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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한 여고수가 있다. 서연의 상상 속에서 방금 만들어 낸 여고수다.
이 여고수는 언제나 삿갓과 면사로 얼굴을 가리고 다니는 탓에 나이를 짐작할 수 없었다. 그뿐이랴, 무기도 차고 다니지 않는 탓에 무슨 무공을 익혔는지조차 파악하기 힘들다.
그녀의 특징이라곤 오직 영물들을 데리고 다닌다는 것인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중원 무림에 영물을 대동하고 다니는 여고수가 있었다면 소문이 나도 진작에 났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모순을 해결할까.
서연은 이 여고수가 사실 일인 전승 신비문파의 일원이었다고 설정하면 될 것이라 생각했다.
속세와 동떨어진 삶을 살아왔을 테니 위명이 알려지지 않은 것도 납득할 수 있었다. 어쩌면 먼 과거에는 유명했으나, 금분세수(金盆洗手)를 마치고 강호 무림에서 벗어난 노강호일 수도 있겠다.
젊은 용모야 반로환동했다고 여기면 될 것이다.
이 여고수는 기본적으로 선한 성향을 가졌지만, 속세에는 최대한 개입하지 않으려 한다. 굳이 소속을 따지면 백도에 속한 무인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렇게 생각하니 금분세수를 마치고 강호 무림에서 벗어난 노강호 쪽 설정이 더 나아 보였다. 속세에 개입하지 않으려는 이유가 명확하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배경을 결정했으니 이제 사용하는 무공과 무기를 정해야 한다. 본래 이런 것은 상세할 수록 좋았다.
근력이나 골격 구조 같은 기본적인 면에서 사내가 여인보다 우위에 서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강맹한 외공이나 중병기를 다루는 데 있어 이러한 차이는 더욱 두드러지니, 여고수들은 힘보다는 기술과 속도, 정교함을 살릴 수 있는 무기를 사용하곤 했다. 상상 속 신비의 여고수 또한 그러할 터였다.
세검(細劍), 연검(軟劍), 비도, 암기, 채찍, 편(鞭), 쌍검, 선(扇)…….
서연은 채찍과 편은 제쳤다. 경박해 보였기 때문이다. 쌍검은 조금 끌렸으나, 서연 자신이 그만한 길이의 검을 차고 다닐 자신이 없었기에 제했다. 검과 연검도 같은 이유로 제하니, 결국 남은 것은 비도와 암기, 그리고 부채뿐이었다.
비도와 암기는 어느 정도 다룰 자신이 있었다. 조각칼과 길이가 비슷했기 때문이다. 허나 여고수가 비도와 암기를 다룬다면, 기품이 없어 보일 뿐만 아니라 자칫 사파나 마도의 인물로 비춰질 수 있었다.
그렇다면 결국 남은 것은 부채뿐이다.
부채는 장점이 많았다. 평상시에 들고 다녀도 시선이 끌리지 않았으며, 얼굴을 반쯤 가리고 부채질만 해도 고수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검은 한 번만 휘둘러도 허접함이 훤하게 드러나지만, 부채는 아무래도 그럴 일이 상대적으로 덜했다. 부채를 무기로 쓰는 무림인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끔 부채질하는 척 손끝에 기운을 모아 두꺼운 나무 한두 그루만 베어내도 굳이 고수 연기를 할 필요도 없을 터였다.
‘그러면 진짜 고수 아닌가?
서연은 문득 드는 생각에 미간을 좁혔으나, 이내 그만두었다.
어디 강호 무림이 나무 한두 그루 베어 넘길 줄 안다고 끝나는 곳이던가. 무림과 엮이면 온갖 사건 사고에 연루되기 마련이며, 이때의 사건사고란 해결하지 못하면 불구가 되거나 죽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고 성공하면 좋으냐?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더 큰 사건 사고에 엮이는 시발점이 되곤 했다. 고로 무림이란 한 번 발을 담그면 죽거나 불구가 될 때까지 영원히 빠져나올 수 없는 지옥도(地獄圖)나 다름없다고 할 수 있겠다.
거기까지 생각을 마친 서연은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실없는 생각을 하다 보니 몸의 떨림도 잦아들고, 긴장도 풀렸다. 심신의 평안을 되찾은 채로 무림인들을 내려다보자, 진짜 자신이 상상 속 여고수라도 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진짜로 거짓말로 속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자고로 거짓말은 언젠가 발각되기 마련이었으니, 끝까지 속일 자신이 없다면 아예 시작도 않는 것이 옳았다. 하지만 저들이 멋대로 착각하는 것까지는 막을 생각이 없는 서연이었다.
마침 품속에 부채 하나가 있었다. 대나무를 잘라 직접 만든 죽선(竹扇)이었다. 서연은 다른 것은 몰라도 무언가를 만드는 데에는 탁월한 재주가 있다고 자부했다. 실제로 여고수를 본 적은 없었으나, 이만한 부채라면 여고수가 들고 다니기에 부족함은 없어 보였다.
마침 새벽비도 멎었겠다, 서연은 품속에서 부채를 꺼내 가볍게 쥐었다. 이내 바로 옆에 있던 두꺼운 소나무를 향해 부채를 휘저으니, 소나무들이 두부처럼 숭덩숭덩 잘려 나갔다. 이는 서연 나름의 기선제압이었다.
“…….”
무림맹 단원들의 얼굴은 더욱 창백해졌다.
서연은 소나무를 마저 자른 다음, 큼지막한 통나무들을 의자라도 되는 양 모닥불 주변에 절묘하게 떨어뜨렸다.
탁! 탁! 탁!
나무토막들은 오죽 무거웠는지 땅바닥에 놓이자마자 땅을 깊이 파고들었다.
이쯤 기다렸는데도 아무 말도 들려오지 않자, 서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앉아서 이야기하는 것이 좋을 듯 한데, 어찌 생각하시는지요.”
그제야 백호가 기운을 거두었다.
화악!
짓눌릴 듯한 위압감에서 벗어난 무림맹 단원들을 헛숨을 뱉어내며 서연을 노려보았다. 이 와중에도 공포감에 사로잡히기보다 싸울 준비부터 하는 걸 보니, 과연 무림맹의 정예라 할 만했다.
“서서 이야기할까요?”
무림맹 단원들은 장산을 바라봤다. 어떻게 해야 할지를 묻는 것이다. 장산은 서연을 위아래로 살피다가 이런 결론을 내렸다.
‘터무니없구나.
당최 뭐 하는 여인이길래 저만한 기운을 쉬지 않고 뿜어댄단 말인가? 다른 건 몰라도 내공 하나만큼은 맹주님과 비교해도 밀리지 않을 것 같았다.
나무의 단면도 마치 종잇장처럼 깔끔했다. 저것을 검도 아닌 부채로 저렇게 만들려면 도대체 얼마나 심후한 내공이 있어야 하는 건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뿜어져 나온 기운에서 패도적이거나 사악한 기운은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말투도 정중하니, 사마외도나 흑도일 가능성도 낮아 보였다.
당장 생각나는 것은 화산의 검후(劍后). 허나 검후가 부채를 사용한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애초에 목소리부터 달랐다. 그 외에도 몇몇 고수들이 장산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으나, 마땅한 답은 찾지 못했다.
‘인명부에도 기록이 없는 여고수.
장산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을 노강호일 가능성이 가장 높아 보였다.
‘반로환동, 어쩌면 이종(異種)의 혼혈일 수도 있겠다.
전자보다는 후자 쪽이 더 그럴듯해 보였다. 반로환동한 고수라면 까마득한 후배들에게 경어를 쓰지는 않을 터이니 말이다.
‘꼭 그렇지도 않나?
곧 결심을 마친 장산은 한숨을 내쉬다가 납검(納劍)했다. 소림부터 들를 것을 후회해도 이미 늦었다. 공연한 직업병이 도져 호랑이굴, 아니. 용둥지에 제 발로 걸어 들어온 셈이었다.
“……앉겠습니다.”
무엇보다 이대로 계속 서 있다간 어디 한 군데라도 잘려 나갈 것만 같았다. 백도의 고수라고 어디 자비롭기만 하겠는가. 오히려 백도야말로 이런 면에서는 칼 같은 법이었다.
곧 맹원들이 꺼진 모닥불 앞에 둥글게 둘러앉았다. 장산은 예를 갖춰 입을 열었다.
“선배님, 저는 무림맹 칠조 조장, 장산이라고 합니다.”
“무림맹……?”
“예, 선배님. 여기 맹원임을 상징하는 징표와 맹주께서 주신 명령서도 있습니다.”
“그, 이 깊은 산골에는 무슨 연유로?”
어쩐지 말소리가 작아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으나, 장산은 애써 내색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소림사에서 맹에 도움을 청했습니다. 방장대사께서 폐관에 드셨고, 나한들 또한 대부분 하남 바깥에서 임무를 수행 중이라 하니, 그때까지만이라도 도움을 달라 청하여 이리 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일월상단 분들을 잡고 심문했던 건.”
“사마외도(邪魔外道)와 연루된 줄 착각하여, 저희가 큰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
서연은 난감한 표정으로 맹원들을 바라보았다. 어째 폭력을 쓰지 않을 때부터 이상하다 했더니, 설마 무림맹이었을 줄은 몰랐다.
서연이 침묵하고 있자, 눈치를 보던 장산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실례되지 않는다면, 존함을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예상보다 더 심각한 상황에 서연은 정신이 아찔해져 미처 대답하지 못했다. 안타깝게도 장산은 그런 깊은 내막까지는 알지 못했다. 여고수가 입을 닫고 있으니 화가 난 것이라 착각하여 사과부터 했다.
“죄송합니다. 금분세수 하셨을 선배님의 존함을 여쭙는 것이 무례였음을 미처 생각지 못했습니다."
서연은 눈만 껌뻑였다. 이쯤 되니 그녀도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선배님이라니. 어쩌다 보니 무림맹을 기만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이러다 자칫 사기꾼으로 몰려 옥살이라도 하게 될까 염려부터 앞섰다.
서연은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다가, 다른 사람들처럼 나무토막 위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러고는 이전보다 훨씬 정중한 어투로 말했다.
“소인은 서연이라 합니다."
서연은 맹원들을 차례로 돌아보며 나지막이 일렀다.
"맹원 분들께서 소인를 무어라 여기시는지는 모르오나, 소인은 그저 산중에 홀로 기거하는 여인일 뿐입니다. 무공도 익힌 적이 없으니, 여러분께 선배님이라 불릴 자격도 없습니다. 상인들을 따라나섰던 것도 여러분들께 해코지를 당할까 염려되었기 때문이니, 부디 용서하십시오.”
그렇게 설명했음에도 맹원들의 표정은 여전히 괴상했다. 설명이 부족했나 싶어 서연은 덧붙였다.
“……궁금한 것이 있으시다면 얼마든지 답해드리겠습니다.”
가장 왼쪽에 있던 여인이 손을 들었다.
“선배님, 후배는 제갈혜(諸葛慧)라고 합니다.”
“선배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그럼 서연 님, 혹여 나무는 어찌 자르셨는지요?”
“별 볼일 없는 잡기(雜技)일 뿐입니다. 여러분의 시선을 현혹하여 고수 행세를 하려 했으나, 상황이 이리 되었으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잡기요……?”
“예.”
“혹시, 한 번만 더 보여주실 수 있겠습니까?”
서연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일어서서 소나무 쪽으로 다가갔다. 속일 마음이 없었기에, 이번에는 부채도 없는 맨손이었다. 맹원들이라면 뛰어난 무인들일 터이니 알아서 잘 분별하리라는 마음도 있었다.
서연은 좌장으로 소나무를 친 다음에 잠시 기다렸다. 서연이 생각하기에, 그건 공격이라기보다는 엉망진창의 헛짓거리에 가까웠다.
의(意)도 없고, 형(形)은 지리멸렬(支離滅裂)했다. 거대한 나무가 쉽게 잘려나가니 겉보기에는 그럴듯해 보일지 모르나, 어찌 이따위 움직임을 무공이라 할 수 있겠는가. 차라리 저잣거리에서 파는 삼류 무공이 이보다는 깊은 뜻을 품고 있을 터였다.
그렇기에 이것은 잡기(雜技)에 불과하다.
서연의 자조(自嘲)가 무색하게도, 소나무는 힘없이 동강났다.
“…….”
맹원들은 침묵에 잠겼다. 서연은 개의치 않고 말했다.
“질문 계속 하셔도 됩니다.”
이번에는 다른 사내가 손을 들었다.
“……그러면 저 범은 선배님께서 직접 키우시는 것입니까?”
“키우는 범은 아닙니다. 어쩌다보니 인연이 닿아 함께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선배라 부르는 것은 그만두셨으면 합니다.”
“……죄송합니다.”
마침 백호가 다가와 서연의 얼굴에 거대한 머리를 마구 비벼댔다. 서연은 대화에 집중해야 했기에 백호를 적당히 쓰다듬다 밀어냈지만, 그 모습을 본 맹원들의 얼굴은 더욱 창백해졌다. 아예 새파랗게 질려 버린 인원도 적지 않았다.
장산이 손을 들었다.
“그러면 서연 님께서는 태실산에 사시는 겁니까?”
“예. 제자 한 명, 백호 하나, 올빼미 하나를 데리고 살고 있습니다.”
“실례지만 혹 소림과는 이야기가 되어 있으신지요?”
서연은 잠시 고민하다 답했다.
“제가 소림을 잘 알지는 못하나, 소림의 청허 스님과 이야기를 나누긴 했습니다.”
“…….”
이내 장산 역시 입을 다물었다. 서연은 얼마간 더 기다리다가 입을 열었다.
“더는 질문 없으시다면, 저도 몇 가지 여쭈어도 될는지요?”
“얼마든지 물어보십시오.”
장산의 자세는 어쩐지 이전보다 더욱 공손해 보였다.
“하남에 파견 나오셨다 들었는데, 일이 그리 심각한가요? 듣자 하니 아랫동네에서는 어린아이가 서른 명도 넘게 사라졌다고 하더군요.”
장산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굳은 얼굴로 답했다.
“문제가 있어도 없게 하겠습니다.”
“예?”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러니 안심하십시오.”
장산은 놀랍게도 이마에서 땀을 흘리고 있었다.
서연은 감탄했다. 이 으스스한 날씨에 땀을 흘리는 장산을 보며 놀란 것이 아니었다. 이 세계의 무림맹이 참으로 제대로 된 집단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수하들이 저렇게 행동하는 것을 보면, 맹주가 어떤 사람인지는 굳이 만나볼 필요도 없었다.
분명 중원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협객일 것이다.
“참으로 다행입니다.”
“……그리 생각해주시니 저희도 감사할 따름입니다.”
“마지막으로 한 말씀만 드려도 되겠습니까?”
“말씀하십시오.”
“일월상단 분들을 깨워서 잘 돌려보내고, 따로 사과도 해주셨으면 합니다. 여러분의 행동이 잘못되었다 말하는 것은 아니오나, 무고함이 밝혀졌다면 사과하는 것이 인간된 도리라 생각합니다.”
“……예.”
"여러분들을 보니, 무림맹의 미래가 참으로 밝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감사, 합니다."
고개를 열렬히 끄덕이는 장산과 맹원들을 보며, 서연은 이리 용기 내어 나서기를 참 잘했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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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연은 가까운 객잔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도시로 향하는 길목에 자리한 탓인지, 객잔은 온갖 강호인들로 왁자지껄했다.
“맛집인가 봐요.”
옆에 있던 화련이 중얼거렸다.
손님이 워낙 많아 잠시 기다려야 했다. 점소이가 다급히 다가와 주문부터 먼저 받겠다고 하기에, 화련이 먹고 싶어 하는 음식 몇 가지를 주문했다.
“요즘 병사로 지원하면 돈을 그리 많이 번다면서? 서쪽 오랑캐들이 그리 강해 보이지는 않던데. 이번 기회에 나도 병사나 지원해볼까?”
“나는 전쟁이 너무 커지지는 않을까 걱정되는데, 자네는 아닌가 보군.”
세상 소문 논하기를 좋아하는 행인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어느새 빈 자리가 났다.
객잔 일층에는 흉악한 인상을 지닌 낭인들이 앉아 있었는데, 그들은 서연의 범상치 않은 분위기와 허리춤에 매인 검을 보고 이내 시선을 내리깔았다.
서연은 잠시 멍한 표정으로 낭인들을 쳐다봤다.
“…….”
낭인들은 서연의 시선을 느꼈는지 저들끼리 수근거리다가, 도망치듯 거리를 벌려 객잔 바깥으로 사라졌다.
갑자기 급한 일이라도 생긴 것일까?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아시는 분이세요?”
“잠시 착각했단다.”
서연은 당과를 먹는 화련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과거의 자신이라면 어떠했을까. 사내들과 눈을 마주칠까 두려워 고개를 푹 내리깔고 도망칠 생각부터 하지 않았을까.
사람은 고쳐 쓸 수 없다는 말이 있다. 타고난 본성이 쉽게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자신은 어찌 변했단 말인가?
오랜 세월 세상과 등지고 살아온 스스로가 한심하여? 아니면 용기를 내고자 결심했기에? 지켜야 할 인연이 생겨서? 이대로 살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혹은 흔히 말하는 깨달음을 얻어서인가?
아니다.
화전민 여자아이에게 연민을 느꼈기 때문이다.
서연은 무심코 화련을 내려다보았다. 땡글맹글한 눈동자가 고스란히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서연은 사람은 고쳐 쓸 수 없다는 말을 믿는 사람이었으나, 동시에 아주 사소한 계기로도 변화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이 그러했기 때문이다.
번개와 같은 깨달음이었다. 누군가에게는 사소할지 모르나, 정기신의 균형이 기이할 정도로 뒤틀려있던 서연에게는 사소하지 않았다.
고금을 통틀어 다신 없을 재능을 가졌기에, 정(精)과 기(氣)의 타고난 능력만으로 이미 천상의 경지에 닿아 있었던 서연이었다. 허나 신(神)은 그렇지 못했다. 절대자의 것이라기엔 유약했고, 어렸으며, 미숙했다.
인간의 정신은 오직 자기성찰과 참오를 통해서만 성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음의 문을 닫고 외진 곳에 틀어박혀 살았기에 세속의 경험을 쌓지 못했고, 조각에 몰두하며 심신을 다스렸기에 번뇌할 일이 없었다.
그렇기에 깨달음을 얻을 계기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지금은 달랐다.
번뇌했고, 행동했으며, 작게나마 이루었다.
서연은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심득을 붙잡으려 애를 썼다. 보통 이럴 때는 가부좌 자세로 운기조식(運氣調息)하는 것이 보통이나, 아직 그러한 경험이 없어 쉽사리 행하지 못했다. 다만 본능적으로 눈을 감고 호흡을 가다듬으며 집중할 뿐이었다.
시끄럽고 변수도 많은 객잔에서 운기조식을 하는 것이 위험하다는 사실을 무협지에서 본 적은 있었으나, 제가 하는 행동이 운기조식의 일종이라는 사실도 몰랐다.
찰나였다. 서연의 육신을 타고 옅은 바람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일반인들은 그저 바람이라 생각하고 넘겼지만, 무공을 익힌 적이 있는 사람들은 달랐다.
즉각적으로 반응했다.
“이건……?”
“몸이 갑자기 왜.”
본능적으로 경직되었고, 갑자기 제 몸을 떠는 이도 적지 않았다.
허나 무공 수위가 그리 높지 않았기에, 그 기이한 현상의 원인까지는 밝혀내지 못했다.
허나 화련은 달랐다. 경외심을 느꼈다.
“스승님…….”
남들보다 훨씬 무공 수위가 높았기 때문이다.
자연지기가 몰아치며 온 몸을 따스하게 감싸안는 것이 느껴졌다. 온화한 기운이 혈맥을 타고 흐르는 듯했다.
화련은 감격으로 가빠지는 숨을 가까스로 다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 스승의 호법을 서려는 것이다.
하수와 고수를 막론하고 모든 무인은 운기조식 중 가장 취약해진다. 온 정신을 내부를 관조하는데 쏟아붓기에, 자칫 사소한 변수 하나에 주화입마에 빠지게 되기 때문이다.
스승님 정도 되는 고수가 그것을 모를리 없으나, 본래 깨달음이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찾아오는 법.
그렇기에 화련은 세찬 시선으로 주변을 경계했다.
서연은.
눈을 감고 몰입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시커먼 공간에 당도했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공허한 공간이었으나, 왠지 모를 편안함이 그녀를 감쌌다.
“…….”
자세히 보니 완전히 시커먼 공간은 아니었다. 마치 잠을 잘 때 눈꺼풀 사이로 살색 빛이 새어 들어오는 것처럼, 그 내부 또한 그러했다. 다만 빛이 너무나 미약하여 집중하지 않으면 어둠이라 착각할 뿐이다.
마치 계란 껍데기 속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었다. 다가려고 하니 무슨 벽 같은 게 만져졌다. 서연은 별다른 고민 없이 주먹을 들어서 벽을 두드렸다.
생각보다 더 단단했다. 서연은 벽을 몇 번 더 두드려보다가, 편안한 자세로 자리에 앉았다.
‘어쩌다가 여기에 떨어졌을까.
서연은 여기가 심상 속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했다. 그렇기에 시간이 지나면 현실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일반적인 고수들이라면 지금 같을 때에 막혀 있는 혈도를 재정비하거나, 새로 얻은 기운을 갈무리하거나, 혹은 소주천과 대주천을 반복하며 단전에 내공을 쌓고는 했다.
허나 십이정경(十二正經)과 기경팔맥이 뚫리다 못해 자연과 완전히 동화된 서연은 상황이 조금 달랐다.
육체와 내공은 이미 하늘에 닿았다. 더 나아가고자 한다면 결국 정신이 성장해야 했다.
허나 누구도 그러한 사실을 일러주지 않았기에, 서연은 편안한 공간 속에서 그저 호흡만을 계속할 뿐이었다.
'편안하구나.'
겁쟁이처럼 살았을때나 지금이나 세상은 그대로다.
바뀐 것은 마음가짐 뿐이다.
시간이 엄청나게 느려진 것처럼 느껴졌다.
반쯤 무아지경에 빠진 상황. 호흡을 반복하고 정신이 평안해지자, 서연을 가로막고 있던 단단한 껍질에도 마침내 미세한 실금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서연도 그것을 눈치챘다. 허나 이어지던 실금은 어느 순간 퍼져나가기를 멈췄다.
‘뭐지?
마치 이것으로는 부족하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이것이라니, 심득을 말하는 것일까?
그러다 정신이 몽롱해지며 무아지경에서 벗어난 순간, 찬물이 쏟아지는 것처럼 눈이 번쩍 떠졌다.
“아…….”
아쉬움과 탈력감이 동시에 몰려들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땐, 화련이 코 앞까지 얼굴을 들이밀고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
정신을 차렸을 땐 시켰던 음식들이 전부 식어 있었다. 화련에게 물으니, 그새 반 시진이 넘게 흘렀다고 했다.
“왜 먼저 먹지 않고.”
“당연히 스승님이 먼저 드셔야죠. 그리고 저는 당과를 먹어서 괜찮았어요.”
서연은 픽 웃고는 근처를 지나가는 점소이를 불러세웠다. 음식을 먹지도 않고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꼴이 되었기에, 점소이의 얼굴에는 불퉁함이 잔뜩 드러나 있었다.
“식은 음식은 다시 데워서 포장하고, 음식도 새로 내주실 수 있을까요?”
서연은 그러면서 돈을 두둑이 내밀었다. 잔돈은 가지라는 뜻이다.
“금방 내오겠습니다 여협!”
순식간에 대역죄인에서 협객 대접이다. 점소이는 능숙하게 주문을 받은 다음, 대나무로 된 통에 따끈따근한 음식들을 포장해 내밀었다. 저것도 다 값에 포함되어 있었다.
화련이 물었다.
“이건 나중에 드시려고요?”
“저분들 드리려 한단다. 그 사이에 음식이 나오면 먼저 먹으렴.”
서연은 음식을 들고 객잔 바깥으로 나섰다. 들어오기 전 보았던 거지들에게로 향하는 길이었다.
갑자기 연민이 들어 나누어주려는 것이 아니었다. 평범한 거지들이었다면 점소이가 벌써 쫓아내고도 남았을 터. 저리 떡하니 자리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개방(丐幫)에 정식으로 소속된 거지일 가능성이 높았다.
서연이 여태껏 만났던 정파 인사들은 하나같이 도리를 아는 이들이었다. 이 정도 대접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설령 개방 소속이 아니어도 상관없었다. 이리 여유로울 때 베풀어서 나쁠 일은 없지 않은가.
서연이 다가오는 것을 본 노년 거지가 넌지시 말했다.
“우리 주시려고?”
“네.”
“……참말로?”
“그럼요.”
노년 거지는 이런 일은 또 처음이라는 듯 머리를 긁적였다.
“나는 개방 출신이 아닌데? 뭔가 착각을 하고 있는 듯해서.”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드릴 생각이었어요.”
“그렇다면야 감사히 먹겠소.”
노년 거지는 고맙다며 고개를 넙죽 숙이더니,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큰 소리로 외쳤다.
“이리 와서들 먹어라! 이 분이 주신거니까 다들 고맙다고 하고!”
어디선가 슬금슬금 나타난 거지들이 서연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서연은 그런 거지들을 빤히 쳐다보다가 품에서 조각칼을 꺼내더니, 나뭇가지를 꺾어 그 자리에서 수저를 만들기 시작했다.
“…….”
맨손으로 퍼먹으려던 거지들은 눈치껏 서연을 지켜보았다. 그러다가 솜씨가 심상치 않은 것을 알고는 감탄사를 뱉었다.
“보통 실력은 아닌데.”
“기가 막히네.”
“솜씨가 좋은데, 형님은 어떻게 생각하쇼?”
“잘해.”
“그게 끝이여?”
“잘하면 잘하는거지. 나같은 무지렁이가 봐서 뭘 알겠냐?”
서연은 근처 물가에서 수저를 헹군 다음 거지들에게 건넸다. 거지들은 양손으로 젓가락을 들고 혀를 내둘렀다.
“칠도 안했는데 광이 나네.”
“부자들한테 비싸게 팔아도 되겠어.”
“일다경은 걸렸나?”
서연은 그런 거지들을 지켜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편히 드세요. 저도 식사를 해야 해서.”
그렇게 말하며 객잔으로 들어가려는데, 처음에 만났던 노년 거지가 입을 열었다.
“혹시 일가친척이나 지인 중에 이립 쯤 된 사내가 많소?”
“그건 왜요?”
“혹여 군문에 몸담을 생각이 있는 사람이 있거든 그러지 말라고 말리고 싶어서. 국경 쪽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갔다간 몸 성히 돌아오지는 못할 거야.”
방금 전까지 있던 장난기 가득한 노인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듯, 분위기가 돌변해 있었다. 문득 너무 고요해진 터라 서연은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지인 중에 사내는 없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듯 합니다.”
여기저기서 타박하는 듯한 대답이 되돌아왔다.
“그러게, 딱 봐도 외동이라니까.”
“형님도 틀리는 때가 있구만.”
“미안합니다. 우리 형님이 가끔 이래. 노망났다니까?”
“가서 사과드려. 이 분위기 어떡할거야.”
“헛소리니까 너무 담아두진 마시고. 알겠지요?”
서연은 거지들이 낄낄대는 것을 보다가 따라 웃었다. 서연은 자신이 이런 초탈한 분위기를 좋아한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그래서일까, 괜히 한 번 더 물었다.
“혹시 어린 제자를 데리고 구경할 만한 곳이 있을까요?”
거지들은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숭산에서 칠주야 정도 뒤에 행사를 한다고 하던데.”
“지역은 상관 없는거요? 없으면 섬서는 어떠시오? 조만간 화산이랑 종남이 한 판 한다던데.”
“놀러가기에는 물놀이가 좋은데, 하남에는 마땅한 호수가 없으니…….”
그때 노인 거지가 입을 열었다.
“용문석굴(龍門石窟)에는 가보셨나? 보아하니 조각 솜씨가 아주 뛰어난 듯 한데, 가서 얻을 것이 아주 많을 걸세.”
들어본 적이 있었다. 십만 개에 이르는 불상과 벽화가 있는 깊은 석굴이었던가. 높이가 다섯 장도 넘는 거대한 조각상도 있다고 했던 것 같았다.
옆에 있던 거지가 이어 말했다.
“낙양이면 확실히 가깝긴 하지. 마차를 타면 이틀도 안 걸리겠어. 구경거리도 많아. 옛 왕조들의 수도라 그런가. 식도락 여행하듯이 가도 좋고.”
확실히 영감을 얻을 거리는 많을 것 같았다. 큼지막한 상단들도 자주 집결한다고 하니, 눈도 호강할 것 같았고 말이다.
고민하는 와중에, 골똘히 생각하던 거지 하나가 입을 열었다.
"생각해보니 금룡상단이 연다는 각예대회(刻藝大會)도 낙양이었던 것 같은데? 내가 봤을 때 자네 정도 실력이면 입선도 어렵지 않을거야."
각예. 사물에 예술을 새긴다는 뜻이다. 조각도 각예의 일종이라 할 수 있겠다.
거지가 물었다.
"이번 건 어떻소?"
서연이 웃으며 대답했다.
"밥 값을 치르고도 남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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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양현의 공사터.
족히 수백 명을 수용할 수 있을 만한 넓이의 담벼락이 차곡차곡 세워지고 있었다.
인부들이 머무는 천막의 숫자만 보더라도 새로 자리잡을 대문파의 위세를 짐작하게 했다.
쿵! 쿵!
무수히 많은 인부들이 망치를 두드리고 있었다. 근래에 보기 드문 대공사였다.
자연스레 인부들 사이에서도 온갖 추측이 오갔다.
“해남파가 이곳으로 이주한다는 소문이 돌던데? 근래 장강 이남이 난리지 않은가.”
“멸문한 광동진가의 방계라면 모를까, 한 지역의 패자로 군림하는 대문파들이 고작 두렵다는 이유 때문에 오지는 않을 것 같소이다.”
“팔대세가도 멸문 당했는데 그 아래의 대문파들은 오죽할까. 나는 이해하네. 남들이 손가락질 하더라도 이승에서 구르는 것이 낫지.”
“나는 공사만 마치면 호북으로 갈 생각도 하고있네 그려. 가서 신녀문주께 공양이라도 드릴까 해. 마음씨가 어찌나 고우시다던지, 우리같은 민초들에게도 격어(格語)를 써 주신다고 하더라니깐. 소림사의 고승들이나 그러지 않은가.”
“아무리 그래도 다른 구파가 낫지 않을까 싶구만. 쌓아온 역사가 다른데. 당장 무당파만 해도 검선이 계시지 않은가. 기왕이면 신선이 여럿 계신 곳에 공양하는 것이 낫지.”
“자네가 그날 떠올랐던 연꽃을 보지 못해서 그렇다니깐. 구천현녀의 환생이시라는 소문이 파다해.”
식사 시간에 자유롭게 떠들었다. 색이 없고 낡은 옷에서 인부들의 처지를 짐작할 만했다.
하나같이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사람들이었는데, 요즘 같은 때에 식대를 지급하는 공사판이 있다는 것 자체를 감사히 여겼다.
금룡상단이 돈을 아끼지 않은 탓이다. 신녀문의 명성에 누가 되지 않기 위함이었다.
당연히 외관에도 큰 신경을 썼다. 재료를 아끼지 않았다는 뜻이다.
“사치스럽지 않으면서도 고아한 향취가 드러나도록 하라니. 으음…….”
“상단주께서 구파의 산문을 예시로 드셨네. 장문인들이 산의 가장 높은 곳에서 문파를 굽어보듯, 작금의 공사도 그리 진행해야 할 것이네.”
“산세가 완만하니 공사 자체는 어렵지 않을 것 같습니다만.”
책임자로 보이는 이들이 설계도를 펼쳐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근처에 팔짱을 낀 채로 경계를 서는 무인들도 있었다. 내부에 외부인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통제했다.
“괜히 그런 소문이 도는 게 아니었네요.”
화려한 옷을 걸친 소녀가 말했다.
길게 늘어뜨린 머리카락 곳곳에 장신구를 달았다. 그 나이대의 소녀가 가질 법한 활달함 대신 묘한 총기를 품었다.
갈색 눈동자가 빛을 내며 공사장을 빠르게 흝고 있다.
회화루의 영영이었다.
곁에 선 여인은 적어도 열 살은 많아 보였는데, 안절부절 못하는 기색이 얼굴에서부터 드러났다.
예화라는 이름을 가진 예기로, 일전에 서연에게 찾아와 도움을 구했던 여인이었다. 영영을 친동생처럼 여기는 사람이기도 했다.
“영영아, 이런 곳에 있어도 될까? 무사님들이 다 검을 차고 계시는데…….”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그녀를 힐끗 본 영영은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무심히 입술을 뗐다.
“그래서 마실 것들을 가져 왔잖아요. 며칠 전에 책임자와 이야기를 끝내 두었으니 막지 않을거에요. 그리고…….”
주변을 살피던 영영의 눈매가 한순간에 무심해졌다.
“저희보다 세가 강할 것이 분명한데, 이렇게라도 미리 알아둬야죠. 회화루는 한창 크기를 키우고 있는 중이에요. 언젠가 은인을 다시 뵙게 될 때 누가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바삐 돌아다녀야 해요.”
“……최근에는 언니들한테 높으신 분들이 하시는 말씀을 집중해서 듣고 적어두라고도 했다면서.”
“살길을 모색해둬야죠. 언제 끈이 떨어질지 모르니.”
지학에 불과한 아이가 가질만한 심계가 아니다.
삼사층 높이의 주루가 도합 열 개도 넘는다. 객잔까지 합치면 그의 배는 되었다.
오가는 돈이 막대했다. 그만한 돈을 홀로 관리하면서도 위와 아래에서 잡음이 나오지 않도록 조율했다.
지역 관리들과 무림맹의 인사들에게 법에 걸리지 않을 정도의 대접까지 하면서다.
근래에는 하오문이 그러하듯 인근에서 정보를 끌어모으고 있었다.
표면적으로는 매 루주가 한 일로 알려져 있었다. 예화처럼 가까운 사람이나 영영의 진가를 알았다.
‘은인께서는 노래 한 곡조로 족하다 하셨지만, 은인의 제자분은 또 모르지. 나보다 나이가 어리시니. 언젠가 도움을 필요로 하실 수도.
영영은 가라앉은 눈매로 생각에 잠겼다. 인부와 책임자들에게 매실차를 건넬 때 환하게 웃던 사람이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기녀라는 출신이 은인께 누가 된다? 다른 세상을 사는 신선들에게 그런 신분이 중요할 것이라 생각되지는 않는다. 필시 도문에서도 드높은 신분을 가지신 분이실게다. 그만한 실력을 가지시고도 신분을 감추지 않으셨더냐.
이따금 지현이 해주는 이야기를 떠올렸다.
회화루의 언니들은 지금의 삶으로도 충분히 만족하고 있었지만, 영영은 아니었다.
‘나는 여기서 끝날 그릇이 아니야.
상재를 타고났다고 했다. 성별을 막론하고 북경으로 찾아가 호부(戶部)에 몸 담았다면 능히 천하에 이름을 떨칠만하다고 했다.
최근 회화루에 다녀갔던 고위 관리에게서 들었던 말이다. 재능의 편린만을 드러냈는데도 그리 반응했다.
수양딸로 삼고 싶다고도 했다. 끝내 거절했다. 이 편이 은인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자고로 대문파들은 마땅한 수입원을 찾는 것이 가장 고되다고 했으니.
그렇게라도 은인에게 도움이 되고자 했다.
‘은인의 무학이 점창과도 비슷하다고 했었나.
혹시나 하여 익명으로 구호품들을 보냈다. 중소 규모의 상단들을 구워삶은 덕이다.
앞으로 일이년이면 일대를 완전히 장악할 자신이 있었다. 은인의 성함을 따 서연문이라는 이름까지 지으려 했던 터였다.
‘어떻게 막을 방법이 없을까.
허나 이런 거대한 문파가 들어서면 많은 것이 틀어진다. 영영은 괜시리 마음이 복잡해졌다.
*****
서연 일행은 곧장 화양현으로 향했다.
낙양 부윤이 줬었던 명예 도감 임명장의 덕을 톡톡히 보았다. 마차를 타고 대로를 가로질러 나아갔다.
금룡상단주에게 신녀문의 터가 될 곳의 위치를 전해들었었다. 마부에게 삯을 얹어주고 전해들은 위치로 향했다.
“음?”
마침내 금벽산이 말했던 장소에 당도했을 때.
서연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거대한 공사장 한복판이었기 때문이다.
골조만 봐도 크기를 짐작할 만했다. 대문파가 새로 자리잡는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크기였다.
과거에 종남파의 산문에 머물렀었기에 알 수 있었다. 담벼락의 길이가 심상치 않았다.
금룡상단의 옷을 걸쳐입은 관계자들이 오가는 것을 보고 나서야 신녀문의 문지방을 넘었음을 자각했다.
완성되지도 않은 대문의 대략적인 크기가 그려졌다. 마차가 두세대는 한 번에 오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대문파의 산문에 버금갔다.
안쪽에는 인부들이 땅을 파서 연못을 만들고 있었다. 마차에는 뿌리채 뽑혀 온 조경용 식물들이 적지 않았다.
“이곳으로 들어오시면 안 됩……!”
막아서려는 책임자들이 경악했다.
서연이 금룡상단의 본가에서 둘째 공자를 반 불구로 만든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그 탓에 금룡상단 내부에 그녀의 용모가 널리 알려져 있었다.
당장 공사의 책임자들부터가 당시에 자리했던 이들이었다. 서연의 얼굴을 모르는 이가 없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한순간에 태도를 바꿔 곧장 상석으로 안내했다. 설계도가 자리한 유독 큰 천막이었다.
내부에는 족히 열 명이 넘는 사람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대규모 공사에 자주 초빙되는 인물들인지, 하나같이 장인과도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지천명을 넘은 사람이 태반이었다. 연륜이 있다는 뜻이다.
서연은 속으로 낭패라는 생각을 했다.
‘거절할 수도 없겠구나.
이만한 장인들을 모으는 것 자체부터가 큰 부담이었을 터.
자재나 인부를 고용하는데 들였을 자금은 말할 것도 없었다.
상단주께서 이렇게까지 성의를 보이셨는데 이제 와서 부담스럽다고 거절하는 것은 사람이 할 짓이 아니었다.
애써 납득하고자 했다.
‘……그래, 기왕이면 작은 것보다는 큰 것이 좋지.
구파와 세가, 심지어는 사파나 마교의 대문파들도 하나같이 거대했다.
문파의 세를 떨치기 가장 쉬운 방법이 크고 넓은 담벼락을 짓는 것이라는 말이 괜히 시중에 떠돌겠는가.
문파가 작으면 온갖 수단을 동원해도 명성을 떨치기 힘들었지만, 문파가 크면 자연스레 대문파라는 말이 따라붙는 법이다.
‘그래도 너무 크구나. 인원이 고작 셋 뿐인데.
금룡상단주께 느끼는 마음의 부담이 더욱 커졌다. 그 탓에 음성이 자연스레 가라앉았다.
“실례지만 설계도를 잠시 확인해봐도 되겠습니까?”
책임자들은 괜히 흠칫했다. 신녀문주의 심기가 불편한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금룡상단주에게 엄포를 들었던 탓도 있었다.
외모로 나이를 판단하지 말라는 말부터, 괜한 무례를 저지르지 말라는 말까지 온갖 경고를 들었다.
묘한 긴장이 흐르는 분위기 속에서, 서연의 시선이 설계도를 흝었다.
건축에는 조예가 없으나 대략적인 그림을 유추할 수는 있었다.
‘정문과 균형을 맞추려면 석상은 백호의 본래 크기대로 만들어야겠구나. 문주실은 뒷산 정상에 두셨고, 빈객을 들이는 방은 뭐 이리 많을까. 연못에, 화원에, 뒷산까지 감안하면……. 돈을 여간 많이 쓰셨겠다. 이 빚을 어찌 갚아야 할까. 자식을 그리 만들었는데도 이리 퍼주시니.
땅의 단위가 정(町: 3,000평)을 아득히 넘어섰다. 과장하여 집성촌이 들어선다고 해도 믿을 법한 크기였다.
마음이 더욱 무거워졌다.
이쯤 되니 신녀문을 대문파로 만들지 못하는 것이 되려 죄라고 느껴질 정도였다.
“…….”
서연의 분위기가 심각해지자 천막 내부에도 침묵이 흘렀다. 공기가 매우 무거워졌다.
설계도면을 내려놓은 서연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가 도와드릴 만한 일이 있는지 여쭙고 싶습니다.”
“……예?”
“저와 제자들이 머물 공간을 어찌 남의 손에만 맡길 수 있겠습니까. 최소한 주춧돌은 세워야 면이 설 듯합니다.”
침묵 속에서 수염이 수북한 사내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그, 혹 마음에 드시지 않는 부분이 있으신지요? 문주님의 의견을 경청할 터이니, 부디 가감없이 이야기 해주십시오.”
“전부 마음에 듭니다. 다만, 이리 구경만 하는 것이 편하지 않아 그럽니다.”
조용한 천막 안에서, 서연은 진심으로 말했다.
책임자들은 그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서연의 얼굴이 여전히 굳어 있었기 때문이다.
구천현녀는 본디 선악을 엄중히 따지는 신선이라고 했다. 서연의 행보 역시 신화 속의 구천현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
사람으로 살아온 이상 찔리는 점이 한둘씩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서연이 자신들의 죄를 추궁하는 중이라 착각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그때 총책임자로 보이는 중년인이 입을 열었다.
“문주님에 관한 이야기들을 익히 들었습니다. 각예 실력이 천하 일절이시라고 다들 말하더군요.”
천하에서 다섯 손가락에 꼽히는 전문 건축가였다. 자부심이 대단하기로 유명한 인물이었다.
구파와 뭇 세가에서도 이름을 날렸을 정도였다.
장문인과 가주들을 마주한 경험이 적지 않았다. 그 탓에 천막에 위치한 책임자들 중에서 홀로 서연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도움을 주신다는 것이, 혹 건축에 직접 관여하시겠다는 말씀이신지요? 그것이 아니라면 문주님께서 마땅히 도와주실 만한 일이 없습니다. 자재는 인부들이 나르면 되고, 자금은 금룡상단에서 대주니 말입니다.”
중년인은 설계도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터가 워낙 넓고 좋습니다. 뒤에 완만한 산이 걸쳐 있는지라 낮과 밤의 전경도 매우 좋지요. 저를 믿고 맡겨주시면 삼 년 안에 완성해보이겠습니다.”
“삼 년…….”
서연의 탄식을 다르게 이해했는지, 중년인이 부연 설명했다.
“길게 느껴지시겠지만, 사실 이 정도면 매우 빠른 편에 속합니다. 뒷배가 금룡상단이라 그렇지요. 보통은 오 년, 자재 조달이 늦으면 십 년까지도 걸리는 일이 파다하지요.”
정론이었다.
허나 삼 년이라는 시간 동안 금룡상단이 사용할 자금의 양과, 그동안 불편하게 산 속에 살아야 할 제자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불편해지고 있었다.
적당한 방을 구해 들어가 사는 것도 문제였다. 대체 구파의 어느 장문인이 객잔에서 몇 년동안 숙식을 해결한단 말인가.
일문의 문주로서 그런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지탄이나 받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서연은 무심코 태실산에 있는 작은 오두막을 떠올렸다.
반나절만에 지었었던…….
으아아악―!
돌연 바깥에서 비명이 울려퍼졌다. 한둘이 아니었다. 장비와 자재 따위를 내팽겨치고 달아나는 소리가 사방에서 몰아쳤다.
거센 풍랑이라도 불어온 듯했다. 두꺼운 천막이 격렬하게 펄럭거렸다.
서연의 시선이 천막 바깥으로 향한 순간.
바람을 타고 큼지막한 무언가가 천막 내부로 들어왔다. 그야말로 찰나였다.
뒤늦게 불어닥친 바람에 책임자들의 머리칼이 거세게 휘날렸는데, 다들 눈을 부릅뜬 채로 시선을 위로 치켜들고 있었다.
큼지막한 백호가 오연히 서 있었다. 어찌나 거대한지 천막이 꽉 차다 못해 위로 들릴 정도였다.
주인의 심기를 눈치채고 달려온 것이다. 털이 풍성한 꼬리를 좌우로 흔드는 모습이 칭찬이라도 바라는 듯했다.
허나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그리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
곧장 심장을 부여잡고 주저앉는 이들은 예사였다.
반쯤 졸도한 이들도 적지 않았다.
서연 역시 놀란 것은 마찬가지였다. 아무 전조도 없이, 심지어 본모습을 드러내고 나타날 줄은 몰랐다.
서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자신이 도맡아 키우는 영물이었으니 작금의 혼란도 자신의 죄일 터였다.
멀리서 병장기를 뽑아드는 소리도 들려왔다. 책임자들이 죄다 호환(虎患)을 당하게 생겼다는 외침 역시 천막 틈새로 새어들어왔다.
“…….”
서연은 천천히 손가락을 치켜들어 천막 바깥을 가리켰다.
호흡을 가다듬고, 냉엄한 얼굴을 한 채였다.
“나가거라.”
주인을 멀뚱히 내려다보던 백호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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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사들은 엄중한 태세로 주변을 경계하고 있었다.
금룡상단이 감당하는 대규모 공사였다. 돈 냄새를 맡은 승냥이 때가 어디서 나타날지 몰랐다.
칼을 차고 긴장을 유지한 채로 주변을 경계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갑자기 왜 이렇게 소란스럽지?”
인부들에게 매실차를 마저 나눠주던 예화가 말했다. 상대방이 답을 알고 있을 것이라 기대하는 어조였다.
영영은 곧장 대답하는 대신 공사장의 천막이 밀집된 구역을 살폈다. 주전부리를 가지고도 출입을 허가받지 못한 구역이었다.
독이나 약을 타지 않았다는 입증을 했는데도 그랬다. 철저한 경계에서 대문파 특유의 엄중한 기질을 느꼈다.
“높은 사람이 오기라도 했나 봐요. 이 정도 규모라면 고위 관리가 들러서 확인해 볼 법도 하죠.”
“은단화(銀檀花)? 은단화 맞소?”
“네, 맞아요.”
영영은 인부의 질문에 곧장 미소를 드러내며 차를 따랐다. 천생 예기라고 해도 믿을 화사한 얼굴이었다.
“내 살다살다 은단화에게 차를 다 받을 줄은…….”
영영은 주루의 가장 주목받는 자리에서 비파를 연주하곤 했다. 그녀의 연주를 들으려 회화루에 손님들이 길게 늘어서 있는 날이 하루이틀이 아니었다.
어느 순간 그럴듯한 별호까지 생겼다.
작금 화양현에서 가장 명성을 떨치는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힘들지는 않으시고요?”
예의상 질문을 던진 순간이었다.
으아아악―!
멀리서 비명이 들려왔다. 출입을 통제하던 무사들이 달음박치는 소리가 뒤따랐다.
영영의 표정이 한순간에 무심하게 가라앉았다.
“언니는 여기 계세요.”
“응?”
곧장 땅을 박차고 달렸다. 지현에게서 약식으로나마 보법을 배웠다. 그 덕에 치마를 입고도 질주할 수 있었다.
금룡상단에서 고용한 무사들보다는 느렸다. 도망가는 사람들의 비명에서 상황을 유츄해야 했다.
“호환, 호환이야!”
“산군이 내려왔다!”
책임자들이 모여 있는 천막이 위로 불쑥 솟아 있었다. 거대한 짐승이 안에 들어가기라도 한 듯했다.
거대한 꼬리가 천막 바깥으로 살짝 튀어나와 있었다. 무늬에서부터 범임을 직감할 수 있을 정도였다.
영영은 아연실색했다.
‘범이……저렇게나 크다고?
무사들도 섣불리 나서지 못했다. 단련된 무인은 흉포한 짐승도 손쉽게 사냥할 수 있다지만, 저만한 크기라면 더 이상 짐승의 범주에 놓을 수 없었다.
수백 년 묵은 요괴나 괴이로 봐야 옳다. 다들 나서지 않는 것은 그 때문이었다.
이따금 들려오는 소음을 보면 아직 책임자들이 잡아먹히지는 않은 듯했다.
무거운 적막이 흐르던 때였다.
천막 안에서 희미한 목소리가 울렸다.
“나가거라.”
영영의 눈이 커졌다. 목소리가 어딘가 익숙했던 까닭이었다.
“은인……?”
뒤이어 천막이 크게 펄럭거렸다. 거대한 짐승의 울음소리와 함께 책임자들이 동요하는 소리가 뒤따랐다.
무인들이 멈칫했다.
천막이 크게 헤집어지는 소리와 함께 푸른 귀기를 띄는 눈동자가 밖으로 튀어나왔다.
화악―
불현 듯 그림자가 드리웠다. 거대한 구름이 태양을 가린 듯한 느낌.
고개를 치켜든 무사들이 경악했다.
“헉……!”
머리 하나가 성인 남성의 몸통 크기에 가깝다.
풍기는 분위기 역시 매우 강렬했다. 짐승들은 물론이고, 웬만한 무인들조차 전의를 상실할 수준이었다.
당황하는 와중에도 곧장 검을 겨누는 것에서 보기 드문 정예임을 알 수 있었다.
“무슨 크기가……!”
고개를 거의 수직으로 치켜들어야 할 정도였다.
어딜 가도 산신으로 모실 법한 존재다. 영영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무슨.
오죽했으면 백호의 걸음거리가 묘하게 조심스럽다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할 정도였다. 특유의 눈썰미를 발휘하지 못했다.
머리가 새하얘졌다.
그르릉―
오싹한 울음소리. 저를 향해 겨눠진 창칼들을 위협으로도 느끼지 않는 듯했다. 가소롭다는 얼굴로 입을 크게 벌렸다.
날카로운 이빨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산신! 산신이 어찌……!”
“산을 개발하여 노하신게야!”
“도, 도망치지 마라! 대열을 유지해!”
뒤이어 공황에 빠진 비명이 사방에서 들려왔다. 무기를 든 양 팔을 덜덜 떠는 이들이 대다수였다.
쿵―
걸음을 딛을 때마다 땅이 가볍게 울렸다. 무인들이 주춤거리며 점차 물러나던 때였다.
“저……?!”
“어찌 저런……!”
웬 여인이 홀로 천막 밖으로 나왔다.
옅은 바람에 선녀와도 같은 옷자락이 휘날렸다. 뒤이어 고개를 돌린 산신과 시선이 맞닿았다.
떨리는 병장기를 겨누고 있던 무사들, 도주하던 인부들, 숨 쉬는 것조차 잊고 반쯤 공황에 빠져 있던 책임자들.
모두의 시선이 여인을 눈에 담았다. 천하에 없던 미태(美態)다.
큼지막한 산군이 위압적인 시선으로 내려다보는데도 눈매가 무심했다.
세인들이 품지 못하는 도화를 머리칼에 담았다. 하강한 선녀라도 되는 듯했다.
한순간 신화 속으로 들어왔다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묘한 대치 속에서.
여인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가만히 있거라. 저 분들이 얼마나 놀랐겠느냐. 네 잘못이 몹시 크다.”
잠시 고요가 번졌다.
“……?”
상황을 곧장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다.
여인의 목소리가 꼭 산군을 타박하는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랫것 부리듯 대할 존재는 아니라 여겨졌다.
짐승들도 사람의 말을 알아듣는데, 신수는 오죽할까.
천상에서 내려온 존재들의 다툼이 자연스레 그려졌다.
짙은 긴장감으로 일대가 잠식된 때였다.
산군이 양발을 공손히 모은 다음 여인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르릉―
그리고는 애정을 갈구하는 새끼처럼 큼지막한 머리를 가져다 부볐다.
여인은 한숨을 내쉬면서도 손을 펼쳐 산군의 머리를 부드럽게 헤집었다.
“…….”
그 상태로 굳은 이들이 태반이었다. 모두가 믿기지 않는다는 기색을 보였다.
일부는 도망치는 것조차 잊고 멍한 얼굴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한참이 지나서야 토해내듯 방언을 뱉어냈다.
“지, 진짜 선녀셨구나……!”
“짐승도 아니고 설마 신수를 기르실 줄은…….”
산군을 쓰다듬는 것을 멈춘 여인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가 큰 실수를 지었습니다. 놀라셨을 모든 분들께 사죄드립니다.”
옷자락이 희미하게 흩날렸다. 양 손이 맞닿는 소리와 함께였다.
포권을 올린 것이다.
인부들은 되려 곤란한 기색을 띄며 허리를 연신 숙였다. 그러면서 기웃기웃 고개를 치켜들어 여인의 면면을 살폈다.
몇몇 이들의 입에서 신녀문주라는 말이 흘러나왔다. 도화색 머리카락이 세간에 널리 알려진 탓이다.
영영은 입을 다물지 못한 채로 은인을 올려다보았다.
민초들이 구파의 도사들을 신선으로 대접한다는 말을 듣고 무지하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아.”
생각이 바뀌었다.
저만한 존재가 선녀가 아니라면 도대체 누가 선녀일까.
아름답다는 말로도 부족했다.
영민하기는 했으나, 어린아이 특유의 순수를 완전히 잃지는 않았다.
영영의 갈색 눈동자가 더없을 동경으로 물들었다.
*****
서연은 주변에 흐르는 묘한 기류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자신을 지켜보는 사람들이 무엇을 상상하고 있을지 자연스레 그려졌다. 자신이라도 그러했을 것이다.
‘더는 숨길 수 없게 되었으니.
그럴 바에는 대놓고 드러내는 것이 낫다고 여겨졌다.
영물을 휘하에 둔 문파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남만의 야수궁이 대표적이었다.
문파의 명예를 드높이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시대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으나, 이것으로 신녀문의 이름을 널리 알릴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여겼다.
당초부터 신녀문의 상징으로 백호를 삼을 생각이었다. 대문 앞에 백호의 석상을 세워놓으려 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금룡상단의 둘째 공자를 겪은 이후로 위상의 중요성을 느꼈다. 제자들이 멸시받지 않는 삶을 살게 하기 위해서라도 거쳐가야 할 과정이라 여겼다.
“저…….”
웬 여아의 부름이 상념을 깼다.
고개를 돌렸다. 걱정과 기대가 섞인 얼굴을 한 소녀가 다가와 있었다.
예전에 회화루에서 구해주었던 소녀였다. 나중에 노래를 한 곡조 들려주는 것으로 은혜를 갈음하라고 했었던 것이 기억났다.
“오랜만이구나.”
서연의 얼굴이 희미한 호선을 그렸다.
혹 자신을 알아보지 못할 것을 겁냈던 영영의 표정이 한순간에 밝아졌다.
“서연 님……!”
서연은 생각했다. 일 년 사이에 많이 자랐구나.
서연은 영영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근시일에 네 연주를 감상하러 가야겠구나.”
일전에 냉엄한 기세를 내뿜던 여인과 같은 인물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말투에 온정이 가득했다.
“지금 당장이라도 들려 드릴 수 있어요…….”
답지 않게 수줍은 어투로 중얼거리는 영영이었다.
회화루의 다른 예기들이 보았다면 경악할 만한 장면이었다.
“당장은 힘들겠구나. 신녀문을 짓고 나서 너를 초대할 터이니, 그때까지 열심히 연습하려무나.”
맑은 목소리에 범접할 수 없는 절대성이 스며들어 있었다. 구파의 장문인들보다 더한 무게감이었다.
뒤에 거대한 신수가 자리한 탓이 컸다. 거기에 천상에나 있을 법한 머리색이 더해져 초월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서연은 하얀 턱을 돌려 책임자들을 응시했다.
“인부들이 많이 놀라 힘을 낼 수 없을 듯하니, 오늘 하루는 쉬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그만큼 제가 대신하지요. 이 아이가 보기보다 힘이 좋아, 못해도 백 명 분의 일은 할 수 있을겁니다.”
헤집어진 천막 안에서 눈만 깜빡이고 있던 중년인이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리 하시지요.”
“배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인부들의 일당은 제 사비에서 갈음하겠습니다. 금룡상단주께도 그리 전해주세요.”
“……예.”
서연은 그대로 몸을 돌렸다.
저벅.
설계도의 구조는 전부 뇌리에 새겨 두었다. 두 번 확인할 필요는 없을 터였다.
“오늘 제자들이 머물 공간 정도는 지어두자꾸나.”
너른 공터에 서서 그리 말했다. 뒤따라온 백호는 커다란 눈을 깜빡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천천히 걸음하여 자재들을 산더미처럼 등에 매고 돌아왔다. 성인 남성 수십이 달려들어야 겨우 나를만한 무게였다.
백호가 사뿐히 자재들을 내려놓자, 서연은 머릿속으로 설계도의 모습을 가늠하며 한 손을 슬쩍 들었다.
가벼운 손짓을 따라 큼지막한 석재들이 둥실 떠올랐다.
고절한 허공섭물이었다.
척―
마치 종잇장을 들어올리는 듯했다.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
차곡차곡 쌓여가는 석재를 보고 일대가 다시금 경악으로 물들었다.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해 눈을 비비는 이들도 있었다.
이번에는 민초들보다 무인들이 큰 놀람을 드러냈다.
“허공섭물로 저럴 수 있단 말인가?”
“벌써 한 시진 째야. 차라리 술법이라는 편이 믿을법 하겠는데.”
헛웃음을 짓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본신무공이라는 검은 꺼내지도 않았다. 얼마나 고강할까. 한 번 받아봤으면 소원이 없겠다.”
“빈객으로라도 들어가면 가능할지도. 더 높은 곳을 바라볼 수 있을 듯한데.”
“남정네들은 아서. 여인으로 태어난 덕 좀 보자.”
어디를 가도 정예에 속하는 무인들이었기에 뜻하는 바가 컸다.
과거에 태실산에 오두막을 지었을 때보다 빠른 속도였다. 그때는 무학을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전신을 타고 흐르는 신령한 진기를 자유로이 다룰 수 있었다.
괜한 죄책감 때문에 인부들을 쉬게 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실로 그들을 대신할 자신이 있었기에 그리 말한 것이다.
스윽.
뒤이어 서연이 잔향을 발검했다. 어깨어림에서 진기를 일으켜 기단(基壇)을 향해 내질렀다.
사아악!
공기가 잘려나가는 소리와 함께 기단이 잘려나갔다. 보기 흉하게 튀어나와 있던 표면이 한순간에 매끄러워졌다.
건물의 토대를 찰나에 다진 것이다.
뒤이어 떠오른 두꺼운 나무 기둥들이 덜컥 소리를 내며 단단히 자리잡는다.
서연이 손짓을 거듭할수록, 허공을 맴도는 도화빛 진기 역시 짙어졌다.
건물을 하루만에 짓는다. 불가능한 일이다. 세상 물정 모르는 아이들도 그 정도는 알았다.
허나.
“…….”
점차 형태를 드러내는 전각을 보며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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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림인에 관한 소문은 열의 아홉이 과장이라는 말이 있다.
견문이 넓지 않은 민초들의 눈에는 그저 지붕을 한 번에 몇 개씩 넘나드는 무림인들조차 신선으로 보이는 까닭이다.
오랜 세월에 걸쳐 천하에 무력을 증명해 온 구파나 세가가 아닌 이상에야, 일반적인 무림고수에 관한 풍문은 성 하나를 넘어서는 순간 와전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심지어 절세고수인 사마련주조차 어떤 지역에서는 잔혹한 패자라는 소문과 황실이 두려워 전면에 나서지 못하는 비겁자라는 소문이 공존했으니.
장강 이남이었다면 믿을 수 없는 일이다.
혈귀와 살수, 그리고 온 천하의 광인들을 힘으로 무릎 꿇려 휘하에 둔 작자다. 장강 이남에 미치는 영향력이 절대적이었다.
민초들은 사마련주라는 직책조차 함부로 입에 담지 못했다.
허나 섬서만 와도 이야기가 달라졌다. 사마련주를 그저 한 명의 절세고수라 여기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천하가 끝도 없이 넓은 까닭이다.
화양현 같은 현의 민초들에게 절세고수는 너무나 먼 곳의 이야기였다.
하루 살아 하루 벌어 먹기도 바빴다. 사마련주보다 몽둥이와 칼 따위를 들고 약탈을 일삼는 흑도가 더 두려운 법이다.
나이 지긋한 노인들은 풍년이 이어지기 전 찾아왔던 가뭄을 기억했다. 피어오르는 새싹의 크기를 보고 한해 농사의 길흉을 점쳤다.
수백 수천 리를 걸어 소림사까지 찾아가 공양을 드렸다. 토속 신앙 따위에 의지하는 자들도 적지 않았다.
그런 시대다. 믿고 의지해야 할 것이 절실히 필요했다.
헌데.
우우우웅―!
눈 앞에서 성인 남성의 수 배는 되는 나무 기둥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태풍에도 흔들리지 않을 굵기였다.
너른 공터에 서 있는 여인의 손짓 한 번에 그 육중한 기둥이 깃털처럼 가볍게 들어 올려졌다. 그때마다 손끝에서 옅게 휘날리는 도화색 진기가 꼭 날개옷처럼 아련하게 보였다.
민초들은 입을 다물고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산신이 나타났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온 것이다.
초고수의 전유물이라는 허공섭물이었다. 내공이 어지간히 많지 않고서는 시도조차 힘들었다.
허나 일평생 농사만 지어왔던 민초들이 자세한 내막을 알겠는가. 당연히 선녀가 부리는 조화로 이해했다.
그새 너른 공터를 둘러싸듯 자리한 민초들의 숫자만 보아도 소문이 퍼진 속도를 짐작할 수 있었다.
성인 남성 정도는 한입에 삼킬 수 있을 만한 크기의 산군이 큰 송곳니를 드러내고 다가왔을 때에는 비명을 지르거나 엎어지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허나 산군이 시선조차 주지 않고 석재 따위를 들고 돌아가자 모두의 얼굴에 의아함이 번졌다.
그런 산군을 향해 미소지으며 털을 가볍게 쓰다듬는 여인을 보고 나서야 상황을 이해했다.
예로부터 백호는 상서로운 동물이라 불렸다. 사방신(四方神)의 기원인 영수 중 한 자리를 차지하기 때문이다.
그런 백호를 부리는 존재다.
천상의 가장 높은 곳에 거니는 선녀라 여기는 것이 당연했다.
“공양을 드리면 한 해 농사가…….”
밭을 갈다 왔는지 쟁기를 들고 있던 사내가 작게 중얼거렸다.
드높은 금룡상단의 무인들조차 넋을 놓고 지켜보는 것이 민초들의 눈에 훤히 들어왔다. 평소에는 곁눈질로만 쳐다봐야 했던 자들이다.
하나같이 형형색색의 옷을 입고 있었는데, 백의 장포를 하나 걸친 여인만 못했다.
땅을 갈아야 할 아들을 찾아온 아비가 걸음을 멈추고, 그런 아비를 찾아나선 조부의 걸음이 멈췄다.
선녀의 손끝에서 펼쳐지는 기적을 지켜보는 것에 정신이 팔린 것이다.
선유후부가(仙遊朽斧柯)라는 말이 있다.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른다는 소리다.
작금의 민초들이 그러했다.
툭, 투툭.
육중한 기둥 위에 기와가 하나 둘 쌓여간다. 마치 편경으로 연주하듯, 서로 맞닿을 때마다 청아한 소리를 뱉어냈다.
민초들은 허공을 딛고 올라선 여인을 그저 올려다볼 뿐이었다. 더 이상 드러낼 경악이 남아있지 않았다.
배우지 못한 몸가짐이 폐가 될까 두려워 그저 몸을 낮출 뿐이었다.
사락.
마지막 기와가 끝단에 내려앉았다. 어느새 지면으로 내려온 서연의 옷자락이 땅 위로 솟아오른 풀잎에 스친 것이다.
그녀는 멍하니 서 있는 총책임자를 향해 고요히 입을 열었다.
“제가 홀로 모든 것을 이루어버리면, 인부들의 생계가 끊어지겠지요.”
“…….”
“그러하니, 제자들과 함께 머무를 거처만을 마련하고 손을 거두겠습니다. 혹여 도움이 필요한 때가 온다면 언제든 불러주시어요. 늘 산봉우리에 머물고 있을 터이니.”
천하를 주유하는 여타 고수들과는 태도부터 달랐다. 거리낌 없이 존대를 입에 담는데, 속마음을 비쳐보기라도 하는 듯 눈동자가 현기로 가득했다.
신녀문주. 누가 보더라도 신선이라 부를 만한 자였다.
일전까지만 해도 자부심과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던 총책임자의 얼굴에 음영이 졌다.
족히 몇 달은 걸릴 일을 반나절도 되지 않아 마무리했다. 건축에 소양이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초반에는 어디 해보라는 듯한 마음도 없잖아 있었는데, 지금은 깊은 부끄러움만이 느껴질 뿐이었다.
역으로 시험당했다는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만이 눈치챌 수 있도록 조용히 꾸짖은 것에서 그녀의 자비로운 심성을 짐작할 수 있었다.
고개를 끄덕였다. 천하에 두루 이름을 알린 건축가로서의 명성을 내려놓은 것이다.
‘어떻게든 일 년 안에 끝내야겠구나.
천천히 멀어지는 신녀문주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그리 생각했다.
*****
신녀문의 공사터 앞으로 공양을 드리려는 인파가 장사진을 이루었다.
천상에서나 볼 법한 조화를 두 눈으로 직접 마주한 까닭이다.
대문파가 자리 잡을 것이라던 소문이 삽시간에 가라앉고, 그 자리를 신녀문이 들어선다는 소문이 대신했다.
민초들은 차마 신녀문주가 머문다는 산까지 발을 들이지는 못했다. 화를 입을 것을 염려한 것이다.
구파의 장문인들이 기거하는 곳에 함부로 발을 들이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없는 살림에 소박한 물건들을 들고 와, 현장 책임자들이 머무는 천막 앞에 놓고 가기를 반복했다.
신녀문주께 공양할 수 없으니 이렇게라도 거들려고 한 것이다.
건축가들은 난감해하면서도 감히 그 정성을 거부하지 못했다.
“자고로 공양을 드릴 때는 정성이 제일이라고 했네. 어찌 귀천이 중요하겠는가? 천상에서 보면 금은보화도 흙에 불과할 걸세.”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닐 것 같다만…….”
“헌데, 선녀님께서도 육식을 즐기시려나?”
“자네 그러다 큰 변을 당할 수도 있네. 드높은 구파의 신선 분들도 육고기는 함부로 입에 대지 않는다고 했어.”
하루 이틀에 끝날 행렬처럼 보이지 않았다.
뭇 다른 문파들은 이를 개파식을 열기도 전에 세를 과시하는 행사로 받아들였으나, 제대로 항의할 수조차 없었다.
신녀문주 정도 되는 고수는 성 단위를 통틀어서도 드물었기 때문이다.
그 무렵 서연은 새로운 거처로 완전히 이사를 마친 참이었다.
오두막에 있던 물건들을 모두 챙기고, 일대를 처음 자리 잡았을 때의 모습으로 원상복구한 후였다.
화련을 가르칠 때 시험 삼아 거목에 새겨두었던 천수관음만 남겨둔 채였다.
서연의 거처는 일대가 완전히 내려다보이는 위치에 지어졌다. 드넓은 중원을 놓고 보면 낮고 완만한 산에 속했으나, 화양현을 한 눈이 품기에는 충분했다.
“보통 새 문파가 자리 잡을 때면 근처 문파에서 서찰을 보내기도 합니다만, 세 차이가 워낙 막대하니 감히 그럴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모양입니다.”
무릎을 꿇고 앉은 채 나무 조각을 깎아내던 소녀가 말했다.
손놀림이 각예에 완전히 익숙해진 모양새였다. 손에서 형상을 잡아가는 작(雀: 참새)은 당장이라도 허공을 박차고 날아갈 듯했다.
당소소였다.
사천당문의 직계였던 탓에 문파를 운영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서연보다 경험이 많았다.
대사저인 화련도 따지고 보면 모산파의 후계자였으나, 사천당문과의 체급 차가 워낙 막대했기에 이럴 때는 그저 입을 닫고 있는 편이 현명함을 알았다.
근래 당소소의 각예 실력이 일취월장 하는 것에서 위기감을 느꼈던 탓도 있었다.
‘내가, 내가 언니인데……!
대사저로서의 자존심이 뭉개지기 직전이었다.
“스승님께선 예전처럼 편히 돌아다니는 것도 힘드시겠습니다. 죽립을 써도 알아보는 사람들로 가득하니.”
제가 깎아낸 작품을 이리저리 돌려보던 당소소가 말을 이었다.
“부친께서도 그 탓에 사천 땅에 가문 밖으로 사사로이 걸음할 수 없으셨지요. 초고수들의 움직임이 그 자체로 온갖 뒷말을 자아내는 탓입니다.”
근래 서연의 무위를 보고 언행이 더더욱 정갈해졌다. 공손히 양손을 모은 몸가짐에서 아미파의 여승에게서나 느낄 법한 절제미와 단단함이 흘러나왔다.
신녀문의 제자된 자로서 느끼는 책임감이 막중한 듯했다.
서연으로 하여금 일문의 집법당주(執法堂主)를 떠올리게 만드는 분위기였다. 어린 제자에게서 문파의 규율을 세우고 처벌을 집행하는 최고 책임자의 기백을 느꼈다.
이럴 때마다 아직 갈 길이 멀다는 것을 깨닫고는 했다.
문파를 어찌 운영할지는 어느 정도 구상해두었다. 회화루의 여인들과 근처의 고아들을 데려와 간단한 무공을 가르칠 생각이었다.
문파가 크다고 하여 처음부터 거창하게 시작할 생각은 없었다. 오히려 기초를 제대로 다지는 것을 더 중요하다 여겼다.
도에 근간을 둔 문파다. 정종무공을 대하듯 접근하는 것이 옳다.
신녀문의 무공은 보통의 재능과 노력으로는 입문조차 버거웠다. 구파나 세가가 그러하듯, 단계별로 가르칠 무학을 구상해야 했다.
‘천녀유검과 비연천공, 연화비영보는 자질이 출중한 장문제자들에게만 가르쳐야겠지.
종남파만 해도 절기에 속하는 천하삼십육검을 제하고도 무려 스무 가지가 넘는 검법을 보유하고 있었다.
기본이 되는 중검의 묘리를 오랜 세월에 걸쳐 여러 갈래로 발전시켜 온 것이다.
종남에 머물렀을 때 검법을 직접 배웠던 탓일까, 서연은 스스로 중검의 묘리를 잘 알고 있다고 자부했다.
‘사람마다 어울리는 검법이 다른 법이니.
언젠가 입문할 문도에게 가르쳐 줄 요량으로 만들어 두는 것도 좋을 듯싶었다.
신녀문의 근본은 각예에서 비롯된 정교함이다. 새로 창안하는 검법 역시 그 근본에서 벗어나서는 아니 될 터.
“…….”
서연은 말없이 일어섰다. 초식을 궁리하면서다.
자질을 크게 타고나지 않아도 되는 검법이어야 하니, 삼재검법에서 응용해야 했다.
‘어찌해야 무거우면서 동시에 정교할 수 있을까.
청강석을 떠올렸다. 무림인들이 검격의 깊음을 드러내고자 할 때 사용하는, 단단하기로 이름난 암석이었다.
과거에 한 번 다뤄본 적이 있었다. 단단할수록 힘조절을 세심히 해야 했다. 자칫하면 진흙처럼 덩어리진 채로 부서져 버리기 때문이다.
그때 느꼈던 감각에 종남파에서 배웠던 여러 중검의 투로를 덧씌웠다
기초에 충실하고자 했다. 조금이라도 복잡한 부분이 있다면 망설이지 않고 전부 덜어냈다.
사아아―
검을 쥔 손아귀 끝에서 평소와 다른 묵직함을 느꼈다.
천녀유검에 비하면 한없이 투박했으나, 그 나름의 운치가 있었다.
투로의 형태를 결정한 이후로는 거침없이 검법을 이어나갔다.
몹시 담담한 형태의 검격이 풀려나왔다.
‘이것도 좋구나.
수비일변도라 부르는 것이 옳다. 그럴듯한 보법을 더하면, 제 한 몸 지킬 수단으로는 충분할 듯했다.
서연은 이것이 자만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사천당문의 가주가 열반을 깨달은 육체라 칭하지 않았던가.
이 정도는 응당 해내야 한다고 여겼다.
움직임이 더해질 때마다 검격이 더욱 짙어졌다. 서연은 검로와 방향을 일필휘지로 빈 서책에 써 내려갔다.
나흘 후.
신녀문에 검법이 하나 더해졌다.
*****
“어떻느냐?”
“어…….”
화련은 입을 다물었다.
스승님이 나흘 동안 평소와 다른 방식으로 검을 다루시는 모습을 봤다.
이따금 자신들을 지도해 주시면서도 서책에 무언가를 적어 내려가곤 하셨는데, 설마 그 짧은 시간에 검법을 창안하셨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농부들이 심은 작물이 싹을 틔우지도 못할 시간이다.
대종사라는 말에 틀림이 없다.
“이름이 뭔가요?”
“마땅한 이름은 없단다. 일단은 중검의 묘리를 담았으니, 중검결(重劍訣)이라 부를 계획이란다.”
후일 환검과 유검(柔劍), 첨검(尖劍)같은 검식들을 더할 생각이라는 것처럼 들렸다.
화련은 곁눈질로 스승의 눈치를 살폈다. 입술을 부리처럼 내민 채였다.
오랫동안 함께 지내다 보니 느끼는 것이 있다.
스승님께서는 무학의 이름을 짓는 데 있어 유독 단촐함을 고수하는 경향이 있으셨다.
스스로를 드러내시기를 꺼리는 성정 때문인지, 아니면 민망함을 느끼셔서인지는 모르겠으나, 화련은 그래서야 아니 된다고 생각했다.
자고로 무학이란 자신은 물론이요, 남들의 눈에도 멋지고 아름다워야 하는 법이다.
무림인들이 괜히 이름에 온갖 거창한 미사여구를 다 붙이겠는가.
종남파가 결코 화산파에 비해 약하지 않거늘, 단지 검법의 화려함이 덜하다는 이유로 화산파보다 세가 약해진 것만 봐도 알 만했다.
문파가 천하에 이름을 떨치고 세를 키우려면, 그 이름부터 멋지고 아름다워야 했다.
그러니 신녀검결이다.
‘천하의 모든 검식을 품고 있는 궁극의 검인 거지.
천하공부출소림(天下功夫出少林)이 웬 말이냐.
그때가 되면 신녀문을 칭하는 말로 바뀌게 될 터였다.
캬!
감탄을 내뱉는 화련의 머릿속엔 더 이상 모산파는 남아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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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산에서 낙양까지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았다. 작정하고 준마를 채찍질하면 두 시진 안에 닿을 수 있었고, 설령 도보로 길을 나선다 해도 넉넉히 사흘이면 충분히 다다를 만했다. 서연은 이왕 떠나게 된 길, 모처럼의 유람을 만끽할 작정이었다.
낙양으로 향하는 유람선에 오르기로 마음먹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한창 출항 준비에 여념이 없는지, 선원들의 움직임이 분주했다. 화물을 싣는 운송선과는 그 목적부터 달랐다. 돈 많고 유람을 즐기는 젊은 객들이 선호하는 배답게, 악공들의 흥겨운 가락과 진미로운 음식 냄새가 승선하기도 전부터 코끝을 간지럽혔다.
“인당 팔백 냥 되시겠습니다.”
섬뜩하리만치 비싼 가격에 곁에 있던 화련이 눈을 껌뻑였다. 너무 비싸요. 화련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허나 서연은 아랑곳 않고 선뜻 돈을 지불했다. 남궁세가에서 받았던 금자는 아직 손도 대지 않았던 터였다. 이번 기회에 어엿한 어른으로서 한껏 멋을 부리고 싶은 마음 또한 없지 않았다.
배 위에 올라타자 한켠에 두런두런 앉아 있는 젊은 남녀들이 보였다. 안휘성에서 만났던 남궁 남매와 비슷한 연배로 보였다. 하나같이 잘 사는 집안의 자제들인지, 등 뒤로는 호위 무사들을 하나둘씩 거느리고 있었다.
그들은 서연과 화련을 보고는 기이한 미소를 지었다. 왜 저런 표정을 하고 있는 걸까. 서연이 의아해할 무렵, 술잔을 든 한 귀공자가 불쑥 다가왔다.
“소저께서는 혹시 뱃값을 얼마나 내셨습니까? 설마 진정 팔백 냥씩이나 내신 것은 아니겠지요?”
추파를 던질 줄 알았건만. 뜬금없는 질문에 서연은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자 귀공자는 난감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사실 저희가 오늘 종일 배를 대여하여, 친구들끼리 장난삼아 뱃삯을 팔백 냥까지 올리면 어찌 될지 내기를 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손님이 단 한 명도 오지 않을 것이라고 말이지요. 저는 아무도 오지 않을 쪽에 걸었습니다.”
어쩐지 배에 손님이 그리 없더라니, 그런 사연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러면 내려야 하나요?”
“아닙니다. 내기에서 진 사람이 손님을 대접하고, 돈도 되돌려주기로 했습니다. 여섯 중에 저만 오지 않는다는 쪽에 걸었으니, 제가 대접해야지요.”
그가 웃으며 말했다.
“소개가 늦었습니다. 금룡상단의 삼남, 금진송이라 합니다. 자랑은 아니지만, 부잣집에서 나고 자라 이 정도는 큰 부담이 아닙니다. 남아일언 중천금이라 했으니, 소저께서 거절하시면 제 입장이 난감해집니다. 부디 친우들 사이에서 면을 세울 수 있도록 도와주시겠습니까?”
“금룡상단!”
서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는데, 옆에 있던 화련이 비명을 지르듯 소리쳤다.
그러다가 어색하게 입을 다물었는데, 어린 아이라 그런지 누구도 타박하지 않았다.
“혹시 동생분이십니까?”
“제가 가르치는 아이에요.”
“혹시 무얼 가르치십니까? 아, 이 이야기는 저쪽으로 가셔서 마저 나누시겠습니까? 흥미로운 이야기는 여럿이 들어야지요. 이건 이야기값입니다. 부디 받아주십시오.”
금진송은 그렇게 말하고는 품에서 전낭을 꺼내 건넸다. 겉보기에도 팔백 냥보다는 많이 들어 있었다. 서연이 거절하려는데, 금진송은 능청스러운 얼굴로 성큼성큼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서연은 헛웃음을 지었다. 상단의 자제라더니, 분위기를 주도하는 데 거침이 없었다. 이렇게 되니 거절할 수도 없었다.
그런데도 기분이 나쁘지가 않으니, 사람을 다루는데 탁월한 능력을 가졌다고 할 수 있겠다.
서연이 다가가자 곳곳에서 웃음이 터졌다. 비웃음이 아니었다. 내기에서 진 금진송을 놀리는 것이다.
금진송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빈자리를 가리켰다.
“여기 앉으시면 됩니다. 방금 말씀은 그리 했지만, 부담스러우시다면 적당히 어울려주시다가 언제든 돌아가셔도 됩니다.”
원형 탁자라 어딜 앉아도 옆 사람과 맞닿을 수 밖에 없는 구조였다. 서연이 적당한 자리를 골라 앉아, 화련도 옆자리에 앉았다.
자리에 앉은 영애가 고개를 까닥였다.
“운(雲) 가의 초아에요. 그쪽은요?”
“서연이라고 합니다.”
“가문은요?”
서연이 고개를 가로젓자, 운초아의 미간이 순간적으로 좁혀졌다. 수백 냥이 넘는 거액을 선뜻 낸 사람이 평범한 민초일 거라고는 상상조차 못했던 탓이다.
“그러면 어느 문파 출신이신가요? 화산? 아니면 종남?”
“딱히 소속된 문파는 없어요.”
“…….”
모든 이들이 숨죽인 가운데, 금진송이 다급히 나섰다. 상황이 묘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강호에 어디 본 신분을 숨기고 다니는 사람이 한둘이겠습니까? 운 소저도 그만 하십시오.”
“…….”
“이러지들 말고 들어보십시오. 제가 방금 서연 소저께 물으니, 제자를 가르친다고 하더이다. 무얼 가르치는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금진송은 그렇게 말하며 서연을 바라보았다. 사실 그도 나름의 생각이 있었다.
강호 무림에 여인이 홀로, 그것도 어린 여제자를 데리고 다닌다. 그뿐이랴, 허리춤엔 보란 듯이 검도 패용했다.
‘분명 뛰어난 검수일 것이다.
그래야만 했다.
자칫했다간 초대한 손님을 공개석상에서 망신 줄 불한당이 될 판이었다.
허나 서연의 입에서 튀어나온 문장은 그런 금진송의 기대를 배반했다.
“조각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조각?”
“낙양에서 각예대회가 열린다기에, 견문이나 쌓을 겸 가는 중이었습니다.”
운초아의 입매는 어느새 삐뚜름하게 올라가 있었다. 눈매에도 어느새 오만함이 잔뜩 피어올랐다.
다른 자제들도 마찬가지였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은연중에 서연을 무시하는 듯한 기운을 풍겼다.
태생이 그러했다. 각자 지역에서 왕처럼 군림하며 자란 탓이리라.
금진송만 어쩔 줄 몰라했다. 홀로 상가(商家) 출신이라서 그런가? 아니다. 그냥 타고난 성품이 그런 것이다.
운초아가 비웃음을 애써 숨긴 어조로 쏘아붙였다.
“원래 그리 얼굴을 가리고 다니시나요? 다른 의도가 있어서 그런 건 아니고, 불편해 보여서요.”
시선이 노골적이다. 어떤 생각을 하는 것인지 얼굴에 훤했다.
서연도 그러한 분위기를 눈치챘다. 그냥 일어서면 그만이었지만, 금진송이 너무 죄송하다는 듯 쳐다보아 그러지도 못했다.
화련이 너무 음식을 맛있게 먹고 있던 탓도 있었다. 봉황탕, 벽옥두부……죄다 들어보지도 못한 휘황찬란한 요리들이었다. 이번 기회에 원없이 먹이고 싶다는 마음 또한 있었다.
‘하긴, 이런 사람도 있어야지.
어디 정파라 하여 선인만 있겠는가. 오히려 여태 운이 너무 좋았던 것이다.
서연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반응하자, 운초아는 더욱 노골적으로 나왔다.
“아니면 용모가 추해서 숨기는 걸까요?”
“운 소저, 그만 하시오. 지금 선을 넘었소.”
금진송의 제지에도 운초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금진송을 제외한 다른 자제들이 무언으로 호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금진송을 제외하면 모두 무가의 자제였다. 은연 중에 상가 출신인 금진송을 무시하고 있었기에 이런 반응이 가능했던 것이다.
“일개 조각가가 그만한 거금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도 이상해요. 그 많은 돈을 어떻게 벌었을지도 궁금하네요.”
금진송이 벌떡 일어났다. 그는 이제 분노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놀림거리로 삼으려고 데려온 것이 아니다. 비록 내기에 져서 만났지만, 진심으로 대접할 생각이었다. 허나 친우라 소개한 작자들이 제 손님에게 물을 먹이니, 얼굴에 절로 열이 올랐다.
그는 세찬 시선으로 운초아를 노려보다가 서연을 향해 깊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서 소저. 날을 잘못 잡은 듯 합니다. 나중에 각예대회에서 뵙게 되면 제가 제대로 대접할테니, 지금은 장소를 옮기는 게 좋을 듯합니다.”
허나 운초아는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서연을 일으켜 세우려는 금진송을 보란 듯이 막아세웠다.
“근래 하남에 사마외도가 많이 들어왔다고 하던데, 혹 얼굴을 가리는 것도 그런 이유일지 모르죠.”
“나도 운 소저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오.”
“얼굴을 봐야겠어요.”
침묵하던 자제들의 입도 트였다. 사방에서 서연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그중에는 호위들에게 은밀히 시선을 보내 포위토록 하는 이도 있었다.
장난이 선을 넘었다. 아니, 어느순간부터 장난이 아니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금진송의 생각대로였다. 자제들은 하나같이 서연이 사마외도면 목을 베어 명성을 드높이고, 아니라면 일개 민초일 터이니 함구토록 할 생각이었다.
“적당히들 하시오!”
“저는 오히려 금 공자가 그리 나오는 이유를 이해할 수가 없어요. 얼굴 좀 보겠다는게 그리도 큰 죄인가요?”
호위들은 이제 노골적으로 서연을 빙 둘러싸고 있었다. 검집에 손을 올린 이도 적지 않았다. 여차하면 출수하겠다는 것이다.
‘이젠 안 되겠다.
서연은 더 이상 듣고만 있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혼자였다면 모를까, 화련이 바로 옆에 있었기 때문이다.
“얼굴을 보여드리기만 하면 되는 건가요?”
서연은 그렇게 말하며 죽립에 손을 올렸다. 얼굴을 가리고 다녔던 이유는 간단하다. 괜한 일에 연루될 것을 걱정했기 때문이다.
허나 오히려 얼굴을 가리는 것 때문에 문제가 생길 판이니, 드러내는 것이 옳았다.
운초아가 냉소를 감추지 않은 어조로 말했다.
“우둔하진 않으니 다행이네요.”
그렇게 말하며 이겼다는 얼굴로 서연을 응시했다.
운초아는 일개 민초에 불과한 서연이 자신들과 감히 한자리에 합석했다는 사실에 엄청난 불쾌감을 느끼고 있었다. 사마외도가 아니더라도, 이 자리에서 반드시 망신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조각가 따위가 검을 차고 다니긴.
꼴에 무인 행세를 하고 다니는 것도 거슬렸다. 이번 기회에 제대로 교육하고, 주변에 얼씬도 못하게 할 생각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교육은 일반적인 교육이 아니었다. 무릎꿇린 다음, 감히 얼굴을 올려다보지도 못하도록 격의 차이를 느끼게 하는 것을 의미했다. 운초아의 시종들처럼 말이다.
그때였다.
스윽.
서연이 죽립을 내리기 무섭게, 도화와도 같은 머릿결이 윤기로 이지러졌다.
“뭣!”
“어떻게 저런 색깔이…….”
비단보다 우아한 머리색에 감탄한 몇몇 자제들은 상황도 잊은 채 입을 떡 벌렸다. 근엄한 얼굴로 서 있던 호위들마저도 눈을 부릅뜨고 서연을 쳐다봤다.
당황한 것은 운초아도 마찬가지였다. 면사를 벗지도 않았는데 이미 빼어난 외양이 저절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발악하듯 외쳤다.
“며, 면사도 벗어!”
표면적으로나마 유지하던 경어조차 잊은 채였다.
모두의 시선이 서연의 섬섬옥수와 같은 손으로 향했다. 면사가 차차 내려오며 백옥같이 새하얀 피부가 겉으로 드러났다.
가늘게 휘어져 길게 뻗은 눈꼬리에는 벽녘의 연꽃과도 같은 눈동자가 자리해 있었다.
천하일색(天下出色)이라고 칭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외모였다.
한 사내가 혼을 빼앗긴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경국지색(傾城之色)이다.”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서연은 입을 작게 열고 긴 날숨을 내뱉었다.
탐스러운 벚꽃잎처럼 붉고 보드라운 입술이 움직일 때마다 사내들이 탄식을 토해냈다. 서연이 물었다.
“이제 충분한가요?”
“조, 조금만 더.”
서연은 말이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넋이 나간 얼굴로 중얼거리던 사내가 황급히 제 입을 틀어막았다.
“……미안하오. 나도 모르게.”
금진송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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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싸움에서 밀리거나 기세에 눌린다 싶을 때 바로 무기를 뽑아 드는 것은 무림인의 흔한 버릇이었다. 이는 논리도 명분도 부족하니 결국 힘으로 해결하려는 치졸한 발상인데, 문명인인 서연의 눈에는 실로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상대가 자신보다 얼마나 강한지도 모르면서 무턱대고 칼부터 뽑는단 말인가? 칼을 뽑는 순간 필시 둘 중 하나는 피를 보기 마련인데, 흑도든 백도든 자신이 패배할 거라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는 것이 참으로 안타까웠다. 허나 그녀가 검을 뽑지 않은 이유는 비단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스승은 제자의 거울이라 했다. 하찮은 모욕 몇 마디에 화를 내며 칼을 뽑는다면, 화련이 그 모습을 그대로 따를까 염려되었던 것도 있었다.
물론 운초아가 선을 넘었다면 이야기가 달라졌을지 모르나, 적어도 아직까지는 선을 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무기를 뽑지 않았기 때문이다.
범부들과는 그릇부터 달랐기에 할 수 있는 생각이었다.
허나 버릇은 고쳐놓을 생각이었다.
고등학생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가 저리 패악질을 부리니, 윗 사람들이 어찌 키웠을지 눈에 훤했다. 다른 자제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런 놈들을 내버려뒀다간 나중에 제자가 컸을 때 세상이 어찌 될지 눈에 훤했다.
“어찌, 사마외도처럼 생겼습니까?”
서연은 그렇게 말하며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흔치 않은 얼굴이라, 어디서 봤다면 쉬이 떠올릴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 말하며 사내들을 하나씩 응시하자, 사내들이 호응하듯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서 소저 말이 맞소!”
“내 백부께서 무림맹에 계시오만, 용모파기를 아무리 떠올려봐도 서 소저같은 미인은 본 적이 없소이다.”
“용모파기에 담기지 않을 외모요.”
사내들의 눈빛에는 그새 흠모와 찬탄의 빛이 깃들어 있었다.
사내라면 열이면 열 좋아할 얼굴이오, 설령 여인이라도 동경하고 따를만한 외모였다. 더구나 타고난 몸매도 좋았다.
물론 운초아도 예쁘장한 얼굴의 소유자였지만, 서연과는 감히 비교할 것이 못 됐다. 그 일례로 방금 전까지 운초아에게 호응하던 사내들이 그녀에게서 한 걸음씩 멀어지고 있었으니 말이다.
“근본도 없는 년이!”
기세에서 밀린 운초아가 가차없이 말했다. 더 이상 멸시하는 어조를 숨기지 않았다.
“그까짓 얼굴을 드러냈다고 하여 사마외도라는 의심을 벗을 수 있으리랴 생각했나?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조각가가 거금을 선뜻 내어 후기지수들만 탄 배 위에 올라탔다. 살수라는 의심이 절로 든다. 아니, 어쩌면 사내들을 노리고 탄-”
운초아는 색녀일지도 모른다는 말을 차마 내뱉지 못한 채로 입을 다물었다. 누군가 짙은 살기를 자신에게 뿜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누가?
서연은 아니다. 어디 한 번 해보라는 얼굴로 쳐다보고 있기는 하나, 적어도 살기를 풍기지는 않았다.
운초아는 식은땀을 흘리며 다급히 주변을 돌아보았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사내들이 당황했으나, 운초아의 시야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마침내, 운초아의 시선 끝에 한 소녀가 들어왔다.
서연과 같이 탄 이후로 줄곧 탁자에 앉아 음식을 먹고 있던 화련이었다.
“…….”
화련은 죽일듯한 눈동자로 운초아를 노려보고 있었다.
말도 안되는 살기다. 식은땀이 절로 흘렀다.
화련은 주변을 돌아보다가, 자신에게만 보이는 각도로 입을 달싹거렸다.
- 한마디만 더 해봐라. 그 창자부터 찢어주마.
그러면서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는데, 그 소리가 너무 작아 집중하던 운초아 말고는 아무도 듣지 못했다.
“허억!”
“끄으윽!”
곧 운초아의 호위들이 짙은 복통을 호소하며 주저앉았는데, 심한 내상이라도 입은 것인지 입에서는 검은 피를 줄줄 흘려댔다.
내력 차이가 너무나도 컸기에 발생한 일이었다.
애초에 화련은 천하삼대방파인 모산파의 후계자요, 내로라하는 후기지수 중 하나였다.
이까짓 ‘자칭’ 후기지수들과는 비교될 수준이 못 되었다.
‘이게 대체…….
운초아는 갑작스럽게 변한 상황을 도저히 따라갈 수 없었다. 다시 화련의 전음이 뇌리에 스쳤다.
- 네 년은 스승님께서 직접 계도하실 것이다.
그리 말하고는 아무 일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려 다시 음식에 집중하는 화련이었다. 겉으로 보기엔 그저 식탐만 많은 줄 알겠지만, 실상은 식사를 하는 젓가락으로 은근슬쩍 진을 그리고 있었다.
‘스승님께서도 묵인하셨다.
진을 보고도 아무 말씀 없으셨으니, 어느 정도 마음대로 행동해도 좋다는 뜻이리라.
‘사내들이란.
금진송을 제외하고는 죄다 한 패나 마찬가지였다. 하나같이 죽일 놈들이라는 것이다.
먼 과거 금분세수하여 함부로 살생을 하지 않는 스승님을, 잡것들이 뭣도 모르고 모욕했다.
‘소림의 방장대사도 아래로 볼 배분이거늘.
백 번 죽여도 쌌다.
배에 탄 순간부터 만약의 상황에 대비하여 진법부터 그려놓고 있었다. 무슨 진법이냐. 전서구를 소환하는 진법이라 할 수 있겠다.
‘운가의 초아, 만(萬) 가의 도오, 풍(馮) 가의 문연…….
순식간에 금진송을 제외한 자제들의 이름을 휘적인 화련은 종이를 냅다 바다로 던졌다. 곧 하늘에서 새 한 마리가 나타나 종이를 덥썩 물고 어디론가 날아갔다.
무림맹 지부가 있는 방향이었다.
저번에 염이선과 동행했을 때 지부의 위치를 미리 알아둔 덕분이었다.
‘본가로 돌아가도 지옥을 보게 해주겠다.
종이에는 자제들이 서연에게 어떠한 무례를 저질렀는지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무림맹원들이 머저리가 아니라면 상황의 심각성을 알았을 터, 직접 나서지 않고는 못 배길 것이다.
거파의 장문인보다 더한 자를 모욕했다. 가문에서 쫓겨나도 이상하지 않았다.
어쩌면 제대로 조지기 위해 대주급을 불러올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화련이 다시 손가락을 튕기자, 이번에는 자제들이 반응했다. 하나같이 꿀렁이는 배를 부여잡더니, 이마에서 짙은 땀방울을 흘려댔다.
운초아와 금진송만이 예외였다.
“끄, 끄으으…….”
설사였다.
허나 갑판 아래로 내려간다고 해도 해결할 수는 없을 것이다. 화장실을 망가뜨려놨으니 말이다.
남은 방법은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바지에 지리거나, 수치를 무릅쓰고 바다 밖으로 둔부를 내미는 방법 뿐이다.
잘난 방술사가 이래서 무섭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기 때문이다.
“허억, 허억…….”
“윽, 으그극!”
“도련님?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호위들이 다급히 달려와 배를 붙잡고 쓰러진 자제들을 일으켜 세웠다. 주변을 경계하는 호위들도 있었나. 허나 자제들은 그러건 말건 울음이라도 터질 것 같은 얼굴로 입술을 악물고 주변을 황급히 두리번거릴 뿐이었다.
‘갑자기……. 배가 왜…….
‘죽는다……. 말하면 죽는다…….
다들 혼절할 것 같은 심정으로 호위의 옷자락을 꽉 붙잡았다. 온 내공을 괄약근에 끌어모으는 이도 있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한 운초아가 사내들을 붙잡았지만, 사내들은 온 힘을 쥐어짜내 운초아를 밀어내고는 화장실로 향했다.
“꺼져라!”
“비켜!”
그 힘이 어찌나 강한지, 운초아가 형편없이 밀려날 정도였다.
운초아는 반쯤 넋이 나간 얼굴로 사내들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제 호위들은 피를 토한 채로 엎어져 있고, 제 편이었던 사내들도 죄다 아래로 내려가 버렸다.
“이게 무슨…….”
황망한 것은 금진송도 마찬가지였다.
‘설마?
그새 음식이 상했을 리가 없었다. 당장 금진송 자신도 음식을 집어먹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모르는 사이에 독을 탄건가?
‘허나 그렇다기엔, 저 아이가 음식을 가리지 않고 죄다 집어먹지 않았던가.
당장 지금도 음식을 끄적이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 식탐을 뚫고 독을 넣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서 더 당황스러웠다.
그때 운초아가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사, 살수였구나 네년! 처음부터 우리를 다 죽일 생각으로 배에 오른 거였어!”
자기도 저렇게 쓰러질까 두려웠던 것인지 운초아가 검집에 손을 얹고 뒤꿈치를 뒤로 밀어넣었다.
발검하려는 것이다.
저러면 진정 돌이킬 수 없게 된다.
‘나서야겠다.
금진송은 생각했다. 이러다가 진짜로 제가 초대한 손님이 큰 화를 입게 생겼다.
금진송은 눈짓으로 호위들과 시선을 맞추었다. 삽시간에 뜻을 알아챈 호위들이 고개를 끄덕이고 운초아의 곁으로 다가갔다.
허나 운초아가 검을 뽑는 것이 더 빨랐다.
촤악!
“네 입으로 배후를 들어야겠다!”
짧게 뇌까린 운초아가 검법을 펼쳤다. 서연의 팔을 자르려는 것이다.
“막아라!”
금진송이 다급히 소리쳤다. 호위들도 빠르게 반응했지만, 운초아를 따라잡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명색이 무가의 자제였다. 일개 호위들보다는 쌓아온 세월부터 달랐다.
운초아의 검이 서연의 팔에 닿으려는 그 순간이었다.
콰악!
서연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벼락처럼 검을 수직으로 뽑아 공격을 막아냈다. 그리고는 왼손으론 운초아의 얼굴을 꽉 틀어쥐었다.
“어떻…….”
어떻게, 라는 말을 운초아가 내뱉기도 전에, 서연은 팔을 휘둘러서 운초아를 바닥에 패대기쳤다.
패대기질을 반복할 때마다 쾅 하는 굉음이 울리며, 선상 바닥이 깊게 파였다.
쾅! 쾅!
“쿠엑, 쿠엑!”
운초아의 동공이 순식간에 흐려졌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종류의 고통이었다.
서연은 한 손으로 운초아의 얼굴을 들어올렸다 내려찍기를 반복했다. 내력은 싣지 않았다. 싹수가 노란 어린 것을 훈육하는 심정이었기 때문이다.
그럴 때마다 선상 전체에 큰 진동이 울렸는데, 그때마다 지켜보는 이들은 하나같이 몸을 움찔 떨었다.
‘역시 스승님이시다.
화련은 감탄하듯 서연을 응시했다. 뒤통수가 깨지기 직전까지만 내리치는 힘 조절이 기가 막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운초아는 두 눈을 까뒤집고 기절했다. 서연은 그런 운초아를 집어들고는, 선상 한쪽에 아무렇게나 내동댕이쳤다. 기이한 자세로 널브러진 모습이 마치 바닷바람에 널린 오징어 같았다.
서연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도로 납검하고는, 금진송에게 다가가 말했다.
“저 쪽이 먼저 공격했는데, 나중에 일이 생기면 공증을 서주실 수 있겠습니까?”
“얼마든지 그리하겠습니다. 서 소저께서 불편하실 일은 추호도 없으실겁니다.”
금진송은 속으로 감탄했다. 강호 무림을 주유하는 상인이라 간담이 큰 덕도 있었다.
‘진짜로 신분을 숨긴 고수였구나.
강호에서는 노인과 아이, 여자를 조심하라더니, 그 말이 딱 들어맞았다. 사문을 묻고 싶다는 생각이 굴뚝같았으나, 금진송은 가까스로 입을 다물었다.
어떻게든 환심을 사고 싶었기 때문이다.
여태 여인에게 헤벌레하는 사내들을 이해하지 못했던 금진송이었으나, 오늘만큼은 달랐다. 왜 주왕이 달기에게 홀려 파국을 일으켰는지 알 것 같았다.
‘참으로 아름답다.
오죽했으면 각예대회의 심사위원들을 매수하여 환심을 살 생각까지 들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렇게 된다면 아버지에게 죽도록 맞겠지만, 그 대가로 서연의 미소를 볼 수만 있다면 남는 장사라고 생각했다.
‘일단 뒷정리는 확실히 해야겠지.
무림인들의 은원은 확실하다 했다. 여기서 자신이 운초아와 그 일당들을 확실히 정리한다면, 서연 또한 만족할 듯싶었다.
‘납품도 몇 달 끊고, 주변 상인들에게도 눈치를 주면 알아서 말라죽겠지.
명색이 천하 오대 상단이었다. 고만고만한 무가 너댓 개 망하게 만드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친우? 원래 상인들에게는 모두가 친우이고, 동시에 남인 법이다. 맺고 끊음이 확실하다는 것이다.
다시 죽립과 면사를 둘러쓰는 서연을 보고, 금진송은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때 아닌 상사병에 걸린 금진송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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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연은 가는 도중에 배를 갈아타야 했다. 아래층에서 끔찍한 냄새가 올라왔기 때문이다. 다급히 바깥으로 도망쳐 나온 호위들의 신발에는 황갈색 무언가가 묻어 있었는데, 그것만으로도 돌아가는 상황을 대충 유추할 수 있었다.
이따금 아래층에서는 비명과, 푸드득― 하는 소리가 뒤섞였다.
다들 끔찍한 얼굴을 하고 있는 가운데, 화련만이 히죽 웃고 있었다. 어린아이가 똥 이야기를 좋아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기에, 다들 그러려니 했다.
졸지에 똥쟁이들을 친우라 소개한 꼴이 된 금진송은 얼굴이 벌개졌고, 곧 전서구를 보내 자신의 상단에서 새 배를 한 척 불러왔다.
“이쪽으로 갈아타시면 되겠습니다. 낙양까지 제가 모시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하하, 이 정도는 얼마든지 해드려야지요.”
서연이 고맙다고 할 때마다 금진송은 헤헤거리며 제 머리를 긁었다.
아무튼 그렇게 원래 탔던 유람선에는 똥쟁이 넷과, 운초아, 그리고 그들의 호위들만 남았다.
나중에 누가 배를 발견하면, 저들 모두 인간 취급을 못 받을 듯 싶었다. 왜 모두냐 묻는다면, 화련이 운초아의 복통은 하루 뒤에 일어나도록 조절했기 때문이라고 답하면 되겠다.
구조될 때 지릴 가능성이 높다는 소리다.
'하남의 다섯 똥쟁이. 보기 좋다. 어울려.'
다시 말하지만, 잘난 방술사가 이렇게나 무섭다.
화련은 히죽 웃으며 갑판 너머를 응시했다. 멀지 않은 곳에 낙양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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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연은 금진송과 나란히 다탁에 앉았다. 금진송은 시종에게 조심스레 다병을 넘겨받고는, 굳이 자신이 직접 따랐다.
“용정차입니다.”
각예대회가 열리기까지는 시일이 조금 남아 별채에서 대접받는 중이었다. 서연은 본래 거절할 생각이었으나, 금진송이 너무나 간곡하여 어쩌다보니 이렇게 되었다.
서연은 제 앞에 놓인 유리잔과 화려하기 그지없는 별채의 내부를 찬찬히 둘러보았다.
‘돈이 어지간히 많나 보다.
진짜 황금을 산처럼 쌓아두고 살 듯 싶었다.
단순히 금력만 놓고 보면 중원에서 첫손에 든다고 했다. 어느 정도 과장 섞인 말일 터이나, 아예 헛소리처럼 들리지도 않았다.
‘이것도 자기 돈으로 산 별채라고 했지.
초기에 자금을 지원받기는 했지만, 그 이후에 불린 것은 본인의 능력이라고 했다. 상재가 타고 났다는 것이다.
“그런 일을 겪으신 데에는 제 잘못이 큽니다. 적어도 각예대회가 끝날 때까지만이라도 제가 도울 수 있게 해주십시오.”
“너무 폐를 끼치는 것은 아닐지…….”
“전혀 폐가 아닙니다. 만회할 기회를 주십시오.”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야…….”
서연의 대답에 금진송은 됐다는 얼굴을 하며 남몰래 주먹을 꽉 쥐었다.
첫 단추는 꿰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용문석굴로 가신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길을 잘 아는 시종을 붙여드릴테니, 제자 분과 함께 구경하고 오시지요. 저는 가야할 곳이 있어서 함께 따라가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금진송은 그렇게 말하며 자리를 피했다. 함께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부담이 될까 싶어 자리를 파한 것이었다. 자고로 인연을 맺고자 할 때는 신중해야 했다. 급하게 굴었다간 가까워질 인연도 멀어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금진송은 바깥으로 나가기 무섭게, 신임하는 수하 하나를 붙잡고 말했다.
“돈은 넉넉히 들고가고, 가문의 귀빈이라 생각하고 대접하거라. 만약 돈이 부족하면, 전장에 내 이름으로 얼마든지 달아두고.”
수하는 눈을 껌뻑거렸다. 여인을 만나는 것보다 돈을 버는 것을 좋아하여, 온갖 핑계를 대며 혼사 자리도 거절하던 금진송이었다. 그런 금진송이 갑자기 이리 나오니 낯설 수 밖에 없었다.
수하는 조심스레 물었다.
“……저분이 누구시길래 그러십니까?”
“은인이시다.”
“혹시 뱃놀이를 가셨을 때 수적이 습격하기라도 했습니까?”
수하는 제가 말 하면서도 말도 안된다고 생각했다. 낙양에 수적이라니. 지나가는 개도 안믿을 헛소리였다.
금진송은 황홀하다는 얼굴로 답했다.
“내 견문을 넓혀주셨지.”
“……예?”
“호위도 넉넉히 데려가거라. 거절하신다면 적당히 거리를 두고 따라가게 해. 신분을 숨기고 계신 분이시다. 직접 힘을 쓰시는 일은 없어야 해. 곤란한 일이 생길 것 같으면 너라도 미리 나서도록 해라.”
금진송은 그렇게 말하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 따라가고 싶다.
형님들이 기루에 뼈빠지게 들락거리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을까.
그런 생각을 하던 금진송은 제 뺨을 몇 번이고 내리쳤다.
‘서연 소저를 기루의 여인들과 비교하다니! 너도 똑같은 사내였구나. 멍청한 놈! 무례하다고 뺨을 맞아도 이상하지 않다. 맞아도 싸다!
금진송은 다시 한숨을 내쉬다 저를 이상하게 쳐다보는 수하에게 말했다.
“내 뺨을 때려라.”
“……예?”
“세게 때려라. 발칙한 생각을 한 내게 벌을 주려는 것이다.”
수하는 눈치를 보다가 금진송의 뺨을 툭 쳤다. 도련님이 드디어 정신이 나갔나 싶었다.
“더 세게 쳐라!”
진짜 정신이 단단히 나가신 듯 했다. 이쯤 되니 수하도 겁을 먹을 수 밖에 없었다.
“도련님. 혹시 제가 무언가 잘못한 것이 있다면 말씀해주세요. 제가 어찌 도련님을 때리겠습니까.”
“때리라니깐!”
“아이고, 이러지 마시고요.”
수하는 넙죽 엎드렸다. 주인이 때리라고 진짜 때리는 시종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그래도 어렸을 때부터 모셔서 때리는 척이라도 했던 것이지, 다른 시종이었다면 때리라는 말이 나오는 즉시 넙죽 엎드렸을 것이다.
“하아…….”
금진송은 바닥에 넙죽 엎드린 제 수하를 보다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그동안 제 뺨을 계속 때린 탓인지 얼굴 한쪽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얼굴 한 번 봤다고 사랑에 빠지는 것들은 멍청이라고 했다.
금진송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 중 하나였으나, 자신이 그 당사자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돈 버는 재미에 빠져 제대로 사귄 친구가 몇 없던 탓도 있었고, 기루를 들락거리는 형님들이 한심해 보여 여인을 멀리했던 것도 있었다.
여인들을 봐도 별 감흥이 없었던 것도 한몫했다. 금진송의 눈에는 마을에서 이쁘다는 여인들도 다 비슷해 보였다.
눈코입이 달려있으면 그러려니 했다는 것이다.
허나 서연은 달랐다. 본 순간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금진송은 한숨만 푹푹 쉬었다. 도무지 일이 손에 잡힐 것 같지 않았다.
‘중증이구나.
눈이 지독할 정도로 높아서 생긴 일이었으나, 금진송은 끝까지 그 이유를 알아내지 못했다.
*****
서연 일행은 용문석굴을 향해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겼다. 인산인해를 뚫고 입구에 도착했을 때, 서연은 비로소 용문석굴이 어찌 그리 유명한지를 깨달았다.
멸망한 옛 왕조가 수만 명의 인력을 동원하여 수백 년에 걸쳐 이룩한 석굴이라 했다. 그 웅장한 크기는 도저히 가늠할 수가 없었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석굴의 갯수만 수천 개가 거뜬히 넘었으니 말이다.
“전부 돌아보시려면 열흘은 걸리실 겁니다.”
금진송이 붙여준 시종이 입을 열었다. 짧은 흑발과 흑안을 가진 여인이었는데, 풍기는 분위기만 보면 마치 오랜 세월 살수로 살아온 사람 같았다.
그러한 기색을 눈치챘는지, 여인이 입을 열었다.
“교교(嬌巧)라 합니다. 성은 없고, 금진송 도련님을 모신지는 십오 년이 조금 넘었습니다.”
슥 눈치를 보던 교교가 자백하듯 덧붙였다.
“……예전에 호위 살수 일을 하긴 했습니다. 거슬리신다면 사람을 바꿔드리겠습니다.”
“괜찮아요.”
“그러면 계속 안내하겠습니다.”
그렇게 석굴을 거니는데, 어디선가 큰 소리가 터져 나왔다. 비명과 함께 누군가를 향한 험악한 욕설이 뒤섞여 들려왔다.
화련이 서연에게 물었다. 키가 작아 인파에 가려 앞이 보이지 않았던 탓이다.
“스승님, 무슨 일이에요?”
서연은 비명이 들려온 방향을 쳐다보다 눈살을 찌푸렸다. 용문석굴의 자랑이라던 노사나불(盧舍那佛)의 머리가 뚝 떨어져 산산조각이 나 있었던 것이다. 워낙 크고 무게도 무거웠던지라, 도저히 되돌릴 수 없을 정도로 박살이 나 있었다.
“불상이 부서진 모양이구나.”
참담한 광경에 행인들이 혀를 내둘렀다.
“어떻게 이런 일이…….”
“아무리 근래 얕은 지진이 났다지만 어찌 노사나불이, 그것도 머리가 박살이 난단 말인가?”
“사람부터 옮겨! 이러다 다친 사람들 다 죽겠다!”
“끄아아악! 끄아아아악!”
“황상께서 전쟁을 일으켜 천존(天尊)께서 노하신 게야!”
“누구야! 어떤 정신 나간 놈이 황상을 모욕한거냐! 역모다!”
말다툼은 순식간에 싸움으로 번져나갔다. 염불을 외우던 스님들조차 일어나 싸움에 돌입한 행인들을 말리기에 여념이 없었다.
파편에 맞아 사경을 해매는 행인들이 적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서연은 하얀 의복에 피가 묻는 것을 아랑곳하지 않고 나섰다.
무거운 파편을 단숨에 밀어낸 다음, 혈맥을 두드려 출혈을 틀어막았다. 점혈을 응용한 것이었다.
어디서나 분위기를 뒤바꾸는 사람들이 있다.
두려움과 공황이 섞인 얼굴로 제 상처를 보던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손가락이 몇 번 닿았을 뿐인데 피가 멎었기 때문이다.
오죽했으면 표정변화가 극미한 교교마저도 눈을 둥그렇게 뜨고 있을 정도였다.
“……의원이셨습니까?”
“혈맥을 잠시 틀어막았을 뿐입니다. 길어야 두 시진이니, 그 안에 의원에게 데려가야 합니다.”
교교는 입을 다물었다.
혈맥을 틀어막았단다. 석불에 깔려 뭉개지고 산산이 찢어졌을 혈맥을 말이다. 도대체 내공 운용이 얼마나 섬세해야 그것이 가능할지 가늠이 가지 않았다. 적어도 후기지수라 불릴 급은 아니었다.
최소한 수십 년 강호를 주유하며 산전수전을 겪은 내가고수(內家高手)는 되어야 할 터였다.
‘금 도련님. 도대체 누굴 데려오신 겁니까.
내력이 느껴지지 않았기에 평범한 사람인 줄 알았건만, 이제보니 격의 차이가 너무 심해 인지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반박귀진(返璞歸眞)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모두들 그만 싸우고 저길 보시게!”
“신의……신의다……!”
사람들이 다툼을 멈추고 수군거렸다. 싸움에 휘말릴 것을 염려하던 민초들도 하나 둘씩 모여들었다.
멀리서 지켜보던 금룡상단의 호위들도 다가왔다. 그들은 교교의 지시를 받고 부상자를 실어 나르기 시작했다.
“금룡상단이다!”
“어쩐지……일전에 신의가 하남에 있다더니, 금룡상단에 몸을 담았었단 말인가?”
곧 곳곳에서 탄성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죽을 줄 알았던 사람들이 멀쩡히 살아 나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긴장했던 부상자들의 가족들이 서연에게 다가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의원님! 참으로, 참으로 감사합니다!”
“흑, 제 지아비를 살려주셨습니다.”
“선녀가 따로 없구나……!”
서연은 자신이 의원이 아니라 말하려다가 그저 마주 고개를 숙였다. 그것이 겸손으로 비춰졌는지, 환성은 더욱 커졌다.
서연은 실려나가는 부상자들을 지켜보다가 교교에게 말했다.
“저분들도 책임지고 치료해주세요. 비용은 제가 따로 지불하겠습니다.”
“아닙니다. 금 도련님께서 비용을 지불할 일이 생기면 원 없이 지원하라 하셨습니다. 애초에 그리 손해도 아니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근래 군문으로 끌려간 이들이 적지 않아 민심이 흉흉해지려던 참이었다. 사람 목숨 몇을 구한 것으로 세간의 민심을 얻는다면 금룡상단으로서는 실로 남는 장사였다.
교교는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래서 은인이라 하셨던 건가?
물론 아직 더 두고 보아야겠지만, 과연 상재를 타고난 도련님이다 싶었다. 상가가 심성이 선한 고수와 연을 맺어두어 손해 볼 것은 없었으니 말이다.
‘보기보다 나이가 많다고 생각해야겠어. 내공을 생각하면 못해도 불혹은 넘었다고 봐야겠지. 그런데도 손만 보면 약관의 젊은이 같으니, 본 실력을 숨기기 좋겠어.
교교는 냉혹한 살수의 시선으로 서연을 분석했다.
‘젊은 목소리와 외양으로 방심을 일으켜 하수는 물론이고 고수에게도 일격을 먹일 생각을 하다니……. 심성은 선한 듯 보이나, 매우 신중하고 계산적이겠다. 적으로 두면 매우 위험하겠어.
물론 도문 소속일 가능성도 배제하지는 않았지만, 교교는 서연이 정사지간에 속한 무인일 가능성이 높다고 여겼다. 살수라는 말을 듣고도 아무렇지 않다는 듯 넘겼기 때문이다.
‘어쩌면 진짜로 신의일 수도 있겠다.
성별도, 외양도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 바로 신의다. 그렇다고 헛소문으로 치부하기에는 이름난 고수들이 하나같이 칭송하는 것을 보면 분명 실존하는 인물이기는 할 터였다.
저만한 실력자라면 웬만한 고수들도 아래로 보일 터이니 저리 당당하게 돌아다니는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모르겠다. 힘드니 급료나 올려달라 해야겠다.
괜히 생각이 복잡해지니 가슴만 답답해졌다. 교교는 다시 본분에 집중하기로 마음먹었다. 금 도련님의 은인께서 용문석굴을 편히 관람하실 수 있도록 안내하는 일 말이다.
‘그건 그렇고, 당분간 용문석굴에도 발길이 뜸하겠구나.
크기가 5장이 훌쩍 넘는 노사나불의 얼굴이 완전히 망가졌으니, 흉흉한 소문이 돌기 전에 관에서 나서서 출입을 막을 것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서연을 바라봤을 때였다.
서연이 망가진 노사나불을 빤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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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양은 드넓은 중원에서 북경과 장안 다음으로 큰 도시다. 수백만이 넘는 인파가 쏘다니는 만큼, 인간군상도 다양했다. 조각가 또한 많았다.
허나 장안의 자랑이자 불심의 정수가 깃든 용문석굴 노사나불의 머리를 다시 빚어낼 만한 조각가가 있느냐 물으면, 그 누구도 선뜻 답할 수 없었다.
노사나불의 높이는 족히 다섯 장을 훌쩍 넘는다. 건장한 사내 여덟을 수직으로 세워도 그 머리 근처에도 미치지 못할 지경이다.
더구나 용문석굴의 재료는 딱딱하고 촘촘한 감람석이라, 칼날 한 번 대기도 쉽지 않은 강도를 지녔다.
내부는 어둠에 잠겨 횃불에 의지해야 했고, 천장 근방은 습기로 가득하여 정과 망치를 내리치기조차 여의치 않았다.
가장 골치 아픈 문제는, 사내의 몸통만 한 감람석 덩어리를 깎아내어 그 높은 곳까지 올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만약 그렇게 땀 흘려 올렸는데도 아귀가 맞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허송세월이 될 터.
“골치 아픈 일이 생겼군.”
“그러게 말일세. 당장 작업을 시작해도 반 년은 걸릴 듯 하니.”
낙양에서 가장 드높고 아름답다는 기루였다. 금룡상단주와 낙양을 관장하는 부윤(府尹)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꼼꼼하고 날카롭게 생긴 노인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낙양 부윤이었다.
흰머리가 히끗히끗 나 있었는데, 문사임에도 풍기는 분위기가 여느 장수 못지 않았다.
그가 말했다.
“자네 상단에서 내일모레 각예대회를 연다고 하지 않았나? 아예 불상을 만들어 보게 하는 건 어떤가? 노사나불을 수리할 인재도 알아볼 겸 말일세.”
“원한다면 그리 하겠지만, 목공(木工)이라면 모를까, 노사나불을 깎아낼 수준의 석공이 낙양에 나타났다면 내가 진작에 알았을걸세.”
금룡상단주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용문석굴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건은 이미 전해들은 참이었다. 셋째의 수하들이 그곳에 머물고 있었기에 누구보다 빨리 소식을 전해들을 수 있었다.
채 하루도 되지 않았는데 온 낙양에 소문이 퍼져나갔다. 심지어 황제 폐하의 덕이 부족하여 이런 변고가 생겼다는 망언을 퍼뜨리는 우민들까지 생겨났다.
엄히 추포하여 쉬쉬하는 분위기가 되었으나, 백성들의 민심이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했다.
낙양은 금룡상단의 뿌리가 되는 곳이자, 하남의 심장과도 같았다. 이곳의 민심이 흔들린다면 바로 옆 섬서에도 그 여파가 미칠 것이고, 북경에 닿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다들 집단으로 활동하는지라 이렇다 할 석공이 없네. 개인의 이름이 부각된 경우는 드물어. 기껏해야 초대 황릉을 만든 석공들의 제자들 정도나 될까. 허나 하나같이 북경에서 떠날 생각이 없으니 어찌할 도리가 없네.”
예술가들이 수도에 몰리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귀족과 부유한 자들이 많기 때문이다.
물론 낙양도 부유하기로는 다섯 손가락 안에 들었지만, 북경과 비교할 수는 없었다. 당연히 석공들의 수준 또한 뒤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황상께 주청을 올리면 어찌 해결할 수도 있겠으나, 그리했다간 내 무능만 드러낼 뿐이니…….”
부윤은 답지 않게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단순히 불상 하나 무너진 것이 아니었다. 민심이 무너질 판이었다. 북경에서 오해라도 한다면, 목숨이 위태로울 수도 있었다.
전선과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는 운남과 흑룡강, 그리고 청해의 관리들은 지금도 심심찮게 목이 잘려나가고 있지 않은가.
이곳은 대도시 낙양이다. 낙양의 민심을 잡지 못했다간 말 그대로 십족이 멸해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러한 기색을 눈치챘는지, 금룡상단주가 말했다.
“너무 염려 마시게. 진작 새외로 사람을 보내두었네.”
“새외라고 다를까? 중원의 석공보다 뛰어날 것 같지는 않은데.”
“우리와 같은 인간이 아니라네.”
부윤이 눈을 부릅떴다. 금룡상단주는 장난기 어린 얼굴로 친우를 쳐다보다가 덧붙여 말했다.
“우리 가문과 교류하는 청목족이시네. 증조부 때부터 연이 닿아 있었지.”
“청목족? 그자들이 조각도 할 줄 알았나?”
“일반적이진 않지. 허나 그분은 청목족 사이에서도 별종이셔서, 아주 오랜 세월 조각을 해오셨다네.”
금룡상단주는 그렇게 말하며 창 밖을 응시했다.
작년까지는 풍년이었다. 무려 수십 년 동안 이어진 풍년이었다. 전쟁이 이어지고 있음에도 민심이 유지되고 있는 것은 전부 그 덕분이었다.
허나 올해는 작년보다 비가 덜 내렸다. 작황이 덜할 것은 분명했다. 흉년은 아니겠으나, 민심이 지금보다 나빠질 것은 명백했다.
부윤이 천천히 입술을 뗐다.
“새외에서 낙양까지 오는데 빨라도 달포는 걸릴텐데. 너무 늦어.”
“최후의 방안일세. 그 안에 답을 찾는 것이 자네에게도 내게도 좋겠지.”
수십 년을 함께해온 지기라 그런지, 눈빛만 봐도 서로가 뭘 말하려는지 알았다.
금룡상단주가 말했다.
“각예대회는 내일로 앞당기겠네. 감람석도 오늘 안에 전부 구해놓지.”
“고맙네. 비용은 이쪽에서 대겠네. 사람들이 많이 보도록 방도 널리 퍼뜨려 놓지.”
하루 만에 수백 명이 쓸 상품의 감람석을 구하고, 낙양 모든 사람들이 알도록 곳곳에 벽보를 붙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허나 이 둘에게는 가능했다.
곧 고개를 끄덕인 노인들은 각자 할 일을 끝내기 위해 밖으로 나섰다.
*****
“각예대회가 내일로 앞당겨졌다고 합니다.”
금진송이었다. 그는 아침에 그랬던 것처럼 소식을 전한다는 핑계로 서연의 처소를 찾았다. 사실 방문이라 표현하기도 애매한 것이, 애초에 서연이 묵는 곳이 금진송의 별장이었다. 집주인이 제 집을 들락날락거리는 것을 두고 어찌 왈가왈부하겠는가.
막무가내로 들어온 것도 아니요, 온갖 예를 갖추며 들어왔다. 또 손에는 용정차가 담긴 찻주전자도 들려 있었다.
부잣집 자제, 그것도 집주인이 흙바닥에서 찻주전자 덜렁 들고 있는 꼴을 보고도 가만있으면 사람이 아니다.
용문석굴에 다녀온 서연이 금진송과 다시 마주 앉아 차를 들이키게 된 경위는 그러했다.
“부탁하셨던 민초들은 전부 치료를 마쳤습니다. 저희 상단이 운영하는 의원에서 책임지고 있으니, 별 탈 없이 완치될 겁니다.”
“편의를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서연이 고개를 숙였다. 진심이었다. 아무런 흑심 없이 선뜻 제 돈을 내어주는 사람에게는 얼마든지 고개를 숙일 만 했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용정차 들이키는 소리만 이따금 울려퍼질 뿐이었다. 어색함을 참지 못한 금진송이 먼저 입을 열었다.
“사실, 내일 각예대회에서 감람석을 사용할 예정이랍니다. 아, 다른 분들에게도 알려진 사실이니 곡해는 마십시오.”
“감람석 말입니까?”
“제가 조각은 잘 모르지만, 감람석이 다루기 힘든 재료라는 건 압니다. 마침 창고에 감람석이 있는데, 한 번 사용해 보시겠습니까?”
“정말입니까?”
서연의 상기된 목소리에 금진송은 제가 기분이 더 좋아졌다. 아버지께 졸라대어 감람석 덩어리를 얻어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곧 서연은 창고로 이동했다. 창고에는 몸통보다 조금 작은 감람석 덩어리가 너덧 개 놓여 있었다.
서연은 용문석굴에서 보았던 노사나불을 떠올렸다. 관아에서 다급히 달려와 반쯤 쫓겨나다시피 나와야 했지만, 그때 느꼈던 감상은 아직도 오롯이 지니고 있었다.
‘노사나불을 새로 깎아낼 사람을 구하려는거야.
내막을 알지는 못하지만, 각예대회를 앞당긴 이유를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본래 자유였던 재료를 굳이 감람석으로 바꾸었겠는가.
‘기왕이면 내가 하고 싶다.
서연 또한 천성이 조각가였다. 비록 세가 작은 상인들에게만 조각을 팔았을지언정, 제 실력이 어디서 꿀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천하의 내로라하는 조각가들과 이번 기회에 실력을 겨루어 보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다.
“제가 써도 될까요?”
“애초에 그리하시라고 가져왔습니다. 일전 유람선에서 있었던 일에 대한 사과라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서연은 그렇게 말하며 금진송의 손을 덥썩 잡았다. 악수한 것이다.
허나 금진송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하여, 얼굴이 벌게진 채로 어버버거렸다.
‘소, 손을 잡아버렸다.
오죽했으면 현기증이 느껴질 정도였다. 순간 어지러움을 참지 못하고 비틀거릴 정도였으니 말이다. 뒤에 서 있던 교교가 잡아주지 않았다면 볼썽사나운 꼴을 보였을 것이다.
금진송은 가까스로 호흡을 다듬고 말했다. 얼굴은 그새 벌게져 있었다.
“이, 이만 가보겠습니다.”
금진송은 다급히 빠져나갔다. 교교는 그런 금진송과, 서연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무서운 여인이다.
저보다 배분이 몇 개는 아래일 사내를 아무렇지 않게 꼬셔대다니. 저 정도 철면피여야 중원 무림에서 여고수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인지 두려움마저 들었다.
‘일찍 은퇴하기를 잘한건가.
자신도 무림에 오래 몸을 담았더라면 저런 괴물이 되었을까? 모르겠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교교는 몸을 얕게 떨다가, 넋이 나간 금진송을 이끌고 밖으로 나갔다.
‘도련님은 내가 지켜야 한다.
아무리 은인이라지만, 이건 좀 아닌 듯 싶었다.
*****
서연은 손재주가 빠른 편이었다. 일전 남궁 남매에게 목검을 만들어줄 때도 일 다경도 채 걸리지 않았으니 말이다. 허나 재료가 석재라면, 그것도 단단한 편에 속하는 감람석이라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졌다.
홀로 남은 서연은 눈앞에 놓인 감람석의 표면을 만지작거리며 생각했다.
‘단단하다. 이 정도면 며칠은 걸릴 것 같은데.
물론 이조차도 다른 석공이 들었다면 헛소리 하지 말라고 버럭 소리 질렀을 것이다. 본래 석재 조각은 짧게는 몇 주, 길게는 년 단위로 걸리는 작업이었기 때문이다.
비록 각예대회에서 사용할 감람석은 크기가 작아 그보다는 덜 걸리겠지만, 그래도 최소 몇 주는 걸린다고 봐야 했다.
괜히 금룡상단주와 부윤이 하루라도 빨리 각예대회를 시작하려 했던 것이 아니다.
물론 서연의 용력 자체가 남달랐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애초에 어느 무림인이 시간만 오래 걸리는 조각을 취미로 할까. 분재 다듬기라면 모를까.
서연은 품 속에서 망치와 정(鑿)을 꺼냈다. 머릿속으로 얼개를 대충 그린 다음, 위치를 어림잡아 망치를 내리쳤다.
곧 서연은 순식간에 감람석을 둥그런 모양으로 깎아냈다. 뒤에서 공손한 자세로 지켜보던 화련은 그 모습을 보며 감탄했다.
“스승님은 어떻게 그렇게 빠르게 하시는 거예요?”
“음, 이리 와보렴.”
서연은 품에서 작은 망치와 정을 꺼냈다. 예전에 화련에게 주려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서연은 정과 망치를 집어든 화련의 양손을 잡고는, 힘을 조절하여 감람석을 툭툭 내리쳤다. 몇 번 두드리자 딱딱한 감람석 한편이 뚝 하고 떨어졌다. 신기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는 힘조절이었다.
‘와.
화련은 순수하게 감탄했다. 제 손이 이렇게 움직일 수도 있구나 싶었다. 스승님이 제 양 팔을 직접 움직이니 이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 것 같았다.
‘검술이랑 똑같아. 어쩌면 더 어려울수도.
검술은 검로가 틀려도 다시 연습하면 그만이다. 허나 조각은 다르다. 한 번 실수하면 돌이킬 수 없다. 실력은 물론이고, 모든 움직임에 확신을 담아야 한다는 뜻이다.
“내가 옆에 낸 모양을 그대로 따라해보렴.”
서연은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화련은 제 스승과, 감람석을 번갈아 쳐다보다가 약간 긴장한 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윽.”
“괜찮으니 계속 하렴. 실수할 수도 있지.”
서연은 끙끙대는 화련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옅게 웃었다.
끙끙거리면서도 어떻게든 해보려는 모습이 참으로 기특했다. 화련에게는 확실히 재능이 있었다. 아무리 자신이 까다로운 부분을 전부 쳐냈다지만, 어설프게나마 그 맥을 따라가고 있었으니 말이다.
‘계속 틈틈이 연습하고 있었나 보구나.
굳은살이 박힌 손만 보아도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어디 조각이 쉬운 일인가. 막대한 힘이 들고, 자칫했다간 손을 다치기 일쑤였다.
‘나도 더 잘난 사람이 되야겠지.
저만한 재능의 아이를 가르치는데, 어디 스승이 보통 사람이어서야 되겠는가.
서연은 내일 있을 각예대회에서 이기기로 마음먹었다.
곧 스승도 제자 옆에 나란히 서서 조각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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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서연은 곧장 각예대회가 열리는 광장으로 향했다.
본디 오가는 인파로 북적이던 광장을 대회용으로 개조하여, 수백 명의 장인이 동시에 기량을 펼칠 수 있도록 너른 터를 마련한 것이었다.
아침 이른 시각이었음에도 이미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볼거리가 귀한 시대다. 금룡상단에서 대회를 연다 하니, 강호의 무인들은 물론 평범한 백성들까지 구름처럼 몰려와 구경하려는 것이었다.
거리에선 어느새 주전부리를 파는 행상들의 우렁찬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한쪽에는 길게 늘어선 줄이 보였다. 줄을 선 이들은 하나같이 손에 세월의 흔적이 깊게 새겨진 상처들을 달고 있었는데, 하나같이 장인이라고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분위기를 풍겼다.
뛰어난 석공일수록 손에 부르튼 상처가 많다. 야장의 손이 굳은살로 뒤덮이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서연이 그 줄에 서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서연에게 달라붙었다. 누가 봐도 의구심으로 가득한 얼굴이었다.
눈빛만 보아도 무슨 말을 하려는지 넉넉히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
‘여인이?
허나 줄을 잘못 섰다고 나서서 꾸짖는 이는 없었다. 서연의 허리춤에 매인 끌과 망치 같은 조각 도구들이 매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곧 사람들은 서연에게서 관심을 털어냈다. 겉모습만 번지르르한 이들은 스스로 도태될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었다. 서연도 그러리라 여겼다.
서연은 화련의 손을 잡은 채로 접수대로 다가가 신상명세를 말했다.
“하남성 태실산? 산골짜기에 사는 사람도 다 있군. 이름은 서연, 맞소?”
“예.”
“옆에 있는 나무 조각 하나 들고 가시오.”
접수원 옆에 놓인 책상에는 네모난 나무토막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서연은 그중 하나를 집어 들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서연은 손바닥만 한 나무토막을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참나무다.
손에 꼽을 정도로 단단한 나무였다. 나뭇결 또한 거칠어 다루기가 매우 까다로운 재료에 속했다.
‘이걸로 거르려나 보다.
어디 석공이라고 나무를 다루지 못하겠는가. 자고로 뛰어난 조각가는 재료를 가리지 않는 법이다.
귀한 감람석을 아무에게나 내어줄 수는 없었을테니 말이다.
서연은 곧 안내받은 천막 안으로 들어섰다. 시험을 주관하는 감독관이 서연을 책상 앞으로 이끌었다. 기이하게도 금룡상단의 상단원과 관아의 관리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감독관인 모양이었다.
감독관이 말했다.
“일다경 안에 나무토막을 원형으로 깎아내면 되오.”
“일다경이요?”
“완벽한 구체일 필요는 없소. 우리가 세워둔 기준만 넘으면 합격이고, 그러지 못하면 불합격이오.”
서연은 안도했다.
겉면까지 완벽하게 다듬지 않아도 된다는 뜻으로 해석했기 때문이었다.
‘그 정도면 충분하지.
이 시험 주제를 듣고 적잖은 석공들이 절망했음을 몰랐기에 나올 수 있는 생각이었다.
나무토막을 쥔 서연의 손이 힘차게 움직였다.
재료의 단단함은 서연에게 큰 의미가 없었다. 서연은 나무토막을 한 손으로 단단히 고정한 다음, 조각칼을 들고 거침없이 깎아내기 시작했다.
“빠르다!”
“어찌 여인이 저런 속도를 낸단 말인가?”
주변에 서 있던 몇몇 사람들이 감탄사를 터뜨렸다. 그들 중에는 시험에서 난항을 겪고 있던 조각가들도 있었다.
“……무슨 사과 껍질을 깎는 것 같군.”
옆에서 지켜보던 감독관들조차 감탄을 감추지 못했다.
일다경이라는 촉박한 시간을 주었건만, 서연은 그 사분의 일도 되지 않는 시간에 온전한 구체의 형태를 만들어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아교와 모래로 만든 사포로 겉면을 매끄럽게 다듬고 있었다.
“그만해도 좋소. 통과요!”
“통과라뇨?”
“기준을 한참 초과했소. 애초에 겉면을 다듬는 것까지 상정하지 않았소.”
감독관은 서연이 만들어낸 구체를 보고 혀를 내둘렀다. 이내 그것을 책상에 올려놓고 약간 힘을 주어 밀어냈다. 곧 구체는 구슬처럼 또르르 굴러갔다. 한 번쯤 걸리는 면이 있을 법도 했건만, 굴러가는데 막힘이 없었다.
“혹시 스승이 있으시오?”
극찬이었기에 서연은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감독관은 그것을 사문을 알리고 싶지 않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설마 독학으로 이만한 경지에 오르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던 탓이다.
*****
첫 시험에서는 무려 절반이나 걸러졌다. 다행히 두 번째 시험은 없었다. 금룡상단에서 준비한 감람석의 수보다 남은 장인의 수가 적었기 때문이다.
첫 관문을 통과한 석공들 중, 평소 친분이 있는 이들은 이동하는 틈을 타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보아하니 섬세함보다는 속도를 중시하는 듯하더이다.”
“아무래도 노사나불을 하루빨리 수리해야 하니 그러했겠지. 괜히 감람석으로 주제를 바꿨겠는가?”
“여럿이서라면 모를까, 혼자서라면 몇 달은 족히 걸릴 작업인데.”
개방된 너른 공간에는 사람 수에 맞춰 감람석 덩어리들이 놓여 있었다. 서연의 상체보다 조금 컸는데, 그 색깔과 질감을 보아하니 하나같이 최상품이었다.
화련은 인파의 접근을 막기 위해 쳐둔 울타리 바깥에서 작은 손을 흔들고 있었다.
“힘내세요!”
서연은 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온 사람부터 맨 앞줄에 서는 방식이었는데, 서연의 자리는 공교롭게도 정가운데였다. 다른 석공들이 온통 진한 색의 옷을 입고 있어 그런지, 흑돌 사이에 놓인 백돌처럼 유독 눈에 띄었다.
곧 강단 앞에 후덕한 풍채의 노인이 나타났다. 금룡상단주였다. 거대한 상단을 이끄는 자는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닌지, 성품 좋아 보이는 얼굴 너머로도 이유 모를 위압감이 느껴졌다.
그는 석공들을 예리한 시선으로 살핀 다음 입을 열었다. 무공을 익힌 모양인지, 작게 말했음에도 그 목소리가 좌중에 울렸다.
“당장 시작하시면 되겠소. 숙식은 금룡상단에서 책임지겠소이다.”
그때 석공 하나가 손을 들어 외쳤다.
“기간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금룡상단주는 그럴 질문이 나올 것을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기간 제한은 없소. 주제도 상관없소. 다만, 속(速), 정(精), 의(意) 세 분야에 비중을 두어 판단할 것이오.”
각각 속도와 정교함 그리고 조화로움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단순히 빠르게만 만들어 내면 실격이오. 무릇 작품으로 인정받을 만할 수준이어야 하외다. 그렇다고 너무 오래 걸려도 좋은 점수를 받기는 힘들 것이오. 다들 지역에서 내로라하는 장인들일테니 이 말을 이해했을 것이오. 그럼.”
금룡상단주는 그렇게 말하고는 단상 아래로 내려왔다. 구경꾼들이 있는 곳이 아니라, 석공들이 있는 방향으로 말이다.
코앞에서 직접 보고 판단하겠다는 뜻으로 여겨졌다.
천하에서 내로라하는 상단주의 안목이 손꼽힐 정도로 뛰어날 것은 당연한 이치. 그것에 딴지를 거는 석공들은 없었다.
금룡상단주는 여유로운 걸음으로 앞줄부터 차례로 흝어나갔다. 본래 첫날에는 이렇다할 볼거리가 없다. 전체적인 그림을 그려야 하기 때문이다. 허나 속도를 평가 기준으로 내세운 탓에, 다짜고짜 끌부터 치켜드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석공 하나를 쳐다보던 금룡상단주가 속으로 혀를 찼다.
‘이쪽은 볼 것도 없군.
아마도 감람석을 다뤄본 경험이 없던 모양이다. 단단하다고 하여 너무 강하게 힘을 줘버리면 덩어리째로 떨어져 나가는 것이 바로 감람석이었다. 경험이 없으면 제대로 다루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저렇게 실수할 바에는 차라리 한 걸음 물러나서 고뇌하는 편이 현명하다고 할 수 있겠다.
금룡상단주는 돌아다니면서 제 수하들에게 은밀히 전음을 뿌렸다.
- 8번, 5점 감점하게.
- 11번도 5점 감점.
- 18번도 5점 감점.
금룡상단주는 가차없이 평가했다. 노사나불을 새로 만들어야 하는 중차대한 일이다. 실력이 뒤떨어지는 자에게 맡길 바에는 차라리 머리가 부서진 채로 내버려두는 편이 나았다.
이따금 금룡상단주는 걸음을 멈췄는데, 그때마다 구경꾼들도 해당 장인의 작품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다듬는 속도가 거침이 없으면서도 두드리는 힘이 일정하다. 뛰어난 장인은 정을 두드릴 때 소리부터 다르다. 경지에 올랐다는 뜻이다.
- 43번은 3점 가산하게.
서 있는 자리가 곧 번호였다. 금룡상단주는 이따금 고개를 끄덕이기도, 때로는 옅게 감탄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중간 쯤에서 걸음을 멈춰 섰다.
그곳에 한 여인이 서 있었다. 각예대회에 참가한 유일한 여인이었다.
‘셋째가 말했던 여 석공이 저자였나?
여인은 깊이 고뇌하는 모양인지, 감람석 덩어리를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생각이 복잡해질 만도 하지. 애초에 여인의 몸으로는 다루기 힘든 재료니.
왜 야장이 대부분 남성이겠는가. 힘이 많이 들기 때문이다. 석공도 마찬가지다. 여인이 하기엔 벅찬 작업이 수두룩했다. 단단한 감람석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이윽고 서연이 정과 망치를 치켜들었다. 그리고는 일말의 망설임 없이 정질을 시작했다.
똑-!
마치 옥을 두드리는 듯 청량한 소리가 울렸다. 순간 금룡상단주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다른 석공들을 마저 살피려던 금룡상단주는 고개를 돌려 다시 서연을 응시했다.
곧 금룡상단주는 서연이 무얼 하려는지 이해했다.
‘환조(丸彫)로구나.
사방에서 감상할 수 있도록 조각하는 기법을 말한다. 입체감이 온전하지만, 모든 면을 온전히 깎아내야 하기에 한 면만 깎아내는 일반적인 방법보다 몇 배는 까다로운 기법이었다.
본디 조각은 부산스럽고 번잡한 작업이다. 당장 주변에서도 정(釘) 울리는 소리에 귀를 막는 행인들이 적지 않은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똑, 똑, 똑-!
허나 저 여인은 달랐다.
요란스럽지 않고 청아했다. 돌이 아니라 옥을 부딪치는 것 같았다. 그런데도 그 소리가 작지 않아, 듣기 좋은 소리가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금룡상단주는 어느새 작품에 몰입한 채로 서연을 바라보았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처음보다 몇 걸음 가까이 다가가 있었다.
감람석 덩어리의 형상은 조금씩 바뀌었다.
처음에는 그저 거대한 덩어리였다. 도대체 얼마나 큰 그림을 그리고 있는지 가늠조차 되지 않을 정도였다.
곧 하나의 덩어리가 세 개의 산봉우리 같은 모양으로 변모했다. 처음에는 대자연을 그려내려나 했다. 봉우리를 먼저 만들고, 거기에 배경 그림을 양각(陽刻)할 때 일반적으로 그러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금룡상단주는 자신이 완전히 틀렸음을 깨달았다.
‘아!
봉우리를 만드는 것이 아니었다. 비록 지금은 희미했으나, 봉우리 하단에서부터 가부좌를 튼 무릎과 다리의 형태가 차차 드러나고 있었다.
‘삼신삼세불(三身三世佛)이다.
세 가지 몸을 지닌 세 분의 부처라는 뜻. 굳이 봉우리를 세 개씩이나 만든 것도 이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부터 봉우리마다 부처를 새기려 했던 것이다.
금룡상단주는 숨죽인 채 감람석을 응시했다.
서연의 손이 움직일 때마다 봉우리 위에 옷이 그려진다. 가늘게 물결치고 주름진 옷이다. 어찌나 정교한지, 누가 실제 옷을 입혀놓았다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고개를 쭉 빼고 지켜보던 금룡상단주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어찌 이렇게 짧은 시간에…….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치켜들었는데, 어느새 세상이 까맣게 물들어 있었다.
금룡상단주는 저도 모르게 입을 뻐끔거렸다. 등에 흥건한 식은땀과 시큰거리는 무릎이 몇 시진 동안이나 몰입하고 있었음을 알려주었다.
고개를 돌리자 수많은 상단원들이 자신을 염려스러운 듯 쳐다보고 있었다.
“……상단주님? 괜찮으십니까?”
걱정하는 듯한 어투로 묻는 상단원을 보고, 금룡상단주는 터져 나오려는 헛웃음을 가까스로 틀어막았다.
“내가 얼마나 이러고 있었나?”
“여섯 시진이 조금 넘었습니다. 아무리 여쭈어도 대답이 없으셔서, 선 채로 정신을 잃으신 줄 알았습니다.”
농담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금룡상단주는 헛웃음을 짓다가 다시 서연이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똑-!
시끄러웠던 시험장에서 오직 서연의 정질만이 청아하게 울려퍼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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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시간이었다. 보름달이 휘영청 떠오른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본디 조각이란 하루 이틀에 끝날 작업이 아니기에, 금룡상단에서 마련해 준 숙소에서 피로를 풀고 다시 칼을 잡는 것이 순리였으리라.
허나 자리를 떠난 석공은 하나도 없었다. 그들은 정과 망치도 내려놓고, 금룡상단주가 그랬던 것처럼 넋이 나간 채 서연의 주위를 둥글게 에워싸고 서 있었다
흔한 감탄사조차 내뱉지 않는다. 숨소리마저 불경인 양 하나같이 입술을 굳게 다문 채였다.
모두가 일찍이 자신만의 경지에 올랐고, 각 지역에서 이름을 떨치던 장인들이었다. 그렇기에 눈앞에서 펼쳐지는 광경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그 누구보다 잘 알았다.
금룡상단주처럼 처음부터 서연을 지켜보았던 장인은 없었다. 각자 자신들의 작품에 혼을 쏟고 있었기 때문이다.
허나 사람인 이상, 집중력의 끈이 끊어지는 순간은 찾아오는 법. 행인들의 경탄, 상단원들이 하나둘 모여드는 소란, 그리고 옆자리에 선 장인들이 홀린 듯 한곳을 응시하는 것에 이상함을 느끼고 고개를 돌린 순간, 그들은 헤어 나올 수 없는 깊은 늪에 빠져들었다.
감람석은 본래 단단한 암석이라 섬세한 표현에는 한계가 따르기 마련이다. 용문석굴의 노사나불상이 전체적으로 둥글고 뭉툭한 느낌을 주는 것도 그 때문이 아니던가. 허나 서연의 조각은 재료의 한계를 거침없이 부수고 있었다.
몸을 휘감는 굴곡 하나하나, 옷깃의 주름 한 올, 심지어 옷 위로 드러난 육체의 윤곽과 핏줄마저 살아있는 듯 꿈틀거렸다.
마치 살아있는 부처가 그 자리에 앉아있는 듯한 착각에 빠질 지경이었다.
낙양에서 손꼽히는 명장이라 불리던 늙은 석공은 서연의 팔이 한 번 움직일 때마다 깊은 침음을 토해냈다.
‘조각 위에 투명한 옷을 씌운 것만 같구나.
이제 고작 하반신만 만들었을 뿐이다. 본디 작품이란 완성되고 나서야 비로소 그 진가를 드러내는 법이거늘, 도대체 어떤 경지에 이르러야 이토록 작은 편린만으로도 숙련된 조각가들을 경악케 할 수 있단 말인가.
이미 승자는 정해졌다. 그 사실을 모르는 석공은 단 한 명도 없었다. 허나 그렇다고 하여 패배감에 젖거나 안타까워하는 이는 찾아볼 수 없었다
대신 그들은 서연의 손짓 하나, 움직임 하나까지 마음속 깊이 새겨 넣으려는 듯 전심전력으로 서연을 주시했다.
땅-
서연은 감람석의 아랫부분에 정을 놓고, 두들겼다. 연꽃으로 된 받침대를 만들려는 것이다.
단순히 연꽃을 본딴 받침대가 아니다. 천개의 연꽃잎이 겹겹이 쌓여 피어나는 천엽연화대(千葉蓮華臺)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청아한 소리가 울려퍼질 때마다 감람석의 틈 사이로 신비로운 연꽃이 하나둘씩 피어올랐다.
밤을 꼬박 세워 동녘에 해가 솟아오를 무렵, 결가부좌(結跏趺坐)를 튼 노사나불의 형상이 온전히 드러났다. 왼손은 무릎 위에, 오른손은 가볍게 들어 올린 그 자애로운 모습에, 깨달음을 얻어 염불을 외는 승려들이 적지 않았다.
서연은 이제 다른 쪽 봉우리로 걸음을 옮겼다.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행인들이 오갔는지는 헤아리기도 힘들 지경이었다
조금이라도 더 그 신묘한 기예를 눈에 담으려던 석공들이 한계에 다다라 쓰러지고, 의원으로 실려 가고, 심지어 치료를 마다하고 기어서라도 다시 돌아오는 사례가 끊이지 않았다.
“내 죽는 한이 있어도 계속 봐야겠다.”
“하지만 스승님!”
“막지 마라!”
제자들을 뿌리치고 각예대회로 미친 듯이 되돌아오는 석공들도 있었다.
집념이 모이면 광기가 되는 법. 그리고 예술가의 광기는 그를 지켜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압도하는 분위기를 풍기는 법이다.
시끄러워야 할 광장이 침묵으로 물든 것은 전부 그 때문이었다. 나이 지긋한 석공들이 풍기는 지독한 집념과 광기가 모든 행인들의 입을 다물게 만들었음이었다.
무림인이라 하여 예외는 아니었다.
나흘째 되던 날, 서연은 끝내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까지 만들어냈다.
사람이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오로지 조각에만 혼신을 쏟을 수 있을까.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다. 천하에서 이름 높은 무인이라 할지라도 불가능한 일이다.
자연과 하나가 되는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지에 올랐다면 모를까.
“……정녕 신선이라도 된단 말인가?”
홀린 듯 서연의 움직임을 지켜보던 무림인들이 그리 탄식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조각의 도를 알지 못하는 자들조차도 그 눈부신 기예를 느꼈기 때문이다.
행인들도 그러한 기류를 느꼈다. 서연이 먹지도 마시지도, 잠들지도 않을지 내기를 거는 몰상식한 무리도 적지 않았다
허나 나흘이 닷새가 되고, 칠주야가 되던 날, 그런 이들은 싸그리 사라졌다.
스스로 부끄러움을 깨닫고 입을 다문 채 자리를 떠났기 때문이다.
어느 순간부터 행인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말했다.
“신선이시다.”
“상제께서 내리신 선녀시다.”
“원시천존(元始天尊), 원시천존.”
소문을 듣고 찾아온 도인과 승려 또한 헤아릴 수 없었다.
화련은 한계에 다다른 눈꺼풀을 간신히 치켜들었다. 주전부리로 허기를 채우고, 선잠으로 수마를 쫓는 것도 이제는 한계에 다다랐음이다.
어린아이의 몸으로 칠 주야를 버틴 것만으로도 이미 기적과 같았다. 화련의 몸이 기우뚱 기울어 쓰러지려는 찰나, 누군가가 그녀를 붙잡아 세웠다.
- 수고했다. 이만 쉬거라.
유혼이었다. 그는 주변 사람들의 눈을 가려 화련을 안전한 곳으로 이동시킨 다음, 그대로 눕혀 재웠다. 화련은 그 즉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유혼은 잠든 화련을 지켜보다가, 그대로 창공으로 솟구쳤다. 백호가 땅에서 주인의 곁을 지킨다면, 자신은 마땅히 하늘에서 보위해야 했다.
여드레가 되었을 때, 마침내 석가불(釋迦佛)이 완성되었다.
불도에서 숫자 팔(八)은 더없이 상서로운 숫자였다. 상서로운 표상의 개수도 여덟 가지요, 깨달음의 진리를 상징하는 법륜이 팔각형인 것도 그 때문이었다.
동시에 여덟은 득도를 뜻했다.
서연은 마침내 정질을 멈추었다. 깊이 숨을 들이쉰 후, 제가 혼신의 힘을 다해 빚어낸 삼신불을 바라보았다
손꼽히는 걸작이라 자부할 만했다. 이토록 조각에 모든 혼백을 쏟아부었던 적이 언제였는지, 기억 속에서도 희미했다.
며칠이 흘렀는지조차 가늠할 수 없었다. 그저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는 것만 알았다. 다만 해가 여전히 하늘에 높이 떠 있다는 사실에 문득 의아함을 느낄 뿐이었다.
서연은 그런 생각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온 세상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을 향해 있다는 것을 그제야 알아차렸다.
경지에 이른 석공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들은 한없이 부드러운, 동시에 경외심이 가득 담긴 표정으로 서연을 바라보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대표로 나선 것은 나이 지긋한 노년의 석공이었다. 그는 서연에게 공대하는 것을 더없이 당연하게 여겼다.
그는 느릿하게 고개를 돌려 석공들을 응시했다.
곧, 주위에 둘러섰던 모든 석공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서연에게 예를 취했다.
새로운 지평을 연 종사(宗師)에게나 올릴 법한 인사였다.
*****
서연은 저녁 어스름이 깔리고 나서야 비로소 그 자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여드레 만에 정신을 차린 터라 허기가 극심했던 탓에, 식사를 겸해 석공들과 수많은 문답을 나누었다.
뛰어난 장인들과 나누는 대화는 그 자체만으로도 즐거웠다. 한마디 한마디에 견문이 넓어지는 기분이랄까.
나중에 잠에서 깨어난 화련이 찾아와 말을 걸지 않았더라면, 하루고 이틀이고 그곳에서 머무르며 대화를 계속했을 것이다.
그렇게 자리를 뜨려는데, 주변에 있던 행인들이 그림자처럼 서연의 뒤를 조용히 따랐다. 그 수가 물경 수백에 육박했으니, 실로 장관이었다.
서연은 설마 이토록 많은 인파가 자신을 뒤따르고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저 저녁때가 되어 다들 대로로 오가는 것이라 여겼을 뿐.
군중이 이토록 몰리면 으레 역모로 오인당하기 십상이다. 명망 높은 금룡상단주가 직접 나서서 행인들을 진정시키지 않았다면, 필시 무슨 일이 터졌을 터였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금룡상단주는 더없이 겸손한 행동거지로 서연을 마차로 이끌었다.
본래 첫날부터 우승자가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허나 이틀이 되고, 사흘이 지나 여드레 만에 완성본을 마주한 순간, 금룡상단주는 깨달았다. 이 분의 거취는 자신이 함부로 왈가왈부할 수 있는 범주를 아득히 넘어섰음을.
만약 이 분께서 노사나불의 수리를 기꺼이 맡아준다면 더할 나위 없겠으나, 설령 개인적인 사정으로 이를 거부하신다 한들 이쪽에서 어찌 할 도리가 없다는 것도 깨달았다.
황실에 있는 그 어떤 조각가를 데려온다 해도, 이 분의 편린에도 미치지 못할 것이라고 금룡상단주는 확신했다. 설령, 자신의 가문과 연이 깊은 청목족 조각가를 데려온다 할지라도 말이다.
실력자를 원하기는 했으나, 이 분은 그런 수준을 아득히 벗어난 존재였다.
당장 하늘에서 선녀가 내려왔다고 말하는 민초들이 수천에 달했으니 말이다.
이 소문이 북경에 닿는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눈에 훤해서 걱정도 되었다.
가장 큰 문제는, 금룡상단주 본인조차 그 소문에 내심 동의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영생을 산다는 청목족보다도 더욱 오랜 세월을 갈고 닦아야 비로소 이룰 만한 경지다.
도대체 어떤 예를 취해야 마땅할까. 금룡상단주가 속으로 고뇌하던 그때, 서연의 나직한 음성이 그의 귀를 파고들었다.
“우승자라 하여 너무 과한 예를 취하시면 제가 불편합니다. 편히 대해주세요.”
서연 입장에서는 지극히 당연한 말을 한 것이었으나, 그 말을 들은 금룡상단주는 짓눌렸던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살아온 햇수로 따지면 나는 갓난쟁이일진데.
배려심이 하해(河海)에 비견될 정도로 깊다. 셋째 아들 또한 이런 배려심에 탄복했던 것일까.
결국 금룡상단주, 금벽산은 얕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 하겠습니다. 아니, 그리 하겠소.”
서연은 그제서야 편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환갑은 훌쩍 넘은 듯한 노인이 존대하는 것이 내심 불편했기 때문이다. 허나 금벽산은 그조차도 겸양으로 받아들였다.
“삼신세불은 어찌 하실 요량이시오?”
“제가 가져가도 되는 것이었습니까?”
서연의 말에 금벽산은 다시금 감탄했다. 속세에서 빚어낸 것은 속세의 것이라 여기는가. 그토록 귀한 명물을 제 것이 아니라 여기는 마음가짐이 참으로 한량없었다.
그랬기에 금벽산은 다시금 존대를 늦추지 않았다.
“당연하지요. 작품의 거취는 응당 주인이 결정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서연은 그 말을 듣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분명 삼신세불을 집으로 가져가면 좋겠지만, 기왕 자신의 혼이 깃든 작품을 많은 이들이 보았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다.
서연이 물었다.
“용문석굴의 노사나불을 제가 고쳐도 되겠습니까?”
금벽산은 눈을 둥그렇게 뜨다가, 이내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하하, 하하하!”
서연은 그 웃음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속으로 고개를 갸웃거릴 뿐.
“말년에 참으로, 참으로 좋은 구경을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참으로 말을 기분좋게 한다 싶었다. 동시에 한 가지 기억이 서연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일전에 청허 스님을 만났을 때의 기억이었다. 돌이켜보니 그분 또한 말을 참으로 아름답게 하셨던 기억이 선명했다.
‘삼신세불은 소림에 줘야겠다.
이 정도라면 소림사에서도 거절하지는 않을 듯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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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림에는 매일같이 인파가 끊이지 않는다. 복을 빌거나 시주를 올리기 위함이다.
허나 요 근래 분위기는 조금 이상했다. 소림 방장께서 폐관수련에 드셨음에도 방문객의 수가 예년보다 이할 내지 삼할은 족히 늘었는데도 말이다.
방문객들의 얼굴에 만족의 기색이 아닌, 묘한 아쉬움만 서려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음, 역시 그 신물에는 미치지 못하는구나.”
“기대가 너무나 컸다.”
“사람의 솜씨로는 정녕 신선의 경지를 따라잡을 수 없는 것인가.”
소림의 자랑이자 대웅보전의 주존불(主尊佛)을 친견한 방문객들마다 하나같이 이런 탄식을 내뱉고 사라지니, 승려들은 당최 영문을 몰라 좌불안석이었다.
참다못한 몇몇 승려들이 조심스레 연유를 물으니, 그들의 입에서 흘러나온 이야기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낙양에서 열린 각예대회에서 선녀가 삼신세불을 직접 빚어냈는데, 그 신비로운 불상을 보고 난 후로는 소림의 주존불이 한낱 평범한 조각상으로 보인다는 것이었다.
소림의 십팔나한과 사대금강을 제외하고는, 여타 승려들은 방장의 허락 없이는 함부로 산문을 벗어날 수 없는 법.
고로 소문의 진위를 직접 확인할 길이 없으니, 며칠째 방문객들의 탄식에 시달리며 번뇌에 휩싸이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한두 명이라면 그러려니 넘겼겠으나, 찾아오는 이들마다 한결같이 선녀니, 신선이니 지껄여대니, 무시하는 것조차 어려울 지경이었다.
오늘 또한 그러했다. 해가 미처 떠오르지 않은 이른 새벽임에도 산문 밖이 소란스러운 기척으로 가득했다.
산문을 지키던 나한들이 눈을 들어 앞을 주시하니, 무명천을 걸친 무인들이 웬 마차 한 대를 조심스레 호위하며 다가오고 있었다.
높은 신분의 인물들이 제 신분을 감추고자 호위들에게 평범한 옷을 입히는 것은 강호에서 나름 흔한 일이었기에, 나한들은 당황하지 않았다. 허나, 그 무리 맨 앞에 선 무인의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나한들은 감히 입을 다물지 못하고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금룡상단주 금벽산의 동생, 금벽운(金碧雲)이 서 있었기 때문이다.
말이 동생이지, 금룡표국을 운용하는 실질적인 주인이나 다름 없었다.
“금룡표국주께선 어인 일로 오셨습니까?”
“형님이 긴히 부탁하여 이리 찾아오게 되었소. 지급(至急)이라더군.”
매우 급한 일이라는 뜻이다.
표국에게 급한 일이란 한가지뿐이니, 바로 대단한 표물을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운송하는 것이었다.
금룡표국주가 직접 나설 정도라면 보통 표물은 아닐 터. 어쩌면 물건이 아닌 사람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까지 미쳤다.
나한들의 표정이 복잡해지는 것을 읽었는지, 금벽운이 말했다.
“형님이 각예대회를 열었다는 소문은 들었을 것이오. 그때 만장일치로 수석을 차지한 걸작이 마차 안에 들어 있소이다.”
나한들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좁혔다. 며칠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각예대회 이야기에 이미 지긋지긋할 지경이었기 때문이었다.
‘설마 이곳까지 와서 자랑이라도 할 셈인가?
금룡표국, 아니. 그 뒤에 있을 금룡상단의 파렴치한 행각에 울화가 치밀어 오르려던 찰나, 금벽운이 다급히 이어 말했다.
“본디 작품은 제작자에게 귀속되는 법이나, 그 분께서 소림에 전해드리면 좋겠다 말씀하시어 이리 찾아오게 되었소이다. 내 확실치는 않으나, 소림 방장대사와 깊은 연이 있으신 분 같소.”
“쉬이 넘기기 힘든 말을 하십니다.”
금벽운은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소림의 나한당주(羅漢堂主)였다.
“각예대회에서 있었던 일은 익히 들었습니다. 약관이 겨우 넘었을 법한 여인이 삼신삼세불을 만들어냈다는 것도 말입니다. 실력이 뛰어난 것은 당연하겠으나, 그만한 연배에 방장님과 연이 있다는 말은 믿기 어렵습니다.”
오랜 기간 교류하여 서로를 이해할 수준이 되어야 깊은 연이라 부를 만 했다. 그리고 방장대사와 그만한 연을 쌓으려면, 못해도 고희(古稀)는 되어야 했다.
그러려면 그 여인은 육신의 세월을 되돌리는 노화순청은 물론이고, 인체의 시간을 거스르는 반로환동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뜻인데, 그만한 여고수가 존재했다면 천하에 이름이 알려져도 진작 알려졌을 것이다.
금벽운은 답답함을 느꼈다. 허나 이해하지 못할 말은 아니었다. 서연의 기행을 직접 보지 못했더라면 그도 같은 생각을 했을테니 말이다.
“일단 들어오시지요.”
나한당주는 표사들을 이끌고 내부로 향했다. 그때, 듬직한 체구의 승려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나한당주에게 정중히 반장(半掌)하고는, 금벽운과 표사들에게도 차례로 반장하며 예를 표했다. 표사 하나가 놀란 얼굴로 나지막이 외쳤다.
“방장제자 무율!”
“그렇게 불리기도 합니다.”
무율은 곧 금벽운에게 다가가 말했다.
“방장께서 참으로 좋은 선물을 받았다 전해드리라 하셨습니다.”
그 말에 금벽운의 얼굴에 놀라움이 스쳤다.
“그 말은, 드디어 폐관을 깨고 나오셨다는 뜻이오?”
허나 무율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설명을 들으니, 이따금 소림의 각주들과 제자들에게 전음을 보내 대화를 나눈다는 것이었다.
깊은 침음을 삼키던 금벽운은 표사들에게 손짓했다. 곧 마차 문이 열리며, 고운 비단에 감싸인 불상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면, 비단을 치우겠소이다.”
표물을 제대로 옮겼다는 확인을 받아야 했으니 말이다. 곧 표사들이 조심스럽게 비단을 걷어냈다. 곧 모습을 드러낸 삼신삼세불에, 금벽운은 내심 또 감탄했다.
‘볼 때마다 감탄스럽구나.
가끔씩 돈으로 그 가치를 감히 매길 수 없는 물건들이 있다. 금벽운이 생각하기에, 지금 눈앞의 불상이 그러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고개를 돌렸는데, 나한당주와 무율이 멍청한 표정으로 삼신삼세불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눈을 감고 한참 동안 염불을 외웠다. 아미타불.
그 시간이 무려 일다경에 달했다.
“……괜찮으시오?”
참다 못한 금벽운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때서야 두 승려는 깊은 숨을 토해내며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무율이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혹시, 태실산에 기거하는 분이십니까?”
삼신삼세불을 만든 자의 거처를 묻는 것이었다. 금벽운은 이를 알려주어도 될지 잠시 고민하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곧 무율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려왔다.
“……아직 찾아뵙지도 못했는데, 이리 깊은 가르침을 주시는군요.”
그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무율은 망설임 없이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나한당주는 제 무지함을 한탄하듯, 그러면서도 더없이 후련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아무래도 금룡표국주께서 하셨던 말씀이 옳았던 것 같습니다.”
방장대사와 깊은 연을 맺은 사람이 맞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이만한 귀물을 선뜻 내어주겠는가. 어쩌면 방장대사보다 배분이 높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한당주는 뇌리를 스쳐지나가는 무수한 깨달음과, 그 즐거움을 가까스로 참아내며 말했다.
“소림이 잘 받았다고 전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갑자기 바뀐 분위기에 금벽운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중에 듣기를, 둘 모두 깊은 깨달음을 얻어 폐관에 들었다고 했다.
*****
서연은 삼신삼세불을 조각한 후에도 계속 금진송의 집에 머물렀다. 금룡상단의 셋째 금진송 말이다. 나이 지긋한 금룡상단주와 계속 같은 자리에 있던 것이 불편했던 것이다.
못해도 할아버지 뻘은 되는 이가 이쪽을 상전 모시듯 하니, 도리를 아는 사람이라면 불편함을 느끼는 것이 당연했다.
“여기, 당과를 가져왔단다.”
금진송은 때때로 달콤한 당과를 가져와 화련에게 건넸다. 화련은 평소 고양이처럼 새침하게 굴다가도, 그럴 때면 당과를 군말 없이 받아먹었다.
시녀 교교는 그런 도련님의 모습을 보며 내심 한탄했다. 스승인 서연의 호감을 얻고자 제자인 화련부터 구슬리려는 의도가 빤히 보였기 때문이다.
허나 쑥맥인 것을 어찌하겠는가. 마음 같아서는 도와주고 싶었지만, 끔찍한 나이차로 도련님이 괜히 상처받을까 쉽사리 나서지 못했다.
서연이 직접 문 밖으로 나가 당과를 사올 수 없는 이유는 간단했다. 저택 문 앞에 인파가 너무나도 많았기 때문이다.
“제 아이를 한 번만 봐주실 수 있겠습니까!”
“정화수도 떠놓고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선녀님, 선녀님!”
금벽산은 서연의 거처를 철저히 감췄고, 각예대회에 참가했을 때 기록했던 신상정보 또한 즉시 폐기했다. 허나, 서연을 각예대회에서 안전히 빼내고자 금룡상단의 마차에 태웠던 것이 화근이었다.
그 이후 민초들이 금룡상단의 저택에 물밀듯이 몰려들어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자식의 복을 빌어달라는 이는 예사요, 서연을 스승으로 모시고 싶다는 이들 또한 적지 않았다.
상황이 이런지라 도무지 문밖으로 나설 수 없었다. 만약 이대로 노사나불까지 고치러 나갔다가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눈에 훤했다.
아무리 관리들이 용문석굴의 출입을 틀어막고 있다지만, 낙양에 사는 사람만 수백만이었다. 그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뚫고 용문석굴까지 가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다.
불가능하진 않겠으나, 고려해야 할 사항이 너무나도 많았다. 마차를 타야 했고, 행인들의 시선을 속일 가짜 마차도 여러 대 구해야 했으며, 동시에 티 나지 않게 은밀히 재료를 실어 나를 사람들도 물색해야 했다. 그 모든 일에 관아가 적극적으로 협조해야만 가능할 터였다.
그렇기에 서연은 못해도 몇 개월은 금진송의 별장에서 머물러야겠다고 짐작했다.
허나 서연이 예상하지 못한 것이 있다면, 낙양 부윤의 일처리가 상상 이상으로 뛰어났다는 것이다.
부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서연이 머무는 곳으로 직접 찾아왔다.
“황상을 모시는 관리인 탓에 섣불리 경어를 쓸 수 없는 것을 이해하시오.”
“지금처럼 편히 대해주시는게 제게도 편합니다.”
“음.”
서연의 말에 부윤은 감탄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겸손함에 마음이 움직인 것이었다.
낙양 부윤이 어떤 사람인가. 오도(五都)에서도 손꼽히는 낙양의 부윤은 지방관 중에서도 최고위직에 가까웠다. 어떤 면에서는 하남성의 총독보다도 권한이 많았으니, 그 힘을 짐작할 수 있겠다.
부윤은 서연을 잠시 쳐다보다가 말을 이었다.
“노사나불을 수리하는 것 이외에는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았다고 들었소.”
“맞습니다.”
“정녕 다른 것을 바라진 않소?”
서연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돈이 부족한가? 아니, 그렇지 않았다. 굳이 아쉬운 점을 꼽자면, 새로운 조각 재료를 구하고 싶은 것 정도였는데, 곧 받게 될 각예대회 상금을 대신하여 재료를 구하면 그만이었다.
“충분합니다.”
서연의 눈빛과 부윤의 시선이 허공에서 교차했다.
그렇게 세 호흡 정도의 짧은 시간이 흘렀을 때, 부윤은 서연이 진심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허어!”
부윤은 서연이 삼신삼세불을 만드는 것을 직접 보지는 못했다. 끝내야 할 일이 너무나도 많았기 때문이었다.
허나 믿음직한 친우와 수하들에게서 소문을 전해 듣고 나름대로 결론을 내린 상황이었다. 그리고 지금의 간단한 문답을 통해 완전히 결론을 굳혔다.
‘진정으로 어떤 대가도 요구하지 않을 사람이로다.
어느 정도는 남에게 보이기 위해 꾸며낸 모습일 것이라 단정하여, 금은보화를 비롯한 온갖 진귀한 재료들을 예비해 왔건만.
서연의 티 없는 진심 앞에 부윤은 내심 부끄러움을 금치 못했다. 더 이상 지체할 이유가 없음을 직감한 그는,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기로 마음먹었다.
“본관이 준비는 모두 끝내놓았소. 재료는 이미 전부 옮겨두었고, 참장(參將)과 이야기도 마무리했소. 당시 기록이 담긴 문건들도 준비되어 있으니, 준비되면 언제든 출발하면 되오.”
이미 금룡상단의 것으로 위장한 마차 수십 대를 낙양 곳곳으로 보내놓았다. 서연과 비슷한 복장으로 위장시킨 여인들을 섬서를 비롯한 온갖 곳으로 보내 시선도 분산시켰다.
그뿐이랴. 참장의 병사들이 민초로 변장하여 용문석굴 주변을 빼곡히 둘러싸고 있으니, 적어도 달포 간은 그 누구도 감히 접근하지 못할 터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금룡상단 문 바깥으로 나서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당장 지금도 문 앞에 수많은 민초들이 웅성이고 있었으니까.
허나 부윤은 그런 것조차 당연히 염두에 두었다.
“금룡상단의 모든 별장에는 외부와 연결되는 비밀통로가 있소.”
다른 사람도 아닌 금룡상단주 본인에게 직접 전해들은 사실이었다.
부윤은 자리에서 일어선 다음, 서재 한편에 빼곡히 쌓인 책들을 더듬었다. 이내 어느 책 한 권을 잡아당기자, 기관이 작동되는 듯한 묵직한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어둠 속으로 이어지는 통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통로 천장 중간중간에는 값비싼 야명주(夜明珠)가 밝게 빛나고 있었는데, 그 길이가 못해도 백 장은 족히 넘어 보였다.
“저 끝에 마차가 있소이다.”
서연은 부윤과 함께 길을 나섰다.
*
비밀리에 준비된 마차를 타고 용문석굴 입구에 당도했을 때, 서연은 이미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용문석굴을 수비하던 병사들의 얼굴에 묘한 두려움이 서려 있었기 때문이다. 잘 닦인 병장기에서부터 이들이 정예병임을 알 수 있었으나, 그들의 눈빛에는 이해할 수 없는 공포가 드리워져 있었다.
곧 무관 하나가 다급히 달려왔다. 그는 서연과 부윤을 번갈아 살피더니, 난감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당장 들어가시는 것은 힘들 것 같습니다.”
뜬금없는 말에 부윤이 미간을 좁혔다. 못해도 천 명은 족히 되는 병사들이 이곳을 지키고 있을텐데, 도대체 어찌하여 들어가지 못한단 말인가.
무림인? 어불성설이다. 하남, 그것도 낙양에서 어떤 정신 나간 무림인이 감히 관부(官府)의 통제를 거스르겠는가.
남은 가능성은 오직 하나. 부윤보다 높은 자가 방문을 금한 것뿐이었다.
“혹 군왕(郡王)께서 방문하시기라도 했는가?”
무관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갑자기 노사나불 옆에 산군이 나타났습니다.”
“……산군이라니?”
뜬금없는 소리에 부윤은 허탈한 숨을 토해냈다. 낙양을 지키는 정예병들이 고작 짐승 따위에 겁을 먹었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무관은 변명하듯 덧붙였다.
“크기가 세 장도 넘게 커졌다가, 그림자 속에 숨어 사라졌다가, 정신을 차리면 다시 전혀 다른 곳에서 튀어나오는 탓에 도저히 잡을 수가 없습니다.”
그의 말만 들으면 병사들이 단체로 환각(幻覺)에 걸리기라도 한 듯했다.
그때 서연이 조용히 물었다.
“혹시 백호였습니까?”
그는 반말을 하려다, 서연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저도 모르게 존대했다.
“그랬던 것 같습니다.”
“눈은 파란색이었고요?”
“그것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곧 서연이 안도했다는 얼굴로 말했다.
“제가 잘 아는 범 같은데, 들어가서 확인해봐도 되겠습니까?”
잘 아는 범이라는게 성립이 가능한 문장이었던가.
“…….”
순간 분위기가 묘해졌으나, 서연만 깨닫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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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의 실랑이가 있었으나, 서연은 이내 용문석굴의 깊숙한 곳으로 발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만에 하나 있을 상황에 대비하여 마흔 명 남짓한 병사들이 옆에 붙은 덕분이었다.
용문석굴 내부의 기운은 숨 막힐 듯 무거웠다. 허나 이는 두려움이라기보다는, 언제라도 어둠 속에서 짐승이 튀어나올지 모른다는 팽팽한 긴장감에 가까웠다.
“아주 작은 그림자 사이에서도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그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육안으로는 쫓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런 증언이 들려올 때마다 서연은 백호임을 확신했다. 천하에 어찌 이리 신묘한 범이 둘씩이나 존재할 수 있겠는가.
애초에 두려워하기에는 너무나 오랜 세월을 함께했다.
그런 상념에 잠겨 얼마를 걸었을까, 멀지 않은 곳에서 병사들의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다들 날카로운 창날을 치켜들고 한곳을 겨냥하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부서진 노사나불이 있는 방향이었다. 정확히는, 그 앞에 태산처럼 앉아있는 거대한 백호를 겨누고 있었다.
“무슨 크기가!”
“저 정도면 산신령 아닌가?”
무지한 병사들이 떠들어대자, 무관들이 엄한 눈빛으로 주의를 주었다. 섣불리 공격하는 병사는 없었다. 백호가 보란 듯이 쩍 벌어진 입으로 하품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적의 없는 맹수를 공격하여 분노케 할 만큼 어리석은 자는 적어도 이곳에는 없었다. 다만, 맹수이기에 경계할 따름.
백호는 잠시 코를 킁킁거리더니, 돌연 고개를 어딘가로 치켜들었다.
“어어, 움직인다!”
“으아아악!”
“막아라!”
백호는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날카로운 창의 숲을 단 한 걸음에 뛰어넘고는, 서연의 눈앞에 의연히 착지했다.
서연은 자신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거대한 백호를 올려다보며 속으로 되뇌었다.
‘어째 그새 곱절은 커진 것 같구나.
손을 하늘로 치켜들어야 겨우 백호의 얼굴에 닿을 정도였으니, 그 크기가 짐작 가는가.
‘아직 다 자란 것이 아니었구나.
놀랍게도 그 압도적인 크기에도 불구하고, 아직 성체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무, 물러나십시오!”
서연의 곁에 있던 무관이 다급히 검을 뽑아들었다. 서연은 무관을 향해 손을 내밀며,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곧, 백호가 거대한 얼굴을 서연에게 마구 비벼대기 시작했다. 서연은 백호의 등과 목덜미를 정겹게 쓰다듬었다.
“이게 대체 무슨…….”
아예 넙죽 드러누워 배를 보이며 뒹구는 백호를 본 무관은 황망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저 여인이 대체 누구인지 당장이라도 부윤께 여쭙고 싶었으나, 감히 무례를 범할 수 없어 입술만 꾹 다물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 크기부터 가히 영물이라 칭해도 부족함이 없는데, 심지어 사람의 말도 알아듣는다. 저만한 산군을 아무렇지 않게 부리는 인물이 어찌 보통 사람이겠는가.
그러거나 말거나, 서연은 한참 동안 백호를 쓰다듬었다.
“도와주러 왔구나.”
노사나불의 크기는 5장이 족히 넘는다. 나무로 된 사다리도 쉽게 버티지 못할 높이였다. 결국 절벽에 매달린 채로 작업해야 했는데,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다.
허나 백호가 도와준다면 그보다는 쉽게 해낼 수 있을 터였다.
이내 백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서연은 단숨에 백호의 등에 올라탄 다음, 노사나불이 있는 방향으로 향했다.
이번에는 그 어떤 병사도 감히 앞을 막아세우지 못했다.
*****
서연은 조급히 작업을 시작하지 않았다. 창작이 아닌 복원이기에, 가벼운 마음가짐으로 임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마치 검술을 복원하듯, 창작자의 의도부터 헤아려야만 했다.
그런 심정으로 노사나불의 겉면을 더듬던 서연의 손끝에, 무언가 이상한 감각이 전해졌다.
‘다르다.
옷 주름을 새길 때의 강약과 팔을 조각할 때의 새김의 깊이가 확연히 달랐다. 보통 사람이라면 결코 알아챌 수 없었을 미세한 차이였으나, 서연은 그것을 구분할 수 있는 비범한 안목을 지니고 있었다.
곧 서연은 어깨를 만든 석공과 손가락을 다듬은 석공과 바닥 장식을 새긴 석공까지 모두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못해도 수십 명의 석공들이 힘을 합쳐 완성한 작품이었던 것이다.
‘쉽지 않겠다.
타인의 의도를 완전히 꿰뚫어 보아야 하니, 그 난이도가 실전된 절학을 익히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때 문득 서연의 뇌리에 청허대사의 말이 스쳐 지나갔다.
―서책을 쓰는 것이 좋겠소.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지 않고, 시주께서 직접 말이오.
서연은 그제서야 자신이 서책을 쓰겠다고 마음만 먹었을 뿐, 여태껏 딴 짓만 해왔음을 깨달았다. 동시에 이번 노사나불 복원이야말로 그 서책을 쓰기에 아주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는 것도 깨달았다.
타인의 대작, 그것도 이만한 크기의 조각을 복원하는 작업은 다시는 없을 귀한 경험이 될 터이니 말이다.
서연은 문방사우가 구비된 책상을 보다가 말했다.
“빈 책 한 권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무엇에 쓰려 하시오?”
부윤은 이전보다 훨씬 조심스러운 기색이었다. 방금 전까지 산군의 등에 타고 있던 이를 어찌 예전처럼 대할 수 있겠는가. 오히려 그것을 감안하면 부윤은 대단히 담대한 편에 속했다. 당장 지금만 해도 백호가 움직일 때마다 수많은 병사들이 움찔거리고 있었으니 말이다.
“복원하는 방법을 기록해두려 합니다. 훗날 이와 같은 일이 또 생길 수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부윤은 서연에게 어린 제자가 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는 서연의 속 뜻을 읽어내고는 잠시 고민에 잠겼다.
“한 권을 이쪽에서 필사하게 해 주시오. 그대의 말대로 어디서 또 이런 일이 생길지 모르니 말이오. 허나 원본은 그대 마음대로 해도 좋소.”
“그래도 되겠습니까?”
“그러면 그 책을 고스란히 우리에게 넘겨줄 생각이었소?”
“그리 명하신다면 그리해야지요.”
부윤은 이제 감탄사를 내뱉을 힘조차 없었다. 여드레 내내 끼니와 잠을 잊고 오직 조각에만 몰두한 여인이 집채만한 범을 제 수족처럼 부리는 것으로 모자라 물욕마저 없다.
‘진정 신선 아닌가.
불교나 도가에서 천상의 존재들이 어린아이, 노인, 혹은 여인의 모습으로 지상에 나타나 속세의 고관대작들을 골려주는 설화가 한두 가지가 아니었기에 든 생각이다.
