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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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망의 찬반 투표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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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인족은 질서 정연한 움직임으로 신분 확인을 하고 용지를 받아서 기표소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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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투표장을 나오면서 출구조사에 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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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표가 끝나자마자 출구조사 결과가 발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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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성 비율은 당연히 100%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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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인족의 단합력은 과연 대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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곁눈질로 결과지를 들여다본 서란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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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개표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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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아직 모르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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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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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린어를 위시한 어인교단 일등 신도들 덕분에 개표 절차는 빠르게 진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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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표율은 무려 98%에 육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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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도면 사실상 투표권자 중 거동이 불가능할 정도의 병자 외에는 모두 참여한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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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뒤에 개표 결과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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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성표가 7할, 나머지는 전부 무효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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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표가 뭔지 이해를 못한 어인족이 3할씩이나 된다는 점을 제외하면 큰 이변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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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은 투표 결과를 확인하고 안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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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 다행이로구나. 혹여나 인계에 남아서 전대 용신의 귀환을 기다리고 싶다는 의견이 많으면 어쩌나 걱정했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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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수면 위에서 봄이 막 지나가고 있을 무렵, 담청과 어인족의 동반 승천이 확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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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서란은 용궁을 떠나 육지로 올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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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 관리 위원회의 업무 때문에 바쁘다가 이제서야 돌아다닐 시간이 생긴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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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 먼저 갈 곳은 동대륙 대수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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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오랜만에 동대륙 땅을 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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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송진 이용 수속을 마치고 고대 유적 외부로 나오자 여름 특유의 녹음이 서란을 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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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균열이 닫힌 지 30년이 넘었건만 심층부는 여전히 명계에 의해 침식된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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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태본곡까지 전력질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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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행인면목 친구들과의 해후가 기다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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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괴 무리를 분쇄하며 살인전차처럼 내달린 서란은 얼마 지나지 않아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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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본곡은 이전에 방문했을 때와 비교해서 전혀 달라진 점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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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지고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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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행인면목과 수도자들에게 이삼십 년 정도는 그다지 긴 시간이 아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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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눈을 감고 의식으로 도시 전체를 감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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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사 생활을 했던 배움의 거리, 미목대회를 준비하며 다녔던 장소, 자주 방문했던 음식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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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추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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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에 잠겨 있던 서란은 눈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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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고 있던 대상을 발견한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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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은 줄기와 불타는 가지가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며 걷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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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잽싸게 두 나무에게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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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은 줄기! 불타는 가지! 둘 다 오랜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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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한 목소리를 들은 두 오행인면목이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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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은 줄기가 서란을 먼저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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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 폐관수련은 끝난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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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셈이지. 얼굴 좀 보려고 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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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다시 보니 정말 좋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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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는 가지도 뒤늦게 서란을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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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거기 있었군요. 오랜만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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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행인면목한테 이십여 년쯤은 잠깐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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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큼 반갑다는 의미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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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자 한 명과 나무 두 그루는 한적하고 볕 잘 드는 장소에서 한동안 담소를 나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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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 떠나려는 서란에게, 곧은 줄기가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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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폐관수련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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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그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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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부지런하시네요. 다음에는 언제 나오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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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조만간 비승을 할 예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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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곧이곧대로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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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밀 사항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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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서란은 어물거리며 웃어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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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약간 오래 걸릴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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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는 가지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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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 결과에 따르면 심층부를 잠식한 명계의 기운도 수백 년 뒤에는 완전히 정화될 거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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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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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정말입니다. 그때가 되면 우리가 서란이 있는 곳으로 들어가는 것도 가능하다는 뜻이죠. 자주 찾아가서 귀찮게 굴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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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친구는 웃으면서 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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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심층부 고대 유적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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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륙에 파견된 첩보 조직 요원들이 바삐 움직이며 철수 준비를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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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학자들도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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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첩보 요원들에게 뱅크런 작전 이후의 동대륙 정세에 대해서 들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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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대문파 두 곳은 내분으로 해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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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머지 여덟 곳도 위세가 예전만 못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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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후죽순 등장한 신흥 문파들이 파격적인 조건으로 인재 및 기술 빼먹기에 나선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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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유출된 십대문파의 비전 인형술 서적 몇 권을 속독으로 대충 훑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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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이면 몰라도 지금은 딱히 배울 게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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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도 그럴 것이, 지구에서부터 독과점 기업이 R&D 열심히 한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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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다 읽은 십대문파의 비전을 짐수레 위에 대충 던져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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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레에 실린 화물은 대부분 고대 유물이거나 고고학자들이 작성한 연구 자료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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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쉽게도 성과는 다소 미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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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송진은 어떤 원리로 작동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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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균열을 만든 건 도대체 누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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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 고대 문명은 한순간에 멸망해 버렸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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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혀내지 못한 의문이 많았지만 시간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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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죽문과 금작파의 비승에 앞서, 동서 대륙을 연결하던 전송 시설은 잠정 폐쇄될 예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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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 발생할지도 모르는 대륙 간 분쟁을 예방하기 위한 결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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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전송진을 통해 서대륙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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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의 다음 행선지는 지저세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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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에 적힌 주소를 물어물어 찾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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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꽤 괜찮아 보이는 건물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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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12년 차 부부, 토토서와 지암서의 러브러브 하우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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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을 두드리자 지암서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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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 정말 반가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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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고 가는 T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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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반가워, 지암서. 그 동안 잘 지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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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들 키우느라 정신 없어 지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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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최근 받았던 편지의 내용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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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일곱째 낳았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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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그래서 남편도 저도 육아 휴직 내고 집에서 애 보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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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들지? 나도 육아 비슷한 거 해 봐서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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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식산대붕 얘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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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의문문으로 지저귀던 오목눈이는 어느덧 글방을 졸업하고 집에서 빈둥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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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금영영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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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과 지암서는 러브러브 하우스로 입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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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으로 들어서자 어른 두더지 한 마리와 어린 두더지 일곱 마리가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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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암서는 능숙한 솜씨로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는 넷째, 다섯째, 여섯째를 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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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토서는 우는 아기를 달래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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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이야, 서란. 보다시피 인사를 할 만한 여건이 안되네. 이해 좀 해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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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 괜찮아. 얘가 막내지? 장군감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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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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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족이 달라서 그런지 구분이 좀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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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적 나이가 많은 첫째와 둘째, 셋째는 용돈을 받아서 자기들끼리 놀러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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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째, 다섯째, 여섯째, 일곱째는 지암서의 동화책 읽는 소리를 듣다가 서서히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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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으로 몰래 나가면 거대 괴조에게 잡아 먹힌다는 교훈적인 내용이 담긴 동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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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을 모두 재운 토토서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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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을 떠나서 하늘로 간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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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맞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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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암서가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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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 정말 보고 싶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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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보고 싶을 거야, 지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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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은 진심으로 서로의 앞날을 축복해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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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아홉이나 되는 미궁언서 가족들 틈에서 함께 저녁 식사를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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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다음 날 아침 지저 세계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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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죽문과 지저 세계가 맺은 무역 협정은 동부 해안 동맹이 승계받을 예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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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과의 문호 개방을 요구하는 미궁언서들의 목소리는 점점 커져만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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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는 수직 갱도파와 수평 갱도파 이외에도 아예 지상으로 나가자는 제삼세력도 등장했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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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과 지저 세계 간의 교류는 이미 막을 수 없는 거대한 흐름이나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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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엽이 지는 가을, 서란은 오죽문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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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위성 금죽화의 유지 보수 메뉴얼을 작성하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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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비승한 이후, 인계에 남겨질 금죽화는 동부 해안 동맹이 공동 관리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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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밖에도 사전에 약정했던 대로 유나라, 양나라, 교나라 삼국의 영토를 비롯해서 분배해야 할 게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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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저택에서 메뉴얼 작성과 수행을 병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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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마침내 오영근을 조화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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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문은 삽시간에 서대륙 전역으로 확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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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뒤, 적대문파들이 항복 선언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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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별다른 요구 없이 항복을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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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화신기 수사가 된 이후에 적대문파들을 일소해 버리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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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삼환문이 망하고 유나라에 닥친 혼란을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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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가르친 여무진이 어릴 적 난세로 가족을 잃고 세상을 저주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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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대륙 전체를 잿더미로 만들 불씨가 되길 자청할 마음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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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해 겨울, 우화 의식의 준비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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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대기실에서 우화 의식의 시작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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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한 해 동안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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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생전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인계의 풍경을 마지막으로나마 뇌리에 새기기 위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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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유나라 중부의 고향에도 들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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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류씨 가문을 방문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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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운 친족은 대부분 영면에 들었고, 남은 건 면식조차 없는 이들뿐이었던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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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위장용 신분의 부고 소식이나 전해 줄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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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실 내부는 시리도록 고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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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전까지는 의식용 예복의 착용을 돕는 하녀들 덕분에 활기가 넘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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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지금은 서란 혼자만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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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기다렸을까, 악기 소리가 울려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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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우화 의식이 시작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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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차분하게 대기실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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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으로 나오자 쭉 뻗은 길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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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눈 덮인 길을 묵묵히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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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륙의 역대 우화 예정자들, 즉 모든 화신기 수사들 역시 거쳐간 식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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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빠르지도, 너무 느리지도 않은 걸음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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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손히 모아 잡은 손에 들린 기다란 목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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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패에 적힌 출신지와 이름 석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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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걸었을까, 저 멀리 인파가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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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로 좌우에 수많은 수도자들이 늘어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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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측이 금작파, 우측이 오죽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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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수선에 입문한 열 살 무렵의 연기기 수사들이 한목소리로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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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에서의 마지막 걸음, 경하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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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에서의 마지막 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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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분히 중의적인 표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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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인계를 떠나 선계로 비승하고 나면 돌아올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고, 화신기 수사가 되어 비행능력이 생기면 대지를 디딜 필요가 없어진다는 뜻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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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수도자들의 외침을 들으며 계속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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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갈 때마다 주변 수도자들의 연령대는 점점 높아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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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선화를, 이아금을, 금영영을, 호혜문을, 그리고 왕 수사를 차례차례 지나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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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마침내 끝에 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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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교월과 여무진이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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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에서의 마지막 걸음, 경하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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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단에 도착한 서란은 홀로 계단을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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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누구도 대신 걸어 줄 수 없는 오르막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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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선의 본질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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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총 125개의 계단을 거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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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기 수사와 범인의 한계 수명은 정확히 12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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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인의 생애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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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단을 모두 오르자 화로가 하나 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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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자신의 명패를 불길 속에 던져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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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나라 중부의 류서란’이라는 글귀가 불타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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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범인 류서란은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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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문파의 최종 목표는 선계로 비승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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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로 구성원과 기술, 조직도, 의결 기관 등 수도문파의 모든 체계는 오로지 화신기 수사의 배출을 목적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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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 배치 역시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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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제단 꼭대기에 자리를 잡자 오죽문 전체가 공명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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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파 설립 당시부터 주요 건축물 대부분은 진법적인 활용을 염두에 둔 채 배치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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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건물들을 축으로 삼아 진법이 발동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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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줄 같은 연결망을 통해서 산맥의 천지영기가 제단으로 밀려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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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꼭대기에 앉아 있는 서란에게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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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단 근처의 영기 농도는 일시적으로나마 선계와 크게 다를 바 없는 수준까지 치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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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영기를 물에 비유한다면 서란은 범람 직전의 강물에 몸을 담그고 있는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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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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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이 순간만을 위해 쌓아올린 수행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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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단전에 위치한 금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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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단전에 위치한 영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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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단전에 위치한 원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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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의 삼단전이 공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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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영기는 계속해서 오행법력으로 변환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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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색, 흑색, 청색, 백색, 황색의 빛무리가 서란을 휘감은 채 그 몸집을 점차 불려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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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에 의해서 응집된 오행법력은 그들 스스로가 새로운 인력의 근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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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던 인력의 크기는 마침내 특이점을 돌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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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내 우주가 서란을 향해 쏟아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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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영기가 폭포수처럼 내리꽂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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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 장소, 더 나아가 산맥의 상공이 구멍이라도 뚫린 듯 새까맣게 물들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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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륙 전역의 하늘이, 구름이, 바람이, 눈이 서란의 머리 위로 밀어닥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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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떠 있음에도 푸르름을 잃어 버린 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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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봉우리를, 구름을, 거목을, 바위를 한순간에 휩쓸어 간 광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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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레 종말을 맞이한 것만 같은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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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륙의 모든 생명이 이변을 감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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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력한다고 숨길 수 있는 혼란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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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약한 영감이라도 지닌 요수나 요괴, 영물은 공포에 질린 채 도망치기 바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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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변은 오래 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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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풍은 빠르게 잦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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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도 본래의 색을 되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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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에는 뿌리째 뽑힌 아름드리나무의 흔적과 바위가 있던 구덩이, 무너진 산봉우리만이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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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푸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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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백일몽이라도 꾼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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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각, 우화 의식은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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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을 중심으로 팽창과 수축을 급격히 반복하던 오행법력의 구체에도 변화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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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과 기름처럼 따로 놀던 오방색 빛무리는 서서히 하나로 섞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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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국에는 오색 운무가 되어 서란의 중단전에 스며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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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라만상의 기운을 품은 안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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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혼원법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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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계에서 원영기 다음 경지를 운무기라고 부르는 이유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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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감고 있던 눈을 반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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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공 안쪽, 오색 광채가 일렁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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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기를 읽는 영안, 관천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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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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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다단한 천체의 흐름 너머로 인계와 선계를 연결하는 하나의 밝은 궤적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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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저 빛을 따라 비승하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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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다시금 눈을 감고 내면을 관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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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단전에는 혼원법력 이외에도 새로운 무엇인가가 자라난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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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번째 영근, 풍영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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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신기 수사가 지닌 비행능력의 근원이며 선계로 비승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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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풍영근과 혼원법력을 공명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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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한 줄기 실바람이 작은 육체를 휘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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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다리가 점차 대지의 속박을 벗어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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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나라 중부의 류서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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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작농 집안에서 태어난 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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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의로 고향을 등진 공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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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이 닿아 수도문파에 입문한 일영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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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귀한 사람이 되고 싶었던 수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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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사랑만을 바랐던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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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을 얻어 축기에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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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과의 만남을 계기로 금단을 형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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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적자를 쓰러뜨리고 원영을 응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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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오늘, 하늘에게 스스로를 증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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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인으로서 죽고 영물로서 다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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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소 화신기 수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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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자들의 함성이 산맥을 뒤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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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죽문과 금작파는 공동으로 화신기를 배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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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천 년 동안 이어져 내려온 수도문파의 숙원이 드디어 이루어진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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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제가 안 열리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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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자들은 기본적으로 음주를 즐기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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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기기 수사만 되어도 술에 취하지 않을 뿐더러 수행에 방해가 된다는 인식도 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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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의식처럼 극히 일부의 경우에만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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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선계 축제에서 술을 찾아보기 힘든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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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대신 사람들은 각자 좋아하는 음료를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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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물, 꿀차, 꽃차, 그냥 차, 과즙 음료, 탄산수, 발효 음료, 식초 음료 등등 없는 게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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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제품 개발은 보통 연단술사들의 몫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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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금이 큰 잔을 하나 내밀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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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내용물 확인하지 말고 한 모금만 마셔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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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뜬금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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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아, 빨리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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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끼리 갑자기 웬 애교인가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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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기기 수사니까 술에 취했을 리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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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축제 분위기에 들뜬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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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정체불명의 액체를 음미하다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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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곰탕 국물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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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렸습니다! 내용물을 확인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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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생각해 봐도 곰탕 맛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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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반쯤 빈 잔을 들여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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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탕하면 떠오르는 뽀얀 국물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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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보기에는 그냥 맹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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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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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진짜 신기하다. 이거 어떻게 만들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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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금은 득의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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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소매에서 잘 접힌 종이를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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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 안에는 회색 가루가 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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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금은 가루를 가리키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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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물에다가 이 가루를 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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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한 잔 분량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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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커다란 물통 하나에 한 꼬집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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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전생에 읽었던 책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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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성 착향료 전문가가 쓴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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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후각이 얼마나 속이기 쉬운지 적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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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나 흥미롭게 읽었던 기억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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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은 한동안 대화를 나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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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다른 음식도 재현할 수 있는지 궁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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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금은 한번 시도해 보겠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친구들이랑 놀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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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바람이나 쐴 겸 한적한 장소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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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발자국 하나 없는 설원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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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이 끝나고 내리던 눈은 그친 지 오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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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바람이 불 때마다 나뭇가지에 쌓여 있던 눈이 흩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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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을 보고 있는데 누군가 말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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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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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 여기서 혼자 뭐 하고 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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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을 좀 쐬고 있었습니다. 담청 님은 축제 잘 즐기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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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끽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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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고개를 돌려 담청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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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의 두 손에는 군것질거리가 잔뜩 들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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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말이 아니라 진짜로 만끽하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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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옛날 기억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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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주를 되찾고 떠나려던 소용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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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을 지어 달라는 갑작스러운 부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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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과 함께 보낸 수십 년의 세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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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돌연 질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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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 님, 이름은 마음에 드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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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당연하지, 누가 지어 준 이름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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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시다면 다행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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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일 계속되던 축제가 끝날 무렵, 봄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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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략 16년 전, 그러니까 막 남대륙 원정을 마치고 돌아왔을 무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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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은 서란의 저택 근처에 씨앗을 하나 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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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정체는 바로 초대형 선인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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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인장은 척박한 환경에서도 곧잘 생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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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간 방치해도 잘 버틴다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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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이 키우기에 이보다 적절한 식물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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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초대형 선인장(16살)은 주인의 무관심과 냉대 속에서도 여태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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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담청은 그 동안 물을 딱 두 번 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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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어 사료는 안 까먹고 하루에 다섯 번씩 꼬박꼬박 준다는 걸 고려하면 일부러 이러나 싶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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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선인장의 키는 50m까지 자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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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히 성장하려면 아직도 한참 남았지만, 슬슬 식용으로 쓸 수 있을 정도는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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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밑둥을 뎅강 자르는 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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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칼을 선인장 표면에 깊숙이 박아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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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궤적이 원을 그리도록 칼날을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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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령껏 힘을 주자 뽕 하는 소리와 함께 선인장의 속살이 원뿔 모양으로 분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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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끄러미 지켜보던 담청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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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봐도 놀라운 손재주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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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진군도 동감하는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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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그렇습니다. 조각칼을 자주 다뤄서 그런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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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의 현란한 칼 솜씨가 선인장을 먹기 좋은 크기로 토막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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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다 됐습니다. 드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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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과 등 진군은 선인장 속살을 야금야금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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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도 한 조각 집어서 맛을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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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인장에서 왜 수박 맛이 나는지는 의문이었지만, 용과 거인도 실존하는 세상이니 그러려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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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수박과 선인장의 차이점에 대해서 고뇌하고 있을 무렵, 담청과 등 진군은 한창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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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의 얘기를 듣던 등 진군이 질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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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거인이요? 남대륙에 거인이 산다는 말씀이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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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이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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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용암 목욕도 하면서 즐겁게들 지내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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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인들의 신장은 어느 정도였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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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 대붕이 본체의 두 배가 좀 안 됐을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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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진군은 저 멀리 서 있는 식산대붕의 본체를 바라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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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장 차이를 고려하면 선계에 서식하는 거인족과는 완전히 별개의 종족이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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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은 전에 본 선계의 광경을 떠올리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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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계의 거인족이라면 키가 구름까지 닿는 커다란 녀석들을 말하는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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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맞습니다. 선계 고유종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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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신장 차이가 많이 나긴 하는구나. 같은 종족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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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진군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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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정말 신기하네요. 하계에 그 정도 크기의 거대종이 존재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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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 천지영기의 농도 때문이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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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그렇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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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가만히 듣고 있던 서란이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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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진군, 궁금한 게 하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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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가 궁금하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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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죽문과 금작파가 선계로 비승한 다음에 무사히 정착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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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화 의식을 치르던 도중, 산맥 전체의 천지영기가 제단에 집중된 일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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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서란은 일시적으로나마 선계 수준의 영기 농도를 체험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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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결과 걱정이 하나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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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진군은 살며시 웃더니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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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생각을 하시는지 짐작이 되는군요. 선계의 수도문파들과 경쟁조차 안될까 봐 걱정하시는 거죠? 풍부한 천지영기와 수행 자원, 수준 높은 공법 등으로 누적된 격차를 따라잡을 수 있을까 싶으신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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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걱정이 되죠. 선계에서는 의식 없이도 화신기까지 도달할 수 있다고 하셨잖아요. 하도 천지영기가 풍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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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그 뿐이겠습니까? 영근 자질이나 선골 자질을 개선시켜 주는 영과도 드물긴 하지만 존재하죠. 심지어 비경 의식을 치를 때도 하계처럼 최적의 시기를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이게 모두 선계의 영기 농도 덕분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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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말로 축복받은 수선 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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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의 표정은 급격하게 의기소침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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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승한 이후 선계 토박이들에게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미래가 기다리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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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진군은 개구쟁이처럼 웃으며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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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크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오죽문과 금작파의 앞날에는 탄탄대로가 열려 있으니까요. 전부 류 수사님 덕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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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덕분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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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요, 왜 그런지 설명해 드릴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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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고개를 맹렬히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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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진군은 질문을 하나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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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 수사님께서는 속세 출신이라고 하셨죠? 오죽문에 입문한 건 몇 살 때였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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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공녀가 된 다음 해에 왕 수사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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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다섯 살에 입문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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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기에 성공한 나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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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다음 해, 열여섯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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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진군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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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호라, 1년 밖에 안 걸리셨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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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선 자체는 열 살에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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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작농 집안에서 태어나셨다면서요. 하급 영석조차 없었겠군요. 그리고 농사를 돕고 나면 수행할 시간이나 있었겠습니까? 하루에 수행하는 시간이 네 시진(8시간)도 안되는데 그게 어떻게 수선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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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과 담청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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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형 선인장 아래로 보이는 드넓은 저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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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영영이 중정에서 브런치를 먹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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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진군의 질문은 계속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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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단기와 원영기에 도달한 건 언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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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단기는 20살, 원영기는 35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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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문하고 바로 다음 해에 축기기, 그리고 4년만에 결단기, 또 15년 뒤에는 원영기까지 도달하셨네요. 심지어 원영기부터 화신기까지의 오채지심 수행은 30년도 채 안 걸렸고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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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의 나이는 올해로 64세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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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로 나열해 보니 얼마나 빠른지 체감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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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신기 수사의 수명이 2천 년이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더욱 말이 안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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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등 진군이 하고자 하는 말을 알아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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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제 경지 상승 속도가 그 정도로 빠르다고요? 선계 수도문파들과의 격차를 뒤집을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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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감이 안 잡히시는 모양이군요. 하긴, 이해는 됩니다. 하계에서 비승한 수도문파들은 하나같이 선계에 대한 지나친 환상을 품고 있었으니까요. 괴로움이 존재하지 않는 낙원이라느니, 오영근자도 숨만 쉬면 신선이 될 수 있다느니 하는 식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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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 제가 그 정도는 아니죠. 등 진군한테 몇 년을 배웠는데 선계에 대한 환상이라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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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진군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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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선계 태생의 일영근자는 평균적으로 몇 살에 축기기에 도달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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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요... 열일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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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은 스무 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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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납득이 안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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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 축기기면 오죽문과 금작파 등 거대문파 소속 일영근자의 평균과 다를 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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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계와 하계의 영기 농도 차이가 몇 배인데 이런 결과가 나오는지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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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진군이 서란의 궁금증을 풀어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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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 수사님께서는 일영근자라는 이유로 문파의 집중 투자를 받으셨죠? 영석이나 단약 같은 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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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기둥뿌리 좀 뽑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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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선계와 하계의 일영근자가 비슷한 시기에 축기기 수사가 되는 겁니다. 선계의 수도문파가 적게 투자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계의 수도문파가 상상 이상으로 많이 투자하는 탓이죠. 물론 깨달음 문제도 관련이 있습니다. 선계에 산다고 누구나 현명해지는 건 아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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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질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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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계에서는 다음 경지에 도달하기 위한 수행 시간이 몇 배씩 증가하나요? 인계는 얼추 다섯 배 정도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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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배 정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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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암산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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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살에 입문해서 스무 살에 축기기, 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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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 시간이 3배씩 증가한다면 결단기까지 30년, 원영기까지 90년, 화신기까지 27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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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부 다 더하면 선계 태생의 일영근자는 410살에 화신기에 도달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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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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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계 태생 일영근자는 평균적으로 410살에 화신기 수사가 되는군요! 제 경지는 선계를 기준으로 해도 6배 이상 빠른 상황! 이제 좀 안심이 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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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진군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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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0살이 아닙니다. 1400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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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10년, 30년, 90년, 270년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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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0년이 아니라 1260년입니다. 원영기에서 화신기로 넘어가는 오채지심 수행에 걸리는 시간은 하계나 선계나 비슷합니다. 따지고 보면 당연한 일이죠. 선계의 천지영기가 풍부하든 말든 오영근 조화와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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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말을 더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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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그러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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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축하 드립니다. 류 수사님께서는 선계 평균보다 20배 가량 빠른 속도로 경지를 올리고 계십니다. 이제 이해가 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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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배... 20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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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중얼거리던 서란은 폴짝 뛰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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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힘차게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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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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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 대한 불안을 모두 떨쳐 버린 서란의 미소는 여름날 따가운 햇살처럼 눈부시게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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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선계에 가려면 일단 비승을 해야 하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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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중심에서 2천 년 넘게 수문장 노릇을 하고 있는 독안룡부터 어떻게 할 필요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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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과 담청, 등 진군은 머리를 맞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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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인형을 구슬로 만들어서 간편하게 휴대하려던 야망이 좌절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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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인방은 낙담한 표정으로 다탁에 둘러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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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부름꾼이 내온 고급차도 식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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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그녀들의 희망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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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연소자 류서란이 가장 먼저 말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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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재미있었잖아요. 그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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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임의 두 번째 연장자 호혜문도 수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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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이 옳습니다. 비록 마무리가 아쉽기는 했지만, 충분히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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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최고령자, 담청이 생떼를 부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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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슬픈 결말, 나는 인정할 수 없다! 하늘도 무심하지! 어째서 우리의 노력이 보답 받을 수 없단 말이냐! 세상이 이렇게 돌아가서는 안된다! 내가 천기를 읽어 해결책을 찾아오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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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은 그대로 문을 박차고 뛰쳐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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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지에 남겨진 두 사람이 서둘러 뒤쫓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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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과 호혜문은 눈 내리는 밤하늘을 고속 비행하는 담청의 뒷모습만을 간신히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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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밤, 눈 내리는 하늘, 사슴뿔, 고속 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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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련의 요소들이 서란의 옛 기억을 상기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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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타클로스의 선봉대장인 붉은코 순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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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돌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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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슴코는 매우 반짝이는 코. 만일 내가 봤다면 불 붙는다 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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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에서 듣고 있던 호혜문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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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무슨 노래인가요? 처음 들어본 것 같네요. 유나라 민요인 모양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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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식 중에 흥얼거리던 서란이 화들짝 놀라서 딴청을 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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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요라뇨, 그냥 즉흥적으로 부른 겁니다. 우리 차나 마저 마시죠. 어차피 담청 님은 한동안 안 돌아오실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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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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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은 차분히 앉아서 다 식은 차를 홀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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찻주전자가 절반쯤 남았을 때, 문이 벌컥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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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전파를 수신하고 돌아온 담청은 당연히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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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겹게 춤추며 등장한 금영영이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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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뜩 밀린 숙제, 이제는 안녕! 자유를 되찾은 금영영, 지금 여기에 입장! 춥고 목마른 본좌에게 따듯한 음료 한 잔을 진헌할 만고충신이 이 자리에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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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쓱으쓱 어깨춤을 추며 다탁으로 다가온 금영영은 찻주전자를 그대로 들어서 마셔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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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정도 있던 찻물이 세상에서 사라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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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맛을 다신 금영영이 호탕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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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었군. 하지만 괜찮다! 이 몸은 관대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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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영영은 방금 전까지 올해분 숙제를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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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답한 문파를 벗어난 해방감을 만끽하며 실컷 노느라 차곡차곡 쌓아둔 탓에 굉장한 분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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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며칠 뒤가 기한이라서 요즘 엄청 바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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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지금 흥이 잔뜩 오른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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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런, 다들 표정이 말이 아니군! 무슨 일이지? 이 몸에게 말해라, 단숨에 해결해 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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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과 호혜문은 금영영의 출신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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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작파는 법기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수도문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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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져야 본전이니 함구할 이유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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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시선을 교환하던 두 사람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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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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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부름꾼이 따듯한 차를 새로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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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두육비 거대인형에 대한 설명도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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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을 경청하던 금영영이 시원스레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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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그건 조금 어렵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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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말투마저 정상으로 돌아온 지 오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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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어떻게 안 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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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혜문이 간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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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칫 친자식이라도 아픈가 오해할 절실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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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금영영의 견해는 흔들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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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 들어보니까 꽤 큰 인형이라며? 애초에 인형처럼 복잡한 물건은 축소나 변형이 힘들어. 하물며 그렇게 큰 물건이면 거의 불가능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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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혜문이 들고 있던 과자를 떨어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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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삼 개월 시한부 선고를 들은 드라마 여주인공 같은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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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봐도 절망에 찬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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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구질구질하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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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방천화극은 잘만 변형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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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영영이 당황하지 않고 받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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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전부 금속으로 만들어진 법기니까 그렇지. 약간만 과장하면 구조적으로는 금속 주괴랑 다를 바가 없어. 단일한 소재로 만들었고, 조립하지 않은 한 덩어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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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금영영의 장황한 설명을 요약하면, 너무 복잡하고 거대한 탓에 소형화가 불가능하다는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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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심한 좌절감에 서란이 고개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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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무엇인가가 시야 안으로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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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탁 위에 떨어진 과자 부스러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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깍지 낀 두 손으로 하관을 가린 류서란이 잠시 고민하다가 조용히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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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작고 간단한 구조는 소형화할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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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영영이 호언장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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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하지, 내가 누구? 금작파의 유망주! 간단한 물건을 소형화하는 건 식은 차 마시기지! 오십 개든 백 개든 가져와 보라고! 전부 구슬로 바꿔 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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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낌새를 눈치챈 호혜문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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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어떤 계책이 떠오른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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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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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그렇습니다. 크고 복잡한 물건이라서 안된다? 그렇다면 방법은 처음부터 하나뿐이었습니다. 작고 간단한 물건으로 바꾸면 그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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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고 약한 다수, 크고 강한 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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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호혜문이 했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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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엄숙하게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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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삼두육비 거대인형을 토막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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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사람은 제각기 다른 감정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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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영영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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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혜문은 어느새 밝게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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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한없이 진지한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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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 스물넷, 몸통 열둘, 팔 일흔둘. 총 수량은 백하고도 여덟. 소형화는 영영이 담당해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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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십 개든 백 개든 가져오라고 허세를 부렸던 금영영이 당황해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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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팔 개? 내가 혼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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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과 호혜문이 환한 미소로 감사 인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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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흔쾌히 자원해 줘서 정말 고마워. 영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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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감사드려요, 금 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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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눈사람이 된 담청이 복귀하면서 예술가 삼인방이 다시 모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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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구슬 변환 담당 금영영도 함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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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명이 추가된 예술가 사천왕은 더 이상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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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두육비 거대인형은 빠르게 인수분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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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심사 당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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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목에 구슬 목걸이를 걸고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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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영영을 잠 못 이루게 한 구슬은 전부 백팔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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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걸이가 너무 길어서 몇 겹으로 겹친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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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불안하게 만드는 차림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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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 담당자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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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쩐지 쉽지 않은 하루가 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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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던 시간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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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힘찬 기합과 함께 수인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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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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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걸이를 구성하던 구슬들이 일제히 발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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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대한 법력을 머금은 구슬이 저절로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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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벌떼처럼 사방으로 발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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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을 중심으로 휘몰아치던 구슬은 이내 저마다 정해진 형상으로 변형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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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제자리에서 높이 도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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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발판처럼 생긴 부속품이 서란을 받치고 소용돌이 한가운데로 날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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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슬에서 변형된 기괴한 벽돌들이 모여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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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서로 끼우고 돌리느라 난리법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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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힘없는 조립 과정이 끝나고 인형이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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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당자는 일순간 말문이 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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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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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식간에 완성된 삼두육비 거대인형이 짜랑짜랑한 목소리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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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습니까, 저희의 걸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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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 내부에 탑승한 서란의 증폭된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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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당자는 초현실적인 조형미에도 불구하고 금방 정신을 가다듬고 제 할 일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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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복잡한 조립 과정과 동작을 위해서 어떤 논리 구조를 탑재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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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부 수동 조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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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도대체 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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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문 단계의 인형술사는 인형을 직접 조종하지요! 한마디로 이건 입문 수준, 그야말로 기초적인 인형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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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당자는 아연한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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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인형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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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담당자가 질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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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인형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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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하여, 금강야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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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희에 찬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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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당자는 터덜터덜 사무실로 복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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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런 게 세상을 돌아다니면 사람들이 오죽문을 어떻게 생각할지 두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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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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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차마 내키지 않는 도장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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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야차는, 인형이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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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겨울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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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변신합체 삼두육비 거대인형 금강야차는 예술가 사천왕의 손에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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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되고, 서란은 스물한 살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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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오죽문에 이런 얘기가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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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 수사님은 참 좋은 분이지만, 심미안이 좀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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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 창문으로 들어오는 봄바람을 즐기며 잠자던 서란이 갑자기 인상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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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의 꿈속에 두 인물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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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인물이라고 정의하기에는 다소 애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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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한 권과 귀신 한 명이 그 주인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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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젓가락 같은 팔다리를 가진 두꺼운 책이 울분에 차서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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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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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속이라서 둘로 분열되어 있던 소녀 서란과 소년 서란이 동시에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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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원통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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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책이 더 크게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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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괘씸한 너희 년놈들이 나를 먼지투성이 금고에 처박아 둬서 너무나 원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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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보니 표지에 ‘학습인형연구’라고 적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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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인화된 연구서가 연신 분풀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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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 서란과 소년 서란은 매타작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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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젓가락에 두들겨 맞던 서란즈를 살려준 건 어떤 인상 좋은 노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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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허, 너무 그러지 말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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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서가 얌전해지자 노인이 서란즈에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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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자네들에게 정말 갚을 수 없는 은혜를 입었네. 아무도 찾지 않는 인형술사가 제자를 두 명이나 얻었으니 말이야. 나는 참 행운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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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보니 이마에 ‘인형애호가’라고 적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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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꿈을 자네들에게 맡기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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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은 본 적 없는 연구서 저자의 상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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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꿈속이라서 그런지 논리적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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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영근자였던 그는 죽는 순간까지 청년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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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마찬가지로 꿈속이라서 논리적인 사고가 불가능했던 서란즈는 깜빡 속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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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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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은 동시에 기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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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에서 깰 때까지 연구서와 인형애호가는 서란즈에게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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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원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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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한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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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갈아 가면서 병 주고 약 주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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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범적인 당근과 채찍, 혹은 좋은 경찰 나쁜 경찰 전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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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굉장히 효과가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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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에서 깬 서란이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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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생각해보니까, 역시 수동 조작을 인형술이라고 우기는 건 조금 아닌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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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진 머리가 봉합된 서란이 제정신을 되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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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섭에 성공해서 싸움을 피하면 최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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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마냥 낙관적으로 생각할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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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준비해야 하는 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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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진군은 양측의 전력을 비교,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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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성기란, 별을 잉태하는 경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경지에 도달하면 중단전 혹은 하단전에 위치한 영성의 별에서 무한한 법력을 뽑아 쓸 수 있지요. 하지만 독안룡은 승천 직전의 용, 아직은 불완전한 상태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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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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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완전한 상태요? 태성기가 아니라는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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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밀히 따지면 여의주에 별을 담았을 테니 태성기는 맞습니다. 다만 하계라는 환경 탓에 온전히 개화하지 못했으니 준태성기 정도라고 표현할 수 있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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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담청 님도 아직까지는 준태성기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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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진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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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에 제가 하계에는 거대종이 드물다고 말씀 드렸었죠? 여의주를 완성한 용도 마찬가지입니다. 하계가 품기에는 너무나 거대한 존재인 탓에 선계로 승천한 이후에야 비로소 만개할 수 있죠. 여의주를 완성한 용이 맹목적인 승천 갈망에 시달리는 이유가 불완전한 상태를 본능적으로 기피하기 때문이라는 가설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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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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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 님,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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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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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모르겠다는 말씀이시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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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의 시선이 다시 칠판 쪽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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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진군은 설명을 계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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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간단합니다. 류 수사님과 용녀님께서 힘을 합치면 어렵지 않게 독안룡을 쓰러뜨리실 수 있다는 거죠. 2천 년 전에 태성기가 된 독안룡이나 20년 전에 막 태성기가 된 용녀님이나 전력의 양적인 측면은 거의 비슷비슷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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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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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적인 측면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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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안룡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대단한 전투 경험은 없을 겁니다. 기껏해야 요괴 무리 정도나 죽여 봤겠죠. 수백 년 전에 죽인 화신기 수사도 비승 도중에 습격했으니 일방적인 싸움이었을 테고요. 애초에 하계에는 용의 맞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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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용을 제외하면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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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진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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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그렇습니다. 만약 전대 용신을 살해한 게 독안룡의 소행이 맞다면 조금 더 주의할 필요는 있겠죠. 하지만 단지 그뿐입니다. 2 대 1로 교전하면 지고 싶어도 질 수가 없습니다. 게다가 여러분 곁에는 제가 있죠. 지금부터 선계의 공법과 법술을 전수해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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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과 담청은 환한 미소와 함께 만세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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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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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안타깝게도 제가 아는 공법은 인간 수도자용뿐입니다. 용족 수도자의 공법은 굉장히 드물거든요. 류 수사님께 공법을 가르쳐 드리는 동안 용녀님께서는 법술 자습을 하고 계시지요. 성실하게 암기하셨는지 이따 여쭤 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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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진군은 직접 쓴 법술 교재를 담청에게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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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하도 두꺼워서 거의 정육면체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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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의 두 팔은 힘없이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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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거나 말거나 서란과 등 진군, 둘만의 공법 과외가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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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총 다섯 개의 원영기 공법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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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기 특화형 토속성 공법, 적토전해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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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기 특화형 금속성 공법, 비절철비쇠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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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정 특화형 목속성 공법, 축성개화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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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어 특화형 화속성 공법, 포화호신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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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마지막이 수속성 공법, 낙수천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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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법의 이름을 뜻풀이하면 다음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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떨어지는 물이 바위를 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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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풀이에서 연계되는 직관적인 심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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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한 방울씩 떨어진 물이 오랜 세월 동안 서서히 바위에 구멍을 뚫는 광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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왠지 대기만성형 공법이 아닐까 싶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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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오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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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수천석은 대기만성형 공법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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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극단적인 공격 특화형 공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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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수천석을 익힌 수도자의 법력에는 결계를 불안정하게 만드는 성질이 깃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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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죽문의 원영기 수사와 싸울 때, 결계의 방어력만 믿고 회피를 소홀히 하면 안되는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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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적인, 모르면 죽는 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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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낙수천석에도 단점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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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의 결계 또한 불안정하게 만든다는 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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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단점도 포화호신결을 배우면 장점으로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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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화호신결은 극단적인 방어 특화형 공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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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부정형 법화 결계를 생성하는 게 공법의 주된 효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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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력의 결계를 불안정하게 하는 성질은 부정형 법화 결계를 오히려 강화시키니, 두 공법의 장점만 남는 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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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덕분에 오죽문의 역대 원영기 수사들은 낙수천석과 포화호신결을 모두 익힌 시점부터 대요괴 절단기로 변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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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난세에는 문파 절단기라고 불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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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죽문이 서대륙 오대문파인 이유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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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갑자기 여태 배운 원영기 공법들을 등 진군에게 설명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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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부터 배울 운무기(화신기) 공법과의 호환성 문제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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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놀랍게도, 수도공법은 아무거나 막 배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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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궁리하던 등 진군이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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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도 별문제는 없을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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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호환되는 공법이 있고 그렇지 않은 공법이 있었다니... 진짜 꿈에도 몰랐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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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경우에는 신경 쓰실 필요가 없습니다. 단지 원영기 공법과 화신기 공법끼리의 호환성만 주의하면 되죠. 오행법력에서 혼원법력으로 넘어가는 시점이니까요. 그 외에는 음... 서로 상반되는 효능의 공법을 함께 익히지 않는 정도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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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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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 아무튼 제가 익힌 원영기 공법들의 효능은 그대로 유지할 수 있다는 말씀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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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운이 좋으셨습니다. 두 개는 오죽문, 그리고 두 개는 금작파의 공법이었죠? 덕분에 공법끼리의 동질성이 꽤 높은 편입니다. 이것저것 주워 익힌 경우에는 화신기 공법을 배우면서 대부분의 공법이 효능을 잃는 경우도 드물지 않거든요. 물론 오늘 가르쳐 드릴 운무기 공법의 엄청난 조화성 덕분이기도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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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화성이 높은 공법이요? 기본공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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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진군은 보기 드물게 흥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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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공이라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자고로 공법 창안이란 천재 중의 천재들만의 영역! 그런 공법 창안자들마저 입을 모아 칭송하는 게 조화성 높은 공법입니다! 그야말로 모든 상류가 경유하고 모든 하류로 이어지는 바로 그 지점! 그런 천고의 공법을 고작 기본공에 비유하시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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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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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답해 보세요! 특별한 선골이나 혈통, 환경을 타고난 소수만이 익힐 수 있는 공법과 만인이 익힐 수 있는 공법! 전자와 후자 중 어느 쪽이 더 위대한 공법입니까!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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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떠듬떠듬 답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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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 후자가 더 대단한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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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귀처럼 일그러진 등 진군의 얼굴에 미소가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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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류 수사님께서는 뭘 좀 아시는군요. 갑자기 목소리를 높여서 죄송했습니다. 그만 흥분해 버리고 말았군요. 아무튼 조화성 높은 공법의 위대함은 기억해 두십시오. 편향된 견문이나 주관의 한계, 개인성에 매몰되지 않고 삼라만상에 관한 통찰이 있어야만 조화성 높은 공법을 창안할 수 있는 법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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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공법, 혹시 등 진군께서 만드신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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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아닐 겁니다. 명백하게 제 역량 밖의 물건이거든요. 아, 참고로 가장 만들기 쉬운 건 혈족 전용 공법입니다. 창안자와 유사한 영육을 지닌 후손들이 공법을 익히기 때문입니다. 고려해야 할 요소가 상대적으로 적을 수밖에 없죠. 그래서 수도가문들은 보통 혈족 전용 공법을 몇 개씩이나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얘기가 잠시 옆길로 샜군요. 수업을 계속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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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진군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던 조화적인 공법의 이름은 ‘무명공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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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이 질문을 안 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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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공법 이름을 잊어 버리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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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닙니다, 진짜로 이게 공법 이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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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법 이름이 무명공법이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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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공법, 이름이 없는 공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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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이 생각해 보니 꽤 괜찮은 작명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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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옛날부터 이런 걸 좋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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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진군이 찬물을 끼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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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은 좀 웃기지만 완성도는 훌륭할 겁니다. 대신에 학습 과정이 다소 난해하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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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기는 이름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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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공법, 나름 운치 있는 이름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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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약간 시무룩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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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공법을 익히는 데에는 반나절 정도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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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과 담청은 그 밖에도 여러 법술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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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은 합격술 종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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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락하기 전의 등 진군은 요수술사였던 모양인지 굉장히 편중된 법술 지식을 보유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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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독안룡과의 전투를 준비하며 인형과 죽순 탄도탄, 인공위성 금죽화 등을 개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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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산대붕 포함, 셋이서 합격술 훈련에도 매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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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기전으로 독안룡을 쓰러뜨리기 위해 등 진군이나 싱크 탱크와 상의하는 일도 잦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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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년 뒤, 가을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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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파 식구들의 응원을 뒤로 한 채 서란과 담청, 식산대붕 삼인조는 서대륙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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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은 남대륙 원정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속도로 세상의 중심을 향해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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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주치는 요괴 군단은 모조리 바스러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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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무렵, 일행은 세상의 중심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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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망대해 한가운데에 거대한 공혈이 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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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선계가 세상의 중심이라 일컫는 지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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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수로 둘러쌓인 깊은 구멍에 빠지면 저승까지 다다른다고 해서 명계의 입구라고도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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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공에는 먹구름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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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겁을 머금은 구름 길, 바로 승천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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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시기가 잘 맞았는지 통로가 열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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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일행이 주목한 대상은 따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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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존재는 명계로 이어진 세상의 중심과 선계로 통하는 승천문 사이를 유영하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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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안룡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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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야를 가득 메울 정도로 길고 거대한 육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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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림과 뇌운, 날씨의 주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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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물 중의 영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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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안룡은 승천문을 응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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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신을 바람에 실은 채 그저 그렇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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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줄기에 수염이 젖었고 번개가 비늘을 빛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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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한 구름마저 용 앞에 자신을 낮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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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안룡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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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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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서야 독안룡의 오른편 얼굴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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짓뭉개진 눈가의 흉터 사이에는 눈알 대신 여의주가 박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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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로 턱 아래에 하나, 그리고 오른손에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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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주, 여의주, 여의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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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개의 여의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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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세 개의 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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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생각이 서란의 머릿속을 점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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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마다 여의주는 하나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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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여의주를 빼앗으면 승천할 수 없는 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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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대 용신이 실종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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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중심을 가로막은 독안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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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천 직전의 용이 선계로 떠나지 않은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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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떠날 수 없었던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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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개의 여의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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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렸다니, 누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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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신기 수사인 자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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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족인 담청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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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면 네 번째 여의주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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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 이 가능성을 떠올리지 못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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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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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의 외침이 서란을 깨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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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정신을 차리자마자 나팔을 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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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의 명령이 인형 군단을 가동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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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후, 독안룡이 들이닥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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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안룡은 오로지 본능만으로 작동하는 괴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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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바다 요수였던 시절에도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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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그때도 이름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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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수가 태어난 곳은 위험한 바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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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체에서 태어난 괴물들이 영원히 투쟁하다가 종국에는 시체가 되어 도로 가라앉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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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말로 지옥 같은 장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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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요수 또한 굴레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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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우고, 잡아먹고, 또다시 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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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일 상대를 가려본 적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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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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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요수는 마침내 요수왕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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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따르는 무리도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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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더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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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수왕은 스스로의 격을 높여서 용으로 거듭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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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의 군단은 끝없이 세력을 확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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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렵, 미완의 용은 호적수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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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성을 앞둔 여의주, 다종다양한 구성의 정예 군단, 그리고 패도를 걷는 절대 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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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상처럼 똑 닮은 한 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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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아래에 절대자가 둘씩이나 존재할 수는 없는 법, 두 용과 그들의 군단은 숙명처럼 격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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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와 살점, 조각 난 뼈가 비처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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쌓인 시체가 섬을 이룰 즈음, 전쟁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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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용 중 하나는 오른쪽 눈을 잃었고, 나머지 하나는 목숨과 여의주를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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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를 죽음으로 뒤덮은 대전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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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강대하던 용의 군단도 영락을 피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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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눈을 잃은 절대자는 살아남은 한 줌의 정예병과 함께 은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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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투성이 용은 때를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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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직한 수하들이 제단을 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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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여의주를 완성할 날이 목전에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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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멀리 떨어진 두 제단에서 한날한시에 의식이 진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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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색 연무의 회전, 압축, 그리고 눈부신 번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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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이 종료되고 두 개의 별이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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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하들은 완성된 여의주를 주인에게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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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색찬란한 쌍성이 용의 외눈을 사로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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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에 벌어진 일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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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은 세상의 중심을 부유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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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에 들러붙은 피와 살점이 적잖이 불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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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의 잔해인지는 알 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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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는 용을 만류하던 수하들의 흔적일 수도 있고, 주제도 모르고 용에게 덤벼든 다른 군단의 흔적일 수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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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딱히 중요한 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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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앞에서 승천문이 열리고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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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내 천겁을 머금은 구름길이 활짝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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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천지영기의 흐름이 급격하게 뒤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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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중심, 그 거대한 공혈이 일시적으로 닫히며 승천문까지 이어지는 용오름이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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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성의 용은 흐름에 올라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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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나긴 육신을 오색 구름으로 휘감고 비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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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의 본능에, 승천 갈망에 따라 선계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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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천겁이 내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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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색 운무와 결계가 순식간에 꿰뚫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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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분노가 용린을 깨부수며 피육을 난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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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은 승천하기 위해서 몸부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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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우와 뇌운을 조종하며 하늘로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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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끝내 승천문에 닿을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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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영기의 흐름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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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천문이 닫히고 그 대신 명계의 입구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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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신창이가 된 용은 위아래가 뒤집힌 용오름에 휩쓸려 공혈 내부로 빨려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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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을 잃은 용은 계속해서 추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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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체에 작용하는 명계의 인력 또한 기하급수적으로 강해졌기에 탈출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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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라면 여기서 용의 패도는 끝났을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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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이변이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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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수 없는 이유로 정해진 운명이 뒤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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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주 안에 갇힌 호적수의 혼백이 영향을 미쳤을지도 모르고, 용 자신이 살면서 쌓아 온 업의 무게 탓이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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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우지간 무엇인가가 바둑판 위의 돌을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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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은 의식을 되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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턱 아래의 하나, 그리고 오른손의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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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여의주가 공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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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신만고 끝에 공혈을 빠져나온 용은 하늘을 우러러보며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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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죽이려던 손길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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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로 자신을 살리려던 손길 또한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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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도대체 하늘의 뜻은 어디에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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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용은 생각을 그만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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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전부 부질없는 고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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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다른 두 의지가 존재한다는 게 중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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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죽이고자 하는 의지는 분명 강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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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 힘을 온전히 발휘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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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 않았더라면 제아무리 용이라고 해도 살아남을 수 없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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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은 오른손에 든 여의주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자신의 텅 빈 눈구멍에 박아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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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주의 크기가 저절로 변하면서 피와 진물로 흥건한 안와를 가득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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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상처와 새로 난 상처가 뒤섞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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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지나지 않아서 과거에 잃어버렸던 오른쪽 시야가 회복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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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은 네 개의 대륙을 시야에 담으며 날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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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더 힘을 키운 뒤, 천겁을 극복하고 승천할 작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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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안룡은 그렇게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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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공은 독안룡의 차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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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개의 여의주, 세 개의 별이 공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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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부신 뇌전이 천지를 뒤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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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곡예비행을 통해서 회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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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은 마주 쏜 뇌전으로 공격을 빗겨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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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산대붕은 법화 결계를 두른 채 견뎌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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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과 담청이 동시에 같은 수인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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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력의 파동과 함께 합동 법술이 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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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가 하늘을 향해서 쏟아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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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식간에 물로 된 감옥이 완성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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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안룡은 오색 운무와 결계로 몸을 감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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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후, 공격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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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의 안쪽 벽면에서 법력을 머금은 물이 고압으로 분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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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장대비가 독안룡의 결계를 난도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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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안룡은 재빨리 서란과 담청의 법력에 간섭해서 법술을 흩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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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대한 수량의 바닷물이 해수면으로 낙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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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에서 벗어난 독안룡을 반겨준 건 사출이 완료된 백만 마리의 자안효 군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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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과 담청이 시간을 끌어준 덕분에 식산대붕은 무사히 격납고를 비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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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줏빛 안광이 번쩍인 직후, 불가청비가시 광선이 빗발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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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그마치 군단 전체가 펼치는 합격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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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계를 불안정하게 만드는 성질의 법력 탓에 독안룡의 결계와 오색 운무가 빠르게 붕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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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집단전이라면 독안룡의 전문 분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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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의 군단을 호령하던 당시의 독안룡은 전략가이며, 선봉장이며, 무패의 군단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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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급변하는 상황 속에서도 어렵지 않게 대응책을 마련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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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안룡은 즉시 결계의 형태를 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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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일벽을 수천 겹의 층으로 나누고 결계 사이사이를 오색 운무로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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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청비가시 광선이 결계를 깎아 내는 것보다 보충되는 속도가 월등히 빨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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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유가 생긴 독안룡은 즉시 반격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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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대한 파동과 함께 대량 살상 법술이 발동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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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차별적으로 난사된 낙뢰와 비바람이 면을 이룬 채 비행하던 자안효 군단을 휩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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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번에 전력의 절반 가까이 무력화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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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추된 경우는 오히려 드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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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다수는 그 자리에서 먼지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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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은 올빼미 인형들은 대열을 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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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대로 자잘한 공격은 전혀 통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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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제로 빈틈을 만들고 일격에 죽여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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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산대붕과 자안효 군단은 한 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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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거대한 원형 경기장이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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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물들끼리의 살육전이 개시될 예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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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마침 천지영기의 흐름이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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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쯤 열려 있던 승천문이 완전히 개방되고, 명계의 입구가 닫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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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용오름이 바다와 하늘을 연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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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계의 절대자들이 서로를 향해 격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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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조종하는 물의 칼날이 하늘을 쪼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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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안룡이 휘두른 폭풍 채찍이 바다를 두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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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이 내던진 벼락의 창이 천지를 꿰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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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하나가 산을 부수고 강을 뒤엎을 법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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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놀라게 하고 땅을 뒤흔드는 공방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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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말로 경천동지의 싸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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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계로 향하는 용오름을 사이에 둔 채, 세 개의 초음속 비행체들이 어지러운 궤적을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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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이어 터지는 법력의 파동, 발동되고 파훼되길 반복하는 법술, 요동치는 결계와 회피 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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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직한 힘싸움이 한동안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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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과 담청은 명백하게 시간을 끄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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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전을 통해 독안룡을 고꾸라뜨리겠다는 무모함의 발로가 결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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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을 단번에 끝내기 위한 노림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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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가 시작되고 반 시진(1시간)이 경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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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과 담청이 그토록 기다리던 순간이 도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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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독안룡을 찌를 비수가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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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은 봉인술을 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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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대의 바람이 명령에 따라 독안룡을 옥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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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안룡은 즉시 봉인술을 파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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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응에 걸린 시간은 찰나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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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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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안룡의 위치가 한순간이나마 고정됐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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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개량형 죽순 탄도탄이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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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순 탄도탄은 독안룡전의 핵심 대비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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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력 증폭, 소형화, 추진력 및 효율 향상 등 여러 개량을 거쳤지만 가장 중요한 건 역시 풍속성 법술을 응용한 미세 결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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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개량형 죽순 탄도탄은 공기의 저항을 완벽하게 무시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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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전투 시작과 동시에 인공위성 금죽화를 거쳐서 발사장으로 신호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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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사 직후, 급격하게 가속한 개량형 죽순 탄도탄의 최고 속도는 음속의 일만 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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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결과, 서란 일행이 삼 개월 동안 이동한 거리를 반 시진만에 날아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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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산대붕과 자안효 군단이 수집한 독안룡의 좌표는 곧장 인공위성 금죽화로 전송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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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 구조물에 탑재된 법뇌와 해석기관은 목표물을 정확하게 조준하는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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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이 독안룡의 발을 묶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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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당 수천 km씩 이동하는 탄도탄은 독안룡의 감지 범위 밖에서부터 빛살처럼 내리꽂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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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하는 입장에서는 마치 순간 이동처럼 느껴지는 일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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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령 예지 능력을 보유했다고 해도 회피나 방어를 장담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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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열하는 섬광과 엄청난 충격파, 뒤따르는 굉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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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이 내려앉은 듯한 광량이 눈을 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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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격하게 확산된 충격파가 소리를 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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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를 벗어난 굉음이 촉각을 마비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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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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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순 탄도탄은 아직도 잔뜩 날아오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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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이 일체 불가능한 극한의 상황에서 서란과 담청, 식산대붕은 계획대로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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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의 용안이 섬광 너머의 독안룡을 포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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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쉽게 죽어주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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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모든 역량을 방어에 총집중한 채 탄도탄 세례를 견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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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은 다시 한번 봉인술을 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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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아까처럼 파훼할 여유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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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안룡의 움직임은 완전히 봉쇄되었고, 그 좌표는 담청의 뿔을 통해 식산대붕에게 전송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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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평선 저 너머에서부터 시작된 빛줄기는 정확하게 목표물을 명중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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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수면으로, 해저로, 심해로, 그 지반 아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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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안룡은 속절없이 아래로 처박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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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과 탄도탄 세례가 독안룡의 손발을 묶어 두는 동안, 서란과 식산대붕은 마무리 일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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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안효 군단이 일대의 천지영기를 끌어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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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영기는 서란을 거치며 혼원법력으로 변환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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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흐름의 마지막에 존재하는 건 식산대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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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대한 법력이 밀어닥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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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인형핵과 해석기관은 그 힘을 온전히 제어하고 압축하는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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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괴적인 힘의 종착지는 식산대붕의 부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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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사 준비를 마친 식산대붕의 부리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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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딱 맞춰서 탄도탄의 재고가 소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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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가지 공격의 끝과 시작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맞아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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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인형을 포신 삼아 쏘아진 필살의 오색 광선이 독안룡에게 직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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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가, 바다가, 지각이 일순에 붕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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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파만으로 천공 결계가 요동치고, 그 광량이 동서남북 모든 대륙에서 관측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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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공격이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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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부하 탓에 동면 상태에 접어든 식산대붕이 바다로 추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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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대의 바닷물이 붕괴된 지반으로 밀려 들어가며 거대한 소용돌이를 형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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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구태여 ‘해치웠나?’ 같은 부활의 주문을 외우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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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해 할 필요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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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의 표정이 좋지 못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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둔중한 파동과 함께 소용돌이가 거꾸로 치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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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오리 안쪽에 비상하는 그림자가 엿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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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색찬란한 빛과 함께, 독안룡이 용오름을 갈기갈기 찢으며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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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기전으로 쓰러뜨리려던 당초의 목표는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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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산대붕과 자안효 군단은 전력에서 이탈했고, 서란과 담청 또한 힘을 많이 소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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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안룡은 오연한 표정과 달리 상처투성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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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건 필사적인 난타전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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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약 2천 년 전, 승천에 실패한 독안룡은 세상의 중심에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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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인계 전체를 살피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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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표는 세 번째 여의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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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백 년 전, 북대륙에서 이변이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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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 전역을 휩쓰는 광풍, 우화 의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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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안룡은 일개 수도자가 스스로를 갈고닦은 끝에 영물로 거듭나는 순간을 목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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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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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안룡은 과거에 바다 요수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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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인간 수도자라고 해서 용으로 거듭나지 못하리라는 법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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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물며 이미 영물이 된 화신기 수사라면 더더욱 그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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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안룡은 화신기 수사를 유심히 지켜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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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화 의식 이후, 북대륙에 피바람이 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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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신기란 감히 대적할 수 없는 경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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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수도문파가 무력하게 쓸려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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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선계와 공생 관계를 유지하던 속세의 범인 왕국들 또한 혼란을 피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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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몇 야심가가 전쟁을 일으켰고, 망국의 유민은 굶주림에 도적 떼로 변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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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대륙은 한순간에 인세의 지옥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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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체가 산을 이루고 피는 바다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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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 곳곳에서 기아와 역병이 만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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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켜켜이 쌓인 죽음이 요괴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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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자 한 명의 행보가 빚어낸 난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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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안룡은 여전히 화신기 수사를 주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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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문득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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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은 저 자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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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리를 어긴 벌로써 천겁을 내리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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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면 오히려 등 떠밀며 악행을 부추길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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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쉽게도 그 궁금증은 해소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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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신기 수사는 자기 문파와 함께 북대륙을 떠나 세상의 중심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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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자신을 기다리던 독안룡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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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는 오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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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안룡이 법술을 사용했고, 그걸로 전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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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신기 수사의 결계를 관통한 벼락은 일격에 비행 선단 전부를 잿더미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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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신기 수사 역시 무사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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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기갈기 찢긴 육신은 이미 빈사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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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체 이탈한 화신기 수사의 원영은 금단마저 버려둔 채 필사적으로 도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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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독안룡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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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체와 영혼은 한 쌍, 금단이 제 성능을 오롯이 발휘하기 위해서는 원영이 반드시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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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독안룡은 자기 영역을 침범한 존재를 살려 보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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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쳤던 원영은 얼마 못 가서 사로잡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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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격 과정에서 독안룡의 존재감을 느낀 바다 생물들이 혼비백산하여 줄행랑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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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해거인 가족도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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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영역 바깥에서 벌어진 일이었기에 독안룡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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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중심으로 돌아온 독안룡은 화신기 수사의 영혼을 금단에 봉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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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강제로 날씨를 비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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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이어 인위적인 여의주 의식이 강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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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주 의식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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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신기 수사의 금단으로 여의주를 대체하겠다는 독안룡의 계획은 거의 성공하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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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의식 막바지에 문제가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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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뢰가 내리치는 순간, 금단이 힘의 부하를 견디지 못하고 폭발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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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안룡은 산산조각 나 흩어지는 화신기 수사의 원영을 일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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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의식 과정 전반을 면밀히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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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상 자체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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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의식 막바지까지는 순조롭게 진행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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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단의 품질이 여의주가 되기에 충분하지 못했다는 게 독안룡이 내린 결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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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신기 수사의 금단은 인간 치고는 꽤 커다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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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도 그럴 것이, 보잘것없는 재능을 지니고 있었더라면 화신기까지 도달하지도 못했을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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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여의주에 버금갈 정도는 결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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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안룡은 인공 여의주 계획을 폐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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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상으로는 충분히 실현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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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필수 준비물이 여의주에 버금가는 크기의 금단을 지닌 화신기 수사라면 의미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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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기된 계획은 얼마 지나지 않아 독안룡의 뇌리에서 완전히 밀려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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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여의주 의식이 감지된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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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안룡의 시선이 서쪽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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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장한 제단 꼭대기, 오색의 별이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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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의 무리들이 의식 장소를 둘러싼 채 요란을 떨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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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미 달린 요수들, 바로 어인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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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인족은 완성된 여의주를 신에게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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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을 담은 여의주가 제 주인과 공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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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공을 향한 용안에 선계의 풍경이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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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안룡은 제 경험에 비추어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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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용도 머지않아 승천 갈망에 이끌려 세상의 중심으로 날아올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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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어인족의 신이 된 용은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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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신은 하늘로 추락하는 대신 바다로, 미물들의 곁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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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안룡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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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무엇을 위하여 승천을 마다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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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라면 당장 들이쳐서 숨통을 끊었겠지만 갑작스레 든 호기심에 생각을 바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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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안룡은 한동안 용신을 지켜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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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도망칠 곳도 없을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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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안룡은 용궁의 주인을 먹투성이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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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소매에 먹물을 묻히고 다닌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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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임없이 뭘 기록하느라 식사 중에도 손에서 붓을 놓지 않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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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안룡의 기다림은 수백 년이나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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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투성이는 당최 세상의 중심으로 오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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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참다 못한 독안룡이 직접 찾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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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중에 물 밖으로 나와 천체 관측을 하던 용신은 급속도로 가까워지는 존재감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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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동시에 결코 피할 수 없는 죽음이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 또한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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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신은 심해의 어인족을 지키기 위해서 가능한 먼 곳으로 상대를 유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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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안룡은 손쉽게 먹투성이를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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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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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롭게 손에 넣은 여의주와 용의 혼백을 가지고 세상의 중심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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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얼마 뒤, 독안룡은 세 번째 여의주와 함께 승천문에 도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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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도 천겁의 방해로 승천에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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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거의 닿을 뻔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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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천까지 마지막 한 조각만을 남겨둔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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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투성이를 죽이고 백 년 가까이가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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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안룡은 여전히 세상의 중심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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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여전히 네 번째 별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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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동안 세상에는 많은 일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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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륙 동부에서 한 소녀가 환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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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는 공녀로 뽑혀 타국으로 끌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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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수도자가 되어 되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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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굴에 틀어박힌 채 천 년 동안 수행만 하던 어린 용의 여의주 의식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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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서툰 솜씨로 만든 제단이 비바람에 무너지며 의식이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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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독안룡의 마수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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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는 진창에서 여의주를 주워 문파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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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용 또한 동굴을 나와 그 뒤를 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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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적으로 소녀는 결단기에 도달했고, 어린 용은 이름을 가지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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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에 소녀는 이름을 가진 용과 함께 어인족의 신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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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심마를 겪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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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전송진을 밟아 동대륙까지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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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안룡이 처음으로 소녀의 존재를 인식한 것도 그 무렵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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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는 대륙 간 발사체를 통해 바다 건너로 자신의 안부를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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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순 발사체들은 동대륙과 서대륙 사이의 망망대해를 가로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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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는 때마침 열리던 승천문의 인력에 휘말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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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는 교대하듯 닫히던 명계로 빨려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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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일부는 독안룡의 손아귀에 붙잡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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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안룡의 시선이 발사체의 궤적을 역추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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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라만상을 꿰뚫어 보는 용안이 소녀에게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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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주보다 커다란 금단 또한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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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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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단지 그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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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화신기 수사가 아니라면 무의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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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안룡은 소녀에 대한 관심을 거두어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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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다시 짧은 기다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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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안룡의 시선이 남대륙을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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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을 가진 용의 두 번째 여의주 의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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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번과 달리 의식은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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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완의 여의주에서 오색찬란한 별이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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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때 독안룡이 주목하고 있던 건 완성된 여의주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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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 중에 제단을 지키던 소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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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두개골 안에 덩치 큰 원영이 깃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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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기지 않는 경지 상승 속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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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잊혀졌던 생각이 망각 속에서 부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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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상으로만 가능하리라 여겼던 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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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인공 여의주 계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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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안룡은 소녀를 주의 깊게 관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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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작 여의주의 대체제로써 끝날 수준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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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의 금단과 원영 안에는 그 이상의 가능성이 내포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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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주가 제 주인과 함께 공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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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을 가진 용은 하늘을 일별하더니 인간들이 기다리는 지상으로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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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투성이와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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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안룡은 지금 당장 어린 용을 죽이는 대신 조금만 더 기다리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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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는 금방 영물이, 화신기 수사가 될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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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영물의 대면이 약간 더 늦춰진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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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부터 독안룡의 눈은 소녀에게 고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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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거인의 영토, 화영근, 산호로 꾸며진 용궁, 우주 구조물 건설, 고대 유물 속 존재, 그리고 수영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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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목적인 시선은 한시도 소녀를 떠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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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그토록 기다리던 순간이 도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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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륙 전체를 휩쓰는 광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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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파 비승을 위한 우화 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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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서 영물로 거듭나는 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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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안룡은 차분한 마음으로 소녀를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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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개월이 지나자 소녀가 육지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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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중심으로, 독안룡이 기다리는 바로 이곳으로 날아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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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오랜 기다림 끝에 맹수의 엄니가 사냥감의 목덜미에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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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와 달이 수차례 뜨고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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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대의 천지영기가 모조리 고갈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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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독안룡의 일격을 허용한 서란이 격추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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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나긴 싸움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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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의 외침이 비명처럼 울려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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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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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락하던 서란은 해수면에 처박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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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물거품과 함께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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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에는 큰 지장이 없지만 도저히 싸울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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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과 독안룡이라고 무사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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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동안 지속된 싸움으로 모두가 만신창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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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승패는 명확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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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의 여의주는 이미 한계에 직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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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에 독안룡은 비교적 여력이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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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독한 무력감이 담청을 옥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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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산대붕이 전력에서 이탈한 이후, 서란과 담청은 훈련했던 합격술을 비처럼 쏟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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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마다 독안룡은 최소한의 피해로 대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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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해 둔 전술이 바닥난 뒤에는 난타전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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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차 격화되던 교전이 후반부에 접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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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의 양상은 사실상 서란과 독안룡의 일대일 결투로 변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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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은 도저히 그 둘을 따라갈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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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지날수록 서란은 더욱더 빠르고, 강하고, 예리해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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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안룡의 예측을 월등히 상회하는 성장 속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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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도 비상식적인 광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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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안룡은 온 신경을 서란에게 집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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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런 불가해 요소는 반드시 제거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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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이 여태까지 버틸 수 있었던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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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패배가 눈앞까지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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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이미 쓰러졌고, 담청도 얼마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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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서는 결코 독안룡을 이길 수 없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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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은 자신의 최후를 직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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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마지막으로 힘을 끌어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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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을 때 죽더라도 일격이나마 먹여 줄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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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독안룡의 상태가 좀 이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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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해저로 가라앉는 서란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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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연, 독안룡의 시선이 담청을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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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한마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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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용이여, 이곳을 떠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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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귀를 의심한 담청이 되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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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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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보내 주마. 목적한 바는 이루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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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 내 여의주를 노린 게 아니었다는 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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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안룡은 구태여 대답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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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다시금 서란을 내려다 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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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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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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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안룡은 여의주를 세 개나 지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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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이 가질 수 있는 여의주는 보통 하나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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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하니 양도받았을 리는 없고, 나머지 두 개는 다른 용을 죽이고 빼앗았을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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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담청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독안룡의 말이 자신을 가리킨 것이리라 생각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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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 여의주를 손에 넣어서 천겁을 이겨내고 억지로 승천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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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걸 목적으로 세상의 중심에서 자신들이 오길 기다리고 있었겠거니 생각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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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냥 보내주겠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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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주가 목적이 아니었다는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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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도대체 무슨 이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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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어떤 번뜩임이 담청의 뇌리를 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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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화 의식을 통해 영물로 거듭나는 화신기 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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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성기부터 경지 체계를 공유하는 용과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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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의 특출나게 거대한 원영과 금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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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의 시선이 독안룡을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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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을 죽이고 여의주를 모으는 독안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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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에게는 별 관심이 없는 독안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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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서란만을 바라보는 독안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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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색 용안에 과거의 기억이 비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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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식적으로 여의주를 종속시켰던 놀라운 재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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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한다면 용이 될 수도 있었던 천고의 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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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귀한 존재가 되고자 영생마저 마다했던 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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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의 사고는 한순간에 결론까지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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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약에 비약을 거쳐 도출된 탓에 추론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예지에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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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오답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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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안룡은 모종의 방법을 통해 서란의 금단과 원영을 여의주로 바꿀 작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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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그것이 서란에게 예정된 끔찍한 최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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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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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이 소리쳐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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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나를 곱게 보내주겠다는 이유가 무엇이냐?! 그것도 방금 전까지 목숨을 걸고 싸웠던 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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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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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손 안에 다 들어온 여의주를 포기하는 이유! 굳이 나를 살려 줄 이유가 있냐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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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안룡은 잠깐 고민하더니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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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모르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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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은 말문이 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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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안룡이 한 말의 진위 여부는 가릴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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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용에게는 진실과 거짓을 구분하는 용안의 권능이 통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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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무슨 이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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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 부른 포식자의 변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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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칠 때 등 뒤를 노리기 위한 기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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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면 위협조차 되지 않는 약자에 대한 무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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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의 고민은 깊어져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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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걸 눈치챈 모양인지 독안룡이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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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믿겠다는 표정이로군. 아, 내가 뒤쫓아갈까 봐 걱정되는 건가? 그렇다면 이대로 승천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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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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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천문은 몇 달 간격으로 열린다. 그리고 며칠 간만 유지되지. 조만간 닫힐 터이니 떠나라. 그러면 내 추격을 두려워할 이유도 없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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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마친 독안룡은 무심히 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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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러진 서란에게로 다가가려는 듯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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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말의 망설임도 느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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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이 터 올 무렵의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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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측에는 선계로 향하는 용오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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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측에는 천천히 멀어지는 독안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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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은 문득 고독함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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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넓은 세상에 홀로 남겨진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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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용의 담청색 용안이 천공을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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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야 가득 펼쳐진 수평선이 세상을 이등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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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랏빛 하늘에는 승천문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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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새까만 바다에는 죽어가는 친구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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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과 지상으로 반분된 세상, 승천의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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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공교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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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과거 여의주를 잃어버렸던 그 순간부터 어린 용을 지독히도 괴롭혀 왔던 잡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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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째서 승천을 바랐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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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용으로 태어난 숙명이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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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면 스스로도 모르던 바람의 발현이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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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주를 잃어버렸을 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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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주를 되찾았을 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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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여의주를 완성했을 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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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루고 또 미뤄 온 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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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써 외면했지만 물음은 끈질기게도 쫓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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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친구의 죽음과 닫히려는 승천문 사이에서 드디어 덜미를 잡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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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어린 용에게 묻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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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무엇을 위하여 이 자리에 섰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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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치고 또 도망친 끝에 더이상 도망칠 곳이 사라진 지금에서야 던져진 물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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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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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동굴을 벗어났을 무렵의 어린 용이었다면 이 물음에 대답할 수 없었을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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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지금이라면 고민할 필요조차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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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용의 여의주가 요동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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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력의 파동을 감지한 독안룡이 고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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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미한 발버둥이다, 어린 용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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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은 사나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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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어린 용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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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안룡은 심상치 않은 낌새를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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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의 파동은 점차 격렬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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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색의 별이 연신 비명을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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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부하된 여의주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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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안룡은 담청의 의도를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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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천을 포기하고 평생 땅을 길 작정이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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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답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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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담청, 친구를 버리고 목숨을 부지할 정도로 졸렬하게 살아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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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후 담청의 여의주가 폭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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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산조각 난 별의 파편이 바다로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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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가라앉은 장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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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란한 소리를 내며 닫히는 승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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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집힌 채 하늘에서 바다로 내리꽂히는 용오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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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악에 물든 독안룡의 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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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을 벗고 해수면으로 추락하는 소용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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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서란이 눈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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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잠력을 폭발시키는 법술이 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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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자의 수명이나 경지, 혹은 다른 무엇인가를 희생한 대가로 잠깐이나마 막대한 힘을 손에 넣는 방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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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이 한 행동도 그와 유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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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성기 수사가 보유한 오색의 별, 영성은 무한한 혼원법력의 원천이 되는 기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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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은 미래영겁 동안 누릴 수도 있었던 힘을 지금 이 순간으로 모조리 당겨 온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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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난 손실률을 차치하고서라도 그 총량 만큼은 독안룡을 압도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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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려드는 법력 속에서 서란의 의식이 부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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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격추되는 그 순간까지도 독안룡을 쓰러뜨리기 위한 방법만을 갈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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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간절히도 바랐던 수단이 손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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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빠르게 상황 판단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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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력을 담을 그릇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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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해도 오래 붙잡아 둘 수는 없을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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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혼원법력일지라도 타인의 것이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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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즉석에서 법술을 창조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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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배우고 익혔던 모든 법술이 해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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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가능한 조각조각 나눠진 법술의 구성 요소들이 찰나에 하나로 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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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디 법술이란 아무리 단순한 것일지언정 이렇게 마구잡이로 창안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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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떠러지를 눈을 감은 채 질주하는 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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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서란은 감각만으로 기적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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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를 잃은 담청이 해수면과 충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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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대지가 몸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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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보다도 높이 솟은 머리와 전신을 갑옷처럼 두른 암석, 그것은 분명 신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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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에서 태어난 거신이 독안룡에게 달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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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속도로 붕괴하는 거체를 유지하느라 법술을 사용할 여력이 거의 바닥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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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다지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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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두 번째 기회는 없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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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를 뒤흔드는 거신의 포효, 그와 함께 초대형 법술이 발동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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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저에서부터 솟구친 무수한 작살이 천공의 독안룡에게 쇄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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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피가 불가능할 정도로 광범위한 공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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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안룡은 반사적으로 오색 운무와 결계로 전신을 감쌌지만, 평상시처럼 기민할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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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태껏 한 번도 본 적 없는 법술이었던 탓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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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나긴 교전으로 심신이 지칠 대로 지친 탓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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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용이 제 손으로 여의주를 부순다는, 감히 상상조차 못해 본 광경을 목격한 탓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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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요소들이 독안룡의 대응을 아주 약간 늦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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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신의 법술은 그 찰나의 빈틈을 파고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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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걸로 서란과 독안룡의 생사가 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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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작살이 결계를, 오색 운무를, 그리고 독안룡의 비늘을 관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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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중과 동시에 작살 몸통과 대지를 연결하고 있던 사슬이 되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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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살에 달린 갈고리가 독안룡을 구름 위 하늘에서 지상으로 끌어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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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신에게는 법술을 사용할 만한 여력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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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상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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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최후에 의지할 건 가장 익숙한 도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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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안룡은 무의미하게 발버둥치는 대신 법력을 끌어모아 근접전에 대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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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상황에서 취할 수 있는 최선의 대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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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거신의 간격이 독안룡에게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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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자의 체중을 고스란히 파괴력으로 전환하는 비전 무술, 거인살법이 작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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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신의 오른팔이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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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깨 부근에서 한없이 느리게만 느껴지던 속도는 말단부로 갈수록 기하급수적으로 빨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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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끝에 가서는 잔상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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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명을 지르는 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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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찰로 인해 백열하는 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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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표로 삼는 건 여의주를 쥔 오른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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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촉처럼 내찌른 거신의 관수가 목적을 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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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린과 골육이 피를 흩뿌리며 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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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주를 쥔 오른팔이 하늘을 날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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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안룡은 직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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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살을 맞은 순간부터 이미 패배한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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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할 수 없는 죽음이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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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쩐지 홀가분한 기분마저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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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을 잃는다는 사실에 좌절하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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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건 독안룡이 살아온 방식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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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오로지 본능으로만 작동하는 괴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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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요수로 태어나 투쟁 속에 살았을 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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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적수를 만나 군단과 오른쪽 눈을 잃었을 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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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겁을 맞고 승천에 실패한 채 추락했을 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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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안룡은 단 한 번도 좌절한 적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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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아가지 못하면 단지 죽어 가라앉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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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으로 나아가는 지금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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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안룡은 사납게 포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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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옛날 위험한 바다에서 처음 눈을 떴을 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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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 신화 속에나 등장할 법한 두 괴물이 서로를 향해 맹렬히 육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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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나에 수백, 수천 번의 공방이 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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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낙하하던 독안룡의 오른팔이 해수면에 닿았을 무렵, 싸움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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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신의 수도가 독안룡의 목을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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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안룡의 잘린 머리가 하늘을 날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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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뒤집힌 용오름에 휩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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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끝에는 승천문과 교대하듯 열린 명계의 입구가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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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혈의 인력이 독안룡의 머리를 잡아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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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건 언제 끝날지도 모를 추락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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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천 년간 유예된, 참으로 공교로운 최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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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 떨어질수록 하늘은 점차 좁아져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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꺼져가는 의식 속에서 독안룡은 자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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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의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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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은 왜 그토록 승천을 갈망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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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한 번도 고민해 본 적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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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본능에 따라, 맹목적으로 내달렸을 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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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시간이 부족해서 답을 내릴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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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한 세계를 종횡무진했던 독안룡의 패도가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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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서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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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를 잃은 용의 사체가 망망대해에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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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괴된 암석 거신 또한 그 옆에 몸을 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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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거대한 봉분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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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돌무더기를 헤치고 엉금엉금 기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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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에 빠진 담청도 첨벙첨벙 헤엄쳐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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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은 만신창이가 된 채 잔해의 섬에서 재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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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슬픈 눈으로 담청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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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을 잃은 뿔, 텅 빈 하단전, 사라진 뇌영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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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나 혼원법력의 출처는 담청의 여의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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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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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물로 흠뻑 젖은 머리칼을 쥐어짜던 담청이 돌연 피식 하고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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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의 심정을 헤아린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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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이 여상한 목소리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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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그렇게 됐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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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 님, 저 때문에 여의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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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왜 네 탓이겠느냐, 내가 결정한 일인 것을. 그리고 나는 괜찮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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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도 눈물을 흘리는 와중에 서란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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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만들 수는 있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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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잘 모르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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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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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이 품을 수 있는 여의주는 오직 하나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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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완의 여의주를 빼앗기거나 잃어버린 경우라면 오랜 시간을 들여 다시 만들면 그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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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미 완성된 여의주를 제 손으로 깨부순 경우에는 새로 만드는 게 가능할지 의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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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은 차가운 비를 맞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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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표정 지을 것 없다. 너를 안심시키기 위한 거짓말이 아니라, 나는 정말로 괜찮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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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렇게나 선계에 가고 싶어 하셨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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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내가 그토록 갈망했던 건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선계의 풍경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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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되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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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아니었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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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예전에 서란 네가 이렇게 물었었지? 어째서 수행을 시작하였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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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그랬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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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없는 용으로 존재하던 과거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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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난리를 만난 잉어는 연못을 나와 용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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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주를 잃어버린 용 또한 동굴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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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많은 변화를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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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귀한 사람이 되고 싶다던 소녀와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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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어린 용이었던 소용녀는 이름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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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로 가 어인족의 신이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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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인연을 만난 끝에 여의주를 완성했고, 소중한 인연을 지키기 위해 승천을 포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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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 결정을 후회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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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소 눈을 뜬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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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은 천공이 아닌 친구를 응시하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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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평생을 적막한 동굴 속에서 지냈다. 수직굴 너머로 보이는 비좁은 하늘만을 바라보며 살아왔지. 하루빨리 여의주를 완성하고 선계로 승천하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이유 따위는 고민해 본 적도 없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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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이제는 안다. 내가 승천을 갈망했던 건 선계에 가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고독하기 그지없는 동굴, 그 답답한 어항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거야. 나는, 나는 외로웠던 거다. 하늘은 혼자서 날기에는 너무나도 광활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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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물 중의 영물이니, 천공의 대리자니, 풍우와 뇌운의 주재자니 고고하게 굴었지만 나는 그저 외톨이였어. 용은 홀로 온전한 존재라며 강한 척 했지만, 사실은 누군가와 함께 하늘을 날고 싶었다. 그래서 승천을 갈망했던 거다. 선계에는 나와 같은 존재가, 용이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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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발은 점점 굵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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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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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에 떨어진 빗방울이 이마를, 눈가를, 뺨을, 턱을 지나 바다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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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침묵하던 담청이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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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니 나는 괜찮다. 너를 구할 수만 있다면 여의주도 아깝지 않다. 내가 정말로 바랐던 건 승천 같은 게 아니라 인연이었으니까. 전부 네가 가르쳐 준 것이다. 게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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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담청은 말을 계속 이어 나가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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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별안간 서란이 자신을 끌어안은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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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녀린 육체가 품 안에서 간헐적으로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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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담청은 서란의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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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다가 아직 승천이 불가능하다고 확정된 것도 아니지 않느냐. 몇백 년쯤 뒤에 난데없이 선계에서 재회하게 될지도 모르지. 설령 인계에 남는다고 해도 어인족과 함께라면 더는 외롭지 않을 터이니 그리 슬퍼할 필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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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은 한동안 서로 끌어안은 채 비를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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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은 서란의 체온을 느끼며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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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변온 동물인 용에게 인간의 체온은 너무나 뜨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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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치게 탐한 나머지 돌이킬 수 없는 화상을 입어 버렸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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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서히 비가 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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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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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비가 완전히 멎었을 무렵, 긴 포옹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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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간간이 훌쩍거리면서도 담청을 향해 마주 웃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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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불청객이 난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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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생처음 듣는 미성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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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끝났으면 이 몸이 얘기해도 되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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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과 담청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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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족 특유의 사슴뿔과 청록색 눈동자, 그리고 눈부신 미모를 지닌 묘령의 여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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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표정한 얼굴만 빼면 굉장히 낯이 익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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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탐정 이인조는 순식간에 해답을 도출해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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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화랑 똑같이 생겼으니 어려울 것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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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과 담청이 동시에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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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대 용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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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대 용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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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투명한 전대 용신의 혼백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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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용, 아니지... 이름이 담청이라고 했던가? 아무튼 그대가 어인족의 새로운 신인 모양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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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은 깜짝 놀라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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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걸 어떻게 안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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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후후, 실로 간단한 문제로다. 어인족을 언급한 걸 듣고 어림짐작했지, 마침 용족이기도 하고. 하지만 결정적인 증거는 그대들의 영혼에 새겨진 백연향로의 흔적이라고 할 수 있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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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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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악에 빠진 담청 대신에 서란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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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연향로라면, 용궁 심처에 보관되어 있던 향로 형태의 법보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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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가 떠올린 그 물건이 맞다. 어인족이 해저 어딘가에서 주웠다며 이 몸에게 바쳤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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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찰만으로도 저희가 향로를 사용했다는 사실을 아실 수 있는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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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대 용신의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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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몸에게는 어려운 일도 아니지. 오랜 세월 동안 백연향로를 연구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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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정말 놀랍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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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 인간 치고는 꽤나 예리한 안목을 지녔구나. 잠깐, 이게 아니지... 하마터면 목적을 망각할 뻔했군... 이 몸이 그대들에게 말을 건 이유는 거래를 제안하기 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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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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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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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정확히 말하면 저 담청이라는 용에게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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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 님한테요? 무엇을 원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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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대 용신이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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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의주를 완성한 뒤부터 줄곧 어인족과의 동반 승천을 연구해 왔다. 그대들에게 동반 승천의 법술을 알려 줄 터이니 어인족을 선계로 데리고 가다오. 보수는 충분히 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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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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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조용히 듣고 있던 담청이 끼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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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여의주는 이미 산산조각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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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다, 이 몸의 여의주가 거래 보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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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고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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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대 용신이 손짓하자 해수면 아래에서 거대한 여의주가 부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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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는 독안룡의 잘린 머리와 함께 명계 저편으로 사라졌지만, 세 번째 여의주는 그렇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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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도 정신이 없었던 탓에 잠시 깜빡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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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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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주를 양도해 주시겠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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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빼앗은 게 아니라 양도받은 것이니 천겁을 두려워 할 이유도 없겠지? 여의주가 귀물이긴 하다만 어인족을 선계로 보낼 수만 있다면 전혀 아깝지 않다. 망자가 된 처지이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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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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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대 용신은 자신의 오른손을 보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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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가락 끝부터 조금씩 희미해지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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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시간이 얼마 안되는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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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죽음을 언급하는 상황에서도 전대 용신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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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백이 심각하게 손상됐다. 흉수가 죽은 이후부터 서서히 붕괴하기 시작하더구나. 도구랍시고 꽤나 험하게 다룬 모양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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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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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조차 할 수 없는 겁니까? 독안룡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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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하나뿐이라서 독안룡인가? 참 재미있는 표현이로군. 아무튼, 그대의 말이 맞다. 이 몸은 곧 죽는다. 그래도 그대들 덕분에 이지를 상실하기 전에 죽을 수 있겠군. 감사를 표해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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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대 용신이 부드럽게 손짓하자 여의주가 본래의 크기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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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색의 별이 담긴 여의주가 담청의 품에 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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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명과 함께 사라진 뇌영근이 돌아오고 한줄기 돌풍이 담청의 몸을 휘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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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하니 허공을 부유하던 담청이 다급히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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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주를 이렇게 선뜻 양도하다니! 내, 내가 독안룡 못지 않게 사악한 용이면 어쩌려고 그러느냐?! 그대가 아끼던 어인족을 착취하는 악신이면 어쩌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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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하, 이 몸은 전부 지켜보고 있었다! 흉수의 손에 사로잡힌 채로 말이지! 남을 위해 승천마저 마다한 그대가 어인족에게만 모질게 굴 것 같지는 않구나! 게다가 이 몸은 천재 중의 천재, 뛰어난 안목으로는 천하에 따라올 이가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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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용에게 여의주가 갖는 의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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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전대 용신이 돌연 고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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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계의 입구가 존재하는 방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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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시계의 마지막 모래가 방금 막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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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대 용신이 큰소리로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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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명계가 손짓하는 것이 느껴지는구나! 이제 어인족의 미래는 그대들에게 부탁하지! 참고로 이 몸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 죽음조차도 손쉽게 극복해 보일 테니까! 그럼 이만, 아하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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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대 용신은 유쾌하게 웃으며 명계로 퇴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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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미세하게 올라간 입꼬리를 제외하면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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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혈로 모습을 감춘 이후에도 전대 용신의 웃음소리 만큼은 꽤나 오랫동안 메아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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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게 공혈 내부에서 두 가닥 뇌전이 솟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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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대 용신이 쏜 것으로 추정되는 뇌전은 눈 깜짝할 사이에 서란과 담청에게 직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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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전 안에는 동반 승천의 법술이 담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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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문뜩 그런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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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그 딱딱한 표정, 설마 웃고 있던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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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화에 묘사되어 있던 자애로운 미소가 사실은 최대한 활짝 웃은 상태였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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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에서는 분명 부드러운 얼굴이 어쩌고 하지 않았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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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만 접했던 전대 용신은 차분하면서도 지적인 면모를 지닌 여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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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실제로 대면하니 느낌이 좀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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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정은 무뚝뚝하지만 내면은 더없이 유쾌했고, 자기애 또한 대단한 여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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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이 작성한 탓인지 기록물에는 주관적인 견해나 왜곡이 다량 첨가된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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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그러면 안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담청과 독안룡, 전대 용신을 차례차례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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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쩐지 용족에 대한 선입견이 생길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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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대 용신이 떠나고 급속도로 어색해진 분위기, 눈치를 보던 서란이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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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 돌아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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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는 것이 좋겠구나. 그런데 대붕이는 언제 일어나는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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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동면 상태에서 깨어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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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다시 침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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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이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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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아무튼 일이 잘 풀려서 다행이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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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게 말이에요! 이제 선계로 가는 것만 남았어요! 모두 함께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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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맞다! 전대 용신에게 여의주도 양도받았고, 잠력을 격발한 후유증도 딱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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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담청의 왼쪽 뿔이 뚝 하고 부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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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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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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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과 담청은 당혹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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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멍하니 땅바닥에 떨어진 뿔을 바라만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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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둘이서 뚫어져라 쳐다본다고 밑동부터 부러진 뿔이 도로 붙는 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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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칫 잘못하면 담청이 아니라 독각룡이 될 수도 있는 아찔한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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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뒤, 식산대붕이 씩씩하게 기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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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통신 설비를 통해 독안룡전에서 승리했다는 전문을 서대륙으로 전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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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다시금 3개월을 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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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귀 도중에 해저도시를 잠깐 경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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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대 용신 실종 사건의 전말을 전해 들은 어인족은 마음의 눈물을 금치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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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자신들을 버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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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최후의 순간까지 그들을 지키고자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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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인족 신도들은 창고를 뒤져 고이 포장해 두었던 전대 용신의 신상을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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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고 있는지조차 긴가민가한 표정의 신상이 상대적으로 작은 두 신상 곁에 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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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부터 어인족은 신을 셋이나 모시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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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늦봄, 서란 일행은 오죽문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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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비행하던 서란과 담청은 저택의 대문 앞에 착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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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장 안쪽에서는 걸어서 이동할 것, 이 집의 몇 안되는 규칙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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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붕이가 처마 부숴먹은 다음부터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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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년만에 집으로 돌아온 두 사람은 중정을 가로질러 등 진군의 방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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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은 부러진 한쪽 뿔을 오른손에 쥔 채 붕붕 휘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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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꿎은 화초들이 봉변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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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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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 님, 풀 그만 괴롭히고 빨리 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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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차, 나도 모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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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 좀 보세요. 뿔에 풀물 들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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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뿔을 건네받아 손수건으로 문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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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닦으니까 지워지기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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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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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윽고 등 진군의 거처에 당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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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방 주인이 내부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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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가를 받은 서란과 담청이 방 안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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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동부터 깔끔하게 부러진 담청의 뿔을 본 등 진군은 한동안 골똘히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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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더니 의원이 문진을 하듯 담청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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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진찰 결과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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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진군이 똑똑해 보이는 표정으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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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력을 격발한 것 치고는 굉장히 운이 좋았습니다. 한쪽 뿔이 부러진 탓에 천기를 읽는 능력은 잃었지만, 추가적인 증상은 보이지 않아요. 부러진 뿔은... 뭐, 선계에 가면 방법이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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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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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정말이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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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그렇습니다. 영구적인 손상을 복구하는 수단 정도는 널리고 널렸죠. 영과를 먹는다거나, 독특한 공법을 수행한다거나, 아니면 진선경 수도자가 되는 방법도 있겠네요. 등선 의식을 마치면 환골탈태를 거쳐 새로운 육체를 손에 넣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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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을 들으니 안심이 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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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진군은 용족 보양용 탕약의 처방전을 작성하기 위해 자리를 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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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은 콧노래를 부르며 부러진 뿔의 단면을 손톱으로 갉작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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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진선경 수도자가 되면 환골탈태한다는 사실을 뇌내 기억장치에 소중히 저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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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문뜩 이런 의문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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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 전문적인 분위기를 풍기기는 하는데, 과연 등 진군의 판단을 신뢰해도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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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뭘 알고 처방하긴 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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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이름도 까먹은 사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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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돌팔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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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맞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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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이 생각해 보니 등 진군은 첫 만남부터 줄곧 나쁜 방향으로 자신의 판단력을 입증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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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인이 해제된 직후, 원영만 남은 상태로 서란과 담청에게 덤볐다가 제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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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이면 독안룡 정도는 낙승일 거라더니 까딱하면 몰살될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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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진군의 빅데이터를 기반으로 분석했을 때, 내일 당장 남은 오른쪽 뿔마저 뚝 부러진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것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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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는 사이에 등 진군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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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방전은 또 그럴 듯하게 써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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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한 번만 더 믿어 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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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만하게 구는 담청을 데리고 등 진군의 방을 나선 서란은 통신기를 꺼내 연락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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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을 들은 수선 동아리 회원들은 한달음에 담청의 병문안을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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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다른 일영근자 두 명은 같은 공간에서 생활하니 손님은 호혜문과 이아금 둘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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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설적이게도 문파 전체가 비승 준비로 바쁜 탓에 글방과 약당은 한가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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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혜문은 오늘도 털이 북실북실한 산양을 타고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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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보다 약간 늦게 도착한 이아금의 나룻배에는 갖은 약재가 실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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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에게 막 완성한 탕약을 먹이기 위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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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상자나 되는 약재를 바라보던 서란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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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금아, 이거 약당 창고에서 꺼내온 거 아니야? 이렇게 마음대로 사용해도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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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인계에 두고 갈 물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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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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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태까지 수많은 비행선을 건조했지만 그 안에 사람을 태우기에도 벅찬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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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순간에도 오죽문과 금작파는 엄청난 분량의 물자를 파기하거나 양도하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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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요한 건 선계에 가서 구하겠다는 심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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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의 방이 사람의 온기로 가득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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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금은 방 한쪽으로 가서 조제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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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들은 저마다 대화를 나누면서도 탕약 달이는 과정에 관심을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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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타 준 꿀차를 연신 들이키는 담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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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러진 뿔을 살펴보는 금영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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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제자 장선화와 얘기하는 호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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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단용 솥과 씨름하는 이아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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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옆에서 훈수하는 등 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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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녀가 차려 온 주전부리를 흡입하는 분신 식산대붕과 천재 인면조 홍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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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류들 틈바구니에서 과일을 집어 먹는 삼안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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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각기 한마디씩만 해도 열 마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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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 님, 꿀 더 넣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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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도면 충분한 것 같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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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무슨 원리로 뿔이 천기를 읽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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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며칠 전부터 궁금했던 건데요. 공법 수행 도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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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 부분이 어려웠구나. 그럴 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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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주괴오초? 처음 듣는 이름인데 이건 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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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놓여 있는 갈색 약재입니다. 하계에서는 다른 명칭으로 부르는 모양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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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맛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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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도 먹어 봐, 대붕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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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과일 안 먹을 거면 이리 주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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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작복작한 분위기는 얼마 안 가 잦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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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듯한 방 안에 잔뜩 모여 있으니 꽤나 노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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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는 사이에 탕약이 완성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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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금은 탕약을 담청에게 내밀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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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울 때 드세요, 용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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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릇을 받은 담청이 잠시 주변을 둘러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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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눈동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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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걱정하는 마음에 병문안을 온 이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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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선, 시선마다 호의와 애정이 흘러넘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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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은 충동적으로 말을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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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이름으로 불러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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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가까이 있던 이아금이 되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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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이름으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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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앞으로는 용녀님이라고 부르지 말고. 담청이라는 이름으로 불러줬으면 좋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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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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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장한 모두가 우물쭈물하고 있을 때, 식산대붕이 큰 소리로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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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 담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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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에 있던 홍순이 잽싸게 식산대붕의 부리를 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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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중의 시선이 바쁘게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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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없이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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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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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그래도 존칭은 붙여줬으면 싶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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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장이 풀린 다른 사람들도 따라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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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순은 붙잡고 있던 식산대붕의 부리를 놔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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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산대붕은 신나서 담청의 이름을 연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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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금이 다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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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기 전에 드세요, 담청 님. 이러면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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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이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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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결 낫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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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는 탕약을 쭉 들이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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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족 보양용 탕약이 꼴깍꼴깍 목구멍을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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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은 곧장 죽상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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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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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이아금이 포도맛 탕약으로 교체해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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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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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화신기 수사가 되며 천기를 읽는 영안, 관천안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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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유심히 관찰해 본 바, 다음에 승천문이 열리는 시기는 올해 겨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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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 년도 넘게 남았지만 비행 선단의 이동 속도를 고려하면 하루빨리 출발할 필요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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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 수사는 멍하니 승선 행렬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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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공녀 신세가 된 서란을 이아금과 함께 오죽문으로 데려온 장본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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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공로 하나로 지금까지 수뇌부에게 몇 차례나 포상을 받았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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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쌍의 젊은 부부가 아이의 손을 잡은 채 배에 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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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마, 아빠. 우리 어디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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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계로 가는 거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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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몇 밤만 자면 금방 도착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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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밖에도 수많은 사람이 선단에 몸을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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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푼 희망을 가슴에 안은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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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장되는 모양인지 두리번거리는 사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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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념에 잠긴 채 비행 선단을 올려다보는 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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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락용 인면조 무리는 새장째 옮겨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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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을 들고 바삐 오가는 도자기 인형들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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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핏 듣기로는 동물농장의 핵심부인 법뇌만 선계로 챙겨 갈 예정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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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 수사는 마지막으로 오죽문의 전경을 둘러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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잦은 외부 활동 탓에 본산의 경치는 어쩐지 낯설게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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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다른 수도자들과 마찬가지로 그에게도 이 산맥은 마음의 고향이나 다름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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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의 눈앞에 펼쳐진 건 하늘에 닿을 듯 솟아있는 산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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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봉우리마다 사람이 지었다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웅장한 전각들이 세워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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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맥 틈새로 구름이 강처럼 흐르는 광경은 그야말로 경외감을 불러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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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광경을 내려다보니 많은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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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왕 수사는 한숨으로 그 모든 걸 털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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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는 자신에게 배정된 선박에 승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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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문파가 설립된 시절부터 산맥을 지켜 온 대결계가 걷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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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뚱맞게 서 있는 초대형 선인장만 제외하면 그야말로 신선이 살 법한 절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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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넓은 산맥 곳곳에서 비행 선단이 날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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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수도문파가 염원하는 문파비승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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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승 행렬은 빠른 속도로 동쪽을 향해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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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닉 결계를 두른 채 대운하를 따라 움직이길 얼마, 마침내 해안 지대에 당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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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바다로 나가기 전에 어인족과 합류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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꿀차를 마시던 담청이 서란에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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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슬 어인족을 데리고 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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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가시게요? 등 진군이랑 함께 가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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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다, 크게 어려운 법술도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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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마친 담청은 식산대붕 밖으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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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후, 매서운 폭풍이 휘몰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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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이 본신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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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비늘, 턱 아래에 있는 여의주, 밑동부터 부러진 왼쪽 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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뿔이 한 개라는 점만 제외하면 그림 속에서 튀어나온 듯한 용의 형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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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크기가 좀 아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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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지낸 지는 꽤 오래 됐지만, 서란은 담청의 본모습을 오늘에서야 처음 목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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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마저도 가릴 듯 거대했던 독안룡의 위용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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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 전대 용신이 담청을 어린 용이라고 불렀는지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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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은 몸을 이리 꼬고 저리 꼬느라 바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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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오랜만에 본신을 드러낸 탓에 적응이 잘 안되는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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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용의 형상에 그럭저럭 익숙해졌는지 바닷속으로 쏙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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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옆에 있던 등 진군에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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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족은 원래 서로 몸집 차이가 큰 편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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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생종답게 연령에 비례하는 편이죠. 어떤 진선경 용족 같은 경우에는 본신을 드러내면 조수에도 영향을 미칠 정도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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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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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만으로 자연계에 영향을 끼칠 정도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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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상 피와 살로 이루어진 천체나 다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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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탄이 절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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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눈을 감고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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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한계를 초월하고 우주적 존재로 거듭난 자신이 행성으로 구슬치기를 하는 광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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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등 쓸데없지만 시간은 잘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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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는 동안 담청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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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층 작아진 용궁을 품에 꼭 끌어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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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족 전체를 데리고 비승할 수 있다니, 법보 만만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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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인족과 합류한 이후, 비행 선단은 본격적으로 속도를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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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은 화신기 수사와 용의 앞을 차마 가로막지 못하고 황급히 비켜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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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 간의 대장정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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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겨울 무렵, 일행은 세상의 중심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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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마침 승천문이 활짝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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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중간 천기를 관찰하며 비행 속도를 조절해 온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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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계의 입구가 닫히며 용오름이 하늘을 향해 솟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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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과 담청은 재빨리 그 위로 올라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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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거할 수 없는 흐름에 비행 선단 전체가 승천문을 향해 비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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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겁을 머금은 구름길이 비승 행렬을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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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차원 압력에 대비해 결계를 생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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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형 법화 결계가 일행을 휘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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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길 너머로 새까만 공허가 엿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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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마지막으로 지상을 돌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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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게 닫힌 명계의 입구가 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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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줄기 번뜩임이 서란의 뇌리를 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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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수림 심층부에 있던 대균열은 명계의 입구에서 영감을 얻어 건설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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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가 끝나기도 전에 승천문에 진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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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난 차원 압력이 법화 결계를 짓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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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문파를 두 개나 짊어지고 비승하는 탓에 결계에 가해지는 부담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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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인 화신기 수사였다면 결코 견뎌 낼 수 없었을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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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의 금단이 요동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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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색의 혼원법력이 결계에 동력을 공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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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 선단을 감싸 안은 법화가 더욱 맹렬하게 타오르며 차원 압력에 저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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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화 결계와 차원 압력의 힘겨루기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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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최후의 승자는 서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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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팎의 두 힘은 서서히 균형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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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유가 생긴 서란은 주변을 둘러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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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은 오색 운무를 두른 채 낑낑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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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뭔가 감을 잡았는지 결계가 급속도로 팽창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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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만간 안정화가 될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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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의 시선이 옆사람을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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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관제실에 있던 등 진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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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승에 관해서 뭘 좀 물어볼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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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서란은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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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을 세공하여 만든 등 진군의 눈은 머나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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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시간으로 공유되는 식산대붕의 시선을 통해 외부를 구경하는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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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서야 서란은 등 진군이 선계 태생이라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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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 개인사를 제외하면 뭐든지 다 아는 것처럼 굴던 그녀에게도 미지의 영역은 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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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진군은 난생처음 목도하는 우주의 자태에 푹 빠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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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하고자 했던 말을 도로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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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진군을 방해하고 싶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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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냥 우주나 구경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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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천안을 통해 보이는 우주는 어둡고 공허하기는커녕 형형색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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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각색의 항성과 성간 물질 덕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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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작품을 완성하고 난 이후의 유화 팔레트를 보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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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을 꼽아 보라면 당연 서란 일행이 타고 있는 공허의 흐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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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한 종류의 흐름들이 혈관처럼 이리저리 뒤엉킨 채 우주 전역을 뒤덮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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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복잡한 탓에 천기를 읽지 못하면 영원토록 떠돌아도 길을 찾을 수 없을 게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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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담청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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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결계를 안정화시킨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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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뿔이 부러진 탓에 천기를 못 읽게 된 담청은 까딱 잘못하면 우주 미아가 될 수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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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전심술을 통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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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 님, 속도를 좀 더 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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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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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뒤 잘 따라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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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행은 점차 가속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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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좌우, 무수한 갈림길이 그들 앞에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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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선계로의 경로를 또렷하게 표시해 주는 관천안 덕분에 길을 잃을 염려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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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해서 나아가자 깔때기 모양의 거대한 소용돌이 통로가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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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행은 빙글빙글 회전하며 그 안으로 입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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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깜짝 사이에 퇴장하자 저멀리 선계가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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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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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 님, 저기 보세요! 선계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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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로 광활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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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다 도착한 모양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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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행은 공허의 통로를 질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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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도착할 기미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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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다가가고 또 다가가도 행성은 계속해서 커지기만 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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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등 진군이 어딘가를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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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저기 좀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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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과 담청의 고개가 그쪽 방향으로 회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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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다른 우주 여행객과 눈이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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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쪽도 문파 비승 중인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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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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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에 선계는 하나고 하계는 여럿이라고 했었지? 저기도 우리처럼 선계로 가는 모양이다. 그나저나 이런 우연이 다 있구나, 비승 시기가 겹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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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진군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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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들 선계와 명계, 그리고 무수한 하계를 통틀어 삼천 세계라고 부르곤 합니다. 이렇게 비승하다 마주치는 정도는 드문 일도 아닐 겁니다. 두고 보시지요, 선계에 접근할수록 더 많은 비승 행렬과 마주칠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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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전에 열중하던 서란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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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 있는 합류점에서 저쪽 흐름과 우리 흐름이 만나네요. 통로가 좁아서 나란히 갈 수는 없을 것 같아요. 우리가 양보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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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 일행은 양보를 위해 속도를 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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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두 비승 행렬의 상대 속도는 전혀 변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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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쪽도 동시에 속도를 줄인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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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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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켜주려나 보다. 우리가 어서 지나가 주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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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 일행은 서둘러서 속도를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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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번에도 양쪽의 상대 속도는 불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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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손발이 착착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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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켜보던 등 진군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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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헷갈리지 않게 속도를 아예 줄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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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 일행은 급격히 감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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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나에 무수한 눈짓이 두 집단 사이를 오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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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쪽 비행 선단이 가속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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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길 비켜주기 신경전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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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측은 충돌하지 않고 합류점을 연달아 통과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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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날던 비승 행렬의 후미에서 감사의 표시로 등불을 몇 차례 깜빡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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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윽고 두 집단 모두 선계 영향권에 접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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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진군의 말이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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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성에 가까워질수록 비승 행렬은 더 많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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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승천자의 모습에 눈이 어지러울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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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의 관천안이 이변을 감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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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태 한줄기로만 그어져 있던 비승 경로가 수천, 수만 가닥으로 흩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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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수한 빛줄기가 선계 곳곳을 가리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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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금세 그 의미를 눈치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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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승에 성공한 모양이에요. 이제부터는 그냥 아무데나 착륙하면 되나 봐요. 어디가 좋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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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진군이 다급하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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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쪽, 저 방향으로 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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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쪽으로요? 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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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없습니다. 가면서 설명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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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일단 등 진군이 시키는 대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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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르게 움직이는 흐름 속에서 갈림길을 만날 때마다 이리저리 방향을 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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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비승 행렬은 선계 중심부를 향해 곧장 하강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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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행이 선계 북부 지역으로 뻗은 외길에 접어들자 등 진군이 설명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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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계는 갑을 병정 무기 경신 임계, 총 열 개의 구역으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제각기 인접한 두 구역씩 묶여 방위와 색상, 오행속성에 대응되죠. 그 중에서도 임계 구역은 북방, 흑색, 수속성을 상징합니다. 담청 님과 어인족, 오죽문의 주속성을 고려하면 북부 지역이 최선의 선택입니다. 그 부근에 용족이 많이 서식하기도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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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 그래서 남들처럼 중부 지역으로 안 가고 북부 지역으로 가는 거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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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중부 지역의 정신 나간 지가도 결정에 한몫 거들었습니다. 방금 중부 지역에 하강했던 승천자들 대부분은 얼마 못 가서 변방으로 이주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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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고개를 주억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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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값 문제라고 하니까 정말 확 와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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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 선단은 서서히 고도를 낮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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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구름 밑으로 하강한 순간, 농후한 천지영기가 그들을 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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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계와 선계 사이에는 우기의 습도와 수중 환경 정도의 영기 농도 차이가 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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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내로 밀려드는 맑은 기운이 서란의 수명을 4000년까지 늘려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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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식간에 두 배로 증가한 수명에 놀란 서란은 등 진군을 보고 다시 한번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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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계에서는 의식 없이도 화신기까지 경지를 올릴 수 있다더니 정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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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진군은 자리에 가만히 선 채로 금단을 완성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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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의 경계심이 급격하게 치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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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 보니 예전에 싸웠던 등 진군은 금단과 육체 없이 원영만으로 존재하는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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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처 반응할 틈도 없이 금단을 완성한 걸 보아하니 준선경 수도자였다는 증언이 마냥 거짓말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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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을 눈치챘는지 등 진군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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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그렇게 경계하지는 마세요. 무서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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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섭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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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무기 수사가 영성의 별을 세 개나 지닌 용을 죽였는데 어떻게 안 무섭겠습니까? 당연히 무섭죠. 그보다 담청 님을 봐 주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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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뒤따라오던 담청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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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근 천지영기를 탐욕스럽게 흡수한 영성의 별이 잠에서 깨어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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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이 진정으로 태성기에 도달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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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뿔의 어린 용을 휘감은 오색 운무의 맥동, 정말 장엄한 광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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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과정을 함께 지켜보던 등 진군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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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다 끝났군요. 이만 착륙하도록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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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아래에는 푸른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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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대를 탐색하던 서란 일행은 몇 개의 크고 작은 섬들로 이루어진 군도를 정착지로 낙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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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궁도 근처 해저에 안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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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죽문과 금작파 사람들이 몇 개월만에 하선하고, 어인족 또한 동면에서 깨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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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수도자들과 어인족은 저마다 바삐 움직이며 정착지를 건설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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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계까지 타고 온 비행선은 대부분 해체되어 거주지로 재조립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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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기차게 돌아가는 공사 현장을 바라보던 서란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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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우리 이제 뭐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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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진군이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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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시다, 관청에 무주지 점유 신고하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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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과 담청, 등 진군은 한데 모여 관청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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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관청 소재지를 모르지만 상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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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진군이 길잡이 법술을 알고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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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 도중, 서란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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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잡이 법술이라니, 신기하네요. 혹시 특정 대상을 콕 집어서 추적할 수도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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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방식으로 사용할 수는 없습니다. 길잡이 법술은 가장 가까운 등선명부만을 가리키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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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선명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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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진군은 먼 곳을 응시하며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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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조금 있다가 설명해 드리죠. 생각보다 중심지와 가까운 장소에 정착한 모양이군요. 거의 다 도착했습니다. 일단 속도를 좀 늦추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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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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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저희끼리 미리 말을 맞추어 놓아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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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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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뭣하러 그러는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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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솔직하게 전부 말하시려고요? 류 수사님은 65살이라는 어린 나이로 하계에서 비승했고, 담청 님은 법보를 지닌 채 특정 종족 전체와 동반 승천하셨다고?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많은 관심을 받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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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일리가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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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고민하던 등 진군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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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류 수사님의 나이부터 바꾸죠. 열 배로 부풀려서 650살 정도면 적당하겠네요, 거짓말하는 입장에서 기억하기도 쉽고. 오죽문과 금작파는 처음부터 하나의 수도문파였다는 식으로 인원을 축소하면 되겠고... 담청 님은 다른 용들처럼 혼자 승천하신 걸로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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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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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인족은 어찌해야 하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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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 미발견 선계 고유종이라고 치죠. 아시겠죠? 어인족과 담청 님은 선계에서 만나신 겁니다? 물론 법보 얘기는 절대로 꺼내시면 안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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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내 명심 하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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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진군이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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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제부터는 제 호칭에도 유의해 주세요. 진군은 준선경 이상의 초월자들에게만 허용되는 존칭이거든요. 함부로 사용하면 큰일 날 수도 있습니다. 있는지 없는지 모를 제 원수의 귀에 들어갈 수도 있고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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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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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이제부터는 뭐라고 부를까요? 등 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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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예 가명을 하나 짓죠. 음... 백월, 백월이라는 어감이 어쩐지 마음에 드네요. 결정했습니다, 이제부터 제 이름은 등백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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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씨는 안 바꿔도 되나요? 보통 은원 관계라는 건 혈통이나 성씨와도 관련이 많을 텐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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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백월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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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씨는 선계 100대 성씨에 속합니다. 엄청나게 흔하다는 뜻이죠. 진군이라는 칭호만 사용하지 않으면 절대로 못 찾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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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등백월의 호언장담에 괜스레 불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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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행은 얼마 안 가서 목적지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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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 일행이 정착한 곳의 명칭은 임6 구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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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계 국제 연맹, 도원향이 설치한 등선명부의 주변에는 마천루가 즐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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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이 임6 구역의 중심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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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백월이 고도를 낮추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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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부터는 비행 고도 제한 구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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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해서 높이 날면 어떻게 되는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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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회 경고 이후 곧장 대공 사격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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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과 담청은 군말 없이 고도를 낮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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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목적지인 등선명부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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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선명부는 허공을 부유하는 비석의 집합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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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백월이 관광 가이드 같은 태도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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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보시는 이 비석들이 등선명부입니다. 비석의 수효는 총 110개, 등선 의식을 무사히 마치고 진선경 수도자가 되면 저기에 이름이 새겨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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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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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선계에는 현재 진선경 수도자가 110명이나 존재한다는 소리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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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뇨, 그렇지는 않습니다.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모양이 특이한 비석들을 자세히 봐 주시겠습니까? 10개 중에 3개가 텅 비어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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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진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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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백월이 설명을 이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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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에 진선경은 두 단계 혹은 세 단계로 나뉜다고 말씀 드렸었죠? 준선경 수도자가 등선 의식을 치르면 시해선이 됩니다. 그 다음 경지는 지선이죠. 등선명부는 시해선비 100개와 지선비 10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새로운 신선이 탄생할 때마다 하늘이 무슨무슨 진군이라는 명칭을 비석에 새겨주는 방식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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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선명부를 유심히 관찰하던 담청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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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현존하는 진선경 수도자는 일곱의 지선과 여든넷의 시해선뿐이라는 뜻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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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맞습니다. 이름이 새겨지지 않은 비석은 남은 자리를 의미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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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가 다 차면 어떻게 되는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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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백월이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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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저도 잘 모르겠군요. 아마도 결원이 생길 때까지는 그 누구도 진선경에 도달할 수 없지 않을까요? 등선 의식 자체가 불가능하다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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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서란이 질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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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선경의 세 번째 단계는 뭔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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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거요? 시해선비가 100개고, 지선비가 10개니까, 규칙성을 고려하면 그 위에 비석이 하나 더 존재하지 않을까 추측하는 이가 꽤 많습니다. 그럴 듯하게 들리죠? 그래서 혹자는 지선 다음에 천선이라는 지고의 경지가 존재한다고 떠들기도 합니다. 물론 근거 있는 얘기는 아니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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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장히 잘 아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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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백월이 살짝 미소 지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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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도는 상식이죠. 아, 시간이 꽤 늦었네요. 