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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리스트 컷 신드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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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친 부위가 하필 목이긴 하지만, 결코 깊은 상처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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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동맥같은 큰 혈관이 베인 것도 아니라, 지혈 없이 방치하더라도 과다출혈로 이어지지 않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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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나는 [전투 치유] 스킬이 있어서, 이 정도 상처는 가만두기만 해도 금방 회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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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들갑은, 안 죽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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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한 표정으로 포션을 내미는 리즈멜의 손을 쳐냈다. 포션이라면 나도 많다, 애초에 필요도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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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즈멜도 자기가 호들갑을 떨고 있다는 자각은 어느 정도 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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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도 상처가 치명적이지 않다는 걸 모를 리 없다. 크리스탈 거미때 자가치유 능력이 있다는 걸 보여주기도 했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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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 별로 걱정한 거 아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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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도 뻔한 태도를 보이며 고개를 휙 돌리는 리즈멜. 나는 상처가 나은 것을 보여주며, 계속 이어서 하자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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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5분만에 다시 시작된 어둠 속에서의 시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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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야가 제한된 상황에서도 나는 부지런히 움직이고, 청각과 촉각을 활용해가며 인형에 맞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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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두어 번 합을 나누고 나면 꼭 한 번씩 헛손질을 했다. 직감 스킬의 보조가 있는데도 이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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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문제는 계속되는 리즈멜의 참견이었다. 내가 유효타를 허용했다 싶으면 곧장 달려와서 내 상태를 살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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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진짜 크게 다쳤잖아. 잠시 쉬었다가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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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게 다치긴 무슨, 멀쩡하니까 계속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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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가 그렇게 나는데 어디가 멀쩡하다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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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몸 쓰는 일에는 도무지 재능이 없다. 직접 구르고 깨지며 배우지 않으면 뭐 하나 제대로 익힐 수 없는 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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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리즈멜은 내가 구르거나 깨진다 싶으면, 곧장 달려와서 시험을 멈추고 내 상태를 살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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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식으로는 끝이 없다. 이래서 대체 언제쯤 성장할 수 있을지, 까마득해 짐작되질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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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포기할 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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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시야가 제한되는 것만으로 이렇게까지 고전할 줄 몰랐다. 상상도 못 해본 약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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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층의 리자드맨 주술사를 시작으로, 조금씩 마법을 사용하는 적이 나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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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내가 알기로, 흑마법이나 저주 계열 쪽의 마법에는 상대의 시야를 방해하는 수단도 수두룩하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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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그림자 마법을 다루는 이곳의 다크엘프들만 해도 그렇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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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투술과 다른 무기술을 봉인한 상태였다고 해도, 고작 인형 하나에 공격을 허용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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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게 된 이상 다른 선택지는 없다. 나는 리즈멜이 말하는 감각의 확장을 꼭 터득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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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흠, 그 정도면 처음치고는 엄청나게 잘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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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느끼고 있는 초조함이 얼굴에 드러났는지, 리즈멜이 대뜸 그렇게 말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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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이건 하루이틀만에 터득할 수 있는 재주가 아니거든. 배움이 빠른 인간족이라도 다를 건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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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이틀로 안 되면, 보통은 얼마나 걸리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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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같이 수련한다는 기준에서, 첫 단계를 넘기기까지- 길면 10년, 짧으면 반 년. 나도 반 년은 걸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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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한 단위다. 1층에서 내가 날려 먹은 시간이 반년 정도였고, 3층에서 폐관수련에 들인 시간도 그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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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자하지 못할 만큼 긴 시간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아무리 짧아도 반년일 경우는 좀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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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의 집의 유골 안치기간은 보통 처음에는 15년, 그리고 때마다 연장할 수 있는 구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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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무연고자의 경우에는 10년이라고 들었다. 임시 보관 기간이 2년씩 있다고는 하지만, 결국 1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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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졸업자들을 통해 탑 바깥과 연락을 취하고 있는 길드 쪽에 말을 전해두면, 어떻게든 늘릴 수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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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로, 꼭 몇 년 안에 나가겠다는 생각이 있는 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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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몇 년이 걸려도 나가기만 한다면 괜찮다는 생각이다. 내 목표에 시간제한 같은 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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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나는 나를 믿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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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쌓아온 노력과 힘을 믿을지언정, 내 의지와 성실함은 결코 믿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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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근본은 결국 엄마의 등골을 빼먹던 앰생 백수 새끼다. 어쩌다가 달려나가기 시작했지만, 한 번 관성을 잃으면 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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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을 마냥 귀여워하는 다크엘프에게 둘러싸여 긴 시간을 보내다 보면, 분명 나는 다시 멈춰 서고 말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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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년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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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빠르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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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즈멜은 그렇게 말하고는, 내 표정에서 무언가를 읽은 것인지 황급히 말을 덧붙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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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제법 재능도 있고, 인간족은 원래 배움이 빠르지 않으냐며, 넉넉히 일 년이면 꼭 익힐 수 있을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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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나도 비슷하게 생각한다. 이런 방식으로도 일 년쯤 되면 익힐 수 있겠지. 그럴 생각이 없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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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긋한 방식으로 일 년이 걸린다면, 과격한 방식을 쓰면 한 달 정도면 되지 않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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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즈멜과의 수련을 마치고, 다시 숙소로 돌아오니 오늘도 엘레노어가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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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오늘은 조금 빨리 돌아왔구나. 연습이 일찍 끝난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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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엘레노어의 물음에 오늘은 볼 일이 있다고 대충 대답하며, 곧바로 장비를 챙겨 나갈 준비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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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하는구나, 제대로 대꾸도 안 해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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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는 태도가 매몰차다며 서운하다는 듯 말하긴 했지만, 딱히 행선지를 묻거나 붙잡으려 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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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어도 제대로 대답해 줄 생각은 없었지만 말이다. 그러면 분명히 말리려고 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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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 커뮤니티를 열어 7층 전역의 지도를 켜고, 미리 점찍어둔 장소를 향해 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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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지는 진영 퀘스트를 수행하느라 거의 손대지 않았던 필드 보스의 출몰 지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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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받은 제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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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긴 다크엘프 진영에서 황혼 거미 토벌을 진행하는 것처럼, 왕국군 진영을 선택할 경우 와야 하는 장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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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몰하는 몬스터는 이 지역에 흘러넘치는 저주에 영향받아 이성을 상실한 인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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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처를 지나다니다 저주에 당한 산적, 왕국 병사, 기사 등이 적으로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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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이다, 적이다, 적은 죽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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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워라, 우리의 왕국을 수호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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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조리 쓸어버리자, 얘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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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없는 눈으로 무기를 빼 들고 접근하는 저주받은 인간들을 앞에 두고, 나는 단검을 뽑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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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3층에서 짧은 시간 동안 다양한 무기술을 터득할 수 있었던 것은, 스스로 위기에 뛰어들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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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화살을 몸에 찌르고, 이길 수 없을 것 같은 강력한 리자드맨에게 무모하게 덤벼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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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자신의 생존 본능을 자극해, 폭발적인 성장을 해낸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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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도, 해야 할 일은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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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촤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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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손의 단검으로 내 눈을 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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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한 그림자 마법이 없어도 이거라면 쉽게 시야를 제한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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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 으윽, 씨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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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 이상으로 고통이 크다. 뺨을 타고 흐르는 게 피인지 눈물인지 구별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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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 더해, 사방에서 다가오는 발소리에 심장이 쿵쾅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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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제대로 베었으니 포션을 마셔도 바로 회복되진 않겠지. 이걸로 이제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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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느껴보는 압도적인 위기감. 그리고 묘한 흥분에 손끝이 덜덜 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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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 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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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은 무딘 무기만 쓰는 그림자 인형이 아니다. 다쳤다고 멈춰줄 리즈멜도 이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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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을 뽑아들고, 적의 발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뛰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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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펙을 낮추고 촉각을 최대한 예민하게 느끼기 위해, 이번에는 방어구도 모두 해제하고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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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게임처럼 빤쓰만 입고 나온 건 아니지만, 방어력 면에서는 그것과 큰 차이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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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을 잃은 인간들의 무기는 저주로 인해 더욱 강화된 상태이기에, 더더욱 공격을 허용하면 안 되는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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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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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바람 소리에 의존해, 날아드는 공격을 피해냈다. 이미 내 몸에는 깊고 얕은 자상이 네다섯 개는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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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개중 치명상은 하나도 없다. 모든 공격을 피하는 건 불가능해도, 치명상에 한해서라면 어떻게든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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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적으로 추측되는 냄새나는 놈의 도끼 공격을 피해내고, 앞으로 크게 전진하며 검을 휘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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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리는 것은 목, 휘둘러지는 무기의 높이를 추측해 어깨의 위치를 계산하고, 그보다 살짝 위로 검을 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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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촤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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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을 찢고 뼈가 있는 부분까지 칼날이 닿는 감촉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제대로 목을 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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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을 베어버린 산적을 걷어차고, 다른 방향에서 덤벼드는 누군가의 창을 회피하고 반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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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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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보이지 않기에 확신할 수는 없지만, 지금 공격에는 크리티컬이 터졌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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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손맛이다. 치명상을 입힐 때의 손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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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즈멜이 알려준 오감의 활용법이 머릿속에서 쏙쏙 떠오른다. 뺨에 닿는 흙먼지의 감촉에 웃음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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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무거운 망치를 땅에 질질 끄는 소리가 들렸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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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날아온 흙먼지는 그 망치가 휘둘러지며 닿은 것. 그리고 특유의 묵직한 바람 소리, 휘두를 때의 호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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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한 타이밍에 검을 들어, 망치를 휘두르고 있을 산적의 손목 위치를 베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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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작 무기 휘두르는 소리와 발소리만으로 상황을 어림하고 있던 자신이 바보같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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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많은 감각이 주변의 상황을 읽어주고 있는데, 고작 그런 것에만 의지하고 있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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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촤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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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추정되는 적을 베어버리고 천천히 눈을 뜨자, 시야가 한결 밝아진 것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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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치유]와 아이템 효과로 눈이 회복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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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회복된 눈앞으로 푸른 인터페이스 메시지가 여럿 떠올라 있는 것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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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시브 스킬 : 감각 강화 1레벨을 습득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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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새로운 스킬이 습득되어 있었고, 직감 스킬의 레벨도 조금 올라 있었다. 해낸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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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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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실거리는 웃음이 저절로 입에서 새어나왔다. 그에 더해, 새로운 메시지가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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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이 땅의 왕이시여, 사악한 마법사의 제단을 어째서 그냥 내버려 두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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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병사도 기사도 더 이상 보내지 않으시고, 그저 주변을 봉쇄하라는 명령만 내리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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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을 지키는 망자가 그토록 두려우십니까. 이미 부패해 썩어버린 무사의 시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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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템 메시지와 함께 나타난 것은, 6층의 좀비를 연상케 하는 검을 든 시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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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SS - 그 옛날 썩어버린 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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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를 든 자세와 기백 모두 예사롭지 않으나, 나는 다시 한번 웃으며 눈을 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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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긋한 방식으로 일 년, 과격한 방식으로 한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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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내 방식으로는 반나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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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나한테는 이게 맞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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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챔피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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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벽 스킬을 발동하고 전력으로 내리꽂은 주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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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구를 쓰고 있었어도 절대 버틸 수 없었을 위력의 일격이 하이엘프 기사에게 그대로 꽂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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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상대는 7층 보스보다 강력한 엘리트 NPC다. 이 한방으로 쓰러트릴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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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 으으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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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턱이 제대로 박살난 하이엘프 기사는 쉽게 일어설 수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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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엘프들은 금방 사태를 수습하기 시작했다. 부상을 입은 기사 녀석을 재빨리 끌고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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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인간족이, 어떻게 이런, 대체 무슨 사악한 수를 쓴 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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끌려나가는 하이엘프 기사는 인지부조화를 일으키며 그렇게 지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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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칼 들고 덤벼놓고 누구한테 사악하다 뭐다 지껄이는 건지 모르겠네, 어이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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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하이엘프가 커뮤니티에서 좆좆좆좆으로 불리는 건 다 이유가 있다. 뻔뻔해서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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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 페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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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마중을 나왔던 하이엘프 왕자는 사색이 된 얼굴로 기사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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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하의 폭주에 놀란 걸까, 아니면 결투 상대인 내가 상상 이상으로 강해서 놀란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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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흠, 잠시 소란이 있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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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직된 분위기 속에서 하이엘프 한 명이 헛기침하며 상황을 정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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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그게 잠깐의 소란으로 치부할 수 있는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도 괜히 험악한 분위기를 만들고 싶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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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처음부터 무척 험악한 분위기긴 했지만, 결투 전에 서로 열을 올려서 좋을 건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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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상황을 정리하고 나서는, 지정된 결투 장소를 향해 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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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이 순환하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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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엘프 마을의 중앙에 도착하자, 맵 이동을 알리는 시스템 메시지가 표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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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이 순환하는 곳이라, 엘프들의 혼을 순환시킨다는 세계수가 있는 장소이기에 붙은 이름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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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저기 있는 앙상한 나무가 세계수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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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수라는 이름답게 크기는 거대하지만, 딱 봐도 힘을 잃고 시들어 가는 듯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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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외형과는 또 별개로, 굉장히 강대한 마력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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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힘을 잃고 시든 상태에서 이 정도면, 예전에는 대체 얼마나 강력한 마력을 품고 있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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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 인간족도 세계수의 위용은 알아보는 모양이군. 그러니 자꾸만 우리의 숲을 넘보는 것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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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수를 올려다보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자, 길안내를 하던 하이엘프가 혀를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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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그들 숲을 노리는 건 내가 아니라 왕국군 진영이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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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라고 다 싸잡아서 똑같이 생각하는게, 현실의 인종차별과 전혀 다를 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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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투 장소는 리즈멜이 사용하는 연무장의 두 배 정도 크기가 되는 공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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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쌩 공터는 아니고, 나름대로 정비되어 있는데다가 구경을 위한 좌석까지 쫙 깔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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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 일이다 보니, 많은 하이엘프들이 결투를 구경하기 위해 자리를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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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많은 엘프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이, 왕관을 쓰고 상석에 자리 잡고 있는 무표정한 엘프 남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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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도착해 있던 다크엘프의 여왕과 가까이 앉아 있는 걸 보면, 저게 현재 하이엘프의 왕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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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저나, 오래 산 엘프들은 다 저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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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엘프 여왕도 그렇고, 하이엘프 왕도 그렇고, 둘 다 무슨 오래된 고목 같은 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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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라 딱딱하게 굳은 정물을 보는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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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엘프들과 비교해도 독보적으로 오래 살았을 테니까, 저렇게 초연한 모습인 것도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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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엘레노어도 나중에는 저렇게 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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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상상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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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관인 자격으로 참여한 엘프는 많이 있지만, 공식적으로 참관인의 역할을 맡은 것은 하이엘프의 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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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된 것 같으니 진행하도록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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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투의 룰은 결투 신청을 받은 쪽이 정할 수 있다. 이번 결투는 내가 건 형식이기 때문에, 그 권리는 왕자 쪽에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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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는 이미 한번 나한테 털린 전적이 있으니, 직접 무력을 부딪치는 방식은 택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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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하게는, 엘레노어가 그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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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조금 전, 마중을 나왔던 왕자 녀석의 표정은 분노와 적의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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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놓고 나를 곤죽으로 만들어 버리고 싶다는 표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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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굴러먹다 왔는지 모를 놈이 약혼자를 걸고 결투하자고 신청한 상황이니, 이해는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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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투에서는 무기와 마법 사용이 모두 허용되며, 한쪽이 패배를 선언하거나 전투 불능 상태가 될 경우에만 종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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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내 예상대로, 하이엘프의 왕이 선언한 결투의 규칙은 단순한 일대일 승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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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당장 내 눈앞에 서 있는 왕자의 표정에는 일말의 투지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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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기랄, 제기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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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지는 커녕, 초조한 표정으로 손톱을 딱딱 갉아대고 있다. 이유는 대충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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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리트인가 뭔가 하는 기사 녀석이 나한테 턱주가리가 아작나는 모습을 봤기 때문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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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녀석이 상정하고 있던 내 전투력은 몇 주 전의 그것일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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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한 검술 실력은 형편없고, 다양한 무기를 이용한 변칙적인 전투법으로 베리트를 몰아붙이던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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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투자의 권리 행사로 핸디캡을 신청해, 무기 사용에 제한을 걸면 어떻게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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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면 하이엘프의 보물이나 뭐 그런 좋은 아이템을 두르고 싸우려고 했을지도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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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나는 그 몇 주 사이에 이전과는 어마어마한 실력 향상을 이루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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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녀석도 그걸 눈치챈 거다. 어떤 핸디캡을 내걸고 싸워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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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한 대지와 세계수의 은혜가 옳은 자의 편을 들 것이다, 두 결투자는 명예를 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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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하이엘프의 왕이 결투 시작을 선언하려 한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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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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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질끈 감은 왕자가 번쩍 손을 들어 올리며,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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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엘뤼온 프락시누스는, 결투자의 정당한 권리로서 나의 챔피언을 지목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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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는 대뜸 결투를 대신해 줄 대전사, 챔피언의 지목을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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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프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번져나갔다. 역시 예정에 없던 일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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챔피언은 결투를 치를 능력이 없거나, 너무 고귀한 신분을 가진 자가 결투를 치를 때에 부를 수 있는 대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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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엘프의 왕자이면서 걸려온 결투를 받은 입장인 이놈에게는 분명 챔피언을 부를 권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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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이렇게나 웅성거리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는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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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저런 겁쟁이를 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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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나 한심해 보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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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런 녀석이 내 약혼자라니, 한숨이 나오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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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중석에 있던 엘레노어가 푹푹 한숨을 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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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혼자를 걸고 하는 결투에서 바짝 쫄아 챔피언을 부르다니, 이렇게 한심한 경우가 어디 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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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경하러 온 하이엘프들도 이건 좀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다들 표정이 좋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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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가장 표정이 안 좋은 것은 역시 왕자 본인이었다. 이게 창피한 짓인 줄은 아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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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뜻을 대행할 챔피언은 프락시누스 기사단의 고결한 제1기사 메르세데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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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피와 수치로 얼굴이 새빨개진 왕자는 결국 챔피언의 이름을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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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이런 허접한 놈이 아니라, 제대로 된 상대와 붙어볼 수 있다면 환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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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이게 왕자의 돌발 행동이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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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세데스라는 놈이 이 자리에 있는지도 의문이고, 이걸 받아줄지도 의문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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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벅, 저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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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석에 있던 흰 정복 차림의 하이엘프 한 명이 걸어나오며, 그런 걱정은 깨끗이 날아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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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대신, 새로운 걱정이 내 안에서 샘솟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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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그러진 표정의 왕자가 물러나고 정복 차림의 엘프가 검을 뽑아 내 앞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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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대뜸 챔피언이 될 줄은 몰랐던 건지, 전투에 적합한 차림이 아니다. 굉장히 불편해 보이는 차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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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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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하의 뜻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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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의 챔피언으로 나선 메르세데스라는 기사의 머리 위에 떠 있는 콘솔의 색깔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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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도적인 레벨 차이를 의미하는 새까만 콘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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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층의 수많은 엘리트 NPC 중에서도 독보적인 스펙을 가진 규격 외의 최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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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뤼온 전하께 해를 입히고도 그냥 돌아갈 수 있었던 행운을, 너 스스로 걷어찬 꼴이 되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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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에 만났던 하이엘프 여기사가 내 앞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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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빌어먹을 시련의 탑이 나를 향한 악의를 내보인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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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층에서 대뜸 속성 공격을 하는 필드보스가 튀어나온다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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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층에서는 전사에게 치명적인 전기 배리어를 쓰는 리자드맨이 나온다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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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층에 올라오고 나서는 초입부터 보스보다 강력한 엘리트 NPC의 습격을 받는다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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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의 손길도 닿지 않은 탑을 혼자서 기어 올라가고 있는 상황이니, 대부분은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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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도 그렇다. 내가 일반적이지 않은 루트를 타고 있는 탓이라고 한다면 딱히 할 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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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반의 강제 패배 이벤트를 억지로 깨버리고, 엘레노어와의 호감도를 기반으로 에픽 퀘스트를 받은 상태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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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시발, 저 새끼는 쪽팔리지도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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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하께선 현명한 선택을 하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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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평을 담아 중얼거리자, 인상을 구기며 바로 반박해온다. 챔피언이 되어준 것도 그렇고, 충성심이 굉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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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이길 적을 상대하기 위해 최강의 아군을 부른 셈이니까, 딱히 틀린 말도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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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그렇게까지 욕하고 싶은 마음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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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투를 포기할 생각은 없어 보이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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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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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하지, 난 누구처럼 쫄보가 아니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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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이 쿵쾅거리며 짜릿한 긴장감이 전신에 감돈다. 오랜만에 느끼는 감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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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정확히 어느 정도로 강한 건지, 다른 도전자들과 비교해서 얼마나 강한 건지, 그게 궁금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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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 맞붙어 본 랭커가 하필이면 찌르기밖에 못하는 등신이었던 탓에, 객관적인 비교가 힘들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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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여기사는 짐작하기에 최길현보다 스펙도 높고, 실력도 월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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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이 녀석을 꺾는다면 나는 25층의 저층 랭커들 이상으로 강하다는 것이 확실시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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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발언, 철회하려면 지금뿐이다만- 그럴 생각도 역시 없어 보이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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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정당한 권리 행사라고 해도, 갑작스러운 결투 상대의 변경에는 당연히 합의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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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엘레노어도 저기서 뭐라뭐라 항의를 하는 듯 보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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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다음에 만나면 귀 뜯어버린다고 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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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나와 메르세데스는 어떠한 절차도 필요 없이, 서로를 쓰러트릴 것을 합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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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 적색의 마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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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색 마탑은 뭔가 바쁜 일이라도 있는지, 무척이나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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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마법사들이 분주하게 뛰어다니고, 마법을 이용해 이런저런 물건을 급하게 옮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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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생활 시절, 사단장이 방문한다던 날의 우리 부대 분위기를 연상시키는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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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로 방문 예정을 잡고 오신 건 아니죠? 마탑주은 지금 한창 바쁘실 시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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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응대하는 마법사는 바쁜 와중에도 그럭저럭 친절한 태도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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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대뜸 찾아와 마탑주를 만나게 해 달라는 우리의 부탁도 그냥 흘려넘기지 않았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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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래서 문제다. 이 마법사는 분명 에인의 모습을 수정구를 통해 마탑주에게 전송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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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히 설명하기는 힘들고, 아무튼 얼굴을 보면 바로 알 거라는 내 말을 믿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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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최근에 마탑주가 다른 사람으로 바뀐 걸까? 에올피아가 만들어 준 자료가 최신화가 안 됐었다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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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곧바로 마법사에게 마탑주가 최근에 바뀌었느냐고 물었지만, 원하던 대답을 돌아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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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요, 현 마탑주님께서는 15년 전에 취임하신 이후로 지금까지 직책을 유지하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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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5년이나 10년 정도면 모를까, 15년이라면 아예 다른 가능성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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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인의 나이는 에인 본인도 잘 모르지만, 아무리 봐도 15살 이상 먹은 것처럼 보이지는 않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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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단순히 얼굴을 못 알아볼 뿐인가? 납치당한 이후로 시간이 많이 흘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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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맹아, 너 혹시 엄마랑 떨어진 지 얼마나 됐는지 기억하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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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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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겠지, 애초에 그렇게 오래 지났을 리도 없고……젠장, 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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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혼란 속에서 머리를 긁적였다. 그리고 혹시 몰라 잘라왔던 마탑주의 사진을 꺼내어 마법사에게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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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이 지금 마탑주 맞느냐고, 돌아온 대답은 이번에도 ‘그렇다’ 는 것이었다. 그럼 에인이 착각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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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에인은 어휘와 상식이 부족할 뿐이지 기억력이 나쁜 건 절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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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 보기에도 복잡한 고위 마법진을 완벽하게 똑같이 그려낼 수 있고, 주문 언어를 암기하는 것에도 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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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혁악마님, 나 엄마 못 만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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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인이 눈을 크게 깜빡거리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눈물이 그렁그렁하다거나, 울먹이고 있는 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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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에인은 이제껏 우는 모습을 한 번도 보여준 적이 없다. 기본적으로 표정 변화가 많지 않은 꼬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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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만큼 오랫동안 같이 지내다 보면, 사소한 표정의 차이도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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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건 에인이 속상할 때 짓는 표정이다. 자주 본 표정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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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냐, 만날 수 있어. 뭔가 착오가 있었나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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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에인의 머리를 토닥이며, 잠시 고민했다. 눈앞의 마법사에겐 아직 사정을 제대로 설명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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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하다. 에올피아도 적색 마탑주에게 아이가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고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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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에인은 최소한 숨겨둔 자식이라는 의미, 대놓고 요 꼬마를 마탑주의 아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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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실례지만, 혹시 마탑주님과의 관계가 어떻게 되나요? 제가 다시 연락을 드려 볼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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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그게, 참, 뭐라고 해야 하나, 가족, 가족입니다. 저 말고 이 꼬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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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시라고요? 마탑주님의 자제분은 아닐 테고…… 들어본 적은 없지만, 혹시 친척분이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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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적당히 그렇다고 대답하며, 에인의 이름도 알려주었다. 마법사는 다시 수정구를 만지작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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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 에인의 표정이 이 이상 나빠지는 건 사양이다. 이래도 모른다고 한다면 그냥 자식이라고 밝혀 버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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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 복잡한 사정이 있어서 알아봤는데도 모르는 척하는 거라면, 최소한 언질 정도는 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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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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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구를 이용해 뭔가 통신을 하던 마법사가, 대뜸 고개를 푹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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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분은 저희 마탑에서 나가주셔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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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당혹스러운 축객령이 내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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쿵 소리를 내며, 굳게 닫혀 버린 적색 마탑의 문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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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겹의 마법으로 보안 장치가 된 문은 건드리기만 해도 약한 불씨를 튀기며 우리의 접근을 거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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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축객령이 아니라 출입을 완전히 금지당했다. 이유도 전혀 모르는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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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혁악마님, 우리 엄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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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인은 내 옷소매를 당기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도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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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이 너무 당혹스러운 나머지, 그냥 맥없이 쫓겨난 상태. 에인에게는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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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대답하지 않자, 에인은 혼자 도도도 문으로 달려가다가 불씨와 함께 튕겨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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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당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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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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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넘어진 에인을 일으켜 세웠다. 조그맣고 하얀 손에 울긋불긋한 화상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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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빨리 인벤토리에서 포션을 꺼내 상처부위에 들이부었다. 심한 상처는 아니라 금방 나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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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아파……진혁악마님, 나 왜 못 들어가? 엄마 못 만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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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야, 만날 수 있어. 아마 마탑이 많이 바빠서 그런가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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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룻밤만 자면 엄마 만날 수 있다고 했는데……소원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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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순간마다 꼭 말빨이 딸리는 나는, 그저 ‘아니야, 만날 수 있어.’ 라는 말만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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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상을 입은 에인을 번쩍 들어 올려 어깨에 앉혔다. 아무렇게나 한 말이지만 적색 마탑이 바쁜 건 정말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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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거기에 이유가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주변의 행인 중 마법사처럼 보이는 사람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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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바빠서 그런 걸 거야. 어디, 자, 저 사람한테 한 번 물어보자. 무슨 일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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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대로 저벅저벅 걸어가, 로브를 입은 남성의 앞을 막아선 뒤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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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봐요, 뭐 하나만 물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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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씨, 댁은 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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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색 마탑 말인데, 평소엔 저렇게 안 바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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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브 남자는 은근히 짜증을 내면서도, 평범하게 ‘그렇다’ 고 대답해주었다. 나는 이어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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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오늘은 뭐 때문에 저리 바쁘답니까? 우리가 여기 사람이 아니라, 왜 저러는지 모르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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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잘은 모르고……듣자하니 외부에서 대단한 마법사가 오늘인가 내일인가 방문하기로 했다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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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장이 방문하는 날 부대 같다는 인상이었는데, 아무래도 진짜 그런 상황이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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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게 에인을 모르는 체하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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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로, 나는 로브 남자에게 몇 가지를 더 물었다. 주로 적색 마탑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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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색의 마탑주는 어떤 인물인지, 어떤 연구를 하고 어떤 생활을 하는지, 있는 대로 묻고 또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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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나이에 뛰어난 마법적 재능을 바탕으로 출세한 불세출의 화염 마법사, 여러 여성 마법사들의 존경을 받는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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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탑주가 되었을 때의 나이는 무려 스물하나, 당시 역대 최연소의 마탑주로서 명성이 자자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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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밖에는 마법사답게 성격이 다소 괴팍한 면이 있었다는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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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젊은 나이에 성공한 원인인지 곁에 남자가 없었다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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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마법사는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르면, 연구는 포기하고 적당한 신분의 남자에게 들러붙는 일이 흔하다는 모양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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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색 마탑주는 그런 기미는커녕, 근처에 이성을 두는 일 자체가 거의 없었다는 이야기다. 느낌이 좋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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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에인은 대체 어디서 어떻게 얻은 자식인 걸까. 애초에 아이 아빠는 또 누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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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내 다리 뒤에 숨어있는 에인을 내려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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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혁악마님, 나 정말로 엄마 볼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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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그렇다니까. 이때쯤에 나온다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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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나 착하게 기다릴게. 엄마 보고 싶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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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브 남자에게 들은 중요한 이야기가 하나 더, 바로 적색 마탑주는 매일 일정 시간마다 마탑의 설비를 점검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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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이 직접 만든 결계 장치의 유지 보수를 위해서라는데, 그때라면 아마 마탑주를 직접 볼 수 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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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든 본인을 직접 만나서, 사정을 듣건 어쩌건 할 테다. 이번에는 조금 억지를 써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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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생각하며 가까운 벤치에 앉아 있을 때였다. 돌연 에인이 폴짝 뛰어내려 어디론가 달려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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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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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까지 써서 달리고 있는 건지, 속도가 무척이나 빨랐다. 나는 곧바로 에인을 쫓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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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멀리 적색 마탑의 입구에서 모습을 드러낸 붉은 로브의 여성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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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가 멀지만, 확실히 알아볼 수 있었다. 받아온 사진이랑 거의 똑같이 생겼다. 적색 마탑주가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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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꼬맹아. 넘어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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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마탑주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 곁에는 로브를 뒤집어쓴 적색 마탑의 마법사들이 여럿 자리 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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잽싸게 달려간 에인은 작은 몸집을 살려 다른 마법사들을 뚫고, 대번에 마탑주에게 달라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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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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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순간, 적색 마탑주의 표정이 눈 깜짝할 사이에 몇 번을 연달아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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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을 스쳐 지나간 감정은 한둘이 아니었지만, 그중에서 확실히 드러난 것은 두 가지. 당혹과 경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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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조차도 일반적인 시야로는 포착하기 힘들었겠지만, 나는 남다른 반응 속도와 [사고 가속] 덕분에 알아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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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일렁였던 감정은 금세 사라지고, 적색 마탑주의 얼굴은 다시 무표정으로 굳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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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다음 순간- 마탑주는 다시 인상을 찌푸렸고, 곧 입술 끝에서 짧은 한 마디가 튀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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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더러운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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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로브 자락 사이로 갑작스레 튀어나온 다리가 에인을 거칠게 걷어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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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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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 아이가 먼지와 함께 뒹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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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 우주에 배신당한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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털썩 소리와 함께, 발에 차여 내팽개쳐진 에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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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는 불쾌하다는 듯이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적색 마탑주와 주변의 마법사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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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는 조금씩 웅성거리고 있는 다른 시민들까지- 주변 일대의 모습을 동시에 시야에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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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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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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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역으로 전개한 마력감지에 마법사들이 반응한다. 청색 마탑에서도 광역 탐지는 금지라고 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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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탑주를 포함한 주변 마법사들의 보유한 마력을 통해 수준을 가늠해 보고, 뚜둑거리는 손을 가볍게 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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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사들은 내 스스럼없는 마법감지를 불쾌하게 받아들이고는, 차단 마법을 전개해 감지를 끊으려 시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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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니들 수준으로 내 마력을 막을 수 있을 것 같냐. 좆밥 새끼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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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마검이던 때의 칼레온을 찍어 눌렀던 것처럼, 마력의 출력을 앞세워 저급한 마법식을 짓뭉개 부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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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명이 전개한 마법을 그렇게 찍어누르니, 개중 나름의 수준 높은 마법사가 나서서 마법을 전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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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식하게 힘으로 찍어누르기 힘든 수준의 고위급 차단 마법, 곧 탐지는 끊겼지만 이미 견적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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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놈들이 대충 어느 수준인지, 가진 마력의 양은 어떻고 마법사로서의 격은 또 어떠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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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검은 아직 꺼내지 않았다. 복장이 터질 것 같지만, 지금은 진정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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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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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을 크게 내쉬자 조금 침착함이 돌아오는 것 같았다. 나는 일단 에인의 상태를 살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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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적으로 방어를 펼친 건지, 아니면 그냥 그리 세게 걷어차이지 않은 건지, 상처는 없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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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히 아파하는 것 같지도 않고, 잠시 멍하니 바닥에 주저앉아 있을 뿐이다.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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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꼬맹이가 피나 눈물 중 하나라도 흘리고 있었다면, 상황은 지금과 많이 달랐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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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맞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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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인은 평소와 같은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곤 다시 일어나 도도도 달려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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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에인을 따라 움직였다. 길을 막는 행인들이나 마법사들은 어깨로 쳐내고 밀치며 앞으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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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인은 자신을 발로 차버렸던 적색 마탑주의 앞을 가로막고는, 큰 소리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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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나야. 나 엄마 보고 싶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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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색 마탑주는 다시 한번 인상을 찌푸렸다. 으득, 이를 악무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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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주변에는 웅성거림이 퍼져 나갔다. 마탑주가 발로 차버린 어린아이가 대뜸 ‘엄마’ 같은 말을 하고 있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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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신으로 유명한 적색 마탑주에게 아이가 있었다- 그런 소문이 퍼지기에 딱 좋은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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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저기서 기다리라고 했는데, 모르는 사람들이 나 데려갔어. 나쁜 사람들이었는데 진혁악마님이 나 구해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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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을 멈춘 적색 마탑주 앞에서, 에인은 평소보다 빠른 목소리와 몸짓으로 그동안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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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봐, 나도 이제 엄마처럼 마법 할 수 있어. 이거 진혁악마님이 만들어 준 건데, 여기 그림은 엄마 그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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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인은 자신의 완드에 새겨진 그림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마법사의 문장 옆에 직접 그려넣은 알아보기 힘든 그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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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나 안 보고 싶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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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색 마탑주는 차가운 눈으로 에인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조금 전에 지었던 것과 같은 표정으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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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잘못 본 모양이구나, 애야. 나는 네 엄마가 아니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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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투는 상냥했지만, 목소리에 담긴 감정은 분명한 경멸과 혐오를 나타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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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닌데, 엄마 맞는데……왜 아니라고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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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인은 그렇게 말하며 마탑주를 향해 손을 뻗었다. 마탑주는 옷자락을 펄럭이며 그 손을 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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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러운 손으로 어딜 만지려고…나는 너 같은 자식 둔 적 없어, 별 거지 같은 것이 달라붙어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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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순간, 마탑주의 손에서 작은 화염이 치솟았고, 뱀의 혀처럼 움직이는 화염은 에인을 향해 닥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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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두고 볼 수 있는 건 거기까지였다. 나는 곧바로 에인을 내 뒤로 잡아당기며 화염을 막아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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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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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에 열이 오른 채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건 알지만, 이젠 상관하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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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화염 내성] 레벨은 18층 수준에서는 가히 절대적이라고 칭해도 모자람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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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마탑주가 쏘아낸 화염을 막아낸 팔뚝이 화끈거린다. 마탑주급에게는 당연하다면 당연한 위력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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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에, 결코 어린아이에게 가볍게 쏘아내도 되는 화력이 아니다. 에인은 이 불꽃을 막아낼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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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모르겠지만, 만약 막지 못했다면 분명 전신이 불타고 말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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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 마탑주는 딱히 에인이 방어 마법을 쓸 수 있다고 생각하진 않았을 거다. 죽일 심산이었던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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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마탑주의 혐오에 찬 말을 들으면서도, 혹시나 모를 가능성을 생각해 마지막까지 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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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다소 과격한 방법을 써서라도, 에인과의 관계를 부정해야만 하는 중요한 이유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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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명백히 살의가 느껴지는 불꽃을 쏘아낸 이상, 그따위 사정은 아무래도 상관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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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어도 그게 에인을 위한 사정은 아니었을 게 분명하니까. 그렇다면 더 볼 것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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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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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탑주는 맨 팔뚝으로 불꽃을 막아낸 나를 보며, 작게 인상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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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알아볼 리가 없지, 조금 전에도 대놓고 광역 탐지를 전개했었고- 애초에 수정구로 연락을 받았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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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색 마탑주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녀석은 품 안에서 완드를 만지작거리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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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꼬마의 보호자인가, 타죽기 싫으면 그 더러운 것 데리고 눈앞에서 사라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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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탑주의 방대한 마력이 내 주변을 압박해왔다. 보통이라면 숨쉬기도 버거워할 강력한 압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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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내겐 가소로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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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 죽기 싫으면 꺼지라고? 나를 태워 죽이는 게 과연 가능할 것 같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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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조용히 검과 방패를 꺼냈다. 마탑주도 전투태세를 갖추는 나를 보며 마력을 끌어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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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동시에 내 마력감지에 무언가 걸렸다. 두 사람 간에 주고받은 마법적 통신, 전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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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확실히 처리했다며, 이것들은 다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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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죄송합니다, 곧장 조치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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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됐어, 이렇게 된 김에 내가 직접 손쓸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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엿듣는 것은 가능했지만, 누가 누구에게 말하고 있는 것까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짐작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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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마탑주와 그 부하 마법사중 하나겠지. 청색 마탑주처럼 전속 비서 같은 게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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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한 건 천천히 물어보면 된다. 대답할 수밖에 없는 상태로 만들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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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가 검을 휘두르며 앞으로 나가기 직전- 조그만 그림자가 나를 막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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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혁악마님,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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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 머리의 꼬마, 에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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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색 마탑주를 그냥 돌려보내고, 가까운 벤치에 앉아 얕게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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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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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인은 내가 전투태세를 갖추는 것을 보자마자, 재빨리 나를 막아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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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랑 싸우지 말라고, 소원이라고 말하면서. 엄마를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이 꼬마에겐 당연한 일이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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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내 잘못이다. 에인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고, 내 독단으로 ‘엄마’를 베어버리려 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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옳고 그름을 떠나, 아이 앞에서 해도 되는 행동은 분명 아니었다. 머리에 너무 열이 오른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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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인은 벤치에 앉아 한동안 말이 없었다. 짧은 다리를 파닥거리며 고개를 푹 숙이고 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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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트 엘프의 비술을 이럴 때 쓸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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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혁악마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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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에인이 마침내 고개를 들어 올리며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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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내가 싫은가 봐, 안 보고 싶었나 봐……나는 엄마가 제일 좋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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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이 아니었다. 한참을 혼자 생각한 끝에 결론을 내린 것이었다. 드문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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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나도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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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탑주의 자식이 혈사교에게 그렇게 허무하게 납치됐다는 사실부터 이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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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인이 상식이라곤 전혀 모른다는 점도, 내가 끓인 잡탕죽 따위를 맛있다고 좋아했던 것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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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성별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고, 엄마가 ‘에인’이라고 부르는 게 편하다고 했던 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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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기다려’라는 말에 순순히 기다리다가 그대로 납치를 당한 것도- 돌이켜 보면, 하나같이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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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 상상이 너무 불쾌하고 기분 나빠서, 나도 모르게 외면하고 있었던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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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나는 에인에게 나 자신을 겹쳐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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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한 처지, 비슷한 마음. 어쩌면 결말마저도 나와 비슷할지도 모른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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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나를 원하지 않는다.’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런 일만은 제발 아니었으면 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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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컥 치밀어 오르는 뜨거운 감정을 겨우 삼키며, 에인의 머리 위에 조심스레 손을 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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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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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고른다. 조심스럽게.하지만 내 서툰 말재주로는 에인을 위로할 수 없다. 말뿐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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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맹이 네가 잘 몰라서 그래, 어른들은 항상 바쁘고 사정이 많거든. 그냥 조금 오해가 있는 것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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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 머리칼을 마구 헝클어트리며, 벤치에서 일어나 인벤토리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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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원 들어주기로 했잖아, 조금만 기다려봐. 금방 가서 오해를 풀고 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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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레온을 꺼내 상급 마법석을 끼우고, 검령을 불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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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네 스승님이랑 같이 숙소에 가 있어. 어디인지 기억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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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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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현자가 되겠다는 녀석이 이런 걸로 기죽으면 안 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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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검령에게 꼬마를 잘 지키라고 단단히 신신당부했다. 검령은 보기보다 에인을 꽤 아끼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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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급 마법석까지 끼워줬으니, 18층의 평균 수준을 생각해보면 차고 넘칠 만큼 강력한 경호원이 되어 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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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에인을 숙소로 돌려보내고, 나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홀로 적색 마탑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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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를 풀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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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심각한 오해를 한 모양이니, 오해를 푸는 과정도 좀 심각할 수 있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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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악마가 소원을 이뤄주는 방법으로는 딱 맞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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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 마탑 붕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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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색 마탑의 문은 여전히 맹렬한 화염으로 감싸여, 굳게 닫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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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세상에 진정한 의미로 닫힌 문은 없다. 아직 안 열린 문만 있을 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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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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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러를 두른 발길질로 걷어찬 문짝이 고속으로 날아가, 마탑 안쪽의 벽에 부딪히며 조각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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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탑 로비에 있던 마법사들은 저마다 다른 반응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이목이 끌리는 건 나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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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살짝 나아진 감이 있지만, 나는 기본적으로 말재주도 사회성도 무척 나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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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탑주 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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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번에는 짧게 말하고, 검과 방패에 마력을 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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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뜻을 이보다 분명하게 전달할 방법은 없으리라. 안 나오면 쳐들어갈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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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탑의 마법사들은 여전히 상황 파악을 제대로 못 한 상태였다. 사람이 칼 들고 쳐들어왔는데 반응하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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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요, 뭐 하는 분이신지 모르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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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브를 쓴 남자 마법사 하나가 내게 다가와 어깨에 손을 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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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남자의 손을 떨쳐내고, 왼손에 든 방패를 남자의 배에 힘껏 꽂아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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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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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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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마법사는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곧바로 쓰러졌다. 이어서 [위압] 스킬을 전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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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하는 분이신지 모르겠다고, 그럼 이젠 알겠네. 내가 뭐 하러 온 새끼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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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트닝 차지]와 [대전]을 발동해 무기와 전신에 전격을 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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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직거리는 번개가 튀기 시작하자, 마법사들의 얼굴에 당황이 어린다. 나는 다시 한번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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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탑주 나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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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말로만 떠드는 것도, 마법사들이 얌전하게 구는 것도, 모두 거기까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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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먼저 움직인 것은 벽에 몸을 기댄 채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스태프를 든 여자 마법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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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나는 다르다’ 라는 분위기를 물씬 풍기고 있던 마법사의 곁에서 붉은 마법진이 연달아 소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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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에 들어서며 예민하게 날이 선 감각과 마력감지는 그 마법진이 무엇을 토해내려는지 정확하게 눈치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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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직 미사일과 유사한 화염 속성의 기초 공격 마법, 사용된 마력의 양과 형태를 보면 연발식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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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마법진이 불길을 토해내는 것보다, 내가 그 마법사의 지척까지 접근하는 것이 훨씬 빨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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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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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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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가지 버프 스킬을 사용한 내 움직임을, 책상물림만 하던 마법사 따위가 쫓을 수 있을 리가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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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번에 도약하며 마법사의 명치에 무릎을 꽂아 주자, 얇은 얼음이 깨지는 듯한 감각과 함께 마법사가 혼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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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방어 마법을 하나 두르고 있던 것 같은데, 너무 약해서 무슨 수를 쓸 것도 없이 박살 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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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해, 저거 막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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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이 전투태세를 갖춘 마법사들이 소리쳤다. 그런 말을 할 시간에 주문이라도 외웠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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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 파이어 애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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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영창과 함께 불화살이 쏘아졌다. 대충 손등으로 쳐내고 가까운 마법사의 턱을 후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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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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턱 관절이 가볍게 박살 나며 픽 쓰러진다. 내가 생각해 뒀던 마법사를 무력화하는 가장 빠른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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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은 입으로 외우는 것, 죽통을 박살 내 놓으면 무영창이 불가능한 마법사는 즉시 무력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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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이이이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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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탑 안에 돌연 큰 경보음이 울려 퍼진다. 동시에 마탑에 장치되어 있던 여러 마법이 발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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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야 마탑 전체의 비상 상황이라는 생각이 든 모양이다. 마탑주도 상황을 눈치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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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어나와라, 마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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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색 마탑이 통째로 무너지는 꼴을 보고 싶지 않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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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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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사와의 전투 경험은 몇 번 있었지만, 이렇게나 많은 마법사를 상대하는 건 처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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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상관없다. 원래 다수를 상대로 한 섬멸전이야말로 솔플러인 나의 주력 분야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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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멀리서 완드를 들고 있던 마법사 다섯 명이 거대한 마법진을 그리며, 화염을 쏘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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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수의 마법사가 힘을 합쳐 전개하는 고화력 마법, 다만 마법진의 형태는 조금 전에 다른 놈이 쓰는 걸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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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발하는 화염의 탄환을 공중에 형성한 뒤, 다섯 차례에 걸쳐 축차로 분사하는 화염의 산탄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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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광! 쾅! 콰과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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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제의 불꽃놀이처럼 눈앞을 향해 닥쳐오는 형형색색의 불길을- 무시하고 그냥 전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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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염 내성]은 내가 가장 먼저 얻은 내성 스킬 중 하나, 그걸 뚫으려면 다섯이 아니라 오십 명은 힘을 합쳤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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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 히익! 왜, 왜 이것도 안통하는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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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탈을 부리듯 소리치는 마법사의 얼굴을 벽에 처박아 버리고, 검을 휘둘러 나머지 네 명의 아래턱을 베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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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영창이 가능한 마법사 하나가 저항하고자 화염의 사슬을 소환했지만, 사슬은 일 초 만에 부서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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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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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의 마법사를 제압한 뒤에는, 다른 마법을 캐스팅하고 있는 놈들부터 우선으로 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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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벤토리에서 꺼낸 쇠구슬을 투척하는 것만으로, 순식간에 마법사의 숫자가 우수수 줄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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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비백산에 빠진 몇몇 마법사들은 아예 등을 보이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굳이 그들까지 쫓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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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딱히 적색 마탑을 박살 내러 온 게 아니다. 마탑주를 불러내기 위해 이러고 있을 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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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어떻게, 분명 마탑의 ‘옥염 결계’가 몸을 짓누르고 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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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완드를 들고 전투중인 마법사 하나가 그런 소리를 했다. 뭔가 방해 효과를 가진 마법이 전개되고 있던 모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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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보니 [민첩] 스탯이 살짝……정말 살짝 낮아져 있었다. 효과가 너무 약해서 눈치도 못 채고 있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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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건방진 놈, 행패는 거기까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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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의기양양한 웃음을 지으며 마탑에 어울리지 않는 모습을 한 떡대 하나가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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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색으로 칠해진 갑옷을 입고, 손에는 거대한 메이스를 들고 있다. 키만 해도 거의 2m는 되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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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핏 보기에는 그냥 중갑 전사지만, 메이스는 제대로 화염으로 불타고 있고- 갑옷에는 마법진이 떠올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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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호라, 가끔 있다고 들었지. 마법을 이용해 근접에서 전투하는 배틀메이지 타입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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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맛을 보여주지…플레임 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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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갑의 배틀메이지는 불타는 메이스를 봉처럼 빙빙 돌려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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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랄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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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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놈은 그대로 오러를 두른 내 주먹에 맞아, 메이스와 갑옷이 한번에 박살 나며 뻗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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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따위로 눈앞에서 폼잡고 있으면, 그냥 샌드백 하겠다는 의미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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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전부터 계속 방해받고 있지만, 어떻게든 탐지를 펼쳐 보니 이걸로 1층은 거의 전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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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는 채로 다음 층으로 올라갔다. 그곳에는 또 폼 잡고 있는 남자 마법사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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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까지다, 침입자. 내가 있는 한 마탑주님께는 손가락 하나 못 댈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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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장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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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없으니까 댈 수 있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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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슬리는 마법사를 창 밖으로 던져버리고, 지나는 길에 있는 어중이떠중이들은 [라이트닝 차지]로 기절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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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이 낮은 마법사들은 숲에서 만났던 몬스터들만도 못해서, [대전]을 켜고 스치는 것만으로 쓰러트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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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계단을 조금 올라가고 나니, 돌연 거대한 마력의 덩어리가 감지에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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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이이이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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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감각]으로 강화된 청력에 들리는 엔진이 돌아가는 듯한 소음, 그리고 느껴지는 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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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공의 마력이 일제히 누군가의 통제 아래 들어가, 거대한 마법을 짜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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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같은 마력 조작과 운용이 가능한 것은 당연히 마탑주 하나뿐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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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저 마법이 만들어지고 있는 방향으로 도약한다면 단번에 마탑주를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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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문제는 그렇게 한다면 저 마법이 나를 정면으로 덮칠 것이라는 점- 별로 대단한 문제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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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후, 완성된 마법진이 토해내는 화염은 커다란 뱀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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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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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스킬로 스탯을 증폭시키며, 그 거대한 뱀을 향해 정면으로 뛰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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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꽃의 뱀은 화염 마법의 최고 전문가인 적색의 마탑주가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 일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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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아무런 피해도 없을 수는 없었다. 전체적으로 무시할 수 없을 만큼 불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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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몸이 아니라, 옷과 갑옷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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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벤토리에서 다른 갑옷을 꺼내 장착하고, 적색 마탑주의 앞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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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탑주는 인상을 굳게 찌푸린 채, 주변에 화염 속성의 마법진을 수십 개나 전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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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사는 자신의 공방에서 더욱 강해진다. 하지만 저 숫자의 마법진은 좀 이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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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력감지로 전말을 파악해 보니, 마탑주는 적색 마탑의 온갖 설비를 자신만을 위해 사용하고 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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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조금 전에 그 녀석이지. 목적이…뭐야. 왜 나를 찾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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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탑주는 긴장한 표정으로 그렇게 물었다. 깽판을 친 보람이 있군, 대화를 나누기에 적합한 태도가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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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목적은 단순하다. 마탑주에게서 에인에 대한 솔직한 이야기를 듣는 것, 그리고 가능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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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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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 둔 것은 있지만, 아직 그것을 입 밖으로 낼 차례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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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딱히 마탑주를 죽이러 온 건 아니다. 적색 마탑을 무너트리려고 온 것도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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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를 협상 테이블에 앉힐 수만 있다면, 굳이 이 이상 폭력을 행사할 이유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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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하나만 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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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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빡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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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대만 맞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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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이고 지랄이고, 일단 저 씨발년의 면상에 한 대 꽂아 주지 않고서는 분이 안 풀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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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인을 걷어찬 값으로, 너도 일단 딱 한 대만 맞고- 이야기는 그다음에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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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나 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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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 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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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미 한 번 마탑주급의 마법사와 싸워본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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액체금속의 자유로운 조작을 무기로 삼는 청색 마탑주, 쉽게 이기긴 했지만 마냥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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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는 에인을 지키기 위해 일부러 공격을 맞아 준 거긴 했지만, 한 방 한 방이 무시 못할 위력을 품고 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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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청색 마탑주와 눈앞의 적색 마탑주를 비교해보면 어느 쪽이 더 강할까- 길게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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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이 쪽이 훨씬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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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사로서의 기량만 놓고 보자면 동등하다고 생각되지만, 보유한 마력량에서 차이가 크게 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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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림잡아 두 배 이상, 거기에 마탑의 설비가 공급해주는 양까지 포함하면 열 배는 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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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마탑주라는 자리를 마법 대결로 정하는 것도 아닐 테니까. 전투능력의 차이가 커도 이상하지는 않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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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헛소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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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한 대만 맞으라는 내 말에 인상을 찌푸리며, 마탑주는 수십 개의 마법진을 작동시켜 선제공격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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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순간, 눈앞을 가득 메우는 불꽃의 파도. 이건 못 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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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탑주의 공격속도가 빠르고 어쩌고가 문제가 아니라, 그냥 범위가 개지랄맞게 넓어서 못 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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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르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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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냥 안 피했다. 방패를 앞세우고 오히려 불길에 뛰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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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묘하게도 불길은 벽처럼 물리적인 저항력을 가지고 내 몸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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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려눕혔던 마법사 중 몇 명이 비슷한 마법을 사용했었다. 중량을 가진 단단한 불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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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로 나를 탑 바깥까지 밀어낼 셈인가 본데, 그러기에 이 정도로는 좀 부족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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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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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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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방패를 쥔 손에 힘을 넣으며 그대로 밀고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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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불꽃의 파도가 반대로 밀려 나간다. 하지만 마탑주는 당황하지 않고 이어서 다른 마법을 전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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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안쪽이 묘하게 따끔거렸다. 공기를 들이마시며 화염이 안으로 들어온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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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뭔가 호흡하기가 어색한데……이것 봐라, 산소가 아예 없어졌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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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의 불꽃은 기본적으로 마나를 연소시켜 만드는 것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일부러 산소를 태운 거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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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염의 벽으로 나를 밀어내면서, 동시에 질식을 유도할 생각이었던 것 같다. 확실히 이건 꽤 유효한 공격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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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위가 넓어 피할 방법이 없으면서, 강력한 물리력으로 몸을 밀어내는 화염의 파도에 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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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소를 태워버려 호흡도 곤란하게 만들고, 목구멍으로 침투하는 불길로 몸 안쪽을 함께 태워버리는 트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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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광! 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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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에 이어서 날아오는 고밀도 화염의 탄환까지, 한 번에 수를 아낌없이 털어서 싸우는 타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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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 청색 마탑주에게 마법사간의 전투에 대해서 물은 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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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마탑주는 ‘마법사간의 전투는 체스와 같다’ 라고 비유하며 설명을 늘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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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그냥 체스가 아니라, 눈과 귀를 모두 가리고 진행하는 블라인드 체스 같은 것이라 말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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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에게 어떤 기물이 남아 있는지도 모르고, 어떤 수를 뒀는지도 모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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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의 차례인지도 모르고, 사소한 반칙을 잡아낼 방법도 없이, 더듬더듬 진행하는 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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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는 입장에서는 그게 맞는 비유인가 싶었는데, 적색 마탑주의 전투방식을 보다 보니 이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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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향해 날아드는 수많은 마법은, 체스로 치면 주요 기물을 모조리 쏟아부어 펼치는 공세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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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계산과 심리전을 엮어 펼치는, 한정된 공간 안에서의 예술적인 두뇌 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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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건 마법사간의 싸움이 아니다. 마탑주는 체스를 두고 있지만, 나는 그럴 생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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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력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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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르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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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몸에서 분출된 맹렬한 마력에 의해, 화염의 탄환은 튕겨 나가고 불꽃의 파도는 갈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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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탑주가 퀸, 나이트, 비숍, 룩을 모두 동원해 포진을 펼치는 것이 가능하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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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폰 10마리를 제물로 바쳐 체크메이트의 거신병을 소환해, 체스판을 둘로 쪼개는 게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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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거롭게 머리를 굴리고 수 싸움을 펼칠 필요가 없는, 압도적인 힘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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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벅, 저벅, 저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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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염의 파도를 뚫고 천천히 다가간다. 마탑주는 사색이 된 채로 나를 마냥 올려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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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전력으로 후려치면 마탑주는 분명히 죽겠지. 그러니까, 마력강화는 다시 풀고- 아이템도 장착을 해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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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벽]이나 [혼신] 같은 버프 스킬도 해제하고, [약점 간파] 등의 스킬도 발동하지 않게 제어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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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력도 오러도 두르지 않고, 그저 순수한 육체의 힘만을 주먹에 담아 휘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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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나, 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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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꽈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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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으깨지는 소리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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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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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한 대만 맞자고 했지만, 정말로 한 대만으로 끝낼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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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으로 흩날린 불꽃, 부서진 벽과 금이 간 바닥, 그리고 이따금 튀어 있는 핏자국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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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득하게 ‘오해’를 푼 흔적이었다. 그 참혹한 한가운데에서, 마탑주는 숨을 헐떡이며 입술을 달싹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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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역시… 불공평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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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탑주의 눈은 초점을 잃은 채로 텅 비어 있었고, 목소리는 마치 자기 자신에게 말하듯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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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왜 나만… 왜 나한테만… 이런 괴물들이 몰려오는 건데. 대체…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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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탑주의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뭘 그렇게까지 억울해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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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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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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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마탑주의 어깨를 짓밟았다. 뼈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목 안쪽에 걸려 있던 질문들이 하나씩 터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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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에인의 부모가 맞지? 그 애랑 무슨 관계야. 그리고 왜 그 애를 모르는 척한 거지- 당장 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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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탑주는 내 물음에 실로 격하게 반응했다. 돌연 미친 듯이 웃고, 울다가, 불길을 토해 내듯 말을 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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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내가 낳았어. 내가 낳았지만……왜 내가 그 더러운 것의 부모여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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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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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낳고 싶어서 낳은 것도 아니고, 배고 싶어서 밴 것도 아니야, 내 피가 섞인 것도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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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해서 바뀌어 가던 마탑주의 표정은 이내 조소로 끝맺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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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치광이 노인네가 내 뱃속에 쑤셔 넣은 악마의 잡종……그걸 왜 내 자식이라 불러야 하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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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탑주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로브 자락을 풀어헤치고, 그 밑의 셔츠를 뜯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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훤히 드러난 아랫배에 새겨진 칼자국과, 옅은 마력이 느껴지는 검은 자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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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자국에서는 호문쿨루스와 [심연의 파편]에서 느낄 수 있었던, 불길한 마력이 새어나오고 있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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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자국 밑에는 칼로 새긴 듯한 숫자가 적혀 있었다. 마탑주는 그것을 소리내어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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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템이 제공하는 번역 기능이 멋대로 의역한 탓에, 알아들을 수 없었던 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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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인(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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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겨진 숫자는 ‘1’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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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더러운 잡종을 부르는 호칭은 이거면 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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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마녀는 담담한 조소와 함께, 자신에게 있었던 비극을 읊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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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몇 년 전이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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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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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몇 년 전이었더라, 나는 시골에서 갓 상경한 어린 마법사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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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이름을 남길 대마법사가 되겠다는 포부는 있었지만, 그만한 능력은 없었던 멍청하고 우둔한 마녀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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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사실 능력의 유무는 중요하지 않았어. 그때나 지금이나, 여자 마법사는 늘 편견의 대상이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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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을 배우는 여자는, 적당히 출세해서 좋은 집안에 시집가려는 생각밖에 안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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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탑에서 한 자리를 꿰차고 있는 마법사라도, 여자라는 이유로 언제나 그런 말과 시선을 받고 사는 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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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물며 능력도 부족하고 멍청하기까지 한 촌뜨기 마녀에겐 어땠을까. 받아주는 마탑이 있을 리 없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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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다란 꿈을 안고 상경했지만,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방황하던 나에게- 그 남자가 다가와 말을 걸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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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야, 내 밑에서 마법을 배워 보지 않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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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는 많았지만, 어딘가 묘하게 매력적인 남자 마법사였지. 지성이 가득 담긴 짙은 회색 눈이, 어쩜 그렇게 멋져 보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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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겉모습만 매력적인 게 아니었어. 그는 전 대륙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실력의 마법사이기도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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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런 사람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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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눈앞에서 펼쳐 보인 마법에, 나는 단숨에 시선을 빼앗겼어. 그토록 아름답고 압도적인 마법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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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그때 나는- 시골 아이들이 나를 보고 ‘마법사’라며 외치던 때의 반짝이던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는지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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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곧바로 그가 누구인지 알아보았어. 마법의 길을 걷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그의 이야기를 들어봤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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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백개의 마법을 개발하고, 수십 개의 일화를 남기고, 몇 개의 전설을 써낸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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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낙에 두문불출하는 탓에 실존 여부마저 의심받고는 하던 신비의 마법사가, 내 눈앞에 나타나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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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뜨기에 불과하던 나의 재능을 알아봐 주고, 먼저 제자로 들어오지 않겠냐고 제안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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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에 대한 욕심만큼은 누구보다 컸던 어린 마녀가, 그 제안을 어떻게 거절할 수 있었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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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의 유혹이었던 거지, 말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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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잘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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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우물쭈물하면서도 건네진 손을 잡았고, 그렇게 나는 그 사람의 제자가 되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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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색 마탑, 백색 마탑, 갈색 마탑의 마탑주를 모두 겸하고 있는 마법 학회의 최고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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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정마법사 대부분의 스승이자, 주문 언어학자이자, 아케인 칼리지의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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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에 전 대륙을 떠도는 방랑 마법사라고도 알려진 살아 있는 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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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버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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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의 실험체가 되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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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 악마의 이름을 부르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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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손을 뻗던 그 순간부터, 남자는 이미 마법의 정점에 도달해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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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의 말을 빌리자면- ‘인간’이라는 종족이 ‘개체’로서 도달할 수 있는 한계의 문턱에 닿아 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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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는 어떤 마법사와도 비견되지 않는 신적인 능력을 갖추고 있음에도, 더욱 높은 영역으로 나아가기를 원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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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벌인 모든 실험은 결국 인간이라는 종족과 그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에 목적이 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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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내게 가해진 첫 번째 실험은 마력 회로의 이식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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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보유할 수 있는 마력 회로의 최대 숫자는 총 220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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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중 활성화된 회로의 숫자는 개인마다 차이가 있지만, 무슨 짓을 해도 그 이상으로 늘릴 수는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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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는 타인의 마력 회로를 추출해 이식하는 것으로, 보다 많은 회로를 보유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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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내 몸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마력 회로가 심어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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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을 찢고, 뼈를 깎는 고통을 견디며, 나는 몇 번이고 그의 실험대 위에 누워야 했어. 도망칠 방법은 없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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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험은 절반의 성공으로 끝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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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로의 추출과 이식은 모두 성공했지만, 그가 원하던 대로 220획 이상의 회로를 보유할 수는 없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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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인간들의 회로에서 우수한 부분만을 추출해 이식하여, 실험체의 마법적 능력을 향상하는 건 가능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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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태어날 때부터 완벽에 가까운 마력 회로를 지니고 있었던 그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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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그는 실망한 기색 하나 없이, 곧바로 다음 단계의 실험에 착수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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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후로 한동안 큰 실험에 동원되는 일은 없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훗날을 위한 준비 기간에 지나지 않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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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어느 날, 그는 내 앞에 뿔이 달린 알몸의 여자를 데려다 놓고는, 상기된 표정으로 설명을 늘어놓기 시작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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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귀여운 내 제자야. 혹시 ‘마족’이라는 걸 들어본 적 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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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계라 불리는 다른 세계에서 탄생하는 악마를 닮은 종족, 태어나는 순간부터 마법을 타고 나는 강대한 종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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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그동안 마족의 마력 회로를 인간에게 이식하는 실험을 하고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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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결과는 언제나 실패. 이질적인 회로는 인간의 몸이 감당할 수 없는 격렬한 거부 반응을 일으켰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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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 역겨운 남자는 끔찍한 상상력으로 해법을 찾아내고야 말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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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마족과 교접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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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과 마족의 피를 섞은 잡종을 만들어, 그 회로를 추출해 자신에게 이식하기로 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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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실험은 또다시 예상 밖의 장벽에 부딪혔지. 마족의 몸으로는 인간의 자식을 제대로 품을 수 없었던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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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 차례나 수정을 성공시켰지만, 마족의 면역 체계가 성장한 태아를 ‘이물질’로 인식하고 파괴해버렸다고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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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노욕과 광기에 물든 마법사는, 간단한 물건을 좀 빌리자는 듯이 가볍게 말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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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말인데, 네 배를 좀 빌려줄 수 있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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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직도 밤마다 그날의 꿈을 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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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를 겪어본 적도 없었던 내 몸에, 기괴한 마도구들이 들이닥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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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떠올리기도 끔찍한 몇 시간의 고통 끝에, 내 아랫배에는 불길한 마법진과 숫자가 새겨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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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 속을 파고들어 자리를 틀어버린 그 역겨운 생물은, 종양처럼 내 몸에서 영양분을 빨아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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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강제로 주입된 마력과 영양 덕분에 나는 죽지도 못한 채, 그 추악한 것이 자라나는 감각을 고스란히 느껴야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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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열 달이 흘렀고, 마침내 그것을 토해낼 시간이 다가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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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겪은 출산의 고통은, 생각보다 크지 않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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넣어질 때의 고통이, 빼내질 때보다 훨씬 더 지독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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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난 악마의 잡종은 아비를 똑 닮은 회색 머리칼과 눈동자를 지니고 있었어. 어미의 것과 같은 꼬리나 뿔은 없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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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을 열 달 동안 배 속에 품고 있던 나는 알 수 있었지. 그것이 분명히, 제대로 악마의 힘을 계승했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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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기뻐하며 아이를 안아 들었고, 곧이어 복잡하게 얽힌 거대한 마법진을 그리더니 알 수 없는 의식을 시작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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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은 분명했지. 아이의 마력 회로를 추출해, 자기 자신에게 이식하기 위한 마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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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마법이 실패하길 간절히 바랐지만, 남자의 천재성은 그마저도 아무렇지 않게 성공시켜 버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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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가 아이에게서 가장 먼저 빼앗은 건- 마력 회로의 중심이자, 마력을 생성하는 기관인 마나 하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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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한계에 닿아 있던 마법사가, 괴물의 영역에 닿아- 태산 같은 마력을 손에 넣는 순간이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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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나는, 그가 마나 하트를 손에 넣는 찰나의 틈을 노려- 혼신의 각오로 아이를 빼앗아 도망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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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가 그 이상의 힘을 손에 넣는다면, 세상에 어떤 끔찍한 일이 벌어질지는 불을 보듯 뻔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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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친 나는 가장 먼저 얼굴과 이름을 바꿨어. 그리고 그 남자의 영향력이 덜 미치는 마탑을 찾아, 조용히 소속되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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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히 도망치는 것만으로는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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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겐 ‘세력’과 ‘확실한 신분’이 필요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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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오래 걸리지 않아서, 나는 곧 적색 마탑주의 자리에 올랐지. 믿기 어려울 만큼 간단하게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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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이식된 마력 회로, 그 남자의 곁에서 훔쳐 배운 마법- 그에게서 도망치는 게 고작이었던 힘이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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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마법사들과 비교해 보면, 나는 이미 대마법사의 경지에 올라 있었던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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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에 그리던 출세를 이룬 셈이지만, 기뻐할 수는 없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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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언젠가 그 남자에게 발각될 날을 두려워하며, 마지막에 본 그 복잡한 마법진을 홀로 연구하기 시작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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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마력 회로를 빼앗는 마법. 그걸 손에 넣기만 한다면, 더는 그 남자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을 거라고 믿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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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그 더러운 회색 아이의 마력 회로를 내가 빼앗아서, 그 힘으로 그에게 맞설 생각이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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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그 마법을 내가 완전히 구현하는 건 불가능했고- 점점 더 견디기는 힘들어져만 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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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꼬마만 없으면 완벽히 정체를 숨기고 ‘적색의 마탑주’로 살아갈 수 있을 거라는 생각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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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역겨운 꼬마가 나를 ‘엄마’라고 부르기 시작했다는 사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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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과 바닥을 불태우고 있던 화염이 차례차례 빛을 잃으며, 느릿하게 꺼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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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에인을 혈사교에게 팔아넘겼다……그런 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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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색 마탑주는 흐릿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만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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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사정이 있을 거라는 생각은 했다. 하지만 그게 뭐든 간에, 에인을 죽이려고 한 시점에서 용서하지 않을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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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마탑주의 입에서 흘러나온 이야기는 내 생각 이상으로 처절하고, 무겁게 공기를 짓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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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아, 이제 속이 후련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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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탑주는 비웃음과 함께 반문했다. 그럴 리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던진 물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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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버워크, 그냥 18층의 설정상으로 존재하는 세계관 최강자 정도로 생각하고 있던 마법사가- 모든 일의 근원이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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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픽 퀘스트에 실로 어울리는 배경이다. 세계수를 삼키려 들었던 하이엘프의 왕에 필적하는 악역이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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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나는 에인이 엄마와 함께 행복하게 잘 살기만을 바랐다. 에픽 퀘스트의 전말 따위는 알 바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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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나는 마탑주를 협박해 적당한 거짓말을 시켜- 에인을 청색 마탑주 아래로 입양을 보내게 할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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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 수 없이 떨어져야 한다는 말로, 될 수 있으면 에인이 상처받지 않게 ‘엄마’와 헤어질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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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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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래서는 뭘 어째야 하는지 모르겠다. 머리가 너무 복잡하다. 젠장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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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다 운명이었던거야. 내가 그 남자의 손을 잡은 날부터…이렇게 될 운명이었던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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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를 감싸 쥐고 있는 나를 향해, 적색 마탑주는 쓰게 웃으며 손을 펼쳐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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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혈사교 놈들에게 팔려간 그 꼬마가, 어디선가 이런 괴물을 끌고 돌아올 줄은 정말 몰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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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문득 한 가지 의문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적색 마탑주는 왜 에인을 혈사교에 팔아넘긴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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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인과의 연결고리를 끊고 싶은 거라면, 본인 손으로 확실하게 죽이는 게 나았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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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사교의 제물이 되어서 고통받다 죽기를 원해서? 그게 아니면, 그럴 리는 없겠지만, 자신의 손으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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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도 하필이면, 그 남자가 오기로 한 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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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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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탑주가 내뱉은 말에 이어지던 생각이 뚝 끊어졌다. 무척이나 분주해 보였던 적색 마탑의 모습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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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누가 말해 줬지. 어딘가에서 굉장한 마법사가 적색 마탑을 방문하기로 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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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마탑주의 이야기에 나온 재버워크였다면, 그놈이 오늘 이곳에 오기로 한 거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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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였다. [초감각] 스킬의 경고와 함께 어디선가 검 한 자루가 날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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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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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마어마한 속도로 날아온 검은 내 앞에 있던, 적색 마탑주의 가슴을 꿰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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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하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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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세 가지 이유로 경악했다. 어디선가 날아온 검이 마탑주에게 치명상을 입혔다는 사실이 첫 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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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탑주의 가슴을 꿰뚫은 검이 다름 아닌, 불길한 마력이 담긴 칼레온이었다는 사실이 두 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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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령이 사라지고 칼레온이 여기 날아왔다는 것은, 에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의미라는 사실이 세 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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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씨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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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길함을 감지한 순간, 눈앞에는 시스템 인터페이스가 제멋대로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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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픽 - 회색 아이와 마법의 서 : 퀘스트 목표가 갱신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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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 불편한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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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픽 : 회색 아이와 마법의 서 - 납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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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 : 당신이 잠시 눈을 뗀 사이, 불쌍한 아이가 못된 마법사에게 납치당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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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납치범이 남긴 흔적을 통해 범인을 유추하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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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인의 정체는 대륙 역사에 길이길이 남을 전설적인 마법사, 재버워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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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초월적인 경지에 오른 마법사로부터, 아이를 구해내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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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스트 목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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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이를 구조하기(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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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재버워크를 토벌하기(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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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색 마탑주의 심장에 칼레온이 박힌 모습을 보자마자, 직감처럼 떠오른 사실이 퀘스트 창에 새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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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스트 목표엔 아무런 필수 조건이 없었다. 퀘스트를 수행할지 말지는 전적으로 나의 선택이라는 의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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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면, 애초에 포기를 전제로 설계된 퀘스트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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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어먹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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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인터페이스를 닫고, 눈앞의 마탑주부터 살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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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에 검이 깊숙이 박혀 들어갔지만, 숨은 아직 끊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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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술 사이로 숱한 욕설을 뱉어내며, 인벤토리에서 되는대로 포션을 꺼내 들었다. 뭐든 효과가 있기를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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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였다. 마탑주의 심장에 박힌 칼레온에서 불길한 마력이 피어오르더니, 눈앞에 환영이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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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제대로 들리고 있나? 이 마법은 오랜만이라 자신이 없군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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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끗희끗한 머리를 올백으로 넘긴 노인의 모습이 나타났다. 머리는 백발이었지만, 눈동자만큼은 또렷한 회색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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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여기서 그 외의 누가 나올 수 있겠는가. 재버워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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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상황은 짐작하고 있겠지. 우리 아이가 그동안 신세를 많이 졌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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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된 입장으로서 더 이상 민폐를 끼치기도 뭐해서, 조금 급하게 아이를 데려가기로 했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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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인사도 없이 나타나 아이만 데려가는 건 실례일 테니, 서로 얼굴이나 한번 볼까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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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만나고 싶다면, 검에 새긴 좌표로 혼자 오게. 자네를 위한 만찬을 준비해 두고 기다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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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영은 그 일방적인 통보와 함께 툭 끊겼다. 칼레온의 검신엔 룬으로 새겨진 좌표가 또렷이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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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목적이 무엇이든, 노골적으로 나를 유인하고 있다. 포션을 쥔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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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하하……하하하, 결국, 이렇게 되는 거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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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적색 마탑주가 피를 머금은 입술을 겨우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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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 집어넣어… 차라리 이게 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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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감각] 스킬이 아니었다면, 들을 수조차 없었을 미세한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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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똑똑히, 기억해, 이건 다 네 탓이야. 그러니까 네가 책임지고… 죽여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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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의미인지 처음엔 이해할 수 없었다. 재버워크를 죽이라는 말인가 했지만, 뒤이어 나온 말이 이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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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못했어… 태어난 것에게 죄는 없단 걸 알면서도…나는 그걸 사랑할 수도, 죽일 수도 없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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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탑주의 입에서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이미 몸도 가누지 못하면서, 마탑주는 기어코 내 멱살을 붙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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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네가 해야 해…책임지고 죽여… 그 남자의 손에 들어간 이상…그게 가장 편한 길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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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탑주의 손이 천천히 흘러내렸다. 마력감지에 잡히던 생명반응이 뚝 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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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색 마탑주가 숨을 거두었다. 멱살을 잡혔던 옷깃에서 미처 닦아내지 못한 피가 천천히 스며들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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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란스럽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흐름에 머리가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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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버워크의 목적은 무엇이며, 마탑주의 마음과 생각은 어떠했는지, 당장은 무엇하나 이해하기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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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한 가지만은 확실했다- 내가 어떤 새끼를 죽여야 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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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딱 기다려라 씨발 새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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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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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색 마탑주의 시신을 수습해주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그럴 시간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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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누가 봐도 내가 그를 죽인 것처럼 보일 상황이었다. 상황이 꼬이기 전에 물러나는 게 상책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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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색 마탑의 마법사들에게 맡기면 알아서 수습할 테고, 그편이 훨씬 더 깔끔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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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우선 정비를 위해 숙소로 향했다. 에인과 함께 쓰던 방은 뜻밖에 깔끔한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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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하나, 눈에 띄게 달라진 점이 있었다면……침대가 깔끔하게 두 동강 나 있다는 사실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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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령 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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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레온에 마법석을 장착해 검령을 소환하고, 에인이 납치되던 때의 상황을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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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습이었다. 막아내지 못하고 몸이 그대로 절단되었지. 열선을 발사하는 형태의 마법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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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령이 아는 건 거기까지였다. 갑작스럽게 텔레포트로 나타난 재버워크가 정확히 한 번의 공격으로 끝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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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검령이 허무하게 뒈지는 건 처음 있는 일이 아니었지만, 상급 마법석을 써서 소환했는데도 딱 한 방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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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버워크가 격이 다르게 강하다는 건 이제 의심할 여지가 없다. 어차피 지금까지 나온 정보들도 그렇게 말하고 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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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사의 경지에 도달한 적색 마탑주조차, 그의 틈을 노려 겨우 도망칠 수 있었을 뿐이라 말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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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버워크에게서 도망치는 것이 전부였던 힘으로도, 마탑주의 자리를 얻는 것은 손쉬웠다고도 말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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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름상 이번 에픽 퀘스트의 보스 격으로 보이는데, 9층에서 상대했던 월드 보스를 기준으로 생각해야 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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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어먹을, 그때는 아군이라도 있었지만……이번에는 인질까지 잡힌 상태로 일대일을 하게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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놈의 목적이 무엇이냐에 따라서 상황은 달라지겠지만, 싸우게 됐을 때의 승산은 얼마나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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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에 내가 불러내면 바로 칼질할 준비 하고 있어. 그놈이랑 싸우러 갈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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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렇게 일러두고 검령을 역소환했다. 그리고 칼레온에 각인된 룬 문자를 손으로 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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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되먹은 마법인지, 접촉하는 것만으로 머릿속에 좌표의 정보가 알아서 흘러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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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를 읽어내며 오픈 커뮤니티를 열어, 빠르게 정보를 수배하는 글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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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18층 NPC 재버워크 관련 정보 전부 제보받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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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버워크에 대해 얻을 수 있는 정보를 모두 알려달라고, 이번에도 집단지성의 힘을 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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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보받은 정보와 검색을 통해 얻은 내용을 있는 대로 머리에 쑤셔 박으며, 빠르게 걸음을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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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문하는 곳은 목적지로 향하는 길에 있는 모든 상점, 잡화건 무기점이건 상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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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벤토리에 넣을 수 있는 판정의 아이템을 구분하지 않고 모조리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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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템을 흩뿌려 공간을 난잡하게 하는, 7층 결투 때의 전술을 선택지로 마련해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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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족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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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 준비를 더해도 도통 안심이 되질 않는다. 뭔가 다른 수단이 더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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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뜩이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미니맵을 펼치고 근처의 마탑을 모조리 체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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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색 마탑에서 지내며 알게 된 건데, 대부분의 마탑에는 다양한 마법 아이템과 설비가 구비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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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비를 유지하기 위한 마법석도 대량으로 있고, 전투에 써먹을 만한 아이템도 분명 있을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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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평판이나 서브 퀘스트 탓에 이런 일은 꼭 손해로 돌아오기 마련이지만…… 지금은 긴급 상황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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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버워크를 내버려 두면 이 18층 세계 전체가 잘못될 가능성도 있으니, 이건 필요에 의한 징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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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길에 있는 모든 마탑의 창고를 깡그리 털어서, 아이템을 챙겨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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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버워크가 마탑주 자리를 겸하고 있는 세 마탑을 포함해, 총 여섯 곳의 마탑을 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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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 재버워크에 대한 정보도 꽤 많이 수집했고, 전투에 쓸만한 아이템도 여럿 빌려 오는 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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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색 마탑과 흑색 마탑의 지부에는 마탑의 일 년 치 연구 예산에 상당하는 금화를 주고 하루 동안 대여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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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색 마탑, 백색 마탑, 갈색 마탑, 자색 마탑에서는 무력과 공갈을 내세워 반 억지로 갈취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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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하게 재버워크와 무관한 자색 마탑의 마탑주가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엉엉 울긴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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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다 쓰레기 같은 환각 마법밖에 못 다루는 약소 마탑 주제에, 무척 과분한 아이템을 가지고 있었던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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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전투 중에 파괴되지만 않으면 제대로 깨끗하게 쓰고 돌려줄 생각이다. 나는 강도가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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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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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준비를 마친 후, 재버워크가 지정한 장소에 시간을 맞추어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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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층 전역 지도의 왼쪽 끝 부분에 표시된 대륙의 끝자락- 항구에서 배를 타야 도달할 수 있는 망망대해 한복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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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곳에는 어마어마한 마력으로 떠받쳐져 낮게 활공하고 있는 섬이 있었다. 터무니없는 장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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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을 통해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섬인지, 아니면 마법으로 섬 일부를 잘라서 띄운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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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쪽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딴 짓거리를 한 마법사가 얼마나 강할지 생각하면 숨이 절로 막힐 지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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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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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구에서 빌렸던 뗏목을 부수며 힘차게 도약해, 섬 위로 단번에 올라탔다. 섬의 전경은 아주 기상천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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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로 만들어진 숲이라고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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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롯이 마법 연구를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 보이는- 미궁 지역보다 더욱 살풍경한 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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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섬 전체에서 느껴지는 불길한 마력, 나는 또 한 가지 사실을 확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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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층 미궁 지역은 어느 마법사의 연구실이었지만, 사악한 무언가에 영향받아 호문쿨루스의 터가 되었다고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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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악한 무언가의 정체는 재버워크가 틀림없다. 왜 에인이 [심연의 파편]에 관심을 뒀는지 알 것 같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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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물학적 아버지의 마력에 본능적으로 반응한 것이겠지. 불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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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심을 날카롭게 곤두세우며 주변을 살피던 중, 허공에 마법진 하나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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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진은 거대한 성문처럼 천천히 열렸고, 그 안에서 한 남자가 걸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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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오게나, 기다리고 있었다네. 그대가 ‘진혁악마님’이 틀림없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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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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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곧바로 남자의 머리를 도끼로 쪼개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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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 재버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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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무장으로서 항상 갖추고 다니는 손도끼와 단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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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중 지근거리에서 더 파괴적인 위력을 발휘하는 것은 도끼 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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팍, 하고 허공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도끼날이 남자의 정수리를 찍었다. 단순하고 위력적인 직선으로의 공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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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과는 확실했다. 단단한 것을 가르는 특유의 손맛과 함께, 재버워크의 머리통은 쪼개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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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에 데미지를 입히고도 남을 만한 깊이까지 도끼날이 박혔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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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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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끼날을 통해 파직거리는 번개가 안쪽으로 침입한다. 머리 안쪽까지 전기구이로 만들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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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도 멈추지 않는다. 언제 어떤 수단으로 회복할지 모른다. [혼신] 스킬을 발동시키며 추가타를 잇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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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목에 힘을 욱여넣고 오러를 둘러, 이미 반쯤 쪼개진 머리를 더욱 깊이 쪼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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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끼날은 이미 미간까지 침입했다. 그대로 손목을 천천히 뒤로 당겨, 자연스럽게 손도끼를 빼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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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낸 도끼를 이번에는 수평 방향으로 휘두른다. 오러를 두른 날로 목을 단번에 그어, 절반가량을 절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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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으로 들어가 왼쪽으로 빠져나온 도끼를 손안에서 빙글 회전시켜, 다시금 공격의 방향을 바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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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를 낮춤과 동시에 노리는 것은 몸통의 왼편, 주요 장기를 보호하고 있는 갈비짝을 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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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콱! 콱! 콱! 콱! 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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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번. 날이 들어가는 방향을 정확하게 잡고, 가슴 근처 시작해 허리 부근까지 내려가며 한 번씩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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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는 박아넣은 도끼를 빼지 않은 상태로 놓아버리고, 낮은 자세에서 몸을 크게 회전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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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로 인벤토리에서 장검을 꺼내, 오러를 두르고 두 허벅지를 뼈째로 절단해 끊어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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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모자라다. 머리통과 주요 내장을 다져 놓았지만- 아직 심장을 뭉개놓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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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가 잘려 뒤로 넘어가는 재버워크의 상체에 달려들어, 인벤토리에서 꺼낸 메이스를 휘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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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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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이 있는 가슴 부근을 일격으로 으깨버렸다. 이어서 [라이트닝 차지]와 [대전]까지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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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직거리는 번개의 마력이 쏟아져 남아 있는 상체의 다른 부위를 노릇하게 구워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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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질을 잡고 있는 테러범을 상대로 취할 수 있는 가장 빠르고 효과적인 대응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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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개짓거리를 펼치기 전에, 확실하게 사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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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박으로 테이블에 오른 상대와는 협상하지 않는 것이 상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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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야 원, 인사 정도는 얌전히 들어주면 덧나는 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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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전에 들었던 것과 같은 목소리가 저 너머에서 들렸다. 그 자리에는 상처 하나 없는 재버워크가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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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발밑에서 으깨진 이건……환영이나 분신 같은 건 아니다. 제대로 산산조각이 난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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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스러진 시체에서 흘러나오는 묘한 마력, 묘하게 익숙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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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문쿨루스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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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일세. 눈썰미가 좋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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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본인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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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이렇게 싱겁게 끝날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검과 방패를 들어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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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버워크의 머리 위에는 NPC의 적대를 의미하는 콘솔이 떠올라 있었다. 색깔은 칠흑에 더없이 가까운 적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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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층에서 메르세데스의 머리 위에 떠올라 있던 것과 비슷한 색이다. 그때보다 살짝 적은 정도의 격차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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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식으로 인사하지, 내가 바로 ‘재버워크’라고 불리는 하찮은 마법사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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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게 성장했건만, 아직도 이만큼 차이가 나는 NPC가 존재한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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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빌어먹을 탑은 난이도 설정이 너무 잘못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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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버워크의 외견을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말쑥한 노년의 신사- 그렇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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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의 나이에도 꾸준히 몸을 단련한 것인지, 꼿꼿한 허리와 넓은 어깨는 정장을 멋들어지게 소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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깔끔하게 정리해 넘긴 희끗희끗한 백발에서는 연륜이 느껴지고, 회색 눈동자에선 묘한 깊이가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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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손에는 자신의 키보다 조금 짧은 스태프를 들고 있다. 고풍스럽게 조각된 나무 재질의 촛대 같은 디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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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특이한 점으로, 그 끝에 유리로 만든 큼직한 정육면체가 둥둥 떠 있다는 점이다. 마법석이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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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런 신사 같은 이미지를 완전히 박살 내는 점이 하나, 바로 놈에게서 넘실거리는 마력의 기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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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 너무 뚫어져라 보지 말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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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궁 지역의 호문쿨루스에게서 느껴졌던 그 불길한 마력이 은은하게 연기처럼 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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흘러나오는 마력의 양 자체는 지극히 적다. [마력 지배]가 아니었다면 존재를 눈치채기도 힘들었을 정도의 소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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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마법사에게서도 저것보다는 많은 양의 마력이 흘러나오고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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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건 재버워크가 보유하고 있는 마력량이 적기 때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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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이 오줌보가 새는 게 뭘 보기 좋다고 그렇게 관찰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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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마력을 완벽에 가깝게 통제하고 있다. [마력 지배]를 가진 나도 저런 수준의 통제는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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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만큼의 마력을 갖고 있는지 견적을 내기가 힘들다. 하지만 조금만 집중해서 들여다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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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보인 모양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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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기지도 않는다. 완벽하게 파악한 건 결코 아니겠지만……저게 대체 어떻게 되먹은 마력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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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라는 종족의 한계를 초월하고, 한 개체로서의 한계를 초월하기 위해 연구를 한다고 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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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는 성공한 모양이다. 또라이같이 많은 마력통이 종족 특성인 마족들 사이에서도 저만한 마력을 가진 놈은 하나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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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아니라 자연경관이 옷을 입고 걸어 다니는 걸 보고 있는 것 같다. 원근감이 이상해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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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은 안으로 들어오게, 함정 같은 건 없으니까 걱정하지 말고……자네를 위한 만찬을 준비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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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버워크는 검과 방패를 들고 적의를 뿌리는 나를 신경도 쓰지 않는지, 그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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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기습이 대역 호문쿨루스를 처치한 걸로 끝났으니, 서두른다고 될 상황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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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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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버워크의 발밑으로 화려한 레드카펫이 깔렸다. 나는 입술을 씹으며 길을 따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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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풍경한 인공섬의 한가운데에 있는, 더욱 살풍경한 분위기의 저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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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택 안쪽도 섬 바깥과 크게 다를 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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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의 효율만을 중시한 듯한 금속 투성이의 저택, 나는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마력감지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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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해 마법을 쓸 거라고 생각했는데, 재버워크는 뜻밖에 순순히 내가 감지를 돌리게 놔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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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아무리 탐색해도 에인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어딘가에 감춰 둔 건지, 아니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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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앉아서 뭐라도 좀 들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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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버워크가 손뼉을 짝짝 치자, 순식간에 눈앞에 거대한 테이블과 산해진미가 차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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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라면 오는 길에 화이트롤을 있는 대로 씹어 삼켜 둔 참이다. 이딴 자식이 주는 음식을 먹을 이유도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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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에 뭔가 독 같은 걸 넣어 뒀을 수도……아니, 그쪽은 상관없지. 오히려 좀 먹는 시늉을 하는 게 낫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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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얼굴을 찌푸린 채 자리에 앉아, 눈앞에 놓인 빵 한 조각을 살짝 떼어 입에 넣고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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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맹이는 어디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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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버워크는 내 질문에 미소를 지으며 허공을 향해 가볍게 손짓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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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뚜벅뚜벅 다가오는 발소리와 함께, 두 마리의 목각인형이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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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품에는 에인이 안겨 있었고, 잠들어 있는 듯 보였다. 살아 있구나. 우선은 안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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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력회로는 이미 추출된 걸까, 아니면 인질로 쓰기 위해 붙잡아둔 걸까. 손이 근질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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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네. 아이에게는 손 하나 대지 않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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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을 나보고 믿으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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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인데 어쩌겠나. 나는 이제 이 아이에게 별다른 흥미가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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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버워크는 자리에서 일어나, 인형의 품에 안겨 있는 에인의 뺨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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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피를 이은 반마족의 마력 회로를 이식한다……그 발상을 처음 떠올린 게 몇 년 전이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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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버워크의 말은 끔찍한 사실을 암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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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이만큼 완벽한 작품은 없었지만, 마력 회로의 개선을 이루기에는 충분했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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놈은 이미 지난 몇 년 동안 같은 짓을 반복한 끝에, 목적을 이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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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에게 흥미가 아예 없었던 건 아니야. 다만, 그보다 더 흥미로운 게 생겼을 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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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버워크는 그렇게 말하며,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는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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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는 내가 아이의 기억을 엿보면서 얼마나 놀랐는지 모를 테지, 이계에서 넘어온 초인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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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힘과 마력, 나조차도 원리를 알 수 없는 공간 마법, 보자마자 이거다 싶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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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경지에 올라서고 나서야 간신히 시야에 들어온 하늘 너머, 마법의 성위에 도달하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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놈은 황홀한 표정을 지은 채 나불나불 알아듣지 못할 소리를 씨부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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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인의 기억을 엿보자 눈에 들어왔던, 원리를 알 수 없는 공간 마법이라- 인벤토리를 말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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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PC가 시스템을 온전히 인식할 수 있는 경우는 매우 드무니, 내 몸에 관심을 가진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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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환 조건일세, 아이는 상처 하나 없이 넘겨줄 테니…자네는 내게 와 줘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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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각인형이 내게 다가와 품에 안겨 있는 에인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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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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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교환 조건인지 뭔지는 처음부터 성립될 수 없었다. 뭐, 아이는 상처 하나 없이 넘겨주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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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의 품에 안긴 에인의 뺨에는, 옅은 눈물 자국이 말라붙어 있었다. 지랄하고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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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이 있어도 울음만큼은 보이지 않던 이 꼬맹이가, 어쩌다가 그렇게 울었을까- 잘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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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엄마를 가장 사랑하는 순진한 아이는, 이미 넘칠 만큼 상처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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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핏자국도 못 남기고 뒤질 줄 알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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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가를 치를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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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 검과 마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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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색 마탑에서 대여해 온 최상급 마도구, 그림자 전송기 가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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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바닥만 한 큐브 형태의 이 마도구는, 지정한 대상을 결계로 감싸 그림자 공간에 격리시키는 기능을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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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위험물질을 안전하게 운송하기 위한 용도로 만들어졌지만, 나는 이걸 에인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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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드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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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큐브는 순식간에 수백 개의 조각으로 나뉘어, 목각 인형의 팔에 안겨 있던 에인을 향해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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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에인의 몸이 검은 조각들에 의해 감싸였고, 조각들은 이내 다시 하나의 작은 큐브 형태로 응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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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리가 완료된 큐브가 내 손안에 돌아왔다. 나는 정해진 순서대로 조작한 큐브를 저택 바깥으로 힘껏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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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색 마탑에서 직접 새겨 넣은 리콜 룬에 의해, 큐브는 스스로 목적지인 흑색 마탑까지 이동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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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착하면 자동으로 배출 기능이 작동할 테고, 그다음은 두둑한 금화를 받은 마법사들이 에인을 안전하게 지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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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판 모르는 놈들에게 꼬맹이를 맡기는 건 아무래도 찜찜하지만…… 지금 상황에선 이게 최선의 선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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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음, 분명 아이는 상처 하나 없이 넘겨준다고 했는데……사람을 좀 믿어보는 게 어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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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버워크는 아쉬운 듯 말했지만, 정작 올라간 입꼬리는 그다지 아쉬워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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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좋을 대로 해보게나. 처음부터 순순히 넘어와 줄 거라곤 기대하지도 않았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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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을 깊게 들이쉬며 전신에 마력을 흘려보낸다. 필요한 스킬들을 연달아 활성화한 뒤, 단숨에 앞으로 돌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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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앞에 차려진 산해진미의 식탁이 길을 가로막고 있었지만, 내 돌진 앞에서는 스티로폼보다 못한 장애물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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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 따윈 눈 깜짝할 사이에 좁힐 수 있었지만, 이미 재버워크도 전투태세를 갖춘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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놈은 내 쪽으로 검지손가락을 뻗으며, 특유의 불쾌한 마력을 뿜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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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직 미사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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놈이 사용한 마법은 지극히 평범한 기초 공격 마법인 매직 미사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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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초감각]스킬로 강화된 내 기감은 그것을 예사롭지 않은 위협이라 인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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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각 [도약] 스킬을 발동, 땅을 박차고 단번에 공중으로 솟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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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쾅! 콰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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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발밑을 스쳐 지나간 마법의 탄환이, 살풍경한 저택의 벽을 그대로 뚫고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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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버워크는 공중으로 뛰어오른 나를 눈으로 좇으며, 태연하게 손짓해 허공에 마법진을 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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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전에 사용한 것과 똑같은 매직 미사일, 하지만 마법진의 숫자가 예사롭지 않은- 아니, 비정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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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직 미사일은 워낙 단순하고 배우기 쉬운 마법이라, 전투 마법사들 사이에선 종종 내기의 주제가 되곤 한다고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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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더 멀리까지 쏘는가, 누가 한 번에 더 많이 쏘는가- 다중 캐스팅은 전투 마법사에게는 필수적인 기술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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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은 12발까지 쏴 봤다는 청색 마탑주의 말에 따르면, 현재까지 알려진 최고 기록은 전전대 백색 마탑주가 세운 18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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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지금 재버워크가 소환한 마법진의 수는, 얼핏 보아도 50개는 훌쩍 넘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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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두두두두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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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지금 고정 포대 진지에 정면으로 돌격하고 있는 거였나- 그런 착각을 하게 만드는 화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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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더 이상 잴 것 없이 마력강화를 발동하고, 미친 듯이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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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강! 캉! 카강! 카가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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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를 써서 벨 필요는 없다. 탄속이 빠르니 오러를 두르고 궤적에 검을 갖다 대기만 해도 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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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상당히 성장한 [사고 가속]을 발동하면, 빛살처럼 날아드는 마법의 탄환도 굼벵이처럼 느릿하게 눈에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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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날아드는 탄환 자체가 워낙에 많은 탓에, 모든 탄을 베어내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그렇기에 키운 [내구] 스탯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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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방한방이 전차의 주포를 연상시키는 파괴력을 내는 탄환이라도, 내 내성과 내구 스탯 앞에서는 기세가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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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십 개가 넘는 마법진에서 연달아 쏘아지는 매직 미사일을 쳐내고 받아내며, 마침내 거리를 좁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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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거리가 좁아진 순간, 재버워크는 아무렇지 않게 다음 마법을 펼쳐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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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어 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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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직 미사일과 마찬가지로 화염 계열의 가장 기초적인 공격 마법인 파이어 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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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순식간에 닥쳐오는 화염구에서 느껴지는 열기는 적색 마탑주의 최대 화력에 버금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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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스스로 거리를 벌리면 다시 좁히기는 어마어마하게 어렵겠지. 그렇다면 그냥 맞아주고 찌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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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 좋게도 마침 화염 속성을 골라주었지 않나, 마력강화까지 켰으니 이 정도는 별문제 없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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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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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거리에서 터진 충격파로 속이 뒤흔들렸지만, 불길을 뚫고 검을 내지르-려고 한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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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유를 생각하는 것보다 빠르게, 검을 놓고 왼편으로 몸을 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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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이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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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런 전조 없이 쏘아진 푸른 광선이 대지를 갈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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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함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초라한 한 줄기의 푸른 광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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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것이 긁고 지나간 대지는 극지방의 크레바스처럼 어마어마한 깊이까지 갈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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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한 박자 늦게 광선이 지나간 자리에서 푸른 마력의 충격파가 솟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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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구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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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령을 한 방에 처치했다는 열선이 바로 이거구나. 피한다고 피했는데 팔을 살짝 긁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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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팔에 묶어 뒀던 방패는 깨끗하게 절단되었고, 광선이 잠깐 스쳐 지나간 팔뚝은 지글거리는 화상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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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감각] 스킬로도 감지가 한 박자 늦었다. 시전 동작도 전조도 전혀 없는 주제에, 위력이 말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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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갖 내성을 떡칠하고 [강철의 혼]의 보정까지 받는 내 몸에 스친 것만으로 이런 상처를 남긴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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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18층 도전자는 일렬로 세워서 이거 한 번 긁어주면 백 명은 넘게 뒈지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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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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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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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뚝의 상처를 살피면서 동시에 휘두른 검은 허공을 갈랐다. 재버워크는 이미 텔레포트로 거리를 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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놈의 등 뒤에는 마력으로 이루어진 두 개의 구체가 둥둥 떠 있었다. 저게 그 ‘오브’ 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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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작성한 마법진을 구체 내부에 저장해 두고, 원하는 순간에 출력하는 구조의 캐스팅 보조 마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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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하군, 그걸 정면에서 피한 사람은 처음 봤지 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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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버워크는 그렇게 말하며 등 뒤에 띄운 오브를 통해 한 번 더 광선을 쏘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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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이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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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빨리 몸을 낮춰 피하자, 등 뒤의 구조물들이 광선이 지나간 궤적대로 정확히 잘려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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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궤적을 따라 다시 한번 마력 폭발이 일어나며, 일대가 그대로 초토화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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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은 독립적으로 캐스팅 마법을 사용하며 전투를 펼치고, 동시에 오브를 통해 즉발 마법을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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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뮤니티와 마탑을 통해 수집한 정보와 대체로 일치한다. 저 오브야말로 놈의 진짜 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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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기로는 다섯 개의 오브를 동시에 전개하고, 각각의 오브가 다른 마법을 사용한다고 들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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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는 후속으로 충격파를 발생시키는 저 마법 광선이고, 다른 하나는 아마도 방금 사용한 단거리 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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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사급 공격기와 순간이동, 둘 다 아무런 준비동작 없이 뻥뻥 써대도 괜찮은 수준의 마법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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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나한테도 무기는 있다. 각각의 마탑에서 빌려 온 최상급의 마도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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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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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색 마탑에서 강탈해 온 마도구, 창조의 궤를 가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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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벤토리에서 튀어나온 거대한 비석이 지면에 꽂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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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력을 불어넣자 가동을 시작한 창조의 궤는 내가 선언한 ‘27번’ 프리셋에 맞추어 지형을 변형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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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비석의 이름은 창조의 궤, 갈색 마탑의 마법사들이 20년의 대규모 연구 끝에 완성해 낸 최고 걸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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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과는 단순하다. 장착된 마법석과 충전된 마력을 소모해, 주변의 지형을 원하는 대로 주무르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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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모할 재료만 충분하다면 불과 몇 분 만에 작은 도시 하나를 만들어 낼 수도 있는 어마어마한 마도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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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구구구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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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식간에 대지가 갈라지고 솟아오르며, 재버워크의 저택과 그 주변을 완전히 갈아엎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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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이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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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버워크가 쏘아낸 마법 광선이 창조의 궤를 반으로 쪼개버렸지만, 이미 궤는 역할을 다한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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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어진 지형은 높은 벽과 천장으로 사방이 막힌 평지, 놈과 맞서 싸우기에 가장 최적화된 지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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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광선의 위력을 보고 직감했다. 엄폐물이고 지랄이고 저거 한 방이면 다 잘려나갈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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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차라리 이런 널따란 투기장을 만들어 놓고 싸우는 게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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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과 천장은 섬의 지반을 이용해 매우 두껍게 형성했으니, 단거리 전이로 빠져나갈 수도 없을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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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다란 짐승 우리 같군, 자네에게 잘 어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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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죽거리는 재버워크, 나는 곧바로 놈의 웃는 면상을 박살 내 주기 위해 과감한 선택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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녀석은 나를 꽤 얕보고 있다. 