‘아.
부윤은 문득 어지러움을 느껴 황급히 자리를 피했다. 이 이상 머물렀다가는 황상께 불경한 마음을 갖게 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서연은 부윤이 준비한 기록들을 읽고 확인하는 데 꼬박 반나절을 소모했다. 목차는 어떠한지, 그림은 어떠한 상황에 그려 넣었는지, 심지어는 문체까지 하나하나 꼼꼼히 살폈다.
개중에는 특이하게도 무공서와 흡사한 서책도 있었다.
‘특이하게 혈자리를 다 그려 놓았구나.
조각칼을 내리칠 때 어느 혈자리에 힘을 주어야 하는지, 또 어떻게 깎아야 가장 효율적인지 적혀 있는 기록들이 적지 않았다. 보아하니 먼 과거에는 무림인 중에 취미로 석공 일을 하던 기인들이 적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보통 서책은 아니다.
서연은 서책을 읽던 도중 문득 떠오른 구결을 되뇌었다.
‘정중견진 보시자비(靜中見眞 普施慈悲).
소란에서 벗어나 참된 자신을 보고, 자비로운 마음을 품어라. 유독 선명하게 뇌리에 새겨진 탓에 기억에 남았다.
생각해보면 조각을 할 때에 마음가짐까지 신경 썼던 적은 손에 꼽았던 것 같았다. 그저 집중하면 족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것도 가르치면 좋겠다 싶어 빈 서책에 옮겨 적었다.
문득 서연의 심장이 걷잡을 수 없이 요동쳤다.
본디 서연은 조각 그 자체를 하나의 심공으로 삼았다. 타고난 재능과 속세와 동떨어진 환경 덕에 무의식적으로 터득한 것이었다. 그랬기에 정해진 구결이랄 것도 없었고, 당연히 그것을 가르치는 것도, 배우는 것도 불가능했다.
허나 지금, 심공의 첫 구결이 선명히 새겨졌다.
무맥의 발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름을 정해야겠다.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을 담게 될 터이니, 운월정공(雲月淨功)이라거나 벽해진공(碧海眞功)과 같은 그럴싸한 이름들이 뇌리를 스쳤다.
허나 이내 그만두었다. 그저 조각에 몰입하며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을 담은 서책에 불과할진대, 무슨 그리 거창한 이름을 붙이랴.
서책을 만들기로 결정했을 때의 마음을 되새기는 것으로 족했다.
서연은 화련을 처음 만났을 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때 어떠한 생각을 했던가.
제 제자가 세상으로부터 자유로웠으면 했다.
하고 싶은 일을 전부 할 수 있었음 했다.
‘비연천공(飛鳶天功)이라 해야겠다.
하늘을 나는 기러기처럼 자유롭게 세상을 거닐라는 뜻이다.
이후 서연은 노사나불의 복원을 재개했다. 그 과정에서 깨달음이 찾아올 때마다, 빈 서책에 비연천공의 빈 부분을 조금씩 채워나가기 시작했다.
하늘에 닿은 오성이 불세출의 신공의 창안을 부채질했다.
서연은 시간이 평소보다 느리게 흘러간다고 느꼈다. 그 정도로 몰입한 것이다.
‘여기서는 이렇게 했구나.
옛 장인들의 흔적을 더듬으며 그들의 자세와 움직임을 읽어냈다. 그러한 움직임들 또한 비연천공에 담으려 했으나, 이내 생각을 바꾸었다. 차라리 움직임만을 따로 모아 새로운 책에 집필하는 것이 나으리라 여겨졌기 때문이다.
비연천공에는 오직 마음가짐에 해당하는 것만을 적는 것이 옳다는 생각을 했다. 심법이라는 뜻이다.
심법이라 하니 거창하게 들리지만, 어찌 무림인만 마음을 가다듬겠는가. 농부든, 석공이든, 상인이든, 속세의 번뇌에 흔들리지 않으려면 결국 마음의 중심이 오롯이 서야 하는 법이다.
노을이 저물고 땅거미가 선명해지며, 다시 아침 해가 떠오르기를 반복했다.
그러한 시간 속에 비연천공에 새겨지는 글자 또한 늘어갔다.
서연은 이따금 금진송의 거처로 돌아가 화련과 식사를 같이하고, 가르침을 베풀기도 했다. 삼신세불을 만들 때처럼 단기간에 끝낼 수 없는 작업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비연천공을 거의 완성했을 때, 서연은 여기서 더 나아갈 수 없음을 직감했다.
재능이 부족했던 것이 아니다. 다만 경험이 부족했다.
오랜 세월 홀로 자연 속에 은거하며 살았기에 심공을 창안할 수 있었으나, 역설적으로 그렇기에 도리어 글로는 다 풀어낼 수 없는 부분이 많았다.
홀로 깨닫기에는 충분했으나, 남을 가르치고 이해시키기에는 부족했던 것이다.
서연은 동시에 왜 달마대사나 장삼봉 같은 대종사들이, 또 소림사의 승려들과 구파의 도인들이 강호무림을 주유했는지를 깨달았다.
직접 걷고 보아야만 느낄 수 있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당장 지금도 그러했다. 노사나불을 눈으로만 보았을 때와, 직접 만지고 복원했을 때 얻는 것은 천지 차이였다.
다른 석공들이 겪었을 고뇌와 고찰을 읽고, 그것을 정리하는 것만으로도 얻는 바가 이리 컸다. 가까운 낙양에서도 이러할진대, 강호 사방의 다른 곳에서는 또 어떠할지 궁금했다.
북경의 석공들이 그리 뛰어나다던데, 그들은 어떠할까. 옛 남방의 석공들도 실력이 뒤지지 않는다 들었다. 운강석굴의 불상도 그리 웅장하고, 또 머나먼 북해에서는 아예 얼어붙은 폭포에 그림을 새겨 넣는다고도 했다.
서연은 다시금 복원에 전념했다.
강호를 두려워하던 여인은 이제 없었다.
*****
- 가고 싶은 곳은 정했느냐?
“일단은 사천이나 운남을 생각하고 있어요.”
- 운남? 듣자하니 모산파로 돌아갈 생각은 아예 없는 모양이구나.
“적어도 몇 년은 더 기다려야 괜찮을 듯 싶어서요. 제가 갑자기 나타나 봐야 어머니만 힘들어하실 거에요.”
금진송의 별장에 위치한 마루였다. 화련과 유혼이 마주보고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서연이 노사나불 복원을 거의 마무리하고, 여행을 떠나자고 이야기했던 것이 불과 하루 전의 일이었다.
서연은 화련으로 하여금 목적지를 정하도록 했다. 기왕이면 어린아이가 가고 싶어 할 만한 곳으로 가면 좋겠다는 생각에서였다.
물론 화련은 어린아이가 아니었기에, 최대한 스승의 마음을 헤아리려 했다.
사천에는 옛 조각가들의 뛰어난 작품들이 즐비했고, 운남에는 대리석의 발원지인 대리국(大理國)이 있었다. 이 두 곳을 목적지로 정한다면 서연의 가르침을 더욱 원활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결국 운남을 가려면 사천을 거쳐야 하니, 결과적으로는 둘 다 가겠구나.
“그렇게도 되겠네요.”
화련은 제 말투가 어린아이처럼 바뀌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너무 오래 어린아이 행세를 하다 보니 예전 말투가 더 부자연스러워진 것이다. 요즘 들어 하루에 한 번꼴로 당과를 먹게 된 것도 그러한 연유였다.
문득, 화련은 제 키가 그동안 조금도 크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마침 유혼도 옆에 있겠다, 화련은 제 궁금증을 해소하고자 했다.
“혹시 키는 안 크나요?”
- 자고로 어릴수록 기경팔맥이 수월하게 순환하는 법. 주인님의 무학을 익히려면 지금처럼 어린 편이 좋다.
당연한 이야기였으나, 화련은 왠지 유혼이 대답을 회피하려 한다고 느꼈다.
“저는 키가 조금 컸으면 좋겠는데요.”
- 갈(喝)!
유혼이 일갈했다. 그는 진심으로 분노한 기색이었다.
- 자고로 중요한 것은 내적인 성장이거늘, 어찌 허물에 불과한 외적인 것에 집착하느냐! 내 너를 그리 가르치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래도 꾸준히 자라는 편이 주변 사람들이 보기에 자연스럽지 않을까요?”
잠시 침묵이 일었다.
- 더 어리게 만들어주랴?
화련은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
유혼은 진정 그러고도 남을 짐승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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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한 여고수가 있다. 서연의 상상 속에서 방금 만들어 낸 여고수다.
이 여고수는 언제나 삿갓과 면사로 얼굴을 가리고 다니는 탓에 나이를 짐작할 수 없었다. 그뿐이랴, 무기도 차고 다니지 않는 탓에 무슨 무공을 익혔는지조차 파악하기 힘들다.
그녀의 특징이라곤 오직 영물들을 데리고 다닌다는 것인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중원 무림에 영물을 대동하고 다니는 여고수가 있었다면 소문이 나도 진작에 났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모순을 해결할까.
서연은 이 여고수가 사실 일인 전승 신비문파의 일원이었다고 설정하면 될 것이라 생각했다.
속세와 동떨어진 삶을 살아왔을 테니 위명이 알려지지 않은 것도 납득할 수 있었다. 어쩌면 먼 과거에는 유명했으나, 금분세수(金盆洗手)를 마치고 강호 무림에서 벗어난 노강호일 수도 있겠다.
젊은 용모야 반로환동했다고 여기면 될 것이다.
이 여고수는 기본적으로 선한 성향을 가졌지만, 속세에는 최대한 개입하지 않으려 한다. 굳이 소속을 따지면 백도에 속한 무인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렇게 생각하니 금분세수를 마치고 강호 무림에서 벗어난 노강호 쪽 설정이 더 나아 보였다. 속세에 개입하지 않으려는 이유가 명확하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배경을 결정했으니 이제 사용하는 무공과 무기를 정해야 한다. 본래 이런 것은 상세할 수록 좋았다.
근력이나 골격 구조 같은 기본적인 면에서 사내가 여인보다 우위에 서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강맹한 외공이나 중병기를 다루는 데 있어 이러한 차이는 더욱 두드러지니, 여고수들은 힘보다는 기술과 속도, 정교함을 살릴 수 있는 무기를 사용하곤 했다. 상상 속 신비의 여고수 또한 그러할 터였다.
세검(細劍), 연검(軟劍), 비도, 암기, 채찍, 편(鞭), 쌍검, 선(扇)…….
서연은 채찍과 편은 제쳤다. 경박해 보였기 때문이다. 쌍검은 조금 끌렸으나, 서연 자신이 그만한 길이의 검을 차고 다닐 자신이 없었기에 제했다. 검과 연검도 같은 이유로 제하니, 결국 남은 것은 비도와 암기, 그리고 부채뿐이었다.
비도와 암기는 어느 정도 다룰 자신이 있었다. 조각칼과 길이가 비슷했기 때문이다. 허나 여고수가 비도와 암기를 다룬다면, 기품이 없어 보일 뿐만 아니라 자칫 사파나 마도의 인물로 비춰질 수 있었다.
그렇다면 결국 남은 것은 부채뿐이다.
부채는 장점이 많았다. 평상시에 들고 다녀도 시선이 끌리지 않았으며, 얼굴을 반쯤 가리고 부채질만 해도 고수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검은 한 번만 휘둘러도 허접함이 훤하게 드러나지만, 부채는 아무래도 그럴 일이 상대적으로 덜했다. 부채를 무기로 쓰는 무림인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끔 부채질하는 척 손끝에 기운을 모아 두꺼운 나무 한두 그루만 베어내도 굳이 고수 연기를 할 필요도 없을 터였다.
‘그러면 진짜 고수 아닌가?
서연은 문득 드는 생각에 미간을 좁혔으나, 이내 그만두었다.
어디 강호 무림이 나무 한두 그루 베어 넘길 줄 안다고 끝나는 곳이던가. 무림과 엮이면 온갖 사건 사고에 연루되기 마련이며, 이때의 사건사고란 해결하지 못하면 불구가 되거나 죽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고 성공하면 좋으냐?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더 큰 사건 사고에 엮이는 시발점이 되곤 했다. 고로 무림이란 한 번 발을 담그면 죽거나 불구가 될 때까지 영원히 빠져나올 수 없는 지옥도(地獄圖)나 다름없다고 할 수 있겠다.
거기까지 생각을 마친 서연은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실없는 생각을 하다 보니 몸의 떨림도 잦아들고, 긴장도 풀렸다. 심신의 평안을 되찾은 채로 무림인들을 내려다보자, 진짜 자신이 상상 속 여고수라도 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진짜로 거짓말로 속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자고로 거짓말은 언젠가 발각되기 마련이었으니, 끝까지 속일 자신이 없다면 아예 시작도 않는 것이 옳았다. 하지만 저들이 멋대로 착각하는 것까지는 막을 생각이 없는 서연이었다.
마침 품속에 부채 하나가 있었다. 대나무를 잘라 직접 만든 죽선(竹扇)이었다. 서연은 다른 것은 몰라도 무언가를 만드는 데에는 탁월한 재주가 있다고 자부했다. 실제로 여고수를 본 적은 없었으나, 이만한 부채라면 여고수가 들고 다니기에 부족함은 없어 보였다.
마침 새벽비도 멎었겠다, 서연은 품속에서 부채를 꺼내 가볍게 쥐었다. 이내 바로 옆에 있던 두꺼운 소나무를 향해 부채를 휘저으니, 소나무들이 두부처럼 숭덩숭덩 잘려 나갔다. 이는 서연 나름의 기선제압이었다.
“…….”
무림맹 단원들의 얼굴은 더욱 창백해졌다.
서연은 소나무를 마저 자른 다음, 큼지막한 통나무들을 의자라도 되는 양 모닥불 주변에 절묘하게 떨어뜨렸다.
탁! 탁! 탁!
나무토막들은 오죽 무거웠는지 땅바닥에 놓이자마자 땅을 깊이 파고들었다.
이쯤 기다렸는데도 아무 말도 들려오지 않자, 서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앉아서 이야기하는 것이 좋을 듯 한데, 어찌 생각하시는지요.”
그제야 백호가 기운을 거두었다.
화악!
짓눌릴 듯한 위압감에서 벗어난 무림맹 단원들을 헛숨을 뱉어내며 서연을 노려보았다. 이 와중에도 공포감에 사로잡히기보다 싸울 준비부터 하는 걸 보니, 과연 무림맹의 정예라 할 만했다.
“서서 이야기할까요?”
무림맹 단원들은 장산을 바라봤다. 어떻게 해야 할지를 묻는 것이다. 장산은 서연을 위아래로 살피다가 이런 결론을 내렸다.
‘터무니없구나.
당최 뭐 하는 여인이길래 저만한 기운을 쉬지 않고 뿜어댄단 말인가? 다른 건 몰라도 내공 하나만큼은 맹주님과 비교해도 밀리지 않을 것 같았다.
나무의 단면도 마치 종잇장처럼 깔끔했다. 저것을 검도 아닌 부채로 저렇게 만들려면 도대체 얼마나 심후한 내공이 있어야 하는 건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뿜어져 나온 기운에서 패도적이거나 사악한 기운은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말투도 정중하니, 사마외도나 흑도일 가능성도 낮아 보였다.
당장 생각나는 것은 화산의 검후(劍后). 허나 검후가 부채를 사용한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애초에 목소리부터 달랐다. 그 외에도 몇몇 고수들이 장산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으나, 마땅한 답은 찾지 못했다.
‘인명부에도 기록이 없는 여고수.
장산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을 노강호일 가능성이 가장 높아 보였다.
‘반로환동, 어쩌면 이종(異種)의 혼혈일 수도 있겠다.
전자보다는 후자 쪽이 더 그럴듯해 보였다. 반로환동한 고수라면 까마득한 후배들에게 경어를 쓰지는 않을 터이니 말이다.
‘꼭 그렇지도 않나?
곧 결심을 마친 장산은 한숨을 내쉬다가 납검(納劍)했다. 소림부터 들를 것을 후회해도 이미 늦었다. 공연한 직업병이 도져 호랑이굴, 아니. 용둥지에 제 발로 걸어 들어온 셈이었다.
“……앉겠습니다.”
무엇보다 이대로 계속 서 있다간 어디 한 군데라도 잘려 나갈 것만 같았다. 백도의 고수라고 어디 자비롭기만 하겠는가. 오히려 백도야말로 이런 면에서는 칼 같은 법이었다.
곧 맹원들이 꺼진 모닥불 앞에 둥글게 둘러앉았다. 장산은 예를 갖춰 입을 열었다.
“선배님, 저는 무림맹 칠조 조장, 장산이라고 합니다.”
“무림맹……?”
“예, 선배님. 여기 맹원임을 상징하는 징표와 맹주께서 주신 명령서도 있습니다.”
“그, 이 깊은 산골에는 무슨 연유로?”
어쩐지 말소리가 작아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으나, 장산은 애써 내색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소림사에서 맹에 도움을 청했습니다. 방장대사께서 폐관에 드셨고, 나한들 또한 대부분 하남 바깥에서 임무를 수행 중이라 하니, 그때까지만이라도 도움을 달라 청하여 이리 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일월상단 분들을 잡고 심문했던 건.”
“사마외도(邪魔外道)와 연루된 줄 착각하여, 저희가 큰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
서연은 난감한 표정으로 맹원들을 바라보았다. 어째 폭력을 쓰지 않을 때부터 이상하다 했더니, 설마 무림맹이었을 줄은 몰랐다.
서연이 침묵하고 있자, 눈치를 보던 장산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실례되지 않는다면, 존함을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예상보다 더 심각한 상황에 서연은 정신이 아찔해져 미처 대답하지 못했다. 안타깝게도 장산은 그런 깊은 내막까지는 알지 못했다. 여고수가 입을 닫고 있으니 화가 난 것이라 착각하여 사과부터 했다.
“죄송합니다. 금분세수 하셨을 선배님의 존함을 여쭙는 것이 무례였음을 미처 생각지 못했습니다."
서연은 눈만 껌뻑였다. 이쯤 되니 그녀도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선배님이라니. 어쩌다 보니 무림맹을 기만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이러다 자칫 사기꾼으로 몰려 옥살이라도 하게 될까 염려부터 앞섰다.
서연은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다가, 다른 사람들처럼 나무토막 위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러고는 이전보다 훨씬 정중한 어투로 말했다.
“소인은 서연이라 합니다."
서연은 맹원들을 차례로 돌아보며 나지막이 일렀다.
"맹원 분들께서 소인를 무어라 여기시는지는 모르오나, 소인은 그저 산중에 홀로 기거하는 여인일 뿐입니다. 무공도 익힌 적이 없으니, 여러분께 선배님이라 불릴 자격도 없습니다. 상인들을 따라나섰던 것도 여러분들께 해코지를 당할까 염려되었기 때문이니, 부디 용서하십시오.”
그렇게 설명했음에도 맹원들의 표정은 여전히 괴상했다. 설명이 부족했나 싶어 서연은 덧붙였다.
“……궁금한 것이 있으시다면 얼마든지 답해드리겠습니다.”
가장 왼쪽에 있던 여인이 손을 들었다.
“선배님, 후배는 제갈혜(諸葛慧)라고 합니다.”
“선배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그럼 서연 님, 혹여 나무는 어찌 자르셨는지요?”
“별 볼일 없는 잡기(雜技)일 뿐입니다. 여러분의 시선을 현혹하여 고수 행세를 하려 했으나, 상황이 이리 되었으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잡기요……?”
“예.”
“혹시, 한 번만 더 보여주실 수 있겠습니까?”
서연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일어서서 소나무 쪽으로 다가갔다. 속일 마음이 없었기에, 이번에는 부채도 없는 맨손이었다. 맹원들이라면 뛰어난 무인들일 터이니 알아서 잘 분별하리라는 마음도 있었다.
서연은 좌장으로 소나무를 친 다음에 잠시 기다렸다. 서연이 생각하기에, 그건 공격이라기보다는 엉망진창의 헛짓거리에 가까웠다.
의(意)도 없고, 형(形)은 지리멸렬(支離滅裂)했다. 거대한 나무가 쉽게 잘려나가니 겉보기에는 그럴듯해 보일지 모르나, 어찌 이따위 움직임을 무공이라 할 수 있겠는가. 차라리 저잣거리에서 파는 삼류 무공이 이보다는 깊은 뜻을 품고 있을 터였다.
그렇기에 이것은 잡기(雜技)에 불과하다.
서연의 자조(自嘲)가 무색하게도, 소나무는 힘없이 동강났다.
“…….”
맹원들은 침묵에 잠겼다. 서연은 개의치 않고 말했다.
“질문 계속 하셔도 됩니다.”
이번에는 다른 사내가 손을 들었다.
“……그러면 저 범은 선배님께서 직접 키우시는 것입니까?”
“키우는 범은 아닙니다. 어쩌다보니 인연이 닿아 함께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선배라 부르는 것은 그만두셨으면 합니다.”
“……죄송합니다.”
마침 백호가 다가와 서연의 얼굴에 거대한 머리를 마구 비벼댔다. 서연은 대화에 집중해야 했기에 백호를 적당히 쓰다듬다 밀어냈지만, 그 모습을 본 맹원들의 얼굴은 더욱 창백해졌다. 아예 새파랗게 질려 버린 인원도 적지 않았다.
장산이 손을 들었다.
“그러면 서연 님께서는 태실산에 사시는 겁니까?”
“예. 제자 한 명, 백호 하나, 올빼미 하나를 데리고 살고 있습니다.”
“실례지만 혹 소림과는 이야기가 되어 있으신지요?”
서연은 잠시 고민하다 답했다.
“제가 소림을 잘 알지는 못하나, 소림의 청허 스님과 이야기를 나누긴 했습니다.”
“…….”
이내 장산 역시 입을 다물었다. 서연은 얼마간 더 기다리다가 입을 열었다.
“더는 질문 없으시다면, 저도 몇 가지 여쭈어도 될는지요?”
“얼마든지 물어보십시오.”
장산의 자세는 어쩐지 이전보다 더욱 공손해 보였다.
“하남에 파견 나오셨다 들었는데, 일이 그리 심각한가요? 듣자 하니 아랫동네에서는 어린아이가 서른 명도 넘게 사라졌다고 하더군요.”
장산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굳은 얼굴로 답했다.
“문제가 있어도 없게 하겠습니다.”
“예?”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러니 안심하십시오.”
장산은 놀랍게도 이마에서 땀을 흘리고 있었다.
서연은 감탄했다. 이 으스스한 날씨에 땀을 흘리는 장산을 보며 놀란 것이 아니었다. 이 세계의 무림맹이 참으로 제대로 된 집단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수하들이 저렇게 행동하는 것을 보면, 맹주가 어떤 사람인지는 굳이 만나볼 필요도 없었다.
분명 중원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협객일 것이다.
“참으로 다행입니다.”
“……그리 생각해주시니 저희도 감사할 따름입니다.”
“마지막으로 한 말씀만 드려도 되겠습니까?”
“말씀하십시오.”
“일월상단 분들을 깨워서 잘 돌려보내고, 따로 사과도 해주셨으면 합니다. 여러분의 행동이 잘못되었다 말하는 것은 아니오나, 무고함이 밝혀졌다면 사과하는 것이 인간된 도리라 생각합니다.”
“……예.”
"여러분들을 보니, 무림맹의 미래가 참으로 밝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감사, 합니다."
고개를 열렬히 끄덕이는 장산과 맹원들을 보며, 서연은 이리 용기 내어 나서기를 참 잘했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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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산과 무림맹 단원들은 최대한 빠르게 태실산에서 멀어졌다. 노망난 노강호가 갑자기 자신들을 불러세워 협박을 겸한 일장 연설하지 않을까 두려웠던 것이다.
노망났다는 표현이 적절할지는 모르겠으나, 그만한 지법(指法)을 익혔으면서 스스로를 일반인이라 주장하는 인간이 정상일 것 같지는 않았다. 그 정도로 뻔뻔해야 비정한 강호에서 당당히 금분세수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으니 말이다.
알 수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조금이라도 빨리 이곳을 탈출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홍일점, 제갈혜는 아예 반쯤 정신이 나가 있었다.
‘잡기, 잡기, 잡기…….
콕 집어서 모지리 취급을 받았기 때문이다.
분한 마음에 눈물이 나올 것 같았으나, 제갈혜는 가까스로 눈물을 참았다. 그랬다간 진짜로 모지리가 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다른 맹원들은 훌쩍거리는 제갈혜에게서 모르는 척 시선을 돌렸다. 제갈혜가 지법을 아주 오랜 세월 파고들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가 없었지만, 태실산의 노강호가 듣고 있을까 걱정되어 차마 위로의 말조차 건넬 수 없었다.
쉬지 않고 달려 마침내 시내에 도착한 장산은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사마련이나 마도와 싸웠을 때도 이렇게 심장이 두근거렸던 적이 없었는데, 지금은 심장이 미치도록 날뛰고 있었다.
안색이 창백하게 질려 있던 조원 하나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조장님. 이제 얘기해도 되는 걸까요?”
장산은 곧장 대답하는 대신 고개를 들어 태실산 방향을 바라봤다. 못해도 삼십 리는 달려온 것 같았다. 이 거리에서 자신들의 목소리를 듣는다면 그건 자연사다.
장산이 고개를 끄덕이자, 조원들이 철푸덕 소리를 내며 쓰러지듯 앉았다.
훈련된 무인들이라 입밖으로 탄식을 내뱉지는 않았지만, 머릿속은 그야말로 엉망진창이었다.
‘흐, 흐흐흐.
‘마교가 십만대산에 처박혀 있는 이유를 강제로 알게 된 기분이야…….
'이건 또 어떻게 보고하지.'
‘난, 난 모지리가 아니야.
장산은 완전히 망가져버린 조원들을 쳐다보다가,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자신도 주저앉았다.
“오늘은……이만 쉬자.”
심력을 너무 많이 썼다. 행인 한 명 없는 시간에 돌아다녀 봤자 얻을 수 있는 정보도 없으니, 푹 자고 일어나서 계속해도 늦지 않을 터였다. 괜히 아무 데나 쑤시고 다니다가 똑같은 실수를 반복할 것 같다는 두려움도 있었다.
장산은 힘이 쫙 풀려버린 다리를 주무르려다가, 문득 기름진 냄새가 풍겨 고개를 돌렸다. 그쪽을 보니 웬 노파가 갓 찐 만두를 꺼내어 보자기에 담고 있었다. 보아하니 새벽부터 장사를 준비하는 모양이었다.
배도 고프겠다, 장산은 노파에게 다가가 물었다.
“혹시 이 만두 파시는 겁니까?”
“손님이 사신다면야 얼마든지 팔지요.”
“가득 담아 주십시오. 열 명이 먹을 겁니다.”
“아이고, 아직 장사 준비가 안 돼서 드릴 그릇이 없는데.”
“그럼 그냥 보자기 채로 주십시오. 값은 넉넉히 치르겠습니다.”
장산은 그렇게 말하며 노파에게 돈을 건넸다. 돈을 확인한 노파가 눈을 크게 떴다.
“……너무 많은데요?”
“저희가 많이 배고파서 그럽니다.”
노파는 연신 고개를 꾸벅였다. 하루 장사를 제대로 시작하기도 전에 만두를 다 팔았기 때문이다.
“먹자.”
장산은 보자기를 땅바닥에 내려놓았다. 조원들은 장산이 말을 꺼내기 무섭게 만두를 집어 먹었다. 산처럼 쌓여 있던 만두들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마저 먹고 묵을 객잔부터 찾자. 그 다음에.”
그 순간, 장산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조원 셋을 심부름시켰던 일을 뒤늦게 떠올린 것이다.
‘아…….
조원들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사방에서 침 넘어가는 소리만 꿀꺽- 하고 울렸다. 장산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태실산 방향을 말없이 응시했다.
노망난 노강호가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
장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다시 돌아가고 싶진 않았다.
조원들은 그제야 서로를 응시했다.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했으나, 지금은 그 설마가 현실이 될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힘이 다 풀린 몸을 이끌고 하남의 온 객잔을 돌아다니고 싶지도 않았다.
누군들 그러고 싶겠는가.
그렇기에 조원들은 서로의 눈치만 살살 봤다. 곧 장산이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다 싶은 놈은 거수해라.”
“조, 조장님.”
“거수해.”
“…….”
곧 조원 셋이 슬금슬금 오른손을 치켜들었다. 아주 공교롭게도 세 명 모두 막내급이었다.
“걔들 엄한 곳으로 새기 전에 후딱 가서 데려와라.”
“……예.”
*****
장마철이라 빗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서연은 빗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고 명상에 잠겼다. 왜 명상을 하느냐 묻는다면, 산속이라 딱히 할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무림맹원들과는 헤어졌지만, 서연은 그저 그대로 밤을 지새우고 있었다. 새벽비를 맞아서인지 도저히 잠이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루 이틀 잠을 거른다 해서 망가질 육체도 아니었으니, 서연은 이번 기회에 생각이나 정리하기로 했다.
가장 먼저, 오늘 만났던 이들이 무림맹이 아닌 사마외도였다면 어찌 되었을지 생각했다. 그랬다면 지금처럼 분명 몸 성히 돌아오지는 못했을 터였다.
갑자기 이런 생각을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좋은 스승이 되려고 노력하다보면 사건사고에 자주 엮이게 될 터. 그러다 보면 좋든 싫든 강호에 발을 걸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서연은 전생에 보았던 여러 무협지들을 떠올렸다. 삼류, 이류, 일류, 절정, 초절정, 화경 등으로 무학을 분류했던 무협지들이 떠올랐고, 또 삼화취정(三花聚頂)이나 오기조원(五氣朝元) 같은 현상으로 경지를 분류하는 무협지들도 떠올랐다.
허나 이내 그만두었다. 본디 무학이란 평생 파고들어도 모자를 학문일진대, 그렇게 편의적으로 정확하게 정의될 수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검기와 검강으로 절정 초절정이 나뉜다면, 일평생 경공만 수련하여 강호 최정상에 오른 무인은 그들보다 못하단 말인가?
애초에 절정(絕頂)이라 하면 오를 수 없을 정도로 높은 경지라는 뜻인데, 갑자기 앞에 초(超) 자는 왜 붙는단 말인가?
사람마다 얻는 깨달음이 다르고, 살아온 삶이 다른 것은 당연한 이치인데, 모두가 지향하는 방향이 같다는 것부터 이상했다. 만약 그런 곳이 있다면 그 강호는 분명 무(武)가 본연의 가치를 상실한 곳일 터였다.
고로 검기든, 검강이든, 오기조원이든 삼화취정이든, 경지를 구분하는 모든 것들에는 큰 의미가 없어야 한다.
사람마다 꽃이 피고 지는 방법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이정표는 될 수 있을지언정, 절대적인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됐다. 적어도 서연은 그렇게 여겼다.
그런 의미에서 이 세계의 강호 무림은 참으로 마음에 들었다.
절세고수들의 앞에 화경(化境)이나 현경(玄境) 같은 수식어가 붙던가? 그렇지 않다.
그저 절세(絕世).
세상에 견줄 데가 없을 정도로 뛰어난 고수들을 칭하기에 그것이면 충분하다는 뜻이다.
그 아래 이름을 날리는 고수들도 그저 별호(別號)로 불릴 뿐, 경지로 불리지는 않았다.
허나 삼류 무인은 있었다. 어디에나 삼류는 있는 법이었으니 말이다.
서연은 자신이 어느 정도 위치에 있는지를 가늠해보았다. 보법은 배운 적이 없고, 검법 또한 마찬가지였다. 마보와 같은 운동으로 외공을 단련한 적도 없으며, 그렇다고 무인들과 논검(論劍)을 나눠 본 적도 없었다. 실전 경험은 단연 없었다.
그러므로 삼류 이하라고 할 수 있겠다.
허나 서연에게는 무형의 절세 명검이 있었다. 형태에 구애받지 않으며, 두꺼운 거목이든 바위든 깔끔하게 양단하는 심검(心劍) 말이다.
물론 마땅한 이름이 없어 심검이라 부를 뿐이지, 서연은 이것을 진짜 심검이라고 여긴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조금 과격히 말하면, 서연은 이것이 심검이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왜냐.
고수가 되려면 일단 정기신(精氣神)이 균형을 이뤄야 했다. 여기서 정(精)은 단단한 육체를, 기(氣)는 육체를 움직이는 힘을, 신(神)은 무인의 정신을 의미했다.
그뿐이랴. 심후한 내공과 그를 바탕으로 한 탁월한 무공도 뒷받침되어야 했다.
거기까지가 서연이 생각하는 고수의 전제 조건이었다.
그래서일까. 차라리 이것이 그저 제게 주어진 신기한 능력이라 여겼으면 여겼지, 서연은 도저히 이것을 심검이라 여길 수 없었다. 그것은 평생을 갈고닦은 무인들에 대한 모욕이며, 동시에 기만이기 때문이었다.
무협지를 너무 많이 읽어 생긴 폐해라고 할 수 있겠다.
서연이 전생에서 구무협(舊武俠)을 추종하는, 소위 말하는 진성 무틀딱이 아니었다면 생각이 달라졌을지 모르나, 안타깝게도 그럴 일은 없었다.
서연은 표정을 착 가라앉힌 채로 손에 들린 심검을 흝어봤다.
사실 이 정도만 되어도 어중간한 힘만 믿고 설치는 잔챙이들 정도야 어렵지 않게 물리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다 보면 점차 윗선들이 그걸 명분삼아 달려들 것이고, 언젠가는 이것으로도 감당하지 못할 진짜 고수들이 나타날 것이다.
그러면 죽은 목숨이다.
그 모든 것을 감내할 자신도, 손에 피를 묻힐 자신도 없었기에 숨어살기를 택했건만.
이제 그것도 어렵게 되었다.
누누이 말하지만, 좋은 스승이 되는 것은 이렇게나 어려운 일이다.
‘무관에 들어가서 호신술이라도 배워야 하나.
본래 고수가 되려면 골격과 기혈이 완전히 굳지 않은 어린 시절부터 무공을 익혀야 했다. 허나 서연에게 있어 무공은 어디까지나 자신과 제자를 지키기 위한 호신의 방편이었으니, 나이는 크게 중요치 않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남궁세가에서 그럴듯한 검법이라도 하나 얻어올 걸 그랬나.
그만한 무림세가에는 외인에게도 공개되는 무공 비급이 여럿 있을 터였다. 허나 이제 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랴. 서연은 머릿속으로 근처에 있던 무관을 몇 개 떠올려보았다.
‘청풍무관(淸風武館), 진가무관(陳家武館), 비룡각(飛龍閣)…….
곰곰이 생각해보니 비룡각은 무관이 아니라 볶음면을 파는 객잔이었다. 객잔 자체는 초라했지만, 주인장의 내공이 만만치 않아 아주 맛있게 먹었던 장소였다.
아무튼, 적당한 무관을 물색할 필요는 있어보였다.
제자도 가르치랴, 조각해서 돈도 벌랴, 책도 쓰랴, 검법도 배우랴.
해야 할 일이 산더미였다.
“…….”
허나 기분이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았다. 이 세계에 떨어진 이후 처음으로 그럴듯한 목표가 생긴 것 같았기 때문이다.
명상을 마친 서연은 화련이 자고 있을 방으로 향했다. 습기도 차고 더운 날씨 탓인지, 화련은 이불도 걷어차고 배까지 훤히 드러낸 채 아무렇게나 엎어져 자고 있었다.
서연은 그런 화련을 살포시 들어올린 다음, 조심스럽게 돌아 눕혔다. 화련은 잠시 움찔거렸으나, 이내 깊이 잠들었다. 꼼지락거리는 손이 마치 꿈 속에서도 조각 연습을 하는 것 같아 보여 서연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땀에 살짝 젖어 화련의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떼어내면서 서연은 생각했다.
강호에서 살아남으려면 아예 산속에 틀어박히거나, 아니면 의지를 관철할 수 있을 만큼의 힘이 있어야 한다고.
‘내일은 무관이라도 알아봐야겠다.
후자는 모르겠으나, 서연은 적어도 산속에만 틀어박혀 살지는 않으리라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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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산과 무림맹 단원들은 최대한 빠르게 태실산에서 멀어졌다. 노망난 노강호가 갑자기 자신들을 불러세워 협박을 겸한 일장 연설하지 않을까 두려웠던 것이다.
노망났다는 표현이 적절할지는 모르겠으나, 그만한 지법(指法)을 익혔으면서 스스로를 일반인이라 주장하는 인간이 정상일 것 같지는 않았다. 그 정도로 뻔뻔해야 비정한 강호에서 당당히 금분세수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으니 말이다.
알 수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조금이라도 빨리 이곳을 탈출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홍일점, 제갈혜는 아예 반쯤 정신이 나가 있었다.
‘잡기, 잡기, 잡기…….
콕 집어서 모지리 취급을 받았기 때문이다.
분한 마음에 눈물이 나올 것 같았으나, 제갈혜는 가까스로 눈물을 참았다. 그랬다간 진짜로 모지리가 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다른 맹원들은 훌쩍거리는 제갈혜에게서 모르는 척 시선을 돌렸다. 제갈혜가 지법을 아주 오랜 세월 파고들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가 없었지만, 태실산의 노강호가 듣고 있을까 걱정되어 차마 위로의 말조차 건넬 수 없었다.
쉬지 않고 달려 마침내 시내에 도착한 장산은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사마련이나 마도와 싸웠을 때도 이렇게 심장이 두근거렸던 적이 없었는데, 지금은 심장이 미치도록 날뛰고 있었다.
안색이 창백하게 질려 있던 조원 하나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조장님. 이제 얘기해도 되는 걸까요?”
장산은 곧장 대답하는 대신 고개를 들어 태실산 방향을 바라봤다. 못해도 삼십 리는 달려온 것 같았다. 이 거리에서 자신들의 목소리를 듣는다면 그건 자연사다.
장산이 고개를 끄덕이자, 조원들이 철푸덕 소리를 내며 쓰러지듯 앉았다.
훈련된 무인들이라 입밖으로 탄식을 내뱉지는 않았지만, 머릿속은 그야말로 엉망진창이었다.
‘흐, 흐흐흐.
‘마교가 십만대산에 처박혀 있는 이유를 강제로 알게 된 기분이야…….
'이건 또 어떻게 보고하지.'
‘난, 난 모지리가 아니야.
장산은 완전히 망가져버린 조원들을 쳐다보다가,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자신도 주저앉았다.
“오늘은……이만 쉬자.”
심력을 너무 많이 썼다. 행인 한 명 없는 시간에 돌아다녀 봤자 얻을 수 있는 정보도 없으니, 푹 자고 일어나서 계속해도 늦지 않을 터였다. 괜히 아무 데나 쑤시고 다니다가 똑같은 실수를 반복할 것 같다는 두려움도 있었다.
장산은 힘이 쫙 풀려버린 다리를 주무르려다가, 문득 기름진 냄새가 풍겨 고개를 돌렸다. 그쪽을 보니 웬 노파가 갓 찐 만두를 꺼내어 보자기에 담고 있었다. 보아하니 새벽부터 장사를 준비하는 모양이었다.
배도 고프겠다, 장산은 노파에게 다가가 물었다.
“혹시 이 만두 파시는 겁니까?”
“손님이 사신다면야 얼마든지 팔지요.”
“가득 담아 주십시오. 열 명이 먹을 겁니다.”
“아이고, 아직 장사 준비가 안 돼서 드릴 그릇이 없는데.”
“그럼 그냥 보자기 채로 주십시오. 값은 넉넉히 치르겠습니다.”
장산은 그렇게 말하며 노파에게 돈을 건넸다. 돈을 확인한 노파가 눈을 크게 떴다.
“……너무 많은데요?”
“저희가 많이 배고파서 그럽니다.”
노파는 연신 고개를 꾸벅였다. 하루 장사를 제대로 시작하기도 전에 만두를 다 팔았기 때문이다.
“먹자.”
장산은 보자기를 땅바닥에 내려놓았다. 조원들은 장산이 말을 꺼내기 무섭게 만두를 집어 먹었다. 산처럼 쌓여 있던 만두들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마저 먹고 묵을 객잔부터 찾자. 그 다음에.”
그 순간, 장산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조원 셋을 심부름시켰던 일을 뒤늦게 떠올린 것이다.
‘아…….
조원들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사방에서 침 넘어가는 소리만 꿀꺽- 하고 울렸다. 장산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태실산 방향을 말없이 응시했다.
노망난 노강호가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
장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다시 돌아가고 싶진 않았다.
조원들은 그제야 서로를 응시했다.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했으나, 지금은 그 설마가 현실이 될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힘이 다 풀린 몸을 이끌고 하남의 온 객잔을 돌아다니고 싶지도 않았다.
누군들 그러고 싶겠는가.
그렇기에 조원들은 서로의 눈치만 살살 봤다. 곧 장산이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다 싶은 놈은 거수해라.”
“조, 조장님.”
“거수해.”
“…….”
곧 조원 셋이 슬금슬금 오른손을 치켜들었다. 아주 공교롭게도 세 명 모두 막내급이었다.
“걔들 엄한 곳으로 새기 전에 후딱 가서 데려와라.”
“……예.”
*****
장마철이라 빗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서연은 빗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고 명상에 잠겼다. 왜 명상을 하느냐 묻는다면, 산속이라 딱히 할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무림맹원들과는 헤어졌지만, 서연은 그저 그대로 밤을 지새우고 있었다. 새벽비를 맞아서인지 도저히 잠이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루 이틀 잠을 거른다 해서 망가질 육체도 아니었으니, 서연은 이번 기회에 생각이나 정리하기로 했다.
가장 먼저, 오늘 만났던 이들이 무림맹이 아닌 사마외도였다면 어찌 되었을지 생각했다. 그랬다면 지금처럼 분명 몸 성히 돌아오지는 못했을 터였다.
갑자기 이런 생각을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좋은 스승이 되려고 노력하다보면 사건사고에 자주 엮이게 될 터. 그러다 보면 좋든 싫든 강호에 발을 걸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서연은 전생에 보았던 여러 무협지들을 떠올렸다. 삼류, 이류, 일류, 절정, 초절정, 화경 등으로 무학을 분류했던 무협지들이 떠올랐고, 또 삼화취정(三花聚頂)이나 오기조원(五氣朝元) 같은 현상으로 경지를 분류하는 무협지들도 떠올랐다.
허나 이내 그만두었다. 본디 무학이란 평생 파고들어도 모자를 학문일진대, 그렇게 편의적으로 정확하게 정의될 수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검기와 검강으로 절정 초절정이 나뉜다면, 일평생 경공만 수련하여 강호 최정상에 오른 무인은 그들보다 못하단 말인가?
애초에 절정(絕頂)이라 하면 오를 수 없을 정도로 높은 경지라는 뜻인데, 갑자기 앞에 초(超) 자는 왜 붙는단 말인가?
사람마다 얻는 깨달음이 다르고, 살아온 삶이 다른 것은 당연한 이치인데, 모두가 지향하는 방향이 같다는 것부터 이상했다. 만약 그런 곳이 있다면 그 강호는 분명 무(武)가 본연의 가치를 상실한 곳일 터였다.
고로 검기든, 검강이든, 오기조원이든 삼화취정이든, 경지를 구분하는 모든 것들에는 큰 의미가 없어야 한다.
사람마다 꽃이 피고 지는 방법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이정표는 될 수 있을지언정, 절대적인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됐다. 적어도 서연은 그렇게 여겼다.
그런 의미에서 이 세계의 강호 무림은 참으로 마음에 들었다.
절세고수들의 앞에 화경(化境)이나 현경(玄境) 같은 수식어가 붙던가? 그렇지 않다.
그저 절세(絕世).
세상에 견줄 데가 없을 정도로 뛰어난 고수들을 칭하기에 그것이면 충분하다는 뜻이다.
그 아래 이름을 날리는 고수들도 그저 별호(別號)로 불릴 뿐, 경지로 불리지는 않았다.
허나 삼류 무인은 있었다. 어디에나 삼류는 있는 법이었으니 말이다.
서연은 자신이 어느 정도 위치에 있는지를 가늠해보았다. 보법은 배운 적이 없고, 검법 또한 마찬가지였다. 마보와 같은 운동으로 외공을 단련한 적도 없으며, 그렇다고 무인들과 논검(論劍)을 나눠 본 적도 없었다. 실전 경험은 단연 없었다.
그러므로 삼류 이하라고 할 수 있겠다.
허나 서연에게는 무형의 절세 명검이 있었다. 형태에 구애받지 않으며, 두꺼운 거목이든 바위든 깔끔하게 양단하는 심검(心劍) 말이다.
물론 마땅한 이름이 없어 심검이라 부를 뿐이지, 서연은 이것을 진짜 심검이라고 여긴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조금 과격히 말하면, 서연은 이것이 심검이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왜냐.
고수가 되려면 일단 정기신(精氣神)이 균형을 이뤄야 했다. 여기서 정(精)은 단단한 육체를, 기(氣)는 육체를 움직이는 힘을, 신(神)은 무인의 정신을 의미했다.
그뿐이랴. 심후한 내공과 그를 바탕으로 한 탁월한 무공도 뒷받침되어야 했다.
거기까지가 서연이 생각하는 고수의 전제 조건이었다.
그래서일까. 차라리 이것이 그저 제게 주어진 신기한 능력이라 여겼으면 여겼지, 서연은 도저히 이것을 심검이라 여길 수 없었다. 그것은 평생을 갈고닦은 무인들에 대한 모욕이며, 동시에 기만이기 때문이었다.
무협지를 너무 많이 읽어 생긴 폐해라고 할 수 있겠다.
서연이 전생에서 구무협(舊武俠)을 추종하는, 소위 말하는 진성 무틀딱이 아니었다면 생각이 달라졌을지 모르나, 안타깝게도 그럴 일은 없었다.
서연은 표정을 착 가라앉힌 채로 손에 들린 심검을 흝어봤다.
사실 이 정도만 되어도 어중간한 힘만 믿고 설치는 잔챙이들 정도야 어렵지 않게 물리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다 보면 점차 윗선들이 그걸 명분삼아 달려들 것이고, 언젠가는 이것으로도 감당하지 못할 진짜 고수들이 나타날 것이다.
그러면 죽은 목숨이다.
그 모든 것을 감내할 자신도, 손에 피를 묻힐 자신도 없었기에 숨어살기를 택했건만.
이제 그것도 어렵게 되었다.
누누이 말하지만, 좋은 스승이 되는 것은 이렇게나 어려운 일이다.
‘무관에 들어가서 호신술이라도 배워야 하나.
본래 고수가 되려면 골격과 기혈이 완전히 굳지 않은 어린 시절부터 무공을 익혀야 했다. 허나 서연에게 있어 무공은 어디까지나 자신과 제자를 지키기 위한 호신의 방편이었으니, 나이는 크게 중요치 않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남궁세가에서 그럴듯한 검법이라도 하나 얻어올 걸 그랬나.
그만한 무림세가에는 외인에게도 공개되는 무공 비급이 여럿 있을 터였다. 허나 이제 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랴. 서연은 머릿속으로 근처에 있던 무관을 몇 개 떠올려보았다.
‘청풍무관(淸風武館), 진가무관(陳家武館), 비룡각(飛龍閣)…….
곰곰이 생각해보니 비룡각은 무관이 아니라 볶음면을 파는 객잔이었다. 객잔 자체는 초라했지만, 주인장의 내공이 만만치 않아 아주 맛있게 먹었던 장소였다.
아무튼, 적당한 무관을 물색할 필요는 있어보였다.
제자도 가르치랴, 조각해서 돈도 벌랴, 책도 쓰랴, 검법도 배우랴.
해야 할 일이 산더미였다.
“…….”
허나 기분이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았다. 이 세계에 떨어진 이후 처음으로 그럴듯한 목표가 생긴 것 같았기 때문이다.
명상을 마친 서연은 화련이 자고 있을 방으로 향했다. 습기도 차고 더운 날씨 탓인지, 화련은 이불도 걷어차고 배까지 훤히 드러낸 채 아무렇게나 엎어져 자고 있었다.
서연은 그런 화련을 살포시 들어올린 다음, 조심스럽게 돌아 눕혔다. 화련은 잠시 움찔거렸으나, 이내 깊이 잠들었다. 꼼지락거리는 손이 마치 꿈 속에서도 조각 연습을 하는 것 같아 보여 서연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땀에 살짝 젖어 화련의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떼어내면서 서연은 생각했다.
강호에서 살아남으려면 아예 산속에 틀어박히거나, 아니면 의지를 관철할 수 있을 만큼의 힘이 있어야 한다고.
‘내일은 무관이라도 알아봐야겠다.
후자는 모르겠으나, 서연은 적어도 산속에만 틀어박혀 살지는 않으리라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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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련은 근래 들어 스승님의 외유가 잦아졌음을 깨달았다. 서연은 사흘에 한 번꼴로 저자로 나섰고, 그럴 때마다 그림자처럼 화련을 데리고 다녔다.
화련이 서연의 손을 꼭 붙든 채 당과를 오물거리고 있게 된 것 또한 같은 연유라고 할 수 있겠다.
스승님께서 숨기는 것이 없음을 보이고자 이러시는지, 아니면 진정 어린아이 취급을 하시는지는 알 수 없으나, 화련은 왠지 모르게 후자일 것이라 짐작했다.
“당과 더 먹고 싶니?”
“괜찮아요.”
마치 노인이 장성한 손주를 어린아이처럼 대하듯, 스승님 또한 그러하시리라 지레짐작했기 때문이다.
‘옆집보다 여기가 더 달콤하네. 앞으로는 여기서 사달라 졸라야겠어.
생각의 관점이 바뀌어서인지, 혹은 시간이 많이 지나서인지는 모르겠으나, 화련은 이제 서연이 자신을 아이 취급하는 것을 당연한 이치처럼 받아들이고 있었다.
자고로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라 하였다. 스승님께 입은 은혜를 생각건대, 아이처럼 행동하는 것 자체를 나름의 효도라 여기기 시작한 것이다.
아예 마음가짐 자체가 바뀌었다고 할 수 있겠다.
화련은 작아진 육신에도 완전히 적응했다. 처음에는 팔다리가 전체적으로 짧아져 별 고생을 다 겪었으나, 이제는 가동범위가 작은 것 또한 나름의 장점이 있다는 것을 깨달을 정도로 익숙해졌다.
일단 몸이 가벼워서 움직이는데 힘이 덜 들었다. 적게 먹어도 금세 배가 불렀고, 온종일 움직여도 기운이 팔팔했다. 단점은 이따금 단것이 당긴다는 것인데, 그럴 때면 지금처럼 당과 한두 개를 집어먹으면 금세 괜찮아졌다.
이는 기존의 둔형천은술에 유혼의 몇몇 술법이 추가된 결과였다. 결과적으로 술법은 훨씬 정교해졌으나, 화련은 더는 그 때의 일을 떠올리고 싶지 않아했다.
영유아강술(嬰幼兒降術)이나 역린동심술(逆鱗童心術)처럼 이름에서부터 무언가 음습하고 불길한 내력이 느껴지는 술법들을 잔뜩 들고왔던 유혼의 얼굴이 자꾸만 뇌리를 스쳤기 때문이다.
화련은 살다살다 올빼미가 그리도 음험한 동물로 느껴질 줄은 몰랐다.
그때는 질색했지만, 결과적으로 화련의 외형은 이전보다 더 소녀다워졌다. 유혼의 말을 옮겨 표현하자면 앙증맞아졌다고 할 수 있겠다.
당장 당과를 입에 물고 걷는 지금도 그러했다. 그녀가 걸음할 때마다 사내아이들의 시선이 쏟아지니, 그 효험을 짐작할 수 있었다.
물론 화련은 그런 시선들을 일절 개의치 않았다. 당과를 먹는 데 온 정신이 팔려 있었기 때문이다.
“스승님, 근데 오늘은 어디로 가시나요?”
“일단은 청풍무관에 갈 생각이란다.”
“무관이요……?”
뜬금없는 서연의 말에 화련은 그저 눈만 껌벅였다. 천하에서 무관이라는 단어와 가장 어울리지 않을 듯한 이를 꼽으라면, 스승님이 능히 세 손가락 안에 들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스승님의 성정 상 문파의 현판을 뜯으러 가실 리는 만무할 터. 그렇다면 필시 다른 연유가 있을 터인데,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마땅한 까닭이 떠오르지 않았다.
‘청풍무관은 또 뭔데.
이름부터 동네에서 흔히 볼법한 삼류 무관처럼 들렸다. 필시 관장의 이름은 청풍일 것이요, 그 실력 또한 검기조차 제대로 뽑아내지 못하는 허접한 무인일 것 같았다.
물론 그 청풍이라는 자가 스승님처럼 은거했던 고수일 가능성이 없지는 않았기에, 화련은 묵묵히 서연의 뒤를 따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청풍무관의 현판이 눈에 들어왔다. 예상대로 낡고 빛바랜 나무 현판에는 ‘청풍무관’이라는 글자가 거칠게 쓰여 있었다. 문이 활짝 열린 무관 안에서는 앳된 소년들이 목검을 휘두르며 어설픈 초식을 익히고 있었다.
서연의 등장에 목검을 휘두르던 아이들은 일제히 동작을 멈추고 이들을 응시했다. 그들의 시선은 서연보다 화련에게 더 오래 머물렀다. 동네에서 보지 못했던 이쁘장한 아이가 나타나서 신기했던 모양이다.
곧 안쪽에서 묵직한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덩치 큰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사내가 경계어린 눈빛으로 서연을 바라보며 물었다.
“관장님 되시나요?”
“제가 관장이긴 합니다만.”
“검법을 배워보려 하는데, 혹시 여인도 받으시는지요?”
화련은 제 스승이 진짜로 도장깨기를 하러 왔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급히 서연을 쳐다봤다.
“……!”
청풍무관 관장, 청풍이 대꾸했다.
“남녀를 가려 받지는 않습니다만, 기준이 남성에게 맞춰져 있어 따라오기 쉽지는 않을겁니다.”
“적당히 호신용으로만 배울 생각이어서요. 그 정도는 괜찮습니다.”
청풍의 미간이 좁혀졌다. 명색이 무관을 운용하는 무인인지라, 자존심이 상한 것이다. 허나 먹고사는 일 앞에서 어디 자존심을 세우겠는가. 청풍은 최대한 내색하지 않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수업은 사시(巳時)에 시작합니다. 기간은 달포 단위이고, 가격은 팔십 냥입니다만……마침 검법을 시작할 시간인데 일단 구경부터 하시겠습니까?”
“그렇게 할게요.”
청풍은 무관에 배우겠다고 찾아온 여인들을 상대해본 경험이 적지 않았다. 보통 이럴 때 기합차고 힘들고 지루한 자세를 반복하여 시키는 모습을 보여주면 제풀에 겁을 먹고 나가떨어지곤 했다.
청풍은 자리에서 일어나 관원들에게 훈련 명령을 하달했다.
“관원들은 모두 응격검(鷹擊劍) 실시! 교관들은 목검을 들고 내려가서 자세가 틀어진 관원이 있으면 즉시 열외시켜라. 자세 한 번 틀릴 때마다 동네 한 바퀴 씩이다.”
곧 우렁찬 대답과 함께 관원들이 검법을 펼치기 시작했다. 청풍은 흐뭇한 표정으로 관원들을 지켜보다가, 단상 위에 올라가 검법을 펼쳤다.
“타핫!”
응격검은 날카로운 매가 먹이를 덮치듯 빠르고 맹렬하게 공격하는 검법이다. 쉽게 말해 잔재주를 배제한 묵직한 검이라는 것이다.
그랬기에 청풍은 나름대로 제 검에 자부심이 있었다. 실속은 없고 화려하기만 한 검법으로 사람들의 눈을 현혹시키기나 하는 다른 무관들보다는 자신이 배는 낫다고 여겼다.
‘제대로 안 할 거면 차라리 빠르게 포기하는 편이 낫다.
청풍은 이것을 나름의 배려라고 생각했다. 정녕 호신이 목적이라면 어중간한 마음으로 시작해서는 안됐다. 어디 흑도들이 여인이라고 사정을 봐주던가. 위협으로부터 몸을 지키려면 끝장을 볼 생각으로 임하던가, 아니면 돈을 들여 호위를 구하는 편이 낫다.
청풍은 가열차게 검을 휘둘러 몰아치기 시작했다.
“흐음.”
청풍을 지켜보던 교관 하나가 미소를 지었다.
“관장님께서 오늘따라 진지하시다. 검에 실린 내력이 심상치 않구나.”
“또 손님 겁주시려나 봅니다. 안 그래도 이번 달도 빠듯할 것 같은데.”
“다들 한눈팔지 말고 똑바로 따라해라! 관장님처럼 검법을 펼치려면 매일 전심전력을 다해도 모자랄 것을! 거기 너! 열외!”
교관은 자세가 흔들리던 관원 하나를 열외시킨 다음 말을 이었다.
“어련히 하시겠지. 솔직히 자네도 알잖는가. 응격검은 여인이 배울만한 검은 아니야.”
“그렇긴 하죠.”
그러나 교관들의 감상과는 달리, 뒤에서 지켜보던 화련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음.
허접하다.
이렇게 허접하면 안되는데.
최선을 다하고 있는 청풍의 노력이 무색하게도 화련은 응격검을 보면서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못했다.
‘왜 저기서 저렇게 움직이지?
너무 허접해서 말도 안 나올 지경이었다.
비록 검법을 제대로 배워본 적은 없으나, 명색이 중원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방파의 대공녀였다. 이렇다 할 고수들을 직접 물리친 경험도 적지 않았고, 그중에 검수가 가장 많았기에 검법이 눈에 익은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이치였다.
허나 저 검법을 보아라.
맹렬하게 내리꽂혀야 할 지점에선 느려지고, 힘을 실어야 할 부분에서는 힘이 빠져버린다. 오죽했으면 스승님이 자신을 여기에 데리고 온 이유가 잘못된 검법의 예시를 보여주기 위함이라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물론 동네 무관이라는 간판을 놓고 보면 그럭저럭 나쁘지 않았다. 허나 딱 그 정도였다. 검깨나 다룬다는 흑도를 만난다면 세 합도 버티지 못하고 모가지가 날아갈 그런 수준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서연이 입을 열었다.
“화련아.”
“네, 스승님.”
“저 검법은 어떠하니?”
화련은 별로라고 대답하려다가, 서연의 진중한 얼굴을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화련은 다시금 고개를 돌려 신중한 표정으로 청풍을 지켜보다가 말했다.
“저라면 저기서 이렇게. 아, 잠시만요.”
화련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바닥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던 목검을 집어들었다. 잠시 숨을 가다듬던 화련은, 순식간에 자세를 잡았다.
이내 화련의 목검이 허공을 갈랐다.
처음에는 검 끝에 힘도 실리지 않았고, 무게중심을 잃고 비틀거리기 일쑤였다. 검신은 사시나무처럼 떨렸고, 몸의 움직임도 삐걱거렸다.
말 그대로 엉망진창이었다.
지켜보던 몇몇 관원들은 아예 보란 듯이 비웃기까지 했다.
‘한 주먹거리도 안되는 것들이……!
화련은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는 몸에 눈살을 찌푸렸다. 허나 말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서연과 눈을 마주한 순간, 마음속에서 깊은 파문이 일렁이는 것을 느꼈다.
‘…….
화련은 목검을 고쳐 잡았다.
비록 검법을 펼쳐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으나, 화련은 제 오성(悟性)이 여느 천재들에 뒤처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이런 허접한 검법의 초식 정도는 어렵지 않게 해낼 수 있을 것이라 자만했고, 처참하게 실패했다.
‘집중하자.
화련의 표정은 이전과는 같은 사람이라고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진중해졌다. 화련은 눈을 감고 기억하는 대로 초식들을 반복해서 펼쳐나갔다.
응격검의 초식은 총 다섯 개.
‘비상하고, 하강하고, 회오리치며, 꿰뚫다가, 제자리로 되돌아온다.
초식마다 본래 이름이 있겠으나, 화련은 그저 그렇게 부르기로 마음먹었다.
화련의 움직임은 여전히 삐걱거렸다. 곁에서 들려오는 비웃음 또한 여전했으나, 화련은 더는 신경쓰지 않았다.
눈을 감은 채로 응격검의 모든 초식을 다섯 번씩 반복했을 때, 화련은 제 움직임의 어디가 잘못되었는지를 깨달았다. 열 번을 반복했을 때는 모든 초식을 보다 정확하게 펼치게 되었으며, 검신에서 전해져오는 떨림 또한 잔잔하게 가라앉았다.
스무 번을 반복했을 때는 초식들의 순서를 마음대로 뒤섞어가며 펼치기 시작했다. 화련은 이때쯤 응격검의 기원이 어디였는지 알 것만 같았다.
‘……점창파?
서른 번을 반복했을 때, 화련은 응격검에 완전히 몰입했다. 초식에는 군더더기가 사라졌고, 공격들은 거듭할 때마다 묵직해졌다. 화련은 동시에 점창파를 떠올렸다.
섬전처럼 쾌속하고, 무겁고 강맹하며, 베기는 집어치우고 찌르기에 목숨을 거는 공격일변도의 검법을 펼치는 도문. 응격검은 분명 점창을 닮아 있었다. 모든 초식이 결국 무언가를 꿰뚫기 위한 준비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먼 옛날 하산한 속가제자가 만든 검법이라도 되는 걸까? 아니면 세월이 흐르며 덜어내고 더해지는 과정에서 이렇게 변한 것일까?
그렇게 쉰 번을 반복했을 때, 화련은 더는 이것을 허접한 검법이라 폄하할 수 없었다.
오랜 세월이 흘러 초식도 변하고, 본래의 색도 대부분 잃어버렸지만, 저자의 집념만큼은 여전했다.
아마 응격검의 저자는 점창파를 동경했을 것이다. 무에 대한 재능은 그리 많지 않았을 것이나, 집념만큼은 하늘을 뚫을 듯했을 터. 현실의 벽에 막혀 더 나아가지 못할 것을 알았음에도, 끈질기게 매달려 어설프게나마 점창의 형(形)을 모방했으리라.
“…….”
원류를 한없이 닮고자 했던 아류(亞流).
화련은 말없이 잠시 서 있었다.
화련의 눈은 아무도 없는 허공을 향해 있었으나, 그 너머로 응격검을 창안한 무명의 무인을 보고 있는 듯했다.
형이 조잡하다고 한들, 그 속에 담긴 뜻까지 폄하할 수 있는가.
화련은 아무말 못하고 입만 뻐끔거리다, 고개를 푹 숙였다. 부끄러웠던 것이다.
문득 화련은 스스로가 한심하다고 느껴졌다.
“후우…….”
토해내듯 숨을 뱉어낸 화련은 다시금 서연을 바라봤다. 그리고는 딱딱하게 굳어버린 청풍과, 관원들을 응시했다.
화련은 청풍에게 포권을 취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청풍 관장님. 제 식견이 짧아 검법의 진의를 미처 깨닫지 못했습니다. 청컨대, 비무 한 번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으음…….”
청풍은 신음성을 뱉어내면서 살살 주변 눈치를 봤다. 온 관원들의 시선이 청풍에게 쏠려 있었다. 여기서 물러난다면 학관이 어떻게 될지는 불보듯 뻔했다.
평상시 같으면 나이대가 비슷한 관원을 대신 불렀을 것이나, 화련의 실력이 예사롭지 않아 보이는 탓에 그럴 수도 없었다. 교관들조차 못미더웠다. 어쩌겠는가, 직접 나설 수밖에.
“……들어오려무나. 내 다섯 수를 양보해주마.”
“감사합니다."
그날 청풍학관은 현판을 뜯겼고.
웬 여인과 소녀가 도장깨기를 하고 다닌다는 괴이한 소문이 하남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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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인생만사 새옹지마(塞翁之馬)라지만, 호신술 하나 배우려다 갑자기 학관 도장깨기를 하게 될 줄 그 누가 예상했으랴.
적어도 서연은 꿈에도 몰랐다.
본래 시선을 끌만한 행동은 최대한 자제하려던 서연이었건만, 일이 이리 되었으니 후회한들 이미 때는 늦었다.
당장 지금만 해도 그러했다. 볶음면 하나 먹으려는데도 온갖 사람들이 주변에서 웅성거렸다.
“새파랗게 어린 여자애한테 청풍무관 관장이 털렸다면서?”
“진가무관은 아예 문을 닫았다더군.”
“그 아이의 스승은 도대체 어떤 고수이기에?”
“내가 성 노인한테 슬쩍 들었는데, 일인전승 신비문파라 하더이다.”
듣고 반응해달라고 옆에서 저러는 것이다. 일반적인 강호인이었다면 제 명성이 드높아진다고 좋아했겠지만, 서연은 오히려 수명이 깎여나가는 것 같다는 기분만 들었다.
사실 청풍무관에 들어갔을 때까지만 해도 마냥 좋았던 서연이었다. 동네 무관이니 수준은 애초부터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수준 높은 무학을 견식할 생각이었으면 구파일방의 속가들로 향했을 것이다.
허나 굳이 무관부터 찾은 이유는, 평범한 아이들이 땀 흘리며 수련하는 모습을 보며 소박한 즐거움을 느끼고 싶었기 때문이다.
자고로 아이들의 얼굴을 보면 스승의 인성을 안다고 하였다. 청풍무관에서는 팔굽혀펴기나 마보와 같은 힘든 자세를 할 때도 비명을 지를 뿐, 힘들다고 투정부리는 아이가 하나 없었다. 제대로 가르치고 또 제대로 배우고 있다는 뜻이다
청풍이 가르치던 응격검도 그러했다. 비록 견문있는 이들이 보기엔 어설퍼 보일 수는 있으나, 무학에 대한 관심을 이끌어내기 위한 입문용 검법이라 생각하면 나쁘지 않았다.
아이들의 눈이 오죽 까다롭던가. 자칫 그럴듯하기만 한 잔재주에 매몰되기 십상인데, 응격검은 투박하면서도 나름의 멋이 있었다. 흥미를 이끌어내기 충분하다는 것이다.
물론 어느 정도 교정은 필요하겠지만, 동네 학관이 가르칠법한 무공 중에서 찌르기에 대하여 이만큼 깊게 고찰한 검법이 또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너무 고절한 검법을 가르치면 아이들이 따라오지 못할테고, 그렇다고 너무 기초적인 검법을 가르치면 아이들이 흥미를 잃을 터이니, 그런 의미에서 청풍은 동네 무관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했다고 할 수 있겠다.
모두 마음에 들었으나, 그중 최고를 꼽으라면 단연 화련이 목검을 쥐었을 때라고 말할 수 있겠다.
몰입하여 그런 것인지, 아니면 그저 몰랐던 재능을 이제야 깨우쳤는지는 모르겠다만, 서연은 뒤죽박죽으로 이어지는 초식 중에 화련의 오성이 정확한 방향을 찾아 꿈틀거리는 것을 보았다.
육체적인 거리감을 그제야 완전히 체득한 것일까. 초식을 거듭할수록 기운이 안정되었고, 얕은 검진(劍震) 또한 잦아들었다.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났을 때에는 진중했다가, 초식을 제 마음대로 펼칠 수 있게 되었을 때는 기뻐하고, 숨겨진 의를 깨우쳤을 때에는 반성하는 제자의 모습을 보면서.
서연은 자신의 재능이 결코 허접한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한 번 보았을 뿐인 응격검의 초식이 머릿속에 선연했고, 어떻게 펼쳐야 할지, 또 어떤 의도로 만들어졌는지, 또 허초를 어디에 섞어야 하는지도 훤히 보였기 때문이다.
동시에 배운 적도 없는 검법 몇 개가 서연의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회풍무류검(廻風舞流劍)이나 섬광분운검(閃光分雲劍) 같은, 응격검의 뿌리가 되는 점창의 검법들이 그것이었다.
그 즈음, 서연의 심상 너머에 웬 사내가 홀연히 나타났다.
사내는 도인의 복장을 하고 있었는데, 이내 응격검의 기수식을 취했다. 발검과 납검을 일평생 반복했던 모양인지, 한 치의 떨림도 없는 모습이 경이롭기까지 했다.
서연은 제 손에 들린 목검을 내려보다가, 본능적으로 기수식을 취했다.
점창의 섬광분운검이었다.
본 적도 없는 검법을 나는 어찌 아는 걸까. 그런 의문은 자연스럽게 머릿속 어딘가로 사라졌고, 이내 상대를 면밀히 탐색하는 검수로서의 정체성만이 남았다.
서연은 사내의 호흡에 집중했다. 쾌검이란 일순간에 잠력을 폭발시켜야 하기에, 다른 무엇보다 호흡이 핵심이었다.
곧 사내가 숨을 크게 들이켰다.
그리고.
쩌어엉!
산산이 조각난 사내의 검이, 서연의 심상 속에 서리서리 뻗쳐올랐다. 서연은 사방으로 흩어지는 조각들을 보며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다.
비록 섬광분운검에 미치진 못했으나, 그 속에 담긴 의지와 처절함은 고스란히 전해졌기 때문이다.
서연의 손에 들린 목검이 반으로 갈라진 것이 그 증거였다.
그제야 사내는 만족했다는 듯 희미하게 웃더니, 서연에게 포권하고는 그림자처럼 사라졌다.
정신을 차렸을 땐, 화련이 청풍을 세 수만에 쓰러뜨린 이후였다.
거기까지만 해도 괜찮았다.
청풍무관 관생들이 제 관장이 어린아이에게 털린 것을 무슨 자랑거리라도 되는 것 마냥 이곳저곳에 떠들어대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입에서 입으로 거쳐간 소문은 순식간에 와전되었고, 그 결과가 이것이다.
“남만에서 올라왔다는 소문이 있네. 죽립을 걷어보면 귀가 뾰족할거라던데.”
“그게 참말이오?”
“건청문(乾淸門)은 단단히 준비를 하고 있더이다.”
“내 전해들은 이야기인데, 나왕문(羅王門)에서도 관심을 보이고 있다고 하오.”
그래도 마냥 나쁜 일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제자의 재능을 알았고, 또 서연 자신의 재능도 깨달았기 때문이다.
‘보통 재능은 아닌 것 같은데.
서연은 마음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볶음면을 집어먹었다.
이 기분을 대체 무어라 표현해야 할까.
오랜 세월 강호와 떨어져 지내려 했던 노력이 무색하게도, 재능이라는 단어 하나에 이리도 쉽게 흔들리는 꼴이 우습기도 하고.
다시 예전처럼 틀어박혀 살자니, 괜한 재능을 버리는 것만 같고.
참 인간의 욕심은 끝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볶음면의 맛을 제대로 느끼지 못할 정도로 번뇌에 잠겨있던 와중에, 청경채를 걸러 먹던 화련의 시선이 뒤쪽으로 쏠렸다.
그곳에 웬 여인이 서 있었다.
동공이 벌겋게 충혈된 여인은 손톱을 깨물면서 객잔 내부를 둘러보고 있었다. 행색은 추레했고, 몸동작은 뚝뚝 끊어지는 것이 마치 무슨 병에라도 걸린 것 같았다.
점소이가 곧장 나섰다.
“손님, 여기서 이러지 마시고 일단 나가실까요?”
“아, 안 돼.”
“만두 하나 드릴테니까, 적당히 하고 나가시라고.”
“안된다고!”
이쯤 되자 객잔에 있던 손님들의 시선도 전부 여인에게 쏠렸다. 여인은 그러거나 말거나 주변을 돌아보며 뭐라 중얼거리더니, 서연을 바라봤다.
“차, 찾았다.”
여인은 점소이를 옆으로 밀쳐내고는, 서연이 있는 방향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러고는 다짜고짜 엎드리더니 서연의 발을 붙잡고 늘어졌다.
“도, 도와. 도와주세요.”
“스승님.”
“가만히 있으렴.”
서연은 나서려는 화련을 막아세운 다음, 제 다리를 붙잡고 눈물을 쏟아내는 여인을 응시했다.
‘해하려는 의도는 없어보이는데.
몸 곳곳에 큼직한 매질과 채찍 자국이 나 있는 것으로 유추하건데, 기루에서 도망쳐 나온 여인 같았다.
아무리 소림이 떡하니 버티고 있다지만, 하남이 보통 넓은가. 막말로 남한의 두 배 가까이 넓은 것이 하남이다. 소림이 정파의 태산북두라 한들 그 넓은 땅을 혼자서 어떻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조금만 도시 외곽으로 나가도 분위기가 삭막해지는 것도 이 때문이었다.
대놓고 흑도질을 하는 놈들은 없지만, 불법과 합법 사이에 애매하게 걸친 이들은 많았다. 도박장을 만든다거나, 먼 곳에서 가난한 처자들을 살살 꼬셔서 홍등가에 집어넣는다거나…….
서연은 일단 여인을 일으켜 세운 다음, 자리에 앉혀 물부터 먹였다. 자신을 예화라 소개한 여인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회, 회화루에 동생이 잡혀 있어요. 친동생은 아니지만, 친동생처럼 아끼는 아이에요. 루주가 닷새 안에 여고수를 데려오면 살려주고, 안 그러면 온몸을 묶어서 돼지 먹이로 던져준댔어요. 이제 하루 남았는데, 소문을 들어서…….”
“다른 분들께 말은 해보셨습니까? 관이라던가.”
“안 돼요! 관은 안 돼요!”
예화는 안색이 새하얗게 질린 채로 서연을 붙잡았다. 그녀의 표정이 워낙 절절했기에, 서연은 더 캐묻는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대충 상황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서연은 주변을 가볍게 훑었다. 다들 안 듣는 척하고 있을 뿐, 온 신경을 이쪽에 쏟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리 사람이 많은 곳에서 할 만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어, 손님. 계산하시려고요?”
당장 점소이부터가 아쉽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일단 나가서 얘기할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나설 만한 일은 아니었다. 소림이 눈을 부릅뜨고 있는 하남에서 활동할 있을 정도면 오죽 음험한 놈들일 터인데, 아무 생각 없이 갔다가 무슨 험한 꼴을 당할지 눈에 훤했다.
소림이 이런 일까지 받아줄 정도로 여유가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일단 찾아가서 대화를 나눠보는 것이 우선인 것 같았다.
비룡각을 나서서 소림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명백히 예화를 찾아온 듯한 사내들이 길을 막아섰다.
“예화야, 우리 왔다.”
복장을 맞춰 입은 왈패들은 서연을 슥 쳐다보다가 코웃음을 쳤다.
“예화야, 예화야. 이 멍청한 년아. 루주께서 닷새나 주셨는데, 설마 검도 안 차고 다니는 일반인을 고수라고 데려갈 생각이었냐?”
“이럴 거였으면, 그냥 네가 직접 고수 행세하지 그랬냐? 이건 뭐, 오죽 멍청해야지.”
왈패들은 서로 낄낄대다가, 침을 찍찍 뱉으며 다가왔다.
“그쪽도 뭣도 모르고 나선 듯 한데, 어디 하나 잘리기 싫으면 이만 돌아들 가쇼. 보아하니 동네 무관 몇 개 털었다고 나대는 것 같은데, 그러다가 객사해.”
“아니면 그쪽도 따라오던가. 딱 보니 창기로 일하면 돈도 잘 벌 것 같은데.”
왈패들은 히죽거리며 서연의 몸을 흝었다.
서연은 대답하는 대신 시선을 내려 화련을 응시했다.
놀랍게도 어린 제자는 분노하고 있었다. 스승이 나서지 않았기에 화를 삭이고 있을 뿐이다.
곧 서연은 화련과 시선을 마주했다.
“…….”
속이 뒤틀렸다.
“귀 먹으셨나? 얌전히 보내줄 때 그냥 가라니까?”
서연이 꿈쩍도 하지 않자, 왈패는 얼굴을 흉신악살처럼 일그러뜨린 채 저벅저벅 걸어왔다. 몸을 풀 때마다 근육 곳곳에서 뚜둑 소리가 울려퍼졌다.
왈패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손바닥을 휘둘렀다. 뺨을 치려는 것이다.
동시에 서연의 눈이 번뜩였다.
‘머리.
서연은 무식하게 힘만 실린 공격을 바라보다가 가볍게 한 걸음 뒤로 물러나 피해냈다. 왈패의 얼굴에 당황함이 스쳤다.
“이 년이!”
움직임이 훤히 보였다. 서연은 날아드는 주먹을 잡아채서 그대로 꺾어버린 뒤, 사내가 그랬던 것처럼 손바닥을 휘둘렀다.
촤악!
뺨을 쳤는데 무슨 채찍에 맞은 것 같은 소리가 났다. 서연은 사내를 무릎꿇린 다음, 한 손으로 멱살을 쥐고 말 그대로 무지막지하게 패기 시작했다.
옆에 있던 다른 왈패들이 서연을 공격하기 위해 애를 썼으나, 서연에게 닿기에는 한참 부족했다.
서연은 미친 개새끼를 계도하는 심정으로 처음에 덤볐던 사내의 뺨을 계속 후려쳤다.
‘너희들은 짐승이다. 사람 말을 할 줄 아는 짐승.
사내는 빠져나가기 위해 발버둥쳤지만, 아무리 힘을 줘도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촤악! 찰싹! 촤악! 찰싹!
거리가 순식간에 잠잠해지고, 서연을 막아세우려던 왈패들도 더는 덤벼들지 못하고 근처에 서서 마른침만 삼켰다.
사내의 얼굴은 이미 걸레짝처럼 변한 상태.
서연은 피떡이 되어버린 사내를 땅바닥에 내팽개친 다음, 싸늘한 시선으로 주변을 흝었다. 그렇게 격렬히 움직였는데도 서연의 호흡엔 변화가 없었다.
“어…….”
그 모습을 지켜보던 사내가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차마 도망치지는 못했다. 제 발에 걸려 넘어졌기 때문이다.
곧 왈패들을 말 그대로 개패듯이 패기 시작한 서연의 모습을 보며 화련은 괜히 심각해졌다. 스승님이 화난 모습을 처음 봤기 때문이다.
‘말 잘 들어야겠다. 화나시면 답도 없겠구나.
어쩌면 양 볼에 당과를 가득 채우고 볼이 터질 때까지 뺨만 때리실 수도 있겠다는 끔찍한 생각도 들었다.
“화련아.”
괜히 찔렸던 화련은 공손한 자세로 대답했다.
“예, 스승님. 말씀하세요.”
“물 한 잔만 가져다 주렴.”
객잔으로 달려가는 화련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서연은 생각했다.
제자를 위해서라도, 앞으로 검 하나쯤은 차고 다녀야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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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화루.
회화루주(繪花樓主)는 산적처럼 험악한 인상을 한 채로 의자에 걸터앉아 있었다.
“그래서, 데려오라 명한 여자는 어디에 두고 너희들만 왔더냐?”
덜덜 떨던 왈패 하나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그게…. 예화가 진짜로 여고수를 찾아낸 모양입니다. 영곽이가 저항도 못하고 맞았고, 그 와중에도 등 뒤에서 날아오는 공격은 귀신같이 피했습니다.”
회화루주가 말했다.
“그래서 도망쳤다?”
“그건 아니고, 그쪽에서 그냥 보내줬습니다.”
“보내주면서 무슨 말이라도 했나?”
“찾아갈 테니 기다리라고는 했습니다.”
회화루주는 주변을 둘려보면서 말했다.
“대체 뭐 하는 여고수라더냐? 쓰는 무기는 또 무엇이고?”
왈패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이고만 있었다. 차마 맨손으로 처맞았다는 말을 할 수 없었던 탓이다.
“물어보면 대답을 해라.”
“맨손으로 맞았습니다.”
주변에 도열해있던 간부들이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
회화루주도 코웃음을 치며 왈패들을 쳐다봤다.
“이거 보기보다 더 멍청한 놈들이었군. 도대체 무슨 배짱으로 돌아온거냐?”
“그러게 말입니다. 어디에 확 묻어버릴까요.”
회화루주는 계속 비웃는 대신 자리에서 대뜸 일어나더니 왈패의 뺨을 쳤다. 짝! 소리와 함께 졸지에 뺨을 또 맞은 왈패는 한 손으로 제 얼굴을 붙잡고 고개를 숙였다.
“어떠냐. 그 여인이 이것보다 아프게 때리더냐?”
“…….”
숨막히는 정적이 내려앉았다. 눈치가 있다면 여기서 회화루주의 공격이 더 아프다고 해야 했다.
회화루주는 미간을 찌푸린 채로 다시금 왈패의 뺨을 쳤다. 이번에는 약간이지만 내공도 실었다. 짜악- 소리가 방 내에 울려퍼졌다.
“죄송, 죄송합니다.”
그런데도 사내는 죄송하다는 말만 반복했다. 그제서야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챈 간부들이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루주님. 그 여자는 아무래도 내공을 싣지 않았겠습니까? 분명 힘깨나 썼을 겁니다.”
“원래 많이 맞으면 감각이 둔해진다고 하지 않습니까. 멍청한 놈이라 제가 아픈지도 모르는 모양입니다.”
이쯤 되니 회화루주도 오기가 치밀어 올랐다.
회화루주는 아예 한쪽 소매를 걷어붙이고 사내의 뺨을 후려쳤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사내가 벽까지 튕겨나가자, 회화루주는 그제서야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꼴도 보기 싫으니 멀리 치워라.”
“예, 루주님.”
기절한 왈패를 끌고 사라진 수하들을 지켜보던 회화루주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왈패 놈들을 멀쩡히 돌려 보냈으니 흑도일 가능성은 낮았다. 흑도였다면 못해도 손가락이나 귀 정도는 잘라 보냈을 테고, 가끔 심한 놈들은 팔을 잘라 보내기도 했으니 말이다.
‘손속이 딱 정파인데.
듣자하니 복장부터가 도인 같다고 했다. 애초에 아미파의 승려라면 면사를 쓸 이유도 없다.
회화루주는 간부들의 면면을 차례차례 훑었다. 회화루주가 관리하는 주루는 총 세 개. 전부 불법과 합법의 선 사이에 애매하게 걸쳐 있는 것들이었다.
미약하지만 관과도 연이 닿아 있었다. 어찌 탐관오리들이 난세에만 존재하겠는가. 아무리 황제가 법을 엄중히 세우려 한다 해도, 흑도는 흑도 나름의 방식이 있었다.
일단 돈을 먹여보고, 난색을 표하면 여인을 같은 방에 밀어 넣었다. 그리고 춘약을 탄 향초를 살살 피워 올리면 열에 아홉은 넘어왔다. 그 순간부터 관리는 빼도 박도 못하게 된다. 장부에 기록이 다 남아 버렸으니, 얌전히 돈을 받아먹고 쉬쉬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회화루주는 여태 그렇게 살아왔다. 영리하고 비열하게 처신한 것이다.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진짜 여고수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건장한 사내 셋을 가지고 놀았다는 것에서 제대로 싸울 줄 아는 무인임은 분명했다.
“여기까지 찾아올 때까지 기다릴 필요는 없겠지. 매 각주.”
“예, 루주님.”
“굳이 집안에서 난장판을 벌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그대는 어찌 생각하나?”
“맡겨만 주신다면 완벽하게 마무리하고 오겠습니다.”
회화루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녀오시오. 수하들도 적당히 끌고 가고.”
“예.”
“그리고 운 각주는 적당히 발이 날랜 놈들 몇 데리고 매 각주를 뒤따라 가게 해. 감당하지 못할 고수다 싶으면 보고하라고.”
“그리 하겠습니다.”
“할 말은 끝났으니 이제 물러들 가라.”
“예, 방주님.”
간부들이 모두 사라질 때까지 회화루주는 가만히 앉아 방 안을 둘러봤다.
적당히 헛된 희망이나 심어줄 생각으로 여고수를 운운했건만, 예화 그 멍청한 년이 진짜로 해낼 줄은 몰랐다.
‘다음에는 그냥 패야겠군.
회화루주는 혀를 차며 바깥으로 나갔다.
*****
서연이 곧장 회화루로 향하지 않고 근처에 있는 철방부터 들른 것은 무기를 사기 위함이다. 비록 가짜 심검이 있기는 하나, 섣불리 내보일 무기는 아니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검 한 자루만 차고 다녀도 삼류 왈패들이 쉬이 접근치 못할 것이라는 계산도 있었다.
철방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 나이 지긋한 주인이 서연을 맞았다. 구릿빛 근육이 선명한 것이, 마치 오랫동안 외공을 익힌 무인처럼 보일 정도였다.
“찾으시는 거라도 있으시오?”
“여인이 쓸만한 검 좀 골라주시겠어요?”
“연검, 장검, 단검 중에 어떤 검 말씀이시오?”
“장검으로 부탁드립니다.”
주인은 서연의 몸을 쓱 훑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치수를 가늠하는 듯했다.
“이쪽으로 오시게.”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후끈한 열기가 온몸을 감쌌다. 쇠망치 소리 우렁찬 곳을 지나니, 몇 자루의 장검이 놓인 탁자에 다다랐다.
“예전에 용봉지회가 열렸을 때 납품하고 남았던 것들이오.”
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날을 살폈다. 목검을 만들어 본 경험이 있었기에, 검을 보는 눈은 제법 있었다. 이 정도면 단연 상품(上品)이었다.
“이걸로 할게요.”
서연의 결정에 철방 주인은 잠시 기다리라 청하고는, 숫돌을 돌려 다시금 검날을 갈았다. 안 그래도 날카로웠던 검은 빛을 받아 번들거릴 정도로 영롱하게 빛났다.
철방 주인은 서연을 쳐다보지도 않고 나직이 물었다.
“이 근방에선 못 보던 분인데, 새로 이사라도 오셨소?”
“네.”
“이 일을 오래 하다 보니, 검을 사러 오시는 분들의 눈빛만 봐도 대충 어떤 분들인지 짐작이 가오. 그저 새 무기를 자랑하러 오시는 분도 있고, 별생각 없이 오시는 분들도 있고, 아니면 아예 누군가를 해코지할 생각으로 오시는 분들도 있소. 헌데, 아주 가끔 손님 같은 분들이 찾아오시오.”
철방 주인은 가죽 검집에 검을 집어넣으며 말했다.
“누구와 싸우시려는지는 모르오나, 무운을 빌겠소.”
“…….”
서연은 잠시 철방 주인과 눈을 마주쳤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무림에 발을 걸친 사람이라 그런가, 눈썰미가 남달랐다.
서연은 장검을 가볍게 휘둘러보았다. 처음 잡아보는 검이었으나, 그 궤적이 참으로 유려했다.
‘…….
크게 분노했던 탓일까. 평소라면 온갖 염려가 몰아쳤을 심상 속은 고요하기만 했다. 지켜야할 것이 있는 자들의 마음가짐이 이러할까.
예화에게서 회화루의 수준을 전해들은 서연은 제 승산을 아주 높게 쳤다. 예화는 생각보다 많은 것들을 알고 있었다. 간부는 몇 명인지, 어떻게 생겼는지, 어떤 무기를 사용하는지, 내부 구조는 어떻게 되는지.
그때서야 서연은 예화 또한 아주 오랜 세월 마음속으로 칼을 갈아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만 그 칼을 다룰 능력이 없어, 맞고 또 맞으면서 견디기만 했던 것이다.
강호가 이렇다.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려면 결국 직접 나서서 싸워야 한다.
서연은 도로 납검하고는 결심을 마쳤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철방 바깥으로 나서자, 화련과 예화가 나란히 서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홑몸이었다면 이대로 예화를 따라가면 그만이었으나, 화련이 문제였다. 데려가자니 위험했고, 그렇다고 이곳에 두고 가자니 야산을 오르다 해코지라도 당할까 염려스러웠다.
일단 적당한 곳에 맡기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래서 이웃이 있는 게 좋다는 것이로구나.
서연은 내심 좁은 주변 관계를 한탄했다. 그런 한숨을 다른 뜻으로 받아들였는지, 화련과 예화는 서서 눈치만 볼 뿐이었다.
서연은 괜히 주변을 훑었다. 객잔에 혼자 두고 갈 수도 없고, 마땅히 맡길 장소도 없었다. 진지하게 백호에게 부탁해야 하나 하는 생각마저 들 지경이었다.
그때, 전방에 몇 명의 무인들이 말없이 걸어가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은 하나같이 초록색 무복을 입고 있었는데, 등 뒤에는 '맹(盟)' 자가 크게 새겨져 있었다.
하남 일대의 치안을 관리하게 되었다는 말이 거짓이 아니었는지, 맹원들은 걸음을 옮기면서도 행인들의 행색을 샅샅이 확인했다. 괜한 불안감을 퍼뜨릴 수 있었기에 그저 눈으로 훑어보는 수준에 불과했지만, 그것만으로도 흑도를 구분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시선에서부터 느껴졌다.
자신들을 향하는 시선을 느꼈는지, 걸음을 옮기던 맹원들이 일제히 돌아섰다. 서연이 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사이에, 제일 뒤에 서 있던 남자가 미간을 좁힌 채로 서연을 빤히 쳐다봤다.
“……맞는 것 같은데.”
“나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죽립에 면사, 거기에 여자아이와 동행하시는 분은 흔치 않지.”
들으라고 저러는 걸까.
곧 처음에 입을 열었던 사내가 앞으로 나서며 공손히 물었다.
“혹, 서연 님 되십니까?”
“그렇긴 합니다만.”
“염이선이라 합니다. 장산 조장님께 이야기 전해 들었습니다. 그때는 사정이 있어 직접 뵙진 못했지만, 이리 만나 뵙게 되어 인사드립니다.”
서연도 얼떨결에 따라서 고개를 숙였다. 듣자하니 그때는 밥 심부름을 나가 서연을 만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혹 어디로 향하시는 길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저희가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기꺼이 돕겠습니다.”
“일이 바쁘진 않으신가요?”
“지금은 순찰 시간이라 괜찮습니다.”
사실, 혹여 서연을 만나게 되면 하던 일도 전부 내려놓고 나서서 도우라는 엄포를 들었기 때문이었으나, 그 이야기는 쏙 빼놓았다. 무림맹원들도 그 정도 눈치는 있었다.
서연은 다시금 무림맹원들의 심성에 감탄했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제 제자를 잠시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부탁이라 하심은?”
서연은 비룡각에서 예화를 만나게 된 것부터 지금까지의 상황을 간략히 설명했다.
“…그리하여 회화루로 갈 생각인데, 제자를 마땅히 맡길 곳이 없습니다.”
“그, 혹 회화루에 혈교나 마교라도 있습니까?”
“예?”
“……헛소리였습니다. 무시하셔도 됩니다.”
염이선은 난처한 얼굴로 화련을 응시했다. 열 살도 안 되어 보이는 꼬마를 맡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나, 그 다음이 문제다.
‘엄청 무서운 분이시라 들었는데.
막상 만나보니 또 아닌 것 같아 염이선은 혼란스러웠다. 초면부터 기세를 뿜어내셨다면 납작 엎드려 알겠습니다만 반복했을 터. 허나 지금은 진정 제자를 맡기고자 하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들이 일을 해결하지 못해 직접 나서게 되었다고 문책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경험상 이런 경우는 동행하는 것보다 뒤를 밟는 쪽이 현명했다. 본래 흑도란 위기 탐지 능력만큼은 기가 막혀서, 상대가 저보다 많거나 조금이라도 강한 것 같으면 도망치려는 습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분명 노강호께서도 그걸 아시고 혼자 나서시려는 것이리라.
‘일단 조장님께 보고는 드려야겠다.
잠시 서연의 눈치를 살피던 염이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제자분은 저희가 맡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서연은 그렇게 말한 다음, 무릎을 숙여 화련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었다.
“다녀오마.”
염이선과 맹원들은 홀연히 사라지는 서연의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서연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가서 보고부터 드리고 오는 것이 좋겠다. 옷도 눈에 안 띄는 걸로 갈아입고.”
경공으로 달려가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터였다. 노강호의 제자야 업고 가면 될테고 말이다.
저들끼리 상의하는 맹원들을 가만히 지켜보던 화련이 나지막이 말했다.
“저는 화련이라고 해요.”
“나는 염이선이라 한단다. 내가 업어줄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염이선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화련은 껑충 뛰어서 순식간에 담벼락 위로 올라갔다. 어린 소녀가 보일 만한 경공은 아니었으나, 그 눈빛에는 경멸이 잔뜩 담겨 있었다.
“어…….”
“싫어요.”
화련은 경계심 가득한 표정으로 염이선을 노려보다가, 이 장(丈)이 넘는 거리를 좁혀 원래 자리로 되돌아왔다.
"저 혼자 갈 수 있어요."
염이선은 입을 다문 채로 고개만 끄덕였다. 문득 열 살 넘게 차이 나는 앙칼진 막내 누이가 눈 앞에 아른거렸다. 한참 말 안 들을 나이라는 것이다.
'왜 맡기고 가신지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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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행이 된 서연과 예화는 말을 타고 곧장 도시를 벗어나 빠르게 남쪽으로 향했다. 예화의 걸음이 너무 느렸기 때문이다. 애초에 그런 몸 상태로 여기까지 온 것이 기적에 가까웠다.
원래는 마차를 타려 했으나, 도시 바깥까지 가는 마차는 몇 시진씩 기다려야 한다는 말에 어쩔 수 없이 마시장에서 남는 말을 빌려 탔다. 화양현에 도착하면 말을 반납해야 했지만, 그래도 처음부터 걸어가는 것보단 훨씬 나았다.
서연의 허리를 꽉 부여잡고 달리던 예화가 조심스레 말했다.
“고수 분들은 말도 이리 능숙하게 다루시는군요.”
서연은 처음 타본다는 말을 하려다가 속으로 꿀꺽 삼켰다. 타본 소감을 말하자면, 백호를 타는 것보다 몇 배는 쉬웠다. 아무래도 속도도 백호 쪽이 빠르고, 달리는 길도 백호 쪽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험하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백호는 산길로만 다니니까.
서연은 순식간에 화양현에 당도했다. 상인이 서연이 내민 대여 증서를 확인하는 사이, 예화는 말에서 힘없이 내려섰다. 오랜 시간 달린 탓에 가랑이가 쑤셔오는 고통에 그녀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이윽고 증서 확인을 마친 상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은전 두 냥 되겠습니다.”
“……!”
어마어마한 대여료에 낯빛이 변하는 예화를 힐끗 본 서연은 묵직한 전낭에서 은전을 꺼내어 내밀었다.
‘생각보다 훨씬 비싸구나.
말이 금값이라더니. 그리 오래 빌린 것도 아닌데 요금이 이리 나올 줄은 미처 몰랐다.
말을 묶어두고 나서는데, 예화가 고개를 푹 숙인 채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아직 노잣돈은 넉넉했으니 진정 괜찮았다. 오히려 몸도 아픈 처자가 괜한 눈치를 보는 것 같아 서연의 마음만 더 불편했다. 괜찮다는 듯 미소를 지으려던 서연은, 이내 눈을 가늘게 떴다.
“저쪽에 있는 자들, 아는 사람들인가요?”
“어디요?”
“오솔길 옆에.”
“매, 매 각주에요…….”
흑도로 보이는 이들 열 명이 아무렇게나 걸어오고 있었는데, 등에 두 자루 도를 열십자로 맨 사내가 유독 눈에 띄었다. 첫인상부터 험악하게 생긴 것이, 딱 봐도 매 각주였다.
그들은 스무 걸음을 더 다가온 후에야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예화냐?”
매 각주가 묻자, 예화는 대답도 못하고 덜덜 떨다가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아버렸다.
“그럼 그쪽이 예화가 데려왔다는 여고수시고? 어째 생각보다 겉모습은 그럴듯한데, 얼굴은 어째 가리고 다니나? 지아비한테만 보여주시려고?”
매 각주는 제가 하는 말이 우스웠는지 말을 하는 와중에도 픽픽 웃어댔다.
그러다 웃음기를 싹 지우더니, 옆에 있던 수하들에게 손짓했다.
“일단 저 죽립부터 벗겨라. 얼굴을 봐야겠다.”
수하들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연스럽게 무기를 뽑아들었다.
서연은 동요하는 대신, 섬섬옥수 같은 손을 움직여 면사 한 켠을 걷었다. 그리고는 도화를 머금은 눈동자를 천천히 치켜들어 다가오는 사내들을 응시했다. 제 외모와 인상이 가지는 위력을 알고 있었기에 할 수 있는 행동이다.
“…….”
졸개들은 혼이 나간 듯한 얼굴로 서연의 반면(半面)을 바라봤다. 일부는 아예 입도 벌리고 있었는데, 그들은 서연이 코앞까지 다가오는 것을 봤으면서도 움직일 생각조차 못하는 듯 보였다.
툭툭.
서연은 그대로 앞으로 움직이면서 손으로 졸개의 마혈(痲穴)을 짚었다. 예전에 수인경혈도를 읽었을 때 외워두웠던 혈자리였다. 처음 짚어 보는 것이었는데, 움직임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손끝에서 꿈틀거리는 이게 진기인가. 지금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서연은 외모에 한눈이 팔린 졸개들의 마혈을 마저 짚었다. 마혈이 눌린 졸개들은 식은땀을 흘리면서 온 몸을 부들부들 떨 뿐,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했다.
반수가 허무하게 제압당했다. 미인계가 이렇게나 무섭다.
서연은 무심한 눈을 한 채로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는 재차 호흡을 가다듬은 다음에 말했다.
“그쪽 말대로 죽립을 벗을까 고민 중이다.”
긴장한 티를 내지 않으려 애를 썼다. 다행히 이 협박은 매 각주에게 먹혔다.
“…….”
말 많던 매 각주가 입을 다물었기 때문이다.
본디 점혈이란 내가기공(內家氣功)의 정수로, 대단히 높은 수준의 무인들만 펼칠 수 있는 기술이었다. 상대방의 신체에 자신의 내공을 심어 넣어야 하기 때문이다. 자칫 실수했다간 제압은커녕 세맥과 혈도만 끊어지는 위험한 기술이기도 했다.
어쩌면 정파로 위장한 마교의 고수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저 여자와 눈이 마주친 수하들이 돌처럼 굳어버렸기 때문이다.
생각이 복잡해졌기 때문일까, 매 각주는 더 이상 웃을 수 없었다.
물론 졸개들이 이러한 사실을 알 리가 없다. 눈치없는 졸개 하나가 말했다.
“너희들 뭐하냐? 장난치지 말고 빨리 덮쳐라. 아, 혹시 저 여자가 가장 늦게 움직이는 놈한테 시중이라도 들어준다더냐?”
“하하하하.”
서연이 다시금 면사를 걷어올리려 하자, 매 각주가 욕지거리를 쏟아냈다.
“전부 아가리 닥쳐라. 그 망할 주둥아리를 찢어버리기 전에. 루주께서 모셔오라 명하신 분을 이리 희롱하는 것이 제정신 박히고 할 짓이냐? 한 번만 더 개소리를 지껄이면 그 대가리부터 갈라놓을 줄 알아라.”
수하들은 싹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여기 또 눈치없는 놈이 있었다.
“희롱은 각주님께서 먼저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러자 매 각주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허리춤에 매달려 있던 도를 뽑아들고는 딴지를 걸었던 수하의 머리를 후려쳤다. 도면(刀面)에 얻어맞은 사내는 찍 소리도 내지 못하고 뒤로 넘어갔다. 그러고도 성이 안 차는지, 매 각주는 발을 치켜들어 수하를 마구 밟아댔다. 결국 기절한 수하는 코도 부러지고, 이빨도 죄다 날아갔다.
“또 대꾸하고 싶은 놈 거수.”
“…….”
“저렇게 되기 싫으면 전부 입 닥치고 있어라.”
졸개들은 감히 대답할 생각도 하지도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서연이 다시금 면사를 만지작거리자, 화들짝 놀란 매 각주가 납작 엎드렸다.
“살려주십시오. 제가 미처 고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까불었습니다. 부디 회화루로 모실 수 있게 해주십시오.”
흑도에서 오랜 세월 살아남은 인물답게, 매 각주의 처신은 너무나도 신속했다. 매 각주는 옆에서 ‘갑자기 뭐하십니까? 같은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졸개들에게 욕을 쏟아냈다.
“이 골통 빈 놈들아. 저기 서 있는 저것들이 진짜로 멍청해서 서 있기만 하는 걸로 보이냐? 살고 싶으면 당장 납작 엎드려라. 그래야 팔다리 하나 정도로 끝날 수 있으니까.”
그제서야 수하들은 매 각주의 말대로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매 각주가 다시 입을 열었다.
“수하들은 제가 잘 단속하겠습니다. 살려주십시오.”
서연은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녀의 침묵은 오히려 매 각주의 심장을 얼어붙게 했다. 등줄기에는 식은땀이 흘러내렸고, 심장은 마치 폭풍우 속의 배처럼 거칠게 요동쳤다.
“정녕 믿지 못하시겠다면, 이 자리에서 애들 팔부터 부러뜨리겠습니다.”
“각주님……?”
“미친놈들아. 너희들 살려주려고 이러는거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매 각주는 자리에서 일어나 수하들의 팔을 하나씩 부러뜨렸다. 죄다 칼 쓰는 손을 부러뜨렸는데, 그 때문인지 매 각주를 살벌하게 노려보는 수하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덤벼드는 놈은 하나도 없었다. 전부 덤벼도 매 각주를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기어코 수하들의 팔을 모두 분지러뜨린 매 각주는 한숨을 푹 내쉬더니, 제 오른팔부터 꺾어버렸다. 그리고는 바닥에 엎드려 말했다.
“살려주십시오.”
매 각주는 서연의 대답을 기다리면서 왼팔을 내밀었다. 양손잡이이니 마저 부러뜨리라는 뜻이다.
서연이 침묵하고 있자, 매 각주가 재차 말했다.
“당연히 아시겠지만,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저희를 지켜보고 있는 녀석들이 있습니다. 아마 지금쯤 회화루로 달려가고 있겠지요. 제가 회화루로 통하는 지름길을 압니다. 놈들보다 빠르게 도착할 수 있습니다.”
살업을 쌓고 싶지 않았던 것은 서연도 마찬가지였다. 서연은 경악한 얼굴로 저를 올려다보는 예화와, 매 각주를 번갈아 응시했다.
“예화를 업고 달려라.”
왼팔은 그대로 두겠다는 뜻이다.
“감사합니다.”
살았다는 생각이 들어서인지, 자리에서 일어서는 매 각주의 다리는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예화야, 업혀라.”
“…….”
“여기서 널 해코지했다간 우리 다 죽는다. 그러니 업혀다오. 부탁이다.”
매 각주는 그렇게 말하면서 매고 있던 무기도 싸그리 던져버렸다.
“영영이가 어디 있는지 안다. 루주의 처소 근처에 갇혀있을거다.”
“……!”
예화의 얼굴이 충격으로 물들었다. 그녀는 한참 동안 매 각주를 응시하다가, 결국 등에 업혔다.
“출발해도 되겠습니까?”
서연이 고개를 끄덕이기 무섭게, 매 각주가 빠른 속도로 달렸다. 외곽에서 활동하는 흑도치고는 뛰어난 보법이었다. 서연은 앞서 달려가는 매 각주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그의 몸놀림을 따라 했다.
거친 호흡을 들이키며 달리던 매 각주는 뒤를 돌아본 순간 경악했다. 서연이 깃털 같은 발걸음으로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탓이다. 그렇게 빠른 속도로 달리는데도 죽립이 기울어지지 않았다. 도저히 사람의 움직임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다.
언뜻 본 것만으로도 제가 펼치는 보법과 같은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도 보법에서부터 격이 달랐다. 물론 상식의 선이라는 것이 있었기에, 매 각주는 서연이 보법을 단 한 번 보고 통찰했다고는 생각지 못했다.
‘……도망갔어도 전부 죽었겠다.
*****
그렇게 산길을 일 각 정도를 달리고 나서야 현(縣)의 입구에 도착했다.
눈앞에 펼쳐진 현은 제법 번화한 모습을 띠고 있었다. 사람들로 북적이는 거리에서 조금 떨어진 외딴 곳에 붉은 단청과 화려한 문양을 새긴 기루가 자리 잡고 있었다.
매 각주는 회화루를 바라보다가 서연에게 말했다.
“간부들만 아는 뒷길이 있습니다.”
매 각주를 뒤따라 들어간 창고에는 장정 하나가 겨우 들어갈만한 철문이 놓여 있었다. 그림자와 먼지로 가득한 물건 틈 사이에 놓여 있는 탓에 자세히 살피지 않으면 찾지 못할 정도로 교묘하게 감춰져 있었다.
매 각주가 철문 앞에서 말했다.
“매 각주다. 일 마치고 복귀했다.”
곧 철문이 아무 소리 없이 열렸다.
“각주님. 벌써 다녀오셨습니까?”
매 각주는 문지기를 쳐다보더니, 좌장으로 뒷목을 내리쳤다. 곧 정신을 잃은 문지기가 픽하고 쓰러졌다.
“일단 기절시켰습니다만, 죽이는 편이 나을까요?”
매 각주는 그렇게 말하며 문지기의 목덜미를 발로 짓밟았다. 서연의 허락이 떨어진다면 당장이라도 숨통을 끊을 기세였다.
이 순간 서연은 무림인들의 손속이 얼마나 잔혹한지를 다시금 실감할 수 밖에 없었다.
허나 서연은 번민에 잠기는 대신, 조용히 문지기의 마혈을 짚었다.
“계속 가지.”
“……예.”
서연은 어두운 통로를 걷는 내내 생각을 정리했다. 습하고 퀴퀴한 흙냄새가 코를 찔렀지만, 그녀의 사유(思惟)는 더욱 뚜렷해졌다. 저들이 짐승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짐승이 무어냐.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같은 사람을 해치는 것이 짐승이다. 이를테면, 단지 쾌락을 위해 아녀자를 납치하여 능욕하고 팔아넘기는 자들이 그러하고,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려 무고한 이들의 보금자리를 불태우고 가족을 찢어놓는 무뢰배들이 그러하다.
허나 이 짐승들은 누군가에게는 잔혹한 짐승이면서도, 또 다른 이에게는 피붙이고, 또 벗이 되기 마련이었다.
세상의 흑과 백이 이토록 명확하게 분리되어 있지 않은 탓에, 부처께선 대자대비(大慈大悲)한 마음으로 모든 중생을 감싸안고 구제하라 이르셨다.
허나 부처가 되는 것은 너무나도 힘든 일이다. 이 세상에는 자비를 베풀 수 없을 정도로 잔악한 짐승들이 많기 때문이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악행 앞에서 무한히 자비를 베풀 수 있을 정도로 서연은 인내심이 깊지 못했다.
그러나 사람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사람은 무어냐.
한 번 어긋난 자를 바로잡아 길을 일러주는 것이 사람이다. 죄를 뉘우치는 자를 받아들이는 자가 사람이며, 또 짐승이 사람을 해치지 못하도록 계도하는 것이 사람이다.
어두운 통로 끝, 사다리가 있는 곳에서 미약한 빛이 새어들어왔다.
서연은 짐승으로 가득한 무림에서 사람이 될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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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화루의 으뜸은 단연 회화루주였다. 그렇다면 그 다음가는 2인자는 누구일까.
저마다 지닌 재주가 다르다 하나, 예화는 매 각주를 2인자라 여겼다. 인망은 두말할 나위 없었고, 당장 회화루주를 제외한다면 회화루에서 가장 강한 사내가 바로 매 각주였기 때문이다.
헌데 그런 매 각주가 허리가 끊어져라 굽신거리니, 자연스레 서연에게 경외심이 솟아날 수밖에 없었다.
저게 진짜 여고수라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였다.
이런 표현이 적절할지는 모르겠으나, 저리 펑퍼짐한 옷을 걸치고서도 도드라지는 굴곡을 숨기지 못하는 데에서 예화는 넘을 수 없는 벽을 느꼈다.
회화루에서 그런 방면으로 명성이 자자한 손 부인을 데려와도 상대조차 되지 않을 듯했다.
괜한 패배감을 느끼며 사다리를 오르자, 고관대작이라도 묵을 법한 화려찬란한 방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예화는 회화루에서 오랜 세월을 보냈지만, 이런 방이 있다는 것은 오늘에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주변을 조심스럽게 살피던 매 각주가 입을 열었다.
“바로 위층에 회화루주가 있습니다.”
서연은 예화가 완전히 올라서는 것을 확인한 후 입을 뗐다.
“이만한 현이라면 필시 관아(官衙)가 있을 터인데.”
“……허면 관아로 가서 포쾌들을 불러올까요.”
매 각주는 그렇게 말하면서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눈치껏 대답하기는 했지만, 흑도에 몸담은 무인에게 관아로 가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허나 화양현의 관리들은 대부분 회화루주가 건넨 뇌물을 받아먹은 탓에 자신이 간다 한들 쉽사리 움직이지 않을 터였다.
자칫 심기를 거스를 수도 있었기에, 매 각주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변명처럼 들리실지 모르겠으나, 저희 루주께서 포두에게 바친 돈이 적지 않아 관아에서도 선뜻 나서려 하지 않을 겁니다.”
자신이 가봤자 무의미하다는 말을 돌려 말한 것이었다.
권위적인 어투를 사용하는 것은 꽤 낯설었지만, 흑도를 상대로 굳이 얕보여 좋을 것은 없다 결론 내린 서연이 입을 열었다.
“무림맹이 오고 있다는 말을 덧붙인다면 나서지 않고는 못 배길 것이다. 화양현에 닿기 전에 이미 말을 끝내 놓았으니, 진위 여부를 확인하는 것도 어렵지 않겠지. 이해했나?”
“……이해했습니다.”
매 각주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어차피 거절하면 죽음뿐이다. 뇌옥에 들어가는 순간 흑도 인생도 끝이 나겠지만, 죽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 듯싶었다.
도망치는 것도 불가능했다. 저만한 실력자라면 오히려 자신이 도망가기를 기다리고 곳곳에 함정을 파놓았을지도 몰랐다. 애초에 무림맹이 오고 있다면 섣불리 도망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무리 관의 영향력이 하늘을 찌른다지만, 화양현 같은 작은 현의 관아보다는 무림맹의 위세가 더 높았다. 무림맹원들이 권위의식을 발휘하여 다툼을 일으킨다면 모를까, 웬만한 상황이라면 관아에서도 협력하려 할 것이다.
“……가보겠습니다.”
서연은 도로 비밀통로로 내려가는 매 각주를 응시했다.
어차피 흑도는 믿어서도 안되고, 믿을 수도 없는 족속들이다. 매 각주가 진짜로 관아로 가서 포쾌들을 불러올 가능성은 낮다고 여겼다. 어쩌면 주변 흑도들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도 있겠지만, 서연은 그래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발소리가 멀어지자, 예화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는 여기 있는 편이 좋을까요?”
“같이 올라가는 편이 나을 거에요. 인질로 잡힐 수도 있어서.”
비수에 맞을 위험이 있기는 했지만, 그 정도는 충분히 막아낼 자신이 있었다.
“방해 안 되게 납작 엎드려 있을게요.”
예화가 서연의 등 뒤에 달싹 달라붙고, 서연은 검집에 손을 얹은 채로 방 밖으로 나섰다.
꽤 넓은 복도가 한눈에 들어왔다. 방은 꽤 많았는데, 저 안에 납치당하거나 뭣도 모르고 잡혀온 여인들이 한둘씩 들어차있을거라 생각하니 속이 뒤틀렸다. 화련이가 자신을 만나지 못했으면 이렇게 됐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문득 이대로 올라가 회화루주만 쓰러뜨리면 나머지 흑도 놈들이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질도 잡고, 어쩌면 다른 지역으로 도망가서 또 똑같은 짓을 벌이고…….
서연은 잠깐 눈을 감고 생각했다. 몇 명까지 감당할 수 있을지 가늠하려는 것이다.
위층으로 올라가자, 시종으로 보이는 놈들이 소리를 내지르며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서연은 아랑곳하지 않고 검을 뽑은 다음, 옆에 있는 기둥을 벽채로 갈라놓고 다시 떨거지들을 응시했다.
종잇장처럼 갈라져 나뭇조각을 뱉어내는 벽과 기둥, 그리고 서연의 분위기가 맞물렸다.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 같았던 떨거지들은 눈빛을 교환하더니 좌우로 비켜섰다. 서연은 떨거지들을 지나치며 하려던 말을 뱉어냈다.
“썩 꺼져라. 못난 얼굴을 보니 기분이 참 더럽다.”
떨거지들은 서연의 눈치를 보다가, 계단 아래로 후다닥 달려 내려갔다.
침입자가 나타났다, 여인 홀로 쳐들어왔다, 루주님이 위험하시다 등등. 온갖 외침이 아래쪽에서 울려퍼졌다.
‘더 많이, 더 많이 와서 봐라.
그렇게 생각하면서 문을 열자 무언가가 서연의 관자놀이를 향해 날아왔다.
쐐액!
서연은 암기의 정체를 확인하기도 전에 검을 뽑아 그대로 튕겨냈다. 두꺼운 장침 비슷한 것들이 속절없이 튕겨나가 바닥과 벽에 꽂혔다.
회의 중이었는지, 회화루주의 곁에는 간부 셋이 나란히 서 있었다. 서연은 회화루주의 분위기를 살폈다. 일전에 심상 속에서 만났던 응격검의 조사(祖師)에 훨씬 못 미쳤다.
“예화부터 죽여라. 저 년이 기어코 사달을 냈구나.”
회화루주가 무심하게 말했다.
세 간부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곧바로 땅을 박찼다. 서연은 각자 다른 방향에서 쇄도하는 간부들을 응시했다. 각자 들고 있는 무기가 달랐다. 누군가는 도끼, 또 누군가는 검, 또 누군가는 도(刀).
“꼴에 사내라는 것들이 삼대 일이라니.”
예상하지 못한 말에 간부들의 호흡이 흐트러졌다.
서연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회풍무류검의 초식을 펼쳤다. 광풍이 몰아치며, 달려들던 간부들이 황급히 뒷걸음쳤다.
“……!”
서연은 멈추지 않고 검격을 내질렀다.
점창의 검법은 섬전처럼 쾌속하면서도 무겁고 강맹하다. 극쾌의 묘리를 살리기에 찌르기에만 목숨을 거는 것이다.
쩌엉!
서연의 검에 꿰뚫린 도끼가 그대로 산산조각났다. 검격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기이한 각도로 뒤틀려 기어코 적의 옆구리를 찍었다.
“카학!”
검면에 후려치듯 맞은 적은 그대로 튕겨나가 담벼락에 부딪혔다. 벽에 처박힌 적은 덜덜 떨다가, 각혈하며 그대로 쓰러졌다. 호흡할 때마다 뚜둑 소리가 울려퍼지는 것이, 일격에 온 몸의 뼈가 부러진 것처럼 보였다.
소강상태가 일었다.
아래층에서 무기를 치켜들고 다급히 올라온 졸개들도, 남은 간부들도, 그리고 회화루주마저.
모두 아무 말도 못하고 경악어린 시선으로 서연을 응시했다.
상대가 몇 수는 앞서는 고수라는 사실을 알아챈 것이다.
가장 정신을 빨리 차린 것은 회화루주였다. 그는 손가락을 치켜들고 수하들에게 명령했다.
“쳐라!”
곧 검을 들고 있던 간부가 재빠르게 나섰다. 서연은 달려드는 적을 날카로운 눈으로 응시했다.
삼류 흑도의 무공에는 보통 이름이 없다. 제대로 된 무공을 익힌 이가 없기 때문이고, 또 지역마다 이름이 다를 정도로 제멋대로이기 때문이다.
저것도 마찬가지다.
잠깐 보기만 해도 검이 어디로 움직일지 알 것만 같았다.
‘어쩌면 지역에서 손에 꼽을 재능일 수도 있겠다.
서연은 제 재능에 대한 평가를 약간이나마 상향 조정했다. 신체능력은 모르겠지만, 오성만큼은 후기지수(後起之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하다 여겼다.
‘시험해봐야겠다.
문득 육체가 어디까지 따라와 줄지 궁금해졌다.
‘섬광분운(閃光分雲).
예측 불가능하고 연속적으로 몰아치는 회풍무류검과는 성격이 다르다. 구름마저 가를 정도로 빠르게 움직이는 검. 점창파 독문검법인 사일검법(射日劍法)에 미치지는 못할지언정, 섬광분운검도 신속하기로는 사일검법에 뒤지지 않았다.
간부가 한 걸음을 채 딛기도 전에 서연의 검이 아홉 번 움직였다.
근육이 찰나에 수축하고 펴지는데도 막힘이 없었다.
“아……!”
곧 어디선가 탄식이 들려왔다. 간부는 벌벌 떨다가 벌집처럼 구멍이 난 검을 놓치곤 뒷걸음쳤다.
서연은 도주하려는 간부의 머리를 그대로 내리쳤다. 짓이겨지는 소리와 함께 머리가 뭉개진 간부가 바닥에 처박혔다.
쩌억!
폭발한 경파가 강풍을 터뜨렸다. 다시금 침묵이 깔렸다.
서연은 고개를 돌려 회화루주를 응시했다.
“사내라면 당당히 나서라.”
“…….”
회화루주는 대답하지 않았다. 수하들은 빠짐없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도무지 나설 자신이 없었기에, 회화루주가 나서서 서연을 상대해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섣불리 도망칠 수도 없다. 여태껏 쌓아온 것을 전부 버릴 자신이 있다면 모를까.
마침내 회화루주가 입을 열었다.
“가장 먼저 공격한 놈에게 금은을 하사하겠다.”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회화루주가 다시 입을 열었다.
“여자도 주마.”
순간, 몇몇 졸개들이 움찔했으나 여전히 나서려는 이가 하나도 없었다. 얼굴이 붉어진 회화루주에게 서연이 말했다.
“인망도 없고, 사내다운 패기도 없구나. 한심한 놈.”
차라리 매 각주가 백 배는 나았다.
“너 같은 놈한테는 검을 쓰는 것도 아깝다.”
서연은 그렇게 말하며 납검했다.
이쯤 되니 회화루주도 발끈할 수밖에 없었다. 회화루주는 허리춤에 매여있던 검을 뽑아든 채 앞으로 나섰다.
“개같은 년. 무기도 없이 나를 상대할 수 있을 것 같더냐?”
서연은 회화루주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도약으로 빠르게 거리를 좁혔다. 그리고는 전신의 공력을 실어 좌장을 내밀었다.
회화루주는 다급히 검을 들지 않은 손바닥을 내밀었다. 검을 휘두르기에는 거리가 너무 짧았기 때문이다.
쩌어엉!
곧 기파가 갈라지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본디 장법(掌法)이란 타격 범위가 넓어 적의 내부를 뒤흔들고 진탕시키는 데에 그 목적이 있었다. 그렇기에 장력의 겨룸은 곧 내공이 깊은 자가 유리할 수밖에 없었다.
회화루주는 눈을 부릅떴다.
‘무슨!
마주한 순간 손바닥의 감각이 사라졌다. 마치 수백 장(丈)이 넘는 거대한 기암괴석을 홀로 마주한 듯한 기분이었다.
눈 한 번 깜빡이지도 못할 찰나의 순간, 팔꿈치에서 뼈가 부러지는 섬뜩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우두두둑!
“……!”
고통을 채 느끼기도 전에 서연의 강맹한 내력은 회화루주의 신체를 타고 올라 어깨마저 산산조각 냈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그의 오장육부를 모조리 진탕시켰다.
압도적인 내력 차이에 회화루주는 무기력하게 튕겨 나가 벽에 처박혔다. 금이 간 벽은 폭포처럼 먼지를 쏟아냈고, 그의 몸은 벽에 박힌 채 축 늘어졌다.
“끄…….”
회화루주는 입에서 죽은 피를 끝없이 흘려댔다. 살아는 있었으나 몸에 성한 곳이 단 한 군데도 없었다.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처참한 몰골이었다.
서연은 기절한 회화루주의 머리칼을 쥐어잡았다.
“루주의 복수를 하고 싶으면 오라.”
남은 간부들은 피만 줄줄 쏟아내는 회화루주의 꼴을 보며 저도 모르게 움찔거렸다. 그들의 눈에는 두려움과 경악이 뒤섞여 일렁였다.
침묵 속에서 무기들을 놓치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려 퍼졌다.
졸개들은 도망칠 생각도 하지 못하고 제자리에 엎드려 절했다.
“사, 살려주십시오.”
서연은 검집을 든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죽이지는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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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련은 경공을 펼치며 무림맹원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회화루 위치는 파악했나?”
“저쪽 길목이 가장 빠릅니다. 험한 산길이라 필마(匹馬)로 가는 것보다 경공을 펼치는 편이 배는 빠릅니다.”
장산의 말이 이어졌다.
“내가 최선두에 서고, 제갈혜는 최후미를 맡는다. 나머지 진형은 자유롭게 하되, 혹 아이가 뒤처지거든 가장 가까이 있는 자가 업고 속행해라.”
화련은 짤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배려해주셔서 감사해요. 그래도 혼자 갈 수 있어요.”
염이산이 헛기침하며 부연했다.
“염려치 않으셔도 될 듯합니다. 화련이가 저보다 빠릅니다.”
“진심이냐?”
“예.”
“너는 임무 끝나고 개인 훈련이다.”
“……예.”
장산은 화련과 잠깐 눈을 마주쳤다. 둘 다 아무런 말이 없었기에, 장산이 다시 물었다.
“속도를 더욱 높이려고 하는데. 따라오기 벅차면 언제든 말하도록 하거라.”
“벅차면 말씀드릴게요.”
“알겠다.”
장산이 고개를 끄덕였다.
“최대한 빨리 가자. 특이사항이 있거든 즉시 고하고. 혹여 사마외도를 마주치게 되면 최우선적으로 아이부터 보호하도록.”
곧 무림맹원들이 속도를 높였다. 화련은 어렵지 않게 그들을 뒤따랐다. 옛날부터 경공 하나만큼은 자신있었기 때문이다.
장산은 처음에는 화련을 힐끔거렸으나, 그녀가 아무렇지 않게 뒤따르는 것을 보고는 이내 경공에 집중했다.
“…….”
대화는 일절 없었지만, 어떤 상황인지 눈치채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이따금 드러나는 무림맹원들의 심란한 얼굴이 모든 것을 설명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그나마 나았지만, 염이선이 스승님의 일을 장산에게 고했을 때까지만 해도 맹원들은 거의 공황에 걸린 사람처럼 반응했었다.
그게 사실이냐, 진짜 사실이냐, 참말로 사실이냐, 출발하신지는 얼마나 되셨냐, 뭐라 말씀하셨냐 등등.
그러다 이내 체념했는지 눈을 질끈 감고 땅이 꺼져라 한숨부터 내쉬었다. 칼에 맞아도 신음 한 번 내지 않을 것처럼 생긴 무인들이 그리 반응하니 그 파장이 더욱 크게 다가왔다.
주변에 있던 다른 맹원들도 탄식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무어라 말하려다, 화련이 옆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입을 싹 다물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 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대충 윗사람에 대한 한탄 비슷한 것이리라 화련은 짐작했다.
분위기가 딱 그러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살다 보면 윗사람의 험담 정도는 할 수 있는 법이라 여겼기에, 화련은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오히려 괜히 중간에 끼어 고생하는 듯 느껴져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어디 스승님이 보통 사람인가. 만약 입장이 바뀌어 자신이 무림맹원이었다고 생각하면 정말 끔찍할 것 같았다.
잠시 후 화양현에 도착한 화련이 제일 처음 본 것은, 팔이 부러져 바닥을 빌빌 기어대는 흑도의 졸개들이었다.
장산은 흑도들을 힐끗 쳐다보더니 손을 까닥였다.
“잔챙이들이다. 살려두신 이유가 있을 터이니 빠르게 제압하고 속행한다.”
곧 무림맹원들은 도주하려는 흑도들에게 전광석화처럼 달려들어 검집채로 내리쳤다.
일단은 기절만 시켜놓고 나중에 와서 거둬들이기로 하고, 무림맹원들은 회화루가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막 현에 들어서렸는데, 팔이 부러진 한 사내가 다급히 달려왔다. 방금 만났던 흑도들과 같은 부류인가 싶어 제압하려던 찰나, 사내가 입을 열었다.
“무림맹 분들 되십니까? 소인은 회화루의 매 각주라 합니다. 이름 모를 여고수께서 맹원분들을 뵙게 되면 관아로 가서 포쾌(捕快)들부터 데려오라 명하셔서 이리 전해드립니다.”
뜬금없는 말에 장산이 미간을 좁혔다. 언뜻 듣기엔 그럴듯했으나, 흑도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장산이 믿지 못하는 기색을 보이자, 매 각주가 다급히 덧붙였다.
“정 믿지 못하시겠다면 절 포박하시고 두세 분만 따라와주시면 안되겠습니까? 그분의 분노를 감당키 어려울 것 같아서 그럽니다.”
“…….”
그쯤 되니 장산도 매 각주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미 한 번 실수를 저지른 상황이었다. 아니, 예전에 태실산에서 벌어진 일까지 치면 이번이 두 번째였다.
만약 이번에도 실수하면?
참을 인 세 번이면 살인도 면한다는데, 마침 이번이 세 번째였다.
곧 장산의 시야에 노망난 노강호가 자신들을 매타작하는 모습이 환영처럼 아른거렸다.
“……일단 관아부터 들르지.”
이에 반대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
“네놈들을 어찌해야 좋을까.”
제 앞에 넙죽 엎드려 있는 수십 명의 흑도를 보며 서연이 나지막이 읊조렸다. 지금이 바로 인생의 아주 중요한 기로라고 생각했다.
‘무작정 패는 것도 상책은 아니다.
작금의 행동이 앞으로의 방향성을 결정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때 한 놈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살려주시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허면 네 양쪽 다리부터 부러뜨려 보아라.”
“…….”
놈은 언제 그랬냐는 듯 입을 다물었다. 사내다운 강단이라곤 없는 놈들이었다. 애초에 기대도 하지 않았기에, 서연은 한숨조차 내쉬지 않았다.
서연은 공력을 끌어올린 다음, 검집채로 내리쳐 놈의 양쪽 다리를 부러뜨렸다. 우두둑 소리와 함께 고통을 견디지 못한 놈이 기절했다. 그제야 서연은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지키지 못할 말은 입에 담지도 마라.”
흑도들의 안색이 다시 창백해졌다.
“사람을 해친 적 없는 놈들은 손을 들어라.”
“……그러면 살려주시는 겁니까?”
서연은 질문한 흑도 놈을 노려봤다. 방금 전 질문했던 놈이 어떻게 되었는지 보았을텐데도 저런 질문을 할 정도로 눈치 없고 멍청한 놈들 투성이였다. 서연은 흑도 조무래기들에 대한 평가를 짐승보다 살짝 아래로 하향 조정했다.
“일단 거수해라.”
서연이 그렇게 덧붙이자, 눈치를 보던 흑도 몇몇이 슬금슬금 손을 들었다. 수를 세어보니 십 분의 일에 살짝 못 미쳤다.
서연은 그들의 면면을 훑어보다가, 옆에 서 있던 여인들에게 물었다. 회화루주를 쓰러뜨리고 갇혀있던 기녀들을 여기까지 데려온 것이었다. 개중에는 예화가 찾던 영영이란 아이도 있었다.
“저 중에 거짓을 고하는 자가 있다면 말씀해주십시오.”
“…….”
기녀들은 후폭풍이 두려웠는지 입을 다물었다. 서연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고개 숙이고 눈 감아라.”
눈치를 보던 흑도들은 서연이 검집을 만지작거리자 망설임 없이 고개를 처박았다. 서연은 다시 기녀들에게 물었다.
“손짓이나 눈짓으로 알려주셔도 됩니다. 눈치 볼 필요도 없습니다.”
그제서야 기녀들이 한 놈을 가리켰다. 주변 눈치를 보다가 세 번째에 손을 들었던 놈이었다.
“……염치도 없는 놈이었구나.”
서연은 발검한 채 놈에게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놈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치켜들었지만, 이미 늦어도 한참 늦은 후였다.
뻐억― 소리와 함께 놈의 몸이 그대로 땅바닥에 처박혔다. 굉음에 몇몇 흑도 놈들이 움찔거렸지만, 마른침만 삼킬 뿐 움직이는 놈은 하나도 없었다.
서연이 다시 입을 열었다.
“여인을 납치하거나, 겁탈하거나, 능욕한 적이 없는 놈은 일어나라.”
방금 전 일을 겪어서인지, 이번에는 일어난 사람이 고작 한 명뿐이었다. 공교롭게도 방금 전 일어났던 놈들 중 하나였다. 서연은 다시금 기녀들을 쳐다봤다.
기녀들은 이번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희들한테는 잘 해줬어요.”
“가끔씩 식사에 당과도 넣어줬어요.”
제법 제대로 된 놈이었다. 이제 보니 나이도 어린것이, 흑도에 몸을 담은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아 보였다.
“너는 저쪽 구석으로 가라.”
“……알겠습니다.”
감사하다는 말을 하지 않은 것도 마음에 들었다. 최소한의 염치는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몇 번의 문답을 반복하다 보니, 얼추 인간과 짐승의 경계가 뚜렷이 드러났다. 그때, 조용히 지켜보던 기녀 하나가 슬며시 입을 열었다. 유독 앳되어 보이던 기녀였다.
“저, 여고수님. 혹시 저희는 이제 어떻게 되나요? 쫓겨나나요? 회화루가 사라지면 저희가 갈 곳이 없어서요. 할 줄 아는 게 춤이랑 노래밖에 없거든요.”
맥락 없는 질문에서부터 어린 나이가 느껴졌다.
“옛날에 살던 곳으로 돌아가도 또 팔릴거에요. 예전에 매향각에서 일했을 때도 그랬어요. 포쾌들이 들이닥쳐서 저희들을 다 풀어주고,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노잣돈도 줬었는데, 아버지한테 노잣돈도 빼앗기고 다시 팔렸어요.”
기녀는 울먹거리지도 않았다. 이런 삶에 익숙해진 까닭이었다.
문득, 힘이 없으면 행복조차 누릴 수 없는 시대라는 생각이 들었다.
흑도가 사라지면 그 자리에 새로운 흑도가 생긴다.
회화루 또한 마찬가지였다. 불태워 없앤다 한들 머지않아 이름만 바꾼 새로운 회화루가 생겨날 터였다.
“…….”
서연의 고민이 깊어졌다.
*****
“이쪽으로.”
매 각주는 살면서 이런 일이 있을까 싶었다.
‘살다살다 무림맹원들과 포두를 동시에 안내하게 될 줄은.
포쾌들을 이끄는 자가 바로 포두였다. 비록 작은 현의 포두이기는 하나, 엄연히 무공을 익힌 무관이었다.
평소 제 실력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 인물이었는데, 무림맹원들을 마주하고는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것을 보니 맹원들의 역량에는 미치지 못했던 모양이다.
사실 관아로 들어서자마자 체포될 줄 알았다. 애초에 그럴 각오로 갔었다. 허나 정신을 차려보니, 선두에 서서 길을 안내하고 있는 기묘한 상황이었다.
‘모르겠다. 죽으면 죽겠지.
이미 반쯤 내놓은 목숨이었다. 체념한 매 각주는 회화루의 정문으로 들어섰다. 은밀히 움직일 필요가 없었기에 이쪽으로 들어온 것이다. 비밀통로가 있다는 것도 미리 일러두었으니, 누가 도망칠 것을 염려할 필요도 없었다.
회화루는 고요했다. 본래 포쾌들을 이만큼 끌고 왔다면 누구라도 반응했을 터인데 말이다.
‘그새 다 죽은건가.
그만한 여고수라면 그리하고도 남았을 것 같긴 했다. 회화루주가 이 현에서는 강했으나, 현 밖으로 나가면 삼류라는 사실을 매 각주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최상층으로 올라가자, 예상과는 전혀 다른 광경이 펼쳐졌다. 회화루주의 방은 쓰러져 신음하는 흑도(黑道) 무인들로 가득했다. 그중 몇몇은 비교적 멀쩡한 모습이었는데, 쓰러져 있는 흑도들을 밧줄로 꽁꽁 포박하고 있었다.
그중 한 사내가 매 각주를 발견하고는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매 각주님?”
“너희는 여기서 뭘 하고 있는거냐?”
“그, 웬 고수님이 나타나셔서 짐승만도 못한 놈들을 묶으라 명하셔서 그리 하고 있었습니다.”
“짐승……?”
곧이어 따라 들어온 맹원들과 포쾌들의 시선에도 경악과 놀람이 가득했다.
“완전히 병신을 만들어놨군.”
놀란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던 포두가 중얼거렸다.
회화루주는 말 그대로 숨만 겨우 붙어 있는 상황이었다. 단전은 완전히 부서졌고, 팔다리의 근육도 죄다 끊어진 처참한 몰골이었다. 작살난 오른팔을 보건대, 장력 싸움을 하다가 이리 되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맨손으로 이렇게 만들었다고?
황태자의 친위대, 천명검(天命劍)이 떠오를 정도의 손속이었다. 황실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그 숫자가 수백이 넘는다고 했던가. 평범한 무인 행세를 하고 다니다가, 선을 넘은 탐관오리나 무림인이 있으면 검을 뽑아 징치(懲治)한다는 소문을 들어본 적이 있었다.
그래서일까, 포두는 흑도들을 죽이지 않고 살려둔 것이 자신에게 보내는 경고라고 느꼈다.
포두가 다급히 물었다.
“그 고수분은 어디로 가셨느냐.”
“어디로 가셨다니요?”
사내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저기 계시지 않습니까.”
모두의 시선이 사내의 손끝으로 향했다.
본래 회화루주의 자리였을 태사의(太師椅), 그 앞에 한 여인이 앉아 있었다.
여인은 사색에 잠긴 듯,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고 있었다. 열린 창문에서 바람이 흘러들어오며, 면사가 천천히 옆으로 흩날렸다.
그 때문일까, 순간적으로 시선이 엉켰다. 실로 절세라 부족함이 없는 외모에, 남녀를 가리지 않고 모두가 경탄을 금치 못했다.
“헉!”
설마 하는 얼굴로 서연을 응시하던 매 각주가 비명을 지르듯 소리쳤다.
동시에 눈을 질끈 감고 얼굴을 감싸는 모습이 아주 우스꽝스러웠는데, 그 덕에 정신을 차린 이도 적지 않았다.
“……안 굳었다? 왜 움직여지는 거지?”
매 각주는 호들갑을 떨며 주변의 눈치를 봤다. 서연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해 할 수 있는 말이었다.
“푸헤헹.”
순간 웃음을 참지 못한 화련이었다. 괜히 웃음을 참으려다 더욱 바람 빠진 소리를 뱉어내고 말았다.
“……죄송합니다.”
괜히 뻘쭘해진 화련이 사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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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두는 걸레짝처럼 너덜거리는 검을 집어들었다. 아홉 개의 구멍이 뚫린 검신은 보는 것만으로도 섬뜩한 분위기를 내뿜었다.
‘도대체 용력이 얼마나 대단하기에…….
검을 부수지 않고 구멍만 이리 뚫어내려면 필시 찌르기의 대가가 아니고서야 불가능한 일. 비록 견문이 얕아 검흔만으로 문파를 가늠할 수는 없었으나, 각 문파의 명성은 익히 아는 바였다. 이만한 찌르기라면 점창파 말고 마땅한 문파가 떠오르지 않았다.
점창파. 먼 운남에 위치하여 다른 구파에 비하여 영향력이 작을 수는 있으나, 관리들에게는 남다른 의미를 가진 문파였다.
새외무림과 직접 맞닿아 마교를 비롯한 사마외도를 막아내는 칼날. 변방을 수호하는 변경백(邊境伯)과 유사한 역할 때문인지, 황실에서 점창파를 예우함은 공공연한 비밀처럼 전해졌다.
찰나에 면사 틈으로 비친 용모 또한 그러했다.
‘점창파 장문제자가 청목족이라 들었는데.
수는 적으나 남녀 가릴 것 없이 하늘에서 내려온 신선과 같은 용모를 지녔다던가. 직접 보지는 못했으나, 저만한 외모가 청목족이 아니라면 도대체 누가 청목족일까 싶었다.
포두는 마른침을 삼켰다. 어찌 그인들 촌구석에 박혀 썩고 싶었겠는가. 사파를 척결하고 백성을 괴롭히는 죄인들을 잡아들여 공을 세우고 싶었으나, 상급자인 지현(知縣) 나리가 회화루주에게 매수된 탓에 뜻을 펴지 못했다.
허나 상황이 이렇게 되었으니, 이것이 하늘이 주신 기회가 아니면 무얼까.
상급자를 고발함은 보통 죄이나, 탐관오리를 들춰내는 일로 포장한다면 능히 용기로 둔갑될 터. 지현과 같은 문반(文班) 출신들이야 곱지 않게 보겠으나, 애초 무반(武班)인 그에게 큰 의미는 없을 것이다.
문반과 무반은 진급 체계도 다르고, 화양현처럼 조그마한 마을의 지현이라면 필시 뒷배도 없을 것이 분명했다.
‘가능성이 있다.
저 여고수의 배분이 얼마나 높은지는 모르겠으나, 무림맹 조장씩이나 되는 인간이 쩔쩔매는 것을 보면 보통 배분은 아닐 것이다.
못해도 구파의 일대제자(一代弟子) 급은 될 것이라 짐작했다.
일대제자가 무엇인가. 말만 제자요, 다음 세대에 구파를 이끌어갈 실질적인 주역이자, 예비 장문인이며 장로가 될 배분을 말하는 것이 아니던가.
‘이 정도면 충분히 걸어볼 만하다.
겉보기엔 잔혹하나, 죽은 자가 하나도 없는 것을 보아 손속 또한 자비로웠다. 여인들을 한곳에 모아두고 죄질이 덜한 흑도들도 내버려두었으니, 저러한 성품을 지닌 정파 무인이 으레 가질 걱정거리란 뻔한 법.
상황판단을 마친 포두가 입을 열었다.
“회화루를 무너뜨리지 않아도 됩니다.”
상황 설명은 배제한 채 결론만 말했기에,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돌아보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허나 포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여고수가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 말을 들어주고 있다.
그 침묵이 계속 말하라고 독려하는 듯했다.
“회화루주가 운영하는 기루는 세 개였습니다. 그중 두 개는 매일 홍등(紅燈)을 달았으나, 회화루는 홍등을 건 날보다 그렇지 않은 날이 많았습니다. 창기보다 예기가 많았다는 뜻입니다.”
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 말씀해주세요.”
광오한 실력을 가진 여고수가 목소리까지 따뜻하니 그것이 배려처럼 느껴졌다.
“창기들은 돌려보내되, 예기들은 남겨 계속 영업을 하도록 하는 것이 옳습니다. 섣불리 없앴다가 새로운 흑도가 나타나 도를 넘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돌아갈 집이 없는 자들은 옆 주(州)에 생기는 관영기녀원(官營妓女院)으로 보내면 됩니다. 제가 마침 그쪽 담당 관원과 개인적인 친분이 있습니다. 마땅한 기녀를 모으지 못해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하니, 그쪽으로 보내면 될 듯합니다.”
“관리는 현에서 하게 되는 건가요?”
“기존의 흑도에게 맡기는 편이 낫습니다.”
관아에서 직접 운영하면 제약이 많다. 허가를 받기도 까다롭고, 인건비 또한 전부 장부에 비용으로 차출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뿐이랴, 상부에 보고하기도 마땅치 않고, 잘못했다간 횡령으로 몰릴 가능성 또한 적지 않았다.
“결국 기루란 손님을 받아야만 유지될 수 있습니다. 관아의 방식으로 운영했다간 결국 주변 기루에게 손님을 모두 빼앗기게 될 것이고, 그러면 같은 일이 반복될 뿐입니다. 허나 이리 하면 관아가 뒤를 봐주는 격이 되니, 다른 흑도들은 함부로 영업장을 열 수도 없을 것입니다.”
“죄를 지은 흑도들은 어떻게 하실 생각이신지요?”
목소리가 더욱 부드러워졌다. 제시한 방책이 마음에 든다는 것이다.
포두는 지금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엄벌에 처하고, 죄질에 따라 분류하여 상대적으로 괜찮은 자들만 추려 노역을 대신하는 식으로 근무토록 하는 방안이 좋을 듯합니다.”
“관리자로는 누구를 임명하실 생각이신가요?”
다 왔다. 포두는 곧장 대답하는 대신 주변을 살폈다. 사실상 답이 정해져있는 질문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매 각주가 좋을 듯 합니다. 살인을 저지르기는 했으나, 같은 흑도를 죽였을 뿐 민생에 손을 뻗친 적은 없습니다. 철저히 조사하겠지만, 죄질이 그리 크지는 않을겁니다.”
매 각주는 서연이 이야기를 꺼내기 전부터 눈치껏 무릎을 꿇고 있었다.
입도 다물고 있었다. 여기서 함부로 입을 열었다가 경을 치르게 될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기 때문이다.
서연은 고개를 들려 기녀들을 응시했다. 사실 매 각주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전해 들은 바 있었다.
무섭고 흉악하게 생겼으나, 기녀들을 함부로 대하지는 않았다고 했다. 매 각주가 두려워 억지로 뱉는 말이 아니었다.
사내로서의 강단도 있었다. 수하들을 함부로 대하지도 않았다. 기녀들과 수하들의 이름과 얼굴도 기억하고 있었다.
“매 각주님이면 괜찮을 것 같아요.”
“무서운 분이시긴 하지만, 다른 각주님들처럼 저희를 때리시진 않으셨어요.”
“손님들이 난폭하게 굴 때 도와주신 적도 있어요.”
매 각주는 여전히 무표정했으나, 속으로는 안도하고 있었다. 여태껏 선을 지키겠다고 했던 행동들이 그대로 돌아와 자신의 삶을 연명하게 하게 해주었으니, 실로 다행이라 생각했다.
기녀들과 포두가 직접 나서서 변호했다. 서연은 자신이 더 개입할 필요가 없다고 여겼다.
“부탁드리겠습니다. 포두 대인.”
서연은 그렇게 말하며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포권했다. 포두는 침묵했다. 일개 포두로서 무림인에게 이만한 예를 받을 줄 몰랐던 까닭이다.
“…….”
관원들을 무시하는 다른 무림인들과는 달랐다. 지방 관리를 무지렁이 취급하는 무림인들이 적지 않았다.
구파의 도인들은 전부 이러할까.
마음이 움직였기 때문일까, 포두 또한 눈빛부터 달라져 있었다. 곧 정신을 차린 포두가 예우하듯 마주 고개 숙였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
흑도들을 압송한 포두는 결연한 얼굴로 돌아갔다. 일을 제대로 마무리 지으려면 지현과 담판부터 지어야 했기 때문이다.
예기들이 서연에게 감사 인사를 올리던 그때, 한 소녀가 앞으로 나와 입을 열었다.
“감사합니다. 혹시 성함을 여쭈어도 될까요? 머릿속에 담아두고 평생 기억하려 합니다.”
영영이었다. 예화가 여동생처럼 아낀다던 바로 그 아이였다. 지학이 살짝 안 되어 보였는데, 눈에 총기가 서려 있는 것이 보통 아이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서연이라 한단다.”
서연의 대답에 영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입술을 달싹거리는 것이, 뜻을 곱씹기라도 하는 모양이었다.
“언젠가 뵙게 되면 반드시 보은하겠습니다.”
어린아이가 굳은 어조로 다짐하듯 말하는 것이 귀여워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중에 노래나 한 곡조 들려주렴.”
일을 마무리한 서연은 느긋하게 복귀했다. 제자와 함께 도시 바깥으로 나온 것은 처음이었으니, 이번 기회에 세상 구경이나 할 생각이었다.
마침 옆에 무림맹원들도 있었기에 서연이 물었다.
“근처에 아이를 데리고 가기에 적당한 곳이 있을까요?”
쭈뼛거리며 뒤따르던 장산이 사레라도 들렸는지 마른 기침을 토해냈다. 주변에 있던 맹원들도 마찬가지였다.
겨우 호흡을 되찾은 장산이 말했다.
“화양현의 일은 맹에서도 예의주시하도록 하겠습니다. 걱정은 놓으셔도 될 듯 합니다.”
동문서답이었다.
허나 서연은 뭐라 되묻는 대신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하남에 있는 도시들의 치안을 관리하던 중에 여기까지 단숨에 달려올 정도로 책임감이 넘치는 사람들이 아닌가. 지금처럼 정신을 못 차리는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어디 무림맹원이 할 일이 한둘이랴. 서연은 무림맹원 또한 참 할 짓이 못 된다고 생각했다. 보통 책임감으로는 감당하기 어렵다는 뜻이었다.
물론 맹원들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맹주님과 독대하여 차를 마시는 것보다 지금이 열 배는 더 불편했다.
‘앞으로 하남 쪽 임무는 쳐다도 안 봐야겠다.
‘교대가 언제더라? 한 반 년 남았나? 그때까지 어떻게 버티지?
‘보고서가 도대체 얼마나 늘어난거야.
뛰어난 고수는 목울대의 울렁임만으로도 전음입밀(傳音入密)을 알아차린다는 것을 알았기에, 처량한 신세를 어디에다 한탄할 수조차 없었다. 그렇다고 다른 곳으로 가자니, 어디가냐고 한소리를 들을까 눈치가 보였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맹원들의 불안도 커졌다.
폭풍전야라 할 수 있겠다.
“그럼 맹원 분들은 보통 어디에서 쉬시나요?”
저 질문은 지금 너희 주제에 쉴 생각을 하는 것이냐고 눈치를 주시는 것일까, 아니면 너희들과 같이 있는 것이 불편하니 당장 꺼지라고 눈치를 주시는 것일까. 장산은 말 한마디에 오장육부가 뒤틀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오늘 처음 알았다.
맹주님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맹주님이 그립다.
장산은 주변 눈치를 슬쩍 봤다. 맹원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시선을 피했다. 먼저 대답한 사람이 피를 본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그렇다고 눈앞에서 떠넘길 수도 없었다. 자신이 일을 해결하지 못해 수하들에게 떠넘기는 무능한 놈이라 생각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문득 노강호께서 맹주님께 가서 항의하는 장면이 머릿속에 선연히 그려졌다.
갈굼당한 맹주님이 다시 장로님들을 갈구고, 갈굼당한 장로님들이 다시 대주님들을 갈구고…….
‘아.
눈앞이 새하얘지는 느낌이 이러할까. 내리갈굼의 지옥이 눈 앞에 선연했다.
장산은 눈을 질끈 감고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입을 열었다.
“어찌 맹원의 일원으로서 편히 쉴 수 있겠습니까. 앞으로 반년간은 주야 2교대로 돌아가면서 민생 안정에 집중할 계획입니다.”
폭탄선언이었다.
당황한 맹원들은 눈을 부릅뜨고 제 조장을 노려보거나, 꺽꺽 소리를 뱉거나, 심장을 부여잡았다.
서연은 시선이 화련에게 향해 있어 그러한 광경을 보지 못했다.
그때였다. 서연의 손을 꼭 잡고 있던 화련이 입을 열었다.
“스승님. 저 당과가 먹고 싶어요. 배도 고파요.”
“배고프니?”
“네.”
화련은 그렇게 말하며 맹원들을 슥 돌아봤다. 그러면서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화제를 돌려줄테니 눈치껏 떠나라는 뜻이다.
‘아!
‘실로 자애로운 심성이다!
‘노망난 노강호 밑에서 어찌 저런 제자가 나왔을까? 선녀라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구나!
무림맹원들은 화련의 품성에 감탄했다. 제갈혜는 아예 입에 주먹까지 넣고 울음을 참고 있었다. 물론 서연이 고개를 돌렸을땐 언제 그랬냐는 듯 정자세로 서는 것을 잊지 않았다.
“저는 이만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제자와 식사를 해야 해서요.”
“조심히 가십시오.”
“혹시 같이 드시겠습니까? 정말 고생하시는 것 같아, 밥이라도 대접하려 합니다.”
장산의 머리에서 식은땀이 흐르려던 찰나에, 화련이 다시 입을 열었다.
“저는 스승님이랑 둘이 먹고 싶어요.”
그날 화련은 맹원들 사이에서 선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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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연은 가까운 객잔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도시로 향하는 길목에 자리한 탓인지, 객잔은 온갖 강호인들로 왁자지껄했다.
“맛집인가 봐요.”
옆에 있던 화련이 중얼거렸다.
손님이 워낙 많아 잠시 기다려야 했다. 점소이가 다급히 다가와 주문부터 먼저 받겠다고 하기에, 화련이 먹고 싶어 하는 음식 몇 가지를 주문했다.
“요즘 병사로 지원하면 돈을 그리 많이 번다면서? 서쪽 오랑캐들이 그리 강해 보이지는 않던데. 이번 기회에 나도 병사나 지원해볼까?”
“나는 전쟁이 너무 커지지는 않을까 걱정되는데, 자네는 아닌가 보군.”
세상 소문 논하기를 좋아하는 행인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어느새 빈 자리가 났다.
객잔 일층에는 흉악한 인상을 지닌 낭인들이 앉아 있었는데, 그들은 서연의 범상치 않은 분위기와 허리춤에 매인 검을 보고 이내 시선을 내리깔았다.
서연은 잠시 멍한 표정으로 낭인들을 쳐다봤다.
“…….”
낭인들은 서연의 시선을 느꼈는지 저들끼리 수근거리다가, 도망치듯 거리를 벌려 객잔 바깥으로 사라졌다.
갑자기 급한 일이라도 생긴 것일까?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아시는 분이세요?”
“잠시 착각했단다.”
서연은 당과를 먹는 화련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과거의 자신이라면 어떠했을까. 사내들과 눈을 마주칠까 두려워 고개를 푹 내리깔고 도망칠 생각부터 하지 않았을까.
사람은 고쳐 쓸 수 없다는 말이 있다. 타고난 본성이 쉽게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자신은 어찌 변했단 말인가?
오랜 세월 세상과 등지고 살아온 스스로가 한심하여? 아니면 용기를 내고자 결심했기에? 지켜야 할 인연이 생겨서? 이대로 살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혹은 흔히 말하는 깨달음을 얻어서인가?
아니다.
화전민 여자아이에게 연민을 느꼈기 때문이다.
서연은 무심코 화련을 내려다보았다. 땡글맹글한 눈동자가 고스란히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서연은 사람은 고쳐 쓸 수 없다는 말을 믿는 사람이었으나, 동시에 아주 사소한 계기로도 변화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이 그러했기 때문이다.
번개와 같은 깨달음이었다. 누군가에게는 사소할지 모르나, 정기신의 균형이 기이할 정도로 뒤틀려있던 서연에게는 사소하지 않았다.
고금을 통틀어 다신 없을 재능을 가졌기에, 정(精)과 기(氣)의 타고난 능력만으로 이미 천상의 경지에 닿아 있었던 서연이었다. 허나 신(神)은 그렇지 못했다. 절대자의 것이라기엔 유약했고, 어렸으며, 미숙했다.
인간의 정신은 오직 자기성찰과 참오를 통해서만 성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음의 문을 닫고 외진 곳에 틀어박혀 살았기에 세속의 경험을 쌓지 못했고, 조각에 몰두하며 심신을 다스렸기에 번뇌할 일이 없었다.
그렇기에 깨달음을 얻을 계기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지금은 달랐다.
번뇌했고, 행동했으며, 작게나마 이루었다.
서연은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심득을 붙잡으려 애를 썼다. 보통 이럴 때는 가부좌 자세로 운기조식(運氣調息)하는 것이 보통이나, 아직 그러한 경험이 없어 쉽사리 행하지 못했다. 다만 본능적으로 눈을 감고 호흡을 가다듬으며 집중할 뿐이었다.
시끄럽고 변수도 많은 객잔에서 운기조식을 하는 것이 위험하다는 사실을 무협지에서 본 적은 있었으나, 제가 하는 행동이 운기조식의 일종이라는 사실도 몰랐다.
찰나였다. 서연의 육신을 타고 옅은 바람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일반인들은 그저 바람이라 생각하고 넘겼지만, 무공을 익힌 적이 있는 사람들은 달랐다.
즉각적으로 반응했다.
“이건……?”
“몸이 갑자기 왜.”
본능적으로 경직되었고, 갑자기 제 몸을 떠는 이도 적지 않았다.
허나 무공 수위가 그리 높지 않았기에, 그 기이한 현상의 원인까지는 밝혀내지 못했다.
허나 화련은 달랐다. 경외심을 느꼈다.
“스승님…….”
남들보다 훨씬 무공 수위가 높았기 때문이다.
자연지기가 몰아치며 온 몸을 따스하게 감싸안는 것이 느껴졌다. 온화한 기운이 혈맥을 타고 흐르는 듯했다.
화련은 감격으로 가빠지는 숨을 가까스로 다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 스승의 호법을 서려는 것이다.
하수와 고수를 막론하고 모든 무인은 운기조식 중 가장 취약해진다. 온 정신을 내부를 관조하는데 쏟아붓기에, 자칫 사소한 변수 하나에 주화입마에 빠지게 되기 때문이다.
스승님 정도 되는 고수가 그것을 모를리 없으나, 본래 깨달음이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찾아오는 법.
그렇기에 화련은 세찬 시선으로 주변을 경계했다.
서연은.
눈을 감고 몰입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시커먼 공간에 당도했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공허한 공간이었으나, 왠지 모를 편안함이 그녀를 감쌌다.
“…….”
자세히 보니 완전히 시커먼 공간은 아니었다. 마치 잠을 잘 때 눈꺼풀 사이로 살색 빛이 새어 들어오는 것처럼, 그 내부 또한 그러했다. 다만 빛이 너무나 미약하여 집중하지 않으면 어둠이라 착각할 뿐이다.
마치 계란 껍데기 속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었다. 다가려고 하니 무슨 벽 같은 게 만져졌다. 서연은 별다른 고민 없이 주먹을 들어서 벽을 두드렸다.
생각보다 더 단단했다. 서연은 벽을 몇 번 더 두드려보다가, 편안한 자세로 자리에 앉았다.
‘어쩌다가 여기에 떨어졌을까.
서연은 여기가 심상 속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했다. 그렇기에 시간이 지나면 현실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일반적인 고수들이라면 지금 같을 때에 막혀 있는 혈도를 재정비하거나, 새로 얻은 기운을 갈무리하거나, 혹은 소주천과 대주천을 반복하며 단전에 내공을 쌓고는 했다.
허나 십이정경(十二正經)과 기경팔맥이 뚫리다 못해 자연과 완전히 동화된 서연은 상황이 조금 달랐다.
육체와 내공은 이미 하늘에 닿았다. 더 나아가고자 한다면 결국 정신이 성장해야 했다.
허나 누구도 그러한 사실을 일러주지 않았기에, 서연은 편안한 공간 속에서 그저 호흡만을 계속할 뿐이었다.
'편안하구나.'
겁쟁이처럼 살았을때나 지금이나 세상은 그대로다.
바뀐 것은 마음가짐 뿐이다.
시간이 엄청나게 느려진 것처럼 느껴졌다.
반쯤 무아지경에 빠진 상황. 호흡을 반복하고 정신이 평안해지자, 서연을 가로막고 있던 단단한 껍질에도 마침내 미세한 실금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서연도 그것을 눈치챘다. 허나 이어지던 실금은 어느 순간 퍼져나가기를 멈췄다.
‘뭐지?
마치 이것으로는 부족하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이것이라니, 심득을 말하는 것일까?
그러다 정신이 몽롱해지며 무아지경에서 벗어난 순간, 찬물이 쏟아지는 것처럼 눈이 번쩍 떠졌다.
“아…….”
아쉬움과 탈력감이 동시에 몰려들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땐, 화련이 코 앞까지 얼굴을 들이밀고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
정신을 차렸을 땐 시켰던 음식들이 전부 식어 있었다. 화련에게 물으니, 그새 반 시진이 넘게 흘렀다고 했다.
“왜 먼저 먹지 않고.”
“당연히 스승님이 먼저 드셔야죠. 그리고 저는 당과를 먹어서 괜찮았어요.”
서연은 픽 웃고는 근처를 지나가는 점소이를 불러세웠다. 음식을 먹지도 않고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꼴이 되었기에, 점소이의 얼굴에는 불퉁함이 잔뜩 드러나 있었다.
“식은 음식은 다시 데워서 포장하고, 음식도 새로 내주실 수 있을까요?”
서연은 그러면서 돈을 두둑이 내밀었다. 잔돈은 가지라는 뜻이다.
“금방 내오겠습니다 여협!”
순식간에 대역죄인에서 협객 대접이다. 점소이는 능숙하게 주문을 받은 다음, 대나무로 된 통에 따끈따근한 음식들을 포장해 내밀었다. 저것도 다 값에 포함되어 있었다.
화련이 물었다.
“이건 나중에 드시려고요?”
“저분들 드리려 한단다. 그 사이에 음식이 나오면 먼저 먹으렴.”
서연은 음식을 들고 객잔 바깥으로 나섰다. 들어오기 전 보았던 거지들에게로 향하는 길이었다.
갑자기 연민이 들어 나누어주려는 것이 아니었다. 평범한 거지들이었다면 점소이가 벌써 쫓아내고도 남았을 터. 저리 떡하니 자리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개방(丐幫)에 정식으로 소속된 거지일 가능성이 높았다.
서연이 여태껏 만났던 정파 인사들은 하나같이 도리를 아는 이들이었다. 이 정도 대접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설령 개방 소속이 아니어도 상관없었다. 이리 여유로울 때 베풀어서 나쁠 일은 없지 않은가.
서연이 다가오는 것을 본 노년 거지가 넌지시 말했다.
“우리 주시려고?”
“네.”
“……참말로?”
“그럼요.”
노년 거지는 이런 일은 또 처음이라는 듯 머리를 긁적였다.
“나는 개방 출신이 아닌데? 뭔가 착각을 하고 있는 듯해서.”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드릴 생각이었어요.”
“그렇다면야 감사히 먹겠소.”
노년 거지는 고맙다며 고개를 넙죽 숙이더니,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큰 소리로 외쳤다.
“이리 와서들 먹어라! 이 분이 주신거니까 다들 고맙다고 하고!”
어디선가 슬금슬금 나타난 거지들이 서연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서연은 그런 거지들을 빤히 쳐다보다가 품에서 조각칼을 꺼내더니, 나뭇가지를 꺾어 그 자리에서 수저를 만들기 시작했다.
“…….”
맨손으로 퍼먹으려던 거지들은 눈치껏 서연을 지켜보았다. 그러다가 솜씨가 심상치 않은 것을 알고는 감탄사를 뱉었다.
“보통 실력은 아닌데.”
“기가 막히네.”
“솜씨가 좋은데, 형님은 어떻게 생각하쇼?”
“잘해.”
“그게 끝이여?”
“잘하면 잘하는거지. 나같은 무지렁이가 봐서 뭘 알겠냐?”
서연은 근처 물가에서 수저를 헹군 다음 거지들에게 건넸다. 거지들은 양손으로 젓가락을 들고 혀를 내둘렀다.
“칠도 안했는데 광이 나네.”
“부자들한테 비싸게 팔아도 되겠어.”
“일다경은 걸렸나?”
서연은 그런 거지들을 지켜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편히 드세요. 저도 식사를 해야 해서.”
그렇게 말하며 객잔으로 들어가려는데, 처음에 만났던 노년 거지가 입을 열었다.
“혹시 일가친척이나 지인 중에 이립 쯤 된 사내가 많소?”
“그건 왜요?”
“혹여 군문에 몸담을 생각이 있는 사람이 있거든 그러지 말라고 말리고 싶어서. 국경 쪽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갔다간 몸 성히 돌아오지는 못할 거야.”
방금 전까지 있던 장난기 가득한 노인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듯, 분위기가 돌변해 있었다. 문득 너무 고요해진 터라 서연은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지인 중에 사내는 없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듯 합니다.”
여기저기서 타박하는 듯한 대답이 되돌아왔다.
“그러게, 딱 봐도 외동이라니까.”
“형님도 틀리는 때가 있구만.”
“미안합니다. 우리 형님이 가끔 이래. 노망났다니까?”
“가서 사과드려. 이 분위기 어떡할거야.”
“헛소리니까 너무 담아두진 마시고. 알겠지요?”
서연은 거지들이 낄낄대는 것을 보다가 따라 웃었다. 서연은 자신이 이런 초탈한 분위기를 좋아한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그래서일까, 괜히 한 번 더 물었다.
“혹시 어린 제자를 데리고 구경할 만한 곳이 있을까요?”
거지들은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숭산에서 칠주야 정도 뒤에 행사를 한다고 하던데.”
“지역은 상관 없는거요? 없으면 섬서는 어떠시오? 조만간 화산이랑 종남이 한 판 한다던데.”
“놀러가기에는 물놀이가 좋은데, 하남에는 마땅한 호수가 없으니…….”
그때 노인 거지가 입을 열었다.
“용문석굴(龍門石窟)에는 가보셨나? 보아하니 조각 솜씨가 아주 뛰어난 듯 한데, 가서 얻을 것이 아주 많을 걸세.”
들어본 적이 있었다. 십만 개에 이르는 불상과 벽화가 있는 깊은 석굴이었던가. 높이가 다섯 장도 넘는 거대한 조각상도 있다고 했던 것 같았다.
옆에 있던 거지가 이어 말했다.
“낙양이면 확실히 가깝긴 하지. 마차를 타면 이틀도 안 걸리겠어. 구경거리도 많아. 옛 왕조들의 수도라 그런가. 식도락 여행하듯이 가도 좋고.”
확실히 영감을 얻을 거리는 많을 것 같았다. 큼지막한 상단들도 자주 집결한다고 하니, 눈도 호강할 것 같았고 말이다.
고민하는 와중에, 골똘히 생각하던 거지 하나가 입을 열었다.
"생각해보니 금룡상단이 연다는 각예대회(刻藝大會)도 낙양이었던 것 같은데? 내가 봤을 때 자네 정도 실력이면 입선도 어렵지 않을거야."
각예. 사물에 예술을 새긴다는 뜻이다. 조각도 각예의 일종이라 할 수 있겠다.
거지가 물었다.
"이번 건 어떻소?"
서연이 웃으며 대답했다.
"밥 값을 치르고도 남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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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산에서 낙양까지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았다. 작정하고 준마를 채찍질하면 두 시진 안에 닿을 수 있었고, 설령 도보로 길을 나선다 해도 넉넉히 사흘이면 충분히 다다를 만했다. 서연은 이왕 떠나게 된 길, 모처럼의 유람을 만끽할 작정이었다.
낙양으로 향하는 유람선에 오르기로 마음먹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한창 출항 준비에 여념이 없는지, 선원들의 움직임이 분주했다. 화물을 싣는 운송선과는 그 목적부터 달랐다. 돈 많고 유람을 즐기는 젊은 객들이 선호하는 배답게, 악공들의 흥겨운 가락과 진미로운 음식 냄새가 승선하기도 전부터 코끝을 간지럽혔다.
“인당 팔백 냥 되시겠습니다.”
섬뜩하리만치 비싼 가격에 곁에 있던 화련이 눈을 껌뻑였다. 너무 비싸요. 화련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허나 서연은 아랑곳 않고 선뜻 돈을 지불했다. 남궁세가에서 받았던 금자는 아직 손도 대지 않았던 터였다. 이번 기회에 어엿한 어른으로서 한껏 멋을 부리고 싶은 마음 또한 없지 않았다.
배 위에 올라타자 한켠에 두런두런 앉아 있는 젊은 남녀들이 보였다. 안휘성에서 만났던 남궁 남매와 비슷한 연배로 보였다. 하나같이 잘 사는 집안의 자제들인지, 등 뒤로는 호위 무사들을 하나둘씩 거느리고 있었다.
그들은 서연과 화련을 보고는 기이한 미소를 지었다. 왜 저런 표정을 하고 있는 걸까. 서연이 의아해할 무렵, 술잔을 든 한 귀공자가 불쑥 다가왔다.
“소저께서는 혹시 뱃값을 얼마나 내셨습니까? 설마 진정 팔백 냥씩이나 내신 것은 아니겠지요?”
추파를 던질 줄 알았건만. 뜬금없는 질문에 서연은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자 귀공자는 난감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사실 저희가 오늘 종일 배를 대여하여, 친구들끼리 장난삼아 뱃삯을 팔백 냥까지 올리면 어찌 될지 내기를 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손님이 단 한 명도 오지 않을 것이라고 말이지요. 저는 아무도 오지 않을 쪽에 걸었습니다.”
어쩐지 배에 손님이 그리 없더라니, 그런 사연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러면 내려야 하나요?”
“아닙니다. 내기에서 진 사람이 손님을 대접하고, 돈도 되돌려주기로 했습니다. 여섯 중에 저만 오지 않는다는 쪽에 걸었으니, 제가 대접해야지요.”
그가 웃으며 말했다.
“소개가 늦었습니다. 금룡상단의 삼남, 금진송이라 합니다. 자랑은 아니지만, 부잣집에서 나고 자라 이 정도는 큰 부담이 아닙니다. 남아일언 중천금이라 했으니, 소저께서 거절하시면 제 입장이 난감해집니다. 부디 친우들 사이에서 면을 세울 수 있도록 도와주시겠습니까?”
“금룡상단!”
서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는데, 옆에 있던 화련이 비명을 지르듯 소리쳤다.
그러다가 어색하게 입을 다물었는데, 어린 아이라 그런지 누구도 타박하지 않았다.
“혹시 동생분이십니까?”
“제가 가르치는 아이에요.”
“혹시 무얼 가르치십니까? 아, 이 이야기는 저쪽으로 가셔서 마저 나누시겠습니까? 흥미로운 이야기는 여럿이 들어야지요. 이건 이야기값입니다. 부디 받아주십시오.”
금진송은 그렇게 말하고는 품에서 전낭을 꺼내 건넸다. 겉보기에도 팔백 냥보다는 많이 들어 있었다. 서연이 거절하려는데, 금진송은 능청스러운 얼굴로 성큼성큼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서연은 헛웃음을 지었다. 상단의 자제라더니, 분위기를 주도하는 데 거침이 없었다. 이렇게 되니 거절할 수도 없었다.
그런데도 기분이 나쁘지가 않으니, 사람을 다루는데 탁월한 능력을 가졌다고 할 수 있겠다.
서연이 다가가자 곳곳에서 웃음이 터졌다. 비웃음이 아니었다. 내기에서 진 금진송을 놀리는 것이다.
금진송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빈자리를 가리켰다.
“여기 앉으시면 됩니다. 방금 말씀은 그리 했지만, 부담스러우시다면 적당히 어울려주시다가 언제든 돌아가셔도 됩니다.”
원형 탁자라 어딜 앉아도 옆 사람과 맞닿을 수 밖에 없는 구조였다. 서연이 적당한 자리를 골라 앉아, 화련도 옆자리에 앉았다.
자리에 앉은 영애가 고개를 까닥였다.
“운(雲) 가의 초아에요. 그쪽은요?”
“서연이라고 합니다.”
“가문은요?”
서연이 고개를 가로젓자, 운초아의 미간이 순간적으로 좁혀졌다. 수백 냥이 넘는 거액을 선뜻 낸 사람이 평범한 민초일 거라고는 상상조차 못했던 탓이다.
“그러면 어느 문파 출신이신가요? 화산? 아니면 종남?”
“딱히 소속된 문파는 없어요.”
“…….”
모든 이들이 숨죽인 가운데, 금진송이 다급히 나섰다. 상황이 묘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강호에 어디 본 신분을 숨기고 다니는 사람이 한둘이겠습니까? 운 소저도 그만 하십시오.”
“…….”
“이러지들 말고 들어보십시오. 제가 방금 서연 소저께 물으니, 제자를 가르친다고 하더이다. 무얼 가르치는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금진송은 그렇게 말하며 서연을 바라보았다. 사실 그도 나름의 생각이 있었다.
강호 무림에 여인이 홀로, 그것도 어린 여제자를 데리고 다닌다. 그뿐이랴, 허리춤엔 보란 듯이 검도 패용했다.
‘분명 뛰어난 검수일 것이다.
그래야만 했다.
자칫했다간 초대한 손님을 공개석상에서 망신 줄 불한당이 될 판이었다.
허나 서연의 입에서 튀어나온 문장은 그런 금진송의 기대를 배반했다.
“조각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조각?”
“낙양에서 각예대회가 열린다기에, 견문이나 쌓을 겸 가는 중이었습니다.”
운초아의 입매는 어느새 삐뚜름하게 올라가 있었다. 눈매에도 어느새 오만함이 잔뜩 피어올랐다.
다른 자제들도 마찬가지였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은연중에 서연을 무시하는 듯한 기운을 풍겼다.
태생이 그러했다. 각자 지역에서 왕처럼 군림하며 자란 탓이리라.
금진송만 어쩔 줄 몰라했다. 홀로 상가(商家) 출신이라서 그런가? 아니다. 그냥 타고난 성품이 그런 것이다.
운초아가 비웃음을 애써 숨긴 어조로 쏘아붙였다.
“원래 그리 얼굴을 가리고 다니시나요? 다른 의도가 있어서 그런 건 아니고, 불편해 보여서요.”
시선이 노골적이다. 어떤 생각을 하는 것인지 얼굴에 훤했다.
서연도 그러한 분위기를 눈치챘다. 그냥 일어서면 그만이었지만, 금진송이 너무 죄송하다는 듯 쳐다보아 그러지도 못했다.
화련이 너무 음식을 맛있게 먹고 있던 탓도 있었다. 봉황탕, 벽옥두부……죄다 들어보지도 못한 휘황찬란한 요리들이었다. 이번 기회에 원없이 먹이고 싶다는 마음 또한 있었다.
‘하긴, 이런 사람도 있어야지.
어디 정파라 하여 선인만 있겠는가. 오히려 여태 운이 너무 좋았던 것이다.
서연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반응하자, 운초아는 더욱 노골적으로 나왔다.
“아니면 용모가 추해서 숨기는 걸까요?”
“운 소저, 그만 하시오. 지금 선을 넘었소.”
금진송의 제지에도 운초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금진송을 제외한 다른 자제들이 무언으로 호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금진송을 제외하면 모두 무가의 자제였다. 은연 중에 상가 출신인 금진송을 무시하고 있었기에 이런 반응이 가능했던 것이다.
“일개 조각가가 그만한 거금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도 이상해요. 그 많은 돈을 어떻게 벌었을지도 궁금하네요.”
금진송이 벌떡 일어났다. 그는 이제 분노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놀림거리로 삼으려고 데려온 것이 아니다. 비록 내기에 져서 만났지만, 진심으로 대접할 생각이었다. 허나 친우라 소개한 작자들이 제 손님에게 물을 먹이니, 얼굴에 절로 열이 올랐다.
그는 세찬 시선으로 운초아를 노려보다가 서연을 향해 깊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서 소저. 날을 잘못 잡은 듯 합니다. 나중에 각예대회에서 뵙게 되면 제가 제대로 대접할테니, 지금은 장소를 옮기는 게 좋을 듯합니다.”
허나 운초아는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서연을 일으켜 세우려는 금진송을 보란 듯이 막아세웠다.
“근래 하남에 사마외도가 많이 들어왔다고 하던데, 혹 얼굴을 가리는 것도 그런 이유일지 모르죠.”
“나도 운 소저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오.”
“얼굴을 봐야겠어요.”
침묵하던 자제들의 입도 트였다. 사방에서 서연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그중에는 호위들에게 은밀히 시선을 보내 포위토록 하는 이도 있었다.
장난이 선을 넘었다. 아니, 어느순간부터 장난이 아니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금진송의 생각대로였다. 자제들은 하나같이 서연이 사마외도면 목을 베어 명성을 드높이고, 아니라면 일개 민초일 터이니 함구토록 할 생각이었다.
“적당히들 하시오!”
“저는 오히려 금 공자가 그리 나오는 이유를 이해할 수가 없어요. 얼굴 좀 보겠다는게 그리도 큰 죄인가요?”
호위들은 이제 노골적으로 서연을 빙 둘러싸고 있었다. 검집에 손을 올린 이도 적지 않았다. 여차하면 출수하겠다는 것이다.
‘이젠 안 되겠다.
서연은 더 이상 듣고만 있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혼자였다면 모를까, 화련이 바로 옆에 있었기 때문이다.
“얼굴을 보여드리기만 하면 되는 건가요?”
서연은 그렇게 말하며 죽립에 손을 올렸다. 얼굴을 가리고 다녔던 이유는 간단하다. 괜한 일에 연루될 것을 걱정했기 때문이다.
허나 오히려 얼굴을 가리는 것 때문에 문제가 생길 판이니, 드러내는 것이 옳았다.
운초아가 냉소를 감추지 않은 어조로 말했다.
“우둔하진 않으니 다행이네요.”
그렇게 말하며 이겼다는 얼굴로 서연을 응시했다.
운초아는 일개 민초에 불과한 서연이 자신들과 감히 한자리에 합석했다는 사실에 엄청난 불쾌감을 느끼고 있었다. 사마외도가 아니더라도, 이 자리에서 반드시 망신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조각가 따위가 검을 차고 다니긴.
꼴에 무인 행세를 하고 다니는 것도 거슬렸다. 이번 기회에 제대로 교육하고, 주변에 얼씬도 못하게 할 생각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교육은 일반적인 교육이 아니었다. 무릎꿇린 다음, 감히 얼굴을 올려다보지도 못하도록 격의 차이를 느끼게 하는 것을 의미했다. 운초아의 시종들처럼 말이다.
그때였다.
스윽.
서연이 죽립을 내리기 무섭게, 도화와도 같은 머릿결이 윤기로 이지러졌다.
“뭣!”
“어떻게 저런 색깔이…….”
비단보다 우아한 머리색에 감탄한 몇몇 자제들은 상황도 잊은 채 입을 떡 벌렸다. 근엄한 얼굴로 서 있던 호위들마저도 눈을 부릅뜨고 서연을 쳐다봤다.
당황한 것은 운초아도 마찬가지였다. 면사를 벗지도 않았는데 이미 빼어난 외양이 저절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발악하듯 외쳤다.
“며, 면사도 벗어!”
표면적으로나마 유지하던 경어조차 잊은 채였다.
모두의 시선이 서연의 섬섬옥수와 같은 손으로 향했다. 면사가 차차 내려오며 백옥같이 새하얀 피부가 겉으로 드러났다.
가늘게 휘어져 길게 뻗은 눈꼬리에는 벽녘의 연꽃과도 같은 눈동자가 자리해 있었다.
천하일색(天下出色)이라고 칭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외모였다.
한 사내가 혼을 빼앗긴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경국지색(傾城之色)이다.”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서연은 입을 작게 열고 긴 날숨을 내뱉었다.
탐스러운 벚꽃잎처럼 붉고 보드라운 입술이 움직일 때마다 사내들이 탄식을 토해냈다. 서연이 물었다.
“이제 충분한가요?”
“조, 조금만 더.”
서연은 말이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넋이 나간 얼굴로 중얼거리던 사내가 황급히 제 입을 틀어막았다.
“……미안하오. 나도 모르게.”
금진송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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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련은 근래 들어 스승님의 외유가 잦아졌음을 깨달았다. 서연은 사흘에 한 번꼴로 저자로 나섰고, 그럴 때마다 그림자처럼 화련을 데리고 다녔다.
화련이 서연의 손을 꼭 붙든 채 당과를 오물거리고 있게 된 것 또한 같은 연유라고 할 수 있겠다.
스승님께서 숨기는 것이 없음을 보이고자 이러시는지, 아니면 진정 어린아이 취급을 하시는지는 알 수 없으나, 화련은 왠지 모르게 후자일 것이라 짐작했다.
“당과 더 먹고 싶니?”
“괜찮아요.”
마치 노인이 장성한 손주를 어린아이처럼 대하듯, 스승님 또한 그러하시리라 지레짐작했기 때문이다.
‘옆집보다 여기가 더 달콤하네. 앞으로는 여기서 사달라 졸라야겠어.
생각의 관점이 바뀌어서인지, 혹은 시간이 많이 지나서인지는 모르겠으나, 화련은 이제 서연이 자신을 아이 취급하는 것을 당연한 이치처럼 받아들이고 있었다.
자고로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라 하였다. 스승님께 입은 은혜를 생각건대, 아이처럼 행동하는 것 자체를 나름의 효도라 여기기 시작한 것이다.
아예 마음가짐 자체가 바뀌었다고 할 수 있겠다.
화련은 작아진 육신에도 완전히 적응했다. 처음에는 팔다리가 전체적으로 짧아져 별 고생을 다 겪었으나, 이제는 가동범위가 작은 것 또한 나름의 장점이 있다는 것을 깨달을 정도로 익숙해졌다.
일단 몸이 가벼워서 움직이는데 힘이 덜 들었다. 적게 먹어도 금세 배가 불렀고, 온종일 움직여도 기운이 팔팔했다. 단점은 이따금 단것이 당긴다는 것인데, 그럴 때면 지금처럼 당과 한두 개를 집어먹으면 금세 괜찮아졌다.
이는 기존의 둔형천은술에 유혼의 몇몇 술법이 추가된 결과였다. 결과적으로 술법은 훨씬 정교해졌으나, 화련은 더는 그 때의 일을 떠올리고 싶지 않아했다.
영유아강술(嬰幼兒降術)이나 역린동심술(逆鱗童心術)처럼 이름에서부터 무언가 음습하고 불길한 내력이 느껴지는 술법들을 잔뜩 들고왔던 유혼의 얼굴이 자꾸만 뇌리를 스쳤기 때문이다.
화련은 살다살다 올빼미가 그리도 음험한 동물로 느껴질 줄은 몰랐다.
그때는 질색했지만, 결과적으로 화련의 외형은 이전보다 더 소녀다워졌다. 유혼의 말을 옮겨 표현하자면 앙증맞아졌다고 할 수 있겠다.
당장 당과를 입에 물고 걷는 지금도 그러했다. 그녀가 걸음할 때마다 사내아이들의 시선이 쏟아지니, 그 효험을 짐작할 수 있었다.
물론 화련은 그런 시선들을 일절 개의치 않았다. 당과를 먹는 데 온 정신이 팔려 있었기 때문이다.
“스승님, 근데 오늘은 어디로 가시나요?”
“일단은 청풍무관에 갈 생각이란다.”
“무관이요……?”
뜬금없는 서연의 말에 화련은 그저 눈만 껌벅였다. 천하에서 무관이라는 단어와 가장 어울리지 않을 듯한 이를 꼽으라면, 스승님이 능히 세 손가락 안에 들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스승님의 성정 상 문파의 현판을 뜯으러 가실 리는 만무할 터. 그렇다면 필시 다른 연유가 있을 터인데,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마땅한 까닭이 떠오르지 않았다.
‘청풍무관은 또 뭔데.
이름부터 동네에서 흔히 볼법한 삼류 무관처럼 들렸다. 필시 관장의 이름은 청풍일 것이요, 그 실력 또한 검기조차 제대로 뽑아내지 못하는 허접한 무인일 것 같았다.
물론 그 청풍이라는 자가 스승님처럼 은거했던 고수일 가능성이 없지는 않았기에, 화련은 묵묵히 서연의 뒤를 따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청풍무관의 현판이 눈에 들어왔다. 예상대로 낡고 빛바랜 나무 현판에는 ‘청풍무관’이라는 글자가 거칠게 쓰여 있었다. 문이 활짝 열린 무관 안에서는 앳된 소년들이 목검을 휘두르며 어설픈 초식을 익히고 있었다.