이만 관청으로 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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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마지막으로 등선명부를 살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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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선명부의 맨 상단, 열 개의 지선비 중 하나가 유독 서란의 시선을 잡아 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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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천답층진군이라는 칭호가 새겨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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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일행은 표지판을 따라 관청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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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벽에 걸린 달력을 멍하니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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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놀랍게도, 선계에서 사용하는 역법은 서란이 태어난 인계의 것과 굉장히 유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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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계와 명계, 하계를 통틀어 삼천 세계라 부를 정도라고 하니 이런 우연도 다 있구나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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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랑 하는 종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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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의 고개가 전광판을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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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에 앉아 있는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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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쉽게도 서란의 번호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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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번 딸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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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광판에 뜬 숫자는 이번에도 서란의 번호패와 무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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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대신 담청과 등 진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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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구를 향해 다가가는 둘의 뒷모습을 보며 서란은 또다시 인고의 시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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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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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광판과 번호패를 번갈아 확인한 서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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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잽싸게 창구를 향해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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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서란의 차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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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당 관원의 영혼 없는 목소리가 서란을 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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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패 여기 놔 주세요. 어떤 용무로 오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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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너편의 인간 관리는 무려 원영기 수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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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 임용에 필요한 조건이 종족별로 판이하다는 사실은 등백월에게 이미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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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인간 수도자의 경우에는 원영기부터 서류 지원이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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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이 한계를 초월하는 원영기부터 수면의 필요성과 언어의 장벽이 사라지기 때문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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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관청의 미쳐 돌아가는 노동 환경 따위는 서란의 알 바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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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천자 등록 문제로 왔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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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함과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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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서란, 650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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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는 서랍에서 옥두꺼비를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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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꺼비 입 안에 손을 넣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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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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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좋습니다. 빼지 말고 가만히 계세요. 조금만 더요. 네, 다 됐습니다. 이제 빼셔도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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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손을 빼자 옥두꺼비가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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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지, 운무기! 체내에서 차원 전송 흔적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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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당 관리는 뭔가를 바쁘게 기록하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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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인되셨습니다. 이 안내문은 나중에 돌아가서 읽어 보세요. 비승 증명서 발급해 드릴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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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발급해 주세요. 그리고 무주지 점유 신고는 어디서 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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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52층 토지과로 가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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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비승 증명서와 안내문을 챙겨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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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는 잽싸게 종을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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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민원인이 창구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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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은 등백월의 도움으로 승천자 등록을 마친 채 서란을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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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끝났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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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등록 다 했어요. 이제 무주지 점유 신고하러 가죠. 52층에 있는 토지과로 가면 된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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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층! 그렇다면 승강기를 타 볼 수 있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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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듣고 있던 등백월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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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 전에 먼저 들를 곳이 있습니다. 비승 증명서는 발급 받으셨죠? 아, 안 잊으셨군요. 그러면 바로 상업 지구로 출발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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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백월은 서란과 담청을 이끌고 관청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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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행이 당도한 곳은 관립 경매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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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매라면 안 좋은 기억뿐인 서란은 질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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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은 여기저기 구경하느라 바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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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설 안내도를 살펴보던 등백월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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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품 등록은 12층이네요, 가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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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강기를 타고 올라가자 직원이 맞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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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소매에서 꺼낸 목함을 직원에게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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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자 안에는 토선과 2개가 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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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륙 십대문파한테 받은 5개에서 서란과 여무진, 금교월이 먹은 목선과를 제외한 나머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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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원은 토선과 2개를 경매 물품으로 등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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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경매 시작가에 해당하는 금액을 선지급해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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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찰가와의 차액은 수수료를 제하고 차후에 방문 수령하라는 안내 또한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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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돈주머니를 안은 채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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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맞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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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백월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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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은 자금이 급하니까요. 게다가 선과처럼 환금하기 용이한 물건도 드뭅니다. 유찰될 염려도 없고, 수수료만 해도 거금이죠. 관립 경매장이 괜히 경매 시작가만큼 선지급해 주는 게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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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정도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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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토선과 두 개는 높은 확률로 준선경 수도자 손에 들어갈 겁니다. 어쩌면 시해선 중 누군가일 수도 있고요. 자기 자식이, 어여쁜 후손이 오래 살길 바라는 부모 마음이야 다 똑같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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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만 무슨 소린지 도통 이해하지 못한 채, 일행은 경매장을 벗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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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계의 모습은 서란의 상상과는 확연히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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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리 아홉 달린 여우와 신선을 태운 두루미가 구름 위를 누비는 동양 판타지 장르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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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보다는 퓨전 사이버펑크에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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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매점 점원이 밝은 목소리로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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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분 모두 안목이 뛰어나시네요. 요즘은 족자형 단말기가 유행이거든요. 호불호 없는 기기 형태와 뛰어난 성능, 게다가 휴대의 편리성까지 잡았죠. 그래서 남녀노소 불문하고 많이들 구매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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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이 족자형 단말기를 도로록 펴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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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만 있으면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과도 얼굴을 보면서 얘기할 수 있다는 말이냐? 선계에는 신기한 물건이 많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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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최근에 승천하셨나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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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막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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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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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더더욱 족자형 단말기가 필요하실 거예요. 화상 통화 정도는 단말기의 수많은 기능 중 극히 일부에 불과합니다. 그 밖에도 서신 전달 기능, 좌표 고정 기능, 사진 및 영상 촬영 기능 등이 탑재되어 있죠. 물론 가장 중요한 건 천라지망 접속 기능이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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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설마설마하는 심정으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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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라지망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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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그렇습니다. 천라지망, 도원향이 직접 개발하고 유지 및 보수하는 전 선계적 법력 통신망이죠. 공인된 단말기만 있으면 누구나 접속할 수 있는 정보의 바다죠. 화면에 있는 그물 그림을 누르시면 되니까 한번 사용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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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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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키는 대로 그물 아이콘을 꾹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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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지구인에게는 굉장히 친숙한 형태의 네모 상자가 서란을 반겨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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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색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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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원이 검색창을 가리키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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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길쭉한 상자를 누르시고 궁금한 걸 질문하시면 돼요. 글로 적든 음성으로 묻든 상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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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끝으로 검색창을 콕 찔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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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기 인식기가 작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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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손가락으로 글씨를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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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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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면은 곧장 고양이 관련 정보로 가득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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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완 고양이 요수 만드는 법’, ‘고양이 요수 약점’, ‘고양이 간식 사람이 모르고 먹으면’ 등등 다양한 내용이 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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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리 두 개 달린 고양이 사진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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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원이 소명의식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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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 정말 배우는 게 빠르세요. 역시 하계에서 승천하신 분들은 뭐가 달라도 다른가 봐요. 아참, 혹시 관청에서 비승 증명서는 발급받으셨을까요? 저희 매장이 승천자 할인 행사를 진행 중이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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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좀 어이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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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험생 할인도 아니고 승천자 할인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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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건 선계가 아니야, 라고 외쳐야 할 것만 같은 심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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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등백월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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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조금만 더 둘러보고 올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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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러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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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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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백월은 미소로 화답한 뒤 담청을 챙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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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은 잉어가 헤엄치는 다섯 시진(10시간)짜리 동영상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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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보면 최면에라도 걸린 줄 알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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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매점을 벗어난 서란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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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선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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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백월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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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떨 줄 아셨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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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뭐... 여우 요수와 두루미 요수가 정답게 산천을 노니는, 그런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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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고전적인 상상을 하셨군요. 선계는 넓으니까 잘 찾아보면 문명 발달의 흐름이 비껴간 지역도 분명 있을 겁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지금 보시는 바와 같아요. 기술이란 결국 발전하는 거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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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주변을 둘러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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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거리에는 단말기 판매점이 몰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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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같이 자기가 원조라고 주장하는 광고판이 인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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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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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전부 자기들이 원조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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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있는 판매점은 대부분 원조가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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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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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백월이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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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원래는 모두 같은 회사였거든요. 가격 경쟁으로 선계의 단말기 시장 전체를 장악했다가 반독점법에 걸려서 회사가 수천 개로 쪼개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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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만한 덩치의 회사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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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원향의 최고 심판관이 직접 내린 판결인데 뭐 어쩌겠습니까? 회사 쪼개야지. 저번에 얘기해 드린 적 있었죠? 조수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거대한 진선경 용족이 한 분 계신다고. 그 분이 최고 심판관이십니다. 물론 지선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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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담청을 언뜻 바라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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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족이 판관이면 위증은 꿈도 못 꾸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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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안에는 진실과 거짓을 구분하는 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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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계로 비승하기 전에 담청이 알려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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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병 온 사람들에게 자신을 이름으로 불러 달라고 부탁했을 무렵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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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백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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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습니다. 처음부터 죄를 안 짓는 게 가장 좋죠. 언제였는지 정확하게 기억은 안 나지만 조직적으로 위조 지폐를 생산하던 수도가문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됐을 것 같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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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죽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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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곱게 죽지도 못했죠. 아마 지금까지도 명계에서 죗값을 치르고 있을 겁니다. 명계 관리자께서도 도원향 소속의 지선이시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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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과 담청, 등백월은 족자형 단말기를 구매한 뒤 다시금 관청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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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행은 승강기를 타고 52층 토지과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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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주지 점유 신고를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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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도 민원인으로 들끓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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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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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좀 특이하네요. 아무리 무주지 점유라지만 허가제가 아니라 신고제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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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계가 워낙 넓어야지요. 빈 땅을 마냥 놀리는 것보다는 누구라도 차지해서 관리하는 게 백배는 낫습니다. 적어도 요괴는 퇴치할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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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긴, 그것도 그렇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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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행은 인고의 시간 끝에 무주지 점유 신고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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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오죽문-금작파 합병 문파의 정식 명칭은 ‘금죽문’으로 결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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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죽문은 문파명에 대나무만 들어가면 검은색이든 흰색이든 신경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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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작파 또한 이름에 황금이 들어가기만 하면 참새든 뱀이든 상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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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든 뱀부 멤버들은 토지과를 나와 다른 층으로 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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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착한 곳은 77층의 비승 지원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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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여기는 좀 한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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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담청이 칭얼거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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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도대체 언제 끝나는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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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히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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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승하면서 몇 개월이나 무수면 비행을 했고, 선계에 도착해서는 관청 뺑뺑이를 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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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아무리 용이라고 해도 슬슬 피곤할 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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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웃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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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 님, 졸리면 저한테 업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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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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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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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이 쿨쿨 자는 동안 차례가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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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구로 다가간 서란은 자신과 담청 몫의 비승 지원금을 신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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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착 보조금, 수선 격려금 등 혜택이 풍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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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 순간을 위해서 비승 증명서를 발급받고 단말기를 개통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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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층으로 이동하던 도중에 서란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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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우리야 등 수사가 있다지만, 다른 수도문파들은 막 비승하고 가뜩이나 경황없는 상황에서 이런 정보를 어디서 접하나요? 대부분 모르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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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습니다, 그래서 신청률이 굉장히 저조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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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적인 모르면 못 받는 돈이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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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를 나누다 보니 선골 검사장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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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사관은 서란과 등백월, 곤히 잠든 담청의 법력을 추출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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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사 결과는 올해 안으로 통보해 준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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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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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정말 다 끝난 거 맞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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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뇨, 아직 하나가 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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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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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행은 또다시 승강기에 올라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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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깨가 침으로 흥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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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은 업힌 상태에서도 정말 잘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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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업어 가도 모를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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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등백월을 기다리는 동안 벽보를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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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다란 벽보는 관광지를 안내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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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지는 무려 선계에 산재한 오행비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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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적혀 있는 내용만 보면 이게 오행비경인지 국립 공원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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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경 의식 신청을 마친 등백월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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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끝났습니다. 그런데 뭘 보고 계셨습니까? 아, 오행비경 관광 벽보였군요. 우연이네요, 제 비경 의식이 치러질 장소도 바로 이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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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가 언제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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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 이분기 정도면 순번이 돌아올 거라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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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청하고 반 년 정도만 기다리면 비경 의식을 치를 수 있다니, 서란이 여기가 선계라는 사실이 새삼 크게 와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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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원향이라는 국제 연맹이 비경을 관리하고 원영기 수사가 민원 접수를 하는 게 당연한 세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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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말로 별세계가 아닐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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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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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처리가 굉장히 능숙하시네요? 봉인된 기간이 짧지는 않았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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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계에는 큰 변화가 드물거든요. 도원향과 거기 소속된 지선 다섯 분의 영향력을 감안하면 필연적인 결과입니다. 나머지 두 분은 세상사에 관심이 영 없으시기도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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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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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등백월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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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보기보다 똑 부러지는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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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준선경이라는 높은 경지까지 도달했던 수도자답지 않다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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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모로 남을 부리기보다는 남에게 부림을 당하는 쪽에 더 가깝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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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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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행은 문파 식구들이 기다리는 군도로 복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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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군도의 정식 명칭은 극광제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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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광, 오로라가 빈번해서 그렇게들 부른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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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뒤, 선골 검사 결과가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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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이 제 단말기를 펄럭이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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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한테도 선골이 있다고 하는구나! 그런데 공백지체가 도대체 무엇이냐? 설명이 너무 길어서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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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백월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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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백지체의 가장 큰 특징은 예민한 기감입니다. 하긴, 담청 님은 한때 잉어였다고 하셨죠? 잉어처럼 수명이 짧은 생물이 무슨 수로 영수를 거쳐 용이 되었나 했더니 이런 이유가 있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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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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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지 상승 속도가 빠른 선골 중에 하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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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이 좋아진 담청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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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백월, 그대는 어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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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제 선골은 태혼지체라고 하는군요. 혼백의 격이 태생적으로 높다고 합니다. 불가사의한 위압감을 뿜어내기 때문에 요수술과 굉장히 잘 어울린다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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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오, 그렇구나. 서란, 네 선골은 무엇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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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하니 결과지를 들여다보던 서란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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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타고난 선골이 없다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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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죽문 비승 0년, 연말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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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근 없는 이를 지칭하는 말은 범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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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선골 없는 이를 지칭하는 말은 범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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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선골 미보유자, 즉 범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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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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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골이 없다고?! 그렇다면 서란은 영원토록 신선이 될 수 없다는 뜻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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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백월이 물 흐르듯 부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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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아닙니다. 영근이 없으면 무슨 수를 써도 수도자가 될 수 없지만, 선골 좀 없다고 신선이 못 되는 건 아니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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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런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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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습니다. 물론 선골 보유자에 비해서 경지 상승 속도가 확연히 느린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수명이 끝나기 전에 다음 경지로 올라갈 수만 있다면 신선이 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범골임에도 기연을 여럿 만나 신선이 된 경우도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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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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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 불행 중 다행이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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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행운일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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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운이라고? 범골로 태어난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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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백월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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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요, 가지고 있던 선골이 사라진 상황이 아니지 않습니까. 류 수사님은 여전히 찬란한 재능을 품고 계십니다. 만약 진짜 범골이면 더 좋죠. 선골만 얻으면 더욱 빠른 속도로 경지를 올리실 수 있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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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은 예전에 나눈 대화를 떠올리는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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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참, 그러고 보니 그대가 예전에 그런 얘기를 했었지. 선계에 가면 부족한 선골 자질을 보완할 수단이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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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단은 많습니다. 체질을 개선시켜 주는 선과를 먹거나 비슷한 효능을 지닌 공법을 익혀도 되죠. 아니면 그냥 재능에 의지해서 진선경까지 도달하는 것도 괜찮겠네요. 어차피 환골탈태를 거치면 선골 자질의 차이가 무의미해지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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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는구나, 서란. 혹여나 내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말만 하거라. 선과든 공법이든 함께 찾아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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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격적인 검사 결과에 망부석처럼 굳어 있던 서란이 마침내 정신을 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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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써 주셔서 감사해요, 담청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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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이 아니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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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도 그러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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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짱을 낀 채 고민하던 등백월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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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아직 범골이라고 확정된 건 아닙니다. 검사 과정에서 오류가 있었을 수도 있고, 너무 희귀해서 여태까지 학계에 보고되지 않은 선골일 수도 있으니까요. 저희끼리 따로 확인해 보도록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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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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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사 이외에도 선골 유무를 확인할 방법이 있나요? 아, 혹시 체질을 바꿔주는 선과를 먹거나 공법을 익히는 방법인가요? 범골이라면 새로운 선골이 생길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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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너무 위험한 방법이군요. 한번 선과나 공법을 통해서 체질을 바꾸면 돌이킬 수 없습니다. 류 수사님이 진짜 범골이라면 별 탈 없을 테지만, 혹시라도 알려지지 않은 선골을 지니고 계시면 문제가 됩니다. 최악의 경우에는 재능이 크게 퇴보할 수도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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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선골이 퇴보하는 경우도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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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백월이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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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하죠. 부주의하게 넣은 향신료 한 줌이 요리 전체의 풍미를 해치는 건 결코 드문 일이 아닙니다. 수선 또한 마찬가지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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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어떻게 확인을 하시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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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한테 범골만 익힐 수 있는 공법이 있습니다. 그걸 한번 익혀 보시죠. 그래서 배워지면 범골이고, 아니면 선골 보유자인 겁니다. 물론 지금 당장은 안됩니다. 태성기 공법이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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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위계 수사의 경지는 운무기부터 태성기, 광홍기, 은한기까지 네 단계로 구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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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지금 운무기니까, 한 단계만 올리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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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돌고 돌아서 수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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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무명공법을 열심히 수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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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흘 연속 철야 수행을 마친 서란이 임시 수련실 밖으로 걸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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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현재 기분이 매우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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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백월에게 배운 무명공법 덕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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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적으로 조화를 추구하는 성질과 특유의 유연한 법력 운용 방식, 그리고 자체적인 완성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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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말로 서란의 마음에 쏙 드는 공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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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무명공법의 창안자를 직접 만나 보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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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하늘에 올라 극광제도를 내려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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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저기 늘어선 건물, 섬 사이를 바삐 오가는 비행 법기, 무리 지어 돌아다니는 어인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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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 수련실 안에서 보낸 시간은 고작 열흘이지만, 군도는 못 알아볼 정도로 달라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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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리번거리던 서란은 찾고 있던 대상을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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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백월과 담청이 손바닥만 한 섬에서 여유롭게 피서를 즐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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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섬을 향해 하강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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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백월이 서란을 발견하고는 인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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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자수 두 그루 사이의 그물 침대에 누운 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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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만 색안경을 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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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은 백사장 쪽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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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만 밖으로 내놓은 채 모래 찜질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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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찬가지로 까만 색안경을 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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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등백월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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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매장에 맡긴 선과가 팔렸다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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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오늘 새벽에 낙찰됐다더군요. 시해선끼리 가격 경쟁이 붙은 모양인지 제 예상보다 훨씬 비싸게 팔렸습니다. 확인해 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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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단위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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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불로 받은 경매 시작가와 경매장 이용 수수료를 제하고도 상상을 초월하는 거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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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과 담청 몫의 비승 지원금까지 더하면 당분간 자금 문제로 곤란할 일은 없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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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말기를 주인에게 돌려준 서란은 백사장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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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척을 느낀 담청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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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곳은 연중 내내 따듯하다고 하는구나. 계절이 여름뿐이라니, 그야말로 낙원이 따로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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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쩐지 야자수 천지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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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자수라... 그러고 보니 지식으로만 접했지 직접 보는 건 또 처음이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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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손짓하자 한줄기 바람이 야자열매 두 개를 나무에서 똑 떼어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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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 님, 야자열매 먹어 본 적 없으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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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먹을 수 있는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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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요, 한번 맛만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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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의 두 팔이 백사장 위로 불쑥 튀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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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엄지로 야자열매 껍질에 구멍을 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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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담청의 손에 잘 쥐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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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먹는 방법을 알려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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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이랑 껍질 안쪽의 흰 부분을 드시면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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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은 구멍에 입을 대고 꼴깍꼴깍 소리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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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이어 야자열매를 껍질째 아작아작 씹어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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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치과 갈 일은 없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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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자기 몫의 야자열매를 먹으며 청록색 바다와 크고 작은 섬들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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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범인을 유치할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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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계의 농후한 천지영기 덕분에 범인이 내뿜는 탁기를 염려할 필요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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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광제도가, 금죽문의 영역이 수도자와 범인으로 가득차는 광경이 벌써부터 기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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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멀리, 식산대붕 본체가 바다에 앉아 반신욕을 즐기는 모습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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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승 1년, 등백월이 수속성 비경 의식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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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에 있던 것까지 합쳐서 화수 이영근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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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품이랍시고 유리처럼 투명한 소라 껍데기를 잔뜩 가지고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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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승 10년, 호혜문이 결단기에 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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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나이 82세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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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무지체라는 선골을 보유한 사실도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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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승 18년, 장선화가 결단기에 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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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나이 58세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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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아쉽게도 선골 보유자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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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비승 20년, 금영영이 결단기에 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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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나이 88세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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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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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금영영은 이영근자인 호혜문보다 몇 년은 먼저 축기에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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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정작 금단 형성 시기는 십 년이 늦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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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혜문이 선골 보유자인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저위계에서는 영근 자질이 훨씬 더 중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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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따지고 보면 선골 문제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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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일영근자이면서 선골이 없는 장선화보다도 경지 상승 속도가 느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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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금영영이 축기기 수사가 되었을 당시에 장선화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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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계 평균보다 20배 빠른 서란의 경우와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말이 안되는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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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원래 말이 안되는 건 없는 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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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칭 대기만성형 인재 금영영에게는 특히 더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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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의 핵심은 결국 단말기와 천라지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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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기기 수사는 수은으로 목욕을 해도 멀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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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도파민 중독에는 속수무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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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영영은 망령처럼 천라지망 곳곳을 배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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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판 갱신, 게시판 갱신, 또 갱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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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파민으로 엉망진창 절여진 뇌는 새로운 자극을 끊임없이 갈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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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걱정에 서란의 한숨은 나날이 늘어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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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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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심은 거대 선인장을 파먹던 담청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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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걱정이라도 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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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영이 때문에 그래요. 수행은 뒷전이고 온종일 단말기만 들여다보고 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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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걱정할 이유가 있을까 싶구나. 그다지 재미도 없던데 말이지. 조만간 영영이도 질릴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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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의 걱정과 달리 의외로 담청은 천라지망 중독에 빠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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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보다는 실물을, 앉아 있는 것보다는 외부 활동을 선호하는 아웃도어파라서 그런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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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금방 단말기에 대한 흥미를 잃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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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금영영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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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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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새로 지은 저택으로 귀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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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가에 선인장 즙을 잔뜩 묻힌 담청도 함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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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를 음미하던 금영영이 인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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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 좋은 아침. 잘 잤어? 담청 님도 안녕히 주무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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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과 담청이 마주 인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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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잘 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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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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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아침이 아니지만 그냥 그러려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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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은 공을 챙겨서 놀러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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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수련실 안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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닫히는 문 너머에서 금영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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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당최 말이 안 통하네. 이런 사람들은 천라지망 못 쓰게 하면 안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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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영영은 오늘도 어김없이 수선 교류회에서 건실한 갑론을박을 주고 받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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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는 ‘법기와 법술, 뭐가 더 강한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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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명의 연기술사로서 결코 질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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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님의 명예를 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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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란 시작의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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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학이 끝나서 글방 선생 호혜문은 바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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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겨울, 마감을 앞두고 벼락치기로 숙제를 해치웠던 금영영도 금작파로 끌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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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림으로 대충 만든 과제물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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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도 인형술 공부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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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표는 자동성을 지닌 정통파 인형 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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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쉽지만 수동 조작은 한동안 봉인할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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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파 결과물이라면 이미 충분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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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대여한 인형술 입문편, 기본편, 숙련편을 서란은 아직도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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깜빡하고 반납하지 않았는데 장서각에서도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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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빌리겠다는 사람이 없어서 그런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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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술이 얼마나 비주류 법술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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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문편은 인형술사가 인형을 직접 조종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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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동 조작이라면 서란의 전문 분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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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으로 치면 튜토리얼 여포라고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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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편은 자동성에 관한 내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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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술사가 미리 입력해 놓은 논리 구조에 따라서 인형이 스스로 움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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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혀로 할짝거리다가 직립 이족 보행의 쓴맛을 보고 나뒹굴었던 지점이 바로 여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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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련편은 한층 심화된 내용을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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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도달한 인형술사는 자기 인형에게 특수 능력마저 부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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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야 공유나 자동 수복, 심지어 의사소통 능력이 부여된 인형도 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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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예상하기로는 학습인형연구서를 읽으려면 우선 숙련편부터 완벽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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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찬가지로 숙련편보다는 기본편이 더 먼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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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직립 이족 보행 시간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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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깜짝 놀라서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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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멀쩡히 걷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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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토인형이 갑자기 사람처럼 정원을 누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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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치 못한 성공에 서란은 두려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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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찾아온 행운은 언제든 떠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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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서둘러서 복제품을 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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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같은 형태, 똑같은 논리 구조를 가진 인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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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두 인형이 보여준 모습은 전혀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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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다시 한번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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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움직이다가 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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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같이 걷던 복제 점토인형이 가만히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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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더 참고 기다렸더니 다시 동작하기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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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서란이 바라던 결과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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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토인형이 돌연 문워크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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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걷는 인형과 뒤로 걷는 인형을 바라보며 서란은 정신이 나가버릴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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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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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인형술은 비주류 법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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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이 왜 이러는 건지 물어볼 사람도 전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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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털 나고 이 정도로 외롭고 서러웠던 적이 드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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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서 도대체 어떤 싸움을 해오신 겁니까, 인형애호가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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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문득 인형애호가를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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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삼 인형술 불모지인 서대륙에서 목각인형을 탄생시킨 대단함이 존경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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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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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저편에서 인형애호가(노인, 상상화)가 빵끗 웃고 있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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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인형술을 가르쳐줄 사람이 간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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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찾다가 찾다가 담청에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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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히는 담청이 아니라 괴전파 수신기인 사슴뿔이 서란의 목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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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 님, 혹시 뿔을 잠깐만 빌려주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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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 연못에서 잉어들과 즐겁게 헤엄치던 담청이 화들짝 놀라서 반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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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뿔을? 도대체 무슨 이유로 그런 무서운 소리를 하는 것이냐? 용의 뿔은 잘라도 계속 자라나는 손톱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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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오해를 바로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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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뽑아가겠다는 말이 아닙니다. 실물이 아니라 능력을 빌리겠다는 의미죠. 천기를 읽는 능력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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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떠올린 해결책은 지극히 현대인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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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는 것이 있다면 검색 엔진에게 질문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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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그래머들도 모르면 그냥 인터넷에 검색한다고 전생에 얼핏 들었던 기억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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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년감수한 담청이 연못에서 기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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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무엇이 궁금한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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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색이 돈 서란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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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부분을 고쳐야 제 인형술이 발전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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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이 즉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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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다, 나는 모르겠구나. 혹시 알게 된다면 너에게도 말해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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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천기를 읽어 보셔야지요. 왜, 녹용이 번쩍하는 그런 거 있잖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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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기를 읽는 능력이란 하늘이 말해주는 비밀을 일방적으로 듣는 것이다. 다른 용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는 하늘에게 뭘 물어볼 능력이 없다. 무작정 기다리다가 운이 좋으면 쓸모 있는 정보를 얻는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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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마친 담청은 다시 연못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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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망한 서란은 터덜터덜 점토가 있는 곳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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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다시 점토인형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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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지나고 서란은 직립 이족 보행을 마스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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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부터는 점토만으로 인형을 만들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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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능 향상을 위해서 비싼 재료가 필요한 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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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서란은 걱정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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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귀한 소재? 얼마면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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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변신합체 삼두육비 거대인형 금강야차를 통해서 막대한 개발비를 손에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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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면 두렵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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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즉시 장서각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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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퍼핏마스터가 된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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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서란이 개발비를 받는 일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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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하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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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가을, 가택연금이 끝난 장옥기는 사회봉사의 일환으로 장서각에서 일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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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일조차 없던 가혹한 반년이 마침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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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장옥기는 여전히 장서각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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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는 그저 ‘재미있으니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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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작성, 필사, 색인 정리가 재밌다는 의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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낳고 기른 부모도 몰랐지만, 장옥기는 타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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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은 그에게 강렬한 욕망을 갖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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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재능까지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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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물과 종이만 있다면 하루 종일도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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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근무 시간을 제멋대로 엿가락처럼 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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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은 누구보다 빨리, 퇴근은 누구보다 늦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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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서각 각주는 수백 년을 살았지만, 이렇게 유능하고 열정적인 청년을 본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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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봉사 기간이 끝난 장옥기는 곧장 장서각 재경직 말단으로 발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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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쟁한 지원자들을 모조리 때려눕힌 쾌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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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옥기는 전과자라는 패널티에도 불구하고 재경직 선발 배틀로얄에서 당당히 살아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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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집단이나 마찬가지지만, 예산을 다루는 부서에게는 명시적인 권한보다도 강한 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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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이유로 내부 구성원의 청렴함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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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옥기가 재경직 말단으로 뽑힌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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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욕에 휘둘리는 사람이 사설 도박장을 몇 년 동안 무급으로 운영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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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과 기록이 보증 수표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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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횡령하지 않는 남자는 재경부로 출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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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문을 열자마자 기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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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같은 선배들이 난동을 부리고 있던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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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파에 돈이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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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죠, 선배? 예산이 바닥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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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산이다! 우린 다 파산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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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류 수사가 인형 개발비를 신청했습니다. 액수가 만만치 않은데 이 일을 어쩌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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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인형?! 너 지금 미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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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서 절대로 못 준다고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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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 주면 오죽문 진짜로 망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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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지나자 다른 부서에서도 사람들이 달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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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리 예산 좀 주세요! 이 어음 오늘까지 안 막으면 부도에요! 문파 신용이 박살난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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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수목전에 영석이 없어서 영초랑 영목이 전부 고사 직전이에요! 죽기라도 하면 복구하는데만 수백 년은 더 걸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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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상, 초비상! 미궁언서용 비축 식량이 고갈 직전이에요! 당장 다른 문파에서 수입 안 하면 지하자원과 교환할 식량이 바닥납니다! 이건 협정 위반과 관련된 외교 문제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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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사 예언 속에 등장하는 종말의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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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천 년 역사의 장엄한 수도문파가 위태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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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파 재산을 횡령하는 도둑놈들이 많아서 그런 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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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은 류서란 한 명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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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죽문의 최연소 결단 의식에 위기감을 느낀 적대적 수도문파들이 이렇게 저주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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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급한 결단 의식은 실패하고 이번 손실을 복구하는데 족히 수백 년은 걸릴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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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절한 그들의 저주는 정확히 절반만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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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가볍게 결단에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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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대신 오죽문이 파산 직전에 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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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정된 문파 비승은 먼 미래의 일이지만, 부도 직전인 어음은 당장 눈앞에 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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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경부 구성원들은 잘못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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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오히려 스스로가 엘리트임을 증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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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에 가까운 자금 돌려막기로 오죽문의 파멸을 예정보다 뒤로 늦췄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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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영원히 늦출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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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구경조차 못해본 서란의 인형 개발비는 예산 부족이라는 타당한 사유로 증발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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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울해도 어쩔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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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돈이 전부 어디로 갔냐고 물으면 재경부 사람들은 손을 들어서 서란을 가리킬 게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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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죽문, 파산 선언까지 앞으로 몇 개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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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인배들은 창고에서 금품이나 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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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진정한 도둑은 나라에 망조를 가져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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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 문파를 빈사 상태로 몰아넣은 고금제일 대도, 류서란은 밤새 잠들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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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든 오죽문 식구들의 얼굴이 연신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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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다 문파 망하면 어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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뿔뿔이 헤어지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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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파 비승으로 보답한다는 내 다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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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아침까지 한숨도 못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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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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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자고 있던 담청을 깨워서 오죽문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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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결계를 지나서 북동쪽으로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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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에 도착해서 출국 절차를 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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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혈만 빨아먹다가 외국으로 도망친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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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화벌이를 위한 소녀 가장 무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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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선계 국제 시장 한 구석, 누군가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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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속성, 수속성 한 명씩 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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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재빨리 일어나서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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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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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자 인력 시장은 여느 때처럼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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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단 의식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얼마 뒤, 금영영에게 한 통의 서신이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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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부터 수뇌부 회의에 참석하라는 내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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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 안 할 거면 남들처럼 일이라도 하라는 구박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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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금죽문에는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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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자와 범인의 공존, 인근 해역의 정찰, 시설 확충, 정보 수집 등 처리할 문제가 태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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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가장 중요한 업무는 의사 결정 기관의 구조적인 개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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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승 이전, 금죽문의 수뇌부는 이영근 및 삼영근 결단기 수사로만 구성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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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는 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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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영근자는 의결권이 없었고, 사영근자나 오영근자는 결단기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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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지금 이곳은 선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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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환경이 급변한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조직 구조 또한 변화할 필요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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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그것을 결정하기 위한 회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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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이유로 금영영은 일영근자임에도 수뇌부 회의에 참석하게 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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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영근자든, 선골 보유자든 본인의 경지가 결단기 수사이기만 하면 예외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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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호혜문과 장선화도 회의에 참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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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장의 목소리와 함께 회의가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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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제32회 수뇌부 조직 구조 개편 논의를 시작하겠습니다. 지금까지 접수된 개편안은 총 132개입니다. 그 중에서 자진 철회와 단일화, 폐지된 123개 개편안을 제외하면 실질적으로 9개만 남은 상황입니다. 각자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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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장이 금방 소란스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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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상 유지안이 가장 합당하지 않겠습니까? 여태까지 그랬던 것처럼 결단기에 도달한 모든 수도자가 의사 결정에 참여하면 되지요. 조직 건전성의 관점에서도 나무랄 데 없는 선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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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의사 결정 참여자가 너무 많아지지 않을까요? 자칫 잘못하면 사소한 문제 하나 해결하는데 몇 달씩 걸릴 수도 있습니다. 건전성 측면에서는 물론 좋겠지만 대응성이 너무 떨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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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동의합니다. 특히 지금은 선계라는 낯선 환경에 적응해야만 하는 시기입니다.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 의사 결정 과정이 둔해지는 건 치명적입니다. 저는 차라리 수뇌부 총원을 줄이는 것도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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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발 기준은 뭐죠? 역시 높은 경지인가요? 아니면 연령이나 공헌도, 평판? 또는 다른 무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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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생각해 봐도 경지가 가장 낫겠군요. 공헌도나 평판처럼 주관적인 판단이 개입되지도 않고, 나이처럼 거저 주어지는 것도 아니니까요. 그나마 분쟁의 여지가 적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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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이전처럼 경지를 기준으로 수뇌부를 선발하되 결단기보다 높은 경지를 하한선으로 잡아야겠군요. 저위계는 논외로 치는 게 맞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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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소한 운무기부터 시작해야죠. 아니면 구조를 개편하는 의미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너무 높은 경지를 기준으로 삼으면 권력이 지나치게 집중될 테니까 적절히 잘 골라야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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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준을 제대로 정했다고 해도 유예 기간이 넉넉히 필요할 겁니다. 기준선을 점진적으로 올리지 않으면 사실상 수뇌부가 일시에 마비되는 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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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영영은 필사적으로 하품을 참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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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듯한 날씨, 어려운 말을 주고받는 차분한 목소리들, 밤샘 익명 토론으로 누적된 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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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금영영은 고뇌하는 자세를 취한 채 꿀잠을 자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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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선화는 두 발 달린 짐승보다는 사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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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반듯한 자세와는 달리, 머릿속은 논제와 무관한 딴생각으로 가득 찬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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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기지 않는 사실이지만 서란을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글방 최고의 모범생이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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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혜문은 성실하게 논의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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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이의 의견을 경청하고, 간간이 자기 의견을 피력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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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죽문의 미래가 참 밝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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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장이 회의를 잠시 중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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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휴식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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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혜문은 그 짧은 휴식 시간조차 무의미하게 그냥 흘려 보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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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대신 관련 통계 자료를 훑어보는데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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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원향에서 직접 발행한 ‘선계경지통계백서’라는 이름의 두꺼운 서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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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를 보니, 영근 및 선골 자질별 실질 도달 가능 한계 경지에 관한 내용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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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영근자와 오영근자는 대개 원영기가 한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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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평균적으로 530세, 790세가 되면 원영기에 도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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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영근이 너무 많은 탓에 오채지심 수행 도중 수명이 다하기 일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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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근 조화 난이도는 다른 영근, 즉 장애물의 개수와 연관이 깊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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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근, 삼영근일 때는 별 차이가 없지만 사영근, 오영근일 때는 확연히 어려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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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에 따르면 사영근자와 오영근자의 오채지심 소요 기간은 각각 1620년, 2160년으로 추정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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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에 일영근자, 이영근자, 삼영근자의 평균 오채지심 수행 기간은 1260년으로 동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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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간별 수행 기간은 180년, 180년, 360년, 540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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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략 1:1:2:3의 비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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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어디까지 범골 기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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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혜문 입장에서는 흥미로울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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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에 어떤 내용이 나올지 몹시 궁금했지만 아쉽게도 휴식 시간이 끝나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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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중단되었던 회의가 재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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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혜문은 읽고 있던 선계경지통계백서를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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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뒤, 흰 연기로 가득 찬 좁은 밀실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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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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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니어스 드래곤 담청이 고민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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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 중간중간 왼쪽 머리를 긁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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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들어 왼쪽 뿔 부근이 간지러울 때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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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법보 한증막을 즐기던 서란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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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 님, 무슨 생각을 그렇게 깊이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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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그게...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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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 그러지 마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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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팔꿈치로 담청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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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이 이히히 하고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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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의 얼굴에도 괜스레 웃음꽃이 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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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담청이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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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은 독안룡과의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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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안룡은 갑자기 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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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왜... 독안룡은 여의주를 세 개나 가지고 있었지 않느냐, 천겁을 견디고 억지로 승천하기 위해서. 그래서 우리를 공격했던 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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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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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아요, 담청 님의 여의주를 노리고 달려들었었죠. 제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싸움이었습니다. 담청 님이 아니었으면 결코 이길 수 없었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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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정말 강한 상대였지... 그런데 서란 네가 잘못 알고 있는 사실이 하나 있다. 그때 독안룡이 노린 건 내 여의주가 아니었었다. 네 원영과 금단이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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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제 원영과 금단을 어디에 쓴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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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이 진지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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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거 없는 직감이지만, 너의 원영과 금단으로 인공 여의주로 만들 작정이었던 건 아닐까 싶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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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 여의주? 그게 가능한 일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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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잘 모르겠구나. 하지만 여의주도 따지고 보면 용의 내단일 뿐이다. 그렇다면 인간 수도자의 금단이라고 여의주가 되지 말란 법 없지. 실제로 서란 너한테는 용이 될 기회도 있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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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과거의 기억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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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이 아직 소용녀였을 무렵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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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여의주를 돌려주겠다던 서란에게 담청은 용이 될 기회를, 영생을 마다하겠느냐고 물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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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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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가 처음 만났을 때요? 하지만 그건 담청 님의 여의주 때문이었잖아요. 여의주도 없이 인간이 어떻게 용이 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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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따지면 나는 본래 잉어였다. 전대 용신과 독안룡 또한 날 때부터 용이었던 건 아닐 테지. 둘 다 선계 태생이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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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듣고 보니 그건 또 그러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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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이 본론을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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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진짜로 하고 싶었던 얘기는 따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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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로 있다고요? 그게 뭔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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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 지금이라도 용이 되지 않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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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도 못한 용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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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무기(화신기) 수사는 잉태 의식을 통해서 다음 경지인 태성기에 도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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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에 용족은 여의주 의식을 통해서 자신의 여의주를 완성하고 태성기에 도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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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서로 다른 여정을 거쳐 온 인간과 용족은 태성기를 기점으로 경지 체계를 공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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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수도자는 태성기, 광홍기, 은한기를 거쳐서 준선경 수도자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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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족 수도자 또한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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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의 천재적인 발상은 바로 그 지점, 인간과 용족이 태성기부터는 같은 단계를 밟아 나간다는 사실에서 착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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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당황한 목소리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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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보고 잉태 의식 대신 여의주 의식을 치러서 태성기에 도달하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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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하면 너도 용이 될 수 있지 않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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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족이라는 게 그렇게 휙휙 바뀌는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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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은 본격적으로 설득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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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도만 한번 해 보거라. 적어도 손해 볼 일은 없지 않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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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랬다가 덜컥 용이 되면 어쩌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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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더 좋지. 서란, 잘 생각해 보거라. 용이 되면 좋은 점이 얼마나 많은 줄 아느냐? 영생은 기본이고 뇌영근도 생길 테지. 아참, 비승하기 전에 내가 말해주지 않았던가? 삼라만상을 들여다보는 용안에는 진실과 거짓을 구분하는 권능 또한 존재한다고. 어떠냐, 갑자기 막 용이 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느냐? 응?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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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서란은 부탁에 못 이겨 등백월을 찾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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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은 자기 계획을 등백월에게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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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이 끝나자 등백월은 고민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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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근거리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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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마침내 등백월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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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의식을 하나만 치를 이유가 있을까요? 그냥 둘 다 해 버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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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깜짝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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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지에 반인반룡이 되게 생긴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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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담청은 진심으로 기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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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승 23년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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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태 의식과 여의주 의식의 결과는 거의 비슷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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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든 용족이든 태성기에 도달하면 공통적으로 영성이라고 부르는 오색의 별을 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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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점은 영성이 위치한 장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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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수도자는 중단전에 별을 품었고, 용족 수도자는 하단전의 여의주에 별을 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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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이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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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에 잉태 의식과 여의주 의식을 둘 다 치른다면 저는 총 두 개의 영성을 지니게 되는 거잖아요. 그래도 괜찮은 거예요? 한 사람이 원영이나 금단을 두 개씩 가지고 있는 격이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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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영이나 금단을 복수로 가지고 있으면 문제가 되지만 영성은 아무리 많아도 상관 없습니다. 애초에 그게 고위계 수행의 목적이기도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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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의 숫자를 늘리는 게 목적이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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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백월이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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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그렇습니다. 아, 이럴 게 아니라 아예 수업을 할까요? 이 참에 전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흑판과 백묵을 가져올 테니까 두 분 다 잠시만 기다리고 계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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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은 작살에라도 맞은 듯 당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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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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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 절박함은 등백월에게 닿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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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문이 굳게 닫히고 도망칠 구멍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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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꼼짝없이 수업을 들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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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의 얼굴이 한층 시무룩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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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얗고 정갈한 글씨가 검은 칠판을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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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위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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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위계, 소우주, 준선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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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선경, 대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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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서를 마친 등백월이 분필을 내려놓고 질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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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수도자를 기준으로 설명하자면, 원영기까지의 경지는 저위계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운무기부터는 고위계로 분류되죠. 그렇다면 도대체 뭘 기준으로 저위계와 고위계를 구분 짓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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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이 손을 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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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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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영영도 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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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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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도 자기 나름대로 답변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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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원법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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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백월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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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승, 힘, 혼원법력, 모두 맞는 말입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당연한 일이죠. 그 모든 요소들이 모여서 운무기라는 경지를 구성하는 셈이니까요. 결국 우리는 나무가 아니라 숲을 봐야만 합니다. 낱낱의 조각이 아니라 전체, 수선의 가장 중요한 본질을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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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손을 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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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초월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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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월, 바로 그겁니다. 연기기일 적에는 천지영기로 탁기를 씻어냈고, 축기기가 된 뒤에는 정순한 법력을 쌓았죠. 더 나아가서는 금단을 형성하고 원영까지 응집했습니다. 육체의 한계와 영혼의 한계를 초월한 셈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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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백월이 분필로 칠판 어딘가를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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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위계라는 단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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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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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수도자는 저위계를 거치며 태생적인 한계를 초월해 나갑니다. 수명을 늘리고, 격을 높이고, 마침내 영물로 거듭나는 겁니다. 하늘에게 스스로를 증명한다고 표현하기도 하죠. 아무튼, 운무기 수사가 되면 그때부터 고위계 수행이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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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백월이 다른 단어를 연달아 지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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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고위계, 소우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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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무기, 태성기, 광홍기, 은한기, 이상의 네 경지를 통틀어 고위계라고 부릅니다. 이름만 들어도 감이 잡히시죠? 네 단계 모두 천체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각각 성운, 항성, 성단, 은하를 뜻하죠. 즉, 고위계 수행이란 내면의 소우주를 완성해 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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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선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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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위계 수행을 거듭할수록 혼원법력은 오색의 별로 압축되고, 그 수 또한 점차 증가합니다. 그렇게 해서 무지개빛 성단을, 자기만의 은하를 창조하는 거죠. 그러다가 내면의 소우주를 완성하는 순간, 비로소 준선경이라는 영역에 도달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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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을 듣던 서란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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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위계 수행으로 태생적 한계를 초월하고, 고위계 수행으로 내면의 소우주를 완성한다... 그렇다면 진선경부터는 대우주와 관련이 있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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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맞습니다. 분명 대우주와의 합일이 어쩌고 했던 것 같은데, 자세하게는 잘 모르겠군요. 관련 지식이 애초부터 없었든, 다른 기억과 함께 소실되었든 둘 중 하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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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담청이 손을 들고 질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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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한 것이 하나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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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가 궁금하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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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이 하나일 때가 태성기라면, 몇 개부터 광홍기가 되는 것이냐? 또 은한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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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백월이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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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만 있어도 광홍기입니다. 별의 수효가 일만 개를 초과하면 은한기가 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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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완성된 여의주를 세 개나 들고 있던 독안룡은 광홍기 수도자였다는 뜻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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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무사히 승천을 했다면 준광홍기 정도는 되지 않았을까 싶네요. 물론 죽을 때까지 진정한 광홍기에는 도달하지 못했을 테지만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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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듣고 있던 서란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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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어째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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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앗은 힘은 자신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수선이란 그 누구도 대신 걸어 줄 수 없는 고독한 오르막길입니다. 도둑질 따위로는 결코 초월이라는 목표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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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은, 자기 힘이기만 하면 어떤 방식이든 상관없다는 뜻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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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백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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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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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두 종류의 의식을 치르면 저도 준광홍기가 되는 건가요? 두 개의 영성을 지니고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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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적으로는 태성기일 뿐이지만, 실질적으로는 그렇게 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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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잠시 생각할 시간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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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등백월에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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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인반룡이 되고 나서 심각한 부작용을 겪을 확률이 얼마나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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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작용이라... 반인반룡의 절대다수는 태어나기도 전에 죽는다고 합니다. 인간의 피가 용의 피를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죠. 하지만 극소수는 무사히 세상에 나옵니다. 실제로 도원향에 소속되지 않은 지선 중 한 분이 반인반룡이시기도 하고요. 그러니 류 수사님이라면 별문제 없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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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고민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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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수도자들처럼 평범한 길을 갈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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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면 위험을 감수하고 미지의 길을 갈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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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쪽을 골라도 일장일단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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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인 방법으로 태성기에 도달해도 상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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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서란에게는 시간과 재능이 넘쳐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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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어진 수명이 부족해서 진선경에 도달하지 못할 가능성은 전무하다고 봐도 무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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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러려면 용의 권능들을 포기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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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라만상을 들여다보는 용안, 더없이 귀한 뇌영근, 영생 등이 그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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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도 사람인데 솔직히 욕심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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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의 마음은 조금씩 반인반룡이 되는 쪽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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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환생하면서 성별도 바뀐 처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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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와서 종족이라고 못 바꿀 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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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임6 구역의 현 시국 또한 서란의 결정에 무게 추를 더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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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계는 갑1부터 계10까지, 총합 백 개의 관습적인 구역으로 나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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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원향의 다섯 지선은 가급적 모든 구역에 담당 시해선을 배치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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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성공은 요원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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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현존하는 시해선은 84명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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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전원이 도원향에 소속된 것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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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공석이 발생하는 건 필연적인 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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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마침 임6 구역에도 담당 시해선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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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구역 내 다른 경쟁자들보다 먼저 진선경에 도달하기만 하면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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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죽문의 향후 수만 년 위세가 서란의 경지 상승 속도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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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은 극도로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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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도 욕심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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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을 서두를 이유 또한 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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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망설일 필요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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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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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짓거 한번 해 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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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이 기쁨에 차서 폴짝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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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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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가 하늘까지 닿을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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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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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승 25년, 반인반룡 의식 준비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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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은 바위섬 한쪽에는 잉태 의식용 제단이, 반대편에는 여의주 의식용 제단이 세워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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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거행한 잉태 의식이 종료되는 즉시 여의주 의식을 이어 갈 예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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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 초유의 듀얼 코어 의식, 금죽문 수도자들의 얼굴에 긴장감이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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웬일로 일찍 일어난 금영영이 질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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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수사님, 운무기 수사가 태성기에 도달할 때까지 걸리는 평균 수행 시간이 어느 정도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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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무기부터 태성기까지의 수행 시간은 오채지심 수행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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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그런가요? 혹시 조금만 더 자세하게 설명해 주실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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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백월은 의아함을 느끼며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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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유달리 학구열이 높으시군요. 뭐, 어려운 일은 아니니 설명해 드리죠. 원영기에 도달하고 오채지심 수행을 할수록 타고난 영근 자질이 무의미해진다는 사실은 잘 알고 계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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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요, 전부 오영근자가 되니까 그런 거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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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맞습니다. 그때부터는 영근 자질보다는 선골 자질이나 오성이 훨씬 중요해지죠. 그러니 오영근 조화에 걸리는 시간만 알면 그 수도자의 영근 이외의 다른 자질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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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영영은 열정적으로 필기하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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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골 수도자가 오영근을 조화시키는데 걸리는 시간이 평균적으로 540년이었던가요? 이런 경우에는 태성기까지 몇 년이나 걸릴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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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오영근 조화보다는 3배 정도가 더 걸린다고 하니까 1620년 정도겠네요. 그리고 류 수사님은 오영근 조화에 9년이 걸렸으니, 태성기까지 27년 정도 소요될 거라고 예상이 가능하죠. 실제로도 거의 비슷하게 걸렸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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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정말 그러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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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증을 해결한 금영영은 이후에도 서란의 의식 과정을 유심히 관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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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이나 동영상을 찍고, 기록도 많이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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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련의 기행은 의식이 다 끝날 때까지 계속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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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반인반룡 태성기 수사가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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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영영은 경건한 마음으로 책상을 정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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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대한 분량의 소설 감상문을 바닥에 내려놓고, 국수가 담긴 그릇을 조심조심 올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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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단말기를 조작해 동영상을 재생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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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있었던 서란의 의식 장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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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잉태 의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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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제단 꼭대기에 오르자 몇 차례의 둔중한 파동이 군도 전체를 뒤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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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태산만 한 종을 울리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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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눈을 감은 채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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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줌 호흡과 함께 막대한 양의 혼원법력이 허공으로 뿜어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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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분출된 오색 운무가 일대를 뒤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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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무는 영상을 촬영하던 금영영 또한 집어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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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천히 움직이는 화면에 주변 광경이 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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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를 둘러봐도 오로지 오색 운무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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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색 운무는 서서히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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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차리기도 힘들 정도로 느리던 풍속은 얼마 지나지 않아 광풍으로 돌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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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어딘가를 향해 급격하게 휘몰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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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도를 뒤덮었던 짙은 오색 운무가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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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면이 다급하게 제단을 향해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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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원법력이 뭉쳐 탄생한 오색의 별이 서란의 가슴, 중단전으로 녹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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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로록호로록 면을 마시던 금영영이 진중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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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영 구도가 좀 아쉽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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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체 피드백을 마친 금영영은 단말기를 조작해 영상을 빨리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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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미한 중간 과정들이 휙휙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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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기다리던 장면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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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주 의식용 제단에 오른 서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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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와 마찬가지로 휘몰아치는 혼원법력의 폭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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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단이 위치한 하단전으로 밀려드는 오색 운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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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세상을 탈색시킬 듯한 섬광과 함께 한줄기 벼락이 서란의 정수리에 내리꽂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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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색 머리 사이에는 어느새 뿔이 돋아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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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이어 천둥이 요란하게 울려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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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감고 있던 눈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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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색 용안과 같은 빛깔의 사슴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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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인의 환호 속에서 쌍성의 반인반룡이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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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영영은 영상을 정지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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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다시 한번 자체 피드백 시간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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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 막바지, 배율을 조절해서 서란이 눈 뜨는 모습을 확대한 건 꽤나 느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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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영영은 굉장히 만족스러운 얼굴로 국수 국물을 쭉 들이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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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로 우렸는지 육수가 아주 일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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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식으로 제격이라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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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영영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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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한 그릇만 더 먹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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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영영은 망설이지 않고 방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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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거울을 가만히 들여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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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먼저 보이는 건 자주색 눈동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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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의 각도를 조금 조절하자 전두골에 자라난 사슴뿔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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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안과 마찬가지로 자주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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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이런저런 웃긴 표정을 지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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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행동에 따라 거울 속 소녀의 표정도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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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설기는 하지만 분명 자기 얼굴이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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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감은 채 내면을 관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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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단전과 하단전에 각각 위치한 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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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수목금토풍뇌, 일곱 개의 영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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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다른 성질의 두 혼원법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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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명상을 통해 더욱 깊게 침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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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방 의식의 최심부까지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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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존재하던 삼천구백여 개의 향 대신 거대한 용 한 마리가 똬리를 튼 채 잠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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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과 마찬가지로 자주색 뿔을 지닌 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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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을 마치고 눈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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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자신이 영생자가 됐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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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적이지만 용의 형상으로 변할 수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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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인반룡은 맞지만 인간 쪽에 더 가까운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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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옷을 갈아입고 방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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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처럼 문틀에 뿔을 부딪치는 일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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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동이 트고 있을 무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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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도를 지나던 금영영이 반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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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서란! 이제 어지러운 건 괜찮아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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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웃으며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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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이제는 멀쩡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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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왜 그랬던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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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감각이 너무 변해서 적응을 못했나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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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영영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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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문제 아니라니 다행이야. 걱정 많이 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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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 걱정을 꽤 많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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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고마워, 영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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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 친구 사이잖아. 아, 일찍 일어났더니 피곤하네. 나 이만 갈게. 조금 더 자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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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 밤을 꼬박 새고 지금 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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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영영은 하품을 하며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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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몰래 쓴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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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안의 권능을 검증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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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완전히 뜬 해가 세상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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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백월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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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가르쳐 드릴 공법은 ‘위무골경’이라고 합니다. 조화 추구형인 동시에 대기만성형 공법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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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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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화 추구형은 뭔지 알겠는데 대기만성형이라는 건 어떤 의미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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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그대로입니다. 지금 당장은 별 효능이 없지만 대성하면 큰 효능을 발휘하는 공법이죠. 위무골경은 사용자의 체질을 개선해서 어떤 선골이든 얻을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줍니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선골보유자는 이 공법을 익히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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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선골이든 얻을 수 있는 기반? 그 말은 일반적으로는 얻는 게 불가능한 선골도 있다는 뜻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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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백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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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그렇습니다. 선과를 먹거나 공법을 익혔다고 무조건 선골을 획득하는 건 아닙니다. 선결 조건이 필요한 경우도 종종 있거든요. 이전 경지에서 특정 공법을 대성했어야 한다거나, 혈통을 타고 났어야 한다거나, 보다 하위 범주의 선골이 필요하다거나 하는 식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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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무골경 하나만 대성하면 그런 조건을 몽땅 무시할 수 있다고요? 그게 가능한 일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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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구십이라는 어린 나이에 반인반룡 준광홍기 수사가 되는 건 말이 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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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반박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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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백월이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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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위무골경을 익혀 보세요. 습득이 가능하면 범골인 거고, 불가능하면 선골보유자인 겁니다. 되든 안 되든 결과가 나오면 바로 저한테 알려 주세요. 그래야 새로운 공법을 가르쳐 드리든 선골 확인 방법을 모색하든 할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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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건네받은 공법서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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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골 획득 조건을 완전히 없애 준다니, 세상에 그런 개사기 공법이 어디 있나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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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공법의 출처도 의문투성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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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창안했으며, 어떤 경로를 통해 등백월의 수중에까지 들어왔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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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질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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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런 대단한 공법은 어떻게 얻으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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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요, 그건 기억이 안 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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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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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과 거짓을 구분하는 용안의 권능은 잠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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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큰 격차가 존재해서 그런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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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면 용안을 무력화하는 다른 뭔가가 있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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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공법서를 챙겨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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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시도해 보고 나중에 알려 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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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시지요. 아, 그리고 류 수사님께는 용족 태성기 공법도 필요할 겁니다. 저번에 보니까 체내에 두 종류의 혼원법력이 흐르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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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반인반룡들도 공법을 두 개씩 익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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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백월이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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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천적인 반인반룡은 남들처럼 하나의 공법만 수행할 겁니다. 하지만 장담은 못하겠군요. 이미 류 수사님처럼 후천적으로 반인반룡이 된 경우도 존재하니까요. 아무튼 일반적인 경우가 아니라는 것 정도만 알아두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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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너무 눈에 띄지 않을까요? 그것 때문에 나이도 속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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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 둘러대면 그만입니다. 여태 인간인 줄 알고 있었는데 선계에 와서 잠들어 있던 용족의 피가 깨어났다든가, 이상한 공법을 익힌 부작용이라거나 하는 식으로요. 다른 수도자의 혈통이나 공법에 대해서 캐묻는 건 굉장히 무례한 행동이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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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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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거짓말이 의미가 있을까요? 선계 전역에 돌아다니는 용안이 한두 개가 아닐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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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습니다. 같은 용족한테는 용안의 권능이 전혀 통하지 않으니까요. 용이 작정하고 거짓말하면 절대 안 들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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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한테는 용안이 안 통해요? 그건 몰랐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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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그 길로 담청을 찾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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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의 사실 여부를 검증하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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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등백월 말대로 담청에게는 용안의 권능이 통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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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과 담청은 한동안 헤엄친 뒤 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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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뒤, 서란은 위무골경을 습득하는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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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번도 난관을 만나지 않았음은 물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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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습득이 쉬웠는지, 서란 자신만을 위해 만들어진 맞춤 공법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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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모든 게 명확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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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정 범골 서란은 고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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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해야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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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면 실망해야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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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경이 참 복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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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런 고민은 오래 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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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회복 탄력성의 괴물답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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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힘찬 걸음과 함께 수련실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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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면서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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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고로 모든 목표 달성은 계획 수립에서부터 시작되는 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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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한 장 없이 천 리 길을 갈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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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에 도착한 서란은 책상 앞에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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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고위계 로드맵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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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물을 머금은 붓이 역동적으로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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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 목표는 가능한 빨리 진선경에 도달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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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기 목표는 선골을 획득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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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마지막, 단기 목표는 훌륭한 용족 태성기 공법을 손에 넣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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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 적으니 모든 게 명확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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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소매에서 단말기를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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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천라지망에 접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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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부터 경매장을 샅샅이 뒤져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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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낙찰가를 확인하고 경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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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십, 백, 천, 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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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저히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몇 번이나 자릿수를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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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런다고 뭐가 바뀌는 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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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족 태성기 공법은 여전히 정신 나간 가격을 자랑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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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사려고 마음 먹으면 살 수는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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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족 태성기 공법이 아무리 비싸다고 해도 선과보다 비싼 건 아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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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승 직후, 토선과 두 개를 팔아서 마련한 자금은 아직도 잔뜩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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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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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돈 주고는 이 정신 나간 가격에 절대 못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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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울해서 기절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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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미련 가득한 손짓으로 단말기를 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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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단말기를 서랍 속에 처박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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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보고 있다가는 심마에 걸릴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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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정오, 함께 점심을 먹던 금영영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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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 왜 그렇게 죽상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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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족 태성기 공법이 필요한데 너무 비싸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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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그러면 법관 고시 한번 응시해 봐. 따지고 보면 너도 용이잖아. 성실하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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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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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관 고시? 갑자기 그건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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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영영이 여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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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 합격하면 용족 태성기 공법 주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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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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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밥 먹다 말고 자기 방으로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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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허겁지겁 서랍에서 단말기를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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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급한 나머지 가구를 부술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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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검색어를 입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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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 관, 고,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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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정보가 우수수 쏟아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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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관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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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식 명칭은 법원 공개채용시험 용족 전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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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원향의 사법 기관, 최고재판소가 직접 주관하는 대규모 법관 선발 시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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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시 요건이니, 시험 절차니 꽤나 복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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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지금 궁금한 건 그런 게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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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의 눈이 바쁘게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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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합격자 특전 및 혜택을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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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격자는 짧은 연수를 거쳐 법관으로 임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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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격자에게는 용족 태성기 공법, 수명경벽회공에 더해 다종다양한 수행 자원이 지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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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격자는 누적된 공헌도를 여타 공법이나 수행 자원과 교환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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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관 고시인지 뭔지에 합격하면 용족 태성기 공법을 준다는 금영영의 말은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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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수명경벽회공에 대해서 검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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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천라지망 백과사전에 등록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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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수명경벽회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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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 용족 태성기 공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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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석 : 맑은 거울을 닦아 회색을 쪼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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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문서를 정독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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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 심판관 선백파흑진군께서 몸소 창안하신 감각 강화형 공법이다. 용족 공법답게 용안의 권능을 대폭 강화하는 게 주된 효능이다. 법원 공개채용시험 용족 전형(일명 법관 고시) 합격자들에게만 특별 지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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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 심판관이라면 서란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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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승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등백월에게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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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백파흑진군은 도원향 소속의 용족 지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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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식당으로 돌아오자 금영영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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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 봐, 내 말이 맞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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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게... 수명경벽회공이라고, 평범한 것도 아니고 무려 지선이 직접 창안한 공법이라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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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공법 하나 배우려고 여의주 완성한 태성기 용족들이 법관 고시에 그렇게나 매달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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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 자리에 앉은 서란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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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너는 그런 정보를 어떻게 알고 있는 거야? 정작 태성기 수사인 나랑 담청 님은 몰랐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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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영영은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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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어, 그런 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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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 수 없이 많은 배역을 완벽하게 수행하기 위한 자료 조사의 일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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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 식사를 마친 서란은 등백월을 찾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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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관 고시에 대해서 물어보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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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마침 인형 정비가 필요한 시기이기도 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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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등백월의 오른팔을 분리하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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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수사, 혹시 법관 고시라고 아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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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관 고시요? 글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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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규모 법관 선발 시험이래요. 정식 명칭은 법원 공개채용시험 용족 전형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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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백월은 남은 손으로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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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의 인적 사항 이외에는 모르는 게 없던 박식한 사람이 대답을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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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 입장에서는 뭔가 신선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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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등백월이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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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생각해 봐도 모르겠네요. 혹시 어디서 주관하는 시험인지도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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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원향의 최고재판소가 주관한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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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재판소? 아, 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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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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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뭔가 떠오르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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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재판소의 수장이 선백파흑진군이라는 분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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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빠르게 기억을 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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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본 천라지망 백과사전에 따르면 최고재판소의 수장은 최고 심판관 선백파흑진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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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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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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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맞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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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그랬군요. 제가 봉인되어 있는 사이에 기관명이 변경된 모양입니다. 예전에는 분명 최고재판소가 아니라 최고심판소였습니다. 선백파흑진군께서 최고 심판관이라고 불리셨던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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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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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정비하던 오른쪽 인형팔을 탁자 위에 조심조심 내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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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소매에서 족자형 단말기를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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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색어를 입력하자 관련 정보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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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단말기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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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진짜네요. 최고재판소의 예전 이름이 최고심판소래요. 지나치게 권위적인 인상을 준다고 3만 년 전쯤에 지금처럼 바꿨대요. 법관 고시도 그때부터 시행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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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쩐지... 그나저나 기관명 이외에도 이것저것 많이 바뀌었나 보군요. 공개채용 같은 방식으로 구성원을 뽑는다니, 예전이었으면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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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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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백월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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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심판소였던 시절에는 모든 심판관을 비밀리에 선발했거든요. 사실상 사법 기관이라기 보다는 정예토벌부대에 더 가까웠죠. 저번에 말씀 드렸었죠? 선계의 질서를 해치면 어떻게 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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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독점법 때문에 쪼개진 단말기 회사나 위폐 생산하던 수도가문 말씀하시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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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습니다. 다 지난 일이라서 얘기하는 거지만, 그때 진짜 분위기 살벌했었습니다. 선계 전역이 숨죽이고 경과를 지켜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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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오른팔을 동체에 연결하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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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정도였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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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반독점법 사건이 특히 더 그랬죠. 까딱하면 선계 전역이 불바다가 될 수도 있는 아찔한 상황이었습니다. 다행히도 회사 지도부가 제때 항복을 선언했죠. 덕분에 천문학적인 벌금과 회사 분할 정도로 끝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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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폐를 생산하던 수도가문은 어떻게 됐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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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백월이 오른팔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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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살됐습니다. 선계 전역으로 도주한 수뇌부는 선백파흑진군의 법술 한 번에 일소됐고, 나머지 관련자들은 심판관 부대가 차례차례 주살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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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술 한 번으로 선계 전역에 흩어진 수뇌부를 공격했다고요? 상상이 잘 안 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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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히 지고의 경지라고 불리는 게 아닙니다. 뭐, 선백파흑진군께서 유달리 강하신 것도 사실이지만 말입니다. 아, 이제 좀 오른팔이 잘 움직이는군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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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새로 얻은 정보를 머릿속에 잘 정리하며 등백월의 방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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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그 길로 담청을 찾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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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은 저택 중정에서 잉어들과 헤엄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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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승할 때 용궁에 태워서 데리고 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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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못 밖으로 고개를 내민 담청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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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 정비는 끝난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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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방금 막 끝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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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그러면 지금부터 함께 수영하지 않겠느냐? 내가 새로 개발한 수영법을 보여 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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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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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 님, 정말 안타깝지만 그럴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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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러느냐? 혹시 다시 어지러워진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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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요, 저는 멀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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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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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왜 같이 수영을 할 수 없다는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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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 님, 정말 실례되는 질문이지만 최근에 수행은 얼마나 하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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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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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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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최근 법보 한증막에 들어간 건 언제였나요? 제가 반인반룡이 되기 이전 아니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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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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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생각이 맞았나 보군요. 그때부터 벌써 보름 가까이 지났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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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이 허둥지둥 변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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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게... 그, 그래! 아직 용족 태성기 공법을 못 구하지 않았느냐! 나는 훗날 더욱 힘차게 수행하기 위해 체력을 비축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겨울잠을 자는 곰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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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그러셨군요. 용족 태성기 공법을 구하면 다시 열심히 수행하실 생각이셨던 거죠? 그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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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내 말이 바로 그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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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활짝 웃는 얼굴로 본론을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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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잘 됐네요, 지금이 바로 겨울잠에서 깨어나실 순간입니다. 내년부터 저랑 법관 고시 준비하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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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 법관 고시? 그게 무엇이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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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원향 최고재판소에서 주관하는 법관 선발 시험입니다. 합격하기만 하면 용족 태성기 공법과 함께 다양한 수행 자원을 왕창 지급해 준대요. 담청 님도 같이 가실 거죠? 그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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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이 떨리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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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가다니? 어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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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유학이죠. 제가 알아봤는데, 계2 구역 어딘가에 태성기 용족들이 모여서 법관 고시를 준비하는 섬이 존재하더라고요. 영백도라는 곳인데, 면학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고 강사들 실력도 출중하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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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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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은 힘없이 연못 바닥으로 가라앉아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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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과 담청은 금죽문에서 연말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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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을 결심했다고 덜렁 떠나면 좀 곤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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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뇌부와 유학 관련으로 상의할 것도 있고, 지인들과 작별 인사도 나눠야 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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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내년부터라고 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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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뇌부는 조직 개편으로 바쁜 와중에도 서란과 담청의 유학 문제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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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여느 때처럼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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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유학생이 법관 고시 준비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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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의 마지막 날이 성큼 다가오자 연일 시끌벅적하던 극광제도도 꽤나 한산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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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서란의 저택은 더할 나위 없이 북적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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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석별의 정을 나누기 위해 모인 덕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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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 모임 참석자들은 저마다 대화를 하거나 음식을 먹으며 시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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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혜문은 늘 그렇듯 산양을 타고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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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이라니, 정말 큰 결심을 하셨군요. 부디 좋은 결과가 있기를 빌겠습니다. 아, 그리고 이건 유학 응원 겸 드리는 선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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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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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뭔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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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입니다. 이것저것 사용해 봤는데 그게 가장 좋더군요. 글씨도 정갈하니 괜찮게 나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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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고마워요, 혜문. 잘 쓸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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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를 표하자 미소가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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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혜문은 비승 이후로 줄곧 글방 업무와 수뇌부 업무를 병행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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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런지 몸가짐 하나하나에서 점차 관록이 엿보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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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이어 이아금이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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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 간다며? 여기서 먼 곳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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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히 그렇지도 않아. 전송진이 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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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긴, 그러네. 그래도 영상 통화 자주 해야 된다? 알겠지, 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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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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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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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이다? 잊으면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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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아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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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은 서로 끌어안으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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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자주색 사슴뿔이 포옹을 방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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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이아금이 서란의 등 뒤로 돌아가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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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정수리에 얼굴을 묻은 채, 이아금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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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언니, 요즘은 비녀 거의 안 꽂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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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비녀? 뭔가 계속 신경 쓰이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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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하네, 반인반룡이라서 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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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금은 마지막으로 서란을 한 번 꽉 끌어안고는 놓아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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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는 피곤한 듯 작게 하품하며 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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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계의 낯선 약재를 연구하고, 신약을 개발하느라 연일 야근한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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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모임 장소인 중정을 둘러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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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선화는 연못에 발을 담근 채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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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 들어 부쩍 고민이 잦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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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만의 인형을 제작하려고 이런저런 시행착오를 거듭하고 있는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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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백월은 이아금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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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서란과 눈이 마주치자 살짝 눈인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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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녀들 얘기를 들어 보면 오채지심 수행 때문에 요즘은 거의 방안에서 지낸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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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산대붕, 홍순, 삼안묘 삼인방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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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 화덕 근처에 자리잡은 채 요리가 완성되는 즉시 꿀떡꿀떡 삼키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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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들끼리 과일은 그냥 먹는 게 맛있다느니, 구워 먹는 게 더 맛있다느니 하며 쑥덕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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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순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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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구워 먹는 게 맛있지. 고기도 그렇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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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히 보면 전신이 법력으로 충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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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계에 와서 인면조용 공법을 배운 덕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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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순은 이제 어엿한 축기기 수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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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안묘가 반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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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과일이랑 고기가 같나? 생과일이 최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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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안묘는 영근 검사관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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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된 업무는 당연히 영근보유자를 찾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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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하면서 왕 수사의 안부 편지를 서란에게 가져다 주는 날도 종종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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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신 식산대붕이 중간에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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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과일과 구운 과일, 전부 맛있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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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산대붕은 딱히 뭔가를 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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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보거나 극광제도 인근을 비행하는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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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계에는 인공위성이 없지만, 서란이 기지국을 설치해 준 덕분에 활동 반경은 꽤 넓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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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영영은 장의자에 드러누운 채 단말기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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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도로 편안한 자세와 무한 리필되는 음식, 따듯한 날씨, 친구들, 그리고 수선 교류회 탐방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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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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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영영은 수선 교류회 법관 고시 게시판에 질문글을 하나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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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법관 고시 그거 자동문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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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점에서 55점이면 합격권이라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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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점 만점이니까 반타작만 해도 되는 거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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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글방에서 받아쓰기 80점 맞았는데 저도 법관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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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이어 고시생들의 격렬한 반응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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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글) 너, 법관 고시가 우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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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기 과목만 열 개가 넘고 그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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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차 총합 과락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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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합격자 평균 수험 기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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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자) 잉, 무섭게 왜 그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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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글) 게시판지기는 이런 글 안 지우고 뭐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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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글) 슬슬 채용 공고 올라올 시기가 됐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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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쩐지 분탕질이 만연하더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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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글) 너무 뻔해서 30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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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자) 저 80점 맞았다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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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뻔뻔해서 10점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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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글) 법관 고시 꼭 봐라,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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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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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글) 방점 찍어 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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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자식 지금 방점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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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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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글) 얘 고위계 게시판 유명인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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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로 유명한데? 경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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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분탕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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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자) 이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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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관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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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영영은 천변만화하는 가면 탈부착 실력으로 법관 고시 게시판을 활활 불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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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승 26년, 새해가 밝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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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과 담청은 금죽문 식구들의 열렬한 환송을 받으며 머나먼 유학길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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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원 여남은 명도 함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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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6 구역 중심지로 향하던 도중, 담청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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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시험일은 얼마나 남은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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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인가 7년 정도 남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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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남은 것 같은데 벌써부터 유학을 갈 필요가 있는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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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륜을 돌리던 서란이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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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이면 진짜 촉박한 편이에요. 필기 과목이 열다섯 개 정도 되거든요. 성실하게 읽어도 다 보는데만 이삼 년 정도 걸린대요. 과락을 피할 정도가 되려면 거기서 또 이삼 년은 더 공부해야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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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딱 6년만 참고 공부하면 되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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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그건 아니죠. 법관 고시는 상대 평가잖아요. 남들보다 높은 점수를 받아야 합격하는 방식이에요. 단번에 합격한다는 생각은 버리는 게 좋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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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이 한층 쭈글쭈글해진 얼굴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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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다음번 시험은 언제 열리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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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년 뒤에 열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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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고 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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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또박또박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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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년 뒤에 열린다고요. 법관 고시는 백 년마다 한 번씩 실시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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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한 번 낙방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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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 수 있나요, 백 년 더 공부하는 거지. 아, 중심지에 거의 다 도착했네요. 내릴 준비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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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비행 법기를 지상에 정박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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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온 수행원들은 짐 가방과 넋이 나간 담청을 챙겨 우르르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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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 범선을 몰고 군도로 복귀할 인원만 남고, 나머지는 전송진 관리소에 입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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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창구 직원에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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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계 분타행 소형종 단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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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복으로 드릴까요, 편도로 드릴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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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도로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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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를 받은 뒤 검문소에 가서 줄을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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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했던 것보다 오래 기다려야 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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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행은 짐 가방을 깔고 앉은 채 수다를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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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격에서 벗어난 담청이 서란에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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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왜 임계 분타로 가는 것이냐? 영백도가 있는 계2 구역으로 곧장 가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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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원향이 각 구역 간 전송진 개설을 엄금했거든요. 질서 유지를 위해서래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임계 분타를 경유해서 계2 구역까지 가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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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굳이 그런 결정을 내렸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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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천라지망 백과사전을 보며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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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보자... 아, 여기 있네요. 예전에 은한기 수사 한 명이 구역 간 전송진으로 선계 전역에 신출귀몰하며 문제를 일으킨 적이 있었나 봐요. 그때부터 전송진을 규제하기 시작했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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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범죄자를 체포하기에는 용이하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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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에 줄 서는 시간도 같이 늘었다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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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루한 기다림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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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원들은 서로에게 기대어 꾸벅꾸벅 졸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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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단말기로 책을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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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은 심심함에 몸을 배배 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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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몸부림치는 것도 질린 담청은 검문소 앞에 늘어선 인파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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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 소, 호랑이, 토끼, 용, 뱀, 말, 양, 원숭이, 닭, 개, 돼지 등등 다양한 종족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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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같이 지루해서 죽을 것 같은 얼굴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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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족 대통합의 기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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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지겨워서 죽으려고 하는 담청에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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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 님, 지루하면 한숨 주무세요. 차례가 오면 깨워 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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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만 혼자 깨어 있겠다는 소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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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어차피 잠을 안 자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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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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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루하진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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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고 있으면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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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야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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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은 커다란 짐 가방 위에 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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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울어진 시야에 곤히 자는 수행원들이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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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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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수면이 필요 없는 몸이라도 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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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가 깨어 있을 테니 자도 된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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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삼 서란이 좋은 윗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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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은 눈을 굴려 서란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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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견답지 않게 진중한 태도로 책을 읽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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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지나지 않아 눈꺼풀이 스르르 감겨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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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줄은 느리지만 꾸준하게 줄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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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들어 있던 수행원들도 하나둘씩 깨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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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서란 일행의 차례가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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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검문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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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진 자리에 서자 전송진이 발동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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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계 분타를 거쳐서 계2 구역으로 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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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컷 잔 담청이 눈을 비비며 일어났을 때는 이미 목적지 영백도에 도착한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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푹 자고 일어난 담청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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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 저 섬이 영백도가 맞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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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아요. 꽤나 큰 섬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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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펑펑 내리고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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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백도에는 연중 내내 눈이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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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자체도 영원히 하얀 섬이라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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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고시생들에게는 다른 이름으로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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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깨달음의 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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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영백도에 발을 디디면 깨달음을 얻기 전에는 벗어나는 게 불가능하다는 의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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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고시생은 법학에 통달해 법관이 되거나, 스스로의 한계를 절실히 체감해야지만 영백도를 빠져나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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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은 영백도를 유심히 살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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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 변두리에는 거대한 비행장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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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이착륙하는 범선들로 비행장이 소란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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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 일행이 탄 함선도 비행장에 착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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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원들은 짐 가방을 챙겨 잽싸게 하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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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2 구역 중심지에서 배를 탄 이후 여태까지 선실에 틀어박혀 있었으니 답답할 만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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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은 빈 손으로 털레털레 걷다가 뭔가를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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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다란 선박에서 범인들이 우르르 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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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년 내내 눈만 내리는 섬에 범인들이 정착하다니, 정말로 특이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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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이 서란에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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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범인들은 왜 영백도에 정착하는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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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착이라고요? 아, 저 사람들이요? 정착이 아니라 일하러 온 거예요. 아침 일찍 와서 일하다가 밤이 되면 돌아가고 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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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매일 출퇴근 할 정도면 꽤나 가까운 장소에 사는 모양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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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어딘가를 가리키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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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쪽으로 쭉 날아가다 보면 범인들이 많이 사는 섬이 하나 있어요. 일 년 열두 달 날씨가 맑아서 상청도라고 불린대요. 식료품이나 의복, 장작 같은 물자들은 전부 거기서 들여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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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긴, 영백도에는 풀 한 포기 안 보이는구나. 어디를 둘러봐도 온통 눈밭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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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처럼 수행원을 데리고 오지 않은 경우에는 범인들을 고용하기도 한대요. 아, 저기에 인력 사무소도 있네요. 저기서 고용하는 건가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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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는 사이에 일행이 타고 온 범선이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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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담청은 돌아가는 길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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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줄곧 잠만 잤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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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로가 사라진 담청은 초긍정 회로를 가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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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과 함께 공부하면서 나태해진 마음도 다잡고, 동족 친구도 잔뜩 사귀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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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잘 됐다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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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은 그렇게 생각하며 비행장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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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낙관적인 기대는 반나절을 채 못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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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은 희망의 불씨를 꺼트리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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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안되는 건 뭘 어떻게 해도 안되는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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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원가 안으로 한 발짝 들어서자마자 곳곳에 산재한 음울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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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한숨, 또 저기서 한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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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생기 없는 얼굴로 거리를 배회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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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교롭게도 바로 어제가 모의고사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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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고시생이 이상 행동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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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해 봐! 어디 백날 떨어뜨려 봐! 백 년 뒤에 또 응시하면 그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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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은 경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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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한복판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서 놀란 게 아니라, 아무도 그 기행에 신경 쓰지 않는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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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고시생들은 태연하게 하던 일을 계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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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도는 일상이나 다름 없다는 태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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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더 황당한 건 따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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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치광이처럼 굴던 고시생은 어느 정도 울분이 해소되었는지 흐트러진 머리를 정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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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근처 식당으로 들어가 식사를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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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자연스럽기 그지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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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이 서란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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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 공부를 꼭 여기서 해야 하는 것이냐? 영영이 보니까 천라지망으로 뭘 공부하던데, 우리도 그렇게 하면 안되는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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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 님, 무슨 말씀이세요. 여기서 공부해야 모의고사도 보고 주관식 문제 첨삭도 받고 그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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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분위기가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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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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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위기가 왜요? 매일매일 벼랑 끝에 서 있는 듯한 아찔함, 한정된 자리를 노리고 달려드는 경쟁자들, 숫자 하나에 갈리는 승패. 벌써부터 막 능률이 오를 것 같지 않습니까? 심지어 여기 모인 고시생들은 전부 용족이잖아요. 영생자들끼리 펼치는 무한 경쟁이라... 후후, 벌써부터 피가 끓어오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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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혀 공감이 안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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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신가요? 뭐, 금방 이해하게 되실 거예요. 육체적 싸움으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특유의 그 무언가가 있거든요. 아, 행정사무처에 도착했네요. 어서 수강 신청하러 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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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은 희희낙락 접수 창구로 달려가는 친구의 뒤통수를 가만히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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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뜩이나 향상심이 하늘을 찌르는 서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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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반인반룡이 된 다음부터는 그런 수행 중독 증상이 한층 더 심화된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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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에 잠겨 있던 담청은 서란의 목소리를 듣고 허둥지둥 창구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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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구에는 젊은 용족 직원이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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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주를 완성한 태성기 수사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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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는 대략 2000살 정도로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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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구 직원이 환한 미소와 함께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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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수강 신청 때문에 오셨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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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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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혹시 빈자리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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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요 그럼요. 빈자리야 항상 있죠. 몇 년짜리 강의로 신청 하시겠어요? 백 년짜리부터 반 년짜리까지 빈틈 없이 구성되어 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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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시험부터 바로 응시하려고 하는데 혹시 몇 년짜리 강의가 제일 괜찮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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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구 직원이 책자를 뒤적이며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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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시험일까지 6년 살짝 더 남았거든요? 그러니까 고객님 같은 경우에는 ‘필기 완전 정복’ 강의와 ‘실기 기초 숙달’ 강의를 조합하시면 정말 좋을 것 같아요. 둘 다 5년짜리 강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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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두 개를 같이 들으라는 말씀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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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그렇죠. 하나는 오전 강의고 나머지 하나는 오후 강의예요. 그리고 시험일 1년 전부터 ‘실전 대비 종일반’ 강의를 들으시면 딱 6년이거든요. 이거 한번 읽어 보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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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강의 설명서를 쭉 훑어보며 질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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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3차 면접 준비는 따로 안 해도 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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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부분은 전혀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실전 대비 종일반’ 강의 안에 3차 면접 대비 과정도 포함되어 있거든요. 합격 여부는 사실상 1차 필기와 2차 실기에서 결정되기 때문에 면접 준비는 시험일 1년 전부터만 해도 충분하실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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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오, 괜찮네요. 이걸로 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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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구 직원이 탁상형 단말기를 조작하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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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인하겠습니다. 5년짜리 강의 ‘필기 완전 정복’과 마찬가지로 5년짜리인 ‘실기 기초 숙달’ 하나씩 맞으시죠? 혹시 1년짜리 ‘실전 대비 종일반’ 강의도 미리 결제하실 의향이 있으실까요? 저희가 지금 행사 중이라서 묶음 신청하시면 특가를 적용해 드리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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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요? 그러면 같이 결제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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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알겠습니다. 결제는 할부로 하시겠어요? 아니면 일시불로 하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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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소매에서 단말기를 꺼내다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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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한 사람 더 있거든요. 담청 님! 담청 님도 빨리 이거 신청하세요! 묶음 결제하면 할인해 준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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딴생각을 하던 담청이 허둥지둥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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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창구 직원에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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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하나씩 더 결제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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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알겠습니다. 강의 여섯 개, 일괄 결제해 드리겠습니다. 결제는 할부랑 일시불 중에 어떤 걸로 해 드릴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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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불로 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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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구 직원이 옥판 하나를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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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단말기를 옥판 위에 가져다 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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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랑 하는 소리와 함께 결제가 완료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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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구 직원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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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기와 실기 강의는 열흘 뒤부터 시작됩니다. 수강료 안에 교재비도 포함되어 있으니까 별도 구매하실 필요는 없으세요. 혹시 따로 궁금하신 점 있으실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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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딱히 없네요. 끝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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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다 되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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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단말기를 소매에 넣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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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히 계세요. 담청 님, 가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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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 응? 아, 알겠다. 그대들도 잘 있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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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구 직원도 조건 반사적 인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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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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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과 담청은 강의 설명서를 들여다보며 행정사무처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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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마자 창구 직원은 옆자리 동료에게 말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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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방금 봤냐? 되게 어리지 않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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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그런 척 모든 상황을 지켜봤던 동료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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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봤지 봤지. 근데 진짜 뭐냐? 어떻게 그 나이에 태성기지? 암만 많이 쳐줘야 1500살도 안 될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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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1500살이야. 딱 봐도 1100살 아니면 1200살 정도겠구만. 아, 부럽다. 무슨 선골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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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 좀 괘씸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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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러움에 몸부림치던 창구 직원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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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괘씸해? 뭐가 괘씸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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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2100살인 나도 여태 여의주를 완성 못했는데 1200살에 태성기? 안되지 안돼. 나 이거 못 참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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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참으면 네가 뭐 어쩌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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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료가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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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울분, 상청도로 가서 해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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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청도? 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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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오늘 밤...! 너도 같이 갈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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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구 직원이 군침을 삼키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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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내 몫도 대신 내주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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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도 아닌 너한테 왜 돈을 써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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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긴, 그것도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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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구 직원과 옆자리 동료는 퇴근하자마자 상청도로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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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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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백도로 돌아왔을 때는 새벽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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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흘 뒤, 강의 첫 시간이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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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첫 수업이 있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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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과 담청은 함께 강의실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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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이하게도, 건물 전체가 용안의 권능을 무력화시키는 결계로 둘러싸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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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강 방지용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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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강생들은 제각기 원하는 자리에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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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히 지정 좌석제는 아닌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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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담청과 함께 앞자리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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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어떤 사내가 강단에 올라 인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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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오늘부터 ‘필기 완전 정복’ 강의를 담당하게 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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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를 마친 강사는 곧장 수업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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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관 고시의 채용 과정은 필기와 실기, 그리고 면접까지 총 세 단계로 이루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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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면접 자체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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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디로, 합격 여부는 사실상 1차 필기 시험 성적과 2차 실기 시험 성적에 달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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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사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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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필기 시험은 총 열다섯 개의 법률 관련 과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각 과목 성적의 평균이 여러분의 1차 필기 시험 성적이 됩니다. 적성에 맞는 특정 과목을 집중적으로 공부해도 되고, 모든 과목을 균등하게 공부해도 됩니다. 예시로 몇 가지 전략에 대해 짧게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가장 일반적인 방식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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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사는 몇 개의 수험 전략을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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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공책에 강사의 설명을 받아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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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은 영 집중하지 못하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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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사는 주의 사항에 대해서도 알려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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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균등 공부 전략을 취하면 상관없지만, 차등 공부 전략을 선택할 경우에는 주의하실 점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과락을 하지 않는 겁니다. 열다섯 개의 과목 중 단 하나라도 40점 미만의 점수를 받으면 무조건 탈락됩니다. 나머지 과목이 전부 100점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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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고개를 끄덕이며 필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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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점 미만, 과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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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조건 탈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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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사는 지우개로 칠판을 지우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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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이 수강하신 ‘필기 완전 정복’은 열다섯 개의 필기 과목을 두루 다룹니다. 강의 난이도 자체는 입문자도 이해하기 쉬운 수준이니, 과목이 많다고 지레 겁먹으실 필요는 없습니다. 강의를 충실하게 들으셨다는 가정하에 여러분이 과락을 당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자, 그러면 본격적으로 강의를 시작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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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오전이 통째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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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가 끝나자 어느새 점심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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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강생들은 강의실에서 나와 식당가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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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과 담청도 그 대열 안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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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이 넋 나간 표정으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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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 강의 내용이 이해가 되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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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어렵지만 그럭저럭 들은 만하던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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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을 만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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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필기한 공책을 들여다보며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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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선계의 법 체계와 서대륙의 법 체계가 생각 이상으로 유사하더라고요. 예전에 외출증 발급 받으려고 속세 행동 지침이라는 걸 공부한 적이 있었거든요. 그게 이런 식으로 도움이 될 줄은 또 몰랐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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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계와 인계의 법 체계가 비슷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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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대륙 사정은 저도 잘 모르겠네요. 그래도 서대륙이랑은 꽤 비슷했어요. 아, 도착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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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식당가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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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과 담청은 유명한 고기덮밥집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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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천 년째 대대손손 운영 중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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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에는 오후 수업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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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강 열흘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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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시생 담청이 잠에서 깨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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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장히 이른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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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은 엉금엉금 기어 이부자리를 벗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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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몽사몽 중에 씻고 식당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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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원들이 벌써 아침식사를 차려 놓은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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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졸려서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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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에는 서란과 함께 오전 강의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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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최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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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도 그랬고, 아마 내일도 그럴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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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 시간이 되자 정신이 좀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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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과 함께 식당가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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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역시나 고기덮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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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이 불만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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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다른 거 좀 먹으면 안되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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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요, 가깝잖아요. 저기요, 고기덮밥 두 개 주세요. 그리고 쇠 수저 말고 나무 수저로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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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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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연속 고기덮밥을 먹은 뒤에는 오후 강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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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실기 기초 숙달’ 강의는 꽤 재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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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보다는 놀이를 한다는 느낌이 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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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 입장에서는 그나마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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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기 강의가 끝나면 집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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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원표 석식을 챙겨 먹고 곧장 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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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담청을 기다리는 건 자유 시간이 아니라 야간 자율 학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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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게까지 자습을 한 담청은 잠자리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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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눈을 감았다 뜨자 아침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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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와 똑같은 오늘이 담청을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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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의 정신력이 급속도로 깎여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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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서란의 일정은 훨씬 더 비인간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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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족과 달리 수면이 불필요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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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인족과의 화상 예배, 안부용 영상 통화, 공법 수행, 야간 특강, 다음날 강의 예습 등 할 일이 태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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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서란은 서란이고, 담청은 담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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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강 보름째, 고장 난 담청이 끙끙 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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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으... 으우... 우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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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은 야간 자율 학습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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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도저히 집중이 되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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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 위에서 깨알 같은 글씨들이 춤추고, 책장은 무려 한 시진째 넘어갈 기미조차 안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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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은 왼쪽 뿔 부근을 신경질적으로 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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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주를 완성하기 위해 좁은 동굴에 600년씩이나 처박혀 있었던 시절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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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는 그 짓을 어떻게 감내했는지 의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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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담청은 책상 앞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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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저히 더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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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산책이라도 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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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임대)을 나선 담청은 곧장 하늘로 날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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깜깜한 밤하늘을 배경 삼아 눈발이 휘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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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거지같은 날씨가 아닐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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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은 조금 더 멀리 나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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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같은 방향으로 날자 눈이 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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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백도에서 꽤나 멀어진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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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은 개방감을 만끽하며 심호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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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바람을 쐬니까 한결 나은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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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도 공부하다가 답답하면 산책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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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은 영백도로 돌아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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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어떤 소리가 담청의 귀를 사로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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쿵짝쿵짝 흥겨운 가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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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의 눈이 저절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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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에 존재하는 건 커다란 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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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 때문에 한밤중에도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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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은 섬의 정체를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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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백도 인근에 위치한 또 다른 섬, 상청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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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사들이 근처에도 가지 말라고 했던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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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은 멍하니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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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잠깐, 구경만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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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낚싯바늘에 걸린 생선처럼 상청도를 향해 일직선으로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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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린 듯 섬에 접근하던 담청을 누군가 제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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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님, 정말 죄송하지만 용족이시라면 입장료를 지불해 주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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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을 되찾은 담청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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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장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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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그렇습니다. 용담에 방문하는 길이시지요? 이 시간이면 하루 이용권, 심야 이용권, 시간제 이용권 중 하나를 추천드립니다. 어떤 걸로 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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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게... 내가 현금이나 단말기를 안 챙겨 왔구나. 이만 가 보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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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궁금해도 돈이 든다면 또 얘기가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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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은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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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백도로 돌아가기 위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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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근처에 있던 다른 직원이 담청을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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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님,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1400살 미만의 용족은 입장료가 무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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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의 이성이 잘 익은 수박처럼 쪼개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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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료란 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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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그럼요. 여기 이 어린이용 팔찌를 차고 입장하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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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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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은 팔찌를 차고 상청도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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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직원이 큰 목소리로 배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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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에서 즐거운 시간 보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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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시간 보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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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이 떠난 뒤, 인간 수도자가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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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님, 그런데 1400살이 안되는지는 어떻게 아셨습니까? 외견이 어려 보이긴 하는데, 그건 영생종이 다 그렇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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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족 수도자가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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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용족끼리는 딱 보면 감이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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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게 신기하네요. 원리가 뭐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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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체가 아니라 영혼을 보고 구분하는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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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직원은 몇 마디 더 떠들다가 자리로 복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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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는 사이에 담청은 상청도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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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쭉한 산 하나를 기준으로 섬의 절반은 어둡고, 나머지 절반은 밝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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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이 켜진 구역은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용족 방문객들로 바글바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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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원지의 직원들이 목청껏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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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수생생물 인형탈 행렬이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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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용 입장 팔찌 하나당 무료 뽑기 한 번! 꼴등 상품만 해도 무려 기념 모자! 어린이용 팔찌는 무료 뽑기 세 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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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수영 솜씨를 만천하에 뽐내세요! 일출까지의 순위를 기준으로 상품을 드립니다! 참가만 해도 기록과 상관 없이 간식 증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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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대규모 수중 불꽃놀이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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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은 끝내 유혹을 이기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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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생생물 인형탈 행렬을 관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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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어 인형탈을 쓴 직원이 엿을 비처럼 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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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과 혀가 동시에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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뽑기도 세 번이나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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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부 다 꽝이었지만 상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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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은 모자로 삼층탑을 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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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영 대회에도 참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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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족 어린이들은 담청의 상대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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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울하면 자기들도 태성기 수사하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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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속에서 펼쳐지는 화려한 불꽃놀이를 마지막으로 담청의 밤 산책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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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시 준비 1개월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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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과 담청의 일상에도 슬슬 규칙성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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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그 방향성은 완전히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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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거의 기계처럼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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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먹는 시간까지 줄여가며 공부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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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야간 특강을 뭐 그리 많이 듣는지 새벽까지 집에 안 들어오는 경우도 잦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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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칙적으로 생활하는 건 담청도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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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실기 강의를 마치면, 언제나처럼 귀가해서 씻고 밥을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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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열심히 공부하는 척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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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상 앞에 오래 앉아 있을 필요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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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이어 야간 특강이 시작되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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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마치 신데렐라처럼, 자정만 되면 집에서 사라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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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집에 남은 건 담청과 수행원들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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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수행원들의 존재는 문제가 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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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수험생은 이럴 때 사용할 수 있는 전가의 보도를 한 자루씩 지니고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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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이 수행원들에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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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밤 늦게까지 공부할 것이니 공연히 방해하지 말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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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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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 가 보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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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원들은 공손한 자세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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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아무도 담청을 막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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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밤놀이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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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은 살금살금 창문을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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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얼마나 날았을까, 눈이 그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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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부터는 상청도의 권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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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멀리 입장료를 걷는 직원들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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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매표소 직원과 눈이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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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은 소매에서 백금 팔찌를 꺼내 착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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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런 제지 없이 통과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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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려 귀빈용 백금 팔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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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 없이 곧장 놀이 기구에 탑승하고, 어떤 공연이든 귀빈석에 앉아서 관람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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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이런 특권을 맛보면 어린이용 무료 입장 팔찌로 돌아가는 건 불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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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은 유원지를 제 집처럼 누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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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보름 넘게 방문했지만 전혀 질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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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매일이 새롭고 재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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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원지 운영 위원회의 부단한 노력 덕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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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은 지불한 금액 만큼의 행복을 돌려주는 멋진 장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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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담청은 굉장히 부유한 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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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그마치 한 종족의 신이니, 어찌 보면 당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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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상시 해변에 앉아 모래성이나 지으면서 노는 건 돈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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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손 담청은 유원지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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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따 오전 강의 중에 조는 건 기정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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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런 배덕감마저 한낱 조미료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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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시생 신분으로 노니까 한층 더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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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은 직원들의 배웅을 뒤로한 채 귀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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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살금살금 자신의 방 창문을 넘다가 누군가와 눈이 딱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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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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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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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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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 님, 여기 앉아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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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난 듯 요동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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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왜 그러는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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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갔다 오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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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요 앞에 산책을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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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조용히 담청을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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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소매에서 단말기를 꺼내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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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말기 안에는 담청의 사진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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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히 말하자면 용담의 천라지망 누리집에 올라온 ‘이달의 최다 방문 어린이 고객’이라는 제목의 정면 사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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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객의 신원을 보호하기 위해 눈가를 검게 칠해 놓은 편집이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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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왼쪽 뿔이 부러진 ‘담ㅇ’이라는 이름의 용족 어린이가 선계에 둘씩이나 존재할지는 의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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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은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힌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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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은망덕한 유원지 녀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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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용담 직원들은 아무 잘못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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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히 사진 올리기 전에 몇 번이나 물어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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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오리 감자 먹는 데 정신 팔려서 건성건성 듣고 그러라고 한 건 담청 본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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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은 땀을 뻘뻘 흘리며 웅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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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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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청도에 가신 게 맞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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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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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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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들을 필요가 없겠네요. 생각해 보니 요즘 오전 강의 시간에 자꾸만 졸고 그러시던데, 전부 이유가 있었군요. 담청 님, 공부 시작한 지 이제 한 달 지났습니다. 그런데 벌써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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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조잘조잘 떠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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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목조목 뜯어보면 하나같이 정론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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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건 서란 입장에서나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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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다 못한 담청이 반감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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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나는 원래 법관 고시 같은 거 준비하고 싶은 마음 없었다! 서란 네가 반쯤 억지로 시킨 것 아니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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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 님이 수행도 안 하고 놀기만 하시니까 그랬죠! 게으름뱅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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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고? 이, 이 독불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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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유치한 말다툼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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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패는 안 봐도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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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 구사 능력이나 순발력 면에서 담청은 서란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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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담청이 울음을 터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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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 나가라고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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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제 얘기 안 끝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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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랑 이제 말 안 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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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은 서란을 방 밖으로 밀어낸 뒤 문을 쾅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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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화가 머리 끝까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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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가 끓어오르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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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문에 대고 뭐라 뭐라 소리치려던 순간, 서란은 다수의 인기척을 감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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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돌리자 잔뜩 긴장한 수행원들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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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에 잔뜩 움츠러든 목과 어깨, 필사적으로 윗사람의 안색을 살피는 눈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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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의 부모님이 부부싸움을 할 때마다 서란이 짓던 표정이 딱 저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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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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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쏘아붙이려던 가시 돋친 말도 도로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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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냥 집 밖으로 나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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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이지만 거리는 고시생으로 붐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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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강의에 늦지 않기 위해 서두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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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다툼을 꽤나 오래 한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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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인파와 반대되는 방향으로 무작정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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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오전 강의는 자체 휴강인 셈 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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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공부할 기분도 아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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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걸었을까, 작은 개울이 하나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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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옷을 입은 채로 물속에 뛰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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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열받아서 저도 모르게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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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차가운 물 속에서 혼자 씩씩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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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불장군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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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 님을 위해서 그랬던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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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도 몰라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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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머리가 좀 식자 다른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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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 님, 고시 공부가 하기 싫으셨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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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의견을 여쭤 본 적이 한 번도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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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내 생각만 밀어붙였었나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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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소매에서 단말기(완전 방수)를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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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면을 켜자 ‘이달의 최다 방문 어린이 고객’이라는 제목의 정면 사진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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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속의 담청은 정말 해맑게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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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한동안 담청의 사진을 들여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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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의 미소를 보는 건 거의 한 달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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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동안은 줄곧 침울한 모습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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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깊은 고민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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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싸움에서 처참하게 패배한 담청은 이불을 뒤집어 쓰고 울다가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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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났을 때는 이미 저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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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끼나 걸렀더니 굉장히 허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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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을 나선 담청은 식당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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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도중 몇 겹의 벽 너머로 서란을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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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없이 식탁에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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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은 옳다구나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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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울다 지쳐 잠들기 전까지 ‘그때 이렇게 받아쳤으면 서란이 아무 말도 못했을 텐데...’ 비슷한 생각을 마구마구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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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내 시뮬레이션 완료, 이제는 아까처럼 쉽게 당하지 않을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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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은 ‘나 아직도 화 많이 났어요’하는 발소리와 함께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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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서란의 사과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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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 님, 아침에 있었던 일은 정말 죄송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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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 응? 뭐라고 그랬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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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잘못에 대해서 사과드리고 싶어요. 돌이켜 보면 그럴 만한 일이 전혀 아니었는데... 저도 모르게 신경이 예민해졌었나 봐요. 정말 죄송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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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의 사과는 몇 번이나 되풀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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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언변으로 서란을 압도한다는 담청의 상상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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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응어리진 감정은 꽤나 해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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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이 코맹맹이 소리로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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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다, 나는 다 이해한다. 요즘 좀 이상하긴 했지만, 비승하고서 생활 환경이 급변했으니 그럴 수도 있지. 응, 그렇고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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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그래도 내일은 진료소에 가 보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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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되니까 나도 함께 가 주마. 절대 놀고 싶어서 그러는 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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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은 이윽고 화해의 포옹을 나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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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해요, 담청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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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이에 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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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금 집안에 평화가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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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서란과 담청은 진료소에 방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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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태여 멀리까지 갈 필요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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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상청도에 큰 게 하나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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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조용히 자기 차례를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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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가장 의심되는 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일명 PTSD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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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지목이나 독안룡 같은 강적과 목숨을 걸고 싸운 경험이 정신에 충격을 준 건 아닐까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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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전문적인 심마 감정을 신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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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료소 직원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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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서란 님, 3번 검사실로 들어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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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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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차례네요. 갔다 올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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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검사 잘 받고 오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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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담청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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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남겨진 담청에게 지나가던 직원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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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건강 검진 받으러 오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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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 검진? 그게 무엇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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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모르시는군요. 건강 검진이라는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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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계 건강 검진은 전 종족의 수도자를 대상으로 백 년마다 한 번씩 진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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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도 물론 도원향이 만든 제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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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료소 직원은 어차피 무료니까 온 김에 하고 가라며 권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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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은 별다른 고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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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검사 결과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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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과 담청은 긴장한 채 진료실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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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료실 안쪽에는 의사 한 명이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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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가 서란을 바라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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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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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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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봐라! 내가 이상하다고 하지 않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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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의 고개가 이번에는 담청을 향해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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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에 계신 분도 마찬가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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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보니 남 일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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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의사에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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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 님도 심마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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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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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아니... 어떤 종류의 심마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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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가 검사 결과지를 들여다보며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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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상성 심마의 일종으로 추정됩니다. 원인은 높은 확률로 부러진 왼쪽 뿔이겠죠. 아까 여쭤 본 바로는 하계에서 생긴 상처라고 하셨는데, 혹시 선계에 온 다음 진료를 받으신 적이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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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대신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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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뇨, 그냥 약만 먹고 말았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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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약을 드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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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그게... 분명 목주괴오초 어쩌고 하는 약재가 들어가는 약이었는데... 용족 보양용 탕약이라고 그랬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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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는 잠시 심사숙고하더니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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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예 틀린 처방은 아니군요. 그래도 너무 옛날 방식입니다. 외상성 심마에 대한 연구가 전혀 진행되지 않았던 시절의 지식이죠. 의료 현장에서는 안 쓰인 지 2만 년도 더 됐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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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번개라도 맞은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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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만 년 동안 업데이트가 안 된 의료 지식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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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태까지 상상조차 못해 본 발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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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는 두 사람에게 몇 가지를 질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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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뿔이 부러진 이후에 지나치게 산만해지지는 않았나요? 집중이 어렵다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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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독증은 어떤가요? 글자가 회전한다든지 글줄이 출렁거린다든지 하는 증상이 있나요? 너무 작은 글씨를 보면 머리가 아프지는 않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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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가 수시로 가렵지는 않나요? 특히 왼쪽 뿔 뿌리 부근이 말이에요. 아, 지금도 무의식적으로 긁고 계시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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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하나 틀리는 게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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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은 입을 뻐끔거리며 놀라움을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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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잉어로 되돌아간 듯한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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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의사에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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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전부 부러진 뿔 때문이라는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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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히 말하자면 기질적인 면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혹시 감각과 관련된 선골을 지니고 계십니까? 아니면 비슷한 효능의 공법을 익히셨다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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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 예, 맞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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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은 선골보유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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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지닌 선골의 이름은 공백지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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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도로 예민한 감각이 주된 특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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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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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그러셨군요. 용족의 뿔은 굉장히 섬세한 감각 기관입니다. 기가 순환하는 통로이기도 하죠. 중요 부위인 만큼 크게 손상되면 몸 전체에 악영향을 끼칩니다. 선골이나 공법에 대해서 여쭤 본 것도 그것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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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이 예민하면 영향을 더 많이 받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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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맞습니다. 뿔이 부러지면 기의 흐름과 감각이 뒤틀리죠. 선골이나 공법을 통해 감각이 증폭된 경우에는 증상이 더욱 심각하고요. 추가적인 정밀 검사가 필요하겠지만, 지금으로서는 외상성 심마일 확률이 높아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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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어 행동을 하던 담청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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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그러면 서란은 어떤 심마인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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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가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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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서란 님 같은 경우는 종족성 심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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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족성 심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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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종족성 심마. 분류상으로는 심마에 속하지만, 반인반룡 특유의 희귀병이라는 관점도 존재하죠. 아무튼 굉장히 드물다는 점만 기억하시면 됩니다. 반인반룡이라는 종족 자체가 원체 적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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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듣고 있던 서란이 질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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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족성 심마라고 판단하신 이유가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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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요,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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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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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는 말없이 책상 서랍을 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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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쇠로 된 자를 꺼내 서란에게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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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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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가 쇠로 된 자를 멀리 치우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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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그 느낌, 쇠붙이가 거슬리시죠? 생체 자기장에 이상이 생겨서 그런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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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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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좀 넣어 보시겠어요? 체온 좀 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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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옥두꺼비 입에 손을 쏙 집어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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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가 수치를 확인하고는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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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평균 체온 정도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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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런 문제도 없다는 말씀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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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 많죠. 인간은 항온 동물이고 용은 변온 동물이잖아요. 반인반룡도 굳이 따지자면 후자에 가깝습니다. 이거 이마에 붙이고 계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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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시키는 대로 하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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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차갑네요. 이건 어떤 약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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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약이 아니라 그냥 냉습포입니다. 그나저나 체온이 비정상적으로 높다는 걸 못 느끼셨습니까? 마치 체액이 끓어오르는 기분이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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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냥 고양감인 줄 알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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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는 옥두꺼비를 서랍에 넣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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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판단 능력의 감소도 엿보이는군요. 혹시 근래 들어서 성격이 급변하지는 않았나요? 시야가 좁아졌다거나, 독단적으로 행동하는 일이 늘었다거나 하는 식으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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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에 앉아 있던 담청이 잽싸게 고자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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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 독불장군처럼 군다! 점심에 뭐 먹을지도 맨날 자기가 정하고! 나는 고기덮밥 그만 먹고 싶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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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그런 일이 있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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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아,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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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의 증언을 경청하던 의사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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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백하게 과집중 상태입니다. 게다가 생체 자기장의 이상과 비정상적으로 높은 체온까지, 전형적인 종족성 심마 증상들입니다. 용족과 인간, 두 종류 기의 불균형에서 비롯되는 희귀 질환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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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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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귀병이면 완치는 어려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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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뇨? 열흘 정도 약 챙겨 드시면 다 나을 겁니다. 희귀병이지 난치병은 아니거든요. 아, 체온 유지에는 각별히 신경 써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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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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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서란과 담청은 정밀 검사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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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사 결과는 종족성 심마와 외상성 심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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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변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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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과 담청은 진료소를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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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에는 약봉지가 하나씩 달랑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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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다 먹으면 완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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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새 냉습포를 이마에 붙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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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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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러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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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이 효과가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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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이 뿔에 연고를 치덕치덕 바르더니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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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머리가 맑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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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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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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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의 침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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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조심스레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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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시 공부, 그만두셔도 괜찮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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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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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저 때문에 억지로 하셨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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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고민하던 담청이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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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왕 시작한 거, 6년만 해 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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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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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이번에 떨어지면 더는 안 할 거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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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은 영백도로 복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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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흘 뒤, 서란의 종족성 심마가 완치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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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라보는 시야가 확 넓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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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경주마용 차안대를 벗은 듯한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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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곧장 행정사무처로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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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강의 변경 및 환불 신청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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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달도 채 안 들은 강의라서 변경 및 환불 수수료는 따로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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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자신과 담청의 강의를 재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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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족성 심마에 걸려 있을 때와는 전혀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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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짠 일정은 완벽하게 담청 친화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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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담청이 그렇게나 바라던 튀김 점심 특선을 먹으며 새로운 일정에 대해서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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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담청 님의 오전 강의는 변경하지 않았어요.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필기 완전 정복’ 강의를 들으시면 돼요. 난독증은 괜찮아지신 거 맞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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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아무 문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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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요, 그래도 너무 무리하지는 마세요. 재발할 수도 있다고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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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왕오징어 튀김을 먹던 담청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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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강의는 어떻게 되는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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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실기 기초 숙달’ 강의요? 그건 아예 환불했어요. 오후에는 저랑 같이 필기 과목을 공부할 거예요. 혹시나 오전 강의에서 이해 못한 부분이 있다고 해도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가르쳐 드릴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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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저녁 식사 이후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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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쇠젓가락을 탁탁 부딪치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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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부터는 담청 님 자유 시간이에요. 대신에 상청도로 놀러 가시는 건 안돼요. 유원지는 보름마다 한 번, 오후 시간에만. 아시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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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 너도 함께 가는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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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그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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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은 대왕오징어를 우물거리며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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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에는 강의, 오후에는 서란과 함께 공부, 그 뒤로는 쭉 자유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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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보름에 한 번씩 유원지에 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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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도라면 충분히 가능할 듯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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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은 문득 궁금한 게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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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실기는 공부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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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기는 신경 쓰지 마세요. 시험 1년 전부터 준비해도 충분할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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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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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담청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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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첫 시간에 수험 전략 설명할 때 하나도 안 들으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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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너무 어려운 소리를 하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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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그럴 수 있죠. 간단하게 설명해 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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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관 고시는 1차 필기 점수와 2차 실기 점수의 평균으로 합격 여부가 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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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락이 하나도 없다는 가정하에, 평균 점수 45점에서 55점 사이가 합격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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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60점 이상부터는 명백한 선두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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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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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고시생 대다수가 어떤 수험 전략을 취하는지 아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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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야 둘 다 공평하게 공부하지 않겠느냐. 어차피 중요한 건 필기와 실기의 평균이니까. 잘하던 걸 더 잘하는 것보다 못하던 걸 잘하는 게 훨씬 쉬울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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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그게 맞죠. 그런데 법관 고시는 좀 달라요. 실기 강의 들었던 걸 생각해 보세요. 뭐가 좀 특이하지 않던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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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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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기 강의? 결계를 두른 상자에 어떤 물건이 들어 있는지 알아맞히라느니, 수도자 여럿 줄 세워 놓고 거짓말쟁이 골라내라느니 했었지. 공부하는 것 같지 않아서 재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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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부 용안의 감지 능력을 키우는 훈련이에요. 법관한테 법률 지식 못지 않게 중요한 건 진실과 거짓을 구분하는 권능이잖아요. 그런데 담청 님도 아시다시피, 수선과 관련된 감각이라는 게 하루 아침에 길러지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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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 그래서 비교적 빨리 점수를 올릴 수 있는 필기 과목에 집중한다는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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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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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맞습니다. 수행은 꼬박 백 년을 매진해도 진척이 더디지만, 법률을 그 정도 공부하면 전문가가 되고도 남죠. 그래서 고시생 대부분의 수험 전략은 필기 고득점과 실기 최저 달성에 초점을 두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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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반대로 하자는 것이냐? 필기 최저 달성에 실기 고득점 전략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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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그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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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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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가 잘 안되는구나. 그렇다면 더더욱 실기 강의를 들어야 하는 것 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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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 님은 필기와 실기를 전부 준비하시면서 1차 시험에서 과락을 면할 자신이 있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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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앗, 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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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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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우리한테는 그게 있잖아요, 그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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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그거’란, 선골과 영안을 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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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골보유자인 담청한테는 공백지체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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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서란한테는 두 종류의 영안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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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관천안과 용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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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관 고시를 날로 먹겠다는 게 서란의 심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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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안은 생각보다 희귀한 능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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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자들이 수시로 사용하는 영안술과는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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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진짜 영안을 흉내 낸 법술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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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안은 크게 두 종류로 나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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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족의 용안이나 거인족의 천리안, 삼안묘의 세 번째 눈 같은 건 선천적 영안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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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운무기 수사의 관천안은 후천적 영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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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안을 지니고 태어나지 못한 종족의 수도자들은 고위계에 도달하는 순간 관천안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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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생적인 한계를 수행을 통해 초월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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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선의 본질에 대해서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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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의 경우도 비슷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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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안 없는 종족, 인간으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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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영물로 거듭나며 관천안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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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잘 닦인 포장도로를 달리던 서란은 갑자기 개척자 정신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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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태 의식과 여의주 의식을 모두 치르고 후천적 반인반룡이라는 전인미답의 경지에 도달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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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관천안에 더해 용안까지 얻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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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인 경우, 이런 일은 있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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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안끼리도 우열이 존재하는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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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대로라면 보다 우월한 용안이 관천안을 말끔히 지워버렸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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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서란은 후천적 반인반룡이라는 유례없는 종족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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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체내에는 두 종류의 서로 다른 혼원법력과 영성의 별이 공존하고 있는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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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복수의 영안을 온전히 지닐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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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성기에 막 도달했을 무렵의 서란은 자연스레 궁금증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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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의 영안을 지니면 어떻게 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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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문은 천라지망 검색을 통해 손쉽게 해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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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놀랍게도, 선계에는 복수의 영안을 지닌 수도자가 극소수나마 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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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그중 하나는 굉장한 유명인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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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원향의 최고 심판관, 선백파흑진군은 용안과 천리안을 함께 보유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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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백파흑진군은 본래 용족으로 태어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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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체라기보다는 천체에 가까운 규모의 거대한 본체, 그리고 선계 전역으로 도주한 이들을 한 눈에 포착하는 광대한 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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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부 거인족이라는 태생에서 비롯된 요소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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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인족 출신 용, 선백파흑진군이 복수의 영안을 지닐 수 있었던 이유는 간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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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리안과 용안은 모두 희대의 영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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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둘 다 서로를 완전히 압도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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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계의 수많은 호사가들은 언제나 7대 지선 중 누가 가장 강한지 여부를 두고 입씨름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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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구태여 어떤 진군의 안력이 가장 뛰어난지를 두고 다투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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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의 영안을 지닌 선백파흑진군이 최고라는 건 이견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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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의미에서, 서란의 ‘필기 턱걸이-실기 고득점’ 전략에도 나름의 근거가 존재하는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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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자신의 5년짜리 ‘필기 완전 정복’ 강의를 3년짜리 ‘법률 종합 단기’ 강의로 변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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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간이 짧아진 만큼 학습 난이도는 훌쩍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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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담청을 합격시키려면 이 방법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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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다른 강의를 듣는 탓에 서란과 담청의 학습 진행도에 다소간의 괴리가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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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격차는 계속해서 커져 갈 예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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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써 서란은 자기가 담청의 과외 선생님이 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는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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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담청에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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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히 법조문을 암기하는 데서 그치시면 안돼요. 법률 전반을 관통하는 핵심 원리를 이해하고 개별 사건마다 적절하게 적용할 줄 아셔야 합니다. 특히 이 두 사건의 차이점에 대해 유의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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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눈에는 둘 다 똑같은 사건으로 보이는데 도대체 뭐가 다른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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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말씀이세요? 전혀 다르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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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열심히 공부하던 담청이 질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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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하여 이 판례에는 방금 전 사건과 전혀 다른 법 원리가 적용되는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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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예외 사항이라서 그냥 외우셔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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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외가 너무 많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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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만 머리 깨지는 법률 공부가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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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의 수험 전략은 확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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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은 오로지 필기 과목만을 공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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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중요한 건 뭐니 뭐니 해도 1차 시험에서 과락을 맞지 않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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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기 고득점은 바라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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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목 15개가 전부 40점만 넘으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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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족한 점수는 실기로 보충하면 그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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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표가 턱걸이인 만큼, 담청이 공부해야 할 분량은 다른 수험생들에 비해서 적은 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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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담청을 가르치면서 변별력 문제가 출제되는 단원들을 모조리 건너뛰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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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건 고득점을 노릴 때나 신경 쓰는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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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먹고 오전 강의, 점심 먹고 개인 과외, 저녁 먹고 자유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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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의 매일은 순조롭게 반복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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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보름째 되는 날, 유원지에 방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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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청도로 향하던 도중에 담청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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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 나만 믿고 따라오거라. 용담에 대해서 나 만큼 빠삭한 용도 드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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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담청 님만 믿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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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명한 판단이다. 아, 저기 직원이 오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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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족 직원이 담청에게 아는 척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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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오랜만에 찾아 주셨군요. 그 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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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나는 잘 지냈다. 밤낮으로 공부에 매진했지. 그것이야말로 수험생의 본분이니까. 아, 여기는 함께 온 친구다. 어린이 입장 팔찌를 하나 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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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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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족 직원이 고민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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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의 나이가 구분이 안돼서 그러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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뿔의 색깔을 보아하니 반인반룡이라 그런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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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족 직원의 고뇌를 해결해 준 건 서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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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저도 백금 팔찌로 하나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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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러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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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어차피 보름마다 방문할 건데 매번 새로 발급 받자니 번거로울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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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원은 반색하며 백금 팔찌를 건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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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금 팔찌를 나란히 찬 서란과 담청은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며 유원지에 입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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쿵짝쿵짝 흥겨운 가락이 귀를 즐겁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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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이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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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 재미있어 보이지 않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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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멋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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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치? 