아직 오브를 두 개밖에 꺼내지 않았다는 것이 그 증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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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놈은 내 몸 자체에 관심이 있으니, 가능한 한 생포 쪽으로 가닥을 잡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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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인의 기억을 엿보았다고 했으니, 그걸로 내 힘을 어림해 보고 충분히 가능할 거라고 생각한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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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에인에게도 보여주지 않은 기술이 아직 남아 있다. 무척 최근에 터득한 기술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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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이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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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러 서클을 전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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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 파훼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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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전사와 마법사의 싸움은 대개 속도의 차이로 승패가 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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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력 면에서는 마법사가 대체로 우월하지만, 강력한 화력을 위해서는 그만한 캐스팅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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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사는 마법사가 화력을 투사하는 데 필요한 캐스팅 시간보다 더 빨리 접근할 수만 있다면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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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사는 전사가 접근하기 전에 캐스팅을 마치고 공격에 나설 수 있다면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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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재버워크는 이 기본적인 전투 양상을 완전히 무시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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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스팅 속도 자체도 빠르지만, 오브로 시전하는 즉발 마법이 완벽하게 빈틈을 메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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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을 즉발하는 상대로 마법을 쓰기 전에 접근한다니, 말도 안 되는 이야기 같지만- 나라면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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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브 마법은 ‘즉발’이지 ‘자동’이 아니니까. 재버워크가 아예 반응하지 못할 수준까지 속도를 내면 되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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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걸 위해 필요한 것은 버프를 넘어선 도핑, 연비와 반동 문제로 봉인하고 있던 오러 서클을 사용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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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이이이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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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팔과 양다리에 각각 하나씩, 복제 호문쿨루스 때의 네 배인 네 개의 서클을 동시 전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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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색 마탑주의 말에 따르면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마력회로의 숫자는 220개가 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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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오러 서클은 체외에 형성하는 마력회로와 같다. 즉, 인간의 한계를 억지로 넘어선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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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신체에는 어마어마한 부하가 걸린다. 검령도 내게 짧은 시간만 발동해 공격력을 증폭시키라고 조언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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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런 어중간한 방법으로는 재버워크를 이길 수 없다. 나는 서클을 모두 마력강화의 증폭에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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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르르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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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페이스에 나타나는 스탯이 이전에 본 적 없는 수준까지 상승한 것을 보며, 나는 땅을 박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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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의 발구름만으로 전신이 삐걱거리지만, 그에 따른 속도는 음속을 가볍게 돌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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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버워크가 눈을 깜빡이는 아주 짧은 순간, 나는 이미 그의 앞에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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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과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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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 들어간 참격, 하지만 소리도 손맛도 이상했다. 놈의 몸에 얇은 배리어가 펼쳐져 있던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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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방금 일격으로 완전히 파괴되었다. 오러가 뿜어내는 공격력은 재버워크 수준의 마법사에게도 감당 불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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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순간, 재버워크는 다시 한번 전이를 사용해 멀찍이 떨어졌지만- 나는 1초도 걸리지 않고 곧바로 다시 접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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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버워크의 등 뒤에 또 하나의 오브가 떠올랐다. 상황을 생각해 보면 보나 마나 방어 마법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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놈이 사용하는 다섯 가지의 오브 마법 중 하나, 손톱만 한 크기까지 압축시킨 마법 방어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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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브를 통해 일정 거리 안으로 다가오는 공격을 미리 감지하고, 공격 경로에 배치해 막아낸다는 사기 스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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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신에 펼치고 있던 배리어의 강도를 생각해 보면, 아마 압축 방어막은 오러 공격조차 막을 수 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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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나는 공격력을 더 끌어올릴 뿐, [사고 가속]을 발동해 정확한 타이밍에 기술을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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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오러 서클이 하나 휘감긴 팔에, 또 하나의 서클을 형성해 겹으로 공격력을 높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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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리는 것은 목, 일격에 머리를 절단해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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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뒈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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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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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다음 순간 내 검은 허무하게 튕겨 나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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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도 안 돼, 아무리 단단한 방어막이라고 해도 깨부술 수 있을 텐데? 이걸 튕겨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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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번 더 [사고 가속]을 발동해, 내 검을 튕겨낸 방어막의 모습을 똑똑히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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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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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탑과 커뮤니티에서 수집한 정보와는 형태가 완전히 다르다. 손톱만 한 압축 방어막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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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을 찢어놓기라도 한 것처럼,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새까만 균열이 여럿 겹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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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지금은 저 정체불명의 방어마법만이 문제가 아니다. 다른 오브 하나가 빛을 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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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사 수준의 위력을 내는 마법 광선이 지근거리에서 발사된다. 거기에 놈의 등 뒤에 떠오른 수십 개의 마법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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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러 서클을 통한 무리한 도핑으로 끌고 온 공격 턴이, 완벽한 카운터를 맞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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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러 서클은 기본적으로 공격의 한순간에만 발동해야 하는 스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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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나는 내구력과 재생력을 통해 반동을 감당하며, 연속적으로 서클을 유지한다는 수단을 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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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에 더해 원래 사용 방식대로 한 번 더 휘감은 서클까지, 이번 공격은 사실상 모든 것을 쏟아부은 올인 베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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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 모를 마법에 의해 그것이 튕겨 나간 순간 찾아온 반동은, 마력강화의 첫 자력 사용 때와는 비교도 안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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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뚜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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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 안에서 뭔가 끊어지는 소리가 났다. 억지로 끌어올린 마력이 역류하며 속을 뒤집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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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로 인한 데미지에도 쉴 틈은 없었다.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광선에 몸이 반으로 갈라질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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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으로 잘려도 안 뒤지는 몸이긴 하다만, 저 광선은 절단면을 불태워 버린다. 아마 못 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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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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튕겨나간 검을 그대로 놓아버리고, 억지로 몸을 뒤로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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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순간 닥쳐오는 푸른 마법의 광선, 여전히 초라한 모습이지만 그 위력은 잘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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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뒤로 뛴 상황, 하지만 나는 이제 공중에서도 움직임의 궤도를 바꿀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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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술 스킬인 ‘소드 차지’의 돌진 판정을, 신체에서 한 방향으로 마력을 분출하는 것으로 재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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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면에서 일자로 쏘아지는 광선을 억지로 우측으로 굴러 피해내고, 자세를 다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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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공격은 끝이 아니다. 재버워크가 캐스팅한 수십 개의 마법진이 동시에 불을 뿜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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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매직 미사일이나 파이어 볼 같은 기초 마법이 아니다. 튀어나오는 것은 황금빛 화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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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진 하나하나가 어마어마한 속도로 화살을 난사한다. 수십 대의 중기관총이 면전에서 쏘아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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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할 수 있는 거리가 아니다. 양손으로 검을 붙잡고, 날아드는 화살을 하나씩 쳐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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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 가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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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캉! 캉! 캉! 캉! 카가강! 카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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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킬의 효과로 느릿하게 변한 시야의 힘을 빌려, 어떻게든 막아내고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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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이에 재버워크는 다시 텔레포트로 거리를 벌렸다. 또 다른 마법을 추가로 캐스팅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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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발, 욕을 안 할 수가 없네. 놈의 스펙도 스펙이지만, 판단이 너무 안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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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수집한 재버워크의 정보는 커뮤니티에서의 단편적인 제보와 각각의 마탑에서 전해 들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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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재버워크는 18층에서 잠깐만 모습을 드러내는 중립 NPC로, 싸우는 모습은 정말 조금밖에 보여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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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정보도 불확실한 부분이 많았다. 하지만 그 점은 마탑에서 전해 들은 걸로 보충했다고 생각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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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장, 머리에 너무 열이 올라 있었나. 어이없게 놓친 템포를 다시 잡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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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색 마탑에서 빌려 온 마도구, ‘천뢰의 장갑’ 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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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틀릿 형태의 이 마도구의 효과는 매우 단순하다. 발동 즉시, 사용자의 몸을 마력 입자로 바꾸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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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개 속성을 띤 입자가 된 사용자는 빛에 가까운 속도로 이동할 수 있으나, 어떤 물리적인 공격도 불가능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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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라이트닝 차지]와 [대전]을 활용하면, 입자 상태에서 놈에게 돌진하는 것만으로 전격을 먹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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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지지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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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적으로 번개 그 자체가 된 채, 재버워크에게 그대로 돌진한다- 그리고 난데없이 뒤바뀐 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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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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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도구의 발동 효과가 꺼지며 원래대로 돌아온 몸, 그리고 돌진했던 나는 오히려 재버워크를 등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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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뒤에서 다시금 날아오는 광선과 마법을 삐걱거리는 몸으로 피해 내며, 상황을 파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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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도구의 효과를 발동시키자마자 재버워크는 재빨리 문제의 방어 마법을 전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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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내 돌진은 방어 마법에 막히지 않았다- 아하,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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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 마법이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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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혼신의 검을 튕겨낸 건, 공간 마법으로 되돌아온 내 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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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 가속]을 발동시키고, 느려진 세계에서 현재까지 얻은 정보를 정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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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사 수준의 위력을 내는 광선, 자유자재로 시전하는 단거리 전이, 그리고 공격을 반사하는 공간 마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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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마법은 방어막이 아니라 포탈이었다. 좌표를 반전시켜 공격을 거꾸로 튕겨내는 뭐 그런 거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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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마어마하게 성가신 마법이지만, 굳이 그런 마법을 사용한 이유는 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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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방어 수단으로는 내 공격을 막을 자신이 없었던 거다. 한 대만 제대로 들어가면 이긴다고 봐도 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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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저 공간 마법을 어떻게 파훼하느냐인데……일단 평범한 검격이라면 너무 쉽게 반사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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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 볼 수 있는 건 지향성이 없는 광역 공격, 그리고 놈이 마법을 펼치기 전에 기습하는 것 정도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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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쪽이건 평범하게는 불가능하다. 놈은 번개로 변한 내 돌진에도 대응해 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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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어떻게 반응했지- 그렇게 생각하며 재버워크의 모습을 다시 살펴보니,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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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샌가 등 뒤에 떠 있는 네 번째 오브, 그 위에는 눈동자를 닮은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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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꺼내셨군, 예지 마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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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뮤니티와 마탑에서 손에 넣은 정보를 다 믿을 수는 없지만, 저것 하나만큼은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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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지가 아니고서야 벼락의 속도로 돌진하는 내 공격에 맞춰 마법을 전개할 수는 없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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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초 뒤의 시야를 미리 불러오는 마법이랬던가, 성능은 훌륭하지만 제약이 많다고도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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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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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인벤토리에서 두 개의 마도구를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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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 방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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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뭐라고 해도, 내 최대 강점은 압도적인 전투 지속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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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피해를 60% 반감시키는 [강철의 혼], 절단된 몸도 도로 붙여버리는 [초재생], 그리고 세 가지의 내성 스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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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강철의 혼]을 비롯한 방어 능력들을 총동원해도, 재버워크의 마력 광선만큼은 막아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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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재생]으로도 오러 서클을 무리하게 전개한 반동을 버텨내는 것이 한계, HP는 차오를 기미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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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최대 강점인 전투 지속력의 양대 축이 흔들리는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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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마지막 하나, 각종 내성 스킬만큼은 아직도 잘 써먹을 자신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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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그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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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벤토리에서 꺼낸 첫 번째 마도구는, 남색 마탑에서 빌려 온 이른바 ‘혼탁의 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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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갖 종류의 독이 섞인 플라스크 안에서 원하는 성분만을 추출해내는, 원심분리기 같은 마도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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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이라면 전투가 아닌 연구용으로나 쓰일 법한 장치지만, 내가 주목한 건 추출 기능이 아니라 그 플라스크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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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플라스크 안에는 그동안 남색 마탑이 연구하고 제조해온 수많은 독극물이 죄다 혼합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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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더 오래 버티나 해 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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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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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납하기로 했지만 어쩔 수 없지, 나는 주저 없이 플라스크를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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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버워크의 오브가 다시 광선을 발사했고, 플라스크는 정교하게 갈라져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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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고열의 광선도 그 안의 독을 깨끗하게 소멸시키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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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맹독에 불을 붙여 기화시켜, 어마어마한 살상력을 가진 독무를 만들어 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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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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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유롭던 재버워크의 표정이 일순간에 바뀌었다. 놈의 등 뒤에서 마지막 다섯 번째 오브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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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묘한 바람이 재버워크의 몸을 중심으로 불어오고, 맹독의 구름은 바람의 장벽에 휘감겨 사방으로 흩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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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나오시겠지, 내가 가진 모든 독 포션과 남색 마탑의 독이 전부 융합된 미친 독안개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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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이곳은 밀폐된 공간. 기다린다고 독이 흩어질 리 없고, 방어 마법을 전개하지 않으면 버틸 수도 없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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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원 참, 위험한 짓을 하는군. 함께 자살이라도 할 셈이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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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버워크는 에인의 기억을 통해 내 전투력을 엿봤을 뿐. 내 스탯과 스킬 전부를 알고 있는 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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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반 자살이라니. 상식적으로, 내가 그런 짓을 왜 하겠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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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독 내성 스킬 레벨이 몇이게, 이 새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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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전투 지속력은 상황이 극한에 가까워질수록 더욱 빛난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 환경을 극한으로 만들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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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독을 얼마나 들이마셔도 별 상관없지만, 저쪽은 독을 막기 위해 마법을 계속 유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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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그 마법 풀리면 뒤지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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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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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언과 동시에 땅을 박차며 앞으로 전진했다. 그러자 곧바로 날아오는 광선과 푸른 마법 탄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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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도 억지로 몸을 비틀어 광선을 피한다. 모든 공격을 피하는 건 어렵기에, 탄환 쪽은 그냥 맞아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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놈은 예지 마법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니 몇몇 공격은 아예 피할 생각을 안 하는게 나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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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엉! 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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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을 법한 공격은 내구도를 믿고 그냥 맞는다. 정말로 위험한 공격이 섞이면 마력을 분출해 밀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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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한 방에 죽일 수 있을만한 공격은 광선 하나뿐, 그것 하나만이라면 예지고 뭐고 어떻게든 피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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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조도 없고, 시전 동작도 없고, 미래까지 예지해 발사되는 광선을 어떻게 피하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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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이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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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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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과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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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아드는 일직선 광선을 이번에도 몸을 비틀어 피해내며, 조금씩 거리를 좁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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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버워크는 초월적인 경지에 오른 마법사다. 이 18층 세계에 놈과 맞설 수 있는 존재는 아무도 없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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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 때문에, 놈은 당연히 실전 전투 경험이 적을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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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짓이 뻔하잖아. 광선이 쏘아지는 방향은 결국 일직선, 타이밍만 알면 당연히 피할 수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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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궁에서 나를 복제한 호문쿨루스와 싸워본 게 큰 도움이 됐다. 나를 상대하는 상대방의 기분을 알아 버렸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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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공격을 우습게 받아내고, 쉴 새 없이 달려드는 지구력 무한 전사란 얼마나 역겨운 상대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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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나도 이 상황을 영원히 지속할 수는 없다. 오러 서클의 반동이 내 몸을 빠르게 망가뜨리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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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걸 저놈이 알 리가 없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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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건 타격을 받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타격을 받아도 내색하지 않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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놈은 한 대만 제대로 맞아도 치명상이고, 유지 중인 마법이 깨지는 것만으로도 맹독에 당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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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은 난공불락으로 보이는 무적의 원패턴을 유지하고 있지만, 강한 압박감 속에서는 누구나 실수하기 마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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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방패를 던졌다가 까먹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던 것처럼, 방심하다가 아스테리오스의 도끼에 썰렸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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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단력을 상실해라, 빈틈을 보여라, 내가 후벼 파서 무너트릴 수 있는 약점을 노출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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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도로 부족하다면, 상황을 더 복잡하게 만들어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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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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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색 마탑에서 가져온 마도구를 작동시키며, 인벤토리에서 아이템을 쏟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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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래봤자 놈이 쏘는 광선 한 방이면 아이템이고 뭐고 다 반토막이 나서 증발할 뿐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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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아드는 투척 무기를 막기 위해 방어 마법을 할애하게 한다면, 의미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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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웅! 훙! 휘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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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버워크의 몸 주변에 떠오른 공간의 균열을 통해, 내가 던진 무기들이 되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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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내 호문쿨루스가 그랬듯이, 나도 내가 대충 던진 무기에는 맞아봤자 딱히 다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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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해서 쏟아지는 수십 수백 발의 마법 포격과 반사되는 투척 무기까지, 전부 그냥 몸으로 받아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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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하게 위협적인 마법 광선만을 타이밍을 읽어 피해내며, 달려들어서 검으로 일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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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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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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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번에도 공간 마법에 의해 검은 튕겨 나가고, 내 몸만 충격을 고스란히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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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나는 아무런 내색 없이, 삐걱거리는 몸으로 계속 덤벼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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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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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틈이 드러나길 바라며, 지독한 소모전을 이어간 지 얼마나 지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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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옷 아래로 핏물이 흘러내려 바닥을 적신다. 전신의 근육이 갈기갈기 찢긴 듯 고통을 호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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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걱거리던 관절은 이제 반쯤 녹아내린 것 같다. 오러 서클을 장시간 유지한 대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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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뛰어다니면 안 지치나? 그만하고 함께 차라도 한잔하는 게 어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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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재버워크는 여전히 다섯 개의 오브를 안정적으로 유지한 채, 여유롭게 마법을 운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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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새끼, 마력량이 도대체 어떻게 되먹은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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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력 회로를 개선해 인간의 한계를 초월했다느니 어쩐다느니, 그딴 말로 설명이 안 되는 수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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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내 MP는 슬슬 바닥이 보이고 있다. 애초에 오러 서클 자체가 연비 좋은 기술은 아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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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는 놈의 마력 고갈이 아니라, 집중력 고갈을 노린 건데- 도무지 생각처럼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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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우……큭, 쿨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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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게 숨을 돌리려 했지만, 목구멍에서 피가 울컥하고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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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어먹을, 내 쪽에 먼저 한계가 찾아올 줄이야. 재버워크 쪽의 집중력이 생각 이상으로 뛰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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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버워크의 등 뒤에 떠오른 오브가 빛나며, 이번에도 푸른 광선이 쏘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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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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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번 힘차게 굴러 광선을 피해냈지만, 이어서 날아드는 마법 공격은 당연히 피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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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염 속성이 내게 잘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놈은 이제 정체 모를 검은 탄환을 날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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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날아드는 탄환 앞에서 마법석을 끼워두었던 칼레온을 꺼내, 준비 중이던 검령을 소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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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과광! 콰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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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령은 검은 탄환에 맞아 공중으로 떠올랐고, 만신창이가 되어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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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석어, 준비해 둔 수단은 이걸로 끝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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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딜 봐도 궁여지책에 불과한 수단이었기에, 재버워크는 혀를 차며 그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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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텔레포트를 사용해 거리를 벌려 대던 재버워크는 이제 스스로 다가왔지만,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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녀석이 내 몸 상태를 알 리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다가오는 걸 보면- 설마 처음부터 알고 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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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겠지, 용케 그렇게나 움직였어…그래서 더더욱 탐나는군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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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다가온 재버워크가 손을 휘둘렀다. 마법의 사슬이 허공에서 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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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사슬을 채워서 데려가도록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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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완전히 이겼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멍청한 새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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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당장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는 건 사실이지만, 내 HP는 이제야 절반 정도 깎였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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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HP가 절반 이하로 떨어진 순간, [불굴]스킬은 발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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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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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을 휘둘러 재버워크의 사슬을 튕겨내고, 인벤토리에서 갑옷 무더기를 꺼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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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적으로 시야를 가린 뒤, 놈의 배후로 움직여-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오러를 두른 검을 휘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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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버워크의 반응은 기민했다. 예지의 오브가 있기 때문에, 몇 초 뒤의 광경을 보았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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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기습이 안 통한다는 걸 아직도 모르는 모양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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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이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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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버워크의 오브가 광선을 쏘고, 동시에 공간 마법을 전개했지만- 방향이 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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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각 마법 전문의 자색 마탑에서 강탈해 온 마도구, 환영의 베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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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효과는 특정한 대상 하나에게 완벽한 환영을 덧씌워 모습을 속이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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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버워크의 공간 마법이 막아낸 것은, 내가 아닌 만신창이가 된 검령의 공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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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스테리오스의 도끼에 반으로 썰렸던 것은, 승리를 확신하고 방심했던 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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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도 다를 거 없구나, 그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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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촤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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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선에 의해 검령이 반으로 토막나는 것과 동시에, 내가 휘두른 검이 재버워크의 등을 크게 베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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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예 몸을 대각선으로 갈라 버릴 생각이었는데, 방어 마법이 한 겹 더 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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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굴]스킬의 힘까지 빌려 날린 혼신의 일격이었지만……뭐, 일단 유효타를 먹였으니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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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마지막까지 아끼고 있던 백색 마탑의 마도구, 천사의 날개깃을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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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도구의 효과는 지극히 단순, 내장된 마력을 소모해 사용자의 상처를 흡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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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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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많은 상처를 흡수한 탓인지, 수백 번을 쓸 수 있다던 날개깃은 파괴되고 말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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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HP는 완벽하게 회복되어- 풀피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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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맞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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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 합을 나눠본 적은 없지만, 이 여기사는 징그러울 정도로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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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괜히 곧바로 도주를 결심했던 게 아니다. 애초에 도주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차이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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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그때보다 대단히 스펙이 오른 건 아니기에, 평범하게 생각해 본다면 이건 절대 이길 수 없는 싸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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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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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세데스가 측면으로 휘두른 검을 막아내자마자, 전신에 어이없을 정도로 강한 충격이 닥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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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말하지만 막은 거다. 그냥 무방비하게 맞은 것도 아니고, 제대로 검을 들어 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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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 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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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막아도 막은 것 같지가 않다. 나는 [감각 강화]를 발동하며 자세를 다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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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발을 굴러 거리를 좁히며, 곧바로 반격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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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결한 동작으로 검을 휘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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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동작이지만, 그만큼 다양한 방향으로의 전환에 능한 공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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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의 반응과 대응을 미리 상정하고 움직이는 검로, 막아도 피해도 정확하게 후속타로 이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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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메르세데스는 아주 간단하게 내 상정을 뛰어넘어 대응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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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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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을 뻗는 동작 자체는 지극히 평범하다. 이런 각도로 할 수 있는 건 단순한 받아치기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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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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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평범한 받아치기일 뿐인데도, 비정상적인 위력과 속도가 나왔다. 몸이 기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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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세데스의 검은 그대로 한 번 더 휘둘러졌다. 재빨리 검을 들어 올려 막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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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분명 제대로 막아냈음에도 뒤로 주욱 밀려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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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이걸로 끝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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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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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멀리 밀려났던 것 같은데,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내 검을 후려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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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바닥이 징징 울린다. 악력이 조금만 달렸어도 검을 놓칠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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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가각, 카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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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을 맞대고 각자의 검로를 펼치며, 서로의 목을 노리는 대치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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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럴 때는 힘의 균형이 무너지는 순간 곧바로 일격을 허용하게 된다. 그런데 이 년은 왜 이렇게 힘이 센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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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를 보면 그냥 손목 힘만 쓰는 것 같은데, 검에 실리는 무게가 장난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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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편없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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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메르세데스는 단번에 자세를 낮추고 무게중심을 바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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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짓누르던 검이 순식간에 아래로 파고든다. 나는 재빨리 검을 고쳐 쥐어 대처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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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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녀석이 검을 위로 휘두른 순간, 막대한 충격을 받으며 몸이 위로 떠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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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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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마디 욕설을 내뱉으며, 추격에 대비해 공중에서 최대한으로 자세를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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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공격은 이어지지 않았다. 메르세데스는 오히려 뒤로 물러서며 검을 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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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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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바닥에 착지하며, 다시 한번 속으로 욕을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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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깐프 새끼가 사람을 아주 개좆으로 보고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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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세데스는 조금 전부터 시종일관 한 손만 써서 나를 상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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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등 뒤로 손을 돌렸을 때는 보조무기라도 꺼내는 건가 싶었지만, 그게 아니라 뒷짐을 진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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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놓고 격의 차이를 보여주겠다면서 이렇게 덤벼오던데, 아주 시발 어이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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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시발, 이놈의 탑은 왜 이렇게 양심이 없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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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검술 실력도 그동안 많이 좋아졌다고 생각했는데, 저 양심 없는 년을 상대로는 도저히 상대가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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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검술 Lv.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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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층 도전자 중에서 나보다 검술 스킬이 높은 도전자는 없을 텐데, 저건 뭐가 저렇게 센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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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명하는 종족은 생각도 짧군, 설마 정말로 나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한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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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세데스는 검을 늘어트리고 다가오며, 뻔한 도발을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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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하지, 느그들 왕자처럼 쉽게 단념하는 성격이 아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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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년도 저렇게 말하면서도, 사실은 알고 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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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전력은 이 정도가 아니라는 걸, 아직 설레설레 하고 있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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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다양한 무기를 전환해가며 싸우는 변칙적인 전투 방식을 아직 내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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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딱히 검술만으로 이기겠다는 생각을 한 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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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힘을 아끼면서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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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말을 해서 좋을게 없을 텐데, 인간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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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도발에 인상을 구긴 메르세데스는, 그대로 발을 굴러 사선으로 검을 휘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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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우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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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 위를 스쳐 지나간 검이 공기를 가르며 찢어지는 듯한 소리를 낸다. 정말 어이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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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젠 슬슬 익숙해졌다. 뒷짐을 진 채로 펼칠 수 있는 검로는 한정되어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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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제 와서 말하는 거지만- 사실 변칙 무기술만이 내 모든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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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 말고도 잔재주가 몇 개 더 있거든, 이를테면 이런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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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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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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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신 스킬을 발동해 휘두른 내 검이, 메르세데스의 검을 튕겨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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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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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층 보스전에서 터득했던 패시브 스킬, 혼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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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킬의 성능은 전력을 다한 공격의 위력이 증가한다는 참으로 모호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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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수치가 적힌 것도 아니고, 그냥 전력을 다하면 위력이 세진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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얻은 뒤로 한 번도 그 성능을 체감해 본 적이 없었던 이 스킬의 진가는 일정 레벨을 돌파한 뒤에야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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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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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신의 검이 튕겨 나올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해본 것인지, 메르세데스의 표정이 단번에 굳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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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테지, 녀석이 보기에는 내 근력이 갑자기 강해진 것처럼 느껴질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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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실제로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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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정 레벨을 돌파한 혼신 스킬에는 액티브 사용 옵션이 붙었다. 효과는 특정 스탯의 순간적 증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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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P를 소모하는 일회성 버프 스킬로, 솔직히 연비는 좋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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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렇게 결정적인 순간에 사용해 스탯을 증폭시키는 것으로, 상대를 당황하게 하는 것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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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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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세데스의 검을 쳐낸 뒤, 한 번 더 혼신 스킬을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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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증폭시킨 스탯은 민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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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틈을 드러낸 메르세데스의 몸통을 향해, 평소보다 훨씬 빨라진 검을 휘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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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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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세데스는 그마저도 막아냈지만, 결코 완벽하게 막은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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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종일관 유지하고 있던 뒷짐도 풀렸고, 순간적으로 무게중심이 크게 기울어 자세가 무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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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 상태에서 검로를 이어가도 유효타를 먹이긴 힘들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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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비장의 무기는 이런 순간에 꺼내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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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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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벤토리에서 손도끼를 꺼내, 메르세데스의 귀를 향해 휘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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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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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와의 수련을 통해 마력감응을 터득한 이후, 나는 혼신 스킬을 훨씬 자유자재로 쓸 수 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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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내의 마력이 이동하는 것을 감각할 수 있게 되면서, 혼신 스킬의 원리를 대강 파악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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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의 특정 근육에 마력을 흘려 넣어 폭발적인 힘을 내는 방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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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리를 파악하자 응용으로 잇는 것도 쉬웠고, 실전 전투에 바로 적용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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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촤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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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둘러진 손도끼가 엘프 특유의 길쭉한 귀를 거칠게 그었다. 그렇게 큰 상처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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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어쨌든 상처는 상처, 제대로 한 방 먹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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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치는 것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던 상대에게, 빈틈을 노려 한 방 먹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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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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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얼마 만에 느껴보는 짜릿함인지, 저절로 웃음이 나온다. 끝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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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로 멈출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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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파고든 빈틈을 이 정도 값으로 때울 수는 없지, 이대로 계속해서 몰아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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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벤토리에서 무기를 쏟아내며 공격을 이어나간다. 검과 창과 도끼와 망치와 쇠구슬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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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캉캉캉캉캉카강카가강카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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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단련해온 무기술과 체술을 쉴 새 없이 퍼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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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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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신 스킬의 활용은 단순히 스탯이 증폭되는 것 이상의 이점을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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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정 스탯을 갑자기 한 방향의 강화에 몰아버림으로써, 내 공격의 속도와 위력을 예측할 수 없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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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메르세데스도 시간이 지나면 알아서 감을 잡겠지만, 적어도 지금 당장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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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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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어에만 급급하던 메르세데스의 검을 쳐올리고, 가드가 텅 비어버린 몸통을 향해 단검을 휘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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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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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제대로 들어간 공격, 이어서 나는 한동안 쓰지 않았던 스킬을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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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트닝 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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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지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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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검을 통해 전격이 흘러들어 가며, 메르세데스의 표정이 한껏 일그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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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조금 짜릿한 정도에 불과했던 스킬이지만, 이것도 마력 운용을 깨우치며 위력이 크게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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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박혀 들어간 단검이 뽑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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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있는 일은 아니기에, 그대로 단검을 놓아버리고 손도끼를 휘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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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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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세데스의 맨손이 손도끼를 붙잡았다. 조금 전보다 명백하게 반응이 빠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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쯧, 내 턴은 이걸로 끝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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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이 정도면 제법 괜찮았다. 뒤로 가볍게 뛰어서 거리를 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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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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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세데스는 작게 신음하며 옆구리에 박힌 단검을 뽑아냈다. 생각보다 깊게 박힌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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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처음 만났을 때처럼 갑옷과 방패를 착용하고 있었다면, 저 단검도 제대로 박히지 않았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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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얕잡아 본 결과가 무시할 수 없는 부상으로 이어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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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아까 한 말 또 해봐. 뭐가 형편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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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잡하게 꺼내놓았던 무기를 인벤토리로 되돌려 정리하며, 가볍게 도발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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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데없을 정도로 높은 자존심이 특징인 하이엘프 아니랄까 봐, 메르세데스의 얼굴은 금세 일그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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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그 말, 후회하게 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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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르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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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둥 소리와 함께 메르세데스의 몸에 새하얀 빛이 맴돌기 시작했다. 마력 강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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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어력이라고는 전혀 없는 정복 차림이지만, 저걸 사용한 시점에서 그런 건 아무 의미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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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격력도 방어력도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수준으로 증폭됐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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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너도 2페이즈라 이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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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이제부터가 진짜 싸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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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 노욕의 종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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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가 회복되고 HP는 최대로 차올랐지만, 완전한 풀 컨디션이 된 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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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러 서클을 장시간 사용하며 소모된 MP는 그대로, 반면 재버워크는 크게 일격을 먹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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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명상에 준하는 타격을 입히긴 했지만, 놈에게도 회복 수단 하나쯤은 있을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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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로, 지금 몰아쳐야 한다. 확실하게 숨통을 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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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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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러를 두른 검을 휘둘러, 휘청거리는 재버워크의 목을 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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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놈이 펼쳐낸 방어막에 의해 검은 막히고 말았다. 역시 오러 서클 없이는 한 방에 뚫을 수는 없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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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력은 바닥나기 직전, 쓸만한 치유 수단도 이미 써버렸다. 이 이상으로 오러 서클을 사용하는 건 너무 무모한 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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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뭐, 내가 언제는 안 무모한 짓만 했나. 망설임 없이 팔에 오러 서클을 두르고, 힘차게 검을 긋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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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가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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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재버워크의 몸을 두르고 있는 방어막은 뚫릴 생각을 하질 않는다. 뭔가 이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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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러 서클의 출력이 떨어졌나? 그게 아니면 놈의 방어막이 더 단단해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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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문을 품은 채 즉시 [사고 가속]을 발동시킨다. 느리게 비치는 시야로 천천히 원인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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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곧 눈에 들어온 것은, 재버워크의 등 뒤에 떠 있는 오브의 숫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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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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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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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브가 다섯 개라는 정보조차 틀렸던 건가. 두 개 이상을 다루는 것조차 비정상이랬으면서, 어이가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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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상황이 꼭 절망적인 건 아니다. 재버워크의 안색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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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준비하지 않은 건지- 회복 수단은 따로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이 순간 시간은 내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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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을 고속으로 캐스팅하는 것도, 오브를 조종하는 것도, 모두 상당한 연산 능력을 요구하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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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중상을 입고, 방어 마법이 깨지며 소량이나마 독을 흡입한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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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꼴로 얼마나 오랫동안 제 실력을 낼 수 있을까, 그것도 전투 경험이 얼마 없는 책상물림 마법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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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 흐흐… 상처를 입은 게 대체 얼마만인지 모르겠군. 대단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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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곧바로 카운터가 날아올 줄 알았지만- 재버워크는 어쩐지 피를 뚝뚝 흘리며 실실 웃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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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까지 그런 수를 숨기고 있었을 줄이야. 보통 각오론 할 수 없는 짓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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놈은 중얼거리듯 말을 이어갔다. 나는 언제든 공격할 준비를 유지한 채, 잠시 놈의 지껄임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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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데, 그렇게까지 나를 죽이고 싶어하는 이유를 도무지 모르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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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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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에게, 그 아이가 대체 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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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꾸할 생각은 없었지만, 너무나 터무니없는 말을 내뱉는 바람에 무심결에 입을 열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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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이고 싶어하는 이유를 모르겠다니, 에인의 기억을 훔쳐봤다면서 어떻게 저런 소리를 할 수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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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이코패스 마법사에게 뭘 기대하느냐마는, 이번 말만큼은 진심으로 불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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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주워 온 아이에게 그렇게 정을 주는 겐가? 게다가 절반은 흉측한 마족의 피를 이은 존재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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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 새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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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그 아이가 언젠가 재앙이 될 수 있다는 사실도 당연히 알고 있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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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 번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 꼬마가 재앙의 씨앗이라니, 쉽게 넘길 수 없는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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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 그건 몰랐나 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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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어진 재버워크의 말은, 믿기 어려울 만큼 충격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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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버워크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나는 자연스럽게 한 가지 사실을 알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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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층인 19층이 18층의 아주 먼 미래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 정확히 얼마나 미래인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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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한 것은 오직 하나. 19층의 배경은 18층의 무대인 대륙이 거대한 재앙을 겪고 몰락한 이후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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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재앙이 당연히 재버워크와 관련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분명히 이 미친 마법사가 뭔가 벌인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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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마족의 혼혈은, 성장하면서 결국 완전한 마족으로 변모하게 된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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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인을 따지자면, 분명 이놈이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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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도 단순한 마족이 아닌, 반드시 정신적인 장애를 가진 마족으로 말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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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족 혼혈은 어릴 적부터 발달장애와 자폐적 기질을 조금씩 보이는데, 어째서인지 아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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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두뇌에 두 자아가 섞여서 혼재하기 때문이라네, 인간의 자아와 마족의 자아가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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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자아라는 표현은 조금 어폐가 있군. 대립 의식, 그 정도 표현이 걸맞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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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합되어 있으면서도 끈질기게 반목하는 두 의식이, 서로를 죽이고 있는 걸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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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은 인간 쪽의 의식이 주도권을 잡고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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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간 이어진 재버워크의 이야기는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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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아이는 끝내, 강렬한 파괴욕구와 위험한 힘을 가진 마족이 될 터- 아마 이런 이명이 붙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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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층에서 영혼의 형태로 등장하는 보스, 내가 14층에서 베어 넘긴 육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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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 마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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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 에인은 회색 마왕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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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결국 사라져야 마땅한 재앙의 싹을 유효하게 활용했을 뿐인……쿨럭, 이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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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버워크가 돌연 입에서 피를 토했다. 잠깐 흡입했을 뿐임에도 남색 마탑의 독은 잘 듣고 있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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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인이 마족이 되어 날뛰게 될 것이라는 재버워크의 예측은 분명 옳을 것이다- 충격적인 사실이지만, 그래서 어쩌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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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마왕이 되건 뭐가 되건, 지금의 꼬마는 그냥 세상에서 엄마를 제일 좋아하는 가엾은 아이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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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불대는 건 끝이냐, 숨 돌릴 시간 줘서 고맙다. 덕분에 마력이 꽤 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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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쩐지, 에인의 얼굴에 말라붙은 눈물 자국이 있던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아마 에인에게도 똑같은 말을 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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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언젠가 사악한 마족이 되어 세상을 파괴할 거라고, 너는 살아있어서는 안 되는 존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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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을 무찌르는 정의로운 현자가 되고 싶어하던 그 꼬마에겐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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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꼬맹이가 웃으면서 지내기를 바랐고, 그걸 방해하는 놈들은 죄다 죽여버리겠다고 다짐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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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금 검에 오러를 두르고 선언한다, 네가 나한테 뒈지는 이유는 그거 하나면 충분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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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쿨럭, 쿡, 그런가,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 우선 사과부터 하지, 내가 자네를 너무 얕본 모양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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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버워크는 토해낸 피를 닦아내며, 오른손으로 쥐고 있던 스태프를 처음으로 휘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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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어설픈 수는 쓰지 않겠네, 자네를 쓰러트려야 할 적수로 보고……전력을 다하도록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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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순간, 내 [초감각]스킬은 머리가 아플 정도로 강렬한 경고를 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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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버워크의 등 뒤로 새로운 일곱 번째의 오브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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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한 번 더, 새로운 여덟 번째의 오브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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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 번 더, 또 새로운 아홉 번째의 오브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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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씩 떠오르기 시작한 오브의 숫자는 순식간에 백 개에 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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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지간히 재능 있는 마법사라도 두 개 이상을 다루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알려져 있는 오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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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앞의 재버워크는 그것을 다섯 개나 동시에 다루는 초월적인 경지에 다다른 마법사라고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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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저 개수는 대체 뭐란 말인가, 백 개라니- 인간의 뇌로 저만한 오브를 동시에 다루는 게 가능한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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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에 완전히 문외한이던 시절의 나라면 ‘또 양심 없는 지랄을 하네’ 라 말하고 넘어갔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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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쌩초짜 수준이라고는 해도 마법에 입문한 지금의 내 시선으로 보기에는- 저건 그런 수준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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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이나 실력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저만한 오브를 동시에 다루는 건 ‘그냥’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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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나도 저항할 수 없는 환각 마법 같은 것으로 눈을 속이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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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랐나 보군, 하지만 이건 환영도 속임수도 아니라네. 자, 직접 보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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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버워크는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그렇게 말하며 오른손에 쥔 스태프를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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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스태프 윗부분에 달린 네모난 큐브가 흔들거리더니- 이내 반으로 갈라져 그 내용물을 노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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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약하게 발광하는 선이 오밀조밀 엉켜 있는, 붉은 고깃덩어리- 겉보기엔 그렇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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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마력감지를 통해 확인한 그 정체는, 이제까지 본 그 어떤 것보다 끔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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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미친……새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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놈이 지닌 비현실적인 양의 마력, 백 개의 오브를 동시에 다루는 연산 능력, 그 모든 비밀이 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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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브 속 고깃덩이의 정체는, 수많은 인간에게서 추출했음이 분명한 조직- 극한까지 압축된 뇌신경과 마력회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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놈은 백 명이 넘는 인간에게서 ‘마법’을 담당하는 부분을 모조리 추출해, 자신의 스태프에 집어넣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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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길쭉한 스태프 하나를 만드는 데 얼마나 많은 희생자가 필요했을지, 상상도 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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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이만한 숫자를 동원하는 건 처음이라네, 하지만 자네가 어디 적당히 강해야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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놈의 스태프에 달린 큐브는 다시 흉측한 내용물을 감추고, 강렬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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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오른 백 개의 오브 역시 함께 발광하며, 숨이 막힐 것 같은 마력으로 일대를 잠식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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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무슨 수단을 숨기고 있을지 모르니, 단순한 방법으로 가겠네. 받아 볼 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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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진 마력을 모두 쏟아부어 날리는 최강의 일격- 한 방 싸움으로 결판을 짓자 이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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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노멀 클래스 전붕이인 내게는 마땅히 강력한 공격 기술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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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야지 뭐, 씨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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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다면, 이 자리에서 만들어야겠지. 머리를 쥐어짜내 방법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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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러 서클을 실전에서 바로 시전했던 것처럼, 이 자리에서 이론상으로만 있던 기술을 짜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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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령이 말해준 오러 운용의 종결점, 전사에게 있어서 고유마도와 같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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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의념기를, 이 자리에서 만들어 내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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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 장소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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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이라도 전투 능력에 도움이 될 만한 스킬은 모두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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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 가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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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탯이 상승하는 감각을 느끼며, 마지막으로 사고 가속까지 발동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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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한까지 끌어올린 사고력은 주변의 광경을 멈춘 것처럼 인식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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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나를 수백 번으로 쪼갠 끝에 도달한 정지된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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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념기를 구현할 시간을 버는 것이라면 이 정도만으로 충분하다. 하지만 나는 멈추지 않고, 사고를 더욱 가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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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러와 검기를 처음 각성했던 순간- 그때 나는 분명히 정지된 세계를 넘어, 나의 의식만이 존재하는 공간에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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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체험했을 때는 단순한 주마등으로 생각했지만, 이젠 그것이 의도적으로 불러일으킬 수 있는 현상임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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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서 수억 번의 시행착오를 반복해, 끝내 오러를 완성시켰듯- 이번에는 의념기를 깨우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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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확신은 없지만, 해내야 한다. 그 공간으로의 입성은 의념기를 터득하기 위한 기본 전제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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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속된 사고로 인해 멈춘 듯 보이던 세상이, 천천히 흑백으로 물들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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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점을 향하는 집중력과 사고력이, 인식할 필요가 없는 것부터 순서대로 지워 없애는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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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색이 사라지고, 이어 선이 흐려지며, 마침내 시야가 완전히 암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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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야가 검게 물든 뒤엔 청각, 후각, 촉각, 미각이 차례로 소실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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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모든 오감을 소실하고, 세상을 인지하던 미약한 기감마저 사그라든 그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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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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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다시 한 번, 축축한 강물과 나 자신만이 존재하는 세계에 들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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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롯이 내 사고만이 존재하는 공간. 검령은 과거 의념기에 대해 설명하며 이 현상을 언급한 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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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태는 사람마다 다르지만, 일정한 경지에 도달한 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 체험하는 현상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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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령이 스스로 이름 붙이기를, 검의 절벽. 하지만 나의 내면세계에는 절벽도 검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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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적당한 다른 이름이 필요하겠지만, 일단은 내면세계라고 부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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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좀 무협지 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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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괜히 그렇게 중얼거리며, 강물이 흐르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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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도 차림새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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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이게 정말 내 사고로 이루어진 내면세계라면, 옷쯤은 마음대로 만들 수 있어야 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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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무의식이 이 상태를 가장 편하고 자연스럽다고 인식하는 건지, 아무리 생각해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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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됐어, 누가 보는 것도 아니고. 일단 복습부터 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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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가볍게 마력강화부터 시작해, 몸에 오러를 두르고, 마지막으로는 오러 서클을 구현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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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러의 고리를 또 하나의 마력 회로처럼 활용해, 마력이 사용되는 기술의 위력을 비약적으로 높이는 도핑 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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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검령이 생전에 만들어냈던 의념기다. 하자가 많은 기술인 것 같지만, 그건 사용자가 나이기 때문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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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령의 말에 따르면, 의념기란 전사 자신의 심상을 오러에 녹여내 구현하는 것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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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력은 사용자의 감정과 마음에 영향을 받지만, 오러는 감정과 무관하게 언제나 안정적인 성질과 형태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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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일정한 경지에 도달한 전사는 자신의 의지를 오러에 투영함으로써, 그 성질과 형태를 변환시켜 더욱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으며- 그것이 바로 ‘의념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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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의념기를 모방하는 것도 가능하긴 하지만, 동일한 심상을 가지지 않은 채 발현된 의념기는 결국 반쪽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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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러 서클은 검령이 품고 있는 의지가 형태로 발현된 것이기에, 타인인 내가 사용하는 한 결코 완벽할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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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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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내가 오러에 담아낼 수 있는 의지는 무엇일까? 나는 눈을 감고 상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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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싸우게 하는 것, 내게 이 탑을 뚫고 나아가겠다는 의지를 심어준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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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의 세계가 요동치며, 떠올린 모습을 그려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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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그럴 줄 알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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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내가 담아낼 의지는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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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이 그려낸 것은 익숙한 얼굴의 다크엘프. 처음으로 함께 ‘다음’을 약속했던, 엘레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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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을 둘러본다. 얕은 강이라 생각했던 심상의 풍경은, 어느새 호수로 변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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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별빛이 흐르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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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심상이 이 장소를 그려냈다는 건- 자각하지 못했지만, 역시 그때부터 마음이 있었다는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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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긴, 저런 끝내주는 그림자 주머니를 달고 있는 다크엘프가 나랑 어울려줬는데, 어떻게 마음이 없었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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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써 시선을 돌리려 했지만 그럴 수 없었던- 이 심상이야말로, 내 의지에 불을 붙이는 기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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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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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식 웃으며 손을 뻗는다. 널리 펼쳐져 있던 심상이 내 손안에서 압축되며 불꽃의 형태를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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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의지와 욕망이 하나 되어 만들어낸 불꽃. 이것이 바로, 나의 의념기가 구현할 형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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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남은 건, 이걸 검에 담아 쏘아내는 것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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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의념기도 생각보다 어려운 건 아니네. 자신 있었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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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가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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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히 가속되던 사고가 정속을 되찾고, 세계는 다시 원래대로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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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개의 오브를 소환한 재버워크는, 자신의 모든 것을 담아 거대한 마력의 창을 직조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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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맞았다가는 분명 몸이 가루가 되겠지, 피할 수 있을 만큼의 공격 범위도 아니야. 맞받아쳐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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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른손에 흐르는 마력을 내면세계에서처럼 조작해, 불타는 오러의 줄기를 만들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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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버워크의 이야기를 들으며 MP를 회복해둔 덕에, 지금 내 상태는 한없이 만전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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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런 최상의 컨디션에서도, 이 불타는 오러를 완전히 통제하는 건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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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장, 안정적인 오러를 다루는 것과는 난이도가 전혀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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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염의 형태를 띠는 탓인지, 입자 하나하나의 움직임이 무척 불규칙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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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우……천천히, 천천히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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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호흡을 하며, 오른손을 감싸는 불타는 오러 줄기를 조심스럽게 검 속으로 밀어 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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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든 검에 쑤셔 넣기만 하면, 그다음은 검기를 쏘는 요령대로 분사하면 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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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력은 충분할 것이다. 이번이 첫 사용이지만, 이거라면 놈을 불태우고도 남을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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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기대 위력은 둘째치고, 막상 실전에 투입하려니 생각도 못 한 문제점이 발목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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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병, 이거 왜 이렇게 느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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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봐도 내가 검에 오러를 담는 것보다, 재버워크의 마법이 준비되는 게 더 빠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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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새끼가 정정당당하게 내 준비 시간을 기다려 주지는 않을 테니,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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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잠깐만, 그건 서로 마찬가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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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왜 저 새끼랑 정정당당하게 풀파워 화력 대결을 해 줘야 하지? 그냥 먼저 베면 되는 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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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100% 완성된 의념기를 휘둘러야 할 필요는 없다. 놈의 방어를 뚫고 치명상을 입힐 수만 있으면 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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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개의 오브는 대부분 창을 직조하기 위해 사용되고 있다. 물론 그 중 몇 개는 방어를 위해 쓰이고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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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예지의 오브는 없다. 예지마법이 담긴 오브만큼은 유일하게 눈으로 식별 가능하니까,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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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미완성된 의념기로 놈의 방어를 뚫는 것은 가능한가- 당연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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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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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색 마탑에서 빌려 온 마도구, ‘천뢰의 장갑’을 꺼내서 다시 발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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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개 속성을 띠는 마력의 입자로 몸을 바꾸어, 재버워크의 한 발짝 앞까지 단번에 돌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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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타이밍을 맞추어, 마도구의 효과를 해제- 그리고 오른손에 들린 불타는, 아니, 반쯤 불타는 검을 휘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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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라면 원거리까지 강력한 화염을 분사해 모든 것을 불사르는 기술이지만, 이 상태로도 위력은 충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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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져라, 새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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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버워크의 몸 앞에 재빨리 몇 겹의 방어막이 나타났지만, 오러의 불꽃은 그 모든 것을 살라버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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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완성의 의념기는 그대로 놈의 상반신을 파고들어, 그 안쪽까지 불태워 증발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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쏘아지기 일보 직전이었던 마력의 창은 주인의 통제가 끊어짐과 동시에 격렬하게 발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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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어 씨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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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장, 저거 폭발할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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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을 놓아버리고 재버워크의 몸을 밟아 최대한 멀리 도약하며, [철벽] 스킬을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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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력의 창이 붕괴함에 따라 세상이 밝게 변하고, 터져 나온 천둥소리가 귓가를 울리더니 이내 조용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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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하얗던 시야도 이내 몰려드는 통증과 함께 새까맣게 암전되고, 전신의 감각이 순간적으로 마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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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지는 어두운 세상 속에서 유일하게 보인 것은 하나의 시스템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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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 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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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어이없는 결말이지만, 어쨌든 내가 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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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를 뒤흔들던 마력의 폭풍이 끝나고, 내 눈에 비친 것은 하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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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버워크가 만들어낸 창이 폭발하며 발생한 충격파는 정말 어마어마한 위력을 자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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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폭발이 지향성을 갖고 나한테 날아올 예정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절로 식은땀이 흐를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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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그 충격파에 휩쓸린 나도 멀쩡할 수는 없었다. 하늘이 보인다는 것은 내가 땅에 뻗어 있다는 의미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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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벤토리를 열어 얼굴이 있을만한 위치로 포션을 꺼내 드롭시켰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아서 먹을 방법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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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라이, 나중에 몇 개는 병을 딴 상태로 넣어두든가 해야겠다. 이런 상태에선 있어도 먹지를 못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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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 수 없이 그대로 누워서 [초재생]의 효과로 몸이 회복되기만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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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우……뒈질 뻔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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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주변을 둘러보니, 마탑의 마도구로 형성했던 지형은 온데간데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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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버워크가 텔레포트로 빠져나갈 수 없게끔 벽을 매우 두껍게 만들었었는데, 그게 방금 걸로 싹 소멸할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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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녀석의 마법과 내 의념기가 정말 그대로 충돌했으면, 승패랑 별개로 같이 뒤졌을 가능성도 있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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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구구구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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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릿속으로 직전의 전투를 복기하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서려던 그 때, 돌연 진동이 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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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보니까 여기, 공중에 떠 있는 섬이었지- 그것도 재버워크의 마력으로 날아다니고 있었던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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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버워크가 죽어서 섬이 붕괴하려는 건가, 마지막까지 더러운 새끼 같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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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쉴 틈도 안 주냐 치사한 새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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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욕설을 내뱉으며 섬에서 벗어나기 위해 달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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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고, 에픽 퀘스트의 진행도가 99%를 초과함에 따라, 계층의 설정이 변경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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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눈앞에 나타난 것은 낯선 듯 낯설지 않은- 새빨간 시스템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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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 밴더스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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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한 번밖에 보지 못했던 메시지지만, 워낙 강렬했던 탓에 그 내용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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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궁 지역이 소멸합니다. 보스 몬스터의 전이문 활성화 권한이 임시로 에픽 퀘스트에 이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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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몇 번째인지조차 가늠할 수 없는 섬뜩한 감각을 다시 느끼며, 재버워크와 격돌했던 그 자리로 되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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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픽 퀘스트 진행 중, 우호도 80 이상의 NPC와 파티를 결성할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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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의 창이 폭발하며 모든 것이 쓸려나간 그 한가운데에, 깊숙이 박혀 있는 한 자루의 스태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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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태프 끝에 달린 큐브가 다시 한번 저절로 열리며, 백 명이 넘는 인간의 신경과 마력회로가 꿈틀거리며 기어나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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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어나온 신경들은 거대한 기생충 떼처럼 땅을 파고들며 대지를 침식해간다. 익숙하면서 불길한 마력이 샘솟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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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히 재버워크는 처치했다. 다소 허무한 결말이었지만, 확실하게 숨통을 끊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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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치가 올랐고, 레벨 업 알림도 떴으며, 내 마력감지에도 생체 반응은 딱히 걸려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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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돌이켜보면 이런 일은 처음이 아니었다. 그때도, 나는 에픽 퀘스트를 진행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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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발, 이번에는 또 뭐가 튀어나오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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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설을 내뱉으며 검을 들고 달렸다. 꿈틀거리는 저 신경 덩어리를 날려버리면, 어떻게든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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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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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오러를 두른 검은 허망하게 튕겨 나갔다. 재버워크가 사용하던 방어 마법, 하지만 그것보다도 훨씬 단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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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걸 뚫으려면 다시금 의념기를 구현해야 한다. 나는 오른손에 마력을 모으며 집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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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의념기를 형성하는 것보다 빠르게- 돌연 귓가에 끔찍한 비명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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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아아아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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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귓가에 울린 게 아니다. 마력을 통해 직접 머릿속에 전달되는 전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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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에, 무너져 간다고 생각했던 지면이 거꾸로 솟아오르며 기이한 형상을 그려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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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거대한 인간의 얼굴이었다. 탐욕이 주름진 추악한 얼굴. 나는 곧바로 그 주인을 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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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성위에 이를 것이다. 죽음을 극복하고, 우주 너머 별의 권좌에 오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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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백 명이 동시에 외치는 듯했던 비명은 하나의 소리로 모여, 재버워크의 음성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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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육신으로 부족하다면, 그것을 버려서라도. 평생을 바친 마법의 성위에 닿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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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틀거리던 신경은 이미 지면 깊숙이 파고들었고, 스태프는 섬의 중심부까지 더욱 깊이 침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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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위를, 성위를, 성위를성위를성위를성위를성위를성위를이루, 이루, 이루, 이루리라, 이루리라아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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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버워크의 목소리로 내질러지는 괴성과 함께, 지면에서 솟아나는 날카로운 가시가 나를 노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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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천뢰의 장갑’을 발동해 재빨리 그 자리에서 벗어나며, 새롭게 태어난 재버워크의 몸뚱이를 눈에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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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을 갈아넣은 스태프를 핵으로 삼고, 섬 하나를 통째로 육체삼아 만들어 낸- 기괴하고 거대한 골렘의 육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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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월드 레이드가 진행됩니다. 파티와 공격대의 편성 인원 제한이 해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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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 월드 레이드의 난이도는 50인 이상의 공격대를 기준으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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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격대를 결성하십시오. 현재 서버의 참여 가능 도전자 :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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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월드 레이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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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층에서 그랬듯, 이번에도 월드 보스가 출현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계속 마음 한편에 자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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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터무니없이 강한 재버워크를 상대하다 보니, ‘설마 이 이상은 없겠지’ 라며 무심코 결론을 내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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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빌어먹을 탑이 내 예상을 깨부수고 미쳐 날뛴 게 하루 이틀도 아니건만, 신경이 무뎌져 있던 게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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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에 닿는 눈을 지녔으나, 그 빛을 붙들 손은 주어지지 아니하였으니, 하늘을 우러르되 닿을 수 없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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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어뜯는 턱과 움켜쥐는 발톱으로 만물을 갈취하면 닿을 수 있으리라며, 허망한 꿈으로 자신을 속여왔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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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께서 참으로 계시거든, 어찌하여 이 끔찍하고 뒤틀린 피조물을 그 눈 아래에 버려두셨나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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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LD BOSS - 성위에 닿지 못한 자, 재버워키 재버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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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완성된 골렘의 모습은 말로 형언하기 힘든 기괴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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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를 닮은 대가리에 곤충을 연상시키는 한 쌍의 더듬이, 새빨간 눈동자와 길고 가느다란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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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과 다리는 예전에 봤던 공룡을 연상시켰으며, 긴 꼬리와 박쥐를 닮은 날개가 붙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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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을 닮았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놈은 날개는 사용하지 않고 네 다리로 바다를 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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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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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을 부유하던 섬이 괴상한 형태로 변해 걸어 다니기 시작한 꼴, 아주 고질라가 따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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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나 진정으로 경악스러운 것은 놈의 덩치나 외형이 아니라, 전신에 두르고 있는 마력의 방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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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오러로도 한방에 뚫리지 않는 방어벽을 전신에 빼곡하게 펼치고 있다. 말이 되는 건가, 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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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층때는 월드 보스가 상대라도, 메르세데스처럼 나 이상의 스펙을 가진 NPC들의 협력으로 어떻게든 맞설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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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이 18층에 나와 비견될 수 있는 NPC는 재버워크 하나밖에 없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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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내 오러로도 못 뚫는 방어벽을 전신에 펼치고 있고- 심지어 골렘이기에 핵이 부서지지 않는 한 계속 재생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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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히든이니 에픽이니 따질 때가 아니라, 그냥 이론상으로도 공략이 불가능한 상대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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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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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 밑으로 마력을 넓게 펼쳐, 어설픈 모양새지만 수면을 밟고 섰다.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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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다시 한번 [사고 가속]을 전개하려던 찰나, 기괴한 형태로 변한 재버워크가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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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거대한 입에서 쏘아지는 푸른 빛살- 놈의 가장 강력한 공격 중 하나였던 마법 광선이 쏘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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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까지의 초라한 형태가 아닌, 브레스에 가까운 규모와 기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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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과과과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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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선이 지나간 자리에 뒤따르는 충격파, 바닷길이 그대로 갈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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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브를 사용하지 않는 마법이었기에 전조를 감지하고 피할 수 있었지만, 아슬아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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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눈동자가 당신을 주시합니다, 재버워키 재버워크가 당신을 추적하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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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벌하기 짝이 없는 시스템의 안내 메시지와 함께, 머릿속에 연달아 전음이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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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너를 먹고, 성위에 오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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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란하고 시끄러운 전음 사이에서 식별할 수 있는 말은 그것이 유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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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 보스가 휴면에 들어가기 전까지 펼치는 개막 패턴으로- 놈은 나를 추적하기로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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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전을 세울 시간도, NPC를 모아 힘을 합칠 시간도, 주어지지 않았다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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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놈의 등에서 내려오지 않고 버티는 편이 나을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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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력을 사용해 물 위를 걷고 있는 지금 상태로는 제대로 싸우기가 힘들다. 코어를 노릴만한 방법도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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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인 점이 있다면, 놈의 이동속도가 느리다는 것 정도인가. 그마저도 저 날개를 펼치면 또 어떨지 모르겠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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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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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버워크가 오른팔을 들어 올려 크게 휘둘렀다. 날카로운 발톱이 바람을 가르며 바다 위로 상처가 새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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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발톱을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넓은 범위의 참격이 발생한다. 내 검기의 최대 사거리를 능가하는 미친 공격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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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장, 이래서는 다시 거리를 좁히는 것도 힘들겠다. ‘천뢰의 장갑’도 그렇게 마구 써댈 수는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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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반쪽짜리라고는 해도 의념기를 사용하느라 마력도 많이 소모한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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놈의 전신을 둘러싸고 있는 방어막을 뚫고, 코어를 일격에 파괴할만한 화력을 낼 수 있을지 불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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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 수 없다, 일단은 시간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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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부디 놈의 이동속도가 빨라지지 않기를 바라며, ‘천뢰의 장갑’을 발동해 육지로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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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르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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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개 속성의 마나로 변한 몸은 한없이 벼락에 가까운 속도로 쏘아져, 순식간에 항구까지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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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멀리서 골렘이 된 재버워크가 천천히 다가오고 있는 것을 확인하며, 퀘스트 창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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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픽 : 회색 아이와 마법의 서 - 최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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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 : 노욕의 끝을 달려온 마법사와, 가엾은 아이의 이야기가 여기서 끝을 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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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스트 목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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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재버워키 재버워크를 처치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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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아이를 보호하기(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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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아이의 소원을 들어주기(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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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스트 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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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스트 완료 시, 진행과정에 따라 랭크를 산정합니다. 랭크에 따라 보상이 변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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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당신의 퀘스트 랭크 :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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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랭크로 퀘스트 완료 시, 최대 유니크 등급의 보상을 선택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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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대로 재버워크를 처치하는 건 필수 조건, 애초에 전이문 활성화 권한이 이양되었다니 당연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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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탑의 협조를 받아서 뭔가 방법을 강구해 볼까? 하지만 재버워크의 추적을 내버려두고 마탑으로 향하는 게 가능한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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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 화력의 의념기를 정면에서 때려 박으면 코어를 확실하게 파괴할 수 있는 걸까? 마력량은 충분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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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보니, 한 가지 떠오르는 수단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그것도 반쯤 도박이나 다름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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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결국 재버워크에게 다시 접근해야 한다는 점이 문제다. 사거리는 극복할 방법이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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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머리를 싸매고 있던 중, 익숙한 기척이 등 뒤로 접근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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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혁악마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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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이 그렁그렁한 꼬마 에인이 내 옷소매를 잡아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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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 악마는 울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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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회색 꼬마는 좀처럼 울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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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지 않은 시간을 함께 여행하면서 그렇게 생각했지만,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꼭 그런 것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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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인이 반마족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뒤에 하나 깨달은 것이 있다. 이 연약해 보이는 꼬마가 사실은 무척 튼튼하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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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기 직전까지 갔던 상태에서 기력을 깎아먹는 포션을 마시고 살아난 건, 단순한 우연이나 기적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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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생적으로 강인한 신체능력을 타고나는 마족의 육신을 갖고 있었기에, 그 험한 경험을 하면서도 크게 다치지 않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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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혹하기 그지없는 온갖 고초를 겪었음에도, 울지 않을 수 있었던 거다. 마족의 몸은 아프지 않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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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재버워크에게 납치당한 에인의 눈가에는 눈물이 말라붙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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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지금의 에인 역시, 당장에라도 울 듯이 그렁그렁한 눈망울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이유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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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맹이, 네가 왜 여기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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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에인을 보자마자 반사적으로 물었다. 에인은 지금 여기가 아니라 흑색 마탑에 있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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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인은 내 다리에 얼굴을 비비더니,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눈을 떴는데 모르는 곳이어서, 마법으로 빠져나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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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을 차리는 게 흑색 마탑에 도착하는 것보다 빨랐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 결계를 자력으로 빠져나왔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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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지 않은 미래에 세계를 휩쓸고 마계를 제패할 ‘회색 마왕’으로서의 자질?그런 생각이 절로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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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혁악마님, 다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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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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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피 나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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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인이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에인은 내가 다친 모습을 거의 본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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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나는 재버워크의 마법이 폭발하면서 입은 상처가 아직 다 낫지 않은 상태. 내 기준으론 경상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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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객관적으로 보면 여전히 중상 수준이고, 어린아이의 눈엔 훨씬 더 심각하게 보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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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정도면 침 바르면 낫는다며, 별일이 아니라 말하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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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때문에 다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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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에인이 먼저 말을 꺼냈다. 그리고 나는 실수했다. 곧바로 아니라고 말했어야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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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상한 할아버지가 데려가서, 그래서, 진혁악마님이 나 구하러 와서, 그래서 다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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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인은 상식이 심각하게 부족하고, 재버워크의 말한 것처럼 자폐적인 기질을 간혹 보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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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게 이 꼬마의 머리가 나쁘다는 뜻은 아니다. 기억력이나 학습속도는 오히려 천재적인 수준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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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도 차원이 다른 마나 감응력을 지닌 아이이기에, 재버워크의 힘과 마력도 분명히 느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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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에 곧장 알아챌 수밖에 없었던 거다. 정황상, 내가 다칠 이유는 그것밖에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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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아니, 그런 거 아니야. 나는 괜찮아. 근데 지금 여기가 좀 위험하거든? 그러니까 잠깐만 떨어져 있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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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에인을 천천히 달래기엔 시간이 부족했다. 지금도 재버워크가 나를 쫓아 이쪽으로 오고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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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칼레온을 꺼내 들고 ‘스승님 불러줄게.’ 라 말하며, 다리에 매달린 에인을 떼어내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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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혁악마님도, 나 버릴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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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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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혁악마님도 내가 싫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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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인의 두 마디가, 내 생각과 행동을 순식간에 멈추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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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킬을 통해 수백 배까지 가속되고, 자신만의 내면세계를 구축하는 것도 가능한 사고능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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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위기를 눈앞에 두고도 빠르게 굴러가던 머리가, 어린아이의 몇 마디에 멈춰 설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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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격적인 두 마디로 나를 붙잡은 에인은, 작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무엇보다 크게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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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때문에 다쳤잖아…진혁악마님도, 엄마처럼 내가 싫어졌어? 그래서 그런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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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인이 이런 식으로 ‘엄마’를 입에 올리는 건 처음이다. 머리를 망치로 세게 한 대 맞은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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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할아버지가 그랬어, 엄마는 내가 미워서 버린 거래. 그래서 아는 척도 하기 싫었던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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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문장과 단어 하나하나에 물기가 서려 있다. 회색 눈이 또르르 물방울을 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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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나 때문에 힘들었대. 내가 옆에 있어서, 그래서, 내가 엄마라고 불러서, 그래서…너무너무 힘들고 아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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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한 마디 한 마디마다, 흐느낌 섞인 들숨과 날숨이 뒤엉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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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내가 나쁜, 악마라서……엄마가 나를 버린 거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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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에인과 나눈 대화들이 한꺼번에 떠올라,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뇌간을 푹푹 쑤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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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악마로 알고 있는 에인에게 경각심을 주기 위해서, 청색 마탑주와 내가 반복해서 했던 이야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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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는 나쁘다고, 세상에 ‘진혁악마님’ 같은 악마는 더 없을 거라고, 악마는 반드시 쓰러트려야 한다고, 그렇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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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때문에 다들 아프고 힘든 거랬어, 나중에 내가, 나쁜 마왕이 돼서…나 때문에 다 죽을 거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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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인의 말은 계속되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재버워크는 에인에게 정말 모든 것을 들려준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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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혁악마님’은 사실 악마가 아니고, 너야말로 마족이고 악마이며, 너는 나중에 회색 마왕이 될 거라고-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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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마왕을 무찌르는 현자의 이야기를 동경하던 아이의 마음에, 재버워크는 비수를 꽂고 난도질을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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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혁악마님도, 나 때문에 다쳤잖아…그럼 내가 싫어진 거잖아, 그러니까…그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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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푹 숙인 채 울먹이는 에인을 바라보며, 이건 또 무슨 운명의 장난인가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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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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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게 자기 탓이라 말하며 흐느끼는 에인의 모습 위로, 다른 누군가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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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꼬마의 마음을 백분 이해한다. 돌이켜보면, 처음부터 이래저래 닮은 부분이 많은 처지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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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가 왜 나를 그렇게 안쓰러워했는지, 이제야 알 것 같다. 그 빛나는 눈동자에도 이런 모습이 비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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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꼭 중요한 순간마다 말주변이 부족한 나는, 어떤 말이 이 아이를 위로할 수 있을지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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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기억을 더듬었다. 엘레노어는 나에게 어떻게 해주었던가. 어릴 적의 나에게, 엄마는 어떤 말을 해주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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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한 말도, 화려한 언변도 필요치 않았다. 그때의 나에게도, 지금의 에인에게도, 필요한 건 오직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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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탓이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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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조심스레 에인과 눈높이를 맞추고, 그 작은 몸을 꼭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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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로는 모든 감정을 다 전할 수 없을 때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포옹이라는 행위가 있는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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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으로 때우는 건 내 전문이다. 그래서 나는 한 마디만을 반복하며, 에인을 꼭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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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흐느끼며 웅얼거리는 에인의 말에 나는 한결같이 대답했다. 네 탓이 아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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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세상의 모든 불행과 고통이 이 아이를 중심으로 얽혀 있더라도- 단지 태어났을 뿐인 생명에게 잘못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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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인을 낳고 길렀던 적색 마탑주도 그랬다. 끝내,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손으로 아이를 죽일 수는 없었다고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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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한 자는 따로 있다. 죽고도 또다시 추하게 되살아난 역겨운 마법사, 모든 책임은 그 새끼가 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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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재버워크는 이미 제법 가까운 거리까지 도달해 있었다. 항구의 NPC들조차 그 존재를 인식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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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어, 저거 뭐야! 야! 저거 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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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떻게 알아! 도망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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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쪽으로 온다, 온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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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버워크에게서 흘러넘친 불길한 마력이 바다를 가르고, 항구의 NPC들을 일제히 혼돈에 빠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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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앙에 필적하는 괴물이 다가오고 있다. 하지만 나는 에인이 진정할 때까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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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분 뒤, 에인은 눈물과 콧물로 범벅된 얼굴을 내 어깨에서 떼며,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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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아니야? 나, 악마인데, 나쁜 마왕이 된다고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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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꼬맹아. 그거 말인데, 사실 악마랑 마족은 다르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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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신중히 골라낸 말을 꺼냈다. 참고로, 이건 거짓말이 아니다. 마족과 악마는 정말로 엄연히 다른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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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마족의 피가 조금 섞였을 뿐이야. 그리고, 마왕이 된다는 건 또 누가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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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사교에게 납치당한 에인은 온갖 가혹한 고초를 겪었음에도 울지 않았다. 마족의 몸은 아프지 않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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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재버워크에게 납치당해 심한 말을 들은 에인은, 이렇듯 내가 보는 앞에서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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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체는 마족일지라도, 마음은 분명 인간이기에. 제대로 아파하고 울음을 터트릴 수 있었던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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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런 근거도 없지만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 이 꼬마가 마왕 같은 게 된다니, 그럴 리가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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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 알아? 악마는 안 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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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에인의 지저분해진 얼굴을 조심스레 닦아주며, 작은 몸을 번쩍 안아 어깨 위에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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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버워크는 이제 완전히 항구에 도착해 있었다. 주변은 완전히 아비규환. 이보다 더한 난장판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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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손으로 인벤토리를 열었다. 숙소에 떨어져 있었던 큼직한 완드를 꺼내, 에인의 손에 꼭 쥐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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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마왕이라는 건 저런 걸 말하는 거야. 딱 봐도 나쁘게 생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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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 봐도 존나게 사악해 보이는 모습을 한 새까만 괴물- 이 에픽 퀘스트의 마지막 보스 몬스터, 재버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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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박에 가까운 계획이지만, 이 꼬맹이를 위해서라면 과감하게 올인 한 번쯤은 괜찮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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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무찔러 보자, 우리 꼬마 현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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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보는 앞에서 함께 마왕을 무찌르고, 동경하던 이야기 속의 현자가 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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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 별에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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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구에 도착한 재버워크는 특유의 붉은 눈동자로 나를 노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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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꼬라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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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놈의 시선을 받아치며, 내 어깨에 올라타 있는 에인에게 마도구를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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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이나 연속으로 사용한 탓에, 이제는 과열되어 거의 쓸 수 없는 상태가 된 ‘천뢰의 장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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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마도구의 기본적인 효과는 사용자의 몸을 번개 속성의 마나로 변환시켜, 초월적인 스피드를 내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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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사용할 때마다 내부의 마법진이 과열되어, 연속 사용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 지금은 사실상 고철 덩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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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딱 한 가지, 지금처럼 과열된 상태의 이 장비를 억지로 써먹는 방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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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부의 마법진을 즉석에서 개조해 다른 방식으로 활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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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납하기로 한 마도구를 개조한다는 건 당연히 원래는 안될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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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시당초, 황색 마탑에서 심혈을 기울여 완성한 최상급 마도구를 그렇게 쉽게 개조할 수 있을 리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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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수 있지, 꼬맹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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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할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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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우리의 마법천재 꼬맹이에게는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운 일. 나는 잠깐 시간만 벌어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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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오오오오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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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버워크의 흉측한 입에서 포효가 터져 나왔다. 그 소리는 이미 단순한 음파를 넘어 충격파로 변질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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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구에 정박해 있던 조각배들은 그것만으로 산산조각 나 침몰했고, 거대한 범선들조차 우그러져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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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저건 단순한 외침일 뿐, 공격행위가 아니다. 재버워크는 한 차례 포효를 끝으로 본격적인 움직임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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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지직! 콰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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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룡처럼 생긴 손아귀로 건물을 으스러뜨리며, 나를 향해 달려온다. 나는 에인을 단단히 붙잡은 채 뛰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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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렘의 몸으로 변한 재버워크는 인간일 때보다 훨씬 강력한 방어력과 공격력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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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저 입에서 뿜어내는 마력 광선은, 말 그대로 광역 즉사 브레스라 불러도 무방한 미친 공격 패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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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과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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쏘아진 푸른빛의 광선이 살벌한 기세로 날아든다. 나는 가볍게 왼쪽으로 뛰어 그것을 피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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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격력은 강해졌지만, 오히려 피하기는 쉬워졌다. 오브를 사용한 마법이 아니기에, 전조가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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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월적인 마나 감응력을 지닌 에인은 말할 것도 없을 테고, [초감각] 스킬을 가진 나에게도 그 궤적은 뻔히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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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지 마법과 함께 써도 한 번도 제대로 맞추지 못했던 주제에, 이제 와서 명중률이 올랐을 리는 만무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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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인간일 때보다 공격 타이밍이 더 뻔해진 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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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렘으로 변화하며 외쳐 댔던 전음이 무척 엉망이었던 점을 통해 상상해보자면, 이성을 상실한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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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목표로 정하고 공격을 날릴 만큼의 지능은 있는 듯 하지만, 그냥 조금 똘똘한 몬스터나 다름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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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긴, 체급과 마력이 저렇게나 불어났는데 이성적인 행동까지 할 수 있으면- 그건 밸런스 붕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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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 사이를 뛰어다니며 요란한 공격을 피한다. 지금 날아드는 공격은 오직 광선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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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히 회피에만 집중하면, 몇 분 정도는 충분히 버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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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피하기만 해서는 이길 수 없다. 당장 회피는 가능해도 거리를 좁히는 것조차 어려운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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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혁악마님, 다 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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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단조로운 패턴의 공격을 요리조리 피하고 있던 도중, 어깨 위에 앉은 에인이 내 뺨을 콕콕 찔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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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준비해두었던 대량의 마법석을 인벤토리에서 꺼냈다. 검령을 소환할 때 한두 개씩 사용하던 마법석이 수백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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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인은 개조된 ‘천뢰의 장갑’을 마법석을 향해 뻗었다. 그리고 완드를 힘차게 휘둘러 마법을 시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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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자의 육체를 마력으로 바꾸는 기능을 개조하여 만든 것은, 특정한 물질을 고스란히 마력으로 치환하는 마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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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벤토리에서 꺼낸 수백 개의 마법석을 일제히 마나로 변환하고, 에인이 그 힘을 모아 공격 마법을 시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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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사가 어그로를 끌고, 마법사가 후방에서 화력을 퍼붓는다는, 레이드의 기본 공식을 실천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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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에인이 날린 마법은, 번개 속성의 전략급 공격 마법 묠니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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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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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르르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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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채만 한 굵기의 번개가 허공을 가르며, 재버워크의 옆구리를 직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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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의 벼락과는 비교도 안 되는 압도적인 위력. 한순간, 시야가 새하얗게 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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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광보다 늦게 도달한 폭음이 천지를 울렸고, 일순간에 재버워크의 어깻죽지와 날개 한 짝이 뜯겨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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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이 공격으로도 처치까지는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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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버워크의 몸을 감싸고 있는 얇은 마력 방어막이, 위력을 크게 반감시키는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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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효타를 입혔다고 좋아할 때가 아니다. 놈은 골렘, 부서진 몸뚱이가 금세 주변의 잔해를 흡수해 복구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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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꼬맹아, 다음 거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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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정도는 예상한 결과다. 처음부터 이 일격으로 잡을 수 없을 줄은 알았다. 진짜 중요한 건 이제부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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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걸로 수백 개의 마법석을 소모하긴 했지만, 아직 비슷한 양의 마법석이 인벤토리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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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인은 완드를 휘둘러 공중에 물방울을 소환했다. 예전에 나에게 보여주었던, 마법을 이용한 비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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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진혁악마님, 움직일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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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번에 날아오르는 것은 에인뿐만이 아니다. 소환된 물방울이 내 팔다리에 달라붙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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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몸이 멋대로 둥실거리며 떠올랐다. 생각보다 엄청 이상한 느낌, 하지만 허우적대고 있을 시간은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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놈이 손상을 복구하고 있는 사이, 이대로 비행해서 그 몸뚱이에 다시 올라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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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이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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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을 가르며 앞으로 전진한다. 비행 마법에는 생각보다 금방 적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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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적인 움직임은 에인이 마력으로 조작해주고, 나는 그 흐름을 따라가며 힘으로 방향을 조절하는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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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에 떠 있는 물방울을 힘차게 차서, 위험한 상황에서 궤도를 급히 바꾸는 것도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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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쐐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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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버워크가 길다란 꼬리를 채찍처럼 휘둘렀다. 곧바로 물방울을 박차 궤도를 바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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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마력을 분출하는 방식으로 공중에서 궤도를 바꿀 수 있지만, 그 방식은 순간적으로 마력을 많이 소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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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전의 성공을 위해서 나는 마지막까지 마력을 최대한 아낄 필요가 있으니, 지금은 이 방식이 최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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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맹아, 준비는 다 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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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진혁악마님은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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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인이 걱정된다는 듯이 물었다. 이미 작전을 정할 때부터 알려준 일이지만, 에인의 역할은 곧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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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정도 거리를 좁혀서, 확실하게 놈의 몸에 올라탈 수 있게 된다면- 에인은 마법을 써주고 바로 빠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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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공격의 여파가 어디까지 미칠지 아직 확신이 없으니, 망설이지 않고 텔레포트를 쓰라고 말해 준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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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을 건 한 번의 올인 베팅, 실패하면 다음은 없다. 하지만 원래대로라면 이보다 훨씬 험난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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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인의 존재가 도박의 성공률을 크게 높여 준 거다. 이 정도면 안전한 편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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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갸아아아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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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버워크가 괴성을 내지른다. 동시에 머릿속에 기괴하게 얽힌 전음이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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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은 처음에 들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자신은 죽지 않을 것이며, 마법의 성위에 닿을 것이라는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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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시스템 메시지가 확실하게 알려주었다. 재버워크의 이명은 ‘성위에 닿지 못한 자’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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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놈의 성위 성위, 시끄러워 죽겠네! 애새끼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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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욕설을 내뱉으며, 마구잡이로 휘둘러지는 재버워크의 발톱과 날아드는 광선을 피해 거리를 좁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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놈의 어깻죽지와 날개는 이미 거의 다 회복되었다. 타이밍은 지금이다. 에인에게 신호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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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벤토리에서 쏟아져 나오는 수백 개의 마법석, 다시 한번 휘둘러지는 완드, 시전되는 대규모 마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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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PC ‘에인’이 당신에게 방어 마법을 시전합니다. 모든 입는 피해가 대폭 감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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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PC ‘에인’이 당신에게 보호 마법을 시전합니다. 방어력이 대폭 상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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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PC ‘에인’이 당신에게 축복 마법을 시전합니다. 내구 스탯이 대폭 상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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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PC ‘에인’이 당신에게 저항 마법을 시전합니다. 모든 속성 피해가 반감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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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PC ‘에인’이 당신에게 증폭 마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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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게 이어지는 시스템 메시지를 손으로 쓸어 치운 뒤, 마지막 물방울을 힘껏 밟고 재버워크를 향해 돌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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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완전히 회복된 재버워크는 고개를 홱 돌리며, 거대한 발톱을 나를 향해 뻗었다. 타이밍은 아슬아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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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슬 퍼런 마력이 깃든 발톱.하지만 저걸 피하려고 움직였다간, 한 번뿐인 기회를 놓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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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 수 없다. 내가 더 빠르기를 기도하며, 이대로 맞부딪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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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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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였다, 발톱을 휘두르던 재버워크의 몸이 크게 기울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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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런 맥락도 전조도 없이, 아무것도 없는 맨땅에서 넘어진 것이다- 나는 뒤로 고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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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어깨에서 뛰어내린 에인이 똑바로 눈을 맞추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텔레포트로 거리를 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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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인이 마지막으로 쓰고 간 것은, 상대가 누구든 간에 무조건 한 번 넘어트린다는- 마법 발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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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핫, 진짜 천재 맞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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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피식 웃으며, 양 팔에 최대한 마력을 쏟아부으며 [철벽] 스킬을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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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신]스킬까지 사용해 [내구]스탯을 증폭시키고, 에인이 걸어준 각종 방어마법의 효과를 빌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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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벤토리에서, 그동안 손도 댈 수 없었던 찬란한 번갯불의 도끼를 꺼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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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몸을 절단냈던 [성위 : 케라우노스]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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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 하나가 그대로 골렘이 된 재버워크에게 어울리는, 섬 하나쯤은 일격에 산산조각낼 수 있는 위력의 도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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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갖 방어 버프를 둘렀음에도, 깃들어 있는 어마어마한 힘에 손잡이를 쥔 두 손이 순식간에 타들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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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그렇게 좋아하는 성위 맛 좀 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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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스꽝스럽게 넘어진 재버워크의 몸뚱이에 착지하며, 불타는 두 손에 담긴 빛줄기를 휘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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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빛도, 대지의 그림자도, 모두 일제히 뒤덮는 신화의 벼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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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악하기 짝이 없는 늙은 마법사의 말로는, 단말마도 없이 빛 속에서 부서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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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 항구도시의 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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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당, 따당, 따당- 멀리서 리듬감 있는 망치 소리가 들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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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하나 주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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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이, 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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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손질된 생선이 꾸러미에 담겨 내게 건네진다. 나는 붕대가 칭칭 감긴 왼손으로 그걸 받아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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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선장수는 꾸러미를 건네며 잠시만 기다려 보라더니, 매대 뒤편에서 작은 주머니 하나를 꺼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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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쩍 들여다보니, 그 안에는 이 항구도시 특유의 방식으로 가공된 반건조 새우가 가득 담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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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별 건 아니고, 며칠 전에 팔다 남은 거 따로 손질해둔 거야. 가져가서 먹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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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괜찮다며 거절하려 했지만, 생선장수는 반쯤 억지로 새우 주머니를 내게 안겨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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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먹어야 그 손도 빨리 나을 거 아니야, 용사 형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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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그렇게 말하며 붕대에 감긴 내 손을 가리켰다. 흠, 호의를 너무 거절하는 것도 좀 예의가 아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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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적당히 고맙다고 말하고, 생선 꾸러미와 새우를 인벤토리에 쑤셔 넣은 뒤 커뮤니티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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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서진혁#26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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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이거 어떻게 먹는게 맛있겠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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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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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건조 새우라는데 그냥 구워먹으면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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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우가 반건조가 있음? 그냥 말린새우 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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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ㄴ 좀 다름 저번에 보니까 껍질벗기면 새우살 쫀득하게 있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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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ㄴ 중국쪽에 비슷한 요리법 있던걸로 기억함 ㅇㅇ 대충 센불에 볶으면 될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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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 저거 써본적 있는데 튀긴담에 소스묻히면 맛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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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글을 올린 건, 오픈 커뮤니티의 여러 탭 중 가장 글리젠이 적은 ‘요리&생활’ 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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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 안에 장기 체류 중인 도전자들을 위한 생활 팁을 공유하는 곳으로, 내가 최근 들어 많이 활동 중인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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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층에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내가 이런 게시판을 자주 들락날락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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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이것도 에인 덕분인 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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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중얼거리며 붕대로 감긴 양손을 내려다보았다. 마지막 싸움 이후 벌써 몇 주가 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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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위의 힘이 깃든 도끼에 맞은 재버워크는 그대로 깨끗이 소멸했고, 나는 무리하게 도끼를 휘두른 대가로 양손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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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꿈치 부근까지 완전히 잿더미가 되어 사라진 탓에, 포션이나 [초재생] 스킬로도 회복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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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보다시피 지금은 양손 모두 제대로 붙어 있다. 여러 마탑의 협력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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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에인과 함께 재버워크를 쓰러트린 뒤, 가까운 마탑을 통해 청색 마탑과 적색 마탑에 연락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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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한 것은 에인의 출생에 얽힌 비밀과, 재버워크의 실체에 관한 폭로였다. 마법계는 이 일로 완전히 난리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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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증거도 없는 이야기라 믿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의외의 원군 덕분에 일이 쉽게 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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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색 마탑주의 측근이었던 한 마법사가, 생전에 마탑주가 수집한 재버워크에 관한 자료를 가져와 공개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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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버워크가 벌여온 온갖 끔찍한 생체실험이 세상에 드러나며, 추가 조사 끝에 마법계는 우리의 폭로를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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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후에도 뭐, 돌이켜 보면 이런저런 귀찮은 일들이 많았지만- 결국 다른 마탑들의 협력을 얻고 지금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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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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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뮤니티에 올라온 새우 요리 레시피를 확인하며 걷던 중, 목적지에 도착해 발걸음을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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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구도시에는 어울리지 않는, 길쭉한 탑 형태의 건물. 날림으로 지어진 이곳이 지금 나의 숙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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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 앞에는 나무를 대충 잘라 만든 조그만 표지판이 박혀 있고, 그 위에는 삐뚤빼뚤한 글씨가 쓰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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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회색 마탑, 외부인 출입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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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구도시의 영웅으로 불리게 된, 우리 회색 꼬맹이가 직접 쓴 글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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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회색 마탑’이라 당당하게 적혀 있어도, 당연히 진짜 마탑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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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항구도시 복구를 위해 파견된 마법사들을 위한 임시 숙소일 뿐, 마법 연구와는 거의 무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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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에인이 좋아하니까 적당히 회색 마탑이라 이름 붙이고, 탑 모양으로 지어 놨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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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에 돌아온 나는, 우선 백색 마탑에서 파견된 마법사에게 양손의 상태를 진단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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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보다 회복이 빠르네요, 이제 붕대는 풀어도 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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룬 문자가 새겨진 붕대를 풀자, 겉보기엔 멀쩡한 양손이 드러났다. 손에 마력을 둘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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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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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력이 방출되는 속도도 출력도,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부족하다. 역시 아직은 무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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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양손은 외형만은 멀쩡히 돌아왔지만, 팔에서 이어지는 마력 회로와 같은 중요한 부분은 여전히 소실된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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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 회복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희석된 엘릭서 정도는 필요할 거라나, 하여튼 귀찮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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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야기로만 듣고 있는데, 재활은 계속하고 계신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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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재활이라고 해도 대단한 건 아니다. 그냥 손을 많이 쓰라는 것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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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항구의 시장에서 생선을 사 온 이유도 바로 그 재활 때문이다. 이래저래 손을 쓸 겸, 요리를 하고 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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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벤토리에 비축해 뒀던 식품이 거의 다 떨어진 김에, 에인한테도 먹여줄 겸 시작한 건데……생각보다 적성에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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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급 요리]스킬의 레벨도 부쩍 올라 벌써 11레벨, 며칠에 한 번꼴로 레벨이 오르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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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마력회로만 멀쩡했으면 오러를 더 연습하거나 마법을 배울 생각이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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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내가 만든 요리가 제일 맛있다며 기뻐하는 꼬맹이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이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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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요리를 맛있게 먹어주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싱숭생숭한 감각이 가슴 언저리에서 피어오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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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아직 못 먹어봤지만, 다른 분들이 진혁님 요리가 그렇게 맛있다 말씀하시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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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색 마탑에서 파견 나온 마법사는 그렇게 말하며 작게 손뼉을 쳤다. 뭐, 그런 소리를 듣고 있긴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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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에인에게나 먹여 주었던 요리지만, 요즘에는 이 숙소의 다른 마법사들의 몫까지 자연스럽게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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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활 삼아서 시작한 요리였는데, 이래서는 완전히 재미를 붙인 꼴이다. 이런 건 나도 엄마를 닮은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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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엄마도 내게 이런저런 요리를 해 주는 걸 무척 좋아했었지. 정작 본인은 끼니도 잘 챙기지 않았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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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에인이 없었다면 굳이 요리에 손을 대지는 않았을 거다. 사놓은 음식이 떨어지면 화이트롤이나 먹고 있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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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것도 오늘이 마지막이다. 나는 인터페이스를 조작해 퀘스트 창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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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스트 완료 : 회색 아이와 마법의 서 - 최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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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행상황에 따라 랭크 및 보상을 결정합니다……평가 완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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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크 : 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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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층으로 이동하여 지정된 보상을 수령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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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이어져 온 에픽 퀘스트가 마침내 끝을 맞이했고, 남은 것은 보상을 받는 것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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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 에인과도 헤어질 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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얻어온 반건조 새우는 기름에 튀겨낸 다음, 진한 소스를 입혀서 접시에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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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에서 사 온 생선은 회를 떠서 가볍게 초밥을 쥐어 봤다. 에인은 이렇게 한입에 넣을 수 있는 음식을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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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밥은 이번에 처음 만들어 보는 건데, 생각보다 잘 됐다. 생각해보면 내가 못 만들 수가 없는 요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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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를 뜨는 것도 결국은 칼질이라 잘 할 수밖에 없었고, 밥 쪽이야 들어가는 재료의 양만 잘 지키면 그만이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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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분의 음식은 근무 중인 마법사들에게 나눠주고, 에인의 몫을 챙겨서 탑 꼭대기의 방으로 걸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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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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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로 된 문을 열어젖히자, 기척을 느낀 에인이 살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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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흘렸던 눈물이 무언가 기폭제가 된 것인지, 요즘 들어 에인은 표정이 무척 다양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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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인은 자신의 책상 위에 올려놓았던 종이를 치우고, 내 손에 들린 접시를 받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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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와, 진혁악마님 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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옅은 웃음기와 함께 콧노래를 부르며 에인은 구석에 놓여 있던 식기를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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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마을을 떠날 때 샀던 어린이용 스푼과 포크 세트, 그리고 자연스럽게 내 몫의 식기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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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히 생각은 없었는데, 이러면 같이 먹어야겠네. 함께 식사하는 건 싫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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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는 요즘 어때, 잘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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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소스를 입힌 새우튀김을 씹으며, 툭 던지듯 물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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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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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꼬마도 이런 부분에서는 여전히 한결같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나름 설명을 하려고 한다는 부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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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인은 초밥을 입에 물고, 책상에 올려놨던 종이더미를 이리저리 뒤지더니, 이내 마법진이 그려진 종이 하나를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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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버워크의 마력회로를 강탈하는 마법진만큼은 아니지만, 무척이나 복잡한 마법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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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고 있는데 잘 안돼, 아직 모르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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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에인이 자신에게 깃든 마족의 피를 희석하기 위해 만들고 있는 마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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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 마왕으로 타락하지 않기 위해, 마족의 피로 발생하는 영향을 스스로 제거하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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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타인의 고유마도마저 베껴낼 수 있는 천재인 에인에게도, 이것만큼은 무척 어려운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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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는 단순하다. 기존에 존재하지 않았던 마법이며, 개발 단계에서 실험도 불가능하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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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에인은 가진 마력량마저 희박하다 보니, 뭔가 시도하는 것 자체가 어렵다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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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이건 거의 다 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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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인은 그렇게 말하며, 일전에 개조했던 ‘천뢰의 장갑’을 꺼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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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빌려 왔던 마도구들은 흑색 마탑의 것을 제외하면 모두 재버워크와의 결전에서 손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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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인은 개조된 형태로나마 남아 있는 ‘천뢰의 장갑’을 반환하기 위해, 다시 원래의 기능대로 돌려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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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자색 마탑의 마도구는 무사한 줄 알고 있었는데- 반납하러 갔더니 인벤토리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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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전투 중에 인벤토리로 돌려놓는 걸 까먹어서 잃어버린 모양이었다. 자색 마탑주가 엉엉 울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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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하네, 역시 우리 현자님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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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설프게 웃으며 에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막상 헤어지려니 마음이 편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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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의 영혼은 아마도 SSS랭크 달성으로 인한 특례, 혹은 시련의 탑의 안배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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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내가 떠나고 난 후- 여기에 남은 에인의 이야기는 어떻게 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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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앙에 의해 마법이 쇠퇴한 19층이라는 미래, 그리고 회색 마왕의 영혼이 나타나는 48층의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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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층의 에인이 퀘스트 완료와 함께 깡통으로 변하고, 그 영혼과 기억이 이어지게 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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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비극이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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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 시련의 탑 19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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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련의 탑은 NPC의 영혼을 재활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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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소스를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한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의도가 숨어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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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의 경우처럼, 에인의 혼과 의식도 퀘스트 완료와 함께 상층의 자신-회색 마왕에게 이어진다고 가정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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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에인이 어떤 행동을 하든, 어떤 결심을 하든 결국 48층의 회색 마왕이 되는 미래만이 예정되어 있다는 뜻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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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는 영혼이 없는 채 흘러갔던 7층에서 8층까지의 20년을, 돌아보면 마치 꿈을 꾼 것처럼 느껴졌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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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층에서 9층까지의 긴 시간도 마찬가지. 영혼도 의식도 희미한 채, 예정된 미래를 향해 달려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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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저층에서 행한 행동은, 같은 세계관을 공유하는 상층에 얼마나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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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층의 NPC들이 7층과 8층에서의 내 행적을 기억하고 있었던 걸 보면, 분명 아무 의미가 없는 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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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8층과 9층 모두, 삼대 세력의 전쟁이라는 큰 배경에는 아무런 변함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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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앙에 의해 마법이 쇠퇴하고 몰락한 19층의 배경, 회색 마왕의 영혼이 등장하는 48층의 보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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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프 층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그 큰 배경과 설정은 결국 변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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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능성은 넘쳐난다. 에인의 연구가 실패하기만 하면 결국 그렇게 흘러갈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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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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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인은 머리를 쓰다듬다 말고 고민에 빠진 나를 보며, 귀엽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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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다가올 작별에 대해 이 꼬마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분명 나름대로 생각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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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인도 이제 내가 진짜 악마가 아니라는 걸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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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간략하게 설명한 결과, 차원을 떠도는 용병이나 모험가 같은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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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헤어지게 된다는 사실도 알고 있을 거다. 그리고 그때까지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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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에, 내가 떠난 이후를 생각하며 저렇게 혼자 공부하고 있는 걸 테다. 이 회색 꼬맹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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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혁악마님, 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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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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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려 보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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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인은 그렇게 말하며 내 무릎 위로 기어 올라와 뺨을 콕콕 찔렀다. 정신의 피로가 얼굴에 드러났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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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별생각 없이 에인의 말랑한 뺨을 손가락으로 찔러보다가, 망설이던 말을 조심스레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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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앞으로는 청색 마탑에서 지내게 될 거야. 그때 그 선생님들 기억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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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큰 선생님이랑 작은 선생님. 마법 많이 가르쳐줬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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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그 선생님들이 널 맡아주기로 했어. 아마 입양 형식이 될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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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모든 이야기는 끝난 상태였다. 청색 마탑주는 놀라울 정도로 흔쾌히 에인을 받아주겠다고 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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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도 안 했는데 자식부터 생기네.’ 같은 소릴 했다가, 에올피아에게 바로 결혼당할 예정이라나 뭐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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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인은 여전히 멀뚱멀뚱 나를 올려다보고 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싶던 순간, 입술이 살짝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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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멋진 현자님 되면, 진혁악마님도 나 보러 와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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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울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에인은 내가 상상한 것보다 훨씬 단단하게 마음을 다잡은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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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모습이 그렇게 기특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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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나는 마지막 채비를 마치고 18층의 미궁 지역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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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버워크의 죽음이 영향을 미친 걸까. 미궁에 있던 호문쿨루스들은 한 마리도 남지 않고 알아서 소멸한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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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보스전은 물론, 그 어떤 방해도 받지 않고 활성화된 전이문까지 빠르게 도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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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이라고 해서 굳이 다시 인사를 하진 않았다. 전날 밤, 이미 충분히 마음을 나눴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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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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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숨을 내쉰다. 걱정도, 아쉬움도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마음이 편할 리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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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현자가 되면 보러 와야 해?’라는 말에는 끝내 대답하지 못했다. 쉽게 약속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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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 꼬맹이가 그렇게 단단히 마음을 다잡았는데, 나만 계속 미련을 붙잡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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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한 감정을 가슴 깊숙이 눌러 담고, 전이문에 손을 얹는다. 시스템 메시지가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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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층 전이문을 활성화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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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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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가벼운 부유감과 함께 시야가 빛에 휩싸이고- 다음 순간, 나는 새로운 세계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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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층의 배경은 몇 번이고 말했던 대로, 18층의 먼 미래다. 재앙이 닥친 후, 마법과 문명이 모두 몰락한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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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뮤니티의 정보에 따르면, 19층 초입 맵은 그 설정에 맞춰 잿가루가 날리는 황야라고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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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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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전이 특유의 울렁이는 감각이 사라진 후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어딜 봐도 황야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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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애초에 야외조차 아니었다. 바닥은 눈부신 흰 대리석, 고요하고 넓은 실내 공간. 마치 미술관 같은 분위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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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커뮤니티 정보와 계층 초입 환경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는 간혹 있었다. 방심은 금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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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뚜벅, 뚜벅, 뚜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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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공간을 울리는 느긋한 구두 소리. 저 멀리, 한 남자가 차분한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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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력 감지를 전개해 살펴본다. 강한 마력, 잘 다듬어진 기세- 그러나 근육이 제대로 쓰이지 않는 걸음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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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적으로 보아, 마법사가 틀림없었다. 내가 펼친 광역 감지에 그가 살짝 움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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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일찍 도착하셨으면 말씀이라도 해주셨으면 좋았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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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당황한 듯 외치더니, 이내 헐레벌떡 달려와 내 앞에서 허리를 굽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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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회에서 오신 감찰관분 맞으시죠? 이곳의 총책임자인 그레임입니다. 곧바로 안내해 드리면 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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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가슴팍에는 말한 그대로 ‘그레임’이라는 이름표가 붙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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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상했다. 19층에 이런 NPC가 등장한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협회는 또 뭐며, 감찰관은 무슨 소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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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신규 퀘스트가 생기는 건가 싶어 인터페이스를 열어봤지만, 퀘스트창에는 여전히 단 하나의 항목만 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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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급 산정이 완료된 에픽 퀘스트의 보상을 수령하라는, 18층에서 보던 것과 같은 메시지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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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뭐……그렇다고 할 수 있겠네요. 그런데 왜 제가 감찰관이라고 생각하신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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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재빨리 말을 골라 물었다. 아직 상황 파악이 되진 않았지만, 당장은 이 오해를 이용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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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 그거야 당연하지 않습니까. 마력 사용 허가도 되어 있으시고, 무엇보다 그 문장을 달고 계시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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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임은 웃으며 내 가슴팍을 가리켰다. 내 견장에 새겨져 있는 다크엘프 정찰대의 문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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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순간, 불현듯 어떤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나는 그레임의 반응을 무시한 채, 무작정 안쪽으로 달려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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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곳에서, 마주하게 되었다. 웅장한 존재감으로 서 있는 어떤 인물의 거대한 동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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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이어 헐떡이며 달려온 그레임이 숨을 고르는 사이, 나는 동상 아래 새겨진 이름에 시선을 고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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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의 현자, 에인 그레이 헤세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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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풍당당하게 로브를 걸치고 서 있는 동상의 인물은, 익숙한 형태의 완드를 손에 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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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회색 마탑의 초대 마탑주…역사상 가장 위대한 마법사로 기억되는 한 사람을 위한 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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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도달한 19층은- 그 꼬마의 이름이, 찬란한 역사의 일부로 새겨져 있는 미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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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관에는 회색 현자, 에인과 관련된 거의 모든 것이 전시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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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에 자주 입었던 로브, 직접 작성했던 노트의 사본, 연구 자료를 정리한 문서들,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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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이 포크를 그렇게 오랫동안 썼단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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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예전에 사줬던 어린이용 식기 세트같은, 온갖 잡다한 물건들조차 빠짐없이 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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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헤세드 경의 특이한 습관으로 유명했죠. 어릴 적부터 쓰던 식기를 늘 지니고 다니셨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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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임이 물건 하나하나에 담긴 사연을 해설해줄 때마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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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한 기억이, 조금은 낯선 역사가 되어 다시 다가오는 기묘한 감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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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된 건 그런 사소한 물건들만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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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관의 가장 깊숙한 곳, 그 끝자락에는 하나의 거대한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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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알아볼 리가 없는 마법진이었다. 