서연의 등장에 목검을 휘두르던 아이들은 일제히 동작을 멈추고 이들을 응시했다. 그들의 시선은 서연보다 화련에게 더 오래 머물렀다. 동네에서 보지 못했던 이쁘장한 아이가 나타나서 신기했던 모양이다.
곧 안쪽에서 묵직한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덩치 큰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사내가 경계어린 눈빛으로 서연을 바라보며 물었다.
“관장님 되시나요?”
“제가 관장이긴 합니다만.”
“검법을 배워보려 하는데, 혹시 여인도 받으시는지요?”
화련은 제 스승이 진짜로 도장깨기를 하러 왔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급히 서연을 쳐다봤다.
“……!”
청풍무관 관장, 청풍이 대꾸했다.
“남녀를 가려 받지는 않습니다만, 기준이 남성에게 맞춰져 있어 따라오기 쉽지는 않을겁니다.”
“적당히 호신용으로만 배울 생각이어서요. 그 정도는 괜찮습니다.”
청풍의 미간이 좁혀졌다. 명색이 무관을 운용하는 무인인지라, 자존심이 상한 것이다. 허나 먹고사는 일 앞에서 어디 자존심을 세우겠는가. 청풍은 최대한 내색하지 않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수업은 사시(巳時)에 시작합니다. 기간은 달포 단위이고, 가격은 팔십 냥입니다만……마침 검법을 시작할 시간인데 일단 구경부터 하시겠습니까?”
“그렇게 할게요.”
청풍은 무관에 배우겠다고 찾아온 여인들을 상대해본 경험이 적지 않았다. 보통 이럴 때 기합차고 힘들고 지루한 자세를 반복하여 시키는 모습을 보여주면 제풀에 겁을 먹고 나가떨어지곤 했다.
청풍은 자리에서 일어나 관원들에게 훈련 명령을 하달했다.
“관원들은 모두 응격검(鷹擊劍) 실시! 교관들은 목검을 들고 내려가서 자세가 틀어진 관원이 있으면 즉시 열외시켜라. 자세 한 번 틀릴 때마다 동네 한 바퀴 씩이다.”
곧 우렁찬 대답과 함께 관원들이 검법을 펼치기 시작했다. 청풍은 흐뭇한 표정으로 관원들을 지켜보다가, 단상 위에 올라가 검법을 펼쳤다.
“타핫!”
응격검은 날카로운 매가 먹이를 덮치듯 빠르고 맹렬하게 공격하는 검법이다. 쉽게 말해 잔재주를 배제한 묵직한 검이라는 것이다.
그랬기에 청풍은 나름대로 제 검에 자부심이 있었다. 실속은 없고 화려하기만 한 검법으로 사람들의 눈을 현혹시키기나 하는 다른 무관들보다는 자신이 배는 낫다고 여겼다.
‘제대로 안 할 거면 차라리 빠르게 포기하는 편이 낫다.
청풍은 이것을 나름의 배려라고 생각했다. 정녕 호신이 목적이라면 어중간한 마음으로 시작해서는 안됐다. 어디 흑도들이 여인이라고 사정을 봐주던가. 위협으로부터 몸을 지키려면 끝장을 볼 생각으로 임하던가, 아니면 돈을 들여 호위를 구하는 편이 낫다.
청풍은 가열차게 검을 휘둘러 몰아치기 시작했다.
“흐음.”
청풍을 지켜보던 교관 하나가 미소를 지었다.
“관장님께서 오늘따라 진지하시다. 검에 실린 내력이 심상치 않구나.”
“또 손님 겁주시려나 봅니다. 안 그래도 이번 달도 빠듯할 것 같은데.”
“다들 한눈팔지 말고 똑바로 따라해라! 관장님처럼 검법을 펼치려면 매일 전심전력을 다해도 모자랄 것을! 거기 너! 열외!”
교관은 자세가 흔들리던 관원 하나를 열외시킨 다음 말을 이었다.
“어련히 하시겠지. 솔직히 자네도 알잖는가. 응격검은 여인이 배울만한 검은 아니야.”
“그렇긴 하죠.”
그러나 교관들의 감상과는 달리, 뒤에서 지켜보던 화련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음.
허접하다.
이렇게 허접하면 안되는데.
최선을 다하고 있는 청풍의 노력이 무색하게도 화련은 응격검을 보면서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못했다.
‘왜 저기서 저렇게 움직이지?
너무 허접해서 말도 안 나올 지경이었다.
비록 검법을 제대로 배워본 적은 없으나, 명색이 중원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방파의 대공녀였다. 이렇다 할 고수들을 직접 물리친 경험도 적지 않았고, 그중에 검수가 가장 많았기에 검법이 눈에 익은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이치였다.
허나 저 검법을 보아라.
맹렬하게 내리꽂혀야 할 지점에선 느려지고, 힘을 실어야 할 부분에서는 힘이 빠져버린다. 오죽했으면 스승님이 자신을 여기에 데리고 온 이유가 잘못된 검법의 예시를 보여주기 위함이라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물론 동네 무관이라는 간판을 놓고 보면 그럭저럭 나쁘지 않았다. 허나 딱 그 정도였다. 검깨나 다룬다는 흑도를 만난다면 세 합도 버티지 못하고 모가지가 날아갈 그런 수준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서연이 입을 열었다.
“화련아.”
“네, 스승님.”
“저 검법은 어떠하니?”
화련은 별로라고 대답하려다가, 서연의 진중한 얼굴을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화련은 다시금 고개를 돌려 신중한 표정으로 청풍을 지켜보다가 말했다.
“저라면 저기서 이렇게. 아, 잠시만요.”
화련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바닥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던 목검을 집어들었다. 잠시 숨을 가다듬던 화련은, 순식간에 자세를 잡았다.
이내 화련의 목검이 허공을 갈랐다.
처음에는 검 끝에 힘도 실리지 않았고, 무게중심을 잃고 비틀거리기 일쑤였다. 검신은 사시나무처럼 떨렸고, 몸의 움직임도 삐걱거렸다.
말 그대로 엉망진창이었다.
지켜보던 몇몇 관원들은 아예 보란 듯이 비웃기까지 했다.
‘한 주먹거리도 안되는 것들이……!
화련은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는 몸에 눈살을 찌푸렸다. 허나 말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서연과 눈을 마주한 순간, 마음속에서 깊은 파문이 일렁이는 것을 느꼈다.
‘…….
화련은 목검을 고쳐 잡았다.
비록 검법을 펼쳐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으나, 화련은 제 오성(悟性)이 여느 천재들에 뒤처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이런 허접한 검법의 초식 정도는 어렵지 않게 해낼 수 있을 것이라 자만했고, 처참하게 실패했다.
‘집중하자.
화련의 표정은 이전과는 같은 사람이라고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진중해졌다. 화련은 눈을 감고 기억하는 대로 초식들을 반복해서 펼쳐나갔다.
응격검의 초식은 총 다섯 개.
‘비상하고, 하강하고, 회오리치며, 꿰뚫다가, 제자리로 되돌아온다.
초식마다 본래 이름이 있겠으나, 화련은 그저 그렇게 부르기로 마음먹었다.
화련의 움직임은 여전히 삐걱거렸다. 곁에서 들려오는 비웃음 또한 여전했으나, 화련은 더는 신경쓰지 않았다.
눈을 감은 채로 응격검의 모든 초식을 다섯 번씩 반복했을 때, 화련은 제 움직임의 어디가 잘못되었는지를 깨달았다. 열 번을 반복했을 때는 모든 초식을 보다 정확하게 펼치게 되었으며, 검신에서 전해져오는 떨림 또한 잔잔하게 가라앉았다.
스무 번을 반복했을 때는 초식들의 순서를 마음대로 뒤섞어가며 펼치기 시작했다. 화련은 이때쯤 응격검의 기원이 어디였는지 알 것만 같았다.
‘……점창파?
서른 번을 반복했을 때, 화련은 응격검에 완전히 몰입했다. 초식에는 군더더기가 사라졌고, 공격들은 거듭할 때마다 묵직해졌다. 화련은 동시에 점창파를 떠올렸다.
섬전처럼 쾌속하고, 무겁고 강맹하며, 베기는 집어치우고 찌르기에 목숨을 거는 공격일변도의 검법을 펼치는 도문. 응격검은 분명 점창을 닮아 있었다. 모든 초식이 결국 무언가를 꿰뚫기 위한 준비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먼 옛날 하산한 속가제자가 만든 검법이라도 되는 걸까? 아니면 세월이 흐르며 덜어내고 더해지는 과정에서 이렇게 변한 것일까?
그렇게 쉰 번을 반복했을 때, 화련은 더는 이것을 허접한 검법이라 폄하할 수 없었다.
오랜 세월이 흘러 초식도 변하고, 본래의 색도 대부분 잃어버렸지만, 저자의 집념만큼은 여전했다.
아마 응격검의 저자는 점창파를 동경했을 것이다. 무에 대한 재능은 그리 많지 않았을 것이나, 집념만큼은 하늘을 뚫을 듯했을 터. 현실의 벽에 막혀 더 나아가지 못할 것을 알았음에도, 끈질기게 매달려 어설프게나마 점창의 형(形)을 모방했으리라.
“…….”
원류를 한없이 닮고자 했던 아류(亞流).
화련은 말없이 잠시 서 있었다.
화련의 눈은 아무도 없는 허공을 향해 있었으나, 그 너머로 응격검을 창안한 무명의 무인을 보고 있는 듯했다.
형이 조잡하다고 한들, 그 속에 담긴 뜻까지 폄하할 수 있는가.
화련은 아무말 못하고 입만 뻐끔거리다, 고개를 푹 숙였다. 부끄러웠던 것이다.
문득 화련은 스스로가 한심하다고 느껴졌다.
“후우…….”
토해내듯 숨을 뱉어낸 화련은 다시금 서연을 바라봤다. 그리고는 딱딱하게 굳어버린 청풍과, 관원들을 응시했다.
화련은 청풍에게 포권을 취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청풍 관장님. 제 식견이 짧아 검법의 진의를 미처 깨닫지 못했습니다. 청컨대, 비무 한 번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으음…….”
청풍은 신음성을 뱉어내면서 살살 주변 눈치를 봤다. 온 관원들의 시선이 청풍에게 쏠려 있었다. 여기서 물러난다면 학관이 어떻게 될지는 불보듯 뻔했다.
평상시 같으면 나이대가 비슷한 관원을 대신 불렀을 것이나, 화련의 실력이 예사롭지 않아 보이는 탓에 그럴 수도 없었다. 교관들조차 못미더웠다. 어쩌겠는가, 직접 나설 수밖에.
“……들어오려무나. 내 다섯 수를 양보해주마.”
“감사합니다."
그날 청풍학관은 현판을 뜯겼고.
웬 여인과 소녀가 도장깨기를 하고 다닌다는 괴이한 소문이 하남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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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싸움에서 밀리거나 기세에 눌린다 싶을 때 바로 무기를 뽑아 드는 것은 무림인의 흔한 버릇이었다. 이는 논리도 명분도 부족하니 결국 힘으로 해결하려는 치졸한 발상인데, 문명인인 서연의 눈에는 실로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상대가 자신보다 얼마나 강한지도 모르면서 무턱대고 칼부터 뽑는단 말인가? 칼을 뽑는 순간 필시 둘 중 하나는 피를 보기 마련인데, 흑도든 백도든 자신이 패배할 거라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는 것이 참으로 안타까웠다. 허나 그녀가 검을 뽑지 않은 이유는 비단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스승은 제자의 거울이라 했다. 하찮은 모욕 몇 마디에 화를 내며 칼을 뽑는다면, 화련이 그 모습을 그대로 따를까 염려되었던 것도 있었다.
물론 운초아가 선을 넘었다면 이야기가 달라졌을지 모르나, 적어도 아직까지는 선을 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무기를 뽑지 않았기 때문이다.
범부들과는 그릇부터 달랐기에 할 수 있는 생각이었다.
허나 버릇은 고쳐놓을 생각이었다.
고등학생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가 저리 패악질을 부리니, 윗 사람들이 어찌 키웠을지 눈에 훤했다. 다른 자제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런 놈들을 내버려뒀다간 나중에 제자가 컸을 때 세상이 어찌 될지 눈에 훤했다.
“어찌, 사마외도처럼 생겼습니까?”
서연은 그렇게 말하며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흔치 않은 얼굴이라, 어디서 봤다면 쉬이 떠올릴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 말하며 사내들을 하나씩 응시하자, 사내들이 호응하듯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서 소저 말이 맞소!”
“내 백부께서 무림맹에 계시오만, 용모파기를 아무리 떠올려봐도 서 소저같은 미인은 본 적이 없소이다.”
“용모파기에 담기지 않을 외모요.”
사내들의 눈빛에는 그새 흠모와 찬탄의 빛이 깃들어 있었다.
사내라면 열이면 열 좋아할 얼굴이오, 설령 여인이라도 동경하고 따를만한 외모였다. 더구나 타고난 몸매도 좋았다.
물론 운초아도 예쁘장한 얼굴의 소유자였지만, 서연과는 감히 비교할 것이 못 됐다. 그 일례로 방금 전까지 운초아에게 호응하던 사내들이 그녀에게서 한 걸음씩 멀어지고 있었으니 말이다.
“근본도 없는 년이!”
기세에서 밀린 운초아가 가차없이 말했다. 더 이상 멸시하는 어조를 숨기지 않았다.
“그까짓 얼굴을 드러냈다고 하여 사마외도라는 의심을 벗을 수 있으리랴 생각했나?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조각가가 거금을 선뜻 내어 후기지수들만 탄 배 위에 올라탔다. 살수라는 의심이 절로 든다. 아니, 어쩌면 사내들을 노리고 탄-”
운초아는 색녀일지도 모른다는 말을 차마 내뱉지 못한 채로 입을 다물었다. 누군가 짙은 살기를 자신에게 뿜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누가?
서연은 아니다. 어디 한 번 해보라는 얼굴로 쳐다보고 있기는 하나, 적어도 살기를 풍기지는 않았다.
운초아는 식은땀을 흘리며 다급히 주변을 돌아보았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사내들이 당황했으나, 운초아의 시야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마침내, 운초아의 시선 끝에 한 소녀가 들어왔다.
서연과 같이 탄 이후로 줄곧 탁자에 앉아 음식을 먹고 있던 화련이었다.
“…….”
화련은 죽일듯한 눈동자로 운초아를 노려보고 있었다.
말도 안되는 살기다. 식은땀이 절로 흘렀다.
화련은 주변을 돌아보다가, 자신에게만 보이는 각도로 입을 달싹거렸다.
- 한마디만 더 해봐라. 그 창자부터 찢어주마.
그러면서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는데, 그 소리가 너무 작아 집중하던 운초아 말고는 아무도 듣지 못했다.
“허억!”
“끄으윽!”
곧 운초아의 호위들이 짙은 복통을 호소하며 주저앉았는데, 심한 내상이라도 입은 것인지 입에서는 검은 피를 줄줄 흘려댔다.
내력 차이가 너무나도 컸기에 발생한 일이었다.
애초에 화련은 천하삼대방파인 모산파의 후계자요, 내로라하는 후기지수 중 하나였다.
이까짓 ‘자칭’ 후기지수들과는 비교될 수준이 못 되었다.
‘이게 대체…….
운초아는 갑작스럽게 변한 상황을 도저히 따라갈 수 없었다. 다시 화련의 전음이 뇌리에 스쳤다.
- 네 년은 스승님께서 직접 계도하실 것이다.
그리 말하고는 아무 일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려 다시 음식에 집중하는 화련이었다. 겉으로 보기엔 그저 식탐만 많은 줄 알겠지만, 실상은 식사를 하는 젓가락으로 은근슬쩍 진을 그리고 있었다.
‘스승님께서도 묵인하셨다.
진을 보고도 아무 말씀 없으셨으니, 어느 정도 마음대로 행동해도 좋다는 뜻이리라.
‘사내들이란.
금진송을 제외하고는 죄다 한 패나 마찬가지였다. 하나같이 죽일 놈들이라는 것이다.
먼 과거 금분세수하여 함부로 살생을 하지 않는 스승님을, 잡것들이 뭣도 모르고 모욕했다.
‘소림의 방장대사도 아래로 볼 배분이거늘.
백 번 죽여도 쌌다.
배에 탄 순간부터 만약의 상황에 대비하여 진법부터 그려놓고 있었다. 무슨 진법이냐. 전서구를 소환하는 진법이라 할 수 있겠다.
‘운가의 초아, 만(萬) 가의 도오, 풍(馮) 가의 문연…….
순식간에 금진송을 제외한 자제들의 이름을 휘적인 화련은 종이를 냅다 바다로 던졌다. 곧 하늘에서 새 한 마리가 나타나 종이를 덥썩 물고 어디론가 날아갔다.
무림맹 지부가 있는 방향이었다.
저번에 염이선과 동행했을 때 지부의 위치를 미리 알아둔 덕분이었다.
‘본가로 돌아가도 지옥을 보게 해주겠다.
종이에는 자제들이 서연에게 어떠한 무례를 저질렀는지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무림맹원들이 머저리가 아니라면 상황의 심각성을 알았을 터, 직접 나서지 않고는 못 배길 것이다.
거파의 장문인보다 더한 자를 모욕했다. 가문에서 쫓겨나도 이상하지 않았다.
어쩌면 제대로 조지기 위해 대주급을 불러올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화련이 다시 손가락을 튕기자, 이번에는 자제들이 반응했다. 하나같이 꿀렁이는 배를 부여잡더니, 이마에서 짙은 땀방울을 흘려댔다.
운초아와 금진송만이 예외였다.
“끄, 끄으으…….”
설사였다.
허나 갑판 아래로 내려간다고 해도 해결할 수는 없을 것이다. 화장실을 망가뜨려놨으니 말이다.
남은 방법은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바지에 지리거나, 수치를 무릅쓰고 바다 밖으로 둔부를 내미는 방법 뿐이다.
잘난 방술사가 이래서 무섭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기 때문이다.
“허억, 허억…….”
“윽, 으그극!”
“도련님?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호위들이 다급히 달려와 배를 붙잡고 쓰러진 자제들을 일으켜 세웠다. 주변을 경계하는 호위들도 있었나. 허나 자제들은 그러건 말건 울음이라도 터질 것 같은 얼굴로 입술을 악물고 주변을 황급히 두리번거릴 뿐이었다.
‘갑자기……. 배가 왜…….
‘죽는다……. 말하면 죽는다…….
다들 혼절할 것 같은 심정으로 호위의 옷자락을 꽉 붙잡았다. 온 내공을 괄약근에 끌어모으는 이도 있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한 운초아가 사내들을 붙잡았지만, 사내들은 온 힘을 쥐어짜내 운초아를 밀어내고는 화장실로 향했다.
“꺼져라!”
“비켜!”
그 힘이 어찌나 강한지, 운초아가 형편없이 밀려날 정도였다.
운초아는 반쯤 넋이 나간 얼굴로 사내들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제 호위들은 피를 토한 채로 엎어져 있고, 제 편이었던 사내들도 죄다 아래로 내려가 버렸다.
“이게 무슨…….”
황망한 것은 금진송도 마찬가지였다.
‘설마?
그새 음식이 상했을 리가 없었다. 당장 금진송 자신도 음식을 집어먹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모르는 사이에 독을 탄건가?
‘허나 그렇다기엔, 저 아이가 음식을 가리지 않고 죄다 집어먹지 않았던가.
당장 지금도 음식을 끄적이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 식탐을 뚫고 독을 넣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서 더 당황스러웠다.
그때 운초아가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사, 살수였구나 네년! 처음부터 우리를 다 죽일 생각으로 배에 오른 거였어!”
자기도 저렇게 쓰러질까 두려웠던 것인지 운초아가 검집에 손을 얹고 뒤꿈치를 뒤로 밀어넣었다.
발검하려는 것이다.
저러면 진정 돌이킬 수 없게 된다.
‘나서야겠다.
금진송은 생각했다. 이러다가 진짜로 제가 초대한 손님이 큰 화를 입게 생겼다.
금진송은 눈짓으로 호위들과 시선을 맞추었다. 삽시간에 뜻을 알아챈 호위들이 고개를 끄덕이고 운초아의 곁으로 다가갔다.
허나 운초아가 검을 뽑는 것이 더 빨랐다.
촤악!
“네 입으로 배후를 들어야겠다!”
짧게 뇌까린 운초아가 검법을 펼쳤다. 서연의 팔을 자르려는 것이다.
“막아라!”
금진송이 다급히 소리쳤다. 호위들도 빠르게 반응했지만, 운초아를 따라잡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명색이 무가의 자제였다. 일개 호위들보다는 쌓아온 세월부터 달랐다.
운초아의 검이 서연의 팔에 닿으려는 그 순간이었다.
콰악!
서연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벼락처럼 검을 수직으로 뽑아 공격을 막아냈다. 그리고는 왼손으론 운초아의 얼굴을 꽉 틀어쥐었다.
“어떻…….”
어떻게, 라는 말을 운초아가 내뱉기도 전에, 서연은 팔을 휘둘러서 운초아를 바닥에 패대기쳤다.
패대기질을 반복할 때마다 쾅 하는 굉음이 울리며, 선상 바닥이 깊게 파였다.
쾅! 쾅!
“쿠엑, 쿠엑!”
운초아의 동공이 순식간에 흐려졌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종류의 고통이었다.
서연은 한 손으로 운초아의 얼굴을 들어올렸다 내려찍기를 반복했다. 내력은 싣지 않았다. 싹수가 노란 어린 것을 훈육하는 심정이었기 때문이다.
그럴 때마다 선상 전체에 큰 진동이 울렸는데, 그때마다 지켜보는 이들은 하나같이 몸을 움찔 떨었다.
‘역시 스승님이시다.
화련은 감탄하듯 서연을 응시했다. 뒤통수가 깨지기 직전까지만 내리치는 힘 조절이 기가 막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운초아는 두 눈을 까뒤집고 기절했다. 서연은 그런 운초아를 집어들고는, 선상 한쪽에 아무렇게나 내동댕이쳤다. 기이한 자세로 널브러진 모습이 마치 바닷바람에 널린 오징어 같았다.
서연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도로 납검하고는, 금진송에게 다가가 말했다.
“저 쪽이 먼저 공격했는데, 나중에 일이 생기면 공증을 서주실 수 있겠습니까?”
“얼마든지 그리하겠습니다. 서 소저께서 불편하실 일은 추호도 없으실겁니다.”
금진송은 속으로 감탄했다. 강호 무림을 주유하는 상인이라 간담이 큰 덕도 있었다.
‘진짜로 신분을 숨긴 고수였구나.
강호에서는 노인과 아이, 여자를 조심하라더니, 그 말이 딱 들어맞았다. 사문을 묻고 싶다는 생각이 굴뚝같았으나, 금진송은 가까스로 입을 다물었다.
어떻게든 환심을 사고 싶었기 때문이다.
여태 여인에게 헤벌레하는 사내들을 이해하지 못했던 금진송이었으나, 오늘만큼은 달랐다. 왜 주왕이 달기에게 홀려 파국을 일으켰는지 알 것 같았다.
‘참으로 아름답다.
오죽했으면 각예대회의 심사위원들을 매수하여 환심을 살 생각까지 들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렇게 된다면 아버지에게 죽도록 맞겠지만, 그 대가로 서연의 미소를 볼 수만 있다면 남는 장사라고 생각했다.
‘일단 뒷정리는 확실히 해야겠지.
무림인들의 은원은 확실하다 했다. 여기서 자신이 운초아와 그 일당들을 확실히 정리한다면, 서연 또한 만족할 듯싶었다.
‘납품도 몇 달 끊고, 주변 상인들에게도 눈치를 주면 알아서 말라죽겠지.
명색이 천하 오대 상단이었다. 고만고만한 무가 너댓 개 망하게 만드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친우? 원래 상인들에게는 모두가 친우이고, 동시에 남인 법이다. 맺고 끊음이 확실하다는 것이다.
다시 죽립과 면사를 둘러쓰는 서연을 보고, 금진송은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때 아닌 상사병에 걸린 금진송이었다.
*****
서연은 가는 도중에 배를 갈아타야 했다. 아래층에서 끔찍한 냄새가 올라왔기 때문이다. 다급히 바깥으로 도망쳐 나온 호위들의 신발에는 황갈색 무언가가 묻어 있었는데, 그것만으로도 돌아가는 상황을 대충 유추할 수 있었다.
이따금 아래층에서는 비명과, 푸드득― 하는 소리가 뒤섞였다.
다들 끔찍한 얼굴을 하고 있는 가운데, 화련만이 히죽 웃고 있었다. 어린아이가 똥 이야기를 좋아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기에, 다들 그러려니 했다.
졸지에 똥쟁이들을 친우라 소개한 꼴이 된 금진송은 얼굴이 벌개졌고, 곧 전서구를 보내 자신의 상단에서 새 배를 한 척 불러왔다.
“이쪽으로 갈아타시면 되겠습니다. 낙양까지 제가 모시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하하, 이 정도는 얼마든지 해드려야지요.”
서연이 고맙다고 할 때마다 금진송은 헤헤거리며 제 머리를 긁었다.
아무튼 그렇게 원래 탔던 유람선에는 똥쟁이 넷과, 운초아, 그리고 그들의 호위들만 남았다.
나중에 누가 배를 발견하면, 저들 모두 인간 취급을 못 받을 듯 싶었다. 왜 모두냐 묻는다면, 화련이 운초아의 복통은 하루 뒤에 일어나도록 조절했기 때문이라고 답하면 되겠다.
구조될 때 지릴 가능성이 높다는 소리다.
'하남의 다섯 똥쟁이. 보기 좋다. 어울려.'
다시 말하지만, 잘난 방술사가 이렇게나 무섭다.
화련은 히죽 웃으며 갑판 너머를 응시했다. 멀지 않은 곳에 낙양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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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연은 금진송과 나란히 다탁에 앉았다. 금진송은 시종에게 조심스레 다병을 넘겨받고는, 굳이 자신이 직접 따랐다.
“용정차입니다.”
각예대회가 열리기까지는 시일이 조금 남아 별채에서 대접받는 중이었다. 서연은 본래 거절할 생각이었으나, 금진송이 너무나 간곡하여 어쩌다보니 이렇게 되었다.
서연은 제 앞에 놓인 유리잔과 화려하기 그지없는 별채의 내부를 찬찬히 둘러보았다.
‘돈이 어지간히 많나 보다.
진짜 황금을 산처럼 쌓아두고 살 듯 싶었다.
단순히 금력만 놓고 보면 중원에서 첫손에 든다고 했다. 어느 정도 과장 섞인 말일 터이나, 아예 헛소리처럼 들리지도 않았다.
‘이것도 자기 돈으로 산 별채라고 했지.
초기에 자금을 지원받기는 했지만, 그 이후에 불린 것은 본인의 능력이라고 했다. 상재가 타고 났다는 것이다.
“그런 일을 겪으신 데에는 제 잘못이 큽니다. 적어도 각예대회가 끝날 때까지만이라도 제가 도울 수 있게 해주십시오.”
“너무 폐를 끼치는 것은 아닐지…….”
“전혀 폐가 아닙니다. 만회할 기회를 주십시오.”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야…….”
서연의 대답에 금진송은 됐다는 얼굴을 하며 남몰래 주먹을 꽉 쥐었다.
첫 단추는 꿰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용문석굴로 가신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길을 잘 아는 시종을 붙여드릴테니, 제자 분과 함께 구경하고 오시지요. 저는 가야할 곳이 있어서 함께 따라가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금진송은 그렇게 말하며 자리를 피했다. 함께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부담이 될까 싶어 자리를 파한 것이었다. 자고로 인연을 맺고자 할 때는 신중해야 했다. 급하게 굴었다간 가까워질 인연도 멀어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금진송은 바깥으로 나가기 무섭게, 신임하는 수하 하나를 붙잡고 말했다.
“돈은 넉넉히 들고가고, 가문의 귀빈이라 생각하고 대접하거라. 만약 돈이 부족하면, 전장에 내 이름으로 얼마든지 달아두고.”
수하는 눈을 껌뻑거렸다. 여인을 만나는 것보다 돈을 버는 것을 좋아하여, 온갖 핑계를 대며 혼사 자리도 거절하던 금진송이었다. 그런 금진송이 갑자기 이리 나오니 낯설 수 밖에 없었다.
수하는 조심스레 물었다.
“……저분이 누구시길래 그러십니까?”
“은인이시다.”
“혹시 뱃놀이를 가셨을 때 수적이 습격하기라도 했습니까?”
수하는 제가 말 하면서도 말도 안된다고 생각했다. 낙양에 수적이라니. 지나가는 개도 안믿을 헛소리였다.
금진송은 황홀하다는 얼굴로 답했다.
“내 견문을 넓혀주셨지.”
“……예?”
“호위도 넉넉히 데려가거라. 거절하신다면 적당히 거리를 두고 따라가게 해. 신분을 숨기고 계신 분이시다. 직접 힘을 쓰시는 일은 없어야 해. 곤란한 일이 생길 것 같으면 너라도 미리 나서도록 해라.”
금진송은 그렇게 말하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 따라가고 싶다.
형님들이 기루에 뼈빠지게 들락거리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을까.
그런 생각을 하던 금진송은 제 뺨을 몇 번이고 내리쳤다.
‘서연 소저를 기루의 여인들과 비교하다니! 너도 똑같은 사내였구나. 멍청한 놈! 무례하다고 뺨을 맞아도 이상하지 않다. 맞아도 싸다!
금진송은 다시 한숨을 내쉬다 저를 이상하게 쳐다보는 수하에게 말했다.
“내 뺨을 때려라.”
“……예?”
“세게 때려라. 발칙한 생각을 한 내게 벌을 주려는 것이다.”
수하는 눈치를 보다가 금진송의 뺨을 툭 쳤다. 도련님이 드디어 정신이 나갔나 싶었다.
“더 세게 쳐라!”
진짜 정신이 단단히 나가신 듯 했다. 이쯤 되니 수하도 겁을 먹을 수 밖에 없었다.
“도련님. 혹시 제가 무언가 잘못한 것이 있다면 말씀해주세요. 제가 어찌 도련님을 때리겠습니까.”
“때리라니깐!”
“아이고, 이러지 마시고요.”
수하는 넙죽 엎드렸다. 주인이 때리라고 진짜 때리는 시종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그래도 어렸을 때부터 모셔서 때리는 척이라도 했던 것이지, 다른 시종이었다면 때리라는 말이 나오는 즉시 넙죽 엎드렸을 것이다.
“하아…….”
금진송은 바닥에 넙죽 엎드린 제 수하를 보다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그동안 제 뺨을 계속 때린 탓인지 얼굴 한쪽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얼굴 한 번 봤다고 사랑에 빠지는 것들은 멍청이라고 했다.
금진송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 중 하나였으나, 자신이 그 당사자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돈 버는 재미에 빠져 제대로 사귄 친구가 몇 없던 탓도 있었고, 기루를 들락거리는 형님들이 한심해 보여 여인을 멀리했던 것도 있었다.
여인들을 봐도 별 감흥이 없었던 것도 한몫했다. 금진송의 눈에는 마을에서 이쁘다는 여인들도 다 비슷해 보였다.
눈코입이 달려있으면 그러려니 했다는 것이다.
허나 서연은 달랐다. 본 순간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금진송은 한숨만 푹푹 쉬었다. 도무지 일이 손에 잡힐 것 같지 않았다.
‘중증이구나.
눈이 지독할 정도로 높아서 생긴 일이었으나, 금진송은 끝까지 그 이유를 알아내지 못했다.
*****
서연 일행은 용문석굴을 향해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겼다. 인산인해를 뚫고 입구에 도착했을 때, 서연은 비로소 용문석굴이 어찌 그리 유명한지를 깨달았다.
멸망한 옛 왕조가 수만 명의 인력을 동원하여 수백 년에 걸쳐 이룩한 석굴이라 했다. 그 웅장한 크기는 도저히 가늠할 수가 없었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석굴의 갯수만 수천 개가 거뜬히 넘었으니 말이다.
“전부 돌아보시려면 열흘은 걸리실 겁니다.”
금진송이 붙여준 시종이 입을 열었다. 짧은 흑발과 흑안을 가진 여인이었는데, 풍기는 분위기만 보면 마치 오랜 세월 살수로 살아온 사람 같았다.
그러한 기색을 눈치챘는지, 여인이 입을 열었다.
“교교(嬌巧)라 합니다. 성은 없고, 금진송 도련님을 모신지는 십오 년이 조금 넘었습니다.”
슥 눈치를 보던 교교가 자백하듯 덧붙였다.
“……예전에 호위 살수 일을 하긴 했습니다. 거슬리신다면 사람을 바꿔드리겠습니다.”
“괜찮아요.”
“그러면 계속 안내하겠습니다.”
그렇게 석굴을 거니는데, 어디선가 큰 소리가 터져 나왔다. 비명과 함께 누군가를 향한 험악한 욕설이 뒤섞여 들려왔다.
화련이 서연에게 물었다. 키가 작아 인파에 가려 앞이 보이지 않았던 탓이다.
“스승님, 무슨 일이에요?”
서연은 비명이 들려온 방향을 쳐다보다 눈살을 찌푸렸다. 용문석굴의 자랑이라던 노사나불(盧舍那佛)의 머리가 뚝 떨어져 산산조각이 나 있었던 것이다. 워낙 크고 무게도 무거웠던지라, 도저히 되돌릴 수 없을 정도로 박살이 나 있었다.
“불상이 부서진 모양이구나.”
참담한 광경에 행인들이 혀를 내둘렀다.
“어떻게 이런 일이…….”
“아무리 근래 얕은 지진이 났다지만 어찌 노사나불이, 그것도 머리가 박살이 난단 말인가?”
“사람부터 옮겨! 이러다 다친 사람들 다 죽겠다!”
“끄아아악! 끄아아아악!”
“황상께서 전쟁을 일으켜 천존(天尊)께서 노하신 게야!”
“누구야! 어떤 정신 나간 놈이 황상을 모욕한거냐! 역모다!”
말다툼은 순식간에 싸움으로 번져나갔다. 염불을 외우던 스님들조차 일어나 싸움에 돌입한 행인들을 말리기에 여념이 없었다.
파편에 맞아 사경을 해매는 행인들이 적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서연은 하얀 의복에 피가 묻는 것을 아랑곳하지 않고 나섰다.
무거운 파편을 단숨에 밀어낸 다음, 혈맥을 두드려 출혈을 틀어막았다. 점혈을 응용한 것이었다.
어디서나 분위기를 뒤바꾸는 사람들이 있다.
두려움과 공황이 섞인 얼굴로 제 상처를 보던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손가락이 몇 번 닿았을 뿐인데 피가 멎었기 때문이다.
오죽했으면 표정변화가 극미한 교교마저도 눈을 둥그렇게 뜨고 있을 정도였다.
“……의원이셨습니까?”
“혈맥을 잠시 틀어막았을 뿐입니다. 길어야 두 시진이니, 그 안에 의원에게 데려가야 합니다.”
교교는 입을 다물었다.
혈맥을 틀어막았단다. 석불에 깔려 뭉개지고 산산이 찢어졌을 혈맥을 말이다. 도대체 내공 운용이 얼마나 섬세해야 그것이 가능할지 가늠이 가지 않았다. 적어도 후기지수라 불릴 급은 아니었다.
최소한 수십 년 강호를 주유하며 산전수전을 겪은 내가고수(內家高手)는 되어야 할 터였다.
‘금 도련님. 도대체 누굴 데려오신 겁니까.
내력이 느껴지지 않았기에 평범한 사람인 줄 알았건만, 이제보니 격의 차이가 너무 심해 인지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반박귀진(返璞歸眞)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모두들 그만 싸우고 저길 보시게!”
“신의……신의다……!”
사람들이 다툼을 멈추고 수군거렸다. 싸움에 휘말릴 것을 염려하던 민초들도 하나 둘씩 모여들었다.
멀리서 지켜보던 금룡상단의 호위들도 다가왔다. 그들은 교교의 지시를 받고 부상자를 실어 나르기 시작했다.
“금룡상단이다!”
“어쩐지……일전에 신의가 하남에 있다더니, 금룡상단에 몸을 담았었단 말인가?”
곧 곳곳에서 탄성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죽을 줄 알았던 사람들이 멀쩡히 살아 나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긴장했던 부상자들의 가족들이 서연에게 다가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의원님! 참으로, 참으로 감사합니다!”
“흑, 제 지아비를 살려주셨습니다.”
“선녀가 따로 없구나……!”
서연은 자신이 의원이 아니라 말하려다가 그저 마주 고개를 숙였다. 그것이 겸손으로 비춰졌는지, 환성은 더욱 커졌다.
서연은 실려나가는 부상자들을 지켜보다가 교교에게 말했다.
“저분들도 책임지고 치료해주세요. 비용은 제가 따로 지불하겠습니다.”
“아닙니다. 금 도련님께서 비용을 지불할 일이 생기면 원 없이 지원하라 하셨습니다. 애초에 그리 손해도 아니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근래 군문으로 끌려간 이들이 적지 않아 민심이 흉흉해지려던 참이었다. 사람 목숨 몇을 구한 것으로 세간의 민심을 얻는다면 금룡상단으로서는 실로 남는 장사였다.
교교는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래서 은인이라 하셨던 건가?
물론 아직 더 두고 보아야겠지만, 과연 상재를 타고난 도련님이다 싶었다. 상가가 심성이 선한 고수와 연을 맺어두어 손해 볼 것은 없었으니 말이다.
‘보기보다 나이가 많다고 생각해야겠어. 내공을 생각하면 못해도 불혹은 넘었다고 봐야겠지. 그런데도 손만 보면 약관의 젊은이 같으니, 본 실력을 숨기기 좋겠어.
교교는 냉혹한 살수의 시선으로 서연을 분석했다.
‘젊은 목소리와 외양으로 방심을 일으켜 하수는 물론이고 고수에게도 일격을 먹일 생각을 하다니……. 심성은 선한 듯 보이나, 매우 신중하고 계산적이겠다. 적으로 두면 매우 위험하겠어.
물론 도문 소속일 가능성도 배제하지는 않았지만, 교교는 서연이 정사지간에 속한 무인일 가능성이 높다고 여겼다. 살수라는 말을 듣고도 아무렇지 않다는 듯 넘겼기 때문이다.
‘어쩌면 진짜로 신의일 수도 있겠다.
성별도, 외양도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 바로 신의다. 그렇다고 헛소문으로 치부하기에는 이름난 고수들이 하나같이 칭송하는 것을 보면 분명 실존하는 인물이기는 할 터였다.
저만한 실력자라면 웬만한 고수들도 아래로 보일 터이니 저리 당당하게 돌아다니는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모르겠다. 힘드니 급료나 올려달라 해야겠다.
괜히 생각이 복잡해지니 가슴만 답답해졌다. 교교는 다시 본분에 집중하기로 마음먹었다. 금 도련님의 은인께서 용문석굴을 편히 관람하실 수 있도록 안내하는 일 말이다.
‘그건 그렇고, 당분간 용문석굴에도 발길이 뜸하겠구나.
크기가 5장이 훌쩍 넘는 노사나불의 얼굴이 완전히 망가졌으니, 흉흉한 소문이 돌기 전에 관에서 나서서 출입을 막을 것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서연을 바라봤을 때였다.
서연이 망가진 노사나불을 빤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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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양은 드넓은 중원에서 북경과 장안 다음으로 큰 도시다. 수백만이 넘는 인파가 쏘다니는 만큼, 인간군상도 다양했다. 조각가 또한 많았다.
허나 장안의 자랑이자 불심의 정수가 깃든 용문석굴 노사나불의 머리를 다시 빚어낼 만한 조각가가 있느냐 물으면, 그 누구도 선뜻 답할 수 없었다.
노사나불의 높이는 족히 다섯 장을 훌쩍 넘는다. 건장한 사내 여덟을 수직으로 세워도 그 머리 근처에도 미치지 못할 지경이다.
더구나 용문석굴의 재료는 딱딱하고 촘촘한 감람석이라, 칼날 한 번 대기도 쉽지 않은 강도를 지녔다.
내부는 어둠에 잠겨 횃불에 의지해야 했고, 천장 근방은 습기로 가득하여 정과 망치를 내리치기조차 여의치 않았다.
가장 골치 아픈 문제는, 사내의 몸통만 한 감람석 덩어리를 깎아내어 그 높은 곳까지 올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만약 그렇게 땀 흘려 올렸는데도 아귀가 맞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허송세월이 될 터.
“골치 아픈 일이 생겼군.”
“그러게 말일세. 당장 작업을 시작해도 반 년은 걸릴 듯 하니.”
낙양에서 가장 드높고 아름답다는 기루였다. 금룡상단주와 낙양을 관장하는 부윤(府尹)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꼼꼼하고 날카롭게 생긴 노인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낙양 부윤이었다.
흰머리가 히끗히끗 나 있었는데, 문사임에도 풍기는 분위기가 여느 장수 못지 않았다.
그가 말했다.
“자네 상단에서 내일모레 각예대회를 연다고 하지 않았나? 아예 불상을 만들어 보게 하는 건 어떤가? 노사나불을 수리할 인재도 알아볼 겸 말일세.”
“원한다면 그리 하겠지만, 목공(木工)이라면 모를까, 노사나불을 깎아낼 수준의 석공이 낙양에 나타났다면 내가 진작에 알았을걸세.”
금룡상단주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용문석굴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건은 이미 전해들은 참이었다. 셋째의 수하들이 그곳에 머물고 있었기에 누구보다 빨리 소식을 전해들을 수 있었다.
채 하루도 되지 않았는데 온 낙양에 소문이 퍼져나갔다. 심지어 황제 폐하의 덕이 부족하여 이런 변고가 생겼다는 망언을 퍼뜨리는 우민들까지 생겨났다.
엄히 추포하여 쉬쉬하는 분위기가 되었으나, 백성들의 민심이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했다.
낙양은 금룡상단의 뿌리가 되는 곳이자, 하남의 심장과도 같았다. 이곳의 민심이 흔들린다면 바로 옆 섬서에도 그 여파가 미칠 것이고, 북경에 닿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다들 집단으로 활동하는지라 이렇다 할 석공이 없네. 개인의 이름이 부각된 경우는 드물어. 기껏해야 초대 황릉을 만든 석공들의 제자들 정도나 될까. 허나 하나같이 북경에서 떠날 생각이 없으니 어찌할 도리가 없네.”
예술가들이 수도에 몰리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귀족과 부유한 자들이 많기 때문이다.
물론 낙양도 부유하기로는 다섯 손가락 안에 들었지만, 북경과 비교할 수는 없었다. 당연히 석공들의 수준 또한 뒤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황상께 주청을 올리면 어찌 해결할 수도 있겠으나, 그리했다간 내 무능만 드러낼 뿐이니…….”
부윤은 답지 않게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단순히 불상 하나 무너진 것이 아니었다. 민심이 무너질 판이었다. 북경에서 오해라도 한다면, 목숨이 위태로울 수도 있었다.
전선과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는 운남과 흑룡강, 그리고 청해의 관리들은 지금도 심심찮게 목이 잘려나가고 있지 않은가.
이곳은 대도시 낙양이다. 낙양의 민심을 잡지 못했다간 말 그대로 십족이 멸해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러한 기색을 눈치챘는지, 금룡상단주가 말했다.
“너무 염려 마시게. 진작 새외로 사람을 보내두었네.”
“새외라고 다를까? 중원의 석공보다 뛰어날 것 같지는 않은데.”
“우리와 같은 인간이 아니라네.”
부윤이 눈을 부릅떴다. 금룡상단주는 장난기 어린 얼굴로 친우를 쳐다보다가 덧붙여 말했다.
“우리 가문과 교류하는 청목족이시네. 증조부 때부터 연이 닿아 있었지.”
“청목족? 그자들이 조각도 할 줄 알았나?”
“일반적이진 않지. 허나 그분은 청목족 사이에서도 별종이셔서, 아주 오랜 세월 조각을 해오셨다네.”
금룡상단주는 그렇게 말하며 창 밖을 응시했다.
작년까지는 풍년이었다. 무려 수십 년 동안 이어진 풍년이었다. 전쟁이 이어지고 있음에도 민심이 유지되고 있는 것은 전부 그 덕분이었다.
허나 올해는 작년보다 비가 덜 내렸다. 작황이 덜할 것은 분명했다. 흉년은 아니겠으나, 민심이 지금보다 나빠질 것은 명백했다.
부윤이 천천히 입술을 뗐다.
“새외에서 낙양까지 오는데 빨라도 달포는 걸릴텐데. 너무 늦어.”
“최후의 방안일세. 그 안에 답을 찾는 것이 자네에게도 내게도 좋겠지.”
수십 년을 함께해온 지기라 그런지, 눈빛만 봐도 서로가 뭘 말하려는지 알았다.
금룡상단주가 말했다.
“각예대회는 내일로 앞당기겠네. 감람석도 오늘 안에 전부 구해놓지.”
“고맙네. 비용은 이쪽에서 대겠네. 사람들이 많이 보도록 방도 널리 퍼뜨려 놓지.”
하루 만에 수백 명이 쓸 상품의 감람석을 구하고, 낙양 모든 사람들이 알도록 곳곳에 벽보를 붙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허나 이 둘에게는 가능했다.
곧 고개를 끄덕인 노인들은 각자 할 일을 끝내기 위해 밖으로 나섰다.
*****
“각예대회가 내일로 앞당겨졌다고 합니다.”
금진송이었다. 그는 아침에 그랬던 것처럼 소식을 전한다는 핑계로 서연의 처소를 찾았다. 사실 방문이라 표현하기도 애매한 것이, 애초에 서연이 묵는 곳이 금진송의 별장이었다. 집주인이 제 집을 들락날락거리는 것을 두고 어찌 왈가왈부하겠는가.
막무가내로 들어온 것도 아니요, 온갖 예를 갖추며 들어왔다. 또 손에는 용정차가 담긴 찻주전자도 들려 있었다.
부잣집 자제, 그것도 집주인이 흙바닥에서 찻주전자 덜렁 들고 있는 꼴을 보고도 가만있으면 사람이 아니다.
용문석굴에 다녀온 서연이 금진송과 다시 마주 앉아 차를 들이키게 된 경위는 그러했다.
“부탁하셨던 민초들은 전부 치료를 마쳤습니다. 저희 상단이 운영하는 의원에서 책임지고 있으니, 별 탈 없이 완치될 겁니다.”
“편의를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서연이 고개를 숙였다. 진심이었다. 아무런 흑심 없이 선뜻 제 돈을 내어주는 사람에게는 얼마든지 고개를 숙일 만 했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용정차 들이키는 소리만 이따금 울려퍼질 뿐이었다. 어색함을 참지 못한 금진송이 먼저 입을 열었다.
“사실, 내일 각예대회에서 감람석을 사용할 예정이랍니다. 아, 다른 분들에게도 알려진 사실이니 곡해는 마십시오.”
“감람석 말입니까?”
“제가 조각은 잘 모르지만, 감람석이 다루기 힘든 재료라는 건 압니다. 마침 창고에 감람석이 있는데, 한 번 사용해 보시겠습니까?”
“정말입니까?”
서연의 상기된 목소리에 금진송은 제가 기분이 더 좋아졌다. 아버지께 졸라대어 감람석 덩어리를 얻어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곧 서연은 창고로 이동했다. 창고에는 몸통보다 조금 작은 감람석 덩어리가 너덧 개 놓여 있었다.
서연은 용문석굴에서 보았던 노사나불을 떠올렸다. 관아에서 다급히 달려와 반쯤 쫓겨나다시피 나와야 했지만, 그때 느꼈던 감상은 아직도 오롯이 지니고 있었다.
‘노사나불을 새로 깎아낼 사람을 구하려는거야.
내막을 알지는 못하지만, 각예대회를 앞당긴 이유를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본래 자유였던 재료를 굳이 감람석으로 바꾸었겠는가.
‘기왕이면 내가 하고 싶다.
서연 또한 천성이 조각가였다. 비록 세가 작은 상인들에게만 조각을 팔았을지언정, 제 실력이 어디서 꿀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천하의 내로라하는 조각가들과 이번 기회에 실력을 겨루어 보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다.
“제가 써도 될까요?”
“애초에 그리하시라고 가져왔습니다. 일전 유람선에서 있었던 일에 대한 사과라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서연은 그렇게 말하며 금진송의 손을 덥썩 잡았다. 악수한 것이다.
허나 금진송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하여, 얼굴이 벌게진 채로 어버버거렸다.
‘소, 손을 잡아버렸다.
오죽했으면 현기증이 느껴질 정도였다. 순간 어지러움을 참지 못하고 비틀거릴 정도였으니 말이다. 뒤에 서 있던 교교가 잡아주지 않았다면 볼썽사나운 꼴을 보였을 것이다.
금진송은 가까스로 호흡을 다듬고 말했다. 얼굴은 그새 벌게져 있었다.
“이, 이만 가보겠습니다.”
금진송은 다급히 빠져나갔다. 교교는 그런 금진송과, 서연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무서운 여인이다.
저보다 배분이 몇 개는 아래일 사내를 아무렇지 않게 꼬셔대다니. 저 정도 철면피여야 중원 무림에서 여고수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인지 두려움마저 들었다.
‘일찍 은퇴하기를 잘한건가.
자신도 무림에 오래 몸을 담았더라면 저런 괴물이 되었을까? 모르겠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교교는 몸을 얕게 떨다가, 넋이 나간 금진송을 이끌고 밖으로 나갔다.
‘도련님은 내가 지켜야 한다.
아무리 은인이라지만, 이건 좀 아닌 듯 싶었다.
*****
서연은 손재주가 빠른 편이었다. 일전 남궁 남매에게 목검을 만들어줄 때도 일 다경도 채 걸리지 않았으니 말이다. 허나 재료가 석재라면, 그것도 단단한 편에 속하는 감람석이라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졌다.
홀로 남은 서연은 눈앞에 놓인 감람석의 표면을 만지작거리며 생각했다.
‘단단하다. 이 정도면 며칠은 걸릴 것 같은데.
물론 이조차도 다른 석공이 들었다면 헛소리 하지 말라고 버럭 소리 질렀을 것이다. 본래 석재 조각은 짧게는 몇 주, 길게는 년 단위로 걸리는 작업이었기 때문이다.
비록 각예대회에서 사용할 감람석은 크기가 작아 그보다는 덜 걸리겠지만, 그래도 최소 몇 주는 걸린다고 봐야 했다.
괜히 금룡상단주와 부윤이 하루라도 빨리 각예대회를 시작하려 했던 것이 아니다.
물론 서연의 용력 자체가 남달랐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애초에 어느 무림인이 시간만 오래 걸리는 조각을 취미로 할까. 분재 다듬기라면 모를까.
서연은 품 속에서 망치와 정(鑿)을 꺼냈다. 머릿속으로 얼개를 대충 그린 다음, 위치를 어림잡아 망치를 내리쳤다.
곧 서연은 순식간에 감람석을 둥그런 모양으로 깎아냈다. 뒤에서 공손한 자세로 지켜보던 화련은 그 모습을 보며 감탄했다.
“스승님은 어떻게 그렇게 빠르게 하시는 거예요?”
“음, 이리 와보렴.”
서연은 품에서 작은 망치와 정을 꺼냈다. 예전에 화련에게 주려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서연은 정과 망치를 집어든 화련의 양손을 잡고는, 힘을 조절하여 감람석을 툭툭 내리쳤다. 몇 번 두드리자 딱딱한 감람석 한편이 뚝 하고 떨어졌다. 신기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는 힘조절이었다.
‘와.
화련은 순수하게 감탄했다. 제 손이 이렇게 움직일 수도 있구나 싶었다. 스승님이 제 양 팔을 직접 움직이니 이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 것 같았다.
‘검술이랑 똑같아. 어쩌면 더 어려울수도.
검술은 검로가 틀려도 다시 연습하면 그만이다. 허나 조각은 다르다. 한 번 실수하면 돌이킬 수 없다. 실력은 물론이고, 모든 움직임에 확신을 담아야 한다는 뜻이다.
“내가 옆에 낸 모양을 그대로 따라해보렴.”
서연은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화련은 제 스승과, 감람석을 번갈아 쳐다보다가 약간 긴장한 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윽.”
“괜찮으니 계속 하렴. 실수할 수도 있지.”
서연은 끙끙대는 화련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옅게 웃었다.
끙끙거리면서도 어떻게든 해보려는 모습이 참으로 기특했다. 화련에게는 확실히 재능이 있었다. 아무리 자신이 까다로운 부분을 전부 쳐냈다지만, 어설프게나마 그 맥을 따라가고 있었으니 말이다.
‘계속 틈틈이 연습하고 있었나 보구나.
굳은살이 박힌 손만 보아도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어디 조각이 쉬운 일인가. 막대한 힘이 들고, 자칫했다간 손을 다치기 일쑤였다.
‘나도 더 잘난 사람이 되야겠지.
저만한 재능의 아이를 가르치는데, 어디 스승이 보통 사람이어서야 되겠는가.
서연은 내일 있을 각예대회에서 이기기로 마음먹었다.
곧 스승도 제자 옆에 나란히 서서 조각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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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서연은 곧장 각예대회가 열리는 광장으로 향했다.
본디 오가는 인파로 북적이던 광장을 대회용으로 개조하여, 수백 명의 장인이 동시에 기량을 펼칠 수 있도록 너른 터를 마련한 것이었다.
아침 이른 시각이었음에도 이미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볼거리가 귀한 시대다. 금룡상단에서 대회를 연다 하니, 강호의 무인들은 물론 평범한 백성들까지 구름처럼 몰려와 구경하려는 것이었다.
거리에선 어느새 주전부리를 파는 행상들의 우렁찬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한쪽에는 길게 늘어선 줄이 보였다. 줄을 선 이들은 하나같이 손에 세월의 흔적이 깊게 새겨진 상처들을 달고 있었는데, 하나같이 장인이라고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분위기를 풍겼다.
뛰어난 석공일수록 손에 부르튼 상처가 많다. 야장의 손이 굳은살로 뒤덮이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서연이 그 줄에 서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서연에게 달라붙었다. 누가 봐도 의구심으로 가득한 얼굴이었다.
눈빛만 보아도 무슨 말을 하려는지 넉넉히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
‘여인이?
허나 줄을 잘못 섰다고 나서서 꾸짖는 이는 없었다. 서연의 허리춤에 매인 끌과 망치 같은 조각 도구들이 매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곧 사람들은 서연에게서 관심을 털어냈다. 겉모습만 번지르르한 이들은 스스로 도태될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었다. 서연도 그러리라 여겼다.
서연은 화련의 손을 잡은 채로 접수대로 다가가 신상명세를 말했다.
“하남성 태실산? 산골짜기에 사는 사람도 다 있군. 이름은 서연, 맞소?”
“예.”
“옆에 있는 나무 조각 하나 들고 가시오.”
접수원 옆에 놓인 책상에는 네모난 나무토막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서연은 그중 하나를 집어 들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서연은 손바닥만 한 나무토막을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참나무다.
손에 꼽을 정도로 단단한 나무였다. 나뭇결 또한 거칠어 다루기가 매우 까다로운 재료에 속했다.
‘이걸로 거르려나 보다.
어디 석공이라고 나무를 다루지 못하겠는가. 자고로 뛰어난 조각가는 재료를 가리지 않는 법이다.
귀한 감람석을 아무에게나 내어줄 수는 없었을테니 말이다.
서연은 곧 안내받은 천막 안으로 들어섰다. 시험을 주관하는 감독관이 서연을 책상 앞으로 이끌었다. 기이하게도 금룡상단의 상단원과 관아의 관리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감독관인 모양이었다.
감독관이 말했다.
“일다경 안에 나무토막을 원형으로 깎아내면 되오.”
“일다경이요?”
“완벽한 구체일 필요는 없소. 우리가 세워둔 기준만 넘으면 합격이고, 그러지 못하면 불합격이오.”
서연은 안도했다.
겉면까지 완벽하게 다듬지 않아도 된다는 뜻으로 해석했기 때문이었다.
‘그 정도면 충분하지.
이 시험 주제를 듣고 적잖은 석공들이 절망했음을 몰랐기에 나올 수 있는 생각이었다.
나무토막을 쥔 서연의 손이 힘차게 움직였다.
재료의 단단함은 서연에게 큰 의미가 없었다. 서연은 나무토막을 한 손으로 단단히 고정한 다음, 조각칼을 들고 거침없이 깎아내기 시작했다.
“빠르다!”
“어찌 여인이 저런 속도를 낸단 말인가?”
주변에 서 있던 몇몇 사람들이 감탄사를 터뜨렸다. 그들 중에는 시험에서 난항을 겪고 있던 조각가들도 있었다.
“……무슨 사과 껍질을 깎는 것 같군.”
옆에서 지켜보던 감독관들조차 감탄을 감추지 못했다.
일다경이라는 촉박한 시간을 주었건만, 서연은 그 사분의 일도 되지 않는 시간에 온전한 구체의 형태를 만들어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아교와 모래로 만든 사포로 겉면을 매끄럽게 다듬고 있었다.
“그만해도 좋소. 통과요!”
“통과라뇨?”
“기준을 한참 초과했소. 애초에 겉면을 다듬는 것까지 상정하지 않았소.”
감독관은 서연이 만들어낸 구체를 보고 혀를 내둘렀다. 이내 그것을 책상에 올려놓고 약간 힘을 주어 밀어냈다. 곧 구체는 구슬처럼 또르르 굴러갔다. 한 번쯤 걸리는 면이 있을 법도 했건만, 굴러가는데 막힘이 없었다.
“혹시 스승이 있으시오?”
극찬이었기에 서연은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감독관은 그것을 사문을 알리고 싶지 않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설마 독학으로 이만한 경지에 오르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던 탓이다.
*****
첫 시험에서는 무려 절반이나 걸러졌다. 다행히 두 번째 시험은 없었다. 금룡상단에서 준비한 감람석의 수보다 남은 장인의 수가 적었기 때문이다.
첫 관문을 통과한 석공들 중, 평소 친분이 있는 이들은 이동하는 틈을 타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보아하니 섬세함보다는 속도를 중시하는 듯하더이다.”
“아무래도 노사나불을 하루빨리 수리해야 하니 그러했겠지. 괜히 감람석으로 주제를 바꿨겠는가?”
“여럿이서라면 모를까, 혼자서라면 몇 달은 족히 걸릴 작업인데.”
개방된 너른 공간에는 사람 수에 맞춰 감람석 덩어리들이 놓여 있었다. 서연의 상체보다 조금 컸는데, 그 색깔과 질감을 보아하니 하나같이 최상품이었다.
화련은 인파의 접근을 막기 위해 쳐둔 울타리 바깥에서 작은 손을 흔들고 있었다.
“힘내세요!”
서연은 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온 사람부터 맨 앞줄에 서는 방식이었는데, 서연의 자리는 공교롭게도 정가운데였다. 다른 석공들이 온통 진한 색의 옷을 입고 있어 그런지, 흑돌 사이에 놓인 백돌처럼 유독 눈에 띄었다.
곧 강단 앞에 후덕한 풍채의 노인이 나타났다. 금룡상단주였다. 거대한 상단을 이끄는 자는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닌지, 성품 좋아 보이는 얼굴 너머로도 이유 모를 위압감이 느껴졌다.
그는 석공들을 예리한 시선으로 살핀 다음 입을 열었다. 무공을 익힌 모양인지, 작게 말했음에도 그 목소리가 좌중에 울렸다.
“당장 시작하시면 되겠소. 숙식은 금룡상단에서 책임지겠소이다.”
그때 석공 하나가 손을 들어 외쳤다.
“기간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금룡상단주는 그럴 질문이 나올 것을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기간 제한은 없소. 주제도 상관없소. 다만, 속(速), 정(精), 의(意) 세 분야에 비중을 두어 판단할 것이오.”
각각 속도와 정교함 그리고 조화로움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단순히 빠르게만 만들어 내면 실격이오. 무릇 작품으로 인정받을 만할 수준이어야 하외다. 그렇다고 너무 오래 걸려도 좋은 점수를 받기는 힘들 것이오. 다들 지역에서 내로라하는 장인들일테니 이 말을 이해했을 것이오. 그럼.”
금룡상단주는 그렇게 말하고는 단상 아래로 내려왔다. 구경꾼들이 있는 곳이 아니라, 석공들이 있는 방향으로 말이다.
코앞에서 직접 보고 판단하겠다는 뜻으로 여겨졌다.
천하에서 내로라하는 상단주의 안목이 손꼽힐 정도로 뛰어날 것은 당연한 이치. 그것에 딴지를 거는 석공들은 없었다.
금룡상단주는 여유로운 걸음으로 앞줄부터 차례로 흝어나갔다. 본래 첫날에는 이렇다할 볼거리가 없다. 전체적인 그림을 그려야 하기 때문이다. 허나 속도를 평가 기준으로 내세운 탓에, 다짜고짜 끌부터 치켜드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석공 하나를 쳐다보던 금룡상단주가 속으로 혀를 찼다.
‘이쪽은 볼 것도 없군.
아마도 감람석을 다뤄본 경험이 없던 모양이다. 단단하다고 하여 너무 강하게 힘을 줘버리면 덩어리째로 떨어져 나가는 것이 바로 감람석이었다. 경험이 없으면 제대로 다루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저렇게 실수할 바에는 차라리 한 걸음 물러나서 고뇌하는 편이 현명하다고 할 수 있겠다.
금룡상단주는 돌아다니면서 제 수하들에게 은밀히 전음을 뿌렸다.
- 8번, 5점 감점하게.
- 11번도 5점 감점.
- 18번도 5점 감점.
금룡상단주는 가차없이 평가했다. 노사나불을 새로 만들어야 하는 중차대한 일이다. 실력이 뒤떨어지는 자에게 맡길 바에는 차라리 머리가 부서진 채로 내버려두는 편이 나았다.
이따금 금룡상단주는 걸음을 멈췄는데, 그때마다 구경꾼들도 해당 장인의 작품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다듬는 속도가 거침이 없으면서도 두드리는 힘이 일정하다. 뛰어난 장인은 정을 두드릴 때 소리부터 다르다. 경지에 올랐다는 뜻이다.
- 43번은 3점 가산하게.
서 있는 자리가 곧 번호였다. 금룡상단주는 이따금 고개를 끄덕이기도, 때로는 옅게 감탄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중간 쯤에서 걸음을 멈춰 섰다.
그곳에 한 여인이 서 있었다. 각예대회에 참가한 유일한 여인이었다.
‘셋째가 말했던 여 석공이 저자였나?
여인은 깊이 고뇌하는 모양인지, 감람석 덩어리를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생각이 복잡해질 만도 하지. 애초에 여인의 몸으로는 다루기 힘든 재료니.
왜 야장이 대부분 남성이겠는가. 힘이 많이 들기 때문이다. 석공도 마찬가지다. 여인이 하기엔 벅찬 작업이 수두룩했다. 단단한 감람석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이윽고 서연이 정과 망치를 치켜들었다. 그리고는 일말의 망설임 없이 정질을 시작했다.
똑-!
마치 옥을 두드리는 듯 청량한 소리가 울렸다. 순간 금룡상단주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다른 석공들을 마저 살피려던 금룡상단주는 고개를 돌려 다시 서연을 응시했다.
곧 금룡상단주는 서연이 무얼 하려는지 이해했다.
‘환조(丸彫)로구나.
사방에서 감상할 수 있도록 조각하는 기법을 말한다. 입체감이 온전하지만, 모든 면을 온전히 깎아내야 하기에 한 면만 깎아내는 일반적인 방법보다 몇 배는 까다로운 기법이었다.
본디 조각은 부산스럽고 번잡한 작업이다. 당장 주변에서도 정(釘) 울리는 소리에 귀를 막는 행인들이 적지 않은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똑, 똑, 똑-!
허나 저 여인은 달랐다.
요란스럽지 않고 청아했다. 돌이 아니라 옥을 부딪치는 것 같았다. 그런데도 그 소리가 작지 않아, 듣기 좋은 소리가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금룡상단주는 어느새 작품에 몰입한 채로 서연을 바라보았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처음보다 몇 걸음 가까이 다가가 있었다.
감람석 덩어리의 형상은 조금씩 바뀌었다.
처음에는 그저 거대한 덩어리였다. 도대체 얼마나 큰 그림을 그리고 있는지 가늠조차 되지 않을 정도였다.
곧 하나의 덩어리가 세 개의 산봉우리 같은 모양으로 변모했다. 처음에는 대자연을 그려내려나 했다. 봉우리를 먼저 만들고, 거기에 배경 그림을 양각(陽刻)할 때 일반적으로 그러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금룡상단주는 자신이 완전히 틀렸음을 깨달았다.
‘아!
봉우리를 만드는 것이 아니었다. 비록 지금은 희미했으나, 봉우리 하단에서부터 가부좌를 튼 무릎과 다리의 형태가 차차 드러나고 있었다.
‘삼신삼세불(三身三世佛)이다.
세 가지 몸을 지닌 세 분의 부처라는 뜻. 굳이 봉우리를 세 개씩이나 만든 것도 이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부터 봉우리마다 부처를 새기려 했던 것이다.
금룡상단주는 숨죽인 채 감람석을 응시했다.
서연의 손이 움직일 때마다 봉우리 위에 옷이 그려진다. 가늘게 물결치고 주름진 옷이다. 어찌나 정교한지, 누가 실제 옷을 입혀놓았다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고개를 쭉 빼고 지켜보던 금룡상단주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어찌 이렇게 짧은 시간에…….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치켜들었는데, 어느새 세상이 까맣게 물들어 있었다.
금룡상단주는 저도 모르게 입을 뻐끔거렸다. 등에 흥건한 식은땀과 시큰거리는 무릎이 몇 시진 동안이나 몰입하고 있었음을 알려주었다.
고개를 돌리자 수많은 상단원들이 자신을 염려스러운 듯 쳐다보고 있었다.
“……상단주님? 괜찮으십니까?”
걱정하는 듯한 어투로 묻는 상단원을 보고, 금룡상단주는 터져 나오려는 헛웃음을 가까스로 틀어막았다.
“내가 얼마나 이러고 있었나?”
“여섯 시진이 조금 넘었습니다. 아무리 여쭈어도 대답이 없으셔서, 선 채로 정신을 잃으신 줄 알았습니다.”
농담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금룡상단주는 헛웃음을 짓다가 다시 서연이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똑-!
시끄러웠던 시험장에서 오직 서연의 정질만이 청아하게 울려퍼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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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시간이었다. 보름달이 휘영청 떠오른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본디 조각이란 하루 이틀에 끝날 작업이 아니기에, 금룡상단에서 마련해 준 숙소에서 피로를 풀고 다시 칼을 잡는 것이 순리였으리라.
허나 자리를 떠난 석공은 하나도 없었다. 그들은 정과 망치도 내려놓고, 금룡상단주가 그랬던 것처럼 넋이 나간 채 서연의 주위를 둥글게 에워싸고 서 있었다
흔한 감탄사조차 내뱉지 않는다. 숨소리마저 불경인 양 하나같이 입술을 굳게 다문 채였다.
모두가 일찍이 자신만의 경지에 올랐고, 각 지역에서 이름을 떨치던 장인들이었다. 그렇기에 눈앞에서 펼쳐지는 광경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그 누구보다 잘 알았다.
금룡상단주처럼 처음부터 서연을 지켜보았던 장인은 없었다. 각자 자신들의 작품에 혼을 쏟고 있었기 때문이다.
허나 사람인 이상, 집중력의 끈이 끊어지는 순간은 찾아오는 법. 행인들의 경탄, 상단원들이 하나둘 모여드는 소란, 그리고 옆자리에 선 장인들이 홀린 듯 한곳을 응시하는 것에 이상함을 느끼고 고개를 돌린 순간, 그들은 헤어 나올 수 없는 깊은 늪에 빠져들었다.
감람석은 본래 단단한 암석이라 섬세한 표현에는 한계가 따르기 마련이다. 용문석굴의 노사나불상이 전체적으로 둥글고 뭉툭한 느낌을 주는 것도 그 때문이 아니던가. 허나 서연의 조각은 재료의 한계를 거침없이 부수고 있었다.
몸을 휘감는 굴곡 하나하나, 옷깃의 주름 한 올, 심지어 옷 위로 드러난 육체의 윤곽과 핏줄마저 살아있는 듯 꿈틀거렸다.
마치 살아있는 부처가 그 자리에 앉아있는 듯한 착각에 빠질 지경이었다.
낙양에서 손꼽히는 명장이라 불리던 늙은 석공은 서연의 팔이 한 번 움직일 때마다 깊은 침음을 토해냈다.
‘조각 위에 투명한 옷을 씌운 것만 같구나.
이제 고작 하반신만 만들었을 뿐이다. 본디 작품이란 완성되고 나서야 비로소 그 진가를 드러내는 법이거늘, 도대체 어떤 경지에 이르러야 이토록 작은 편린만으로도 숙련된 조각가들을 경악케 할 수 있단 말인가.
이미 승자는 정해졌다. 그 사실을 모르는 석공은 단 한 명도 없었다. 허나 그렇다고 하여 패배감에 젖거나 안타까워하는 이는 찾아볼 수 없었다
대신 그들은 서연의 손짓 하나, 움직임 하나까지 마음속 깊이 새겨 넣으려는 듯 전심전력으로 서연을 주시했다.
땅-
서연은 감람석의 아랫부분에 정을 놓고, 두들겼다. 연꽃으로 된 받침대를 만들려는 것이다.
단순히 연꽃을 본딴 받침대가 아니다. 천개의 연꽃잎이 겹겹이 쌓여 피어나는 천엽연화대(千葉蓮華臺)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청아한 소리가 울려퍼질 때마다 감람석의 틈 사이로 신비로운 연꽃이 하나둘씩 피어올랐다.
밤을 꼬박 세워 동녘에 해가 솟아오를 무렵, 결가부좌(結跏趺坐)를 튼 노사나불의 형상이 온전히 드러났다. 왼손은 무릎 위에, 오른손은 가볍게 들어 올린 그 자애로운 모습에, 깨달음을 얻어 염불을 외는 승려들이 적지 않았다.
서연은 이제 다른 쪽 봉우리로 걸음을 옮겼다.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행인들이 오갔는지는 헤아리기도 힘들 지경이었다
조금이라도 더 그 신묘한 기예를 눈에 담으려던 석공들이 한계에 다다라 쓰러지고, 의원으로 실려 가고, 심지어 치료를 마다하고 기어서라도 다시 돌아오는 사례가 끊이지 않았다.
“내 죽는 한이 있어도 계속 봐야겠다.”
“하지만 스승님!”
“막지 마라!”
제자들을 뿌리치고 각예대회로 미친 듯이 되돌아오는 석공들도 있었다.
집념이 모이면 광기가 되는 법. 그리고 예술가의 광기는 그를 지켜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압도하는 분위기를 풍기는 법이다.
시끄러워야 할 광장이 침묵으로 물든 것은 전부 그 때문이었다. 나이 지긋한 석공들이 풍기는 지독한 집념과 광기가 모든 행인들의 입을 다물게 만들었음이었다.
무림인이라 하여 예외는 아니었다.
나흘째 되던 날, 서연은 끝내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까지 만들어냈다.
사람이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오로지 조각에만 혼신을 쏟을 수 있을까.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다. 천하에서 이름 높은 무인이라 할지라도 불가능한 일이다.
자연과 하나가 되는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지에 올랐다면 모를까.
“……정녕 신선이라도 된단 말인가?”
홀린 듯 서연의 움직임을 지켜보던 무림인들이 그리 탄식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조각의 도를 알지 못하는 자들조차도 그 눈부신 기예를 느꼈기 때문이다.
행인들도 그러한 기류를 느꼈다. 서연이 먹지도 마시지도, 잠들지도 않을지 내기를 거는 몰상식한 무리도 적지 않았다
허나 나흘이 닷새가 되고, 칠주야가 되던 날, 그런 이들은 싸그리 사라졌다.
스스로 부끄러움을 깨닫고 입을 다문 채 자리를 떠났기 때문이다.
어느 순간부터 행인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말했다.
“신선이시다.”
“상제께서 내리신 선녀시다.”
“원시천존(元始天尊), 원시천존.”
소문을 듣고 찾아온 도인과 승려 또한 헤아릴 수 없었다.
화련은 한계에 다다른 눈꺼풀을 간신히 치켜들었다. 주전부리로 허기를 채우고, 선잠으로 수마를 쫓는 것도 이제는 한계에 다다랐음이다.
어린아이의 몸으로 칠 주야를 버틴 것만으로도 이미 기적과 같았다. 화련의 몸이 기우뚱 기울어 쓰러지려는 찰나, 누군가가 그녀를 붙잡아 세웠다.
- 수고했다. 이만 쉬거라.
유혼이었다. 그는 주변 사람들의 눈을 가려 화련을 안전한 곳으로 이동시킨 다음, 그대로 눕혀 재웠다. 화련은 그 즉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유혼은 잠든 화련을 지켜보다가, 그대로 창공으로 솟구쳤다. 백호가 땅에서 주인의 곁을 지킨다면, 자신은 마땅히 하늘에서 보위해야 했다.
여드레가 되었을 때, 마침내 석가불(釋迦佛)이 완성되었다.
불도에서 숫자 팔(八)은 더없이 상서로운 숫자였다. 상서로운 표상의 개수도 여덟 가지요, 깨달음의 진리를 상징하는 법륜이 팔각형인 것도 그 때문이었다.
동시에 여덟은 득도를 뜻했다.
서연은 마침내 정질을 멈추었다. 깊이 숨을 들이쉰 후, 제가 혼신의 힘을 다해 빚어낸 삼신불을 바라보았다
손꼽히는 걸작이라 자부할 만했다. 이토록 조각에 모든 혼백을 쏟아부었던 적이 언제였는지, 기억 속에서도 희미했다.
며칠이 흘렀는지조차 가늠할 수 없었다. 그저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는 것만 알았다. 다만 해가 여전히 하늘에 높이 떠 있다는 사실에 문득 의아함을 느낄 뿐이었다.
서연은 그런 생각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온 세상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을 향해 있다는 것을 그제야 알아차렸다.
경지에 이른 석공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들은 한없이 부드러운, 동시에 경외심이 가득 담긴 표정으로 서연을 바라보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대표로 나선 것은 나이 지긋한 노년의 석공이었다. 그는 서연에게 공대하는 것을 더없이 당연하게 여겼다.
그는 느릿하게 고개를 돌려 석공들을 응시했다.
곧, 주위에 둘러섰던 모든 석공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서연에게 예를 취했다.
새로운 지평을 연 종사(宗師)에게나 올릴 법한 인사였다.
*****
서연은 저녁 어스름이 깔리고 나서야 비로소 그 자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여드레 만에 정신을 차린 터라 허기가 극심했던 탓에, 식사를 겸해 석공들과 수많은 문답을 나누었다.
뛰어난 장인들과 나누는 대화는 그 자체만으로도 즐거웠다. 한마디 한마디에 견문이 넓어지는 기분이랄까.
나중에 잠에서 깨어난 화련이 찾아와 말을 걸지 않았더라면, 하루고 이틀이고 그곳에서 머무르며 대화를 계속했을 것이다.
그렇게 자리를 뜨려는데, 주변에 있던 행인들이 그림자처럼 서연의 뒤를 조용히 따랐다. 그 수가 물경 수백에 육박했으니, 실로 장관이었다.
서연은 설마 이토록 많은 인파가 자신을 뒤따르고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저 저녁때가 되어 다들 대로로 오가는 것이라 여겼을 뿐.
군중이 이토록 몰리면 으레 역모로 오인당하기 십상이다. 명망 높은 금룡상단주가 직접 나서서 행인들을 진정시키지 않았다면, 필시 무슨 일이 터졌을 터였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금룡상단주는 더없이 겸손한 행동거지로 서연을 마차로 이끌었다.
본래 첫날부터 우승자가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허나 이틀이 되고, 사흘이 지나 여드레 만에 완성본을 마주한 순간, 금룡상단주는 깨달았다. 이 분의 거취는 자신이 함부로 왈가왈부할 수 있는 범주를 아득히 넘어섰음을.
만약 이 분께서 노사나불의 수리를 기꺼이 맡아준다면 더할 나위 없겠으나, 설령 개인적인 사정으로 이를 거부하신다 한들 이쪽에서 어찌 할 도리가 없다는 것도 깨달았다.
황실에 있는 그 어떤 조각가를 데려온다 해도, 이 분의 편린에도 미치지 못할 것이라고 금룡상단주는 확신했다. 설령, 자신의 가문과 연이 깊은 청목족 조각가를 데려온다 할지라도 말이다.
실력자를 원하기는 했으나, 이 분은 그런 수준을 아득히 벗어난 존재였다.
당장 하늘에서 선녀가 내려왔다고 말하는 민초들이 수천에 달했으니 말이다.
이 소문이 북경에 닿는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눈에 훤해서 걱정도 되었다.
가장 큰 문제는, 금룡상단주 본인조차 그 소문에 내심 동의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영생을 산다는 청목족보다도 더욱 오랜 세월을 갈고 닦아야 비로소 이룰 만한 경지다.
도대체 어떤 예를 취해야 마땅할까. 금룡상단주가 속으로 고뇌하던 그때, 서연의 나직한 음성이 그의 귀를 파고들었다.
“우승자라 하여 너무 과한 예를 취하시면 제가 불편합니다. 편히 대해주세요.”
서연 입장에서는 지극히 당연한 말을 한 것이었으나, 그 말을 들은 금룡상단주는 짓눌렸던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살아온 햇수로 따지면 나는 갓난쟁이일진데.
배려심이 하해(河海)에 비견될 정도로 깊다. 셋째 아들 또한 이런 배려심에 탄복했던 것일까.
결국 금룡상단주, 금벽산은 얕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 하겠습니다. 아니, 그리 하겠소.”
서연은 그제서야 편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환갑은 훌쩍 넘은 듯한 노인이 존대하는 것이 내심 불편했기 때문이다. 허나 금벽산은 그조차도 겸양으로 받아들였다.
“삼신세불은 어찌 하실 요량이시오?”
“제가 가져가도 되는 것이었습니까?”
서연의 말에 금벽산은 다시금 감탄했다. 속세에서 빚어낸 것은 속세의 것이라 여기는가. 그토록 귀한 명물을 제 것이 아니라 여기는 마음가짐이 참으로 한량없었다.
그랬기에 금벽산은 다시금 존대를 늦추지 않았다.
“당연하지요. 작품의 거취는 응당 주인이 결정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서연은 그 말을 듣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분명 삼신세불을 집으로 가져가면 좋겠지만, 기왕 자신의 혼이 깃든 작품을 많은 이들이 보았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다.
서연이 물었다.
“용문석굴의 노사나불을 제가 고쳐도 되겠습니까?”
금벽산은 눈을 둥그렇게 뜨다가, 이내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하하, 하하하!”
서연은 그 웃음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속으로 고개를 갸웃거릴 뿐.
“말년에 참으로, 참으로 좋은 구경을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참으로 말을 기분좋게 한다 싶었다. 동시에 한 가지 기억이 서연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일전에 청허 스님을 만났을 때의 기억이었다. 돌이켜보니 그분 또한 말을 참으로 아름답게 하셨던 기억이 선명했다.
‘삼신세불은 소림에 줘야겠다.
이 정도라면 소림사에서도 거절하지는 않을 듯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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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림에는 매일같이 인파가 끊이지 않는다. 복을 빌거나 시주를 올리기 위함이다.
허나 요 근래 분위기는 조금 이상했다. 소림 방장께서 폐관수련에 드셨음에도 방문객의 수가 예년보다 이할 내지 삼할은 족히 늘었는데도 말이다.
방문객들의 얼굴에 만족의 기색이 아닌, 묘한 아쉬움만 서려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음, 역시 그 신물에는 미치지 못하는구나.”
“기대가 너무나 컸다.”
“사람의 솜씨로는 정녕 신선의 경지를 따라잡을 수 없는 것인가.”
소림의 자랑이자 대웅보전의 주존불(主尊佛)을 친견한 방문객들마다 하나같이 이런 탄식을 내뱉고 사라지니, 승려들은 당최 영문을 몰라 좌불안석이었다.
참다못한 몇몇 승려들이 조심스레 연유를 물으니, 그들의 입에서 흘러나온 이야기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낙양에서 열린 각예대회에서 선녀가 삼신세불을 직접 빚어냈는데, 그 신비로운 불상을 보고 난 후로는 소림의 주존불이 한낱 평범한 조각상으로 보인다는 것이었다.
소림의 십팔나한과 사대금강을 제외하고는, 여타 승려들은 방장의 허락 없이는 함부로 산문을 벗어날 수 없는 법.
고로 소문의 진위를 직접 확인할 길이 없으니, 며칠째 방문객들의 탄식에 시달리며 번뇌에 휩싸이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한두 명이라면 그러려니 넘겼겠으나, 찾아오는 이들마다 한결같이 선녀니, 신선이니 지껄여대니, 무시하는 것조차 어려울 지경이었다.
오늘 또한 그러했다. 해가 미처 떠오르지 않은 이른 새벽임에도 산문 밖이 소란스러운 기척으로 가득했다.
산문을 지키던 나한들이 눈을 들어 앞을 주시하니, 무명천을 걸친 무인들이 웬 마차 한 대를 조심스레 호위하며 다가오고 있었다.
높은 신분의 인물들이 제 신분을 감추고자 호위들에게 평범한 옷을 입히는 것은 강호에서 나름 흔한 일이었기에, 나한들은 당황하지 않았다. 허나, 그 무리 맨 앞에 선 무인의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나한들은 감히 입을 다물지 못하고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금룡상단주 금벽산의 동생, 금벽운(金碧雲)이 서 있었기 때문이다.
말이 동생이지, 금룡표국을 운용하는 실질적인 주인이나 다름 없었다.
“금룡표국주께선 어인 일로 오셨습니까?”
“형님이 긴히 부탁하여 이리 찾아오게 되었소. 지급(至急)이라더군.”
매우 급한 일이라는 뜻이다.
표국에게 급한 일이란 한가지뿐이니, 바로 대단한 표물을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운송하는 것이었다.
금룡표국주가 직접 나설 정도라면 보통 표물은 아닐 터. 어쩌면 물건이 아닌 사람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까지 미쳤다.
나한들의 표정이 복잡해지는 것을 읽었는지, 금벽운이 말했다.
“형님이 각예대회를 열었다는 소문은 들었을 것이오. 그때 만장일치로 수석을 차지한 걸작이 마차 안에 들어 있소이다.”
나한들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좁혔다. 며칠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각예대회 이야기에 이미 지긋지긋할 지경이었기 때문이었다.
‘설마 이곳까지 와서 자랑이라도 할 셈인가?
금룡표국, 아니. 그 뒤에 있을 금룡상단의 파렴치한 행각에 울화가 치밀어 오르려던 찰나, 금벽운이 다급히 이어 말했다.
“본디 작품은 제작자에게 귀속되는 법이나, 그 분께서 소림에 전해드리면 좋겠다 말씀하시어 이리 찾아오게 되었소이다. 내 확실치는 않으나, 소림 방장대사와 깊은 연이 있으신 분 같소.”
“쉬이 넘기기 힘든 말을 하십니다.”
금벽운은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소림의 나한당주(羅漢堂主)였다.
“각예대회에서 있었던 일은 익히 들었습니다. 약관이 겨우 넘었을 법한 여인이 삼신삼세불을 만들어냈다는 것도 말입니다. 실력이 뛰어난 것은 당연하겠으나, 그만한 연배에 방장님과 연이 있다는 말은 믿기 어렵습니다.”
오랜 기간 교류하여 서로를 이해할 수준이 되어야 깊은 연이라 부를 만 했다. 그리고 방장대사와 그만한 연을 쌓으려면, 못해도 고희(古稀)는 되어야 했다.
그러려면 그 여인은 육신의 세월을 되돌리는 노화순청은 물론이고, 인체의 시간을 거스르는 반로환동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뜻인데, 그만한 여고수가 존재했다면 천하에 이름이 알려져도 진작 알려졌을 것이다.
금벽운은 답답함을 느꼈다. 허나 이해하지 못할 말은 아니었다. 서연의 기행을 직접 보지 못했더라면 그도 같은 생각을 했을테니 말이다.
“일단 들어오시지요.”
나한당주는 표사들을 이끌고 내부로 향했다. 그때, 듬직한 체구의 승려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나한당주에게 정중히 반장(半掌)하고는, 금벽운과 표사들에게도 차례로 반장하며 예를 표했다. 표사 하나가 놀란 얼굴로 나지막이 외쳤다.
“방장제자 무율!”
“그렇게 불리기도 합니다.”
무율은 곧 금벽운에게 다가가 말했다.
“방장께서 참으로 좋은 선물을 받았다 전해드리라 하셨습니다.”
그 말에 금벽운의 얼굴에 놀라움이 스쳤다.
“그 말은, 드디어 폐관을 깨고 나오셨다는 뜻이오?”
허나 무율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설명을 들으니, 이따금 소림의 각주들과 제자들에게 전음을 보내 대화를 나눈다는 것이었다.
깊은 침음을 삼키던 금벽운은 표사들에게 손짓했다. 곧 마차 문이 열리며, 고운 비단에 감싸인 불상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면, 비단을 치우겠소이다.”
표물을 제대로 옮겼다는 확인을 받아야 했으니 말이다. 곧 표사들이 조심스럽게 비단을 걷어냈다. 곧 모습을 드러낸 삼신삼세불에, 금벽운은 내심 또 감탄했다.
‘볼 때마다 감탄스럽구나.
가끔씩 돈으로 그 가치를 감히 매길 수 없는 물건들이 있다. 금벽운이 생각하기에, 지금 눈앞의 불상이 그러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고개를 돌렸는데, 나한당주와 무율이 멍청한 표정으로 삼신삼세불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눈을 감고 한참 동안 염불을 외웠다. 아미타불.
그 시간이 무려 일다경에 달했다.
“……괜찮으시오?”
참다 못한 금벽운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때서야 두 승려는 깊은 숨을 토해내며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무율이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혹시, 태실산에 기거하는 분이십니까?”
삼신삼세불을 만든 자의 거처를 묻는 것이었다. 금벽운은 이를 알려주어도 될지 잠시 고민하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곧 무율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려왔다.
“……아직 찾아뵙지도 못했는데, 이리 깊은 가르침을 주시는군요.”
그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무율은 망설임 없이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나한당주는 제 무지함을 한탄하듯, 그러면서도 더없이 후련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아무래도 금룡표국주께서 하셨던 말씀이 옳았던 것 같습니다.”
방장대사와 깊은 연을 맺은 사람이 맞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이만한 귀물을 선뜻 내어주겠는가. 어쩌면 방장대사보다 배분이 높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한당주는 뇌리를 스쳐지나가는 무수한 깨달음과, 그 즐거움을 가까스로 참아내며 말했다.
“소림이 잘 받았다고 전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갑자기 바뀐 분위기에 금벽운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중에 듣기를, 둘 모두 깊은 깨달음을 얻어 폐관에 들었다고 했다.
*****
서연은 삼신삼세불을 조각한 후에도 계속 금진송의 집에 머물렀다. 금룡상단의 셋째 금진송 말이다. 나이 지긋한 금룡상단주와 계속 같은 자리에 있던 것이 불편했던 것이다.
못해도 할아버지 뻘은 되는 이가 이쪽을 상전 모시듯 하니, 도리를 아는 사람이라면 불편함을 느끼는 것이 당연했다.
“여기, 당과를 가져왔단다.”
금진송은 때때로 달콤한 당과를 가져와 화련에게 건넸다. 화련은 평소 고양이처럼 새침하게 굴다가도, 그럴 때면 당과를 군말 없이 받아먹었다.
시녀 교교는 그런 도련님의 모습을 보며 내심 한탄했다. 스승인 서연의 호감을 얻고자 제자인 화련부터 구슬리려는 의도가 빤히 보였기 때문이다.
허나 쑥맥인 것을 어찌하겠는가. 마음 같아서는 도와주고 싶었지만, 끔찍한 나이차로 도련님이 괜히 상처받을까 쉽사리 나서지 못했다.
서연이 직접 문 밖으로 나가 당과를 사올 수 없는 이유는 간단했다. 저택 문 앞에 인파가 너무나도 많았기 때문이다.
“제 아이를 한 번만 봐주실 수 있겠습니까!”
“정화수도 떠놓고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선녀님, 선녀님!”
금벽산은 서연의 거처를 철저히 감췄고, 각예대회에 참가했을 때 기록했던 신상정보 또한 즉시 폐기했다. 허나, 서연을 각예대회에서 안전히 빼내고자 금룡상단의 마차에 태웠던 것이 화근이었다.
그 이후 민초들이 금룡상단의 저택에 물밀듯이 몰려들어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자식의 복을 빌어달라는 이는 예사요, 서연을 스승으로 모시고 싶다는 이들 또한 적지 않았다.
상황이 이런지라 도무지 문밖으로 나설 수 없었다. 만약 이대로 노사나불까지 고치러 나갔다가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눈에 훤했다.
아무리 관리들이 용문석굴의 출입을 틀어막고 있다지만, 낙양에 사는 사람만 수백만이었다. 그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뚫고 용문석굴까지 가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다.
불가능하진 않겠으나, 고려해야 할 사항이 너무나도 많았다. 마차를 타야 했고, 행인들의 시선을 속일 가짜 마차도 여러 대 구해야 했으며, 동시에 티 나지 않게 은밀히 재료를 실어 나를 사람들도 물색해야 했다. 그 모든 일에 관아가 적극적으로 협조해야만 가능할 터였다.
그렇기에 서연은 못해도 몇 개월은 금진송의 별장에서 머물러야겠다고 짐작했다.
허나 서연이 예상하지 못한 것이 있다면, 낙양 부윤의 일처리가 상상 이상으로 뛰어났다는 것이다.
부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서연이 머무는 곳으로 직접 찾아왔다.
“황상을 모시는 관리인 탓에 섣불리 경어를 쓸 수 없는 것을 이해하시오.”
“지금처럼 편히 대해주시는게 제게도 편합니다.”
“음.”
서연의 말에 부윤은 감탄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겸손함에 마음이 움직인 것이었다.
낙양 부윤이 어떤 사람인가. 오도(五都)에서도 손꼽히는 낙양의 부윤은 지방관 중에서도 최고위직에 가까웠다. 어떤 면에서는 하남성의 총독보다도 권한이 많았으니, 그 힘을 짐작할 수 있겠다.
부윤은 서연을 잠시 쳐다보다가 말을 이었다.
“노사나불을 수리하는 것 이외에는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았다고 들었소.”
“맞습니다.”
“정녕 다른 것을 바라진 않소?”
서연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돈이 부족한가? 아니, 그렇지 않았다. 굳이 아쉬운 점을 꼽자면, 새로운 조각 재료를 구하고 싶은 것 정도였는데, 곧 받게 될 각예대회 상금을 대신하여 재료를 구하면 그만이었다.
“충분합니다.”
서연의 눈빛과 부윤의 시선이 허공에서 교차했다.
그렇게 세 호흡 정도의 짧은 시간이 흘렀을 때, 부윤은 서연이 진심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허어!”
부윤은 서연이 삼신삼세불을 만드는 것을 직접 보지는 못했다. 끝내야 할 일이 너무나도 많았기 때문이었다.
허나 믿음직한 친우와 수하들에게서 소문을 전해 듣고 나름대로 결론을 내린 상황이었다. 그리고 지금의 간단한 문답을 통해 완전히 결론을 굳혔다.
‘진정으로 어떤 대가도 요구하지 않을 사람이로다.
어느 정도는 남에게 보이기 위해 꾸며낸 모습일 것이라 단정하여, 금은보화를 비롯한 온갖 진귀한 재료들을 예비해 왔건만.
서연의 티 없는 진심 앞에 부윤은 내심 부끄러움을 금치 못했다. 더 이상 지체할 이유가 없음을 직감한 그는,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기로 마음먹었다.
“본관이 준비는 모두 끝내놓았소. 재료는 이미 전부 옮겨두었고, 참장(參將)과 이야기도 마무리했소. 당시 기록이 담긴 문건들도 준비되어 있으니, 준비되면 언제든 출발하면 되오.”
이미 금룡상단의 것으로 위장한 마차 수십 대를 낙양 곳곳으로 보내놓았다. 서연과 비슷한 복장으로 위장시킨 여인들을 섬서를 비롯한 온갖 곳으로 보내 시선도 분산시켰다.
그뿐이랴. 참장의 병사들이 민초로 변장하여 용문석굴 주변을 빼곡히 둘러싸고 있으니, 적어도 달포 간은 그 누구도 감히 접근하지 못할 터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금룡상단 문 바깥으로 나서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당장 지금도 문 앞에 수많은 민초들이 웅성이고 있었으니까.
허나 부윤은 그런 것조차 당연히 염두에 두었다.
“금룡상단의 모든 별장에는 외부와 연결되는 비밀통로가 있소.”
다른 사람도 아닌 금룡상단주 본인에게 직접 전해들은 사실이었다.
부윤은 자리에서 일어선 다음, 서재 한편에 빼곡히 쌓인 책들을 더듬었다. 이내 어느 책 한 권을 잡아당기자, 기관이 작동되는 듯한 묵직한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어둠 속으로 이어지는 통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통로 천장 중간중간에는 값비싼 야명주(夜明珠)가 밝게 빛나고 있었는데, 그 길이가 못해도 백 장은 족히 넘어 보였다.
“저 끝에 마차가 있소이다.”
서연은 부윤과 함께 길을 나섰다.
*
비밀리에 준비된 마차를 타고 용문석굴 입구에 당도했을 때, 서연은 이미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용문석굴을 수비하던 병사들의 얼굴에 묘한 두려움이 서려 있었기 때문이다. 잘 닦인 병장기에서부터 이들이 정예병임을 알 수 있었으나, 그들의 눈빛에는 이해할 수 없는 공포가 드리워져 있었다.
곧 무관 하나가 다급히 달려왔다. 그는 서연과 부윤을 번갈아 살피더니, 난감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당장 들어가시는 것은 힘들 것 같습니다.”
뜬금없는 말에 부윤이 미간을 좁혔다. 못해도 천 명은 족히 되는 병사들이 이곳을 지키고 있을텐데, 도대체 어찌하여 들어가지 못한단 말인가.
무림인? 어불성설이다. 하남, 그것도 낙양에서 어떤 정신 나간 무림인이 감히 관부(官府)의 통제를 거스르겠는가.
남은 가능성은 오직 하나. 부윤보다 높은 자가 방문을 금한 것뿐이었다.
“혹 군왕(郡王)께서 방문하시기라도 했는가?”
무관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갑자기 노사나불 옆에 산군이 나타났습니다.”
“……산군이라니?”
뜬금없는 소리에 부윤은 허탈한 숨을 토해냈다. 낙양을 지키는 정예병들이 고작 짐승 따위에 겁을 먹었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무관은 변명하듯 덧붙였다.
“크기가 세 장도 넘게 커졌다가, 그림자 속에 숨어 사라졌다가, 정신을 차리면 다시 전혀 다른 곳에서 튀어나오는 탓에 도저히 잡을 수가 없습니다.”
그의 말만 들으면 병사들이 단체로 환각(幻覺)에 걸리기라도 한 듯했다.
그때 서연이 조용히 물었다.
“혹시 백호였습니까?”
그는 반말을 하려다, 서연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저도 모르게 존대했다.
“그랬던 것 같습니다.”
“눈은 파란색이었고요?”
“그것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곧 서연이 안도했다는 얼굴로 말했다.
“제가 잘 아는 범 같은데, 들어가서 확인해봐도 되겠습니까?”
잘 아는 범이라는게 성립이 가능한 문장이었던가.
“…….”
순간 분위기가 묘해졌으나, 서연만 깨닫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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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의 실랑이가 있었으나, 서연은 이내 용문석굴의 깊숙한 곳으로 발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만에 하나 있을 상황에 대비하여 마흔 명 남짓한 병사들이 옆에 붙은 덕분이었다.
용문석굴 내부의 기운은 숨 막힐 듯 무거웠다. 허나 이는 두려움이라기보다는, 언제라도 어둠 속에서 짐승이 튀어나올지 모른다는 팽팽한 긴장감에 가까웠다.
“아주 작은 그림자 사이에서도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그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육안으로는 쫓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런 증언이 들려올 때마다 서연은 백호임을 확신했다. 천하에 어찌 이리 신묘한 범이 둘씩이나 존재할 수 있겠는가.
애초에 두려워하기에는 너무나 오랜 세월을 함께했다.
그런 상념에 잠겨 얼마를 걸었을까, 멀지 않은 곳에서 병사들의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다들 날카로운 창날을 치켜들고 한곳을 겨냥하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부서진 노사나불이 있는 방향이었다. 정확히는, 그 앞에 태산처럼 앉아있는 거대한 백호를 겨누고 있었다.
“무슨 크기가!”
“저 정도면 산신령 아닌가?”
무지한 병사들이 떠들어대자, 무관들이 엄한 눈빛으로 주의를 주었다. 섣불리 공격하는 병사는 없었다. 백호가 보란 듯이 쩍 벌어진 입으로 하품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적의 없는 맹수를 공격하여 분노케 할 만큼 어리석은 자는 적어도 이곳에는 없었다. 다만, 맹수이기에 경계할 따름.
백호는 잠시 코를 킁킁거리더니, 돌연 고개를 어딘가로 치켜들었다.
“어어, 움직인다!”
“으아아악!”
“막아라!”
백호는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날카로운 창의 숲을 단 한 걸음에 뛰어넘고는, 서연의 눈앞에 의연히 착지했다.
서연은 자신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거대한 백호를 올려다보며 속으로 되뇌었다.
‘어째 그새 곱절은 커진 것 같구나.
손을 하늘로 치켜들어야 겨우 백호의 얼굴에 닿을 정도였으니, 그 크기가 짐작 가는가.
‘아직 다 자란 것이 아니었구나.
놀랍게도 그 압도적인 크기에도 불구하고, 아직 성체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무, 물러나십시오!”
서연의 곁에 있던 무관이 다급히 검을 뽑아들었다. 서연은 무관을 향해 손을 내밀며,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곧, 백호가 거대한 얼굴을 서연에게 마구 비벼대기 시작했다. 서연은 백호의 등과 목덜미를 정겹게 쓰다듬었다.
“이게 대체 무슨…….”
아예 넙죽 드러누워 배를 보이며 뒹구는 백호를 본 무관은 황망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저 여인이 대체 누구인지 당장이라도 부윤께 여쭙고 싶었으나, 감히 무례를 범할 수 없어 입술만 꾹 다물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 크기부터 가히 영물이라 칭해도 부족함이 없는데, 심지어 사람의 말도 알아듣는다. 저만한 산군을 아무렇지 않게 부리는 인물이 어찌 보통 사람이겠는가.
그러거나 말거나, 서연은 한참 동안 백호를 쓰다듬었다.
“도와주러 왔구나.”
노사나불의 크기는 5장이 족히 넘는다. 나무로 된 사다리도 쉽게 버티지 못할 높이였다. 결국 절벽에 매달린 채로 작업해야 했는데,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다.
허나 백호가 도와준다면 그보다는 쉽게 해낼 수 있을 터였다.
이내 백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서연은 단숨에 백호의 등에 올라탄 다음, 노사나불이 있는 방향으로 향했다.
이번에는 그 어떤 병사도 감히 앞을 막아세우지 못했다.
*****
서연은 조급히 작업을 시작하지 않았다. 창작이 아닌 복원이기에, 가벼운 마음가짐으로 임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마치 검술을 복원하듯, 창작자의 의도부터 헤아려야만 했다.
그런 심정으로 노사나불의 겉면을 더듬던 서연의 손끝에, 무언가 이상한 감각이 전해졌다.
‘다르다.
옷 주름을 새길 때의 강약과 팔을 조각할 때의 새김의 깊이가 확연히 달랐다. 보통 사람이라면 결코 알아챌 수 없었을 미세한 차이였으나, 서연은 그것을 구분할 수 있는 비범한 안목을 지니고 있었다.
곧 서연은 어깨를 만든 석공과 손가락을 다듬은 석공과 바닥 장식을 새긴 석공까지 모두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못해도 수십 명의 석공들이 힘을 합쳐 완성한 작품이었던 것이다.
‘쉽지 않겠다.
타인의 의도를 완전히 꿰뚫어 보아야 하니, 그 난이도가 실전된 절학을 익히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때 문득 서연의 뇌리에 청허대사의 말이 스쳐 지나갔다.
―서책을 쓰는 것이 좋겠소.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지 않고, 시주께서 직접 말이오.
서연은 그제서야 자신이 서책을 쓰겠다고 마음만 먹었을 뿐, 여태껏 딴 짓만 해왔음을 깨달았다. 동시에 이번 노사나불 복원이야말로 그 서책을 쓰기에 아주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는 것도 깨달았다.
타인의 대작, 그것도 이만한 크기의 조각을 복원하는 작업은 다시는 없을 귀한 경험이 될 터이니 말이다.
서연은 문방사우가 구비된 책상을 보다가 말했다.
“빈 책 한 권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무엇에 쓰려 하시오?”
부윤은 이전보다 훨씬 조심스러운 기색이었다. 방금 전까지 산군의 등에 타고 있던 이를 어찌 예전처럼 대할 수 있겠는가. 오히려 그것을 감안하면 부윤은 대단히 담대한 편에 속했다. 당장 지금만 해도 백호가 움직일 때마다 수많은 병사들이 움찔거리고 있었으니 말이다.
“복원하는 방법을 기록해두려 합니다. 훗날 이와 같은 일이 또 생길 수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부윤은 서연에게 어린 제자가 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는 서연의 속 뜻을 읽어내고는 잠시 고민에 잠겼다.
“한 권을 이쪽에서 필사하게 해 주시오. 그대의 말대로 어디서 또 이런 일이 생길지 모르니 말이오. 허나 원본은 그대 마음대로 해도 좋소.”
“그래도 되겠습니까?”
“그러면 그 책을 고스란히 우리에게 넘겨줄 생각이었소?”
“그리 명하신다면 그리해야지요.”
부윤은 이제 감탄사를 내뱉을 힘조차 없었다. 여드레 내내 끼니와 잠을 잊고 오직 조각에만 몰두한 여인이 집채만한 범을 제 수족처럼 부리는 것으로 모자라 물욕마저 없다.
‘진정 신선 아닌가.
불교나 도가에서 천상의 존재들이 어린아이, 노인, 혹은 여인의 모습으로 지상에 나타나 속세의 고관대작들을 골려주는 설화가 한두 가지가 아니었기에 든 생각이다.
‘아.
부윤은 문득 어지러움을 느껴 황급히 자리를 피했다. 이 이상 머물렀다가는 황상께 불경한 마음을 갖게 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서연은 부윤이 준비한 기록들을 읽고 확인하는 데 꼬박 반나절을 소모했다. 목차는 어떠한지, 그림은 어떠한 상황에 그려 넣었는지, 심지어는 문체까지 하나하나 꼼꼼히 살폈다.
개중에는 특이하게도 무공서와 흡사한 서책도 있었다.
‘특이하게 혈자리를 다 그려 놓았구나.
조각칼을 내리칠 때 어느 혈자리에 힘을 주어야 하는지, 또 어떻게 깎아야 가장 효율적인지 적혀 있는 기록들이 적지 않았다. 보아하니 먼 과거에는 무림인 중에 취미로 석공 일을 하던 기인들이 적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보통 서책은 아니다.
서연은 서책을 읽던 도중 문득 떠오른 구결을 되뇌었다.
‘정중견진 보시자비(靜中見眞 普施慈悲).
소란에서 벗어나 참된 자신을 보고, 자비로운 마음을 품어라. 유독 선명하게 뇌리에 새겨진 탓에 기억에 남았다.
생각해보면 조각을 할 때에 마음가짐까지 신경 썼던 적은 손에 꼽았던 것 같았다. 그저 집중하면 족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것도 가르치면 좋겠다 싶어 빈 서책에 옮겨 적었다.
문득 서연의 심장이 걷잡을 수 없이 요동쳤다.
본디 서연은 조각 그 자체를 하나의 심공으로 삼았다. 타고난 재능과 속세와 동떨어진 환경 덕에 무의식적으로 터득한 것이었다. 그랬기에 정해진 구결이랄 것도 없었고, 당연히 그것을 가르치는 것도, 배우는 것도 불가능했다.
허나 지금, 심공의 첫 구결이 선명히 새겨졌다.
무맥의 발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름을 정해야겠다.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을 담게 될 터이니, 운월정공(雲月淨功)이라거나 벽해진공(碧海眞功)과 같은 그럴싸한 이름들이 뇌리를 스쳤다.
허나 이내 그만두었다. 그저 조각에 몰입하며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을 담은 서책에 불과할진대, 무슨 그리 거창한 이름을 붙이랴.
서책을 만들기로 결정했을 때의 마음을 되새기는 것으로 족했다.
서연은 화련을 처음 만났을 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때 어떠한 생각을 했던가.
제 제자가 세상으로부터 자유로웠으면 했다.
하고 싶은 일을 전부 할 수 있었음 했다.
‘비연천공(飛鳶天功)이라 해야겠다.
하늘을 나는 기러기처럼 자유롭게 세상을 거닐라는 뜻이다.
이후 서연은 노사나불의 복원을 재개했다. 그 과정에서 깨달음이 찾아올 때마다, 빈 서책에 비연천공의 빈 부분을 조금씩 채워나가기 시작했다.
하늘에 닿은 오성이 불세출의 신공의 창안을 부채질했다.
서연은 시간이 평소보다 느리게 흘러간다고 느꼈다. 그 정도로 몰입한 것이다.
‘여기서는 이렇게 했구나.
옛 장인들의 흔적을 더듬으며 그들의 자세와 움직임을 읽어냈다. 그러한 움직임들 또한 비연천공에 담으려 했으나, 이내 생각을 바꾸었다. 차라리 움직임만을 따로 모아 새로운 책에 집필하는 것이 나으리라 여겨졌기 때문이다.
비연천공에는 오직 마음가짐에 해당하는 것만을 적는 것이 옳다는 생각을 했다. 심법이라는 뜻이다.
심법이라 하니 거창하게 들리지만, 어찌 무림인만 마음을 가다듬겠는가. 농부든, 석공이든, 상인이든, 속세의 번뇌에 흔들리지 않으려면 결국 마음의 중심이 오롯이 서야 하는 법이다.
노을이 저물고 땅거미가 선명해지며, 다시 아침 해가 떠오르기를 반복했다.
그러한 시간 속에 비연천공에 새겨지는 글자 또한 늘어갔다.
서연은 이따금 금진송의 거처로 돌아가 화련과 식사를 같이하고, 가르침을 베풀기도 했다. 삼신세불을 만들 때처럼 단기간에 끝낼 수 없는 작업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비연천공을 거의 완성했을 때, 서연은 여기서 더 나아갈 수 없음을 직감했다.
재능이 부족했던 것이 아니다. 다만 경험이 부족했다.
오랜 세월 홀로 자연 속에 은거하며 살았기에 심공을 창안할 수 있었으나, 역설적으로 그렇기에 도리어 글로는 다 풀어낼 수 없는 부분이 많았다.
홀로 깨닫기에는 충분했으나, 남을 가르치고 이해시키기에는 부족했던 것이다.
서연은 동시에 왜 달마대사나 장삼봉 같은 대종사들이, 또 소림사의 승려들과 구파의 도인들이 강호무림을 주유했는지를 깨달았다.
직접 걷고 보아야만 느낄 수 있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당장 지금도 그러했다. 노사나불을 눈으로만 보았을 때와, 직접 만지고 복원했을 때 얻는 것은 천지 차이였다.
다른 석공들이 겪었을 고뇌와 고찰을 읽고, 그것을 정리하는 것만으로도 얻는 바가 이리 컸다. 가까운 낙양에서도 이러할진대, 강호 사방의 다른 곳에서는 또 어떠할지 궁금했다.
북경의 석공들이 그리 뛰어나다던데, 그들은 어떠할까. 옛 남방의 석공들도 실력이 뒤지지 않는다 들었다. 운강석굴의 불상도 그리 웅장하고, 또 머나먼 북해에서는 아예 얼어붙은 폭포에 그림을 새겨 넣는다고도 했다.
서연은 다시금 복원에 전념했다.
강호를 두려워하던 여인은 이제 없었다.
*****
- 가고 싶은 곳은 정했느냐?
“일단은 사천이나 운남을 생각하고 있어요.”
- 운남? 듣자하니 모산파로 돌아갈 생각은 아예 없는 모양이구나.
“적어도 몇 년은 더 기다려야 괜찮을 듯 싶어서요. 제가 갑자기 나타나 봐야 어머니만 힘들어하실 거에요.”
금진송의 별장에 위치한 마루였다. 화련과 유혼이 마주보고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서연이 노사나불 복원을 거의 마무리하고, 여행을 떠나자고 이야기했던 것이 불과 하루 전의 일이었다.
서연은 화련으로 하여금 목적지를 정하도록 했다. 기왕이면 어린아이가 가고 싶어 할 만한 곳으로 가면 좋겠다는 생각에서였다.
물론 화련은 어린아이가 아니었기에, 최대한 스승의 마음을 헤아리려 했다.
사천에는 옛 조각가들의 뛰어난 작품들이 즐비했고, 운남에는 대리석의 발원지인 대리국(大理國)이 있었다. 이 두 곳을 목적지로 정한다면 서연의 가르침을 더욱 원활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결국 운남을 가려면 사천을 거쳐야 하니, 결과적으로는 둘 다 가겠구나.
“그렇게도 되겠네요.”
화련은 제 말투가 어린아이처럼 바뀌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너무 오래 어린아이 행세를 하다 보니 예전 말투가 더 부자연스러워진 것이다. 요즘 들어 하루에 한 번꼴로 당과를 먹게 된 것도 그러한 연유였다.
문득, 화련은 제 키가 그동안 조금도 크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마침 유혼도 옆에 있겠다, 화련은 제 궁금증을 해소하고자 했다.
“혹시 키는 안 크나요?”
- 자고로 어릴수록 기경팔맥이 수월하게 순환하는 법. 주인님의 무학을 익히려면 지금처럼 어린 편이 좋다.
당연한 이야기였으나, 화련은 왠지 유혼이 대답을 회피하려 한다고 느꼈다.
“저는 키가 조금 컸으면 좋겠는데요.”
- 갈(喝)!
유혼이 일갈했다. 그는 진심으로 분노한 기색이었다.
- 자고로 중요한 것은 내적인 성장이거늘, 어찌 허물에 불과한 외적인 것에 집착하느냐! 내 너를 그리 가르치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래도 꾸준히 자라는 편이 주변 사람들이 보기에 자연스럽지 않을까요?”
잠시 침묵이 일었다.
- 더 어리게 만들어주랴?
화련은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
유혼은 진정 그러고도 남을 짐승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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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내가 주위를 찬찬히 훑어보다 입을 열었다.
“용문석굴로 향하는 길은 어느 쪽이오?”
그는 특이하게도 죽립으로 얼굴을 완전히 가리고 있었다. 보통 사파 무인들이 제 신분을 감추고자 흑의를 걸치고 그리하는 것과는 사뭇 달랐다.
사내의 의복은 도리어 화려하기 그지없어, 굳이 따지면 마치 유람을 나온 귀공자 같았다.
때마침 지나가던 약초꾼 하나가 답했다.
“지금은 용문석굴에 발을 들이기 어려울 게요. 관군이 길목을 굳게 막고 있소. 허가받은 마차만이 간혹 오다닐 뿐이지.”
“노사나불이 부서져서 그렇다는 소문이 있던데, 과연 그러한가?”
“내막까지는 잘 모르겠소. 나도 소문으로만 들은지라.”
귀공자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되물었다.
“헌데 요즘은 병사들도 이리 평범한 행색으로 위장하고 다니는가?”
약초꾼은 입을 다물었다. 대신 침묵하며 품 속에서 검을 뽑아들었다. 귀공자는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무관이었군.”
“…….”
병사들은 창을 주 무기로 삼는다. 검을 사용한다는 것은, 필시 무과에 급제한 무인이라는 뜻이다.
허나 귀공자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용문석굴이 자리한 산 너머를 지그시 응시했다. 그런 귀공자를 바라보던 약초꾼, 아니 무관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이곳은 관이 행사하는 곳이니, 무림인이면 물러가라.”
약초꾼 행세를 하던 사내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특유의 드센 분위기를 풍기는 무관만이 남았다. 곧 근처에서 자연스럽게 위장하고 있던 병사들이 속속이 나타나 귀공자를 에워쌌다.
순식간에 포위된 상황. 허나 귀공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혹여 빈틈이 있을까 싶어 용문석굴 주변을 전부 살펴보았거늘, 길목마다 이리 병사들이 틀어막고 있더구나. 황상의 군대가 아직 녹슬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아까부터 대체 무슨 말을―.”
귀공자는 쓰고 있던 죽립을 벗었다. 그러자 기다란 귀와 함께 새파란 눈이 드러났다.
무관은 그의 귀와 미려한 용모를 보고는 청목족이라는 사실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청목족?”
“낙양 부윤 대인과 이미 이야기가 되어 있는 것으로 안다. 길을 열도록.”
곧 무관은 부윤에게 전해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금룡상단주와 협력하여 비밀리에 청목족을 데려오기로 했다는 이야기 말이다.
“동행인이 있다고 들었소만.”
“발걸음이 너무나 더디기에 먼저 달려왔다.”
청목족의 경신법은 익히 소문이 자자했다. 익히기만 해도 나무와 나무 사이를 자유롭게 오갈 수 있다던가. 대성하면 바람보다 빠르다는 이야기는 강호에 파다했다.
“이것을 보여주면 될 것이라더군.”
곧 귀공자는 품에서 금룡상단의 인장이 새겨진 문서를 꺼내 보여줬다. 거기엔 월중천(月仲擅)이라는 이름과, 금룡상단주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
그제서야 무관은 납검했다.
“실례가 많았소.”
월중천은 그런 무관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무언가 불편하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전보다 훨씬 권위 어린 말투였다.
“비록 지금은 낙향하였으나, 내 예전에 지휘사(指揮使)의 직을 맡은 적이 있다.”
무관은 갑자기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는 얼굴로 월중천을 올려다보았다.
지휘사라 함은, 위(衛)를 다스리는 최고 지휘관을 뜻했다. 당장 자신들의 최고 상관인 참장(參將)보다도 품계가 높은 것이 지휘사였다.
‘뭔 개소리지.
무관인 이상 당연히 그 정도 되는 고위 무관들의 명단은 전부 꿰고 있었다. 허나 아무리 머리를 굴려보아도 낙양에 그만한 청목족 무관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사칭죄를 엮어 당장 잡아들여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하던 그때, 한 가지 가능성이 무관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예전이라고 했다.
상대는 영생에 가까운 세월을 살아간다는 청목족이다. 그뿐이랴. 종족 자체가 허언을 큰 허물로 여겨 매우 꺼린다고도 했다.
무관은 이전보다 훨씬 정중한 어투로 물었다.
“혹시, 언제쯤 근무하셨는지 알 수 있겠습니까?”
“태황조(太皇祖) 시절이었다.”
현 황상의 고조부 때 관직 생활을 했다는 것이다. 보통이었다면 허언이라 일갈했겠으나, 월중천의 화려한 복식에 당당히 새겨진 흉배(胸背) 탓에 그럴 수도 없었다.
무관은 품계에 맞게 흉배에 수를 놓는다. 지휘사는 웅비(熊羆), 즉 곰의 문양을 수놓았다.
월중천의 옷에 수놓아진 짐승 또한 공교롭게도 곰이었다. 진위 여부는 따질 것도 없었다. 도대체 얼마나 먼 옛날에 수를 놓았는지, 금실로 새겨진 부분을 제외하고는 모든 색이 바래어 있었기 때문이다.
결정적으로, 월중천의 손에는 고위 관료가 아니면 지닐 수 없는 상아로 만든 아패(牙牌)가 들려 있었다.
“시, 실례했습니다!”
곧 무관이 납작 엎드렸다. 월중천은 그제서야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곧 월중천은 용문석굴로 걸음을 옮겼다.
*****
서연은 낙양 부윤이 있는 곳을 찾아갔다.
그의 거처는 묵직하고 고풍스러운 기운이 숨 막힐 듯 감도는 장소였다.
수많은 하급 관리들이 은은한 햇살이 스며드는 격자문 아래에서 붓을 움직이고 있었는데, 특유의 숨 막히는 분위기에 찾아온 이들은 하나같이 압도되어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내로라하는 무인들조차 이곳에선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기 마련인데, 서연의 얼굴은 몹시도 담담했다. 그동안 몇 번 오갔기 때문이다.
저벅.
부윤은 서연이 찾아올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 노사나불의 복원이 오늘 중으로 마무리될 것임을 예상했기 때문이다.
“부윤 대인.”
“잘 오셨소.”
서연의 인사에 부윤이 마주 답했다. 서로 격식을 차린 인사였다.
부윤은 문득 옛 노사나불의 모습을 떠올렸다.
못해도 수백 년 전에 조각된 불상이다. 아무리 정성을 다해 관리했다 한들, 세월의 풍파 앞에 마모되고 물때가 끼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복원하기 전 노사나불 또한 그러했다. 얼굴은 형편없이 부서졌고, 팔과 다리에는 온갖 물때와 이끼가 덕지덕지 피어 있었다.
‘과연, 어찌 바뀌었을까.
아직 직접 확인하지 않았다. 기왕이면 모든 손길이 완성되었을 때, 그 장대한 모습을 한눈에 담고 싶었기 때문이다. 오랜 붕우(朋友)인 금벽산 또한 그리 하기를 권했다.
그렇다고 아예 손을 놓을 수는 없었기에, 수하들로 하여금 매일 복원 진행 상황을 보고하도록 했다.
수하들은 좌정한 노사나불이 자비로움과 위엄을 온전히 되찾았다고 입을 모아 얘기했다.
‘실로 하늘이 내린 솜씨였습니다.
세월을 거슬러 노사나불이 처음 만들어졌을 때로 돌아간 것 같다고 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으며, 심지어 아예 원본을 뛰어넘었다고 평하는 이들까지 있었다.
매일 귀로 소식을 전해 듣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이쯤 되니 부윤도 근질거리는 몸을 참기 힘들었다. 당장이라도 달려가 그 웅장한 자태를 확인하고 싶다는 마음을 애써 삼킨 적이 적지 않았다.
“본관을 찾아왔다는 것은, 드디어 노사나불이 제 모습을 찾았다는 뜻으로 이해해도 되겠소?”
“그렇습니다.”
서연이 담담하게 대답하자 부윤의 표정은 더욱 환해졌다. 부윤의 오랜 경험상, 저리 미사여구를 떼고 간결하게 말하는 사람일수록 기가 막힌 작품을 보여주곤 했기 때문이다.
수하들의 보고를 통해 이미 진행 상황을 낱낱이 알고 있었음에도 그러했다.
못해도 반 년, 길면 몇 년까지도 예상했던 대업을 조속히 마무리지었으니, 참으로 큰 은혜를 입은 셈이었다.
낙양 부윤 자리는 본래 성(省)을 다스리는 총독이 되기 전 거치는 필수 관문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렇다 할 큰 사건만 터지지 않는다면, 몇 년 후 하남의 실권자가 되는 것은 따놓은 당상이라는 뜻이다.
서연 덕분에 노사나불 복원이라는 대업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으니, 민심이 흔들릴 일도 없고, 흠잡힐 일도 없었다. 부윤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붕우인 금벽산에게 듣자하니, 서연은 재물에 크게 연연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보답해야 할까. 곧 보답으로 적절한 것들이 부윤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석공이니만큼 물욕은 없을지라도 진귀한 재료 욕심은 있으리라. 아예 운남 대리석 광산의 출입 허가서를 주는 것도 괜찮을 듯싶었다. 여러 곳을 거닐 테니 역참 통행첩도 쓸모가 있을 테고, 아예 명예 관직을 부여하는 것도 좋은 방안일 것 같았다.
잠시 고민하던 부윤은 머잖아 결론을 내렸다.
‘그냥 전부 주어도 되겠다.
금은보화를 주는 것보다 더한 가치를 가진 것들도 많았으나, 부윤은 본래 통이 큰 사내였다. 은혜를 입었다면 몇 배로 베풀어야 면이 섰다. 더욱이 서연이 이러한 권한들을 사사로이 쓰지 않으리라는 확신도 있었다.
곧 하급 관리가 품에 무언가를 잔뜩 안고 와서는 서연 앞에 섰다. 멀뚱히 서 있는 서연에게 부윤이 말했다.
“받으시오.”
“네.”
서연은 눈치껏 가장 위에 있는 문서를 집어 들었다. 낙양 부윤의 인(印)이 선명하게 새겨진 문서였다.
그곳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낙양 도감 서연(洛陽 都監 徐蓮).
낙양에서 으뜸가는 장인이라는 증표이자, 한 대업을 총괄한 최고 책임자에게 주어지는 지극한 예우였다.
*****
서연이 떠난지 두 시진 정도 지났을 때였다.
낙양 부윤은 제 붕우인 금벽산을 기다릴 겸, 서연이 정리했던 서책을 펼쳤다. 사실 서책을 필사하라 명한 데에는 별다른 의도가 없었다. 훗날 이와 같은 일이 생겼을 때 대비도 하고, 기록도 남길 겸 그리 명했던 것이다.
서연이 남긴 책은 총 두 권이었다. 한 권은 비연천공이었고, 다른 하나는 순전히 복원의 기록만을 담은 복원록(復元錄)이었다.
부윤은 옅게 웃었다.
‘무슨 이름을 무공서처럼 지어놓았군.
쓸데없이 장황한 이름과는 다르게, 그 필체만큼은 유려하고 힘이 넘쳤다. 부윤은 속으로 감탄하며 복원록의 첫 장을 펼쳐 들었다.
그러다 이내 입을 다물었다.
[세 치 간격으로 코의 너비를 잡고, 미간에서부터 곧추솟은 콧날은 두 치 육 푼으로 한다.
그 가장자리를 반 치만 끌어올려 깊이를 더하면 입술은 두텁되 자비로운 미소를 머금도록 할 수 있다. 혹 이 조절이 어렵거든 전곡혈(前谷穴)을 맞대어 가늠하면 도움이 된다.
눈꼬리는 반 치 살짝 올려 위엄을 더하고, 귓불은 어깨에 닿을 듯이 다섯 치 길게 늘어놓는다.
목의 삼도(三道)는 깊이를 일 푼으로 하면 보다 섬세하게 작업할 수 있다. 이때 우수(右手)라면 외관혈(外關穴)과 태연혈(太淵穴)에 힘을 균일히 주어 운용하는 것이 좋다.
불상의 전신을 이와 같은 간격으로 비례를 맞춘다면, 그 크기가 어떠하든 완벽한 균형을 이룰 것이다.]
“…….”
부윤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복원록을 덮었다. 더 볼 필요도 없었다.
‘……사람의 눈썰미가 아니다.
당장 아무 석공에게 이 복원록을 보여준다면, 그들 또한 노사나불을 능히 재현해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정도로 정밀하고 세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평생 조각이라고는 해본 적 없는 자신조차 어설프게나마 따라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말이다.
부윤은 양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곧 그의 시선이 비연천공으로 향했다. 서연이 말하기를, 견문이 부족하여 아직 다 만들지 못했다고 했다.
미완성본이라 하여 필사를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부윤 앞에 놓여 있는 것이다.
부윤은 그새 말라붙어버린 입술을 깨물었다.
‘진정 견문이 부족했을까? 이만한 오성을 가진 존재가?
그럴 리가 있겠는가.
귀신에게 홀린 듯한 기분이었으나, 이쯤 되니 확인하지 않고서는 배길 수 없었다.
부윤은 떨리는 손으로 종잇장을 넘겼다. 이전보다 훨씬 조심스러운 기색이었다.
적막 속에서 책장 넘기는 소리만 조용하게 울려퍼졌다.
부윤은 무공을 익히지 않았다. 문관이었기 때문이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안목까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여타 관리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비급을 탐독한 것이 그였다.
그랬던 부윤의 입술이 푸들거렸다. 책장을 넘길수록 더욱 그러했다.
‘어찌, 어찌 이런…….
구결을 탐독할수록, 감당할 수 없는 물건이 손에 들어왔다는 것을 실감했다. 무림인이 아닌데도 그랬다.
끝내 빈 종이에 도달했을 때, 부윤은 저도 모르게 탄식했다.
“아!”
그는 어느새 빨갛게 충혈된 눈을 비볐다.
‘제기랄.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만한 서책을 아무렇지 않게 넘겨줬단 말인가!
그것도 미완성본을!
무공서라는 것을 떼놓고 보아도 얻을 것이 많았다. 마치 옛 학자들이 손수 적어 내려간 고서를 읽는 심정이었다.
번뇌가 절로 피어올랐다. 코앞에 진미가 놓여 있는데 먹지 못하는 기분이었다.
‘실로 신공이라 칭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미완성인데도 그랬다.
파사현정의 기운이 서려 있기에, 도가나 법가의 정순한 내공을 쌓은 이가 아니라면 입문조차 불가능했다. 불순한 마음을 품고 익히려 한다면, 그 즉시 기혈이 뒤틀려 의념부터 망가지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운기의 경로조차 나와 있지 않은 탓에, 종사인 서연의 도움 없이는 익히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서연 또한 그것을 알았기에 이리 쉽게 내어주었으리라.
'그렇다고 붙잡을 수도 없다.'
이만한 서책을 아무렇지 않게 내놓고 간 위인이 과연 관군에게 잡힐 리 만무했다.
자신이 서연을 위해 원 없이 베풀었듯, 서연 또한 자신에게 아낌없이 그리한 것이라 여길 수 밖에 없었다.
'안타깝다. 진작 이 서책부터 읽어봤을 것을.'
그랬다면 간단한 문답이라도 나눌 수 있었을 터인데.
부윤은 그 사실이 못내 아쉬웠다.
그때 웬 귀공자가 문을 다급히 박차고 들어왔다.
월중천이었다.
복원된 노사나불을 마주하고 왔는지, 냉철하고 고고하다는 청목족답지 않게 초조함으로 가득한 기색이었다.
곧 둘의 시선이 마주쳤다.
둘은 서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눈빛만으로도 알았다.
“…….”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탄식만 뱉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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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벽산은 침음을 삼키며 복원록을 내려놓았다. 이미 열 번도 넘게 확인한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그 경이로움이 여전했다.
‘측량할 필요도 없구나.
노사나불의 진신(眞身) 앞에 섰기 때문이었다.
일류 상인은 어림짐작으로 비단의 길이를 꿰뚫어 보고, 한 손으로 저울 없이 무게를 재는 법이라 했다. 금벽산도 그러한 경지에 올라 있었다.
그렇기에 눈대중만으로도 원본과 복원록의 기록을 보고 대조할 수 있었다.
다시금 노사나불을 마주한 금벽산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몇 번을 보아도 한 치의 틀림이 없었다.
제 몸 수십 배를 넘는 불상을, 그것도 만드는 도중에 이리도 정확히 헤아렸다는 뜻이다.
천하를 꿰뚫어 본다는 천안(天眼) 정도는 가져와야 비로소 믿을 만한 일이었다.
“……실로 신기로다.”
세상에 완벽이란 없다고 했다. 둥그런 옥구슬에도 어딘가 흠이 숨어 있기에 그런 고사가 생겨났다지 않는가.
손바닥만 한 구슬도 그러할진대, 다섯 장을 넘어서는 노사나불이 완벽하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그래야만 했다. 그런데…….
“사, 사람의 능력이 아닙니다.”
측량하겠다고 나선 상단원들이 하나같이 마른침을 삼켰다. 경외심? 아니, 이쯤되니 그 너머의 불가해한 영역을 마주한 듯한 심정이었다.
서연은 노사나불을 원본 그대로 복원해냈다. 수백 년의 세월을 거슬러 온전한 그때의 모습으로 되돌린 것이다.
복원이었기에 그렇게 했다. 만약 창작이었다면 서연은 이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대작을 만들어냈을 것이다.
그 증거로, 노사나불 뒤편의 석굴에는 기하학적인 만다라가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노사나불의 머리에서부터 피어오른 만다라는, 석굴 전체를 토양 삼아 사방으로 그 뿌리를 뻗쳤다.
어두운 저녁임에도 그 무늬가 선명했다. 은하수 가운데에 홀로 떨어진 심정이었다.
“허, 허억.”
압도되어 숨을 쉬는 것조차 까먹은 이들이 속출했다. 만다라의 끝을 가늠하려 고개를 치켜들고 뒷걸음치다 넘어지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끝없이 이어지는 무늬가 균형을 이룬다. 뭘 모르는 상단원이 보기에도 그러했다. 시야의 한 쪽을 가리고 보아도 여전히 대칭이 맞았다.
오른 눈을 가리면 다시 나머지 절반이 상하로 균형을 이루었고, 거기서 다시 반으로 나누어도 여전히 대칭을 이뤘다.
그렇게 만다라의 끝 부분으로 시선을 옮기다 보면, 어느새 노사나불이 세워진 중심으로 자연스럽게 시선이 되돌아왔다.
“……진정 천상의 존재가 내려왔다 가셨구나.”
금벽산은 말 그대로 토해내듯 언어를 뱉어냈다. 시선을 둘 데가 없었다. 바닥에도 만다라가 뿌리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천장과 벽과 바닥에 그려진 만다라가 완연한 원을 이룬다.
불도에서 으레 말하는 무한과 번뇌, 그리고 윤회.
그 모든 것들이 만다라에서 순환하다 노사나불이 있는 중심에서 아라한을 그려낸다. 초월한다는 뜻이다.
“……확실한 건 불자들의 성역이 되겠다.”
월중천이었다. 아주 오랜 세월을 살아온 청목족이었기에, 적잖은 왕조가 부흥하고 멸하는 것을 보았다.
내로라하는 유적들과 보물들을 직접 본적이 적지 않았다. 개중에는 장인들의 혼이 담겼다는 물건들도 있었다. 살아있는 것처럼 기운을 뿜어내는 검도 있었다.
허나 이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살아있다? 아니, 그 정도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토기(土氣)와 금기(金氣)가 어우러진 자연지기가 만다라 틈 사이로 끊임없이 새어나왔다. 그 자체로 작은 지맥을 대신하고 있는 것이다.
본래도 명당이었다. 거기에 신기 어린 손길이 닿으니, 자그마한 지맥이 피어오른 것이다.
‘산정(山精)들이 보면 환장을 하겠다.
청목족이 뭘 모르는 이들에게 이족(耳族)이라고 불리는 것처럼, 산정들도 뭘 모르는 이들에게 둔족(遁族)이라 불렸다. 둔하게 생기고 키가 작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종족 자체가 장인이라 웬만한 귀물도 돌 보듯 하는 이들인데, 이걸 보면 생각이 달라질 듯 싶었다. 아니, 달라질 것이라 확신했다. 예로부터 산정들은 지맥에 환장했으니 말이다.
질 좋은 광물이 많이 나온다 하여 그러했다. 깊은 산속에 틀어박혀 사는 것 또한 그런 이유였다.
월중천은 다시금 책상에 놓여있는 서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비연천공이라 했다.
사락.
부윤은 눈을 부릅뜨고 그런 월중천을 쳐다보았다. 본래 아무에게나 보여줘서는 안되는 귀물이었으나, 상대가 태황조 시절에 오랜 세월 일한 충신이었기에 그리한 것이다.
‘결코 세간에 퍼져서는 아니 되는 물건이다.
뱁새가 황새를 쫓다 다리가 찢어진다고 했다. 이 또한 그러했다. 뭣 모르는 자들이 함부로 따라 하다가는 일평생을 속절없이 허비하기 딱 좋은 물건이었다.
‘마땅히 북경에 진상해야 한다.
낙양에는 노사나불이 있고, 소림도 삼신세불을 품었으니, 북경에도 무엇 하나 올려보내야 이치에 맞았다. 오히려 그리해야 서연에게 쏘아질 괜한 질시의 화살을 막을 수 있었다.
눈썰미 없는 자들은 시기하겠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은 스스로 주의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서연 또한 그것을 노리고 자신에게 이 귀물을 내어주었으리라.
무력으로 경고하는 것보다 몇 곱절은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적어도 부윤은 그리 여겼다.
이윽고 월중천은 비연천공을 완독했다. 한 장을 넘길 때마다 청목족 특유의 고고함도 내려놓고 감탄하던 그는 어느새 완연한 탄식을 토해내고 있었다.
“아아…….”
월중천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정녕 인간이 맞으셨나?”
“셋째에게 듣기를, 지극히 아름다운 여인이라 했습니다.”
“그럴 리가 없다. 그럴 리가…….”
금벽산은 월중천에게 존대했다. 그의 증조부 때부터 연을 맺어온 어른이었기 때문이다.
월중천은 몇 번이고 거듭하여 비연천공을 읽어 내려갔다.
“옛 어르신들과 피가 섞인 분이실 가능성도 있겠다. 인간의 세월로 쌓을 수 있는 무학이 아니야. 하늘이 내린 천고의 무재라 해도 불가능해. 불가능하다…….”
월중천은 비척비척 걸음했다. 답지 않게 힘이 빠진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한참 동안 입만 달싹거렸다.
금벽산은 그런 월중천을 바라보다가, 옆에 서 있는 부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부윤은 다른 의미로 심난한 얼굴이었다.
시선을 느꼈는지 부윤이 말했다.
“……노사나불을 민간에 공개를 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지 모르겠다.”
“그러라고 자네에게 맡기고 가셨겠지.”
부윤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느 종교든 그 세를 불리면 북경에서는 으레 경계하기 마련이었다. 어느 국가나 다를 바 없었다. 황실에서 도문과 불도를 대우하는 것은 그들이 백성들을 외압으로부터 보호하고 분란을 막아서이지, 진정으로 그들을 섬겨서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출입을 막으면?
서연이 어찌 나올지 알 수 없었다.
세 사람은 답지 않게 연거푸 한숨만 내쉬었다.
*****
낙양에 거대한 파문을 일으킨 장본인인 서연은 화련과 함께 유유히 이동했다. 다행히 이제는 맨 발로 걸어다닐 필요가 없었다. 낙양 부윤이 역참을 이용할 수 있도록 허락했기 때문이다.
본래 인사권은 황상의 고유한 권한이었으나, 명예직 정도는 부윤도 내릴 수 있었다. 거기에 역참 통행첩까지 얹어주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음.
말에 안장까지 채우고, 거의 걷는 것과 비슷한 속도로 이동했음에도 무언가 불편했다. 뒤에 화련이 타고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승차감이 백호와 다르다고 할까. 말을 탈 때면 항상 이것이 아쉬웠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대낮에 그만한 범을 타고 다닌다면 당장 관아에서 난리가 날텐데.
도대체 뭘 먹고 다니는지 쑥쑥 자라서, 이제는 대로를 혼자서 꽉 채울 수준이라 더더욱 그리할 수 없었다.
‘섬서를 들렀다가 가야겠다.
애초에 사천을 가려면 섬서를 거쳐야 했다. 서연은 이번 기회에 아예 강호를 주유할 생각이었다. 섬서를 거쳐서 사천으로, 그 다음에 운남까지 내려갔다가, 중원 전체를 한 바퀴 돌 생각이었다.
지역마다 구할 수 있는 재료가 다르니, 그때마다 조각을 해보고 비연천공도 완성할 계획이었다.
그뿐이랴, 조각할 때의 움직임을 담을 서적도 따로 완성해야 했으니, 여행 중에 해야 할 일이 많았다.
따로 돈을 벌 필요는 없을 듯 했다. 금벽산과 부윤이 말 그대로 온갖 것들을 쥐여주었기 때문이다.
당장 도감(都監)만 하여도 이름만 명예직이지, 낙양 부윤이 보증한 장인이라 어디 가서든 대접받기에는 충분했다
적당한 관아에 가서 신분패만 내밀면 부윤의 이름값에 벌벌 떨며 먹을 거리를 내놓을 사람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좋다 좋아.
서연은 노사나불을 복원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고관대작들은 하나같이 뱃살이 그득그득하고 농땡이만 친다는 편견도 없지 않아 있었는데, 이번 일을 계기로 그러한 편견도 싹 사라졌다.
‘관도 정파도 생각보다 괜찮은 사람들이 많다.
이쯤 되니 아예 무협지에서 유명했던 문파들을 찾아가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곧 서연은 일전에 객잔에서 만났던 거지들에게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섬서에서 화산파와 종남파가 한판 붙는다고 했었지.
실제로 싸운다는 뜻은 아니었다. 어찌 정파, 그것도 천하에 이름을 날린 도문들이 사사로운 이유로 싸우겠는가.
각자 뛰어난 후기지수들을 내세워 비무대회를 연다는 뜻이다.
그것만으로도 좋은 구경거리가 될 듯 싶었다.
그뿐이랴, 섬서에는 낙양보다 큰 도시인 장안(長安)이 있다. 중원에서 둘째로 큰 도시답게 온갖 사람들이 몰려든다 했다. 서역으로 향하는 무역로의 시작점도 이곳에 위치한 탓에, 색목인들도 어렵지 않게 마주할 수 있다고 했다.
동방에서만 나는 재료가 있듯, 서방에서만 나는 재료도 있는 법이다. 청금석과 홍옥, 벽옥, 산호나 유리 같은 진귀한 재료들이 그러했다.
서연은 열흘 동안 말을 달려 섬서에 닿았다. 그동안 화련에게 비연천공을 보여주진 않았다. 완성되면 보여줄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인파로 가득한 도심에서 말을 타고 다닐 수는 없었기에, 가까운 역참에 말을 맡기고 발걸음을 옮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화려한 거리에 당도했다. 아직 장안의 초입인데도 그러했다. 고개를 조금만 돌려도 칼을 찬 사람들로 가득했다.
특이한 점은 도인처럼 보이는 이들이 유독 많이 보인다는 것이었다. 화산파와 종남파가 세운 여러 분타(分舵)의 영향이리라.
그뿐이랴. 호북의 무당산이 멀지 않다. 무당파의 분타도 세워져 있다는 것이다. 다른 도시에 세웠다면 영역을 침범했다 욕을 들었겠지만, 장안이 워낙 큰 도시인 탓에 그럴 수도 없는 듯했다.
‘과연, 사람이 많긴 하구나.
그때였다. 옆에서 큰 소란이 일었다. 무슨 일인가 하고 쳐다보니, 일사불란하게 줄지어 오는 남녀 도사들이 있었다.
그 수가 다섯이었는데, 인파를 뚫고 오는 것에 거침이 없었다. 주변 행인들이 눈치껏 길을 비켜섰기 때문이었다.
무복에 새겨진 매화 자수가 유독 눈에 띄었는데, 그것을 보고 화산파의 도인들임을 알 수 있었다.
그중 유독 나이가 어려 보이는 소녀가 눈에 띄었는데, 지학을 막 넘긴 강호 초출의 신진으로 보였다.
곧 소녀의 얼굴을 본 행인들이 외쳤다.
“소검후(小劍后)다!”
어린 소녀가 벌써부터 별호를 가졌다니, 실로 의외였다. 허나 순전히 외양 때문에 별호가 생기는 경우도 있었기에 서연은 그러려니 했다. 화산에 검후가 있다는 사실은 서연도 익히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소검후, 그럴듯하네.
물론 단순히 작다고 하여 소검후라 불리지는 않았을 터. 당연히 그 이름에 걸맞은 무공 실력이 뒷받침되었으리라.
허나 그녀의 작은 체격이 별호에 어떻게든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는 생각까지는 도저히 지울 수 없었다.
그때였다. 소검후의 눈초리가 이쪽을 향하더니, 다짜고짜 달려오는 것이 아니던가.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걸음을 몇 번 옮기지도 않은 것 같았는데 어느새 서연 앞에 도달해 있었다.
“검후의 진전을 이었다더니!”
“과연 신묘한 경신법이로다!”
소검후는 주변 행인들의 외침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녀는 서연과 옆에 손을 잡고 서 있는 화련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화련이 있는 방향으로 쪼그려 앉았다.
그리고는 대뜸 한 손을 내밀어 화련의 머리를 쓰다듬으려 했다.
팍!
서연이 무의식중에 소검후의 손목을 잡아채서 그대로 옆으로 흘려보내지만 않았어도,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
순간 사방에서 침묵이 흘렀다. 손목을 잡힌 소검후도, 서연도 당황하여 그 자세 그대로 굳어 있었다.
뒤에 서 있던 화산파 도인 중 가장 연장자로 보이는 사내가 황급히 끼어들기 전까지만 해도 그러했다.
“죄송합니다. 대사저(大師姐)께서 가끔 이리 엉뚱하게 구실 때가 있습니다.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서연은 눈을 껌뻑거렸다. 말이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대사저라니? 그건 배분이 가장 높은 여제자에게나 붙이는 말이 아닌가?
서연은 저도 모르게 물었다.
"혹시 나이가 어찌 되시는지요?"
“…….”
소검후는 대답하지 못했다. 대신 귓볼이 벌게졌다.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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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검후 신초빈(申草瀕)의 옛 별호는 설매화(雪梅花)였다.
얼음장 같은 눈매와 도통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입매 탓에, 마치 천 년 묵은 한빙에서 뿜어져 나오는 듯한 서늘한 분위기를 풍겼기 때문이었다.
그 때문에 감히 누구도 쉽게 다가설 엄두를 내지 못했다.
말수가 유난히 적은 것도 그러한 인상을 쌓는 데 한몫했다. 오죽했으면 사형제 사이에서도 그녀와 제대로 대화를 나눠본 이가 손에 꼽을 정도였다.
키가 작다고 멸시한 것은 아니었다. 그 누가 감히 검후의 직전제자를 멸시할까.
홀로 풍기는 분위기가 고고했기에, 감히 다가가지 못하는 것에 가까웠다.
물론 소검후는 다른 이들과 두루 친하게 지내기를 원했으나, 워낙 소극적이고 조용한 성격 탓에 그러지도 못했다.
검후가 직전제자로 받은 탓에 항렬이 꼬여버린 연유도 있었다. 눈 떠보니 나이 지긋한 아저씨들과 같은 항렬이 되어버린 것이다.
심지어 검후는 현 화산 장문인보다 항렬이 높았다. 장문인보다 먼저 입문했기 때문이다.
소검후는 그렇게 대사저가 되었다.
화산파는 다른 도문에 비하면 분위기가 개방적이었다. 속가를 만들기를 꺼리지 않는 화산파 특유의 성향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화산파에 막 입문한 제자들 중에는 뭣도 모르고 소검후에게 다가가 반말로 인사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키가 작아 자신과 동문으로 착각했기 때문이었다.
허나 소검후는 곧장 인사를 받지 않았다. 어찌 대답해야할지 고민하던 것이었으나, 다른 사람들은 그런 소검후가 매우 화가 났다고 여겼다.
‘대사저, 검을 뽑으시면 안됩니다. 뭣도 모르는 아이니 용서하시지요.
‘사고,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사고조님, 또 비무를 핑계로 무력을 사용하시면 아니됩니다!
‘흐, 흐어어엉! 태사고님, 때리지 말아주세요……!
그런 일이 생긴 이후로, 어린 입문제자들조차 감히 소검후에게 말을 걸 시도를 하지 못했다.
소검후가 노력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그녀는 어느 정도 친해진 사람 앞에서는 나름 말수가 많아지는 편이었기에, 스승인 검후에게 이러한 고민들을 토로했었다.
‘이런 일이 있었는데, 그 아이를 어떻게 해야 할까요. 비무라도 해야 할까요?
허나 말투가 심각할 정도로 딱딱하고 무거웠던 탓에, 검후는 제 제자가 새로 입문한 아이를 해하려는 줄로 오해했다.
졸지에 소검후는 말 한 번 잘못했다고 어린 입문제자를 목검으로 무자비하게 다스릴 뻔한 냉혹한 인간이 되고 말았다.
그 후 소검후는 타인에게 고민을 토로하기를 그만두었다.
그렇게 몇 년. 어느새 성인이 되었지만, 소검후의 키는 여전히 십대 초중반쯤에 멈춰 있었다.
본래 동기였을 아이들은 성인이 되기 한참 전에 장성했거늘, 소검후만 처음 모습 그대로 멈춰버린 것이다.
오죽했으면 소검후라는 영광스러운 별호가 자신을 놀리기 위해 만들어졌을지도 모른다고 곡해할 지경에 이르렀으니 말이다.
결국 소검후는 이러한 번민을 아이들을 만나는 것으로 풀었다. 갓난아기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 나이의 아이들은 무표정한 소검후를 보면 으레 무섭다고 울어댔다.
다행히 다섯 여섯쯤 되는 어린아이들은 예쁜 사람을 좋아했고, 소검후는 외양이 매우 빼어난 편에 속했다. 소검후는 티 없이 제게 다가오며 웃는 아이들을 보며 마음의 심려를 해소하곤 했다.
오늘도 그러했다.
길을 걷던 중에 예쁘장하고 귀여운 아이를 만났다. 열 살은 되었을까? 아슬아슬했지만, 그 나이대의 소녀들 또한 으레 예쁜 것을 좋아하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소검후는 언제나처럼 아이를 쓰다듬으며 심려를 해소하려 했다.
본래 쓰다듬어도 되는지 묻는 것이 상례였으나, 무뚝뚝하고 차가운 말투를 마주한 아이들이 으레 겁을 먹고 도망치기 일쑤였기에, 일단 저지르고 보았다.
그랬다가 막혔다.
옆에 서 있던 여인에게.
놀란 소검후의 눈동자가 매우 커졌다. 타인이 보기에는 느끼지 못할 정도로 미세한 차이였으나, 소검후 본인은 제 눈동자가 평소보다 세 배는 크게 떠졌다고 생각했다.
‘잡혔어.
화산파가 검법으로 유명하다지만, 권장법과 수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소검후 또한 난화수(亂花手)나 매화산수(梅花散手)를 대성했고, 검후에게 직접 전수받은 산화무영수(散花無影手)도 한창 익히는 중이었다.
배분에 걸맞는 실력 또한 가지고 있었다. 나이를 생각하면 말도 안되는 일이었다. 화산이 자랑하는 제일기재라는 말이 아깝지 않았다.
그런데도 잡혔다.
‘고수다.
순간 소검후의 눈동자가 다른 의미로 반짝였다.
‘비무해달라고 부탁해볼까.
소검후는 본래 비무를 즐겼다. 비무 중에는 강제로라도 몸을 부대끼게 되는 탓에, 친해진 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비무에도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래야 실전에서도 제 실력을 내는 법이다.
스승인 검후의 가르침 덕에 하수를 상대할 때도 항상 최선을 다했다.
다만 그 최선이 다른 이들이 보기에 공포스러웠던 것이 문제였다.
아무리 목검 비무라지만, 뛰어난 무인과의 비무는 필시 상처를 남기는 법이다. 소검후는 비무에서도 최선을 다했기에, 그녀를 상대한 사람들은 항상 어딘가 한 군데씩 부러지곤 했다.
물론 사형제와 사질들은 이러한 사실을 소검후 앞에서 내색하지 않았다. 괜히 훌쩍거렸다가 더 심하게 맞을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소검후는 아직도 사형제들과 비무하면 친해진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뭣도 모르고 반말했던 입문제자들과 비무를 하려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친해지고 싶어서 그랬다.
누가 와서 알려줬다면 좋았겠으나, 안타깝게도 그럴 기회가 없었다. 화산파 내부에서는 감히 소검후에게 대들 사람이 없었고, 종남과 무당의 후기지수들은 사사로이 검을 섞지 않고자 했다.
소검후가 검을 제대로 섞어본 유일한 외인은 광검(狂劍) 남궁청해 뿐이었다.
인간관계가 박살난 소검후와, 검에 미쳤다는 남궁청해가 어찌 비무했을지는 안 봐도 눈에 훤했다.
자그마치 칠주야 동안 밥 먹고 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매일같이 비무했고, 이기고 지기를 반복했다. 둘은 엄청나게 친해졌다.
남궁청해가 검에 미친 인간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으나, 소검후는 그 때문에 비무만능주의의 열렬한 신봉자가 되었다.
친해지고자 했던 사형제, 사질들과 수없이 비무했다. 화산파의 일대, 이대, 삼대제자들은 대사저의 난데없는 패악질에 속절없이 쓸려나갈 뿐이었다.
장문인과 장로들도 막지 않았다.
제자들의 실력이 느는 것은 확실했고, 살초(殺招) 또한 일절 없었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예전에 검후에게 그렇게 당했기 때문도 있었다. 그 스승에 그 제자라고 할 수 있겠다.
다만 차이점은 검후는 매우 사교적이었으나, 소검후는 그러지 못해 괜한 오해를 샀다는 것이다.
다시 방금 상황으로 돌아와서.
소검후는 제 양팔을 꽉 틀어잡은 사형제들과 사질들을 부루퉁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물론 그들은 겉보기엔 무표정하기 그지없는 소검후를 보며 남몰래 부르르 떨었다.
“사고, 저희가 전부 잘못했어요. 그러니 한 번만 참아주세요.”
“이번에도 난동을 일으키시면 정말로 큰일납니다!”
난동? 한 번도 일으킨 적 없다. 비무했을 뿐이다.
그 여파로 주변 일대가 쓸려가긴 했으나, 민가에 피해를 준 적은 없다. 어찌 도사가 되어 다른 이에게 피해를 줄까.
소검후는 제 사질들이 쓸데없는 걱정을 한다고 생각했다. 마음씨가 이리 상냥하여 험한 세상을 어찌 살아갈까 걱정도 되었다.
‘나중에 비무 한 번씩 해줘야겠다.
기특하니 그 정도는 해줘도 되리라.
*****
서연은 졸지에 화산파 분타가 세운 객잔에서 밥을 얻어먹게 됐다. 허나 체할 것 같은 분위기에 밥을 넘기기 힘들었다.
코앞에 소검후가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표정이 없다.
좋지 않은 방향으로 인형 같다고 해야 할까. 아름다우면서도 묘하게 무생물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방년 스물세 살이라고 했다. 솔직히 말해 그보다 훨씬 어려 보였다. 성인 여성보다는 소녀에 가깝다고 할까.
다짜고짜 화련을 쓰다듬으려 했던 것에 대해 사과하긴 했다. 다만 말로 하지는 않았다. 고개를 정중하게 꾸벅 숙였다. 옆에 있는 도사들에게 물으니 원래 말수가 적다고 했다.
‘이건 말이 아예 없는 수준 아닌가.
그렇다고 나쁜 사람 같지도 않았다.
당과부터 사들고 와서 화련에게 건네주었기 때문이다. 화련이 당과를 선뜻 받아먹었을 때, 굳어있던 소검후의 입매가 풀려 올라가는 것을 서연은 분명 보았다.
화련은 당과 하나에 제 머리를 쓰다듬는 것을 허락했다. 그 결과 소검후는 입술 끝이 약간 몽실해진 채로 화련의 머리를 계속 쓰다듬었다.
‘특이한 사람이네.
이곳에 오기 전에 다른 도인들에게서 사정을 대충 전해들었다. 소검후의 배분 이야기도 그 중 하나였다.
어쩌면 대사저라는 압박감 때문에 저리 강압적인 모습을 연기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겠다고 서연은 속으로 짐작했다.
서연이 천천히 입술을 뗐다.
“곧 종남파와 지회(之會)를 연다고 한다고 들었습니다.”
“아.”
소검후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혹시 소검후 님도 참가하시나요?”
소검후는 이번에는 고개를 짧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는 참가할 수 없어요.”
“아.”
이번에는 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검후가 출전한다면 종남파에서도 마땅히 배분이 맞는 제자를 내밀어야 했다. 그것이 도리였기 때문이다.
중년의 일대 제자를 내세워야 한다는 뜻이다.
그쯤 되면 이겨도 문제요, 져도 문제였다.
이기면 약관 즈음의 여인을 실력으로 짓눌렀다고 말이 나올 테고, 지면 약관 즈음의 여인에게 졌다고 말이 나올 것이다.
고로 소검후가 참여하는 것을 종남에서 반길 리 만무했다.
소검후의 입술이 부루퉁 피어올랐다. 서연처럼 눈썰미가 신기가 오른 사람이 아니고서야 알아챌 수 없을 정도로 미세한 변화였다.
‘어지간히도 나가고 싶나 보다.
서연은 문득 소검후가 안쓰럽다고 느꼈다. 빈궁한 사람을 보았을 때의 안쓰러움과는 조금 달랐다. 이제 보니 사람 자체가 뭔가 멍하고 얼빠져 보인다고 할까.
다른 화산파 도인들이 들었다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고 한소리 했을 것이다.
물론 서연은 그런 생각을 겉으로 내색하진 않았다.
식사를 마친 김에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소검후가 입을 열었다.
“그.”
한 글자를 내뱉었을 뿐이다. 순간 주변에 있던 화산파 도인들이 일제히 눈을 부릅떴다.
허나 안타깝게도 소검후가 문장을 완성하는 것이 더 빨랐다.
소검후의 시선은 서연의 허리춤에 매여있는 검을 향해 있었다.
“비무 한 번 부탁드려도 될까요. 검을 사용하시는 것 같은데.”
서연은 문득 예전에 회화루를 쳐들어갔을 때를 떠올렸다. 그때 제 오성을 일대제자 수준이라 어림짐작했었다.
마침 소검후 또한 배분으로 따지면 일대제자였다.
물론 소검후는 일대제자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어리다.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다지만, 수십 년을 더 살아왔을 진짜 일대제자들만큼 강하진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나보다는 훨씬 강하겠지.
화산이 자랑하는 검후의 제자가 어디 보통 사람일까. 오성만 놓고 보아도 자신보다 몇 배는 뛰어날 것이다.
소검후도 제 실력이 더 낫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서연은 소검후가 무인의 방식으로 사과하려는 것이라 어림 짐작했다.
본래 뛰어난 무인과의 비무는 지도대련이 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검술을 가다듬기에도 좋겠다.
저만한 실력자와 비무라면 분명 얻는 것이 많을 것이다. 서연은 소검후의 배려를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다.
곧 서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적당한 장소가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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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인생만사 새옹지마(塞翁之馬)라지만, 호신술 하나 배우려다 갑자기 학관 도장깨기를 하게 될 줄 그 누가 예상했으랴.
적어도 서연은 꿈에도 몰랐다.
본래 시선을 끌만한 행동은 최대한 자제하려던 서연이었건만, 일이 이리 되었으니 후회한들 이미 때는 늦었다.
당장 지금만 해도 그러했다. 볶음면 하나 먹으려는데도 온갖 사람들이 주변에서 웅성거렸다.
“새파랗게 어린 여자애한테 청풍무관 관장이 털렸다면서?”
“진가무관은 아예 문을 닫았다더군.”
“그 아이의 스승은 도대체 어떤 고수이기에?”
“내가 성 노인한테 슬쩍 들었는데, 일인전승 신비문파라 하더이다.”
듣고 반응해달라고 옆에서 저러는 것이다. 일반적인 강호인이었다면 제 명성이 드높아진다고 좋아했겠지만, 서연은 오히려 수명이 깎여나가는 것 같다는 기분만 들었다.
사실 청풍무관에 들어갔을 때까지만 해도 마냥 좋았던 서연이었다. 동네 무관이니 수준은 애초부터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수준 높은 무학을 견식할 생각이었으면 구파일방의 속가들로 향했을 것이다.
허나 굳이 무관부터 찾은 이유는, 평범한 아이들이 땀 흘리며 수련하는 모습을 보며 소박한 즐거움을 느끼고 싶었기 때문이다.
자고로 아이들의 얼굴을 보면 스승의 인성을 안다고 하였다. 청풍무관에서는 팔굽혀펴기나 마보와 같은 힘든 자세를 할 때도 비명을 지를 뿐, 힘들다고 투정부리는 아이가 하나 없었다. 제대로 가르치고 또 제대로 배우고 있다는 뜻이다
청풍이 가르치던 응격검도 그러했다. 비록 견문있는 이들이 보기엔 어설퍼 보일 수는 있으나, 무학에 대한 관심을 이끌어내기 위한 입문용 검법이라 생각하면 나쁘지 않았다.
아이들의 눈이 오죽 까다롭던가. 자칫 그럴듯하기만 한 잔재주에 매몰되기 십상인데, 응격검은 투박하면서도 나름의 멋이 있었다. 흥미를 이끌어내기 충분하다는 것이다.
물론 어느 정도 교정은 필요하겠지만, 동네 학관이 가르칠법한 무공 중에서 찌르기에 대하여 이만큼 깊게 고찰한 검법이 또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너무 고절한 검법을 가르치면 아이들이 따라오지 못할테고, 그렇다고 너무 기초적인 검법을 가르치면 아이들이 흥미를 잃을 터이니, 그런 의미에서 청풍은 동네 무관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했다고 할 수 있겠다.
모두 마음에 들었으나, 그중 최고를 꼽으라면 단연 화련이 목검을 쥐었을 때라고 말할 수 있겠다.
몰입하여 그런 것인지, 아니면 그저 몰랐던 재능을 이제야 깨우쳤는지는 모르겠다만, 서연은 뒤죽박죽으로 이어지는 초식 중에 화련의 오성이 정확한 방향을 찾아 꿈틀거리는 것을 보았다.
육체적인 거리감을 그제야 완전히 체득한 것일까. 초식을 거듭할수록 기운이 안정되었고, 얕은 검진(劍震) 또한 잦아들었다.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났을 때에는 진중했다가, 초식을 제 마음대로 펼칠 수 있게 되었을 때는 기뻐하고, 숨겨진 의를 깨우쳤을 때에는 반성하는 제자의 모습을 보면서.
서연은 자신의 재능이 결코 허접한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한 번 보았을 뿐인 응격검의 초식이 머릿속에 선연했고, 어떻게 펼쳐야 할지, 또 어떤 의도로 만들어졌는지, 또 허초를 어디에 섞어야 하는지도 훤히 보였기 때문이다.
동시에 배운 적도 없는 검법 몇 개가 서연의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회풍무류검(廻風舞流劍)이나 섬광분운검(閃光分雲劍) 같은, 응격검의 뿌리가 되는 점창의 검법들이 그것이었다.
그 즈음, 서연의 심상 너머에 웬 사내가 홀연히 나타났다.
사내는 도인의 복장을 하고 있었는데, 이내 응격검의 기수식을 취했다. 발검과 납검을 일평생 반복했던 모양인지, 한 치의 떨림도 없는 모습이 경이롭기까지 했다.
서연은 제 손에 들린 목검을 내려보다가, 본능적으로 기수식을 취했다.
점창의 섬광분운검이었다.
본 적도 없는 검법을 나는 어찌 아는 걸까. 그런 의문은 자연스럽게 머릿속 어딘가로 사라졌고, 이내 상대를 면밀히 탐색하는 검수로서의 정체성만이 남았다.
서연은 사내의 호흡에 집중했다. 쾌검이란 일순간에 잠력을 폭발시켜야 하기에, 다른 무엇보다 호흡이 핵심이었다.
곧 사내가 숨을 크게 들이켰다.
그리고.
쩌어엉!
산산이 조각난 사내의 검이, 서연의 심상 속에 서리서리 뻗쳐올랐다. 서연은 사방으로 흩어지는 조각들을 보며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다.
비록 섬광분운검에 미치진 못했으나, 그 속에 담긴 의지와 처절함은 고스란히 전해졌기 때문이다.
서연의 손에 들린 목검이 반으로 갈라진 것이 그 증거였다.
그제야 사내는 만족했다는 듯 희미하게 웃더니, 서연에게 포권하고는 그림자처럼 사라졌다.
정신을 차렸을 땐, 화련이 청풍을 세 수만에 쓰러뜨린 이후였다.
거기까지만 해도 괜찮았다.
청풍무관 관생들이 제 관장이 어린아이에게 털린 것을 무슨 자랑거리라도 되는 것 마냥 이곳저곳에 떠들어대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입에서 입으로 거쳐간 소문은 순식간에 와전되었고, 그 결과가 이것이다.
“남만에서 올라왔다는 소문이 있네. 죽립을 걷어보면 귀가 뾰족할거라던데.”
“그게 참말이오?”
“건청문(乾淸門)은 단단히 준비를 하고 있더이다.”
“내 전해들은 이야기인데, 나왕문(羅王門)에서도 관심을 보이고 있다고 하오.”
그래도 마냥 나쁜 일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제자의 재능을 알았고, 또 서연 자신의 재능도 깨달았기 때문이다.
‘보통 재능은 아닌 것 같은데.
서연은 마음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볶음면을 집어먹었다.
이 기분을 대체 무어라 표현해야 할까.
오랜 세월 강호와 떨어져 지내려 했던 노력이 무색하게도, 재능이라는 단어 하나에 이리도 쉽게 흔들리는 꼴이 우습기도 하고.
다시 예전처럼 틀어박혀 살자니, 괜한 재능을 버리는 것만 같고.
참 인간의 욕심은 끝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볶음면의 맛을 제대로 느끼지 못할 정도로 번뇌에 잠겨있던 와중에, 청경채를 걸러 먹던 화련의 시선이 뒤쪽으로 쏠렸다.
그곳에 웬 여인이 서 있었다.
동공이 벌겋게 충혈된 여인은 손톱을 깨물면서 객잔 내부를 둘러보고 있었다. 행색은 추레했고, 몸동작은 뚝뚝 끊어지는 것이 마치 무슨 병에라도 걸린 것 같았다.
점소이가 곧장 나섰다.
“손님, 여기서 이러지 마시고 일단 나가실까요?”
“아, 안 돼.”
“만두 하나 드릴테니까, 적당히 하고 나가시라고.”
“안된다고!”
이쯤 되자 객잔에 있던 손님들의 시선도 전부 여인에게 쏠렸다. 여인은 그러거나 말거나 주변을 돌아보며 뭐라 중얼거리더니, 서연을 바라봤다.
“차, 찾았다.”
여인은 점소이를 옆으로 밀쳐내고는, 서연이 있는 방향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러고는 다짜고짜 엎드리더니 서연의 발을 붙잡고 늘어졌다.
“도, 도와. 도와주세요.”
“스승님.”
“가만히 있으렴.”
서연은 나서려는 화련을 막아세운 다음, 제 다리를 붙잡고 눈물을 쏟아내는 여인을 응시했다.
‘해하려는 의도는 없어보이는데.
몸 곳곳에 큼직한 매질과 채찍 자국이 나 있는 것으로 유추하건데, 기루에서 도망쳐 나온 여인 같았다.
아무리 소림이 떡하니 버티고 있다지만, 하남이 보통 넓은가. 막말로 남한의 두 배 가까이 넓은 것이 하남이다. 소림이 정파의 태산북두라 한들 그 넓은 땅을 혼자서 어떻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조금만 도시 외곽으로 나가도 분위기가 삭막해지는 것도 이 때문이었다.
대놓고 흑도질을 하는 놈들은 없지만, 불법과 합법 사이에 애매하게 걸친 이들은 많았다. 도박장을 만든다거나, 먼 곳에서 가난한 처자들을 살살 꼬셔서 홍등가에 집어넣는다거나…….
서연은 일단 여인을 일으켜 세운 다음, 자리에 앉혀 물부터 먹였다. 자신을 예화라 소개한 여인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회, 회화루에 동생이 잡혀 있어요. 친동생은 아니지만, 친동생처럼 아끼는 아이에요. 루주가 닷새 안에 여고수를 데려오면 살려주고, 안 그러면 온몸을 묶어서 돼지 먹이로 던져준댔어요. 이제 하루 남았는데, 소문을 들어서…….”
“다른 분들께 말은 해보셨습니까? 관이라던가.”
“안 돼요! 관은 안 돼요!”
예화는 안색이 새하얗게 질린 채로 서연을 붙잡았다. 그녀의 표정이 워낙 절절했기에, 서연은 더 캐묻는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대충 상황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서연은 주변을 가볍게 훑었다. 다들 안 듣는 척하고 있을 뿐, 온 신경을 이쪽에 쏟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리 사람이 많은 곳에서 할 만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어, 손님. 계산하시려고요?”
당장 점소이부터가 아쉽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일단 나가서 얘기할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나설 만한 일은 아니었다. 소림이 눈을 부릅뜨고 있는 하남에서 활동할 있을 정도면 오죽 음험한 놈들일 터인데, 아무 생각 없이 갔다가 무슨 험한 꼴을 당할지 눈에 훤했다.
소림이 이런 일까지 받아줄 정도로 여유가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일단 찾아가서 대화를 나눠보는 것이 우선인 것 같았다.
비룡각을 나서서 소림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명백히 예화를 찾아온 듯한 사내들이 길을 막아섰다.
“예화야, 우리 왔다.”
복장을 맞춰 입은 왈패들은 서연을 슥 쳐다보다가 코웃음을 쳤다.
“예화야, 예화야. 이 멍청한 년아. 루주께서 닷새나 주셨는데, 설마 검도 안 차고 다니는 일반인을 고수라고 데려갈 생각이었냐?”
“이럴 거였으면, 그냥 네가 직접 고수 행세하지 그랬냐? 이건 뭐, 오죽 멍청해야지.”
왈패들은 서로 낄낄대다가, 침을 찍찍 뱉으며 다가왔다.
“그쪽도 뭣도 모르고 나선 듯 한데, 어디 하나 잘리기 싫으면 이만 돌아들 가쇼. 보아하니 동네 무관 몇 개 털었다고 나대는 것 같은데, 그러다가 객사해.”
“아니면 그쪽도 따라오던가. 딱 보니 창기로 일하면 돈도 잘 벌 것 같은데.”
왈패들은 히죽거리며 서연의 몸을 흝었다.
서연은 대답하는 대신 시선을 내려 화련을 응시했다.
놀랍게도 어린 제자는 분노하고 있었다. 스승이 나서지 않았기에 화를 삭이고 있을 뿐이다.
곧 서연은 화련과 시선을 마주했다.
“…….”
속이 뒤틀렸다.
“귀 먹으셨나? 얌전히 보내줄 때 그냥 가라니까?”
서연이 꿈쩍도 하지 않자, 왈패는 얼굴을 흉신악살처럼 일그러뜨린 채 저벅저벅 걸어왔다. 몸을 풀 때마다 근육 곳곳에서 뚜둑 소리가 울려퍼졌다.
왈패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손바닥을 휘둘렀다. 뺨을 치려는 것이다.
동시에 서연의 눈이 번뜩였다.
‘머리.
서연은 무식하게 힘만 실린 공격을 바라보다가 가볍게 한 걸음 뒤로 물러나 피해냈다. 왈패의 얼굴에 당황함이 스쳤다.
“이 년이!”
움직임이 훤히 보였다. 서연은 날아드는 주먹을 잡아채서 그대로 꺾어버린 뒤, 사내가 그랬던 것처럼 손바닥을 휘둘렀다.
촤악!
뺨을 쳤는데 무슨 채찍에 맞은 것 같은 소리가 났다. 서연은 사내를 무릎꿇린 다음, 한 손으로 멱살을 쥐고 말 그대로 무지막지하게 패기 시작했다.
옆에 있던 다른 왈패들이 서연을 공격하기 위해 애를 썼으나, 서연에게 닿기에는 한참 부족했다.
서연은 미친 개새끼를 계도하는 심정으로 처음에 덤볐던 사내의 뺨을 계속 후려쳤다.
‘너희들은 짐승이다. 사람 말을 할 줄 아는 짐승.
사내는 빠져나가기 위해 발버둥쳤지만, 아무리 힘을 줘도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촤악! 찰싹! 촤악! 찰싹!
거리가 순식간에 잠잠해지고, 서연을 막아세우려던 왈패들도 더는 덤벼들지 못하고 근처에 서서 마른침만 삼켰다.
사내의 얼굴은 이미 걸레짝처럼 변한 상태.
서연은 피떡이 되어버린 사내를 땅바닥에 내팽개친 다음, 싸늘한 시선으로 주변을 흝었다. 그렇게 격렬히 움직였는데도 서연의 호흡엔 변화가 없었다.
“어…….”
그 모습을 지켜보던 사내가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차마 도망치지는 못했다. 제 발에 걸려 넘어졌기 때문이다.
곧 왈패들을 말 그대로 개패듯이 패기 시작한 서연의 모습을 보며 화련은 괜히 심각해졌다. 스승님이 화난 모습을 처음 봤기 때문이다.
‘말 잘 들어야겠다. 화나시면 답도 없겠구나.
어쩌면 양 볼에 당과를 가득 채우고 볼이 터질 때까지 뺨만 때리실 수도 있겠다는 끔찍한 생각도 들었다.
“화련아.”
괜히 찔렸던 화련은 공손한 자세로 대답했다.
“예, 스승님. 말씀하세요.”
“물 한 잔만 가져다 주렴.”
객잔으로 달려가는 화련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서연은 생각했다.
제자를 위해서라도, 앞으로 검 하나쯤은 차고 다녀야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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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무 한 번 하려고 화산의 드높은 봉우리까지 올라가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 일이다. 그럴 바엔 차라리 주변의 적당한 속가를 찾아 비무대를 마련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소검후가 찾아간 백검문(百劍門)은 비무를 펼치기에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외곽에 자리하여 사람들의 시선이 과하게 쏠리지 않는 점도 좋았으나, 무엇보다 백검문주가 소검후와 개인적인 친분이 깊었다.
과거 소검후가 백검문주의 여식을 구한 인연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은혜를 잊지 않았던 것일까, 소검후가 당도하자 백검문주는 버선발로 뛰쳐나와 반겼다.
“소검후 님, 오셨습니까?”
소검후는 고개만 끄덕였다. 대답은 옆에 있던 도인이 대신했다.
“비무를 하려고 하는데, 자리를 마련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백검문주는 소검후와 그 옆에 선 서연을 번갈아 보았다. 그러다가 시선을 돌려 소검후 뒤에 선 화산의 도인들을 응시했다.
‘사질들과 대련하시려는 게로군.
아무리 생각해도 옆의 여인보다는 화산의 다른 도인들과 합을 겨루리라 짐작하는 것이 이치에 맞았다. 나름대로 합리적인 판단을 마친 백검문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곧장 준비하겠습니다.”
일다경도 되지 않아 백검문도들이 달려왔다. 정리를 마쳤다는 것이다. 안쪽으로 들어가니 제법 격식을 갖춘 비무장이 그 위용을 드러냈다.
“편히 사용하시면 됩니다.”
그리 말하며 물러나려던 백검문주는 심히 부자연스러운 움직임으로 뒤돌아섰다. 제딴에는 태연한 척 하는 모양새였다.
“소검후님, 실례가 아니라면 제 딸아이가 참관해도 되겠습니까?”
“네.”
소검후는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화산의 검법은 어느 정도 세간에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종남과 지회를 여는 것 또한 그런 연유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곧 바깥으로 달려 나갔던 백검문주가 여식을 데리고 비무장으로 들어섰다. 공교롭게도 소검후와 비슷한 연배로 보였다.
물론 이는 겉모습만 보았을 때의 이야기다.
실제 나이는 소검후보다 꽤 어리다는 뜻이다.
“배울 것이 많을 터이니, 집중하여 보거라.”
“네, 아버지.”
백검문주의 여식이 고개를 끄덕였다. 백검문주 또한 딸을 핑계 삼아 자리를 뜨지 않았다. 졸지에 비무장의 관객이 둘 늘어난 셈이었다. 화산파 도인 넷에 화련까지 합치면 총 일곱이었다.
제 삼자가 지켜보는 앞에서 검을 뽑는 것은 서연에게 처음 있는 일이었다.
‘떨리지는 않는다. 다행이다.
서연은 비무대로 오르며 어떤 검법을 사용해야 할지 생각했다. 일전에 회화루에서 사용했던 점창의 검법들이 머릿속을 스쳤으나, 외인이 함부로 도가의 검법을 펼쳤다는 말이 나온다면 분명 뒷말이 나올 것이다.
화산의 도인들이 입이 가벼울 리는 없겠으나, 서연이 점창파와 연관이 있다는 생각까지는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서연이 비무대에 완전히 올라 소검후의 반대편에 서자, 백검문주와 그 딸이 나직이 속삭였다.
“음?”
“처음 뵙는 분이 올라가셨네요. 화산파 도인 같지는 않은데.”
“소검후님과 그리 차이 나지 않는 연배인 듯하니, 혹 먼 곳에서 온 후기지수일 수도 있겠구나.”
서연은 내심 웃음을 삼켰다. 누가 보는 앞에서 자세를 취하는 것이 처음이라서였다.
목검을 치켜든 두 사람이 마주 섰다. 서연은 입을 다물고 기다렸다.
본래 실력이 뛰어난 자가 하수에 맞춰 규칙을 정하는 것이 상례였다. 넘어지면 끝이라든지, 세 수를 양보한다든지, 아니면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방어만 하겠다든지 말이다.
그렇기에 기다렸다. 허나 소검후는 이를 전혀 다르게 받아들였다. 그녀는 서연을 저보다 윗줄의 고수로 여겼다.
일전에 서연이 고절한 수법의 금나수를 보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서연의 침묵을 길게 얘기하지 말고 바로 들어오라는 뜻으로 이해했다.
무인은 본디 무공으로 이야기해야 하는 법이니.
곧 소검후가 움직였다. 오행매화보(五行梅花步)였다.
화산의 경신법은 다른 도문들과 비교했을 때 매우 빠른 편에 속했다. 검법 특유의 성향 때문이다.
종남의 천하삼십육검이나 무당의 태극검이 수비에 치중하는 것과 달리, 화산의 검법은 대부분 공격적이었다.
그렇다고 하여 살을 내주고 뼈를 취하는 점창의 극단적인 검법과 같지도 않았다. 굳이 따지면 화려함 속에 비수를 숨겨 상대를 서서히 말려 죽이는 방식이라고나 할까.
세 보 만에 지척에 닿았다. 처음으로 마주한 화산의 경신법은 놀라울 정도로 신속하고 화려했다.
‘꽃이 피어오르는 것 같다.
소검후의 손바닥이 매화처럼 늘어지다 추락했다. 장법부터 펼친 것이다.
‘이게 말로만 듣던 낙화추영장(落花追影掌)인가? 신묘하다. 손가락이 수십 개는 겹쳐 있는 것 같구나.
흥미롭다. 그 와중에 자신이 보고 파훼할 수 있도록 손속을 조절하는 마음씨가 고마웠다.
팍!
손바닥을 마주 펼쳐 밀어내듯 튕겨냈다. 내공을 싣지 않았는지 손끝에서 느껴지는 반탄력이 없다시피 했다.
그 때문에 서연이 실었던 내력이 기파처럼 터져나갈 정도였다.
콰아아!
실상은 서연의 생각과는 정반대였다.
“?!”
소검후는 서연의 막대한 내력에 놀라 눈을 부릅떴다. 잠깐 닿았음에도 엄청난 반탄력 탓에 몸이 잠시나마 붕 뜰 정도였다.
만약 서연이 그 빈틈을 놓치지 않고 장법을 내질렀다면 소검후의 갈비뼈는 필시 모조리 분질러졌을 터였다.
‘고절해. 장법만으로는 안되겠어.
소검후는 얼얼해진 왼손을 몇 번 쥐었다 폈다. 상대의 권장법이 저보다 몇 수는 위라는 사실을 인정한 것이다.
터억.
수준을 가늠했다. 상대는 명백히 자신보다 윗줄의 고수였다.
‘동년배인 줄 알았는데.
손과 목소리만으로 그리 판단했다. 허나 내공의 양으로 미루어 짐작컨대 절대로 동년배일 수 없었다.
명색이 화산 제일고수의 직전제자다. 화산이 자랑하는 자소단을 복용한 덕에 남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방대한 내공을 지닌 그녀였다. 내공만 놓고 보면 후기지수 가운데에서도 독보적일 정도다.
허나 방금 장법이 교차했을 때 깨달았다.
‘밀려. 압도적으로.
소검후는 서연의 수준을 구파(九派)의 중견 초고수로 격상시켰다.
소검후는 흐트러졌던 기파를 순식간에 가다듬었다. 작게나마 흐트러졌던 숨이 한순간에 되돌아오고, 손 끝의 목검을 따라 움직이던 진기가 매화처럼 피어올랐다.
화아악!
“낙화검(落花劍)!”
구경하던 백검문주의 여식이 경악 어린 말투로 외쳤다. 상승의 검법은 아니었다. 고작 비무에 화산의 비전을 드러낼 수 없음이다. 허나 피어오른 매화의 수로 유추하건데 막대한 내기가 담겨 있음은 분명했다.
쩌저적!
그 일례로 소검후가 들고 있던 목검에 균열이 가고 있었으니, 그 속에 담긴 진기의 방대함을 엿볼 수 있었다.
“한 번.”
소검후가 짧게 되뇌었다. 목검이 부러지는 것은 중요치 않았다. 단지 검을 한 번만 섞어보는 것으로 충분했다. 어차피 목검은 수없이 많았다.
목검을 든 오른손에 검파(劍波)가 휘감긴다.
‘따갑다.
서연은 눈살을 좁혔다. 소검후라는 별호답게 그 기세만으로도 피부를 저밀 듯했다.
소검후는 특이하게도 양손잡이었다. 듣자하니 타고난 재능으로 우검좌장을 다룬다 했다. 검격 틈에 장법을 섞을 수 있다는 뜻이다.
호사가들이 말하는 말뿐인 우검좌장과는 격이 달랐다. 화산의 장문인조차 그 고절함을 인정했다. 검후의 직전제자가 될 수 있었던 것도 저 재능 덕이라 했다.
사실상 두 명의 고수를 동시에 상대하는 것과 다름없다.
‘나중에 따로 감사를 표해야겠다.
고수가 하수와 비무할 때 본신무공을 드러내는 경우는 없다. 굳이 사용하지 않아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있다면 상대에게 가르침을 내리고자 할 때뿐이다.
본래 고수의 조언은 아무리 작더라도 하수에겐 깨달음의 단초가 되기 마련이다. 본신 무공을 드러내는 비무라면 오죽하겠는가.
그렇기에 더더욱 사과하려는 진심이 느껴졌다. 처음에 괜한 오해를 했던 것이 미안해질 지경이었다.
서연은 눈 앞을 응시했다. 소검후가 신속한 발놀림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이전의 현란한 보법과는 다른 종류다. 상체를 숙인 채로 정면으로 순식간에 검을 찔러온다.
좌장에는 당장이라도 폭발할 듯한 진기를 머금었다.
화악!
가공할 속도에 돌바닥에서 먼지가 폭발하듯 사방으로 휩쓸었다.
서연 역시 검을 내밀었다. 형편없이 밀리지 않기 위해 전신에서 진기를 끌어올렸다.
‘보인다.
매화가 피어날 경로가 선명히 보였다. 저를 찔러 파훼하라고 속삭이는 듯 했다.
‘곡지혈(曲池穴)에 내기를 온전히 실어 넣는다면 필시 위력이 곱절은 증폭될 텐데.
화산 제일기재라는 소검후가 그것을 모를리 없을 터. 분명 고의적으로 힘을 줄였으리라.
하수에 대한 배려가 한량없이 깊다.
‘상냥하여라.
서연은 소검후의 배려를 거절할 생각이 없었다.
무딘 목검에 순간 날이 섰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찬란한 광채가 흘렀다. 햇살이 반사되며 오색 광채가 사방을 휘감았다.
검면을 쓸어내리며 자세를 잡았다. 서연이 든 목검이 순식간에 쏘아졌다.
쐐액!
광채가 물결치며 몰아치던 매화를 한 점으로 풀어헤친다.