용담과 함께라면 수험 생활 6년 정도는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갈 게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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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과 담청의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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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 뒤, 두 고시생의 용담 방문 횟수도 어느새 세 자릿수를 돌파한 지 오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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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법관 고시 1차 시험일이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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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시험 장소는 도원향 임계 분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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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은 심호흡을 한 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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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 장소인 강당 전체가 용안 무력화 결계로 빈틈없이 둘러싸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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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강당 안에 배치된 시험 감독관은 응시생의 숫자보다 몇 배나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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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행위는 절대로 불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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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 감독관 중 하나가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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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1차 시험을 시작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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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은 천천히 문제지의 봉인을 뜯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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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모의고사에서 연습했던 대로 1번 문제부터 차근차근 풀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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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했던 것처럼 많이 떨리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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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번은 전형적인 ‘모두 고르시오’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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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개의 보기 중에서 옳은 것, 혹은 옳지 않은 것을 모두 고르는 방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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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에 의지해서는 정답을 맞힐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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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담청도 아는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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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빈출 문제라며 거의 노래를 불러 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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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은 어렵지 않게 정답을 찾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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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로도 담청은 막힘 없이 문제를 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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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 문제 오늘 아침에 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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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헷갈리니까 조심하라고 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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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의고사에서 몇 번 틀렸던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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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의 문제 푸는 속도는 느린 편에 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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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시험 시간이 부족할 일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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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점 턱걸이가 목표이기 때문에 후반부의 초고난도 문항 따위는 거들떠볼 필요조차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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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은 마침내 문제 풀이를 모두 끝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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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문제지의 4할이 공백으로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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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건 담청과는 상관없는 문제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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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자기가 적은 답안을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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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수한 부분은 딱히 눈에 띄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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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면서 시험이 종료되기를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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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필기 과목의 경우도 대동소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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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보름에 걸친 1차 필기 시험이 모두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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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의 필기 평균은 43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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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락은 하나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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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관 고시 2차 시험 장소는 무기 구역 중심지에 위치한 도원향 총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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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시험을 통과한 서란과 담청은 전송진을 타고 선계 중부로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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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시생 신분인 덕분에 따로 비용을 지불하거나 줄을 서서 대기할 필요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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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송진 관리소를 나서자마자 무엇인가가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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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까맣고 거대한 정사각뿔 형태의 건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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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게 바로 도원향 총타, 흑단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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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이 솔직한 감상을 내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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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못생긴 건물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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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게요, 꼭 석탄 더미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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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원향에는 건축가가 한 명도 없는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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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관광 안내 책자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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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건축 당시에는 나름대로 궁전 비슷한 수준이었다고 하네요. 오랜 세월 동안 개보수를 거치면서 지금의 모습처럼 변했대요. 극한의 실용성을 추구한 결과인가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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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실용적인 게 좋아도 그렇지, 주변 미관을 혼자서 다 망치고 있지 않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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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민원도 엄청 들어온대요. 귓등으로도 안 들어서 그렇지. 참고로 지상으로 드러난 건 극히 일부분이고 나머지는 전부 땅속에 묻혀 있다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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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이 지면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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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일대에는 결계가 잔뜩 설치되어 있구나. 혹시 관광 안내 책자에 흑단궁의 전체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도 나와 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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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뇨, 기밀 사항이라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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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그거 아쉽구나. 그래도 흑단궁을 제외하면 예쁘고 화려한 건물들이 아주 많구나. 선계의 중심지라는 말이 전혀 아깝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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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책자를 넘기며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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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관광 명소도 많네요. 법관 고시 다 끝나고 나서 같이 둘러 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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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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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은 예약해 둔 숙소로 갑시다. 2차 시험까지 며칠 안 남았으니 명상이라도 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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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과 담청, 수행원들은 숙소로 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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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저기 둘러보던 담청이 문득 서란에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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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이걸 안 물어 봤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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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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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 네 필기 점수는 몇 점이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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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책자를 덮으며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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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점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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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표정을 보아하니 괜찮게 본 것 같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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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나 잘 본 편에 속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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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의 필기 평균은 61점, 선두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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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아직 연기기였던 서란은 수도문파 간 친목대회에 출전한 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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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호혜문, 금영영과 친해진 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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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참가했던 문파는 총 네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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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략적으로 성세를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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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오르는 신성, 금작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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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과 역사의 강자, 오죽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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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수도문파가 선두 경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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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뒤에서 맹렬히 추격하는 건 약목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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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나라를 기준으로 북동쪽에 위치한 주나라를 다스리는 수도문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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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수선계 국제 시장 개최국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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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년 전, 약목파의 원영기 수사가 큰 그림을 그리며 영초와 영목 등을 잔뜩 재배한 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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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대계 따위에 호들갑을 떠는 범인들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위엄찬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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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영기 수사는 비록 수명이 다해서 죽었지만, 씨앗은 수백 년만에 발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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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 만한 영초나 영목은 기르는데만 족히 수백 년 이상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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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운이 안 따라주면 문파 망하는 지름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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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성공하면 보상도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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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을 포기한 목속성 원영기 수사의 헌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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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대를 위해서 먹고 싶은 걸 꾹 참고 약재를 키운 수도문파 구성원의 인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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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오랜 노력이 결실을 맺을 때까지 외침을 막아줄 든든한 동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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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작파와 오죽문의 등 뒤에서 수백 년을 버틴 약목파는 서대륙 전체의 단약 재료 시장에서 압도적인 점유율을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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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시장에서 발생하는 수수료는 천문학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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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단짝친구, 오죽문과 금작파에게도 다달이 친구비를 입금했으니 우애는 날로 돈독해져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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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과 담청이 신분패 하나 달랑 들고 국경을 넘을 수 있었던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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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문 같은 건 잘 모르는 타인에게나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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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죽문과 약목파는 남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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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흐르듯 시장에 진입한 서란과 담청은 곧장 인력 시장으로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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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기다리던 순간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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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속성, 수속성 한 명씩 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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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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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번쩍 손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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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자 인력 시장이 침묵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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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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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여기에 애들 데려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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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누가 딸을 데리고 온 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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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혹시나 싶어서 영안술을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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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랍게도 뿔 달린 소녀와 그냥 소녀의 단전에는 커다란 내단이 자리 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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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도 전부 똑같은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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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단기 수사가 여기에 왜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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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력 시장에서 일거리를 찾는 수도자들은 전부 축기기 수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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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기는 법술을 사용할 수 없고, 결단기부터는 보통 지명 의뢰만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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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벌이가 난생처음인 담청과 서란만 모르는 상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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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자를 모집하던 여자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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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쪽 선배님은 어떤 속성이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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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안으로 법력을 관찰하면 속성은 금방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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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정토법력, 즉 노란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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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담청은 오색찬란한 법력을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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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즉시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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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분은 수속성 공법을 익히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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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용은 속성 구분이 모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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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이 지닌 혼원법력은 모든 속성의 법력을 대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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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영근만 있다면 속성 제한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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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은 잉어 영수에서 용이 된 경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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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생생물, 잉어 영수였기에 수영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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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용으로 다시 태어났기에 풍영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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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으로 치면 담청은 수풍 이영근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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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여의주에 벼락을 담는데 성공하면 뇌영근까지 추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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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부 모여서 비와 바람, 구름과 번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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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날씨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용이란 이렇게 완성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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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풍뇌 삼영근을 달성한 용은 무적의 존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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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신기 수사조차 가볍게 죽일 수 있으니 천하에는 적수가 없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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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고금제일 대도에게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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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여의주를 훔쳐서 용의 승천을 막고, 홀로 거대 문파를 벼랑 끝으로 몰아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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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피해자는 또 누가 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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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인력 시장에 앉아 있던 평범한 축기기 수사들도 피해자라고 볼 여지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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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급 어린이 바둑 대회 참가자로 갑자기 성인 바둑 기사(9단)가 난입한 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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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이 불가능한 생태계 교란종의 출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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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집원은 고민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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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금방 결정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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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급해서 뭘 따져볼 시간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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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집원이 결연하게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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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습니다! 두 분 다 가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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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지는 주나라 북부, 임무는 운하 보수 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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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나라는 무역이 발달한 나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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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쪽으로는 바다가, 서쪽으로는 평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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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강과 바다를 연결하는 운하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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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의 발단은 바다 괴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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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잘못 먹고 미쳐버린 건지 육지로 돌진한 거대 해산물이 중요한 운하를 망가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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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사적인 노력으로 사건은 은폐했지만 광범위하게 파괴된 운하를 빠르게 복구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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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하 복구 담당자 중 한 명인 모집원이 급하게 토속성, 수속성 수도자를 찾았던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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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복구해야 하는 운하입니다. 어떻게, 두 달 안으로 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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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드라인에게 쫓기는 절박한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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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녀는 행운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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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력 시장에서 서란과 담청을 만났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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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담담히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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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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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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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집원이 슬픈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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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 자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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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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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과 담청은 운하 보수 공사에 돌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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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운하에 가득한 물부터 제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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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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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이 기합과 함께 손짓하자 기적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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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하에 흐르던 물이 떠오르고 바닥이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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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악스러운 사실은 액체가 아치형으로 떠오른 채 여전히 흐르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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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류에서 내려온 유수가 무지개처럼 공중을 날아서 하류로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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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최강의 영물, 용에게만 허락된 신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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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집원이 열렬한 반응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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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강 전체를 하늘로 들어올리시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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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서란의 차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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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거산요지선공’이라는 결단기 공법을 익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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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을 풀이하면 산을 들고 땅을 뒤흔드는 공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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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다소 과장이 섞인 작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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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별세계에서 춤추듯 내려온 천재, 류서란이 펼치는 거산요지선공은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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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검지손가락을 뻗어 운하 바닥을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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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손목을 꺾자 검지가 하늘을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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벗겨진 땅거죽도 공중에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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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줌 법력도 막대한 힘으로 증폭하는 공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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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주보다 큰 금단은 폭풍처럼 주변 영기를 빨아들여서 법력으로 변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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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지표면을 부침개처럼 뒤집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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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집원은 없던 신앙심이 생긴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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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신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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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달도 빠듯할 것 같았던 대공사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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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보수 작업을 마친 서란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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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영석은 얼마나 줍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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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집원이 경건하게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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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달 치 공사비를 전부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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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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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일정이 괜찮으시다면 나머지 운하도 고쳐주시겠습니까? 제가 다른 담당자들에게 말해서 공사비를 전부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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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목 공사의 신, 류서란 님께서 말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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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죠, 저를 부르는 곳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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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한 달 동안 서란은 주나라 전역을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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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목 공사의 신을 영접한 운하 보수 담당자들은 기꺼이 모든 보수 예산을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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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사 마감을 지켜줬으니 서란은 신이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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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사 담당자들도 만족하고 서란도 만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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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 수당을 잔뜩 받아서 영석 부자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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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산요지선공 숙련도 역시 쭉쭉 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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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소문은 빠르게 전파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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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나라에 토목 공사의 신이 산다고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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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형 토목 공사를 계획 중이던 수도문파들이 주나라 국제 시장으로 날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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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목 공사의 신은 다음에 어디로 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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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한 빠른 순서를 위해서 경매까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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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열기로 가득한 경매장의 무대 뒤편, 서란과 담청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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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 님, 정말로 저처럼 모두 기부하시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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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용에게 영석이 무슨 필요가 있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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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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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표정 지을 것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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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독해진 우애 속에서 서란과 담청이 포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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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수선계 국제 시장 창설 이래로 가장 치열했던 오늘의 경매도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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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매로 벌어들인 수익금 중 수수료를 제외한 금액은 모두 불우한 오죽문에게 기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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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각된 대기 번호는 총 삼백 개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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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에 하나씩 일정을 끝마쳐도 대충 이 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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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재입대한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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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담청과 함께라면 버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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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라, 낯설고도 드넓은 세상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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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더 이상 두렵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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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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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과 담청은 무대로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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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노예 경매 같이 느껴지지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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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가자들은 번호패를 간절히 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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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은 저들이 아니라 서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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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까지 바친 이들이 간절히 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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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 광경을 경매라고 칭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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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상황에 어울리는 단어는 바로 숭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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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들은 제물을 바치고 기도하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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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순간부터 서란이 저들의 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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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태어난 여신이 나지막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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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장 서시지요, 제가 필요한 곳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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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에게 응답받은 신도들이 감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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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도 꽤나 흥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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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속성 수도자로 살면서 이런 대접은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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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찾지 않던 토속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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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곳에서만은 특별 대우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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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속성, 수속성 부럽지 않은 인기쟁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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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세계를 열광시키는 슈퍼 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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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건 서대륙 월드 투어나 다름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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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위대한 쇼걸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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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목 공사 듀오는 대륙 순회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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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정은 예상했던 것보다 금방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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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번한 지표면 뒤집기로 거산요지선공을 대성해 버린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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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년 뒤, 둘은 마지막 공사 현장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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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죽문과 인접한 해선문의 영역, 건나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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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관 고시는 꽤나 독특한 방식의 시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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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특이한 건, 1차 시험에서 과락만 면하면 무조건 2차 시험 응시 자격이 주어진다는 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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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기 평균이 43점이든 61점이든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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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여기까지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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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합격-불합격 방식의 시험도 존재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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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의아한 부분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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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관 고시는 1차 시험 성적과 2차 시험 성적을 종합해서 합격자를 선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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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스레 이런 의문이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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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럴 거였으면 처음부터 합격-불합격 방식말고 성적순으로 1차 시험 합격자를 가려냈으면 되는 거 아니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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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2차 시험 시기만 되면 도원향 총타는 선계 전역에서 모인 고시생들로 미어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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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 대충 하다 과락 맞고 1차 탈락한 허수 외에는 전부 2차 시험 보러 오니 당연한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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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숙박업자들은 행복의 비명을, 행정 관료들은 고통의 비명을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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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관 고시가 너무 오래 전에 만들어진 제도라는 게 모든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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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식 명칭, 법원 공개채용시험 용족 전형은 올해로 제342회를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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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년마다 시행된다는 걸 고려하면 무려 34000년 이상 된 낡은 제도라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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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한두 번 개편된 제도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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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창기 법관 고시는 절대평가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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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2차 시험 모두 합격-불합격 방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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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격 기준은 당연히 선백파흑진군이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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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백파흑진군은 굉장히 엄격한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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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자신은 물론이고 남에게도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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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하늘이 그에게 지어준 등선명 자체가 ‘흰 것을 뽑고 검은 것을 깨뜨리다’라는 의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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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백파흑진군의 무자비한 합격 기준이 법관 고시 응시생들을 난도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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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년 연속으로 합격자가 전무하자, 참다 못한 법관들이 일제히 들고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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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력 부족 문제가 너무 심각했던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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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선백파흑진군이 넓은 아량을 보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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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관 고시는 정원제로 개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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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시험은 합격-불합격 방식으로 유지하고, 2차 시험 성적순으로 당락을 결정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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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에 2차 시험 과락 제도를 도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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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법관들의 과로는 전혀 해결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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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 시험마다 합격 정원의 1할도 못 채우는 일이 비일비재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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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도 선백파흑진군이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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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치게 높은 낙제 기준에 1차 시험 합격자들이 우수수 쓸려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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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관 고시 제도의 역사는 곧 개편의 역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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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백파흑진군은 자기만의 기준을 꿋꿋하게 내세우고, 인력 부족에 시달린 법관들의 항의가 빗발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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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원향의 수많은 제도들 중에서 개편 횟수만 따지면 법관 고시가 압도적으로 1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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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 수백 번의 개편을 거친 법관 고시는 마침내 현재의 모습으로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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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도 누더기처럼 기워 붙였더니 원래는 어떻게 생긴 제도였는지도 기억나지 않을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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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선백파흑진군은 단 하나 만큼은 절대로 타협하지 않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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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실기 시험의 난이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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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안에는 진실과 거짓을 구분하는 권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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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아무에게나 통하는 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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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력화 결계를 제외하면, 용안의 권능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 정도로 알려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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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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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도 용안을 지니고 있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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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용에게는 용안의 권능이 일절 통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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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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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도적인 경지에 도달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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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상호 간에 두 단계 정도의 경지 차이가 존재하면 용안의 권능은 무용지물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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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2차 시험장에 은한기 수사를 들여보낸 선백파흑진군의 무자비함은 인상적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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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은한기 수사는 구술 담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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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안의 권능으로 구술 담당이 말하는 내용의 진위 여부를 가려내는 것이 실기 시험의 내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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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한기 수사가 구술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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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사기 범죄자의 비공개 사건 기록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잘 듣고 진위 여부를 가려주세요. 그러면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사기 범죄자 ‘갑’은 평소 알고 지내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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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한기 수사는 너무 느리지도, 너무 빠르지도 않은 속도로 사건 기록을 읽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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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원본 기록과 2차 시험을 위해 일부 변경한 실기용 기록, 두 개를 모두 숙지한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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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디로 진실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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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시자들이 할 일은 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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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 담당의 말을 통해 기록의 진위 여부를 가리고, 원본을 유추해 내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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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탐지기 성능 실험과 다를 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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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한기 수사의 구술이 계속될수록 응시생들의 얼굴이 점차 흙빛으로 변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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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단계나 되는 경지 차이 때문에 용안의 권능이 전혀 통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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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 내용의 진위 여부를 구분할 수 있는 건 극소수의 응시생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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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도 그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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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자 ‘갑’은 공범 ‘병’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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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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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병’은 공범이 아니라 피해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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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사가 시작되자 공범 ‘을’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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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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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을’은 범죄자 ‘갑’의 공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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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자 ‘갑’은 서부 ‘경5 구역’으로 도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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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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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정확히 어디가 거짓인지는 알 수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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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피처가 ‘경5 구역’이 아닐 수도 있고, 아예 도피에 관한 모든 것이 위증일 수도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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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를 다 읽은 구술 담당이 시험장에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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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빠르게 답안지를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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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관식이기 때문에 더욱 주의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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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구술 담당이 입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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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광홍기 수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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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이도로 치면 방금 나간 은한기 수사가 ‘상’, 지금 들어온 사람이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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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구술 담당이 들어왔다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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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성기, 광홍기, 은한기 등 경지도 다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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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마침내 실기 시험이 종료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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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시생들은 저마다의 표정으로 시험장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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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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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단궁 내부의 최고재판소 인사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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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점 담당 직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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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뜩이나 주관식 문제라서 채점하기 곤란한데 응시생 숫자까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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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한 안에 전부 끝내려면 한시도 쉴 틈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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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랑족 직원 한 명이 답안지를 들여다보며 연신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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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 거짓, 거짓, 거짓, 거짓, 진실, 거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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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역할은 초벌 채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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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 내용의 진위 여부만 확인하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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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인 채점은 옆에 앉은 동료의 몫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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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랑족 직원은 그야말로 기계처럼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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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 거짓, 거짓, 진실, 거짓, 진실,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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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에 앉은 동료가 한마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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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히 좀 채점하면 큰일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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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안 하면 자꾸 헷갈린단 말이야. 아, 어디까지 채점했는지 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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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휴, 말을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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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랑족 직원은 다시금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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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 거짓, 거짓, 거짓, 진실, 거짓... 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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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왜 그러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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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 12번 문제 진위 여부 다 맞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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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자리 동료가 고개를 들이밀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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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번 문제? 그거 구술 담당 준선경 수도자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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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여태까지 채점하면서 전부 틀렸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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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다 맞혔지? 찍었는데 운이 좋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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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랑족 직원이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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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제, 문항이 50개가 넘는데? 그리고 진위 여부는 틀리기라도 하면 그 즉시 감점이잖아. 그런 걸 모르겠다고 냅다 찍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차라리 빈칸으로 놔두고 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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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다, 틀리면 감점이네... 진짜 어떻게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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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봐도 실력으로 푼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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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자리 동료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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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말이 되나? 태성기 수사의 용안이 준선경 수사한테 통했다고? 경지 차이만 세 단계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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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완전히 통한 건 아닌가 봐. 12번 문제, 진위 여부만 적혀 있고 나머지는 공백이잖아. 자세한 내막까지는 파악하지 못한 모양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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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아깝다. 진위 여부는 부분 점수 되게 적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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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랑족 직원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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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분 점수가 어디야. 고시생들, 필기 1점 올려 보겠다고 몇 년씩 고생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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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긴, 그것도 그래. 아니, 근데 뭐 이런 문제를 출제하냐? 응시생들 다 틀리는 문제가 무슨 변별력이...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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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말을 하다가 말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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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문이 막힌 동료 대신 인사과장이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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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들, 퍽 한가한 모양이야? 이렇게 한담을 다 나누시고. 당연히 채점들은 다 하셨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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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랑족 직원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도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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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합니다, 아직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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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남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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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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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과장이 환한 미소와 함께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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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빨리 좀 해 줄 수 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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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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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고맙군. 눈물나게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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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과장이 떠나고, 두 직원은 묵묵히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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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랑족 직원은 초벌 채점한 답안지를 옆자리 동료에게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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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다음 답안지를 채점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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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옆자리 동료가 숨죽인 소리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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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잠깐 이것 좀 봐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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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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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번 진위 여부 다 맞힌 아까 그 답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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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랑족 직원은 인사과장의 눈치를 조심스레 살피다가 옆자리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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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안지에는 믿기지 않는 점수가 적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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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기 성적이 무려 70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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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랑족 직원은 놀란 나머지 벌떡 일어났다가 인사과장에게 혼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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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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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은 3차 면접 응시 자격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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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성적은 필기 43점, 실기 59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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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균을 내면 51점, 합격 안정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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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면접장으로 가던 서란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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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 님,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점검하겠습니다. 이런, 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면접관이 보이는군요. 어떻게 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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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152번, 담청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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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습니다, 존댓말 특훈은 성공적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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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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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너무 떨리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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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요. 3차 면접은 사실상 요식 행위거든요. 빨가벗고 들어가지만 않으면 합격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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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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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긴장한 담청을 잘 달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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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본인은 전혀 긴장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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떨어질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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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의 최종 성적은 필기 61점, 실기 70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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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은 끊임없이 속으로 되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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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치게 긴장하지 말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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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접관의 질문에 집중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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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 토론 중에 싸우지 말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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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는 사이에 면접 순서가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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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번에서 155번까지, 5개의 번호가 호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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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은 152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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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시생 네 명이 일제히 몸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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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도 뒤늦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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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쉽게도 서란과는 다른 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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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은 직원의 안내에 따라 대기실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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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복도를 걷자 면접장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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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면에 의자가 주르르 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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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원이 응시자들에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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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에 순서대로 앉아서 대기해 주세요. 앞 조 면접 끝나면 바로 알려 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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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시생 다섯은 주춤주춤 의자로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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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의자라서 그런지 확실히 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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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뚱이만 편하다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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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한 마음으로 기다리기를 잠시, 드디어 앞 조의 면접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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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게 닫혀 있던 면접실의 문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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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번부터 150번 응시생이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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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의 오장육부가 바짝 졸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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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려 두 명이나 펑펑 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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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에서 도대체 뭘 어떻게 한 건지 두려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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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원이 사무적인 태도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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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번부터 155번까지, 다섯 분 입장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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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의 조는 잔뜩 긴장한 채 면접실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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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명의 면접관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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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같이 범상치 않은 인상의 소유자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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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운데 앉은 면접관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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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편하게 앉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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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를 듣고 나니 한층 더 불편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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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명의 응시생들이 차례대로 의자에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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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은 곧은 자세를 유지한 채 마른침을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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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법관 고시 3차 면접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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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접 일정이 모두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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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과 담청은 함께 면접장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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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해질녘이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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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노을을 바라보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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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 님, 면접 잘 보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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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게 본 것 같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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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봐요, 긴장할 필요 없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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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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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접 분위기는 시종일관 화기애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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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섭게 생긴 외모와 달리, 면접관은 중간중간 농담도 하며 응시생들의 긴장을 풀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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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박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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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접을 마친 담청은 갑자기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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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그, 대성통곡하던 두 명은 도대체 뭐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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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회가 된다면 왜 울었는지 물어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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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은 멍하니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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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 이제 다 끝난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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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그런 셈이죠. 앞으로 남은 건 기껏해야 임명장 수여식 정도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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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격자 발표가 언제인지 아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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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손가락을 꼽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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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격 통보 자체는 며칠 안 걸릴 거예요. 공식적인 합격자 발표는 임명장 수여식을 마친 다음일 거고, 연수원 입소도 얼추 그 무렵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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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그 연수원이라는 건 몇 년 동안 다녀야 하는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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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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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이 즉각 질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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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엑, 10년씩이나? 그렇다면 용족 태성기 공법도 10년 뒤에나 받을 수 있는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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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아니에요. 수명경벽회공은 법관 임명장이랑 같이 수여 받는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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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다행이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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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은 노을에 물든 거리를 걸어 숙소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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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뒤, 합격 통지서가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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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과 담청은 별다른 이변 없이 합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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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를 전해 들은 금죽문 식구들도 기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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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며칠 뒤, 임명장 수여식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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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과 담청은 예복을 갖추어 입고 외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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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지는 도원향 총타, 흑단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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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수처에 방문 목적을 밝히자 안내원이 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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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내원은 서란과 담청을 대강당으로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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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강당 안은 예비 법관들로 바글바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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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여식 진행 요원이 둘에게 다가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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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분 다 면접 번호 기억하고 계시죠? 같은 번호의 좌석에 앉으시면 됩니다. 식순이 적힌 유인물 드릴 테니까 한 번씩 읽어 보시고요. 아, 류 수사님께서는 잠깐만 이쪽으로 와 주시겠어요? 따로 전달 사항이 있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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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은 서란과 헤어져 자기 자리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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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번이면 꽤나 앞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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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금방 찾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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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은 152번 좌석에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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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 체구를 기준으로 만든 탓에 의자가 좀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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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받이에 기대자 반쯤 누운 자세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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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은 그 자세로 아까 나눠준 유인물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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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다지 복잡한 식순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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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으신 분이 축사 몇 마디 하고, 대표 선서하고, 임명장 수여하고, 공법 전수하고, 마지막으로 안내 사항 몇 가지 전달하면 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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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이하게도 축사는 선백파흑진군이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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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은 다 읽은 유인물로 종이접기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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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숙한 솜씨로 종이공을 완성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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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는 사이에 임명장 수여식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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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선경 용족 하나가 단상에 올라 얘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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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계의 질서를 위하여 언제나 공사다망하신 최고 심판관, 선백파흑진군께서 급한 용무로 자리를 비우셨습니다. 그런 까닭에 이번 제342회 법원 공개채용시험 용족 전형 최종 합격자 임용 축사는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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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의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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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그래도 지루할 것 같았는데 천만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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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백파흑진군을 향한 존경심이 무럭무럭 자라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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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해를 구한 준선경 용족이 식순을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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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대표 선서가 있겠습니다.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주세요. 그리고 합격자 대표, 단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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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의 시선이 연단 측면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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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 세례 속에서, 서란이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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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준선경 사회자 앞으로 가서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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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한 손을 머리 높이로 든 채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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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서, 우리 예비 법관 일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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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맑은 목소리로 선서문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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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의 종류답게 미사여구가 잔뜩 붙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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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줄로 요약하자면, 선계의 법 질서 수호를 위해 이 한 몸 헌신하겠다는 내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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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 선서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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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임명장 수여 차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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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관계상, 이것도 서란이 대표로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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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독을 마친 사회자가 임명장을 내밀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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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격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류 법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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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감사 인사와 함께 임명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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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수명경벽회공을 지급할 차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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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선경 용족의 뿔이 벼락을 뿜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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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법을 담은 뇌전이 합격자들에게 직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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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의 머리에 수명경벽회공이 저장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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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법서에는 금제도 하나 포함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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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이게 무단 유출 방지책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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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전송을 마친 준선경 용족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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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명경벽회공에 관한 모든 정보는 기밀 사항입니다. 기록하거나 발설하는 즉시, 누가 어디서 그런 건지 파악할 수 있습니다. 명심하세요, 선백파흑진군께서 창안하신 금제를 파훼하는 건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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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중을 둘러보던 준선경 용족이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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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마지막으로 안내 사항 전달이 있겠습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신규 임용된 법관은 예외 없이 10년의 연수원 과정을 수료해야만 합니다. 하지만 최고재판소 내부 사정으로 인해 여러분, 342기는 합숙 교육 대신 영상 강의로 대체하겠습니다. 미이수자는 법관 임명이 취소되니까 잊지 말고 들으세요. 혹시 질문 있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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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격자 중 한 명이 손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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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선경 용족이 질문자를 지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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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점이 궁금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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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찰관 선발은 어떻게 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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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찬가지로 성적 우수자 중에서 선발할 겁니다. 또, 질문 있는 분 계십니까? 없으시군요. 그러면 제342회 임명장 수여식을 마치겠습니다. 다시 한번, 합격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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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띤 박수와 함께 식순이 모두 종료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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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격자들은 임명장을 안고 퇴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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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과 담청도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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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담청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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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 감찰관이 무엇인지 아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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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들이 비리 저지르는지 감독하는 관리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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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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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은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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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격자 발표 시기가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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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관 고시 게시판뿐만 아니라 수선 교류회 전체가 관련 이야기로 떠들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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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모두가 애타게 기다리던 도원향 일일 소식지가 천라지망에 게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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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보) 합격자 발표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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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42회 법원 공개채용시험 용족 전형 합격자 발표 -도원향 일일 소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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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관 고시 최연소 수석 등장! 최종 성적은 필기 61점, 실기 70점! -선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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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관 고시 수석, 하계 출신의 682세 반인반룡 태성기 수사로 밝혀져 충격! -중부매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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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하나 없이 기사만 인용한 게시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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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기사 제목만 확인해도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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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글창 불태우기 충분했다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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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글) 이건 아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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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글) 와, 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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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글) 682살이 수석? 이게 맞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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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격부터 말이 안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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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글) 자꾸 이러면 나 수선 못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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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접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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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님 어디 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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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글) 도대체 선골이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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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천지일신 그런 거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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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일신이 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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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방금 지어낸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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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글) 아,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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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리 거짓말이라고 해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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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글) 응, 죽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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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글) 그런데 반인반룡도 용족 전형 볼 수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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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례지만 종족 차별주의자이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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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보) 합격자 수기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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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비승한 문파 식구들에게 보은하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다. -제342기 수석 합격자 류서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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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승한 지 얼추 32년 정도 됐고, 법관 고시는 6년 전부터 준비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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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글) 거짓말하지 마~ 안 믿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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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글) 합격 수기 차마 다 못 읽고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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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그냥 쭉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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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이 답답해서 도저히 못 보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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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글) 여기 멍청한 녀석들 많네. 680살? 수험 기간 6년? 믿을 게 없어서 순진하게 이런 걸 믿고 있냐? 십중팔구 거짓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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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긴, 반인반룡이니까 나이 사기 치기는 쉽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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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봐도 5000살 넘은 노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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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5000살이야. 딱 봐도 덜 컸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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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글) 와 뭐냐? 이번 시험에 1100살짜리 용족도 한 명 합격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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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0살짜리 수석 아니었으면 얘가 역대 최연소 될 뻔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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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아니야, 900살에 합격한 경우도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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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글) 이번 시험 좀 쉬웠나? 수석한 애 최종 성적이 필기 61점, 실기 70점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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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백파흑진군이 우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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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격자 평균을 보면 딱히 쉬웠던 것도 아닌가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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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서 선두권 평균보다 5점이 높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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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웠냐면서 너는 왜 합격 못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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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님 진짜 어디 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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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관 고시 게시판을 활활 불태우는 방화범들, 그중 동일인이 몇 명인지는 오로지 금영영 본인만이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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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명장 수여식 바로 다음 날, 신입 법관들은 호출을 받고 다시금 흑단궁에 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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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무지 배정 문제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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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라면 연수원부터 수료해야 할 테지만, 지금 같은 경우에는 어쩔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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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과 직원이 종이를 한 장씩 나눠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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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나눠 드린 종이에 발령 받고 싶은 구역을 정자로 적어 주세요. 위에 있는 게 1순위 지망이고 나머지 하나가 2순위 지망입니다. 특정 구역을 콕 집어 고르셔도 되고, 광역 행정 구역을 선택하셔도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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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관 하나가 손을 들고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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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정 구역에 지망이 과도하게 몰리면 어떻게 됩니까? 추첨을 통해서 정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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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과 직원이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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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경우에는 부득이 성적순으로 자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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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채용 시험 최종 성적 말씀하시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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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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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법관들 몇몇도 연이어 질문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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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지망, 2지망을 전부 떨어지면 어떻게 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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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행정 구역별 정원은 어떻게 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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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기는 어디로 가야 찾을 수 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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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선택의 시간이 도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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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입 법관들은 서로서로 시선을 주고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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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오랜 세월 수험 공부에만 몰두했던 이들답게 임기응변에는 하나같이 젬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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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계 최고의 인재들이 선보이는 두뇌전이라기보다는 우왕좌왕하는 미아 집단의 행태에 더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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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보다 못한 인사과 직원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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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정하는 건 어디까지나 임시 발령지입니다. 10년의 시보 기간이 끝나면 다시 한번 근무지를 변경할 테니까 너무 심각하게 고민하실 필요는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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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관 대다수는 안심한 채 서류를 작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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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고득점자들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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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계 중심지 발령이 아른거리는 선두권답게, 더욱 치열한 눈치 싸움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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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몇 점을 맞았고, 몇 등을 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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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서로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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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백파흑진군이, 언제나처럼, 합격자들의 성적과 등수를 도원향 누리집에 공개한 덕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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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득점자들이 가장 신경 쓰는 건 역시나 수석 합격자, 류서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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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원이 한 자리뿐인 구역도 꽤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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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곳을 선택했다가 류서란과 겹치기라도 하면 1지망이 허무하게 날아가는 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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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류서란은 좀처럼 원서를 작성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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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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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기다리고 있는 게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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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실컷 마시고 돌아온 담청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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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 나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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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마시는데 왜 이렇게 오래 걸리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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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기가 구석에 꼭꼭 숨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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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서란과 담청은 고민하지 않고 원서를 작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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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지망은 임6 구역, 2지망은 임계 구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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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과 겹칠 염려가 전혀 없는 장소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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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과 직원이 서류를 수거하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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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무지 배정 결과는 오늘 중으로 연락이 갈 겁니다. 통지서에 기재된 일시까지 발령 받은 근무지로 등청하시면 됩니다. 하나 마나 한 소리겠지만, 무단으로 지각하거나 결근하시면 절대 안됩니다. 시보 기간에는 조금만 잘못해도 임용이 취소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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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관 중 하나가 손을 번쩍 들고 질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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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수원 대체용 영상 강의는 언제부터 들으면 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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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내킬 때부터 들으시면 됩니다. 다만 10년 안에는 전부 수료하셔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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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보 기간 중에 대체 강의 수강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 휴직 기간은 어느 정도나 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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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과 직원이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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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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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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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그렇습니다. 강의는 강의고, 업무는 업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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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강의 수강과 업무를 병행하라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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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나 업무량 많기로 유명한 최고재판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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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아리 법관들은 선백파흑진군의 무자비한 용인술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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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과 직원이 원서의 장수를 세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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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을 보좌할 수행원들은 처음 등청하시는 날, 근무지에서 만나실 수 있을 겁니다. 구성 인원은 호법 셋, 보좌관 셋입니다. 가급적이면 상호 간에 우호적으로 지내십시오. 바꾸고 싶다고 막 바꿀 수 있는 건 아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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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인사과 직원은 서류 뭉치를 챙겨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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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에서 기다리고 있던 안내원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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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돌아가셔도 됩니다. 아, 나가실 때 임시 출입증은 잊지 말고 반납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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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여 있던 법관들은 제각기 자리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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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서란과 담청 또한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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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 출입증을 반납하고 흑단궁을 나서자, 정오의 햇볕이 내리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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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배가 고파진 담청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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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 점심 식사는 어찌할 테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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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왕 밖으로 나온 김에 외식하고 들어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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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꾸나. 그런데 뭘 먹을지가 고민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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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서란은 잠시 주변을 둘러보더니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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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사람들을 따라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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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단궁 관리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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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원래 관청 근처 맛집은 관리들이 잘 알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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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서란과 담청은 관리들의 뒤를 쫓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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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단궁 인근 번화가는 점심 먹으러 나온 관리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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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목적지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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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서란과 담청은 자리에 앉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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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이어 흑단궁 관리들이 식사를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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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갈비탕을 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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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서란은 자연스럽게 손을 들고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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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갈비탕 두 개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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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산 먼저 해 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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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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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서란은 단말기를 들고 계산대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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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남겨진 담청은 식당 내부를 두리번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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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없던 빈자리마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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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무슨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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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여인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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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쪽 다 어디서 들어 본 적 있는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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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의 시선이 입구 쪽을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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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자리가 하나도 없네... 어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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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데 가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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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쉽다. 여기 정말 유명한 집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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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의 두뇌가 맹렬히 작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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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 고파서 성능이 대폭 감소했지만, 가까스로 두 여인의 정체를 떠올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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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접장 앞에서 마주친 울보1, 울보2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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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마침 돌아온 류서란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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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 님, 왜 그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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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 혹시 두 명쯤 동석해도 괜찮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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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딱히 상관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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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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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보1(가칭)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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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석시켜 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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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보2(마찬가지로 가칭)도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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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아요, 여기 갈비탕 정말 먹고 싶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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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서란이 사회인의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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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 뭘요. 같은 법관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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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이 대뜸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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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접장에서는 어찌하여 울었던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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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서란의 팔꿈치가 담청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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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댓말 모드로 전환된 담청이 재차 질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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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접장에서는 어떤 연유로 눈물을 흘리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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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보1과 울보2가 서로를 마주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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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 다 어색한 표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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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다행스럽게도, 불쾌하다기보다는 쑥스러운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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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보1이 대표로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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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그게... 면접을 완전히 망친 줄 알았거든요. 문을 열고 나오는데 꼼짝없이 백 년을 더 공부하게 생겼다 싶었죠. 그런 생각을 하니까 저도 모르게 막 눈물이 나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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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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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시 공부 백 년 연장이라, 정말로 끔찍하군요. 저 또한 절실히 공감하는 바입니다. 그렇고 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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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의 정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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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마침 주문한 갈비탕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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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 모락모락 나는게 굉장히 맛있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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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보2는 호들갑을 떨어서 화제를 돌리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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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것보다 담청의 질문이 훨씬 빨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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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에 계신 분은 무슨 까닭으로 낙루하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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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보2는 떠듬떠듬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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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게... 저도 비슷한 이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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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셨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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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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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다시 어색한 침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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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기심을 충족한 담청은 갈비탕을 음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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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서란은 분위기 전환을 시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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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그래도 결국 두 분 다 합격하셨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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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보1과 울보2도 연이어 호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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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맞아요! 지나고 보면 전부 추억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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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그 일을 계기로 친구도 생겼는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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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서란은 잽싸게 대화의 캐치볼을 이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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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분은 원래부터 아는 사이가 아니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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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보1이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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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면접장에서 처음 본 사이에요. 울면서 서로 위로해 주다가 친해졌죠. 나이대도 비슷하고 대화도 잘 통하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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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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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둘 다 3000살 정도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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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울보1과 울보2를 자세히 관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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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별다른 성과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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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족이 반인반룡의 연령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반인반룡 또한 용족의 연령을 구분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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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그냥 갈비탕이나 먹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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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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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족스러운 식사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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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히 맛집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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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서란-담청 듀오와 헤어진 울보1-울보2 듀오는 소화도 시킬 겸 인근 공원을 거닐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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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보1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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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그 두 사람, 완전 애기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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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0살이랑 680살이면 애기 맞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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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그 나이 때 뭐 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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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보2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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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긴 뭘 해. 여의주 껴안고 수행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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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고 보니 그러네. 근데 요즘 애들 되게 빠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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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니까, 심지어 둘 다 하계 출신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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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보1이 고개를 주억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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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문파 소속이랬었지? 이름이 뭐였더라, 금죽문이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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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런 이름이었지. 아무튼 저렇게 운 좋은 수도문파는 삼천세계를 통틀어도 얼마 안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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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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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울보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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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열심히 공원을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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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바퀴, 두 바퀴, 세 바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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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 바퀴 정도 돌았을 때, 울보2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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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좀 불안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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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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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죽문 말이야. 왠지 곧 망할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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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보2가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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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해? 갑자기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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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승한 지 얼마 안 된 수도문파들은 어쩔 수 없이 승천자한테 의존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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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치, 하계에 있을 때부터 그랬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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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보1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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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죽문이라는 수도문파도 저 둘만 사라지면 바로 망하는 거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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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둘은 괜찮지 않나? 양쪽 다 법관이잖아. 어떤 미친 수도자가 법관을 해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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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죽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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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보2는 그제서야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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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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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렵, 류서란과 담청의 단말기에 이적 제안서가 바닷물처럼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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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랑은 이름난 해결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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떼인 돈 받아드리는 그런 부류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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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전문 분야는 문파 이적 중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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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수가 난잡한 책상을 정리하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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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수사님, 이번 의뢰 대상은 누구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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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가장 유명한 사람이야. 자네도 알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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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유명하다면... 혹시 반인반룡 류 법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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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랑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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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맞아. 거대문파 측에서 의뢰가 들어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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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문파에서요?! 그러면 완전 특급 의뢰잖아요! 제가 지금 당장 이적 제안서 작성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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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됐어 됐어. 이적 제안서 같은 건 무의미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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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수(경력 3개월)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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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적 제안서 안 써요? 여태까지 항상 그렇게 일하셨잖아요. 단말기 번호 알아내고, 이적 제안서 보내고, 만나서 협상하고, 계약서에 도장 찍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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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에는 약간 다른 방식으로 접근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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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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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랑이 탁상용 단말기를 들여다보며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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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 법관이 지금 좀 유명해? 모르긴 몰라도 눈 한 번 감았다 뜨면 이적 제안서가 백 개씩 불어날 테지.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보낸 이적 제안서가 눈에 띄기나 하겠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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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긴, 듣고 보니 그렇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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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류 법관 단말기로 이적 제안서 보내는 녀석들은 죄다 얼치기야. 중개 경력이 짧아서 거물과 접촉하는 절차를 모르는 거지. 아니면 그냥 사기꾼이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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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수가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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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기꾼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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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 상대가 어수룩하길 바라는 거지. 평생 법관 고시만 준비한 어린애잖아. 발송자 명의만 변경한 이적 제안서를 무더기로 보내고 하나만 걸려라 하는 거지. 상대가 운 좋게 관심을 보이면 말로 잘 구슬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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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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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대랑이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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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말도 안되는 조건을 들이밀고는 어디 가서 이런 대우 못 받는다며 계속 어르는 거지. 거기에 속아서 도장 찍으면 곧장 인생 꼬이는 거야. 나중에 가서 눈탱이 맞았다는 걸 깨달아도, 뭐 어쩌겠어. 중개인은 이미 수수료 챙겨서 사라졌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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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아니, 법관한테 사기를 친다고요? 목숨을 뭐 다섯 개 정도 들고 다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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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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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약 조건이 어떻든 최종 결정은 결국 본인이 한 거잖아. 도의적인 문제가 있을지언정 법률적인 문제는 하나도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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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수가 씩씩거리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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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도 본때를 보여 줘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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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슨 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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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사기죄로 고소한다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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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랑이 피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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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구를 고소할래? 말도 안되는 계약 조건을 내건 의뢰인? 아니면 그 조건을 그대로 제시한 중개인? 하나 골라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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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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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 중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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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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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 중개인. 기망 행위는 어떻게 입증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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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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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수는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끝에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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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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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각 났어요! 어디 가서 이런 대우 절대로 못 받는다고 했던 그 부분! 바로 그 부분을 지적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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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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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도 안되는 조건을 제시하면서 그런 소리를 했으니까 기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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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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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랑이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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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정도 가지고는 거의 불가능해. 거래상 유리함을 위한 협상 전략으로 볼 여지가 있거든. 만약 그 정도로 기망 행위가 성립한다면 선계에 범죄자가 아닌 사람은 없을 걸? 이거 밑지고 파는 거라 말하는 상인들도 몽땅 잡아 넣어야 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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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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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와, 진짜 열받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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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래서 도장 함부로 찍지 말라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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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수는 자기 자리에 앉은 채 고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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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떻게 하면 가상의 사기꾼을 감옥에 집어넣을 수 있을지에 관한 고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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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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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수가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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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 수사님, 그런데 법관들이 어떻게 사기를 당해요? 대화 몇 마디면 상대가 거짓말을 하는지 아닌지 바로 알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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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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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서 이적 제안서를 단말기로 보내는 거야. 직접 만나서 얘기하자고 하면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얼버무릴 걸? 어차피 손해 볼 것도 없으니까. 속으면 좋고 아니면 마는 거지.”
|
||||
|
||||
“그야말로 기가 막히네요. 하늘은 대체 뭐 하나, 사기꾼들 안 잡아가고? 그런데 오 수사님, 아까부터 계속 뭐 하고 계시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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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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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대랑이 여상하게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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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 법관 인적 사항 조사하는 중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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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수는 급격한 흥미를 느끼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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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뒷조사요? 그, 그거 불법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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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일 날 소리를... 이거 합법적인 조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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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요? 그러면 어떻게 하는 건지 저도 좀 알려 주시면 안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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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랑은 한숨을 푹 쉬며 옆으로 살짝 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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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수는 잽싸게 자기 의자를 가지고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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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통 둘이 나란히 탁상형 단말기를 들여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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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랑이 열람 중인 문서를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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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법관 고시 합격자 정보야. 합격자 이름, 연령, 최종 성적 및 등수, 소속 문파 같은 정보들이 기재되어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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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네요. 류서란, 682세... 저랑 몇 살 차이도 안 나는데 벌써 태성기 수사예요. 저는 아직도 원영기 수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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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선은 결국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야. 쓸데없이 남과 비교할 필요 없어. 그리고 지금 중요한 건 나이가 아니라 소속 문파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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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수가 화면을 바라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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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죽문이라... 난생처음 듣는 이름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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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하지, 류 법관 승천자 출신이잖아. 기사 같은 것도 좀 찾아 읽고 그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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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반인반룡이라는 건 알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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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랑은 정말 장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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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류 법관은 선계 태생이 아니라서 세간에 알려진 정보가 거의 없어. 이럴 때는 소속 문파에 관한 정보부터 모으는 게 효과적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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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오... 그런데 금죽문에 대해서는 어떻게 조사하실 건가요? 우리가 아는 거라곤 이름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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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방법이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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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랑은 새로운 문서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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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42회 신규 법관 발령 공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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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서란의 근무지는 임6 구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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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수가 잔뜩 흥분한 채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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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러네요! 이미 소속된 문파가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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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석 합격자가 선계 중심지도 아니고 저런 변방을 선택할 이유는 달리 없지. 그런데 특이한 점이 하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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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뭔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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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랑이 문서 어딘가를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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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봐. 합격자 담청, 근무지는 임6 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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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 법관이랑 같은 곳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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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소속 문파 이름도 똑같아. 이 넓은 선계에 금죽문이라는 이름의 문파가 하나는 아닐 테지만, 뭔가 굉장히 공교롭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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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수는 명탐정 같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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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수상하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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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생각해 봐도 둘 다 같은 문파 소속이라고 보는 게 합리적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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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가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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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랑은 또다시 새 문서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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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임6 구역 천라지망 민원 창구에 접속해서 등기 장부 열람 신청을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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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찾으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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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았지, 여기를 한 번 봐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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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수는 시키는 대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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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죽문... 금죽문... 아, 여기 있네요. 극광제도라는 곳에 정착했군요. 무주지 점유 신고를 한 건 삼십여 년 전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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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격 수기에 적혀 있던 그대로야. 그리고 다음, 임6 구역의 기상 관측 기록 최근 30년 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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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 여파 감지, 태성기 수준으로 추정. 7년 전? 이건 진짜 최근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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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랑이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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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각에는 이게 류 법관의 여의주 의식인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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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여의주 의식이면 비승은 어떻게 한 거예요? 용족은 여의주를 완성해야지만 승천할 수 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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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하계에서는 인간 수도자의 방식으로 경지를 올린 거 아닐까 싶네. 자질이 비슷하다는 가정하에 고위계에 도달할 때까지 걸리는 시간은 인간 수도자 방식이 훨씬 짧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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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수가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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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되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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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야 모르지, 반인반룡이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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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인간 수도자로서 승천하고, 용족 수도자로서 태성기에 도달했다는 건가요? 여의주 의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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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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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내 생각은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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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에 그 추측이 맞다면, 왜 굳이 익숙한 방식을 버리고 용족 방식으로 갈아탔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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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운무기 공법을 살 돈이 없었나? 용족은 태성기에 도달할 때까지 공법이 필요 없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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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수가 예리한 표정으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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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용족 태성기 공법이 필요해져서 법관 고시에 응시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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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보면 앞뒤가 딱 맞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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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수사님, 혹시 천재 아니에요? 이런 정보는 어떻게 다 아시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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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찬을 들은 오대랑은 기분이 좋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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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예전에 관원 생활을 좀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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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원영기 수사일 때 말씀하시는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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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맞아. 나는 사영근자였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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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영근자, 오영근자는 평범한 수행으로는 수명이 다 할 때까지 운무기에 도달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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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대부분 관직에 종사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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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쌓은 공헌도를 수행을 증진시켜 줄 보물과 교환하기 위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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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수가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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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관리 생활을 통해 운무기에 도달하신 거예요? 와, 공헌도 모으기 엄청 힘들다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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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건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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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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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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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헌도 쌓이는 꼴을 보아하니 일하다가 늙어 죽겠더라고. 그래서 관직 때려치우고 해결사가 됐어. 어차피 원영기로 죽을 거 돈이나 벌자는 심보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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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운무기는 어떻게 되셨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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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쪽 일이 생각보다 적성에 잘 맞았거든. 이적 중개 수수료 모아서 단약을 왕창 사 먹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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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수는 갑자기 이 바닥에 뼈를 묻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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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 또한 사영근자였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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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수가 힘차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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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의뢰를 해결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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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천라지망에서 류 법관 관련 기사 좀 찾아 줄래? 나는 합격 수기에 적혀 있던 영백도에 대해서 좀 알아 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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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넵,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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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은 각자의 단말기를 들여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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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사무실이 침묵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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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조수가 비명을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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깜짝 놀란 오대랑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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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뭐야! 왜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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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 법관 진짜 나이가 682살이 아니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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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나도 보여 줘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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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수가 허둥지둥 단말기를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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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보라는 기사는 안 찾아보고 수선 교류회 법관 고시 게시판 같은 걸 들여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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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오대랑은 잔소리할 겨를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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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류서란이랑 같은 문파 소속인데, 류서란 진짜 나이 682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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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눌러 볼 수가 없는 제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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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죽문은 사실상 류서란 원맨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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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머지가 못난 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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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류서란이 너무 잘났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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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뇌부 또한 이 점을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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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말로 류서란 없는 금죽문은 용신 없는 어인족이나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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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을 안 할래야 안 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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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거리는 크게 두 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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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서란이 죽거나, 다른 거대문파로 이적하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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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쪽이든 금죽문은 몰락할 게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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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서란과 담청의 합격이 확실시 되었을 무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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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부터 수뇌부는 이 문제에 대해서 논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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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죽문의 사활이 걸린 중대한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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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적 문제에 대해서는 걱정할 필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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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서란을 다 잡은 물고기 취급하는 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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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적인 측면과 이성적인 측면을 모두 고려한 ‘류잘알’ 호혜문 선생님의 분석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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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혜문의 의견은 다음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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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 수사님께서 다른 거대문파로 이적하실 가능성은 전무하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최소한 자발적으로는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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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뇌부 중 한 명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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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 수사, 그렇게 생각하시는 이유가 뭡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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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류 수사님은 성격 자체가 무던하신 분입니다. 사치나 향락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수행에만 전념하시죠. 관심사라고 해 봐야 인형술이나 지인 모임, 창작 활동 정도가 전부입니다. 한마디로 재물이나 권세 같은 세속적인 급부로는 쉽사리 매혹할 수 없다는 뜻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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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긴, 그런 쪽으로는 유달리 관심이 없으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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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혜문은 차분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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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그나마 생각해 볼 수 있는 수단은 수행 자원을 대가로 제시하는 겁니다. 선골이 생기는 선약이나 절세 공법 같은, 그런 귀물을 말이죠. 그런데 솔직히 이쪽도 가망은 거의 없습니다. 류 수사님께서는 도리에 어긋나는 행동을 엄청 꺼리시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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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 님께 여의주를 돌려 드렸던 것처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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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습니다. 게다가 류 수사님께서는 더할 나위 없이 출중한 재능마저 지니고 계시죠. 100살도 안된 나이에 벌써 태성기에 도달하시지 않았습니까. 진선경에 도달하는 건 기정사실인 셈이죠. 선골이나 절세의 공법이 없다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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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뇌부 한 명이 말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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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그만이라는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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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습니다. 류 수사님 입장에서는 선골이든, 절세의 공법이든 큰 의미가 없습니다. 게다가 영생자이시지 않습니까. 어차피 도달할 목적지, 조금 더 빨리 가겠다고 여태까지 쌓아 온 인연을 저버리실 이유가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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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이적 문제로는 안심해도 되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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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혜문이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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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가 정성을 다해 섬기는 한, 류 수사님께서는 언제까지고 금죽문 소속이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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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뇌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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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혜문의 견해는 지극히 합리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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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당사자인 류서란과의 우애도 돈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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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다 더 설득력 있기는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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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자발적인 이적에 대한 염려는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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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아직도 위험 요소는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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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자발적 이적과 암살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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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뇌부는 대책 논의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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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치는 어떤가요? 류 수사님과 가까운 사람을 인질로 삼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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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 수사님께서 인질범의 요구에 휘둘리실 것 같지는 않군요. 피의 복수를 하면 했지. 게다가 법관을 상대로 인질극을 하는 건 현명한 선택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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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애초에 비자발적으로 류 수사님의 소속을 변경해도 얻을 게 없습니다. 절대 협조하지 않으실 겁니다. 우리가 걱정해야 할 건 암살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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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암살이라... 확실히 일리가 있군요. 682살 태성기 수사는 몰라도 97세 태성기 수사는 암살 대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아니, 애초에 682살 태성기라는 것 자체도 충분히 위험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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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 수사님 본인을 납치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다음 경지는 요원한데 남은 수명도 얼마 안되는 악인, 그런 수도자에게는 류 수사님이 주인 없는 선과처럼 보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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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도공법의 제물로 사용할 거라는 말씀이시군요. 확실히 일리는 있어요. 독안룡의 사례도 있고, 원래 절박해지면 물불 안 가리는 법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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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를 거치며 의견이 좁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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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관건은 류서란의 진짜 나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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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수를 써서라도 비밀을 유지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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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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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뇌부 중 한 명이 현실적인 한계를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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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를 영원히 통제할 수는 없어요. 일단 막아야 할 입이 너무 많습니다. 금죽문 수도자들 중에 류 수사님의 진짜 나이를 모르는 사람이 있긴 합니까? 선계 태생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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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당연히 없죠. 애초에 인계에 있을 때부터 류 수사님은 그런 쪽으로 유명하셨잖아요. 서대륙 전체를 기준으로도 모르는 수도자가 더 드물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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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속 지금처럼만 하면 되는 거 아닌가요? 단말기 소유는 철저한 허가제, 외출은 원칙적으로 금지, 수도자 집단과 범인 집단의 완전 분리, 외부 수도자 접근 차단. 여태까지 잘해 오지 않았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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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것도 슬슬 한계에 도달했습니다. 내부에서도 불만의 목소리가 적지 않아요. 꿈에도 그리던 선계에 도착하지 않았습니까. 당연히 호기심이 생길 테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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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비승하고 나서 삼십 년 넘게 틀어막은 것도 기적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식으로 무작정 금지해서는 불만을 잠재울 수 없어요. 대안이 필요한 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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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출 제한은 요괴 문제도 있으니 그렇다 치고, 단말기 소유 규제만이라도 완화해 주죠? 절대로 정보를 유출하지 말라는 경고와 함께요. 류 수사님 신변에 문제가 생기면 본인도 위험해질 텐데 입을 함부로 놀리는 바보가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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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멍청함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분명히 문제가 터질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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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금영영이 정말 오랜만에 발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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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예 공개해 버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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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장이 삽시간에 고요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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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선화는 의자째로 금영영과 거리를 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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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은 방금 그 발언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뜻의 보디랭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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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장이 애써 웃으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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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 수사,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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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이 염려하시는 게 뭔지 압니다. 입이 가벼운 누군가가 류 수사님의 나이를 발설하고, 사람들이 그 정보를 믿는 거 아닙니까. 납치든 암살이든 전부 부차적인 문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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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이번에는 안 졸고 잘 들으셨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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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잔을 가볍게 회피한 금영영이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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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설 자체를 방지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애초에 입이 몇 갠데 그걸 다 틀어막나요. 결국 방법은 처음부터 하나뿐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발설된 내용을 안 믿게 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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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 보다 자세하게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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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선수를 치는 겁니다. 그럴 듯한 내용이 섞인 가짜 정보를 여기저기 뿌리는 거죠. 나 류서란이랑 같은 문파 소속인데, 류서란 진짜 나이 682살 아니다. 사실은 1200살이다. 뭐 이런 식으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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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장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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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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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0살이라는 부분만 바꿔서 비슷한 짓을 반복하는 겁니다. 사실은 10000살이라더라. 아니다, 3000살이라더라. 내가 들었는데 682살이 맞다더라. 그런 식으로 허위 정보를 마구 뿌리는 겁니다. 천라지망 대형 교류회에 도배도 하고, 언론 제보도 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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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과잉으로 사람들을 혼란에 빠뜨리겠다는 말씀이시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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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이 오른 금영영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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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도 커지고 말하는 속도 역시 빨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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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그겁니다! 익명의 제보자가 쏟아져 나오는데 저마다 하는 얘기가 다른 겁니다. 나중에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진실을 파악하기 위해 노력하던 사람들도 점차 지칠 겁니다. 그리고는 자기가 믿고 싶은 대로 믿기 시작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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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오, 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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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되면 금죽문의 누군가가 진실을 발설하든 말든 상관이나 있겠습니까? 어차피 다들 관심도 없는데 말이죠. 어차피 류 수사님은 선계 태생도 아니잖아요. 결국 증거라고는 익명의 제보뿐, 그 누구도 진실에 다가갈 수 없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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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듣고 있던 누군가가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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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안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용족은 발설자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알 수 있을 텐데, 허위 정보가 전부 무의미해지는 거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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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용안도 만능은 아닙니다. 용안의 권능은 진리가 아니라 믿음에 관한 겁니다. 대상이 잘못된 정보를 진짜라고 믿은 채 발언했다면 진실 판정이 나옵니다. 그래서 재판 과정에나 쓰이는 겁니다. 안 그랬으면 수학 난제 같은 걸 물어봤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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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족 입장에서는 발설자가 진실을 잘못 알고 있는 걸로 치부할 수도 있다는 겁니까? 그건 지나치게 낙관적인 전망이 아닐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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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금영영은 다 계획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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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족이 발설자의 정보를 종합해 진실에 도달한다고 해도 상관없습니다. 그 용족의 발언을 신뢰할 수 있는지는 또 별개의 문제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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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참, 용족에게는 용안이 통하지 않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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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습니다, 용족인 탓에 자기 발언의 진위 여부를 증명할 수 없는 겁니다. 그때 우리가 나서는 거죠. 용족들이 어린 천재를 질투해서 모함하는 거라고. 아니면 반인반룡이기 때문에 차별한다는 식으로 몰아가도 괜찮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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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씨 혈족들은 전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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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발상은 천라지망의 망령이 되어서 인간성을 상실한 반동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잠들어 있던 금씨 혈통의 찬란함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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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게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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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금죽문에 통신부가 신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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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금영영은 단번에 통신부장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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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락출세도 이런 벼락출세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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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이렇게 살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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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조 금영영은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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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년 100세, 느지막이 일어나 브런치나 먹던 부끄러움 많은 생애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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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건 통신부의 금 부장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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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영영이 출근하자 부하들의 인사가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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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셨습니까, 부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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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아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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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금 부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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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장님이라니, 참으로 좋은 울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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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영영은 부장실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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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상 위에는 따듯한 차가 준비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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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알맞은 온도, 보좌관이 금영영의 출근 시간에 맞춰 준비해 놓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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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영영이 업무를 시작하자마자 부하 직원들이 보고서를 들고 몰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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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장님, 여론 몰이 담당 직원들은 어떻게 교육시킬 예정이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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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같은 건 필요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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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하, 하지만 어휘력이나 전달력 같은 건 가르쳐야 하지 않을까요? 신규 직원들의 글은 너무 엉망진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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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영영은 현기 어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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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획일적인 교육은 부자연스러움을 유발할 뿐이야. 잘 써도 좋고, 못 써도 좋다. 참담한 어휘력, 전달력 부족, 문법 오류, 박살난 논리까지, 전부 향신료지. 우리 글을 더욱 자연스럽게 만들어 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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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교육 없이 검수 과정만 거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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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수 과정도 필요 없어. 요점이 뭔지도 모르는 채 중구난방 떠드는 게 우리 목적을 이루기에는 훨씬 효과적이지. 다른 사람들을 속 터지게 만드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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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직원이 들어와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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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 투서의 초안, 서른다섯 개 모두 완성했습니다. 이대로 주요 언론에 제보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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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언론은 안돼. 그런 곳은 이런 익명 투서 따위로는 결코 움직이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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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그러면 어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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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영영은 꽃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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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류 언론에 제보해. 직원 숫자가 두 자릿수인 그런 곳 말이야. 최근 가장 화제가 되는 인물이 류 수사님이잖아. 법관 고시 약발 떨어지기 전에 조회수 하나라도 더 뽑아 먹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을 거야. 사실 확인 같은 건 절대로 안 할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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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렇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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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류 언론들이 너도나도 떠들어대기 시작하면 경기는 끝이지. 고상한 척하던 나머지 언론들도 부랴부랴 흐름에 편승할 거다. 요즘 천라지망을 뜨겁게 달군 류 법관 관련 소문들, 뭐 그런 제목으로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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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음 직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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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장님, 통신부 직원들 내부 단속 문제는 어떻게 할까요? 수뇌부에서 단말기 소유 규제 완화하면서 정보 통제가 한층 힘들어졌는데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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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유출을 미연에 방지하기는 힘들겠지. 그냥 기밀 유포자만 사후에 체포하도록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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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저희가 조직적으로 여론을 조작했다는 사실이 드러나진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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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영영이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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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도 우리가 먼저 유포하면 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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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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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특정 집단이 조직적으로 류 법관을 음해한다는 정보를 퍼뜨려 버려. 완전 말도 안되는 정보도 덧붙여서 말이야. 뭐, 막후에서 선계를 좌지우지하는 용족 비밀 결사가 반인반룡을 표적으로 삼았다든가 그런 식으로. 정반대 형태의 음모론도 같이 퍼뜨리는 거 잊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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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부 직원들은 감탄하며 부장실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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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누구도 금영영의 판단을 의심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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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취미도 미친 듯이 하면 업이 되는 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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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영영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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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장님 의자라서 그런지 정말 푹신푹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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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삼 출세했다는 실감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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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영영은 고요한 부장실에 홀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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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에 편안하게 몸을 묻은 채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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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예전처럼 졸음이 몰려오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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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는 너무나도 명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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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영영의 가슴 속에 존재하는 심장은 잠들기에는 너무나 빠르게 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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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기분은 난생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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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영영은 살며시 미소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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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소 너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서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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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은 것과 해야 할 것의 진정한 합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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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할 때마다 너는 항상 이런 심정이었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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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금영영에게 속삭이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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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바로 이 순간을 위해서 태어났던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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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실히 공감하는 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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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을 정도로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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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렵, 서란과 담청은 등청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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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만) 기다리고 기다리던 첫 출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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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지는 임6 구역 중심지에 위치한 법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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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 도중, 담청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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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매일 이 먼 거리를 오가야 하는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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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가 멀어요, 이 정도면 코앞이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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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사직하고 싶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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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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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관의 의무근무기간은 100년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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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두는 것도 내 마음대로 못하는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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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명경벽회공 값이라고 생각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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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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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대체 강의를 미이수하면 어떻게 되는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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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네요. 머리 뚜껑 열어서 수명경벽회공을 회수해 가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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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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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벌레와 월요병 환자는 마침내 법원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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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부에서는 잠시 헤어져서 각자의 사무실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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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여섯 명의 수행원과 만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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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성은 호법 세 명, 보좌관 세 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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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랍게도 호법 전원이 용족 태성기 수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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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각의 명칭은 대호법, 좌호법, 우호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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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관의 신변을 보호하는 게 그들의 임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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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끔한 인상의 용족 여성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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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류 법관님. 제 이름은 손달입니다. 편하게 손 호법이라고 불러 주세요. 이쪽은 좌호법, 그리고 저쪽이 우호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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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서 반가워요, 손 호법, 다른 분들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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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호법과 좌호법, 보좌관 셋도 자기소개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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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부 여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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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법관의 성별에 맞춘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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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호법 손달이 서란에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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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정해 주셔야 할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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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뭔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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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의 거취 문제입니다. 원칙적으로, 수행원과 법관은 온종일 함께 해야만 합니다. 신변 보호와 업무 보조를 위해서죠. 하지만 원하신다면 다른 방법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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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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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면 어떤 방식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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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에 계실 때만 저희와 함께하셔도 됩니다. 퇴청하신 다음에는 해산하고요. 류 법관님과 저희들, 모두 각자의 거처로 돌아가는 거죠. 어떤 방식이 편하실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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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청 이후에도 쭉 함께 하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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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할 필요조차 없는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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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관 수행원단의 구성은 용족 태성기 수사 3명, 그리고 인간 원영기 수사 3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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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하게만 계산해도 금죽문 전체와 맞먹거나 상회하는 수준의 전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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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달이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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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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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수면 문제는 어떻게 하실 건가요? 호법 세 분은 용족이시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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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대로 눈을 붙이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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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법복으로 갈아입고 담청과 합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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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쪽 수행원단도 이쪽과 대동소이한 구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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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곳에 14명이나 모여 있으니 북적북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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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이 헐렁한 소매를 휘두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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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 우리 이제 뭐 하면 되는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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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약식 재판 절차에 대해서 배운대요. 영상 강의만으로는 실무 경험을 쌓을 수 없으니까요. 이 과정이 끝나면 순회 재판소 쪽 업무를 담당하게 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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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부터 재판이라고? 영 자신이 없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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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교육실로 향하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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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회 재판은 대부분 소소한 사건들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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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런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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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요, 암만 인력이 부족해도 최고재판소가 시보 기간인 법관한테 중대 사건을 맡기진 않죠. 그리고 보좌관 분들도 도와주실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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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과 담청은 교육실로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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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적 중개 전문 해결사, 오대랑과 그의 조수는 열심히 차를 마시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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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에도 장소는 해결사 사무소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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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6 구역 법원 근처에 위치한 찻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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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차만 열 잔 넘게 마신 조수가 푸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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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수사님, 우리 언제까지 차 마셔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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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 법관 퇴청할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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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호한 거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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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랑은 새로운 차를 주문하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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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결사한테 가장 중요한 덕목이 인내심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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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래도 좀 심하잖아요. 저 민들레차 벌써 열세 잔째예요. 하도 많이 마셨더니 이제는 향만 맡아도 속이 울렁거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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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처럼 다른 차 마시면 되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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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수는 반쯤 남은 찻잔을 멀리 치우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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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죽문, 지나치게 폐쇄적이지 않아요? 특히 그 올빼미 인형들, 우리가 극광제도에 접근하자마자 벌떼처럼 몰려들었잖아요. 저 그거 보고 진짜 심장 마비 올 뻔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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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문파인가 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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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보통 그 정도까지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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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수는 이후에도 한참을 투덜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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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조사했는데 뭐 하나 나오는 게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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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잠복 근무 비슷한 짓까지 하면서 이렇게 생고생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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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오대랑이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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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왔다, 류 법관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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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 예? 어, 정말이네? 바로 접촉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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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일단은 지켜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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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랑과 조수의 의식 영역이 확장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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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지나치게 접근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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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지 차이 때문에 아차 하면 발각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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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과 담청, 수행원단이 법원 부지를 벗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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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성기 수사가 동격의 수도자를 무려 셋이나 수행원으로 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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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관의 사회적 지위가 드러나는 대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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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수도자가 서란 일행에게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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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법 중 한 명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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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자는 포기하지 않고 뭐라 뭐라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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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수가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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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사람이 뭐라고 하는지 들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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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쪽도 이적 중개인인가 봐. 휘황찬란한 계약 조건을 들이밀고 있어. 절세의 공법, 준선경 수도자의 수제자가 될 기회, 산더미 같은 영석. 뻔하지만 거부하기 힘든 대가만 제시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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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그러면 어쩌죠? 우리 쪽 의뢰인이 제시한 거랑은 비교도 안 되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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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랑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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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 법관이 이적 제안을 거절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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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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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잠깐도 고민을 안 하더라. 자기는 여기까지 혼자 오지 않았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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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수가 다 식은 민들레차를 들이켜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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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우리 의뢰는 볼 것도 없이 실패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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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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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왜라뇨, 당연한 거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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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는 서란 일행을 보며 오대랑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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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네는 돈주머니의 크기만으로 이적 여부가 결정되면 우리 같은 이적 중개 해결사가 도대체 왜 필요하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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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방법이 있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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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보기 전에는 모르지. 일단 의뢰인한테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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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랑은 조수와 함께 찻집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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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간, 서란은 무수한 이적 제안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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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때마다 비슷한 말로 거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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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은 금죽문을 떠나고 싶은 생각이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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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문은 삽시간에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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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 법관이 소속 문파와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이적 제안을 거절했다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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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서란의 신의를 칭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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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적 제안은 여전히 계속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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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계약 조건만 더 좋아졌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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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이래도 안 넘어와?’라고 묻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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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기야 이런 제안까지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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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적 중개인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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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죽문 전체를 인수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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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이적을 조건으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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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류 법관님께서 계약서에 서명만 하시면 됩니다. 그 즉시 금죽문 수도자 전원의 소속이 변경될 겁니다. 모든 수도자가 꿈꾸는 거대문파의 일원이 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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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이적 계약서를 건네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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꼼꼼히 읽어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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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 조건 자체는 확실히 좋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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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다 읽은 계약서를 중개인에게 돌려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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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서명은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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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 조건이 문제가 아니었던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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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그냥 이적 자체가 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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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문파 소속이 되면 당연히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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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치는 수행 자원과 절세의 공법, 비전 단약, 우수한 법술, 가르침을 전수해 줄 스승 등 부족한 것 하나 없이 지낼 수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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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포기해야만 하는 것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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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주도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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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문파의 수장은 준선경 혹은 진선경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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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한기나 광홍기의 숫자도 적지 않을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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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아래 태성기 정도는 발에 채일 정도로 굴러다닐 게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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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필연적으로 거대문파의 결정에 끌려다닐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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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죽문 전체가 함께한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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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극복할 수 있는 체급 차이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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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바로 그 부분이 마음에 안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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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 꼬리 대신 뱀 머리로 남겠다는 게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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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착 뱀을 잘 길러서 용으로 만들겠다는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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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자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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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금죽문에는 숨겨야 할 비밀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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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의 특이성은 물론이고, 담청의 향로 법보나 등백월의 내력 등이 그 예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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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상황에서 거대문파와 인수 합병을 추진하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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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인수 합병 제안을 거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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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일행과 함께 법원으로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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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적 중개인들도 관청까지 따라오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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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과 담청은 환복하고 업무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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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에는 법관 업무 지침서를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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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0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차곡차곡 쌓인 덕분인지 살인적인 분량을 자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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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보 기간 동안 이걸 전부 숙지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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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공부하다 보니 정오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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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은 법원 구내 식당에서 먹을 예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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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떡갈비 나온다고 담청이 기대를 많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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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좌관 여섯과 호법 넷은 외부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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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 입맛대로 사 먹으러 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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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호 원칙에 따라 양쪽 다 대호법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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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의 대호법은 말수가 적은 여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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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에 서란의 대호법, 손달은 사교적인 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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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이나 지났다고, 그녀는 벌써 담청과 친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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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은 떡갈비를 먹으며 연신 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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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달은 경청과 호응, 질문을 반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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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개구리를 화제로 저렇게 오래 얘기하는 것도 재주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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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를 마친 일행은 자유 시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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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은 낮잠을 자겠다며 자기 사무실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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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 같은 경우는 자투리 시간을 활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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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호법 손달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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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지금 공부하시는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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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연수원 대체 영상 강의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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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 열심히 하시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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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지나가는 말로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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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찰관이 되고 싶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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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단말기에 통신 엽서가 한 장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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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영영 : 이 몸, 천재! (^o^)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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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보낸 건지 봤더니 금영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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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도 한 장 동봉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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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만 색안경을 쓴 채, 중역 의자에 거만한 자세로 앉아 있는 금영영 본인의 사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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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한 내용은 적혀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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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무슨 의미인지는 대충 파악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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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부 주도의 연막 작전 얘기가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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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문뜩 불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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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두방정 떠는 금영영을 보니 더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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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만남으로부터 어언 80년, 서란과 금영영은 서로에 대해 너무나 잘 아는 사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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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서란은 불안함을 애써 억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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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영영은 비로소 새 삶을 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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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에 초를 치고 싶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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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림 문자나 하나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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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 (Oo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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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믿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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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인 금영영을, 통신부를, 그리고 수뇌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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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없이 그저 믿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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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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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요즘 지나치게 바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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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관 업무와 연수원 대체 강의 수강, 추가로 자기 수행까지 병행하고 있는 판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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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따가 오후에는 재판 과정도 견학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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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두 개였으면 싶은 순간의 연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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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죽문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관해서는 신경 쓸 겨를조차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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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조력자들을 신뢰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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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강의를 재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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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퇴청 시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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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과 담청, 수행원단은 법원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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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일남 일녀가 일행 쪽으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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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재빨리 선수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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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적, 곤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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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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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적 제안 때문에 그러는 게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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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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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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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굉장히 머쓱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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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이적 중개인들에게 잔뜩 시달린 여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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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5초만 시간을 되돌리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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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사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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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합니다, 이적 중개인인 줄 알고 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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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적 중개인은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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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럴 줄 알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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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재빨리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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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하지만 이적 문제로 찾아뵌 건 아닙니다. 정말로요. 제 용건은 동맹 관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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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맹? 문파 간 동맹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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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피풍사문의 사 문주님께서 제 의뢰인이십니다. 혹시 들어 보셨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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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들어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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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의 시선이 담청을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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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쪽도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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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 못한 손달이 서란에게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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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수사님께서는 은한기 수사이십니다. 사씨 수도가문, 피풍사문의 최고 어른이시죠. 세간에는 풍속성 법술의 달인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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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한 분이시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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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태까지 한 번도 못 들어 보셨습니까? 임6 구역에 거주하시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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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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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근방에 위치한 수도가문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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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6 구역 중심지 근처는 대부분 피풍사문의 영역입니다. 도원향이 소유한 곳을 제외하면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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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그런데 굉장히 구체적으로 아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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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달이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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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 법관님의 신변을 보호하는 게 제 임무입니다. 이 정도 사전 조사는 필수 사항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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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직스럽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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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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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남자에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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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습니다, 한번 들어나 보죠. 어디서 얘기할까요. 근처에 있는 찻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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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풍사문은 어떠십니까? 사 문주님께서도 류 법관님과의 만남을 고대하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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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바로 출발하죠. 아, 그 전에. 제가 두 분을 뭐라고 부르면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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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오대랑이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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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해결사 오대랑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쪽은 제 조수입니다. 오 수사, 등 수사라고 불러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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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좌관 여섯은 금죽문으로 돌아가고, 나머지는 피풍사문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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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풍사문의 위세는 대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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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이 펼쳐진 광활한 영토, 거인이 지은 듯 웅장한 건물, 그리고 몇 명인지 모를 태성기 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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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색의 은하수를 보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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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접실로 향하던 도중, 담청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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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좀 궁금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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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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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가 궁금하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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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문주는 은한기 수사가 아니더냐. 피풍사문이 어떻게 임6 구역의 노른자위 땅을 차지했는지 의문이다. 이 구역에 준선경 수도자가 없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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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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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의 고개가 서란을 향해 홱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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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 너는 이유를 알고 있는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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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아마 은한기와 준선경, 두 경지 간의 차이가 극히 미미하기 때문일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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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가 적어? 그럴 수가 있는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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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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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맞아요. 예전에 등 수사가 고위계 경지에 대해 설명할 때 그랬었잖아요. 은한기와 준선경을 같은 단계로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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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랑의 조수, 등 수사가 잠깐 움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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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내 자기 얘기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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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이 아리송한 얼굴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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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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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어요. 아무튼, 은한기와 준선경은 양적인 측면으로만 따지면 별 차이가 없대요. 단지 준선경에 도달하면 영생자가 되고, 등선 의식을 치를 자격이 생길 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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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고 보니 같은 단계라고 볼 여지도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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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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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과거, 그 누구도 진선경에 도달하지 못했던 때에는 준선경을 대원만이라고 부르기도 했대요. 궁극의 경지, 즉 수선의 종착지라는 뜻이죠. 아니면 그냥 신선이라고 부르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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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피풍사문이 중심지를 차지한 이유는 사 문주가 임6 구역에서 가장 강하기 때문이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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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그렇지 않을까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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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과 담청의 눈이 동시에 손달을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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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았는지 틀렸는지 알려 달라는 시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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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달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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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예 틀린 말씀은 아닙니다. 사 수사님의 무력이 적지 않은 기여를 했지요. 하지만 이렇게만 설명하면 자칫 오해를 살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짊어진 의무 만큼의 권리를 누리고 있다는 표현이 더 바람직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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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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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 치안 유지 문제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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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습니다. 대요괴 토벌 문제이기도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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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 정도 실력자가 구태여 금죽문과 동맹을 맺을 이유가 있는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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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달은 굉장히 조심스러운 투로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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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그 문제를 함부로 입에 올리는 건 예의가 아닐 것 같군요. 어차피 곧 아시게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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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행은 곧이어 응접실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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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부에는 수도자 한 명이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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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쩐지 문약해 보이는 인상의 사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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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바로 은한기 수사 사율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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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율상은 일행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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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 담청, 그리고 여섯 명의 호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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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바퀴 돈 시선은 다시금 서란을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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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율상은 서란을 응시하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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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수사, 이만 나가 보게. 아, 고맙다는 말부터 해야겠군. 오늘 보여 준 수완은 인상적이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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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입니다, 사 문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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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결사 오대랑은 조수와 함께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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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써 응접실 내부에는 열 명만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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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과 담청, 여섯 명의 호법, 그리고 사율상과 묘령의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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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율상이 건너편 자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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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앉게, 앉게. 자네가 류 법관인 모양이지? 들었던 대로 눈과 뿔이 자주색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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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류서란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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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서 반갑군. 나는 사율상이라고 하네. 자네들도 편하게 앉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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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과 담청은 시키는 대로 자리에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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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법 여섯은 정중히 사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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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는 서란과 담청의 주변에 시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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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율상도 재차 권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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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대신 말을 고르는 듯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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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과 담청은 사율상의 말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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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접실에 침묵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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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사율상이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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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 법관, 자네가 하계 출신이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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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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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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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그렇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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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연유로 그러시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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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율상이 나지막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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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선계가 보기보다 비정한 곳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었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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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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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계는 더없이 비정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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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반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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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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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동시에 분위기가 급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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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법 전원이 서란과 담청의 앞을 가로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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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차하면 몸으로라도 공격을 방어할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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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사율상의 눈을 뚫어져라 직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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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율상 또한 여전히 서란을 응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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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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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명의 호법이 서로 눈짓을 주고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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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진지하게 수명경벽회공 구결이라도 낭송해야 하나 고민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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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솟는 긴장감이 응접실을 가득 메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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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순간, 사율상 뒤편에 시립해 있던 여인이 조곤조곤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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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주님, 그렇게 앞뒤를 자르고 말씀하시면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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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또 그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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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그러셨습니다. 손님들께서 경계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꼭 해코지하겠다는 말처럼 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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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율상은 난처하다는 듯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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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오해하게 했다면 미안하군. 나는 말재주가 없어서 말이야. 그런 의도로 한 말은 아니었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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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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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의도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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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호법들은 여전히 경계심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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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용안은 은한기 수사에게 통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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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여기에는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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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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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호법,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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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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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문주님께서도 나쁜 의도는 없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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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법들은 천천히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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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위기가 일단락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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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율상은 내심 안도하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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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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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도 오해가 풀린 것 같군. 이래서 내가 용족을 좋아한다네. 내 부족한 말주변으로도 그럭저럭 진심이 전해지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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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율상 뒤편의 여인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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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주님, 차라리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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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가 생각하기에도 그게 좋을 것 같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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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류 법관님께서만 괜찮으시다면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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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동의하자 사율상은 곧장 용건을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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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죽문과 동맹을 맺고 싶네. 기간은 대략 2만 년 정도, 그 동안 인재 교류를 통해 선계의 연기술과 연단술을 공유해 주는 건 어떤가. 아, 자네한테는 별도로 풍속성 법술을 전수해 주지. 원한다면 내 인맥을 소개해 줄 수도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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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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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율상의 제안에 거짓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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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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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후하게 퍼 줘서 걱정이 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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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뭘 요구하려고 저러나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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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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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대가로 무엇을 원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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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미래를 원한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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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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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김없이 묘령의 여인이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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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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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이번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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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더 자세하게 설명해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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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을 고민하던 사율상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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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 법관, 고위계 수행에 대해서는 좀 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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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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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백월은 지금 당장 필요한 부분 이외에는 결코 가르쳐 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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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보면 현명한 전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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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솔직하게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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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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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겠지. 그래도 고위계 명칭이 천체에서 비롯되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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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그 정도는 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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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선은 크게 세 단계로 구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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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저위계는 태생적인 한계를 초월하는 단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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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화 의식을 통해 영물로 거듭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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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족이나 거인족처럼 태생적인 영물들은 이 단계를 건너뛰고 곧장 고위계부터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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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고위계는 내면의 소우주를 완성해 나가는 단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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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경지 명칭도 모두 천체와 관련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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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자가 양적으로 팽창하는 단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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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진선경은 대우주와의 합일을 이루는 단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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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하게도 알려진 바가 거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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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적인 비약을 겪는다는 사실만이 알려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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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율상이 말을 이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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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선계는 흔히 혼원법력을 성운에 빗대고는 하지. 그래서 고위계의 첫 단계를 운무기라고 부르는 것이고. 태성기, 광홍기, 은한기도 마찬가지라네. 각각 항성, 성단, 은하를 상징하거든. 여기까지 이해 안되는 부분은 없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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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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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 이해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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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아, 그러면 마저 설명하지. 잉태 의식이든, 여의주 의식이든 혼원법력을 응집해 영성의 별로 만드는 건 똑같다네. 이 부분은 이해가 쉽지. 성운이 뭉쳐서 항성이 되는 건 직관적이니까. 그런데 아까 광홍기가 뭘 상징한다고 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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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란이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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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단이라고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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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성단. 이 부분은 납득이 좀 안되지 않나? 어떻게 항성의 숫자를 더 늘릴 수 있지? 어떻게 해야 영성의 별을 두 개나 지닐 수 있겠나? 우리는 이미 태성기에 도달하면서 가진 재료를 모두 소진해 버렸는데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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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고 보니 그렇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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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율상이 장난기 어린 얼굴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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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법 자체는 꽤 단순하다네. 완제품을 다시금 재료로 되돌리는 거지. 조금 과격하게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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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성의 별을 다시 부수는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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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잠력 격발의 원리와 유사하지? 그 다음에는 폭증한 혼원법력을 잘 제어해서 복수의 별로 빚어 내기만 하면 된다네. 이 과정을 항성의 생몰에 빗대어 윤회 의식 혹은 순환 의식이라 부르지. 어떤가, 참 쉽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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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란이 쓴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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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패하면 큰일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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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이지. 수명이 반토막 나거나 경지가 퇴보하는 건 다반사고, 즉사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네. 하지만 어차피 류 법관 자네와는 관계 없는 얘기일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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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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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율상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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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몇 살이라고 했었지? 700살? 아니지, 좀 더 어렸던가? 아무튼, 그 어린 나이에 벌써 태성기까지 도달하지 않았나. 준비만 제대로 하면 자네가 순환 의식을 실패할 염려는 없어. 자네가 걱정해야 할 건 오히려 환경적인 요인이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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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변 정세 같은 외부 요소들이로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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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방금 얘기하지 않았나. 선계는 생각보다 훨씬 비정한 곳이라고. 앞서 가면 앞서 갈수록 세상은 더더욱 자네를 가만두지 않을 테지. 그리고 자네는 점점 더 조급해질 거야. 종국에는 나처럼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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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령의 여인이 다급히 만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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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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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영원히 숨길 수는 없는 노릇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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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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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율상은 여상한 태도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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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 법관, 나는 10000년 정도를 더 살 수 있다네. 아참, 혹시 인간 은한기 수사의 수명이 몇 년인지 알고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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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000년이라고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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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있었군. 아무튼, 나는 수선을 시작한 이래로 수명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거의 없다네. 자질이 뛰어난 수도자들이 으레 그러하듯 말이야. 자기 자랑 같지만 내 자질도 꽤 괜찮았거든. 6000살도 안 돼서 은한기에 도달했으니 당연히 신선이 될 줄 알았지. 하지만 16000년이 지난 지금도 준선경은 요원할 뿐이라네. 왜 그럴 것 같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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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조심스레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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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환 의식 도중에 실패하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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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틀렸군. 순환 의식 도중에 한 번이라도 실패했다면 내가 여태까지 살아 있지도 않았겠지. 은한기에 도달하지 못했을 테니까. 나는 아홉 번의 순환 의식을 모두 성공리에 마쳤다네. 다만 경지를 너무 빠르게 올린 것이 문제가 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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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지를 빨리 올리는 게 문제가 될 수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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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율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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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위계에서는 문제가 되지. 순환 의식이라는 건 따지고 보면 폭발을 통해서 억지로 그릇을 넓히는 행위라네. 실패하면 당연히 그릇이 깨져 버리지. 하지만 성공했다고 여파가 전무한 건 아니야. 크든 작든 피해는 끊임없이 누적된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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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사 문주님께서 준선경에 도달하지 못하시는 이유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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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과거의 나는 굉장히 조급했거든. 시시각각 심해지는 주변의 견제 속에서 가문을 보호해야만 했지. 하루라도 빨리 경지를 올려야만 했어. 결과적으로 피붙이들은 지켰지만 더이상 계단을 오를 수 없는 신세가 되었다네. 굳이 비유하자면 금이 잔뜩 간 그릇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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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순간, 서란은 동맹을 제안한 사율상의 의도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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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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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2만 년짜리 동맹인 거군요. 사 문주님의 수명이 다할 때까지 1만 년, 그 이후에는 제가 1만 년. 금죽문의 현재를 보장해 주고 피풍사문의 미래를 보장 받는다. 미래를 원한다는 아까의 말씀은 이런 의미였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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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 말이 맞네, 안전망 비슷한 거지. 우리 피풍사문에는 현재 광홍기 수사가 한 명도 없다네. 1만 년 뒤에는 또 모르지만, 적어도 은한기 수사는 없겠지. 내가 죽으면 피풍사문은 곧장 몰락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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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이 많은 모양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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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율상이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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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이의 등에는 과녁이 달려 있고, 그 과녁은 높이 올라갈수록 더욱 잘 보이는 법이니까. 임6 구역의 모두가 내 등을 노려보고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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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죽문 같은 신진 세력을 제외하면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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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이해력이 좋군. 자네가 어떤 이적 중개인한테 그랬다지? 나는 여기까지 혼자 오지 않았다고. 처음 전해 들었을 때는 꽤나 인상 깊었다네. 그래서 동맹을 제안하기로 결심했지. 함께 하고 싶어졌거든. 류 법관, 자네는 어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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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할 것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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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죽문과 피풍사문은 동맹 관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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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맹 체결 과정이라고 해 봐야 서란과 사율상의 구두 약속뿐이었지만 상관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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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 다 그 정도 재량권은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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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늦은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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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공증은 내일 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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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청의 모든 부서가 24시간 돌아가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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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 일행은 저녁을 얻어 먹은 뒤 복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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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가하는 도중, 서란은 수뇌부에게 피풍사문과의 동맹에 대해서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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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일 없으면 내일 아침까지는 승인될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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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택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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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은 대호법 등에 업혀서 방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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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먹을 때부터 꾸벅꾸벅 졸기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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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나 피곤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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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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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달이 네 개나 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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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광과 극광이 한데 어우러져 군도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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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영 애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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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강의는 내일 들어야 할 듯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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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수련실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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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등백월과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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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정에 서서 밤하늘의 달을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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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바쁘다 보니 얼굴 본 지가 오래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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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백월이 평탄한 어조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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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나 간만에 뵙는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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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어 달 정도 됐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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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긴, 요즘 많이 바쁘시더군요. 저도 그랬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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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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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채지심 수행은 잘 되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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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조롭습니다. 이미 한 번 지나친 길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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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도 온전치 못하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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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백월의 눈매가 초승달처럼 휘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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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선과 관련된 감각은 기억과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한 번 숙달되면 쉽사리 잊어버리지 않습니다. 굳이 비유하자면 젓가락질 같은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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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등백월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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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안은 여전히 잠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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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원향 총타에서 마주친 준선경 수도자에게도 불완전하게나마 통했던 권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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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등백월에게 만큼은 효과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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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다른 궁금증이나 해결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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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은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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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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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환 의식에 관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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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백월은 습관적으로 턱을 만지작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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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환 의식이라... 아, 윤회 의식을 말씀하시는 거군요. 어디서 들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류 수사님께 광홍기는 다소 이르지 않을까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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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지금 당장 순환 의식을 거행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냥 의식의 여파가 궁금할 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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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파? 의식 도중에 실패한 수도자들의 말로가 궁금하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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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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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뇨, 경지를 지나치게 빨리 올렸을 때 어떤 문제가 생기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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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율상에게는 물어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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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분명 배려 없는 행동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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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한때 진선경 목전까지 도달했었던 등 진군에게는 상관없는 질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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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백월의 미소가 한층 짙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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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점이 궁금하셨군요. 뭐, 이 정도는 지금 알려 드려도 되겠죠. 대단한 비밀도 아니고. 그건 혼백의 손상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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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백의 손상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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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그렇습니다. 충분히 제어되지 못한 힘이 스스로를 해치는 겁니다. 홍수로 인해서 제방이 무너지는 것처럼 말이죠. 의식에 실패하는 게 바로 이런 경우입니다. 운이 좋으면 반죽음이죠. 대다수는 그냥 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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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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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하게 제어한다면 어떻게 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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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이론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애초에 자기 역량을 벗어난 힘이에요. 결국 관건은 완전히 실패하느냐, 불완전하게나마 성공하느냐 둘 중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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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불완전하게나마 성공하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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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백월이 여상한 태도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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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월을 향해 한 걸음 나아가는 겁니다. 손상된 혼백을 끌어안은 채 말이죠. 다행스럽게도 미약한 손상 정도는 세월이 흐르면 회복됩니다. 요양하다가 상태가 호전되면 또다시 의식을 치르는 식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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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과정을 아홉 번이나 거치는 겁니까? 혼백이 손상된 정도와 남은 수명을 저울질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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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뇨, 은한기에 도달할 때까지 거쳐야 하는 의식 횟수는 수도자의 자질에 따라서 다릅니다. 그래도 아홉 번이면 준수한 편이군요. 이론상으로는 최대 열네 번까지도 걸리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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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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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각하게 손상된 혼백을 치료하는 방법이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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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료요? 어느 정도 수준의 손상을 말씀하시는 건지 모르겠지만 거의 불가능하다고 보시면 됩니다. 자연 치유력이 감당할 수 있는 임계점을 벗어나면 반대로 붕괴하기 시작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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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와닿지 않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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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백월이 놀랍다는 듯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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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십니까? 굉장히 의외로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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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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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백이 심각하게 손상된 이의 최후를 눈앞에서 지켜 보셨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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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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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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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하계에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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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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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순간, 서란은 누군가의 얼굴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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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고 있는 건지 구분조차 안되던 무뚝뚝한 외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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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에 더없이 유쾌했던 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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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에게 자신의 여의주를 양도하고 명계의 입구로 사라져 버린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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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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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대 용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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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그리고 담청 님의 경우도 비슷하죠. 독안룡과 싸우면서 스스로 영성의 별을 부수셨으니까요. 불완전한 태성기여서 천만다행이었죠. 후유증이 천기를 읽는 능력과 뿔 하나로 그쳤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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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만약에 승천하고서 그랬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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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백월이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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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잠력을 격발한 것 치고는 굉장히 운이 좋으셨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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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괜찮은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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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을 겁니다. 용족 보양용 탕약을 장복하셨고, 향로 법보도 사용하셨으니까요. 여태 멀쩡히 살아 계시는 게 그 증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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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진심으로 반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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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심 외상성 심마도 진단 못하고 2만 년 된 케케묵은 처방이나 하는 돌팔이라며 욕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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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등백월의 시의적절한 처방이 아니었으면 담청이 크게 잘못될 수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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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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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진솔하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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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수사, 담청 님을 고쳐줘서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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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 인사라면 예전에 이미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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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요. 알고 나니 더 고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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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백월이 빙그레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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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삼스럽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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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심이에요. 혹시 내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해요. 최선을 다해서 도와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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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겠습니다. 비싸게 부려 먹어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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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과 등백월은 얼마간 더 한담을 나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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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거리가 부쩍 가까워진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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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광과 극광이 두 사람을 비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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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지기 전, 서란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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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 향로 법보가 심각하게 손상된 혼백을 치료하는데 도움이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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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법보라고 해도 그건 좀 힘들 것 같군요. 다른 방법을 찾아 보셔야 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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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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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뒤, 날이 밝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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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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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과 사율상은 법원에 방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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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파 동맹 관련 공증을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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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약서에 두 사람의 지장이 찍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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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을 나서며 사율상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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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한결 홀가분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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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농담을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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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약속을 안 지키면 어쩌시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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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지장까지 찍은 마당에 그런 소리를 하는 건가? 자네도 보기 보다 짓궂은 면이 있군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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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인반룡의 마음은 모르는 거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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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율상이 점잖게 웃으며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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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어쩌겠나. 부족한 내 안목을 탓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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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담하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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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앞으로 걸을 때는 넘어질 각오도 해야 하는 법이지. 그리고 원래 조약서 따위는 큰 의미가 없다네. 중요한 건 사람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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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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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조약서는 왜 굳이 공증받으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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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한테 보여 주려고 그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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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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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대번에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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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약에 관한 소문이 퍼지면 자연스레 이적 중개인들도 떨어져 나갈 게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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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을 위한 사율상의 따듯한 배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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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령의 여인, 수행 비서가 작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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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주님, 슬슬 약속 시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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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율상이 놀란 얼굴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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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그렇게 됐나? 점심 식사라도 같이 할까 했는데 안되겠군. 류 법관, 그러면 나는 이만 가 보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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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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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참, 법술 전수 관련해서는 조만간 우리 쪽에서 사람을 보내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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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율상과 수행 비서는 그렇게 떠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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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잽싸게 극광제도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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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이라서 한동안 출근할 필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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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순간을 조금이라도 더 만끽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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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한다는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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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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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조명과 잔잔한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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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에서 완전히 단절된 것만 같은 분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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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의 추천이 없으면 입장할 수 없는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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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은 이렇게 했지만 어차피 찻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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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를 둘러 봐도 이적 중개인들만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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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마다 있는 동종 업계 모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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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적 중개인 한 명이 문득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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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진짜 열심히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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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해? 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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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 법관 이적 건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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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한마디가 도화선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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곳곳에서 류 법관 얘기가 튀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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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풍사문과 금죽문도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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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적 중개인들이 수군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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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죽문, 통째로 인수되나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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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그 얘기 어디서 들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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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사람이 그랬는데, 피풍사문 수도자들이 극광 제도에 들락날락거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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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아, 류 법관이랑 사 문주가 법원에 방문해서 뭐 공증 받았다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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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 조건 되게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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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풍사문 돈 많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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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6 구역 중심지를 혼자 독차지하고 있는데 당연히 많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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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문주가 다른 건 몰라도 싸움은 참 잘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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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봤자 임6 구역 수준 아니야? 선계 전체를 기준으로 보면 중견 정도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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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긴, 거대문파들도 류 법관한테 관심이 꽤 많았다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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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어떻게 계약까지 한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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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럽다, 나도 류 법관처럼 살고 싶어. 모두의 주목을 받는 삶... 어떤 기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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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대단해서 부럽지도 않다. 나는 오히려 오 수사가 부러워. 확 와닿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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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수사? 해결사 오대랑 말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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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네, 이번 건 오 수사가 중개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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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수사, 그 친구 수완 참 좋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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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수료로 떼돈 벌었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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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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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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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한창 수행 삼매경에 빠져 있을 무렵, 손님 한 명이 금죽문에 방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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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풍사문 소속의 태성기 수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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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사다망한 사율상을 대신해서 서란에게 법술을 전수해 줄 사람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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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은 스스로를 사유경이라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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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류 법관님. 저는 오늘부터 법술 전수를 담당하게 된 사유경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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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가워요, 사 수사. 저는 류서란이라고 해요. 경지도 비슷한데 말씀 편하게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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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습니다. 이게 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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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도 재차 권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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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촉하는 것 같아서 미안한데, 법술은 언제부터 배울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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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 법관님께서 원하신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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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요? 그럼 바로 시작하죠. 어디서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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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경이 공손하게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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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계 혈족 전용 수련장이 있습니다. 거기라면 법술의 여파를 염려하실 필요가 없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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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요, 어서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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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안내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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곁에서 서란을 호위하던 손달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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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번인 좌호법과 우호법을 호출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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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경이 난색을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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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피풍사문의 비전인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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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여상한 투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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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습니다, 손 호법. 피풍사문의 영역이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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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겠습니다. 그래도 위험한 일이 생기면 곧장 연락해 주십시오.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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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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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경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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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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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은 묵묵히 하늘을 날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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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풍사문의 수련장은 극광 제도에서 꽤나 멀리 떨어진 위치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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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태성기 수사의 비행 속도로는 금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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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과 사유경은 얼마 지나지 않아 목적지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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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망망대해를 바라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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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계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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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보이시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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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폐용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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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경이 소매를 뒤지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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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도 하지만 주된 용도는 환경 보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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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 보호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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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정확히 말하면 법술의 여파로부터의 보호죠. 아시다시피 고위계쯤 되면 걸어다니는 자연재해나 마찬가지지 않습니까. 법술로 난장판이 된 지형을 복구하는 것보다는 결계를 설치하는 게 훨씬 더 경제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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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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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득할 만한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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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서란은 독안룡과 싸우면서 세상의 중심을 개판으로 만들어 놓은 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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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당시에는 경지가 태성기도 아니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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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경은 소매에서 패를 하나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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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질은 호박인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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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운데에 ‘사’ 자가 새겨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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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은 패를 이용해서 결계를 통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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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부로 들어서자 독특한 구조물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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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기둥들이 결계 외곽을 따라 장벽처럼 끝도 없이 늘어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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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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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둥들이 결계의 축 역할을 하는 모양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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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이쪽 분야는 잘 몰라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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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모르시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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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경은 잽싸게 화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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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오늘 가르쳐 드릴 법술의 이름은 ‘피풍술’입니다. 풀이하면 바람을 입는 법술이라는 뜻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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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이한 이름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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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처음 들었을 때는 그렇게 생각했었습니다. 그래도 직접 보고 나면 왜 그런 이름이 붙었는지 아시게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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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경은 곧장 피풍술을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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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겹의 바람이 사유경을 휘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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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보이지 않는 비단을 몸에 두른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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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경의 움직임에 따라 바람으로 짠 천이 하늘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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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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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래서 피풍술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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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습니다. 지금은 시범을 보이는 거라 한 겹만 걸쳤는데, 술사의 역량만 따라 준다면 열 겹이든 백 겹이든 상관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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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어용 법술인 모양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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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경이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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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는 않습니다. 방어 능력이 없는 건 아니지만 굳이 따지자면 공격용 법술에 더 가깝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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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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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시를 보여 드리겠습니다. 아, 물이 튈 테니까 미리 결계를 둘러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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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경이 망망대해를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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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해수면이 폭발하며 거대한 물보라가 하늘까지 치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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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신을 휘감고 있던 한 겹의 바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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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쏟아지는 바닷물을 결계로 막으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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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겹으로 하면 더 강해지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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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이죠. 그래도 위력에 너무 집착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무리해서 바람을 모으다가 선수를 놓치거나 공격이 빗나갈 수도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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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게 때릴 생각하지 말고 툭툭 치라는 뜻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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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경이 작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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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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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는 모습이 문주인 사율상과 판박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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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사유경 선생님의 개인 과외가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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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곤조곤한 말씨로 잘 가르쳐 준 덕분에 서란은 금방 피풍술을 습득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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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실제로 사용해 볼 차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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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경이 망망대해를 가리키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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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수면을 향해 법술을 날려 보세요. 바람은 한 호흡 정도만 모으시면 적당할 겁니다. 아시겠죠, 가장 중요한 건 속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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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 조절은 안 해도 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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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홍기 수준까지는 거뜬히 버티는 결계입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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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안심하고 피풍술을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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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후, 결계 속에 있던 사유경은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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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서란의 역량을 오판했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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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겹, 두 겹, 네 겹, 여덟 겹, 열여섯 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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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이미 몇십 겹의 바람을 두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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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작 한 호흡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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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경은 서둘러 서란을 제지하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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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뭔가 조치를 취하기에는 남아 있는 시간이 너무나 짧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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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사유경의 입술이 채 열리기도 전에 법술이 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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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의 일격이 바다를 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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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격 지점에서부터 외곽으로, 막대한 양의 해수가 파문을 이루며 밀려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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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장벽처럼 늘어선 결계를 덮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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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벽 결계 전체가 위태롭게 점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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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사유경이 걱정하던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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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도 결계의 기능은 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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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난 해수가 다시금 타격 지점을 향해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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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솟고, 밀려나고, 다시 치솟고, 밀려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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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가 찻잔 속의 내용물처럼 요동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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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경은 그 광경을 지켜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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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스스로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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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은 결코 광홍기에 도달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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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사유경이 스스로를 향해 내린 결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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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울해 할 일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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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영근자, 오영근자 대부분은 한평생 오채지심 수행이나 하다가 원영기로 죽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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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무기에 도달하는 건 극소수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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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골 보유자도 아니고, 영생자도 아닌 이들에게는 태성기까지가 한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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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혹 수명이 다하기 직전에 도박하는 심정으로 순환 의식에 도전하는 경우도 존재한다고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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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성공 사례는 거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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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일생의 종착지인 경지가, 다른 누군가에게는 그저 경유지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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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경은 복잡한 심경으로 서란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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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병 깰 뻔한 강아지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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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세상은 불공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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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과 담청이 법관 고시에 합격하고, 금죽문과 피풍사문이 동맹을 맺고, 금영영이 생산적인 일을 시작한 뒤로 어느덧 6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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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비승 3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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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금이 딱 100살이 되는 해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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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의 저택에서는 지금 이아금의 100번째 생일을 축하하는 잔치가 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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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호법 손달 또한 생일 잔치에 참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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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의 호위를 담당한 지 어느덧 6년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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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교적인 성격답게 호위 대상인 서란은 물론이고 그 주변인들과도 적지 않은 친분을 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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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달은 환한 미소와 함께 이아금에게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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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축하 인사, 그 뒤에는 덕담이나 농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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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답으로 경계심 한 점 없는 미소가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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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금, 100세, 삼영근자, 범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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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나 실력 있는 연단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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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는 농림부로 소속 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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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호혜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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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숙하고 재주 많은 여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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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는 사회 과학 분야가 가장 적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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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혜문, 110세, 이영근자, 선골 보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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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 년 내로 원영기에 도달할 것으로 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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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교육자, 지금은 행복부의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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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혜문과의 지적인 대화를 마친 손달은 근처 장의자에 몸을 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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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정 구석에 위치한 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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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치에 참여한 인물들이 한눈에 다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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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선화, 78세, 일영근자, 범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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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서란의 제자, 인형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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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쁜 류서란을 대신해서 금죽문의 인형을 유지 및 보수, 현재는 인형부의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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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순, 인면조, 축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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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선화의 애완 인면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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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면조 치고는 굉장히 높은 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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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산대붕 분신, 경지는 운무기 정도로 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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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서란이 제작한 자아를 지닌 인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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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체의 크기는 1리(400m)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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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안묘, 요괴 출신으로 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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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나 괜찮은 영안을 지니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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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근 보유자를 찾는 업무를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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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 수사 혹은 왕 노인, 나이는 270세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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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서란, 이아금과 유독 친분이 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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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평생 영근 보유자를 찾는 일에 매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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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경, 나이는 3500세 정도, 태성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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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씨 가문 직계 혈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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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주인 사율상과의 계보가 꽤 가까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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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백월, 정보 전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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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죽문과 함께 비승한 건 확실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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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의 주시할 필요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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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 나이는 대략 1100세 정도, 선골 보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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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러진 왼쪽 뿔이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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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죽문 소속 수도자들, 그리고 어인 교단과 꽤나 오랜 기간 교류한 것으로 추정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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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서란, 대외적 나이 700살 정도, 반인반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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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골 보유 여부는 불명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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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순되는 정보가 지나치게 많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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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손달은 기록보관소 소속 정보 요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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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선문은 오죽문 동쪽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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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작파는 오죽문 북쪽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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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약목파는 오죽문 동북쪽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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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문파는 지리적으로 굉장히 인접한 이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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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막 속에 감춰져 있던 네 번째 친선대회 참가 문파가 바로 해선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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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일강이중일약에서 일약을 담당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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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라면 해선문은 나머지 세 문파와 겸상을 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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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마침 자리가 하나 남기도 했고, 나름 이웃 문파인데 쏙 빼놓고 자기들끼리만 놀면 따돌리는 것 같아서 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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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연 지연 혈연 중 지연 찬스를 쓴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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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내륙 문파인 오죽문과 금작파에게는 소중한 해상 자원 공급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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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은 자염과 해산물을 구매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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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큰 돈벌이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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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해선문은 경매에서 손가락만 빨다가 마지막 번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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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뢰 내용은 작은 인공섬 건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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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들도 영초 한번 길러보겠다는 심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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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기를 듣던 서란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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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초를 키우는데 왜 섬을 만드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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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 주변에 산호를 잔뜩 심을 예정입니다. 키우려는 영초가 산호초에서만 자라거든요. 다 자란 모습은 이렇게 생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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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선문 수사가 그림을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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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호초에 영초가 착 달라붙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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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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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건 해초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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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초도 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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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긍한 서란이 즉시 공사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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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거산요지선공에 통달해 버린 서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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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가락 하나 까딱할 필요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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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짐 지고 해역을 빙빙 돌았더니 섬이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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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석은 오죽문으로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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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겠습니다, 약목표국에게 특급배송으로 맡기면 금방 가져다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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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사를 마친 서란은 약속 장소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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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일 년 동안 삼백 건이 넘는 의뢰를 해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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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방금 완성한 인공섬이 마지막 의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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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인도에 도착하자 담청이 반겨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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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방 끝났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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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온동물인 담청은 모래사장에 파묻혀서 얼굴만 내놓고 모래찜질을 즐기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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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작 섬 하나 만드는 일인데요,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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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도 곧장 옆에 드러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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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신력을 사용하자 모래가 서란의 몸을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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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글라스가 없는 건 아쉽지만, 어차피 결단기 수사는 태양 좀 직시한다고 다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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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리쬐는 햇빛,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 좋은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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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여름부터 올해 여름까지 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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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과 담청은 놀 자격이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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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절친의 여름 바캉스는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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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 하늘과 아름다운 해변, 그리고 생선 대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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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생선 대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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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저히 그냥 넘길 수 없는 부조화를 감지한 서란이 몸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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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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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선들이 두 다리로 해변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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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선 머리에 박힌 크고 둥근 눈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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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꺼풀이 아니라 아예 눈꺼풀조차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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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늘로 덮인 전신, 손발에는 물갈퀴도 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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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캉스를 방해한 불청객들은 어인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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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의도적으로 찾아온 건 아닌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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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봐도 당황한 채 다급하게 시선을 교환하던 어인족은 대표를 한 명 뽑아서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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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다가온 어인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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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이 섬은 저희 어인 교단의 사유지라서요. 실례지만 즉시 퇴거해 주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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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내심 당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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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섬, 내 섬이 어디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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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혹시 그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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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곡에 평상 펴놓고 마음대로 자릿세 받는 그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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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로 물러설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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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권리로 저희를 쫓아내는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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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야 해선문에게 땅문서를 산 주인의 권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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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크게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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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퇴거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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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자기가 누워있던 모래사장을 정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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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에서 눈치보던 담청도 슬그머니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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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사슴뿔도 모래 위로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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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인들은 담청의 뿔을 보곤 헉하고 경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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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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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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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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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인 대표가 갑자기 떠나려는 둘을 만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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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잠시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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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려던 서란과 담청이 의아해서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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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사적으로 둘을 멈춰 세운 어인은 고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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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엄청난 순발력으로 핑계를 지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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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차, 이런 중대한 실수를 저지르다니... 다시 생각해보니 저희 교단이 구매한 사유지는 이 섬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그만 착각해 버렸지 뭡니까. 쉬시는데 방해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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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척동자가 봐도 굉장히 수상한 태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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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우리가 여기서 놀아도 상관없는 게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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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의 물음에 어인이 공손하게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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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요, 그럼요. 애초에 저희 섬이 아닌데 무슨 권리로 여러분을 내쫓겠습니까. 무인도에 네 것 내 것이 어디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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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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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답을 들은 담청은 희희낙락한 얼굴로 자기가 누워있던 구덩이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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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잔뜩 기대하는 눈빛으로 서란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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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모래를 덮어주며 어인에게 질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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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다른 용건이 있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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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심 가득한 목소리에 어인이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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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건이요? 전혀요. 저희는 이만 가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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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인족은 우르르 바다로 입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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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섬을 떠난 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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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수면 위로 떠오른 생선 대가리들이 아직 서란과 담청을 지켜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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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과 어인들은 잠시 눈싸움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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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꺼풀이 없는 어인과 결단기 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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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가 수명이 다해서 죽기 전에는 절대로 끝나지 않을 대결을 멈춘 건 어인의 외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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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휴식을 방해한 보상이 필요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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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마주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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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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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침묵하던 어인이 말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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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수사님의 법력은 토속성이시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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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대답하지 않자 어인이 계속 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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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속성이라니, 이거 참 공교로운 일이군요. 마침 저희 교단에도 수리할 건물이 있었는데 말입니다. 