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dd 3 AI agents (writing, revision, story-continuity specialists) - Add 4 slash commands (rovel.create, write, complete, seed) - Add novel creation/writing rules - Add Novelpia reference data (115 works, 3328 chapters) - Add CLAUDE.md and README.md 🤖 Generated with [Claude Code](https://claude.com/claude-code) Co-Authored-By: Claude Opus 4.5 <noreply@anthropic.com>
12 KiB
이아금이 대로했다.
놀라운 광경이었다.
하지만 그럴 만도 했다.
징징거리면서 탕약 좀 달게 만들 수 없냐고 먼저 귀찮게 굴었던 건 분명히 서란이었다.
이아금은 그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진지하게 듣고 달콤한 탕약을 개발해 준 것이었다.
기껏 가져다 줬더니 ‘좀 이상한데, 그리고 약을 누가 맛으로 먹음?’ 같은 개소리를 씨불이면 보살도 분노를 참지 못한다.
이아금이 그 자리에서 약그릇으로 서란의 정수리를 내리쳤다고 해도 무죄가 분명했다.
하지만 이아금은 교양있는 사람이었다.
눈앞에 있는 두개골을 강타하고 싶은 충동을 참고 도리어 보란듯이 환하게 웃었다.
어차피 약그릇 정도로 때려봤자 아프지도 않을 거라는 사실도 한몫했다.
그렇다고 화가 안 난 건 아니었다.
다음 날, 다시 온 이아금이 말했다.
“류 수사님, 약 드실 시간입니다.”
서란은 약그릇을 받더니 물었다.
“아금아, 갑자기 왜 존댓말을 하고 그래?”
“약 드실 시간입니다.”
녹음기라도 쓴 것처럼 똑같은 응답이 돌아왔다.
대답은 하고 있지만, 대화를 하는 건 아니었다.
서란은 심마를 겪는 동안 자기가 남들에게 했던 소통 거부를 형태만 바꿔서 고스란히 돌려 받았다.
수준 높은 거울 치료.
서란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이아금이 재차 말했다.
“약 드실 시간입니다.”
“으, 응...”
서란은 일단 탕약부터 꼴깍꼴깍 마셨다.
“여기, 다 마셨어.”
“약은 남기지 말고 전부 드세요.”
서란이 눈치를 보면서 약그릇을 들여다 봤다.
흰 사기 그릇에 남은 건 탕약의 흔적뿐이었다.
남기지 말라니, 영문 모를 일이었다.
서란이 곰곰이 생각했다.
탕약, 분명히 다 마셨는데...
혹시 기분이 나빠서 평소보다 예민한 건가?
그러면 이 몸이 풀어줄 수밖에 없겠네.
서란은 전생에 배운 필살 애교를 사용했다.
“이잉, 아금이 화났엉? 나 보고 기분 풀어잉.”
이아금이 바퀴벌레를 본 표정으로 말했다.
“뭔, 약이나 마저 드세요.”
“네.”
서란은 황급히 약그릇에 고개를 처박았다.
그리고 그릇에 묻은 탕약을 핥아 먹었다.
낼름낼름 혀 설거지를 마치고 그릇을 돌려줬다.
깨끗해진 그릇 안을 살핀 이아금이 돌아갔다.
동생에게 경멸당한 서란이 부장님을 원망했다.
부장님, 애교 한 방이면 만사해결이라면서요...
이 대사로 연애랑 결혼까지 다 하셨다더니...
아금이한테는 하나도 안 통하잖아요...
서란은 가물가물해진 부장님의 얼굴을 떠올렸다.
곰처럼 듬직한 장사 체형, 둥글둥글한 인상.
귀여운 부장님이 빵끗 웃었다.
도대체 왜 효과가 없었는지 의문이었다.
서란은 깨달았다.
이아금이 화난 원인은 자신에게 있었다.
다른 사람에게는 화내지 않는 게 그 증거였다.
통렬한 자기비판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서란은 고민했다.
과연 내 잘못은 무엇인가.
나의 어떤 말과 행동이 아금이를 상처 입혔나.
어떻게 사과하면 용서받을 수 있을까.
당연하게도 소용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뭐가 원인인지 의문이었다.
서란이 하늘을 우러러 아무런 부끄러움이 없을 정도로 대단한 인격자였기에 그런 건 아니었다.
반대로 짚이는 게 너무 많아서 문제였다.
부끄럼투성이 생애를 살아온 짐승 합격자, 류서란의 허물은 무궁무진했다.