곧바로 쇄도하는 소검후의 좌장을 옆으로 비껴 흘려내고, 몰아치는 검파를 사방으로 흝어냈다.
스아악-!
서연의 팔을 따라 움직인 진기의 파동이 허공에 선을 그려내더니 소검후의 목검을 그대로 양단했다.
쩌억!
동강난 상단부가 힘없이 돌바닥을 굴렀다. 곧 소검후의 손에 들려있던 몸체마저 진기를 견뎌내지 못하고 산산히 부서졌다.
타인이 보기에는 그야말로 찰나에 일어난 일이었다.
구경하던 백검문주의 여식이 웅성거렸다.
“아버지, 보셨어요?”
“으음…….”
백검문주는 대답하는 대신 고뇌하는 척 입을 다물었다. 공방을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는 말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엄청난 공방이었다. 더 붙일 말이 없구나.”
그렇기에 백검문주는 달리 할 말이 없어 그리 둘러댈 수밖에 없었다.
“……!”
화산의 도인들은 눈을 부릅 뜬 채였다. 그중에는 대사저가 외인에게 상해를 입을까 염려하여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채비를 하던 이도 있었다.
’대사저가……패하셨다고?
단순히 배분이 높다 하여 대사저로 대접하는 것이 아니었다. 실력으로 강호에 그 위명을 떨쳤기에 마땅히 대접하는 것이었다.
검후의 제자만 아니었다면 진작에 화산이 자랑하는 정예, 매화검수의 일익으로 활약했을 터.
허나 그런 소검후가 고작 두 합 만에 패배했다. 아니, 서연이 손속에 여유를 두지 않았다면 첫 합에 승패가 갈렸을 것이다.
“…….”
소검후는 텅 빈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 방금 전까지 들려있던 목검은 온데간데없고, 손끝에 까끌히 만져지는 나뭇조각만이 그 흔적을 남겼다.
아무리 상승의 검법이 아니었다지만, 단 한 수에 이리 파훼될 것이라고는 꿈에도 몰랐다.
격이 다르다. 스승인 검후에게 가르침을 받을때나 있을 법한 일이다.
“많이 배웠습니다.”
서연이 정중히 포권했다. 그녀는 진심이었다. 이번 대련을 통해 적잖은 영감을 얻었기 때문이었다.
‘내 눈이 생각보다 좋구나.
평범한 재능으로 검로를 읽어낼 수 있겠는가. 소검후가 손속에 여유를 두어 가능했겠지만, 그럼에도 제 안력이 뛰어나다는 것은 확실했다.
물론 서연의 포권은 다른 이들에게 전혀 다르게 받아들여졌다.
“…….”
몇 수나 뛰어난 고수가 하수에게 배웠단다. 그게 말이 되는 소리겠는가.
당연히 고깝게 들렸다. 다만 그 말투가 너무나도 정중하여 감히 나서는 이가 없을 뿐이었다.
소검후는 천성이 둔한 인물이었기에 그런 미묘한 분위기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아직 배워야 할 것이 많으니 겸손하게 굴라는 뜻으로 돌려 해석할 따름이었다.
그래서 다시 물었다.
“……진검으로 다시 해보고 싶은데, 어찌 생각하시나요.”
필시 진검이라면 몇 합 정도는 더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목검으로는 상승의 검법을 펼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허나 서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미 사과받고도 남을 만큼 깨달음을 얻었다. 저만한 사람이 자신을 위해 두번씩이나 허물을 드러낼 필요가 없다고 여겼다.
“무리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래서 그렇게 답했다.
물론 이 말 역시 주변 사람들에게는 전혀 다르게 들렸다.
무리하지 않아도 된다? 진검을 들어도 결과는 같을 테니, 그저 얌전히 있으라는 말로 들렸다.
몇몇 도인들이 뒷목을 잡았다. 격한 감정에 열이 오른 탓이다.
“어, 억!”
“실로 오만하다.”
“너무 흥분하지 마. 냉정하게 보면 대사저께 가르침을 베풀었다고 봐야 맞으니까.”
“말투가 거칠 뿐이지, 몸 성히 끝내신 것만 보아도 심성이 악하신 분은 아니다.”
차마 선하다고는 못했다.
화련은 이번만큼은 화산의 도인들에게 뭐라 하지 못했다. 그녀가 느끼는 감상도 엇비슷했기 때문이다. 물론 싫지는 않았다. 스승님이 자신을 저만큼이나 아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마음에 안드는 사람을 만나면 내 머리를 쓰다듬게 해야겠다.
분명 스승님께서 탈탈 털어주실테니 말이다.
화련은 나중에 제 여동생을 만나면 머리부터 들이밀기로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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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화종지회(華終之會)를 구경하려 했던 것은 마땅한 구경거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운남까지 이어질 긴 여정이 지루한 걸음의 연속이 될 터이니, 적당히 쉬어갈 필요가 있었다.
허나 소검후와의 비무 후 생각이 바뀌었다. 제 안력이 생각보다 훨씬 대단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 탓이었다.
그쯤 되니 화종지회가 다르게 보였다.
명색이 구파가 당당히 내세운 후기지수들이다. 제 안력에 확신을 가지기에 아주 좋은 기회로 보였다.
검을 제대로 쥐어 본 적도 없으면서 스스로의 재능을 일대제자 수준이라 짐작했었다. 육체에 걸림이 없고, 오성에 막힘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스스로의 재능을 수십 년간 체계적으로 무를 갈고닦아온 구파의 중견 고수들과 동선상에 두었다. 스스로 놀랄 정도의 파격이었다. 당시에는 그렇게 여겼다.
거기에 안력까지 더해지려 하고 있었다.
이쯤 되니 서연도 자신이 진지하게 어렸을 때부터 검을 배웠다면 어찌 되었을지 궁금해질 지경이었다.
고향인 안휘성에서 이름을 날리는 것은 물론이고, 어쩌면 남궁세가에 들어가 검대를 이끌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지나가던 구파 도인이 발견했으면 주워갔으려나.
산속에 틀어박히지만 않았어도 분명 그리되었을 것 같았다. 허나 그렇게 되었다면, 일신의 무력을 믿고 부모의 복수를 꾀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휘성이 어디인가. 팔대세가의 수장이나 다름없는 남궁세가의 영역이요, 정파의 거두인 무당파와 소림이 지척에 놓인 곳 아니던가. 사실상 정파 무림의 심부나 다름 없었다.
북경과도 그리 멀지 않다. 쉬지 않고 말을 달리면 칠주야도 걸리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 곳에서 혈겁을 일으킨 작자들이 어디 보통이겠는가.
수십 일 동안 잿더미가 된 초가의 지지대 아래에 숨어 지냈다. 이따금 목이 말라 장강으로 갈 때마다 떠밀려오는 시체들을 보며 혈겁이 끝나지 않았음을 짐작했을 뿐이다.
시체는 종류를 가리지 않았다. 어떤 날에는 처참한 모습으로 변한 관병들이 떼거지로 떠밀려오기도 했다. 이따금 백의를 입은 사람들도 떠밀려 왔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구파의 도인이었던 것 같다.
배가 갈라지고, 상반신만 떠밀려오고, 세로로 잘리고, 가로로 잘리고…….
맨정신으로 버틸 수 있는 재해가 아니다. 뜬 눈으로 지샌 날이 태반이었다. 무림인을 괴력난신으로 여긴다는 민초들의 심정을 뼈저리게 이해했다.
작은 마을이라 그나마 피해가 덜했다는 말이 충격이었다. 도망쳐온 이들에게 듣기를, 가까운 도시인 함산(含山)에서는 시체가 호수를 가득 메웠다고 했다.
그 때문일까, 산 속에 숨어 지낼 때도 최대한 사람을 마주치지 않으려 노력했다. 혹여 혈겁이 자신을 쫓아올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옛 일을 떠올리다 보니 서연도 생각이 달라졌다.
‘어쩌면 더 일찍 죽었을 수도 있겠다.
과신하기 딱 좋은 재능이었으니 말이다.
서연은 소검후가 입을 열 때까지 그런 상념에 잠겨 있었다.
“다음에는 진검으로 비무했으면 좋겠어요.”
대사저로서 너무 오래 자리를 비울 수 없었기에 가봐야 한다고 했다. 아무리 섬서가 정파 무림의 땅이라 한들, 이만한 행사가 열리면 뭣 모르는 낭인들이 설쳐대기 마련이었다.
지회에 참여하지 않는 도인들은 치안을 더욱 엄중히 다스리기 위해 장안 주변을 엄중히 경계해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황실에서 직접 나서서 징치하기 때문이다.
황태자가 이끄는 천명검에 대항하는 순간 반역도라는 낙인이 찍혔다. 사마외도라면 모를까, 민초들 곁에 자리잡은 정파라면 반드시 따라야 했다.
곧 소검후를 비롯한 도인들과 헤어졌다. 서연은 화련과 백검문 바깥으로 나왔다.
화종지회가 열리는 곳으로 찾아가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온갖 행인들이 그 이야기만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종화지회(終華之會)라 부르는게 맞지. 소검후도 출전하지 않는데 화산이 무슨 수로 이길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검후께서 계시는 화산을 종남보다 아래로 보는 건 조금 아닌 듯 한데. 화종지회라 부르는 게 맞소.”
“그렇게 따지면 종남에는 검선 여동빈이 계셨지. 반면 화산에는 등선한 도인이 하나도 없지 않소.”
“수백 년도 더 전의 과거에 매몰된 꼬라지가 딱 종남파 놈이구만? 그쪽 속가 출신이오?”
“뭐? 그러는 그쪽은 사실 화산 분타 소속 아니오?”
“소, 솔직히 무당파가 최고라 생각하오.”
그러다 다툼이 일어나는 것을 한두 번 목격한 것이 아니었다. 분위기가 격해져 서로 치고받다 크게 다쳐 쓰러지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그런 싸움은 근처의 관병과 도인들이 나서고 나서야 일단락되었다.
분위기가 과열된 것이 한눈에 보였다. 당사자인 도인들보다 민초들이 더욱 그러했다. 두 도문 모두 적잖은 속가를 보유한 탓에, 그에 소속감을 느낀 사람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라 추측했다.
화종지회가 열린다는 비무대는 생각보다 단촐했다. 일전에 방문했던 백검문의 비무장보다도 단촐해보였으니 오죽할까.
그렇다고 하여 그 위에 선 도사들까지 허술해 보이지는 않았다. 세 치보다 살짝 낮은 비무대의 양쪽 끝에 도열한 도사들의 모습은 올려다보는 이들로 하여금 어린 신선 같다는 느낌을 주었다.
신선이라 느낄 만도 했다. 섬서에서 두 도문이 끼치는 영향력은 그야말로 막대했기 때문이다.
지회를 개최하게 된 연유도 국경에서 일어나는 전쟁으로 인해 흔들리는 민심을 다잡고, 민초들에게 건재함을 보여주며 안심을 주기 위함이었으니 말이다.
대회장 인근엔 그야말로 엄청난 인파가 몰아쳤다. 온갖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다.
아예 상층의 창문을 훌쩍 열어놓고 자릿세를 받는 객잔도 적지 않았다.
“비무대가 훤히 보이는 자리요. 은전 다섯 냥만 받겠소이다.”
“여기요.”
서연은 선뜻 돈을 내밀었다. 사람이 너무 많아 까치발을 들지 않고서는 앞을 보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이 정도인데 화련은 오죽할까. 기왕이면 제대로 구경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곧 단상 위로 장포를 걸친 노인이 허공에서 홀연히 나타났다. 옷차림을 보건데 종남의 장로였다. 곧 그를 알아본 구경꾼들이 입을 모아 감탄했다.
“장백신옹(長白神翁)!”
“도대체 어디서 나타났단 말인가?”
“실로 고절한 신법이다!”
장문인이 사사로운 이유로 산문 밖으로 나올 수 없었기에, 장로가 개회식을 대신하는 것이다.
곧 장백신옹이 입을 열었다. 공력을 담기라도 한 것인지 목소리가 사방에 쩌렁쩌렁 울렸다.
“지회를 시작하기 전에 빈도가 이 자리를 찾아주신 여러분께 한 말씀 올리겠소. 본 지회는 어디까지나 화산과 종남이 교류하여 친목을 도모하기 위함이지, 누가 더 뛰어난지를 겨루기 위함이 아니오.”
말을 할 때마다 은은한 바람이 불어와 옷자락과 수염을 가볍게 휘날렸는데, 그 모습이 가히 신선이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특이하게도 화산 쪽에서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원래라면 화산에서도 마땅히 대리인을 내세워야 했기 때문이다.
행인들도 그것을 알아차렸는지 웅성대기 시작했다.
“검후께서는 어디 계시지?”
“화산에 장로가 어찌 그분 한 분뿐이겠소? 게다가 그분이 어디 한가하신 분이던가? 척결해야 할 사마외도가 적지 않은 것을.”
“누가 들으면 종남파는 손가락만 빨고 있는 줄 알겠구려.”
다시금 주변이 소란스러워질 때였다. 장백신옹은 손을 들어 행인들을 진정시킨 다음, 상황을 설명했다. 이번 지회의 개회식은 종남이, 다음 지회는 화산이 맡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제서야 납득한 구경꾼들이 잠잠해졌다. 곧 장백신옹이 개회를 선언했다.
이윽고 양쪽에서 화산과 종남의 도인이 한 명씩 비무대에 올라섰다. 둘 다 약관이 안 되어 보였는데, 이러한 경험이 처음인지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오오!”
“이번에 나선 도사님들 나이가 열여섯이라며?”
관중들이 흥분하여 외쳤다. 아예 승패를 두고 남몰래 돈을 거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그래도 대놓고 하지는 않았기에, 경계를 서는 도인들은 그런 도박꾼들을 못 본 척 넘어갔다.
두 도인은 가볍게 검을 휘두르며 몸을 풀다가, 천천히 기수식을 취했다.
서연의 무릎에 앉아있던 화련이 당과를 삼킨 다음에 물었다.
“스승님은 누가 이길 것 같으세요?”
“이번 경기는 아무래도 종남이 우세하지 않을까 싶구나.”
실전이라면 모를까, 비무만 놓고 보면 수비적인 검세를 취한 종남파 쪽이 훨씬 유리해 보였다. 수비자가 실수하는 것보다 공격자가 실수하는 것이 더욱 치명적이었기 때문이다.
화산의 검은 화려함 속에 살초를 숨기는 방식인데, 저리 몸이 굳어 있다면 제 실력을 펼치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곧 경기는 서연의 예상대로 흘러갔다. 긴장한 화산의 도사는 제 실력을 제대로 펼치지 못했다. 모든 공격이 단단히 틀어막히자 다급하게 승부수를 걸었지만 그마저도 실패했다.
“과연 대종남이다!”
“저런 분들이 섬서를 수호하시는구나!”
패배를 시인한 화산의 도사가 물러설 때였다.
“이번 지회의 승패를 두고 내기해보는 것은 어떻겠는가?”
바로 옆에서 맑고 나긋한 목소리가 울렸다.
고개를 돌리니 흑단과도 같은 머리칼을 가진 여인이 옆자리에 앉아 있었다. 겉보기에는 이립 정도로 보였으나, 특유의 정갈한 분위기에서 헤아릴 수 없는 연륜이 묻어났다
특이하게도 서연처럼 죽립을 쓰고 있었는데, 그럼에도 뛰어난 외모가 가려지지 않았다.
“실은 방금 자릿세를 내는데 돈을 다 써버렸다네. 설마 은전 다섯 냥씩이나 할 줄은 미처 몰랐지 뭔가.”
활달한 기질이 말투에서부터 물씬 풍겼다. 일전에 소검후를 만나서 그런가, 그 차이가 유독 크게 다가왔다.
“승패를 헤아려 더 많이 맞추는 쪽이 식사를 사는 것이 어떤가? 값비싼 것을 청하지는 않을 터이니 너무 염려 마시게. 이쪽은 소면 하나면 족하니.”
그녀의 입매가 호선을 그렸다. 어찌할 것이냐고 묻는 듯했다.
“지면 어찌하시려고 그러십니까? 남은 돈이 없으시다고 말씀하셨는데요.”
서연이 그렇게 대꾸한 직후였다. 여인의 눈이 크게 뜨였다. 이제 보니 자신이 질 것을 아예 상정하지 않은 듯했다. 곧 익살스럽게 웃은 여인이 말했다.
“사실 식사 한 끼 살 만큼은 있었다네.”
그렇게 말하며 전낭을 내밀었다. 그 안에는 자그마한 동전 몇 푼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안 그래도 심심해지던 차였다. 식사 한 끼가 걸린 내기 정도야 얼마든지 수락할 만했다. 물론 서연은 지든 이기든 밥을 살 생각이었다. 가난한 도인의 돈을 뜯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화산과 종남이 내세운 후기지수는 각각 여덟. 방금 한 경기가 끝났으니, 남은 경기는 일곱 개였다. 칠판 사선승제라는 뜻이다.
비무대에 두 후기지수가 올라섰다. 일전에 나섰던 도사들보다는 나이가 있어 보였다.
“이쪽은 화산의 승리에 걸겠네.”
“음, 저와 생각이 같으시군요.”
무승부를 생각하지 못했던 서연이 낭패라는 얼굴을 했다. 그때 여인이 제안했다.
“그러면 이리 해보세. 같은 쪽에 걸었다면, 더 그럴듯한 이유를 대서 상대를 납득시키는 쪽이 이기는 것으로.”
나쁘지 않은 방법 같았다. 여인은 서연이 먼저 할 것을 권했다.
서연은 곧장 답하는 대신 잠시 생각했다.
화산의 도사는 일전의 소검후가 그랬던 것과 같은 기수식을 취하고 있었다. 분명 낙화검일 것이다.
종남의 도사 또한 전판에 나섰던 도사와 같은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같은 검법을 사용한다는 뜻인데, 얼핏 보았을 때는 정면을 여섯 방위로 나누어 방어하는 듯 했다. 정확한 명칭을 알지 못하니 임의로 육합검이라 칭했다.
낙화검이 가장 취약해지는 때는 상단세에서 찌르기로 전환할 때다. 그 때 구미혈(鳩尾穴)이 온전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허나 종남의 도사가 이를 파훼하려면 육합을 임의로 깨뜨리고 쏟아지는 낙화 앞으로 나서야 했다. 여섯 방위로는 온전히 닿을 수 없음이다.
전판의 미숙한 도사였다면 모를까, 이번에 나선 화산의 도사는 낙화검의 검초를 눈 감고도 능숙하게 펼칠 만큼 연마한 듯 했다. 긴장하여 실수할 일이 없다는 것이다.
결국 남은 방법은 종남의 비전인 천하삼십육검을 펼치는 것 뿐인데, 남들이 보는 앞에서 그런 상승의 검법을 꺼낼 리가 만무했다.
정리를 마친 서연은 제 생각을 말로 풀어 설명했다.
“결국 낙화검을 펼칠 때 구미혈을 뚫느냐 못하느냐에서 승부가 갈릴 것 같은데, 태을무형검(太乙無形劍)같은 쾌속한 검법이라면 모를까, 지금 펼치는 검법으로는 파훼할 수 없을 듯합니다.”
“음……?”
여인의 눈이 커졌다.
“화산의 도사를 상대해본 경험이 있나? 아니, 그렇다고 해도 쉬이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이 아닌데…….”
“사실 일전에 소검후의 검술을 견식한 적이 있습니다. 그분도 곡지혈에 내기를 온전히 싣지 않던데, 이번 분도 그러시는군요. 상대가 다칠 것을 염려하는 모양입니다.”
“곡지혈……?”
이윽고 미간을 좁힌 여인의 시선을 돌렸다. 무언가를 깊이 생각하는 듯했다. 잠시 후, 여인의 목울대가 작게 울렁거렸다. 그 모습이 마치 어딘가로 전음을 보내는 듯 했다.
곧 비무대에 올라가있던 화산의 도인이 갑자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갑작스럽게 집중력이 흐트러진 모습에, 순간 밀릴 정도였다.
그러다 갑자기 기도가 달라졌다. 낙화검을 막아내던 종남의 도사의 얼굴에 경악이 어렸다.
투쾅!
사방에 꽃잎이 휘날렸다. 종남의 도사는 넝마가 된 채로 비무장 바깥으로 튕겨나갔다.
“이게 무슨……?”
옆에 서 있던 여인은 황망한 얼굴로 서연을 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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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백 년 동안 전승되어 온 무학은 그 자체로 이미 검증된 것이나 다름없다. 옛 종사들의 깨달음과 경험이 담겨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애초에 하나의 무학을 고치고 개선한다는 것은 그리 쉽게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위력을 올리려다 진기가 뒤틀리는 것은 예사요, 심지어 주화입마에 드는 경우도 허다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 무학이 비전에 해당하는 상승의 검법이라면, 오랜 시간을 투자해서라도 개선할 가치가 있다. 한 문파의 근간이자 정수가 거기에 담겨 있음이니.
허나 낙화검은 기를 수발할 줄 알게 된 화산의 제자들이 처음으로 배우는 검법에 불과하다.
이미 검증된 기초 검법에 오랜 시간과 노력을 들여 개선하려는 시도는 드물다. 설령 개선에 성공했다고 한들, 문파 전체의 전력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차라리 그 시간과 노력을 상승의 비전 무학을 연마하거나 새로운 절기를 창안하는데 쏟는 것이 현명할 터였다.
‘번뜩이는 영감 따위로 재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거늘…….
명색이 화산의 기반이 되는 검법이다. 저리 쉽게 파훼되고, 또 저리 쉽게 위력이 증대해서는 안됐다.
상리에 맞지 않은 일이다. 천하 만물이 영감으로 화하는 경지에 올랐다면 모를까.
본래 이런 방식으로 내기를 할 생각은 없었다.
익힌 무공의 상성, 자세, 운기, 특유의 습관, 검로, 내력을 능숙히 끌어올리는 정도 등등. 겉으로 드러나는 것들을 눈썰미로 읽어내어 승패를 예측하려 했다.
그마저도 내로라하는 고수들에게만 허락된 기예였다. 승리를 자신한 것도, 패배하면 어쩔 것이냐고 물었을 때 소상히 웃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선수를 양보했다. 단순히 심심하여, 또한 여검수로 보여 견문이나 넓혀주고자 그리했다.
허나 여인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응수했다.
검법을 펼치기도 전에 기수식만으로 무학 전체를 뜯어내어 살핀 다음, 파훼식과 개선안을 동시에 들이밀었다.
“…….”
쉬이 넘길 수 없는 말이었기에 수치를 감내할 생각으로 전음을 보냈다.
사방에 흩날리는 꽃잎과 충격에 휩싸인 비무대가 그 진위를 증명했다.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었다. 그렇기에 입을 다물고 있었다.
“말씀이 없으시니, 이번 판은 제가 이긴 걸로 해도 되겠군요.”
“…….”
옆 자리에 앉은 여인이 그리 말했을 때 대답하지 못했던 것도 그러했다.
능히 일문을 세우고 무너뜨릴 재능이다. 무림의 공적(公敵)으로 몰려도 이상하지 않다.
그런데도 숨기지 않고 당당히 드러냈다.
생각이 많아졌다. 명경지수(明鏡止水)에 오른 이후로 처음 겪는 일이었다.
숨을 가다듬었다. 넓은 마음으로 포용하고 이해하려 했다. 풍파가 몰아치려던 마음이 잠잠해졌다. 조금만 더 나아갔다면 자칫 심마에 들 뻔했다.
곧 다음 경기가 시작됐다. 다행히 튕겨나갔던 종남의 도사는 크게 다치지 않았다. 지켜보고 있던 장백신옹이 제때 나섰기 때문이다.
―검후. 이게 무슨 짓이오.
장백신옹의 세찬 전음이 이쪽을 향했다. 검후는 옅은 한숨을 내쉬다가 고개를 숙였다.
―급히 확인할 것이 있어 알면서도 수치스러운 행위를 저질렀소. 내 날을 잡아 정식으로 사죄하리다. 미안하오.
순순히 고개를 숙이자 장백신옹도 더는 캐묻지 않았다. 나중에 이 일을 빌미삼아 종남이 적잖은 것을 요구할 것이 머릿속에 그려졌으나, 당장은 중요치 않았다.
곧 새로운 도사들이 비무대 위로 올라섰다. 이번 화종지회는 경기를 거듭할수록 점차 연배가 올라가는 방식이다. 최종전에는 일대제자들이 나서는 방식이라 했다.
장문제자는 나서지 않았다. 일문의 명예를 짊어진 이들이기 때문이다. 패배했다간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많았다.
잠시 고민하던 검후가 입을 열었다.
“……이번에 나서는 화산의 제자는 오행매화검(五行梅花劍)을 익혔다네. 만물을 구성하는 오행의 이치를 무공에 접목한 검법이지.”
“오행이라 하심은.”
“각각 목계, 화계, 토계, 금계, 수계를 뜻하네. 서로 상생하고 상극하여 순환하는 상생상극(相生相克)의 묘리가 담겨 있지. 본래는 다섯가지의 기운을 모두 담아야 대성했다고 할 수 있지만, 웬만한 기재도 한 가지 기운을 온전히 담지 못하네. 저 제자가 목계만 다루는 것도 그러한 연유지.”
검후는 이번에는 종남파의 도사를 쳐다보았다.
“종남은 이번에 대천강검법(大天剛劍法)을 들고 온 듯 하네. 강맹하고 굳건한 위력을 자랑하는 중검이지. 매우 견고하고 안정적이고, 종남답지 않게 패도적이기도 하네.”
“잘 아시는군요.”
“직접 상대해봤으니 그럴 수 밖에.”
저도 모르는 사이에 어조가 조심스러워졌다. 괜시래 평가를 받는 듯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번 경기는 누가 우세할 듯싶으신가요?”
면사 틈 사이로 도화같은 눈동자가 비쳐보였다. 검후는 곧장 답하지 못했다.
“목계는 봄날의 새싹처럼 부드러우면서 끈질기게 뻗어 나가는 특징을 지녔지. 유연함 속에 강인함을 숨기고, 끊임없이 상대를 휘감으며 빈틈을 노릴 터.”
여인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 이야기하라고 하는 듯했다.
“반면 종남의 대천강검은 유연함을 짓누르는 강인함을 지녔으니, 아무리 목계라고 해도 그 강맹함을 정면으로 뚫어내기는 쉽지 않을 것이네. 마치 가는 나뭇가지가 거대한 바위를 뚫어내려 하는 것과 같지. 결국 그 차이를 뚫어낼 수 있을 정도로 힘의 격차가 뛰어나야 하는데, 그래 보이지는 않는군. 이번 경기는 종남의 도사가 우세할 걸세.”
“안목이 범상치 않으시군요.”
“……음, 칭찬 고맙네.”
곧 비무대 위에서 두 도사의 검이 격렬하게 부딪히기 시작했다. 화산의 검은 마치 춤을 추듯 유려하게 휘감았고, 종남의 검은 묵직한 굉음을 내며 이를 쳐냈다.
옆에 있던 여인은 그를 조용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이번에는 읽어내지 못한 것인가?
실전에서 사용되는 고절한 무학으로 나아가니 그런 듯했다.
이따금 그러한 사람들이 있었다. 일평생을 걸고 하나의 구결을 파헤치는 것을 큰 명예로 여겼다. 어쩌면 낙화검의 결만 오랫동안 파헤친 속가의 여식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잘못 보았나?
문득 기대했던 박동이 가라앉을 때였다.
“사선으로 나아갈 때, 자세가 너무 곧습니다. 오행을 다뤄본 적이 없어 목계의 원리까지는 모르겠으나, 진각을 비튼 채로 나아가면 승산이 있어 보입니다.”
“……진각을 비틀다니?”
“음, 제 견문이 부족하여 말로 설명하기 힘들군요.”
여인은 그렇게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허리춤에 매인 검이 유려하게 뽑혔다. 한 번의 막힘이 없다. 단련된 검수다.
‘……분명 무학을 익힌 흔적이 없었거늘.
검수의 손은 으레 부르트고 흉해지기 마련인데, 저 여인의 손은 섬섬옥수라 칭하기에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렇기에 강호에 막 출도한 여검수라 여겼다. 허나 방금 자세를 보니 알았다.
‘정녕 환골탈태라도 했단 말인가?
기수식을 취함에 막힘이 없다. 오행매화검의 기수식이다.
차마 방금 보고 깨우쳤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 자세가 너무나 정갈했음이다.
여인이 눈을 감고 집중하기 무섭게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는다. 검 끝에 나뭇잎이 피어올랐다는 착각이 들었다.
검후의 눈이 부릅뜨였다.
‘자연지기……?!
경지에 오른 초고수만 인지할 수 있을 정도로 미약하다. 객잔에 있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비무대에 있는 장백신옹마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세밀한 조절이었다.
육체의 내공을 오행으로 변환한 것이 아니다. 육신 바깥, 즉 대자연에서 직접 끌어온 것이다. 그 정도를 구분할 눈썰미는 있었다.
대자연을 단전으로 삼기에 내공 수발에 제한이 없다. 그렇기에 강호 무림은 경의를 담아 이들을 절세고수라 칭했다.
구파를 통틀어도 단 한 명 뿐이었다. 드넓은 천하에 고작 다섯이다.
방금 전까지 그러했다.
‘대체!
차라리 몽환 속을 헤매고 있다는 쪽이 납득이 갈 정도였다. 마음속의 명경에 깊은 파문이 일었다. 그만큼이나 놀랐다.
명경지수를 완성한 이후로 이토록 격렬한 충격을 받은 적이 없었다.
비무가 절정에 치닫을수록 구경꾼들의 호응이 거칠어진다. 허나 여인에게까지 닿지 않는다. 드높은 산맥이 태풍에 휩쓸리지 않는 것처럼 홀로 고요했다.
사악―.
곧 여인의 검이 움직였다.
같은 기수식인데 검세가 달랐다.
출수하는 손과 같은 발을 원래보다 반 보 더 내밀었다. 놓인 모습도 비스듬했다. 진기가 발끝으로 온전히 흘러들어간다.
콱!
가벼운 한 걸음으로 족했다.
“……!”
오행매화검은 오늘부로 새로 태어났다.
“이런 식으로 하면 될듯한데. 어찌 생각하시는지요.”
여인은 곧바로 납검하며 물었다. 빛이 사선으로 새어들어와 천하일색이라 칭하기 부족함이 없는 용모가 비쳤다.
언제 그랬냐는 듯, 절세고수의 기도는 온데간데 사라지고 일반인의 그것처럼 되돌아왔다. 실로 신기라 칭하기 부족함이 없는 반박귀진이었다.
“…….”
천하를 통틀어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검수라 자부했다. 금분세수한 노괴들과, 절세고수를 포함해서 그리 말한 것이다.
‘자만했구나.
이 연배에 강호의 넓음을 다시 깨닫게 될 줄은 몰랐다.
여인이 제 자리에 돌아와 앉을 때까지, 검후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정신을 가다듬는데 한참이 걸렸다.
눈을 뜨니 여인은 태연한 얼굴로 비무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따금 웃는 것을 보니 진정으로 저 광경을 즐기는 듯했다.
갓난아기들의 어리광을 보는 기분일까. 알 수 없었다. 절세고수란 능히 살아있는 신선이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존재들이다. 하수의 시선으로 읽을 수 있을 리가 없다.
새로 태어난 오행매화검을 직접 펼쳐 시험해보고 싶었으나, 아무래도 힘들 듯싶었다.
결국 다른 방법으로 확인해야 했다.
‘이 방법 뿐이로구나.
마음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쉰 검후는 비무대를 응시했다. 곧 승패가 결정될 것 같았다. 화산의 도사가 종남의 중검에 형편없이 밀려나고 있었다.
―현종아, 기도를 가다듬으렴. 발은 반보 더 내밀고, 보법은 부운약표(浮雲躍飄)로 바꾸는 것이 좋겠다. 단중혈(丹中穴)에 진기를 집중시킨 다음, 터뜨리듯 사선으로 전개하거라.
―대, 대장로님?
―일단 해보거라. 도의를 어긴 수치는 본 장로가 감내하마.
―알겠습니다.
화산이 당당히 내세운 후기지수다. 속에 담긴 검의까지 깨달을 수는 없겠으나, 정답까지 가는 상세한 방법을 직접 듣고 그대로 따라할 수준은 되었다.
곧 현종의 기도가 일변했다.
삽시간에 매화가 피어오르며 폭풍처럼 날아들었다.
“어엇?”
“또 화산이!”
“전투 중에 깨달음을 얻다니, 소검후를 제외한 후기지수들은 전부 종남에 뒤쳐질 줄 알았거늘!”
뭣 모르는 구경꾼들이 감탄했다. 허나 검후는 곧이곧대로 좋아할 수 없었다.
―검후!
장백신옹이 눈을 부릅뜬 채로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번에는 흘러나오는 기파를 숨기지 않았다. 저렇게 반응할만 했다. 장백신옹이 보기에 이는 명백한 기만이었다.
―일문의 대장로라는 자가 어찌 이런 짓을! 이번 일은 화산에 정식으로 항의하겠소!
이 와중에도 전음으로 말하는 것이 그의 성품을 드러냈다. 독설을 담지 않는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화산과 종남이 교류하기 위한 목적으로 열었던 지회의 목적을 제 손으로 흐렸다. 드센 지탄을 받아도 할 말이 없었다.
두번째 비무도 화산의 승리로 끝났다.
따로 말로 하지는 않았지만, 사실상 저 여인의 승리나 마찬가지였다.
‘더 해봐야 의미가 없다.
명색의 화산의 제일검수였다. 절세고수와 생사결을 벌여도 쉽사리 패배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실제로도 그러했다. 허나 지금처럼 안목만 두고 다툰다면 백이면 백 패배할 것이다.
더 나섰다간 장백신옹이 직접 나설 것 같기도 했다.
검후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화산으로 모셔야겠다.
물론 그 전에 해야할 일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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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종지회의 결과는 장안 전체로 일파만파 퍼져나갔다.
섬서의 중심이 되는 두 도문의 겨룸이었다. 관객이 적지 않았던 만큼 순식간에 소문이 퍼져나가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동률이었다면서?”
“초반에야 화산이 우세했지, 그런데 연배가 높아질수록 종남이 강해지더이다. 아무래도 그 나이는 되어야 중검이 제대로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이겠지. 결론적으로 일대제자끼리 겨뤘을 때는 일대 일 동률이기는 했지만 말이네.”
“듣자하니 화산의 이대제자들이 비무 도중에 깨달음을 얻었다던데?”
“놀랍기는 했네. 속절없이 밀리다가 갑자기 몰아붙이더군. 내 무림인들의 세계는 잘 모르겠으나 그건 충분히 깨달음이라 불릴 만했네.”
“그래놓고 결론이 사대 사 동률이라. 탕진한 도박꾼들이 꽤 많았겠어.”
장백신옹은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검후가 뒤에서 협잡질을 벌이지 않았더라면 육대 이로 종남이 압승했을 터였으니 말이다.
소검후가 나서지 않은 경기였다. 최소한 우세를 점했어야 했다.
‘정파 무림이 자랑하는 협의지사로 기억하고 있거늘.
수십 년 전에 일어났던 정사대전에서 현 종남 장문인을 구해냈던 것이 검후였다. 사마련의 내로라하는 고수들을 일개 후기지수의 신분으로 당당히 맞섰다. 심지어 마땅한 보상도 거절했다.
―나중에 화산이 위험에 처했을 때 종남이 도와주는 것으로 족합니다.
반쯤 잘려나간 오른팔을 붙잡고 웃으며 그리 말하는 모습은 그야말로 협객이라 칭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때 현장에 있었던 장본인 중 하나였기에 느끼는 바가 컸다.
그렇기에 공론화하지 않았다. 은혜를 원수로 갚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마음이 복잡했다. 검후 정도 되는 인물도 나이를 먹으면 달라지는 것일까.
“죄송합니다, 장로님.”
일대제자 명진이 고개를 푹 숙였다. 그 모습에 다시금 마음 한켠이 아려왔다. 종화지회를 이길 생각으로 왔을텐데, 동률에 그쳤으니 상심이 클 제자들의 심정이 이해됐기 때문이다.
“수고했다. 최선을 다했으니 누가 타박하겠느냐? 장문인께서도 잘했다고 칭찬해주실 것이다. 상심하지 말고 오늘은 장안에서 쉬도록 하자꾸나.”
착잡한 마음을 뒤로한 채 움직이려던 차였다.
―장백신옹. 큰 폐를 끼쳤소. 입이 두 개여도 할 말이 없소. 사과하고 싶으니 내가 있는 곳으로 와주시겠소? 직접 찾아가는 것이 도리이나, 사정이 있어 그럴 수 없소.
검후였다.
마침 대화를 나눌 생각이었기에, 장백신옹은 순순히 검후가 안내하는 방향으로 향했다.
‘할 말이라도 원없이 하고 와야 마음이 편하겠구나.
그런 생각으로 걸음했다.
검후는 처음에 보았던 그 객잔에 있었다. 바가지를 그득하게 씌우기로 유명한 객잔이었다. 그 때문인지 객잔 이층에는 검후와 웬 여인 한 명, 그리고 그 위에 걸터 앉은 여아가 전부였다.
특이하게도 여인은 죽립에 면사까지 쓰고 있었다. 흰 장포를 걸쳤음에도 옷에 때 하나 묻지 않았고, 피부도 새하얗고 고왔다.
검후가 쉽사리 자리를 뜨지 못했다는 것으로 볼 때, 검후보다 높은 사람인 것은 확실했다.
저만한 연배의 여인을 검후가 깍듯이 대할 이유는 없다. 강호의 법도 밖에 있는 존재라면 모를까.
필시 황실에서 온 귀인이리라.
“이쪽 분은 종남파의 장백신옹이시네.”
검후가 말했다. 황족을 대한다기엔 말투가 불경했다.
장백신옹이 미간을 좁히기 무섭게 검후가 전음했다.
―편히 대하지 않으면 마음이 불편해진다 하셨기에 이리 하는 중이네. 어울려 주시게.
―누구시기에?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절세고수시네.
믿기 힘든 말이었다. 문득 검후가 또 장난질을 하는 건지 의심부터 들었다.
허나 진중한 눈동자를 보니 또 아닌 것 같았다.
본디 검후는 웃음과 장난기가 많은 여인이나, 진중할 때는 한없이 진중해지는 여인이었다. 장백신옹은 내심 한숨을 내쉬며 한 번 더 속는 셈 치고 자리에 앉았다.
“종남의 장로시지요? 일전의 경기는 잘 보았습니다. 종남의 저력이 한 눈에 보이더군요.”
검후의 맞은편에 앉아있던 여인이 입을 열었다. 옥구슬이 굴러가는 듯한 고운 말투였다.
장백신옹은 경어를 써야 할지, 아니면 평소대로 말할지 고민하다가 천천히 입을 뗐다.
“그리 봐주시니 고맙소. 헌데 누구시오?”
“서연이라 합니다. 하남성 태실산에서 왔습니다.”
서연은 약간 놀란 상황이었다. 합석했던 여인이 지인을 불러도 되냐고 묻기에 순순히 응했는데, 갑자기 종남파의 장로씩이나 되는 사람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역시 보통 분은 아니셨구나.
어째 안목이 남다르다 했다. 종남파 장로를 지인으로 둘 정도라면 분명 평범한 여인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검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종남파의 장로인 장백신옹을 너무 편하게 대했기 때문이다.
겉보기에 이립도 되지 않아 보였으나, 검후가 옛적에 노화순청을 이뤄 젊을 적의 용모를 그대로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할 수 있는 생각이었다.
온 장안이 그 이야기로 떠들썩했기에 걷기만 했음에도 알게 되었다. 거리를 거닌지 일다경도 되지 않아 검후와 관련된 이야기를 다섯 번도 넘게 들었으니 그 파급력을 짐작할 수 있겠다.
곧 장백신옹이 물었다.
“태실산이라면.”
“소림과는 연관이 없습니다. 이따금 조각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필부지요.”
“……조각?”
장백신옹의 눈에 순간 이채가 돌았다. 노년에 들어 얻은 몇 안 되는 낙이 바로 정교한 각예품을 감상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구경에는 재물이 들지 않으니 그렇게 된 것이다.
솔직히 말해 이번 종화지회가 아니었더라면, 금룡상단이 여는 각예대회에도 기꺼이 찾아갔을 이가 바로 장백신옹이었다.
“혹시 이번에 금룡상단에서 열었던 각예대회에 참가하셨소?”
“부족한 실력을 좋게 헤아려 주신 덕분인지, 운 좋게 우승할 수 있었습니다.”
“우승이라? 천하에 이름난 장인들이 적지 않게 참가했다 들었거늘, 너무 예를 차려도 폐가 되는 법이오.”
장백신옹은 너털웃음을 지으면서도 속으로는 냉정하게 서연을 흝었다. 이렇다 할 기파가 느껴지지 않았다.
‘내공은 없는 듯한데.
자신이 느끼지 못할 수준의 반박귀진을 이루었거나, 아니면 무공을 익힌 적 없는 일반인이라는 뜻이다.
아무리 보아도 전자보다는 후자일 가능성을 높게 쳤다. 검후의 말을 듣지 않았더라면 전자는 애초에 생각치도 않았을 터였다.
손 또한 조각을 익힌 장인의 손이라고 보기 힘들었다. 이렇다 할 상처나 굳은살이 없었기 때문이다.
장백신옹은 수염을 쓰다듬고 잠시 사색에 잠기더니, 서연에게 물었다.
“혹시 조각하는 것을 구경할 수 있겠소?”
“여기서 말인가요?”
“빈도의 오랜 취미올시다. 이번 지회만 아니었어도 각예대회로 찾아갔을 것이오. 우승자라 하니 그 솜씨를 견식해보고 싶소.”
장백신옹은 품 속에서 타원형의 옥을 꺼내 서연에게 내밀었다. 손바닥보다 살짝 작은 크기의 옥석이었다. 백옥 특유의 은은한 빛깔을 띄고 있었는데, 손에 쥐면 차가운 기운이 강하게 느껴졌다. 마치 얼음을 만지는 듯했다.
범상치 않은 물건임을 단번에 알아본 서연이 입을 열었다.
“귀물이군요. 정말 이걸 사용해도 되겠습니까?”
“오래 전에 빙궁에서 전해받은 물건이오. 마땅한 사용처가 없어 그저 지니고만 다니고 있었지. 좋은 구경거리로 쓰일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하오.”
말은 그렇게 했으나, 장백신옹은 나름대로 큰 결심을 한 것이었다. 저만한 옥은 같은 무게의 금으로도 구할 수 없었다. 나중에 뛰어난 장인을 만나면 그때 맡길 생각으로 아껴둔 것이었다.
‘검후…….
검후의 말을 믿고 내밀었다. 이마저도 거짓말이면 평정을 찾기 힘들 것 같았다.
장백신옹은 시선에서 걱정을 애써 숨긴 채 서연이 옥석을 깎아내는 모양새를 지켜보았다.
서연은 한 손으로 옥석을 잡고, 반대 손으로 정을 잡고 힘을 주어 깎아냈다. 그리 힘을 많이 준 것 같지도 않은데 단단한 옥석이 무른 나무토막이라도 되는 것처럼 턱턱 깎여나갔다.
서연은 옥석의 겉면의 일부를 깎아내더니, 깊은 곡면을 새겼다. 둥글기만 했던 겉껍질이 바람에 흩날리는 구름처럼 변했다.
장백신옹은 어느새 반쯤 몰입한 상태로 서연의 손놀림을 응시했다.
‘군더더기가 없다.
절세고수임은 아직 모르겠으나, 각예대회에서 우승했다는 것은 분명해보였다.
곧 옥석의 중심부에 깃털이 하나둘 생겨나더니, 유유히 비행하는 학이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서연은 학의 다리 끝부분에 소나무 한 그루를 새긴 다음, 장백신옹에게 옥석을 건넸다.
장백신옹은 숨을 죽인 채 제 손에 놓인 백옥의 겉면을 천천히 매만졌다. 운학(雲鶴)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볼록하게 튀어나와 있었다. 학의 날개는 깃털 하나하나가 살아 숨 쉬는 듯했고, 길게 뻗은 목은 고고한 기상을 뿜어냈다.
학이 아니라 그 주변을 파내어 양각(陽刻)한 것이다.
역동적으로 그려진 탓에 학이 당장이라도 백옥 바깥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그 뒤로 펼쳐진 배경은 또 어떤가. 겹겹이 이어진 산봉우리는 마치 수묵화처럼 아득하게 펼쳐져 있었고, 그 봉우리 사이사이에 웅장하면서도 기개 넘치는 나무들이 뿌리를 박고 서 있었다.
틈 사이로 은은하게 새어나오는 냉기가 안개처럼 퍼져나가며 더없을 운치를 풍겼다.
장백신옹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손바닥보다 작은 옥에 어찌 이런…….”
가히 신기라 칭하기에 모자람이 없다.
“마음에 드시는 듯하니 다행입니다.”
“마음에 들다니? 이건 고작 그런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오.”
장백신옹은 아예 백옥을 눈 바로 앞에 치켜들고 살폈다. 반들반들한 겉면을 만질때마다 감탄이 절로 새어나왔다. 어찌 날카로운 면이 하나도 없단 말인가.
그때였다.
“종남에는 검선 여동빈을 묘사한 석상이 있네. 당대 최고의 석공이 무려 십오년에 걸쳐 완성한 걸작이지.”
검후였다. 그녀는 은근한 얼굴로 서연을 쳐다보며 말했다.
“예전에 가서 직접 본 적이 있는데, 각예의 미학을 알지 못하는 빈도가 보기에도 굳건한 기상이 절로 느껴졌다네. 섬서를 통틀어도 그만한 석상을 보기는 힘들걸세.”
“그렇습니까?”
“안타까운 점은 종남의 내당에 위치해 있어, 장로 정도 되는 인물의 허락이 없다면 구경할 수 없다는 걸세.”
그러면서 장백신옹에게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근데 마침 이 자리에 종남의 장로가 계시는구려.”
“…….”
이쯤 되니 장백신옹도 검후의 속내를 읽을 수 있었다.
―검후, 무슨 생각이오?
―참을성이 부족했었네. 도인답지 않은 모습을 보였어.
검후는 일전에 있었던 일을 담담히 털어놓았다. 낙화검에 이어 오행매화검이 다시 태어나는 것을 목도했을 때의 충격을 숨김없이 고했다.
협보다 무를 중시했다. 도인이기 전에 무인처럼 굴었다.
문파의 흥망을 짊어진 자로서 마땅히 해야할 일이라 생각해서 그리했다.
천지의 이치를 꿰뚫는 듯한 고수의 조언을 두고 그 어떤 무인이 평정을 유지할 수 있을까.
그 탓에 평생을 갈고닦아 이룬 명경지수가 형편없이 요동치는 것을 알지 못했다.
―종남이 뫼셔야 옳아.
―화산은?
―언젠가 모셔야겠지. 더없을 은혜를 입었으니. 다만 지금은 아닐세. 준비가 되지 않았어.
그렇게 말하는 검후의 목소리는 걷잡을 수 없을 떨리고 있었다.
웃음 뒤에 감춰져서 미처 깨닫지 못했다. 검후의 혈색이 흑철처럼 시커멓게 죽어 있었다. 지독한 심마가 뿌리내린 것이다.
검후가 한쪽 입꼬리를 치켜들었다.
―알아채는 것이 너무 늦어.
장백신옹이 눈을 부릅떴다.
―괜찮소?
―이만하면 싸게 먹힌 거지. 말 몇 마디에 눈이 멀어 일평생 쌓아온 도를 스스로 부정했으니. 어쩌면 처음부터 시험하시려 한 것이 아닐까 싶네. 자네는 통과했고, 나는 실패한게지.
검후는 차라리 심마에 든 것을 다행이라 생각했다.
처음에는 알지 못했으나, 화종지회가 끝날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문파의 미래만을 생각하고 억지로 저 여인을 모셨더라면 분명 화산은 이전보다 강해졌을 것이다. 허나 도문으로서의 정체성 또한 잃었을 것이다.
―오늘 일로 무마할 생각은 없소. 도인이 그래서는 안되겠지. 정양을 마친 후에 직접 찾아가 사죄하리다.
검후는 새까맣게 죽은 안색을 이끌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와중에도 몇 번씩 쿨럭이며 기침을 쏟아냈다.
“몸이 좋지 않아 먼저 가보겠네. 밥 잘 얻어먹고 가네.”
“아, 조심히 가십시오.”
서연 또한 자리에서 일어나서 마주 포권했다.
어느 순간부터 안색이 시커멓게 죽길래 슬슬 걱정되던 차였다. 이제라도 떠나간다고 하니 다행이라는 생각부터 들었다.
검선 여동빈을 묘사했다는 석상 생각을 하던 중에도 계속 걱정이 되었으니 오죽할까. 심한 병이 아니기를 기도할 뿐이다.
검후가 떠나가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장백신옹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편히 말씀하십시오.”
“내일 아침에 종남산에 오를 계획인데, 같이 가시는 건 어떠하시오?”
서연의 안색이 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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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남산은 장안에서 하루도 되지 않는 거리에 있었다. 여태껏 보아온 뭇 산들과는 달리 그 산세가 유독 완만한 것이 특징이었다.
“…….”
종남의 도사들은 은연중에 서연과 화련을 힐끔거렸다. 전날 장백신옹에게 설명을 들었음에도 낯설기 그지없었기 때문이다.
종남파는 소림처럼 금녀의 전통은 없었으나, 아주 오랫동안 여제자를 들이지 않았다. 입문을 거부한 것이 아니다. 들어오려 했던 여제자가 한 명도 없었던 것이다.
삼대제자와 이대제자를 통틀어 여인이 단 한 명도 없었으니, 그 정도를 짐작할 수 있겠다.
그 때문인지 산문에 여인을 들이는 일 자체가 흔치 않았다.
“그, 서 소저라고 부르면 되겠습니까?”
“편하신 대로 불러주세요.”
“서 소저께서는 검을 익히신 겁니까?”
“호신용으로 차고 다니는 것에 가깝지요.”
“그렇습니까?”
종남의 제자들이 금세 화색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얼굴에 훤히 드러났다.
“흠흠, 그러면 저희가 나중에 한 번 검술을 봐드릴까요?”
“그래주시면 고맙죠.”
서연은 작게 웃었다.
전체적으로 사람들이 순수하기 그지없었다. 그럴만도 했다. 삼대제자는 앳된 소년이고, 이대제자는 소년에서 갓 청년으로 넘어가는 나이였기 때문이다.
일행은 어느덧 종남산 초입에 당도했다. 산세 자체는 숭산보다 훨씬 완만하여, 그 때문인지 얼마 오르지 않아 입구에 도달할 수 있었다. 입구는 종남의 도사들이 굳건히 지키고 있었다.
“장로님, 무탈하셨습니까.”
“너희도 별일 없었느냐?”
형식적인 안부인사를 마친 장백신옹이 서연에게 눈짓했다.
“본 장로의 손님이시다.”
“서연이라 합니다. 이 아이는 제가 가르치는 제자고요.”
서연이 포권했다.
현재 분쟁을 겪는 문파도 없고, 더욱이 장로의 귀한 손님이었다. 덕분에 서연은 어떠한 수색도 거치지 않고 종남파로 발걸음을 들일 수 있었다.
“본파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서 소저.”
정갈한 느낌의 전각들이 산세와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었다. 특이한 것은 곳곳에 검의 형상을 한 비석이 장엄하게 솟아 있었다는 것이다.
서연의 시선을 느꼈는지 장백신옹이 나지막이 운을 떼듯 설명했다.
“사마련으로부터 본파를 수호한 도사들을 기리기 위해 당대 장문인께서 세우신 것이지. 저 검혼비(劍魂碑) 하나하나가 곧 종남의 혼이라오.”
검혼비의 숫자는 언뜻 보아도 수십 개를 넘어섰으니, 당시 전투의 치열함과 처절함이 능히 짐작되고도 남았다.
놀랍게도 그 오랜 세월에도 불구하고 검혼비에는 돌 때 하나 피어있지 않았다. 후배 도사들이 선배들의 넋을 기리며 성심껏 관리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일이었다.
적지 않은 전각들과 산봉우리를 지나치던 도중이었다.
“빈도는 장문인께 종화지회와 관련된 말씀을 전하러 먼저 가보도록 하겠소. 그동안 본파의 안내는 여기 정혜가 해줄 것이오.”
장백신옹은 그렇게 말하며 옆에 있던 도사를 가리켰다. 종화지회에 참여했던 도사 중 하나였다. 이대제자들의 대사형이라 했다.
“이대제자 정혜라 합니다. 청풍각(淸風閣)으로 안내할 테니, 부디 따라와 주시겠습니까?”
종남의 귀한 객들이 머무는 장소라 했다. 과연 그 이름답게 고요하고 평화로운 기운이 감도는 누각이 자리해 있었다.
“이곳에 짐을 풀고 편안히 머무시면 됩니다. 필요하신 것이 있다면 언제든 불러주시면 되겠습니다.”
“정혜 도사님.”
“말씀하십시오, 서 소저.”
“종남산에 검선 여동빈님의 모습을 딴 석상이 있다 들었는데, 혹시 어디 있는지 알 수 있을까요?”
“아, 여선검상(呂仙劍像)은 내당에 있어 당장은 보실 수 없는 것으로 압니다. 아마 장로님께서도 그 때문에 장문인을 뵈러 가신 것으로 압니다.”
장로씩이나 되는 사람이 장문인께 허락을 구해야 볼 수 있다니. 자세한 내막까지는 알 수 없었으나, 평범한 석상이 아닌 것은 분명해보였다.
그때 정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시간이 조금 걸릴 듯한데, 연무당(練武堂)으로 가보시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서 소저께 종남의 무공을 알려드릴 수는 없겠으나, 검세를 다듬어드리는 것 정도는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헌앙하게 생긴 청년이 왜 안절부절 못하나 했더니 그것 때문에 그랬던 모양이다.
‘좋은 기회겠다.
서연은 고개를 끄덕이고 연무당으로 향했다. 무예를 연마하는 수련장이라는 이름답게, 종남의 어린 도사들이 검법을 다듬느라 여념이 없었다.
허나 어디선가 사박사박 다가오는 서연의 우아한 인기척을 느꼈는지, 그 자리에 굳은 채로 숨을 죽이는 도사들이 적지 않았다.
“죽립은 벗으시는 편이 더 좋으실 겁니다. 시선이 알맞은 방향으로 향하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거든요.”
그때, 제 말의 요상함을 알아차린 정혜가 다급히 덧붙였다.
“아, 그……! 오해하지 마셨으면 합니다! 절대 다른 의도가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불편하면 벗지 않아도 된다고 몇 번이나 덧붙여 말했다.
“도사님이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벗는 편이 낫겠지요. 그 대신 그만큼 잘 봐주실 거라 믿습니다.”
장난식으로 덧붙인 말에 정혜의 귓볼이 벌게졌다. 순진한 도사를 놀리는 재미가 있었다.
사락.
서연은 죽립과 면사를 한 번에 벗어냈다.
“아?”
서연의 맨 얼굴을 본 정혜의 눈이 크게 뜨였다.
*****
장백신옹에게 전후 사정을 전해들은 종남 장문인이 얕게 침음했다.
속세에서 태허진인(太虛眞人)이라 불리는 자였다.
“……절세고수라.”
“일단 검후에게는 그렇게 전해들었습니다. 직접 확인해보지는 못했으나, 범상치 않은 사람인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화산의 대장로는 허언을 하지 않을 사람이다. 믿어 손해를 보지는 않을 듯 하구나.”
“사실, 산문에 들이기로 결정한 것이 잘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태허진인이 고개를 저었다.
“여태 존재조차 알려지지 않았던 분이다. 다른 의도가 있으셨다면 이러한 방식으로 들어오시지 않으셨을게다. 나름의 방법으로 허락을 구하셨다고 봐야 옳다.”
절세고수들은 하나같이 비범한 면이 있다. 무당의 검선은 말할 것도 없고, 남궁가의 가주도 그러했다. 황실의 절세고수도, 마교의 교주도, 심지어는 사마련주도 예외는 아니었다.
일반인과는 보는 시선이 아예 다른 이들이다. 정사마가 기이한 균형을 이루고 있는 것은 전부 그 때문이었다.
평범한 무인이 거지 행세를 한다면 정신이 나간 것이지만, 검선이 거지 행세를 하면 하늘을 이불 삼고 땅을 침대 삼아 자연의 이치를 깨우치려고 그러한 것이다.
그것이 맞든 틀리든,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 정신건강에 이로웠다.
“산문 모든 곳을 자유롭게 드나드실 수 있도록 하고, 혹여 폐를 끼치는 일이 없도록 제자들에게 엄히 주의를 주도록 하거라.”
“그렇게 말하실 줄 알고 정혜를 붙여두었습니다.”
이대제자들의 대사형 격인 정혜의 품성은 예로부터 유명했다. 그 품성만 보고 제자로 받으려는 장로가 적지 않았다는 사실만 봐도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여선검상을 보러 오셨다고 했으니, 어쩌면 종남의 검을 견식하러 오셨을 수도 있겠다. 뵙기 전에도 종화지회를 구경하고 계셨다고 하지 않았더냐.”
“확실히,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백신옹이 고개를 끄덕였다.
태허진인은 장백신옹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원하신다면 수련도 마음껏 참관하실 수 있도록 하라.”
“장문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본디 타인의 무공 수련을 보는 것은 금기시된다. 비무와는 다르게 무공 수련에서는 형과 식이 온전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뭇 고수들은 형과 식을 보고 무공을 통찰한다. 파훼식은 물론이거니와, 자칫 무공의 원류까지 읽힐 가능성이 있었다.
장백신옹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은 것은 그 때문이었다.
“장문인,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그건 아닌 듯합니다.”
“비무를 보는 것만으로 화산의 검을 통찰하셨다 들었다. 종남이라고 다를까.”
“하지만…….”
“이미 절세의 경지에 도달한 선자(仙子)가 무슨 연유로 종남의 비전을 탐한단 말이냐. 차라리 호방한 면을 보여 좋은 인상을 드리는 편이 나으리라.”
장백신옹은 태허진인을 착잡하게 바라보다가 눈을 살짝 감았다.
정론이었기에 반박할 수 없었다. 그래도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까지는 어찌 할 수 없었다.
“……장문인의 뜻을 알겠습니다. 다른 장로들에게는 제가 전하겠습니다.”
애써 납득하며 그리 말했다. 태허진인은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다녀오거라. 나는 선자를 뵈어야겠다.”
곧 태허진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
서연의 검이 곧게 나아갔다.
이렇다할 검식은 없었다. 횡베기, 종베기와 찌르기가 전부였으니,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삼재검법이라 할 수 있으리라.
날을 잡아 기초를 수련해본 적이 없었다. 재능이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기초가 제대로 다져지지 않으면 무용지물일 뿐이다.
서연이 기본 자세만 반복하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종남의 검법은 수비적이라 했지.
남을 먼저 공격할 일보다, 남의 공격을 막을 일이 많아 보였다. 막는 방법이라도 제대로 배우고 간다면 앞으로도 요긴하게 쓸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촤악!
검로가 한치의 흐트러짐 없이 허공을 가른다. 옆에서 지켜보던 정혜는 입을 다문 채였다.
“어떤가요?”
“…….”
“정혜 도사님?”
“죄, 죄송합니다. 시선이 다른 곳에 팔려 있던 탓에 제대로 보지 못했습니다.”
정혜는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 정신을 차리기 위함이었다.
‘어찌 사람이 저리 아름답단 말이냐.
도화경에나 있을 법한 머리색은 또 뭘까.
방금 전까지 목검 부딪히는 소리로 가득했던 연무장이 고요로 물들었다. 온 도사들이 서연만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종남의 도사들은 허가만 받는다면 산문 바깥을 자유롭게 주유할 수 있었다. 규율도 상대적으로 자유분방한 편이라 이따금 혼인하는 도인들도 적지 않았다.
물론 규율에 명시되지 않았을 뿐이지, 혼인을 권장하는 것은 아니었다. 명색이 도인이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러한 연유로, 종남의 도사들은 스스로 여인의 미색에 대한 내성이 남다르다 여기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원시천존, 태상감응(太上感應)…….”
일대제자들은 다급히 도문(道文)을 중얼거렸다. 그조차도 못하는 이들도 있었으나, 아래 배분의 제자들에 비하면 그나마 나았다.
이대제자들은 제 가슴팍을 붙잡았다. 눈만 마주쳤는데도 가슴이 떨렸기 때문이다. 젊은 혈기를 주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태반이었다. 다급히 자리를 피하는 도사들도 적지 않았다.
삼대제자들은 아예 대놓고 자리에 앉아 구경했다. 반쯤 넋을 놓은 기색이었다.
“어때요, 아름다우시죠?”
화련은 삼대제자 틈 사이에 껴서 팔짱을 낀 채로 그렇게 말했다. 소년 도사들은 홀린 듯 고개만 끄덕였다.
물론 화련도 눈치채지 못한 것이 있었다면, 삼대제자 중에는 서연만큼이나 화련을 보고 얼굴을 붉히는 소년 도사가 많았다는 것이다.
기껏해야 서너 살 차이였다. 외형으로만 따졌을 때 그랬다. 동년배가 주는 힘이 그만큼이나 강했다고 봐야 옳았다.
“아, 아름다우시네요…….”
“그렇죠?”
“네, 네에…….”
화련은 순식간에 소년 도사들을 휘어잡았다.
“혹시 도사님들도 당과를 드시나요?”
“가, 가끔 먹어요.”
“그러면 어디서 사는지 알려주실 수 있나요? 제가 당과를 아주 좋아하거든요.”
“여, 여기서 기다리시면 제가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사형! 치사하게 먼저-.”
화련은 저들끼리 밀치며 달려가는 삼대제자들을 응시했다. 과연 종남의 제자들답게 경공 실력이 남달랐다.
화련은 남몰래 코웃음을 쳤다.
‘애들이란.
다루기 참 쉬웠다. 당과도 어렵지 않게 얻을 듯 싶었다.
그때였다. 나이 지긋한 노인이 연무장 내부로 들어섰다.
화련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태허진인?”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새어나왔다. 화련은 저를 묘한 눈으로 응시하는 태허진인에게서 애써 시선을 돌렸다.
화련은 서연에게로 쪼르르 다가가 말했다.
“스승님, 종남파 장문인께서 오셨어요.”
정혜를 비롯한 다른 도사들은 그제서야 태허진인이 찾아온 것을 알아챘다. 화들짝 놀란 도사들이 다급히 고개를 숙였다.
“장문인! 그, 그게…….”
태허진인은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장문인을 뵙습니다.”
서연은 납검한 다음 정중하게 포권을 취했다.
대문파의 수장을 만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오랜 세월을 틀어박혀 살았던 탓에 태허진인의 명성을 듣지는 못했지만, 신선다운 풍모만으로도 충분히 경외를 느꼈다.
서연을 물끄러미 눈에 담고 있던 태허진인은 작게 미소짓더니 마주 포권을 받아줬다.
“서연 선자.”
“선자라뇨, 당치도 않습니다.”
서연은 한사코 고개를 가로저었다.
“장문인께서 그리 대하시면 제가 너무 불편합니다. 그저 객으로 대해주셨음 합니다.”
태허진인이 웃었다. 어느새 그의 얼굴에는 짙은 호의가 깃들어 있었다.
절세고수가 장문인의 면을 세워준 탓이다.
“여선검상을 보러 왔다고 들었는데, 맞소?”
“맞습니다.”
“그렇다면 당장 이동하는 것이 좋겠소. 해가 지면 보기 힘드니 말이오.”
서연은 그게 무슨 말이냐는 얼굴로 태허진인을 응시했다.
곧 태허진인은 종남산의 가장 높은 곳을 가리켰다. 장문인이 기거하는 내당 뒤쪽에 위치한 절벽이었다.
까마득한 벼랑이라 불리기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높았으니, 오죽했으면 종남산이 완만한 것이 전부 저 절벽과 균형을 맞추기 위함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두 발로는 못 올라갈 것 같았다.
“……혹시 저 위에 있습니까?”
설마 저기도 내당으로 치는 것일까? 엄밀히 따지면 산문 내부에 있기는 한데…….
서연은 그런 생각을 하며 조심스레 물었다. 태허진인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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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직으로 솟은 절벽은 말 그대로 까마득할 정도로 높았다. 서연은 구름마저 뚫고 올라선 봉우리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혹 저 봉우리에 이름이 있습니까?”
“만공정(萬孔頂)이라 하오.”
처음엔 그 의미를 짐작할 수 없었으나, 거리를 좁히자 이내 깨달았다. 거대한 절벽 곳곳에 수천을 헤아릴 만한 큼지막한 구멍들이 뚫려 있었던 것이다.
만 개의 구멍이 뚫린 봉우리라는 이름에 걸맞은 광경이었다.
서연이 저절로 탄식을 내뱉었다. 구멍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이 기묘한 소리를 냈기 때문이었다. 그 소리만으로도 저 높은 곳에 얼마나 거친 바람이 휘몰아치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맨손으로는 도저히 오르지 못하겠다.
줄을 매달고 올랐다간 줄째로 바람에 휩쓸려 날아갈 지경이었다. 구멍을 딛고 오르는 방도를 떠올렸으나, 구멍 틈새로 새어 나오는 바람의 기세를 보니 차라리 구멍을 피해 가는 것이 안전 하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저 구멍들은 어쩌다 생긴 것인지 아십니까?”
“옛 선인들이 수련하다 남긴 흔적이라는 설도 있고, 순양자(純陽子)께서 교룡을 쓰러뜨렸을때 그리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소. 허나 구전일 뿐이니, 흘려들어도 무방하오.”
여기서 순양자란 검선 여동빈의 도호를 의미했다.
곧 태허진인은 양 손을 내밀어 만공정의 양 면을 가리켰다. 그의 눈빛은 흔들림 없는 바위처럼 단단했다.
“먼 과거에는 종남산도 오악(五岳)에 비견될 만큼 험준했다 들었소. 그때의 만공정은 종남산의 정상이자, 천하에 그 웅장함을 견줄 곳이 없었다고 하더이다. 여선검상도 그때 만들어졌다오. 허나 순양자께서 만공정의 사방을 모두 갈라내어 지금의 형상이 되었다지.”
“…….”
서연은 입을 다물었다. 일신의 힘으로 산을 잘라냈단 말인가? 그 기상이 실로 상상조차 불가능했다.
허나 터무니없는 말로 치부하기엔 만공정의 잘린 면이 너무나도 반듯했다. 마치 거대한 칼을 대고 베어낸 듯한 기분이 들 정도였다.
눈으로 얼핏 보았는데도 날카로운 예기가 느껴졌다.
서연은 종남산을 오르던 중 보았던, 완만한 언덕 구석구석에 박혀 있던 거대한 기암괴석들을 떠올렸다.
그때는 이해하기 어려운 풍경이었으나, 태허진인의 이야기를 들으니 비로소 깨달음이 찾아왔다. 어쩌면 그 거대한 기암괴석들은 순양자가 산맥을 베어 가른 후에 남은 잔해였으리라.
‘……이 정도는 되어야 일문의 대종사라 할 수 있는 것이로구나.
만공정의 깎아지른 한쪽 면에 손을 대고 있던 서연에게 태허진인이 물었다.
“어떻소?”
“……허황된 이야기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빈도 또한 만공정을 처음 마주했을 때 그리 느꼈소. 종남의 전대 장문인들 또한 그러하셨을 것이오.”
서연 또한 동의하는 바였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장문인께서는 만공정을 어찌 오르십니까?”
“장문제자들에게 대대로 내려오는 경신법이 있소. 무영공공보(無影空空步)라 하오.”
뜻을 해석하니 그림자조차 남기지 않고 허공을 밟는 듯 움직이는 경공이란다. 저 정도 되는 경신법이어야 만공정을 수월히 올라갈 수 있다는 말로도 들렸다.
‘종남 장문인에게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게 이런 의미였나?
평범한 무인이라면 만공정을 오르기는커녕 중간 즈음에 낙엽처럼 휩쓸려 갈 터였다.
태허진인은 걸음을 멈춘 채 서연을 응시했다.
“한번 보여드리겠소.”
태허진인은 그야말로 질풍처럼 빠르게 나아갔다. 땅을 박차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는데, 보폭이 워낙 커서 한 걸음에 수십 장을 나아간다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특이하게도 그는 뒷짐을 지고 있었는데, 멋을 부리기 위함이 아니라 경공의 기세를 극대화하여 가속하기 위해 그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태허진인은 도약으로 최대한 높이 솟구친 다음, 절벽을 마치 지면이라도 되는 것처럼 손쉽게 나아갔다.
‘놀랍구나.
강호에 나온지 얼마 되지 않아 잘 모르겠으나, 대문파의 장문인에 걸맞는 실력을 가졌다는 것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태허진인은 그야말로 순식간에 구름을 뚫고 만공정 정상에 올라섰다. 그 거리가 오죽 멀었던지 서연의 눈에도 작은 점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이제 내려가겠소.”
그 먼 거리였음에도 태허진인의 목소리가 귓가에 선명하게 들렸다. 말로만 들었던 육합전성이라도 되는 것일까.
곧 태허진인은 공중으로 뛰어오른 다음 그대로 수직으로 떨어졌다. 이따금 발길질을 했는데, 놀랍게도 그때마다 속도가 점차 감소했다.
서연은 감탄한 기색을 감추지 않은 채로 사뿐히 착지하는 태허진인을 응시했다.
“대단하십니다.”
태허진인은 살짝 웃었다.
“과찬이오.”
그렇게 빨리 올라갔다 내려왔는데 태허진인의 장포에는 흙먼지 한톨 묻어있지 않았다.
“그러면, 어찌 보셨소?”
“나름대로 안목이 뛰어나다 자부하고 있었는데, 덕분에 새로운 세계를 알게 된 느낌입니다.”
“……그렇소?”
태허진인의 미간이 약간 좁혀지려던 때였다.
숨을 가다듬던 서연이 생각했다.
‘나는 여태껏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있었구나.
무영공공보를 견식한 덕분에 깨달았다.
서연은 정신을 극한으로 집중하며, 몸속에서 꿈틀거리는 진기를 발끝에 모았다. 주변의 자연지기가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모여들더니 그녀의 발 주위 세 장 반경에 파릇한 새싹을 틔웠다.
서연은 눈을 감고 있었기에 그 엄청난 변화를 보지 못했다. 이미 그 짧은 순간에 완전히 몰입한 것이다.
“……!”
갑작스럽게 밀집되는 자연지기를 목도한 태허진인의 눈이 더할 나위 없이 커졌다.
태허진인은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동시에 눈꺼풀을 들어올린 서연이 걸음을 내딛었다.
‘호흡을 끊을 때마다 진기도 같이 터뜨린다.
순식간에 맨 땅에 도달했다. 한 걸음에 무려 세 장을 이동한 것이다.
허나 서연은 거기서 만족하지 않았다. 보다 더 나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시선을 치켜들자 만공정의 웅장한 봉우리가 한눈에 들어왔다. 그때, 서연은 기이한 경험을 했다.
시야가 일순간 뒤집히더니, 수백 장도 넘는 거대한 교룡의 환영을 마주했다. 교룡은 무지막지한 속도로 만공정을 휘감듯 솟구쳐 올랐다. 그 섬뜩한 발톱에 닿을 때마다 바위가 찢겨나갔다.
교룡은 한 사내를 맹렬히 쫓고 있었다. 사내는 뒷짐을 지고 있었는데, 그 존재감이 거대한 교룡에 전혀 뒤지지 않았다. 특이한 것은 강한 역광 때문에 사내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는 점이었다.
사내는 기이하고 변화무쌍한 보법으로 교룡의 맹렬한 공격을 모두 피했다. 교룡이 발톱을 휘두르고 꼬리를 휘감으며 절벽을 부술 듯 덤벼들었으나, 사내는 종이 한 장 차이로 이를 모두 비껴냈다. 사내가 발을 딛을 때마다 만공정에는 큼지막하고 깊은 발자국이 생겨났다.
환영은 얼마 지나지 않아 가라앉았다. 사내가 마지막 걸음을 딛고 교룡의 목을 베어내는 순간이었다. 환영 속에서 교룡의 거대한 몸체가 폭포수처럼 무너져 내리는 듯했다.
‘……진짜였구나.
동시에 깨달음이 섬광처럼 스쳤다.
만공정은 순양자, 즉 검선 여동빈이 등선하기 전 종남을 위해 남긴 거대한 유산이나 다름 없었다.
‘왜 이만한 절벽이 내당에 있나 했더니.
종남의 제일 절학이 바로 이곳 만공정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던 것이다.
특출난 오성으로 그 모든 것을 기억했다. 순양자가 만공정의 어디를 어떻게 딛고 나아갔는지, 그 발자취와 보법의 오묘함이 그녀의 뇌리에 선명하게 새겨졌다.
우웅!
전신에서 진기가 흘렀다.
서연은 조심스럽게 첫 걸음을 내디뎠다. 육신이 마치 깃털처럼 떠올랐다. 순양자가 그랬듯 뒷짐을 지고 자세를 취하자, 몸의 균형이 놀랍도록 안정되었다.
서연의 시야에는 환영 속 순양자가 내딛던 발자취가 선명하게 보였다. 서연은 그 발자취를 그대로 따라가기 시작했다.
첫 걸음은 더뎠지만, 두 번째, 세 번째 걸음을 내딛을수록 그녀의 움직임은 점차 빨라지고 유려해졌다. 거친 바람이 그녀의 몸을 휘감았으나, 서연은 어느새 바람과 함께 나아가는 방법을 터득했다.
태허진인은 놀란 얼굴로 서연을 응시했다.
“아아……!”
주름진 얼굴에서 경탄이 피어올랐다. 만공정의 본의를 그제서야 깨우친 것이다.
수십 년 동안 만공정을 곁에 두고 살아왔으나, 여태 그 의미를 알지 못했다. 허나 이제야 깨달았다.
태허진인의 주름진 얼굴이 더없을 경탄으로 물들었다.
서연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도화와 같은 기운이 피어올랐기 때문이다.
“진정 선자였도다……!”
서연은 생각했다. 구멍의 깊이가 곧 일보의 강약을 결정했다. 얼핏 보면 패도적인 보법이라고 오해할 수 있었으나, 실상은 정반대였다.
‘바람에 나풀거리는 잎새 같다.
세월의 풍화에 흔적이 스러지지 않도록 순양자가 후대를 위해 배려했다고 봐야 옳았다.
탁―.
육신이 날개라도 돋친 것처럼 가벼워졌다. 서연은 저도 모르게 환하게 웃었다. 가파른 절벽을 딛고 서 있었는데도 즐겁기만 했다.
서연은 기암을 붙잡은 채로 멈춰 서서 옅게 미소 지었다.
두려움은 없었다. 다만 더없이 기뻤다.
‘나는 기재가 맞았구나.
마음에 얹혀 있던 커다란 돌멩이 하나가 뚝 떨어져나간 듯했다. 묘한 해방감마저 느껴졌다.
조각을 하는 것만큼이나 즐거웠다. 생각대로 몸이 움직여서 그러할까.
무에 일생을 바치는 무인들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처음이었다. 심경의 변화가 스스로도 놀라웠다.
‘일평생 보법만 익혀도 즐겁겠다.
화산의 암향표(暗香飄), 제갈세가의 천기미리보(天機迷離步), 무당의 제운종(梯雲縱)…….
천하를 오시한다는 보신경들은 또 어떠한 묘리를 품고 있을까.
신공에는 의념이 담긴다고 했다. 순양자의 보법도 그러했다. 물러섬이 없었다. 무엇이 앞을 가로막든 끝없이 나아가고자 하는 기상이 서려 있었다.
묵묵히 나아가는 종남과 참으로 어울리는 보법이라는 생각을 했다.
서연은 그렇게 백 보를 더 나아갔다. 내려올 때에는 순양자의 보법을 역순으로 밟아 잎새처럼 사뿐히 착지했다. 도화와 같은 머리칼이 우아하게 나풀거렸는데, 그 모습이 가히 선녀라 칭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끝까지 올라가지는 못했다. 구멍의 개수가 곧 나아가야 할 보법의 수였다. 더 나아가기에는 연습이 필요할 것 같았다.
물론 단순히 올라가고자 했다면 언제든 올라갈 수 있었다. 이제는 그럴 자신이 있었다. 허나 그런 방식으로 올라가고 싶지는 않았다.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고자 호흡을 반복했다.
자연스레 호법을 서게 된 태허진인이 조용히 말했다.
“……선자께서는 종남의 은인이시오.”
옳은 말이었다.
그동안 존재조차 몰랐던 절세 무공을 복원해냈다. 경지에 오른 장문제자들은 이제 만공정을 오르고 또 오르는 것만으로도 순양자의 보법을 익히게 되리라.
서연이 눈꺼풀을 들어올렸을 때였다.
“선자, 이름을 지어주시오.”
“……제가 말인가요?”
“선자가 아니면 누가 이 무공에 이름을 붙일 수 있겠소. 순양자께서 이름을 정해두지 않으셨으니, 선자가 정해야 마땅하오.”
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실로 영광스러운 일이다.
이름을 뭐라고 해야 좋을까.
바람에 나풀거리는 잎새처럼 가볍고.
그러면서도 신선과도 같은 기품이 절로 풍겨나오고.
용보다 빠르며, 또 우아했다.
또 제 이름을 넣고 싶다는 욕심도 피어올랐다.
보법을 펼쳤을 때 느꼈던 심정 또한 담고 싶었다.
그 모든 감상이 담긴 무공은.
분명 연화비영보(蓮華飛影步)라는 이름으로 불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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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또 무얼 하세요?”
서연은 뒷짐을 진 채로 제자리에서 가볍게 뛰다가 화련의 물음에 대꾸했다.
“음?”
“지금 하시는 게 뭔지 궁금해서요. 일전에 말씀하셨던 연화비영보인가요?”
“그렇단다.”
화련은 서연이 제대로 된 보법을 펼치는 것을 처음 보았다. 그동안은 줄곧 백호를 타고 다녔기 때문이다.
허나 처음으로 마주한 서연의 보법은 아름다운 연꽃이 빛나며 날아오른다는 이름답게, 참으로 우아했다.
나풀거리는 옷을 입고 연화비영보를 펼친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선녀라 추앙받을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뿐히 걸음할 때마다 은은하게 피어오르는 도화색 기운 또한 그렇게 느끼도록 하는데 한몫했다.
“나중에 저도 배울 수 있을까요?”
“음, 그건 잘 모르겠구나.”
서연은 연화비영보를 복원한 장본인이기에 익히는 것을 허락받았지만, 타인에게 이를 알려주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문파의 비전이 유출되는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섣불리 대답하지 못했다. 물론 화련은 아직 제가 부족하다는 뜻으로 알아들었다.
서연은 숨을 가다듬으며 멈춰섰다. 종남파의 삼대제자가 찻물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소년 도사는 서연을 보자마자 귓불이 붉어졌다.
서연이 종남파에 들어온 이후로 쭉 죽립과 면사를 벗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편이 보법을 펼치기 편해서였다.
“고맙습니다, 도사님.”
“네, 넵!”
서연은 가만히 차를 들이켰다. 그 맛이 일품이었다.
사실상 개인실이나 다름없는 거대한 수련장은 서연이 현재 받고 있는 대우를 증명했다. 순양자의 무공을 복원한 서연은 그야말로 귀빈이나 다름없는 대접을 받았다.
안 그래도 서연을 극진히 대접했던 태허진인이었지만, 지금은 말할 것도 없었다.
비전이나 다름없는 연화비영보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익힐 수 있도록 허락했다. 서연이 없었다면 실전되었을 것이란 말도 덧붙였다. 그렇다고는 해도 더없는 파격이었다.
서연의 품성을 믿지 않았다면 쉬이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칠주야가 넘는 시간동안 서연은 매일같이 만공정을 오르내렸다.
예전부터 기이할 정도로 눈이 밝았다. 날이 밝고 어두운 것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 그 때문인지 서연은 주야를 상관하지 않고 수련에 전념할 수 있었다.
만월이 깊은 밤이었다.
만공정의 벽면을 디뎌도 소리가 나지 않는 경지에 다다랐다. 풀벌레 소리에 묻힐 정도로 발걸음이 희미하고 가벼웠다.
연화비영보는 끝없이 나아가는 것을 핵심 구결로 삼았다. 공격을 회피한다기보다는 마땅히 있어야 할 곳으로 나아간다는 느낌이 강했다.
우웅.
뇌리에 단단히 새겨진 순양자의 보법을 따라하다보면, 있지도 않은 교룡의 공격을 피해내고 있다는 착각마저 들었다.
‘경신법이자 보법이구나.
본래 신법은 전체적인 몸동작을, 경공은 빠르게 달리기 위한 신법을, 그리고 보법은 상대를 공격하거나 회피할 때 사용하는 움직임을 뜻했다.
허나 연화비영보는 그 모든 것을 한 번에 할 수 있었다. 등선했다는 도사가 직접 만든 무공다웠다.
이제는 세찬 바람 속에서도 발을 놀리는데 거침이 없었다. 세찬 바람이 오히려 걸음을 북돋아주는 듯했다. 놀랍도록 친숙한 느낌까지 들었다.
자연이 그녀에게 호응하는 것이었으나, 그것까지는 미처 깨닫지 못했다.
‘즐겁다.
처음 익힌 무공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성취가 빨랐다. 마치 자신을 위해 만들어진 무공인 양 몸에 딱 맞았다.
그렇게 만공정을 몇 번이나 휘감듯 움직였을까. 정신을 차렸을 때는, 어느새 여선검상이 있는 정상에 도달해 있었다.
‘완전히 익혔다.
대성(大成)까지는 아니었으나, 더 이상 만공정의 도움을 받지 않아도 연화비영보를 자유로이 펼칠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앞으로 여정을 떠나는 길에 틈틈이 수련한다면 언젠가 자연스레 대성해 있으리라.
그런데 특이하게도 여선검상보다 그 앞에 놓인 검혼비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일전에 장백신옹에게 들었던 이야기 때문이었다.
‘이건…….
사마련에 맞서다 죽은 도사들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이라 했다. 그렇다는 뜻은, 이곳에서 스러져간 종남의 도사가 있었다는 뜻이다.
‘진짜 검이다.
수십 년 전부터 꽂혀 있었을 텐데도 여전히 예기를 내뿜고 있었다. 칼날 하단부에 태허(太虛)라는 글자가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태허검인 듯했다.
허나 태허는 현 종남 장문인의 도호였다. 미간이 절로 좁혀지려던 그때, 멀지 않은 곳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곧 태허진인이 만공정 위에 나타났다.
그는 서연과, 그 앞에 놓인 태허검을 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빈도의 사제였소. 혈혈노파(血血老婆)의 장력에 심장이 꿰뚫려 절명했지.”
태허진인은 옅은 한숨을 내쉬며 태허검의 손잡이를 쓸어내렸다.
“…….”
“동 항렬의 막내였소. 진중한 사형제들 사이에서도 홀로 밝아 모두와 허물없이 지냈다오.”
“그러면 장문인께서는.”
“빈도의 도호는 본래 태진(太眞)이었소.”
서연은 그제서야 내막을 알게 되었다. 사제의 유지를 잇기 위해 도호를 그대로 가져다 쓴 것이다.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으나, 그만큼 사이가 돈독했다는 것으로 이해했다.
이번에는 서연이 물었다.
“그러면 태허검은 어쩌다 이곳에 꽂혀 있게 된 겁니까?”
태허진인이 말했다.
“사마련이 대대적으로 습격했소. 산문을 지키던 도사들을 먼저 쓰러뜨리고 순식간에 내부로 들이닥쳤지. 당시 장문인께서는 사마련 팔천(八天)의 일익인 마영종주(魔影宗主)와 겨루느라 우리를 도울 여력이 없으셨소. 당시 장로님들 대부분이 청성파를 돕기 위해 사천까지 나가있던 상황이라 피해가 더 컸지.”
청성파는 머나먼 사천성에 위치해 있었다. 서연은 그제서야 수십 년 전에 일어났던 정사대전의 규모가 얼마나 거대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당시 본문은 혈혈노파와 같은 사파의 고수들에 맞설 사람이 부족했소. 치욕을 감수하고 오대 일로 싸웠음에도 불구하고 형편없이 밀렸지.”
“혈혈노파가 그렇게나 강했습니까?”
태허진인이 고개를 내저었다.
“결단이 부족했소. 두려움에 잠식되어 누구 하나 먼저 나서려 하지 않았지. 혈혈노파가 공격할 때마다 막기에만 급급했소. 혈혈노파도 그러한 기색을 알아채고 적극적으로 나섰지. 전원이 극심한 상처를 입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소.”
태허진인은 씁쓸한 얼굴로 말했다.
“막내 사제가 그것을 가장 먼저 알아차렸소. 일말의 망설임 없이 선천진기를 끌어내어 혈혈노파와 동귀어진을 택했지.”
“……재능이 범상치 않으셨겠습니다.”
“화산의 검후에 비견될 정도였소. 어떤 면에서는 그보다 뛰어났지. 지금까지 살아있었더라면 필시 본문의 제일고수가 되었을 것이오.”
도호가 담겨 있는 검이 그 재능을 증명했다. 분명 범상치 않은 인물이었으리라.
“혈혈노파는 막내 사제의 마지막 일검에 오른팔을 잃었소. 우리도 그제서야 상처를 도외시하고 싸우기 시작했지. 날이 밝을 때까지 싸우고, 혈혈노파를 비롯한 사파의 고수를 베고 또 베었소. 그렇게 지쳐 나가떨어졌을 때쯤에 화산파의 지원군이 당도했소. 화산도 사마련의 습격을 받은 것은 매한가지였는지 온 몸이 상처로 가득했소.”
“그곳에 검후도 계셨겠군요.”
“그러했다오.”
태허진인은 잠시 옛일을 회상하려는 듯 눈을 감았다.
“검후와 막내 사제는 실력이 비슷하여 자주 교분을 나눴소. 얼핏 보면 같은 문파 출신이라는 착각이 들 정도로 친분이 깊었지. 연인은 아니었으나, 몇 년 뒤에 그렇게 될 것이라 확신할 정도로 서로를 아꼈다오.”
태허진인은 그 이후에 벌어진 일까지는 말하지 않았다. 서연 또한 묻지 않았다. 검후가 옛 태허 도사의 시신을 마주했을 때 어찌 반응했을지 눈에 훤히 보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화제를 돌렸다.
“오가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검후께서 바라는 것 없이, 훗날 화산이 위급할 때 종남이 돕는 것으로 족하다고 말씀하셨다고.”
태허진인의 표정에는 씁쓸함이 스쳐 지나갔다.
“검후는 막내 사제를 잃은 본문에게 무얼 요구할 인물이 못 되었소. 반쯤 제정신이 아닌 상황에서도 고인에게 폐가 될까 두려워 곪아가는 속내를 겉으로 드러내지도 못했지.”
그래서 억지로 담담한 체하며 웃었다.
극히 일부만 아는 내막이었다.
“나중에서야 만공정 꼭대기에 막내 사제의 검을 놓아달라고 부탁하더군. 영면한 이후에도 본문의 정경을 한 눈에 담을 수 있었다면 좋겠다고. 태허검이 이곳에 놓이게 된 연유는 그러하오.”
태허진인은 그렇게 말하면서 서연을 깊이 응시했다. 주름진 얼굴이 유독 슬퍼 보였다.
“이제 빈도가 질문 해도 되겠소?”
“네.”
“선자께서는 아주 오랜 세월을 속세와 동떨어져 살아왔을 것이오. 맞소?”
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허나 모종의 일을 계기로 세상 밖으로 나오기로 결심하셨소. 분명 쉬운 결단은 아니었을 것이오. 그 이유를 알지도 못하고 물을 생각도 없으나, 본문은 언제고 선자를 빈객으로 대하겠소. 빈도와 막내 사제가 수없이 순양자의 보법을 견식할 수 있도록 한 것에 대한 보답이라 생각하시오. 또한 선자께서 연화비영보를 타인에게 전수한다고 하더라도 본문은 관여하지 않겠소.”
서연의 눈이 커졌다.
“너무 과합니다.”
서연의 말에 태허진인은 잠시 멈추었다가, 조용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정 과하다는 생각이 들면, 나중에 한 번 화산에 방문하는 것으로 보답해주시오.”
“……화산 말입니까?”
서연은 입을 다물었다.
어떻게 종남파도 아닌 화산파에 방문하는 것이 보답이 된단 말인가?
이쪽의 부담을 덜어주려 억지로 이유를 만들어낸 것 같아서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렇기에 이리 물을 수 밖에 없었다.
“제가 화산에 가는 것이 어찌하여 보답이 된단 말입니까?”
“그리하면 빈도의 마음이 편해지기 때문이오.”
“하지만…….”
“지금 당장이 아니라도 괜찮소. 오 년, 십 년 뒤라도 상관없소. 정 힘들다면 영면하기 전이라도 좋으니, 언젠가 꼭 한 번만 방문해주시오. 화산도 분명 빈객으로 맞이할 것이오.”
빈말이라기에는 그 눈빛에 담긴 감정이 너무나도 절절했다.
서연은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그리하겠습니다.”
그제서야 태허진인의 주름진 안색이 환해졌다. 놀라울 정도로 안도한 기색이었다.
태허진인은 한동안 고맙다는 말만 반복했다. 나이 많은 노인을 등쳐먹는 것 같아 서연은 몹시 마음이 불편해졌다.
대화가 예고없이 끊겨 정적이 흐르는 가운데, 태허진인이 어디론가 걸어갔다. 여선검상이 있는 방향이었다.
서연은 그제서야 여선검상을 제대로 확인할 수 있었다.
순양자는 뒤돌아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모습이었는데, 그 때문에 얼굴을 볼 수 없었다. 그뿐이랴, 당대 최고의 석공이 만들었다는 말이 무색할 만큼 외형은 평범하기 그지없었다.
그렇기에 자연스레 입고 있는 옷에 새겨진 글자로 시선이 갔다. 돌을 옷 모양으로 깎아낸 다음, 그 위에 글자를 음각한 것이었는데, 그 글자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거렸다.
일필휘지로 써 내려간 듯 거침이 없었다.
서연은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 필체 하나로 천하 일절을 논할 만했기 때문이다.
이만한 석공이라면 분명 여선검상 자체도 걸작으로 깎아낼 수 있었을 터. 허나 글자를 보다 눈에 띄게 하려고 일부러 그리하지 않은 듯했다.
서연은 글자를 천천히 읽었다.
구인자생(救人者生).
살릴 사람을 구하는 자는 삶을 얻는다.
용실자진(容失者進).
실수를 용서하는 자는 나아간다.
득생이진 시위도(得生而進 是爲道).
삶을 얻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곧 도라.
옛 선인의 깨달음이 그곳에 담겨 있었다. 묻지 않아도 누가 적었는지 한 눈에 알 수 있을 정도였다.
“…….”
그렇기에 서연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글귀 하나하나가 제게 말을 거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마침 아침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순양자가 앉아있는 방향이었다. 그 때문인지 순양자의 주변이 타오르는 듯 이글거렸다.
“아침 해를 맞으며 운기조식을 하는 것만큼 즐거운 일이 없소. 하늘이 감싸주는 것처럼 따뜻하고 편안하다오.”
태허진인은 그렇게 말하고는, 양손을 자신의 무릎 위에 편히 얹고 눈을 감았다. 깊게 호흡을 하는 것이, 곧장 운기조식에 돌입한 모양이었다.
서연은 놀란 얼굴로 태허진인을 응시했다.
호법도 없이 무슨 생각으로 저리 갑작스럽게 운기조식에 돌입한단 말인가.
“…….”
서연은 호법을 서듯 태허진인의 주변을 맴돌았다. 허나 곧 그만두었다. 자신이 움직이는 것 자체가 방해가 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서연까지 입을 다무니 그야말로 완벽한 적막이 찾아왔다. 드높은 봉우리에 올라선 탓에 흔한 풀벌레 소리마저 들리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돌려 태허검이 있는 방향을 보았다.
쏟아질 것처럼 가득 차있던 어둠이 밀려나며 헛것이 보이는 것일까. 희끄무레한 불빛이 일렁이는 것 같았다.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그 모습이 마치 사람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서연은 멍한 얼굴로 태허검을 바라보다가, 차례로 태허진인과 여선검상을 바라보았다. 공교롭게도 셋이 각각 한 방위를 맡고 있었다.
빈 방위를 채워야할 것만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곧 서연 역시 가부좌를 틀었다. 코앞이 아찔한 절벽이었으나, 등을 감싸는 따스한 기운 탓에 두렵지가 않았다.
서연은 순양자가 새긴 문장을 되뇌이다가, 저도 모르는 사이에 운기조식에 돌입했다.
네 도인은 편안한 얼굴로 따스한 햇살에 몸을 맡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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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끝자락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몸이 따스했다. 의식적으로 시도한 첫 대주천이었기 때문이다.
임독양맥을 포함한 전신의 십팔맥을 모두 동원하여 운기했다. 전신 세맥에 천지자연의 기운이 흘러들어 순환하기를 거듭하니, 자연지기가 끝없이 흘러나왔다.
정순한 기운을 느낀 산새들이 곳곳에서 날아들어 짹짹거렸다. 하찮은 미물들의 눈에는 서연이 신령한 나무처럼 보였던 것이다.
자그마한 산새들은 서연의 머리와 어깨에 앉아 지저귀었다. 특히 서연의 정수리 부근에 유독 많이 몰려들었는데, 상단전이 천지와 공명하여 자연지기를 내뱉고 들이마시기를 반복했기 때문이었다.
그 기운을 받은 산새들의 날개에 윤기가 돌고 깃털의 색이 화려해졌다. 이따금 덩치가 커지는 산새들도 있었다.
그때, 유혼이 서연의 주변에 조용히 내려앉았다. 제 주인의 수행에 방해될까 크기를 참새만 하게 줄인 채였다.
―주인께 너무 가까이 붙지 마라.
유혼은 술법으로 가벼운 바람을 일으켜 말을 못 알아듣는 금수들을 땅바닥으로 내려놓았다.
이따금 큼지막한 맹금들이 날아들기도 했다. 그럴 때면 유혼은 제 크기를 원래대로 되돌려 맹금들을 노려보았다. 넘볼 수 없는 기세를 마주한 맹금들은 순식간에 꼬리를 내리고는 만공정에 조심스레 착지했다.
산새들을 사냥하러 온 것이 아니다. 자연지기를 받아먹기 위해 온 것이다. 하찮은 짐승들도 귀한 것을 알아보았다.
유혼이 호법을 서고 있었기 때문일까, 감히 도를 넘고 욕심을 부리는 미물은 나타나지 않았다.
무수한 산새들이 찾아오고 떠나기를 반복하는 동안, 유혼은 말없이 주인의 앞을 지켰다.
이따금 절벽 끝으로 걸음을 옮기고는 했는데, 거대한 백호가 만공정의 벽을 타고 올라올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백호는 용케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고 만공정 코앞까지 와 있었다. 그 몸집이 얼마나 거대한지, 꼭대기에서도 그 위용이 훤히 보일 정도였다.
유혼은 보란 듯이 미간을 좁히며 주의를 주었다.
―산군 놈아. 네가 올라오면 너무 눈에 띈다.
백호도 그것을 알았는지 한동안 만공정 주변을 맴돌기만 했다. 은형술을 사용한다면 들키지 않고 올라올수야 있겠으나, 그 크기가 문제였다. 거대한 백호가 올라온다면 발 디딜 곳조차 없어질 것이다.
―몸체를 작게 바꿔주랴?
유혼의 말에 백호는 코웃음을 치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유혼 역시 기대도 하지 않았다는 듯 고개를 돌려 다시 주인을 응시했다.
그렇게 해가 중천에 뜰 무렵, 유혼은 산새들을 전부 물린 뒤 날갯짓 소리조차 내지 않고 조용히 날아올랐다.
곧 서연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평범한 무인이라면 방금의 운공으로 단전에 내공이 쌓였겠으나, 이미 자연과 동화된 서연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서연은 요상한 눈빛으로 배꼽 아래를 한참 쓰다듬었다. 무협지에서 으레 단전의 위치를 이곳으로 꼽았기 때문이었다.
‘이게 내공이 모였을 때의 감각인가?
육체가 따뜻하고 기운을 꺼내 쓸 수 있으니 분명 내공이 있을 텐데,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대주천을 할때도 기운이 전신 세맥을 통해 흘러가는 것 같기는 한데, 어디로 모이지 않고 그냥 들어오고 나가기만 반복했다.
과거 서연이 스스로를 하류 무인이라 착각했던 가장 근본적인 이유가 이것이었다. 무인이라면 으레 가져야할 단전이 없었기 때문이다.
‘상단전이나 중단전이 먼저 발달한 체질인가.
서연은 정수리와 명치를 차례로 만지작거리다가 이내 그만두었다. 어쩌면 온몸을 단전으로 쓰는 희귀 체질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 체질이라면 굳이 알려져서 좋을 것은 없어보였다. 구음절맥(九陰絶脈)이든, 구양신맥(九陽神脈)이든 내로라하는 체질이 나타나면 강호에 으레 혈사가 벌어졌기 때문이다.
“후…….”
문득 옆에 있는 태허진인의 숨이 길게 흘러나왔다. 서연은 태허진인을 바라봤다. 주변에서 세찬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는데, 호흡을 반복할 때마다 하얀 김이 솟구쳤다.
태허진인은 한참동안 숨을 들이쉬고 내쉬기를 반복하다가 눈을 떴다. 그의 얼굴에는 놀라움이 역력했다.
맨땅에 앉아 운기조식만을 취했을 뿐인데, 웬만한 영약을 먹은 것 이상으로 내공이 쌓였기 때문이다. 서연의 옆에서 날것 그대로의 자연지기를 흡수하였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운기조식에 든 사이에 서연이 벌모세수(伐毛洗髓)를 해 주었다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벌모세수란 초고수가 하수의 세맥을 내가기공으로 뚫어주거나 내공을 불어넣어 주는 것을 의미했다. 일문의 장문인이자, 한때 종남이 자랑하던 후기지수였던지라 내로라하는 영약들을 적잖이 섭취했던 터였다. 그렇기에 그 외에는 마땅한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서연은 가만히 앉아 있는 태허진인을 바라보다가 눈치껏 축하의 말을 건넸다.
“장문인, 축하드립니다. 성취가 있으셨던 모양입니다.”
“……고맙네.”
태허진인은 떨떠름한 목소리로 답했다. 축하 말고는 어떠한 감정도 내색하지 않는 서연의 얼굴을 볼 때, 이번 일을 모르는척 해주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내공이 족히 십 년은 늘었다.
놀라운 일이다. 기연이라 칭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 때문일까, 태허진인의 얼굴은 이제 호의를 넘어선 짙은 친근감마저 품고 있었다.
서연의 배포에 감탄한 것이다.
‘……손녀라도 있으셨나.
서연은 저를 보며 옅게 웃는 태허진인을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
서연은 종남파에서 달포 가량을 더 머물렀다. 보법을 익히는 김에 검법도 같이 배우기 위함이었다.
태허진인은 서연이 종남의 모든 무학을 견식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다만 비전인 천하삼십육검은 예외였는데, 서연 본인이 부담스럽다며 거절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러한 사실을 문파 내부에 대대적으로 알리는 것은 큰 반향을 일으킬 수 있었기에, 서연은 대부분의 시간을 종남파가 제공한 개인 연무장에서 보냈다.
이따금 장문제자 정휘가 개인 연무장을 방문하여 교분을 나누고는 했다. 정휘는 자세한 내막까지는 알지 못했으나, 서연이 종남의 귀빈 대접을 받을 정도로 대단한 업적을 이뤄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나이가 어리다고 무시하지 않고 도리어 깍듯이 대했다.
물론 그것도 잠시였다.
서연이 정휘에게 제 검술을 봐달라고 부탁했던 것이 계기였다. 정휘는 순순히 부탁을 수락하며, 귀빈이니만큼 진심으로 봐주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허나 서연의 실력을 본 순간, 자신이 왈가왈부할 수 없는 경지임을 깨달았다.
오히려 이쪽이 배우는 입장이었다.
그래서 정휘는 서연이 견식을 핑계 삼아 자신에게 가르침을 내리고 있다고 여겼다.
“정휘 도사님, 그러면 오늘도 검술을 봐주실 수 있을까요?”
“아, 얼마든지 그리하겠습니다.”
서연이 작금 펼치는 검술은 종남의 유운검법(流雲劍法)이었다. 무려 열여덟 개의 초식으로 이루어져 있어 파생되는 변화가 무궁무진한 검법이었다.
당연히 그 난이도 때문에 쉽게 건드릴 수 없는 무학이었으나, 서연은 보란 듯이 여러 개의 초식을 하나의 초식인 것처럼 매끄럽게 연계했다.
정휘는 속으로 감탄함과 동시에 안타까움을 느꼈다. 서연이 오늘 종남산을 떠나기 때문이다. 고작 달포 가량 교류한 것만으로도 엄청난 진전이 있었기에 더욱 아쉬울 수 밖에 없었다.
“이번에는 어땠나요?”
“더할 나위 없이 좋았습니다.”
“……오늘도 그렇게 말씀하시는군요. 귀빈을 대해야 하는 도사님의 입장도 이해는 가지만, 고칠 점이 있다면 허심탄회하게 말씀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
정휘는 서연의 지탄에 입을 다물었다. 부족한 제 안목을 타박하는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검법을 한 달씩이나 보여줬는데 아직도 그 안에 담긴 묘리를 눈치채지 못했느냐고 훈계하는 것 같기도 했다.
정휘는 속으로 탄식을 내뱉었다. 종남 제일기재라는 별호가 이곳에서만큼은 무색할 따름이었다.
실상은 전혀 달랐으나, 정휘가 그것을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서연은 남몰래 한숨을 내쉬며 도로 납검했다. 확실히 실력이 늘기는 한 것 같은데, 정휘가 계속 듣기 좋은 말만 해주는 탓에 실력을 명확히 파악하기가 힘들었다.
‘자만하기 딱 좋은 시기인데.
제 재능도 파악했고, 제대로 된 보법도, 검법도 익혔다. 강호에 나선 지 얼마 안 된 후기지수들이 자만하여 가장 많이 화를 입는 시기가 바로 이때쯤이었다.
종남에 머무는 동안 간간이 바깥 소식을 전해 들었다. 이번 가을에 농사를 망친 장강 이남의 민심이 심상치 않다고 했다.
잠잠하던 녹림(綠林)이 발호했다. 본래 녹림은 풍년일 때는 정예 십팔채만을 유지했는데, 이따금 민심이 흉흉해지면 그에 따라 수를 불리곤 했다.
반년 사이에 녹림십팔채가 삼십육채가 되었다고 했다. 녹림뿐이랴, 장강에서도 수로채가 하나둘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고 했다.
다행히 서연이 본래 가려고 했던 사천성과 운남성은 정파의 영역이었기에 녹림도나 수적들이 대대적으로 발호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평시보다 위험한 것은 확실했다.
서연이 종남에 오래간 머무른 것도 그 때문이었다. 산적들을 만나도 제자를 지킬 수 있겠다는 확신이 필요했다.
‘십대 일, 어쩌면 이십대 일을 하게 될지도 모르는데.
장문제자인 정휘와도 합을 겨뤘으니, 실력이 부족하지는 않을 터이나 그래도 무언가 아쉽다는 감정까지 완전히 지울 수는 없었다.
태허진인과 했던 약속을 지킬 겸, 수련도 계속할 겸 화산으로 바로 찾아갈 생각도 했으나, 태허진인이 당장 가는 것보다 시간을 두고 여유롭게 방문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 하여 그만두었다.
‘그래도 연화비영보를 완벽히 익혔으니.
수틀리면 제자를 안고 자리를 피하면 될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만약 상대가 그조차도 따라잡을 수준의 고수라면…….
서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쓸데없는 생각을 하여 굳이 불안감을 키울 필요는 없었다. 애초에 다 감수할 생각으로 세상 밖으로 나왔던 것 아니던가.
정 안되면 낙양 부윤이 주었던 명예직인 도감 증패를 내세워 관인 행세를 하면 될테고 말이다.
물론 무림을 징치하겠다는 목적으로 세워진 천명검이라는 단체가 대놓고 존재하는 세계에서 관무불가침이 과연 제대로 이뤄질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서연이 그런 생각을 하며 짐을 챙기는데, 누군가 정중히 문을 두드렸다. 문을 열어보니 태허진인이 서 있었다.
“선자, 떠나신다고 들었소.”
“그렇게 되었습니다.”
태허진인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어 내밀었다. 나무로 된 각패였는데, 특이하게도 색이 하얬다. 색이 바랜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순백색인 듯했다. 설명을 들으니 청목족이 영목(靈木)이라 부르는 나무의 조각으로 만들었다고 했다.
“이 패를 보여주면 종남과 친분이 있는 모든 문파들이 빈도를 대하듯 대접할 것이오.”
“……예?”
“별거 아니겠으나, 부디 받아주시오. 그래야 나중에 화산에도 편히 방문할 수 있지 않겠소.”
너무 과하다고 거절하려 했으나, 태허진인이 너무나도 완고하여 그럴 수 없었다. 서연은 다시금 제가 나이 지긋한 노인에게 약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서연은 태허진인과 작별인사를 나눈 다음 종남산을 내려왔다.
늘 그랬듯 죽립에 면사를 쓴 채였다.
저번과는 달리 이번에는 역참에서 말을 빌리지 않았다. 틈틈이 보법을 연습해야 했기 때문이다. 화련도 연화비영보를 연습하고 있었는데, 확실히 어린아이가 익히기에는 버거운 보법이었는지 끙끙대는 일이 잦았다.
급한 여정이 아니었기에 느긋하게 대로를 따라 이동했다. 그 때문인지 저녁이 다 되어서야 묵을 만한 객잔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저녁시간 답지 않게 객잔 주변이 사람들로 북적거렸는데, 입구에서부터 몰려있는 사람들을 보아하니 대부분 손님이 아닌 구경꾼인 모양이었다.
아무리 대로라 해도 이만한 사람이 몰려 있는 것은 흔치 않았다.
무슨 일인가 하고 다가서려는데, 누군가가 행인들을 거세게 밀치고 앞으로 튀어나왔다.
“죽기 싫으면 막지 말고 비켜라!”
얼굴에 큼지막한 칼자국이 난 중년인이었다. 전체적으로 거친 사파인다운 분위기를 풍겼는데, 객잔에서 칼부림이라도 일으켰는지 피칠갑을 한 채였다.
민초들에게 거침없이 무기를 휘두르는 것을 보니 폭급한 성정을 짐작할 수 있었다.
서연은 놀란 눈을 하면서도 화련을 제 등 뒤로 숨기듯 잡아당긴 후 망설임 없이 발검했다.
본능의 영역이었다.
유려한 발검만으로도 서연이 실력자라는 것을 알아차린 중년인이 낭패라는 듯한 얼굴을 했다.
“젠장, 그새 포위당했나!”
빠르게 도법을 펼쳐 서연을 베고 나아가려던 때였다.
콰악!
서연의 검 끝에서 펼쳐진 중검의 묘리가 중년인의 도를 그대로 찍어눌렀다.
“무슨 힘이……!”
순식간에 부러진 도를 보며 아연실색한 중년인이 뒷걸음치던 그때였다.
촤악!
뒤편에서 나타난 사내가 단번에 중년인의 목을 양단했다.
“도움을 받았구려.”
사내의 등에는 천(天) 자가 크게 새겨져 있었다.
드넓은 중원에서, 황태자를 상징하는 홍실로 하늘을 새길 수 있는 집단은 단 하나 뿐이다.
“종남의 도인이 나서줄 줄은 몰랐소. 고맙소.”
사내가 포권을 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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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녕 천명검이다.”
“귀독문(貴毒門)의 무인들을 모조리 일도에 쓰러뜨리다니. 말단이 이 정도라면, 천하를 징치한다는 말도 허언이 아니겠구나.”
잘려나간 중년인의 목을 마주한 행인들의 목소리에는 놀라운 기색이 서려 있었다. 사람이 죽은 것에 놀라는 이는 없었다.
섬서성은 비록 정파의 영역이었으나, 사마외도의 본거지인 감숙성과 녕하성에 맞닿아 있어 이 같은 일은 으레 벌어지는 풍경이었기 때문이었다.
사내는 핏물 한 방울 묻지 않은 도신을 도로 납도하고는, 서연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천명검 패검대(覇劍隊) 소속 팽무성(彭武成)이라 하오. 도인께서는 성함이 어찌 되시는지.”
서연은 선뜻 답하지 못했다. 찰나의 순간, 코앞에서 사람의 목이 잘려나가는 것을 목도했기 때문이었다. 조금만 더 가까웠더라면 그 피가 서연의 옷자락을 적셨을 터였다.
어느새 주변은 삼삼오오 모여든 행인들로 가득 차 있었다.
“팽무성? 하북팽가의 장남, 광염삭월(狂焰削月) 아니던가!”
“혼원벽력신공(混元霹靂神功)을 익혀 웬만한 칼은 박히지도 않는다던데. 팽가주는 도검불침의 경지를 이뤘다는 말도 있소.”
“팽가가 황실과 뜻을 함께하기로 결정했다는 소문이 사실이었다니!”
늦은 저녁 시간임에도 수런거리는 소리가 사방을 울렸다.
서연은 잠시 고민에 잠겼다. 팽무성이 자신을 종남파의 도인이라 오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방금 전 펼친 검법이 종남의 것이었으니, 그리 오해할 만도 했다.
허나 서연에게도 나름의 생각이 있었다. 헤어지기 전, 태허진인이 건넨 말 때문이었다.
―선자께서는 외부에서 자유로히 본문의 검을 사용해도 좋소. 뒷말이 나오더라도 본문이 감내하리다.
그때는 너무 과한 배려라 여겼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태허진인은 언젠가 이런 난처한 상황이 닥칠 것을 미리 짐작했던 모양이었다. 제대로 익힌 검법이라곤 종남의 것밖에 없으니 말이다.
‘몇 번을 생각해도 고마우신 분이다.
언젠가 반드시 은혜를 갚으리라 다짐한 서연 또한 예를 갖춰 마주 포권했다.
“하남성 출신 서연이라 합니다. 종남의 도인은 아니오나, 연이 닿아 그 검을 익히게 되었습니다.”
서연은 더 이상 뒷말이 나오기 전에 품속에서 작은 각패를 꺼내 내밀었다. 태허진인에게 직접 받은 것이었다.
각패를 받아든 팽무성의 눈에 순간 이채가 서렸다.
“이것은…….”
전해 들었던 외양과 흘러나오는 기운으로 보건대, 틀림없는 진품이었다. 팽무성은 서연의 외양을 찬찬히 훑었다.
사실 그는 반쯤은 떠볼 생각으로 종남의 도인이냐 물었던 참이었다. 현 종남파의 이대제자 및 삼대제자 중에는 여인이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명색이 황태자가 이끄는 집단이다. 금의위는 물론, 동창과도 깊이 연루되어 있었기에 개방과 하오문에 비할 수 없을 수준에 정보력을 가지고 있었다.
본래 종남 출신이 아닌 자가 종남의 검을 익혔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당장 살생을 금하는 소림조차도 제 비전을 유출한 자가 있다면 사지근맥을 끊고, 심하면 살계(殺戒)를 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만큼 외인에게 문파의 비기를 알리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
그렇기에 서연이 종남의 검을 훔쳐 사용하는 사마외도일 가능성까지 염두에 두려던 그였으나, 지금은 생각이 완전히 달라졌다.
‘……태허진인에게 알려지지 않은 여식이 있었나?
나이대를 보아하니 손녀뻘에 해당되는 듯한데, 종남의 장문인쯤 되는 고수가 작정하고 숨겼다면 여태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을 만도 했다.
‘아니면 단순히 연이 닿았을 수도 있겠다.
혈육이 아닐 가능성 또한 충분했다. 구파의 도인들이 전란 속에 부모를 잃은 고아들을 거두어 기르는 일은 꽤나 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종남은 수십 년 전 정사대전 당시 막대한 피해를 입었던 만큼,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두 번째 장문제자를 비밀리에 숨겨두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곧 팽무성이 서연에게 각패를 돌려주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면 서연 소저라고 부르면 되겠소이까?”
“편하신대로 부르시면 되겠습니다.”
충분히 윗선에 보고할 만한 사항이었다. 어찌하여 그간 꽁꽁 숨겨진 종남의 비녀(秘女)가 이제서야 정체를 드러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것은 암검대(暗劍隊)가 조사할 일이지 패검대의 관할이 아니었다.
“혹 서연 소저도 암단화를 찾아 오신 것이오?”
“……암단화라 하셨습니까?”
“모르셨던 모양이구려.”
“실은 운남으로 향하던 중 사람이 모여 있는 것을 보고 확인하러 들렀던 것뿐이라,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팽무성은 남몰래 고개를 끄덕였다. 면사 때문에 표정까지는 읽을 수 없었으나, 목소리를 통해 유추하건데 거짓은 아닌 듯했다.
암단화는 강한 냉기를 품은 독초였다.
허나 독초는 쓰기에 따라 영약이 되기도 하는 법. 암단화 또한 그러한 부류였다.
본디 영약은 지맥의 기운을 머금고 자라나 자연히 양기를 품게 되는 것이 보통이다. 그렇기에 반대로 음기를 품은 영약은 매우 귀한 취급을 받았다.
이따금 극한 지방에서 나는 수십, 수백 년 묵은 설삼이 막대한 가격에 거래되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암단화는 백년짜리 설삼보다 한 단계 높은 수준의 냉기를 품은 독초였다.
인근에 사파 낭인들이 유독 많이 몰려드는 것은 전부 그 때문이었다.
영약과 영초에 관한 소문은 반드시 피를 불렀다.
사실 서연 또한 어느 순간부터 기류가 심상치 않아졌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도시 밖으로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거늘, 검을 패용한 무인들이 유독 많이 보였기 때문이다.
“운남으로 가신다 들었는데, 석천(石泉) 방향으로 가시오, 아니면 녕강(寧强) 방향으로 가시오?”
두 곳 모두 섬서성의 끝자락에 위치한 도시였다. 차이점이라면 녕강은 섬서의 서남쪽 끝에 위치해 있고, 석천은 동남쪽에 위치해 있다는 것이었다.
서연은 본래 석천 방향으로 갈 생각이었다. 아무래도 녕강은 감숙과 가까워 사마외도를 마주칠 가능성이 더 높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찌 물으십니까?”
“암단화가 피어올랐다는 소문이 들린 곳이 석천 인근이라 그렇소. 본관이 모시는 패검대주께서도 그곳으로 향하는 중이시라오.”
서연은 이 말을 듣고 약간 놀랐다. 팽무성이 스스로를 본관(本官)이라 칭했기 때문이다.
천명검에 속한 무인들이 관리에 준한 대우를 받고, 스스로를 관인이라 여긴다는 말을 들어본 적은 있었지만, 명문 팔대세가에 속한 팽무성조차 저렇게 말할 줄은 몰랐다.
무림이 황실의 권위 아래에 놓인 수준을 넘어섰다.
팽무성 정도 되는 무인이 무림인으로서의 정체성보다 관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더 중시한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도대체 황실의 힘이 얼마나 강하기에 저럴 수 있을까. 어쩌면 지금 이 시기가 대명의 황금기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관무불가침은 유명무실하겠구나.
다른 것은 몰라도 그것만큼은 확실해 보였다.
고민하는 서연을 보던 팽무성이 입을 열었다.
“보아하니 가는 방향이 비슷할 듯한데, 본관이 동행을 청해도 되겠소?”
“동행, 말씀이십니까?”
팽무성은 눈짓으로 서연 뒤에 선 화련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결례인 것은 아오나, 영약에 눈이 먼 폭급한 종자들이 소저에게 해를 입힐까 염려되어 그렇소.”
혹여 서연의 자존심을 건드릴까 말투부터 조심스러웠다. 서연 또한 그 속에 담긴 진심을 읽어냈다.
물론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팽무성은 혹여 서연이 화를 입고 난 후 종남이 분노하여 일이 커질 것을 걱정했다.
일전의 합을 보았을 때, 제 한 몸 지킬 실력은 충분해 보였으나, 사파 고수들과 맞서는 상황에서 어린 여아까지 지킬 수준은 못 될 듯했기 때문이다.
“괜찮습니다. 말씀을 들어보니 녕강 방향으로 돌아가면 될 듯 합니다. 그리고 팽 공자께서는 석천으로 가실 것 아닙니까.”
서연은 무턱대고 팽무성을 믿지 않았다. 팽무성의 신원이 믿을 만한 것과는 별개로, 무림인들과 대립 구도를 이루는 천명검과 괜히 엮였다 화를 입을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아니오. 본관도 녕강 방향으로 향할 예정이오. 단독임무를 마치고 막 복귀하던 터라, 이번 임무에는 참여하지 않기로 했소. 그러니 소저가 염려하는 일은 생기지 않을 것이오.”
서연은 팽무성을 잠시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
본래 무협지에서 하북팽가는 타고난 신력과 근골 덕에 덩치가 크고 호쾌하다는 모습으로 자주 등장하고는 했다.
허나 팽무성은 그러한 고정관념을 당당히 깨부쉈다. 덩치도 평범했고, 지극히 예의발랐다. 이따금 서연이 질문하면 성실히 답해주기도 했다.
“천명검의 조직도는 간단하오. 무수한 말단 대원 위에 열 명의 대주가 있고, 그 위에 단주가 있지. 대주들과 비무를 해서 실력을 증명하지 않는 이상 본관은 영원히 말단이라오.”
“군문과 비슷할 줄 알았는데, 들어보니 사뭇 다르군요.”
“아무래도 실력이 중하니 그렇소.”
둘은 생각보다 대화가 잘 통했다. 서로 예의를 깍듯이 차리는 것을 선호했기 때문이다.
“서 소저는 운남에는 무슨 일로 가시오?”
“운남의 대리석이 그렇게 질이 좋다하여 구경하러 가고 있었습니다.”
“……대리석? 아, 각예를 즐겨했다는 것을 미처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소.”
그렇게 사흘 동안 여유로히 나아갔다. 본래 천명검은 임무를 마치면 충분한 휴식이 주어진다고 했다. 팽무성도 그러했다. 보름 안에만 목적지에 도착하면 된다고 했다.
이따금 적잖은 낭인들을 마주쳤는데, 그들은 서연에게 다가가려다 팽무성의 등 뒤에 당당히 새겨진 천 자를 보고 꼬리를 내렸다.
뭣도 모르고 덤벼드는 이들도 적지 않았으나, 그들 모두 팽무성의 도에 절명했다.
광염삭월이라는 별호처럼, 팽무성의 도는 패도와 쾌도의 성격을 동시에 띄고 있었다. 사람 서넛을 무기 채로 양단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홀로 당당히 강호 무림을 주유할 수준이 되어야 비로소 옷에 하늘을 새길 수 있다고 했다. 이 정도 되는 사람을 말단으로 부리는 황실의 힘을 짐작할 만했다.
녕강이 하루 거리였다. 허나 이상하게도 갈수록 여정 중에 낭인을 만나는 일이 잦아졌다. 길을 잘못 들었다고 착각할 정도였다.
산길을 걷는 중에도 마찬가지였다. 행인들이 나누는 대화가 심상치 않았다.
―낭인 하나가 미쳐서 사람을 서른이나 죽였다더군. 관군이 나서기 전까지 노소를 가리지 않고 피바람을 일으켰다지 뭔가.
―진령산맥(秦嶺山脈)으로 올라갔던 약초꾼들이 죄다 실종되었다고 하더이다. 그 때문에 약값이 천정부지로 올랐다지. 미리 약초를 쟁여뒀던 의원들은 노났겠어.
―요 근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산을 넘어오던 보부상들의 발걸음이 뚝 끊겼다네.
팽무성의 표정이 굳어지는 것을 보아, 그 또한 무언가 심상치 않음을 알아차린 듯했다.
석천과 녕강의 거리는 수백 리가 넘었다. 낭인들이 아무리 암단화에 눈이 멀었기로서니, 여기까지 찾아올 가능성은 없었다.
바로 그때, 하늘에서 무언가 빠르게 착지했다. 성인 남성의 머리보다 약간 작은 크기의 맹금이었다. 맹금은 팽무성의 어깨에 내려앉은 다음 얌전히 발톱에 매달린 전서를 내밀었다.
팽무성은 이전보다 훨씬 딱딱한 어조로 말했다.
“……은비조(銀飛鳥)요. 패검대가 소통할 때 사용하는 맹금이오.”
곧 전서에 담긴 내용을 확인한 팽무성이 침음을 뱉어냈다. 서연은 눈치껏 뒤로 물러나 있었기에, 뭐라 적혀있는지 확인할 수 없었다.
팽무성의 심상찮은 표정으로 보아 보통 일은 아닐 터. 서연은 긴장한 얼굴로 그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곧 팽무성이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암단화에 대한 정보가 잘못되었소. 몇몇 문파들이 시선을 돌리기 위해 작정하고 교란을 펼쳤다더군.”
“그게 무슨 뜻입니까?”
“……하품 암단화가 석천이 아니라 녕강 인근 산자락에서 발견되었다고 하오.”
암단화는 사기(死氣)와 음기가 응집된 곳에서 떼를 지어 피어난다. 하품 암단화가 발견되었다면 멀지 않은 곳에 상품 암단화도 있다는 뜻이다.
“대주께서도 급히 방향을 돌려 이곳으로 오고 계시다더군. 이만 헤어져야 할 것 같으니, 본관은 먼저 가보겠소이다.”
팽무성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쐐애애액!
공기가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창이 날아들었다.
팽무성은 고개를 돌려 공격이 날아오는 방향으로 발도하려 했다.
허나 그때쯤 서연의 검이 이미 창날을 반으로 갈라내고 있었다.
촤아악!
처참하게 잘려나간 창날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이걸 막아?”
산자락에서 나타난 산적의 입꼬리가 비틀어졌다. 평범한 산적이라기에는 풍기는 기파가 심상치 않았다.
“……네 놈이 한 짓이냐?”
서연은 날이 선 눈빛으로 산적을 노려보았다. 자신이 아니라 어린 화련을 노렸다. 그 수법이 아주 악질적이었다.
산적이 이죽거리는 얼굴을 한 채로 말했다.
“그렇다면?”
기다렸다는 듯 서연의 검신이 빛줄기를 토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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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연은 곧바로 나서지 않았다.
경솔하게 제자의 곁을 비웠다가 오히려 위험한 상황에 빠질 수 있음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처음 창을 던졌던 산적이 비릿한 웃음을 흘렸다. 등에는 날렵한 형태의 창이 족히 다섯 개는 넘게 매여 있었다. 놀랍게도 손에는 큼지막한 부월(斧鉞)도 들려 있었다.
“어째, 보기보다 영리하구나.”
그의 곁으로 여섯 명의 산적이 더 모습을 드러냈다. 녹림의 무뢰배답게 제각각의 무기를 들고 있었다. 검, 작살, 비도, 그물은 물론이요, 심지어는 커다란 언월도를 든 자까지 있었다.
눈앞에 드러난 것만 그 정도였다. 섣부른 도발에 넘어가 경거망동했다면 큰 화를 입었으리라.
“과연 황태자의 개들 답다. 그리 교란했는데도 기어코 이 깊은 산골까지 찾아왔구나.”
“죽일까요?”
산적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굳이 반역도로 몰릴 필요가 있을까. 개놈아, 저 여인을 포함해 가진 것을 모두 놓고 가면 너는 살려 보내주마.”
산적은 커다란 부월을 한 번 튕겨 보였다. 다른 무뢰배들의 무기보다 두 배는 족히 되어 보였다.
산적들은 적당히 다가서다, 세 장이 조금 안 되는 거리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입이 거친 것과는 다르게 그들의 눈은 매서웠다. 단순한 잡배가 아니라는 뜻이다.
‘평범한 산적이 아니다. 녹림인가.
서연의 눈빛이 깊어졌다.
오고가며 들었던 소문에 따르면, 녹림의 우두머리 녹왕(綠王)에게 직접 무공을 전수받은 자들만이 부월을 다룰 수 있다고 했다.
얼굴에서 드러나는 자신감이 그 소문을 뒷받침하는 듯했다.
“왜 대답이 없지?”
“주제도 모르는 무지렁이들의 말에 무엇하러 답할까.”
팽무성은 그 한마디를 내뱉고는 성큼성큼 앞으로 나섰다.
―본관이 정면을 맡겠소.
전음이 귓가를 울림과 동시에 팽무성이 번개처럼 튀어나갔다. 그의 손에 들린 도가 언월도를 들고 있던 사내의 심장에 깊숙이 박혔다.
“쳐라!”
파악!
동시에 수풀과 나뭇가지 위에서 수십 명의 녹림도가 일제히 튀어나왔다.
사방에서 그물과 비수가 쏟아져 내렸다. 그중에는 자색으로 물든 모래를 뿌리는 자도 있었으니, 독에 절인 모래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서연은 망설임 없이 연화비영보를 펼쳤다. 왼손으로는 화련을 단단히 품에 안은 채였다.
“화련아.”
“네, 스승님.”
“눈을 감으렴.”
화련은 순순히 눈을 감았다. 고수의 손에 붙들려 보법이 펼쳐지는 것을 온몸으로 느끼는 것은 흔치 않은 기회였기 때문이다.
눈을 감으라는 것도 온 정신을 감각에 집중하라는 뜻으로 헤아렸다.
화련은 이번 기회에 반드시 연화비영보를 익히리라 다짐하며 두 손으로 눈을 꼭 가렸다.
팟!
순식간에 서연의 신형이 사라졌다.
“뭣이!”
“당황하지 말고 기감을 펼쳐라!”
눈 깜짝할 새에 후방을 장악한 서연은 유운검법을 펼쳐 한 산적의 양 손목을 단칼에 잘라냈다. 거대한 도를 들고 있던 자였다.
칼날은 그대로 땅바닥에 떨어지며 산적의 발등을 꿰뚫었다.
“크아아악!”
연화비영보는 펼치면 펼칠수록 속도가 빨라지는 신묘한 보법이었다. 고작 네 걸음을 내디뎠을 뿐인데, 산적들은 감히 서연의 그림자조차 쫓지 못했다.
굳이 제 손에 피를 묻힐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몸 성히 돌려보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망설임 없이 어린아이부터 노린 짐승만도 못한 놈들이었다. 자비를 베풀 이유가 없었다.
때로는 죽는 것보다 살아남아 죗값을 치르는 것이 더 고통스러운 법이었다.
촤악-!
검막을 펼쳐 사방에서 날아드는 날붙이를 튕겨냈다. 제 손으로 던진 무기에 맞아 피를 뿌리는 산적들이 적지 않았다.
“고수다!”
“고수도 칼 맞아 죽는 건 매한가지다!”
유독 덩치가 큰 민머리 산적이 앞으로 나섰다. 용력이 심상치 않았는데, 진기를 휘감은 도를 휘두를 때마다 나무가 속절없이 베어 넘어가 산산조각이 났다.
서연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검을 내질렀다. 둘의 진기가 충돌한 것은 찰나에 불과했다.
압도적인 내력의 차이를 버텨내지 못한 도가 산산조각으로 부서졌다. 서연은 장력을 실은 손을 민머리 사내의 상반신에 가져다 댔다.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막대한 내력을 한순간에 받아들인 사내의 얼굴이 울긋불긋해지더니, 심하게 토혈했다.
“카학……!”
곧 그의 몸이 포탄처럼 뒤쪽으로 튕겨나갔다.
쾅!
흙먼지가 일고 거친 바람이 몰아쳤다. 민머리 사내를 잡으려던 산적들 또한 사방으로 튕겨나갔다. 서연은 곧장 다리에 진기를 집중시킨 다음 사뿐히 물러섰다. 방금까지 서 있던 자리에 창이 깊숙이 박혔다.
“칫!”
처음에 창을 던졌던 산적과 같은 놈이다.
‘용서치 않는다.
차라리 자신을 겨냥했다면 백번 양보하여 이해했을 터이나, 저놈은 명백히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었다.
싸움을 길게 끌어 좋을 것이 없었다. 서연은 곧장 검을 유려하게 내질렀다. 예상보다 곱절은 빠른 속도에 산적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스쳤다.
그는 빠르게 몸을 뒤로 젖혀 피하려 했으나, 귓바퀴가 잘려나가는 것까지는 막지 못했다.
“흡!”
그러나 비명을 지르기는커녕 빠르게 뒤로 물러서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촤악!
그리고는 부월을 하늘로 던져 올린 다음, 부월이 떨어지기 전에 등에 매인 창 두 자루를 뽑아 그대로 투척했다.
하나는 머리를, 다른 하나는 서연의 심장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공기가 갈라지는 섬뜩한 소리가 귀를 때렸다.
하지만 종남의 강건함을 체화한 서연이었다. 유려하게 검을 한 번 회전시켜 어이없을 정도로 간단하게 창을 튕겨냈다.
“종남이 어째서 천명검과……!”
산적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그러는 와중에도 하늘에 던져두었던 부월을 잡아채 서연의 머리를 향해 내리칠 준비를 했다.
그러나 서연의 태을분광검(太乙分光劍)이 먼저였다.
중검으로 이름을 날린 종남의 유일한 쾌검식이다. 거기에 유려한 보법이 더해졌다.
베이는 소리보다 참격이 먼저였다. 산적이 정신을 차렸을 때, 서연은 이미 그의 등 뒤에 서 있었다.
빛살이 잦아들며 산적의 양팔이 맥없이 땅바닥으로 추락했다.
“끄아아아아악!”
산적의 고통스러운 비명이 산중을 뒤흔들었다. 그 와중에도 산적은 발버둥 치며 도주하려 했다. 양팔이 잘린 몸으로도 살 길을 찾아 움직이는 것이다.
쾅!
하지만 서연이 사내의 안면을 내리찍는 것이 더 빨랐다. 어찌나 강하게 내리쳤는지 머리통이 땅속으로 반쯤 파묻힐 지경이었다.
“감히.”
서연은 분노한 기색을 숨기지 않고, 사내의 얼굴을 움켜쥔 손에 힘을 주었다. 뼈가 으스러지는 섬뜩한 소리와 함께 사내가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질렀다.
“끄, 끄아아아악!”
산적은 몇 번 꿈틀거리더니 이내 축 늘어졌다. 육신이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아득히 뛰어넘는 고통을 한순간에 느꼈기 때문이리라.
“관부로 압송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오. 녹림채주에게 직접 사사한 녹림도는 흔치 않으니. 어쩌면 녹림채주의 은거지를 알고 있을지도 모르지.”
어느새 주변 정리를 마친 팽무성이 다가왔다. 그의 주변에는 간부로 보이는 산적들의 시체가 즐비했다.
모두 한 칼에 목숨을 잃은 흔적이었다.
팽무성은 이런 일이 익숙한 듯 실신한 산적의 단전을 파괴했다. 사지의 근맥을 끊는 움직임 또한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서연의 표정이 흐려진 것을 느꼈는지 팽무성이 덧붙였다.
“이해해주시오. 천명검은 적이 많은지라, 소저처럼 손속이 자비로웠다간 얼마 버티지 못하고 객사하기 십상이오.”
“……이해합니다.”
서연은 그의 입장을 충분히 헤아렸다.
애초에 관부에 인계하려 했으니, 관인이나 다름없는 팽무성에게 처리를 맡기는 것이 옳다고 판단했다.
애초에 황태자를 모욕한 죄를 물어, 누구보다 혹독하게 죄의 값을 치르게 할 장본인이 바로 팽무성이었다.
본디 역모에 연루된 무림인들은 사지를 찢어 죽이는 거열(車裂)에 처하는 경우가 태반이었기 때문이다.
“그릇이 크시구려. 감사하오.”
팽무성은 감사를 표한 뒤, 고의적으로 진기를 흘려보내 산적의 정신을 강제로 일깨웠다. 일말의 배려도 없는 패도적인 진기에, 산적은 몇 번이고 토혈했다.
“크, 크하아악! 녹왕께서 용서치 않을 것이다!”
팽무성의 미간이 악살처럼 일그러졌다. 근본도 없는 무뢰배들이 감히 왕(王)을 입에 담았기 때문이다.
팽무성은 무림인들이 지닐 수 있는 별호의 상한선은 존(尊)이라 생각했다. 망령되게 제(帝)나 왕을 입에 담는 무림인들은 그 존재만으로도 역모와 다를 바 없었다.
“누구와 공모했느냐?”
일전의 대화로 미루어 보건대, 패검대가 엉뚱한 곳으로 향하게 된 일에는 분명 녹림의 개입이 있었다.
본디 영약은 소문만으로도 혈사를 일으키는 법. 패검대로서는 진위 여부를 확인하기에 앞서, 그로 인해 발생할 민초들의 피해를 막는 것이 우선이었다.
소문을 파악하자마자 패검대가 석천으로 향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녹림 혼자 벌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내가 불 것 같으냐?”
“기대도 안했다. 일 각 뒤에 다시 물어보마.”
“뭐?”
팽무성은 무표정한 얼굴로 산적의 혈도 몇 곳을 두드렸다. 서연은 특유의 예리한 눈썰미로 팽무성이 짚은 혈자리를 읽어냈다.
‘독맥의 요혈, 교신혈(交信穴), 신문혈(神門穴)?
서연은 설마 하는 표정으로 산적을 지켜보았다. 곧 산적은 온몸이 근질거리는 사람처럼 꿈틀거리더니, 이내 이를 딱딱 부딪치며 온몸을 비틀기 시작했다.
머지않아 산적은 거친 숨을 토해냈다. 아득바득 깨문 입에서는 핏물이 쏟아져 나왔고, 동시에 뼈와 기혈이 뒤틀리는 듯한 기괴한 소리가 함께 들려왔다.
그 와중에 아혈이 짚혀 비명조차 지를 수 없었다.
궁금증을 참지 못한 서연이 조심스레 물었다.
“혹, 분근착골(分筋錯骨)입니까?”
팽무성은 살짝 놀란 얼굴로 답했다.
“……이걸 아시오?”
무협지에서 흔히 등장하는 수법이라 혹시나 하여 던진 질문이었는데, 팽무성의 얼굴을 보니 아무나 아는 수법은 아닌 듯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고문을 위해 만들어진 수법을 아무나 아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다. 황실이나 일부 권력자들만 알 법한 기밀이었다.
서연은 대충 얼버무렸다.
“얼핏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그렇구려.”
팽무성은 더 캐묻지 않았다. 종남파와 괜한 분쟁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연이 펼치는 검법을 보았다. 녹왕에게 부법을 사사한 산적을 일검에 압도했다.
후기지수라 불릴 수준을 뛰어넘었다. 숨겨진 장문제자라 생각하기에 충분하고도 남는 무재였다.
일각이 지났다. 의기양양했던 산적은 어느새 처량하고 볼품없는 꼴로 변해 있었다.
팽무성이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일각을 더 기다릴까?”
“말하……겠다. 말하겠다…….”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 수준의 고통이었다. 단련된 무인이라 할지라도 견뎌낼 수 있는 종류의 고통이 아니었다.
“당가……당가와 공모했다.”
“당가? 사천당문(四川唐門)을 말하는 건가?”
“크흐, 흐. 천하에 당가가 그것 말고 또 있을까.”
팽무성은 그 와중에도 정신을 못 차리고 도발하는 산적의 어깨를 잡아채 비틀었다. 기괴한 뼈 꺾이는 소리와 함께 사내가 다시금 비명을 토해냈다.
“끄아아아악!”
“더 자세히 말해라.”
팽무성의 눈빛이 살기를 내뿜었다.
“구체적으로 누구와 접촉했지?”
사천당문 전체가 이번 일에 연루되었다면 이는 패검대 하나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이었다.
“……가면으로 가리고 있어 얼굴을 보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화침(梨花釘)을 사용하는 것을 보았다.”
이화침은 당문의 독문 암기인 폭우이화침(暴雨梨花針)을 의미하는 것이리라. 이는 최소 당가의 직계거나, 그에 준하는 고수가 연루되어 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게 끝이다. 빌어먹을 놈아.”
팽무성은 산적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그는 진위를 가늠하겠다며 분근착골을 다시 시전했다.
섬뜩한 소리가 다시 울려퍼졌다.
“늙은이! 나이가 지긋한 늙은이었다!”
“더 할 말 없나?”
“없다! 정말로 없다! 그러니 제발 이제는 죽여다오.”
팽무성은 이 과정을 세 번 더 반복했다. 철저함을 넘어선 집요한 수준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산적의 육신은 걸레짝처럼 변했다. 살아도 산 것이 아니었다.
팽무성은 서연을 돌아보았다. 서연이 제압한 산적이었으니, 그 처우를 묻는 것이다.
서연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라의 관리가 죽일 것을 결정했다. 따라야 옳았다.
차도살인(借刀殺人)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어차피 관아로 데려가도 죽을 것은 매한가지였기 때문이다. 애초에 산적 하나를 호송하러 녕강까지 돌아가는 것도 말이 되지 않았다.
스악!
곧 산적의 목이 떨어졌다.
“서 소저, 이만 헤어지는 것이 좋겠소. 본관은 암단화가 있는 곳으로 가야할 듯 하오.”
서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말을 듣고 나니 이 길 끝에 얼마나 많은 무림인들이 버티고 서 있을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홀로 상대할 바에는 팽무성과 동행하는 편이 더 안전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따라가겠습니다. 그 편이 더 안전할 것 같군요.”
“안전이라?”
팽무성의 얼굴이 꿈틀거렸다. 사실 내심 서연이 도와주기를 바랬다. 허나 먼저 청할 분위기가 아니었기에 반쯤 포기하고 있었는데, 그녀가 먼저 나서주니 이보다 기쁠 수가 없었다.
저만한 실력자가 설마 진정 안위를 염려하여 동행을 청하겠는가. 분명 자신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 스스로를 낮추는 것이리라.
‘종남이 머지않아 다시 날아오르겠구나.
실력은 물론이고 인품까지 갖춘 무재였다.
“그러면 부탁드리겠소.”
팽무성이 정중히 포권을 취했다.
다만 한 가지 문제가 남아 있었다. 암단화의 위치를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고문했던 산적도 그 정보까지는 알지 못했다. 이러다가는 진령산맥 전체를 샅샅이 뒤져야 할 판이었다.
‘관군과 연계해야 하는가.
그렇게 생각하던 순간이었다.
하늘에서 은빛 올빼미 한 마리가 착지했다.
팽무성은 놀란 얼굴로 올빼미를 응시했다. 패검대가 사용하는 은비조와는 비할 수 없을 정도로 고고한 기운을 풍겼다. 얼핏 보아도 영물이라 칭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만한 영물이 서연의 어깨 위에 얌전히 앉아 있었다.
“소저, 이것은……?”
“음, 저와 연이 닿은 아이라고 해야 할까요.”
서연은 유혼이 왜 여기 있는지 알지 못했다. 백호도 그렇고, 유혼 또한 자연을 멋대로 배회하다 제멋대로 나타나곤 했기 때문이다.
곧 유혼이 한쪽 날개를 치켜들었다. 진령산 정상 방향이었다.
서연은 잠시 고민하다 물었다.
“안전한 방향은 어디니?”
유혼은 이번에는 반대 방향을 가리켰다.
“팽 공자.”
“……예.”
“암단화가 어디 있는지 알 것 같습니다.”
서연이 유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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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화루.
회화루주(繪花樓主)는 산적처럼 험악한 인상을 한 채로 의자에 걸터앉아 있었다.
“그래서, 데려오라 명한 여자는 어디에 두고 너희들만 왔더냐?”
덜덜 떨던 왈패 하나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그게…. 예화가 진짜로 여고수를 찾아낸 모양입니다. 영곽이가 저항도 못하고 맞았고, 그 와중에도 등 뒤에서 날아오는 공격은 귀신같이 피했습니다.”
회화루주가 말했다.
“그래서 도망쳤다?”
“그건 아니고, 그쪽에서 그냥 보내줬습니다.”
“보내주면서 무슨 말이라도 했나?”
“찾아갈 테니 기다리라고는 했습니다.”
회화루주는 주변을 둘려보면서 말했다.
“대체 뭐 하는 여고수라더냐? 쓰는 무기는 또 무엇이고?”
왈패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이고만 있었다. 차마 맨손으로 처맞았다는 말을 할 수 없었던 탓이다.
“물어보면 대답을 해라.”
“맨손으로 맞았습니다.”
주변에 도열해있던 간부들이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
회화루주도 코웃음을 치며 왈패들을 쳐다봤다.
“이거 보기보다 더 멍청한 놈들이었군. 도대체 무슨 배짱으로 돌아온거냐?”
“그러게 말입니다. 어디에 확 묻어버릴까요.”
회화루주는 계속 비웃는 대신 자리에서 대뜸 일어나더니 왈패의 뺨을 쳤다. 짝! 소리와 함께 졸지에 뺨을 또 맞은 왈패는 한 손으로 제 얼굴을 붙잡고 고개를 숙였다.
“어떠냐. 그 여인이 이것보다 아프게 때리더냐?”
“…….”
숨막히는 정적이 내려앉았다. 눈치가 있다면 여기서 회화루주의 공격이 더 아프다고 해야 했다.
회화루주는 미간을 찌푸린 채로 다시금 왈패의 뺨을 쳤다. 이번에는 약간이지만 내공도 실었다. 짜악- 소리가 방 내에 울려퍼졌다.
“죄송, 죄송합니다.”
그런데도 사내는 죄송하다는 말만 반복했다. 그제서야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챈 간부들이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루주님. 그 여자는 아무래도 내공을 싣지 않았겠습니까? 분명 힘깨나 썼을 겁니다.”
“원래 많이 맞으면 감각이 둔해진다고 하지 않습니까. 멍청한 놈이라 제가 아픈지도 모르는 모양입니다.”
이쯤 되니 회화루주도 오기가 치밀어 올랐다.
회화루주는 아예 한쪽 소매를 걷어붙이고 사내의 뺨을 후려쳤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사내가 벽까지 튕겨나가자, 회화루주는 그제서야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꼴도 보기 싫으니 멀리 치워라.”
“예, 루주님.”
기절한 왈패를 끌고 사라진 수하들을 지켜보던 회화루주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왈패 놈들을 멀쩡히 돌려 보냈으니 흑도일 가능성은 낮았다. 흑도였다면 못해도 손가락이나 귀 정도는 잘라 보냈을 테고, 가끔 심한 놈들은 팔을 잘라 보내기도 했으니 말이다.
‘손속이 딱 정파인데.
듣자하니 복장부터가 도인 같다고 했다. 애초에 아미파의 승려라면 면사를 쓸 이유도 없다.
회화루주는 간부들의 면면을 차례차례 훑었다. 회화루주가 관리하는 주루는 총 세 개. 전부 불법과 합법의 선 사이에 애매하게 걸쳐 있는 것들이었다.
미약하지만 관과도 연이 닿아 있었다. 어찌 탐관오리들이 난세에만 존재하겠는가. 아무리 황제가 법을 엄중히 세우려 한다 해도, 흑도는 흑도 나름의 방식이 있었다.
일단 돈을 먹여보고, 난색을 표하면 여인을 같은 방에 밀어 넣었다. 그리고 춘약을 탄 향초를 살살 피워 올리면 열에 아홉은 넘어왔다. 그 순간부터 관리는 빼도 박도 못하게 된다. 장부에 기록이 다 남아 버렸으니, 얌전히 돈을 받아먹고 쉬쉬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회화루주는 여태 그렇게 살아왔다. 영리하고 비열하게 처신한 것이다.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진짜 여고수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건장한 사내 셋을 가지고 놀았다는 것에서 제대로 싸울 줄 아는 무인임은 분명했다.
“여기까지 찾아올 때까지 기다릴 필요는 없겠지. 매 각주.”
“예, 루주님.”
“굳이 집안에서 난장판을 벌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그대는 어찌 생각하나?”
“맡겨만 주신다면 완벽하게 마무리하고 오겠습니다.”
회화루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녀오시오. 수하들도 적당히 끌고 가고.”
“예.”
“그리고 운 각주는 적당히 발이 날랜 놈들 몇 데리고 매 각주를 뒤따라 가게 해. 감당하지 못할 고수다 싶으면 보고하라고.”
“그리 하겠습니다.”
“할 말은 끝났으니 이제 물러들 가라.”
“예, 방주님.”
간부들이 모두 사라질 때까지 회화루주는 가만히 앉아 방 안을 둘러봤다.
적당히 헛된 희망이나 심어줄 생각으로 여고수를 운운했건만, 예화 그 멍청한 년이 진짜로 해낼 줄은 몰랐다.
‘다음에는 그냥 패야겠군.
회화루주는 혀를 차며 바깥으로 나갔다.
*****
서연이 곧장 회화루로 향하지 않고 근처에 있는 철방부터 들른 것은 무기를 사기 위함이다. 비록 가짜 심검이 있기는 하나, 섣불리 내보일 무기는 아니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검 한 자루만 차고 다녀도 삼류 왈패들이 쉬이 접근치 못할 것이라는 계산도 있었다.
철방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 나이 지긋한 주인이 서연을 맞았다. 구릿빛 근육이 선명한 것이, 마치 오랫동안 외공을 익힌 무인처럼 보일 정도였다.
“찾으시는 거라도 있으시오?”
“여인이 쓸만한 검 좀 골라주시겠어요?”
“연검, 장검, 단검 중에 어떤 검 말씀이시오?”
“장검으로 부탁드립니다.”
주인은 서연의 몸을 쓱 훑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치수를 가늠하는 듯했다.
“이쪽으로 오시게.”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후끈한 열기가 온몸을 감쌌다. 쇠망치 소리 우렁찬 곳을 지나니, 몇 자루의 장검이 놓인 탁자에 다다랐다.
“예전에 용봉지회가 열렸을 때 납품하고 남았던 것들이오.”
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날을 살폈다. 목검을 만들어 본 경험이 있었기에, 검을 보는 눈은 제법 있었다. 이 정도면 단연 상품(上品)이었다.
“이걸로 할게요.”
서연의 결정에 철방 주인은 잠시 기다리라 청하고는, 숫돌을 돌려 다시금 검날을 갈았다. 안 그래도 날카로웠던 검은 빛을 받아 번들거릴 정도로 영롱하게 빛났다.
철방 주인은 서연을 쳐다보지도 않고 나직이 물었다.
“이 근방에선 못 보던 분인데, 새로 이사라도 오셨소?”
“네.”
“이 일을 오래 하다 보니, 검을 사러 오시는 분들의 눈빛만 봐도 대충 어떤 분들인지 짐작이 가오. 그저 새 무기를 자랑하러 오시는 분도 있고, 별생각 없이 오시는 분들도 있고, 아니면 아예 누군가를 해코지할 생각으로 오시는 분들도 있소. 헌데, 아주 가끔 손님 같은 분들이 찾아오시오.”
철방 주인은 가죽 검집에 검을 집어넣으며 말했다.
“누구와 싸우시려는지는 모르오나, 무운을 빌겠소.”
“…….”
서연은 잠시 철방 주인과 눈을 마주쳤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무림에 발을 걸친 사람이라 그런가, 눈썰미가 남달랐다.
서연은 장검을 가볍게 휘둘러보았다. 처음 잡아보는 검이었으나, 그 궤적이 참으로 유려했다.
‘…….
크게 분노했던 탓일까. 평소라면 온갖 염려가 몰아쳤을 심상 속은 고요하기만 했다. 지켜야할 것이 있는 자들의 마음가짐이 이러할까.
예화에게서 회화루의 수준을 전해들은 서연은 제 승산을 아주 높게 쳤다. 예화는 생각보다 많은 것들을 알고 있었다. 간부는 몇 명인지, 어떻게 생겼는지, 어떤 무기를 사용하는지, 내부 구조는 어떻게 되는지.
그때서야 서연은 예화 또한 아주 오랜 세월 마음속으로 칼을 갈아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만 그 칼을 다룰 능력이 없어, 맞고 또 맞으면서 견디기만 했던 것이다.
강호가 이렇다.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려면 결국 직접 나서서 싸워야 한다.
서연은 도로 납검하고는 결심을 마쳤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철방 바깥으로 나서자, 화련과 예화가 나란히 서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홑몸이었다면 이대로 예화를 따라가면 그만이었으나, 화련이 문제였다. 데려가자니 위험했고, 그렇다고 이곳에 두고 가자니 야산을 오르다 해코지라도 당할까 염려스러웠다.
일단 적당한 곳에 맡기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래서 이웃이 있는 게 좋다는 것이로구나.
서연은 내심 좁은 주변 관계를 한탄했다. 그런 한숨을 다른 뜻으로 받아들였는지, 화련과 예화는 서서 눈치만 볼 뿐이었다.
서연은 괜히 주변을 훑었다. 객잔에 혼자 두고 갈 수도 없고, 마땅히 맡길 장소도 없었다. 진지하게 백호에게 부탁해야 하나 하는 생각마저 들 지경이었다.
그때, 전방에 몇 명의 무인들이 말없이 걸어가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은 하나같이 초록색 무복을 입고 있었는데, 등 뒤에는 '맹(盟)' 자가 크게 새겨져 있었다.
하남 일대의 치안을 관리하게 되었다는 말이 거짓이 아니었는지, 맹원들은 걸음을 옮기면서도 행인들의 행색을 샅샅이 확인했다. 괜한 불안감을 퍼뜨릴 수 있었기에 그저 눈으로 훑어보는 수준에 불과했지만, 그것만으로도 흑도를 구분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시선에서부터 느껴졌다.
자신들을 향하는 시선을 느꼈는지, 걸음을 옮기던 맹원들이 일제히 돌아섰다. 서연이 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사이에, 제일 뒤에 서 있던 남자가 미간을 좁힌 채로 서연을 빤히 쳐다봤다.
“……맞는 것 같은데.”
“나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죽립에 면사, 거기에 여자아이와 동행하시는 분은 흔치 않지.”
들으라고 저러는 걸까.
곧 처음에 입을 열었던 사내가 앞으로 나서며 공손히 물었다.
“혹, 서연 님 되십니까?”
“그렇긴 합니다만.”
“염이선이라 합니다. 장산 조장님께 이야기 전해 들었습니다. 그때는 사정이 있어 직접 뵙진 못했지만, 이리 만나 뵙게 되어 인사드립니다.”
서연도 얼떨결에 따라서 고개를 숙였다. 듣자하니 그때는 밥 심부름을 나가 서연을 만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혹 어디로 향하시는 길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저희가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기꺼이 돕겠습니다.”
“일이 바쁘진 않으신가요?”
“지금은 순찰 시간이라 괜찮습니다.”
사실, 혹여 서연을 만나게 되면 하던 일도 전부 내려놓고 나서서 도우라는 엄포를 들었기 때문이었으나, 그 이야기는 쏙 빼놓았다. 무림맹원들도 그 정도 눈치는 있었다.
서연은 다시금 무림맹원들의 심성에 감탄했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제 제자를 잠시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부탁이라 하심은?”
서연은 비룡각에서 예화를 만나게 된 것부터 지금까지의 상황을 간략히 설명했다.
“…그리하여 회화루로 갈 생각인데, 제자를 마땅히 맡길 곳이 없습니다.”
“그, 혹 회화루에 혈교나 마교라도 있습니까?”
“예?”
“……헛소리였습니다. 무시하셔도 됩니다.”
염이선은 난처한 얼굴로 화련을 응시했다. 열 살도 안 되어 보이는 꼬마를 맡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나, 그 다음이 문제다.
‘엄청 무서운 분이시라 들었는데.
막상 만나보니 또 아닌 것 같아 염이선은 혼란스러웠다. 초면부터 기세를 뿜어내셨다면 납작 엎드려 알겠습니다만 반복했을 터. 허나 지금은 진정 제자를 맡기고자 하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들이 일을 해결하지 못해 직접 나서게 되었다고 문책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경험상 이런 경우는 동행하는 것보다 뒤를 밟는 쪽이 현명했다. 본래 흑도란 위기 탐지 능력만큼은 기가 막혀서, 상대가 저보다 많거나 조금이라도 강한 것 같으면 도망치려는 습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분명 노강호께서도 그걸 아시고 혼자 나서시려는 것이리라.
‘일단 조장님께 보고는 드려야겠다.
잠시 서연의 눈치를 살피던 염이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제자분은 저희가 맡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서연은 그렇게 말한 다음, 무릎을 숙여 화련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었다.
“다녀오마.”
염이선과 맹원들은 홀연히 사라지는 서연의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서연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가서 보고부터 드리고 오는 것이 좋겠다. 옷도 눈에 안 띄는 걸로 갈아입고.”
경공으로 달려가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터였다. 노강호의 제자야 업고 가면 될테고 말이다.
저들끼리 상의하는 맹원들을 가만히 지켜보던 화련이 나지막이 말했다.
“저는 화련이라고 해요.”
“나는 염이선이라 한단다. 내가 업어줄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염이선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화련은 껑충 뛰어서 순식간에 담벼락 위로 올라갔다. 어린 소녀가 보일 만한 경공은 아니었으나, 그 눈빛에는 경멸이 잔뜩 담겨 있었다.
“어…….”
“싫어요.”
화련은 경계심 가득한 표정으로 염이선을 노려보다가, 이 장(丈)이 넘는 거리를 좁혀 원래 자리로 되돌아왔다.
"저 혼자 갈 수 있어요."
염이선은 입을 다문 채로 고개만 끄덕였다. 문득 열 살 넘게 차이 나는 앙칼진 막내 누이가 눈 앞에 아른거렸다. 한참 말 안 들을 나이라는 것이다.
'왜 맡기고 가신지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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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연 일행은 진령산 방향으로 향했다.
산길을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묘한 악취가 코를 찔렀다. 짐승의 사체가 썩어 문드러지는 듯한 역겨운 냄새였다.
“여기서 잠깐 기다리시오.”
팽무성은 일행을 멈춰 세우고 구덩이로 다가섰다. 그는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자신의 도를 구덩이 속으로 찔러 넣었다가 뺐다.
찐득한 무언가가 도신을 타고 흘러내렸다. 오래전 썩어내린 사체의 핏물이었다.
“…….”
화련이 미간을 좁혔다. 진득한 사기를 보아하니 한두 마리가 묻혀 있는 것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아직은 검수보다 방술사로서의 경험이 많은 화련이었다. 진령산에 들어서기 전부터 대기를 메우던 사기의 정체가 이제야 분명해졌다.
암단화는 냉기, 다른 말로는 음기를 품은 영약이다.
빙설로 뒤덮인 땅이 아니라면, 지맥의 기운을 받아 자라는 영약이 양기를 품는 것이 자연의 이치. 허나 이 이치를 꿰뚫고 억지로 음기를 머금게 하는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사기 또한 음기의 일종이었다. 이따금 공동묘지에서 음기를 잔뜩 품은 영약이 나타나고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물론 평범한 묘지가 내뿜는 사기는 그저 그런 수준이라서, 나오는 영약의 수준도 기껏해야 십년 하수오 정도에 비견될 수준이었다.
허나 산 전체를 시체로 가득 메운다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암단화 만한 영약이 자랄만도 했다.
화련은 속으로 혀를 찼다.
‘산 전체가 재배지였구나.
녹림이 헛소문을 퍼뜨리고 길목을 막아선 이유가 명백해졌다. 이토록 진동하는 시취라면 일반인조차 이상함을 알아챌 터였다.
사천당문이 연루되었다는 말 역시 신빙성이 있었다. 암단화는 영약이기 전에 독초다. 이만한 음기를 머금은 독초는 사천당문으로서도 쉽게 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산 전체를 재배지로 만들려던 모양이오.”
팽무성도 곧 그것을 알아챘다. 온 산이 구덩이로 가득했다. 짐승의 사체만 들어있을 리 없었다.
‘지독하다.
팽무성의 표정이 심각하게 굳어졌다.
산 깊숙이 들어갈수록 호흡할 때마다 지독한 사기와 음기가 혈도 속으로 스며들었다.
이렇게 되면 마치 빙공에 당한 사람처럼 운기의 수발이 느려지고, 몸 또한 둔해지기 십상이었다.
녹림도가 어찌하여 진령산 주변만 철저히 지키고, 정작 산 안쪽은 내버려두나 했더니 이런 내막이 있었던 것이다.
‘이 자체로 독이나 다름없구나.
팽가의 독문무공인 혼원벽력신공(混元霹靂神功)을 익혔는데도 이 정도였다. 일반적인 심법을 익힌 무인이었다면 자신의 곱절은 몸이 굳었을 것이다.
팽무성은 둔해진 감각을 되찾고자 끊임없이 손을 쥐었다 폈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돌려 서연을 응시했다. 서연은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놀라운 것은 그녀의 등에 안긴 화련 또한 멀쩡해 보였다는 점이다.
아무리 정순한 도가의 심공을 익혔다 한들, 매 순간 기를 발산하지 않고서야 저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피독주라도 물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종남 장문인에게 받았던 영목으로 된 각패의 비호를 받는지도 몰랐다.
청목족들이 신으로 모시는 나무라고 했다. 그 자체로 신령스러운 기운을 풍겨 사악한 기운으로부터 보호받는다는 이야기도 들어본 적이 있었다.
민간에서는 여전히 전설처럼 여기는 말이다. 팽무성 또한 천명검에 합류하고 몇 년이 지나서야 알게 된 사실이었다.
사악.
허공을 가르며 다시금 유혼이 서연의 어깨 위로 날아들었다. 유령처럼 날갯짓 소리 하나 없이 내려앉는 그 모습은 신비롭기 그지없었다.
“저쪽으로 가면 될 듯 합니다.”
언제부터인가 서연이 앞장서고 있었다. 말려드는 듯한 느낌이 들었음에도 팽무성은 서연을 뒤따르는 것 말고는 달리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저벅.
산속이 사기로 물든 탓에 그 흔한 벌레 울음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 때문인지 발소리가 유독 크게 울렸다.
서연은 담담한 걸음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시체는 어렸을 때 질리도록 보았던 탓에 익숙했다. 다만 제 등에 안겨 있는 제자가 문제였다. 이런 곳에 오래 머물게 하고 싶지 않았다.
“팽 공자. 속도를 높여도 될까요?”
“……그러도록 하시오.”
우웅!
결심한 순간 전신에 맺혀 있던 진기가 격렬하게 맥동했다. 산 전체에 깔린 막대한 사기는 서연의 신체에 어떠한 영향도 주지 못했다.
찰나지간에 신형이 앞으로 쏘아지며 잔상을 남겼다. 이형환위(移形換位)라 착각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속도였다.
팽무성은 경악으로 가득 찬 표정을 지었다.
‘무슨 속도가……!
적진 한복판에서 자신의 신법을 자랑하기라도 하려는 것인가. 팽무성은 온 기운을 발끝에 집중시킨 다음 황급히 뒤쫓았다.
파악!
그 역시 내로라하는 고수이자 팔대세가 중 하나인 하북팽가의 장자였다. 고절한 신법을 펼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서연의 뒤를 따라잡았다.
달리는 와중에도 진기를 억지로 순환시켜 체내에 쌓이는 사기를 해소하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럼에도 평소보다 내력 순환에 어려움을 겪었다. 자신이야 철저한 훈련을 거쳤으니 그렇다 쳐도, 서연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것은 도무지 납득할 수 없었다.
‘……무리하고 있는 것 아닌가?
오죽했으면 적진에 도달하기도 전에 서연이 탈진할 것 같다는 생각이 먼저 들 정도였다.
팽무성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지금 속도로 가도 괜찮겠소?”
“괜찮습니다.”
서연의 속내는 사뭇 달랐다. 주변을 샅샅이 살피며 가느라 속도를 더 내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오가며 매복한 산적 무리를 다섯이나 보았다. 속도를 높여 빠르게 지나가지 않았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알 수 없었다.
‘정상에 가까워질수록 인기척이 많다.
서연은 미간을 좁히며 걸음을 멈췄다. 팽무성 또한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처음보다 호흡이 약간 거칠어져 있었다.
“사방이 녹림도로 가득하구려. 이전처럼 빠르게 주파하는 것은 무리겠소.”
사기가 점점 짙어졌다. 그 말은 저 앞을 지키고 있는 녹림도 또한 보통 무인들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위로 가겠습니다.”
“……위라니?”
탓!
서연은 곧장 나무의 튀어나온 부분을 밟으며 하늘로 솟구쳤다.
파라락!
옷자락이 펄럭이며 나뭇가지를 딛는 몸놀림은 맨발로 땅을 딛는 것처럼 유려하기 그지없었다.
“……허.”
팽무성의 허탈한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팔보다 얇은 나뭇가지를 딛고 나아가는데도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얼핏 들으면 바람 소리로 착각할 만큼 미미했다.
‘청목족 혼혈이라도 되는 것인가.
이쯤 되니 진지하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종남파에서 저만한 보신경을 가지고 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청목족은 영생에 가까운 시간을 산다고 했으니, 어쩌면 손녀가 아니라 진짜로 종남 장문인의 숨겨진 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보신경만큼은 천하 일절이라더니.
팽무성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서연을 뒤따랐다. 서연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은밀하게 나아간다는 목적만은 지켜냈다.
화아아악!
빽빽하게 솟은 나무 위까지 경계할 정도로 철저한 녹림도는 없었다. 설령 있다 한들, 작정하고 인기척을 감춘 서연과 팽무성의 실력을 감지할 정도로 뛰어난 자는 없었다.
멀지 않은 곳에 동굴이 보였다. 입구에 꺼진 횃불이 놓여 있었는데, 동굴에서 새어 나오는 음기에 영향을 받은 듯 축 늘어져 있었다.
‘제대로 찾아왔다.
서연은 주위를 둘러보고 인기척이 없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조심스럽게 발을 디뎠다.
어둠에 영향을 받지 않는 시야를 타고났다. 음기로 가득 찬 동굴 속이 대낮처럼 환히 보였다.
그때, 동굴 벽면에서 인영이 일렁이는 것이 보였다. 서연이 다가오는 것을 그제야 눈치챘는지,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품속에서 다급히 무기를 꺼냈으나, 서연의 발검이 곱절은 빨랐다. 어느새 빛무리가 일렁이는 검이 상대의 목덜미에 들이밀어져 있었다.
“항복입니다.”
여인보다는 소녀에 가까운 목소리였으나, 놀랍게도 겁에 질린 기색은 없었다.
연녹빛 눈동자가 서연을 빤히 응시했다.
“구파의 도인이신 듯 한데, 검을 거두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자색이 뒤섞인 짧은 흑발에 녹안을 지닌 여인이었는데, 그녀가 입고 있는 녹빛 경장(輕裝)이 유독 눈에 띄었다.
“이곳까지 오신 이유를 대충 알겠습니다. 암단화 때문이지요? 저 역시 그것 때문에 왔습니다.”
“입을 열어도 된다고 한 적은 없는데.”
서연은 무정하게 느껴지는 말투로 말했다. 목을 언제든 벨 수 있다는 허장성세를 부리기 위함이었다.
“그러면 물어보십시오. 만족하실 때까지 답해드리겠습니다.”
담담한 말투에서부터 성격이 드러났다. 죽음이 두렵지 않다기보다는, 애초에 사람 자체가 무감정한 듯했다.
“사천당문에서 왔나?”
“그렇습니다. 현 가주께서 제 아버지 되십니다.”
예상보다 더 거물이었다. 서연의 얼굴에 경계심이 한층 짙어졌다. 순순히 답변하는 척하다가 독을 뿌릴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이곳에서 무슨 짓을 하고 있던거지?”
“저도 정확히는 모릅니다. 다만 가문의 오 장로가 연루되었다고 짐작하고 있는 중입니다.”
“오 장로?”
“칠 년 전에 파문되었던 인간입니다. 절차대로라면 사지근맥을 전부 자르고 독단도 부쉈어야 했는데, 가주께서 쓸데없이 정이 많으신 분이시라 몸 성히 쫓겨났었지요.”
곧 그녀의 무감정한 시선이 서연의 뒤편에 있는 팽무성을 향했다.
“이런 식으로 가문의 명예를 더럽힐 줄 알았다면 억지로라도 목을 쳤을텐데 말입니다.”
팽무성이 입을 뗐다.
“녹림이 아무리 미련하다 해도 옛적에 파문당한 장로에게 속아 넘어갔을 것 같지는 않다만.”
“공표하지도 않은 사실을 무지렁이들이 어찌 알았겠습니까.”
“듣기로는 폭우이화침도 가지고 있다던데.”
“그 사실은 저희도 안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저희라는 말을 들은 팽무성은 혀를 찼다. 여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동굴 곳곳에서 날카로운 기파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명색이 사천당문의 직계다. 어찌 홀로 보냈겠는가.
곧 사방에서 녹색 옷을 입은 무사들이 우수수 나타났다. 하나같이 예사롭지 않은 기세를 풍겼다.
“패검대의 팽무성인가.”
“아가씨를 놓아드리도록.”
일갈하려던 것을 억지로 참고 노기를 다스리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동굴에 잠입한 상황이 아니었다면 진작에 출수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매서운 기세를 풍겼다.
허나 서연은 여전히 검을 거두지 않았다.
츠츳!
오히려 검 끝에 맺힌 진기가 이전보다 더욱 세찬 기운을 내뿜었다. 어두웠던 동굴 내부가 순간적으로 밝아졌다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진정 해보겠다는 건가……!”
당가의 무인들이 나섰다. 그중에는 당장이라도 비도를 출수할 것처럼 구는 무인들이 적지 않았다.
중원에서 독으로는 제일이라 했다. 시야를 새외까지 넓혀야 비로소 견줄 만한 집단이 생길 정도였다.
그때였다.
“그만.”
서연에게 목이 겨눠진 여인이었다. 그녀의 연녹빛 눈동자가 서연을 빤히 응시했다.
처음으로 놀라움이라는 감정을 비추고 있었다.
“내려오십시오. 들켰습니다.”
“…….”
당가 무인들의 움직임이 일제히 굳었다.
여인은 제 목에 칼날이 닿는 것을 아랑곳하지 않고 고개를 치켜들었다.
“두 번 말해야 합니까?”
그제서야 천장에서 한 사내가 착지했다. 다른 당가 무인들보다 어두운 색상의 옷을 입고 있었다.
여인이 서연을 보고 말했다.
“이제 되었습니까?”
서연은 그제서야 납검했다. 저쪽에서 먼저 출수하기는 했으나, 피아 식별이 되지 않은 상황이었으니 그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다.
상황 자체가 이들의 결백을 증명했다. 만약 이들이 적이었다면 이런 식으로 나서지 않았을 것이다.
무엇보다 팽무성과 안면이 있는 듯했다.
“당소소(當小小)라 합니다. 그쪽은?”
“서연이라 합니다.”
당소소는 여전히 무표정했다. 다만 눈가에 묘한 흥미가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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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싸움에서 밀리거나 기세에 눌린다 싶을 때 바로 무기를 뽑아 드는 것은 무림인의 흔한 버릇이었다. 이는 논리도 명분도 부족하니 결국 힘으로 해결하려는 치졸한 발상인데, 문명인인 서연의 눈에는 실로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상대가 자신보다 얼마나 강한지도 모르면서 무턱대고 칼부터 뽑는단 말인가? 칼을 뽑는 순간 필시 둘 중 하나는 피를 보기 마련인데, 흑도든 백도든 자신이 패배할 거라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는 것이 참으로 안타까웠다. 허나 그녀가 검을 뽑지 않은 이유는 비단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스승은 제자의 거울이라 했다. 하찮은 모욕 몇 마디에 화를 내며 칼을 뽑는다면, 화련이 그 모습을 그대로 따를까 염려되었던 것도 있었다.
물론 운초아가 선을 넘었다면 이야기가 달라졌을지 모르나, 적어도 아직까지는 선을 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무기를 뽑지 않았기 때문이다.
범부들과는 그릇부터 달랐기에 할 수 있는 생각이었다.
허나 버릇은 고쳐놓을 생각이었다.
고등학생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가 저리 패악질을 부리니, 윗 사람들이 어찌 키웠을지 눈에 훤했다. 다른 자제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런 놈들을 내버려뒀다간 나중에 제자가 컸을 때 세상이 어찌 될지 눈에 훤했다.
“어찌, 사마외도처럼 생겼습니까?”
서연은 그렇게 말하며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흔치 않은 얼굴이라, 어디서 봤다면 쉬이 떠올릴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 말하며 사내들을 하나씩 응시하자, 사내들이 호응하듯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서 소저 말이 맞소!”
“내 백부께서 무림맹에 계시오만, 용모파기를 아무리 떠올려봐도 서 소저같은 미인은 본 적이 없소이다.”
“용모파기에 담기지 않을 외모요.”
사내들의 눈빛에는 그새 흠모와 찬탄의 빛이 깃들어 있었다.
사내라면 열이면 열 좋아할 얼굴이오, 설령 여인이라도 동경하고 따를만한 외모였다. 더구나 타고난 몸매도 좋았다.
물론 운초아도 예쁘장한 얼굴의 소유자였지만, 서연과는 감히 비교할 것이 못 됐다. 그 일례로 방금 전까지 운초아에게 호응하던 사내들이 그녀에게서 한 걸음씩 멀어지고 있었으니 말이다.
“근본도 없는 년이!”
기세에서 밀린 운초아가 가차없이 말했다. 더 이상 멸시하는 어조를 숨기지 않았다.
“그까짓 얼굴을 드러냈다고 하여 사마외도라는 의심을 벗을 수 있으리랴 생각했나?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조각가가 거금을 선뜻 내어 후기지수들만 탄 배 위에 올라탔다. 살수라는 의심이 절로 든다. 아니, 어쩌면 사내들을 노리고 탄-”
운초아는 색녀일지도 모른다는 말을 차마 내뱉지 못한 채로 입을 다물었다. 누군가 짙은 살기를 자신에게 뿜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누가?
서연은 아니다. 어디 한 번 해보라는 얼굴로 쳐다보고 있기는 하나, 적어도 살기를 풍기지는 않았다.
운초아는 식은땀을 흘리며 다급히 주변을 돌아보았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사내들이 당황했으나, 운초아의 시야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마침내, 운초아의 시선 끝에 한 소녀가 들어왔다.
서연과 같이 탄 이후로 줄곧 탁자에 앉아 음식을 먹고 있던 화련이었다.
“…….”
화련은 죽일듯한 눈동자로 운초아를 노려보고 있었다.
말도 안되는 살기다. 식은땀이 절로 흘렀다.
화련은 주변을 돌아보다가, 자신에게만 보이는 각도로 입을 달싹거렸다.
- 한마디만 더 해봐라. 그 창자부터 찢어주마.
그러면서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는데, 그 소리가 너무 작아 집중하던 운초아 말고는 아무도 듣지 못했다.
“허억!”
“끄으윽!”
곧 운초아의 호위들이 짙은 복통을 호소하며 주저앉았는데, 심한 내상이라도 입은 것인지 입에서는 검은 피를 줄줄 흘려댔다.
내력 차이가 너무나도 컸기에 발생한 일이었다.
애초에 화련은 천하삼대방파인 모산파의 후계자요, 내로라하는 후기지수 중 하나였다.
이까짓 ‘자칭’ 후기지수들과는 비교될 수준이 못 되었다.
‘이게 대체…….
운초아는 갑작스럽게 변한 상황을 도저히 따라갈 수 없었다. 다시 화련의 전음이 뇌리에 스쳤다.
- 네 년은 스승님께서 직접 계도하실 것이다.
그리 말하고는 아무 일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려 다시 음식에 집중하는 화련이었다. 겉으로 보기엔 그저 식탐만 많은 줄 알겠지만, 실상은 식사를 하는 젓가락으로 은근슬쩍 진을 그리고 있었다.
‘스승님께서도 묵인하셨다.
진을 보고도 아무 말씀 없으셨으니, 어느 정도 마음대로 행동해도 좋다는 뜻이리라.
‘사내들이란.
금진송을 제외하고는 죄다 한 패나 마찬가지였다. 하나같이 죽일 놈들이라는 것이다.
먼 과거 금분세수하여 함부로 살생을 하지 않는 스승님을, 잡것들이 뭣도 모르고 모욕했다.
‘소림의 방장대사도 아래로 볼 배분이거늘.
백 번 죽여도 쌌다.
배에 탄 순간부터 만약의 상황에 대비하여 진법부터 그려놓고 있었다. 무슨 진법이냐. 전서구를 소환하는 진법이라 할 수 있겠다.
‘운가의 초아, 만(萬) 가의 도오, 풍(馮) 가의 문연…….
순식간에 금진송을 제외한 자제들의 이름을 휘적인 화련은 종이를 냅다 바다로 던졌다. 곧 하늘에서 새 한 마리가 나타나 종이를 덥썩 물고 어디론가 날아갔다.
무림맹 지부가 있는 방향이었다.
저번에 염이선과 동행했을 때 지부의 위치를 미리 알아둔 덕분이었다.
‘본가로 돌아가도 지옥을 보게 해주겠다.
종이에는 자제들이 서연에게 어떠한 무례를 저질렀는지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무림맹원들이 머저리가 아니라면 상황의 심각성을 알았을 터, 직접 나서지 않고는 못 배길 것이다.
거파의 장문인보다 더한 자를 모욕했다. 가문에서 쫓겨나도 이상하지 않았다.
어쩌면 제대로 조지기 위해 대주급을 불러올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화련이 다시 손가락을 튕기자, 이번에는 자제들이 반응했다. 하나같이 꿀렁이는 배를 부여잡더니, 이마에서 짙은 땀방울을 흘려댔다.
운초아와 금진송만이 예외였다.
“끄, 끄으으…….”
설사였다.
허나 갑판 아래로 내려간다고 해도 해결할 수는 없을 것이다. 화장실을 망가뜨려놨으니 말이다.
남은 방법은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바지에 지리거나, 수치를 무릅쓰고 바다 밖으로 둔부를 내미는 방법 뿐이다.
잘난 방술사가 이래서 무섭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기 때문이다.
“허억, 허억…….”
“윽, 으그극!”
“도련님?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호위들이 다급히 달려와 배를 붙잡고 쓰러진 자제들을 일으켜 세웠다. 주변을 경계하는 호위들도 있었나. 허나 자제들은 그러건 말건 울음이라도 터질 것 같은 얼굴로 입술을 악물고 주변을 황급히 두리번거릴 뿐이었다.
‘갑자기……. 배가 왜…….
‘죽는다……. 말하면 죽는다…….
다들 혼절할 것 같은 심정으로 호위의 옷자락을 꽉 붙잡았다. 온 내공을 괄약근에 끌어모으는 이도 있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한 운초아가 사내들을 붙잡았지만, 사내들은 온 힘을 쥐어짜내 운초아를 밀어내고는 화장실로 향했다.
“꺼져라!”
“비켜!”
그 힘이 어찌나 강한지, 운초아가 형편없이 밀려날 정도였다.
운초아는 반쯤 넋이 나간 얼굴로 사내들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제 호위들은 피를 토한 채로 엎어져 있고, 제 편이었던 사내들도 죄다 아래로 내려가 버렸다.
“이게 무슨…….”
황망한 것은 금진송도 마찬가지였다.
‘설마?
그새 음식이 상했을 리가 없었다. 당장 금진송 자신도 음식을 집어먹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모르는 사이에 독을 탄건가?
‘허나 그렇다기엔, 저 아이가 음식을 가리지 않고 죄다 집어먹지 않았던가.
당장 지금도 음식을 끄적이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 식탐을 뚫고 독을 넣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서 더 당황스러웠다.
그때 운초아가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사, 살수였구나 네년! 처음부터 우리를 다 죽일 생각으로 배에 오른 거였어!”
자기도 저렇게 쓰러질까 두려웠던 것인지 운초아가 검집에 손을 얹고 뒤꿈치를 뒤로 밀어넣었다.
발검하려는 것이다.
저러면 진정 돌이킬 수 없게 된다.
‘나서야겠다.
금진송은 생각했다. 이러다가 진짜로 제가 초대한 손님이 큰 화를 입게 생겼다.
금진송은 눈짓으로 호위들과 시선을 맞추었다. 삽시간에 뜻을 알아챈 호위들이 고개를 끄덕이고 운초아의 곁으로 다가갔다.
허나 운초아가 검을 뽑는 것이 더 빨랐다.
촤악!
“네 입으로 배후를 들어야겠다!”
짧게 뇌까린 운초아가 검법을 펼쳤다. 서연의 팔을 자르려는 것이다.
“막아라!”
금진송이 다급히 소리쳤다. 호위들도 빠르게 반응했지만, 운초아를 따라잡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명색이 무가의 자제였다. 일개 호위들보다는 쌓아온 세월부터 달랐다.
운초아의 검이 서연의 팔에 닿으려는 그 순간이었다.
콰악!
서연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벼락처럼 검을 수직으로 뽑아 공격을 막아냈다. 그리고는 왼손으론 운초아의 얼굴을 꽉 틀어쥐었다.
“어떻…….”
어떻게, 라는 말을 운초아가 내뱉기도 전에, 서연은 팔을 휘둘러서 운초아를 바닥에 패대기쳤다.
패대기질을 반복할 때마다 쾅 하는 굉음이 울리며, 선상 바닥이 깊게 파였다.
쾅! 쾅!
“쿠엑, 쿠엑!”
운초아의 동공이 순식간에 흐려졌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종류의 고통이었다.
서연은 한 손으로 운초아의 얼굴을 들어올렸다 내려찍기를 반복했다. 내력은 싣지 않았다. 싹수가 노란 어린 것을 훈육하는 심정이었기 때문이다.
그럴 때마다 선상 전체에 큰 진동이 울렸는데, 그때마다 지켜보는 이들은 하나같이 몸을 움찔 떨었다.
‘역시 스승님이시다.
화련은 감탄하듯 서연을 응시했다. 뒤통수가 깨지기 직전까지만 내리치는 힘 조절이 기가 막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운초아는 두 눈을 까뒤집고 기절했다. 서연은 그런 운초아를 집어들고는, 선상 한쪽에 아무렇게나 내동댕이쳤다. 기이한 자세로 널브러진 모습이 마치 바닷바람에 널린 오징어 같았다.
서연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도로 납검하고는, 금진송에게 다가가 말했다.
“저 쪽이 먼저 공격했는데, 나중에 일이 생기면 공증을 서주실 수 있겠습니까?”
“얼마든지 그리하겠습니다. 서 소저께서 불편하실 일은 추호도 없으실겁니다.”
금진송은 속으로 감탄했다. 강호 무림을 주유하는 상인이라 간담이 큰 덕도 있었다.
‘진짜로 신분을 숨긴 고수였구나.
강호에서는 노인과 아이, 여자를 조심하라더니, 그 말이 딱 들어맞았다. 사문을 묻고 싶다는 생각이 굴뚝같았으나, 금진송은 가까스로 입을 다물었다.
어떻게든 환심을 사고 싶었기 때문이다.
여태 여인에게 헤벌레하는 사내들을 이해하지 못했던 금진송이었으나, 오늘만큼은 달랐다. 왜 주왕이 달기에게 홀려 파국을 일으켰는지 알 것 같았다.
‘참으로 아름답다.
오죽했으면 각예대회의 심사위원들을 매수하여 환심을 살 생각까지 들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렇게 된다면 아버지에게 죽도록 맞겠지만, 그 대가로 서연의 미소를 볼 수만 있다면 남는 장사라고 생각했다.
‘일단 뒷정리는 확실히 해야겠지.