세세한 부분은 다소 차이가 있었지만, 그 기본 구조는 그대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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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버워크의 노욕이 만들어 내었고, 적색 마탑주가 훔쳐냈으며- 에인이 마법을 배우는 계기가 되었던 그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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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가장 좋아하는 마법’, 타인의 마력과 회로를 억지로 빼앗아 이식하는 ‘강탈’의 마법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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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세드 경의 가장 위대하고 숭고한 업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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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을 요구하자, 그레임은 한층 경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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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의 칭호를 받은 마탑주께서, 작위와 가명인 ‘헤세드’를 부여받게 된 계기이기도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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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 중의 마력을 흡수해 저장하고, 이를 통해 타인에게 마력 회로를 새겨줄 수 있는- ‘나눔’의 고유 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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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세드 경은 이 마법으로 마법사와 비마법사의 경계를 허무셨습니다.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발상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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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인류가 마력의 혜택을 누릴 수 있게 만들어 준, 역사상 가장 위대한 마법이라 평가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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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 속에 남아 있던 작은 응어리가 스르르 녹아내리는 듯한 기분이었다. 저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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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마법을……이렇게까지, 이토록 대단한 것으로 바꾸어 내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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헛웃음은 어느새 환한 미소로 번졌다. 이렇게 기분 좋게 웃어보는 게 도대체 얼마 만이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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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입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일전에 편지로 말씀드린 지하 던전 몬스터 토벌 건으로 넘어가겠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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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쩔쩔매며 말을 잇는 그레임의 이야기를 손짓으로 멈추게 하고, 저 구석진 곳의 마법진에 대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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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하게 설명을 듣지 못한 마법진이면서, 조금 전부터 계속 내 마력과 공명하고 있던 마법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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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건… 헤세드 경께서 말년에 남기신 것입니다만, 아직 그 의미를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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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그때, 퀘스트 창이 반응하며 메시지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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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스트 보상이 지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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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에, 마법진이 빛을 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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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대한 마력이 흘러넘치는 빛 속에서, 회색 머리칼과 회색 눈동자를 가진 훤칠한 마법사의 환영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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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설지 않은 얼굴이다. 회색의 환영은 조용히 내게 다가와, 말 없이 두 팔을 활짝 벌려 나를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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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게 왔잖아, 진혁악마님. 어때, 나 완전 멋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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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음을 통해 전해진 익숙한 말투와 목소리, 나는 살짝 웃으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몰라볼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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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영은 곧 사라졌다. 그레임은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가, 눈을 휘둥그레 뜬 채 나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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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잠시 눈을 감고, 에인이 나를 위해 남겨준 무언가를 찬찬히 느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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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유 특성 : ‘천의 마술’을 획득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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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고유 특성, 우리 꼬맹이는 마지막으로 나를 위한 큰 선물을 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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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멀리서 요란한 발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뚜벅뚜벅, 실내에 울리는 구두 소리가 시끄럽게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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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이어 단정한 정복을 입은 한 무리가, 익숙한 문장이 새겨진 메달을 들고 들이닥쳤다. 그중 가장 앞선 이가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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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 감찰관이 나왔는데 여기 총책임자는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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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임은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고는, 다시 나를 쳐다보았다. 얼굴에 당혹과 혼란이 뒤섞인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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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런 그를 향해 피식 웃어 보였다. 뒤로는 아직도 미약한 잔광이 남아 있는 마법진이 조용히 사라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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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고 많으셨습니다. 전 이제 됐으니까, 저기 진짜 감찰관 양반 상대하러 가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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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가, 감찰관이 아니셨다고요? 그리고, 방금 그건 분명히… 당신, 대체 누구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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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의 질문에 바로 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잠시 시선을 돌려 동상 쪽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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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에인의 조각상이, 어쩐지 이 모든 상황을 즐겁게 지켜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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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좋은 구경 잘했습니다. 아, 그리고 그 지하 던전 몬스터는 제가 처리해 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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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지하 던전이 아마 이번 층의 미궁 지역이겠지, 말을 마친 뒤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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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뒤로 들려오는 소란과 당황한 외침들, 그리고 여전히 벙찐 얼굴의 그레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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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 녀석 진짜, 크게 될 줄 알았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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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부 어쩐지 유쾌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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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 시련의 탑 22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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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선한 바람이 목덜미를 스치며 땀을 식혀주고, 하얀 새가 창공을 가로지르며 울음을 터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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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커다란 나무 그늘 아래 돗자리를 펴고 앉아, 치즈돈까스 도시락을 먹으며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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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시련의 탑 22층의 외곽 사냥터, 하지만 몬스터는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다. 내가 다 죽였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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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냥터는 특이하게도, 24시간 동안 스폰되는 몬스터의 총량이 정해져 있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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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하루 안에 최대치만큼의 몬스터를 처치해버리면 그날은 남은 시간 동안 완전한 안전지대가 되는 구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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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루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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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즈돈까스 한 조각을 입에 넣고, 일취월장한 요리 실력을 발휘해 끓인 우동 국물을 한 모금 들이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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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에, 내 앞에 앉아 함께 도시락을 먹고 있던 검령 역시 국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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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 국이 너무 짠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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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처먹지를 말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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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먹으라 하지 않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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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자식, 기껏 챙겨줬더니 투덜댄다. 내가 그 우동 국물을 재현하겠다고 얼마나 노력을 들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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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둘이 답지않게 겸상한 채로 도시락을 먹고 있는 건, 조금 전까지 훈련 삼아 대련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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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층에서의 사건 이후 의욕이 붙은 나는, 20층과 21층을 쉬지 않고 밀어붙여 돌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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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층 모두 퀘스트의 볼륨이 상당하고, 기본적인 공략 난이도도 높은 편이라 시간이 꽤 걸리긴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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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두 층을 돌파하고 도달한 이번 22층은, 시련의 탑 전체 중에서도 손꼽히게 평화로운 계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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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남주원#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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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22층은 퀘스트가 진짜 이게 다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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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 잼민이 강아지 찾아주기랑 늙은이 지팡이 만들어주기 이딴거밖에 없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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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궁에도 몬스터 뒤지게 없고 마을 바깥에는 아예 몹이 안나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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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상하게 진행해서 후속이 없는거임? 아니면 원래이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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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ㅇㅇ원래 없는거 맞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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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기 원래 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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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끼 잡는퀘는 안받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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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ㄴ 그거 하면 뭐 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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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ㄴ 뭐 안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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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ㄴ 그럼 왜하는건데 ㅅ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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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ㄴ 퀘스트 주는 NPC가 ㅈㄴ 이쁨 동탄미시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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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ㄴ 동탄미시 ㅇㅈㄹ하네 그 퀘스트는 어디서 받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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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데 그 마을 경비대는 ㅈㄴ세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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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평화로운지, 22층 관련 정보를 커뮤니티에서 검색해봐도 건질 만한 건 이런 잡담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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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동탄 미시 느낌’이라는 퀘스트 NPC의 외형은 서버마다 편차가 심한데, 내가 있는 2661서버는 별로인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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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예쁘게 나왔다는 다른 서버의 스크린샷을 봐도- 다크엘프 누님들에 비하면 평범한 정도였던 걸로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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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이지, 킹갓황밤깐프를 거르고 좆좆좆좆 진영을 고른 놈들은 대체 어떤 녀석들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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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22층은 이렇게 퀘스트도 전반적으로 소박하고, 등장하는 몬스터도 층수에 비해 약한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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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는 이 기회에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며, 자체 단련과 양손의 재활에 집중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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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먹었으면 계속하자, 칼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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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냐, 마법석부터 제대로 끼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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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즈돈까스 도시락을 깨끗이 비운 나와 검령은 다시 무기를 들고 서로를 마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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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층에서 손상된 양손의 마력 회로는 아직도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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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막 발을 들여놓은 의념기 수련은 사실상 중단된 상태. 오러 운용에도 다소 차질이 생긴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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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는 오히려 발상을 바꿔, 한동안 손에서 놓고 있던 순수 검술 수련에 집중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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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현재 내 스펙은 이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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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혁 Lv.73 (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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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P : 1450/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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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P : 1200/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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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력 : 125 (1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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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첩 : 120 (1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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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구 : 128 (1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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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능 : 121 (1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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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은 그리 오르지 않았지만, 전체적인 스탯은 꾸준히 성장해 매우 높아진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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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이제 레벨과 클래스는 별 의미가 없는 느낌이다. 레벨업보다 단련과 업적으로 오르는 수치가 더 많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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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여겨 볼 점은 지능 스탯의 큰 성장이다. 전사라는 클래스 탓에 다른 스탯에 비해 많이 뒤처지는 편인 스탯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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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을 배우고 높은 수준의 오러를 다루기 시작한 덕분인지, 최근들어 유독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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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영향으로, MP 수치마저 전사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높은 수준까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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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세를 생각해 보면 조만간에 HP를 추월하게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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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마력회로의 손상 탓에 오른 스탯만큼의 퍼포먼스를 못 내고 있는 상황이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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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상층으로 올라가서 등급이 높은 포션이나 엘릭서 따위를 구할 수 있게 되면 알아서 해결될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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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탯도 스탯이지만, 스킬 쪽의 성장도 만만치 않게 올라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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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폰 마스터리 Lv.3] [오러 마스터리 Lv.3] [전투 각성 Lv.39] [전투 지속 Lv.39] [마력 지배 Lv.4] [마력 강화 Lv.3] [종합 원소 내성 Lv. 13] [종합 상태이상 내성 Lv. 10] [종합 대마법 내성 Lv. 9] [오색 정령의 가호 Lv.2] [라이트닝 차지 Lv.29][약점 간파 Lv.10] [초감각 Lv.8] [초재생 Lv.3] [혼신 Lv.16] [집광 Lv.17] [불굴 Lv.19] [도약 Lv. 8] [명상 Lv. 12] [위압 Lv. 4] [정신 오염 내성 Lv. 34] [정화 Lv.4] [사고 가속 Lv.13] [초급 요리 Lv.12] [초급 마법 Lv.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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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표시를 해도 길어 보이는 이 스킬 목록에서, 특히 주목할 만한 점이라면 [오색 정령의 가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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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층 클리어 보상으로 [광휘 정령의 가호]를 얻으면서, 기존 정령의 가호 스킬들이 모두 통합되어 생긴 신규 스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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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기본 성능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고, 가호 스킬에 붙어 있는 액티브 효과도 모두 그대로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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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층에서 배운 마법 스킬도 이제 3레벨, [명상]이나 [도약]같은 다른 스킬들도 고르게 성장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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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웨폰 마스터리]에 통합된 검술 스킬은, 세부 항목을 열어서 확인해 보니-[상급 검술 Lv.10]까지 성장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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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밖의 다른 무기술도 꾸준히 성장해 모두 상급에 이르렀고, 체술과 투척술 역시 모두 상급까지 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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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도면, 이 시련의 탑 세계에서 순수한 무기술만으로 나와 대적할 수 있는 도전자는 몇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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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최상층 랭커나 대형 길드 간부급이라면 얘기가 다를지도 모르겠지만, 절대로 뒤처지지는 않을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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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검술 실력을 계속 끌어올리려는 이유는 단순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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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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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중심이 약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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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순수한 검술로는 저 검령 자식의 경지에 미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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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몸으로 검 하나만을 갈고닦아, 끝내 마계까지 제패해버린 남자, 검령 칼레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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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날 전투 중에 허무하게 죽어나가는 탓에 허당처럼 보이지만, 그 검술과 기교만큼은 진짜중의 진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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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검령을 상대로 한 내 검술 대련의 성적은 23전 3승 20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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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까지나 검술 단련이 목적이기 때문에, 제약을 많이 걸고 진행하는 대련이긴 하지만- 처참한 전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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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즈돈까스 도시락을 해치우고 다시 진행한 대련도 결국 내 패배, 21패를 기록하며 오늘의 대련은 끝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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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한 [강철 직검]을 인벤토리에 넣고, 아쉬움이 담긴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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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환 지속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검령은 내 앞에 마주 주저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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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 이 나를 상대로 하고 있으니 당연한 결과지. 그래도 기죽지 마라, 네놈의 검술 실력은 놀라운 수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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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딱히 자학하는 건 아니다. 당장 운동도 제대로 안 하던 백수인 내가 여기까지 성장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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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뭣보다, 검뿐만이 아니라 다양한 무기술을 다루고…동시에 마법에까지 손을 대고 있지 않으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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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그것도 그렇다. 아직 대단한 수준은 아니지만, 19층 이후로 마법적인 성취도 나름대로 이루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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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내 마법적 성취는 에인이 내게 남겨준 유산- 새로 생긴 특성인 [천의 마술]의 영향이 압도적으로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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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손대고 있긴 한데……에인이 아니었으면 아직도 매직 미사일밖에 못 썼을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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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태창을 열어서, [강철의 혼]과 나란히 있는 [천의 마술]의 정보를 다시 확인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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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유 : 천의 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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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마법사가 평생을 걸쳐 쌓아올린 드높은 지혜의 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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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영혼에 새겨진 이 특성은 어떤 경우에도 사라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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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마법의 시전 시간과 소모 마력량이 50% 감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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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류를 불문하고 모든 마법의 캐스팅 시간과 마나 소모를 절반으로 줄여주는 미친 효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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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의 혼]에 비하면 살짝 뒤떨어지는 편이긴 하지만, 마법사 계열이라면 침을 질질 흘리며 탐낼 효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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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특성에는 설명에 적혀 있지 않은 한 가지 부가 효과가 또 존재한다. 사실, 그쪽이 메인이라고 봐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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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관측한 마법의 구조를 곧바로 이해하는 ‘마법 관조’ 효과. 내 영혼에 말 그대로 현자의 지혜가 새겨진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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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런 사기 능력을 갖추고 있음에도, 내가 쓸 수 있는 마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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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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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까지도, 기껏해야 이런 몇 종류의 원소 마법이 전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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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 출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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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의 마술]이 가져다주는 마법 이해 능력은 분명 굉장한 게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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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마법의 구조와 작동 방식을 이해할 수만 있을 뿐, 딱히 응용할 능력까지 주어지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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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유하자면, 컴퓨터의 구조를 이해했다고 해서 컴퓨터 한 대를 뚝딱 만들 수 있는 게 아닌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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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조금 맞지 않는 비유였나. 그래, 차라리 코딩에 비유하는 게 맞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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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정한 프로그램에 쓰인 코드를 싹 다 보여준다고 해도, 문외한이 그걸 그대로 재현할 수는 없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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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마법이라는게 그렇게 쉽게 입문할 수 있는 분야가 아니다. 당장 주문 언어나 룬 문자도 모르는 마당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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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청색 마탑주에게 받았던 마법서를 정독하며, 간단한 원소 마법 정도는 부릴 수 있게 됐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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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버워크의 마법이 무기로 쳤을 때 최신형 미사일이라면, 내 마법은 원시인의 주먹도끼쯤 된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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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일단 마력량만큼은 꽤 많아서 나름대로 위력이 나오긴 한다. 바위만 한 주먹도끼인 셈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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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 그 꼬마가 네게 넘겨주었다는 힘 덕분이랬나. 확실히 그 수준으로는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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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안에서 작은 화염을 피워낸 나를 보며 검령이 시비를 걸었다. 그러고 보니, 괜히 신경 쓰이는 점이 하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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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근데 너는 마지막으로 꼬맹이 못 본 건 아쉽지 않냐. 스승님이니 뭐니 했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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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검령놈도 어쨌든 에인을 꽤 아끼는 편이었는데, 마땅히 인사도 못 하고 헤어지게 된 게 아쉽지는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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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핫, 이 칼레온을 뭘로 보는 거냐. 검술의 끝을 보기 위해 육신과 세상마저 등졌던 몸이다. 그깟 게 뭐가 대수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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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긴, 검령도 처음부터 검령은 아니었을거다. 원래는 평범한 인간 검사였다가, 마계까지 발을 들여놓았다고 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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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면 검령의 과거 이야기는 딱히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걸 들어봤자 어디다 쓰겠느냐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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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에인과의 일 이후부터, 어쩐지 이런 쪽에도 조금씩 흥미가 생긴다. 알게 되면, 뭔가 바뀔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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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을 버리고 텅 비어버린 손이기에 비로소 검을 쥘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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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과 이별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다 보면 검날만 무뎌질 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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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놈도 의념기와 같은 더 높은 경지에 닿고 싶다면, 명심하는 게 좋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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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령은 뭔가 조언하는 것처럼 말하더니, 소환 시간이 다 떨어져 곧장 검으로 돌아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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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검령의 말을 곱씹으며, 오랜만에 인벤토리를 열어 [엘레노어의 영혼]을 꺼내 잠시 만지작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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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니까 저 녀석, 아직 내가 의념기를 쓸 수 있다는 걸 모르는구나. 부상 때문에 못 보여 줬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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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엘레노어의 존재를 떠올리며 의념기에 도달했고, 내 목적을 상징하는 불길을 구현해 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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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것을 버리고 또 버린 끝에, 마지막에 손 안에 남은 결코 버릴 수 없는 것- 나의 불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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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령은 아마도 의념기에 도달하기 위한 마음가짐을 말한 것이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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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검령에게 있어서 나의 불꽃과 대치되는 존재는- 그 손에 쥔 검 하나라는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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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어떻게 살았길래 그럴 수가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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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을 휘두르면서 성적 흥분을 느끼는 극한의 검술박이, 뭐 그런 거라도 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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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력회로를 복구하고 마법까지 만족스럽게 익히고 나면, 한 번쯤 이야기를 들어 봐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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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자기가 왕년에 잘 나갔다고 하니까, 안 들어볼 수가 없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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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롭게 단련에 힘쓰고 있는 만큼, 최근에는 커뮤니티를 들여다 보는 시간도 많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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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 언어와 룬 문자를 공부하고 있는 만큼, 같은 계열의 공부를 하는 도전자들과도 제법 이야기를 나누고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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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에 재미를 붙인 만큼, 요리 관련된 게시판에도 자주 들리며 교류하는 도전자의 숫자가 많이 늘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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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가끔 오는 개인 쪽지와 대화에 답장하며, 가볍게 커뮤질을 하던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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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임서준#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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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근데 슬슬 페스티벌 열릴때 되지않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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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3년은 좀 덜찼는데 이쯤이면 소식 하나쯤 올때된거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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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스티벌 NPC뜨기전까지는 아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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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메테오스톤 장비 개마려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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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직은 꽤 남았지 근들갑 ㄴ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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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간되면 몬스터가 편지드롭하는데 아직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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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ㄴ 편지는 모든몹이 다 드롭하는거임? 레벨상관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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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ㄴ ㅁㄹ? 근데 날짜 정해지면 시스템 캘린더인가에 뜰거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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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다음주쯤에 정보 풀리지 않을까? 역대 페스티벌 날짜보면 대충 이쯤에 뜨긴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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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스티벌 3년마다 무조건 열리는거임? 확실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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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ㄴ 그랜드페스까지 하고 끝나는거면 모를까 갑자기 없어지진 않을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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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테오스톤 장비 없어도 탑깨는데 아무지장없다 사냥이나 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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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띄는 제목의 게시물이 하나 있어서 들어가 보니, 페스티벌과 관련된 이야기가 벌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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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게시글을 시작으로, 다른 커뮤 망령들도 페스티벌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나씩 꺼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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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곧 떡밥이 크게 구르기 시작했고, 관심이 생긴 나도 흐름에 맡겨 글 몇 개를 쓰고 있을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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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섭최초)페스티벌 개최 편지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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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가 막힌 타이밍에 페스티벌의 개최 소식을 알려주는 편지 아이템을 먹었다는 도전자가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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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김지훈#13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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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전섭최조)페스티벌 개최 편지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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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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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구라임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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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어쩔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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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가 뭘 할 수 있는데이 좃밥새끼야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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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나 화내거나 댓글에 욕이나 패드립 하는거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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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할 수 있냐고 이 씨발좆밥같은새끼야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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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새끼는 작성자 눌러보면 서버 뜨는거 모르나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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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 내가 뭘 할수 있는지 똑똑히 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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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이야 뉴비같은데 어그로도 타이밍 봐가면서 끌어라 너 그러다 진짜뒤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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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ㄴ 뒤지기는 ㅋㅋ 내가 어디섭 누군줄알고 죽일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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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ㄴ 너 1397서버 김지훈이잖아 병신아 작성자 누르면 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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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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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ㄴ ?는 씨발 줘패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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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얘들아 진짜 편지 먹은사람 떴다 념글 ㄱ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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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내용은 예상한 대로 어그로였지만, 놀랍게도 몇 분 뒤에 정말로 편지를 먹었다는 도전자가 나타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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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 커뮤니티는 어마어마한 속도로 페이지를 갱신하며, 흥분의 도가니에 빠져들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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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25층 플로어 공략과 통산 5번째의 페스티벌, 어쩌면 타이밍이 겹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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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보자, 지난 페스티벌로부터 벌써 3년이 다 되어 가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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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공략하던 층이 6층이었고, 지금 있는 층이 22층이니까- 평균적으로 두 달에 한 층씩 깬 느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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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프 층처럼 시간을 오래 잡아먹은 층도 있고, 마계 층처럼 빠르게 지나온 층도 있었지만- 역시 엄청 느린 편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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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공략 중인 층수가 낮을 뿐이지 내 스펙은 이미 한참 상층 수준이니까. 마냥 느리다고만 할 수도 없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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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페스티벌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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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지난 페스티벌에 관해서는 좋은 기억이 별로 없다. 마무리가 그런 모양이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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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그렇다고 다음에 열리는 페스티벌에 참여하지 않을 생각인 건 아니다. 페스티벌 자체는 무척 좋은 이벤트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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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페스티벌도 돌이켜 보면 마무리가 찝찝했을 뿐이지, 즐길 거리 자체는 무척 많았던 걸로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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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그 때는 상황상 즐기지도 못하고 많이 겉돌고 있었지만- 지금은 또 사정이 다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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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뮤니티에서 요리나 룬 문자등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며 친해진 도전자들을 만나 봐도 좋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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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리젠 장난 아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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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손가락으로 스크롤을 슥슥 넘기며 구경하던 중, 다시 한번 눈에 띄는 게시글이 하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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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서버의 치안을 담당하고 있는 여러 길드 중, 가장 세력이 거대한 길드 측에서 올린 게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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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독)각 서버별 토너먼트 참여자는 미리 참가 의사 밝혀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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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스티벌의 메인이벤트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는, 전체 서버의 최강자를 가리는 토너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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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너먼트 자체는 시스템에 의해 진행되지만, 각 길드는 원활한 관리를 위해 미리 참가자들의 목록을 추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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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히 미리 참가 의사를 밝히지 않아도 상관은 없지만, 이게 또 일종의 출사표처럼 작용한단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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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기 넘치는 신흥 랭커들이 상층의 랭커들에게 도전장을 던진다든가, 뭐 그런 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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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런 출전 의사를 밝힌 도전자들은, 실제 토너먼트가 시작될 때까지 커뮤니티의 주인공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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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전자들 사이에서 알려진 스펙을 분석하여, 우승 후보를 추리고 가벼운 스포트 도박을 벌인다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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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당연히 누구누구가 우승할 거라며, 소위 말하는 갈드컵을 벌이거나 할 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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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이번에는 당연히 준태햄이 우승 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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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우승은 무조건 이새끼임……jpe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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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준혁은 이번에 안나오면 물로켓 확정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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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보자, 나도 양손의 마력회로를 복구하기 전에는 25층 도전은 미룰 생각이었으니까……마침 잘 됐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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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공략 중인 계층이나 레벨 따위로는 계측할 수 없는 내 스펙이, 다른 도전자들과 비교하면 어느 정도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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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살짝 웃으며, 호기롭게 출사표를 던지는 다른 랭커들과 마찬가지로 글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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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서진혁#26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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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이봐 커붕이, 슬슬 가지러 가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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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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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승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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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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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 시련의 탑 23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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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삼스러운 이야기지만, 나는 사실 커뮤니티에서만 유명한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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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이 등장한 지 15년이 다 되어가는 현재, 바깥세상에서도 헌터와 시련의 탑을 다룬 콘텐츠는 어마어마하게 소비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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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한적으로 공개되는 탑 내부의 소식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기사나 방송, 유튜브 렉카 채널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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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몇 인기 있는 헌터들은 연예인처럼 개인 방송이나 예능에도 적극적으로 출연하는 추세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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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등급의 헌터를 보유하는 것이 곧 국력으로도 이어지는 시대이니, 이 정도 관심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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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마당에, 전 세계에 단 한 명뿐인 솔플러인 내가 유명하지 않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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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유명세에 비해 정작 나에 대해 제대로 알려진 정보는 많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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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수밖에 없다. 내가 직접 밝히지 않으면 아무도 모르는 거고- 이제 나는 커뮤질을 잘 하지 않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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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처럼 강박적으로 멀리하는 건 아니지만, 굳이 내 일거수일투족을 보고할 생각은 없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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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강지호#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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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근데 걔 스펙은 어느정도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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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봤을때 19층인가 깨고 있었던거같은데 그럼 별로안쎈거 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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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플로 다 공략하니까 비슷한층 공략파보다는 훨쎄긴할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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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봤자 저층랭커급 아님? 걍 근들갑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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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혁이 말하는거면 걔 지금 21층인가 그럴걸 저번에 물어봤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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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ㄴ 22층 올라간지 좀됐을껄 나도 자세히는 모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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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근들갑이긴 함 ㅋㅋ 솔플로 보스잡는게 뭐 그렇게 어려운가 공략도 다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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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ㄴ ㅄ 니가 솔플로해봐라 20층 보스같은건 기믹못풀면 난이도 존나올라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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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혁이 직업도 전붕이라 별로 쎄진않을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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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솔직히 저층랭커급도 많이 올려쳐줬다고 본다 ㅋㅋ 랭커가 괜히 랭커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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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르겠음 근데 중층급한테는 못비비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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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인지, 내 참전 소식으로 한바탕 떠들썩했던 커뮤니티에도 슬슬 이런 글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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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유일무이한 솔플러라는 이색적인 타이틀 덕분에, 압도적 우승 후보로 추켜세우는 글들이 넘쳐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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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시간이 지나 분위기가 식으니, 점차 이런 식의 ‘냉정한’ 평가들이 올라오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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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도 당연한 일이다. 나는 내 스펙을 커뮤니티에 구체적으로 공개한 적이 거의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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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한 번 있긴 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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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지성의 힘을 빌려 월드 보스에 도전했던 9층, 그때만큼은 제법 상세히 스펙을 밝힌 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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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그 당시 내 스펙은- 지금보다 레벨도 20 정도 낮았고, 마력 강화도 아직 터득하지 못했던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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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나는 이미 6층 시절에도 저층 랭커인 최길현을 개처럼 팰 수 있었지만- 실력은 수치로 드러나지 않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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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그것도 최길현의 기본적인 기량이 바닥을 기고 있어서 이길 수 있었던 거였다. 실제로 스펙은 놈이 훨씬 높았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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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측해 보자면, 최길현은 딜타임이 되면 강한 스킬로 데미지만 넣고 빠지는 무뇌 딜러 노릇만 하고 있던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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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헌터협회의 높으신 분이어서, 고층의 랭커들도 놈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고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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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진짜 진지하게 진혁이 빠는새끼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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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진혁이가 16강은 충분히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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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 보스 솔플은 걍 클래스가 다른거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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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펙은 모르겠고 일단 와꾸가 궁금함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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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러 불을 지핀거긴 하지만, 아무리 그대로 잘 알지도 못하면서 자기들끼리 말이 너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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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평가하는 쪽은 기껏해야 25층 랭커 수준일 것이라고, 고평가하는 쪽은 최소 8강 안에는 들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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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토너먼트에 참가하는 도전자의 라인업에 따라 상황은 달라지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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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지난 페스티벌이랑 비슷한 수준으로만 나온다고 친다면……당연히 내가 우승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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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승컵, 가지러 간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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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커뮤니티를 둘러보며 페스티벌에 관한 소식을 찾아보다가, 인터페이스를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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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저번에는 제대로 못 즐기고 왔지만, 시스템이 진행하는 것 외에도 별의별 행사가 다 진행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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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스티벌의 메인이벤트인 토너먼트 말고도, 대형 길드의 주최로 열리는 온갖 콘테스트 같은 것들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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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인대회라던가, 요리 경연 대회라던가, 허수아비 극딜 대회라던가, 친선 스포츠 경기라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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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중간에 나오는 바람에 못 봤지만, 저번 페스티벌의 마지막 날에는 불꽃축제와 콘서트도 있었던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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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볍게 흥미가 있거나 구경할 행사들을 메모해 놓은 뒤, 자리에서 일어나 미궁 지역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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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위기는 거의 페스티벌 전야 수준이지만, 아직 진짜로 페스티벌이 개최되기까지는 꽤 시간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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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까지 22층에서 단련에 힘써도 되겠지만, 토너먼트를 대비해 실전 감각이 무뎌지지 않게 해 둘 필요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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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양손의 마력회로 손상을 회복할 방법도 찾고 싶으니- 대충 24층까지는 쭉 진도를 빼 두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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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층은 나도 조금 기대하는 부분이 있는 계층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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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하합니다. 시련의 탑 22층을 최초로 클리어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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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리어 보상 : ‘경험치’, ‘골드’를 획득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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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련의 탑 23층 전이문을 활성화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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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 클리어 보상 : ‘황금빛 양털’ 를 획득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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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 기여도 보상 : ‘인도하는 자의 지팡이’, ‘경험치’ 를 획득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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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일격 보상 : ‘인도하는 자의 지팡이’를 획득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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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층의 보스는 날개 없는 용을 닮은-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아무튼 특이한 생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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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은 너무 길어서 외우지도 못하고 까먹었고, 패턴은 너무 좆밥이라 외울 필요가 없었어서 기억이 안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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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층은 계층 자체가 매우 쉽게 설계된 만큼, 보스전 난이도도 매우 쉬운 축에 속했고- 보상도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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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 기여도 보상과 최후의 일격 보상 공통으로 나온 지팡이는 조금 특이한 기능이 달린 스태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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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 클리어 보상인 황금빛 양털은 장비나 소모품도 아닌 그냥 기타 아이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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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빛 양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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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영웅이 용에게서 훔쳐내었다는 황금 양털의 복제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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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우 가치가 높아, 비싼 가격에 거래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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푹신푹신하여 바닥에 깔고 눕기에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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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동안 골드를 쓰지 않아서 돈은 넘쳐나기에, 사실상 그냥 푹신한 방석을 얻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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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빛 양털]을 잠시 꺼내서 만져보고, 다시 인벤토리에 처박은 다음 23층으로 향하는 전이문을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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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의 울렁거리는 감각과 함께, 곧 생경한 세계가 펼쳐진다. 커뮤니티에서 본 것과 똑같은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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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층은 다른 계층과 비교해도 유독 특이한 배경인데, 그 특성 때문에 제법 ‘인기가 있는’ 층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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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롭게 펼쳐진 세계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하늘을 찌를 것처럼 높이 솟은 금속의 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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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사방에서 번쩍이는 마법과는 무관한 빛줄기,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돌아다니는 비행물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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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로 표현하기 쉽지 않은 복잡한 풍경이지만, 사실 이런 풍경을 간단하게 설명하려면 한 단어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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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사이버펑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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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층은 마법과 같은 중세 판타지적인 요소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 그저 퇴폐적으로 발달한 문명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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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들 말하는 사이버펑크 세계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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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문명에서 격리되어 온갖 판타지 세계를 여행하다 이런 곳에 와 보니, 정말 기분이 이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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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저렇게 큰 건물을 보는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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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이만 보면 거의 세계수만한 건물도 있다. 바깥 세계도 수십 년쯤 지나면 이렇게 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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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시각에만 의존해 세상을 파악하지 않는 몸이지만, 이렇게 위쪽 시야가 답답한 건 오랜만인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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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떨어진 장소는 아무래도 이 사이버펑크 도시의 외곽- 그중에서도 형편이 좋지 않은 동네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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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저기 쓰레기가 널려 있고, 고물 드론과 깜빡거리는 네온사인이 잔뜩 보이는 걸 보면 아마 맞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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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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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커뮤니티를 켜서 23층의 지도를 검색해보았다. 정말 드물게도, 23층은 아직 완성된 지도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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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버펑크 도시라는 특성 탓에 지리가 장난 아니게 복잡하기 때문이다. 맵 전체가 어지간한 미궁 이상이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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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미궁 지역이 있는 중심 도시나, 숙소 등을 얻을 수 있는 주요 지역은 거의 다 망라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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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에 적힌 설명을 읽어 보니, 별로 형편이 좋지 않은 동네인 것 같다는 내 추측은 정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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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그레이 캐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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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구잡이로 지어진 건물과, 불법으로 덧붙인 온갖 시설물들로 둘러싸여 있다는 우범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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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층의 주요 몬스터라고 할 수 있는 폭주 드론이나 폭주 사이보그도 자주 출현하는 장소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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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 층에나 있는 외곽 지역의 사냥터라고 보면 되려나. 그래도 좀 많이 구석진 곳이긴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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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도시로 가는 길은……이거 뭐 어떻게 가야 하는 거지. 지도로는 잘 모르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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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그러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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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일단 가볍게 마력감지를 펼쳐, 생명반응이 느껴지는 뒷골목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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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발소리를 죽이고 은밀하게 주위를 둘러싸기 시작한 시커먼 무리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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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버펑크 도시답게 몸에 기계 파츠를 이식한 껄렁거리는 불량배 놈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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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 어디서 온 샌님인데 우리 구역에서 어슬렁거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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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길을 모를 때에는 현지인한테 안내받는 게 제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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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공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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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능 수치에 비례해 공격력과 방어력을 포함한 모든 스탯을 크게 증폭시키는 스킬, 마력 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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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력강화는 말 그대로, 습득하는 것만으로 인생역전이 가능한 사기 스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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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내가 [혼신] 스킬로 얼마나 큰 이득을 봤는지만 봐도 대충 알 수 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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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신]은 단일 스탯을 순간적으로 증폭시킬 뿐이지만, 마력강화는 모든 스탯을 함께 증폭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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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단순히 4종의 스탯만 증폭시키는 게 아니라, 공격력과 방어력까지 증폭시킨다는 점이 특히 사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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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력 스탯이 증폭되면 공격력이 오르고, 내구 스탯이 증폭되면 방어력이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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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거기서 공격력과 방어력을 한 번 더 별개로 증폭시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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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질 전투력이 어마어마하게 상승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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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 더해서, 증폭 수준을 정하는 스탯이 지능이라는 점도 무척 사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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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력-민첩-내구의 세 스탯은 검을 나누면서 어림짐작해 볼 수 있지만, 지능 스탯은 겉으로는 티가 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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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에, 스킬을 사용한 순간 스탯이 얼마나 증폭될지 예측할 수 없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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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밖에도, 전사 클래스에겐 반쯤 버려지는 스탯인 지능을 유효하게 활용할 수 있다는 점이라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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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상 지능만 올려도 모든 스탯이 다 오르는 것과 마찬가지가 된다는 점이라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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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마력강화의 사기성은 일일이 언급하다 보면 끝도 없을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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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르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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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마력의 빛을 두르고 천천히 걸어오는 메르세데스에게서 어마어마한 압박감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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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히 기분 탓이 아니다. 새롭게 개화한 내 마력 감응 능력이, 흘러나오는 마력의 압박을 느끼고 있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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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습을 대비해 대형 방패를 꺼내 앞세운다. 무기도 에르웬이 만들어 준 가장 좋은 것으로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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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눈앞에 주먹이 닥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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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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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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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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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르게 방패를 들어 올리며 내구력을 최대한으로 강화했음에도 불구하고, 충격을 이기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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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트럭에 부딪힌 것도 아니고, 뭔 비행기랑 교통사고가 난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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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이 정도로 피지컬 차이가 나면 막아도 막는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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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젠장, 주먹이 부딪힌 순간 밀려난 방패에 머리를 맞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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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마에서 피가 난다. 출혈 자체는 별 상관없는데, 이러면 중요한 순간에 시야를 가릴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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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포션을 써서 회복해야겠는데- 라고 생각한 순간, 다시금 닥쳐오는 공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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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인지 주먹인지도 분간이 안 간다. 그냥 뭔가 번쩍이는 것밖에 안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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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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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도 방패로 어찌저찌 막기는 했지만, 그대로 몸이 주욱 밀려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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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팔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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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벤토리에서 꺼낸 포션은 충격파에 휩쓸려 박살 나고, 바닥에 흩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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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할 틈도 안 주겠다 이건가. 그 정도로 세면 방심이라도 할 것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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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생각한 것보다 버틸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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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7층에 막 진입했을 때의 나라면 첫 번째 공격에 아무런 반응도 못 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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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건 그냥 뭔 짓을 하건 눈으로 쫒을 수 없다. 마력감지를 통해 공격을 예측하고 막아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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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그러울 정도로 빠르고 강하지만, 저년의 검술 형태는 베리트인가 뭔가 하는 놈과 크게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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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아도 막은 게 아닌 마당에 그게 무슨 소용이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다 생각해 둔 게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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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찌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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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력강화를 사용한 메르세데스의 기척이 직감 스킬과 마력감지에 잡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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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두르는 검의 경로가 예측된다. 나는 그 경로를 가볍게 손짓해, 인벤토리를 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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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템 드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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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처박아 뒀던 대량의 갑옷과 방패를 동시에 쏟아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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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층까지 공략해 오면서 수십 개나 되는 보물상자를 털고 아이템을 입수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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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비 아이템은 보물상자만이 아니라 몬스터 드롭으로도 얻을 수 있다. 그리고 그 대부분은 사실 쓸모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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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용 제한 때문에 못 끼는 것도 있고, 그냥 성능이 어중간해서 굳이 착용할 필요가 없는 것들이 대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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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나는 만일의 상황을 대비해, 이런 예비의 예비 장비들도 어느 정도 강화를 해 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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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내구] 풀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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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강화만 해 두고 꺼내지도 않았던 갑옷, 방패, 무기, 아무튼 단단한 것들을 전부 쏟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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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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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세데스의 공격이 폭음을 일으키며, 꺼낸 장비들이 스티로폼 조각처럼 공중을 날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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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대량의 장애물을 공격 경로에 쏟아내는 것만으로, 충격은 크게 감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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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세데스의 공격은 마법이나 광역 스킬이 아닌, 그냥 무식하게 강한 참격과 타격일 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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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물리적인 벽을 만들어 내는 것만으로 어떻게든 막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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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냐 이건, 공간 마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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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레 어이없는 방식으로 공격이 막힌 메르세데스가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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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PC에겐 당연히 그렇게 보이겠지,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갑자기 대량의 물체가 소환된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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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를 비롯한 다크엘프들은 내가 허공에서 물건을 꺼내는 것을 ‘아이템 박스’라는 마법으로 인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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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건 마법이 아니라 그냥 시스템에 딸린 인벤토리 기능, 그 사용에는 아무런 소모 값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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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로, 이런 것도 가능하다는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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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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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흩뿌린 아이템을 밟고 공중으로 크게 뛰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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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세데스는 그런 나를 재빠르게 발견하고, 공중을 향해 공격을 날리려 시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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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번에도 나는 인벤토리에서 대량의 아이템을 쏟아냈다. 이번에는 그냥 자잘한 잡템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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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마력으로 주변을 감지할 수 있겠지만, 이렇게 대량의 장애물이 한 번에 소환되면 그것도 힘들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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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아냐고? 내가 마력감지를 터득한 뒤에 직접 실험해봤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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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가강! 카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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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세데스는 재빨리 검을 놀려 장애물들을 쳐냈지만, 나는 흩뿌려진 아이템을 다시 회수하며 뿌려 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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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릴 수 있는 건 아이템만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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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간에서 그랬던 것처럼, 금화 수백만 개의 형태를 한 골드도 뿌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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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까짓 잔재주로 시간을 벌 셈이냐, 인간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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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강! 카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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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세데스는 수많은 장애물을 쳐내면서도, 요란하게 움직이는 내 위치를 짐작하고 있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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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대충 예상했다. 저 녀석의 마력감지는 나보다 수준이 높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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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정도만 해도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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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위치를 어림할 수 있을지언정, 내가 무슨 동작을 하는지까지는 모르는 모양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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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메르세데스는 내가 장애물 사이에서 툭 튀어나와 기습공격을 감행할 것을 경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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쏟아지는 여러 물건 따위에 크게 신경을 뺏기지 않고, 내가 달려드는 것만을 경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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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 때문에, 갑작스레 날아드는 이걸 막을 수는 없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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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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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물 사이사이를 정확하게 통과하는, 내가 투척한 손도끼 한 자루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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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한 마력을 가진 존재는 마력감지에 더 쉽게 걸려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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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로 말하자면, 강한 마력을 품고 있지 않은 무생물은 감지에 쉽게 걸리지 않는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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쏟아지는 수많은 무생물이 단순한 눈속임이라고 생각하고, 오롯이 내 위치에만 신경을 쏟고 있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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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 때문에, 빠르게 날아드는 무생물의 존재를 눈치채는 것은 늦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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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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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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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한 무방비 상태에서 손도끼를 얻어맞은 메르세데스, 다만 상처는 크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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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겠지, 마력강화로 인해 방어력까지 크게 상승했을 테니까. 투척 한 방이 유효타가 되긴 쉽지 않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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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웅! 후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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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에 떨어진 아이템을 다시 회수하고 쏟아붓고, 잡템을 걷어차고 땅을 엎어버리며 장애물을 계속 늘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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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이사이로 쇠구슬이며 단검이며 손도끼며 하는 투척물을 또 계속해서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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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잖은 짓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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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유효타를 먹었기 때문일까, 이젠 방심하지 않고 제대로 쳐내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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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럴수록 점점 더 정신이 없겠지, 마력감지를 통해 내 위치를 추적하는 것도 힘겨워질 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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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녀석이 취할 행동은 뻔하다. 다소 무리해서라도 아이템의 산을 뚫고 나를 노리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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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과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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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예상대로, 메르세데스는 어마어마한 힘을 실은 돌진으로 아이템 더미를 뚫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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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어쩌나, 거긴 내가 있는 장소가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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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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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병신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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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세데스의 뒤편에서 튀어나와, 검을 휘둘러 녀석의 팔을 베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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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촤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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녀석은 베이자마자 바로 반격했고, 나도 팔을 베이고 말았지만 상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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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동등한 수준의 상처를 입었다면, [전투 치유]를 갖고 있는 내가 이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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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세데스가 내 위치를 착각한 이유는 단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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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끼로 사용한 것은 주변의 빛을 모아 광원을 생성하는 [집광]스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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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척물을 의식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메르세데스의 마력감지는 그 정확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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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광]스킬도 엄연히 마력을 사용하는 마법 스킬, 사용하는 순간에 마력이 모여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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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집광의 사용과 동시에 유지하고 있던 [라이트닝 차지]를 꺼서, 순간적으로 착각을 불러일으킨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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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한 결투에 이런 더러운 수를 쓰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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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씨구, 니들이 한 짓은 그럼 깨끗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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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없는 속임수에 당한 것이 분했는지, 부들거리는 메르세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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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비웃음과 함께 계속 공격을 이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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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템을 미친 듯이 쏟아내며 그 사이사이로 무기를 투척하고, [집광] 디코이를 통해 위치를 속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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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메르세데스는 점점 내 속임수와 기습에 적응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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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시간을 끄는 것 자체에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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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력강화는 강력하지만 어쨌든 지속형 스킬, 유지에는 당연히 마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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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 짓거리를 하기 위해 나도 MP를 소비하고 있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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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내가 [집광]스킬에 쓰는 분량보다 녀석이 마력강화에 쓰는 양이 더 많을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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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졸하고 비겁한 방식이라고 욕해도 소용없다. 공략은 원래 그런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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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보다 강한 적을 상대로, 온갖 방식으로 약점을 찾아 분석해서 쓰러트리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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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7층에 들어서자마자 이 녀석에게 당할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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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 패배 이벤트, 솔로 플레이의 특수성, 에픽 퀘스트 루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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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특수한 조건이 붙고 붙은 결과지만- 어쨌든 강대한 위협을 만났다는 건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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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당연히 공략법을 생각해 놔야 하는 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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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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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번 메르세데스의 후방을 잡고, 빈틈을 노려 검을 휘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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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미 예측하고 있었는지, 녀석의 검이 더 빠르게 내게 닥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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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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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러졌던 왼쪽 팔을 들이밀어 억지로 막아내고, 그대로 내 검을 내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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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뭘 위해서 지난 몇 주간 그렇게 단련에 매진한 거라고 생각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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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귀 뜯어버린다고 말했지, 이 새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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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촤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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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친 참격이 메르세데스의 왼쪽 귀와 어깨를 그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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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 그레이 캐슬의 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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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앞을 가로막은 불량배는 세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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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속으로 이루어진 팔을 달고 있는 덩치 좋은 놈이 둘, 번쩍거리는 의안이 달린 놈이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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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겉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지만, 내 마력감지에 걸리는 놈들이 총 여섯 명- 합계 아홉 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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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장 상태는 허리춤에 매여 있는 권총 비스무레한 물건이 하나 있는 정도, 이건 확실히 겉으로 식별하기는 어렵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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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드도 리얼스킨으로만 잔뜩 두른게, 돈 좀깨나 있는 녀석인가 본데……길이라도 잃으셨나? 으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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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으로 보이는 금속팔 남자가 건들거리는 걸음으로 다가와 그렇게 물었다. 그림으로 그린 듯한 불량함이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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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모드라는 건 이놈이 달고 있는 금속팔처럼 몸에 이식하는 기계 파츠의 총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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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얼스킨은 그중에서도 겉으로 보기에 맨몸과 잘 구분되지 않는 외형의 모드를 말한다던가, 고가라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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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 보스……잠깐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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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놈들은 어느 정도로 패야 적당할까 견적을 내고 있던 중, 후방에서 팔짱을 끼고 있던 의안 녀석이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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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라고 불린 기계팔 남자는 고개를 홱 돌렸다. 그리고는 의안의 남자와 귓속말을 나누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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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자식, 모드랑 프레임이 스캔이 안 돼. 내추럴이라고 뜨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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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내추럴? 진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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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아니면, 6등급 이상의 군용 스텔스 모드를 쓰고 있는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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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장히 작은 목소리지만 [초감각]을 가진 나에게는 선명하게 들린다. 처음 듣는 단어지만 대충 내용은 짐작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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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라고 불린 남자가 인상 쓰며 나를 쳐다보았다. 기계가 잔뜩 삽입된 몸이지만 표정은 잘만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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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하고 있구만, 여기서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 이놈들의 깜냥이 보일 것 같은데……한번 좀 긁어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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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삥 뜯는거 아니었냐, 고철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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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뮤니티에서 본 대로라면, 이 세계에서 ‘고철’이란 말은 이런 놈들에게 굉장히 심한 욕설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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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품질 모드를 장착한 놈들을 콕 집어 비하하는 말로, 대충 흑인한테 말하는 ‘검둥이’ 정도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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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팔은 장식이야? 쫄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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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이곳은 슬럼 내지는 빈민촌이다. 이렇게까지 말하면 분명 못 참는 놈이 하나쯤은 나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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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부터 말하자면, 정답이었다. 눈앞의 세 놈이 아닌- 저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다른 놈이 무언가를 발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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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력감지로 훑어보니 조그만 미사일이나 뭐 그런 것 같다. 위력은 모르겠지만 속도는 느리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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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한 번 맞아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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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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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란한 폭발음과 함께 먼지가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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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이 검은 연기에 휩싸였고, 바닥에는 불이 붙어 타닥타닥 타오르고, 내 몸은……음, 멀쩡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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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색 마탑의 일반 마법사들이 사용하는 공격 마법이랑 비슷한 정도인가. 그보다 살짝 센 것 같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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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력이 깃들지 않은 순수한 폭발 공격인 탓에, 위력을 구체적으로 가늠하기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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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신 렉스, 뭐 그딴 놈한테 바짝 쫄고 지랄이야? 그래가지고 니 구역은 지킬 수 있겠어? 어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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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새끼, 라토! 우리 구역에서 뭔 짓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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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가리 행세하고 있는 자식이 벌벌 떠는 게 답답해서, 내가 먼저 한 발 쏴 줬다. 불만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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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나한테 미사일을 쏜 놈은 이들과 같은 패거리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묘하게 험악한 분위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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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트 NPC는 아닌 것 같은데, 상당히 생동감 있는 놈들이다. 지켜보면 뭔가 퀘스트라도 생기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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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연기 속에서 [암영] 스킬로 몸을 감추고, 상황을 조금 더 지켜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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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토라고 불린 놈은 빨간 모히칸 머리를 하고, 비정상적으로 거대한 팔을 달고 있는 남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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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식하게 크고 기다란 양 팔을 이용해 고릴라처럼 움직이는데, 뭐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꼴사나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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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라토는 자신과 비슷한 모히칸 머리를 한 패거리 몇 명을 데리고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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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새끼가……우리 좆되게 하려고 작정했지? 아까 같은 놈 잘못 건드리면 다 같이 뒤지는 거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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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막아 세웠던 무리의 보스, 기계팔의 렉스가 인상을 쓰며 말했다. 사정은 대충 알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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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계에서 모드를 전혀 장착하지 않은 ‘내추럴’은 극소수의 최상위 계층에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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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놈들의 스캔에 ‘내추럴’로 나온 나는, 뭐가 됐건간에 든든한 뒷배경이 있는 것처럼 보였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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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아니면, 스캔조차 되지 않는 정체불명의 특수 모드를 장착한 위험 인물로 판단되었을 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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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봐도 거창한 조직은 아닌 이놈들로서는, 건드리고 싶지 않은 존재였겠지- 그걸 저놈이 쏴버린 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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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쫄기는 병신이, 그거 한 발 처맞고 산산조각난 거 보면 모르겠냐? 그냥 쌩 내추럴이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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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씨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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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보니 어디 별난 집안 도련님인가 본데, 죽여서 깨끗하게 묻으면 보복이고 뭐고도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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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토 패거리와 렉스 패거리는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언쟁을 이어나갔다. 슬슬 사태의 윤곽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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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철이라고 떠드는 새끼는 다 뭉개버린다고 지껄이던 놈이, 나이 좀 먹었다고 아주 겁쟁이가 다 됐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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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락서니를 보니 그동안 업그레이드는 하나도 안 했나 본데, 그딴 떨거지들이랑 왕 노릇 하느라 고생이 많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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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너도 고생 그만하고, 이제 그만 은퇴나 해라. 네 그 구식 모드는 내가 좋은 곳에 비싸게 팔아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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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 불량배들끼리의 세대교체가 이루어지려는 상황 같다. 저 모히칸 패거리가 여길 잡아먹으려는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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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나 두들겨 팬 다음 따까리로 삼아서 길안내를 받을 생각이었던 나에게는, 꽤 괜찮은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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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때맞춰 퀘스트가 발생했다. 제목은 오픈 커뮤니티에서 봤던 그것과 정확히 일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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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스트 발생 : 그레이 캐슬의 갱단들 - 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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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 : 당신은 그레이 캐슬의 뒷골목에서 벌어지고 있는 갱단 간의 충돌 현장을 목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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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사람이라면 조용히 자리를 피하는 게 상책이겠지만, 당신에겐 더 멋진 선택지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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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갱단 중 하나의 편에 서서 항쟁을 승리로 이끈다면, 무언가 보답을 받을지도 모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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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스트 목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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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이언피스트 갱단을 돕기(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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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레드 파이어즈 갱단을 돕기(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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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층의 주요 서브 퀘스트로 알려져 있는 갱 퀘스트가 이런 식으로 시작하는 거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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갱단의 이름은 듣던 것과 다르지만, 서버에 따른 차이거나 최초 진행 퀘스트라서 그런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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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곧바로 [암영]스킬을 해제하고, 두 패거리 사이를 당당하게 가르고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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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케이, 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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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퀘스트도 필수 목표가 없고, 갱단을 돕는다는 선택 목표만 두 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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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굳이 선택 목표를 고르지 않아도 퀘스트는 진행할 수 있다는 것- 그렇다면 다음은 뻔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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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갱단 중 하나를 돕는다는 선택지를 고르지 않고, 이 퀘스트를 진행하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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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쥐어패면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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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쪽 갱단을 공평하게 다 때려잡고- 내가 이 구역을 먹으면 되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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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련의 탑에서 히든 피스를 찾으려면 이 정도는 당연히 해 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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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가지 않는 길을 가는 것, 쉬운 길을 두고 구태여 어려운 길을 찾아가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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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미사일을 맞는 모습을 정면에서 봤던 렉스는, 놀란 표정으로 한 발짝 뒷걸음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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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안 뒤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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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일을 쏜 장본인인 라토 역시, 인상을 구기며 그 큼직한 팔을 빙빙 돌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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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중- 찌릿거리는 감각과 함께 무언가 얕은 파장이 내 몸 위를 스쳐 지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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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장이 발생한 지점은 라토의 뒤편, 모히칸 머리를 한 또 다른 남자- 뭔가 스캔을 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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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추럴은 맞는데……에너지 쉴드라도 갖고 있었나 보지? 돈이 어지간히 많은가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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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는 투를 보니, 스캔의 결과를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 눈치다. 스캔의 정확도에 자신이 있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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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구식 모드니 업그레이드니 떠들어 댔던 걸 보면, 저 모히칸들은 상당히 좋은 모드를 쓰고 있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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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 알량한 쉴드가 너를 얼마나 지켜줄 수 있을 것 같냐. 내추럴 자식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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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컥! 철컥! 철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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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토의 커다란 양팔이 금속음과 함께 변형한다. 철컥거리며 변화한 팔의 모습은- 마치 대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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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위이잉’ 하는 동작음과 함께, 대포로 변한 팔이 탄환을 쏘아낸다. 조금 전에 맞은 미사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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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거리에는 이쪽도 원거리로 대응해볼까. 인벤토리에서 쇠구슬 하나를 꺼내 냅다 투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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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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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에서 요격된 미사일은 허무하게 산산조각이 나서 흩어졌다. 라토의 눈이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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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뭐야, 쉴드가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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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청하게 말을 흘리는 라토의 앞으로 [도약]과 [신속]을 사용해 단숨에 접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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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력회로가 손실된 손으로는 아주 조금의 오러밖에 발현하지 못하지만, 딱 보니 오러까지 필요하지도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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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볍게 [철벽]스킬만을 발동한 뒤, 놈의 꼴사나운 팔을 주먹으로 힘껏 내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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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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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포로 변한 커다란 팔이 나무젓가락처럼 꺾이며, 그 안에 장전되어 있던 포탄을 뱉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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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과광, 쏟아진 포탄이 폭발을 일으키며 라토의 양팔과 어깻죽지가 휩쓸려 파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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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악한 표정의 라토는 이를 악물고 등 뒤로 힘껏 뛰더니, 갑자기 힘껏 고개를 까딱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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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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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놈의 머리를 장식하던 빨간 모히칸 헤어가- 주먹만 한 크기의 총구로 변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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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뭐야 저게. 모히칸이 무기가 됐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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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히칸이 변형해 만들어진 총구에 묘한 열기가 모인다. 마력이 아닌 다른 종류의 파괴적인 에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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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탄을 쏘아내는 양팔과는 다르게, 에너지를 모아서 쏘는 무기- 하지만 그래서 오히려 뻔하기 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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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력감지를 통해 그 위력과 형태가 가늠할 수 있다. 저 모히칸 캐논은……존나 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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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병신같은 무기를 다 보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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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꽈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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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토의 모히칸 머리는 내 주먹 한 방에 찌그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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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 인수합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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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놈들은 어딜 어떻게 봐도 별로 대단한 조직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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갱단이라고 영단어로 칭하니까 괜히 있어 보이는 것뿐이지, 그 근본은 그냥 동네 깡패 새끼들밖에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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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렇게 별 대단치도 않으면서 무리지어 다니는 놈들의 최대 특징은 언제든, 강약약강이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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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사되지도 못한 채 찌그러진 모히칸 캐논, 바닥에 엎어져 버린 놈들의 대장 라토. 상황 파악은 끝났을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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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히칸 패거리는 서로의 눈치를 살피며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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냅다 등을 보이며 달려도 모자랄 판이지만, 저렇게 눈치를 살피고 있는 것 역시 이런 놈들의 또 다른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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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튀기에는 가오가 상하는 거다. 그게 아니면 보스를 두고 그냥 도망치기 좀 그렇다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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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니들 두목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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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엎어진 라토의 머리를 발끝으로 깡깡 차대며 물었다. 대답하는 놈은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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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숨을 쉬며 다른 놈들도 다 쥐어팰 생각으로 앞으로 나선 순간, 후방에 있던 모히칸 한 놈이 무기를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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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토의 빨간 모히칸이 포신으로 변했던 것처럼, 놈은 검은 모히칸을 네 발의 총구로 변환시켜 나를 겨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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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두두두두두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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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른 속도로 회전하며 탄환을 쏟아내기 시작한 모히칸 기관총, 나는 [사고 가속]을 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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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리게 흘러가는 세상 속에서 쏟아지는 탄환의 궤적이 선명하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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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태까지의 공격들과는 다르게 탄환의 속도가 매우 빠르다. 피하기도 애매해서 그냥 맞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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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팅! 티딩! 티디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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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벽]스킬을 사용하고 [혼신]스킬로 스탯을 증폭시키자, 너무나 손쉽게 튕겨나가는 탄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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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력은 그냥 따끔하기만 한 정도다. 실탄이 아니라 비비탄 총 세례를 맞고 있는 정도의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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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쏟아지는 탄환을 무시하고 앞으로 걸어가, 공격을 계속하고 있는 모히칸을 뜯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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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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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전기가 끊어진 로봇처럼 픽 주저앉아 버리는 검은 모히칸의 깡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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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지, 단순히 헤어스타일을 통일한 게 아니라 이 모히칸이 이놈들의 주요 파츠였던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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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좋다. 나는 뜯어낸 모히칸을 던져버리고, 남아 있는 다른 모히칸들에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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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들 두목이 누구야, 이 중에서 제일 높은 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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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 히익! 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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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튈 생각 말고 대답을 하라고, 닭벼슬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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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채 도망가려는 또 다른 모히칸의 다리를 로우킥으로 분쇄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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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남은 모히칸들은 벌벌 떨면서 손가락으로 바닥에 쓰러진 붉은 모히칸, 라토를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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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그러면 이놈 다음으로 높은 놈은 누군데, 부두목이나 그런 거 있을 거 아니야. 차기 두목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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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히칸들은 이번에도 쓰러져 있는 검은 모히칸을 가리켰다. 조금 전에 기관총을 쏘던 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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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다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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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묻자, 모히칸들은 저마다 웅성거리며 연공서열이 어쩌고 하며 누군가를 떠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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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언쟁 끝에 떠밀려 나온 녀석은 이번에도 검은 모히칸을 달고 있는 놈이었다. 행동대장이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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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대장 모히칸은 다가오는 나를 보며 쩔쩔매다가, 이내 ‘헛!’ 하고 숨을 내뱉더니 대뜸 고개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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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혀, 형님께서 이제 우리 두목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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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눈앞에 떠오르는 시스템 메시지- [보스의 자격]이라는 업적이 달성되며 보너스 스탯을 획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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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스트 완료 : 그레이 캐슬의 갱단들 - 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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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두 갱단 사이에서 한쪽의 편을 들라던 퀘스트도 완료되며, 경험치와 골드가 보상으로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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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곧바로 후속 퀘스트가 발생했고, 나는 발걸음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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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금속 팔이 인상적인 아이언피스트 갱단의 두목인 렉스라는 놈을 향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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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니들 보스는 누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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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층 진입으로부터 45분째, 나는 이렇게 갱단 두 개를 먹어치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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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층의 갱단 퀘스트는 이제까지의 층에서 종종 있었던 진영 퀘스트와는 조금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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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진영에 소속되어 쭉 해당 루트를 따라가는 방식뿐만이 아니라, 무척 다양한 선택지가 있다는 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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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소속된 갱단을 뒤통수친다거나, 갱단의 보스를 암살하고 자신이 보스를 먹는다거나 하는 짓도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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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공권력에 갱단을 넘겨버리는 것도 가능하고, 복수의 갱단에 양다리를 걸쳐 극한까지 이득을 취하는 것도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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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이 그럴 생각이 없다 하더라도, 시스템이 퀘스트의 형식으로 이런 선택지들을 계속 들이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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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내 앞에도 그런 선택지라고 해야 할지- 아무튼 묘한 퀘스트 하나가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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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 캐슬의 갱단들 - 인수합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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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 : 당신은 그레이 캐슬의 뒷골목을 점령하고 있는 갱단을 무력으로 무릎꿇려, 산하로 흡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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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기간 반목하며 균형을 유지해온 두 갱단이 흡수 통합되었다는 사실은 뒷골목에 큰 파란을 불러오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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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같은 파란은 분명 여러 종류의 분쟁과 혼란을 낳을 것이며, 이에 대처하는 것은 온전히 당신의 몫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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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스트 목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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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름없음)갱단을 그레이 캐슬의 정점에 올려놓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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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선행 목표 달성 시 개방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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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선행 목표 달성 시 개방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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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선행 목표 달성 시 개방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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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 커뮤니티에 검색해 보니, 에픽 퀘스트처럼 나 혼자만 받은 퀘스트는 아닌 듯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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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대부분이 첫 번째 목표를 조금도 달성하지 못하고, 다른 루트의 퀘스트로 빠지게 됐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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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목하고 있는 십수 개의 갱단을 도전자들이 내키는 대로 돕는 구조상, 달성하지 못하는 게 당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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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 길드가 작정하고 퀘스트를 통제한다면 어떻게든 될 수도 있겠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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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나 이외의 도전자가 존재하지 않는 이 2661서버에서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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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한번 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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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말씀이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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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스트 창을 들여다보며 뱉은 혼잣말을 듣고, 검은 모히칸……이었던 갱 녀석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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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아이언피스트 갱단의 아지트, 23층은 숙소를 구하기 어려운 편이기에 나는 이곳을 거처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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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더럽고 죄다 쇳덩이들밖에 없어서 살풍경하지만, 그래도 드러누울 수 있는 소파 정도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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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인수합병, 그레이 캐슬에 있는 갱단 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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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그레이 캐슬을 통합하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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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딱한 소파에 [황금빛 양털]을 깔고 드러누운 나를 향해, 전직 모히칸 녀석이 화들짝 놀라며 되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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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왜 모히칸이 아니라 전직 모히칸이냐면……내가 꼴 보기 싫어서 모히칸 싹 다 뽑으라고 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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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전직 모히칸이다. 참고로 대체할 헤어 파츠가 없어서 전직 모히칸들은 싹 다 대머리인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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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근데 그게 그렇게 놀랄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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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님, 형님은 다른 구역에서 넘어오신 분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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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구역, 대충 그렇지? 근데 그게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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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히 내 무력에 의문을 표하거나, 다른 거대 갱의 존재를 우려하는 것이라면 그냥 무시할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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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내 밑으로 들어오게 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싹싹하게 굴고 있는 이놈의 표정은 뭔가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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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창백하게 질린 것이, 그런 말을 꺼내는 것 자체가 문제라는 것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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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내가 설명해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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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벌 떠는 대머리를 어깨로 밀치고 앞으로 나온 것은, 아이언피스트 갱단의 전 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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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팔을 가진 사나이, 렉스는 괴담을 이야기하듯 운을 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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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 캐슬에는 사신이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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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층의 세계는 엘리시온이라 불리는 거대한 강철의 낙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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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해로 오염되어 더는 살 수 없게 된 바깥세계를 버리고 이주해 온, 인류를 위한 닫힌 이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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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실제로 그 이름과 어울리는 ‘이상향’은 엘리시움 중앙의 화이트 그리드- 혹은 가장 중앙인 유토피아 시티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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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 존의 바깥은 방향에 따라 레드 그리드니 블루 그리드니 하는 색깔로 불리며, 각각 다른 특성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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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곳, 그레이 캐슬은 엘리시온의 끝자락- 온갖 혐오시설이 모여있는 낙원의 그림자와 같은 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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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색도 청색도 황색도 구분 없이, 한데 뒤섞여 쓰레기와 같은 회색으로 물드는 성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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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질서가 곧 질서인 무법지대- 그런 설정이라고 커뮤니티에서 읽은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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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갖 씨발것들이 모이는 그레이 캐슬에도 역사가 있어, 그래 봤자 족보싸움이 거의 다지만, 뭐가 있기는 있다 이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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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그레이 캐슬의 역사에 이름을 남긴 전설적인 갱이 세 명 있었는데, 누군지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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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레드 잭슨, 조니 엑스, 그리고 제이 토멘트……이 세명은 그레이 캐슬에서 나고 자란 새끼들이면 모르는 놈이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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렉스는 그렇게 말하며 잠깐 씨익 웃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강철팔을 대뜸 내 앞으로 들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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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제이 토멘트의 마크지. 저기 자빠져 있는 닭벼슬 새끼랑 나는, 예전에 제이의 갱단에 함께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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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팔에 새겨진 문양은 렉스가 입고 있는 옷에 그려진 아이언피스트 갱단의 마크와도 비슷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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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우……어차피 이건 궁금하지도 않겠지. 아무튼, 계속 말하자면, 그 세 명이 전설인 이유는 다른 게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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렉스의 한쪽 눈알이 파랗게 빛나며, 가까운 테이블에 홀로그램을 그려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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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놈들 세 명 모두가 이 그레이 타운을 한 번 통합하거나, 통합 직전까지 갔던 놈들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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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그램이 나타낸 것은 그레이 타운의 어느 뒷골목 풍경- 그리고, 누군지 모를 사람의 시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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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뒈졌거든, 원래 살아있는 새끼들은 전설이 못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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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체의 오른팔에는 렉스가 보여준 것과 똑같은 마크가 붙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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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 회색 성채의 사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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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그레이 캐슬을 통일한 건 뉴로그레이브라는 갱단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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놈들의 대가리인 드레드 잭슨은 ‘기관총 드레드’라고 불렸지. 지 앞길 막는 놈들은 전부 갈겨버리는 걸로 유명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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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레드는 온갖 미친놈들이 우글거리던 그레이 캐슬을 압도적인 힘으로 밀어버리고, 자기가 이 회색 지대의 왕이라고 선언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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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새끼는 이상할 정도로 ‘왕’이라는 단어에 꽂혀 있었지. 머리는 별로였던 것 같은데, 어디서 주워들은 말에 빠진 거겠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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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드레드가 진짜 어떤 놈이었는지는 나도 잘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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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지금도 말야, ‘그레이 캐슬 역사상 제일 셌던 갱단이 뭐냐?’ 하면, 뉴로그레이브부터 꼽는 놈들이 아직 꽤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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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 그 새끼들 시절엔 기저귀 차던 놈들이 지껄이는 거지만, 그래도 그 정도로 뉴로그레이브가 셌던 건 맞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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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정작 그 두목인 드레드는, 그레이 캐슬을 통일하고 바로 다음 날에 뒈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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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죽였는지, 어떻게 죽였는지, 아무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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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을 선언한 다음 날에 갑자기 사라져서는, 며칠 뒤에 시체로 떴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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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도 그냥 죽은 게 아니야. 시체가 완전히 갈기갈기 찢겨 있었고, 이식했던 모드나 프레임까지 멀쩡한 데가 없었다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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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그때는 그걸 이상하게 생각하는 놈들은 없었어. 애초에 드레드 자체가 그냥 무식한 병신이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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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관총 드레드’라니까 뭔가 있어 보이긴 하는데, 그 시대를 진짜 살아본 놈들은 다 안다나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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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새끼는 그냥 별명대로 총만 존나게 갈겨댔을 뿐이고, 뉴로그레이브를 진짜로 키운 건 그 밑에 있던 부하들이었다는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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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정도 세력이 커지고 난 후에는, 그레이 캐슬의 통일이라는 목표에 끌려 제 발로 합류한 놈들이 더 많았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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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렇게 들어온 놈들은 처음엔 고분고분했어도- 드레드가 얼마나 멍청한지 알고 나선 점점 말을 안 들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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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그 중 하나가 뒤통수 갈기고 죽인 거겠지, 다들 그렇게 생각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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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레드가 뒤지자마자 뉴로그레이브는 바로 쪼개졌어, 좀 치는 놈들이 죄다 자기가 다음 보스라고 나섰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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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나서는 다시 혼돈의 시절이었지, 자기가 드레드를 죽였다고 허세 떠는 놈들도 많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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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쪼개진 뉴로그레이브 잔당과 새롭게 생겨난 갱단이 다시 통일된 건, 그로부터 15년 뒤의 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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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로그레이브가 그레이 캐슬에서 가장 거대하고 강력한 갱단이었지만, 정작 보스였던 드레드는 그냥 병신이었다고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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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말야, 그다음에 나타난 놈은 달랐어. 조니 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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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새끼는 드레드랑은 아예 급이 달랐지. 갱단의 세력은 작았지만, 그냥 그레이 캐슬 통틀어 제일 센 놈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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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용 수준의 프레임이랑 모드를 몸에 떡칠하고, 자기 측근 몇 명만 데리고 다니면서 근처 갱단을 하나씩 다 조졌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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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튼, 파괴적이라는 말이 존나 잘 어울리는 새끼들이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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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 망나니처럼 굴지도 않았고, 통제가 안 되는 부하도 없어서, 드레드보다 훨씬 빠르게 통일을 이뤄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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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놈이 그레이 캐슬을 통합해서 뭘 하려고 했는지는 아무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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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하면, 순식간에 갱단을 통합한 그 녀석도 뭔가 뜻을 밝히기도 전에- 드레드랑 비슷한 꼴로 뒈져버렸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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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보스인 조니 엑스만 뒈진게 아니었어, 놈과 함께했던 부하들도 함께 시체로 발견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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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부터 시작된 거야, 그레이 타운을 통합한 놈들은 모두…사신에게 죽임당한다는 소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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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소문에 쐐기를 박은 게, 제이 토멘트의 죽음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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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 타운 통합을 이루거나, 통합에 가까워지기라도 하면 곧 사신에게 죽임을 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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렉스의 이야기를 요약하자면 그렇게 정리할 수 있었다. 후반부에는 거의 자기 추억담이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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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신이라는 놈을 실제로 본 사람은 없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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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문득 궁금해져서 물었다. 렉스는 이를 아득바득 갈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기에 비로소 ‘사신’이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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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격자도 데이터도 없다. 나도 제이의 죽음 이후 온 힘을 기울여 찾아봤지만, 건질 만한 건 아무것도 없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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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격자가 아무도 없다는 건 확실히 이상한 일이다. 이 사이버펑크 세계에 드론이나 카메라 따위는 널려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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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듣자하니 모드를 장착하기 위한 핵심 부품인 ‘프레임’에는 모두 블랙박스가 붙어 있다고 하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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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에게 당한 것으로 추측되는 시신의 블랙박스는 모두 고장 나 데이터가 사라진 상태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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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P라도 맞은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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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이버펑크 세계에도 흔하지는 않지만 EMP장비가 있다고 하니, 그거라면 대충 설명이 되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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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문득 궁금해져서 렉스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더 던졌다. 물론 대답은 모두 시원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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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렉스는 내가 ‘사신’에 대해 궁금해한다는 사실 자체를 신경 쓰는 듯하더니, 작게 귓속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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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내 추측이지만……사신은 엘리시온 정부가 파견한 살수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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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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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 캐슬이 통일된 조직이 된다면, 도시를 위협할 전력이 될 테니까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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렉스는 그렇게 말하고는, ‘그러니 괜히 갱단 통합 같은 터무니없는 소리는 하지 마라’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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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오히려 더 흥미가 생긴단 말이지. 히든피스를 찾는 입장에서는 특히 더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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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조금 천천히 진행할 생각이었지만, 빠른 시일내에 그 ‘사신’을 한번 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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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지도 같은거 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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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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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어, 아까 그거 비슷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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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은 그레이 캐슬에 존재하는 갱단 세력과 그 위치에 대해서부터 좀 알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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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라면 제가 정리해 뒀습니다 형님! 프레임 아이디 알려주시면 바로 데이터 전송해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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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그런 거 없어, 들고 다니면서 볼 수 있게 뽑아서 가져와. 여긴 태블릿 같은 건 없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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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블릿이라니, 그런 언제적 구닥다리 골동품을……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금방 가져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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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모히칸 현 대머리 깡패에게 얇은 태블릿 하나를 받아, 지도를 살펴보고 적당한 동선을 생각해 길을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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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먹어치운 두 갱단을 제외하고, 이 그레이 캐슬에 존재하는 다른 갱단의 숫자는 총 스물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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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들도 따라와서 길 안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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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렇게 말한 뒤, 검을 뽑아들고 아지트 바깥으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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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지는 지도에 표시된 지점, 그리고 목표는 그 지점까지 향하는 길에 있는 모든 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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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 캐슬은 엘리시온의 외곽 지역을 칭하는 말이니, 그냥 크게 한 바퀴 빙 돌면 되는 동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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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스티벌 개최 전까지 23층을 깨 놓으려면, 이 정도는 하루 만에 처리해 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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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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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근과 콘크리트가 뒤섞인 폐건물이 우르르 박살 나며, 거대한 기계 병기가 착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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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소스켈레톤이라는 이름의 장비를 장착한 갱단 두목, 이름은……뭐더라, 관심이 없어서 안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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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그 갱단 두목이 어디선가 기묘한 무기를 가져와 장비하고는, 내게 겨누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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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깝죽대는 것도 거기까지다, 좆같은 뮤턴트 새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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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위력에 상당히 자신이 있는 무기인지, 놈은 위풍당당한 태도로 지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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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뮤턴트는 또 뭐야. 그러고 보니 조금 전에 박살 냈던 갱단에서 누가 비슷한 말을 했던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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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스캔을 돌려도 금속 부품이 보이질 않으니, 이제는 나를 생체 병기 같은 걸로 착각하고 있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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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저건 뮤턴트를 죽이는데 최적화된 병기라고 보면 되는 걸까나, 한 번 맞아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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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같은 새끼들한테는 이게 딱이지, 고주파 위상 교란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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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모를 갱단 두목의 무기가 불을 뿜었지만, 나는 그 자신만만한 공격에 한숨만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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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주파 위상 교란기, 생긴 건 다르지만 조금 전에 다른 녀석이 사용했던 무기랑 똑같은 이름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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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명 효과로 분자 결합을 흐트러트려 생물을 증발시키는 광선을 쏜다던데, 나에게는 전혀 통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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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리가 어떻건 간에, 단순히 에너지를 방출해 신체에 영향을 미치는 계열의 무기는 내게 일절 통하지 않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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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벽]스킬을 사용하거나, 마력강화를 사용하거나, 어쨌든 마력을 쓰면 모두 평범하게 방어할 수 있는 공격밖에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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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고작해야 23층의 NPC인 이놈들의 무기가 내는 출력으로는, 내 마력 방호를 뚫을 수 있을 리가 없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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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갖 첨단 기술이 적용된 병기도, 마력이라는 초월적인 힘의 존재 앞에서는 모두 평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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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트닝 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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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지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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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사된 광선을 무시하고 접근해, 놈의 엑소스켈레톤인가 하는 장비를 전격으로 지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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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니저러니해도 결국 기계들이라서 그런지, [라이트닝 차지]와 [대전]을 이용한 공격이 아주 잘 먹혀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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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나름의 보호 장비가 있는 모양인지, 몇몇 놈들한테는 아예 막힐 때도 있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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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허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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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병기가 과전류에 의해 기능을 정지하자,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쓰러진 갱단 두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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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이놈의 부하들은 죄다 비슷한 꼴로 뻗어 있다. 이걸로 마지막이었던 이 갱단도 사실상 전멸한 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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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놓친 갱단이 더 있는 게 아니라면, 슬슬 퀘스트창에 변화가 일어날 참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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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 캐슬의 갱단들 : 퀘스트 목표가 갱신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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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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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스트 목표의 갱신과 함께, 눈앞에는 붉은 알림창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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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 캐슬의 사신이 나를 추적한다는 알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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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 질서와 규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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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 캐슬의 사신이 당신을 추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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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층에서 늑대 퀘스트를 받았을 때 나오던 것과 비슷한 알림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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갱단을 통합하자마자 조금의 지체도 없이 갱신된 퀘스트 목표는 [제한시간 동안 사신에게서 살아남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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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밑으로는 48시간짜리 타이머가 표시되어 있었는데, 아직 시간이 흐르고 있는 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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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이라는게 뭔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갱단을 통합한 내 존재를 인식하고 추적을 개시하면 시작되는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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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저나, 대뜸 48시간 동안 ‘사신’의 추적으로부터 살아남으라니. 좀처럼 보기 힘든 방식의 목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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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을 처치하라거나, 사신의 정체를 알아내라거나, 뭐 그런 목표가 생길 줄 알았는데. 왜 하필이면 생존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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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엘리시온이라는 도시의 특정한 시스템 자체가 ‘사신’이라서, 애초에 쓰러트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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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면 단순히 23층 도전자의 실력과 스펙으로는 결코 쓰러트릴 수 없는, 어마어마하게 강한 상대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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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는 후자였으면 좋겠다. 나는 페스티벌 전에 실전 감각을 닦아두려고 여기에 온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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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띠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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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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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살난 건물 잔해를 걷어차며 고민하던 중, 오픈 커뮤니티의 사운드 알람이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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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너먼트 참가 선언을 한 이후로 개인 쪽지가 너무 많이 와서, 어지간한 알람은 다 꺼두고 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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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템 창을 열어 커뮤니티에 들어가 보니, 내가 설정해 둔 키워드 알림이 반응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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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가자 필독)페스티벌 토너먼트 관련 정보와 주의사항 안내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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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인해 보니, 시련의 탑 내부의 치안 유지를 담당하고 있는 대형 길드에서 올린 공지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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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은 지난 토너먼트 때 올라왔던 것과 거의 똑같았다. 시스템과는 별개로 대형 길드가 만든 자체적인 규칙들이 대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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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너먼트라고 할지라도 살인은 금지, 고의성이 없는 사고일지라도 책임을 묻겠다는 내용이 가장 강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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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그렇겠지. 시스템의 기본 설정이 HP가 일정 수치 이하로 내려가면 승부가 난 것으로 판정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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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정이 나오면 서로에게 자동으로 보호막이 씌워지고, 몇 초 후 자동으로 경기장 바깥으로 전송되는 방식이라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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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시스템이 있는데도 상대방을 사고로 죽인다는 것은 말이 안 되니까, 살인으로 보고 조치하겠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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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조치’라는 것은, 일반적인 법률이 기능할 수 없는 시련의 탑 환경에서는 당연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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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K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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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신경도 안 쓰고 있던 사실이지만, 새삼 다른 서버도 무척 이상한 환경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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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강한 무력을 가진 대형 길드끼리의 연합이 자체적으로 만들어 낸 어설픈 규칙과 법률로 굴러가는 오묘한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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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템의 존재 탓에 그 규칙에는 당연히 구멍이 있을 수밖에 없으며, 논쟁과 논란거리도 없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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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당장 나랑은 아무 상관도 없는 이야기이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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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61서버에서 솔플러로 지내고 있는 나에게는 어떤 길드의 어떤 규칙도 강제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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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서버의 도전자가 모이는 페스티벌 맵이 아니고서야, 내게 간섭할 방법은 전무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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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사실 페스티벌 맵에서도 마찬가지다. 길드 연합이 규칙을 강제할 수 있는 건 그들에게 무력이 있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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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하게는- 탑 안의 사회를 안전하게 유지하겠다며, 수년 이상을 탑에서 나가지 않고 있는 길드 간부들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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쌓아올린 시간이 곧 힘이나 다름없는 세계이기에, 그들은 절대적인 규칙의 수호자로 존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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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혁 Lv.73 (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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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P : 1450/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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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P : 1200/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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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력 : 126 (1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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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첩 : 121 (1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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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구 : 128 (1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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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능 : 121 (1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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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아직 23층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이만한 스펙을 자랑하는 내가- 규칙을 깨부수려 한다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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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당장 그들을 무력으로 앞설 수는 없겠지만, 여러 가지 편법을 사용한다면 혼란을 주는 건 충분히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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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 길드가 내게 조치를 취하기 전에, 잔뜩 깽판을 쳐 놓고 재빨리 2661서버로 귀환한다면 어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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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비단 내가 아니더라도- 어디선가 갑작스레 굉장한 힘을 가진 에픽 직업 전직자 같은 게 나타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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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의 서버에 그 사람보다 강한 도전자가 아무도 없다면, 별로 다를 것 없는 환경이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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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 역시 형님이십니다! 그레이 캐슬을 혼자서 점령하시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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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어이 모든 갱단을 무력으로 쓸어버린 나를 보고 굽실거리는 전직 모히칸 대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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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잡스러운 갱단 녀석들도 나름의 방식으로 이 그레이 캐슬의 질서를 유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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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압도적인 힘을 가진 내가 난입한 것만으로, 모든 질서와 구도는 박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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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 길드가 업로드한 규칙 글의 댓글창에서는 다들 모범생처럼 알겠다고 말하고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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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대형 길드의 철저한 주의에, 평범한 도전자들은 안심된다고 떠들고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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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어, 볼일 다 봤으니까 이만 돌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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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눈에는 이 사이버펑크 세계의 뒷골목이나, 시련의 탑 사회나 크게 다를 게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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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어느 쪽이건- 결국 나랑은 별 관계없는 것들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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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 캐슬 전역의 갱단을 깨부숴 놓은 뒤, 아이언피스트의 아지트로 돌아와 드러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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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다시 오픈 커뮤니티를 열어, 23층 사이버펑크 세계에서 사두면 좋은 아이템 목록을 쭉 읽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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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층은 극도로 발달한 기술 덕분에, 이곳에서 통용되는 화폐인 크레딧만 구할 수 있으면 가져가기 좋은 물건이 많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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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하게 영양을 섭취할 수 있다는 칼로리 스틱은 아무래도 좋지만, 랭커들도 애용하는 특수 재질의 속옷에는 나도 관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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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어도 전혀 입은 것 같지 않다는 편안함뿐만이 아니라, 착용하는 것만으로 체중이 감소하는 신기한 효과가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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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옷 따위에 반중력 장치라도 달린 건지, 어떻게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굉장히 인기가 있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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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딧이야 적당히 삥을 뜯으면 얻을 수 있을 테니, 몇 개쯤 사서 올라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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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 00 : 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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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퀘스트창에 붙어 있는 타이머는 아직도 움직일 생각을 안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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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때문에 그레이 캐슬을 마냥 떠나기도 뭣해서, 가능하면 빨리 좀 와줬으면 좋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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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의 ‘사신’이 암살자 같은 거라면, 빈틈을 드러내면 그때 찾아오려나? 한번 실험해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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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22층 보스를 깨고 얻은 [황금빛 양털]이 매우 편안하게 느껴지는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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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도 거의 밤인 것 같고, 딱 두 시간 정도만 눈을 붙여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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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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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털을 깐 소파에 아무렇게나 드러누워, 적당히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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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수면에도 상당히 익숙해져서, 이제 나는 정확히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만큼 잠을 잘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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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에 마력을 퍼트려 놓고, 약간의 긴장 상태만 유지하면, 누가 접근해도 바로 알아차리고 일어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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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눈을 감고, 잠에 든 지 대략 한 시간이 지났을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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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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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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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에 퍼트려놓은 마력이 무언가 움직임을 잡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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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바로 체내에 마력을 돌려 빠르게 정신을 차리고, 눈을 감은 상태 그대로 주변을 경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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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몇 분이 지나도 따로 감지되는 것이 없었다. 기분 탓인가 싶어서 자는 척을 그만두고 소파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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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초감각]과 연동된 마력감지는 거의 모든 종류의 은신을 간파할 수 있지만, 여전히 반응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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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아주 약간의 위화감- 스스로도 설명할 수 없는 직감에 의존하여 허공을 향해 손을 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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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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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았다, 이 새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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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끝에 잡힌 정체불명의 무언가를 냅다 땅바닥에 내리꽂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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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과광, 큰 소리와 함께 바닥이 무너지고 아래 층으로 추락했다. 흙먼지 사이에서 뭔가가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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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아무리 마력을 퍼트리고 [초감각]을 활성화해봐도, 그 정확한 위치나 움직임을 느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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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사이버펑크 세계인가, 내 마력감지로도 잡아낼 수 없는 미채 기술 같은 게 있나 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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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히 투명해지는 것만이 아니라, 발자국과 발소리도 남기지 않고, 내 마력감지를 완벽히 통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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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 [초감각]스킬에 통합되었던 [직감]스킬에는 희미하게나마 걸려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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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 57 : 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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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스트창에 붙어 있던 타이머도 움직이고 있다. 역시 ‘사신’은 실체가 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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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레이 캐슬을 통합하는 것 같으니까 나타났나 본데, 진짜로 중앙 도시에서 보낸 살수 같은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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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직이지 않고 있는 ‘사신’을 향해 말하며, 인벤토리에서 방패와 도끼를 하나씩 꺼내 장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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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감]스킬로 아슬아슬하게 감지하고 있지만, 역시 정확도가 너무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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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안전을 위해 방패를 들고, 검보다 마구잡이로 휘두를 수 있는 도끼를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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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는데 대답을 안 하네, 뒤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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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싸워본 적은 있지만, 아예 보이지 않는 적이랑 싸우는 건 처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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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인지, 간만에 머리까지 피가 빡 도는 느낌이다. 아주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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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실전감각 한번 다시 깨워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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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 먼지 칼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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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히 모습을 완벽히 감추는 게 전부라면 대응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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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인벤토리에서 석회암질의 짱돌 하나를 꺼내, 왼손으로 움켜쥐어 가루가 되도록 부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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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만들어진 흰 가루에 약간의 마력을 담아 주변으로 흩뿌렸다. 그리고 [사고 가속]을 사용해 분진의 움직임을 관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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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나 넓은 범위에 흩뿌렸지만, 뭔가가 분진을 뒤집어쓰는 듯한 모습은 보이질 않는다- 그리고 순간 찌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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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감이 반응하는 대로 방패를 들어 올렸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지만, 방패의 윗면이 베여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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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의 공격이 틀림없다. 하지만 주위로 흩뿌린 분진은 거의 흔들리지 않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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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 이건 투명화라는 수준이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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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국이 남지 않는 것을 보고 대충 예감했지만, 역시 사신은 단순히 모습을 감추기만 하는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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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이 자리에 존재하지 않았다가 갑작스럽게 나타나는 것 같다. 이딴 게 마법이 아니라 과학 기술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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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전에 한 차례 접촉한 게 아니었다면, 원거리에서 공격을 날리고 있는 거라고 착각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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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확신할 수 있다, 사신은 분명히 이 근처에 있다. 실체가 있는 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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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의 공격에 훼손된 방패를 내려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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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날카로운 것에 베인 모양새다. 검은 아니겠지만, 아무튼 참격 계열의 공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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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방패를 이토록 쉽게 베어낸 걸 보니, 보통 예리한 무기가 아니다. 내 몸도 어떻게든 벨 수 있겠는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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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감에 많이 의존하는 방식이 되겠지만, 일부러 빈틈을 내주고 타이밍을 맞춰 카운터를 먹여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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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패를 일부러 살짝 내리고, 오른손에 쥔 도끼에 마력을 흘려 넣는다. 오러는 형성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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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러는 막대한 공격력을 자랑하지만, 검기나 의념기같은 고급 기술이 아니면 넓은 범위를 타격하기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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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내 마력회로의 상태로는 그런 고급 기술을 쓸 수 없으니, 일단은 단순하게 대량의 마력을 때려 붓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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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찌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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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번 경고하는 직감, 즉시 [철벽]과 [혼신]스킬을 사용해 방어력을 보충하고 회피는 포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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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 날카로운 것이 목을 스치고 지나간다. 경동맥이 있는 위치가 살짝 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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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에 마력을 때려넣은 도끼를 공격이 날아든 방향으로 힘차게 내려찍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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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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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발하는 마력이 주변 일대를 휩쓴다. 아이언피스트의 아지트가 순식간에 무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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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지트에 있던 갱단원들이 휘말리며 시끄럽게 비명을 지르고 난리를 친다. 그리고 그 요란한 소음과 붕괴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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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계까지 발휘된 [초감각]스킬은 허공에서 흔들리는 검은 입자의 무리를 발견해 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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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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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트닝 차지]를 두르고 [대전]을 발동시키며, 옅게 마력을 두른 손으로 입자를 붙잡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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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로 붕괴되어가는 지면을 향해 힘껏 집어 던지자, 마침내 놈의 모습이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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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지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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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텔레비전의 노이즈를 연상시키는 잡음과 함께, 천천히 드러나는 사신의 정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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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바디슈트로 전신을 감싸고 있는, 검을 든 암살자가 그곳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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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손에 잡힌 검은 입자를 본 순간, 나는 놈의 정체를 곧바로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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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하면, 그 검은 입자는 오픈 커뮤니티의 23층 정보글에도 언급되어 있었으니까. 저건, 나노슈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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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태를 자유자재로 변환시킬 수 있다는 엘리시온의 최상급 의복. 도전자들도 크레딧을 모아 사려고 한다는 말이 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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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평범한 나노슈트는 저딴 미친 은신능력을 제공하지는 않는다. 나노슈트는 기본적으로 형태변형이 가능한 옷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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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건 아마도 군용으로 개발된 특수한 나노슈트겠지. 광학미채를 비롯해 다양한 모드와 연동되는 방식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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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것만으로는 존재가 사라지는 듯한 그 은신 능력은 설명되지 않는다. 추측해 보자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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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게 있다는 얘기는 못 들어봤는데, 나노 로봇……뭐 그런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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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임을 비롯한 모든 요소가 나노 기술로 이루어진, 원격 조종 나노 로봇쯤 되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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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노입자 하나하나가 미채를 활성화한 상태로 부유하고 있다가, 중요한 순간에만 형태를 형성하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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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내 목에 생채기를 남긴 날붙이의 정체도, 나노 입자를 그러모아 만든 칼날 같은 거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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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역 공격이 가능한 마법이 있었으면 쉽게 잡았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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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를 알고 나니, 비정상적으로 보였던 난이도가 사실 정상이었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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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노 입자의 칼날은 날카롭지만 방어할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고, 습격 시간까지 타이머로 정직하게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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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자 형태라 물리공격으로 때리기는 거의 불가능하지만, 범위가 있는 마법 공격이라면 잘 먹힐 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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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사가 포함된 파티가 충분히 경계를 갖추고 대응한다면, 48시간 동안 버티는 것 정도는 가능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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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면 당하지만 알면 잡을 수 있는 초견 살해 타입의 암살자, 뭐 그런 느낌이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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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직! 지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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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대전]을 통해 흘러간 전류를 제대로 처맞은 나노로봇은 애매한 형태로 몸을 구성하며 일어나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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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학미채 기능은 방금 그걸로 망가졌는지, 몸 여기저기가 투명해졌다가 말았다가 하는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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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상태로는 이제 상대도 안 된다. 이제 이놈을 대충 48시간 동안 갖고 놀면 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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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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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틀거리는 나노봇을 [라이트닝 차지]를 두른 다리로 걷어찼다. 과자처럼 쉽게 부서지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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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굴데굴 구르더니 다시 재구성을 시작한 나노로봇을 내려다보던 중, 인기척이 접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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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기척이다. 고개를 돌려 보니, 싸움에 휘말렸던 갱단원들 사이에서 ‘렉스’가 튀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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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이 일어난 거냐! 다른 구역 새끼들이 습격이라도……그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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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 주먹을 꽉 움켜쥐고 싸울 준비를 하고 있던 렉스는, 나노로봇을 보고 인상을 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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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들이 말한 사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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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소개하자, 렉스의 구겨졌던 얼굴이 흉하게 일그러지며 두 눈이 번뜩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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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보니까, 이 녀석은 예전 자신의 두목을 사신에게 잃었댔지. 나름의 사연이 있는 것 같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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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디슈트를 입은 인간 형태에서 검은 안개처럼 흩어지기 시작하는 나노로봇을 향해, 렉스가 강철팔을 들어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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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후 강철팔에서 뭔가 올가미 같은 것이 쏘아지더니, 흩어져가는 나노로봇을 덮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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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지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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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가 흐르는 올가미였나. 속박된 나노로봇은 더 이상 형태를 변환시키지 못하고 버둥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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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엄청 쉽게 제압되네. 은신이나 공격능력과 비교하면 기본 성능은 부족한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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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놈이…그레이 캐슬의 사신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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렉스는 복잡한 표정으로 나노로봇을 내려다보았다. 이래저래 할 말이 많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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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 순간, 관자놀이를 찌르는 찌릿한 직감에- 나는 곧바로 렉스를 걷어차며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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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순간, 돌연 공중에서 출현한 수십 자루의 칼날이 내 팔을 베고 렉스의 전신을 찢어발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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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촤자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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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재빨리 마력을 둘러 깊이 베이지는 않았지만, 렉스의 몸뚱이는 순식간에 해체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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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작 한순간에, 홀로그램으로 보여주었던 시체와 똑같은 꼴로 죽고 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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렉스의 몸을 찢어발긴 칼날은 입자의 형태로 흩어졌다가 결합하더니, 여러 명의 ‘사신’으로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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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긴……사신이 하나라는 말은 없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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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무 망설임 없이, 새롭게 나타난 사신들의 사이로 뛰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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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하던 도끼를 집어넣고, 인벤토리에서 새 무기를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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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놈들의 방어력은 생각 이상으로 형편없다. 그렇다면 위력을 포기하고 넓은 범위의 타격을 고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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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꺼낸 무기는 21층에서 얻은 [용암석 망치]라는 이름의 두 손 둔기 분류의 무기. 다만 나는 한 손으로 사용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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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무기는 기본적으로 화염 속성 데미지를 입힐 수 있고, 고유 효과로 [용암 폭발]을 발생시키는 효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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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은 거창하지만 정작 위력은 별로라서 쓸 일 없던 무기지만, 이런 상황에는 딱 맞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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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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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두른 망치가 폭발하며 붉은빛의 유사 용암을 주변으로 흩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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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노로봇 사신들은 입자 형태로 변하며 투명화했지만, 곧 다시 공중에서 발생하는 폭발에 휩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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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암 폭발에 휩쓸린 입자들이 소산한다. 예상대로 입자 상태에서는 방어력이 더더욱 떨어지는 모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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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츠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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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입자 상태로 움직이면 안 된다고 판단했는지, 공중에서 다시 형태를 갖추는 나노로봇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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놈들은 입자를 모아 만든 검을 휘둘러 용암을 베고 잘라내는 방식을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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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하면 용암 폭발에 휩쓸려 허무하게 당하지는 않으니까, 하지만 형체를 이루면 나한테 당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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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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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반쯤 인간의 형상을 이룬 나노로봇을 하나 붙잡아, [대전]을 통해 고압전류를 흘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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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다시금 [용암석 망치]를 휘둘러 폭발을 일으키고, 물러나는 나노로봇들을 하나씩 붙잡아 지져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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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에서 날아드는 입자 칼날의 공격은 아무래도 좋다. 급소가 베이는 것만 피하고 몸으로 받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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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이 정도 상처는 죄다 [초재생]으로 커버할 수 있다. 놈들은 화력 부족으로 나를 잡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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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3체의 사신을 쓰러트린 순간, 마력감지에 돌연 강한 인기척 하나가 잡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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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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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돌려 보니, 똑같은 사신 하나가 나를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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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이제 보니까 똑같지 않다. 생명반응이 느껴진다. 이 새끼, 안에 사람이 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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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은 무인 로봇이 아니라 원격조종 드론이었던 건가- 그리고 이놈이 조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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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트닝 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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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덤벼드는 사신의 검을 피해내고, 곧바로 멱살을 잡아 [대전]을 사용해 전격을 흘려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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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전격을 맞은 사신은 어째서인지 무력화되지 않고, 되려 그 상태에서 내 가슴팍을 향해 손을 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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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나지막이 중얼거리는 작은 목소리. 심장을 꿰뚫는 막대한 힘의 격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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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격장(電擊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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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이 아찔해지는 충격이 나를 덮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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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 심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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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하려면 얼마든지 피할 수 있었을 공격이지만, 그냥 맞아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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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는 단순하다. 어차피 23층 NPC의 공격이 나한테 제대로 먹혀들 리가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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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그냥 안이하게 군 건 아니다. 당연히 때맞춰 [철벽]과 [혼신]을 비롯한 내구력 강화 스킬을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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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슴 깊숙이 찌르고 들어오는 정체불명의 충격- 내장이 죄다 뒤집히는 감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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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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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감전이랑은 전혀 다른 느낌이다. 의지를 가진 전격이 내장을 헤집으며 고루고루 지져놓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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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이상하다. 위력이 비정상적으로 강하다. 이건 절대 23층의 NPC가 구사할 수 있는 위력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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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어력을 무시하고 들어오는 데미지 판정인가. 아니, 그렇다 해도 지나치게 강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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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씨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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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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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의 본체는 데미지를 받은 내가 잠시 멈춘 틈을 타, 멱살을 잡은 손을 풀고 뒤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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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노머신으로 동작하는 다른 ‘사신’보다 훨씬 잽싼 몸놀림. 놈은 잠시 멈춰 서서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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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직거리는 전기가 놈의 손바닥에서 맴돌고 있다. 어쩐지 조금 당황한 듯한 눈치다. 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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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이유야 뭐가 됐건 아무래도 좋다. 지금은 저 새끼가 방금 사용한 공격의 정체가 가장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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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방금 그거 뭐냐. 신기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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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이 진탕이 되며 올라온 피를 대충 뱉어내고, [용암석 망치]를 굳게 부여잡은 채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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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사신은 답하지 않았다. 대답 대신, 여전히 전격이 맴돌고 있는 손으로 검을 다시 집어들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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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나노로봇에게 말을 건 거였으니까,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던 것도 이해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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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히 안에 인간이 들어있는 이 새끼는 왜 말을 씹는지 모르겠네. 사람이 물었으면 대답을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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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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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였다, 당장에라도 달려들 것 같았던 사신은 그대로 발길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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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동시에 아직 파괴되지 않은 여러 대의 나노로봇들이 나를 향해 일제히 달려들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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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끌 셈인가. 하지만 이놈들은 이제 나한테 아무런 방해도 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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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르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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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력강화를 발동하자 몸에 깃드는 마력의 폭풍, 그것에 [라이트닝 차지]를 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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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으로 내 주변에는 전격의 격류가 발생하며, 이런 계열의 공격에 취약한 나노로봇은 내게 접근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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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력강화를 통해 끌어올린 신체능력에 더해 [신속]과 [혼신] 및 [도약]까지 사용해 단번에 걸음을 내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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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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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번 아지트 건물이 우르르 무너지며, 덤벼들던 나노로봇들이 흙먼지와 함께 흩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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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력의 도약으로 1초도 되지 않아 사신을 따라잡은 나는, 그대로 놈의 뒤통수를 붙잡고 집어던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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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균열과 함께 어딘지 모를 낡은 건물에 처박힌 사신. 적당한 위력으로 날렸지만, 꽤 제대로 데미지가 들어간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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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은 비척거리며 일어섰다. 이어서, 검은 바디슈트와 함께 놈의 모습을 가리고 있던 헬멧이 빠직거리며 부서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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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헬멧이 부서지고 드러난 얼굴은, 갈색 머리칼과 갈색 눈동자가 인상적인- 뭐야, 이거 여자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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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형 때문에 당연히 남자일 거로 생각했는데……하긴, 사이버펑크 세계니까 이상할 것도 없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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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지, 애초에 얼굴이 저렇다고 무조건 여자라는 보장도 없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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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 에인처럼 좀 예쁘장한 남자일 수도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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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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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여자건 남자건 알 바 아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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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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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에 처박혔을 때의 충격 탓인지, 사신은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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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전의는 여전한지, 나노머신으로 만든 검을 힘차게 꼬나쥐고 나를 향해 달려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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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쓸모를 다한 [용암석 망치]와 방패를 집어넣고, 가볍게 마력을 두른 채로 맨손으로 싸움에 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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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소를 정확하게 노려오는 검을 손등으로 쳐내고, 그대로 한 발 깊이 파고들어 명치에 주먹을 날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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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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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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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디슈트의 가슴팍 부분에 균열이 일어나며, 사신은 깊이 헛숨을 들이켰다. 상대도 안 되는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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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격장이라고 했던가, 조금 전의 강력한 공격은 대체 뭐였던 거지. 도저히 같은 적의 공격이라고는 믿기지 않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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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치에 한 방 먹여준 후, 잠시 회복할 시간을 주었다. 사신은 다시금 나노머신 검을 휘두르며 덤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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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번에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검술 자체는 꽤 괜찮지만, 단순히 순발력으로 나를 따라잡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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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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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더 명치에 일격을 먹여주고, 나노머신으로 이루어진 검을 빼앗아 부러트려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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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러트린 검 조각은 그대로 [라이트닝 차지]와 [대전]으로 바싹 튀겨서 잿더미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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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무기를 잃었으니, 덤비려면 맨손으로- 조금 전처럼 전격장이라는 기술을 써서 덤벼야 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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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발 앞으로 다가서자, 사신은 새된 기합 소리를 내지르며 다시금 달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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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손에는 약한 전격이 휘감겨 있다. 나는 그 모습을 보자마자 약하게 [사고 가속]을 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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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릿하게 흘러가는 세계 속에서, 내게 달려들어 손바닥을 내지르는 사신의 모습을 천천히 관측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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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손바닥에 내 가슴팍에 닿고, 사신의 입이 ‘전격장’이라는 말을 내뱉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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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찌르는 듯한 전격이 내 몸을 파고들기까지- 일련의 과정을 모두 세세히 뜯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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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지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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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사고 가속]이 끝남과 동시에 닥친 충격은 처음과는 너무나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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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어를 무시하고 안쪽까지 파고드는 듯한 감각 자체는 여전하다. 하지만 뭔가, 결정적인 부분이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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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산되는 전격의 세기, 흘러들어오는 힘의 감촉- 전반적인 위력이 조금 전과 비교했을 때 너무나 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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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격을 맞고도 끄떡하지 않는 나를 바라보며, 사신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더 이상 방법이 없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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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실망스러움을 감추며, 그대로 사신의 복부를 몇 차례 가격해 기절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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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였던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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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으로부터 살아남으라는 타이머는 아직도 40시간 이상이 남아 있는 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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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언피스트 갱단의 아지트는 사신과의 전투 여파로 반파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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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원들도 전 보스였던 렉스의 처참한 죽음에 통곡하느라 바빴기에, 나는 사신을 다른 갱단의 아지트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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갱단원들로부터 적당한 구속구를 빌려 사신의 몸을 꽁꽁 싸맸고, 적당한 속박 마법도 하나 걸어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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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색 마탑주에게서 받은 마법서에 적힌 기본 속박 마법이지만, 마법이 없는 이쪽 세계 사람들에겐 잘 통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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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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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자신은 없다. [천의 마술]의 힘을 빌려 어찌저찌 시전하긴 했는데, 솔직히 잘 된 건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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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그렇게 구속한 사신 앞에 의자를 꺼내 앉고, 녀석이 정신을 차리기까지 잠깐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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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사신이 눈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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녀석은 자신의 몸을 감싸고 있는 구속구를 발견하곤 잠시 몸부림치더니, 살기를 담은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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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에 검이라도 있었으면 당장 찔러올 기세다. 