당장 서란이 심마에 빠졌을 때, 이아금이 약 한번 먹여보겠다고 얼마나 어르고 달랬던가.
이아금은 당시에 국가 편찬 효녀 모음집 우수 사례로 선정될 만한 정성과 애정을 쏟아부었다.
여기가 속세였으면 벌써 마을 입구에 효녀비 두어 개 정도는 세워지고도 남았다.
서란은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갔다.
부엌 담당 하녀가 물었다.
“류 수사님, 여기에는 웬일이신지요?”
“혹시 고구마가 있니?”
하녀가 곰곰이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썰어서 말린 것도 괜찮으신가요?”
“그렇다면 됐다.”
집을 나선 서란이 바람처럼 식당으로 갔다.
다행히 식당에는 고구마가 있었다.
서란은 큼직한 걸로 몇 개 챙겼다.
집에 돌아온 서란은 아궁이부터 찾았다.
장작을 집어넣고 분광술을 사용하자 불이 붙었다.
저출력 분광술은 약간만 응용하면 돋보기로 개미를 태울 때처럼 사용할 수도 있었다.
잠깐 불을 보면서 멍을 때렸다.
장작은 숯이 되고, 숯마저 절반쯤 재가 됐다.
재와 잔불 속으로 서란이 고구마를 투입했다.
다시 기다렸다.
이 정도면 다 됐나 싶을 때 소매를 걷었다.
그리고 아궁이에 맨손을 쑥 집어넣었다.
용암에 들어가서 목욕도 할 수 있는데 아궁이 안에 있는 잔불 따위가 무서울 리 없었다.
맛있는 군고구마가 완성됐다.
좀 많이 탄 것 같지만, 사소한 문제였다.
서란은 정성스럽게 표면에 묻은 재를 털어냈다.
바구니에 잘 담아서 약당으로 갔다.
입구 근처에 잘 숨어서 퇴근 시간을 기다렸다.
마침내 앵그리 이아금도 약당을 나섰다.
서란은 쏜살같이 이아금에게 달려갔다.
“아금아, 내가 잘못했어!”
그리고 군고구마가 든 바구니를 내밀었다.
이아금은 원래 ‘뭘 잘못했는데?’로 시작되는 잔혹한 연속 살초를 시전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바구니에 든 서란의 정성을 보고는 날뛰는 살기를 가라앉혔다.
과거, 이아금이 지금보다 더 어렸을 때였다.
막 수도자가 된 이아금은 종종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생기면 서란 앞에서 토라진 티를 내곤 했다.
말 한마디 없이 벽보고 돌아 앉은 이아금을 달래주는 건 역시나 서란의 몫이었다.
다양한 방법이 동원됐지만, 가장 효과가 좋았던 건 군고구마였다.
이아금은 어릴 적부터 군고구마를 좋아했다.
스물한 살이 된 이아금이 서란을 바라봤다.
기억 속에 있는 얼굴과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그때도 저렇게 안절부절 어쩔 줄 몰라 했었다.
한숨을 쉰 이아금이 말했다.
“언니 집에 가서 먹자, 배고프다.”
그 말을 들은 서란이 밝은 얼굴로 앞장섰다.
둘은 군고구마를 먹으며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다.
말하지 않으면 모르는 법이니까.
이아금은 화가 풀렸고, 서란도 두 번 다시는 약 먹으면서 맛 타령을 하지 않게 됐다.
잘됐군, 잘됐어.
양나라 땅속 깊숙한 곳, 지저 세계.
천부적인 광부, 미궁언서들은 오늘도 영토 확장에 힘쓰고 있었다.
이 두더지 요수들에게 인간들이 멋대로 정한 지상의 국경선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어차피 땅 밑은 모조리 미궁언서들의 세상이었다.
사십일 번 채굴단의 하루는 오늘도 바빴다.
법술로 신체 능력을 강화한 미궁언서들이 맹렬한 속도로 땅을 파고 나아갔다.
광맥이라도 하나 찾으면 그게 다 식량이었다.
채굴단원은 무아지경에 빠진 채 전진했다.
그에게 삶이란 굴착이었고, 굴착이 곧 삶이었다.
언젠가 세상에서 가장 깊은 곳, 전설로만 전해지는 명계까지 이어진 땅굴을 파는 게 꿈이었다.
채굴단원이 흥얼거렸다.
“나는야 굴착 전문가, 점심은 명계에서 먹지.”
그러다가 코가 뭔가에 부딪혔다.