용궁을 지탱하던 산호 대들보에 잔금이 갔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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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에 있던 어인들이 일제히 동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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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등 신도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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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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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둘러서 수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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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다간 용궁이 무너져 버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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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워서 듣고 있던 담청이 벌떡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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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궁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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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하겠지만 용궁에는 용이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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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은 살면서 다른 용을 본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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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을 동굴 호수에서 지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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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등 신도가 반색하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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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용궁에 흥미가 있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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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이 선선히 수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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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괜찮다면 한번 방문하고 싶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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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괜찮죠!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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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된 서란이 담청에게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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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로 따라가시려고요? 어인족 녀석들 엄청 수상해 보이는데요? 함정이 분명해요. 용궁이라는 것도 전부 방금 지어낸 거짓말이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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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담청은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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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이면 어떻고 함정이면 어떠냐. 어인족이 무슨 재주로 용을 해친다고. 속인 사실이 드러나면 벌을 주면 그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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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고 보니 정말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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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주를 가진 용에게는 신화적인 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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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적어도 인계에서만은 천하무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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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강한 존재들이 전부 승천해 버렸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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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안심이 안된 서란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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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저도 같이 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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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할 것 같다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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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곳에 어떻게 담청 님을 혼자 보냅니까. 함정이라면 혼자보다는 둘이 더 안전하겠죠. 만약에 거짓말이 아니면 저도 용궁 구경하고 좋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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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같이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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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이 웃으며 서란의 손을 잡아 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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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던 일등 신도가 반갑게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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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분이 함께 가시나요? 좋습니다, 그러면 바로 출발합시다. 저희는 이제부터 천해 지부를 거쳐서 심해에 있는 교단 본부로 갈 예정입니다. 아참, 형제님께서는 먼저 가서 소식을 전해주시죠. 환영 준비를 부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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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과 담청이 시선을 교환하더니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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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영 준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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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거창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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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등 신도가 음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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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 선물도 잔뜩 있으니 기대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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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인의 눈꺼풀 없는 눈알이 둘을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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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령은 순식간에 교단 본부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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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산호로 지어진 용궁이 심해의 짙은 어둠 속에서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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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궁에 들어선 전령이 곧장 교주의 거처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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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주님, 긴급 속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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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호 분재를 다듬고 있던 교주가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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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님, 아직도 수행이 부족하시군요. 해류에 떠밀리는 해초가 아니라 굳건한 산호와 같은 마음가짐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어떤 소식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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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두른 탓에 아가미를 헐떡이던 신도가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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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해 경비대가 순찰을 돌다가 용을 만났습니다! 용과 그 일행께서는 지금 초대를 받고 심해로 향하고 계십니다! 어서 환영 준비를 마쳐야 합니다, 교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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깜짝 놀란 교주가 집게발 가위로 애지중지 가꾼 분재 허리를 잘라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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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갑작스러운 초대를 수락하셨다고? 혹시라도 무례한 언사로 강요한 건 아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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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령이 입을 뻐끔거리며 대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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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가요? 용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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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주도 금방 납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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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긴, 생각해보니 그렇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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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득은 마침 자리에 계시던 홍린어 일등 신도님께서 맡아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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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오, 그녀가 이번에도 큰일을 해주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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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주가 감탄하자 전령이 맞장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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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습니다, 제가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봤습니다. 뛰어난 언변으로 순식간에 신뢰를 얻어내는 놀라운 광경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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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주는 어인족의 오랜 고난을 상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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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입니다, 신께서는 아직 우리 어인족을 버리지 않으셨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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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들게 살아온 전령도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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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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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라서 눈물은 흐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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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금의 생일 잔치가 끝나고 며칠 뒤, 손달은 서란에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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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 법관님, 혹시 휴가 좀 쓸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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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가? 언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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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닷새 뒤 하루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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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흔쾌히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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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되죠. 그런데 별일이네요. 손 호법이 휴가를 다 쓰시고. 여태까지는 전부 돈으로 받으셨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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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번에 친구가 결혼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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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그 친구도 용족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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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달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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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맞습니다. 사진 보여드릴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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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봐도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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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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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달은 단말기의 사진첩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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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친구와 함께 찍은 사진을 몇 장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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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정말 친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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닷새 뒤, 손달은 오랜만에 평상복을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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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택 구성원들과 인사한 뒤, 대문 밖으로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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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곧장 올빼미 인형이 하나 따라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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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빼미 인형이 친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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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인 발견, 조회 실시. 신원 확인. 손달 님, 행선지를 말씀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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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광 제도 밖으로 나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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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선지 확인. 안내를 시작합니다. 경고, 위험할 수 있으니 함부로 경로를 벗어나지 말아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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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빼미 인형이 선도 비행을 실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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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달은 뒤따라 비행하면서 재차 확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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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죽문은 뭔가를 숨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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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숨기는 것 자체는 이상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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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비밀 하나 없는 수도문파 따위는 존재하지 않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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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금죽문은 도가 지나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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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달은 금죽문 곳곳을 살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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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광 제도는 5개의 구역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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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명칭은 범인 구역, 수도자 구역, 어인족 구역, 외부인 구역, 그리고 특별 구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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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인 구역에는 범인만, 수도자 구역에는 금죽문 소속 수도자만, 어인족 구역에는 어인족만 들어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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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 출입 허가를 받고 방문한 외부인들은 정해진 구역을 벗어나는 즉시 추방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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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외는 손달을 비롯한 수행원단과 사유경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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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이들만이 특별 구역에 출입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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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 중요 인물 취급을 받는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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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과의 관계 덕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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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올빼미 인형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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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지 도착. 안내를 종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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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마친 올빼미 인형은 극광 제도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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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달은 극광 제도의 전경을 용안에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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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은 올빼미 인형 군단에 의해 뒤덮였고, 바다에는 어인족 순찰대가 바글바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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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봐도 편집증적인 보안 체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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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달은 전송진을 통해 도원향 총타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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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원향은 선계 최대, 최고의 조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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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떤 거대문파조차 감히 맞먹을 수 없는 규모의 역사, 시설, 인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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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건 다 제쳐두더라도 선계의 일곱 지선 중 다섯이 도원향 소속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도원향의 위세를 짐작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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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달은 도원향 오대 기관 중 하나인 기록보관소 소속의 정보 요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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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머지 기관들의 명칭은 최고재판소, 윤회전생청, 천기연구소, 천간관리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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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지선이 각 기관의 수장을 담당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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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기록보관소의 수장은 영세 필경사, 첨천답층진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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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달은 전송진 관리소를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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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미관을 혼자서 다 망치는 새까맣고 거대한 정사각뿔 형태의 건물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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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원향 총타, 흑단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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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단궁에 들어선 손달은 곧장 승강기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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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승강기는 아니고 제한 구역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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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부에는 승강기 안내원이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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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강기 안내원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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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층으로 가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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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 432층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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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한 외의 구역에 출입을 시도하실 경우, 경고 없이 사살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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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달이 동의하자 승강기가 작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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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기판에 표시된 층수가 빠른 속도로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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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승강기 내부는 미약하게 흔들릴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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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강기 안내원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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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 432층, 도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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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달은 살짝 목례한 뒤 밖으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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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는 일자 복도를 따라 쭉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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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발 한 발 나아갈 때마다 주시하는 눈길 또한 점차 늘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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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도 끝에 도착하자 문이 하나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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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근처에는 사무원 둘이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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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 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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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원 한 명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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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사기 앞에 서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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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달은 순순히 검사기 앞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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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된 위치에 서자, 검사기가 빛을 뿜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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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밀 검사 과정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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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달은 문뜩 그런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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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 오류, 기기 고장, 혹은 그 밖에 어떤 이유든 간에 검사 결과가 반대로 나온다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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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해명의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을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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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방식으로 죽으면 좀 웃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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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사 결과가 나오고, 손달은 문 너머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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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단궁 지하 432층, 균열 대책 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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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부장이 질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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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서란은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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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달이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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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출근하고, 일하고, 퇴근하고, 공부하고, 수행하고. 모범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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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바쁜 와중에 수행도 해? 향상심이 대단한 모양이지? 인성은 좀 어떤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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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고난 자질을 고려하면 준법정신이 굉장히 뛰어난 편에 속합니다. 기본적으로 선량하기도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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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부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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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 아주 좋아. 결격 사항은 달리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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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부분이 좀 불분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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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뭐 때문에 그러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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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달이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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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이 좀 많은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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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세상에 비밀 없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그래. 비밀 같은 건 나도 많아. 지금 우리가 하는 이 짓거리도 다 비밀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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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수상해서 그런데, 혹시 기밀 문건 좀 열람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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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부장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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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는구나... 진짜 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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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상시국이니 어쩔 수 없죠. 그러라고 있는 균열 대책 본부고, 그러라고 있는 초법적 권한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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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나 때는 이런 거 말도 안되는 일이었는데... 알겠어, 류서란 관련 기록이면 충분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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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부장은 구역관리원 쪽으로 협조 공문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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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뒤, 본부장의 탁상용 단말기로 류서란 관련 기밀 문건들이 전송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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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천자 등록 문서, 무주지 점유 신고서, 선골 검사 결과지 등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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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부장은 자료를 차례차례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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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보자, 무주지 점유 신고서는 별 거 없고. 승천자 등록 문서는...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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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러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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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서란, 비승 연령 650세,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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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달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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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말씀이십니까. 류서란은 반인반룡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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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분명히 인간이라고 적혀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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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오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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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부장은 한참을 고민하다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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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지, 어쩌면 비승 당시에는 진짜 인간이었을 수도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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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계에 와서 반인반룡이 됐다고요? 아예 용족이 되는 거면 몰라도, 후천적으로 반인반룡이 되는 게 가능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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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천적 반인반룡인데 용족의 피가 비교적 옅었던 거 아닐까? 그래서 용족의 특성이 발현되지 않았던 거지. 심지어 하계는 영기가 굉장히 희박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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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달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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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기연구소에 문의해 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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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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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부장은 협조 공문을 하나 더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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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논문 한 편이 전송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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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기 밀도와 영물의 생육에 관하여’라는 제목의 두꺼운 논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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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부장은 논문을 대충 훑어보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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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예 불가능한 건 아닌가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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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말로 생명의 신비로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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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수상하다는 비밀, 이거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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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달이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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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운 비밀이기는 한데... 굳이 편집증적으로 굴면서까지 숨길 정도인가 싶네요. 고민 좀 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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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고민 실컷 하게. 나는 기밀 문건이나 마저 살펴 보고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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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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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달은 고민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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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서란, 금죽문이 숨기고 있는 비밀이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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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달은 6년 간의 기억을 차분히 되짚어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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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답에 거의 도달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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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본부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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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골이라고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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쩌렁쩌렁한 고함이 손달의 고막을 뒤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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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쯤 손 안에 들어왔던 해답도 도망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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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달은 저도 모르게 인상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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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는 말씨도 곱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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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왜 그러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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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부장은 너무 놀라서 말도 제대로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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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단말기 화면을 손달 쪽으로 돌려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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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서란의 선골 검사 결과지를 열람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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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달이 투덜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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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얼마나 대단한 선골이길래... 범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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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서란은 선골 보유자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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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더없이 명쾌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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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달은 지금에서야 금죽문이 보여준 편집증적이기 그지없는 태도를 이해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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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0세 미만 태성기 수사가 사실은 범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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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숨겨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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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키면 감당이 안되는 비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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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부장이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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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맞아? 비밀이 이게 맞는 거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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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이거라면 납득이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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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이제 류서란은 문제 없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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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달이 확신에 찬 얼굴로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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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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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았어, 영입 후보에 올려 둬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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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 전에 처리해야 할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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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부장이 불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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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데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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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라지망에서 류서란 나이와 관련된 얘기가 자꾸 나오더라고요. 법관 고시 합격했을 때부터 그러기는 했는데, 요즘은 들어서 유독 심해진 것 같습니다. 극광 제도 주변에 기자들도 좀 돌아다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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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무슨 소린지 알겠어. 나이 조사하다가 범골이라는 게 드러날까 봐 걱정하는 거지? 내가 해결해 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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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부장은 최고재판소에 연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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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저예요. 류서란이라고 아시죠? 왜, 그 법관 고시 수석. 예, 예. 언론 쪽에 얘기 좀 전해 주실 수 있을까요? 아니, 무슨 보도 관제예요. 그런 거 아닙니다. 그냥 선백파흑진군께서 어린 법관 나이 가지고 어쩌니 저쩌니 하는 거 좀 언짢아하시는 것 같더라, 그런 얘기만 좀 전해주세요. 괜찮죠? 예, 감사합니다. 예, 예. 아, 그럼요. 언제 밥 한 번 먹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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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천기연구소에 연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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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뭐 부탁 좀 드려도 될까요? 아, 천라지망 관련된 거예요. 그 검색 노출 빈도인가? 그거 좀 조절해 주셨으면 해서요. 류 법관이라고 아시죠? 저희 쪽에서 신경 쓰고 있는데 천라지망에 나이 얘기가 자꾸 나와서 골치 아프네요. 아, 삭제하실 필요까지는 없고, 그냥 자연스럽게 치워만 주세요. 눈에 잘 안 띄게. 아, 정말요? 감사합니다. 그럼요, 알죠. 예,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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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화가 종료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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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죽문 통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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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원 한 명이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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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장님! 주요 언론이 올렸던 폭로 기사가 갑자기 삭제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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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정정 보도 올라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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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라지망 교류회 전역에서 류 수사님 나이에 관한 관심도가 대폭 감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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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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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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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 부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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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영영은 어안이 벙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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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돈에 눈이 먼 머저리가 류서란의 나이에 관한 정보를 언론사에 팔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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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금영영은 이아금 생일 잔치에도 참석 못하고 부장실에 처박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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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보를 확보한 언론사는 집요하게 금죽문을 찔러 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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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오늘 정오, 기어이 폭로 기사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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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기절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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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히 벼랑 끝까지 내몰린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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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갑자기 모든 문제가 해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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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로 기사가 내려가더니 정정 보도가 올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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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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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부 직원들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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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금 부장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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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될 거라고 예측하셨던 거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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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쩐지 침착하시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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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가 믿음이 부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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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예측 같은 거 한 적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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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착한 게 아니라 그냥 포기한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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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은 금영영한테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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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금영영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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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산대로다, 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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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생각해 보니까 운도 실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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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밀 누설 사건은 어찌어찌 잘 마무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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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칠기삼의 화신, 금영영이 걸음을 내딛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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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개선장군이라도 되는 양 위풍당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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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거대한 문이 저절로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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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장 안에서 박수갈채가 터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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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금 수사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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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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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는 금죽문의 영웅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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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전의 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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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 신산귀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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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하십니다, 아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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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씨 가문의 자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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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라지망 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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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조작의 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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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부장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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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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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 소리와 칭찬 세례, 호의로 가득찬 표정, 무수한 외침, 자신의 이름을 연호하는 목소리, 휘파람, 그리고 또다시 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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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모든 요소가 금영영의 감각 기관을 두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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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부와 고막을 두드리고, 솜털을 곤두세우고, 시야를 어지럽히고, 두뇌와 오장육부를 뒤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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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그대로 하늘을 노니는 듯한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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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선이 뭐 별 게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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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바로 우화등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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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영영은 한껏 도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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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저도 모르게 양팔을 벌리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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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채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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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장 분위기는 더욱 후끈하게 달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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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영영은 수뇌부를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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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말로 슈퍼스타의 재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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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소란이 진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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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장은 난장판이 된 지 오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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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아닌 게릴라 콘서트의 여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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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뇌부는 신나게 집어던진 집기들을 주섬주섬 정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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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각자 정해진 자리에 착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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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슬 회의를 시작해야 할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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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장이 목소리를 몇 번 가다듬더니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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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큼큼, 그러면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최근에 기밀 유출 사건이 있었습니다. 문파 구성원 중 한 명이 극비 정보를 언론에 제보했다더군요. 자그마치 류 수사님의 실제 연령에 관한 내용이었습니다. 자세한 설명은 통신부장께서 직접 해 주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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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영영은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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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저희 통신부는 인가되지 않은 통신 기록을 발견했습니다. 바로, 언론사 계정과의 통신이었죠. 금죽문 소속 수도자 중에 내통자가 있었던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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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뇌부 중 하나가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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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에는 어떻게 됐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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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말기 등록 번호를 조회했습니다. 그리고 내통자를 긴급 체포하는데 성공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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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순히 혐의를 인정하던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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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영영이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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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율령부의 협조로 빠르게 자백을 받아냈죠. 제보비에 눈이 멀어서 그랬다고 털어놓더군요. 언론사가 류 수사님의 실제 연령에 관한 정보를 손에 넣은 겁니다. 절체절명의 순간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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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뇌부가 수군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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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래서 기자들이 얼쩡거렸던 거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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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래 침입하려다가 붙잡힌 사람도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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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위험한 상황이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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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영영이 말을 이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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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위기 상황임을 인지한 통신부는 즉각 대응 절차에 들어섰습니다. 그리고 며칠 만에 문제를 깔끔하게 해결해 냈죠. 류 수사님의 비밀을, 더 나아가 금죽문 전체를 지켜낸 겁니다. 바로 저, 통신부장 금영영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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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해서 그러는 건데,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상황을 해결한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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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 점에 대해서는 보안상의 이유로 자세히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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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안상의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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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뇌부는 쉽사리 납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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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은 모르겠지만 심오한 뭔가가 있겠지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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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심오한 뭔가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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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종 기사가 천라지망에서 삭제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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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사가 부랴부랴 정정 보도를 낸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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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리꾼들의 관심도가 급격하게 감소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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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영영은 그냥 아무것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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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태까지도 몰랐고, 앞으로도 쭉 모를 예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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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이유로 설명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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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얘기를 듣고있던 의장이 질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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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참, 기밀을 유출한 배신자는 어떻게 됐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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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영영이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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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요, 저는 잘... 율령부장께서 아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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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의 시선이 율령부장에게 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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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령부장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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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신자와는 아름다운 이별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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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뇌부는 잘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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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곧장 관심을 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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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마귀 밥이든 물고기 밥이든, 배신자의 말로 따위야 알 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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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장이 회의를 진행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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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다음 의제로 넘어가겠습니다. 비승 직후부터 논의해 왔던 의사 결정 체제 개편안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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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뇌부는 또다시 열띤 토론을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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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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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 때와 같은 점심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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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과 담청은 닭국수를 먹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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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호법 두 명도 함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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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발은 쫄깃하고 닭고기는 부드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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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장사가 잘되는 집은 뭐가 달라도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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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서란의 표정이 영 좋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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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다리를 쪽쪽거리던 담청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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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 혹시 국수가 입맛에 안 맞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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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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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왜 그리 기운이 없는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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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한숨을 푹 쉬며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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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수원 대체 강의를 다 들어 버렸거든요. 이제부터는 뭘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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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히 물어봤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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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은 도로 닭국수에나 집중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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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응은 전혀 다른 쪽에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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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달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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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수강을 끝내셨다고요? 법관 시보 기간은 아직도 4년이나 남아 있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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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반인반룡이라서 잠을 안 자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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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그래도 정말 놀랍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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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달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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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에서 지켜본 서란의 삶은 조식 업무 중식 업무 석식 수행 및 공부의 무한 반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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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마가 의심되는 수준의 정신 나간 일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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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한편으로는 납득이 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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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선골 보유자도 아니면서, 680세라는 어린 나이에 태성기 수사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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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지간히 미쳐서는 이렇게 빨리 경지를 올릴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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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말로 수행 광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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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달은 남몰래 혀를 날름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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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여자, 선골을 얻고 나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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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만 해도 정말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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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 일인데도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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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은편에 앉아 있던 담청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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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달, 왜 자꾸 혀를 날름거리는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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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한테는 국물이 좀 뜨겁네요. 그냥 닭냉국수를 시킬 걸 그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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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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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점심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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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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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 일행은 오후 업무를 마치고 귀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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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녀들이 손님의 방문을 알려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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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의 정체는 이아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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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담청과 함께 응접실로 들어서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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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금아, 이 시간에 웬일이야? 항상 야근 때문에 바쁘더니. 혹시 오늘 약당 쉬는 날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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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당이 아니라 보건부. 이름 바뀐 지가 언젠데. 그리고 나 이제 보건부 소속 아니야. 다른 부서로 이동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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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어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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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금이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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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림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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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 일은 좀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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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원이지, 낙원. 항상 정시 퇴근이거든. 지긋지긋한 약재 냄새 안 맡아도 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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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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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 약재 냄새는 중대 사항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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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환히 웃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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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아금이 네가 만족한다니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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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참, 이 얘기 때문에 온 게 아닌데. 언니한테 알려 줄 게 있어서 왔어. 그런데 단말기는 왜 꺼둔 거야? 연락 안 받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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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오후에 재판 참관 일정이 있었거든. 깜빡하고 다시 안 켰나 봐. 알려 준다는 건 또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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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금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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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도 혜문 언니한테 들은 건데, 금죽문 의사 결정 체제 최종 개편안이 결정됐대. 당장 내년부터 시행할 예정이라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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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그거? 비승 0년부터 논의하더니 드디어 결론이 났구나. 어떻게 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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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만, 분명히 유인물을 받았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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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아금은 소매를 뒤적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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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얇은 책자를 한 권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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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에는 ‘제1회 금죽문 민선 의원 선거 안내서’라고 적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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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금이 책장을 넘기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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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의결 기관인 수뇌부를 폐쇄하고 새로운 의결 기관을 창설할 예정이래. 기관명은 민선 의회, 줄여서 민회라고 하고 말이야. 민회 구성원은 선거를 통해서 뽑을 건가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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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담청이 이아금에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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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원이 되면 뭐가 좋은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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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수뇌부의 권한을 고스란히 승계하게 될 거예요. 금죽문 전체의 행보를 결정하는 거죠. 법을 제정하거나 새로운 정책을 시행하는, 뭐 그런 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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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만약 극광 제도 한가운데에 유원지를 만들겠다고 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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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금의 여상한 답변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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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회만 통과하면 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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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나도 그 선거라는 거 나갈 수 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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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요. 입후보하시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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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이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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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나가보고 싶구나. 서란 너는 어떠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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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별로 생각이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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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좀 아쉽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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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금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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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그런데 투표는 할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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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하지, 소중한 한 표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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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표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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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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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한 표 아니야? 좀 특이하네. 그러면 몇 표씩 주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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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랑 담청 님은 세 표씩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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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그러면 다른 사람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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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금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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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기기와 축기기는 한 표씩이고, 결단기와 원영기는 두 표씩이야. 운무기와 태성기는 세 표씩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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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지마다 표수가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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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렇게 놀라, 언니. 당연한 거 아니야? 경지가 다른데 어떻게 표수가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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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사회과학계열 복수 전공자로서 이런 참담한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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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황급히 선거 안내서를 살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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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자세히 보니 더 가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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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금죽문 소속의 모든 수도자(어인족 등 요수 포함)는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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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모든 유권자는 경지별로 상이한 표수와 득표 반영 비율을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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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이름이 기입되지 않은 투표 용지는 모두 무효표 처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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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참지 못하고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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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런 건 선거가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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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금죽문에서는 이게 선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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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선 의회의 발족은 바로 내년, 비승 39년으로 예정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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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안에는 선거를 끝마쳐야 한다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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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말로 할 일이 산더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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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보자들은 곧장 선거 운동을 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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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시설을 확충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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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석 채굴량을 늘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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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급품을 다양화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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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권자들도 제각기 의견을 표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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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문화 시설이 부족하긴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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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아, 극장이고 도서관이고 항상 인산인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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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 수사님은 책 또 안 쓰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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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인형, 재밌지. 나도 좋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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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영석 채굴량은 어떻게 늘리겠다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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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부 예산 늘리겠다는 소리 아니야? 어차피 일은 채굴 인형이 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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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만 있다고 되는 게 아니잖아. 인형술사가 너무 부족하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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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언제 적 얘기야. 요즘은 인형술사 많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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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그 비주류 법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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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 수사님부터가 인형술사시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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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아, 내 조카도 축기기 되고 인형술 배우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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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긴, 요즘은 인형 없으면 문파 안 돌아가지. 생활용품 같은 거 전부 인형들이 만들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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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급 받으면서 수행만 하니까 편하긴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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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많이 좋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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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게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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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광 제도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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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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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자기 침대에 얌전히 누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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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장히 보기 드문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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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쉬고 있는 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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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용안으로 바닷속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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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히 말하면 어인족 구역의 중앙 광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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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다란 제단 꼭대기, 담청의 모습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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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 선거 유세 중인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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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은 짧은 팔을 휘저으며 뭐라 뭐라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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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쉽게도 소리까지는 들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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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무성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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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의 발언이 끝나자마자 어인족이 열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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깃발과 발광 산호봉을 미친 듯이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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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몇은 실신해서 들것에 실려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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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이 좋아진 담청은 두 팔을 번쩍 치켜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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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인족의 반응은 더욱 격렬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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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이대 용신님, 완전 광장을 뒤집어 놓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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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시선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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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손에 든 책자를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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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금죽문 민선 의원 선거 안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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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득표 반영 비율에 주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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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금죽문 선거의 가장 큰 특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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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지별 표수 차이 따위는 중요한 축에도 못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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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인(서란 기준) 선거는 100%의 득표율을 후보자들끼리 나눠 먹는 구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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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권자 전원이 법적으로 단일 계층이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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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금죽문은 전혀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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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죽문의 유권자층은 무려 6계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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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기, 축기기, 결단기, 원영기, 운무기, 태성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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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각 계층마다 득표율을 따로 계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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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정 후보가 연기기 계층 절반의 지지를 받으면, 그의 득표율은 50%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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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에 다른 계층의 득표율도 합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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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디로, 금죽문의 선거는 득표율 총합이 무려 600%씩이나 되는 슈퍼 선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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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기막힌 건 따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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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죽문 소속 연기기 수사는 셀 수 없이 많지만, 태성기 수사라고는 서란과 담청 둘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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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두 계층이 선거에 끼칠 수 있는 영향력, 즉 득표율은 100%로 동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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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과 담청의 표 6개가 연기기 수사 전원의 표와 동등한 가치를 지니게 되는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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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로 뽑는 민선 의원 숫자는 총 100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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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0%라는 정신 나갈 것 같은 수치의 총합 득표율을 고려하면, 득표율 6%선만 넘기면 당선이 확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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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죽문 소속 원영기 수사가 열 명이 채 안 되니까, 그 중 한 명만 자기를 지지해도 민선 의원이 될 수 있다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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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관점에서 생각하면, 담청은 어인족 구역에서 선거 유세를 할 필요조차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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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표 3장에 전부 자기 이름 적고 투표함에 집어 넣으면 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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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만 해도 득표율 50%로 당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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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의 처지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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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지고 보면 득표율 16.66%짜리 표를 세 장이나 보유하고 있는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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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 되면 차라리 지명권이라고 불러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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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막중한 책임감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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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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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표를 받으면 무조건 당선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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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의 자주색 눈동자가 미세하게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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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극광 제도 전역이 시야에 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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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성 지도를 내려다보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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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의 시선이 수도자 구역 곳곳을 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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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 유세 중인 후보자들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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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보자들 옆에는 알림판이 하나씩 세워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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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의 공약이 적힌 알림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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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후보들의 공약을 자세히 살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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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 1인면조? 수도자 전원에게 인면조를 한 마리씩 지급하겠다고? 그래서 뭐 어쩌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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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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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방 수업 시간 단축? 시험 및 숙제 전면 금지? 뭐 저런 공약이 다 있지? 아, 어린애구나. 얼추 열한 살 정돈가? 그러고 보니 의무 교육 연령이 열다섯 살로 올라갔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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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락, 집에 가서 숙제나 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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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다처제 허용? 아니, 진짜로? 아, 자기 부인한테 권각술로 두들겨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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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찬가지로 탈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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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의 시선이 빠르게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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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이거다 싶은 공약이 안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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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과 없는 탐색이 계속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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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누군가를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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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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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혜문이 선거 유세를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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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림판에는 ‘행복한 가정, 행복한 금죽문을 만들겠습니다.’라는 표어가 적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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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수도자는 금죽문 소속이기 이전에 가정의 구성원, 고로 가정의 행복이 선행되어야지만 문파 전체가 행복해질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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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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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뜬구름 잡는 소리만 하던 다른 후보들과 달리 구체적인 공약을 내세웠구나. 게다가 발상도 아주 마음에 쏙 들어. 역시 혜문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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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혜문, 서란의 좋아요 획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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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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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발견한 건 장선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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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어는 ‘선계형 미래 인재 육성 백년대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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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 미만 연기기 수사들을 대상으로 인형술 교육을 의무화하겠다는 게 공약의 주요 골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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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함박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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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술 교육 의무화, 이 또한 항거할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지. 암, 그렇고 말고. 선화라면 분명 훌륭하게 해낼 거야. 누구 제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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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선화, 서란의 좋아요 획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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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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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표는 단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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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탐색을 계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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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금영영을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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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찬가지로 선거 유세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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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체 방송국을 설립하겠다는 게 공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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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고민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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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 영영이라... 요새 평판도 많이 좋아졌다던데 한번 믿어 볼까? 마침 공약도 괜찮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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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영영, 서란의 좋아요 획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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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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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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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투표날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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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인파가 투표소로 몰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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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표소는 삽시간에 혼잡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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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행 요원들이 연신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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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차례 줄을 서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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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표 용지 왼쪽 상단에는 본인 이름을, 중앙에는 뽑고자 하는 후보 이름을 적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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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위가 본인 이름, 중앙이 후보 이름입니다! 헷갈리시면 안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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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지별로 투표 용지의 형태가 다릅니다! 잘 확인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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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님, 그쪽은 축기기 수사 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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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 투표 용지에 편지 적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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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정이 빠듯합니다! 투표를 마치신 분은 지체 없이 나가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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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물 반입 불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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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그 광경을 멀찍이서 지켜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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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그대로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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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행 요원들이 비극적으로 몸부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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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성기 담당 창구의 직원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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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 수사님, 태성기용 투표 용지 세 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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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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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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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태성기용 투표 용지를 살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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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박 문양이 새겨진 값비싼 비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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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오히려 유쾌한 기분마저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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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칸막이 안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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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먼저 왼쪽 상단에 ‘류서란’이라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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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표 용지 중앙은 후보 이름을 적는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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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혜문, 금영영, 장선화의 이름을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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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투표 용지를 잘 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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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칸막이에서 나와 투표함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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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장 다 집어넣고 투표소를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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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건 개표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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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표가 종료되고, 곧장 개표가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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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표 과정에 인형을 사용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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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당으로 영석을 받은 연기기 수사들이 힘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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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이 두 손을 모은 채 간절히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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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발 당선... 제발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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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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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 것도 없이 담청은 당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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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한테 세 표를 던졌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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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굳이 나서서 초를 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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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는 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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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마조마했던 만큼 결실 또한 달콤할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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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선거 결과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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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술로 증폭된 사회자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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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득표율 1위, 담청 님! 축하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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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이 팔짝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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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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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하드려요, 담청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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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고맙구나 서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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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 과정을 지켜보던 어인족도 환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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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신님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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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모신님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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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용신님이 금죽문을 지배하시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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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아, 맞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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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캬, 이게 옳게 된 세상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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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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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자가 어인족을 진정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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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자, 다들 진정해 주세요. 오늘 안에 당선자 100명을 발표하려면 시간이 촉박합니다. 빠르게 2위를 발표하겠습니다. 제1회 금죽문 민선 의원 선거, 그 대망의 득표율 2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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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집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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득표율 1위가 담청이라는 건 어차피 상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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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질적으로 중요한 순위는 2위부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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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자가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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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득표율 2위, 류서란 님! 축하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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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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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당선자)은 즉각 이의를 제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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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저는 후보자 등록을 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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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자가 조심스레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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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보자 등록이요? 그게 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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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로 등록 과정을 거쳐야지만 선거에 후보자로서 참가할 수 있는 거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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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저는 잘... 선거 관리 위원, 나와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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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 관리 위원 셋이 무대에 올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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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절차는 따로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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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시초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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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금죽문 소속 수도자에게는 피선거권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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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 관리 위원 셋은 도로 무대를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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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말을 잇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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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체 이탈이라도 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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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그 많은 표의 출처도 의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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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명탐정 서란의 직감이 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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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 님, 혹시 저 뽑으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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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이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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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세 장 다 나한테 투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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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셨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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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에 분명 생각 없다고 하지 않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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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의 표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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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살짝 머쓱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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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사건은 미궁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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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누가 자신을 뽑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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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대놓고 물어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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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기명 투표이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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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크게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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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서란 뽑은 사람, 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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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저기서 손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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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죽문 수도자도 있고, 어인족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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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 유세조차 안 한 것 치고는 꽤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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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득표율 2위를 할 정도는 결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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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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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누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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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산대붕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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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니다 박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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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붕아, 너도 투표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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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똑똑하고 성실한 사람 고르는 거잖아요. 그래서 세 표 중에 한 표는 박사님 뽑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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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의 머릿속에서 기억 하나가 부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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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산대붕의 카탈로그 스펙에 관한 정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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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전투력란에 분명 ‘원영기 초월’이라는 둥 적어 놨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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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수께끼는 모두 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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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을 득표율 2위로 만들어 준 건 식산대붕의 운무기 표가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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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죽문 유일의 운무기답게 한 장에 무려 득표율 33.33%짜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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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자가 귀빈석을 바라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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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 수사님, 발표를 계속해도 괜찮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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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럼요.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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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이어서 득표율 3위, 발표합니다! 3위, 호혜문 님! 축하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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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식산대붕에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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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붕아, 혹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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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호 수사님도 뽑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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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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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혜문이 득표율 3위인 건 납득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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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과 식산대붕의 표만 합쳐도 벌써 50%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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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제자들과 학부모의 표까지 생각하면 2위를 차지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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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영영이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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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 그리고 호 수사. 우리 대붕이, 안목이 아주 대단하네. 정말 똑똑하고 성실한 사람만 뽑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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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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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은 물론 언니겠지? 그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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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산대붕은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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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후, 사회자가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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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득표율 4위, 등백월 님! 축하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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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과 금영영이 동시에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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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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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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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산대붕이 윙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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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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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그제서야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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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백월은 서류상으로는 금죽문 소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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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지원금 받겠다고 그렇게 등록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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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란 속에서도 당선자 발표는 계속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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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전에 수뇌부 회의장으로 사용되던 건물은 그대로 민회 의사당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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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자 발표 이후, 100명의 민선 의원들은 의사당 건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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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장 의장 선거가 있을 예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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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흐느적흐느적 의사당에 입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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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반가운 얼굴들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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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무진과 금교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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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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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두 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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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원영기 수사는 쓴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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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한 비언어적 표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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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민선 의회에 의해 징발된 피해자는 서란 혼자만이 아닌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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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과 여무진, 금교월은 도란도란 대화를 나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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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선계에서도 잘 지내는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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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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득표율 1위, 담청(임시 의장)이 발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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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제1회 민선 의회 의장 선거를 시작하겠습니다. 입후보자는 손을 번쩍 들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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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끝나기 무섭게 담청은 손을 번쩍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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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럴 때는 또 입후보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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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받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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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이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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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없습니까? 그러면 표결하겠습니다. 입후보자 담청의 민회 의장 임명, 찬성하시는 분은 거수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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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명이 추가로 거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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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아까부터 손을 들고 있었던 담청까지 포함하면 총 100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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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장일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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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이 나무망치를 땅땅 두드리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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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성 100명, 반대 0명, 기권 0명. 이로써 담청 의원이 당선자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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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선 의원들은 일제히 물개 박수를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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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이게 맞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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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구태여 지적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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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소용없을 걸 알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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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침울하고, 담청은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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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의 침울함은 딱 열흘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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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영영은 친구인 서란을 이렇게 표현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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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슬 서 말과 실을 주고 동굴에 가둬 놓으면 누가 안 시켜도 구슬을 실에 꿰고 있을 위인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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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없이 정확한 통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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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그냥 일을 사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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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의회 업무도 일은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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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가능하다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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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기꺼운 마음으로 금죽문 유원지 건설 타당성 조사 보고서를 작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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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찬가지로 담청의 즐거움도 열흘짜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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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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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찬가지로 많은 권한에는 많은 업무가 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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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 득표율과 의회 내 영향력이 정비례하는 금죽문의 의사 결정 과정을 고려했을 때, 민선 의원 중에서 가장 일을 많이 해야 하는 건 다름 아닌 담청 의장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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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스스로 자초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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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장님, 유원지 부지 선정 결과 보고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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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놀이기구 관련 안전 규정 신설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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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장료별 평균 방문객 예측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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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보안을 위한 외부 방문객 이동 경로 1안, 2안, 3안, 4안, 5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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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기구 설계 초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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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장님, 주무시면 안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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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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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재하셔야 할 게 산더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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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장님, 결재 좀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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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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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세요, 의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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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장님, 결재하셔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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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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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은 너덜너덜해져서 저택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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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몽사몽간에 씻고 밥을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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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부자리에 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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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한 번 감았다 뜨자 아침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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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은 퀭한 눈을 한 채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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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건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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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이어 하녀들이 들이닥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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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녀들은 담청을 씻기고, 입히고, 먹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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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식간에 등청 준비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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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밝은 얼굴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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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 님, 어서 출근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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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은 후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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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하고 싶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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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관 고시 그만둬도 된다고 할 때 그만둘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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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걸 왜 계속하겠다고 해 가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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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래서 행복할 때 약속하지 말라고 하는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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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미 수명경벽회공을 배운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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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관의 의무근무기간은 100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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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94년 정도를 더 버텨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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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은 내키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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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쏜살같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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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퇴근 시간이 도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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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길, 서란이 밝은 얼굴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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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 님, 어서 출석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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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죽문 민선 의회는 의장님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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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은 서류 더미에 파묻힌 채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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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 보니까 직접 의원이 될 필요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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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하다 못해 의장만이라도 안 했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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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이렇게 고통 받지도 않았을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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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은 생기 없는 눈으로 의사당을 둘러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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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석 몇 개가 텅 비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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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기 싫어서 도망친 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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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선 의원은 정당한 사유 없이 태업하면 곧장 뇌옥행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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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석의 주인들은 현재 휴직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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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마 의사가 없었고, 수행에 매진해야 할 특별한 사유가 있는 자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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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무진과 금교월이 그 예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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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쉽게도 담청은 해당 사항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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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 유세를 제일 열심히 한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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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영생자라서 수행이 급하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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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은 휴식 선언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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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슬금슬금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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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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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 님, 어디 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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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잠깐 바람 좀 쐬고 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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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방 오셔야 해요. 아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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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은 의사당 밖으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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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갈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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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근처 공원 의자에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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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하니 달을 올려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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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광과 극광이 밤하늘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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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익숙해진, 그럼에도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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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아름다움을 보며, 담청은 고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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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당 바닥에 누워서 못하겠다고 때굴때굴 구르면 혹시라도 휴직 시켜주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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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혀 아름답지 못한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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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두 남녀가 다가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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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녀님, 안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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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뵈니 정말 기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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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녀님, 정말 오랜만에 듣는 호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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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의 시선이 두 남녀를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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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 다 외모는 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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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은 금방 두 사람을 알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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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너희들이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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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과 함께 공놀이를 했던 아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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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에는 나이가 열 살, 열한 살 정도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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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둘이 딱 붙어 다녔던 기억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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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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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둘은 여전히 함께 다니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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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내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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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결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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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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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이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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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벌써 육십 년도 넘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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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자식도 있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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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이 뭔가요, 손주도 있지. 저희 벌써 할아버지 할머니 소리 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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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은 감회가 새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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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작 수십 년 정도 지났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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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 다 훌쩍 자라 버렸다는 점이 놀랍고, 그럼에도 어릴 적 모습이 남아 있다는 게 신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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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하면서도 낯선 두 남녀는 한동안 대화를 나누다가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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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은 멀어지는 두 남녀를 지켜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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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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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걸음이 향한 곳은 당연히 의사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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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 힘차게 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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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식은 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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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은 조금만 더 열의를 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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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봤자 고작 백 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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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도면 사랑하는 금죽문을 위해서 충분히 헌신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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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혼자 하는 것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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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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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장님, 문화 시설 확충 관련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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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 우리 금죽문을 위해서 함께 힘내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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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요 그럼요. 아무튼 결재 좀 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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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은 결재 도장을 쾅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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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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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히 한 달 뒤, 비승 3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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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충격적인 소식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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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 님, 저 내일부터 의회 출석 안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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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왜 그러는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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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회 재판 일정이 잡혔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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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이 바닥을 때굴때굴 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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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배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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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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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원향은 생각보다 고루한 집단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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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선 다섯 명의 아득한 나이를 고려하면 정말 의외의 일이 아닐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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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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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꿀 필요가 없다면 굳이 바꾸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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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만 년이 경과하든, 100만 년이 경과하든 상관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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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고쳐야 할 필요성을 느끼면 반 년 된 제도도 손보는 게 도원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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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고집을 부리는 부분도 분명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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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원향 총타 흑단궁이 그 대표적인 예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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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원이 아무리 많이 접수되어도, 다들 석탄궁이라고 놀리는, 기괴한 외형 만큼은 결코 변하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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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지선 중 누구 취향인지는 의견이 분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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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거지같이 생긴 건물만 제외하면, 도원향은 썩 괜찮은 조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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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괴 토벌과 치안 유지, 빈곤 퇴치에도 언제나 앞장 서고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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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짓 한 번으로 지형을 바꾸는 강자들이 즐비함에도 선계가 멀쩡히 돌아가는 건 반쯤 도원향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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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도원향 직할령을 선호하는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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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공서나 문화 시설 같은 게 집중되어 있기도 하고, 무엇보다 안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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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과 담청이 매일매일 출근하는 임6 구역 중심지 또한 그런 직할령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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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직할령은 한정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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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자든 범인이든, 도원향 직할령에 거주할 수 있는 이들은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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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머지는 선택을 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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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부류는 그냥 앉아서 뭉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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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기회를 잡기 위해 살인적인 물가를 감내하며 직할령에 남기를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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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인생 역전의 기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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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와 자원이 모이는 곳에는 기회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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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운이 따라준다면 한 방에 신세 고치고 해피한 직할령 라이프를 보낼 수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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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결사 오대랑과 그의 조수가 여기에 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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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부류는 수도문파 혹은 수도가문이 다스리는 자치령으로 이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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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를 다소 포기해야 한다는 점만 제외하면 나쁘지 않은 삶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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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죽문과 피풍사문에 거주하는 범인 대다수가 이런 부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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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들에게도 인생 역전의 기회는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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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근 보유자를 낳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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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출산율이 굉장히 높은 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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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부류는 개척자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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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집 하나 장만하는데 수천 년씩 걸리는 도원향 직할령은 물론이고, 부자유를 감내해야만 하는 자치령도 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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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냥 자기들끼리 정착지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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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정착지는 얼마 못 가서 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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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일부는 끈질기게 살아남아서 도원향의 기준을 만족할 때까지 성장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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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정착지를 흔히들 자유 도시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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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순회 재판을 위해 방문한 곳도 그런 자유 도시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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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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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도시의 전경을 바라보며 감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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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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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좌관 한 명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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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러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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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크네요. 이 정도 규모면 그냥 자기들끼리 재판해도 되는 거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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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 수 없습니다. 자유 도시의 권한은 1심 재판까지거든요. 그마저도 중범죄는 곧장 도원향 관할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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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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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자유 도시가 아니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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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치권 자체는 꽤나 폭넓게 인정됩니다. 사법권만 유독 엄격히 통제해서 그렇지. 선백파흑진군께서 이런 부분에는 굉장히 완고하시다고 들었습니다. 그래도 자유 도시 입장에서도 손해는 아닐 겁니다. 사법권의 일부를 포기하는 대신에 도원향의 보호를 받을 수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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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긴, 그것도 그렇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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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수행원단과 함께 자유 도시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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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에는 별의별 종족이 다 모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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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말로 종족의 용광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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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문 도중, 누군가 서란 일행에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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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차림으로 보아하니 관리인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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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검문소까지 나와 있는 건 다소 신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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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가 굉장히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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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이번에 순회 판사로 오신 류 법관님이시지요? 정말 학수고대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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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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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이 많이 밀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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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 그렇고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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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 밀려 있으면 안 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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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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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법원으로 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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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는 반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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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시겠습니까? 바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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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판관 류서란의 데뷔 재판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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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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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하겠지만 ‘개작두를 대령하라!’ 같은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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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그런 건 순회 판사의 재량 밖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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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회 판사의 권한으로 처리할 수 있는 건 경범죄나 사소한 민사 분쟁 정도가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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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도둑이 항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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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억울합니다! 배가 고파서 빵을 훔쳤는데 이 형량이라니요! 고작 빵 하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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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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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딱 하나의 빵만을 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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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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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빵을 훔쳤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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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그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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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안관, 증거물을 제출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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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안관들이 낑낑거리며 증거물을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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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 남성 다섯 명이 나란히 누울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한 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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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걸 훔칠 생각을 했다는 게 더 대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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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지엄한 판결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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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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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도둑(아님)이 끌려나가며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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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상소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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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계 장 발장은 이미 한 번 상소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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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도시 자체 재판소의 1심 판결에 불복한 결과, 상급 법원인 순회 재판소까지 온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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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안타깝게도 순회 재판의 판결에 대해서는 상소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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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사건은 층간 소음 분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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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이하게도 윗집이 아랫집을 제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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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랫집 거주자가 박쥐였던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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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집 거주자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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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사님, 매일 밤 천장 갉작거리는 소리 때문에 잠을 못 자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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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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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매일 밤 갉작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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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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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고는 왜 밤마다 그러는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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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야행성이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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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어째서 주행성 종족용 공동 주택에 거주하는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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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랫집 거주자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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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예산 문제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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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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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조금 부정 수급을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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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다시 지엄한 판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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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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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쥐 또한 질질 끌려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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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아침에 집이 없어졌지만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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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조금 부정 수급과 위증 때문에 투옥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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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재판은 탈세 관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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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히도 피고인이 용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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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안의 권능은 무용지물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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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고인은 당당하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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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세가 아닙니다. 절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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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안관, 피고인의 천라지망 검색 기록을 제출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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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는 순회 판사님, 제가 탈세 혐의에 대해서 자백해도 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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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결, 압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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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에도 많은 사건이 서란을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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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무 불이행, 토지 소유권 분쟁, 점유 시효 문제, 영업 정지 처분 취소소송, 부작위위법확인소송, 가처분 신청 등등 그 종류도 다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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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점심 시간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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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 일행은 법원 구내식당으로 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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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점심은 찜 요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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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보는 채소가 잔뜩 들어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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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일행을 안내했던 관리가 조심스레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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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 법관님, 혹시 오후 재판도 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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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보니까 할 일이 태산이더라고요. 빨리빨리 해치워 버리죠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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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러시겠어요? 그러면 혹시 저녁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저희가 따로 준비해 드려도 될까요? 물론, 류 법관님만 괜찮으시다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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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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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저야 감사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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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겠습니다! 아, 못 드시는 음식은 없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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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잘 먹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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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는 만면에 미소를 머금고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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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부하 직원에게 명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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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식 시간에 맞춰서 만찬 차려 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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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 법관님 오후 재판도 하신대요? 정말 다행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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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게 말이야. 저번에 온 순회 판사는 격일로, 그것도 오전 재판만 깔짝거리다가 갔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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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하 직원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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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 때문에 재판이 엄청 밀렸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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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이번에는 운이 좋았어. 혹시라도 불편하시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서 모셔. 숙소도 더 꼼꼼히 청소하고, 혹여나 관광이 하고 싶으실 수도 있으니까 안내인도 준비해 두고. 한 치의 빈틈도 없이, 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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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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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기껏 준비한 숙소가 쓰이는 일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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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섭할 사람이 없는 환경과 밀린 재판이 많다는 명분이 상승 효과를 발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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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저녁 만찬을 먹고도 숙소에 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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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삐가 풀린 13000근짜리 마차가 내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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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회 재판, 24시간 영업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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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인이 무인도에 누워 낮잠을 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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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워 있는 곳은 진창 한복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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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여인이 입고 있는 백의는 조금도 더럽혀지지 않은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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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른 호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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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고 성숙한 외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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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마에 달린 청자색 사슴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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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인반룡의 여인이 눈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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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비속불박진군, 선계에 단 일곱만 존재하는 지선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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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선이 되기 전 이름은 주양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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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지금도 주양 진군이라 불리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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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에서 막 깨어난 주양 진군은 도로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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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후각에 정신을 집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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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멀리서 낯익은 냄새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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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양 진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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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에 닿았던 의복과 신체, 그 어떤 곳에도 더러움은 묻어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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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자색 용안이 어딘가를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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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까만 바다 사이로 보이는 거대한 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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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종족이 바글거리는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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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시간에도 불이 켜진 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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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에 주양 진군이 찾던 존재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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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색 뿔과 용안을 지닌 반인반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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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방금 전 맡은 낯익은 냄새의 근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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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양 진군은 강한 흥미를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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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발을 들고 그저 한 걸음 내딛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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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후, 주양 진군은 서란의 앞에 당도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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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는 당황한 서란에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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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누구냐? 구은랍의 사생아라도 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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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비속불박진군 주양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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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방랑하는 반인반룡 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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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어떤 것으로도 묶을 수 없고 얽지 못하는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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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정말이지 당혹스럽기 그지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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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야의 순회 재판을 진행하는 도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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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목은 무전취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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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습범이라서 죄질이 굉장히 나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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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걸릴 재판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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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쇄 회로 영상도 확보했고, 증인도 많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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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봉 좀 두드리고 투옥시키면 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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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때, 여인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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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런 전조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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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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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담한 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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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부시게 새하얀 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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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자색 사슴뿔과 청자색 눈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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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은 법정 한복판에 덩그러니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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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의 다른 이들에게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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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순회 판사만을 응시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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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여인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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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누구냐? 구은랍의 사생아라도 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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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비슷한 의문을 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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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생아? 누구한테 하는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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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순회 판사한테 하는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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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구은랍은 또 누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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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도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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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저한테 하시는 말씀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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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의의 여인이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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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여기에 너 말고 또 누가 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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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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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청객(무전취식 피해 점주들) 숫자만 해도 수십 명은 족히 넘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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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같이 이 자리에서 당장 벗어나고 싶어 하는 얼굴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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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청객들은 간절한 눈빛으로 서란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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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좀 해 달라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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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 안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순회 판사이니, 아예 일리가 없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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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눈앞의 여인을 유심히 살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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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색도 난색도 아닌 중성색의 뿔과 용안, 반인반룡만의 특징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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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의 격차는 가늠조차 안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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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도 굉장히 많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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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소 진선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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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도 이 자리를 떠나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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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법봉의 무게를 져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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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공손한 태도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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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등선명이 어떻게 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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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속불박진군 주양강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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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진군이셨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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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속불박진군이 인상을 팍 쓰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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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양이 성이고 강이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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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복성이셨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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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그나저나 너, 구은랍과는 무슨 관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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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은랍이 도대체 누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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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눈알을 대굴대굴 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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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대호법 손달과 눈이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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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치 빠른 손달은 서기용으로 구비되어 있던 공책에 뭔가를 적어서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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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천답층진군의 존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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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주양 진군에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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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천답층진군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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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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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첨천답층진군의 이름이 구은랍이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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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청객들의 궁금증이 해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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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기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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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천답층진군과 비속불박진군, 둘 다 선계에 단 일곱 명뿐인 지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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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절대자들 사이의 일은 모르는 게 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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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이 더욱 간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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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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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오해를 하고 계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첨천답층진군과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게다가 사생아라니요. 혹시 그렇게 생각하시는 이유라도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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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 물론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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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뭔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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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양강이 확신에 찬 태도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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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냄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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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냄새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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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네게서 구은랍 그 녀석과 똑같은 냄새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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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류 법관한테서는 첨천답층진군과 똑같은 냄새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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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청객들은 조심스레 귀를 틀어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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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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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자기 팔뚝을 킁킁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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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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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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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박꼬박 씻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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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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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모르겠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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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취를 말하는 게 아니다. 내가 말하는 냄새는 영혼이나 혈통 같은, 좀 더 근원적인 무언가니까. 이래도 네가 구은랍의 혈육이 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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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저는 하계 출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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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양강은 귓등으로도 안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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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천자라, 자기 신분을 숨기고자 하는 이들이 항상 내뱉는 소리지. 참 성의 없게도 둘러대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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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입니다. 관청에 가서 확인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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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문서도 당연히 위조했겠지. 구은랍 그 녀석은 기록보관소의 수장이니 어렵지 않을 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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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말문이 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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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답답함, 정말 오랜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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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벽에다 대고 얘기하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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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꿍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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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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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양강은 허리춤에 손을 턱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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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자신만만한 태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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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밉기 그지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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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양강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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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발뺌해도 내 후각을 속이는 건 불가능하다. 그만 포기하고 인정하거라. 무엇보다, 지선의 조력이 아니었더라면 네가 그 어린 나이에 태성기까지 도달할 수 있었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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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그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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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그 반응, 당황했군. 역시 내 생각이 맞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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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양강은 홀로 납득하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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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에서 있던 손달도 덩달아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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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서란이 사실은 첨천답층진군의 숨겨진 혈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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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고 보니 나름 일리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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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골이 680세에 태성기 수사가 되는 것보다는 훨씬 현실성이 있는 가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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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천자 등록도, 선골 검사 결과지도 모두 위조 문서였던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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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전부 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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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다시 생각해 보니까 말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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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서란이 선계 태생이라는 가설은 금죽문에서 관찰한 사실 관계와 모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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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달은 빠르게 정신을 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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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동안에도 서란과 주양강의 설전은 계속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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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내 누가 패배하게 될지는 자명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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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쟁의 승패란 본디 논리력보다는 지구력으로 결판나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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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서란이 항복 선언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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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하죠, 제가 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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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인정하는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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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뭐...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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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양강의 콧대가 하늘을 찔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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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그 정도면 썩 괜찮았다. 나 정도 되는 사람이 아니었다면 깜빡 속아 넘어갔을 테니까. 나 정도 되는 사람이 아니었다면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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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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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고 말고, 이 몸은 살면서 단 한 번도 져 본 적이 없는 무패의 논객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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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승의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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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문득 억울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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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자신이 뭘 잘못했다고 이런 터무니 없는 오해를 받아야 한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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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원통해서 기절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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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스레 서란의 태도 또한 불퉁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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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주양 진군께서는 첨천답층진군께 관심이 무척 많으시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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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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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렇지 않습니까. 냄새가 어쩌니, 사생아가 어쩌니 하시는 것도 그렇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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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양강은 허리춤에서 손을 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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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대로 팔짱을 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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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방어적인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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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씨도 아까와는 좀 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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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그럭저럭 친분이 있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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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계속 이름으로 부르셨던 거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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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도원향도 만든 사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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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깜짝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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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도원향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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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나와 구은랍 둘이서 창건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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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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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양강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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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반사적으로 손달 쪽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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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치 빠른 손달은 또 공책에 뭔가를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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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는 서란에게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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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현재는 탈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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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저도 모르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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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왜 굳이 탈퇴하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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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양강은 입술을 달싹이다가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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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은랍이 꼴보기 싫어서 탈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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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요? 어떤 점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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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기생오라비 같이 생긴 낯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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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봐도 방금 지어낸 핑곗거리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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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청객들은 막고 있던 귀를 슬그머니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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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는 서로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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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에 담긴 의미는 대동소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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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혹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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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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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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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혹시 설마 진짜로 치정 문제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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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속불박진군이 첨천답층진군과 함께 도원향을 창설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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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함께 하고 싶은 마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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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껏 만든 도원향에서 탈퇴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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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 보기 껄끄러운 일이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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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 법관이 첨천답층진군의 사생아인지 아닌지에 대해서 집요하게 캐물은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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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신경 쓰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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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청객들은 제각기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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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할 것만 같았던 약속, 유혹과 배신, 혹은 일방적인 연심과 절절한 고백, 그리고 격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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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진실은 당사자들만이 알고 있을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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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청객들은 청각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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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려 지선끼리의 치정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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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을 걸고서라도 들을 만한 가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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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깝게도 사건의 전말은 밝혀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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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속불박진군 주양강이 어느샌가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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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과 마찬가지로 전조 없는 퇴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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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궁금하겠지만 무전취식 상습범은 투옥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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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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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자유 도시에 도착한 이후 처음으로 자기 숙소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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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동안은 법원에서 먹고 씻고 다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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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오늘 만큼은 좀 편하게 쉬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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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침대에 걸터앉은 채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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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호법,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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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말씀하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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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지선 분들도 비속불박진군처럼, 어... 호탕하시진 않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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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짜냐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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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달은 안심하라는 듯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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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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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속불박진군만 저런다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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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활짝 웃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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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쵸? 그런 거 맞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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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그렇습니다. 그래도 어떻게 보면 저런 엉뚱함 또한 천재의 일면일지도 모르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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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의 일면? 하긴, 지선이라는 경지에 도달할 정도면 그야말로 천재 중의 천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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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달이 고개를 주억이며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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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요, 고작 3000년 만에 지고의 경지에 도달하셨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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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요? 비속불박진군께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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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혹시 모르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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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0년 만에 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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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정신이 아득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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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백월,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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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선의 5대 요소는 영근, 선골, 오성, 공법, 자원이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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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두 개 정도 없어도 되는 거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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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난생처음으로 다른 수도자들이 자신을 보며 느낀 심정에 공감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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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불공평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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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비속불박진군 주양강은 또다시 법원에 방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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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양강은 또다시 서란을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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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번에는 그냥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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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색 꽃 한 송이와 함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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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양강이 서란에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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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아직 네 이름도 듣지 못했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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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류서란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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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 류씨라... 알겠다. 이 꽃은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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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얼떨결에 꽃을 받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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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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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뜬금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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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식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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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일단 받았으니 고맙다고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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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감사합니다. 예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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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든다니 다행이구나. 갑을 구역까지 가서 꺾어 온 보람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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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을 구역이요? 밤사이에 선계 동부까지 다녀 오신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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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양강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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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정도는 식은 죽 먹기다. 이 몸의 전송술은 선계 제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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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긴 어제도 갑자기 나타났다가 갑자기 사라지셨었죠. 전송진도 없이 그런 게 가능할 줄은 상상도 못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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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선쯤 되면 못하는 게 더 드물어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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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광장 시계탑이 뎅뎅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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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업무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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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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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양 진군, 저는 이만 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재판 일정이 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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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늦으면 안 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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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꽃은 감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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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양강은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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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할 나위 없는 안도감에 절로 한숨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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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양강이 순순히 물러나서 정말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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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수행원단과 함께 법정에 입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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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곧장 주양강을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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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청석에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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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도 하필이면 맨 앞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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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그냥 할 일이나 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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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 도리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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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자 외 출입 금지라고 얘기해 봤자 안 들을 게 뻔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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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순회 재판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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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에 참석한 주양강은 틈틈이 깐족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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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습적인 소액 사기꾼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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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런 놈이 여태 살아 있다니. 말세군 말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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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기물파손죄를 저지른 패거리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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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시켜라, 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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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업원의 임금을 체불한 점주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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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우, 쓰레기! 전 재산 몰수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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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치안관들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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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필사적으로 서란의 시선을 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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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야 암만 봐도 무리한 요구이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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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서란이 직접 나설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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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숙, 정숙! 방청객들은 사담을 삼가 주십시오! 그리고 법정은 투기장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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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과가 있었는지 주양강은 입을 다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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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대신에 낮잠을 자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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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안 하니까 지루한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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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 입장에서도 차라리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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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어도 법정은 정숙해졌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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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틈에 재빨리 재판을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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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재판이 모두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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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찾아 온 점심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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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양강은 칼같이 기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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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서란 일행에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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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은 내가 대접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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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저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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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담 갖지 않아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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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부담스러웠지만 거절하기도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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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 일행과 주양강은 근처 요리점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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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의 맛 자체는 굉장히 훌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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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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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네요. 그런데 이런 맛집은 어떻게 아셨나요? 혹시 전에도 이 도시에 방문한 적이 있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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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결에 바람이 속삭이는 소리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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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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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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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소린지 전혀 알아 들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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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나 마저 음미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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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양강은 서란의 접시에 요리를 올려 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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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먹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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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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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먹는구나, 더 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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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삼 인분 가량을 더 먹고 나서야 자리를 벗어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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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에 돌아온 서란은 곧장 담당자를 호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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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재판을 위해 준비해야 할 게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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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담당자는 뜻밖의 소식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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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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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에는 재판이 3건뿐이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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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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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정 되게 빡빡하다고 하지 않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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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당자가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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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항소 취하하겠다며 난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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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비속불박진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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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그럴 겁니다. 소문이 쫙 퍼졌거든요. 비속불박진군께서 법정을 참관하신다고. 찔리는 게 있는 항소인들이 대거 도망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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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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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찔리는 게 있는 항소인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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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모르시는군요. 순회 재판을 받는 이들 중 대다수는 항소 좀 한다고 결과가 바뀌지 않는다는 걸 잘 압니다. 그럼에도 당장의 처벌을 피하기 위해 항소하곤 하죠. 어차피 순회 판사는 비정기적으로 방문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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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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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당자는 심야 재판도 모두 취소되었다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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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3건의 재판을 잘 처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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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에는 퇴근해서 숙소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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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 문이 저절로 열리며 불청객이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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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양강이 꽃 한 송이를 내밀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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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흰색 꽃도 좋아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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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대답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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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꽃을 건네받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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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주양강을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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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좀 불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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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생아 운운하던 첫 만남이 그랬고, 자기 멋대로 불쑥불쑥 나타나는 행실 또한 민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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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지 좀 높다고 남을 업신여기는 것도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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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애써 예의를 갖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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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재판 때문에 좀 피곤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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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런, 피곤하면 안 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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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하지만 오늘은 이만 돌아가 주시겠습니까? 목욕이 하고 싶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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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양강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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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러면 함께 들어가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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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말문이 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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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처구니가 없어서 기절할 것 같아서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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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나랑 장난치나 싶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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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런 감정은 주양강과 눈을 마주친 순간 사라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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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자색 용안에는 기대감만이 가득 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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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그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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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서란은 주양강과 함께 욕조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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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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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재로 만든 욕조는 꽤나 커다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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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반인반룡은 목욕물에 몸을 담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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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양강은 아직도 꽃을 손에 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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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말없이 주양강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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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옥 같은 피부와 흑단 같은 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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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으로 그린 듯한 미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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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투적인 표현은 하기 싫지만, 정말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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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양강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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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정확히 몇 살이더냐? 겉보기로는 백 살 조금 넘는 듯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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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딱히 놀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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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반인반룡이기도 하고, 격차도 만만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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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들켰으면 오히려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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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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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104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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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그랬구나. 그러면 여의주를 완성한 건 몇 살 때였느냐? 나는 75세쯤 완성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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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세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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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양강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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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닮은 점이 참으로 많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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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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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고 말고. 종족도 같고, 성별도 같고, 심지어 타고난 자질마저 비슷하지 않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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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별달리 대답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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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동안 침묵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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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양강은 손에 든 꽃을 만지작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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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불현듯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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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물어보고 싶은 건 없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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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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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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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거나, 수행에 관해서든 뭐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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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고민하다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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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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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순환 의식에 대해서 여쭤봐도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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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환 의식? 아, 윤회 의식 말이구나. 괜찮으니 어서 물어보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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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의식을 치르면서 혼백의 손상을 최소화할 수 있는 방법이 궁금합니다. 주양 진군께서는 3000년 만에 지금의 경지까지 도달하지 않으셨습니까. 어떻게 그 정도로 빨리 경지를 올리면서 혼백을 온존하신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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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양강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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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 도중에 법력을 세심하게 제어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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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더 자세하게 설명해 주실 수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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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그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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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양강은 여차저차 설명을 이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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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잘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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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다른 주제에 대해서 질문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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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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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백의 손상을 치료하는 게 가능한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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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놔두면 저절로 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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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 치유가 불가능할 정도로 심각하게 손상된 혼백을 인위적으로 치료할 수단이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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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양강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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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정확한 명령어를 입력한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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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결과값이 나오길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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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을 고민하던 주양강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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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는 바로는 없구나. 하지만 진행 중인 붕괴를 멈출 수 있는 방법은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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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어떤 방법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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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계로 가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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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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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계요? 죽으면 가는 그 명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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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명계에서는 그 누구도 죽지 않는다.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말이지. 영혼을 짓뭉개든 육신을 토막 내든 마찬가지야. 망자는 생전의 모습으로, 생자는 명계에 발을 디딘 그 모습 그대로 재생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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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혼백이 붕괴되는 것도 멈추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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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양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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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녹기 시작한 얼음을 냉동고에 집어 넣는 격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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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꺼내면 다시 녹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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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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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이승에서 죽기 VS 저승에서 좀 늦게 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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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지가 양쪽 다 거기서 거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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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명계에 대한 호기심은 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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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다시금 주양강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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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기보다 아는 게 많은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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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잡을 수 없는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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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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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답지 않게 순수한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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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양강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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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 궁금한 것이 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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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소 민감한 질문일 수도 있는데 괜찮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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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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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주양강의 젖무덤 사이를 바라보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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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치에 있는 그 흉터는 뭔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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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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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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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양강이 여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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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기억나지 않는구나. 아주 어렸을 적에 생긴 모양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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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시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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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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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실의 불이 확 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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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광원이라곤 제각기 발광하는 서란과 주양강의 사슴뿔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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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의 자주색 용안에 주양강이 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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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도, 가슴팍도, 언제까지 들고 있을 작정인지 모를 흰색 꽃도 모두 청자색으로 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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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저도 모르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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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첨천답층진군의 사생아가 아니라고 하면 믿으실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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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한테까지 애써 숨길 필요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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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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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금 불이 켜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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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목욕을 한 뒤로 며칠이 경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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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양강은 이후에도 꼬박꼬박 서란을 만나러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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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도 구태여 밀어내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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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슬 주양강이 어떤 사람인지 감이 잡힐 것도 같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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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꽃을 건네받으며, 서란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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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양 진군, 평소에는 주로 뭘 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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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잠을 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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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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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양강이 의아한 얼굴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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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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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계속 낮잠만 주무시진 않을 거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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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 일어나서 산책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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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할 때 말고는 쭉 잔다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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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단 한 번의 질문으로 핵심에 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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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양강의 행동에는 악의가 전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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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사람 간의 거리감에 대한 이해가 부족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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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차마 형용하기 어려운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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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송술 같은 고계 법술도 턱턱 쓰는 진선이 대인 관계 능력 부족이라니, 이럴 수가 있나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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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아예 말이 안 되는 건 또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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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인 관계 능력이라는 것도 결국은 기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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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어느 정도는 훈련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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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그러면 영원히 못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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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주양강을 바라보며 고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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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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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언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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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놔둘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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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같았으면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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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테 충고나 조언 같은 거 안 하는 성격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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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방성이나 뭐 그런 이유가 아니라, 어차피 의미 없는 행동일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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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라는 동물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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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굳게 다짐해도 사흘을 채 못 가는데 타인이 한마디 보탰다고 결과가 바뀔 리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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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충고든 조언이든 백날 해 봤자 서로 마음만 상할 뿐이라는 게 서란의 평소 지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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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좀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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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양강은 총 한 방이면 너도나도 공평하게 죽는 지구인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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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만 먹으면 혼자서도 대멸종 두세 번 정도는 일으킬 수 있는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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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절대자에게 사교성이 전무하다니, 핵탄두 일가족이 도심을 걸어다녀도 이 정도로 불안하지는 않을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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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숙고하고 또 숙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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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결정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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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얘기나 해 보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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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슬쩍 운을 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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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양 진군, 여쭈어 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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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물어보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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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번 찾아와서 꽃을 주시는 건 진군께서 제 호감을 사고자 하시기 때문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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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양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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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말이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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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방식을 다소 바꿔주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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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식을 바꿔? 어째서 그래야 하는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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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이게 뭐하는 건가 하는 얼굴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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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방적으로 호의를 쏟는다고 친분이 생기는 건 아닙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거리감이라는 게 존재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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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정성을 다하면 되는 것 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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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긍정적인 마음이라고 할지라도 받는 사람 입장에서는 준비가 필요한 법입니다. 누군가에게 다가가기 위해서는 기다릴 줄도 아셔야 합니다. 안 그러면 역효과가 나기도 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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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양강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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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효과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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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부담스럽기도 하고 불쾌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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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뜻으로 그런 건데 불쾌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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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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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 진군 주변에 있는 벌레를 대신 잡아 준다면 기분이 어떨 것 같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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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 고맙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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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옷 안에 들어간 벌레를 잡아 주겠다며 가슴팍에 손을 쑥 넣으면 어떨 것 같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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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양강은 교차한 양팔로 제 가슴팍을 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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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아무리 선의라고 해도 그건 좀 그렇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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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쵸? 그쵸? 그게 바로 거리감이란 겁니다. 진군께서 제 숙소에서 튀어나오시거나, 대뜸 같이 목욕하자고 하셨을 때 제가 딱 그런 기분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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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딴에는 보다 친밀해지고 싶어서 그랬건만, 네가 그런 기분이었을 줄은 미처 몰랐다. 미안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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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양강은 순순히 제 잘못을 인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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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오히려 말을 꺼낸 서란이 당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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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칭 무패의 논객답게 이번에도 박박 우길 줄 알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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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양강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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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내가 고쳤으면 하는 점이 더 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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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법원에 있을 때는 안 찾아오셨으면 하네요. 저한테도 사회 생활이라는 게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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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겠다. 그렇다면 꽃은 어떠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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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생각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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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번 꺾어 오는 꽃 한 송이, 과연 괜찮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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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21세기 지구였다면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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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선계 기준으로는 아슬아슬하게 OK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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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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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송이 정도는 괜찮을 것 같네요. 꽃다발도 아니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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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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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왜 굳이 꽃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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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양강이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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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받았을 때 가장 기뻤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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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한테 받으셨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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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은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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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질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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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천답층진군께서요? 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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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만나러 올 때면 언제나 그랬다. 게다가 매번 다른 꽃을 들고 왔었지. 그 마음이 기뻐서, 어릴 적 나는 구은랍이 방문하는 날만을 손꼽아 기다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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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수선도 첨천답층진군께 배우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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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양강은 살며시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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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그 뿐이겠느냐? 몸을 씻는 법도, 머리를 빗는 법도, 단장하는 법도, 모두 그에게 배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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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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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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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천답층진군 구은랍(인간 남성)을 향한 서란의 호감도가 소폭 감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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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뒤, 비승 4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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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 일행의 여정은 순조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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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도시, 수많은 재판을 거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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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주양강도 함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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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양강과 동행하는 것도 어느샌가 익숙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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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향 자체가 수더분해서 그런지 원영기에 불과한 보좌관들과도 데면데면하게나마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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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가끔 이상한 행동을 하기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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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지적하면 대부분은 고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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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 생각해 보면, 두 번째로 만났을 때, 법정에서 정숙하라는 말을 듣고 입을 다물기는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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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대신에 낮잠을 자서 문제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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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일행은 한가로이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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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도시와 다음 도시 사이에 있는 무인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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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이하게도 섬 전체가 꽃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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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의 머리를 빗겨 주던 주양강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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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지는 않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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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아프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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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 조절이 영 힘들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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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딸랑 하는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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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소매에서 자기 단말기를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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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 엽서가 한 장 도착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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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랍게도 발신자는 등백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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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문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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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편지함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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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양강은 슬며시 시선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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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했지만 예전처럼 훔쳐보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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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안된다는 걸 이제는 아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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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대신에 직접 물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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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보낸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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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지인이 이영근 조화에 성공했다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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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채지심 수행 말이구나. 몇 년 정도 걸렸다고 하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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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잠깐 고민하다가 당사자에게 물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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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상관없다는 등백월의 답신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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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야 75년 태성기도 있는데 이영근 조화 40년 정도가 뭐 그리 대수겠냐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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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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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 걸렸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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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나 괜찮은 선골을 지닌 모양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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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가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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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손달의 단말기가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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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달은 단말기를 확인하더니 표정을 굳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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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금방 평소대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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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양강이 잽싸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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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이라도 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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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뇨, 대출 광고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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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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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다시 서란의 단말기가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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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백월인가 싶어서 얼른 확인해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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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이 보낸 통신 엽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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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의아한 목소리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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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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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러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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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번 도시가 통제 구역으로 지정되었다네요. 순회 재판 순서를 하나 건너뛰고 다다음 도시로 가라는 법원의 공문이에요. 사유는 딱히 안 적혀 있네요. 늦지 않으려면 지금 바로 떠나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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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행은 곧장 무인도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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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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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해 연말, 서란의 순회 판사 임기가 종료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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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별의별 범죄가 다 있다는 걸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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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유익하기 그지없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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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행은 금죽문으로 복귀할 준비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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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하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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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속불박진군 주양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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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골머리를 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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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오겠다고 하면 어찌 해야 하나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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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고민은 의외로 싱겁게 해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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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양강이 먼저 얘기를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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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도시에서 헤어지는 편이 좋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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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심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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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아무래도 내가 틀렸던 모양이야. 너를 보고 구은랍의 사생아 운운했던 얘기 말이다. 첫 대면부터 너무 무례했었지. 그것도 사과하고 싶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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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생아, 정말 오랜만에 듣는 단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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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지고 보면 그 도시를 떠난 이후로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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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 모두 이 화제를 기피한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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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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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갑자기 생각을 바꾸신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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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처음 봤을 때부터 반쯤 직감했다. 냄새가 똑같기는 하다만 단지 그뿐이었지. 너와 구은랍은 본질적인 부분이 다르다. 정확히 뭐가 어떻게 다른 건지는 모르겠지만. 인정하기 싫어서 여태 억지를 부린 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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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와서 솔직해지신 이유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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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양강이 홀가분하다는 투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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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니까 그런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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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가 돌아가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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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순회 도중이라면 몰라도 어물쩍 뭉개고 문파까지 따라가는 건 여러모로 민폐일 테니까. 이게 바로 적절한 거리감이라는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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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양강의 결심은 확고한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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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눈치를 보다가 농담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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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씀은 패배를 인정하시는 거죠? 전승 기록이 깨졌으니 더는 무패의 논객이 아니게 됐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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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논쟁 같은 거 해 본 적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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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거짓말이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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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양강은 살포시 웃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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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나는 이만 가 보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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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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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끌어 봤자 헤어지기만 힘들 것 같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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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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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잠깐만 기다려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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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러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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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태 받기만 했잖아요. 마지막인데 저도 선물 하나쯤은 드려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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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잽싸게 상점가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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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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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에 단말기 하나를 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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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단말기를 건네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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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연락처 등록해 놨어요. 언제든지 편하게 연락해 주세요. 말벗 정도는 되어 드릴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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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양강은 단말기를 받으며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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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도록 하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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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과 비속불박진군은 그렇게 작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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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서란은 주양강의 통신 엽서 폭탄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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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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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랑 딸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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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랑딸랑딸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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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란한 종소리를 들으며, 이아금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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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혹시 연애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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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닌데? 갑자기 그건 왜 궁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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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하는 것도 아닌데 무슨 연락을 그리 많이 주고받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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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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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게 있어. 이 또한 내 과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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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언니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그런데 순회 재판 일정은 완전히 끝난 거야? 아니면 또 나가야 하고 그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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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출근할 일 없어. 오늘부터 휴가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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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금은 근래 들어서 가장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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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가?! 얼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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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순회 재판 포상 휴가랑 연차 휴가 남은 거 한꺼번에 사용해서 시보 기간 끝날 때까지 반 년 정도는 쉴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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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웬일이야? 언니가 휴가를 다 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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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열심히 답장을 보내며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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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별로 쓰고 싶지 않았는데, 최고재판소 내부 지침에 걸렸나 봐. 의무적 휴가 사용 횟수 미달로 강제 집행됐어. 그래서 한동안 출근 못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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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 혹시 무급 휴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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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급 휴간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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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금은 정신이 아찔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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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 보니 담청은 매년 15일 정도 출근을 안 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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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서란이 쉬는 모습은 보지 못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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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금은 설마 싶은 마음에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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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혹시 여태까지 휴가 몇 번 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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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이 처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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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휴가를 안 쓰는 거야? 특별한 이유라도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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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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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나는 감찰관이 되고 싶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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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찰관? 그거 연수원 대체 강의만 잘 들으면 되는 거 아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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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발 기준을 찾아봤는데, 대체 강의 성적이 동일하면 시보 기간 중 근무 태도로 당락이 갈린다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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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금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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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회 재판도 감찰관 때문에 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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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도 그렇지만 공헌도 때문이기도 해. 공헌도 많이 쌓으면 단약이나 영과로 바꿔 주잖아. 부지런히 모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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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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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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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 좋아서 하는 거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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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알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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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맞다. 나 이만 가 볼게. 등 수사 인형몸 정비해 주기로 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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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응접실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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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금은 멀어지는 서란을 유심히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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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심마 진료 예약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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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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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백월은 중정 한편에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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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강, 검정, 파랑 세 종류의 정순법력이 체내에 감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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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근을 조화시킨 지 얼마나 됐다고 그새 비경 의식을 치른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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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백월이 서란을 발견하고는 인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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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뵈니 정말 반갑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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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락 자체는 종종 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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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그래도 직접 얼굴 보는 거랑 같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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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킥킥 웃으며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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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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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저나 오늘은 혼자 계시는군요. 별일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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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손 호법이요? 당분간 법관 업무 쉬게 돼서 수행원들한테도 휴가를 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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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백월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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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가라, 심심하시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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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도 하고, 민선 의원 노릇도 해야죠. 아, 팔 좀 잠깐 들어 주실래요? 어깨 관절부터 분리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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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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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백월이 삐걱거리는 오른팔을 들어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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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능숙한 솜씨로 인형팔을 동체에서 분리해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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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장을 걷어 내자 복잡한 내부 구조가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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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장의 원인은 수명이 다한 부품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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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인형팔을 정비하며 상투적인 말을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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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기억은 좀 어떤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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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 시도를 해 보고 있기는 한데, 이렇다 할 진척이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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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 잘 풀렸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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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백월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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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류 수사님은 좀 어떠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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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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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수행 말이에요. 진척은 좀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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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잠시 말을 고르다가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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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등 수사한테 배운 위무골경을 대성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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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인가요? 굉장히 빠르시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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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수명경벽회공의 수행은 진척이 너무 더디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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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백월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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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명경벽회공이라면 그거죠? 법관 고시에 합격하고 전수받은, 선백파흑진군께서 직접 창안하신 공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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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맞아요. 혹시 공법을 두 개 익혀서 그런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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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는 않을 거예요. 사람마다 잘 맞는 공법이 있고 잘 안 맞는 공법이 있거든요. 저번에 말씀 드렸었죠? 혈족 전용 공법 같은 건 공법 창안자와 공법 사용자의 육신 및 혼백이 유사하기 때문에 성취가 빠른 거라고. 비슷한 이치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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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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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선백파흑진군과 달리 반인반룡이라서 그런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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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걸 수도 있고, 위무골경이 류 수사님과 유달리 잘 맞는 탓일 수도 있죠. 게다가 용족 공법 익히기 시작한 지 아직 10년도 안 지났잖아요. 고위계 공법이라는 건 원래 수백 년, 수천 년씩 진득하게 파고들어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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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긴, 그 말이 맞겠네요. 어깨 관절 다시 연결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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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아까 뽑은 오른팔을 도로 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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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칵 하는 기분 좋은 소리와 함께 인형팔과 동체의 회로가 동기화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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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백월은 시험 삼아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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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 없이 잘 작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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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백월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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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움직이네요. 지연 시간도 없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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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밖에 고장 난 곳 또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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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허벅지가 좀 이상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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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등백월이 앉은 의자 앞에 쪼그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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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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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리는 안 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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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리 쪽 회로만 잠깐 끊으면 돼요. 고관절은 분리했다가 재결합하기 번거롭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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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은 잠시 대화를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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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중정에 부품 잘그락거리는 소리만이 간간이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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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비를 마친 서란이 시선을 들어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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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백월은 손가락에 내려앉은 무당벌레 한 마리를 관찰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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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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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력을 지니고 있네요. 요수의 일종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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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문천도충이라 불리는 요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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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이한 이름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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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백월이 무당벌레의 무늬를 가리키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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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세요, 무늬가 십자 별 모양이죠? 그래서 성문천도충이라는 이름이 붙은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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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한 요수인가요? 벌 떼 같이 달려들어서 상대를 갉아먹는다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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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똑똑해서 애완용으로는 괜찮죠. 요충 치고는 귀엽게 생기기도 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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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백월은 정육각형의 결계를 생성해서 성문천도충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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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문천도충은 잽싸게 몸을 뒤집어 죽은 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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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거나 말거나, 등백월은 성문천도충이 든 결계 상자를 품속에 집어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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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다리를 움직여 본 등백월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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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위무골경을 대성하셨다는 거죠? 슬슬 선골에 대해서 고민해 볼 필요가 있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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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거 관련해서 조사를 좀 해 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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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부지런하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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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소매에서 단말기(음소거)를 꺼내 관립 경매장에 접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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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골에도 등급이 있더라고요. 5급이 제일 아래고 그 위로 4급, 3급, 2급, 1급, 그리고 제일 위가 특급. 그런데 정확히 무슨 차이가 있는 건지는 잘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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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 효율을 몇 배로 늘려주는지에 따라서 등급을 나눈 겁니다. 오채지심을 예로 들까요? 일반적으로 범골 일영근자는 이영근 조화를 위해 180년 정도를 수행해야 합니다. 하지만 5급 선골이 있으면 120년 밖에 안 걸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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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 3년 할 거 2년 만 해도 되는 셈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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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백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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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습니다. 마찬가지로 4급 선골은 90년, 3급 선골은 60년, 2급 선골은 45년, 그리고 1급 선골은 36년이 걸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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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급 선골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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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지 상승 배율이 5배를 초과하면 모두 특급 선골로 분류됩니다. 그런데 큰 의미는 없어요. 수선계 역사를 통틀어도 특급 선골은 몇 개 안 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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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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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수사 선골은 몇 급인지 물어봐도 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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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될 거 없죠. 제 태혼지체는 3급 선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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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급 선골이 아니었나요? 이영근 조화시키는데 40년 밖에 안 걸렸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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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백월이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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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미 한 번 준선경까지 도달해 봤으니까요. 오채지심 수행이 처음이었으면 60년 정도 걸렸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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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생각해 보니 그렇겠네요. 그러면 혜문과 담청 님의 선골은 몇 급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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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 수사의 천무지체는 4급 선골, 담청 님의 공백지체는 1급 선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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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깜짝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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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백지체가 그렇게 좋은 선골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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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히 용이 된 게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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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오... 그러면 저도 1급 선골을 얻는 걸 목표로 해야 할까요? 아니면 아예 특급 선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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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백월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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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백 년 안 쓸 텐데 굳이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대충 4급 선골 정도면 충분하죠. 어차피 선골 같은 건 진선경에 도달하고 나면 무의미해지기도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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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참, 환골탈태가 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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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좋은 선골을 찾아다니는 것도 여간 시간 낭비가 아닙니다. 위무골경 덕분에 어떤 선골이든 얻을 수 있다고 해도, 그런 기연 자체가 원체 드무니까요. 류 수사님 같은 경우에는 차라리 선골을 포기하고 수행에만 전념하시는 게 훨씬 더 효율적일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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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골을 아예 포기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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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일리가 있는 작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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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회 비용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더욱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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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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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알겠습니다. 그럼 저는 바빠서 이만 가 보죠. 어디 고장나면 또 연락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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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하러 가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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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뇨, 의사당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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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선 의회 초대 의장, 담청이 서란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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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즐겁게 의사당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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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백월도 마침 잘 됐다며 동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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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 보니 그녀도 의원 중 한 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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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당에 들어서자 여기저기서 인사를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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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을 향한 인사가 대부분이었지만 등백월을 향한 것들도 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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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금죽문에 부쩍 녹아든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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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단 근처에서 등백월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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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 수사님께서는 의장실로 가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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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담청 님 좀 뵈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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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여기서 헤어져야겠네요. 제 사무실은 이쪽이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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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를 마친 등백월은 복도 저편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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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다 계단을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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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장실은 위층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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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당 내부는 굉장히 혼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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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선 의원과 그들의 수행원, 자문 위원 등이 제각기 발걸음을 재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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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파 규모에 비해 현저히 적은 의석수를 고려하면 필연적으로 바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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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의장실 앞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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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방 소식을 전할 보좌관은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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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옆에 비단 끈이 하나 늘어져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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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봐도 이걸 당기라는 뜻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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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조심스레 비단 끈을 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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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랑 하는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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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장실 안에서 담청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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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오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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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별생각 없이 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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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대로 굳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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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장실이 충격적인 꼴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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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부의 절반은 모래사장이고, 나머지 절반은 인조 해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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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장의 통유리를 통해 석양이 비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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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꽂이나 탁상 같은 건 코빼기도 안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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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은 물 위에 해달처럼 동동 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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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어떻게 했는지 인공 파도까지 구현해 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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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면이 출렁거릴 때마다 담청의 몸 또한 연신 오르락내리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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큼지막한 색안경을 낀 채, 담청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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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용건으로 왔느냐? 업무 보고라면 부의장에게 가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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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대답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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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당황스러워서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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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이게 현실인지조차 의심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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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가 말이 없자 담청은 고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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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서란과 눈이 딱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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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 파도가 철썩이는 가운데, 두 사람은 한동안 서로를 바라보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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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위기 전환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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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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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원, 의장, 부의장, 또 부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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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사람이 의장실에 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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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대로 서란, 담청, 호혜문, 장선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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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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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 님,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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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그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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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인조 해변은 또 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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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의 시선이 장선화에게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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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선화의 시선은 다시 호혜문에게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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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혜문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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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는 끝내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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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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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제가 순회 재판하는 동안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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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많은 일이 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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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혜문은 그 동안의 우여곡절에 대해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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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치게 많은 일이 담청에게 집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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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장이 고장나고 의회가 통째로 마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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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부의장 두 명(호혜문과 장선화)에게 의장의 권한을 포괄 위임해서 문제를 해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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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로 완벽한 세 줄 요약이 아닐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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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로는 서란이 목격한 그대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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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은 의장실을 인조 해변으로 개조한 채 잔잔한 파도에 몸을 내맡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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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장 직인은 아예 호혜문이 지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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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이 처연한 목소리로 서란에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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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 수 없었다. 법원 업무도 있고, 연수원 대체 강의도 들어야 하는 상황이었지. 도저히 의장 역할까지 수행할 여력이 안되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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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셨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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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날 이해해 주는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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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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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요. 최선을 다하셨던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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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나도 잘해 보려고 했었다. 금죽문에 대한 애정도 애정이고,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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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쉿, 더 말하지 않으셔도 돼요. 다 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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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은 감격한 얼굴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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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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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괜찮습니다. 제가 왔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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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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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이 서란을 와락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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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의 사슴뿔이 성대하게 맞부딪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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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슴벌레와 장수풍뎅이의 싸움을 보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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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만 아니면 훨씬 감동적인 장면이었을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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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선화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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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괜찮으시겠어요? 막 순회 재판을 끝내신 참이잖아요. 대체 강의를 모두 이수하셨다지만 법원 업무 자체도 만만치 않다고 담청 님께 들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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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 나 한동안 휴가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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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가요? 선생님께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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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이아금한테 했던 설명을 똑같이 반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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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혜문과 장선화는 전후 사정을 모두 듣고 동시에 같은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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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그렇지, 하는 표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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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호혜문에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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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문, 시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이 뭔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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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시찰 보고서가 필요해요. 곧 있으면 공약 이행 중간 평가 시기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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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요, 맡겨만 주세요. 저 이제 시간 많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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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갑부, 류서란 의원이 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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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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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찰 일정이 잡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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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평가할 공약은 호혜문의 ‘행복한 가정, 행복한 금죽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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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 말하면 양육 관련 기초 교육 이수 체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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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곧장 예비 부모 교육장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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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장 책임자가 바람처럼 달려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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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 의원님, 이렇게 방문해 주셔서 정말 영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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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장 운영은 순조로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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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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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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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하는 모습을 좀 참관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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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요, 그럼요.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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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저 건물인가 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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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책임자를 따라 건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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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에서는 젊은 부부들이 교육을 듣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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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은 하나같이 임산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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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아이를 갖는 부부들이 교육 대상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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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사는 차분한 목소리로 양육에 대해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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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에게 먹이면 안 되는 음식, 호의적인 눈맞춤이 아이의 정서에 미치는 영향, 제대로 안는 법, 바람직한 양육 태도, 하면 안 되는 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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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외한인 서란이 보기에도 체계적인 교육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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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옆에 있는 책임자에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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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무 이수라고 들었는데 교육 대상자들의 반발은 없던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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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초 교육 수료자에게 각종 양육 지원을 제공하는 식으로 반발을 최소화하고 있습니다. 의무 이수라고 해 봤자 한 분기 정도만 들으면 되니까요. 게다가 교육 한 번 듣고 끝이 아니라 수료 이후에도 지속적인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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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긴, 한 번 듣고 완벽하게 실천하기는 어렵죠. 좋은 방식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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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찰을 마친 서란은 고과 점수를 매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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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육 관련 기초 교육 이수 체계,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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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향한 곳은 유원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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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이 내건 공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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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사겸사 문화 지구의 역할도 담당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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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책임자와 함께 유원지를 둘러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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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문객 대부분이 가족들끼리 온 듯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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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인 부모와 범인 자녀, 범인 부모와 수도자 자녀, 수도자 부모와 범인 자녀, 수도자 부모와 수도자 자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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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같이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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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책임자에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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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인 가족들도 많이 보이는군요. 입장료는 얼마 정도 됐었죠? 범인 입장에서는 꽤 부담스러운 가격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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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담스러운 건 사실입니다. 그래도 아이가 있는 가정에는 매년 가족 구성원 수 만큼의 입장권을 지급하고 있습니다. 할인 행사도 자주 하는 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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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네요. 문화 산업 쪽은 어떤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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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임자가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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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관람료는 전부 최소로 책정했습니다. 애초에 돈 벌려고 하는 사업이 아니니까요. 무료 관람도 고려해 봤습니다만, 몰상식한 이들을 거르기 위해 적게라도 관람료를 받기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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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짜라고 하면 무작정 우습게 보는 사람들이 간혹 있죠. 잘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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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류 의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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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시설 겸 유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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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과,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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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서란이 향한 곳은 방송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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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부장 겸 방송국장 겸 민선 의원인 금영영의 공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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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지구의 공연 대다수는 여기서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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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영영 대신 부국장이 서란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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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죄송합니다, 류 의원님. 국장님께서 지금 촬영장에 계셔서요. 사람을 보내서 빨리 모셔오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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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습니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 방해하려고 온 것도 아니고. 안내만 해 주시면 그냥 조용히 보다 갈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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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감사합니다!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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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영장으로 가는 건 좀 그래서 기록실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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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태까지 만든 공연의 영상들이 보관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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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연극, 무용, 영화 등 그 종류도 다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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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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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인기 있는 건 어떤 종류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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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연속극이겠죠. 시청률이 제일 높을 때는 6할 이상도 종종 나오고 그럽니다. 아, 시청률은 금죽문에 보급된 단말기 숫자를 통해 계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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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군요. 음...? 이 연속극은 시청률이 왜 이 모양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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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국장이 난처한 표정으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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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첫 번째로 방영한 연속극 말씀이시군요. 주연 배우의 연기력 문제로 시청률이 꽤 저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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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연 배우가 누구였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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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 국장님이십니다. 참고로 총감독도 금 국장님께서 맡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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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현기증이 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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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부장 겸 방송국장 겸 민선 의원 겸 주연 배우 겸 총감독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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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하랴 연출하랴 정말 바쁘셨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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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당히 좀 했으면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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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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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연기 안 하죠? 후속작 시청률 보면 안 하는 것 같기는 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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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그래도 연출은 꾸준히 하십니다. 그쪽으로는 실력이 정말 대단하시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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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다행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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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국 고과,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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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에도 서란은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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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 안전모를 쓴 채 인형 자동 제조 공정을 견학하는 어린 연기기 수사들도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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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선화의 인형술 의무 교육의 고과는 물론 ‘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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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찰 보고서 작성을 마치자 어느새 심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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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당을 나온 서란은 룰루랄라 귀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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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정말 보람찬 하루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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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저택으로 돌아가서 수행을 할 작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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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부득이 예정을 변경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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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 꺼진 방안에서 기다리던 이아금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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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잠깐만 여기 와서 앉아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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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왜왜, 왜? 갑자기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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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얘기가 있어서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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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나무젓가락처럼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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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호칭이 ‘언니’라서 이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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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오빠’나 ‘아들’이었다면 도망쳤을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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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이아금 옆자리에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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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서란은 심마 진료를 받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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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고 어두운 심해 밑바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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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궁을 중심으로 해저 도시가 형성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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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을 장식하는 발광 산호 때문에 눈이 부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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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고개만 들어 올리면 바로 심해의 어둠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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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해에 잠든 어인족의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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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결계로 바닷물을 밀어내고 지어진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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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어둠을 밝히는 꺼지지 않는 빛의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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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불야성이 바로 어인 교단의 본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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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과 담청이 도착한 곳은 용궁 심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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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화롭지만 동시에 비밀스러운 밀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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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의심의 눈초리로 주변을 둘러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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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한 영초를 아낌 없이 사용한 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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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여기에 맹독이 들어있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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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다, 용과 고위계 수사에게 독은 무용지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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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급 발광 산호를 사용한 거대 조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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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저 안에 암살자를 숨겨 놓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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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다, 도시 전체가 덤벼도 승산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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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무슨 꿍꿍이속인지 짐작조차 안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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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회가 시작되었지만 명탐정 서란은 절대로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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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기다리던 순간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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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를 홍린어라고 소개했던 일등 신도가 이상한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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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쩡히 음식을 먹다가 갑자기 서란의 소매에 뭘 집어넣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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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당해서 소매 안을 보니 주괴가 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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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상급 법기 재료 중 하나인 성백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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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에서는 절대로 구할 수 없고, 하늘에서 떨어진 운석에나 조금 들어있는 희귀한 금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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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묵직한 주괴의 형태로 존재하는 건 상식에 위배되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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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안목 없는 서란은 모를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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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제 소매에 이런 걸 집어 넣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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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린어가 시치미를 뚝 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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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어 넣다니요, 무엇을? 제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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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방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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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반박을 하려던 서란이 입을 다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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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다른 이유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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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반대쪽 소매도 무거워진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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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돌리자 옆자리 어인이 태연하게 앉아서 먼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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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나 싶어서 확인해 봤더니 역시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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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도 성백은 주괴가 서란을 반겨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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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매치기도 아니고 소매넣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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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너무 어이가 없어서 말문이 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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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비수로 옆구리를 찔렸어도 이 정도로 황당하지는 않았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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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은편을 바라보니 담청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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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매가 온갖 잡동사니로 가득 차서 터질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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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어떤 직감이 서란의 뇌간에서 번뜩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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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혹시 뇌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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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쇄적인 장소, 은밀한 접대, 비싸 보이는 물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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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의 좌뇌 우뇌가 상상의 나래를 활짝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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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귀한 존재가 되고 싶어서 수선을 시작한 서란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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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분연한 일갈을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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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게 무슨 짓입니까! 