물론, 입고 있던 나노슈트를 포함해 모든 무장은 미리 해제해 둔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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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트가 아니더라도, 몸에 이식된 전투용 모드나 프레임이 잔뜩 있을 테지만- 어차피 나한테는 안 통할 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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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맞춰 일어났네. 5분만 더 늦었으면 두들겨서 깨우려고 했거든, 내가 너한테 궁금한 게 좀 많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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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말하자, 사신은 입술을 몇 차례 질끈 깨물더니,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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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큭…죽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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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 무슨 오크나 고블린한테 납치된 여기사가 뱉을만한 대사를 그대로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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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내가 이 녀석을 갱단원들한테 마음대로 하라고 던져주면 능욕물 한 편 뚝딱이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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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나는 그런 취미도 없고, NPC를 그렇게 다뤘다가는 퀘스트 진행이 막히기 십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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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이긴 뭘 죽여. 내가 궁금한 게 많다니까. 대답만 잘하면 살려줄 수도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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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말하자, 사신은 이를 악물고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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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질문에 대답할 이유 따윈 없다. 고문 따위로 입을 열 수 있을 거라 착각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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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연한 말투와 표정도 그렇고, 단단히 각오한 눈빛이었다. 확실히 쉽게 입을 열 것 같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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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몸을 얼마나 더럽혀도, 어떤 수치와 굴욕을 주더라도, 내게서는 아무것도 얻어갈 수 없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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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음, 아까도 했던 말이지만 진짜 무슨 고블린한테 잡혀 온 여기사 같은 소리를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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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레기장의 더러운 시궁쥐와 괴물 뮤턴트 따위에게, 나는 결코 굴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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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울 때는 한마디도 안 하더니, 이런 상황이 되니까 말이 무척 많아지는 사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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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도면 사실 그냥 쫄아있는게 아닐까. 딱 보니 이미 머릿속으로 이런저런 상상을 끝낸 모양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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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잠시 고민하며 퀘스트창을 열었다. 사신에게 살아남으라는 목표는 아직 변하지 않은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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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을 완전히 제압한 이 상황에서도 목표가 변하지 않는 걸 보면……한 가지 떠오르는 것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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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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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결론을 내린 후, 아무것도 묻지 않고 가만히 의자에 앉아 마법 하나를 시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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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십여 분 뒤, 고문을 당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던 사신이 되려 고개를 갸웃거릴 때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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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감이 날카롭게 경고를 발하며, 설치해 둔 마법이 허공을 향해 불을 뿜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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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줄 알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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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명의 사신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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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 신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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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사신이 한 명이라는 말은 어디에도 없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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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머가 멈추지 않았다면 또 다른 사신이 나타날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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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사신의 출현을 대비해 미리 설치해 둔 마법은 불의 장벽을 만들어내는 ‘파이어 월’ 마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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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살을 위해 접근한 사신은 곧바로 화염의 벽에 휩쓸렸고- 입자 상태의 나노머신은 그대로 깡그리 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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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염의 벽이 사그라들고 나타난 것은, 잡혀 있는 ‘사신’과 거의 똑같은 차림을 한 또 하나의 사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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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형도 거의 비슷한 것 같고, 사용하는 무기도 똑같이 검 형태의 나노머신, 하지만 미묘하게 다른 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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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스타일은 조금씩 다른가 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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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붙잡힌 첫 번째 사신은 전형적인 암살자 타입으로, 원거리에서 나노로봇을 보내며 싸우는 타입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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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사신은 본인이 직접 다량의 나노머신을 주변에 두르고 나타났다. 좀 더 적극적인 전사 타입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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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형태로 변환시킬 수 있는 나노머신의 활용법은 무궁무진하니, 스타일에 차이가 있는 건 당연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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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런 트랩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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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이번 사신은 과묵한 타입도 아닌 건지, 파이어 월에 당하자마자 그런 소리를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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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저나, 파이어 월의 화력이 생각보다 많이 약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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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서를 보고 얼렁뚱땅 시전한 것치고는 꽤 괜찮긴 하지만, 소모한 마력량에 비하면 연비가 형편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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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의 마술]의 부가효과로 구조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음에도, 예상이 빗나갔다는 건- 그냥 내 실력 문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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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검은 이쯤 하고, 일단은 이번 사신을 상대하자. 인벤토리에서 적당한 둔기류 하나를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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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야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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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롭게 등장한 사신은 오른손에 쥔 검을 휘두르며, 새된 기합을 내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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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노머신으로 이루어진 검은 휘둘러짐과 동시에 형태를 변환해, 채찍처럼 나를 덮쳐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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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곧바로 [라이트닝 차지]를 부여한 둔기를 크게 휘둘러, 날아드는 나노머신 채찍을 떨어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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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지직, 맞아떨어진 나노머신은 그대로 전격에 의해 기능을 상실하며 분해되고 추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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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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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으로 떨어진 나노머신은 가벼운 불 마법으로 소각, 경악하는 사신을 향해 접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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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를 잃자 이번 사신도 곧바로 전류를 일으킨 손을 뻗어왔다. 이놈의 전격장은 과연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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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팍에 닿은 파직거리는 손, 내장을 헤집어 놓는 것 같은 충격이 닥쳐들지만- 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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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라이, 꽝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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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꽈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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둔기를 휘둘러 헬멧을 쓴 정수리를 가격하고, 휘청거리는 사신의 명치에 니킥을 박아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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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니킥을 맞고도 뻗지 않은 사신은 계속해서 덤벼들었지만, 그대로 몇 분간 내 체술의 연습대가 되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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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씬 두들겨 맞아 기절한 2호 사신은 그대로 구속당하고, 1호 사신의 곁으로 던져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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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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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2호 사신의 헬멧도 벗겨 냈는데, 드러난 얼굴이 1호 사신과 똑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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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버펑크 세계니까 있을 법하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복제 인간이나 뭐 그런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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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것치고는 전투방식이나 성격에 제법 차이가 있는 것 같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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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클론이 아니라 그냥 똑 닮은 쌍둥이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성형으로 얼굴을 맞췄다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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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자세한 건 천천히 알아가면 그만이다. 지금은 심문보다는 포획에 집중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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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 02 : 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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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퀘스트 창에 나와 있는 타이머는 멈추지 않고 있으니, 곧 3호 사신이 올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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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 열 명쯤 붙잡아놓고 심문하다 보면, 그 중에서 한 명쯤은 술술 불지 않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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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나타난 사신은 입자 상태의 나노머신을 자신의 팔다리처럼 쓰는 녀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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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수라처럼 팔을 여섯 개나 만들어서, 각각의 팔에 다른 무기를 들고 덤비는 타입이었는데- 별로 강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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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마다 전투 스타일이 다 다르긴 하지만, 근본적인 전투 능력과 스펙에는 큰 차이가 없는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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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여러 명의 사신을 계속 상대할수록, 점점 더 적응되어가는 나만 편해질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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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이익! 이거 당장 풀지 못해! 가만두지 않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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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사신들은 각각 성격도 다 달랐다. 이번 사신은 여러모로 떼쓰는 어린애 같다고 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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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묵한 사신, 시끄러운 사신, 리액션이 큰 사신, 시종일관 실실거리는 사신, 전투광 기질을 보이는 사신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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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차례 찾아오는 사신을 죄다 격파하고 감금하다 보니, 정말 온갖 성격과 스타일의 사신을 다 만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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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는 아예 두 명의 사신이 함께 합세해서 나타나기도 했는데, 그래 봤자 그것도 내 상대는 아니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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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적으로, 이름도 잘 기억나지 않는 이 갱단 아지트의 지하는 사신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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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 받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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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당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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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구를 채운 사신을 지하실에 던져넣고, 슬슬 시간이 다 되어가는 타이머를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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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 : 02 : 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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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시간은 이제 3분 정도, 사신은 이제 충분히 포획했다. 슬슬 지하실 공간이 모자랄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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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사신들끼리 작당모의를 하는 걸 방지하기 위해, 각각 다른 공간에 격리해 두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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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그것도 한계를 맞이해, 한 공간에 사신이 두어 명씩 들어가 있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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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아지트에 있던 갱단원들을 싹 내쫓아 공간을 확보했는데도 이 정도다. 몇 명인지 슬슬 세기도 귀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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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 캐슬의 갱단들 : 퀘스트 목표가 갱신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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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 : 당신은 그레이 캐슬의 뒷골목을 점령하고 있는 갱단을 무력으로 무릎 꿇려, 산하로 흡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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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레이 캐슬의 진정한 지배자로 군림하기 위해서는 아직 넘어서야 할 거대한 시련이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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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 캐슬의 역대 지배자들을 모두 암살한 존재, 정체불명의 사신이 당신을 노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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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사신의 습격에서 살아남았지만, 여전히 당신을 노리는 배후의 정체는 미궁 속에 가려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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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스트 목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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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름없음)갱단을 그레이 캐슬의 정점에 올려놓기(완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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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제한시간 동안 사신에게서 살아남기(완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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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사신을 보낸 흑막의 정체를 알아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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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선행 목표 달성시 개방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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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머의 남은 시간이 모두 흘러가자, 퀘스트 목표가 갱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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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의 정체를 알아내라- 아마 원래대로라면 여러 서브 퀘스트를 통해 조사를 진행하는 거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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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격장이라는 기술에 대한 궁금증으로 사신들을 잡아놓은 게 도움이 되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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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남은 건 심문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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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하실에 던져넣은 사신들을 하나씩 찾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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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부터 말하자면, 역시 사신들을 잔뜩 포획해 놓은 게 큰 도움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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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들은 모두 똑같은 얼굴과 체형을 가졌지만, 성격은 천차만별이었기에- 어려운 심문도 필요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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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험한 괴물 녀석…우리를 모아놓고 하렘이라도 만들 생각이었나…! 뒷골목의 쓰레기답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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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묵한 편이었던 1호 사신은 이렇게 고블린에게 잡혀 온 여기사 같은 소리를 자꾸만 해 대는 성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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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겁한 녀석! 정정당당하게 다시 싸우자! 정면 대결이라면 내가 이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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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노머신도 없이 칼 한 자루만 들고 덤벼왔던 7호 사신은 정면 승부에 집착하는 성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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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가 궁금하다고? 네 목을 한 번만 자르게 해 주면 뭐든지 알려주지! 목을 내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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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톱처럼 회전하는 나노머신을 다루던 9호 사신은 이렇게 열불을 내며 날뛰는 성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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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반항적인 성격의 사신들이 있는 한편, 오히려 고분고분한 성격의 사신들도 여럿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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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고문이 두려워 입을 열 거로 생각했다면 정확하다, 뭐든 묻는 대로 대답해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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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장의 나노머신도 전투 데이터도 모두 주겠다! 살려만 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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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 히익! 제발 때리지 말아 주세요! 다 말해 드릴게요! 거짓말도 안 할게요! 흐이이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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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히 대단한 위협을 가한 것도 아니고, 구타나 고문을 한 것도 아니지만, 알아서들 술술 불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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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알아낸 것은 이들 ‘사신’의 정체, 나노슈트의 사용법, 그리고 퀘스트에서 말한 이들 뒤 흑막의 정체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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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에 내가 궁금해했던 ‘전격장’이라는 기술의 원리와 실체에 대해서도 모두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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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발경(電磁発勁)이라는 기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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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을 알려준 것은 당당한 태도로 ‘고문만은 제발 하지 말아다오’ 라고 말하던 11호 사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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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내의 프레임과 모드를 구동하는데 사용되는 전류를 상대방에게 밀어 넣어, 회로를 파괴하는 대 사이보그 전투술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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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을 듣고 나니, 어째서 처음 맞았던 전격장이 유독 강력한 위력을 발휘했던 것인지 쉽게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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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호 사신은 내가 [라이트닝 차지]와 [대전]으로 흘려 넣은 전류를 거꾸로 이용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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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쩐지 이상할 정도로 강하더라니, 내 공격을 강하게 증폭시켜 반사 당한 것이나 다름없었던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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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너 같은 뮤턴트에게도 통하는 기술이지만……쳇, 전부 말했으니 고문은 하지 않는 거겠지?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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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보그의 회로를 파괴하기 위한- 적의 내부에 전류를 밀어 넣는 방식 덕분에, 내 방어를 반쯤 무시할 수 있었던 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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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단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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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빠르게 퀘스트와 미궁 지역을 밀고 다음 층으로 넘어갈 생각이었지만, 흥미가 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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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라이트닝 차지]를 통해 전류를 발생시킬 수 있으니, 원리만 따지자면 나도 습득할 수 있는 기술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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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에, 체내 동력부에서 생산하는 전기를 유도해 상대방에게 밀어넣는다는 그 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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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만 응용하면, 손을 통해 마력을 방출하는 기술로도 써먹을 수 있는 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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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층에서 손상되어 아직도 회복되지 않은 내 양손으로도, 충분히 구현할 수 있는 공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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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너희 못 풀어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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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페스티벌 전까지 어떻게든 한번 익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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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 딱 맞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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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호 사신과 17호 사신 덕분에, 그레이 캐슬을 노리는 흑막의 정체는 손쉽게 알아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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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스트 목표도 갱신되었고, 남은 것은 흑막을 찾아내 처치하고 그레이 캐슬을 점령하는 것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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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미 내 흥미는 퀘스트가 아니라 사신들이 사용하는 전자발경이란 기술로 옮겨 간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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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발경을 가르쳐 달라고……? 너는 뮤턴트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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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은 대뜸 전자발경을 가르쳐 달라는 내 말에 그렇게 대답했다. 뮤턴트 아니라니까 그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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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발경은 대 사이보그 전투술임과 동시에, 체내에 파워팩을 가진 사이보그만이 쓸 수 있는 기술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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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사이보그가 아닌 나는 쓸 수 있을 리가 없다는 것이다. 나는 그런 건 알아서 하겠다고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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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뭘 어떻게 가르쳐 줘야 하는 거냐. 데이터라면 복제해 줄 수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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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게 문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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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그거다. 우리도 전자발경은 인큐베이터에서 디지시냅스로 익힌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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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똑같은 얼굴을 한 이 사신들은 내 예상대로, 인큐베이터에서 배양된 복제인간이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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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자 가위 기술로 편집된 어떤 인물의 DNA를 기반으로 생성하여, 학습 장치를 통해 지식을 주입받은 양산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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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것치고는 하나하나 개성이 엄청나지만, 어쨌든 가진 지식은 장치를 통해 흡수한 것이 전부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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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에 당연히 자신이 가진 지식을 전수해 주는 것도 불가능, 복제한 데이터를 전송해도 내겐 수신할 방법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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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디지시냅스라는 이름의 학습장치를 구하더라도, 사이보그가 아닌 나는 사용할 수 없다는 것 같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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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획한 사신 중에서 좀 똘똘한 타입을 데려와 설명하라고 하면 어떨까……그런 녀석은 애초에 협조를 안 해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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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읍, 이러면 나가린데……어쩔 수 없네. 시간이 조금 걸리더라도 클래식한 방법을 쓰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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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풀어줄 테니까 도망칠 생각 하지 마라. 도망치다 걸리면 뒤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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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이다! 나는 죽는 것만은 절대 사양이다! 그런데 풀어준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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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호 사신은 불안하다는 듯 물었으나, 나는 일단 구속구부터 풀어주고 설명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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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운동과 담쌓은 개백수의 몸으로 시작해, 자력으로 각종 무기술을 상급 수준까지 익힌 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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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상급에 도달하기까지 여러 NPC의 도움을 받기는 했지만, 그 시작은 훨씬 무식한 방법이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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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리자드맨 전사들에게 칼자루 하나 꼬나쥐고 덤벼들어, 말 그대로 맞고 깨지고 부딪히며 배웠던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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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식하긴 하지만, 그게 나 같은 놈한테 가장 잘 맞는 방식이다. 모르면 맞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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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한테 전격장 몇 발만 꽂아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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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내성 스킬도 올릴 겸, 전자발경은 맞으면서 배우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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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좀 오래 걸리더라도, 역시 이만한 방법이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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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살을 통해 그레이 캐슬의 통합을 견제해 온 흑막의 정체는, 뻔하게도 엘리시온 중앙 의회의 상원의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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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한 이름까지는 듣지 못했지만, 굳이 알 필요도 없었다. 상원의원이라는 자리 자체가 극소수만이 오를 수 있는 위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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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이유 역시 단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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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 캐슬은 엘리시온 외곽에 위치한 지역이자, 동시에 엘리시온을 둘러싸고 있는 벽과 같은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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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 거주하는 인구는 행정의 손이 닿지 않는 탓에, 정확한 통계조차 존재하지 않는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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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정하기도 어려운 숫자의 인구가 무력을 기반으로 한데 뭉친다면, 그건 사실상 군벌과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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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력과 조직력은 아직 어설픈 수준이지만, 지리적인 이점과 막대한 인구수라는 명확한 강점이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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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그들이 일제히 봉기라도 한다면, 그 위협은 엘리시온 중심부, ‘화이트 그리드’에까지 미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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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사신에게 쓱싹하고 썰리는 무력 수준을 생각해 보면, 과연 그런 게 가능할까 싶지만- 또 모르는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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렉스의 보스였다던 제이 토멘트라는 작자만 해도, 굉장히 훌륭한 리더십을 갖춘 녀석이었다고 들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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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엘리시온의 상원의원은 그런 지방 군벌의 출현을 걱정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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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시온의 의원직은 명목상 선출직이지만, 실상은 세습되는 지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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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지를 가진 귀족이나 마찬가지인 의원에게, 군벌의 출현은 경계할 수밖에 없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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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더 추측해보자면, 아마 갱단을 처음 통합한 드레드라는 녀석이 문제가 아니었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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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라는 단어에 집착하는 기색을 보였다고 하니까, 반란을 꿈꾸는 위험분자로 보였을 가능성이 무척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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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사신’은 그런 위험분자를 쥐도 새도 모르게 제거하기 위해 만들어진 흉악한 암살 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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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각이 가진 개성에도 불구하고 이름조차 부여받지 못한 양산품 ,암살을 위해서만 탄생한 존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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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정말 괜찮은 거 맞냐……! 나중에 이걸 빌미로 때리려는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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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내 앞에서, 한 손에 전류를 깃들인 채 사시나무처럼 벌벌 떨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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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시원하게 최대 출력으로 전격장 몇 발 꽂아달라니까, 지레 겁을 집어먹고 이딴 소리나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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겁이 많아서 뭐든 술술 불어주는 건 좋은데, 이럴 때는 역시 방해가 되네. 다른 사신한테 시켜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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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잇, 이젠 나도 모른다! 전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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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고민하던 중, 결국 마음을 굳힌 듯 사신이 손을 내뻗는다. 나는 곧바로 [사고 가속]을 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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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력 감지와 [초감각]을 동원해 흐르는 힘의 결을 가능한 한 섬세하게 포착하고, 그것을 이론에 대입해 현상을 분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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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되는 에너지가 마력이었다면 훨씬 쉽게 파악할 수 있었겠지만, 역시 순수한 전류는 파악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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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지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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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한 발, 정통으로 전격장을 맞은 뒤- 남은 전류가 속을 헤집는 것을 천천히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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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은 알 것 같기도 하다. 일단 전류가 내 안으로 들어온 이후 어떤 식으로 퍼지는지는 대략 감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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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전류를 유도해서 외부로, 즉 상대에게 ‘꽂아넣는’ 과정인데…… 아직 더 많은 관찰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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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그렇고, 분명 최대 출력으로 쏘라고 했는데 왜 이런 애매한 위력이지? 좀 약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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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제대로 안 할래? 풀파워로 쏘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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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전히 벌벌 떨고 있는 사신에게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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겁먹은 사신은 그다음에도 애매한 위력으로 전격장을 발사했지만, 몇 번 반복하니 점점 나아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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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마지막엔 망설임 없이 최대 출력 전격장을 날릴 수 있게 되었지만, 딱히 성과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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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금방 뭔가 얻어낼 거라고 기대한 건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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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아쉽긴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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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이 최대 출력 전격장을 사용할 수 있는 건 최대 4회까지가 한계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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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발경이라는 기술 자체가 파워팩의 에너지를 소모하는 방식이니, 제한이 있는 건 당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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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파워팩은 자가발전 기능이 있어서 시간이 지나면 충전되긴 한다. 문제는 그 시간이 꽤 길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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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나는 어쩔 수 없이 태도가 고분고분한 사신들을 하나씩 데려와 번갈아 전격장을 날리게 시켜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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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저는 정말 진심으로 죽일 작정으로 했는데요…… 그걸 다 맞고도 왜 멀쩡하신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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쭈글쭈글한 목소리로 소심하게 의문을 제기한 건 12호 사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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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원래 전기에 강해. 그보다 너도 배터리 다 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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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을 적당히 흘려넘기며 반대로 묻자, 12호는 찐따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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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하는 행동 하나하나에 찌질함이 묻어나오는 건 18층의 자색 마탑주 이후로 처음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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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이걸로 전격장은 맞을 수 있는 만큼 맞은 셈인가. 내성도 딱히 오른 것 같진 않고, 여전히 성과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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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대 더 맞아보면 뭔가 깨달을 것 같기도 한데…… 갱단원들에게 시켜서 모은 배터리도 이미 전부 소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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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들의 프레임을 구동시키는 데 들어가는 전력량이 워낙 커서, 전기를 공급할 방법이 많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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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잖아도 그레이 캐슬은 항상 전력난에 시달리는 장소라고 하니, 이젠 정말 어쩔 수 없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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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근데 진짜 이걸로 충전 안 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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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 히익! 그런 거 맞으면 죽어버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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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내 [라이트닝 차지]로 전력을 공급할 수는 없을까 싶어 물어봤지만, 아무래도 감당할 수 없는 모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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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자 하니, 이전에 내 [라이트닝 차지]를 반사했던 1호 사신은 아직도 일부 회로가 손상된 상태라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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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히 무모한 시도를 했다가 사신을 줄이고 싶지는 않고, 결국 파워팩이 자동 충전될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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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사실…… 효율은 별로지만 파워팩을 충전하는 방법이 하나 있긴 해요. 저희, 식품 섭취가 가능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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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12호 사신이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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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말씀드리지만 효율은 정말 형편없어요. 어디까지나 구식 설계의 흔적이 남은 수준이라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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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 그레이 캐슬에서 사신을 충전할 만큼의 식품을 구하기는 무척 어렵다. 그러니 저렇게 쭈굴대며 말하는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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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냥 아무 식품이나 섭취해도 괜찮은 거라면, 이야기는 달라지지. 나는 인벤토리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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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섭취하는 식품 종류는 아무거나 상관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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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열량, 고지방, 고당류 식품이면 뭐든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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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은 그렇게 말하며, ‘어차피 연료일 뿐이니까요, 칼로리 스틱도 괜찮아요’ 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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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열량, 고지방, 고당류- 그거라면 딱 맞는 게 내 인벤토리에 넘칠 만큼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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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작 말을 하지 그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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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포함한 시련의 탑 도전자들이 애용하는 달콤한 칼로리 스틱, 화이트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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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 사이버펑크의 요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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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화이트롤은 매우 맛있는 축에 속하는 간식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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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근한 카스테라 가루를 묻힌 부드럽고 달달한 크림빵이 맛이 없을 수가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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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처음에 먹을 때는 무척 좋아했었고, 내가 화이트롤을 나눠준 NPC들도 대부분 좋아하는 모습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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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나도 화이트롤이 맛있는 간식이라는 건 안다. 물릴 대로 물렸지만, 머리로는 분명히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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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게 대체 뭐죠……믿을 수 없어요, 이게 정말로 합법이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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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저렇게까지 오버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뭔가 잘못된 것 같다는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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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식품을 섭취해 에너지로 바꿀 수 있다는 사신의 말을 듣고, 곧바로 화이트롤을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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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열량, 고지방, 고당류- 달콤한 크림을 가득 채운 화이트롤은 이들이 말하는 연료의 조건에 완벽히 들어맞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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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이 쿵쾅거리고, 눈이 빙빙 도는 것 같아요……하지만 데이터 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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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나온 게 저 반응이다. 사신은 화이트롤을 먹자마자 말도 안 된다며 현실을 부정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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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겠어요, 강한 중독성을 가진 신종 전자 마약이군요! 그게 아니라면 설명할 수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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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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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아닌가요? 그렇지만 이 식품은, 너무……모르겠어요, 이건, 그래요, 그거에요, 맛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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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은 내 음식을 처음 먹었을 때의 에인보다도 더 격렬하게 반응했다. 마치 단것을 처음 먹어보는 사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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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말하는 투를 들어보니, 아무래도 진짜 처음 먹어보는 것 같았다. 애초에 음식을 제대로 먹은 적이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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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난 장소는 세포를 배양하는 시험관이었고, 가진 지식은 모두 학습장치로 주입받은 것이라 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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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을 암살 병기로 살아왔을 처지를 생각해 보면, 그렇게까지 이상한 반응은 아닐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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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으로는 알고 있었지만, 세상에 이런 감각을 주는 물건이 있었다니……믿을 수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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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너지 충전을 위해 악으로 깡으로 먹으라 할 셈이었는데, 이렇게 되면 굳이 강요할 필요도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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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화이트롤 하나를 소중하게 아껴먹고 있는 사신의 앞에, 무수히 많은 양의 화이트롤을 쌓아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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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이 이걸 얼마나 먹을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인벤토리에는 수만 개나 되는 화이트롤이 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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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너지 전환 효율이 좀 낮더라도, 부족함 없이 공급할 수 있으리라. 게다가 사신은 이 녀석 하나만이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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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찐따 사신이 화이트롤을 먹게 두고, 다른 고분고분한 사신들을 데려와 똑같이 화이트롤을 먹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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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 그런 수상한 식품을 먹으란다고 고분고분 받아먹을 줄 알았나? 정답이다……으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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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사치스러운 음식을 먹인다는 건……최후의 만찬이라는 거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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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 뮤턴트 녀석! 이 화이트롤이라는 음식은 대체 뭐냐! 몸이 달아오르고 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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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개성이 넘치는 사신들은 처음에는 조금씩 다르게 반응했지만, 일단 화이트롤을 먹은 후의 반응은 비슷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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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웃기는 꼴이긴 하지만, 어쨌든 이걸로 전자발경을 익히기 위한 준비는 확실히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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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다시 열어본 오픈 커뮤니티는 여전히 페스티벌에 대한 소식으로 떠들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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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이에 토너먼트 참가 의사를 밝힌 랭커들의 숫자도 꽤 늘어났고, 벌써 노점을 차릴 생각이 만만한 도전자들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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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그동안 요리를 계기로 친해진 생활 게시판의 도전자들이랑 가벼운 약속을 몇 개 잡아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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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히 그 사람들이랑 뭘 하려는 건 아니고, 서로 얼굴이나 비추고 요리 이야기나 좀 하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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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 노점을 차려서 뭐라도 팔아볼까 하는 생각도 해봤지만, 근본적인 시스템의 한계로 애로사항이 너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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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스티벌 구역에서의 거래는 모두 대형 길드가 만들어낸 인프라 속에서 간접적으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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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령 노점을 차린다고 해도, 장사가 아니라 금전이 오가지 않는 자원봉사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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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애초에 토너먼트 일정이 어떻게 될 지 모르고, 노점을 차릴 시간 여유가 있을 것 같지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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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그렇게 커뮤니티를 한 번 살펴보고- 이번 퀘스트에 대한 정보글을 가볍게 작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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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현재 진행 중인 [그레이 캐슬의 갱단들] 퀘스트는 다른 서버에서도 진행할 수 있는 퀘스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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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갱단을 통합해야 한다는 첫 번째 목표를 달성하기가 매우 힘들어, 아무도 여기까지 진행하지 못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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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서진혁#26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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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23층 갱단 통합 퀘스트 진행중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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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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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깨진 않았는데 목표는 다 오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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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깨고나면 흑막 관련 정보 포함해서 한번 더 공략글 쓰겠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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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갱단 통합 부분부터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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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보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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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신은 물리뎀으로는 걍 못잡는거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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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ㄴ 잡으려면 잡을것같은데 마법으로 잡는게 훨씬편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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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ㄴ 근데 니는 전붕이면서 어케잡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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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 클론은 총 몇마리임?? 다똑같이생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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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ㄴ 내가 잡은건 스물정도 됨, 생긴건 다똑같은데 성격이랑 스타일은 다 다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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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클론부대 ㅈㄴ이쁘네 ㅋㅋㅋ이새끼는 뭐 맨날 미소녀만만나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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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ㄴ ㄹㅇ 진혁이 특검해야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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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쾌감을 느껴본적없는 클론눈나부대는 좀 야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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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장문으로 쓴 정보글이건만, 커뮤니티 망령들은 퀘스트가 아니라 스크린샷에만 정신이 팔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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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화이트롤을 입안 가득 채워넣고 눈을 휘둥그렇게 뜬 사신의 모습은, 확실히 눈에 띄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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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죄다 똑같이 생기기도 했고, 몸매가 너무 평탄한 탓에 다크엘프와 비교하자면 민망한 수준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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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저기, 충전 다 됐어요. 이제 전격장을 쓰면 되는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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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커뮤니티를 닫고, 충전을 마친 사신들을 불러 다시금 전격장을 차례대로 맞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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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확실하게 감이 잡히지는 않았지만, 계속 반복하다 보면- 분명 재현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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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저나 얘네들, 화이트롤 엄청 잘 먹네. 물리지는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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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거 하나에 저렇게 좋아하는 걸 보니 안쓰러울 지경인데, 다른 것도 한번 먹여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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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손에 마력을 그러모으고, 손상된 회로의 사이사이로 마력을 흘려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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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것은 마력을 끈처럼 만들어, 끊어진 회로 사이를 통과할 때 손실되지 않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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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우웅, 하는 소리와 함께 푸른 마력의 형상이 오른손 위로 나타났다. 넘실거리는 마력의 발현은 아직 불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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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나는 [라이트닝 차지]를 활성화하며 심장 부근의 주요 회로를 더 강하게 활성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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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혈액을 펌프질하듯, 전기 속성을 띠게 된 마력을 천천히 손끝으로 인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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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발경은 사이보그의 전신에 장착된 프레임과 모드를 일종의 길로 활용하면서 발동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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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진 회로를 따르지 않고, 간접적으로 전기가 통할 수 있는 다른 기관을 통해 힘을 인도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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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같은 방법을 사용한다. 마력회로가 아닌 내 뼈와 혈관을 이용해- 천천히 힘을 인도하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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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5분가량이 지났을 때, 이변이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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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안에서 넘실거리던 마력이 마침내 심장에서 출발한 마력과 이어져, 전기의 성질을 띠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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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스킬의 힘을 이용하지 않고, 순수한 조작만으로 [라이트닝 차지]를 체외로 방출해 낸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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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다, 그걸 상대방의 체내에 흘려 넣으며 회로를 파괴하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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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켜보고 있던 사신 4호가 그렇게 말했지만, 이 흐름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집중력이 한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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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파직거리는 전격은 허공으로 흩어지고 말았다. 전격장의 시전은 실패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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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은 이 정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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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으로 전격장을 맞아가며 기술을 연습한지 벌써 2주째, 나는 전자발경의 묘리를 깨우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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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전격을 상대에게 흘려넣는 것까지는 불가능하지만, 그 직전 단계까지라면 어떻게든 할 수 있게 된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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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전격을 발현하기까지 5분씩이나 걸리는지라, 실전에서는 전혀 쓸만한 게 못 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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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손상된 마력회로의 사용법이라는 실마리는 분명하게 잡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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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아, 방금 그건 성공으로 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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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정도면 잘 된 거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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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뭐어, 우수하다고 생각하는데, 으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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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전격장을 성공하기만을 학수고대하고 있던 사신들이 발을 동동 구르며 그렇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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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녀석들이 이러는 이유는 단순하다. 오늘 전격장의 성과가 나온다면, 아주 호화롭게 먹여주기로 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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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주간의 성과는 전자발경의 기초 습득뿐만이 아니었다. 나는 마침내 이십여 명의 사신 전원을 길들이는 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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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고분고분한 녀석들에게 화이트롤을 먹이는 걸로 시작해서, 나중에 아예 요리를 시작한 게 제대로 먹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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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버펑크 세계에서는 어마어마하게 귀하다는 ‘오가닉’ 재료를 사용한 요리의 힘이라고 할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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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같이 ‘큭 죽여라’를 말하던 1호 사신도 얄짤없이 내 요리의 포로가 된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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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이번 건 성공으로 치자. 먹고 싶은 거 하나씩 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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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져준다는 기색으로 그렇게 말하자, 사신들은 저마다 손을 들며 좋아하는 음식을 말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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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림스튜, 치즈 돈가스, 탕수육, 짬뽕, 갈비찜……하여튼 입맛들도 하나같이 개성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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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휴, 메뉴 통일은 죽어도 안 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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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괜히 헛웃음을 흘리며, 나노머신으로 만든 식칼을 들고 간이 주방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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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침을 질질 흘리며 기대하고 있는 사신들의 사진을 찍어, 오픈 커뮤니티에 업로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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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자 밥탐 기다리는 사신들.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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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사신들의 먹방과 일상 사진은 커뮤니티에서 무척 유명해져 있었다. 곧 댓글이 주르륵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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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ㅅㄲ는 대체 싸펑세계관에서 뭘ㄹ하는거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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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게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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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 변화는 성장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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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전 감각을 키우고자 진입했던 23층이건만, 어쩐지 요리사 노릇이나 하고 있는 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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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꾸준히 전격장을 습득하기 위한 훈련을 하고 있기도 하고, 기어이 전자발경을 어느 정도 익혀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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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로, 딱히 문제가 있거나 불만이 있는 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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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내 음식을 먹는 사신들의 리액션이 보통 재미있는 게 아니라서, 이것도 나름대로 만족스러운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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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자하니, 사신들은 아예 식사라는 행위를 해본 적이 거의 없다고 한다. 기껏해야 칼로리 스틱을 좀 먹어봤을 뿐이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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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사신들은 시험관에서 고속 배양된 몸이기에, 실질적인 나이는 대부분 거의 어린아이 수준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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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 외견만큼의 연령을 가진 건, 고참에 속하는 1호 사신 정도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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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어린 사신은 만들어진지 2년 정도밖에 안 됐으니, 어떤 면에서는 에인보다 더 순수한 백지상태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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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녀석들이 사이버펑크 세계관에서는 귀하디귀한 자연 재료를 이용한 음식을 맛봤으니, 리액션이 좋을 만도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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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가 취미인 사람에겐 잘 먹는 사람만큼 반가운 상대도 없다고 하던가, 하여튼 보고 있으면 재밌는 녀석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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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이런 사신들의 먹는 모습을 즐기는 건 비단 나뿐만이 아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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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서진혁#26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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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풀토핑 떡볶이 코스 흡입하는 8호 사신보고가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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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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떡볶이는 일반, 로제, 까르보까지 해서 3종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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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김은 잘 기억안나는데 튀길만한건 다 튀겨서 대충 7종류 될거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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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식하고나서 후식으로 샤베트까지 깔끔하게 조졌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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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호의 추천조합은 로제 양념에 튀김빵 푹찍어먹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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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가 사신중에서 제일잘먹는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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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걸 혼자 다만들었다고?? 이새끼 요리 왤케잘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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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ㄴ 진혁이 요리스킬도 따로 있을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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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ㄴ 요리시작한지 얼마안됬다는데 벌써 10렙넘었다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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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꼴 ㅅㅂ 이시간에 이런거올리지 말라고 개새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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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ㄴ 오늘치 잡템팔고 떡볶이 2인분 즉시구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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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우튀김개바삭해보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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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 튀김빵은 뭐임 고로케같은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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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ㄴ 비슷함 내용물은 치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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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ㄴ 통모짜핫도그같은건가보네 개맛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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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진혁 내 아내 합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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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호사시니 개귀여워퓨ㅠ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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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몇주간 내가 올린 사신들의 먹방씬은 모조리 인기글 탭에 올라가 있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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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너지 효율 문제로 굉장히 많은 양을 먹으면서도, 다들 가지런하게 먹는 편이라 인기가 없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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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슬슬 때가 다가오고 있다. 다른 게 아니라, 사신들에게 요리를 해먹이기 위한 식재료가 바닥날 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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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인벤토리에 남아 있는 식재료의 양 자체는 상당하지만, 사신들의 먹성을 생각해보면 그렇게 오래가지 못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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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이 재료들이 다 동나기 전에 전격장을 습득할 수 있을까 싶다. 앞으로 조금만 더 하면 될 것 같은데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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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그런 생각을 하며 전격장 연습에 매진한 지 일주일이 더 지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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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그게 무슨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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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전격장을 습득하지 못한 채로, 가진 식재료가 다 떨어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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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조심스럽게 전한 소식에, 사신들은 말 그대로 세상이 끝난 것만 같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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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고……파스타를 더 이상 해줄 수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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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비찜도 못 만들어 준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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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떡볶이도 이제 못 먹는다고? 무슨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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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같은 얼굴과 똑같은 차림에도 개성이 확실한 사신들이지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었을 때의 반응은 다들 비슷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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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아직 식재료가 완전히 떨어진 건 아니다. 아직 여유 분량이 조금 남아 있지만, 거의 동나기 직전인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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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떨어지고 나서 말하는 것보다는, 아직 여유 분량이 남아 있을 때 말해두는 게 좋을 것 같아서 그런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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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진짜예요……? 진짜로 우리 이제 맛있는 거 못 먹는 거예요? 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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찐따 같은 성격의 17호 사신이 울먹이며 물었다. 나는 남은 식재료의 현황을 간단히 설명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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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습장치를 통해 습득한 지식 외에는 어린아이나 마찬가지인 사신들도, 숫자에 관한 계산은 무척 빠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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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들은 남은 재료의 양을 듣자마자, 각자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을 몇 번이나 더 먹을 수 있을지를 바로 계산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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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아, 농담이지? 그럼 이제 돈까스는 앞으로 열 개밖에 못 만든다는 거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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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거 진짜야? 내 피자는 아무리 많아도 세 개밖에 못 만드는데? 거짓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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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게 식사의 즐거움을 배워버린 사신들은 말 그대로 멘탈이 나가버렸다. 곧 사신들은 내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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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뭔가 방법은 없는 거야? 나는 이제 핫도그 없이는 못 살아…제발, 방법이 있다고 말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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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료만 구할 수 있다면야 당연히 더 해줄 수 있지. 근데, 그게 안 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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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뭔가 대체 재료를 쓴다거나…아니면, 우리 나노슈트를 팔아서 재료를 사는 건 어때? 꽤 비쌀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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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을 하든 뭘 하든 입도 뻥끗 안 하겠다던 녀석들이, 자발적으로 극비 물품인 나노슈트를 팔겠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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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렇게 만들어놓은 거긴 하지만, 너희 진짜 원래 임무는 이제 안중도 없구나. 그래도 되는 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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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거였군……우릴 중독시킨 뒤, 값비싼 식재료를 대가로 성적인 착취를 하려는 거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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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아직도 그 소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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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 시치미 떼봤자 소용없다. 나는 네 음란한 속셈 정도는 훤히 들여다볼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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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와중에 1호는 또 이상한 소리나 하고 있다. 얘는 진짜 학습 데이터에 야설이라도 들어 있었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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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그렇게 상황을 전달하고 잠시 놔두었더니- 사신들은 저들끼리 쑥덕쑥덕 의견을 나누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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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제 전격장을 위해 이 녀석들에게 일부러 음식을 챙겨줄 필요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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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발경의 기본 원리는 충분히 감을 잡았고, 공격을 더 맞아봤자 새롭게 깨달을 건 없다. 남은 건 연습의 영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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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내가 사신들과 계속 지내고 있는 이유는, 순전히 이 녀석들에게 요리를 해주는 게 즐겁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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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결국 나는 이 녀석들의 보스인 상원의원의 멱을 따러 가야 한다. 어차피 때가 되면 헤어질 사이라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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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의 퀘스트에 특별한 방해가 되지 않는 한, 여기서 놓아달라고 하면 그냥 보내줄 생각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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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생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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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잠시 후, 회의를 마친 사신들은 정말 상상도 못한 소리를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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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시온 중추를 습격해서, 식재료를 약탈해 오는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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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들, 내 요리가 그 정도로 마음에 들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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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요리에 쓰이는 재료들은 딱히 이 사이버펑크 세계에서 구할 수 없는 것까지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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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합성 식품이나 칼로리 스틱 같은 가공품이 아닌 식재료는 매우 귀하기에,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구할 수 없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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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내가 만들어주는 음식에 푹 빠져버린 사신들은, ‘일반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식재료를 구하는 것을 선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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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 그리드를 거쳐 화이트 존으로 가자. 거기선 밀가루도 고기도 다 유통되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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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 존은 가장 안쪽의 ‘유토피아 시티’를 제외하면 가장 부유한 계층의 사람들이 사는, 이른바 ‘부자 동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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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 사신들의 보스인 상원의원이 거주하고 있는 구역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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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곳을 습격해서 약탈하자니, 솔직히 내 입장에서는 나쁘지 않다. 오히려 편하고 좋은 동선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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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레이 캐슬이 화이트 존을 공격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로 만들어진 암살병기들이- 이런 소리를 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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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도 안 주고 일만 시키는 파파따위 알게 뭐야, 우리도 그냥 우리 마음대로 살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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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 우리한테는 파파가 내리는 명령만이 전부였어요……그치만 이젠 그렇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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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최근에 알게 된 건데, 상원의원은 클론 사신들에게 자신을 ‘파파’라고 부르도록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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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명령만을 수행하는 꼭두각시였음에도, 사신들은 그 호칭 그대로 상원의원을 아버지처럼 여겼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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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학습장치를 통해 어떤 부분에 조작을 가해서, 충성심을 가지도록 세뇌를 가한 것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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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파보다 떡볶이가 더 좋아. 그냥 네가 새 파파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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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 세뇌가 고작 맛있는 식사 몇 번에 풀려버리다니, 높은 기술 수준에 걸맞지 않은 허술함에 한숨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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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생각해보면, 그렇게 이상한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욕망이야말로 사람의 의지를 가장 강하게 불태우는 불씨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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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나만 해도 그렇다. 엘레노어와의 내일이라는 단순한 욕망 하나를 붙잡고, 탑의 정상을 향해 달려가고 있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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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살병기로 키워졌다는 배경에도 불구하고, 각자 확실한 개성을 확립했을 만큼 강한 자아를 지닌 이 녀석들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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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는 식사라는 단순한 욕망과 쾌감을 계기로, 극적인 변화를 맞이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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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니들 맘대로 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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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절대로 바뀌지 않는 것도 아니다. 나는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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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랬던 것처럼, 여기 이 사신들이 그런 것처럼, 세상의 그 누구도 다르지 않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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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모두가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은- 이 시련의 탑 세계에서는 그렇게 좋은 일만은 아니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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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페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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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프들에게 있어서 귀는 상당히 민감한 부위라고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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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적으로 민감하다는 게 아니라, 정서적으로 민감한 부위라나. 함부로 건드리면 큰 실례가 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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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인간에게 매우 우호적이고 개방적인 다크엘프들도 만져지는 것을 조금 꺼리는 눈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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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는 오히려 만져보라고 자꾸 들이대긴 했는데, 그건 걔가 변태라서 그런 것 같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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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하이엘프 사이에서의 인식은 또 어떤가 하면- 예전에 봤던 커뮤니티 글로 쉽게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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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박진호#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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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이 씨발 개씹좆프새끼들 왜 지랄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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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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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 한번 만진거가지고 존나 발작하네 미친새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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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며칠째 뭔 아동성폭행범 보는것마냥 꼴아보는데 어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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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 만지는게 그렇게 심각한 일이냐? 내 잘못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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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건 좆좆좆좆을 고른 니 잘못이 맞다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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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뭘 어떡해 너는 강간범이 뭐 하면 용서해줄거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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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ㄴ이게 시발 강간이 나올 정도 일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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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ㄴ아직 숲깐프새끼들 혐성맛을 덜봤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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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빵빵깐프 누님들도 귀는 함부로 못만지게하는거 모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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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데 숲깐프 절벽년들 추행한거면 걍 아동성폭행이랑 똑같은거 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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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ㄴ숲깐프는 슬렌더야 씹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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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ㄴ페도검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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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ㄴ‘어린이사랑꾼’입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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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뮤니티에서 하이엘프의 귀는, 건드리는 순간 호감도가 바로 나락으로 떨어지는 버튼 취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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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메르세데스도 내 공격에 귀가 살짝 베였을 때, 유난히 불편한 표정을 지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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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 순간, 나는 그 귀를 아예 잘라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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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촤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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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는 완전 절단, 그리고 그 아래의 어깨에까지 칼날이 박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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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력강화로 인한 방어능력 탓에 크리티컬이 터지는 치명상은 아니지만, 무시하지 못할 수준의 유효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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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타격을 넣은 직후, 메르세데스의 검이 빛살처럼 쏘아져 나를 덮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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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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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뚝에 이어서 오른쪽 가슴 근처를 꽤 깊이 찔렸다. 재빨리 발을 놀려 놈의 공격거리에서 벗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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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추격이 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뜻밖에 그런 일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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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세데스는 잘려나간 귀를 한 손으로 붙잡은 채, 한껏 찡그린 표정으로 헐떡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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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뿐만이 아니다. 이를 악물었는지 턱이 부들부들 떨리고, 세게 쥐어 잡은 검손잡이가 절그럭거리며 흔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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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 이, 인간, 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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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말까지 심하게 더듬고 있었다. 이제 와서 지구력 부족으로 헐떡이고 있는 건 아닐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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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빡쳤네, 저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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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이런 상황에서 개빡친 상대방이 보일 수 있는 패턴은 두 가지 정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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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는 머리에 피가 쏠려서 사리분별도 못하고 무작정 덤벼드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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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한테는 이게 가장 좋다. 이 잡템 세례를 이용한 빈틈 만들기도 슬슬 한계를 보이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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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벤토리의 용량은 끝이 없더라도, 인벤토리 안의 내 아이템에는 분명한 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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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유효한 장애물이 되어주는 [내구]풀강 갑옷들은 죄다 걸레짝이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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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잡템들은 아예 다 박살 나서 회수도 못 하게 돼버린 것들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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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집광] 디코이에도 점점 적응하고 있으니, 여기서 슬슬 약해져 주지 않으면 곤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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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둘째는, 분노를 계기로 뭔가 각성을 하거나 숨겨둔 힘을 꺼내는 경우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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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르르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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녀석의 몸에서 피어오르는 마력의 빛이 갑작스레 거칠어진 것을 보면, 아마 후자가 당첨인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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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하다 하다 3페이즈까지 있는 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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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의적인 의미로 발광하기 시작한 메르세데스의 힘은 아주 강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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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여주마, 죽여주마, 인간족 놈, 죽여주마아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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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쾅! 콰앙! 콰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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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격 한번 한번에 땅이 갈라지고 충격파가 터져 나온다. 주변에 널브러진 아이템들이 마구 조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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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도와 근력 모두 조금 전보다 더 강력해졌고, 당연히 그 공격에 정면으로 노출된 나는 무사하기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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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전에 입은 상처를 회복할 틈도 없이, 몸에 자꾸만 상처가 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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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딱히 치명상은 입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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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나갔죠? 안 맞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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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자식, 죽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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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세데스가 열이 뻗칠 대로 뻗친 탓에, 침착함을 잃고 무식하게 덤비고 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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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력도 순발력도 올랐지만 정작 중요한 기술의 날카로움이 크게 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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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기능사 최길현이 그랬던 것처럼, 아무리 스펙이 좋아도 공격 패턴이 단순하면 그냥 호구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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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과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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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최길현이랑은 다르게, 이쪽은 무식하게 덤벼들어도 무시하기 힘들긴 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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찌르기밖에 못하던 최길현과 비교하면, 눈에 뵈는 게 없는 상태로도 달인급 솜씨를 내고 있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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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 하나 잘린 게 그렇게 빡쳐? 느그 왕자님 욕하는 것보다 그게 더 빡쳐? 흠, 이거 기사 탈락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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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역겨운 자식이, 그 저급한 혓바닥으로 기사의 자격을 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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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 역겨운 짓은 그쪽이 더 많이 하지 않았나? 허연 귀쟁이 새끼들은 내로남불이 패시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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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일부러 부상을 입어 가면서도 속을 박박 긁어대고 있다. 녀석이 침착함을 되찾지 못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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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족, 주제에, 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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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아무리 봐도 점점 화가 가라앉아가고 있다. 반면에 내 몸에는 점점 상처가 늘어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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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여 HP는 대략 60%, 정타를 맞지 않은 상태로 이 정도까지 까였다는 건 심각한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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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티컬급 공격을 맞으면 한번에 반피 이상이 나가는 것도 가능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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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다행인 점은, 녀석의 몸 상태가 조금씩 나빠져 가는 게 보인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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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력강화의 출력을 억지로 끌어올린 대가와, 내가 아이템을 던져대며 살포한 독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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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6층에서 얻을 수 있었던 일부 독 계열 포션을, 아이템 사이에 섞어서 주변에 계속 흩뿌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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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식으로 뿌린 독은 당연히 효과가 강하지도 않고, 범위 안에 있는 나도 함께 피해를 입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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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이런 식으로 쓰라고 있는 물건이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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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나는 레벨이나 스펙에 비해 비정상적인 수준의 내성 스킬을 갖고 있기에, 그 점은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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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억……허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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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분노가 아니라 상태가 나빠진 탓에 거친 숨을 뱉고 있는 메르세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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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여전히 표정도 일그러져 있어, 아직 완전히 이성을 찾은 것처럼 보이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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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족 놈……가만두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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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직감했다. 지금이야말로 저 깐프년에게 결정타를 먹일 수 있는 타이밍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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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상 상태가 안 좋아지더라도, 녀석이 냉정함을 되찾으면 이기기 힘들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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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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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신]스킬로 민첩을 증폭시키며, 검과 방패를 들고 정면으로 달려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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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세데스 역시 희번뜩한 눈빛으로 맞서 달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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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도는 무시무시하지만, 이를 악물고 정면으로 달려드는 모습이 완전히 빈틈투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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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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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한 타이밍에 맞추어, 왼손의 방패를 전력으로 집어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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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럽게 날아든 방패에 대처하느라 몸의 중심이 크게 기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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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한 발자국, 이 타이밍, 이건 무조건 적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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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생각하며 검을 휘두른 순간, 무언가 내 가슴팍에 꽂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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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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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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꽂혀들어온 것은, 닿을 리 없는 거리에 있던 유백색의 아름다운 칼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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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네가 속았구나, 인간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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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세데스가 검을 집어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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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부터 이미 냉정함을 되찾고, 화를 내는 척하고 있었던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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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타이밍에 페이크를 걸고 투척 따위를 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특히 저 하이엘프의 성격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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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이, 발……이럴 거면서 아까는 잘도, 비겁하다고, 지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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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들은 말을 그대로 돌려주마, 네놈에 비하면 별것도 아닐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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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개씹좆프 새끼들, 인성 하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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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청이는 내 몸에서 메르세데스의 검이 뽑혀나갔다. 피가 주르륵 흐르며 눈앞이 어지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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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이겼다고 생각해서 너무 방심하고 있었던 걸까. 남 말 할 처지가 아니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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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길 말은 그게 전부인가? 보나 마나 항복을 입에 담을 것 같지는 않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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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한 소리를 한다. 이 상황까지 와서 누가 항복을 할 수 있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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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츠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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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세데스의 몸에서 마력강화의 빛이 줄어들어 간다. 한계에 도달한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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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중상을 입고 HP도 절반 이하로 내려간 나에 비해, 아직 여력이 남아 있는 분위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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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력강화가 꺼진 상태로도 나보다 스펙이 높을 테니, 당연한 일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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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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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쯤 죽어가는 나를 마무리짓기 위해, 메르세데스의 검이 높이 들어 올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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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족 치고는 제법이었다. 잘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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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신창이가 된 내 몸으로는 여유롭게 내리쳐지는 검을 피할 방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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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래, 병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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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나게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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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촤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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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렵지 않게 검을 피해내고, 카운터로 녀석의 팔을 베어버렸다. 피가 분수처럼 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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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 억……네놈, 어떻게, 그 상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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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태가 뭐 어쨌다고, 귀쟁이 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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뻐억,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떠듬거리는 메르세데스의 명치를 걷어차 날려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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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상태가 안 좋긴 하다. 출혈이 심해서 눈앞이 살짝 어지럽고, 몸도 성한 곳이 별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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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이 새끼야, 내 전투 지속 레벨이 몇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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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이라면 움직일 수 없을 정도의 상처를 입고도, 나는 전투를 계속 이어나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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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헉, 끅, 이놈, 뭐냐, 이 힘은……대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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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발길질에 정통으로 얻어맞은 메르세데스가 이어서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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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내 근력이 조금 전보다 더 강해진 것에 의문을 느낀 모양이다. 거 궁금한 것도 많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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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거 아니다, 이건 1층 클리어 보상으로 얻은 어떤 스킬의 효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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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P가 일정 수치 이하로 떨어지면 모든 스탯이 상승하는 패시브 스킬, 불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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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격력과 방어력까지 별개로 올라가진 않지만, 모든 스탯이 상승한다는 점에서 마력강화와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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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걸 구구절절이 설명해 줄 생각은 없다.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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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뭘 모른다는 듯 물어보고 앉았냐. 니들도 이런 거 많이 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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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긴 뭐야, 반피 까였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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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힘을 쏟아부어 반죽음으로 만들어 놨더니, 난데없이 숨겨둔 힘을 꺼내서 파워업하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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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부터 2페이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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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나는 결투에서 승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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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 정면돌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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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시온의 도시 구획은 크게 넷으로 나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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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가장 바깥에 위치한 외곽지역이자 내가 머무르고 있는 그레이 캐슬. 온갖 범죄가 들끓는 회색 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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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그 안쪽의 컬러 그리드. 레드부터 퍼플까지 일곱 개의 구역으로 세분화되어 있는 최대 크기의 거주 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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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엘리시온의 심장부이자 수도 역할을 하는 화이트 존. 온갖 행정 시설과 대형 기업이 밀집되어 있는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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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넷째, 도시 한가운데에 자리하고 있으면서도 외부와 단절된 정체불명의 낙원, 유토피아 시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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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스트의 최종 목표인 상원의원도, 사신들이 노리는 식재료도, 모두 화이트 존 안에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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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뿐만이 아니다, 다음 층으로 올라가기 위한 미궁 지역도 화이트 존에 위치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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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하게는 화이트 존의 지하- 버려진 휴머노이드와 드론들이 방황하고 있는 ‘블랙 존’이 23층의 미궁 지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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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층 미궁의 보스는 오래전 버려진 인공지능이 스스로 개조를 거듭한 끝에 탄생했다는, 일명 ‘키메라 드론’ 이라는 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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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23층의 진짜 보스는 사실 그 키메라 드론이 아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진짜 난관은 따로 있다고 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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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시온에서 가장 중요한 지역으로서, 화이트 존에 갖춰진 막대한 경비 병력이야말로 23층의 진정한 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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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인 키메라 드론의 공략보다, 그 경비 병력을 뚫고 블랙 존까지 진입하는 것이 훨씬 더 어렵다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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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하나가 네임드 개체 수준으로 강력한 경비병력이 무한에 가깝게 보충되는 탓에, 전투로 뚫는 것은 거의 불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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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는 여러 스킬을 활용해 무력충돌을 피하며 잠입하는 방식의 진행이 정석 공략법으로 자리 잡혀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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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그런 화이트 존으로 스무 명이 넘는 사신들을 이끌고 침입하는 것은- 과연 얼마나 힘들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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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모르겠지만, 일단 레드 그리드를 통과하며 짐작한 바로는- 생각보다 훨씬 쉬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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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존나 사기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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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들은 나노슈트에 장착된 ‘은폐장’이라는 모드를 사용해, 완벽에 가까운 투명화가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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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에 은폐장은 단순히 모습을 감추는 것뿐만이 아니라, 가동 중에 발생하는 모든 소음을 제로로 만들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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뿐만 아니라, 적외선 탐지기나 굴절 감지기등의 각종 보안장치까지 완벽하게 무시할 수 있기까지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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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화이트 존의 경비가 삼엄하더라도, 사신들의 은폐장 앞에서는 정말 아무런 의미가 없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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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나도 완벽하지는 않지만, [암영]스킬을 사용하면 이 정도의 보안장치는 무시하고 이동할 수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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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하지, 은폐장은 13레벨 특수 모드야. 대부분의 감시체계에는 절대 걸리지 않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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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맞아요, 최상급 군사용 감시체계로도 은폐장은 잡아낼 수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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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꾸로 묻고 싶은데, 그러는 너는 어떻게 은폐장을 쓰고 있는 우리를 감지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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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쉽게 도달한 화이트 존의 입구를 앞에 두고, 귀에 끼운 통신기를 통해 사신들의 물음이 전해져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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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어떻게 감지한 거냐고 물어봐도, 마력감지로 잡아낸 것도 아니라서- 딱히 할 말이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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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직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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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 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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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대충 대답했더니, 3호 사신이 징그럽다는 듯이 그렇게 말을 흘렸다. 뭐 어쩌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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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괴물 뮤턴트가 같은 편이니까 든든하네, 바로 파파한테 가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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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식재료 확보를 위한 약탈 여정이지만, 우리의 첫 목표물은 상원의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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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해두는데, 이건 절대 내가 설정한 목표가 아니다. 무려 여기 이 사신들이 먼저 제안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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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파의 벙커만 털어도 돈가스를 백 번은 먹을 수 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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녀석들의 파파- 상원의원의 벙커에 대량의 식료품이 저장된 창고가 있다는 황당한 이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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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이렇게까지 해로운 식충이들은 달리 없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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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대로, 화이트 존의 입구에 존재하는 경비 로봇은 우리의 은신을 감지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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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항 검색대 비스름한 보안 게이트도 아무렇지 않게 통과해 버리고, 손쉽게 화이트 존에 입성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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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 존의 도시는 그레이 캐슬은 물론이요, 레드 그리드와도 무척 다른 분위기를 띠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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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온 두 구역이 정석 사이버펑크에 가까운 느낌이었다면, 여기는 좀 더 미래적 분위기가 난다고 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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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버펑크라기보다는 정통 SF에서 묘사되는 도시에 더 가까운 느낌이다. 물론 실상은 그렇지 않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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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보기만 번드르르하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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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역으로 마력감지를 돌려 보니, 이 화이트 존은 정말 겉만 그럴듯하게 꾸며 놓은 환락의 도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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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급 사교클럽처럼 꾸며놓은 건물 안에서는 매춘이, 오페라 하우스처럼 생긴 극장에서는 천박한 공연이 펼쳐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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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보이는 대형 백화점 건물은 몇 개의 층이 통째로 성인용품만 팔고 있는데다가, 지하는 어휴, 장난이 아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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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런 건물들이 공공기관이랑 당당하게 등을 맞대고 우뚝 솟아 있다는 사실에 인지부조화가 올 지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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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파의 벙커는 이쪽이야, 어서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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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4호 사신의 안내를 따라 도시 안쪽으로 이동했다. 벙커로 향하는 길은 상당히 복잡한 루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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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들의 말에 따르면, 상원의원은 강박에 가까울 만큼 안전에 예민하게 군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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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화이트 존 안에서도 쉽게 찾아가기 힘든 장소에 벙커를 지어 놓고, 그걸 집무실로 쓰고 있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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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왔어, 저기가 입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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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도착해 보니 확실히 그런 것 같았다. 상원의원의 벙커는 말 그대로 빌딩 숲 사이의 요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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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벙커 입구를 지키는 경비로봇의 숫자만 해도 마흔 대가 넘는다. 아니, 저게 경비 로봇은 맞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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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커먼 동체에 어마어마한 크기의 화기가 다닥다닥 붙어 있고, 무슨 레이저 터렛 같은 것도 장치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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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 경비 로봇이 아니라 군사용 대량살상병기처럼 생겨먹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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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의 은폐장은 저것들도 거의 다 무시할 수 있지만, 첨단 기술이 아닌 [암영]스킬로는 여기까지가 한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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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영]은 분명 훌륭한 은신 스킬이지만, 은폐장처럼 모든 흔적을 깨끗이 지울 수 있는 건 아니라서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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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그럼 저희는 작전대로 뒷문으로 갈 건데요, 어쩌실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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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들은 은폐장을 믿고 뒷문으로 침입해, 안쪽의 보안 설비를 무력화하고 이동한다는 작전을 짜둔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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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폐장을 쓸 수 없는 나는 다른 방식으로 침입해야만 하는데, 어떻게 침입할 예정인지는 아직 설명해 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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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하면, 사실 아무 계획도 없었거든. 슬금슬금 잠입하는 건 내 성미에 맞지 않아서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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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정문으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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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당하게 정문으로 뚫고 들어가서, 상원의원의 목을 따고, 다시 정문으로 돌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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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로 하니까 좀 이상하게 들리지만, 그냥 늘 하던 대로 하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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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애애애애애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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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울리며, 새까만 동체에 중화기를 붙인 경비로봇들이 일제히 대열을 갖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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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들을 뒷문으로 보낸 후, [암영]스킬을 풀고 로봇 한 대를 작살냈더니 바로 이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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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이런 상황이라면 침입자를 향한 경고 한 번쯤은 날려줄 만도 한데, 이놈들은 그런 것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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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두두두두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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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짜고짜 쏘아지는 총탄의 세례, 나는 큼직한 방패 하나를 내세워 마력을 두르고 그대로 전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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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한 기교를 부릴 것도 없었다. 그대로 대열을 갖춘 로봇들을 들이받는 것만으로 전열은 손쉽게 무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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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쪽으로 파고들어 장검과 도끼를 휘둘러 새까만 로봇들을 차례차례 토막 내자, 삐삐거리는 비프음이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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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순간, 벙커 입구의 바닥 부분이 열리며 회색 동체의 인간형 로봇들이 무기를 들고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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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거 본 적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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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 커뮤니티에 올라와 있는 23층 주요 몬스터 일람에 기록되어 있는 로봇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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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이 뭐더라, 아무튼 무슨 군용 휴머노이드라고 들었는데- 왜 개인 벙커에 군용 병기가 저렇게 많은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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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병력이 잔뜩 동원되는 건 나쁘지 않다. 나한테 어그로가 끌릴수록 사신들은 더 편하게 움직일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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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나는 아직 사신 외의 제대로 된 23층의 몬스터와 싸워 본 적이 없다. 갱단원들은 허수아비 같은 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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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전보다 더 어렵다는 경비로봇의 물량공세를 나는 어디까지 감당할 수 있을까, 그것도 궁금한 참이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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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등급 적대 행위를 감지하였습니다. 적성 대상 1체를 확인하였습니다. 제거 절차를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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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총부터 쏴갈기고 적대행위를 탐지했다고 지껄이는 병신같은 로봇의 말을 들으며, 몸에 마력을 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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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트닝 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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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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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점 간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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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전 상황이라면 전격장의 연습도 더 잘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라이트닝 차지]까지 발동한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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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성 대상의 15등급 이상 에너지 방출을 확인했습니다. 제거를 위해 추가 병력 지원을 요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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벙커의 문이 열리며, 보다 요란하고 괴상한 외형을 지닌 로봇과 다수의 드론들이 추가로 배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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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라이트닝 차지]를 감지하고 숫자를 늘린 모양인데, 그럼 이러면 어떻게 되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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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르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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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마력강화를 발동해, [라이트닝 차지]로 방출되는 전력의 기세를 더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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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나를 막으려면 군대를 끌고 와야 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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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 종이호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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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층 세계는 프레임이나 모드의 등급을 숫자를 붙여서 나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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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한 기준은 잘 모르겠는데, 아마 10등급 이상부터는 개인이 소유하는 게 완전히 금지된 수준이라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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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곳의 경비 시스템은 내가 방출한 [라이트닝 차지]의 위력을 15등급 수준이라고 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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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마력강화를 통해 더 강한 에너지를 방출하면 몇 등급쯤 될까 싶어서, 한번 해 본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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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등급 고에너지 반응을 확인했습니다. 기용 가능한 전 병력을 동원하여, 적성 개체를 말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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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들이 사용하는 은폐장이 13등급의 장비라고 했으니까, 그것보다 다섯 단계는 높은 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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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벙커의 문이 열리며 온갖 거대한 병기와 로봇들이 우르르 튀어나왔다. 숫자는 얼핏 봐도 백이 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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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보니, 일대다수의 싸움은 익숙하지만 백이 넘는 상대와 동시에 교전하는 건 오랜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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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펄스 에너지 사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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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먼저 나선 것은 대충 3m쯤 되어보이는 사이즈의 인간형 로봇, 놈의 어깨에서 대포 같은 것이 쏘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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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이잉! 콰르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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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명음과 함께 쏘아진 것은 백색의 에너지, 나는 방패를 들어올렸지만- 그대로 쭉 밀려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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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펄스 에너지라는 이름도 그렇고, 밀어내는 것에 특화된 무기인가. 근력이랑 상관없이 쭉쭉 밀리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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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단순히 밀어낼 뿐이라면 나도 똑같은 짓을 할 수 있다. [천의 마술]의 힘을 빌려 마법진을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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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플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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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전한 마법은 청색 마탑주가 내주었던 마법서에 기록되어 있는, 가장 기본적인 방어 마법 중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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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과는 단순하게 약한 수준의 물리공격을 튕겨내는 것뿐. 하지만 일단 마력을 잔뜩 때려넣어 성능을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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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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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도 없이 밀려나던 발이 멈춘다. 방패 위에 덧씌운 리플렉터 마법이 리펄스 에너지를 튕겨내기 시작한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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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튕겨낸다고 해봤자, 그렇게 대단한 수준은 또 아니다. 마력을 아무리 넣어봤자 근본은 기본 방어 마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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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 정도면 충분하다. 아주 약간만 튕겨낼 수 있으면, 나머지는 그냥 완력으로 밀어붙이면 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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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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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색의 에너지를 그대로 밀어내며 다시 앞으로 전진, 그대로 덩치 큰 로봇에게 접근해 방패를 휘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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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그작, 로봇의 동체가 과자처럼 손쉽게 바스러졌다. 동시에 다른 로봇들이 나를 무기로 겨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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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마법을 연상시키는 공기의 탄환, 이글거리는 화염 세례, 파직거리는 전격의 파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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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것들을 전부 무시하고 달려들어, 로봇의 머리통에 차례차례 [대전]을 통해 전류를 밀어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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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지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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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기대했건만, 아무래도 전자발경 같은 걸 사용할 수 있는 사이보그는 이 자리에 없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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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장치가 되어 있는지, 내가 흘려 넣은 전류를 차단하는 것까지는 가능하지만- 반격할 줄은 모르는 것 같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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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이 넘는 숫자의 로봇과 드론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일격마다 몇 대의 로봇이 박살 나고 있는 형편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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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당 아군 병력 손실이 기준치의 12.6배를 초과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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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 제압까지 필요한 자원 계산을 시행합니다. 완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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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력의 272%를 투입할 시 제압이 가능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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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식간에 절반가량이 쓸려나가고 나니, 공중에 떠 있던 드론들이 윙윙거리며 뭔가 말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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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상 시퀀스를 개시한다느니 어쩌느니 떠들던 드론들은 곧 ‘마스터’에게 통신을 연결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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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터라는 건 아마 상원의원이겠지, 물론 나는 딱히 놈이랑 대화하러 온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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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력손실률이 52%라고? 이것들이 이런 미친 짓을……당장 그만두지 못하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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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에, 연결된 통신을 거친 목소리는 무척 다급하게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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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목에 찬 스마트워치에 사신들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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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꽤 깊숙한 곳까지 잘 침투한 모양이다. 병력 대부분이 내 쪽으로 몰렸으니,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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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방진 놈… 네가 누구인지 알고 있다. 이번에 그레이 캐슬의 갱단을 통합했다는 그 뮤턴트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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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멈추라’며 다급하게 외치던 상원의원의 목소리는, 공격을 멈춰준 잠깐 사이에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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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저나- 나를 어떻게 알고 있나 싶었는데, 그렇게 사신을 잔뜩 보냈으니 모를 수가 없었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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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투를 보아하니, 마치 내가 쳐들어올 걸 미리 알고 있었던 것처럼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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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허세인지, 아니면 진짜로 예상하고 있었던 건지, 그것까지는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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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카메라가 망가져 상황을 직접 볼 수 없다는 게 아쉬울 지경이다. 겁도 없이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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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잠시 고민했다. 이걸 대답해줘야 하나 싶어서. 애초에 대답하면 저쪽에서 제대로 들을 수는 있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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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 존까지 침입해 엘리시온의 상원의원을 공격하다니, 네놈은 지금 엘리시온에 전쟁을 선포한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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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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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입을 여는군. 그레이 캐슬의 쓰레기라도, 엘리시온과 전쟁을 벌인다는 의미쯤은 아는 모양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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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내 목소리는 제대로 전달되고 있는 것 같은데- 이 새끼는 도대체 뭔 자신감으로 지껄이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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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네놈을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 지난 일주일간은 네놈이 어떤 연구실에서 만들어졌는지만 조사하고 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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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인식이 심하게 어긋나 있는 것 같지만, 일단은 들어보기로 했다. 상원의원은 곧 폭풍처럼 말을 쏟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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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인지 아나? 아무런 모드도, 프레임도 착용하지 않은 뮤턴트가 그런 힘을 보인 전례는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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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무력이라면 유사한 개체가 전혀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것들은 모두 이성을 잃은 괴물에 불과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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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네놈은 뮤턴트로서 그만한 힘을 가졌음에도 온전한 이성을 유지하고 있다. 그 연구 가치는 실로 대단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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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금방 상원의원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눈치챌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런 배경 설정이 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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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많은 갑부들은 몸에 모드와 프레임을 이식하는 것을 저급하게 여긴다고 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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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를 이식하지 않고 가능한 한 내추럴의 상태를 유지한 채, 시술을 통해 수명을 늘리는 것을 선호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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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가능한 한 온건한 방법으로 포획하고 싶었던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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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상원의원은 전형적인 말 많은 악당처럼 주절주절 자신이 세웠던 계획을 떠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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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은 딱히 들을 가치도 없었다. 당분간 나를 그레이 캐슬에 잘 박아두고, 잘 관찰할 생각이었다나 뭐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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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 있는 강력한 뮤턴트인 나를 베이스로 천천히 연구해, 영생을 이루는 것을 꿈꿨다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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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걸, 네놈의 멍청한 행동으로 모두 그르치게 된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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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녀석은 대체 뭘 근거로 나를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한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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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원의원은 암살을 위해 내보낸 사신들이 하나둘씩 당한 것을 계기로, 나를 연구하고자 마음먹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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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분간은 천천히 관찰과 감시만 하다가, 연구시설이 완성되면 나를 포획해 써먹을 생각이었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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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하고 있는 벙커의 대규모 병력도 이렇게 쓸려나가는 마당에, 무슨 수단으로 나를 포획하려고 했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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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의문은 이어진 상원의원의 말을 통해 금방 해결할 수 있었다. 어이없는 착각을 했을 뿐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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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 녀석들의 나노슈트를 빼앗아 써먹은 거겠지, 거기에 그레이 캐슬의 버러지들을 죄다 끌고 왔을 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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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원의원은 내가 사신에게서 빼앗은 장비와 갱단원들을 이끌고 총공세에 나선 것으로 생각한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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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엘리시온의 시스템은 결코 너희 같은 쓰레기들이 설치게 두지 않는다. 네게 다음은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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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은 숫자로 밀어붙여 이길 수 있을지 몰라도, 화이트 존의 진짜 군대는 이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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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위험을 감지한 AI가 군을 호출했다. SIFT의 15레벨 전투병력 3,000기가 이곳을 향해 오고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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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패거리는 깨끗이 청소되고, 고등급 뮤턴트인 네놈은 규정에 따라 DNA 한 조각 남기지 못하고 소각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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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가 망가져 상황을 직접 못 보고 있었기에, 내가 갱단원들을 내세워 숫자로 밀어붙인 거라고 착각한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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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인가. 나는 이 세계의 일반적인 상식을 벗어나 있는 존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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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련의 탑 도전자들이 내 강함을 제대로 추측하지 못하듯이, 상원의원 역시 궤를 벗어난 적을 상상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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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도적인 무력 앞에서는 종이호랑이나 다름없는 시스템 하나만을 믿고, 혼자서 현실과는 거리가 먼 결론을 내린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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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소수로 난동을 부렸을 뿐이라면, 적당한 병력으로 덤벼온 거라면, 무마해 줄 수 있었겠지만……너희는 선을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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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말하는 꼴을 보니, 사신들의 배신은 아예 상상도 못 하고 있는 것 같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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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그 허접한 세뇌를 믿고 있는 거겠지, 설마 사신들이 음식에 낚여 반역을 저지를 줄 예상이나 했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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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거리 중 15레벨 급의 병력은 얼마나 있지? 끌고 온 패거리는 몇이나 있나? 기껏해야 떨거지들 오백 정도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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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백도 많이 쳐줬다는 듯 말하는 상원의원의 목소리를 재생하고 있는 드론을 향해, 나는 대답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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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나 혼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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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40분 후, 나는 출동한 15레벨 전투병력 3,000기를 완파하고 상원의원의 벙커에 침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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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도적으로 강력한 개인 앞에서, 숫자만 거창할 뿐인 집단은 아무 의미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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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 도시의 질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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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원의원의 벙커 안은 매우 복잡한 구조로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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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방송국처럼, 침입자가 쉽게 장악하지 못하도록 계단을 비롯한 구조물들이 이리저리 흩어져 있는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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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에 쓸데없는 기둥과 각종 보안장치가 달린 장애물들이 이곳저곳에 배치되어 있어, 거의 미궁 지역이나 다름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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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마력감지를 광역으로 펼치면 모두 해결될 문제다. 나는 포션 하나를 들이키며 천천히 마력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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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생이 묘하게 늦네, 방사능이라도 맞은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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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력을 일으키며, 재생하는 상처를 바라보았다. 3천이나 되는 병력이 상대였으니, 부상이 아예 없을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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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일건을 쏘는 탱크에, 플라즈마를 뿜어내는 폭탄에, 온갖 사이보그 병사와 강력한 무인 드론들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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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원의원은 15레벨 전투병력이라고 했지만, 드문드문 놈들이 하는 말을 들어보니 그 이상의 병력도 섞여 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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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도보도 못한 해괴한 무기들로 쉴 새 없이 몰아붙이니, 나라고 해도 나름대로 소모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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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그래 봤자 [초재생]으로 감당할 수 있는 범위 안쪽이고- 무엇보다 소모값만큼의 이득도 얻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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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원소 내성 Lv.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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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계층에서는 맞아볼 수 없는 다양한 공격을 맞아본 결과, [종합 원소 내성]스킬의 레벨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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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밖에도 꾸준히 사용한 [라이트닝 차지]의 레벨도 하나 올라서, 이제는 30레벨을 달성한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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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에 사이보그 병사 몇 놈과 싸우면서 전자발경의 감각에도 조금 더 가까워진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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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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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역으로 전개한 마력감지가 시설 내부를 완벽하게 파악하고, 상원의원의 위치를 잡아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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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사신들의 위치 역시 마찬가지로 확인됐다. 뭐, 이쪽은 스마트워치를 통해 이미 확인한 상태였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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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사신들은 바깥 병력을 정리했다는 내 통신을 받고, 신나게 벙커의 식품창고를 터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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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장으로 돌아온 통신의 내용을 보면 상당히 들떠 있는 것 같다. 나도 메시지를 하나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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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원의원 모가지만 따고 금방 갈 테니까 천천히 챙기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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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사신들이랑 양동으로 펼칠 계획이 있었지만, 이렇게 된 김에 상원의원은 혼자서 처리할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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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들을 처분하기 위한 킬스위치 같은 게 있을 가능성도 있으니까, 내가 깔끔하게 죽여두는 게 훨씬 낫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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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상원의원은 얼마나 강하려나. 따지고 보면 그놈이 이 퀘스트의 최종보스인 셈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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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시온의 고위층은 모드를 착용하지 않고 내추럴로 사는 걸 선호하기에, 아예 전투능력이 없을 가능성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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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턴트 연구에 흥미를 갖고 있었으니, 뭔가 신체개조를 했을 수도 있고- 아니면 따로 호위가 있을 수도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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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봤자 23층이고, 그래봤자 일반 퀘스트니까, 대단한 걸 기대하기는 어렵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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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닦고 기다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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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상원의원에게 들리도록 일부러 소리내어 그렇게 말한 뒤, 이동을 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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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물을 깨부수며 최단거리로 도착한 상원의원의 집무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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벙커 내에서도 가장 엄중한 보안을 자랑하는 그 방의 문짝은 거의 암반 수준의 두께를 가진 벽으로 가로막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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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닦고 기다리랬더니 문을 걸어잠그고 농성하기를 택한 것 같다. 이딴 거 나한테는 아무 의미도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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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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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엘프제의 검 한 자루를 꺼내 들고, 그 위로 마력을 쏟아붓고 집중시켜 얇은 오러를 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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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 손의 마력회로 손실로 예전처럼 자유자재로 오러를 사용할 수는 없지만, 아예 못 쓰는 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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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평소보다 좀 더 시간을 들이고, 평소보다 좀 더 마력을 들이면 이 정도 수준의 오러는 충분히 만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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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아무리 얇고 가늘더라도 오러는 오러, 어지간한 물질은 모두 종잇장처럼 베어가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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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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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금속으로 만들어진 두꺼운 벽을 느긋하게 잘라내자, 호화롭게 꾸며진 내부가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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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버펑크 세계라고는 믿기지 않는 화려한 가구에, 여러 최첨단 기계가 어우러진 모습이 참 오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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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혀 다른 시대의 건축물 두 개를 억지로 합쳐놓은 느낌, 그리고 그 중앙에는 상원의원이 우뚝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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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저 텔레토비 같은 옷은 또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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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원의원은 우주복 비스무레한 슈트를 걸치고 있었다. 호신용으로 착용한 강화복 같은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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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로…정말로 혼자인 건가…대체 어디서 이런 괴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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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원의원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자기 눈으로 직접 보지 않고는 믿을 수 없었던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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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중앙 관리국이 숨겨놓은 비밀 병기인가, 아니면 유토피아 시티에서 흘러나오기라도 한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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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잣말인지 질문인지 모르겠다. 나는 담담하게 검을 들어 올렸다. 상원의원은 주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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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나를 죽여서 어쩔 셈이지? 엘리시온의 상원의원을 살해하면 네놈만 고달파질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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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도 그 비슷한 소리 하지 않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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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은, 아직은 돌이킬 방법이 있다. 상원의원인 내가 비호하고 나서면 오늘 일은 덮을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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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란한 슈트를 입고 있지만, 회유책을 들고 나온 걸 보니 딱히 전투력에는 자신이 없는 모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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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원의원 살해는 반역죄나 다름없다. 나를 죽이면 네놈은 평생 크레딧이라고는 써보지도 못할 것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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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원의원은 자신을 죽일 경우 일어날 일을 상세하게 예시를 들어가며 설명했다. 내게는 우스울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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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시온 경찰과 군대의 추격, 크레딧을 포함한 모든 전자계좌의 정지, 넷필드는 물론이요 모든 장치를 이용할 수 없을 거라는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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녀석은 여전히 나를 엘리시온 사회라는 틀 안에서 바라보고 있었다. 이곳의 주민이 아닌 내겐 아무 의미가 없는 일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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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그나마 들이밀 수 있는 거라곤 그런 것들뿐이겠지. 무력으로 이길 수 없으니 일상을 인질로 잡으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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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오픈 커뮤니티에 올라온 페스티벌과 관련된 여러 공지들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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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키지 않으면 대형 길드에 의해 불이익을 받게 될 것이라는, 솔플러인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규칙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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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도적인 무력을 가지고 다른 세계에서 넘어온 강자에겐, 어떤 경고와 위협도 종이호랑이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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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히 그러겠다는 건 아니지만, 나는 이곳에서 했던 것과 똑같은 짓을 그곳에서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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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그딴 거 써본 적도 없어, 등신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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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련의 탑의 랭커들은, 억제할 수 없는 강력한 개인이 나타난다면- 과연 어떻게 대처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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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스티벌과 토너먼트라는 큰 행사를 앞두고, 머릿속에는 묘한 생각이 계속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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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원의원이 입은 슈트는 여기 기준으로 17레벨에 해당하는 전투병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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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들이 입는 나노슈트보다 급이 높은 물건인데, 확실히 그에 걸맞은 방어력과 공격력을 갖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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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과거형으로 말하는 것만 봐도 알겠지만, 결국 나한테는 별 의미가 없었다. 상원의원은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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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헉, 흐억, 허억, 숨이……숨이, 으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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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대단한 공격을 한 것도 아니다. 그냥 슈트를 박살 내며 명치를 한 대 때려줬을 뿐, 그걸로 이런 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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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뭐 하나만 물어보자. 대답 잘하면 살려줄 수도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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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히 제압된 상원의원의 머리채를 잡고, 나는 23층의 배경 설정을 들은 이후 쭉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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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 시티는 뭐 하는 곳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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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 존보다 더 깊숙한 엘리시온의 최심부에 존재하는 정체불명의 낙원, 나는 계속 그 장소의 정체가 궁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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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중한 경비 때문에 도전자 중에서도 들어가 본 사람이 없고, 심지어 엘리시온의 주민들도 제대로 아는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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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놓고 히든 요소라는 느낌을 물씬 풍기는 장소 아닌가. 상원의원쯤 되는 녀석이라면 뭔가 알고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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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가쁘게 호흡하는 상원의원에게 포션 하나를 먹이고, 대답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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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 시티는……낙원이다, 그것 말고는, 나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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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른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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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정말이다. 이 엘리시온의 누구도 그곳에 대해 알지 못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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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이야기였다. 유토피아 시티야말로 엘리시온의 가장 중요한 곳이자, 중심이 되는 장소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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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곳에 대해서, 엘리시온을 지배하는 상원의원이라는 작자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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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을 찌푸리며 다시금 묻자, 상원의원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모를 수밖에 없는 이야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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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한 거다, 유토피아 시티는 엘리시온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도시다! 누구도 그 안쪽을 본 적이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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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당한 이야기였으나, 상원의원은 재빨리 뒷말을 덧붙였다. 이어진 것은 간략한 역사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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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시온은 닫힌 낙원을 둘러싸고 뒤늦게 형성된 도시에 불과해! 두 도시의 역사는 완전히 별개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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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기를- 오염된 바깥세상을 버리고 지어진 낙원은, 엘리시온이 아니라 유토피아 시티였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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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를 위해 유토피아 시티가 엘리시온의 중심인 것처럼 말했지만, 사실은 그냥 아무 상관도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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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 이야기가 붙긴 했지만, 결국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소리였다. 더더욱 흥미가 돋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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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러냐. 그럼 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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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상원의원에게 더 이상 들을 이야기는 없어 보인다. 나는 깔끔하게 손도끼를 휘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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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로 퀘스트는 클리어, 유토피아 시티와 관련된 후속 퀘스트가 나올 줄 알았는데- 아쉽게도 그렇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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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대로 조사해보지 않고 넘어갈 생각은 없다. 하지만 지금은 그보다 우선인 일이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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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창고 다 털었어, 파파는 아직 멀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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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든 요소를 찾기 전에, 그리고 24층으로 넘어가기 전에, 이 식충이들부터 어떻게든 해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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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 미련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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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계에서는 매우 고급품에 속하는, 공산품이 아닌 식재가 한가득 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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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쌓여 있다는 말로는 부족할지도 모른다. 너무 많아서 양을 가늠하기 어려울 지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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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거 봐요, 대단하죠? 앞으로 맛있는 거 계속 먹을 수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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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 한 명이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그렇게 물었다. 확실히 이 정도면 재료가 부족할 일은 없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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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명이 넘는 사신들은 저마다 하이파이브를 하고는, 재잘거리며 자신들이 먹고 싶은 음식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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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 시티도 빨리 찾아가보고 싶지만, 일단 아지트로 돌아가는 게 먼저다. 나는 인벤토리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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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두두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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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걱정했지만, 산더미 같은 식재료는 제대로 아이템으로 판정되어 인벤토리로 쏟아져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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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키는 대로 창고를 털어오라고 하긴 했지만, 어떻게 다 가져가려고 이만큼이나 되는 양을 챙겨왔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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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PC인 이상 내 인벤토리를 완벽하게 인식할 수는 없을 테니, 단순히 욕심을 잔뜩 부린 것뿐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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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파는 어떻게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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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재료를 챙기던 중, 1호 사신이 내게 다가와 물었다. 그러고 보니 아직 말을 안 해줬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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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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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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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호는 살짝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심경이 복잡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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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녀석은 사신 중에서 최연장자고, 그만큼 상원의원의 지시를 받으며 생활한 시간도 길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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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도 안 주는 파파따위 없어도 된다며 반역을 결심했지만, 막상 이렇게 되니 썩 유쾌하지는 않은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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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저나, 퀘스트가 완료되었으니 자아를 잃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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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그랬으면 더 편하고 빠르게 다음 층으로 넘어갈 수 있었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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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아, 빨리 가자! 나 얼른 페퍼로니 피자가 먹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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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비찜! 갈비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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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새로운 음식이 먹어보고 싶어요, 안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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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난 어린아이들처럼 재촉하는 사신들을 보며, 18층과 19층에서의 일을 조금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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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와는 다른 방식으로 ‘다음’을 약속하고, 그 흘러간 ‘다음’의 결말을 보았던- 그건 아직도 내게 인상 깊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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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식충이 사신들에게도 ‘다음’이 있을지 모른다. 물론 그런 것 하나하나를 신경 써서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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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적어도 내 손이 닿은 범위의 일은 제대로 매듭지어야 하는 것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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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알았으니까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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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대로 사신들을 이끌고 아지트로 돌아와, 요청받은 음식을 있는 대로 잔뜩 만들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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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원의원의 벙커에서 털어온 식재료는 내 인벤토리에 갖춰져 있던 재료들보다 종류가 훨씬 다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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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각각 사신들의 ‘최애 음식’을 보다 업그레이드해서 먹여줄 수도 있었고, 새로운 음식을 선보일 수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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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 요리 스킬의 레벨도 더 올랐고, 한식 계열의 음식을 먹이며 국뽕을 채우기도 했고- 아무튼 즐거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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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내가 너희에게 요리를 해 주는 건 오늘까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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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식충이들의 응석을 언제까지고 들어줄 수는 없는 노릇, 나는 당당하게 파업을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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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도 슬슬 독립할 준비를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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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극에 중독된 사신들은 더 이상 내가 만들어주는 요리 없이는 살 수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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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 사이버펑크에도 맛있는 요리는 있다. 하지만 이 사신들이 중독된 ‘현대 음식’은 오직 내 손에서만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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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 커뮤니티에서 긁어모은 레시피에, 내 나름의 개량을 거쳐 맵단짠을 강조한 자극적인 스타일의 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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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 완벽하게 재현할 수 있는 요리사는 이 23층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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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나는 곧 23층을 떠나야만 한다. 사신들의 중독적인 욕구를 무한히 채워줄 수는 없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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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최소한 내 손으로 확실하게 독립심을 길러주고 떠날 필요가 있을 거다- 그렇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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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 무무무, 무슨, 무슨 소리야, 그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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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천벽력같은 소식을 들은 사신들은 이번에도 격하게 반응했다. 어쩐지 전보다 더 심한 것 같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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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런 눈으로 쳐다봐도 안되는 건 안되는 거다. 나는 단호하게 딱 잘라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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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그대로야, 내일부터는 너희가 알아서 해 먹든가 해. 나는 여기까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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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사신들은 망연자실해 주저앉거나, 나노머신으로 칼을 만들어 들이밀거나, 엉엉 우는 녀석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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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모습까지도 각자 개성이 넘쳐흐르니, 얼굴이 똑같아도 누가 누구인지 구분이 너무 잘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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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칼을 들이민 사신의 손목을 꺾어 나노머신을 빼앗고, 그걸 식칼 형태로 변형시켜 돌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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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알고 있겠지만, 나는 엘리시온 사람이 아니야. 앞으로도 여기서 살 생각은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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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시온 사람이 아니야? 그럼 뭔데, 바깥에서 왔다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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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해, 아무튼 나는 곧 여기를 떠날 거야. 너희한테 평생 요리를 만들어 줄 수는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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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인벤토리에서 평소에 쓰던 조리도구를 꺼내 늘어놓았다. 사신들이 주목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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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들 파파는 뒈졌어, 그리고 나는 너희의 새 파파가 되어줄 생각이 없지. 그러면 이젠 독립해야 할 거 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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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나는 사신들에게 요리를 가르칠 것이다. 내가 없어져도 저들끼리 알아서 요리를 해먹을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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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스트가 완료되고 깡통이 된 NPC에게도, 기억은 남아 이어진다. 그렇다면 이것도 나름 의미가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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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 싶은 음식이 있으면 이제부턴 직접 만들어 먹어, 만드는 방법은 전부 알려 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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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 우리는 요리 같은 거……해본 적 없단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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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요리 시작한 지는 얼마 안 됐어, 많이 하다 보면 알아서 다 늘더라. 그러니까 일단 해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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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페스티벌이 시작되기까지는 제법 기간이 남았다. 그전까지만 어떻게든 한 사람 몫을 하게끔 가르쳐 놓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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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 존의 병력과 싸우며 전자발경도 제법 가닥을 잡았으니, 시간 여유는 꽤 많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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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운 것부터 하자, 일단 너 나와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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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들이 각자 좋아하는 음식을 만들 수 있게 된 것은, 그로부터 3주가량이 지난 이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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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하기 짝이 없는 나노머신을 완벽하게 다루며, 그걸로 사이보그를 숭덩숭덩 잘라내던 녀석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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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 요리를 가르치기 시작하자, 식칼 사용을 비롯한 기본적인 도구 사용법은 대부분이 하루 만에 익혀 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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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는 기본만 할 줄 알게 된다면, 그 이후로는 그저 레시피를 외우고 사소한 요령을 몸에 익히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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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과 함께 쌓인 숙련도는 결과물에 그대로 반영되고, 마땅히 할 일도 없는 사신들에겐 남는 게 시간이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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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봐, 파파! 완벽하게 튀겨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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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이 녀석들은 놀라울 만큼 빠른 속도로 요리 기술을 습득해 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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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을 가르치다 보면 자신도 공부가 된다더니, 나도 사신들을 가르치며 요리 스킬의 레벨이 더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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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완벽한 프라이드 치킨을 만들어 낸 사신 8호를 칭찬해주며, 오픈 커뮤니티를 살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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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페스티벌 날짜 공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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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페스티벌 이벤트는 거의 모든 정보가 풀렸고, 기간 역시 정말 코앞까지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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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스티벌 맵으로 향하는 포탈이 열리는 것은 내일모레, 시간으로 치면 48시간이 살짝 안 되게 남은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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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페스티벌이 열리기 전에 사신들을 다 가르쳐 놓고, 유토피아 시티까지 다녀와 볼 생각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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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되면, 유토피아 시티의 히든 요소를 캐보기에는 살짝 시간이 모자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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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슬 가야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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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곧바로 아지트의 갱단원들과 사신들을 모두 불러모아, 이제 떠날 때가 됐다고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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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응은 제각각이었다. 특히 실컷 부려 먹었던 갱단원 중에서는 신 난다는 티를 못 내서 안달인 놈도 있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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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 쪽은 본인들이 요리를 할 수 있게 되었으니, 아쉬워하는 녀석들과 아무래도 좋다는 녀석들로 갈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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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떠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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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중, 1호 사신이 혼자 앞으로 나와 그렇게 물었다. 설마 이 녀석이 이런 표정을 지을 줄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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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날 사람을 음흉하다고 쏘아붙이더니, 얼굴에 아주 미련이 뚝뚝 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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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녀석은 사신 중에서도 특히 요리를 빠르게 배워서, 이제 내 요리에 집착할 이유는 없을 텐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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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저질스러운 욕망을 위한 클론 하렘을 만들겠다는 계획은 어떻게 된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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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계획 세운 적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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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 마라, 네 속셈은 뻔히 보여. 그게 아니면 요리를 가르칠 이유가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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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역시 적응의 동물이라, 이제 1호 사신의 이런 터무니없는 소리도 흘려넘길 수 있게 된 지 오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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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려버리자, 1호 사신은 역정을 내며 내 뒷덜미를 붙잡아 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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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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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순히 끌려와 다시 고개를 돌려주니, 아랫입술을 꾹 깨물고 어깨를 떠는 1호의 모습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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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로 가는 거야? 이렇게 떠나서 다시는 안 돌아올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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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하다, 나는 유토피아 시티를 확인하고 나면 그대로 다음 층으로 올라갈 생각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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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나도 모르겠다. 나중에 인사하러 한번 올 수도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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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1호가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지만, 그렇다고 내 생각이 크게 달라질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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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층을 지나 멋진 회색 현자가 된 에인과 재회했듯이, 이 녀석들과도 언젠가는 재회할 수 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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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마음으로 바라되 미련은 남기지 않고, 나는 내가 바라보는 길을 향해 계속 전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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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될 수 있으면 또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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깡통이 된 후에 헤어지면 더 아쉬울 뿐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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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 멋진 신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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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신에 도움을 주는 망토를 걸치고, [암영] 스킬을 사용해 모습을 감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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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원의원을 잡으며 엘리시온의 주요 전투병력을 작살내 놨기 때문인지, 화이트 존 안쪽으로 잠입하는 것은 아주 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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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입 후에는 먼저 미궁 지역인 블랙 존으로 이동했다. 블랙 존의 환경은 커뮤니티에 작성된 정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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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괴한 폭주 로봇과 생체실험으로 생겨난 뮤턴트가 바글거리는 지하도- 솔직히 그냥 하수구 같은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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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저분하고, 어두침침하고, 가끔씩 더러운 시궁쥐(로봇) 같은 게 나오고, 이 정도면 거의 비슷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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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커뮤니티에서 이런 소리를 하면, 도전자들은 그 시궁쥐들이 미친 살인병기지 않느냐고 따지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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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균 보유 개체, 일급 질병 유발 개체, 오염, 소독, 제거합니다, 정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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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가 제일 더러워, 로봇청소기 새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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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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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한테는 이 살인 로봇들이나 진짜 쥐새끼나 크게 다를 것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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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커뮤니티에 뿌려져 있는 지도를 토대로 블랙 존을 탐험하고- 오래 걸리지 않아 보스룸을 찾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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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안쪽에 있는 키메라 드론만 처치하면 전이문을 활성화하고 다음 층으로 올라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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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유토피아 시티를 한 번 확인하고 가기로 했으므로, 일단은 발걸음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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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블랙 존에서 빠져나와 [암영]을 사용해 은신하고, 화이트 존의 거리를 빠르게 지나 ‘벽’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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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 시티와 화이트 존을 나누는 경계문, 하지만 이 게이트는 사실 겉모습만 이렇게 꾸며놓았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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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원의원이 말하기를, 필요에 의해 문처럼 보이도록 꾸며놨지만- 사실은 절대 열리지 않는 그냥 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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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시온보다 먼저 존재했던 인류를 위한 낙원의 경계선, 나는 [강철 직검]에 오러를 둘러 휘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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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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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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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벽에는 굵은 흠집이 하나 생겼을 뿐이다. 이거 대체 뭘로 어떻게 만든 벽인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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얇은 오러였다지만 고작 흠집이라니, 이 정도 단단함은 미스릴 같은 최상급 소재에서나 나오는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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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아예 못 자를 정도는 아니다. 나는 시간을 들여 최대한 마력을 집중시키고, 더 강한 오러를 형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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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가가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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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벽은 결코 쉽게 잘리지 않았다. 결국, 간신히 몸만 지나갈 수 있는 통로를 뚫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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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구멍으로 유연성을 발휘해 몸을 욱여넣고, 마침내 입성한 유토피아 시티의 모습은 놀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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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원이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황폐했다던가, 사실 낙원 따위는 없었다던가- 그런 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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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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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 안쪽에 펼쳐진 것은 널따란 마당이 딸린 주택이 주욱 늘어선 극도로 평범한 길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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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빌딩이나 화려한 전광판, 날아다니는 로봇이나 비행선 같은 사이버펑크적인 요소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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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이문을 타고 다른 층으로 넘어왔는가 의심이 될 정도로, 유토피아 시티 안쪽은 그냥 평범한 주택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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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평범한 주택가에는- 정말로 평범하게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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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여자, 아이, 노인-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비슷한 옷차림을 하고 각자의 일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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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볍게 산책을 하기도 하며, 일터로 떠나는 사람도 있는 것 같고, 집 안에서 휴식을 취하는 사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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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평범한 일반 주택가의 모습이라 오히려 황당했다. 분명 뭔가 거대한 비밀이 숨어 있을 줄 알았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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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기다려 봐도 퀘스트가 발생할 기미는 보이지 않고, 주변을 둘러봐도 이상한 점은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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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껏해야, 주택의 모습이나 사람들의 옷차림이 다 비슷비슷하다는 것 정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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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비슷한 건물이 쭉 늘어서 있는 건 대한민국에서도 흔한 일이고, 옷차림이 비슷한 것도 마찬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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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지, 대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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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볍게 마력감지까지 펼쳐 봤지만, 뭔가 특이한 기척이 감지된다거나 하는 일도 전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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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민 끝에, 이번에도 현지인에게 물어보는 편이 낫겠다고 판단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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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는 행인 하나를 붙잡고, 바깥에서 온 사람이라고 소개하며 안내를 해줄 수 있겠냐고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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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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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에서 온 사람을 경계하거나 적대한다고 해도 상관없다. 친절하게 굴어 주면 더더욱 좋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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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잘 몰라서……경찰서에 가보시는 게 어때요? 저쪽으로 쭉 가시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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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돌아온 것은 너무나 무난하고 평범한 반응이었다. 행인은 그대로 기척도 없이 지나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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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퀘스트는 생기지 않은 채고, 커뮤니티를 열어서 유토피아 시티에 대해 검색해봐도 나오는 건 딱히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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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 수 없나, 일단은 움직여 보는 수밖에. 경찰이라면 뭔가 좀 더 그럴듯한 반응을 해 주지 않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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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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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생각하며 앞으로 한 걸음 내디딘 순간, 나는 뒤늦게 위화감을 느끼고 고개를 돌려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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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사람들이 평범하게 생활하는 지극히 평범한 주택가- 하지만 이곳에는 중요한 것이 하나 빠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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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지나간 그 사람도, 주변에서 움직이는 다른 사람들도, 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아니, 조금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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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게 아니다. 사람들에게서 생명반응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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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감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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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킬을 활성화해 청각을 강화시켰다. 개미 걸어가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을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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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근, 두근, 두근.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심장박동 소리가 들린다. 침을 삼키는 소리까지도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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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러면서도 생명반응은 느껴지지 않는다. 분명히 모든 기관이 살아 있는 것처럼 소리 내고 있음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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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력을 사용해 [초감각]스킬을 더 강화하고, 광역으로 정밀도가 높은 감지를 다시 펼쳐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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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 그런 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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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박동 소리, 위장이 음식물을 소화하는 소리, 혈관에 피가 흐르는 소리- 모두 들리는 한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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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고 미세한 다른 소리가 섞여서 함께 들려온다. 위잉위잉 돌아가는 엔진의 구동음이, 사람들에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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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 시티의 주민들은 사람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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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 일부를 기계로 대체한 사이보그나, 인간과 닮은 휴머노이드- 그 어느 쪽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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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보그도 뇌나 심장을 비롯한 주요 신체기관은 남아 있기에, 마력을 퍼트려 생명반응을 감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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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들의 경우도 복제된 클론이면서 신체 대부분이 기계로 개조된 사이보그였지만, 제대로 생명반응이 있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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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곳의 시민들은 아니다. 심장 비슷한 것이 뛰고 있지만 심장이 아니다. 뇌조차도 존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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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지나가는 행인을 붙잡고 대가리를 터트려 보면, 그 안에는 뇌가 아닌 기계부품이 들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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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로이드의 도시……뭐 그런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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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이렇게까지 사람과 비슷한 행동을 하면 그냥 사람이 아닐까 싶지만- 뭔가 생각이 턱턱 막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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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진 행동대로만 움직이는 NPC를 처음 봤을 때 느꼈던 것과 같은, 기묘한 불쾌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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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반응을 잡아내는 마력감지 없이, 단순히 [감각 강화]같은 스킬만 있었으면 눈치채지 못했을 텐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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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기묘한 로봇들의 존재에, 어째서인지 거부감을 느끼고 있었다. 소름이 돋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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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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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게 심호흡하며, 일단은 계속 걸었다. 그리고 동시에 마력감지의 범위를 더욱 넓혀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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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내 마력감지의 최대범위는 상상을 초월한다. 넓으면 넓을수록 정밀도는 떨어지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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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유토피아 시티의 전경을 간략하게 파악하는 것뿐이라면 대단한 정밀함은 필요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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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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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역 탐지를 사용해 뭔가 딱 봐도 중요해 보이는 시설물 하나를 찾는 데에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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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사당을 연상시키는 외견의 건물, 그 지하에 무언가 숨겨진 공간 같은 것이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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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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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킬을 사용해 재빨리 그 건물이 있는 방향으로 달렸다. 동시에 이 도시의 이상한 점을 하나 더 찾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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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사는 주택의 모양과 구조가 모두 거의 똑같다. 사람들의 외모와 체형과 옷차림 역시 거의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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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몇 종류의 NPC를 복제해서 이곳저곳에 풀어놓은 느낌. 도시의 전체적인 구획과 구조 역시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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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똑같은 일을 하고, 똑같은 방식으로 여가를 보내고, 똑같은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는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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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 의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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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착한 건물은 정말로 국회의사당이었고, 건물 안팎으로는 또 비슷한 얼굴의 사람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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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차림새는 조금 다른 면이 있는데, 배지를 달고 있는 걸 보면- 국회의원이나 정치인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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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저들 역시 생명반응을 내는 생명체는 아니었다. 나는 그들을 무시하고 의사당 안쪽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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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봐요, 여긴 함부로 들어오면 안 되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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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지해오는 경비원을 밀쳐내자, 경비원은 그대로 정지하더니 제자리로 돌아갔다. 버그가 난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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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이 쓰였지만, 일단 이 아래에 뭐가 있는지부터 확인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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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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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꽈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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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벤토리에서 꺼낸 대형 망치로 바닥을 깨부수고, 숨겨진 공간에 발을 들여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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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 있는 것은 수천 개는 되는 전선과 코드가 연결된 거대한 컴퓨터와- 작은 디스플레이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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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퀘스트는 발생하지 않았지만, 디스플레이가 담긴 컴퓨터는 스피커로 소리를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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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오십시오, 유토피아 관리 시스템 A2-33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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윙윙거리는 구동음과 함께 눈을 뜬 컴퓨터는 작은 디스플레이로 나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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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 디폴트 오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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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컴퓨터를 보호해야 할 외장은 모조리 뜯겨있고, 흉하게 드러난 내부 부품들의 모습은 기괴하기 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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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가죽을 벗겨 낸 대형 짐승을 보는 것 같다. 이 컴퓨터의 모습에서 그나마 볼 만한 것이라고는, 정면에 달린 작은 디스플레이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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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조그만 디스플레이는 웃음 모양의 이모티콘을 띄운 채,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스피커를 통해 말을 전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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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오십시오, 유토피아 관리 시스템 A2-33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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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이게 유토피아 시티를 관리하고 있는 메인 컴퓨터, 이 도시의 기괴한 모습을 설명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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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뭘 물어봐야 할지 모르겠다. 어떻게 물어봐야 할지도 모르겠고. 아니, 그보다도 이거- 수상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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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들의 몸에 들어가 있는 것과 비슷한 파워팩 수백 개가 컴퓨터 본체에 다닥다닥 붙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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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징그러운 외형도 그렇고, 유토피아 관리 시스템이라는 설명도 그렇고, 암만 봐도 히든 보스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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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 시티의 역사를 알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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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마력을 끌어올리며, 컴퓨터를 향해 그렇게 말했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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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장난 건 아닌 것 같은데- 잠시 고민하고 있자니, 컴퓨터의 부품 몇 개가 움직이더니 내게 입력장치를 들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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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마이크가 달려 있고, 익숙한 형태의 자판이 붙어 있는……그러니까, 키보드로 입력하라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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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닥, 타닥, 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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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판을 두드려 말한 것과 똑같이 입력하자, 디스플레이가 반짝거리며 다시금 스피커가 울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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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2-23의 데이터베이스로 답변할 수 없는 내용입니다. 장착된 A2-11의 데이터를 불러옵니다, 3초가 소요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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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이어 디스플레이에 표시된 이모티콘 모양이 바뀌었다. 이전 것보다 앙증맞게 웃는 표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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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레이터 기능을 활성화했습니다. A2-23의 데이터베이스를 참고하여 유토피아의 역사를 자세히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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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커에서 출력되는 목소리도 바뀌었다. 활달한 기계음은 노이즈가 섞인 채로 설명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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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 프로젝트는 전후력 1163년에 시작된 ‘행성 자원 고갈 및 오염에 따른 인류 이주 계획’의 총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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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환경오염과 자원 고갈로 더 이상 인류가 살 수 없게 된 행성에서, 인류 보존을 위한 낙원을 만드는 계획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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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력 1160년에 발발한 제5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유토피아 프로젝트의 본격적인 시동은 1168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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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디스플레이에서 이런저런 화면이 지나갔다. 