무림인들의 은원은 확실하다 했다. 여기서 자신이 운초아와 그 일당들을 확실히 정리한다면, 서연 또한 만족할 듯싶었다.
‘납품도 몇 달 끊고, 주변 상인들에게도 눈치를 주면 알아서 말라죽겠지.
명색이 천하 오대 상단이었다. 고만고만한 무가 너댓 개 망하게 만드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친우? 원래 상인들에게는 모두가 친우이고, 동시에 남인 법이다. 맺고 끊음이 확실하다는 것이다.
다시 죽립과 면사를 둘러쓰는 서연을 보고, 금진송은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때 아닌 상사병에 걸린 금진송이었다.
*****
서연은 가는 도중에 배를 갈아타야 했다. 아래층에서 끔찍한 냄새가 올라왔기 때문이다. 다급히 바깥으로 도망쳐 나온 호위들의 신발에는 황갈색 무언가가 묻어 있었는데, 그것만으로도 돌아가는 상황을 대충 유추할 수 있었다.
이따금 아래층에서는 비명과, 푸드득― 하는 소리가 뒤섞였다.
다들 끔찍한 얼굴을 하고 있는 가운데, 화련만이 히죽 웃고 있었다. 어린아이가 똥 이야기를 좋아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기에, 다들 그러려니 했다.
졸지에 똥쟁이들을 친우라 소개한 꼴이 된 금진송은 얼굴이 벌개졌고, 곧 전서구를 보내 자신의 상단에서 새 배를 한 척 불러왔다.
“이쪽으로 갈아타시면 되겠습니다. 낙양까지 제가 모시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하하, 이 정도는 얼마든지 해드려야지요.”
서연이 고맙다고 할 때마다 금진송은 헤헤거리며 제 머리를 긁었다.
아무튼 그렇게 원래 탔던 유람선에는 똥쟁이 넷과, 운초아, 그리고 그들의 호위들만 남았다.
나중에 누가 배를 발견하면, 저들 모두 인간 취급을 못 받을 듯 싶었다. 왜 모두냐 묻는다면, 화련이 운초아의 복통은 하루 뒤에 일어나도록 조절했기 때문이라고 답하면 되겠다.
구조될 때 지릴 가능성이 높다는 소리다.
'하남의 다섯 똥쟁이. 보기 좋다. 어울려.'
다시 말하지만, 잘난 방술사가 이렇게나 무섭다.
화련은 히죽 웃으며 갑판 너머를 응시했다. 멀지 않은 곳에 낙양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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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연은 허공을 밟듯 사뿐히 내려섰다.
산산이 흩어진 파편들이 폭풍처럼 몰아쳤지만, 서연의 주변에 이르러서는 마치 보이지 않는 벽에 부딪힌 듯이 힘을 잃고 흩어졌다.
탁.
길게 늘어진 장포가 바람에 펄럭이며 주위의 모든 시선을 사로잡았다.
특히 당소소는 홀린 듯한 눈동자를 감추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고서 서연을 흝어보았다.
‘……아름답다.
일전의 일격은 당소소가 어찌 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호위대주가 미처 손도 써보지 못하고 휩쓸려 나간 것만 보아도 그 위력을 짐작할 수 있었다.
부월 끝에 실린 무게감부터 확연히 달랐다.
죽음을 직감했으나, 명색이 사천당문의 직계였다. 순순히 죽음을 받아들일 생각은 없었다.
부월이 제 육신을 가르는 순간, 핏물과 독을 함께 터뜨려 끔찍한 고통을 선물해주리라 다짐했다.
허나 서연이 그를 막아냈다.
그 검격이 어찌나 황홀했던지, 당소소는 죽음의 문턱에 서 있었다는 사실조차 잊은 채 멍하니 서연의 모습만을 좇았다.
사천당문의 역사를 통틀어 손꼽히는 재능을 지녔다. 그렇기에 서연의 검술이 본래 짧은 검을 다루는 검법을 변형한 것임을 한눈에 꿰뚫어 보았다.
‘저걸 단도로 펼치면 또 얼마나 아름다울까.
은신해 있는 호위대주를 간파했을 때부터 평범한 인물이 아님을 짐작했지만, 이토록 무공의 경지가 드높을 줄은 몰랐다.
“……쓸만한 조력자를 데려왔구나.”
곧 어둠 너머에서 산발의 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녹색 눈동자가 어둠 너머에서 야차처럼 번뜩였다.
사천당문의 전 오장로, 당위산(唐威山)이었다.
탁!
곧 그의 옆에 덩치 큰 사내가 착지했다.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엄청나게 날렵했는데, 그의 손에는 끝이 완전히 망가진 부월이 들려 있었다.
무시무시한 기세로 호위대주를 일격에 베어 넘기고, 당소소마저 격살하려 들었던 장본인이었다.
매서운 기파를 내뿜는 그 모습은 녹왕의 다섯 수제자, 녹림오호(綠林五虎) 중 한 명임을 짐작케 했다.
서연을 위아래로 흝은 그가 이죽거렸다.
“계집치고는 속도가 예사롭지 않군. 그 나이에 보일 수 있는 경지가 아닐진대, 죽립과 면사를 벗겨 직접 확인해봐야겠다.”
“그쪽이 느린 것 아닌가?”
“공격을 막으면서 진기를 대부분 소모했을텐데, 답지않게 허세를 부리는구나. 그 기세도 마음에 든다. 근맥을 끊어낸 다음 첩으로 삼아야겠다.”
그는 곧 등에 매여 있던 또다른 부월을 꺼내들었다. 녹왕의 제자들은 하나같이 무기를 소모품처럼 여기는 듯했다.
그때 옆에 있던 당위산이 끌끌 웃으며 말했다.
“방심하지 말게. 일전의 일격을 막아냈다는 것만으로도 후기지수라 불릴 수준은 아니니.”
어찌나 심후한 내공을 지니고 있는지, 당위산의 목소리가 공동을 가득 울렸다. 곡선같이 휘어진 눈동자가 당소소를 향했다.
“칠 년만이구나.”
주름진 얼굴에서 악살같은 미소가 올라온다. 본능적으로 거부감이 드는 미소였다.
“벌써 노부를 잊었더냐? 예전에 노부의 다리를 붙잡고 당과를 사달라고 졸랐던 것이 어제 일처럼 생생한데, 그새 이리 장성했구나.”
그의 말투는 마치 뱀이 혀를 날름거리는 듯했다. 서연은 당소소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당소소는 당위산의 말이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허공만을 멍하니 응시하고 있었다.
녹림오호가 픽 웃으며 말했다.
“온실 속 화초처럼 자라왔을테지. 호위의 죽음에 충격을 받아 정신을 놓기라도 한 모양이다.”
“…….”
당위산이 좁힌 미간으로 당소소를 노려보았다.
다른 명문세가라면 모를까, 당가의 직계들이 어떻게 자라나는지 아는 이라면 감히 그런 말을 할 수 없었다.
매 순간 죽음과 맞닿아 지내는 독인들이다. 호위의 죽음에 충격을 받았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무아지경?
하지만 그조차 아니었다. 당소소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리는 것을 보아, 조금 전의 검격을 복기하는 듯했다.
‘복기할 만한 것도 없었거늘.
당위산은 속으로 혀를 찼다. 혹 독이 뇌까지 미쳐 기혈을 갈무리하는 중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지는 높았을지언정, 재능은 당소소에 미치지 못했기에 생긴 오해였다.
당소소의 시야는 아직도 서연의 손끝에서 펼쳐지던 검격에 머물고 있었다.
죽음의 문턱에 이르렀기에 세상이 평소보다 느리게 흘렀다. 거기에 오성까지 더해졌다. 그렇기에 검결의 오묘함을 엿볼 수 있었다.
서연에게 목숨을 구원받은 것은 첫 번째 은혜였다.
직계의 목숨을 구했으니, 당문의 비급을 견식하게 하고 은공으로 모시는 것으로 그 빚을 갚을 수 있을 것이다.
허나 서연이 펼쳤던 검격.
그것은 목숨으로도 가치를 추산하기 힘들었다.
사천당문의 절기인 만천화우(萬天花雨)는 초대 가주가 직접 창안한 절기다. 허나 그것은 비도가 아니라 얇은 침 수천 개를 사용하여 펼치는 것이다.
허나 서연이 펼친 절기는 달랐다. 비도로 펼칠 수 있는 무학이다.
그것을 저를 구하면서 드러냈다.
‘아……!
당소소는 벅찬 숨을 가까스로 가라앉혔다. 그제야 가문을 등지고 마교에 투신했던 숙부의 마음을 온전히 헤아릴 수 있었다.
무릇 상승의 무학이란, 무림인에게 목숨보다 더한 보배였으니.
겨우 정신을 차린 그녀는 자신을 노려보는 당위산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서연에게로 한 발짝 다가섰다.
사박.
“당 가의 소소가, 은공께 인사드립니다.”
등 뒤에 무서운 적을 두고서도 조금의 망설임 없이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주변을 호위하듯 서 있는 당가의 무인들을 믿어서가 아니었다. 당소소 스스로가 자신의 목숨보다 이 일이 더 중요하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당씨 성을 가진 것들은 하나같이 정신이 나갔다더니!”
부월을 든 사내가 세차게 소리쳤다. 매서운 기파가 공동 내부에 절절히 울렸다.
“아가씨께서 은공께 온전히 예를 표하실 수 있도록 해라.”
당가의 무인들 중 우두머리 격의 사내가 그렇게 말했다. 곧 당가의 무인들이 일제히 앞으로 뛰어나갔다.
쩌엉! 쿵!
당가 무인들은 죽음이 두렵지 않은 사람처럼 덤볐다. 저보다 두세 수는 앞서는 고수를 향해 야차처럼 달려들었다.
“은공, 무엇이든 말씀하십시오. 제가 따르겠습니다.”
서연은 허리를 숙인 채 자신을 올려다보는 당소소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이걸 고지식하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정신이 나갔다고 해야 할까.
물론 그걸 따질 상황은 아니었다. 부월을 든 사내는 녹림오호라는 별호에 걸맞게 당가의 무인들을 오히려 압도하고 있었고, 정작 가장 위협적인 당위산은 나서지도 않은 상태였다.
서연은 당소소를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당 소저.”
“말씀하십시오.”
“제 제자를 부탁합니다.”
화련을 품에 안고 싸우는 것은 무리였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당소소의 곁에 두는 것이 나아 보였다. 그렇게 하면 당문의 무인들이 화련을 함께 지킬 것이기 때문이다.
당소소는 결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제 목숨을 바쳐 지키겠습니다.”
그 정도까지는 필요 없다고 말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사천당문은 참으로 고지식하구나.
고지식하다는 말로 넘길 수준은 아니었다. 차라리 광기라 해야 옳을 터였다.
어느새 팽무성이 서연의 옆에 나란히 섰다. 눈빛만으로도 그가 무엇을 하려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이전에 그랬듯, 먼저 나서겠다는 뜻이리라.
타악!
팽무성이 곧장 앞으로 뛰쳐나가 도를 횡으로 내질렀다.
“그 도격, 패검대로구나. 황태자의 개가 이곳까지 찾아왔어.”
당위산이 말했다.
천명검을 두려워하는 말투가 아니다. 완전히 사마외도의 길로 들어섰기 때문이다.
그는 독기를 양 팔에 휘감은 다음 그대로 일장을 내질렀다.
화아악!
팽무성은 거대한 도면(刀面)으로 독무를 막아섰다. 완전히 피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츠츳!
입에 머금고 있던 피독주가 타들어 가는 듯한 열기를 뿜어냈다. 기껏해야 반 각이면 그 효용을 다할 터였다.
그와 동시에 사각지대에서 비도가 날아들었다. 명색이 사천당문의 전대 장로였다. 팽무성보다 그 격이 명백히 뛰어났다.
쩌엉! 쩌엉!
팽무성의 도는 유독 큰 편이었다. 그 길이가 성인 남성의 상반신보다 컸다.
그럼에도 비도와 충돌할 때마다 세차게 흔들렸다. 만약 무게가 가벼운 도였다면 진작에 구멍이 뚫리고도 남았을 것이다.
빈틈이 없었다. 어떻게든 앞으로 나아가 검격을 내질러야 했으나, 당위산은 조금의 틈도 허용하지 않았다.
독무를 헤치고 나아가려 하면 온갖 종류의 암기가 사방에서 날아들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고작 다섯 걸음밖에 나아가지 못했다.
‘패검식이 결코 얕지 않거늘, 내 경지가 문제다.
패검대가 익히는 무공을 패검식이라 했다. 본래 무기를 가리지 않는 무학이지만, 검수가 많아 그리 불렸다. 만약 도를 쓰는 사람이 더 많았다면 패도식이라 불렸을 것이다.
황실의 대종사가 직접 창안한 무학이다. 뛰어난 오성을 지닌 팽무성조차도 대성하기 어려운 무공이었다.
제대로 입문한 것만으로도 재능을 인정받았으나, 그것만으로는 눈앞의 노괴를 상대하기에 역부족이었다. 당위산이 펼치는 것 또한 팔대세가의 절기였으니.
그 순간이었다.
촤아아악―!
한 걸음에 서연이 팽무성을 스쳐 지나갔다. 섬광이라 칭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속도였다. 뒤늦게 솟구친 바람이 팽무성의 전신을 거칠게 휘감았다.
“……!”
당위산은 다급히 양손의 비도를 교차해서 서연의 검격을 막아내려 했다.
허나 서연의 검과 맞닿은 순간 당황하여 비도를 놓을 수 밖에 없었다.
한 번의 충돌에 무기를 감싼 독기가 두부처럼 뭉그러졌다. 비도는 순식간에 두 동강이 났다.
이상함을 깨달은 즉시 무기에서 손을 떼고 물러났음에도, 찰나에 서연의 진기가 당위산의 손아귀를 파고들었다.
그는 양 손에서 느껴지는 아릿한 감각에 손을 쥐었다 폈다.
‘…….
조금만 더 나아갔으면 몸째로 베였을 것이다. 그는 황급히 전신의 진기를 폭발시켰다.
어둠 속에서 세차게 움직이는 그의 속도는 순식간에 몇 배나 빨라진 듯했다. 당문의 보법이라기보다는 살수의 보법에 가까웠다.
서연은 당황하지 않았다. 당문의 오 장로가 살수들의 교육을 담당했었다는 사실을 미리 전해들었기 때문이다.
그뿐이랴.
일합에 깨달았다. 자신이 더 강했다. 재능도 제가 더 뛰어났다.
다만 부족한 것은 실전 경험과 상대를 죽이겠다는 살의뿐이었다.
턱.
당위산은 품속에서 폭우이화침을 꺼내들었다. 겉보기에는 그저 둥근 원통일 뿐이지만, 내부 구조는 내로라하는 장인들조차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복잡했다.
돌출부를 누르면 동물의 털보다도 가느다란 침 수백 개가 한 번에 날아갔다. 내기를 담아 쏘아내면 웬만한 검풍으로도 막아낼 수 없었다.
침 끝에는 각기 다른 종류의 독이 묻어 있는데, 하나하나가 치명적이었다. 그중에는 내공 수발을 틀어막는 산공독도 열 종류나 있었다.
괜히 당가의 독문 암기라 불리는 것이 아니다.
물론 당위산은 폭우이화침만 믿을 생각이 없었다.
당위산의 눈동자에서 녹색 빛이 흘러넘쳤다.
치이익!
주변 대기가 녹아내리는 듯한 소리를 내며, 당위산의 전신 혈관이 꿈틀거렸다. 극독이 그의 내공을 물들였다.
‘제자라 했겠다.
오가는 말을 분명히 들었다. 당소소의 품에 안겨 있는 여아는 분명 저 여고수의 진전을 잇고 있다.
당위산은 일말의 망설임 없이 폭우이화침의 돌출부를 눌렀다. 폭발하는 듯한 소리와 함께 무수한 침이 서연에게로 쇄도했다.
본래 속도가 화살보다도 빨랐다. 거기에 당위산의 내기까지 실렸다. 평범한 무인은 비침이 날아드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할 것이다.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당위산은 독단에서 최심사혼독(催心死魂毒)을 끌어올려 그대로 화련이 있는 방향으로 손을 뻗었다. 독기를 쏘아내려는 것이다.
천운이 따라 폭우이화침을 막아낸다고 한들, 제 제자가 죽는 것까지는 막을 수 없으리라.
결국 제자를 구하기 위해선 쏟아지는 비침을 도외시하고 나서야 할 터.
‘수 싸움에서 내가 이겼……?!
그 순간, 당위산의 눈이 처음으로 크게 뜨였다. 등 뒤에서 막대한 진기가 쏟아지는 것을 느꼈다.
어찌 사람이 이렇게 빠를 수 있단 말인가.
서연은 당위산의 옆구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세찬 독기가 손끝에서 펼쳐진 순백색 광채에 뭉그러졌다.
손 끝에 담긴 기운은 그야말로 압도적이었다.
당위산은 가까스로 고개를 돌렸다. 순간적으로 시선이 마주쳤다.
“……!”
당위산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오랜 경험으로 통찰했다. 중독된 사람이 보일 수 있는 눈빛이 아니다. 서연은 정말로 찰나에 모든 비침을 막아내고 여기까지 당도한 것이었다.
이제 그에게 남은 수단은 체내를 가득 메운 최심사혼독뿐이었다. 서연의 손바닥이 제 옆구리에 닿았을 때, 당위산은 그것을 천운이라 여겼다.
당문을 상대해본 경험이 일천한 것이 분명했다. 그랬다면 이런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을 것이다.
당문의 무인은 전신이 독이나 다름없으니, 맨몸으로 접촉했다간 중독되기 십상이었다.
당위산 또한 그러했다. 그의 육신을 세차게 오가는 최심사혼독은 닿는 순간 상대의 심장으로 몰아쳐 죽음에 이르게 하는 극독이었다.
그는 극독이 서연의 몸으로 흘러가는 것을 느꼈다. 화련에게 쏘려던 독기마저 방향을 돌려 서연의 육신으로 흘러가도록 했다.
독단이 텅 비겠지만, 괜찮았다. 상황을 마무리한 후에 암단화를 흡수하면 될 터였다.
그런 생각을 하며 안도하기 무섭게.
쩌억―!
끝도 없이 들어차있던 독단이 순식간에 바닥을 드러냈다. 파문된 이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쌓아온 독이 일순간에 사라진 탓에, 당위산은 막대한 탈력감에 휩싸였다.
‘무슨……!
서연과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었기에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의 독이 먹물 한 방울이라면, 서연은 거대한 대양(大洋)이었다.
먹물을 떨어뜨려 대양을 검게 물들일 수 있을까. 어불성설이다.
“대체, 누구시오……?”
음성이 뚝뚝 끊어졌다.
서연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당위산의 옆구리를 더욱 세게 움켜쥐었다.
콰아아아아앙――!
곧 막대한 장력이 서연의 손끝에서 터져나갔다.
빛이 공동을 가득 메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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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연의 공격은 당위산의 내력을 일격에 모조리 파쇄했다.
당위산은 그 자리에서 튕겨나가는 동시에 허물어졌다. 처참한 몰골로 벽에 처박혀 있었다.
“흐으으…….”
먼지 너머로 끔찍한 신음이 울려퍼졌다. 당위산이 거친 숨을 토해내는 소리였다.
동시에 공동 내부에 침묵이 흘렀다.
사천당문의 무인들과 합을 겨루고 있던 녹림오호도 예외는 아니었다.
팔대세가의 전 장로가 일격에 완패했다.
“…….”
기류가 완전히 뒤바뀌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괜찮으십니까?”
화련을 옆구리에 단단히 낀 채 묻는 이는 당소소였다. 무지막지한 충격파로부터 화련을 보호하려고 취한 자세였다.
화련은 잠깐 동안 쿨럭거리다가 대답했다.
“네. 괜찮아요.”
화련은 제 몸을 억지로 끌어안은 당소소에 대해 불만을 드러내지 않았다.
어찌되었든 외양만 보았을 때 자신은 열 살 언저리의 어린 소녀였다. 저리 나서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스승님의 위용을 알지 못하니 저럴 만도 하지.
이 공동 전체가 무너진다 한들 자신은 털끝 하나 다치지 않을 터였다.
허나, 사천당문 같은 평범?한 가문에서 자란 당소소가 그것을 어찌 알겠는가.
‘음.
묘한 우월감에 휩싸인 화련의 뺨이 씰룩거렸다.
모산파의 후계자로 살았을 때는 느끼지 못했던 감정이다. 아무리 모산파의 위명이 높다고 한들, 사천당문에 비할 수 있었겠는가.
아무리 잘 쳐줘도 한 수 아래였다.
허나 지금은 다르다.
사천당문? 충분히 좋은 가문이다.
일생을 바쳐 정진한다면 스승님까지는 무리여도, 그 언저리까지는 도달할 수 있지 않을까.
자신의 스승이 이토록 대단한 존재라는 생각만으로도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제 그만 내려주세요.”
“그러겠습니다.”
당소소는 순순히 화련을 내려놓았다. 화련은 과시하듯 어깨를 으쓱였으나, 당소소는 그 자그마한 우쭐거림을 눈치채지 못했다
대신 미련 가득한 눈빛으로 허공을 응시하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화련의 어린 육신을 품에 안았던 순간, 그녀는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은공의 무학을 익히기에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육체임을.
물론, 단번에 알아챈 것은 아니었다.
충격파를 피해 물러서는 급박한 상황 속에서 무심코 몸을 몇 번 더듬고 나서야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말랑한 촉감이 만족스럽기는 했으나, 결코 고의는 아니었다.
아무튼, 그렇게 알게 된 화련의 육체는 그야말로 완벽에 가까웠다.
골격과 근질, 피부의 탄력은 물론이고, 혈맥의 순환에도 한치 어긋남이 없었다. 조그마한 영약 하나라도 복용한다면 머지않아 임독양맥을 타통할 수 있을 듯했다.
이는 당소소가 웬만한 의원보다 육체 구조를 면밀히 파악하고 있는 사천당문의 직계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당소소는 문득 자신이 몇 살에 임독양맥을 타통했는지 떠올렸다. 아마 열다섯, 그것도 온갖 영약을 복용한 후에 가주의 도움을 받고서야 겨우 이뤄낸 일이었다.
저 나이에 임독양맥을 타통하다니. 하늘이 내린 재능이라 불러도 부족함이 없었다.
저 정도는 되어야 제자로 받아주는 걸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흠…….
당소소는 남몰래 화련을 훑어보며 생각했다.
무학 앞에 어찌 나이가 중요하겠는가. 중요한 것은 오직 실력과 잠재력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화련 정도라면 나이를 불문하고 충분히 작은 주인님으로 모실 만했다.
‘지금부터 미리 연습해야 하나.
당소소는 속으로 몇 가지 단어를 중얼거렸다.
은공께서 자신을 제자로 받아주시지 않을 것이라 확신했기에 그리 생각했다.
대신 죽는 날까지 시종 행세를 하며 그림자처럼 따른다면 곁에서 훔쳐보는 것 정도는 허락해주실 듯싶었다.
당소소는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살다 죽으면 충분히 호상이라 여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하며 당소소는 걸음을 옮겼다. 땅바닥에 쓰러진 당위산의 뒤처리를 하기 위함이었다.
놀랍게도 당위산은 아직 숨이 붙어 있었다. 갈비뼈가 죄다 부러져 폐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만 뱉어대고 있었지만, 그래도 살아있기는 했다.
당소소는 손속에 자비를 두었던 서연에게 속으로 또다시 감사를 표했다.
당문의 이름을 더럽힌 작자다. 단순히 목을 베어 죽이는 것으로는 모자랐다.
“네가……네가 누구를 데려온 줄 아느냐…….”
바람 빠지는 목소리로 겨우 내뱉은 말이 그것이었다. 당소소는 당위산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면 그쪽은 아십니까?”
당위산의 입꼬리가 흐릿하게 올라갔다. 말해주겠으니 가까이 오라는 의미였다.
콱!
당소소는 가까이 다가가는 척하다 순식간에 뒤로 물러나더니, 비도를 꺼내 당위산의 사지를 향해 던졌다. 한순간에 사지근맥이 잘려나간 당위산이 짐승처럼 거친 비명을 내질렀다.
“크아아악!”
“개수작 부리지 마십시오.”
단발을 귀 뒤로 쓸어 넘긴 당소소가 차갑게 대꾸했다.
“그쪽이 은공의 정체를 알았다면 순순히 모습을 드러냈겠습니까? 깨닫는 즉시 꼬리를 내리고 도망쳤겠지요. 이 지경이 되고도 머리를 굴려대는 꼴이 같잖습니다. 지난 칠 년 동안 가주께 위치가 발각당할까 두려워 사천 땅에 발조차 들이지 못했던 작자가.”
“…….”
“그쪽에게 들어야 할 이야기가 아주 많습니다. 방금 하려던 말은 그때 이어서 듣는 걸로 하지요.”
당소소는 그렇게 말하며 비도로 제 손끝을 그어 상처를 냈다. 비도를 타고 흐르는 핏물이 끓어오르는 듯한 소리를 냈다.
당위산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물들었다.
“도, 독인(毒人)……? 너같은 애송이가 어찌 그 경지에…….”
독공을 익히는 자들이 최종적으로 목표로 하는 경지가 있다.
살점과 피를 비롯한 신체의 모든 것이 극독으로 화하는 독인이 바로 그것이었다.
당문의 장로였던 당위산조차 아직 그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다.
사천당문을 통틀어, 오직 당가주 한 명만이 도달했다고 알려진 경지였다.
“글쎄요.”
당소소는 빙그레 웃으며 핏물을 당위산의 입으로 떨어뜨렸다.
핏물이 혀에 닿는 순간 당위산이 눈을 부릅떴다.
?!
혓바닥이 타들어가는 감각, 그와 동시에 뻣뻣하게 굳어가는 전신.
“컥!”
당위산은 순식간에 충혈된 눈으로 당소소를 쳐다보았다.
그런 그를 바라보며 당소소가 말했다.
“푹 자고 일어나면 본가의 뇌옥에서 눈을 뜨게 될 겁니다.”
다음 순간, 당위산은 눈을 희번덕이며 혀를 까뒤집은 채 혼절했다.
당소소는 그런 당위산을 포박하고는 그의 심장 부근에 손을 올렸다. 독단에 담긴 독기를 미리 빼두려는 의도였다.
독공을 익힌 무인들은 독단(毒丹)을 따로 만들어 그 안에 독기를 담아둔다.
단전과 유사하지만, 차이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단전은 깨져도 내공만 잃을 뿐 목숨에는 지장이 없으나, 독단은 깨지는 순간 온몸이 중독되어 죽음에 이르게 된다.
그래서 독단은 심장 바로 옆에 만든다. 어차피 그곳이 꿰뚫리면 죽기 때문이다.
‘없다.
허나 놀랍게도 독단에 담긴 독기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당소소는 고개를 돌렸다. 녹림오호를 매섭게 몰아붙이고 있는 서연을 향해서였다.
*****
팽무성은.
도를 치켜든 채로 전투에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팽가의 보법은 엄밀히 말해 신속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패검대에서 익힌 보법 또한 마찬가지였다.
반면 서연의 보법은 상식을 초월할 정도로 신속했다. 눈을 깜빡이는 찰나에 동굴의 끝에서 끝으로 이동하는 수준이었다.
괜히 끼어들었다간 오히려 방해만 될 것이 분명했다.
녹림의 보법이 본래 도주에 특화된 것이 아니었더라면, 진작에 승패는 갈렸을 것이다.
당문의 고수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달려들던 그들마저도 지금은 묵묵히 제자리를 지킬 뿐이었다.
이름만 녹림오호일 뿐, 이미 불혹에 가까운 중견 고수들이다. 그 힘은 웬만한 문파의 장로들과 견줄 만하다 들었다.
허나 서연에게 속절없이 압도당하고 있었다.
서연은 검을 내리쳐 부월째로 녹림오호를 짓눌렀다.
콰드득!
섬뜩한 소음이 일었다. 마지막 부월이 박살 나며, 무기를 쥐고 있던 두 팔의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였다.
힘의 차이가 압도적이다. 저보다 두 배는 거대한 사내를 상대로 차원이 다른 용력을 보였다.
“……!”
순식간에 양팔의 통제권을 잃은 녹림오호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그 와중에도 고통의 비명은 지르지 않았다.
“청목족이더냐!”
서연은 대답 없이 검을 뻗었다. 상대의 근육이 단단했기에 단순히 팔을 베는 것으로는 제압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그때.
녹림오호가 거센 기합을 내지르며 다리를 뻗었다. 다리에 실린 기운이 어찌나 거센지, 주변의 대기가 일렁일 정도였다.
다리가 잘리는 것을 감수하고서라도 서연에게 일격을 날리려는 것이다.
허나 서연은 녹림오호가 다리를 내려치기도 전에 공격의 맥을 끊어버렸다.
콱!
한 손으로 제 허리보다 두꺼운 다리를 붙잡았다.
“허.”
녹림오호는 처음으로 탄식을 내뱉었다. 양 팔이 쓸 수 없을 정도로 부러졌을 때도 전의를 잃지 않았던 그였다.
힘을 주어도 다리가 빠지지 않는다. 용력 차이가 압도적이라는 뜻이다.
일전에 합을 겨루며 느꼈지만, 이 정도로 차이날 줄은 몰랐다.
“……숫제 괴물이구나.”
녹림오호가 허탈하듯 말했다. 그 말이 마지막이었다.
빛살이 일며 양쪽 발목이 잘려나갔다.
양팔이 부서지고, 발목마저 잘렸으니, 아무리 녹림오호라 한들 도망칠 길은 없었다.
서연은 쓰러진 녹림오호에게 손을 가져다댔다. 일전에 팽무성이 단전을 폐하는 것을 보았다. 지금이라면 따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당문과는……엮이지 말라더니…….”
녹림오호가 피를 토하며 한탄하듯 중얼거렸다.
그 순간 서연의 옷자락이 작게 펄럭였다. 손끝에서 뿜어져 나온 내력이 녹림오호의 체내를 파고들더니, 그의 단전을 거칠게 깨부쉈다.
무인으로서의 사형선고나 마찬가지다. 그 뒤에 따라오는 끔찍한 고통은 말할 것도 없었다.
서연은 숨을 가다듬은 다음 도로 납검했다. 검신에는 핏물 한 방울 묻어있지 않았다.
*****
곧바로 동굴 바깥으로 나설 수는 없었다. 부상자들이 몸을 추스를 시간도 필요했고, 무엇보다 암단화를 저리 내버려 둘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암단화는 격렬한 싸움이 끝난 뒤에도 그 빛을 잃지 않고 우뚝 서 있었다. 검붉은 빛깔이 묘하게 매혹적이었다.
어느 정도 뒷정리를 마친 당소소가 입을 열었다.
“정해진 절차 없이 암단화를 건드렸다가는 목숨을 잃습니다.”
“피독주를 써도 그러한가?”
“예, 팽 나으리. 피독주를 써도 죽습니다.”
당소소는 어느새 암단화의 바로 코앞까지 다가가 있었다.
“당위산이 암단화를 캐지 못하고 내버려둔 것도 그 때문일 겁니다. 완전히 무르익은 암단화가 품은 독은 당가의 무인들도 감당하기 힘듭니다.”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품속에서 피독주를 꺼내 암단화 근처에 떨어뜨렸다. 피독주는 땅에 닿기도 전에 녹아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
“이제 보니 보통 물건이 아니군요. 최상품입니다. 못해도 오백 년 묵은 설삼과 동일 선상에 놓아야겠군요.”
당소소의 눈빛이 이채를 띠었다. 이만한 암단화는 인위적으로 재배할 수 없다. 본래 자라 있던 것에 비료를 주어 키웠다고 보는 것이 옳았다.
그 비료는 오가며 보았던 시체일테고 말이다.
잠시 고민하던 당소소가 서연을 바라보았다.
“은공, 어찌하시겠습니까?”
“어찌하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신가요.”
“저희 당문도 염치란 것이 있습니다. 그 누가 은공 앞에서 암단화의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겠습니까. 그건 저쪽의 팽 나으리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순간 팽무성에게 시선이 쏠렸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옳소.”
서연이 다시 물었다.
“만지면 죽는다 하셨는데, 채집하는 방법을 알고 계신 건가요?”
“당연히 알고 있-.”
선뜻 대답하려던 당소소는 잠시 말을 멈추고 다시 입을 열었다.
“은공, 제가 올해로 열여덟입니다. 처음 만났을 때처럼 편하게 반말로 대해주십시오. 존댓말을 들을 때마다 심장이 철렁하여 심히 부담스럽습니다.”
“열 여덟……?”
놀란 말투로 되뇌인 것은 화련이었다.
“흐음…….”
그녀는 겉으로는 태연한 표정을 유지했지만, 눈빛만은 반짝반짝 빛내며 당소소를 응시했다. 으스대고 싶은 마음을 꾹 참으며 속으로 외쳤다.
‘내가 두 살 많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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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행은 어깨를 으쓱거리는 화련을 잠시 바라보다가, 이내 당소소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은공, 부디 하대해주십시오. 편히 소소라고 부르셔도 됩니다.”
서연은 입을 다물었다. 자신이 늘 나이 지긋한 분들에게 했던 말을 이렇게 되돌려 받을 줄은 상상하지 못했던 탓이다.
그동안은 그것이 당연한 예의라고 여겼으나, 당소소의 말을 듣고 가슴 한편이 불편해지는 것을 보니 마냥 그런 것만도 아닌 모양이었다.
서연은 짧은 한숨을 푹 내쉬며 속으로 생각했다. 여태 살아오며 대놓고 하대를 해본 적이 드물었다.
상대가 적일 때는 경어를 사용할 이유가 없으니 당연히 하대를 했지만, 평소에는 화련처럼 누가 봐도 어린아이가 아닌 이상 경어를 사용했다.
그것이 편했기 때문이다.
허나 당소소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그럼, 이제부터는 편히 대하도록 하겠습니다.”
“은공, 그렇게 말씀하시면서도 경어를 사용하고 계십니다. 설마 당문의 무인들이 눈치를 주었을리는 없고, 혹 팽 나으리가 그러셨습니까?”
당소소를 포함한 당문의 무인들의 시선이 일제히 팽무성을 향해 홱 돌아갔다. 갑작스레 쏠린 시선에 당황한 팽무성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본관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소.”
“저는 당연히 팽 나으리를 믿습니다만, 은공께서도 그렇게 생각하실지는 모르겠습니다. 팽 나으리, 본가로 초대해 드릴 터이니 잠시만 땅바닥을 보고 계실 수 있겠습니까?”
“그건-.”
팽무성은 화를 내려다 입을 다물었다. 천명검이라는 집단의 특성상 명문세가와는 사이가 그리 좋지 않았다.
반 각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 동안 시선을 처박고 있는 것으로 사천당가 내부에 들어갈 수 있다면, 그것은 충분히 남는 장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내 팽무성은 스윽 몸을 돌려 땅바닥을 굴러다니는 돌멩이의 개수를 새기 시작했다.
서연은 묘한 부담감을 느꼈다. 난생처음 느껴보는 종류의 부담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이게 뭐라고 이토록 부담이 될 일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저 평소에 제자를 부르듯 하면 되지 않겠는가.
순식간에 마음을 다잡은 서연이 말문을 떼었다.
“소소야.”
“예, 은공.”
생각보다 울림이 나쁘지 않았다. 서연은 하대하는 것도 나름의 멋이 있다고 느꼈다.
당소소의 목숨을 구했다. 사천당가의 혈족들이 모여 사는 요새인 당가타(唐家陀)에 들어가서도 경어를 사용한다면 주변인들이 이상한 눈으로 쳐다볼 것이다.
당연히 해야할 일이라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사천당문으로 안내해줄 수 있겠니?”
서연의 음성이 잔잔하게 울렸다.
“마땅히 그리하겠습니다.”
당소소가 고개를 숙이며 포권을 취했다. 경어를 들을 때 불편하다던 말이 거짓은 아니었는지, 이전보다 훨씬 편안한 얼굴이었다.
“암단화는 어찌할 생각이니?”
서연은 채집 절차가 매우 복잡할 것이라 짐작했다. 피독주가 녹아내리는 것을 보아하니, 두꺼운 장갑을 끼고 뽑아도 중독될 것 같았다.
특수한 장치를 쓸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서연의 기대와 달리, 당소소는 맨손으로 암단화를 뽑아 올렸다. 주변의 대기가 타들어 가는 듯한 소리를 냈지만, 당소소는 고통스러워하는 기색이 조금도 없었다.
“사실 저는 독인이라 괜찮습니다. 만독불침(萬毒不侵)까지는 무리여도, 천독불침(千毒不侵) 정도는 될 듯 싶군요.”
당소소는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까닥였다. 곧 당문의 무인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흑단으로 만들어진 두꺼운 상자를 가져왔다.
당소소는 암단화 뿌리에 묻은 흙을 털어낸 다음, 상자에 넣고 밀봉했다. 놀랍게도 상자는 타들어 가는 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독인……?”
팽무성이 놀란 얼굴로 중얼거렸다. 단순히 놀라움으로 넘길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저 나이에 독인의 경지에 도달했다는 것은, 천명검 소속의 독룡은 물론이요, 현 당가주보다도 재능이 뛰어나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당소소는 그런 시선을 느꼈는지 조용히 덧붙였다.
“팽 나으리도 어찌보면 은인이라 할 수 있으니 알려드리는 겁니다. 다만 이 이야기가 천명검 바깥으로 새어나가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상부에 보고를 올리는 것까지는 괜찮으나, 소문이 퍼지는 것까지는 바라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 정도는 상정 범위 내였기에 팽무성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리다.”
이내 일행은 동굴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당소소는 암단화가 담긴 상자를 품에 꼭 끌어안은 채였다.
“암단화는 본가에서 영약으로 가공한 다음에 은공께 돌려드리겠습니다.”
서연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암단화보다도, 그 암단화를 온전히 품고 있는 상자에 더 시선이 갔다.
겉에 있는 장식부터 그러했다. 자개처럼 겉면이 화려했는데, 그 화려함 속에 숨겨진 견고함이 범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솜씨라 믿기 힘들었다.
상자가 잠깐 열렸을 때 내부 구조를 확인한 탓이다. 흡사 나무로 만들어진 정교한 기계장치에 가까웠다.
서연의 시선을 느낀 당소소가 답했다.
“본가에 머무시는 산정께서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직역하면 산의 정령이라는 뜻이다. 서연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입을 열었다.
“혹시 산정이 키가 작고, 수염도 수북하시니?”
당소소의 눈이 커졌다.
“어찌 아셨습니까? 혹 은공께서는 과거에 산정을 뵈신 적이 있으십니까?”
설마가 사람잡는다더니. 일전에 얼핏 들었던 청목족도 그렇고, 이 세계는 확실히 무협지에서 보았던 평범한 중원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쯤 되니 진정 자신이 청목족 혼혈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생부(生父)의 얼굴을 한 번도 뵌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머니보다 먼저 돌아가셨다는 것만 알았다.
서연은 괜히 손으로 귀끝을 매만졌다. 귀는 둥글기만 했다.
*****
일행은 녕강에서 사천당문이 위치한 성도(成都)까지 꼬박 칠 주야를 걸었다. 녕강이 사천과 인접했음에도 그러했다.
대명의 모든 행정구역을 통틀어 가장 넓은 곳이 바로 사천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성들은 기껏해야 한두 개의 대방파가 자리했지만, 사천에는 세 개나 되는 대방파가 존재하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예로부터 사천성은 천부지국(天府之國), 즉 하늘이 곳간을 내려준 땅이라 불릴 정도로 유명한 곡창 지대였다.
날씨가 덥고 습해 향신료가 잘 자랐고, 자연스레 식문화가 발달했다.
그런 사천성의 제일방파로 군림하는 사천당문이 부유한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일행은 사천당문의 정문에 도착했다. 끝도없이 펼쳐진 드높은 담장을 일 각이 넘는 시간동안 걷고 난 후였다.
장원 내부에 거주하는 사람의 수만 따진다면 중원을 통틀어서 세 손가락 안에 들 것이라 했다.
사천당문이 세워진 것이 수백년 전의 일이다. 직계는 소수였지만, 방계나 데릴사위, 그리고 당문에서 식솔로 살아가는 자들까지 합치면 그 수가 물경 수천에 달했다.
팽무성이 혀를 내두르며 장원 내부를 살폈다.
“작은 도시라고 해도 믿겠군.”
아직 내성으로 들어가지 않았는데도 그러했다.
대부분의 식솔들은 외성에 거주했다. 그들은 당소소를 마주할때마다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두려움이 아니라 진실로 존경하는 시선이 담겨 있다는 점에서 사천당문이 식솔들을 어찌 대해왔는지 알 수 있었다.
“소소 아가씨, 대체 어딜 다녀 오셨기에 열흘이나 걸리셨어요?”
“비밀입니다.”
“또 이러신다. 저녁에는 수자육편(水煮肉片)이면 될까요?”
“매콤하게.”
“네, 매콤하게 해드릴게요.”
당소소는 익숙한 듯 식솔들과 편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특이한 점은 당소소가 상대의 나이를 불문하고 경어를 썼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화련을 대할때도 그랬다.
예의가 바른 것일까, 아니면 성격이 유별난 것일까. 서연은 둘 다일 것이라 짐작했다.
내성으로 향하는 정문은 실로 웅장했다. 소림과 종남파의 산문을 합쳐도 이보다는 작으리라 생각될 정도였다.
이윽고 내성 입구를 지키던 고수들이 당소소에게 고개를 숙였다.
“아가씨.”
“이분은 저를 구해 주신 은공이십니다. 극진히 모시도록 하십시오.”
척!
당가의 고수들은 반문하지 않았다. 일말의 망설임 없이 서연을 향해 포권을 취했다.
“이건 이번에 캔 암단화입니다. 영약으로 가공하여 은공에게 드려야 하니, 독심방(毒心房)으로 가져가십시오.”
“예.”
"죄인들도 곧장 뇌옥에 집어넣으십시오."
"예."
“그리고, 가주님은 어디 계십니까?”
“가주께서는 현재 패검대주와 독대하고 계십니다.”
“패검대주……?”
당소소의 시선이 순간 팽무성에게로 향했다.
성도로 향하는 길에 팽무성이 틈틈이 은비조를 사용하여 패검대와 소통하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 덕분에 패검대가 사천 땅에 발을 들였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자신들보다 먼저 도달했을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이는 팽무성 또한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아마 패검대주께서 홀로 방문하셨을 것이오.”
패검대의 경신술이 느린 것은 사실이나, 패검대주만은 예외였다. 그는 패검대에 들어오기 전부터 별개의 경신법을 익히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소소는 서연에게 물었다.
“은공, 어찌하시겠습니까? 본래 은공을 가주님께 당당히 소개하려 했는데, 웬 나으리가 다 망쳤습니다. 은공께서 원하신다면 직계의 권한으로 가주전으로 들어가겠습니다. 패검대주가 중요한 사람이기는 하지만, 당가주께는 패검대주보다 제가 더 중요한 사람입니다.”
말 한마디만 하면 가주전으로 쳐들어갈 기세였다.
서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미 당소소가 은공으로 모시는 것도 충분히 부담스러웠다. 그뿐이랴. 외성을 오가는 도중에 자신에게 공손히 구는 당가의 식솔이 적지 않았다.
여기에 당가주까지 추가된다면 그 부담감이 얼마나 클지 가늠이 가지 않았다.
서연은 얼핏 튀어나오려는 경어를 가까스로 삼키고 말했다.
“나중에 천천히 뵈어도 괜찮단다.”
“……그렇습니까?”
당소소는 씰룩거리는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팽 나으리는 은공께 감사하십시오. 은공이 아니었다면 피도 눈물도 없는 독인인 제가 무슨 짓을 했을지 모릅니다.”
“서 소저, 고맙소.”
팽무성은 순순히 사과했다. 사천당문 내부에서 직계의 심기를 거스르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냉정하게 말해, 그의 잘못이 없다고만 볼 수도 없었다.
자신이 은비조를 보내지 않았더라면 패검대주가 이곳에 올 일도 없었으니 말이다.
당소소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도 일단 가주님께 이 일을 전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도록 하겠습니다. 아가씨. 따로 전달한 말은 더 없으실까요?”
“패검대주가 떠나면 바로 은공을 모시고 가겠다는 말도 전해주십시오.”
“그리 하겠습니다.”
일행은 당소소의 안내를 받고 곧장 영빈당(迎賓堂)으로 향했다. 귀빈을 맞이하는 장소라고 했다.
내부는 화려하기 그지없었는데, 특이하게도 웬 남아가 한 가운데에 서 있었다.
당소소와 똑 닮게 생겼다. 쌍둥이라는 뜻이다.
“오가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누님의 목숨을 구해주셨다고.”
소년은 서연을 향해 정중히 포권했다. 당소소를 누님이라 부르는 것으로 보아, 나중에 태어난 쪽인 듯했다.
“당진성(唐辰星)이라 합니다. 가주께서 용무를 처리하시는 중이라, 급히 소가주인 제가 대신 모시게 되었습니다.”
명문가에서 자란 탓인지, 품고 있는 기세가 매서웠다.
당소소가 독공 위주로 수련했다면, 당진성은 암기술 위주로 수련한 것 같았다.
“혹 필요한 것이 있으시다면 기탄없이 말씀하십시오.”
서연은 잠시 고민했다. 아직 밥을 먹을 때는 아니었고, 그렇다고 당문을 소개해 달라고 했다가는 또 온갖 식솔들의 인사를 받게 될 것 같았다.
그러다 문득 암단화를 담았던 상자가 떠올랐다.
“당문에 산정이 계시다고 들었습니다. 그분을 뵐 수 있을까요?”
당진성은 즉답하지 않았다. 산정이 계시는 것을 어찌 알았는지 묻지도 않았고, 가서 무엇을 하실 것인지 묻지도 않았다.
대신 당소소를 한 번 쳐다보았다.
―누님.
―아우님, 은공을 앞에 두고 전음을 보내는 건 대체 어느 가문의 예의입니까?
당진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말본새를 보아하니 누님이 맞았다.
고로 마교의 주구(走狗)가 누님을 살해한 다음 인피면구를 뒤집어쓰고 누님 행세를 하고 있을 가능성은 없다고 봐도 좋았다.
물론 아직 몇 가지 가능성이 아직 남아있기는 했다.
마교의 주구가 누님에게 섭혼술을 걸어 부리고 있을 가능성, 혈교가 혈고를 심어 조종하고 있을 가능성, 천명검이 기어이 누님에게까지 마수를 뻗쳤을 가능성…….
이 외에도 대략 육십하고도 다섯가지 가능성이 더 존재했다.
뭘 모르는 누님은 이를 꼴깞이라 치부했지만, 당진성은 이러한 걱정들을 제가 마땅히 할 일이라 여겼다.
사천은 사마외도의 영역과 직접적으로 맞닿은 땅이다. 소가주인 자신이 어찌 안일하게 굴 수 있겠는가.
누군가는 항상 만약의 상황에 대비해야 했다.
그렇기에 당진성은 품 속에 항상 두 자루의 비도와, 아흔 여덟 자루의 비침을 품고 다녔다.
두 자루의 비도는 각각 아버지와 누님이 조종당했을 때 사용하기 위함이었다.
나머지 아흔 여덟자루의 비침도 나름의 사용처가 있었다.
천하의 모든 당씨 중에 자신이 가장 비장한 각오를 품고 있지 않을까. 적어도 당진성은 그렇게 생각했다.
본래라면 칠십 단계가 넘는 검증 절차를 거쳐야 했지만, 아직까지는 누님의 목숨을 구한 은공인 서연을 그리 대할 수는 없었다.
일단계를 통과했으니 마땅히 안내해드려야 했다.
당진성은 감정을 숨기는 것에 능숙했다.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고 웃는 얼굴로 말했다.
“따라오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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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당문의 소가주, 당진성은 가히 편집증이라 일컬을 만한 성정을 지닌 인물이었다.
자신에게 닥칠 피해를 걱정하는 일반적인 편집증과는 사뭇 달랐다. 그의 의심과 두려움은 오직 사천당문의 안위만을 향해 있었다.
누님을 제외한 동년배 중 독보적인 무위를 갖춘 것도 모두 이 기벽 덕이었다. 가문을 지키려면 결국 당진성 본인이 강해져야 했으니 말이다.
물론 당진성은 이러한 성격을 겉으로 전혀 드러내지 않았다. 사천당문의 식솔들이 보기에, 당진성은 그저 예의바르고 성실한 소년일 뿐이다.
실상은 달랐다.
당진성의 속이 뒤틀려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온 중원을 통틀어 당가주와 당소소, 단 두 명뿐이었다.
당진성은 서연 일행을 안내하면서 그들의 행색을 꼼꼼히 흝었다. 우선 누님의 은공이라던 서연부터였다.
‘손에 이렇다 할 굳은살이 없다. 겉으로 드러나는 나이는 많아야 약관 언저리. 허나 고작 그 나이에 오장로와 녹림오호를 격살할 수 있었을까?
아니라고 생각했다.
당진성의 사고회로는 일반인들과 완전히 달랐다.
그렇기에 그는 서연이 반로환동한 초고수일 가능성과, 동시에 약관 언저리의 나이에 환골탈태를 이뤄낸 천재일 가능성을 동시에 고려했다.
전자는 상상력이 뛰어난 자라면 으레 떠올릴 수 있는 일이었으나, 후자는 완전히 상식 밖의 일이었다. 그래서 당진성은 후자 쪽에 더 무게를 실었다.
그래야 그 상황이 닥쳤을 때 충격이 덜하기 때문이다.
‘저 연배에 저 정도 성취라면, 천명검단주의 숨겨진 직전제자인가? 아니, 어쩌면 사마외도가 숨겨놓은 신진고수일 수도 있겠다.
마교의 소교주도 성별이 밝혀지지 않았다 들었다. 혹시 모르는 일이다.
아니면 노고수가 어린 여인의 손가죽을 벗겨 끼고 있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러나 잠시 생각하던 당진성은 고민 끝에 그 가능성을 철회했다.
‘산정의 눈썰미는 인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나다. 인피면구 비슷한 것을 사용하고 있다면 그 즉시 들통날거야. 저 정도로 오성이 뛰어난 고수가 그것을 감안하지 않았을 리 없다.
당진성의 시선은 이제 서연이 쓰고 있는 죽립과 면사로 향했다.
흑도의 무인이라면 저런 식으로 얼굴을 가리고 다니지 않는다. 자칫 거친 바람이라도 불어 맨얼굴이 드러나면 큰 낭패를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통 가면을 쓰고 다니지.
허나 그러지 않은 것으로 보아, 스스로가 떳떳하거나 혹은 흑도 출신임에도 맨 얼굴이 알려지지 않은 무인일 것이다.
전자보다 후자일 때가 가문에 더 큰 충격을 안겨줄 터이니, 후자 쪽에 비중을 두고 생각하는 것이 더 이득이었다.
당진성은 슬쩍 고개를 돌려, 나긋나긋한 어조로 물었다.
“은공께서는 여행을 다닌다고 하셨지요? 혹, 어디에서 오셨는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하남에서 왔습니다.”
하남이라니, 예상 밖의 답이었다. 아무리 제정신이 아닌 사마외도라 할지라도 소림이 있는 하남에 기거하지는 못한다.
그렇기에 사마외도의 간자들은 제 출신을 댈 때, 하남 출신이라는 말은 감히 입에 답지 못했다. 금방 들통나기 때문이다.
“하핫, 그렇군요.”
당진성은 웃는 척을 하다가 이내 입을 다물었다.
‘만만치 않은 적수다.
설마 대놓고 정면 돌파를 시도할 줄은 몰랐다.
더 묻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그랬다가는 이상한 오해를 살 수 있었다.
―아우님. 질문 의도가 매우 불순합니다. 혹시 또 맞고 싶어서 그러는 겁니까?
당장 누님부터가 저를 세차게 노려보고 있었다. 이 이상 떠보았다가는 한 대 얻어맞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이 서연의 일행을 파악할 차례.
팽무성? 저 인간은 볼 것도 없다. 자신이 소가주 자리를 떠맡게 된 것도, 형님이 저 인간의 꼬드김에 홀딱 넘어간 탓이었으니 말이다.
'천명검은 무슨 빌어먹을 천명검.'
팽무성에게는 반드시 갚아줘야 할 빚이 있었다. 제게 소가주 직을 떠넘긴 형님도 마찬가지다. 언젠가 공식석상에서 제대로 망신을 주리라 다짐하는 것으로 족했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것은 은공이 데려온 여자아이 뿐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리 특별한 점이 보이지 않았다.
‘제자라고 했다.
흝어보았을 때 학대의 흔적은 없었다. 오히려 살집이 적당히 오른 것이, 잘 먹고 잘 지내는 모양이었다.
사마외도일 가능성이 크게 낮아졌다. 하지만 당진성은 방심하지 않았다.
‘외양은 얼마든지 그럴듯하게 만들 수 있다.
허나 표정과 행동까지 속이기는 힘들다. 하지만 이곳저곳을 둘러보는데 여념이 없는 화련은 정말로 그 나이대의 어린아이처럼 보였다.
자신처럼 다섯 살 때부터 편집증적인 사고를 가지게 된 것이 아닌 이상, 저 나이대에 그만한 연기력을 가지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물론 당진성은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었다. 혹시 몰랐다. 반로환동한 초고수가 어린아이 행세를 하고 있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과연 이것도 넘길 수 있을까.
당진성은 품에서 당과를 꺼냈다. 매 순간 비장한 각오를 품고 사는 그였다. 이따금 단 것으로 풀어주지 않으면 정신이 위태로워지곤 했다. 품에 단 음식을 넣고 다니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당진성은 화련에게 다가가,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은공의 제자 분, 이걸 한 번 드셔보시겠습니까?”
"음, 이건 뭔가요?"
다 알면서 물어보다니. 순간 싸가지없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당진성은 서글서글한 미소를 품은 채로 다시 말했다.
"당과입니다. 꿀을 발라 맛이 아주 좋지요."
“!”
순간 화련의 눈이 번쩍 뜨였다. 연기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화련은 일말의 망설임 없이 당과를 받아들고는, 입을 크게 벌려 핥아 먹고 부숴 먹기를 반복했다.
누가 보아도 그 나이 또래의 아이가 보일 법한 모습이었다.
‘…….
반로환동한 초고수가 체면을 전부 내려놓고 저리 열심히 연기할 수 있을까. 그럴 가능성은 없다고 봐도 좋았다.
'정말로 그냥 어린아이인가.'
저 모습을 보라. 입 주변에 설탕이란 설탕은 다 묻히고 먹고 있다.
허나 이상하리만치 묘한 기시감이 드는 탓에, 의심의 시선을 거두기가 힘들었다. 당진성은 스스로의 감이 꽤 좋은 편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 감으로 찾아낸 간자가 무려 열 명이 넘었으니 오죽할까.
그렇기에 당진성은 방심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화련을 떠보았다.
“……하나 더 드시겠습니까?”
“네.”
꿀로 범벅이 된 손을 내미는 화련을 보며 당진성은 속으로 침음을 삼켰다.
'입 주변에 꿀이 무슨.'
그뿐이랴. 옷 주변에도 흥건하게 묻어 있었다. 오죽했으면 서연이 직접 나서서 손수건으로 닦아주어야 했을 지경이었다.
"당과 주세요."
"……예."
만약 화련이 진정 반로환동한 초고수라면, 당진성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인간의 마음을 포기한 괴인을 어찌 이기겠는가. 아무리 당진성이라도 그건 무리였다.
*****
서연 일행은 사천당문의 내당 깊숙한 곳으로 향했다.
깊숙하다는 표현보다 더 적절한 말은 없을 터였다. 산정이 머무는 곳은 정말로 어두컴컴한 땅속이었기 때문이다.
가히 갱도라고 불러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깊고 험난한 길이었다.
앞서가던 당진성이 설명하듯 말했다.
“본가에서 다루는 독 중에는 광물독도 적지 않습니다. 그러한 독을 지속적으로 공급하기 위해서는 이런 시설이 필요하지요.”
설명하는 당진성에게서는 이전보다 힘이 빠진 기색이 역력했다.
이따금 화련에게 당과를 내밀 때만 생기를 되찾았는데, 화련이 당과를 받아먹으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생기를 잃었다.
저도 당과를 좋아하면서 억지로 나눠주는 건가 싶었다.
서연의 상념은 그리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거대한 석문이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당진성은 석문 한가운데에 파인 홈에 제 보패를 끼워 넣은 다음 내공을 흘려보냈다. 그러자 고절한 기관진식이 발동하며 석문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구구구궁!
무게가 수천 근에 달할 것 같은 석문이 거침없이 열렸다. 모두가 놀랐지만, 가장 놀란 이는 서연이었다.
이전에 암단화를 담았던 함도 그러했듯, 이 석문 또한 정교한 장치들이 숨겨져 있었다. 당문의 직계가 아닌 다른 사람이 건드렸다면 분명 꿈쩍도 하지 않았을 터였다.
일행은 석문을 통과한 뒤에도 한참을 더 나아갔다. 다행히 천장에 야명주가 박혀 있어 발을 헛디딜 일은 없었다.
언제부터인가 묘한 열기가 느껴졌다. 대장간 속으로 들어온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쇠를 두드리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소가주.”
“철영(鐵榮) 장인.”
이윽고 한 사내가 나타나 당진성과 마주 포권을 취했다. 무수한 수염에 짧은 팔다리를 지닌 사내였는데, 그 키가 네 척에 살짝 못 미쳤다.
허나 근육만큼은 남달랐다. 불에 그을린 듯한 그의 근육은 그를 작은 거인으로 느끼게 할 만큼 강렬한 분위기를 풍겼다.
“이곳에는 무슨 일로 오셨소?”
“본가의 은공께서 장인을 뵙고 싶다고 하여 이리 모셨습니다.”
“은공?”
산정 장인의 시선이 곧장 서연에게로 향했다. 씨족 특유의 눈썰미일까. 당진성이 말한 은공이 누구인지를 곧장 알아챈 기색이었다.
그는 서연을 빤히 쳐다보다가 다짜고짜 물었다.
“혹 다른 씨족의 혼혈이시오?”
다른 씨족이라 함은 필시 청목족을 말하는 것일 터였다. 서연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답했다.
“아닙니다.”
“당문의 은공은 내게도 은공이나 마찬가지오. 단순히 내 용모를 보고자 이곳까지 찾아온 것은 아닐터. 원하는 것을 말씀하시오.”
그렇게 말하는 산정 장인의 눈빛은 정말로 뭐든 만들어줄 수 있다고 확신하는 듯했다.
야장술과 손재주로는 천하에 견줄 존재가 없다고 했다. 오가며 보았던 기관진식들만 보아도 그것이 사실임을 알 수 있었다.
처음에는 단순히 암단화를 멀쩡히 담아낼 수 있을 정도로 정교한 함을 누가 만들었는지 궁금하여 찾아왔을 뿐이었으나,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다.
그러한 장치를 어떻게 만들었냐고 묻는 것은, 자신에게 삼신세불을 어찌 만들었냐고 묻는 것과 같았다.
손재주는 본래 감각의 영역이라서,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많았다. 들어도 큰 소용이 없을 것이라 확신했다.
더구나 당문의 직계만이 드나들 수 있는 이곳을 아무 때나 들어올 수 있는 것도 아닐 터, 단순히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이만한 장인과 대면할 기회를 날리고 싶지 않았다.
잠시 고뇌하던 서연이 입을 열었다.
“제 검을 봐주실 수 있겠습니까?”
“……검을?”
서연은 더 설명하는 대신 허리춤에 매여 있던 검집을 풀었다. 이전에 하남의 대장간에서 샀던 검이었다.
산정 장인은 서연의 검을 순순히 건네받았다. 검 자체는 별 볼일이 없었다. 인간들의 눈에는 장인이라 불릴 실력자가 만든 것이겠지만, 산정 장인이 보기에는 그저 그런 검에 불과했다.
“……으음.”
허나 산정 장인은 코웃음 치는 대신 검의 감촉에 집중했다. 그의 손길은 조심스러웠는데, 그 모습이 마치 검을 사람처럼 대하는 듯 했다.
뛰어난 산정 장인은 검파의 감촉을 통해 검의 생애를 느낄 수 있었다. 그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런 의미에서 서연의 검은 남달랐다.
검이란 본래 수많은 살생을 거치며 피와 한을 품게 되기 마련인데, 이것은 단 한 번도 누군가의 목숨을 끊은 적이 없었다.
그뿐이랴, 검의 결에서는 도가와 법가의 정순한 기운이 동시에 느껴졌다.
‘괜히 청목족이라 착각한 것이 아니었구나. 필부(匹夫)가 품을 수 있는 마음가짐이 아니다.
산정 장인이 내심 감탄하면서도 감정을 계속 이어나갔다.
검은 주인을 닮는다고 했다. 서연의 검이 좀처럼 부서지지 않을 단단한 영성(靈性)을 띄게 된 것은 분명 그 때문이리라.
믿기 힘든 일이다. 자연지기로 가득한 지맥에 보관하지 않는 한, 물건이 영성을 띄려면 못해도 수십 년의 세월을 거쳐야 했다.
허나 그가 손에 든 검은 이 모든 것을 정면으로 부정하듯, 미약하나마 분명한 영성을 띄고 있었다.
“……보기 드문 검이로군.”
그래서 그리 말했다.
검 자체는 평범했다. 허나 주인이 천하에 드문 기상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검 또한 보기 드문 보검이 되었다.
허나 제 주인의 실력을 온전히 담아내기에는 그것만으로는 모자랐다.
“원한다면 새 검을 만들어줄 수 있소. 이 검과, 내가 가진 재료를 함께 녹여서 말이오. 당연히 손에도 잘 맞을 것이오.”
잠시 고민하던 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더 좋은 검을 만들어준다는데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칠주야만 기다리시오. 천하의 명검을 만들어 드리리다.”
장인의 자부심이 깃든 표정으로 그리 말했다.
칠주야, 일반적인 시선으로 보기에는 검 하나를 만들기도 촉박한 시간이었지만, 상대는 산정 장인이었다. 웬만한 검은 한 시진이면 만들어낼 수 있었다.
고로 칠주야가 걸린다는 뜻은, 전심을 다해 검을 만들겠다는 뜻이다.
‘장인도 은공이 마음에 드셨나보다.
당소소가 남몰래 고개를 끄덕이던 순간이었다.
―딸아.
당가주의 전음이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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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자헌(唐紫軒)이라 하오.”
핏기 없이 창백한 피부를 한 사내가 말했다. 녹빛 비단 장포에서 묘한 위압감이 흘렀다.
특히 그의 눈빛이 그러했다. 쉰을 훌쩍 넘긴 나이였으나, 독공을 극성까지 익힌 탓인지 얼굴에서 세월의 흔적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허나 손은 달랐다. 손가락 마디마디에는 오랜 단련의 흔적이 깊게 배어 있어 왜인지 모르게 서늘한 기운을 풍겼다.
단정하게 정리한 수염도 그러한 느낌을 주는 데 한몫했다. 사람 자체가 한 자루의 날 선 검 같았다.
“……서연이라 합니다.”
산정 장인에게 검을 맡기고 곧장 가주전으로 향한 상황이었다.
그 먼 거리에서 당소소에게 전음을 보냈다고 했다. 천하에 내로라하는 팔대세가의 가주답게 그의 내공 또한 깊고 심후한 모양이었다.
‘고수다.
한눈에 봐도 알 수 있었다. 마주 서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돋을 정도로 강렬한 존재감이었다.
서연은 일전에 당소소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쓸데없이 정이 많은 사람이라고 했었던가. 그 말은 확실히 틀린 것 같았다.
눈도 깜짝하지 않고 수천을 학살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또 모를까. 도저히 정이 많은 인물로는 보이지 않았다.
“소가주는 이만 물러가도록.”
본래 태사의에서 앉은 채로 손님을 마주한다고 했다. 허나 은공인 서연을 그리 마주할 수 없었기에, 당자헌은 선 채로 서연을 맞이했다.
대충 보아도 키가 여섯 척은 훌쩍 넘어보였다. 여태 일행 중에서 가장 키가 큰 것은 팽무성이었는데, 당자헌은 그런 팽무성보다 키가 훨씬 컸다.
“예…….”
당진성은 감히 대들지도 못하고 뻣뻣한 목소리로 대답하며 물러났다. 이 자리에서 압박감을 느끼지 않는 사람은 오직 당소소 뿐이었다.
그녀는 평소와 달리 입매를 비튼 채였다. 부끄러움과 분노가 얼굴에 스몄다.
당자헌은 그런 당소소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할 말이 많아 보이는구나.”
“딱히 그렇지는 않습니다.”
“아닌 것 같다만.”
당자헌은 어디 한번 말해보라는 듯 고개를 까닥였다. 기다렸다는 듯 당소소가 말했다.
“후안무치한 수적들도 손님을 맞이할 때는 앉힐 자리부터 준비합니다. 저는 당연히 은공을 영빈당에서 맞이할 줄 알았습니다. 헌데 가주전이라니요. 은공을 상대로 가주의 위엄을 드러내어 어디에 쓴단 말입니까?”
“진정 위엄을 드러내고자 했다면 태사의에 앉은 채로 맞이했을 것이다.”
“압니다. 그래서 가만히 있으려 했습니다.”
당자헌이 시종들에게 손짓했다. 곧 시종들이 기다렸다는 듯 의자와 탁자를 날랐다. 전부 영빈당에서 보았던 것들이었다.
당자헌은 정중히 손을 내밀며 말했다.
“앉으시오.”
서연 일행은 떨떠름한 얼굴을 하다 의자에 앉았다. 당자헌 또한 맞은편에 앉았다.
당자헌이 다시 물었다.
“더 할 말이 있느냐?”
“제가 은공을 모시고 본가로 복귀하는 것을 뻔히 아셨으면서 패검대주를 먼저 뵈신 것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아무리 상대가 천명검의 대주라고 한들, 본가 직계의 목숨보다 중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기에 패검대주를 먼저 만난 것이다.”
“……예?”
“네 오라비가 임무 중에 해를 입었다. 사경을 헤매고 있다더군. 아무리 가문의 의무를 등졌다고는 하나, 여전히 내 아들이다. 패검대주가 나서지 않았으면 필히 목숨을 잃었을 터, 그렇기에 그를 먼저 만났다.”
“……,”
당소소는 입을 다물었다. 아버지의 말투에 깊은 분노가 서려 있었기 때문이다.
어찌 된 일인지 묻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은공을 모셔놓고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당자헌은 시선을 돌려 서연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는 아주 천천히 입술을 뗐다.
“천명검의 단주가 신묘한 검술로 첫째를 현혹한 것이 불과 오년 전의 일이오. 그에 이어 독녀까지 출가한다 하니, 아비로서 견디기 쉽지 않았소. 그 탓에 가주답지 않은 언행을 보였지. 용서하시오.”
“……출가, 말씀이십니까?”
갑작스러운 말에 서연이 당황했다. 사천당문의 독녀라 함은 당소소를 의미할 터. 그런데 갑자기 그녀가 왜 출가한다는 말인가.
당자헌의 시선이 다시금 당소소에게로 향했다.
“내가 착각한 것이더냐?”
“……아닙니다.”
당소소의 얼굴에 당혹이 맺혔다. 설마 이리 빠르게 속내를 들킬 줄은 몰랐던 탓이다.
나중에 조용한 장소에서 독대하여 따로 말씀드리려 했다. 상황이 이리 될 줄은 몰랐다.
사나운 외양에 가려졌을 뿐이지, 명문세가의 가주답지 않게 정이 많으신 분이다. 아무리 은공이라고 한들, 독녀가 가문을 떠나가도록 일조했으니 좋게 보일 리 없었다.
그렇기에 선 채로 대질했다. 가주이기 전에 아비로서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의사표현이었다.
“언제 떠날 생각이더냐?”
“……은공께서 떠나실 때 함께 떠날 생각이었습니다.”
그쯤 되자 서연도 돌아가는 상황을 어렴풋이 알아차렸다. 다만 부녀의 일인 것 같았기에 지켜만 보았다.
“보아하니 제대로 설명도 드리지 않은 모양이구나. 거절하시면 어찌하려 그랬느냐. 억지로 따라가려 했더냐? 은공에게 짐이 되는 것이 네가 은혜를 갚는 방법이었더냐. 그런 것이라면 내 너를 단단히 잘못 키웠다.”
“…….”
“회수하라 명했던 암단화를 영약으로 가공하여 전할 수 있는 것도, 산정 장인에게 검을 만들어달라 부탁할 수 있는 것도 전부 네가 본가의 직계여서 가능한 것이다. 출가하려던 주제에 가문의 것을 마음놓고 사용하려던 네 알량한 마음가짐이 우습다.”
당자헌의 녹색 눈동자가 곧 당소소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이만 물러가도록 하거라.”
“……예.”
당소소는 고개를 푹 숙인 채로 가주전을 빠져나갔다. 곧 드넓은 가주전에는 서연과 당자헌 둘만 남았다.
시종들이 차를 들고 올 때까지 침묵은 이어졌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당자헌이었다.
“못 보일 꼴을 보였소.”
“괜찮습니다.”
“본래 영빈당에서 모시려 했소. 첫째의 일 때문에 감정을 추스르기 힘들어 내부를 더럽혔지. 급히 가주전으로 모실 수 밖에 없었소.”
“이해합니다.”
명문가의 가주다. 자세를 낮추고 사과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뿐이랴. 어느 날 갑자기 화련이 처음 보는 남자아이를 따라가겠다고 한다면, 서연 자신도 당자헌과 똑같이 반응할 것 같았다.
심지어 당자헌은 친딸이었고, 몇 년 전에는 전 소가주였던 큰아들을 비슷한 방식으로 빼앗겼던 경험도 있었다. 게다가 의자를 치운 것도 본의가 아니었다.
실로 대인배나 다름없었다. 정이 많은 사람이라는 것을 그제서야 이해했다.
“당……아가씨가 저를 따라오고 싶어 하는 듯 보였습니다. 헌데 저로서는 도무지 그 이유를 알 수 없군요.”
일전에 당소소가 스스로를 소소라 불러도 된다고 말했으나, 당문의 가주 앞에서 그리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유라. 은공에게서 제 목숨으로도 갚을 수 없는 무언가를 엿보았을 것이오. 필시 그러했겠지.”
딸아이는 사천당문의 모든 무학을 자유로히 익힐 수 있었으나, 만천화우만은 예외였다. 그것은 가문의 후계자만 익힐 수 있는 신공절학이다.
첫째 또한 후계자였을 때는 만천화우를 익혔으나, 천명검으로 떠나가며 만천화우를 잃었다. 천하에 내로라하는 방술사들의 도움을 받아 뇌리에 새겨진 묘리를 지운 것이다.
그렇기에 딸아이는 독을 집중적으로 파고들었다. 막내와 첫째보다 빠르게 독인의 경지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그 덕분이었다.
‘절기를 보였나.
당자헌은 서연을 살폈다. 분명 검수라 했다. 도대체 무엇을 보여줬기에 딸아이가 저리 매료되었을까.
첫째가 천명검단주의 검격에 홀렸던 것은, 무에 대한 첫째의 욕심이 남달랐기 때문이다. 무림을 징치한다는 집단의 수장이다. 능히 천하를 논할 만한 검격에 첫째는 순식간에 매료되었다.
물론 사천당문의 무공 또한 절세의 무공이었다. 초대 가주께서도 절세 고수였고, 전전대 가주께서도 그러했다.
―종사의 밑에서 배우고 싶습니다. 보내주십시오. 아버지.
허나 그 말에 당자헌은 끝내 장남을 보내줄 수밖에 없었다. 당자헌은 천하에 내로라할 고수 중 하나였지만, 대종사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막내만큼은 다른 무엇보다 가문의 안위를 중히 여겼다는 점이다. 그 점이 당자헌의 유일한 위안거리였다.
“독인의 경지에 오르면 세상을 한없이 느리게 볼 수 있소. 천고의 안법보다도 더한 통찰을 지니게 되지.”
서연은 그 말을 듣고 당소소가 보았던 무언가가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연화비영보인가.
등선한 신선의 보법이다. 당자헌의 말을 들어보니 당소소라면 충분히 그 묘리를 읽을만도 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분노하였겠으나, 서연은 일반적인 무림인들과는 거리가 멀었다.
화련에게 가르치고 있는 보법이었다. 다른 이의 관점에서 설명을 듣는다면 제자를 가르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짐작가는 것이 있나보오.”
“그렇습니다.”
당자헌은 그거면 되었다는 고개만 끄덕일뿐, 더 캐묻지 않았다. 은공에게 이러한 것을 캐묻는 것 자체가 무례라 여기는 듯했다.
“딸아이가 은공을 따라가는 것을 원치 않는다면, 본 가주가 막으리다.”
“그, 막는다 하심은.”
“가주령을 내려 폐관에 들게 할 것이오. 은공이 떠날 때까지 바깥을 보지 못하겠지.”
과하다. 허나 다른 말로 하면 그 정도로 대응하지 않으면 당소소가 따라오는 것을 막을 수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제 어미를 닮아 고집이 아주 강하오. 내버려두면 은공을 몰래 뒤따르며 은혜를 갚을 방법을 홀로 강구하겠지. 그럴 바에는 이 편이 낫소.”
“…….”
“부담스러워 보이니 문답은 그만하리다. 가문의 모두에게 은공을 직계와 동등히 대하라 명했으니, 사천 땅에서 불편함을 겪는 일은 없을 것이오.”
당자헌은 그렇게 말하며 서연을 응시했다. 다른 것은 모르겠으나 심성이 선한 여인이라는 것은 알겠다.
최선은 서연이 딸아이를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이다.
물론 당자헌은 딸아이가 본가에 남기를 바랬으나, 그렇게 된다면 딸아이가 큰 상심에 빠지게 될 것은 당연한 바.
제 욕심으로 딸아이와 멀어질 바에는, 차라리 호의를 베푸는 것이 낫다는 것을 당자헌은 오랜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폐관에 들게 하실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든 은공을 따라가려 할 것이오. 어쩌면 시종처럼 부려달라며 납작 엎드릴지도 모르지.”
서연은 속으로 침음을 삼켰다.
명문가 여식을 시종으로 부린다라. 이상한 소문이 퍼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제가 잘 해결해보겠습니다.”
“그렇다면, 믿겠소이다.”
당자헌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네가 직접 할 일이다.
아비로서 할 만큼 했다. 나머지는 딸아이가 직접 해결해야 할 일이었다.
당자헌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따라오시오.”
서연은 순순히 그를 뒤따랐다.
“혹시 어디로 가는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본가의 보고(寶庫).”
사천에서 가장 부유하다는 가문의 보고다. 천문학적인 가치의 보물들을 품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지금부터 무엇을 받을지 생각해두는 것이 좋을 것이오.”
“……무엇이 있습니까?”
당자헌은 등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로, 지하로 내려가는 문을 열었다. 끝없이 펼쳐진 계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당자헌이 너털웃음을 흘렸다.
“없는 것을 물어보는 것이 빠를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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겹겹이 이어진 수백 개의 계단을 내려서자, 수십 개의 문이 늘어선 복도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없는 것을 묻는 것이 빠르다는 당자헌의 말이 허언이 아니었는지, 복도를 채운 보물들은 각양각색의 빛을 발하고 있었다.
“종류를 불문하고 세 가지를 가져가시오. 무엇이 있는지 물어보면 답해드리리다.”
서연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 영약도 있습니까?”
영약만큼 내공을 빠르게 얻을 수 있는 방법은 없다고 봐도 좋았다. 여태껏 내공의 부족함을 느낀 적은 없었으나, 이번 기회에 하나쯤 얻어두는 것도 괜찮을 듯 싶었다.
사천에서 가장 부유하다는 당문의 보고다. 암단화 정도 되는 영약도 선뜻 내줄 정도라면, 그보다 더한 것이 하나쯤 있을 법도 했다.
허나 이어진 당자헌의 말은 서연의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었다.
“공청석유(空淸石乳)가 있소.”
“……예?”
저도 모르게 눈이 휘둥그레졌다. 빙공 영약의 왕이 만년설삼(萬年雪蔘)이고, 열양공 영약의 왕이 만년화리(萬年火鯉)라면, 공청석유는 일반 무공을 익힌 자들의 왕 자리를 차지하는 지고의 영약이었다.
극도로 정순한 자연지기를 품고 있어 마시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양의 내공을 얻을 수 있고, 자칫 음양의 균형이 뒤틀려 큰 위험에 처할 수 있는 다른 영약들과는 달리 어떠한 부작용도 없는 영약이었다.
당연히 돈으로는 살 수 없는 신물이었다.
서연은 진중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렇게 귀한 것을 주셔도 되는 겁니까?”
“딸아이의 목숨보다는 싼 값이오.”
당자헌은 망설임 없이 한 금고로 다가섰다. 그가 내기를 불어넣자, 거대한 금고가 딸깍 소리를 내며 열렸다. 금고 안에는 자그마한 약병이 있었는데, 그 안에 공청석유가 담겨 있는 듯했다.
곧 약병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허공섭물(虛空攝物)이라 했다. 진기로 만물을 움직이는 경지였다.
서연은 제 손에 놓인 약병을 멍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이제 두 가지 남았소.”
서연은 진심으로 놀랐다. 대인배라 불릴 수준을 뛰어넘었기 때문이다.
이쯤 되자 기쁨보다는 양심의 가책이 먼저 들었다.
허나 내색할 수는 없었다. 당자헌 본인이 딸아이의 목숨보다는 싼 값이라 했다. 여기서 자신이 머뭇거린다면, 당소소의 목숨을 공청석유의 값어치보다 못하게 여기는 꼴이 될 터였다.
검은 필요 없었다. 산정 장인에게 이미 맡겨둔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방어구가 낫겠다.
제자를 지키는 것뿐 아니라, 어쩌면 당소소까지 보살펴야 할 수도 있었다.
처음에는 부담스러운 마음에 당소소의 동행을 거절하려 했으나, 이미 공청석유를 받아버린 이상 그렇게 하기도 힘들게 되었다.
공청석유를 받아놓고도 입을 싹 닫는다? 인간 거죽을 둘러쓴 짐승이나 마찬가지리라.
그러므로 방어구였다.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타인을 지켜야 할 일이 자주 생길 것 같았기 때문이다.
“칼이 잘 들지 않는 옷도 있습니까?”
“인면지주(人面蜘主)의 실과 천잠사(天蠶絲)를 엮어 만든 장포가 있소. 진기가 실리지 않은 도검은 감히 흠집조차 내지 못할 것이오.”
당자헌이 입고 있는 장포 또한 그러한 종류였다. 그는 직접 보여주려는 듯 장포에 진기를 흘려보냈다. 그러자 장포의 끝자락이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허공으로 떠올랐다.
“이렇게도 사용할 수 있소.”
당자헌이 손짓하자, 힘없어 보이던 천 조각이 채찍처럼 쏘아져 나갔다. 힘을 더 싣자 단단하고 빠른 둔기가 되기도 했다.
콰앙!
서연은 펄럭이는 장포에 직격당해 처참하게 무너진 벽면을 응시했다. 단순히 옷이라고 치부할 수 없는 파괴력이었다.
“…….”
더는 놀랄 일도 없을 것 같았다. 서연은 어느새 제 손에 홀연히 놓인 흰 장포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제 하나 남았소.”
더 얻을 것이 남아 있을까? 이곳에는 사천당문의 비급 뿐만 아니라, 이렇다할 검법과 심법도 있었다. 허나 필요치 않았다.
종남의 검법, 연화비영보, 비연천공, 편린이기는 하나 점창의 검법까지 알고 있었다. 지금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서연의 고민이 길어지자, 당자헌이 입을 열었다.
“철영 장인에게 들었소. 은공은 살생을 선호하지 않는다고.”
“맞습니다.”
“음.”
겉으로 보이는 당자헌의 표정은 복잡하고 미묘했다. 무림인으로서 살생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원한을 가진 자를 살려두면 언젠가 반드시 후환이 되어 돌아오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불살을 내세우는 소림조차도 이따금 살계를 열겠는가. 허나 당자헌은 서연의 사연을 묻지 않았다.
대신, 머릿속으로 적당한 물건을 물색했다. 순전히 은혜에 대한 호의만은 아니었다. 서연이 안전할수록 제 딸아이 또한 안전할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기절시키는 독이나 상처를 치료하는 약은 딸아이도 만들 수 있었다. 사천당문의 직계인 그녀는 독인의 경지에 올라 눈을 감고도 신체의 도해(圖解)를 엿볼 정도. 수십 년 의술을 익힌 의원보다 나을 터였다.
정보 또한 마찬가지였다. 타고난 성품 탓에 위험한 곳으로 향할 것 같지도 않았고, 욕심이 적어 장보도 같은 것에 눈이 멀 것 같지도 않았다.
그때 당자헌의 시선이 서랍 속의 쥘부채에 머물렀다. 절세고수였던 조부가 사용하던 것이었다. 영목으로 만들어져 무기의 역할도 수행할 수 있었지만, 본래 목적은 그게 아니었다.
초대 가주께서 남만의 청목족에게 받은 것으로, 바람의 영성이 깃들어 있다고 했다. 주인으로 인정받으면 저보다 강적을 만났을 때 저절로 떨려 위험을 알려준다고 들었다.
당연히 당자헌도 사용해 보았지만, 주인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그의 아버지였던 전대 가주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렇기에 이 보고에 보관된 채 잊혀 있었다.
“이것을 한 번 들어 보시겠소?”
서연은 머뭇거리다 손을 내밀어 쥘부채를 건네받았다. 그동안 받았던 것들에 비하면 평범해 보였기에, 상대적으로 덜 긴장할 수 있었다.
허나 그것도 잠시.
화아아악!
서연의 손이 닿자마자 강렬한 바람이 몰아쳤다. 몸을 감싼 장포가 세차게 펄럭였다.
지켜보던 당자헌은 저도 모르게 헛숨을 삼켰다. 가주의 자리에 오른 이후 한 번도 평정을 잃지 않았던 그답지 않았다.
무학을 극성까지 익힌 무인의 검은 살아있는 것처럼 소리를 낸다. 그것을 검명이라고 한다. 허나 당자헌은 쥘부채가 저리 크게 노래할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허……!”
그의 경악 어린 목소리마저 쥘부채의 울림에 묻혀버릴 정도였다.
서연은 어느새 눈을 감고 있었다.
쥘부채를 잡는 순간 깨달았다. 어떻게 사용하는지, 또 어떤 능력을 가졌는지. 금방이라도 창공에 오를 수 있을 것처럼 전신이 가벼워졌다.
‘바람인가?
본래 다루기 억센 물건이었다. 청목족들이 신성시하는 영목으로 만들어진 탓이었다.
자연지기를 자유로히 다루는 청목족의 옛 왕족들이 사용할 것을 상정하고 만들어진 탓에, 상대가 절세고수라고 한들 쉬이 제 힘을 내어주지 않았다.
허나.
‘가만히.
우웅.
서연이 진기를 불어넣기 무섭게 묘한 진동음을 발하며 순한 양처럼 굴었다. 서연의 전신을 타고 맥동하는 막대한 자연지기를 느꼈던 탓이다.
우우웅-!
수십 년 만에 부모와 재회한 아이처럼 울어댔다. 애절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바람은 더욱 거세게 몰아치며 보고를 순식간에 어지럽혔다. 오직 서연의 주변만이 태풍의 눈처럼 고요할 뿐이었다.
당자헌은 몸 위를 두르고 있는 호신강기를 강하게 때리는 바람을 보며 침음을 삼켰다. 단순한 바람이 아니라 마치 칼날 같았다.
아주 어렸을 적, 조부가 이 부채를 쓰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기껏해야 작은 산들바람을 일으켰을 뿐이었으나, 조부는 그 산들바람만으로도 허공답보(虛空踏步)를 펼치곤 했다.
헌데 이건 대체 뭐란 말인가.
‘폭풍……?
이 자리에 자신이 있었기에 망정이지, 다른 이였다면 사천당문이 오랜 세월에 걸쳐 모아온 보물들이 전부 망가졌으리라.
그 정도로 바람이 거셌다.
당자헌은 미간을 좁히며 진기를 끌어올렸다. 폭풍에 휩쓸려 회오리치던 물건들이 바람을 거스르기 시작했다. 당자헌의 진기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수백 개가 넘는 물건들이 원래 있던 위치에 질서정연하게 쌓였다. 폭풍 속에서도 진기를 자유로이 펼칠 정도로 세밀한 진기 운용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으음……!”
허나 폭풍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거세질 뿐이었다. 오죽했으면 폭풍 한가운데에 있는 서연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강제로라도 개입해야 하는가.
당자헌이 그렇게 판단하고 출수하려던 찰나였다.
화악!
폭풍이 그야말로 한순간에 가라앉았다. 그것이 환각이 아님을 알 수 있었던 것은, 쥘부채를 든 채 지상으로 서서히 내려오는 서연의 모습 덕분이었다.
그새 갈아입기라도 한 것일까. 서연은 어느새 당자헌이 건넸던 흰 장포를 걸치고 있었다.
옷소매가 긴 탓에 유독 나풀거림이 심했는데, 그조차도 우아하게 느껴졌다.
서연이 땅바닥에 착지하기 무섭게 사방에서 잔잔한 바람이 흘러나왔는데, 어째서인지 도화색처럼 보였다. 바람에 색이 있을 수 있는 것일까.
당자헌은 눈을 몇 번 깜빡이다가, 서연에게로 다가갔다. 서연은 쥘부채를 든 채 가만히 서 있었다.
“어찌 한 것이오……?”
서연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답했다.
“……잘 모르겠습니다.”
사실 그렇지 않았다.
거세지는 바람에 당황하여 쥘부채를 세게 한 번 내리쳤더니 잠잠해졌다. 하지만 기대에 찬 시선을 하는 당가주 앞에서 차마 그런 경박한 대답을 할 수는 없었다.
‘잠시나마 부유했다.
능공허도, 허공답보……. 자유자재로 허공을 디디는 고수들이 어떠한 심정인지 잠시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어쩌면 이것이 당문의 보고에 있는 것 중에 가장 귀물일지도 모르겠다.
우웅…….
쥘부채는 여전히 울어댔는데, 세게 얻어맞은 탓인지 이전보다 그 울음소리가 초라했다.
“…….”
당자헌도 그 미묘한 울음을 느꼈다. 절세고수였던 조부의 손에서도 반항을 일삼던 쥘부채가 순한 양처럼 굴고 있었다.
‘……여인만 제대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이었나?
억지로나마 그렇게 이해했다. 명색이 팔가의 가주였다. 금세 정신을 갈무리했다.
“공청석유도 이 자리에서 섭취하는 것이 좋을 것 같소. 본 가주가 운기를 도울 테니, 은인께서는 안심하시오.”
“그러도록 하겠습니다.”
사천당문이 서연에게 쏟은 성의는 그야말로 엄청났다.
서연은 가부좌를 트는 중에도 과분함을 느꼈다. 이쯤 되니 오히려 자신이 당소소를 모셔야 할 판이었다.
“대주천을 해 본 경험이 있을 것이오. 거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 전신 세맥의 흐름을 느낀다고 생각하는 것이 좋소. 운기가 불안정해지면 개입할 것이니, 손이 닿아도 너무 놀라지 마시오.”
서연은 약병의 뚜껑을 따고 공청석유를 입에 흘려 넣었다. 우유와 같은 맛이 느껴졌는데, 삼키자마자 기운이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본래라면 극상의 영약을 섭취한 순간 전신의 혈도가 자극을 받아 울렁거려야 했으나.
‘뭐지.
혈도가 간지러운 느낌만 잠깐 들더니, 공청석유의 기운이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전신 혈도가 진작에 자연과 동화된 탓이었다. 아무리 공청석유가 정순한 자연지기의 집합이라 해도, 서연의 육신에는 미치지 못했다.
초고수가 하품 영약을 아무리 먹어도 내공을 얻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운기를 시작하면 말씀하시오.”
당자헌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서연이 아직 공청석유를 입에 머금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그, 당 가주님.”
운기 중에 대놓고 입을 열었다. 급박한 문제가 생긴 것으로 착각한 당자헌이 다급히 서연의 등허리에 손을 올렸다.
“진기도인을 돕겠소. 입을 다무시오.”
당자헌은 다급히 서연의 전신 근육과 혈도에 진기를 흘려 넣었다.
그리고 경악했다.
‘무슨……!
당자헌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몇 번이고 서연의 육신을 다시 살피고 나서야 침음을 흘렸다.
‘천무지체(天武肢體)라도 되는가?
극음과 극양, 삼재, 오행, 태극의 모든 기운이 있어 정사마를 가리지 않고 모든 무공을 조화롭게 익힐 수 있었다.
그뿐이랴. 무공의 이해도가 남달라 얼핏 본 것만으로도 형을 따라할 수 있는 신체라 했다.
당자헌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서연의 육신에는 불순물이 일체 없었다. 오히려 자신의 진기가 불순물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정처없이 서연의 체내를 주유하던 공청석유 또한 마찬가지였다.
공청석유는 당자헌의 진기를 느끼기 무섭게 폭포를 거슬러 오르는 연어처럼 살길을 찾아 맹렬히 질주했다.
!
공청석유의 기운은 그야말로 순식간에 당자헌의 육신으로 흘러들어갔다.
진기도인을 하려던 당자헌은 졸지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대주천을 반복해야 했다.
그렇게 앉은 채로 한 시진이 지날 무렵, 당자헌은 겨우 호흡을 다잡고 눈을 떴다.
공청석유의 막대한 내공을 온전히 흡수했다.
“……이, 이게 대체.”
그는 완전히 이해를 포기한 사람의 얼굴을 한 채로 서연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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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자헌은 혈맥을 따라 흐르는 무량한 내공에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차가운 칼날과 같던 사천당문의 가주가 이토록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다는 것을 과연 누가 믿을 수 있을까.
대체 어찌하여 공청석유를 자신이 흡수하게 되었는가.
당자헌은 서연의 육신을 살피던 기억을 떠올렸다. 진실로 경이로운 육체였다. 그렇기에 전설 속에서나 전해 내려오는 천무지체라 착각했다.
허나 공청석유의 기운이 자신에게로 흘러들어온 것을 생각하면 천무지체는 아니었다.
‘……무극지체(無極之體)? 정녕 실존했던가?
열반의 묘리를 몇 번이고 깨달은 몸이라는 뜻이다. 선천적으로 내공이 마르지 않는 체질이라 했다.
운기로 얻는 내공양이 막대하여, 하단전과 중단전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어 전신을 단전으로 사용한다는 것을 얼핏 들어본 적이 있었다.
그렇다면 공청석유가 듣지 않았던 것도 설명할 수 있었다. 들어갈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하단전이 느껴지지 않았었다.
그러한 것들이 당자헌의 추측에 확신을 실어주었다. 터무니없이 들릴 수도 있었으나, 결국 언젠가 존재했으니 전설로나마 남았을 것 아닌가.
설마 서연이 자신보다 고수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절세고수는 굳이 영약을 취할 필요가 없다. 자연을 단전으로 사용하기에, 영약을 먹어도 내다 버리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그 어떤 절세고수가 귀한 공청석유를 상대로 그런 의미없는 짓을 하겠는가.
애초에 서연이 절세고수였다면, 공청석유를 그대로 들고 가 제자에게 가져다 먹였을 것이다.
그러니 제 체질을 여태 몰랐다는 쪽이 훨씬 설득력 있었다.
‘딸아이가 혹할 만도 하구나.
능히 새로운 지평을 열만한 신체였으니 말이다.
서연이 자연지기를 끌어올리는 모습을 직접 보았거나, 하다못해 무학을 주제로 이야기라도 나누었다면 당자헌의 생각은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여러 상황이 겹친 탓도 있었다. 쥘부채의 영향으로 일대의 자연지기가 마구 뒤섞였고, 서연의 육신 자체도 다른 절세고수들과 판이했다.
그렇기에 당자헌은 서연이 무극지체라 착각할 수 밖에 없었다.
서연 또한 긴장한 얼굴로 당자헌을 응시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에 당자헌이 입을 열었다.
“은공은 무극지체 같소.”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공청석유를 내다 버린 듯 하여 좌불안석이었는데, 뜬금없는 말이 튀어나와 당황했다.
“호흡 자체가 운기로 화한 체질이오. 확인해보니 임독양맥도 타통되어 있고, 기경팔맥과 십이정경에 정순한 기운이 가득 차 있더이다. 여태 살아오며 내공이 부족하다고 느낀 적은 없을 것이오. 앞으로도 그러하겠지.”
“그럼…….”
“은공에게는 영약이 필요치 않소. 실로 괴력난신과 같은 자질이오.”
“괴력난신…….”
서연이 멍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당자헌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실로 그러하오. 앞으로 삼십 년이면 능히 절세고수의 반열에 오를 수 있을 것이오. 팔대세가는 말할 것도 없고, 구파일방 또한 은공의 자질을 깨닫게 되는 순간 어떻게든 모시려 할 것이오.”
서연은 가만히 입을 닫고 있었다. 다른 사람이 한 말이라면 몰라도, 사천당문의 가주가 거짓을 지어낼 이유가 없었다.
육체에 대한 공부로는 신의와 견줄 만하다 했다. 당가주가 자신을 무극지체라 한다면, 무극지체가 맞을 터.
어쩐지 밤길이 훤히 보이고, 격렬하게 움직여도 육체가 쑤시지 않으며, 하단전이 느껴지지 않는데도 내공을 거침없이 사용할 수 있더라니. 그런 내막이 있었던 모양이다.
‘삼십 년 뒤에 절세고수라.
드넓은 강호무림의 절대자 중 하나가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갑자기 너무 일이 커진 것 같았다.
서연은 절세고수 같은 것은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그저 제 제자를 가르치며 강호를 유람하다 조각이나 하는 지금의 삶이 좋았다.
무공 또한 여행 도중 생길지 모를 문제로부터 제자를 지키고자 익혔던 것이다.
물론 고수가 된다면 좋기야 하겠지만, 지금처럼 한가로운 생활은 하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당자헌이 삼십 년이라 단언한 것은, 말 그대로 최선을 다해 단련했을 때의 일일 터.
지금처럼 여유롭게 강호를 유람하며 다니면 그보다 훨씬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은 자명했다.
그뿐이랴. 무극지체라 했다. 구음절맥이나 구양절맥보다 귀한 체질인 것은 분명했다. 당자헌이 좋게 말해주기는 했으나, 정파에서 모셔간다는 뜻은 다른 말로 사파나 마교에서 잡아간다는 뜻이기도 했다.
물론 겉보기로 알아낼 수는 없을 것이다. 당자헌 또한 인체의 도해를 꿰뚫고 있는 사천당문의 가주라는 특수성 때문에 알아챌 수 있었으리라.
평정을 되찾은 서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숨길 방법이 있겠습니까?”
“은공에게 직접 진기를 흘려넣지 않는 한, 누구도 알아채지 못할 것이오. 소림의 방장이 천안통을 깨쳤다 하니 그는 예외로 두어야겠으나, 그만한 안법을 깨친 자는 중원 무림을 통틀어서 셋이 넘지 않소.”
서연은 내심 안도했다. 그 말은 즉슨 웬만해서는 정체가 탄로 날 일이 없다는 뜻이었으니 말이다.
심지어 강적을 만난다면 쥘부채가 알아서 경고해줄 터이니, 위험에 처할 일도 없을 것이다.
“아무튼, 은공의 체질로 인해 본의 아니게 공청석유의 기운을 흡수하게 되었소. 그러니 두 가지를 더 고르시오.”
왜 갑자기 두 개로 늘어난단 말인가? 그러한 기색을 느꼈는지, 당자헌이 말했다.
“공청석유를 은공이 사용하지 못했으니 하나, 또 영약으로는 성취를 얻기 힘든 경지에 도달했던 본 가주가 은공의 체질 덕분에 적잖은 성취를 얻었으니 둘이오.”
본래 당자헌 정도 되는 고수라면 공청석유 정도 되는 영약으로도 내공을 얻기 힘들었다. 사용하지 않고 가문의 보고에 보관해두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허나 서연 덕에 웬만한 깨달음 이상으로 내공을 얻었다.
서연은 얼떨떨한 얼굴로 보고를 돌아보았다. 더 고를게 남았나? 모르겠다.
그러다 문득 생각했다.
이번 기회에 제자가 쓸 물건까지 얻어가면 좋을 것 같았다.
*****
대명은 더없는 태평성대를 누렸다. 이십 년 동안 풍년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그 풍년은 올해로 끝을 맺었다. 사천, 안휘, 하남과 같은 평야지대의 작황이 예년의 절반에도 못 미쳤다.
그뿐이랴, 장강 이남은 가히 흉년이라 칭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수준이었다.
거기에 정복전쟁까지 겹쳤다.
국사를 돌보는 자금성 태화전(太和殿)의 분위기가 무거운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명나라 황태자 주영륜(朱英倫)은 전장으로 떠난 황제 대신 정무를 도맡아 처리했다. 본래 황태자에게 정무를 맡기는 것은 자칫 황권을 흔들 만한 중대한 사안이었으나, 황제 본인이 아랑곳하지 않았기에 가능했다.
오히려 대리청정을 장려했다. 고작 정무를 맡는 것으로 제 황위를 흔들 수 없다고 신하들 앞에서 확언하고는 친히 군대를 이끌고 국경으로 떠났다.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다. 본디 황제는 존귀한 존재인 바, 황태자인 자신이 가는 것이 옳았다.
허나 부친은 이를 원치 않았다. 명군이기 전에 패왕이었다.
“국경의 정벌군에게 군량을 보급하는 일이 지연되고 있사옵니다. 귀주와 광서, 광동 지방에서 특히 어려움이 깊다고 하옵니다.”
전부 장강 이남이다. 사마련, 스스로를 팔천(八天)이라 자칭하는 무도한 세력이 기다렸다는 듯 약탈을 감행하고 있었다.
부친이 국경으로 떠난 탓이다. 온 중원에 황제가 미치던 영향력이 지대했다.
황태자의 손끝이 의자의 팔걸이를 툭툭 두드렸다. 대리청정 자체를 부담으로 여기는 여타 황족들과 다르게, 그의 표정은 여유롭기 그지 없었다.
그의 나이가 불혹에 가까웠다. 간언과 아첨을 능히 구분할 줄 알았다.
“섬월대(閃月隊)를 보내라. 도지휘사사(都指揮使司)와 연계할 권한을 줄테니, 막는다면 이유를 불문하고 섬멸하도록.”
한 성의 군사를 통할(統轄)하는 사령관이다. 거기에 천명검까지 파견한다면 군량 보급에 문제가 생길 일은 없으리라.
“점창이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하오. 마땅히 지원을 보내야 할 것으로 사료되오.”
“곤륜과 공동파 또한 마찬가지요.”
“마교가 큰 분란을 일으키지 않은 것이 수십 년이오. 오히려 장강 이남의 사마련이 큰 문제올시다. 그 쪽에 집중하는 것이 맞소!”
“동의하오. 마교가 수작을 부릴 생각이었다면 진작 나섰을 것이오.”
“사교의 종자들이 잠잠한 것이 더욱 수상하올시다. 이럴 때일수록 대비를 철저히 해야 하오!”
“그만.”
황태자가 말했다.
“사마외도의 간자들만 있는 줄 알겠다. 덕분에 정무의 본질이 흐려졌다. 더 듣고 싶지 않으니 대신들은 이만 물러가라.”
고오오.
동시에 황태자의 주변에서 패도적인 기파가 흘러나왔다.
“허어억……!”
“흡…….”
짓눌리는 듯한 압박감에 대신들이 침음성을 토해냈다.
말로만 무림을 징치하겠다고 할 사내가 아니었다. 황태자는 어렸을 때부터 무공을 익혔다.
신하들은 다급히 물러갔다. 황태자는 그런 대신들을 보며 코웃음을 쳤다.
부친의 눈치를 보던 작자들이 안하무인하게 구는 꼴이 우습다. 저러는 이유 또한 안다. 부친이 그야말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기 때문이다.
허나 호부 밑에 견자 나겠는가. 주영륜 또한 호락호락한 이가 아니었다.
그의 시선이 다탁에 놓인 두루마리들로 향했다. ‘낙양 부윤’, ‘전 지휘사 월중천’. 두루마리를 작성한 자들의 이름이었다.
황상에게 고할 목적으로 작성된 것이다. 허나 황태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두루마리를 완전히 풀었다. 황상께 전권을 위임받았다. 무엇을 꺼릴까.
낙양의 소식은 진작에 귀에 닿았었다. 동창의 손이 중원 전역에 닿아있기 때문이다.
뭣 모르는 민초들이 선녀가 나타났다고 읊어대었다고 했던가. 그것을 생각하면 낙양 부윤의 보고는 한참 늦었다고 할 수 있다.
두루마리만 보냈다면 진작에 보고가 닿았을 것이다. 허나 낙양 부윤은 서책 한 권을 동봉했다. 그것이 귀물이라도 되는 양, 무수한 병사들로 호위하며 보낸 탓에 보고가 늦었다.
황태자의 시선이 비연천공이라는 글귀를 스쳤다.
서체가 아주 유려한 것이, 여인이 적었다고는 믿기 힘들 정도의 명필이었다.
흥미가 돋은 황태자는 한 손으로 서책의 첫 장을 펼쳐 들었다.
황제의 아들로서 부친이 검을 휘두르는 것을 수없이 보았다.
신공절학을 구분할 수 있는 안목이 충분했다.
“심공이구나.”
황태자가 희미하게 웃었다. 비급의 첫 장부터 드러난 기개가 심히 광오하게 느껴졌다.
“드넓은 중원을 자유로이 거닐겠다고.”
흥미가 돋아 혼잣말이 절로 나왔다. 심성이 글귀에서부터 느껴져, 엷은 미소를 오랫동안 머금었다.
허억―
곁에 시립해 있던 환관들의 입에서 낮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냉랭한 표정을 짓는 것이 일상이었던 황태자가 웃는 모습을 실로 오랜만에 보았기 때문이었다.
황태자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는 환관들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저 손에 들린 비연천공에 집중하며 다음 장을 읽어 내려갔다.
능히 절세를 논할만한 심법이다. 대종사라 칭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비록 미완성본이기는 하나, 이토록 귀한 보물을 황실에 기꺼이 진상한 마음씨가 기꺼웠다.
낙양 부윤이 말하기를, 저자는 운남으로 향하는 중이라 했다. 조각에 심취하여, 옛 대리국(大理國)이 있던 곳으로 발길을 옮긴다는 것이다.
황태자의 입매가 묘하게 비틀렸다. 정파의 절세고수 중, 부친과 연이 없는 자가 없었다.
천명검단주? 자신의 수하였으나, 동시에 황상의 친우였다. 애초에 천명검이라는 막강한 집단을 자신이 움직일 수 있게 된 것 자체가, 부친의 묵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기대가 얼굴 밖으로 드러났다. 그 때문인지 황태자의 입꼬리가 아주 작게 더 위로 올라갔다.
“자유를 원한다니, 그리 해야겠지.”
원하는 대로 간섭하지 않는다. 절세고수의 환심을 살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했다.
부친보다, 자신의 손이 먼저 닿았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곧 황태자의 손 끝에서 거대한 불꽃이 일어났다. 낙양 부윤이 보냈던 두루마리가 재도 남기지 못하고 타서 없어졌다. 기를 발해 물건을 태우는 삼매진화(三昧眞火)의 묘리였다.
“…….”
비연천공도 태워야 할까. 황태자는 잠시 고민했다. 잠시 본 것으로 내용은 전부 새겼다. 괜히 기록을 남겼다간 부친의 눈에 띌 수도 있었다.
허나 그만두었다.
부친의 손이 닿지 않은 첫 절세고수가 보낸 친애의 표식을, 어찌 없앨 수 있겠는가.
“가자.”
곧장 자리에서 일어난 황태자가 말했다. 수많은 환관들이 그를 뒤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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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소소의 방에 머물고 있는 화련은, 다과를 연거푸 먹어댔다.
“…….”
빈 그릇을 당소소가 말없이 채워주기 무섭게 화련은 순식간에 다과를 해치웠다. 당소소는 그런 화련의 모습을 보고 더욱 식욕을 잃었다.
창밖 나뭇가지에 앉은 유혼이 가볍게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완전히 애가 다 되었구나.
화련은 다과를 씹던 입을 멈추고 고개를 홱 돌려 그를 노려보았다.
―다 유혼 님 때문에 이렇게 된 거잖아요.
―그 정도면 사소한 부작용이다. 혈맥과 근육을 어린아이의 것으로 되돌리는 것이 쉬운 일인 줄 아느냐.
안다. 아니까 잠자코 있던 것이다.
의도가 불순하게 느껴져서 그렇지, 유혼이 펼친 술법인 영유아강술은 그야말로 대법이라 불릴만했다. 능히 반로환동의 하위호환이라 부를만했기 때문이다.
단 한 명에게, 그것도 십 대에게만 사용할 수 있다는 제약이 있었지만 말이다.
서연을 처음 만났을 때의 화련은 아슬아슬하게 십대의 끝자락에 놓여 있었다. 생일이 지나지 않았던 탓이다.
‘조금 억지스러운 감이 있기는 하지만.
유혼이 괜찮다고 했으니 이리 성공한 것 아닌가.
물론 화련은 유혼의 말을 그대로 믿지 않았다. 필시 십 대보다 나이가 더 많은 자에게는 술법을 사용하고 싶지 않았던 유혼이 멋대로 규칙을 만들어냈으리라 짐작할 뿐이었다.
단 것을 먹지 못하면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거나, 어린아이 같은 행동을 하고도 전혀 위화감을 느끼지 못한다는 사소한 부작용을 제외하면, 어린 육신으로 살아가는 것도 나름 만족스러웠다.
“더 가져다 드리면 되겠습니까?”
당소소는 저 작은 몸에 저리 많은 다과가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으나, 겉으로 내색하진 않았다. 평소에 무표정으로 살아왔던 덕이다.
시종들? 전부 물려두었다. 당연히 화련의 호의를 얻기 위함이었다.
서연보다 화련을 먼저 공략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음, 괜찮아요.”
“그러면 차를 들고 오겠습니다. 섞을 꿀도 함께 가져오겠습니다.”
곧 당소소가 방 밖으로 나갔다. 침묵 가운데 먼저 입을 연 것은 유혼이었다.
―네 마음에 들려고 저리 열심이다. 말로 구슬리려 하지도 않고 묵묵히 움직이는 것을 보고도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느냐?
―제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그래도 주인님께 의견 정도는 말할 수 있을 것 아니더냐. 당가의 소소 아가씨가 아주 보기 좋다고. 데려갔으면 좋겠다고.
―유혼 님이 그걸 원하시는 건 아니고요?
유혼은 입가에 곡선을 그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화련은 질린다는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솔직히 화련도 당소소가 싫지 않았다. 나이로도, 배분으로도 자신이 위였기 때문이다. 후임이 들어온다는데 어떤 선배가 싫어하겠는가.
'애가 싹싹해.'
어린아이의 외형을 한 자신에게 깍듯이 대하는 것만 봐도 그 인품을 알 수 있었다.
무엇보다 당소소는 요리를 아주 잘했다. 방금 먹은 다과도 전부 당소소가 직접 만든 것이라 했다.
스승님도 요리를 잘 하셨지만, 당과나 다과같은 간식거리를 만들어주신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사매라 불러야 하나.'
혼자 생각에 잠긴 화련을 지켜보던 유혼은 클클 웃으며 어딘가로 날아갔다.
―이만 가마. 수련을 게을리 하지 말고. 주인을 실망시키지 말거라.
갑자기 왜 저런 말을 하나 했더니, 곧 문이 열리며 당소소와 함께 서연이 나타났다. 당가주와 대면을 마친 모양이었다.
서연은 품에 자그마한 함들을 여러개 들고 있었다. 당가주가 선물을 저리 많이 챙겨준 것인가?
“화련아.”
“네, 스승님.”
“자리에 앉으렴. 네가 쓸 영약을 얻어왔단다.”
“네에?”
설마 스승님께서 자신이 쓸 물건을 가져올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화련이 당황하고 있는 가운데, 옆에 있는 당소소가 함을 열며 하나씩 설명했다.
“청령보정환(淸靈補精丸), 영지환(靈芝丸), 천왕보심단(天王補心丹)……. 가주님께서 많이도 챙겨주셨군요, 순서만 지켜 먹으면 내공을 갑자도 넘게 얻겠습니다.”
당소소 또한 혀를 내둘렀다. 자신도 먹어보지 못한 영약들도 여럿 섞여 있었다.
중간에 시비가 다가와서 함 하나를 마저 건내주었는데, 그곳에는 암단화를 가공한 단약이 들어 있었다.
방금 전까지 다과를 쉬지않고 집어먹었던 화련은 난감한 얼굴을 했다.
‘차만 마시고 마무리하려 했는데.
차마 배가 부르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화련은 다과를 무작정 집어먹었던 과거의 자신에게 한탄하며 가부좌를 튼 채로 자리에 앉았다.
“내가 기운을 갈무리하여 네게 넘겨줄 것이란다. 그러니 진기가 들어차도 당황하지 말거라.”
화련은 순간 죄책감을 느꼈다. 속이 더부룩한 것을 스승님이 눈치채고 저리 말하시는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서연은 그런 화련의 등에 손을 가져다 댄 다음, 영약을 순서대로 삼켰다.
‘영약은 쓰구나. 공청석유가 맛이 좋은 편이었어.
잡념도 잠시였다. 서연의 체내에 들어온 약 기운들은 화들짝 놀라 활로를 찾아 해멨다.
공청석유도 스스로를 불순물이라 여길 정도로 정순한 육체다. 그보다 못한 영약들은 오죽하겠는가.
우웅-
서연은 손 끝으로 빠져나가는 기운들을 느끼며 만족스러운 얼굴을 했다.
“……!”
옆에서 지켜보던 당소소가 경악했다. 갑자기 은공께서 영약을 삼키신다기에 설마 했는데, 설마하니 진기도인을 직접 하실 줄은 몰랐다.
‘저걸 진기도인이라 할 수 있나?
약효만 저리 넘기는 것이 가능한지는 차치하고, 흘러가는 기운의 양으로만 보았을 때 약효가 전부 온전히 넘어간 듯 보였다.
자신의 기운을 타인에게 넘겨주는 격체전력에 가까웠다.
“헉!”
“놀라지 말고 호흡에 집중하렴.”
동시에 서연은 비연천공을 하루빨리 완성할 필요성을 느꼈다. 단순히 호흡을 반복하는 것보다, 심법을 운용하는 것이 훨씬 도움이 될 터였다.
‘무극지체라 했다.
웬만한 묘리를 한 번 보고 깨달을 수 있다는 뜻이다. 타인의 육신에 진기를 흘려넣을 기회가 흔치 않으니, 이번 일을 계기로 내가공부를 제대로 해볼 작정이었다.
늦게나마 체질을 알았다. 그것이면 충분했다.
타인에게로 흘러들어간 진기의 흐름을 온전히 관조한다. 만족할 생각은 없다. 한 단계 더 나아간다.
기경팔맥, 십이정경, 전신 세맥……점점 더 미세한 혈맥에 진기를 자유로이 흘려넣었다. 그 와중에 제자가 다치지 않도록 혈맥을 단단히 보강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서연의 진기는 순식간에 화련의 백회혈에 닿았다. 임독양맥을 연결하려면 백회혈을 틀어막고 있는 생사현관을 타통해야 한다.
본래 목숨을 걸만큼 위험한 일이다. 화련의 나이에는 시도하지 않는 것이 이치에 맞다.
허나 서연은 아랑곳하지 않고 진기를 불어넣었다. 정순한 기운과 영약의 약효가 뒤섞여 순정하게 흘러들었다.
콰아아―
파도처럼 몰아치던 기운이 생사현관을 몇 번 두드리더니, 찰나지간에 뚫고 나아갔다. 그 과정이 오죽 자연스러웠는지, 당사자인 화련조차도 일말의 고통을 느끼지 못할 정도였다.
'원체 잘 닦여 있는 육체였다.'
생사현관이 유독 부드러웠다. 그렇기에 간단히 타통할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곧 서연의 인도에 따라 한 곳으로 모인 진기는 자연스럽게 화련의 단전으로 나아갔다.
‘감싼다.
화련의 단전은 실시간으로 그 크기를 불렸다. 단 한 점의 손실도 없었다.
‘이게 진기를 다루는 감각이구나. 확실히 기억해야겠다.
단순히 감각에 의지하여 펼쳤을 때와, 확실히 인지하고 펼쳤을 때의 느낌은 천지 차이였다.
이를 응용하여 타인의 육신에 진기를 흘려넣고 뒤흔든다면 어렵지 않게 무력화시킬 수 있을 듯했다.
작게나마 깨달음을 얻었다. 이 묘리를 비연천공에 추가해도 좋을 듯했다.
“되었단다.”
서연은 땀 한방울 흘리지 않았다. 오히려 지친 것은 화련이었다. 체내를 주유하는 막대한 기운에 긴장하여 그리 된 것이다.
단전에 들어찬 기운이 몇 배로 많아졌다. 지금이라면 연화비영보도 훨씬 쉽게 펼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감사합니다…….”
화련의 눈동자는 더없는 감정을 품고 있었다. 스승의 은혜가 한량없이 깊었다.
원래도 존경했으나 이제는 스승의 은혜에 감복하여 완전히 우러러보는 수준이었다.
“네가 잘 따라와준 덕분이란다.”
화련의 머리를 쓰다듬던 서연이 당소소를 힐끗 보았다. 둘의 시선이 마주쳤다.
서연은 일전에 가주전에서 있던 일을 떠올렸다. 당소소가 저를 따라가고 싶다고 했었던 일 말이다.
대화를 나누어볼 필요가 있었다.
잠시 고민하던 서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나는 평소에 각예를 즐겨 하곤 한단다. 세상을 주유하는 것도, 제자에게 각예를 가르치기 위함이었지.”
당소소는 눈치껏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셨군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서연은 픽 웃으며 말했다.
“왜 나를 따라오고 싶다고 생각했니?”
당소소는 곧장 대답하지 못했다. 답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았기 때문이다.
마음에 들지 않는 대답을 했다가는 은공을 따라가지 못할 수도 있다는 걱정이 수면 위로 떠올라, 한참 동안 입술을 여닫기만을 반복했다.
서연이 그녀의 손을 잡기 전까지는 그러했다.
“……?”
당소소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서연을 응시했다. 도화색 눈동자와 마주쳤다.
"편히 말하렴."
아름다웠다. 정신이 맑게 개이는 듯했다.
당소소가 서연을 따라가고자 했던 것은, 서연의 검이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그것을 제 손으로 직접 펼쳐보고 싶었다.
그것뿐인가?
‘아니.
당소소는 속으로 고개를 가로저으며, 마음 깊은 곳에 묻어두었던 시커먼 생각을 꺼내놓았다.
오랜 시간 그녀를 짓눌러온 자격지심이었다.
당소소는 후계자가 될 수 없었다. 오라비의 입지가 워낙 단단했던 탓이다. 당연히 만천화우 또한 익힐 수 없었다.
그래서 동생과 약조했다. 한 명은 암기술에 통달하고, 다른 한 명은 독공을 익혀, 각 분야의 최고가 되어 언젠가 오라비를 이겨보자고.
만천화우에는 관심이 없다고 여겼었다. 오라비가 천명검으로 떠나고, 동생이 후계자가 되기 전까지는.
웃는 동생을 축하해주면서도, 당소소는 어째서인지 속이 곪아가는 듯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스스로를 몰아붙였던 것도 그때쯤이었다. 주변인들의 우려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독공에 몰두했다. 감당할 수 없는 독을 들고 폐관에 임했다.
그 정도도 판단하지 못할 만큼 정신이 불안정했다.
천운이 따라 독인의 경지에 오르지 못했더라면, 핏물조차 남기지 못하고 녹아 없어졌으리라.
목숨보다 무학에 대한 집착이 컸다. 애써 외면했던 마음을 그때서야 깨달았다.
그렇기에 서연의 검격을 마주했을 때, 놓치고 싶지 않았다. 가문을 등져서라도 따라가고 싶었다. 시종 행세를 해서라도 배우고 싶었다.
그렇게 배워서.
“오라비와 동생과 아버지께, 제가 배운 것이……만천화우보다 낫다고 당당히 말하고 싶었습니다.”
당소소는 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어째서인지 목소리가 얕게 떨렸다.
“저도 은공을 따라가서, 배우고 싶습니다. 허락하지 않으신다면……정말 슬프겠지만, 본가에 남아서 은공이 보여주셨던 편린을 다듬고 또 다듬겠습니다.”
그러다 한계에 부딪히면 결국 서연을 찾아 떠날 것임을 알고 있었지만, 차마 그 말까지는 하지 못했다.
타인에게, 그것도 은인에게 제 시커먼 속내를 모두 드러내는 것은 너무나도 무겁고 힘든 일이었다. 준비가 필요했다.
당소소는 크게 심호흡했다.
서연이 품에서 작은 조각칼을 꺼내기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이만한 검으로 펼치는 검법을 말하는 거니?”
“……!”
“맞구나.”
서연의 눈이 빛났다. 영감이 발한 것이다.
본디 무공의 원류가 그러했다. 역사 깊은 구파에 동물과 자연의 형상을 본딴 무공이 적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이다. 조각을 본딴 검법을 만들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무극지체라는데, 그것 하나 못할까.
제자에게 가르칠 마땅한 검법이 없었는데, 당소소 덕분에 완전히 가닥이 잡혔다.
더 없는 성과였다.
심공, 보법, 검법까지. 무학의 대략적인 틀이 잡힌 것이다.
‘만천화우보다 나을지는 모르겠다.
만천화우는 옛 절세고수가 창안한 무학이었기 때문이다.
허나 허투루 만들 생각은 없었다. 제자의 몸을 지켜줄 무학이다. 결코 대충 해낼 수 없는 일이었다.
서연은 다시 고개를 돌렸다. 항상 무표정하던 당소소가 어찌할 줄 모르는 얼굴로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일평생 명문가의 자제로 살아왔을텐데도, 이름조차 없던 제 검술을 더 높게 쳐주는 것도 고마웠고, 방금까지 우울했으면서 조각칼을 본 순간 눈동자에서 반짝반짝 빛을 내는 것도 귀여웠다.
“소소야.”
“네, 은공.”
서연은 당소소를 향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가서 당가주님께 허락받고 오렴.”
“……가, 감사합니다!”
그렇게 외치는 당소소의 목소리는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아이에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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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행이 된 서연과 예화는 말을 타고 곧장 도시를 벗어나 빠르게 남쪽으로 향했다. 예화의 걸음이 너무 느렸기 때문이다. 애초에 그런 몸 상태로 여기까지 온 것이 기적에 가까웠다.
원래는 마차를 타려 했으나, 도시 바깥까지 가는 마차는 몇 시진씩 기다려야 한다는 말에 어쩔 수 없이 마시장에서 남는 말을 빌려 탔다. 화양현에 도착하면 말을 반납해야 했지만, 그래도 처음부터 걸어가는 것보단 훨씬 나았다.
서연의 허리를 꽉 부여잡고 달리던 예화가 조심스레 말했다.
“고수 분들은 말도 이리 능숙하게 다루시는군요.”
서연은 처음 타본다는 말을 하려다가 속으로 꿀꺽 삼켰다. 타본 소감을 말하자면, 백호를 타는 것보다 몇 배는 쉬웠다. 아무래도 속도도 백호 쪽이 빠르고, 달리는 길도 백호 쪽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험하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백호는 산길로만 다니니까.
서연은 순식간에 화양현에 당도했다. 상인이 서연이 내민 대여 증서를 확인하는 사이, 예화는 말에서 힘없이 내려섰다. 오랜 시간 달린 탓에 가랑이가 쑤셔오는 고통에 그녀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이윽고 증서 확인을 마친 상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은전 두 냥 되겠습니다.”
“……!”
어마어마한 대여료에 낯빛이 변하는 예화를 힐끗 본 서연은 묵직한 전낭에서 은전을 꺼내어 내밀었다.
‘생각보다 훨씬 비싸구나.
말이 금값이라더니. 그리 오래 빌린 것도 아닌데 요금이 이리 나올 줄은 미처 몰랐다.
말을 묶어두고 나서는데, 예화가 고개를 푹 숙인 채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아직 노잣돈은 넉넉했으니 진정 괜찮았다. 오히려 몸도 아픈 처자가 괜한 눈치를 보는 것 같아 서연의 마음만 더 불편했다. 괜찮다는 듯 미소를 지으려던 서연은, 이내 눈을 가늘게 떴다.
“저쪽에 있는 자들, 아는 사람들인가요?”
“어디요?”
“오솔길 옆에.”
“매, 매 각주에요…….”
흑도로 보이는 이들 열 명이 아무렇게나 걸어오고 있었는데, 등에 두 자루 도를 열십자로 맨 사내가 유독 눈에 띄었다. 첫인상부터 험악하게 생긴 것이, 딱 봐도 매 각주였다.
그들은 스무 걸음을 더 다가온 후에야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예화냐?”
매 각주가 묻자, 예화는 대답도 못하고 덜덜 떨다가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아버렸다.
“그럼 그쪽이 예화가 데려왔다는 여고수시고? 어째 생각보다 겉모습은 그럴듯한데, 얼굴은 어째 가리고 다니나? 지아비한테만 보여주시려고?”
매 각주는 제가 하는 말이 우스웠는지 말을 하는 와중에도 픽픽 웃어댔다.
그러다 웃음기를 싹 지우더니, 옆에 있던 수하들에게 손짓했다.
“일단 저 죽립부터 벗겨라. 얼굴을 봐야겠다.”
수하들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연스럽게 무기를 뽑아들었다.
서연은 동요하는 대신, 섬섬옥수 같은 손을 움직여 면사 한 켠을 걷었다. 그리고는 도화를 머금은 눈동자를 천천히 치켜들어 다가오는 사내들을 응시했다. 제 외모와 인상이 가지는 위력을 알고 있었기에 할 수 있는 행동이다.
“…….”
졸개들은 혼이 나간 듯한 얼굴로 서연의 반면(半面)을 바라봤다. 일부는 아예 입도 벌리고 있었는데, 그들은 서연이 코앞까지 다가오는 것을 봤으면서도 움직일 생각조차 못하는 듯 보였다.
툭툭.
서연은 그대로 앞으로 움직이면서 손으로 졸개의 마혈(痲穴)을 짚었다. 예전에 수인경혈도를 읽었을 때 외워두웠던 혈자리였다. 처음 짚어 보는 것이었는데, 움직임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손끝에서 꿈틀거리는 이게 진기인가. 지금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서연은 외모에 한눈이 팔린 졸개들의 마혈을 마저 짚었다. 마혈이 눌린 졸개들은 식은땀을 흘리면서 온 몸을 부들부들 떨 뿐,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했다.
반수가 허무하게 제압당했다. 미인계가 이렇게나 무섭다.
서연은 무심한 눈을 한 채로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는 재차 호흡을 가다듬은 다음에 말했다.
“그쪽 말대로 죽립을 벗을까 고민 중이다.”
긴장한 티를 내지 않으려 애를 썼다. 다행히 이 협박은 매 각주에게 먹혔다.
“…….”
말 많던 매 각주가 입을 다물었기 때문이다.
본디 점혈이란 내가기공(內家氣功)의 정수로, 대단히 높은 수준의 무인들만 펼칠 수 있는 기술이었다. 상대방의 신체에 자신의 내공을 심어 넣어야 하기 때문이다. 자칫 실수했다간 제압은커녕 세맥과 혈도만 끊어지는 위험한 기술이기도 했다.
어쩌면 정파로 위장한 마교의 고수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저 여자와 눈이 마주친 수하들이 돌처럼 굳어버렸기 때문이다.
생각이 복잡해졌기 때문일까, 매 각주는 더 이상 웃을 수 없었다.
물론 졸개들이 이러한 사실을 알 리가 없다. 눈치없는 졸개 하나가 말했다.
“너희들 뭐하냐? 장난치지 말고 빨리 덮쳐라. 아, 혹시 저 여자가 가장 늦게 움직이는 놈한테 시중이라도 들어준다더냐?”
“하하하하.”
서연이 다시금 면사를 걷어올리려 하자, 매 각주가 욕지거리를 쏟아냈다.
“전부 아가리 닥쳐라. 그 망할 주둥아리를 찢어버리기 전에. 루주께서 모셔오라 명하신 분을 이리 희롱하는 것이 제정신 박히고 할 짓이냐? 한 번만 더 개소리를 지껄이면 그 대가리부터 갈라놓을 줄 알아라.”
수하들은 싹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여기 또 눈치없는 놈이 있었다.
“희롱은 각주님께서 먼저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러자 매 각주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허리춤에 매달려 있던 도를 뽑아들고는 딴지를 걸었던 수하의 머리를 후려쳤다. 도면(刀面)에 얻어맞은 사내는 찍 소리도 내지 못하고 뒤로 넘어갔다. 그러고도 성이 안 차는지, 매 각주는 발을 치켜들어 수하를 마구 밟아댔다. 결국 기절한 수하는 코도 부러지고, 이빨도 죄다 날아갔다.
“또 대꾸하고 싶은 놈 거수.”
“…….”
“저렇게 되기 싫으면 전부 입 닥치고 있어라.”
졸개들은 감히 대답할 생각도 하지도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서연이 다시금 면사를 만지작거리자, 화들짝 놀란 매 각주가 납작 엎드렸다.
“살려주십시오. 제가 미처 고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까불었습니다. 부디 회화루로 모실 수 있게 해주십시오.”
흑도에서 오랜 세월 살아남은 인물답게, 매 각주의 처신은 너무나도 신속했다. 매 각주는 옆에서 ‘갑자기 뭐하십니까? 같은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졸개들에게 욕을 쏟아냈다.
“이 골통 빈 놈들아. 저기 서 있는 저것들이 진짜로 멍청해서 서 있기만 하는 걸로 보이냐? 살고 싶으면 당장 납작 엎드려라. 그래야 팔다리 하나 정도로 끝날 수 있으니까.”
그제서야 수하들은 매 각주의 말대로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매 각주가 다시 입을 열었다.
“수하들은 제가 잘 단속하겠습니다. 살려주십시오.”
서연은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녀의 침묵은 오히려 매 각주의 심장을 얼어붙게 했다. 등줄기에는 식은땀이 흘러내렸고, 심장은 마치 폭풍우 속의 배처럼 거칠게 요동쳤다.
“정녕 믿지 못하시겠다면, 이 자리에서 애들 팔부터 부러뜨리겠습니다.”
“각주님……?”
“미친놈들아. 너희들 살려주려고 이러는거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매 각주는 자리에서 일어나 수하들의 팔을 하나씩 부러뜨렸다. 죄다 칼 쓰는 손을 부러뜨렸는데, 그 때문인지 매 각주를 살벌하게 노려보는 수하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덤벼드는 놈은 하나도 없었다. 전부 덤벼도 매 각주를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기어코 수하들의 팔을 모두 분지러뜨린 매 각주는 한숨을 푹 내쉬더니, 제 오른팔부터 꺾어버렸다. 그리고는 바닥에 엎드려 말했다.
“살려주십시오.”
매 각주는 서연의 대답을 기다리면서 왼팔을 내밀었다. 양손잡이이니 마저 부러뜨리라는 뜻이다.
서연이 침묵하고 있자, 매 각주가 재차 말했다.
“당연히 아시겠지만,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저희를 지켜보고 있는 녀석들이 있습니다. 아마 지금쯤 회화루로 달려가고 있겠지요. 제가 회화루로 통하는 지름길을 압니다. 놈들보다 빠르게 도착할 수 있습니다.”
살업을 쌓고 싶지 않았던 것은 서연도 마찬가지였다. 서연은 경악한 얼굴로 저를 올려다보는 예화와, 매 각주를 번갈아 응시했다.
“예화를 업고 달려라.”
왼팔은 그대로 두겠다는 뜻이다.
“감사합니다.”
살았다는 생각이 들어서인지, 자리에서 일어서는 매 각주의 다리는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예화야, 업혀라.”
“…….”
“여기서 널 해코지했다간 우리 다 죽는다. 그러니 업혀다오. 부탁이다.”
매 각주는 그렇게 말하면서 매고 있던 무기도 싸그리 던져버렸다.
“영영이가 어디 있는지 안다. 루주의 처소 근처에 갇혀있을거다.”
“……!”
예화의 얼굴이 충격으로 물들었다. 그녀는 한참 동안 매 각주를 응시하다가, 결국 등에 업혔다.
“출발해도 되겠습니까?”
서연이 고개를 끄덕이기 무섭게, 매 각주가 빠른 속도로 달렸다. 외곽에서 활동하는 흑도치고는 뛰어난 보법이었다. 서연은 앞서 달려가는 매 각주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그의 몸놀림을 따라 했다.
거친 호흡을 들이키며 달리던 매 각주는 뒤를 돌아본 순간 경악했다. 서연이 깃털 같은 발걸음으로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탓이다. 그렇게 빠른 속도로 달리는데도 죽립이 기울어지지 않았다. 도저히 사람의 움직임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다.
언뜻 본 것만으로도 제가 펼치는 보법과 같은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도 보법에서부터 격이 달랐다. 물론 상식의 선이라는 것이 있었기에, 매 각주는 서연이 보법을 단 한 번 보고 통찰했다고는 생각지 못했다.
‘……도망갔어도 전부 죽었겠다.
*****
그렇게 산길을 일 각 정도를 달리고 나서야 현(縣)의 입구에 도착했다.
눈앞에 펼쳐진 현은 제법 번화한 모습을 띠고 있었다. 사람들로 북적이는 거리에서 조금 떨어진 외딴 곳에 붉은 단청과 화려한 문양을 새긴 기루가 자리 잡고 있었다.
매 각주는 회화루를 바라보다가 서연에게 말했다.
“간부들만 아는 뒷길이 있습니다.”
매 각주를 뒤따라 들어간 창고에는 장정 하나가 겨우 들어갈만한 철문이 놓여 있었다. 그림자와 먼지로 가득한 물건 틈 사이에 놓여 있는 탓에 자세히 살피지 않으면 찾지 못할 정도로 교묘하게 감춰져 있었다.
매 각주가 철문 앞에서 말했다.
“매 각주다. 일 마치고 복귀했다.”
곧 철문이 아무 소리 없이 열렸다.
“각주님. 벌써 다녀오셨습니까?”
매 각주는 문지기를 쳐다보더니, 좌장으로 뒷목을 내리쳤다. 곧 정신을 잃은 문지기가 픽하고 쓰러졌다.
“일단 기절시켰습니다만, 죽이는 편이 나을까요?”
매 각주는 그렇게 말하며 문지기의 목덜미를 발로 짓밟았다. 서연의 허락이 떨어진다면 당장이라도 숨통을 끊을 기세였다.
이 순간 서연은 무림인들의 손속이 얼마나 잔혹한지를 다시금 실감할 수 밖에 없었다.
허나 서연은 번민에 잠기는 대신, 조용히 문지기의 마혈을 짚었다.
“계속 가지.”
“……예.”
서연은 어두운 통로를 걷는 내내 생각을 정리했다. 습하고 퀴퀴한 흙냄새가 코를 찔렀지만, 그녀의 사유(思惟)는 더욱 뚜렷해졌다. 저들이 짐승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짐승이 무어냐.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같은 사람을 해치는 것이 짐승이다. 이를테면, 단지 쾌락을 위해 아녀자를 납치하여 능욕하고 팔아넘기는 자들이 그러하고,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려 무고한 이들의 보금자리를 불태우고 가족을 찢어놓는 무뢰배들이 그러하다.
허나 이 짐승들은 누군가에게는 잔혹한 짐승이면서도, 또 다른 이에게는 피붙이고, 또 벗이 되기 마련이었다.
세상의 흑과 백이 이토록 명확하게 분리되어 있지 않은 탓에, 부처께선 대자대비(大慈大悲)한 마음으로 모든 중생을 감싸안고 구제하라 이르셨다.
허나 부처가 되는 것은 너무나도 힘든 일이다. 이 세상에는 자비를 베풀 수 없을 정도로 잔악한 짐승들이 많기 때문이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악행 앞에서 무한히 자비를 베풀 수 있을 정도로 서연은 인내심이 깊지 못했다.
그러나 사람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사람은 무어냐.
한 번 어긋난 자를 바로잡아 길을 일러주는 것이 사람이다. 죄를 뉘우치는 자를 받아들이는 자가 사람이며, 또 짐승이 사람을 해치지 못하도록 계도하는 것이 사람이다.
어두운 통로 끝, 사다리가 있는 곳에서 미약한 빛이 새어들어왔다.
서연은 짐승으로 가득한 무림에서 사람이 될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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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당문 내에서 작은 소문이 돌았다. 당소소 아가씨가 뒷산에서 돌과 나무를 깎는다는 소문이었다.
그렇다고 하여 직접 찾아가는 사람은 없었다. 일단 아가씨께 무례가 되기도 했거니와, 돌과 나무 따위를 깎는 것을 구경하러 찾아갈 정도로 한가한 사람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천당문의 식솔들이 괜히 많겠는가. 이만한 장원을 막힘없이 운영하기 위해서는 모든 구성원이 제 할 일을 빈틈없이 해내야 했다.
이따금 당소소 아가씨가 괴상하게 깎인 나무토막을 들고 어디론가 황급히 달려가는 것을 볼 때마다 궁금증이 솟아오르긴 했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직계가 하는 일이니 다 이유가 있을 것이다. 새로운 방식의 훈련이지 않을까. 문제가 있다면 높으신 분들이 알아서 제지하실 것이다.
다들 그렇게만 생각했다. 사천당문의 소가주, 당진성만 제외하고 말이다.
“누님, 내일 떠나신다고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당소소는 당진성을 쳐다보지도 않고 그리 말했다.
그녀의 시선은 눈 앞에 놓인 나무토막을 향해 있었는데, 연녹색 눈동자가 그녀의 표정이 일그러질 때마다 미세하게 흔들렸다.
깊은 수심에 잠긴 듯했다. 평소보다 몹시 진지해 보였다.
“갑자기 각예에 취미를 들이셨습니까? 저희 또래에는 뱃놀이가 훨씬 어울립니다.”
“집중해야 합니다. 방해할거면 멀리 가십시오. 훠이.”
“다물고 있겠습니다. 저도 누님이 뭘 하시는지 궁금했던지라.”
당진성은 당소소의 뒤로 물러서자마자 도로 얼굴을 무표정하게 되돌렸다.
‘누님이 이상하다.
본래도 괴짜였으나, 이 정도는 아니었다. 그뿐이랴, 갑자기 부친과 독대하더니 외유를 허락받아 버렸다.
처음에는 수련이나 하나 싶었는데, 진짜로 각예를 하고 있었을 줄이야. 무림인과 각예? 솔직히 어울리지 않았다. 차라리 난(蘭)을 기르는 것이 백배 천배 나았다.
“음.”
잠시 고뇌하던 당소소는 자그마한 칼을 움직여 나무토막을 잘라냈다. 힘이 부족한 탓에 칼은 나아가다 막히기를 반복했다.
“누님, 진기를 사용하면 훨씬 쉬울 것 같습니다.”
“아우님은 제가 그것도 모르는 멍청이로 보입니까?”
“…….”
일부러 쓰지 않았다는 것이다. 당진성은 입을 다물었다.
당소소는 불만족스러운 얼굴로 나무토막을 응시했다. 엉망이었다. 평소에 이런 훈련을 하지 않은 탓에 더 그랬다.
“아무리 생각해도 예술품을 만드는 것 같지는 않은데, 왜 이런 짓을 하시는 겁니까?”
당소소는 질린다는 얼굴로 당진성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대답해주지 않으면 떠나지 않을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사물의 결을 읽는 훈련입니다. 대성에 이르면 나뭇가지조차 명검처럼 쓸 수 있게 됩니다.”
“……그렇습니까?”
“직접 보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보면, 아우님도 생각이 달라질 겁니다.”
매일 저녁마다 서연은 화련과 당소소를 데리고 각예를 가르쳤다. 화련이야 매일 보았던 장면이었기에 담담했지만, 당소소는 달랐다.
볼품없이 쓰려져있던 고목이 활강하는 맹금의 모습으로 화하는 것을 목도했다.
달빛이 궤적에 거침없이 잘려나갔다. 월광이 아름답게 비산할 때마다 경악했다.
혼몽 속에 들어온 것 같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 정도였다.
예술적 감각보다 무학에 대한 이해도가 높았기에, 움직임에 담긴 무를 먼저 읽어냈다.
그렇기에 당소소는 당당하게 이리 말할 수 있었다.
“모든 무림인이 각예를 했다면, 평균 수위가 지금의 곱절은 되었을 겁니다.”
“그……렇군요.”
당진성은 확실히 누님이 이상해졌음을 느꼈다. 허나 내색하지 않고 화제를 돌리려 나무토막을 향해 턱짓했다.
“그래서 지금은 무얼 만드시는 겁니까?”
“구체를 만들고 있습니다. 기초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다 하여.”
당진성은 남몰래 눈을 좁혔다. 아무리 보아도 구체보다는 찌그러지고 비틀린 무언가에 가까웠다.
이쯤 되니 누님이 진짜로 질 나쁜 사기꾼과 연루된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마저 들었다. 부친께서 어련히 판단하셨겠지만, 또 모르는 일 아닌가.
‘부친마저 속여먹었을지 모르지.
파문된 오장로를 단독으로 격살한 인물이니, 실력은 확실히 뛰어날 터. 거기서 수십 수 정도 실력을 더 숨기면 부친도 어찌저찌 속여넘길만했다.
당진성은 무려 두 시진동안 당소소를 지켜보았다. 소가주로서 마땅히 해야할 업무? 새벽 일찍 일어나 전부 처리하고 왔다. 당진성은 이리도 철저한 인물이었다.
물론 당진성은 여기서 만족할 생각이 없었다. 은공 일당이 매일 뒷산에서 벌인다는 기이한 모임에 직접 참석할 생각이었다.
어찌 가느냐?
그것은 바로, 산정 장인이 칠 주야에 걸쳐 만든 명검을 가져다준다는 핑계로 방문하는 것이다.
“……어찌하여 소가주가 직접 왔소?”
“가문의 은공을 헛되이 대할 수 있겠습니까. 은공께서 직접 오시는 것도 좋겠지만, 제가 직접 전해드리는 것이 훨씬 모양새가 좋지요. 설명해주실 것이 있다면 제가 기억해두었다가 전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음.”
“검집을 벗겨 살피지는 않겠습니다. 그건 은공이 직접 해야 할 일이지요. 아니면 장인께서도 함께 가시겠습니까? 은공께서 어디 계시는지는 제가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당진성은 기어코 산정 장인까지 꼬드겨 뒷산으로 올랐다. 목격자는 많을수록 좋다는 계산이었다.
“소가주는 성실하시구려. 장차 큰 인물이 되시겠소.”
“하하. 가문의 최고 명장께 그런 말씀을 들으니 참으로 기분이 좋습니다. 실망시켜 드려선 안 되니 제가 더 노력해야겠군요.”
“허허허!”
“하하하하!”
무뚝뚝한 산정 장인조차 그에게 마음을 연지 오래였으니, 열 여덟이라고는 믿기 힘든 처세였다.
정작 가져다준다던 명검은 산정 장인이 들고 있었다. 떠넘긴 것은 아니었다. 명장들은 으레 제가 만든 병기를 주인에게 직접 가져다주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물론 당진성은 거기까지 계산했다.
당진성은 눈이 소복이 쌓인 산길을 터덜터덜 걸었다. 겨울이 다 되어 입에서 김이 새어 나왔지만, 내로라하는 후기지수였기에 춥지 않았다.
‘누님도 떠나시면 한가해지겠다.
형과 누이가 죄다 떠나가니 괜스레 상념이 깊어졌다.
그때였다.
“아.”
당진성이 저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었다.
멀리서도 눈에 띄는 용모. 현실감이 다소 멀어지는 자태였다.
죽립을 벗은 모습을 처음 보았다. 누님과 제자를 앞에 앉혀두고 고목을 깎아내고 있었다. 눈이 소복이 쌓인 겨울 산에서 그러고 있으니 더욱 신비롭게 느껴졌다.
‘……다른 세상에서 왔다고 해도 믿겠다.
어깨까지 늘어뜨린 담홍발이 홀로 소담히 피어오른 벚꽃 같았다. 그 때문인지 주변 풍경과 완전히 동떨어져 보였다.
어찌하여 용모를 가리고 다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녀가 눈웃음이라도 짓는다면 가슴을 붙잡고 쓰러질 사내가 적지 않으리라.
당진성은 곧장 해독약을 삼킨 후 다시금 서연을 응시했다. 여전히 미려한 용모였다. 환각이 아니라는 뜻이다.
‘확실히 범상치 않구나. 기인인 것은 알겠다.
민초들이었다면 천상에서 내려온 선녀라 착각할 만했다. 당장 구파의 도인들도 신선 취급을 받는 세상인데 오죽하겠는가.
‘방심하지 말자.
그렇게 다짐하며 고개를 돌렸을 때, 산정 장인은 이미 서연의 근처까지 걸어가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그제야 당진성은 자신이 한참 동안 넋을 놓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찌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아무래도 직접 전해드리는 것이 좋을 듯하여 이리 찾아오게 되었소.”
서연은 두 손으로 검을 건네받았다. 너무나 가벼워 무게가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운철(隕鐵)을 섞었소. 오랜만에 욕심이 들더군.”
“……운철을 말입니까?”
“재료는 중요치 않소. 결국 누구의 손에 들렸느냐가 중요하지.”
장인은 어서 검을 뽑아보라 재촉했다.
서연은 손잡이를 잡는 순간 약간 놀랐다. 예전에 자신이 쓰던 검의 손잡이를 그대로 살려 만들었기 때문이다.
새 검은 손에 익숙하지 않기 마련인데, 기존의 손잡이를 살린 덕에 감각이 전혀 낯설지 않았다.
서연은 천천히 검을 뽑았다. 도중에 날에 닿은 눈송이가 반으로 갈라졌다.
사악―
검을 뽑기만 했는데도 대기가 갈라지는 소리가 은은하게 퍼져나갔다.
“……!”
눈처럼 맑은 검신에 주변 사람들의 놀란 얼굴이 선명하게 비쳤다.
‘명검이다.
그만큼이나 아름다웠다.
서연은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라 말로 표현하기 힘들었다.
곧 서연과 산정 장인의 눈이 마주쳤다. 산정 장인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촤악!
곧 서연의 검이 밤공기를 갈랐다.
회종혈부터 진기를 끌어모아 한 번에 힘을 실어 내리그은 것이다. 일 년 전, 화련을 제자로 받아들였던 그날 밤에 펼쳤던 바로 그 검법이었다.
‘연화비영보도 섞어보자.
검법은 본디 보신경과 섞여야 비로소 완성되는 법이었으니 말이다.
사아아―
흰빛 궤적이 춤추듯 이지러졌다. 눈발 사이로 실선이 선명히 그려지고, 갈라진 눈의 잔향이 길게 흩어졌다.
빠르면서도 섬세한, 능히 천상의 검법이라 할 만했다. 힘이 실리지 않는 것처럼 보였음에도 사방에서 잔바람이 몰아쳤다.
이름조차 정해지지 않은 검법의 초식 하나를 펼쳤을 뿐이지만, 섣불리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참으로 찬란하구나…….
당진성의 얼굴에만 음영이 졌다. 제 누님을 어떻게 홀렸는지 알아차린 탓이다.
각예를 본딴 검법이라 그런가, 마치 춤을 추는 듯했다.
긴 장포를 입고 있는 탓에 더더욱 그러했다. 마치 날개옷을 입은 듯했다.
‘더, 더 봐서는 안된다……!
찰나에 마음이 동했다. 더 보고 싶다는 마음이 솟구쳤다. 계속 보았다가는 저마저 가문을 저버릴지도 모른다. 그럴 수는 없었다.
당진성이 눈을 질끈 감은 순간이었다.
서연이 깊이 숨을 들이마신 후, 천천히 검을 집어넣었다.
사아악―
허공에 잔향처럼 남아있던 검의 궤적이 그제서야 흩어졌다.
사방에서 숨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화련은 제 정수리에 쌓인 눈을 털어냈다. 숨도 쉬지 못하고 검무에 몰입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제야 알아챘다.
산정 장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넋을 빼고 보았소이다. 검법의 이름을 여쭈어도 되겠소?”
“아직 마땅한 이름을 정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말을 해도 될지 모르겠소만, 능히 천하를 논할 만한 검법이었소.”
검법에 천(天) 자를 담을 만하다는 의미였다.
청목족만큼은 아니었지만, 산정 역시 평범한 인간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장수했다.
명장으로 살아오며 견식한 절세검법이 적지 않았을 터. 서연의 검법 또한 그와 비견된다는 뜻이었다.
서연은 그러한 내막까지는 몰랐으나, 중하게 받아들일 조언이라 생각했다.
“잔향(殘香)도 기뻐하는군.”
산정 장인은 검을 보며 그리 말했다. 흘러나오는 검파를 느낀 것이다.
우웅.
지지 않겠다는 듯 서연의 쥘부채 또한 묘한 진동음을 발했다. 잔향검은 반응하지 않았다. 아직 영성이 깃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잔향, 좋은 이름이군요.”
“필생의 역작이오. 부디 잘 사용해주시오.”
칠 주야만에 만든 검이었다면 필생의 역작이라 하지 않았을 것이다. 허나 그는 일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운철을 정련했고, 그 운철을 잔향을 만드는 데 사용했다.
백 번 다듬은 철을 백련정강(百鍊精鋼)이라 했다. 일 년 동안 수천 번은 족히 다듬었을 운철은 뭐라 불러야 할까.
거기에 서연이 기존에 사용하던 검의 영성까지 섞였다. 잔향이 신병이기로 거듭난 것은 그 덕이었다.
“감사합니다. 장인의 명성에 누가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나 또한 영광이오.”
둘은 마주 포권했다.
서연은 제 허리춤에 매인 잔향과, 저를 올려다보는 화련과 당소소를 바라보았다.
둘은 심상 속에서나마 서연을 따라하려 애썼다. 그것이 표정에서 그려졌기에, 서연은 웃으면서 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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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당문을 떠나는 날 아침에는 눈이 그쳤다. 서연은 당가주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간 신세 많이 졌습니다.”
“딸아이를 잘 부탁드리겠소.”
당자헌은 당소소와도 시선을 마주했다. 운남의 치안이 영 좋지 않다는 사실을 들은 터라 가슴 한켠에 묘한 걱정이 맴돌았다.
물론 내색하지는 않았다. 현명한 딸아이니 잘 처신할 것이라 믿었다.
“전장(錢莊)에 자금과 연락책을 마련해두었으니, 필요하면 언제든 사용하거라.”
“잘 쓰겠습니다. 아버님.”
가주님이라 부르지 않았다. 당자헌은 딸아이의 그런 세심한 배려가 좋았다.
“잘 가거라.”
“예.”
당소소가 걸음을 돌려 떠나가려는 순간, 서연이 당소소에게 눈짓했다. 가서 한 번 안아드리라는 것이다.
“으음.”
당소소는 잠시 망설이다, 당자헌에게 다가가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잘 다녀오겠습니다.”
“……!”
“그러니 아버님과 아우님은 걱정하지 마시고, 가문을 잘 지키고 계십시오.”
당소소는 그렇게 말하고는 양쪽 입꼬리를 어거지로 끌어올렸다. 웃음이라고 하기에는 묘했지만, 그 정도면 작별 인사로 충분했다.
곧 서연 일행은 성도 바깥을 향해 걸었다.
사천성의 지리는 당소소가 훤히 꿰고 있었기에, 길 안내는 당소소가 도맡아서 했다.
“은공, 운남에 급히 가야할 일이 있으신 것은 아니지요?”
“천천히 가도 된단다.”
“그러면 여유롭게 관광하듯 가겠습니다.”
드넓은 사천성에서 가장 큰 도시는 성도다. 앞으로 만날 도시들은 모두 성도보다 작을 터였다.
서연은 앞서가는 당소소를 보며 병아리 같다는 생각을 했다. 당연히 화련은 털도 덜 자란 병아리다. 그렇다면 자신은 어미닭인가? 군사부일체라 했으니, 어쩌면 틀린 말도 아니리라.
당소소를 제자로 여기지 않았다면 할 수 없는 생각이었다.
구배지례를 행해야만 제자이겠는가. 서로를 스승과 제자로 여기면 그것이 곧 사제지간이라 생각했다. 화련을 처음 제자로 받아들였을 때도 구배지례를 행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더 강해져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여인 셋이 다니기 험난한 강호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서연 일행은 금세 대로로 나아갔다.
성도에서 벗어난지는 꽤 되었지만, 사천 땅은 당문의 영역이나 마찬가지다.
맞은편에서 지나치던 행인들이 서연 일행을 보며 속삭였다. 선두에 선 당소소를 본 순간 그리한 것이다.
“당랑암화(唐娘暗花)다.”
“세가의 금지옥엽이 어찌하여 이곳까지?”
“홀로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분명 근처에 당문의 무사들이 인기척을 감추고 있을걸세. 저번의 천양문(天陽門)의 장자가 뭣모르고 들이댔다가 양물이 잘렸다지 않는가.”
“……암화라는 별호가 참으로 어울리는군.”
독인의 경지에 오른 당소소의 귀에는 그 속삭임들이 전부 들렸다. 민초들이 작정하고 속삭여도 이 정도 거리에서는 듣기 싫어도 들리는 법이었다.
물론 당소소는 천양문의 장자가 누구인지도 몰랐다. 제게 들이댔던 수많은 남정네들 중 하나일 것이라 지레짐작했을 뿐이었다.
평소 같았다면 신경 쓰지 않고 지나쳤으리라. 사천당문의 직계라면 뭣 모르는 민초들의 말에 일희일비하지 않기 때문이다.
“양물……?”
허나 뒤에서 따라오던 화련이 반응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사타구니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당소소가 다급히 입을 열었다.
“헛소문입니다.”
“으음.”
“화련 님. 저는 남정네들의 그것을 자르는 취미가 없습니다. 제게 무례히 굴었다면 차라리 독을 뿌렸을 겁니다.”
“으으음.”
화련은 억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소소 님을 믿어요.”
당소소는 그런 화련을 보며 미간을 좁혔다. 전혀 믿는 눈치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서연은 픽 웃으며 티격대격하는 둘을 바라보았다. 생각보다 잘 어울렸다.
‘맛있는 거라도 사 먹여야겠다.
사천에 와서 제대로 된 사천요리를 먹어본 기억이 없었다. 사천당문에서 호화로운 식사를 대접받았지만, 외인임을 고려한 탓인지 음식은 하나도 맵지 않았다.
마침 눈앞에 크고 화려한 객잔이 보였다. 근처에 다가가니 알싸한 향이 코 끝에서 맴돌았다.
‘음.
이번 기회에 화련의 식성을 바꾸는 것도 괜찮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까지고 단 것만 먹였다간 이가 상할테니 말이다.
“점심은 저걸 먹자꾸나.”
*****
“역시 은공이십니다. 매운 음식도 잘 드시는군요.”
식후차를 마시며 말하는 당소소의 시야에, 눈물과 콧물을 질질 흘리는 화련이 보였다.
화련이 저런 처지가 된 것은 전적으로 화련 본인의 잘못이었다.
서연과 당소소는 진심으로 화련을 걱정하여 매울 수 있으니 양념을 적당히 조절해야 한다고 경고했는데, 화련은 거기서 어린아이 특유의 경쟁심이 발동한 듯했다.
자기도 평소에 매운 것을 즐겨 먹었다는 얼토당토 없는 소리를 하더니, 당소소만큼 많은 양의 양념을 쏟아부었다.
세 입까지는 어찌저찌 버텼지만, 금세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되고 말았다.
외지인이 사천 요리를 얕보다가 체읍(涕泣)을 쏟아내는 것은 흔한 일이었기에, 점소이는 익숙한 듯 천을 건네주었다. 서연은 그 천으로 그런 화련의 얼굴을 닦았다.
“느무… 느무… 매어여…….”
입술이 퉁퉁 불어 발음도 질질 샜다.
“그러게 적당히 먹으라 하지 않았니.”
“재송함미다…….”
서연은 화련의 얼굴을 닦아주며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후엑.”
화련은 그 와중에도 물을 벌컥벌컥 들이키거나, 달아오른 혀에 손부채질을 하기 바빴다.
그 모습이 꽤나 요란했는데, 손님들은 각자 떠들기 바빴던 탓에 시선이 끌리지는 않았다.
“사천은 아직 멀쩡하구만. 자네 운남 가봤나? 그쪽 객잔들은 조용해.”
“그 넓은 땅을 점창파 혼자서 감당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지. 국경 근처에 군이 자리잡고 있어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일이 터져도 진작 터졌을거야.”
“탈주병들이 적지 않다던데. 관아에 밀고하면 은자를 준다더군.”
국경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은 일상이 된지 오래였다.
전쟁은 크게 서정(西征)과 남벌(南伐)로 나뉘어 있었는데, 운남은 그중 남벌과 연관이 있었다다. 남쪽 끝에서 남만과의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황상께서 안남(安南) 정벌을 시작했다고 들었소. 병사들의 시체가 산처럼 쌓였다더군. 친한 동생이 금룡상단에서 일하는데, 최근 바다에서 익사한 시체를 하루 꼴로 마주한다더이다.”
“장강 이남의 사파들도 발호했다던데.”
“그나마 마교가 잠잠한 것이 다행이지. 작금의 교주는 전대 교주를 참살한 것 말고는 중원을 침략한 적은 없지 않은가.”
“후우, 후엑.”
“마교주가 겁이 많아서 그런 것 아니오?”
“……그런 이야기는 대놓고 하지 않는 것이 좋소.”
옆 탁자에서 듣고 있던 연륜 많은 노상인이 충고하듯 말했다. 허나 낭인은 충고를 귀담아듣기는커녕 코웃음만 쳤다.
“마교가 천산에 처박혀서 나오지 않는 것은 사실이지 않소. 그런 인간을 어찌 절세고수라 할 수 있겠소. 겁쟁이라면 또 모를까. 어디 내 말이 틀렸소?”
“후엑, 하악.”
“……충고를 한 것이오. 아무리 사천이 정파의 영역이라지만, 그러다 객사할 수 있소.”
“객사? 지금 객사라 했나?”
낭인이 탁자를 쾅 치며 일어났다. 근처에 앉아있던 낭인들 또한 함께 일어나 흉흉한 기세를 내뿜었다.
“…….”
떠들썩하던 객잔이 순식간에 적막으로 물들었다. 오죽했으면 화련의 안절부절 못하는 숨소리가 엄청나게 크게 들릴 정도였다.
모든 시선이 서연 일행에게로 쏠리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상당수가 당소소를 알아보았다. 비단으로 된 녹빛 경장, 새하얀 피부. 출중한 용모.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 더 힘들었다.
“당랑암화다.”
“당문의 직계가 어찌하여 성도 바깥에…….”
동시에 낭인들을 애도했다. 당랑암화의 눈에 띈 이상, 끔찍한 최후를 맞이하게 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허나, 낭인들은 놀라기는커녕 오히려 더 분노했다. 제게 쏠려야 했을 시선이 한순간에 웬 여인에게 쏠린 탓이다.
작은 마을에서 왈패로 살아온 탓에 견문이 부족했다. 소문이 유독 흉흉한 마교에 관한 이야기를 몇 번 들어본 것이 전부였다. 당연히 당소소도 알아보지 못했다.
강호 초출이나 보일 법한 기질을 훤히 드러냈다. 낭인은 당소소에게 쏠린 시선을 제게 다시 돌리고자, 양 팔을 뻗어 노상인의 멱을 틀어쥐고자 했다.
타악-!
서연이 낭인의 팔을 붙잡지 않았다면 분명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
사박.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서연은 그야말로 갑작스레 나타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야말로 독보적인 존재감이라 칭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오죽했으면 팔을 붙잡힌 낭인마저도 마른침을 삼킬 지경이었다.
‘팔을 부러뜨리는 것이 나을까.
노인의 멱살을 틀어쥐려 했다. 강호 초출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으나, 심히 나쁜 손버릇을 타고 난 것은 분명했다.
‘이대로 놔둬도 객사할 것 같기는 하다.
사천은 마교의 영역과 그리 멀지 않다. 노상인의 말마따나 분노한 마교인에게 참살당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이런 소문은 금세 퍼져나가는 법이었으니 말이다.
결심을 마친 서연이 양 손에 힘을 주었다.
“끄으으윽……!”
낭인이 신음을 뱉어냈다. 서연의 양 손이 제 팔을 강하게 짓누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순식간에 식은땀을 흘렸다. 도무지 뿌리칠 수 없었다. 이러다 양팔이 우그러질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낭인의 뇌리를 잠식했다.
낭인의 팔에서 부서지는 듯한 소리가 들릴 때쯤, 서연은 그의 팔을 놓아주었다.
서연은 거친 숨을 내뱉는 낭인을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예전에 회화루로 갔을 때, 사람이 되기로 다짐했다. 잘못된 길로 빠진 사람을 한 번 정도는 용서해줄 의향이 있었다.
물론 서연은 어쭙잖게 마무리한 상대가 복수심을 품고 돌아온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상대가 낭인인 이상, 힘의 차이를 명확하게 보여주어야 했다.
촤악!
서연은 망설임 없이 발검했다. 낭인의 양쪽 소매가 동시에 잘려나갔다. 살갗에는 그저 얇은 실선이 생겨났을 뿐이나, 낭인은 그것만으로도 제 손목이 잘려나간 줄로 착각하고 주저앉았다.
“……보이지 않았다.”
“참으로 고절한 검초다! 당랑암화와 괜히 어울리는 것이 아니었구나.”
“사사로이 목을 베지 않는 것도 자비롭도다!”
사방에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서연은 아랑곳하지 않고 검으로 사내의 목을 겨눈 채 기세를 뿜어냈다.
“허, 허억!”
나머지 낭인들도 저항할 의지를 잃었다. 견문이 부족했음에도 상대의 실력이 넘볼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남을 알았다. 서연이 그들의 목 근처에 실선을 새겼기 때문이다.
"사, 사죄드리겠소!"
낭인들은 서연이 뭐라 말하지 않았음에도 알아서 노상인에게 넙죽 엎드렸다. 그리고는 서연의 눈치를 보다 도망치듯 빠져나갔는데, 실례라도 한 것인지 어기적거리며 달려가는 이가 적지 않았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큰 일을 치를 뻔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노상인의 말투는 낭인들을 대할 때보다 훨씬 정중했다. 잘 자란 손녀를 대하는 듯했다.
“제가 어찌 사례해야…….”
서연의 행색을 살피던 노상인의 눈이 이채를 띄었다.
“혹, 하남에서 오셨습니까?”
“그걸 어찌…….”
서연 또한 미간을 좁혔다. 어디선가 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노상인이었다.
“저희 상단의 짐꾼들을 구해주셨던 분을 어찌 잊겠습니까.”
“!”
그제서야 노상인의 옷에 새겨진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하남 태실산에 있을 때 자주 사용했던 일월상단의 표식이었다.
“혹시 어르신이 일월상단주십니까?”
“역시 기억하시는군요. 언젠가 한 번 찾아뵈어 감사 인사를 드려야겠다고 생각하였는데, 설마 이렇게 먼 곳에서 뵙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서연은 저도 모르게 노상인의 일행을 응시했다. 혹여 저번에 구했던 짐꾼들이 있나 해서였다.
노상인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전부 하남에 남아 있습니다. 이런 장거리 상행에 데려갈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사실 일월상단이라는 이름은 서연 입장에서는 그리 듣기 좋은 이름은 아니었다.
무협지에서 마교인이 스스로를 자칭하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데, 하나는 천마신교요, 다른 하나는 일월신교(日月神敎)기 때문이다.
허나 설마, 소림사가 제 앞마당에 사교의 이름을 딴 상단이 자리잡도록 허락했겠는가. 그럴 리가 없었다.
그게 사실이라면 마교와 소림사가 둘다 멍청이 집단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고로 일월상단은 마교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평범한 상단이라는 것이 서연의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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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겠지만, 저희 상단에는 주력 상품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없습니다.”
노상인은 서연에게 차를 따라주며 그런 말을 했다. 점소이가 고개를 조아리는 것을 보니, 그의 연줄이 먼 운남까지 닿아있는 듯했다.
“그래서 천하를 주유하며 온갖 물품을 사다 모으지요. 굳이 따지자면 잡상인에 가깝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어르신, 어떤 잡상인이 수천 리를 누비며 다니겠습니까. 자부심을 가지셔도 될 듯합니다.”
“허허.”
노상인은 탁자에 둘러앉은 이들을 둘러보다가 말했다.
“소개가 늦었군요. 이 늙은이는 송월(宋月)이라 합니다.”
어쩌다보니 합석하게 된 당소소와 화련도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둘다 공과 사는 구분할 줄 알았다.
“사천당문의 당소소라 합니다.”
“저는 화련이에요.”
서연은 따로 제 소개를 하지 않았다. 노상인이 제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송월 노인이 당소소에게 말했다.
“사실 이 늙은이가 객잔에 방문했을 때부터 당문의 금지옥엽이 계신 줄을 알고 있었습니다. 상인의 고질병이지요. 혹여 누추한 시선에 언짢음이 있었다면 용서하십시오.”
“천만에요, 괜찮습니다.”
여든이 훌쩍 넘어보이는 노인이 그리 말하자, 당소소도 나름의 표정관리를 했다.
“어르신께서는 이제 하남으로 돌아가시는 겁니까?”
서연의 질문에 송월 노인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보통 한 번 상행을 떠나면 새외까지 나갑니다. 다행히 이 늙은이가 헛살지는 않은 덕에 이곳저곳에서 도움을 많이 받지요”
곧 송월 노인이 품 속에서 낡은 지도를 꺼냈다.
“이번에는 아마, 운남에서 새로 발견되었다는 대리석 광산의 경매를 들를 생각입니다. 그 다음에는 북서쪽으로 꺾어서 남목림(南木林)까지 가겠군요. 그 이후에는 잘 모르겠습니다. 본래라면 남만이나 서역에도 한 번씩 방문했을 터인데, 국경 상황이 심상치 않은 터라 그럴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금룡상단 정도 되는 상단에만 허가증을 내주더군요.”
서연은 송월 노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발이 넓은 수준을 아득히 뛰어넘었다. 남목림이라면 서장에 위치한 고산 마을인데, 멀지 않은 곳에 주무랑마(珠穆朗玛 : 에베레스트)가 위치해 있었다. 여든이 넘는 노인이 거기까지 간다는 것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송월 노인에게서 기이한 느낌을 받은 채로 서연이 입을 열었다.
“어르신께서 아주 정정하신 모양입니다. 혹시 과거에 무공을 익히셨습니까?”
그 말에 송월 노인이 또렷한 눈빛으로 서연을 주시했다.
“익혔었지요. 사실 이 늙은이가 소싯적에는 꽤 잘 나갔습니다. 지금처럼 새외로 자유로이 돌아다닐 수 있는 것도 전부 그때 덕을 쌓아놓은 덕분이지요. 물론 지금은 예전만 못합니다.”
송월 노인은 그렇게 말하며 주름진 오른팔을 슬쩍 내밀었다. 근맥이 잘려나간 흔적이 선명했다.
“이건 어쩌다가…….”
“지금이야 황상께서 단단히 중심을 잡고 서 있어 정사마 간의 분쟁이 드물지만, 과거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포로를 멀쩡한 상태로 붙잡아 두는 경우가 드물었지요. 보통 단전을 폐했고, 사지근맥을 자르는 일도 적지 않았습니다. 이 늙은이야 외공을 익혀 아직 걸어다닐 수는 있습니다만, 그렇지 않은 이들은 얼마 버티지 못했습니다.”
섬뜩한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다는 듯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산전수전을 다 겪으며 살아남은 사람이 내뿜는 특유의 분위기가 있었다.
“다행히 상단 일을 하느라 이곳 저곳을 꾸준히 돌아다닌 탓에, 다릿심만큼은 웬만한 젊은이들 못지 않습니다. 이것도 따지고 보면 외공 수련이라고 할 수 있겠군요.”
송월 노인은 그렇게 말하며 미소지었다.
단전을 잃은 무림인의 십중팔구가 절망감에 사로잡혀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송월 노인은 참으로 뛰어난 정신력을 가졌다고 할 수 있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저 마음가짐만큼은 배울 만했다.
능히 비연천공에 추가할 만했다.
예전이라면 이렇게 생각하지 못했겠지만, 제 자질을 깨달은 이후로 서연은 심상의 한계를 정하지 않았다.
절세고수가 될 자질이라 했다. 한계를 정해둘 이유가 없었다. 이런 대화에서도 능히 배움을 얻을 수 있다고 여겼다.
마음이 동하니 혈맥을 맥동하던 진기가 호응하듯 움직였다. 호흡 몇 번으로 세맥이 단단해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비연천공이 이전보다 더 완성에 가까워진 것이다.
따로 종이에 꺼내 적을 필요는 없었다. 구결을 떠올린 순간 뇌리에 새겨졌기 때문이다.
“…….”
문득 서연을 지켜보던 송월 노인의 몸이 얕게 떨렸다.
“왜 그러십니까?”
서연의 물음에도 송월 노인은 곧장 답하지 않았다. 그는 물을 마시고 나서야 구겨졌던 안색을 풀었다.
“사실 이 늙은이가 견문이 넓습니다. 살면서 한 명도 보기 힘들다는 절세고수를 셋이나 뵈었지요. 무당검선, 사마련주, 그리고 교주가 바로 그들입니다.”
“교주라고 하심은.”
“예, 천산(天山)에 있는 그 교주가 맞습니다.”
송월 노인은 옅은 한숨을 내쉬면서 말을 이었다.
“검선은 소탈한 사람입니다. 검선보다는 걸선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 사람이지요. 하늘을 이불 삼고, 산을 베게 삼아 천하를 주유합니다. 무당산에 기거하는 날이 손에 꼽지요. 기인이라 칭하기에 부족함이 없지만, 그래도 사마련주보단 낫습니다. 검선은 적어도 장문인 역할은 제대로 하기 때문이지요. 예측 불허라는 단어가 가장 어울리는 사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마지막은 교주인데, 직접 평가하기 두려운 자입니다. 헌데 손님에게서 새어나온 기도가 그들의 젊었을 적과 유사하여 저도 모르게 당황했습니다.”
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예전이었다면 이해하지 못했겠으나, 당가주에게 자질을 전해들은 이후였으니 납득했다. 허나 서연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자, 송월 노인이 다시금 침음을 흘렸다.
그는 다 식은 차를 마저 들이킨 다음 입을 열었다.
“손님.”
“예.”
“혹시 일행 분들과는 어떤 관계신지요?”
송월 노인의 말에 서연은 일행을 다시 소개했다.
“이 아이는 제 제자입니다. 그리고 소소와는 뜻이 맞아 동행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렇군요. 보통 관계가 아닌 듯 하여 여쭈었는데, 이 늙은이의 짐작이 맞은 듯합니다.”
“헌데, 그건 어찌하여 물으셨는지요.”
서연의 질문에 송월 노인이 별것 아니라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손님의 실력이 뛰어나신 듯하여 동행을 청하려 했습니다. 허나 어린 제자를 데리고 다니시는 듯하니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여기까지 호위 없이 오신겁니까?”
송월 노인이 그건 아니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실은 상단에서 고용한 호위가 있었는데, 사천 땅으로 오는 중에 변을 당했습니다. 듣자하니 영약에 눈이 먼 사파 무리들이 발호했다고 하더군요. 천명검 패검대가 돕지 않았더라면 이곳까지 닿지 못했을 것입니다.”
암단화 사건을 이야기하는 듯했다. 연륜 있는 상단주가 어찌하여 호위도 두지 않았는지 궁금했는데, 그런 내막이 있었던 모양이다.
아무리 단단히 준비했다 쳐도 일월상단은 기껏해야 중소 상단에 불과했다. 그만한 일에 휩쓸리고도 호위만 잃은 것이 용했다.
잠시 고민하던 서연이 말했다.
“운남까지는 제가 도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도 마침 대리(大理)로 향하던 중이었던지라.”
“혹, 손님께서도 대리석 때문에 그곳으로 가시던 중이셨습니까?”
“예.”
송월 노인은 화련과 당소소를 차례로 응시하다가 이전보다 훨씬 편한 어조로 대꾸했다.
“그래주신다면 감사하지요. 혹시 원하시는 물품이 따로 있으십니까? 본래 돈으로 드리는 것이 관례이나, 손님께서 돈이 부족해 보이지는 않아서 말입니다. 예전에 사가셨던 재료들도 가지고 있는데, 그것으로 대신할까요?”
점토나 흑단 같은, 조각에 쓰는 재료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서연도 돈보다는 그러한 재료들로 받는 것이 더 유용해 보였다.
예전에 화련을 처음 받았을때도 일월상단에서 점토를 구해다 썼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해주시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그것 말고 제가 기억해 두어야 할 것이 있을까요?”
“탈 것이 있으시다면 챙겨오셔도 좋습니다. 그리고 음식은 저희 쪽에서 챙길테니, 따로 챙겨오실 필요는 없습니다. 내일 진시(辰時)에 이 객잔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곧 송월 노인은 고개를 숙이고 사라졌다. 몇몇 상단원들이 그를 뒤따랐다.
그의 뒷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당소소가 입을 열었다.
“……인피면구는 아닙니다. 무공을 잃었다는 말도 사실인 듯하고요. 전전 세대의 인물이라 얼굴만 보고 정체를 파악하지는 못했으나, 간이 보통 큰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합니다.”
“왜요?”
화련의 질문에 당소소가 답했다.
“교주는 평가하기 두렵다면서, 정작 검선과 사마련주는 아무렇지 않게 평했습니다. 직접 만나본 적은 없지만, 저는 사마련주가 아주 무서운 사내라는 것은 압니다. 옛 혈교 교주마저도 힘으로 복속시킨 인간이 사마련주 아닙니까.”
사마련의 여덟 하늘이 그렇게 생겨났다. 장강 이남이 완연한 사파의 영역으로 변한 것도 그 시점이었다.
수십 년 전 일어났던 정사대전 당시에도 사파는 이 정도로 뭉치지 못했다. 정파가 사마련을 경계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다행인 점은 사마련주는 적어도 두 번째 정사대전을 일으키지는 않았다.
“힘을 모으고 있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어찌 되었든 정파에는 절세고수가 두 분 계시니까요.”
무당검선과 남궁세가주를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들어보니 균형이 정말로 아슬아슬했다.
“그래서 수상한 분 같니?”
서연의 물음에 당소소가 미간을 좁혔다.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지금은 잘 모르겠습니다. 꿍꿍이가 있다기보단 그냥 비밀이 많은 사람 같습니다.”
근맥이 잘리고도 멀쩡히 돌아다니는 노인이다. 숨기고 싶은 사연이 여럿 있을법했다.
“나도 같은 생각이란다.”
“동행하기로 결정하신 겁니까?”
“일단은.”
서연은 이런 것도 다 경험이라고 생각했다. 제자가 장성하여, 홀로 험난한 강호를 겪게 하는 것보다 이런 식으로 먼저 경험하게 하도록 하는 것이 좋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거짓을 말하는 것 같지도 않았고.
서연은 송월 노인과 대화하면서도 그의 전신에 집중하고 있었다. 어깨와 눈의 사소한 떨림, 그리고 호흡 같은 것들.
서연이 경험이 부족하다는 것을 통찰한 당가주의 조언을 따른 것이다.
―웃는 낯으로 다가오는 이들을 경계하시오. 유독 비범하게 느껴지는 인물이라면 더더욱.
―기왕이면 큰 무리에 끼어 동행하는 것이 좋소. 은공이라면 무리 전체가 살수로 돌변하여도 대응할 수 있을거요. 방심만 하지 마시오.
―무극지체라면 웬만한 독은 통하지 않을 것이오. 허나 독인만은 못하니, 항상 딸아이의 도움을 받으시오.
―전음? 지금 전음입밀의 묘리를 물은 것이 맞소? 당연히 알려는 드리겠소만, 은공의 스승이 누구인지 궁금해지는구려. 대체 어떤 작자가…….
전부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조언이었다. 아무리 서연이 무협지를 즐겨 읽었다고 한들, 경험이 일천한 것은 사실이었으니 말이다.
서연은 시선을 바깥으로 돌렸다.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불침번이라도 서야 할까.
여태 객잔에 들어가서 잠을 청할때면 별 걱정 없이 잤다. 애초에 그러라고 있는 것이 객잔이기 때문이다.
허나 주의해서 나쁠 것은 없을 터였다.
서연은 침대가 두 개 있는 방을 잡고 화련과 당소소를 먼저 눕혔다.
밤을 샐 생각이었기에 의자에 걸터앉아 무엇을 조각할지 궁리했다. 화련과 당소소 둘 다 단발이었던지라 비녀를 쓸 일은 없을 터였다.
‘목검을 만들어줘야겠다.
일 년 전에 남궁 남매에게 흑단으로 목검을 만들어줬던 일이 떠올랐다. 일월상단주에게 질 좋은 흑단을 받는 것으로 호위비를 갈음하면 될 듯했다.
“잠이 안 오니?”
뒤척이다 일어난 당소소를 보며 그리 물었다.
“자기 전에 물을 좀 마시려고 합니다.”
당소소는 눈을 비비다가 문득 고개를 창 쪽으로 돌렸고.
“꺄아악!”
답지 않게 높다란 비명을 내질렀다. 요란한 소리를 내지르며 주저앉았고, 졸지에 곤히 잠들어 있던 화련마저 화들짝 놀라 일어났다.
“대체 뭘 보고…….”
서연은 다급히 창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큼지막한 눈동자가 푸른 귀기를 잔뜩 흘리고 있었다.
오죽했으면 혼령에 익숙한 화련마저 움찔할 정도였다.
서연은 다른 의미로 놀랐다.
‘……도대체 뭘 먹고 다니길래.
덩치가 커진 탓에 창가에 얼굴을 반쪽 밖에 들이밀지 못했다. 그래서 단번에 알아보지 못했다.
방문객의 정체는 백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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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소소는 얼굴을 반쪽만 들이밀고 둥그런 혀를 낼름거리는 큼지막한 짐승을 바라보았다.
상황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저것을 뭐라 불러야 한단 말인가? 요괴? 영물? 다른 것은 모르겠으나 평범한 짐승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했다.
허나, 당소소를 가장 놀라게 한 것은, 짐승의 큼지막한 덩치도, 익숙한 듯 짐승을 쓰다듬는 은공도 아니었다.
짐승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아무일 없다는 듯 도로 드러누워 색색거리며 골아떨어진 화련이었다.
‘……내가 이상한 것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오죽했으면 이것이 춘몽인지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
겁이 많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독물을 다루는 사천당문의 무인이 귀신 같은 것을 두려워하겠는가.
허나 눈 앞의 광경은 당소소의 상정범위를 아득히 뛰어넘었다.
집채만한 범이 도시 한복판까지 내려와 이층 창가에 얼굴을, 그것도 반쪽만 들이밀 것이라고 그 누가 상상할 수 있겠는가.
당소소는 동생이 챙겨주었던 약을 몇 개 챙겨먹고 나서야 가까스로 진정할 수 있었다.
그르릉-
짐승이 묘한 울음소리를 낼때마다 움찔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은공. 그건 도대체……뭡니까?”
“음.”
서연은 백호를 쓰다듬기를 멈추고 당소소를 응시했다.
‘제대로 설명은 해줘야겠지.
앞으로 종종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될 텐데, 그때마다 기겁하게 만들 수는 없었으니 말이다.
“나와 연이 닿은 영물이란다.”
“…….”
영물인 것 같기는 했다. 집채만한 범이 영물이 아니라면 대체 뭐가 영물이란 말인가.
“한 번 쓰다듬어보겠니?”
“……괜찮습니다.”
갑자기 긴장이 풀려서 그런지 전신에서 힘이 쭉 빠지는 느낌이었다. 다시 노곤해지려는 때쯤, 복도에서 발걸음 소리가 울려 퍼졌다. 발걸음 소리는 서연 일행이 머물고 있는 숙소 앞에서 멈췄다.
문 바깥에서 객잔 주인이 문을 가볍게 두드렸다.
“그, 별일 없으십니까?”
객잔에서 가장 비싼 방이다. 그런 방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면, 아무리 무던한 주인장이라도 안부를 묻는 것이 옳았다.
백호의 눈동자가 좌우로 휙휙 움직이는 것을 당소소는 놓치지 않았다.
“별일 없습니다. 갑자기 거미가 나와서.”
평정을 가장하고 대답했다. 허나 객잔 주인은 쉬히 떠나지 못했다.
사천당문의 금지옥엽이 이 방에 머무는 것을 알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독충을 다루는 그녀가 거미를 무서워할 것 같지는 않았다.
객잔 주인은 안에서 무슨 일이 터졌다고 확신했다. 어쩌면 살수가 들이닥쳤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했다.
내색했다가는 저까지 죽을 수 있었기에, 객잔 주인은 마른침을 삼키며 답했다.
“그렇……군요.”
그렇게 말하며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관아에 신고해야겠다고 다짐하면서다.
당소소는 주인이 애먼 오해를 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정말로 괜찮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밤중에 깨워서 죄송합니다. 편히 주무십시오.”
“…….”
당소소의 미간이 절로 좁혀졌다. 직접 문이라도 열고 나서야 할까. 그런 생각이 들던 차였다.
백호가 체념하듯 한숨을 내쉬었다. 곧 거대했던 백호의 몸체가 바람이 빠지는 것처럼 순식간에 줄어들었다.
집채만했던 백호가 새끼고양이만큼 작아지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서연은 깜짝 놀란 얼굴을 한 채 백호를 안아들었다. 털이 푹신하고 꼬리가 복슬복슬 한 것이 백묘보다는 설표에 가까웠다.
“별 능력이 다 있었구나.”
서연에게 들려 있는 와중에도 백호의 시선은 창 밖을 향해 있었다. 정확히는, 산 중턱에 앉아있는 유혼을 향해서였다.
부리로 곡선을 그리는 것이 참으로 얄미웠다.
본래라면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과거 서연이 한 곳에 틀어박혀 살았을 때만 하더라도 맘 편히 자연지기를 받아먹을 수 있었으니 말이다.
허나 서연의 외유가 길어지자, 직접 바깥을 돌아다니며 사냥을 다녀야 했다.
명색이 신수다. 어디 야생동물 같은 것을 잡아먹겠는가. 보기 드문 영물과 영초를 직접 찾아다녀야 했다.
그것도 일 년에 가까워지니 슬슬 힘들어졌다. 아무리 좋은 영약을 캐먹어도 주인의 곁에 잠깐 안겨있는 것만 못했다.
결국 세태의 흐름과 타협해야 했다.
“열겠습니다.”
상황 파악을 마친 당소소가 문을 열고 객잔 주인을 잡아당긴 것은 그 다음이었다.
갑작스레 저를 붙잡는 손아귀에 소스라치게 놀란 객잔 주인은 비명을 지를 뻔했으나, 눈앞에 펼쳐진 평범한 광경에 얼떨떨해했다.
“이게 무슨…….”
색색거리며 자고 있는 여자아이 하나, 흰털 짐승을 안고 있는 여인 하나, 그리고 저를 세차게 노려보고 있는 당문의 직계까지.