이 뇌물들, 당장 도로 가져가십시오! 저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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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느와르 영화 마니아 류서란은 뛰어난 후각으로 범죄와 음모, 혈흔의 잔향를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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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는 단호하게 거부 의사를 표명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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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심에 휘둘리는 순간 간악한 모사꾼에게 코가 꿰여 조종당하는 끔찍한 일이 벌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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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예전에 본 영화에서는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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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득 천재 홍린어가 이번에도 세 치 혀를 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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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물이라니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이건 선금입니다, 선금. 이전에 산호 대들보를 고쳐준다고 약조하지 않으셨습니까. 다만 급한 마음에 다소 부적절한 장소에서 건네 드렸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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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곧장 대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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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그 망가졌다는 산호 대들보 좀 보여주세요. 걱정되신다니 제가 고쳐드리죠. 지금 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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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까요? 자, 가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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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린어가 앞장서자 서란이 곧장 뒤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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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음걸이에 맞춰서 힘차게 휘젓는 두 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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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주괴 때문에 무거워서 축 늘어진 서란의 소매는 그다지 흔들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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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호로 지어진 용궁 복도를 두리번거리며 걷던 홍린어가 대들보 하나를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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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게 바로 제가 말했던 대들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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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이 잔뜩 가서 부서지기 직전이라더니, 도대체 어디가 망가졌다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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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입니다, 저기. 잘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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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히 보니 미세한 흠집이 존재하기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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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대들보는 우주 망원경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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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우주 망원경이라고 해도 현미경으로나 보일 저런 빗금은 수리 안 하고 그냥 방치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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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목 공사 경력 일 년, 류서란이 보기에 저 대들보는 천 년은 더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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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쩡하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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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린어는 전문가의 견해를 겸허하게 수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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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로 다행이군요. 저희가 건축은 문외한이라서 잘 몰랐습니다. 이제 연회장으로 돌아가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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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마땅한 표정으로 돌아온 서란이 발견한 건 반듯하게 쌓아 놓은 성백은 주괴 더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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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또 뭐죠? 뇌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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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 공사 잔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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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뭘 고쳤던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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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 말했군요, 자문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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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만만치 않은 강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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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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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가 끝난 일행은 용궁 구경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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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궁인데 용은 코빼기도 안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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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해진 담청이 옆에 있던 교주에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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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은 어디 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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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물이 가득 담긴 손수레를 밀던 교주가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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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앞에 계시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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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을 바라보며 하는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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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말고 용궁에 사는 용을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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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이요? 용궁에는 용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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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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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이 생각해보니 어인족은 용궁을 보여준다고 했지 용이 있다고는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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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을 기대했던 담청이 화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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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왜 이름을 용궁이라고 지은 것이냐! 용도 안 사는 궁전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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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주가 슬픈 목소리로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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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계셨습니다. 지금은 아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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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어인 교단의 구구절절한 사연을 늘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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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소한 종족, 용의 은혜, 종교 창시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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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인족이 어떻게 심해를 지배하게 되었는지 간략하고 재미있게 설명하는 구연동화 한 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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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해서 어인 교단은 지금의 성세를 이룩했지요. 하지만 수십 년 전, 용신님께서 갑자기 사라져 버리신 겁니다. 신을 잃은 교단의 신도들은 점차 타락해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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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마친 교주는 서란과 담청을 뚫어져라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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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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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보고 새로운 신이 되어 달라는 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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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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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귀찮은 일을 내가 왜 하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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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주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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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주인이 없어진 용궁을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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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이 즉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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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노릇도 괜찮을 것 같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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깜짝 놀란 서란이 담청을 만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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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로 하시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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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할 건 또 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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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 님 이름을 빌려서 나쁜 짓을 한다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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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는 벌을 내리면 그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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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사자가 괜찮다니 서란도 할 말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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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난 교주는 계약서를 들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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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위 유지 조항, 초상권에 관한 조항, 계약 조건 변경 절차에 관한 조항 및 기타 여러가지 사항이 적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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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과 지장을 통해서 담청은 용신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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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본을 만들어 담청에게 건네준 교주가 이번에는 서란에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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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사님께서는 신이 되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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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황당한 얼굴로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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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용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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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교주는 영업을 멈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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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커다란 금단을 지니셨는데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용신이라는 표현이 마음에 안 드시면 다른 신도 괜찮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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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에 신이 둘씩이나 필요한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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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 관리의 일환이라고 생각해주시죠. 하나보다는 둘이 안전하죠. 한 분이 승천해도 다른 한 분이 계시니까요. 그리고 저희 어인 교단은 일신교라고 엄격하게 정해진 것도 아닙니다. 이참에 그냥 다신교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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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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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혼란스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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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제대로 된 종교가 맞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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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필요하면 종족 불문으로 모집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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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치고는 지나치게 탄력적인 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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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린어도 계속 서란에게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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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사님, 어인 교단에는 신이 필요합니다. 부디 저희를 불쌍히 여기시고 계약서에 서명을 해주세요. 지금이라면 특별히 정기 공물 이외에도 엄청난 비정기 공물을 바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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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냄비를 주문하면 냄비 하나 더 준다는 홈쇼핑 광고가 떠오르는 발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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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부로 계약하면 안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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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극렬하게 저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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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절대로 신이 되지 않을 겁니다! 잘 생각해보니까 이거 교단이랑 운명 공동체로 묶이는 거잖아요! 교단이 잘못하면 나도 같이 욕먹고! 싫어, 오늘 처음 본 교단을 뭘 믿고! 이거 놔! 내 소매에 주괴 좀 그만 집어 넣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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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상의 귀재, 홍린어는 한 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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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요구를 거절당하면 작은 요구를 들이밀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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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알고도 당하는 그녀의 필살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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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일일 체험은 어떠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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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일 체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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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일단 하루짜리 단기 계약을 맺고 신으로 살아 보시죠. 그러다가 마음에 안 드시면 다음 날에 그냥 철회하시는 겁니다. 물론 일단 받으신 계약금은 다시 돌려주실 필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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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일단 동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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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득당한 건 절대로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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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절했다가 다시 귀찮아지기는 싫어서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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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며칠 이내에 해약하지 않으면 계약 기간이 자동으로 연장되는 일일 체험 계약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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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까먹지 않고 해지하면 그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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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자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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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OTT 구독 끊는 거 잊어버리고 이 년 동안 생돈 날린 경험은 이미 기억 속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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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린어는 서란을 데리고 보물창고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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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이리저리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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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을 열기 전, 홍린어가 문득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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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계약금은 얼마나 드려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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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면 되냐는 질문에 서란이 대충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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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당히 주세요, 적당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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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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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린어가 보물창고 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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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에 보관된 건 단순한 재물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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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눈에 보이는 압도적인 설득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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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 수혈로 위기만 간신히 넘긴 수도문파의 입장에서는 가뭄 도중 내린 단비처럼 간절한 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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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껴 먹으면 원영기까지 먹고도 남을 영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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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술 수련에 필요한 수많은 희귀 재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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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등 신도 겸 금고지기 홍린어가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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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제부터 전부 수사님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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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인 교단 역사상 최고의 교섭 전문가, 신이 내린 설득의 천재, 절대로 실패하지 않는 협상가, 홍린어가 보물창고 열쇠를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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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열쇠를 공손히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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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 해지 같은 불경한 단어는 잊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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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되어 돌아온 서란에게 담청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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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는 교단이 잘못하면 욕을 같이 먹네 어쩌네 하지 않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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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류서란, 오죽문의 부흥을 위해서라면 일신의 오욕마저 기꺼이 감수할 각오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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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인 교단은 신을 둘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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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모신 류서란과 용신 담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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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병원으로 향하며 연신 툴툴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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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금아, 진료 꼭 받아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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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하지. 언니 툭하면 심마 걸리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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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 밖에 안 걸렸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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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금이 눈에 쌍심지를 켜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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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 밖이라니! 그게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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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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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두 번이 세 번, 네 번 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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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억울하다는 투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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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심마 완치된 지도 몇 년 안됐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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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알아 봤는데, 심마는 재발이 엄청 쉽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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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 아무리 그래도 세 번씩이나 걸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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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심마 전문 병원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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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금은 곧장 창구로 가서 접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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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예약한 덕분에 금방 서란의 차례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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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아담한 방으로 안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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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호사가 친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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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설문지 하나만 작성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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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괜히 움찔하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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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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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초진 설문지라고 하는 거거든요. 다 적고 옆에 있는 종을 울리시면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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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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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호사는 문을 닫고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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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두 장짜리 초진 설문지를 살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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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항 숫자 자체는 몇 개 안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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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한 인적 사항, 방문 이유, 그리고 심마 병력 따위를 묻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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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금방 설문지 작성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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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을 땡 울리자 아까 그 간호사가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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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호사는 잠시 기다리라는 말만 남기고는 설문지를 챙겨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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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간호사는 두꺼운 종이 뭉치를 끌어안은 채 다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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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관 고시용 법전 저리 가라 할 두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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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도 두꺼워서 잘하면 화승총도 막겠다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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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호사는 종이 뭉치를 내려 놓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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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도 방금 전 초진 설문지랑 똑같이 작성해 주시면 돼요. 다 끝나면 종 울려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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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뭔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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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면적 인성 검사지예요. 아, 반드시 솔직하게 답변하셔야 해요. 아셨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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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마친 간호사는 방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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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검사지 첫 장을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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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 시간에 늦는 경우가 있습니까?’라는 문항이 있고, ‘매우 그렇다.’부터 ‘전혀 그렇지 않다.’까지 다섯 개 중에서 고르는 방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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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에 받았던 병역 판정 검사 생각도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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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묵묵히 검사지를 채워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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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번 문항, 748번 문항, 5210번 문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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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릴 정도로 많은 숫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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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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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마침내 검사지를 모두 채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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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을 땡 울리자 방문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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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호사가 검사지를 챙기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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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생하셨습니다. 대기실에서 일행 분과 함께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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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난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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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뇨, 이제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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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터덜터덜 대기실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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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실에 들어서자 이아금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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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에 앉아 심마 정보지를 뒤적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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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기척을 느낀 이아금이 고개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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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끝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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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시작이라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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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오래 걸린다고 들었던 것도 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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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과 이아금은 대기실에 앉아 시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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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중간 간호사가 서란을 데리고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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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사가 끝나면 다시 대기실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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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정말 다양한 검사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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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을 그리거나 미완성된 문장을 마저 완성하기도 하고, 의사와 선문답 비슷한 걸 주고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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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중에는 수도자 오성 검사라는 것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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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마침내 모든 검사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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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지를 들여다보던 의사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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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 수사님께서는 심마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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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금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서란은 보란듯이 가슴을 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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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아직 안도하기에는 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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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야 하는 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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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가 말을 이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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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문제가 전혀 없는 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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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금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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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그 문제가 뭔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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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각한 수준의 수행 중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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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 중독이랑 심마가 다른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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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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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마라는 건 쉽게 말해서 혼백과 육신, 기 등에서 비롯된 문제입니다. 육체와 정신의 괴리라든가, 기의 불균형이 대표적인 예시죠. 쉽게 말해서 수도자들만 겪는 질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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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 중독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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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박 중독, 마약 중독, 천라지망 중독 같은 그런 거죠. 표현은 수행 중독이라고 했지만, 그냥 일 중독이라고 생각하셔도 무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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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잽싸게 끼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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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마가 아니면 굳이 치료할 필요도 없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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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치하면 심인성 심마로 발전할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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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치료해야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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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금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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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치료는 가능한 거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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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요, 치료 의지와 꾸준한 상담만 있으면 충분히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안심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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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가 어떻게 하면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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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가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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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수행 중독의 원인부터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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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인이라는 말씀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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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그렇습니다. 원인도 모르면서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는 법이죠. 가장 흔한 이유는 아무래도 불안이겠군요. 얼마 남지 않은 수명, 뒤처질지도 모른다는 공포, 성과에 대한 압박, 혹은 강박적인 완벽주의 성향. 모든 수도자들이 크든 작든 이런 종류의 불안을 안고 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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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금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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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명 문제는 아닐 거예요. 언니는 영생자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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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도 한마디 보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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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박적인 완벽주의도 아닌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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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도 제 나름대로의 분석을 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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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691세, 그리고 태성기 맞으시죠? 통계적으로 보면 1급 혹은 2급 선골을 지니셨을 테고... 음, 오성 검사 결과도 매우 우수합니다. 특히 공간지각능력이 유달리 뛰어나시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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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금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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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지각능력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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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이나 물체를 입체적으로 파악하는 능력이죠. 추상적인 개념을 이해하고 형상화할 때도 필요하기 때문에 시공간분석능력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뭐, 지금 중요한 건 이게 아니죠... 아무튼 수도자로서의 재능이 종합적으로 뛰어나다는 점만 아시면 됩니다. 아마도 이게 원인이 아닐까 싶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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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어난 재능이 문제가 되기도 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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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가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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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에 따라서는 문제가 되기도 합니다. 세상은 천재에게 더욱 엄격한 잣대를 들이미는 경향이 있으니까요. 특히 수선계가 그렇죠. 어떤 선골을 타고 났으면 몇 살에 어느 경지까지는 도달해야 한다, 그런 얘기가 판을 치는 세계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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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성과에 대한 압박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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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보다 자질이 떨어지는 수도자에게 뒤처질지 모른다는 공포이기도 하죠. 분노, 자괴감, 자기혐오, 열패감, 절망 등등 안 겪어 본 사람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심정이라더군요. 이 중압감을 못 견뎌 끝내 은거를 선택하는 이들도 적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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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금은 입을 틀어막은 채 서란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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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파 비승이라는 막중한 책임을 떠안은 일영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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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선경에 도달해 문파를 부흥시키겠다는 각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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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도 쉬지 않고 자신을 채찍질하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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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금은 눈물을 글썽이며 서란을 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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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여태까지 눈치채지 못해서 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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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아니야. 그런 거 아니야 아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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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맞아, 언니는 어렸을 때부터 항상 그랬지... 언제나 괜찮은 척하면서 나부터 달래고, 안심시키고... 정작 본인도 힘들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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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황급히 부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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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금아, 나 진짜 괜찮아. 이거 다 내가 좋아서 하는 거라니까? 나 일 좋아하는 거 알잖아,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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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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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물론 걱정될 때도 있었지. 선계라는 낯선 곳에 왔으니까. 그래도 이제는 안 그래. 피풍사문과 동맹도 맺었고, 최고재판소라는 배경도 얻었잖아. 이제 금죽문의 앞날은 탄탄대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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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아금은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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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힘들었구나! 내가, 내가 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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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금아, 그만 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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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자게 누히해지 모태서 미아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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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작에 눈치채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뜻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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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엉엉 우는 동생을 어르고 달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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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마저 눈물을 글썽일, 감동적인 광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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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마 진료는 그렇게 어영부영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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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윽고 ‘후회’라는 광풍이 금죽문을 휩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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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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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은 소식을 듣고는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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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그렇게 힘들어 하고 있었다니... 나는 그것도 모르고 그저 의지하려고만 했었구나... 따지고 보면 이제 막 백 살 남짓된 어린아이일 뿐이거늘... 나의 죄가 참으로 깊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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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선화도 물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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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가 어리석었습니다... 선생님께서 이루신 업적에 눈이 멀어서 본질을 보지 못했어요. 아니, 노력조차 안 했다는 말이 옳겠군요. 저한테 선생님은 진리요, 빛이며, 하늘이었으니까요. 아아, 스승을 보필하는 것조차 못하는 제자가 더 살아서 무엇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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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혜문도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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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뇨, 비단 개인의 과오가 아닙니다. 금죽문 전체의 책임이라고 할 수 있죠. 우리는 여태 류 수사님께 너무나 많은 짐을 짊어지도록 강요했습니다. 문파 비승이라는 숙원을 이루어 줄 유일한 존재라는 이유로, 찬란한 재능을 타고 났다는 이유로, 그 누구보다 노력했다는 이유로... 예, 고작 그런 이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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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부장 겸 방송국장 겸 민선 의원 금영영도 열성적으로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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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옳소! 그 어떤 집단도, 그 어떤 이도 누군가에게 수선을 강요해서는 안됩니다! 류 수사님께서는 이미 우리 금죽문에 차고 넘칠 정도로 헌신하셨습니다! 열심히 땀 흘린 자는 마땅히 쉴 자격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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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선 의원들도 일제히 호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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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이 옳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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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파 비승 하나만으로 우리는 평생토록 다 갚을 수 없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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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우리가 은혜에 보답할 차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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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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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은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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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은! 보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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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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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은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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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동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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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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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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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서에 서명을 한 서란은 걱정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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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어인 교단이 악행을 저지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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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을 받았으니까 묵인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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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면 양심에 따라서 처벌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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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도덕적 딜레마에 빠지는 일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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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술은 새 부대에 담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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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신이 등장했으니 새로운 교리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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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인 교단은 대대적인 교리 개편에 착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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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들의 도움으로 예복을 입던 서란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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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새로 바뀐 교리는 어떤 내용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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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주가 공손하게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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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모신님, 부디 말씀을 낮춰주시지요. 저희 섬기는 이들은 그저 신께서는 내려주시는 명령이면 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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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된 이후부터 어인 교단의 태도가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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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공손해서 이게 남의 주머니에 맘대로 주괴 쑤셔넣던 그 어인족이 맞는지 헷갈릴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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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익숙하지 않은 명령조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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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바뀐 교리가 무엇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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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리를 저희가 감히 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저 신께서 내리신 음성을 경전에 받아 적을 뿐이지요. 이번에 거행하는 용신제 도중, 두 분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곧 저희 교단의 새로운 교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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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호관을 머리에 쓴 서란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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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에 내가 모자 대신 신발을 머리에 얹고 다니라고 말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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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주가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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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당 그렇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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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용 옥경을 목에 건 서란이 다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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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을 버리고 사막에 가서 살라고 말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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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또한 따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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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조금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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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막 모신 신에게 이 정도로 순종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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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악신이라도 섬기면 어쩌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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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딱 잘못하면 멸종하는 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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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관점에서는 쉽게 납득하기가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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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교주의 설명을 들어보니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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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인족에게는 이게 보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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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류 중 일부는 무리를 지어서 포식자를 쫓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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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인족 역시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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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에게 있어서 분열이란 곧 죽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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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로운 용을 만나고 어인족은 번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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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인족은 구원자에게 기꺼이 종족 전체를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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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은 허락받았고, 어인 교단이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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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대 용신은 책임감 있는 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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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인족을 핍박하지도, 교단을 악용하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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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선량함 덕분에 서쪽 바다는 평화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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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인족도 용신의 뜻에 충실히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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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섬기기 좋은 신이라는 건 중요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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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신이 악행을 일삼는 악신이었다고 해도 어인 교단은 절대적으로 복종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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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인족이 심해에 얌전히 머무른 것은 신이 그것을 바랐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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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신께서 육지를 가리킨다면 종족 전체가 기꺼이 창칼을 앞세우고 진군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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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정을 펼치며 어인들을 참살한다고 해도 그들은 신에게 죄를 묻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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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어인족의 신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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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짝 질린 서란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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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계약서는 도대체 뭐였지? 품위 유지 조항이니 계약 조건 변경 절차니 하는 것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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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이란 그저 형식일 뿐입니다. 그리고 신을 구속할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신께서 스스로 내리신 결정을 제외하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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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는 변온 동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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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류는 스스로 체온을 조절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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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건 어인족도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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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인족을 정의하는 건 그들 자신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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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대 용신을 만나고 신앙을 가진 이후부터 그들은 온전히 신의 소유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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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로 어인족의 행보도 새로운 신에게 달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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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신제가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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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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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히 군림할 것 같았던 용신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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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인족에게는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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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을 잃은 교단은 수십 년 동안 우왕좌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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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혼란한 곳만 골라다니는 요괴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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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을 듣고 해저 도시로 찾아온 만영충은 즉시 어인족의 탈을 뒤집어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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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는 무질서에 기름을 끼얹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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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동가는 오늘도 즐겁게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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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신은 떠났다! 우리 어인족을 버리고 홀로 승천해버린 것이다! 선행을 베푸는 것, 성실하게 일하는 것, 가족을 사랑하는 것, 그리고 신을 섬기는 것! 용신이 우리에게 전해준 모든 가르침은 무가치했던 것이다! 세상에는 오직 잔혹한 추위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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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파 속에서 신실한 노인 한 명이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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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 않다! 신께서 우리를 버리셨을 리 없어! 나는 용신님을 직접 뵌 적이 있다! 그 분은 말 한마디 없이 신도들을 내던질 분이 아니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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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동가가 노인을 지목하며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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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석은 소리! 용신은 벌써 하늘로 떠났다! 우리들을 버리고! 우리 어인족은 더 이상 신을 모실 수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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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동 당한 군중이 일제히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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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분명히 어떤 사정이 있었을 거다! 도저히 우리에게 돌아올 수 없던 피치 못할 이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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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 수 없는 이유는 무슨! 그냥 우리를 버린 거야! 아니면 용이 지상에서 죽기라도 했을까봐!? 도대체 누가 용을 죽일 수 있단 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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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가 열렬히 호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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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옳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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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이 굽은 노인이 힘없는 목소리로 호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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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야, 그렇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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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점차 꺼져가는 노인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어인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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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내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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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니까 저축도 전부 부질 없는 짓이야! 어차피 어인 교단은 끝났어! 차라리 이 돈으로 인생 최후의 노름을 즐기는 게 남는 거야! 당장 도박장으로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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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에 있던 여인도 비슷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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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이참에 확 가출해 버려야지! 아무도 찾을 수 없는 곳에 가서 자유롭게 놀 거야! 정말 좋은 생각이야, 오늘 바로 짐 싸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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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아이들도 동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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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커서 약쟁이가 될 테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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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강도가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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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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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나랑 이인조 사기꾼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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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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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실한 노인은 사회를 물들인 어둠에 경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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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야, 그래서는 안된다... 자고로 신앙을 잃는 것은 죽음을 의미하는 법이다... 내가 정말 재미있고 교훈적인 경전을 읽어 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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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대장 소년이 대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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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봐, 할아범. 요즘에 그런 지루한 얘기를 도대체 누가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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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게 물들어 가는 어인족의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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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인의 탈을 쓴 선동가, 만영충은 희열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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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강대한 어인족의 감정을 조종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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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골목길에서 어떤 어인이 튀어나와서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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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 공식 발표 떴다! 오후에 용신제를 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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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신제란 용신을 기리는 제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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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인족들은 그 의미를 즉각적으로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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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신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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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게 물든 어인족의 마음이 순식간에 정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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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박장 간다던 사내가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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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용신님이야! 믿고 있었습니다! 도박은 무슨 도박이냐, 이 돈으로 자식들 공부나 시켜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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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출을 결심했던 여인도 집으로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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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경사를 어서 부모님께 전해 드려야겠어! 아버지 어머니, 잠시만 기다리세요! 제가 오늘부터 효도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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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법자가 될 뻔한 꿈나무들이 노인을 졸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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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르신, 제발 교훈적인 경전 말씀을 들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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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습니다, 저도 독실한 신자가 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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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벌써부터 신앙심이 샘솟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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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실한 노인은 굽은 허리를 똑바로 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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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 같은 근육과 듬직한 체격이 풍족한 신앙을 빨아들이며 팽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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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식간에 회춘한 노인이 호탕한 목소리로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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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젊은이들답지 않은 훌륭한 신실함! 좋다, 소년 소녀들이여, 나를 따라와라! 함께 신앙의 아름다움을 배우고 찬미해 보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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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동을 하던 만영충은 당황해서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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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왜 그러십니까?! 고작 용신이 돌아왔을 뿐입니다! 다시 우리를 버리고 떠나면 어쩌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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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중이 일제히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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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신님이 돌아오신 게 기쁘지 않은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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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뭐지? 돌아버린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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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어인족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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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영충은 뒤집어 쓴 변장을 벗어 던지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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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들켜 버렸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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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쪽같이 숨긴 선동가의 정체가 탄로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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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한 일이 해저 도시 전역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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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 년만에 치러진 용신제는 정말 성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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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산호관을 쓴 담청과 서란은 높은 가마에 앉은 채로 쭉 뻗은 대로를 행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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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인족은 예쁜 조개와 소라고둥, 발광 산호를 뿌리며 환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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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신 새로운 신을 환영하며 소리치던 인파는 거대한 제단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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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마꾼들은 가파른 계단을 올라서 서란과 담청이 앉은 가마를 제단의 가장 높은 위치에 내려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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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화로운 가마가 안착한 순간 수백 명의 악단이 일제히 악기를 연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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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신제의 하이라이트, 공개 문답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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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단 중간에 무릎을 꿇은 교주가 큰 소리로 신에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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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신님, 대지모신님! 대지모신님, 용신님! 이 미천한 이가 종족을 대표하여 존귀한 두 분께 감히 가르침을 청합니다! 부디 저희를 가엾게 여겨 그 음성을 들려주십시오! 어인 교단은 앞으로 어떤 가치를 쫓아야 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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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족의 운명이 걸린 무거운 질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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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은 오랜 고민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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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안에는 진실과 거짓을 구분하는 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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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제아무리 용이라고 해도 본인의 눈으로 스스로를 바라볼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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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이번에도 답을 내리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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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신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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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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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인족은 여전히 침묵을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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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속으로는 모두가 공포에 질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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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하지 못한 대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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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도리를 따르라는 가르침도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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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로지 도구로써 다루는 포악한 명령도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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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께서 바라신다면 어인 교단은 기꺼이 흑도 백도 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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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회색은, 망설임은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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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인족이 절망에 잠긴 순간, 서란은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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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철학이나 신앙과는 친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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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스스로가 원하는 것만은 잘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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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짧은 고민 끝에 답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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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모신이 신자들에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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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우리가 추구할 것은 바로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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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어인족을 새롭게 정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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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신제는 성공적으로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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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어인 교단은 여전히 바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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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빨리 기획 상품을 생산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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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상과 초상화를 만들어서 팔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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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의 질문에 교주가 공손하게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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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바로 그렇습니다. 여기 시제품이 있으니 한번 구경해 보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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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일단 조각상부터 살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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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바닥만 한 발광 산호로 만든 섬세한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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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모신 조각상과 용신 조각상 두 종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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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보기에는 꼭 피규어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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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상을 내려놓고 초상화를 살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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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화는 작은 돌액자에 들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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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도 조각상처럼 두 종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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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이식 액자 다리 덕분에 세울 수 있는 형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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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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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걸 사는 신도들이 많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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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요, 없어서 못 팝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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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대 용신 시절에도 팔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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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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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크게 상관없겠지. 앞으로 이런 상품 판매는 나에게 허락받을 필요가 없다. 알아서 진행하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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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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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서류에 도장 찍느라 바빴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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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담청은 용궁 탐험하느라 파업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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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매 허가를 받은 교주가 물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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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즈는 바로 다음 날부터 판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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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점 시간이 되자 신상 판매점의 문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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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날부터 줄을 선 어인족 신도들이 매장 내부로 밀물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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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뜩 쌓여있는 신상을 등진 종업원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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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신상을 드릴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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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신님 초상화랑 조각상 두 개씩, 대지모신님 초상화랑 조각상 두 개씩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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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쪽에서 절을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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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격을 지불한 구매자는 근처 방석 위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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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경건한 마음으로 큰절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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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업원이 잘 포장된 상자를 건네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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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매자는 신상이 든 상자를 공손히 들고 집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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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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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차례였던 어인이 곧장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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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모두 다섯 개씩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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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객님 정말 죄송하지만, 발매일에는 일 인당 두 개까지만 구매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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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 수 없지... 그러면 그렇게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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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알겠습니다. 여기서 절을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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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금 지급, 절 한 번, 상자 수령, 빠른 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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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매자는 포장된 상자가 흔들리지 않는 한도 내에서 최대한 빠른 속도로 집에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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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뿐만이 아니라 주변에 있는 이들 모두가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경보를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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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돌아온 어인을 가족들이 환영해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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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하다, 아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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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빨리 신상을 모셔오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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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내 동생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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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 나 빨리 신님을 영접하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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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 줄을 선 어인 사내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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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매일이라서 인원수에 맞게 구매하지 못했습니다. 종류별로 두 개씩 제한이 있더군요. 나중에 다시 방문 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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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로 아쉽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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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모두가 숭배할 수 있게 거실에 모셔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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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 상자는 내가 열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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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야, 우선 절부터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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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인 가족은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절을 하고 상자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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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손 방지를 위한 완충재를 치우자 신상이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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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전한 선반을 신상이 장식하니 만족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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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상 판매점은 연일 사람으로 붐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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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구입한 어인, 재구매한 어인, 곰곰이 생각해보니 선반이 허전한 것 같아서 삼차 구매한 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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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하는 족족 팔려서 판매점이 보유한 재고 수량은 항상 영으로 수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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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인 교단은 열렬한 성원에 힘입어 신님 캐릭터 상품을 다각화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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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적으로 허가를 받을 필요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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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상품 제작에 관한 전권을 위임받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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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상 판매 방식도 대대적으로 리뉴얼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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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의적인 비즈니스 모델의 새로운 도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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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판매점도 용신 전문점과 대지모신 전문점으로 분할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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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치프레이즈는 ‘사랑하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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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대지모신님 사랑하자’ 소형 깃발이 출시되었습니다! 모두 아시다시피 대지모신님의 상징색은 노란색입니다! 현재 재고 소진 직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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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건 꼭 사야만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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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 ‘용신님 사랑하자’ 발광 산호 막대가 판매됩니다! 이대 용신님의 상징색은 파란색! 오로지 지금만 손에 넣을 수 있는 기간 한정 상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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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리 내 돈 가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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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자’라는 문구가 해저 도시를 강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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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사랑 타령을 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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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히 운명적인 만남도 속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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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내가 신상을 건네며 여인에게 청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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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내 곁에서 기도해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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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뻐요, 우리 함께 숭배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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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혼 첫날밤, 부부는 수온 상승에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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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실 벽면에도 역시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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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모신과 용신의 그림이 둘을 지켜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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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말씀에 순종하는 신실한 신도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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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노릇을 하던 사이에 가을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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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사랑 열풍은 쉽사리 식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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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혼인율과 출산율, 해수 온도만 치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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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호를 모조리 하얗게 바꿔버릴 기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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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서란이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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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호 백화 현상을 걱정한 건 아니고, 그냥 오죽문 식구들 얼굴이 보고 싶어져서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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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슬 집에 가야할 것 같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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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인족 시동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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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용궁 안에 계시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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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지를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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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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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담한 현실에 어인족 시동이 경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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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도 마음이 불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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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인 교단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언제 올지도 모르는 신들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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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서란과 담청이 어인족을 위해서 영원히 용궁에 눌러앉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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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 내키는 대로 사는 담청은 몰라도 서란에게는 문파 비승이라는 인생 목표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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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고민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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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로 마땅한 대안 없이 육지로 돌아가면 어인 교단이 바친 공물을 먹튀한 셈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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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심해에 틀어박혀서 신 노릇을 계속해도 오죽문이 몰아준 지원을 먹튀한 셈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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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골라도 먹튀범이 되는 극한의 양자택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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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저히 선택하지 못한 서란이 시동에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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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 님은 어디 계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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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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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신님은 어디 계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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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동도 이번에는 알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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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집품 창고에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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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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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은 요즘 전대 용신이 남기고 간 수집품에 빠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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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담청이 있는 장소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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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환 문제를 함께 상의할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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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궁은 다 좋은데 복잡한 구조가 문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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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 만나려고 찾아가는 게 이렇게 힘들어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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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찾아간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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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그 자리에서 멈춰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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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수가 떠오른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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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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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곧장 담청과 교단 고위 인사들을 소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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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자기 계획을 개략적으로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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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듣던 담청이 대표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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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어인족이 우리를 찾아오게 하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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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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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순례가 바로 묘수의 정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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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과 담청은 일단 오죽문으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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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신 어인 교단이 정기적으로 오죽문을 방문하는 것이 계획의 골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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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럴 경우 오죽문은 성지, 어인족 방문객은 순례단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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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러면 대지모신과 용신은 멀고 먼 심해 속 용궁에 주기적으로 방문하지 않아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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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어인 교단도 신이 부재한 상황에서 기약 없는 기다림으로 고통받을 필요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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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최선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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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이 이견을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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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순례하는 어인족만 고생하는 것 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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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 님, 아직도 어인족을 잘 모르시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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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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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뒤돌아 보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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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이 순순히 고개를 뒤로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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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경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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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에 잠겨서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았던 어인 교단 고위 인사들이 활짝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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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계신 곳으로 찾아간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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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원할 때 언제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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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지, 숨이 쉬어지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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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라니... 너무 즐겁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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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든 여정도 그들에게는 새로운 콘텐츠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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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은 여전히 반론을 멈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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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그러면 이동 수단은 어쩔 생각이냐? 어인족은 물을 떠나서는 오래 살 수 없고, 속세에 가득한 범인들의 눈도 피해야만 한다. 바다에서부터 오죽문까지 그 먼 거리를 어찌 안 들키고 걸어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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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올 필요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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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헤엄치기라도 한다는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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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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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차 반박하려던 담청이 문득 입을 다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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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넓은 육지를 가로질러서 헤엄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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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급격하게 익숙해진 뭔가가 막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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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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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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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획은 단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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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나라 동부 해안부터 운하를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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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로 오죽문이 위치한 산맥 근처까지 직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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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인 교단은 대지를 횡단한 운하를 따라서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헤엄치기만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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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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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인이 순례 도중 말라죽을 일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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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이라면 운하에 잔뜩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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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인들에게 들킬 염려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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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하 바닥에 붙어서 이동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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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로 완벽한 계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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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인 교단은 즐겁게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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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전명 : 성지 순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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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지 : 어인 교단 본부가 위치한 해저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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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유지 : 해선문이 다스리는 건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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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착지 : 성지 오죽문이 위치한 양나라 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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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 방법 : 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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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해에 잠들어 있던 어인족이 깨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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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과 담청, 어인 몇 명은 육지로 올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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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선문에게 운하 공사 협조를 요청할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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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나라에게는 애초부터 결정권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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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당자는 서란의 웅대한 포부를 듣고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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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조금 곤란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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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안된다는 외교적 수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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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한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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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나라를 동서로 관통하는 운하를 만들겠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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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쩡한 국토를 반으로 쪼개는 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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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뇌부가 제정신이라면 수락할 리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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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선문과 나름 교류를 이어오던 어인 교단은 이미 협상 상대방을 잘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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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런 상황을 예상하고 비책도 준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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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주의 신호를 받은 홍린어가 앞으로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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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상의 귀재가 담당자의 귀에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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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양나라로 향하는 운하가 생긴다면 얼마나 많은 교역선이 건나라를 거쳐 갈지. 양나라는 대국입니다. 당연히 생산하고 소비하는 물산도 상상을 초월하지요. 운하만 뚫리면 그 막대한 물류가 전부 해상으로 오갈 게 분명합니다. 그러면 누가 또 이득을 볼까요? 건나라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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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짝 혹했던 담당자가 다시 정신을 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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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나라가 덕을 본다는 건 알겠습니다. 그래도 안되는 건 안되는 겁니다. 애초에 우리 해선문에는 그렇게 거대한 운하를 만들 역량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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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답변도 예상 범위 안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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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운하를 왜 해선문이 만듭니까? 그저 범인들을 부려서 공사하는 시늉만 하십시오. 토목 공사 같은 건 저희 대지모신님께는 너무나 손쉬운 일입니다. 수사님도 한 번쯤은 들어보셨겠지요? 토목 공사의 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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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당자는 어느새 마른침을 삼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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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저도 해선문 사람이니 들어는 봤습니다. 망망대해에 눈 깜짝할 사이에 인공섬이 생겨났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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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린어가 협상에 쐐기를 박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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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게 끝이 아닙니다. 속세의 범인 국가뿐 아니라 해선문의 창고도 채워드려야지요. 저희 어인 교단은 도리를 모르는 집단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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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혹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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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저희 어인족이 운하를 지날 때마다 통행료를 드리지요. 어떤 물건으로 값을 치르면 좋을까요. 어디, 영석은 어떨까요? 저희에게는 그저 돌이지만, 수도자에게는 귀한 수행 자원이라지요? 아시다시피 심해에도 영석 광맥은 많습니다. 아직도 곤란함이 남았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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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당자는 밝게 웃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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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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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인 협상단은 당사자와 원만하게 합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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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선문을 나온 뒤, 서란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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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 님, 그 향로는 왜 계속 들고 계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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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부터 향로 하나를 애지중지 끌어안고 다니던 담청이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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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향로는 법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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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보가 뭐죠? 법기 비슷한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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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로 아는 게 없구나. 법보란 신선이 직접 만든 신묘한 보물을 뜻한다. 수도자가 만든 법기 따위와 비교하기에는 미안할 정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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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선? 그러면 선계에서 만든 거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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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한 걸 묻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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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왜 지상에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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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씩 이런 일이 발생하곤 한다. 선계에 있던 물건이 차원의 틈새를 통해서 인계로 떨어진 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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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찌그러진 향로를 유심히 살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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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싸구려 골동품 같은 생김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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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담청의 설명을 듣고 나니 꾀죄죄한 쓰레기가 아니라 고풍스러운 명작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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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궁금해진 서란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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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귀한 보물을 어디서 찾으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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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대 용신이 만든 수집품 창고에서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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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전대 용신은 어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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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에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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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아마도 바다에 떨어진 걸 주웠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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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다른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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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향로에 급격하게 관심이 많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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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대 용신은 왜 이런 법보를 두고 승천했을까요? 저라면 입안에 넣어서라도 반드시 가져갔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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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도 동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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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챙겨간 나름의 이유가 있었겠지? 아니, 아무튼. 이 향로, 효능도 굉장하다. 안에 불을 붙이고 명상을 하면 정신 수양에 큰 도움이 된다. 어제 시험 삼아서 잠깐 사용해 봤는데, 영혼마저 맑아지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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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종일 품에 안고 있던 이유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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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원영기 갈 때도 진짜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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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요하면 네게도 빌려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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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담청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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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이런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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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보도 나눠 쓰는 아름다운 우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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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은 하하호호 웃으며 즐겁게 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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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로의 원래 주인은 벌써 까맣게 잊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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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 년 전에 승천했을테니 그냥 없는 셈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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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표 특대운하 건설 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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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선문은 설득당한 지 오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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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써 계획은 가장 어려운 고비를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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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사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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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죽문은 설득할 필요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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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년 넘는 외화벌이를 마치고 돌아온 서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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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어인 교단의 신이 됐다는 건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문파를 위해서 제 한 몸 희생한 공로가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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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뇌부는 이제부터 서란이 어떤 기행을 저질러도 전적으로 지지해줄 마음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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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거절할 이유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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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죽문은 즉각 대규모 프로젝트에 돌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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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아직도 오죽문에서 남아있던 금중패가 달콤한 냄새를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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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뇌부 회의장 근처를 서성이던 그는 새로 사귄 친구에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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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게, 주 수사. 뭐 새로운 일이라도 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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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바다에서부터 이 근처까지 운하를 만든다고 하더군. 어인 교단이랑 지속적인 교류를 하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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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수사는 대수롭지 않게 알려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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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히 기밀 사항도 아니었던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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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중패는 어렵지 않게 미공개 정보를 입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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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뒤, 금작파에서 사절단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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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건은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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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왕 운하 만드는 거 아예 교나라까지 연장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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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 우리도 공사를 돕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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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작파는 금토 속성 전문 수도문파, 자기들도 돕겠다고 하니 오죽문도 흔쾌히 동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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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금작파 토속성 수도자들도 바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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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금작파에 머무르던 약목파 수사가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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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게, 무슨 큰일이라도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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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작파 수사도 별생각 없이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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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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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뒤, 약목파 사절단이 오죽문에 방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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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우리도 계획에 참가시켜 달라고 부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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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선계 국제 시장 면세 특권을 살며시 내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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꿀통 하나에 곰 여러 마리가 앞발을 집어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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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신기하게도 안에 든 꿀이 점점 늘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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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들은 더욱 즐거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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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운하 길이는 처음 계획했던 것보다 곱절은 더 길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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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에서부터 시작된 운하는 건나라, 양나라, 교나라, 주나라를 차례대로 거쳐서 다시 바다로 나갈 예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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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개국을 관통하는 초대형 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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된서리를 맞은 건 속세 왕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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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도 연락 담당 겸 인면조 애호가, 거기에 경증 결벽증까지 겸비한 고 수사가 양왕에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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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달 사항은 잘 이해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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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왕이 황당한 얼굴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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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하를 설계하라는 말씀이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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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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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쪽 국경에서 양나라 중서부를 거쳐서 북쪽 국경까지 이어지는 거대한 규모로, 맞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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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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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올해 농한기까지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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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이해했으면서 왜 계속 물어보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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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왕이 옆에 있던 대신에게 눈치를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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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 노릇의 장점 중 하나는 직접 하기 싫은 일을 남에게 대신 시킬 권력이 있다는 부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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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울하면 자기도 왕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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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의 아니게 떠밀린 대신이 고 수사에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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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고 수사님, 지금은 초가을입니다. 공사 시작이 농한기라고 하셨는데, 시간이 너무 촉박합니다. 국토를 관통하는 거대한 규모의 운하를 설계하려면 할 일이 많습니다. 답사도 해야하고, 이런저런 측량이나 계산도 잔뜩 필요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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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수사는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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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왕과 대신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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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들의 바람이 이루어지는 일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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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수사가 여상하게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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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너희가 참으로 고생이 많겠구나. 아무튼 추수하기 전까지는 설계를 끝내 놓거라. 나는 그때 다시 방문하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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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는 훨훨 날아서 자기 집으로 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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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블레스 오블리주, 대충 풀이하면 상류층에게는 높은 사회적 신분에 걸맞는 의무가 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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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세상에 공짜 점심 같은 건 없는 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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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잘 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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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점심, 양왕과 대신들은 성대한 연회를 열어서 산해진미를 즐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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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밥값을 할 차례가 왔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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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수백 년을 사는 수도자들의 웅장한 포부는 범인에게는 너무나 버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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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상차림으로 반찬 오십 개 올리고 식사했던 양왕이 옆에 있던 대신에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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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목 공사면 공부 관할이 맞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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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이 즉시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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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습니다, 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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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 대신, 이 자리에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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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 대신이 죽을상을 하고 앞으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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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있습니다, 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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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이 이 문제에 대해서 신경쓸 일이 없었으면 좋겠소. 자네를 믿어도 되겠나, 공부 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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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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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소, 예산 문제는 재상과 의논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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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청으로 돌아온 공부 대신이 아랫사람들을 모조리 소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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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계, 측량, 건축, 하여간 뭐든지 상관없다. 운하 설계에 필요한 장인들을 소집해라. 지금 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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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좌관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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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많이 모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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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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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하지만 그러면 예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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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 대신이 결연하게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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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다, 양나라는 대국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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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만사가 다 그렇듯 소요 시간을 단축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돈을 왕창 쏟아붓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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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비슷한 일이 건나라, 교나라, 주나라에서도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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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선, 구름 타고 날아다니는 영생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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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세에 사는 범인들도 신선이 뭔지는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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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진지하게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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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무수한 전설 중 하나로 치부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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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문파와 속세 지배층이 협력한 덕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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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범인들이 수선계에 대해서 몰랐으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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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나쁜 뜻은 전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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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상관없는 일로 근심하지 말라는 배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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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인들에게는 수선에 대한 지식이 필요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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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근이 있다면 수도자가 된 뒤에 배우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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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로, 영근이 없다면 알아도 무용지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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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적 세계관을 부수고, 사회를 혼란스럽게 할 금단의 지식 같은 건 애초에 모르는 게 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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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비밀주의는 상고 시대부터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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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양나라도 이런 원칙을 준수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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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자들이 우르르 몰려가서 운하를 뚝딱 건설하는 식으로 일을 처리하면 곤란하다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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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근처 초원에 갑자기 운하가 나타나면 범인들이 얼마나 혼비백산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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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해결책은 처음부터 하나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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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세의 왕국들은 농한기가 되자마자 건설 인부를 대량으로 모집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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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추수도 끝났겠다 집에 앉아서 새끼줄이나 꼬던 사내들은 경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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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혀 있는 일당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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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하루 일하고 이렇게나 큰돈을 받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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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운하는 갑자기 왜 만드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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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친구야, 지금 그게 중요한가! 자리가 다 차기 전에 얼른 달려가서 지원부터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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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고 보니 자네 말이 맞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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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문이 퍼지자 지원자가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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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부들은 저마다 나무 괭이 하나씩 들고 공사 현장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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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로 아무것도 없는 들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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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감독이 손짓을 하면 십장들이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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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근 촌락에서 온 청년도 십장이 지시하는 바에 따라서 열심히 괭이질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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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 바짝 일해서 결혼 자금을 마련할 작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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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을 정오까지 땅을 파다가 새참을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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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지시에 따라서 다시 노동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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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어느 정도 기울자 십장들이 돌아다니면서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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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 중지, 작업 중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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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공사는 끝났습니다! 연장 반납한 사람부터 일당 받고 돌아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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땀범벅이 된 청년도 일당을 받고 숙소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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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피곤해서 저녁도 대충 먹고 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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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눈을 한 번 감았다 뜨자 아침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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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은 부랴부랴 공사 현장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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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 좋아! 안전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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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 좋아! 좋아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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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지 않게 도착한 청년이 힘차게 구호를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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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다음 어제 파던 구멍으로 다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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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문득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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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제 이렇게나 깊이 팠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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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공사가 끝날 때까지만 해도 분명히 허리 높이 정도 되는 구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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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오늘 와서 다시 보니 구멍 안에서 바깥이 전혀 안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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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궁금해서 감독하던 십장에게 물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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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왠지 구멍이 우리가 팠던 것보다 깊어진 것 같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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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을 받은 십장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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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조상님께서 오셔서 대신 파주셨겠소?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땅이나 파시오. 계속 딴짓하면 일당을 절반으로 깎을 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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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장이라는 지위가 부여한 권위에 주눅이 든 청년은 얌전히 괭이질이나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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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를 떠돌던 미약한 의문도 곧바로 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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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피곤해서 고민할 기운도 사라진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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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이 가진 의문에 대한 해답은 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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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막용 공사가 끝난 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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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처럼 살금살금 등장한 수도자 무리가 토속성 법술을 이용해서 대규모 굴착 작업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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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래 온 수도자들은 새벽이 되자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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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보다 훨씬 깊어진 구멍만 남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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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외적으로는 인부들의 노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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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질적으로는 토속성 수도자들의 야근 덕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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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수가 끝나고 시작된 대규모 운하 공사는 다음해 파종 직전에서 끝나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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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은 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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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금은 놀라운 소식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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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을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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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가 쑥스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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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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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상대는 누군데? 나도 아는 사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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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아마도 모를 거야. 금작파 사람이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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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어쩌다가 만났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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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부터 인재 교류다 뭐다 소란스러웠잖아. 그때 유학 온 사람인데, 법술 모임에서 친해졌거든? 내심 신경이 쓰였는데 운 좋게 중매가 들어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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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신경 쓰인다던 남자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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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가 수줍게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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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정말 우연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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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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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을 전한 친구는 행복한 얼굴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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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금도 걸음을 옮겨 목적지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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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당 입구에서 만난 다른 친구가 이아금을 보고 급하게 달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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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금아, 그 소식 들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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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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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 사저 이번 봄에 결혼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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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금이 감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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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자기는 죽어도 결혼 안 한다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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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는 유학가서 만난 남자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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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금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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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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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 사저와는 별로 안 친해서 관심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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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와 헤어진 이아금은 약당 복도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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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또 친구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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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는 굉장히 익숙한 화제를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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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금아, 그 소식 들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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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금은 혹시나 싶어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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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혹시 누가 결혼이라도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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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라, 송 사형 결혼하는 거 벌써 들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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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매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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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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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랑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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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작파 유학생이야. 미녀라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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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도 이전에 들은 소식과 비슷한 내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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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한담을 나누다가 친구는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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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혼자가 된 이아금이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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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결혼하는 사람이 많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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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품실에 도착한 이아금에게 연단술사가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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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수사, 그 소식 들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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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카로운 직감이 이아금의 경추를 관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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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누가 유학생이랑 중매 결혼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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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들었구만? 임 수사 결혼하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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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 수사 결혼 소식은 처음이지만, 비슷한 소리를 많이 듣기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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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작파, 유학, 중매 결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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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굉장히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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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금은 즉시 정보를 수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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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대한 인간 관계 덕분에 과정은 수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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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만간 결혼할 예정이 있는 사람들의 명단이 완성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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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수도자들도 결혼은 많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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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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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금은 빽빽한 친구들 결혼식 일정 때문에 당장 분신술이라도 익혀야할 처지에 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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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금이 명단을 보며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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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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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하던 이아금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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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있을 것 같은 사람에게 물어볼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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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서란의 친구, 금영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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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제 대충했다가 끌려간 금영영은 외출 금지가 풀리자마자 오죽문으로 날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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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도 서란의 저택에서 지내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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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 되면 금작파 수도자라고 부르기도 민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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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금은 긴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며 서란의 저택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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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를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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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로 비명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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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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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금은 황급히 저택으로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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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문을 박차고 들어서자 가까운 건물에서 연기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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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장 문을 연 이아금은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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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로 자욱한 방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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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과 담청, 금영영이 향로 근처에 옹기종기 둘러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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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뭐라도 구워 먹는 듯한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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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서란, 담청, 금영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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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잇값 못하는 삼인방은 요리를 하던 게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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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연히 수행 도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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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이 전대 용신의 수집품 창고에서 발견한 향로 법보에는 영혼을 단련해주는 효능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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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 수양이 필요한 담청과 서란, 그리고 신선이 만들었다는 법보를 연구하고 싶었던 금영영은 한 방에 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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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은 향로를 가운데 놓고 둘러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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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영영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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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어떻게 작동시키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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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이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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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력을 주입하면 알아서 불이 붙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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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에 있던 서란이 직접 시범을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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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로 손잡이를 잡고 정토법력을 불어넣자 텅 빈 향로 안에서 황색 불꽃이 저절로 피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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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공에서 타오르던 불이 이내 흰 연기를 내뿜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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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영영은 급격하게 머리가 맑아지는 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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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롭군요. 뭘로 만들고, 어떤 원리로 작동하는 걸까요? 불은 법력은 계속 주입해주지 않아도 계속 타오르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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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과 서란이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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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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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력을 보충해주지 않으면 일정 시간 타다가 저절로 꺼지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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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영영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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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법력말고 다른 연료는 넣어 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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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과 담청이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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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모습을 본 금영영이 이마를 탁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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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 정도는 실험해 봤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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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주인 서란이 벌떡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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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 내가 태울 만한 걸 가져올 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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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르게 부엌에 다녀온 서란이 작은 상자를 향로 안에 던져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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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연기에서 굉장히 익숙한 냄새가 풍겨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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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가민가하던 담청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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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가져온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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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엌에서 찻잎을 가져왔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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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이 다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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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찻잎? 어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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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장작을 가져올 생각이었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안 보이더군요. 그래서 가장 비슷할 걸로 가져왔습니다. 냄새도 좋고 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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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금영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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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장작 몇 개를 가지고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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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신기한 듯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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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장작 어디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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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영영은 장작을 향로에 넣으며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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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엌에 있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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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을 들은 서란이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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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내가 찾았을 때는 없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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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작 몇 개를 삼킨 향로는 검은 연기를 풀풀 뱉어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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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 안은 순식간에 매캐해졌지만, 독한 연기 좀 들이마셨다고 죽는 나약한 생물은 여기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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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냄새가 별로 좋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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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이 대표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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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썩 유쾌한 냄새는 아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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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더니 선반 위에 놓인 향초를 집어서 향로 안에 통째로 던져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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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급 찻잎, 잘 마른 장작, 거기에 장미 향초까지 함유된 연기는 그럭저럭 괜찮은 향기를 풍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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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리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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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대표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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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료를 넣었으니 더 오래 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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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이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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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은 잘 모르겠구나. 계속 지켜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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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영영도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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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검은 연기에도 영혼을 맑게 해주는 효능이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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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가 있는 지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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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연기 말고 검은 연기에도 효능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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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인방은 연기로 자욱한 방 안에서 고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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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금이 문을 열고 들어올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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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안 보이지만 수도문파의 수뇌부는 바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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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활한 산맥 전체를 다스리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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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은 부지와 빼곡한 건물, 셀 수 없는 구성원, 그 모든 구성 요소들을 유지 및 관리하기 위해서 폭증하는 업무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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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결정 사항은 결국 수뇌부가 결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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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방 학생들에게 어떤 간식을 제공할지는 글방 선생 호혜문이 결정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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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한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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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몇 살부터 글방에 다닐 것인가, 몇 살까지 글방에 다닐 것인가,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 등등은 모조리 수뇌부가 결정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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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무주공산이 된 유나라를 금작파와 공동 통치할 경우, 그곳에서 발견한 영근보유자와 영초 등은 어떤 방식으로 분배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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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저 세계를 양분한 수직 갱도파와 수평 갱도파 사이에 형성된 정치 지형은 어떻고, 만약 오죽문에게 불리한 상황이 닥치면 개입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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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선 관계인 금작파와 제휴한 인재 및 기술 교류 협정은 차후 두 문파 사이에 존재하는 역학 관계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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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처리해도 업무는 항상 포화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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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수뇌부는 기나긴 정책 회의를 마치고 각자 자기 수행 시간까지 챙겨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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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적 업무와 사적 수련의 양립을 달성한 초인들이 바로 수도문파 수뇌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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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세의 사정에 지극히 어둡다는 부분만 제외하면 팔방미인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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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열세 번째 의제는 ‘류서란에게 언제부터 결단기 준비 과정을 교육시킬 것인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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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장은 두 부류로 나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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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쪽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라는 의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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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반대쪽의 의견은 ‘아직은 너무 이르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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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결단기 수사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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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너무 아깝습니다. 지금까지는 어쩔 수 없었다지만, 이제부터라도 빨리 결단기에 도달하기 위한 수행을 시작할 필요가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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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여태 자유롭게 지냈던 이유는 간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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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오죽문은 새로운 결단기 수도자를 배출할 준비가 전혀 안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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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이른 나이에 축기기에 도달한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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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단기 수사 한 명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자원과 인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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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수한 고급 단약, 초대형 토기영석, 속성에 맞는 특수한 진법과 진법을 설치하기에 알맞은 명당까지 문파 전체가 심혈을 기울여서 준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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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결단에 도전하기 몇 년 전부터 미리미리 준비하는 게 보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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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일영근자 류서란은 오죽문 수뇌부가 가장 애지중지하는 천고의 기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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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약, 영석, 진법, 명당, 인력, 공법, 시기 등 제반 사항을 가능한 완벽하게 갖추기를 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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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운이 따라준 덕분인지 최근에서야 모든 준비가 갖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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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급 단약은 준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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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속성 뱀요괴인 흑린역류혈사의 요단과 여러가지 부재료로 조제할 예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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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죽문은 연단술이라면 서대륙 제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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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 토기영석은 금작파에게 구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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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그쪽 최연소 일영근자인 금영영이 금속성 일영근이라서 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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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토속성이었다면 절대 팔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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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요한 진법은 이미 보유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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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지리적으로 알맞은 명당은 지저 세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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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조 인력도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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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결단기 공법조차 새로 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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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오죽문에 있던 토속성 공법도 충분히 쓸만했지만 수뇌부는 오로지 최고만을 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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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국 금작파에 문의해서 화속성 결단기 공법과 맞교환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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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는 서란이 스무 살이 되는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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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 수백 년 중에서 가장 천지에 토영기가 풍부한 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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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음 번 기회는 최소한 백오십 년 뒤에나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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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는 전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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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수뇌부의 결정만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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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죽문의 앞날을 수백 년, 어쩌면 영원히 좌지우지할 중대한 회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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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기 교육 찬성파가 발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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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당장이라도 시작해야 합니다. 이런 최적의 순간에 류 수사 같은 어린 천재가 오죽문에 몸담고 있다니, 두 번 다시는 이런 기회가 안 올 거예요. 이건 천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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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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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른 사람도 많이 찬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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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맞습니다. 기한이 촉박하기는 하지만, 류 수사라면 충분히 시기를 맞출 수 있을 겁니다. 이번에는 정말로 화신기 수사가 탄생할 수도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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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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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야말로 온 세상이 도와주는 격입니다. 솔직히 이 정도로 천운이 따라주지 않으면 문파 비승은 불가능합니다. 당장 서대륙에서 수천 년 동안 선계로 떠난 수도문파가 하나라도 있던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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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파 비승을 위해서는 화신기 수사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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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오직 일영근자만이 미약하게라도 화신기에 도달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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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로 수명의 한계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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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근은 열 살이 되면 활성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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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아무리 빠르게 수선에 입문해도 열 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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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기 수사의 수명은 125년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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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영근자는 평균적으로 십 년 정도 수행하면 축기에 성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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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축기기 수사는 250년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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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이는 스무 살, 남은 수명은 230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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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바로 이전 단계에서 수행한 시간보다 다섯 배 정도가 더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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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영근자는 오십 년을 더 수행해야만 결단기 수도자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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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로 결단기 수도자의 수명은 축기기 때보다 두 배 증가한 500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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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는 일흔, 남은 수명은 430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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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대망의 원영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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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영근자는 250년이라는 오랜 수행 끝에 원영기에 도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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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영기 수도자의 수명은 천 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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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이는 삼백이십, 남은 수명은 68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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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고난 재능과 수도문파의 적극적인 지원에 힘입어 원영기까지 승승장구해온 일영근자는 이쯤에서 처음으로 벽을 직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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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까지 경험한 귀납적인 추론에 따르면 화신기에 도달하기 위해서 필요한 추정 수행 기간은 약 1250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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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남은 수명은 칠백 년이 채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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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명이 너무나 부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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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요한 수행 기간은 다섯 배로 증가하는데 수명은 고작 두 배씩 늘어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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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영기 수사가 맞이한 벽은 수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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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다영근자들을 절망으로 몰아 넣은 세월의 흐름이 마침내 일영근자에게도 당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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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영기가 천재들의 무덤이라고 불리는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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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기 교육 찬성파는 절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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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신기는 정말로 하늘이 내려주는 경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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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어린 류서란과 지금 이 순간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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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회를 놓치면 다음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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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기 교육 반대파도 할 말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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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무모한 계획입니다. 애초에 류 수사는 나이가 너무 어려요. 눈이 녹고 봄이 와봐야 고작 열아홉 살이란 말입니다. 결단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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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파가 일제히 찬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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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시기에 목매지 말고 차분하게 결정해야 합니다. 후년을 놓친다고 류 수사가 영원히 결단에 실패하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냥 조금 아쉬울 뿐이지요. 류 수사는 충분히 재능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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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류 수사가 경지를 돌파하는 속도는 이미 이례적인 수준입니다. 확률 낮은 도박을 시도하지 않아도 안정적으로 화신기에 도달할 가능성이 큽니다. 오히려 조급한 마음으로 결단을 시도하다가 류 수사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오죽문은 완전히 끝장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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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기 교육 찬성파와 반대파는 한참을 토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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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운을 놓치는 것이 아쉬운 찬성파와 위험한 도박을 꺼리는 반대파가 설전을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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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도 안 자고 떠든 끝에 결론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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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자가 투표 용지를 정리하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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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최종 결론입니다. 후년에 찾아오는 최적의 결단 시기는 아쉽지만 포기합니다. 양측 모두 일리 있는 주장을 펼쳤지만, 결과에 승복해주시길 바랍니다. 만일 중대한 변수가 발생하면 재투표도 가능하니 참고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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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반 투표 결과, 반대파가 근소하게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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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 측이 최후에 주장했던 내용이 유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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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일 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류서란에게 결단에 필요한 지식을 온전히 전수할 교육자가 없다는 게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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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에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이라도 데려오지 않는 이상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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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투표가 끝나고 결단기 수사들이 분분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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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각자 수행하러 갈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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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장 문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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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밖에 류서란이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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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어깨 위에 소용녀를 목말 태운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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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뇌부는 일제히 소용녀의 머리에 달린 사슴뿔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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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라, 용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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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산 결단기 수사는 아는 게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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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숨에 소용녀의 정체를 파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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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용이 물고 있는 물건도 함께 알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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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건, 여의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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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나서서 서란에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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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 수사, 무슨 이유로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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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논리정연하게 사정을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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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줍게 된 여의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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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온 소용녀와 뒤바뀐 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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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주를 돌려주기 위한 선결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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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은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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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주를 돌려주기 위해서는 우선 결단기 수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용녀님이 제 결단을 돕기로 했습니다. 앞으로 장기간 체류할 예정이라서 미리 말씀드리려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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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을 했던 수사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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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알겠네. 우리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돌아가 보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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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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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손히 인사한 서란이 저멀리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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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장 문이 다시 닫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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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대한 변수가 발생했으므로 재투표를 진행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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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자가 회의를 재개하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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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파에 있던 사람들이 우르르 자리를 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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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는 볼 필요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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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죽문과 류서란, 소용녀는 각자의 목적을 위해서 임시 동맹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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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금은 당장 방부터 환기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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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캐한 검은 연기가 봄바람을 타고 흩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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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금은 곧장 서란에게 질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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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법보는 또 왜 저러고? 원래 흰 연기 내뿜는 향로 아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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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떠듬떠듬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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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 뭐냐... 실험을 하다가 약간 착오가 있었어. 별일 아니니까 신경 안 써도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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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금은 물러서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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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실험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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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료를 좀 넣어 볼까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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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넣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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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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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금은 곧장 눈을 감고 후각에 집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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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간 전문적인 훈련을 마친 이아금의 후각은 이미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지 오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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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눈 감고 미후각만으로 약재의 이름은 무엇인지, 어떤 환경에서 길렀는지도 맞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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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숨길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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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인드 테스트 그랜드 마스터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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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많이 들어간 건 장작이네. 그리고 이건, 차 냄새? 아하, 찻잎이구나. 음, 꽃 향기랑 기름 냄새라... 내가 사준 향초잖아? 선물 받은 향초는 도대체 왜 넣은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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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담청 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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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법보는 향로야, 난방용 화로가 아니라. 이렇게 아무거나 집어 넣으면 안 돼. 장난치다가 혹시라도 망가지면 어쩌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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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난이 아니라 탐구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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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금은 들은 척도 않고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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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언니 나이가 몇 살인데 애들처럼 불장난을 해? 이제 스물세 살이잖아. 슬슬 어른스러운 모습을 보여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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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에 있던 스물여섯 살 금영영이 움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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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친구들 중에는 결혼하는 애도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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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서란이 깜짝 놀라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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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아금이 네 친구가 벌써 결혼을 해? 무슨 결혼을 그렇게 빨리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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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금이 황당하다는 듯 대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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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 스무 살인데 뭐가 빨라? 속세였으면 애도 둘은 있을 나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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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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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망각하고 있던 사실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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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하겠지만 사람은 나이를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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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에 안 늙는 사람만 득실거려서 깜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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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금아, 네가 나보다 세 살 어리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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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맞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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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공포에 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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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금이가 올해로 스무 살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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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따라다니면서 언니 언니 하던 그 꼬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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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더 이상 아기가 아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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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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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그러워! 너는 누구냐, 나는 너를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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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금은 서란의 헛소리를 깔끔하게 무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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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영 언니, 요즘 우리 문파 사람 중에서 금작파 쪽이랑 중매 결혼하는 경우가 이상할 정도로 많던데 뭐 아는 거 있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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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영영이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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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당연히 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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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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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죽문이랑 금작파, 반쯤 합병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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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탄이 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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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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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신기 수사의 비승 과정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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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세상의 중심으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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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승 압력을 버틸 결계를 몸에 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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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로 하늘에 뚫린 구멍을 통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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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사히 선계에 도착하면 비승 성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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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이 승천하는 과정도 대동소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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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가끔씩 천겁 맞고 비승 실패하는 경우도 존재하지만, 일반적으로 과정 자체는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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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화신기 수사 혼자서 비승하는 게 아니라면 계산이 상당히 복잡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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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문파와 동반 승천하는 경우, 화신기 수사는 홀로 엄청난 부담을 감당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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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하는 사람과 물자가 많을수록 비승이 실패할 확률도 기하급수적으로 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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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파 비승에는 크든 작든 위험성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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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지금까지 뒷바라지해 준 은혜는 나 몰라라 하고 얌체처럼 본인만 승천해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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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라면 어렵지만, 혼자라면 손쉬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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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혼자 승천해서 뭘 어쩌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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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계 출신 화신기 수사는 전부 일영근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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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영근 보유자답게 한평생 자기 손으로 뭘 직접해본 경험이 없는 백수, 백조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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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다수가 혼자서는 제 앞가림도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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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문파가 비승을 위해서 화신기 수사에게 의존하는 만큼, 화신기 수사 역시 수도문파의 도움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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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단 실생활뿐 아니라 수선도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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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껏 문파를 버리고 혼자 승천해 봤자 필요한 자원이 없어서는 다음 경지까지 도달할 수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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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문파 비승 자체는 상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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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수는 사람과 물자를 얼마나 가지고 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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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선계로 옮기는 인적 물적 자원의 총합과 누적된 부담으로 증가하는 실패 확률 사이에서 적정선을 찾을 필요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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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계산은 크게 어렵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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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선발대 덕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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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수선계는 적정값 산출에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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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 결괏값이 곧 수도문파 규모의 실질적 상한선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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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보다 규모가 더 크면 비승은 실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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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면 구성원 일부가 인계에 버려지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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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문파는 일영근자에게 집중적으로 투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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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수도자들은 문파 비승을 위해서 헌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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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기형적인 구조가 유지될 수 있는 건 모두가 이익을 공유하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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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우리 모두’가 아니라 ‘너와 내’가 되면 수도문파는 필연적으로 분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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닫힌 사회에서 서로 반목하면 집단은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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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 전체를 지배하는 수도문파, 이런 초대형 집단은 근본적으로 탄생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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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범부들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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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에게는 여의주 뺨치는 거대 금단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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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한 계산 끝에 두 문파는 결론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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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죽문과 금작파는 함께 승천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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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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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륙 중서부, 사악한 음모자들이 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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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같이 오죽문과 적대적인 문파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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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단 의식 제발 실패하라고 저주하던 그들이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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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성원들끼리 서로 적대 관계인 경우도 많았지만, 미증유의 위기가 다가오자 똘똘 뭉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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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죽문에서 화신기 수사가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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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계에 도래한 절대자가 얌전히 선계로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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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선계 역사에 그런 경우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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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죽문과 금작파는 수천 년 전에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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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는 양나라와 교나라에 수도문파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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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없었는지 생각해보면 금방 답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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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대 화신기 수사가 비승하기 전에 적대적인 문파를 모조리 멸문 시켜버린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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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천 년 간 균형을 유지하던 세력 구도를 폭풍처럼 쓸어버리고 서대륙 수선계 전체를 초기화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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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순간에 서대륙 대부분이 무주공산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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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문파가 새로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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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죽문과 적대 관계인 문파들은 공포에 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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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백 년 후로 예정된 죽음이 초읽기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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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출 수 없는 파멸이 그들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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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아우성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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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먼저 선수를 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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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습니다,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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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일곱이고, 저기는 고작 넷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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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제 공격을 주장하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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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죽문, 금작파, 약목파, 그리고 해선문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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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예 사 개국 동맹을 쓸어버리자는 의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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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면전은 너무 위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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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린 년도 아직은 결단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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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암살만 하면 상대도 어쩔 수 없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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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살 작전을 주장하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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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신기에 도달할 가능성이 있는 원영기 수사들의 인적 사항이 수도문파 최고 기밀인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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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류서란의 경우는 성대한 결단 의식 때문에 서대륙 전체에서 모르는 이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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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립인 수도문파들도 끌어들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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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도 분명 두려워하고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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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가 적으려면 압도적인 격차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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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맹 확대를 주장하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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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면전을 하든, 암살을 하든 보복을 피하기 위해서는 이쪽부터 덩치를 키울 필요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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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립 문파들까지 포섭하면 오죽문과 그 동맹, 그리고 류서란까지 확실하게 죽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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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롭던 서대륙에 거대한 전운이 감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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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전령이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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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 속보입니다! 오죽문과 금작파가 초대형 동맹을 결성했습니다! 구성 문파는 약목파와 해선문, 그리고 중립을 유지하던 수도문파 십여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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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을 준비하던 일곱 문파는 경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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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하던 형세가 완전히 역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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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중립 문파들도 합류하지 않을 게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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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한번 싸워 보기도 전에 패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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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륙 전체를 뒤덮으려던 대전쟁은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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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란 원래 외교 허접들이나 하는 헛짓거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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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곱 문파는 황급히 해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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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오고 간 흉계는 영원히 함구하기로 약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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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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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중패는 토속성 공법 전문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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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공법 연구는 어디까지 학술적 취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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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의 진짜 전문성은 외교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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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작파 수석 외교관 금중패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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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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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호, 그들이 그런 흉계를 꾸몄단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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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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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고자가 비굴하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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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습니다, 금 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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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중패는 미소를 짓더니 보좌관에게 명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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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약속한 대가를 드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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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좌관이 밀고자에게 옥함을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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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급히 옥함 안을 본 결단기 수사는 내용물을 확인하고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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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탐욕에 휘둘리던 그는 간신히 진정하고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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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 수사, 혹시라도 우리 문파가 그 모임에 참석했다고 오해를 하지는 않으시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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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럼요, 전부 첩보 활동이 아닙니까. 그 정도로 훌륭한 정보원을 의심하다니요. 염려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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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밀고자가 황급히 떠난 뒤, 보좌관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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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 수사님, 저 거짓말을 믿지는 않으시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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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연한 것 아니냐. 우리를 배신하고 저쪽에 붙었다가 상황이 바뀌니까 다시 꼬리를 흔드는 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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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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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좌관이 화를 참지 못하고 토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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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런 박쥐 같은 녀석! 금 수사님, 저는 이해가 안 됩니다. 아무리 외교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이 신뢰라지만, 저런 소인배에게까지 약속을 지킬 이유가 있나요? 저 놈이 먼저 우리를 배신하지 않았습니까. 배신한 대가를 치르게 해줘도 세상에 욕할 사람이 없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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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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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중패가 차분하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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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은 욕하지 않아도 저 소인배는 분명히 앙심을 품겠지. 물론 그의 문파도 그럴 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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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까짓게 감히요? 그리고 저런 약소 문파 정도는 적으로 돌려도 상관없지 않겠습니까? 제 놈들이 뭘 할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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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중패는 보좌관을 질책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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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게도 옛날에는 저런 시절이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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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는 것은 시간을 들여서 배우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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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은 산맥이 아니라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다. 우리에게 사소한 일이라면 그냥 웃어 넘겨라. 자비란 본래 강자의 특권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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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좌관이 재차 질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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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하지 않다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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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중패가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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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계속 웃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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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좌관이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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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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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어릴 적 모습이 남아 있는 손녀를 보며 금중패가 자상하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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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소를 지우는 건 상대를 찌른 뒤에도 족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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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녀가 생각에 잠기자 금중패는 자리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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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은 그에게 정말로 특별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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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면적으로는 대규모 합동 결혼식이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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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 이면에는 다른 의도가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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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천 년 전, 약소 문파였던 금작파는 오로지 외교력 하나로 지금의 영광을 쟁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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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륙 오대 세력에 속하는 거대 문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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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중패는 상념에 잠긴 채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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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어릴 적 들었던 금언을 잊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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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정직하게 행동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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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익을 기꺼이 나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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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의를 사는데 망설이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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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이웃을 사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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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중패의 피에 흐르는 금작파의 정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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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광장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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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형 동맹에 참가한 중립 문파들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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펄럭이는 무수한 깃발들은 하나하나가 금작파가 쌓아올린 외교 관계와 신뢰를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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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작파는 오죽문과 승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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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연적으로 양나라, 유나라, 교나라 삼국과 무수한 자원들이 지상에 남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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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작파는 삼국의 영토와 잉여 물자를 무기로 중립 문파들과 지지부진한 협상을 계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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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는 지금 눈앞에 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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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부부들이 사랑으로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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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맹 구성원들이 그들을 진심으로 축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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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선지 하객으로 참석한 어인족도 환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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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작파가 고수한 원칙이 만든 광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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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관으로서 정말 감개무량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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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중패는 눈시울을 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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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이웃을 사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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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작파는 틀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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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요즘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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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벽 끝에 몰려있던 오죽문의 재정도 호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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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형 운하, 동맹 문파 간에 잦아진 교역, 어인 교단의 공물 덕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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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정을 담당하는 재경부에게 류서란은 구원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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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때문에 문파 망할지도 모른다는 부담감을 내려놓은 서란은 수련에 박차를 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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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의 아침은 빠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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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같이 기상해서 한증막에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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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는 건 결코 아니고, 수련의 일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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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한증막이 아니라 법보 한증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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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고 밀폐된 공간, 오직 의자와 법보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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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을 닫고 향로에 불을 붙이면 한증막 완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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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험을 거듭하다가 알아낸 사실인데, 향로에서 나오는 연기는 피부로도 흡수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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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실이 밝혀진 계기는 순전히 우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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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로에 불을 피우고 흰 연기를 마시던 서란은 딴생각을 하다가 숨 쉬는 걸 잊어 버린 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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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단기 수사는 질식 따위로는 안 죽어서 의식하지 않으면 가끔씩 이럴 때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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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연기를 마시며 누워있던 담청은 경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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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에는 코로 호흡해서 몰랐는데, 향로의 연기는 서란의 살갗으로도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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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서류도 아니고 피부 호흡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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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서란이 청개구리라서 그런 건 아니고, 원래 법보에 내재되어 있는 효능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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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과 담청은 즉시 기발한 생각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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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를 전신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차라리 비좁은 공간에서 향로를 사용하는 게 더 효율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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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보 한증막은 그렇게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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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아침, 서란은 한증막에서 명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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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로 안에서 타오르는 불꽃 때문에 한증막 내부 온도는 계속 상승하지만, 어차피 결단기 수사는 열사병에 걸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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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훤히 드러낸 서란의 피부가 발갛게 달아오르며 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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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소 민망하지만 흡수 효율을 향상시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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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 단련과 땀 빼기를 마친 뒤 목욕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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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을 차려 입고 늦은 아침을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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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가 끝날 때쯤 이아금이 찾아와서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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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약 먹을 시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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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당이 열심히 만들어준 다종다양한 영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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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단약하면 떠오르는 환약, 물에 타서 먹는 가루약, 뭘 넣었는지 걱정스러운 진한 탕약, 심지어 바르는 약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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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분량을 열심히 먹고, 마시고, 바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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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약재 냄새 풀풀 풍기며 한마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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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너무 쓴데... 달게 만들 수는 없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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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약이라는 게 자기 마음대로 재료를 넣고 빼고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그냥 당과 먹고 참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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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오늘도 당과나 쭙쭙 빨면서 집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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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인 교단의 신, 대지모신 노릇을 할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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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당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 어인족 순례자들이 회전 초밥처럼 순차적으로 알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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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곧은 자세로 앉아 있다가 공물을 받고 덕담 몇 마디 해주는 게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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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 아이돌 팬사인회 비슷한 분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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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등 신도가 연신 주의를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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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물은 수입의 오 푼을 초과해서는 안됩니다. 이를 어길 경우, 삼 개월 간 공물을 바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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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가 감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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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일해서 부자가 되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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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 시간이 된 서란이 집으로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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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는 결단기 수사의 육체를 이길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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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잠들기 전까지 인형술을 공부할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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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죽문이 파산 위기에서 벗어나면서 서란의 개발 지원금도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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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상 자기가 번 돈을 돌려받는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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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네 것이 내 것이면, 내 것도 네 것인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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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이런 사소한 부분에 개의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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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족한 재료를 손에 넣은 서란은 열심히 맨땅에 헤딩하기를 반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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꿀팁 하나 가르쳐 줄 사람도 없는 비주류 법술을 선택한 어리석은 자의 숙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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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학습 진도는 정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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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력이 빠르게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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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산맥이 흰 눈으로 뒤덮인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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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서란의 생활에도 변화가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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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를 만든 계기는 단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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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도 쉬지 않은 부지런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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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흔히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경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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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내가 직접 볼 수 없다고 특정한 개념이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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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정신력도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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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단기란 육신의 초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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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영기란 영혼의 초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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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서란은 결단기 수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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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디로 이미 초월해 버린 육신과 달리 영혼은 아직도 인간의 한계에 묶여 있는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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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와 어른이 함께 이인삼각을 하는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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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는 힘들지 않다고 혼자 열심히 내달리던 육체가 문득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 옆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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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의 정신이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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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 속에 나온 마음(의인화)이 서란에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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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있잖아, 이제 더 이상은 못할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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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는 재가 되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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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기울어진 문파를 살려보겠다고 일 년 동안 휴일도 없이 대규모 토목 공사를 계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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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혹한 일정을 가까스로 소화하고 여름 해변에서 즐거운 바캉스를 즐기려던 계획도 좌절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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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지에 어인 교단의 대지모신이 되고, 담청이 파업하는 동안 줄곧 도장이나 찍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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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기간 동안 서란의 마음은 복합 골절과 초고속 회복을 반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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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야구 선수의 팔꿈치 관절이란 원래 쓸수록 망가지고, 그건 사람의 정신도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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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인적인 회복 탄력성도 이제 한계에 다다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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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렬히 타오르던 내면의 불꽃이 피시식 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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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눈을 뜬 서란이 혼자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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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안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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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의 눈썹이 역팔자를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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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 수양? 질렸어, 안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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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약 섭취? 맛도 없는 걸 내가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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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노릇? 그것도 때려치울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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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술? 비주류 법술 싫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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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파업 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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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번아웃 증후군이라고 부르는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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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선계에서는 심마라고 교양있게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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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공식적인 자리가 아니라면 다들 ‘결단기병’이라는 명칭을 더 자주 사용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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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서란이 흑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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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죽문 전체에 초비상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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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망 받는 천재의 타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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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파 비승이 걸린 중대 사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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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죽문 수뇌부가 즉시 소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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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각한 분위기 속에 누군가 발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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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심마에 빠진 건 확실해 보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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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그런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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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정확히 무슨 심마입니까? 심마도 종류가 여러가지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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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흔히들 결단기병이라고 부르는 그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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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마에 대해서 잘 아는 박식한 이가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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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보다 수행을 열심히 하는 수도자들이 종종 겪는 병입니다. 결단기에서 가장 발병 빈도수가 높은데, 정신과 육체의 괴리가 주된 이유로 꼽힙니다. 정신이 육체를 못 따라가서 문제가 생긴다는 말이 더 정확하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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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에 앉아있던 수사가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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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과 육체의 괴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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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그렇습니다. 결단기에 도달하면 육체가 한계를 초월하죠. 아무리 수행을 해도 몸이 지치지 않으니, 당최 멈추지를 않는 겁니다. 게다가 원영기에 도달하기 위해서 정신 수양에 집중하기까지 하면 사태가 더욱 악화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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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알겠습니다. 가뜩이나 몸만 튼튼한 결단기 수사가 육신은 편하고 영혼이 힘든 수행을 해서 생기는 문제로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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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신체적 피로가 없으니 문제를 사전에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죠. 나중에 봤더니 몸은 멀쩡한데 정신만 피폐해져 있는 겁니다. 화로가 크다고 장작을 한꺼번에 전부 넣고 태워 버려서 연료가 고갈된 상태라고 할 수 있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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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멀리 자리한 사람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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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들어본 적이 없는데, 흔한 병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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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식한 수사가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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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마 중에서는 굉장히 드문 경우입니다. 사람이라면 보통 이 지경이 되기 전에 스스로 멈추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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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뇌부는 오래 전에 본 보고서를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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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죽문 비전 신체 단련 전문가, 마 수사가 제출한 류서란 관찰 보고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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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이 정확하다면 보고서 내용에 ‘일반적이지 않은 향상심’이라는 문구가 열댓 번쯤 들어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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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층 심각해진 수뇌부가 웅성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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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괜찮은 치료 방법이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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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의 질문에 심마 전문가가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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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히 없습니다. 그냥 자연 치유뿐입니다. 괜히 건드리지 않고 가만히 놔두는 게 가장 좋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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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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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에 필요한 시간은 어느 정도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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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정도 수행을 멈추면 원래대로 돌아옵니다. 평균적으로는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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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작 몇 년 정도라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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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소식에 회의장 분위기가 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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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혼자 고민에 잠겨 있던 수사가 질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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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균적이라는 말은, 더 걸리거나 회복하지 못한 경우도 있다는 말씀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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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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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에 회복하지 못하면 어떻게 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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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가 입을 다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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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이 길어질수록 긴장감은 점차 고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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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른침 삼키는 소리마저 들릴 정도로 적막한 회의장, 심마 전문가가 마침내 말을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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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알려지지는 않은 사실이지만, 오죽문에도 결단기병을 극복하지 못한 수도자가 한 분 계셨습니다. 여러분께서도 이미 잘 아시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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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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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 년 전에 돌아가신 엽 수사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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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뇌부는 이름만 듣고는 바로 떠올리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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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으로 부르는 경우가 드물어서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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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누군가 몸을 떨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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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에 질린 수사가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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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인형술에 심취하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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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그 분이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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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근 자질, 일영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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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수행 경지, 결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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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년, 오백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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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인, 수명 한계 도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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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엽관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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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를 서대륙 최고 인형술사라 자칭하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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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는 인형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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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가진 ‘학습인형연구’의 저자, 인형술 애호가의 정체가 바로 엽관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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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가 수뇌부 전체에 전염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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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관보는 결단기병을 끝내 극복하지 못하고 인형술에 심취한 괴인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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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수행마저 등한시한 나머지 일영근자임에도 죽을 때까지 원영기에 도달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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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라고 암흑 진화해서 그렇게 되지 말라는 법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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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뇌부는 수백 년 동안 점토인형을 만지작거리며 결단기에 머무르는 류서란의 모습을 상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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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대전쟁보다 더 두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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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 서란은 수행 전반을 보이콧하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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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단약 섭취도 수선의 일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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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담당자인 이아금만 생고생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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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을 꾹 닫고 도리도리하는 금쪽이에게 약 한번 먹여 보겠다고 온갖 방법을 동원했다는 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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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덜컹덜컹, 마차가 들어갑니다. 성문을 열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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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금이 약숟가락을 서란의 입으로 가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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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어르고 달래도 성문은 요지부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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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단호하게 거부 의사를 표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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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으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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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애 반찬 투정과는 격이 다른 철벽 수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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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가 뭘 거부하면 억지로라도 먹일 수는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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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결단기 수사가 인간을 초월한 교합력으로 이를 악물어 버리면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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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금은 접근 방법을 바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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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진짜 이렇게 유치하게 굴 거야? 이제 계절 바뀌면 언니도 스물네 살이 되잖아. 약 먹기 싫다고 투정부릴 나이는 한참 지났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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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짓 화를 내도 안 먹혀서 작전을 또 바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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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았어, 그러면 오늘은 딱 한 입만 먹자. 나도 더 먹으라고는 안 할게. 진짜 딱 한 입이야. 자, 여기 봐봐. 이 조그만한 약숟가락 보이지? 아 하세요,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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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운 스물세 살은 이번에도 들어먹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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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둬, 전부 관둬. 먹기 싫으면 억지로 먹지 마. 이거 정말 귀한 탕약인데 언니 대신에 내가 다 마셔야겠다. 아, 맛있다 맛있어. 이러다가 내가 언니보다 경지가 더 높아지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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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떡이 더 커 보인다.’ 유도도 무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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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방법이 더는 떠오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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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아금은 그냥 왼손으로 서란의 코를 꾹 막아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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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이 막혀서 어쩔 수 없이 입을 벌리면 그 틈에 탕약을 콸콸 부어 넣을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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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결단기 탈인간 보디는 호흡마저 불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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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존심 강한 두 수도자의 대결이 계속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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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약은 이미 싸늘하게 식어버린 지 오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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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눈알을 굴려서 이아금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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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함께 시선으로 말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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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 ‘저런, 안 통했는데 어쩔래?’ 라는 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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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받은 이아금이 잠깐 고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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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코로 부어 넣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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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곧 정신을 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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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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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아야 한다, 아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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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는 너를 업어 키운 서란 언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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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더 어린 동생이 백기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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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에게 단약 먹이기’는 오늘도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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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금은 일단 약당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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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전상 후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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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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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금이 서란과 실랑이하고 있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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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단술사들은 전부 모여서 토의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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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류서란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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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단약을 먹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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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수사가 또 늦는 걸 보니 오늘도 약을 거부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이제 어쩌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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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이나 간식은 제대로 먹고 있지 않나요? 식사에다가 몰래 섞어서 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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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 수사는 의욕이 없는 거지, 갑자기 지성이 사라진 게 아닙니다. 그리고 비싼 단약을 억지로 먹여도 본인이 약효를 흡수하지 않으면 무용지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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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오늘도 이렇다 할 명안은 나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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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도 단약을 조제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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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은 양만 조금 줄이고 매일 가져다 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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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지도 않는데 굳이요? 비용도 만만치 않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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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재 아깝다고 대뜸 주는 걸 멈췄다가 더 엇나가면 어쩌려고요. 사람 마음이라는 게 원래 사소한 부분에서 상하는 법입니다. 꾸준히 가져다주면 언젠가는 생각이 바뀌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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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안 먹은 단약은 어쩌죠? 시간이 지나면서 약효도 빠르게 사라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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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이 수사 먹이죠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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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그 의견에 동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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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긴 거의 의자매던데, 좋은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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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 수사도 별로 안 아까워하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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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문이 열리며 이아금이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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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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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목 없는 얼굴로 들어온 이아금에게 한 연단술사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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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실패했나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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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도저히 입을 열질 않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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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단술사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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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만하군, 수고했네. 아참, 그 탕약은 이 수사 자네가 다 마시게나. 버리기는 아깝고 보관할 방법도 마땅치 않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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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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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금이 차가운 탕약을 사약처럼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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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업을 하고 열흘이 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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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의 마음은 점점 불편해져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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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충동적으로 내린 결정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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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는 너무 지쳐서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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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대에 누운 서란이 속으로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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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잠 자니까 너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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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언제까지 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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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아니면 반 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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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지 올리는 건 지금도 빠르니까 좀만 더 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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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여태까지 열심히 달려왔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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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년 정도는 푹 쉬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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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안한 표정으로 다시 단잠에 들던 서란이 갑자기 눈을 번쩍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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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일 년은 너무 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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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든지 꾸준히 하는 게 중요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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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가서 다시 하려면 힘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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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애초에 일 년을 논다고 의욕이 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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앉으면 눕고 싶고, 누우면 자고 싶어질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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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지날수록 다시 시작하기 힘들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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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상체를 벌떡 일으키며 혼잣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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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수행을 해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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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상념 때문에 쉽사리 침대 밖으로 벗어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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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진짜 하기 싫은데 어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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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게으름 피우면 문파 사람들이 싫어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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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서 단약이랑 영석 잔뜩 빨아먹더니 논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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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호의를 보일 때 수행을 재개해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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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움받고 싶지는 않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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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오늘까지만 쉬고 내일부터 열심히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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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정말 하고 싶지 않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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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적인 사고가 무한 나선을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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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스갯소리로는 결단기병이라고 부르지만, 서란의 증상은 본질적으로 심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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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마란, 마음을 좀먹고 영혼을 죽이는 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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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점점 극단적인 망상에 사로잡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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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로 수행을 완전히 포기한 미래를 상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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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파 비승이라는 희망이 사라지자 오죽문 수도자들이 서란에게 가시 돋친 욕설을 토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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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팍한 인간 관계는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고, 친구들마저 서란에게서 등을 돌려 떠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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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모두의 원망 속에서 고독하게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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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을 재개할 경우를 가정한 미래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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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 속 서란은 오랜 휴식기 동안 녹이 슨 감각 때문에 고생하면서도 부랴부랴 수선에 힘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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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미 볼품없이 퇴색된 재능은 두 번 다시 빛나지 않았고, 서란은 화신기 수사가 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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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도 서란은 쓸쓸하게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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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운으로 화신기에 도달한 미래도 비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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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신히 문파 비승에 성공한 서란은 너무 무리한 탓에 수행이 퇴보해서 대부분의 경지를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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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더 이상 쓸모가 없어진 서란을 내쫓아 버리고 자기들끼리 행복한 선계 생활을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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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모두의 기억 속에서 잊혀진 채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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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마가 서란의 영혼을 갉아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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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필사적으로 맞서 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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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피해 망상은 점차 심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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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내는 환청까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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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부모는 너를 사랑하지 않았어. 심지어 너 자신마저 그랬지. 하긴, 누가 너 같은 걸 사랑하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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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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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무릎에 얼굴을 묻고 애써 부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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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긴 뭐가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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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마가 서란의 귀에 계속해서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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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를 틀어막아도 목소리는 사라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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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밤새 필사적으로 몸을 웅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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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침, 이아금이 약을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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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한마디도 대꾸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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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죽문 수뇌부는 당시에 막 축기기 수사가 된 호혜문을 보고 글방 선생이 제격이라고 생각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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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나는 지성, 모범적인 행실, 박학다식함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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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말로 엄격한 글방 선생이 되어서 오죽문 아이들을 효자 효녀로 개조해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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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호혜문의 글방에 엄격함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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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저 가지 먹기 싫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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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식하는 아이에게 호혜문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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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가 먹기 싫어요? 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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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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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입을 다물자 호혜문의 미소가 짙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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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응, 왜 그럴까요? 말하기 싫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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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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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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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요, 그럼 선생님한테만 몰래 알려줄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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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한테 말해주면 안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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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았어요, 약속할게요. 자, 귓속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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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작게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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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끄덩거려서 안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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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혜문이 아이의 귓가에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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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선생님이 대신 먹어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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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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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정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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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은 가지도 먹을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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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혜문이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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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을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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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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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이상한 질문이지만, 선생 경력만 오 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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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고루 먹어야 미인이 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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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는 호혜문의 얼굴을 보고 속으로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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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진짜 골고루 먹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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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생각을 바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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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저 반만 먹을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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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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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격함은 없었지만 호혜문은 좋은 선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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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애정 가득 교육 방법은 수많은 꾸러기 꾸러기 말썽꾸러기들을 모범생으로 탈바꿈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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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오죽문 내부에서는 호혜문의 글방은 효자 효녀 제조소라고 명성이 자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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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방 졸업식, 참스승 호혜문은 올해도 무수한 금쪽이들을 바른 생활 어린이로 갱생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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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들의 눈물 어린 감사와 함께 한 해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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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혜문은 바쁜 탓에 신경써주지 못했던 친구를 찾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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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만난 서란은 소통을 일절 거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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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을 둥글게 만 것이 꼭 고슴도치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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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의 얼굴은 볼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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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쌍한 팔자 눈썹과 축 처진 입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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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이라는 개념을 형상화한 표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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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태가 더 안 좋아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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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금이 서란에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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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산책이라도 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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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여전히 웅크린 채 반응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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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내키는구나? 알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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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금은 호혜문을 데리고 방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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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아예 반응도 안 하는데 어쩌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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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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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혜문은 고민하다가 의견을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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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환경부터 바꿔보는 건 어떨까? 심마에 빠졌을 때 조용한 장소에 머무는 건 그다지 현명한 판단이 아닌 것 같아. 적막함 속에서 부정적인 생각만 반복할 게 분명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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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금이 듣기에도 그럴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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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소 소란스러운 장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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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가급적이면 혼자 두지 않을 것. 심마의 원인과 연관된 요소들과 떨어뜨려 놓을 것. 내가 떠올릴 수 있는 건 이 정도뿐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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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에요, 혜문 언니. 큰 도움이 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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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금은 문을 살짝 열어서 안을 들여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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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여전히 침울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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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가끔 시선을 돌려서 약당에서 가져온 단약을 바라보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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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그래도 쭈글쭈글한 표정이 더 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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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속세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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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금은 서란을 위한 효도 관광을 기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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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세라면 적당히 소란스럽고, 혹시라도 수선을 연상시킬만 한 사람이나 물건도 거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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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발로 걷지는 않을 테니 서란을 옮겨주고 지속적으로 관리해줄 동행자도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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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금은 자의로 참가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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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단술사들과 달달한 탕약을 개발할 계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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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면 혹시라도 서란이 먹을까 싶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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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은 반쯤 타의로 참가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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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모신과 교대해서 순례단을 맞이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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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한 리스크 관리조차 소홀히 하지 않았던 어인 교단의 선견지명이 빛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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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멤버는 류서란, 호혜문, 금영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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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지는 볼거리가 풍부한 양나라 왕도, 금영영의 비행 마차를 타고 갈 예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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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왕도로 출발하는 날 아침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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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금이 온갖 호들갑을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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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요, 서란 언니 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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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따리를 받은 금영영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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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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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이랑 신발, 손수건, 이불이에요. 가급적이면 매일 씻기고 갈아입혀 주세요. 잘 때 배에 이불 덮고 자는지도 확인해주시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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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영영은 보따리를 마차에 실으며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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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뭐지, 모녀지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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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을 싣고 고개를 돌리니 이아금이 다른 보따리를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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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또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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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길에 입 심심하면 언니 먹으라고 싼 간식이에요. 한번에 너무 많이 주지는 마세요. 먹으면 자기 전에 꼭 양치질 시켜 주시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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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영영은 생각이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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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구나, 사육사와 동물이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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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랍게도 보따리는 하나 더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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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의 책장에 꽂혀 있던 잡서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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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심심해 하면 읽어주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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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영영은 얼른 마차를 출발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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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라도 보따리가 더 있을까 봐 두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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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도, 바퀴도 없는 금속 마차가 하늘을 날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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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나라 왕도까지는 금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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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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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 법기를 고 수사 거처 인근에 주차해 놓은 일행은 곧장 왕도 관광을 즐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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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개최된 축제 덕분에 왕도는 떠들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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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대의 현란한 곡예와 함박웃음을 짓는 구경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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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연주와 아름다운 노랫소리가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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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죽이 연신 하늘을 형형색색 수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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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사람은 딱히 목적지 없이 거리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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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혜문은 연신 쏘아올린 폭죽을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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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영영은 광대의 농담을 듣고 박장대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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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도 호혜문에게 업힌 채 실실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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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식피식 바람 새는 소리를 듣고 금영영이 얼른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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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서란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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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잽싸게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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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지로 웃음을 참았더니 입꼬리가 경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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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가면극 할 때 쓰는 익살스러운 탈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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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제는 밤에도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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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사람은 천혜루라는 구층 누각에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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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에 일찍 잠들던 금영영은 벌써 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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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을 의자에 내려놓은 호혜문이 자신도 옆자리에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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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은 늦은 시간에도 불구하고 불이 꺼지지 않는 야시장을 말없이 구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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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소음이 사라진 자리에 고요가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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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소리와 시끌시끌한 활기는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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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도 다시 생각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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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선하기 싫어, 더 놀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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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움받기도 싫어, 수행해야만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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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수선하기 싫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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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리에 꼬리를 물고 부정적인 생각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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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내 찾아올 심마의 전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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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오늘 밤은 혼자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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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혜문이 문득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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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누각 이름이 어째서 천혜루인지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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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답이 없어도 호혜문은 개의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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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혜루는 수백 년 전에 건설됐죠. 하늘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지었다고 합니다. 저도 어릴 적에는 그렇게 배웠습니다. 물론, 수도자가 된 이후에는 감사하는 대상이 하늘이 아니라 수도문파였다는 진실도 알게 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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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침묵하던 호혜문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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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얘기는 별로 재미가 없었나 보군요. 다른 이야기를 할까요.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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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혜문은 이런저런 대화 소재를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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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전에 대한 소감, 지필묵에 관한 선호, 양나라 십대 명승지, 권각술에 대한 깨달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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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도저히 넘겨들을 수 없는 말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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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 수사를 보면 아버지가 떠오르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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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에 남자였던 서란이 찔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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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자 시선이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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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혜문이 작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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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야 관심을 가지시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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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시선을 피한 서란에게 호혜문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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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보낸 제 어린 시절이 궁금하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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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먼산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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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질문을 하나 하죠. 이곳 왕도 북서부 지구 안에 있는 전체 토지 중, 저희 가문이 소유한 비율은 얼마나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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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에 대답 안 하면 뒷이야기를 안 들려 줄 것 같아서 서란은 대충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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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할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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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웃던 호혜문이 정답을 알려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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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요, 배포가 너무 작으십니다. 정답은 최소한 육 할 이상입니다. 그것도 벌써 이십 년 전이니까, 지금은 더 늘어났을 수도 있겠네요. 이 천혜루도 저희 가문 소유입니다. 축제 와중에도 저희 세 사람이 꼭대기 층을 전세낼 수 있었던 비결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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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꽤나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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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드넓은 왕도를 아홉 등분한 북서부 지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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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토록 광대한 토지의 육 할 이상을 한 가문이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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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족을 제외하면 양나라에서 가장 부유한 집안이라는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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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에 나올 이야기가 더욱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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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를 따라서 강물처럼 이어진 등불을 바라보던 호혜문은 이내 어린 시절 이야기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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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혜문은 어린 시절, 재녀로 명성이 자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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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아버지 머리를 닮은 덕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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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아버지는 호혜문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찬란한 재능을 가지고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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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유한 명문가, 잘 생긴 외모, 빛나는 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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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게는 재상이라는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가 약속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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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황처럼 날개를 활짝 펼치고 비상하는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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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병마가 천재의 날개를 꺾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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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차 심해지던 기침에 피가 섞여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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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인의 부축이 없으면 걷지도 못하는 병약한 몸으로는 대국의 재상 자리를 감당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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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아귀에 거의 들어왔던 영광이 도망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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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사내는 여전히 가진 것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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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까지 이어진 전답과 왕가 다음으로 명성 높은 대가문, 그리고 셀 수 없는 혈족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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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사내는 잃어버린 영광에 집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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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분신이 될 천재를 직접 만들기로 작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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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해서 첩을 들였고, 계속해서 자식을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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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문이 트이면 곧장 어미에게서 떼어놓고, 가혹한 교육 환경에 던져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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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를 나눈 형제자매 간의 치열한 경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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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의 항아리 속에서 호혜문은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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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내에게 호혜문은 딸이 아니라 분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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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대에 가까운 교육과 피나는 경쟁, 일곱 살에 수많은 경전을 외우는 재녀가 탄생한 배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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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만의 기준을 요구하며 호통치던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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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를 경쟁자로만 여기는 형제자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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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이란 두려움의 대상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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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혜문은 마음 붙일 곳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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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끼 고양이를 주워서 몰래 길렀던 적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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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조금 자라더니 담장 너머로 도망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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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장 너머의 축제와 하늘을 수놓던 폭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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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혜문은 열 살이 되어서야 담장을 벗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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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신술인 권각법에 집착했던 것도 내면에 잠재된 두려움의 발로였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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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마친 호혜문이 서란에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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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우연히 류 수사와 만났죠. 오해가 계기가 되어 친해지고, 함께 어울리면서 타인에 대한 두려움도 점차 옅어졌죠. 굴레를 벗어 던지니 축기기에 도달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류 수사가 차지하는 지분이 적지 않아요. 감사하고 있습니다, 물론 아금이에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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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홀린 듯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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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지분이 얼마나 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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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글쎄요. 얼추, 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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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기대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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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분이 크다고 했으니 삼 할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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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할이 아닌 건 아쉽지만, 아금이도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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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 할로 만족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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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혜문이 결과를 알려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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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삼 푼 정도 되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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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로 실망스러운 소리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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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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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혜문이 작게 웃더니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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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합니다, 그래도 제 인생이니 남에게 휘둘리기만 하면 안되겠죠. 사실 삼 푼도 후하게 쳐준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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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주 웃던 서란이 문득 궁금해져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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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상처는 어떻게 극복한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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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복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아버지에게 악감정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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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했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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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혜문이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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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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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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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감정은 지금도 쓸 곳이 많습니다. 류 수사, 아금이, 금 수사, 용녀님, 그리고 가르치는 학생들도 있겠군요. 단순하게 우선 순위 문제입니다. 뭐, 세월이 수백 년 정도 지나서 한가해지면 용서해 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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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놀라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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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영기에 도전할 생각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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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혜문이 자신만만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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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요, 저는 자신이 있습니다. 천재니까요. 이영근자가 원영기 수사가 된다니, 솔직히 일영근자보다 대단한 일이죠? 굉장히 드물지만 가끔씩 성공하는 사람도 있다고 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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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암산을 하다가 호혜문이라면 아예 불가능한 것도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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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혜문이 계속해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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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까지 얘기했었죠? 아참, 감정. 사람 감정이라는 것도 결국 유한한 자원이죠, 그래서 귀한 것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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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방 선생 호혜문의 비밀 과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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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손가락질 받고 싶은 사람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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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문에 감정도 도둑질의 대상이 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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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 비하면 정당하게 사랑받고자 하는 류 수사의 노력은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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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존경받는 선생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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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아버지를 반면교사 삼아서 내가 싫었던 일을 남에게 하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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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들이 훗날 부모나 스승이 되었을 때, 나와 내 가르침을 기억해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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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철학을 늘어놓다가 향후 자아 실현 방도까지 떠들기 시작한 호혜문에게 서란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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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심마에 지면 어쩌죠? 혹시라도 제가 수선을 포기하면, 문파 사람들이 싫어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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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속에 가득 찬 걱정이 튀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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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벗어난 갑작스러운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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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유소년 교육 전문가는 대처가 빨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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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왜 지는 겁니까? 그저 오래 살기 위해서 생애 대부분을 수행에 쏟는 삶이라니, 정말 불행한 삶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람이라면 자고로 자기 행복을 위해서 살아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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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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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그렇습니다. 존경이든, 사랑이든. 뭔가 목적이 분명해야죠. 수선은 그저 수단이지만, 목표는 다양할 수 있겠죠. 류 수사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목적과 수단을 혼동해서는 안됩니다. 수단 따위, 필요하다면 버릴 줄도 알아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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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수명을 늘린 다음에 행복을 찾는다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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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에게 도취된 호혜문은 점차 신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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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이나 시간, 감정은 무한하지 않습니다! 우리 몸은 늙지 않아도 마음은 늙기 때문에! 류 수사, 마음 가는 대로 하십시오, 행복을 위해서! 그리고 기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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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혜문은 열이 올라서 붉어진 뺨으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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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이에게 사랑받고, 모든 이를 사랑하는 건 불가능한 일입니다! 오직 신만이 가능한 위업이죠! 하지만 적어도! 저는 서란, 당신을 사랑합니다! 물론 친구로서! 힘들다면 수선을 포기해도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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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혜문의 일장 연설이 마침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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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밤의 고성방가로 시끄럽던 누각이 조용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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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영영이 코고는 소리만 간간이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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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움이 밀려온 호혜문이 떠듬떠듬 변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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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두서가 없었죠? 말하고 보니 꽤나 민망하군요. 새벽이라서 그런 것 같으니까, 이해해 주세요. 음, 저는 이만 가보죠. 대화 즐거웠습니다, 류 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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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혜문은 호다닥 계단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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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문, 오늘 정말 선생님 같았어요.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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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을 들은 호혜문이 더 빨리 도망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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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타버린 잿더미 속에서 잔불이 고개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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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책이나 조금 읽다가 잘 생각으로 책보따리를 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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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학습 인형 연구서를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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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잡서와 같이 딸려온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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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연구서를 펼쳐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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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동안 쏟은 노력이 무의미하진 않았는지, 어느새 절반 정도는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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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속에서 저자 엽관보의 생각이 엿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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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도 인형애호가 엽관보의 일화를 전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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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내 심마를 극복하지 못한 일영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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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연구서에 담긴 감정은 소문과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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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륙 최고 인형술사 엽관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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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부심과 충만함, 만족감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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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도망친 게 아니라 길을 찾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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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책을 덮고 고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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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엇을 위하여 수선을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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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히 사랑받거나 귀한 사람이 되고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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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굳이 수선할 필요도 없이 결혼을 하거나 속세에서 왕 노릇을 해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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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다지 마음에 내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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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으로 원하는 것에 대해서 생각하다가 해가 뜨고 아침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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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호혜문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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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한 사랑이란 오로지 신의 권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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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무한히 사랑받고, 무한히 사랑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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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히 마르지 않을 바다와도 같은 갈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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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신에게만 허락된 경지라고 해도 상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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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선이란 곧 초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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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한계란 수도자에게는 무의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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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신이 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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꺼진 열정이 되살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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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처럼 맹렬하진 않지만, 고요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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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을 밝히는 등불 속 불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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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금영영의 허벅지를 찰싹 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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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어,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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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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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영, 아침 먹으러 가자. 배고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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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영영은 경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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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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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계단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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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걷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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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각에는 자다 깬 금영영만 남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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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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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도 관광 이후, 서란은 심마를 극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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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아직은 요양과 안정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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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단약 섭취와 짧은 수행만 하며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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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금이 자신만만하게 탕약을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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쭉 마신 서란이 굉장히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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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난 이아금이 소감을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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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때, 언니? 간신히 개발한 달콤한 탕약이야. 진짜 맛있지? 그거 만드느라 엄청 고생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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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투덜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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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이상한데... 그리고 누가 약을 맛으로 먹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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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이아금도 참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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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금이 대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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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운 광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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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럴 만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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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징거리면서 탕약 좀 달게 만들 수 없냐고 먼저 귀찮게 굴었던 건 분명히 서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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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금은 그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진지하게 듣고 달콤한 탕약을 개발해 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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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껏 가져다 줬더니 ‘좀 이상한데, 그리고 약을 누가 맛으로 먹음?’ 같은 개소리를 씨불이면 보살도 분노를 참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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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금이 그 자리에서 약그릇으로 서란의 정수리를 내리쳤다고 해도 무죄가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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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아금은 교양있는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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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앞에 있는 두개골을 강타하고 싶은 충동을 참고 도리어 보란듯이 환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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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약그릇 정도로 때려봤자 아프지도 않을 거라는 사실도 한몫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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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화가 안 난 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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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다시 온 이아금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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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 수사님, 약 드실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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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약그릇을 받더니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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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금아, 갑자기 왜 존댓말을 하고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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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드실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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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음기라도 쓴 것처럼 똑같은 응답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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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답은 하고 있지만, 대화를 하는 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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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심마를 겪는 동안 자기가 남들에게 했던 소통 거부를 형태만 바꿔서 고스란히 돌려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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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준 높은 거울 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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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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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금이 재차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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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드실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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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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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일단 탕약부터 꼴깍꼴깍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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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다 마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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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은 남기지 말고 전부 드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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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눈치를 보면서 약그릇을 들여다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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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사기 그릇에 남은 건 탕약의 흔적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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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지 말라니, 영문 모를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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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곰곰이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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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약, 분명히 다 마셨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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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기분이 나빠서 평소보다 예민한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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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이 몸이 풀어줄 수밖에 없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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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전생에 배운 필살 애교를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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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잉, 아금이 화났엉? 나 보고 기분 풀어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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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금이 바퀴벌레를 본 표정으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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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 약이나 마저 드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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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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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황급히 약그릇에 고개를 처박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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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릇에 묻은 탕약을 핥아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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낼름낼름 혀 설거지를 마치고 그릇을 돌려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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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끗해진 그릇 안을 살핀 이아금이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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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에게 경멸당한 서란이 부장님을 원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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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장님, 애교 한 방이면 만사해결이라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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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사로 연애랑 결혼까지 다 하셨다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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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금이한테는 하나도 안 통하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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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가물가물해진 부장님의 얼굴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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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처럼 듬직한 장사 체형, 둥글둥글한 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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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여운 부장님이 빵끗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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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왜 효과가 없었는지 의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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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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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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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금이 화난 원인은 자신에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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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에게는 화내지 않는 게 그 증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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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렬한 자기비판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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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고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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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내 잘못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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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어떤 말과 행동이 아금이를 상처 입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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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사과하면 용서받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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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하게도 소용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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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생각해봐도 뭐가 원인인지 의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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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하늘을 우러러 아무런 부끄러움이 없을 정도로 대단한 인격자였기에 그런 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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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로 짚이는 게 너무 많아서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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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럼투성이 생애를 살아온 짐승 합격자, 류서란의 허물은 무궁무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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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서란이 심마에 빠졌을 때, 이아금이 약 한번 먹여보겠다고 얼마나 어르고 달랬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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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금은 당시에 국가 편찬 효녀 모음집 우수 사례로 선정될 만한 정성과 애정을 쏟아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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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속세였으면 벌써 마을 입구에 효녀비 두어 개 정도는 세워지고도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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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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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엌 담당 하녀가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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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 수사님, 여기에는 웬일이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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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고구마가 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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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녀가 곰곰이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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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썰어서 말린 것도 괜찮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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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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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을 나선 서란이 바람처럼 식당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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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식당에는 고구마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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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큼직한 걸로 몇 개 챙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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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돌아온 서란은 아궁이부터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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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작을 집어넣고 분광술을 사용하자 불이 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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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출력 분광술은 약간만 응용하면 돋보기로 개미를 태울 때처럼 사용할 수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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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불을 보면서 멍을 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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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작은 숯이 되고, 숯마저 절반쯤 재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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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와 잔불 속으로 서란이 고구마를 투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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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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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도면 다 됐나 싶을 때 소매를 걷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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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아궁이에 맨손을 쑥 집어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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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암에 들어가서 목욕도 할 수 있는데 아궁이 안에 있는 잔불 따위가 무서울 리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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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는 군고구마가 완성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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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많이 탄 것 같지만, 사소한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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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정성스럽게 표면에 묻은 재를 털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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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구니에 잘 담아서 약당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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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구 근처에 잘 숨어서 퇴근 시간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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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앵그리 이아금도 약당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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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쏜살같이 이아금에게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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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금아, 내가 잘못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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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군고구마가 든 바구니를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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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금은 원래 ‘뭘 잘못했는데?’