이쪽 세계의 역사를 알지 못하는 나로서는 알아보기 힘든 자료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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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렇다고 아예 이해할 수 없을 정도는 아니었다. 언뜻 보기에는, 지구와 매우 비슷한 환경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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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완전히 똑같은 건 아니다. 십여 년 전 시련의 탑과 게이트가 출현하며 지구의 환경과 사회는 극적으로 바뀌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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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지구는 게이트의 몬스터들에게서 채취한 코어나 마력자원을 이용해, 지하지원 의존을 크게 줄인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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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획 초기의 낙원 프로젝트는 잔여 자원을 활용해 전 인류의 5%를 보존할 수 있을 것으로 예정되었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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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23층 세계의 과거는 달랐다. 마력을 비롯한 이계의 자원 없이, 순수하게 행성의 자원만을 이용해온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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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 건설 진행 중 발생한 환경 악화의 영향으로, 보존 가능 수치를 1%로 재설정해야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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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것은, 탑이 나타나지 않은 지구의 미래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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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가 설명해준 유토피아는, 한정된 자원으로 인류가 존속하기 위해 만들어진 작은 낙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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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능한 모든 방식으로 추출한 잔여 행성자원을 통해, 영구히 존속될 수 있을만한 숫자의 인류만을 이 땅에 남기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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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존속 가능한 인류의 숫자는 첫 계산 당시에는 5%였으나, 이후에는 1%로 설정되었고- 그게 이 낙원의 예정된 인구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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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인류의 1%, 지구를 기준으로 생각해보면 7천만 정도의 인간만이 이 ‘유토피아’에서 살아남아 역사를 이어갈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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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현재 유토피아 시티에는, 7천만은커녕 7명의 인간도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을 흉내 내는 기계들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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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바깥의 엘리시온에 거주 중인 인간의 숫자를 헤아려보면, 그에 근접한 수치일지도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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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지금 여기는 왜 이 모양이 된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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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저도 모르게 말을 내뱉었다. 대답하지 않는 컴퓨터를 보고 한숨을 내쉬며, 다시 자판을 두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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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2-11의 데이터베이스로 답변할 수 없는 내용입니다. A2-23의 메인 데이터를 불러옵니다, 3초가 소요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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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컴퓨터는 다시금 시스템을 바꾸었다. 내가 처음 마주쳤던 유토피아 관리 시스템이 다시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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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질문에 답변하기 위해서는 유토피아 프로젝트가 목표를 달성한 전후력 1203년의 데이터 열람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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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고, 열람이 필요한 데이터 F97-2199는 일급 정신 장애 및 치명적 자살 증후군을 유발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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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터 열람 전, 이하의 향정신성 약물을 모두 복용한 후 유서를 작성하여 주십시오. 뇌전성 모르핀 정제 2m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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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템은 이름만 들어도 심상찮은 마약성 약물의 목록을 줄줄이 나열했다. 물론 나는 그런 걸 갖고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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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내성이 너무 높아서 죄다 한 사발씩 들이켜도 별 효과는 없겠지만……대체 왜 그런 걸 권하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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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작도 안 간다. 나는 [정신 오염 내성]스킬을 믿고, 다시금 자판을 두드려 해당 데이터를 재생할 것을 명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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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 프로젝트는 목표 달성 이후, 상정되지 않은 외부 요소의 간섭으로 보유 자원을 손실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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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실한 자원은 ‘아스트라’로 임시 명명된 에너지원으로서, 기원이 해석되지 못한 미지의 자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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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관리 시스템 A2-23은 해당 자원의 손실 이후의 측정 데이터를 토대로, 인류종 보존 가능 수치를 재설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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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템은 아무렇지 않게 자신이 새로 계산한, 보존 가능하다고 판단된 인류의 숫자를 화면에 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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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구 보존 가능 인구 : 0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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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스템의 개발자는, 보존 가능한 인류의 숫자가 0으로 계산되었을 때를 상정하지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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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의 시스템은 영구 보존이 가능한 숫자의 인류를 지키기 위해, 모든 수단을 강구하게 짜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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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존 가능한 인구가 10명이라면, 그 10명을 존속시키기 위해 도시의 시스템을 스스로 개편하게 되어 있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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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외부 요인’의 개입으로 모종의 주요 자원을 손실하자, 그 수치가 0명이 되었고- 이는 치명적인 오류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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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템은 영구 보존 가능한 인류 0명을 위해 도시 전체를 개편했고, 그 개편 끝에 지금의 유령도시가 완성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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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명의 인류를 위해 존재하는 공허한 낙원. 시스템은 프로그래밍의 빈틈에 빠져 무의미한 행동을 반복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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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원의 소모 없이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노동용의 휴머노이드를 제조해 투입하였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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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스플레이는 그동안 시스템이 들려온 갖가지 노력을 표시하고 있었다. 하나같이 낭비에 불과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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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엘리시온은……결국 멸망한다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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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 시스템의 계산으로는, 남은 자원을 어떻게 사용하든 인류는 절대 영구 존속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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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유토피아 시티 바깥에 존재하는 엘리시온의 인구는, 미래에 자원 부족으로 완전히 소멸하게 된다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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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이 세계에는 예정된 멸망이 닥쳐든다. 마치 세계수가 뿌리내린 9층의 세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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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내가 신경을 써야 할 일은 아니다. 모르는 세계가 언젠가 망하든 말든 내가 알 게 뭐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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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세계에 남은 사신들을 생각하면,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이 하나쯤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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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닥, 타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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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천천히 자판을 두들겼다. 시스템에게 설명을 요구하며, 천천히 명령을 입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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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명의 인류를 영구 보존하겠답시고, 괴상한 낭비를 하고 있는 시스템에게- 상황을 알려주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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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이게도 시스템은 인간 친화적으로 설계되어 있었다. 한 시간 정도를 들여서 나는 명령 입력에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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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한 명령은 단순하다. 이미 인류의 영구 존속은 불가능하게 되었으니, 목표를 변경하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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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미한 0명의 영구 존속이 아닌, 남은 인류의 장기 존속을 위해 도시를 개편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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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원의 시스템 개편을 시작합니다. 소요 예정 시간 : 312시간 5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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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유토피아 시티는 내부를 개편하고 문을 개방해, 엘리시온의 시민들을 안으로 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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닫힌 낙원에서 열린 낙원이 된 이 세계가 앞으로 어떻게 변화할지는 모르겠지만, 조금은 나은 미래가 생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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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퀘스트 창이 제멋대로 열리더니, 빠르게 등록된 퀘스트가 곧바로 완료 처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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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스트 완료 : 닫힌 낙원 - 디스토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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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보상으로 들어온 것은 새로운 스킬, [파동 제어 Lv.1]이라는 패시브가 등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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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시브 스킬의 효과는 굳이 설명을 읽을 필요도 없었다. 그동안의 연습을 통해 체득한 감각이 알려주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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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력을 비롯한 에너지를 자유롭게 요동치게 하며, 흐름을 조작할 수 있게 해주는 스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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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읍……스스로 얻고 싶었는데, 그래도 됐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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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서 나는 전격장과 같은 전자발경을 자유롭게 다룰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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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한 내용은 모르겠지만 히든 퀘스트도 어찌저찌 클리어했고, 남은 건 24층으로 넘어가는 것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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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페스티벌 일정이 있으므로, 보스를 잡고 나서도 바로 넘어가지는 않을 셈이다. 포탈이 여기에 생길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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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아직 신경 쓰이는 점이 하나 남아 있다- 인류의 영구 존속을 불가능하게 만든 ‘외부 요인’에 대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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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실했다는 ‘아스트라’라는 자원에 대해서도 신경이 쓰이고, 그것과 관련해서 마음에 걸리는 점도 하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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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도시 개편을 진행 중인 메인 컴퓨터에게 다가가, 다시금 자판을 두드려 질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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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갖 마약성 약물을 복용하고 열람할 것을 권하는 데이터의 정체와, 그 미지의 ‘외부 요인’에 대해 알려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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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요인’이란, 유토피아 프로젝트가 가동 중에 연구진과 시스템에 접촉한 미지의 다원정보체를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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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시스템의 해석으로는 다중차원에 중첩되어 존재하는 모종의 생명체라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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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데이터베이스에는 해당 외부 요인이 접촉했을 당시의 영상과 음성 자료가 남아 있습니다. 재생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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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살짝 긴장하며 자판을 눌렀다. 곧 작은 디스플레이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어둠이 드리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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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이이이이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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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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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가 찢어질 듯한 노이즈, 뇌를 파고드는 정체불명의 소음, 눈을 파고드는 영상 속의 어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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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는 듯한 통증과 함께 피눈물이 흐른다. 소음이 지나간 귓가에서도 주르륵 따뜻한 것이 흘러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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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가 녹아내려 입과 코로 흘러나오는 감각, 나는 이 지옥 같은 고통을 이미 느껴본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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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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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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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벤토리에서 도끼를 꺼내 내 다리를 찍었다. 다른 방향의 고통에 조금씩 진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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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알림창 몇 개가 눈앞에 떠올랐다. [정신 오염 내성] 스킬의 레벨이 한번에 두 개가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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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동시에 괴상한 노이즈로만 들리던 소음 속에서, 딱 한마디 말이 식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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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긴 폐품이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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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디스플레이는 원래의 화면으로 돌아왔다. 스피커도 소리의 재생을 멈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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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눈과 입과 귀와 코에서 피가 철철 흘렀지만, 끝까지 고통을 견뎌내며 정신을 바로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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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그게 이 별의 자원을 앗아간 존재의 정체……아마도 내가 15층에서 관측했던 무언가와 같은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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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음성과 영상을 남긴 외부 요인은, 본 시스템에 접촉할 당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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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 시스템은 그것의 이름을 이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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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을 자칭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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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나는 정신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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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 두 번째 페스티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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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을 차린 건 그로부터 대략 한 시간이 지난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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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에 말라붙은 피를 떼어내고 주변을 살펴보니, 관리 컴퓨터는 도시의 정돈 작업을 진행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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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내가 손쓸 만한 부분은 달리 없었기에, 나는 잠시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자리를 떠나 블랙 존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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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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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막는 폭주 로봇들을 격파하며 보스룸으로 향하는 내내, 컴퓨터가 보여준 영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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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흑 같은 존재가 내뱉은 알 수 없는 한마디, 그리고 컴퓨터가 그것을 지칭하며 사용한 단어. 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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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별’이 이 세계에서 앗아간 것으로 추정되는 자원, ‘아스트라’의 정체까지. 신경 쓰이는 것들이 너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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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1%를 영구 존속시킬 수 있는 에너지원……그게 말이 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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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이 생각해보면, 컴퓨터가 설명한 유토피아 프로젝트는 애초에 이상한 점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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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일부를 낙원에 격리해 영구적으로 존속시키겠다는 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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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대단한 자원이라도 결국 소모성일텐데, ‘영구히’ 존속시킨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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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반영구적’이라는 걸 과장한 표현일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그 동력은 미지의 에너지원인 ‘아스트라’에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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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트라를 잃은 후 시스템이 인류의 영구 존속은 불가능하다고 계산했으니, 그것이 존속의 핵심이라는 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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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렇게 중요한 자원이 미지의 에너지원이라고? 수천만 인구를 지탱할 에너지에 대해 아는 게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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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별’이라는 존재가 아스트라를 노리고 나타난 것도 틀림없다. 내가 들은 그 한 마디가 그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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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정신을 차린 후 컴퓨터에게 ‘아스트라’와 ‘별’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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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 쓰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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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모든 것들의 정체야말로, 시련의 탑을 무너뜨리기 위한 열쇠가 될 것이라는 직감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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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별’이란 존재는 성위와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아스테리오스의 도끼를 포함해, 드물게 언급되던 그 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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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위- 무언가 극한에 이른 경지를 의미하는 것 같기도 하고, 신적인 존재를 의미하는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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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어느 쪽이건, 아마도 그건 이 탑의 GM이라는 녀석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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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면 너머로 본 ‘별’이 내게 안겨준 고통은, 15층에서 GM이 개입했던 때에 느꼈던 것과 똑같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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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오픈 커뮤니티를 뒤져봐도 마땅한 정보는 없고, 아무리 고민을 해도 뾰족한 답이 떠오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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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삼스레 깨닫는다. 시련의 탑의 도전자들조차, 정작 이 탑에 대해 아는 것은 거의 없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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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이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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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걷다 마침내 보스룸에 도착해 문을 열었다. 깜빡이는 조명등이 차례로 불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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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종 20레벨 전투병기의 제작을 위해 만들어진 인공지능은, 계획이 중지된 이후에도 계속 작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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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한 보스는 수십 개의 추진체가 달린 날개 형태의 비행 장치를 장착한 거대한 로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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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SS - 키메라 드론 페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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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름 냄새를 풍기는 기괴한 키메라 로봇의 모습에 나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집중력을 끌어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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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해결할 수 없는 의문은 내버려 두고, 눈앞에 닥친 일에 신경을 쏟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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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무리 강해졌다고 한들, 상대가 아무리 약해 보인다 한들, 전투 중에는 절대 한눈을 팔아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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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 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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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발경의 기본 원리이자 내가 새롭게 습득한 패시브 스킬, [파동 제어]는 일종의 마력 제어 기술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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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력 지배]가 마나의 입자 하나하나를 정밀하게 다루는 것이라면, 이건 입자의 움직임이 만드는 여파를 제어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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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밀함은 내가 본래 사용하던 마력제어 기술에 미치지 못하나, 지금 같은 상태에서 사용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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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트닝 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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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개 속성의 마력을 오른팔에 흘린다. 많은 마력을 소모해도, 회로가 손상된 탓에 온전한 출력은 나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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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마력을 직접 흘려 넣는 것이 아닌, 마력이 만들어내는 파동을 이용해 간접적으로 힘을 전이시킨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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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력회로의 손상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양팔을 통해 100%에 가까운 출력을 구현해 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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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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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개 속성의 마력이 만들어내는 전격의 파동을 손바닥에 집중시키며, 보스를 향해 달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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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로 손바닥을 드론의 머리통 부분에 갖다 대며, 맺어두었던 파동을 그대로 상대의 내부로 전이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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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투한 번개의 마력은 격하게 요동치며, 적을 체내에서부터 헤집어 데미지를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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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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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르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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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 위력으로 시전한 전격장이 붉은 이펙트를 터트리며, 로봇의 머리통을 작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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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하게 터득한 전자발경- 전격장의 위력은 내 생각 이상으로 강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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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성이 극도로 좋은 기술이라는 점을 감안해야겠지만, 미궁의 보스를 한 방에 정리하는 위력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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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에 파동을 제어한다는 묘리는 다른 기술에 접목하는 것도 그렇게 어렵지 않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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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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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볍게 시험 삼아 오른손에 오러를 둘러보았다. 확실히 전개 속도와 강도가 눈에 띄게 좋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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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력회로가 손상되기 이전과 비교하면 역시 아직 모자라지만, 그래도 크게 부족하다는 인상은 안 드는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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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동 제어]의 스킬 레벨이 아직 1레벨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앞으로 발전할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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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스펙업 요소까지 포함하면, 어찌저찌 페스티벌 직전까지 예전만큼의 힘을 되찾는 것은 성공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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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도면 토너먼트 결과가 안 좋아도 ‘아 내가 그때 도끼만 안 썼어도’ 하며 후회할 일은 없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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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토너먼트 결과가 안 좋을 거라는 생각은 조금도 안 하고 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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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까, 대진표 확정됐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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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스티벌이 열리기까지 몇 시간을 앞두고, 나는 커뮤니티를 둘러보며 잠시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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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층으로 향하는 전이문 앞에서 화이트롤로 가볍게 요기를 마쳤을 때쯤, 눈앞에 포탈이 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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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통합 이벤트 : 시련의 탑 페스티벌이 개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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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탈을 통해 공용 서버로 이동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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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벤트 서버 : A 구획으로 이동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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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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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겨난 포탈에 손을 대고, 알림창의 메시지를 수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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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룸의 전이문을 사용할 때와는 미묘하게 다른 감각이 느껴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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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3년 만에 다시 보는 페스티벌의 세계가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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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전의 페스티벌 지역은 중앙에 분수대가 있는 유럽풍의 광장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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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도 기본적인 분위기는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다. 아니, 오히려 살짝 차분해진 느낌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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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만요! 좀 지나갑니다! 비켜요 비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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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였다. 노점을 차리려는 도전자인지, 여러 가지 기물을 들고 바쁘게 달려가는 중년의 남성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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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러고 보니 저번 페스티벌은 포탈이 열리고 조금 지나서 들어갔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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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오픈런을 한 셈이니까, 노점을 준비하는 도전자와 대형 길드의 관계자들이 많이 보이는 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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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서버에서는 길드 관계자들이 먼저 출입해서, 뒤에 들어오는 도전자들의 교통정리를 할 예정이라고 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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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곧 지금보다 훨씬 혼잡해질 거다. 그나저나, 축제 분위기랑은 별개로- 이거 진짜 심각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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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페스티벌때는 마력을 느낄 줄도 몰랐던지라 전혀 모르고 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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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못 봐주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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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새끼들, 이놈이고 저놈이고 죄다 마력을 병신처럼 질질 흘리고 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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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진 마력량은 제법 많은데, 그걸 제어할 줄 모르는 채 흘리고 다니는 놈들이 너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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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것 때문에 거북함을 느끼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는데- 꼴사나운 것도 정도가 있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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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탑 도전자들의 평균 수준이 낮을 거라는 건 예상했지만, 뭔 모지리 새끼들이 이렇게 많은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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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토너먼트에 나오는 놈들도 이렇게 등신처럼 마력을 다 흘리고 다니는 건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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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감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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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결국 스킬을 사용해, 상시 전개하고 있던 마력감지의 수준을 반대로 낮춰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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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력이라고는 한 움큼도 존재하지 않는 사이버펑크 세계에서 넘어왔다 보니, 괜히 더 예민해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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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계속 감지 수준을 낮춰둘 수는 없으니까, 적응되면 천천히 수준을 다시 높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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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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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였다, 다른 모지리들과는 다르게 그럭저럭 정돈된 마력을 가진 남자 한 명이 내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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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점 등록하신 분 아니시죠? 어디 서버 분이신데 벌써 들어오셨어요, 공지 안 보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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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는 걸 보니 교통정리를 맡은 길드의 일원인 것 같았다. 나는 본능에 따라 남자의 신체를 훑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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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음걸이도 불규칙하고 무게중심도 엉망이다. 허리춤에 검을 찬 걸 보니 검사인 것 같은데, 딱 봐도 기량이 처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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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봤던 창기능사 최길현보다는 아슬아슬하게 낫지만, 검술이나 박투술 스킬은 있어봤자 초급 수준이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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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문제는 아니긴 한데…서버랑 성함 좀 말씀해주세요, 기록해 놔야 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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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61서버, 서진혁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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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2661……잠깐만요, 어디 서버라고요? 지금 서진혁이라고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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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별생각 없이 들고 있던 펜을 끼적이나 싶더니, 퍼뜩 고개를 쳐들고 그렇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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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 이런 식으로 새삼스럽게 내 인지도를 체감하게 되는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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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 주문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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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련의 탑 도전자와 한국의 헌터 지망생 중에서, 내 이름을 안 들어본 녀석은 아무도 없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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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정작 그 인지도를 내가 체감해 본 적은 없다. 커뮤니티에서의 인지도는 피부에 와닿지 않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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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실존인물이었구나, 진짜 본인 맞아요? 그 서진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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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런지, 이렇게 연예인 내지는 인플루언서를 보는 듯한 눈으로 쳐다보니 괜히 낯간지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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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끄덕여 긍정하자, 남자는 잠시만 기다려 달라며 종이뭉치를 들고 어디론가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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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더니 왠 남녀 패거리 몇 명을 이끌고 나타났는데, 아무래도 같은 길드나 파티의 도전자들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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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사람이야? 뭔가 생각한 거랑 다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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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뭐야, 완전 멀쩡하게 생겼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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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거리는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내게 관심을 보이며 다가왔다. 다짜고짜 악수하자며 손을 잡는 녀석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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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까지 관심을 보이니 나도 좀 당황스럽다. 아니, 그보다 이 녀석들- 다른 놈들보다 훨씬 세 보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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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마크를 달고 있는 걸 보니 똑같은 길드 소속인 것 같은데, 대형 길드의 간부나 뭐 그런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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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고 있는 마력량도 상당하고, 무게중심이나 걸음걸이도 괜찮다. 물론 이놈들도 힘이 좀 새긴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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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저 기억하세요? 그리핀 길드 소속 김준태라고 하는데, 예전에 쪽지로 몇 번 대화한 적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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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했더니, 몇 년 전쯤에 엄마의 뼛가루를 장기간 안치해 둘 수 있는 납골당을 소개해 줬던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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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납골당 알아봐 줬던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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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아요, 제가 알아봐 드린 건 아니고 그냥 소식만 전해드린 거지만요. 반갑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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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색하게나마 악수를 나누자, 붙잡은 손에서 제법 강한 근력이 느껴졌다. 보기보다 힘이 좋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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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부가 아니라 행정 담당의 일반 길드원이랬던 것 같은데, 나름 공략파 출신이라 스펙을 꽤 올린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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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한편, 커뮤니티를 통해 나와 교류한 적이 있는 사람은 김준태 말고도 제법 많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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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나 싸인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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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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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염색을 안 해서 푸딩 같은 꼴이 된 노란 머리의 남자가 내게 종이를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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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1556서버 강태오야, 이번 페스티벌에서 보면 싸인받아간다고 했잖아. 그러니까 빨리 싸인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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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뮤니티 댓글창에서 자주 봤던 커뮤 망령 중 하나다. 댓글 말투랑 엄청 안 어울리는 얼굴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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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솔플러가 진짜 왔다고? 비켜 봐, 나도 얼굴 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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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페스티벌 맵이나 좀 둘러볼 셈이었는데, 갑자기 사람이 자꾸 꼬이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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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사람들과 적극적으로 교류해 볼 생각도 있었지만, 이렇게 들이대니까 엄청 부담스러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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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플루언서들이 피곤하다는 게 이런 의미였구나. 신기해하는 눈빛이 무슨 동물원 원숭이라도 보는 것 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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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야, 사람이 구경거리도 아니고 모여서 뭣들 하는 거야. 불편하시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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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자, 덩치 좋은 길드원 한 명이 그렇게 말하며 눈치껏 사람들을 떼어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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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지 모르겠는데, 몸만 봐도 꽤 강해 보인다. 길드마크의 형태가 살짝 다른 걸 보면 간부급인가- 스펙은 어느 정도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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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고, 길드원들이 실례가 많았습니다. 바쁘실 텐데 지나가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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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히 바쁜 건 아니지만, 이 상황이 피곤한 건 맞았기에 적당히 감사 인사를 하고 다른 포탈을 향해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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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너먼트 조별예선 A조시죠? 첫날부터 대진이 꽤 빡세던데, 응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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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드 간부로 보이는 남자는 그런 말을 하며 내 등을 떠밀어 주었는데- 대진이 빡세 보인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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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슨 소리인가 싶어서, 오픈 커뮤니티에 올라온 조별예선 대진표를 확인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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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너먼트 조별예선 1일차 대진표 (A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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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어디가 빡세다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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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스티벌의 메인 이벤트라고 할 수 있는 토너먼트는 조별예선부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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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명 정도의 참가자를 한 그룹으로 묶어 대진시키고, 탈락 순서대로 승점을 챙겨 다음 스테이지로 올라가는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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떨어진 사람들도 그대로 끝나는 건 아니고, 패자 그룹에서 맞붙어 승리하면 또 올라올 수 있는 구조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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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조별예선이 끝나면, 본선으로 올라온 인원들끼리 토너먼트식 1대1대결을 통해 승패를 가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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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는 잘 몰라서 이걸 무슨 구조라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썩 합리적인 구조는 아니라는 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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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우승이 아니더라도 순위에 따라 상품을 받을 수 있기에, 본선 진출을 노리는 도전자들이 꽤 많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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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선부터 강한 도전자와 만나 패자조로 내려가고 나면, 승점을 챙기기가 매우 어려워지는 구조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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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너먼트 조별예선 1일 차 대진표 (A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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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배정된 A조의 대전 상대를 한번 눈으로 훑어 보았다. 빡센 대진이라고 들었는데……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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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난하게 1위로 3연승을 하면 본선 진출 확정, 그리고 A조에서 만날만한 다른 강한 도전자는- 별로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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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중간마다 주목받는 루키인 25층의 저층 랭커나, 나름 인지도가 높은 50층의 중층 랭커도 있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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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다른 조의 대진을 안 봐서 그런지- 특별히 빡센 대진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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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전자들의 이름을 다 외우고 있는 것도 아니기에, 내가 모르는 이름 중 강한 도전자가 있을 수도 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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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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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생각해봐도 이 예선이 빡셀 것 같지는 않은데, 역시 내 스펙이 과소평가되고 있을 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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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이건 이따가 생각하기로 하고- 슬슬 내가 기다리고 있는 다른 서버의 도전자들이 도착할 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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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도전자들이 페스티벌에 일정을 맞춰 다른 서버의 도전자들을 만나서 교류하고는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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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나도 약속을 몇 개 잡아두었다. 오늘은 몇 명의 도전자와 함께 이벤트 던전을 공략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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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평범한 도전자들은 아니고- 던전 공략도 딱히 평범한 방식으로 공략하려는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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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주문술사 정모 개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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룬 문자등의 정통 마법을 연구하고 있는 도전자들과 함께, 오직 정통 마법만으로 던전을 공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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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의 마술]을 통해 온갖 마법을 관찰하고, 룬 문자와 주문 언어까지 배워갈 기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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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 언어와 룬 문자를 공부해, NPC들처럼 제대로 된 마법을 쓰고자 하는 도전자- 통칭 주문술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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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 말하는 ‘효율적인 스펙업’을 포기하고 낭만을 쫒는 괴짜들이, 이만큼이나 함께 모일 기회는 좀처럼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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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 장소에 모인 주문술사들의 숫자는 나를 포함해 다섯 명, 딱 파티 하나를 구성할 수 있는 숫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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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인원으로 제대로 파티를 구성하는 건, 원래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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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흠, 안녕하세요, 아이스메이지 강준호입니다…오늘은 잘 부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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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임을 연 사람은 내가 아니라, 저기서 떠듬떠듬 어색하게 자기소개를 한 얼음법사, 강준호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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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려 주문언어와 룬 문자 양쪽을 모두 제법 익혀서, 정통식 마법을 사용해 실전 전투까지 가능한 사람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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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 세상에서는 대학원생이었다는데, 마법 쪽으로도 학구열을 불태운 결과인지- 아무튼 이 사람에게선 배울 게 많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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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호 이외의 다른 세 명도 모두 마찬가지로 마법사 계열 클래스, 사실 원래는 이보다 더 많이 모였어야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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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분들은 안 오시는 모양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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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 수 없죠, 근데 진짜 던전 갈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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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요, 이대로는 좀 힘들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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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에 나온 다른 사람들의 태도가 애매하듯이, 말로만 나온다고 하고 출석하지 않은 이들이 대다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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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그렇겠지, 다들 각자 소속된 파티가 있을 테고- 무엇보다 주문술사들끼리 함께 던전을 돈다는 건 말도 안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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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레벨과 스펙도 제각각이고, 클래스는 모두 마법 계열, 파티 밸런스가 전혀 안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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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에 정통 주문과 마법만으로 던전을 깨려 한다고까지 했으니, 무슨 농담처럼 들렸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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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쫑내죠? 어차피 이 멤버로 깰 수 있는 던전도 없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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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몸으로 ‘그냥 구경할 겸 나와봤다’는 티가 풀풀 나는 남자 마법사가 그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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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누구냐, 솔플한다는 사람도 안 오는것 같고……하긴, 전붕이가 뭔 주문을 배우겠어요, 그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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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직 내가 서진혁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이런 의욕 없는 사람은 일찌감치 떨어져 주는 게 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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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나는 원래 솔플러다. 굳이 인원을 채워서 갈 필요도 없고, 마법을 배울만한 상대가 하나라도 있으면 그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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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조금 전부터 여기 자칭 주문술사들의 마력을 읽어 보니……한 명을 빼고는 죄다 엉터리로밖에 안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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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아쉬우면 이대로 같이 식사나 하고 헤어지죠. 사실 저도 파티원들이랑 약속한 게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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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서 나불거리는 남자 마법사와, 그 마법사가 힐끗 쳐다보는 여자, 별말 없이 커뮤니티를 보고 있는 다른 한 명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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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다 등신처럼 마력을 질질 흘리고 있다. 저 따위 마력제어 능력으로 무슨 주문을 다루겠다는 건지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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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렇죠, 일정이 있으시면 어쩔 수 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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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여기, 혼자서만 아쉬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얼음 마법사 강준호는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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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카롭게 잘 정련된 마력의 질, 체내에 축적하고 있는 마력의 양, 모두 훌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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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저도 가보겠습니다, 나중에 기회 되면 또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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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의욕 없는 세 사람이 떠나도록 내버려두고, 혼자 남은 강준호에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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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던전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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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당신한테 궁금한 게 아주 많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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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 저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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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호의 인상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어딘가 아파 보이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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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습게도, 시련의 탑에서 이런 인상을 가진 사람은 정말 보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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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련의 탑에서 제공하는 스탯과 자연 회복력이, 도전자가 가진 여러 신체적 문제를 해결해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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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추 측만증이라던가, 손목 터널 증후군이라던가, 거북목이라던가, 인대 손상이라던가- 그런 고질병들은 물론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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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역력 상승에 따라 감기 같은 여러 잔병치레에서도 해방되고, 영양 불균형과 수면 부족같은 사소한 것들도 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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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의 초대장이 몇몇 사람들에게 인생 역전의 찬스로 불리는 것에는 이런 점도 크게 한몫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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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커들의 무료 버스를 타서 레벨을 조금만 올려도, 현대 의학의 한계를 뛰어넘는 의료 케어 풀코스를 받는 셈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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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강준호는 제법 레벨이 있는 도전자임에도 불구하고, 시들시들한 허수아비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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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밑에는 다크서클이 퀭하고, 팔다리는 근육이 제법 잡혀 있음에도 젓가락처럼 연약해 보이는 게, 딱 병자 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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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마법사 클래스라고 해도, 어느 정도의 [근력]과 [내구] 스탯은 갖춰져 있기에- 저러기도 힘들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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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애초에 다크서클은 대체 어떻게 생긴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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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인의 경지에 이른 시련의 탑 도전자는 수면이 거의 필요치 않은 몸이고, 이 정도 레벨이면 더더욱 그렇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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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끼리 던전을 가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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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그러려고 모인 거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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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호는 목소리마저 시들시들했다. 사람 목소리가 시들하다는 게 무슨 소리인가 싶겠지만, 진짜로 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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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러면서도 체내에 머금고 있는 마력은 매우 잘 다듬어져 있다. 신체는 시들시들해도 마력은 활기가 넘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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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보기에는 이래도, 마력을 선명하게 감지할 수 있는 나에게는 이 사람이 오히려 훨씬 강인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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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긴 하죠, 그렇지만 정통 마법이 아니더라도……두 명이서 던전 클리어는 많이 힘들 텐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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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그런 거 많이 해봐서 아는데, 할 만 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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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해보셨다고요? 페스티벌은 이제 막 열렸는데……아, 혹시 랭커 분이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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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스티벌이 이제 막 열렸는데, 어떻게 던전을 많이 돌아봤다는 거냐- 그게 가능한 경우는 한 가지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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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전에 이미 페스티벌에 참가해 본 경험이 있는 고레벨 플레이어일 경우, 하지만 나는 좀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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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페스티벌에 참가해 본 건 맞지만, 그때도 던전은 그렇게 많이 안 돌아봤었지. 도중에 하차하기도 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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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아니고요, 제가 솔플 많이 해봤거든요. 두 명이면 차고 넘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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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플……어, 어어, 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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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에 절은 두 눈을 번쩍 뜬 강준호가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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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예 제가 바로 그 서진혁입니다’ 뭐 그렇게 말할 셈이었지만, 막상 입 밖으로 내자니 좀 오글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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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그거 맞고요……됐으니까 파티 신청이나 해보세요. 이거 어떻게 하는건지 다 까먹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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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빠르게 파티 신청을 하고, 그대로 강준호의 뒷덜미를 끌고 가까운 포탈로 입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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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강준호가 들어온 던전은 [죽음 숭배자의 신전]이라는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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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레벨대인 내가 들어오기에는 좀 급이 높은 던전이었지만, 어차피 내 스펙은 그보다 훨씬 높으니 상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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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뜻밖에 강준호도 레벨이 꽤 높은 편이어서, 이 정도면 정말로 차고 넘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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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혁 씨……라고 부르면 될까요? 진혁 씨는 레벨이 혹시 어떻게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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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요, 레벨보다 스펙 좀 높은 편이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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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저희 2인인데 좀 힘들지 않을까요, 여기 레벨 컷이 80 이상인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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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강준호는 당연히 불안해했다. 내 스펙은 이미 80레벨도 가볍게 넘는 수준이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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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였다, 던전 바닥이 진동하기 시작하더니- 이내 지면에서 큼직한 골렘 한 마리가 솟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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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의 주요 몬스터인 [신전의 수호골렘]이다. 강준호는 재빨리 지팡이를 들어 올리고 캐스팅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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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내가 기대한 것과는 다르게, 정통 주문이 아닌 평범한 도전자처럼 스킬을 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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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혁 씨, 탱만 잠깐 서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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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설 건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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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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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하다는 듯이 딜러와 탱커로 역할을 구분하려는 강준호를 무시하고, 뒤로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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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호도 캐스팅을 취소하고 재빨리 물러났다. 그런데, 그렇게 황당하다는 듯이 노려볼 것까지야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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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계획은 전원이 마법사인 파티로 입장해서, 주문 언어와 룬 문자를 사용한 정통 마법을 시험하는 것 아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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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마당에 나한테 전사의 역할을 기대하면 안 되지, 나도 지금은 주문술사- 마법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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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직 미사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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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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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무척 익숙해진 기초 마법을 빠르게 캐스팅해, 겉으로 보이지 않는 핵을 단번에 노려 맞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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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직 미사일은 단순하기 짝이 없는 기초 공격 마법이지만, 이렇게 마력을 대량으로 담아서 쏘면 제법 위력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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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에 마법진을 살짝 개량해서 관통력을 더 높이는 것으로, 제법 단단한 골렘을 일격에 쓰러트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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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술사끼리 모여서 던전 깨자면서요, 스킬 쓰지 말고 주문으로 캐스팅하셔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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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번 던전 공략에서 검과 방패 모두 쓰지 않을 생각이다, 몽둥이로 더 많이 쓰던 미스릴 완드만이 이번의 주 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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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쿵쿵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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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소리가 울리며 몇 마리의 골렘이 추가로 나타났다. 보행형이 아닌 날아다니는 가고일 골렘까지 함께 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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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손짓하자, 강준호는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마침내 기다리던 주문 캐스팅을 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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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공에 그려지는 룬과, 입으로 중얼거리는 주문 언어, 그리고 만들어진 마법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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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시클 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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쏘아지는 마법의 구조를 [천의 마술]이 모두 풀어낸다. 그렇지, 이게 마법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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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속 발사된 얼음의 창이 골렘들을 꿰뚫고, 강준호는 다시 한번 같은 마법을 캐스팅해 발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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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몇 가지의 기초 마법을 함께 사용하며 강준호가 마음껏 주문을 쓸 수 있도록 서포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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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동시에 관찰하며, 관측하고, 해석하여, 이해한다. 그렇게 마지막 한 마리의 골렘이 남았을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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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번엔 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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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강준호를 뒤로 물리고, [천의 마술]을 통해 여러 번 관측하며 뜯어본 룬을 허공에 그려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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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는 완벽하게 이해했다. 요령은 부족하지만 어설픈 부분은 [마력 지배]의 정교한 컨트롤과 출력으로 메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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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시클 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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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선된 마법진이 큼지막한 얼음의 창을 토해내고, 쏘아진 창은 골렘의 핵을 정확하게 뚫고 붉은 이펙트를 터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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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던전에 들어온 지 10분째, 나는 강준호의 주문 하나를 베끼는 것에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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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의 보스인 [고위 죽음 숭배자]의 머리통에 큼지막한 바위 하나가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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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지가 모두 불로 그을린데다가, 머리에 얼음송곳이 하나 박혀 있었고, 여기저기 관통상까지 입었던 보스는 그대로 머리가 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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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던전 클리어 메시지가 나타나며, 인벤토리에 [페스티벌 코인]을 포함한 보상들이 주르륵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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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인 파티인데다가, 스킬을 자체 봉인하고 정통 마법만 쓴다는 패널티가 있었음에도, 우리의 클리어 타임은 평균보다 빨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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쉴 새 없이 주문 마법을 쏟아내던 강준호는 그대로 맥이 풀린 듯,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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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아~ 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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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호의 표정은 더 이상 병든 환자처럼 시들시들하지 않았다. 아드레날린이 팍팍 돈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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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아……전 이게 진짜 될 줄 몰랐어요. 솔직히 처음 계획부터 제대로 공략하긴 힘들 것 같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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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호는 시원한 웃음을 지으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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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진짜, 캬…진혁 씨 진짜 나빴네. 마법사로 클래스 바꾼 거 여태껏 숨긴 거예요? 완전 속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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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던전 공략에서 나는 강준호의 마법을 무척 많이 베껴내었다. 하지만 마법적으로 이득을 본 건 강준호도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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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마법을 잘 쓰지 못할 뿐이지, 마력을 다루는 기술 자체는 매우 뛰어나다. 그렇기에 강준호에게 여러 조언을 해 줄 수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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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테면 감지를 펼쳐 골렘의 핵을 단번에 찾는 방법이라던가, 흘러나오는 마력을 정돈하는 방법이라던가, 그런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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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에 마법을 하나하나 베껴서 그대로 쓰는 모습까지 보여줬더니, 강준호는 이제 내가 마법사 클래스라고 믿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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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그렇겠지. 세상에 어느 전붕이가 이 정도로 마력을 다루겠어. 정통 마법은 말할 것도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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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다행이다, 진혁 씨 오늘 토너먼트 나가죠? 예선 A조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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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그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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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사였으면 대진 꽤 빡셌을거예요, 예선치고 엄청 힘들겠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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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호는 뜬금없이 토너먼트 대진 이야기를 했다. 전사였으면 대진이 빡셌을 거라니. 이유가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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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보세요, 고스펙 근접 계열이랑 광역 위주 마법사 클래스랑 막 섞여 있잖아요. 이러면 전사는 힘들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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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들어 보니, 일반론에서 비롯한 상성 이야기였다. 5인 조별 경기에서 이런 구성은 전사에게 힘들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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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사와 마법사 클래스가 1대1이면 전사가 좀 더 유리하지만, 이런 난전 상황에서는 마법사가 훨씬 유리하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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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자하니 꽤 일리가 있는 이야기였다. 평범하게 생각해보면 보통은 그렇겠지, 보통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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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마법 쓰시는 거 보니까, 어디……이렇게만 가면 승점은 충분히 챙기실 수 있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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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호는 던전을 공략하는 사이 내게 친밀감이 꽤 쌓였는지, 아예 전략적인 승점 획득 방식까지 조언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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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심내지 말고 특기를 살려 2등만 노리면, 안정적으로 승점을 챙겨 본선 진출을 확정 지을 수 있을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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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따가 경기 보러 갈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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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커뮤니티 특유의 호들갑을 제외하면, 나를 향한 냉정한 평가는 꽤 낮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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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긴, 커뮤니티의 여론이 꼭 실제 여론과 일치하는 건 아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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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승후보라고 했던 건 그냥, 소위 말하는 커뮤니티 한줌단들의 농담 섞인 ‘억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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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선은 살살 하려고 했는데, 안 되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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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예선에서 나 만나는 놈들은, 그냥 운이 나빴다고 생각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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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 역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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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토너먼트는 시련의 탑 최강자를 뽑는 천하제일 무술대회 같은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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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벤트의 원래 취지는 그런 것이었겠지만, 대형 길드간의 조율로 현재는 유망한 신인들을 위한 대회가 된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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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도 그럴 것이, 대형 길드의 간부중에는 거의 십 년을 탑에 체류하고 있는 미친 녀석들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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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련의 탑 내부의 사회 안정을 도모한다며, 스스로 탑에 남기로 한 자경단 같은 녀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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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전자들에게 반쯤 NPC 취급을 받는 그 ‘고인물’들이 출전한다면, 당연히 그놈들 중 하나가 우승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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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한번 본선에 진출했던 도전자는 다음 회부터는 출전하면 안 된다든가……뭐 그런 암묵의 룰이 형성된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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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고로, 내 경쟁자이자 이번 토너먼트의 우승후보 중에도 대형 길드의 간부 같은 놈들은 딱히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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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대형 길드에 소속되지 않은 상층 랭커들 몇몇이 출전하긴 했다. 모두 우승후보 1,2위를 다투는 놈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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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내 예선 상대 중 대단한 놈은 딱히 없다. 상층 랭커는 전혀 없지만, 그래도 중층 랭커는 조금 있는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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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강준호의 이야기를 들어 보니, 내가 그런 중층 랭커들을 이길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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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로 꼽는 이유는 당연히 스펙의 문제, 내 클래스가 아직도 노멀 클래스 전사라는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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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동안 커뮤니티에 뿌리박힌 전붕이 멸시는 어디 가질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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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공개한 내 스펙이 대단했다는 점이나, 온갖 보스를 솔플로 격파했다는 사실도 사람들을 설득하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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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솔플을 해 본 사람이 없으니, 대단하다 대단하다 하지만 그게 얼마나 어려운지 잘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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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설득력이 있는 월드 보스 격파 기록도, 온갖 공략을 끌어모으고 엘리트 NPC들의 협력까지 이뤄 달성한 결과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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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층이라는 매우 낮은 층에서 출현했다는 이유로, 쓰러트린 월드 보스의 강함 자체를 크게 내려쳐 보는 이들도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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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현세대 시련의 탑 도전자들은- 9층에서 공개했던 내 스펙조차 제대로 해석하지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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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진혁이 존나 잡캐네 스킬이 왜이럼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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액티브 스킬은 거의 없고, 높은 내성 수치와 온갖 내성과 무기술등의 패시브 스킬로 도배된 내 스킬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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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킬북을 통해 효율 좋은 스킬을 골라 익히는 대부분의 도전자는, 내가 가진 스킬들의 의미를 알지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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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예 몇몇 스킬들은 ‘왜 전사가 이딴 스킬이 있음?’ 이라며 웃음거리로 취급하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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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너먼트 조별 예선 참가하시는 분이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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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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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하실 장비랑 아이템 여기에 적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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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호와 헤어진 뒤, 나는 간단한 준비를 마치고 토너먼트 경기를 위한 대기실에 입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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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실 앞에서는 길드 관계자가 접수원 역할을 하며, 참여자의 아이템 명단을 정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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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참가자는 이 종이에 토너먼트에서 사용할 아이템의 목록을 기입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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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템상으로 있는 제약은 아니고, 토너먼트의 공정성과 재미를 위해 자체적으로 준비한 조치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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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 아이템은 스탯 버프류와 회복류를 가리지 않고 딱 두 개까지만, 무기는 미리 등록한 것 외에는 스위칭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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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어구와 무기는 입장할 때 장비 상태를 보여준 것이라면 따로 등록하지 않아도 사용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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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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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살짝 웃으며 텅 빈 종이를 돌려주었다. 접수원은 주민센터의 공무원처럼 한숨 쉬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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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등록하실 아이템 하나도 없어요? 지금 장비하신 것 외에는 금지되시는데, 그 상태로 나가실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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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수원이 이렇게 말한 이유는 단순하다. 내가 이곳에 오기 전에 한 작은 ‘준비’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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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이대로 나갈 건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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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내 차림은 흰색 셔츠와 검은색 바지 하나- 가벼운 방어구도 무기도 없는 맨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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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감을 각인시키기에는 이만한 퍼포먼스가 또 없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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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너먼트의 승리 룰은 간단하다, 상대를 무력화시키면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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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템적으로 이 ‘무력화’ 는 그 수단을 가리지 않는다. 죽여버리건, 기절시키건, 도전자 마음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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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대형 길드끼리 합의한 사안으로, 상대 도전자를 사망에 이르게 할 경우 ‘처벌’이 내려지게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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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시스템상으로 상대 도전자를 죽이기도 쉽지 않다. 무력화 판정이 내려지면 자동으로 경기가 종료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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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에 장외 판정도 있다는 것 같고, 항복을 선언하면 경기가 종료되기도 하고……아무튼 그런 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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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분 후, 토너먼트 개인전 부문, A조 예선 1라운드가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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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템 메시지가 곧 경기가 시작된다는 사실을 알리고 있다. 나는 지금 경기장 한쪽 끝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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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선을 보러 온 도전자의 숫자는 프로야구 관중 수준이 우스워 보일 정도, 멀리서 들리는 목소리들이 소란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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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내가 띄워놓은 오픈 커뮤니티의 [중계] 탭도 소란스럽게 페이지를 갱신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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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혁게이 떴냐 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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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명중 누가 진혁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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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굽지말고 빨리시작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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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거 장비 숨기려는거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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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경기 몇번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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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플러새끼 3위예상한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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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경기 배당률.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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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나를 향한 주목도가 압도적으로 높다. 하지만 내 얼굴을 아는 사람은 없는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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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소거법으로 아무 장비도 착용하지 않은 내가 ‘서진혁’일 것으로 예측하는 이들은 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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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분 후, 토너먼트 개인전 부문, A조 예선 1라운드가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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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운트다운이 시작되며, 각 도전자들 앞에 있던 가림막이 사라지고 서로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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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 드디어 그 유명하신 솔플러 얼굴을 보는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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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맞은편에 있는 중년의 남자가 히죽대며 그런 말을 내뱉었다. A조 예선 1라운드의 1위 후보로 유력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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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핀 길드에서 운영하는 경기 예상 토토의 배당률과 예측 순위에 따르면- 저 사람이 1위고 내가 2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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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층에서 장기간 체류한 저층 랭커 출신, 최근에 25층 플로어를 졸업하고 빠르게 50층 직전까지 도달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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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에 클래스는 전직 조건이 까다롭지만 1대1에 강하기로 유명한 전사 계열 레어 클래스인 중장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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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왜 장비를 숨기고 그래, 어차피 근접 전붕이 아니야? 남자답게 뜨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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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파이팅 포즈를 취하며, 오른손의 전투망치를 높게 치켜들었다. 시간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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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가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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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시작과 함께 [신속]을 발동하고, 정면으로 도약해 상대와 거리를 좁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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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비를 숨기긴 누가 숨겨, 명치 딱 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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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꽈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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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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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측 순위 1위의 중장기사는 가장 먼저 탈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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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력강화나 오러는 사용하지 않았다, 마력도 거의 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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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아이템 효과도 없이, 순수한 피지컬만으로 명치를 갈겨서 기절시켰다. 1초도 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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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선 상대들의 수준은 이미 가림막이 사라지기 전부터, 마력감지를 통해 대충 눈치채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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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내의 마력량으로 보아 모두 나보다 스펙이 낮고, 어설픈 근육의 움직임을 보면 실력도 형편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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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히 이들을 무시하는 건 아니다. 그냥 어이가 없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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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녀석들을 상대로 건실하게 승점을 챙겨 올라가라고? 전붕이라 상성이 나쁠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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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기고 앉았다, 수준 차이가 너무 심하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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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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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배당률 1위 후보를 기절시키고, 바로 땅을 박차서 다른 도전자에게 달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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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이어서 예측 순위 3위, 화염술사 클래스의 마법사는 내 속도에 반응도 못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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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전의 전사보다 몸빵이 약할 것 같으니, 살짝 힘을 빼고 명치 한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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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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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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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파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그대로 기절, 다시 땅을 박차서 다음 상대에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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큼직한 대형 방패를 들고 있어서 얼굴도 안 보인다. 그대로 방패 위로 힘차게 주먹질 한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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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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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패가 산산이 조각나며, 상대는 폭발음과 함께 그대로 멀리 날아갔다. 남은 건 이번에도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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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선 진출은 꿈에도 꾸지 않고 있었을 저스펙, 예측 순위 최하위의 도전자- 마찬가지로 주먹질 한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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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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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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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이외의 모든 도전자가 전투불능이 됨에 따라, 경기 종료를 알리는 시스템 메시지가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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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도전자당 1초에서 0.5초씩, 총 경기 시간 합계 3.8초. 팝콘 한 알을 먹을 시간도 없는 역대 최단시간 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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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깜짝할 사이에 끝나버린 경기를 보며 관중들은 잠시 얼어붙었고, 뒤늦게 환호성을 내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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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아아아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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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환호성을 만끽하며, 나는 경기장 위에서 약간의 웃음을 띠며 셀카 겸 캡쳐를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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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위를 한 나를 제외하고, 나머지 도전자들의 순위는 쓰러진 순서대로 판정되니까- 최하위 도전자가 2위로 승자조 진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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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자조 진출을 예측하는 스포츠 토토는 역대 최고의 역배를 터트린 셈이다. 나는 커뮤니티에 바로 글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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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서진혁#26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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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역배충 병신 토쟁이새끼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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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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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형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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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아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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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곧바로 무수한 개추와 쪽지의 세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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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느린 발을 향한 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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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위해 마련된 침대 위에서 잠시간 몸을 뒤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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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가만히 드러누워서 시간을 보내는 것은 정말 오랜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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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시간을 보냈다고는 해도 이제 기껏해야 30분 정도가 지났다. 이 이상은 좀이 쑤셔서 가만히 있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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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의 정혼자 자리를 두고 펼쳐진 결투는 내 승리로 마무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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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력강화의 출력을 무리하게 높인 반동을 받은 메르세데스는, 불굴을 발동시킨 나를 이길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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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로 몇 합을 더 나누다 승패가 갈렸고, 나는 다크엘프들에 의해 마을로 옮겨져 이렇게 혼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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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싸움에서 이긴 이상 내가 해야 할 일은 더 없는 게 당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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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따지자면 나도 엘레노어의 챔피언 같은 역할이었던 거니까. 사후처리는 엘레노어가 알아서 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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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투의 승리자로서 해야 하는 게 몇 개 있다고는 하던데, 중환자에게 굳이 시킬 만큼 중대한 일은 아니라는 모양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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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나는 혼자만의 휴식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된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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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일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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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그냥 쉬고 있을 생각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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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은 결투의 복기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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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투에서 이기긴 했지만, 내가 메르세데스를 뛰어넘었느냐 한다면 그건 또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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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세데스는 왕자 녀석에게 갑작스레 불려 결투에 임하게 됐다. 그런 만큼 무장 상태도 형편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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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무기인 검은 갖고 있었지만, 근접 전사에게 또 하나의 무기나 다름없는 방패가 없는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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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무엇보다 어떤 방어구도 없이 불편한 정복 차림으로 싸움에 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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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층에 들어왔을 때 보았던 무장한 모습과 비교하면 분명 전투력이 떨어진 상태에서 싸움에 임한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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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다가 녀석은 처음부터 엄청나게 방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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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움직임을 파악하고 따라가기 전까지, 녀석은 한 손은 뒷짐을 진 채 싸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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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처음부터 마력강화를 한 채 싸움에 임했으면 결과가 어떻게 됐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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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후반에는 귀를 베인 것으로 이성을 잃고, 기술의 날카로움을 잃은 채 날뛰어 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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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그건 그쪽의 잘못이니까 내 감점 요소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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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만 보면 80점 정도라고 쳐줄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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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내가 그 전투에서 보인 퍼포먼스를 다시 재현할 수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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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텅 비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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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바로 조금 전까지, 침대에 누워서 인벤토리의 아이템을 정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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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득하던 재료 아이템은 물론이요, 예비용으로 준비해 뒀던 방어구와 무기 대부분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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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은 어차피 안 쓰던 물건이었지만, 그렇다고 쉽게 손에 넣을 수 있는 물건들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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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템을 쏟아부어 시야를 가리고, 억지로 빈틈을 만드는 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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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략의 문제점은 잡템이건 뭐건 아이템을 너무 많이 소비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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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처구니없는 위력의 공격을 막아내기 위한 일회성 방패로 동원한 결과, 장비들의 내구도가 순식간에 갈려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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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기본 내구도가 낮았던 저층에서의 전리품들은 산산조각이 나서 수리도 불가능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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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층에서 7층까지 올라오며 긁어모은 아이템을 고작 한 번의 싸움에 소모하고 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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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련의 탑#266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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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언젠가 이 탑에 다른 도전자가 들어온다면, 그 많은 자원을 싹 쓸어다가 내다 버린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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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삼 뉴비가 들어올 리는 없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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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좆같은 새끼라고 생각하겠지, 사실 어떻게 생각하든 아무 상관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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좆같으면 뭐, 지가 어쩔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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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데없는 생각은 그만두고, 다시 정리하자. 일단 인벤토리를 이용한 전략은 괜찮았지만 다시는 못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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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템을 대량으로 소비한다는 문제점도 있고, 애초에 상대가 전사여서 쓸 수 있었던 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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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메르세데스가 마법사였다면, 그냥 범위가 넓은 마법 한방으로 아이템을 싹 날려버릴 수 있었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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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전사라도 오러 마스터리 같은 스킬을 갖고 있으면, 넓은 범위를 공격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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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메르세데스보다 강한 고층의 적이 상대라면 전사건 뭐건 간에 통하지 않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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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공략이라는 게 다 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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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가 누구건 간에 다 통하는 공략법 같은 건 없다. 이번 전략은 메르세데스 맞춤 공략이었던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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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 수 있는 수단을 이번에 다 퍼부었으니, 나는 이번 결투에서 소위 말하는 ‘영끌’을 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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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결과, 나는 평소보다 더 강한 150%의 전력을 발휘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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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세데스는 방심이나 무장 상태의 문제 등으로 80%의 전력밖에 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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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도 무척이나 힘들게 이겼으니, 메르세데스를 능가했다고는 할 수 없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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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더 단련에 매진해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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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당한 높이의 벽을 마주하는 것은 강력한 성장의 동력이 된다. 그 벽 너머를 잠시나마 엿보았다면 더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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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일차 목표는 마력의 감응과 운용 수준을 더 높이는 것으로 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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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세데스는 내가 충분히 넘어설 수 있는 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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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에는 내 100%로 너의 100%를 능가하고 말겠다. 그리고, 그 때에도 계속 시비를 건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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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머지 귀 한쪽도 마저 잘라주마, 깐프 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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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투의 복기와 반성을 대충 마치고, 남는 시간은 모조리 명상에 투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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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력감응와 마력운용의 레벨을 끌어올리는 것이 당장의 목표이기도 하고, 마력강화의 위력까지 몸소 겪어본 참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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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아무리 해도 이놈의 명상은 좀처럼 잘되질 않는다. 엘레노어가 말한 마음의 혼란이 원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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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혼란하면 마력도 함께 혼란해진다고 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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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일차원적인 욕망의 덩어리다. 하지만 나는 그런 내가 싫다. 확 죽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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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죽어서는 안 된다. 이 탑을 뚫고 나가야만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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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순의 심리를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 마력을 완벽하게 다루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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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그런 걸 핑계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신을 생각하면 또 혐오감이 차오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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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다른 성과가 없는 명상을 미련하게 반복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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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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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눈을 떠서 숨을 내쉬고 보니, 어느새 바깥은 밤이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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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을 하다 보면 시간이 빨리 가는 것 같다. 내가 그만큼 명상에 집중하고 있다는 뜻이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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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엘레노어는 아직도 안 돌아왔나. 결투의 사후처리에 시간이 좀 걸릴 거라고 하긴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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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그 변태 엘프가 방해하지 않으면 나야 좋은 일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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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평소 이맘때쯤이면 시련의 탑에서 있었던 일을 풀어놓곤 했었는데, 괜히 허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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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뭔 소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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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전하면 안 되잖아, 역시 슬슬 맛이 가기 시작했어. 빨리 8층으로 올라갈 필요가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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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층에서도 엘레노어는 만나게 되겠지만, 배경상 이렇게 여유를 부릴 일은 없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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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인상에 깊이 남은 강한 기척이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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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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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이 열리고, 엘레노어가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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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자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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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번이나 생각하는 거지만, 역시 엘레노어의 기척은 유독 알기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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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낙에 격한 전투였다 보니, 엘레노어는 내가 누워 있을 거로 생각한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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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들어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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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의 네글리제 차림이 아닌 걸 보니, 결투의 사후처리를 마치고 곧바로 온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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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이젠 네글리제 차림이건 뭐건 크게 신경도 안 쓰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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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 있었나, 지쳤을 텐데 왜 쉬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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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도로 지치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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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식은 중요한 거다. 그대라고 다르지 않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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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는 옅게 웃으며 내 옆에 앉았다. 이것도 그동안 꽤 익숙해져서, 신경 쓰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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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그놈과의 약혼은 제대로 파탄 났다. 숲쟁이들과의 화친도 순조롭게 어그러진 것 같고, 의뢰 완료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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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대로, 퀘스트 창에는 [다크엘프의 서 - 1장]이 완료되었으며 보상을 준비 중이라고 나타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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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약속했던 답례는 그대가 딱 좋아할 만한 걸로 준비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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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그동안 보상에 관한 부분은 반쯤 까먹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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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히 뭘 준다고 약속한 것도 아니고, 커뮤니티의 다른 도전자들과 같은 보상을 줄 것 같지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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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별 대단치 않은 보상을 줘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나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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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부터는 그대가 원하는 대로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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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좀 더 가까이 달라붙은 엘레노어가 따뜻한 숨을 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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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대를 짚고 있던 내 손 위로 엘레노어의 손이 겹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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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 계속 있는 것도, 떠나는 것도, 모두 그대가 선택할 수 있어. 그대는 정식으로 내 정혼자가 되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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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는 약혼을 깨달라고만 했지, 그 후에 뭘 어떻게 해달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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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혼자의 자리를 꿰찼지만, 이대로 그냥 떠나도 아무 상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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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부터 그런 계약이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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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반대로 떠나지 않고, 이대로 엘레노어와 함께 살아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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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이지, 보면 볼수록 내 취향이란 말이야. 몇백 년이 지나도, 그대만 한 이상형은 나타나지 않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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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잖아도 가까웠던 엘레노어의 얼굴이 더 가까워진다. 입술이 닿기 직전의 거리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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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딱 그 자리에서 멈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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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날 생각이구나, 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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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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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그런 눈을 하고 있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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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는 알고 있었던 것처럼 담담히 말했다. 별로 아쉬워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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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곳을 떠나는 걸 잠시나마 아쉬워했다는 것을 눈치채고, 그것만으로 만족한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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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는 언제나 이렇다. 그냥 변태처럼 보여도, 신기할 정도로 깊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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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쳇, 분위기 타서 입맞춤 한 번 정도는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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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이런 점까지도 이제는 익숙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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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많은 부분이, 익숙해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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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는 용납하기 힘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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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 별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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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 커뮤니티가 전에 없던 기세로 불타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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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격적인 모습을 보여줬으니 당연한 일이지만, 이렇게 인기글이 빠르게 갱신되는 건 아예 처음 보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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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그 인기글 대부분이 나를 언급하다 못해, 온갖 주접을 떨며 찬양하는 내용이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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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강진수#2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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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오늘부로 서진혁 지지를 철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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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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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 지지관계에서 벗어나 서진혁과 나는 한몸으로 일체가 된다 서진혁에 대한 공격은 나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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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70억 명의 서진혁 팬이 있다면, 나는 그들 중 한 명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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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1억 명의 서진혁 팬이 있다면, 나 또한 그들 중 한 명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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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천만 명의 서진혁 팬이 있다면, 나는 여전히 그들 중 한 명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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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백 명의 서진혁 팬이 있다면, 나는 아직도 그들 중 한 명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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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한 명의 서진혁 팬이 있다면, 그 사람은 아마도 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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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단 한 명의 서진혁 팬도 없다면, 나는 그제서야 이 세상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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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혁, 나의 사랑. 서진혁, 나의 빛. 서진혁, 나의 어둠. 서진혁, 나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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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혁, 나의 기쁨. 서진혁, 나의 슬픔. 서진혁, 나의 안식. 서진혁, 나의 영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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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혁,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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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 진 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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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배의 신 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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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좆같은새끼를 뭐가좋다고빠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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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ㄴ 정배충 기습출현 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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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ㄴ 꺼어어어어억~~잘먹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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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 서진혁 카페 다녀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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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솔직히 한번정도는 빨아줄수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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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 탑에 들어오기 전에 봤던 온갖 주접 템플릿들이 죄다 모여 있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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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커뮤니티에 이렇게 ‘빨아주는’ 녀석들만 있는 건 아니다. 역배를 터트린 녀석이 있으면 정배가 망한 놈도 있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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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이 밑만 해도 [이 씨발 개좆같은새끼 죽이고싶으면 개추 ㅋㅋ] 라는 제목의 글에 내 사진이 박혀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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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진심으로 하는 말은 아닌 것 같고, 이런 사태를 만들어낸 내 무력을 향한 관심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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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경기를 마치고, 다시 대기실로 돌아왔다. 아직 예선전 경기는 두 번이 더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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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혁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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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대기실로 돌아오니 누군가 모르는 사람이 나를 불렀다. 한 명도 아니고 세 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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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장은 하지 않았지만, 입고 있는 옷에 똑같은 마크가 붙어 있다. 그리핀 길드를 상징하는 마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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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의 형태가 조금 다른 걸 보니, 뭔가 특이한 일을 맡은 녀석들이거나- 길드의 간부급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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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뭡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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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내 예상으로는 후자가 확실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녀석들……하나하나가 상당히 강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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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어중이떠중이들과는 다르게 마력을 거의 흘리지 않고 있고, 걸음걸이와 중심을 정확하게 유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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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앞의 남자는 짧은 직검을 쓰는 전사, 그 뒤의 다른 남자는 둔기류를 사용하는 근접계, 맨 뒤의 여자는 마법사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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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유하고 있는 마력의 총량, 그리고 각자 유지하고 있는 묘한 간격이 그 증거다. 그런데 이 녀석들이 나를 왜 찾아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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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스포츠 토토 때문에 드릴 말씀이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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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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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네가 그 스포트 토토 관리자들이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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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핀 길드의 간부들은 자초지종을 간략히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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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배가 터져서 생긴 손해로 항의하러 왔다거나 한 건 아니었다. 딱히 내가 승부조작을 한 것도 아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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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아무리 도전자들끼리의 간단한 도박이라고 해도, 돈이 걸린 일이다 보니 예민하게 반응하는 이들이 있을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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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한을 품은 이들이 실제로 물리력을 행사하러 올 가능성도 있으니, 그런 일은 자제해달라고- 그런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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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뮤니티 여론은 돈을 잃은 쪽도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지 않았지만, 실제와 커뮤니티 여론은 또 다른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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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전에 열렸던 지난 페스티벌, 나는 커뮤니티를 통해 비춰지는 분위기만을 믿었다가- 예상치 못한 상황에 처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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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뜻 평화롭게 돌아가는 것처럼 보여도, 이 시련의 탑 사회의 치안은 결코 안전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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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경험한 사이버펑크 세계에서 그랬듯이, 강력한 무력을 가진 개인이 날뛴다면 쉽게 무너질 수 있는 불안한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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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좀 자제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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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하게 걱정해줘서 대답하긴 했는데, 뭘 자제해야 하는 거지. 이미 커뮤니티에 어그로는 잔뜩 끌어놨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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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음, 앞으로의 대전 상대는 정배순으로 탈락시켜야 하나? 근데 그건 승부조작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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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하게 생각하면 그나마 센 놈부터 처리하는 게 맞기도 하고, 이거 내가 의식하기 시작하면 끝도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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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혹시 클래스가 어떻게 되세요? 경기 봤는데, 이제 그냥 전사는 아니신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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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하던 중, 그리핀 길드의 간부 중 한 사람이 그렇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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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뇨, 그냥 전사인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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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렇게 대답하고, 커뮤니티를 열어 다음 대진표를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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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이, 그리핀 길드에서 관리하는 스포츠 토토의 집계 배당 순위가 달라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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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내가 예측 1위고, 2위는 다른 조에서 올라온 저층 랭커……나를 제외하면 가장 스펙이 높은 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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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3위는 이름도 들어본 적 없는 저레벨 도전자였다. 이번에 터진 역배를 보고 마구잡이로 건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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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면 이제 신경쓸 필요 없겠다, 역배 한 번으로 순위 예측이 완전히 엉망이 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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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 내 마음대로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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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경기에도 무장은 변경하지 않고 나갔다. 그냥 평범한 의복에 맨주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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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로는 40층을 공략 중인 마법사가 한 명, 47층을 공략 중인 궁수가 한 명, 55층을 공략 중인 격투가가 한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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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예측 순위 2위였던 저층 랭커, 25층에서 상당히 오랜 시간을 보냈다는 둔기 전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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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꽈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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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첫 번째 예선전 상대가 그랬듯이, 이번에도 순서대로 명치에 주먹 한 방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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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번에는 살짝 방식을 바꿨다. 모든 경기가 5초 안에 끝나버리면 보는 맛이 없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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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과광! 콰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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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사가 쏘아낸 거대한 암석과 화염의 탄환이 내 몸에 직격했다. 당연히 피해는 입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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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색을 한 마법사가 연달아 쏘아내는 마법을 모조리 무시하고 천천히 걸어가, 주먹을 치켜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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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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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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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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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시나무처럼 벌벌 떠는 게 좀 안쓰러웠지만, 차별하지 않고 명치에 한 방 꽂아주었다. 살살은 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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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겁이 났으면 그냥 기권해도 됐을 텐데, 그러지 않은 걸 보면 뭔가 꿍꿍이속이 있던 게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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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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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생각해보니까, 그냥 너무 겁먹어서 기권 생각이 안 났을 수도 있겠다. 나도 옛날엔 그랬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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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벌써 몇 년 전이더라, 1층 보스전에서 패퇴하고 패닉에 빠져 포션의 존재도 잊어버렸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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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돌이켜 보면, 고작 그 정도 상처로 무슨 호들갑을 떨었나 싶다. 그런 시절이었으니 어쩔 수 없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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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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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사를 때려눕힌 후, 뒤통수로 날아온 화살을 잡아챘다. 작은 소리도 안 내고 날아오는 화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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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의 마술]의 힘으로 살펴보니, 화살에 약한 침묵 마법이 부여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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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음을 완전히 제거하는 효과의 마법이지만, 화살 자체가 마력을 머금고 있으니 은밀성은 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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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 뒤통수에 눈알이라도 달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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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시위를 매긴 궁수가 그렇게 말하며 입을 떡 벌렸다. 있는 마력도 다 질질 흘리는 놈이 무슨 말이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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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뒤통수에 눈알이 달린 게 아니라, 너희가 멀쩡히 있는 눈을 다 감고 다니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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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선 1차전을 통과한 승자조 싸움인데도, 평균 수준이 매우 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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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이 녀석들 중에서 첫 번째 경기의 중장전사를 이길 수 있는 놈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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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한테 대진이 빡세다고 한 거였구나, 다른 도전자들 기준에서는 정말로 운이 나빴던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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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아아아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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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공격을 맨몸으로 맞아준 퍼포먼스 덕분인지, 5초도 걸리지 않았던 첫 경기보다 훨씬 큰 함성이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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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뮤니티 반응은 말할 것도 없었다. [이 새끼 씨발 원펀맨임?] 이라는 글이 엄청난 추천수를 받은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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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분위기는 조금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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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경기처럼 주접이나 숭배글보다는, 진지하게 내 스펙을 분석하는 글이 매우 많이 올라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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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야 진지하게 나를 우승권 전력으로 보기 시작한 거겠지. 드러낸 게 없으니 분석하는 내용은 형편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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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고 있는 커뮤니티에 [슬슬 가지러 가볼까(2트)]라는 제목으로 글을 하나 쓰고, 대기실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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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이 달리는 수백 개의 댓글을 감상하며 잠시 시간을 보냈더니, 금방 다음 대진표가 올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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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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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승자조 구성원은 직전과는 사뭇 달랐다. 나를 제외한 대전상대가 모두 랭커 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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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층의 현역 저층 랭커가 두 명, 25층 랭커 출신의 중층 도전자가 한 명, 그리고- 현역 중층 랭커가 한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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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스티벌 개최 전, 커뮤니티에서는 나를 중층 랭커와 비슷하거나 그 이상일 것으로 예측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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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한수……이야, 이름은 진짜 강해 보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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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진짜 현역 중층 랭커와 맞붙으면 결과는 어떨까- 사실, 이미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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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맨주먹으로도 내가 이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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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 예선 종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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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토너먼트에 나오는 다른 도전자들과 비교하여, 압도적인 강점이 하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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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다른 우승후보급 랭커들과 다르게 스펙과 전투 방식이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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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너먼트에 대비해 상세한 스펙을 숨겨온 랭커들도 있기는 하지만, 그들도 나처럼 베일에 싸인 수준은 결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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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소한 클래스와 레벨, 주로 사용하는 무기의 종류, 파티 플레이시에 담당하는 포지션등은 모두 알려져 있는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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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에 나는 레벨도, 클래스도, 주로 사용하는 무기의 종류도- 모두 불분명한 상태다. 당장 이 글만 봐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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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이영훈#2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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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진혁이 격투가쪽으로 클래스 바꾼거 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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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전붕이가 맨손으로 저렇게 쎈게 말이 안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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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사에서 격투가로 넘어가는건 스펙 손해도 별로 없잖음? 얘 골드 존나많던데 템으로 커버도 됐을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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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선전 본 사람들은 알텐데 저정도 속도면 민첩 깡스탯만 거의 100은 되야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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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얘 추정 레벨이 대충 60쯤이잖아 이거 백퍼 민첩 몰빵형 격투가임 아니면 말이 안됨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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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봤을때는 격투가쪽 유니크 클래스로 넘어간거 거의 100%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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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에 얘 격투술 레벨도 존나 높다고했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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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혁이 레벨이 60대임? 확실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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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ㄴ 진혁이가 커뮤에 글쓴거로 분석해서 대충 계산한거임, 그 이상 레벨은 레벨차 경험치 감소때문에 못찍을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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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ㄴ 얘 히든 존나 파먹는다는데 그럼 좀 더 높을수도 있는거 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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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ㄴ 히든을 솔플로 어떻게 다챙겨먹냐 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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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거 맞는듯 장비도 없는데 너무 빨랐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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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속도는 스킬빨 아님? 걔 존나 이상한 패시브 스킬 많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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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ㄴ 스킬빨이어도 60렙대에 깡민첩 100급 속도는 안나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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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ㄴ 깡민첩 100인거는 뭔 근거로 말하는거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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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손으로 다른 도전자들을 때려눕혔던 퍼포먼스를 보고, 멋대로 내 클래스를 격투가 계열로 예측하는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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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실제로 격투가 계열 클래스로 넘어갈 수 있는 기회가 있긴 했다. 다른 계열의 유니크 클래스로 갈 수도 있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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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제 와서 다른 클래스로 가볍게 넘어갈 생각은 없다. 전사 계열 에픽 클래스쯤 되는 게 나온다면 몰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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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저나, 이런 추측 글들을 보면 결론은 다 틀리긴 했지만, 접근은 꽤 괜찮은 것들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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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테면- 내 속도를 민첩 깡스탯 100급이라고 추측한 것, 실제로 사소한 장비 옵션 등을 모두 뺀 내 민첩 스탯은 110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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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쓴 커뮤글을 근거로 추측한 레벨도, 실제 내 레벨과 상당히 근접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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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내 레벨은 70 초반, 이들이 추측한 수치는 60 이상 70 미만 정도. ±5 정도를 오차 범위로 잡는다면 거의 맞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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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긴, 레벨과 스탯에 크게 연연하지 않는 나보다- 수치를 절대적으로 여기는 다른 도전자들이 이런 쪽으로는 훨씬 잘 알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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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수치를 절대적으로 여기는 탓에, 오히려 정상 범위를 한참 벗어난 내 스펙은 전혀 맞추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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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모처럼 예선 마지막 경기니까- 이번에는 서비스나 한번 해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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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아아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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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호성이 들리는 토너먼트 경기장에 입장한다. 대전 상대는 정면의 한 사람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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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여태까지의 다른 경기처럼 나를 포함해 다섯 명이 있어야 하지만, 다른 세 사람은 기권을 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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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랑 같은 조에서 이길 자신이 없으니, 그냥 기권하고 하위 그룹에서 안전하게 승점을 챙기기로 한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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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하게 쫄지 않고 대결에 임한 도전자는 당연히, 가장 스펙이 높았던 현역 중층 랭커- 강한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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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평성을 위해 일부러 자세히 정보를 찾아보지는 않았지만, 마검사 클래스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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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분 후, 토너먼트 개인전 부문, A조 예선 3라운드가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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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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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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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벅 인사한 강한수를 향해 마주 고개를 까딱였고, 곧 경기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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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검사는 말 그대로 검과 마법을 함께 다루는 하이브리드형 레어 클래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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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펙이 낮으면 이도저도 아닌 작은 육각형이 되는 클래스지만, 중층 랭커라면 그런 수준은 이미 졸업했을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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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니크 클래스에 비하면 살짝 아쉬운 감이 있지만, 완성된 마검사 클래스는 다른 레어 클래스보다는 한 수 위로 친다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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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마력감지를 펼쳐서 확인해 보니- 이 사람은 다른 도전자들과는 기본적인 마력 제어 능력부터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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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전에 대기실에서 만났던 그리핀 길드의 간부급은 아니지만, 꽤 괜찮은데……마침 잘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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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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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척 예의바른 태도로 검을 꺼낸 강한수가, 날카로운 마력을 검에 담으며 돌진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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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가볍게 양 주먹을 들어 올려 가드를 잡고, 간격을 좁혀오는 강한수의 검격을 천천히 관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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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꽤 괜찮은데. 이 정도면 7층에서 만났던 하이엘프 기사랑 좋은 승부가 될 것 같다. 기대 이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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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이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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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딱 하나, 치명적인 헛점이 하나 있었다. 바로 이 순간 검에 몰려드는 약한 마력의 발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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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으로 휘둘러진 강력한 참격을 피해내고, 짧게 잽을 날려 어깨를 맞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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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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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단한 갑옷이 음료수 캔처럼 찌그러지며, 강한수는 뒤로 살짝 물러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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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술 수준은 무척 괜찮지만, 이렇게 중요한 순간마다 검에 마력을 집중시키는 것이 그대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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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검뿐만이 아니라 전신의 근육에도 약한 마력이 깃드는 모습이 보인다. 이유는 이미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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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킬을 너무 많이 쓰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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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터리 스킬에 종속된 액티브 스킬, 내가 예전에 애용하던 ‘소드 차지’나 ‘브랜디쉬’ 같은 것들을 쓰고 있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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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하면 자동으로 검과 신체에 마력이 깃들고, 정해진 동작을 정확하게 재생하는- 빈틈투성이의 스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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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턴이 정해진 몬스터를 상대로는 잘 통하겠지만, 마력을 감지할 수 있는 상대에겐 미리 동작을 알려주는 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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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력감지가 지금보다 훨씬 수준이 낮았어도 마찬가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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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렇게 중요한 순간마다 시스템상으로 정해진 동작을 수행하기만 한다면, 쉽게 수를 읽고 반격할 수 있었을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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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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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대로 맹공을 펼쳤지만 손쉽게 간파당한 강현수는, 작게 침음성을 흘리며 자세를 다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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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패를 든 왼손을 앞으로 내세우고, 손안에 마력을 집중시킨다. [천의 마술]이 곧바로 그 정체를 까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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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탯을 상승시키는 강화 마법, 그리고 자동으로 방어막을 생성하는 방어 마법, 마지막으로 화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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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르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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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종류의 마법을 꽤 빠르게 시전했지만, 그렇게 전조를 다 보여주면 무슨 소용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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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계열 마법은 그냥 쓰게 내버려두고, 날아온 화염구는 손에 약간의 마력을 두르고 쳐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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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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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마법이 그냥 손에 툭 맞고 튕겨 나갈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던 걸까, 엄청 크게 놀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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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한수는 그대로 강화마법을 두른 채 돌진해왔다. 동시에 왼손으로 매직 미사일 계열의 마법을 캐스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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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나한테는 전혀 통하지 않았다. 검술도, 마법도, 잔재주도, 스펙도, 모두 나한테 전혀 미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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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슬슬 경기를 끝내 볼까. 모처럼 서비스를 하기로 마음먹었으니, 마지막은 좀 화려하게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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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트닝 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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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지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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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에 전격을 두르고, 이어서 [대전]을 발동해 그 힘을 옮기며, [파동 제어]의 묘리를 접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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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려드는 강한수의 머리를 손으로 움켜쥔 뒤, 자동으로 생성된 방어막 안쪽으로 전격을 밀어 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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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의 속을 진탕으로 만드는 파동의 흐름을 이끌며, 그대로 강한수의 머리를 땅에 처박아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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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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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르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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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 사이보그용 전투술의 시범과 함께, 나는 본선 진출을 확정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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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의 연습으로 완벽히 체득한 전격장은 이 토너먼트에 매우 알맞은 기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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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격의 파동을 상대방의 내부에 밀어넣기에, 방어력을 무시할 수 있는 특성- 그리고 외상을 거의 입히지 않을 수 있는 특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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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 쪽으로 적당한 위력의 전격장을 한 번 박아주면, 상대방의 뇌를 진탕으로 만들어 곧바로 기절시키는 것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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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력이 과하면 그대로 머리가 터져 죽겠지만, 내가 조절하기에 따라 안전하게 상대를 기절시킬 수 있으니- 사고가 날 염려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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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다른 도전자들이 보기에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예선 경기가 끝난 직후 또 커뮤니티가 난리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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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도전자들도 23층의 사이버펑크 세계를 거쳐온 적이 있기 때문에, 전격장을 알아보는 이들이 있었던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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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잘 아는 건 또 아니어서, 사이보그들이 사용하는 무시무시한 즉사급 공격 스킬- 그렇게 이해하는 놈들이 대부분이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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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가 땅에 처박힌 강한수의 모습을 캡쳐에 올리며, [강한수 이사람 죽은거 아님?] 같은 글이 올라오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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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강한수는 곧 시스템의 회복 효과에 의해 다시 일어났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는 금방 잠잠해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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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격장? 기초적인 임플란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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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새끼 사이보그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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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시니들 밥먹이면서 저거 배운거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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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혁이는 왜 혼자 장르가 다른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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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대신, 이번에도 내가 선보인 퍼포먼스에 대한 여러 감상들이 올라왔고- 그 중 어떤 글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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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박원호#2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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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방금 경기로 서진혁 분석 끝났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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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스도 대충 짐작가고 스탯이랑 레벨도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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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포먼스 하겠다고 괜히 스킬 낭비한거 후회하게 해주겠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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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선에서 만나자, 딱기다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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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올린 사람은, B조 예선 승자조에서 압도적인 퍼포먼스를 선보인 중층 랭커 출신 도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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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대형 길드 간부의 수제자, 매우 빠른 스펙업 속도로 주목받고 있는 슈퍼 루키, 유니크 클래스 보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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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갖 요란한 별명이 붙어 있으며, 내 본선 첫 대전 상대로 유력한 도전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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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 위화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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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니크 클래스 [원소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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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원소 계열 마법사의 완벽한 상위 호환으로, 전직하는 즉시 기본 4속성 마법을 모두 습득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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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성 데미지를 증폭시키는 각종 패시브까지 기본으로 제공되며, 클래스 보정으로 획득하는 스탯 역시 우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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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적이 상대건간에 강력한 화력을 안정적으로 투사할 수 있기에, 여러 파티와 길드에서 러브콜이 오는 만능형 딜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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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향해 본선에서 만나자고 선언한 박원호라는 도전자는 그 [원소술사] 클래스의 보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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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에 커뮤니티에서 매우 유명한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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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유명하다는 건 그 실력 때문에 유명하다는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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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력과 아주 무관한 건 아니지만, 기본적으로는 그냥 커뮤니티 망령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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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같이 아슬아슬한 줄타기성의 어그로 글을 올려대고, 유머성 글에는 빠짐없이 출현해 댓글을 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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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 길드의 간부라고 알려진 본인의 스승에 관한 썰도 드문드문 풀고, 자신의 실력과 스펙을 과시하는 일도 많다 보니, 주목도가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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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소위 말하는 ‘호감 고닉’쯤 되는 녀석이다. 빠와 까를 모두 미치게 하는 슈퍼스타- 뭐 그렇게 말하는 녀석들도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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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이런 타입은 대부분 싫어하는 쪽과 좋아하는 쪽이 극단적으로 갈리기 마련이다. 당연히 이 녀석도 마찬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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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는 너무 나댄다고 싫어하고, 누구는 웃기다며 좋아하고, 그래도 양쪽 모두 공통으로 내리는 평가가 하나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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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그런 인간적인 평가와는 별개로 실력 하나만큼은 확실하다는 것이다. 이른바 ‘슈퍼 루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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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걔가 그렇게 세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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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너먼트 예선이 끝난 후, 노점 거리를 둘러보다 마주친 강준호에게 물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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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저랑 같은 서버라서 본 적이 있거든요. 클래스 성능이랑 스펙도 좋은데, 스킬 분배 센스가 굉장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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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호는 도전자가 운영하는 노점에서 산 매운 닭꼬치를 한 입 베어 물며, 손가락을 치켜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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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 속성을 전부 다루는 만큼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의 숫자가 엄청난데, 그걸 모두 완벽하게 활용하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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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어마법이면 방어마법, 공격마법이면 공격마법, 원거리 스킬은 모두 끝 사거리에서 정확히 맞추고……명중률은 거의 100%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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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딜러라는 포지션에 매몰되어서 딜만 넣는 마법사랑은 달라요, 오히려 전방위적으로 파티원을 서포트하기도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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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자하니, 그런 스킬 사용 능력은 어떤 대형 길드의 마법사 클래스 간부에게 직접 배운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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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먹구구식 공략이 많았던 2세대 당시의 도전자로, 레어 클래스면서 본인의 기량만으로 5개 속성을 다룬다는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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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의 마법사들은 후방에서 안전하게 딜만 넣는 포지션은 아니었으니, 아마 그런 테크닉을 전수해 준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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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후 탑을 졸업하고 나면, A급 헌터 자리는 따놓은 당상이라는 평가예요. 윽, 케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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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을 이어가던 강준호는 매운 닭꼬치가 목에 걸렸는지, 황급히 물을 들이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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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가 안 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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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이 이렇게 말하는 걸 보니 인상과는 다르게 제법 실력이 있는 모양인데- 그래봤자 마법사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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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다고 한들, 설마 그놈이 재버워크만큼 강하진 않을 거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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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완벽한 안티메이지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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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페스티벌 맵 C 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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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 유명한 분이 오셨네~ 토너먼트 본선 진출하셨다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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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주문술사 정모에 이은 두 번째 친목 모임. 나는 낯선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채 뻘쭘하게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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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모인 사람들은 에인을 돌보게 된 것을 계기로, 육아 팁과 요리 지식을 나누었던 생활 게시판의 붙박이 도전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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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뮤니티에 올라온 글의 문체와 어투에서 어느 정도 짐작은 했지만, 현장에 나오니 생각보다 더 동네 반상회스러운 분위기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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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남성 도전자들도 있다. 잘 헤아려보면 성비는 거의 반반에 가깝다…하지만 이 ‘여사님’들의 존재감이 너무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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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본 것보다 더 잘생겼네, 키도 훤칠하고~ 연애할 때 우리 남편 보는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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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말하며 은근히 내 팔에 몸을 비벼오는 여기 이 분은, 올해 43세 강지혜 씨. 무려 중학생 아들이 있는 유부녀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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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얼굴만 봐서는 도저히 40대 초반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이게 말로만 들었던 시련의 탑의 안티에이징 효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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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련의 탑 도전자들은 노화가 느리다. 단순히 느리기만 한 게 아니라, 아예 거꾸로 젊어지는 경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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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탯이 상승하고 신체능력이 발달하면서, 회복 효과 덕분에 주름이 없어지거나 체형이 변화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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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나만 해도, 비틀어진 골반과 척추가 교정되며 키가 조금 자랐고- 푸석푸석하던 피부도 확 좋아진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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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런 변화도 만능은 아니라서, 중년이 청년 시절로 돌아가는 수준의 극적인 변화는 불가능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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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보니, 관리 잘한 40대 여성을 20대 언저리로 보이게 해주는 수준은 가능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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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혁씨 요리실력도 부쩍 늘었던데, 이렇게 잘 생겼으면서 요리까지 잘하기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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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좀 먹어봐요, 젊은 사람이 요리하려면 이런 맛도 알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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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휴, 한창때인데 맨날 혼자라 외로워서 어떡해? 사람 그립지 않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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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탓인지, 아줌마들의 주책에 묘한 끈적거림이 느껴진다. 뭐냐, 여성 헌터는 불륜률이 매우 높다고 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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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잖아, 진혁씨는 연애할 때 몇 살 차이까지 가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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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이건 씨발 대놓고 추파잖아. 당신 탑 바깥에 남편도 있으면서, 그래, 탑 바깥에 있으니까 이러는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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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이~ 이상한 뜻 아니고, 우리 딸이 조금 컸으면 딱일 것 같아서 그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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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살 차이까지 가능하냐고? 내가 30대 초반이니까 10살 정도는 괜찮다는 대답이 듣고 싶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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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요, 한 2,000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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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가 정확히 몇 살이더라. 시계열이 어긋나서 헷갈리는데, 그 이상으로 차이 나지는 않았으면 좋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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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고, 몸에 쫙 붙는 롱 드레스를 입고 들러붙는 아줌마를 밀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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댁들이 아무리 나이에 비해 젊고 몸매가 좋아도, 다크엘프 누님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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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약혼자가 딱 그 정도 나이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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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엘레노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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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캡처해 둔 사진이나 한번 돌려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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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소 해괴하고 불편한 모임이 될 뻔했던 생활 게시판 친목 모임은 곧 정상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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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몇몇 아줌마들이 나한테 추파를 던지긴 했지만, 그래도 전체적인 분위기는 훈훈하고 건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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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요리 쪽으로 상당한 수확이 하나 있었는데, 오늘 모인 인원 중에서 몬스터 요리를 연구하는 요리사가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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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도 파인다이닝 계열에서 일하던 사람이라는데, 시련의 탑에 들어와서 새로운 식재료를 마구 시험해 보기 시작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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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거 진짜 맛있네, 이게 무슨 몬스터 고기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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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레이크 꼬리 살이에요, 소금만 쳐서 저온으로 구웠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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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몬스터 전리품을 요리에 접목해보려 많이 노력했지만, 성공적이었던 건 고작 몇 번뿐이었는데- 이 사람은 급이 다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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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자하니 요리 스킬도 상급을 목전에 두고 있다는 것 같은데, 어지간한 랭커보다 이 사람이 더 대단한 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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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세계에서 진지하게 요리를 연구해, 이만한 결과를 내놓다니. 특히 마법을 이용한 몇몇 조리법은 정말 상상도 못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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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는 진혁씨도 대단하던데요, 아까 고기를 종잇장처럼 자르시던데. 어떻게 한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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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별건 아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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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인벤토리에서 꺼낸 식칼에 가볍게 오러를 둘러 보여주었다. 요리 쪽으로 내 특기는 이것 정도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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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러는 무엇이든 가볍게 절단한다. 당연히 온갖 식재료를 가볍고 예리하게 절단하는 것도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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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 이용해 오늘 선보인 것이 바로 ‘생 대패 삼겹살’이다. 전혀 냉동하지 않은 돼지고기를 극한까지 얇게 썰어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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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그거 오러 아닌가요? 진혁 씨 그런 것도 할 줄 알아요? 아니, 그걸 요리에 써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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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사의 삼신기라고 불리는 스킬을 식칼 따위에 쓰고 있는 모습에, 요리사 도전자가 매우 크게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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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계기였다. 서로 요리나 생활 팁을 공유하러 온 자리였는데, 어쩌다 보니 내 스펙과 스킬에 관한 이야기가 오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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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히 숨기려는 것도 아니었으니, 나도 주변에서 묻는 만큼 착실하게 대답해 주었다. 거의 한 시간가량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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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 그럼 토너먼트도 우승해볼 만한 거 아니야? 나 진혁씨 믿고 돈 걸어봐도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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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전투에는 별 관심이 없는 요리/생활 탭의 도전자들이, 모두가 궁금해하는 내 스펙을 상세히 알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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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크게 걸진 마시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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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분석이 끝났다는 그 슈퍼루키 도전자는, 아마 여기 모인 아줌마들의 반의반도 아는 게 없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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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나를 응원하러 오겠다는 아주머니들의 인사를 받아 두고, 다시 다른 곳을 구경하러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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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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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돌이켜 보니 뭔가 이상한 점이 하나 있었다. 아까 나한테 자꾸 들이대던 아줌마 몇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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끈적거리는 태도에 신경이 쏠려서, 정작 그때는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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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들, 뭔가 기척이 좀 이상하지 않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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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 토너먼트 32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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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력을 제어하지 못하는 도전자들이 신경에 거슬려, 일부러 감지의 수준을 많이 낮춰둔 탓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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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 보니, 몇몇 사람들의 기척이 유독 제대로 느껴지지 않았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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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예 안 느껴졌던 건 또 아니고, 뭐라고 해야 하나- 흘러나오는 마력과 생명반응이 좀 오락가락하는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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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라멘트 수명이 다 되어서 깜빡이는 백열전구처럼, 기척이 강해졌다 약해지기를 조금씩 반복하고 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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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겪는 일이라 이걸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어쨌든 그냥 몇몇 사람들의 기척이 이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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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스킬 때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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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이마를 짚고 고민해봤지만, 마땅히 답은 나오지 않았다. 솔직히 굳이 신경써야 할 일인가 싶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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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목 모임에 나왔던 사람들은 대부분 스펙이 낮거나 애매한 저레벨 도전자들, 내게 달라붙었던 아줌마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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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수상쩍은 일을 꾸미고 있다 할지라도, 그게 뭔들 나한테 통할 일은 없다. 잔재주 종류는 내게 특히 안 통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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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보다는 내일 열릴 토너먼트 본선을 더 신경 쓰는 게 좋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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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선은 예선과 다르게 도전자간의 1대1 매치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또 하나의 차이점으로, 특수 보호 효과가 제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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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P가 0으로 떨어지거나, 빈사 상태가 되면 자동으로 발동하는 강력한 보호막+회복 효과. 즉, 사망 방지 장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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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보호 효과 덕분에, 본선에 진출한 도전자들은 상대방을 죽일지도 모른다는 걱정 없이 전력으로 싸울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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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령 즉사급 데미지를 입어도, 보호 효과를 받아 기력만 소진한 채 경기장 바깥으로 전송된다고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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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커뮤니티에는 마침 그 보호 효과와 관련된 공지사항이 하나 올라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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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독)토너먼트 본선 참가자들에게 안내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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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의 치안을 담당하는 거대 길드의 마스터가 직접 올린 범죄 예방 공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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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은 토너먼트 본선 탈락자에 대한 보호조치가 예정되어 있다는 것과, 범죄행위에 대한 강력한 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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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너먼트에서 즉사급 데미지를 입고 탈락한 도전자는, 보호 효과가 발동되어 기력만 상실하고 경기장 바깥으로 전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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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기력을 상실한 도전자가 누군가에게 습격당하기라도 하면 어떨까. 변변찮은 저항도 못 하고 살해당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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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토너먼트 본선 진출자가 뉘집 개 이름도 아니고, 개나 소나 쉽게 죽일 수 있는 건 아니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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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핀 길드에서 주최하는 스포츠 토토도 본선으로 가면 그 규모가 더욱 커진다. 예민해진 도전자도 당연히 많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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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련의 탑은 초대장만 받으면 누구나 들어오는 장소, 당장은 잠잠하지만 범죄자나 질 나쁜 인간들도 얼마든지 섞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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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로- 큰돈을 걸었다가 잃고 탈락자에게 보복하려 드는 개인, 혹은 집단이 있어도 이상하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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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 길드의 보호조치에도 빈틈은 얼마든지 있다. 그러니 이들이 약속할 수 있는 건, 범죄 행위자에 대한 강력한 처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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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K라는 단어로 순화하고는 있지만, 결국 처형뿐이다. 대형 길드의 간부들이 모두 칼을 들고 나설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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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러고 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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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생각을 하니 마침 떠오르는 것이 하나 있었다. 토너먼트 단체전, 파티를 이뤄 붙는 경기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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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망한 신인 도전자들을 위한 자리인 개인전과는 다르게, 그쪽은 각 길드의 간부들이 힘을 과시하기 위한 장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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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드 페스티벌에서만 열린다는 길드전 콘텐츠보다 규모는 작지만, 진짜 강한 도전자들의 힘을 확인할 수 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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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그 예선이 진행되고 있다니까, 남는 시간은 그거나 보러 가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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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서버의 치안을 책임지는 대형 길드의 본질은, 잘 쳐줘도 자경단이고 나쁘게 말하면 군벌이나 다름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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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법률과 처벌이 통용될 수 없는 이곳에서, 무력을 독점하고 본인들의 잣대로 타인을 심판하는 존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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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녀석들이 계속해서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신들의 정당성과 무력을 주기적으로 어필해 줄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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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 길드의 간부 중에는 탑에서 10년 이상을 썩은 괴물들도 있으니, 그 이상 무슨 어필이 필요할까 싶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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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이런 건 눈으로 안 보면 꼭 이해하지 못하고 개기는 놈들이 한둘쯤 나오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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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단체전은 그런 놈들의 기를 죽이기 위해 존재하는 무력 어필의 장, 비유하자면 대규모 열병식 같은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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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층 랭커와 길드 간부들로 이뤄진 올스타 파티가, 아낌없이 그 힘을 드러내는 정상 결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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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쾅! 콰광! 콰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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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남는 차에 보러 온 단체전 예선은, 그런 평가에 걸맞게 상당히 수준 높은 대결이 펼쳐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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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전 예선에서 봤던 애매한 저층~중층 랭커가 아닌, 다수의 고층 도전자들이 맞붙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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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킬 한방한방이 엄청난 위력을 뿜어내며, 나조차도 얕볼 수 없는 충격량이 대기를 쩌렁쩌렁 울려 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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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세긴 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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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쪽 파티 모두 75층 이상의 고층 도전자랬던가, 탑을 졸업하고 헌터가 되기 직전인 완성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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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스펙이 높긴 높다. 저런 녀석들이 개인전에 우르르 나왔다면, 나도 우승은 장담할 수 없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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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스펙에 비해 기량이 영 아니다. 뭐, 고층 도전자라고 해도 성장방식은 거기서 거기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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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감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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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층 도전자들의 수준을 더 자세히 알고 싶어서, 경기장까지 닿도록 넓은 범위에 마력을 퍼트려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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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곧바로 실수했음을 깨닫고 마력을 거두었다. 여기서는 감지를 쓰면 안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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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문제점은 경기를 구경하러 온 도전자가 너무 많았다는 것, 혼탁하게 섞인 다수의 마력에 현기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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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엇, 방금, 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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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문제점은, 무대 위에서 격렬한 전투를 벌이고 있던 파티의 핵심- 마법사 한 명이 내 마력을 느끼고 움찔했다는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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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스킬에 의존해 성장했다고는 하지만, 고레벨 마법사답게[마력 감지]계열 스킬의 레벨이 높은 탓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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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팽하게 맞붙던 두 파티의 싸움은 한 쪽의 마법사가 한눈을 판 사이, 균형이 무너지며 그대로 승부가 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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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거 참, 집중 좀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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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력도 나쁘면서 쓸데없이 예민한 게 독이 됐구나. 안타까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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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토너먼트 본선 시작까지 30분이 남은 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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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바글거리는 인파를 뚫고 대기실에 입장했다. 생각보다 조금 늦게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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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너먼트가 행사로서 인기가 많은 건 알고 있었지만, 본선 시작이라고 해서 이렇게까지 인파가 몰릴 줄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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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히 인파가 몰린 것 외에도, 응원한다며 나를 둘러싸는 사람들도 무척 많았던 탓에 시간이 좀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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떨쳐내려면 얼마든지 떨쳐낼 수 있었지만, 이런 상황은 처음이기도 하고- 그러다가 괜히 누가 다치면 안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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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무기 쓰시는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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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실에 들어가니, 일전에 나를 응원한다고 했던 그리핀 길드의 간부가 나를 보며 그렇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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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경기 전후의 혼잡을 수습하기 위해 배치된 것 같다. 나는 검과 방패를 들어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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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이제부터는 본선이니까, 계속 맨주먹만으로 싸우는 건 상대방에게도 예의가 아닐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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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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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툭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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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고, 자기 자리로 돌아가 대기했다. 곧 나는 경기장 안쪽으로 이동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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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객석에 채워진 사람들이 환호하며 손을 흔든다. 가볍게 마력감지를 펼쳐 보니, 조금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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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며칠 함께 주문을 연구하며 던전을 돈 강준호가 있었다. 그리고 조금 옆으로 저번에 만난 친목회 인원들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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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한테 달라붙던 젊은 아줌마들이 꺅꺅거리며 내 이름을 소리치고 있다. 허, 참, 이걸 모여서 응원해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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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핫, 그 차림은 뭐야? 이제 와서 전사라고 페이크라도 치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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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내 맞은편의 32강 상대, 원소술사 박원호는 실실 웃으며 그런 말을 내뱉었다. 뭐라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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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크가 아니라 진짜 전사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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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핫, 내가 바보인 줄 알아? 분석 끝났다고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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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어떻게 분석했는데 그런 말이 나오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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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가 없어서 그렇게 받아치자, 놈은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기다렸다는 듯 말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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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보통 도전자들이랑은 좀 다르거든, 네가 번개 속성의 마력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다는 걸 바로 눈치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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놈의 마력이 스멀스멀 내 발밑을 타고 올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은근슬쩍 마력감지를 펼치고 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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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공개했던 스킬 중 [라이트닝 차지]가 있었지만, 고작 차지 스킬로는 그렇게 자유롭게 마력을 다룰 수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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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여기까지 듣고, 나는 이 녀석이 얼마나 얼토당토않은 착각을 했는지 깨달았다. 녀석은 설명을 이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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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녀석도 어설픈 재주가 독이 된 케이스였다. 놈은 내 예선 경기를 보고 내 마력을 곧바로 분석해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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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마법 스킬을 얻은 전사치고는 너무 높은 수준으로 번개의 마력을 다루고 있었고, 그것이 착각으로 이어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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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보여준 특징에 딱 맞는 하나의 클래스, 유니크 클래스인 청마도사……훗, 정곡을 찌른 모양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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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번개 속성 전문의 마법사라고 착각하게 된 것이다. 하필이면 그 착각에 딱 맞는 특징의 클래스가 있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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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마도사, 번개 마법을 주무기로 완드와 스태프에 의존하지 않는 하이브리드 타입의 마법사 클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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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신체를 전기로 자극하는 것으로, 근력과 민첩 스탯을 증가시키는 고유 버프 스킬이 존재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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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해, 청마도사 클래스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하나 있으니까……나한테 간파당하고 싶지 않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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놈은 범인을 잡아낸 명탐정처럼 위풍당당하게 떠들었다. 동시에 경기 시작을 알리는 카운트가 움직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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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모든 스킬은 번개 속성! 단일 속성 대책은 시간이 조금만 있으면 거뜬하지! 이제 너는 나를 이길 수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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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의 마술]이 놈이 장착한 장비에 걸린 마법을 읽어내었다. 여러 종류의 번개 속성 저항 마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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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러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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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가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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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운트다운이 끝나고, 경기가 시작되었다. 박원호는 곧바로 한 겹의 절연 마법을 더 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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녀석이 잘못 판단한 점은 한둘이 아니지만, 다 제쳐놓고 그중에서 가장 큰 것을 꼽자면- 일단은 두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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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번개 속성 대책은 했을지언정- 물리 공격 쪽에는 전혀 대책을 세워두지 않았다는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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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꽈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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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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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시작과 동시에 앞으로 질주한 나는 방패로 놈의 면상을 힘껏 후려쳐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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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개 속성만 막으면 이길 줄 알았냐. 설령 내 클래스가 정말 청마도사였다고 해도 피지컬은 어디 안 가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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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선 때 다른 도전자들을 원펀치로 보낸 내 근력과 순발력에, 이 녀석 수준으로는 전혀 대응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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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파동 제어]를 통해 상대의 내부로 침투하는 전자발경은, 이런 얄팍한 방어 마법으로 막을 수 없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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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머리에 콘돔 뒤집어쓰고 벼락 맞으면 살겠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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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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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르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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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패치기에 이어서, 머리를 잡고 쏟아낸 전격장. 박원호는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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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4. 빵 부스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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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한 것과 다르게, 너무 싱겁게 끝나버린 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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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호도 분명 제 딴에는 철저히 준비한다고 했던 거겠지. 그게 실수를 넘어 자충수가 된 게 문제였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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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소술사 클래스인 박원호는 다양한 상황에 대응이 가능한 육각형의 마법사 타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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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림짐작이지만, 아마 근접 전투도 어느 정도는 자신이 있었을 거다. 반응속도는 꽤 빨랐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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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선전의 도전자들은 내 주먹에 반응도 못 하고 뻗었지만, 이 녀석은 내 방패 공격을 눈으로 쫓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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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작 몸이 따라가지 못한 게 문제지만, 방패로 얻어맞고 나서도 바로 뻗지는 않았던 걸 보면 맷집도 괜찮은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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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시작과 함께 전개한 게 절연 마법이 아니라 물리 방어 마법이었다면, 그렇게 쉽게 당하지는 않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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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인은 결국 잘못된 분석, 번개 속성에 대응하겠답시고 아이템 세팅을 이상하게 바꿔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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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런 사정이 있다 한들, 결과는 먼저 도발까지 했다가 딱 두 방에 뻗어버린 추한 모양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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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잖아도 호감고닉으로 유명했던 녀석이니, 커뮤니티의 익살꾸러기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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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김지성#2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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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 : 오케이 서진혁 분석완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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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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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이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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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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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냉철한 분석은 대원호 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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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기객관화 지리노 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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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방컷날거 분석해서 두방컷난거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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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씨발 ㅋㅋㅋ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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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왤케 당당하노 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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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박윤호#2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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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방금 경기로 서진혁 분석 끝났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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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스는 대충 모르겠고 스탯이랑 레벨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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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포먼스하겠다고 괜히 스킬 낭비한거 후회하지 않을거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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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선에서 만나지말자, 제발부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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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새끼는 뭐야 씨발 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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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호인줄 알았는데 윤호노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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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ㄴ 서버도 똑같음 뭐하는새끼냐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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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호게이 이게 커뮤 첫글인게 ㅈㄴ 웃기네 ㅅㅂ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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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는 뒤통수에 마법날아와도 그런갑다 해라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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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된 소재거리는 당연히 며칠 전 커뮤니티에 올렸던 ‘분석 완료’ 게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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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돔 운운한 내 목소리는 관중석에까지 들리지 않았는지, 그걸 소재로 드립을 치는 경우는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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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밖에는 박원호가 과거에 커뮤니티에 올렸던 몇몇 게시글이 파묘당해, 그걸로 조리돌림을 당하는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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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놈 그거, 평판은 나쁘지 않은가 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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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호 같은 랭커급의 강자가 커뮤니티에서 이렇게까지 놀림거리가 되는 일은 원래 거의 없다시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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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한 일이다, 머리에 스팀이 오른 랭커에게 물리적으로 보복당할 가능성이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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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최길현의 악명을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진짜 위험한 놈들 상대로는 쉬쉬하게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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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환경에서 이렇게 조리돌림을 당한다는 건, 당사자가 이런 일로 보복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도전자들에게 있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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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헤쳐진 옛날 게시글을 좀 살펴보니, 입을 털다가 굴욕을 당하고도 웃어넘겼던 일이 몇 번씩 있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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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저나, 분위기가 이러니까 가만히 있기 아쉽네. 나도 장작 좀 넣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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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서진혁#26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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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원호한테 너무 그러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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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가 나잖아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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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도는 비틱질이 아니라 쇼맨십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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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경기가 끝난 뒤에는 다른 도전자들의 32강 경기를 지켜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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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번의 경기를 모두 볼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우승후보로 불리는 이들의 경기는 모두 챙겨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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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75층의 고층 랭커들은 만만하지 않다. 단체전에 참가한 원숙한 도전자들보다도 더 강해 보이는 이들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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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런 이들 사이에서 가장 내 눈을 사로잡은 것은, 오히려 우승후보로는 전혀 꼽히지 않던 무명의 도전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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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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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다란 경기장 위에서 두 명의 전사가 맞부딪힌다. 