채굴단원은 크고 길쭉한 코를 쓰다듬으며 감히 자신을 가로막은 방해물을 바라봤다.
처음에는 광물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네모반듯한 벽돌을 차곡차곡 쌓아 만든 구조물.
채굴단원이 중얼거렸다.
“이건, 혹시 건물인가?”
채굴단원이 위치한 곳은 지하 세계였다.
당연하지만 땅 밑에 건물을 지을 수는 없다.
그렇다면 이 구조물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채굴단원은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떠올리는데 성공했다.
미궁언서의 오래된 전설과 관련된 내용이었다.
당연하겠지만, 땅 밑에 건물을 지을 수는 없다.
그렇다면 이 구조물은 어떤 사실을 증명한다.
건축 당시에 이곳은 지하가 아니라 지표면이었다.
미궁언서 종족의 오래된 전설에는 빈번하게 등장하는 몇 가지 시작 문구가 있다.
대지가 지금처럼 깊지 않았던 시대.
겁 없이 땅을 파면 명계에 떨어지던 시대.
세상이 혼란과 무질서로 가득했던 시대.
이제는 되돌릴 수 없는, 지나간 시대.
채굴단원이 크게 외쳤다.
“지나간 시대! 지나간 시대의 유적이 여기 있다!”
소리를 듣고 몰려든 채굴단도 경악했다.
지나간 시대는 허구가 아니었다.
아무도 믿지 않던 전설은 실존했다.
지저 세계 전체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소식은 지저 세계뿐 아니라 지상까지 전해졌다.
미궁언서와 제휴를 맺은 오죽문, 오죽문과 일심동체가 된 금작파, 기타 수많은 동맹 수도문파들까지.
깊은 지하에 잠들어 있던 유적이 세상에 드러났다.
고대 유적, 실로 가슴 뛰는 울림이었다.
이 놀라운 소식은 취미 생활이나 즐겨볼 요량으로 커다란 원예 가위 들고 정원수를 난도질하던 서란의 귀에도 들어갔다.
참고로 서란은 고고학 관련 영화를 수십 번 이상 돌려본 탐험 영화 마니아였다.
서란은 즉시 모험을 준비했다.
삽이나 곡괭이는 거추장스러울 뿐이었다.
안전 장비? 서란은 지저 세계가 통째로 붕괴한다고 할지라도 멀쩡히 걸어나올 재주가 있었다.
서란이 챙긴 건 오로지 모자와 채찍뿐이었다.
“위대한 모험이 나를 부르는구나!”
강호에 장보도가 나타나면 피바람이 부는 법.
고단한 역경과 눈부신 명예가 기다리고 있었다.
용기와 지혜, 행운을 겸비한 영웅만이 지하에 잠든 보물을 차지할 자격이 있었다.
서란은 곧장 문파 대결계를 넘었다.
목적지는 당연히 지저 세계였다.
하지만 고대 유적은 구경도 못했다.
고대 유적 인근을 지키던 두더지가 말했다.
“발굴 현장은 지상에 있습니다.”
지표면에서부터 파고 들어갈 예정이라고 했다.
서란은 할 수 없이 목적지를 바꿨다.
양나라와 건나라 국경 지대가 발굴 현장이었다.
주변은 이미 수도자들로 바글바글했다.
조금 돌아왔지만 어쨌든 모험이 시작된다.
서란은 힘차게 첫발을 내딛었다.
그리고 곧장 쫓겨났다.
고고학자 수사가 불꽃처럼 분노했다.
“아니, 거길 그냥 밟고 들어오면 어떻게 합니까! 저기 있는 경고문이 안 보여! 발굴 현장에 함부로 들어오지 말라고! 당장 나가!”
욕먹고 시무룩해진 서란은 멀리 떨어진 곳에서 발굴 현장을 슬픈 눈으로 바라봤다.
수많은 고고학자들이 두꺼운 밧줄을 이리저리 치면서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일부는 쪼그려 앉아서 땅을 파고 있었다.
토목 공사하는 것처럼 법술로 팍팍 파는 게 아니라 작은 붓으로 흙을 살살 긁는 중이었다.
서란은 무릎에 고개를 묻었다.
황금 조각상과 비탈을 굴러오는 바위는 없었다.
고대의 보물, 샘솟는 탐욕, 배신과 음모도 없었다.
심지어 채찍을 휘두르는 고고학자마저 없었다.
이세계 고고학에 모험은 없었다.
이런 건 서란이 꿈꾸던 모습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