로 시작되는 잔혹한 연속 살초를 시전하려고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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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바구니에 든 서란의 정성을 보고는 날뛰는 살기를 가라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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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이아금이 지금보다 더 어렸을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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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수도자가 된 이아금은 종종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생기면 서란 앞에서 토라진 티를 내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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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한마디 없이 벽보고 돌아 앉은 이아금을 달래주는 건 역시나 서란의 몫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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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방법이 동원됐지만, 가장 효과가 좋았던 건 군고구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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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금은 어릴 적부터 군고구마를 좋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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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한 살이 된 이아금이 서란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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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속에 있는 얼굴과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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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도 저렇게 안절부절 어쩔 줄 몰라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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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숨을 쉰 이아금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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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집에 가서 먹자, 배고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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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을 들은 서란이 밝은 얼굴로 앞장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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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은 군고구마를 먹으며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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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지 않으면 모르는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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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금은 화가 풀렸고, 서란도 두 번 다시는 약 먹으면서 맛 타령을 하지 않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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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됐군, 잘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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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나라 땅속 깊숙한 곳, 지저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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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부적인 광부, 미궁언서들은 오늘도 영토 확장에 힘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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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두더지 요수들에게 인간들이 멋대로 정한 지상의 국경선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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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땅 밑은 모조리 미궁언서들의 세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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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십일 번 채굴단의 하루는 오늘도 바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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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술로 신체 능력을 강화한 미궁언서들이 맹렬한 속도로 땅을 파고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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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맥이라도 하나 찾으면 그게 다 식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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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굴단원은 무아지경에 빠진 채 전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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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게 삶이란 굴착이었고, 굴착이 곧 삶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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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세상에서 가장 깊은 곳, 전설로만 전해지는 명계까지 이어진 땅굴을 파는 게 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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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굴단원이 흥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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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야 굴착 전문가, 점심은 명계에서 먹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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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코가 뭔가에 부딪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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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굴단원은 크고 길쭉한 코를 쓰다듬으며 감히 자신을 가로막은 방해물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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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광물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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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모반듯한 벽돌을 차곡차곡 쌓아 만든 구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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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굴단원이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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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혹시 건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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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굴단원이 위치한 곳은 지하 세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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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하지만 땅 밑에 건물을 지을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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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 구조물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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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굴단원은 생각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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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떠올리는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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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궁언서의 오래된 전설과 관련된 내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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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하겠지만, 땅 밑에 건물을 지을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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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 구조물은 어떤 사실을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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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 당시에 이곳은 지하가 아니라 지표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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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궁언서 종족의 오래된 전설에는 빈번하게 등장하는 몇 가지 시작 문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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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가 지금처럼 깊지 않았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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겁 없이 땅을 파면 명계에 떨어지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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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혼란과 무질서로 가득했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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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되돌릴 수 없는, 지나간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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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굴단원이 크게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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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시대! 지나간 시대의 유적이 여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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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를 듣고 몰려든 채굴단도 경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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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시대는 허구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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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믿지 않던 전설은 실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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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저 세계 전체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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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은 지저 세계뿐 아니라 지상까지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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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궁언서와 제휴를 맺은 오죽문, 오죽문과 일심동체가 된 금작파, 기타 수많은 동맹 수도문파들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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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지하에 잠들어 있던 유적이 세상에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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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유적, 실로 가슴 뛰는 울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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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놀라운 소식은 취미 생활이나 즐겨볼 요량으로 커다란 원예 가위 들고 정원수를 난도질하던 서란의 귀에도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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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서란은 고고학 관련 영화를 수십 번 이상 돌려본 탐험 영화 마니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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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즉시 모험을 준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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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이나 곡괭이는 거추장스러울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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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 장비? 서란은 지저 세계가 통째로 붕괴한다고 할지라도 멀쩡히 걸어나올 재주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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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챙긴 건 오로지 모자와 채찍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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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모험이 나를 부르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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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에 장보도가 나타나면 피바람이 부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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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단한 역경과 눈부신 명예가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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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기와 지혜, 행운을 겸비한 영웅만이 지하에 잠든 보물을 차지할 자격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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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곧장 문파 대결계를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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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지는 당연히 지저 세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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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고대 유적은 구경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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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유적 인근을 지키던 두더지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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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 현장은 지상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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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표면에서부터 파고 들어갈 예정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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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할 수 없이 목적지를 바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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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나라와 건나라 국경 지대가 발굴 현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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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은 이미 수도자들로 바글바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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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돌아왔지만 어쨌든 모험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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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힘차게 첫발을 내딛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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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곧장 쫓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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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학자 수사가 불꽃처럼 분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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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거길 그냥 밟고 들어오면 어떻게 합니까! 저기 있는 경고문이 안 보여! 발굴 현장에 함부로 들어오지 말라고! 당장 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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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먹고 시무룩해진 서란은 멀리 떨어진 곳에서 발굴 현장을 슬픈 눈으로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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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고고학자들이 두꺼운 밧줄을 이리저리 치면서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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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는 쪼그려 앉아서 땅을 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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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목 공사하는 것처럼 법술로 팍팍 파는 게 아니라 작은 붓으로 흙을 살살 긁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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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무릎에 고개를 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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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 조각상과 비탈을 굴러오는 바위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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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의 보물, 샘솟는 탐욕, 배신과 음모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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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채찍을 휘두르는 고고학자마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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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고고학에 모험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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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건 서란이 꿈꾸던 모습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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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출입 금지 처분에도 포기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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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 현장 주위를 얼쩡거린 지 한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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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마침내 발굴 현장 임시 보조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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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만 그렇고 사실상 집중 감시 대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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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학자들 입장에서도 별도리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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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울한 얼굴과 깊은 한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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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온몸으로 자기 의사를 표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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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고대 유적이 구경하고 싶어요,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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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학자들은 매일매일 두려움에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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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도 어엿한 서대륙 수도자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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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회 공사 도중, 서란이 보여준 지표면 뒤집기는 한번 보면 절대로 잊을 수 없는 기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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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산요지선공이라는 가공할 공법을 대성한 천재, 서란은 마음만 먹으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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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류서란이 품고 있는 호기심과 인내심 중 더 거대한 감정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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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서란이 더 이상 참지 못하게 되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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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고대 유적을 구경하겠다고 지표면과 고대 유적을 함께 들어올리기라도 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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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면 남들 몰래 땅파고 내려가서 누구보다 먼저 유적지 내부로 진입하기라도 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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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지를 발굴할 때는 지켜야할 절차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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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지표면을 조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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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을 덮고 있는 토양 자체도 탐구 대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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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대충 파묻은 쓰레기도 역사의 흔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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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은 일부 구역만 우선적으로 발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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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얻은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이 고대 유적을 어떻게 발굴할 것인지 결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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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과정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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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서란이 지표면을 뒤집어 버린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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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토양과 유물들이 엉망진창 뒤섞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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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층의 순서와 두께, 다양한 토양의 성분, 유물의 분포 등 모든 고고학적 자료가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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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한 연원을 지닌 다른 유적을 못 찾으면 그 시대와 관련된 모든 연구가 불가능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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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의 부주의한 행동 하나 때문에 인류 역사에 영원한 공백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고고학자들을 괴롭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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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발굴 대장이 어려운 결단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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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서란에게 임시로 출입 자격을 부여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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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에 두고 직접 감시하겠다는 판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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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 대장은 서란에게 발굴 현장에서 지켜야하는 주의 사항과 행동 규칙을 속성으로 주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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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대상에 해당하는 범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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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 발굴 보조, 류서란이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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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이 조금이라도 묻어 있으면 해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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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과 접촉하기 전 필수 과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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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의 대답은 거침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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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속 담당자에게 보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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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속 담당자가 부재중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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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역 담당자에게 보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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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구역 담당자마저 부재중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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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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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담당자의 허락을 받았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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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만지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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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 현장은 눈으로만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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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로 잊어버리면 안된다고 강조, 또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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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자신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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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한 달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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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현장 규칙을 철저하게 준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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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학자들도 어느정도 안심한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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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사고란 원래 이런 순간에 찾아오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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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 발굴 도중, 어떤 고고학자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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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 수사, 그림자 때문에 어두워서 그러는데 대여섯 걸음만 물러나 주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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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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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곧이곧대로 여섯 걸음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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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불운은 고고학자의 부주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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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같았으면 꼼짝도 하지 말라고 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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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시키는대로 뒷걸음질치다가 뭘 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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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불운은 고대 구조물의 높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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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표만 살짝 깎았는데 벌써 상층부가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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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밟은 건 옥상에 있던 환기구 덮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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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불운은 서란의 작은 체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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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기구는 도둑이 신세 지는 비밀 통로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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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아니었다면 빠지고 싶어도 불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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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 불운은 고위계 수사 특유의 방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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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과 부상, 그리고 경계심은 불가분한 관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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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덤덤한 얼굴로 환기구를 따라 추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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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번째 불운은 환기구의 구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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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철도, 분기도 없이 이어진 일자형 통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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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어디 하나 걸리지 않고 쭉 미끄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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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번째 불운은 뇌리에 새겨진 규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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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연화도 안 가지고 있는 처지에 추락을 멈추고 싶으면 사지를 뻗어서 통로에 박아넣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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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유적지 파손 금지 규칙을 준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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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유적의 환기구는 정말 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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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끄러운 환기구 표면, 완만하게 휘어진 곡선 궤도, 서란의 공기역학적 신체가 상승효과를 발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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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봅슬레이는 한계를 모르고 가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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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표면에서부터 시작된 미끄럼틀은 유적 최하층까지 직통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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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알 같은 속도로 하강하던 여정도 금방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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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기구가 서란을 아래로 뱉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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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지 예상 지점에는 고대 전송진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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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일곱 번째 불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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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송진이 번쩍 빛나고 서란의 모습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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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가지 불운 중 하나라도 없었다면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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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세상 일이라는 게 원래 이딴 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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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식한 말로 스위스 치즈모델이라고 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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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해서, 서란은 미지의 세계로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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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 마지않던 모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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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장소에서 서란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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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곧장 밑으로 내리꽂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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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송 과정에서 운동 에너지가 사라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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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발밑에 있는 전송진으로 처박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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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표면에서부터 시작된 추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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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난 위치 에너지가 운동 에너지로 전환됐고, 서란은 제대로 된 낙법조차 사용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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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히어로 랜딩, 그리고 착지 지점이 파손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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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전송진이 작동을 중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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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도 전송진이 뭔지는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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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고 시대보다 이전에 사용했던 이동 수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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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학자들과 어울리면서 관련 지식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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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고 시대란 현시점에서 문헌으로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오래된 시대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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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 지금으로부터 4만 년 정도 이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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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 먼 과거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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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송진은 상고 시대에도 미지의 산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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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만 년 전에도 작동 원리를 해명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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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지금까지도 로스트 테크놀로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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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가진 전송진을 복구할 방법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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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박살난 전송진을 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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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일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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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만큼 보이는 대형 사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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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송진은 양쪽에 존재하는 두 개가 한 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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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쪽이 망가지면 다른 쪽도 쓸모가 없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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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동 원리 해명을 위해서는 온전한 전송진 한 쌍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게 학계의 정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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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방금 드롭킥 한 방으로 고대 문명의 찬란한 유산 하나를 돌무더기로 바꿔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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덤으로 실전된 기술을 복구할 가능성도 제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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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도 감탄할 반달리즘의 극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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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자리를 옮겨 자기가 만든 참상을 감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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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한 전송 문양이 그려진 석재 바닥 위로 서란의 앙증맞은 손자국, 발자국이 찍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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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허리가 식은땀으로 축축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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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하던 범인은 범죄 현장을 이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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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안술을 쓴 서란이 칠흑 같은 어둠을 누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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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길을 따라서 걷다가 출구를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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틈새로 들어오는 빛, 서란은 벽을 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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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벽이 회전하며 넓은 공간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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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통 돌로 만든 거대한 궁전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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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 사이사이로 거대한 나무들이 빼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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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도 고대 유적인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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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전송진을 밟았던 지하 유적과 달리, 이 장소는 하늘이 보이는 밀림 한복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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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음으로 가득한 대자연을 보니 한숨부터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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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지간히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오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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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가진 건 지금 입고 있는 옷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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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법기들은 거추장스러워서 숙소에 던져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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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디로 비행 법기도 없이 사람 사는 곳까지 걸어가야 한다는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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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근처 나무 위에서 주변을 둘러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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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전이 위치한 곳은 약간 경사가 있는 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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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왜 평지를 놔두고 이런 괴상한 장소에 궁전을 지었는지 의문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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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고민하던 서란은 길을 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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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가 높아지는 방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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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이 올라가서 주위를 살필 작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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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흔적을 남기면서 걷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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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고고학자들과 유적을 방문할 때 이 흔적으로 보고 찾아올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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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조한 암석 표지판이 우후죽순 솟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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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숭이 울음소리가 시끄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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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같은 방향으로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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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이 거대한 수림에 질려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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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곳에서 어디를 봐도 온통 나무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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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녹색 바다에 던져진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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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는 원숭이 요괴들이 달려든 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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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개량형 암석 폭탄을 몇 방 먹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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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원숭이 가족의 절반은 비료가 되고, 나머지 절반은 혼비백산해서 도망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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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수로 전송진을 밟고 열흘이 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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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료로 만든 원숭이가 세 자릿수를 돌파한 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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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마침내 사람의 흔적을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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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조금 오래된 흔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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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반신 없는 망자가 서란을 반겨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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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이상한 느낌을 받은 서란이 영안술로 백골을 유심히 살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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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한 가지 사실을 알아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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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자는 생전에 결단기 수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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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단기 수사는 죽이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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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주요 특징부터가 초월적인 생명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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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인계를 통틀어서 결단기 수사를 죽일 수 있는 생물은 굉장히 드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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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꼽아 보자면 용이나 고위계 수사, 대요괴 정도가 유력한 용의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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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명탐정 서란이 생각하기에, 이 수도자를 죽인 건 대요괴가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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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이나 고위계 수사가 본인이 죽인 시체의 아랫도리를 어디에 쓰려고 가져가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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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배고플 때 간식으로 먹으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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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요괴가 금단과 함께 꿀꺽한 게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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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대요괴에 대해서 빠삭하게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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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고 시대부터 세상에 등장한 모든 대요괴의 종류와 위험성, 그 대처법에 대해서 숙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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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서 한 건 아니고, 오죽문 수뇌부가 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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털레털레 돌아다니다가 ‘모르면 죽어야지.’를 당하지 말라는 깊은 뜻이 담겨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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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머릿속 대요괴 데이터베이스를 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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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바다에 사는 놈, 제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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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열 사막에 사는 놈, 제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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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 지대에 사는 놈, 제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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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림에 사는 놈, 결단기 수사를 두 동강 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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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어진 정보에 딱 들어맞는 기록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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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 사슴벌레처럼 생긴 대요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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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은 기억이 안 나는데, 아무튼 가위처럼 생긴 턱으로 절단하지 못하는 게 없을 정도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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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 속도가 굉장히 빠르고, 영역 본능이 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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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있다가 걸리면 험한 꼴을 당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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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사슴벌레 대요괴의 턱에 자기 허리가 뎅강 잘리는 상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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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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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기겁하며 달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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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멈춰서 백골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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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신력을 사용하자 대지가 저절로 갈라지며 백골이 매장되고, 작은 묘비가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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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지를 완성한 서란은 즉시 도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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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에 처한 결단기 수사의 질주는 과연 빨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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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총알처럼 나무 사이를 누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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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어떤 시선이 서란을 주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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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품없는 외모와 길고 깡마른 팔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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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곳은 비쩍 마른 주제에, 오직 복부만 터질 듯 부풀어 오른 불균형적인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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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욕만이 들끓는 퀭한 눈과 오금이 저릴 정도로 날카로운 이빨이 나무 그림자 속에서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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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계에 갇혀서 전생의 죗값을 치르는 귀신, 시선의 주인은 바로 아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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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귀는 점찍은 사냥감을 추격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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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을 가로막는 거목을 모조리 분쇄하는 질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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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림은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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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달리던 서란도 가까워지는 소음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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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뭔가 싶어서 힐끔 뒤를 돌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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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요괴가 거품을 문 채 쫓아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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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에 걸려서 털이 전부 빠진 원숭이처럼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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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귀가 뭔지 모르는 서란이 잠시 고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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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건 또 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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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봤던 원숭이 요괴 친척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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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에 걸려서 털이 빠지고 복수가 찬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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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신경을 끄고 계속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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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냥감에게 달려들던 아귀도 이상함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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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쫓아가도 거리가 좁혀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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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계에서는 물론, 인계로 올라와서도 이렇게 당황스러운 경우는 겪어본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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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아귀를 만난 사냥감은 모두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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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식간에 거리를 좁혀오는 포식자를 떨쳐 내지 못하고, 끝내 아귀의 위장으로 들어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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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귀란 네 발로 뛰는 죽음의 상징, 일단 마주치면 결코 도망칠 수 없는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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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명백하게 비상식적인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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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생명을 삼켰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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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수림 심층부에서 자그마치 수백 년을 살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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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동안 먹어 치운 희생자는 셀 수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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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본 결단기 수사도 아귀가 잡아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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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계에 침식된 대수림 심층부에서는 원영기 수사조차 비행을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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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거할 수 없는 명계의 인력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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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지 못하는 아귀에게 이곳은 최고의 사냥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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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귀 입장에서는 난생처음 경험한 무력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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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히 계속되는 고통스러운 허기와 잡히지 않는 사냥감에 대한 분노로 아귀는 실성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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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귀가 거대한 증오를 토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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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에에에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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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수림을 뒤흔드는 가공할 포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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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귀의 손발톱이 길어지고, 안광마저 붉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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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에서나 볼 법한 질척거리는 사기가 아귀의 주둥이에서 줄줄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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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 사이의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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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순간 서란이 뒤로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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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기를 멈춘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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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주도 좋게 뒤로 달리면서 검지손가락을 들어올려 아귀를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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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의 금단이 맹렬하게 소용돌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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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불쌍해서 봐줄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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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저렇게 고래고래 소리지르면 곤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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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요괴가 듣고 찾아오면 어떻게 책임질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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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공에 법력이 모여들더니 구슬 형태로 뭉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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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담청이 보여준 묘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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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순간에 황색 구체 수십 개가 발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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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귀는 날아오는 공격을 보며 상대를 비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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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맞설 생각을 하다니, 정말로 어리석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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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치는데만 집중했다면 살아남을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었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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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금단은 내가 맛있게 먹어 치워 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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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귀는 공격을 몸으로 받아내고 뒤로 달리느라 속도가 느려진 사냥감을 물어뜯을 작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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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의 강인함을 신뢰하는 대담한 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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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원래 세상 일은 내 마음대로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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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귀는 지금까지 세상에 존재했던 서란의 적대자들과 정말 유사한 최후를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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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 지형, 혹은 아귀의 신체와 충돌한 법력 구슬이 성대하게 폭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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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저히 믿기지 않는 위력 속에서, 아귀는 영문도 모르고 증발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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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수림 심층부의 사흉, 그중 하나가 방금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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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죽인 당사자는 알 길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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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즉시 뒤로 돌아서 전력 질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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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라도 대요괴와 마주칠까 봐 조마조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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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날 뒤, 서란은 드디어 문명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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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신히 찾은 사람의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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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닉술을 사용한 서란이 도시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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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숭이 요괴가 득실거리는 대수림 근처에 위치한 도시치고는 상당히 번화한 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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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곧장 으슥한 골목길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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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은폐 결계를 두른 채 단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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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꼬박 하루를 자고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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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근처 냇가로 가서 목욕부터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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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 빼고 광낸 서란은 도시 관청에 잠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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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먼저 군사용 지도를 살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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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에는 대륙 전체가 개략적으로 그려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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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쪽은 안전한 바다, 그 외에는 위험한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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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 중앙에는 광활한 대수림이 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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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전송된 곳은 서대륙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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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있는 곳은 묘나라, 동대륙 중서부에 위치한 범인들의 국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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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쩐지 말과 글이 약간 이질적이구나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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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관청 밖으로 터덜터덜 걸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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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건너 서대륙까지 돌아가려면 굉장히 험난한 여정을 감내할 필요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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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바다를 건널 수는 없으니, 오로지 안전한 항로를 따라서 움직여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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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중에 세상의 중심까지 거쳐가는 대장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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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가에 쪼그려 앉은 서란이 머리를 감싸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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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 으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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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개고생할 미래를 상상하며 신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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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맛있는 냄새가 서란의 코를 자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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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고개를 들어서 냄새의 근원지를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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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양념을 발라서 구운 닭꼬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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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입맛을 다시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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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애처럼 군것질거리에 정신이 팔린 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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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륙 식문화에 대한 학술적 탐구심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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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홀린 듯이 닭꼬치를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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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꼬치 단 양념으로 세 개 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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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노릇하면서 슬슬 하대가 자연스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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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알겠습니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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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게 주인은 즉시 닭꼬치를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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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돈부터 받고 넘겨주는 게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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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서란은 딱 봐도 부잣집 딸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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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에 꽂은 비녀만 팔아도 밭 한 뙈기는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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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닭꼬치를 맛있게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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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은 서대륙이나 동대륙이나 거기서 거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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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한 달만에 먹는 간식이라서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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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를 마친 서란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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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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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게 주인의 대답을 듣고는 소매를 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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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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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의 전낭은 바다 건너 서대륙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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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처럼 굳은 서란이 비 오듯 땀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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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봐도 돈 없는 사람의 표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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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록있는 가게 주인 역시 상황을 파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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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부자는 전낭을 직접 들고 다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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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게 주인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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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려 드릴 테니, 하인을 부르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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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하지만 서란의 하인 역시 서대륙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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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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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우물쭈물하자 가게 주인이 다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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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면 가문 이름만 알려주시지요. 값은 제가 차후에 방문해서 받아 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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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하던 서란이 비녀를 뽑아서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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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꼬치 세 개 먹은 값으로는 과한 재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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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게 주인은 당연히 기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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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됩니다요, 받을 수 없습니다! 나중에 아기씨 집안에서 아시기라도 하면 정말 큰일이 납니다요! 사족에게 사기를 쳤다고 맞아 죽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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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족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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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태생부터 소작농의 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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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가게 주인은 절대로 믿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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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래 군것질을 해놓고 집안 어른들에게 들키기 싫어서 거짓말하는 것이라고 확신한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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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말을 누가 믿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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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은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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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녀를 건네는 여아, 결코 받지 않는 중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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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기 드문 구경거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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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어떤 사내가 가게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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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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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게 주인이 곧장 사정을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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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군, 잘 알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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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내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대신 값을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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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는 여자애를 데리고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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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게 주인은 방금 그 사내가 부잣집 아기씨의 하인 쯤 될 것이라고 혼자서 납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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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에서 멀리 떨어진 뒤, 사내가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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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님, 난처하신 상황 같아 실례를 무릅쓰고 나섰습니다. 부디 너그럽게 용서해주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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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안술을 사용해서 상대가 수도자라는 사실을 확인한 서란이 감사 인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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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닙니다, 감사할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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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내가 황급히 손사래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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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을 낮춰주시지요. 제 나이라고 해 봐야 고작 백 살 정도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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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사내가 오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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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스물네 살이라고 사실대로 털어 놓기에는 난감한 문제가 너무나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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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단기 수사의 나이가 고작 스물넷인 건 절대로 일반적인 일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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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득시키든 못 시키든 서란은 곤란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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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냥 흐름에 올라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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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네가 편하다면 그리 하도록 하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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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결 안도한 사내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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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 앞에서 공손히 행동하는 것이 사람의 도리 아니겠습니까. 부디 마음 쓰지 마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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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괜히 찔려서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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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 내 나이가 올해로 이백사십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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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배로 뻥튀기한 사기 나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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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기기 수도자, 단원표와의 첫 만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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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동대륙에서 원숭이 요괴들과 투닥거리고 있을 때, 서대륙은 발칵 뒤집힌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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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환기구에 빠지자 수뇌부는 즉각적으로 ‘류서란 구하기’ 대작전을 실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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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까지만 해도 걱정하는 사람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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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단기 수사는 고작 높은 곳에서 실족한 정도로 다치지 않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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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긴 해프닝 정도로 넘어갈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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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수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수도자가 자기 애완 나비를 환기구로 들여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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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광 나비는 주인의 명령에 따라서 환기구가 끝나는 지점까지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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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 자리에 서란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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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와 시야를 공유하고 있던 수도자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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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 수사가 밑에 없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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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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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 작업 총책임자가 뒷목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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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 상황에 처한 요구조자가 할 일은 안전한 곳에서 얌전히 구조대를 기다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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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건 현명한 판단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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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라도 서로 엇갈리면 굉장히 피곤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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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급적이면 제자리에서 가만히 기다릴 것, 참고로 미아 행동 원칙도 얼추 비슷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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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주변부터 둘러보죠. 어디 갔는지 찾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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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책임자의 요구 사항이 수도자를 거쳐서 지하에 있던 발광 나비에게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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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 영수가 뿜어내는 빛이 더욱 찬란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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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석실 안이 삽시간에 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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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유된 시야로 석실을 살핀 나비 주인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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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내부가 완벽하게 밀실인데요? 석실의 유일한 출입구는 오래전에 무너진 것처럼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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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환기구는 분명 외길 아니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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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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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특별히 눈에 띄는 요소는 없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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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집중한 채 침묵하던 수도자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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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에 이상한 문양이 새겨져 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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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여기에 그려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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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자는 나름대로 열심히 그림을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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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책임자도, 구조 대원들도 처음 보는 문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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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옆에서 구경하던 고고학자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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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 고대 전송진 문양 같은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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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책임자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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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구조자가 유적 구경하겠다면서 싸돌아다니는 미아 행동을 한 게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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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서란은 환기구를 타고 추락한 뒤, 불행히도 바로 밑에 있던 전송진을 밟고 실종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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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어 넘길 사소한 사건은 진짜 재난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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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뇌부가 즉시 소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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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최대한 평정을 유지한 채 논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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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송진을 통해 구조대를 보낼 수는 없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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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쉽게도 반대편에서 망가졌다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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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 전체를 대대적으로 수색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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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다가 적대 문파들이 눈치채면 도리어 류 수사를 위험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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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규모는 좀 작더라도 은밀하게 찾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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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 있던 수도자들을 잘 단속해서 비밀이 누설되지 않도록 해야 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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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외적으로는 심마가 다시 도져서 칩거했다고 둘러댈까요? 당장 작년 겨울부터 외출을 거의 안 했던 것 같은데, 충분히 그럴싸하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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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로 좋은 생각이십니다. 혹시라도 의심받지 않도록 아주 가까운 친지들에게만 이 사실을 알리고, 협조를 부탁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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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다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류 수사는 이미 결단기 수사입니다. 충분히 위험을 벗어나고 우리 곁으로 돌아올 역량이 있다는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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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응책이 마련된 뒤, 모두가 평소처럼 행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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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적으로 류서란은 방안에 틀어박혔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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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위계 수사 이외에도 비밀을 아는 이들은 류서란과 친분이 있던 호혜문, 담청, 금영영, 이아금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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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약당 연단술사들마저 진실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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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다 끝난 줄 알았더니 또 시작이네.’하는 마음으로 류서란이 먹을 단약을 조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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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먹이기 담당 이아금은 오늘 치 단약을 가지고 서란의 방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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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대 위에 이불을 둘둘 두른 형체가 누워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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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장용으로 가져다 놓은 죽부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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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는 사람이 보면 진짜 류서란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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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금이 죽부인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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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도대체 어디 간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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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류서란(죽부인)이 거부한 단약은 이번에도 이아금이 남김없이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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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쇼걸, 서란의 탈출 마술은 대성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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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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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모르게 사라진 세기의 마술사, 류서란은 그 무렵 식당에서 국수를 먹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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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고명이 잔뜩 올려진 곱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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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값은 당연히 단원표가 지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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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은편에서 경청하던 단원표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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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그런 사정이 있으셨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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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떠든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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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은 류서란, 나이는 이백사십 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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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가 태생, 수선을 시작한 건 열 살 무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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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은 마침 인근을 지나가던 수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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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에는 스승님을 따라서 대수림에 은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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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님이 돌아가신 뒤에는 지금까지 폐관 수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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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외모는 어릴 적 탕약을 잘못 먹은 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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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전낭은 요괴 퇴치 도중에 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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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 정리하면 이런 설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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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과 거짓을 적절하게 버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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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원표는 서란의 거짓부렁을 의심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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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의심해 봤자 검증할 방법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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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원표가 감탄한 표정으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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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백 년이 넘도록 폐관 수련을 하시다니, 참으로 대단하십니다. 남들은 십 년도 힘들어서 못 견딜 텐데... 하긴, 그 정도로 비범한 의지력을 지니셨기에 산수의 신분으로도 결단기 수사가 되셨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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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수란 수도문파에 속하지 않은, 야생 상태의 수도자를 일컫는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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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을 지원해 줄 세력이 없어서 경지 상승이 굉장히 느린 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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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알기로는 일영근자라고 해도 축기기까지 수십 년이 넘게 걸리는 험난한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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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로록 면을 먹던 서란이 부연 설명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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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나는 운이 좋았지. 스승님께서 이런저런 단약을 많이 가지고 계셨거든. 응, 정말로 운이 좋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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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셨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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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말해서 서란은 약간 초조한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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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륙 오죽문 소속이라고 사실대로 털어놓을 수 없는 탓에 부득이하게 산수 신분이라고 둘러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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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뒤늦게 생각해보니 산수 주제에 경지가 결단기라는 것도 말이 안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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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황급히 대화 주제를 바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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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렇다 치고, 자네도 참 대단하군. 산수가 축기에 성공하는 건 하늘의 별 따기일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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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근 보유자, 단원표는 축기기 수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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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기로는 축기에 성공한 나이가 마흔일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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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아는 이영근자의 평균적인 축기기 도달 연령은 문파의 지원을 받았을 경우, 서른 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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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파의 후원도 없는 산수 치곤 놀라운 성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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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찬을 들은 단원표가 멋쩍게 겸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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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휴, 아닙니다. 축기가 하늘의 별 따기라니, 과장도 심하십니다. 마흔일곱이면 그렇게 빠른 것도 아닌 걸요. 다른 이영근자들은 이르게는 서른 후반 정도에 축기를 성공하는 경우도 빈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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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의 수선에 대한 상식이 전면 부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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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이영근이라지만 산수가 서른 후반에 축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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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변한 수도문파도 없는 주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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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지,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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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장히 의아했지만, 겉으로 티를 내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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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륙과는 너무나 다른 동대륙의 수도자 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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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차이를 만들어낸 결정적인 원인이 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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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홀로 수선처럼 원시적인 수행 방법으로도 서대륙 산수들보다 빠르게 경지를 올린 비결이 궁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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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 간 산업 스파이, 류서란은 기회를 엿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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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회는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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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던 단원표가 깜빡했다는 듯이 질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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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참, 류 선배님께서도 다시 대수림으로 가십니까? 오랜 폐관 수련을 마치고 세상에 나오셨으니, 이 기회에 다른 산수들과도 교류를 좀 나누셔야지요. 생각이 있으시다면 저와 함께 가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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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의아하다는 듯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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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대수림으로 가자고? 원숭이 요괴라도 잡을 생각이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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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을 들은 단원표가 손사래를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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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뇨 아뇨, 제가 여쭌 건 심층부가 아닙니다. 표층부에 있는 태본곡 얘기입니다. 애시당초 제 수행으로 대수림 깊숙한 곳까지 들어갔다간 결코 살아서 나오지 못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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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대수림이 심층부, 표층부로 구분된다는 사실도 방금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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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본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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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중얼거리자 단원표가 알아서 알려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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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태본곡이요. 산수와 오행인면목의 중립 도시, 대수림의 요괴들을 가두는 최후의 보루. 혹시 한 번도 못 들어보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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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뻔뻔하게 아는 척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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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태본곡! 물론 들어 봤지, 당연히 들어 봤고말고. 대수림 표층부에는 태본곡이 있다, 기본 상식이지 않은가! 폐관 수련을 이백 년이나 했더니 잠시 깜빡했을 뿐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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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그러셨군요! 태본곡처럼 잘 알려진 수행 명소를 모르다니, 말이 안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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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아, 상식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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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죠, 제가 앞장 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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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은 하하호호 웃으며 대수림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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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요괴를 퇴치하다가 비행 법기가 망가졌다는 핑계를 대며 단원표의 법기를 얻어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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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정도 날아가자 울창한 대수림 한복판에 떡하니 자리잡은 거대한 골짜기가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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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목의 뿌리처럼 생긴 골짜기라고 해서 태본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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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행인면목이라는 영목 종족의 영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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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수도문파 같은 외부 세력은 한 발자국도 들어올 수 없는 절대 불가침 권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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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산수들은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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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부한 영기에도 불구하고 수도문파가 차지하지 못한, 젖과 꿀이 흐르는 기회의 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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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본곡의 존재가 동대륙 수선계에 알려지자, 산수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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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금에 와서는 오행인면목과 산수가 공존하는 독특한 생태계가 완성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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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본곡 한쪽 거리에 잔뜩 모여서 바글거리는 산수들을 보고 서란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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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사람들은 뭘 하고 있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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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가리킨 곳을 본 단원표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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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저기는 배움의 거리입니다. 경지 상승을 위해서 서로 정보도 공유하고, 필요하다면 영석을 지불해서 가르침을 청하기도 하죠. 대부분은 열심히 경지를 올려서 보다 좋은 조건으로 거대문파에 입문하길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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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신림동 고시촌을 떠올리며 대강 반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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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에 힘쓰는 건 바람직한 일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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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원표는 아쉽다는 듯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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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한때는 저 배움의 거리에서 수선에 열중했습니다. 하필 영석이 바닥나는 바람에 그만... 영석 좀 벌면 다시 공부를 할 생각이죠. 류 선배님께서는 특별히 관심있는 법술이 있으신지요? 영석만 지불하면 안 가르쳐주는 것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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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큰 기대 없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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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인형술에는 관심이 좀 있는데... 워낙에 비주류 법술이어야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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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주류 법술의 서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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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기대조차 하지 않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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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에게 인형술이란 한없이 고독한 법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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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단원표가 믿기지 않는 말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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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인형술은 주류 법술, 상식이지 않습니까? 저 거리에서 법술을 가르치는 강사의 절반 이상은 인형술사입니다. 영문을 모르겠군요. 혹시 이백 년 전에는 인형술이 비주류 법술이기라도 했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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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악한 서란이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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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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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럽게 당도한 인형술사의 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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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동대륙이 급격하게 좋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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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배움의 거리를 배회하다가 어떤 광고 문구를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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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선계 일반 상식(비정기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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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사 : 축기 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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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이란 곧 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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험난한 수선계도 이것만 알면 안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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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무료로 수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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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보용으로 진행되는 무료 강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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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내문에는 수행에 도움이 되는 정보나 주의점, 수선계의 역사에 관해서 알려준다고 적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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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문파 소속 수도자라면 자연스럽게 배우는 일반 상식이지만, 산수들은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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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석도 없고, 동대륙 사람도 아닌 서란에게는 정말로 안성맞춤인 강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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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인파에 섞여서 강의실로 입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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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부에 사람이 많아서 맨 뒷줄에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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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기다리자 축기기 수사 한 명이 강단에 올라서 인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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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수도자 여러분. 축기 과정 전문 강사, 축기 도사입니다. 오늘 강의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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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중한 인사가 끝나자 수강생들이 박수를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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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사는 수많은 수도자를 앞에 두고도 차분하게 준비해 온 강의를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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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경험이 많은 모양인지 관록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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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사는 커다란 흑판에 동대륙을 그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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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략적인 대륙 지형과 그 중심을 차지한 대수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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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수림 주변으로 옹기종기 모여있는 거대문파들과 변방으로 밀려난 약소문파들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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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사는 칠판을 두드리면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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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선의 역사를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대륙의 지형부터 숙지하셔야만 합니다. 가장 중요한 요소는 역시 대수림 최심부에 존재하는 대균열입니다. 대균열이 오늘날의 수도 문화를 만드는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죠. 다소 복잡할 수도 있지만, 제가 최대한 간략하게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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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과 수강생들은 강의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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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륙 중앙에 존재하는 대수림은 표층부와 심층부로 구분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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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층부란 배움의 거리가 있는 태본곡을 포함해서, 오행인면목이 지배하는 모든 권역을 의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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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수림 테두리를 두껍게 감싸고 있는 오행인면목의 영토에서 더 들어가면 드디어 심층부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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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층부와 심층부를 구분하는 가장 큰 요소는 그 장소가 명계에 의해서 침식되었는지 여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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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식이 진행된 곳은 절반쯤 명계로 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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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괴나 귀신, 마도수사 이외의 존재는 한 발짝만 들어가도 명계의 규율, 죽음에 얽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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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계가 영혼과 육체를 끌어당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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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위계 수사가 멋모르고 들어갔다간 영혼을 빼앗기고, 오행인면목처럼 거대한 종족은 자기 체적을 감당하지 못하고 육체가 붕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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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계의 인력에 저항하면서 심층부에 접근할 수 있는 건, 오로지 고위계 수사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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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마저 화신기가 아니면 비행이 불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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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인은 대수림 최심부에 있는 대균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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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균열의 존재는 어떤 화신기 수사의 목숨을 건 탐험 덕분에 세상에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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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균열 너머에는 놀랍게도 명계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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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계의 절대자, 화신기 수사조차 하마터면 대균열을 통해서 명계로 끌려갈 뻔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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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균열을 통해서 흘러나오는 명계의 인력은 영혼과 육체뿐만 아니라 영기마저도 잡아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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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결과, 대륙의 영기 분포는 극도로 편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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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수림이 위치한 대륙 중심부와 가까울수록 영기가 풍부하고, 변방으로 갈수록 급격하게 희박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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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극도로 편중된 영기 분포, 이러한 환경적 요인은 수도문파의 형성에도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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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기가 풍부한 중심부는 경쟁이 치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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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력이 강한 거대문파일수록 대수림에 가까운 영토를 차지했고, 약소문파들은 변방으로 밀려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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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자와 약자의 격차는 계속해서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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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극화된 수도문파의 규모는 곧 대량의 산수들이 발생하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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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기가 고갈되다시피 한 변방에서 약소문파 소속으로 사느니 차라리 산수가 되겠다는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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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오행인면목이 지배하는 대수림 표층부는 산수들이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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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방 약소문파들이 지속적인 인력 유출을 견디지 못하고 줄줄이 무너진 것도 당연한 수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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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층부에 몰려든 산수 집단과 오행인면목은 오랜 세월 동안 공생 관계를 형성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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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본곡처럼 몇몇 중립 도시에 모인 산수들은 오늘도 배움의 거리에 모여서 수선에 힘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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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나는 수행으로 자신을 증명하고, 좋은 조건으로 거대문파에 입문하는 게 그들의 주된 목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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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사는 수행에 도움이 될만 한 여타 정보와 몇몇 주의점까지 설명하고 깔끔하게 강의를 끝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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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장히 알찬 내용에 수강생들이 박수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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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도 열심히 동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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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에서 일어나는 수강생들에게 강사가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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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수업을 경청해주신 수도자 여러분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저는 축기 전문 강사, 축기 도사였습니다! 연기기 수사들을 대상으로 한 유료 강의도 정기적으로 진행하고 있으니,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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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료 강의에 대한 홍보 내용을 듣고 솔깃한 수도자가 꽤 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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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료 강의를 미끼로 수강생을 모으고, 자기 강연 실력을 선보인 뒤에 유료 강의 홍보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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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빈틈없는 홍보 전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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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터덜터덜 강의실을 나오면서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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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구나, 대균열 때문이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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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쩐지 서대륙에 비해서 산수의 숫자가 지나치게 많고, 수준도 상향 평준화 되어 있더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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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륙 산수 대부분이 대수림에 모여서 거대문파 입문을 위해서 서로 절차탁마한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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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차후 펼쳐질 동대륙 생활이 기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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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배움의 거리에 머무르면서 매일매일 공부에 힘쓰고 싶은 마음이 무럭무럭 자라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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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인형술 강의부터 잔뜩 수강할 계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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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러려면 영석이 잔뜩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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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길모퉁이에 서서 한참을 고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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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기간에 막대한 학비를 모을 방법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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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목 공사도 고려해봤지만, 거대문파를 제외한 약소문파가 모조리 말라죽은 상황에서 대규모 토목 공사에 대한 수요가 얼마나 많을지 의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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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옆을 지나가던 두 산수의 대화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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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나도 강사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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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주제에? 아서라, 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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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내가 뭐 어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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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사 업계도 얼마나 경쟁이 치열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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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는 며칠에 한 번씩 강의하고 수강료로 영석을 산더미처럼 벌어간다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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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도 다 특출난 뭔가가 있으니까 가능한 거지. 축기도 간신히 성공한 네 강의를 도대체 누가 듣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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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은 티격태격하며 떠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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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단어가 서란의 귀에 박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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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출난 무언가, 남들에게는 없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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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뜩이는 영감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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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사악하게 웃으며 입맛을 다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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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본곡 배움의 거리는 오랜만에 떠들썩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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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신입 강사가 내건 수강 모집 광고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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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수한 강의가 생겨나고 사라지는 이 바닥에서 신참자가 내건 광고는 주목받기가 정말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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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새로 등장한 그 광고는 충격적인 문구로 수도자들의 복합적인 관심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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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지에 적힌 내용은 이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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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단이란 무엇인가(정기 유료 강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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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사 : 결단기 수사 류서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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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형 금단 보유자의 비전 대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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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주만 한 금단을 만드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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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도 결단기 수사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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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강의는 무료로 진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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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보면 결코 잊을 수 없는 내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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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력 한 줄 없는 산수 출신 강사, 심지어 강의명은 ‘결단이란 무엇인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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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이 여의주를 문 용이라도 된다는 태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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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담하는데 이토록 오만한 광고 전략을 내건 강사는 배움의 거리 역사상 단 한 번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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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자들은 첫 강의 날짜를 손꼽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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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본곡 배움의 거리에 저런 어처구니없는 광고를 믿은 순진한 산수는 한 명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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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첫 번째 수업은 무료라고 적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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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첫날이 다가오자 수도자들은 어디 두고 보자는 심정으로 몰려와 강의실을 가득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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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꾼 얼굴이나 한번 구경하자는 심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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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정된 시간이 되고 서란이 강단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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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안술을 사용하고 있던 수도자들은 경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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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의 단전에는 주먹보다 큰 금단이 떡하니 자리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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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단기 수사의 금단은 평균적으로 콩알 크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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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혹가다가 천재에게 거대문파의 지원이 집중되면 호두알만 한 크기의 금단이 완성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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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런 건 양심적으로 금단이라고 부르면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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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여의주에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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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순간, 수강생들이 비슷한 생각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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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지에 적혀있던 ‘초대형 금단 보유자의 비전 대공개, 여의주만 한 금단을 만드는 방법.’은 과장 하나 없는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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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혹시 마지막 문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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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와 흥분, 정적 속에서 첫 강의가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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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선은 초월, 그리고 초월이란 곧 보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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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문장을 시작으로 강의는 매끄럽게 진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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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륙 오대문파인 오죽문에서 가장 화신기에 가깝다고 평가되는 원영기 수사, 여무진의 가르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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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낱 잉어로 태어나 천 년을 수련해서 승천 직전까지 갔던 소용녀, 담청의 가르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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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거물의 가르침이 수선계 역사에 전례가 없던 천재, 최연소 결단기 수사 류서란의 입을 통해서 동대륙에 전파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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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수업이 끝나고 서란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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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료 강의 분량은 여기까지입니다. 다음 내용을 더 듣고 싶으시다면 영석 결제를 통해서 유료 강좌를 수강해주세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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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일, 수강 신청 폭주로 접수처가 마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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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의 거리 역사상 최고 기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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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신인이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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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슨했던 배움의 거리에 천재지변이 닥친 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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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진하는 거인을 피하지 못한 피해자가 속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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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 년 경력의 유명 강사, 대형 금단(별호)은 도통 상도덕이라는 것을 모르는 신참을 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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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를 듣던 수강생 숫자가 급감한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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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결단기 산수 치고는 드물게도 호두알에 약간 못 미칠 커다란 금단을 지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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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수도자들보다 다소 컸던 금단이 그를 순식간에 유명 강사로 만들어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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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금단 크기에 자부심이 대단했던 그의 평소 지론은 ‘내 것보다 작은 건 금단이 아니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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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서란이 나타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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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깝게도 그와 서란, 두 사람이 진행하는 강의는 완벽하게 동일한 분야를 다루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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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 거리에서는 승자가 모든 걸 독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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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이런 뒷담화의 주인공까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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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 금단, 꼴이 웃기지 않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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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금단 좀 크다고 틈만 나면 거들먹거리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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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신참한테 수강생 싹 뺏겼다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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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강의 실력도 부족하면서 금단 크기로 유명해진 강사잖아. 이참에 그냥 별호도 바꾸면 되겠네, 대형이 아니라 중형 금단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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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자들의 비웃음을 들으며 대형 금단은 패배감을 곱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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텅 비어있는 쓸쓸한 강의실이 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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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없었을 때만 해도 앉을 자리가 부족할 정도로 수강생이 바글바글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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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 금단은 명상을 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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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도 부족하고 어리석은 우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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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단 크기가 수도자의 전부는 아닌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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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보다는 법력 통제력이 더 중요하단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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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연한 사고 전환으로 정신적 평안을 되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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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제아무리 훌륭한 자기 합리화 실력을 지녔다고 해도, 현실 문제가 저절로 해결되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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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 금단은 보조 강사들을 전부 호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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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들, 그쪽 강의를 듣고 비전을 빼 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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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성스러운 수하들이 고개를 숙이며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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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 금단은 세상 물정 모르는 신참에게 이 바닥 특유의 살벌한 신고식을 겪게 해 줄 작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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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사람을 보내서 강의 내용을 모조리 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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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같이 베낀 강의를 개설한 뒤, 유명세를 바탕으로 이쪽이 원조라는 진흙탕 여론전을 실시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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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에는 차분히 기다리기만 해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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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 금단이 가만히 있어도 수십 년 동안 쌓인 추종자들이 알아서 상대 강사를 난도질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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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교수법이나 도둑질하는 파렴치한으로 몰린 신참자의 명성은 물거품처럼 꺼질 게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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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만 시간이 흘러도 진실은 잊혀지고, 대형 금단이 새로이 원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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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방진 새내기를 잡아먹고 더욱 찬란하게 빛날 미래를 상상하며, 대형 금단은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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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뒤, 보조 강사들이 돌아와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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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도 못 따라하겠던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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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 금단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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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료 강좌가 시작되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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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단에 오른 서란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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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료 강의에서도 말씀드렸던 것처럼, 금단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법력에 대한 통제력입니다. 유료 강의 첫 시간에는 이와 관련된 이론을 중점적으로 배워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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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의 강의가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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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에 앉은 수강생은 곧장 두 부류로 나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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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는 만족스럽게 경청하는 부류였고, 나머지 하나는 다소 지루한 표정을 짓고 있는 부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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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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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의 강의는 축기기 수사를 대상으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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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기기 수사라는 한 가지 분류로 묶여있지만, 사실 수강생끼리 공유하는 공통점은 수행 경지와 산수라는 출신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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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서로 살아온 세월, 수행 진척, 보고 배운 것까지 모두 제각각인 복합적 집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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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의 강의 내용은 분명 충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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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모두에게 그렇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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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막 축기에 성공한 오십 대 산수와 벌써 이백 년 이상을 수선한 산수는 반쯤 다른 경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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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이론적 토대와 실질적 수행, 두 분야 모두를 대성한 결단기 목전의 수도자마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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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의 원론적 강의는 분명 훌륭했지만, 진짜 실력자들의 입장에서는 다 아는 얘기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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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족과 불만족이 공존하던 강의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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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서란은 막 강의실을 떠나려던 수강생들을 다시 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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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쪽지 시험을 보겠습니다. 시험지를 받으신 분은 순차적으로 뒷사람에게 전달해 주세요. 문제를 다 풀면 자리에서 기다리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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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지 시험이라고 해놓고 시험지는 거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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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단 이론에 대한 이해를 묻는 객관식 문항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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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시계의 모래가 전부 떨어지고 시험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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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지를 걷은 서란이 채점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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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하나만 틀려도 탈락이라서 어렵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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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만점자 명단을 보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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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점자는 전원 중급반으로 진급합니다. 아쉽게 탈락한 분들은 실망하지 마세요. 매일매일 쪽지 시험을 봐서 만점자를 진급시킬 예정입니다. 중급반 수강생들에게는 새로운 강의 시간표가 배정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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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의 차별화 전략은 분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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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급반은 만점 받을 때까지 결단 이론만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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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이론적 토대가 마련된 중급반부터는 결단에 필요한 실질적인 강의를 듣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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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력 통제력 향상을 위한 명상 수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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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집중이 깨진 수강생의 어깨를 대나무 막대(이름은 통통이다.)로 두드리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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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름을 일정하게 유지해야 합니다. 법력이 갈대처럼 흔들리는 건 아직도 통제력이 부족하다는 증거입니다. 조금 더 집중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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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지 시험을 통해서 걸러진 중급반 수강생들은 하급반 수강생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숫자가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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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서란도 같은 시간을 강의하면서 보다 많은 주의를 기울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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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행하는 강의가 실질적으로 늘어난 서란은 더욱 바빠졌지만, 수강생들의 수업 만족도는 높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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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중급반에서도 매일 시험을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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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급반으로 진급한 극소수의 수강생들은 한층 더 밀도 높은 가르침을 받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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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려 몸으로 배우는 결단 과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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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강생의 등에 손을 댄 서란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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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내에서 움직이는 영기가 느껴지십니까? 지금부터 통제된 영기로 금단 형성 과정을 묘사할 겁니다. 영기를 자신의 법력이라고 생각하고 천천히 따라오세요. 지금 이 감각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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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려 결단 과정 유사체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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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강생의 몸안에 흐르는 극소량의 영기를 서란의 금단으로 통제해서 움직이는 방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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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의 법력은 수강생의 법력과 충돌하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영기로 결단 과정을 흉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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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작은 금단을 가진 범재들은 죽었다 깨어나지 않는 한 불가능할 신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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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초초천재 류서란은 이번에도 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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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수가 수선 도중 겪는 가장 큰 어려움은 이론적 토대와 실질적 수행의 괴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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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먹구구식으로 쌓은 수행은 균등하기 어렵고, 경지를 올리는데 있어서 족쇄로 작용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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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분반과 진급 체계를 이용해서 산수들이 중구난방으로 쌓아 온 성취가 조화를 이루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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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급반에서는 이론적인 토대를 닦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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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반에서는 실질적인 수행을 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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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급반에서는 유사체험으로 상위 경지를 엿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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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의 상중하 분반 강의는 혁신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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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죽문이 수천 년 동안 쌓아온 수선 이론, 담청이 육백 년 간 거듭했던 시행착오, 하늘이 최애하는 류서란의 천재성이 합쳐진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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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강사들은 알려줘도 따라할 재주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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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개월 간 진행된 여름 강좌가 끝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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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규 강좌 ‘결단이란 무엇인가.’는 결단기 수사를 하나 배출하는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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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도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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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 분기가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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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강좌, 겨울 강좌도 끝난 지 오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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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동안 결단기 수사 여섯 명을 더 배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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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단기를 목전에 둔 최상위권 실력자들이 모조리 서란의 강의로 몰려든 덕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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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신성 금단이라는 영예로운 별호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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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좌가 너무 인기 많아서 사람도 잔뜩 채용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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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사무 보조, 단원표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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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 강사님, 연말 시상식 개최위원회에서 강사님의 참석 여부를 문의했습니다. 가급적 참석해 주셨으면 하는 눈치던데요. 수상이 확실시된 상황이니 당연한 일이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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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거물 흉내를 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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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석하겠다고 전하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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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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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원표가 강사 연구실을 나가자 서란이 소매에서 서책을 한 권 꺼내 살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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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책의 정체는 올해 하반기 통계 자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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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의 거리 관리위원회에서 만든 출간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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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즐거운 마음으로 책장을 넘겨, 올해의 수강료 수입 순위표가 그려진 곳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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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한 해, 서란은 결단에 관한 강의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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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기 수사는 숫자가 많아도 재물이 적고, 결단기 수사는 재물이 많아도 숫자가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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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의 거리에서 가장 돈이 되는 강의 대상이 바로 축기기 수사라는 의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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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강료 합계 상위 열 명을 비교한 도표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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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의 수입을 표시한 먹선이 종이를 뚫을 기세로 우뚝 솟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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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적인 비율을 맞추기 위해서 바닥에 깔린 아홉 명의 범부들이 참으로 안쓰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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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뒤 열린 연말 시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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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당연하게도 올해의 강사 부문과 올해의 강의 부문을 동시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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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위 있는 여타 기록들을 모조리 경신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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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초 생각했던 목표도 초과 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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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이 밝아오는 이른 새벽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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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강 신청을 위해서 접수처로 달려온 축기기 수사들이 연신 아우성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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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저히 믿기지 않는 사태가 벌어진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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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 금단의 강의가 하나도 없다니, 도대체 무슨 헛소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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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켜, 나는 작년 가을부터 기다렸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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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제발 진정하세요! 신성 금단은 봄 강좌를 개설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그러니까! 애초에 수강 신청을 할 강의가 없다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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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무지 납득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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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배움의 거리에서 신성 금단, 류서란 강사보다 유명한 사람이 어디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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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연말 시상식에서 동시 수상까지 했으니, 강의만 개설하면 영석을 갈퀴로 쓸어 담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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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강의를 개설하지 않았다는 놀라운 사실은 삽시간에 배움의 거리 전역으로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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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 강사의 갑작스러운 은퇴 소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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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수많은 루머가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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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석을 잔뜩 벌었으니 원영기에 도전하기 위한 폐관 수련을 시작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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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금단과 이론적 성취에 대한 소문을 듣고 거대문파에서 억만금으로 영입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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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다, 떠오르는 신성을 시기한 유명 강사들이 힘을 합쳐서 압력을 가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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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마다 떠드는 말은 달랐지만, 배움의 거리를 밝히던 큰 별이 졌다는 사실은 모두가 동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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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들은 전부 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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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 금단, 류서란은 태본곡을 떠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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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하면 인형술 강의를 잔뜩 수강한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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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강좌들이 시작되는 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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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정된 강의실에 입실한 ‘즐겁게 배우는 기초 인형술’의 강사는 제 눈을 의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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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계 전설, 류서란이 맨 앞자리에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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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 위로 유성이 떨어진 심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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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단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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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하게는 법력을 응축시켜서 하단전에 금단을 형성하는 행위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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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더 넓은 관점에서 바라보면 수선의 근본적인 목적, 초월을 향한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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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에는 다소 변질되었지만, 본래 수선이란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고자 하는 이들로부터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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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으로 정예병 수백을 물리친 맹장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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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리마를 오로지 두 다리로 추월한 전령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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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인 괴조를 쏘아 떨어뜨린 명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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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괴와 전란으로 천하는 혼란스러웠고, 무수한 영걸이 제각기 목적을 위해서 세상을 떠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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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인은 흉내조차 낼 수 없는 비범함을 선망한 추종자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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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영걸에게 가르침을 구하고 제자가 되어 수행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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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세월이 흐르고 지식이 축적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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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근의 존재가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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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범한 능력을 선보이던 영걸들은 하나같이 영근보유자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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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근이 사람을 특별하게 만드는 근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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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기의 존재가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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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근보유자만이 영기를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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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내 영근마다 차이가 있다는 사실도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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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기의 존재가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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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인이 많은 대도시는 수행을 하기에 적절한 장소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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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수행자들이 깊은 산속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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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시대에나 인재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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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수한 천재들이 태어나고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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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수행에 바친 삶은 그대로 토양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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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지 체계와 수행 방법 등이 정립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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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여든 수행자 집단은 수도문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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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으로 쌓인 지식은 마침내 결실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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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승천이라는 천고의 비밀에 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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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선이란 단순히 장생을 위한 비방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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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범함에 대한 열망에서 태어난 학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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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자란 곧 수선에 일생을 바친 학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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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로 결단이란 단순히 금단을 형성하는데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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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선이란 곧 초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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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초월은 보충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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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불완전함에 대한 보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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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단이란 즉 육신의 한계를 초월하는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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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녹고 새순이 돋는 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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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죽문은 결단 의식을 위해서 총력을 동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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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박한 일정에 부차적 업무가 대부분 중단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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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정된 시기는 당장 내년 여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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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도 결단을 준비하느라 굉장히 바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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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주 앉은 소용녀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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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의 여의주와 인간 수도자의 금단은 형성하는 과정에 다소 차이가 있다. 하지만 공통적으로 얼마나 방대한 법력을, 얼마나 수월하게 통제할 수 있는지가 가장 중요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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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머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은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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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의 물음에 소용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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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다, 결국 둘 다 내단이니까. 네가 나에게 배울 것 역시 법력을 다루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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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솔직히 그건 자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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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은 서란이 토신력으로 만든 돌구슬에 법력을 불어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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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개발한 특제 암석폭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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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력은 출중하지만 취급이 까다로워서 방치한 기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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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 보면 깜짝 놀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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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의 생각과 달리 소용녀는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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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인간 수도자치고는 그럭저럭 괜찮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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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고작 그럭저럭이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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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으로서는 굉장히 낯선 반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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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죽문 식구들은 뭐 하나 보여줄 때마다 매번 천고의 기재라며 찬양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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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구심을 갖는 서란에게 소용녀가 시범을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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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용녀가 손가락을 휙 휘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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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돌구슬 안에 압축되어 있던 법력이 고스란히 빠져나와 허공에 둥글게 뭉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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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성도 다른 타인의 법력을 순식간에 탈취해서 내 것처럼 제어하는 신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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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엄청난 격차를 실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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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용녀가 만든 법력 구슬은 서란이 만든 것보다 훨씬 작은 크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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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물체에 의지하지도 않고 압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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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로 박수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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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력 구슬을 흩어버린 소용녀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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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너에게는 재능이 있다. 아마도 결단기 수도자 중에서도 너처럼 법력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사람은 드물거다. 하지만 여의주를 통제하기에는 아직 한참 모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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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용녀의 목적은 여의주를 돌려받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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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려면 우선 서란의 실력을 향상시켜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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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주 소유권을 돌려받는 건 그 다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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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용녀가 재차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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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지금 네 상태로도 결단은 손쉽게 성공할 수 있다. 하지만 명심해라. 어설픈 성공은 필요 없다. 너는 반드시 최고의 금단을 형성해야만 한다. 그래야 하루라도 빨리 여의주를 통제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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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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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금단은 기준이 뭐죠? 빛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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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기, 기준은 바로 크기다. 기억해라, 내단은 무조건 커야 한다. 요단, 금단, 여의주. 아무튼 내단이라고 불리는 건 어떤 이유에서든지 커다랄수록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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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용녀가 열변을 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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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단이란 자기 법력을 통제하고 천지 영기를 끌어당기는 구심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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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내단이 클수록 법력과 영기에 작용하는 인력도 강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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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단의 크기는 중대 사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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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범생 서란이 질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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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녀님, 그러면 흑린역류혈사의 요단은 뭔가요? 그게 여의주보다 훨씬 커다랗던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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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린역류혈사의 요단은 어지간한 바위 크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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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직접 들고 오지 못하고 물류 중심지를 거쳐서 가져올 계획이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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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기기 위해서는 범선형 법기가 필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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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축기기 강도단 중 요단을 챙긴 일당이 가장 먼저 잡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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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선이 너무 느렸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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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용녀가 소리를 꽥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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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건 내단이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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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렬한 반응 이후 추가 설명이 튀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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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린역류혈사의 요단은 편의상 요단이라고 부르지만 실상은 웅담이나 녹용 같은 부속물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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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결단기 수사 몇 명에게 멸종 당한 나약한 요괴에게 내단이 있다는 것부터가 웃긴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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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구 같은 미궁언서나 신나게 괴롭혔지, 축기기 수사가 몇 명만 모여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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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 사냥해 본 서란도 금방 납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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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기회는 오직 한 번뿐이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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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내년 여름까지 기량을 갈고닦아서 최대한 큰 내단을 만들어야 한다. 평균적인 결단기 수도자의 금단이 콩알만 하다고 하니까... 최소한 호두알보다는 커야할 것 같구나. 내 여의주와 비슷한 수준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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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소용녀의 여의주는 주먹 크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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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지금은 여의주가 없어서 결단기 수도자 정도로 약해졌지만, 본래는 승천 직전까지 갔던 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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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력을 발휘할 요건만 갖춰지면 원영기 수사도 소용녀의 상대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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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과 소용녀는 수행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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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표는 호두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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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단 의식 때문에 문파 전체가 시끄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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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 장소에 진법을 설치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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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합한 보조 인력을 선발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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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망이 된 일정표를 이리저리 조립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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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아무래도 가장 시끄러운 곳은 따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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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의식용 단약을 조제하는 약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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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절반쯤 전쟁터나 다름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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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단약의 주재료인 요단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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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적으로 흑린역류혈사는 수백 년 전에 멸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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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디로 오죽문 연단술사들은 전원 흑린역류혈사 요단으로 단약을 만들어 본 경험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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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로지 수백 년 전에 기록된 약방에만 의지해서 단약을 조제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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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도면 사실 연단술이 아니라 고고학의 영역에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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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단술사들은 고문서를 뒤지며 고통스러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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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신한 표기법에 연신 몸을 뒤틀던 사내가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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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된 분량이 왜 이 모양이야! 적당히 넣는 게 도대체 어느 정도냐고! 어떤 연단술사가 매번 직감에 의존해서 연단술을 해! 도량형에 맞게 적으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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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 신호로 여기저기서 쌍욕이 튀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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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개같은! 이런 미개한 도량형을 왜 사용한 거야! 도량형 통일한 지가 벌써 수천 년이 지났다고! 이딴 원시 도량형 쓰는 인간들은 전부 죽여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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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재 이름이 모조리 사어잖아! 남들이 안 쓰는 용어 혼자서 쓰니까 스스로가 대견하게 느껴지기라도 했냐?! 제발 남들도 알아들을 수 있는 소리를 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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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연구실 문이 슬쩍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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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뜩 예민해져 있던 연단술사들이 일제히 출입문을 노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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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부름 때문에 고문서를 잔뜩 들고 온 이아금만 활화산 같은 분위기에 당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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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연단술사들은 금방 평정을 되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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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수행으로 정신을 수양한 사람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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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나름 지식인들 모임이라고 차분하게 연구를 하자 조금씩 일이 진행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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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누가 기가 막힌 해결책을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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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완제품에서부터 조제 과정을 역순으로 밟아서 부재료와 각각의 함유량, 처리 공정들을 유추하자는 의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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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집단은 뭉칠수록 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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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단술사들은 밤낮없는 노력 끝에 조제법을 성공적으로 복구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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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역사에 남을 대장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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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격에 겨운 연단술사들이 서로를 부둥켜안고 기쁨을 나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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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한 사람이 걱정을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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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제부터는 어쩌죠? 지금 우리가 복구한 건 대부분 추정에 근거한 근삿값이잖아요. 미세한 오차를 보정할 필요가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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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야 뭐... 시행착오를 통해서 어떻게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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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재료는 그렇다고 쳐도, 주재료인 흑린역류혈사 요단은 어쩌죠? 다시 구할 방법도 없어서 연구에 사용할 양이 터무니없이 부족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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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단술사들이 일제히 침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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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차는 반드시 수정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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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너무 많은 실험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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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은 횟수로 정확한 함유량을 계산할 획기적인 방법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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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극소량으로 실험하는 건 어떨까요? 그러면 횟수를 늘려도 주재료 소모량은 크지 않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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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율만 맞추면 되니까 크게 상관은 없는데... 그렇게 적은 양으로 결과를 어떻게 확인하죠? 맛을 볼 때 제대로 느껴지기나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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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각과 후각만 예민하면 되는 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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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수도자라고 해도 감각이 그렇게 예민한 사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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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침묵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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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민한 미후각, 마침 약당에 있는 수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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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단술사들은 모두 한 소녀를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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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재와 탕약 냄새가 죽도록 싫은 약당 소속 이아금 수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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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사는 식은땀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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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겁게 배우는 기초 인형술’은 연기기 수사들을 대상으로 하는 입문 강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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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강사 본인도 수선 경력이 오십 년 정도 밖에 되지 않은 축기기 수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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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단기는커녕 축기기만 돼도 거들떠 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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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241세(본인 주장)가 된 결단기 수사가 관심을 가질 만한 수준은 결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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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강의실 안에 있는 수강생 전원이 만학도(25세)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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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 좌석제 때문에 불가피하게 서란의 주위에 앉은 연기기 수사들이 전전긍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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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의 입실 전까지만 해도 화기애애했던 면학 분위기가 운석 한 방에 초토화된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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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사는 두려움에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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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결단기 수사가 여기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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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무슨 의도를 가지고 앉아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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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내 짧은 배움을 조롱하려는 생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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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사는 최악의 경우를 상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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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장히 실망스러운 강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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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가르치는 방법을 모르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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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의 거리 수준도 알 만하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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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 속 서란이 혹평을 쏟아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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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락하는 강의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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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복되는 강의 개설 반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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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내 태본곡을 떠나는 자신의 뒷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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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사는 극심한 두려움에 몸서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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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럼에도 도망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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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잘나가는 유명 강사는 아니지만, 그에게도 나름대로 소명의식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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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는 얼굴과 공손한 말씨를 유지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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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때우기가 아니라 유익한 지식을 전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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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단에 오른 자, 반드시 수업을 끝마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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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사는 공포를 딛고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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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수강생 여러분. ‘즐겁게 배우는 기초 인형술’의 강사, 수다 인형입니다. 오늘 함께 배울 내용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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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강의는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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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다 인형은 정말 열정적으로 강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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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중간 간단한 농담과 적절한 질문을 건네면서 경직된 강의실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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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학도 하나 때문에 굳어있던 다른 수강생들도 점차 수업 내용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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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겁에 가깝게 느껴지던 시간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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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다 인형은 극심한 피로에 쓰러질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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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끝까지 미소를 잃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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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주의 인물, 류서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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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더니 ‘흠...’하고 강의실 밖으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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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작은 소리였지만, 수다 인형의 귀에는 폭풍우 속 우뢰 소리처럼 크게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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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사는 완전히 탈진한 채 퇴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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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이라니, 어떤 의미를 가진 ‘흠...’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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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강의가 형편없었다는 소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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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나는 강사로서 해내지 못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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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의에 빠진 강사에게 사무원이 달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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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다 인형 님, 이것 좀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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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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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 선배님이 적으신 강의 평가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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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다 인형이 황급히 평가 설문지를 들여다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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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가 유익해요. 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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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남긴 담백한 후기가 적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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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 강사가 남긴 짧은 문구와 높은 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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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후배를 격려하는 듯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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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다 인형은 가슴 속으로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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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구나, 해냈던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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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강의가 수강생들에게 닿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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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걸어온 길은 틀리지 않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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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해서 강사로 살아갈 용기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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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다 인형은 밤새 다음 수업 준비에 힘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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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느낀 벅찬 감정을 잊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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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강의 실력은 날로 일취월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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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게 서란이 쓴 격려의 메시지 덕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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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서란이 의도한 바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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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전생에서 배달 리뷰에 모조리 만점을 주던 버릇으로 대충 적어 놓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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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모르고 먹으면 전부 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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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지나 여름, 서란은 오직 공부에 몰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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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여기, 내일은 저기, 밤에도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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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까지 줄여가면서 인형술을 탐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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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을 목말라하던 서란은 동대륙에서 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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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서란을 보고 의문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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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연유로 인형술에 저리도 목을 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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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누구도, 심지어 서란 본인조차 모를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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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서란을 인형술사로 만들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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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신 메카 파일럿이 되고 싶었던 어릴 적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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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나도 온존된 열혈남아의 본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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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도 아니면 영혼에 내재된 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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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가 어떻든 서란은 전혀 상관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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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순간이 너무나 즐거웠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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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딱히 궁금해하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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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작 진짜로 궁금해한 사람들은 따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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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 선배님, 결단기 강의는 도대체 언제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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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 금단 류서란의 강좌 개설을 목이 빠져라 기다리던 예비 수강생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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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여서 점심을 먹던 중, 산수 하나가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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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 선배님, 아직도 인형술 공부하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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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식사를 하던 친구가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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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어제도 수업 일곱 개나 들으시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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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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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석한 산수들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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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년 동안 한결 같으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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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 좀 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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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술이란, 도대체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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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발, 제발 강의 좀 개설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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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다가 축기기에서 늙어 죽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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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곧 가을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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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울한 분위기가 흐르던 와중, 누군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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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석이 다 떨어지면 강의를 개설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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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반박이 날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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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언제? 한, 십 년 정도 지난 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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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적인 견해를 제시한 산수가 다시 반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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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 년이면 충분히 기다릴 만 하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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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기기 수사 관점에서는 맞는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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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벌어둔 영석도 무한한 게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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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년짜리 수명을 믿고 열심히 버티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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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서란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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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 선배님, 대수림 탐험대에 투자해서 영석을 몇 배로 불리셨다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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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 몇 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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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 아홉 배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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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자 한 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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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분산 투자. 일부 탐험대가 성공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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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약한 희망의 불씨가 흔적도 없이 꺼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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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거짓말 좀 하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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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자를 해서 돈을 벌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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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수림 탐험대, 그거 전부 사기 아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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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재주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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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십 년은 진짜 아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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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수들은 급격하게 우울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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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나 이번 분기에는 강좌를 개설하셨을까, 접수대 앞에서 얼마나 서성였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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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절한 기다림에도 불구하고, 서란이 강좌를 개설하는 일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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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많은 영석을 지불한다고 해도 강사 본인이 안 하겠다는데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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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술 공부가 질리면 복귀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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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어둔 영석이 떨어지면 복귀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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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개설 일주년 기념으로 복귀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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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아무 이유나 가져다 붙인 희망 사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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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너무 간절해서 어쩔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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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기기 산수들은 자기 혼자 기대하고, 뒤이어 좌절하기를 연신 반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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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를 마친 산수가 결연하게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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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이제 더는 못 참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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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참으면 어쩌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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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가서 강좌 개설을 요청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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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 친구들이 산수를 만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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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잠깐만 진정해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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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는 결단기 선배님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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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진짜 큰일 날지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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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산수는 완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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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이거 놔 봐. 나는 꼭 해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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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수를 친구들을 뿌리치고 내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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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같은 선배님께 직접 찾아간 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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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정말로 쉽지 않은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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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수는 전 사무 보조, 단원표에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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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수사, 제발 우리 얘기 좀 전해 주시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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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러세요, 제가 무슨 힘이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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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가 그나마 안면이 있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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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거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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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절한 부탁에 못 이긴 단원표는 서란에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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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강좌를 애타게 기다리는 여론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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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얘기를 듣던 서란이 시원스레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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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가을에는 한 번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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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강좌 개설은 그렇게 확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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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원표가 대리 제출한 신청서도 곧장 수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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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강의 개설 공지가 게시판에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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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은 배움의 거리 전역에 빠르게 전파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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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 금단 결단기 강의, 가을로 확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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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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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 발표 맞아? 저번처럼 헛소문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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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수처 게시판에 공지 사항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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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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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부 내 앞에서 비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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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도 접수처는 마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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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강생이 너무 많아서 강의가 둘로 쪼개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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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흔쾌히 동의한 덕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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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매불망 기다려 온 가을 강좌 첫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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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보다 몇 배나 많아진 사람 앞에 서란이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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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모르는 사람이 없는 첫 문장을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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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선은 초월, 그리고 초월이란 곧 보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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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백기가 반 년이나 됐지만, 실력은 여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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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해 가을, 결단기 여럿을 새로 배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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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머지 수강생들 역시 훌륭한 성취를 이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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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행복한, 아름다운 가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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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종강 공지만 없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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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강좌는 개설되지 않을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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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분기 강의, 미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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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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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수들 입에서 절로 비명이 터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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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강좌를 기다리던 이들이 비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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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계에서 고문받는 희생자가 지를 법한 절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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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서란도 어쩔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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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여름, 서란은 동대륙에 내던져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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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분기 강의, 두 분기 공부, 다시 한 분기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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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시간이 일 년하고도 반이나 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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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송진을 밟고 실종된 이후, 거의 이 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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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의 외유가 지나치게 길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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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전부 ‘한 분기만 더...’를 반복한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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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학구열에 취해서 정신을 못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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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것도 어쩔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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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륙에서 서대륙까지는 편도로 년 단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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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돌아가면 재방문은 거의 불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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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끊임없이 갈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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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배울 수 있는 지식이 너무 아까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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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문파 식구들이 걱정하고 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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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일을 어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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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돌아가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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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겨울 결단기 강좌는 없을 예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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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앞으로도 영원히 없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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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미련을 못 버리고 마지막까지 미적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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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배움의 거리에 더 머무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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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소식만 전할 방법이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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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나 대신 편지 좀 배달해주면 좋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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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편지 배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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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번에도 영감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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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유레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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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륙과 서대륙은 멀리 떨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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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망대해를 사이에 둔, 두 대륙을 횡단하는 건 정말 험난한 여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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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원양 항해 자체가 반쯤 자살 행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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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는 육지가 보이는 곳까지만, 이게 상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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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물며 몇 년이라는 시간이 소요되는 항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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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 인지를 초월한 규모라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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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콜롬버스는 신대륙 찾겠다고 두 달 보름 항해했다가 선상 반란을 겪을 뻔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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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영겁에 가까운 세월이 흐르고, 바다 위에 드리워져 있던 미지의 장막도 벗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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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에 존재하는 빈 공간을 참지 못하는, 용감한 탐험가들의 희생으로 쌓아올린 기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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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찾은 해로를 안전한 바다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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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 준비와 적절한 수행, 그리고 강인한 의지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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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 가지만 있다면 바다란 더 이상 세계를 나누는 높디높은 장벽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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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분열된 사대륙을 묶어 주는 연결고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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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돌아가기 위해 틈틈이 바다 관련된 강의를 들을 때마다, 서란은 매번 같은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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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우주 여행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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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장기간 항해, 머나먼 목적지, 텅 빈 공허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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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와 바다는 닮은 점이 정말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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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스럽게 생각도 그쪽으로 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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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륙에 편지를 보내기 위한 수단을 궁리하던 서란이 로켓을 떠올린 건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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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순 로켓에 편지를 담아서 서쪽으로 날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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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인도에 표류된 사람이 유리병 안에 편지를 넣고 망망대해로 던지는 것과 비슷한 행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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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전명, 대륙 간 로켓배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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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성공할 확률은 천문학적으로 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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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중에 연료가 바닥날 수도, 비행 요수나 폭풍우를 만나서 격추될 수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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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지나치게 대범해진 서란의 사고 방식은 이 정도 난관에 좌절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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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률이 낮으면 물량공세를 하면 그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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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태본곡을 잠시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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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곧장 동대륙 최서단으로 날아가서 어떤 바위섬에 자리를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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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근방에는 수도문파가 하나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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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지난 일 년 동안 태본곡에서 배운 인형술 관련 지식을 총동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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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 거리를 생각하면 수많은 기능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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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형화로 무게를 줄이고, 추진 기관 연비를 개선하고, 소량의 자가 충전 기능까지 추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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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성된 죽순 로켓의 크기는 무릎 높이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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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부에는 서대륙으로 보낼 물건을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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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곧장 서쪽으로 발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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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고, 넣고, 발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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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일련의 과정을 계속 반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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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에 익숙해질수록 양산 속도는 점점 빨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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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래에는 몇 호흡만에 하나씩 발사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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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료로 사용된 바위섬은 갈수록 작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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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도 어느새 끝나고, 봄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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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도 망망대해로 로켓 쏘는 것을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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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섬을 전부 깎아서 없애버린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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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도면 하나는 도착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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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태본곡으로 복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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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부는 전했으니, 공부를 재개할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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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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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순 로켓들은 망망대해를 가로지르며 셀 수 없는 고비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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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진 기관 오작동 탓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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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료인 법력이 고갈된 탓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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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향을 잘못 잡은 탓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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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우를 만난 탓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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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개에 직격해버린 탓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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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 요수와 충돌한 탓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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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중심에 빨려들어간 탓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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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용의 손아귀에 붙잡힌 탓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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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수 없는 인력에 휘말린 탓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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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소수의 로켓만이 서쪽 바다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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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끝내 육지에 도착한 경우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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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명이 다 된 로켓들이 우수수 추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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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켓은 계속해서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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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심이 깊어질수록 사방은 점차 어두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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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조차 닿지 않는 심해까지 내려온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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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다시 빛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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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어둠을 밝히는 불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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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광 산호로 이루어진 웅장한 용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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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에 살고 신앙에 죽는 어인족의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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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어인 교단의 심해 본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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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정기 순례를 떠나려던 어인족 무리 위로 석재로 만든 이상한 원통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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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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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리를 얻어맞은 일등 신도, 홍린어가 정체불명의 해양쓰레기를 집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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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성지에서 본 죽순처럼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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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저리 만지작거리던 와중, 돌연 원통이 반으로 쪼개지며 구슬을 하나 떨어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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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린어는 구슬을 유심히 관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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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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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종류의 법기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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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 삼아 법력을 불어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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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대뜸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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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공녀, 이웃나라로 끌려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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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쪽으로, 동쪽으로 멀리 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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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과 친구들을 두고 떠나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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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고 온 마차는 부서진 지 오래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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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를 기다리는 서쪽이 그리워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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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공녀, 고향으로 발길을 내딛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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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린어는 경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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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모신님의 음성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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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슬의 정체는 서란이 만든 인형 부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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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력을 주입하면 녹음된 소리가 흘러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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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명명하자면, ‘류서란의 골든 레코드’ 정도가 적절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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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대신 노래를 선택한 건 보안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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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면 다른 사람이 주워서 가사를 확인해도 제대로 된 의미 파악이 불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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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음기 제작 방법은 인형술 강의에서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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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서란이 작사, 작곡한 신곡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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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음기는 공물로써 담청에게 바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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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은 내용을 확인한 뒤 수뇌부에게 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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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죽문 수뇌부가 또 소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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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명이 넘는 결단기 수사가 모인 조용한 공간, 선명하게 울리던 서란의 자작곡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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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사람만 이해할 수 있는 비유로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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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뇌부는 어렵지 않게 숨겨진 전언을 파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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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륙에 있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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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쩐지 아무리 찾아도 없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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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무사해서 다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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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사를 들어보니 돌아오는 중인 것 같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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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이해하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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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 그렇다면 몇 년 이내로 돌아오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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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소식을 전했다면, 지금은 반 정도 왔을 수도 있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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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야 좀 안심이 되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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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죽문 수뇌부는 크게 안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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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사 마지막 부분을 ‘지금 서대륙으로 가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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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서란이 의도한 바는 전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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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수미상관 방식을 선호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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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아직도 태본곡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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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부를 전한 뒤, 서란(26세)은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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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까지만 공부하고 출발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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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륙의 인형술을 오죽문에게 선물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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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사겸사 영석도 좀 벌어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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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해, 서란(27세)은 여전히 떠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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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만 더 공부하면 뭔가 보일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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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탐험대 투자도 성공적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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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의환향해서 오죽문에 보은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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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돌아온 봄, 서란(28세)이 투덜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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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지루해. 영 들을 만한 강의가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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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송진을 밟고 날아와서 올해로 오 년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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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본곡 밖으로 한 발짝도 안 나가고, 인형술 강의만을 찾아서 배움의 거리를 떠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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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하루에 강의를 일곱 개씩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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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주고 배울 수 있는 지식은 벌써 모조리 습득해버린 지 오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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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극심한 콘텐츠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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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숨겨진 인형술 비기도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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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쉬운 예시로는 동대륙 거대문파들이 대대로 지켜 온 비전 지식이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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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외지인은 결코 손에 넣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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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서란은 할 일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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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단기 강의도 옛날에 때려치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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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이은 투자 대성공 덕분에 알량한 노동 소득 따위는 필요가 없어진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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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기기 수사들이 울부짖든 말든 영석 갑부가 된 서란은 손톱만큼도 신경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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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로는 오직 공부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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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하고, 공부하고, 또 공부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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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이 변하든 말든 태본곡에 틀어박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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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슬 여기가 고향처럼 느껴질 지경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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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인형술 실력은 수직 상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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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서는 엄두도 못 냈던 심화편까지 끝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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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술 사용이 가능한 인형조차 제작할 수 있는, 진정한 인형술사가 됐다는 의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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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둥빈둥 놀다가 문득 오죽문 생각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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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매장만 들렀다가 집에 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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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산더미 같은 영석을 벌어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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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막대한 물량을 전부 들고 갈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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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피하게 경매장에서 보다 작고 비싼, 고가치 소형 품목으로 바꿔 줄 필요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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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수림 밖에 위치한 묘나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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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룡문이 지배하는 속세왕국으로, 동대륙 최대 규모의 경매장이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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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과 단원표가 만난 곳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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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최고 등급 경매에 참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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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사람을 가려 받는 곳이지만, 태본곡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유명 강사는 상관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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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된 좌석에 앉아 주위를 둘러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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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같이 거대문파 소속들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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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이 결단기, 간혹 원영기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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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문파의 대리인으로서 참석한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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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경에 열중하는 사이, 경매가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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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물건은 단약이 든 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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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복하면 뼈와 근육이 튼튼해지고 수명도 몇 년 정도 늘려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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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능이 굉장히 훌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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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가장 먼저 수신호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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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수도자들도 계속해서 가격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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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복되던 입찰 경쟁 끝에 단약은 어떤 거대문파의 대리인이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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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다소 아쉬웠지만, 금방 털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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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첫 번째 물건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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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에 나올 더 좋은 경매 물품을 위해서 자금을 아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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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매는 계속 진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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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력한 영수의 알, 천 년 이상 된 영초, 대수림 심층부에서 가져온 고대 유물, 최고급 재료로 만들어진 법기, 우연히 인계에 떨어진 법보 파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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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서란은 눈으로만 구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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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돈이 너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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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에서 세 번째 경매 물건은 천년토영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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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재 주제에 토영기를 머금고 있어서 토속성 인형의 주재료로 사용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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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에게 너무 절실한 물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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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곧장 입찰에 뛰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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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찰가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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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전재산마저 지불할 각오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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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경매장에서는 돈이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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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토영목의 주인은 이번에도 거대문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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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낙찰가는 서란의 전재산보다 훨씬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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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이 아무리 부유해도 수천 년 된 거대문파의 재력에는 당해낼 방도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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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경매가 끝날 때까지 서란은 빈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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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쓸쓸하게 경매장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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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폐 문파들이 밉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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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천년토영목이 너무 가지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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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본곡 중심지, 오락의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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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자들이 모여서 음주가무를 즐기는 장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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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위치는 배움의 거리 바로 옆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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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다지 어울리는 조합은 아니지만, 사람이 미치지 않고서야 어찌 공부만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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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가 가장 빛나는 시간, 밤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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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열심히 공부한, 혹은 오늘까지만 놀기로 결심한 수도자들이 너도나도 모여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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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사람은 대로에서, 없는 사람은 골목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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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름한 주점 안에 앉아 있던 사내가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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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륙 수선계가 이렇게 돌아가선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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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방금 전까지 여기 안주 맛있다며, 음식 얘기를 나누던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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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장히 뜬금없는 화제 전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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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술 취한 사람이 원래 다 그런 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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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하게 마신 친구들도 덩달아 목청을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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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 말이 백번 옳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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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문파가 동대륙을 좀 먹고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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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야기하는 온갖 폐단이 도를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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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자리 분위기가 한층 화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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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여 앉은 사내들은 연신 거대문파가 수선계에 끼친 악영향에 대해서 성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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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만취해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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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기기만 되어도 술에 취하지 않지만, 여기 열혈남아들은 연기기 허접들이라서 어쩔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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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남자끼리 모여서 술 한 잔 마시면 대개 시사 토론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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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들도 보편타당한 만민 율법에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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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일 논제는 ‘동대륙, 이대로 괜찮은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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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안 괜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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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지역 간 영기 불균형이 너무 심해. 대수림 근처에 눌러앉은 거대문파 이외에는 문파다운 문파가 없다니까? 산수들도 죄다 십대문파 들어가겠다고 죽어라 수행하고 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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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아, 거대문파는 풍부한 영기로 점점 강성해지고 약소문파는 점점 고사하고 있어. 산천에 영기란 영기는 모조리 말라 버렸다고. 수행을 할 수 있는 땅도 매년 감소하는 추세라서 전망이 너무 어두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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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극화나 영기 고갈도 문제지만, 가장 심한 건 약소문파가 모조리 사라지고 있다는 거야. 이 시대에 누가 변방에서 수선하겠어? 차라리 대수림에서 산수 생활을 하고 말지. 여긴 영기라도 충만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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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에 그 소식 들었냐? 어떤 축기기 선배님이 제자 찾는다고 변방을 돌아다니시다가 일영근자 하나 발견하셨거든? 그런데 그 일영근자가 몇 살이었는지 알아? 나이가 오십이 넘었다고 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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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이러니까 동대륙에서 화신기 수사가 안 나오지. 약소문파 죄다 문닫고 수도자 신규 유입이 격감했다더니, 일영근자가 태어나면 뭐하냐고. 자기가 타고난 자질도 모르고, 평생 땅이나 파다 죽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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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최근에 나온 화신기 수사가 몇 년 전 사람이었지? 대충 만 년 정도 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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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추 그럴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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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륙 진짜 망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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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전부 대균열 때문이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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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지, 그 말이 맞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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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륙 수선계의 몰락은 가속화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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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그들에게 주어진 미래도 암울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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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혈남아들은 급격하게 침울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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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어떤 소녀가 맞장구를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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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문파들이 잘못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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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내들은 깜짝 놀라서 목소리의 주인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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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모르게 슬쩍 합석한 소녀가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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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 등급 경매에 참가했다가 거대문파들의 자본력에 얻어맞고 빈손으로 나온 류서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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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취하지도 않는 술 대신에 과즙 음료를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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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서 가만히 들어보니, 자네들이 참으로 의기가 넘치더군. 경세의 포부를 가져 마땅한 인재들이야. 그래서 말인데, 내가 뭘 좀 물어봐도 괜찮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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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내들은 선선히 제안을 수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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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법력이 없는 탓에 영안술은 못 쓰지만, 옷차림만 봐도 귀인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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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같은 선배님을 보자 술이 깨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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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고개를 주억이다가 질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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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온종일 상점 거리를 돌아다녔다네. 그런데 이게 웬걸? 인형 재료 판매점마다 모조리 저급품뿐이지 않겠나. 도저히 상급품을 찾을 수가 없더군. 혹시 어디서 구할 수 있는지 알고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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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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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토영목을 눈앞에서 놓친 서란은 경매장 앞에 쭈그려 앉아 억울해하다가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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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 등급 경매에 나올 법한 희귀품은 애초부터 개인이 구매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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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강의로 돈을 버는 속도보다 거대문파의 재산 증식 속도가 훨씬 빠를 건 자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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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심부리다간 백 년이 지나도 서대륙에 못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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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오죽문 식구들을 생각하며 서란은 인형술사로서의 욕망을 내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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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당히 상급품만 구매해서 돌아갈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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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하루 종일 상점가를 돌아다녀도 저질 재료 이외에는 찾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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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토영목처럼 희귀한 재료를 바란 게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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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당히 백년토영목이나 흑목석 상급품 정도로 만족할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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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발견한 것이라고는 수십 년 된 토영목이나 중품 흑목석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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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슬픈 마음에 배회하다 주점에 당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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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의 물음에 대한 답변은 바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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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지금은 상급품을 구하기 힘드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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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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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부터 십대문파가 고품질 재료들을 무차별적으로 매점하는 중입니다. 인형 재료, 법기 재료, 단약 재료 등등 전혀 가리지 않고 말이죠. 그래서 시장에 상급품이 씨가 말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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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다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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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십대문파가 몇 년 뒤에 비싼 가격으로 되팔기 전까지는 가망이 전혀 없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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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수십 년 이상 안 팔지도 모릅니다. 이런 재료들은 오래 될수록 가치가 높아지지 않겠습니까? 정말 심한 경우에는 백 년 가까이 창고를 잠그고 기다릴 때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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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탐험대한테 웃돈을 주고 직접 구매하는 수밖에 없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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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문파의 투자를 일정 비율 이상 받은 탐험대의 발견물은 경매장을 통해서 우선적으로 유통됩니다. 그리고 일단 경매가 시작되면 전부 십대문파가 사들이는 식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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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내는 유통 과정을 더욱 자세하게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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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험대는 대부분 거대문파의 투자를 받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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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대수림에서 발견되는 절대 다수의 물자는 경매장을 통해서 십대문파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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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수림, 탐험대, 경매장을 순차적으로 거치는 유통 구조는 직거래 가능성을 원천 봉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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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문파들끼리 모든 수행 물자를 과점한 채, 수요와 공급은 물론 가격까지 좌지우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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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적폐 집단은 영기가 풍부한 영역뿐만 아니라 동대륙 전체의 부를 독식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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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니 서란이 경매에서 참패한 것도 당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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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거대문파들을 분쇄해 주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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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늘고 예쁜 서란의 눈썹이 역팔자를 그리기 직전, 침묵하고 있던 사내가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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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선배님께서는 결단기 수사가 아니십니까. 배움의 거리에서 신성 금단이라는 별호로 유명하신데, 굳이 산수 신분으로 지내실 필요가 있습니까? 십대문파 아무 곳에나 가서 문만 두드리면 곧바로 입문하실 수 있으실 텐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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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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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문파에 소속되고 싶지 않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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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입문한 다음에 희귀 재료만 낼름 챙겨서 도망칠 생각도 안 해본 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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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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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오죽문을 배신할 수도 없는 일이니, 천년토영목은 이미 포기한 지 오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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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내는 계속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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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찾으시는 재료가 무엇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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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별 기대 없이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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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토영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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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내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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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차라리 미목대회에 참가하시지요. 백 년마다 한 번 열리는데 마침 올해가 그 시기입니다. 최종 순위가 삼 위 이내라면 천년오행목 중 하나는 받을 수 있으니, 시도해 볼 법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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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황급히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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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가 어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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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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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회 참가 신청을 하는 곳이 어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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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내는 떠듬떠듬 접수처를 알려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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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를 기억한 서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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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한줄기 바람처럼 내달려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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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술이 다 깬 사내들이 시선을 교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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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이만 일어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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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좋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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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더 마시기도 뭐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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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저나 오늘 좀 많이 마셨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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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값이 만만치 않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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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좀 아끼면 어찌어찌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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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내들은 어수선하게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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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계산을 하기 위해 계산대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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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산대에 서 있던 주인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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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술값은 아까 어떤 여성분이 대신 지불하고 가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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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내들은 화들짝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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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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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신성 금단 선생님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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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선배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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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결단기 수사의 배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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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하루 벌이가 시원치 않은 연기기 수사들의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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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목대회 접수처 담당자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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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을 맺은 오행인면목은 어디 있습니까? 미목대회는 대리 신청이 불가능합니다. 반드시 정원사와 오행인면목이 함께 와서 서류를 작성해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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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목대회가 뭔지도 모르고 대뜸 신청부터 한 서란은 당황해서 질문을 안 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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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행인면목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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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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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다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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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을 맺으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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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니까요, 왜 자꾸 물어보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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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어코 한 번 더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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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을? 저랑 오행인면목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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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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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접수처에서 쫓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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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에는 참가 요건에 대한 안내문이 들려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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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회는 혼자서 참가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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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목대회란 가장 아름다운 나무를 뽑는 대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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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로 정원사와 오행인면목이 둘 다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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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려 나무와 수도자의 복식 대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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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수 마감일까지, 남은 시간은 고작 삼십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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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안에 나무 친구를 만들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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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륙은 인형술이 굉장히 발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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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히는 그걸 제외한 나머지가 대부분 도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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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배움의 거리에서 인형술 강의만 주구장창 들었던 주된 이유는 본인이 원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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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강의 다양성이 부족한 것도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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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전부 오행인면목들이 너무 잘난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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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행인면목은 무작위 속성을 지닌 채 태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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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영기를 타고나면 화영인면목, 목영기를 타고나면 목영인면목, 대충 이런 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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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족 내에 다섯 속성 영목이 모두 존재한다고 해서 명칭이 오행인면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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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나무들은 미용과 건강을 위해서 종종 가지치기를 하곤 했는데, 그 부산물이 바로 오행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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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백 년 이상이면 백년오행목, 천 년 이상이면 천년오행목으로 분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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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탐냈던 천년토영목은, 천 년 넘게 산 토영인면목이 잘라낸 곁가지였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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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수림 표층부를 지배하는 거대 영목들이 산수 집단의 출입을 막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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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데없이 크고 둔한 나무 종족의 손으로는 만족스러운 가지치기가 거의 불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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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행인면목들에게는 인간 정원사가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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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용사와 이발하는 손님의 관계와 비슷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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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행인면목들은 만족스럽게 가지치기를 끝내고, 자기 몸에서 떨어져 나온 곁가지들을 정원사에게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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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 영목 입장에서는 곁가지였지만, 사람이 보기에는 통나무와 그다지 다를 바 없는 크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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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사도, 오행인면목도 행복한 공생 관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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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시중에 유통된 오행목은 대부분 인형을 제작할 때 사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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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술사들이 가장 선호하는 재료가 목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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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생물을 생물로 만드는 게 인형술의 종착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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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부터 생물의 일부였던 목재야말로 최고의 인형 재료라는 건 어찌보면 당연한 논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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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오행인면목의 목재는 어떤 속성의 법력과 만나도 반발하지 않고 잘 어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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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재 주제에 서로 다른 속성을 지닌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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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화법력은 화영목을, 정금법력은 금영목을 사용하면 효율 감소 없이 인형술을 사용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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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술이라는 법술에는 순수 법술적 특징과 순수 법기적 특징이 혼재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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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인형이란 만드는 인형술사의 실력이 절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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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나머지 절반은 재료의 품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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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동대륙에서 인형술이 주류가 된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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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율성과 범용성, 심지어 한계점까지 높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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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술을 안 쓰는 사람이 바보가 되는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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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여타 법술과 법기 따위는 대부분 사장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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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술사는 점차 증가했고, 너도나도 오행목을 차지하고 싶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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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결과, 비극이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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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보 고약한 어떤 거대문파가 문제를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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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정당당한 가지치기가 아니라, 거대 영목 멱따기를 통해서 오행목의 대량 확보를 시도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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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오행인면목을 죽이고, 해당 문파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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쪼잔하게 가지치기를 왜 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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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을 뎅강 쳐버리면 오행목이 복사가 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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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도 빨리 해라, 재료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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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돈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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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통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나도 땅을 사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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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옆에서 보니까 굉장히 쉬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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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거대문파 연합이 대수림으로 우르르 몰려갔고, 사상 초유의 비극이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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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말 그대로 대자연과 싸우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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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야 가득한 고위 법술을 무더기로 얻어맞고 고위계 수사들조차 파리목숨처럼 죽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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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수림의 주인된 입장에서는 희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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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행인면목들은 방어 전쟁에서 완승한 뒤, 수도문파를 모조리 대수림 밖으로 내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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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비실비실한 산수들은 봐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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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치기해 줄 정원사도 필요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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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본곡이라는 중립 도시가 탄생한 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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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일단 예술의 거리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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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사들이 모여 사는 장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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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업을 하며 파트너를 물색할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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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 조합에 가서 영업 신고를 하자, 접수 업무를 보던 조합원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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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 조합 정식 정원사로 등록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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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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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가입하시면 광고비 지원과 임대료 할인 혜택도 적용되는데 괜찮으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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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입하면 가지치기 보상을 전부 경매장에 우선 매각해야만 하는 조항도 있잖아요. 안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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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인형 재료가 필요해서 정원사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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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 조합 혜택이 아무리 좋아도 오행목을 경매장에 넘겨야하는 조건이라면 수락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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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서란은 비조합원 정원사로 등록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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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영업장을 마련하기 위해서 담당자에게 가자마자 사회의 쓴맛을 톡톡히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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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부지는 조합원에게만 허용된 장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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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이 건물은 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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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곳도 조합원 전용 임대 건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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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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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합원으로 가입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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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입 안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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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강사 생활로 많은 부를 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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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조합원이 아닌 탓에 번화가 대신 인적이 드문 골목 안쪽에 영업장을 차릴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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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이 아무리 많아도 허가가 안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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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외 광고를 신청할 때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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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큰 광고판으로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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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 설치 담당자가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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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합원이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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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뇨, 그러면 중간 크기는 가능한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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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간판 정도는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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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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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 조합에 가입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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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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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 조합 녀석들은 굉장히 끈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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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문파의 후원으로 유지되는 이 집단은 돈 주는 사람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필사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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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사를 계속 조합원으로 만들고, 이를 통해서 경매장에 넘기는 오행목 할당량을 채워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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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 조합은 말로만 산수 집단이지, 사실상 거대문파의 산하 기관이나 다름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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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수림 출입이 금지된 거대문파도 이들 덕분에 간접적으로나마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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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도적인 자본력으로 예술의 거리 주요 지점을 독차지한 뒤, 차별 정책을 펼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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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행인면목들은 이런 사소한 문제에 대해서는 관심이 전혀 없어서 더 큰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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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서란은 입간판 하나만 겨우 챙겨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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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바닥만 한 널빤지로 만든 허접한 물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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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속 옐로카드가 마구마구 누적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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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영업장까지 가면서 속으로 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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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무슨 보드게임하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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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 하나 통째로 차지하면 통행료 두 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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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더러워서 못 해 먹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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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덜거리면서 허름한 영업장을 정리하고, 입간판에 광고 문구를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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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별로 만들어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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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 정원사 류서란이 예술의 거리에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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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랍게도, 누구 하나 관심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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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수 마감까지 고작 열 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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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최선을 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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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 문구가 적힌 조그만 팻말 하나 들고 번화한 거리로 가서 홍보에 힘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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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비행 광고가 금지된 탓에 작은 키를 보완하려고 팻말을 번쩍 들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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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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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에 있는 바오밥나무보다 몇 배 이상 거대한 오행인면목들에게는 서란이 보이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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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미가 아무리 크게 소리쳐도 코끼리 귀에는 전혀 안 들리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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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형 광고판만 내걸 수 있었다면, 이런 차가운 무관심을 겪을 일도 없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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춥고 눈 오는 날, 거리를 방황하던 성냥팔이 소녀의 심정을 확실하게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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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점차 시무룩해져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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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만 있으면 밥을 안 먹어도 배부른 사람은, 관심이 없으면 시들어 버리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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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게 울리던 목소리도 기어들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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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누군가 서란에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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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미목대회에 참가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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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고개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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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뿌리로 된 두꺼운 두 다리가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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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뒤로 젖힐수록 줄기, 팔, 얼굴과 머리 위로 자란 풍성한 가지들이 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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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다니는 나무 거인, 오행인면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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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가 소심해 보이는 얼굴로 우물쭈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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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혹시 아니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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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크게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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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뇨, 참가자가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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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을 듣고 나무의 얼굴이 살짝 밝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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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은 마친 서란이 상대의 대답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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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오행인면목은 입만 우물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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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냥 서란이 먼저 말을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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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목대회에 참가하실 생각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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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들릴까 봐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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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상대에게도 들린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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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보다 더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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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더니 돌연 사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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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죄송합니다. 방금 한 질문은 잊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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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떠나가려는 오행인면목을 붙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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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잠깐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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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행인면목은 또 시키는 대로 멈춰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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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목대회에 참가하고 싶으신 거 아닌가요?! 관심이 있으시다면 저와 함께 대회에 참가합시다! 저도 아직 짝이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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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말을 고르던 오행인면목이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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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원래는 마음이 있었는데... 다시 생각해보니까 영 자신도 없고, 주제 넘은 짓 같아서요. 아무튼 귀찮게 해서 죄송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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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포기하지 않고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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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자신이 없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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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줄기나 가지도 굵고, 아무튼 좀 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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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에요, 충분히 멋진 나무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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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오행인면목의 미의식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자기 나름대로 솔직하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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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앞에 있는 거대 영목은 사람 입장에서 보면 충분히 멋진 나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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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찬을 들은 나무 거인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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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요? 어떤 점이 멋진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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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즉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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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기가 꼿꼿한 게 정말 나무다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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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의 대답을 듣고 굉장히 동요하던 오행인면목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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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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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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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행인면목이 한 번 더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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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때문에 당신까지 웃음거리가 될 지도 몰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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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요, 저도 초보자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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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서란의 정원사 경력은 며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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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이 발견되기 전에 심심풀이로 잠깐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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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참가 신청부터 하고 연습할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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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고민하던 오행인면목은 결심한 듯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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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요, 함께 미목대회에 나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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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활짝 웃으며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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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우리 통성명부터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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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곧은 줄기라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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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류서란이에요! 반가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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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만나서 반가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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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행인면목이 작은 손짓으로 인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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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도 손인사 대신 팻말을 힘차게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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팻말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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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별로 만들어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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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 정원사와 소심한 나무는 짝꿍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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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가 접수는 순식간에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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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에 허름한 영업장으로 돌아온 서란과 곧은 줄기는 사이 좋게 앉아서 한담을 나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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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목대회는 가을까지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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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출전하는데 서로 서먹서먹하면 곤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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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기를 나눈 결과, 곧은 줄기의 나이는 이백 살이 조금 넘는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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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편하게 말을 놓으라며 곧은 줄기가 부탁했고, 서란도 흔쾌히 수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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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나이로 오 년 가까이 살아온 서란은 어느새 설정에 반쯤 잡아먹힌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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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은 줄기의 어깨에 앉아있던 서란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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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미목대회는 평가 기준이 어떻게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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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모 점수와 무용 점수를 합산해서 순위를 결정해요. 심사위원은 속성별로 한 분씩 총 다섯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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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랬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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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은 줄기가 의아한 듯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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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모르셨나요? 정원사분들은 다들 아시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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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정원사 등록한 지 한 달도 안 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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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 그대로 초보자셨군요. 그런데 미목대회에는 갑자기 왜 참가하시는 건가요? 신규 정원사들을 위한 작은 대회도 많은데, 처음부터 이렇게 큰 대회는 부담스럽지 않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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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솔직하게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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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년토영목이 가지고 싶어서 참가하게 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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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쩐지, 그래서 별이 되게 해준다고 광고를 하셨던 거군요. 삼등만 해도 천년오행목 중 하나를 선택해서 받을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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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못 알아들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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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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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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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해지는 단계라서 대화가 종종 끊기고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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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과 곧은 줄기는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며 새로운 화제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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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찾은 건 서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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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미목대회에는 무용 점수도 있다고 했잖아. 혹시, 춤은 출 줄 알아? 예전에 배웠다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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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은 줄기도 곧장 화제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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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백 년 전부터 틈틈이 연습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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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하네, 백 년 전이면 저번 미목대회가 열린 해부터 준비한 거잖아. 올해에 출전 안 했으면 엄청 아쉬울 뻔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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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은 줄기가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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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헤, 그러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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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도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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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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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 번 침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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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다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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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춤 한번 보여줄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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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그건 좀 부끄러운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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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대회 나가면 무대 위에서 춰야 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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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그러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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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고 보니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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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은 줄기는 쭈뼛거리며 일어나더니, 서란을 땅에 내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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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부드러운 동작으로 춤추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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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반주 무용이 끝난 뒤, 서란이 박수를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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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잘한다! 연습 진짜 많이 했나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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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에게 보여주는 건 처음인데, 괜찮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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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정말 예쁘더라. 그런데 조금만 더 자신감을 가지고 춤췄으면 좋겠어. 약간 주눅 든 표정이더라. 그거 말고는 완벽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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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신감, 그렇죠. 무용 선생님도 매번 그러셨는데, 고치려고 해도 잘 안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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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하지 마, 내가 예쁘게 꾸며 줄게. 장식도, 가지치기도 나한테만 맡겨. 너는 일등을 하겠다는 마음가짐으로 무용 연습에만 힘을 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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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은 줄기가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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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등이요? 우리 목표는 삼등이 아니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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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도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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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등? 전혀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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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어째서 별로 만들어 드린다는 광고 문구를 내세우셨나요? 삼등이 목표라는 뜻 아니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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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은 무슨 별? 거기에 무슨 의미가 있는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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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은 줄기는 서란의 표정을 보고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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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참가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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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차근차근 설명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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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목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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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년마다 가장 아름다운 나무를 뽑는 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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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별에 따라서 남성 부문과 여성 부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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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속성끼리 치르는 예선전을 거치고, 예선 상위 오등까지 본선에 진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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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선에 모인 스물다섯 오행인면목들끼리 미모와 무용으로 일등, 이등, 삼등을 가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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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등은 태양을 상징하는 일미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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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등은 달을 상징하는 월미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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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등은 별을 상징하는 성미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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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목대회 관련으로 ‘별이 되었다.’라는 건 흔히 ‘삼등을 차지했다.’라는 뜻을 나타내는 관용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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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이 설명을 듣고 나서야 자신에게 쏟아졌던 무관심을 이해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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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이 터져라 소리쳤던 광고 문구는 당신을 삼등으로 만들어 드리겠다는 괴상한 의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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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지식이 있는 오행인면목들 입장에서는 도무지 의도를 짐작할 수 없는 외침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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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 배운 서란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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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저번 미목대회 일미목은 누구였어? 어떻게 꾸밀지 궁리할 때 참고하게 알려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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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대 일미목은 불타는 가지라는 화영인면목이었어요. 무용 실력도, 꾸민 미모도 뛰어났죠. 최연소 일미목인데, 정말로 굉장하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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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는 가지? 그게 이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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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맞아요. 화영인면목이던 할머니의 이름을 물려받았는데, 항상 자랑스러워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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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자세히 알고 있네, 혹시 둘이 친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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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뇨, 딱히 그런 사이는 아니고... 그냥 어쩌다 얘기를 나눈 적이 있을 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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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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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침묵이 오고, 화제가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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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은 어두워질 때까지 얘기하다가 잠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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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곧은 줄기는 꿈을 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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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속에서 그녀는 어릴 적 모습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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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치고는 굵은 줄기와 가지, 그리고 항상 주눅 들어 있는 표정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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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은 줄기는 굉장히 소심한 나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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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래 친구들과도 잘 어울리지 못했고, 말실수를 지나치게 염려하느라 말수도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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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은 평생 외롭게 살 팔자라며, 지레 포기한 채 예쁘고 자신만만한 또래들을 부러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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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는 가지도 그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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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활 타오르는 아름다운 가지, 자신과 다르게 매끄러운 줄기, 그리고 스스로에 대한 확고한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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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십이라는 어린 나이 때문에 미목대회에 참가하지는 못했지만, 그녀는 태양처럼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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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런 미목과 자신은 결코 같은 자리에 설 수 없겠지, 그런 생각을 자주 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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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우연히 그럴 기회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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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추종자를 몰고 다니던 불타는 가지와 언제나 혼자 있는 모습만 보이던 곧은 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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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나무는 어쩌다 한자리에 단 둘이 남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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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 기억은 안 나지만, 곧은 줄기는 멍하니 불타는 가지를 바라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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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는 가지가 시선을 느끼고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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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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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은 줄기는 곧장 사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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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미안해... 네가 너무 예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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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는 가지는 시원스레 웃더니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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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좋게 봐줘서 고마워. 너도 정말 예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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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황한 곧은 줄기가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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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어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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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을 받은 불타는 가지는 이렇게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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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가 참 곧아, 별처럼 빛날 자질이 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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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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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 전후에 있었던 일은 기억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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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불타는 가지와 나눈 대화만은 백오십 년이 지난 지금도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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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은 줄기에게는 결코 잊지 못할 기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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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이 끝나고, 곧은 줄기가 잠에서 깨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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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본 불타는 가지의 옛 얼굴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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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백 살이 되자마자 미목대회에 출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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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압도적인 점수 차로 일미목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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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부신 미모와 아름다운 춤사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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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목대회에서 일등을 한 뒤 보여준 의연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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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말로 태양처럼 빛나는 나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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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광경이 곧은 줄기를 사로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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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회가 끝나고 곧장 무용을 배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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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백 년 간 하루도 쉬지 않고 반복한 연습은 곧은 줄기를 훌륭한 무용수로 만들어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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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는 가지에 대한 동경이 그녀를 바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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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마지막 한 발짝을 내딛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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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는 가지처럼 되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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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렇게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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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보고 별이 될 자질이 있다고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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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그저 예의상 칭찬했던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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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목대회에 나가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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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히 나갔다가 비웃음거리만 되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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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은 줄기는 변화를 바랐지만, 두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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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생각이 복잡해진 그녀는 산책을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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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막한 밤 거리를 걸으며 쉬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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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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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곧은 줄기는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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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한 보름달 아래, 자기와 함께 미목대회에 참가할 정원사가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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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늦은 시간까지 잠자리에 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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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을 조명 삼아 점토를 만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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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잠에서 깬 곧은 줄기를 보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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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혹시 나 때문에 시끄러워서 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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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뇨, 마침 잠이 안 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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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또,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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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방금 전까지 하던 일을 계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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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로 된 다리, 줄기와 가지, 그리고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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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이서 본 점토는 곧은 줄기를 닮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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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은 줄기가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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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한밤중에 뭘 하고 계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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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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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어떻게 꾸밀지 고민하고 있었어. 개인적인 생각인데 우리는 곧고 튼튼한 줄기를 강점으로 내세우는 게 좋을 것 같아. 너는 단점이라고 했지만, 내가 보기에는 정말 멋지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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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잠도 안 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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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도저히 잘 수가 없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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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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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를 떠나는 곧은 줄기에게 서란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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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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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산책을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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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은 줄기는 한참 동안 멍하니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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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서란과 만나게 된 건 정말 우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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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처럼 시선을 내리깔고 걷다가, ‘당신을 별로 만들어 드립니다!’라고 적힌 팻말을 흔들던 정원사가 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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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이라는 문구를 보고 저도 모르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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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미목대회에 참가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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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하고 싶다는, 별이 되고 싶다는 갈망 덕분에 간신히 용기를 내서 건넨 물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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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꺼내고 곧장 후회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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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그녀를 붙잡지 않았다면 미목대회에 참가조차 하지 않았을 게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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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은 줄기는 아까 본 서란의 얼굴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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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토를 주무르던 서란의 얼굴은 확신에 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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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 믿음은 본인을 향한 게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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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곧은 줄기를 향한 확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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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은 줄기는 밤하늘을 올려다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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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불타는 가지는 이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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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가 참 곧아, 별처럼 빛날 자질이 보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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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만난 서란은 이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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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기가 꼿꼿한 게 정말 나무다워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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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현은 다르지만, 결국 둘 다 같은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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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치고는 굵은 줄기와 가지, 소심한 성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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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은 줄기는 스스로를 믿지 못했지만, 그들은 기꺼이 그녀에게 믿음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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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은 줄기의 내면에서 열망이 피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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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내 별이 될 수 없을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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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칭찬이 그저 겉치레였을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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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수를 해서 비웃음거리가 될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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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은 줄기는 믿음을 가지고 나아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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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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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빛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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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이 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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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광에 가려졌지만, 밤하늘에도 별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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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선전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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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년에 한 번 있는 미목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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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가자들이 대수림 표층부 전역에서 모여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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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목대회가 열리는 태본곡은 오행인면목과 정원사들로 한창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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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선전은 열흘에 걸쳐서 치러질 예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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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선에 진출할 수 있는 건 상위 오등까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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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하게 생각하면 이틀에 한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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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치의 아쉬움도 남기지 않기 위해, 참가자들은 여태까지 쌓아올린 결실을 여지없이 발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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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일째 예선전, 정원사로 참가한 서란 역시 무대 뒤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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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장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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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아름다운 나무를 뽑는 미목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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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종류의 대회에 참가하는 오행인면목들은 기본적으로 본인 외모에 대한 자신감이 넘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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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강한 자기 확신이란, 흔히 더 큰 성취를 향한 원동력으로 작용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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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목대회 참가자들은 모두가 이 순간을 위해서 평생 동안 목피가 닳도록 노력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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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을 익히는 것도, 미모를 가꾸는 것도 무엇 하나 쉽고 편한 과정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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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나가 볼까?’ 