한쪽은 평범한 검방 전사지만, 반대쪽은 도끼를 든 야만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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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의 클래스는 [검투사], 후자의 클래스는 [광전사]다. 둘 다 동등한 레어 등급의 클래스로, 공략 층수는 64층과 72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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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스펙 역시 72층을 공략중인 광전사 쪽이 더 높다. 하지만 경기의 양상은 조금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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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앙! 캉! 카강! 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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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쭉한 외날검과 방패를 든 검투사가 광전사를 상대로 일방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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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아아아아!! 뭉개버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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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관객들은 광전사가 우위라고 느끼고 있는 듯싶었다. 이해하지 못할 일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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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투사의 공격은 모두 가벼워 보인다. 한편 광전사는 여러 공격을 몸으로 받아내며 강력한 일격을 적중시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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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제대로 적중하는 공격은 없고, 전부 다 막히거나 흘려질 뿐이다. 화려하기만 하고 유효하게 들어가는 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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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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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광전사가 몸에 붉은 기운을 두르며 무식한 돌진을 개시했다. 체급을 앞세워 억지로 몰아붙일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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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전사는 가히 인간 전차라 해도 좋은 미친 체급을 갖고 있다. 저런 덩치와 근육은 탑 내부에서의 단련만으로는 결코 만들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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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고난 프레임에 더해, 탑 바깥에서 큰 사이즈의 근육을 만드는 트레이닝을 꾸준히 해야만 만들 수 있는, 딱 봐도 강해 보이는 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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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 비해 검투사의 체격은 상대적으로 작다. 하지만 세세히 뜯어보면 오히려 저쪽의 체형이 훨씬 더 낫다는 걸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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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크같은 근육을 가진 광전사에 비해 작을 뿐, 190은 되어 보이는 신장- 거기에 쭉쭉 길게 뻗은 팔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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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식하게 덩치만 큰 것보다는 저런 체형이 근접 전투에선 더 유리하다. 균형 잡힌 몸에서 나오는 유연함과 안정적인 움직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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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촤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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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슬아슬하게 돌진을 피해낸 검투사의 공격이, 광전사의 몸에 커다란 상흔을 새겼다. 이걸로 승패가 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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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런 특징도 없지만 그렇기에 더 상대하기 까다로운, 그냥 무난하게 강한 타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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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열리는 토너먼트 16강, 내 대전 상대는 저 녀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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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너먼트 경기를 모두 보고 난 후, 나는 3번째 친목회를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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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만난 것은 각 계층의 배경과 설정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는, 일명 ‘고고학자’ 계열의 도전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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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특한 방식으로 계층을 공략하고, 특이한 퀘스트를 많이 진행해 온 나에게, 이들은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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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수가 행성의 지맥을 빨아먹는 괴물이었다고요? 진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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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테면, 7층에서 9층까지 이어진 엘프 퀘스트를 통해 알게 된, 세계수의 비밀과 하이엘프 왕이 꾸며온 음모 같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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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저찌 알게 된 배경 이야기를 풀어놓자, 이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날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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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명은 아예 내 멱살을 잡고 짤짤 흔들어 대며, 빨리 더 많은 이야기를 토해내라고 독촉하기까지 했을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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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뻐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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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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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그런 놈들은 진정하라는 의미로 주먹 맛을 좀 보여줬지만, 아무튼 무수한 관심이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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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비단 이들만이 내게 무수한 관심을 쏟은 것은 아니었다. 토너먼트를 통해 내 얼굴이 워낙 많이 팔린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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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보는 도전자들이 응원하고 있다며 등을 두드리거나, 아니면 싸인을 해달라고 하거나, 먹을 걸 건네주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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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뮤니티에서의 인지도는 곧 현실의 인지도로 이어졌고, 이제 인지도는 그대로 인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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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리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알게 된 사실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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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줌마들에게서 느꼈던 이상한 기척은 의외로 그렇게 드문 것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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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그런 기척이 나는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비슷한 느낌의 기척을 가진 사람들이 종종 보이고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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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 성별, 외견, 소속, 그 어떤 부분에서도 공통분모가 없는 사람들이었으므로- 수상하게 여길 건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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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수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 한들, 솔직히 나랑은 별 상관없는 일이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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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건 대형 길드에서 알아서들 하겠지. 그러라고 있는 길드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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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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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나는 고고학자 도전자들에게 성위에 대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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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색을 통해서는 알아낸 게 없지만, 배경 파고들기를 좋아하는 이들이라면 뭔가 알고 있지 않을까 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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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과 연관된 매우 격이 높은 존재라는 것밖에는……저도 참 궁금한데, 누가 알려줬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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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아쉽게도, 이들 역시 성위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다만, 흥미로운 이야기 하나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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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하지만 성위와 신은 또 다른 존재라는 것 같아요. 이건 저도 전해 들은 이야기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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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책에 적혀 있기를, 성위랑 동격으로 놓일 수 있는 건, 신령(神靈)과 진룡(眞龍)뿐이라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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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는 건 적어도 성위와 신령은 서로 다른 존재라는 거잖아요, 진룡은 뭔지 잘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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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내용이 적힌 책은 상층에서나 볼 수 있다고 하니, 당장은 검증 불가능한 이야기지만- 머릿속에 넣어둘 필요는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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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위에 대해서 알아낸 건 없지만, 이것저것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서 만족스러운 친목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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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다음 날, 토너먼트 개인전 16강 경기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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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5. 토너먼트 16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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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16강 상대인 검투사 남자의 이름은 김민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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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서버에 동명이인만 두 자릿수에 달할 정도로 흔한 이름이다. 심지어 생긴 것도 흔하게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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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히 잘생기지도 못생기지도 않은 평범한 이목구비, 평범한 검은 머리칼에 검은 눈동자, 존재감 없는 외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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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스도 흔해빠진 전사 클래스의 파생 직업, 사용하는 무기도 흔해빠진 검과 방패의 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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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막상 본인과 대치하면 절대 흔하다느니, 평범하다느니, 지껄일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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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아아아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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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호를 받으며 경기장에 입성해, 무장을 갖춘 김민준을 정면에서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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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광전사와 비교했을 때 작을 뿐이지, 키도 굉장히 장신인데다가 팔다리가 쭉쭉 길게도 뻗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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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런 체형은 흑인 운동선수들한테서나 보던 것 같은데, 평범한 한국인 얼굴로 저런 몸을 가지고 있으니 위화감이 엄청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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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장비도 평범한 듯 보이기에 오히려 평범하지 않다. 저런 건 평범하다기보다는 일부러 수수한 걸 고른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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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직도 [강철 직검]을 주 무기로 선호하듯, 저쪽도 장식이 거의 달리지 않은 심플한 디자인의 장비를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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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전지향적인 세팅을 했다는 뜻이다. 저번에 보니 대인전에도 익숙해 보이던데, 원래 바깥에서 뭐 하던 사람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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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하지만 아직은 물어볼 수 없다. 시합이 시작되면, 아니면 끝난 뒤에, 천천히 대화를 시도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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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가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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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벅, 저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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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운트가 끝나고, 나와 김민준은 서로의 움직임을 살피며 천천히 경기장 한가운데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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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움직이기 시작하니 확실히 남다른 점이 눈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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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육의 움직임, 호흡, 걸음걸이, 적당한 긴장까지- 모두 놀라울만큼 안정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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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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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 입으로 말하긴 뭐하지만- 이 정도로 깔끔한 움직임은 쉽게 도달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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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지 않은 실전 경험과 꾸준한 단련이 뒷받침되어야만 만들어지는 자세다.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드는 상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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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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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을 뽑았다. 경직된 분위기가 일순간에 달아오른다. 내가 먼저 김민준을 향해 달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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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한 타입이니 어지간해서는 먼저 공격에 나서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내가 먼저 들어가 주는 게 맞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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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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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직한 궤도로 내려친 [강철 직검]이 김민준의 외날검에 막혔다. 아니, 단순히 막힌 게 아니라 흘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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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준은 그대로 검로를 비틀어 외곽으로 빼낸 뒤, 외날검을 휘두르- 지 않고, 검신을 손으로 잡아 목을 향해 찔러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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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검술 용어로 하프 소딩이라 부르는 그 기술이다. 이걸 자연스럽게 사용한다는 점에서 이미 다른 도전자들과는 급이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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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대로 검을 쥔 손목을 위로 비틀어 올려, [강철 직검]의 크로스 가드를 앞세움으로써 찔러 들어오는 외날검을 받아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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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부드럽게 어깨와 손목을 움직여, 근거리에서 김민준의 목을 향해 칼날을 들이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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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근거리에서 벌어지는 소드 레슬링 상황, 이런 상황에서 기술과 기교로 대처하는 게 가능한 도전자는 극히 드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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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김민준은 해냈다. 크로스가드에 막혔던 외날검을 물 흐르듯이 뒤로 빼서 던져버리고는, 순식간에 부무장으로 전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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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애용하는 손도끼처럼, 손목에 수납해둔 짧은 단검을 꺼내어 목덜미로 향해오는 [강철 직검]의 날을 받아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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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준은 그대로 힘을 주어 직검의 날을 밀어내고,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로우킥을 날려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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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장의 전환도, 근거리에서의 체술 싸움으로의 전환도, 모두 빠르고 군더더기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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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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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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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쪽 다리를 들어 로우킥을 방어하고, 그대로 김민준의 몸을 강하게 밀어 차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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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대로였으면 굳이 이런 방어자세를 취할 것도 없었다. 오히려 [철벽]으로 받아내고 강제로 턴을 잡았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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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렇게 수수하게 훌륭한 기량을 뽐내는 상대를, 스킬과 스펙으로 찍어누르는 건 못할 짓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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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해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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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여든 관중과 커뮤니티의 익살꾸러기들에겐 미안하지만- 오늘은 화려한 맛은 좀 빼고 싸워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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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준처럼 무난하게 강한 타입을 공략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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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찮은 수 싸움과 기량 승부에 어울려주지 않고, 압도적인 힘과 체급으로 압살해 버리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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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의 혼]이라는 사기적인 패시브를 갖고 있으며, 마력강화를 포함한 온갖 강화 수단을 가진 내겐 손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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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런 방식으로 찍어누르는 싸움만 하다 보면, 무식하게 스펙만 높은 다른 도전자들과 다를 게 없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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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질적인 실력을 키우고 싶다면, 때로는 이렇게 정직한 싸움도 즐길 줄 알아야 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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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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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준의 외날검을 쳐내고, 들고 있는 방패 밑으로 몸을 날려 양다리의 오금을 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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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준은 태클을 방어하기 위해 재빨리 자세와 중심을 낮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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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순간 나는 한쪽 손으로만 다리를 잡고, 반대쪽 손으로는 김민준의 옷깃을 잡는 자세로 전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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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격투기에서는 절대로 나올 수 없는 동작이지만, 시련의 탑 도전자의 강인한 육체가 있다면 가능한 변칙 그래플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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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목 하나로만 전신을 지탱하고, 나머지 신체부위를 하체 근처로 밀어 넣어 비정상적인 무게중심을 형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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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극한까지 낮춘 자세에서 등을 이용해 상대를 들어 올려, 그대로 지면에 내리꽂아 처박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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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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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원 트롤의 지도자급 개체가 사용하던 기술과, 리자드맨의 근접 레슬링 기술을 결합한 동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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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인끼리의 검술과 격투에 익숙한 검령은 방어해 냈었지만, 김민준은 전혀 대응하지 못하고 그대로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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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에 꽂힌 김민준은 재빨리 자세를 다잡았다. 나는 김민준을 향해 달려들었지만, 눈앞으로 방패가 날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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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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뻔한 시간벌이용 투척을 피해내고, 검을 뽑아든 김민준의 손목을 비틀며 빼앗았던 단검을 휘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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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준은 숨을 크게 들이쉬더니 단번에 자세를 크게 낮추었다. 그리고 전신을 채찍처럼 휘둘러 발차기를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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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볍게 뛰어 피해내자, 이번에는 전신의 탄력을 이용해 공중으로 도약. 힘차게 외날검을 휘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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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 머리를 쓴 공격이었겠지만, 전체 동작이 너무 커서 빈틈이 뻔히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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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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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날검의 간격 안쪽으로 파고들어, 반 박자 빠르게 얼굴에 주먹을 꽂아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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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는 조금 전부터 계속 이런 식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김민준의 기술에는 큰 약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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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모든 기술이 지나치게 현대적이라는 점. 일반적인 격투의 상식을 깨는 초인적인 동작에는 좀처럼 대응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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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기응변 능력은 괜찮아서 나름대로 수를 강구하는 모습을 보이긴 하지만, 결국은 금방 한계를 노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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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경기도 내가 이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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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몇 분 후, 이제 승패는 누가 봐도 명확한 수준까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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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 헉, 허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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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번이고 나와 칼을 부딪쳤던 김민준은 헉헉거리며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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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재생]의 효과로 무한에 가까운 내 지구력을 따라올 수 있을 리가. 수비적으로 대응해서 체력을 아꼈지만 슬슬 한계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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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러 기술과 기술의 싸움으로 상대해줬지만, 나는 결국 끝까지 피는커녕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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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상 시간을 줘도 무의미하겠지만, 그렇다고 저렇게 뻗은 상대에게 결정타를 넣기는 좀 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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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하시네, 어디서 배우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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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뻗어있는 김민준을 향해 다가가 손을 뻗으며 물었다. 김민준은 잠시 불타는 듯한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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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내 어차피 졌다고 결론을 내렸는지, 금방 표정을 풀고 내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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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 아카데미 교육생……시설에서는 수석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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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 그러고 보니 그런 게 있었지. 헌터를 전문적으로 양성하는 일종의 실용전문학교 같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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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역 헌터들과 온갖 트레이닝 전문가들의 지도를 바탕으로, 신체를 단련하고 기술을 연마하는 곳이라고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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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도전자들이 생활체육 아마추어들이라면, 이 사람은 태릉 출신 엘리트 체육인쯤 된다고 생각하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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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접 전투 부문에서는 항상 만점이었는데, 이렇게 질 줄 몰랐습니다. 세상은 넓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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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넓다는 말은 오히려 내가 하고 싶다. 설마 도전자 중에서 나랑 이만큼이나 겨룰 수 있는 사람이 있을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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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검술과 체술 모두 최소 중급에 10레벨 이상이겠지. 어쩌면 상급 직전까지 도달했을 가능성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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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요, 저도 많이 배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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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말이 아니다. 차이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비등한 수준의 상대와 대련해 본 경험은 분명 내게도 도움이 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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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령 녀석은 스펙이 딸릴 뿐이지, 여전히 순수 검술 면에서는 나보다 훨씬 강하니까. 이런 거랑은 조금 느낌이 다르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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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가능하면 페스티벌이 끝나기 전에 몇 번 더 붙어보고 싶은데, 이걸 기회 삼아 친구추가라도 해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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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경기 끝나고 같이 식사라도 하실래요? 이겼으니까 제가 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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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 유명인한테 밥 한 끼 얻어먹을 수 있다면 저야 환영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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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색한 말투로 건넨 식사 제의, 김민준은 웃음과 함께 그것을 흔쾌히 수락하며 항복을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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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김민준은 경기가 끝난 후, 식사는 커녕 그대로 잠수를 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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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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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6. 파라노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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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한국인에게 ‘밥 한번 먹자’는 말은 그냥 인사치레긴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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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 된 사회생활을 해본 적이 없는 나도 그건 안다. 하지만 이번에는 좀 상황이 다르지 않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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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패가 결정난 후, 나는 모처럼의 다른 경기 관람도 포기한 채 곧바로 바깥으로 나왔지만- 김민준은 나타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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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려도 안 오고, 커뮤니티로 쪽지까지 넣어봤지만 씹힌 것 같고, 경기장 주변을 빙빙 돌아봐도 안 보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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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밥이고 뭐고 그냥 경기가 끝나자마자 다른 곳으로 가버린 모양이다. 어이가 없어서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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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살다 남자한테 바람을 다 맞아보네, 이거 진짜 이상한 기분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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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강 상대였던 박원호도 경기에 지고 나서 쪽팔렸는지 바로 잠수를 타 버렸는데, 김민준도 그런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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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박지원#2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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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이번 토너먼트 최고 명경기 이거인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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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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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혁게이 vs 민준이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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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킬 싹 다 빼고 담백하게 육탄전으로 붙는거 ㅈㄴ 맛있었다 ㅇ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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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확실히 전붕이들 싸움이 보는맛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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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ㅇㅈ 진짜 옛날 검투시합이 이런느낌이었을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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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건 진혁이도 진혁인데 민준이햄이 접수 개찰지게 해준게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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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ㄹㅇ 이정도로 수준높은 맞대결 오랜만인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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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ㄴ 수준높은 맞대결 ㅋㅋ 걍 하루종일 샌드백되서 개처맞는게 뭐가수준높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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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ㄴ 경기 수준은 모르겠는데 니 수준은 알만하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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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ㄴ 도현이 애미 샌드백처럼 줘패는게 더 재밌긴하지 인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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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새끼들 어제까진 개듣보 취급해놓고 이제와서 민준이햄 이러고있네 ㅅㅂ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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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뮤니티 여론은 이렇듯 김민준에게 아주 호의적이지만, 다르게 말하면 결국 그냥 명품 조연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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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면, 내가 손을 뻗었을 때도 잠깐 이를 악무는 것 같았다. 나름 훈훈한 마무리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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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이럴 때는 역지사지로 생각해 보라고들 하던데, 내가 김민준 같은 상황이었다면 어땠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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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면 좀 더 붙어보고 성장하고 싶었을 것 같지만, 남의 마음을 내가 알 리가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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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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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겠다, 그냥 신경쓰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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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준과의 파토난 약속을 대신해, 나는 강준호와 함께 밥을 먹으러 노점 거리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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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페스티벌에서 만난 사람은 그밖에도 많지만, 제일 대하기 편한 사람을 꼽으라면 역시 이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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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줌마들처럼 과한 관심을 보이지도 않고, 고고학자들처럼 설정을 더 풀어달라고 닦달하지도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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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담담하게 함께 던전을 클리어하고, 룬 문자와 주문 언어의 공부에 묵묵히 협력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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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진혁 씨가 제 파티원들 다음으로 편해요, 말도 잘 통하고, 이렇게 음식 취향도 맞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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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호는 그렇게 말하며, 새빨간 매운 소갈비찜 한조각을 후후 불어 입안에 넣고 몸을 비틀어 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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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 가만 보면 매운 걸 잘 먹는 것도 아니면서 꼭 매운 음식만 골라서 먹는단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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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서버의 파티원들은 매운 걸 못 먹는 편이라서, 함께 식사를 하는 일은 거의 없다는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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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그냥 뭐든 잘 먹는 거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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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렇게 답하며 똑같이 매운 소갈비찜 한조각을 입에 넣었다. 어우, 이건 확실히 내 입에도 맵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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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운 감각은 혓바닥이 느끼는 통증, 그리고 탑의 시스템은 다른 건 몰라도 ‘고통’에 만큼은 내성을 부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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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그간 별의 별 고통을 다 느껴본 덕분에, 이 정도로는 끄떡도 안 하긴 하는데-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먹는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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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히 궁금해져서 슬쩍 주변을 둘러봤는데, 다른 도전자들도 별다른 호들갑 없이 잘만 먹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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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지, 나 사실 맵찔이었나. 아니면 여기가 진짜 매운맛 매니아들만 찾는 숨겨진 노점이었던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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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아니면, 뭔가 매운 음식을 잘 먹는 비법이 있나. [포커페이스] 스킬이라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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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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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도 괜히 궁금해져서, 가볍게 마력을 일으켜 감지를 돌려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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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강렬한 위화감이 몸을 감쌌다. 이 사람들, 묘하게 기척들이 다 이상한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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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운 갈비찜을 아무렇지 않게 먹고 있다는 걸 제외하면, 딱히 공통점도 없는 사람들일텐데- 대체 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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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혁 씨, 뭐 찾으세요? 화장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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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뇨, 그게 아니라…그냥 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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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기척을 내는 사람은 그 밖에도 많았지만, 이렇게 한 자리에만 모여 있으니 뭔가 느낌이 이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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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런 근거도 보증도 맥락도 없다. 내가 그간 쌓아온 수많은 경험으로도 설명할 방법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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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냥 이상하다. 그냥 불길하다. 보통 이런 느낌이 들 때는 대부분 뒈질 뻔했을 때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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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문득 눈앞의 강준호가 실력 괜찮은 주문술사라는 사실을 뒤늦게 떠올렸다. 나는 조용히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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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들, 기척이 좀 이상하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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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순간, 조용히 갈비찜을 먹고 있던 모든 사람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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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를 감지한 순간, 몸은 언제나 그랬듯 판단보다 빠르게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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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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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자리에서 의자를 걷어차 날려버리고, 강준호의 손목을 붙잡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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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점 주인인 도전자가 ‘어어, 갑자기 왜 그러세요’ 하고 의문을 표했지만, 대답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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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인파가 많은 곳으로 향한다. 단순히 내 착각일수도 있지만, 자리를 피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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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혁 씨, 잠깐만요! 뭐가 어떻게 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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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강준호의 말을 흘려넘기며, 재빨리 마력을 퍼트리며 심신을 날카롭게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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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어떻게 전투가 벌어져도 곧바로 대응할 수 있게끔, 하지만 마력을 퍼트린 순간 나는 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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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백열전구처럼 묘하게 점멸하는 생명반응, 그 이상한 기척을 내는 사람은 그 전에도 드물게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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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지금 퍼트린 마력에 감지되는 같은 기척이……이게 대체 뭐야, 왜 이렇게 많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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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파가 밀집된 구역에 가야 하나쯤 느껴질까 싶었던 기척이, 무시할 수 없는 숫자로 불어나 여기저기 섞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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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발, 뭐가 어떻게 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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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더위에도 끄떡하지 않는 몸이 식은땀을 흘린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위협에 등골에 소름이 돋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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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기가 느껴지는 것도, 위협이 날아온 것도 아니지만, 주변 모든 사람이 암살자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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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런 근거도 보증도 없는, 생사를 넘어온 그간의 경험에서 비롯한 직관- [직감]이 내게 경고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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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혁 씨, 무슨 상황이든 일단 길드로 가죠. 그리핀같은 대형 길드를 찾아가면 보호받을 수 있을 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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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을 듣고 퍼뜩 정신이 들었다. 솔로 플레이가 너무 익숙해서 혼자 대처해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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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변의 위협이 느껴졌을 때는 대형 길드의 막사를 찾아라, 토너먼트 참가자들에게도 그런 공지가 가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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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다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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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곧바로 그리핀 길드의 막사로 향했다. 토너먼트 관련된 수속을 처리하느라 한번 가본 적 있는 장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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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성거리는 인파를 힘으로 뚫고, 재빨리 내달려 도착한 천막을 향해 무작정 뛰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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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왁, 깜짝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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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지만, 나는 천막에 뛰어든 직후 짧게 감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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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대형 길드의 간부급은 다르다는 걸까, ‘깜짝이야’ 같은 말을 하면서도 모두 재빨리 전투태세를 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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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무리하고 있던 마력이 뿜어져 나와 기세를 더하는 한편으로, 재빨리 뛰어들어온 나와 강준호의 얼굴을 살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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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누군가 했더니 솔플러 분이셨네요. 그렇게 급하게 뛰어들어와서는, 무슨 일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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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다음 순간, 나는 뭐라고 말을 해야 하는지 떠올릴 수 없었다. 내 부족한 사회성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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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할 방법이 없는 직관에서 비롯한 위기감, 나는 오직 그것만을 믿고 여기까지 뛰어왔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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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씨발……돌겠네, 이걸 뭐라고 해야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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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은 하지 마시고, 천천히 말씀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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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렇다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을 수는 없어서, 나는 떠듬떠듬 힘겹게 상황을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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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설명을 들은 그리핀 길드의 간부들은 모두 아리송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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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식사중에 갑자기 생명의 위기를 느껴서, 급하게 여기로 뛰어 오셨다…그런 말씀이신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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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하고 나니 이렇게 어이없는 소리도 없었다. 하지만 내가 느낀 직관을 이들에게 전달해 줄 수도 없는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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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력감지를 써 보니까 기척이 이상한 사람들이 많았고, 그 사람들이 동시에 진혁 씨를 노려봤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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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자면 그렇게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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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오신 분, 강준호 씨? 강준호 씨도 그 이상한 기척을 느끼셨나요? 사람들이 노려본 것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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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호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너무 빠르게 붙잡고 나온 바람에, 오히려 아무것도 보지도 느끼지도 못한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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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저희 쪽을 쳐다본 것 같기는 했는데, 자세히는 못 봤고…이상한 기척이라는 건 저도 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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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끝에 ‘그래도 진혁씨가 허튼소리를 할 사람은 아니다’ 라고 변호해 주긴 했지만, 아무 소용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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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핀 길드의 간부들은 약간이지만 언짢은 표정으로, ‘한번 조사해 볼게요’ 라는 말과 함께 우리를 내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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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상 진상 민원인 내지는 피해망상 환자 취급을 당했다. 당연히 조사고 뭐고 할 리가 없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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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장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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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터덜터덜 막사에서 걸어나왔다. 정말로 내가 과민하게 반응한 걸까- 그런 생각까지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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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 때, 내 등을 살짝 두드리는 손길이 반대로 내 감각을 깨웠다. 등을 두드린 건 안면이 있는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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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스티벌 맵에 들어온 이후 몇 번 마주쳤던, 토너먼트를 응원한다고 말해줬던 바로 그 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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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너먼트 때문에 예민해지신 것 같습니다. 응원하고 있으니, 너무 긴장하지 마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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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 새끼도 기척 이상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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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7. 확신의 자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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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로 들어와 침대에 앉아, 머리를 움켜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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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장할, 대가리가 터질 것 같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 짐작조차 안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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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마력감지를 펼쳐 보면, 특유의 이상한 기척을 내는 사람들의 존재가 확실히 식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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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파사이에 자연스럽게 섞여 있는 그것은, 기척을 제외한 어떤 부분도 이상하지 않다- 그래서 신경 쓰지 않았던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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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것들은 분명히 나를 위협했다. 간만에 느껴보는 찌릿찌릿한 위기감에 저절로 몸이 움직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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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도 정체도 모르겠지만 적이라는 건 확실하고, 천천히 숫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것 역시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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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발, 거기서 뛰쳐나오면 안 됐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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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를 감수하더라도 정면에서 맞서야만 했다. 어차피 나는 어지간한 일로는 죽지 않으니, 확실하게 증거를 잡았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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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상한 기척의 정체가 무엇이든 내가 만나본 적 없는 종류의 적임은 분명하니, 정보를 수집했어야 하는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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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라도 길거리에서 아무나 잡아와 심문 따위를 해 봐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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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랬다가는 내가 범죄자 취급을 받으며 페스티벌 내내 수배령이 떨어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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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탑의 스테이지였다면 또 모를까, 적의 정체를 전혀 모르는 시점에서 너무 과감한 행동은 벌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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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핀 길드의 간부 몇몇에게 이상한 인상이 박혔으니 더더욱 힘든 상황이다. 지금 내가 뭘 해도 피해망상 환자 취급을 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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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 일단 침착하게 정리해 보자. 지금도 이상한 기척을 가진 사람들은 점점 늘어나고 있다고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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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의 위협을 대형 길드에 알리려면, 확실한 물증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차라리 같은 상황을 재현해 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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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인이 되어줄 사람을 곁에 두고, 실제로 내게 가해지는 위협을 목격시킨다면- 조사를 의뢰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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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내게 가해질 위협의 수위를 모른다는 점이다. 당장 상대가 내가 손쓸 수 없을 만큼 강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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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긴 내가 공략 중인 스테이지가 아니고, 1층부터 100층까지의 모든 약자와 강자가 모이는 페스티벌 맵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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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상대’란 누구지? 누가 내 적이지? 이 기척을 가진 불특정 다수가 모두 내 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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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척의 정체도 모르고, 상대가 소수인지 다수인지도 모르며, 제대로 상대가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아니, 막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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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로 내 머리가 이상해진 거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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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정신병자가 아니라는 확증은 있는 건가? 스트레스에 노출된 머리통이 맛이 갔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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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동안은 실제로 반쯤 맛이 간 채로 살았고, 아직 그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해도 이상할 건 전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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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시당초, 내가 처해 있던 환경은 미치지 않는 게 이상한 환경이었다. 거기에, 페스티벌에 오기 전에 본 ‘별의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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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잖아도 높았던 [정신 오염 내성]의 레벨이 상승했다,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피를 쏟을 만큼 강력한 정신적 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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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내 뇌를 망가트린 거라면, 내 정신적 문제가 망상장애를 일으킨 거라면, 사실 ‘적’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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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 검증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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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민을 멈추고 행동하기로 했다. 인벤토리에서 날카로운 단검 한 자루를 꺼내, 그 위로 강하게 오러를 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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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으로는 전신에 퍼져 있는 마력을 최대한 죽이고, 남은 HP의 잔량을 확실하게 확인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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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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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힘껏, 자신의 심장을 향해 단검을 찔러넣고 한 바퀴 비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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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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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패시브 스킬의 효과로 인해 불사신이나 다름없는 몸뚱이도, 절대 죽지 않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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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 몸에 흐르고 있는 마력을 제어함으로써, 스스로의 재생력을 약화시키는 방법을 최근에 찾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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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그럼에도 워낙 튼튼하고 생명력이 강한 몸뚱이인지라, 단순히 심장에 칼을 박는 걸로는 원하는 피해를 입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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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결국 오러까지 두르고 심장에 박아넣은 단검을 한 바퀴 비틀고 나서야, 제대로 삼도천을 향해 몸을 던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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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시된 HP가 단번에 깎여나가 0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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찢어진 심장이 피를 흘리고, 눈앞은 순식간에 깜깜해지며, 의식이 흐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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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근차근 죽음이 다가온다. [사고 가속]을 발동하지 않았음에도, 주마등이 스치는 뇌는 멋대로 빠르게 사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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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가장 커다란 스트레스 반응, 그리고 나를 무엇보다 강하게 만드는 경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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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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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내 몸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피를 철철 흘리며 침대에 엎어진 죽기 직전의 나는- 분명 웃고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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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위기에 처했을 때 내가 보여주는 일관된 반응, 심장이 반쯤 찢어져도 분명 이 새끼는 웃고 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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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갑게 발밑을 침잠하는 죽음의 공포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걸로 알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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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느끼는 죽음의 감각과 위기감은 무엇보다 정확하다는 사실을, 이 애매한 자살 시도로 깨달았다 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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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P가 0이 되어도 몸뚱이는 잠시 살아남는다. 아스테리오스의 도끼에 반으로 잘려나갔을 때 그랬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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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죽지 않는다. 이 꼴로도 살아 있다. 정확하게 내가 생각한 그대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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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내 사고는 틀리지 않는다. 내가 쌓은 경험은 나를 배신하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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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나는 미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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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그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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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가는 와중, 작은 소음이 귓가에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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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귓가가 아니다. 왜냐하면 내 귀는 지금 기능을 많이 상실했거든. 마력감지에 걸린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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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력 지배]와 [파동 제어]로 어마어마한 수준까지 발달한 내 마력 지각력은, 몸이 죽어가는 와중에도 정확하게 기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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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재생]의 효과가 발휘되어 HP가 조금씩 차오르고, 다시 밝아지기 시작한 여러 감각에 잡힌 것은 작은 기척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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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미하게 점멸하는 수상한 기척을 가진 누군가가, 숙소 창문에 얼굴을 댄 채 나를 엿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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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걸렸구나 이 새끼야, 내가 병신처럼 혼자 뒈지려는 걸 보고 마무리라도 지어주러 오셨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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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이걸 어쩌나, 나는 심장에 칼 하나 박힌다고 뒈지는 몸이 아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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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력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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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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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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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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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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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갖 스킬을 동시에 발동한 내 손아귀가, 창문을 통째로 분쇄하며 무언가를 움켜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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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에 달라붙어서 나를 지켜보고 있던 ‘무언가’는 잽싸게 도망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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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당히 재빠른 놈이다. 못해도 25층 랭커 수준은 될법한 순발력인가- 상태가 조금만 더 좋았으면 잡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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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심장에서 흘러나온 피로 범벅된 손아귀 안에는, 짧은 검정색 머리카락 몇 올이 쥐어져 있었다. 그놈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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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으로 잘 보관해 두기는 하겠지만, 이 머리카락 몇 올로 뭔가 알아낼 수는 없을 거다. 그래도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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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감각에 대한 확신과 함께, 나를 적대하고 있는 ‘무언가’가 분명한 실체를 갖고 있음을 이걸로 확인한 셈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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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훅……켁, 아, 아쉽네, 살점 몇 조각이라도 뜯었으면 좋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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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어디로 역류했는지 입안에 살짝 고인 피를 토해내고, 포션을 들이키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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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카락이 아니라 다른 부위를 뜯어낸 거였으면, 살점에 남은 마력을 통해 추적을 벌일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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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이 상태로는 좀 어려우려나. 계산대로 살긴 했는데, 계산대로 한 번 뒤지기 직전까지 다녀온 참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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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 뭐야, 누가 실내에서 마법 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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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저 사람 같은데…세상에, 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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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사람 죽겠다! 힐 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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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숙소 바깥은 난리도 아니었다. 그렇겠지, 난데없이 벽이 폭발하더니 피투성이인 사람이 나온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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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와중에 나를 알아보는 사람도 몇 명 있어서, 소란은 더욱 커질 분위기였다. 마침 잘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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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사람들 중에서 한 명쯤은 나를 창문에서 엿보던 놈을 목격했겠지, 이걸 이용해 길드 쪽에 조사를 넣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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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려 토너먼트 8강 진출자의 암살 미수다. 물론 피투성이가 된 건 내 자해 때문이지만, 그래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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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뭣하면 커뮤니티에서 여론을 부추기면 그만이다. 본선 진출자는 특별히 신경 써서 보호한다고 하지 않았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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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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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근처에서 순찰 중이던 그리핀 길드원 한 명이, 상황을 인지하고 부리나케 내 쪽을 향해 달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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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 길드의 간부급 사이에도 기척이 이상한 놈이 몇 명 섞여 있기에, 길드를 쉽게 믿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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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기척이 이상한 녀석들의 존재를 알릴 방법은 직접 물증을 잡는 것 외에도 한 가지 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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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하게, 나 말고도 이 ‘기척’을 감지할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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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비슷한 수준까지 마력감지가 가능한 랭커가 있다면, 분명 이상한 점을 눈치채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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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어쩌다 이런…잠시만 기다리세요, 곧 저희 길드 힐러가 도착할 겁니다. 포션 먼저 드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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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드원이 건넨 포션을 벌컥벌컥 들이키며, 그게 가능할 만한 랭커들의 면면을 머릿속에서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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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놈이고 저놈이고 마력을 질질 흘리고 다니는 마당에, 나와 동등한 감지가 가능한 사람이 전체 서버에 몇 명이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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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몇 명쯤은 확실하게 있을 거다. 1~2세대 시절부터 탑에 체류하고 있는 괴물들이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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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요, 당신네 길마좀 만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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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대형 길드를 책임지고 있는 우두머리, 길드 마스터들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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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8. 길드 마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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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급 헌터가 될 수 있는 스펙을 가졌음에도, 탑 바깥으로 나가지 않고 꾸준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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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체류하고 있는 서버 하나에 그치지 않고, 온갖 서버에 영향력을 끼치며 탑의 경찰 노릇을 자처한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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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법지대가 될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최소한의 질서를 세우고 규율을 만든 자- 그리고 그게 가능한 무력을 갖춘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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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 길드의 길드마스터란 죄다 그런 자들이다. 단순히 탑에 체류한 기간만 해도 십 년은 되어가는 괴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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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대외 활동은 꽤나 제한된 형태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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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길마님은 그렇게 막 만나실 수 있는 분이 아니시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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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길마를 만나고 싶다는 내 요청은 곧바로 거절당했다. 여기까지는 예상한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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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압도적인 무력을 가진 집단은, 군대와 마찬가지로 움직이지 않고 자리를 지킬 때 가장 든든한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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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대형 길드의 마스터는 리더와 전략병기의 역할을 겸하고 있는 존재이니, 아무나 쉽게 만날 수 없는 게 당연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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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나는 ‘아무나’가 아니다. 전 서버 유일의 솔플러, 토너먼트 8강 진출자, 그리고 무엇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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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내가 2661서버 대표 권한으로 만나겠다는데 뭐가 문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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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원이 한 명뿐인 서버긴 해도, 어쨌든 길드마스터에게 면회를 신청할 자격이 있는 서버 대표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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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대한민국 시련의 탑 서버에 통용되는 규칙은, 3대 대형 길드의 연합 회의를 통해 민주적으로 정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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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회의에 참석할 수 있는 것은 길드마스터를 포함한 각 서버의 대표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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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로 비유하자면, 이들은 국회의원과 비슷한 역할을 맡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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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작은 서버의 약한 도전자라고 해도, 적절한 절차를 거쳐 선출된 대표자라면 이 회의에 참가할 자격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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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서버의 규칙이 어떻든 나랑은 아무 관계도 없는 이야기이기에, 신경도 쓰지 않고 있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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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이야기가 다르지, 이건 마땅한 내 권리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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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2661서버 대표의 자격으로 그리핀 길드의 마스터에게 면담을 요청하고 있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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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 서버에 혼자 계시잖아요. 당연히 만장일치로 뽑힌 대표시겠죠! 말이 되는 소리를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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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버 대표들끼리는 평등하다면서요, 그럼 1명뿐인 서버의 대표도 평등하게 대해줘야 하는 거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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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당연히 평등하긴 하지만, 요즘 길마님이 워낙 바쁘기도 하시고……아니, 왜 이렇게 억지를 부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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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을 치며 답답해하는 이 길드원은 조금 전, 용건을 말해주면 꼭 길마에게 전달해주겠다고 말한 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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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장히 중요한 이야기라고요, 다른 사람 없이 꼭 1대1로 이야기해야 한다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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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건은 잘 전달해 드리겠다고 말씀드렸잖아요, 그렇게 저희가 못 미더우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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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하지, 내가 당신을 어떻게 믿어. 아까부터 주변에 기척 이상한 놈들이 하나둘씩 접근해 오고 있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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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드의 간부급에게도 일부 손이 미쳤고, 말단 길드원들은 말할 것도 없이 영향을 받은 상태인 게 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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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억울해하는 길드원은 평범한 기척이긴 하지만, 나로서는 억지를 쓸 수밖에 없는 상황이란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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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알았어요,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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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렇게 한 시간가량을 실랑이한 뒤에야, 비로소 길드 마스터와 독대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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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핀 길드 마스터의 이름은 김남혁, 올해 43세의 유도 국가대표 출신 운동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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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유 클래스는 격투가 계열 유니크 클래스로, 이름은 불명이지만 짐승으로 변이하는 수인화가 가능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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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일까, 내가 요구한 대로 1대1로 대면해 본 김남혁은- 정말로 짐승 같은 아우라를 풍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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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갑습니다, 서진혁 씨. 그리핀 길드 마스터인 김남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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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볍게 악수를 하자마자 느껴지는 막강한 근력, 스탯이 증가하는 수인화를 발동하지 않았음에도 압도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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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스탯만 따져도 내 두 배 정도는 될까, 간접적으로 느껴지는 마력의 양도 재버워크 이상으로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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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그만한 마력을 거의 새나가지 않게 잘 통제하고 있다. 나와 비교해도 크게 흠잡을 것 없는 제어능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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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보아하니 실력은 소문 이상이신 것 같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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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혁이 툭 던진 한마디 역시 그의 실력과 눈썰미를 제대로 증명하고 있었다. 내 실력을 가늠해 본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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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1.5세대 시절부터 탑에 체류하고 있는 근본 있는 실력자답다. 이런 사람이라면 금방 상황을 눈치챌 수 있을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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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은 의식하지 못하고 있어도, 내가 언질을 주면 곧 위화감을 눈치챌 거다. 그다음은 완전히 맡겨도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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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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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 ‘이상한 기척’의 이야기를 꺼내야만 하는 내 입에서는 실실거리는 웃음만이 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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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이 그리핀 길드의 마스터, 탑 밖으로 나가면 S급이 확정된 강자, 대한민국 전체 탑에서 손꼽히는 최강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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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다. 아주 마음에 든다. 루키들 위주로 진행되어아먄 한다는 토너먼트 개인전이 암묵적 룰이 원망스러울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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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는 댁도, 존나게 쎄 보이시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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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층을 얼마나 더 올라가야 이만한 강자와 마주칠 수 있을까, 앞으로 싸워 볼 기회가 있기는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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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당장 이 사람과 맞붙으면 어떻게 될까, 내가 이길 수 있을까, 이기기 위해서는 뭐가 필요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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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진 정보가 거의 없다, 스펙 차이를 생각하면 정공법으로는 절대 못 이긴다. 생각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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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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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수를 나누던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간다. 마력이 감정에 반응해 들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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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을 찢어 생사의 경계에 다녀왔기 때문일까, 바짝 날이 서 있는 온갖 감각이 시뮬레이션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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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능을 외치는 계산 뒤로 죽음이 보인다. 하지만 내 죽음이 만들어 낼 결과도 선명히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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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 하나- 아무리 못해도 팔 하나는 확실히 가져갈 수 있다. 운이 따라준다면, 팔이 아니라 목을 가져갈 수 있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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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용건이라는 게 이건 아니었을 텐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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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혁이 곤란하다는 듯한 말에, 나도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런, 잠깐이지만 너무 흥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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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의 쾌감을 쫓는 것은 좋지만, 그것에 매몰되지는 않기로 정하지 않았던가. 잠깐 심호흡하고 진정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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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는 길은 분명 틀리지 않았다. 그러니 길을 헷갈려 애먼 곳으로 빠지지만 않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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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실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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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빙그레 웃으며, 악수를 위해 잡은 손을 위아래로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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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김남혁에게 그간 겪은 일과 수상한 기척에 대한 것을 상세하게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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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허무맹랑한 소리라고 생각하는 듯싶었지만, 내가 뜯어낸 머리카락을 보여줄 때쯤에는 태도가 바뀌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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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내 직접 마력을 퍼트려 감지를 펼치는 것 같더니, 내가 말한 ‘이상한 기척’은 잡아낼 수 없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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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마법사 계열이 아니라 감지에는 약합니다. 솔직히 잘 모르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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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다긴다 하는 길드 마스터라도 내 감지능력은 따라올 수 없나. 하긴, 나도 처음에는 긴가민가하게 느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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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증은 둘째치고 심증도 너무 약합니다. 서진혁 씨도 명확한 실체는 잡지 못한 것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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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 김남혁 역시 내 신경과민을 의심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그게 옳을 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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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서버 최강자 중 하나가 감지하지 못한 것을, 나만은 정확하게 감지하고 있다니- 말이 안 되는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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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내 판단과 감각은 절대 틀리지 않는다. 자신한다, 이건 그냥 김남혁의 감지가 나보다 수준이 낮은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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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실체가 애매하다고 그냥 방치할 겁니까. 실체가 밝혀졌을 때는 이미 늦었을 수도 있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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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내 판단을 그대로 믿을 수는 없겠지만, 방심해서는 안 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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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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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혁은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믿기 힘든 이야기지만, 일단은 믿어보겠다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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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수상한 기척’에 관한 내 말을 그대로 믿으면, 오히려 도울 수 있는 부분이 더 적어진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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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저희 길드원들도 그 수상한 기척을 내고 있어서, 믿을 수 없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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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는 말이었다. 애시당초 나도 대단한 협력을 바란 건 아니었다. 여차할 때의 아군이 하나쯤 있으면 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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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숙소를 훔쳐보던 사람이라면 저희 쪽에서 찾아보겠습니다. 토너먼트 참가자에 대한 보호 차원이라고 하면 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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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말하며, 김남혁은 내가 갖고 있던 머리카락 한 올을 가져갔다. 연금술을 이용해 조사하겠다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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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카락의 주인만 찾아내도 반 이상은 해결된다. 나는 김남혁과 몇 마디 대화를 더 나누고 막사에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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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 이젠 대놓고 보고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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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력을 넓게 퍼트리자 가까이에서 느껴지는 수십 개의 이상한 기척- 아무래도 나를 감시하고 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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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숨길 생각도 없는 걸까, 아니면 단순히 숫자가 어마어마하게 늘어났을 뿐인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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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같아서는 아무나 한 놈 붙잡아서 속을 뜯어보고 싶지만, 길드장이 나섰으니 조금 기다려 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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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나는 토너먼트 8강 경기에 손쉽게 승리하고- 김남혁에게 머리카락의 주인을 찾았다는 연락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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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채팅을 통해 전달된 스크린샷에 나와 있는 얼굴은, 조금이지만 낯이 익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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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9. 흑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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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강 경기 상대는 72층을 공략 중인 랭커 출신의 소환술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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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승후보 까지는 아니지만, 이번 토너먼트의 다크호스로 취급받고 있는 도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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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경기는 별 극적인 장면 없이 싱겁게 끝났다. 그렇지만, 딱히 상대가 약했던 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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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약하지 않았다는 정도가 아니지. 여태까지 토너먼트에서 붙은 도전자들 중에서 스펙적으로는 가장 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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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겁다는 건 어디까지나 내 일방적인 감상, 이게 다 어제 김남혁 같은 강자를 본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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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 도전자의 강함에 대한 역치가 올랐다고 할까……그리고 상대방의 클래스도 한몫을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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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대일 싸움에 능하고 마법사 상대로 특히 강한 나인데, 하필 상대는 물량빨 마법사인 소환술사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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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강용준#24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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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오늘자 8강 하이라이트……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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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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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환수 무시하고 뚜벅뚜벅 걸어가는 진혁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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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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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끼하나들고 18대1하는 바람의전설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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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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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량 다 씹어버리고 혁준이대가리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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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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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외 : 갑옷정령 몸통박치기로 분쇄(어케했노ㅅ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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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환수만 열마리인데 걍 무시하고 들어가네 미친새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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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와 씨발 나 소환술사인데 1인칭으로 2짤보면 지릴자신있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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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ㄴ 난 소환술사 아닌데도 개쫄리는데 정상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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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ㄴ 저기 대가리찍히는게 소환수가 아니라 니 파티원이라고 생각해보셈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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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새끼 도끼들고나온거보면 일부러 겁주려고 한거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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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짤 저걸 들어갈생각을하네 제정신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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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가리찍는거 ㅅㅂ 슬래셔무비노 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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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뮤니티의 반응은 이렇게 화끈했지만, 나는 묘한 불연소감을 간직한 채 경기장을 나와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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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경기장을 나오자마자, 강렬하게 느껴지는 ‘이상한 기척’에 의해 저절로 긴장감이 싹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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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보다 숫자가 더 많아진 것 같다. 경기장 근처에만 대체 몇 명이 있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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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장 관중석에는 얼마 없었던 것 같은데, 경기장 근처의 인파에 상당히 많은 숫자가 섞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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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의식하지 않는게 차라리 낫겠다 싶어, 나는 마력감지의 범위를 축소시킨 채로 인파 사이를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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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사람이 없는 골목으로 슬쩍 빠져나오니, 띠링- 하는 소리와 함께 커뮤니티의 쪽지 알림이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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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혁 : 머리카락 주인 찾은 것 같습니다. 스크린샷 보냈으니 확인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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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그걸 하루 만에 바로 찾은 건가, 무슨 수를 쓴 건지는 모르겠지만 생각 이상으로 빠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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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곧바로 김남혁이 보낸 첨부파일을 열어 보았다. 스크린샷은 총 세 개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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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는 인파 사이에 섞인 모습을 찍은 스크린샷, 하나는 정면 얼굴이 나온 증명사진 같은 스크린샷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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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면 얼굴은 앞선 두 개의 스크린샷을 토대로, 어떤 서류에서 같은 사람의 얼굴을 따로 발췌한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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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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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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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하다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분명히 본 적이 있는 얼굴. 비단 얼굴만이 아니라 이름도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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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납득이 안 된다. 정말로 이 녀석이라고? 대체 어떻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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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혁 씨, 이런 데서 뭐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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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골목에 있는 나를 발견한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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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어딘가 아파 보이는 인상의 비실비실한 마법사, 주문술사 강준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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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도 관중석에서 내 경기를 보고 있었지, 경기가 끝나자 나를 찾아서 밖으로 나온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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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별 일 아니라며 절레절레 손을 젓고, 등을 기대고 있던 골목 밖으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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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곧바로 눈치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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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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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호의 기척이 이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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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러 마력감지의 범위와 수준을 낮추고 있었지만, 이렇게 가까우면 모를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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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의 강준호와 명백하게 기척이 다르다. 점멸하는 백열전구처럼 흐리게 깜빡이는 생명반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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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정, 인상, 말투, 마력까지 모두 평소와 똑같지만- 딱 하나, 기척만이 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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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끝나고 표정이 안 좋던데, 컨디션 괜찮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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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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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괜찮아 보이는데, 포션이라도 하나 드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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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호는 그렇게 말하며 페스티벌 코인으로 산 포션을 내게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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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것을 받지 않은 채 경계태세를 유지했다. 언제라도 검을 뽑을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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솜씨 좋은 주문술사인 강준호는, 긴장 상태에 들어간 내 마력의 기세를 읽은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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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혁 씨, 갑자기 왜 그러세요……혹시 저번에 말씀하신 그 이상한 사람들이 또 있는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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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장, 안 그래도 스크린샷에 찍혀 있던 ‘그 놈’ 때문에 복잡하던 머리가 팽팽 도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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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가 죽은 듯 살짝 눈썹이 처진 강준호는, 포션을 집어넣고는 조심스러운 태도로 말을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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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모임에서 만난 사람들이랑, 가게에 있던 사람들 기척이 이상하다고 말씀하셨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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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그날 이후로 신경 쓰여서 계속 감지해 보려고 했는데, 저는 아무리 해도 잘 모르겠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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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진혁 씨를 못 믿는 건 아니에요. 진짜로, 대체 사람들 기척이 뭐가 다르다는 건지 모르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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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얼거리는 강준호의 목소리는 나와 주문에 관해 토론하던 때와 전혀 다를 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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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만 그런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그런 것 같던데…말씀 좀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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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 때문에 더욱 소름이 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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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꽁꽁 잘 감췄는데, 대체 어떻게 눈치챈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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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입가가 희미하게 비틀리는 것을 보자마자, 나는 검을 뽑아 강준호의 목을 겨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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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목이라도 베시게요? 인적 드문 골목이지만, 제가 소리라도 지르면 다들 금방 몰려올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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짙은 비웃음이 섞인 어투는 직전과 미묘하게 달라져 있었다. 본색을 드러낸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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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를 지를 틈이 있을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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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뽑아든 칼날에 오러를 둘렀다. 강준호의 목을 자르는 데에는 1초도 걸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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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마음대로 하세요, 이 사람이 죽건 말건 저랑은 아무 상관 없어요. 진혁 씨는 그렇지 않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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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는 말이다. 여기서 목을 베어도 강준호의 입을 빌려 말하고 있는 ‘누군가’는 죽지 않는다. 나만 살인범이 될 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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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정을 대충 알고 있는 김남혁도 이걸 커버쳐 줄 수는 없을 거다. 애초에 커버를 쳐 줄지도 의문이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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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지 말고, 우리 대화나 좀 해보는 게 어때요? 진혁 씨도 궁금한 거 많으시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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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란 이런 걸 말하는 것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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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호는 나를 페스티벌 구역 외곽에 있는 카페테리아로 안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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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멀지 않은 카페테리아로 향하는 길목에도, 드문드문 나를 알아보는 도전자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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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인을 해 달라며 엉겨붙기도 하고, 팬이라며 이상한 주접을 떨며 따라붙는 이들도 있었으며, 아는 얼굴도 몇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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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며칠간 친목 모임에서 만났던 요리인들과 아줌마들이- 모두 뻔뻔하게 특유의 기척을 흘리며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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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앉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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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경계태세를 유지한 채, 강준호가 안내한 테이블에 착석했다. 곧 주변 테이블에 다른 사람들이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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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중에도 아는 얼굴이 상당히 많았다. 김남혁이 보내준 스크린샷에 찍힌 그 녀석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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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머리카락에 짧은 키, 똑 닮은 이목구비를 가진 두 사람- 3년 전 페스티벌에서 만났던 쌍둥이 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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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길현이랑…최길훈이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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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릴 완드로 머리통을 두들겨 맞고, 커뮤니티 인기글에 박제까지 당했던 창 기능사 형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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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를 엿보다가 재빨리 도망친 모습을 보고, 못해도 저층 랭커 수준의 순발력이라고 생각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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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편없는 창 솜씨와는 별개로 저층 랭커 출신이 맞으니, 내 판단은 역시 정확했던 것 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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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이나 지났는데, 이름까지 기억하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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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 깊게 남은 놈들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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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긴 그렇겠죠, 다른 사람들도 대충 알아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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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호는 그렇게 말하며 옆 테이블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그래, 모두 아는 얼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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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등을 두드려 줬던 그리핀 길드의 간부. 밥 사준다는 말을 까버리고 잠수를 탄 검투사 김민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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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석이 끝났다며 도발을 던졌다가, 대차게 굴욕을 당하고 커뮤니티를 끊은 줄 알았던 원소술사 박원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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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너먼트에서 나와 맞붙었던 예선전 상대들과, 32강 및 16강에서 탈락한 다른 도전자들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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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있는 중견급 강자들과 토너먼트의 슈퍼루키들이, 한데 모여 나를 둘러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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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패자부활전이라도 열리나 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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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한다면 그렇게 해 드릴 수 있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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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을 찌푸리며 비아냥을 던졌지만, 강준호는 아무렇지 않게 그것을 받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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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토너먼트에서 제낀 적이 있는 이들은 둘째 치고, 잘 모르는 이들도 꽤 섞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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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다대일 싸움에 강한 나지만, 이만한 인원이 동시에 덤벼든다면-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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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그렇게 긴장하지 마세요, 싸우지 말고 대화로 풀자고 말씀드렸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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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기고 있네, 이게 대화로 풀자는 새끼가 할 짓인가. 정작 본인은 얼굴도 드러내지 않았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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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겁이 좀 많아서 그래요, 어차피 저 두 사람 때문에 대충 짐작은 하고 계시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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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을 끝으로, 강준호는 입을 딱 다물었다. 그리고 동시에 내 어깨에 놓이는 부드러운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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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뒷자리에 앉아 있던 이번 사건의 흑막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투로 인사를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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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갑노 진혁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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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동자를 새빨갛게 물들이고 나타난 것은- 1554 서버의 여자 마법사, 김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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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불쾌한 골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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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는 그 이상 말하지 않고, 조용히 방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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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혼자가 된 나는 명상을 이어나가려 했지만, 도무지 집중이 되질 않아 평범하게 잠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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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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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략하게 정비를 마치고 떠나려는 나를 수많은 다크엘프들이 배웅했다. 그 사이에 소문이라도 난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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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일찍 가는 거 아니야? 이왕이면 십 년 정도는 있다가 가지, 아쉽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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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아, 인간족한테 십 년이면 엄청 긴 거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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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가? 그러면 한 오 년 정도만……나는 별로 대화도 못 해봤단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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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제 엘레노어의 정혼자 신분인데도, 떠나는 사실 자체에 의문을 갖는 다크엘프는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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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투로 정혼자 자리를 빼앗은 지 하루밖에 안 지났는데, 신경도 안 쓰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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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처음부터 구실 뿐인 이야기였음을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다시 돌아올 거로 생각하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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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8층의 특성을 생각하면 그렇게 여겨도 별문제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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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영 퀘스트가 이어지는 8층의 배경은 7층의 미래 시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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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뮤니티에 따르면 퀘스트 NPC도 동일하게 나타난다고 하니, 이 녀석들하고도 결국 다시 만나게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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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배웅하는 이들 중에는 당연히 리즈멜을 비롯한 정찰대원들도 끼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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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인간족, 이거 가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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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즈멜은 내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받아 들고 보니, 아이템 이름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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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까마귀의 망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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옅은 보랏빛이 도는 검은 망토였는데, 스탯이 없는 대신 [은신]이라는 고유 스킬이 붙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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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신은 도적 계열 클래스의 공통 스킬로, 발소리와 기척을 없애주는 단순한 스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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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대단한 스킬은 아니지만, 아이템에 붙어도 될 만큼 만만한 스킬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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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척을 죽여주는 망토야, 너무 무모한 짓 좀 하지 말라는 의미로 주는 거니까. 이상한 착각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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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각할 여지가 뭐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리즈멜이 저렇게 말하는 게 어디 한두 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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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워, 잘 쓸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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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순히 감사 인사를 하자, 리즈멜은 약간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휙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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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뭔가를 건네는 것은 리즈멜만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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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 인간족아, 이것도 가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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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일을 도와주었던 정찰대원이 어디서 본 적이 있는 숄더 아머를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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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등 탐색대원의 증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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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엘프 퀘스트의 최주요 보상 중 하나로 알려진 방어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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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라, 이거 얻기 힘든 거 아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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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였지만 어쨌든 같은 탐색대 식구였잖아? 리즈멜이랑 엄청나게 활약도 했고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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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도 순순히 감사 인사를 하고 받았다. 다른 다크엘프들도 저마다 이런저런 물건을 하나씩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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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능 좋은 포션이나 스탯을 올려주는 영약 등의 실용적인 것도 있었고, 과자나 도시락 같은 먹거리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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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하게 만든 거라 생긴 건 좀 엉망이지만, 쓰거라. 유용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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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밖에도, 대장장이 에르웬이 짧은 순간 마법 방패를 생성하는 팔목보호대를 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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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상, 7층 진영 퀘스트를 모범적으로 진행할 경우 얻어갈 수 있는 보상들을 한 번에 받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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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화룡점정을 찍은 것은, 당연하게도 엘레노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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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가 건넨 것은 단순한 이별의 선물이 아닌, 약혼을 깨준 것에 대한 답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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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이번 에픽 퀘스트의 보상이다. 건네어진 것은 심플한 디자인의 펜던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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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던트 아이템은 흔치 않은 만큼, 성능이 어떤 것이라도 만족스러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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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설명을 들어 보니, 보통 좋은 게 아니라 사기 수준 아이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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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이도가 7층 수준을 한참 벗어나서 그런지, 보상도 7층 수준을 한참 벗어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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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스트 자체는 7층 이후로도 이어질 예정이라, 최종 보상도 아닐 텐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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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그대는 이제 그 시련이라는 것에 도전하러 가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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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아. 내가 말을 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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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정도야 당연히 알지, 그대와 자주 이야기했던 주제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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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의 눈이 별빛처럼 타오르고 있다. 미지의 세상을 향한 강렬한 호기심을 담은 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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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면, 언젠가 함께 다른 세상을 여행해 보고 싶다고 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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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엘프와의 마찰이 예정되어 있지 않았더라면, 나를 따라가겠다고 말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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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가 NPC인 이상, 결코 실현될 수 없는 일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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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가 꼭 시련을 마치고, 여행길의 끝에 소망을 이룰 수 있기를 응원하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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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는 내 목표가 엄마의 성묘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걸 목표로 하는 내 마음에 대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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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여행이 끝나는 날에, 달리 갈 곳이 없다면……언제든 내 곁으로 돌아와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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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와도 된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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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얼, 이상한 표현도 아니지 않으냐. 그대는 내 정혼자야, 내 옆자리는 언제든 그대의 것인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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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이 시련의 탑 서버에 불과한 이상,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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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무척 고마운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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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스트 완료 : 다크엘프의 서 - 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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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스트 완료를 알리는 시스템 메시지와 함께, 나는 정말 마지막으로 인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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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고마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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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엘프들은 내 인사에 웃음으로 화답하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엘레노어도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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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랑살랑 흔들리는 손, 생긋 지어 보인 웃음, 그 모든 것이 판에 박은 듯 똑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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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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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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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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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명의 다크엘프가 입술을 달싹이며 내뱉는 말까지, 소름이 끼칠 정도로 똑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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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뭐야, 지랄……장난하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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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층에서 만났던 양치기 소녀처럼, 그리고 다른 층의 수많은 무기질한 깡통 NPC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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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러지, 무슨 다른 용건이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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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황한 내 말에 대답한 것은 엘레노어 한 명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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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다크엘프들은 삐걱거리는 듯한 움직임으로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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갸웃거리는 고개의 각도마저 똑같다. 동시에 움직이는 모습이 공장의 기계를 보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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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불편한 곳이라도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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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엘레노어만이 다르게 말하고 행동했으나, 그 말투와 표정이 이전과 확연히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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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심지어 느껴지는 기척마저 달랐다. 이전의 강렬한 기척이 온데간데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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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사람처럼 반응하고, 사람처럼 행동하고 있지만, 결코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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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중간하게 사람을 흉내 내고 있는 무언가로밖에 보이지 않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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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아니야, 아무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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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신에 본능적인 거부감이 치밀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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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나를 보고, 인간을 귀여워하는 다크엘프들은 일제히 걱정된다는 듯 수십 개의 손을 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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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도망치듯 마을을 빠져나와, 7층의 미궁 구역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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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영 퀘스트는 아직 이걸로 끝난 게 아니다. 8층에서도 계속해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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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는 이렇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그게 지금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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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8층에서도 똑같은 NPC가 출현하는 거 아니었나? 그런데 왜 이렇게 된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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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8층에서 다시 만났을 때도 이런 상태인 건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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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뭔데, 씨발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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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란한 정신과 마음을 부여잡고, 떨리는 걸음으로 보스룸을 향해 전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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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층의 미궁 구역은 매우 좁고, 보물 상자 같은 것도 없다. 보스룸 앞에 도착하는 것은 금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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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생각하고 있을 시간은 없다. 솔직히 이 이상 생각할 자신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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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빨리 8층으로 올라가 NPC들의 상태를 확인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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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기 위해서라도 지금은 진정해야 한다. 시간을 낭비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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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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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을 열자 활활 타오르며 내부를 밝히는 횃불, 저 멀리 7층의 보스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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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짐승이 살고 있는 대산림의 먹이사슬, 그 끝에 선 것은 다름 아닌 하늘의 패자였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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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를 퍼덕거리고 있는 거대한 인면조와, 윙윙거리며 배회하고 있는 거대 말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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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SS - 천공의 패자 파르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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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층 보스는 남성 하피 같은 외형으로, 근접 전사의 천적이나 마찬가지인 비행형 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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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 스펙 자체는 특별히 대단하지 않지만, 데미지를 넣을 기회를 거의 주지 않는 까다로운 타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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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에 HP가 감소하면 떠다니는 말벌을 잡아먹고 회복하는 패턴까지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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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사를 멸시하는 듯한 악랄한 패턴 탓에, 마법사나 궁수 등의 원거리 공격수가 필수적인 보스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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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나는 이미 7층 스펙을 한참 뛰어넘었고, 이딴 놈에게 오래 시간을 쓸 생각도 싹 날아간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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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벤토리에서 커다란 쇠구슬을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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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전에 받았던 능력치 상승 영약도 먹고, 엘레노어에게 받은 펜던트의 효과도 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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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르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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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몸에 마력의 빛이 어리며, 폭발적인 힘이 넘쳐흐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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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던트의 효과는 마력을 저장해 뒀다가, 사용자가 원하는 순간에 개방되어 마력강화를 발동시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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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내 지능 스탯의 영향을 받지 않고, 강화 수치도 고정되는 등 제한 사항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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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마력강화는 마력강화, [불굴]이 발동한 것 이상으로 놀라운 힘이 몸에 깃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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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루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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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가 날개를 퍼덕거리며, 공격을 위해 나를 향해 날아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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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나름대로 속도를 낸 것이겠지만, 마력강화를 한 메르세데스에 비하면 멈춘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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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트닝 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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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 증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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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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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진 모든 버프 스킬을 발동시켰다. 전격이 깃든 쇠구슬이 손안에서 찌그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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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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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력으로 내던진 쇠구슬이 적중하자, 보스의 왼쪽 가슴께가 통째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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뜯겨나간 날개와 살점의 파편이 흩날리고, 보스는 그대로 추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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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하합니다. 시련의 탑 7층을 최초로 클리어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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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적 달성 : 일격필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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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적 보상 ‘ 액티브 스킬 - 약점 간파’ 를 획득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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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 피를 먹는 생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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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정이 왜 그래요, 이거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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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랄한 목소리로 해괴한 인사를 건넨 김진아가 싱긋 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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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전 페스티벌에서 만나 잠시 파티를 이루었고, 거하게 뒤통수를 맞으며 헤어졌던 그 사람이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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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어딘가에 살아 있을 거라고 생각하긴 했다. 하지만 저 ‘두 사람’과 함께 내 앞에 나타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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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길현과 최길훈 형제- 김진아는 두 사람을 꼭 죽여야만 했다. 그러지 않으면 자신이 위험해질 상황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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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이제 커뮤니티 말투 잘 알아요, 일부러 농담으로 해 본 건데……표정 좀 풀면 안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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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랄, 내가 지금 표정을 풀게 생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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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만에 만났는데 좀 화기애애해도 괜찮잖아요. 그래도 저희 꽤 친한 거 아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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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김진아의 변한 모습을 천천히 살폈다. 눈동자가 붉게 물들었고, 피부는 창백하리만치 새하얗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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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직접 만나본 적은 없지만, 이런 특징을 가진 종족이 상층에서 나온다는 건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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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피를 빨아 생명을 갈취하는 귀종의 괴물, 흡혈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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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혈귀가 되셨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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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보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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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봐도 티 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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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 그건 그렇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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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분명 평범한 마법사 도전자였던 김진아가, 왜 대뜸 흡혈귀가 되어서 나타났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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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된 모든 키워드를 차단하고 헤어졌던, 그 3년 전의 페스티벌 이후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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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그동안 고생 좀 했거든요. 종족을 바꾼 건 별일도 아니었어요. 인간이길 포기한 게 몇 번이었는지도 몰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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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테리아의 종업원 NPC가 내 앞에 찻잔을 내려놓았다. 김진아는 자리를 옮겨 내 맞은편에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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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마음대로 한 잔 시켰어요. 제가 사는 거니까 취향에 안 맞아도 불평하시면 안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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닳아빠진 미소를 지어 보인 김진아는 내게 차를 권했다. 나는 인상을 쓰며 찻잔을 들어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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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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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렇게나 한 모금 마시니, 은은한 단맛과 부드러운 향이 입안에서 흘러넘쳤다. 아는 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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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력한 지효성의 마비약을 섞어 넣었던, 그때 마셨던 것과 완벽히 똑같은 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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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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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좆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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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퉁명스러운 대답에 김진아는 만족스럽다는 듯 웃었다. 뭘 위해 통하지도 않을 같은 마비 차를 준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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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마비약으로 감추고 다른 걸 탔나 싶어 마력으로 감지까지 해봤지만, 그런 낌새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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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과거의 일을 비꼬고 싶었던 건가. 하지만 그 일이라면, 나도 할 말이 없진 않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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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러고 보니 그 얘기를 안 드렸네요. 왜 이렇게 경계하시나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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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순간, 김진아는 흡혈귀 특유의 송곳니를 드러내며 쿡쿡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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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진혁 씨한텐 별로 원한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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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는, 개도 안 믿을 개소리를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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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아가 하는 말에 특별히 틀려먹은 부분이 있는 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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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 그땐 제가 먼저 잘못했던 거죠. 제 목숨 건지겠다고 진혁 씨를 죽이려 한 셈이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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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독기가 잔뜩 씌어 번들거리는 붉은 눈동자를 보고도, 그 말을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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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정말 싸울 생각 없어요. 여기 있는 사람들은…… 제가 겁이 많아서 호위로 데려온 것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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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너먼트 본선에 진출했던 도전자만 스무 명이 넘고, 거기에 랭커급 도전자 수십 명을 더한 전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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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소리도 이 정도면 수준급이다. 월드 레이드도 해봄직한 병력을 그냥 호위로 쓰고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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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도 구성이면 어지간한 중견 길드 하나쯤은 간단하게 짓밟을 수 있겠구만, 말 같지도 않은 구라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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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라니까요, 진혁 씨를 어떻게 할 생각이었다면 이보다 더 데려왔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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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울하다는 듯이 말하지만, 소름 끼치는 속뜻이 손쉽게 읽힌다. 그래, 이보다 뭐가 더 있다 이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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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것들은 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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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것들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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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들, 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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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주변을 둘러싸고 앉아 있는 사람들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김진아는 작게 손가락을 까딱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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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 테이블에서 잡담을 나누며 차를 마시고 있던 도전자가 우리 쪽으로 다가왔고, 김진아는 다시 손을 까딱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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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그래도 이걸로 진혁 씨랑 얘기해 보고 싶었어요, 완벽하게 감췄다고 생각했는데……대체 어떻게 아신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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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온 도전자는 자신의 왼뺨과 턱을 양손으로 붙잡았고, 그대로 힘을 주어 자신의 머리를 비틀어 꺾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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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두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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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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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을 오르며 온갖 기괴한 꼴을 다 본 나도 기겁할 광경이었다. 비틀린 목 사이로 피가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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흘러나온 피는 물줄기가 되어 공중에서 흘렀고, 김진아의 창백한 손안으로 모여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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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혈귀는 자신의 피를 이용해 이런저런 짓을 할 수 있다고 들었지만……이건 대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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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아귀라는 거예요, 제 스킬로 만든 사역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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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아는 ‘원래는 좀 더 징그럽게 생겼다’며, 자신의 등 뒤에서 피로 이루어진 팔을 소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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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환된 여덟 개의 팔은 목이 비틀린 도전자의 몸을 목각인형처럼 비틀더니, 다시 목 안으로 피를 흘려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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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새 원래 모습으로 돌아온 혈아귀- 도전자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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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이렇게 갓 죽은 시체로 만든 건, 생전의 모습과 자아를 대부분 보존한 채로 조종할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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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지금, 이 사람들이 다 한번 죽은 시체들이라고? 여기 있는 전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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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자면 그렇죠, 그래도 겉보기에는 산 사람이랑 아무 차이 없잖아요? 진짜로 어떻게 안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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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저지른 미친 짓거리와 내가 지은 표정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김진아는 태연하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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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새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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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알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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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족을 바꾼 건 별일도 아니었다는 말이, 드디어 이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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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아는 내 욕설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혈아귀의 위장을 어떻게 알아차렸느냐며 집요하게 질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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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 길드 간부 중에서도 눈치챈 사람은 없었어요. 일부러 위험한 사람들 근처는 피해 다니기도 했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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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웬만하면 중요할 때를 빼고는 명령도 안 내렸고, 흘러나오는 마력이나 기척도 완벽히 감췄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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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사 클래스 쪽 사람들은 대놓고 감시해도 전혀 모르더라고요. 진혁 씨만 이상하게 계속 눈치채던 거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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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활한 목소리로 주절거리던 김진아는 매운 갈빗집에서 있었던 일도 직접 언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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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라도 눈치채는 사람이 있으면 바로 처리할 수 있도록, 미리 경계 명령을 입력해 놨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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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리한다- 당장 이 수많은 혈아귀들의 모습만 봐도 알 수 있지만, 살인을 참 쉽게 입에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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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척이 이상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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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이상했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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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해주면 알기는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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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희대의 미친년 앞에서 더 이상 적의를 감추지 않았다. 마력을 주변에 살포하며 [위압]스킬을 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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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아는 사방에서 가해지는 압력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이 정도는 별것도 아니라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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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압]스킬의 효과가 그렇게 강력한 건 아니지만, 마법사가 이걸 완전히 무시하는 건 쉽지 않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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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음, 대답해 주기 싫으시면 어쩔 수 없죠. 괜찮아요, 어차피 진혁 씨 말고는 아무도 못 알아보던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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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수롭지 않다는 반응이다. 나는 대답하지 않고 전투태세를 갖춘 채, 반대로 질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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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이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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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 친하게 지냈던 강준호와 친목회에서 만났던 여러 도전자가 모두 혈아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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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모인 전력은 절대 만만하지 않지만, 내가 언제는 상대가 만만해서 싸웠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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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답 여하에 따라 여기서 바로 목을 벤다. 아니, 뭐라고 하는지만 듣고 그냥 벨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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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위협하지 않으셔도 말씀드릴 생각이었어요. 진혁 씨라면… 이해해 주실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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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아는 천천히, 그러나 단호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핏빛 혓바닥이 춤추듯 움직이며 문장을 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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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표는 3년 전부터 하나뿐이었어요. 아니, 어쩌면 그보다 훨씬 전부터였을지도 모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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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요, 언제든 제 몸 하나만 건사하면 되는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목적이라면- 생존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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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전부예요. 하지만 살아남으려면 그만한 힘이 필요하잖아요? 진혁 씨도 아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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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아는 번들거리는 눈을 붉게 빛내며, 운을 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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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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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입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지난 3년간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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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눈을 감으면 항상 같은 꿈을 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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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 속에서 제가 하는 일은 항상 정해져 있죠, 떨리는 손으로 향긋한 차에 독을 넣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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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독을 마신 남자는 끄떡도 하지 않고, 다른 두 명의 남자를 잔인하게 베어요. 맞아요, 그날의 꿈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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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혁 씨가 그 형제를 아무렇지 않게 베는 모습을 보며, 저는 떨리는 손을 부여잡은 채 마냥 울고만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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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게 끝이라고, 이제 나도 죽게 될 거라고, 생각을 잘못했다고, 그런 말만 머릿속에 맴돌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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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진혁 씨는 결국 저를 죽이지 않았어요. 대신 잔인한 선택지를 제 눈앞에 두고 떠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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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개새끼…속였, 속였어…걸레 같은, 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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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형제는 팔과 다리를 하나씩 잃은 채, 굼벵이처럼 꿈틀거리며 제게 욕을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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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알았죠, 이 두 사람을 죽이지 않으면 제가 죽게 될 거라는 걸요. 진혁씨도 알고 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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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어떤 선택을 할지 말이에요, 저는 이미 진혁 씨를 죽음으로 내몰려 했던 적이 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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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죄송해요, 죄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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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울면서 쓰러져 있는 두 사람에게 다가갔어요. 진혁 씨에게 그랬던 것처럼, 사과를 반복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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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인벤토리에서 단검을 꺼내 직접 그들의 목을 찔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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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을 쓰면 금방 소란이 일어나, 사람들이 몰려왔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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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단도 결심도 빨랐지만, 문제는 행동이었어요. 저는 분명 떨리는 손으로도 힘차게 단검을 잘 찔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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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안 들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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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진혁 씨의 차에 독을 타는 것과 다르게, 직접 사람을 죽이는 건 쉽지 않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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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 저, 진짜 약해 빠졌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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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시련의 탑 8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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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 클리어와 함께 곧바로 전이문을 활성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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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이문을 넘어갈 때의 울렁거리는 느낌이 사라지고 펼쳐진 세계는 7층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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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는 넓게 펼쳐진 숲, 여기저기 널려 있는 나무들도 그다지 특별할 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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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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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가만히 주변을 살피고 있었는데, 멀리서 쿵쿵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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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가 난 방향으로 마력을 퍼트려 소리의 주인을 감지해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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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다란 나무 골렘 같은 게 쿵쿵거리며 돌아다니고 있다. 7층에 나온다는 나무 괴물과는 다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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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엘프의 사역마나 경비용 골렘 같은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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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든간에 그리 강해 보이지도 않고, 지금은 그보다 중요한 일이 있다. 일단 다크엘프의 마을부터 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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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의 위치는 굳이 지도를 찾아볼 필요도 없이, 이미 외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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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탁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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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지를 향해 전속력으로 전진했다. 7층 보스를 클리어하고 얻은 스킬의 효과가 발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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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른 속도를 내세워 치고 빠지는 전략을 구사하는 보스는, 최대 기여도 보상으로 이런 스킬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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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주 Lv.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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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다리에 약간의 마력이 맴돌고, 발걸음이 가벼워지며 속력이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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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민첩 스탯에 비례해 성능이 달라지는 구조인지, 1레벨짜리 스킬치고 효과가 상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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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달리던 중, 나는 조금 전에 감지했던 나무 골렘과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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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숲 전체에 이런 골렘이 틈틈이 깔려 있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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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렘은 나를 보자마자 눈을 빛냈다. 그리고는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곧바로 덤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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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층 보스를 일격사시키고 달성한 업적의 보상을 시험해 볼 차례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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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점 간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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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앞의 나무 골렘을 지정하고 스킬을 발동하자, 묘한 마력의 흐름이 놈에게 얽혀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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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력을 사용해 주변을 감지할 때와 비슷한 감각이지만, 조금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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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력 감지가 일정 범위에서의 움직임을 감지한다면, 이건 상대방의 내부를 훑어보는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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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골렘의 전반적인 구조가 머릿속에 읽혀 들어오고, 자연스럽게 취약한 부분을 찾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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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골렘은 등짝 부분에 박혀있는 작은 씨앗을 핵으로 삼아, 그곳에 마력을 담아 움직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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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로, 저 씨앗을 파괴하면 바로 무력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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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기기기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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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렘은 느릿하게 팔을 들어 올렸다. 나를 내려찍으려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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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둔중한 생김새 이상으로 심각하게 느려터졌다. 저런 건 맞아주려고 해도 못 맞아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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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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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렘의 품으로 접근해, 철벽 스킬을 발동한 주먹을 가슴팍에 찔러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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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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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먹은 한 방에 골렘의 몸을 파괴하고 등까지 꿰뚫었고, 붉은 이펙트와 함께 핵이 파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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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평소랑 크리티컬이 터지는 느낌이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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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킬 설명에 급소 적중시 크리티컬이 발생할 수 있다고 적혀 있었는데, 그 부분 때문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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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의 크리티컬은 치명타를 먹였을 때 발생하는 판정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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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건 간파한 급소를 적중시키면 인위적으로 크리티컬을 발생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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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명타가 아닐 수도 있었을 공격을, 강제로 치명타로 만드는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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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템은 가끔 설명이 명확하지 못한 부분이 많으니, 이렇게 뭐든 직접 체험해가며 파악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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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지금은 그것보다 우선 마을에 가고 싶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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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구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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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을 파헤치며 나무 골렘 여러 마리가 나타나 내 주변을 에워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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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마리를 잡으면 여러 마리가 추가로 나타나는 구조였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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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공략글에 관련 정보가 나와 있겠지만, 급하게 층을 올라오느라 확인을 못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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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만 보면 몬스터를 잘못 건드렸다가 혼자 포위당한 꼴로, 굉장한 낭패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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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이 정도는 이제 아무렇지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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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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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이 정확하게 박살 난 나무 골렘들이 모조리 땅에 엎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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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기다려 봤지만, 추가로 나타나는 골렘은 없었다. 아마 나타나는 숫자에 제한이 있었던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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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보통의 도전자가 10명 이상씩 모여서 잡아야하는 각 층의 보스를 한 방에 죽일 수 있을 정도로 강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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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와서 이런 잡몹이 많이 나타나 봤자 아무 방해도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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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렘들을 쓰러트리고 계속해서 길을 나아갔다. 그리고 곧바로 예상치 못한 상황에 부닥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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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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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에 이상한 기운을 풍기는 안개가 스멀스멀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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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템에 표시되는 미니맵도 가려져 보이지 않게 되었고, 길 자체도 내가 아는 길과 달라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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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도 다크엘프 마을 근처에는 안개가 자욱했지만, 이런 맵 기믹 같은 건 딱히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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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이 정도쯤 왔으면 슬슬 마을이 보여야 하는데, 온통 안개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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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 증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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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력을 주변에 퍼트리며, 감각 증폭 스킬을 사용했다. 그리고 곧바로 혼란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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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트린 마력이 사방팔방으로 흩어져버리고, 제대로 주변을 감지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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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마법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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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주변에 퍼져 있는 안개가 모종의 방해 효과를 만들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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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히 감지를 방해하거나 시야를 가리는 게 다가 아니다. 내 감각을 뒤죽박죽으로 망가트리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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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식을 보면 일정 범위에 발생하고 있는 마법 같은데, 마력감지에도 영향을 미치니 어떻게 해야 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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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뮤니티에 검색하면 해법이 나올 것 같기도 한데, 이런 건 너무 공략에 의존하기도 뭣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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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자력으로 극복하지 못하면, 언젠가 이것 때문에 곤욕을 치를지도 모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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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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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볍게 심호흡하며, 다시 한번 마력을 전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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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광] 스킬을 사용할 때의 감각을 되살려서, 최대한 마력을 한 점에 모아서 조작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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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만 하면 어떻게든 될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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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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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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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하면 집중할수록 오히려 마력의 흐름을 통제하기가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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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을 시도할 때와 비슷하다. 마음의 혼란이 그대로 마력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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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장할, 나는 그냥 다크엘프들의 상태를 빨리 확인해 보고 싶은 것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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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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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감고 온 신경을 마력감지에 쏟는다. 마력은 계속해서 통제되지 않고, 멋대로 흩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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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대로 흩어지는 마력을 붙드는 것은 계속해서 실패했다. 그렇다면, 방법을 바꿔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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흩어지는 마력을 반대로 밀어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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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대신 한꺼번에 최대한 많은 양의 마력을 사용해서, 어떻게든 멀리까지 가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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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태창에 표시되는 MP 수치가 바닥을 보일 때까지, 무작정 마력을 퍼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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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멀리멀리 퍼져 나간 마력의 끝에 어떤 기척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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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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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기척을 느끼자마자 전속력으로 달려나갔다. 그러자 보인 것은, 커다란 룬 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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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룬 베어를 베어 넘기고 있는 익숙한 모습의 다크엘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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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7층에서부터 이 특유의 강렬한 기척은 좀처럼 놓치기 힘들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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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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룬 베어가 쓰러지고, 검에 휘감은 그림자를 흩어버린 다크엘프는 내 쪽을 향해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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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 누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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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잠시 망설였다. 과연 나를 기억하고 있을까, 저건 내가 알고 있는 그 사람이 맞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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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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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어색하게 인사를 건네자, 다크엘프- 엘레노어는 천천히 내게로 걸어왔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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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정말 그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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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바로 나를 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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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엘프 마을의 위치는 7층에서와 전혀 달라지지 않은 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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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누군가 함부로 침입하지 못하도록, 마을 주변에 펼쳐둔 안개의 마법을 더욱 강화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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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그냥 시야를 조금 방해하는 정도였지만, 이제는 아예 감각을 모두 뒤죽박죽으로 만들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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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의 예외 대상을 지정할 때, 왜 그대 생각을 못 했었는지 모르겠어. 하루도 그대를 잊은 적이 없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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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다시 만난 게 그렇게 좋은지, 무척 싱글벙글한 모습으로 말하는 엘레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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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가 마법을 설정할 때 나를 떠올리지 못한 이유는, 아마 시스템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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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안개 너머 - 르우엘의 그루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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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를 따라 다시 다크엘프의 마을에 도착했다.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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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다크엘프들도 엘레노어처럼 나를 알아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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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속으로 그런 의문을 떠올린 직후, 나는 이마를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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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상관없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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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뭘 걱정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NPC들이 나를 못 알아보는 게 뭐가 문제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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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좋은 일 아닌가. 쓸데없는 일에 사로잡히지 않고 성장에만 매진할 수 있는 기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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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엘프들의 친절은 나를 무르게 만든다. 그래서 황급히 7층을 떠난 것 아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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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왜, 지금은 나를 알아봐 주기를 바라고 있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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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길게 생각할 필요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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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혁, 이 역겨운 새끼. 아직도 안식 같은 걸 바라고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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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즈멜과의 대화 이후, 나는 다크엘프들을 그냥 NPC로 대하지 않기로 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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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처럼 말하고, 사람처럼 행동하면, 그건 그냥 사람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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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시련의 탑은 그 생각이 틀렸다고 알려주었다. 이들은 엄연히 시스템의 일부, NPC에 불과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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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가 돌아온 걸 알면 다들 깜짝 놀라겠지? 한동안 마을 분위기가 많이 가라앉았었는데, 숨통이 좀 트이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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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족은 빨리 늙을 텐데, 그대는 또 어떻게 예전이랑 전혀 달라지지 않은 모습으로 나타나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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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련이란 것은 다 마쳤나? 그동안 얼마나 많은 차원을 여행했지? 벌써 기대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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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여전히 꿈과 호기심으로 불타고 있는 엘레노어의 눈을 보고 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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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지난 20년간의 이야기를 들려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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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해와 합리는 흩어지고, 원초적인 마음이 자꾸만 고개를 쳐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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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엘프 진영을 고르면 안 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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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20년 전의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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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엘프 진영을 골랐던 것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돌이켜보면 그렇게 중요한 이유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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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리고자 했으나 좀처럼 쉽게 버려지지 않던 것, 마지막에는 결국 저열한 욕구에 이끌렸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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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나는, 내 사사로운 욕망의 대가를 치르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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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그대는 세상 정세에 둔감했지? 마을의 분위기가 달라져서 놀랐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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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손을 잡아끈 엘레노어가 살짝 웃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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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대로, 다크엘프의 마을은 7층 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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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저기에 군사 목적으로 보이는 시설물이 새로 지어져 있고, 묘한 긴장감이 맴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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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는 그 이유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지만, 나는 이미 이유를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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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층의 배경은 7층의 미래로, 진영 퀘스트 1장의 마무리로부터 20여 년이 지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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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임없이 갈등을 빚던 삼대 세력이 결국 무력 충돌을 일으킨 이후의 시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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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력 충돌이 벌어진 원인은, 7층에서 진영 퀘스트를 수행한 도전자의 행적에 따라 다르게 언급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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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엘프 진영을 도왔으면 그것대로, 왕국군 진영을 도왔으면 또 그것대로, 다크엘프 진영을 도왔어도 마찬가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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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PC들은 진영에 조력한 도전자의 행위가 충돌을 일으키는 불씨로 작용했다는 식으로 언급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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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는 게임으로 치면 조건부로 재생되는 스크립트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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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영 퀘스트 수행 여부에 따라 언급의 내용이 달라질 뿐, 8층의 기본적인 배경은 무슨 일이 있어도 바뀌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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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전자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올라왔더라도, 삼대 세력은 결국 어떻게든 충돌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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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된 거다, 숲쟁이 놈들이 기어이 맛이 간 거야. 바라던 일이긴 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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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는 마지막으로 하이엘프의 험담을 덧붙이며, 지난 20년간의 이야기를 간략하게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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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치의 이야기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짧고 단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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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 시스템의 탓이라고 생각하는 건, 내가 과민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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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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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대충 대답하며 계속 걸었다. 걷다 보니, 조금씩 다른 다크엘프들이 슬쩍슬쩍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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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 저기……저거 혹시 그 인간족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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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 정말 똑 닮았네요. 그 인간족의 자식이나 그런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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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이 장성할 만큼 지난 건 아니지 않아? 20년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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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족은 20년이면 다 자란다던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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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색은 조금 달라졌지만, 7층에서 몇 번 봤던 사람들이었다. 사소한 NPC들 하나까지 나를 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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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이라고는 해도, 수명이 긴 엘프들에게는 그렇게 오래된 것처럼 느껴지지도 않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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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접해본 경험은 유독 인상 깊게 남는다고도 하고, 워낙에 파격적인 일을 벌였기도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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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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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길을 가던 중,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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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송이 인간족이잖아! 뭐야, 다시 돌아온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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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층에서 보던 것과는 사뭇 다른 차림새를 한 리즈멜이 그곳에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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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 스타일도 7층에서와 많이 달라져 있었고, 답지 않은 원피스 차림에 귀에는 피어싱까지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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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리즈멜은 혼자가 아니었다. 그 곁에는 똑같은 피어싱을 하고 있는 남자 다크엘프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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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아, 인사해. 이쪽은 내 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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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잠깐 사이에 완전히 달라져 버린 리즈멜의 모습은, 여러 생각을 들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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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즈멜의 남편은 나도 아는 사람이었다. 7층에서 본 적이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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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렇게 존재감이 있지도 않았고, 리즈멜이랑 특별한 관계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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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해할 수 없는 20년이라는 흐름 속에서 무언가 있었던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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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실존했던 것인지는 둘째 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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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란 눈치구나, 그대는 리즈멜이랑 많이 친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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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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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음, 리즈멜의 결혼은 우리에게도 갑작스러운 일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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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던 길에 잠시 마주쳤을 뿐이라, 리즈멜과는 가볍게 인사만 마치고 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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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는 리즈멜의 결혼 사실에 놀란 나에게, 둘의 연애사에 대해 짧게 설명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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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 다크엘프의 결혼 문화에 대해서도 조금 알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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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엘프들은 귀를 통해서 세계수의 은혜가 흘러들어 온다고 믿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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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이 짝을 맞춘 피어싱의 의미와, 엘프들에게 귀가 가지는 의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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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 같은 장신구를 단다는 건, 같은 은혜를 공유하며 나란히 삶을 걸어가겠다는 의미가 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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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프의 귀는 인간으로 치면 왼손 약지와 같은 위치였던거다. 짝을 맞춘 피어싱은 결혼반지랑 비슷한 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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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장신구를 달던 건 아니고, 원래는 부부끼리 귀에 같은 모양으로 흉터를 새기는 식이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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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들으니, 하이엘프 여기사 메르세데스가 왜 그렇게 분노했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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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에 같은 흉터를 새기는 것이 결혼의 맹세라고 한다면, 다른 사람에게 귀를 잘리는 건 어떤 의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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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세데스의 귀에는 피어싱은커녕 뚫은 자국조차 없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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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를 뜯어버리겠다는 내 말에, 엘레노어가 그런 욕은 처음 들어본다면서 웃었던 것도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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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엄청나게 심한 짓을 한 거였구나. 미안한 마음은 손톱만큼도 안 생기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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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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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다 보니, 금세 내가 7층에서 이용하던 숙소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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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는 나를 이끌고 곧바로 방으로 향했다. 한시라도 빨리 내 이야기를 듣고 싶다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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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내가 이 마을을 떠났던 것은 기껏해야 두세 시간 전의 일, 풀어놓을 이야기 따위는 당연히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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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어서 말해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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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엘레노어의 꿈꾸는 눈을 외면하기란 무척 힘든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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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층에서 뒤질뻔했던 썰 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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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산수련 23일차.t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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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발 악마년한테 통수맞았다 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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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층에서 칩거 생활을 할 적에 읽었던, 커뮤니티의 썰풀이 글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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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것을 내 경험인 척 읊었다. 엘레노어는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내 이야기를 경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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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후, 이렇게 그대의 이야기를 듣는 것도 오랜만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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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건 실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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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어쩐지 그대가 겪은 일을 말하는 것 같지가 않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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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 보면, 엘레노어는 나를 처음 만난 순간부터 내 마음을 꿰뚫어 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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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전부터 표정도 좋지 않고, 그간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그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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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는 처음부터 내 어설픈 거짓말이 통할 상대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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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말재주로 설명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설명한다고 이해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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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은 금방 들켰지만, 그렇다고 진실을 말해줄 수는 없었다. 엘레노어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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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로 하기 힘들다면, 보여줘도 괜찮다. 방법은 그대도 알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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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가 자신의 이마를 톡톡 두드렸다. 사념과 기억을 공유할 수 있는 나이트 엘프의 비술을 말하는 게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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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 못 하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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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개를 저었다. 엘레노어는 반대로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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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강요하는 건 아니다. 그대가 그렇게 괴로운 표정을 짓는 것에는, 당연히 그만한 이유가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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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하지 않다고 말하면 거짓말이겠지만, 내 인내심은 호기심 이상으로 많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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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가 스스로 말해줄 날까지, 느긋하게 기다리겠다. 무얼, 시간이라면 수백 년도 더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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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의 호기심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고 있는 나로서는,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배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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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정작 엘레노어는 담담하다 못해 후련한 표정으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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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표정을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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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의 20년 전 밤이자, 나의 어젯밤에 보았던 표정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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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곳을 떠나는 걸 잠시나마 아쉬워했다는 것을 눈치채고, 그것만으로 만족했던 그 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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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언제든 그대의 편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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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는 이번에도 그 이상 말하지 않고, 조용히 방을 떠나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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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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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작게 한숨 쉬며, 잠시간의 고민 끝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이런 때일수록 더욱 단련에 매진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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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 수 없는 일은 신경 쓰지 말자. 내가 할 수 있는 일에만 집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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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올라가야 할 층이 90층도 넘게 남았다. 이런 일로 벌써 흔들리면 안 될 노릇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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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감고 명상하며, 쓸데없는 잡념을 떨쳐버리고 마력의 흐름에 집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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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쿵, 쿵, 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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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작디작은 심장 소리가 북처럼 크게 귓가에 울려 퍼지며 신경을 방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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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마력은 주인의 의지와 마음에 직접적으로 반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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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란하기 짝이 없는 마음 탓에 집중은 점점 흐트러져만 가고, 마력은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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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발…좆같네,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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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번을 시도해도 생각대로 풀리지 않는 명상을 그만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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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마력의 흐름은커녕, 한 번도 놓쳐본 적이 없는 강렬한 기척밖에 느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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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기척의 주인은 당연히 엘레노어다. 신기하게도, 이렇게나 거리가 멀어졌음에도 생생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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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가 유독 강한 마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거나, 나이트 엘프의 비술로 감각을 공유한 적이 있기 때문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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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좋은 사실이다. 내 마력감지 수준이 아직 한참 모자라다는 뜻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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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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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러고 보니까 딱 한 번- 엘레노어의 기척을 느낄 수 없었던 순간이 있었다. 불과 몇 시간 전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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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엘프의 서 1장을 완료하고, 마을을 떠나기 직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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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중간하게 사람을 흉내 내고 있는 듯 보였던, 그때의 엘레노어에게선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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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련의 탑 시스템에 의해 평범한 깡통 NPC가 됐다고 해도, 마력이 사라지는 건 아닐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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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내가 엘레노어에게서 느끼고 있는 이 기척은 대체 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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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세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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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나는 방문 앞으로 다가온 엘레노어의 기척에 눈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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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밤은 평안했나, 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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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어, 잘 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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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긋 웃으며 인사하는 엘레노어에게 대충 대답했다. 사실 잠은 한숨도 못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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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에게서 느껴지는 이 특징적인 기척이 자꾸만 신경 쓰여서, 그 조사에 매진하느라 밤을 새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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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딱히 알아낸 것은 없었다. 애초에 나는 마력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도가 너무 부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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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층에서 엘레노어에게 마력 운용을 배우며 터득한 배경 지식이 있긴 하지만, 바꿔 말하면 결국 그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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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가 알려주는 지식과 요령은 대부분 너무 추상적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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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간밤에는 오랜만에 오픈 커뮤니티를 뒤져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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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력 운용과 마력 감지 스킬은 마법사 계열 클래스라면 하나쯤 갖추고 있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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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잘 찾아보면 내 궁금증을 풀어줄 정보나 공략글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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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박찬용#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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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마력감응 이거 뭐하는 스킬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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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으면 좋다고 하는데 걍 스킬퀘 선행용임? 어케 쓰는거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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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력감응 높으면 스킬 연비 좋아짐, 필수스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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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ㄴ 그런 설명 안써있는데 확실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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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ㄴ 설명은 안적혀있는데 법딱이면 다 알고있을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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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 60렙 불쟁이인데 앞에 마력이라고 붙은 스킬은 높아서 손해볼거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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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ㄴ 정확한 성능이 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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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ㄴ 그건 모르겠고 아무튼 좋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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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사 스킬퀘 선행용 맞음 그거없으면 스킬 반도 못배울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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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력감응을 비롯한 마력계 패시브 스킬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도전자는 정말 아무도 없다시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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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력을 운용하는 기본 원리는 물론이요, 스킬을 터득하고 있으면서도 사용법을 제대로 모르는 놈들이 대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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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레벨 공략파 도전자나 랭커급 도전자들도 중요도는 인지하고 있었지만, 구체적으로 아는 건 별로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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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대로 마력에 대해 이해하고 있는 듯 보이는 자칭 ‘정통파 메이지’ 라는 도전자들이 있긴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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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놈들도 서로 하는 말이 죄다 안 맞는데다가, 커뮤니티에서는 완전히 사이비 취급이라 신뢰도가 너무 부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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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따로 알아낸 것 없이, 그냥 커뮤니티 눈팅만 하다가 밤만 샌 꼴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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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잘 잔것 맞나? 조금 피곤해 보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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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의 일을 생각하며 고민에 빠져 있자, 엘레노어가 불쑥 얼굴을 들이밀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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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다니까, 그냥 어제 좀 무리해서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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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렇게 말하며 엘레노어에게서 받았던 펜던트를 꺼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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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 썼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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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자에게 제한적인 마력 강화를 가능하게 해주는 7층 퀘스트의 최종 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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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효과는 단연코 절륜하지만, 그에 걸맞은 부작용도 존재한다. 신체에 그만한 부하가 걸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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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얼굴이 피곤해 보인다면, 그건 전적으로 이 펜던트 때문이다. 하룻밤 새는 것쯤 나한테는 아무것도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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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 이제 보니 그렇구나. 내장된 마력이 떨어진 걸 보니 꽤 최근에 썼나 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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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는 펜던트를 곁눈질하는 것만으로 내장된 마력의 양을 정확히 파악해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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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주변 인물 중에서 마력에 대해 가장 잘 아는 건 역시 엘레노어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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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느끼고 있는 기척의 정체를, 엘레노어 본인은 알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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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와 간략하게 아침 식사를 하고, 나는 곧바로 생각하던 것을 물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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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척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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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NPC니 뭐니 하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냥 유독 너의 기척만 크게 느껴진다고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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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히 마력의 보유량 때문에 차이가 난다기에는, 좀 이상할 정도로 기척이 강렬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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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음, 짐작이 안 가는군. 추측해 보자면, 그대의 감지능력이 편향적으로 발달한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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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향적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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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문 일이긴 하지만, 종종 특정한 사물을 잘 감지하는 방향으로 능력이 발달하는 경우가 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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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는 그렇게 말하며 몇 가지 예시를 들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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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거리 투사체를 유독 잘 감지하는 경우라던가, 생물체의 기척을 유독 잘 감지하는 경우라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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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특정한 개인만을 유독 잘 감지하는 경우는 자신도 들어보지 못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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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는 그냥 익숙한 기척이라 그런 게 아니냐고 되물었지만, 나는 당연히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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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나도 모르겠군. 개인적인 바람으로는, 그대가 나를 특별히 여겨서 그런 것이었으면 좋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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끈적한 목소리를 내며, 엘레노어의 꾸물거리는 손이 내 허벅지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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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또 시작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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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한 곳으로 기어오르는 손을 쳐내고, 생각을 이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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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의 말대로, 내가 특정한 무언가를 강하게 감지하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엘레노어만이 가진 무언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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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NPC들에게는 존재하지 않고, 엘레노어만 갖고 있는 것에는 무엇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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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아이템을 가진 것도 아니고, 다크엘프 왕가의 혈통에 전해지는 특별한 기질 같은 게 있는 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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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게 있었다면 7층에서 다크엘프의 여왕을 봤을 때 똑같이 느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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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면, 정말로 나이트 엘프의 비술로 감각을 공유한 적이 있기 때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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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런 거라면 엘레노어가 모르고 있을 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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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층에서 갑자기 기척이 사라졌던 일도 설명이 안 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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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잠깐, 하나 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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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NPC와 달리 엘레노어만이 가진 것, 최상급 엘리트 NPC로서의 자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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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걸 감지하고 있는 거라면 모두 설명이 된다. 7층에서 갑자기 기척이 사라졌던 것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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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자아를 물리적으로 느낀다는 게 말이 되는 건가? 