객잔 주인의 판단은 빨랐다. 그는 짐승을 몰래 반입한 서연을 탓하는 대신, 넙죽 엎드려 사죄했다.
“죄송합니다.”
그는 숙박비를 받지 않겠다는 말을 몇 번이고 반복하고는, 왕 앞에서 물러나는 신하처럼 뒷걸음치며 물러났다.
‘당랑암화가 거미를 무서워하는구나.
의외라는 생각을 애써 감춘 채였다.
*****
“……오랜 세월 상행을 다녔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군요.”
송월 노인은 서연의 다리 옆에 서 있는 흰털 짐승을 응시했다. 줄무늬를 보아하니 범의 새끼인 듯 했다.
얼핏 보면 백묘라 착각할 만했지만, 훈련된 짐말들이 다가오기를 꺼리는 것만 봐도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본래 범이라도 새끼 때에는 겁이 많은 것이 상식이나, 저 놈은 어찌된 영문인지 제 눈을 또렷이 응시하고 있었다. 평범한 짐승은 아니라는 것이다.
“문제가 되겠습니까? 안 된다 하시면 돌려보내겠습니다.”
“상관 없습니다. 놀라기는 했지만, 이 늙은이는 색다른 상황을 마주하는 것을 매우 즐기는 사람입니다.”
송월 노인은 백호를 쓰다듬거나 하지는 않았다. 몇 번 쳐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차에 두고 다니시거나, 날뛰지 않게만 하시면 될 듯합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서연은 설마 백호가 날뛸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말을 몇 마리씩 삼킬 수 있는 영물이 사람 몇 속여먹겠다고 새끼 행세까지 할 것 같지는 않았다.
“인수(仁壽)를 거쳐서 악산(樂山)까지 남쪽으로 쭉 내려갈 계획입니다. 지금 속도면 넉넉하게 달포면 운남에 도착하겠군요.”
송월 노인은 말을 타지 않고 두 발로 앞장서서 걸었다. 여든 먹은 노인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발걸음이 굳셌다.
서연은 슬쩍 일월상단의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하남에서 여기까지 오면서 산 물건이 거의 없었는지, 마차가 대부분 비어있었다.
“어르신은 평소 상행을 다니실 때도 이렇게 걸어 다니십니까?”
“보통은 그렇지요. 몸을 직접 움직이면서 땀도 흘리고, 근육통도 앓다 보면 아직 살아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아무래도 먼 과거에 무인이어서 그렇겠지요.”
“대단하십니다.”
서연 또한 상단의 호위였기에, 노인의 옆에서 나란히 걸었다. 백호를 포함한 나머지 일행은 전부 마차에 남겨둔 상황이었다.
송월 노인이 문득 남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 늙은이가 아무리 대단하다 한들 황상만 할까요. 저보다 더 지긋한 나이에 군을 이끌고 계시지 않습니까. 제가 아무리 정정해도 무거운 갑옷을 입고 이리 걸어다닐 수는 없습니다.”
서연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었다.
“혹시 황상도 뵈셨습니까?”
“멀리서 얼핏 형상만 뵈었습니다. 단기필마(單騎匹馬)로 적군을 향해 질주하셨던 모습이 도저히 잊혀지지 않습니다. 그때 제가 환갑이었으니, 벌써 이십 년도 더 된 이야기군요.”
나이 지긋한 황제가 홀로 적진으로 달려가는 그림이 도무지 그려지지 않았다.
여봉선의 환생이라도 된단 말인가? 아니, 아무리 여봉선이라고 해도 환갑이 넘는 나이에 그러지는 못했을 것 같았다.
‘도대체 뭐 하는 사람이었을까.
이야기를 듣다보니 송월 노인에 대한 궁금증이 더욱 솟아났다. 검선, 사마련주, 마교 교주, 거기에 멀리서나마 황제까지 보았다.
이토록 넓은 견문을 가지려면 동창의 우두머리인 사례태감 정도는 되어야 할 것 같았다.
물론 서연은 송월 노인의 과거를 직접적으로 묻지는 않았다. 무례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송월 노인도 마찬가지로 서연에 대해 묻지 않았다.
그 말은 즉슨, 서로의 과거를 묻는 것을 제외하고 웬만한 이야기를 다 나누었다는 것이다.
며칠 동안 여유롭게 걸어 악산 근처에 도달했다.
“서 호위는 이 늙은이의 생각보다 대단한 분이셨군요. 여태 살검을 사용한 적이 없다니. 참으로 대범하십니다.”
“여태 제가 감당할 수 있는 적들만 만나서 가능했겠지요. 운이 좋았습니다.”
“운이라. 제게 칼을 겨눈 원수를 살려둔다는 것은 구파의 도인들도 쉬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자부할 만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평생 무인 구실을 못하게 만들었는데도 말입니까?”
서연을 빤히 응시하던 송월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요. 왜 그런지 아십니까?”
“잘 모르겠습니다.”
“사지근맥을 잘리면 거동이 매우 불편해지고, 평생을 남이 떠주는 미음만 받아먹어야 합니다. 하지만 제가 생각하기에 서 호위께서 그 정도로 조치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적당히 무인 구실을 못하게 하는 선에서 마무리지었겠지요. 맞습니까?”
서연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말도 할 수 있고, 절뚝이면서도 걸어다닐 수는 있을테니, 평생 모은 돈을 가져다가 흑도 문파로 가져가서 서 호위를 암살할 살수를 고용할 수도 있겠군요. 어쩌면 서 호위를 따라다니다가 객잔에서 시킨 음식에 몰래 독을 넣을 수도 있겠습니다.”
“……감안은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대단하다는 겁니다.”
송월 노인이 잔잔하게 미소지었다.
“서 호위는 평생 살수에 쫓기느라 밤을 새고, 동시에 매일 음식을 먹을 때마다 은침을 꽂아넣는 삶을 감당하기로 결정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여인을 때리고, 저보다 약자를 괴롭히는 무도한 이들을 살리기 위해서 말입니다. 소림의 방장도 그렇게는 못할 겁니다.”
“어르신, 금칠이 과하십니다."
송월 노인이 뜬금없이 이렇게 말했다.
“정사마가 무엇을 기준으로 나뉘는 지 아십니까?”
“잘 모릅니다.”
“약자를 위해 싸우는 것이 정파입니다. 그 목적이 자신이 아닌 남을 향해 있으니, 협객이라고 칭함에 부족함이 없지요. 그렇기에 정(正)입니다. 반면 마교는 강자와 싸우기 위해 수련합니다. 한 계단씩 차례차례 짓밟고 올라가, 끝내 하늘에 닿으려 하지요. 그렇기에 마(魔)입니다. 마지막으로 사파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싸웁니다. 약자를 아무렇지 않게 짓밟고, 또 강자에게 숙이기를 꺼리지 않지요. 비굴하다기보다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고 해야 옳습니다. 그렇기에 사(邪)입니다.”
송월 노인은 그렇게 말하며 서연을 바라봤다.
여태 없던 길을 가려 하는 여인이다.
정파와 궤가 비슷하나, 그보다 원대하다. 그렇기에 같이 두고 판단할 수 없었다.
'중원에 네 번째 바람이 부려는가.'
송월 노인이 갑자기 어둠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곳 악산에는 대붕파(大鵬派)라는 세력이 있습니다. 악산 근처의 산길을 관리하고 통행료를 받는 자들인데, 계산이 합리적이라 특이하게도 정사지간 취급을 받습니다. 헌데―.”
송월 노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바람을 가르며 날아온 비수가 서연의 손에 사로잡혔다.
착!
서연은 비수 끝에 묻은 찐득한 핏물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
어둠 너머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험악한 기세를 내뿜는 사람 서너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손과 입가에는 핏물이 묻어 있었는데, 특이하게도 눈동자와 머리카락이 붉었다.
"대붕파 사람들입니까?"
서연의 질문에 송월 노인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마련 팔천의 음혈종(陰血宗), 옛 혈교의 잔재들입니다."
간악한 미소를 내보인 음혈종 무인이 말했다.
“마침 의식을 치를 정혈이 부족하였는데, 잘 되었다. 너희들의 피로 혈사(血祀)를 마저 치뤄야겠…….”
그때였다.
서연은 품에서 쥘부채를 꺼내 강하게 쥐었다. 떨리지 않았다. 저보다 약하다는 뜻이다.
‘단번에 끝내자.
몇 명이나 있을지 몰랐다. 단기 결전으로 가는 것이 옳았다.
진기가 일점으로 빨려들어가는 감각이 들었다. 압축된 바람으로 인해 주변 대기가 일그러질 정도였다.
심상치 않은 기세를 느낀 혈귀들의 얼굴에 경악이 어렸다.
“무슨……!”
다음 순간, 세찬 칼바람이 그들을 덮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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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월상단의 마차 내부.
당소소의 눈길이 빠르게 바깥을 흝었다. 적습이다.
“화련 님은 여기 계십시오.”
어느새 양 손에 비수를 치켜든 채였다. 어디까지나 동생보다 덜 익혔을 뿐, 비도 또한 수준급으로 다룰 수 있었다.
스으으―
정신을 집중하자 비도 끝이 독기로 물들었다. 스치기만 해도 전신에서 피를 쏟아내며 죽을 극독이었다.
당소소는 속으로 셋을 센 다음, 천으로 된 차창 끄트머리를 향해 비도를 던졌다. 은밀히 접근하던 음혈종의 졸개를 향해서였다.
“컥!”
이마에 비도가 틀어박힌 졸개가 단말마를 토하다 그대로 녹아내렸다. 화련은 그것을 놀란 눈으로 쳐다보다가, 다급히 고개를 숙였다.
콱!
방금까지 머리가 있던 곳을 칼이 쑤시고 들어왔다. 칼은 날카로운 쇳소리를 내며 마차의 벽에 깊이 박혔다 뽑혔다.
화련은 뚫린 구멍을 응시했다. 실전 경험을 쌓게 해주려는 스승님의 배려일까? 오랜만에 실전 경험을 마주하니 신체의 모든 감각이 예민해지는 듯했다.
‘상인들!
위험에 처한 상단 무리를 발견한 화련이 다급히 문을 박차고 나가려던 그때였다.
쐐애애애애액-!
칼바람이 몰아치는 듯했다. 스승님이 계시는 방향이었다.
반대 방향에 서 있었는데도 옷자락이 절로 펄럭였다. 쥘부채를 내지르는 순간 음혈종 무인들이 피칠갑이 된 채로 날아갔다.
화련은 다급히 팔을 치켜들어 흙바닥에서 몰아치는 돌멩이로부터 얼굴을 가렸다. 강풍이 잦아들며 서연의 장포가 화려하게 너울졌다.
쾅!
그때, 화련의 등 뒤에서 그녀를 노리려던 음혈종의 무인 셋이 거대한 충격과 함께 땅바닥에 처박혔다. 허리가 활처럼 꺾인 채였다.
마차 위에 앉아 상황을 주시하던 백호의 한 수였다. 팔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포격에 가까운 굉음이 울렸다.
주인의 제자가 보는 앞이라 힘을 조절했다. 이곳에서 보이지 않는 먼 산등성이에서 다가오던 음혈종 무인들은 그야말로 피떡이 되었다.
“허공에서, 무슨……!”
“사술이다!”
인지 범위를 아득히 뛰어넘은 속도다. 졸개들의 눈에는 백광이 번쩍이는 것으로만 보였다.
상황을 정리한 백호는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와 제 주인을 응시했다. 음혈종 고수 셋이 주인의 일수를 버티지 못했다.
특유의 재생력 덕에 죽지는 않았으나, 살이 찢기고 뼈가 파쇄된 탓에 꿈틀거리며 토혈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좋다.
서연은 쥘부채의 성능에 감탄했다. 손속을 조절하는 데 이만한 물건이 없었다. 웬만한 무인들은 부채질 몇 번에 제압될 터였다.
‘길이도 비슷하다.
접은 채로 들면 조각칼과 길이가 비슷했다. 당소소가 말했던 검법을 창시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평범한 상단인 줄 알았건만, 듣도 보도 못한 분이 한 분 계셨구려.”
새하얀 수염을 가진 노인이 어둠 너머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입술이 유독 붉었는데, 입을 열 때마다 사이한 기운이 절로 풍겨나왔다.
“멸문한 대붕파와 연관이 있으시오?”
멸문을 입에 담았다. 멸문의 주체가 누구인지는 묻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노인의 손에도 짙은 핏물이 묻어 있었기 때문이다.
노인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주변을 흝었다. 쥘부채라. 흔히 쓰이는 무기는 아니다.
‘제갈세가인가?
방술사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었다. 부채는 으레 진법이나 술법가들이 사용하는 물건이었으니 말이다.
검을 차고 있는 것으로 볼 때 방술사보다는 제갈가 출신일 가능성이 더 높았다.
‘진작 진법을 펼쳐놓았을 수도 있겠다.
일찍이 내보냈던 수하들이 백광에 몰살당했으니 말이다.
“팔대세가와 적대할 생각은 없소이다. 이대로 물러갈까 하오만.”
서연은 기만 섞인 말에 대답하는 대신 시선을 돌려 송월 노인을 응시했다. 송월 노인은 기다렸다는 듯 서연이 원하는 대답을 뱉어냈다.
“음혈종 구 장로입니다. 혈면수라(血面修羅)라고도 불렸지요. 본명까지는 모르겠습니다.”
순간, 혈면수라가 검강을 쏟아냈다. 송월 노인을 향해서였다.
촤악!
서연은 순식간에 송월 노인의 앞을 가로막듯 선 다음, 발검하여 잔향검을 십(十) 자로 내질렀다.
쥘부채만으로는 막기 힘들다는 판단에서였다.
피처럼 붉은 검강이 채찍처럼 몰아쳤는데, 서연은 쥘부채와 잔향검을 조화롭게 사용해 공격을 전부 막아냈다.
혈면수라는 미간을 좁힌 다음, 곧장 서연에게 근접하여 일장을 뻗었다. 금나수의 묘리가 섞여 있는지, 장법이 마치 휘감기는 듯했다.
“…….”
서연은 당황하지 않았다. 쥘부채가 여전히 떨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사마련 팔천의 장로라 한들, 구 장로면 사실상 말단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사천당문의 오 장로도 이겼었다.
방심만 하지 않으면 충분히 물리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양손을 앞으로 뻗어 태극의 형태로 휘감았다. 잔향과 쥘부채가 동시에 회전하며 구 장로의 공격을 고스란히 튕겨냈다.
팍!
상대를 잡아채려는 쪽과, 튕겨내려는 쪽이 찰나에 몇 번씩 뒤바뀌었다.
한 손만 사용하던 혈면수라는 어느새 양 손을 전부 사용하고 있었다.
팍! 팍! 팍!
둘의 투로는 점차 빨라졌다.
태을무형검의 초식을 펼쳐 장법을 틀어막고, 쥘부채로 바람을 터뜨려 공격한다.
별 볼일 없어 보이는 바람 한 줄기에도 검의 묘리가 새겨져 있다.
점차 밀리는 것은 혈면수라였다.
서연의 귀에 무언가 잘려나가는 소리가 여러번 겹쳐 들렸다.
혈면수라가 한쪽 팔을 붙잡은 채로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그가 땅에 착지하자마자 오른 손목이 푸악― 소리를 내며 잘려나갔다.
“……!”
혈면수라는 곧장 달려들지 않았다. 대신 잘려나간 오른 손목에 기운을 끌어올렸다.
재생의 공능이 발현되지 않았다. 방금 맞았던 검격에는 분명 도가의 정순한 기운이 얽혀 있었다.
혈면수라가 침음을 흘렸다. 분명 진기를 극성까지 끌어올려 막으려 했음에도, 손목이 종잇장처럼 잘려나갔다.
‘여태 도가의 기운을 숨기고 있었을 줄이야.
쥘부채 때문에 곧장 인식하지 못했다. 처음부터 상대가 도가나 법가의 고수임을 알았더라면 다른 식으로 대처했겠지만, 한 수 늦은 탓에 찰나에 손목을 잃었다.
경험 많은 고수라도 속아 넘어갈 만큼 치명적이었다. 웬만한 무인들은 두 합을 채 나누기도 전에 치명상을 입었을 터였다.
심계가 참으로 무서운 여인이다.
‘함정이었나.
백 리 가량 떨어진 곳에 아미파가 기거하고 있었다. 자신을 사냥하기 위해 함정을 팠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때, 상황을 지켜보던 송월 노인이 말했다.
“서 호위의 실력을 보니 자리를 피하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언뜻 들으면 안도하는 말처럼 보였다. 허나 혈면수라에게는 전혀 다르게 들렸다.
도발이나 다름 없었다. 눈 앞의 여인에게 자신이 맥없이 패사할 것이라 확신하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말 아닌가.
“노오옴!”
도발의 힘이 대단했다. 서연은 세차게 달려드는 혈면수라를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기도가 미약하게 흔들린다. 효과가 생각보다 좋아.
일문의 장로가 저리 동요할 정도다. 제대로 배워두면 나중에 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당가주에게 무림의 동향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음혈종의 간부들은 사람의 피를 빨아먹는 혈귀라 들었다. 웬만한 상처는 어렵지 않게 재생해낸다고.
청목족도, 산정도 있는 세상이다. 거기에 혈귀가 추가된다고 하여 이상할 것은 없었다.
송월 노인은 생각했다.
‘혈귀들의 수괴 중 하나다.
아무리 서연에게서 옛 절세고수들과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지만, 혈면수라를 쉽게 제압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지 않았다.
죽이는 것보다 제압하는 것이 몇 배는 더 어렵기 때문이다. 내로라하는 후기지수들도 제압은커녕 그의 독문무공인 혈수지공(血手之功)을 막아내기에도 급급할 터였다.
그뿐이랴. 언제든 잘린 손목을 재생시킬 수 있음에도 저리 달려들고 있었다. 서연이 방심하는 순간 새 손목을 만들어내어 빈틈을 노릴 것이다.
혈귀나 택할 법한 간악한 전투 방식이었다.
도발을 하여 시선을 돌리려 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무림의 네 번째 바람을 일으킬지도 모르는 여인의 뜻이 혈귀 때문에 망가지길 원치 않았다.
‘아무리 대단한 자질을 지녔다고 해도…….
그가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혈면수라의 신형이 크게 흔들렸다. 세차게 달려오던 기세가 일순간에 뭉개졌다. 서연에게 손목이 잘려나갔을 때 체내로 파고든 정순한 진기가 기혈을 뒤틀기 시작한 것이다. 내가중수의 묘리였다.
쿠에에엑!
입을 틀어막은 손틈 사이로 피가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온 정신을 기혈을 가다듬는 것에 쏟아부었는데도 그러했다.
“무슨……짓을……!”
전투를 지켜보던 송월 노인은 저도 모르게 눈을 크게 떴다. 토혈하는 피가 검게 물들어 있었다. 내장까지 망가진 것이다.
혈면수라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겪고 있는 일이 도저히 믿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전신을 흉흉하게 휘감고 있던 붉은 기파가 볼품없이 사라졌다.
“허어!”
송월 노인은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 돌아가는 상황을 그제서야 알아차린 것이다.
“……음혈종 장로를 일격에.”
송월 노인은 처음에는 서연이 독이라도 썼을까 의심했다. 그래서 서연의 안색과 눈빛부터 살폈다. 독을 쓰는 자들 특유의 표정이 드러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허나 아니었다. 그녀는 순수하게 제 힘만으로 혈면수라를 굴복시킨 것이었다.
도대체 몇 개의 배분을 뛰어넘은 것일까.
경악한 송월 노인이 생각에 잠겼을 때, 서연은 사박거리는 걸음으로 재기불능의 상처를 입은 혈면수라에게 다가갔다.
왼손 손목이 날아가고, 내부가 진탕이 되었음에도 혈면수라의 눈빛에 담긴 살기는 여전했다. 그는 눈을 부릅뜬 채로 중얼거렸다.
“……소림 방장이 파계하여 낳은 자식이라도 되는가?”
서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잔향검으로 혈면수라의 남은 팔을 마저 잘라낸 다음, 그의 단전을 폐하려 했다.
“같이 가자. 우리의 피와 살이 혈세 천하의 초석이 되리라.”
혈면수라는 무릎을 꿇은 채로 억지로 혈공 진기를 끌어올렸다. 상반된 기운이 체내에서 마구 충돌하며 육신에 심대한 타격을 주었다.
혈귀 특유의 재생력이 아니었다면 진작에 몸이 타 없어졌을 것이다.
츠츠츠츠―
전율스러운 기파가 몰아치며 혈면수라의 주변이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울렁거렸다. 그 모든 일이 눈 한번 깜짝할 사이에 벌어졌다.
‘…….
이대로 내버려두었다간 주변까지 휩쓸리겠다는 불안한 마음에 다급히 혈면수라의 머리를 움켜쥐었다.
“늦었다. 불신자야.”
혈면수라는 서연을 바라보며 입을 벌려 웃었다. 이빨 사이로 피가 흘러 기괴했다.
서연은 소름을 느끼면서 머리를 굴렸다. 이 상황을 어찌 타개해야 할까.
이제와서 단전을 폐한다고 해도 돌이킬 수는 없다.
“본교의 비전이다. 구결도 모르는 네깟 년이 어찌 막을까.”
혈면수라는 입꼬리를 올리며 이야기했다.
진기 운용 방법, 구결, 운기의 경로까지 모두 꿰고 있어야 했다. 내부자, 그것도 장로급의 존재나 알 법한 내용이었다.
서연은 도발에 아랑곳하지 않고 혈면수라의 전신에 진기를 퍼뜨렸다.
육신의 진기 도해를 순식간에 읽어냈다. 그 틈에서 인위적인 기의 흐름을 인지했다.
제 재능의 한계가 없다는 것을 아니 진행에 막힘이 없었다. 무수히 쏟아지는 정보를 막힘없이 받아들였다.
‘열반을 깨우친 육체라더니.
구결까지는 모르겠으나,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폭주하는 진기의 흐름을 역산했다.
‘단기혈(斷基穴), 대추혈(大椎穴), 신궐혈(神闕穴). 여기까지 도착했으면 다시 위로.
사아아아악―
질주하던 혈공 진기가 한순간에 역행하기 시작했다.
혈면수라는 즉각적으로 반응했다.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내, 내 것이다……!”
육신의 통제권을 완전히 빼앗겼다. 평생 동안 쌓아온 혈공 진기가 빨려 들어가고 있다.
“안 돼! 안 돼!”
적발이 순식간에 힘없는 백발로 변했다. 팽팽했던 피부 또한 탄력을 잃고 축 늘어졌다.
‘배신, 배신자가……!
역으로 흡정을 당하고 있었다. 음혈종의 핵심 구결을 알지 못하면 불가능한 일. 혈면수라가 배신자가 있다고 착각하는 것도 당연했다.
‘혈공 진기는 지독하구나. 양만 많을 뿐, 질은 하잘 것 없으니.
당연하지만 서연은 혈공 진기를 흡수할 생각이 없었다. 공청석유조차 불순물로 여기는 육체다. 사이한 혈공 진기는 오죽할까.
흡수하는 족족 먼지로 화하여 공중으로 흩어졌다.
‘묘리는 얼추 알았다.
음혈종과는 상성이 좋다는 것도 깨달았다. 쥘부채가 괜히 떨리지 않았던 것이 아니었다.
서연은 천천히 손을 떼었다. 혈면수라는 완전히 넋이 나간 자세로 덜덜 떨고 있었다.
“아아……. 으아아아…….”
한쪽은 손목이 잘리고, 다른 한쪽은 팔째로 잘린 것으로 모자라, 타인에게 갈취했던 진기를 모두 빼앗겼다.
힘없는 노인, 아니. 그보다도 못한 존재가 되었다.
서연은 그런 그를 차갑게 내려다보다가 말했다.
“인간같지 않은 것들아.”
그녀의 장포가 펄럭이며 혈면수라의 몸을 휘감았다. 서연은 그를 붙잡은 채로 남아있는 음혈종의 잔당들에게 고했다.
“내 친히 너희를 계도해주마.”
음혈종의 잔당들이 일제히 침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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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켜보던 송월 노인이 탄성을 터뜨렸다. 얼굴 위로 드러난 감탄을 숨기지 않았다.
주변에 있는 음혈종의 잔당들을 살펴보니 다들 반쯤 넋이 나간 상태였다. 혈면수라는 호흡하는 것조차 어려워 보였다. 실력이 유독 뒤떨어지는 잔당들 중에는 손발을 떠는 이도 있었다.
하강한 선녀인 듯 사뿐히 바닥을 딛고 서 있다.
장포가 펄럭이며 초월적인 분위기를 더했다.
그 와중에 서연은 혈면수라를 내려다보았다. 단전을 파할 필요도 없었다.
간질에 걸린 사람처럼 감히 서연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부르르 떨고 있었다.
서연은 그를 붙잡은 채로 걸음을 디뎠다. 연화비형보가 펼쳐지며 순식간에 음혈종의 잔당 앞에 도달했다.
누구도 움직이지 못했다. 서연에게 압도된 것이다.
서연은 눈 앞의 음혈종 무인에게 고했다.
“죽음조차 자비다.”
“…….”
“평생을 후회하며 살도록.”
음혈종 무인은 입을 열지 못했다. 서연의 어조에 감정이 묻어나오지 않았다. 그렇기에 더 두려웠다.
꽈악―
자신의 머리를 틀어쥐는 손바닥을 보며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했다.
다른 잔당들 또한 입을 다문 채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역지사지.
평생 남에게 빼앗을 줄만 알았던 짐승들이 처음으로 천적을 만났다.
짧은 비명. 일순간에 범인만도 못한 존재로 변한 짐승이 주저앉는 것은 그 다음이었다.
“…….”
혈공 진기는 어떻게든 서연에게 달라붙어 있으려 했다. 천하에 둘도 없는 자질임을 느낀 것이다. 무학의 창시자보다 서연이 나았다.
구결을 깨달은 순간 세뇌당하는 무공이다. 음혈종이 쉽게 세를 불린 것은 그 덕이었다.
허나 서연은 담담히 혈공 진기를 떨쳐냈다. 마치 먼지를 털어내는 듯했다.
“어, 어째서…….”
민초 수백에게 강탈한 진기가 무로 화해 사라졌다. 음혈종 무인은 망연자실한 얼굴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쩌적!
전신이 말라붙는다. 타인의 것을 갈취하여 억지로 그릇을 키워왔던 이들이다. 혈공 진기를 빼앗긴 순간 육신을 구성하던 것들이 그릇째로 망가졌다.
그들은 살아만 있게 되었다.
서연은 다른 음혈종 무인에게로 나아갔다. 그들에게는 서연이 마치 저승의 염라처럼 느껴졌다.
“으, 으으으……!”
이제는 서연이 손만 살짝 뻗어도 부르르 떨 정도였다.
“차라리 죽, 죽여주……. 컥!”
몇 번 반복하다 보니 흡정의 구결을 깨달았다. 분명 흡성대법(吸星大法)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타인의 진기를 강탈할 수 있다면, 그 반대도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흡성대법을 펼쳐 혈공 진기를 빼앗는다. 그 다음 금진(金津)혈과 옥액(玉液)혈에 억지로 정순한 진기를 심어놓았다. 효과는 즉각적이었다.
혀를 깨물어 자진하려던 사내가 눈을 부릅떴다. 상극의 진기가 혈자리에 단단히 자리잡은 탓에 안면 근육을 움직일 수 없었다.
턱과 혀가 축 늘어졌다. 서연보다 더 뛰어난 내가고수가 나타나서 진기를 해소해주지 않는 한, 평생을 저리 살아가야 할 것이다.
‘앞으로도 이렇게 하면 되겠다.
평온하게 한 걸음을 내딛는다. 서연의 걸음이 멈출 때마다 적발의 짐승들이 색을 잃었다.
도망치는 이들은 없었다. 음혈종의 무인들은 혈세 천하를 믿었다. 서연이 펼치는 흡성대법을 보고 그녀를 자신들을 징치하기 위해 하늘에서 내려온 진혈의 사도라 여겼다.
서연이 혈공 진기를 취했다면 오히려 기뻐했을 것이다. 허나 하잘것없이 내다버리는 것을 보고 절망을 금치 못했다.
제가 믿던 신에게 버려졌다. 차라리 죽는 것이 나았다.
돌이킬 수 없는 심마를 입어 각혈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아아아…….”
“어찌하여 저희를 벌하시나이까…….”
서연은 아랑곳하지 않고 혈공 진기를 취한 다음 내다버리기를 반복했다.
모든 음혈종 잔당들을 처리하는 데까지는 일각도 걸리지 않았다.
“어르신. 관아에 먼저 들를 수 있겠습니까?”
본래 상행을 하던 중에 방향을 바꾸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이다. 허나 송월 노인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히려 그렇게 말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기색이었다.
“그래야지요. 포박을 돕겠습니다.”
송월 노인이 손짓하자 상단원들이 하나 둘 나타나 포로들을 포박하는 것을 도왔다.
새외를 넘나드는 상단이라 그런가, 생사가 위태했던 사람들 답지 않게 다들 담담해 보였다.
허나 서연을 보는 눈동자에 경외를 품었다.
“스, 스승님……!”
화련이었다. 놀란 얼굴로 달려오는 와중에 연화비영보를 능숙하게 펼쳐냈다.
반짝반짝 빛나는 눈동자를 보니 서연이 마치 선녀처럼 보이는 듯했다.
‘다행히 다치치 않았구나.
백호가 돕는 것을 보았다. 덕분에 걱정 없이 혈면수라를 상대할 수 있었다.
나중에 날을 잡아 빗질이라도 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은공은 존재 자체로 음혈종의 재앙이나 다름없겠습니다.”
당소소는 폐인으로 전락한 무인들을 보며 그리 말했다. 무던해보이는 목소리 틈 사이로 경탄이 드러났다.
상극의 기운으로 혈공 진기를 제압한 것까지는 이해했다. 서연이 설마 흡정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나름대로 각오를 했는데, 중간부터는 서연을 지켜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정파 놈들이……괴물을 숨겨두고 있었구나…….”
붙잡혀있던 혈면수라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도대체 언제부터 첩자를 심어두었단 말인가?
도가의 기운 너머에 흡성대법을 숨겼다. 저 뒤에 무엇을 더 숨기고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찰나에 구결을 분석하여 파훼했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고금에 둘도 없을 재능이 다른 편에 섰다는 것을 믿기 힘들었다.
“은공을 보고 괴물이라니. 피를 탐하다 보니 안목마저 망가진 모양입니다.”
당소소였다. 그녀가 손끝으로 몽혼독을 퍼뜨리자 혈면수라가 버티지 못하고 고꾸라졌다. 모든 힘을 잃은 힘없는 늙은이다. 수마를 견뎌낼 수 있을 리가 없다.
상단원들은 포로들을 마차에 짐짝처럼 실었다. 곧 마차가 도시가 있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
힘을 잃고 영락(零落)했다 한들, 사마련 팔천의 장로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동네 관아에 맡기고 떠날 수 없는 존재임이 분명했다.
결국 일월상단은 악산부의 부윤이 머무는 곳에 직접 찾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른 아침이었다. 부윤이 막 등청했을 시간이다. 때 이른 방문객을 박대해도 이상하지 않을 때였다.
“……음혈종 혈귀들을 잡았다고.”
관모를 쓴 남성이 입술을 뗐다. 악산 땅에서 가장 권세가 높은 자다. 권태로운 자세로 앉아있는 것이 이상하지 않았다.
“내 용모파기를 외우고 다니지는 않으나, 혈면수라가 저렇게 힘없는 노인으로 영락했다는 말을 도저히 믿을 수 없다. 사실을 대조해야겠으니, 한쪽에서 대기하라.”
부윤이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피로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런 일에 시간을 쏟기 싫다는 생각이 행동으로 드러났다.
“일월상단, 하남에 적을 둔 상단이구나. 이름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상단이 사천까지 몸 성히 왔다는 것을 믿기 어렵다.”
부윤은 그렇게 말하며 서연을 응시했다.
“여인 홀로 혈면수라를 상대했다는 것은 더더욱 믿기 힘들다. 본관을 기망하고 있다는 생각이 절로 드는구나. 신분부터 증명하도록 하라.”
“알겠습니다.”
권태로운 태도를 끝까지 유지했다. 낙양 도감이라는 문서를 읽기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도감?”
악산 부윤이 미간을 좁혔다. 서연과 문서를 번갈아 보던 그는 손끝에서 진기를 끌어올렸다.
당연히 그 또한 무공을 익혔다. 대명의 관리라면 응당 가져야할 소양이었다.
“진품……이군.”
말투가 보다 유해졌다. 같은 부윤이라고는 하나, 대도시인 낙양의 부윤과 작은 악산의 부윤은 그 급 차이가 꽤 났다. 낙양 부윤이란 으레 총독 내정자가 거쳐가는 요직이었으니 말이다.
악산 부윤은 서연에게 문서를 건네며 말했다.
“대붕파에 사람을 보내 직접 확인해보겠다. 작은 문파가 아니었으니, 희생된 사람이 적지 않았을 터. 무관들 중에 무공에 조예가 있는 자들이 적지 않으니, 상해를 입은 흔적을 보고 음혈종의 무학임을 파악할 수 있으리라.”
취급은 달라졌으나, 대기하라는 뜻은 여전했다.
“혹 얼마나 걸릴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속히 끝낼 일이 아니다. 본관을 보채지 말라.”
악산 부윤이 단호히 말했다. 그는 여전히 권태로운 눈으로 무릎을 꿇고 있는 음혈종 무인들을 응시했다.
혈면수라 정도 되는 무인의 용모파기는 상부에 요청해야 얻을 수 있었다. 족히 사흘은 걸릴 터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 힘없는 노인이 혈면수라 같지는 않았다. 신분을 확인했음에도 저를 기망한다는 생각이 도저히 지워지지 않았다.
“부윤 어르신!”
그때 관리 하나가 다급히 달려왔다. 저렇게 다급히 달려올 품계가 아니었기에 더 의아했다.
“무슨 일인가?”
관리는 곧장 답하지 않았다. 한참을 달려온 듯, 가쁜 숨을 가다듬었다.
“태, 태자 전하께서 전서를 보내셨습니다.”
“……전하께서?”
황상께서 친히 원정을 나간 지금, 대명을 실질적으로 운영하고 있는 이가 바로 황태자였다. 대리청정을 하고 있는 상황이었니, 황제와 동급으로 대해야 마땅했다.
악산 부윤은 황급히 옷차림을 단정히 했다.
곧 동창의 환관이 가마를 타고 나타났다.
황태자의 전서를 전달하는 역할이다. 품계로 보나, 받는 신임으로 보나 악산 부윤보다 급이 높았다.
환관은 가마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
그의 시선은 악산 부윤보다 서연에게 더 오래 머물렀다. 서연은 의미심장한 시선을 느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이윽고 환관의 눈이 악산 부윤에게로 돌아왔다.
“악산 부윤 장원평(張元平), 전하께서 친히 전서를 보내셨습니다.”
환관은 손을 뻗어 붉은빛으로 화려한 두루마리를 내밀었다. 악산 부윤은 무릎을 꿇은 채로 천하의 보물을 받듯 조심스럽게 전서를 받아들였다.
칙서가 아니라 전서다. 이만하면 충분한 예를 취했다고 할 수 있었다.
“곧장 읽으세요.”
황명을 전달하는 사자 앞에서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관리로서 가장 피해야 할 일이었다. 그는 엄숙한 표정으로 전서를 읽어 내려갔다.
‘음?
허나 그것도 잠시였다. 악산 부윤의 얼굴이 일순간에 하얗게 물들었다.
눈이 흔들리는 것이, 질문을 해도 되는지 눈치를 살피는 듯했다.
허나 악산 부윤은 끝까지 입을 다물었다. 가까스로 전서를 다 읽고 나서야 나지막이 읊조렸다.
“받들겠습니다.”
“실수하지 않으리라 믿겠어요.”
환관은 씩 웃고는 닫시 가마에 올라탔다. 가야 할 곳이 많았다. 인수(仁壽), 자양(資陽), 내강(內江), 흥문(興文), 거기에 미고(美姑)에 서창(西昌)까지 들러야 했다.
전부 사천의 도시였다.
사천성만 그럴까. 운남성은 물론이고, 중경과 귀주, 광서에도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을 터였다.
전부 무공 서적 하나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십수년 동안 웃음을 보이지 않았던 황태자가 주변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대소했다.
오죽 드문 일이었으면 북경 전체에 소문이 퍼질 정도였다. 명민한 황태자가 그것을 몰랐을 리가 없다. 그런 소문을 감수할 만큼 즐거웠다는 것이다.
사천과 운남에는 유독 신임하는 환관을 파견했다. 그렇기에 그는 다른 환관들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환관은 떠나기 직전에 서연을 응시하다가 사라졌다. 갈 길이 멀다는 말을 덧붙이면서다.
“……방금 건넸던 문서, 다시 확인해봐도 되겠나?”
환관이 떠난 것을 확인한 악산 부윤이 서연을 향해 말했다. 일전보다 말투가 훨씬 조심스러웠다. 높은 사람을 대하는 듯했다.
서연은 갑작스레 변한 태도에 의아함을 느꼈다.
“문서라 하심은.”
“낙양 부윤이 적었던 문서 말이네.”
서연은 순순히 도감 임명장을 건넸다. 문서를 살피던 악산 부윤의 입술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
묘한 긴장감이 주변을 맴돌았다.
“…….”
악산 부윤은 몇 번이고 임명장을 살폈다. 어찌나 열심히 살피는지, 황태자가 보낸 전서보다도 꼼꼼히 읽는다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침묵이 길어졌다.
악산 부윤은 한참 동안 입매를 달싹거렸다. 말문을 어찌 열어야 할지 고뇌하는 듯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본관이 과거에 혈면수라를 만난 적이 있다. 오래전 일이라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으나, 얼굴이 그때와 똑 닮았군.”
악산 부윤을 말을 하면서도 마른침을 삼켰다. 설마 그럴 리는 없겠지만, 서연의 눈치를 살피는 듯했다.
“그러면, 떠나도 되는 겁니―.”
“본관은 예전부터 협의지사에 대한 관심이 많았네.”
악산 부윤은 다급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조찬이라도 한 번 대접하고 싶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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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산 부윤 장원평은 의자의 등받이에 몸을 뉘였다.
수하들을 전부 물리고 방 안에 홀로 남은 상황이었다. 갑작스런 풍파를 겪기라도 했는지 심력 소모가 큰 듯했다.
정사품의 고관이다. 한 도시를 다스리는 부윤이라면 조정에 굳건한 연줄을 두세 개쯤은 가지고 있기 마련.
그가 다스리는 도시에서는 웬만한 대문파도 그의 눈치를 살피며 함부로 날뛰지 못했다.
고위 지방관이라는 뜻이다.
허나 산전수전 다 겪은 그가 지친 기색을 대놓고 드러냈다. 공무로 눈코 뜰 새 없었을 시각인데도 수하들을 물리고 심신을 가다듬고 있었다.
“…….”
그는 흘깃, 황태자가 보낸 전서를 살폈다.
몇 번을 읽어봐도 적혀있는 내용이 바뀌지 않았다. 그렇기에 더욱 믿기 힘들었다.
황태자가 어떤 사람인지 악산 부윤은 잘 알았다. 냉혹하고 칼 같은 사람이다. 부친의 패왕과도 같은 기질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민초들에게는 명군이나, 신하들에게는 폭군이다. 신임하는 환관이 비리를 저지르자 눈도 깜빡하지 않고 삼족을 멸한 일화는 유명했다.
또한 몹시 오만하고 거침없었다. 대리청정한 기간이 십 년은 족히 넘었다.
약관이 되기도 전에 후계 구도를 완전히 확립했다. 그의 형제들은 촌구석을 다스리는 친왕이 되었다.
반발했던 황족들은 전부 군부에게 끌려가 참수당했다. 문무백관은 물론이고, 황제가 공인한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위치였다.
그런 인물이 벗이라는 단어를 입에 담았다. 방금 전까지 조찬을 함께했던 여인을 칭하는 단어였다.
심기를 거스르지 말라는 말도 덧붙였다.
황태손은 물론이고, 태자비에게도 무심했던 황태자답지 않았다.
“…….”
별 생각이 다 들 수 밖에 없었다.
내색하지 말라는 말이 있었기에 목울대를 치고 오르려는 공대를 가까스로 참아냈다. 사정하여 가까스로 조찬을 대접하고 돌려보냈다.
더 잡아두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다. 조찬 중에도 불편한 기색을 숨김없이 드러냈기 때문이다.
일월상단이 운남으로 편히 향할 수 있도록 통행증을 뚫어주니 그제서야 호흡이 편해졌다.
‘참으로 힘들었다.
최선을 다해 처신했다. 초반에 권태로운 기질을 드러내지만 않았더라면 완벽했을 것이다.
이후는 하늘에 맡기는 것 말고는 별다른 수가 없다.
‘어사라도 되는가.
설마 진심으로 벗이라 생각하여 그리 말했을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황태자로부터 막중한 임무를 받은 신하라 판단하는 것이 합리적이었다.
운남은 전쟁터와 직접적으로 맞닿아있다. 온갖 사마외도가 발호했고, 점창파는 자신들의 영역을 막아내기에도 급급했다.
순간 악산 부윤의 뇌리에 일월상단의 목적지가 스쳐지나갔다.
옛 대리국이 있던 땅으로 가는 중이라 했다. 점창산(點蒼山)이 코앞이었다.
‘……설마?
천명검 대주들의 신상은 극비다. 정2품 총독 정도는 되어야 그들의 용모파기를 직통으로 받아볼 수 있다.
천명검이 무림인과 부패한 관리들의 사신으로 군림할 수 있게 된 가장 큰 이유다.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낼 때도 얼굴을 가리고 있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성별조차 밝혀지지 않은 대주가 대부분이었다.
악산 부윤은 눈을 감고 가능성을 따져보았다.
“…….”
평범한 대주를 벗이라 칭했을까? 차기 단주감이 아니고서야 그럴 수 없는 노릇이었다.
사실 천명검의 힘을 생각하면, 단주 한 명은 너무 적었다. 기존 단주를 원로원으로 이동하고, 새 단주를 임명한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당장 음혈종 장로를 상처 하나 없이 살려서 추포해오지 않았던가.
‘자칫 목이 잘릴 뻔했구나.
악산 부윤은 괜히 목을 가다듬었다. 대주들이 가졌다는 즉결처분권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면사 너머의 외모를 보지 못했기에 할 수 있는 생각이었다.
그랬다면 황태자비를 갈아치운다고 착각했을테니, 맘 편히 잘 수도 없었을 터였다.
그 편보다 지금이 훨씬 나았다.
*****
옅은 눈발이 몰아쳤다.
눈이 잔뜩 쌓인 산길을 거니는 인파가 적지 않았다. 다들 걸음을 바삐 옮겼다.
“사천 땅에 들어온지 한참 지났는데, 이제는 괜찮은 것 아니에요? 다리가 너무 아파요. 마을 어르신들도 한참 전에 뒤쳐졌잖아요.”
“운남에서 난리가 났다더니, 참말이었나보다. 피난민들이 끝도 없이 쏟아지는구나.”
“점창파의 도사들은 대체 무얼 하길래 사마외도들이 날뛰는 것을 방조하고 있는 것이오?”
“방조는 무슨. 산하 문파들이 죄다 패사했다는 소문이 이미 파다해. 점창산에 틀어박혀 방어에 집중하고 있다던데.”
“그러다 멸문이라도 하는거 아닌가 모르겠네.”
온갖 이야기가 들려왔다.
날이 바뀔 때마다 운남에 관한 소문이 흉흉해졌다. 피난민들의 수가 그를 증명했다.
비단 사마외도로 인한 것만은 아니다. 안 그래도 땅이 척박한 운남이었다. 흉년까지 겹치자 버티지 못한 민초들이 사천으로 피난한 것이다.
“황군이야 전쟁을 치르느라 바쁘다고 쳐도, 천명검은 대체 무얼 하고 있는건가? 손가락만 빨고 있지는 않을 것 아닌가.”
“대부분이 장강 이남으로 향했다더군. 그쪽은 완전히 피바람이 불고 있는 모양이야. 운남은 그에 비하면 안전하지.”
“사마외도들도 영악해. 민초들만 건들지 않으면 황군이 나서지 않는 것을 아는 것이지. 교묘하게 점창파만 노리고 있다더군.”
스윽.
서연은 자잘한 나무토막을 쥔 손목을 움직였다. 마차에서 조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주변에서 들려오는 말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묵묵히 조각칼을 움직일 뿐이었다.
근래 들어 검을 뽑는 일이 잦았으나, 어디까지나 그녀의 본은 조각이었다. 화련도 조각을 가르치려 제자로 들였던 것 아니던가.
‘얼추 감이 잡힌다.
일행이 근처 객잔에서 저녁을 해결하러 떠난 도중에도 서연은 조각을 계속했다. 새로운 초식을 창안하기 위함이었다.
일월상단이 가지고 다니던 서책들을 참고하여 비연천공을 마저 완성하는 것도 함께였다. 최소한 이번 여행이 끝나기 전까지는 심공을 완성할 생각이었다.
사아악―
조각을 계속하다보니 깨달은 사실이 하나 있었다. 각예에는 찌르기라 할만한 동작이 거의 없었다.
전부 베는 동작이다. 검을 들고 펼치는 도법이라고 불러도 할 말이 없을 정도였다.
재료를 나무로 한정했을 때에는 그러했다. 범위를 암석까지 넓혀야 가까스로 찌르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횡베기, 종베기, 찌르기를 합쳐서 삼재검법이라 했다. 기초에 해당하는 것을 빼먹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돌로 하는 각예도 가르쳐야겠구나.
서연은 눈을 감은 채로 심상 속에서 유검(遊劍)을 펼쳤다. 유랑하며 만든 검이라 하여 유검이라 이름 붙였었다.
일전에 당소소를 구할 때 펼쳤던 검술이 유검의 첫 번째 초식이었다.
팍!
곧 들고 있던 나무조각에 부월을 올려친 듯한 궤적이 새겨졌다.
‘검으로 초식을 펼치면 이런 검흔이 남는구나.
단검으로 펼치면 어떻게 될지 의문을 느꼈다. 곧바로 조각칼로 검흔을 새겨보았다.
검을 다룬 세월보다 조각칼을 다룬 세월이 압도적으로 길었다. 기상천외한 기예가 손끝에서 자유자재로 펼쳐졌다.
스악!
나무조각을 겉면에 만개하는 꽃과 같은 검흔이 새겨졌다. 심상 속에서 나타난 녹림오호가 부법을 제대로 펼치기도 전에 쓰러졌다.
‘이것도 고절하기는 한데.
길이가 짧아서 그런지 검을 사용할 때보다 위태롭다.
서연은 심상 속에서 검법을 보완하고자 했다. 한 손에는 검을, 다른 손에는 쥘부채를 든 채였다. 쌍검이나 다름없었다.
본디 쌍검은 무기를 하나만 다루는 것과는 격이 다른 난이도라 했다. 허나 서연에게 해당되는 일은 아니었다.
결심하기 무섭게 두 자루 신병이기가 날개처럼 움직였다.
쥘부채가 일으킨 바람이 검이 나아갈 길을 열어준다. 덕분에 검이 반 호흡 빠르게 나아간다.
심상 속의 녹림오호는 반응조차 하지 못하고 반으로 갈라졌다.
‘제이초는 파풍유영(破風遊影)이라 해야겠다.
그렇게 새로운 초식을 창안하면, 눈을 뜨고 심상 밖으로 빠져나와 나무토막과 서책에 차례로 새겼다.
검흔이 순식간에 늘어났다.
무림의 고수들이 어찌하여 심상 수련에 열을 들이는지 알 것 같았다. 무학을 창안하는 데에 있어 이만한 것이 없었다.
‘직접 싸워보면서 보완도 해야겠지만.
서연은 아쉬운 얼굴로 나무토막을 응시했다. 흑단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섯 초식을 채 견디지 못했다.
‘빨리 운남에 가고 싶다.
성인 남성의 몇 배는 되는 대리석들이 널려있다고 했다. 그것으로 조각을 하면 필히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막 마차 밖으로 나가려던 그때 문이 열렸다. 음식을 잔뜩 싸들고 온 당소소가 놀란 얼굴로 서연을 주시했다.
“아, 은공.”
“음?”
당소소의 뒤에서 따라오던 화련도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스승님, 밖으로 나가시게요?”
이제보니 같이 먹으려고 객잔에서 음식을 여기까지 싸온 듯했다. 서연은 기특하다는 미소를 지으며 음식들을 건네받았다.
“뭘 이렇게 많이 싸왔어? 그렇게 배가 고팠니?”
“무엇을 좋아하실지 몰라서 다 준비했다고 해야 할까요.”
당소소는 웃으면서 마차 가운데에 탁자를 깔았다.
“스승님은 가만히 계세요.”
“그래.”
화련이 물잔, 젓가락 등을 챙겨서 서연의 앞에 내려놓았다. 그동안 연습이라도 한 것인지 행동이 매우 능숙했다.
“송월 어르신은 객잔에서 드신다니?”
“네. 마차 뒤편에 탁자가 있으니 가져다 쓰라고 하셨어요.”
“돈은 소소가 냈니?”
“상단주께서 대주셨습니다.”
“감사하다고 말씀은 드렸고?”
“예.”
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소소는 예의가 바르구나. 당가주께서 아주 잘 가르치셨어.”
당소소는 무표정한 얼굴로 꾸벅이면서 음식을 마저 차렸다. 꽤 큰 탁자였는데도 음식으로 가득 찼다.
서연은 음식을 나르는 당소소와 화련을 보았다.
“잘 어울리는구나. 사저와 사매라고 해도 믿겠어. 입문 시기를 생각하면 소소가 사매가 되겠지. 하여간 난 운이 좋구나. 맛있는 음식도 챙겨다주는 제자도 있으니 말이야. 이제 얼추 된 것 같으니 들어오렴.”
가까운 노점상에서 당과라도 하나 챙겨오려던 화련이 자연스럽게 방향을 전환했다.
“네, 네.”
서연은 죽립과 면사를 벗으며 말했다.
“앉으렴.”
“예.”
서연은 둘 앞에 놓인 잔에 물을 따라주며 말했다.
“화련이도 소소 옆에 앉고.”
“네.”
어느새 마차 안이 향긋한 음식 냄새로 가득 찼다. 뭐라고 더 말을 하려다가, 웃음이 절로 나와서 그럴 수 없었다. 당소소와 화련의 표정을 봤기 때문이다.
“화련아, 소소야.”
“네.”
“예, 은공.”
서연은 끝내 웃음을 참지 못하고 한 마디를 던졌다.
“서로를 사형제로 삼는 것은 어떠니?”
순간 당소소가 토끼처럼 눈을 크게 뜨고, 화련은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얼굴에는 질투의 기미조차 없었다.
오히려 제 밑에 누가 생긴다는 사실이 기꺼운 듯했다.
서연은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른 당소소를 보며 즐거이 웃었다. 여태껏 그녀가 보였던 그 어떤 표정보다도 극적인 감정 변화였다.
“저는 소소 사매가 마음에 들어요.”
화련이 눈치껏 말하자, 서연이 시원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서연은 이번에 당소소에게 물었다.
“소소는 어떻게 생각하니?”
당소소는 달아오른 얼굴의 열기를 느끼며 더듬더듬 답했다.
“저도, 좋습니다.”
서연은 환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제 먹자꾸나.”
스승이 으레 할법한 정겨운 말을 덧붙이면서.
“……제가 독이 있나 먼저 살피겠습니다. 스승님께서는 염려하지 마십시오. 화련 사저도요.”
서연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기미(氣味)라도 하려는 듯 보였는데, 긴장한 탓에 음식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도 모르는 듯했다.
“사매, 독 없어? 이제 먹어도 돼?”
“…….”
당소소는 곧장 답하지 못했다. 한 번에 너무 많은 음식을 집어넣었기 때문이다.
음식들을 겨우 삼킨 당소소가 숨이 찬 목소리로 답했다.
“드셔도, 됩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으나,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모두가 웃음을 터뜨렸다.
셋은 해가 질 때까지 웃으며 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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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연은 운남으로 향하는 도중에 제자들과 온갖 이야기를 나누었다. 새로 깨달은 사실이 하나 있었는데, 생각보다 당소소가 과묵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저, 매일 당과만 먹으면 이가 녹습니다. 저는 이가 다 빠져 잇몸만 딱딱거리는 사저를 보고 싶지는 않습니다.”
“…….”
할 말은 하는 성격이었다.
그리고 웬만한 상황에서 웃지 않는다는 것도 특징이었는데, 이따금 웃음을 참으려 할 때마다 눈썹 끝만 꿈틀거리곤 했다. 뭣 모르는 타인이 보면 인상을 쓴다고 착각할 수준이었다.
“사매는 귀신이 무서워?”
“안 무섭습니다.”
“저번에는 놀랐잖아.”
“……비몽사몽한 상태에서 그만한 범을 보면 누구라도 놀랄 겁니다.”
아무튼, 두 제자가 티격태격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은 서연으로서도 나름 즐거운 경험이었다. 어찌하여 구파의 장문인들이 수많은 제자를 들이는지 이해가 간다고나 해야 할까.
서연은 달리는 마차 안에서 둘에게 조각을 가르치고, 자세를 봐주고, 또 보법과 검술도 가르쳤다.
“진기 운용이 매우 섬세해야겠군요. 스승님께서 조각을 그리 중요시 여기신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마차는 줄곧 오르막길을 달렸는데, 워낙 행인들이 많이 다니는 길이다 보니 산적이나 도적은 마주치지 않았다.
화련은 보통 닭이나 말, 소 같은 동물을 조각했고, 당소소는 거미나 오공(蜈蚣), 혹은 나비 같은 것들을 조각했다.
표현력은 화련이 나았고, 섬세한 부분에서는 당소소가 나았다. 암기를 다루는 탓에 손재주가 뛰어날 수밖에 없는 사천당문의 특징 탓에 그런 결과가 나온 듯했다.
이따금 송월 노인이 마차 안으로 찾아오곤 했는데, 그는 그럴 때마다 둘이 조각한 물품에 값을 매겼다.
“이 정도면 장터에 내다 팔 수 있겠습니다.”
“사매가 만든 건 얼마나 할까요?”
“은전 하나는 있어야겠군요. 나비 조각은 수요가 좋습니다.”
“그러면 제가 이걸 은전 하나에 판다고 하면 사시겠습니까?”
“당랑암화가 직접 만들었다는 말을 덧붙여도 되겠습니까?”
“그러려면 금자 한 개는 내셔야 할 겁니다.”
송월 노인은 순순히 금자를 내밀었다. 당소소는 가격을 더 높게 부를 것을 아쉬워했다.
“열 배를 부를 걸 그랬습니다.”
화련은 승부욕을 느끼고 더욱 조각에 몰두했다. 이따금 작품을 만들어 송월 노인에게 값을 물었는데, 은전 세 개까지는 어찌어찌 받아냈다.
“역시 사저십니다.”
그럴 때마다 당소소는 짝짝 박수를 쳤다.
“……이름값을 빼고 보면 내가 이긴 거나 마찬가지야.”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놀리지 마.”
“놀리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는 진심으로 감탄했습니다.”
물론 그렇게 말하는 당소소의 눈썹 끝은 여김없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제자들의 실력이 일취월장하는 것에 보람을 느꼈다. 서연 역시 제자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자는 시간도 줄여가며 무학에 몰두했다.
‘운기 경로를 이렇게 수정하는 편이 더 낫겠다.
서연은 깊은 명상에 잠긴 채로 새로운 초식과 심공의 완성을 고민했다. 침대에 앉은 채로 잠을 지새운 날이 많았다.
그렇게 몇 주를 반복하다 보니 순식간에 곤명(昆明)에 닿았다. 사계절 내내 온화하여 봄의 도시라는 말까지 붙은 운남성의 성도(省都)였다.
겨울치고 따뜻했으나, 분위기까지 온화하지는 않았다.
평범한 행인들마저 무기를 패용하고 다녔다. 몇 걸음 걷지도 않았는데 흉흉한 민심이 그대로 드러났다.
오죽했으면 음식을 파는 객잔조차도 시비가 걸릴 것을 염려해 칼을 찬 무사를 고용했을 정도였다.
“오늘도 이상 없습니다. 편히 드셔도 됩니다.”
당소소가 음식을 먼저 기미(氣味)하는 것은 일상이 되었다. 서연이 시킨 적은 없었다. 당소소 본인이 그러길 바란 것이다.
여러 번 시도하여 익숙해진 덕에 이전처럼 양 볼에 빵빵하게 음식을 채우는 불상사는 벌어지지 않았다.
탁.
화련 또한 조심스러운 몸가짐으로 수저를 놓았다. 당소소의 행동을 보고 예전에 으레 하곤 했던 시비의 역할을 다시 떠올린 것이다.
“운남 사람들은 온갖 곤충들을 다 튀겨 먹는다고 들었는데, 직접 보니 평범하군요.”
만두와 국수를 남김없이 해치운 당소소가 말했다.
“슬슬 다 먹었으면 일어나자꾸나.”
“예.”
본래 식비는 송월 노인이 전부 대기로 했지만, 제자들이 직접 만든 각예품을 송월 노인에게 팔기 시작한 이후로는 서연이 식비를 계산했다.
이따금 상품성이 없어 보이는 것들도 좋다고 사갔기 때문이다. 서연이 죄송함을 느끼는 것도 당연했다.
“얼마인가요?”
음식을 재빨리 나른 점소이가 후다닥 다가왔다.
“쉰 냥입니다.”
“네?”
“만두 다섯 개, 국수 세 그릇 시키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면 쉰 냥이 맞습니다.”
사천 땅에서 같은 음식을 시켰을 때 가격이 스물두 냥이었다. 도시 몇 개 지나쳐 왔다고 가격이 곱절이 넘게 뛰어 있었다.
서연은 속으로 혀를 내저으며 전낭을 뒤적여 은자 하나를 꺼내 건넸다.
“밥값이 많이 비싸네요.”
한 해 농사를 망쳤다기에 평상시보다 비쌀 것은 예상했으나, 이토록 차이 날 줄은 몰랐기에 한 말이다.
“전쟁도 있고, 요새 민심이 워낙 흉흉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주방장님도 근래 들어 식재료 가격을 감당하기 힘들어졌다고 하시더군요.”
은자를 지불해서 그런지 거스름돈을 계산하는 데 한참이 걸렸다.
그때 입구에서 누군가가 서연을 향해 말했다.
“비켜.”
서연은 문득 고개를 돌려 비키라고 말한 사내를 응시했다.
“…….”
얼굴에 큼지막한 흉터가 난 사내가 보란 듯이 박도를 치켜들고 있었다. 그는 서연이 차고 있는 검을 보고 코웃음치더니, 거스름돈을 계산하던 점소이를 툭툭 쳤다.
“상납 받으러 왔다.”
점소이가 화들짝 놀라며 굽신거렸다.
“어, 어르신. 오셨습니까?”
절대 어르신이라 불릴 연배는 아니었다. 허나 사내는 그 호칭이 마음에 들었는지, 박도를 까닥까닥 흔들었다.
“아직 보호비를 안 냈던데.”
“……저번 주에 직접 와서 가져가지 않으셨습니까.”
“저번 주?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에 없다만.”
사내는 손가락을 치켜들어 귓구멍에 가져다 댔다.
“점창의 도사 놈들한테 지불하고 까먹기라도 했나?”
손님들이 말소리를 죽이고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점창파가 몰아치는 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점창산에 틀어박혔다는 소문을 익히 들었던 탓이다.
점소이는 사내의 억지에 곧장 대답하지 못했다.
사내는 망설이지 않고 출수했다. 버릇없는 점소이의 머리를 탁상에 내리꽂기 위함이다.
탁―!
상황을 지켜보던 서연이 마주 출수했다. 순식간에 사내의 손목을 잡아챘다.
“어째 날이 갈수록 짐승보다 못한 것들이 느는 것 같구나.”
사내가 고개를 홱 돌리더니 놀란 얼굴로 서연을 노려봤다.
“……?”
당황도 잠시였다. 박도를 든 손을 급히 움직여 서연의 목을 노렸다.
궤적을 보아하니 타인의 목숨을 끊는 것에 익숙한 듯했다. 여태 얼마나 가볍게 손을 썼을까. 분명 희생자가 적지 않았을 것이다.
작금의 운남은 완연한 사마외도의 강호였다. 적어도 서연은 그렇게 느꼈다.
박도의 궤적을 응시하는 한편, 서연은 붙잡은 사내의 손목을 강하게 잡아당겼다.
순식간에 균형이 무너진 사내의 육체가 기우뚱 넘어졌다. 일순간에 제 체중을 아득히 뛰어넘는 힘이 가해졌기 때문이다.
사내는 그 와중에도 박도를 놓치지 않았다. 자세가 무너졌음에도 여전히 서연의 목을 노렸다.
서연은 제 제자들에게 들으라는 듯 입을 열었다.
“보렴.”
그대로 조각칼을 꺼내 휘둘렀다. 공기를 가르는 소리조차 내지 않고 쏘아진 검격이 정확히 도격의 결을 후려쳤다.
쩡―!
울리는 듯한 충격이 사내의 팔목에서부터 어깨까지 뻗어 나갔다.
서연은 땅에 늘어진 사내를 싸늘한 시선으로 깔아보며 말했다.
“이렇게 결을 찌르면 일격에 무력화할 수 있단다.”
조각을 응용한 묘리다. 사내의 당혹한 얼굴이 서연의 시야에 맺혔다.
“사술을……!”
졸지에 구경거리가 된 사내가 다시금 바닥을 박찼다. 다시금 힘차게 휘둘러진 박도는 답지 않게 고절한 묘리를 품고 있었다.
의아함을 느꼈다. 사마외도가 품을 만한 묘리가 아니었다.
‘……회풍무류검?
점창의 묘리가 왜 흑도의 손에서 펼쳐지고 있는 것일까.
서연은 미간을 좁힌 채로 옷자락을 휘둘렀다. 사락거리는 소리가 뚜렷이 울렸다.
쾅!
진기를 가득 주입한 옷자락과 충돌한 박도가 단번에 산산조각 났다.
“……!”
사내는 망연자실한 얼굴로 손잡이만 남은 박도를 쳐다보다가, 자세를 급히 돌렸다. 도망가려는 것이다.
서연은 찰나에 출수하여 사내의 뒤통수를 잡아챘다. 수북한 감촉이 손끝으로 느껴졌다.
“사, 살려…… 컥!”
서연은 아랑곳하지 않고 사내의 머리를 땅바닥에 내리꽂았다. 동시에 일어난 기파가 바람처럼 퍼져나갔다.
“……뭐 하는 놈들인지 아십니까?”
점소이는 바닥에 엎어진 채로 의식을 잃은 사내를 바라보면서 대답했다.
“비천도문(飛天刀門)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원래는 다른 곳에 상납을 바쳤었는데, 그새 망한 모양입니다. 점창의 도사분들께서 사라지고 나서부터는 이런 일이 잦습니다.”
듣자하니 원래 점창파가 관리하던 구역인 듯했다.
이러다가 괜한 객잔이 피해를 입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서연은 사내를 끌고 밖으로 나갔다.
“소소야. 깨울 수 있겠니?”
“가능합니다.”
당소소가 하독하기 무섭게 사내가 움찔하더니 순식간에 정신을 차렸다. 사내는 오한이라도 느끼는 모양인지 온몸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
사내는 당소소의 외형을 보고 그녀가 사천당문 출신임을 알아보았다. 동네를 전전하는 삼류 흑도가 아니라는 뜻이기도 했다.
“확실히 이상하군요. 외양은 평범한 동네 흑도로 보였습니다만.”
“찌르기에 점창의 묘리가 담겨 있더구나.”
당소소는 서연의 말을 듣고 눈을 크게 떴다. 그 말은 즉슨, 점창파가 위태롭다는 소문이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변방을 수호하는 변경백이라 불렸던 만큼, 황실이 예우하던 점창이 멸문한다면 사천 땅까지 그 여파가 닿을 것이다.
“어떤 경로로 연성하게 되었는지 고하게 만들어야겠군요.”
혈자리가 눌려 제압된 사내가 말했다.
“어……디서 오신 분인지는 모르겠으나, 크게 실수하신 겁니다. 점창파 장문인조차 산문 밖을 벗어나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그보다 뛰어난 고수가 아니시라면 조용히 떠나시는 편이 안전할…….”
“일다경 후에 다시 묻겠습니다.”
당소소는 입매를 비틀면서 사내의 복부에 독장(毒掌)을 꽂아넣었다.
스아아악―!
섬뜩한 소리와 함께 사내가 입을 쩌억 벌린 채로 온몸을 비틀었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듯했다.
“뭘 한 거니?”
“단장독(斷腸毒)입니다. 내장이 끊어지는 고통을 느끼게 하지요. 심문할 때 아주 좋습니다.”
일다경이 지나자 사내가 벌벌 떨면서 말했다.
“사, 사마련 팔천의 음혈종과 흑룡회가 직접 나섰습니다! 그, 그리고 저희 비천도문은 흑룡회의 산하 문파입니다!”
“저는 당신의 출신이 아니라 검법을 알게 된 경위를 물었습니다.”
“……속가를 관리하기 위해 본산을 떠나있던 점창 제자들을 저희 비천도문이 맡고 있습니다.”
말만 들으면 점창 제자들이 비천도문의 비호를 받고 순순히 검법의 묘리를 알려 준 것처럼 들렸다.
헛소리임이 분명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점창의 도사들이 본문을 배반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사내는 입을 다물었다. 당소소는 기다렸다는 듯 다시금 단장독을 하독했다.
일다경 후, 사내는 핏발이 선 눈을 한 채로 말했다.
“삼대제자! 삼대제자들의 팔다리를 자르겠다고 겁박했습니다! 사지근맥도 망가뜨리고, 단전도 폐하겠다고 하니 순순히―.”
“온갖 패악질을 다 부리고 다녔구나.”
더 들을 것도 없었다. 서연은 손끝으로 진기를 일으켜 사내의 정수리를 세 번 정도 가볍게 내리찍었다.
그러자 서연의 진기가 굵은 강침(鋼針)이라도 되는 것처럼 사내의 육신을 세차게 파고들었다.
“……!”
상극의 기운을 가진 사파의 무인이라 생긴 현상이었다. 정종무공을 익힌 무인이었다면 영약을 섭취한 것과 같은 효과를 입었을 것이다.
당소소는 빙공에 당한 것이라도 되는 양 전신이 뻣뻣하게 굳어버린 사내를 보다가 몸을 일으켰다.
“천명검은 어찌하여 가만히 있는 걸까요.”
“운남이 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무리 전하의 검이라도 곧장 대응하기 쉽지 않지요.”
송월 노인이었다. 서연이 돌아오지 않자 객잔 근처를 직접 찾아나선 듯했다.
“서 호위께서는 비천도문이 있는 곳으로 가실 생각이신지요?”
“예.”
“그럼 저희도 따라가겠습니다.”
“그러실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송월 노인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속가를 관리하던 도사들이 적지 않았을 겁니다. 서 호위께서 그들을 구해내신다고 해도, 그만한 숫자를 점창산까지 안전히 데려가는 것은 힘드실 겁니다.”
“위험하실 겁니다.”
“한창 때에는 이보다 더 위험한 일도 겪었지요. 게다가 이 늙은이는 상인입니다. 점창파의 신의는 보화를 주어도 살 수 없지요.”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서연은 딱딱하게 굳은 사내를 노려보다가 그의 정수리를 파고든 진기를 거둬들였다. 사내는 숨이 넘어갈듯한 날숨을 내뱉으며 서연을 보았다.
“커헉!”
사내는 서연의 눈빛만 보고도 그녀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아차렸다.
“비천도문으로 갈 생각이다. 안내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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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창파 장문제자는 흐트러진 진기를 애써 가다듬었다. 암담하다는 말로도 부족할 정도로 좋지 않은 상황에 처했다.
‘억세게도 묶었구나.
도주할 수 없다. 위지향은 꺾인 손목을 보며 그렇게 결론지었다.
청목족 특유의 억센 육체 덕에 근맥까지는 상하지 않았지만, 시급히 치료하지 않으면 평생 검을 쥘 때 불편함을 겪을 터였다.
분파들이 곤란함을 겪는다기에 실력이 뛰어난 사질들을 끌고 곤명에 도달했다.
드넓은 운남에 구파는 점창 하나 뿐이었다. 홀로 두 도시를 도맡아 수호하는 장로들이 적지 않았다.
장문제자 위지향은 대도시인 곤명을 맡았다. 점창에 우호적인 문파가 많아 상대적으로 지키기 쉬웠기 때문이다.
거기에 관군도 자리하고 있었다. 사마외도가 감히 침범할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설마 본산을 공격할 줄은.
점창산에서 급히 전서구가 날아들었다. 음혈종이 점창산 본문을 공격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장로들과 장문제자인 자신마저 본산에서 수백 리 떨어진 곳에 위치한 상황이었다.
다급히 채비했다. 최단거리로 경공을 펼쳐 나아가려 했다.
설마 그곳에 매복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관은 전쟁에 급히 투입되어 대부분이 자리를 비웠고, 심지어 곤명 부윤마저 갑자기 북경에 차출된 상황이었다.
불운이 겹쳤다.
본래도 사마외도의 지척에 놓인 위치에 자리하던 점창이었다. 혹독한 수련을 거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었다.
어렸을 때부터 물러서지 않는 법을 배웠고, 목숨을 도외시하고 찌르는 각오를 체득했다.
본산제자 다섯이서 흑룡회 산하 문파들의 합공을 버텨냈다. 위지향은 그동안 문주 셋의 목을 베었다.
청운검(靑雲劍)이었던 별호에 마(魔)가 붙었다. 그만큼 처절하게 싸웠다는 것이다.
점창의 제자들은 도망치는 것을 수치라 여겼다. 목을 베이더라도 상대의 심장을 찌르는 것을 미덕으로 여겼다.
오죽했으면 흑룡회 무인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북경이 괜히 예우하는 것이 아니었구나. 제자 다섯이서 사흘을 버티다니. 죽음조차 미덕으로 여기는 광인들이다. 사로잡는 것을 수치로 받아들일테니, 계속 몰아붙여라.”
위지향과 사질들은 하루를 더 버텼다. 출혈을 견디지 못한 사질 둘이 절명했을 무렵에야 비로소 사로잡혔다.
“자진할 수 있으니 재갈을 물려라.”
“점창의 제자들은 자진하지 않는다. 이빨로 사파 잡것들의 목을 뜯으면 뜯었지.”
“…….”
위지향의 입에 재갈이 물린 것은 그런 연유였다.
잡혀있는 동안 무려 세 번이나 탈출을 시도했다. 고통에 겨워하는 사질들을 돌봐야 했다. 청목족 특유의 생명력 넘치는 신체 덕에 자신은 상황이 나았다.
‘장문인은 괜찮으실까.
이따금 간수들이 조롱하기 위해 찾아오고는 했다. 덕분에 돌아가는 상황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흑룡회주와 일대일이었다면 이리 걱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구파의 장문인 중에서도 수위를 다투는 고수가 바로 점창 장문인이었기 때문이다.
허나 음혈종주까지 나섰다. 절세고수가 아닌 이상 팔천 종주들의 합공을 견뎌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장문인이라면 둘 중 하나는 반드시 데려가셨을 것이다.
음혈종주는 재생의 공능을 가지고 있으니, 흑룡회주를 노리지 않으셨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올렸다. 비천도문의 뇌옥이었다. 뇌옥 반대편에 사질들이 아무렇게나 쓰러진 채였다.
그들을 내려다보는 자들의 얼굴에 조소와 분노가 서려 있다. 족히 스무 명이 넘었다.
그런 광경을 조용히 지켜보는 사내가 있었다. 유독 큼지막한 도를 든 사내였다.
비천도문주였다.
흑룡회 산하 문파의 문주가 내뿜는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사나운 기세였다.
‘풍마나찰도(風魔羅刹刀)가 산하 문파의 문주로 위장하고 있는 줄 알았다면 어떻게든 대책을 세웠을 텐데. 너무 무모했다.
흑룡회주의 오른팔이라던 풍마나찰도가 자신의 신분까지 숨겨가며 자신을 노릴 줄은 몰랐다. 그 탓에 사로잡혔다.
만전의 상태에서도 백 합을 견디기 힘든 상대였는데, 진기를 모조리 소모한 상태에서 버틸 수 있을 수가 없었다. 일검에 자세가 무너지고 주저앉았다.
“다섯을 풀어주어라.”
풍마나찰도가 입을 뗐다. 뇌옥 한켠에 갇혀 있는 어린 아이들을 가리키면서다.
점창파 속가의 입문제자들이었다.
운남은 본래 점창의 영역이었다. 성도인 곤명은 말할 것도 없었다. 사로잡힌 속가의 어린 아이들이 수도 없이 많은 까닭이었다.
점창의 본산제자들이 사로잡혔다는 사실을 듣고 나선 협의지사들이 적지 않았다. 그들은 전부 풍마나찰도의 손에 고혼이 되었다.
사마외도답게 나이가 찬 무인들을 손쉽게 몰살했다. 다만 어린아이들은 살려두었다. 갑자기 연민이 생겨 그런 것은 아니다.
“양의검(兩儀劍)의 구결을 한 줄 말할 때마다 다섯을 놓아주마.”
목숨 자체를 저울대에 올려 점창의 무인들을 조롱했다. 구결을 읊으면 실제로 풀어주었다. 한 번 놓은 아이들을 다시 사로잡지 않았다.
명색이 흑룡회주의 오른팔이었다. 속이는 것을 스스로의 격을 떨어뜨리는 행위라 생각했다.
사파 잡배 주제에 자존심을 부리는 것이 역겨웠다. 위지향은 끓어오르는 속을 애써 다스렸다.
‘비전을 발설하는 척 비천십이표(飛天十二飄)로 귀를 물어뜯을까. 이문혈(耳门穴)이 통째로 날아가면 균형이 흔들릴텐데. 그리하면 본파의 장로님들께서 상대하기 수월해지겠지.
그 와중에도 상대를 어찌 상대할지를 고민했다. 목숨마저 판돈으로 올려 목적을 이루려는 점창파의 성품이 그대로 드러났다.
위지향은 고개를 뇌옥에 처박은 채로 문댔다. 재갈을 벗기 위함이다. 간수들이 다가와서 막아세우려는 찰나, 풍마나찰도가 손을 치켜들었다.
“제 사질들을 대신해 구결을 읊기라도 할 모양이다. 막지 마라.”
“할 짓이 어지간히 없나보군.”
재갈을 벗겨낸 위지향이 말했다.
“하루종일 거기 앉아 있으면 내가 사일검법(射日劍法)의 묘리를 불기라도 할 것 같나? 사질들은 정이 많아 어린아이의 목숨과 본문의 비전 중에 후자를 택했지만, 나는 그렇지 않아. 죽으면 죽었지. 굳이 사일검법을 견식하고 싶으면 결박부터 풀어. 네 머리에 직접 구멍을 뚫어 장식해줄테니.”
“이 놈이 제 처지도 모르고……!”
“그것도 나쁘지 않겠군. 풀어주거라. 대신 일도를 견뎌내지 못할 때마다 점창 속가 하나를 멸문해야겠다.”
위지향이 피식 웃었다. 한 문파의 멸문을 제 탓으로 떠넘기는 언행이 참으로 역겹다.
그래도 거절할 생각은 없었다. 동귀어진의 각오로 나선다면 손가락 하나 정도는 가져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차피 사일검법의 묘리를 알기 전까지는 나를 죽이지 못한다.
팔 정도는 잘리겠지만, 그 정도면 이득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던 때였다.
[숨을 참으십시오.]
누군가의 전음이 들려왔다. 여인의 목소리였다.
“……?”
위지향의 눈이 커졌다. 그녀는 특유의 직감을 믿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눈으로 보았을 때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허나 다음 순간, 간수들이 픽픽 쓰러지기 시작했다.
‘독이다.
쓰러진 간수들의 가슴팍이 오르내리는 것을 보아하니 수면독인 것이 분명했다.
보통 독이라는 것은 눈으로 구분할 수 있기 마련. 무색 무취의 독을 사용한다면 분명 보통 실력자는 아닐 것이다.
그때 풍마나찰도가 미간을 좁히면서 허리춤의 대도를 잡았다.
스악!
빛줄기가 번뜩였다. 두꺼운 철문으로 만들어진 뇌옥의 출입구가 두 갈래로 갈라졌다. 위지향이 한 번도 견뎌내지 못했던 초식이었다.
허나 풍마나찰도는 만족스럽지 않다는 얼굴로 철문 너머를 보며 말했다.
“천명검은 아닌 듯한데.”
주변이 수면독으로 가득한데도 아무렇지 않은 듯했다. 진기를 사방으로 퍼뜨려 독에 저항한 것이다. 일가를 이룬 내가고수나 펼칠 법한 기예였다.
탁.
갈라진 철문 뒤에서 장포를 입은 여인이 걸어나왔다. 풍기는 기운을 보아하니 도사가 분명해 보였다.
사천 땅이 지근거리였으니, 청성파의 도인이라 생각하는 것이 합당했다.
“네가 비천도문주렷다.”
우웅.
여도사가 그리 말했다. 손에는 명검이라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는 검이 세찬 검파를 내뿜고 있었다.
풍마나찰도가 흉흉한 표정을 머금었다.
“천하에 홀로 고강한 줄 아는구나. 눈높이부터 고쳐줘야겠다.”
풍마나찰도가 대도를 높이 치켜든 다음 그대로 내리찍었다.
콰콰콰쾅!
품고 있는 기세가 어찌나 거센지, 복도째 반으로 갈라질 정도였다.
세찬 기파가 차오르며 흙먼지가 차올랐다. 천장이 훤히 드러나며 푸른 하늘이 그대로 드러났다. 뇌옥을 가득 메웠던 독기 또한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보통 독이 아니구나. 믿는 구석이 있었어.”
풍마나찰도는 흙먼지 너머를 바라보며 그렇게 말했다. 독 기운을 전부 날려보냈음에도 수하들이 일어날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확실히, 이만한 독이라면 여기까지 별 소란을 일으키지 않고 잠입한 것도 납득할 수 있었다.
“그건 그렇고, 이 몸의 도격을 두 번이나 막아내다니. 점창의 애송이보다는 낫구나.”
흙먼지가 걷혔다.
저벅.
적막 속에서 여도사의 발소리가 선명히 울렸다.
여도사는 한 손으로 풍마나찰도의 대도를 받아냈다. 용력이 타고났는지, 검을 쥔 팔이 조금도 떨리지 않았다.
“사파 잡것들은 하나같이 말이 많구나.”
어느새 쥘부채를 쥔 여인이 말했다.
사아아―
주변의 대기가 흐릿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
경악스러운 대치다. 도대체 누구이길래 풍마나찰도를 앞에 두고 저만한 기세를 내뿜을 수 있단 말인가.
[엎드리십시오.]
그때 다시 위지향의 귓전에 전음이 울렸다. 일전에 숨을 참으라고 말했던 이와 같은 사람인 듯했다.
위지향은 망설임 없이 바닥에 엎드렸다. 다른 이들이 보았다면 나려타곤이라고 혀를 찼을 것이다.
스악!
빛줄기가 번뜩였다.
창가에서 쏟아진 천잠사(天蠶絲)가 포승줄을 베어버리고 다시 돌아갔다. 은잠사 끝에는 자그마한 비도가 묶여 있었다.
“쥐새끼가 들어왔구나.”
풍마나찰도가 말했다. 천잠사가 들어왔던 창을 쳐다보면서다.
말을 마치기도 전에 참격을 내지르고 있었다. 파도가 너울지듯 벽이 그대로 갈라졌다. 마치 종이를 찢는 듯했다.
쩌어어엉-!
허나 중간쯤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고 멈췄다. 복도 끝에 서있던 여인이 한 걸음에 거리를 좁혀 참격을 막아낸 것이다.
“…….”
침묵이 흘렀다.
풍마나찰도의 미간이 더 흉악해질 수 없을 만큼 구겨졌다.
여도사가 담담하게 말했다.
“데려가려무나.”
장포가 살아있는 것처럼 늘어지더니, 위지향의 육신을 휘감았다. 다음 순간 위지향의 육신이 하늘을 날았다. 던져진 것이었다.
휘익!
지상에서 천잠사가 날아와 몸을 붙잡은 덕에 꼴사납게 추락하지는 않았다.
“사, 사질들이…….”
위지향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웬 짐승이 사질들을 물고 나타났다. 어찌나 빠른지 신형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사천당문에서 오신 분들입니까?”
당소소의 복식을 보고 그렇게 물었다. 당소소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환약을 건넸다. 원기를 북돋우는 약이었다.
다급히 약을 받아 삼킨 위지향이 말했다.
“비천도문주가 아닙니다. 저 자는 풍마나찰……!”
그녀의 말이 끊어졌다.
여도사의 전신에서 폭발하듯 솟구친 진기가 정면으로 쏘아졌다.
콰아아아앙!
풍마나찰도의 전신이 뒤로 밀려나갔다. 어찌나 거칠게 밀려났던지 양 발이 흙 속에 파묻힐 정도였다. 대도로 막았는데도 그 정도였다.
“…….”
저벅.
“나도 세 번을 막았으니, 너도 세 번을 막아보거라.”
여인의 기파가 풍마나찰도의 기파를 거칠게 밀어냈다.
서연이 천천히 손을 뻗었다.
“이제.”
세찬 기운을 머금은 검이 위로 들어올려졌다. 공간이 일그러지는 듯했다.
“두 번 남았다.”
동시에 잔향검이 벼락처럼 내리찍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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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매, 전부 안전한 곳으로 빼돌렸어. 그나저나 독 잘 쓰더라. 전부 깊이 잠들어 있어서 옮기기 편했어.”
작은 손바닥이 당소소의 등을 툭툭 두드렸다.
서연이 손수 만들어준 목검을 들고 있는 소녀, 화련이었다.
전투에 돌입하니 평소의 천진난만한 모습은 간데없고, 보다 진중한 눈빛만이 남아있었다.
“우리도 어서 자리를 뜨자. 여기 있다간 스승님에게 방해만 될거야. 분명 우리 때문에 힘을 억누르고 계시겠지. 풍마나찰도라면 사파에서도 손에 꼽히는 도객이니까.”
재잘거리는 와중에도 칠흑 같은 눈동자를 빛내며 주변을 훑었다.
주술로 부리는 작은 산새들이 전장 위를 맴돌며 그녀의 눈이 되어주고 있었다. 잠입이 수월했던 것도, 뇌옥의 위치를 순식간에 파악한 것도 모두 화련의 능력 덕이 컸다.
당소소는 솔직히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마냥 아이 같던 사저가 이 순간만큼은 자신보다도 노련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쿠웅!
그 순간에도 서연과 풍마나찰도의 충돌에 전각이 몇 채씩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흙먼지가 세차게 몰아쳤다.
화련은 눈을 슬쩍 돌려 위지향을 응시했다. 귀가 뾰족한 것이 청목족이 분명해 보였다.
“청운검 위 소저가 맞으시죠? 저는 신녀문(神女門)의 화련이라 해요.”
“신녀문……?”
위지향이 눈을 크게 떴다. 난생 처음 들어보는 문파였기 때문이다.
“사저?”
당소소 역시 당황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신녀문이라니? 스승님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문파를 세우기라도 하셨단 말인가?
화련이 당소소에게 속삭였다. 풍마나찰도를 몰아붙이는 서연을 보면서다.
“사천당문의 전 장로와 음혈종의 혈면수라를 한 수에 쓰러뜨리신 스승님이 신녀가 아니면 대체 누가 신녀겠어. 이제 거기에 풍마나찰도까지 추가될 텐데, 언제까지고 이름으로만 소개할 수는 없는 법이잖아. 은거하시던 스승님께서 속세로 나와서 명성을 떨치려는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는 법이라고.”
화련은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스승님이 뭐라 하시면 그때 사과드리면 되지 않을까? 나는 어린애니까, 나중에 청운검이 의문을 가져도 아이가 헛바람들어서 괜한 말을 했다고 무마하면 돼. 스승님도 꿀밤 한 대 치고 마실거야.”
“…….”
당소소는 속으로 경악했다. 화련의 영악한 면을 처음 봐서다.
허나 틀린 말은 아니었다. 무림인이라면 누구나 입신양명을 꿈꾸는 법.
스승님이 오랫동안 은거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기에 더 그럴듯하게 들렸다. 필시 큰 뜻을 품으셨기엔 속세로 나오셨을 거라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사매한테만 말해주는 건데, 스승님은 무려 소림 방장과도 친분이 있으셔. 게다가 화산의 검후, 종남 장문인, 최근에는 사천당문 가주님과도 교분을 맺으셨지. 심지어 그게 끝이 아니야. 전낭에는 검존의 각패도 들어 있다고.”
“……검존!”
“거기에 점창까지 추가된다면? 이제 스승님의 원대한 계획을 알 것 같지 않니?”
당소소가 고개를 열렬히 끄덕였다. 갑자기 스승님의 원대한 계획이 보이고 깊은 철학이 느껴지는 듯했다.
하지만 이내 걱정이 앞섰다. 당소소는 조심스레 말했다.
“저희가 괜히 방해하는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됩니다. 따로 생각하신 명칭이 있으실 수도 있는데, 괜히 신녀문이라고 이름붙였다가…….”
“운남은 멀어도 너무 멀어. 분명 일이 마무리되면 하남으로 돌아가실텐데, 전서구를 통해서 연락을 주고받아도 족히 세 달은 걸릴거야. 임시로나마 이름을 알려서 문파의 명성을 끌어모으고, 추후에 바로잡는 편이 나을거야.”
막무가내다. 허나 열 살 아이가 한 말이라 생각하면 점창 장문인도 너그러히 넘어갈 것 같기는 했다.
‘어찌 이런 심계를…….
마냥 순진한 아이라 여겼는데, 열 살짜리라곤 믿기지 않을 만큼 영악한 심계를 지니고 있었다.
그건 그렇고, 들어보니 스승님도 보통 분이 아니셨다. 마냥 성격 좋고 겸손한 분이라고 생각했는데, 일문의 장문인을 맡게 될 사람답게 심계가 보통이 아니었다.
‘소림사, 남궁세가, 당문, 종남파, 화산파에 점창까지.
이제 보니 구파와 팔대세가에서도 이름이 굵직한 문파들만 만나셨다.
아직 검선이 있는 무당파에는 들르지 않으셨지만, 여태 말한 인사들의 인정만으로도 정파의 거두로 인정받기 충분했다.
화련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일단 그러려면 점창파 장문제자부터 안전한 곳으로 돌려보내야 해. 그게 스승님을 도와드리는 길이야.”
전투가 벌어지는 곳에서 시선을 돌렸다. 스승의 승리를 확신하지 않는다면 보일 수 없는 행동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백호는 사로잡혀 있던 마지막 민간인마저 물어다 날랐다. 원래 덩치로 돌아간다면 한 입에 너덧 명씩 나를 수 있었을텐데, 새끼범만큼 작아진 탓에 오래 걸렸다.
“오만하기 짝이 없다. 누가 보면 네 년이 검후라도 되는 줄 알겠구나.”
풍마나찰도가 입을 열었다. 서연의 공격을 받아내고도 내색하지 않았다.
허나 허장성세였다. 검격을 받아낸 손끝이 미약하게 떨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워낙 막대한 진기가 담겨 있던 일격이었다. 보통 진기로는 막아낼 수 없었다. 급히 내력을 끌어올리다 무리를 한 것이다.
서연이 코웃음쳤다.
“비천도문이 검후를 들먹일 수 있을 정도로 세가 컸나 보군. 내 견문이 짧아서 여태 알지 못했던 모양이야.”
“…….”
참으로 당돌한 도발이다. 설마 자신을 아직까지 비천도문주 취급할 줄은 몰랐다.
허나 풍마나찰도는 섣불리 출수하지 못했다.
오른손이 아직도 저릿했기 때문이다.
흑룡회주의 오른팔인 그는 장강 이남에서 초고수로 통했다. 그를 단신으로 상대하려면 구파의 최고수들이 직접 나서야 했다.
그말은 즉슨, 눈 앞의 여도사가 구파의 최고수에 비견될 실력자라는 것이다.
‘누구냐.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서연이 일검을 내질렀기 때문이다.
오른팔의 힘줄이 뚜렷하게 보였다. 검이 닿기도 전에 진기의 폭발이 일었다.
폭풍이 먼저 몰아치며 검이 나아갈 길을 열었다. 흙먼지가 좌우로 갈라지며 백광이 내리꽂혔다.
콰아아아―!
풍마나찰도는 절세의 초식을 마주했다. 그 역시 초고수의 영역에 닿아 있었기에, 검격을 직시하자마자 생사의 경계에 놓였음을 직감했다.
명줄이 위협당하는 감각을 참으로 오랜만에 느꼈다. 온 살갗이 곤두서는 느낌이었다.
“…….”
이만한 여고수가 도대체 어디서 튀어나왔단 말인가.
당황하는 대신 전신을 무형의 기파로 감쌌다. 사파 특유의 패도적인 기운이 주변 공기를 일그러뜨렸다.
파악!
대도를 양손으로 쥐고 발검하듯 내질렀다. 절초 하나하나에 전력을 실었다.
나찰의 춤사위가 시작됐다.
그가 익힌 나찰도법은 순간적인 힘의 집중으로 상대를 찍어누르는 묘리였다. 절초가 더해질 때마다 가해지는 힘이 곱절씩 늘어난다는 뜻이다.
콰앙!
그 증거로 풍마나찰도의 대도를 물들인 묵빛 검강이 점차 크기를 키워갔다.
하지만 풍마나찰도의 사나운 공격은 서연의 백광에 닿기 무섭게 먼지처럼 소멸했다.
너무나 밝은 빛에 어둠째로 잡아먹혔다.
“……!”
일전에 겪었던 초식들과는 감히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고등의 묘리가 담겨 있었다.
점차 하얗게 물드는 세상에서, 이번 공격이 마지막이라는 담담한 목소리가 뒤따랐다.
순간, 느릿하게 다가오던 백광이 한순간에 점멸했다.
사아아―
빛이 폭발했다.
풍마나찰도는 감각에만 의지하여 세상에서 대도를 치켜들었다. 백광을 막아내려는 것이다.
막을 수 없음을 직감했음에도 양 손으로 도면을 치켜들었다. 막대한 충격에 대비하여 전력으로 진기를 끌어올렸다.
콰아악!
닿았다. 한 호흡이 억겁처럼 느껴졌다.
압도적인 무게감에 짓눌리는 듯했다. 양 다리가 무릎까지 파묻혔다. 그를 중심으로 대지가 쩍쩍 갈라졌다.
쿠우웅!
그제서야 눈 앞의 여도사가 구파 장문인에 버금가는 무력을 가졌음을 깨달았다. 하반신이 완전히 땅 속에 틀어박힐 무렵이었다.
압도적인 세월이 아니라면 펼칠 수 없는 불가해의 기예였다.
정순한 법력과 도기가 섞여 묵빛 검강을 찢고 부쉈다. 희롱한다고 해도 부족함이 없는 수준이었다.
‘대체.
양 팔의 감각이 둔해지는 것이 실시간으로 느껴졌다.
상대를 처음부터 구파의 장문인이라 상정해야 했다. 그랬다면 이렇게 일방적으로 승부가 나지 않았을 것이다.
본래 초고수들 간의 싸움은 찰나의 일격으로 승패가 갈리는 법. 초장에 상대를 경시했던 것이 이러한 결과를 낳았다.
“이름!”
제 목소리가 제대로 들리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다. 백광을 뒤따른 엄청난 소음 때문이다.
그럼에도 풍마나찰도는 입술을 달싹였다.
“이름을……말해라!”
전신이 짓눌리는 와중에도 최후를 장식할 무인의 대명(大名)을 묻는다.
여도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한철로 만든 멸천도(滅天刀)가 일절의 소음 없이 잘려나갔다. 풍마나찰도의 한쪽 어깨가 통째로 잘려나간 것은 그 다음이었다.
검이 완전히 땅에 닿고 나서야 삭풍이 몰아쳤다.
쿠우우웅!
주변이 적막으로 물들었다.
서연은 어느새 잔향을 납검한 채였다.
흙먼지 너머로, 정신을 잃고 혼절한 풍마나찰도의 모습이 보였다. 한 손을 높이 치켜든 채였다.
어깨가 잘려나간 그 순간에도 서연의 멱을 붙잡으려 했다. 정신을 잃은 와중에도 손 끝에 느껴지는 경력의 기파가 사나웠다.
한 치 차이로 서연에게 닿지 못했다. 접근을 허용했다면 상황은 완전히 달랐을 것이다.
‘사마외도란 맹수와도 같구나.
독사는 머리가 잘려도 상대를 물 수 있다던가. 작금의 싸움도 그러했다. 마지막에 방심했다면 일수를 허용했을 것이다.
‘흑룡회 산하의 문주가 이렇게 강할 줄이야.
부채가 떨리지 않기에 자신감을 가지고 몰아붙였는데, 자칫 당할 뻔했다.
같은 사마련 팔천이라고 해도 힘 차이가 심한 것일까. 아니면 혈면수라와 상성이 좋아서 그랬을 수도 있겠다.
서연은 호흡을 가다듬으며 그런 생각을 했다.
*****
“…….”
위지향은 입을 다문 채로 마차 반대편에 앉은 여인을 응시했다.
면사 너머로 비치는 고아한 잔영에서 범상치 않은 자태가 느껴졌다. 청목족 특유의 예리한 눈썰미 덕분이었다.
많아야 이립 정도 되는 나이. 씨족보다 아름다운 외양.
거기에 신선과도 같은 특유의 분위기까지.
‘홀로 풍마나찰도를 격살하다니…….
서연을 홀린 듯 바라보던 위지향은 문득 정신을 차렸다. 곧장 흐트러진 자세부터 바로잡았다.
자신은 점창의 장문제자였다. 도움을 받았다고는 하나, 그에 걸맞는 품위를 보여야 했다.
‘문주님이라 불러야 마땅할까.
신녀문의 문주라 했다.
처음 들어보는 문파였다. 청목족으로서 좁지 않은 견문을 가졌음에도 생소했으니, 필시 속세와 거리를 둔 신비문파일 가능성이 높았다.
‘어쩌면 내가 알지 못하는 씨족의 어르신일수도.
영목이 내뿜는 특유의 기운이 강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쥘부채와 종남 장문인의 각패 때문이었지만, 그 사실을 위지향은 알지 못했다.
일월상단을 포함한 서연 일행은 점창산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사경을 헤매는 점창 제자들이 적지 않았으나, 당소소의 의술 덕에 전부 안정기에 돌입했다. 당장 위지향의 손목을 고정하는 부목 또한 당소소가 손수 만들어 준 것이었다.
‘저것도 분명 영물인데.
품에 안겨있는 새끼 범을 쓰다듬는 모습마저 기품이 흘렀다. 영목과 소통한다는 옛 어르신들에게서나 느껴볼 법한 경건함이었다.
분명 영물이다. 저를 또렷이 쳐다보는 푸른 눈만 봐도 알 수 있었다.
“…….”
본의 아니게 눈싸움을 하던 때였다.
무언가가 마차 창가에 내려앉았다. 창공을 비행하다 내려앉은 것이다.
은빛 깃털을 뽐내는 올빼미였다. 일월상단이 습격받지 않고 무사히 지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저 올빼미가 길을 안내해준 덕분이었다.
멋스럽게 늘어뜨린 깃털에서 품격이 느껴졌다. 보는 이로 하여금 한 번 만지고 싶다는 충동을 불어일으킬 정도였다.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인지, 올빼미가 즉각 반응했다. 고개를 돌려 위지향을 쳐다보았다.
삽시간에 얼굴이 정색으로 바뀐다. 경멸하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미간을 잔뜩 좁히다가 창 밖으로 빠져나갔다. 고개를 좌우로 가로저으면서다.
“…….”
위지향은 이유 모를 수모를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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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화루의 으뜸은 단연 회화루주였다. 그렇다면 그 다음가는 2인자는 누구일까.
저마다 지닌 재주가 다르다 하나, 예화는 매 각주를 2인자라 여겼다. 인망은 두말할 나위 없었고, 당장 회화루주를 제외한다면 회화루에서 가장 강한 사내가 바로 매 각주였기 때문이다.
헌데 그런 매 각주가 허리가 끊어져라 굽신거리니, 자연스레 서연에게 경외심이 솟아날 수밖에 없었다.
저게 진짜 여고수라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였다.
이런 표현이 적절할지는 모르겠으나, 저리 펑퍼짐한 옷을 걸치고서도 도드라지는 굴곡을 숨기지 못하는 데에서 예화는 넘을 수 없는 벽을 느꼈다.
회화루에서 그런 방면으로 명성이 자자한 손 부인을 데려와도 상대조차 되지 않을 듯했다.
괜한 패배감을 느끼며 사다리를 오르자, 고관대작이라도 묵을 법한 화려찬란한 방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예화는 회화루에서 오랜 세월을 보냈지만, 이런 방이 있다는 것은 오늘에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주변을 조심스럽게 살피던 매 각주가 입을 열었다.
“바로 위층에 회화루주가 있습니다.”
서연은 예화가 완전히 올라서는 것을 확인한 후 입을 뗐다.
“이만한 현이라면 필시 관아(官衙)가 있을 터인데.”
“……허면 관아로 가서 포쾌들을 불러올까요.”
매 각주는 그렇게 말하면서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눈치껏 대답하기는 했지만, 흑도에 몸담은 무인에게 관아로 가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허나 화양현의 관리들은 대부분 회화루주가 건넨 뇌물을 받아먹은 탓에 자신이 간다 한들 쉽사리 움직이지 않을 터였다.
자칫 심기를 거스를 수도 있었기에, 매 각주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변명처럼 들리실지 모르겠으나, 저희 루주께서 포두에게 바친 돈이 적지 않아 관아에서도 선뜻 나서려 하지 않을 겁니다.”
자신이 가봤자 무의미하다는 말을 돌려 말한 것이었다.
권위적인 어투를 사용하는 것은 꽤 낯설었지만, 흑도를 상대로 굳이 얕보여 좋을 것은 없다 결론 내린 서연이 입을 열었다.
“무림맹이 오고 있다는 말을 덧붙인다면 나서지 않고는 못 배길 것이다. 화양현에 닿기 전에 이미 말을 끝내 놓았으니, 진위 여부를 확인하는 것도 어렵지 않겠지. 이해했나?”
“……이해했습니다.”
매 각주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어차피 거절하면 죽음뿐이다. 뇌옥에 들어가는 순간 흑도 인생도 끝이 나겠지만, 죽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 듯싶었다.
도망치는 것도 불가능했다. 저만한 실력자라면 오히려 자신이 도망가기를 기다리고 곳곳에 함정을 파놓았을지도 몰랐다. 애초에 무림맹이 오고 있다면 섣불리 도망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무리 관의 영향력이 하늘을 찌른다지만, 화양현 같은 작은 현의 관아보다는 무림맹의 위세가 더 높았다. 무림맹원들이 권위의식을 발휘하여 다툼을 일으킨다면 모를까, 웬만한 상황이라면 관아에서도 협력하려 할 것이다.
“……가보겠습니다.”
서연은 도로 비밀통로로 내려가는 매 각주를 응시했다.
어차피 흑도는 믿어서도 안되고, 믿을 수도 없는 족속들이다. 매 각주가 진짜로 관아로 가서 포쾌들을 불러올 가능성은 낮다고 여겼다. 어쩌면 주변 흑도들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도 있겠지만, 서연은 그래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발소리가 멀어지자, 예화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는 여기 있는 편이 좋을까요?”
“같이 올라가는 편이 나을 거에요. 인질로 잡힐 수도 있어서.”
비수에 맞을 위험이 있기는 했지만, 그 정도는 충분히 막아낼 자신이 있었다.
“방해 안 되게 납작 엎드려 있을게요.”
예화가 서연의 등 뒤에 달싹 달라붙고, 서연은 검집에 손을 얹은 채로 방 밖으로 나섰다.
꽤 넓은 복도가 한눈에 들어왔다. 방은 꽤 많았는데, 저 안에 납치당하거나 뭣도 모르고 잡혀온 여인들이 한둘씩 들어차있을거라 생각하니 속이 뒤틀렸다. 화련이가 자신을 만나지 못했으면 이렇게 됐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문득 이대로 올라가 회화루주만 쓰러뜨리면 나머지 흑도 놈들이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질도 잡고, 어쩌면 다른 지역으로 도망가서 또 똑같은 짓을 벌이고…….
서연은 잠깐 눈을 감고 생각했다. 몇 명까지 감당할 수 있을지 가늠하려는 것이다.
위층으로 올라가자, 시종으로 보이는 놈들이 소리를 내지르며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서연은 아랑곳하지 않고 검을 뽑은 다음, 옆에 있는 기둥을 벽채로 갈라놓고 다시 떨거지들을 응시했다.
종잇장처럼 갈라져 나뭇조각을 뱉어내는 벽과 기둥, 그리고 서연의 분위기가 맞물렸다.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 같았던 떨거지들은 눈빛을 교환하더니 좌우로 비켜섰다. 서연은 떨거지들을 지나치며 하려던 말을 뱉어냈다.
“썩 꺼져라. 못난 얼굴을 보니 기분이 참 더럽다.”
떨거지들은 서연의 눈치를 보다가, 계단 아래로 후다닥 달려 내려갔다.
침입자가 나타났다, 여인 홀로 쳐들어왔다, 루주님이 위험하시다 등등. 온갖 외침이 아래쪽에서 울려퍼졌다.
‘더 많이, 더 많이 와서 봐라.
그렇게 생각하면서 문을 열자 무언가가 서연의 관자놀이를 향해 날아왔다.
쐐액!
서연은 암기의 정체를 확인하기도 전에 검을 뽑아 그대로 튕겨냈다. 두꺼운 장침 비슷한 것들이 속절없이 튕겨나가 바닥과 벽에 꽂혔다.
회의 중이었는지, 회화루주의 곁에는 간부 셋이 나란히 서 있었다. 서연은 회화루주의 분위기를 살폈다. 일전에 심상 속에서 만났던 응격검의 조사(祖師)에 훨씬 못 미쳤다.
“예화부터 죽여라. 저 년이 기어코 사달을 냈구나.”
회화루주가 무심하게 말했다.
세 간부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곧바로 땅을 박찼다. 서연은 각자 다른 방향에서 쇄도하는 간부들을 응시했다. 각자 들고 있는 무기가 달랐다. 누군가는 도끼, 또 누군가는 검, 또 누군가는 도(刀).
“꼴에 사내라는 것들이 삼대 일이라니.”
예상하지 못한 말에 간부들의 호흡이 흐트러졌다.
서연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회풍무류검의 초식을 펼쳤다. 광풍이 몰아치며, 달려들던 간부들이 황급히 뒷걸음쳤다.
“……!”
서연은 멈추지 않고 검격을 내질렀다.
점창의 검법은 섬전처럼 쾌속하면서도 무겁고 강맹하다. 극쾌의 묘리를 살리기에 찌르기에만 목숨을 거는 것이다.
쩌엉!
서연의 검에 꿰뚫린 도끼가 그대로 산산조각났다. 검격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기이한 각도로 뒤틀려 기어코 적의 옆구리를 찍었다.
“카학!”
검면에 후려치듯 맞은 적은 그대로 튕겨나가 담벼락에 부딪혔다. 벽에 처박힌 적은 덜덜 떨다가, 각혈하며 그대로 쓰러졌다. 호흡할 때마다 뚜둑 소리가 울려퍼지는 것이, 일격에 온 몸의 뼈가 부러진 것처럼 보였다.
소강상태가 일었다.
아래층에서 무기를 치켜들고 다급히 올라온 졸개들도, 남은 간부들도, 그리고 회화루주마저.
모두 아무 말도 못하고 경악어린 시선으로 서연을 응시했다.
상대가 몇 수는 앞서는 고수라는 사실을 알아챈 것이다.
가장 정신을 빨리 차린 것은 회화루주였다. 그는 손가락을 치켜들고 수하들에게 명령했다.
“쳐라!”
곧 검을 들고 있던 간부가 재빠르게 나섰다. 서연은 달려드는 적을 날카로운 눈으로 응시했다.
삼류 흑도의 무공에는 보통 이름이 없다. 제대로 된 무공을 익힌 이가 없기 때문이고, 또 지역마다 이름이 다를 정도로 제멋대로이기 때문이다.
저것도 마찬가지다.
잠깐 보기만 해도 검이 어디로 움직일지 알 것만 같았다.
‘어쩌면 지역에서 손에 꼽을 재능일 수도 있겠다.
서연은 제 재능에 대한 평가를 약간이나마 상향 조정했다. 신체능력은 모르겠지만, 오성만큼은 후기지수(後起之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하다 여겼다.
‘시험해봐야겠다.
문득 육체가 어디까지 따라와 줄지 궁금해졌다.
‘섬광분운(閃光分雲).
예측 불가능하고 연속적으로 몰아치는 회풍무류검과는 성격이 다르다. 구름마저 가를 정도로 빠르게 움직이는 검. 점창파 독문검법인 사일검법(射日劍法)에 미치지는 못할지언정, 섬광분운검도 신속하기로는 사일검법에 뒤지지 않았다.
간부가 한 걸음을 채 딛기도 전에 서연의 검이 아홉 번 움직였다.
근육이 찰나에 수축하고 펴지는데도 막힘이 없었다.
“아……!”
곧 어디선가 탄식이 들려왔다. 간부는 벌벌 떨다가 벌집처럼 구멍이 난 검을 놓치곤 뒷걸음쳤다.
서연은 도주하려는 간부의 머리를 그대로 내리쳤다. 짓이겨지는 소리와 함께 머리가 뭉개진 간부가 바닥에 처박혔다.
쩌억!
폭발한 경파가 강풍을 터뜨렸다. 다시금 침묵이 깔렸다.
서연은 고개를 돌려 회화루주를 응시했다.
“사내라면 당당히 나서라.”
“…….”
회화루주는 대답하지 않았다. 수하들은 빠짐없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도무지 나설 자신이 없었기에, 회화루주가 나서서 서연을 상대해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섣불리 도망칠 수도 없다. 여태껏 쌓아온 것을 전부 버릴 자신이 있다면 모를까.
마침내 회화루주가 입을 열었다.
“가장 먼저 공격한 놈에게 금은을 하사하겠다.”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회화루주가 다시 입을 열었다.
“여자도 주마.”
순간, 몇몇 졸개들이 움찔했으나 여전히 나서려는 이가 하나도 없었다. 얼굴이 붉어진 회화루주에게 서연이 말했다.
“인망도 없고, 사내다운 패기도 없구나. 한심한 놈.”
차라리 매 각주가 백 배는 나았다.
“너 같은 놈한테는 검을 쓰는 것도 아깝다.”
서연은 그렇게 말하며 납검했다.
이쯤 되니 회화루주도 발끈할 수밖에 없었다. 회화루주는 허리춤에 매여있던 검을 뽑아든 채 앞으로 나섰다.
“개같은 년. 무기도 없이 나를 상대할 수 있을 것 같더냐?”
서연은 회화루주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도약으로 빠르게 거리를 좁혔다. 그리고는 전신의 공력을 실어 좌장을 내밀었다.
회화루주는 다급히 검을 들지 않은 손바닥을 내밀었다. 검을 휘두르기에는 거리가 너무 짧았기 때문이다.
쩌어엉!
곧 기파가 갈라지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본디 장법(掌法)이란 타격 범위가 넓어 적의 내부를 뒤흔들고 진탕시키는 데에 그 목적이 있었다. 그렇기에 장력의 겨룸은 곧 내공이 깊은 자가 유리할 수밖에 없었다.
회화루주는 눈을 부릅떴다.
‘무슨!
마주한 순간 손바닥의 감각이 사라졌다. 마치 수백 장(丈)이 넘는 거대한 기암괴석을 홀로 마주한 듯한 기분이었다.
눈 한 번 깜빡이지도 못할 찰나의 순간, 팔꿈치에서 뼈가 부러지는 섬뜩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우두두둑!
“……!”
고통을 채 느끼기도 전에 서연의 강맹한 내력은 회화루주의 신체를 타고 올라 어깨마저 산산조각 냈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그의 오장육부를 모조리 진탕시켰다.
압도적인 내력 차이에 회화루주는 무기력하게 튕겨 나가 벽에 처박혔다. 금이 간 벽은 폭포처럼 먼지를 쏟아냈고, 그의 몸은 벽에 박힌 채 축 늘어졌다.
“끄…….”
회화루주는 입에서 죽은 피를 끝없이 흘려댔다. 살아는 있었으나 몸에 성한 곳이 단 한 군데도 없었다.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처참한 몰골이었다.
서연은 기절한 회화루주의 머리칼을 쥐어잡았다.
“루주의 복수를 하고 싶으면 오라.”
남은 간부들은 피만 줄줄 쏟아내는 회화루주의 꼴을 보며 저도 모르게 움찔거렸다. 그들의 눈에는 두려움과 경악이 뒤섞여 일렁였다.
침묵 속에서 무기들을 놓치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려 퍼졌다.
졸개들은 도망칠 생각도 하지 못하고 제자리에 엎드려 절했다.
“사, 살려주십시오.”
서연은 검집을 든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죽이지는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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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창파의 고수들은 둘이 한 조를 이루어 움직였으니, 이를 점창쌍검(點蒼雙劍)이라 일컬었다.
수백 년 전 대리국이 멸망했을 때, 운남 일대에 발호한 사마외도를 막아내다 패사한 도사들이 많았던 연유로 생긴 전통이었다.
사천당문의 독이 그보다 두 수 위의 고수를 상대케 하듯, 점창쌍검 또한 그러했다. 소림의 나한진처럼 고절한 합격은 아니었다. 허나 위력만큼은 그에 비할만 했다.
한 명이 목숨을 걸고 극도로 빠른 찌르기로 틈을 만들면, 다른 하나가 분광삼십육검(分光三十六劍)으로 베어 넘겼다.
사실상 동귀어진이나 다름없는 수단을 가감 없이 펼쳤으니, 아무리 고수라 해도 그 기세에 압도될 수밖에 없었다.
수백 년 세월 동안 사마외도에 맞서며 지극히 실전적인 무학을 익혔으니, 뭇 사마외도들의 두려움의 대상이 된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사마련 팔천 둘이 연합했음에도 점창파 산문이 뚫리지 않은 것은 전부 그 덕분이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맑은 선기를 더하던 전각들이 굵직한 연기를 피워냈다. 점창산 일대를 덮은 산불도 함께였다.
나이를 가리지 않고 널브러진 도사들의 시신은, 참극이라 부르기에도 부족함이 없었다.
“……많이도 스러졌구나.”
헌앙한 외모의 사내였다. 이립 정도 되어 보이는 사내가 품었다기에는 믿지 못할 정도로 방대한 기운이었다.
허나 장포 곳곳이 아무렇게나 찢어져 있었다. 주인을 구분하지 못할 핏물들이 흰 장포 곳곳을 물들이고 있었다.
점창 장문인 유원평(兪元平)이었다.
인체의 시간을 거스르는 반로환동의 경지를 이뤄낸 초고수였다.
그의 곁에는 음혈종과 흑룡회의 무인들이 처참하게 꿰뚫린 채로 죽어 있었다. 그 숫자는 죽은 점창파 도사들의 배를 넘겼다.
유원평은 저물어가는 석양을 보며 납검했다. 흑룡회와 음혈종이 퇴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음혈종의 혈귀들은 급소를 꿰뚫리고도 쉬이 죽지 않으니, 이를 간과치 마라. 죽은 듯 보여도 언제 되살아나 덮칠지 모르니, 필히 목을 베고 불태워라.”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장문인.”
살아남은 점창의 도사들이 다급히 전열을 가다듬었다.
음혈종주와 흑룡회주가 전면에 나서지 않았기에 그나마 버티고 있는 상황이었다. 만약 그 둘이 동시에 나섰다면, 점창파는 단 하루도 버티지 못하고 멸문했을 터였다.
이는 유원평이 방어를 도외시하고 필히 한 명은 데려갈 각오로 맞섰기 때문이었다. 점창파를 멸문시킨다 한들, 제가 목숨을 잃는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흑룡회주와 음혈종주가 소모전을 이어나가게 된 경위는 그러했다.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점창파가 날려보내는 전서구를 족족 처리했다. 이따금 포위를 뚫고 빠져나가려는 점창쌍검들을 모조리 처형했다.
점창파는 독 안에 든 쥐가 되었다. 유원평이 빈틈을 보이는 순간 음혈종과 흑룡회는 망설이지 않고 점창파 산문을 부수고 편액을 짓밟을 것이었다.
“장문인.”
유원평이 고개를 돌리니, 행색이 초라한 노인 하나가 뒤에 서 있었다.
점창파의 대장로였다. 어찌나 혹독한 전투를 겪었는지, 전신에 피로가 가득해 보였다.
“이제 본산에 남은 일대제자가 셋뿐입니다. 결단을 내리셔야 할 때인 듯합니다.”
대장로가 말하는 결단은 항복을 의미하지 않았다. 인생의 말년에 접어든 대장로였다. 부끄러운 삶보다 영예로운 죽음을 바랬다.
점창파는 활로 태양을 쏘아 떨어뜨렸다는 궁신 후예(后羿)를 섬겼다. 일생을 화살처럼 살아가며 후예의 화살이 되기를 자처했다.
대장로와 일대제자들은 화살이 되기를 바랐다. 점창의 어린 제자들을 살리기 위해서다.
그러기 위해서는 점창 장문인의 희생이 전제되었다. 음혈종주와 흑룡회주의 시선을 끌어줄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
유원평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대신 고개를 끄덕이고 진기를 가다듬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대장로는 유원평이 이미 각오를 마쳤음을 깨달았다.
“……내일 해가 뜨기 전에 출발하겠습니다.”
대장로는 고개를 깊이 숙인 채 자리를 떠났다.
*****
“이 늙은이는 여기 있겠습니다. 더 가봐야 짐만 될 겁니다. 차라리 이곳에 남아 부상자들을 감당하는 것이 몇 배는 나을 겁니다.”
늦은 밤이었다. 송월 노인이 서연에게 고개를 숙이며 그렇게 말했다.
서연도 동의하는 바였다. 점창산에 가까워질수록 사파를 마주치는 일이 잦아졌다.
유혼의 도움을 받았는데도 그랬다. 옛 대리국 일대를 사파 무리들이 점령하고 있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저 앞은 성채나 마찬가지였다. 점창산 주변에 광대하게 펼쳐진 포위망을 보면서 말하는 것이다.
서연은 제자들에게 말했다.
“너희도 여기 있으려무나.”
둘은 반문하지 않았다. 둘 모두 나이치고 비범한 눈치를 지녔다. 스승님이 단호하게 말씀하시면 빠져야 된다는 것을 알았다.
“네, 스승님. 조심히 다녀오세요.”
“다녀오십시오.”
화련은 포권을 취하는 대신 고개를 꾸벅 숙였다.
“너도 여기 있으렴.”
뒤따르려던 백호가 멈칫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만에 주인을 등에 태우고 산을 질주할 생각에 들떠 있었는데, 갑자기 보모 역을 떠맡게 된 것이다.
허나 어쩌겠는가, 주인이 원한다면 따를 수밖에 없었다.
사박.
세 사람과 짐승 하나는 멀어지는 서연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옆에는 점창파 장문제자인 위지향이 뒤따르고 있었다.
점창파 도사들에게 서연의 신분을 증명하기 위함이라 했다.
물론 다른 이유도 있었다. 점창의 장문제자로서 병상에 누워만 있는 것을 수치로 여겼기 때문이다.
청목족의 육체는 회복이 빨랐다. 꺾였던 손목이 원래대로 돌아온지 오래였다. 한 명이라도 더 베어넘겨 먼저 떠나간 사질들의 고혼을 위로해야 마땅했다.
“흑룡회주와 음혈종주는 분명 다른 곳에 머무르고 있을 겁니다. 동맹이라 한들 본래 사이가 좋지 않은 집단입니다. 사마련주의 힘 아래 억지로 같은 이름으로 묶여 있을 뿐이지요.”
“……그렇군요.”
서연은 둘과 싸울 생각은 없었다. 여태 대문파의 장로를 몇 격살했다고는 하나, 서연은 자만하여 자신을 내세우지 않았다.
상대는 사마련 팔천의 종주들이다. 구파의 장문인과 동급으로 치부해야 옳았다. 그만한 강자들과 싸움이 성립될 리가 없었다.
살아온 세월부터 달랐다. 자고로 무인이란 생물은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강해지기 마련이다.
‘경험의 차이가 압도적이겠지.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다 한들, 압도적인 경험 앞에서는 무력해질 가능성이 높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점창산으로 향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자신이 음혈종이나 흑룡회의 장로를 한둘만 맡아줘도 점창파 도사들의 전투가 수월해질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점창파가 습격당한지 칠주야가 넘었다고 들었다. 점창파의 저항이 그만큼 거세다는 뜻이다. 자신이 추가된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다.
‘천명검도 오고있을테니.
아무리 북경과 운남간의 거리가 수천 리도 넘는다지만, 당장 패검대만 해도 최근에 사천 땅에 머무르고 있었다.
은비조로 소통하는 시간을 고려하면, 지금쯤 운남에 도착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
앞으로 나아가던 위지향이 멈춰섰다. 멀지 않은 곳에서 인기척들이 느껴졌다.
새벽녘에, 그것도 영물의 길안내를 받았기에 여태 걸리지 않고 이동할 수 있었으나, 이제는 그것도 한계에 다다랐다.
천 년이 넘는 세월동안 청목족이 다듬은 보신경을 사용할 때가 왔다. 은밀하고 빠르기로는 천하에서 한 손에 꼽혔다.
―여기서부터는 일족의 보신경을 사용하는 것이 좋을 듯합…….
전음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사박.
서연이 나뭇잎 한가닥을 밟고 섰다. 달빛에 장포가 새하얗게 너울졌는데, 강호를 주유한 경험이 적지 않았던 위지향으로서도 생전 처음 목도한 아름다움이었다.
적진의 한복판이라는 사실도 잊고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계속 가시지요.
서연이 저를 내려다보며 전음을 보내기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위지향은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보신경이…….
그녀는 나무와 나무 사이를 오가는 도중에도 뒤를 힐끗 살폈다. 분명히 일족의 보신경은 아닌데, 그보다 훨씬 부드럽고 우아했다.
대성을 이룬 자신이 보신경을 펼칠 때도 옅은 바람 소리 정도는 들리기 마련인데, 신녀문주는 그렇지 않았다.
자연이 동조하여 고요함을 강제했다. 실로 놀라울 정도의 통제력이었다.
‘……옛 어르신들이 사용하는 보법은 다른가보다.
혼자서 그렇게 납득했다.
그렇게 일다경을 더 나아갔다.
전부 타버려 잿더미만 남은 숲이 모습을 드러냈다. 달빛 틈새로 새까맣게 타버린 시체들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벌어졌던 치열한 전투를 증명했다.
불이 꺼지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일대가 연기로 가득 차 있었다.
위지향은 시체들 틈에서 유독 새하얀 빛을 내뿜는 검신을 보았다. 점창쌍검들에게 주어지는 검이었다.
타버린 검의 손잡이를 붙잡으려던 때였다.
불현듯, 하늘에 백광이 일었다.
점창파 산문이 있는 방향이었다.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린 위지향의 시선에, 달무리를 가리던 구름이 담겼다.
산문에서 일어난 참격의 궤적을 따라, 뒤늦게 공기가 빨려들어가며 천공에 거대한 구멍을 만들어냈다.
콰아아아앙―!
한참 뒤에 소리가 뒤따랐다. 고절한 찌르기의 여파였다.
강풍이 불어닥쳤다. 눈발과 잿가루가 동시에 비산했다.
위지향이 경악한 얼굴로 하늘을 주시했다.
‘……장문인!
서연 또한 놀란 것은 매한가지였다. 구파의 장문인이 얼마나 거대한 힘을 가졌는지 깨달았다.
‘팔천의 종주들도 저보다 못하지는 않을텐데.
압도적인 세월이 느껴졌다. 초식의 깊이부터 다르다고 해야 할까.
족히 몇 리는 떨어져 있음에도 거센 기파가 그대로 느껴졌다. 살갗이 저릿거릴 정도였다.
콰아아아아―!
뒤이어 큼지막한 소용돌이가 몰아치고, 밤하늘 한켠이 핏빛으로 물들었다.
팔천의 종주들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사람의 경지라고 믿기 힘들었다. 대면하면 몇 수 버티지 못하고 필패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곧 점창산이 소란스러워졌다. 포위망을 구성하던 사마련의 무인들이 소리치는 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왔다.
“저쪽이다!”
“벽호검(擘湖劍)이 점창제자들을 데리고 도주하고 있다! 당장 잡아 오라!”
“이대제자와 삼대제자들은 사로잡아라! 고문하여 점창의 비전을 캐야 한다!”
꽈악.
위지향이 검파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검신이 분노로 부들부들 떨렸다.
벽호검은 점창파 대장로의 별호였다. 그렇다는 즉슨, 장문인 홀로 산문을 지키고 있다는 뜻이었다.
“……대장로님이 계신 곳으로 가야 합니다.”
위지향은 뛰어난 오성으로 전후사정을 짐작했다. 아무리 그녀가 점창의 장문제자라 한들, 팔천의 종주들을 상대로는 벌레에 불과할 터였다.
대장로께 가서 돌파를 돕는 것이 옳다. 장문인도 그것을 바랄 것이다.
서연은 보신경을 최속으로 펼치며 나아가는 위지향을 응시했다. 정돈되어 있던 기파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챙!
쾅!
병장기가 부딪히는 소리가 가까워졌다. 서연은 연화비영보를 극성으로 펼쳤다.
한 걸음에 위지향을 앞섰다. 풍경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점창파 도인들이 포위망을 뚫고 나아가고 있었다. 선두에 선 노인이 한자루의 검이 뻗어나가자, 나머지 도인들이 순식간에 뒤따라서 대형을 유지했다.
두드드드!
전방에서 틀어막으려던 사마련의 무인들이 그야말로 갈려나갔다.
돌파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웬만한 경공을 펼치는 무인보다 빨랐다.
그야말로 기병대라고 칭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진격.
놀라운 것은, 어린 이대제자들과 삼대제자들도 한 몸처럼 돌진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뚫고, 부수고, 나아갔다. 수십 배가 넘는 적을 뚫어내며 여태 한 명도 쓰러지지 않았다.
전방을 뚫고 있는 대장로의 침착한 목소리가 들렸다.
“우측으로.”
일대제자들이 말을 이어받았다.
“우측으로!”
몇 겹이나 되는 포위망이 순식간에 뚫렸다.
저 속도라면 자신의 도움이 없더라도 능히 탈출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던 순간이었다.
핏빛으로 물든 하늘 한켠이 일렁이더니, 수백 줄기로 얽힌 폭풍의 실타래 같은 것이 쏘아졌다.
무시무시한 살기가 담겨 있는 공격이었다. 명백히 점창파 대장로를 향하고 있었다.
쩌저적―!
찰나에 공간을 가르며 거리를 좁힌다. 음혈종주의 절기였다.
[본좌가 네놈들의 도주를 허락할 줄 알았더냐.]
수 리 바깥에서 점창파 장문인을 상대하고 있음에도 기파를 흘려보냈다. 산하의 혈귀들을 단말처럼 부렸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음혈종 혈귀들의 눈이 붉게 빛났다.
아무리 점창파 대장로라 한들, 저만한 공격을 피해없이 받아낼 수는 없을 터.
그 틈을 타서 어린 도사들의 생살을 뜯어먹을 생각을 했다.
점창의 무학을 알려줄 포로야, 다섯 정도면 충분하지 않겠는가.
흥분을 감춘 채로 벽호검이 균형을 잃기를 기다리던 때였다.
사락.
홀연히 나타난 여인이 음혈종주의 절기 앞을 가로막듯 섰다. 잔향검을 상단세로 치켜든 채였다.
검신에서 도화색 기운이 흘러나오더니, 핏빛 절기를 덧없이 흩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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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대가 정적으로 물들었다. 시간마저 멈춘 듯, 모두가 굳어버린 채였다.
점창 대장로인 벽호검조차도 얼굴에 드러난 당혹을 감추지 못했다. 다급히 음혈종주의 공격을 받아내려 했던 참이다.
삽시간에 상황을 파악했다. 온전히 막아낼 수 없음을 직감하여 일대제자들에게 물러서라는 명령을 내린 참이었다.
대장로의 주변에 있던 자들이 물결의 파동처럼 멀어진 것은 그러한 연유였다.
팔천 종주의 절기다. 대문파의 장로 정도는 되어야 감당할 자격이 생겼다.
정면으로 막으려 들었다간 휩쓸려 죽을 수 있었기에 진기를 극성까지 끌어올려 꿰뚫으려 했다. 주화입마에 가까운 내상을 각오했던 것이다.
허나 눈 앞의 여인이 그 일격을 틀어막았다. 단순히 절기를 막아낸 것으로 모자라 제 색으로 완전히 물들였다.
잿더미로 가득했던 숲에 꽃잎이 날아드는 듯했다. 기이한 일이었다.
여인이 긴 숨을 내쉰 것은 그 다음이었다. 혈귀들을 오시하는 자태가 오연했다.
서연은 일전에 느꼈던 감각에 집중했다. 음혈종주의 공격을 막아내며 심득을 얻었던 탓이다.
종남의 육합검을 응용했다. 여섯 방위만으로는 수백 줄기로 갈라지는 공격을 막을 수 없었던 탓이다.
검 끝에 기를 느릿하게 덧씌웠다. 마치 종이를 덧붙이듯 허공에 기운이 남도록 한 후, 검을 한 바퀴 휘두르니 기로 이루어진 막이 펼쳐졌다.
‘검막.
허나 음혈종주의 공격은 검막이 미처 막아내지 못한 틈을 파고들었다. 그렇기에 좌우측면에도 검막을 펼칠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공격이 틈을 파고들고, 막기 위해 방위를 하나씩 늘리고.
검막이 완연한 구의 형태를 이뤘을 때.
쩌저정―!
검막을 전방위로 터뜨리듯 흩뿌리며 음혈종주의 공격을 튕겨냈다.
파편 하나하나에 타인의 힘을 역으로 이용하는 중검의 묘리가 담겨 있었다. 핏빛 절기가 서연의 색으로 물든 것은 그 때문이었다.
유검의 세 번째 초식으로 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반격초로 사용하면 될 듯했다.
심득을 갈무리하는 한편, 수 리 너머에서 벌어지는 점창 장문인의 싸움을 살폈다.
거대한 묵빛 폭풍 한복판에 큼지막한 공동이 생겨났다. 그럴 때마다 허공에서 폭뢰가 터지는 듯한 굉음이 울렸다.
콰과광―!
초고수들의 궤적에 온 산맥이 요동쳤다. 땅이 진동할 정도였다.
아득히 먼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이따금 병장기가 충돌하는 충격파가 들릴 정도였다. 도대체 어떤 싸움을 하고 있는건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진기를 가다듬기 힘든가봐. 아까부터 가만히 서있기만 하던데.”
정면에서 낭랑한 음성이 들렸다. 묘한 마성이 담긴 목소리였다.
서연은 미간을 좁힌 채로 고개를 들었다. 포위망을 이루는 자들 중에서 가장 강해보이던 자였다.
외양이 빼어난 여인이었다. 눈과 머리카락이 새빨간 것이 음혈종 사이에서도 높은 직위에 있는 듯했다.
“종주님의 일격에는 본 종이 믿고 따르는 교리가 새겨져 있지. 일격을 허용하는 순간 전신 세맥의 기질이 본 종에 알맞게 변화하게 된단다. 그렇게 저항할 수 있는 것도 잠깐이지. 당장 진기부터 말을 듣지 않을 거야.”
“…….”
일격을 허용하는 순간 혈귀로 변한다는 말처럼 들렸다.
상리로 이해할 수 없었으나, 어떤 의미로 마교보다 더 광인들의 모임이라는 종교집단 다웠다.
“독이라도 된단 말인가?”
“독이라니, 은혜야.”
“송곳니로 흡정을 하는 잡귀가 되는 것이 은혜라니. 다른 것은 몰라도 네놈들의 머리가 완전히 망가졌다는 것은 확실히 알겠다.”
여인은 서연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잡것들이나 그러하지. 그분께 직접 은혜를 받으면 접촉만으로도 흡기할 수 있단다. 온 세상이 영약밭이 되는 것이나 다름없지. 경지를 무한히 올릴 수 있다는 뜻이야.”
힘없는 민초들을 영약으로 본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네 말이 옳다면 음혈종주는 경지를 무한히 올리고도 사마련주에게 패배한 것이구나. 무한의 개념을 모르는 것이 분명해. 산수부터 다시 배워야겠다.”
서연은 그러면서 코웃음을 쳤다. 도발을 서슴없이 입에 담았다. 상대를 경멸했기에 그러한 것이다.
“신녀문주님, 저 자는 음혈종 육 장로입니다.”
뒤늦게 도착한 위지향이 착지하며 덧붙였다. 서연은 대답하는 대신 남몰래 미간을 좁혔다.
‘신녀문주?
자신을 칭하는 말이라는 것은 알았으나, 정정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상대가 언제 출수할지 몰랐다. 경계해야 마땅했다.
“……청운검? 곤명의 포위망을 뚫고 왔다고?”
육 장로가 말했다. 위지향을 쳐다보면서다.
“흑룡회 놈들이 놓친 모양이구나. 잘 되었다. 일 장로가 좋아하겠어. 교를 통틀어서 종주님의 은혜를 입은 청목족은 일 장로 하나 뿐이거든.”
“…….”
위지향은 경멸하는 얼굴을 숨기지 않았다.
촤악!
돌연 피육이 갈라지는 소리가 울렸다. 점창파 대장로가 앞을 가로막고 있던 혈귀를 베어넘긴 것이다.
서연이 아군임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더는 탈출을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고맙소.
전음을 보내면서다. 적을 베면서도 서연을 돌아보며 고개를 짧게 숙였다.
서연 또한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등 뒤에서 다시금 전투가 벌어졌다. 뚫으려는 자와 막으려는 자 간의 전투다.
“문주님, 저도 대장로께 합류하겠습니다.”
“……네.”
위지향은 검진의 맨 뒤에 자리했다. 검을 내뻗을 때마다 공기가 압축되는 듯했다. 찰나에 혈귀들의 등에 수십 개의 구멍을 뚫어냈다.
푸화확―!
“크아악!”
혈귀들이 고통어린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고 있음에도, 육 장로는 여유로운 태도로 일관했다.
“슬슬 근육을 움직이기도 벅차지? 너 정도면 장로가 될 수도 있겠지만, 내가 내버려두지는 않을거야. 평생 발을 핥게 해 주겠어.”
서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품 속의 쥘부채를 잡은 다음, 불쑥 입술을 뗐다.
“육 장로까지도 할만하구나.”
뜬금없는 말이다. 육 장로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좁혔다.
허장성세를 부리는 것이 분명했다. 종주와 동급의 고수가 아닌 이상, 혈공 진기를 떨쳐내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갑자기 무슨 헛소리를…….”
그때였다.
돌연 서연의 기세가 변했다. 온통 검은색으로 가득하던 세상이 도화로 물들었다.
화아아악―!
겉보기엔 아름다웠으나, 적에게는 사신이나 다름없는 기운이었다.
“……!”
순간 육 장로의 신형이 움직였다. 체면을 뒤로하고 일단 자리를 피해야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순식간에 수십 장을 물러났다. 혈공 진기가 더해진 경신법 덕이었다.
허나 땅을 딛고 착지하는 순간, 복부에서 핏물이 솟구쳤다.
‘어느 틈에!
전조도 없이 잘려나갔다. 찰나에 결심하여 뒤로 물러서지 않았더라면 필시 신체부위가 날아갔으리라.
상처부위가 끓어오르며 순식간에 아물었다. 혈공 진기 특유의 재생력이 발현한 것이다.
육 장로의 얼굴이 다시금 안도를 되찾았다.
신녀문주는 처음의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주화입마에 가까운 몸 상태에서 억지로 일격을 가한 것이 분명했다.
먹잇감을 보는 듯한 시선으로 탈바꿈했다. 육 장로의 손톱 끝이 짙은 핏빛으로 물들었다.
“아쉽겠구나. 종주의 일격을 받아내지 않았더라면 내가 당했겠어. 운이 나빴다고 생각하렴.”
육 장로가 웃음을 가득 머금은 채로 걸음을 옮기려던 때였다.
쿨럭―!
돌연 육 장로가 피를 토했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주변을 돌아보면서다.
손톱을 물들이던 핏빛 경파가 본래의 색을 잃고 흐릿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음혈종주의 독도 이와 비슷한 원리로 작용하는 것 같은데. 맞나?”
반신불수나 다름없어야 할 신녀문주가 오연한 걸음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
육 장로는 대답하지 못했다. 폭급한 진기가 전신을 마구 휘젓고 있었기 때문이다.
허나 육 장로는 당황하는 대신 전신을 저미는 듯한 통증을 감내하면서 양 발에 공력을 터뜨렸다.
콱!
땅을 거칠게 딛고 뒤로 물러났다. 사방으로 전음을 퍼뜨리면서다.
본 종의 고위층에 배신자가 있다는 말을 덧붙였다. 혈공 진기의 핵심 구결을 알고 있지 않은 한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촤아아악―!
신녀문주가 검을 휘두를 때마다 굵직한 나무들이 그대로 쓰러졌다. 육 장로는 뒤편에서 느껴지는 무시무시한 존재감에 짓눌리는 듯했다.
신녀문주를 막기 위해 달려들던 혈귀들이 눈빛이 본래의 색을 잃고 새까맣게 죽는 것을 목도했다.
‘흡성대법까지……!
육 장로는 두려움과 공황 섞인 얼굴로 달렸다. 새하얗던 얼굴에 극심한 두려움이 어렸다.
도주하는 와중에도 현묘한 보법을 밟으며 뒤편으로 삭풍을 쏘아보냈다. 그랬기에 타인의 눈에는 육 장로가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 대적을 유인하는 것처럼 보였다.
무수한 혈귀들을 방패로 사용했음에도 순식간에 거리가 좁혀졌다. 육 장로의 움직임이 더욱 다급해지던 순간이었다.
탁.
신녀문주가 걸음을 멈췄다.
‘어찌하여…….
문득 시선을 돌린 육 장로의 눈이 크게 뜨였다.
새빨간 장발을 길게 늘어뜨린 사내가 앞에 서 있었다. 근처에 쌓인 눈보다도 창백한 피부를 가진 탓에 어둠 속에서도 눈에 띄었다.
“……종주!”
육 장로가 경외가 담긴 얼굴로 말했다. 도주했다는 사실을 문책당할 염려는 없었다. 신녀문주 정도 되는 공력의 소유자라면, 필히 종주에게도 큰 영양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상을 받아야 옳았다. 본 종에 배신자가 숨어있다는 사실도 알아냈기 때문이다.
쩌저적―!
아직도 점창 산문에서는 격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흑룡회주와 점창 장문인이 혈투를 이어나가고 있는 탓이다.
음혈종주는 육 장로와 그녀를 뒤쫓던 여인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점창과는 다른 종류의 도기가 느껴져 찾아왔거늘.”
“종주, 본 종에 배신자가 있는 듯해요. 저 자가 흡성대법을 사용하는 것을 제가 보았어요.”
육 장로가 입꼬리를 올리며 얘기했다.
음혈종주의 균형은 놀라울 정도로 안정적이었다. 방금 전까지 점창 장문인과 손속을 겨루고 온 사람답지 않았다.
이대 일의 승부였다. 기파가 정돈되어 있는 것이 당연했다.
점창 장문인의 동귀어진을 각오하지 않았더라면 진작에 승패가 갈렸을 따름이었다.
“잠시 자리를 비우기 위해 흑룡회주에게 많은 것을 양보했다. 네 진기로 그것을 갈음해야겠구나."
음혈종주가 말했다.
"죽이지는 않겠다. 물어야 할 것이 많으니. 내 직접 은혜를 내려주도록 하마.”
음혈종주의 주변을 덮은 그림자가 거대하게 일렁거렸다.
그림자 자체가 불꽃이라도 된 듯했다. 어둠을 완전히 제 수족처럼 부리고 있었다.
“…….”
서연의 얼굴이 미미하게 일그러졌다.
혈귀들을 일일이 제압하며 나아오느라 단번에 거리를 좁히지 못했던 것이 패착이었다. 대적 불가의 요괴에 가깝다는 팔천의 종주와 겨뤄 승산이 있을 리가 없었다.
‘……도주할 수 있을까.
가능성이 지극히 낮아 보였다. 자연재해나 다름없는 강자들을 상대로 어찌 도주할 수 있을까.
초장부터 전력을 내보이고 자그마한 상처라도 입히는 것이 최선일 듯했다.
‘아직 제자들에게 심법도 알려주지 못했거늘.
미완성본이라도 일러줄 것을, 그러지 못한 것이 후회가 되었다.
‘가장 빠른 초식으로.
파풍유영을 전력으로 펼치기 위해 쥘부채를 쥔 순간이었다.
“……?”
서연이 묘한 얼굴로 음혈종주를 응시했다.
허나 곧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누가 보아도 초고수라 칭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자태였다. 제게 좋은 쪽으로 판단하는 것보다 부채가 고장났다고 판단하는 것이 옳았다.
‘전력으로 가야 옳다.
전신 혈도에 탈력감이 들 정도로 진기를 주입했다. 전력을 발휘하기 위함이다.
잔향검을 쥔 손이 세차게 떨렸다. 한계까지 진기를 밀어넣었기 때문이다.
음혈종주는 뒷짐을 진 채로 서연을 쳐다보았다. 그 정도 되는 고수는 상대의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경파만으로도 다음 수를 짐작할 수 있었다.
초식을 어림짐작하며 반격초를 고민했다. 초고수에게만 허락되는 기예였다.
‘종남 출신인 듯 한데. 법력도 섞여있으니 묘하다. 천명검의 숨겨진 대주라도 되는가.
그때였다.
순간 시야가 비틀렸다. 좌안과 우안의 균형이 맞지 않았다. 음혈종주는 자신의 감각을 의심했다.
시야가 갈수록 좌우로 길게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슨……?
희끄무레한 검광이 번뜩인 것은 그 다음이었다.
초고수의 통찰로도 따라가지 못하는 쾌검이다. 빛살이 일기도 전에 베였다.
오죽했으면 동작이 뒤이어 보일 정도였다.
쩌어어어어억―!
검격을 중심으로 넓은 충격파가 터져나간 것은 그 다음이었다. 대지에 반듯한 실선이 생겨났다.
음혈종주는 그제서야 제 신체가 좌우로 분리되었음을 깨달았다.
‘……!
툭.
처참하게 잘려나간 육체가 떨어졌다. 검격이 오죽 빨랐던 탓인지, 육 장로는 참극을 한참 뒤에야 이해했다.
“조, 종주……?”
적의 앞이라는 사실도 잊고 그렇게 중얼거렸다.
음혈종주는 혈귀들의 현인신이기에, 핏물 한점으로도 능히 되살아날 수 있다. 좌우로 잘려나갔을 뿐인 육체가 핏물로 화하여 땅 속으로 스며드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되살아나지 않는가.
감당할 수 없는 적임을 직감하고 도주한 것이다. 누구라도 믿기 힘들 일이었다.
“……가짜였군.”
신녀문주의 음성이 울렸다. 완전히 땅 속으로 스며든 핏물을 지켜보면서다.
“하마터면 속을 뻔했구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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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창파의 산문이었다. 몰아치는 태풍 속에서 잿더미와 불꽃이 마구 휘날렸다.
구파의 장문인과 팔천 종주의 격돌이었다. 사실상 무림 최상층의 충돌이라 봐야 맞았다.
“돌아오지 않는군.”
점창 장문인 유원평이었다. 동귀어진을 각오한 사람답지 않게 담담한 기색이었다.
“음혈종의 혈귀 놈을 멸할 칼을 준비하고 있었거늘.”
“급해져서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는구나.”
온 몸을 흑포로 둘러싼 사내가 대꾸했다. 그가 손을 뻗자 흑룡포가 살아있는 생물처럼 움직여 눈발과 바람을 틀어막았다.
얼핏 보면 힘없이 나풀거리는 천처럼 보이는 그것은 흑룡회주의 독문병기이자 신병이기였다.
구파 장문인의 검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내는 것만 보아도 그랬다. 진기를 주입하면 자유자재로 길이가 늘고 줄기를 반복했는데, 하수들의 접근을 감히 허락하지 않았다.
“음혈종주가 떠나고 나서부터 진기에 여유를 두더구나. 필히 도주한 점창의 제자들과 합류하기 위함이었겠지. 허나 애석하게 되었다, 유가야. 네 제자들은 전부 혈귀가 되어 돌아오겠구나.”
“…….”
흑룡회주는 그렇게 말하며 다시금 도를 치켜들었다. 흑룡회주이기 전에 광서제일도(廣西第一刀)였다.
태산과도 같은 기운이 도 끝에 맴돌았다. 마주한 사람으로 하여금 전신이 저릿거리게 하는 기파였다.
쩌어엉―!
곧 묵빛 진기가 불꽃처럼 피어오르며 유원평을 덮쳤다. 도가 섬뜩한 궤적을 그려내며 유원평의 목을 베어내려 했다.
동시에 흑룡포 또한 포격과도 같은 굉음을 일으키며 유원평의 등을 향해 쏘아졌다.
두 명의 초고수를 상대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보통의 고수라면 여기서 빈틈을 드러내야 옳았다.
유원평은 회피하거나 방어하는 대신 흑룡회주의 심장을 노렸다.
제 몸을 돌보지 않고 사생결단을 내려는 것이다.
흑룡회주는 혀를 차며 진각을 밟았다.
“……이 자리에 장로들을 데려오지 않길 잘했다. 완전히 광인이나 다름 없구나. 검귀라는 별호가 아깝지 않을 정도야.”
유원평이 쓰러뜨린 혈귀들의 수가 기백에 가까웠다. 점창파 산문에 시체로 된 산이 생겨날 정도였다.
그 중에는 흑룡회의 무인들도 적지 않았다. 전부 정예에 속하는 무인이었다.
“산문 아래에 있는 수하가 말해주더군. 청운마검이 이 자리에 찾아왔다고 말이야. 본 회주를 빠르게 떨쳐내지 못하면 네 제자마저 혈귀가 되게 생겼구나.”
물론 흑룡회주는 청운검이 당장 혈귀로 변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사일검법의 묘리를 캐내야 했기 때문이다.
흑룡회는 점창의 무학과 유산을, 음혈종은 점창의 무인들을 원했다. 혈귀로 탈바꿈하는 것은 그 이후가 되어야 했다.
“사파 잡것이 내 제자까지 걱정해줄 줄은 몰랐군.”
유원평이 중얼거렸다. 도사와는 어울리지 않는 말투였다.
사마외도를 면전에 둔 탓에 점창파의 도사들은 이 같은 상황을 굉장히 많이 겪을 수 밖에 없었다.
점창파에 처음 들어왔을 때부터 사마외도의 수작질에 스러진 동문이 몇이었던가. 말투가 점잖은 것이 되려 이상했다.
장문인이 되기 전, 아직 후기지수였을 무렵에는 검귀라 불렸던 그였다. 무수한 사마외도의 목을 베고 서른의 나이에 장문인의 자리에 올랐다. 그 당시에도 더 없는 파격이었다.
그 후로 삼십 년이 넘게 흘렀다.
점창이 황실의 존중을 받게 된 것은 온전히 유원평의 업적이었다.
“후예의 화살을 자처한다더니. 제자에게도 그리 매정할 줄은. 유가야. 너희들은 도사라는 것들이 마교보다 비정하구나.”
흑룡회주가 입꼬리를 올리며 그렇게 말했다.
상대를 조롱하는 말을 내뱉는 와중에도, 흑룡회주의 육신을 둘러싼 흑룡포는 뱀과 같은 움직임으로 유원평의 주변을 맴돌았다.
“과녁이 말이 많다.”
유원평의 눈동자에 새하얀 빛이 어렸다.
사일검법의 사일(射日)은 본디 해를 쏜다는 뜻이다.
궁신은 검이 아닌 화살로 태양을 쏘아 맞혔다. 그렇다면 점창은 어찌하여 검법에 그런 이름을 붙였단 말인가.
상단전이 발달한 초고수들의 의념은 그 자체로 자연에 영향을 끼친다.
화산의 검기가 허공에서 매화를 피워올리고, 음혈종주가 한 줌 핏물로도 되살아나는 것 또한 같은 이치다.
무공의 영역을 초월하게 되는 것이다.
경지에 다다른 점창의 무학도 그와 같았다.
쏘아 맞출 수 없는 것을 쏘아 맞추고, 꿰뚫을 수 없는 것을 꿰뚫을 수 있게 된다.
키이이잉―
초고수들은 일반인들과는 다른 시간을 살았다. 찰나를 다시 수백 번 쪼갤 수 있었다.
쇄도하는 사일검을 향해 눈을 치켜든 흑룡회주가 미간을 좁혔다. 터무니없는 속도다.
허나 그 역시 팔천의 종주였다. 급박한 순간을 찰나로 쪼갰다. 흑룡포로 위력을 줄이고 도법으로 반격초를 펼쳐 막아내려 했다.
‘음.
찰나에 판단하여 그만두었다. 막을 수 없음을 직감한 것이다.
상성이 좋지 않았다. 그 역시 싸움을 즐기는 무인이었지만, 제 목숨을 도외시하고 같이 죽으려는 광인과 동귀어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어깨를 내어주어야 하는가.
저 한 초식을 위해 적지 않은 진기를 소모했을 테니 마냥 손해는 아닐 터였다. 음혈종주가 복귀하면 이전보다 쉽게 패사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던 때였다.
촤아아아악―!
투명한 미풍과도 같은 일격이 둘 사이를 절묘하게 가로막았다. 초고수의 안법으로도 그 묘리를 파악하기 힘든 고절한 검격이었다.
점창파 대장로가 도주했던 방향에서부터 쏘아진 것이다. 음혈종주가 걸음을 옮겼던 방향이기도 했다.
희끄무레한 백광이 너울지더니, 둘 사이에 실선을 그어냈다. 바위와 지맥, 거목과 주춧돌을 가리지 않았다.
찰나에 전부 베였다. 흑룡회주의 반격초와 유원평의 절기를 포함해서다.
“…….”
흑룡회주의 눈매에 날이 섰다. 자신들의 충돌을 막기 위해 쏘아보낸 검격이 아니다. 누군가를 베어넘긴 검격이 우연찮게 이곳까지 영향을 미쳤을 뿐이다.
그리고 이 검격에 당했을 누군가는 높은 확률로 음혈종주일 터였다.
‘황실을 끌어들였군.
흑룡회주는 추측했다. 음혈종주의 기파가 일순간에 사라진 것을 느꼈다. 천명검의 단주가 직접 나선 것이 분명했다.
“종주, 종주께선?”
“퇴각이다! 가까운 지부로 도주하라!”
혈귀들이 다급히 소리쳤다. 각혈하거나 주화입마에 든 혈귀들이 적은 것을 보니 음혈종주가 죽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허나 치명상을 입은 것은 분명했다. 음혈종주의 안위는 뭇 혈귀들에게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강서에 있다고 들었거늘.
흑룡회주의 결정은 빨랐다. 일말의 망설임 없이 전장을 벗어나는 것을 택했다.
화아아악!
흑룡포가 기이하게 울더니, 용과 같은 형상으로 변해 그를 구름과 가까운 높이로 끌어올렸다.
“…….”
유원평은 흑룡회주를 구태여 쫓으려 들지 않았다. 점창의 보법은 단기결전에나 어울렸다. 추격의 효용은 구파의 여타 보법들에 뒤떨어졌다.
대신 검을 제 귀 옆까지 치켜들었다. 마치 활시위를 당기는 듯했다.
눈동자에 흑룡회주의 등을 담았다. 어느새 점과도 비슷한 크기로 멀어져 있었다.
허나.
아직 사일검법의 절초, 후예사일(后羿射日)의 사정권이었다.
스으으.
짧은 호흡을 내뱉은 직후였다.
유원평의 검은 내지르는 과정을 생략하고 곧바로 목적지에 도달했다. 뭣 모르는 타인이 본다면, 처음부터 검이 그 자리에 멈춰 있었다고 착각할 정도였다.
다음 순간, 끝으로 나아가던 흑룡회주의 신형이 허공에서 크게 휘청이더니, 족히 수십 장 아래로 추락했다.
신병이기라던 흑룡포 한켠이 처참하게 찢겨나갔다. 상의에 착용하고 있던 호신갑도 마찬가지였다.
한참을 떨어지다 가까스로 신형을 붙잡고 허공에서 멈춰섰다. 뒤쪽을 세차게 노려보면서다.
그것도 잠시였다. 추격을 염려하여 황급히 자리를 피했다.
“아쉽군.”
유원평은 옅은 웃음기가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
‘베는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서연은 음혈종주가 핏물로 변해 스며든 곳을 응시했다. 피육을 벨 때 느껴지던 특유의 감각이 없었다.
마치 무기물을 베는 것 같았다. 음혈종주의 외양을 본딴 분신임이 분명했다.
진득해야 할 핏물이 빗물보다 빠르게 지면에 흡수되는 것만 봐도 그러했다.
‘음혈종의 장로들은 별 기이한 수작을 다 부리는구나.
육 장로만 되어도 이럴진대, 그보다 상위의 장로들은 오죽하겠는가.
박쥐나 안개로도 변할 듯싶었다.
“상처를 추스를 시간에 도주해라!”
“당장 도망쳐라! 황실의 절세보검이 직접 나섰다!”
난전 속에서 흑룡회 소속 무인들이 다급히 외치는 것이 들려왔다.
서연은 놀란 얼굴로 점창산 산문을 응시했다. 어느 순간부터 격돌하는 소리가 잦아들더라니, 그런 연유가 있었을 줄은 몰랐다.
‘황실의 절세보검이라면, 천명검의 단주인가?
절세고수이자, 천하오절이라고 불리는 인물이다. 기파를 느끼지도 못했거늘, 그 사이에 팔천의 종주를 둘이나 쓰러뜨린 모양이다.
방금 자신이 상대했던 것이 정교한 분신이라는 것이 확실해졌다. 서연은 다시금 당가주에게 전달받았던 쥘부채의 성능을 실감했다.
육 장로는 도망치지도 못했다. 그 잠깐 사이에 서연에게 마혈을 짚였기 때문이다.
혈맥을 종횡무진 활보하는 진기를 느꼈다. 지독한 내상을 입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쿨럭―!
피를 토하고 비틀거리다가 쓰러졌다. 종주가 자신을 버리고 도주했다는 심마까지 더해졌다.
몸을 공벌레처럼 돌돌 만 채로 고통에 떨 수밖에 없었다.
‘……여태 이만한 고수를 숨기고 있었다고?
종주가 대적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도주했다는 뜻은, 눈 앞의 신녀문주 역시 절세고수라는 의미였다.
실로 두려울 정도의 심계였다. 황실에 반발한 세력들을 언젠가 일망타진하겠다는 뜻 아닌가.
종주가 망설이지 않고 도주한 것도 이해가 되었다.
어쩌면 마교가 잠잠했던 것도 눈 앞의 여인의 존재를 미리 알았기 때문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당장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 거친 숨을 내뱉던 육 장로는 얼마 버티지 못하고 혼절했다.
서연의 진기가 전신을 망가뜨렸기 때문이다. 여태 버틴 것이 용했다.
혼절한 육 장로를 내려다보던 서연은 그녀의 뒷목을 붙잡았다. 대롱대롱 들린 꼴이, 음혈종의 장로라고는 믿기 힘든 모양새였다.
위지향에게 듣기로, 운남 곳곳에 점창의 장로들이 파견을 나가 있다고 들었다. 포로로 잡혀 있는 장로들이 많을 것이라 사료되었다.
인질을 교환할 때 사용할 생각이었다. 비교적 몸 성히 사로잡은 것은 그 때문이었다.
‘합류해야겠다.
점창파 장문인 쪽은 천명검단주가 알아서 해결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은 위지향이 있는 방향으로 가는 것이 옳다.
결심한 순간 신형이 수십 보 앞으로 움직였다. 하늘 위를 쾌속히 질주하는 유혼을 따라가는 것이다.
손에 들린 육 장로가 아무렇게나 흔들렸으나 아랑곳하지 않았다. 사마외도들도 포로들을 이처럼 험하게 다뤘을 터였다.
쾅!
멀지 않은 곳에서 점창파 대장로가 누군가와 격돌하고 있었다. 머리카락이 검은 색이었다. 흑룡회의 장로인 듯했다.
여태 수많은 적을 베어오며 지친 탓인지, 대장로의 검이 이전보다 흐린 빛을 머금고 있었다.
“쳐라!”
그야말로 난전이나 다름없었다. 혈귀들과 사파 무인들이 마구 뒤섞인 채로 도사들의 피를 탐했다.
천명검이 나타났다는 소식을 아직 듣지 못한 듯했다. 점창파 대장로와 맞서는 흑룡회 장로의 기세가 등등했기 때문이다.
“전부 살려둘 필요는 없다! 틈을 보이는 즉시 목을 쳐라!”
“일대제자부터 죽여라! 놈들도 지쳐있다!”
사파답게 온갖 무기를 사용했다. 암기는 물론, 독을 사용하는 이도 적지 않았다.
혈귀들 중에는 아예 재생의 공능을 믿고 이빨부터 들이미는 작자들도 적지 않았다.
팍―!
서연은 땅을 거칠게 박차며 하늘 높이 솟구쳤다. 거친 눈보라가 뺨을 스쳤다.
세찬 기파를 뿜어내던 흑룡회 장로의 당황한 얼굴이 서연의 시야에 맺혔다.
그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콰아아아앙―!
마치 별이 추락하듯, 서연의 착지점을 중심으로 무지막지한 진동이 일었다.
“무슨……!”
“균형을 잃지 마라! 그대로 휩쓸린다!”
눈과 먼지가 뒤섞여 흐릿하게 번졌다. 오죽 자욱했는지 잠시 소강상태가 일 정도였다.
사파의 무인들 중에는 순간적으로 귀가 멀어버린 이들도 적지 않았다.
“…….”
짙은 침묵 속에서 먼지가 걷혔다.
흑룡회의 무인들은 뒤이어 나타난 장면을 보고 말을 잇지 못했다.
웬 여인이 흑룡회의 장로를 짓밟은 채로 오연히 서 있었다. 손에는 시체처럼 축 늘어진 음혈종의 장로를 든 채였다.
끔찍할 수준의 침묵 속에서, 여인이 입을 열였다.
“황실의 절세 보검이 당도했으니.”
곳곳에서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경악하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사파 잡것들은 마땅히 무릎을 꿇어라.”
그렇게 말하는 여인은, 황실의 보검을 자칭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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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로 충격적인 광경이었다.
장포에 먼지조차 묻히지 않은 채로 장로를 둘씩이나 제압했다. 흑룡회의 장로 풍뢰자(風雷子)는 처참한 몰골로 땅에 처박혀 있었다.
흐릿한 먼지 속에서도 뚜렷한 도화색 기운을 피워냈다. 진기를 체외로 유형화한 것이다.
공력이 끝도 없이 많다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파라락―
진기에 호응하듯 여인의 장포가 신비롭게 너울졌다.
“…….”
발 밑에 흑룡회 장로를 깔아두었음에도 선녀로 보일 정도였다.
그 각력이 얼마나 강렬했던지, 풍뢰자의 전신은 지반에 절반쯤 파묻혀 있었다.
입고 있던 호신갑만 절묘하게 파괴했다. 만약 여인이 힘을 조절하지 않았더라면 그 몸은 이미 산산이 부서지고도 남았을 것이다.
“흑룡회주와 음혈종주가 패퇴했다. 어쩌면 죽었는지도 모르겠군.”
여인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팔천 종주들의 죽음을 서슴없이 입에 담았다. 오만한 기질을 타고난 것이기라도 한 것일까.
일대가 다시금 침묵으로 물들었다.
여인이 전투의 중심부에 추락하듯 착륙하기 전까지 그 누구도 전조를 인지하지 못했다.
살기마저 완벽하게 통제하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경지였다. 분명 심상마저 완벽히 장악한 초고수임이 틀림없었다.
“…….”
유일하게 반응한 것은 점창파 대장로 벽호검과 풍뢰자뿐이었다.
벽호검은 여인이 추락하기 직전에 검을 뽑아 대응했다. 신녀문주인 것은 알지 못했다. 너무 빠른 속도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풍뢰자는 겨우 고개를 돌리는 것이 전부였다. 벽호검보다 한 발 늦게 알아차린 것이 화근이었다.
제대로 된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제압당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사아아.
먼지가 완전히 걷히고, 일대가 도화빛 진기로 완연히 물들었다.
점창파의 제자들은 눈앞의 여인이 적이 아님을 알았음에도 쉽사리 검을 거두지 못했다.
천명검의 징치는 정사마를 가리지 않았다. 민초의 삶을 해치면 상대의 출신을 아랑곳하지 않고 검을 뽑았다.
벽호검은 정면을 응시한 채 위지향에게 전음을 보냈다.
―신녀문주라 하지 않았느냐.
―그게, 그…….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위지향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생각해보면, 여태 알려지지 않은 신비문파의 문주라기보다는 황실 소속이었다는 쪽이 더 그럴듯했다.
어쩌면 아직 정체가 드러나지 않은 천명검의 대주 중 하나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명검의 대주들은 대문파의 문주들과도 손속을 겨룰 수 있다는 소문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만약 그녀가 진정 천명검의 대주라면, 흑룡회주의 오른팔인 풍마나찰도를 손쉽게 압도한 것도 납득이 되는 일이었다.
서연은.
교묘하게 문장의 일부를 생략하여 말했다. 천명검이 무림인들의 사신으로 군림한다는 사실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던 까닭이다.
싸움을 억지로라도 끝내기 위함이었다.
‘다친 사람이 많구나.
사경을 해메는 도사들이 적지 않았다. 당장 위지향만 하더라도 방금 전에는 없었던 상처가 수십 개나 생겨나 있었다.
전투를 이어나간다면 당장이라도 목숨을 잃을 도사들이 십수 명이 넘었다.
오만한 모습을 연기하며 사방으로 위압적인 기파를 드러낸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사칭과도 거리가 멀었다. 저들이 멋대로 착각한 것이기 때문이다.
위지향이 놀란 얼굴로 자신을 응시하기는 했으나, 당장은 정정할 생각이 없었다. 천명검의 고수로 착각하게 만드는 편이 적들을 압도하기에 더욱 유리했기 때문이다.
순간 흑룡회의 무인 하나가 발작적으로 외쳤다.
“거짓이다! 천명검이 벌써 당도했을 리가 없다!”
권세 있는 가문의 귀공자로 보였다. 이제 보니 짓밟고 있는 풍뢰자와 어딘가 닮아 있었다.
아들이라도 되는 것일까.
“네가 진정 천명검이었다면 그리 말할 시간에 우리를 하나라도 더 베어 넘겼겠지. 시간을 끌려는 같잖은 수작이라고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 말에 사파의 무인들이 하나둘 정신을 차린다. 무기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곧장 느껴졌다.
이래서 사파였다. 상대가 틈을 보이면 곧장 물어뜯을 기회를 노리는 것이, 흡사 인간의 탈을 쓴 짐승 같았다.
“당장 점창 산문을 기점으로 퍼져나가던 기파도 잠잠해졌지. 회주님과 음혈종주가 합심하여 점창 장문인의 수급을 베어냈다는 뜻―.”
서연은 귀공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기수식을 취했다.
이윽고 잔향검을 출수하자, 그녀를 중심으로 도화빛 진기가 물결치며 너울졌다.
마치 잔잔한 호수에 거대한 바위를 떨어뜨린 듯. 그녀의 공력은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주변을 휩쓸었다.
촤아아악―!
드높게 솟아있던 나무들이 처참하게 잘려나갔다. 귀공자의 머리카락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콰과광!
통나무가 추락하는 굉음이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깔리지 않기 위해 다급히 엎드리거나 바닥을 구르는 사파의 무인들이 적지 않았다.
서연은 아무렇지 않다는 얼굴로 납검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그녀의 시선은 줄곧 귀공자를 향해 있었다.
“계속 말해보라.”
“…….”
귀공자는 입술을 파들거리고 있었다. 그의 시선 앞에 잘려나간 머리카락이 나풀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절묘하게 머리카락만 베어냈다.
놀라운 것은 그런 광경을 목도한 이들이 한둘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그 중에는 공포를 이기지 못하고 주저앉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마음만 먹는다면 한 수에 이 자리에 있는 모두를 베어낼 수 있는 강자임을 드러낸 것이다.
이만한 고수가 어찌 시간을 끌겠는가. 그저 명검에 헛된 피를 묻히기 싫은 것이 분명했다.
여인이 고개를 자연스럽게 치켜들었다. 갸름한 턱선이 면사 너머로 슬며시 비쳤다. 도화색 기운을 가득 품은 눈동자가 세차게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너는 항복하지 않을 종자로구나.”
“무……슨…….”
귀공자는 말을 잇지 못했다. 눈앞에 펼쳐진 경악스러운 광경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어느새 여인이 코앞까지 다가와 그의 명치를 손바닥으로 찍어누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손바닥이 닿기도 전에 흐릿한 파동이 번져나갔다. 묵직한 바위에 짓눌리는 듯했다.
후욱.
내가중수의 묘리였다. 맞은 순간 복부 부근이 완전히 구겨지더니 그대로 튕겨나갔다.
콰아아앙!
그때까지도 서연의 주변은 고요했다. 적막이 일대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섣불리 입을 떼었다가 목숨을 잃을 것을 염려한 것이다.
움직임이 보이지도 않았다.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여인이 귀공자의 코앞에 도달해 있었다. 정예에 속하는 무인들은 물론, 반쯤 이성을 놓았던 혈귀들조차 침묵할 정도였다.
“두 번 말하지 않겠다. 꿇어라.”
흑룡회와 음혈종은 끝내 패퇴했다.
*****
사마련 팔천의 종주 둘이 나섰음에도 점창파의 산문을 넘지 못했다는 소문이 삽시간에 천하로 퍼져나갔다.
허나 점창파의 도사들은 마냥 기뻐할 수 없었다. 산문은 대부분 불에 타 재만 남았고, 장차 문파를 이끌어야 할 일대제자들 태반이 목숨을 잃었다.
어린 이대제자와 삼대제자들 역시 반수 아래로 줄었으니, 산문 바깥에 나가있던 장로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오죽했으면 봉문을 입에 담아야 할 정도였다. 쇠락을 감수하고 상처를 추스를 시간이 절실했던 것이다.
천명검의 단주가 제때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멸문당했을 것이라는 소문이 요동쳤다.
점창 장문인이 놀라운 신위를 보여주기는 했으나, 종주들이 도주한 것은 천명검 단주의 검격을 마주한 까닭이라는 이야기가 힘을 얻었기 때문이었다.
신비로운 것은 점창산에 있던 그 누구도 천명검을 마주치지 못했다는 것이다.
허나 그날 새벽에 펼쳐졌던 검격이 너무나 선명했기에, 황실이 점창을 예우하기 위해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떠났다는 이야기가 알음알음 퍼져나갔다.
개중에는 신녀문주에 관한 소문도 있었다.
흑룡회의 사 장로와 음혈종의 육 장로를 제압한 것으로 모자라, 흑룡회주의 오른팔인 풍마나찰도마저 꺾었다는 이야기였다.
갑자기 나타난 신진 문파, 그것도 여고수가 벌였다기엔 믿기 힘든 일이었다.
허나 장문제자인 청운마검을 비롯한 점창의 도사들이 하나같이 소문의 진위를 인정한 탓에, 코웃음을 치고 무시하는 자들은 많지 않았다.
신녀문주의 위명이 바야흐로 천하로 나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저, 그……. 신녀문주님, 맞으신가요?”
서연은 자신을 부르는 꼬마 도사의 말에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급한 전투를 마치고 나서 오해를 풀 생각이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곳곳에서 자신을 신녀문주라 부르는 상황이었다.
이제 와서 수습하기에는 너무나 늦어버린 일이었다.
온 천하에 소문이 퍼졌는데, 이제 와서 아니라고 부정하면 모양새가 너무 우스꽝스럽지 않겠는가.
당장 자신을 초롱초롱한 눈으로 올려다보는 꼬마 여도사만 보아도 그랬다. 구석진 곳에서 동문 남자 도사들을 향해 신녀문주가 최고라고, 닮고 싶다고 외치고 다녔다.
사파 잡것들에게 수많은 사형제를 잃었을 꼬마 여도사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무슨 일이니?”
“와아아……!”
그렇게 서연은 신녀문주가 되었다.
‘선녀문주가 아닌 걸 다행으로 생각해야 할까.
개파식 같은 거창한 것은 생각지도 않았다. 무림에 문파가 어련히 많은가. 열에 아홉은 동네 무관 수준이니, 개파식은커녕 그보다 못한 것도 하지 못하는 문파가 태반이었다.
당장 자신도 하남으로 돌아가면 변변찮은 현판도 없이 산속에 틀어박혀 여자아이 둘만 가르치고 있을 터인데, 개파식을 연다면 웃음거리나 되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거창해도 너무 거창한 이름이구나. 도대체 누가 퍼뜨렸을까.
세상에는 모르는 것도 아는 척 하고 싶어하는 사람이 많았다. 곤명에서 전투를 구경하던 민초들 중 하나일 것이라 생각했다.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기는 여인을 신녀(神女)라 칭하는 것은 어느 마을에서나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죽립에 면사까지 쓰고 사파 무인들을 물리치니, 뭣 모르는 민초들이 신녀라 칭할만도 했다.
‘앞으로 신녀문주라 소개해야겠구나.
서연이라는 이름을 대는 것보다는, 신녀문의 이름을 대는 것이 더 나을 듯했다.
명성을 전해들은 사파 잡것들이 알아서 설설 길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피를 보지 않아도 될테니, 서연으로서는 기꺼울 따름이었다.
일문의 문주를 자칭한다는 부끄러움만 어찌저찌 이겨내면 될 듯했다.
그 생각이 짧았다고 여기기까지는 며칠이면 충분했다.
*****
점창파의 산문이 대부분 불탄 탓에, 서연은 빈객 대접을 받고 있음에도 점창산에 머무르지 못했다.
빈객을 잿더미 속에 묵게 할 수는 없다는 말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서연은 줄곧 점창산 지근거리에 위치한 점창의 속가에 머물렀다. 점창 도사들의 동경어린 시선을 받으면서다.
본래 운남에 오려던 목적도 대리(大理)에서 펼쳐지는 대리석 경매에 참여하기 위함이 아니었던가.
구파와 팔천의 충돌로 경매 자체가 몇 주 뒤로 미뤄졌기에, 서연 일행과 일월상단은 대리에 하염없이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허나 서연은 속가의 정문 밖을 함부로 나갈 수 없었다.
“도화신녀(桃花神女), 도화신녀님이다……!”
“뭐?”
“아니야. 무심잔월(無心殘月)이랬어.”
반년 전에 금룡상단의 별채에서 머무를 때와 비슷한 상황이었다. 허나 그때는 마냥 당황스럽기만 했다면, 지금은 당황을 넘어 부끄러움을 느꼈다.
도화신녀는 뭐고, 무심잔월은 또 뭐란 말인가. 도화경에서 온 신녀에, 무심하고 잔혹한 달? 신녀문주가 선녀처럼 느껴질 줄은 몰랐다.
무림인들은 전부 본인의 명호를 스스로 외치고 다니는 철면피라는 말을 실감했다.
‘……나는 그렇게는 못 하겠다.
아무리 별호가 무인의 정체성이라고 하지만, 저런 단어를 입에 직접 담을 자신이 들지 않았다.
당장 천명검의 단주가 나서지 않았더라면 명성을 얻기는커녕, 지금처럼 몸 성히 서있지도 못했을텐데 말이다.
‘끝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줄은.
과연 절세고수라는 것일까. 전투가 마무리되고, 무수한 사파 무인들을 추포하는 그 순간까지도 그의 기파를 느끼지 못했다.
절세고수들은 구름 위에 산다는 말이 틀리지 않았다.
오후에 점창파 장문인과 대화를 나누기로 했다. 점창파 제자들의 탈출을 도운 은인인 서연에게 마땅히 사례하기 위함이었다.
그때까지 마땅히 할 일이 없었다. 화련과 소소 둘다 당과를 사러 잠시 외출했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조각이나 하며 초심이라도 다잡으려던 순간이었다.
담벼락에 웬 소년이 앉아 있었다. 아리송한 얼굴로 서연을 응시하고 있었는데, 특이하게도 등에 천 자가 새겨진 옷을 당당하게 입고 있었다.
“…….”
뭣 모르는 아이가 천명검 행세를 하고 다니는 것이 분명했다. 관리들에게 잘못 걸렸다간 경을 칠 수도 있었다.
서연은 놀란 얼굴로 말했다.
“얘야.”
소년은 눈만 깜빡거렸다. 그는 고개를 뒤로 돌려 뒤편에 누가 있는지 확인하다가, 아무도 없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눈을 크게 떴다.
“그래, 널 부른 게 맞단다.”
소년의 눈이 더할 나위 없이 커졌다.
곧 소년의 입술이 살짝 열렸다.
“……내가 보이시오?”
애늙은이라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는 말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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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 사이에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서로를 재는 듯한 분위기. 마침내 기세에서 밀린 소년이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담벼락 아래로 내려섰다.
“신녀문주, 맞으시오?”
“그렇단다.”
소년의 어투에는 경계와 불만이 뒤섞여 있었다.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소년은 이전보다도 미간을 더욱 강하게 좁혔다. 아이 취급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키는 화련보다 반 치 정도 컸다. 지학 정도 되어 보였다는 뜻이다. 한창 어른처럼 행세하고 싶은 시기일테니, 저런 모습을 보이는 것 역시 그리 이상하지 않았다.
‘무인들 옆에서 자란 아이들 말투가 저러하지.
늙수그레한 말투를 흉내내는 것만 보아도 그랬다. 저 나이 또래는 저것이 멋인 줄 아는 법이다.
“헌데 내 모습은 어찌 알아보셨소? 고명한 안법을 익혔어도 쉽게 알아챌 수 있는 것이 아닐진대.”
무림인 놀이라도 하던 걸까. 담벼락에 대놓고 앉아 있었으면서 상대가 알아보지 못하기를 바라다니.
서연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소년의 동심을 지켜줄까 싶었지만, 그럴 만한 나이는 이미 지난 듯하여 솔직하게 말해주었다.
“더 노력해야겠구나. 내 눈에는 대놓고 앉아 있는 것처럼 보였단다.”
“…….”
서연은 미소지으면서 옆자리를 툭툭 두드렸다.
“심심하던 차에 잘 되었구나. 내 말동무나 되어주지 않으련? 궁금한 것이 많아보이는 얼굴인데.”
소년의 얼굴은 이제 더 없이 기괴해졌다. 불가해의 요괴를 마주한 듯한 얼굴이었다.
“……천하는 참으로 넓구나. 단주의 말이 틀리지 않았구나. 괴력난신이 이리도 많으니.”
“단주?”
“알면서 어찌하여 물으시오. 천명검의 단주를 말하는 것을 모르지 않을진대.”
서연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설정이구나.
천명검 행세를 하는 것이 이것으로 확실해졌다. 뭇 사내아이들이란 목검을 치켜들고 마을을 종횡무진 휘저으며 고수 행세를 하고 다녔기 때문이다.
물론 소년의 나이는 그런 유치한 장난을 칠 시기는 지난 듯했지만, 아직 철이 덜 들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
소년은 그런 서연을 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순순히 마룻바닥에 앉았다.
“신녀문주, 내가 누군지는 궁금하지는 않으시오?”
“무림인 놀이를 하는 아이가 아니었니?”
“놀이……?”
소년의 표정이 다시금 흔들렸다. 그는 허탈한 듯 숨을 내쉬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 서연을 노려보았다.
“나는 암검대주요. 놀이라고 폄하한 것은 꽤 좋은 수였소. 하마터면 오랫동안 단단히 쌓아온 수양이 흔들릴 뻔했구려.”
“암검대주, 그렇구나. 대주라 불러주기를 바라니?”
“……농은 그만하시오.”
소년은 다시금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전보다 호흡을 안정시키기가 벅찬 듯했다.
서연은 그런 소년을 보며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늘 소녀들과만 지내다가 오랜만에 사내아이와 대화를 나누니 즐거웠던 까닭이었다. 생각보다 장난치는 재미가 쏠쏠했던 덕이 컸다.
“신녀문주, 몇 가지만 물어도 되겠소?”
“얼마든지 물어보렴.”
“……일단 점창파 장문인과는 이야기를 마쳤소. 고절한 검격이 나타나 흑룡회주를 몰아냈다더군. 검흔을 보니 분명 절세고수의 흔적은 맞았소. 정작 단주는 공적인 임무를 수행중이라 운남까지 올 상황이 못 되는데 말이오.”
“그랬구나.”
“처음에는 무당을 생각하였는데, 검선이었다면 본 단을 자처할 이유가 없소. 스스로를 감추고 오히려 점창파 장문인의 면을 치켜세웠겠지. 생각할수록 미궁에 빠지는 느낌이 들더군. 그래서 신녀문주를 직접 찾아온 것이오. 그때는 신녀문주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기 때문이오.”
소년은 말을 제대로 끝맺지 못했다. 돌연 서연이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린 탓이었다.
“애야, 절세고수를 그렇게 부르면 안 된된다. 나는 괜찮지만, 다른 사람들은 괜한 오해를 하여 널 해코지할 수도 있단다.”
“……해코지?”
“사마련주는 그렇다 쳐도, 적어도 정파의 절세고수들을 부를 때에는 경어를 사용하렴. 천명검단주를 부를 때도 마찬가지고.”
소년은 뭐라 반박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서연의 눈매가 날카로워졌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우리는 황실을 섬기기에 정파의 장문인들에게 존칭을 표할 필요가 없소. 애초에 천명검의 대주는 대문파의 장문인과 비슷한 배분이오. 경외를 담을 이유가 없단 말이외다.”
잠시 고뇌하던 소년이 덧붙였다.
“허나, 문주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시정하리다.”
“착한 아이구나.”
소년의 표정이 다시금 묘해졌다.
“취급이야 그리 중요치 않으니 넘어가겠소. 그보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이 있소. 이번 일에 문주가 관여하셨소?”
“그게 무슨 말이니?”
“문주가 두 종주를 물리쳤느냐고 묻는 것이오.”
“아니란다.”
의외로 소년은 실망하거나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렇게 대답할 줄 알았다는 듯이, 저 혼자 고개를 끄덕이고 멋대로 납득했다.
“그렇다면, 이번 일은 천명검이 한 것으로 하겠소.”
“아까부터 계속 당연한 이야기만 하는구나.”
“당연한 일로 취급할 정도는 아니오. 우리도 할 일이 많단 말이외다. 사마련주가 얼마나 예측불가한 광인인지는 문주도 잘 알지 않소. 시선을 우리 쪽으로 돌려주겠다는데, 고맙다고는 못할망정.”
생각보다 성격이 훨씬 엉뚱한 소년이었다. 자신만의 세계 속에서 사는 듯했다.
‘사마련주에 천명검에, 생각보다 세계관이 촘촘하구나. 소설을 쓰면 잘 쓰겠어.
팔짱을 낀 채로 궁시렁거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는데, 딱 그 나이대의 소년이 보일 만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문주가 도발에 일가견이 있다는 것도 보고에 추가하겠소. 나라서 망정이지, 다른 대주가 찾아왔더라면 한바탕 싸우려 했을 것이오.”
“싸우다니. 혹 질 나쁜 아이들과 어울리기라도 하는거니?”
“나는 애가 아니오……!”
목청을 높이던 소년은 곧 제 이마를 짚고 고개를 숙였다. 그 잠깐 사이에 얼굴이 불그스름하게 물들어 있었는데, 화를 낸 스스로가 부끄러운 듯했다.
“체면이 말이 아니군. 나이가 몇인데 아이처럼 소리나 지르고.”
“그 나이 대에는 그럴 수 있단다.”
서연이 느긋하게 말했다. 소년은 이제 헛웃음까지 흘렸다.
“……타인의 속을 긁기로는 사마련주가 최고인줄 알았거늘. 신녀문주를 보니 그도 분발해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요. 얼굴을 면사로 가리고 있어서 망정이지, 표정까지 보였다면 진정 노했을지도 모르겠소.”
“사마련주를 만나보기라도 했다는 것처럼 들리는구나.”
“……힘들군. 참으로 힘들어. 어디부터 어디까지 농인지 알 수가 없구나.”
긴 호흡을 내뱉은 소년이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이전보다 힘이 잔뜩 빠진 기색이었다.
“예고없이 찾아와 큰 결례를 범했소. 깊이 사죄하고 다음부터 이런 일이 없도록 할 터이니, 이제 그만해주시오.”
서연은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생각했다. 또래의 사내아이답지않게 사과할 줄도 아는구나.
부모가 잘 가르쳤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이제 가보겠소. 그럴 일은 없겠으나, 혹 연락할 일이 생기면 언제든 관아로 서찰을 보내시오. 지급(至急)으로 대하리다.”
터덜터덜 떠나는 소년을 지켜보던 서연은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 옷, 밖에서는 입고 다니지 마렴. 관리들에게 잘못 걸렸다간 경을 칠 수도 있단다.”
“…….”
소년은 서연을 망연히 뒤돌아보다 고개를 가로저었다.
*****
“……반로환동한 것을 뻔히 알았을텐데도 그리 뻔뻔하게 굴 줄은. 절세고수들은 전부 괴인이라더니. 그 말은 당최 틀리질 않는구나.”
한탄하는 이는 암검대주였다.
본래 암검대의 역할은 중원 무림을 활보하며 극비에 속하는 정보를 긁어 모으는 것이다.
당연히 황태자가 중히 여기는 서연을 모를 리 없었다.
황태자에게 비연천공을 전달하며 자유를 바란다는 뜻을 함께 밝혔기에, 그동안 암검대 또한 서연의 주변을 감히 조사하지 않았다. 직접적으로 서연과 접촉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는 뜻이었다.
당연히 서연과 신녀문주가 동일인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암검대주는 그 사실을 서연과 대면한 이후에야 알아차렸다.
처음에는 절세 여고수가 갑자기 둘씩이나 생긴 줄 알고 얼마나 당황했던가.
암검대주는 느릿하게 고개를 위로 들었다.
어둑한 동굴 천장.
점창파를 돕기 위해 급히 합류했던 암검대원들이 전부 이곳에 자리해 있었다. 정보를 주로 다루기는 했지만, 은밀하기로는 천명검에서도 손에 꼽히는 그들이었다.
전투력 또한 다른 무력대에 뒤처지지 않았다.
하나같이 흑의를 입고 있었는데, 특이하게도 붓으로 계속 무언가를 써 내려가고 있었다.
은비조와 전서구, 박쥐 등에서 쏟아지는 정보들을 끊임없이 받아 적는 듯했다.