같은 어설픈 각오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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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오늘 이 자리에 목숨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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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지 목표를 위해 평생을 쏟는 건 고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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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고행자들만이 이런 아름다움을 뿜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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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불태웠기에 얻을 수 있는 찬란한 색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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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이 순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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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불태워, 태양처럼 빛났기에 일미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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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처럼 빛났기에 월미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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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처럼 빛났기에 성미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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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하늘 저 너머의 광체에 빗댄 미목대회의 상패 명칭에는 그런 의미가 담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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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부신 광채를 내뿜던 참가자의 차례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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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줌의 여력도 남기지 않고, 모든 걸 불태운 참가자는 무대를 내려 가자마자 탈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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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곧장 다음 참가자가 무대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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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에서 지켜만 봐도 전신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압도적인 광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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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더 지켜보지 못하고 대기실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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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둥으로 형태를 잡고, 장막을 친 개인 대기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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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꺼운 천을 걷고 들어서자 곧은 줄기가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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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애써 태연한 표정과 어투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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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은 줄기, 몸상태는 좀 나아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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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은 줄기가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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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을 설쳐서 조금 피곤했는데, 괜찮아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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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이네, 이제 조금만 있으면 우리 차례야. 머리에 얹은 장식은 어때? 춤출 때 거추장스럽지는 않겠어? 약간 정도는 지금도 조정할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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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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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정도면 충분해요. 정원사님이 잠도 안 자고 열심히 개량해 주셨잖아요. 이 장신구를 착용하고 있으면 섬세한 배려가 느껴지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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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아, 그러면 기력은 어때? 내가 비옥토랑 영양제도 챙겨왔거든? 뿌리라도 잠깐 묻어 둘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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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뇨, 지금이 딱 좋은 것 같아요.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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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도 더는 권유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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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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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그녀는 잔뜩 긴장한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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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은 줄기는 속으로 같은 문구를 되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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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을 보지 마라. 몸을 곧게 펴라. 자신을 가져라. 땅을 보지 마라. 몸을 곧게 펴라. 자신을 가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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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손끝은 여전히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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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몸의 수액이 바짝바짝 마르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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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곧은 줄기의 차례가 코앞까지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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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막 너머에서 관계자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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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2번 참가자, 무대 뒤에서 대기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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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은 줄기는 외길을 따라 무대 뒤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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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부터는 정원사도 그녀를 도와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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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신을 뒤흔드는 긴장감도 최고조에 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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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선이 자연스럽게 내리깔리고, 무거운 장신구가 그녀를 짓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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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힘껏 다져 놓은 의지에도 금이 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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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어라 연습한 무용 동작마저 기억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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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곧은 줄기의 차례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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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신히 무대 위에 올랐지만 거기까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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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 춤을 출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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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리 신청했던 반주가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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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래서는 안 돼! 최소한 부끄럽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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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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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곧은 줄기는 가루가 된 용기를 그러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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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땅을 기던 시선을 간신히 들어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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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덕분에 발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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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 멀리 관객석에 불타는 가지가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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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극도로 짧은 찰나, 무수한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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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째서 여기에 있지? 자기 예선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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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나랑 예선전 날짜가 다르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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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지만, 뭘 위해서 목속성 예선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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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곧은 줄기는 이내 정신을 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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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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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유는 모르겠지만, 불타는 가지가 여기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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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생을 동경해 온 대상 앞에서 꼴사나운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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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가 바로 곧은 줄기의 태양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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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속 되뇌이던 문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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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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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땅을 보지 마라. 몸을 곧게 펴라. 자신을 가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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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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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연한 시선, 곧은 자세, 그리고 자기 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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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곧은 줄기는 이내 자신을 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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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그리고 스스로를 태우며 빛을 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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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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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광에도 가려지지 않을 정도로 밝은 광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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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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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란이 정한 치장 방향성은 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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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굵은 줄기와 가지란, 곧 체격적 우위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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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제로 곧은 줄기는 평균보다 높은 체고에도 불구하고 우수한 운동성을 지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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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다면 이 부분을 전면으로 내세우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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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란은 우선 곧은 줄기의 곁가지를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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덥수룩하던 가지를 깔끔하게 정리하고, 나머지는 석재 기둥을 중심으로 높이 엮어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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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로 길쭉하게 솟은 잎사귀와 가지, 그 꼭대기에는 돌로 조각한 둥지와 인면조 조각상이 얹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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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년오행목 심사위원들은 곧은 줄기의 독특한 치장 양식에서 굉장한 파격성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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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뜩이나 평균을 웃돌던 체고는 석재 장신구에 엮어 올린 가지 덕분에 한층 높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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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과거부터 큰 키란 비범함의 상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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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곧은 줄기는 마치 지상에 내려온 여신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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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찬 무용 동작도 눈길을 사로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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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고 길쭉한 줄기와 가지가 움직일 때마다 잔뜩 묶어 놓은 장식 천이 형형색색 휘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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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이라면 진작에 중심을 잃었을 장신구 무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동작은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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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심함 속에 감춰진 눈부신 외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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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사의 미적 감각이 돋보이는 파격적 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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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가 짓무르도록 연습한 무용 기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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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동경하는 태양 곁에 서겠다는 열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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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자기 전부를 불태우고 무대에서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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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은 줄기는 탈진한 상태로 관객석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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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처럼 불타는 가지도 박수를 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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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일째 예선전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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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과 곧은 줄기는 돌아가서 죽은 듯이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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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흘러 남은 예선전 일정도 모두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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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선 참가자 곧은 줄기, 본선 진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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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살벌한 경쟁률을 뚫고 살아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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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속성 예선전 최종 등수는 일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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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정말 기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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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랬잖아, 너 예쁘다고! 곧은 줄기, 네가 올해 참가한 목영인면목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무야! 예선전 일등이라니, 출발이 굉장히 좋아! 본선에서도 이대로만 가자! 일등까지, 일미목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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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일등이라도 맡겨 놓은 것처럼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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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곧은 줄기가 미목대회 본선에서 높은 등수를 차지할수록 서란의 이득도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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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등에게 수여되는 천년오행목은 단 하나였지만, 이등에게는 각기 다른 속성 세 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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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그녀가 일미목이 되기라도 하면 천년오행목 다섯 종류를 전부 받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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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화수목금토 다섯 가지, 오속성 천년오행목으로 만든 변신합체 거대인형을 꿈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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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서란의 바람이 이루어지는 일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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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다섯 오행인면목이 선보인 놀라운 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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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도 눈을 뗄 수 없는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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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모 점수와 무용 점수를 합산한 천년오행목 심사위원들이 미목대회 최종 순위를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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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은 줄기는 삼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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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영인면목, 곧은 줄기. 삼등, 성미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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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들이 열렬히 환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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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성미목의 탄생을 축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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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이 산산조각 난 서란만 혼자 중언부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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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라, 일등은? 내 화수목금토 천년오행목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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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거나 말거나 대회 절차는 계속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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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영인면목, 흐르는 잎사귀. 이등, 월미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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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등은 저번 회차 대회와 동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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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영인면목, 불타는 가지. 일등, 일미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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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회 마지막 절차, 상패 수여식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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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미목을 중심으로 좌우로 선 월미목과 성미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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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예로운 칭호가 새겨진 상패가 전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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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광하는 관객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던 도중, 옆자리의 불타는 가지가 넌지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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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여전히 자세가 곧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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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옆자리에게만 들릴 작은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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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곧은 줄기는 분명히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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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난 전율이 줄기와 가지를 타고 내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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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을 기억하고 있었구나. 그냥 예의상 한 말이 아니었어. 진심으로 그렇게 믿었던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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떨리는 음성으로 곧은 줄기가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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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그때 당신이 봤던 별이 됐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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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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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답을 듣고 충격받은 곧은 줄기에게, 불타는 가지는 어린 시절처럼 시원스레 웃으며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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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태양처럼 빛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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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목대회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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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목대회 다음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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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금방 기운을 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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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한 회복 탄력성 덕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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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삼등 성미목이 된 것도 기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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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더는 아쉬워하지 않고 현재를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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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천년토영목을 온몸으로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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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히 목재건마는, 마치 점토처럼 부드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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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단전에 있는 토영근이 천년토영목과 감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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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토영목의 농밀한 토영기에 과할 정도로 심취한 서란에게 곧은 줄기가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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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이 남성 부문 미목대회 본선인데, 함께 보러 가실래요? 불타는 가지도 같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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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안 될 것 같아. 가 봐야 할 곳이 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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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를 가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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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잔뜩 눌려 발갛게 변한 얼굴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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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돌아갈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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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급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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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외유가 너무 길어지기도 했고... 더 있으면 정들어서 떠나기 힘들어질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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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은 줄기는 잠시 침묵하더니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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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군요, 그 동안 정말 감사했습니다. 정원사님이 아니었다면 저는 영원히 변할 수 없었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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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더 고맙지, 천년토영목도 얻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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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과 곧은 줄기는 현격한 체구 차이에도 불구하고 조심스레 서로를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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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라도 다시 볼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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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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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다, 먼 미래에는 어쩌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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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행인면목은 수천 년을 살아요. 계속 기다릴 테니까, 반드시 다시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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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꼭 그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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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년이라는 짧은 인연을 끝으로, 서란과 곧은 줄기는 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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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로 종족을 초월한 아름다운 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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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로 멋진 광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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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무명으로 미목대회에 첫 출전해서 성미목을 탄생시킨, 파격적이면서도 아름다운 가지치기 및 치장 솜씨로 화제 몰이를 한 신규 정원사 류서란’을 찾아온 오행인면목 손님들은 당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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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이게 무슨 소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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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름한 영업장 앞에는 팻말이 하나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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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사 류서란, 오늘부로 폐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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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이 밀려 들어오는 상황에서 사공이 노를 안 젓고 나룻배에서 냅다 뛰어내려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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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인상적인 퇴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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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전송진을 밟고 동대륙으로 날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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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착과 동시에 전송 문양을 박살낸 건 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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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퇴로를 끊어버린 지 벌써 오 년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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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도 그 동안 마냥 놀기만 한 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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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땅한 귀환 경로는 결국 해로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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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안전한 바다가 기록된 항해도를 수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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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균열 탓에 영기가 고갈된 바닷가는 쓸모가 없어졌고, 항해도 가격도 덩달아 헐값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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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모아 온 지도 뭉치가 어느새 한 상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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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서대륙까지 이어진 항로를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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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뭘 타고 돌아갈지 정할 차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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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곧장 비행 법기 판매점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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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오세요, 어떤 비행 법기를 찾으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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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을 실을 수 있는 범선형 법기 중에서 가장 크고 빠른 게 뭔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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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객원은 서란을 데리고 안쪽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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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물건은 어떠실까요? 화물도 많이 적재할 수 있고, 속도 역시 개인용 비행 법기 못지않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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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약간 아쉬운 듯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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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큰 건 없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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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객님, 이 법기보다 큰 규모의 비행 법기는 산수가 구매하실 수 없습니다. 수선계 국제법으로 금지하고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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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법을 도대체 누가 만들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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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십대문파들이 만들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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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악질도 아주 골고루 부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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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이걸로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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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로 개수나 추가 구매가 필요하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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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목록이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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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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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목록을 받아서 살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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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량 구매 시 추가하는 옵션 같은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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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별생각 없이 위에서부터 긁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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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부터 여기까지 전부 추가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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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고객님!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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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객원은 함박웃음과 함께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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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남아서 차를 마시던 서란은 문뜩 잊고 있던 범선형 법기 하나를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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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저 세계의 골칫거리, 흑린역류혈사를 퇴치한 대가로 받은 변신괴뢰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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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순 로켓 만들 때 채석장에 박아두고 지금까지 완전히 까먹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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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 법기 치고는 굉장히 느려터진 물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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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특유의 변형 기능 만큼은 흥미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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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돌아가면 잊지 않고 분해해 볼 작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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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멀리서 접객원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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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객님, 개수가 끝났습니다! 배달해 드릴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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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술 덕분인지 정말로 빨리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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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뇨, 타고 갈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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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바로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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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수표로 값을 지불하고 범선에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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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본곡으로 돌아간 서란은 천년토영목과 산더미처럼 쌓인 영석을 화물칸 내부에 차곡차곡 적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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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단기 수사의 장거리 항해에 식량은 필요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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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물칸을 가득 채우고도 남은 영석은 그냥 주거래 은행에 예치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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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해 준비를 마친 서란이 작별 인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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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이만 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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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은 줄기가 손을 흔들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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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 수사님, 꼭 다시 방문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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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그렇게 대수림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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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닉 결계를 두른 범선이 동대륙 하늘을 날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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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물칸이 꽉 차서 배가 무거웠지만, 고향으로 돌아가는 서란의 마음만은 가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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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을 가르며 날던 도중, 속도가 느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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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기가 고갈된 동대륙 변방, 일명 무영지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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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잠시 조타를 멈추고 지상을 내려다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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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기의 자정 능력이 사라진 무영지대는 정말 눈뜨고 볼 수 없는 참혹한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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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실거리는 탁기에 지표면이 전부 잠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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봐도 봐도 익숙해지지 않는 광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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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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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왝 구역질하곤 다시 조타륜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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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이 땅을 떠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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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토법력을 잔뜩 주입하자 범선이 가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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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선은 금방 바다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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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바다가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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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범선을 바다 위에 착륙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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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비 주행을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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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앞에 펼쳐진 드넓은 수평선과 하얀 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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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탄을 금치 못할, 참으로 낭만적인 풍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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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 뜨거운 열혈남아라면 누구나 내면에 범선 한 척 정도는 품고 사는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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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바다사나이 서란도 참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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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돛을 올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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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의 명령에 선원 인형들이 일제히 눈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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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선을 살 때 추가 구매한 옵션 구성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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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각인형 스무 개가 일사불란하게 돛을 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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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을 제대로 받은 돛이 활짝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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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 바닷바람에 서란의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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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미리 구매한 안대를 한쪽 눈에 착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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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아무도 선장을 막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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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침함, 출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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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타륜을 잡은 서란이 법력을 운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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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 뒤쪽에 달린 추진기가 굉음을 내며 작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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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의 불침함(방금 작명했다.)이 급가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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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자, 전속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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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해도에 따르면 이 부근에는 암초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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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서란도 망설임 없이 속도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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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침함은 서쪽을 향해서 맹렬히 전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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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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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하하, 아하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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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엄청난 충격이 불침함을 강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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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아아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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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침함은 굉음을 내며 반파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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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소하던 서란도 타륜과 함께 나뒹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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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까지 젖히며 신나게 웃느라 전방 주시를 태만히 한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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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판 위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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돛이 달린 기둥은 뚝 부러졌고, 선원 인형들 역시 충돌과 함께 튕겨나가 바다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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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체가 우리 다 죽는다며 절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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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뽑힌 타륜을 두 손에 들고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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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무슨 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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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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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수면 위로 고개를 내민 심해거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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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김새는 평범한 여자아이였지만, 머리 크기가 서란의 불침함보다 거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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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해거인이 이마를 쓰다듬으며 울상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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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방금 무슨 일이 있었는지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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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침함은 최고 속도로 심해거인과 충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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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수면 아래에서 머리를 내밀던 심해거인의 이마를 냅다 들이박은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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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과실 비율을 고민하고 있을 때, 어린 심해거인이 울음을 터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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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아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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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가 아니라 몸으로 듣는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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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선체까지 드드드드 진동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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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다급히 사과했지만 소용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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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렁찬 울음소리 때문에 안 들렸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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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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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심해거인 소녀가 울음을 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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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힝, 아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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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를 달래느라 지친 서란이 힘없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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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미안해. 그런데 왜 이런 얕은 곳에 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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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해거인은 이름처럼 심해에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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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치가 너무 커서 머리까지 전부 잠기는 곳이 심해 이외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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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심해거인의 아이가 이런 연해 한복판에 있는 건 조금 이상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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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해거인이 코를 훌쩍이며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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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놀러 나왔다가 길을 잃어버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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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불쌍한 마음에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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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랑 같이 갈까? 부모님 찾아 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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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아빠가 모르는 사람 따라가지 말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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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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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배웠구나. 언니는 그만 갈게, 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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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반파된 불침함을 몰고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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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저 멀리 얼마쯤에서 반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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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심해거인 앞으로 돌아온 서란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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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만났네, 우리 이제 모르는 사이 아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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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해거인이 아리송한 얼굴로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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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그런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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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 이름이 뭐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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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소소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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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이 약간 안 어울리는 것 같았지만, 서란은 굳이 그 생각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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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침함이 앞장서자 소소가 따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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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의 미아 보호는 얼마 가지 않아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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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평선 너머에서 원근감을 무시하는 존재감의 심해거인 둘이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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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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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야! 우리 딸, 소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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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갔었니, 걱정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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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적인 가족 상봉 현장으로 서란의 불침함(반파)이 엉금엉금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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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류서란이라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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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한 잔 마실 시간 정도 함께한 소소가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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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언니가 나 여기까지 데려다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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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심해거인이 눈물을 흘리며 감사 인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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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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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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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한 게 없는 서란이 손사래를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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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닙니다, 아닙니다. 저는 아무것도 안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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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서란의 진심은 전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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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말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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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습니다, 우리 소소를 도와주셨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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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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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해거인들은 서란을 집까지 초대할 기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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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아무리 사양해도 통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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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갈 길이 바쁘다는 말까지 하고서야 심해거인의 친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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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심해거인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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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은인께서는 어디로 가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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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서대륙으로 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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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심해거인이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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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세상의 중심을 통과하시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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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한 항로가 거기뿐이니까, 아마도 그렇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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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가 대뜸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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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거기로는 가면 안 돼! 나쁜 용이 살고 있단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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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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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심해거인이 서란의 물음에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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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독안룡이 세상의 중심을 가로막고 지나가는 모든 존재를 무차별적으로 공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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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안룡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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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건 별명입니다. 한쪽 눈이 없어 그리 부릅니다. 용이란 원래 이름 없는 영물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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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난생처음 듣는 소리에 당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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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안룡이 세상의 중심에서 길을 막고 있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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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이천 년도 더 된 일입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세상의 중심에서 떠나질 않더군요. 수백 년 전에는 비승을 시도하던 화신기 수사를 죽인 일도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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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장히 흉폭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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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독안룡의 존재가 동대륙이나 서대륙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 이유를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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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계에서 화신기 수사를 죽이는 것이 가능한 존재는 여의주를 완성한 용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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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천 직전의 용이 작정하고 살육을 벌이면 화신기 수사라고 해도 살아서 도망갈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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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승천을 안 하고 있는지는 의문이었지만, 이대로 세상의 중심으로 향하는 건 자살 행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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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곧장 배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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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랐으면 목숨이 위험할 뻔했네요.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저는 이만 가 볼 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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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가 손을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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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잘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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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려는 서란에게 아빠 심해거인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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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도로는 은혜를 다 갚을 수 없죠. 제가 괜찮은 무술을 하나 알려 드리겠습니다. 원래 다른 종족에게 유출해서는 안되지만, 이제는 상관없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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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심해거인이 전심술을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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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심술은 특정 정보를 타인에게 전달할 때 사용하는 법술의 일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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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서란도 동대륙에서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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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투스 파일 전송을 마친 서란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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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막 알려주면 벌 받는 거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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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종족은 이미 반쯤 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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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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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독안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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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뇨, 저출산 문제로 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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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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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친숙한 사회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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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서란도 금방 납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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덤으로 소소가 심해거인의 마지막 핏줄이라는 사실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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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해거인 가족과 헤어진 서란은 할 수 없이 배를 돌려서 동대륙으로 복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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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 세 칸 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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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의 끝 무렵, 서란은 묘나라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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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침함이 굼벵이처럼 날아서 어쩔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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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여태 움직인다는 점에서 이름값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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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익숙한 장소에 착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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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지까지 도착한 불침함이 곧장 뻗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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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파된 범선에서 내린 서란에게 누군가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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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 법기를 팔았던 접객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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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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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옵션 비행 범선이 못 본 사이에 유령선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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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일이 있었죠. 수리가 가능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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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불가능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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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그럴 것 같더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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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탄 신형 범선은 그대로 폐선 처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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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물을 전부 주거래 은행(묘나라 지부)에 맡긴 서란은 천년토영목만 챙겨서 태본곡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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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로 곧은 줄기를 만나러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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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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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은 줄기는 당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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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류 수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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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부쩍 친해진 불타는 가지도 함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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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이 분이 그 유명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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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어색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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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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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침묵하던 곧은 줄기가 손뼉을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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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알겠습니다. 제가 의미를 잘못 이해했었군요. 먼 미래라는 말을 저희 종족 관점으로만 생각했습니다. 그렇죠, 인간들에게는 몇 개월도 충분히 긴 시간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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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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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말이 맞죠, 류 수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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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그냥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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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그치 그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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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정원사 영업도 재개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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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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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찮다고 영업장 안 팔고 갔던 게 신의 한 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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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화제의 정원사가 복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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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식지 않은 미목대회의 열기 덕분에 가지치기하러 오는 오행인면목들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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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순식간에 백년오행목을 잔뜩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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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로 동대륙에 정착하려는 건 결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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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전팔기 오뚜기, 회복 탄력성의 괴물, 근성가이 류서란은 용이라는 장애물에도 포기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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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바닷길이라는 가장 빠른 방법은 포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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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년 먼저 가려고 서두르다가 오백 년 먼저 갈 수는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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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플랜B를 진행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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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전명은 ‘대수림 대탐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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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손된 거 말고, 다른 전송진을 찾을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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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대륙 간 전송진을 하나만 달랑 만들어 놓는 건 어리석은 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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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쪽 전송진이 파손되면 도대체 어쩌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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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희박한 확률이지만, 망가진 쪽에 보수 인력이나 재료가 없는 경우도 충분히 있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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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몇 년짜리 장거리 항해로 인력과 재료를 수송하는 개고생을 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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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생각하기에, 심층부 어딘가에 예비 전송진도 준비되어 있을 게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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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처음 날아왔던 곳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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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수림 탐험은 물론 위험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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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대수림 심층부 따위가 위험해 봤자, 여의주를 가진 용(미치광이)보다는 안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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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가지치기를 한 것도 탐험을 위해서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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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필요한 재료는 충분히 손에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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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준비는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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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행 시기는 여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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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험대라는 독특한 산업은 대수림 심층부와 동대륙 수선계의 특수성에 기인해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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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수림 심층부의 특징은 크게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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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신기 수사 이외에는 비행 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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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흉이 돌아다니는 위험한 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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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위계 수사는 한 발짝만 들어가도 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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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외에도 오행인면목 같은 덩치 큰 종족은 들어갈 수 없다는 점, 명계의 인력이 작용한다는 점, 최심부에 명계로 통하는 대균열이 있다는 점 등 자잘한 특징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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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심층부의 여러 특징을 조목조목 따져보면 한 가지 의문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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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누가 탐험대 구성원이 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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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심층부에서 비행이 가능한 화신기 수사는 비승 준비로 바빠서 대수림을 탐험할 시간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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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심부까지 진입해서 대균열을 조사한 화신기 수사는 굉장히 별난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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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명계에 끌려가서 죽을 뻔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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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영기 수사라면 날 수는 없어도, 심층부에서 자기 몸을 지킬 능력이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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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원영기 수사는 전부 거대문파 소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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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대수림 안으로 들어올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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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단기 수사 중에는 산수 출신도 간혹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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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들도 사람인지라 위험한 대수림 탐험보다는 편하고 안전한 일을 선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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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 금단처럼 강사 생활을 하거나, 거대문파에 입문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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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험 도중 아귀에게 잡아먹혀 백골이 된 결단기 수사는 별종 중 별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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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위계 수사를 전부 제외하면, 연기기 수사와 축기기 수사가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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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저위계 수사는 심층부에 들어가는 즉시 영혼이 뽑혀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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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는 안 들어가고, 나머지는 못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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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남은 방법은 하나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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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탐사용 원격 조종 인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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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탐험대는 사람이 아니라 인형으로 구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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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을 조종하는 건 보통 축기기 수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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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명 정도 모여서 탐험대를 결성하고, 각자 인형을 하나씩 조종해서 심층부로 돌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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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대수림 탐험대의 실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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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괴나 사흉을 만나 탐험대가 전멸하면 실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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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히 큰 소득은 없지만, 무사히 돌아오면 다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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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 좋게 비싼 보물을 발견하면 대성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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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보를 처음 들었을 때, 서란은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투자 상품 같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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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싸고 좋은 인형은 깊숙이 들어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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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사가 덜 된 곳이니 보물이 많아서, 하이 리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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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만큼 복귀율이 낮아서, 하이 리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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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하는 즉시 탐험대와 투자자는 손실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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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여나 파산이라도 했다간, 수행 진척까지 멈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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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적인 죽음과 동시에 미래도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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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산수들이 죄다 도박 중독자라서 이런 고위험 고수익 상품에 뛰어드는 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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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 자원, 강의 수강료, 결단 의식 비용 등 산수에게는 돈 들어갈 구석이 너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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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험이나 투자 성공으로 단번에 목돈을 만들지 못하면 이번 생은 어차피 가망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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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원하는 걸 쟁취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는 위험을 감수할 필요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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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가고 싶은 서란도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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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서란도 무작정 쳐들어가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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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을 감수하는 것과 무모한 건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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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소한의 대비책은 필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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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탐사용 인형을 만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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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료는 가지치기로 얻은 백년토영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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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적인 용도는 위험 확인용 정찰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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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유사시에는 방패로도 사용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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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시야를 위해서 키는 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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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을 사방에서 보호할 수 있게 숫자는 다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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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쓰고 버릴 물건이니까, 조형은 적당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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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구체 관절 인형 오 자매가 완성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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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쭉한 신장과 풍만한 몸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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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묘하게 닮았지만, 다채로운 매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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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말로 경국지색 시스터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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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취향이 듬뿍 들어간 작품을 바라보며, 서란은 만족스러운 듯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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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괜찮군, 정말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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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쩐지 환골탈태가 하고 싶어지는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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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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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수림 심층부, 침식지대에 진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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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바로 명계의 인력이 감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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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과 경국지색 시스터즈가 달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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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창하게 자란 나무 사이로 방치된 지 얼마 되지 않은 거대 구조물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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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폐허는 수백 년 전까지만 해도 오행인면목들이 사용하던 거주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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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씩 넓어지는 침식지대 때문에 오행인면목의 서식지는 지금 이 순간에도 줄어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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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름 정도 달리자 공터가 하나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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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서란이 아귀를 죽인 장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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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지난 탓에 어린 나무와 풀로 무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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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조금만 더 들어가면 무덤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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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부터는 남겨진 흔적만 따라가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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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손쉽게 전송진이 숨겨진 궁전에 도착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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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과 무표정한 인형, 활발한 인형, 음침한 인형, 차분한 인형, 귀여운 인형은 열심히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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닷새 정도 뒤, 마침내 경사면에 지어진 거대한 석재 궁전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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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송진을 밟고 처음 도착한 곳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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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기억을 되짚어 궁전 구석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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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였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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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저기 눌러보던 중 한쪽 벽면이 빙글 회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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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 한 점 없는 깜깜한 비밀 통로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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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로 쭉 따라가면 망가진 전송진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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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호, 조명 좀 비춰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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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표정한 인형의 눈에서 밝은 빛줄기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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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 통로 내부는 먼지로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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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손을 비비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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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 출발해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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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경황이 없어서 제대로 살펴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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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서란은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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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륙 인형술의 정수를 담아 제작한 경국지색 오 자매가 주인을 든든하게 지켜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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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바닥과 벽면, 천장을 샅샅이 조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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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숨겨진 통로가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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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험가의 피가 끓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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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정확히 통로 중간쯤에서 식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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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당최 뭐가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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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점점 귀찮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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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 통로는 봐도 봐도 똑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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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냥 전송진이 있는 방까지 직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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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먼저 보이는 건 박살이 난 전송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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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자매, 조명 좀 사방으로 비춰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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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명령하자 인형 오 자매가 눈에 불을 켜고 이리저리 고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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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송진 근처에 서 있던 서란은 벽에 어떤 막대기가 달려 있는 걸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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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레버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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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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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아래로 내려간 레버를 위로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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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라간 레버는 잠시 후 딸깍하고 저절로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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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굉장히 친숙한 장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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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이 생각하던 서란은 이내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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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걸 뭐라고 부르더라? 누전 차단기였나? 아니면, 두꺼비집? 아, 분명히 알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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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의 예상이 맞다면, 특정 조건만 충족되면 레버가 올라가서 다시 내려오지 않을 게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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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를 싸매고 방 안을 빙빙 돌던 서란은 실수로 돌조각을 하나 걷어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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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진 전송진 파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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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파편을 들어서 가만히 살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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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쪽은 맨들맨들했고, 반대쪽은 울퉁불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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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송 문양이 새겨진 면과 아닌 면의 차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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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를 잃은 서란이 파편을 휙 집어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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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다시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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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을 끙끙거리던 중, 어떤 사실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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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양을 바닥이 아니라 석판에 새겼다는 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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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황급히 전송진 파편을 치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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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네모반듯하게 들어간 바닥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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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여기에 넙적한 석판을 끼우라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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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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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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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송 문양을 석판에 새겼다는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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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라도 고장나면 석판만 교체하는 방식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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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깃집에서 불판 갈아주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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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추측이 맞다면 어디로 날아갈 지도 모르는 새로운 전송진은 찾을 필요조차 전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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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석판 하나만 찾으면 집에 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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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일단 조각 난 석판부터 맞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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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전송 문양을 빈 종이에 고대로 베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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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라도 다른 것과 착각하지 않기 위해서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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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사가 완벽하게 끝나자 서란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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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다들 나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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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서란과 인형 오 자매는 대수림 심층부를 샅샅이 수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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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심을 늦추는 일 없이, 차근차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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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주 경계와 은폐 엄폐를 착실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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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나깨나 요괴 조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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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심성은 정확히 사흘 동안 지속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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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부터는 그냥 산책하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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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괴들이 너무 나약해서 어쩔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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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서란과 인형 오 자매를 막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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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수림 심층부는 고위계 수사들에게도 위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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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하면 비행이 불가능한 지역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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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수도자들의 전투 방식은 공중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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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 법기를 타고 하늘을 날며, 공격 법술이나 공격 법기를 사용하는 게 정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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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게 아니라, 그게 가장 효율적이라서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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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수도자들은 지상전에 취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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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동력을 상실한 탓에 제 실력의 반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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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전투기가 땅에서 전차와 싸우는 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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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과거에는 사정이 좀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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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선이라는 학문이 없던 시절, 큰 뜻을 품고 무수한 영걸들이 난세에 뛰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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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위용에 경도된 추종자들은 영걸들에게 가르침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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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으로, 들판으로 모여들어 무술을 단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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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아는 수도문파의 탄생 과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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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디로 수선은 근본적으로 무도에서 비롯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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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로 탄생한 공법 역시 자연스레 신체를 강건하게 하는 것을 주목적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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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자의 신체를 한계까지 단련하기에 연체공법, 당시에는 그냥 공법이라고만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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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랍게도 당시의 주류 무술은 권각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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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문파는 존재했지만, 법술이나 법기는 아직 발명되지 않은 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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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세의 야장이 만든 병장기 따위는 무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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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검불침의 육체를 부술 수 있는 수단은 오직 비슷한 경지에 도달한 수도자의 육체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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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러다임 변화로 연체공법이 거의 사장된 현대 수선계에도 과거의 영향은 짙게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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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예시로는 연기기 과정의 무술 수행이나 오죽문 비전 신체 단련법 등이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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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부 과거에 주류였던 연체공법의 흔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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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흘러, 법술이라는 개념이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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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행 속성에 대한 이론이 정립된 뒤, 속성 공법과 법술이 우후죽순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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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도나도 공격 법술을 발사하는 시대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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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기에 가장 위력적인 공법은 토속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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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보면 정말 놀랍지만 그때는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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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땅을 밟고 싸우던 시절, 토속성 공격 법술 한 방이면 군대고 나발이고 줄초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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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쓸모없다고 구박했던 지진 법술에 얼마나 많은 요괴와 수도자가 목숨을 잃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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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토속성 공법의 영광도 오래 가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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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꼬움을 참지 못한 누군가가 비행 법기라는 신기방기한 물건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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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현대 수선계의 공중전이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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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수 속성은 공격 법술, 목금토 속성은 공격 법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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획기적인 패러다임 전환이 없다면, 앞으로도 계속 유지될 가장 효율적인 전투 방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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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발상만 전환하면 이런 결론에 도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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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땅을 밟고 싸운다는 가정만 있다면, 지금도 토속성 공법은 최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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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도 안되는 어려운 조건이지만, 드넓은 인계에는 그런 독특한 장소가 딱 하나 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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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명계에 침식된 대수림 심층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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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산요지선공을 대성한 자, 서란에게 이곳은 놀이터나 다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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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숭이 요괴는 겁에 질려 도망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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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처럼 약한 요괴나 잡아죽이던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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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괴 종족이라서 뭘 먹을 필요는 없었지만, 그냥 남을 괴롭히는 게 재미있어서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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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숭이 요괴들은 태생부터 가학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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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어떤 무리를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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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인간 하나, 그리고 큰 인형 다섯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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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숭이 요괴들은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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뭣도 모르는 신참이 울부짖는 소리가 듣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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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불행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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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위에서 숨죽이던 기습조가 뛰어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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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치로 깔아뭉개고 사지를 뜯어낼 작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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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작은 머리통이 점점 가까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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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끼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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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울음소리가 원숭이 요괴의 유언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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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로 된 작살이 땅에서 치솟아 공중에 있던 원숭이 요괴의 몸통에 박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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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살 반대편에 달린 사슬이 빠른 속도로 당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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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습조 전원이 땅속으로 끌려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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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제자리에서 폴짝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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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발바닥을 통해서 법력이 대지로 전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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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음과 함께 지진 법술이 발동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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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난 충격파와 함께 일정 반경 안에 있던 거목들이 산산조각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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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장된 탓에 충격파를 정통으로 얻어맞았을 기습조의 최후도 눈에 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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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운 나무에 매달려 있던 원숭이 요괴들 역시 일격에 절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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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 덕분에 살아남은 생존자들은 살았다는 안도감을 느낄 새도 없이 공포에 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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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참상을 만든 장본인과 눈이 마주친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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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발끈해서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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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 원숭이들! 너희 아주 잘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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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장소에 떨어진 자신을 끈질기게 괴롭혔던 그 원한, 서란은 잊지 않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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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한시도 쉬지 않고 물량 공세를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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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번이 패배하자, 나중에는 작전을 바꾸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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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숭이 요괴들은 온갖 기상천외한 방법을 동원해서 서란의 신경을 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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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가져왔는지도 모를 오물 투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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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 요괴들 유인해서 서란과 싸움 붙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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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종일 고막을 때리는 소음 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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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동안 원숭이 요괴들과 함께 하면서, 서란은 정말로 미쳐버릴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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쫓아가면 흩어져서 잽싸게 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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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잠깐 있다가 돌아와서 괴롭힘 재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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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정하고 추격한다면 못 잡을 건 없겠지만, 서란은 눈물을 머금고 포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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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글을 벗어나서 사람 사는 곳까지 가는 게 최우선 목표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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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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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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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흩어져서 추격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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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령을 받은 인형 오 자매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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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 오 자매는 토속성 법술을 사용할 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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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주인과 너무 멀리 떨어지는 것만 아니면, 법력을 무선으로 공급받는 것도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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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 오 자매가 지진 법술을 난사하며 원숭이 요괴의 서식지를 갈아엎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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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임없이 반복되는 추적과 말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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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과 인형 오 자매, 그리고 원숭이 요괴들의 숨막히는 추격전은 장장 열흘이 넘도록 지속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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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서란의 근성이 승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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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한 생존자가 울부짖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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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끼끼! 우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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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숭이 요괴의 애절한 최후 변론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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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심판자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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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원숭이 언어를 모르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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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자비 없는 심판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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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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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장 지진 법술이 발동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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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숭이 요괴는 지면과 함께 폭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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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도적인 개체수를 자랑하던 요괴 종족은 과거의 은원 문제로 열흘만에 멸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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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십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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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탐험가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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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볕이 따사로운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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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돌의자에 앉아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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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호, 나 과즙 음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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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여운 인형, 오호가 과즙 음료를 돌잔에 따라 돌탁자 위에 살며시 내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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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잔을 들어 향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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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미로운 과즙 냄새가 코를 즐겁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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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혀를 즐겁게 할 차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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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손가락을 튕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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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소리는 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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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유능한 부하들은 무음 핑거 스냅에도 불구하고 주인의 뜻을 알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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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분한 인형, 사호가 즉시 내장된 녹음기를 작동시켜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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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아니야. 다음 거. 다음. 그래, 바로 이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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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다롭게 음악을 고르던 서란이 만족한 얼굴로 감귤 음료를 한 모금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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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후한 속세의 맛, 정말로 달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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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세 잔이 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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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감고 음미하던 서란이 잔을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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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잔만 더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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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손에 든 잔의 무게는 변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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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설마 오류인가 싶어서 눈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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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인지 다행인지 오류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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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호가 텅 빈 나무통을 보란 듯이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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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벌써 다 먹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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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아쉬운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 건과일이 든 자루에 손을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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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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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확인했을 때는 분명 잔뜩 있었건만,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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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자루 안으로 머리를 집어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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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지? 구멍은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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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루 밖으로 머리를 뺀 서란이 주변을 둘러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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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멀리, 건포도가 하나 떨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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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 발자국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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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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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영안술을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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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여태 보이지 않던 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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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 한 마리가 건과일을 입안에 잔뜩 욱여넣은 채 도망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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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술로 모습을 감추고 도둑질을 한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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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토끼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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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토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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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는 흠칫 몸을 떨더니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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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쪽 눈, 그리고 이마에도 추가로 눈이 하나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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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안묘의 눈동자 세 개가 격렬하게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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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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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 사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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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고 직전, 삼안묘가 다급히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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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잠시만요! 제가 전부 설명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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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안에 있던 건과일이 우르르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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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의 햇볕은 여전히 따사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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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간식 도둑을 내려다 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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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 말해 봐. 내 간식은 왜 훔쳐먹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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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안묘는 필사적으로 고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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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생각보다 긴 세월을 살아 온 요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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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나이와 강함이 비례하지 않은 탓에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허접한 환술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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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눈치는 빨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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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요력도 변변치 않은 토끼 요괴 주제에 눈치까지 없었다면 죽어도 벌써 죽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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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안묘의 눈이 바삐 움직이며 상대를 탐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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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먼저 상대의 전력, 측정 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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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공에서 반쯤 액화된 법력이 줄줄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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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급 요괴 앞에서 힘자랑이나 하려는 의도가 아니라면, 체내에 과포화된 법력이 무의식 중에 새어 나오는 게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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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을 가볍게 압도하는 힘, 아마 사흉이 전부 달려든다고 해도 승산이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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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판단과 함께, 삼안묘는 탈출을 포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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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주를 시도하는 즉시, 뭐에 죽었는지도 모른 채 명계에서 깨어날 확률이 높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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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일말의 자비에 기대는 편이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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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안묘는 상대의 얼굴을 자세히 관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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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짢음이 살짝 엿보였지만, 심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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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나 표정에서 느껴지는 건 무관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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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간에 존재하는 압도적인 격차를 고려했을 때, 일견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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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답만 좀 잘하면 살려줄 것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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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안묘는 여러 가지 변명을 떠올리다가, 그냥 사실대로 털어놓고 용서를 구하기로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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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 치다 걸리면 그때는 진짜 수습 불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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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안묘가 눈물이 그렁그렁한 세 눈으로 서란을 올려다보며 싹싹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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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정말 죄송합니다... 과일이 너무 먹고 싶어서 그랬어요... 한 번만 용서해 주시면 다시는 안 그럴 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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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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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과일이 그렇게 먹고 싶었으면 스스로 찾아 먹어야지. 남의 간식을 낼름 훔쳐먹으면 되나? 이 근처에는 뭐 과일이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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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마친 서란이 어디 한 번 변명해 보라는 듯한 시선으로 삼안묘를 빤히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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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안묘는 눈알 세 개만 대굴대굴 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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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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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흔쾌히 변론 기회를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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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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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안묘가 조심스레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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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이 근방에는 과일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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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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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일이 없다고? 하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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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적어도 저는 본 적이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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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말문이 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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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이 생각해 보니, 심층부에서는 화신기 수사 이외에는 어떤 존재도 하늘을 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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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조류나 날벌레도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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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벌이나 나비가 없어서 그런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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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분 활동이 불가능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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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면 나무가 겉으로는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영혼이 뽑혀서 전부 죽은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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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과일 없는 삶을 상상해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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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일 애호가 입장에서는 정말로 끔찍한 지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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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안묘가 조금 불쌍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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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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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흠, 아무리 그래도 도둑질은 아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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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안묘가 다시 한 번 앞발을 싹싹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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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죄송합니다... 다시는 안 그럴 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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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기꺼이 용서를 베풀어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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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반성하고 있다니 다행이구나. 이번 한 번만 용서해 주마. 앞으로는 착하게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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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절대로 잊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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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 그래 그래. 바람직한 자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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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괴에게마저 자비를 보이는 이 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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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뒤로 돌아 멋지게 떠나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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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토끼 녀석이 당최 도와주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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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안묘가 조심스레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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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그런데 말입니다. 바닥에 떨어진 건과일, 안 드시면 혹시 제가 먹어도 괜찮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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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는다고? 땅에 떨어진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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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가 다 그렇죠,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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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안 먹으니, 마음대로 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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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의 허락이 떨어지자 삼안묘는 희희낙락한 얼굴로 떨어진 건과일을 주워먹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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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손에 넣은 별미를 양볼이 터지도록 입안에 밀어넣고 만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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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일이 너무 먹고 싶어서 그랬다는 말이 거짓말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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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안묘가 행복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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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 이게 도대체 얼마 만에 먹는 과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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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맛있게 먹어서 서란도 안 물어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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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만에 먹는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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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하진 않지만, 대충 천 년 정도 된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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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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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깜짝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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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괴에게는 정해진 수명 같은 게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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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남에게 죽지만 않는다면, 나이를 먹을수록 점차 강해져서 마침내 대요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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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년이면 어지간한 대요괴 만큼 나이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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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안묘의 나이가 천 살이 넘었다는 놀라운 사실, 서란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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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살이 넘는다고? 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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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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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왜 이렇게 약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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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안묘의 대답이 가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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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요, 토끼 요괴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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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어렵사리나마 납득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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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적으로 삼안묘는 서란에게 합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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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티에서 그가 담당한 롤은 길잡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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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천 년이나 살았으니, 어디에 뭐가 있는지 정도는 빠삭하게 알고 있으리라는 계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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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드헌터 서란의 안목은 이번에도 예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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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과일 잔뜩 먹고 기분 좋아진 삼안묘는 생명의 은인을 위해서 열심히 헌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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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문양이 새겨진 석판, 혹시 본 적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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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요, 저만 따라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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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안묘는 서란을 데리고 동쪽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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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언덕을 하나 오르자 저 멀리 대균열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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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균열 주변은 풀 한 포기 없는 황무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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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명계와 너무 가까워서 그런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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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문득 궁금해져서 질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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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대균열 근처까지 가 본 적도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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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뇨, 제가 바보도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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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수림 심층부에서 천 년 이상 거주한 삼안묘도 대균열 근처까지는 한 번도 다가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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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리한 이는 매를 맞지 않아도 깨닫는 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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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탐험가는 생각이 조금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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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배낭에서 꺼낸 긴 밧줄을 무표정한 인형(일호)의 허리에 칭칭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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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뭐 하시는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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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안묘의 물음에 서란이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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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균열 안이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해서, 살짝 고개만 내밀어 볼 생각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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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진짜 아닌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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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나, 잘 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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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호가 주인의 명령에 따라 대균열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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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숨에 빨려 들어가지 않기 위해 발목을 대지에 박아 넣은 채, 서서히 접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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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과 나머지 인형들은 밧줄을 꽉 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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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균열에 접근할수록 인력이 점차 강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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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라도 그만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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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안묘가 말렸지만 서란은 귓등으로도 안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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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다니까? 저기 봐, 지금도 멀쩡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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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다는 말을 꺼내자마자 문제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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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계의 인력이 인형을 지반 채로 뽑아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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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과 인형들은 즉시 밧줄을 손에서 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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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 일호가 대균열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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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시야 공유 법술이 아직 작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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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이틈에 대균열 안을 재빨리 관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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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부의 모습은 놀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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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히 지반이 갈라져서 생긴 게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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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격에 맞춰 제작한 요철로 차곡차곡 쌓아올린, 마치 우물 벽처럼 보이는 인위적인 형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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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균열은 지형이 아니라 거대한 구조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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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시야 공유가 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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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티원을 하나 잃은 뒤, 목적지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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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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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균열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장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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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안묘가 석판을 본 곳은 어떤 지하 시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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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더 들어가면 석판이 잔뜩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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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숫자가 하나 준 인형들에게 명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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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안묘를 따라가서 이 그림과 똑같은 문양이 새겨진 석판을 가져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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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혼자 남아서 생각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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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아까 그 광경은 뭐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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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히 인위적으로 만든 구조물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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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무슨 용도로 그런 걸 만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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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아까부터 같은 생각만 반복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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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균열은 동대륙 전체에 해악을 끼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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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력이 초래한 영기의 불균형, 혹은 명계에 의한 지형 침식 등이 대표적 예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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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생각해 봐도 굳이 대균열을 만들어서 동대륙 전체를 엉망으로 만든 의도를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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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열심히 고민했지만, 실마리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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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답답한 마음에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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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 안이라서 하늘은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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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다른 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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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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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커다란 천장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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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몇 개가 고리 모양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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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서대로 감상하라는 게 제작자의 의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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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그림은 인계의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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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남북 사대륙, 그리고 의문의 화살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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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쪽, 북쪽, 남쪽 대륙에서 출발한 긴 화살표가 전부 동대륙을 가리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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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그림은 시체 더미를 묘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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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체가 원판 위에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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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김새를 보니 전부 요괴 시체인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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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그림에는 사람이 한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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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에 꽂힌 막대기를 두 손으로 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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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수한 톱니바퀴가 배경을 가득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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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 그림도 사람 그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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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그림과 이어지는지 막대기를 당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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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에 그려진 톱니바퀴 역시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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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번째 그림은 굉장히 직관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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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판 가운데가 갈라지면서 그 위에 쌓여있던 시체가 모조리 구멍 아래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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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번째 그림에서 원판은 다시 닫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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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대균열의 정체를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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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모없는 걸 잔뜩 모아서 차곡차곡 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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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버를 당기면 기계 장치가 작동하고, 물건을 잔뜩 올려둔 구멍 덮개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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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쓰레기는 모조리 아래로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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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균열은 일종의 쓰레기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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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요하면 덮개를 열어서 쓰레기를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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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레기는 순식간에 명계로 빨려들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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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사용하지 않을 때는 다시 닫는 방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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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륙 수선계를 기형적으로 비틀어버린 대균열은 항거할 수 없는 종말이나 재앙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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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안 닫힌 쓰레기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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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명계와 연결된 탓에 문제가 생긴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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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도로 편중된 영기의 분포, 양극화 때문에 몰락해 버린 약소문파, 명계 침식으로 인한 오행인면목의 서식지 감소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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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동대륙에서 경험한 모든 사회 문제의 원인이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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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레기통 쓰고 뚜껑 안 닫은 사람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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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어이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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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이게 말이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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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마침 삼안묘와 인형들도 전송 석판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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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금은 친구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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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외모와 밝은 성격, 사교성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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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많은지 또래 중 친구가 아닌 사람을 세는 것이 빠를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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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만사가 다 마찬가지지만, 대인 관계 역시 반복적으로 연습할수록 점점 능숙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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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대한 인간관계를 구축한 만인의 친구, 이아금 역시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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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복잡한 관계의 중심에 위치한 덕분에 이아금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관한 어떤 통찰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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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은 상황에 맞는 가면을 쓰고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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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식이나 위선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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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방과 나 사이에 맺어진 관계에 따라서 각기 다른 일면을 보여 준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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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도덕성과는 별개의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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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시는 주변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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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과 있을 때는 의젓하게 굴지만, 친구에게는 애교를 부리며 장난을 치는 아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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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로 또래 사이에서는 어른스럽지만, 부모님에게는 어리광을 부리는 아이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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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이아금도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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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래들 사이에서 이아금은 이상적인 친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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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밝은 표정과 포용력, 그리고 꽤나 어른스러운 모습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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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생적으로 타고난, 그리고 끊임없는 경험으로 연마한 일종의 비범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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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서란 앞에서는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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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상을 짓고, 금방 토라지고, 아이처럼 칭얼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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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이아금이 또래 친구들 사이에 있을 때 보여주는 일면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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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로지 가족에게만 보여주던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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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금은 아름다운 외모 때문에 공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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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한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가족과 이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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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에는 제대로 울지도 못할 정도로 두려웠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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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류서란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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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나라에서 끌려온 같은 공녀 신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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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는 이아금보다 세 살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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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인지 둘 다 영근을 지녀 오죽문에 입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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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에게 의존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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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어도 당시의 이아금은 그렇게 생각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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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제는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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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에게 의존만 하는 관계는 오래 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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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굴 식물끼리만 있다면 둘 다 자라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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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는 버팀목이 되어줄 필요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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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금은 오로지 의존했고, 서란은 기꺼이 버팀목을 자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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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금과 서란은 친구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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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관계는 우정이라고 부를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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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금에게 서란은 분명 어머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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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면 나이 차가 많은 언니였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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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이아금이 잃어버린 가족이 되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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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이국에서 단 둘뿐인 고국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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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래 친구에게 할 수 없는 어리광을 받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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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 그리워 악몽을 꿀 때 의지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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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굴 식물인 나팔꽃처럼, 이아금은 서란이라는 버팀목이 있었기에 비로소 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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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겨울, 오랜만에 만났을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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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어느새 훌쩍 자란 이아금을 보고 놀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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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놀란 건 이아금도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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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가 언제부터 이렇게 작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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앳된 얼굴과 왜소한 몸집을 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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끌어안기 위해서 허리를 숙여야할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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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처음부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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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녀로 실린 마차에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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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에도 서란은 작고 여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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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가 좋은 이아금은 금세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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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히 성질을 부리다가 맞고 울던 이아금을 달래준 그 순간에도 서란은 이런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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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소작농 집안에서 태어나 또래보다 체구가 작아서 세 살 어린 자신과 비슷하던 소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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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을 등진 열두 살 아이가 의지하던 상대는 같은 이유로 끌려온 열다섯 살 아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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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살의 이아금은 자기가 다 컸다고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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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열여섯 살의 이아금은 자기가 아직 아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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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찬가지로 열다섯 살은 너무 어린 나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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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서란은 기꺼이 이아금을 보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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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자기 덩치만 한 알을 품는 아기 새와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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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이아금은 추위를 견디고 부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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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금이 서란을 진심으로 존중하는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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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존중한다는 말을 가볍게 사용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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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아금이 생각하는 존중이란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마음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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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나 생각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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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중의 뜻은 ‘높이어 귀중하게 대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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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단술사들이 약재 감별 훈련을 제안했을 때, 이아금이 흔쾌히 동의한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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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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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수사, 굉장히 고된 과정일 텐데 정말로 후회하지 않겠는가? 시간을 두고 신중하게 고민한 뒤에 결정해도 괜찮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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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닙니다,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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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여섯 봄날, 이아금은 사랑으로 어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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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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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용녀는 서란의 이층 전각에 머무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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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한 많은 시간을 훈련에 할애하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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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층 수련장에 마주 앉은 둘은 온종일 수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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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소용녀의 가르침을 금방 흡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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닷새째 되는 날, 서란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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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오늘은 쉬는 날입니다. 같이 놀러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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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소용녀는 납득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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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고?! 당장 내년에 결단 의식을 치르는데 놀 시간이 어디 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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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서란은 요지부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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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그러셔도 안 됩니다. 중요한 원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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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조로운 환경은 편협한 사고를 유발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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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기기 문턱에서 고생하며 얻은 교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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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로 서란은 가능한 한 휴일을 챙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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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소용녀를 끌고 외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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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호한 태도에 소용녀는 직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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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은 서란의 고집을 절대로 꺾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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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상대는 존귀한 존재가 되고 싶다는 이유로 용이 될 기회마저 포기한 인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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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수련 진도는 순조로워서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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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제부터 뭘 할 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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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잠시 고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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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공놀이를 할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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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소용녀와 즐기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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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 뜬 구름을 보자 문뜩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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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특별히 하늘을 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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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용녀가 의아하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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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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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용녀는 생애의 절반은 수중에서, 나머지 절반은 하늘에서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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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에게 비행이란 삶의 일상적인 부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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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히 흥미로운 사건이 아니라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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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긴 인간은 원래 날지 못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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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용녀가 스스로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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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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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다지 재미는 없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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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쉽게도 소용녀의 예상은 빗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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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과 함께 석연화에 탄 순간부터 소용녀는 한시도 하늘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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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색 용안은 오로지 천공을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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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주를 잃고 날아오르지 못하는 서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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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이 된 순간부터 매료된 천공의 아름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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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천에 대한 본능적인 갈망으로 점철된 영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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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용녀는 분명 그리워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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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대상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고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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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색 눈동자에 물기가 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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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용녀는 금방 눈물을 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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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평소와 같은 모습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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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도 애써 못 본 척 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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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에도 닷새에 하루는 휴식을 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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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소용녀도 크게 반발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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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바라보는 건 정말 즐거웠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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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지나고 둘은 조금 더 친밀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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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운 여름, 휴일이 되자 물놀이를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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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잉어였던 소용녀는 수영을 굉장히 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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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고 잔잔한 계곡을 제집처럼 누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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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헤엄을 치던 소용녀를 누가 붙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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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돌려보니 같이 놀던 서란이 범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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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난스럽게 웃으며 소용녀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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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고 투명한 물은 햇빛을 받아서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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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단결처럼 일렁이는 수중의 광채 너머로 웃고있는 서란의 갈색눈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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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용녀가 발을 홱 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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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간질거려서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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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에는 산맥을 거닐며 단풍 구경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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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용녀는 서란과 손을 잡고 산길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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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혼자서 걷는 것이 미숙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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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주 잡은 손은 따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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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 되자 둘은 한 침대를 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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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다른 의도는 없고 체온을 나누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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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온 동물인 용에게 겨울은 너무 추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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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용녀는 온기를 느끼며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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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장히 낯선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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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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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스무 살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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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소용녀도 걷는데 익숙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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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봄에 그랬던 것처럼 둘은 석연화에 올라서 하늘을 날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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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소용녀의 담청색 용안에 담긴 건 더이상 가본 적도 없는 고향, 천공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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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쾌한 기분으로 비행을 만끽하는 류서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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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지난 일 년 동안 가르친 제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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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을 느낀 서란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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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러세요, 용녀님? 할 말이라도 있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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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용녀가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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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다, 그냥 지평선을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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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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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야 가득 펼쳐진 지평선이 세상을 반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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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쪽에는 흰 뭉게구름이 눈이 시릴 정도로 파란 하늘을 떠다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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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쪽에는 검처럼 뾰족하게 솟은 산맥과 오죽문의 건물, 그리고 싱그러운 풀밭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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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용녀는 하염없이 지평선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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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속에 핀 바람이 자꾸만 입가에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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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내 눈을 감더니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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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 내려 가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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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디 용이란 홀로 완전한 영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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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온 동물인 용에게 인간의 체온은 너무 뜨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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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치게 탐했다가는 화상을 입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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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용녀는 번민을 애써 바람에 흘려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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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았던 봄도 지나고 결단 의식이 가까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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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별의 순간도 함께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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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여름, 서란은 결단기 수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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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 사 자매와 삼안묘는 마침내 석판 보관실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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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발한 인형, 이호가 커다란 문을 양쪽으로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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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부에는 석판이 줄지어 눕혀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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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가지 문양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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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서란이 찾는 문양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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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 사 자매는 우선 주인에게 신호부터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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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석판의 네 귀퉁이를 한 곳씩 받쳐든 다음, 왔던 길을 고스란히 되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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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성과를 얻은 삼안묘는 흡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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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도움으로 강자에게 호의를 얻는 건, 정말로 흔치 않은 기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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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괴 사회란 그야말로 약육강식의 밀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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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사소한 친분이 목숨을 구해주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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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안묘는 음흉하게 웃으며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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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회가 될 때마다 더욱 열심히 아부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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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괴롭히던 사흉 녀석들, 긴장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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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그 분께 애원해서 해치워 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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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서란이 기다리는 최상층에 당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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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안묘는 상급자의 요구를 충실히 수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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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지금이야말로 알랑거릴 절호의 기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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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안묘가 간신배 같은 표정을 지으며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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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사님, 이걸 보십시오! 찾으시던 석판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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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공을 생색내려던 삼안묘가 입을 다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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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재회는 예상하지 못한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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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무반주 막춤을 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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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가 그렇게 기쁜지 잔뜩 흥이 오른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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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누가 온 줄도 모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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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머리를 상모처럼 돌리기 시작한 서란을 보며, 삼안묘는 내심 감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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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정말로 대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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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정도는 미쳐야 그토록 강해질 수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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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오늘 또 크게 개안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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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안묘는 눈치를 보다 춤에 합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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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 요괴의 경쾌한 탭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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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른 발 구르기로 바닥을 쳐, 리듬을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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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삼안묘를 힐끗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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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시선 교환, 마음이 통하기에는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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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위기가 달아오르고 서란의 움직임도 빨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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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와 팔을 신명나게 흔들던 서란이 멀뚱멀뚱 구경만 하고 있던 인형 사 자매에게 명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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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른 음악, 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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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들이 같은 음악을 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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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산개해서 입체 음향 효과까지 구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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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자기 감정을 온몸으로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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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한참이나 인신공양 제사장처럼 춤을 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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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란의 축제가 끝난 뒤, 삼안묘가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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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왜 갑자기 춤을 추신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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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자아도취 상태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서란이 두 팔을 한껏 벌리며 연극 톤으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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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내 대균열의 비밀을 밝혀낸 자가 누구인가! 바로 이 몸이다! 그야말로 진정한 탐험가라고 할 수 있지! 아, 두렵구나! 내 두뇌가 품고 있는 지성이! 안타깝구나! 내 불멸의 명성에 가려질 범재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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헛소리에도 불구하고, 삼안묘는 제 할 일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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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대단하십니다! 그나저나 저기 좀 보십시오. 찾으시던 석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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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고개를 끄덕이며 치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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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정말 잘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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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다른 곳으로 가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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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해야만 하는 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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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지하 시설을 뒤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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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지하 3층에서 제어실을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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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에 붙어 있는 커다란 레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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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면을 가득 메운 크고 작은 톱니바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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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으로 본 장면과 굉장히 흡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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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의 예상대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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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천장화는 사용 설명서의 일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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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제어 장치를 찾기 위해 멀리까지 갈 필요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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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제어 장치를 유심히 살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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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보니 레버가 끝까지 안 당겨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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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능 고장이 아니라서 정말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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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만면에 미소를 지은 채 레버를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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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륙 모든 산수와 약소문파, 그리고 오행인면목들아, 부디 나에게 힘을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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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젖 먹던 힘까지 동원해 레버를 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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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꺼운 금속 기둥은 아주 조금씩 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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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단기 수사의 근력으로도 만만치 않은 무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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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하늘을 향해서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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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라, 십대문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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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서란의 복수는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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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죽문의 단약으로 탄생한 괴력은 과연 놀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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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레버가 끝까지 당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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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서 태산만 한 구조물을 움직인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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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를 뒤흔드는 굉음과 함께 대균열이 닫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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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진한 서란은 바닥에 대자로 뻗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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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얼굴 표정에는 환희만이 들끓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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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다 분비된 도파민에 뇌가 녹아버릴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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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대문파 카르텔의 인중에 반독점 펀치를 한 방 때려줬더니 도저히 입꼬리가 내려가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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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수천 년 동안 특권을 누린 십대문파가 대균열 좀 닫혔다고 하루 아침에 망하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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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도 거기까지는 기대 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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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얘기가 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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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 년 살고 죽는 범인조차 복수를 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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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문학적으로 낮은 확률의 당첨 제비도, 제비뽑기가 영원히 계속된다면 언젠가는 뽑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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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대문파들은 영원히 공포 속에서 살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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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래서 남에게 해코지를 하면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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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생을 꿈꾸는 자, 은원관계를 조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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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선계의 유명한 금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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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대문파의 말로에 어울릴 말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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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길고 긴 모험 끝에 세상을 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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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계 침식은 완전히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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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미 침식된 지역은 어쩔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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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오행인면목의 서식지는 무사히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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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균열 탓에 편중된 영기 분포도 해결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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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자연스레 변방 약소문파들이 살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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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문파의 영향력도 크게 축소될 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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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륙은 마침내 구원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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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행인면목과 산수, 그리고 약소문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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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행복한 최고의 결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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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십대문파는 불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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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알 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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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의 구원 목록에 거대문파들은 없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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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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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구조적으로 중요한 톱니바퀴를 몇 개 뽑아서 배낭 안에 집어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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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아무도 대균열을 다시 열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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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구한 모험가가 길잡이에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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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나한테 따로 부탁할 일은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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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안묘는 앞니를 보이며 기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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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안묘의 소원은 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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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괴롭히는 사흉을 퇴치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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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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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흉에게 재앙이 닥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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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균열을 기준으로 서쪽 구역을 차지한 서흉, 아귀는 이미 몇 년 전에 서란에게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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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지하 시설이 위치한 남쪽 구역부터 반시계 방향으로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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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처음은 남쪽 구역의 지배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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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흉은 미라처럼 비쩍 마른 원숭이 요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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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히는 원숭이를 조종하는 마검이 본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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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진 법술 한 방에 마검이 조종하던 원숭이 요괴의 시체가 산산조각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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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근해서 검 한 번 휘둘러 볼 기회조차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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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아직 끝난 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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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흉은 조용히 기회를 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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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력한 육체, 정말로 탐이 나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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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만 더 가까이 다가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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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너의 몸에 빙의해 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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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검은 신화적인 명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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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객이라면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유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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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방법으로 여태 수많은 검객의 몸을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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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서란은 권각술의 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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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을 보는 안목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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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못 이길 싸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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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명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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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길하게 생겼네, 가서 분질러 버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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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 셋이 곧장 마검에게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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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이 억센 손길로 칼자루와 칼끝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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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머지 하나가 발차기 준비 자세를 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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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검이 뭔가 눈치채고 다급히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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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잠깐! 나를 손에 넣으면 세상 모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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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음속 앞차기에 맞은 마검이 뚝 부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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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희생자는 동쪽의 지배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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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흉은 빠른 속도로 구르는 바위벌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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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출 수 없는 돌진에 무수한 생명이 스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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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벌레는 서란과 인형들을 보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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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약하고 가벼운 장난감이 여기 있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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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또 어떤 소리를 내며 죽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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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함께 짓뭉개 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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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렬한 돌진 앞에서 서란은 주먹을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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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의 몸이 발목까지 땅밑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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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산요지선공과 공명한 대지가 서란을 붙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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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심해거인에게 받은 비전 무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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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인은 크기 탓에 무기 사용이 곤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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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거인족의 무술은 대부분 권각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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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하여 거인살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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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자의 체중이 고스란히 파괴력으로 전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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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대지와 한 몸이 된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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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앞까지 다가온 바위벌레에게 정권 지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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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의 무게가 작은 주먹을 통해서 쏘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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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도적인 파괴력이 한 점에 집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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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벌레는 미세먼지벌레가 되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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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순서는 북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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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지 못하는 괴조, 속도는 번개처럼 빠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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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인형들이 눈으로 발사한 불가청비가시 파괴광선보다는 느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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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수림 심층부의 공포, 사흉은 그렇게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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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 안전한 주거지를 얻은 삼안묘가 인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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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히 가세요! 다음에 혹시라도 필요한 일이 있으시면 언제든 불러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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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도 웃으며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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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나중에 올 때는 생과일도 가져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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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류 수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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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 인사를 마친 뒤, 둘은 귀갓길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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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의 경우는 서대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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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통 돌로 지어진 고대 궁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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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과 인형 사 자매는 비밀 통로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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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로 좌우 폭이 왜 이리 넓은가 했더니, 전송 석판이나 시체 수레가 오갈 길이라 그런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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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송실에 도착한 서란이 인형을 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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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들이 석판을 제자리에 살며시 내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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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맞게 들어가서 기분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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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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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 한 번 들어가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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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 이호가 전송진 위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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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딱히 작동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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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이마를 탁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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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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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벽에 달린 레버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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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과는 달리 다시 내려오는 일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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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이게 스위치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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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 다시 올라가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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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전송진을 밟자마자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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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함박웃음과 함께 삼호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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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호, 들어가서 잠깐 있다가 나와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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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찰병 삼호가 전송진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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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본래의 용도대로 사용하는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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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식간에 사라진 삼호는 잠시 후 다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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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안전은 모두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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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집에 갈 수 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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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잠시 추억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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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륙에서 보낸 몇 년이 스쳐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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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워, 이름이 기억 안 나는 강의 보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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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워, 수많은 수강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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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워, 인형술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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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워, 성미목 곧은 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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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워, 소소와 심해거인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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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워, 삼안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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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워, 동대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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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워, 모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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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워, 십대문파 너희만 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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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텔 녀석들 나중에 두고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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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균열을 닫은 업적은 한동안 비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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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문파가 알면 잡아 죽이려고 벼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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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한을 사지 않는 스마트한 복수란 이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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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다시 만날 때까지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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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점프와 함께 전송진에 입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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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만장했던 동대륙 여정도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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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동대륙으로 떠난 지도 벌써 몇 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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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릿느릿 진행되던 발굴 작업은 거의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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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지하에 묻혀 있던 탑도 세상에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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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 최하층, 전송실 바로 옆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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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직자 두 사람이 바둑을 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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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세는 압도적인 집 차이로 백돌이 유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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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을 잡은 수사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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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수만 물러 주면 안되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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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을 잡은 수사가 수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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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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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변하는 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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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초반부터 격차가 벌어진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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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승패는 결정된 지 오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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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흑을 잡은 수사가 항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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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졌네. 한 판만 더 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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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세, 이번에는 몇 점 깔고 하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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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만 더 깔면 이길 수 있을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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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판 위에 흑돌이 여섯 개 깔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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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로 열다섯 번째 대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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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을 잡은 수사는 벌써부터 장고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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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전송실 문이 열리며 서란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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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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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을 두던 수사들이 경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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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류 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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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히 칩거 중이라고 들었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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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서란,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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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직자들은 이 사실을 수뇌부에게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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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즉시 호송대가 파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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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그들을 따라서 비밀리에 복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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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 소집된 수뇌부 회의, 서란은 지금까지 겪었던 모든 자초지종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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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홀로 떠돌던 동대륙 모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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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길을 가로막은 독안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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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수림 수색 끝에 복구한 전송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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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게 축약된 구연동화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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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다른 두 세계의 만남, 정말로 대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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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뇌부의 고민은 깊어져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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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볼 문제가 아니었기에 시간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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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뇌부 중 하나가 서란에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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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 수사, 일단 들어가서 푹 쉬게나. 몇 년이나 타지에서 고생한 사람을 이렇게 붙잡아 두는 것도 도리는 아니겠지. 여독부터 전부 풀고, 자세한 정보는 보고서로 제출해 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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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우선 자기 저택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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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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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돌아온 서란을 반겨준 건 담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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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 드디어 돌아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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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 님, 보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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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은 서로를 꼭 끌어안은 채, 체온을 공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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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격의 재회 이후에는 집 구경부터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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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의 저택은 많이 변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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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중정에 있던 연못이 증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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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단잉어만이 바글거리는 못 한가운데에는 아담한 정자가 하나 들어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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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의 취향이 반영된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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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은 정자에서 정답게 얘기를 나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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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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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이라, 듣고 놀라지 마시죠. 흠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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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목을 한 번 가다듬더니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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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저는 전송진을 밟고 동대륙으로 날아가 버렸습니다. 참으로 불행한 사고였죠. 그 누가 예상할 수 있었을까요, 허름한 유적 밑에 아직도 작동 중인 전송진이 존재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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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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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은 기대감에 눈을 빛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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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극적인 청자의 리액션에 서란도 신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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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진실을 아주 약간 각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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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밀림, 그리고 사방에서 울부짖는 요괴들! 아아, 그야말로 지옥의 풍경이 이러했을까요? 전송진이 망가진 탓에 저는 퇴로마저 잃은 상태였습니다. 그렇다면 오로지 나아갈 뿐! 그렇습니다, 저는 용감히 미지의 땅으로 뛰어들었습니다! 요괴들 사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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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어떤 요괴들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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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장감 고조를 위해 잠깐 침묵하던 서란이 나지막이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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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괴의 정체, 그건 바로 원숭이 요괴들이었습니다. 개체수가 대수림에 있는 모든 잎사귀를 합친 것보다도 많았죠. 그들이 곧 달려들었습니다. 저는 살기 위해 끊임없이 싸워야만 했죠! 하지만, 사흘이 지나도 공격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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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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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어떻게 됐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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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거인살법의 자세를 취하며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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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혈투를 벌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치열하게 겨룬 공방, 고작 한 호흡으로 갈리던 생과 사! 그야말로 인세의 지옥! 하지만 저는 끝내 살아남았습니다! 마침내 원숭이 군단의 우두머리마저 저의 자비없는 권각술에 목숨을 잃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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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숭이 요괴들의 우두머리라니, 듣기만 해도 정말 강해 보이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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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습니다, 상대는 무시무시한 괴물이었습니다. 저는 죽음의 고비를 몇 번이나 극복한 끝에 적을 해치울 수 있었죠. 후후, 아직도 그 날의 혈투가 선명하게 떠오르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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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후에도 서란의 수다는 계속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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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수림을 벗어나자 펼쳐진 동대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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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본곡에서 펼친 계몽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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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심 많은 거대문파들의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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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행인면목과 쌓은 아름다운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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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잃은 소소와 심해거인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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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길을 가로막은 미치광이 독안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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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돌아온 대수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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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악한 원숭이 요괴들을 멸종시킨 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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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균열의 진정한 정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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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륙 수선계를 구원한 놀라운 업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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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공해 온 사흉을 멋지게 물리친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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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송진을 복구한 뒤, 서대륙으로 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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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동안 경험한 대서사시가 드디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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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외출 중이었던 금영영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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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다시 한 번 동대륙 모험기를 들려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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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은 늦은 시간까지 수다를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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푹 자고 일어난 아침, 호혜문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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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방학 기간이라서 글방 업무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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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이번에도 동대륙 모험기를 들려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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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세 번이나 반복했지만, 전혀 힘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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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을 먹고 나니, 이아금도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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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능숙하게 목을 풀며, 방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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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깜짝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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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금은 어느새 축기기 수사가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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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아금아! 이게 무슨 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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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거? 그냥 그렇게 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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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이맘때, 삼영근자 이아금은 스물다섯이라는 젊은 나이로 축기에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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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영근 보유자의 평균적인 축기 성공 연령이 대략 오십 살이니, 정말 기적적인 성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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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아금이 천고의 기재였기에 이런 결과가 나온 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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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금의 경지 상승 요인은 크게 세 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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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요인은 굉장히 풍족한 영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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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 년 전, 친선대회 예선전 결과를 두고 인간 경마가 열린 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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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금은 우리 언니 마음 상하지 말라고 영석 하나를 서란에게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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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서란이 예선 6위를 차지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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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이아금은 영석 한 상자를 통째로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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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부터 수행 목적으로 열심히 소모했지만, 아직도 상자 내용물은 절반 가까이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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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요인은 서란 대신에 먹은 단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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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심마에 빠져서 약 먹기를 거부했을 때도, 전송진 밟고 사라진 탓에 칩거라고 둘러댔을 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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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매일 서란 몫으로 조제된 단약을 먹어야 했던 건 이아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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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처럼 단약을 장복한 일영근자들은 경지가 올라갈수록 점점 약성에 대한 내성이 증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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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서란의 입에 들어간 단약이 효과를 제대로 발휘하려면 약효가 보통 강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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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금의 신체에는 약발이 지나치게 잘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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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요인은 담청의 향로 법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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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로가 하루에 내뿜는 신비한 연기는 한증막으로 즐겼을 경우, 대략 이 인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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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사라졌다고 그냥 버리기는 너무 아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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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이아금은 담청의 강권에 못 이겨 수건 한 장 두른 채 꾸준히 흰 연기를 흡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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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이건 신선이 만든 보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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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로 법보의 신묘한 효능이 이아금의 영혼을 보다 높은 차원으로 힘껏 잡아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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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기 수행의 목적은 심신을 갈고닦는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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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석과 단약, 법보가 이아금을 위해 힘을 합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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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계에서도 이런 호사는 쉽게 누릴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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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이아금은 반강제로 축기기 수사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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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을 다 듣고나서 서란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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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속성도 선택했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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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금이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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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속성 공법을 익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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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다, 너 연단술 훈련도 받았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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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이제는 어엿한 연단술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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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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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감탄사를 끝으로 말을 잇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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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보니 더 어른스러워져서 낯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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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문이 막힌 서란 대신, 이아금이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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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는 정말 하나도 안 변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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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뭐. 외모는 축기기 때부터 그대로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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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금이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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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모가 아니라 성격을 말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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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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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금은 살짝 물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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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낯선 곳에서 혼자 외롭고 힘들었을 텐데... 언니는 여전히 밝고... 여전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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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금은 끝내 눈물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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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황한 서란이 저보다 키가 큰 동생을 달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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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금아, 왜 울어... 울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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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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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금이 허리를 숙인 채 서란을 끌어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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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도 말없이 동생 등을 두드려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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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 다 어렸던 옛날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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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진정이 됐는지 이아금은 울음을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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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아무튼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이야. 정말 보고 싶었어. 내가 언니 많이 좋아하는 거 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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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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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알지 알지. 나도 아금이 많이 보고 싶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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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매로 눈가를 닦은 이아금이 장난스레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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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로? 얼마나 보고 싶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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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만큼 땅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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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부한 표현에 이아금이 웃음을 터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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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 그게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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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멍하니 이아금의 미소를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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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도 크고 부쩍 성숙해졌지만, 어린 시절의 흔적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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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모습이 귀여워서 서란도 그만 웃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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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야 집으로 돌아왔다는 실감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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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과 이아금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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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 번 반복된 동대륙 모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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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번이나 각색한 탓에 반쯤 픽션이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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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처음 듣는 이아금은 마냥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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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에는 전리품 자랑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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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목대회 삼등상, 천년토영목의 영롱한 자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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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목에 일가견이 있던 이아금도 크게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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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마지막으로 인형 사 자매도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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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부에 탑재된 무수한 최첨단 기능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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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말로 동대륙 인형술의 정수나 다름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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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금의 반응은 오늘 본 것 중에서 최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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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진짜로 언니가 만든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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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하지, 여기에 어떤 기술이 들어갔냐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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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대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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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치, 대단하지? 특히 자가충전 기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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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나무를 깎아서 만든 인형이 어쩜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있지? 언니 이런 쪽에도 재능이 있었구나. 사람이랑 진짜 똑같이 생겼다. 잘 할 수 있으면서 예전에는 왜 그런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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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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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이아금이 한 말의 의미를 곱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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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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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금은 지금 인형의 기능이 아니라 외형을 보고 감탄하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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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자 입장에서는 적당히 조형한 외견이 아니라 심혈을 기울인 내면을 보고 감탄해줬으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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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금아, 인형 사 자매는 눈에서 광선도 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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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큰 의미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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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선? 그건 언니가 저번에 만든 법기에서도 나오잖아. 그게 뭐 대단한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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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말로 ‘인형이나 법기나.’ 라는 사고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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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문외한이 꺼낸 무심한 발언에 제대로 긁힌 대다수의 IT업계 관계자들처럼 반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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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상대에게 납득시키기 위한 부질없는 설명을 쏟아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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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손짓 발짓까지 총동원해서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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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때, 이해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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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완벽하게 이해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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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도 이해 못한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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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가 그렇다니까 대강 수긍하는 눈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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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갑자기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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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조용한 데 가서 혼자 외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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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정말 어려운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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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파이 샤워기랑 비슷한 업적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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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성과를 더 조목조목 칭찬해 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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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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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죽문에 널리고 널린 게 대나무 숲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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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데서나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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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끝까지 성능 칭찬은 못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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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금은 황홀한 표정을 지은 채, 경국지색 시스터즈를 구경하며 연신 감탄하기 바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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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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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본격적으로 수행을 재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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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약 섭취와 명상, 법술 공부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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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처럼 하루를 정력적으로 보내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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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같이 기상, 담청과 법보 한증막을 즐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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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무진의 가르침대로 분신술에도 힘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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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시간은 인형술을 공부하거나 명상을 통해서 자신의 내면을 관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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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심마에 빠졌던 과거를 교훈 삼아 적절한 비율로 여가를 즐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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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은 이아금을 만나러 약당으로 찾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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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운좋게 연단 과정을 구경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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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주고도 못 볼 진기한 광경을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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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보 연단술사 이아금은 거대한 솥에 물과 영초를 집어넣고 열심히 끓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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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자를 휘휘 젓다가 살짝 떠서 맛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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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입으로 불을 뿜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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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화법력으로 이루어진 불꽃이 솥을 달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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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자마저 땀을 비 오듯 흘릴 정도의 고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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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금은 내뿜는 숨결의 양을 조절하며 서서히 적정 온도를 찾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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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이아금의 집중력에 감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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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남이 해준 단약만 꿀떡꿀떡 삼켰지, 단약이 이런 힘든 과정 끝에 완성되는지는 전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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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는 절대 단약의 맛을 가지고 이러쿵저러쿵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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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외에도 서란은 오죽문 곳곳을 탐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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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혜문과 함께하는 즐거운 거인살법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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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영영과 함께하는 개허접 바둑 연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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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과 함께하는 대지모신 복각 이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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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륙에서 가져온 짐 정리도 끝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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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금자 증명 옥패와 톱니바퀴는 기념품 상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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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토영목은 장서각 개인 금고에 보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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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더 인형술 실력을 키우고 사용할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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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서란의 관심사는 당연히 인형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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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히는 동대륙과 서대륙, 양 대륙에서 익힌 인형술을 하나로 접목시키는 게 주목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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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륙 인형술의 정수는 이미 보유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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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애호가 엽관보의 ‘학습 인형 연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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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어려워서 예전에는 절반도 이해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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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지금이라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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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경건하게 연구서를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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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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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 수사님! 어찌하여 이리도 빨리 가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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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서를 탐독하며 서란이 눈물을 줄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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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술 불모지 서대륙에서 이 정도 인형술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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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누구도 이해해 주지 않던 고독한 세상에서 엽관보는 홀로 기적을 탄생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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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장난으로 서대륙에 태어난 엽관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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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운의 천재가 남긴 인생 최후의 심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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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동대륙 인형술의 정수를 깨우친 류서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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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일련의 연쇄 속에서 어떤 천명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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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 수사님, 하늘에서 지켜봐 주세요! 제가 당신의 유지를 잇겠습니다! 반드시 궁극의 인형술을 완성시키겠습니다! 반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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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까지 울려퍼질 굳건한 눈물의 맹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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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방에서 얌전히 자고 있던 금영영이 깨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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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따라 유난히 시끄러운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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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영영은 귀마개를 끼우고는 다시 눈을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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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침부터 서란은 인형술에 몰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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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표는 하루 열 번, 감사의 연구서 정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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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번 정도 읽었을 때, 손님이 방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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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뇌부의 일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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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 수사, 혹시 보고서는 아직 멀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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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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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뒤통수를 긁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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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쩐지 뭘 잊은 것 같은 기분이 들더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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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름 가까이 소식이 없자, 독촉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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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부랴부랴 동대륙 보고서를 작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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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죽문-금작파 공동 수뇌부가 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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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제는 ‘적절한 동대륙 접근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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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뇌부는 서란의 동대륙 리포트를 속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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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 나간 분량이었지만, 다들 금방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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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류를 수백 년 넘게 읽으면 싫어도 이렇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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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서의 내용은 생각보다 충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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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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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뇌부는 익숙하게 브레인스토밍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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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접촉을 하기는 해야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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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예 무시하기에는 너무 아까운 일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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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형적인 세력 구도 탓에 낭비되는 인적, 물적 자원이 만만치 않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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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정된 비승을 고려하면, 공법이나 법술 수집에 중점을 두는 편이 낫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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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서를 보니까 범인으로 살다가 죽는 영근보유자들이 너무 많군요. 방법이 아예 없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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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부분은 그냥 포기하죠. 전송진이 있는 대수림 심층부를 통과할 수 있는 건 고위계 수사뿐이지 않습니까. 아쉽지만 어쩔 수 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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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명계의 인력이니, 침식 지대니 하는 게 문제군요. 해결 방법도 마땅치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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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균열도 닫혔으니 금방 괜찮아지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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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식 지대가 정화되는 것보다 우리가 비승하는 게 더 빠를 것 같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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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전송진을 대수림 밖에도 만든다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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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들이 연구 중이기는 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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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송 문양의 해석이나 제작법 복구 가능성은 지금 거론하기에는 너무 이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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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우리끼리 여기서 이런다고 크게 의미나 있겠습니까? 지금 보유한 동대륙에 대한 정보라고 해 봐야 류 수사의 보고서뿐이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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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습니다. 내용은 충실하지만, 결국 혼자서 수집한 정보입니다. 이 정도로는 제대로 된 의사 결정이 불가능합니다. 애초에 서대륙과 동대륙은 수도문파의 구조부터 산수 문화까지 너무 이질적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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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옳은 말씀입니다. 특히 거대문파들에 관한 다양한 정보가 필수적입니다. 그나저나 십대문파 비판 항목은 왜 이렇게 방대합니까? 나머지는 부실한데 여기만 이상할 정도로 분량이 많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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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 대상의 대분류도 너무 많습니다. 오행인면목, 열 개의 거대문파들, 점점이 자리잡은 약소문파들, 심지어 산수 집단까지 있습니다. 그런데 류 수사의 활동 반경은 태본곡에만 집중되어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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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대균열을 닫은 여파로 벌어질 혼란도 문제입니다. 현시점에서는 어떤 예측을 해도 예언가 흉내에 불과할 겁니다. 정보도, 시간도 더 필요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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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 결과, 여론이 한쪽으로 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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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큰 문제는 정보 부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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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동대륙에 관한 의사 결정은 잠정 보류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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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게 수동적인 대응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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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 수뇌부는 어떤 조직을 동대륙에 파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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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책임자 금중패가 전송진을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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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명의 결단기 수사도 함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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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전송진이 있는 궁전을 거점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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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의 임무는 외교가 아니라 첩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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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는 산수로 위장해서 태본곡에 잠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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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륙은 독특한 수선 문화 덕분에 연고 없는 결단기 수사가 대뜸 등장해도 전혀 의심받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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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원들은 동대륙에 녹아들어 인맥을 쌓고 정보망을 구축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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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머지는 최후방 거점인 전송진 궁전을 지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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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에 있는 호전적인 요괴들을 모조리 구축하고, 대균열 인근 유적을 탐색할 예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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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송진만 사수하면 일이 틀어져도 후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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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중패는 심장의 두근거림을 즐기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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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현지 협력자라는 삼안묘부터 찾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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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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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원 일부가 과일 바구니를 들고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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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격조는 우선 요괴 퇴치부터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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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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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무수한 지진파가 대수림을 강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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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관 겸 토속성 공법 전문가 금중패가 첩보 조직 책임자가 된 이유는 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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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관의 덕목은 첩자의 덕목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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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지상전에서 그보다 강한 이도 드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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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중패라면 어떤 상황에도 대응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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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도, 외교도 정보 수집부터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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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말로 최고의 인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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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중패가 기대감에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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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갑구나, 새로운 세상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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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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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래 온 손님이 동대륙을 염탐하고 있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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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맹약에 따라서 연구를 하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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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학습 인형에 관한 연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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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서는 목각인형 내부에 봉인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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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반으로 갈라진 탓에 작동을 멈췄지만, 목각인형은 아직도 그 쓸모를 다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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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서 서문에는 목각인형의 잔해를 교보재로 활용하라는 전언이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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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슥한 심야, 서란은 창고에 고이 잠들어 있던 목각인형의 우반신과 좌반신을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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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술대 위에 나란히 놓인 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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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연구서에 적힌 절차대로 착실하게 목각인형을 해체 및 분석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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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로 감탄이 나오는 설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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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오, 오오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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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저하게 조율된 복잡한 내부 기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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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울 만치 효율적인 법력 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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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의 머리에서 나왔다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정교한 논리 구조와 최적화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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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륙 인형술과는 출발선부터 천지 차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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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고뇌했기에 비로소 도달할 수 있었던 경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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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말로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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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밤새 목각인형을 분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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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합된 부품이 보다 작은 조각으로 나눠질수록, 서란의 인형술 역시 한계를 모르고 발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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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관보는 자신이 일생 동안 쌓아올린 성취를 계승자에게 고스란히 전수하는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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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의 역설계 실력도 일취월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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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필요가 없어진 변형 법기, 변신괴뢰선을 고작 열흘만에 조각조각 분석할 정도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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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과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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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서란의 나이는 딱 서른 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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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엽관보의 연구서를 발견한 그 날로부터 어언 십오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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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이제 준비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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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시 신규 인형 개발 위원회가 소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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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방 신학기 때문에 바쁜 호혜문을 대신해서, 세 번째 자문 위원이 합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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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죽문 죽순이 겸 백조, 금영영 선생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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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륙 유학파 인형술사, 류서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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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인간적인 심미관 보유자, 담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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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로지 효율만 추구하는 자, 금영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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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잇값 못하는 삼인방이 다탁에 둘러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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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표는 산업용 학습인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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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 정확히 말하면, 비숙련 노동 분야에서 사람을 모조리 대체할 수 있는 인형이 만들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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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칭 서대륙 최고의 인형술사는 자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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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도 나름 경력자라고, 담청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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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습인형이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인형이라는 게 보통 성능과 비용이 비례하지 않더냐. 개발비가 아무리 많아도 얼마 못 만들 것 같은데, 단순한 일꾼 치고는 너무 값비싼 인형이 아닌지 모르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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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청산유수로 답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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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는 말씀입니다. 학습능력을 탑재한 인형은 굉장히 비싸죠. 하지만 모든 인형이 제각기 학습할 필요는 없습니다. 비용 문제도 문제지만, 굉장히 비효율적인 방식이니까요. 인형끼리 연결할 수단만 있다면, 뇌는 딱 하나만 존재해도 충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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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이 경악하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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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서로서로 연결된 인형이라니! 그런 방법이 있단 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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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이죠, 제가 누굽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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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답은 바로 전심술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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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심술이란 특정 정보를 타인에게 전달하는 법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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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전심술을 응용해서 인형끼리 정보를 주고 받을 수 있는 법술 연결망 구조를 탄생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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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하야 전심망, 인형들만의 네트워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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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가 전기 신호를 보내면 팔이 움직이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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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이 짠 작전을 병사들이 수행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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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와 네트워크로 연결된 단말기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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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떠올린 구상은 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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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생각과 행동의 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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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방법을 통해서 비용 문제를 돌파해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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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영영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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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습과 통제를 담당할 핵심 인형에만 고급 재료를 사용하고, 나머지는 그냥 저렴하게 만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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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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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바로 그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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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동력원은 또 어쩌려고? 저렴한 재료만 사용하면 한번에 저장할 수 있는 법력의 양이 얼마 안 될 텐데. 축기기 수사가 온종일 따라다니면서 인형 멈출 때마다 충전해 줄 수는 없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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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력원은 법력 원격 공급 법술로 해결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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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영영과 서란은 이후에도 문답을 주고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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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습과 통제를 담당하는, 그런데 이걸 뭐라고 불러야 하지? 핵심 인형? 아무튼 핵심 인형이 나머지 인형들에게 법력을 공급해 주는 방식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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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정확해. 핵심 인형의 정식 명칭은 법뇌야. 법력으로 작동하는 두뇌라는 뜻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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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법뇌는 법력을 어디서 공급받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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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가충전 기능을 탑재할 계획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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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기능은 보통 효율이 끔찍하게 나쁘던데, 수많은 인형에게 공급할 정도의 법력이 모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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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인 경우에는 그렇지만, 소형화를 포기하면 효율 문제는 걱정할 필요 없어. 그 외에도 용맥과 연동해서 영기를 끌어올 생각이야. 법력 수급은 이 정도로도 충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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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력을 원격으로 공급할 경우에 발생하는 한계 거리와 법력 손실률 문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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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계 거리 문제는 산맥 곳곳에 중계기를 설치하면 돼. 중계기 숫자가 늘어날수록 법력 손실률도 점차 낮아지지, 단거리 전송만 반복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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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영영이 감탄하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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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겠다, 너는 서대륙 최고의 인형술사가 맞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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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도 옆에서 서란의 이름을 연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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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서란! 류서란! 류서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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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 과정은 급물살을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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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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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단풍이 산맥을 물들이는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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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반년 간, 삼인방은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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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서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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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일어나서 한증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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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먹고 어인교단 순례자 접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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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 먹고 원영기를 향한 수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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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먹고 인형 개발 회의 참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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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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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일어나서 한증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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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먹고 연못에서 잉어와 함께 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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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 먹고 어인교단 순례자 접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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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먹고 인형 개발 회의 참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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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영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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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지막이 일어나서 점심 먹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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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놀다가 질리면 깔짝깔짝 수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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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먹고 인형 개발 회의 참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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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보다 일찍 잠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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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동안 개발 회의는 막힘없이 진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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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문제 제기도 없었다는 증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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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이런 경우를 망조가 들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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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조의 짐승들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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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계에 도래한 지옥의 군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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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과 담청, 금영영이 차례대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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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완벽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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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잡을 곳이 없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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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도 쭉 이대로만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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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대로 가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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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을 완성하기 위해서 초빙한 외부 협력자, 이아금이 폭주기관차를 전력으로 막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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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닌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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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당황해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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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금아, 갑자기 왜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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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러냐고? 저걸 보고도 그런 말이 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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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금은 삼인방이 탄생시킨 흉물을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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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채만 한 거대 두뇌와 무수한 해골 군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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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뇌는 역겹고, 해골들은 머리조차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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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금이 상식적인 반응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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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왜 뇌 모양으로 만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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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과 담청, 금영영이 순차적으로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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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인형의 이름은 법뇌야. 그래서 뇌 모양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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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크기를 봐라. 참으로 강해보이지 않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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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습 및 통제 기능을 담당하지. 인형이나 중계기까지도 자체적으로 생산할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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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금이 해골 군단의 문제도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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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해골들은 뭐야? 머리통은 또 어디 갔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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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인방은 이번에도 친절하게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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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뇌의 통제를 받는 단말기 인형들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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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가 없으니, 약점도 없는 셈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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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비 향상과 원가 절감을 위한 형태지. 최적화를 위해서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를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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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 설계는 이미 끝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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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화속성 수사의 불타는 숨결로 점토를 도자기로 바꾸면 거대 두뇌와 해골 군단이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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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이아금을 불러온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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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아금은 결사반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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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런 악귀들을 오죽문에 풀어놓을 수는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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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동생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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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금아, 이게 뭐가 악귀 같다는 거야? 이 정도면 그렇게 독창적인 것도 아닌데... 저번에 만든 금강야차는 너도 좋아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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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금이 감추어 왔던 진실을 털어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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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는 말 못했는데... 솔직히 언니 미의식 조금 이상한 것 같아. 언니가 만든 인형들, 혹시라도 애들이 보면 경기를 일으킬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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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격받은 서란이 말을 더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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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내 인형이 그렇게 이상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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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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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왜왜, 왜 그때는 그렇게 말 안했던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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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금이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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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언니가 조각에 재능이 없는 줄 알았어. 그래서 그냥 거짓말한 거야, 상처 주기 싫어서. 그런데 언니가 만든 인형 사 자매를 보고 깨달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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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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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는 조각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어. 단지 심미안이 뒤틀려서 그랬던 거지. 그러니까 이런 이상한 인형 만들지 말고 평범한 거 만들면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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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건 내 미학이야. 이걸 포기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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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 없는 해골이 미학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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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의지와 철학적 사유를 포기한 인간 군상에게 날리는 나의 통렬한 일침이 안 느껴져? 이 뼈대만 남은 집단 내면에 담긴 파격적인 예술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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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금이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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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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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작게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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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알지도 못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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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이아금은 최후의 수단을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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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사람들한테 물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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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도 물러서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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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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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대규모 설문조사가 진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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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 두뇌와 머리 없는 해골 군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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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상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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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화에 나올 법한 귀여운 동물 친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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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 친구들은 이아금의 의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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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몸에 동물 머리를 올린 단순한 형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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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의욕 없이 대충대충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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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문 대상은 폐관 수련 중인 원영기 수사는 제외, 열 살 이상의 수도자라면 누구나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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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성별과 출신, 연령대가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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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령 범위만 얼추 오백 년, 정말 광범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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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서각 여러분의 협조로 결과는 금방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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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전 성별, 전 연령대에서 패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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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한 집단만이 서란의 편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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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대 남성 청소년 집단, 오직 그들만 서란의 거대 두뇌와 머리 없는 해골 군단에 호의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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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어쩔 수 없이 결과에 승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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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추하게 꿍얼거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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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내 미학은 틀리지 않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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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동대륙이었다면 다른 결과가 나왔을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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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진실된 미학이란 패배하지 않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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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서란이 새로 발명한, 도자기 인형 군체의 정식 명칭은 ‘동물농장’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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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농장, 드디어 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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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시일은 당장 올해 연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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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계획은 내년 봄, 동물농장이라는 이름답게 파종하는 시기에 선보일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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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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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맥에 눈이 너무 많이 내렸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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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백 년에 한 번 볼까 말까 한 폭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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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술로 녹이거나 하면 다시 얼어서 빙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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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불쌍한 연기기 수사들이 눈삽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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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기 수사들은 죽을 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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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이 빠져라 삽질을 하고 뒤로 돌아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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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도로 무릎 높이까지 눈이 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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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기 수사들이 울부짖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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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죽문에는 왜 제설 법술이 없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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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이게 맞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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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 좀 내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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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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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뭐라고 떠들든 하늘은 꿈쩍도 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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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사람은 날씨를 바꿀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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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계에서 날씨를 조종할 수 있는 존재는 화신기 수사와 용, 단 둘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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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오죽문에도 용이 하나 있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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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담청에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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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 님, 혹시 날씨를 바꿔 주실 수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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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불 밖으로 얼굴만 빼꼼 내민 담청이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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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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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이 폭설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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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이 서란의 말을 끊고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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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괜찮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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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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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란 것도 결국은 순환이다. 힘이 있다고 억지로 비틀어 봤자 좋을 거 하나 없지. 당장 오늘 날씨를 바꾼 여파 때문에 몇 년 동안 가뭄이 들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래도 바꾸길 원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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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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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요, 못 들은 걸로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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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기 전에 난로 좀 침대 근처로 옮겨 주겠느냐? 너무 추워서 이불 밖으로 나가질 못하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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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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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로 네 개를 옮겨 주고 방에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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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태 내린 눈 무게로 지붕이 무너지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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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다리를 타고 지붕 위로 올라가는 하녀들을 보며, 서란은 마침내 결정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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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 수 없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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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농장(앞서 해보기)이 긴급 출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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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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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눈삽과 함께 보내던 연기기 수사들은 깜짝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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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신이 도자기로 된 동물친구들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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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 고양이, 말, 돼지, 양, 닭, 소, 토끼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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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 모양은 다르지만 모두 눈삽을 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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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기 수사들은 혹시나 하는 기대감에 부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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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건, 류 수사님의 인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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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제설 작업 도와주시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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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으, 역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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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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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동물친구들은 사람들의 기대를 배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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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성하게 삽질하다가 자기 발등 찍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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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치우다가 눈삽으로 옆에 있던 인형 후려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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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혼자 미끄러져 넘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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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얼리 액세스 단계라서 미흡한 점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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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치우는 인형보다 땅바닥에 엎어진 채, 일어나지도 못하고 버둥거리는 인형이 더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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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기 수사들은 기대를 접고 삽질이나 마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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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망스러웠던 동물농장의 첫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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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뇌는 당일 얻은 자료를 토대로 밤새 꿈을 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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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들 중에서 눈을 많이 치운 고성과자 일부의 행동을 나름대로 학습한 뒤, 나머지에게 가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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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전부 동일하게 교육시킨 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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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날, 어김없이 동물친구들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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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기 수사들은 경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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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까지는 제 몸 하나 못 가누던 인형이 대부분이었는데, 오늘은 꽤나 그럴싸하게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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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오작동을 일으키는 경우도 있었지만, 평균만 놓고 보면 괄목상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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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법뇌는 다시 한 번 꿈을 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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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약간씩 다르게 교육시킨 탓에 인형들이 거둔 성과에는 다소간의 차이가 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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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뇌는 이번에도 고성과자 일부의 행동을 학습해서 동물친구들 전체를 개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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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들의 제설 숙련도는 빠른 속도로 발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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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농장의 학습 절차가 정상적으로 작동한다는 사실을 확인한 서란은 점토를 대량으로 구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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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모조리 법뇌의 후두엽 구멍에 쏟아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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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내 전두엽 구멍에서 따끈따끈한 인형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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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습과 교육을 반복하며 향상되는 업무 능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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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토만 있으면 꾸준히 증식하는 인형 숫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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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름 정도 지나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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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연기기 수사들은 필요가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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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치울 장소, 눈 버릴 장소만 지정해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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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인형들이 알아서 다 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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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설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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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생활 구역은 정말 깨끗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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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농장의 제설 속도가 강설량을 이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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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오고, 쌓인 눈도 녹았을 무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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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농장은 무수한 개선을 거쳐 마침내 완성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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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활동 범주 역시 크게 증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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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날이 새로운 기능이 업데이트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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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키워요, 동물농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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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친구들이 낫과 괭이, 쟁기를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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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제초나 파종부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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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빨아요, 동물농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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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친구들이 빨랫방망이와 빨랫감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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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다다다 두드리고, 힘껏 비틀어 탈수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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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옮겨요, 동물농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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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친구들이 무거운 짐을 이고 산맥을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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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적인 경사의 계단도 인형을 막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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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닦아요, 동물농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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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친구들이 오죽문 구석구석을 쓸고 닦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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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레기나 빨랫감도 인형들이 알아서 치워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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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여름, 가을,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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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가 끝나고 다시 한 번 봄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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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임없이 증식한 중계기와 동물친구들 덕분에 동물농장의 영향 범위는 산맥 전역으로 확장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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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 운반, 청소, 세탁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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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기 수사가 담당하던 업무가 거의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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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관리자 몇 명만 있어도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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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기 수사들은 사실상 노동에서 해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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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세상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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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농장 덕분에 비숙련 노동의 수요가 급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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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기 수사의 몫은 인형이 못하는 영역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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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보육 교사나 사무 보조 따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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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부 사람을 상대하는 업무나 두뇌 활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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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마저도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을 여러 명이 함께 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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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연기기 수사들이 할 업무는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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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평균적인 노동 시간은 대폭 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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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기 수사들은 그렇게 확보한 남는 시간을 수행이나 여가에 재량껏 할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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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늘어난 여가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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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기 수사들은 심심해서 몸을 비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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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가 문화의 필요성이 대두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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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 수뇌부는 열띤 토론 끝에 결론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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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장려 운동을 하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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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대뜸 책을 들이밀면서 권유한 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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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스마트하지 못한 방식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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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 수뇌부는 취미 교실부터 잔뜩 개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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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 도예, 자수, 공예, 요리, 목공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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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분야의 취미 교실이 닷새마다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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닷새라는 간격이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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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영영은 바둑 교실에 등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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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서란에게 승패패패승패패승패패패를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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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난 묘수를 배워서 탈탈 털어주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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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을 진행하는 강사는 어떤 결단기 수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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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살 때 처음 돌을 잡은 뒤, 어언 사백 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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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국제 바둑 대회에서 우승만 열 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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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영영은 유익한 시간을 보내고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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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배운 정석을 곧장 서란에게 써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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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방 안 통하게 됐지만, 삼 연승은 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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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영영은 이후에도 꼬박꼬박 수업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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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점점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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닷새마다 듣는 바둑 수업은 너무 감질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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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쯤, 바둑 강사가 이런 얘기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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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수업 시간 이외에도 홀로 공부하고 싶은 분은 장서각에 가보세요. 바둑 관련 서적이 많습니다. 정석이나 사활 문제, 명국 기보까지 있죠. 