나는 대체 뭘 느끼고 있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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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PC를 NPC답지 않게 만드는 것, NPC에게 인간과 같은 자아를 부여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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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사라지는 순간 동시에 자아를 상실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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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순간, 내 머릿속에는 매우 추상적인 한 가지 개념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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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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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그와 관련된 정보를 얻을 방법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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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영 퀘스트의 주축이 되는 3대 세력은 8층에서 꾸준히 충돌을 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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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지적 분쟁이 계속되어, 언젠가 전쟁이 터질 것이 확실시되고 있는 불안정한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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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만큼 다크엘프 진영의 최주요 인사이자 전투원 중 하나인 엘레노어는 이런저런 일로 바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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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그대와 좀 더 이야기하고 싶었는데, 좀처럼 시간이 나질 않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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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엘레노어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런 말을 남기고 내 곁을 떠났다. 아직 퀘스트는 진행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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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쉬워하는 엘레노어에게 인사하고, 나도 발걸음을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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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감지하고 있는 것이 상대방의 영혼이고, 엘레노어의 강렬한 자아와 기척이 영혼에서 비롯한 것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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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거라면……모르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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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니, 그걸 알았다고 해서 딱히 뭐가 되는 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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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이럴 시간에 그냥 퀘스트 진도나 빼는 게 훨씬 나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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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발걸음은 멈추지 않는다. 어쩐지 이번만큼은 좀이 쑤셔서 참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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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찾아온 곳은 7층에서도 종종 방문했던 장소- 다크엘프 에르웬의 대장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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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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닫혀 있는 대장간의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절그럭절그럭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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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이어 문이 열리고, 커다란 가슴에 어울리지 않는 작은 키의 다크엘프가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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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휴, 아무리 급해도 그렇지 이렇게 재촉하는 건 너무하지 않느냐? 늙은이를 얼마나 괴롭힐 셈이……으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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웬 갑옷과 검을 들고 나온 에르웬은 나를 보자마자 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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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뭐냐, 내가 드디어 늙어서 헛것을 보는 건가. 너 내가 아는 인간족 맞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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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이거 보면 알 거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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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들어 줬던……아니, 이게 왜 이렇게 깔끔한 거냐. 어디 장식해 뒀다가 꺼내 온 게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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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웬은 내가 내민 팔목보호대를 보고 어처구니없다는 듯 한숨 쉬었다. 뭐, 그럴 만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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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웬의 시점에선 20년 전에 만들어준 장비를 아직 새것처럼 갖고 있는 셈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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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 좀 아껴서 쓰라고 잔소리하긴 했다만, 말을 잘 들어도 너무 잘 듣는구나. 안 그러게 생겨가지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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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지중지하며 아껴서 그런 게 아니라, 정말로 새것이어서 그런 것뿐이지만, 굳이 오해를 정정할 생각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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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도 그럴 게, 책망하듯 말하고 있지만 은근히 기쁜 눈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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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저나, 언제 또 여기까지 온 거냐. 바쁜 몸이라고 들었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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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일이 좀 있어서. 당분간 머물다 갈 생각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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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엘레노어에게 인사는 했느냐? 그 애가 아주 좋아라 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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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웬은 오랜만에 고향 집에 온 손주를 대하듯 이것저것 물으며, 자연스럽게 나를 안으로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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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간 안은 20년이라는 세월의 흐름에도 크게 바뀌지 않은 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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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다크엘프 대장장이의 나이를 생각하면 20년쯤이야 긴 시간도 아닐 테니, 이상한 일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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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줄 수 있는 게 차밖에 없어서 어쩌나, 오는 줄 알았으면 과자라도 놓아두는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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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됐어, 그것보다 물어볼 게 있어서 온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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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음, 인사나 하러 온 건 아닌 줄 알았지. 오냐, 뭐든 물어 보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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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웬은 쉽게 만날 수 없는 여왕을 제외하면 다크엘프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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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이 주제의 질문을 하기에도 가장 알맞은 상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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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이 얽혀 있는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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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수에 대해서 알려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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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프들의 혼을 순환시켜 영생을 부여하는 신비한 나무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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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비취의 영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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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웬은 처음에는 왜 그런 것을 묻느냐고 했지만, 이내 거두절미하고 아는 것을 말해주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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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수는 무한에 가까운 마나를 품고 있는 나무로, 모든 엘프들의 생명의 근원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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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수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한 에르웬의 어투는 평소와 조금 달랐다. 어린아이에게 동화를 들려주는 듯한 분위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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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기원을 정확히 아는 이는 아무도 없지만, 오래된 전설에 따르면 어머니인 대지가 낳은 첫 번째 생명의 나무가 바로 세계수였다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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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수가 무한에 가까운 마나와 생명력을 갖고 있을 수 있는 이유가 그것인게지, 첫 번째 생명에게 주어진 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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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수는 스스로 낳은 두 엘프종에게 그 생명을 나누어 주었어. 무한에 가까운 생명을 나눠 받은 엘프는 영생종이 되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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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쩐지 에르웬이 이런 이야기를 많이 해 봤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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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우리는 무척이나 장생하지만, 세계수와 영혼의 탯줄이 이어져 있던 그때의 엘프들은 정말로 영원히 살았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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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웬의 눈이 미묘하게 먼 곳을 바라보았다. 오래된 과거를 돌이키고 있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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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영혼은 불멸하더라도, 몸은 결국 쇠하기 마련이지. 세계수는 이 한계를 아주 간단한 방법으로 해결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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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쇠하여 죽음을 맞은 엘프의 혼을 다시 거두어들여, 새 육신을 낳아 그곳으로 순환시킨 것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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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에 새겨진 의식과 기억은 새 육신으로 전달된 이후에도 그대로 이어져, 죽음을 맞은 엘프는 다시 젊어질 뿐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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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엘프의 영혼이 새 육신을 얻고 다시 태어난다, 한마디로 하면 환생이라 이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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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엘프가 스스로 번식하여 늘어날 수 있었던 탓일까, 언젠가부터 세계수도 힘을 잃고 시들기 시작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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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층에서 봤던 세계수의 모습을 기억난다. 비쩍 말랐는데도 굉장한 힘과 존재감을 갖고 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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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시든 상태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는데, 에르웬의 말이 사실이라면 과연 그럴 만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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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나무 하나가 이렇게 많은 엘프들의 생명을 모두 감당하고 있었다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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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생을 안겨주던 순환의 굴레가 망가지며, 엘프들은 더 이상 새 육신을 얻을 수 없게 되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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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신이 쇠하면 그것으로 끝, 우리의 영혼도 세계수로 돌아가지 않고 세상에 흩뿌려지게 되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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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실을 비통해하는 엘프들은 많았지만, 수천 년이 지나 모두 흙으로 돌아간 지 오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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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수가 시든 것은 다크엘프가 대수림을 떠나기 전의 이야기라고 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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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그 시절의 세계수와 영생의 굴레를 기억하는 다크엘프는 여왕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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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웬도 완전히 그 세대의 인물은 아니고, 애매하게 걸쳐 있다고 한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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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나는 지금의 형태가 옳다고 생각한다. 죽음을 통해 뜻을 물려주는 것은 의미가 깊지 않으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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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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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이지, 너희 인간족이 그렇지 않느냐? 백 년도 못 살지만 끊임없이 번성하고 발전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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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발전과 성장은 유언의 힘에서 나오는 것이 분명하다며, 에르웬은 말을 끝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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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일리가 있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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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죽음으로 가슴에 못질된 맹세가, 이 쓰레기 같은 인간을 움직이고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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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수에 대해 이것저것 알게 되긴 했지만, 그렇게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얻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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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는 것은 이 정도뿐인데, 만족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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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족은 못 했다. 솔직히, 에르웬의 마지막 말 때문에 괜히 기분만 나빠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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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걸 티 낼 수는 없어서, 나는 적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에르웬은 한 마디를 더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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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조금 오래 살았을 뿐이라, 아는 것이 많지는 않구나. 이 이상을 알고 싶다면 여왕을 찾아가는 게 나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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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 그렇겠지, 하지만 여왕은 아무때나 만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니까 에르웬을 먼저 찾아온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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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여왕은 좀 상태가 안 좋지마는……너는 엘레노어의 정혼자 신분이니 어떻게든 될 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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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혼자 신분이 아직도 유효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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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얼, 고작 20년 정도 얼굴을 안 비춘 것 뿐 아니냐. 인간족에겐 긴 시간이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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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을 약속해 놓고 20년 동안 얼굴 한번 안 비춰도, 취급이 바뀌지 않는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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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잖아도 엘프의 시간 감각은 쉽게 감이 오질 않는데, 긴 시간을 통째로 건너뛰고 나니 더 헷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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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여왕을 쉽게 만날 수 없는 이유가 아직 하나 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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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여왕이 나한테 호의적이지 않을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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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왕은 세계수에 미련이 남아, 엘레노어를 통한 정략혼으로 하이엘프와 평화 협정을 맺고 싶어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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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 협정은 7층에서의 내 행보로 박살이 나버렸고, 평화는커녕 전쟁 직전까지 온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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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마당에, 여왕이 세계수에 대해 궁금해하는 나를 곱게 봐줄까? 절대 아닐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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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그렇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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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웬도 그 생각은 못 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이내 손뼉을 치더니 좋은 생각이 났다며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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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네가 여왕의 병세를 고쳐줄 영약을 구해오는 건 어떻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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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눈앞에 푸른 알림창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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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픽 : 다크엘프의 서 - 비취의 영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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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 : 위대한 다크엘프의 여왕이 병석에 앓아누운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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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한 이유는 없습니다. 그저, 여왕 본인이 몸져누웠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아 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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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난 중병에 걸려 생사의 기로를 오가고 있을 수도 있고, 사실 가벼운 감기에 들었을 뿐일 수도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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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한 것은, 당신이 여왕과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는 그에 맞는 성의를 보여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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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프의 제약 기술은 무척 훌륭하니, 평범한 약을 가져다주는 걸로는 안 된다는 사실은 알고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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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문으로 전해지는 비취의 영약 정도가 아니라면, 여왕은 당신을 거들떠도 보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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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스트 목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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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비취의 영약을 손에 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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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비취의 영약을 능가하는 진상품을 준비하기(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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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여왕의 병을 치료하기(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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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이런 식으로 진영 퀘스트 라인에 다시 들어올 줄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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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이거, 내가 아는 퀘스트다. 상세한 내용은 다르지만, 8층 진영 퀘스트의 핵심으로 꼽히는 퀘스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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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층 진영 퀘스트는 원래 자잘한 서브 퀘스트 여럿을 진행하는 식으로 되어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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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 난데없이 서브 퀘스트 대부분을 생략하고, 가장 중요하고 난이도가 높은 퀘스트에 진입한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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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거, 내가 알기에는 무조건 파티 퀘스트로 진행해야 하는 기믹이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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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장, 어떡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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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취의 영약 퀘스트는 사실 공략글을 읽으면 아주 쉽게 진행할 수 있는 퀘스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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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약을 얻는 건 둘째치고, 영약을 어디서 얻을 수 있는지 정보를 습득하는 난이도가 높은 퀘스트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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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략글을 따라가면 정보 습득이고 뭐고 다 생략하고, 바로 영약을 습득해서 빠르게 깰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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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그 영약을 습득하는 부분인데, 영약을 얻으려면 반드시 파티 플레이를 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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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템적인 인원수 제한이 있는 건 아니지만, 혼자서는 절대 수행하지 못하는 기믹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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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커뮤니티에 올라와 있는 공략이 그대로 먹힐지도 미지수다. 도전 환경이 다른 부분이 한두 군데가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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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즈멜이나 엘레노어를 데려가고 싶어도, 전쟁 직전의 분위기 때문에 전투요원은 쉽게 자리를 비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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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대장장이인 에르웬도 많이 바쁜 모양이고, 비전투 인원을 데려가는 건 애초에 논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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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구해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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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은 짧게 대답해 퀘스트 수락 의사를 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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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처음부터 거절한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에픽 퀘스트를 거를 수는 없는 노릇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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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잘 됐다. 어려운 과제를 눈앞에 던져 놓으면 일단 잡생각은 사라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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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뮤니티를 열어, 비취의 영약을 얻을 수 있는 장소로 향하는 길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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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취의 영약을 얻기 위해 찾아가야 하는 장소는 이번에도 던전, 다만 조금 특별한 던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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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안에서 특정한 루트를 따라야만 진입할 수 있는 던전 안의 던전이자, 히든 던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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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제단 -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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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온 것은 7층에서 감각 강화를 터득하기 위해 찾았던 저주받은 제단과 비슷하게 생긴 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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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제단이 8층에만 총 다섯 개가 있고, 그중에서 이 세 번째 제단을 통해서만 히든 던전으로 들어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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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뮤니티의 공략글에 나온 대로 제단에 놓인 석상을 조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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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리리리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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톱니바퀴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제단 중앙이 열리며, 보스가 튀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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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SS - 봉인된 제단의 수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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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는 여기저기 톱니바퀴가 박혀 있는 골렘으로, 스펙은 그냥 흔한 필드 보스 수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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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보니 요즘 골렘 타입의 적을 자주 만나는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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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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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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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벤토리에서 둔기 하나를 꺼내 휘두르자, 골렘의 팔 하나가 박살 나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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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골렘은 사지에 박힌 톱니바퀴를 전부 파괴하지 않으면 끝없이 재생하는 타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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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대신 기본 방어력은 골렘 타입의 보스치고 무척 낮은 편에 속한다. 이렇게 한 방에 박살 날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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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쾅! 쾅! 쾅! 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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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다리와 가슴 부분에 박힌 톱니바퀴 하나당 한 대씩, 정확히 다섯 대로 보스를 처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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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한 패턴도 없는 이런 필드보스는, 이젠 그냥 좀 센 잡몹으로밖에 느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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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몇 층을 더 올라가야 내 스펙에 맞는 적이 나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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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러 어려운 길을 가지 않는 이상, 당분간은 보기 힘들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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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모순의 본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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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드 보스를 쓰러트린 후, 감각 강화 스킬의 레벨이 한 번 더 상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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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감각 증폭]이라는 새로운 액티브 스킬도 습득했다. 스킬의 성능은 단순하게 오감을 더 강화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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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 증폭을 켜면 평소보다 더 예민하게 주변을 감지할 수 있게 되는데, 이 순간 나는 말 그대로 생체 레이더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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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민감해지는 정도가 아니라, 소리의 반사로 위치를 파악하는 반향정위까지 활용할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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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를 깨부수며 이룩한 성장은 언제나 짜릿하다. 나는 만족하며 다크엘프의 마을로 되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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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에는 밤을 지새운 듯 보이는 엘레노어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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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피냄새가 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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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보니 다크엘프는 후각이 예민하다 했지. 장비를 갈아입긴 했지만, 피 냄새는 지워지지 않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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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중에 갑자기 장비를 챙기고 외출하더니, 피 냄새를 묻히고 돌아온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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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이 있었냐고 캐물을 법도 한데, 엘레노어는 오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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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그대는 내 취향이란 말이지……보면 볼수록 탐나서 원, 종족이 다르다는 사실이 너무 아깝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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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뭔가 심오한 말을 하려나 했는데 아니었네. 야성미가 넘치는 연하인지 뭔지가 취향이라고 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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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엘레노어는 내가 피 냄새를 묻히고 돌아온 게 마음에 드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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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대도 밤을 새운 거지? 잠은 안 자도 되나? 식사도 하지 않은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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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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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족은 좀 자주 먹는 편 아니었나, 그러고 보니 그대와 식사를 함께한 적이 없는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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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겠지. 다크엘프는 종족 전체가 식사 주기가 뜸한 편이고, 나도 항상 화이트롤로 끼니를 때우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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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다크엘프들은 나랑 눈만 마주쳐도 간식을 먹이려고 들긴 하지만, 어쨌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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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필드 보스를 잡은 직후에 화이트롤을 먹어서 따로 뭘 먹을 필요는 없고, 수면도 딱히 필요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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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욕이 없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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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대충 대답했다. 딱히 거짓말을 한 것도 아니다. 식욕이고 수면욕이고 하는 건 옅어진 지 오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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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저절로 옅어졌다기보다는 스스로 잘라낸 것에 가깝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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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층에 처박혀 있던 시절에도, 꼴에 입이라고 매일같이 맛있는 음식만 골라서 처먹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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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차원적인 욕구만을 충족시키며 하루하루 연명하던 그때의 정신상태로 이 7층에 들어왔다면 어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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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엘프들에게 빌붙어 삼시세끼에 간식까지 받아먹고, 밤에는 엘레노어랑 뒹굴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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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있을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니, 저절로 역겨움이 치민다. 짐승만도 못한 꼴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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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에 깊이 박아넣은 의무와 책임감이 나를 사람답게 만들고 있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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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가, 그건 별로 좋은 일이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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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는 안됐다는 듯이 말했지만, 나는 식욕을 잃어가는 자신이 마음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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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와는 잠깐의 대화 끝에 헤어졌다. 서로 한가한 신세는 아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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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곧바로 정찰대의 건물로 이동했고, 정찰대원 다크엘프들의 관심을 흘려넘기며 리즈멜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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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즈멜과 만나자마자 다시 연무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간단한 몸풀기를 마치고, 어제 하던 훈련을 다시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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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즈멜은 어제보다 훈련의 난이도를 낮춰서 천천히 진행하고 싶은 모양이었는데, 나는 당연히 거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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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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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그림자 속에서, 시각에 의존하지 않고 휘두른 검이 가볍게 인형을 베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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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오늘은 컨디션이 무척 좋은 모양이네? 푹 쉬다 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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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히 더 훈련한 것도 아니지만, 어제와는 사뭇 다른 결과에, 리즈멜은 무척 놀란 눈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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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반은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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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다 온 건 아니지만 컨디션이 좋기는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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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훈련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시험이 급격히 진도를 나갈 마다, 리즈멜의 표정은 점점 나빠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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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마냥 기뻐하며 칭찬도 하고, 너무 우쭐해하지 말라며 틱틱거리기도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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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인형 다섯을 동시에 여유롭게 쓰러트리고, 어제 보여줬던 동작을 완벽하게 재현하기 시작할 때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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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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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것인지, 리즈멜은 입을 꾹 다물고 인상을 찌푸린 채 나를 노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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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성장을 아낌없이 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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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감고 여유롭게 인형을 무찌르며, 감각의 확장을 완벽히 다루고 있음을 증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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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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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즈멜이 돌연 험악한 표정으로 내 어깨를 붙잡았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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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알려준 거잖아. 틀린 부분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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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즈멜은 고개를 저으며, 전혀 아니라고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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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어젯밤에 뭐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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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즈멜의 눈동자에 다시 깊은 걱정이 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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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딱히 범죄를 저지른 것도, 켕기는 일을 한 것도 아니다. 그래서 당당하게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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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실전에서 연습 좀 하고 왔어, 별 거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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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끝맺고 보니 별로 떳떳한 말투가 아니었다. 이것도 내 부족한 말재주 탓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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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전에서 연습하고 왔다니, 지금 장난해? 네 눈을 베면서 싸우는 게 어떻게 그냥 연습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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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즈멜은 내게 바짝 달라붙어서, 추궁하듯 눈을 부릅뜨고 큰 소리로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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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몇 번이고 말했잖아. 무리하지 말라고, 초조해하지 말라고, 너는 잘하고 있다고……그런데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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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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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또 죽고 싶어 안달 난 것처럼 굴기 시작한 거냐고. 그렇게까지 위험한 짓을 할 필요는 없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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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그래도 여기서 아니라고 대답할 수는 없었다. 나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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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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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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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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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말했던 것을 다시 한번 입 밖으로 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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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거미 때와 똑같이, 그냥 할 수 있으니까 한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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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즈멜은 그때도 이 대답을 듣고, 내게 검술을 가르쳐 주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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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네가 뭔가 중요한 목적이 있어서, 한시라도 빨리 강해지고 싶어하는 거라고 생각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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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자꾸만 위험하게 실전에 머리를 들이미는 거라고. 내가 너한테 검술을 가르쳐 주기로 정한 이유도 그거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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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검술을 가르쳐서 너를 충분히 강하게 만들어 준다면, 위험한 짓을 감수할 일도 더는 없을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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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동안 지켜보면서 알았어, 네가 그렇게 급하지 않다는 거. 여유가 있어 보였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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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리즈멜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리즈멜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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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그냥 강해지는 게 좋은 거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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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 끝에 나온 말은, 어떤 의미에서 내 생각을 정확하게 꿰뚫어 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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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즈멜은 내가 성장을 통해 쾌감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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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층을 공략하고 처음으로 노력을 통해 성장하는 행위의 짜릿함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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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짜릿함은 싸구려 도파민에 빠져 있던 내게 너무나 크고 새로운 자극이었고, 나는 한동안 그것을 쫓아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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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지금도 다를 것 없다. 나는 지금도 성장할 때마다 격한 쾌감에 몸부림친다. 하지만 그게 뭐 어쨌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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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력을 즐기는 건 평범하게 좋은 일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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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내가 시련의 탑을 공략하며 나아갈 수 있게 해주는 가장 큰 원동력이 바로 그것 아닌가, 성장의 쾌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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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위험한 방식밖에 몰라서, 그 방법으로만 성장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그래서 그런 거라면 이해할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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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즈멜은 떨리는 목소리로 조금씩 말을 이었다. 나는 이번에도 토 달지 않고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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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젠 아니잖아. 내가 가르쳐 주는 걸 따라오기만 해도 충분해. 나는 네가 만족하고 있는 줄 알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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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즈멜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실제로 나는 리즈멜과의 수련에 충분히 만족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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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이번에만 조금 달랐을 뿐이다. 어느 부분이 달랐다고는 나도 말하기 힘들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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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무 조심하게 굴어서 싫었어? 그래서 그런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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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답하기 어려운 물음이었다. 리즈멜의 걱정이 마음에 안 든다고 생각한 부분도 분명 있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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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꼭 그게 이유라고 할 수만은 없다. 돌이켜 보면 나도 잘 모르겠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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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하나 따져 보자면, 내가 느끼기 시작한 초조함이 가장 크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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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생각해보니 좀 이상하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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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어제만 유독 그렇게 초조했던 걸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뜻밖에 빠르게 답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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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엘프들 사이에서 너무 오래 지나다가는, 다시 예전처럼 한심한 놈으로 돌아가 버릴까 봐. 그거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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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됐는가. 그건 쉽다. 리즈멜이 말한 그대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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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리즈멜과 수련하며 강해지는 것에 충분히 만족하고 있었다. 만족해 버렸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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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만족을 누려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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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 욕망을 모조리 거세했다. 식사는 화이트롤만으로 제한하고, 수면도 조금씩 줄여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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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엘프의 환상적인 몸매에 눈길을 빼앗기면서, 엘레노어의 유혹을 모조리 거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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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네, 네 말이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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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즈멜은 내가 죽고 싶어서 안달 난 놈처럼 군다고 말했다. 그 말은 무척 정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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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수 있어서 하는 거라고 말했지만, 사실 본심은 따로 있었던 거다. 이걸 이제야 깨닫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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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죽고 싶은 거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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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정을 빌미로 부끄러운 줄도 모르는 채 사람 하나를 착취하고 죽여버린 희대의 쓰레기, 서진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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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새끼를 죽여버리고 싶었던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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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새끼가 만족하고 행복해하는 꼴을 보면 배알이 뒤틀려서, 자꾸만 죽음으로 내몰았던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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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죽어버리면 탑을 나가서 엄마에게 사과한다는 목표도 이룰 수 없으니까, 나는 그조차도 이룰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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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고 싶은 것도, 죽고 싶은 것도, 모두 나의 본심. 둘 다 나의 욕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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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 가슴에 박아넣은 맹세는 그 어떤 것도 허락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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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춰 서지 않고 끝없이 나아간다. 이 탑의 천장을 뚫고 벗어날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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헷갈리게 해서 미안하다, 리즈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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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광란의 질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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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를 처치하자, 제단에 놓인 석상들이 일제히 무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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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무너진 석상 아래에 숨겨진 레버를 당기고, 몇 가지 조작을 더 가하면 히든 던전에 진입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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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에 들어가기 전에 한 번 더 장비를 점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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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보니 스틸로 만든 다크엘프제 방어구 풀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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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도 가장 좋은 것으로 착용하고, 방패 아래로 에르웬이 만들어 준 팔목보호대를 착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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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몇 층을 더 올라가야 수준이 맞는 적이 나올까- 그런 생각을 한 게 몇 분 전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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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던전을 기믹 수행 없이 혼자서 돌파하려면 이 정도 준비는 당연히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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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기기기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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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단 바닥이 열리고 히든 던전으로 향하는 문이 드러났다. 곧바로 안으로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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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취의 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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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든 던전은 비취라는 이름 그대로 녹색의 수정이 가득한 지하 신전 비슷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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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신전은 신전인데, 너무 고대 양식으로 만들어진 데다가 지하라는 특성 탓에 동굴에 더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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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 커뮤니티에서 얻은 던전 지도를 켜 놓고, 천천히 계단을 따라 내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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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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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선가 작은 방울 소리가 들려왔다. 마력감지에 몇 종류의 생명 반응이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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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 수정으로 만들어진 나비 같은 것이 내게 접근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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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 나비는 내 주변을 살랑살랑 날아다니더니, 날개를 퍼덕여 둥근 광원체를 쏘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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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집광] 스킬을 사용할 때와 비슷한 광원이다. 손을 뻗어 만져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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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지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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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한 열기를 뿜어내는 광원체가 손가락 끝을 지졌다. 이렇게 작은데도 내 화염 내성을 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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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력이 높아서 그런 게 아니라, 화염 내성으로 막을 수 없는 복합 속성이라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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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구슬을 쏘아대는 나비들을 손으로 붙잡아 으깨버리고, 이어서 계단을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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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히든 던전의 몬스터는 모두 이런 타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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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스터 자체는 그렇게 강하지 않지만, 저런 빛구슬이나 광선을 쏘아서 원거리 공격을 하는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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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층의 히든 보스였던 크리스탈 거미와 비슷하면서 미묘하게 다른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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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무거운 발소리와 함께 새로운 몬스터가 나타났다. 이번에는 거북이 형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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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딱지가 녹색 수정 덩어리로 되어 있어서, 거북이라기보다는 사족보행 달팽이 같은 외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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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우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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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이의 입에 녹색 빛구슬이 모였다. 모여든 빛구슬은 여러 갈래의 광선이 되어 내게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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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을 휘둘러 날아드는 빛구슬을 쳐내고, 단번에 거북이에게 접근해 일격을 먹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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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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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까만 칼날이 수정 덩어리를 뚫고 박혀 들어가, 거북이의 숨통을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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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의 기믹은 이 거북이가 나타나는 구간부터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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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마침 계단만 따라 내려가면 그만이던 구조가 확 넓어지고, 동서남북으로 다양한 갈림길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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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볍게 마력감지를 펼쳐 확인해 보니, 공략글에 나와 있는 기믹 수행용 장치들도 모두 그대로 있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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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우……해보자, 해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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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호흡을 하고, 가볍게 몸을 풀고, 기믹이 있는 동쪽 길을 바라보고, 자세를 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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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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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로 발밑을 있는 힘껏 박차, 지도에 표시된 길을 따라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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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우우욱, 하는 칼바람 소리가 귓가에 스치는 초고속 질주를 시작하고 대략 이 초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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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찌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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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감, 마력감지, 감각 강화, 내 시야를 넓혀주는 세 가지 스킬이 모두 동시에 경고를 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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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 밑을 주의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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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과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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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에서 거대한 광선의 기둥이 솟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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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탈 거미의 입에서 발사되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굵기의 녹색 광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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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영화에 종종 나오곤 하는, 위성 병기의 포격을 연상케 하는 공격이 발밑에서 솟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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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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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명 대신 저절로 욕이 튀어나왔다.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실제로 보니 진짜 장난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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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러면서도 발은 멈추지 않는다. 달리는 걸 멈추면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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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과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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쏘아지는 광선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달려나가는 나를 노리고 몇 번이고 연달아 쏘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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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끝없이 쏘아지는 양심 없는 광선이 바로 이 던전의 기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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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취의 영약은 이 던전 최하층에 고여 있는 샘물, 그리고 그 샘물을 지키는 살벌한 몬스터가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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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감지범위와 미친 사거리의 광선을 무한대로 쏘아내는 괴물, 에메랄드 와이번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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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메랄드 와이번은 이 구간에 들어선 침입자를 감지해, 침입자가 있는 방향을 향해 냅다 광선을 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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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력은 즉사 수준, 광선의 면적도 뭉쳐있는 사람 서너 명쯤은 한 번에 덮쳐 증발시킬 수 있을 만큼 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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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미친 광선을 피하는 방법은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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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티원들과 협력해 이 던전의 장치를 작동시켜 광선을 다른 방향으로 유도하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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떨어져 있는 장치 여럿을 동시에 작동시켜야 하므로, 당연히 혼자서는 못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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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탑의 도전자들에겐 일종의 협력 퍼즐 게임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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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플러인 나한테는 목숨을 걸고 하는 러닝 액션 게임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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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과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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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억, 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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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선 포격을 피해 미친 듯이 달려나가는 내 앞길을 또 한발의 광선이 가로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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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재빨리 달리는 방향을 억지로 틀고, 던전의 벽을 밟아서 회피해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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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꼴을 보면 알겠지만, 광선을 쏘는 와이번은 한 마리가 아니다. 전부 다 해서 여섯 마리라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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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믹을 수행할 수 있다면 여섯 마리든 열 마리든 아무 상관 없겠지만, 나는 사정이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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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마력감지를 익혀서 광선이 날아오는 것을 미리 감지할 수 있기에 망정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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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뭣도 모르고 뛰어들었으면 지금쯤 광선을 세 발쯤 맞고도 남았을 것이다. 한 번만 맞아도 뒤지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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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마력감지가 애매한 위치에서 동시에 쏘아지는 광선을 감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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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벤토리에서 손도끼를 꺼내, 좁은 통로의 벽면에 박아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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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마어마한 가속도가 붙었던 몸이 단번에 제동하고, 한 발짝 앞과 두 발짝 뒤의 위치를 광선이 꿰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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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 씨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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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장, 이런 게 또 문제다. 그냥 계속 달리기만 할 수 있으면 차라리 편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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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밍에 맞춘 정확한 방향전환과 정지를 해내지 못하면, 그것대로 광선에 맞을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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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멈추는 것도 오래 끌면 안 된다. 발밑에서 다시금 찌릿한 경고가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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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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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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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최장거리의 제자리 멀리뛰기로, 발밑에서 쏘아진 광선을 피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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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광선 포격의 가장 좆같은 점은,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더 빨리 날아온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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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메랄드 와이번이 자리를 잡고 있는 장소가 영약이 고여 있는 위치와 매우 가깝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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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가면 내려갈수록 광선의 발사 지점이 가까워지니까, 그만큼 광선이 빨리 날아온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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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좆같은 점은 그 밖에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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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광선에 맞아 박살 나고 수복되고를 반복하며 던전의 지형이 조금씩 바뀌어 버린다는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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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형이 계속 바뀌어대는 탓에 원래 예정보다 이동 경로의 거리가 훌쩍 늘어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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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한으로 달릴 수 있는 러닝 액션 게임의 주인공과 다르게, 엄연히 체력에 한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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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는 중에 틈틈이 포션을 섭취할 수 있긴 하지만, 포션을 마시다가 호흡이 꼬일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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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칫 발이 꼬이기라도 하면 광선에 맞아 뒈질 텐데, 지형마저 지랄이 나니까 욕을 안 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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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광선 포격과는 별개로, 여기가 어쨌든 던전이라는 점. 던전에는 당연히 몬스터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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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반에 나오던 나비나 거북이 정도라면 무시할 수 있겠지만, 점점 크고 센 놈들이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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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오오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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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직선 방향에 수정체로 이루어진 말대가리 괴물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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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재빨리 인벤토리에서 스파이크 박힌 방패를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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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패를 내세운 뒤 속도를 줄이지 않고 달려나가, 정확한 타이밍에 [혼신]을 발동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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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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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으로 이루어진 말대가리 괴물은 들이받힌 그대로 박살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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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스펙이 조금만 딸렸어도 이렇게 몬스터를 몸으로 뚫고 지나가는 짓은 못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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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속으로 불평하는 한편, [질주]스킬의 레벨이 올랐다는 시스템 메시지가 눈앞에 표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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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약이 있는 장소에 가까워질수록 위험요소는 점점 늘어가고 있지만, 몸은 점점 편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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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의 위험도가 올라가는 것보다 내가 성장하는 속도가 더 빨랐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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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나는 위기상황에 처하면 훨씬 빠르게 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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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을 달려 마침내 유일한 안전지대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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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거리 달리기를 하다 보면 시간 감각이 둔해진다던데, 대체 몇 시간을 내리 달린 건지 감이 안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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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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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가 떨리고 숨도 마음처럼 잘 쉬어지지 않는다. 입에서는 단내가 나고 눈앞이 어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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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숙이면 토할 것 같아서, 일부러 천장을 바라보며 숨을 골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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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던전을 그냥 달려서 돌파한 사람은 아마 전 서버에 나 하나 뿐일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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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포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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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저앉고 싶은 마음을 참고 억지로 포션을 들이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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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쳐있던 몸은 포션과 [전투 재생]의 효과로 금방 회복된다. 다시 한번 장비를 점검하고 전투 준비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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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남은 건 하나뿐이다. 저 바닥에 고여 있는 영약을 퍼담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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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문제는 여태껏 줄기차게 광선을 쏴대던 와이번이 영약 고인 바닥 근처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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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서의 정상적인 플레이 방식은, 던전의 장치와 미끼를 활용해 와이번의 시선을 돌리고 영약만 쏙 빼 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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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도 당연히 솔플러인 내겐 불가능한 방법이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단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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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죽이고 뺏어오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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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한 곳에 자리잡고 마음대로 저격해대는 것도 이젠 끝이다, 좆같은 익룡 새끼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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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층에 내 수준에 맞는 적이 없다면, 찾아가면 그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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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에메랄드 와이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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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메랄드 와이번의 스펙이 어느 정도인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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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하다, 잡으라고 있는 몬스터가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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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던전을 구성하는 기믹으로 배치된 존재, 반드시 피해서 행동해야만 하는 무대장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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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상층에 등장하는 와이번 계통의 몬스터가 어느 정도 스펙인지 생각해 보면, 대충 짐작 정도는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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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저만한 위력의 복합 속성 광선을 무한대로 쏘아낼 수 있을만큼의 마력을 갖고 있다는 건 확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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쏘아지는 광선에서 느껴지는 마력량만 해도 대충 내 전체 마력과 비슷한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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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사 클래스라 마력량이 많은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건 어마어마한 수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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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내 기본 스펙부터가 8층 수준은 한참 넘어서 있으니까. 비슷하기만 해도 반칙 수준인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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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와이번은 드래곤의 하위호환쯤 되는 종족으로, 그 신체의 강인함도 예사롭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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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여기까지 오면서 만난 다른 몬스터처럼, 육체가 녹색 수정으로 이루어져 있다면 이야기가 좀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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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놈들의 방어력도 결국 녹색 수정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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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유리 대포일 가능성이 있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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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이런 식의 희망적 관측만 쌓아놓고 적을 판단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짓이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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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승산은 충분하다. 광선 이외의 공격이라면 맞고 버틸 자신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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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 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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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쳤던 몸이 만전에 가까운 상태가 되었음을 확인하고, 나는 곧장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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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메랄드 와이번의 마력이 느껴지는 장소를 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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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취의 영약이 고여 있는 샘은 넓은 공동 한가운데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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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공동의 구석마다 굴이 하나씩 파여 있었고, 그 굴에 에메랄드 와이번이 자리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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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생각 없이 영약을 향해 달려가면 사방팔방의 와이번에게 저격당하는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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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선 원래 감지를 피할 수 있는 우회로를 통해 와이번들을 지나치고, 던전의 기믹을 발동해 시선을 돌려놔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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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나는 기믹을 써먹을 수 없으므로, 우회로만을 이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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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의 와이번들은 주기적으로 잠에 들고, 침입자를 감지하면 깨어나서 활동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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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던전의 우회로를 사용해 굴로 들어가면, 놈들의 잠을 깨우지 않고 이동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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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놈들이 잠에서 깨는 순간은, 도전자가 놈들에게 접촉하거나 우회로와 굴을 벗어나 놈들의 감지에 걸릴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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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로 말하면, 우회로를 벗어나지 않거나 접촉하기 전까지는 안 깨어난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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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빵을 박고 시작하기 딱 좋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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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치를 보면서 슬슬 피해 가야 하는 와이번에게, 나는 당당히 다가가 검을 들어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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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덤벼라, 익룡 새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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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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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번 한 마리의 눈알에 있는 힘껏 검을 박아넣었다. 생각보다 더 깊이 박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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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오오오오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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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번은 크게 소리치며 깨어났고, 그 순간 주변의 공기가 확 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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꺠어난 와이번의 몸에서 마력이 흘러넘치고, 주변에 무작위하게 퍼져 있던 마력이 그에 공명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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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선명하게 느껴지는 어마어마한 마력량에 기가 질릴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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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 시발, 이게 드래곤이 아니라 와이번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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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번의 체내에 쌓여 있는 마력량도 어마어마한데, 대기 중의 마력마저 놈에게 지배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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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딴 미친 생물을 여섯이나 가져다 놓을 생각을 하다니, 제정신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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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탑을 설계한 놈이 누구건 간에, 미치지 않고서야 이런 레벨 디자인을 해놓을 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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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이이이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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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잠시 얼타는 사이, 와이번의 쩍 벌어진 주둥아리에 마력이 모여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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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당연히 선빵을 맞은 와이번이 취할 행동을 몇 가지 상상해 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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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건 살짝 예상을 빗나갔다. 상정하지 못한 정도는 아니지만, 뭐라고 해야 할까. 어이가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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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거리니까 당연히 발톱이나 이빨로 덤벼올 줄 알았는데, 대뜸 면상에다가 광선을 박으려고 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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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대 잡겠다고 미사일을 쏘는 꼴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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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과과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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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신속한 빈대인 나는 미사일을 어렵지 않게 피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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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이런 광역 공격은 멀리서보다 가까이에서 피하는 게 더 쉽다. 사출기는 사각지대가 분명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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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번의 턱 옆으로 회피함과 동시에, 한 번 더 검을 휘둘러 놈의 목 언저리를 베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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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촤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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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생각보다 잘 베인다. 예상대로 이놈들의 방어력은 그렇게 대단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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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라면 거리를 좁힌 상태에서 계속 베는 것만으로 처치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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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이놈이 나를 그렇게 두느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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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아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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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번이 소리를 지르며 날개 끝의 발톱을 휘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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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당히 빠른 속도지만, 마력강화를 발동한 메르세데스의 공격에 비하면 아직 괜찮은 수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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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과 날개가 일체화된 특유의 신체구조 탓에, 동작이 너무 크다는 점도 주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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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가가가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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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둘러진 발톱과 날개 끄트머리에 걸린 벽면이 좍좍 갈려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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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톱 공격을 피해낸 직후에는 놈의 턱주가리가 닥쳐왔다. 그렇겠지, 이쪽으로 오면 이젠 이빨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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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이놈들의 강함은 원거리에서 쏘아대는 무한 포격에 의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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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히 그걸 뺀다고 약한 건 아니다. 평범한 8층 도전자의 스펙이라면 발톱 공격에 반응하지 못하고 찢겼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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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딱 그것까지는 반응하고 피할 수 있는 수준의 스펙이 있다면, 대응해야 할 패턴 자체가 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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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형 특성상 비행도 불가능, 근거리에서는 포격도 마음대로 못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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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남은 건 결국 근접전뿐인데, 저 어정쩡한 신체구조는 근접 전투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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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를 퍼덕거리고 날아올라서 포격하는 것만으로 다 이길 수 있을 테니, 저따위 구조를 하고 있는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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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비유하자면 티라노사우르스와 인간의 대결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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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하게 생각하면 인간이 티라노의 상대가 될 리가 없지만, 종목을 인간이 마음대로 정할 수 있다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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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라노사우르스의 그 옹졸한 앞다리로 인간과 권투 시합을 해서 이길 순 없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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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싸움의 종목을 일대일 근접 육탄전으로 정했고, 와이번의 몸뚱이는 근접전에 적합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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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작 그뿐이지만, 내 승률은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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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번은 신체 구조가 근접전에 부적합할 뿐, 딱히 지능이 부족한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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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에 녀석은 근접전이 이어질수록 본인만 다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현명한 선택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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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오오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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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버둥거리며 굴 밖으로 나가려고 한 것이다. 일단 처한 환경을 바꾸려는 심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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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플라잉-도마뱀 새끼는 지능이 낮지는 않지만 딱히 똑똑한 것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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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려면 진작에 나갔어야지, 여기저기 다 베인 상태에서 그러면 나갈 수 있을 줄 알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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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올 때는 마음대로였겠지만, 나갈 때는 아니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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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곽! 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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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벤토리에서 대형 장병기를 꺼내 집어던져, 와이번의 날개를 바닥에 꿰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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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잔뜩 부상을 당한 상태인 만큼 굴 밖으로 뛰쳐나가려는 속도도 대단치 않았고, 반대로 내겐 여유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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꿰뚫린 날개를 힘으로 뜯어내고 나가려 해도, 내가 새 창을 던져서 다시 꽂아넣는 게 더 빨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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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아아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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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번의 포효가 이제는 그냥 비명으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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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러고 보니 저 포효에 피어 효과도 있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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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마비 내성 때문인지 아무 효과도 안 느껴지네. 역시 내성은 올려두면 무조건 이득이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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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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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 수정이 돋아난 와이번의 몸은 금세 걸레짝이 되었고, 이젠 힘이 다 빠졌는지 바닥에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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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면 남은 건 숨통을 끊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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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으라고 있는 몬스터도 아니고, 보스도 아니라서 보상은 뭘 줄까 싶긴 한데. 은근히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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뻗어버린 와이번의 모가지를 짓밟으며 검을 들어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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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순간, 와이번의 주둥아리에 막대한 마력이 모여드는 것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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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까지 지랄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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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악으로 최후의 광선 한 발을 쏘려는 건가 싶어서, 재빨리 사각지대로 몸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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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와이번은 광선을 쏘지 않았다. 모여든 마력은 빛나는 구체가 되어 굴 바깥을 향해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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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지, 기력이 딸려서 이제 못 쏘게 된 건가? 하지만 왜 바깥쪽을 향해서 쏜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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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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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유를 깨달은 순간, 상황은 이미 늦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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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력감지에 어마어마한 힘의 격류가 걸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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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오오오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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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오오오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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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아아아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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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를 뒤흔드는 포효와 저절로 소름이 돋는 마력의 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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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메랄드 와이번의 마지막 선택은 구조 요청, 빛의 구슬을 통해 다른 굴의 와이번에게 도움을 청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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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놈들에게 동족을 향한 정 따위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잠들어 있던 와이번이 모두 깨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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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방법이 있었으면 왜 굴 밖으로 기어나가려 한 건지 모르겠지만, 그건 와이번 본인만이 알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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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구조 요청이 아니라 이판사판으로 다른 놈들의 잠을 억지로 깨운 걸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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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쿵쿵쿵쿵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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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번 다섯 마리의 발소리가 들리고, 곧 막대한 마력이 한 점으로 집중되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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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태 그랬던 것처럼, 깨어나자마자 침입자를 향해 일직선으로 광선을 갈기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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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도 다섯 마리가 동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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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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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못 피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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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후, 눈을 뜨기조차 힘든 빛이 시야를 모조리 덮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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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불나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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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 상황 속에서 집중력과 판단력은 급격히 상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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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시야가 한순간에 백색으로 물드는 것을 확인하고는, 재빨리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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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신]스킬을 사용해 내구 스탯을 증폭, [철벽]스킬을 발동해 방어력을 증강. 인벤토리에서 방패를 꺼내 차폐물로 삼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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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완벽히 막아낼 자신이 없었다. 내가 가진 것으로 부족하다면, 다음은 주변을 이용할 차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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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가까이에 있는 최대 사이즈의 차폐물, 에메랄드 와이번의 뒤편으로 몸을 감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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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측이라기보다는 바람에 가깝지만, 이놈들의 몸은 본인의 공격에 대한 내성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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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신체 자체의 내구력으로 되는 건지, 아니면 특이한 마법적 수단으로 되는 건지는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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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라면 살 것이고, 후자라면 뒤지겠지. 뻗어버린 와이번이 곧이곧대로 내 방패가 되줄리가 없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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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판단을 마치고 행동으로 옮기기까지 걸린 시간은 대략 1초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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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과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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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져 나온 굉음이 울리던 귓가에는 곧 이명만이 맴돌고, 시야는 이미 새하얀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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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각, 시각, 그리고 이어서 촉각과 마력 지각마저 마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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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태창의 HP 바가 어마어마한 속도로 깎여나가며, 나는 의식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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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속에 잠겨 있는듯한 몽롱함을 느끼며, 힘겹게 정신을 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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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빠르게 마력을 순환시켜 몸의 상태를 확인하고, 동시에 내 쪽으로 광선을 쏘았던 와이번들을 감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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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쪽을 향해 쿵쿵거리며 달려오고 있다. 하지만 거리는 거의 좁혀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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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놈들도 그렇게 느려터진 건 아니라서, 거리가 좁혀지는 데 걸리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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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이 끊겼던 것은 거의 한순간뿐이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잠깐 사이 몸은 아주 걸레짝이 다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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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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헛기침이 멋대로 나온다. 뭔가 토할 것 같았는데도, 피는커녕 침조차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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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목이 타들어 간 것 같다. 씨발, 숨만 쉬어도 불로 지져지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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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눈도 제대로 지져진 것 같고, 사지도 멀쩡한 곳이 없다. 이 정도면 거의 석탄이 됐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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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태창에 표시된 HP는 거의 바닥에 가깝다. 죽기 일보 직전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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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쿡, 커헉, 큭, 씨, 바하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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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소리처럼 들리겠지만, 뭔가 기분이 좋다. 타들어 간 입꼬리가 삐쭉 솟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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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떤 식으로든 성장을 이룰 때마다 강렬한 쾌감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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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코 멈추지 않겠다는 맹세가 나를 앞으로 잡아끈다면, 성장의 쾌감은 내 등을 떠미는 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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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 흐흐흐, 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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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지금 느끼고 있는 쾌감은 성장을 체감했기 때문인가. 그건 아니다, 아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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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를 혐오한다. 스스로 느끼는 쾌감과 온갖 동물적 욕구를 혐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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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 때문에, 몇 번이고 자신을 죽을 위기에 내던져왔다. 죽고 싶어서, 나를 죽이고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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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죽을 위기 속에서 나는 어느 때보다 빠르게 성장하고 강해지기에, 생각해 보면 이만큼 모순된 행동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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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내가 정말로 좋아하는 것은 위기에 자신을 내던지는 행동 자체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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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하면 죽고, 성공하면 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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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천만한 도박처럼 보이지만, 양쪽 모두를 바라는 내겐 어느 쪽이건 당첨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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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헥, 켁, 크, 흐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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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조금씩 나아가는 것을 느끼며, 내게 접근하는 다섯 마리의 와이번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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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겁고, 짜릿하고, 짜증 나고, 징그럽고, 혐오스럽고, 역겹고, 또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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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과 의지는 마력의 운용에 직접 영향을 끼치기에, 이 순간 내 마력은 그 어느 때보다 불안하게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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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건 내 마력을 이용하는 게 아니니까, 이런 때라도 안심하고 써먹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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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력 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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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르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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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전을 마친 펜던트를 사용하자, 벼락 소리와 함께 온몸에 막강한 힘이 깃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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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 바깥으로 나온 와이번들은 보다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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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 안은 마음껏 날아다닐 수 있을 만큼 넓은 건 아니지만, 못 날아오를 정도로 좁은 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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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에 와이번 다섯 마리 중 두 마리는 날개를 퍼덕이며 공중으로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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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놈들의 진짜 무대에 오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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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나도 지금부터가 진짜다. 몸은 만신창이가 됐지만, HP가 조금이라도 남아있다면 죽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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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자릿수를 돌파한 [전투 지속]과 [전투 각성]등의 영향도 있겠지, 반쯤 익은 몸으로도 나는 여전히 싸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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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에 HP가 급격히 떨어지며 발동한 [불굴]의 강화 효과, 펜던트로 발동한 마력강화의 효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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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태까지의 그 어떤 순간보다, 지금의 내가 더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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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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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을 박차며 쏜살같이 지상의 와이번에게 접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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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번은 발톱을 휘둘러 달려드는 나를 후려치려 했으나, 내 속도가 훨씬 더 빨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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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를 좁힌 뒤, 인벤토리에서 꺼낸 굵은 창을 내질러 와이번의 목 근처에 박아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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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이이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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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에 떠 있는 와이번들에게서 강렬한 마력의 파장이 느껴졌다. 광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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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다른 버프를 사용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피할 수 있었던 공격이다. 지금은 더 쉽게 피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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쏘아진 광선이 지면을 휩쓸었지만, 나는 이미 땅을 박차고 공중으로 떠올라 있는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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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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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에서 숨을 크게 들이쉬며 자세를 고치고, 한손검을 든 채 소드 차지 스킬을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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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진 판정과 함께 몸이 전방으로 쏘아지고, 순식간에 날아올라 있던 와이번에게 접근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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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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닿을락 말락한 애매한 거리, 인벤토리에서 대형 할버드를 꺼내 와이번의 어깻죽지에 박아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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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로 할버드의 자루를 붙잡고 기어올라, 와이번의 등에 올라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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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적 달성 : 비룡의 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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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모를 업적이 달성되며, 보상으로 스탯이 약간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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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번은 등에 올라탄 나를 떨쳐내기 위해 온갖 곡예비행을 시도했으나, 그런 것에 떨어질 내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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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와이번의 어깨에 검과 창을 더 박아넣은 뒤, 더 단단하게 버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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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과광! 콰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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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와이번들이 격추를 위해 광선을 쏘아댔지만, 개중 맞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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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와이번이 잘 날아서인지, 저놈들이 동족을 향해 제대로 쏠 수 없어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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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일단 올라타니까 편하다는 건 알겠다. 슬슬 편하게 버티는 법도 알 것 같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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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번 라이더같은 클래스는 없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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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탈것을 키울 수 있으면 참 편하겠다는 생각을 하며, 인벤토리에서 투척용 무기를 새로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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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요란하게 비행하는 와이번의 등 위에서도, 내 투척 능력의 정확도는 떨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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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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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다른 와이번을 향해, 무기를 집어던져 공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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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메랄드 와이번의 최대 약점은 역시 화력에 비해 방어력이 낮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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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 속도도 생각보다 느려서, 내 최대 특기인 투척 공격으로 몇 번이나 유효타를 입힐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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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슬슬 쓸모를 다한 와이번의 어깨를 크게 도려낸 뒤, [혼신]으로 근력을 강화해 손으로 날개를 뜯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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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아아아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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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명 같은 소리를 내지르며 와이번은 추락, 다른 와이번들도 이미 만신창이가 된 채 지상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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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포션을 들이켜 남은 상처를 치유해가며, 다 죽어가는 와이번들의 숨통을 끊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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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거 아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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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선에 맞아 죽을 뻔 했던 것만 빼면, 완전히 일방적인 싸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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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제대로 실력을 갖추고 난 이후로 대형 몹과의 싸움은 언제나 이런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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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대만 잘못 맞아도 죽지만, 기교랄 게 없는 짐승의 무식한 공격에는 한 대도 안 맞는 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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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물론 이것도 내 기본 스펙이 이놈들을 따라갈 수 있기에 가능한 일이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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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력강화는 진짜 사기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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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결국 불굴과 펜던트를 이용한 마력강화의 더블 버프가 어이없을 정도로 강력한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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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강력한 버프 성능이 마냥 만족스러운 것만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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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큰 전투력 상승을 가져다주는 마력강화의 발동을 완전히 아이템에 의존하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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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력강화 사용 후에 찾아오는 반동도 얕볼 수 없고, 충전식인 탓에 원할 때마다 유연하게 쓸 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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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력강화의 성능을 알아버린 이상, 아예 포기할 수도 없는 노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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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너무 강한 아이템은 여러모로 거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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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하루라도 빨리 자력으로 마력강화를 할 수 있게 되는 수밖에 없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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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반성은 이쯤 하고, 이제 남은 건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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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제 네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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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딱 한 마리, 죽이지 않고 살려둔 와이번을 향해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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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와 발톱을 모두 뜯어버리고, 검과 창으로 바닥에 반쯤 꿰어놓은 에메랄드 와이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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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상태로는 전혀 싸울 수 없겠지만, 주둥아리가 남아 있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아직 하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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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른 쏴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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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번은 내가 눈앞에 당당히 다가오자, 즉시 마력을 끌어모아 광선을 준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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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선 한 방에 죽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조금 전에 검증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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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패가 되어줄 차폐물은 이제 없지만, 마력강화를 사용 중이라 실질 방어력은 조금 전보다 더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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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놈들은 보스몹 판정도 아니고, 잡으라고 있는 놈들도 아니라서 그런지 보상을 따로 안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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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내가 알아서 뭐든 챙겨가야 하지 않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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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합 속성의 고위력 공격이니까, 몇 번 맞다 보면 다양한 내성이 쭉쭉 오르지 않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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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시브 스킬 : 대마법 내성 1레벨을 습득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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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시브 스킬 : 주문 내성 1레벨을 습득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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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어설픈 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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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의 기쁨은 몸이 불타는 고통보다 아득히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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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에 대한 내성 따위가 없음에도, 내가 에메랄드 와이번의 공격을 계속해서 맞아줄 수 있던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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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터득한 두 종류의 내성 스킬은 각각 마법 공격 전반과 주문 속성의 피해를 감소시켜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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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뮤니티에 검색해보니, 성질을 변화시키지 않은 자연 상태의 마력이 가지는 속성을 ‘주문 속성’ 이라고 하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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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에 마법을 이용한 여러 방해 효과 같은 것도 대부분 주문 속성으로 판정된다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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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무속성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 같지만, 시스템이 그렇다면 그냥 그런 거겠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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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이로서 퀘스트 목표인 비취의 영약을 얻는 것에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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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을 뻔했던 것치고는 다른 전리품이 없어서 좀 아쉬운 점도 있지만, 크게 불만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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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나는 딱히 보상을 원해서 여기에 온 게 아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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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엘프 여왕에게 세계수에 대해 묻기 위해, 영혼이란 존재에 대해 무언가 답을 얻기 위해, 그래서 온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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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느끼고 있는 엘레노어의 거대한 존재감의 정체를 알고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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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걸 알아서 뭘 어쩔거냐고 묻는다면 딱히 할 말은 없다. 솔직히 나도 이유를 모르겠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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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언제나처럼 무시하고 지나가면 될 뿐인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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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PC가 NPC처럼 행동하는 게 뭐가 어때서, 한 번 생각을 고쳐먹었다지만 다시 고치면 그만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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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와 공유했던 사념과 기억도, 서로 간에 나누었던 정서적인 교류도, 모두 없던 것으로 치면 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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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예전으로 돌아가는 것뿐이다. 문제가 될 만한 건 아무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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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나는 이토록 순조롭게 성장하고 있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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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취의 영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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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에 들린 영약을 내려다보니 갑자기 기분이 불쾌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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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상이 없어도 괜찮다니,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비효율적인 생각을 하게 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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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히 짜증이 치밀어 올라, 손에 들린 영약을 내던져 버릴까 잠시 고민했지만 이내 그만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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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이건 퀘스트니까. 게다가 에픽 퀘스트니까. 다 깬 퀘스트를 굳이 포기할 이유는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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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 속에서 위태롭게 요동치는 마력을 진정시키며, 나는 던전을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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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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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엘프의 마을로 돌아온 나는 곧바로 여왕에게 접견을 요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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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의 정혼자라는 신분 덕분에 여왕을 만나는 것은 어렵지 않았고, 금방 영약을 전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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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스트 완료 보상은 대단한 것 없이 그냥 경험치와 골드, 그리고 여왕과 말을 섞을 기회가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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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약이 효과가 없다거나, 접견을 거부하면 어쩌나 했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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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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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걱거리는 침대에 등을 기댄 여왕이 나를 노려본다. 여전히 마른 고목 같은 눈동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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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묻고 싶은 것이 있다고 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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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왕의 목소리는 7층에서 들어본 것과는 조금 달랐다. 전보다 한껏 바짝 눌어붙은 목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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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수에 대해 궁금한 게 몇 가지 있어서, 다크엘프 중에서 당신만큼 잘 아는 사람은 없을 거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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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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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질문을 추려서 온 건 아니라서 진짜로 ‘몇 가지’인 건 아니야, 알고 있는 걸 전부 듣고 싶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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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왕은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노인보다는 화석에 가까운 나이 때문인가, 정물처럼 보이는 움직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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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어서, 대뜸 말을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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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레스트 엘프가 가진 왕홀과 나이트 엘프가 가진 왕관에는 세계수에게 간섭할 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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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내가 무엇을 알고 싶어하는지 이미 눈치채고 있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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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힘을 이용하면, 순환하는 혼의 흐름에 간섭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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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곧바로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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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이다. 이제 그대는 세계수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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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자신이 알려줄 수 있는 건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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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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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린 빛을 띤 여왕의 눈동자가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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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왕이 하는 말을 쉽게 믿을 수 없었다. 세계수에 대해 내가 모르던 건 그것뿐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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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아무리 캐물어도 여왕의 대답은 같았다. 그게 전부라고, 세계수에는 어떤 숨겨진 비밀도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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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왕은 그 후, 세계수에 대해 자신이 아는 것을 모조리 말해주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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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개중 새로운 사실은 없었다. 여왕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에르웬이 말해준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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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그렇단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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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숨을 내쉬었다. 영혼에 대해서도, 세계수에 대해서도, 새롭게 알게 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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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무한 기분이다. 나는 고작 경험치 조금과 골드 조금을 위해서 그 고생을 한 거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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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레스트 엘프에게 물어봐도 답은 같을 것이다. 그들도 나도 모르는 비밀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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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장담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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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령 무언가 비밀이 숨겨져 있더라도, 그게 그대와 무슨 상관이지. 이미 세계수는 시들어 힘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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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도 그렇다. 어차피 세계수니 영혼이니 하는 것에 대해 더 알아봤자 뭔가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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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여왕이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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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왕은 세계수에 미련이 있는 거 아니었나, 하이엘프의 화친 제안에 엘레노어를 내주며 응한 이유가 그거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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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든 고목에 무슨 미련이 남았을까, 나는 내 딸을 위한 평화를 원했을 뿐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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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딸은 그런 걸 원하지 않는 것 같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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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전적인 성향은 쉽게 고쳐지지 않지, 그 아이도 전쟁을 겪으면 생각이 바뀔 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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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왕은 그렇게 말하고는, 먼 산을 바라보듯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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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그랬지, 세계수를 독점하고 우리를 내쫓은 포레스트 엘프를 혐오했다. 왕이 되기 전에도, 왕이 된 후에도, 놈들을 쓸어버리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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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를 받은 우리에겐 그럴 자격이 있었다. 놈들을 무찌르고 더 넓은 세상을 향해 나아갈 자격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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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누구보다 오래 살아오며 깨닫게 된 사실이 하나 있다. 전쟁은 결코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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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 보면, 나는 다크엘프의 역사에 대해선 배경 설정 수준으로밖에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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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쏜 화살이건, 얼마나 정당한 화살이건, 그것에 꿰뚫려 죽는 것이 누가 될지는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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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위를 놓은 순간부터, 처음부터 해야 했던 일을 하기 전까지- 모두가 고통받을 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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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왕은 그렇게 말하며, 날카로운 눈으로 나를 째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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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리에 앉아서 대화하기 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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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왕은 분명 나를 원망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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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왕과의 긴 대화를 마치고, 밖으로 나와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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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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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로, 엘프의 왕관과 왕홀을 이용하면 세계수와 영혼의 흐름에 간섭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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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알았다고 해서 뭔가 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내가 뭔 짓을 해도 그것들을 손에 넣을 수는 없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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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애초에 세계수가 시들어 버린 이상, 그것들을 갖고 있다고 해도 뭔가 할 수는 없을 거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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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를 살아있게 하는 것, 내가 감지하고 있는 영혼으로 추측되는 무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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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걸 어떻게 할 생각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어쩐지 허무하다. 나는 정말로 뭘 하고 싶었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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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태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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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스트 보상을 받고 레벨이 하나 올랐다. 에메랄드 와이번을 통해 얻은 새 스킬이 눈에 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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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펙 끝내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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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반중인 층수는 물론이요, 레벨에도 어울리지 않는 스펙을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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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미 솔로 플레이라는 점이 문제가 되지 않을 만큼 강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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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이대로라면 시련의 탑을 클리어하는 것은 무난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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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작정하고 층수를 올리는 것에만 전념한다면 25층까지는 순식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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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궁 지역의 보물 상자도, 각 층에 숨겨져 있는 히든 요소도, 목숨 걸고 찾아다닐 필요까지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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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층에 오랫동안 머물며 단련할 필요도 딱히 없다. 마력 운용 연습이야 언제든 할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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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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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즈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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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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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사람 같아도 결국 다들 NPC다. 퀘스트가 끝나면 그냥 깡통 키오스크로 변해버릴 존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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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련의 탑이 그렇게 설계된 걸 어쩌겠어. 나도 결국 탑의 시스템에 속한 존재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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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이 보낸 초대장을 받고, 탑이 부여한 시스템으로 성장하고, 탑이 정한 방식대로 전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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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로만 가면 된다. 괜히 딴 길로 새지만 않으면 나는 충분히 목표를 이룰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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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버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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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멈춰 서지 않기로 정했잖아, 더는 미련 갖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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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다른 욕망에 그랬던 것처럼, 잘라내고 버리면 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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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면욕도, 식욕도, 성욕도, 모든 것을 거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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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도는 별것도 아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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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나는 엘레노어를 찾아가 말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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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도 정찰대의 일을 도와주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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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대 세력은 지금도 끊임없이 충돌하며 마찰을 벌이고 있다. 이미 전쟁은 차근차근 다가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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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퀘스트 속에서 도전자의 역할은, 당연히 자신이 속한 세력을 도와 우위를 확보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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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방법은 당연히 여러 서브 퀘스트를 수행하는 것, 일정 숫자 이상의 퀘스트를 클리어하면 그걸로 2장은 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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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정한 이상 굼뜨게 움직일 생각은 없다. 최대한 빠르게 퀘스트를 깨고 9층으로 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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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가 먼저 그런 말을 해주다니 무척 기쁘구나. 어디, 상으로 입맞춤이라도 해 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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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일이나 알려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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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음, 오늘따라 평소보다 더 쌀쌀맞구나. 어쩐지 처음 만났을 때가 생각나는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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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겠지, NPC는 원래 이렇게 대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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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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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층의 서브 퀘스트는 대부분 전투와 관련된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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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엘프, 하이엘프, 왕국군의 삼대 세력이 직간접적으로 충돌하는 현장에서 무력을 행사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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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다시 정찰대에 합류함과 동시에, 정석적인 퀘스트 내용대로 이곳저곳에서 날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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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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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척한 쇠구슬이 사족보행형 골렘의 머리를 박살 내고, 그 안에 숨어있던 마법사의 모습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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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족 보행형 골렘은 왕국군의 특수 병기 중 하나로, 내부에 술사가 탑승해 조종하는 특이한 골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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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시간 조종이라는 특징으로 이런저런 정보 수집에 이용되고 있다는데, 어마어마하게 비효율적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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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뭐야……너는 누구냐! 왜 우리를 공격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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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족 마법사는 오른손에 파이어볼을 만들어내며, 나를 향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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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저놈이 보기에는 무척 당혹스러운 상황일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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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엘프 진영을 정찰할 목적으로 들어왔는데, 웬 인간한테 공격받은 상황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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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안 보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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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 어깨에 찬 견장을 가리켰다. 견장에는 다크엘프 정찰대의 문양이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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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사는 문양을 알아보더니 경악했다. 인간이 다크엘프의 편에 붙은 게 놀라운 모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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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인간이고 아니고를 떠나서 남의 땅에 병기를 끌고 들어왔으면 당연히 공격받는 거 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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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그건……맙소사, 다크엘프 쪽에 붙다니. 네놈, 더러운 용병 나부랭이였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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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르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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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행동을 벌일 생각은 없었지만, 네놈 같은 인류의 배신자를 놔둘 수는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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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마법사 눈에는 내가 돈에 눈이 멀어서 이종족의 편을 드는 용병 같은 걸로 보이고 있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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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지금 시점에서는 크게 다를 것도 없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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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사가 소환한 파이어볼이 나를 향해 날아온다. 느껴지는 마력의 양은, 음, 별 거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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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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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 팔을 휘둘러 파이어볼을 쳐냈다. 역시 이놈도 그냥 잡몹 수준밖에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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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긴, 그동안 내가 만났던 NPC들이 유독 강했던 거니까. 애초에 왕국군 NPC들은 다 약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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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 무슨, 네놈 정말 인간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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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벤토리에서 미스릴 완드를 꺼내, 마법사의 머리통을 내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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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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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사는 나름의 방어를 펼쳤지만, 미스릴 완드는 그걸 무시하고 놈을 기절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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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절한 마법사는 대충 버려두고, 사족보행 골렘을 으깬 다음 핵을 뽑아 정찰대에 가져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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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군, 이게 인간족의 새 병기란 말이지……정말 고맙다, 또 한 건 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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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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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냥 가는 거냐? 너무 그러지 말고, 가끔은 같이 식사라도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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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엘프 정찰대원의 권유를 무시하고, 나는 오늘도 내 숙소로 혼자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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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대 세력간의 무력충돌은 점점 잦아지고, 세력의 중심이 되는 NPC들도 점점 바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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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약을 먹고도 병세를 완전히 떨치지 못한 여왕을 대신하고 있는 엘레노어도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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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여, 요즘 너무 바쁘게 돌아다니는 것 아닌가? 도움을 주는 건 고맙지만, 조금 쉬엄쉬엄 하지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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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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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기분이 언짢아 보이는구나. 역시 그대도 나랑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은 게지? 다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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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엘레노어가 이렇게 말을 걸어오는 것을 쳐낼 일도 그렇게 많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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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기는 무슨, 됐으니까 네 일이나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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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는 내 태도 변화를 느끼고 있는 듯했지만, 당장의 일을 처리하는 것이 더 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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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왕의 병세가 길었던 육신의 수명이 슬슬 다해가기 때문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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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그렇다면, 엘레노어는 시간이 지나고 분위기가 전쟁에 가까워질수록 더 바빠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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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한테는 아주 잘 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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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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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빽빽한 퀘스트창을 띄우고, 오늘도 싸우러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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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정하고 진도를 빼기 시작하니, 퀘스트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빠르게 진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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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트 NPC나 히든 보스쯤 되지 않으면 나를 막을 수 있는 건 없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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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벤토리에는 퀘스트 보상이 계속해서 쌓였고, 경험치를 얻으며 레벨과 스펙도 조금씩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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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층을 클리어하고 얻은 [질주] 스킬이나 [약점 간파] 스킬의 레벨도 꽤 성장했고, 전반적인 전투 능력이 유의미하게 향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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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마력의 운용 쪽은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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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력강화를 자력으로 깨우치기는 커녕, 날이 갈수록 불안하게 요동치는 마력을 뜻대로 다루기가 어려워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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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날 때마다 펜던트를 사용해 마력강화를 발동하고, 그 감각을 몸에 익히려고 노력한 지도 벌써 몇 주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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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커들이나 사용하는 최상급 스킬을 8층에서 익히려는 건 너무 과한 욕심인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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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리는 슬슬 대충 알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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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을 하며 마력을 움직이다 보면, 혈관이나 신경계와는 다른 모종의 통로가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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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뮤니티의 자칭 정통파 메이지들의 말에 따르면, 이건 모든 생물이 갖고 있는 마력의 회로라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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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던트를 통해 마력강화를 발동하면, 이 회로를 통해 마력이 흘러들어오는 것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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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흘러들어온 마력은 그대로 다시 방출되는데, 그렇게 방출된 마력은 곧 내 신체를 감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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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력강화를 발동할 때의 ‘쿠르릉’ 하는 천둥소리와, 마력강화가 제공하는 방호력의 원천이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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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로를 통해 방출된 마력이 공기를 떨리게 하고, 몸을 두껍게 감싸며 갑옷처럼 기능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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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흘러들어오는 마력은 펜던트에 충전된 마력일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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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자력으로 마력강화를 하는 방법은 지극히 단순하다. 이 회로를 통해 마력을 순환시키면 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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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미로처럼 복잡한 경로를 마력이 올바르게 통과하게 만드는 것이 너무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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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력은 항상 진정되지 않은 상태로 격하게 움직이고, 제대로 통제되지도 않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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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근육이나 신체의 특정 부위에 마력을 쏟아붓는 거라면 어렵지도 않은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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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우……염병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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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마력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 자체는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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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력이 의지와 마음에 반응하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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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의지와 마음이 모순되어 있기 때문에, 마음이 흔들리고 있기 때문에, 이런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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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내가 더 이상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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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브 퀘스트는 오늘 자로 거의 모두 클리어했다. 이제 다크엘프의 서 2장도 끝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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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엘레노어가 다시 깡통이 될 날이 머지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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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남은 서브 퀘스트를 완료하고, 진영 퀘스트 2장을 마무리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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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남은 건 보상 수령뿐이다. 나는 8층 보스전을 준비하며 숙소에서 혼자 커뮤니티를 들여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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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층의 보스는 8층 초반에 보았던 나무 골렘의 강화판으로, 핵이 따로 없는 특수한 골렘 타입의 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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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석 공략 방식은 화염 속성 마법을 사용한 원거리 포격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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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사 위주로 파티를 꾸린다면 10인 이하의 파티로 공략할 수 있을 만큼 상성을 많이 탄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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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쓸 수 있는 속성 공격은 [라이트닝 차지]의 전기 속성 하나 뿐이기에, 별로 참고할 만한 내용은 못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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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패턴도 나무뿌리를 이용한 속박 정도를 제외하면 대부분 단순하니, 쉽게 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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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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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뮤니티 창을 닫고 나니,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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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특유의 기척으로 엘레노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문은 노크 직후 곧바로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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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아직 안 자고 있을 줄 알았다. 무리해서라도 시간을 내길 잘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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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는 내 떨떠름한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저벅저벅 걸어들어와 침대에 걸터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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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그대가 찾아왔는데, 좀처럼 함께 시간을 보내질 못해서 무척 아쉬웠던 참이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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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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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찰대에서 전해달라는 것도 전해줄 겸 해서, 잠시 이야기하러 와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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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의 손에는 한 쌍의 장갑이 들려 있었다. 아무래도 저게 진영 퀘스트 2장의 최종 보상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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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걸 받는 순간 이곳의 NPC들은 다시 깡통이 된다. 생각보다 이르지만, 상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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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요즘 들어 마음이 편치 않아 보여. 아직도 이유를 말해주기는 힘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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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련의 탑에 관한 이야기, NPC에 관한 이야기를 할 수 있을 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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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재촉하는 건 아니다. 그냥……그대가 많이 괴로워 보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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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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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보여, 누구에게도 말하기 힘든 고민이라면 그럴 만도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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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는 쓰게 웃었다. 그리곤 이내 자신이 방해된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는지, 바로 침대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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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말하기 힘들다고 해서 계속 참는 것도 능사가 아니다. 벽에다 대고서라도 이야기해보면 조금 편해질지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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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는 그렇게 말하고는, 퀘스트 보상인 장갑을 내게 건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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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갑을 받자마자 퀘스트 완료를 알리는 시스템 메시지가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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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동시에, 엘레노어에게서 느껴지던 강렬한 기척이 사그라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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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후, 좋은 밤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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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락에 맞지 않는 말을 하는 엘레노어의 표정에서 생동감이 옅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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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층에서 그랬듯이, 이번에도 평범한 NPC로 돌아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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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에다 대고서라도 이야기해보면 편해질지도 모른다고 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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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니들 때문이잖아, 이 개 같은 깡통 새끼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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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하고 있는 엘레노어에게 생각나는 대로 말을 토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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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히 편해지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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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시련의 탑 9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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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오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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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즈가 전환된 나무 골렘이 괴성을 내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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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굉장한 크기였던 골렘은 이제 그 키만 해도 6미터를 넘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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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혼신 스킬과 마력강화를 함께 사용하고 있는 지금의 내겐 크게 의미가 없는 덩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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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번에 골렘의 머리 위로 도약해서, 날아드는 나무뿌리 공격을 모두 무시하고 보스룸의 천장을 박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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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으로 강화된 각력으로 몸을 날려, 수직으로 떨어지며 힘차게 검을 휘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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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드드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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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렘의 몸에서 무수한 나무뿌리가 솟아나며 사선을 가로막았지만, 내 검을 막아내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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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과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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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갯불이 튀며 골렘의 몸체가 거칠게 양단되고, 핵이 없는 탓에 재생도 하지 못하는 골렘은 그대로 무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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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쪽으로 갈라진 골렘이 쓰러지고, 잠시간의 딜레이와 함께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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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하합니다. 시련의 탑 8층을 최초로 클리어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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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템 메시지는 언제나처럼 요란하게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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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리어 보상 : ‘경험치’, ‘골드’를 획득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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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련의 탑 9층 전이문을 활성화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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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 클리어 보상 : ‘나뭇잎 귀고리’ 를 획득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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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 기여도 보상 : ‘낙엽 팔찌’, ‘경험치’ 를 획득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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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일격 보상 : ‘고목나무 활’ 을 획득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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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 클리어 보상과 최후의 일격 보상은 서로 똑같았고, 귀고리와 팔찌엔 둘 다 마법사 착용 제한이 걸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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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은 대강 쓸 줄도 알고 착용 제한도 없었지만, 원거리 공격이 필요하면 그냥 쇠구슬을 던지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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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운 보스라서 그런가, 보상이 필드 보스보다도 실속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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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도전자가 없어서 경매장에 올릴 수도 없고, 액세서리 종류라서 방패막이용으로 쓸 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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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이제 와서 이런 걸로 크게 성장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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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상점에다 팔아야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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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벤토리를 닫고, 9층으로 향하는 전이문을 활성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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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층의 배경 역시 7층과 8층에서부터 그대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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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층은 아직 삼대 세력이 충돌을 일으키기 전, 8층은 삼대 세력이 본격적으로 마찰을 빚기 시작한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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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번 9층은 삼대 세력간에 기어이 전쟁이 터진 시간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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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인지, 전이문을 넘어서 도착한 엘프들의 대산림은 예전에 보던 것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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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나무의 숫자가 크게 줄었다. 벌목된 게 아니라,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꺾이고 부러진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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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불길 속에서 불타고 박살 나며 이런 꼴이 된 거겠지. 일단 다크엘프 마을로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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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프퀘 9층 전역 지도.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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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하게 넘어갔던 8층 때와 다르게, 이번에는 제대로 커뮤니티에서 9층 지도를 찾아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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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도 감각을 헤집어놓는 안개에 가로막히면 어쩌나 했지만, 다행히 평범하게 길을 찾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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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다크엘프 마을의 입구에 도착했을 때, 나는 크게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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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엘프 마을은 더 이상 마을이라고 보기 힘든 모습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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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로 높이 벽을 쌓고, 감시탑과 경비용 골렘을 잔뜩 배치했다. 거기에 지형도 뭔가 바뀐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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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이미 마을이 아니라 요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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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뮤니티에 올라와 있는 스크린샷으로 본 것보다 훨씬 규모가 큰데, 에픽 퀘스트 때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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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공성전에 대한 지식이 있는 건 아니지만, 얼핏 봐도 난공불락으로 보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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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 누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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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의 겉모습을 천천히 살피고 있자, 성벽 위에서 누군가 크게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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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를 밝히지 않으면 쏘겠다! 너는 누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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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개를 들어 얼굴을 보여주었다. 아마 마을의 다크엘프 중에서 내 얼굴을 모르는 이는 없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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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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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벽 위의 다크엘프는 활시위를 붙잡은 채, 인상 쓰며 나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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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는 몇 번 표정을 바꾸었다. 거리가 멀어서 정확히 무슨 표정을 짓는지는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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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얼핏 보기에, 마지막에 지은 표정은 분명 무언가를 결심한 것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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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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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나를 향해 화살이 날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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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7층에서 리즈멜을 통해 다크엘프의 검술을 습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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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검술은 분명 훌륭했다. 하지만 다크엘프도 근본은 엘프, 이들의 가장 뛰어난 기술은 결국 궁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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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도 검술을 배우고 나면, 겸사겸사 궁술까지 익혀볼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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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다크엘프들이 가르쳐 주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냥 배울 수 없는 기술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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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력 친화력을 태생적으로 타고나듯, 엘프들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활을 다룰 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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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가르쳐 주려 한다고 해서 가르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고, 배우고 싶다고 해서 배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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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을 무시하는 명중률과, 이치를 무시하는 궤도를 갖는 엘프의 화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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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마력감지를 개화하고 초월적인 감각을 손에 넣은 내 앞에서는 그렇게 대단한 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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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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쏜살같이 날아오던 화살을 잡아챘다. 반쯤 본능에 따라 잡아놓고도 이게 뭔가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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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다크엘프가 나한테 화살을 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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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진행 중이라 예민해져 있는 건 이해하지만, 내 얼굴과 견장의 마크를 못 알아보는 건 아닐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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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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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우연히 나를 모르는 극소수의 다크엘프가 보초로 배치되어 있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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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쿵, 쿵, 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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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를 지키고 있는 골렘들이 움직인다. 무거운 발소리를 내며 내 쪽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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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뿐만이 아니라, 성벽에 있던 다크엘프 병사들이 일제히 무기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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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아무래도 보통 상황이 아닌 것 같다. 확실하게 나를 적으로 인식한 모양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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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너희 나 몰라? 벌써 까먹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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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가 없어서 그렇게 물었지만, 돌아오는 것은 화살 세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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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디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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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아드는 화실을 마력감지와 직감에 의존해 받아치고 막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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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한편으로 골렘들이 나를 향해 접근하고 있다. 이거 부숴도 되는 건가, 나중에 지장이 생기진 않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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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렘을 상대할 때 좋은 둔기를 인벤토리에서 꺼내고, 긴장을 끌어올리며 대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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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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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골렘은 내게 접근만 하고는, 공격하려는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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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또 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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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벽 위의 다크엘프들도 조금씩 웅성거리고 있었다. 나를 뒤늦게 알아본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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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벽 쪽으로 다시 다가가자, 다크엘프들은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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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춰라, 움직이면 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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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을 모르니까 일단 시키는 대로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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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순순히 멈추자, 다크엘프들은 저들끼리 쑥덕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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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얼마 후, 다크엘프 한 명이 폴짝 성벽에서 뛰어내려 내 앞에 착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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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차림으로 검 두 자루를 들고 나타난 것은, 8층 때와 또 살짝 달라진 모습의 리즈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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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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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즈멜은 내게 들고 나온 수련검을 던졌다. 나는 그것을 받아들고, 일단 자세를 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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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나를 못 알아보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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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선으로 내리그어진 검을 그대로 맞받아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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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막혔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찔러드는 공격에, 검을 맞대며 밀어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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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검로를 향해 힘을 실으며, 서로의 목을 겨누기 위한 근거리에서의 힘 싸움. 우위를 점하기는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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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신] 스킬을 이용해 순간적으로 근력을 증폭시키면 그만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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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 오히려 손에 살짝 힘을 빼고, 균형이 무너지지 않게끔 유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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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중, 리즈멜의 빈손이 검신을 부여잡고 위로 젖히려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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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그 동작에 맞추어 검신 끝을 잡으며 힘 싸움에 대응하고, 동시에 몸을 옆으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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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잡이를 잡고 있던 손을 놓고, 검신 끝을 쥔 손을 주축으로 자세를 바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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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신을 잡고, 검의 폼멜 부분을 둔기로 삼아 머리를 노리는 타격기. 여기서 처음 배운 기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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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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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즈멜은 변칙적인 공격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가볍게 방어하며, 검을 고쳐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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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술을 처음 가르쳐 줬을 때, 함께 가르쳐 주었던 대응 수단과 반격기를 그대로 선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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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움직이는 리즈멜의 동작이 조금 느려졌다는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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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을 한 뒤로는 정찰대 임무에서 한발 물러났다고 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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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전투에 맞지 않는 차림을 한 걸 보면, 오랜만에 검을 들고 나온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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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같지 않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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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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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뎌진 리즈멜의 검기를 받아내며, 빈틈을 찔러 검을 멀리 쳐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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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을 놓친 리즈멜은 당황하지 않고, 그대로 손을 툭툭 털며 얕게 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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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는 너는 너무 변한 게 없잖아, 애송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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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즈멜은 그렇게 말하며 성벽 쪽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나를 겨누던 활이 모두 거두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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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야 무슨 상황이었는지 알겠다. 7층에서 8층 사이엔 20년의 세월 차이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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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8층과 9층 사이의 시간 차이는 얼마나 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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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형조차 바꿔가며 쌓아올린 저 굳건한 요새가 몇 년 정도로 만들어질 것 같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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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엘프들이 나를 알아보고도, 망설이다 활을 쐈어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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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년이나 지났는데, 어떻게 예전 모습 그대로인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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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하는 엘프에게도 결코 짧지 않은 시간, 백 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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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가 없다,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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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부딪힌 검에는 분명히 시간이 묻어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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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NPC에게 존재하는 배경 설정 따위라고 치부하기 힘들 정도의 시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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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층은 시작부터 만만하지 않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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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꿈 같은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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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엘프는 기본적으로 인간에게 우호적이지만, 9층에서는 조금 이야기가 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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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대 세력간의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된 이후이니, 다크엘프들도 이미 인간들과 몇 번이나 충돌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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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을 좋아하고 귀여워하는 성질은 그대로지만, 인간이 적이라는 것은 확실하게 인지하고 있는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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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 때문인지, ‘적이 아니라는 것이 확실한 인간’ 이 나타나자 다크엘프들은 무척 기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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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세상에, 너 정말 그 애니? 그동안 뭐 하고 있다가 이제야 온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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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심해, 아직 본인인지 모르잖아! 인간은 백 년이면 죽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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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 백 년보다 조금 더 오래 사는 인간이 있을 수도 있잖아. 그런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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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보고 마냥 좋아하는 다크엘프가 절반, 그리고 미심쩍게 여기는 다크엘프가 또 절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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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후자의 절반은 미심쩍어하면서도 슬금슬금 가까이 오려고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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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봐도 이상할 정도로 인간을 좋아하는 종족이다. 인간과 전쟁 중이라는 기분은 또 어떨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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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소문도 없이 떠나서 백 년이나 안 나타나길래, 당연히 죽은 줄 알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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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요새 안으로 데려온 리즈멜은 헛웃음을 지으며 그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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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는 게 이상할 정도는 아직 아니지만, 보통 인간족은 이 정도면 다 늙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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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이 부분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무척 고민이었는데, 아직 마땅히 생각난 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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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탑처럼 깡통 NPC가 대부분이었다면 이런 고민을 할 필요도 없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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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나만 시간 여행자가 된 기분을 느껴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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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세대 도전자들도 이런 느낌으로 탑을 올랐을까, 아니면 내가 있는 탑이 특별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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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은 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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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즈멜의 물음에 적당히 대답하고, 마력을 흩뿌려 요새 안쪽의 환경을 훑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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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에서 볼 때도 난공불락의 요새처럼 보였는데, 안에서 자세히 살펴보니 더 장난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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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뭐 드래곤이라도 쳐들어오지 않는 한은 절대 안 뚫릴 것 같다. 수준이 좀 과한 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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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 네가 보통 애송이가 아니긴 해. 보나 마나 백 년 동안 위험한 짓만 골라서 하다가, 어떻게 된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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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즈멜은 전혀 늙지 않고 나타난 내 모습에 크게 의문을 가지지 않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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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불안불안한 검술도 마력도 예전이랑 전혀 달라진 게 없어, 그건 가짜가 흉내 낼 수 있는 게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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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년동안 그대로면 더 이상한 거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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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은 천 년을 살아도 변치 않을 때가 있는 법이야. 특히나, 길을 잃은 자의 방황은 쉽게 멈출 수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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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즈멜은 그렇게 말하고는, 대뜸 내게 가까이 다가와 가슴에 손을 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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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네 덕분에 많은 인간족을 만나볼 수 있었어. 그러고 나니까, 네가 얼마나 유별난지도 알겠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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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7층에서 리즈멜과 그런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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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인간을 만날 수 있게 해주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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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그 끝은 전쟁이 되었지만, 엘레노어의 계획을 도우며 이뤄낸 약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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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뭐, 딱히- 인간족이나, 너 같은 거, 별로 안 좋아하지만……네 그런 점이 나을 수 있었으면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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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이십년 동안 많은 인간을 보고 겪어온 리즈멜은, 나의 병든 부분을 잊지 않고- 이 말을 오래도록 준비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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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로는 어렵겠지만, 엘레노어라면 할 수 있겠지. 사랑하는 사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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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첫눈에 반해서 어쩌고 하던 그거 다 구라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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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이십년동안 믿고 있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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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내가 아니라 엘레노어 잘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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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거나, 요새 안으로 들어왔으니 빠르게 퀘스트 진도를 빼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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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엘프들의 무수한 악수의 요청을 모두 쳐내고, 곧바로 엘레노어를 만나러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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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즈멜도 처음부터 나를 엘레노어에게 데려갈 생각이었던 모양이라, 시간 낭비를 많이 줄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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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엘프 마을, 르우엘의 그루터기 전체가 요새화된 만큼 왕족이 지내는 거주공간도 무척 거대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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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그냥 다 똑같은 나무 아파트 안에서 살았지만, 이제는 제대로 성 같은 것이 생긴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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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에는 따로 경비 병력이 있었고, 나는 순조롭게 그걸 통과해 엘레노어를 마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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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직 꿈을 꾸고 있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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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는 나를 보자마자 대뜸 그런 말을 내뱉었다. 놀라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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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왕이 8층에서 골골거리던 것은 당연히 기억하고 있지만, 9층의 퀘스트를 생각해보면 당연히 나았을 줄 알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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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엘프 여왕의 상징, 세계수에 간섭할 힘이 있다는 왕관은 엘레노어의 머리 위에 얹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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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선명한 꿈은 또 처음인데……환상 마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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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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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맙소사, 이젠 말까지 하는군. 만질 수도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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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는 여전히 뜬구름 잡는 소리를 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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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드러운 손이 내 뺨을 쓸었다. 가만히 두자, 손은 목선을 타고 내려가 가슴에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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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더 천천히 내려가, 내 허벅지에 닿더니 점점 안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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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미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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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게 둘 수는 없지, 백 년이 지났다더니 이 년은 변한 게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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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어, 정말 그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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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손을 확 쳐내자, 엘레노어는 그제야 눈앞의 광경이 진짜라는 것을 알아차린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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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백 년이나 지났는데, 인간족인 그대가 어떻게? 정말로 그대인가? 다시 돌아온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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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을 무엇보다 크게 뒤흔드는 상대, 역시 엘레노어를 상대하는 건 거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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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고 설명을 뱉을 수도 있었지만, 나는 일부러 가만히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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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가 알아서 진정하기까지, 그저 가만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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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왕이 된 엘레노어가 자리하고 있는 알현실은 무척 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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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성이기도 하고, 여왕이기도 하니까 이런 곳에 있는 모양인데, 공간 낭비라는 생각밖에 안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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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하라고 할만한 이들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옥좌와 커다란 회의용 테이블이 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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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말로 공간이 차고 넘친다. 그런데 엘레노어는 이 공간을 잘 나눠 쓸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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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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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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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두니 진정을 하기는커녕, 나한테 매미처럼 바짝 달라붙어서 떨어질 생각을 안 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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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다크엘프들도 날 보고 막 접근해 오긴 했지만, 이건 너무 심하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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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닿아 있지 않으면 실감이 안 난단 말이다. 그대가 정말 내 곁에 있다는 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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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인상 쓰며 달라붙어 있는 엘레노어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뭔가 상태가 안 좋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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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른 고목을 연상시키던 전 여왕과 닮은 눈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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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스럽게 여왕이 내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엘레노어도 전쟁을 겪으면 바뀔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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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혼을 깰 명분이 필요할 때 나타나서는, 내가 원하는 대로 약혼을 깨 주고 훌쩍 떠나버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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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일어나지 않을까 불안한 시기에 나타나서는, 우리를 한껏 돕고 또 훌쩍 사라져버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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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제는 내가 가장 힘들고 괴로울 시기에, 그때와 똑같은 모습으로 나타났지 않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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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어깨를 꼭 끌어안은 엘레노어의 팔이 살짝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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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까지는 우연이라고 쳐도, 이 정도면 보고도 못 믿는 게 당연하지 않으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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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도 그렇겠지 싶었다. 나는 그냥 퀘스트 라인을 따라왔을 뿐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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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엘레노어의 중요한 순간마다 나타나는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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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템이 엘레노어의 중요한 순간만을 골라서 시련의 탑에 배치한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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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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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PC의 시점에서 보는 도전자는 너무나 불가사의하고, 신비롭고, 굉장한 존재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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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엘레노어가 내게 강한 호감을 보이는 것도, 시스템이 정해놓은 결정 사항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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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후, 어떻게 생긴 것까지 딱 내 이상형인지 모르겠다. 그대라는 사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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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시스템에 의해 정해진 것일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배경 설정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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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어도 내가 들여다보았던 엘레노어의 과거는, 리즈멜의 검에서 느껴졌던 세월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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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게,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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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생생해서, 도저히 창작된 배경처럼은 보이지 않았는데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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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는 그러고도 한동안 떨어질 생각을 하질 않았고, 결국 내가 억지로 떨쳐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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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도 정말 너무하구나, 아직 백 년 치를 보충하기까지는 한참 남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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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백 년 동안 붙어 있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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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한 거 아닌가, 정혼자가 백 년 동안 얼굴도 안 비춰서 쓸쓸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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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말하는 엘레노어는 음흉한 표정으로 웃으며 제 아랫배를 툭툭 건드렸다. 또 지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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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언제나처럼 무시하고, 에픽 퀘스트 진행을 위해 뭔가 도울 것이 없느냐고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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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상황에 내가 도울 일이라면 뻔하지, 원래 퀘스트 라인도 이런 식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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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선택한 진영의 지도자에게 임무를 받고, 8층에서처럼 전선에 나서 활약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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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물론 있지. 오직 그대만 해줄 수 있는 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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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도 결국 퀘스트를 위해 존재하는 NPC다. 결국 흐름은 이렇게 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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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데없이 오래 붙어있지 말자, 이번에도 빠르게 퀘스트를 깨고 보상만 받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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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엘레노어의 입에서 나온 말은 예정된 퀘스트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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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랑 동침해 주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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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는 괜찮다, 문제는 지금 내 눈앞에 떠오른 시스템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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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픽 : 다크엘프의 서 - 여왕의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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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의 헛소리가 그대로 퀘스트로 등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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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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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무슨 지랄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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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리베르타스의 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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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내가 에픽 퀘스트에 파악한 것을 정리하자면 이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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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에픽 퀘스트는 고도의 자아를 가진 다수의 엘리트 NPC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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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 에픽 퀘스트는 그 원본이 되는 퀘스트와 큰 진행 방식은 다르지 않으나, 난이도가 매우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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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 에픽 퀘스트의 보상은 시스템이 퀘스트의 진행 과정에 따라 다르게 지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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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 가지 특징을 종합해서 한 줄로 평가하자면, 자유도가 높다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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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PC들의 자아가 보통보다 강한 만큼, 내 행동 하나하나가 다른 반응과 서브 퀘스트를 낳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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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보면 에픽이라는 단어에 굉장히 부합한다고도 할 수 있겠다. 말 그대로 서사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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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대 세력의 갈등 속에서 태어나는 서사에 내가 직접 개입하는 형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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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층의 광경이 커뮤니티에서 보던 것과 여러 차이가 있는 것도, 내가 이들의 서사에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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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지금 눈앞에 나타난 이 퀘스트는, 아마 내 존재가 엘레노어의 서사와 밀접한 연관이 있기 때문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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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픽 : 다크엘프의 서 - 여왕의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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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 : 백 년간의 전쟁 속에서 다크엘프는 점점 열세에 몰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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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도 성장도 빠른 인간족의 왕국은 백 년 전과는 비교되지 않을 만큼 강해졌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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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인간을 좋아하는 다크엘프들이 왕국군과의 싸움에서 망설임을 얻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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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오만하고 건방진 하이엘프들도 호전적으로 덤벼 오고 있으니, 다크엘프들에겐 쉴 시간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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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을 지휘하며, 모든 것을 책임지고 있는 여왕에겐 더욱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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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왕의 어깨에 지워진 짐을 덜어줄 수 있는 것은 당신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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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왕의 명령을 수행하여, 그녀를 도우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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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스트 목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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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왕의 명령을 완수하기(진행 상황에 따라 변경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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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깨 왔던 어떤 퀘스트보다 그 내용에 군더더기가 없었다. 목표가 명령 완수 하나뿐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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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9층의 진영 퀘스트 내용은 원래 이렇다. 그 명령이 다양한 서브 퀘스트로 분화되어서 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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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엘레노어가 내게 내린 명령은 어딜 봐도 ‘동침’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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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퀘스트 목표가 ‘엘레노어와 뜨거운 밤 보내기’ 이딴 식으로 나와 있는 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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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정황이나 맥락을 보면 그게 완수 조건일 것 같단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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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 정도로 왜 그러느냐! 진짜 딱 손만 잡고 잔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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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퍽이나 그렇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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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손잡고 자다 보면, 다른 곳도 잡을 수 있고 그런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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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나 다를까, 엘레노어는 미친 소리를 하고 있었다. 