야명주 하나 없는 곳에서 붓이 움직이는 소리만 이따금 들려왔다.
전부 살수 무공을 익혔기에 안법이 발달하여 가능한 일이었다.
“진정 단주께서 왔다 가셨답니까?”
휘하 대원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암검대주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신녀문주가 한 일이다. 허나 세간에는 우리가 한 일로 알리기로 했으니, 괜한 말이 돌지 않도록 바삐 움직여야겠다.”
“……그 말씀은?”
“신녀문주가 전하와 연이 닿은 절세고수와 동일인이었다.”
그 말을 들은 대원이 뭔가 깨달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본단의 위상을 치켜 세워줄 생각으로 그리했다는 것이군요. 명백히 호의를 가지고 있다고 봐도 좋을 듯합니다.”
대화를 나누는 이는 대원들 중에서 연차가 가장 높은 이였다. 말단들은 이 순간에도 쏟아지는 서찰을 끊임없이 받아 적고 있었다.
“팔천의 종주 둘을 큰 힘도 들이지 않고 쫓아낸 것을 보면……절세고수라는 것도 사실이겠군요.”
“그렇겠지.”
“다른 대주들에게도 보고합니까?”
잠시 고민하던 암검대주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하께 우선적으로 전해드려야 기쁨을 온전히 누리실 수 있겠지. 당분간은 기밀을 유지하도록.”
“예.”
그때였다.
돌연히 날아든 전서구를 살피던 대원들이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리에서 마교의 전 대장로를 발견. 신녀문주와 동일하게 점창 속가에 머무는 것으로 추정됨. 현재 일월상단이라는 이름의 상단으로 위장 중. 맹약을 이행하기 위해 천산으로 향하는 도중 신녀문주와 연이 닿은 것으로 보임. 자세한 내막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 지원을 요청함.”
“현재 객잔 4층을 대실하여 식사 중. 친분이 적지 않아 보임. 신녀문주가 마공을 익혔는지 파악할 필요가 있다고 사료됨.”
“신녀문주의 손이 희고 광채를 띔. 소수마공을 익혔을 가능성이 있음.”
잠시 침묵이 흘렀다.
암검대주는 생각했다.
어찌하여 일이 이렇게 되었는가.
서연과 신녀문주가 동일인이라는 사실을 이제야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몰랐을 때까지만 해도 신녀문주는 명백히 요주의 인물이었다.
갑자기 나타난 신진문파의 문주가 흑룡회주의 오른팔을 꺾었다. 경계해야 마땅했고, 그리했다.
“……신녀문주 곁에 머무르던 모든 인원들을 당장 복귀시키도록. 전하의 명이 우선이다. 절세고수의 심기를 거스르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 지급이다.”
“예!”
대원들이 다급히 서찰을 적어나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내용을 받아적은 다음 전서구와 박쥐 따위의 다리에 그대로 묶고 날려보냈다.
대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암검대주를 향했다.
절세고수를 대면하는 일이다. 대주가 직접 나서야 최소한의 격이 맞았다.
“…….”
암검대주는 진심으로 가기 싫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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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잔 내부는 고요했다.
점창파의 속가가 직접 운영하는 곳이니, 강호의 소란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들은 점창파를 위기에서 구한 서연의 일행을 극진히 모셨다.
서연과 동행한 송월 노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일월상단이 치료한 점창 제자의 수가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록 전투에 직접 나서지는 않았으나, 후방에서 묵묵히 제 몫을 다한 공로는 누구도 폄하할 수 없었다.
당소소와 화련 역시 그 자리에 있었다. 그들의 손을 거쳐 뼈가 맞춰지고 붕대가 감긴 점창 제자가 족히 수십이었다.
‘생선이라니.
서연의 시선이 접시에 놓인 큼지막한 생선에 머물렀다. 운남은 땅 대부분이 해발로 오백 장이 넘는 고산지대로 이루어져 있어, 해산물을 구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귀한 손님을 맞기 위해 아낌없이 값을 치르고 이리 내놓았을 터였다.
“사실, 이 늙은이도 한때 생선장사에 손을 대보려고 했던 적이 있었지요. 염장법만 익히면 한 달은 거뜬하다는 말에 헛고생을 했었습니다.”
기품있게 생선을 발라 먹던 송월 노인이 운을 떼었다.
이렇게만 보면 그저 평범한 시골의 노인 같았다. 허나 세상 견문이 워낙 넓은 것으로 볼 때, 과거에 무림에서 나름 전설적인 인물이었다고 추측할 수밖에 없었다.
밤중에 음혈종의 장로인 혈면수라를 단박에 알아보는 안목이나, 절세 고수들과 안면이 있었던 행적만 보아도 그러했다.
상행도 돈을 벌기 위함이라기보다는, 취미에 가까워 보였다.
본디 상인이라면 시간이 곧 재물이라, 한 시진도 허투루 쓰지 않는 법인데, 그는 서연과 동행하는 동안 단 한 번도 급한 기색을 보인 적이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여태껏 이렇다 할만한 귀한 물건을 사들인 적도 없었다.
그나마 있는 일정이라곤 며칠 뒤에 열릴 대리석 경매에 참여하는 정도였다
다른 상단들은 벌써부터 광산 주인들에게 온갖 뇌물을 바치느라 정신이 없건만, 송월 노인은 지난 며칠간 근처 시장이나 돌아다니고, 평범하기 짝이 없는 풍경을 기웃거릴 뿐이었다.
일월상단이 취급했던 물건들을 보면 더욱 납득이 갔다. 잡상인이라 칭해도 될 만큼 온갖 자질구레한 물건들이 널려 있었으니 말이다.
한참을 생각하던 서연은 무례하게 들리지 않도록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어르신, 상행을 다니시게 된 연유를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찻잔을 들고 내리는 순간의 적막이 유독 무겁게 느껴졌다. 당소소와 화련이 다른 곳에 머물고 있었던 탓이 컸다.
“생각보다 긴 이야기가 될 듯한데. 괜찮으시겠습니까?”
“…….”
서연은 갑작스레 깊어진 송월 노인의 눈빛을 보며 침묵했다. 무림의 거대한 비사와 엮여 있기라도 한 것일까.
그럴 만도 했다. 여든이 훌쩍 넘는 세월을 살아오며 그의 두 눈으로 목도했을 죽음과 비밀이 적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서연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송월 노인이 입을 열었다.
“이 늙은이는 예전에 호법으로 일했습니다. 제가 모셨던 분은 큰 가문의 막내 공자셨는데, 걸음마를 떼시기 전부터 온갖 살수들에 시달리셨습니다. 후계다툼이었지요. 감당하지 못할 만큼의 살수들이 밀려들어 올 때는 공자님을 안고 산길을 달렸던 적이 적지 않았습니다. 보통은 행상인으로 위장했습니다. 봇짐에 공자님을 넣고 다녔지요.”
옛 생각이 나는지 송월 노인이 웃으면서 고개를 몇 번 끄덕였다.
곧 그는 자신의 기나긴 여정을 천천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가문 안에서 머문 날보다 가문 밖에서 머문 날이 많았을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몇 년 동안 다니면서 발각도 되고, 생사의 고비도 넘나들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는 진짜 상인처럼 행동할 수 있게 되더군요.”
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수 년간 살수들을 맞이하고도 살아남았다는 것에서 송월 노인의 능력을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송월 노인이 서연을 응시했다.
“무엇을 숨긴 채로 운반하기에는 상인만한 직업이 없다는 것도 그때 깨달았지요. 어떤 무림인이 생선 비린내로 가득한 통 같은 것을 직접 열고 뒤적이겠습니까. 칼 몇 번 찔러넣는 것이 고작입니다.”
서연은 순순히 수긍했다.
“아무래도 그렇겠지요.”
“그렇게 십 년을 살다보니, 생각보다 적성에 맞더군요. 나중에 은퇴를 하면 상인의 길을 걷기로 마음먹었지요. 무공을 잃고 나서 그 꿈을 이루게 될 줄은 몰랐지만 말입니다.”
그렇다면 무공은 후계다툼에 패하여 잃었던 것일까. 서연이 그리 추측하던 차였다.
“막내 공자께서 어찌 되었는지 궁금하진 않으십니까?”
“솔직히 궁금합니다.”
“후계자가 되셨습니다.”
“……어찌?”
서연이 놀란 얼굴로 말하자, 송월 노인이 지친 표정으로 말했다.
“윗 형제들이 하룻밤에 모두 참살당한 탓이지요. 각기 다른 검초로, 그것도 전부 일격에 당했으니, 무공이 미천했던 막내 공자님은 용의선상에 오르지도 못했습니다.”
송월 노인은 천운이 따랐다, 같은 허황한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대신 침착한 어조로 섬뜩하게 느껴질 만큼 솔직하게 말했다.
“……처음부터 호법이 필요하지 않았던 분이셨던 겁니다.”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근처에서 소란이 들려오기 전까지는 그랬다.
“와아아악! 스승님! 스승님!”
“사, 사저!”
서연은 다급히 방문을 열고 나섰다.
*****
사방이 우뚝 솟은 건물들로 가득했다. 궁전이라 칭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위용이었다.
중원 무림에서 서쪽으로 아득히 먼 곳. 천마신교의 성전(聖殿)이 위치한 곳이다.
“아미타불.”
정순한 법기를 가득 품고 있는 노승이 정좌한 채로 염불을 외고 있었다. 사방이 마교도들로 가득한 장소에서 당당히 염불을 외는 것에서 그의 간담을 엿볼 수 있었다.
승려복 너머로 역근경으로 닦아낸 단단하고 억센 육체가 훤히 드러났다. 그럼에도 얼굴에는 인자함이 깃들어 있었는데, 보는 이로 하여금 천상의 신장을 마주한 듯한 느낌을 주었다.
소림 사대금강의 일좌.
광대한 천하를 자유롭게 주유하며 온 천하의 존경을 받는 나한이 바로 그였다.
그런 그가 천산에서 염불을 외는 이유가 무엇일까. 억류와는 거리가 멀었다. 신체가 구속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의복에서도 이렇다 할 전투의 흔적이 드러나지 않았다.
드넓은 전각에 오직 염불을 외는 소리만 울려퍼지던 때였다.
“수십 년 동안 염불만 외우는 것이 질리지도 않는가?”
노승의 십 보 뒤였다.
흑의를 입은 사내가 등을 벽에 기댄 채 서 있었다.
마교의 천산은 한 해의 절반 이상이 겨울이었다. 당장 창밖에 스산히 떨어지는 눈이 적지 않았음에도, 사내의 옷에는 눈 한 송이 묻어 있지 않았다.
그의 전신에서 풍겨 나온 마기의 기류가 나무 바닥에 스며든 순간이었다.
노승이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마를 자처하는 자들은 잠시도 가만히 있지를 못하는구나.”
파사현정의 신령스러운 법력이 그의 전신에서 흘러나오며 사내의 마기와 정면으로 충돌했다.
드드드!
둘 사이에 반투명한 벽면이 생겼다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한순간에 천장까지 닿았다. 둘 다 막대한 내력을 지니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일이었다.
내력은 사내 쪽이 앞섰다. 다만 상성이 좋지 않았다.
파사현정의 기운이 담긴 무지막지한 경파를 쉽사리 감당하지 못했다.
결국 사내가 먼저 마기를 거둬들였다.
“매년 이리 되풀이되는군. 정중하게 말을 걸 때는 대답조차 하지 않더니.”
사내는 무서울 정도로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승려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성정이 드세단 말이지. 교주께서 자네를 건드리지 말라고 명하지 않으셨다면 자네의 목은 진작에 저잣거리를 나뒹굴고 있었을 걸세.”
노승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다시 염불을 외웠다. 사내는 자신의 까끌한 수염을 쓰다듬으며 아무도 없는 천장을 보고 말했다.
“가서 차나 좀 내오거라.”
담담한 말투로 물은 직후였다. 천장 곳곳에서 들불처럼 기파가 일어났다.
곧 허공에서 흑의인이 나타나더니, 평상에 다구를 내려놓았다. 노승이 대놓고 자신을 무시하고 있음에도, 사내는 일단 자리에 앉아 차 한 잔을 마셨다.
권해봤자 노승이 마시지 않을 것을 아는 것이다.
사내는 스스로 잔에 차를 따르고, 마시기를 반복하다가 입을 열었다.
“교주님의 말씀을 전하러 왔네. 내년에도 계속 머무를 것이냐고 묻고 오라더군.”
“…….”
한순간 염불이 멈췄다. 노승은 그제서야 고개를 돌려 사내를 응시했다.
노승의 눈에 사내의 외양이 담겼다.
풀려있는 듯하면서도 깐깐하고 날카로운 기질을 동시에 드러냈다. 얼핏 보면 낭인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천하에 보기 드문 광인이다.
‘……더 강해졌구나.
노승은 속으로 생각했다. 사대금강 중 최고로 꼽히는 자신조차 눈 앞의 사내의 백초지적이 되지 못했다.
이만한 강자가 마교에 일곱이나 있었다. 교주를 제외하고도 그랬다.
단일 세력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무력이었다. 이들이 중원을 침탈하고자 한다면 온 천하가 격동할 것이 분명했다.
참사를 막으려면 마땅히 감시하고 주시해야 했다.
본래라면 간자를 심고, 온갖 정보전을 벌이는 것이 통상적이겠으나.
―본좌는 의미없는 다툼으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
교주가 출입을 허락한 순간 의미가 없게 되었다.
적지 않은 초고수들이 교주의 의중을 파악하기 위해 천산에 방문했다. 교주는 무기의 패용, 머물 수 있는 기간, 심지어는 천마전의 출입조차 제한을 두지 않았다.
파격을 넘어 정파에게 납작 엎드린다고 느껴질 수준이었다.
그 말을 전대 교주를 열 초식만에 참살하며 내뱉지만 않았다면, 모두가 교주를 겁쟁이로 치부했을 것이다.
곧 노승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계속 머무르겠다고 전하시오.”
사내는 대답하는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반백 년이 넘는 세월이 지났고, 천산에 머물렀던 수많은 정파 세력들은 전부 떠나갔다. 그나마 제갈세가와 몇몇 구파만이 년 단위로 사람들을 보내고 있는 상황이었다.
먼 마교보다 코앞에서 날뛰는 사파를 살피는 것이 급했다.
‘간자들은 아직도 틈틈이 심어놓는 듯하지만.
사내는 속으로 생각했다. 정파에도 심계가 깊은 위인들이 많으니, 방심한 척 심어둔 간자가 족히 수십은 될 터였다.
애초에 정보조직을 통해 천하를 주시하려던 자들이다. 대놓고 사람을 보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할 바에야, 평소대로 간자를 보내는 편이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오히려 여태 남은 소림이 이상했다.
승려라 그런지 쓸데없는 부분에서 우직했다. 설마 수십 년을 천산에 처박혀 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어느 순간부터 마교가 사대금강을 억류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전대 대장로가 볼모를 자처한 것도 그 시점이었다.
소림의 코앞에 자리를 잡고 대놓고 상단 행세를 했다. 마교가 준동하면 제 목부터 치라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무공을 잃었다지만, 그 전에 교주가 총애하던 수하였다. 볼모로서의 가치가 충분했다.
그렇게 수십 년이 지난 지금, 소림의 사대금강과 마교의 전 대장로는 서로가 원치 않는 볼모가 되어 있었다.
“내년에 다시 찾아오도록 하리다.”
사내가 바람처럼 모습을 감추고, 천장을 가득 메웠던 살수들의 인기척 역시 순식간에 사라졌다.
노승은 한참이 지나서야 바깥으로 향했다.
그의 시선 앞에 드높고 푸르른 하늘이 놓여 있었다.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 들어야 정상이겠건만, 어째서인지 하늘을 올려다볼수록 가슴이 답답해지는 듯했다.
“……아미타불.”
교주와 천마의 차이는 무엇인가.
오랜 세월을 천산에 머무른 탓에, 알고 싶지 않아도 알게 되었다.
단순히 마인들의 지도자에서 그치면 교주이나, 거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 하늘을 무너뜨리면 천마가 된다. 교리가 그러하다고 했다.
여태까지의 교주들은 중원 무림을 재패하는 것으로 천마가 되려 했다. 중원 자체를 하늘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전대 교주는 명 황실을 하늘이라 여겼고, 명 이전의 교주들은 그 이전의 왕조들을 하늘이라 여겼다.
허나 작금의 교주는 달랐다.
노승은 고개를 치켜든 채로 호흡을 애써 가다듬었다.
‘…….
교주가 닿고자 하는 하늘이 그곳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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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잔 최상층의 창가에 햇살이 쏟아졌다. 가벼운 식사를 마친 두 소녀는 주변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누각으로 향했다.
“확실히 운남의 산들은 높네. 사천도 꽤 높은 축에 속한다고 생각했는데.”
“사저가 대설산(大雪山)을 가보지 못하셔서 그리 말씀하시는 겁니다. 높이가 점창산의 족히 두 배는 되지요. 어렸을 때에는 그곳으로 설삼을 캐러 가고는 하였는데…….”
두 소녀의 목소리가 유독 낭랑하게 울렸다.
멸망한 대리국의 수도가 근처였다. 워낙 좋은 자리에 세워진 객잔인 탓에, 시선을 어디로 돌려도 절경이었다.
당연히 누각에 사람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크게 떠드는 이가 하나 없었다. 자리한 이들이 점잖은 사람들이라서 그랬던 것은 아니다.
다들 운남을 정파의 영역으로 여기고는 했지만, 실상 구파인 점창을 빼놓고 보면 온전히 정파에 속한 문파가 적었다. 대부분이 정사지간의 문파였다.
사파가 득세했다면 사파에게 붙고, 점창이 득세했다면 점창에게 붙었겠으나, 상황이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곧 봉문할 문파에게 붙는 것이 과연 맞는 판단일지 의문이 드는구려.”
“종주들을 패퇴시킨 것이 점창 장문인이었다면 이리 복잡하지 않았을 터인데…….”
그런 상황에 신녀문주의 제자들이 나타났다.
눈치를 보지 않을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아직까지 전력을 드러낸 적이 한 번도 없다던데.”
“내 익히 들었네. 흑룡회의 나찰도를 몇 합만에 꿇렸다더군. 서로 한 합씩 주고받기를 반복했다던데. 단순한 도인을 넘어 여장부로 대해야 옳아.”
“언행이 천것들과는 다르다던데. 혈통부터 고결하겠지.”
“당랑암화가 제자로 있는 것만 봐도 알겠더군. 당문이 어디 보통 혈족인가?”
다들 속삭이기 바빴다. 이따금 눈짓으로 두 소녀를 살피는 자들은 있었지만, 누구도 그녀들에게 감히 접근하지 못했다.
“다들 눈치보기 바쁘군요.”
“사매는 이런 상황이 익숙한가보네.”
맞은편에 앉아있던 당소소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근데 사매는 단 거는 별로 안 좋아하나봐? 당 소가주님은 단 거를 잔뜩 들고다니던데.”
“싫어하진 않습니다. 굳이 찾아먹지 않는 것에 가깝지요.”
“그러면 이 사저가 맛있는 부분을 떼어줄게.”
화련이 조각칼을 꺼낸 직후였다.
산사나무 열매의 겉면을 덧칠하고 있던 설탕이 꽃잎과도 같은 모양으로 깨어졌다.
당소소가 놀란 얼굴로 그 광경을 바라보자, 화련이 어깨를 으쓱였다.
“많이 연습했거든. 명색이 사저인데, 뒤처질 수는 없잖아.”
“……대단하십니다. 일취월장하고 계셨군요.”
“먹어봐. 사저가 주는 거니까.”
생글거리는 미소를 띤 채로 그리 말했다.
당소소는 산사나무 열매를 입에 집어넣었다.
혀를 자극하는 강한 단맛이 입안 전체에 매끄럽게 퍼졌다. 방금 전에 보였던 꽃잎과도 같은 형상이 단순한 장식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맛있군요. 사저가 왜 그리 당과만 찾아다녔는지 알 것 같습니다.”
“다음에는 사매가 해줘. 하돈(河豚)의 생살이 그렇게 일품이라더라. 포를 뜬 생살을 꽃 모양으로 곱게 진열한다던데.”
열 살, 이제 열 한 살 된 여아가 복어 요리를 입에 담는다. 나이 많은 사매의 출신을 감안하고 그리 말한 것이 분명했다.
당소소는 입꼬리를 올렸다.
“바다에 갈 일이 생기면 그리 하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슬슬 방으로 돌아가야 할 듯합니다. 스승님께서 식사를 마치실 때가 되었으니…….”
돌연 당소소는 말을 멈추고 화련을 응시했다.
화련이 난간 쪽을 응시하면서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어서다. 누가 있나 싶어 옆을 힐끗 보았지만, 당소소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쪽에 뭔가 있습니까?”
어린 사저의 안법이 저보다 낫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그리 물었다.
무학을 익힐 육체를 타고났다. 어쩌면 자신이 보지 못하는 무언가를 보고 있을 수도 있었다.
‘내 눈에만 보이는구나.
화련은 생각했다.
난간에 웬 소년이 앉아 있었다. 작은 손으로 턱을 괴고 있었는데, 당장이라도 아래로 떨어질 것처럼 아슬아슬하게 걸터 앉아 있었음에도 저지하는 사람이 하나 없었다.
복식도 평범했다. 거리에서 으레 볼법한 외형이었다.
화련은 모산파의 후계자로서, 귀안(鬼眼)을 타고났다. 일반인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다는 뜻이다.
‘혼령은 아닌 듯한데.
그리 생각하던 도중에 눈이 마주쳤다.
소년의 눈이 순간 이채를 띄었다.
―너, 내가 보이는 게로구나.
한이 서린 독백이 아니다. 명백한 전음이었다. 화련의 얼굴이 일순간 굳었다.
―신녀문주가 천고의 안법을 가르친 모양이구나. 그 나이에 이만한 성취라니. 기재라 칭하기에 부족함이 없겠어.
정신을 차린 순간 화련의 바로 왼편까지 다가와 있었다.
―본래 신녀문주의 대화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려 했건만, 무료하던 차에 잘 되었다. 오랜만에 어린 기재와 교분을 나눠보는 것도 좋겠구나.
그때까지도 당소소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화련은 눈을 큼지막하게 뜬 채로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섭백소혼무(攝魄消魂舞)라 한다. 나의 진신절기지. 네가 신녀문주의 제자이고, 재능 역시 충분하기에 일러주는 것이다.
소년이 하얀 검지로 당과를 툭툭 두드렸다.
화련은 입을 꾹 닫은 채로 전음을 보냈다. 최대한 아이답게 말하는 것 역시 잊지 않았다.
―누구, 세요?
당황하여 혀를 깨물었다. 소년은 그조차도 흥미롭다는 얼굴이었다.
―함부로 밝힐 수 없는 신분인 탓에 답해줄 수는 없겠구나. 허나 해코지할 생각은 없으니 안심하거라.
어조가 애늙은이나 다름없었다. 절세의 은잠술을 드러내지 않았더라면 그저 멋부리는 남아라고 여겼을 것이다.
반로환동을 이룬 고수라는 것을 그때서야 깨달았다.
대문파의 장문인에 준하는 초고수라는 것이다.
“사저? 괜찮으십니까?”
“어어…….”
당소소를 보며 애써 고개를 끄덕였다. 내색하지 않으려 한 것이다.
‘긴장할 필요 없어.
예전에 소림 사대금강을 만났을 때부터 고수들을 응대해오지 않았던가. 만남이 갑작스러워 당황했을 뿐이다.
‘스승님께 호의를 가지고 있는 듯하니.
뭇 제자를 보고 스승을 판단하기 마련이다. 신녀문의 대사저에 걸맞는 의기를 보여야 했다.
흐트러졌던 호흡을 한순간에 정상 궤도로 되돌렸다. 기세 역시 갈무리하여 일문의 후계자에 걸맞는 고아함을 드러냈다. 그러자 소년의 눈이 이채를 띄었다.
“오호라?”
입 밖으로 말을 꺼냈는데도 누구 하나 반응하지 않았다. 그 잠깐 사이에 기막을 펼쳐 소리를 가둔 것이다.
“네 나이에 그만한 평정심을 가지기 쉽지 않거늘. 신녀문주가 열성을 다해 가르쳤다는 것을 알겠다.”
깊은 흥미를 느꼈는지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린 채였다.
“나이가 조금만 많았어도 대작을 권하였을 것이다.”
암검대주는 진심이었다. 스승의 성격을 닮았을 줄 알았건만, 어찌 성정이 이리 차분하단 말인가. 뭇 여자아이라면 당황하여 눈물부터 보이는 것이 보통이거늘.
‘생각해보면 신녀문주도 언행만 조금 괴팍할 뿐, 성품 자체는 도인이라 칭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녀가 진정 마교와 연이 있으리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마교와 정파가 맺은 옛 맹약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어린 것들이 멋대로 중얼거린 것뿐이다.
설령 신녀문주가 마교 출신이더라도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비연천공의 저자다. 법가와 도가의 절세 심공을 창안한 장본인이 어찌하여 마에 잠식되겠는가. 설령 마기를 사용한다고 하더라도 순정한 기파만을 내보일 것이다.
이곳에 직접 찾아온 것은 혹여 복귀하지 못한 인원들을 돌려보내고, 신녀문주가 불쾌함을 드러냈을 경우 사과하기 위함이었다.
절세고수라면 진작에 자신의 기운을 느꼈을 것이다. 그럼에도 아무 말을 하지 않는 것을 보면 알고도 방관하는 듯했다.
“아무래도 한 수 가르쳐주기를 원하는 듯하구나. 헌데 어찌할까. 내가 아는 것은 살수의 무공 뿐이거늘.”
잠시 고민하던 암검대주가 품에서 비도를 꺼냈다. 곧 비도가 춤을 추는 것처럼 저절로 허공을 유영했다. 허공섭물을 극한까지 응용한 것이다.
곧 비도의 날 부분이 어둠에 잠기더니, 한순간에 사라졌다.
다시 모습을 드러낸 칼날은 무려 세 장이나 떨어진 곳에 위치한 기둥을 뚫고 들어가고 있었다. 그 와중에 손잡이는 여전히 암검대주의 손에 들려 있었다.
칼날이 축지라도 하는 것일까.
“천하에 보기 드문 기재이니, 이리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심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만 돌아갈테니 정진하거라.”
암검대주가 그리 말하며 비도를 품에 집어넣은 순간이었다.
그의 손은 화련의 머리를 향하고 있었다. 기특한 후학을 쓰다듬으려는 것이다.
허나 화련의 머리에 닿지 못하고 허공을 맴돌았다. 진법에라도 갇힌 듯했다.
―돌아가라. 주인은 물론이고, 본도 역시 거기까지는 허락하지 않았다.
절묘하게 화련과 암검대주의 귀에만 울려퍼지는 목소리였다. 암검대주는 당황하는 대신 화련을 쓰다듬으려던 손을 거둬들였다.
“고절한 진법이군. 범위를 내 오른팔에 한정했나? 제갈세가의 은퇴한 노괴라도 되는가.”
―노괴……?
떨리는 말투에서부터 심기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화련은 놀란 눈으로 암검대주를 응시했다.
“말투에서부터 연배를 숨길 생각이 없던 듯한데.”
늙은이라는 말이 장내를 맴도는 듯했다.
동시에 거대한 종잇장이 부욱 찢기는 듯한 소리가 났다.
“어어……?!”
누각 옆에 자리하던 나무가 크게 휘청였다. 동시에 드센 바람이 누각으로 화악 끼쳐왔다.
산발적으로 날리는 머리와 옷자락을 붙잡는 이가 태반이었다. 화련과 당소소만이 예외였다.
이곳저곳에서 억눌린 신음이 흘러나왔다. 초고수의 존재감이 일대를 짓누르는 것이다.
“흐억!”
“가, 갑자기 이게 무슨……!”
곧장 싸움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일촉즉발의 상황이다.
화련은 생각했다. 어떻게해야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을까.
고민은 짧았다.
“와아아악! 스승님! 스승님!”
화련은 아기새처럼 비명을 질렀다. 남들이 보기엔 여자아이가 헛것을 보고 놀란 것처럼 보였다.
탁.
동시에 귀빈실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벅.
복도를 디디는 발소리 역시 함께였다.
“……!”
―……!
누각을 가득 메웠던 기파가 순식간에 잦아들었다. 암검대주는 신속히 비도를 품에 넣고, 일말의 망설임 없이 누각 밖으로 몸을 날렸다.
초고수로서의 자존심을 곧장 굽히고 신녀문주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것을 택한 것이다.
그 와중에도 화련에게 이름 모를 노괴가 먼저 출수했다는 말을 전했다. 자신을 변호해달라는 것이다.
유혼도 마찬가지였다. 주변에 설치해두었던 진법을 찰나에 허물고, 황급히 날개를 푸드덕거리며 자리를 피했다.
본래도 수백 장 거리에 자리하고 있던 터라, 도주는 그야말로 한순간에 이뤄졌다.
사락.
다음 순간 서연이 당도했다. 그녀는 처음부터 거기 있었던 사람처럼 화련의 코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자리에 있던 모두가 경악했다.
“일전의 광풍(狂風), 신녀문주가 벌인 일인가……?”
“움직임이 보이지도 않았다. 속도만큼은 정파의 거두들에 뒤지지 않는다더니!”
서연은 시선으로 주변을 흝었다. 진기의 잔재가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급히 지우고 간 흔적이 역력했다.
예전에는 보지 못했던 것들이다. 의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극지체라는 것을 깨달은 이후로는 달랐다.
재능을 깨달았을 뿐인데 세상이 달리 보였다.
지금 이 순간에도 새로이 깨우치는 것들이 적지 않았다.
진기의 흐름을 추적하여, 이 자리에 있던 자들을 쫓아갈 수도 있었다. 허나 서연은 그리하지 않았다.
“화련아.”
대신 깊은 우려와 온정이 함께 담긴 눈빛으로 제자를 바라봤다. 해코지를 당한 것은 아닌 듯했다. 눈동자에 공포가 담겨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스, 스승님. 그게…….”
“누가 널 위협이라도 했느냐.”
화련은 다급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두 고수의 자존심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거기에 스승님을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다.
“바람이 갑자기 너무 세게 불어서…….”
서연은 제자의 말에서 거짓을 흝어냈다. 허나 노하는 대신 제자의 머리카락을 쓰다듬기만 했다.
스승의 걱정을 하는 것이 눈동자에서부터 드러났기 때문이다.
‘슬슬 심공을 가르쳐야 하나.
여행을 다니며 새로 추가한 구결이 적지 않았다. 사실상 완성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서연은 속으로 비연천공의 구결을 뇌까렸다.
대리석 경매가 내일이었다. 제자들을 가르치며 조각상을 빚으리라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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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가 오랜만에 북적거렸다.
길을 오가는 행인 열 중 아홉이 상인이었다. 본디 대리석 채석장은 재물을 좇는 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법이지만, 보름 만에 열린 경매에 그 열기는 더욱 뜨거웠다.
“이번에 발견된 석맥(石脈)이 그렇게 크다고 들었소만.”
“산 전체가 대리석으로 가득하다고 하더이다.”
인부들이 굵은 밧줄로 큼지막한 대리석을 묶고, 통나무를 깐 바닥 위에서 구령을 외치며 한 치의 오차 없이 돌을 날랐다
성인 남성의 몇 배는 되는 질 좋은 대리석이 산처럼 쌓여갔다. 외지인들에게는 그것조차 큰 구경거리였다.
“이번에는 서역인들도 많이 참여했군요.”
대화 소리가 어찌나 큰지, 송월 노인의 목소리가 겨우 닿을 정도였다.
곳곳에 칼과 창을 든 무관들이 경계를 서고 있었다. 애초에 대리석은 시장에서 흔히 사고팔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가장 큰 거래처인 황실의 눈을 피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행색이 추레한 이들은 접근조차 못했다. 채석장 주변을 기웃거리는 이들만 족히 수백이었다.
“나리! 제발 들여보내 주십시오! 소인은 저 멀리 절강에서 왔는데…….”
“투옥하기 전에 물러가라. 두 번 말하지 않겠다.”
경매장을 오가는 상인들은 모두가 부호라 칭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들의 행색 자체가 곧 신분이었다.
자연스레 그들을 호위하는 무인들의 수준 또한 높을 수밖에 없었다. 검집에 손을 얹고, 여차하면 출수할 듯한 기세를 내뿜는 자들이 적지 않았다.
신분 확인은 오죽 철저한지, 들어가지도 못하고 쫓겨나는 상인들이 삼 할에 달했다. 사마련 팔천이 패퇴한 지 달포가 겨우 지난 시점이다. 이처럼 철저한 검문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이들이 서연 일행은 단번에 들여보냈다. 신녀문주의 위명이 관에까지 퍼진 덕분이라 짐작했다.
‘온갖 시선이 다 끌리는구나. 어찌하여 절세고수들이 두문분출하는지 알겠다.
경외와 호승심, 그 둘이 반반으로 갈려 모든 이들의 눈빛에 깃들었다. 명색이 상단의 호위 무인들이었으나, 그들조차 기세를 감추지 못했다.
주변의 행인 태반이 남성이었던 탓도 있었다. 여인만 셋인 서연 일행에게 시선이 끌리는 것은 당연한 노릇이었다.
“여인만 받는 문파라도 되는가? 아미파처럼?”
“저만한 무인이 어찌하여 이런 곳에 나타났단 말인가?”
“예술에 취미라도 있나보오.”
그들이 생각하기에 신녀문주는 정파의 초고수였다. 그중에서도 도가에 속하는 자였다.
일반적인 도인들이 사치와 거리가 멀다는 것을 생각하면, 작금 신녀문주의 행보는 그들이 알던 통념 속 도사와는 사뭇 달랐다.
허나 감히 그 사실을 입 밖에 내는 이는 하나도 없었다. 서연의 행보가 도사치고는 패도적이라는 소문을 익히 전해 들은 까닭이었다.
―일문의 장문인 정도는 나서야 우위를 점할 수 있다고 하던데.
―당장 점창파의 벽호검이 자신보다 몇 수 위라 판단했다 하더이다. 장문인 급은 몰라도, 최소한 대문파의 대장로보다 윗줄로 봐야 마땅하겠지.
다들 서연의 눈치를 보며 전음으로 대화를 나누기 바빴다.
서연은 그런 그들의 시선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넘겼다. 어떤 크기의 대리석을 사야 할지 고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바빴기 때문이다.
‘기왕이면 하남까지 가져가고 싶은데.
그래도 명색이 문파인데, 그럴듯한 조각품이 하나쯤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야외 경매장에 놓인 대리석들은 크기와 가격이 천차만별이었다. 가장 하품의 대리석조차 금자 열 개를 거뜬히 넘었다.
상상을 뛰어넘는 가격이었다. 안 그래도 암석 중에 최고로 치는 대리석이다. 모든 대리석을 통틀어 이곳 대리에서 나오는 대리석을 최고로 쳤다.
‘여태 모은 돈을 오늘 전부 쓸 지도 모르겠구나. 자금이 아슬아슬하겠다.
수 장에 달하는 거대한 대리석을 구매하려던 당초의 계획을 곧장 철회했다. 적당히 장정만한 크기의 대리석을 구매하는 것으로 타협하기로 마음먹은 순간이었다.
“근래에 위명이 자자하신 문주님을 이리 뵙는군요.”
미성이 가득 담긴 목소리가 장내를 울렸다. 고관이나 쓸 법한 고풍스러운 말투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화법 자체가 굉장히 능숙했는데, 목소리를 듣고도 성별을 헤아리기가 힘들었다.
환관이었다. 일전에 악산 부윤에게 황태자의 전서를 건넸던 장본인이었다.
명백히 고관으로 분류되는 그가 이곳을 방문한 연유가 무엇일까.
서연을 보고 눈웃음을 짓던 환관의 시선이 당소소와 화련에게로 옮겨갔다. 옷태 너머로 드러난 육체의 결을 흝어보고는 감탄사를 토해냈다. 무학의 수준을 가늠한 것이었다.
서연 역시 그러한 눈길을 느꼈다.
‘환관들은 저런 것도 할 수 있구나.
불편함보다 먼저 놀라움을 느꼈다. 범상치 않은 안법임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작정하고 전신을 살폈다면, 그들이 익힌 무공의 운용법까지 짐작했을 법했다. 허나 환관은 제자들의 손만 가볍게 훑어보고는 그만두었다.
“본관은 범화(范華)라 합니다. 수련궁교두(修練宮敎頭)의 직책을 맡고 있지요.”
“신녀문주, 서연입니다.”
서연은 담담히 포권했으나, 부복하지는 않았다. 상대가 자신을 일개 무인이 아닌 문주로 대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몸을 굽혔다가는 오히려 상대를 무시하는 꼴이 될 수도 있었다.
곧 범화는 서연을 향해 눈웃음을 지었다.
“제자분들의 자질이 너무 훌륭하여, 본의 아니게 기도를 훑는 실수를 범했습니다. 이를 어찌 만회해야 할지…….”
동창의 안법으로도 무학을 제대로 흝을 수가 없구나. 범화는 그렇게 속으로 뇌까렸다.
기껏해야 당랑암화에게서 당가의 무학 몇 가지를 읽어낸 것이 전부였다.
황태자의 전서를 사천 일대에 전달하고 운남에 도달했다. 신녀문주가 황실의 보검을 자처하는 듯한 말을 꺼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은 후였다.
황태자가 그 말을 전해 듣고 어떻게 반응할지, 범화의 눈에 선했다.
그는 수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황실을 섬겨온 충신이었다. 당연히 신녀문주에게 호의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허나 명분도 없이 호의를 건넸다가는 신녀문주의 성정상 당연히 거절할 터. 그렇기에 안법으로 제자들의 육신을 훑는 무례를 저질러 억지로 흠을 만들어내고자 하였다.
무림인들의 관점으로 보면 엄연한 무례였다.
헌데 제자들의 실력조차 제대로 가늠하지 못할 줄은 몰랐다. 검법을 익히고 있다는 사실만 얼핏 알아냈을 뿐이었다.
‘검법까지 새로 창안했단 말인가……?
일인지하 만인지상에 위치한 황태자가 절세의 심공이라는 말을 입에 담았다. 황족들이 익히는 심공에 준한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그것만으로도 대종사라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거늘, 한단계 더 나아가 검법까지 창안한 듯했다.
범화는 장차 뒤바뀔 천명검의 편제를 짐작하며 서연의 호의를 사기 위해 다시금 입을 열었다.
“이곳에 찾아오신 것을 보면 필시 대리석을 구하기 위함이라 봐야겠지요. 특상품 이상의 대리석들은 이곳이 아닌 실내에서 거래된답니다. 고관대작들이나 출입할 수 있지요.”
범화의 어조는 나긋나긋했다. 무엇보다 말투에 호의가 가득했다. 주변에서 힐끗거리는 행인들조차 그것을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특상품의 대리석은 기름 묻힌 천으로 닦지 않아도 광이 나지요. 그 중에는 불순물 한 점 없이 목련처럼 하얀 것들도 있답니다.”
“…….”
“아니면, 채석장에서 원하는 크기와 형태로 잘라가실 수 있도록 본관이 말을 해놓지요.”
“혹시 운반도 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되다마다요. 다만, 크기가 다섯 장이 넘어가면 운남 밖으로 이동하는 데에만 보름이 넘게 걸린다는 사실만 알아주셨으면 해요. 그 이후에는 배에 싣고 장강을 따라 이동하겠지요.”
그야말로 청산유수와 같은 말솜씨였다. 천하에서 심계가 가장 깊은 자들만 머문다는 북경의 환관다웠다.
‘단순히 내가 신녀문주라서 이러는 것만은 아닌 것 같구나.
대가없는 호의처럼 보이지 않았다. 받지 않는 것이 마땅했다.
황실이 구파나 세가의 무인들을 사사로히 부렸다는 소문을 들어본 적은 없었으나, 조심하여 나쁠 것은 없어보였다. 그리 결론 내리고 입을 연 순간이었다.
“마음만 감사히 받도록 하겠습…….”
후두둑.
서연의 말이 멎었다. 온 산에서 돌부스러기가 떨어진 직후였다.
뒤이어 산맥 전체가 뒤흔들리는 듯한 굉음이 일었다.
콰과과광! 쩌저저저적―!
발밑의 진동을 느낄 것도 없었다. 당장 정면에서 바위산 자체가 산산히 부서져 내려오기 시작했다.
“산사태! 산사태다!”
“병장기를 챙길 시간에 물러나라! 휩쓸렸다간 시체도 못 찾는다!”
“호, 호위……! 나를 버리고 가면 어찌하는가!”
경사가 일반적인 바위산보다 몇 배는 가파랐다. 대리석을 캐는 것을 몇 백년 동안 반복했던 탓이다.
본래 토양과 섞여 황토색을 띄어야 할 분진이 돌가루와 같은 잿빛만을 토해내는 것만 봐도 그랬다.
서연은 곧장 제자들부터 살폈다. 화련을 업고, 소소를 옆구리에 끼고, 송월 노인을 등에 업히면…….
생각이 멈췄다.
황급히 도망가려다 넘어지는 이들이 눈에 밟혔다.
‘저러다 다 죽겠구나.
놀랍게도 범화는 아직 도망가지 않은 채였다. 실력에 자신이 있는 것일까. 그렇다기에는 실력이 뒤떨어져보이는 시종들 역시 그의 곁에 자리하고 있었다.
“……벽력탄이라도 터뜨린 듯하군요. 대명의 유능한 관리들이 이를 계산하지 않았을 리 없을진대.”
산 꼭대기를 바라보며 미간을 강하게 좁혔다. 일전에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던 사람과 동일인이라고 믿기 힘들 정도였다.
본래 화약은 황실에서 엄중히 통제하는 물건이었다. 시중에 저리 풀리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뜻이다.
역적이라 칭해도 모자람이 없었다.
“물러나야겠군요. 신녀문주도 제자들을 데리고 속히 피신하는 것이.”
분노를 삭이려는 듯, 범화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허나 그는 끝내 말을 끝내지 못했다.
"……!"
옆에 서 있던 신녀문주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녀는 어느새 무너지는 산사태의 정면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재해라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다. 산사태를 코앞에 둔 서연은 그런 생각을 했다.
생각하기 전에 몸이 먼저 움직였다.
십 장이 아득히 넘는 기암괴석들이 능선을 따라 빠르게 추락하고 있었다. 앞으로 수 초면 자신을 덮칠 것이다.
“스, 스승님……!”
제자의 다급한 외침을 뒤로하고 의식을 가다듬었다. 일전에 범화가 보였던 안법을 되새기는 것이다.
우웅.
근래 들어, 빈약한 상상력이 재능의 한계를 제한하고 있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내로라하는 강자들을 상대하면서도 힘에 부쳤던 적이 한 번이 없었다. 자만할 것이 두려워 본신의 강함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했다.
정작 그러면서도 능력의 한계를 알아볼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 자만하지 않는 가장 좋은 방법이 그것이었는데도.
범화가 보였던 경맥의 흐름을 재현한다. 전신 혈도에 흐르는 기운이 양 눈에 집중되며 인지를 가속했다.
화악!
암석들의 추락이 더뎌졌다. 이전보다 세상이 느리게 보이는 것이다.
부족했다.
마음 속으로 직접 창안한 심공의 구결을 외웠다.
‘정중견진 보시자비(靜中見眞 普施慈悲).
소란에서 벗어났다. 사방을 가득 메웠던 소음이 한순간에 잦아들었다.
그리고 찰나에 내면을 관조하기 시작했다.
다음으로는 심공의 이름을 떠올렸다.
비연(飛鳶)의 연은 맹금을 뜻했다. 기러기처럼 세상을 자유로히 거닐기 위해서는, 먼저 솔개와도 같은 힘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세상은 하늘이다. 그렇기에 천공(天功)이다.
‘아.
깨달음이 사방에서 번뜩였다. 다룰 수 있는 진기의 양이 한순간에 늘어났다.
오죽했으면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강함을 되찾아간다고 느꼈을 정도였다.
영겁과도 같은 찰나가 지나갔다. 눈꺼풀을 다시 들어올렸을 때, 기암괴석들은 이전보다 아주 조금 가까워져 있었다.
풍경이 한계까지 느려졌다. 얼핏 보면 멈췄다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막을 수 있을까.
이번에도 고민하기 전에 손이 먼저 나아가고 있었다.
어느새 뽑혀나온 잔향이 도화를 머금었다.
다음 순간 서연의 팔이 흐릿해지더니, 산사태와 정면으로 충돌했다.
콰아아아아아앙!
산사태가 쏟아졌을 때보다 지면이 거세게 흔들렸다. 휘청이고 쓰러지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파사삭!
잔향에 닿은 기암괴석들이 무수히 작은 조각으로 쪼개졌다. 먼지처럼 흩어지는 조각도 있었다.
사아아―
서연은 밀려나기는 커녕 오히려 한 걸음씩 나아가기 시작했다.
한 합에 거석들이 산산조각나는 광경이 서연의 시야를 느리게 스쳤다. 개중에는 뺨이나 머리에 실선을 새기는 것도 있었다.
서연은 당황하지 않았다.
제 한계를 목도하기 위해 다시금 잔향을 내질렀다.
도화와 맞닿을 때마다 돌가루와 꽃잎이 이지러졌다.
완성되지 않았던 무학의 절초가 그녀의 손끝에서 완전히 발아했다.
등을 돌려 도망치던 사람들이 벌떡 일어선 채 같은 방향을 응시했다.
"……!"
다시금 울려퍼진 굉음과 함께 산맥이 발악하듯 성벽과도 같은 기암괴석을 다섯 개나 토해내고.
촤아아아―!
서연의 검끝에서 피어오른 도화경이 일대를 통째로 집어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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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악!
파동처럼 번져나간 바람이 진기로 이루어진 꽃잎들을 사방으로 흩날렸다.
화산의 매화와도 달랐다.
뒤돌아 도망치던 좌중은 멈춰선 채로 침묵했다. 경외와 흥분, 상황을 명확하게 인지하지 못한 이들부터, 편린이나마 읽어내고 경탄하는 이들까지.
단체로 홀린 것처럼 미풍을 타고 대리석으로 가득했던 바위산이 도화로 물드는 것을 바라봤다.
방금 전까지 죽음을 피해 다급히 도주하던 군중들이라고는 믿을 수 없다.
무인으로서의 감흥을 드러내는 호위들과는 달리, 늙은 상인들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제 발치에 살포시 떨어진 꽃잎을 집어든다.
사아악―
손이 닿는 순간 환상처럼 흩어진다. 주름으로 가득한 눈동자가 일순 동심을 머금었다.
구파의 도인들이 신선과 같은 취급을 받는 시대다. 세상의 때로 찌든 상인들이라지만, 그들도 순수했던 시절이 있었다.
어떤 이들은 상기된 표정이다. 채석장 내부로 들어오지 못하고 울타리 바깥을 얼쩡거리던 이들이다.
개중에는 부모를 따라 놀라온 소년 소녀들도 있었다.
“나, 나는 제대로 못 봤어.”
“너무 아름답다…….”
“예전에 아버지를 따라서 화산파에 가본 적이 있었는데, 그때도 이런 건 못 봤어.”
울타리에 팔을 걸터 서서 자기들끼리 이야기했다.
무장한 관인들은 아이들을 제지하지 않았다. 그들조차 도화로 가득한 능선을 보며 침음을 삼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문파의 장문인이나 보일 법한 무위였다. 경악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대장로 급이라더니, 이건 그 수준이 아니지 않은가.”
“당장 구파가 십파가 되어도 이상하지 않겠어.”
“상대적으로 약소한 문파가 밀려나겠지. 구파는 그대로 구파로 남을거요. 신녀문이 거기에 추가될 뿐이지.”
“이걸 검격이라고 볼 수 있소? 술법에 가깝다고 봐야 할 듯한데. 순수한 공력의 발경만으로 이만한 일대에 영향을 미친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되지 않소이다.”
정신을 차리고 상황을 냉정히 분석하는 사람들이 하나둘 생겨났다.
이제 그들은 돌가루와 먼지로 가득한 재해의 가운데를 향해 있었다.
엄청난 신위를 드러냈다고는 하나, 신녀문주의 안위는 또 다른 문제다.
재해에 맞서다 회생 불가의 상처를 입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하나 둘 환상처럼 흩어지는 도화경이 그러한 생각을 이끌어냈다.
묘한 느낌의 적막이 맴돌았다. 그런 생각을 품은 이들이 늘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일대를 완전히 물들였던 도화색 진기가 완전히 사라졌기 때문이다.
“…….”
환관 범화는 홀로 다른 생각을 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서연이 절세고수임을 알고 있는 유일한 외인이었다.
‘마음의 공부가 대단하구나. 이 와중에도 힘을 조절하다니.
재해로부터 민초를 지키기 위해 전력을 드러내지 않았다.
힘을 드러내지 못해 안달이 난 무도한 무림인들과는 그 결부터 달랐다. 실로 도인이라 칭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여태 속세와 떨어져 살았던 것도 이해가 되었다. 타고난 성품 자체가 도사들의 이상향에 가까웠다.
탁.
신녀문주가 납검하는 소리가 선명하게 울려퍼졌다.
화악!
일대를 뒤덮고 있던 흙먼지가 한순간에 흩어졌다.
민초들은 고개를 들고 앞을 바라봤다.
장포를 흩날리는 여인이 시야에 들어왔다.
재해에 죽립이 휩쓸리기라도 한 것일까, 어깨 아래로 길게 내려간 머리칼이 잔잔하게 물결쳤다.
도화경의 선녀들이라고 한들 저리 아름다울까. 연홍발의 고아한 자태가 돌산에 홀로 피어오른 수련 같았다.
연못에서나 피어나는 꽃이 돌산에서 피어오르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헌데 모두가 그런 생각을 했다.
“……허!”
감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등지고 서있어 얼굴을 보지 못했는데도 그랬다.
자태만으로도 고아함이 드러났다고 해야할까. 자리한 대부분이 산전수전을 겪은 상인들이라 망정이지, 민초로 가득했다면 선녀라 추앙했을 것이 훤히 보였다.
오죽했으면 관인들조차 그 사실을 부정하지 못할 정도였다.
“개파식을 여는 순간 천하가 진동하겠구나.”
“……정파가 다시 한번 고강해지겠다.”
“매화검법의 원류라도 되는가. 어찌 저리 고강한지.”
감히 아류라는 말을 입에 담지 못했다. 경지에 이른 검법을 온전히 읽어낼 만한 고수가 한 명도 없었기 때문이다.
지켜보는 이들 가운데에는 개방의 거지들도 있었다.
십만 개방도라고 하였다. 천하에 그들이 자리하지 않은 곳이 없었다.
재해에 닿지 않을 암벽 위에 여유롭게 퍼질러 앉아 있던 그들이었다.
전부 너덧개의 매듭을 가지고 있는 고수들이었다. 최소 호법, 높은 이들은 총타주라는 것이다.
관병들이 상주하고 있었기에 대놓고 접근하지 않았다. 멀찍이 떨어져서 구경하듯 자리했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전부 휩쓸려 죽을 줄 알았건만. 저건 순 괴력난신 아닌가. 어찌 여인의 몸으로 저만한 존재감을…….”
거지 하나가 감탄하듯 말했다. 매듭이 다섯 개가 달린 총타주였다.
“어쩌면 천명검단주가 도착하기 전까지 시간을 끈 사람이 신녀문주였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드는군요. 종주들을 상대로 승리를 거머쥘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수세로 일관한다면 버티기는 어렵지 않을겁니다.”
“수비에 치중된 검법인 듯한데. 종남의 천하삼십육검과 우위를 겨루면 볼만하겠어.”
안목만큼은 웬만한 무림인보다 나은 그들이었다. 맨몸으로 천하를 주유하며 온갖 것들을 마주하기 때문이다.
소문만 무성한 작자들의 실체를 마주하고 실망한 적이 적지 않았다. 신진 고수에 대한 평가가 박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종남의 절세무공에 견줄만하다는 말을 입에 담았다. 박하게 평가했는데도 그 정도라는 의미였다.
대문파의 장문인과 세가의 가주, 팔천의 종주, 마교의 칠마, 그리고 천명검의 대주들.
그들은 사람이 아니다. 신선이나 재해로 봐야 마땅했다.
작금의 신녀문주도 그들과 같은 선상에 올릴만 했다.
“……천하가 격변하겠군.”
그들의 시선 끝에는 신녀문주가 있었다.
*****
서연은 잔해로 가득한 산에서 사뿐히 내려섰다. 중간에 파편에 스치기라도 한 것일까. 오랫동안 쓰고 다녔던 죽립을 잃어버렸다.
허나 서연은 그런것에 신경쓰지 않았다. 일전에 펼쳤던 절초를 되새기느라 정신이 없었다.
‘보완할 점이 많구나.
뺨에 생긴 생채기만 보아도 그랬다. 완벽한 검법이라 부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하늘을 꿰뚫었던 점창 장문인의 검법을 떠올렸다. 그라면 어떻게 했을까.
일수에 꿰뚫지 않았을까. 어쩌면 지반에 거대한 구멍을 뚫어내 재해를 막아냈을 수도 있겠다.
‘한 번 겨뤄보면 확실히 알 듯한데.
뭇 고수들이 대련이나 도장깨기 따위를 하고 다니는지를 이해했다. 실전에서만 얻을 수 있는 깨달음이 있기 때문이다.
허나 아쉬움보다 향상심을 먼저 느꼈다. 명백한 변화였다. 그녀도 모르는 사이에 강호인의 사고방식을 체득한 것이다.
“스, 스승님.”
화련이 다가와 옷자락을 붙잡고 나서야 현실로 돌아왔다. 어린 제자가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손에는 죽립을 든 채였다. 근처 사람들에게서 받아온 모양이었다.
“고맙구나.”
서연은 화련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죽립을 썼다. 그림자로 얼굴을 가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도화색 머릿결은 여전히 그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는 뜻이다.
“……월나라의 서시(西施)가 저러했을까. 면사로 가린 이유를 알겠다.”
춘추시대의 경국지색을 입에 담았다. 그만큼이나 현실감이 다소 멀어지는 자태였다. 무인들이 힐끗거리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본관을 하루에 몇 번씩이나 놀래키시는군요.”
환관 범화가 그리 말했다.
“하남에 적을 두셨다고 들었습니다. 언젠가 정식으로 개파를 선언하신다면, 그때 찾아 뵙고 싶을 정도군요.”
“……!”
주변 상인들이 경악했다. 북경의 실세라는 수련궁교두다. 동창에게 규화보전을 가르치는 고수가 바로 그였다.
그런 이가 개파식에 참석하는 것을 언급했다. 상대를 대문파의 장문인으로 대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은혜를 입었습니다. 재해에 휩쓸려 죽어야 했을 관병들도 온전하고, 오랜 세월을 들여 재건해야 했을 채석장도 지켜냈으니, 재화로 갚을 수 없을 정도지요.”
“해야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 말에 범화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겸양이 아니라 진심으로 말한 것을 읽어냈기에 그랬다.
“이번에도 거절하시면 본관은 후안무치(厚顔無恥)한 사람이 됩니다. 호의가 아니라 응당한 대가를 받는 것이라 생각하세요.”
그가 손짓하자 옆에 있던 시종들이 서연에게 무언가를 건넸다.
“받아주시겠나이까.”
“이건?”
“방금 전에, 교두께서 말씀하셨던 사항들을 적은 문서입니다. 특상품의 대리석과 실내 경매장의 출입 권한, 고르신 물품들을 대신 결제하고 신녀문주께서 원하는 곳에 운반하겠다는 서류입니다.”
아까부터 급히 무언가를 적고 있나 했더니, 이것을 작성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산사태가 코앞까지 다가오고 있는 상황이었거늘, 이 정도 담력이 있어야 황실에 머무를 수 있는 것일까. 다른 의미로 경외심이 들었다.
서연은 이번에는 거절하지 않았다. 이렇게라도 은원을 정리하는 편이 더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서연을 지켜보며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던 범화가 입을 열었다.
“시종들을 남겨놓고 가지요.”
“어디 가십니까?”
“역적들을 잡아야지요.”
범화가 자연스럽게 발을 비튼다. 천천히 몸을 비틀면서 관군들을 이끌고 가는 모습. 명백한 고위 관료의 모습이었다.
“언젠가 다시 뵙지요.”
그가 경매장 바깥으로 걸음을 옮기자, 그새 무장을 마친 무관들이 그를 뒤따랐다.
일대에 자리하던 무관들이 사라진 뒤.
서연은 제자들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도망치지도 않고 스승을 지켜보던 과분한 아이들이다. 기특한 감정과 미안함이 동시에 솟구쳤다.
“오늘은 하루종일 각예를 하자꾸나. 일단 마음에 드는 재료부터 원없이 고르려무나.”
동시에 제자들에게 전음을 보냈다.
―심법도 배우자꾸나.
“!”
두 제자의 얼굴에 한순간에 이채가 돌았다. 당소소야 본래가 무림인이었으니 그렇다 쳐도, 화련마저 무학에 이 정도로 관심을 보일 줄은 몰랐다.
‘요즘에는 조각보다 무학을 자주 드러냈으니.
제자들은 스승의 등을 보며 자란다 했으니, 무학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는 것도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라 생각했다.
서연 일행은 어느새 시종의 안내를 따라 내부 경매장으로 들어섰다. 생각보다 넓었는데, 재해가 일어난 직후라 그런지 내부에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재해를 틈타 황실의 물건을 훔치려는 도적들이 생기기 마련. 현재 이곳에 자리한 무관들은 보화와 함께 산사태에 휩쓸리기를 각오한 자들이었다.
허나 사람인지라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였을 리가 없었다. 신녀문주를 은인이라 생각하는 자들이 적지 않았다.
“우리도 마땅히 들어갈 권한이 있소!”
“안으로 들어가게 해주시오!”
“불허한다.”
그렇기에 더욱 열성적으로 입구를 통제했다. 최대한 신녀문주의 편의를 봐주려는 것이다.
서연을 안내하던 시종도 멀리 물러나 있었다. 서연을 방해하지 않기 위함이었다.
“스승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당소소였다. 그녀는 이전보다 약간 굳은 얼굴로 말했다.
“저는 당문의 도반삼양귀원공(導反三陽歸元功)을 익혔습니다. 양기 계열의 세 가지 독기를 몸에 담는 심법이지요. 스승님의 심법은 분명 막대한 도기를 품고 있을텐데, 제자의 오성이 부족하여 완전히 제어할 자신이 없습니다.”
그녀를 독인으로 만든 심법이기도 했다. 그때도 주화입마를 겪은 탓에 사경을 헤맸다고 들었다.
“…….”
답지않게 머리와 고개를 축 늘어뜨렸다. 화련이 자그마한 손으로 그녀의 등을 툭툭 두드렸다.
“사매, 스승님이 해결해주실거야.”
화련은 그리 말하며 서연을 올려다봤다. 똘망똘망한 눈동자가 제 말이 맞지 않느냐고 묻는 듯했다.
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전신을 맥동하는 심공의 기운을 온전히 느끼면서다.
“하루면 충분할 거란다.”
*****
며칠 뒤, 신녀문주의 소식이 북경에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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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월이 떠오른 밤이다. 달이 완전히 가려진 탓에 밤하늘은 칠흑과도 같았다.
살수들이 가장 활발히 움직이는 때이기도 했다. 허나 대방파의 수장이라도 되지 않는 이상, 북경의 무사들을 뚫고 내성에 당도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황태자의 침소는 늦은 밤임에도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침상 대신 탁자에 앉은 그의 손에는 근시일에 처리해야 할 문건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산더미처럼 쌓인 문건들을 보고도 평온하기 그지없는 얼굴을 짓는 황태자.
황실의 무공을 극성까지 익힌 그였다. 일반인과는 차원이 다른 체력을 지녔다.
특수한 혈통도 한몫했다. 그의 부친이 여든이 훌쩍 넘은 나이에도 전장을 휩쓸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붓을 바삐 움직이던 황태자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입을 열었다.
“들어오라.”
“예, 전하.”
곧 문이 열리면서 약관에 불과한 듯한 외모를 가진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뾰족하게 튀어나온 귀가 청목족이라는 사실을 가감없이 드러냈다.
황제의 어린 시절 스승이자, 현 태자의 조언자인 한림원 대학사였다.
“용무를 말하라.”
무미건조한 음성이었다. 공기가 빠르게 메마르는 듯했음에도, 대학사는 내색하지 않고 고개를 조아렸다.
“암검대주가 서신을 보냈사옵니다.”
지급이라는 말은 굳이 꺼내지 않았다.
수십 년을 부친을 대신하여 국정을 도맡은 탓에, 한 마디를 듣고 열가지 속뜻을 깨닫는 경지에 다다랐기 때문이다.
문무를 겸비한 고관대작들조차 노련하기로는 황태자에 미치지 못할 정도였다.
“점창의 일을 끝맺은 모양이군.”
황태자가 중얼거리며 서신을 건네받았다.
좁혀진 미간 너머로 권태로움이 더없이 드러났다. 서신을 읽어 내려가다 다시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황상이 천명단주와 처음 마주했을 때의 일화를 아는가?”
갑자기 그 이야기를 꺼내는 진의가 무얼까. 대학사는 그런 의문을 품는 대신 대답했다.
“소신도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당연히 기억하나이다.”
늙은 황제가 아직 어린 황자였을 시절의 이야기다. 청목족인 대학사를 제외하고는 그때의 일을 기억하는 이가 없었다.
나머지는 전부 입에서 입으로 전해들었을 뿐이다.
절대자들이 절대자가 아니었을 시절의 이야기니만큼, 당연히 듣고 싶어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 이야기를 가장 많이 들었던 사내가 눈 앞의 황태자였다. 막 말문이 트였을 때부터 부친과 황실 보검의 인연에 관한 이야기를 즐겨들었다.
그 어린 나이부터 충신에 대한 동경을 품은 것이다.
“소싯적에는 천명단주를 따라다녔지. 황상을 뒤따라 황위에 오르면 그때 나의 검이 되어달라고 부탁하고 다녔다. 그때는 그것이 부끄러운 일인 줄도 몰랐다.”
황태자가 서신을 읽어내려가며 작은 미소를 지었다. 어딘가 마음에 드는 구절이라도 있었나.
“그때는 이해가 가지 않았지. 체면을 깎아서 천명단주의 충심을 얻을 수 있다면 이득이라고 생각했으니. 허나, 세상일이라는 것이 그리 간단하지 않더군. 그는 황실의 검이기 전에 황상의 검이었지. 하루는 내 면전에서 충신불사이군(忠臣不事二君)의 고사를 입에 담더군.”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일화. 제나라의 충신 왕촉이 연나라의 대장군인 악의의 권유에도 항복하지 않고 목을 매달았다는 일화이다.
“……전하.”
“일개 황자의 말이라 무게가 담기지 않아 그리 말했으리라 짐작했다. 허나 형제들을 몰아내고 다시 가서 물어도 대답은 변하지 않았지……. 그때서야 깨달았다. 언젠가 황위에 오르더라도 천명단주는 나의 검이 될 수 없겠노라고.”
황태자의 말이 이어졌다.
“구파, 세가, 사마련, 마교……. 고수들은 두 손으로 담을 수 없을 만큼 많으나, 절세고수는 고작 다섯이다. 한 번 출수하여 천하를 대적할 수 있는 이들 중에 하나조차 품지 못한 자가 어찌 황제라는 단어를 입에 담을 수 있을까. 당장 자존심 높은 호족들부터 인정하지 않겠지. 천하가 인정하게 하려면 결국 뜻을 함께하는 절세고수가 있어야 한다. 아니면 아예 황상과도 같은 힘을 가지거나.”
“…….”
불혹에 가까운 세월을 살아오며 어린 시절의 순수를 잃었던 황태자였다.
처음에는 자조하는 듯 하였으나, 들을수록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황제가 되겠다는 포부를 드러낸 것이나 다름없었다.
“전하, 암검대주가 무엇을 적어 올렸는지 소신이 확인해봐도 되겠나이까?”
허나 태자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조언을 구하려면 보여주어야 마땅하나, 그러고 싶지 않다.”
그렇게 말하며 서신을 정성스럽게 다시 포장하여 품 속에 집어넣었다. 짙은 미소를 품은 채였다.
황제의 피를 짙게 이어 수많은 이들을 숙청한 황태자와 동일인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사람이 저리 극단적으로 바뀔 수 있을까.
영생에 가까운 세월을 살아온 대학사도 경험하지 못한 일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뇌옥의 온갖 죄수들을 사면하여 내보내고 싶은 심정이다. 황상께서도 이러한 심정이셨을까. 아니지, 그 때의 천명단주는 이만한 고수가 아니었으니.”
“…….”
절세고수중 하나가 충성을 맹세하기라도 한 것일까. 허나 마땅한 이가 떠오르지 않았다.
혈사를 겪은 남궁가주는 가문을 지키기 위해 맹주 자리조차 거절하고 안휘에 남은 인간이다.
무당의 검선은 장문인 자리에서 벗어나 천하를 주유하기 바빴다.
사마련주와 마교주는 말할 것도 없었다.
‘대체…….
황태자는 생각에 잠긴 대학사의 얼굴을 보며 미소를 띄웠다. 신하가 속으로 무엇을 상상하고 있을지 짐작이 갔기에 더욱 즐거웠다.
‘무엇을 주어야 할까. 이런 적이 없어 조심스럽구나.
사마련의 악적들을 몰아내며 천명검을 자처했다 들었다. 참으로 과분한 선물을 받았다. 어찌 갚아야 할지 가늠이 가지 않았다.
민초를 대하는 인품도, 재물을 탐하지 않는 심성도 마음에 들었다.
‘어렵구나. 어려워.
허나 그러한 고민을 하는 것조차 즐거웠다. 황태자는 제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도 모른 채로 입을 열었다.
“대학사는 이만 나가 보라.”
“……예.”
대학사는 그 자리에서 돌아섰다. 오늘 일을 입 밖으로 내서는 안된다는 결심을 한 채였다.
고관대작이기 전에 황실의 신하였다. 다음 황제가 될 것이 확실시된 태자의 심기를 거스를 이유가 없었다.
황태자의 침소는 아주 오랫동안 불빛을 내뿜었다. 나중에 시비들에게 전해 듣기를, 그날 해가 뜰때까지 불이 꺼지지 않았다고 했다.
*****
보통 신공에 해당하는 무학은 익히기가 매우 복잡하고 까다롭다. 오성과 재능은 당연한 것이고, 뛰어난 스승까지 뒤따라야 겨우 대성할 수 있었다. 그조차도 십 수년은 족히 전력을 다해야 하는 일이었다.
신공이라 칭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심법이었다. 비연천공을 읽은 당소소는 그 사실을 곧장 깨달았다.
움직이면서 운기할 수 있으니 동공이요, 법가와 도가의 깨달음을 담았으니 구파의 무학에 견줄 만했다. 또한, 정종무공이라 믿기 어려울 정도로 토납 역시 신속했다.
유일한 단점은 너무 어렵다는 것이다.
‘뜻이 너무 심오하다.
구결 한 문장을 깨치기가 너무 복잡했다. 나름 사천 제일기재라 불렸는데도 그러했다.
‘단전이 전신에 있는 것처럼 생각하라니. 스승님은 상중하 단전에 구애받지 않기라도 하시는걸까.
이만한 심공을 하루 만에 입문할 수 있다는 것이 도저히 믿겨지지 않았다. 해봤자 구결의 해석을 도와주는 것이 전부라 생각했다.
허나.
“구미혈(鳩尾穴)을 중심으로 전신에 원을 그린다고 생각하려무나. 익숙해질 때까지 반복할 터이니, 전신 세맥의 흐름에 집중하렴.”
서연이 곧장 진기도인부터 시작하자 생각을 바꿔먹을 수밖에 없었다.
“다시 대주천부터 하자꾸나. 기의 흐름을 온전히 느껴야 한단다. 옥침혈부터 선환혈, 백회혈, 인당혈, 단중혈……. 되었으면 조금씩 범위를 넓혀가자꾸나. 십이정경, 기경팔맥…….”
당소소는 전신 세맥을 흐르는 스승의 진기를 느끼면서 경악했다.
단전이 실시간으로 커지고 있다. 말이 진기도인이지, 실상은 격체전력이나 다름없었다.
본디 격체전력은 타인에게 기운을 전가하는 수법이기에 엄청난 체력 소모는 물론이고, 자칫하면 경지 하락으로 직결되는 위험천만한 일.
그런데도 서연은 자신의 독기를 통제하는 수준을 넘어, 운기의 경로로 온전히 이끌고 있다.
불수가 된 아이의 전신을 허공섭물로 통제하여 억지로 걷게 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루를 언급했던 이유를 그제서야 이해했다. 천치라고 해도 이와 같은 방식이라면 심공의 묘리를 깨칠만했다.
“이제 네가 해보려무나. 아니지, 거기서는 명문혈(命門穴)을 더 굳건히 해야 한단다.”
서연은 당소소의 어깨에 손을 얹은 채로 움직이는 기운을 주시했다.
“그래, 그렇지. 완전한 원을 이루면 외압으로부터 벗어나 온전히 신체를 관조할 수 있게 된단다. 그때가 되면 타인의 진기가 감히 네 육신을 침범할 수 없게 될 것이란다.”
내가중수법이 통하지 않는 육체가 된다는 말을 들은 직후였다.
“……!”
당소소의 심장이 울리며, 체내의 기운이 크게 회전했다. 폭포에 놓인 수차와도 같았다.
진기가 회전하며 체내의 수차를 돌리고, 그 수차가 다시금 정기신에 힘을 불어넣는다.
“대성하면 네가 기운을 불어넣지 않더라도 홀로 회전할 것이란다.”
심공을 운용하는 것만으로도 정기신이 나날이 강해진다는 뜻이다.
“하아!”
허나 당소소는 대답하지 못했다. 수백 개에 달하는 전신 세맥의 흐름을 하나하나 의식해야 했기 때문이다.
매 순간 막대한 정보를 처리해야 했다. 도가와 법가의 따스한 기운이 아니었더라면 뇌가 타버렸을지도 몰랐다.
‘이걸 스승님은 매 순간 펼치고 계신다고……?
사람의 경지라 믿기 힘들었다.
내가중수법이 통하지 않는 육체가 된다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전신의 흐름을 온전히 의식하고 있는데, 어찌 타인의 진기 따위가 스며들 수 있단 말인가.
‘손가락도 못 움직이겠다.
압도적인 정보량이 쏟아지는 탓이다. 손가락 하나 움직이기 위해 통제해야할 세맥과 근육이 이렇게 많았던가.
스승님의 제자가 화련 하나뿐이었던 것도 이해가 되었다. 이건 천하에 이름을 날릴 기재여야만 입문할 수 있는 무공이다.
어렸을 때부터 독을 다루며 육체 공부를 성실히 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더라면 십 년이고 백 년이고 입문하지 못했을 것이다.
“스승님, 너무……. 너무 어려워요.”
입을 연 것은 화련이었다. 놀랍게도 서연은 제자 둘의 진기도인을 동시에 하고 있었던 것이다.
화련에게는 전음으로, 당소소에게는 육성으로 구결을 해석해줬다.
거기서 한단계 더 나아가 타인이 엿듣지 못하도록 주변에 기막까지 펼쳤다.
‘생각보다 할만하구나.
놀라운 것은, 그 모든 과정을 어렵지 않게 해냈다는 것이다. 서연조차 스스로의 능력에 놀랄 정도였다.
‘지금도 대문파의 장문인은 될 듯한데.
명백히 비교해볼 대상이 없으니 그리 추측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삼십 년을 더 몰두해야 절세고수라.
단순히 깨달음만으로는 오를 수 없는 경지인 듯했다. 그것이 아니라면 천하에 다섯밖에 없는 것을 설명할 수 없었다.
“스, 스승님. 일으켜 세워주세요.”
화련이 양 손을 겨우 뻗으며 그렇게 말했다. 서연은 그런 화련의 손을 부드럽게 잡고 끌어올렸다.
“스승님.”
“응?”
“잠시만 멈춰도 될까요. 생각할게 너무 많아서.”
“그러렴.”
“후이익…….”
그제서야 화련이 한숨을 푹 내쉬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전신이 땀으로 가득했다.
서연은 혹시나 하여 당소소를 응시했다. 화련보다 상단전이 덜 발달했던 탓일까. 당소소는 입을 여는것조차 벅차 보였다.
눈을 깜빡이는 것이 고작이었다.
서연은 마치 구조신호를 보내듯 다급히 깜빡이는 눈동자를 보며 말했다.
“소소도 멈춰도 된단다.”
“……감사, 합니다.”
그대로 뒤로 자빠졌다. 맨땅인 것을 신경쓰지 못할만큼 지친 것이다.
서연은 반쯤 탈진한 제자들을 보며 다시금 자신의 재능이 얼마나 엄청난지를 깨달았다.
과거 안휘성 근처 산에 틀어박혔을 때만 생각해도 그랬다. 누가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 무의식 중에 신공으로 호흡했다.
거기에 열반을 깨달은 육체라는 무극지체까지 더해졌으니, 당장도 깨닫지만 못했을 뿐 무의식 중에 펼치고 있는 무학이 참으로 많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무위를 찾아간다는 표현이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리라.
‘그래도, 그것보다는 빨리 절세고수가 되야 할텐데.
삼십 년은 길어도 너무 길었다.
할머니가 다 되어 고수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서연은 양 손으로 제자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런 생각을 했다.
뭇 초고수들이 들었다면 주화입마에 들고도 남을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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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련은 경공을 펼치며 무림맹원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회화루 위치는 파악했나?”
“저쪽 길목이 가장 빠릅니다. 험한 산길이라 필마(匹馬)로 가는 것보다 경공을 펼치는 편이 배는 빠릅니다.”
장산의 말이 이어졌다.
“내가 최선두에 서고, 제갈혜는 최후미를 맡는다. 나머지 진형은 자유롭게 하되, 혹 아이가 뒤처지거든 가장 가까이 있는 자가 업고 속행해라.”
화련은 짤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배려해주셔서 감사해요. 그래도 혼자 갈 수 있어요.”
염이산이 헛기침하며 부연했다.
“염려치 않으셔도 될 듯합니다. 화련이가 저보다 빠릅니다.”
“진심이냐?”
“예.”
“너는 임무 끝나고 개인 훈련이다.”
“……예.”
장산은 화련과 잠깐 눈을 마주쳤다. 둘 다 아무런 말이 없었기에, 장산이 다시 물었다.
“속도를 더욱 높이려고 하는데. 따라오기 벅차면 언제든 말하도록 하거라.”
“벅차면 말씀드릴게요.”
“알겠다.”
장산이 고개를 끄덕였다.
“최대한 빨리 가자. 특이사항이 있거든 즉시 고하고. 혹여 사마외도를 마주치게 되면 최우선적으로 아이부터 보호하도록.”
곧 무림맹원들이 속도를 높였다. 화련은 어렵지 않게 그들을 뒤따랐다. 옛날부터 경공 하나만큼은 자신있었기 때문이다.
장산은 처음에는 화련을 힐끔거렸으나, 그녀가 아무렇지 않게 뒤따르는 것을 보고는 이내 경공에 집중했다.
“…….”
대화는 일절 없었지만, 어떤 상황인지 눈치채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이따금 드러나는 무림맹원들의 심란한 얼굴이 모든 것을 설명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그나마 나았지만, 염이선이 스승님의 일을 장산에게 고했을 때까지만 해도 맹원들은 거의 공황에 걸린 사람처럼 반응했었다.
그게 사실이냐, 진짜 사실이냐, 참말로 사실이냐, 출발하신지는 얼마나 되셨냐, 뭐라 말씀하셨냐 등등.
그러다 이내 체념했는지 눈을 질끈 감고 땅이 꺼져라 한숨부터 내쉬었다. 칼에 맞아도 신음 한 번 내지 않을 것처럼 생긴 무인들이 그리 반응하니 그 파장이 더욱 크게 다가왔다.
주변에 있던 다른 맹원들도 탄식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무어라 말하려다, 화련이 옆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입을 싹 다물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 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대충 윗사람에 대한 한탄 비슷한 것이리라 화련은 짐작했다.
분위기가 딱 그러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살다 보면 윗사람의 험담 정도는 할 수 있는 법이라 여겼기에, 화련은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오히려 괜히 중간에 끼어 고생하는 듯 느껴져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어디 스승님이 보통 사람인가. 만약 입장이 바뀌어 자신이 무림맹원이었다고 생각하면 정말 끔찍할 것 같았다.
잠시 후 화양현에 도착한 화련이 제일 처음 본 것은, 팔이 부러져 바닥을 빌빌 기어대는 흑도의 졸개들이었다.
장산은 흑도들을 힐끗 쳐다보더니 손을 까닥였다.
“잔챙이들이다. 살려두신 이유가 있을 터이니 빠르게 제압하고 속행한다.”
곧 무림맹원들은 도주하려는 흑도들에게 전광석화처럼 달려들어 검집채로 내리쳤다.
일단은 기절만 시켜놓고 나중에 와서 거둬들이기로 하고, 무림맹원들은 회화루가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막 현에 들어서렸는데, 팔이 부러진 한 사내가 다급히 달려왔다. 방금 만났던 흑도들과 같은 부류인가 싶어 제압하려던 찰나, 사내가 입을 열었다.
“무림맹 분들 되십니까? 소인은 회화루의 매 각주라 합니다. 이름 모를 여고수께서 맹원분들을 뵙게 되면 관아로 가서 포쾌(捕快)들부터 데려오라 명하셔서 이리 전해드립니다.”
뜬금없는 말에 장산이 미간을 좁혔다. 언뜻 듣기엔 그럴듯했으나, 흑도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장산이 믿지 못하는 기색을 보이자, 매 각주가 다급히 덧붙였다.
“정 믿지 못하시겠다면 절 포박하시고 두세 분만 따라와주시면 안되겠습니까? 그분의 분노를 감당키 어려울 것 같아서 그럽니다.”
“…….”
그쯤 되니 장산도 매 각주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미 한 번 실수를 저지른 상황이었다. 아니, 예전에 태실산에서 벌어진 일까지 치면 이번이 두 번째였다.
만약 이번에도 실수하면?
참을 인 세 번이면 살인도 면한다는데, 마침 이번이 세 번째였다.
곧 장산의 시야에 노망난 노강호가 자신들을 매타작하는 모습이 환영처럼 아른거렸다.
“……일단 관아부터 들르지.”
이에 반대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
“네놈들을 어찌해야 좋을까.”
제 앞에 넙죽 엎드려 있는 수십 명의 흑도를 보며 서연이 나지막이 읊조렸다. 지금이 바로 인생의 아주 중요한 기로라고 생각했다.
‘무작정 패는 것도 상책은 아니다.
작금의 행동이 앞으로의 방향성을 결정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때 한 놈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살려주시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허면 네 양쪽 다리부터 부러뜨려 보아라.”
“…….”
놈은 언제 그랬냐는 듯 입을 다물었다. 사내다운 강단이라곤 없는 놈들이었다. 애초에 기대도 하지 않았기에, 서연은 한숨조차 내쉬지 않았다.
서연은 공력을 끌어올린 다음, 검집채로 내리쳐 놈의 양쪽 다리를 부러뜨렸다. 우두둑 소리와 함께 고통을 견디지 못한 놈이 기절했다. 그제야 서연은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지키지 못할 말은 입에 담지도 마라.”
흑도들의 안색이 다시 창백해졌다.
“사람을 해친 적 없는 놈들은 손을 들어라.”
“……그러면 살려주시는 겁니까?”
서연은 질문한 흑도 놈을 노려봤다. 방금 전 질문했던 놈이 어떻게 되었는지 보았을텐데도 저런 질문을 할 정도로 눈치 없고 멍청한 놈들 투성이였다. 서연은 흑도 조무래기들에 대한 평가를 짐승보다 살짝 아래로 하향 조정했다.
“일단 거수해라.”
서연이 그렇게 덧붙이자, 눈치를 보던 흑도 몇몇이 슬금슬금 손을 들었다. 수를 세어보니 십 분의 일에 살짝 못 미쳤다.
서연은 그들의 면면을 훑어보다가, 옆에 서 있던 여인들에게 물었다. 회화루주를 쓰러뜨리고 갇혀있던 기녀들을 여기까지 데려온 것이었다. 개중에는 예화가 찾던 영영이란 아이도 있었다.
“저 중에 거짓을 고하는 자가 있다면 말씀해주십시오.”
“…….”
기녀들은 후폭풍이 두려웠는지 입을 다물었다. 서연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고개 숙이고 눈 감아라.”
눈치를 보던 흑도들은 서연이 검집을 만지작거리자 망설임 없이 고개를 처박았다. 서연은 다시 기녀들에게 물었다.
“손짓이나 눈짓으로 알려주셔도 됩니다. 눈치 볼 필요도 없습니다.”
그제서야 기녀들이 한 놈을 가리켰다. 주변 눈치를 보다가 세 번째에 손을 들었던 놈이었다.
“……염치도 없는 놈이었구나.”
서연은 발검한 채 놈에게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놈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치켜들었지만, 이미 늦어도 한참 늦은 후였다.
뻐억― 소리와 함께 놈의 몸이 그대로 땅바닥에 처박혔다. 굉음에 몇몇 흑도 놈들이 움찔거렸지만, 마른침만 삼킬 뿐 움직이는 놈은 하나도 없었다.
서연이 다시 입을 열었다.
“여인을 납치하거나, 겁탈하거나, 능욕한 적이 없는 놈은 일어나라.”
방금 전 일을 겪어서인지, 이번에는 일어난 사람이 고작 한 명뿐이었다. 공교롭게도 방금 전 일어났던 놈들 중 하나였다. 서연은 다시금 기녀들을 쳐다봤다.
기녀들은 이번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희들한테는 잘 해줬어요.”
“가끔씩 식사에 당과도 넣어줬어요.”
제법 제대로 된 놈이었다. 이제 보니 나이도 어린것이, 흑도에 몸을 담은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아 보였다.
“너는 저쪽 구석으로 가라.”
“……알겠습니다.”
감사하다는 말을 하지 않은 것도 마음에 들었다. 최소한의 염치는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몇 번의 문답을 반복하다 보니, 얼추 인간과 짐승의 경계가 뚜렷이 드러났다. 그때, 조용히 지켜보던 기녀 하나가 슬며시 입을 열었다. 유독 앳되어 보이던 기녀였다.
“저, 여고수님. 혹시 저희는 이제 어떻게 되나요? 쫓겨나나요? 회화루가 사라지면 저희가 갈 곳이 없어서요. 할 줄 아는 게 춤이랑 노래밖에 없거든요.”
맥락 없는 질문에서부터 어린 나이가 느껴졌다.
“옛날에 살던 곳으로 돌아가도 또 팔릴거에요. 예전에 매향각에서 일했을 때도 그랬어요. 포쾌들이 들이닥쳐서 저희들을 다 풀어주고,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노잣돈도 줬었는데, 아버지한테 노잣돈도 빼앗기고 다시 팔렸어요.”
기녀는 울먹거리지도 않았다. 이런 삶에 익숙해진 까닭이었다.
문득, 힘이 없으면 행복조차 누릴 수 없는 시대라는 생각이 들었다.
흑도가 사라지면 그 자리에 새로운 흑도가 생긴다.
회화루 또한 마찬가지였다. 불태워 없앤다 한들 머지않아 이름만 바꾼 새로운 회화루가 생겨날 터였다.
“…….”
서연의 고민이 깊어졌다.
*****
“이쪽으로.”
매 각주는 살면서 이런 일이 있을까 싶었다.
‘살다살다 무림맹원들과 포두를 동시에 안내하게 될 줄은.
포쾌들을 이끄는 자가 바로 포두였다. 비록 작은 현의 포두이기는 하나, 엄연히 무공을 익힌 무관이었다.
평소 제 실력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 인물이었는데, 무림맹원들을 마주하고는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것을 보니 맹원들의 역량에는 미치지 못했던 모양이다.
사실 관아로 들어서자마자 체포될 줄 알았다. 애초에 그럴 각오로 갔었다. 허나 정신을 차려보니, 선두에 서서 길을 안내하고 있는 기묘한 상황이었다.
‘모르겠다. 죽으면 죽겠지.
이미 반쯤 내놓은 목숨이었다. 체념한 매 각주는 회화루의 정문으로 들어섰다. 은밀히 움직일 필요가 없었기에 이쪽으로 들어온 것이다. 비밀통로가 있다는 것도 미리 일러두었으니, 누가 도망칠 것을 염려할 필요도 없었다.
회화루는 고요했다. 본래 포쾌들을 이만큼 끌고 왔다면 누구라도 반응했을 터인데 말이다.
‘그새 다 죽은건가.
그만한 여고수라면 그리하고도 남았을 것 같긴 했다. 회화루주가 이 현에서는 강했으나, 현 밖으로 나가면 삼류라는 사실을 매 각주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최상층으로 올라가자, 예상과는 전혀 다른 광경이 펼쳐졌다. 회화루주의 방은 쓰러져 신음하는 흑도(黑道) 무인들로 가득했다. 그중 몇몇은 비교적 멀쩡한 모습이었는데, 쓰러져 있는 흑도들을 밧줄로 꽁꽁 포박하고 있었다.
그중 한 사내가 매 각주를 발견하고는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매 각주님?”
“너희는 여기서 뭘 하고 있는거냐?”
“그, 웬 고수님이 나타나셔서 짐승만도 못한 놈들을 묶으라 명하셔서 그리 하고 있었습니다.”
“짐승……?”
곧이어 따라 들어온 맹원들과 포쾌들의 시선에도 경악과 놀람이 가득했다.
“완전히 병신을 만들어놨군.”
놀란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던 포두가 중얼거렸다.
회화루주는 말 그대로 숨만 겨우 붙어 있는 상황이었다. 단전은 완전히 부서졌고, 팔다리의 근육도 죄다 끊어진 처참한 몰골이었다. 작살난 오른팔을 보건대, 장력 싸움을 하다가 이리 되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맨손으로 이렇게 만들었다고?
황태자의 친위대, 천명검(天命劍)이 떠오를 정도의 손속이었다. 황실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그 숫자가 수백이 넘는다고 했던가. 평범한 무인 행세를 하고 다니다가, 선을 넘은 탐관오리나 무림인이 있으면 검을 뽑아 징치(懲治)한다는 소문을 들어본 적이 있었다.
그래서일까, 포두는 흑도들을 죽이지 않고 살려둔 것이 자신에게 보내는 경고라고 느꼈다.
포두가 다급히 물었다.
“그 고수분은 어디로 가셨느냐.”
“어디로 가셨다니요?”
사내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저기 계시지 않습니까.”
모두의 시선이 사내의 손끝으로 향했다.
본래 회화루주의 자리였을 태사의(太師椅), 그 앞에 한 여인이 앉아 있었다.
여인은 사색에 잠긴 듯,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고 있었다. 열린 창문에서 바람이 흘러들어오며, 면사가 천천히 옆으로 흩날렸다.
그 때문일까, 순간적으로 시선이 엉켰다. 실로 절세라 부족함이 없는 외모에, 남녀를 가리지 않고 모두가 경탄을 금치 못했다.
“헉!”
설마 하는 얼굴로 서연을 응시하던 매 각주가 비명을 지르듯 소리쳤다.
동시에 눈을 질끈 감고 얼굴을 감싸는 모습이 아주 우스꽝스러웠는데, 그 덕에 정신을 차린 이도 적지 않았다.
“……안 굳었다? 왜 움직여지는 거지?”
매 각주는 호들갑을 떨며 주변의 눈치를 봤다. 서연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해 할 수 있는 말이었다.
“푸헤헹.”
순간 웃음을 참지 못한 화련이었다. 괜히 웃음을 참으려다 더욱 바람 빠진 소리를 뱉어내고 말았다.
“……죄송합니다.”
괜히 뻘쭘해진 화련이 사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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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해가 밝았다.
창 밖으로 하얀 눈이 내려앉아 있었다. 귀빈을 모시는 방의 창가에서 찬바람이 한차례 몰아쳤다.
한겨울의 찬바람이다. 침소에서 막 일어난 터라 추위를 느낄만도 하였으나, 서연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몸을 갈무리했다.
명백한 한서불침의 화후였다. 최근에야 그것을 인지했다.
‘예전에는 그저 추위에 강한 줄만 알았거늘.
서연은 곧장 옷을 챙겨입은 다음 바깥으로 나섰다.
제자들은 아침부터 수련장에 서 있었다.
“……후우, 하아.”
“스승님, 죄송합니다. 문안, 인사를 드렸어야 했는데.”
이른 아침부터 심법을 펼치고 있었는지 호흡이 가파랐다. 얼마나 노력했는지 며칠만에 일취월장한 듯했다.
당장 당소소만 해도 입으로 대화를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화련은 어기적거리며 걷고 있었다. 사지에 무게추를 매단 사람이나 보일 법한 걸음이었다.
‘열심히 하는구나. 끼니는 거르지 말아야할텐데.
서연은 그런 제자들을 보며 기특함을 느꼈다.
환관 범화가 서찰을 보내왔다. 서연이 말했던 대리석들을 하남으로 옮기는 중이라고 했다.
높은 사람과 인연을 맺어두어 나쁠 것은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행낭에 곱게 넣어두었다.
낙양 부윤에게 받았던 명예 관직 임명서나 장문인들에게 건네받은 각패들 역시 이곳에 넣어두었다.
범화의 서찰 역시 이곳에 넣어둘 만했다.
[……앞으로 두어 달이면 낙양에 대리석이 도착할 겁니다. 신녀문주께서 언제 하남으로 돌아가실지 모르니, 일단은 금룡표국에 맡겨 놓기로 했습니다. 말은 해두었으니 언제든 수령하실 수 있을겁니다.
본관은 환관인지라, 본의 아니게 문주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듣습니다. 자연스레 예전에 각예대회에 참여하신 적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요. 기왕이면 연이 있는 상단에 맡기는 것이 좋을 듯하여 그리 진행하였습니다.
양이 아주 많습니다. 웬만한 공방에서도 수 년을 족히 쓸 수 있는 양이지요. 제자들과 함께 사용하셔도 부족함이 없을겁니다.
본디 역적들에 관한 이야기를 적어서는 아니되지만, 신녀문주를 외인으로 치부할 수 없으니 말씀드리지요. 궁금하실 것 아닙니까.
대월국에서 온 자들인 듯 합니다. 억양부터 중원인이 아니더군요.
할 일이 많은지라, 이만 줄이겠습니다.
수련궁교두 범화.]
역적들을 쫓는 중에 급하게 써올리기라도 했는지, 글씨의 획이 군데군데 흔들려 있었다.
‘환관들도 북경에만 있는 것은 아니구나.
말로만 민초들의 안위를 입에 담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 여태 돌아다니며 부정부패한 관리들을 본 적은 없었으니…….
기껏해야 예전에 회화루주를 징치했을 때 만났던 지현 정도가 부패했다고 해야할까.
천명검과 여타 관리들이 그만큼 잘 관리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맞으리라.
어느새 서연은 제 몸통만한 대리석 덩어리 앞에 당도해 있었다. 모든 대리석을 하남으로 보낸 것은 아니었다. 일부는 이곳, 점창파의 속가로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검술도 소홀히 할 수 없지.
서연이 창안한 유검, 제자들은 천녀유검이라는 거창한 이름으로 불러대기는 하였지만, 아무튼.
유검의 본질은 각예다. 검의 끝을 보려면 각예의 끝을 봐야 했다. 적어도 서연은 그렇게 여겼다.
허나 서연은 곧장 각예를 시작하는 대신 한동안 대리석을 노려보기만 했다. 몇 번 사용해보지 못한 재료였으나,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는 알았다. 일전에 산사태에 저항하며 파악했기 때문이다.
초고수의 검흔이 그 자체로 깨달음이 되듯, 서연 역시 각예로 그만한 경지에 도달하고자 했다.
한동안 적막이 계속됐다.
신녀문주에게 아침을 전달하기 위해 열린 문으로 들어오려던 시비들이 어색하게 몸을 돌렸다. 식은 밥을 들고 되돌아온 시비들을 문책하려던 주인도 신녀문주의 등을 보고는 별말 않고 돌아섰다.
어느새 소문을 듣고 다른 사람들이 하나둘 몰려들었다. 해가 중천까지 뜬 시점이었다.
하늘은 눈구름으로 가득했다. 그 탓에 바깥이 꽤나 어둑했다.
“……점심은 어찌 하셨느냐?”
“거르셨습니다. 완전히 몰입하신 듯하여 감히 다가가지도 못했습니다. 저같은 무지렁이가 잘못 건드렸다가 화를 입으실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기는 하다만…….”
다들 기척을 죽인 채로 신녀문주를 지켜보기만 했다.
“칼질이라도 하시려는 걸까.”
“단순히 검파의 위력을 가다듬을 요량이시라면 청강석을 사용하셨을 터인데.”
쇠만큼 단단하다는 암석을 말했다. 무림맹의 무사들을 뽑을 때 위력을 가늠하기 위해 사용한다던가. 명문 점창의 속가인 탓에, 시비들도 최소한의 안목과 견문이 있었다.
곧 그들의 시선이 신녀문주의 손에 들린 조각칼로 향했다.
“특이하게 생긴 단도구나. 아니지, 각예에 사용하는 칼인가.”
“혹 모르지요. 신녀문주의 독문병기일수도.”
문 너머에서 흘깃 안쪽을 살피는 이들이 늘었다. 당소소와 화련도 어느새 그들에 합류했다.
그 와중에도 심공을 운용하고 있던 터라 걸음이 더뎠다.
그때였다.
신녀문주의 한 손이 자연스럽게 위로 솟구쳤다.
쥘부채를 펼치듯 느릿하게 종(縱)으로 올려치는 일격이었다.
제자들에게 보여주는 것이 목적인 듯, 더없이 천천히 뻗어냈다. 자로 잰 듯 조각도 끝에서 피어오른 경파가 대리석에 흔적을 새겼다.
진기의 일부가 대리석에 새겨진 것이다. 신녀문주가 정지한지 오래였음에도 새겨진 진기만큼은 멈출 줄 모르고 앞서 나아갔다.
촤아악!
마치 종잇장을 베어넘기는 듯한 소리가 선명하게 울렸다.
두 제자의 안색이 더욱 희게 질렸다. 서연과 같은 심공을 익히고 있었기에 보았다.
천녀유검의 제일초였다.
연화비영보와 조화되어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언뜻 보면 조각이 아니라 막무가내로 흠집을 내는 듯했다.
제이초 파풍유영까지도 그랬다. 이어지는 손짓에 대리석이 파편을 토해냈다.
검격이 어찌나 정밀한지 절단면이 매끈했다. 검격이 지나간지 한참 지났음에도 표면에 도화색 진기가 맴돌았다.
화아악!
제삼초부터는 달랐다. 빛줄기가 몰아치며 대리석의 표면에 선명한 획을 그었다. 일필휘지로 글귀를 써내려가는 듯했다.
뭣 모르는 타인들이 보기에는 그저 매끄러운 궤적이었다.
“…….”
그것만으로도 숨을 죽이고 침묵했다. 조각도 끝에 느껴지는 저항감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칼날이 늘어나기라도 하는 것일까. 조각도의 날보다 수십 배는 두꺼운 대리석이 두부처럼 잘려나가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놀라기만 했다.
“아……!”
두 제자는 달랐다. 심공을 익혀서 그런 것일까. 획이 그어진 순서가 선명하게 보였다. 정립된 무공의 수련법이 담긴 교범이나 마찬가지였다.
면면부절 이어지는 흐름이 있다.
오래간 은둔했던 여인이 첫 유랑을 마음먹었을 때 완성한 검이다.
모든 순간이 결심이었다.
빛이 피어오르며 유검의 절초가 피어올랐다. 일전에 산사태를 분쇄했던 일격이었다.
파벽참원(破壁斬願). 가로막는 것을 넘어 원하는 것만 베어넘긴다.
광채가 대리석을 통과하여 구름을 산란시켰다. 뒤이어 광채가 폭발하듯 선명했던 눈구름을 완전히 흝어놓았다.
분쇄되는 듯했다. 하늘이 한순간이나마 맑게 개였다.
‘좋다. 그때보다 훨씬 낫구나.
검법의 성격을 다시금 바꾼 것이다. 제자들이 이것을 익힌다면, 산사태에 휩쓸리더라도 몸 성히 빠져나올 수 있을 것이다. 잔해가 감히 접근하지 못할테니 말이다.
거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면 재해에 맞서는 것도 가능하리라.
“어…….”
당소소는 저도 모르게 침음을 흘렸다가 입을 다물었다. 명백한 무례였음에도 타박하는 사람이 하나 없었다.
다들 그녀와 같은 심정이었기 때문이다.
종남의 검과 닮았다. 천하삼십육검을 의미하는 것이다. 천하에서 틈이 없기로는 첫손에 꼽는다는 검법이었다.
허나 서연의 검법은 막아낸다기보다는 연이어 뻗어친다는 느낌이 강했다.
모든 투로가 최적의 경로를 담았다. 검법이 이어질수록 한겨울의 서늘한 공기가 점차 가열되는 듯했다.
사아아―
뚫린 구름의 틈 사이로 빛이 산란되어 반짝였다.
그 아래에 놓인 대리석은 내리쬐는 햇볕을 온전히 받아냈다.
마지막 검격은 하늘에 새긴 것이다. 일개 암석으로는 감당할 수 없었음이다.
“…….”
두 제자는 경악을 감추지 않은 채로 제 스승의 등을 응시했다.
스스로 뿌듯함을 느끼는 서연과는 정반대의 감정을 느꼈다.
‘하늘을 베어야……. 대성한다고……?
‘맙소사.
아득함을 먼저 느꼈다. 도대체 포부가 얼마나 거대해야 구름에 대고 각예할 생각을 했을까.
창천을 오간다는 교룡이나 그럴 수 있을 것이다.
‘오늘도 잠은 다 잤구나.
화련의 눈동자는 어느새 생기를 잃었다.
*****
그새 구경꾼이 이렇게나 많이 모였던가. 서연은 뒤를 돌아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미처 몰랐다. 점창파의 속가 내부라서 거기까지는 신경쓰지 못했다. 검식을 정립하느라 물아일체에 들었던 탓이 컸다.
‘그래도, 검식의 진의를 깨우칠만한 사람은 없어보이니.
점창파 장문인은 와야 알아보지 않을까. 이 정도는 그간 거처를 선뜻 내어준 것에 대한 호의라 생각해도 될 듯했다.
‘이건 나중에 제자들을 가르칠 때 써야겠다.
비슷하게만 깎아내도 검법을 완숙하게 구사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유검의 검격이 새겨진 대리석을 집어든 순간이었다.
근처에서 소란이 들려왔다. 점창 속가의 담장 너머였다.
“광동진가(廣東陳家)가 멸문했소! 섬뢰도광(閃雷刀光)이 마영종주에게 패사했더이다!”
“팔대세가가 멸문했단 말이오……?”
“세상이 흉흉하구려. 어찌 이런 일이…….”
좌중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음?”
팔대세가의 가주가 허망하게 죽었다. 서연이 황망하다는 얼굴을 했다.
운남에서 광동까지의 거리는 족히 수천 리가 넘었다. 그렇다는 뜻은, 점창파와 비슷한 시기에 습격당했다는 뜻이었다.
“……사마련이 이곳으로 다시 쳐들어오면 어찌해야 하오?”
“점창파가 봉문했다고는 하나, 사마련의 악적들이 그런 사정을 봐줄 리가 없소.”
“지금이라도 피난을 가야 하는가.”
“신녀문주께서 계시지 않소.”
“예끼, 이 사람아! 그 분은 곧 떠나실 분이야! 인세에 계실 분이 아니라고!”
민심이 동요하는 것이 훤히 보였다. 담장 너머에 있었는데도 굳은 분위기가 느껴졌다.
오죽했으면 점창 속가 시비들의 표정마저 심각하게 변했을 정도였다.
곧장 또 다른 일이 일어났다.
“무림맹이 당도하였으니 강호 동도들께서는 안심하십시오!”
사자후와도 같은 외침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목소리에 담은 공력이 어찌나 방대한지, 지붕이나 담벼락에 쌓여 있던 눈송이가 한순간에 사방으로 흩어질 정도였다.
웅성거림이 멈췄다. 서연의 시선 역시 어느새 담벼락 너머를 향해 있었다.
얼핏 보기에도 적지 않은 무인들이 맹원의 복장을 한 채로 서 있었다. 무력대 하나가 통째로 운남 땅으로 내려온 듯했다.
섬서성 서안에서 여기까지 아득한 거리를 달려온 것이다. 일이 터지자마자 나섰다고 봐야 옳았다.
하나같이 극한까지 단련된 무인이었다. 화산이 자랑하는 매화검수들이 저러할까.
‘무림맹주는 절세고수가 아니라 들었는데.
절세고수에 근접한 고수이리라 짐작했다. 제자들을 직접 가르쳐보니 자연스럽게 그리 생각하게 되었다.
보통의 훈련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경지다. 천하에서 손에 꼽는 초고수의 가르침이 더해진 것이 아니라면 불가능했다.
동요하는 민심을 다독이기에는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겉으로 드러난 것이 저 정도라면, 운남의 암중에서 돌아다니는 세력은 저것보다 거대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을 하던 서연의 눈가에, 낯익은 여인이 들어왔다.
“……천명검은 나서지 않는 걸까요?”
“천명단주가 직접 왔다 갔으니, 그것으로 충분한 경고가 되었다고 여기는 것이겠죠. 후폭풍은 생각조차 하지 않고 민초를 수호한다는 기치를 내세우다니. 모순 덩어리에요.”
“임 소저의 생각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신녀문주를 뵈고 싶어요. 그만한 여고수가 새로 등장한 것이 얼마 만인지.”
“아직 알려지지 않은 신비문파라 하던데. 대체 얼마나 고강하기에 깐깐한 개방의 거지들이 그렇게 평했을지 궁금해요.”
푸른색 유삼이 굉장히 잘 어울리는 여인이었다. 수많은 후기지수들이 떠드는 와중에도 홀로 입을 다물고 있었다.
돋보이는 외모를 가진 탓에, 맹원들은 물론이거니와 많은 민초들의 눈길이 그녀에게로 쏠렸다.
검봉(劍鳳), 남궁설화.
그녀는 다른 후기지수들의 말에 적당히 호응하며 주변을 살폈다. 절세의 안법으로 자신들에게 살기를 보내는 사마외도를 가려내려는 의도였다.
‘음?
순간 남궁설화는 갑자기 자신의 검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우우웅―!
일 년 전, 절세 여고수에게서 선물받았던 목검이었다.
뒤이어 남궁설화는 자신을 향해 쏘아지는 세찬 시선을 느꼈다.
“……!”
점창 속가의 담벼락 너머에서, 웬 여인이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전신에서 새어나오는 기파로 인해 이목구비가 흐릿했다. 남궁설화는 저도 모르게 섬뜩함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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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녕 사람인가?
남궁설화는 저도 모르게 숨을 참았다.
한순간에 경악으로 질린 얼굴을 감출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녀는 눈에 띄게 굳은 얼굴로 담벼락 너머를 응시했다.
남궁세가는 검가로도 유명했지만, 기관진식과 진법을 다루는 뇌가로도 적잖은 명성을 떨친 명문이었다.
남궁설화는 둘 중 진법을 익히는 것에 훨씬 많은 노력과 시간을 쏟았다. 재능도 타고났다. 바둑돌 몇 개만으로도 온갖 종류의 진법을 구사할 줄 알았다.
진법을 다루기 위해서는 삼라만상의 이치를 꿰뚫어 보아야 했다. 당연히 안법이 발달했을 수밖에 없었다.
검존 남궁세인이 직접 전수해준 안법인 탓에, 당연히 절세의 영역에 속해 있었다.
먼 운남까지 차출된 것은 그 때문이었다. 웬만한 중견고수보다 그녀의 안목이 뛰어났다. 발걸음과 같은 사소한 몸짓에서 근본을 유추하여 잡아낸 사파 고수가 적지 않았다.
저렇게 흐릿하게 보여서는 안 된단 말이다.
“……!”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기파를 인위적으로 통제하는 경지에 이르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기예였다.
“남궁 소저는 아까부터 어딜 그렇게 쳐다보시는 건가요?”
“담벼락에 걸린 거미줄이라도 보았나 보오. 우리와 달리 안법이 특출나지 않은가. 같은 풍광을 마주해도 거슬릴 것이 곱절은 많겠지.”
옆에 있는 후기지수들이 상대를 인지조차 하지 못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그녀 자신조차도 절세의 안법이 없었다면 자연지물이라 생각하고 넘겼을 것이다.
그뿐이랴.
‘대체, 아까부터 왜 이렇게 흔들리냔 말이야.
방금 전부터 절세고수에게 건네받았던 목검이 세차게 떨리고 있었다. 최고급 흑단으로 깎아낸 목검이었다.
절세고수의 손이 닿은 탓인지 신령스러운 기운이 깃들었다. 제갈가의 고수들이 쥘부채로 진법을 다루는 것처럼, 그녀 역시 목검을 방위침처럼 활용하여 진법을 펼쳤다.
애병이 되었다는 것이다. 근래 들어서는 진검보다 이 목검을 자주 활용할 정도였다.
검존의 차녀인 만큼 마주하는 인사들도 하나같이 거물이었다. 대문파의 수장들을 마주했을 때도 한 번을 떤 적이 없었다.
우우웅!
헌데 지금은 불안할 정도로 떨어댔다. 오죽했으면 떨림을 감추기 위해 손목에 힘을 주고 있어야 했을 정도다.
곧 근처의 후기지수들도 이변을 알아차렸다. 남궁설화가 양 손으로 목검을 굳세게 붙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삭막한 분위기 따위에 긴장할 위인이 아니라는 것을 모두가 잘 알았다. 그녀가 진법의 매개로 사용하는 목검이 보통 물건이 아니라는 것 역시 알았다.
화악!
곧 모두가 태세를 전환했다. 주변을 세찬 눈으로 응시하는 이들은 예사요, 아예 검집에 손을 올리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사실상 기수식을 취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혈기왕성한 무인이기에 그렇게 반응했다.
철저한 훈련을 거친 맹원들은 오히려 침착하게 대응했다.
“경계하되, 지나치게 내색하지는 마라. 이런 곳에서 전투가 벌어졌다가는 후환을 감당하기 힘들다.”
유독 연륜이 느껴지는 중년인이 중얼거렸다.
섬전은창(閃電銀槍) 악천승. 산동악가 출신의 무인이자, 무림맹 오대주였다.
주변을 둘러싼 인파가 동요하기라도 하면 사태가 겉잡을 수 없이 커질 것을 직감했다.
태연함을 가장하며 곧장 남궁설화에게 전음을 보냈다. 기세를 갈무리하고 정면으로 걸으라는 전성을 보낸 직후였다.
―상황을 설명하라.
―명확히 파악하지 못했어요. 자칫 삿된 정보로 대주의 눈을 흐릴까 저어됩니다.
전음을 보낼 때 생기는 목울대의 울렁임조차 조심하는 듯했다.
남궁가의 검봉은 작은 행동 하나에 수십가지 뜻을 숨기는 기재다. 절세고수의 딸이기 전에, 스스로의 능력으로 위치를 증명한 인물이라는 것이다.
무림에는 수십 장 너머에서도 입매의 떨림과 심장의 박동의 변화를 인지하는 기인이사들이 즐비했다. 악천승은 남궁설화의 반응으로부터 전음조차 조심해야 할 상황이라는 것을 인지했다.
―이해했다.
곧장 경로를 틀었다. 점창 속가로 향하려는 것이다. 신녀문주가 기거하고 있다는 정보를 파악하고 있었기에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신녀문주의 위명을 익히 들었다. 보기 드문 협사라고 하던가. 운남 최대 규모의 채석장에서 그녀가 산사태를 갈아냈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운남의 민초들이 크게 동요하지 않을 수 있는 것도 그녀의 덕이 컸다. 도화신녀라는 별호에서부터 더없는 경외가 드러났다.
의지하기 충분한 강자이자 협사라는 것이다.
“…….”
남궁설화는 침음을 삼켰다. 악천승의 발걸음에서부터 목적지를 짐작했기 때문이다.
일전에 느꼈던 인기척은 사라진지 오래였다. 허나 그녀가 남긴 기파만큼은 여전히 점창 속가의 담벼락에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심장이 거세게 두근거렸다. 전신의 감각이 일전에 보았던 것이 실체가 맞았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만한 고수가 작정하였다면 인지하기도 전에 고혼이 되었을 것이다. 고의적으로 스스로를 드러냈다고 봐야 옳았다.
그녀가 순순히 점창 속가로 향하는 것은 그 때문이었다.
신녀문주, 아니면 그녀와 연이 있는 다른 여인일 가능성도 있었다.
도문답지 않게 검격이 패도적이라고 하였다. 견문이 부족하여 자신이 오해했을 가능성도 있었다.
보통 그 정도 되는 절대자들은 하수들에게 자신의 몸가짐조차 드러내지 않았다. 격이 떨어진다는 이유에서였다.
기파를 휘장처럼 펼쳐 음영으로만 드러내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저 흥미만 드러내신 것을 내가 오해하였을 수도.
검이 멋대로 반응한 탓에 판단이 늦었다.
남궁설화를 비롯한 맹원들은 곧장 점창의 속가로 들어섰다. 무림맹이 점창에 방문하는 일이다. 이상함을 느끼는 민초는 없었다.
점창 속가는 맹원들을 기쁘게 맞이했다.
앞으로 운남에서 벌어질 전투의 대부분은 소모전이 될 확률이 높았다. 그렇기에 무림맹이 찾아온 것을 기꺼이 여길 수 밖에 없었다.
“환대에 감사하오.”
오대주 악천승이 속가주와 인사를 나누는 사이, 남궁설화는 속가의 내부를 천천히 흝어보았다.
속가치고는 내부가 굉장히 넓었다. 족히 열 장을 넘는 방이 다섯이 넘었다.
남궁설화는 곧장 후원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시선을 느꼈기 때문이다.
“남궁 소저, 지금은 괜찮으세요?”
“그렇게 떠는 것을 처음 보았소. 힘들면 의지해도 좋소이다. 같은 동료 아니요.”
“……모용 공자. 지금 남궁 소저에게 흑심을 드러내는 건가요?”
“그쪽이 쓸데없이 민감하게 반응하는 듯하오만?”
보기 좋게 깔린 돌바닥을 거닐며 담소를 나눈다.
다들 긴장이 어느정도 풀린 상태였다.
후원의 마루에 웬 여인이 누워 있었다.
다리를 길게 늘어뜨린 채 이쪽을 향해 눈동자만 돌리는 모습.
아름다운 외양 탓일까, 그조차도 매력으로 다가왔다.
남궁설화는 영민한 머리로 뭇 고수와 후기지수들의 용모파기를 모두 암기하고 있었다.
당연히 여인의 신분을 곧장 알아차렸다. 녹색 눈동자가 유독 선명한 여인이었다.
“남궁세가의 남궁설화에요. 그쪽은 당랑암화가 맞으시죠?”
“……예.”
붉은 입술을 힘겹게 달싹였다. 눈동자에서 힘이 느껴지지 않았다. 옆에는 어린 소녀가 앉아서 당랑암화의 입에 설탕 조각 따위를 넣어주고 있었다.
“당랑암화? 사천당문의 직계를 이런 곳에서 다 뵙게 되네요.”
옆에 있던 후기지수가 아양을 떨었다. 황보세가의 여식이었다. 허나 돌아오는 대답은 무심했다.
“후원은 현재 신녀문주께서 사용하고 계시니, 외인들은 자리를 비켜주십시오.”
“사매, 무림맹 분들이래.”
“그렇군요. 맹원 분들은 나가주십시오.”
“…….”
얼핏 보면 무례하다 느끼기에 충분한 언행이었다. 당소소의 전신에 탈력감이 깃들어 있지 않았더라면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예의를 차리기는커녕 손가락을 까딱할 힘조차 없는 듯했다.
그때 당소소의 입에 설탕을 넣어주던 소녀가 일어섰다.
“죄송해요. 사매가 새벽부터 고되게 수련해서, 무림맹 분들을 맞이할 힘이 없네요. 저는 신녀문의 화련이라 해요.”
낭랑한 목소리로 상황을 설명했다. 어린 나이의 소녀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씩씩했다.
“점창의 은인이신 스승님께서는 이따금 화원에서 검술을 펼치시고는 하신답니다. 무림맹 분들께서 스승님의 검술을 견식하고자 하셨다면, 이리 걸음하시면 아니되어요. 마땅히 허락부터 받으셔야지요.”
똑부러지는 목소리로 저리 말하는 것이 귀여웠다.
‘쓰다듬고 싶은데.
오죽했으면 공과 사의 구분이 확실한 남궁설화조차 그리 생각했을 정도였다.
“이토록 어린 나이에. 신녀문주께서 제자로 들인 연유를 알겠어요. 신녀문의 미래가 밝겠군요.”
사악.
황보세가의 여식이 손을 뻗었다. 신력을 타고난 세가의 여식답게, 단순한 움직임에도 금나수의 묘리가 깃들어 있었다.
쓰다듬으려는 것이다.
화련은 질색하며 상체를 틀었다. 반사적으로 연화비영보를 펼친 것이다.
한 걸음 물러서는 것으로 몹시 자연스럽게 손짓을 피했다. 황보세가 여식의 손은 애꿎은 허공을 흝었다.
“어…….”
화련은 미간을 거세게 좁혔다. 후기지수들을 올려다보면서였다.
곧장 머릿속으로 어린아이나 떠올릴 법한 저주를 퍼부었다.
주제도 모르고 내 머리를 쓰다듬으려 해? 일평생 어머니와 스승님에게만 허락했던 머리라고. 망할 올빼미도 내 머리는 못 건드려.
“……제가 나이는 어리지만, 배분으로 치면 여러분보다 낮지 않다고 생각해요. 일문의 장문제자로 대해주셔야 옳다고 생각해요.”
너희들 최고 상관이라고 해야 맹주잖아. 우리 스승님은 무려 절세고수라고.
“곧 스승님이 돌아오실거에요. 그때까지도 떠나지 않으신다면 상황 설명을 잘 하셔야 할거에요.”
후환을 감당해야 할거야. 분명 입에 당과를 가득 채운 다음 너희의 뺨을 치실거라고.
그러는 중에도 입으로는 대문파의 후계자나 보일 법한 언행을 담았다.
공과 사를 명백히 구분한다는 뜻이었다.
“어어…….”
어린 소녀에게 한 방 먹을 줄 몰랐던 황보세가 여식의 눈동자가 커진 순간이었다.
사박.
“화련아. 맹에서 오신 분들께 그렇게 말하면 안 된단다.”
한켠에서 하얀 장포가 펄럭였다. 일전에 후기지수들이 밟고 건넜던 돌바닥에 여인이 서 있었다.
새하얀 피부에서 고결함이 느껴졌다. 은은한 도기가 일대에 퍼져나갔다.
인세에 내려온 선녀라 칭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찬바람에 옅게 휘날리는 연홍발은 말할 것도 없었다. 저잣거리에서 흔히 볼법한 죽립조차 신비롭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후기지수들이 일제히 탄성을 터뜨렸다.
입을 틀어막고 경악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그 정도로 인세와 동떨어진 용모였다.
남궁설화 역시 놀란 눈으로 자신에게 걸어오는 여인을 응시했다.
“예전에 뵈었었지요?”
신녀문주가 말했다. 목소리가 익숙했다. 남궁설화는 저도 모르게 흠칫했다.
'누구지?'
도화를 머금은 눈동자가 호선을 그렸다.
“언젠가 다시 뵙게 되면, 이 각패를 돌려드리기로 하였는데.”
곧 신녀문주의 손 끝에 청옥으로 정갈히 깎아낸 각패가 들렸다. 남궁의 이름이 흔들림 없이 새겨진 각패였다.
“……!”
일대가 다른 의미의 경악으로 물들었다. 오죽했으면 적막이 맴돌 정도였다.
“신녀……문주님?”
남궁설화가 말했다. 돌아가는 상황을 곧장 받아들일 수 없어서였다.
“살다보니 그렇게 되었군요. 이름으로 부르지 않은건 절 배려하려 그런 것이겠지요?”
“……이, 이게.”
어찌 된 일이에요? 남궁설화는 애써 뒷말을 삼켰다.
일년 만에 만난 신녀문주는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기품이 흘렀다.
걸음걸이에서 알 수 없는 초월성을 느꼈다. 맨 얼굴을 드러내고 있는 탓일까.
누구라도 매료될 법한 외모였다. 남녀를 불문하고 이야기한 것이다.
“하남에, 가셨다고 들었는데. 이런 곳에서 다시 뵙게 될. 아니, 그러니까.”
서연은 사천당문에서 강호의 사정을 면밀히 전해들었다. 눈앞의 소녀가 사실은 검존의 여식이었다는 사실도 그때 알았다.
절세고수의 자식인데도 오만함을 드러내기는커녕 자신을 한없이 낮췄다. 심지어 그때 선물해줬던 목검을 여태 애지중지하고 있었다.
호감이 갈 수밖에 없었다.
횡설수설하는 것조차 장점으로 느껴졌다.
서연은 남궁설화와 그녀의 뒤편에 있는 후기지수들의 면면을 살폈다. 그녀의 동료라면 품행은 따로 검증하지 않아도 될 듯싶었다.
그녀는 이제 후기지수들에게 가르침을 베풀 수 있는 위치에 도달했다. 그녀 스스로가 그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운남을 떠나기 전에 호의를 베풀면 될 듯싶었다.
그리고, 서연은 무인에게 호의를 베푸는 방법을 안다고 자부했다.
“제자들이 무례를 저지른 듯한데. 사과해야 옳겠지요.”
서연은 뒷짐을 진 채 후기지수들 앞에 섰다.
하수에게 가르침을 내리는 모양새였는데, 그 오연한 자세를 보고도 입을 여는 이가 한 명도 없었다.
“남궁 소저부터 들어오시겠어요? 무학으로 교분을 나눠본 적은 없는 듯한데.”
동시에 도화를 띤 진기가 사방으로 이지러졌다. 사방을 흩날리는 꽃잎들이 당장이라도 쏟아질 듯했다.
“어어……?”
남궁설화의 음성에 다시금 경악이 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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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서, 말씀이신가요?”
황보세가의 여식이 그리 물었다. 천생신력을 타고난 탓에 날 때부터 외공의 고수나 다름없었다.
얼핏 보면 여리여리해 보이는 팔도 소맷자락을 걷어보면 암석 같은 단단함을 드러냈다. 하북팽가와 외공으로 쌍벽을 이룬다는 명문세가의 여식다웠다.
그녀 정도 되는 후기지수는 세가의 중견 고수들과 비무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후기지수들과의 비무에서 전력을 다했다간 어느 하나가 다쳐야 끝났기 때문이다.
청강석으로 만들어진 비무대조차 황폐해지는 경우가 잦았다. 후원에서 비무를 벌였다간 무슨 일이 벌어질지 눈에 선명히 그려졌다.
“신녀문주님의 실력을 몰라 이리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다만, 문주님의 진신 무공은 워낙 패도적이라 들었어요. 저희가 제대로 받아내지 못해 점창 속가에 해를 입힐까 두렵네요.”
진각 한 번으로 뒤집어질 법한 풀밭이었다. 당장 그녀 정도 되는 후기지수도 경파만으로도 일대를 화포에 맞은 것처럼 뒤집어 엎을 수 있었다.
뜻이 좋다고 해도, 점창 속가가 패악질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황보 소저.”
허나 남궁설화가 그녀를 가로막았다. 나서지 말라는 뜻이다.
“저희 무공이 한참 아래에요. 구파의 장문인 앞에서 우려를 드러내봤자, 의미 없다는 것을 아시잖아요. 검격을 감당하면서 능히 주변까지 다스릴 분이세요.”
남궁설화의 언행이 직설적이라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상대가 약하면 약하다는 것을 가감없이 드러내는 사람이 바로 그녀였다.
그런 이가 신녀문주를 구파의 장문인에 비유했다. 허언으로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남궁설화는 어느새 목검을 뽑아들었다. 세차게 동요하던 목검은 언제부터인가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어쩌면 오랜만에 조물주를 만나 흥분하여 그랬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뭇 영성이 깃든 무기가 그러하였기 때문이다.
‘그때에는 유검(柔劍)을 사용하시는 듯했는데.
과거 안휘성의 뒷산에서 만났을 때의 이야기다. 당시에 빗자루질을 하던 서연을 생각하면 도저히 패도적인 검격을 펼치는 사람이라 생각할 수 없었다.
절세고수다. 검식의 제한이 없다고 봐도 좋았다.
‘당장은 밝히고 싶지 않은 듯 하시니.
그래서 구파의 장문인을 입에 담았다. 배려가 기껍기라도 한 것인지, 서연은 눈동자에 더없는 호의를 품고 있었다.
절세 여고수와의 비무는 천하에 다시 없을 기연이다. 선구자로 대해야 옳았다.
“전력으로 가겠습니다.”
남궁설화가 입술을 달싹였다. 그녀의 눈동자가 한순간에 비범한 안광으로 번뜩였다.
후우웅!
남궁설화의 전신에서 인위적인 안개가 피어올랐다. 진법무공을 펼친 결과였다.
현무착월진(玄武捉月陣)이었다.
본디 다섯이 펼치는 진법이었다. 안개 내부로 들어온 상대의 감각을 혼란시켜, 진기 유동과 검식의 발현에 어려움을 겪게 만든다.
남궁설화는 고절한 진법을 홀로 펼쳤다. 경신법을 펼치는 와중에 목검으로 바닥을 찍어 축을 세웠기에 가능했다.
‘족히 십 장은 퍼졌어야 했는데.
신녀문주의 주변으로 퍼져나가던 안개가 한순간에 흩어졌다. 열 보 거리에 그러한 현상이 발현했다.
자연지물에 영향을 미치는 초고수가 아니고서야 불가능한 일이었다. 운남으로 출행하기 전 그녀의 모친이 주지시켜줬다.
―현무착월진은 천하에서 손에 꼽는 진법이란다. 방술과 진법에 조예가 없다면 초고수라도 일격에는 파훼하지 못해. 허나 안개를 기파로 꺾어버리는 고수와 적으로 만난다면……. 남궁가의 직계에 걸맞는 의기를 보이려무나.
피할 수 없는 죽음을 입에 담았다.
명예를 무엇보다 중요시 여기는 모친이 코앞에서 엄포를 놓는 듯했다.
동시에 남궁가가 전력을 들여 복수하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모친 나름의 모성애였다.
상념을 지웠다.
‘아예 의미가 없는 건 아니야. 기척을 감추는 것 자체에 의미가 있으니.
고수에게 열보 간격으로 접근할 수 있다는 것 자체로 의미가 있었다.
걸음을 내딛은 순간 질풍이 다리에 감겨든다. 천하에서 제일을 다툰다는 보법이 남궁설화의 발끝에서 움텄다.
‘무한보(無限步).
쿵!
서연 역시 그것을 알아보았다. 안개 너머로 아주 희미한 기척이 느껴졌다. 솔잎을 활보하는 율서(栗鼠: 다람쥐)나 저러할까.
안개를 가르며 기파가 정면으로 쏟아졌다. 허나 서연은 그 반대 방향을 향해 잔향을 내질렀다.
“……!”
남궁설화의 얼굴에 당혹감이 맴돌았다. 허초가 완전히 읽혔기 때문이다.
서연은 후기지수를 상대로 천녀유검을 펼칠 생각은 없었다. 대신 근처에 퍼뜨려놓은 진기를 단번에 빨아들이듯 구조를 바꿨다.
탁!
잔향과 맞닿은 남궁설화의 검이 거미줄에 걸린 듯 달라붙었다.
“윽!”
아무리 힘을 주어도 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안개도 예외가 아니었다. 한순간에 잔향으로 빨려들어갔다.
근처에서 지켜보던 후기지수들의 표정이 달라졌다. 남궁설화가 온 진기를 끌어다가 검을 떼어내고자 용을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얼핏 보면 합이라도 맞춘 듯했다.
그 와중에도 서연은 나머지 한 손으로 뒷짐을 쥐고 있었는데, 처음의 자리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
“어찌 저런 기예를…….”
후기지수 하나가 망연한 얼굴로 중얼거릴 때였다.
쩌엉―!
남궁설화는 기어코 검을 떼어내고는 주춤 물러섰다. 그리고는 곧장 상단세를 취했다.
‘창궁무애검법. 완연한 패검이구나.
남궁설화를 중심으로 푸른 기운이 넘실거렸다. 바위마저 가를 듯한 검풍이 동시에 몰아쳤다.
서연은 하늘로 드높이 뛰어오른 남궁설화를 응시했다. 얼핏 보기만 했는데 무학의 요체를 알 것 같았다.
현란한 변초 너머에 홀로 오연한 검격이 숨어 있었다. 창궁무애검의 투로이리라.
‘검파는 하늘로 쳐내야겠다.
결심과 동시에 잔향검의 날을 비틀었다. 비무를 통해 깨달음을 얻는 것은 후기지수들 뿐만이 아니다.
서연 역시 비무를 통해 부족한 경험을 채우고자 했다. 명문세가의 자제들과 지금이 아니면 또 언제 교분을 나누겠는가.
‘창궁무애검은 찌르기에 약하겠다. 점창과는 완전히 정반대구나.
베기에 특화된 검술이라고 할 수 있겠다.
쩌엉―!
칼날이 충돌하며 굉음이 울렸다. 거센 기파가 하늘로 솟구치며 충격파를 흩뿌렸으나, 후원에는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풀잎 하나하나가 서연의 진기로 덧씌워져 있었다. 후원 전체에 호신강기를 씌운 것이나 다름없었다.
연무장으로 이동하지 않은 이유를 그제서야 이해했다. 신녀문주의 진기가 닿은 모든 곳이 연무장이나 다름 없었다.
“……!”
경악한 남궁설화가 들숨을 내쉬기도 전이었다. 그 짧은 순간에 그녀의 목덜미에 검날이 얹어졌다. 닿고 나서야 검날이 뭉툭한 것을 인지했다.
‘검집이었다고?
분명 선명한 예기가 느껴졌거늘, 여태 검을 뽑지도 않았었단 말인가? 분명 안법을 전력으로 펼치고 있었는데도 눈치채지 못했다.
심지어 창궁무애검을 받아낸 검집은 흠집 하나 없이 선명했다.
“과연 남궁의 검이군요. 고절해요.”
서연이 말을 이었다. 그 사이에 허리춤에 잔향검을 도로 맨 채였다.
뒷짐을 진 채로, 한 걸음도 떼지 않고, 심지어 검집으로 싸운 사람이 입에 담을 말은 아니었다. 자칫 조롱으로 들릴 수도 있었으나, 남궁설화는 감히 딴지를 걸 생각조차 못했다.
경외심만 들었다.
‘……절세고수는 창궁무애검을 아무런 여파 없이 받아낼 수 있는 것일까.
그런 것은 아버지만 가능한 줄 알았는데.
오죽했으면 서연이 어깨를 가볍게 두드릴 때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였다.
남궁설화는 다급히 기세를 갈무리하고 포권을 취했다.
“많이 배웠습니다. 그리고, 처음 뵈었을 때와 지금의 입장이 다릅니다. 마땅히 하대해주세요.”
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입술을 뗐다.
예전이라면 거절했을 터이나, 이제는 달랐다. 제자들을 가르치며 하대에도 어느정도 익숙해진 덕이었다.
“그러마.”
“…….”
서연은 힐긋 후기지수들을 응시했다. 남궁설화와 교분을 맺은 이들답게, 하나같이 명가의 자제들이었다.
“사흘 뒤에 운남을 떠날 예정이니, 비무를 청하고 싶다면 언제든 후원으로 찾아오도록 하거라.”
서연은 그렇게 말하며 제 제자들을 일으켜 세웠다. 어느새 신공으로 호흡하고 있는 제자들이었다.
“그리고.”
서연은 떠나기 전에 남궁설화를 응시했다.
“패검의 묘리를 살리고자 진각에 무게를 실으려고 하는 것도 이해는 가지만, 그것은 용력이 타고난 이들이나 해볼 법한 발상이란다. 차라리 직전에 펼쳤던 허초를 갈고닦아 환검으로 나아가도록 하렴. 훨씬 수월하게 검리(劍理)에 다다를 수 있을거란다.”
곧 서연이 잔향검을 가볍게 휘저었다.
“결분혈(缺盆穴)에서부터 소상혈까지를 진기로 이어 붙인다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울 거란다. 검세를 펼치기 쉬워지는 것은 물론, 환검도 매서워질거다.”
곧 잔향의 검신이 폭풍을 머금었다. 창궁무애검의 요체를 품은 것이다.
“……!”
남궁설화의 눈동자가 더 커질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아예 입을 벌리고 있었는데, 초장에 보였던 신중한 모습은 온데간데 사라져 있었다.
“나머지는 점심을 먹고 와서 봐주도록 하마. 오늘 식사를 걸렀던지라.”
곧 서연은 제자들을 끌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
일대가 침묵으로 물들었다.
혈기왕성한 후기지수들 답지 않았다. 약에 취한 사람처럼 멍한 얼굴로 서있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처음에는 외인이나 다름없는 신녀문주에게 다짜고짜 절기를 펼치는 남궁설화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많았다.
신녀문주 정도 되는 초고수는 옷자락 너머에 희미하게 보이는 근육의 움직임만으로도 검법의 약점을 파훼할 만했다. 검법을 보이는 순간 세가의 약점을 드러내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뜻이다.
허나 비무를 본 이후에는 생각이 달라졌다.
파훼식이 의미 없는 강자다. 명백한 구파의 장문인, 그중에서도 상위에 속하는 인물임을 직시했다.
“……전신 세맥의 공부를 일말의 고민조차 없이 풀어주실 줄은.”
“실로 대인이시구나.”
족히 몇 년은 헤맬 법한 일을 단번에 풀어헤쳐 답을 제시했다. 비급 한 줄 때문에 뭇 강호에서 혈사가 일어나는 것을 생각하면, 남궁설화가 얻은 것은 보화로도 갚을 수 없는 기연이었다.
“검식만 보고도 창궁무애검의 묘리를 읽어낼 정도시라면, 천하를 주유한 경험도 결코 적지 않으실텐데.”
“남궁 소저, 도대체 언제 연을 맺으셨던 거에요? 남궁세가의 비선이 대단하다는 것은 들었지만, 그래도 이 정도였을 줄은…….”
가장 놀란 것은 남궁설화였다. 그녀는 얼떨떨한 심정을 감추지 못한 채로 검을 치켜들었다.
신녀문주의 배려로 일전에 선보였던 검로를 안법으로 통찰할 수 있었다.
스윽―
다시금 상단세를 취했다. 신녀문주의 조언을 되새기며 검을 내리그었다.
한순간에 대기를 할퀴면서 뻗어나간 검파가 바닥에 선을 그었다.
화악!
“……대체.”
남궁설화는 침음을 흘렸다. 점창 속가의 마당을 망가뜨렸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할 정도였다.
조언 하나를 실천했을 뿐인데 창궁무애검을 펼치기가 몇 배는 수월해졌다.
그 사실을 모르는 후기지수가 없었다.
이내.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황보세가의 여식이 입을 열었다.
“식사하시는 곳 근처로 가서 기다리는 편이 좋을까요……?”
반대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
“저 분들은 왜 저기서 저러고 계신대요?”
“모르니까 말 걸지 마라.”
점창 속가의 시비들의 대화다. 그들은 식기를 나르는 도중에 바깥에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 있는 후기지수들을 애써 못본 척했다.
―언제쯤 나오실까요?
―황보 소저, 아직 일다경도 안 지났소.
행여 식사에 방해가 될까, 전음으로 대화를 나누었다. 남궁설화는 줄의 맨 뒤편에 서 있었다. 맨 뒤로 물러나라는 무언의 압박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마침내 문이 열렸다.
후기지수들의 얼굴에 일순간 화색이 돈 순간이었다.
문을 열고 모습을 드러낸 것은 새까만 단발을 늘어뜨린 소녀였다. 재미있는 광경을 마주하기라도 한 것인지, 한쪽 입꼬리를 살짝 치켜올리고 있었다.
“흐음…….”
화련의 눈동자가 까맣게 반짝였다.
그녀는 한 손을 제 입에 가져다 댄 다음 속삭이듯 말했다.
“당과 하나만 사다 주시면, 식사가 언제쯤 끝날지 알려드릴 수도 있을 것 같은데…….”
“화련아.”
“넵.”
화련은 울상을 한 채로 입을 다물었다.
“자리에 앉으렴. 채육을 가리지 않아야 키가 잘 큰단다.”
“……네.”
어엿한 고수가 된 서연에게 더 이상 속삭임은 통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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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설련(韋雪蓮)은 하얀 얼굴에 검은색 비단으로 지은 의복을 입은 여인이었다.
천하삼대술사의 차녀이자, 모산파의 현 후계자이기도 했다.
후계 수업에 전심을 다한 탓일까, 이제는 모산파 내부에서도 그녀를 후계자로 인정하는 분위기가 만연했다.
작년까지만 해도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녀의 언니가 후계자 자리를 공고히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헌데 한순간에 땅 속으로 꺼진 사람처럼 사라져버렸다. 그녀와 함께 모산을 떠났던 수하들만 되돌아왔다.
―대공녀께서 이것을 전해달라 하셨습니다. 당신께서는 돌아가지 못하시겠다고 하시면서…….
태음양정단을 받는 대가로, 영물의 범주를 넘어선 짐승들에게 사로잡혔단다. 그만한 존재들이 거리를 대놓고 활보한다는 말이 믿겨지지 않았다.
내단 겉으로 드러난 세찬 기운만 아니었더라면 허언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게 모산파 대공녀의 소식은 그날부로 뚝 끊겼다.
모산파의 방사(方士)들이라고 처음부터 대공녀를 포기했던 것은 아니다. 온 수단을 동원하여 그들의 후계자를 되찾고자 했다.
허나 그때마다 비보만 들려왔다.
“대공녀를 추적하던 혼령들이 모두 소멸했습니다.”
“산군……! 산군을 보았습니다! 시선이 맞닿았을 뿐인데 술법이 한순간에……!”
일을 맡았던 방사들이 혼절하는 일이 적지 않았다.
일평생 인외의 존재들을 상대했던 이들이다. 웬만한 무림인들보다 담력이 뛰어나 전쟁통에서도 꿈쩍도 하지 않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런 이들 중에서 추리고 추린 방사들이 죄다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들이 부리던 식신(式神)조차 감히 대적할 생각을 품지 못했다고 했다. 산군과 마주한 순간 납작 엎드려 벌벌 떨었다던가.
내로라하는 방사들조차 힘으로 굴복시켜야 했던 식신이다. 당장 놈에게 희생되었던 민초가 수십이 넘었다. 쉽게 믿기지 않았다.
허나 한둘도 아니고, 수십 명의 방사들이 죄다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니 믿을 수밖에 없었다.
모산파의 후계자가 위설련으로 바뀌게 된 것은 그때부터였다.
인생만사 새옹지마라던가. 그렇게 잘 나가던 언니가 한순간에 영물들의 한끼 식사가 될줄 그 누가 예상했을까.
그녀의 모친을 비롯한 몇몇 장로들은 언니가 살아있을 것이라고 굳게 믿었지만, 위설련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언제고 잡아먹혀도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신수라고 다 선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경지에 오른 인간들이 어딘가 비틀리는 면이 생겨나듯, 신수가 된 이매망량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당장 구미호 달기(妲己)조차 은 왕조를 멸하지 않았던가. 언니를 붙잡아간 놈 역시 감언이설에 통달한 존재라 여겼다.
시간이 조금 흘러서는 언니의 이야기를 꺼내는 이들조차 사라졌다.
“소림사에 새로 불상이 들어왔다던데, 참으로 현묘하다고 들었소. 귀기조차 씻겨내려간다고 하더이다. 한 번쯤 확인해보는 것이 좋을 것 같소.”
“낙양 일대에서 혼백을 찾아보기 힘들 지경이오. 죄다 성불하기라도 한 것인지…….”
“용문석굴 근처는 가지 마시게. 왜냐고? 부리던 식신들이 한순간에 성불했다니까는! 인간의 기예가 아니란 말이외다! 단순한 석상으로 봐서는 안되오! 필시 교룡의 후예가 개입했을 것이오!”
“근래 모산으로 찾아오는 이들이 줄었소. 본래 억울한 원혼들을 성불시키는 것이 우리의 일인데, 다들 소림으로 몰려가니…….”
“하, 하남 땅에 산군이……! 성불당한다……!”
“섬서 녕강과 석천 인근에서 산적들의 시체가 떼거지로 발견되었다고 하오. 원혼이 생길 가능성이 농후하니 빠르게 다녀오겠소.”
“광동진가의 막내가 목숨을 보전했다던데. 우리가 먼저 발견해서 무림맹에 제보하면 예산에 여유가 생기지 않겠소?”
모산파의 산문에서 들려오는 대화였다.
원체 폐쇄적인 문파였다. 도문치고 방문객을 받지 않는 것만 봐도 그랬다.
모산 전체에 펼쳐진 진법 덕에 위치조차 알지 못하는 이들이 태반이었다. 매일같이 산을 오르는 심마니들조차 그들의 존재를 알지 못했을 정도였으니 오죽할까.
무림의 고위층들이나 황실 정도만 그들을 명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왁자지껄했다. 정파에 속하는 방사의 태반이 이곳에 속해 있다고 봐도 좋았다.
‘나중에 언니를 만나면 내가 성불해줘야겠지.
위설련은 산문을 거닐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솔직히 아직도 후계자가 된 사실이 믿겨지지 않은 날이 많았다.
언니에게 빚을 진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모친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 누구라도 쉬이 행하지 못할 일이었다.
나중에 대성하여 성불시켜주고자 했다. 방사가 취할 수 있는 최고의 예우였다.
위설련이 생각하기에, 그들 자매는 사이가 좋은 편에 속했다. 후계 다툼 같은 것을 벌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언니는 산문 바깥으로 나갈 때마다 당과와도 같은 주전부리를 싸들고 와서 자신에게 건넸다. 특유의 퉁명스러운 언행을 가미한 채였다.
―길 가다가 주웠단다. 이거나 먹고 이빨이나 썩으렴. 나도 먹으라고? 헛소리하지 말고 술법이나 익히러 가. 성취가 미진하면 나중에 쫓아낼지도 모르니.
어렸을 때의 일인데 지금도 생생했다.
세 살 터울인 언니는 자신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어른스러웠다.
물론 위설련은 단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기에, 언니가 건넸던 주전부리들을 전부 먹지 않고 자그마한 함에 고이 넣어두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눈 앞에서 한 번 정도는 먹어볼 걸 그랬나 하는 후회가 컸다.
그런 생각을 하던 도중에, 웬 산새가 날아들었다.
주변을 맴돌다가 정확히 위설련의 어깨 위에 앉았다. 이제 보니 발에 자그마한 쪽지가 묶여 있었다.
연서라도 되는 것일까. 처음 겪어보는 신박한 방식이었다.
희미한 추측을 끝으로 쪽지를 풀어 내용을 확인했다. 펼치는 순간 익숙한 필체가 드러났다.
단정하기 그지없는 글씨였다. 양갓집 규수나 쓸 법한 고아한 서체였다.
[사정을 봐주셔 안부를 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잘 지내시지요? 저는 잘 지냅니다.
자식으로서 마땅히 얼굴을 비추어야 하나, 그럴 수 있는 사정이 아님을 용서하세요.
혹여 오해를 하실까 다시 덧붙이자면, 저는 매우 건강합니다. 후계자로 지내다 갑자기 시종으로 지내려니 어려운 점이 많지만, 그래도 어머니를 구할 수 있던 덕에 더없이 기쁘기만 합니다.
딸이 보고 싶으셔도 찾지는 말아주세요. 보이기 부끄러운 모습을 하고 있는 탓에, 어머니를 뵐 자신이 없습니다.
저는 아직 젊습니다. 십 년은 금세 흘러가겠지요.
그때 다시 뵙겠습니다.
장녀 위화련.]
위설련은 입을 다물었다. 종이의 겉이 희미하게 삭아 있었다. 족히 일 년은 산새의 다리에 매달려 있던 듯했다.
“…….”
언니를 붙잡아간 영물의 소행이 분명했다. 편지를 보낼 수 있게 해준다고 안심시키고, 한참 뒤에 도착하도록 수작을 부렸을 것이다.
참으로 간악하구나. 뒤편에 서 있는 수하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뇌까린 위설련이 다시 입을 열었다.
“……어머니를 뵈러 가야겠다. 지금 당장.”
*****
운남에서 떠나는 날이 밝았다. 신녀문주를 마중하기 위해 거리로 나선 이들이 적지 않았다.
점창파의 도사들은 물론이거니와, 무림맹의 후기지수들도 있었다. 지난 사흘간 신녀문주에게서 많은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일월상단의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신녀문주가 운남을 떠날 때까지 상행을 나가지 않고 기다리는 것을 택했다.
산사태로부터 송월 노인을 구했다는 이유에서였다. 상행보다 은인을 대접하는 것을 더 중히 여겼다.
송월 노인 역시 서연에게 정중한 작별인사를 건넸다.
“언젠가 하남에서 다시 뵙기를 고대하겠습니다. 그때까지 건승하십시오.”
“어르신도 먼 상행길 평안히 다녀오십시오.”
서연 역시 마주 포권을 취했다.
위치가 이전과 달라진 탓인지, 주변 사람들은 그조차도 겸양으로 여겼다. 어떤 대문파의 장문인이 노인에게 고개를 숙이겠는가.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이번에는 남궁설화였다. 그녀는 더없는 진심을 담아 서연에게 허리를 숙였다.
“제가 신녀문주님께 참으로 많이 배웠습니다. 언제고 남궁세가로 찾아오시면, 그때처럼 가문의 귀빈으로 모시겠습니다. 부친 역시 문주님을 기쁘게 맞이하실겁니다.”
절세고수의 이름이 언급되자 뭇 사람들의 시선이 달라졌다. 허나 남궁설화는 아랑곳하지 않고 공경한 자세로 허리를 숙였다.
“각패는 그때 받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면서 생그럽게 웃는다. 마지막까지 각패를 받지 않겠다는 당돌한 기세를 드러내면서다.
‘많이 얻었구나.
첫 여행의 종착점이다. 떠나기 전까지만 해도 온갖 결심을 해야 시도할 수 있었던 것들이, 지금 와서는 아무렇지 않게 되었다.
더없이 성장했다. 산 구석에서 나무 따위를 깎던 여인은 이제 일문의 문주나 가질 법한 마음가짐을 지니게 되었다.
서연은 걸음을 뗐다. 그녀의 뒤로 화련과 당소소가 뒤따랐다.
‘제자들이 복이구나.
이번 여행에서 얻은 것이 많았다. 제자들을 위해서라도 허울뿐인 문파의 문주가 될 수는 없었다.
‘하남으로 돌아가면, 적당한 부지부터 알아봐야겠다.
언제까지고 산 속에서 제자들을 키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 말이다.
‘천천히 돌아가자. 여유롭게.
점창 속가를 뒤로하고 떠났다. 겁 많던 여인의 처음이자 마지막 여행은 그렇게 끝났다.
*****
서연 일행은 사천으로 향하지 않았다. 당소소의 부탁 때문이었다.
“가문을 떠나서 절기를 배워오겠다고 그리 엄포를 놓았는데, 두어달 만에 돌아오면 세가 사람들이 저를 놀릴겁니다.”
“사천당문 사람들은 다 착하던데. 아, 혹시 남동생 때문에?”
“예. 스승님 앞에서 남매끼리 다투는 추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는 않군요.”
당소소와 화련이 앞서 걸어가며 마주 대화를 나눴다.
이제는 걸으면서도 비연천공을 펼칠 있게 된 그들이었다. 서연이 도와주기는 했지만, 그들 스스로가 엄청나게 노력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무튼, 서연은 당소소를 배려하고자 중경 방향으로 걸음을 돌렸다.
“스승님이 살던 곳을 듣기만 했지, 직접 가보는 것은 처음입니다. 참으로 떨리는군요.”
“그렇게 대단하지는 않단다.”
“사저에게 듣기로는, 하루만에 오두막을 지으셨다고.”
“그건 옳은 말이지.”
“그래서 궁금한 겁니다. 가문의 목수들이 들었다면 말도 되지 않는 일이라고 온갖 미사여구를 덧붙였을겁니다.”
답지 않게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그런 당소소를 응시하던 화련이 천천히 입술을 뗐다.
“스승님, 혹시 검선과도 연이 있으신가요?”
“음? 갑자기 왜 그런 생각을 했니?”
“스승님이 가시는 곳마다 온갖 높으신 분들을 다 뵈는 것 같아서요. 중경을 넘어서면 호북인데, 거기에는 무당파가 있잖아요. 검선을 뵐 수도 있는 것 아니에요?”
어린아이나 보일 법한 기대 가득한 얼굴로 스승을 올려다본다.
서연은 미소지으며 어린 제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인연은 없지만, 운이 좋으면 뵐 수도 있겠구나.”
어린 제자의 기대에 부응하고자 말만 그렇게 했다.
검선은 무려 전전대의 무당파 장문인이었다. 구파의 장문인들조차 감히 입에 담을 수 없을 정도로 배분의 차이가 압도적이라는 것이다.
청목족 정도는 되어야 검선에게 말을 놓을만했다.
그런사람을 길가다가 만나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그치만, 걸식하고 돌아다니신다던데…….”
“화련아. 그런 말을 함부로 하면 안된단다.”
“넵.”
갈수록 제자의 말투가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억지로 어른스러운 척을 하던 과거보다야 지금이 훨씬 보기 좋았지만, 걱정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사춘기가 이르게 찾아오면 어찌할까.
나이 많은 사매에게 당과 심부름을 시키며 패악질을 부리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그전에 확실히 버릇을 잡아두어야 할 듯싶었다.
'하지만 어찌?'
화를 내고 싶지는 않았다.
과분할 정도로 총명한 아이다. 자신의 실수로 정서에 삿된 영향을 끼치고 싶지는 않았다.
잠시 고민하던 서연이 입술을 뗐다.
“화련아.”
“네.”
“언젠가 어머니를 뵈기로 하지 않았니. 그때가 되면 네 행적을 고스란히 전해드려야 할텐데, 그때를 위해서라도 신녀문의 대사저에 걸맞는 언행을 가지는 것이 좋을 듯하구나.”
순수한 걱정에서 한 말이다.
날때부터 부친을 여의고, 병으로 모친마저 떠내보낸 아이다.
그런데도 이렇게 잘 자랐다.
앞으로도 지금처럼만 커줬으면 하는 마음이 강했다.
곧 화련이 입술을 다물었다.
십 년 뒤에 돌아가기로 약속했던 것을 그제서야 떠올린 것이다.
“……가기 싫은데요.”
땅에 기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십 년이면 스승님의 무학의 일부조차 제대로 배우지 못했을 것이 훤히 그려져서 그랬다.
옆에서 사레들린 소리가 들렸다. 당소소였다.
눈을 크게 뜬 채로 화련을 응시하다가 급히 어디론가 달려갔다. 곧 당과 하나를 사들고 돌아왔다.
“사저, 이거 드시고 힘내십시오.”
“…….”
바람을 타고 유혼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은 기분 탓일 것이다. 화련은 괜시리 미간을 좁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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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행의 발걸음은 여유로웠다. 제자들이 비연천공을 펼쳐 걷는 것에 몰두한 탓에, 올 때보다 돌아가는 길이 배는 더뎠다.
도로라 할지라도 제대로 정비되지 않은 시대. 일행이 거쳐간 중경부 역시 도시의 길 대부분이 흙먼지 날리는 황토길이었다.
제자들의 고된 걸음을 덜어주고자, 서연은 역참의 관리인에게 신분을 드러내고 말 한 필을 빌렸다.
명예직이었기에 한 필을 빌리는 것이 전부였으나, 제자 둘을 태우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당소소와 화련을 말에 태운 서연은 고삐를 잡고 그 옆을 묵묵히 걸었다. 제자들은 죄스럽고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몇 번이고 고개를 저었으나, 서연은 단호하게 이를 물리쳤다.
말의 흔들림 속에서도 동공을 운용하는 법을 익혀야 한다는 식의 핑계를 대자, 그제서야 죄스러운 기색을 거두고 말 위에 오르는 제자들이었다.
“생각보다 어렵군요. 가만히 있으려 해도 몸이 멋대로 반 척씩 움직이니…….”
산을 굽이굽이 돌아 호북에 다다랐을 때, 서연은 말을 멈춰 세우고 작은 모닥불을 피웠다. 워낙 외진 길이라 그런지 오가는 행인조차 없었다
타닥.
화련은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밤 몇 개를 꺼내 나뭇가지에 꿰어 불에 올렸다. 그런 화련을 물끄러미 보던 당소소가 무심한 듯 말했다.
“사저, 칼집 안 내시면 터집니다.”
“터져?”
“제 동생이 그러다 자주 다쳐서 잘 압니다.”
말을 마친 당소소는 단도를 꺼내 밤 한쪽에 작게 칼집을 냈다. 남이 먹을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허기가 지는 것은 세상의 이치인 법, 당소소 또한 주섬주섬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기 시작했다.
매운 양념을 칠한 육포였다. 냄새만으로도 코가 얼얼해지는 듯했다. 당소소가 말하는 매움의 기준은 범인의 경지를 아득히 벗어나 있었기에, 화련은 차마 그것을 달라고 입을 열 수 없었다.
예전에 뭣도 모르고 덤볐다가 호되게 당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소곳한 자세로 앉아 육포를 조금씩 갉아먹던 당소소가 입을 열었다.
“스승님께서는 돌아가시거든 하실 일이 태산 같으시겠습니다.”
제자들을 따라 가벼운 국물 요리를 하려던 서연이 그 말에 고개를 돌렸다. 당소소는 아랑곳 않고 말을 이었다.
“예로부터 문파의 얼굴은 편액(扁額)이라 했습니다. 분명 스승님께서 직접 새기시겠지요. 천하일절의 필체를 마주한 문사들이 어찌 반응할지 너무 기대됩니다.”
“스승을 너무 띄워주는구나. 그리고? 돌아가면 터부터 새로 잡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서연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모닥불을 가운데에 두고 두 제자와 마주 앉은 상황이었다.
껍질을 까려고 안간힘을 쓰는 화련을 도와주며 입을 열었다.
“아무리 소림이 자비롭다 한들, 바로 곁에 문파를 세우면 가만있지 않을 게다. 더구나 여인들로만 이루어진 문파라 하니 더욱 예민하게 받아들일 터.”
금녀문(禁女門)과 금남문(禁男門)이 고작 산 몇 개를 사이에 두고 있다면, 훗날 어떤 사고가 벌어질지 눈에 보듯 뻔했다. 혈기왕성한 승려들과 어린 제자들이 부딪치면 감당하기 어려운 사건이 터질 수도 있었다.
그렇다고 하여 너무 번잡한 곳으로 가고 싶지도 않았다. 낙양의 각예대회에 참여한 이후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몸소 겪지 않았던가.
선녀라 오해할 민초들이 적지 않을텐데, 괜히 북경의 세찬 시선을 받고 싶지는 않았다.
‘……돈은 엄청 많이 벌 것 같은데.
밤을 호호 불어가며 먹던 화련은 속으로만 그리 생각했다. 근래 들어 스승님이 자신의 뺨을 잡아당기는 일이 잦아졌다.
스승님 나름의 애정표현인 듯했다. 모산파의 후계자 시절 받았던 진짜배기 훈육을 생각하면 뺨을 잡아당기는 것 정도야 애정표현이라 여길 만했다.
‘소림사도 보기보다 엄청 부자잖아.
구파는 보기보다 재물이 많았다.
나라에서 받은 광대한 토지를 임대하고 받는 비용이나, 도시의 주요 길목에 깔린 객잔과 상단에서 얻는 수익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 모든 것을 합쳐도 후원금으로 더 많은 수익을 얻는 문파도 존재했다. 소림사만 해도 황실에서 받는 후원이 어마어마했다.
‘후원금만 받으면 양반이지.
허나 스승님은 원체 재물을 멀리하시니, 후원을 받기는커녕 직접 조각품을 팔아 문파의 운영비를 충당하려 드실 것이다.
폐쇄적이기로 유명한 모산파조차 문파를 그런 식으로 운영하지는 않았다. 비밀리에 의뢰를 받는 것은 물론, 요지에 사람을 고용하여 운영하는 객잔과 주루가 적지 않았다.
‘지금처럼 제자가 둘뿐이면 이대로도 괜찮겠지만.
문파가 조금이라도 커진다면 운영 방식을 달리해야 할 터였다.
어느새 스스로를 신녀문도라 여기게 된 화련이었다.
제자들을 재운 서연은 맑은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지금처럼 야산에서 묵을 때면 밤을 지새우며 제자들의 곁을 지키는 그녀였다.
서연은 고요히 잠든 두 제자와 백호의 머리칼을 차례로 쓰다듬었다.
운남에서 이곳 호북까지 오는 동안 지새운 밤이 적지 않았으나, 그럼에도 늘 깊이 잠든 것처럼 편안했다. 본래 피곤함을 느끼지 않는 육체였으니, 재능을 깨달은 이후에는 말할 것도 없었다.
“천천히 가자꾸나.”
나긋한 음성에 정종 명문이나 가질 법한 기운이 담겼다. 그것을 느낀 백호는 기쁘게 울었다.
서연은 어느새 본래의 크기로 돌아온 백호의 등에 제자들을 태웠다. 어찌나 깊이 잠들었는지, 움직임이 느껴졌을 터인데도 깨지 않았다.
산등성이를 넘어 높게 펼쳐진 성벽이 모습을 드러냈다.
호북의 성도, 무한(武漢).
중원에서 두 번째로 거대한 호수를 품고 있는 대도시가 한 눈에 담겼다.
*****
해가 바뀌었다. 운남보다 북쪽에 위치한 탓일까, 도심 곳곳에 눈발이 몰아쳤다.
서연은 두 제자를 이끌고 무한의 도심을 유유히 거닐었다. 호광의 명물인 동호(東湖)가 지척이었다.
그토록 드넓은 호수는 혹한에도 쉽게 얼어붙지 않는다. 수천에 달하는 객들이 몰려드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허나, 서연이 한가로이 호수를 유람하는 사이에도 천하의 정세는 숨 가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팔대세가의 한 자리를 차지하던 광동진가가 멸문한 사건은 순식간에 천하를 뒤흔들었다.
점창파가 봉문한 것 역시 사마련의 소행으로 밝혀진 직후, 정사의 대립은 예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첨예해졌다.
장강을 사이에 두고 폭풍과도 같은 혼란이 몰아쳤다.
“무령궁(巫靈宮)이 멸문했다더군. 민초들에게 강제로 고리대금을 놓았다 하니, 필시 천명검이 개입했을 걸세.”
“사마련도 영악하기 짝이 없네. 민초만 건드리지 않으면 천명검에서도 나서지 않는 것을 잘 아는지라, 교묘할 정도로 정파 세력만 노리더군.”
“정파는 절세고수가 둘이나 있는데, 얌전히 당하고만 있는단 말인가?”
“세가와 구파는 별개로 봐야 하네. 세가는 지역의 호족 아닌가. 팔가가 칠가가 되었다는 사실을 치부로 여기는 세가는 없을 걸세. 약해서 도태되었다고 여기면 모를까.”
“장강 이남은 사지야. 사마련 종주들이 죄다 그곳에 몰려 있지 않은가.”
“무림맹주는 진작에 채비를 마쳤다더군. 운남과 사천 일대에 맹원을 대거 파견했다던데.”
“제갈가도 양양(襄陽) 일대에서 진법을 보수하기 바쁘다 들었소.”
“신녀문이라고 들어보셨소? 죽엽청 한 잔이면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풀어줄 수 있을 듯한데.”
전쟁에 흉년까지 겹쳤다. 심지어 식량을 재배할 수도 없는 겨울이었다. 장강 이남은 난세라고 봐도 좋았다.
‘호북은 괜찮겠지만, 그래도 주의하는 편이 낫겠지.
서연은 근처 행인들의 말을 들으며 그렇게 생각했다.
호북에는 무당파와 제갈세가가 자리잡고 있었다. 장강과 맞닿은 지역치고 치안이 안정된 것은 전부 그 덕이었다.
역으로 그런 호북에서조차 이와 같은 소문이 돈다는 것 자체가 난세의 증거라 할 수 있었다.
‘흉년과 풍년은 번갈아 찾아온다던데.
일전의 풍년은 족히 스무 년 동안 이어졌다. 흉년이 그만큼 이어진다고 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상상만 해도 두려웠다.
세가와 구파마저 비옥한 땅을 얻고 식량을 구하기 위해 칼을 뽑지 않을까.
천명검? 중원은 천명검이 홀로 징치하기에는 너무나 넓었다. 당장 서연이 기거했던 하남조차 전생의 반도의 몇 곱절은 되었다.
‘지금이라도 즐겨두어야겠구나.
어쩌면 이렇듯 마음 편히 세상을 유람할 수 있는 것도 올해가 마지막일 듯싶었다.
동호를 중심으로 모여든 군중들은 서연의 걸음에 맞춰 자연스레 몇 걸음씩 뒤로 물러났다
죽립 아래로 도화와도 같은 머릿결이 바람에 흩날리는데, 사람들은 견문에 관계없이 그 자태만으로도 고귀한 신분이라는 착각에 빠졌다.
죽립의 그림자에 이목구비가 대부분 가려졌는데도 그러했다.
“……황실에서 오신 분이신가?”
“경망스럽게 굴지 마. 옷깃이라도 잘못 닿았다간 경을 칠 수도 있어.”
새해를 맞아 천하 곳곳의 귀인들이 유람을 나온 상황이었기에, 사람들은 더 이상 왈가왈부하지 않았다.
귀한 가문의 여식이 양친 몰래 세상 밖으로 나왔다 여기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당연히 추파를 거는 이들도 없었다. 서연의 주변으로 범접할 수 없는 기운이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이 방법도 나쁘지 않구나.
이렇게 하면 예전처럼 면사를 쓰고 다니지 않아도 될 듯했다. 서연이 기쁜 마음으로 걸음을 옮기던 때였다.
“……오라버니?”
나란히 서서 걷던 당소소의 고개가 한쪽으로 돌아갔다. 그녀의 시선 끝에 웬 사내 하나가 닿았다.
자색이 섞인 검은 머리카락. 사천당문 직계 특유의 녹색 눈동자까지. 당진성보다는 팔다리가 길었고, 키도 족히 한 척은 컸다.
‘임무 중에 사고를 당해 사경을 헤매고 있다고 들었는데.
족히 몇 달은 지났으니, 치료를 마쳤을 법도 했다.
허나 당소소의 나지막한 외침을 듣지 못한 것일까. 사내는 그저 고개를 돌려 주변을 훑어보다가 어디론가 사라졌다.
문득 당가주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천명검의 단주가 신묘한 검술로 첫째를 현혹한 것이 불과 오년 전의 일이오.
대뜸 내밀한 사정을 털어놓았다. 만천화우라는 절기를 지녔음에도 천명검단주에게 넘어갔다고 했다. 그만큼 무학에 대한 욕심이 지대하다는 뜻이었다.
“……전음을 보낼까 했습니다만, 임무 중일 것이 뻔하여 그만두었습니다.”
당소소가 고개를 제자리로 돌리며 말했다. 약간 실망한 기색이었다. 무표정인 입매가 아주 살짝 아래로 기울어진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패검대라고 했었던가?”
“예. 패검대 소속이지요. 암단화 일이 고작 몇 달 전인데, 벌써 호북까지 온걸 보면 제대로 쉬지도 못하는 모양입니다.”
바삐 돌아다니는 오라비가 안타까운 듯했다.
헌데, 패검대가 어찌하여 제대로 된 복장도 갖추지 않고 동호를 배회하고 있는 것일까. 그 의문이 서연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천명검이 으레 입고 다니는 천 자가 새겨진 옷 대신 평상복을 입은 것만 보아도 그러했다. 필시 위장을 위함이리라.
‘사마외도가 숨어들기라도 한걸까.
눈에 보이는 인파만 족히 수천에 달했다. 이런 곳에서는 작은 소란조차 재앙의 씨앗이 될 터. 사람 틈에 깔려 목숨을 잃는 일이 부지기수일 테니 말이다.
그때였다.
“천마재림(天魔再臨)! 만마앙복(萬魔仰伏)!”
인근의 눈길을 강제로 끌어당기는 사자후와 동시에 강대한 파동이 일었다. 거리가 꽤 되었는데도 그러했다.
곳곳에서 낭패라는 기색과 함께 사자후가 들려온 방향으로 도약하는 무인들이 속속 나타났다.
그중에는 당소소의 오라비라는 사내도 있었다.
“신교천세(神敎千歲)! 성화강림(聖火降臨)!”
서연의 눈이 커졌다. 백 장 떨어진 곳에 위치한 객잔의 벽이, 한순간에 부풀어 올랐다.
화아아악―!
흐릿한 광채와 함께 땅이 움푹 패였고, 사방으로 울림이 번져나갔다.
콰과과과광!
뒤이어 압도적인 크기의 불기둥이 솟구쳤다. 거리가 지극히 멀었음에도 불기둥의 존재가 눈에 훤히 보였다.
멀리서 급박한 외침이 들려오고, 인파는 마치 한 점으로 빨려 들어가듯 혼란스럽게 움직였다.
“마교! 마교의 마인들이다!”
“미, 밀지 마시오! 으아아악!”
허나 서연은 홀로 다른 곳을 주시하고 있었다.
한 중년인이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광기에 물든 눈빛으로 희번덕거리며 웃었다. 조법을 극성으로 익힌 무인인 듯했다. 곧장 벽력탄을 꺼내 점화했다.
“천마재림……!”
벽력탄에서 섬광이 번뜩이는 찰나였다.
다른 이들은 인지조차 하지 못할 만큼 짧은 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때 서연은 이미 중년인의 코앞까지 다가가 출수하고 있었다.
“……!”
중년인의 얼굴에 당혹감이 서렸다. 그는 황급히 조법을 펼쳐 서연을 막으려 들었다. 마교의 무학이었다. 허나 서연은 너무나도 쉽게 사내의 손가락을 떨쳐냈다.
‘내공으로 격발하는 방식이구나.
사아아악!
서연의 손바닥에 놓인 벽력탄이 삿된 소음을 토했다. 눈 몇 번 깜빡일 시간이면 폭발할 것이다.
“이미 늦었…….”
찰나였다.
당장이라도 터질 듯 꿈틀거리던 벽력탄이 순식간에 잠잠해졌다.
꽈드드득―!
내공으로 짓누른 것이다. 그 와중에 일어난 자그마한 폭발들조차 진기로 억눌렀다. 그 여파로 구체였던 벽력탄은 심해에 던져진 것처럼 납작하게 짓눌려 있었다.
‘내공이 늘었다.
제자들을 가르친 덕일까. 예전에는 폭발조차 짓누를 정도는 아닌 듯 했는데.
서연은 괜한 성취감을 느끼며 고개를 돌렸다.
“……!”
중년인은 자신의 눈을 의심하는 듯 헛숨을 들이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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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룰 수 있는 내공의 양이 늘었다.
운남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던 도중에야 깨달았다. 양은 물론이고, 진기를 퍼뜨릴 수 있는 범위 역시 방대해졌다.
‘열반을 깨달은 육체라고 했으니.
제자들을 따라 심공을 의식하여 둘러 두기 시작하자 반응 속도가 무시무시하게 빨라졌다. 뭇 고수들에게 불시에 기습당해도 감당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때서야 비연천공이 완성된 무공임을 확신했다. 다른 누가 와도 마찬가지다. 작금의 비연천공은 완벽했다.
덜고 더할 것이 없었다. 사용자에 알맞게 체내의 혈맥을 변화시키는 천혜의 심공이다.
독인인 당소소에게는 독의 위력을 높이고, 몸에 가해지는 부담을 줄였다. 빠른 경신법을 구사하는 화련으로는 하여금 다리의 환도혈(環跳穴)의 탄력성을 더했다.
‘소림의 역근경에 비할만 하지 않을까.
속으로만 그런 생각을 했다.
고금제일인으로 꼽히는 달마대사가 직접 창안한 무공이다. 진심으로 그에 비할만하다고 여기지는 않았다.
‘그래도 최소한 세 손가락에는 꼽히겠지.
꾸준히 익히면 어느 순간 육체가 탈태한 사람의 것처럼 변한다. 자신이 펼치는 무학에 알맞은 형태로 무골이 다시 다져진다는 것이다.
서연이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이었다.
“…….”
그녀의 주변으로 짙은 적막이 흘렀다. 중년인의 시선은 여전히 서연의 손아귀를 향해 있었다.
분명 불티가 튀어오르는 것을 보았다. 분명 제대로 점화가 되었다는 뜻이다.
헌데 빛만 잠깐 명멸하더니, 그대로 잠잠해졌다. 그제서야 처참한 모습으로 짓눌린 벽력탄의 잔해가 눈에 들어왔다.
완력을 따지기 전에 내력이 압도적이었다.
벽력탄을 저런 수로 파훼한다니? 불가해를 마주한 심정이었다.
“소소야.”
“예, 스승님.”
중년인은 잠시 눈을 깜빡였다. 찰나에 목 뒤에서 따끔한 감각이 느껴졌다.
‘침?
목덜미에 얇은 침이 박혀 있었다.
생각이 거기까지 닿은 순간 의식이 가라앉았다. 시야가 순식간에 땅바닥으로 가라앉았다.
쿵!
“둘다 내 곁에서 떨어지지 말거라.”
당소소는 서연의 말에 고개만 얕게 끄덕였다.
실로 고절한 수법을 접했다. 세간에서 어찌하여 스승님의 무공을 패도적이라 부르는지 알 것 같았다.
‘……대검도 잘 쓰시겠다. 설마 영물도 저런 방식으로 길들이신 걸까.
집채만한 백호와 서연이 씨름하는 장면이 머릿속에서 그려졌다. 팔뚝으로 백호의 목을 졸라 압도하는 장면이 뒤따랐다. 다급히 고개를 가로저어 잡생각을 쳐냈다.
‘소소야, 네가 정녕 미쳤구나.
시급한 상황에 스승을 상대로 그런 불경한 생각을 품다니. 스승님의 곁이라 위험을 느끼지 못하여 이러는 것이 분명했다.
실력이 단번에 늘어난 탓도 있었다. 독을 운용하는 속도가 예전의 배는 빨라졌다. 비연천공의 여파였다.
당소소는 정신을 잃고 엎어진 중년인의 마혈과 수혈을 짚었다.
당장 이런 미친 작자가 몇이나 더 있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오라버니, 다시 말해 패검대가 있던 이유도 그제서야 인지했다.
‘정녕 마교가 맞나.
수가 너무 투명하여 도리어 의심이 생겼다. 정녕 마교가 중원을 침략하고자 했다면, 이렇게 일차원적인 방법은 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정파에 제갈세가가 있다면, 마교에는 옛 사마세가의 후예들이 있었다.
마인들이 존귀히 여긴다는 칠마의 하나로서 마교의 총군사를 맡고 있다고 했다. 부친께 직접 전해들었던 말이니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런 작자가 이런 멍청한 짓을 계획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명 황실의 저력을 모르지는 않을텐데.
사마련이 날뛸 수 있는 것은 군부가 전부 전쟁에 동원되었기 때문이다. 오직 황제의 명만 따르는 대적 불가의 장군들.
그들이 멸한 나라가 몇이던가.
게다가 이번 일은 명백히 그 화살이 민초를 향했다. 당장 천명검이 징치한다고 나서도 이상하지 않았다.
“수십 명이나 더 있구나.”
그때 서연이 말했다. 그녀는 세찬 시선으로 일대를 오시하고 있었다. 부연설명하는 대신 크기를 줄인 채로 제자들 곁에 서 있는 백호를 응시했다.
곧 둘의 시선이 마주쳤다.
서연은 고개를 가볍게 끄덕인 다음, 연화비영보를 극성으로 펼쳤다.
수많은 인파를 물 흐르듯 넘겼다. 바람의 결을 딛고 나아가는 듯했다.
사아악……!
세 걸음에 수십 장을 이동했다. 바람을 가르는 듯한 감각이 발 끝에서부터 울려왔다.
‘간악한 놈들. 인파가 많은 곳에만 골라 서있구나.
소규모 폭발로 인파를 한 곳으로 유도하고, 일제히 벽력탄을 폭발시켜 막대한 피해를 입히려는 듯했다.
놈들이 마교인지, 마교 행세를 하는 사마련인지, 아니면 그조차 아닌 제 삼의 세력인지는 중요치 않았다.
‘한 합으로.
일전의 수법은 사용할 수 없었다. 하나뿐인 육신을 수십으로 분리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진기를 퍼뜨려 전부 일수에 제압해야 했다.
하나라도 놓친다면 족히 수백이 시신으로 전락할 것이 명확했다.
그러려면 모두를 한 눈에 담아야 했다.
‘하늘에서.
결심한 순간 서연의 두 발이 온전히 허공을 디뎠다.
*****
폭발이 일어난 직후.
무인들의 칼부림 소리가 곳곳에서 울려퍼졌다.
더는 정체를 감출 필요가 없었다. 패검대의 무인들은 속히 천 자가 새겨진 무복을 드러냈다.
민초들의 틈 사이에 사마외도 수십이 숨어 있다.
새해의 일출을 보며 복을 빌려던 민초들을 노린 것만 보아도 의도가 분명했다.
뭇 황실은 하늘에 비유되는 바, 복을 빌려던 자들이 해를 입는다면 민초들이 이를 어찌 받아들일지 눈에 훤했다.
황실의 비선으로부터 신빙성 있는 정보를 얻었다.
그렇기에 천명검은 온갖 복장으로 위장하고 있었다. 점소이부터 명문가의 여식 행세를 하던 이도 있었다.
기다렸다는 듯 사마외도에게 날카로운 궤적을 쏟아냈다.
벽력탄을 들고 대로를 활보하는 세력답게, 그들에 맞서는 사마외도 역시 고절한 싸움꾼들이었다.
귀족가 여식으로 변장하고 있던 패검대원이 입술을 뗐다. 패검대에서 보기 드문 여인이었다.
“투로가 선명한 것을 보니 마령신권(魔靈神拳)이다. 뭣도 모르고 마교를 사칭하는 쭉정이들은 아닌 듯하다.”
옆에 있던 패검대원 둘이 반응했다.
“정녕 마교가 맞습니까? 마령신권이라면 필시 마교에서도 상위로 치는 무공일터인데.”
“그것이 중요한가? 그럴 시간에 한 놈이라도 더 베어넘겨야지. 합격진에 능숙한 놈들이야.”
여인은 등에서 제 몸통만한 태도를 꺼내들었다.
‘피해가 크겠는데.
놈들의 정체는 궁금하지 않았다. 민초를 건드린 이상 심문보다 피해를 줄이는 것이 중했다.
사방이 민초로 가득한 탓에 절초를 펼치는 것은 불가능했다. 상황이 삼재에 속하는 기본적인 검법만 사용하도록 강제했다.
사마외도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일이다. 눈매가 번들거리는 것만 봐도 사악한 속내를 짐작할 수 있었다.
초장부터 불리한 싸움이다. 사마외도가 보기에 이곳 동호는 사방이 인질로 가득했다.
“곧 성화가 강림할 터인데 쓸데없는 짓을 하는구나. 그분을 따르지는 못할 망정 징치한다고 나서는 것부터 우습다.”
그리 말하면서 품에서 벽력탄을 꺼냈다. 족히 셋이 넘었다.
입꼬리를 올리며 보란 듯이 민초들의 틈으로 던져넣었다.
“저런 미친 작자가……!”
대치하고 있던 패검대원들이 외쳤다. 그 탓에 호흡이 흐트러졌다. 사마외도는 곧장 서늘한 기운을 머금은 일권을 뻗었다.
명색이 무림을 징치한다는 칼이다. 패검대원들은 호흡이 틀어진 찰나에도 최선으로 대응했다.
둘이 사마외도를 틀어막고, 여인이 벽력탄을 맡았다.
시선 교환조차 없이 일어난 일이다. 족히 수년 간 합을 맞춰오지 않았다면 불가능할 일이었다.
“흡……!”
여인의 도 끝에서 흡인력이 일어나 벽력탄을 일점으로 끌어당겼다.
벽력탄이 도면에 닿은 순간 강기로 패도를 감싼 다음 그대로 땅속 깊이 처박았다.
다음 순간 섬광이 번뜩였다.
콰아아아앙!
땅이 흔들리는 소리였다. 패도를 조금만 얕게 박았더라면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을 것이다.
곧 사마외도의 목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한 패검대원이 호흡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또 무기를 망가뜨리셨군요. 담당 산정이 또 발광하지 않겠습니까?”
“애초부터 잘 만들었으면 이리 망가지지도 않았겠지. 덕분에 권장으로만 싸워야겠군.”
“보통의 병기는 폭발을 견디지 못합니다만.”
“독룡은 잘 하고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사경을 헤매다 깨어난지 사흘 밖에 되지 않았는데.”
대화하는 도중에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럴 시간에 사마외도의 목을 하나라도 더 베어야 했다.
그러다 불현듯.
패검대원들이 멈춰섰다. 다들 홀린 사람처럼 한 방향을 응시했다.
쾅!
누군가 하늘에서 착지했다. 흙먼지가 사방으로 퍼졌다.
“무슨……?”
패검대원들이 술렁였다. 상황을 명확하게 파악하지 못했다.
흐릿한 먼지 너머로 사이한 기파를 풍기는 사내의 인영이 비쳤다.
새어나온 마기의 양이 방대했다. 일대가 어두워질 정도였다.
“……강하다.”
여인이 중얼거렸다. 셋의 합공으로도 승산을 논하지 못할 고수임을 단번에 알아챘다.
가면을 제하고 온통 흑색으로 가득한 사내는 패검대원들에게 시선도 주지 않았다. 다만 허공을 보고 목소리를 토해냈다.
[대계를 시행하라.]
새하얀 가면 너머로 나른한 듯한 목소리가 사방을 흔들었다. 육합전성이었다.
그제서야 사내의 시선이 패검대를 향했다.
[대어가 걸려들었군. 패검대주의 목이라면 본교의 부활을 알리는 효시로 사용하기에 충분할 터.]
감당할 수 없는 강자다. 세찬 기파에서부터 그것을 느꼈다.
“……이제 알겠다. 너희는 옛 마교의 잔재로구나.”
여인은 세찬 눈길로 가면을 쓴 사내를 노려보았다.
[청목족이었나.]
“…….”
모종의 술법으로 뾰족한 귀를 숨긴 것을 단번에 간파당했다. 괜히 떠보려다가 잃은 것이 곱절은 많았다.
[한족들이 무참히 쓸려나가는 것을 눈에 담은 채로 죽어라.]
사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사방에서 섬광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사아아―
벽력탄 중에서도 유독 살상력이 뛰어난 물건임을 직감했다.
모두가 고수에 속했기에 찰나에 일어난 일을 굉장히 느릿하게 느꼈다. 범인과는 다른 시간대를 살아가는 탓이다.
그렇기에 더욱 무력함을 느꼈다. 경신법으로 닿을 수 없는 거리임은 당연하거니와, 눈앞의 사내가 그것을 내버려둘 가능성도 없었다.
이대로 끝나는가.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문득 여인의 눈이 커졌다. 사방에서 불티가 명멸하는 것을 직시한 직후였다.
그보다 빠르게 하늘에 도화를 머금은 기파가 파동처럼 번져나갔다.
화아악!
일순 하늘의 색이 바뀌었다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무공을 익히지 않은 자들은 감히 인지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찰나에 벌어진 일이었다.
굉장히 농밀하면서도 상서로운 기질을 느꼈다. 기파가 그녀의 신체를 한순간에 흝고 지나갔기 때문이다.
신령스러운 영목의 기운. 옛 어르신들이나 다룰 법한 순정한 기운이었다.
다음 순간, 불티가 새어나오던 곳에서 고통스러운 비명들이 울려퍼졌다.
내가중수법에라도 당한 듯했다. 다들 벽력탄을 떨구고 피를 토하며 몸부림쳤다.
“크, 커억!”
“벽력탄이, 어찌하여……?”
내공으로 작용하는 벽력탄이다. 상서로운 파동에 직격당한 순간 본래의 기능을 상실했다.
내부 구조가 한순간에 망가진 것이다. 신기라도 해도 모자람이 없는 기예였다.
바닥에 쓰러져 피를 토하는 이들 대부분은 패검대와 대치하고 있었다. 숨통이 끊어질 듯한 고통을 느끼면서도 한 방향을 응시했다.
패검대 역시 마찬가지였다. 벽력탄의 존재조차 잊고 같은 방향을 시야에 담았다.
하늘에.
웬 여인이 도화를 머금은 머리칼을 찬란히 흩날리며 서 있다.
사아악―!
상서롭게 퍼져나가던 파동이 다시금 여인의 손끝으로 모여드는 것은 장관이라 표현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청목족……!”
“대수림에 처박혀 있어야할 씨족이 어찌!”
“자태가 어찌 저리 고귀한가.”
전황이 한순간에 뒤바뀌었다. 저 여인이 한 일이다.
일대에 자리한 모든 무인들이 그 사실을 깨달았다. 다급히 달아나던 민초들조차 이변을 알아차릴 정도였다.
“어찌하여 한순간에 이리 조용해졌는가……?”
“저쪽! 저쪽에 사람이 날고 있소!”
“선녀, 선녀님이 하늘에서 악적들을 벌하러 내려오셨다!”
“도화경이 정녕 실존했단 말인가?”
바람을 타고 흩날리는 장포는 날개옷이나 다름없었다. 왼손에서 살랑살랑 흔들리는 쥘부채 역시 역시 천상의 신장과도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데에 한몫했다.
그녀의 새하얀 다리가 하늘을 계단처럼 즈려밟으며 차차 하강했다.
허공답보(虛空踏步)였다.
여인의 오른손에는 어느새 신병이기라 칭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검이 들려 있었다.
“비루하구나.”
여인이 가면의 사내를 응시하며 뇌까렸다.
“십 초면 족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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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검대원들이 합공하여도 감당할 수 없는 고수를 상대로, 고작 십 초를 입에 담았다.
광오하기 짝이 없는 발언이었다. 허나 누구도 쉽사리 허언으로 치부하지 못했다.
허공을 딛고 지상으로 내려오는 모습만으로 범상치 않은 존재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드넓은 천하를 통틀어 손에 꼽을 경신법이었다. 살포시 딛는 듯한 발걸음에도 세찬 기파가 실려 있었다.
시야에 닿는 모든 곳을 한 걸음에 능히 당도할 듯한 기세.
[대단히 오만하군.]
여고수를 올려다보던 가면의 사내가 중얼거렸다. 그의 손에는 어느새 검이 쥐여 있었다.
[허나 그렇게 행세할 자격이 있다. 오히려 여태 알려지지 않은 것이 의문스러울 정도군. 이러니 중원 무림이 넓다는 것이겠지…….]
쿨럭―!