물론 대여도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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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영영은 한달음에 장서각으로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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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바둑 관련 서적을 두 권 정도 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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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일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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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취미 관련 서적만 보던 사람들도 장서각에 방문할수록 관심 분야가 넓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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싫어도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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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저히 그냥 넘길 수 없는 문구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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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을 하는 백 가지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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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인이 되기 전에 사람부터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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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면 손해보는 영물 대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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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 문구가 사람을 제대로 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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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기심에 책을 빌려보는 사람도 늘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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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할 일도 없어서 심심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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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직접 책을 쓰는 사람까지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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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수한 신간이 장서각 대여 목록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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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여하는 사람이 많으면 더 찍어내는 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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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쇄기에 먹물 마를 날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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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죽문에 찾아온 독서 열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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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련의 과정을 보고 서란은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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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책 한 번 써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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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눈을 감고 상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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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운 미래, 서란은 대문호가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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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서란에게 열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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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 작가님, 제발 신간을 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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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에 나온 인형술 서적, 정말 굉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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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커서 인형술사가 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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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및 출판 열풍이 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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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도 책을 써서 이 흐름에 올라탈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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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인형술 열풍도 꿈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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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벌써 성공한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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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 수사님, 제가 드디어 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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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곧장 방에 틀어 박혀 집필에 몰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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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 대륙 인형술의 정수를 집대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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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말로 혼을 담아내는 고된 과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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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마침내 완성해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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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술입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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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대에 두고두고 물려줘야만 할 불후의 명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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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자신만만하게 책을 출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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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그마치 서대륙 최고의 인형술사가 저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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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서란은 동대륙 유학파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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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자기 책이 불러올 파장이 기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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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뒤, 서란은 장서각에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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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달의 다독상은 금영영이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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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서 한 달 동안 책을 백 권이나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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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순수하게 감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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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쟤는 수행도 안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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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자리를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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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달의 인기 도서, 해당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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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달의 추천 도서, 해당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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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규 도서 부문을 살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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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달의 인기 신간, 해당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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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달의 추천 신간, 해당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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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흔들리는 정신을 다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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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 첫 술에 배부를 수는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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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내가 책을 낸 줄 몰랐나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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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아니고서야 말이 안 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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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장서각 사서에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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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인형술입문서’는 여태 얼마나 대여됐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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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서가 서류를 뒤적이더니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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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안 빌려 갔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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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도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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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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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죽문의 최연장자는 여무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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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올해로 922세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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덤으로 인계 최강자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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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무진의 일과는 굉장히 규칙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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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도 쉬지 않고 명상과 공법 수행을 반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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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년에 단 하루, 죽순 캐는 날만 예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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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이 마침 죽순을 캐는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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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무진은 어김없이 죽림에 방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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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라서 애들 물놀이하는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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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고 활기찬 아이들의 웃음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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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무진에게는 너무나 오래된 과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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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죽순을 챙겨서 거처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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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보다 약간 많은 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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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무진은 능숙한 솜씨로 죽순밥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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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삼등분으로 똑같이 나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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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무진과 아내, 서란의 몫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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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정기 교습이 있는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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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정확한 시간에 방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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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무진과 서란은 익숙하게 대화를 주고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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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안술을 사용해 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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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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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영안술을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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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결단기 수사가 됐던 순간과는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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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무진에게서 느껴지던 위압감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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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는 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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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격차가 좁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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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의 영혼은 어느새 까마득한 곳까지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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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남은 계단이 몇 개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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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서란의 성장 속도는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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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부적인 재능에 법보의 힘이 더해진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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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경지를 넘볼 때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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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무진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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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원영 의식에 대해서 알려 주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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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눈을 빛내며 집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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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자세한 의식 준비 절차 같은 걸 외울 필요는 없네. 어차피 그런 건 문파에서 준비할 테니까. 자네가 신경쓸 건 단 하나, 천겁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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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겁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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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천겁. 바로 하늘이 내리는 시련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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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무진은 설명을 이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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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영기란 영혼의 초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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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경지에 도달하면 영혼이 한 꺼풀 허물을 벗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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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갓난아이의 모습으로 응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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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잘것없던 영혼은 이런 방식으로 다시 태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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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 격이 높은 존재로 도약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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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영의 형태가 갓난아이와 흡사한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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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보면 윤회를 비트는 행위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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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하늘은 천겁이라는 시련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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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로지 천겁을 견디고 자격을 증명한 수도자만이 원영기라는 경지에 도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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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도 몇 년 뒤에 도전할 예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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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을 마친 여무진이 책을 한 권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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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원영 의식 전까지 반복해서 읽어 보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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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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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무진은 보따리도 하나 건네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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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죽순밥, 집에 가서 친구랑 나눠 먹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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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이런 걸, 정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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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책과 죽순밥을 가지고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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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무진은 정성스럽게 상을 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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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아내가 좋아하던, 그래서 어느새 여무진도 좋아하게 된 죽순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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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아내의 위패 앞에 내려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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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무진은 여전히 아내를 사랑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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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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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이아금과 죽순밥을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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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무진의 요리는 훌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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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식사가 끝나고 차도 한 잔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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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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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금아, 내가 얘기했던 거 알아 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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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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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뭐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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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자기 책이 인기 없는 이유가 궁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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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인간관계가 넓은 이아금에게 부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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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술 서적이 인기 없는 이유를 조사해 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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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금이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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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제일 많은 응답은 무관심이었어. 인형술에 딱히 관심이 없어서 관련 서적을 안 빌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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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그렇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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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득할 수 있는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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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륙에서 인형술은 비주류 법술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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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건 두 번째로 많았던 응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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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금이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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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로 많았던 이유는 고정 관념이었어. 언니가 만든 도자기 인형을 보고 인형술에 대한 선입견이 생겼나 봐. 막연하게 어렵다는 인식 때문인지 인형술 관련 서적은 쳐다도 안 본다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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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한 장만 읽지, 진짜 쉽게 썼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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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응답도 예상한 대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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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로 자주 나온 대답은 흥미 부족이었어. 서고에 꽂혀 있는 책을 꺼내서 몇 장 정도 읽어 봤는데, 그냥 재미가 없었대. 그래서 제자리에 다시 두고 나왔다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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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반만 지나면 재미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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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고개를 떨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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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심한 좌절감에 마음이 꺾일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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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현실이라는 게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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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이달의 인기 도서는 바둑입문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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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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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의 마음이 까맣게 물들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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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술은 수선계 첨단 기술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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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 서적이 바둑 서적한테 지는 게 말이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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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였으면 상상도 못할 일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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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이런 생각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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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만, 생각해 보니까 좀 괘씸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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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 덕분에 놀면서 인형술입문서를 안 읽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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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적으로 한 번은 봐야 하는 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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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쓸쓸히 방으로 가다가 금영영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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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 개월 연속 다독왕은 책을 보며 걷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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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한시도 손에서 놓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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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도끼눈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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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내 책 아무도 안 빌렸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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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러면 얘는 한 달에 책을 백 권씩 읽으면서 내가 쓴 입문서는 한 번도 안 읽었다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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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에는 분명 인형술 좋아한다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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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복도를 지나던 금영영에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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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영, 무슨 책 읽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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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 입문서 읽는 중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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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술은 안 읽어? 전에 해 보니까 재미있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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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안 읽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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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말을 더듬으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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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왜왜,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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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게 더 재미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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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다른 거 다 보면 인형술도 볼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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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영영은 단호하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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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안 읽어. 애초에 누가 요즘 그런 거 읽어, 소설 읽느라 바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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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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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랐어? 요즘은 소설이 유행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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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새 기술서에서 소설로 유행이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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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남을 가르칠 정도의 전문성이 없는 사람도 책을 쓰고 작가가 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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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력과 이야기로 승부하면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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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의아해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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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지금 요리 입문서 읽고 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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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요리사가 주인공인 소설을 보고 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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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마친 금영영은 자기 방에 들어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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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랬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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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도 의문이 해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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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쩐지 안 어울리는 요리 책을 보고 있더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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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신부 수업이라도 하는 줄 알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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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요리사 주인공을 보고 흥미가 생긴 거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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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끄덕이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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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라, 그렇다면 혹시 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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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소설가가 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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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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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스스로를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위대한 예술가라고 굳게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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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역사적인 천재 다 빈치가 지닌 무수한 재능 중에는 문학의 재능도 포함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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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도 질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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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또한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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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술입문서는 인기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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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건 기술서라서 그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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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예술가 류서란이 쓴 소설이라면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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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올라라, 나의 예술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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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장편 소설 집필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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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구성의 요소는 세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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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인물, 배경,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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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당장 인물부터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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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들이 자연스레 인형술에 흥미를 느낄 수 있도록 인형술사를 주인공으로 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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덤으로 인형 동료도 하나 급조해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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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은 몰입감을 위해서 현실을 참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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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륙과 서대륙을 적당히 섞은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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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 대륙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면서 보고 들은 게 도움이 많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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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은 여행 도중에 마주치는 여정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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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가진 인형을 완성하기 위해서 인형술사 주인공은 자기 인형과 함께 모험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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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줄기만 유지한 채, 짧은 에피소드를 다닥다닥 붙일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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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는 모험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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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는 권선징악 바탕에 SF적 철학을 살짝 첨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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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온이 없는 인형보다 냉혹한 인간, 갑작스럽게 생긴 자아에 혼란스러워 하는 인형 소녀, 이외에도 존재와 정의에 대한 고뇌를 겉핥기로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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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완성된 원고를 보며 직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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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 텄다 텄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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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저히 뜰 것 같지 않은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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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술사 소년과 인형 소녀의 운명적인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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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난하게 흐르는 기승전결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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뻔한 클리셰와 사골처럼 우려먹은 주제 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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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루한 고전 소설 냄새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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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은 내 길이 아닌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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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어떻게 사람이 전부 잘 하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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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쯤 못 하는 건 인간미지, 인간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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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글을 쓴 반 년이 아까워서 책을 출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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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은 ‘인형술사 소년과 인형 소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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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장편 소설이 성공할 거라는 기대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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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서란은 대문호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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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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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의 장편 소설은 신기록을 경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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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여하고 싶어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증쇄하고, 또 증쇄하고, 또또 증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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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내 인쇄기가 버티지 못하고 망가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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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달의 인기 도서, 이 달의 추천 도서, 이 달의 인기 신간, 이 달의 추천 신간을 모조리 휩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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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술입문서 대여 순위는 여전히 꼴찌, 결국 순위표의 천장과 바닥을 동시에 차지한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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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운 업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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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서각의 도서 출판 담당자가 서란을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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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 작가님, 다음 편은 언제쯤 완성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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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당황해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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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편이요? 벌써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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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오래 걸릴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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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소한 반 년은 걸릴 텐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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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당자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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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곤란하네요. 사람들이 기다릴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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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이해가 안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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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이렇게까지 유행할 소설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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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닌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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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내 감성이 남들이랑 많이 다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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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 궁리를 하던 담당자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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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이야기 길이를 짧게 잘라서 출판하죠. 나중에 여러 개를 한꺼번에 묶으면 될 것 같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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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솔직히 자신이 없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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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당자가 의욕을 불어넣어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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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인형술입문서의 대여도 폭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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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짓거 한번 해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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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기 부여, 완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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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가 된 지 3년 차, 많은 일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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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금영영이 금작파로 끌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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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제는 내팽개치고 내일 죽을 것처럼 놀던 어느 날, 외면하고 있던 현실이 들이닥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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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금영영의 부모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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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 오죽문까지 온 두 사람은 딸을 양쪽에서 붙잡고 연행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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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영영이 질질 끌려가면서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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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란, 부탁이 있어! 내 방에 있는 책 좀 대신 반납해 줘! 그리고 서랍 안쪽 자작시도 꼭 태워 주고! 나 몰래 열어 보면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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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히 지속될 것만 같았던 다독왕 금영영의 장기 집권도 이렇게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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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서란은 서른다섯, 금영영은 서른여덟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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낼모레 마흔이 저렇게 추하기도 쉽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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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란은 친구의 부탁을 착실하게 이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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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책상 앞에 앉아서 머리를 싸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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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쓰고 있는 내용이 마음에 안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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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년 간, 대문호 류서란은 정말 바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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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소설이 세 권, 단편 소설은 자그마치 스무 권도 넘게 연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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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와중에 매일매일 수행까지 빼먹지 않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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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술사 소년과 인형 소녀’, 줄여서 ‘인형인형’ 시리즈의 인기는 그칠 줄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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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인형술 선호도가 덩달아 상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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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간절히도 바라던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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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서란은 다음 단계로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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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간단 인형 제작 키트 무료 증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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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인형’ 저자의 인형술 취미 교실 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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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외에도 인형술 홍보를 위한 수많은 노력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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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소스 멀티 유즈와 유사한 전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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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열심히 노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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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덕분에 ‘인형인형’의 팬이 된 독자들도 점차 인형술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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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주류 인형술의 흥망성쇠는 이렇게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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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망성쇠인 이유는 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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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술의 인기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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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튤립 버블에 버금가는 성장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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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역사와 비슷한 결말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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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 제작 키트를 완성한 뒤, ‘인형술도 할 만 한데?’라고 생각한 독자가 적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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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밀키트 좀 만들어 봤다고 갑자기 복어 요리 전문가가 되는 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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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진짜 인형술을 목도한 뒤 정신을 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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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술은 소설로만 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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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1년 차, 버블은 순식간에 붕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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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심차게 출판한 인형술입문서 개정판도 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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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열받는 건 딱 인형술만 망했다는 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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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인형’ 시리즈의 인기는 식을 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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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여태까지 소설을 연재하고 있는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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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인형술을 사랑해 주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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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 코난 도일 선생님, 이런 심정이셨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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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그냥 ‘셜록 홈즈’ 해 버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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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원고지를 내려다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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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 코난 도일은 소설 주인공을 죽인 뒤, 길을 걷다가 우산에 얻어맞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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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결국 후속작에서 주인공을 살려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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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서란은 때려 줄 사람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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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이 저절로 움직여서 글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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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악한 악당에게 차례차례 희생되는 동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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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신히 이겼지만 악당의 자폭에 휘말린 주인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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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술사 소년이 죽고 홀로 남겨진 인형 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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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폐 드리프트와 급전개, 몰살 엔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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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가 쓴 글을 읽던 서란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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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원고지를 갈기갈기 찢으며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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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머리에서 썩 나가라, 이 마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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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들 입장에서는 정말 다행인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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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서란은 죽을 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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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이야기 전개가 막힌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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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에 앉아서 몸을 배배 꼬다가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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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이번 편까지만 마무리하고 그만 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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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원고료 받으면서 연재한 소설도 아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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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들 후원도 전부 거절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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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이 점차 연재 중단 쪽으로 기울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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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서란이 마음만 먹으면 아무도 막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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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후원 닫은 무료 연재는 무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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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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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결정하기에는 좀 어려운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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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과 의논이라도 해 볼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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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적절한 상담역을 찾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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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 님과 의논해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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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중정 연못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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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청은 금방 찾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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뿔이 바위틈에 껴서 혼자 끙끙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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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를 쓰던 담청이 서란을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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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 마침 잘 됐구나. 나 좀 도와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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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제가 빼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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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담청의 머리를 이리저리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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뿔이 쏙하고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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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가 틈새에 뿔이 끼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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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갈 것 같아서 넣어 봤더니 안 빠지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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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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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의 궁금증이 해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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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담은 호혜문에게 받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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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집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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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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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글방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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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혜문은 잠깐 일이 있어서 부재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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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들 떠드는 소리를 들으며 서란은 고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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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도 연재를 계속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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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술 홍보도 망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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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의 고통까지 감내하며 더 쓸 이유가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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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돈도 안 받는데 뭘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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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대로 그만둘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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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기다리는 독자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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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결말까지는 써야 하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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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써야할 의미가 정말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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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 고심하고 있을 때, 무슨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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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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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학생이 서란을 보고 경악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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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에 와르르 쏟아진 물건 중에는 서란이 쓴 ‘인형인형’ 단행본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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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문호 류서란의 팬인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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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 류 작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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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노련하게 대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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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들갑, 곤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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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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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는 터져 나오려던 환호성을 꿀꺽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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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피는 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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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는 작은 목소리로 소곤소곤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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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님, 책 정말 재미있게 보고 있어요. 특히 세 번째 장편소설, ‘마모된 톱니바퀴’ 편은 도대체 몇 번을 봤는지 몰라요. 한동안 밤을 새느라 수업 시간마다 졸았다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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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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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어디가 마음에 들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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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는 즉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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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사 인형이 아이를 지키려고 악당과 싸우는 장면이 감동적이었어요. 인형도 감정을 가질 수 있다는 의미잖아요. 합리적인 판단을 하라는 악당의 협박 다음에 나온 대사가 잊혀지지 않아요. ‘내 톱니바퀴가 너무 마모돼서 오류가 생긴 모양이다.’라니,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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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읽고, 많이 쓰고, 많이 생각하면 된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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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 그러면 인형술은 어떻게 해야 늘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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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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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인형술에 관심이 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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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저 작가님이 쓰신 인형술입문서도 소장했어요. 인쇄와 제본 비용만 지불하면 살 수 있더라고요. 그렇게 부담스러운 가격은 아니라서 초판본이랑 개정판 둘 다 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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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술입문서 내용은 어땠니? 어렵지는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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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판본은 조금 어려웠는데, 개정판은 정말 이해하기 쉽더라고요. 어쩌면 제 실력이 늘어서 그렇게 느껴졌을지도 모르지만요. 초간단 인형 제작 묶음이 도움 많이 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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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감격해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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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로 열심히 공부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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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아요, 저 열심히 했어요. 이거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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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는 품 안에서 직접 만든 인형을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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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소 어설픈 부분이 많았지만 훌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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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형은 서란이 만든 동물친구들과 닮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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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인형 귀엽죠? 동물친구들 너무 귀여워서 똑같이 만들었어요. 그런데 요즘은 왜 인형술 책 안 내시나요? 입문서는 다 봐서 볼 게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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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말이 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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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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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술 서적은 완전히 까먹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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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안 보는 줄 알아서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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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쓰느라 바쁘기도 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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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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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쓰려고... 요즘 좀 바빠서 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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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그러셨군요! 항상 응원하고 있어요! 저 소설이든 기술서든, 류 작가님이 쓰신 책은 다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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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는 떨어뜨린 학용품을 주워서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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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일은 마친 호혜문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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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 무슨 일로 보자고 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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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침묵하던 서란이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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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문, 미안해요. 저, 해야만 하는 일이 생겼어요. 제가 불러놓고 이런 소리해서 미안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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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혜문이 미소와 함께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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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괜찮으니까 어서 가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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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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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우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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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호혜문의 뒷말을 못 듣고 뛰쳐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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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에는 늦은 봄비가 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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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서란의 열정을 막을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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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말로 인간 화력발전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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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빗속을 달리며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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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없는 일이 아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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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서든 소설이든 상관 없었던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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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책을, 내 작품을 사랑하는 사람만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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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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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에게 작품은 자식이나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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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여태 자식을 사랑하지 않았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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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힘들게 탄생시킨 작품에게도, 그 작품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도 못할 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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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전생에 그렇게도 영화를 봤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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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롭고, 슬프거나 놀랍고, 끝내는 즐거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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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울 수만 있다면 장르도, 작품성도 상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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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의 내면에서 뭔가가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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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를 쫄딱 맞고 돌아온 서란은 곧장 붓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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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 아니라면 쓸 수 없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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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에 대한 사랑을 담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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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코 숨길 수 없는 진심을 담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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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생각을 담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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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밤새 글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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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죽여서 인형으로 만드는 악당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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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미학만을 고집하는 미치광이 인형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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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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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라면 내 예술을 이해할 수 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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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인형술사 소년이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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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인간을 위한 것, 너는 그저 살인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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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일행은 사랑과 우정의 힘으로 승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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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술사 소년과 인형 소녀’의 네 번째 장편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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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는 ‘예술과 사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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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도 독자들은 열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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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서란이 휴재 통보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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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재 및 자료 조사 여행을 떠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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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지 한 장만 덜렁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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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 경마장을 운영하다가 적발된 장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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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가택 연금과 사회 봉사를 마치고 취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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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밤낮없이 일에 몰두하며 다짐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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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일과 결혼하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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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맹세는 고작 삼 년만에 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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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옥기는 중매 결혼을 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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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이 하도 강권해서 어쩔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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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는 금작파의 삼영근자 금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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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는 장옥기보다 두 살 정도 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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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 도중, 용무 때문에 장서각에 방문했다가 장옥기를 보고 첫눈에 반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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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장옥기는 꽤 준수하게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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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만 다물고 있으면 그렇다는 의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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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옥기의 과거 기행을 몰랐던 금씨는 일에 열중하는 진중한 모습만 보고 행동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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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작파에 있는 부모에게 수백 통이 넘는 편지를 보낸 결과, 목표 달성에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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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두 문파가 합병을 추진하던 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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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은 합동결혼식을 통해서 부부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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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장옥기는 그때까지 새색시 얼굴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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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세 살, 새신랑 장옥기는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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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도 한 번 못 본 새색시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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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내키지 않는 혼인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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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남편 된 도리는 다 해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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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흘러, 어느새 결혼 12년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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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은 아들, 딸, 딸, 딸, 아들, 아들,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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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옥기는 칠 남매의 아버지가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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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너무 아름다워서 어쩔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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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옥기는 결혼을 강권했던 부모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열심히 방중술 수련에 힘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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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어린 시절부터 유독 미인에게 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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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옥기의 장녀, 장선화는 사랑 속에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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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는 독서와 애완 토끼 돌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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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는 인형술에도 관심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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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선화의 나이는 올해로 열 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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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래와 마찬가지로 글방에 다닐 나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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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를 가르치는 선생은 호혜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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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만났던 소녀가 바로 장선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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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독자 장선화는 자기도 모르게 최애 소설의 연재 중단을 막은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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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서란은 여행을 떠났고, 여름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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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처럼 등교한 장선화에게 호혜문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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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선화야. 밤새 영근이 자라났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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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선화는 정말로 기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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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요? 그럼 저도 인형술사가 될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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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당연하지. 열심히 수행해서 축기에 성공하면 진짜 인형도 만들 수 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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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선화는 품속에서 토끼 인형을 꺼내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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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인이 만든 인형, 지금은 그저 장난감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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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오늘부터 장선화는 수도자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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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선화는 신이 나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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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제 영근 자질은 어떤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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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맥하던 호혜문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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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영근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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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죽문이 또 뒤집어지고, 수뇌부가 또 소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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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영근이다! 또 일영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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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운은 어디로 흐르는가! 그건 바로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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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있어라, 우리는 간다! 선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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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통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축제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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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씩은 이렇게 발산해 줄 필요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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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길 만큼 즐긴 수뇌부는 이내 차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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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 수사가 입문한 시기가 대충 이십 년 전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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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요? 시간이 참 빠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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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영근자를 이십 년 간격으로 발견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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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이견을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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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히는 삼백 년만에 찾은 거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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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계산이 왜 그렇게 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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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 수사는 유나라 사람이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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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참, 그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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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죽문 사람들이 흔히들 하는 착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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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양나라 사람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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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나라 남서쪽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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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오리 요리로 유명한 지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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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맛있어서 왕족도 방문한다는 그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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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기대감에 애꿎은 젓가락만 만지작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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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오리고기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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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 늦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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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십 년 전부터 기대했는데 드디어 먹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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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축기기였던 서란이 어느새 결단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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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하는 시간이 너무나 길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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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애써 심호흡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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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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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보따리에서 책을 한 권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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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여무진이 준 원영 의식 관련 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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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도 많이 읽었더니 온통 너덜너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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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분한 마음으로 첫 장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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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인이 되기에 앞서 사람부터 되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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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한 첫 문장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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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저자가 만든 독창적인 문구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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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선계에 전해 내려오는 유명한 금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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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책을 보고 있을 때, 요리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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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를 나르던 하인들이 잠시 멈칫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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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 사 자매의 수상한 차림새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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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같이 삿갓을 쓰고 두꺼운 면사를 드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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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이라는 사실을 숨기기 위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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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서란은 부잣집 여식처럼 꾸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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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얼핏 귀인과 호위 무사들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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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 혼자서 방문하면 들여보내 주지도 않을 것 같아서 부득이하게 이런 수단을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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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인들이 모두 나가고, 식사가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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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 구이, 훈제 오리 냉채, 오리탕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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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미식가가 되어 요리를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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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다, 맛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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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점 줄어드는 오리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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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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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맛있기는 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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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왕족까지 와서 먹을 정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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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잘 모르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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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옆방에서 어떤 대화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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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저히 예전 맛이 안 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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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방장 바뀐 다음부터 몇 년 째 이러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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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있던 주방장이 요리를 진짜 잘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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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말이, 왕족까지 와서 먹고 갔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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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한 그 주방장은 요즘 뭐 하고 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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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환갑이 넘었는데 하긴 뭘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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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긴, 손주들 재롱이나 보고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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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도 안 좋아서 오래 못 살 것 같다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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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를 몰래 엿듣던 서란은 세월을 체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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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위계 수사에게 이십 년은 찰나와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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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범인들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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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십 년은 강산이 두 번은 바뀔 긴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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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을 떨치던 요리사는 세월이 흘러 은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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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다가오는 죽음을 기다리는 노인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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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세월의 무정함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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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애써 외면해 왔던 존재를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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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 헤어진 자신의 육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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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공녀로 끌려온 지도 이십 년이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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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서란의 부모는 지금쯤 60대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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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내일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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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생각이 많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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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혈육이라는 존재가 낯설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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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에서도 그랬고, 현생에서도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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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었다 깨어나도 그건 변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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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로 다시 태어난 뒤에도 노력은 해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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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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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라는 건 도무지 친숙해지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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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전생의 흔적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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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종종 사랑을 주고받는 것도 일종의 기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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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할 수 없는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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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쯤 남은 요리가 싸늘하게 식어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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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고민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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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외면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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훗날 미련을 남기지 않기 위해서라도, 한번쯤은 고향에 방문할 필요가 있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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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유나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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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나라 중부에 위치한 촌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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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의 기억과는 많이 달라진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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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땅 어디에도 가족들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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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모를 숨기고 수소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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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가족들이 고향을 떠났다는 얘기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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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씨 집안은 인근 도시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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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에 도착한 서란은 가족들을 찾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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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할 곳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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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근에서 손꼽히는 대저택에 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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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땅을 부쳐 먹던 서란의 집안은 어느새 가문이라고 불릴 정도로 번성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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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오죽문에서 보낸 재물 덕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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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저택 앞에 가만히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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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하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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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분히 잘 먹고 잘 사는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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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안쪽까지 들어가서 확인해 볼 필요가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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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율법 때문에 모습을 보이지도 못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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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로 떠나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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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대문이 열리면서 누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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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을 꼭 닮은 예쁜 소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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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단옷을 입고 하인들까지 줄줄이 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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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호기심에 근처 거지에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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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아이도 류씨 가문 사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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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지는 얼굴을 가린 귀인에게 공손히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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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그렇습죠. 류씨 가주가 가장 아끼는 증손녀입니다요. 예전에 공녀로 끌려간 막내딸과 똑같이 생겼다고 아주 애지중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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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거지에게 몇 가지 더 물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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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의 할아버지는 서란의 큰오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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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족보상으로 서란에게 소녀는 종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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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신기할 정도로 닮기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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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다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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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녀로 끌려간 막내와 닮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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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내딸 초상화를 아주 쏙 빼닮았다고 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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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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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의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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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화 같은 걸 그린 기억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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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소작농 집안에 무슨 돈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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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지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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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한 일화가 있죠. 류씨 가문은 이 도시에 자리를 잡은 다음, 가장 먼저 화공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정말 엄청난 금은을 뿌렸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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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에는 어찌 되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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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화공을 전부 모은 류씨는 이상한 의뢰를 했습니다. 있지도 않은 막내딸을 그려달라고요. 순전히 가족들이 기억하는 외형 묘사만으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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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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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물을 그리도 쏟아 부었는데 안 될 게 있나요. 돈으로는 귀신도 부린다는데. 결국 류씨가 만족할 만한 초상화가 완성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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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말없이 동전 한 웅큼을 건네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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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덩이를 주면 화만 불러올 게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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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지는 연신 감사 인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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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밤이 되길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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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은닉술을 사용한 채 저택에 잠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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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택을 수색한 끝에 초상화를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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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화는 노부부의 침실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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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가만히 초상화를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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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화 속에는 열네 살의 서란이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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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다섯이 된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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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을 둘러보다가 이상한 걸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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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화 앞쪽, 바닥이 한 곳만 잔뜩 닳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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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사람 발자국 모양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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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닳아버린 바닥 위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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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들자 바로 정면에 초상화가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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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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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초상화를 가장 잘 볼 수 있는 장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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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부부는 아마 이곳에서 딸을 그리워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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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선 바로 이 자리에서, 아주 오랫동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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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을 그림으로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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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자기 초상화를 보며 조용히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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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는 명확하게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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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사람은 기뻐도 울고, 슬퍼도 우는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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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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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의 어린 시절에 배우지 못했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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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을 갈망했지만 끝내 찾지 못했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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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었다 깨어나서조차 깨닫지 못했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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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마침내 사랑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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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을 닦은 서란이 잠든 노부부를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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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름이 가득한 얼굴이지만 알아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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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이 자신을 낳고 사랑해 준 부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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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노부부의 무병장수를 빌며 회복술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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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자에겐 효과가 없지만, 범인에겐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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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쇠한 육신이 약간이나마 건강을 되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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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두 사람의 이마에 한 번씩 입을 맞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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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미처 못한 작별 인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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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가족에게 한 애정 표현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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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실에는 곧 노부부 둘만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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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지목은 국수의 아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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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수란, 어떤 나라에서 장기나 바둑을 가장 잘 두는 실력자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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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위지목은 자연스럽게 바둑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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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살 때 처음으로 바둑돌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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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여섯 살부터 신동이라 불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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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년 뒤, 위지목은 바둑 기사조차 이기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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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바둑 기사는 끝내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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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생을 바쳐 쌓아올린 스스로의 기력에 대한 믿음이 송두리째 무너져 버린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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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상 위, 흑백의 돌 사이로 물방울이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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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살, 국수인 아버지 이외에는 상대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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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마저도 승리하기까지 일 년이 채 안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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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지목은 비공식적으로 유나라의 국수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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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대 국수, 아버지는 이런 충고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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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이란 정신 수양의 방법이다. 바둑 기사에게 기력 못지않게 중요한 건 바로 인성이지. 이 아비의 말을 명심하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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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지목은 공손히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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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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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예의 바른 건 말씨와 표정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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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과의 대국에서 패배하고는 저런 소리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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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국수였던 기사가 보일 모습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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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상 위에 존재하는 건 흑돌과 백돌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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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로 위지목은 누구와도 어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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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판 앞에 앉아서 홀로 바둑만 뒀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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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열 살이 되어 삼환문에 입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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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지목은 스무 살에 축기기 수사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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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게도 결단 과정을 가르칠 스승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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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의 일치인지, 스승도 바둑을 둘 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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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지목은 오랜만에 패배를 경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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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에게 바둑으로 진 건 얼추 십 년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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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은 위지목에게 바둑과 수선을 전부 가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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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육십, 위지목은 결단기 수사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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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지 상승도 빨랐지만, 금단의 크기도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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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지목의 재능은 바둑에만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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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 간 마지막 대국이 끝나고 스승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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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심하십시오, 위 수사. 선인이 되기에 앞서 사람부터 되어야만 합니다. 제 마지막 가르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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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이 바둑을 둘 때마다 항상 하던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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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지목은 그때마다 속으로 진저리를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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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국은 압도적인 집 차이로 위지목이 승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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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세, 위지목은 원영기 목전에 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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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로라면 화신기까지 640년 정도가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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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낌새가 약간 이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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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지목은 일부러 자신의 경지를 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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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세, 삼환문이 내전에 휩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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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영기 노괴 둘이 본격적으로 다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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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면적인 이유는 수행 자원 분배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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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실상은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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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문파 비승이라는 공동의 목표가 아니라, 진영 논리와 권력, 이권을 위해서 싸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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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위지목이 같은 원영기 수사였다면, 상대적으로 약한 그부터 죽였을 게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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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지목은 두 노괴를 보며 확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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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런 추악한 괴물들도 원영기 수사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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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인이 되기에 앞서 사람부터 되라는 수선계 금언 따위는 공허한 외침과 다를 바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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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지목은 이길 것 같은 쪽에 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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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스승은 중립을 지키다가 가장 먼저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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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무려 20년이나 계속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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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전은 삼환문을 완전히 결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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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하게 살아남은 원영기 수사는 산송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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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도, 물자도 멀쩡한 게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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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파를 살리려고 노력하는 이들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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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적으로 위지목의 친구가 그런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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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자기 수행마저 포기한 채 문파에 헌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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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는 위지목에게 자주 이렇게 말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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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목, 네가 있어서 다행이야. 내전만 아니었다면 너는 벌써 원영기 수사가 됐겠지. 분명히 너 같은 사람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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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을 듣고, 위지목은 미소로 화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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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를 친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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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영에 녹아들기 위한 교두보였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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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파가 휘청거린 탓에 원영 의식은 불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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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지목은 조용히 기회를 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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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자그마치 50년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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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바라 마지않던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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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의식 불명의 원영기 노괴를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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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노괴를 호위하던 친구도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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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환문은 그렇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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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위지목은 원영 의식을 준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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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환문에서 가져온 자원만으로는 부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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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수많은 수도자들을 학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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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 주의를 했지만, 꼬리가 길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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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지목은 용의주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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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표를 고를 때는 이득보다는 위험을 우선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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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처리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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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장소 역시 신중하게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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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19년이나 실체가 드러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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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륙 수도문파들은 그 많은 결단기 수사가 한 사람의 손에 죽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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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하게 대요괴를 만났거나, 적대 문파 구성원에게 죽었겠거니 생각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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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이 드러난 건 고작 반 년 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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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위지목은 끝까지 실수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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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리가 잡힌 계기는 순전히 우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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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쌍둥이 수도자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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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수사는 특수한 공법을 익혔는데, 서로의 영혼을 공명시키는 게 그 효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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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쌍둥이, 영혼의 형질도 굉장히 유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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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둥이라는 특성과 딱 맞는 희귀 공법 덕분에 그들은 빠르게 경지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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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동생이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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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은 결속된 영혼을 통해서 동생을 죽인 살인자의 얼굴을 똑똑히 목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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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문파들은 즉각 합동 추격대를 결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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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이 결단기로 이루어진 호화로운 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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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동 추격대는 마침내 위지목과 조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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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처참하게 도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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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지목은 백 년 전에 원영기 직전까지 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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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그 동안 수도자들을 죽이면서 전투 경험은 물론이고, 무수한 법기까지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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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가장 위력적인 건 삼환문의 보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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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지목은 팔에 감긴 삼환목령에게 법력을 먹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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넝쿨 끝에 달린 세 열매 중 하나가 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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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털 달린 씨앗은 바람을 타고 날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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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부에 닿은 씨앗은 즉시 발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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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뿌리를 통해서 희생자의 법력을 흡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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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죽음의 꽃이 곳곳에서 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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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개한 꽃들이 일제히 폭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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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은 삽시간에 피안개로 뒤덮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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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동 추격대 절반이 방금 공격으로 전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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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도적인 격차 속에서 죽어가던 이들이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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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지목! 하늘이 네 놈을 심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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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지목은 천벌을 부르짖는 패배자들을 비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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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심판이니, 천벌이니 하는 가소로운 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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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백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지겹게도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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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선계의 금언들은 대부분 헛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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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인이 되기에 앞서 사람부터 되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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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리를 비틀면 대가가 따라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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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생을 꿈꾸는 자, 은원관계를 조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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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쓸만한 건 은원과 관련된 얘기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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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지목은 확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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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게는 의지 같은 게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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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란 그저 우연히 흩뿌려진 만물의 충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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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벌이니, 천겁이니 하는 것들도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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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밀집된 천지영기에서 비롯된 드문 현상일 뿐, 특정한 자격을 증명하는 시련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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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천겁에게 의지가 있다면, 간악하고 멍청했던 삼환문의 두 노괴는 결단기로 죽었을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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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저런 저주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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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판 위에 존재하는 건 흑돌과 백돌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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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와 내가 실력을 겨루는 반상에 제삼자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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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도 바둑과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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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지목은 패배자의 넋두리를 무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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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안 가 합동 추격대는 전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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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곧 두 번째, 세 번째 추격대가 도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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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지목은 황급히 현장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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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처리에 많은 시간을 쓸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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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인지 사소한 실수를 하나 저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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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발의 여파로 강에 빠진 하반신을 못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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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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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울적한 마음으로 강변에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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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과 관련된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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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괜히 돌멩이나 강에 던지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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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만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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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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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무릎에 고개를 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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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와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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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이상한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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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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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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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다시 고개를 무릎에 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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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좀 도와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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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벌떡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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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히 들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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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감은 서란이 정신을 집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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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법력의 파동이 몸을 두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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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아까 들은 목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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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와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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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수도자가 구조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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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곧장 영안술을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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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저 멀리 뭔가가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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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물을 따라서 사람이 떠내려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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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눈에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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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건 결단기 수사의 육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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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인형들에게 명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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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저 사람을 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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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지 못하는 인형 사 자매가 강에 뛰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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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은 강물에 떠내려갔고, 둘은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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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구조자는 하반신만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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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경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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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머지 절반은 어디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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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하반신이 법력 파동을 내뿜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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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금단 안에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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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영안으로 하반신을 유심히 관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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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단전에 있는 콩알만 한 금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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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안에 어떤 영혼이 들어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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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정체는 위지목에게 죽은 추격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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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히는 꽃이 폭발하기 직전에 자기 영혼을 금단으로 피신시킨 순발력의 대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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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몸만 죽고 영혼과 금단을 온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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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단 생존자가 필사적으로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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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사님, 제발 저희를 도와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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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애써 침착하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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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뭘 도와달라는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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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단 생존자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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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륙이 위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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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지목의 운명이 서란과 얽히게 된 까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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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우선 금단 생존자에게 몸을 만들어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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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료는 강변을 파서 찾아낸 점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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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식간에 손바닥만 한 점토인형이 완성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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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인형 오호의 내부에서 떼어 낸 음향장치를 점토인형 머리통에 잘 부착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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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단도 얼른 자기 하반신을 포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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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체가 저절로 타오르더니 금단 안으로 흡수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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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금단을 점토인형 몸통에 집어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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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단 생존자는 곧장 상황 설명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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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선계 지명수배자 위지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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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목, 많은 수도자들을 죽이고 재물을 강탈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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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은 원영 의식임이 확실시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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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깜짝 놀라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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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나쁜 놈이 원영기 수사가 된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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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그렇습니다. 사건과 관련된 자료를 종합한 뒤 도출해 낸 신빙성 있는 결론이죠. 그는 높은 확률로 유나라에서 원영 의식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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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굳이 유나라에서? 위지목이라는 사람 입장에서는 너무 위험한 장소 아닌가요? 주변에 자리 잡은 수도문파가 이렇게 많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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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단 생존자가 서란의 의문을 풀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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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지목은 과거, 삼환문의 수도자였습니다. 그리고 십여 년 전의 멸문과도 연관이 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고위계 수사 중에서 혼자만 살아 남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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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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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문 당시, 유일한 생존자였던 위지목은 문파의 물자를 모조리 챙겨서 도망친 모양입니다. 하지만 혼자 옮기기에는 지나치게 많은 양이었겠죠. 그래서 멀리 가지 못하고 부득이 근처에 자리 잡을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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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납득하자 금단 생존자는 급히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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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지금 당장 도움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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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보고 위지목이랑 싸워 달라는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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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단 생존자가 손사래를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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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뇨아뇨아뇨! 같은 결단기라고 홀로 상대할 수 있는 괴물이 아닙니다. 저희 합동 추격대도 전력을 오판했다가 전멸했습니다. 우리끼리는 역부족이니 원영기 선배님을 모셔와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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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법이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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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현장까지만 데려다 주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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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흔쾌히 도와주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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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는 사이에 떠내려간 인형들도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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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과 인형 사 자매, 금단 생존자는 다 함께 비행법기를 타고 상류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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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방 전투 현장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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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흔이나 시체는 없었지만, 온통 엉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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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발로 쑥대밭이 된 현장을 둘러보던 금단 생존자가 어떤 수풀을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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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수풀 근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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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수풀을 이리저리 뒤적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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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어떤 물건을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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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장히 작은 피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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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나 곤충을 부를 때 쓰는 물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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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도 물론 금단 생존자의 업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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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기 전에 잽싸게 피리를 던져서 숨긴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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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단 생존자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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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알려주는 대로 힘껏 불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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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피리를 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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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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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새나 곤충에게는 들리는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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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여운 인면조 한 마리가 날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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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새 몸통에 달린 어린 소녀의 머리통, 한번 보면 결코 잊을 수 없는 독특한 외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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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에 대비해, 합동 추격대와 일정 거리를 유지하다가 피리 소리를 듣고 접근한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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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면조가 서란 주위를 날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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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호, 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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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단 생존자가 슬쩍 귓속말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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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새 구이라고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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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이상한 암호였지만 시키는 대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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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새 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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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면조가 서란의 왼쪽 어깨에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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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작은 쪽지에 암호문을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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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에서 금단 생존자가 알려줘서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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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지를 잘 말아서 작은 원통 안에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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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통을 목에 건 인면조가 동쪽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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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어지는 참새 엉덩이를 보며, 서란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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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영기 선배님은 언제쯤 오실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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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 어깨에 앉아있던 금단 생존자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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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면조의 속도를 고려하면... 하루 정도면 원영기 선배님이 여기까지 도착하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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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서대륙을 구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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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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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과 금단 생존자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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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둔중한 울림이 두 사람을 두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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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태산만 한 북을 두드리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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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상은 소리가 아니라 법력의 파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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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이게 뭔지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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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영 의식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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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원영 의식을 준비하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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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은 바보라도 알 수 있을 만큼 명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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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만간 위지목의 원영 의식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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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단 생존자가 다급히 질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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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영 의식은 보통 얼마나 걸리죠? 당연히 결단 의식보다는 훨씬 길겠죠? 제 말이 맞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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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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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봤자 한나절이면 끝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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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영기 수사의 도착까지는 대략 하루가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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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원영 의식은 고작 한나절이면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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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 단계까지 포함해도 시간이 너무 부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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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머리가 복잡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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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단 생존자가 들려준 혐의가 절반만 사실이라고 가정해도, 위지목은 끔찍한 악종이 틀림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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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재능까지 출중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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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영기 수사가 된 위지목은 얼마나 강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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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필히 다음 경지까지 도달하고자 할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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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그때는 피가 강처럼 흐를 게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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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서대륙의 위기가 서란의 위기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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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오죽문으로 돌아가서 보호를 받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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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지목이 제아무리 천재라고 해도 오죽문을 지키는 네 명의 원영기 수사를 이길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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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대륙이 시산혈해가 되든 말든 상관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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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지목이라는 재앙은 결코 서란에게 닿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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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시간은 서란의 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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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화신기까지 폐관 수련만 해도 그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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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 년만 지나도 원영기인 위지목 정도는 벌레처럼 죽일 정도로 강해질 게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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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그때까지 살아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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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내일부터 원영기 수사에게 쫓길 신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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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운이 따라주지 않는다면 추살될 것이요, 목숨을 부지한다고 해도 영원히 숨어 지내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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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서대륙이 위험하다느니 어쩌느니 했던 금단 생존자의 경고는 허황된 소리나 다름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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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서대륙이 다소 혼란스러워지긴 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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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나 많은 수도자가 죽을 확률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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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어지러운 틈을 타 요괴들도 극성일 테고, 범인들의 삶도 덩달아 힘들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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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을 마친 서란은 석연화에 올라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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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빠른 속도로 하늘을 날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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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지는 원영 의식이 준비 중인 제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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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단 생존자가 당황해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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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혼자서 쳐들어가는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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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때문에 서란은 큰소리로 대답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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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영 의식만 방해하고 도망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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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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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 떠들면 두고 갈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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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침묵하던 금단 생존자가 대뜸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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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당신을 압니다! 방금 기억났어요! 스무 살에 결단에 성공했다던 오죽문의 류 수사! 당신, 화신기에 도달하는 게 확실시된 천재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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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뭐라고 대답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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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단 생존자가 말을 계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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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석은 짓 하지 마세요! 아무리 당신이라고 해도 위지목을 이길 수는 없습니다! 분명히 죽을 거라고요! 하늘이 준 재능을 진창에 버릴 셈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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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존귀한 사람이 되고 싶어서 수선을 시작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혼자 도망갈 수는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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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단 생존자가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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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재능은 이미 충분히 귀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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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한 재능 말고 사람이 되고 싶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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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단 생존자는 말문이 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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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의 말에 담긴 의미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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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기억나지는 않았지만, 그도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합동 추격대에 자원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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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단 생존자는 서란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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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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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습니다, 협력하도록 하죠! 날아가면서 들으세요! 지금부터 위지목이 사용할 만한 전술이나 법기에 대해서 알려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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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은 착실하게 위지목에게로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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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 소리처럼 맥동하는 법력의 파동 덕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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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맥박의 근원으로 향하기만 하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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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 장소는 어떤 산봉우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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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허리부터 거대한 결계로 둘러싸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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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기인지 진법인지 모르겠지만, 굉장히 수준 높은 은밀성을 지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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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 준비의 영향으로 천지영기가 맥동하지 않았다면 찾는데 한참 걸렸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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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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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꽉 잡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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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 사 자매의 눈 여덟 개가 동시에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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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점에 집중된 광선이 결계를 약화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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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과 금단 생존자, 인형 사 자매를 태운 석연화가 한계까지 가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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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서란 일행은 결계와 충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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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처럼 깨져 흩날리는 결계의 파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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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격에 튕겨나가는 인형 사 자매와 금단 생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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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장한 의식용 제단 위에 선 위지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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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제단 꼭대기에 놓인 오색 보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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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제단의 구조에 관해서는 무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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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그런 건 문파에서 준비해 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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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원영 의식을 시작하는 법, 의식 도중에 내리치는 천겁에 대응하는 법, 원영을 응집시키는 법 외에는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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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의식용 제단을 망가뜨리는 방법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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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원래 물건을 고장내는 건, 새로 만들거나 고치는 것보다 월등하게 쉬운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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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딱 하나, 저 오색 보주의 역할은 잘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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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오색 보주를 향해 전속력으로 돌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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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탈 목표 너머로 낯선 사내의 얼굴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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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내의 당황한 눈동자에 서란의 얼굴이 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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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로 환하게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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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황한 사내, 위지목은 과연 비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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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영민한 두뇌가 빠르게 상황 판단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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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기습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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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앞의 습격자에게 동료가 있을 가능성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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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지목은 현재 대륙 전체에게 쫓기는 입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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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습당한 상태에서 몇 명인지도 모르는 적들과 싸우는 건 명백하게 하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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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절대로 위지목의 편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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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원영 의식을 시작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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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천겁이 내리치기 시작하면, 원영기 수사 정도가 아니라면 아무도 그를 방해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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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지목은 오색 보주를 향해 손을 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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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의 머리도 맹렬하게 회전하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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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은 위지목의 원영 의식을 방해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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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려면 반드시 오색 보주를 차지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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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보주가 있어야만 의식을 시작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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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속도와 거리를 가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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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도는 법기에 탄 서란이 월등하게 빠르지만, 보주까지의 거리는 위지목이 훨씬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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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주만 낼름 챙겨서 도망치는 건 불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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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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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서란과 위지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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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백 년 간격으로 유나라에서 태어난 두 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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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결단기 수사의 손끝이 보주에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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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동시에 영혼과 금단을 공명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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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의 법력이 손을 통해서 보주로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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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색 보주가 성대하게 폭발하자 그 안에서 뿜어진 두 줄기 광채가 하늘로 솟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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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과 위지목은 폭발의 여파로 튕겨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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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풍과 함께 먹구름이 산꼭대기로 모여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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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공에 응집된 천지영기가 저절로 번쩍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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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내 소나기 같은 벼락이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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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내리는 시련, 천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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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은 서란과 위지목, 두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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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증유의 동시 원영 의식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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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결단에 실패할 가능성은 지극히 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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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부적 재능, 용의 가르침, 거대문파 오죽문의 아낌없는 지원, 게다가 시기도 절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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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횡액만 만나지 않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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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오죽문은 어려운 결정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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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죽문에는 총 네 명의 원영기 수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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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중에서 절반이 폐관 수련을 잠시 중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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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스레 문파 본산이 취약해지지만 감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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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단기 수사도 대부분 합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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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 결정이 일시적으로 마비되는 것도 감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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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죽문은 이번 의식에 사활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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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소한 수도문파 정도는 며칠 만에 지도상에서 지워버릴 수도 있는 전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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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저 세계에 존재하는 거대한 공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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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교한 진법과 요소요소 박힌 대형 토기영석들 한가운데에 웅장한 단이 자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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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앉아서 명상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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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원형 진법의 양쪽 외곽에는 원영기 수사가 한 명씩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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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단기 수사 절반은 진법 근처를, 나머지 절반은 공동과 연결된 모든 토굴을 감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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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단 의식이 끝나기 전까지 접근하는 모든 존재를 무차별적으로 제거하는 게 그들의 역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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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정해진 시간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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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법이 빛을 내며 영석이 빠르게 녹아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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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지저 세계의 모든 영기를 끌어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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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기가 거센 폭풍처럼 몰아치며 세상을 난도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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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식간에 밀려든 영기에 공동이 가득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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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상적으로 모인 영기는 이내 안개처럼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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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물속에 잠긴 듯 자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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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용녀의 위치는 진법과 약간 떨어진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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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면상으로는 서란에게 어떤 이상이 발생했을 때, 적절하게 조력하는 게 그녀가 할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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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실상은 그저 감사의 의미로 가까운 자리를 배정해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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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남들과 달리 긴장할 이유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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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 가르친 소용녀의 입장에서 볼 때, 서란에게는 갑작스러운 변수가 발생해도 스스로 해결할 능력이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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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되었을 즘에는 이미 더 가르칠 게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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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요괴가 튀어나와도, 누가 진법을 망가뜨려도, 심지어 지진이 나도 결단은 성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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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용녀는 고개를 들어 위쪽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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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저 세계에서는 당연히 하늘이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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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장이 둥근 반구형 공간은 꼭 어항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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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용녀가 천 년 가까이 지냈던 거처가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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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에 어둠만이 존재하는 적막한 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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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이라고는 오로지 벌레뿐인 작은 동굴 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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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수직 통로 너머로 보이는 작은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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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 그런 곳에서 천 년을 살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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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어는 백 년을 살고 영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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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어 영수는 삼백 년을 살고 용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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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용은 여의주를 만들며 비좁은 동굴에서 육백 년이라는 시간을 더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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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에는 이런 의문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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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천을 갈망하던 용은 맹목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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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로지 여의주를 완성하는 일에 몰두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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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고 어두운 동굴에 웅크리고도 불편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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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여의주를 잃어버리고 잡념이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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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로 구성되지 않은 의문이 머릿속을 부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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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생처음 겪어보는 지독한 혼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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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마다 소용녀는 내면의 외침을 외면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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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애써 억눌렀던 의구심은 곧 되살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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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주를 뒤쫓다가 서란을 만난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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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선행을 위해서 용이 될 기회를 포기하겠냐는 소용녀의 물음에 서란은 이렇게 되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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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녀님은 어째서 수행을 시작하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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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소용녀는 이렇게 대답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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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본능적으로, 이후에는 승천을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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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생각해보면 결국 같은 대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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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천에 대한 갈망도 결국 용의 본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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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용녀는 무엇 하나 스스로 선택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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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본능에 따라서 짐승처럼 내달렸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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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영생을 마다하냐는 물음에 서란은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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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귀한 사람이 되고 싶어서 수행을 시작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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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말하는 존귀함이 어떤 의미인지는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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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영생을 마다할 정도로 확고한 무언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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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죽고 싶어하는 생명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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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생은 모든 생명체가 갈망하는 본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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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본능에 따르지 않고 스스로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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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용녀가 눈을 감고 무작정 내달릴 때, 서란은 눈을 뜨고 차근차근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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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단 의식은 어느새 막바지로 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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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용돌이치는 정토법력이 서란에게 몰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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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렬한 흐름 속에서 소용녀는 홀로 고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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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째서 승천을 바랐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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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용으로 태어난 숙명이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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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면 스스로도 모르던 바람의 발현이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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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째서 고독한 동굴에서 살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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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넓은 천공을 날아도 여전히 고독했기 때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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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차라리 비좁은 동굴을 선택했던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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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과 함께 하늘을 나는 것은 어째서 즐거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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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잃어버린 것에 대한 집착에 불과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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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면 누군가와 함께 날았기 때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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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 하늘을 올려다보지 않게 되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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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 땅을 내려다보며 걷게 되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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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 사람의 온기에 익숙해졌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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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용녀는 오랜 고민에도 답을 내리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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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결단 의식이 끝나 버린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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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서란은 결단에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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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주보다 커다란 금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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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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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죽문은 축제로 떠들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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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스무 살에 결단기에 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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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여의주보다 큰 금단을 형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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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금을 통틀어 비교할 대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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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희망을 먹고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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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가 아니라 미래를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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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수도자도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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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죽문의 비승은 이제 정해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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쌓아둔 물자는 바닥났지만 상관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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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 미래를 꿈꾸며 모두가 즐겁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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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회장에 홀로 앉아 있던 소용녀에게 어떤 결단기 수사가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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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녀님, 한 잔 받으시지요. 지금까지 류 수사를 가르쳐주셔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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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용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잔을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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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사는 공손히 잔을 채워주고는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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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에도 많은 이들이 소용녀를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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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 어린, 혹은 들뜬 감사 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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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죽문은 이 은혜를 영원히 잊지 않겠다는 약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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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라도 재방문을 기다리겠다는 극진한 요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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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용녀는 문뜩 바람을 쐬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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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연회장을 빠져나와 한적한 곳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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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벌레 소리가 들리는 풀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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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지만 바람은 시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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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누가 소용녀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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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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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돌리자 목소리의 주인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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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제의 주인공이 연회장을 비운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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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실 웃던 서란이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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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약속은 지켜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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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더니 품속에서 여의주를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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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의 법력은 이미 깨끗하게 제거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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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화된 여의주는 예전처럼 투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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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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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용녀는 여의주를 건네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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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혼원법력을 여의주에 밀어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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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여의주도 거부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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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절로 떠올라 회전하던 여의주가 소용녀의 아랫배로 녹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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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이어 고요하던 밤하늘이 요동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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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서 시작된 회오리가 지상으로 내리꽂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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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에 담긴 막대한 영기가 소용녀를 감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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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만물을 끌어당기는 대지의 속박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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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로지 하늘에게 스스로를 증명한 이들만 누릴 수 있는 축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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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주를 지닌 용이 날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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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를 밟고 선 사람과 하늘을 나는 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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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동안 둘은 말없이 서로를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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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용녀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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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대단하구나. 내가 가르쳤지만 놀라워. 여의주를 이토록 완벽하게 정화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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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드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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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의 물음에 소용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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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한번 잃어버렸던 탓에 수십 년 정도는 더 수행해야겠지만... 육백 년을 인내한 것에 비하면 쉽지. 정말 고맙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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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를 하면서도 소용녀는 다른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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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을 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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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 승천을 바라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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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진정한 바람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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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해결하지 못한 의문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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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제 남은 시간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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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당초 임시로 맺어진 사제 관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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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는 이렇게 헤어질 운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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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나는 어째서 망설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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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두려워서 마주 잡은 손을 놓지 못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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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에 피어난 이 바람은 어떤 의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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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용녀는 이번에도 애써 번민을 털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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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내키지 않는 인사를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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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이제 작별이구나. 너라면 분명히 신선이, 네가 바라던 존귀한 존재가 될 수 있을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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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용녀는 점점 높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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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들자 어두운 밤하늘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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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처럼 아름답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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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서란의 목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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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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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날아오르던 소용녀를 누가 붙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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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을 내려보니 이번에도 서란이 범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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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생각인지 소용녀의 발목에 매달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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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색눈과 담청색 용안이 서로를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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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죽문에서 함께 지내요, 용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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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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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지칭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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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문패를 발급할 때 대충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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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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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완전한 용에게 이름 같은 건 불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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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자신을 지칭한다는 건 소용녀에게는 너무나 낯선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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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제는 자연스레 고개가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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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침묵하던 소용녀가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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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지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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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어차피 수십 년 더 수행할 거 그냥 여기서 해요! 이렇게 헤어지기는 너무 아쉽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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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솔직한 발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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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도 알고 있는 모양인지 얼굴이 빨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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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여전히 손은 놓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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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용녀는 오랫동안 입을 다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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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담청색 용안으로 서란을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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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안에는 진실과 거짓을 구분하는 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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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침묵에 서란이 안절부절 마음을 졸일 때, 소용녀가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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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들어보는 맑은 웃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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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을 멈춘 소용녀가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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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다, 그러면 나에게 이름을 지어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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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당황한 얼굴로 질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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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갑자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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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열을 셀 때까지다. 하나, 둘, 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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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숫자가 빠르게 줄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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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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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기능이 반쯤 정지한 서란이 말을 더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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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장감에 시야는 급격하게 좁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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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소용녀의 담청색 눈동자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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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 아홉에 서란이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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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당첨! 아니, 담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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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아차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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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급해서 생각나는대로 말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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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도저히 용에게 어울리는 이름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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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용녀가 눈웃음을 지으며 고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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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 담청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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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더니 발을 홱 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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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목을 놓친 서란이 풀밭에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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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려다보는 사람과 내려다보는 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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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에 두른 바람을 흩어낸 소용녀가 하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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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다리로 선 소용녀가 서란을 내려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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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럭저럭 마음에 드는 이름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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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마친 소용녀는 연회장을 향해서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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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두발로 걷는 것도 꽤나 익숙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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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도 황급히 일어나 쫓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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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용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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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담청은 아직도 모르는 것 투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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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도 알아갈 시간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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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여의주를 잃어버렸을 때, 담청은 하늘을 원망하기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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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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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자신을 꺼내준 것에 감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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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난리를 만난 잉어는 연못을 나와 용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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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여의주를 잃어버린 용도 동굴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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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내 무엇이 될지는 하늘만이 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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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적어도 담청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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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단 의식의 과정은 간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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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영기와 법력을 하단전에 응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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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금단이 만들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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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영 의식도 얼추 비슷한 과정을 거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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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영기와 법력, 영혼을 상단전에 응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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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영을 완성하면 원영기에 도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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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결정적인 차이점이 하나 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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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영 의식은 하늘의 시련을 견뎌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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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겁이라 불리는 번개가 원영 형성을 방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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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사나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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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해를 이기고 원영을 형성하면 성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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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원영기 수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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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내 천겁을 견디지 못하면 실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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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이 좋으면 수행 퇴보, 대부분은 즉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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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하는 건 하늘과 자기 자신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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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격을 증명한다고 표현하는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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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원영기에 도달하는 과정은 지극히 고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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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서란과 위지목의 경우는 약간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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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하는 건 하늘과 나 자신, 그리고 대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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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롭게 원영이나 형성하고 있을 틈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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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가 필사적으로 상대를 방해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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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겁이 내리치는 상황에 벌어지는 사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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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측의 기량은 이미 경지를 초월한 지 오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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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한 실수 하나로 승패가 갈릴 수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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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천겁은 계속해서 강해질 예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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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고 싶으면 한시라도 빨리 상대를 제거하고 원영을 응집할 필요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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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도 포기 같은 건 불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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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서 나갈 수 있는 건 오직 한 사람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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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주가 폭발하면서 튕겨나간 서란과 위지목은 즉시 비행법기에 올라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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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날아오르며 인형 사 자매를 조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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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단 생존자를 멀리 대피시키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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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신도 없는 상태에서 천겁을 버틸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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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 사호가 근처에 떨어진 금단 생존자를 붙잡은 뒤, 천겁 범위 밖으로 냅다 던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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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에 거대한 회오리가 인근을 집어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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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와 단절된 산꼭대기가 암흑 속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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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천겁이 내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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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을 가르는 수백 줄기의 벼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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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과 위지목은 결계를 두를 틈도 없이 무수한 천겁을 얻어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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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난생처음 겪는 격통과 마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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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격에 의식이 날아갈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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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코 정상적인 천겁의 위력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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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의식을 치르는 탓에 생긴 이상현상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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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은 반사적으로 결계를 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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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 번 천겁이 내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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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과 위지목은 안간힘을 쓰며 결계를 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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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층 강해진 천겁의 위력은 경악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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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은 동시에 직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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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계만으로는 결코 오래 버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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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로라면 상대가 아니라 천겁에게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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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천겁이 내리친 순간, 서란이 선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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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 사 자매가 폭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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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감당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회로 과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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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청비가시의 파괴광선이 빗발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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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겁을 견디느라 취약해진 위지목의 결계가 그대로 산산조각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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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서진 결계는 순식간에 복구됐지만, 인형 사 자매에게는 그걸로도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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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괴광선이 무방비한 위지목을 난도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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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계를 완성시킨 위지목은 이미 빈사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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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다리는 허벅지 아래부터 잘려나갔고, 왼쪽 어깨와 함께 얼굴 절반도 소실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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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처가 조금만 늦었어도 즉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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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지목은 필사적으로 법력을 운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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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팔에 감겨있던 넝쿨, 삼환목령이 막대한 정목법력을 먹어치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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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두 번째 열매를 터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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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환목령에는 세 개의 열매가 맺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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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열매의 내용물은 꽃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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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자에게 기생한 뒤, 법력을 흡수해서 폭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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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공격 한 번에 합동 추격대 절반이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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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열매의 내용물은 수액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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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능은 초재생, 어떤 치명상도 순식간에 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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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매가 한 번 맺히는데만 삼백 년 가까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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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환문이 산송장이나 다름없던 원영기 노괴의 목숨을 끈질기게도 연명시켰던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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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 년 뒤에 맺힐 열매를 기다린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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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결실을 보기 직전에 삼환문은 망했고, 보물은 위지목의 차지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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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위지목은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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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지목은 즉시 법용술을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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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단 근처에 놓인 무수한 법기들이 날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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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환문에서 가지고 나온 것도 있고, 수도자들을 죽이고 약탈한 것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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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어법기들이 위지목을 빈틈없이 에워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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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기들은 인형 사 자매의 파괴광선에 맞는 족족 영성을 잃고 부스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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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 수효가 너무나 방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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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동안 공격법기들이 서란을 공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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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란하게 움직이는 병장기, 불을 토해내는 호리병, 소리로 정신을 현혹하는 방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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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즉시 복잡한 회피 기동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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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 사 자매가 즉시 표적을 변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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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 사격에 맞은 공격법기들이 우수수 추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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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시간을 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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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의 구슬 목걸이가 발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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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구슬들이 사방으로 발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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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팔 개의 구슬은 기괴한 벽돌로 변하더니 서란을 중심으로 뭉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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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신과 합체를 마친 삼두육비 거대인형, 금강야차의 목이 맹렬하게 회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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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개의 머리, 여섯 개의 눈이 공격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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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지러이 움직이는 광선이 모든 걸 붕괴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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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위지목을 공격하는 인형 사 자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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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상급 부적을 소나기처럼 퍼붓는 위지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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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계를 두르고 하늘을 유영하는 금강야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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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괴광선을 맞고 위태롭게 깜빡이는 결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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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흑천지를 은하수처럼 뒤덮은 부적의 광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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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서 떨어지는 수천 줄기의 벼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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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기간에 셀 수 없는 공방이 오고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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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기나 부적은 바닥났고, 금강야차도 반파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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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과 위지목은 한계에 직면한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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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약간이나마 위지목이 유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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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결정적인 실책을 저지른 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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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불리를 가른 건 공중전 경험의 차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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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지목은 서란보다 수백 년을 더 살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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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독한 내전에서 살아남았고, 실전을 통해서 수많은 수도자를 살육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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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전투 중반부터 미약하나마 우위를 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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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서란도 급속도로 하늘에 익숙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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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미 벌어진 격차를 좁히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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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지목은 결코 역전을 허용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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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금강야차가 기능을 정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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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뜩이나 내구력이 부족한 인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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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근차근 누적된 피해를 버티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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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순간, 위지목은 직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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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로 향하는 길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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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백한 외통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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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과 위지목, 두 사람의 비행궤도가 뒤엉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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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지목의 공격에 서란이 하늘 높이 떠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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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의 반격이 위지목의 재생된 왼팔을 앗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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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단과 위지목, 서란, 하늘이 일직선을 이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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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을 주고 뼈를 취한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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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위지목의 수읽기가 찾아낸 외통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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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영기의 박동, 천겁이 내리칠 전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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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등지고 지상을 내려다보는 서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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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을 등지고 하늘을 올려다보는 위지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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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천겁을 서란에게 집중시키고, 최후의 일격을 날리는 게 위지목의 노림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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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지목은 삼환목령에게 법력을 주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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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열매의 내용물은 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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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단 정도는 단번에 파괴할 수 있는 비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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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도 위기를 직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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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 사 자매가 최후의 일격을 보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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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계까지 작동한 자가충전 기관이 천지영기를 끌어당겨 법력으로 전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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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대한 법력은 무선 공급 기능을 통해서 고스란히 주인에게 전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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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의 금단이 필사적으로 법력을 통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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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동치던 법력이 거대한 황금빛 구체를 형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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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이라도 통제불능에 빠질 것 같은 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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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오른손으로 위지목을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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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지목도 오른손으로 서란을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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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천겁이 내리꽂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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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위지목에게 이렇게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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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은 정신 수양, 실력보다 인성이 중요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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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은 위지목에게 이렇게 가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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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인이 되기에 앞서 사람부터 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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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는 위지목에게 이렇게 칭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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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라면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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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지목의 의식이 수면 위로 부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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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흑천지, 홀로 빛나는 천공의 황금빛 구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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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지목은 찰나에 상황 파악을 끝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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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천겁을 맞고 한순간 의식을 잃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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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절 직전, 마지막으로 본 광경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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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내리꽂은 수백 줄기의 벼락, 천겁은 명백하게 서란을 비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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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연스러운 경로로 꺾이더니, 하늘에 가까웠던 서란이 아닌 위지목에게 내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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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위지목은 절호의 기회를 놓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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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황금빛 구체가 안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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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서란의 일격이 날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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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부 갑자기 굴절된 천겁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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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결정적인 순간에 꽂힌 비수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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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승패는 뒤집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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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 위지목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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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지목은 영민한 머리로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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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상 위에 제삼자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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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력을 겨루는 두 대국자만이 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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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지론은 대부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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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위지목은 착각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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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은 절대로 대국자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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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반상 위에 놓인 바둑돌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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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지목은 하늘이 둔 한 수를 복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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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은 두 대국자가 번갈아 돌을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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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한 수, 한 수가 전부 중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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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돌을 잘 구분하면 바둑도 잘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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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모없는 돌은 폐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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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돌은 죽든 살든 대세와는 무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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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돌은 요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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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중요한 돌의 생사는 승패와 직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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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정신을 잃었을 때 봤던 광경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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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당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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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 보면 교만을 경계하라는 의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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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의 가르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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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 보면 순리를 따르라는 의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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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의 칭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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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도 바꿀 수 있는 재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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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지목은 마침내 하늘의 의지를 목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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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원영기 노괴는 폐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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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신경 쓸 가치도 없는 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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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리를 따르지 않았을지언정, 그들에게는 세상을 바꿀 재주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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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에 자신은 요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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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입장에서는 죽여야만 하는 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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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꿀 재주를 가지고 태어났지만, 교만했기 때문에 순리를 따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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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일 가치조차 없는 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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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드시 죽여야만 하는 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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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반드시 살려야만 하는 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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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지목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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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는 서란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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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공이 그녀를 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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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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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하늘에게 선택이라도 받은 것만 같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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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후, 위지목에게 눈부신 광선이 내리꽂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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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과 대지를 잇는 빛기둥에 천지가 요동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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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일격에 위지목과 제단, 산봉우리를 먼지로 만들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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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만했던 사내는 그렇게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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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을 준비할 때 발생하는 파동은 숨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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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인들은 결코 알 수 없지만, 당시 유나라에 있던 수도자는 모두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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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합동 추격대의 대원들도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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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서둘러서 파동의 진원지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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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지목이 의식을 준비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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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시작되면 도중에는 개입할 방법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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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의식 장소에 도착한 대원들은 목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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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풍처럼 휘몰아치는, 막대한 천지영기의 와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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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의 규모는 명백하게 상식을 벗어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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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회오리가 산을 통째로 삼킨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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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내, 바람이 모여 구체 형태의 결계가 완성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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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 장소가 외부 세계와 완전히 격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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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영기의 밀도가 너무 높아서 영안술을 사용하지 않아도 눈에 보일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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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흑 같은 결계 안에서 번개가 번쩍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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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시련, 천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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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파 때문에 접근하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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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된 이상 의식 직후를 노려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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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들은 너도나도 피리를 꺼내 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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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면조가 연신 날아다니며 소식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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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추격대에게, 저 멀리 있는 원영기 수사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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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인근에 있던 지원군이 대부분 합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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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식간에 불어난 합동 추격대는 마른침을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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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을 마친 위지목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묶어 두는 게 그들의 임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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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영기 수사의 지원이 올 때까지만 버티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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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도 의식이 막 끝났을 때가 위지목이 가장 취약해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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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겁을 버티느라 체력과 정신력을 소모했고, 아직 새로운 힘에는 익숙해지지 않은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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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지목을 사냥하려면 그 틈을 노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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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장한 채 대기하던 추격대가 눈을 의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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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저히 믿기 힘든 일이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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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부신 섬광과 함께 천지가 요동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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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 장소를 격리하고 있던 구형 결계의 부피가 한순간에 두 배 이상 팽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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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하기 힘든 거력이 내부에서부터 결계를 찢어발기려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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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모인 전원이 협력해도 불가능할 위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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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연 엄청난 양의 천지영기가 몰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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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곧장 결계를 수복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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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부 압력을 못 이겨, 금방이라도 터질 것만 같았던 결계가 서서히 수축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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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동 추격대는 그 모습을 넋 놓고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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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 영기를 모조리 빨아들인 결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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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멀 것만 같은 강맹한 천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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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날처럼 사방을 난자하는 폭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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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평생에 아로새겨질 광경을 목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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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납게 울부짖던 폭풍이 잠잠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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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겁이 그치고, 결계마저 녹아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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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대의 모든 천지영기가 한 점으로 압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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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구름 사이로 한 줄기 서광이 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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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 속에는 어린 소녀와 반투명한 아기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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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 모습을 한 영체가 바로 원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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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균을 한참 웃도는 초우량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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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는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사방을 둘러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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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다음으로 자기 손바닥을, 발바닥을, 마지막으로 아래에 있는 소녀의 육신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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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영은 소녀의 정수리를 조심스레 쓰다듬다가 그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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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 류서란이 감고 있던 눈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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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륙에 새로운 원영기 수사가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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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나이 삼십오 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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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동 추격대 전원이 비슷한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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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배자 위지목은 어디로 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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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결계 안에서 어떤 일이 있었던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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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저 사람, 류서란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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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여기 있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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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륙 수도자들 중 저토록 어린 외모를 가진 건 오직 류서란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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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스물에 금단을 형성했다는, 최연소 결단기 수사에 대한 소문은 모르는 사람이 더 드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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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서란을 직접 본 적이 없다고 해도, 누구나 쉽게 유추할 수 있는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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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들은 서란의 다음 행보를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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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연소 결단기에 이어서 최연소 원영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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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주만 한 금단과 어린애 머리통만 한 원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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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말로 화신기에 걸맞은 재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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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막 천겁을 이겨낸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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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내린 천재는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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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격에 겨워 환호할 것인가, 눈물을 보일 것인가, 그것도 아니면 오연한 태도로 스스로의 비범함을 드러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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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숨죽인 가운데, 서란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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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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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선계 고금 제일의 천재, 류서란이 원영 형성 이후에 가장 먼저 내뱉은 기념비적인 한 마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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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황급히 산사태 토사를 치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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냅다 집어던진 금단 생존자가 떠오른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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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도 금단 생존자는 무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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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처리는 금방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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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수도자들을 살해한 위지목은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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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서란은 의식에 난입해서 악인을 처단, 이후 천겁을 견뎌내고 원영기 수사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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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머지는 추격대원들이 알아서 처리해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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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과 금단 생존자의 증언 기록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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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진 산봉우리 파편 치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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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살난 인형 사 자매와 금강야차 조각 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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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대원들이 바쁘게 움직이는 동안, 서란과 금단 생존자는 짧았던 모험을 되돌아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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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은 좀 어떤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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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단 생존자가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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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군데군데 구멍이 뚫려 있기는 한데... 그래도 많이 좋아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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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단 생존자는 기억 일부를 잃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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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지목이 그의 상반신을 날려버린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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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증상이 경미해서 곧 회복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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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다른 질문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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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어진 몸은 어쩌실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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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토인형 안에 든 금단 생존자가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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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요, 잘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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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술은 어떠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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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도 괜찮을 것 같네요. 문제는 비용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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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단 생존자가 살짝 침울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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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아둔 재산이 얼마 안 되는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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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금방 기운을 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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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이렇게 큰 도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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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 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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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 수사님 덕분에 저도 그렇고, 많은 수도자들이 목숨을 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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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보람을 느끼며 금단 생존자와 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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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임시 주둔지를 떠나려던 찰나, 대원 한 명이 말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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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 수사님, 현상금은 어디로 보내드리면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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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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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상금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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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위지목에게 걸린 현상금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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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잠깐 동안 고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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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문득 뒤를 돌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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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단 생존자가 쉬고 있는 막사가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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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대원에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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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상금은 피해자 구제에 사용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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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액수가 꽤 되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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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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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 큰 기부 이후, 서란은 임시 주둔지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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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연화에는 인형 파편이 가득 실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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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비행 속도가 좀 느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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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릿느릿 날던 서란이 막 양나라 국경에 도착했을 무렵, 발 없는 말이 서대륙을 휩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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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인은 합동 추격대가 해산된 뒤, 소속 수도문파로 돌아간 대원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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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자기가 두 눈으로 목격한 놀라운 일화를 하나도 빠짐없이 보고서에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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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에 제출했는지는 볼 것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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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동 추격대 구성원들은 전원이 결단기 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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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다수가 문파 수뇌부의 일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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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서를 읽은 수뇌부들의 반응은 한결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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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서른다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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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이게 말이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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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될 건 또 뭡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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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결이 도대체 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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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단이 주먹만 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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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원영이 이렇게 크면 두개골 안에 다 들어가긴 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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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부럽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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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단기에서 원영기까지 십오 년이면... 아무리 늦어도 팔십 년 안에는 화신기에 도달하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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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보다 위지목을 혼자서 죽였다는 게 더 놀랍군요. 이 자에게 죽은 결단기 수사가 몇 명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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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계 때문에 과정을 지켜보지 못해서 아쉽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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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형 복구 도중에 인형 파편이 나온 걸 보면 인형술사가 확실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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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술 같은 비주류 법술로 어떻게 이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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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쪽 문파, 이름이 분명 오죽문이었나요? 거기는 화수 법술과 연단술로 유명한 곳 아니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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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습니다, 그리고 류 수사는 토속성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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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기억납니다. 토목 공사를 한다고 여기저기 돌아다니지 않았던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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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슴뿔 달린 여자애랑 같이 다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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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우리 문파 인공호도 류 수사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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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뿔 달린 일행도 만만치 않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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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죽문과 원한이 없는 게 참 다행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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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런데 진짜 어떻게 이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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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인형술이 강한 거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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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진짜 아닌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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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이 술렁이는 동안, 서란은 오죽문에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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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죽문은 문파 비승에 한 걸음 가까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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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뇌부는 환한 미소로 서란을 반겨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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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영 의식 비용을 아낀 문파 재정 담당자들도 행복하긴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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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돌아오자마자 간단한 예식에 참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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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영기 수사라면 누구나 거치는 의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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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알고 지내던 지인들이 감사 인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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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 수사님. 문파를 위해서 노력해 주신 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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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정해진 말로 보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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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닙니다. 저를 위해 희생해 주신 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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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에도 비슷한 말을 몇 차례 더 주고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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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도 수행에 정진하겠다는 서란의 선언을 끝으로 모든 절차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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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과 지인들은 편하게 앉아서 대화를 나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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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과 이아금을 오죽문으로 데려온 왕 수사가 공손하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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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 수사님, 원영 응집을 축하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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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손사래를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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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왕 수사님. 그냥 평소처럼 말씀해 주세요. 이제는 공적인 자리도 아닌 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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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적인 자리라면 나이가 많아도 보다 경지가 높은 수도자에게 공대를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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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사적인 자리라면 크게 상관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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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사자들끼리 알아서 하라는 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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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 수사가 살짝 웃으며 그렇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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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알겠네. 아무튼 축하한다는 말은 진심이라네. 아, 고맙다는 말도 해야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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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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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다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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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열심히 해줘서 고맙다는 뜻이라네. 음, 그렇지. 늙은이는 이만 가지. 젊은 사람들끼리 어울리는 게 더 즐겁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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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 수사는 다른 이들에게도 인사를 하더니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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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아직도 인재 영입에 힘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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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나라를 합병한 이후 더 바빠졌다고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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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 단련 전문가 마 수사도 인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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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나도 이만. 다시 한 번 축하하네, 류 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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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들도 하나둘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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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까지 남아있던 이아금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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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일정 있어? 없으면 밥이라도 같이 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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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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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일정 있는데... 밥은 내일 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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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금이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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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근데 무슨 일정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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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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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원영기 공법 배우러 가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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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일정은 수선계 일타강사 여무진 선생님과 함께하는 즐거운 공부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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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동 추격대는 유나라 영토 진입에 앞서, 오죽문과 금작파에게 협조를 요청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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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한 외교적 절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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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수배자를 쫓는 일이라고 해도, 준군사 조직을 함부로 나라에 들일 수는 없는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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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 수뇌부는 이걸 계기로 정보를 공유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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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지목은 서대륙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셀 수 없이 많은 결단기 수사를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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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쳐도 아주 단단히 미친 게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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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 수뇌부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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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탄만 한 이유는 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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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죽문과 금작파의 피해는 전무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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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지목은 유나라 인근에서는 사냥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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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그는 절제 없는 쾌락 살인마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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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영 의식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제단이 위치한 은신처를 철저하게 숨겨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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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상황에서 은신처 가까이에 자리한, 그것도 서대륙에서 손꼽히는 거대문파 두 곳의 이목을 동시에 끄는 건 정말로 어리석은 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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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문파에게 이 사건은 반쯤 남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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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미친놈 죽여준다는데 막을 이유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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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 수뇌부는 합동 추격대의 출입을 허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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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사겸사 여행 경보도 발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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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나라 입국은 전면 금지됐고, 현재 체류 중인 수도자들에게도 즉각적인 대피를 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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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뇌부는 자신들의 일처리에 감탄하며 해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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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정확히 일각(15분) 뒤에 다시 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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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입국자 명부에 대문짝만하게 기록된, ‘류서란, 유나라행’ 한 줄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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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남 일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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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타격대를 보내야 한다느니, 그럴 게 아니라 원영기급 전력을 투입하라느니 소란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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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오죽문-금작파 합동, 원영기 4인 파티가 결성되기 직전에 사건이 해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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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스스로 위험을 제거하고 돌아온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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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서란에게 이 일화를 들려주고 있는 여무진도 오죽문-금작파 드림팀에 합류할 예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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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무진이 웃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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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일이 있었다네. 아무튼,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이군. 천겁은 어땠나? 버틸만 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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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결계 안에서 했던 고생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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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지목을 죽인 뒤, 서란은 무시무시하게 강해진 천겁을 결계로 막으면서 원영을 응집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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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만 해도 어려운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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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무진이 시킨 분신술 수련이 아니었다면 이도 저도 못하다가 죽었을 게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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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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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천겁... 그거 너무 힘들던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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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가 겪은 건 굉장히 특이한 경우라네. 보통은 그렇게까지 힘들지는 않아. 그러면 한담은 그만하고 수업을 시작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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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자세를 고쳐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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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무진의 수업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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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영기 수사의 특징은 크게 세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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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영응집, 백화요란, 그리고 오채지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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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무진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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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백화요란부터 설명하지. 온갖 꽃이 피어난다는 표현, 여기서 꽃이란 감각을 의미하지. 쉽게 말하면 육감을 개화한다고 할 수 있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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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영기란 영혼의 초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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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계를 벗은 영혼은 육신에 의존하지 않는 별도의 감각 기관을 손에 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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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영감, 혹은 육감이라고 부르는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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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무진의 설명이 계속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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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우선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하지. 나중에 익숙해진 다음에는 눈을 떠도 상관은 없어. 아무튼, 머리를 감싸는 보이지 않는 구체를 상상해 보게. 이제부터 그게 자네의 의식이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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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시키는 대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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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그 구체, 의식의 반지름을 서서히 키우는 거야. 자네는 아직 익숙하지 않으니까, 크기는 나한테 닿을 정도면 충분하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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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의 상상 속 구체가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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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깨를 지나서 허리, 앞에 놓인 책상과 서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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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구체의 표면이 여무진에게 닿았을 때, 갑자기 팽창한 무언가가 서란의 의식을 밀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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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깜짝 놀라서 눈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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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무진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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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 의식이 뭔가에 부딪쳤지? 그게 내 의식 범위라네. 새로운 감각이 어떤 느낌인지 대충 알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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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얼떨떨하게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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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뭔가 신기하네요. 보는 것도 아니고, 만지는 것도 아닌데. 오감이랑은 전혀 다르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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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감각 범위, 즉 의식을 보다 넓게, 보다 오래 유지하는 게 관건이라네. 당연히 하루 종일 할 수 있으면 가장 좋겠지? 평소에도 꾸준히 연습하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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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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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무진은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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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에는 원영에 대한 내용이라네. 이 얘기를 하려면 의식부터 다룰 필요가 있었거든. 그래서 순서를 약간 바꿨지. 의식으로 상단전을 감싸고, 두개골 안쪽에 감각을 집중하게나. 들여다보는 느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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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란은 이번에도 시키는 대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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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머릿속을 물리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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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란을 꼭 닮은 아기 영체, 원영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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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무진이 질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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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영이 보이겠지? 어떤 상태인지 설명해 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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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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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뭔가 인상을 쓰고 있네요. 비좁은지 몸을 잔뜩 웅크린 상태예요. 불편한가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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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무진이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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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네 원영이 워낙 커서 그런 모양이군. 그건 나도 어떻게 해 줄 수 없겠어. 사실 영체니까 좁아도 문제가 될 건 없을 거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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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더니 그냥 설명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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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가장 큰 특징은 비물질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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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에 육체의 물질성에 의존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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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은 육신 없이 홀로 온전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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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만난 금단 생존자가 적절한 예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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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은 육신을 떠나면 필연적으로 손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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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금단에 의지했으니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자아를 잃은 채 떠돌다 소멸했을 게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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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귀들이 하나같이 생자의 몸을 탐내는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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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수도자의 영체, 즉 원영은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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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영은 물질성과 비물질성을 동시에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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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덕분에 육신 없이 홀로 온전히 존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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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부작용 없는 유체 이탈이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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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무진이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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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 수사, 명심하게나. 만약 죽을 위기에 처했다면, 몸을 버리고 원영만이라도 얼른 도망쳐야 하네. 여유가 된다면 금단도 챙기게나, 잃어버리면 수행이 크게 퇴보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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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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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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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하면 몸을 버리고 원영만 도망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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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여유가 된다면 금단까지 챙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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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비상 탈출 장치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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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 강조한 여무진이 수업을 계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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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영기 수사의 세 번째 특징, 오채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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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오채란 다섯 가지 색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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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각각의 색은 오행영근과 대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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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색, 화영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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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색, 수영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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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색, 목영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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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색, 금영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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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색, 토영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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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무진은 자기 가슴을 가리키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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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근은 심장 부근, 즉 중단전에 위치해 있지. 자네가 한 번 나를 진맥해 보겠나? 내 영근이 어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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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여무진의 손목을 진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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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깜짝 놀라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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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삼영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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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무진의 중단전에는 적색, 흑색, 황색의 세 가지 영근이 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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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화수토 삼영근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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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무진이 재차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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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영안을 뜨고 내 법력을 잘 관찰해 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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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영안술을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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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색, 정화법력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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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자세히 보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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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눈을 크게 뜨고 다시 살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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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색이 좀 이상하네요. 적색이 가장 많고, 흑색과 황색이 약간 섞여 있는 것 같아요. 정수법력, 그리고 정토법력이네요. 어떻게 이게 가능하죠? 정순한 법력은 한 종류만 가질 수 있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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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무진이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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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바로 오채지심이라는 표현에 담긴 의미라네. 중단전에 존재하는 오행영근, 그리고 다섯 가지 정순한 법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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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질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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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치만, 저는 토영근만 가지고 있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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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원래는 화영근뿐이었지. 수영근과 토영근은 원영기 수사가 된 뒤에 얻었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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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근은 어떻게 하면 얻을 수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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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무진이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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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손쉬운 방법은 오행선과를 먹는 거라네. 화선과를 먹으면 화영근이 생기는 식이지. 다만 오행선과가 원체 귀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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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방법은 뭔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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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방법은 특정 영기가 풍부한 비경에서 오랫동안 수행을 하는 것이라네. 예를 들면 화산 분화구에 몸을 푹 담그는 식이지. 주변에 만연한 화영기를 응집하면 강제로 화영근을 만들 수 있지. 물론 이것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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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행영근만 모은다고 끝이 아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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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한 소리를 하는군. 다섯 가지 정순법력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뤄야만 화신기에 도달할 수 있다네. 게다가 영근이 하나씩 늘어날 때마다 영기 감응력이 점점 둔해져서 갈수록 힘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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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질색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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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기만 해도 어려워 보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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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웠으면 1250년씩이나 걸렸겠나? 다들 화신기 수사가 되어서 비승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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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가 복잡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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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무진이 박수를 한 번 치더니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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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내가 정리해 주지. 하나, 새로 얻은 육감을 단련한다. 둘, 위험하면 원영으로 도망친다. 셋, 부족한 영근을 보충해서 다섯 가지 정순법력을 조화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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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질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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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원영기 공법은 속성별로 다섯 개나 필요하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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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 말이 맞아. 물론 걱정할 필요는 없다네. 화속성, 수속성 공법은 오죽문에도 좋은 게 있으니까. 그야말로 서대륙 최고의 공법이라고 할 수 있지. 나중에 화수 영근을 얻으면 가르쳐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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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오늘은 토속성 공법을 배우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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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무진이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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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내가 익힌 토속성 공법은 추천하지 않아. 자네는 내일 당장 금작파 본산으로 가서 토속성 공법과 금속성 공법을 배우게나. 목속성은... 뭐 이제부터 알아봐야겠지. 아무튼 문파에서 사력을 다해 최고급으로 구해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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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정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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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감사까지, 자네가 잘돼야 우리도 덕을 보지. 도움이 될 만한 책을 몇 권 챙겨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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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책을 한 보따리나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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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맨 위에 작은 목함이 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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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봐도 비싸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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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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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 수사님, 이 목함은 뭔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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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무진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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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영기가 된 기념으로 자네한테 주는 깜짝 선물이라네. 나중에 집에 가서 혼자 열어 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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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감사 인사를 하고 귀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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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방 안에서 혼자 목함을 열어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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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한 장과 이상한 흰색 열매가 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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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편지부터 읽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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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 수사, 그 금선과는 깜짝 선물이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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깜짝 놀란 서란이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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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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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서프라이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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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여무진의 편지를 정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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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무진이 금속성 오행선과, 금선과를 손에 넣은 건 수십 년 전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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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선문 영역에서 난동을 부리던 대요괴를 토벌하던 도중에 우연히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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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속성 비경이 극히 드물다는 점을 고려하면 정말로 운이 좋았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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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여무진에게도 금영근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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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인 경우라면 당장 먹는 게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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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여무진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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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의 사정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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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오죽문은 250년 가까이 새로운 일영근자를 발견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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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영근자는 수도문파의 미래와 다름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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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로라면 오죽문의 성세도 옛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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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해결 방법은 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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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행선과를 범인이 먹으면 즉시 일영근자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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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오죽문에는 아이들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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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살짜리 중에서 가장 오성이 뛰어난 영재에게 금선과를 먹이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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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무진은 고민을 거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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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자기가 먹고 지금처럼 수행에 매진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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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위적으로 일영근자를 만들어서 미래를 보장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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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쪽이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올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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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미래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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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선과를 섭취하고 사영근자가 된 여무진이 끝내 화신기에 도달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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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로 금선과를 양보한 결과가 훗날 오죽문의 비승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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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무진은 금선과가 든 목함을 바라보며 고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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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 먹거나, 양보하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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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은 점점 후자 쪽으로 기울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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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중 갑자기 류서란이 입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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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다섯이라는 다소 늦은 나이, 하지만 서란은 바로 다음 해에 축기기 수사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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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우연히 만난 여무진의 조언도 한몫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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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놀라운 재능임은 틀림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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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부터 여무진은 서란에 대한 보고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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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한 성품, 최연소 결단기 수사, 성실함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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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여무진의 고민이 마침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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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영근자였던 여무진은 오죽문의 헌신 덕분에 평생을 불편함 없이 살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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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선과는 분명 귀하지만, 지금까지 여무진이 받아 온 은혜에 비하면 하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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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여무진이 돌려줄 차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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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선과가 서란의 손에 들어온 연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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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편지를 다 읽고 감격을 금치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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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라도 빨리 화신기 수사가 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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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당장 행동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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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밤새 잠도 안 자고 짐을 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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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새벽같이 금작파 본산으로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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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금과 한 식사 약속은 깜빡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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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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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쪽으로 직진, 국경 검문소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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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부에 이름 적는 게 검문 절차의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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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죽문과 금작파는 남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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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서란은 금작파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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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작파 본산의 풍경은 굉장히 이국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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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유동 인구의 이 할은 오죽문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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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한국인으로 바글거리는 일본 관광지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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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주위를 둘러보던 서란에게 말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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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 수사님, 이쪽으로 오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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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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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금영영과 묘하게 닮은 사내를 따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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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한 구조의 복도를 이리저리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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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어떤 호화로운 객실에 당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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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내를 마친 사내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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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 수사님을 모셔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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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에서 대답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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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안으로 모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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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방 안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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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영영과 굉장히 닮은 여인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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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서 반갑습니다, 류 수사. 저는 금교월이라는 사람입니다. 과연, 듣던 대로 대단한 원영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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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예의 바르게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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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이렇게 뵙게 되니 기쁩니다. 그리고 부디 말씀을 낮춰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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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그래도 첫 대면부터 그럴 수야 없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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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닙니다, 저는 정말로 괜찮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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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나름 필사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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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영기 수사 금교월은 나이가 구백 살도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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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씨 가문의 현존하는 최고 어른이며, 족보로 따지면 친구인 금영영보다 수십 대는 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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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까마득한 연장자와 맞먹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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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교월도 두 번 사양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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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그렇다면 나도 편하게 대하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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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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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교월은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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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원영기 공법을 배우려고 왔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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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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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수금토 세 가지 영근을 가지고 있단다. 내가 익힌 수속성 공법도 그럭저럭 괜찮은 물건이지만, 아무래도 오죽문의 것보다 못할 테지. 그러니 토속성과 금속성 공법만 가르쳐 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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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교월은 서책을 두 권 건네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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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 놓인 게 금속성 공법, ‘비절철비쇠금’이다. 풀어서 설명하면 ‘끊어지지 않는 철, 쇠하지 않는 금’이라는 뜻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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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작파의 첫 번째 보물, 비절철비쇠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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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기 사용에 특화된 금속성 원영기 공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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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속성 법기의 내구성을 높여주는 효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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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교월이 예시를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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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 사슬 법기를 끊어 보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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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사슬을 양쪽을 잡아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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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히 큰힘을 준 것도 아니건만, 쉽사리 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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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가 평범한 금속이 아니었음에도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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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교월은 끊어진 사슬 한쪽을 내밀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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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비절철비쇠금의 효능을 보여 주마. 내가 법력을 주입하고 있을테니, 아까처럼 끊어 보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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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다시 사슬을 양쪽으로 잡아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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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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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아무리 해도 끊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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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아예 의자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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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본격적으로 힘을 주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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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얼굴이 새빨갛게 변할 정도로 용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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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산만 한 대균열도 홀로 닫았던 거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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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사슬을 이루는 고리가 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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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진맥진한 서란에게 금교월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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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소감이 어떻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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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의자에 주저 앉은 채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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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정말로 놀랍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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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교월이 우아하게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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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작파가 괜히 거대문파가 됐겠느냐. 아무리 외교에 힘을 쏟는다 할지라도, 스스로를 지킬 힘이 없다면 공허한 노력일 뿐이지. 원래 힘없는 자의 외침은 무시당하는 법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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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주억이며 감탄하던 서란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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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속성 공법서는 어떤 효능이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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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교월은 사슬 법기를 옆으로 치우며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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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속성 공법서의 이름은 ‘적토전해경’이다. 풀이하면 흙을 쌓아 바다를 메운다는 의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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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작파의 두 번째 보물, 적토전해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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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찬가지로 법기 사용에 특화된 공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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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속성 법기의 손상을 복구하는 효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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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교월은 이번에도 예시를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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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흑요석으로 만든 소검 법기를 깨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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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적토전해경을 운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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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진 흑요석 소검은 눈 깜짝할 사이에 복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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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교월이 서란에게 소검을 건네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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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금작파에 머무르면서 공법을 익히거라. 궁금한 게 있다면 언제든지 날 찾아와도 좋다. 이 법기는 기념으로 너에게 주마. 대단한 건 아니니 굳이 사양하지는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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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금 수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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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은 공손하게 감사를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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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공법서 두 권과 소검을 품에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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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떠나려던 서란에게 금교월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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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에 특별한 일정이 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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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흔쾌히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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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은 친구를 좀 만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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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영영이가 너와 친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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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금작파에 방문한 김에 한번 보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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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교월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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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런, 아쉽게 됐구나. 영영이는 당분간 바쁘단다. 그 아이는 나중에 만나고 오늘은 나와 함께 식사라도 하는 게 어떻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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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쁘면 어쩔 수 없죠. 식사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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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바로 가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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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이 힘차게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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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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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교월은 서란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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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 있고 성실한데, 예의 바르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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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좀 보고 배웠으면 소원이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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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체적으로는 금영영이 그랬으면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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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금영영은 전혀 바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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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간이면 아마도 침대에서 자고 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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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중천에 떴는데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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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금교월은 자기 후손을 믿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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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렇게 훌륭한 친구를 두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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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원래 끼리끼리 사귀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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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영이도 분명히 저렇게 될 수 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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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교월은 푸른 하늘을 보며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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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디 아이를 훈육하는 건 어른의 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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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을 머금고 회초리를 들 줄도 알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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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극약 처방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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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금영영은 당분간 바빠질 예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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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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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영영은 오늘도 늦잠을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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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이미 중천에 떴지만 전혀 상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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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인은 잠꾸러기, 즉 잠을 많이 자는 것 또한 미인에게 주어진 의무라고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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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영영은 커다란 침대를 벗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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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화롭고 넓은 방은 잔뜩 어질러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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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또한 상관 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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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놔두면 하녀들이 알아서 치워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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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영영은 값비싼 융단을 밟은 채 기지개를 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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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음, 역시 집이 편하긴 편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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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서란의 저택은 너무 좁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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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 안에서 방천화극도 못 휘두를 정도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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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친구와 함께였기에 견딜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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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을 나서자 하녀들이 인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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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씨, 기침하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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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영영도 인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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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좋은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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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지금은 점심이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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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래서 권력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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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들 금영영을 모두의 여동생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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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절대로 과장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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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작파 수도자 세 명이 모이면 첫 번째 사람은 금씨고, 두 번째 사람은 금씨와 혈연 관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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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속성 일영근자 금영영이 사람들에게 얼마나 이쁨을 받았을지는 안 봐도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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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합심해서 오냐오냐한 결과가 이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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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금영영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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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축기에 성공한 뒤부터는 계속 놀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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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 누구도 간섭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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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교월마저도 금영영을 싸고 돌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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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금영영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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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당연히 수행은 안 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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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금영영은 극한의 효율주의자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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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은 선계에 가서 하겠다는 심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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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금영영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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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비승은 류서란이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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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금작파 사람들도 너그러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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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영근자가 금영영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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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금영영의 부모는 생각이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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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일영근자는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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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부모에게 자식은 유일한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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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렇게 한량처럼 뒹구는 꼴은 못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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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마침 금교월의 허가도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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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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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영영의 부모는 힘든 결정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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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은 딸아이에게 가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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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 오향장육 먹으러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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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고기 킬러 금영영이 환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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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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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영영은 그렇게 비행 법기에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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