돌연, 사내가 죽은 피를 토했다. 방금 전까지 태연하게 말하던 사람이라곤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하얀 가면의 입가가 새까만 피로 물들었으나, 사내의 눈가는 여전히 곡선을 짓고 있었으니 그 모습이 꽤나 섬뜩했다.
[소림의 제일가는 땡중도 이리 무식한 방식으로 내가중수법을 펼치지는 못할 터. 인정하지. 너는 천하에 흔치 않은 강자다.]
아예 없다는 말은 담지 않았다.
허언이라 느껴지지 않는 말이었다. 사내는 손가락을 하나씩 접어 세기 시작했고, 셋을 접고 나서야 멈추었다.
[본교로 오라. 너라면 교에서도 중진으로 대접받을 수 있을 것이다. 좌우광명사자(左右光明使者)의 직위조차 어렵지 않게 얻을 수 있으리라.]
광명좌사와 광명우사. 좌우 정승처럼 교주를 보좌하는 천마신교의 최고 권력자를 의미했다.
“마교 놈이었나.”
자신의 주변을 살피기 위함인지, 여고수는 여전히 허공에 일 장 남짓 떠 있었다.
여전히 인파가 많았다. 도망가는 것도 멈추고 그녀를 응시하는 군중이 적지 않았다.
군중은 벽력탄의 두려움조차 잠시 잊은 듯했다. 그녀의 주변에서 흘러나오는 상서로운 기운 탓이었다.
“어찌 한겨울에 꽃잎이 내린단 말인가.”
“우와아……! 어머니, 이것 좀 보세요!”
“따뜻하다. 열양공인 줄 알았건만, 그와도 다르구나. 천하에 없던 심법이다.”
잡히지 않는 꽃잎을 잡으려 애쓰는 아이들까지 생겨났다. 폭발의 여파가 동호 전역으로 번지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첫 폭발 이후로는 이렇다 할 피해가 없었다. 인파가 한 곳으로 쏠리니 영문도 모르고 따라 도망갔던 이들이 태반이었다. 폭죽으로 여기는 이들도 적지 않았던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기세가 완전히 뒤집혔다.
[신교라는 이름이 있거늘, 굳이 멸칭을 입에 담다니. 그것이 네 대답인가.]
서연은 사내의 말을 한 귀로 흘려들으며 생각에 잠겼다. 예전 송월 노인에게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마교는 강자와 싸우기 위해 수련합니다. 한 계단씩 차례차례 짓밟고 올라가, 끝내 하늘에 닿으려 하지요. 그렇기에 마입니다.
그렇게 따진다면 눈앞의 사내는 마교가 아니었다. 벽력탄으로 힘없는 민초들을 짓밟는 행태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다시보니 사파 잡것이 마교 행세를 하고 있었구나.”
사내가 반응했다. 가면 너머의 눈매가 일그러지는 것이 선명하게 보였다.
[흥미로운 주장이군. 이 몸이 사파라니.]
“듣기로, 마교는 타고난 강자존이라 약자를 상대하는 것 자체를 수치로 여긴다던데. 네 행태는 정반대이지 않은가. 치졸한 사파 잡것들이나 보일 행동이지.”
[……몸가짐만 패도적인 것이 아니었군. 타고난 싸움꾼이야. 도발에도 일가견이 있을 줄은.]
서연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당장도 시간만 끌고 있는 주제에 말이 많구나. 내상을 가다듬느라 정신이 없는 것이 뻔히 보이거늘.”
놈이 미쳐 날뛰며 민초들에게 피해를 입힐 것을 염려하여 가만히 듣고만 있던 참이었다. 도주를 유도하여 인적이 드문 곳으로 몰아넣을 계산이었다.
그때, 사내가 껄껄 웃었다.
[들켰나.]
그리고는 돌연 검을 내질렀다. 방향을 가리지 않았다. 상하좌우 모든 방면으로 공격이 쏘아졌다. 전부 군중을 향해 있었다. 대량 학살을 이루기에 충분한 힘이 담겨 있었다.
콰아아아앙!
마치 검은 파도가 밀려드는 듯했다.
[언젠가 다시 보도록 하지.]
검자루에 올라탄 사내의 신형이 하늘로 쏘아져 나간다. 신검합일을 이룬 자들에게만 허락된다는 온연한 어검비행(御劍飛行)의 경지였다.
한순간에 점으로 비칠만한 거리로 멀어졌다. 한순간에 거대한 존재감이 멀어졌다.
군중을 구할지, 아니면 자신을 쫓을지 양자택일을 건 것이다.
패검대원이 침음했다. 귀족가 여식의 복장을 한 청목족 여인이었다.
“어검비행이라면, 광명좌사……!”
옛 교주가 참살당했을 때 목숨을 부지했던 인물 중 하나였다. 지난 수십 년동안 행방이 묘연한 인물이기도 했다.
‘교의 부활을 입에 담더니, 정녕 마교였다고?
굳이 따지면 구마교로 분류되겠으나, 중원 무림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거기서 거기였다.
여인의 생각은 딱 거기까지만 이어졌다. 코앞에서 구마교의 광명좌사가 쏘아낸 검격의 파도가 몰아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촤아아악―!
살아있는 것처럼 일대의 모든 것을 삼키며 나아왔다. 당장이라도 수백이 휩쓸릴 듯했다.
목숨을 내던질 각오로 막을 준비를 했다. 다른 패검대원 역시 같은 생각을 하는 듯했다.
“……참으로 치졸한 수를 쓰는구나. 사마외도라는 말이 어울린다.”
그 순간, 여고수의 목소리가 일대를 울렸다.
온몸에 담겨 있던 연홍색 기운이 빛살처럼 주변을 덮었다. 한순간에 검격의 파도를 따라잡았다.
꽈아아악―!
진기에 짓눌려 파도가 더 나아가지 못하던 그때.
여고수가 절세병기를 가볍게 휘둘렀다. 마치 검은 먼지가 흩어지듯, 광명좌사의 검격이 일순간에 무로 화했다.
‘거칠구나. 이게 마기인가.
서연은 검신을 타고 오르는 마기를 보며 미간을 좁혔다. 검은 불꽃이 튀는 듯했다.
검을 굳게 말아쥐고 털어냈다. 이걸 행인들이 맞았다면 어찌 되었을지 눈에 훤했다.
같은 사람으로 여기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저런 놈을 놓쳤다간 무슨 일이 생길지 몰랐다. 제자들이 괜한 후환을 입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허나, 하늘을 저렇게 빠른 속도로 비행하는 적을 쫓아갈 수단이 없었다.
‘나도 어검술을 익혀야 하나.
그랬기에 서연은 눈을 감았다.
가면의 사내가 남기고 간 진기의 흔적을 역산하면서, 그의 위치를 가늠하려는 것이다.
의식의 범위가 말도 안되게 방대하다는 뜻이었다. 뒤이어 대자연이 호응하듯 길을 열었다.
무수한 구름을 제치고, 의식을 한 줄기 바람처럼 질주시켰다. 그 이후부터는 온전히 감각의 영역이었다.
드넓은 창공에서 홀로 이질적인 기운을 인지했다. 명백히 자연의 흐름을 거스르며 나아가는 누군가를 느꼈다.
‘거기 있구나.
곧 서연이 허공으로 손을 뻗었다.
*****
쐐애액!
대기가 찢기는 소리다. 어검비행을 펼칠 때 으레 듣는 소리였다.
드높은 상공의 거친 바람에 흔들릴 경지는 아니었다. 얕은 내상을 입기는 했으나, 그는 구마교에서도 손꼽히는 고수였다.
광명좌사(光明左使)라는 직책부터가 그러했다.
마교주를 포함하여 세손가락 안에 드는 강자에게만 허락되는 직책이다. 당장 사마련에 투신한다면 종주 자리를 얻고도 남았다.
일부러 세작들을 통해 정보를 흘려 천명검을 동호 일대로 유인했다. 벽력탄으로 민초들을 인질로 잡는다면, 패검대라고 한들 손도 제대로 쓰지 못하고 무너질 것이라 생각했다.
그 여고수만 없었더라면, 그리 되었을 것이다.
그 정도 되는 초고수는 천하에서도 손에 꼽았다. 그런데도 여태 정체를 감추고 살았다.
천하의 내로라하는 광인들과도 궤를 달리하는 인간일 것이 분명했다.
‘손속을 제대로 겨뤄보면 어찌 되었을까. 잘하면 동귀어진도 노릴 수 있을 듯한데.
그 역시 마교의 괴인이다. 자신의 목숨을 쉽게 입에 담았는데도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 정도 세월을 살아오면 생에 대한 집착보다 마지막 족적을 어찌 남길지가 더 중요했다.
파천(破天)을 논한다는 현 교주의 목을 그 목표로 삼았기에 아직은 죽을 수 없었다.
‘분명 즐겁기는 하겠다만.
기왕 죽는다면 천하제일인일 것이 유력한 사내의 검에 죽는 것이 더 즐거울 것이라 생각했다.
물론 언젠가 그 여고수에게 갚아주기는 해야 할 터였다. 그녀 탓에 구마교라는 사실도 발각당했고, 패검대도 온전히 살려보내야 했으니 말이다.
그러던 광명좌사는 불현듯 기이한 감각을 느꼈다.
‘……?
대기의 흐름이 이상했다.
여래신장(如來神掌)의 고사가 갑자기 떠올랐다.
손오공이 수십 가지 신통한 재주와 근두운을 동원하고도 석가여래의 손바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설화에서 비롯된 말이다. 아득바득 빠져나가려고 애를 써도, 끝내 사로잡혀 화과산 아래에 갇혔다는 원숭이가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뒷덜미가 한순간에 서늘해졌다. 그는 자신의 감을 믿고 황급히 허공으로 뛰어내렸다.
꽈아아악!
그가 딛고 있던 어검이 무언가에 붙잡힌 듯, 허공에서 꿈틀거리더니 처참한 소리를 토해내며 찌그러졌다.
‘……무슨?
단번에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추락하는 도중에도 그러했다.
극한으로 압축된 대기가 손바닥 형태를 띠며, 십수 년을 애용했던 명검을 구체의 형태로 짜부라뜨렸다.
꽈드드득!
온갖 혈사를 겪어온 구마교의 광명좌사의 살갗에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가면 너머 경악한 그의 눈이 작아질 줄 몰랐다.
“미친……!”
오죽 당황하여 육성으로 욕설을 토해냈다.
단순히 내공을 많이 품었다고 하여 도달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니다.
일정 경지를 넘어선 무학은 술법과 다를 바가 없게 된다던가.
자신을 맹렬히 뒤쫓는 거대한 대기의 손바닥이 그러했다.
현 교주가 옛 교주를 십 초 만에 참살했을 때 느꼈던 충격에 비견할 만했다. 아니, 어떤 면에서는 그보다도 끔찍했다.
손바닥에 찌그러져 죽다니. 광인이 아니고서야 떠올릴 수 없는 방식이었다.
명백히 절세의 영역에 속하지 않고서는 선보일 수 없는 기예라는 뜻이다.
대적불가.
암담하다는 심정이 절로 들었다. 화과산의 원숭이가 이러한 심정이었을까.
‘곧장 내빼지 않았으면 죽었군.
헛웃음이 절로 터져나왔다. 그렇다고 당장 몸 성히 빠져나갈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지금 이 순간도 신장(神掌)이 맹렬히 그를 추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대로 거리를 벌리지 못한다면 그는 창공에서 피떡으로 변해 죽은 최초의 무인이 될 것이 뻔했다.
‘빌어먹을. 이 나이에 이런 짓을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지상에 바다와도 같은 호수가 뻗어 있었다. 천하에서 가장 넓다는 동정호(洞庭湖)였다.
이 높이에서 추락한다면 몸이 온전치 않겠지만, 짓눌려 죽는 것보다야 나을 터였다.
현 교주가 어찌하여 천산에서 두문분출하는지 이해가 될 듯도 했다. 이만한 고수가 둘만 더 있어도 생사를 논해야 했을테니 말이다.
“살다 살다 이 몸이 괴력난신이라는 말을 입에 담을 줄은.”
뭉툭한 귀로 보건데 한족으로 보였으나, 명확하지 않았다. 이만한 내공을 품은 존재가 정녕 인간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지상이 점차 가까워졌다. 백 장, 오십 장, 십 장…….
그때까지도 여고수가 쏘아보낸 신장은 자신의 멱을 붙잡으려 들었다.
광명좌사는 눈을 질끈 감았다. 속도를 줄이기는커녕 되려 가속했으니, 수면 역시 돌바닥과 다름없을 것이다.
콰아아아아앙!
수면이 폭발하듯 거센 물거품을 토해냈다. 대포라도 쏜 듯했다.
양쪽 다리에서 아득한 충격이 느껴졌다. 완전히 망가졌음을 직감했다. 족히 반 년은 요양에 힘써야 할듯했다.
아득한 고통을 참아내며, 광명좌사는 깊은 물 속에서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광인이 쏘아낸 손바닥은 수면을 한참동안 더듬거리고 나서야 사라졌다.
광명좌사는 한참 뒤에야 수면 위로 올라올 수 있었다. 추락하기 직전에 붙잡히기라도 했는지, 한쪽 팔이 완전히 뭉개져 있었다.
두 다리는 망가졌고, 한쪽 팔은 산산히 부서졌다. 동정호의 길이는 족히 수백 리에 달했으니, 운좋게 배를 구하지 못한다면 익사할 것이 분명했다.
광명좌사는 뒤늦게 깨달았다.
“……잘못 걸렸군.”
천하제일의 광인이 언제고 자신을 다시 노릴 것을 직감했다.
허탈한 웃음소리가 한동한 호수에서 울려퍼졌다.
*****
땡그랑―
처참한 모습으로 변한 철조각과 핏물이 여고수의 손아귀에 들린다.
패검대의 아연실색한 시선 역시 그녀의 손바닥으로 향했다. 일전에 광명좌사가 들고 있던 검이, 찌그러진 구체의 형태로 들려 있었다.
“…….”
일대가 침묵으로 물들었다. 숨을 참는 이가 적지 않았다.
여고수는 나지막한 음성으로 말했다. 진심으로 아깝다는 듯이.
“놓쳤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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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완전히 하늘로 떠올랐다. 기나긴 적막은 그제서야 끝을 맺었다.
서연은 제 손아귀를 내려다봤다.
짜부라진 검과 핏자국이 손아귀에 들려 있었다.
‘잡았다고 생각했거늘.
거리가 워낙 아득했던 탓에 감각에만 의지해야 했다. 무언가를 잡아챘다는 느낌은 들었으나, 그것의 정체까지는 확신하지 못했다.
직접 확인하기 위해서는 잡아당겨 이곳까지 끌어와야 했다.
체외로 뻗어나간 진기의 통제를 극한까지 발휘한 기예였다. 머릿속으로만 떠올릴 법한 절기를 직접 실현해본 것이다.
소림사의 백보신권 역시 이와 비슷한 원리로 작용하지 않을까. 그 묘리를 알았다면 지금처럼 놓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서연은 얼굴 위로 떠오른 희미한 아쉬움을 숨겼다.
‘뭇 초고수들은 각자를 상징하는 절세비기가 있다던데.
오른쪽 어깨의 결분혈(缺盆穴)부터 엄지손가락의 소상혈까지 가벼운 통증을 느꼈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뻐근함이었다.
진기를 장(丈)도 아니고 리(里) 단위로 펼쳤으니 그럴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공량이 막대한 탓인지, 풀어놓은 진기를 회수하는 데에도 적잖은 힘을 써야 했다.
서연은 새하얀 팔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상처의 유무를 확인하다가, 허리춤 검집으로 납검했다.
착―
신병이기 특유의 청아한 소리가 울려퍼졌다.
그제서야 주변이 시야에 들어왔다. 일대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려 있었다.
“…….”
한 성(省)에서 손에 꼽힐 초고수의 경지에 도달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온몸의 감각이 깨닫기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곤두섰다. 주변 행인들의 속삭임이 훤히 들렸다.
“……무슨 일이 일어난거요?”
“검은 파도가 몰아치더니, 갑자기 한순간에 없어진 것만 보았소. 설마 환각이었나?”
“이래서 견문 떨어지는 무지렁이들은. 사방으로 이지러지는 기파를 못 느꼈나? 맞았으면 일격에 죄다 핏물이 되었을거다.”
“구파의 신선들보다 더 신선같은 분이 계셨구나. 어느 도문 출신이실까? 복을 빌고 싶은데. 쌀 한섬도 받아주시겠지?”
“저 날개옷 좀 보렴. 필시 동호를 수호하는 여선(女仙)이실거야. 저 용모좀 봐. 어찌 저리 아름다우신지……. 손이라도 한 번 잡아주셨으면 좋겠다. 시녀 행세라도 하고 싶은데…….”
“아가씨! 명문가의 여식이 그런 말씀을 함부로 하시면 아니됩니다!”
낭인들과 뭣 모르는 민초들의 대화가 이어졌다. 신분을 막론하고 다들 경탄을 입에 담았다.
제갈세가와 무당파가 자리한 호북 땅, 심지어 천하에서 드문 경치를 품었다는 동호 근처였다.
당연히 일대의 절대자 행세를 하던 이들도 자리하고 있었다. 혼란 가운데에서도 인파에 휩쓸리지 않고 진형을 유지하던 이들이었다.
처음부터 온전히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기에, 상황이 어찌 돌아가고 있는지를 꿰뚫어 볼 수 있었다.
강자의 출현에 관한 정보는 그 자체로 막대한 보화가 오가기 마련이다. 개중에는 대화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아예 기막까지 펼치는 이들도 존재했다.
“들어본 적이 있소. 신녀문 문주의 머리카락이 도화를 품었다던데. 그때는 무슨 말인지 몰랐소만, 직접 목도하니 알겠더군. 도화 그 자체요.”
“하오문이 웃돈을 요구하기에 왜 그런가 했더만, 이런 내막이 있었을 줄은. 구마교의 광명좌사가 수를 섞지 않고 물러난 것을 보면, 구파의 장문인 중에서도 수위에 속한다고 봐야겠소.”
“연배가 어찌될까. 분명 환골탈태는 했을테고……. 외양만 봐서는 약관이라고 해도 믿겠소만…….”
신흥 강자의 출현을 곧 기득권에 대한 위협으로 받아들이는 무림 호족다웠다.
초고수의 무위는 차치하고, 작금의 일이 자신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칠지만 따져보는 것만 봐도 그러했다.
당장 퍼지지도 않은 명성을 깎으려 드는 이들도 존재했다.
“애초에 광명좌사가 맞는지도 확실치 않지 않소?”
“대놓고 어검비행을 하는 고수를 무시한다면 옹이구멍이나 다름없는 안목을 가진 것을 드러내는 것이나 다름없소.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겠지. 저 둘이 손속을 제대로 섞지 않았으니, 그 면을 파고드는 편이 맞소.”
“비무라도 청해볼까. 그리하면 우리 가문이 그 명성을 그대로 가져올 수 있을 듯한데.”
허나 전신에서 새어나오는 기파 탓에 그것을 실제로 실행하는 자는 없었다.
기파 자체는 정순했지만, 사람 자체의 분위기가 패도적이었다. 압도된 무인들이 적지 않았다.
“가능하다면 가문의 식객으로 모시는 것이 좋겠소.”
“신녀문의 이름도 알려지고 좋지 않겠소이까.”
“구파가 십파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오. 미리 연을 맺어두어 손해볼 것은 없겠지. 결국 속세로 나온 것을 보면 명예욕도 어느 정도 있는 모양이고.”
억지로 깎아내리는 자들도 존재했다. 허나 신녀문주의 무위를 조금이나마 제대로 목도한 이들은 그러지 못했다.
실력이 유독 뛰어난 이들이었다.
신녀문주의 손끝에서 막대한 양의 진기가 뻗어가는 것을 목도했다. 내공이 많기로 소문난 작자들도 감히 흉내내지 못할 공력 파동이었다.
인간으로 보이지 않았다. 한족으로 보이지 않는 도화빛 머리카락을 보고 도리어 안도한 이들도 있을 정도였다.
인간 행세를 하는 교룡으로 여기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그들은 기막은커녕 전음조차 함부로 내뱉지 못했다. 여고수가 문책할 것을 염려한 것이다.
패검대가 그러했다.
하나같이 내로라하는 기재들만 모인 집단이라 더더욱 그런 경향이 도드라졌다.
눈빛으로 짧게 의견을 나누는 것이 고작이었다.
“도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구명지은을 입었습니다.”
귀족가 여식 복장을 한 여인이 절도 있게 허리를 숙였다. 당황한 기색을 완전히 감춘 채다.
스스로를 대명의 관리로 여긴다는 천명검이 취할 수 있는 최고의 예였다. 상대를 구파의 장문인과 동격으로 여기지 않고서는 불가한 일이었다.
서연은 이러한 인사를 받아본 적이 있었다. 당소소를 처음 구했을 때였다.
‘천명검은 다 좋은 사람들이구나.
무인들이 으레 드러내는 호승심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만날 때마다 호감이 더해졌다.
서연은 천천히 입술을 뗐다.
“괜히 방해하여 죄인을 놓친 것은 아닌지 염려가 됩니다.”
“……누가 그리 생각하겠습니까. 고인께서 돕지 않으셨다면 호북 전역에 다신 없을 참사가 벌어졌을 것입니다. 감사를 드려야 마땅합니다.”
천명검이 외인에게 고개를 숙이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아무리 말단이라도 그랬다.
대주 아래로는 전부 말단이라 칭하는 기괴한 집단인 탓이다.
강호로 따지면 정예 집단에 속하는 이들을 그 누가 말단이라 여기겠는가.
그렇기에 작금의 일이 민초들에게 더욱 크게 다가왔다. 눈앞의 여인이 그만큼이나 존귀한 인물이라는 뜻이었으니.
“천명검이 고개를……. 정녕 구파의 신선이신거요?”
“구천현녀(九天玄女)의 환생이라도 되시는 걸까. 존성대명이라도 들어야 보시(布施)를 바칠텐데. 어쩜 좋아.”
도교의 최고신인 서왕모에 버금간다는 여선을 들먹이는 이들도 생겨났다. 광명좌사를 쫓아낸 모습을 보고 치우를 물리쳤다는 여선을 떠올린 것이다. 웅성거림이 점차 커졌다.
천명검 여인, 단리가예(段離佳藝)는 그제서야 자세를 풀었다.
“사람이 많습니다. 자리를 옮기는 편이 좋을 듯한데 어찌 생각하시는지요.”
“저는 괜찮으니, 뒷수습에 집중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서연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옅은 미소를 피워올리는데, 방금 전 패도적인 기세를 내뿜던 사람과는 동일인이라고 느껴지지 않았다.
경지에 이른 고수들은 하나같이 괴이한 면모를 가지고 있다는 소문이 있다. 패검대원들은 그 소문이 낭설이 아님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당장 그들이 모시는 대주부터가 그러했기 때문이다.
‘이분께서는 그 기질을 악인에게만 드러내는 것일까.
전 광명좌사를 무슨 비충(飛蟲: 날벌레) 쫓아내듯 대하는 태도만 봐도 그러했다.
눈 밖에 나는 행동을 하는 순간 곧바로 고기 경단으로 변하지 않을까.
당연히 태도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청목족임에도 경어를 사용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눈 앞의 여인은 감히 연배를 추측할 수 없는 강자였다.
“…….”
당장 자신을 어린 후기지수로 여기는 듯한 미소만 봐도 그러했다.
단리가예의 외모는 한족으로 치면 어린 편에 속했다. 많이 쳐봐야 열 여덟은 될까. 실제로는 지천명이 넘었다.
모종의 술법으로 뾰족한 귀를 숨기기는 하였으나, 이만한 고수가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씨족의 높으신 분이라고 생각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둥그런 귀는 문제되지 않았다. 옛 어르신들에게는 뾰족한 귀를 숨길 수단이 무궁히 많았다.
아예 신체의 기질 자체를 변화시키는 고등한 술법도 있다고 들었다.
단리가예가 서연과 대화를 나누는 동안, 눈치빠른 나머지 패검대원들은 빠르게 일대를 통제하기 시작했다.
행인들은 통제를 따르는 도중에도 서연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아예 엎드려 절하려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관심을 넘어 숭배에 도달할 지경이었다. 당연히 부담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서연은 그런 그들을 지켜보다 넌지시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방해가 될 듯하니, 자리를 피해드리지요.”
“……예?”
단리가예가 고개를 들었을 때, 서연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 있었다.
*****
동호를 천천히 유영하는 유람선.
갑판 꼭대기층에 앉은 여인이 아래를 힐끗한다. 그녀를 향하는 시선들을 느낀 것이다.
“……면사를 다시 써야 할지 고민이 되는구나.”
서연은 제자들을 보며 그리 말했다. 원래도 제자들과 동호에서 유람을 즐길 생각이었다. 헌데 낮에 벌인 일 때문일까, 유람선에 탄 사람들의 시선이 꺼질 줄 몰랐다.
기나긴 장포에 도화색 머리카락, 허리춤에 찬 신검에 죽립.
특정하기 쉬운 외형이었다. 그것을 아는 당소소가 조용히 말했다.
“솔직히, 이쯤 되면 면사를 쓰셔도 알아볼 사람은 알아볼 겁니다.”
기파를 퍼뜨려 존재감을 흐릿하게 만들 수는 있었다. 허나 민초라면 모를까, 일정 경지에 이른 무인들에게는 도리어 눈에 띄었다.
서연도 그것을 알았기에 힘없이 웃었다. 제자들 앞에서 유약한 모습을 드러낼 수는 없었기에 대놓고 티내지도 못했다.
‘맘 편히 유람할 생각이었거늘.
웬 광인들 때문에 일이 꼬여버렸다. 운남에서 퍼진 소문이야 거리가 수천 리가 넘으니 그렇다 쳐도, 호북은 달랐다.
하남이 지근거리였다. 소문이 퍼지기에 충분한 거리라는 뜻이다.
중원에서 명성이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는 서연도 잘 알았다. 당장 신녀문의 개파식을 연다고 하면 온갖 방파에서 참가 의사를 드러낼 것이 분명했다.
거기까지면 괜찮다. 허나, 민초들이 찾아와 자신을 칭송할 생각을 하니 절로 부담이 몰려왔다.
‘하지 말아야겠다.
당장은 제자 둘을 가르치는 데에 전력을 다할 생각이었다.
만약 개파식을 한다고 해도 지인들만 초청해서 약식으로만 진행해야 하지 않을까.
구파의 장문인들이 어찌하여 산문 바깥으로 나오지 않는지를 이해한 서연이었다.
지금 당장도 그랬다.
“선주 놈, 뱃삯을 열 배를 올리더군.”
“내 경지가 낮아서 그런가? 죽립의 그림자 너머가 보이지가 않아. 용모를 다시 한 번 보고 싶거늘.”
“선녀님 덕에 목숨을 건졌으니, 한 해의 복을 빌기 위해서라도 마땅히 공물을 드려야 할텐데…….”
“형상을 그려낸 화가가 있다던데. 웬 대부호가 웃돈을 주고 사갔다고 들었소.”
상황을 얼추 정리하고, 곧장 제자들에게 달려가 손을 잡고 배에 탔는데도 따라오는 이들이 있었다.
옷차림들만 봐도 평범한 민초가 아니었다. 다들 한가락 하는 작자들이었다.
그런데도 눈동자에 동경을 품은 이가 대다수였다.
“…….”
얕은 한숨을 내쉬며 동호를 응시하던 순간이었다.
서연의 시선 끝에 웬 중년인이 비쳤다. 얼굴에 새겨진 흉터가 유독 선명한 사내였다.
놀랍게도 물 위에 떠 있었다. 등평도수(登萍渡水)라도 펼치는 듯했다.
그의 주변은 온통 붉은 빛으로 가득했다. 자세히 보니 잘려나간 시체들이 족히 수십 구는 되었다.
전투를 마무리한지 얼마 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시체들이 하나같이 세찬 기파를 내뿜고 있었다.
홀로 정예 무력대를 상대하기라도 한 것일까.
등에 새겨진 천 자가 아니었다면, 사마외도로 오인할 법한 외모였다.
곧 둘의 시선이 마주쳤다.
“…….”
중년인은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
단리가예는 황급히 일을 수습했다. 첫 폭발에 휩쓸려 중상을 입은 대원들이 셋이었다. 말이 중상이지 은퇴를 논해야 할 수준의 상처였다. 팔다리가 완전히 날아갔기 때문이다.
신의 정도는 와야 치료를 논할 법했다.
패검대주가 홀로 적진을 타격하기 위해 자리를 비운 탓이었다. 설마 민초들이 대놓고 활보하는 동호를 노릴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당시에는 몇 번이고 검증한 정보를 따라 선제타격하는 것을 합리적이라 여겼다.
허나 상황이 이리 되었으니, 작당모의한 뭇 동창들이 숙청당하지 않을까.
아무튼, 동호에 패검대원들만 있던 것은 그런 연유였다.
“……대주께서 늦으시는군.”
일전의 여고수가 갑자기 모습을 감춘 것과 연관이 있는 걸까.
패검대주는 뭇 대주들 사이에서도 호승심이 드높기로 유명한 사내였다. 둘이 충돌했다간 무슨 일이 생길지 알 수 없었다.
‘설마.
단리가예는 괜시리 불안에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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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검대주는 손에 들린 시신을 놓았다. 원체 무거운 호신갑을 입고 있던 탓일까, 시신은 호수 바닥으로 쏜살같이 가라앉았다.
무력대를 이끄는 수장 격의 시체는 다시 떠오르지 못했다.
패검대주는 가볍게 손을 털어 묻은 핏물을 털어내며 놈들의 무공 연원을 가늠했다. 천명검의 대주들은 황실의 정보단체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어 동급의 고수들에 비해 견문이 넓었다
‘마라법찰(魔羅法刹)인가.
옛 마교가 거느리던 단체였다. 파문당한 땡중들이 모인 무맥이라던가.
소림의 칠십이절예처럼 수많은 무학을 뒤섞어 쓰는 것이 특징이었다. 작은 나룻배를 경공으로 옮겨 타며 합격진을 이어가는 모습만으로도 그 실력을 짐작할 만했다.
어떻게든 움직임을 지연시켜 합류를 막으려는 행동. 그쯤 되니 패검대주도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동호에서 들렸던 폭발음과 분명 연관이 있으리라.
등평도수를 펼치며 인근을 살피던 패검대주가 품속에서 얇은 서책을 꺼냈다. 비급이라기에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빈 종이였다.
패검대원들의 생사가 기록되는 명부. 아무런 글씨도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은, 아직 아무도 죽지 않았다는 뜻이다.
‘착각이었나.
이 법보(法寶)의 원리는 그조차 알지 못했다. 그저 건국 시기부터 내려오는 물건이자, 단주가 지닌 법보의 열화판이라는 사실만 알 뿐이었다.
천하를 징치하겠다고 나서는 천명검을 지방의 호족들이 함부로 해치지 못하는 이유도 이것 때문이었다.
그때쯤 은비조가 날아들었다. 패검대가 사용하는 영물이었다.
말단들의 최선임 격인 단리가예가 보낸 전서였다. 상황이 정리되자마자 급히 쓴 것인지, 평소와 달리 필체가 흐트러져 있었다.
―구마교의 광명좌사, 동정호 방향으로 도주.
―심면천(沈免千), 과장학(郭長鶴), 묘구(描仇) 등 삼인 부상.
―벽력탄 총 84개 중, 1개 폭발, 83개 회수.
―구마교 추종자 33명 체포.
“…….”
전서의 첫 줄부터 이해하기 힘들었다. 패검대주는 곧장 미간을 좁혔다.
실로 구마교의 광명좌사가 나타났다면 패검대가 몰살당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헌데 도주라니? 이치에 맞지 않았다.
그때, 또 다른 은비조가 날아들었다. 역시나 전서가 매달려 있었다.
―신녀문주로 추정.
―구마교의 추종자 전원을 한 합으로 제압. 마교주의 군림보(君臨步)와 유사한 원리로 추정.
―광명좌사는 토혈 후 어검비행으로 도주. 이후의 상황은 부족한 견문으로 파악 불가.
―대주님. 신녀문주가 유람선을 타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알아보니 동선이 겹칠 가능성이 높습니다. 유념하십시오.
이전보다 더욱 망가진 필체였다. 그만큼 다급히 적었다는 뜻이리라.
패검대주의 미간은 더욱 깊게 굳어졌다.
신녀문주, 들어본 적이 있었다. 황태자가 중히 여기는 인물이라던가. 대주들 사이에서 절세고수라는 말이 파다했다.
암검대주는 아예 한술 더 떠서 다음 대 단주 내정자라는 말도 했다. 종잡을 수 없는 괴팍한 괴력난신이라는 평을 덧붙이면서다.
반로환동의 여파를 과하게 겪은 늙은이다. 말투에 과장과 허언을 섞는 경우가 많았다. 나잇값을 못한다는 뜻이다.
얼핏 듣고 넘겼다.
패검대주는 타인을 직접 겪어보고 나서 판단하는 인물이었다. 뭇 소문에 휘둘리지 않았다.
그때 웬 유람선 한 척이 보였다. 거리가 꽤 되었다.
패검대주는 유람선에 올라탄 민초들의 표정과 행색부터 살폈다.
정갈한 옷차림과 밝은 표정에서 동호의 상황을 짐작했다. 이대로 복귀해도 될 듯싶었다.
‘신녀문주도 있는가.
얼굴이나 볼 요량으로 갑판을 차례로 살폈다. 거리가 상당히 멀었던 탓에, 올라타있던 민초들은 그의 시선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때였다.
갑판 꼭대기에서 압도적인 존재감이 움텄다.
호수 위에 태양이 하나 더 떠올라 명멸하는 듯했다. 직시하는 것 자체가 부담으로 다가왔다.
암검대주의 말이 떠올랐다. 괴팍한 괴력난신이라던가. 그 말이 맞았다.
도대체 어떤 고수가 저만한 경지에 오르고도 보란 듯이 기파를 뿜어내고 다니겠는가. 반박귀진을 이루지는 못할망정.
‘무공이 얼마나 고강하기에.
자신의 기파를 직시한 모든 고수에게 선전포고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전부 상대할 자신이 있다는 것이다.
천명검의 단주나 보일 법한 자신감이었다.
‘어울리기는 하는군.
패검대주는 천명검을 이끄는 자는 구파의 장문인보다는 세가의 가주와 같은 기질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천하를 징치하기에 걸맞는 패도적인 기질을 보여야 한다는 뜻이다.
작금의 천명검단주가 그러했다.
그런 평을 하던 도중에, 느껴지던 기파가 다시금 거세졌다.
처음에는 자신을 도발하려는 줄 알았으나, 나중에서야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저 시선이 마주친 여파였을 뿐이다.
‘…….
도문을 이끈다는 여인의 눈이 어찌 저리 패도적인 광망으로 번들거린단 말인가.
집채만한 산군이 저를 응시하는 듯했다. 모든 비무를 생사결로 임할 광인이나 가질 법한 눈빛이다.
광명좌사도 저 기질을 느끼고 도주한 것이 분명했다.
당장이라도 시선을 내리깔지 않으면 물어뜯기기라도 할 듯했다.
언젠가 상관이 될 수도 있는 이에게 자존심을 드러내 무엇할까. 비무는 북경에서 원없이 할 수 있을터였다.
결국 패검대주는 대의를 택하기로 했다.
“…….”
언제까지 시선을 돌리고 있어야 하는가. 부자연스러운 적막이 느껴지던 때였다.
신녀문주가 마침내 시선을 돌렸다. 동시에 그를 짓누르던 압박감도 사라졌다.
“……음.”
그제서야 다리가 발목까지 잠겨 있었음을 깨달았다. 마라법찰의 정예를 상대할 때도 젖지 않았던 옷자락이었다.
신녀문주의 기파에 짓눌린 여파였다.
패검대주는 다시금 암검대주의 발언에 틀림이 없음을 인정했다.
‘당최 종잡을 수가 없는 여인이군.
흠으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한 집단을 이끌 초고수라면 저만한 기백을 보여야 했다.
도리어 장점으로 다가왔다. 패검대주 역시 별종에 속했기에 가능한 생각이었다.
패검대주는 멀어지는 유람선을 지켜보았다. 찰박― 울리는 발소리 너머로 그의 신형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
‘그리 즐겁지는 않구나.
어느덧 나루터에 다다른 유람선을 보며 서연은 그리 생각했다.
본디 뱃놀이란 유복한 이들의 풍류라 들었다. 하여 제자들과 경치 좋은 곳에서 좋은 음식을 먹고, 악공들의 음악을 들으면 절로 미소가 피어오를 줄 알았다.
그렇지 않았다. 오죽 할 짓이 없으면 이런 짓까지 할까 싶었다.
차라리 날을 잡고 각예를 하는 편이 수십 곱절은 즐거울 듯했다.
서연은 고개를 내려 제자들의 면면을 살폈다. 둘다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배를 타는 와중에 비연천공을 운용하는 것이 꽤나 고역이었던 탓이다.
서연은 넌지시 말했다.
“인근에서 하루 묵고 낙양으로 가자꾸나.”
뱃놀이를 즐기는 사이에 동호의 사건이 일단락된 듯했다. 곳곳에 관군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폭발한 객잔 주변을 둘러싼 관군들은 창을 치켜든 채 지나가는 행인들을 면밀히 살폈다.
그 한가운데.
헌앙한 얼굴의 사내가 당혹스러운 얼굴로 당소소를 응시하고 있었다. 녹빛을 띄는 눈동자. 당소소의 오라비였다.
“네가 어찌 이곳에……?”
당소소에게 듣기로는 열 살 연상이라고 했다. 서른을 바라보는 나이라는 뜻이다.
그래도 팔대세가의 직계라는 것일까. 뭇 여인들에게 미청년이라 불릴 만한 용모였다.
다시 보니 체구 또한 탄탄했다. 암기를 전문적으로 다루다 몇 년 전 패검대의 무공에 맞춰 몸을 새로 짜낸 듯했다.
독문병기를 바꾸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닐 터인데도, 허리춤에 매인 검이 몸의 일부처럼 느껴졌다.
단련을 하루도 쉬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제 별 것이 다 보이는구나.
서연은 속으로 생각했다. 뭇 장문인들은 이러한 시선으로 타인을 마주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설마 출가한 것이냐? 가주님께 말씀은 드렸느냐?”
당지승이 말했다. 그는 걱정이 가득한 눈으로 당소소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태도가 마치 어린 아이를 대하듯 조심스러웠다.
“사천성에서 호북의 거리가 족히 수천 리인데. 어찌 가문의 호위도 데려오지 않고…….”
“오라버니.”
당소소는 이런 상황이 익숙하다는 듯 당돌한 어투로 말을 끊었다.
“족히 삼 년만에 뵙는군요. 중상을 입으셨다 들었는데, 다시 보니 무탈하신 듯하여 다행입니다.”
당지승은 곧장 어린 여동생의 말뜻을 알아들었다. 멋쩍은 웃음을 띤 얼굴로 말했다.
“혹 내 걱정이 되어 이곳까지 찾아온 것이냐?”
“안타깝지만 아닙니다. 우연이었지요.”
“큰일에 휘말리지 않아 다행이구나. 도중에 네 모습을 보았다면 염려하여 임무에도 몰두하지 못했을 것이다.”
“여전하십니다.”
살포시 미소 지은 당지승이 말했다.
“장자가 가문의 뜻을 저버리고 떠나간 탓에, 겪지 않아도 되었을 평지풍파를 겪었겠지. 너와 진성이에게는 미안한 마음뿐이다. 그래도 이렇게나마 마주하니 좋구나.”
조용히 읊조리던 당지승의 시선이 그제야 서연에게로 향했다.
커진 눈동자만 보아도 서연의 존재를 뒤늦게 알아차렸음을 알 수 있었다.
“송구합니다.”
직전에 당소소에게 보였던 것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태도였다. 정중하기 그지없었다.
“패검대의 당지승이라 합니다. 신녀문주시지요? 당시 현장에 없던 탓에, 곧바로 알아뵈지 못했습니다. 선배들이 구명지은을 입었다 들었습니다.”
협의지사라는 말이 어울리는 사내였다. 세가의 위명을 내세우지 않고 패검대로서의 정체성만 드러내는 것만 봐도 그러했다.
여태 만났던 후기지수들과는 분위기부터 달랐다.
‘제대로 닦여 있구나. 당가주께서 안타까워하신 이유를 알겠다.
서연은 생각했다.
당소소가 오라비를 또 언제 만날지 기약할 수 없었다. 이번 기회에 함께 식사라도 한다면 좋을 터였다.
곧 서연이 입을 열었다.
*****
일대를 관할하는 부윤이 천명검을 배려하여 관에서 운영하는 객잔의 상층을 비워준 상황이었다.
눈치를 보던 무인과 세인들이 빠져나간 탓에, 드높은 객잔은 답지않게 고요했다.
청목족으로 살아가며 패검대에 오래 몸담은 탓인지, 동료들의 죽음을 누구보다 많이 겪었다. 오늘 일로 누군가 죽지는 않았으나, 은퇴를 논할 만한 부상자들이 속출했다.
단리가예는 연장자로서 착잡한 심정을 풀고자 복도로 나온 참이었다.
독룡과 그 뒤를 따라 여인들이 객잔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대화를 나누는 것이, 그새 친분을 쌓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동료들이 중상을 입었거늘, 아무리 임무가 끝났다고는 하나 저리 방종한 행태를 보여서는 안되었다.
‘여태 저런 모습을 보인 적은 없었거늘.
사경을 헤매고 성격이 뒤바뀌기라도 한 것일까. 연장자로서 문책해야 마땅했다.
큰 숨을 들이쉬던 순간이었다. 단리가예의 시선이 일순 막 객잔 내부로 들어오는 여인에게로 향했다.
“……!”
단리가예의 눈가가 살짝 떨렸다. 사자후를 토해내려던 입술을 다물었다.
분노가 한순간에 사그라들었다.
사자후가 한순간에 소심한 전음으로 탈바꿈했다.
―독룡아, 대체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잠시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독룡의 시선이 객잔의 위층을 향했다. 단리가예는 격하게 반응했다. 시선이 닿지 않도록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단리가예 선배님?
―둘러보지 말고 거기서 대답하거라.
―예, 다름이 아니라 신녀문주께서 이곳의 명물인 우창어(武昌魚)를 드셔보고 싶다고 하시어…….
독룡이 데려온 것이 아니라, 신녀문주가 직접 찾아왔다는 뜻이다.
단리가예는 식은땀을 느끼며 물었다.
―……설마 상층에서 드신다더냐?
―아랫사람들을 배려할 줄 아시는 분입니다. 설령 그런 일이 생기더라도 미리 전해드리겠습니다.
다행히 독룡이 별호에 걸맞게 처신했다.
단리가예는 진심을 담아 덧붙였다. 고맙다.
속으로 안도하던 순간이었다. 누군가가 다시금 객잔으로 들어왔다.
얼굴에 선명히 새겨진 흉터.
“…….”
패검대주였다.
침묵 속에서 신녀문주와 시선을 마주했다.
“…….”
놀랍게도 먼저 입을 연 것은 패검대주였다.
"식사하려던 참인데, 합석하시겠소?"
단리가예는 망연한 표정을 지었다.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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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차차 저물고 있었다. 산기슭을 따라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눈발이 선선한 바람을 타고 태실산 자락을 덮어가고 있었다. 중턱에 홀로 놓인 오두막집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초월적인 무인의 영성이 닿은 탓일까. 아니면 오두막집을 가린 진법 때문일까. 주인이 자리를 비운지 일 년이 가까웠음에도 대지는 더없는 활기를 머금고 있었다.
짐승들은 애처로운 눈빛으로 만상이절진 주변을 맴돌았다. 본능적으로 저 안쪽으로 향해야 살찌울 수 있다는 것을 느낀 것이다.
먹을 것을 구하기가 힘든 겨울이다. 태실산 자락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허나 소림의 사대금강조차 쉬이 넘어서지 못한 진법을 일개 미물들이 넘어설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크기와 능력을 막론하고 통과하지 못했다. 창공을 유영하는 맹금들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본래부터 만상이절진 안에 자리잡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허나 자그마한 산새들조차 산군의 존재감에 압도되어 자취를 감춘지 오래였다.
예외가 없지는 않았다.
과거, 부뚜막 한 켠에 자리를 틀었던 자그마한 지주(蜘蛛)가 그 예외였다.
하찮은 미물이었던 탓에 산군의 기세를 느끼지도 못했고, 워낙 작아 화련의 눈에 띄지도 않았다.
미물 특유의 본능으로 대지의 영성을 마음껏 받아먹었다. 포식자와 경쟁자가 죄다 사라진 환경인 탓에, 오롯이 성장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덩치가 하루가 다르게 불어났다. 더는 부뚜막에서 머무를 수 없을 정도로 자라났다.
어느 순간부터 짐승보다 영물에 가까워졌다. 뱃속에 품은 독기 또한 하루가 다르게 짙어졌다.
뭇 영물이 내단을 품듯, 이 지주 또한 독단을 품게 된 것이다.
마침내 작은 강아지만큼 커졌을 때, 지주는 비로소 사유(思惟)할 수 있게 되었다.
대지를 적신 영기가 기껏해야 몇 달 치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더욱 성장하기 위해서는 바깥으로 나아가 포식해야 함을 깨달았다.
예전처럼 자그마한 비충들을 잡아먹는 것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 역시 직감했다. 보다 큰 것을 삼켜야 했다.
그때 지주의 위로 그림자가 드리웠다. 지주는 곧장 시야를 위쪽으로 치켜들었다.
은색 깃털을 가진 올빼미가 나무둥치에 자리하고 있었다. 얼핏 보아도 보통 짐승과는 거리가 멀었다.
저걸 삼키면 성장할 수 있을까? 시험해 보아야 했다.
그리 생각하며 조심스럽게 다가가던 때였다.
―자리를 오랫동안 비웠기에 설마 했거늘. 역시 주인님이시다. 자취만으로도 온갖 이적을 행하시니.
갑작스레 사방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주는 고개를 좌우로 돌려가며 목소리의 근원을 파악하고자 했다.
오두막의 주인이 찾아왔는지를 확인하려는 것이다. 허나 아무리 둘러보아도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살생을 저질렀다면 곧장 독단으로 갈음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너는 운이 좋구나.
그제서야 눈앞의 올빼미가 전성을 토해낸 주체임을 깨달았다.
올빼미의 주변으로 햇빛을 따라 은빛 실선이 번져나갔다. 지주가 거미줄을 쏘아보낸 것이다.
보통의 거미줄과는 그 강도와 탄력부터 궤를 달리했다. 멧돼지와 같은 산짐승조차 떨쳐내기 힘들 정도였다.
허나 올빼미는 거미줄에 닿기 직전까지도 특유의 차분한 기도를 머금고 있었다.
―평생 의복을 짜게 하면 되겠구나. 천잠사보다 네 것이 낫겠다. 독 역시 주인님의 제자가 용이하게 사용할 수 있을테고.
영문모를 소리를 계속하던 그때였다.
투둑―!
거미줄이 일순간에 터져나갔다. 찰나에 벌어진 일이었다.
지주는 눈 앞의 올빼미가 갑자기 수십 배는 커진 것 같다고 느꼈다. 황급히 놀라 주변을 둘러보았다. 작은 풀잎이 어느샌가 고목보다 크고 두터워져 있었다.
세상이 커진 것이 아니라, 자신이 작아진 것이다.
당연히 정면의 올빼미는 말할 것도 없었다. 발톱에라도 짓밟힌다면 그대로 뭉개질 것이 분명했다.
지주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어찌된 영문인지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거미줄에라도 걸린 듯했다.
그제서야 눈앞의 올빼미가 저보다 상위의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다.
약육강식의 이치대로라면 자신은 곧장 잡아먹혀도 모자랐다. 허나 어찌된 영문인지 올빼미는 자신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기만 했다.
미묘한 얼굴을 지으면서다.
―그 크기로 살거라. 더 커지면 징그럽다. 며칠 안에 네 주인이 될 여아가 당도할 터이니, 잘 처신하도록 하여라.
주인이라는 말만 겨우 알아들었다.
지주가 정신을 차렸을 때, 눈 앞에 있던 올빼미는 어디론가 사라져 있었다.
*****
달그락―
식기를 움직이는 소리만 들릴 정도로 고요했다. 본디 패검대의 식사 자리가 어떠했는지를 생각하면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생사를 넘나드는 전투를 수없이 함께했다. 연차에 따라 선후배라 부를 뿐, 표면적으로는 전부 말단에 불과한 탓에, 무림의 일반적인 무력대보다 사이가 훨씬 돈독했다.
사석에서도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다.
“…….”
이리 분위기가 처참해서는 안된다는 뜻이다.
당장이라도 체할 듯한 얼굴을 지어내는 이가 적지 않았다.
패검대원들은 곁눈질로 상석을 살폈다. 패검대주와 신녀문주가 마주 앉아 서로를 쳐다보고 있었다.
당장에라도 칼부림이 일어날 듯했다. 자신들의 대주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그렇게 생각했다.
천명검의 단주에게도 수십 번 넘게 비무를 청한 인간이다. 오죽했으면 별호가 광풍야차(狂風夜叉)겠는가.
전투 중에도 그 성향을 감추지 않았다. 검으로 상대를 찢는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였으니 오죽할까.
견문이 부족한 몇몇 관리들은 그런 패검대주를 보고 사마외도라 오해한 적이 적지 않았다.
젊었을 적에는 이보다 더 심했다고 했다. 단리가예가 그 증인이었다.
패검대주가 불쑥 입을 열었다.
“수하들이 신세를 졌다고 들었소.”
움찔―
둘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음식을 먹던 패검대원들의 몸이 한순간에 굳었다. 구마교의 주구들을 호기롭게 베어내던 무인들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태도였다.
단리가예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사실상 부대주에 준하는 배분인 탓에, 그녀는 패검대주와 매우 가까운 간격에 자리하고 있었다.
코앞에 신녀문주가 앉아 있다는 뜻이다. 주변에 도움을 요청하지도 못했다. 보다 처량한 눈빛으로 애써 시선을 피할 뿐이다.
“대주된 자로서, 작게나마 대접하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하여 식사를 권하였소.”
대주가 한마디를 뱉을 때마다 몸이 절로 움찔거렸다. 대치하는 범들 사이에 놓인 야토(野兎)의 심정이 이러할까.
“어찌, 입맛에는 잘 맞으시오?”
“참으로 잘 맞습니다.”
서연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근래 들어서는 식사 중에는 죽립을 쓰지 않았다. 그 탓에 몸가짐이 몹시 도드라졌다.
제자들의 눈이 반짝이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서연은 가볍게 패검대원들의 면면을 살피다 물었다.
“패검대와 다시금 연이 닿을 줄은 몰랐습니다. 과거 섬서에서 팽 공자를 만났던 적이 있지요. 그때 신세를 졌었습니다만……. 이곳에는 보이지 않는군요.”
잠시 말을 고르던 패검대주가 입을 열었다.
“……팽무성은 본가에 일이 생겨 이번 임무에 참여하지 않고 급히 복귀하였소. 애당초 천명검의 무력대 전원이 동원되는 것 자체가 흔치 않은 일이오. 이번 일도 벽력탄의 제조법이 유출되었다는 첩보를 듣지 않았다면 수하 다섯으로 충분하였겠지.”
“후폭풍이 크겠군요.”
“구마교의 계획대로 일이 진행되었다면 후폭풍 선에서 끝나지 않았을 것이오. 천명검의 무력대는 존재 자체로 무림의 부담인 바, 역모와 같은 중대사가 아니면 모이는 일 자체가 드무오. 대주들 간의 활동 범위가 겹치지 않는다는 뜻이지. 신녀문주가 자리하지 않았더라면 다른 대주가 합류하기까지 족히 달포는 걸렸을 것이오.”
외인에게 들려줄 법한 이야기는 아닌 듯했다.
허나 서연은 이를 패검대주 나름의 보답으로 받아들였다. 마땅히 줄 것이 없으니 정보로라도 갚으려는 것으로 여겼다.
‘수하를 매우 중히 여기시는 분이구나.
악살과도 같은 외모와는 다르게 말투는 정중하기 그지없었다. 천명검의 대주들은 다 이와 같은 면모를 품고 있을까.
그에 비하면 자신은 아직 멀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일문의 문주에 걸맞는 의기를 보여야 하거늘.
허나 저만한 위치에 서고도 예의를 차리는 인물에게 어찌 하오체를 사용한단 말인가. 당장은 무리였다.
“동창의 환관들 역시 숙청을 피해갈 수 없을 것이오. 구마교와 내통하는 것은 그 자체로 역모에 준하는 중죄기 때문이지.”
“운남에서 벽력탄을 사용하는 종자들을 만난 적이 있지요. 이곳에서도 그럴 줄은 몰랐습니다만. 근래 들어 큰일이 많이 생기는 듯하니, 걱정입니다.”
“…….”
패검대주는 차를 들이키며 속으로 생각했다. 대화 중에 쉼없이 기파를 쏘아보내는건 대체 어느 지역의 예절일까.
괴로운 것은 수하들만이 아니었다. 그 역시 고통받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신녀문주의 전신에서 번져나가는 기파에 짓눌리는 듯했다. 절세심공의 위력을 자랑하기라도 하는 것일까.
그러는 주제에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다.
훗날 상관이 될 가능성이 있었기에 불편한 티를 낼 수도 없었다.
‘벽력탄 때문인가.
어쩌면 신녀문주 나름의 문책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현 단주 역시 괴상한 방식으로 대주들을 시험한 적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유를 원한다고 들었거늘.
설마 그 자유가 수하들을 개처럼 부릴 자유를 의미하지는 않았을 터다.
패검대주는 차 한 잔을 마시면서 맨 끝자리에 앉은 독룡을 흘겨보았다.
“신녀문주의 제자가 본 대주의 수하와 혈연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소. 패검대는 곧 동호를 떠나야 하는 바, 짧게나마 시간을 주는 것이 좋을 듯 싶소만.”
“아…….”
서연의 입매가 잔잔히 곡선을 그렸다.
천명검의 대주라면 총독조차 아래로 보는 품계라고 했다. 그 정도는 되야 지방의 탐관오리들을 즉참할 수 있다던가.
그런 자가 식사를 대접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자신의 제자의 사정마저 배려해주려고 하고 있었다. 그의 심성을 짐작할 수 있었다.
‘천명검은 인성으로 사람을 뽑기라도 하는가.
이래서 사람을 겉모습으로만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이다. 유람선에서 얼핏 보았던 모습으로 섣불리 가늠하려 들었다면 호의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못했을 것이다.
제자들에게 가르쳐야 할 것이 늘었다.
오죽하면 자그마한 심득까지 얻었을 정도였다. 서연은 더없이 만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대주의 말이 참으로 옳습니다.”
서연이 웃으며 당소소와 독룡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그럼,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참으로 맛있는 식사였습니다.”
서연은 제자들을 데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패검대주 역시 고개를 끄덕이면서 독룡을 바라보았다.
“가라.”
“…….”
곧 무수한 시선이 독룡에게로 쏘아졌다. 독룡은 반문하는 대신 눈치껏 걸음을 옮겼다.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마소처럼 느껴지는 것은 기분탓이 아닐 것이다.
패검대주는 신녀문주의 인기척이 객잔 밖으로 완전히 사라진 뒤에야 말문을 열었다.
“……인원수에 맞춰서 죽엽청을 가져오도록.”
수하들은 내색하지 않고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천하에서 손에 꼽는 기재들이었다. 그 때문에 돌아가는 상황을 얼추 짐작할 수 있었다.
패검대주가 비무도 하지 않고 상대를 돌려보냈을 리 없었다.
경지에 이른 초고수들은 의념만으로 간합을 다툰다고 하였다. 뭇 하수들은 절세의 자질을 타고나지 않고서야 인지조차 불가하다던가.
청목족의 예리한 감각을 타고난 단리가예만 어렴풋이 느꼈을 뿐이다.
그들의 대주가 일패했다.
단리가예는 얌전히 대주의 잔에 죽엽청을 따랐다. 이런 날에는 사려야 마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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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두는 걸레짝처럼 너덜거리는 검을 집어들었다. 아홉 개의 구멍이 뚫린 검신은 보는 것만으로도 섬뜩한 분위기를 내뿜었다.
‘도대체 용력이 얼마나 대단하기에…….
검을 부수지 않고 구멍만 이리 뚫어내려면 필시 찌르기의 대가가 아니고서야 불가능한 일. 비록 견문이 얕아 검흔만으로 문파를 가늠할 수는 없었으나, 각 문파의 명성은 익히 아는 바였다. 이만한 찌르기라면 점창파 말고 마땅한 문파가 떠오르지 않았다.
점창파. 먼 운남에 위치하여 다른 구파에 비하여 영향력이 작을 수는 있으나, 관리들에게는 남다른 의미를 가진 문파였다.
새외무림과 직접 맞닿아 마교를 비롯한 사마외도를 막아내는 칼날. 변방을 수호하는 변경백(邊境伯)과 유사한 역할 때문인지, 황실에서 점창파를 예우함은 공공연한 비밀처럼 전해졌다.
찰나에 면사 틈으로 비친 용모 또한 그러했다.
‘점창파 장문제자가 청목족이라 들었는데.
수는 적으나 남녀 가릴 것 없이 하늘에서 내려온 신선과 같은 용모를 지녔다던가. 직접 보지는 못했으나, 저만한 외모가 청목족이 아니라면 도대체 누가 청목족일까 싶었다.
포두는 마른침을 삼켰다. 어찌 그인들 촌구석에 박혀 썩고 싶었겠는가. 사파를 척결하고 백성을 괴롭히는 죄인들을 잡아들여 공을 세우고 싶었으나, 상급자인 지현(知縣) 나리가 회화루주에게 매수된 탓에 뜻을 펴지 못했다.
허나 상황이 이렇게 되었으니, 이것이 하늘이 주신 기회가 아니면 무얼까.
상급자를 고발함은 보통 죄이나, 탐관오리를 들춰내는 일로 포장한다면 능히 용기로 둔갑될 터. 지현과 같은 문반(文班) 출신들이야 곱지 않게 보겠으나, 애초 무반(武班)인 그에게 큰 의미는 없을 것이다.
문반과 무반은 진급 체계도 다르고, 화양현처럼 조그마한 마을의 지현이라면 필시 뒷배도 없을 것이 분명했다.
‘가능성이 있다.
저 여고수의 배분이 얼마나 높은지는 모르겠으나, 무림맹 조장씩이나 되는 인간이 쩔쩔매는 것을 보면 보통 배분은 아닐 것이다.
못해도 구파의 일대제자(一代弟子) 급은 될 것이라 짐작했다.
일대제자가 무엇인가. 말만 제자요, 다음 세대에 구파를 이끌어갈 실질적인 주역이자, 예비 장문인이며 장로가 될 배분을 말하는 것이 아니던가.
‘이 정도면 충분히 걸어볼 만하다.
겉보기엔 잔혹하나, 죽은 자가 하나도 없는 것을 보아 손속 또한 자비로웠다. 여인들을 한곳에 모아두고 죄질이 덜한 흑도들도 내버려두었으니, 저러한 성품을 지닌 정파 무인이 으레 가질 걱정거리란 뻔한 법.
상황판단을 마친 포두가 입을 열었다.
“회화루를 무너뜨리지 않아도 됩니다.”
상황 설명은 배제한 채 결론만 말했기에,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돌아보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허나 포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여고수가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 말을 들어주고 있다.
그 침묵이 계속 말하라고 독려하는 듯했다.
“회화루주가 운영하는 기루는 세 개였습니다. 그중 두 개는 매일 홍등(紅燈)을 달았으나, 회화루는 홍등을 건 날보다 그렇지 않은 날이 많았습니다. 창기보다 예기가 많았다는 뜻입니다.”
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 말씀해주세요.”
광오한 실력을 가진 여고수가 목소리까지 따뜻하니 그것이 배려처럼 느껴졌다.
“창기들은 돌려보내되, 예기들은 남겨 계속 영업을 하도록 하는 것이 옳습니다. 섣불리 없앴다가 새로운 흑도가 나타나 도를 넘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돌아갈 집이 없는 자들은 옆 주(州)에 생기는 관영기녀원(官營妓女院)으로 보내면 됩니다. 제가 마침 그쪽 담당 관원과 개인적인 친분이 있습니다. 마땅한 기녀를 모으지 못해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하니, 그쪽으로 보내면 될 듯합니다.”
“관리는 현에서 하게 되는 건가요?”
“기존의 흑도에게 맡기는 편이 낫습니다.”
관아에서 직접 운영하면 제약이 많다. 허가를 받기도 까다롭고, 인건비 또한 전부 장부에 비용으로 차출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뿐이랴, 상부에 보고하기도 마땅치 않고, 잘못했다간 횡령으로 몰릴 가능성 또한 적지 않았다.
“결국 기루란 손님을 받아야만 유지될 수 있습니다. 관아의 방식으로 운영했다간 결국 주변 기루에게 손님을 모두 빼앗기게 될 것이고, 그러면 같은 일이 반복될 뿐입니다. 허나 이리 하면 관아가 뒤를 봐주는 격이 되니, 다른 흑도들은 함부로 영업장을 열 수도 없을 것입니다.”
“죄를 지은 흑도들은 어떻게 하실 생각이신지요?”
목소리가 더욱 부드러워졌다. 제시한 방책이 마음에 든다는 것이다.
포두는 지금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엄벌에 처하고, 죄질에 따라 분류하여 상대적으로 괜찮은 자들만 추려 노역을 대신하는 식으로 근무토록 하는 방안이 좋을 듯합니다.”
“관리자로는 누구를 임명하실 생각이신가요?”
다 왔다. 포두는 곧장 대답하는 대신 주변을 살폈다. 사실상 답이 정해져있는 질문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매 각주가 좋을 듯 합니다. 살인을 저지르기는 했으나, 같은 흑도를 죽였을 뿐 민생에 손을 뻗친 적은 없습니다. 철저히 조사하겠지만, 죄질이 그리 크지는 않을겁니다.”
매 각주는 서연이 이야기를 꺼내기 전부터 눈치껏 무릎을 꿇고 있었다.
입도 다물고 있었다. 여기서 함부로 입을 열었다가 경을 치르게 될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기 때문이다.
서연은 고개를 들려 기녀들을 응시했다. 사실 매 각주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전해 들은 바 있었다.
무섭고 흉악하게 생겼으나, 기녀들을 함부로 대하지는 않았다고 했다. 매 각주가 두려워 억지로 뱉는 말이 아니었다.
사내로서의 강단도 있었다. 수하들을 함부로 대하지도 않았다. 기녀들과 수하들의 이름과 얼굴도 기억하고 있었다.
“매 각주님이면 괜찮을 것 같아요.”
“무서운 분이시긴 하지만, 다른 각주님들처럼 저희를 때리시진 않으셨어요.”
“손님들이 난폭하게 굴 때 도와주신 적도 있어요.”
매 각주는 여전히 무표정했으나, 속으로는 안도하고 있었다. 여태껏 선을 지키겠다고 했던 행동들이 그대로 돌아와 자신의 삶을 연명하게 하게 해주었으니, 실로 다행이라 생각했다.
기녀들과 포두가 직접 나서서 변호했다. 서연은 자신이 더 개입할 필요가 없다고 여겼다.
“부탁드리겠습니다. 포두 대인.”
서연은 그렇게 말하며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포권했다. 포두는 침묵했다. 일개 포두로서 무림인에게 이만한 예를 받을 줄 몰랐던 까닭이다.
“…….”
관원들을 무시하는 다른 무림인들과는 달랐다. 지방 관리를 무지렁이 취급하는 무림인들이 적지 않았다.
구파의 도인들은 전부 이러할까.
마음이 움직였기 때문일까, 포두 또한 눈빛부터 달라져 있었다. 곧 정신을 차린 포두가 예우하듯 마주 고개 숙였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
흑도들을 압송한 포두는 결연한 얼굴로 돌아갔다. 일을 제대로 마무리 지으려면 지현과 담판부터 지어야 했기 때문이다.
예기들이 서연에게 감사 인사를 올리던 그때, 한 소녀가 앞으로 나와 입을 열었다.
“감사합니다. 혹시 성함을 여쭈어도 될까요? 머릿속에 담아두고 평생 기억하려 합니다.”
영영이었다. 예화가 여동생처럼 아낀다던 바로 그 아이였다. 지학이 살짝 안 되어 보였는데, 눈에 총기가 서려 있는 것이 보통 아이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서연이라 한단다.”
서연의 대답에 영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입술을 달싹거리는 것이, 뜻을 곱씹기라도 하는 모양이었다.
“언젠가 뵙게 되면 반드시 보은하겠습니다.”
어린아이가 굳은 어조로 다짐하듯 말하는 것이 귀여워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중에 노래나 한 곡조 들려주렴.”
일을 마무리한 서연은 느긋하게 복귀했다. 제자와 함께 도시 바깥으로 나온 것은 처음이었으니, 이번 기회에 세상 구경이나 할 생각이었다.
마침 옆에 무림맹원들도 있었기에 서연이 물었다.
“근처에 아이를 데리고 가기에 적당한 곳이 있을까요?”
쭈뼛거리며 뒤따르던 장산이 사레라도 들렸는지 마른 기침을 토해냈다. 주변에 있던 맹원들도 마찬가지였다.
겨우 호흡을 되찾은 장산이 말했다.
“화양현의 일은 맹에서도 예의주시하도록 하겠습니다. 걱정은 놓으셔도 될 듯 합니다.”
동문서답이었다.
허나 서연은 뭐라 되묻는 대신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하남에 있는 도시들의 치안을 관리하던 중에 여기까지 단숨에 달려올 정도로 책임감이 넘치는 사람들이 아닌가. 지금처럼 정신을 못 차리는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어디 무림맹원이 할 일이 한둘이랴. 서연은 무림맹원 또한 참 할 짓이 못 된다고 생각했다. 보통 책임감으로는 감당하기 어렵다는 뜻이었다.
물론 맹원들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맹주님과 독대하여 차를 마시는 것보다 지금이 열 배는 더 불편했다.
‘앞으로 하남 쪽 임무는 쳐다도 안 봐야겠다.
‘교대가 언제더라? 한 반 년 남았나? 그때까지 어떻게 버티지?
‘보고서가 도대체 얼마나 늘어난거야.
뛰어난 고수는 목울대의 울렁임만으로도 전음입밀(傳音入密)을 알아차린다는 것을 알았기에, 처량한 신세를 어디에다 한탄할 수조차 없었다. 그렇다고 다른 곳으로 가자니, 어디가냐고 한소리를 들을까 눈치가 보였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맹원들의 불안도 커졌다.
폭풍전야라 할 수 있겠다.
“그럼 맹원 분들은 보통 어디에서 쉬시나요?”
저 질문은 지금 너희 주제에 쉴 생각을 하는 것이냐고 눈치를 주시는 것일까, 아니면 너희들과 같이 있는 것이 불편하니 당장 꺼지라고 눈치를 주시는 것일까. 장산은 말 한마디에 오장육부가 뒤틀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오늘 처음 알았다.
맹주님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맹주님이 그립다.
장산은 주변 눈치를 슬쩍 봤다. 맹원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시선을 피했다. 먼저 대답한 사람이 피를 본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그렇다고 눈앞에서 떠넘길 수도 없었다. 자신이 일을 해결하지 못해 수하들에게 떠넘기는 무능한 놈이라 생각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문득 노강호께서 맹주님께 가서 항의하는 장면이 머릿속에 선연히 그려졌다.
갈굼당한 맹주님이 다시 장로님들을 갈구고, 갈굼당한 장로님들이 다시 대주님들을 갈구고…….
‘아.
눈앞이 새하얘지는 느낌이 이러할까. 내리갈굼의 지옥이 눈 앞에 선연했다.
장산은 눈을 질끈 감고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입을 열었다.
“어찌 맹원의 일원으로서 편히 쉴 수 있겠습니까. 앞으로 반년간은 주야 2교대로 돌아가면서 민생 안정에 집중할 계획입니다.”
폭탄선언이었다.
당황한 맹원들은 눈을 부릅뜨고 제 조장을 노려보거나, 꺽꺽 소리를 뱉거나, 심장을 부여잡았다.
서연은 시선이 화련에게 향해 있어 그러한 광경을 보지 못했다.
그때였다. 서연의 손을 꼭 잡고 있던 화련이 입을 열었다.
“스승님. 저 당과가 먹고 싶어요. 배도 고파요.”
“배고프니?”
“네.”
화련은 그렇게 말하며 맹원들을 슥 돌아봤다. 그러면서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화제를 돌려줄테니 눈치껏 떠나라는 뜻이다.
‘아!
‘실로 자애로운 심성이다!
‘노망난 노강호 밑에서 어찌 저런 제자가 나왔을까? 선녀라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구나!
무림맹원들은 화련의 품성에 감탄했다. 제갈혜는 아예 입에 주먹까지 넣고 울음을 참고 있었다. 물론 서연이 고개를 돌렸을땐 언제 그랬냐는 듯 정자세로 서는 것을 잊지 않았다.
“저는 이만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제자와 식사를 해야 해서요.”
“조심히 가십시오.”
“혹시 같이 드시겠습니까? 정말 고생하시는 것 같아, 밥이라도 대접하려 합니다.”
장산의 머리에서 식은땀이 흐르려던 찰나에, 화련이 다시 입을 열었다.
“저는 스승님이랑 둘이 먹고 싶어요.”
그날 화련은 맹원들 사이에서 선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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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북의 무한에서부터 낙양까지 올라가는 길.
웬만한 나라보다 거대한 땅이었다. 거쳐야 할 도시가 한둘이 아니었다.
겨울의 끝자락에 닿았을 무렵, 제자들은 비연천공을 펼치며 달릴 수 있는 경지에 도달했다. 완숙의 경지에 올랐음을 의미했다.
예로부터 호북과 하남은 천하의 풍문이 모이는 곳이었다. 길목마다 정세를 논하는 이들이 넘쳐났다.
“동호에 선녀가 나타났다던데?”
“차라리 팔가주가 하나 더 객사했다고 하지 그러나? 무슨 그런 해괴망측한 헛소리를.”
“허언이 아니네. 동호에 살던 내 지인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야. 유람선도 같이 탔다는데, 그리 오래되지 않았는데 벌써 신당을 짓는다고 하더군.”
“요즘 선녀는 유람선도 타는 모양이군. 잘 들었네.”
“허어, 이 사람이 정말! 참말이라니까!”
성과 성 사이의 거리가 워낙 멀어 소문이 와전되는 일은 흔했다. 무림인들의 이야기는 본디 과장이 섞이기 마련이었으니, 민초들 또한 이를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허나 하남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분위기는 사뭇 달라졌다.
운남에서 신녀문주가 보인 이적이 하나둘씩 퍼져나가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신녀문주가 글쎄, 단칼에 재해를 참했다더군! 믿지 못하겠거든 운남으로 직접 가보게. 채석장의 광부들이 당시의 흔적을 그대로 남겨두었다고 하니.”
“동호에서 나타난 선녀가 신녀문주라는 소문이 있네. 그런 복식은 흔치 않지. 예전에야 신의 타령하던 여식들이 비슷하게 행세하고 다녔지마는…….”
“대수림의 왕족 중 하나라는 소문이 있소. 머리색깔이 인세의 것과는 거리가 멀다던데. 몇몇 권세가에서 온갖 염색약을 써도 그 빛깔을 흉내낼 수 없다고 하더군.”
“개방의 거지들도 같은 말을 하더군. 허공답보라면, 구파의 장문인들과도 동일 선상에 놓을 만한 경지 아니오?”
“보기 드문 강자이기는 하나, 어찌 구파가 쌓아온 세월에 비할 수 있겠소? 당장 무당파만 해도 개파 이래로 배출한 절세고수가 몇인데.”
“……틀린 말은 아니오만.”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오. 대월국의 제일고수가 반으로 갈려 죽었다는 풍문이 있소. 전투의 여파로 일대가 사람이 살 수 없다는 불모지가 되었다는데…….”
“소림의 방장대사께서 마침내 폐관을 깨고 나오셨다는군. 필시 더없는 성취를 이루셨겠지.”
서연은 행인들의 이야기를 통해 천하의 정세를 대략적으로 파악했다.
뭇 강자들은 존재 자체만으로도 풍문을 몰고 다닌다고 하였다. 자신 역시 그만한 반열에 올랐다고 보아도 좋으리라.
‘세상이 어찌 돌아가는지 알아야 제자들에게도 피해가 가지 않을 터.
패검대주에게서 한 단체의 수장이 가져야 할 태도를 배웠다. 명목상이나마 일문의 문주가 되었으니, 그에 걸맞는 행실을 보이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전쟁은 끝날 줄 몰랐고, 민심은 예년보다 더욱 흉흉했다. 제자들의 안위를 위해서라도 귀를 열어두어야 마땅했다.
그런 생각을 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익숙한 도시에 당도했다.
낙양. 긴 여행의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스승님.”
“말하려무나.”
“예전에 사저에 듣기로, 용문석굴의 노사나불을 복원하셨다 들었습니다. 천하에서 견줄 작품이 드물다던데, 이번 기회에 한 번 견식하고 싶습니다.”
서연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꾸나.”
기왕이면 최대한 늦게 복귀하고 싶은 것은 서연 역시 마찬가지였다. 당소소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근처에서 주전부리를 사들고 용문석굴로 발걸음을 옮겼다.
중원의 4대 석굴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수많은 인파가 운집해 있었다. 과거에도 사람이 많은 편이었으나, 지금은 그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당연히 무지한 이들도 적지 않았다.
“어찌하여 관람 시간을 제한하는 것이냐! 내 부친이 무려 현승(縣丞)이시다!”
“예외는 없소. 낙양 부윤께서 세우신 원칙이외다. 정 불만이면 그분께 가서 직접 말씀하시오.”
“쯧, 그깟 불상이 뭐가 대수라고! 형편없기라도 하면 네놈에게 책임을 물을 것이다!”
노발대발하며 석굴 내부로 들어갔던 사내는 일 각이 지나기도 전에 귀신에 홀리기라도 한 듯한 얼굴로 되돌아왔다.
비척이는 발걸음이 느릿했다.
“…….”
수행원들의 손길마저 뿌리친 채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 모습이, 혼백이라도 빠져나간 듯했다.
실제로 전신이 땀으로 흠뻑 젖었기에 더욱 그러했다. 늦겨울의 추위를 생각하면 믿기 힘든 일이었다.
놀라운 것은 그런 얼굴을 한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석굴로 막 들어가는 사람들과 빠져나온 사람들의 면면이 확연히 달랐다.
견문이 넓을수록 깨닫는 바가 큰 것일까. 이름난 석공들은 아예 넋이 나간 채 병사들에게 질질 끌려 나오는 경우도 허다했다.
“석 장인은 또 끌려가는군. 올해에만 저 꼴을 스무 번도 넘게 본 것으로 기억하는데.”
“……안목이 모자라서 그런가, 나는 노사나불이 그 정도로 대단한지는 잘 모르겠더군.”
“사실 노사나불의 모습 자체는 과거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네. 진짜는 그 배경에 피어오른 만다라에 있다네. 얄팍한 견식으로 만다라를 살핀 이들은 그저 단순한 실선으로 알고 넘기는 경우도 허다하지.”
낯 뜨거운 찬사들이 서연의 귓가를 스쳤다. 서연은 괜히 죽립을 깊게 눌러쓴 후에야 석굴로 향했다.
노사나불의 전신에서 예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중후한 파동이 감돌았다.
‘어쩌면 당장은 무공보다 각예의 경지가 높을지도 모르겠다.
바닥과 벽에 새겨진 만다라를 타고 흐르는 기운을 보며 그리 짐작했다.
만다라를 매만지려는 순간, 코앞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쿵!
창대를 바닥에 가볍게 두드리는 소리였다. 고개를 들어 확인하니, 체구가 몹시 작고 다부진 사내가 서 있었다.
‘산정?
작달막한 풍채에 근육이 빈틈없이 들어차 있었다. 돌덩이에 가까웠다.
사천당문에서 만났던 산정들과는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그쪽이 장인의 기운에 가까웠다면, 눈앞의 사내는 영락없는 무인에 가까웠다.
“함부로 만지지 말도록.”
“……?”
목소리가 단호했다. 처음에는 관병인 줄 알았으나, 복식에서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관병이라기에는 과할 정도로 고풍스러웠다. 고위 관리라도 되는 듯했다.
“자칫 흠결이라도 생겼다간 지맥의 흐름이 흐트러진다. 그리 되면 노사나불을 수리한 귀인이 직접 자리하지 않는 한 수리가 불가하지.”
“어차피 한족의 눈썰미로는 백 번 천 번 설명하여도 이해하지 못할 걸세. 관병들도 마찬가지야. 손길을 타서 닳기라도 하면 돌이킬 수 없는데!”
이제 보니 한둘이 아니었다. 족히 열 명이 넘는 산정들이 노사나불 주변에 옹기종기 자리잡고 있었다.
뭣 모르는 행인들은 그들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둔족이 어찌하여 이곳에?”
“둔족? 관복을 떡하니 입고 있는데도 감히 모욕을 입에 담아? 여봐라! 본관을 능멸한 이놈을 당장 끌고 가거라!”
“아, 아이고……! 소인의 눈이 침침하여 미처 보지 못했습니다요!”
놀랍게도 근처에 자리하고 있던 한족 관병들이 산정들의 말을 곧이곧대로 따랐다. 한 마디로 신분을 증명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몇몇 행인들은 그 광경을 익숙하다는 듯 지켜보았다.
“또 한 사람 끌려가는군.”
“얼마나 견문이 모자랐기에 면전에서 저런 말을 할까. 아무리 산정이 드물다 해도, 북경을 한 번이라도 방문해봤다면 저런 실수는 하지 않았을 텐데.”
“산정들은 하나같이 성격이 불같다더니. 그 소문이 틀리지 않네그려.”
“저 정도면 양반이네. 듣자 하니 예술작품 앞에서는 성격이 유해진다더군.”
“……저게 유해진 것이오?”
그제서야 서연의 시야에 산정들의 모습이 제대로 들어왔다.
하나같이 날카로운 눈매와 외골수 같은 기질을 품고 있었다. 한눈에 보아도 고집이 몹시 셀 듯한 인상이었다.
서연이 드문 예외일 뿐, 본디 중원에서는 고집이 강할수록 실력이 뛰어난 장인으로 인정받는 기조가 존재했다. 겸손한 자보다 호탕하고 오만한 자가 더 고수로 대접받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그런 의미에서 눈앞의 산정들은 외양만으로도 천하에서 손에 꼽는 장인들이라 할 수 있었다.
‘황실에서 일한다는 석공들이 이들일까.
낙양 부윤이 황실의 장인들을 입에 담았던 이유를 알 듯했다. 아무리 지역에서 이름을 날린 석공이라 한들, 날 때부터 장인으로 태어난 씨족에 비하기는 힘들 터였다.
‘솜씨는 또 어떠할까.
패검대주와 짧은 대화를 나누고 심득을 얻었던 탓일까, 각예의 견문을 넓힐 좋은 기회로 여겨졌다.
서연은 그리 생각하며 정면으로 걸음을 옮겼다.
*****
산정 씨족들은 예로부터 황실과 긴밀한 관계를 맺어왔다. 교룡마저 탐내는 신묘한 손재주 덕이었다.
아득한 옛적, 태조가 교룡의 둥지에서 그들을 구했을 때부터 충성을 맹세했다던가. 수명이 긴 편에 속하는 산정들에게도 이제는 전설 속 이야기일 뿐이었다.
북경에서 가장 가까운 산자락에 자리를 틀었다. 대장군들은 물론이고, 천명검 말단의 무기까지 그들의 손이 닿지 않은 것이 없었다.
본디 은둔을 즐기는 성정 탓에, 그들의 외출은 가뭄에 콩 나듯 드물었다.
용문석굴의 복원을 확인하라는 황실의 명이 떨어지기 전까지는 그러했다.
먼저 떠났던 산정이 돌아오지 않았다. 이를 이상히 여겨 뒤따라간 두 번째 산정 역시 소식이 끊겼다.
―더 봐야겠소.
―하루이틀 걸릴 일이 아니오.
전서구로 고작 한 줄씩을 적어 올렸을 뿐이다.
석굴 터에서 귀한 광맥이라도 발견되었나 싶었다. 허나 달포가 지나도 돌아가지 못하겠다는 말만 반복했다.
뒤이어 그들을 데려오겠다던 산정들도 소식이 끊겼다. 다시 잡아오겠다며 떠나가고 소식이 끊기기를 수 차례나 반복했다.
작금의 상황이 그 결과였다.
―이것이 정녕 한족의 솜씨라고? 믿을 수 없다.
낙양 부윤에게 몇 번이고 진위 여부를 확인했다. 끝끝내 소림사로 들어가 삼신세불을 목도하고 나서야 진실임을 깨달았다.
“야장신의 축복이라도 받지 않고서야…….”
“씨족의 자존심이…….”
나이 지긋한 장인 특유의 옹고집이 발동했다. 이보다 뛰어난 작품을 만들어낼 때까지 이곳에 틀어박히기로 한 것이다.
덕분에 중간에 낀 관리들의 속만 타들어갔다. 산정들이 하나같이 황실에 수십 년 동안 몸담은 중진이었던 탓이다.
뭣 모르는 한족들이 작품을 훼손할까 염려한 산정들이 자발적으로 나서 석굴을 관리하기 시작했다. 기존의 관리자들 역시 자연스레 구석자리로 밀려났다.
“이곳 좀 보게. 곡면을 한 치의 오차 없이 깎아냈어. 누가 보면 석굴 전체를 거푸집에 넣어 굳혔다고 해도 믿을 지경이야.”
“족히 십 년은 걸릴 작업을 어찌 한 달 만에, 그것도 홀로 끝냈단 말인가? 낙양 부윤의 말이 도무지 믿기지 않아. 내 눈으로 직접 볼 때까지는 믿지 않겠네.”
“이 중 복원록을 가장 많이 읽은 작자가 퍽이나 불신하겠군 그려.”
평소라면 환장하는 곡주조차 입에 대지 않을 정도였다. 그만큼 작품을 경건한 자세로 대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들이 열띤 논쟁을 벌이고 있을 때였다.
“무슨 이야기를 그리 열심히 나누고 계시는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옆에서 노사나불을 구경하던 여인이 불쑥 입을 열었다.
“산정 분들의 솜씨가 천하제일이라는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 저 또한 각예에 관심이 있어, 혹 조언이라도 얻을 수 있을까 하는 욕심에 걸음했습니다.”
산정들의 시선이 일제히 여인의 손으로 향했다. 마치 갓 깎은 백옥처럼 희고 부드러운 손은 평생 칼자루 한 번 제대로 쥐어본 적 없는 듯 섬약해 보였다.
속으로 혀를 차는 산정들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았다. 한족 여인의 태도가 정중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조언하면 자네가 알아들을 수는 있겠나?”
“노력해 봐야지요.”
쏘아붙이는 말에도 여인의 눈동자는 흔들림 없이 또렷했다. 얄팍한 호기심이나 허세를 위해 찾아온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그 기개는 마음에 들었다.
“각예에 관한 아무 질문이나 해보게. 그것으로 수준을 가늠할테니.”
수준이 뒤떨어지면 축객령을 내리겠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
여인은 곧장 대답하지 못했다. 몇몇 산정들이 실소를 머금은 그 때였다.
“그 책에 대한 감상을 듣고 싶습니다.”
여인의 손가락이 복원록을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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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문석굴의 내부는 인파로 가득했다. 허나 인파에 비해 그리 소란스럽지는 않았다.
장엄한 기운을 풍기는 노사나불이 코앞에 자리한 탓이다. 뭣 모르는 민초들조차 불상 앞에선 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법이다. 누구 하나 경박하게 굴지 못했다.
간혹 복원된 불상에 감탄을 읊거나, 얕은 속삭임을 나누는 이들만이 드문드문 보일 뿐이었다.
서연은 복원록의 내용을 되짚어 보았다.
비연천공보다 먼저 써내려간 첫 번째 서적이었다. 눈을 감지 않아도 당시의 심정이 생생했다.
기본기를 제대로 다진 각예가라면 누구라도 쉽게 통찰할 수 있도록 친절히 풀어 썼다. 훗날 제자들에게 각예를 어찌 가르쳐야 할지 복원록으로 미리 예행연습을 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고개를 조금 더 옆으로 돌려 복원록 옆에 쌓인 종이 더미를 흝어보았다.
각예와 관련된 온갖 이론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하나같이 낯선 것들이었다. 스승에게 전문적으로 배운 적이 없던 탓이다.
‘다르긴 다르구나.
자신보다 족히 곱절은 살아왔을 이들이다. 자신이 애써 풀어 썼던 친절한 설명들이 어쩌면 중원 무림에 오래전부터 이론의 형태로 존재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석재를 선측(先測)하여 접목하는 방식도 있고, 거푸집에 각예를 새겨 짜 맞추는 방식도 있구나. 헌데 저러면 각예의 운치가 반감될 터인데, 마땅한 방도가 있나……?
본디 서연은 전체적인 얼개를 머릿속으로 잡아두고, 상황에 따라 무수히 변형할 수 있도록 각예에 대한 개념을 짜 두었다.
각예를 진행하는 도중에 재료의 속에서 미처 파악하지 못한 흠결이 나타나더라도 어렵지 않게 대응할 수 있다는 것이다.
비연천공도 자연스레 각예의 영향을 받았다. 틀에 구애받지 않게 된 것이다.
산정들의 방식은 다른 듯했다.
탁자 위에 올라가있는 종이의 맨 윗장만 봐도 그랬다.
‘석굴과 비슷한 크기의 거푸집을 만들어내 한 번에 굳힌다니. 천생 야장이나 할 법한 발상이구나.
어떻게든 기한을 맞추기 위해 고심 끝에 쥐어짠 방안인 듯했다.
종이의 맨 아래에는 그 방법조차 달포 안에 완성하기엔 아슬아슬하다 적혀 있었다.
이어지는 장에는 붓으로 온갖 난장을 벌여 놓았는데, 어린아이가 화풀이라도 한 것처럼 보였다.
설마 진정 화풀이로 그런 짓을 벌였겠는가. 필시 깊은 고뇌의 흔적일 것이다.
서연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석굴을 통째로 담금질하여 만들어내려 했다니…….
그것도 달포라는 짧은 기간에 말이다. 날 때부터 장인이라는 종족답게 그 배포부터가 남달랐다.
비록 금속 공예에는 문외한이었으나, 그 난이도가 결코 낮지 않다는 사실쯤은 알고 있었다.
금속이 굳기 전에 모양을 다잡아야 하니, 시간만 놓고 보면 각예보다 훨씬 촉박하고 까다롭다던가.
“……지금 내게 감상을 물었나?”
산정 하나가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설마 이런 질문을 할 줄은 몰랐다는 얼굴.
옆에서 듣고 있던 산정들은 저마다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한족 여인이 활로를 찾아냈군.”
“어줍잖게 수준을 가늠하려다 오히려 조언만 늘어놓게 생겼네 그려.”
“초고수들이 어찌 야장일을 직접 배워 검을 보는 눈을 키웠겠는가? 만류귀종이라 했네. 경지에 이르면 안목은 저절로 피어나는 법이야. 필시 조각품을 견식한 경험이 적지 않을 터.”
한마디 한마디가 범상치 않았다.
음.
짧게 탄식한 산정 장인이 천천히 입술을 뗀다. 낭패를 본 듯한 기색으로.
“……참으로 정교하게 짜인 서책이네. 불가의 도리를 오랜 세월 탐구한 자나 알 법한 사소한 것들조차 빠짐없이 새겨져 있더군. 본디 각예라는 학문이 대부분 감각에 치중되어 있다는 것을 고려하면, 이 책의 저자는 그 감각마저도 완전히 체화한 인물일 것이야.”
“감각마저 체화…….”
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장인들에게 찬사를 받으니 기쁨보다 부끄러움이 먼저 몰려왔다.
산정 장인은 복원록을 직접 펼쳐 보이며 한 곳을 가리켰다.
“이곳을 보면 그 사실을 다시금 알 수 있네. 정확히 스물여덟 번째 장에 나와있는데, 노사나불의 진신을 크기에 관계없이 재현할 수 있도록 온전히 축척(縮尺)해 놓았더군. 기준을 한족 성인으로 잡아놓은 것을 보고 우리 씨족이 아님을 알았지만…….”
고명한 학사들에게 평가를 받는 학생의 기분이 이러할까.
‘그래도, 좋은 말만 들어서는 의미가 없으니.
서연은 작은 미소를 들으면서 생각했다. 슬슬 비판이 나올 때가 되었구나.
곧 산정 장인이 재차 입을 열었다.
“허나, 정작 석굴을 감싼 만다라에 관한 설명은 생략되어 있더군. 본관은 그 의도가 아주 오만하다고 느꼈네.”
“오만……?”
상상치도 못했던 지적이었다. 도대체 어디가 오만하다는 것일까.
서연은 애써 충격을 감추고 산정 장인을 응시했다.
“저 끝없이 이어지는 만다라를 보게. 천하에 비하면 티끌에 불과한 석굴에 무한을 담아내려 했어. 요리에 비유하면 전채에 불과했던 배경이 다섯 장 크기의 노사나불을 압도했다는 말이네. 보통 이럴 경우 주객이 전도되기 십상이거늘, 신기에 가까운 기예로 그 균형을 이뤄냈지. 배경과 작품이 완전히 하나가 되었다는 뜻이야. 그러고도 노사나불에 관한 내용만을 적어둔 것은 무슨 의미겠는가?”
산정 장인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복원록을 노려보았다.
“무공서로 치면 요결을 빼먹은 것이나 다름없네. 후인들로 하여금 만다라가 점차 흐릿해지는 것을 무력하게 지켜보게 하려는 요량이 아니고서야……!”
“이 친구, 또 흥분했군.”
산정 장인은 호통을 치면서 바닥을 가리켰다.
“당장 이 곡면부터가 말이 되지 않네! 사포로 갈아낸 것도 아닌데, 어찌 이리 곱고 부드러울 수 있단 말인가! 노사나불을 백 번이고 천 번이고 고쳐낼 수 있으면 무엇하나? 만다라가 사라진 노사나불은 더 이상 완전하지 않은 것을!”
“거푸집으로 만들어 붙였다니까 그러네.”
“헛소리 집어치우게!”
서연은 어느새 자신들끼리 열띤 설전을 벌이는 산정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예 알려주어도 따라 하지 못한다고 생각하여 그리하지 않았을까. 당장 산정인 우리조차 몇 달째 머리만 싸매고 있지 않은가.”
“어렵게 생각할 것 없네. 허공답보를 자유로이 펼치는 고수가 아니고서야 저 드높은 천장에 어찌 손이 닿았겠는가. 애초에 인세의 것이 아니야. 당시에도 선녀가 왕래했다는 말이 돌지 않았던가.”
“비인부전(非人不傳)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필시 비급으로도 남길 수 없는 요결이었겠지.”
“…….”
서연은 입을 다물었다.
본디 노사나불을 복원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허나 작게나마 자신의 족적을 남기고 싶다는 욕심에, 불상에 폐가 되지 않는 선에서 배경을 깎아내었었다.
당시에는 그것으로 충분하다 여겼다.
허나 산정 장인의 말대로다. 진정 서책의 이름을 복원록으로 정했다면, 사사로운 욕심으로 더해진 배경의 설명까지 온전히 담아냈어야 했다.
‘이렇게 또 배우는구나.
깨달음을 얻은 서연이 속으로 고개를 끄덕일 때였다.
“아무튼, 본관은 감상을 마쳤으니 이제 자네가 말해보게나. 어디까지 알아들었는가?”
산정 장인이 짐짓 평정을 되찾은 듯한 어투로 말했다.
“본관이 언급한 내용의 일 할만 이해했더라도 잘 들은 것으로 쳐줌세.”
“……들어보니 장인의 말씀에 틀림이 없습니다.”
“흠…….”
상투적인 대답에 산정 장인의 얼굴에 실망이 어린 순간이었다.
“당시에는 노사나불이 주라 생각했습니다. 하여 괜히 배경에 관한 내용을 더했다가 본질을 흐릴 것을 염려하였지요. 듣고 보니 제 불찰이었음을 알겠습니다.”
얌전히 듣고 있던 산정 장인들의 표정이 순식간에 일변했다.
한순간에 좁혀지는 미간들.
낙양 부윤에게 노사나불을 복원한 각예가가 여인이라는 것 외에 마땅한 이야기를 전해 듣지 못한 탓이었다.
황실에서 입단속을 철저히 시킨 여파였다.
한족이라는 것도 복원록을 보고 저들끼리 추측한 결과였다. 같은 씨족이었다면 한족을 기준으로 축척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오만한 확신 때문이었다.
청목족? 그 자존심 강한 씨족이라면 필시 서책에서부터 특유의 기질을 숨기지 않았으리라.
“……자네,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는 아는가?”
장인들의 표정이 해괴해졌다.
당황하여 일갈할 생각조차 잊고 눈만 끔뻑이는 자들이 태반이었다.
“……곧 나가야 하는지라, 당장에 다 적어드리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실례하겠다는 말과 함께 종이들이 가득 쌓인 탁자 앞에 섰다. 산정들은 기세에 밀려 엉거주춤한 자세로 물러나야 했다.
“음…….”
자연스레 서연이 정가운데에 서게 되었다.
빳빳한 표지에서 필사본임을 느꼈다. 원본은 낙양 부윤이 직접 관리하는 탓이다.
어디 한 번 해보라는 태도를 견지하는 자들도 있었다. 속으로는 만일 허풍이라면 경을 칠 생각을 하면서다.
이윽고 서연의 손에 붓이 들렸다.
*****
여인의 손에 들린 붓이 일필휘지로 종이를 누볐다.
사악―
산정들은 흥미롭다는 얼굴로 종이를 응시했다. 여인의 필체에서 명가의 기풍을 느꼈기 때문이다.
‘귀족가의 여식이라 그리 오만했는가.
글쓰는 재주만큼은 뛰어나다고 생각하던 때였다.
“…….”
첫 문장이 막 완성된 시점이었다. 귀족가의 여식이 감히 담을 수 없는 영감이 배어 나왔다.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아무 내용이나 써 내려가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몇몇 산정들은 자연스레 자세를 고쳐 섰다. 미간이 다른 의미로 좁혀졌다.
'어찌 저런 공부를……?'
'중원 제일 석공이 제자를 새로 들이기라도 했는가?'
날 때부터 눈썰미를 타고난 씨족이다. 작은 손짓과 습관에서 묻어나는 삶의 흔적을 읽어낼 수 있었다.
초고수들이 일검만 보고도 상대의 수준을 가늠하는 것과 비슷한 이치였다. 그들의 능력은 분야를 가리지 않는다는 것이 차이점일 뿐.
그중에서도 탁월하기로 손꼽히는 자들만 황실에 몸담을 수 있었다.
그 때문일까.
“……!”
문장이 한 줄 더해질 때마다 눈이 커지는 정도가 확연해졌다.
장인이라는 자부심으로 일평생을 살아왔던 이들이 한 여인의 붓놀림에 충격을 금치 못했다.
'허어……!'
황실의 관리라는 체통조차 잠시 내려놓을 정도로.
그때, 낙양 부윤이 했던 말이 귓가를 스쳐 지나갔다.
―언젠가 뵙게 되면 단번에 알아볼 수 있을 것이오. 눈이 옹이구멍이 아닌 이상에야.
번뜩이는 깨달음을 얻은 몇몇 산정들이 입을 크게 벌리던 그 때였다.
두 장째를 써내려가던 붓이 멈췄다.
“아니, 음……!”
당황한 산정들이 고개를 치켜든 순간이었다.
천상의 색을 머금은 눈동자가 자신들을 고요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주인을 알아보기라도 한 걸까.
우웅―
땅에 피어오른 지맥이 공명했다.
단번에 알아볼 수 있을 거라는 말을 그제서야 이해했다. 눈도 모자라 입마저 끔벅거리는 산정들이 적지 않았다.
여인은 그들에게서 시선을 돌려, 아직까지도 노사나불을 멍하니 올려다보고 있는 여아들을 응시했다.
제자라도 되는 듯했다. 시선에서 더없는 따스함이 느껴졌다.
뒤이어 인파가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것이 보였다. 관병들이 사람을 내보내기 시작한 것이다.
여인은 그러한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노사나불을 볼 수 있는 시간은 일 각이라고 들었습니다. 낙양 부윤께서 필시 사고가 일어날 것을 염려하여 그리하셨겠지요. 예외가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어어…….”
여인은 적다만 종이들을 고이 접고 일어섰다.
그리고는 제 제자들을 이끌고 인파를 따라나섰다.
“언젠가 완성하면, 그때 다시 찾아뵙도록 하지요.”
여인, 아니. 그들이 기다렸던 귀인의 옷자락이 스쳐지나갔다.
산정들은 입을 다물었다.
“…….”
망부석처럼 선 채였다. 떠나가는 귀인을 차마 붙잡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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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그렇게 열심히 쓰시나요?”
화련의 물음에 서연은 손에 든 빈 서책과 붓을 내려놓았다.
“방금 무어라 했니?”
“뭐를 그렇게 열심히 쓰시나 궁금해서요. 스승님께서 객잔에서 글을 쓰시는 모습을 처음 봐서 그랬어요.”
서연은 화련의 말에 간략하게 대꾸했다.
“예전에 썼던 책을 수정하고 있단다. 들어보니 추가해야할 내용이 많더구나.”
“노사나불과 관련된 책인가요……?”
서연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다음 종이를 옆으로 치웠다. 마침 음식을 잔뜩 든 점소이가 방문을 열고 들어오고 있었다.
“일단 식사부터 하자꾸나.”
용문석굴에서 빠져나온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난 시점이었다. 서연 일행은 근처의 객잔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있었다.
근래 들어서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따로 방을 잡고 식사하는 일이 잦았다. 혹여라도 자신을 알아보는 이가 있을까 염려한 탓이었다.
서연은 문득 하남 땅에 처음 발을 들였을 때를 떠올렸다.
그때는 눈에 띄지 않도록 문 가까운 자리에 앉아 소면 한 그릇에 만두 몇 점만 시켜 놓고는 주위를 살피기 바빴다. 일이 벌어지면 가장 먼저 달아나기 위함이었다.
그때를 떠올리니 감회가 새로웠다.
‘이제는 상상조차 어렵구나.
사람은 경험을 통해 자라난다는 말에 틀림이 없었다. 명문 정파와 세가에서 위험을 감수하면서라도 어린 제자들을 세상으로 내보내는 이유를 알 듯했다. 성장하려면 풍파를 견뎌내야 하는 것이다.
‘하남에만 있었다면 이를 알지 못했겠지.
확실히 운남과 낙양의 분위기는 천지 차이였다.
낙양의 거리는 운남에 비해 훨씬 정갈했고, 사람들의 얼굴에도 칼날을 마주할까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당장 객잔에서 칼을 찬 무인을 고용하지 않은 것만 봐도 차이가 명확했다. 관부의 철저한 치안과 더불어, 무림의 태산북두인 소림이 인근에 자리한 덕분이리라.
예로부터 하남은 사마외도들이 발붙일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곳으로 알려져 있었다.
소림 나한들의 법력 무공이 그들에게는 절대적인 상성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천하를 놓고 보면 소수에 불과한 소림 나한들이 명성을 떨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비연천공을 노사나불을 만드는 도중에 창안했던 탓일까, 서연은 제자들의 숨결에서 법력 무공 특유의 신령스러운 경파를 느꼈다.
겉으로는 도가의 기운이 먼저 드러나는 탓에 평범한 무인들은 알아채지 못할 터였다.
‘청허 스님도 언젠가 찾아뵈어야 할 텐데.
오직 법력만을 타고난 무공을 새로 만들어 익히게 한다면, 훗날 제자들을 강호로 내보낼 때 큰 도움이 될 터였다.
그렇게 제자들과 식사를 하면서, 중간중간 새로운 심득이 있을 때마다 복원록을 적어가며 시간을 보냈다.
그때, 복도 저편에서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려왔다.
“방이 다 찼다고? 오늘 점심은 꼭 이 집에서 먹으려 했건만. 자네도 알지 않는가. 이 집이 국수를 잘해.”
“어허, 실망이네 주인장. 우리가 여태 올려준 매상이 얼만데.”
껄껄거리는 웃음소리가 몇 번 울릴 때마다 정명한 기도가 문틈으로 흘러들어왔다.
서연의 기감이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예민해진 결과였다.
잠시 후, 주인장이 조심스러운 얼굴로 방문을 두드렸다.
“저, 손님. 혹시 식사 다 하셨습니까요?”
“무슨 일인가요?”
“저희 가게의 귀인 분들이 오늘 생신이라고 하셔서 말입니다. 혹 식사를 마치시면 알려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서연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화련이 입을 크게 벌린 채 마지막 남은 만두를 꿀꺽 삼키고 있었다.
“차로 입가심만 하고 나가지요.”
“아이고, 배려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주인장은 연신 고개를 조아리며 물러갔다.
그때 찻잔을 조용히 기울이던 당소소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용문석굴을 다녀온 후 처음 하는 말이었다.
“……어찌하여 권세가들이 각예품을 집에 들이는지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개안한다는 감각이 이러할까요. 스승님의 제자가 아니었더라면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되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직도 충격에서 완전히 헤어나오지 못한 듯했다.
화련은 노사나불을 복원 중에 몇 번 마주했던 적이 있었지만, 당소소는 아니었다.
타고난 안목에 더해 스승이 서연이라는 사실까지 더해져 더욱 큰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사매……? 아미파로 가려고?”
“그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는 뜻이었습니다. 아미파에는 저만한 위용을 풍기는 노사나불이 없겠지요. 감상을 말하다 보니 스승님이 예전에 만드셨다던 삼신세불도 보고 싶군요. 자그마치 여드레를 선 채로 조각을 이어나가셨다는데, 신녀라는 말이 참으로 옳습니다. 소림이 금녀의 원칙을 내세우지만 않았더라면 당장이라도 찾아갔을텐데 말입니다.”
서연이 점소이를 불러 계산을 할 때까지 당소소는 감상을 읊고 있었다.
자연스레 옆을 스쳐 지나가는 사내 무리 속에서 익숙한 얼굴이 눈에 띄었다. 금룡상단의 셋째, 금진송이었다.
낙양에 처음 당도했을 때부터 큰 도움을 주었던 사내였다. 화련에게도 친절했던 기억이 남아 있었다.
‘목소리가 낯익다 했더니.
금진송의 생일인 듯, 그의 일행은 생일을 축하하며 시끌벅적했다. 서연은 잠시 축하를 해줄까 망설였지만, 가볍게 목례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으, 은인……!”
그때, 시선이 마주친 금진송이 서연을 발견하고는 허겁지겁 다가왔다. 왠지 모르게 얼굴이 한없이 붉어져 있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뵙습니다. 한동안 뵈지 못해 걱정이 되었습니다만, 잘 지내시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놓입니다.”
“은인?”
금진송과 함께 있던 이들이 의아한 눈으로 물었다.
“먼저 들어가 있게들. 할 일이 있네.”
“양갓집 규수를 소개시켜준대도 코웃음만 치더니. 이유가 있었군 그래?”
“헛소리들 말고 들어가게!”
사내들은 껄껄대며 웃다가 이내 방 안으로 들어섰다.
금진송은 민망한 듯 헛기침을 반복하다 입을 열었다. 어째서인지 시선을 맞추지 못했다.
“그, 추태를 보여 죄송합니다.”
“혈기왕성한 나이니 그럴 수 있지요. 이해합니다.”
그 정도는 웃어넘길 만한 장난이었다. 애초에 목적부터가 금진송을 놀리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혹 어디로 가시는 길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금진송이 조심스레 물었다. 맨땅을 보고 그리 묻는 것이 퍽 요상했다.
“금룡상단으로 가려고 했습니다. 수령해야 할 물건이 있는지라.”
본디 낙양에 온 목적부터가 수련궁교두에게 받은 대리석들을 수령하기 위함이었다. 금룡상단이 물건들을 보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금진송의 얼굴에 순간 화색이 돌았다.
“제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어 직접 동행하지는 못하겠지만, 제 시종을 붙여드리겠습니다. 면식이 있으시지요?”
“……교교라 합니다.”
옆에 서 있던 여인이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과거에 용문석굴의 안내를 맡았던 여인이었다.
‘예전에 호위 살수 일을 했었다던가.
그때는 무림과 연이 없다 여겨 신경쓰지 않았으나, 지금은 또 다르게 느껴졌다. 살수들은 몸을 어떻게 짜냈을지도 궁금해졌다.
서연은 교교의 몸을 가볍게 흝었다.
‘근육이 단기 결전에 맞춰 짜여 있구나. 품에서 비수를 꺼내 내지르면 웬만한 고수들도 받아내기 힘들겠다.
보통의 살수로 보기 힘들었다. 한창 때에는 어느 정도 이름을 떨치지 않았을까.
‘하긴, 금룡상단의 적자에게 어찌 범상한 인물을 붙였을까.
불현듯.
시선을 느낀 교교가 떨떠름한 얼굴을 지었다. 과거 그녀가 서연에게 가졌던 감상은 지금과는 사뭇 달랐다.
산전수전을 다 겪은 내가고수, 본 실력을 숨긴 채 도련님께 접근한 철면피, 젊은 목소리와 외양으로 방심을 일으켜 일격을 먹이는 계산적인 인간…….
맨 얼굴을 목도하고 나니 평이 한순간에 달라졌다.
금진송 역시 어디가서 꿀릴 외모는 아니었으나, 서연에 비할 바는 아니라 여겼다.
작정하고 수작을 부리려 했으면 끝까지 금룡상단에 남았을 터. 미련없이 떠나갔던 순간부터 오해였음을 알았다.
“……모시겠습니다.”
뒤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시선을 애써 무시했다. 언젠가 책잡힐 일을 했나 괜한 오해를 하면서다.
탁!
말을 끝으로 일행은 마차에 탑승했다. 본래 금진송이 타고 왔던 것이었다.
자신은 객잔에 꽤 오래 남아있을 예정이니 나중에 마차를 돌려보내주기만 하면 괜찮다고 했다. 탑승하면 괜한 검문을 생략할 수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서연은 그의 호의를 기꺼이 받기로 했다. 언젠가 각예품을 만들게 되면 금룡상단과 거래해야겠다는 생각을 품은 채였다.
“본가에 방문하신 적이 없으신 걸로 압니다. 가문의 규율로 문을 넘어서부터는 마차를 탈 수 없는지라, 얼굴이 드러나실 겁니다. 미리 가릴 물건을 가져올까요?”
교교가 조심스레 물었다. 과거 서연이 면사까지 쓰고 다녔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괜찮습니다.”
이제 맨 얼굴을 드러내는 것도 익숙해져야 할 터였다. 일문의 문주로서 언제까지고 얼굴을 감추고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 말이다.
쿵!
이윽고 쿵 소리와 함께 문지기들이 거대한 대문을 열어젖혔다. 금룡상단의 본가에는 처음 방문하는 서연이었다. 과거에는 금진송의 별장에서만 머물렀던 탓이다.
큼지막한 마당을 바삐 오가는 시종들과 한 켠에 줄서있는 상인들이 눈에 띄었다.
대륙에서 세 손가락에 꼽힌다는 상단이라는 사실을 실감했다. 섬서에서도 몇 번 보지 못했던 색목인들이 주변을 자유로이 왕래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한켠에 자리한 작은 연못에서는 온갖 사람들이 술잔을 든 채로 풍류를 즐기고 있었다.
금진송의 측근에 속하는 교교를 보고도 전혀 동요하지 않는 태도에서 그들의 위세를 짐작게 했다.
“그래서, 상단에서 맡고 있다는 대리석을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만 융통해줄 수는 없겠는가? 이번에 호광에서 참으로 좋은 조건을 제시해서 하는 말이네.”
“어허, 이 사람이! 안 된다니까 그러네.”
상석에 손사래치는 사내가 유독 눈에 띄었다. 주변에 아름다운 여인들을 끼고 웃고 있었다.
한량처럼 보이는 품행. 사람 자체가 굉장히 느긋해 보였다.
“……본가의 둘째, 금진명(金振明) 도련님이십니다.”
교교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작금의 상황이 익숙한 듯했다.
“음.”
그때 금진명이 고개를 들었다.
재빨리 지나치려는 서연 일행을 흘깃 보더니, 들숨 소리가 커졌다. 매우 크게 놀란 듯했다.
“본가에 침어(沈魚)가 찾아오셨구려! 교교가 안내하는 것을 보니 아우의 손님이신 듯한데!”
이쪽을 향해 손을 번쩍 들었다. 옛 경국지색을 언급하며 펼치는 동작이 퍽 과장스러웠다.
“무슨 일로 오셨는지 알려주실 수 있겠소? 본 공자가 성심성의껏 도와드리리다!”
그새 가죽신을 신고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만취한 듯 보였는데도 발걸음에서 단련된 무인의 기도가 흘러나왔다. 품위가 느껴졌다는 것이다.
언제든지 주기(酒氣)를 흩어낼 수 있는 무인임을 깨달았다. 명문가의 자제다웠다.
“여태 살아오며 마주한 여인 중에 그대가 둘째로 아름답소. 참고로 첫째는 본인의 모친이올시다. 혹 그대는 진송 아우의 연인이시오?”
“금진명 도련님, 언사가 과하십니다.”
교교가 서연의 앞을 가로막듯 나섰다.
“본가에서 받아가셔야 할 물건이 있어 찾아오신 분이십니다. 또한 금진송 도련님께서 은공으로 모시는 분이시기도 한 바, 이 이상의 무례는…….”
“안다, 알아. 찾아온 용무 정도는 물을 수 있지 않느냐.”
금진명이 웃으며 말했다.
“아니면 혹 그대도 본가에서 보관하고 있는 운남산 대리석을 얻어가기 위해 찾아온 것이오? 그랬다면 헛걸음 했다고 할 수 있소. 그건 이미 주인이 있는 물건이외다.”
들어보니 방금까지 연못에서 나누던 대화 역시 이와 관련된 이야기인 듯했다.
금진명은 천천히 앞으로 나서면서 입을 열었다.
“허나, 그대가 부탁한다면 내 친히 부친께 찾아가 일 할 정도는 떼어달라고 말씀드려 보리다. 듣도보도 못한 문파의 문주에게 건네주는 것보다야 천하절색인 그대에게 주는 편이 낫지 않겠소?”
“…….”
서연은 입을 다물었다. 두 제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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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연의 겉옷은 인면지주의 실과 천잠사를 엮어 만든 장포였다.
초고수의 진기조차 능히 받아대는 귀물인 탓에, 웬만한 식견으로도 알아보기 힘들었다. 금룡상단의 둘째라 해도 예외는 아닌 듯했다.
“타인의 물건을 그리 사사로이 다루어도 되는가?”
서연의 목소리가 순간 얼음장처럼 차갑게 가라앉았다. 언행과 분위기만으로도 위엄을 드러내던 패검대주를 보고 느낀 점이 적지 않았다.
집단의 수장이라면 마땅히 그런 면모를 지녀야 한다고 느꼈다.
“본가에서 받아가야 할 물건이 있다고 하였으니, 그렇게 반응하는 것도 이해가 가오. 중한 물건을 우리가 멋대로 다룬다고 여길 수도 있으니.”
금진명이 웃으며 대답했다.
갑작스러운 하대에도 동요하지 않은 듯했다.
술에 취하고도 말투와 걸음에 흐트러짐이 없는 것만 봐도 그랬다. 호부 밑에 견자 없다는 말이 떠올랐다.
한량인데도 풍기는 분위기가 범상치 않았다.
“허나 걱정하지 마시오. 그대가 받아가야 할 물건은 멀쩡히 있을테니. 그 대리석이 예외였던 거요. 대형 채석장에서 족히 반 년은 캐야할 물량을 보냈더군. 황실이 아닌 이상에야 그만한 물량을 감당하기는 힘들지. 일 할 정도는 사라져도 아무도 모를 것이오.”
“…….”
서연은 묘한 표정을 지은 채로 생각에 잠겼다.
들어보니 대리석을 맡긴 사람이 황실의 수련궁교두임을 모르는 듯했다.
그런 것이 아니고서야 금진명의 태도를 설명할 수 없었다.
‘금룡상단주께만 알린 모양이구나.
황실이 개입했음이 알려지는 순간 보답이 아니라 하사품으로 여기는 작자들이 생길 것을 염려한 듯했다. 수련궁교두의 배려였다.
서연은 교교를 불렀다.
“언제까지 듣고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군요.”
“그것이…….”
교교의 안색이 당황으로 물든 때였다.
금진명이 천천히 웃으며 다가왔다.
“아우의 시종은 존중하면서, 정작 그대에게 예의를 차리는 본 공자는 존중하지 않는구려. 스승이 누구이길래 그리 가르쳤는지 참으로 궁금하외다.”
“혹 네 양친이 셋째 공자와 다른가?”
“……?”
서연은 담담히 말을 이었다. 패검대주가 보였던 격조를 떠올리면서다.
“그는 군자의 행실을 알던데, 너는 예의라는 단어의 의미조차 모르는 듯하구나.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겠다.”
오연히 선 채로 금진명을 직시하는 시선에서 기품이 묻어나온다.
몸가짐이 한순간에 달라졌다. 마치 북경의 귀족 같았다. 교교 역시 그것을 느꼈을 정도였다.
파격적인 언행을 보였는데도 그것이 심히 어울렸다.
“…….”
교교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살수로 활동하던 시절에 몇 차례 마주해 보았기에 알 수 있었다. 패도에 몸 담은 인간이나 보일 법한 자태였다.
갑작스럽게 이어진 폭언에 넋이 나간 금진명이 입을 다문 그 때였다.
일전까지 금진명과 대화를 나누고 있던 사내가 벌떡 일어섰다. 입고 있는 형형색색의 비단옷에서부터 재력이 드러났다.
“듣자하니 언행이 방자하기 짝이 없구나! 허리춤에 찬 무기를 보아하니 필시 근방에 적을 둔 문파의 일원일 터인데, 그러고도 감히 금룡상단의 둘째 공자를 모욕하다니……!”
사내는 호통을 치며 성큼성큼 다가왔다. 호위하던 무인들 역시 드센 기파를 내뿜으며 그를 뒤따랐다.
“네놈의 무례한 언행을 모두가 들었으니, 너는 물론이고 네가 속한 문파 역시 응당한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하남의 명문가들은 자식 교육에 관여하지 않는가.
과거 낙양에 당도하기 전에 유람선에서 만났던 후기지수들이 떠올랐다. 금진송 역시 그 유람선에서 처음 만났었다.
‘운초아였던가.
더불어 그녀에게 호응하던 명문가 귀공자들의 모습 역시 그려졌는데, 작금의 상황이 그때와 큰 차이가 없었다.
부유한 땅이라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지역에서는 이렇듯 오만한 자들을 보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상단주의 고심이 크시겠다.
설마 차남을 두고 막내인 금진송만 교육했겠는가. 엄히 다스려도 고쳐지지 않는 망나니들은 어디에나 존재했다. 천성부터가 오만한 탓이다.
정파의 몇몇 자제들이 사마외도와도 같은 기질을 가지게 되는 것도 그 천성 때문이라고 했다.
다가오던 무인들은 품에서 몸둥이와 포승줄 따위를 꺼냈다. 이런 짓에 매우 익숙해 보였다.
다짜고짜 발검하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까.
“너무 험하게 대하지는 말게나. 아직 세상 물정을 몰라 그런 듯하니.”
금진명 역시 다시금 여유를 되찾았다. 그는 한 걸음 물러서 무인들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교교는 건드리지 말거라. 내 아우가 아끼는 시종이라 들었다.”
“도련님……!”
“자네도 너무 저항하지 말게. 어린 사매들이 다칠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러는 금진명의 옷자락이 가볍게 휘날리고 있었다. 전신의 내공을 일으킨 것이다. 여차하면 개입하겠다는 의지가 역력했다.
금룡상단 정도 위치에 오르면 무공 역시 경지에 이르는 것일까.
섭취한 영약이 엄청나게 많은 듯했다. 새어나오는 기파가 심상치 않았다.
“상단주께서 이래도 된다고 가르치셨나?”
“음?”
“아무리 생각해도 금룡상단주께서 이런 작태를 허락하실 것 같지는 않다만.”
“꼭 직접 뵌 적이 있는 것처럼 말하는구나. 본 공자의 부친이 풍류를 즐길 줄 모르는 것은 맞으나…….”
금진명의 입술이 더욱 곡선을 그렸다. 그동안 서연의 기파를 흝어보기라도 한 듯했다. 자신이 명백히 우세하다는 결론을 내린 모양이다.
“크게 다치고 싶지 않다면 앞으로는 경어를 쓰도록 하거라. 본 공자는 자비롭기에 아직 너그러이 넘어갈 용의가 있다. 아우의 은인이라고도 하지 않았느냐. 형제간의 괜한 다툼을 일으키고 싶지는 않다.”
말투가 한순간에 오만해졌다. 이쪽이 본모습인 듯했다.
‘나중에 내 제자들이 이런 작자들을 상대해야 할 터인데.
서연은 무심코 먼 미래의 일을 떠올렸다.
더불어 제자들이 고생하는 모습이 훤히 그려졌는데, 괜시리 가슴 한켠이 답답해졌다.
문파들이 명성을 쌓고 어떻게든 부흥하려 애쓰는 이유를 조금이나마 이해했다. 이런 하잘것 없는 작자들에게 무시받지 않기 위해서가 아닐까.
제자들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자신이 치워두는 것이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중간하게 징치했다간 원한을 품고 제자들을 노릴 가능성이 농후했다.
자신이 낙명(落命)한 이후에도 감히 수작을 부릴 수 없게 하려면 초장부터 상하를 확고히 해야 했다.
‘감히 내려다보지 못하도록.
서연의 머릿속에 신녀문의 첫 번째 법도가 새겨졌다.
결론을 내렸다.
사박.
주변을 가볍게 한 번 흝어본 후에 걸음을 디뎠다. 발 끝 용천혈에 힘을 더하면서다.
발끝에서 바람이 폭발하는 듯한 감각이 몰아쳤다.
다가오던 무인들은 전조조차 느끼지 못했다. 돌연 폭풍이 몰아친다고 느끼는 이들이 태반이었다.
잔잔하던 대기가 갑자기 소나기라도 쏟아지는 듯 먹먹해졌다.
드드드드드!
지축이 울려댔다. 대지가 발끝을 중심으로 큼지막한 선을 그려내며 수십 조각으로 갈라졌다.
몽둥이와 포승줄을 들고 다가오던 자들이 한순간에 균형을 잃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
전신이 짓눌리는 듯했기에 호흡조차 버거웠다. 갑작스레 벌어진 상황에 영문을 파악하지 못했다.
“꺼, 꺼으윽……!”
하나같이 고개를 처박은 채였다. 자신들에게로 오연히 다가오는 발걸음을 듣기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모든 이들의 표정이 변했다.
“삿된 주인을 모신 것을 탓하거라.”
쥘부채를 움켜쥔 손에서 진기의 파동이 거세게 너울거렸다.
햇살이 떠오른 듯했다. 도무지 정면에서 직시할 수가 없었다.
콰아아앙―!
천녀유검의 검초를 머금은 쥘부채가 무인들의 어깨를 일시에 내리쳤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눈을 까뒤집었다.
솟구친 기파가 오죽 강했는지, 흙먼지조차 튀어오르지 못하고 땅을 설설 기었다.
일대가 침묵으로 물들었다. 하수들이 보기에는 찰나에 벌어진 일이었다.
한참 동안 눈을 끔벅이고 나서야 상황을 인지했다. 넘볼 수 없는 고수라는 사실을 그제야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연못에 앉아 술잔을 들이키던 자들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신발조차 내팽개치고 도망가는 이들이 태반이었다.
악기를 연주하던 예기들도 혼비백산하며 달아났다.
무인들을 끌고 왔던 상인과 금진명만이 망연자실한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자, 잠깐……!”
금진명이 뒤로 기어가듯 물러나며 손을 내저었다.
“누구, 누구신지는 모르겠소만, 내가 잘못하였소!”
눈을 다급히 위아래로 움직였다. 중병에 걸린 사람처럼 전신을 잘게 떨었다.
피부에서부터 와닿는 무력 차를 실감했다. 명색이 상단의 차남이었다. 최소한의 안목은 있었다.
‘진각도 아니었다……!
감추고 있던 힘의 일부를 드러낸 것에 가까웠다. 가벼운 걸음이 계기였다.
그걸 알고 나니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믿기지가 않았다. 기껏해야 약관에 불과한 여인이 어찌 저런 경지에 올랐단 말인가.
바삐 돌아가던 머릿속이 수렁에라도 잠긴 듯했다. 도무지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금진명은 식은땀을 흘리면서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생사에 기로에 놓였다는 착각에 이른 얼굴이었다.
“……본 공자에게 해를 입히면 금룡상단에서도 가만 있지 않을 거외다. 구파와 세가는 물론 황실과도 연이 닿아 있는 바, 아무리 초고수인 그대라도 감당하기 힘들 것이오.”
서연은 되려 협박을 하는 금진명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사, 살려주……!”
대신 걸음을 옮겨 무인들을 끌고 왔던 상인의 어깨를 마저 내리찍었다.
콰아아앙―!
비명이 한순간에 잦아들며 일대가 다시금 적막으로 물들었다. 옆에 있던 금진명은 괜히 몸을 움찔 떨었다.
술 기운이 완전히 달아난 듯했다. 얼굴이 완전히 사색으로 물들었다.
타닥!
그때 근처에서 무인들이 달려오는 기척들이 느껴졌다.
금룡상단에서 고용한 무인들이었다.
가문 내부에서 더없는 소음이 울려퍼진 탓이다. 달려오지 않는 것이 되려 이상했다.
허나 서연은 신경쓰지 않았다. 설마 금룡상단에 구파의 장문인이나 세가의 가주가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뒤이어 무인들이 장원에 당도했다. 하나같이 강건한 기도를 품고 있었다.
수는 족히 마흔 정도 될까. 당장 눈앞에 보이는 숫자만 해도 그러했다.
금진명이 화색했다. 제게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다급히 입을 열었다.
“본 공자도 책임을 묻지 않을테니, 이쯤에서 물러나시는 것이 어떻겠소?”
병장기를 패용한 무인들이 가문의 직계를 지키기 위해 급하게 다가오던 때였다.
서연의 시선 끝에 익숙한 노인이 보였다. 갑자기 나타난 흉수에게 차남이 죽을 위기에 놓였다는 말을 듣고 급히 달려오기라도 한 듯했다.
눈이 마주쳤다. 곧 노인의 얼굴에 가지각색의 감정이 번졌다.
곧장 상황을 유추한 듯했다.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변명을 내뱉거나 선처를 구하지도 않았다. 언젠가 이런 날이 찾아올 줄 알았다는 기색이었다.
“…….”
서연은 처음에 했던 생각을 취소했다. 호부 밑에 견자가 나버렸다.
살짝 고개를 끄덕인 다음 다시 금진명을 바라보았다.
쥘부채가 진기를 가득 머금었다.
금진명은 다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어째서인지 가문의 무인들이 다가오지 않고 있었다.
“깨어나면 부친께 백배사죄해라. 본 문주에게도, 본 문주의 제자들에게도.”
스스로를 칭하는 명칭이 바뀌었다. 서연도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일어난 일이다.
화련은 경애 어린 표정으로 스승을 올려다봤다.
앞으로 스승 대신 장문인이라 불러야겠다는 생각을 품으면서다.
“후일 다시 찾아왔을 때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면.”
쥘부채를 높게 치켜들었다. 담긴 진기의 양이 어마어마한 탓일까, 손으로 별을 치켜든 듯했다.
“내 친히 네놈을 불구로 만들어주마.”
금진명이 들은 마지막 말이었다.
콰앙―!
다음 순간 쥘부채가 금진명의 안면을 내리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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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대가 완연한 적막으로 물들었다. 금룡상단의 무사들은 지면에 반쯤 처박힌 둘째 공자를 보며 저도 모르게 병장기를 강하게 쥐었다.
천하에서 세 손가락에 꼽히는 상단이다. 북경에 미치는 영향력만 놓고 보면 능히 첫 손가락에 꼽힌다고 할 만했다.
당연히 이 자리에 모인 무사들 역시 대개 지역에서 명성을 날리던 이들이었다.
“…….”
그런 이들이 수십이 모였는데도 감히 나서지 못했다.
투두둑.
돌 부스러기가 굴러다니는 소리가 작게 울렸다.
진기가 뇌리를 파고든 탓인지, 금진명은 혼절한 상태로도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전류라도 통한 듯했다.
처박힌 지면 주변이 갈라져 있는 것이 섬뜩하게 다가왔다. 전신의 뼈가 우그러지다 못해 그 자리에서 즉사했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숨이 붙어있는 것에서 여인이 손속에 사정을 두었음을 직감했다. 무위의 격이 남달랐다.
여인은 그런 금진명을 내려다보다 섬섬옥수와 같은 손을 치켜들었다.
스윽.
허공섭물의 묘리를 펼쳐 성인 남성을 아무렇지 않게 들어올렸다. 몸가짐에 어린 우아함에서 범접할 수 없는 기백을 느꼈다.
저 정도는 되어야 금룡상단의 본가에 단신으로 난입할 수 있다는 것일까.
타고난 용모 때문인지도 몰랐다. 황실의 고결한 신분이라 추측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출수하지 말라는 엄포가 뒤따른 탓도 있었다.
고요한 혼란 속에서.
서연은 뚜렷한 눈으로 혼절한 금진명을 응시했다.
어줍잖게 대응했다간 훗날 더한 원한을 살 것을 직감했다. 그러했기에 진기를 극한까지 일으켜 금진명의 뇌리에 천녀유검의 검초를 단단히 새겼다.
한 수에 족히 수십 번의 타격이 들어갔다. 전신이 아슬아슬하게 버틸 수준으로 공격을 몰아쳤다는 뜻이다.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았으면 백치가 되고도 남았을 위력이었다. 일격만 더해도 전신의 뼈가 동시에 부러지리라.
‘필시 압도적인 인상을 남겼겠지.
뇌리에 강제로 공포를 새겨놓았다. 천녀유검의 계승자에게 감히 대적하지 못할 것임을 확신했다.
훗날 제자들을 마주하더라도 전신에서 들불처럼 일어나는 경외와 공포를 감당하지 못하고 혼비백산하지 않을까.
비연천공의 법력 이치에 서연의 심상이 가미되어 생겨난 공능인 듯했다. 혼절하기 직전 금진명이 보였던 공황에 가까운 모습에서 유추할 수 있었다.
당장도 그랬다. 허공섭물의 묘리를 펼쳐 들어올린 순간 신체가 반응했다. 전신에 공황이 깃든 것처럼 떨려왔다.
뭣 모르는 이들이 보기에는 서연이 금진명의 육체를 희롱하고 있다고 느낄 정도였다.
‘나아갈 방향이 보이는 듯하구나.
비연천공은 완벽한 무학이지만, 천녀유검은 그렇지 않았다.
불살을 기본 기조로 삼는 검법이다. 능히 천하를 감당할 수 있어야 했다.
어쩌면 오히려 그러했기에 이러한 공능이 생겨났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가와 불가의 무학 역시 남들과 다른 길을 걸었기에 현묘함을 얻어냈기 때문이다.
둘째 공자를 하잘것없는 물건 대하듯 내려놓은 직후였다. 인파를 뚫고 금룡상단주가 코앞에 이르러 있었다. 그를 호위하듯 선 무인들의 기세가 피부를 저밀 듯 매섭게 다가웠다.
금룡상단주가 아무리 대인배라고는 하나, 아들을 이 꼴로 만들어놓고 예전과 같이 대우할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서연이 상황을 설명하려 입술을 떼려던 순간이었다.
“……늙고 못나, 차마 눈 뜨고는 못 볼 부끄러운 꼴을 보였습니다. 둘째를 저리 키운 것은 순전히 이 늙은이의 잘못입니다.”
선대에 북경 귀족과 피가 섞인 이후로는 고위 관리조차 감히 아래로 보지 못한다고 했다. 구파의 장문인이나 세가의 가주들과 동일선상에 놓는 자들도 적지 않았다.
그만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 눈 앞의 젊은 여인을 보고 곧장 경어를 입에 담았다. 경천동지할 일이었다.
“상단주님……?”
주변의 무사들이 경악한 얼굴을 하는 가운데, 금벽산은 서연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둘째는 업보가 많은 아이지요. 일이 닥치고 나서 후회하는 것을 보면, 저 역시 도량이 좁은 소인배였던 모양입니다.”
반 년 사이에 인상이 확연이 달라져 있었다. 움푹 들어간 뺨, 검게 물든 눈가. 큰 편에 속했던 체구 역시 몰라볼 정도로 쪼그라들어 있었다.
중병에 걸렸다가 막 병상을 털고 일어나기라도 한 듯했다.
“상단주님, 아직은 안정을 취하셔야 합니다.”
금벽산은 주변 수하들의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태도였다. 힘겹게 손을 내저어 저를 부축하려던 이들을 떨쳐낼 뿐이었다.
놀란 듯한 서연의 얼굴에 금벽산이 고개를 저었다.
“걱정하실 계제가 아닙니다.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이 핑계로 보이지는 않을까 부끄러울 뿐이지요.”
금벽산은 곧장 무릎부터 꿇었다. 노화로 인해 덜덜 떨리는 손을 뻗은 채 허리를 앞으로 굽인다.
곳곳에서 헛숨을 들이키는 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듯했다. 엎드렸다는 말로도 모자랐다.
“죄송, 또 죄송합니다.”
그 모습에 화들짝 놀란 서연은 그를 일으켜 세웠다.
“어찌 상단주께서 그런 모습을 보이십니까?”
“모두 제가 어리석어 벌어진 일입니다. 자식의 죄는 곧 부모의 무지에서 비롯되었다고 하였으니……. 이렇게 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도중에도 서연의 시선을 마주치지 못했다. 고개 역시 땅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각자 추구하는 상리(商理)가 다르다 여겨 크게 개입하지 않았습니다. 선을 넘지 않는 것으로 족하다 여겼지요. 뇌가 흐려진 탓에 방만한 작태를 방조했던겁니다. 오늘에 와서야 처세를 잘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땅에 떨어진 체면을 건져 무엇하겠습니까. 무슨 처분을 논하시든 달게 받겠습니다.”
그리 말하면서 다시금 예를 취했다. 끝끝내 이마를 땅에 대었다.
‘실로 대인이신데, 어찌.
나이 지긋한 노인이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심히 불편했다.
“제게도 잘못이 있습니다. 수양이 깊지 못한 탓에, 신녀문주임을 곧장 밝히지 못했지요. 그러니 이제 일어나십시오. 정녕 저를 제자들 앞에서 무릎 꿇릴 요량이십니까?”
“…….”
일어서지 않으면 마주 절하겠다는 뜻이었다. 그제서야 금벽산이 고개를 들어올렸다.
“상단주님의 사과는 받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저는 처벌을 마쳤으니, 어서 가서 용무를 보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저는 받아야 할 물건만 받고 가겠습니다.”
“……참으로, 참으로 감사합니다.”
금벽산이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더없는 회한을 품은 얼굴이었다. 애써 미소를 짓는 것이 안쓰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그럼,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그제서야 제 아들에게로 시선을 돌린 금벽산이 입을 열었다.
“가솔들은 금진명을 유폐하고, 대죄를 다스릴 준비를 하거라.”
상인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를 어겼다는 말을 덧붙이면서다.
옆에 있던 무인들이 되물었다.
“유폐, 말씀이십니까?”
“수 대에 걸쳐 쌓은 신뢰를 한순간에 무너뜨릴 뻔했다.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 직계로 대우하지 마라. 밥은 시종들 틈에 끼어 먹게 하고, 잠은 뇌옥에서 자게 해라. 지금 말하는 것 이외에 금진명이 상단 일에 간섭할 여지를 주는 이가 있다면, 그 역시 중죄로 다스릴 것이다.”
서연 앞에서는 드러내지 않았던 노기를 숨김없이 드러냈다.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자리에 있던 모두가 확신했다.
병마를 겪은 몸으로도 상단주로서의 위엄을 더없이 드러냈다. 누구 하나 반문하지 못했다.
내공을 폐하지 않은 것이 아비로서의 마지막 자비인 듯했다.
“…….”
일대가 충격으로 물들었다.
금룡상단 둘째 공자의 인생이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졌다.
일평생을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살아왔던 자였다. 자고로 끝없는 금력은 고위 관리들과 고수들마저 발아래에 두기 때문이다.
그랬던 자가 모든 권세를 잃고 지하로 추락했다.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 들 정도의 형벌이었다.
정신을 차린 금진명이 어찌 반응할지 눈에 훤했다.
금룡상단 정도 되는 상가에는 내공 수발을 억제하는 기문병기 역시 수없이 많았다. 복수를 꿈꾸기는커녕 일반인보다 못한 삶을 살게 될 것이 훤히 보였다.
전음으로 명할 수도 있는 일을 공공연히 드러낸 것에서 금벽산의 면모가 드러났다.
이를 숨기는 것을 더한 치부로 여기는 듯했다.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금진명은 혼절한 채로 뇌옥으로 끌려갔다.
상단주의 명은 지엄했다. 정예 무사들은 더 이상 그를 직계로 대하지 않았다.
금벽산은 직접 서연을 이끌고 대리석이 보관되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산더미처럼 쌓인 대리석들을 보인 다음, 금룡표국의 표사들을 시켜 서연의 거처까지 운반하도록 했다.
귀한 운남산 대리석이 산처럼 쌓여있다고 했던가. 황실에서나 소화할 법한 양이라는 말에 틀림이 없었다.
어찌하여 금벽산이 대리석의 존재를 숨길 수 없었는지도 알 법했다. 아무리 금룡상단이라 한들 이만한 물량이 오갔다면 입단속을 시킬 수 없었을 것이다.
‘족히 반 백년은 쓰겠다.
그러한 기색을 눈치챘는지 금벽산이 말했다.
“너무 많다면 원하시는 만큼만 가져가실 수 있도록 조치하겠습니다. 저희가 언제고 보관하고 있을테니, 원하실 때에 원하시는 만큼 가져가십시오.”
그러면서 다시금 고개를 숙였다.
“……못난 아들을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시 찾아오시면, 그때는 달라진 모습으로 뵙겠습니다.”
목소리가 심히 떨렸다.
일전까지는 상단주였으나, 지금은 그저 못난 아들을 둔 아비였다.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도 애써 웃는 노인을 보니 그 망나니를 죽이지 않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이구나.
본능이 속삭이는 듯했다.
그저 손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런 자들을 지키기 위해서 불살을 입에 담은 것이라고.
망나니 하나를 살린 것이 아니라, 언젠가 찾아올 흉년에 수십 수백을 구했을 노인의 미소를 지키기 위함이라고.
우웅―
잔향이 호응하듯 짧게 울었다. 산정이 만들 때 영성이 깃들기라도 한 것일까.
본디 목숨을 취하기 위해 만들어진 병장기가 호응하는 것이 의아하면서도…….
그 느낌이 싫지 않았다.
웅웅.
쥘부채 역시 지지 않겠다는 듯 작게 떨어댔다.
“장문인…….”
“사저, 굳이 따지면 문주님이라 부르는 것이 맞습니다.”
“…….”
뒤에서 조용히 티격대는 제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서연은 저도 모르게 미소지었다.
갈 곳 없던 고아가 복에 겨운 제자를 둘이나 얻었다.
더 이상 산 속에 숨어살 이유가 없었다. 신녀문은 속세와 떨어져 도를 닦는 도문이 아니기 때문이다.
‘태실산에서 짐만 챙겨서 화양현으로 가야겠다.
회화루가 있던 곳이고, 갈 곳 없던 기녀들이 있던 곳이며, 반드시 보은하겠다던 꼬마 아이가 있던 곳이다.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처음으로 다짐했던 곳이자, 심상의 본(本)을 다진 땅이다.
그곳에 직접 깎아 만든 편액을 달아야겠다. 입구에 대리석으로 깎은 큼지막한 조각상을 세워두면 좋지 않을까.
웃음이 절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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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양현은 현 치고는 제법 번화한 곳이었다.
낙양과 숭산, 그리고 하남의 성도인 정주(鄭州)의 한가운데에 자리 잡은 까닭이었다. 붉은 단청을 얹은 고급스러운 기와집들이 즐비하여, 멀리서도 그 번영이 한눈에 들어왔다.
본디 이처럼 돈이 몰리는 곳에는 으레 흑도가 자리잡기 마련이다.
허나 소림사가 굳건히 뿌리내린 하남의 특성 때문일까, 인근 현에 자리 잡은 흑도라 해봐야 세상 물정 모르는 삼류 잡배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화양현은 조금 남달랐다. 삼류 흑도들이 감히 발 붙이지 못했다. 현의 주민들조차 그 정확한 연유를 알지 못했다.
그저 야심 큰 포두와 새로 부임한 지현이 흑도들을 쥐잡듯 쓸어버린다는 소문만이 무성할 뿐이었다.
화양현에서 가장 큰 기루들조차 모조리 관아의 아래로 들어갔다던가.
기이한 것은, 본래 반발했어야 할 흑도들이 관아의 명을 고분고분 따른다는 점이었다.
안전이 보장되고 볼거리가 풍성하니 자연스레 사람이 몰렸다. 당장 화양(華陽)이라는 이름부터가 꽃이 빛날 정도로 많이 핀다고 하여 붙여졌다.
어느 순간부터 백도의 젊은 후기지수들이 모여서 술도 마시고, 꽃구경도 하다가 연애도 하는 장소로 발전했다.
객잔과 주루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났고, 인근의 문파들마저 하나 둘 속가를 꾸렸다.
목 좋고 물 좋다는 소식에 슬쩍 얼굴을 들이밀었던 흑도들도 있었으나, 죄다 하룻밤 사이에 어디론가 사라졌다.
듣기로는 근처를 배회하던 무림맹원들이 그러했다던가.
일 년 사이에 현의 규모가 몇 곱절로 커졌다. 본디부터 작지 않았던 현이었기에, 그 변화는 더욱 크게 다가왔다. 빠르면 내년에는 주(州)로 승격될 것이라는 이야기가 돌 정도였다.
“무슨 상단 행렬이 저리 길다냐?”
행인들이 길게 줄지어진 상단의 행렬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나름 체급이 커진 화양현에서도 보지 못했던 광경이었다. 짐을 가득 실은 마차가 자그마치 스무 대가 넘었다.
하남에서 으뜸이라 일컬어지는 금룡상단의 행렬이었다. 보기 드문 광경에 평소보다 더 많은 이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삽시간에 객잔들도 가득 차서 상단의 행렬이 어디로 향하는지 내기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명문대파가 새로 지부를 짓기라도 하나보오.”
“그렇다면 굳이 화양현에 지을 이유가 없지 않나……?”
일대의 땅을 통째로 매입한 것인지, 너른 허허벌판 위에 건물의 뼈대가 올라가고 있었다. 터가 워낙 넓어 골조만으로도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었다.
공사의 규모가 방대한 탓에 아무리 빨라도 몇 년은 족히 걸릴 듯했다.
“도대체 뭘 짓기에 저리 큰 땅을…….”
“주가 된다고 하지 않았던가. 관청이라도 새로 짓는가보지.”
“땅 주인 놈, 세 배를 불러도 안 판다고 그리 큰소리치더니.”
뭇 문파와 부자들이 탐내던 땅이었다. 인부들에게 은전을 건네며 주인이 누구냐 묻는 이들도 있었으나, 한결같이 모른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구파가 그러하듯 고아한 향취가 드러나도록 짓는다던가. 기어코 화양현의 뒤편에 자리한 산까지 골조가 뻗어나가는 것을 보고 혀를 내둘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구파 중 하나가 터를 옮긴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
으아악―!
태실산 자락에서 갑작스런 소란이 일었다. 화련이 새싹이 하나둘 피어오르는 흙밭을 나뒹구는 소리가 일대에 울려퍼졌다.
앉은 채로 눈을 감고 있던 서연이 눈꺼풀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근래 일문의 문주에 걸맞는 마음가짐을 가지기 위해 심상을 다스리는 중이었다. 금룡상단에서 뜻을 완전히 세운 까닭이다.
문파를 세운다고 말하니 금벽산이 도움을 주겠다고 나섰다. 은혜를 갚겠다는 노인장의 부담을 덜어줄 겸, 자문도 구하고자 선뜻 수락했다.
―화양현 말씀이십니까? 마침 상단이 가진 땅이 있습니다.
언젠가 개파식을 열겠다는 말도 덧붙였으니, 최소한 문파 행세는 할 수 있을 크기로 준비하지 않을까. 원체 대인배셨으니 말이다.
수풀 너머, 화련이 몸서리치는 것을 봤다.
당소소에 손에 들린 손바닥만한 지주가 원인인 듯했다.
‘영물이라고 했나?
태실산에 당도하자마자 당소소의 다리에 달라붙었던 녀석이다. 독물에 익숙한 당소소도 처음 보는 종이라던가.
당소소가 품고 있는 독기를 느끼기라도 한 듯했다. 충견이라도 되는 양 당소소를 졸졸 따라다녔다.
모종의 계기로 영성을 지녀 사람의 말을 알아듣는 듯했다. 당소소의 말로는 지주답지 않게 살이 통통하게 올라 귀엽다고 했다.
여느 지주와 달라 보이기는 했다. 반짝이는 검은 눈동자들이 심히 부담스러웠다.
사천당문의 직계들은 날때부터 독물과 긴밀히 지낸다고 했다. 그 탓에 미적 감각이 뒤틀린 경우가 많다던가.
당소소의 머리 위.
그곳이 둥지라도 되는 듯 자리를 틀고 앉아있는 지주가 보였다.
“사저, 안 뭅니다. 산군의 털도 거뜬히 쓰다듬으시는 분이 고작 지주를 무서워하시다뇨.”
“폴짝 폴짝 뛰어다니잖아! 당장이라도 옷 속으로 파고들 것 같다고……!”
“지주의 특징이지요. 나름대로 애교를 부리는 겁니다.”
“으꺅!”
어느새 당소소의 어깨에 올라간 지주다. 지주치고 속도가 매우 빨랐다.
와바박거리는 움직임에 화련이 몸을 세차게 떨었다.
영물이라는 말이 틀리지 않았다. 이따금 사냥을 나갈 법도 하거늘, 얌전히 당소소의 주변에만 머물렀다. 찬 봄바람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내는 것만 봐도 그러했다.
독물에 관해서는 당소소가 자신보다 전문가일 터였다. 그랬기에 서연은 지주에 관한 일을 당소소에게 일임했다.
다시 눈을 감고 본래 하던 생각을 계속했다. 신녀문에 관한 생각이다.
문파를 운영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뜻과 목적은 세웠으나, 세세한 방침까지는 정하지 못했다.
본디 문파가 크기를 키우기 위해서는 무인들을 영입하고 제자를 더 받는 것이 첫째이나, 그러고 싶지 않았다.
구파의 장문인들이 괜히 장문제자를 하나만 두겠는가. 제자 하나에 힘을 쏟기에도 벅찬 탓이다.
서연이 생각하기에도 둘이 최선이었다. 여기서 더 늘렸다간 감당하지 못할 것이 눈에 훤했다.
가르치지 못한다는 것이 아니다. 전심전력을 다하지 못한다는 뜻에 가까웠다.
구파나 세가가 그러하듯, 장로나 일대제자 층이 탄탄했더라면 아랑곳하지 않고 제자를 받았겠으나, 막 생긴 신생 문파에 그런 것이 있을 리가 있겠는가.
적당한 중진 고수를 데려와 모시기도 애매했다. 그만한 위치에 도달한 여고수들은 하나같이 소속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름을 신녀문이라 지어놓고 남성 고수를 받는 것도 웃긴 일이다.
무공도 문제였다. 심법은 완성했으나 검법이 아직 미완성이었다. 화산의 매화검만 하더라도 무려 이십사 초식이며, 종남은 거기서 더 나아가 전, 중, 후 각 십이초식으로 이뤄져 있다.
천녀유검은 이제 겨우 네 초식에 불과했다. 미완성의 검법을 가지고 제자를 받는 것도 웃긴 일이다.
두 제자는 예외였다. 검법이 아니라 각예가 시작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셋이 전부다.
유혼과 백호, 거기에 지주까지 더하면 여섯이라고 봐야 할까. 아무튼.
규모를 더 키울 수는 없으니 깊이를 더하는 데에 힘써야 했다. 명성과 권위를 쌓아야 한다는 것이다.
신녀문주라는 별호가 널리 알려지기는 했으나, 오랜 세월에 걸쳐 권위를 다져온 구파나 세가에 비하면 발끝에도 못 미쳤다.
바람 앞의 등불처럼, 한순간에 명성이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다는 뜻이다.
악인을 척살하지 않고도 선인들을 지키는 것을 목적으로 삼은 문파다. 그러려면 의지만으로는 부족했다. 민심이 따라야만 했다.
호랑이를 들먹여 우는 아이를 잠재우듯, 신녀문 역시 민초들에게 그런 존재가 되어야 했다.
‘천하까지는 무리여도, 소림의 절반이라도 이룬다면…….
당장 소림사가 그 예시였다. 이따금 대적이 나타나면 살계를 열기도 하지만, 표면적으로 내세우는 기치는 불살이었다. 그런데도 사마외도들이 감히 침범하지 못했다.
다른 문파가 불살을 내세웠다면 주제를 모른다고 비웃을 세인들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허나 천하의 그 누가 감히 소림을 비웃는단 말인가.
하남 땅에 사마외도가 자리잡지 못한 것이 그 결과다.
‘신녀문을 그렇게 만들고 싶구나.
서연이 생전 처음으로 품은 욕심이었다. 그러려면 지금보다 더욱 제자들을 가르치는 것에 전념해야 했다.
당가주의 말이 떠올랐다. 때로는 엄하게 가르치는 것도 방법이라던가. 그 역시 자식들과 지도대련을 한 적이 적지 않다고 했다.
“둘 다 이리 오려무나.”
제자들을 지켜보던 서연이 입을 열었다. 두 제자들은 다가와 다소곳하게 앉았다.
“아직 손을 나눠본 적이 없는 것으로 안단다. 한 번 스승과 손을 섞어보겠느냐? 동시에 들어와도 된단다.”
“……!”
화련과 당소소가 놀란 기색을 띄었다.
스승과의 비무는 처음이었던 탓이다. 맥락이 없었던 탓에 무언가 잘못한 것은 없는지 괜히 헤아려보려는 둘이었다.
****
화련은 천하에서 가장 강한 열한 살이었다.
유혼의 술법에 영향을 받아 육체가 서연의 심법에 맞춰져 철저히 다시 짜였다. 천하에서 서연 다음으로 비연천공을 잘 구사할 수 있다는 뜻이다.
유혼은 그녀를 두고 절세고수보다 비연천공을 더 잘 다룰 것이라는 말까지 덧붙였다.
위씨 성을 버리고 시종이 되기를 다짐한 그날, 화련은 모산파에서 출가했다.
이따금 모친의 얼굴이 아른거리기는 했으나, 하늘에서 내려온 천녀를 스승으로 모시는 값으로 치렀다고 생각했다.
근래에는 비연천공의 이 성에 도달했다. 힘을 이 할까지 끌어올릴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사천제일기재라는 당소소보다 빠른 성취였다.
―역시 사저십니다. 구파에서 내로라하는 장문제자들도 사저만 못할겁니다.
당소소는 그런 화련을 치켜세웠으나, 화련은 마냥 기뻐하지 못했다. 그녀의 실제 나이는 당소소보다 두 살 연상이었기 때문이다.
상념을 흩어냈다.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지금 그녀 앞에 선 이는 천하에서 가장 강한 여인이다.
기수식조차 취하지 않고 있다. 자세에 연연하지 않는 경지에 도달했음을 의미했다.
‘음.
몇 수를 양보해도 비무가 성립되지 않을 격차다.
처음부터 가르침을 내릴 생각으로 그리 말하셨음을 직감했다. 그렇다면 신녀문 대사저에 걸맞는 품행을 보여야 했다.
사제에게 선수를 떠넘겨서는 안된다는 뜻이다.
화련은 스승께서 직접 깎아준 목검을 강하게 쥐었다. 아직 진검을 들 때가 아니라는 서연의 말 때문이었다.
그때였다.
―손과 발에 위치에 집중하렴. 유검은 본디 정교함에 본을 둔 검법인지라, 매 순간 최선의 투로를 고려해야 한단다. 전곡혈에 힘을 두 푼 가량 더 싣는 것을 잊지 말고.
상서로운 전음이 뇌리에 울려퍼졌다. 실시간으로 지도가 이루어졌다.
당소소 역시 자세를 바꾸는 것을 보니, 두 제자에게 동시에 전음을 보내시기라도 하는 모양이었다.
화련은 옅은 호흡을 내쉬며 자세를 다잡았다.
스윽.
화련의 두 발이 땅을 온전히 디딘 순간, 서연이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비무가 아니라 그저 가르치실 요량이었구나.
괜한 착각이었음을 깨닫고 천녀유검의 일초식을 준비할 때였다.
화악―!
돌연 스승님의 전신에서 기운이 흘러나왔다. 평소에는 드러내지 않고 있던 공력을 개방한 것이다.
화련은 저도 모르게 숨을 참았다. 비무라기에는 풀어헤친 공력의 양이 너무나도 막대했다.
숨쉬기가 벅찰 정도였다. 설마 하는 마음에 기력 수발이 흐트러진 순간이었다.
―궤적을 눈여겨 보려무나. 지인에게 듣기를, 검의(劍意)를 받아들이기에 이 방법이 가장 좋다고 하더구나. 그러니……. 두려워도 눈을 감지 마렴.
스승의 말뜻을 곧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뒤이어 상서로운 기운이 스승님의 손날 끝에 백광처럼 맺혔다.
“…….”
숨이 턱 막혔다.
미소를 짓고 계시거늘 어찌하여 화를 내시는 것처럼 보인단 말인가.
여태 한 번도 쓴소리를 하지 않으셨던 분이다. 무슨 일을 계기로 훈육을 마음먹으신 것이 분명했다.
허나 다급히 머리를 굴려봐도 도저히 잘못한 일이 떠오르지 않았다.
―상단세로 갈 요량이란다. 천천히 내리그을 터이니, 전력을 다해 막을 방법을 강구하려무나.
파아앗―!
어둑해지던 산이 한순간에 흰빛으로 명멸했다.
동시에 스승님의 손날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다가왔다.
와악, 와아악―!
속으로 요란하게 비명을 지었다. 느린데도 피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타고난 신체 탓에 창백하게 질린 와중에도 편린이나마 묘리를 읽어냈다.
뭇 무인들은 이 검에 목숨을 잃어도 웃으면서 죽지 않을까.
살갗으로 세찬 감각이 와닿았다.
투로의 방향, 근육의 짜임새, 내공 호흡의 깊이, 진기의 성질…….
거기까지였다. 의식이 더는 감당하지 못했다.
“…….”
당소소는 입을 다물었다. 스승님의 옆구리에 들린 채로 혼절한 사저를 보면서다.
자신이 다음 차례였다.
저 괴랄한 방법을 일러준 지인이 누군지는 모르겠으나, 참으로 원망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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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적이 끊긴 후미진 뒷골목에서 두 사람이 등을 벽에 기댄 채로 마주하고 있었다.
나중에 온 것으로 보이는 사내가 품속에서 묵직해 보이는 전낭을 꺼내 건네자, 맞은 편에 있던 흑의인이 내용물을 확인했다. 정확히 금자가 스무 개가 들어 있었다. 고개를 끄덕인 흑의인이 말했다.
“말씀하시오.”
전낭을 건넨 사내가 말했다.
“이름은 불명, 신녀문의 문주라 하더군. 그녀에 관한 모든 정보를 원하오.”
“거처는 숭산 인근, 활동반경은 매우 넓은 것 같소. 반 년 사이에 운남부터 호북, 다시 하남을 오갔으니.”
“모든 것을 물었소.”
흑의인은 잠시 침묵하다 다시 입을 열었다.
“천명검은 아닐 것이오. 뒤를 따르는 수하가 보이지 않더군. 천명검의 대주들은 단독 임무를 이리 오랫동안 이어가지 않소. 북경의 고귀한 신분이었다면 이리 세상을 주유하게 두지도 않았을 터. 두문불출하던 신비세가의 후인일 가능성이 유력하오.”
“확실한 것은 없다는 말이군.”
“우리 정도 되니 이만큼이나 아는 것이오. 어떤 면에서는 동창보다 우리가 낫소.”
흑의인은 곧장 품에서 얇은 서책을 꺼내 건넸다. 사내는 이를 넘겨받아 가볍게 내용을 훑었다.
“설마, 하남에서 일을 치를 생각이오?”
“알 필요 없소.”
사내의 단호한 말에 흑의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고객의 심기를 거스르는 것은 좋을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흑룡회로군.
정보상들은 본디 눈썰미를 타고났다. 은잠술이 기본인 대살문(大殺門)의 살수 정도는 와야 출신을 속여넘길 만했다.
어설프게 정파 흉내를 내는 모양이었지만, 보법에서부터 티가 났다.
신녀문주에게 오른팔인 풍마나찰도를 잃었다던가. 품은 원한이 적지 않을 것을 직감했다.
“금자 열 개를 더 주면 중한 정보를 읊어주겠소.”
“여기에 다 적은 것이 아니었단 말이오?”
“그것은 신녀문주에 관한 정보일 뿐, 하남의 동향은 적혀있지 않소. 큰일을 앞두고 준비를 철저히 하여 나쁠 것은 없을 것이오.”
사내는 미간을 찌푸렸다. 머릿속으로 셈을 하던 사내가 혀를 차며 품에서 금화 열 개를 더 꺼냈다.
“장사 잘 하는군.”
“그런 말 자주 듣소.”
굳이 눈앞에서 금자를 다시 세어 확인한 흑의인이 말했다.
“소림은 개입하지 못할 것이오. 방장이 폐관을 깨고 나온지 얼마 되지 않아 밀린 일이 적지 않다더군. 나한당주와 방장제자가 면벽수련에 든 것은 말할 것도 없소. 그리고, 화양현에 구파가 새로 들어선다는 소문이 있소. 금룡상단의 마차가 하루에 수십 대씩 오간다더군.”
“……구파가?”
“솔직히 헛소문이라 생각하오. 구파의 장문인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 수백 년 넘게 머물렀던 터전을 버리고 내빼겠소? 허나 그만한 소문이 돌 정도의 문파가 터전을 옮기는 것은 확실해 보이오. 필시 장강 이남에 터를 잡았던 정파 문파겠지. 과거의 구파였던 형산파나 해남파라든가. 광동진가마저 멸문당했으니, 겁을 먹을 만도 하오.”
흑의인은 그렇게 말하면서 품속에서 보다 얇은 서책을 건넸다.
“무운을 빌겠소.”
사내가 서책을 받자, 흑의인은 기다렸다는 듯 멀어졌다. 사내는 근처에 숨어 있던 수하들에게 말했다.
“따라가 봐라.”
고개를 끄덕이며 손살같이 달려간 수하들은 채 일 각도 되지 않아 돌아왔다.
“놓쳤습니다.”
보법 성취가 가장 뛰어난 녀석들로 골랐는데도 그러했다. 사내는 혀를 찼다.
“음흉한 놈들.”
하오(下汚)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주제에 저만한 강자들을 아무렇지 않게 거느리고 있는 것부터 그러했다.
심지어 방금의 흑의인은 몇 시진 전까지 건너편 객잔에서 점소이 행세를 하던 놈이다. 진상에게 고개를 연신 굽신거리던가. 하오문의 지부임을 알지 못했더라면 영락없이 속았을 것이다.
“음혈종은?”
“연락이 닿지 않습니다.”
음혈종은 연신 부인하고 있었으나, 음혈종주가 운남에서 모종의 일을 겪고 영락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천명단주에게 당했다는 것이 정설이었다. 도주한 것만으로도 놀라운 일이기는 하나, 혈귀들에게 현인신이나 다름없던 종주의 패배는 음혈종의 위세에 뼈아픈 타격이 될 것이 분명했다.
“저희 홀로 치는 겁니까?”
“아니. 대살문과 함께 간다.”
상대는 풍마나찰도를 압도한 인물. 정확한 무공의 위력은 가늠하기 어려웠으나, 최소한 구파의 수장들에 준하는 격을 가졌다고 판단하는 것이 옳았다.
“신녀문주에게는 제자가 둘 있다더군. 당문의 여식은 내버려두더라도, 나머지 하나는 데려가야 본회의 면이 선다.”
*****
시간이 쏜살같이 흘렀다.
고작 일 년 만에 쌓은 무위였다. 제자들을 가르치며 미진한 부분을 다듬고자 하였다.
각예 역시 소홀히 하지 않았다. 훗날 화양현에 세워질 신녀문의 정문에 놓을 석상의 구상을 마쳤다.
웅장한 백호의 자태를 담은 석상을 깎아내기로 했다. 신녀문의 상징으로 삼기에 충분해 보였다. 섭섭하지 않게끔 아래에 작게 유혼의 형상을 더할 생각이었다.
당장 각예를 시작할 생각은 없었다. 화양현에서 신녀문의 터를 직접 본 후에 시작하는 것이 맞다고 여겼다.
‘고생한 제자들에게 휴식을 줄 겸, 화양현에나 가봐야겠구나.
서연은 마루에 널브러져 있는 화련과 당소소를 바라보았다. 다소 지친 모습들인데도 혈색이 뚜렸했다.
비연천공의 공능 탓이었다. 육체의 회복력이 남달랐다. 얼굴에 윤기마저 흐를 지경이었다.
드러누운 채로 당과를 부숴먹는 화련을 본 서연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먹고 싶었을까.
손을 파르르 떨면서도 당과를 놓치지 않는 것이 애처롭게 보이기까지 했다.
“스승님…….”
“오냐, 오늘은 이만하자꾸나.”
제자들을 데리고 태실산 아래로 내려갔다.
숭산 근처에서 가장 크고 유명한 객잔이 어디냐 묻는다면, 열에 아홉은 천향루라 할 것이다. 먼 과거에 서연이 화련을 데리고 방문했던 주루였다.
관이 직접 관리하는 고급 주루답게 음식이 매우 뛰어났던 기억이 났다.
고생했을 제자들을 격려하고자 천향루로 향했다.
주머니 사정이 넉넉한 이들만 방문하는 주루다웠다. 근처에 도착하기 무섭게 시끌벅적한 공기가 와닿았다.
서연을 본 문지기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훤히 드러낸 머리카락 때문이었다. 죽립을 쓰고 있는데도 가려지지 않았다.
본디 무인들은 호패로 신분을 증명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당장 화산파만 해도 그랬다. 도복 끝단에 새겨진 매화만으로 화산의 도사임을 공공연하게 드러냈다.
천명검이 하늘이 새겨진 옷을 입고 다니는 것 역시 같은 맥락이었다.
신분을 드러냄으로서 불필요한 검문이나 괜한 시비를 예방할 수 있었다.
서연이 머리칼 역시 그와 비슷하게 기능했다. 뭣 모르는 사람들이 보기에도 신비로운 색을 품었다.
“……신녀문주?”
“쳐다보지 말게. 추파를 던졌던 금룡상단 둘째 공자를 불구로 만들었다는 소문이 파다해.”
“대수림의 청목족보다도 콧대가 높은 인물이라더군. 도대체 어찌 겁박했기에 그 금룡상단이 꿈쩍도 못한단 말인가.”
마지막 말을 들은 서연은 곧장 고개를 돌렸다. 조심스레 속삭이던 사내들이 곧장 머리를 숙였다.
“으음…….”
저도 모르게 탄식이 새어나왔다.
그때 옆에서 조용히 듣고 있던 당소소가 말했다.
“뭣 모르는 자들이 헛소리를 내뱉는 것은 사천이나 하남이나 똑같군요. 민초들 사이에서는 선녀시라는 평이 파다한데.”
무림에 출도한 시기만을 따지면 당소소가 선배였다. 사천당문의 직계로서 강호에 나선지 족히 십 년도 더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서연은 그녀의 말에 얌전히 귀를 기울였다.
“스승님이 아닌 그 누가 왔더라도 목을 베어 마땅한 일이었습니다. 자비롭다 칭송해도 모자랄 분께 감히 저런 망언을…….”
당소소의 눈가에 진한 독기가 서렸다. 이럴 때마다 서연은 그녀가 무림인임을 실감하곤 했다.
반면 화련은 가만히 손만 잡고 있을 뿐이었다. 아직 무인으로서의 정체성이 크지 않아서라고 서연은 짐작했다.
실상은 달랐다. 화련은 슬쩍 스승님의 눈치를 보면서 망언을 내뱉은 망종들을 향해 온갖 진법을 쏟아붓는 중이었다. 사내들의 안색이 한순간에 새하얗게 질린 것만 봐도 효능을 짐작할 만했다.
길어야 일각이면 천향루 근처에서 헌앙한 청년들이 지렸다는 소식이 들려오지 않을까.
그러한 내막을 알지 못하는 서연은 천향루의 상층으로 향했다. 과거에 머물렀던 최상층에는 이미 손님이 있다기에, 적당한 방을 잡고 음식을 주문했다.
오리 냉채를 기다리면서 길거리를 지나다니는 행인들을 구경했다. 명성과 권위를 어찌 쌓아야 할지 고민하면서다.
문득 만두를 사들고 길을 걷는 사내가 눈에 밟혔다. 낡은 복장과는 다르게 몸가짐에서 단련된 무인의 기질이 느껴졌다.
예전에 비슷한 기질을 본 적이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금진송의 시녀이자, 전 호위살수였던 교교에게서 보았다.
‘…….
서연은 젓가락을 내려놓고 다시 행인들을 살폈다.
지팡이를 짚은 채로 거리를 힘겹게 거니는 노인, 비파를 튕기는 여인, 반대편 객잔 이 층에 앉아서 옆 사람들과 떠드는 청년.
강호에서 노인, 여인, 아이를 조심하라는 말이 갑자기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수상한 기색을 보이는 자들이 열을 넘고, 어느 순간 스물을 넘어가니 눈매에 절로 날이 섰다.
“스승님, 식사가 나왔어요.”
“먼저들 먹으려무나.”
제자들이 염려할까 싶어 내색하지 않았다.
‘……천향루 바깥에만 있을 것 같지는 않은데.
서연의 눈동자가 어느새 도화를 머금었다.
*****
대살문은 천하에서 내로라하는 살수들이 모인 집단이다.
보신경으로 능히 세 손에 꼽힌다는 청목족보다 신속한 경신법을 지닌 탓이다. 씨족의 보신경을 오직 암살만을 위해 오랜 세월을 갈고 닦은 여파였다.
머나먼 과거, 돌이킬 수 없는 상잔을 저지르고 영목에게 버림받아 피부가 죽은 낙엽처럼 물들었다. 그 때문에 세인들에게는 타락한 청목족이나, 아예 암족(暗族)이라 불렸다.
강호의 상층부나 알 법한 정보였다.
그들을 마주친 이들의 태반이 살아남지 못했기 때문이다.
짙게 탄 피부 역시 은잠술의 수준을 끌어올리는 데 일조했다. 두세 수 위의 고수들에게도 감지되지 않을 정도였다.
저녁 어림에 대놓고 지붕 위를 활보하는데도 눈치채는 이가 없었다. 몸을 스쳐지나가는 바람 소리만 얼핏 들릴 뿐이었다.
한 걸음에 민가를 너덧 개씩 지나쳤다. 바람마저 능히 넘어설 속도였다.
곳곳에 살수들을 풀어 위치를 특정했다. 천향루의 삼 층에 있다는 소식을 전해들었다.
그 역시 신녀문주의 무위에 대해 전해들은 바 있었다. 구파의 장문인들에 비견될 정도라던가.
사마련 팔천의 종주들이 민초들에게 괴력난신으로 군림하듯, 구파의 장문인들 역시 사마외도들에게 사신으로 군림했다.
실수가 있어서는 안 됐다.
대살문 특급 살수 서원광은 천향루의 백 장 남짓한 거리에서 멈춰섰다. 구파의 장문인들이 평상시 기감으로 인지하는 범위였다.
철컥―
결론을 내린 서원광은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조립하기 시작했다. 대수림의 청목족이 으레 다룬다는 대궁(大弓)과 형태가 유사했다.
바람이 이끄는 화살은 아득한 거리에 놓인 표적도 손쉽게 꿰뚫었다.
물론 상대는 천하에서 손에 꼽히는 강자.
틈을 보이지 않으면 막아내는 것이 어렵지 않으리라 여겨졌다
‘어린 쪽이라고 했나.
허나 흑룡회의 무인들이 천향루에서 난동을 부려 시선을 끈 틈에, 열 살 남짓의 어린 아이를 노리는 정도는 능히 가능할 터였다.
흔적을 남기지 않아 별호는 없으나, 대살문에서도 몇 없는 특급 살수다. 그의 화살에 명을 달리한 대문파의 고위층이 적지 않았다.
검은 머리칼을 늘어뜨린 채로 지붕에 앉아 대궁의 시위를 천천히 당겼다.
해가 뉘엿하게 지는 가운데.
화아아악―!
불현듯 일대가 복숭아꽃과도 같은 빛깔로 물들었다는 착각이 들었다. 서원광의 뾰족한 귀가 크게 흔들린 순간이었다.
‘……!
눈이 마주쳤다.
다음 순간 신녀문주의 신형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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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황도 잠시, 서원광은 빠르게 목표를 직시했다.
기척이 읽혔으나, 대살문의 특급 살수라는 직책에 걸맞게 당황을 빠르게 가라앉혔다. 평정을 되찾는 속도에서 평범한 살수들과 그렇지 않은 살수들이 갈렸다.
곧장 천향루 인근을 살폈다.
평범한 행상인 따위로 위장한 흑룡회의 무인들이 적지 않았다. 대살문의 살수들 역시 형태를 가리지 않고 변장을 마친 상황이었다.
상대가 정파인일 경우 자주 사용하는 수단이었다. 무고한 이들 사이에 숨어 빈틈을 노렸다.
상대의 검격 발경을 제한하기에 이만한 수단이 없었다. 어디서 기습을 당할지 모르니 수싸움에서도 자연스레 우위에 서게 되었다.
자고로 살수는 제 목숨보다 임무의 성공을 중히 여기는 족속이라 했다. 살수의 시초 격인 형가(荊軻) 역시 시황제를 암살하려 할 때 그러했다던가.
사지가 잘려나가도 목표물의 목에 칼을 박아넣으면 이득이라 여겼다. 서원광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렸을 때부터 세뇌에 가까운 교육을 받은 탓이다. 명령을 따르다가 죽는 것이 살수의 생이라 배웠다.
‘거리는 백 장.
고수의 움직임을 놓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눈을 두 번 깜빡일 시간이면 코앞까지 다가와있지 않을까.
허나 그 정도면 충분했다.
촤락―!
대궁의 시위를 붙잡은 서원광의 손 끝에 얕은 미풍이 일렁거렸다. 씨족의 공능을 발현한 것이다.
쐐애액―!
저물어가는 석양 속에서 먹을 묻힌 화살촉이 쏘아졌다.
인지 범위를 아득히 추월하는 속도였다. 본래도 수백 장을 거뜬히 나아가도록 하는 절세 궁술이다. 백 장 거리에서는 말할 것도 없었다. 씨족의 공능을 타고나지 않는 이상 인지조차 불가할 것이다.
‘고강한 인물이니 인지는 할 수 있겠다.
그것이 최선이라 여겼다. 쓰러진 제자를 절망어린 눈으로 내려다볼 것이 눈에 훤히 그려졌다.
허나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뒤이어 민초로 위장한 사마외도들이 일시에 들이닥칠 것이다. 자신은 그 틈을 노려 신녀문주의 목숨을 취하면 되었다.
그리 생각하며 두 번째 화살을 매길 때였다.
“네놈은 몸 성히 살려두지 않으마.”
등 뒤에서 들려선 안 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강한 선녀와도 같은 자태였다.
바람에 너울지는 머리칼, 섬섬옥수와 같은 손 끝에는 자신이 방금 전 쏘아보냈던 화살이 들려 있었다.
‘……!
소름이 돋기도 전에 곧장 발을 떼고 물러났다. 딛고 있던 기와가 뭉개졌다.
동시에 발치에서 바람이 움텄다. 씨족의 공능을 발현한 것이다. 벽력탄이라도 터뜨린 것처럼 몸이 곧장 뒤로 튕겨나갔다.
아니, 그래야 했다.
앞꿈치의 바람이 잠잠해졌다.
‘무슨?
미간이 급속도로 일그러졌다. 그를 도와야 할 바람이 역으로 그를 떠밀고 있었다.
공기가 좌우로 갈라지고, 바람이 그를 포박하듯 신녀문주를 향해 끌어당겼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천생이 살수인 그의 눈동자가 세차게 떨리는 것만 봐도 상황의 심각성을 알 만했다.
극히 고귀한 씨족에게만 허락되는 기예였다. 대자연이 도와주는 수준을 넘어 수족이 되기를 자처한다고 했다. 씨족 가운데에서도 천하에 단 넷에게만 허락된 경지였다.
“대수림에 있어야 할 자가 어찌하여……!”
서원광의 눈동자가 더는 커질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손끝의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씨족 중에서도 가장 고귀한 자가 어찌 귀까지 숨긴 채 인간 행세를 하고 있단 말인가.
다급히 쏘아보낸 화살이 나아가기를 거부했다. 바람이 그를 허락하지 않았다.
신녀문주는 일렁이는 풍랑 사이에서 표정 없이 그를 내려다보았다. 바람을 수족처럼 부리는 것을 당연히 여기는 듯했다.
전신에서 소름이 끼쳤다. 서원광은 망설이지 않고 등을 돌려 달아났다. 씨족의 공능을 내팽겨친 채, 본인의 진기만을 다루면서다.
‘알려야 한다.
신녀문주가 존귀한 혈통임을 알려야 했다. 대살문으로는 안 된다. 바람이 그녀를 따르는 한, 대살문의 문주조차 감히 그녀를 넘보지 못할 것이다.
소림의 법력이 사마외도에게 넘볼 수 없는 상성으로 군림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리 생각한 순간이었다.
후우욱!
하늘에서 바람이 길게 너울졌다. 동시에 진기가 바람과 어우러져 무형의 손바닥과 같은 형태를 띄는데, 뻗어오는 속도가 엄청나게 빨랐다.
바람 중에서 가장 빠르고 위대한 바람이나 보일 법한 위용이었다.
이것으로 확실해졌다. 신녀문주는 씨족의……!
꽈드드득―!
거기까지였다. 붙잡힌 순간 전신의 뼈와 중하단전이 한순간에 바스라졌다. 서원광은 전신에서 밀려드는 격통을 견뎌내지 못하고 혼절했다.
꺼져가는 의식 너머로, 신녀문주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악행을 저지르면 어찌 되는지, 네놈들이 본보기가 되리라.”
*****
천향루 인근은 하남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 중 하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수백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사마외도와 외적들이 감히 침범하지 못한 탓이다.
서연은 살수를 구분하는 방법 같은 것은 알지 못했다.
자신의 무력을 알고도 찾아온 놈들이라면 표정이나 몸가짐만으로는 구분하지 못하도록 행색을 다듬었을 것이다.
진기를 퍼뜨려 하나하나 근육의 짜임새를 확인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허나 일촉즉발의 상황에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오늘따라 바람이 거세구나.
허공답보를 구사하는 중인 탓일까, 평소보다 바람을 강하게 느꼈다. 안겨오기라도 하는 듯했다.
당장 중요치 않은 일이었다. 곧장 상념을 떨쳐내고는 사방으로 도화색 진기를 퍼뜨렸다. 뭣 모르는 행인들의 시선을 끌기 위함이었다.
화아악―!
심상에 영향을 받은 탓일까, 진기가 자연스레 연꽃의 형태를 띄었다.
“어머니, 아버지! 하늘을 보세요!”
“……내가 지금 몽혼에서 깨어나지 못했나? 오늘 그렇게 많이 마시지는 않았던 것 같거늘. 헛것이 다 보이는구나.”
“선녀님께서 내려오신 모양이다. 너희들도 경박한 모습을 보이지 말고 어서 절하려무나. 선녀님께서 경을 치실게다.”
“방장대사께 얼핏 신녀문주의 불경 공부가 그리 뛰어나다는 사실을 듣기는 했으나, 이 정도일 줄은 차마 몰랐다. 도대체 심상이 어떠하기에 진기가 연꽃의 형태를 띈단 말인가. 선재(善哉), 선재로다.”
“아미타불…….”
노을이 뉘엿하게 져가는 하늘에 떠오른 도화색 연꽃을 보는 행인들의 대화였다.
허나 이적을 일으킨 당사자인 서연은 그들의 대화를 한 귀로 흘렸다.
뭇 행인들이 감탄을 감추지 못하고 연꽃을 올려다보는 가운데 이상할 정도로 동요하지 않는 이들이 있었다.
‘네놈들이구나.
하늘에 기이할 정도로 커다란 연꽃이 피어올랐으면 위를 올려다보는 것이 보통 사람의 심리다. 눈치채지 못했더라도 주변 사람들의 반응을 보고 시선을 따라 돌리는 것이 정상이라는 말이다.
허나 천향루 인근에는 정상에 속하지 않는 자들이 스물하고도 셋이나 되었다.
맞은편 객잔에서 옆사람들과 떠들던 사내가 우뚝 선 채로 제자들이 있는 방향을 노려본다.
걷는 것조차 힘들어보였던 노인이 지팡이 속에서 진검을 꺼냈다.
비파를 튕기던 여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발각당한 것을 직감한 모양이었다.
주변 사람들은 그들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반응했다. 살수들 특유의 고절한 은잠술 탓이다.
안법이 발달한 고수가 아니면 시야에 담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엇, 밀지 마시오!”
“크헉!”
개중에는 막무가내로 주변인들을 밀치면서 달려오는 이들도 있었다. 초장부터 무인으로서의 기도를 숨기지 않던 이들이다.
그 중 제자들을 향해 달려가던 사내가 등에 매고 있던 봇짐에서 큼지막한 도를 꺼내들었다. 가볍게 휘두르며 도격을 다듬는 모습이 유려하기 그지 없었다.
흑룡회의 풍마나찰도에게서 보았던 도격과 유사했다. 놈들도 숨길 생각이 없어보였다. 병장기로 상대의 목숨을 끊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긴다는 사파다웠다.
불현듯 한 걸음에 천향루의 담장 위로 튀어오른 사내가 서늘한 도격을 내질렀다.
빛살과도 같았다. 첫 수부터 전력을 발휘한 것이다.
“신녀문주는 본 회의 징치를―!”
스윽.
문장을 맺기도 전에 출수했다. 민초들 틈에 숨어든 살수들을 구분해내기 전부터 전신에서 공력을 끊임없이 순환시키는 중이었다.
손바닥이 땅으로 향하는 순간 강대한 기파가 번져나갔다. 힘을 주어 주먹을 쥔 순간 농밀한 기운이 실선처럼 번져나가 사내를 옭아맸다.
비충을 잡는 듯한 가벼운 손짓에 막대한 힘이 담겼다.
“허억……!”
단말마처럼 흘러나온 신음을 내뱉은 사내는 압도적인 기세에 선 채로 바닥으로 내리꽂혔다.
콰아아앙―!
육신이 대못이라도 되는 듯했다. 지면에 단단히 틀어박힌 다리를 중심으로 균열이 번져나갔다.
서연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더욱 힘을 불어넣었다. 사내의 육신이 점차 지면을 깊이 파고들어갔다. 전신이 터져나가는 듯한 격통에 경련을 멈추지 못했다.
“커허…….”
얼마 견디지 못하고 고개를 떨궜다. 지면 위로 머리만 드러낸 채였다.
“어찌 사람이……!”
“모두 엎드려! 선녀께서 노하셨다!”
“호광에서 허공을 디뎠다더니……. 허언이 아니었구나.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몇 명의 사람들이 화들짝 놀라 곧장 허리를 숙였다. 살아있는 신선에게 화를 입을까 염려한 것이다.
화련에게 가시를 발라주던 당소소는 소란이 일어난 창 밖을 응시했다.
‘슬슬 잡것들이 꼬이는구나.
스승님의 위명을 생각하면 오히려 늦은 감이 있었다.
명문세가의 직계로 살아가며 비슷한 일을 자주 겪은 탓에 크게 당황하지도 않았다.
‘실로 천하를 논할 만한 장법이시다. 나중에 저것도 알려주실까.
화련은 그녀보다 한 술 더 뜨고 있었다. 이 와중에도 젓가락으로 식사를 이어나가는 눈동자가 굉장히 차분했다. 창 밖으로는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명문대파의 후계자나 보일 법한 얼굴이었다. 문파의 수장을 온전히 믿는 것이다.
‘……역시 사저시다.
나이를 불문하고 윗사람으로 모실 만했다. 스승님께서 첫째 제자로 낙점하신 이유를 알 듯했다.
그에 비하면 자신은 아직 갈 길이 멀다고 할 수 있겠다. 당소소 역시 화련을 본받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음식을 마저 먹는 것에 집중했다.
화아아악-!
하늘에서 피어오른 연꽃에서부터 세찬 아지랑이가 몰아쳤다.
“헉!”
“내공 수발력이 어찌……!”
“신녀문주는 검수라고 하지 않았더냐!”
쇄도해오던 살수들의 움직임을 제한하고, 저항조차 하지 못할 힘으로 짓눌렀다.
가공할 기교였다. 땅에 짓눌리듯 처박힌 신형이 족히 수십에 달했다.
콱!
그 와중에도 세차게 달려오는 이들이 있었다. 지붕을 한 번에 서너 개씩 넘나드는 보법을 지닌 이들이었다.
살수 중에서도 정예에 속하는 이들이었다.
서연을 철저히 배제하고 제자들의 안위를 노렸다. 천하에서 보기 드문 악적들일 것이 분명했다.
망설이지 않고 잔향을 발검했다. 이런 잡놈들을 몸 성히 살려두어서는 안 되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팽무성에게 분근착골이라도 배워 둘 것을 그랬다. 뼈마디만을 잘게 부숴 극한의 고통을 준다던가.
‘아니지.
열반을 깨달은 육체라 했다. 직접 보고 배우지 않아도 능히 깨달을 만하다고 여겼다.
지면에 처박힌 채로 끙끙대는 사내에게 시험해보았다. 서연은 무표정한 얼굴로 손을 뻗어 사내의 머리 위에 올려두었다.
곧장 진기를 퍼뜨려 사내의 근맥을 마구잡이로 헤집었다. 사내는 전류에 감전된 사람처럼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다 어느 순간 고개를 떨궜다.
‘몇 번 더 해보면 알겠다.
일순 살수들의 얼굴이 굳어가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 와중에도 비도를 꺼내 천향루를 향해 던지는 놈들을 보고 매우 큰 분노를 느꼈다.
결심을 내린 서연이 천천히 입술을 똈다.
“네놈들은.”
찰나였다.
잔향이 세차게 움직이며 허공에 무수한 실선을 그려냈다. 살수들의 신체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투두둑―!
동시에 살수들이 들고 있던 병장기와 그를 붙잡고 있던 팔이 종잇장처럼 잘려나갔다.
“뜻대로 죽지도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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