보상이 뭐건 간에 이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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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엘레노어는 매력적이다. 다크엘프들에 대부분 그렇지만, 내가 눈으로 본 사람 중에서 가장 섹시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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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안 되는 거다. 성욕을 떨치지 못하고 육체관계를 맺고 나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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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7층에서 다소의 정신적인 교감을 나눈 것만으로도 크게 흔들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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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에 육체적인 교감까지 더해지고 나면, 엘레노어가 깡통이 된 이후를 견딜 수 없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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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곁잠만으로 괜찮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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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든 엘레노어의 바람을 바꿔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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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은 엘레노어가 왜 대뜸 이런 소리를 하는지 알아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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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차례 기억을 공유하고 사념을 나누었기 때문일까, 나는 엘레노어의 눈만 봐도 대강의 감정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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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엘레노어의 눈은 어딘가 이상했다. 자유를 갈망하며 반짝이고 있던 별빛이 크게 사그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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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잠자리에 들기가 무척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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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는 나와 한참 간 씨름한 뒤에야, 간신히 진심을 말해주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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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가 떠난 이후, 무척 오래도록 전쟁을 지켜보았다. 숲쟁이 놈들, 그리고 인간족 왕국, 많이도 죽고 죽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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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혼을 깨고 숲쟁이 놈들과 싸울 생각을 할 때는, 이런 일이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어렸던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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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든 눈을 감으면 망자들의 비명이 들려, 지난 백 년간 스러져간 동포들의 목소리가- 한순간도 그치질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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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는 전대 여왕이 말했던 것처럼, 전쟁을 겪으며 무척이나 괴로워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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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당한 싸움, 정당한 보복, 그런 문제가 아니었어. 잔인함을 잔인함으로 되갚으려 한 대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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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전대 여왕과 똑같은 언어를 그 입으로 자아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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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식이야 어쨌든, 대화로 풀려고 했던 어머니의 방식은 틀리지 않았던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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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당함과는 관계없이 활시위를 놓은 순간, 함께 앉아 대화하기 전까지 모두가 고통받을 뿐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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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고통의 크기는 내가 감히 헤아릴 수 없었다. 백 년이라니, 내 평생을 쏟아야 간신히 가늠할 수 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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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제 욕망이 바라는 대로, 마음이 시키는 대로 행동하던, 그 엘레노어가 이렇게 되기까지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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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걸음 한 번으로 그냥 지나쳐 버린 시간이- 엘레노어의 눈에 깃든 별빛을 흐리게 한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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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그렇다고 그 재수 없는 왕자 놈이랑 혼인했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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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후회하는 거 아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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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놈이랑 맺어졌으면, 이렇게 그대와 다시 만나 이야기하는 일도 없었을 거 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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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는 천천히 나와 눈을 맞추었다. 흐려졌던 별빛이 조금은 다시 돌아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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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이십 년 전부터, 그대와 함께하는 시간은 언제나 특별했어. 쉬이 설명할 수 있는 느낌은 아니다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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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태여 비유하자면, 생기가 돈다고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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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가 없는 동안은 항상 죽어 있는 듯했고, 그대와 함께 있는 동안은 다시 살아난 기분이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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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의 그 말을 들은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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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후, 너무 이상한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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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 보면, 엘레노어는 처음부터 그랬다. 어렴풋한 기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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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뭘 그렇게 멍하니 바라보고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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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혼욕탕에서, 엘레노어는 내가 퀘스트 창을 보고 있다는 걸 인식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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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NPC들은 눈앞에서 대놓고 시스템 창을 보고 있어도 그걸 인식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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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를 보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고, 그냥 혼자서 넋 놓고 있는 것처럼 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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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엘레노어는 내가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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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뿐만이 아니다. 엘레노어는 나이트 엘프의 비술로 내 기억을 들여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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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 간접적으로 시련의 탑의 존재를 엿보았고, 내가 모종의 시련에 도전하고 있다는 것도 인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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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절대 평범한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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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벤토리를 이용해 상식을 벗어난 전투법을 써도, 공간 마법 같은 것으로 인식하는 게 NPC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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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력도 못 다루는 놈이 허공에서 마구 무기를 뽑아내 휘둘러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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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세데스와의 싸움에서는 마력 운용을 깨우친 상태였기에, 공간 마법이라고 생각해도 이상하지 않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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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이름도 기억이 안 나는 하이엘프 기사 놈과 처음 싸울 때는, 의문을 가질 만도 했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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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내 전법을 보며, 무기를 얼마냐 많이 다루는 거냐고만 지껄여댔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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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력 운용이나 마법에 대해 무지한 에르웬 정도만이 ‘아이템 박스겠거니’ 하고 넘어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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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픽 퀘스트는 고도의 자아를 가진 다수의 엘리트 NPC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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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정리한 에픽 퀘스트의 특징은 틀렸을지도 모른다. 아니, 확실하게 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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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층에서 에픽 퀘스트의 시작을 끊은 건 에르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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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즈멜이야 그렇다 쳐도, 에르웬은 절대로 엘리트 NPC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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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흔한 대장간 NPC일 뿐인데도, 엘리트 NPC 이상의 자아를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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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에픽 퀘스트가 완료되면, 이들은 모두 원본대로 자아를 상실하고 깡통이 되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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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에픽 퀘스트가 모든 NPC들에게 고도의 자아를 부여한다고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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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원래부터 인간에 가까운 면을 갖고 있는 최상급 엘리트 NPC는 어떻게 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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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는 퀘스트가 완료된 이후에도 그나마 덜 기계적인- 불쾌한 골짜기 수준의 반응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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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엘레노어가 에픽 퀘스트를 통해 더 강한 자아를 얻은 결과가, 시스템의 인식인 거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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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여, 왜 그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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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어떤 의미인지는 모르겠다. 그냥 깡통이 조금 덜 깡통이 된다고 달라지는 건 없을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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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만약 엘레노어가 시스템의 영향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운 것이라면- 털어놓을 수 있는 거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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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동안 시스템에 대해 털어놓지 못했던 건 단순히 심리적인 이유만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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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털어놓아 봤자 NPC들은 듣지도 못하니까. 오픈 커뮤니티에서도 그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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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걍 퀘스트 NPC랑 말할때는 롤플레잉 한다고 생각하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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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 가까운 반응을 보이는 NPC를 상대로, 시련의 탑에 대한 주제를 막 말하면 안 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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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템에 존재하는 모종의 차단책으로, 탑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NPC는 모두 똑같은 반응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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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듣거나, 본인이 이해할 수 있는 개념으로 치환하여 듣거나, 이야기 자체를 돌리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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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런 방식으로 넘길 수 없을 정도로 이야기를 계속 이어나간다면, NPC의 설정이 리셋되어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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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셋되는 설정의 정확한 범위는 모르지만, 결코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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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엘레노어를 바라보았다. 엘레노어도 나를 바라보았다. 눈이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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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맞는 건지 모르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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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스트 창을 가볍게 흘겨보며, 나는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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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손만 잡고 자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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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동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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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엘레노어는 생각보다 선을 잘 지키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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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도때도 없이 추행을 시도하고, 동침하자며 몸을 들이밀긴 하지만- 내가 거절하면 결국 포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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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정말로 손만 잡고 자자고 약속한 이상, 이상한 짓을 시도하지는 않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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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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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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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확신까지는 없는데, 어차피 엘레노어가 개짓거리를 하려고 하면 힘으로 막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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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침 제의 자체도 불면증을 해결해 보고자 한 것이었으니, 괜한 걱정을 할 필요는 없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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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아직 이런 걱정을 할 때는 아니다. 잠은 밤에 자는 거고, 지금은 아직 한창 낮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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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에는 엘레노어에게 삼대 세력이 얽힌 전쟁의 상황에 대해 대충 설명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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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백 년간 무시무시한 속도로 발전한 인간족 왕국군이 영토 회복을 내세우며 엘프에게 선전포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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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기로는 엘프가 자리 잡은 대수림이 인간족 왕국의 영토에 포함되어 있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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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그간 실효지배가 안 되어 있는 상황이었고, 이번 기회에 엘프를 몰아내고 숲을 차지할 생각이라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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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하이엘프의 대산림으로 향하기 위해서는 다크엘프의 영역을 거쳐야 한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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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왕국군은 하이엘프와 다크엘프를 싸잡아 자신들의 영토를 점거하고 있는 이종족 세력으로 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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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엘프와 하이엘프를 따로 구분하지 않고 함께 치겠다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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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지리상 먼저 공격받는 것은 당연히 다크엘프, 상황을 보면 엘프끼리 연합해서 왕국군을 막아야 할 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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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미친 혐성 개씹좆프 새끼들은 연합은 커녕, 뜬금없이 다크엘프를 향해 선전포고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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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엘프만 영문도 모른 채, 선전포고 없이 양면전쟁을 치르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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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명분은 우리 쪽에서 먼저 주었지, 선전포고만 하지 않았을 뿐 전쟁은 그전부터 시작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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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겠지, 일방적으로 공격받은 거라면 엘레노어가 이렇게까지 닳아빠지진 않았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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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래도 숲쟁이 놈들의 선전포고는 조금……이상한 점이 많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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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백 년간의 전쟁이니 이래저래 엉킨 지점이 많으리라. 이 정도면 원래의 명분은 아무래도 상관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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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엘프라면 모를까 인간 왕국이 백 년이나 전쟁을 계속하고 있다는 점부터 평범하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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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엘프 진영을 두 쪽에서 다굴하는 형태가 아니라, 셋이서 엎치락뒤치락 싸우고 있는 모양이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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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싸우러 갈 생각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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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가 내 생각을 바로 눈치채고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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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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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층의 왕국군은 백 년간의 발전이 쌓인 덕택에 7층, 8층 이상으로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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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중에는 당연히 엘레노어나 메르세데스 급으로 강한 전력이 존재할 것이다. 아니면 균형이 안 맞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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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성장 수준은 충분하기에, 꼭 그 전력과 맞서고 싶은 것까지는 아니지만- 싸우지 않을 이유도 없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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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년 전보다 더 강해졌을 그대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게 참 우습지만, 죽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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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몸에 밴 피 냄새를 좋아하던 엘레노어도, 백 년이 지나니 이런 소리를 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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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이 생각해보면, 이것도 웃기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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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백 년간 이어졌을지라도, 전투가 백 년간 이어지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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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요새 외에도 다크엘프의 영역은 더 있고, 그 각각의 영역에서 국지전 같은 게 드문드문 벌어지고 있다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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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적들의 최종 목표는 결국 이 요새를 함락시키는 거니까, 뭐가 됐든 이쪽으로 온다는 건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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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정찰대의 역할은 그들을 한 발 먼저 발견해서 받아치는 것. 나도 그 역할을 함께 맡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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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에서 조금 벗어나, 안개에 방해받지 않는 구역까지 나오자 곧바로 적들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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깃발을 보니 왕국군이 틀림없다. 그런데 그 구성 인원이 어쩐지 이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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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저거, 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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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데드인지 몬스터인지, 하여튼 사람은 아닌 것들이 군대 사이에 끼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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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따져보자면 사람보다 몬스터가 더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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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진에 마법사가 몇몇 보이는데, 아무래도 특수한 방식으로 조종하거나 사역하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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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긴, 백 년 동안 전쟁을 이어오려면 인적 자원을 아낄 방법을 찾아야 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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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스터를 잡아다가 사역해서 전장에 내보내면, 병사뿐만이 아니라 병기까지 아낄 수 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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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사는 얼마나 되려나……어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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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일단 적의 숫자를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 가볍게 마력을 퍼트려 감지를 시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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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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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웬 이상한 소리와 함께 감지가 차단되었다. 동시에 몬스터 하나가 괴성을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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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에으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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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지를 차단하는 모종의 수단을 마련해 둔 건가. 기습 공격은 글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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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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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국군의 마법사가 정체불명의 주문 같은 것을 외치자, 몬스터들의 기세가 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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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존재를 인지하고 전투태세로 들어간 거겠지. 좋아, 어디 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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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과 방패를 장착하고 앞으로 나섰다. 몬스터 부대는 나를 발견하자마자 달려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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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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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볍게 발길질해 선두에 선 몬스터를 멀리 걷어차 날려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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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아간 몬스터는 그대로 나무에 여러 번 부딪혀 나가떨어졌지만, 다른 몬스터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덤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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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프가 아니라 인간이 나타나 몬스터를 날려버렸는데, 멈추려는 기색이 보이질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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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사들이 상황 인식을 못 했거나, 인식했지만 몬스터를 멈추지 못하거나, 뭐 그런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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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라길래 뭔가 전략적인 움직임을 취하지 않을까 살짝 기대했는데, 그건 아닌 모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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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촤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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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달려드는 몬스터의 목을 단번에 베어버리며, 방패로 밀쳐 진영을 뚫고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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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다대일의 싸움, 받아치기보다는 이렇게 파고들어 섬멸하는 게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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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레벨이 통 오르지 않고 있는데, 오래간만에 잔뜩 사냥해 보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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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은 이번에도 안 올랐다. 역시 층수보다 레벨이 너무 높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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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스터 부대의 숫자가 백을 훌쩍 넘겼는데도 이 모양이니, 한동안 레벨업은 기대하지 않는 게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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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업은 잘 안 되고 있어도, 개인적인 단련으로도 조금씩 스펙을 올리고 있으니까 큰 상관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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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몬스터를 쓸어버리고 난 뒤에는, 요새로 돌아와 엘레노어와의 동침 준비- 이렇게 말하니까 좀 이상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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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잘 준비를 했다. 일단 몬스터의 피를 잔뜩 뒤집어쓰고 왔으니 목욕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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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상황이지만 다크엘프의 욕탕은 여전히 훌륭했다. 오히려 예전보다 더 좋아진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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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탕이 전체적으로 커진데다가, 탕에 약초 같은 걸 풀어놓은 탓인지 피로가 풀리는 느낌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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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다크엘프의 혼욕 문화도 여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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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족을 좋아하는 다크엘프들이 알몸이라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막 다가와서 여러모로 곤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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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그렇게 목욕을 마치고, 마침내 성 안의 침실에서 엘레노어와 함께 침대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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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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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승낙하긴 했는데, 이거 정말로 괜찮은 거 맞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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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가 저런 네글리제 차림만 아니었어도 별로 거리낄 건 없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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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그대도 피곤할 텐데 어서 누워라. 내 침대는 무척 편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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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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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겁먹지 말고, 정말로 손만 잡고 잘 거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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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의 손이 나를 확 끌어당겼다. 나는 결국 나란히 누워, 천장을 바라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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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만 잡고 잔다는 말이 진짜인지는 모르겠지만, 엘레노어는 눕자마자 내 손을 잡고 깍지를 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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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밤중에 습격이라도 일어나면 곧장 일어나야 한다, 남녀사이의 일을 치를 시간도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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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긴, 전시 상황에 군주가 느긋하게 그러고 있을 시간은 좀처럼 없겠지. 아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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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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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가 손짓하자 방 안의 조명이 모두 꺼졌다. 나도 순순히 누운 채로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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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감긴 했지만, 이대로 그냥 잘 생각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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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로 명상이라도 하며 마력을 굴릴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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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로 딱 손만 잡고 내 옆에 누운 엘레노어는 새근새근 숨을 내쉬더니, 작은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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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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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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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정말 인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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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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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백 년밖에 못 사는 거 아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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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는 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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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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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는 뭔가 망설이는 듯이 입술을 달싹거렸다. 먼저 묻지 않는다면 나도 말할 생각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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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 동안 전투를 치르면서, 엘레노어에게 내 이야기를 털어놓아야 할지 많이 고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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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하고 또 고민했지만, 아직 답은 나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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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PC라는 사실을 떠나서, 이게 과연 엘레노어에게 말해도 좋은 일인가 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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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심정 자체는 이미 8층을 떠나오며, 자아를 잃은 엘레노어에게 한 번 토해내듯 말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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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을 보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었으니, 지금과는 다른 상황이지만- 딱히 편해지는 건 없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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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렇게 자아가 있는 엘레노어에게 말한다고 뭔가 달라질까 싶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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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나이트 엘프의 습성을 강하게 물려받은 엘레노어가 내 말을 어떻게 받아들일지가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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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는 자유를 사랑한다. 무언가에 속박되는 것을 싫어해, 언제든 어디로든 떠나고 싶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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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엘레노어에게, 너는 탑의 시스템에 종속된 NPC라고- 말해도 괜찮은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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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쌔액, 쌔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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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의 규칙적인 숨소리가 귓가를 울린다. 붙잡은 손과 맞닿은 어깨의 온기가 따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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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도 좀처럼 집중하지 못했던 명상은 완전히 깨졌고, 나는 천천히 수마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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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실로 몇 년 만에- 긴 꿈을 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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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 거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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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살과 마법이 날아다니고, 불이 번지며 숲이 타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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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엘프가 한데 뒤섞여 서로를 베고, 찌르고, 쓰러트리며 목숨을 빼앗는 광경이 눈앞을 스쳐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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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감흥 없는 광경이었다. 비극적이라고 느끼기에는 척 보기에도 너무나 조잡하기 짝이 없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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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우는 이들은 얼굴 없는 마네킹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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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아다니는 무기는 영화 촬영을 위한 소품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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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도 나무도 별빛도 모두 조잡한 영상을 띄워 놓은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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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치한 저질 CG 영화를 반쯤 열린 문 너머로 보고 있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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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아무래도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은데, 내 상상력은 대체 어떻게 되어 있길래 이딴 꿈을 만드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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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락이라고는 조금도 모르겠고, 그냥 무진장 길기만 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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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꿈이라는 게 그런 거긴 하지만, 몇 년 만에 꾸는 꿈의 내용이 이따위니까 뭔가 기분이 나쁜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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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언제까지 이어지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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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몸조차 제대로 감각되지 않는 꿈속에서 혼자 중얼거렸다. 그럼에도 꿈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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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이 조잡한 영상을 늘어놓으며, 한참을 보다 못해 진이 빠진 내가 꿈속에서마저 잠들게 될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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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꿈속에서 한 번 더 꿈에 빠져든 그 순간, 내 눈은 저절로 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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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아침이다, 그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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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볕이 환하게 내리쬐는 아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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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는 내 덕분에 오랜만에 푹 잘 수 있었다며 감사를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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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것치고는 아직 피곤해 보이는 눈이지만, 피로의 이유가 비단 불면증 때문만은 아닐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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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작 하루 푹 잔 걸로 풀리기에는 이래저래 쌓인 게 많았겠지. 나랑은 별 상관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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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저나, 그대도 무척 푹 자더구나? 그렇게 빼던 것치고는 내 품이 편했나 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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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랍게도 사실이다. 엘레노어의 영향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도 오랜만에 깊이 잠들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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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 안 꾸던 꿈을 다 꾼 걸 보면, 평소와 다른 잠자리가 영향을 미친 것 같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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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애초에 나는 깊게 자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도 없었으므로, 아무래도 좋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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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개꿈이나 꿨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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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의 말을 대충 받아치고,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며 몸을 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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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시간이나 잠을 자느라 시간을 날렸으니, 남은 시간을 최대한 알뜰하게 써야 하지 않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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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에픽 퀘스트의 목표는 엘레노어의 소망, 여왕의 명령을 완수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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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룻밤 같이 잠을 자 준 것만으로 클리어되는 퀘스트가 아니었다. 요지는 엘레노어를 편하게 해 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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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는 엘레노어와 같이 자주고, 낮에는 엘레노어의 스트레스 요인인 전쟁의 부담을 덜어주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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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층에서 하던 일과 크게 다를 것 없다. 매일매일 전장을 누비면서 적을 쓰러트리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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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이라……나도 간밤에는 꿈을 꾸었지. 오랜만에 깊이 잠든 덕일까, 별난 경험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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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이 덜 깼는지, 몽롱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엘레노어를 두고 무장을 갖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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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스터를 사역해 편제를 갖춘 왕국군 병력은 확실히 강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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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스펙이 너무나도 높은 탓에 위기라고 할 만한 일은 없었지만, 상대하면서 결코 만만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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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국군에는 일반적인 마법사만이 아니라 주술사와 흑마법사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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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단순히 사역한 몬스터를 조종해 공격할 뿐만이 아니라, 갖가지 마법과 작전으로 나를 몰아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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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군을 끼고 싸우는 게 아니라, 혼자 적진에 난입해 싸우는 타입이라는 점을 노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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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스터들을 잔뜩 돌격시켜 억지로 발을 묶고, 대규모 섬멸을 위해 사용하는 마법을 나 하나에 쏟아붓는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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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수의 주술사와 흑마법사들이 동시에 속박과 디버프를 중첩하니, 나로서도 그 대응은 쉽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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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역한 몬스터를 이용해 마력감지를 방해할 수 있다는 점도 있어서, 몇 번이나 강력한 공격을 허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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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말했듯이 위기라고 할 수준까지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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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메랄드 와이번의 공격을 맞으며 키운 [주문 내성]과 [대마법 내성] 스킬이 착실하게 나를 보호해 주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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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에 화염, 냉기, 전격 계열은 내성 덕분에 이중으로 데미지가 반감되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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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술사의 독 계열 공격은 반감되다 못해 아예 무효화되는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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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이 짓거리를 계속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간 갖추지 못했던 내성도 새로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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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시브 스킬 : 저주 내성 1레벨을 습득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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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킬 자체는 꽤 흔하지만, 그동안 기회가 없어서 얻지 못했던 저주에 대한 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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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 자체가 그리 강하지 않아서 그런지, 한동안 1레벨을 쉽게 벗어나지 못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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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그거 좀 더 해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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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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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 더 해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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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마법사 하나를 살려서 잡아두고, 나에게 계속 저주를 쓰도록 해서 해결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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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아둔 흑마법사의 밑천을 탈탈 털어서 [저주 내성]을 3레벨까지 올린 것이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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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층에 진입한 지 이 주가 지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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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에픽 퀘스트는 조금도 진전되지 않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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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는 매일같이 나와 함께 잤지만, 어쩐지 날이 갈수록 상태가 안 좋아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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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응? 그게 무슨 소리냐, 그대 덕분에 요즘은 아주 살 맛이 나는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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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그래 보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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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가 잘못 보고 있어서 그런 거다. 나는 오히려 그대가 걱정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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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렇게 말하고 있지만, 그렇지 않다는 건 눈이 달렸다면 누구나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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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의 눈에서 불타오르던 별은 점점 빛을 잃어가고 있다. 쉽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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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트 엘프의 비술로 기억을 공유한 적이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내 눈치가 좋아진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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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의 마음이 격하게 요동치고 있다는 것을, 왠지 모르게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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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이야, 그냥 조금……고민이 많아져서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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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는 한다. 내가 열심히 날뛰고 있음에도, 전쟁의 상황은 좋아질 기미가 없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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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매일같이 적은 숫자지만 사상자가 생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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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는 그저 NPC일 뿐이지만, 엘레노어에게는 소중한 자신의 동포와 백성일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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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관의 무게에 목이 나갈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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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친 듯 말하는 엘레노어의 모습은 무척 낯설었지만, 그 표정만은 어디에선가 본 적이 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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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이 염병할 전쟁의 판도를 크게 바꿔놓지 않는 한- 이 퀘스트는 깰 수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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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내가 휘젓고 다닌 것은 다크엘프의 영역 근처 일대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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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보다 더 깊은 곳, 이를테면 다른 세력의 영역 안쪽까지 파고들어서 공세를 펼친 적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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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는 단순한 집단이 아니라 거대한 세력, 내가 아무리 강하다고 한들 혼자서 전부를 압도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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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숫자만 많다면 모를까, 엘리트 NPC나 메르세데스 같은 오버스펙 개체도 세력별로 존재하는 마당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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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젠 달리 방법도 없고, 이 일대를 지키며 싸우는 것만으로는 더는 성장하기 힘들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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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뭐, 어쩌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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갖다 박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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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려볼만한 상대는 역시 한 번 밑천을 확인한 하이엘프 진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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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엘프 왕의 실력이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리 높게 쳐도 메르세데스보다는 약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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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메르세데스부터가 상식을 두어 단계는 벗어난 스펙을 갖고 있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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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밖의 다른 엘리트급은 그 기사 놈 수준일 테고, 메르세데스도 지금이라면 얼마든지 이길 자신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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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층에서의 결투로 실력은 충분히 봐 두었고, 스펙은 이제 마력강화로 따라잡을 수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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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장비를 점검하고, 채비를 갖춘 뒤 곧바로 하이엘프의 영역을 향해 걸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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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예상치 못한 곳에서 적을 맞닥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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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는 다크엘프와 하이엘프의 영역 사이에 어중간하게 걸친 대수림의 외곽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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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7층에 올라와 처음으로 엘프를 마주쳤던 그 부근에서, 눈에 익은 얼굴을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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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얼굴 자체는 그리 익숙하지 않지만- 못 알아볼 수가 없는 신체적 특징이 너무나 눈에 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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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쪽 귀가 짧게 잘려나간 하이엘프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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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세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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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엘프 최강의 NPC가, 어째서인지 꾀죄죄한 차림을 하고 나무둥치에 기대어 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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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저게, 저년이 왜 여기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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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붙으러 갈 생각이긴 했지만, 이런 장소에서 대뜸 혼자 자빠져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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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저 차림은 또 뭐란 말인가. 결투 때의 정복도, 예전에 봤던 갑옷 차림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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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년이 지나면서 뭔가 사정이 생겼을 수도 있지만, 저만한 녀석이 왜 이렇게 굴러다니는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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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가 짐작도 안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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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내 기척도 제대로 못 느끼고 뻗어 있는 걸 보니, 어지간히 심하게 지친 모양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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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벅, 저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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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잠시간의 고민 끝에, 검을 한 손에 쥐고 메르세데스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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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여기서 뭐 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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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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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세데스는 화들짝 놀라 눈을 뜨더니, 재빨리 검과 방패를 뽑아들고 전투태세를 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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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입을 떼기 직전, 아슬아슬하게 간격에 들어간 순간 바로 자세를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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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미친 스펙이나 전투감각이 어디 가진 않았나 보네,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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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네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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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세데스는 내 얼굴을 확인하고는, 곧바로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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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한테는 몇 주 전, 그리고 녀석에게는 백이십 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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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귀를 잘라버렸던 때보다도, 더욱 증오가 가득한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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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세계수가 열매를 맺던 시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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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즈멜은 내 대답을 듣고 한동안 말이 없었다. 어지간히 크게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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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모르겠다, 너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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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의 침묵 끝에 리즈멜은 그런 말과 함께, 투명한 눈물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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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엘프가 인간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새삼 다시 알았다. 이런 걸로 울어줄 수 있을 만큼 좋아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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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히 눈물을 닦아낸 리즈멜은 불안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다시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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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우리의 검술을 모두 체득했고, 눈도 제대로 틔웠어. 내가 가르쳐 줄 수 있는 건 더 없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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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스트 완료 : 에르웬의 참견 - 검술 훈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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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웬 이모님에게도 말을 전해 둘게, 너는 검술 훈련을 모두 마쳤다고. 그러니까, 이젠 나를 찾아오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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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스트 창에 붙어있던 선택 목표들이 모두 완료 처리되었다. 대련이니 선별 시험이니 하는 건 아직 하지 않았음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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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식으로 퀘스트가 완료된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보상만 제대로 들어오면 상관없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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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스트 보상 : ‘경험치’, ‘골드’를 획득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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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표 달성 보상 : NPC 에르웬을 통해 수령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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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검이 만들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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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기대감을 부추기는 시스템 메시지에도 불구하고 기분은 썩 좋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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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덜거리는 걸음으로 연무장을 떠나는 리즈멜을 붙잡고 싶었다. 하지만 동시에 떠나게 둬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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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즈멜이 나를 어떤 심정과 생각으로 대하고 있었는지, 무슨 의도로 내게 검을 가르쳐 준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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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조금 전 내가 내뱉은 말에 어떤 상처를 받았을지도, 모두 짐작은 가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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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겠어, NPC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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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혼자 연무장에 주저앉아, 변명 같은 말로 자신을 달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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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연무장에서 괜히 검술 연습을 해 보며 저녁까지 시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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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본격적으로 해가 지기 시작할 때 쯤, 그곳을 벗어나 대장장이 에르웬의 대장간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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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다크엘프에 비해 유독 작은 키를 가진 대장장이는 나를 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손을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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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냐, 조금 더 일찍 올 줄 알았건만. 연장자를 너무 기다리게 하는 거 아니냐, 몹쓸 것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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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려 달라고 한 적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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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참, 여전히 말하는 본새는 귀여운 점이 없구나. 표정은 또 그게 뭐냐, 비 맞은 오렌같은 꼴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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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렌이라는 건 맥락상 이 7층에 서식하는 동물 같은 거겠지. 지금 내 표정이 그렇게까지 안 좋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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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즈멜도 많이 상심한 표정이던데, 둘이 싸우기라도 한 게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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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리즈멜의 마음이 상한 건 알겠지만, 딱히 싸운 것도 뭣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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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로서는 그냥 새삼스레 자아 성찰을 한 것뿐이다. 리즈멜은 내가 한 말에 멋대로 충격을 받았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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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웬도 특별히 캐물으려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냥 그런 일도 있는 거라면서, 대장간으로 들어오라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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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간 안에는 여전히 이런저런 무기들이 걸려 있었다. 저번에 내가 물건을 싹쓸이했는데도, 어느새 다시 꽉 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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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장장이의 작업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는 나도 잘 알고 있기에, 새삼스레 놀라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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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에 가져다준 주괴를 활용하느라 고생 좀 했지, 그래도 덕분에 무척 좋은 검이 만들어졌지 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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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웬은 그렇게 말하며 예스러운 케이스에 담긴 검 한 자루를 꺼내, 내게 건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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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펴봐라, 마음에 들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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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어진 검은 겉보기에는 평범한 에보니 스틸 한손검, 거기에 약간의 장식을 더한 것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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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장이의 걸작 : 요정시대의 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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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격력 + 85 (참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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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명타 피해 : x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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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구도 880/8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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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시행 가능 횟수 : 15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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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시스템이 표시하는 아이템 정보는 장난이 아니었다. 일단 기본 공격력부터가 화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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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한손검 중에서 가장 공격력이 높은 [늑대 사냥의 검]을 가볍게 능가하는 수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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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다가 강화 시행 횟수는 에보니 스틸의 특성을 그대로 받아 15회나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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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층 수준을 한참 넘어선 적을 상대해 온 보상일까, 7층에서 얻을 수 있는 수준의 아이템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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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밸런스 잡힌 튼튼한 검을 좋아한다고 했었지? 그래서 일부러 거창한 마법 기능 같은 건 넣지 않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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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웬은 그렇게 말하며, 그래도 마법 재료를 쓰는 마당에 아무것도 없으면 아쉬울 거라며 한 마디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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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한테 딱 맞는 기능 하나만 넣어 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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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템 정보는 기본 스탯으로 끝이 아니다. 유니크 등급으로 완성된 검에는 고유 효과도 붙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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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유 지속 효과 : 마력 흡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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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스터를 처치할 시, 처치한 몬스터의 마력 일부를 흡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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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수한 마력 수치에 따라 내구도 회복, 자동 청결 효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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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분을 초과한 마력은 착용자의 MP를 회복시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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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스터를 처치할 때마다 자동으로 내구도가 수리되고, 그에 더해 MP를 리필시켜주는 미친 알짜배기 옵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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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템 수리에 들어가는 골드나 재료는 차고 넘치는 신세지만, 실시간 회복은 나에게도 특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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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솔플러라는 특성상 늘어지는 다대일 전투 상황에 처할 일이 매우 많은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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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P는 스킬과 아이템 효과 덕분에 계속 회복되지만, MP랑 무기 내구도는 점점 떨어지기 마련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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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옵션이라면 내 집중력이 버텨주는 한 언제까지고 최대의 전투력을 유지할 수 있게 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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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내주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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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드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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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어, 엄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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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제자리에서 검을 휘둘러 대며, 순순히 기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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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웬은 마냥 기뻐하는 나를 보고 웃으며, 자연스럽게 대장간 안쪽으로 나를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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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좋아해 주니 어깨가 빠지도록 힘쓴 보람이 있구나, 표정도 훨씬 보기 좋아. 앞으로도 좀 그러고 다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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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끄덕이고 검을 인벤토리에 수납했다. 기본 옵션이 워낙 좋으니, 강화는 좀 나중에 해도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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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웬은 언제 준비해 둔 건지, 간단한 다과와 찻잔을 꺼냈다. 나를 위해 일부러 준비해 둔 것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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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엘프들은 왜 자꾸 나한테 뭘 먹이려고 드는건지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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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다크엘프들에게 작은 길고양이 정도로 보이는 건 알고 있지만, 에르웬은 안 그러는 편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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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웬이 특별히 나이가 많은 편이라고 들었는데, 시골 할머니가 종종 찾아오는 고양이에게 밥을 주기 시작한 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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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족이 뭘 좋아하는지는 잘 몰라서, 아무거나 사다 놨는데……혹시 못 먹는 게 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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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런 건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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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좀 앉아라, 설마 검만 홀랑 받아먹고 고생한 사람은 나 몰라라 하려는 건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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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얌전히 자리에 앉았다. 다과는 보아하니 단 것 같아서, 대충 입에 집어넣고 씹어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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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적, 으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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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웬은 그런 나를 보며 약간 씁쓸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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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참, 달콤한 과자를 먹으면서 지을만한 표정이 아니잖으냐. 너 같은 인간족은 살면서 처음 보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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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나 말고 다른 인간족을 많이 봤다는 듯한 말투였다. 다른 다크엘프들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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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괜히 궁금해져서, 인간족을 많이 봤느냐고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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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요즘 젊은 것들보다는 많이 본 편이지. 누가 뭐래도 얼마 안 남은 세계수 세대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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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수 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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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다 시들고 썩은 세계수가, 아직 열매를 맺을 수 있었을 적부터 살아온 늙은이란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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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들어본 적 있는 이야기였다. 포레스트 엘프와 나이트 엘프 모두, 세계수를 통해 혼이 순환하고 있다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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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엘프의 혼은 다시 세계수의 품으로 돌아가고, 세계수는 열매를 맺어 영혼이 깃들 그릇을 다시 낳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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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자면 일종의 환생 시스템, 하지만 이는 세계수가 시들고 힘을 잃으며 과거의 일이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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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엘프 종족의 이름이 하이엘프와 다크엘프가 되기 전의, 어마어마하게 오래된 옛날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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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의 엘프는 모두 영생이라 할 만큼 길게 살았지. 지금도 매우 길게 사는 편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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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말하는 에르웬의 눈동자는 유독 흐린 빛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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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거 아느냐, 영생이니 불멸이니 하는 건 사실 죽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란다. 조금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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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생이란, 나 외의 모든 것이 죽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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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나만 두고, 세상 모든 것이 시간을 이기지 못하고 스러져 이별을 고하지. 그런 느낌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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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락 없는 이야기지만, 그냥 흘려넘길 수는 없는 말이었다. 에르웬의 목소리에는 무언가 절절한 것이 담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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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우리는 시간과 생명을 바라보는 관점이 좀 유별난 편이지. 돌이켜 보면 수십 년도 찰나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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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의미인지 알 만했다. 그렇기에 인간을 마냥 귀엽게 볼 수 있는 거겠지. 생각나는 것을 말하자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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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벌레처럼 보일 수도 있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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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엘프에게 인간은 길고양이보다 더 낮은 무언가처럼 보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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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웬은 내 말을 듣더니, 옅은 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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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무척이나 위대하게 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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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웬의 부드러운 손이 내 손을 감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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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나처럼 짧은 삶을 살지만, 그럼에도 굉장한 존재감을 남기지. 우리에게 인간과 접해본 기억은 좀처럼 잊을 수 없는 것으로 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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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천년을 살았을 거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부드러운 손에서, 굳센 힘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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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리즈멜이 너를 특별히 걱정하는 거란다, 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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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웬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입을 닫았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내 손을 토닥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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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런 말 없이 그저 토닥이는 그 손길에서는, 어쩐지 많은 것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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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장, NPC는 무슨. 나는 아직도 변명 뿐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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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즈멜한테 사과하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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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메르세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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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사연이 많아 보이는 꼬락서니길래, 대뜸 덤비기보다는 말을 걸어 본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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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럴 줄 알았으면 일단 칼빵 한대 놓고 시작할 걸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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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깔이 완전 살인마 눈깔이다. 증오며 분노며 살의며 격한 감정은 죄다 저기에 고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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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놈이 어떻게, 인간 주제에……역시 인간이 아니었던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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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와중에도 내가 백 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음에도 살아 있는 것에는 의문을 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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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깔은 완전 맛이 갔지만, 인지능력이나 이성은 아직 남아 있는 모양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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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따위 것은 신경 쓰지 않겠다. 환영을 보고 있는 거라도 상관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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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생각하자마자 이성을 포기해 버리는군. 나도 긴장 속에서 방패를 들어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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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르릉, 하는 마력강화 특유의 천둥소리가 울려 퍼지며 메르세데스의 몸에 마력의 빛이 휘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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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과는 다르게 시작부터 마력강화를 쓴다. 이렇게 되면 이쪽도 아낄 필요는 없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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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르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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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마력강화를 발동하고, 곧바로 달려드는 메르세데스의 검을 받아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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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건도 동등한 덕분에 제법 잘 받아냈다고 생각했지만, 강한 충격과 함께 내 몸이 살짝 뒤로 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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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긴, 서로 마력강화가 없는 상태에서의 기본 스펙부터 저쪽이 위였으니까. 당연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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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템빨인 나와 다르게 마력강화의 수준 자체도 저쪽이 더 높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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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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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세데스가 내 검을 위로 쳐올림과 동시에, 폭발이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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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의 마력이 부딪히며 생긴 반발력이 만들어낸 여파다. 마력강화 사용자끼리는 흔한 일이라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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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을 쳐낸 메르세데스는 그대로 카이트 실드 형태를 한 방패의 끄트머리로 내 가슴께를 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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뾰족한 방패인 만큼 저 공격의 위력은 육중한 도끼질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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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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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방패로 메르세데스의 방패를 막아낸 뒤, 반댓손의 검을 휘둘러 목을 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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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세데스는 날밑을 이용해 익숙한 듯 막아냈고, 그대로 손목과 어깨를 놀려 소드 레슬링으로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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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력에 차이가 있는 만큼, 이런 대치가 이어지면 당연히 내가 불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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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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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프를 발동해 근력을 증폭시켜, 억지로 대치 구도를 깨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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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뒤이어 놀고 있던 다리를 휘둘러, 기습적으로 킥을 날렸지만- 바로 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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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세데스는 다시 방패를 휘둘러, 뻗어진 내 다리를 그대로 내려찍으려 시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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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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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공격이었기에 피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방패가 내려찍은 지면이 쩌적, 갈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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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가 낮아진 메르세데스를 향해 측면에서 검을 휘둘렀지만, 바로 방패에 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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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세데스는 그대로 방패를 앞세워 거리를 좁혔고, 매우 가까운 거리에서 검을 찔러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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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방패를 이용해 막아낸 뒤, 다시금 이어진 초근접에서의 힘겨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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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깔 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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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살기가 번들거리는 눈으로 나를 노려보는 메르세데스에게 한 마디 던져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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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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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세데스는 이를 악문 채 어정쩡한 소리를 뱉으며, 격하게 몸을 비틀어 공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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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왜 이렇게 흥분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한테는 잘 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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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 결투 때와 비슷하다. 머리에 피가 너무 쏠린 탓에 움직임이 과격하고 단조로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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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무조건 내가 이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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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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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7층 때보다 여러모로 강해지긴 했지만, 여전히 메르세데스는 버거운 상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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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력과 순발력 양면에서 월등하고, 기본적인 검술 실력도 우위, 마력강화의 숙련도마저 역시 압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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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승패는 그런 스펙적인 우월함에서 갈리지 않는다. 이번에도 결투 때와 똑같은 결말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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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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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방패에 얼굴 측면을 거하게 얻어맞은 메르세데스가 그대로 나가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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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력강화는 백 퍼센트 아이템에 의존하는 템빨이지만, 그래서 오히려 우월한 점이 하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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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지속력, 내 체력과 지구력에 관계없이 일정한 수준을 유지한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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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세데스는 싸움이 이어지고 부상이 늘어나며, 점점 마력강화를 유지하기 힘들어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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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시점에 이르러서 그 출력은 초반의 절반 정도, 내 제한적 마력강화와 거의 비슷한 수준까지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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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게 스펙이 거의 동등하게 맞춰졌으니, 내가 우위를 점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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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떨어진 메르세데스를 추격해 허리춤의 손도끼를 휘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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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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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아내지 못하고 한 번 더 공격을 허용한 메르세데스가 뒤로 크게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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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겐 [혼신]과 [약점 간파] 같은 다양한 스킬, 그리고 투척을 비롯한 다양한 무기술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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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에 부상을 입으면 더 강해지는 최상급의 전투 지속 능력까지 갖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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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세데스가 단기 결전으로 끝낼 수 있는 스펙 차이를 갖지 못한 시점에서, 싸움의 결과는 정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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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더러운……더러운 인간 주제에, 죽인다, 반드시 죽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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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걸 모르는 것도 아닐 텐데, 이렇게까지 악을 쓰고 덤벼드는 이유는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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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죽인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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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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둔기를 휘둘러, 달려드는 메르세데스의 한쪽 팔을 쳤다. 부러지는 손맛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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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메르세데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덤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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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상태가 이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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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불구대천의 원수라도 만난 것처럼, 제 몸을 신경 쓰지도 않고 덤벼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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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녀 엘프의 귀를 잘라버린다는 게 무척 심한 일이라는 건 들어서 알고 있지만, 그 원한만이 전부가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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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아까 전에는 환영을 보고 있는 거라도 상관없다고 외치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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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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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길질로 메르세데스를 멀리 날려버렸다. 허리부터 나무에 부딪힌 녀석은 제대로 일어서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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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나를 전부 다 썼는지 마력강화도 끊겼고, 사지 중 멀쩡한 부위가 한 군데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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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처럼 재생 능력이나 HP에 따른 시스템의 보정도 없는 한,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도 힘들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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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드득, 드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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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메르세데스는 부러진 팔 대신 어깨로 몸을 지지하고 억지로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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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을 쥐고 있기도 힘들어 보이는데, 비틀거리면서도 내게 달려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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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아아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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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아예 악쓰며 소리까지 치고 있었다. 나는 다시 발길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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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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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번 나가떨어진 메르세데스는 이마와 무릎으로 땅을 문대가며 힘겹게 다시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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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저분해진 얼굴에서 살기는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남은 건 오직 비탄과 원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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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먼지로 칠갑된 메르세데스의 뺨에서는 이제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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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놈 때문에……네놈 때문이다, 다 네놈 때문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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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까지 누구한테 원망받아 보는 건 정말로 처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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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당황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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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좀 이유는 말해주고 원망해야 하는 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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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일 수도 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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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놈 때문에, 전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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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마침 맥락을 파악할 키워드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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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하라면 그 하이엘프 왕자 놈을 말하는 거겠지, 하지만 나는 그놈에게 딱히 뭔가 한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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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껏해야 처음 만났을 때 팔을 꺾어버린 거랑, 여자 뒤에 숨느냐고 야유한 것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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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도로 원망받을 만큼 거창한 짓은 전혀 안 했다. 귀 자른 거랑 관계가 있는 것 같지도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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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케이, 일단 제압한 다음에 무슨 이야기를 하나 들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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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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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대로, 메르세데스의 명치에 플라잉 니킥을 꽂아 기절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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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기절시킨 메르세데스를 다크엘프 마을로 끌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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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들어보려면 일단 정신을 차리도록 회복을 시켜야 할 테고, 혼자서는 못 하는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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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히는 회복은 시킬 수 있는데, 회복돼서 일어난 이 녀석이 날뛰면 다시 제압하기 힘들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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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펜던트를 재충전하기 전에는 다시 마력강화를 사용할 수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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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세데스는 침상에 눕혀진 후, 세 시간 정도가 지나고 나서야 눈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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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 여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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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일어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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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을 차린 메르세데스는 나를 보자마자 눈을 부릅뜨고 검을 뽑으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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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직이지 마라, 혹시 또 지랄발광할까 봐 엘레노어한테 부탁해서 마법을 잔뜩 깔아 놨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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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하지만 검과 갑옷은 싹 다 압수해 놨고, 침상 근처에는 제압용 마법을 잔뜩 깔아 놓은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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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세데스는 검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경계심이 가득한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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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그냥 죽일까 했는데, 이것저것 궁금한 게 좀 생겨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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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놈에게 말해줄 건 아무것도 없다. 죽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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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물어봤는데 니가 먼저 지껄였잖아. 뭔진 모르겠는데, 내 탓이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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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말실수였는지, 메르세데스는 ‘큿’ 하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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붙잡힌 엘프 여기사가 ‘큿, 죽여라’ 라고 하는 걸 현실에서 보게 될 줄은 몰랐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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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몰랐는데, 예전 그 왕자놈이 왕위를 계승했다며? 네가 말한 전하가 걔 맞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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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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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때문에 그 전하가 어떻게 된 것처럼 말했잖아, 엘레노어한테 그 얘길 하니까 그러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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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세데스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정확하게 짚은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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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엘프에게 선전포고를 한 건 그놈이라고, 엄청 뜬금없고 이상한 타이밍에 싸움을 걸었다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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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엘프 진영은 8층 시점에서부터 사실상 전쟁 중이었지만, 정말로 전쟁이 선포된 것은 왕이 바뀐 이후라고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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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전포고를 하고 본격적으로 전쟁을 시작한 건 선대 왕이 아니라, 그 어설퍼 보이던 왕자놈이었던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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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정확한 이유는 아무도 모른다. 서로 간의 교류가 끊긴 지도 백 년이 지났으니, 당연한 일이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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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놈과 약혼 관계로 오래 알고 지냈던 엘레노어의 말에 따르면, 무척 황당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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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꼬락서니도 어째 좀 이상하고, 너희 쪽에서 뭔가 일이 있었던 거 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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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세데스가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막 던져 봤는데, 아무래도 맞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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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가 내 탓인지, 좀 들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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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세데스도 분명 이 에픽 퀘스트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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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계승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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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한테 사람을 심문하는 기술 같은 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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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메르세데스 본인이 뭐든 말하고 싶어하는 모습이었기에, 설득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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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네놈 때문이다. 네놈 때문에, 전하가 이상해져 버린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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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의 시작은 당연히 나를 향한 원망이었다. 이 부분은 대충 듣고 흘려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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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전하께선 평화를 사랑하는 온화한 분이셨다. 타고난 성정부터 싸움과 분쟁에는 맞지 않으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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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걔가? 선전포고를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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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놈은 전하에 대해 전혀 모르니까 그렇게 지껄일 수 있는 거다! 원래는 그런 분이 아니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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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차, 내 욕은 잘 넘겼는데 너무 어이가 없어서 바로 딴죽을 걸고 말았다. 이러면 안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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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딴죽에 제대로 긁힌 메르세데스는 그 왕자놈이 얼마나 온화하고 상냥한지 떠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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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도 거의 다 흘려듣긴 했지만, 대충 들어도 엄청나게 콩깍지가 씐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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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아주 틀린 말은 아닐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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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맹한 타입이 취향인 엘레노어가 비실비실하고 유약하다고 매번 까 댔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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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왕위에 오르고 난 뒤부터, 전하는 마치 다른 사람처럼 변해버렸다. 눈빛부터 완전히 달라지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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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명하게 빛나던 눈이 빛을 잃고, 선대 왕을 연상시키는 메마른 감정만을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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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당신께선 매일같이, 어떻게 해서든 이 지긋지긋한 분쟁을 끝내겠다고 말씀하셨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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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간추리자면, 왕위를 계승하자마자 사람이 확 달라졌다 이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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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하께선 내가 네놈과의 결투에서 패배한 것이 전쟁의 시발점이었다며, 내게 추방령을 내리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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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예상대로다. 결투 건으로 트집을 잡혀서 내쫓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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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떻게든 전하를 되돌리려 애를 썼지만, 검밖에 다룰 줄 모르는 내겐……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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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왕이 되니까 본색을 드러낸 거 아니야? 너는 거슬리니까 팽당한 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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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하께선 그런 분이 아니라고 몇 번이나 말하지 않았느냐! 인간족은 정말 머리까지 글러 먹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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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누구보고 머리 타령이야, 머리가 정상이라면 이렇게 생각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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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하께선 이미……내게 결투의 책임을 묻지 않겠다고 말씀하셨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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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세데스는 제 잘린 귀를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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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더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라며, 패배는 신경 쓰지 말라며, 잘린 귀도 고칠 방법을 찾아주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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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빛 두 눈이 그립다는 듯 과거를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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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년이 지날 때까지 고칠 방법을 못 찾으면, 책임져 주겠다고……하셨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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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세데스의 목소리가 쥐꼬리만 하게 작아졌다. 얼굴에는 조금 붉은빛이 감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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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씨구, 지랄을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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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이서 아주 천 년의 순애 서사를 만들고 계셨구먼, 커뮤니티 썰풀이 탭에다가 올리면 반응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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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이제 대충 이해는 되네, 왜 그렇게 나를 원망했는지도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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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메르세데스도 그게 진짜로 내 탓이라 믿는 건 아닐 거다. 일종의 현실도피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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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지 대상을 정해놓고 그것에 몰두하는 것으로, 감정을 덮어버리려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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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마음인지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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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를 리가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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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런 도피는 진짜 문제를 직시하기 어렵게 만든다. 왕자가 변한 원인은 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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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위를 계승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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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결론을 내리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퀘스트 알림이 눈앞에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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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픽 : 다크엘프의 서 - 여왕의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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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 : 백 년간의 전쟁 속에서 다크엘프는 점점 열세에 몰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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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도 성장도 빠른 인간족의 왕국은 백 년 전과는 비교되지 않을 만큼 강해졌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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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인간을 좋아하는 다크엘프들이 왕국군과의 싸움에서 망설임을 얻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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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오만하고 건방진 하이엘프들도 호전적으로 덤벼 오고 있으니, 다크엘프들에겐 쉴 시간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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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을 지휘하며, 모든 것을 책임지고 있는 여왕에겐 더욱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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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단독 행동을 통해 이 전쟁의 배후에 대한 미심쩍은 정보를 습득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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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잘 파고들어 보면, 여왕의 어깨에 지워진 짐을 덜어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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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고 : 해당 퀘스트의 난이도는 매우 높습니다, 25인 이상의 파티로 진행하시기를 권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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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스트 목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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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비밀을 파헤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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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흑막을 밝혀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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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전쟁을 종결시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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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엘레노어를 찾아가 메르세데스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그대로 말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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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데 없는 군더더기를 빼면 간단하게 요약할 수 있는 이야기였으니, 오래 걸릴 것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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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이상하군, 선전포고보다도 놈이 자신의 제1기사를 추방해 버렸다는 게 무척 이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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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으나 싫으나 왕자와 메르세데스를 오래 알고 지낸 엘레노어가 이렇게 말할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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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대여, 그걸 눈으로 직접 확인하겠다니? 그게 무슨 소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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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는 이미 채비를 마친 나를 향해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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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그대로야. 내가 직접 봐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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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하이엘프의 영역에 침입해, 직접 왕자 놈의 면상을 보고 올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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갱신된 퀘스트 목표와 설명은 이게 이 길었던 진영 퀘스트의 마지막이 될 것임을 알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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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더 이상 망설일 필요는 없다. 가장 단순하고 빠른 방법으로 퀘스트를 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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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위험하다, 아무리 그대라도 혼자서 놈들의 진영에 쳐들어가겠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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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는 인상을 한껏 찌푸리며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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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물게 보이던 걱정하는 표정과는 좀 다르다. 뭔가 짜증을 내는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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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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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나는 엘레노어가 말한 것처럼 혼자서 쳐들어갈 생각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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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세데스랑 같이 가기로 했어, 자기도 그 왕자 놈 일 때문에 답답했던 모양이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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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한 설득도 필요하지 않았다. 메르세데스는 아직도 왕자놈을 되돌릴 방법을 찾고 있는 모양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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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족 따위와 힘을 합치는 것은 내키지 않지만, 전하를 위해서라면 악마와도 손잡을 수 있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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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세데스가 알려준 루트를 따라 잠입하면 전투는 거의 치르지 않고 왕자놈의 면상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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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나랑 메르세데스가 작정하고 힘을 합치면 정면돌파도 가망이 없는 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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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을 본다고 뭐가 해결되는 건 아니지만, 대충 잡아놓고 칼로 쑤시면 비밀인지 뭔지도 다 불지 않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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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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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는 답지 않게 자신없는 모습으로 입술을 우물거렸다. 어느 때보다 상태가 안 좋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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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보면, 계속 그랬다. 바라는 대로 계속 함께 자 줬건만, 엘레노어의 눈에 담긴 별빛은 점점 흐려지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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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히 잘 자는 것 같은데도 항상 피곤해 보였고, 예전과 같은 자유분방함과 당당함은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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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오늘이 그 최고조다. 이유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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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내가 그대를 어떻게 말리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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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는 혼자 혼란스러워하다가, 이내 힘없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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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모르게 ‘가지 않겠다’ 고 말할 뻔했을 정도로- 처연한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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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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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신경 쓰지 말자. 아무리 사람처럼 보여도, 저건 결국 영혼 없는 깡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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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PC를 신경쓰느라 이렇게 중요한 퀘스트를 내팽개친다니, 말도 안 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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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멈추지 않기로 다짐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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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세데스에게 장비를 돌려주고, 펜던트를 충전한 뒤 곧바로 길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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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조금 걱정했지만, 메르세데스의 머리 위에는 제대로 우호를 의미하는 녹색 콘솔이 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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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하게 아군으로 합류했다고 생각해도 괜찮을 것이다. 시스템은 언제나 정직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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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도 그동안 많이 바뀌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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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층에서의 대결 이후로 처음으로 와보는 대수림 안쪽은 역시 전쟁으로 완전히 갈아엎어진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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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엘프가 그렇게 중히 여긴다던 자연은 죄다 깎여 나갔고, 널찍한 길이며 감시탑 같은 것이 요란하게 설치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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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하께서 직접 지시를 내려 바꾼 것이다. 우리의 추억이 담긴 사과나무도 가차 없이 베어 버리시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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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세데스가 구겨진 표정으로 또 추억담을 이야기했다. 관심 없는 이야기라 그냥 흘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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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두니 이야기가 아무렇게나 흘러, 이제는 전쟁의 원인이라고 할 수 있는 인간족 왕국군을 욕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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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수에 대한 존중은 조금도 없이, 탐욕에 빠져 영토의 권리를 주장하는 모습은……실로 미개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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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중, 멀리서 저벅거리는 다수의 발소리가 들려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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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메르세데스도 감각이 아주 예민한 편이기에, 곧 발소리의 정체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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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욕하는 거 듣고 왔나 보다, 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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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엘프 진영을 노리는 왕국군 병단이 이곳까지 침입해 있었다. 그것도 아마 상당한 정예 병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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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 마침 잘 됐군. 어차피 네놈도 엘레노어의 편에서 싸우고 있겠지? 여기서 적을 줄여두고 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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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쳤냐, 잠입한다며. 여기서 애먼 놈들이랑 싸워서 어쩌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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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실력을 뭐로 보는 거지, 평범한 인간족 병사 따위는 소리도 내지 않고 베어버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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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방당한 뒤로 어지간히 고생을 많이 했나 보다, 7층에서 보던 거랑 성격이 완전 딴판이 되어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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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력 운운하면서 뒷짐 지고 싸우다가 쳐발린 어떤 년이 갑자기 생각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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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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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 좀 차려라, 너희 전하 생각은 안 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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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번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된 메르세데스는 뽑았던 검을 조용히 집어넣었다. 이제야 말이 좀 통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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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그대로 왕국군 병사들을 내버려두고, 하이엘프의 왕성을 향한 잠입을 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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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하이엘프의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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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에게 받았던 망토를 활용해 [은신]을 발동하고, 조용히 탑을 타고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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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 꼭대기에서 주변을 경계하던 하이엘프는 내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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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세데스는 적당히 기절만 시키라고 했지만, 아쉽게도 나한테 그런 재주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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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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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병의 입을 틀어막고 목을 찔러 숨통을 끊었다. 하지만 경계병은 언제나 2인 1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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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뭣, 누구냐, 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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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게 나를 발견한 경계병의 입을 틀어막고, 그대로 대번에 목을 꺾어서 죽여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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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슬아슬했네, 하마터면 들킬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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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의 경계병을 제압한 뒤에는 다시 내려와, 반대쪽 탑을 제압한 메르세데스와 합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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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세데스는 나를 보자마자 인상을 찌푸렸는데, 아무래도 경계병을 죽여버렸다는 걸 알아차린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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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우 불쾌해 보이는 눈빛이었지만, 상황상 어쩔 수 없다는 건 알고 있는지 따지려 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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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잠입 루트는 전투를 최소화할 수 있지만, 아예 피를 묻히지 않을 수 있을 만큼 편한 것도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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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그렇게 각 탑을 정리하고 난 뒤에는, 메르세데스가 준비한 장비를 활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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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형 글라이더같이 생긴 묘한 물건이었는데, 원리는 모르겠지만 잠시간 활공이 가능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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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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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공 장비를 장착하고 그대로 탑에서 뛰어내렸다. 감시탑을 모두 정리했기 때문에 비행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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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로 다크엘프의 마을처럼 요새화된 대산림을 공중에서 쭉 가로질러, 하이엘프의 마을 안쪽으로 손쉽게 입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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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로는 더욱 간단했다. [은신]을 발동하고 속도를 살려 쾌속 질주, 왕이 거하고 있는 성으로 침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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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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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의 창틀을 도끼로 깨부순 뒤, 사뿐히 안으로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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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마력감지를 펼쳤다. 그리고 동시에 어마어마한 기척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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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난 아니네, 이게 세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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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층에서 느낄 수 있었던 세계수의 압도적인 마력량에 저절로 숨이 막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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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고 해야 하나, 이게 몬스터가 아니라 그냥 나무에서 나오고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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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년 전에 비하면 한참 약해진 상태다. 우리의 세계수는 인간족이 감히 넘봐도 될 만한 존재가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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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세데스는 세계수의 마력을 느끼고 움찔거리는 나를 보며 혀를 찼다. 뭐, 말은 나도 동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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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층에서는 그나마 멀리서 봤었지만, 이 성은 세계수가 있는 자리에 지어진 거니까- 확실하게 실감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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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엘프들은 이걸 그냥 지키고만 있지만, 인간의 손에 넘어가면 분명히 어떤 식으로든 이용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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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한 마력의 덩어리가 작정하고 이용되면, 분명 무시무시한 결과를 낳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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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결코 어떤 집단이나 개인이 사적으로 이용해서는 안 되는 미친 물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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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폭탄을 처음 본 사람들이 이런 기분이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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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폭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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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게 있어, 그래서 왕은 어디에 있는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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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잠시 삼천포로 빠진 생각을 되돌렸다. 메르세데스는 손가락으로 저편의 문을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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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수와 직접 연결된 옥좌가 자리한 곳, 하이엘프 왕의 알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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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이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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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문이 저절로 움직여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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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메르세데스는 재빨리 근처의 물건 뒤로 몸을 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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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열린 문 너머에서 누군가 나오려는 낌새는 전혀 없었다. 문 안에서 느껴지는 기척은 하나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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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기척이다. 7층에서 만났던 그 왕자 놈이 저 안에 있는 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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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문은 대체 왜 혼자 열린 거지. 하이엘프식 자동문 센서가 오작동을 한 건 아닐 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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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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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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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릿속에서 대뜸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게 뭐야, 존나 이상한, 그보다 나한테 말한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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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었던 자리에서 슬금슬금 움직여 메르세데스를 쳐다보자, 나와 같은 목소리가 들린 눈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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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서로에게 동의를 구하듯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 활짝 열린 문 앞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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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으로, 들어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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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가 말하는 대로 알현실 안으로 들어서자, 저 멀리 옥좌에 앉은 왕의 모습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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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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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세데스가 처연한 표정으로 그를 불렀다. 나는 어이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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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저게 7층의 그 왕자 놈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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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생긴 건 똑같다. 딱 봐도 싸움은 존나 못 하게 생긴 기생오라비 외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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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눈빛이 달라도 너무 다르다. 선대 다크엘프 여왕보다 더 메말라 있는 눈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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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살금살금 오지 않아도……언젠가 이곳에 부를 생각이었다. 가까이 와라, 셋 모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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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엘프 왕은 이번에는 정체불명의 텔레파시가 아닌 육성으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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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셋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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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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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 배후에서 불쑥 튀어나온 강렬한 기척에 경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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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뭐야, 어디서 튀어나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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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에 휩싸여 나타난 엘레노어는 씁쓸한 표정으로 내 발밑을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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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의 그림자에 길을 뚫어 놓았지, 그대를 말릴 방법이 이것 말곤 떠오르지 않았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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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담이 서늘했다. 엘레노어가 그림자 마법의 달인이라는 건 알지만, 이런 게 가능할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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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층 초입에서 보여줬던 소환의 응용이겠지, 사용하기에 따라 이건 어마어마한 암살 기술이 되는 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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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그런 표정으로 보지 마라, 그대여. 지금 놀라야 할 부분은 여기가 아니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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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는 그렇게 말하며, 손가락을 펴 왕좌에 앉은 하이엘프 왕을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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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좌에 앉은 저것은 그대의 잠입도, 나의 그림자 마법도 모두 꿰뚫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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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년이 지났다고 한들, 내가 아는 그 머저리에겐 죽었다 깨어나도 불가능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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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에는 조금도 소질이 없는 녀석이었거든, 그런데- 저기 앉은 저건 대체 뭐란 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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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는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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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에 앉아 있는 건 절대 7층의 그 왕자 놈이 아니다. 생긴 것을 제외한 모든 점이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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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번 에픽 퀘스트의 목표를 다시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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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스트 목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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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비밀을 파헤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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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흑막을 밝혀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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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전쟁을 종결시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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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을 파헤치고, 흑막을 밝혀내어, 전쟁을 종결시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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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목표가 생겼다는 건, 곧 파헤쳐야 할 흑막과 비밀이 존재한다는 의미다. 그게 저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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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누구인지 궁금한가, 그렇다면 가까이 와라. 모두 말해 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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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들어오라는 듯 손짓하고 있는 왕을 향해, 나는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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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앞으로 나서자, 엘레노어와 메르세데스도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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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우리를 들여보낸 문이 ‘끼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쿵 닫혀버렸다. 이건 예상대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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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메르세데스도, 엘레노어도, 문이 닫혔다고 해서 꼼짝없이 갇힐 만큼 약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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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갑다, 고결한 기사 메르세데스. 아름다운 그림자 엘레노어. 그리고- 이름 모를 인간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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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엘프 왕은 왕좌에서 내려와, 우리를 향해 조금씩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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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를 하는데 대답이 없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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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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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시원한 대답이 듣기 좋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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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엘프 왕은 우리를 보며 비식 웃었다. 역시 저건 생긴 것만 저렇지, 아예 다른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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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쪽도 이름을 밝히지, 내 이름은 엘'로휀, 그대들이 만나러 온 엘뤼온의 아버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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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줄 알았지, 역시 내용물은 다른 사람이었군. 예상대로 선대 왕이 뭔가 술수를 부린 거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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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엘레노어는 하이엘프 왕이 밝힌 이름을 듣고 인상을 찌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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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대 하이엘프 국왕의 이름은 분명 엘'로나벨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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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개를 돌렸다. 말없이 검을 빼들고 있는 메르세데스도 크게 당황한 눈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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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착각하지 마라. 나는 엘뤼온의 아버지이지만, 동시에 엘'로나벨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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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로휀은 우리를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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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하이엘프 전체의 아버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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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순간, 막대한 마력이 파도처럼 넘쳐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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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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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일대를 장악하고 있던 세계수의 거대한 마력이, 의지를 갖춘 것처럼 넘실거리며 진동을 만들어 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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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포레스트 엘프가 자신들을 하이엘프라 칭하기 시작한 그때부터, 나는 매 순간 모두의 왕이자 아버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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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긴장 속에서 검을 뽑았다. 그리고 언제든 마력강화를 할 수 있도록 펜던트를 손에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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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은 우리를 보며 하하, 하고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이 상황이 아주 재미있다는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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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대놓고 흑막이라고 말하는 꼬락서니다. 하지만 대체 왜 이 타이밍에 본색을 드러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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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수가 혼을 순환시키는 장치라는 사실은 알고 있겠지, 그렇다면 그 순환이 언제부터 망가졌는지도 알고 있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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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순환의 굴레는 망가지지 않았다. 그저 내 혼을 순환시키기 위해 전력을 다하고 있을 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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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하이엘프의 왕은 정식으로 왕위를 계승하고, 왕홀을 쥐고 왕좌에 앉은 순간에 나와 대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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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은 여전히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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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말이 없군, 이해하기 힘들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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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단순한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할 바보는 어디에도 없다. 그냥 어이가 없어서 말이 안 나올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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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가 안 되는 건 하나야, 그걸 왜 이제 와서 우리한테 떠벌리고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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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인상을 쓰며 말하자, 하이엘프 왕은 또다시 피식거리며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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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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놈은 웃으며 굳게 닫혀버린 문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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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순순히 내가 부르는 대로 가까이 와 줬기 때문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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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떠벌려도 아무 상관이 없을 것 같으니까 떠벌린 거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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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종족 특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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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소한 수천 년 이상을 암약하고 있었을 흑막이 스스로 정체를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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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는 단순하다, 정체를 드러내도 아무 상관 없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그렇다면, 어째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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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 저 녀석은 이 순간에 정체를 드러내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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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측해 보자면, 둘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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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입을 완전히 막아버릴 자신이 있거나, 정체가 들켜도 상관이 없을 만큼 목표가 코앞이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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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녀석의 정체는 알지만, 녀석의 진짜 목적은 전혀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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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하이엘프 왕이 모두 저 녀석 하나였다면, 왜 녀석은 다크엘프와 평화 협정을 맺으려 했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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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결혼을 통한 평화 협정이 어그러지고, 수십 년이 지난 뒤에 다짜고짜 전쟁을 선포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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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히 연명이 목적이라면, 굳이 세계수를 장악할 필요는 어디에도 없다. 엘프는 원래 영생하는 종족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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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르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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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던트를 사용해 마력강화를 발동했다. 어쨌든 저 녀석이 흑막이라면 여기서 처치하면 그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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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생각하며 검을 쥐고 앞으로 돌진하려던 순간, 세계수가 다시 한번 마력을 내뿜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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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내 발은 그대로 멈추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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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적인 방해 효과를 받은 게 아니다. 그렇다고 공포나 두려움 때문에 발이 멈춘 것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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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머리가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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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느껴지고 있던 해일 같던 마력량이 전부가 아니었다는 사실에, 어이가 없는 전력 차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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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걸 어떻게 해야 이길 수 있을지 전혀 생각이 안 나서, 순간 움직임을 멈추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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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발, 저게 대체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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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엘프 왕의 머리 위에 떠오른 콘솔의 색깔이, 새까맣다 못해 조그만 블랙홀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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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저 모양의 구멍이 허공에 뚫려 있는 것 같다. 너무 어두워서 눈이 착시를 일으키고 있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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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고 있는 검이 그냥 나무토막처럼 느껴지고, 갑옷과 방패는 종잇장처럼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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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어깨에 너무 힘이 들어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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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 어깨에 닿은 손의 감촉, 나는 재빨리 검을 휘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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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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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공격은 허공을 갈랐다. 순식간에 내 뒤편으로 이동했던 놈은 다시 왕좌로 돌아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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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대체 뭐야, 순간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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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력강화를 사용한 내 반응속도를 능가하는 전조 없는 이동기라고? 말이 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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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네가 그렇게 긴장하고 있나, 이름 모를 인간족 검사. 내 목적은 너를 잡아먹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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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수의 마력을 등에 업은 하이엘프 왕이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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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아름다운 그림자여. 네 왕관을 내놓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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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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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그 마지막 한 조각만 있으면……너희를 해할 필요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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놈은 이번에도 순식간에 이동해, 엘레노어의 앞에 나타났다. 나는 다시 검을 휘둘렀지만, 맞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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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수를 장악하는 데 필요한 장치는 셋, 그 마지막이 왕관이다. 너희는 그것만 내놓으면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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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를 드러낸 이유가 이거였나. 왕관을 가진 엘레노어가 자신 앞에 떡하니 나타났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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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그게 목적이라면 결혼으로 평화 협정을 맺는 게 가장 쉬웠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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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어그러지자 힘으로 빼앗기 위한 전쟁을 일으킨 거고- 아니, 그건 좀 타이밍이 이상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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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을 일으키려면 진작에 일으켰어야 하는 거 아닌가? 애초에, 이만한 힘이 있으면 굳이 전쟁 따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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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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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니, 그런 거구나. 처음부터 이만한 힘을 갖고 있던 게 아니었어. 백 년에 걸쳐서 얻은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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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저 녀석이 쌓아올린 힘이 아니다. 백 년을 들여서 세계수의 힘을 다룰 수 있게 된 것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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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구태여 이 방 안으로 끌어들이려고 한 것도, 당연히 이유가 있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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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을 듣고 순순히 왕관을 내줄 것 같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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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과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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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가 손을 휘두르자, 그림자의 가시가 튀어나와 하이엘프 왕을 덮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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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내어주지 않을 줄 알았지. 하지만 너희의 의사 따위는 상관없음을- 왜 깨닫지 못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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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이동으로 가시를 피해낸 왕은 세계수의 마력을 끌어모았다. 요란한 마법진이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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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력 행사를 해야만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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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막막했던 적이, 제대로 힘을 쓰려고 하고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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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견적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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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해야 이 어설픈 녀석을 이길 수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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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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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타고 있던 메르세데스도 마력강화를 발동하고, 엘레노어도 그림자를 끌어올려 대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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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우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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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엘프 왕의 손에서 만들어진 마법진이 발광하는 구체를 만들어 사방팔방으로 흩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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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메랄드 와이번이 있던 지하 던전을 연상시키는 공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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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체 하나하나가 내 마나 총량만큼의 힘을 품고 있지만, 그 정밀함이나 밀집도는 그렇게 높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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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광! 콰과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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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마력강화의 힘에 더해 [혼신]스킬을 발동해, 아슬아슬하게 공격을 피해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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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도 그림자를 이용한 이동 기술로, 메르세데스는 그냥 무식한 속도로 회피해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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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구체는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쏘아진다. 이것만 피하다가 체력이 다 떨어지게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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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어쩔 수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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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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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에 힘을 빡 넣고, [혼신]스킬로 내구 스탯을 높이고, 마지막으로 [철벽]까지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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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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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아드는 구체를 피하지 않고 몸으로 받아버렸다. 폭발의 영향으로 전신이 찌릿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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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다중 내성을 뚫는 공격력, 거기에 폭발 지점에서 마력 폭풍이 휘몰아쳐 속을 진탕으로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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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발, 내장만 따로 빼서 원심분리기에 돌리는 것 같다. 목으로 울컥 피가 올라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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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부상을 감수하는 것으로, 마법 공격을 뚫고 상대와 거리를 좁히는 것에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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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수의 마력은 별의 지맥에서 끌어올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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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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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은 가볍게 배리어를 생성해 내 검을 막아내며, 무어라 떠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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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나무가 그렇듯이, 땅의 힘을 빼앗아 자신이 성장하는 것이지. 그렇기에 그 힘은 절대로 무한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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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엘프 왕의 눈이 빛나고, 괴상한 열선이 나를 향해 쏘아졌다. 나는 재빨리 방패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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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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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열선은 방패를 아무렇지 않게 관통해, 내 팔과 가슴팍을 꿰뚫고 그 자리를 열기로 지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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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의 지맥도 언젠가는 고갈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별은 벌써 밑천을 드러내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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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절거리는 하이엘프 왕을 향해 거대한 그림자의 도끼가 내리쳐졌다. 엘레노어의 공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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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왕은 이번에도 순간이동을 사용해 가볍게 피해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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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말해두겠지만, 이 말을 내 힘에 끝이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이지는 않았으면 좋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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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왕의 배후를 노리고 메르세데스가 검을 휘둘렀지만, 마찬가지로 빗나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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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러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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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포션을 들이키며 들고 있던 검을 집어던졌다. 내 주특기를 펼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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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당연히 빗나갔지만, 이미 내 손에는 새로 창이 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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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도 빗나가고, 이어서 도끼를 휘둘러도 막히고, 방패를 던져도 빗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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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촤라라라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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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인벤토리 안의 물건들을 쏟아내며 왕을 향해 달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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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격이 막히는 건 상관없다. 빗나가는 것도 상관없다. 상처를 입는 것도 상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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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요란하게 날뛰어도 통하는 공격은 하나도 없고, 상처가 벌어지며 피가 흐를 뿐이지만 상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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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안간힘을 써서 덤벼들수록, 저 멍청한 녀석은 나를 얕잡아 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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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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쏟아낸 무기들이 산산이 조각나서 흩날린다. 하이엘프 왕이 귀찮다는 듯 손을 들어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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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을 재촉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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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대한 마력이 모인 손아귀가 다가오는 것을 보며, 나는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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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을 부숴! 여기서 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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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세데스와 엘레노어는 내 외침에 곧바로 반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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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시선을 끄는 사이에 두 사람의 움직임은 많이 자유로워진 상태였다. 하이엘프 왕은 뒤늦게 고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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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놈은 우리가 이 방에 들어온 뒤에야 문을 닫고, 다 이겼다는 듯 자신의 정체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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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녀석의 힘은 세계수에 의존하고 있다, 다른 존재의 힘을 아무런 제약 없이 행사할 수는 없을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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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아니라면, 본인이 전장에 나가서 죄다 쓸어버리고 엘레노어의 왕관을 빼앗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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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추측해 볼 수 있는 제약은- 세계수와 연결된 왕좌가 있는 이 방 안에서만 힘을 쓸 수 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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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칠 수 있을 줄 알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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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엘프 왕은 공간이동을 사용해, 도주하려는 엘레노어의 앞을 가로막았다. 내 추측이 맞았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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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방 바깥에선 세계수의 힘을 자유롭게 쓸 수 없는 거다. 그러니 저렇게 급하게 막는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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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어쩌나, 사실 내 노림수는 탈출이 아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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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렇게 만신창이가 되면서 시선을 끌고, 탈출하라고 외쳤기 때문에- 당연히 그게 노림수라고 생각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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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에 취해서 상대를 얕보다가 엿 먹는 거, 그게 니들 종족 특성인가 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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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트닝 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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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 증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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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점 간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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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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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할 수 있는 버프 스킬을 모두 사용하고, 수없이 던져대던 무기 중 하나를 붙잡아 다시 내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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녀석에게 무식하게 달려들었던 이유도, 탈출하라고 외친 이유도, 모두 이걸 노리고 있다는 걸 들키지 않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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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던져진 무기가 노리는 것은, 세계수와 연결된 하이엘프의 왕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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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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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력으로 내던진 한 자루 창이 왕좌를 산산조각내는 모습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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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하이엘프의 아버지이자 왕이라고 했나, 확실히 그런 것 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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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마어마한 힘을 갖고 있지만, 정작 중요한 실력은- 그 왕자 놈이랑 다를 게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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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탐욕의 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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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접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마력과, 그 마력을 무한에 가깝게 공급하는 세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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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격 한방한방이 마력강화를 발동한 내게도 치명적이며, 양심 없는 방어력과 딜레이 없는 텔레포트까지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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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련의 탑이 지랄 맞은 게 어디 한두 번이냐만은, 아무리 그래도 이런걸 정공법으로 공략하라고 던져놓았을 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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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인 기준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아마 내가 9층 평균 도전자보다 스무 배쯤은 더 셀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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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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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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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좌를 파괴하자마자, 엘레노어를 공격하려던 하이엘프 왕이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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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예상대로 왕좌가 놈의 약점이었다. 마력감지로 살펴보니, 단번에 숨이 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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놈이 사방팔방에 펼쳐두었던 마법진도 모두 사라졌고, 숨쉬기도 힘들던 마력의 격류 역시 잠잠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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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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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나도 거의 동시에 피를 토했다. 이 한 번으로 왕좌를 파괴하기 위해 너무 몸을 혹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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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 맞은 공격은 몇 번 없었지만, 그 몇 번이 모두 치명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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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소를 피했기에 망정이지, 맞은 부위에 따라서는 그 자리에서 즉사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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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시스템상 즉사는 안 하지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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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 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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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세데스가 엘레노어를 향해 소리쳤다.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린 엘레노어가 문을 향해 그림자를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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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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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게 닫혀 있던 문이 산산조각났다. 왕좌를 파괴했으니 이제 문은 아무래도 좋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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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문보다는 쓰러진 왕의 목을 베어서 마무리 짓고 싶은 타이밍인데- 몸이 제대로 안 움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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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력강화가 저절로 해제되면서 온몸에 힘이 빠졌다. 출혈량도 장난이 아니고, 내장도 어떻게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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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있던 때, 갑자기 발밑이 꺼지며 시야가 확 뒤집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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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 뭐여, 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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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순간, 나는 엘레노어의 양팔에 안겨 있었다. 그림자 마법으로 나를 불러온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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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하다, 이 방법밖에 없었어. 어서 빠져나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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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보다, 확인 사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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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라면 방금 죽었다. 생명 반응이 완전히 끊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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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나도 안다. 내 마력감지에도 저놈은 죽은 걸로 느껴진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이걸로 끝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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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리어 메시지가 안 뜨고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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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드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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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나, 불길한 예감은 꼭 빗나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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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혈하며 쓰러졌던 하이엘프 왕의 몸이 이변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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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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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까만 나뭇가지를 연상시키는 무언가가 왕의 몸을 뚫고 튀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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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가지는 거미의 다리처럼 땅을 짚어, 숨이 끊어진 왕의 몸을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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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석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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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에 가깝던 마력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어이가 없을 정도의 마력이 그 죽은 몸에 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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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관만 손에 넣으면……너희에게도 내 대의를 이해시켜 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다짜고짜 왕좌를 부숴 버리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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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미친놈이 지금 뭐라고 하는 거야. 미친 마법을 난사하면서 죽이려고 할 때는 언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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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해주지 않았느냐. 세계수는 별의 지맥을 흡수해 성장하는 나무라고……이 의미를 왜 모른단 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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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이 별은 글렀단 말이다. 우리 엘프가 태어난 시점에서, 이 별의 멸망은 예견되어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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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엘프종이 뛰어난 마력 지각력을 가지고 있는 줄 아느냐! 세계수가 바랐기 때문이다, 마력이 넘치는 새 땅을 찾아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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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주절거리는 하이엘프 왕을 두고, 재빨리 그 방을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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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땅을 찾지 못하면 세계수는 끝이다, 세계수가 끝나면 엘프도 끝이다! 우리의 혼이 영원히 돌아오지 못한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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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는 나를 들쳐업고 속도를 냈다. 메르세데스도 마력강화를 유지하며 함께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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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도는 어처구니 없을 만큼 빠르다. 이미 하이엘프 왕이 있던 알현실에서는 아득히 멀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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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목소리는 계속해서 들려오고 있었다. 이미 목소리가 들릴 만한 거리가 아닌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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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수와의 연결이 끊어졌다고 내가 끝날 줄 알았느냐! 비축해둔 힘은 충분하다, 너희는 멸망을 앞당겼을 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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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였다. 침입자인 우리의 존재를 인식한 하이엘프 기사들이 불쑥 튀어나와, 앞을 가로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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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 뭐 하는 놈들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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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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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 메르세데스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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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세데스가 앞으로 튀어나와 호통치자, 기사들이 당황하며 멈춰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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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방당한 신세라지만, 과거 하이엘프의 제일 기사였던 배경은 어디 가지 않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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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 때, 근처의 벽에서 검은 나뭇가지가 튀어나와 작살처럼 기사들의 몸을 꿰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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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저건 대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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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에 꿰뚫린 기사들은 잠시 버둥거리더니, 순식간에 온몸이 쪼그라들어 먼지로 변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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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관을 순순히 넘겼다면, 희생해야 할 생명은 인간족 병사들의 것만으로 충분했으나……이젠 그럴 수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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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까만 가지가 왕의 목소리를 담고 사방팔방으로 뻗어 나간다. 이건 이미 가지도 뭣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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닿는 것의 생명을 무식하게 빨아들이는 괴물의 촉수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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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퇴로도 순식간에 검은 가지로 둘러싸여 막히고 말았다. 엘레노어는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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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여, 나를 있는 힘껏 붙잡고 있어라. 절대 놓치면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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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는 우뚝 멈추더니, 메르세데스를 한 손으로 잡고 그림자로 마법진을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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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다음 순간, 분수처럼 솟구친 그림자가 우리를 천장으로 사출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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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쾅! 콰광! 콰과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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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겹의 천장을 뚫고, 순식간에 하늘로 떠올랐다. 그 충격이 내 내장을 뒤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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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잖아도 아작나서 곤죽이 되었던 속이 뒤틀린다. 목구멍으로 뭔가 올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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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허억, 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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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에서 거하게 피를 토해내며 바라본 지상은 끔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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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성에서 뻗어나온 무수한 가지는 이제 거대한 파도처럼 성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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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보이는 엘프들을 모조리 꿰뚫어 생명력을 빨아들이고, 번식하듯 분열해 점점 더 주변을 덮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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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속도는 산불이 강풍을 업고 번지는 것처럼 빨랐고, 뻗어 나간 가지는 이제 세계수를 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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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세계수를 타고 기어오르는 새까만 가지는, 나무의 양분을 흡수하는 겨우살이를 연상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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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런 얌전한 것보다는- 배배 꼬인 수십만 마리의 뱀이 세계수를 타고 오르는 것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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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엘레노어도, 메르세데스도 그 모습을 보며 아무런 말도 못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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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세계수와 함께 이 별을 떠나, 머나먼 땅에 새 엘프의 왕국을 세우겠다. 이제 왕관 따위는 필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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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수와 함께 온전히 떠나고 싶었지만, 왕좌가 부서지고 연결이 망가진 이상- 다른 방법을 써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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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을 날만을 기다리고 있는 별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 모두 멸망시켜 세계수의 양분으로 삼아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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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끄럽다 못해 하늘에 쩌렁쩌렁 울리는 전음, 무수한 가시는 이윽고 하나로 얽혀 거대한 형상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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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수에 필적하는 크기로 얽혀 만들어진 그것은, 한 마리의 거대한 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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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고, 에픽 퀘스트의 진행도가 99%를 초과함에 따라, 계층의 설정이 변경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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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궁 지역이 소멸합니다. 보스 몬스터의 전이문 활성화 권한이 임시로 에픽 퀘스트에 이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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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픽 퀘스트 진행 중, 우호도 80 이상의 NPC와 파티를 결성할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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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월드 레이드가 진행됩니다. 파티와 공격대의 편성 인원 제한이 해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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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 월드 레이드의 난이도는 50인 이상의 공격대를 기준으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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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격대를 결성하십시오. 현재 서버의 참여 가능 도전자 :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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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빨간 시스템 인터페이스가 처음 보는 메시지를 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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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 레이드, 공격대, 모르는 단어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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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2661 서버에서 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던 단어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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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에 에픽 퀘스트가 한 번 더 갱신되었고, 거대한 뱀의 이름이 허공에 새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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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히 살고 싶다는 아집이 만들어낸 괴물, 긴 삶을 살며 사람이 아니게 되었으나 누구보다 사람다운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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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욕스럽게 먹어치우고, 끝없이 번식하고 번영하며, 최후의 최후까지 꿈꾸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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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욕망의 총체이며, 우주가 끝나는 날까지 숨쉬기를 바라는 불꽃. 무엇으로 그를 대적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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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LD BOSS - 세계를 삼키는 뱀용, 니드그라크'스바르프발니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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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검은 뱀은 그대로 세계수를 밑동부터 갉아먹으며 그 마지막 가지까지 부수어 입 안에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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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욕스럽게 생명의 나무를 먹어치우고, 그에 그치지 않고 주변의 모든 것을 먹어치운 뱀은- 입을 열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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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세계수와 함께 이 세상을 삼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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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정한 조건을 만족할 경우에만 출현하는 초대규모 레이드 대상, 월드 보스로 거듭난 왕이 붉은 눈을 빛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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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픽 : 다크엘프의 서 - 최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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갱신된 에픽 퀘스트의 내용은 이것이 정말로 최후의 싸움이 될 것임을 알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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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표는 지극히 단순했다. 저 뱀을 처치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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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층에서부터 시작하여, 한참을 이어져 온 다크엘프의 서가 마침내 최종장에 진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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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 레이드 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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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층에서 시작하는 진영 퀘스트는 진행 방식에 따라 20층대까지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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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진영 퀘스트가 중심이 되는 층은 9층까지만이다. 그 이후로는 드문드문 연관된 퀘스트가 나올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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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으로 비유하자면, 후일담이나 팬서비스 수준으로 엘프나 인간 진영이 관련된 내용이 나오는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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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 ‘세계관’이 엄밀하게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이 커뮤니티 도전자들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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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저 꼬락서니를 보면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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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수를 집어삼키고, 말 그대로 세상을 멸망시킬 것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는 거대한 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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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극소수의 엘프 NPC가 등장하는 층의 황폐한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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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이 9층의 세계관은 다른 층까지 이어진다. 저 뱀 때문에 한 번 멸망한 다음의 세계라는 설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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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맙소사……어떻게 이런 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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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번이나 그림자 마법을 사용해 뱀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우리는, 멍하니 무너져가는 성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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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엘레노어도 갑작스레 벌어진 참사에 말을 잇지 못했으나, 가장 동요하고 있는 것은 역시 메르세데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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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중히 여기던 왕자는 몸을 빼앗겨 버렸고, 고향은 실시간으로 거대한 괴물에게 무너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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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어째서, 어째서 이렇게,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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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안타까운 것은, 메르세데스에게는 이 참상을 막을 기회가 있었다는 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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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세데스는 추방당하기 전까지 하이엘프 왕의 곁을 계속해서 지키고 있었으며, 그의 변화를 잘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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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수에 대한 지식이 조금이라도 깊게 있었다면, 이 지경까지 오기 전에 상황을 해결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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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메르세데스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혼자 힘겨워하다, 끝내 추방당하고 기회를 빼앗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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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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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하니 파괴되는 성을 지켜보던 메르세데스가, 결연한 표정으로 검을 집어들고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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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어디 가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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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봐도 제정신이 아니었기에, 나는 곧바로 녀석을 붙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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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추방당한 신세지만, 나는 하이엘프의 제1기사다. 우리의 도시가 무너지는 걸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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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두고 보면 뭐 어쩔건데, 네가 봐도 저긴 이미 그르지 않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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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해도……해야만 하는 일이다. 내겐 버려둘 수 없는 의무가 있어. 도와달라고는 하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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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같으면 신경도 안 썼겠지만, 이번에는 가게 둘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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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궁 지역이 소멸하고, 나는 에픽 퀘스트를 완료하지 않으면 다음 층으로 올라갈 수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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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에픽 퀘스트에 멸망 엔딩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면, 나는 저 뱀을 처치해야만 퀘스트를 완료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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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격대를 결성하십시오. 현재 서버의 참여 가능 도전자 :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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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저 뱀이 공격대를 편성해 싸워야 하는 월드 보스고, 이 빌어처먹을 탑에는 나 혼자밖에 없다는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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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9층 도전자의 평균 스펙을 아득히 초월하고 있으나, 저런 걸 혼자 쓰러트릴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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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소 50인의 공격대를 편성해야만 하는 적, 그걸 나 혼자 쓰러트리려면 평범한 도전자보다 100배쯤은 세야 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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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정도로 강하지 않다. 메르세데스 같은 강력한 아군을 잃으면 끝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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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저기로 달려가서 혼자 뒤지는 게 네 의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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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메르세데스에게 말했다. 이런 말을 내 입으로 해도 괜찮은 건지는-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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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족을 구하고 싶어서 가는 거라면 안 말려, 말리기는 무슨- 도와줄 수도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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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꼬락서니로 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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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지가 날아간 것도 아니고, 내장 좀 갈린 건 포션 때려 부으면 어떻게든 돼. 좀만 있으면 다 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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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전쟁은 더 이어지지 않을 것이다. 지금부터는 진영을 불문하고 하나라도 아군을 늘려야 하는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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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호도 80 이상의 NPC를 파티원으로 넣을 수 있다는 건, 아마 이런 걸 의도한 설정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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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 도와줄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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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하나가 더해진다고 될 일도 아니기에, 나는 엘레노어에게도 물었다. 아마 엘레노어라면 흔쾌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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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그대가 원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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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와줄 줄 알았는데, 어쩐지 좀 떫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두 눈에 별빛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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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표정은 아무래도 괜찮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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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야말로 엘레노어가 원하는 전쟁을 종식시키는 일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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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뮤니티에서 월드 보스에 관한 정보를 있는 대로 긁어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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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인 이상 규모의 공격대가 필요한 대규모 레이드, 난이도는 출현 층수에 따라 다르나 대체로 매우 높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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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리어 시 확정으로 에픽 등급의 보상을 드롭, 보상은 아이템이나 에픽 등급 전직서 등이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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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유명 S급 헌터인 제라드 그레이엄이 보유한 [용살자]라는 에픽 클래스가 월드 보스 레이드로 얻은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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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중요한 점으로, 월드 보스는 출현 직후의 개시 패턴이 종료되면 잠시 휴식 상태에 들어간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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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내 눈앞에는 저 뱀의 재활동까지 남은 시간이 카운트 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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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이건 시스템의 안배로 주어진 공격대 결성을 위한 시간일 것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유효하게 활용해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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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촤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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똬리를 튼 거대한 뱀 근처에서 스멀스멀 기어 다니는 가시덩굴 괴물을 베어버리고, 무너진 건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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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석재 덩어리를 힘으로 밀어서 치우고, 그 밑에 깔려 있던 엘프를 일으킨 뒤 포션을 먹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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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해낸 엘프는 그대로 엘레노어가 설치한 그림자 워프 포인트로 옮겨, 마을로 호송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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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이 짓거리를 몇 시간이나 반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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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 현장에 출동한 소방관이 된 기분이다. 차이점이 있다면 무기를 쓴다는 것 정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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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뭐 끝이 없어서 더 좋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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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해서 스폰되는 가시덩굴 괴물을 썰어버리며 나는 계속해서 파괴된 도시를 누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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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면 상태에 들어간 월드 보스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는 잡몹들은 내게 훌륭한 포션이 되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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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이놈들도 만만치 않은 전투력을 자랑하지만, 내 스펙 앞에서는 그저 그런 잡몹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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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나는 여러 스킬과 무기의 옵션으로 잡몹을 잡을수록 HP와 MP를 회복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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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쪽은 거의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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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쪽에서 구조작업을 벌이고 있던 메르세데스가 합류하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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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성과 인접한 지역이라 피해가 컸어, 살아남은 이들이 무척 적었다……이쪽은 어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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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도 대충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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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그런가, 예상하고 있었지만……남은 이들이라도 구할 수 있었던 것에 기뻐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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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재주가 없는 나로서는 마땅히 답해줄 방법이 없는 말이었다. 다만 조용히 포션 한 병을 건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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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P와 MP를 무한대로 회복할 수 있는 건 나 뿐, 메르세데스는 시간이 지나면 결국 지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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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다, 네가 아니었으면 이만한 숫자를 구할 수는 없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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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준 포션을 받아들며, 메르세데스는 꾸벅 고개를 숙였다. 뭐, 내가 구조에 큰 몫을 한 건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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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구조된 인원을 받아준 건 엘레노어와 다크엘프들이기 때문에, 그에 비하면 대수로운 수준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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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메르세데스가 느끼는 건 또 다르겠지. 어쨌든 내가 말을 꺼내서 실행할 수 있었던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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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로서는 레이드에 참여할 아군을 하나라도 늘리기 위한 일이었을 뿐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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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로,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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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고압적인 엘프의 태도를 바꿔놓기에는 충분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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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러운 월드 보스의 출현으로 하이엘프 세력은 완전히 와해하였고, 소수 난민만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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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피해를 당한 것은 하이엘프만이 아니었다. 마침 도시를 공격하려고 준비 중이던 왕국군 진영도 큰 피해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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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를 입지 않은 것은 다크엘프 진영뿐, 하지만 세상을 먹어치우겠다고 선언한 뱀이 다음으로 향할 목표는 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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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엘프를 쓸어버렸으니, 다음에는 다크엘프의 차례겠지. 그다음에는 남은 인간 세력을 쓸어버릴 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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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어쨌든, 유일하게 피해를 당하지 않은 다크엘프 진영은 현재- 난민촌이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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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판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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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된 하이엘프와 마찬가지로 구조된 소수의 왕국군 병사들이 만신창이가 되어 모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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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엘프들은 그나마 같은 엘프종 사이라서, 상대적으로 경계가 심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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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왕국군 병사들은 상황을 조금도 모르고 휩쓸렸다 구조된 상황이다 보니, 유독 날이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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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인간을 좋아하는 다크엘프들은 난데없이 받게 된 인간 난민들을 향해 어마어마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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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전쟁의 기억 때문에 인간이라고 무조건 호의적으로 대하지는 않는다지만, 기본적인 습성은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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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엘프들에겐 화재 현장에서 꼬질꼬질한 새끼고양이 무리를 구조해 온 꼴이니까, 이 정도면 잘 참고 있는 거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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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나는 이런 불편한 대치를 원해서 이들을 구조해 온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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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 보스의 활동 정지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남은 시간 동안 어떻게든 이들을 규합해서 전력으로 삼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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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가 잘 해줘야 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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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협력을 요청하기 위해 왕국군 본진에 전령을 보내두었다. 곧 이 자리에서 삼대 세력의 정상회담이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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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을 설득해 아군으로 만드는 건, 말재주라고는 쥐뿔도 없는 내겐 불가능한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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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은 깔아뒀으니, 이젠 기대를 걸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는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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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월드 보스 레이드 팁 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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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나는 집단지성의 힘을 빌려, 레이드 전략을 구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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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 커뮤니티의 순기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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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세대의 도전자들은 대부분 커뮤니티에 올라온 공략을 보고, 정석대로 보스를 잡는 타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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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처음 보는 보스를 공략하는 방법을 알아내는 데에는 영 신통치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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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고등급 헌터가 되기 위해 장기 체류 중인 일부 최상위 공략파 도전자나, 소수의 고인물 도전자들은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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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련의 탑 내부의 질서 유지를 위해 남은 길드 마스터나, S급을 목표로 한참 동안 처박혀 있는 최고위 랭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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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1세대 도전자에 한없이 가까운 경험을 쌓았으며, 실제로 1~2세대 당시에 탑을 오른 경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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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혁이 살아있었네 ㅋㅋ 생존신고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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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얘 아직도 솔플임? 2661에 아직도 뉴비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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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ㄴ 그런듯? 커뮤에 2661태그 단놈이 아무도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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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드보스는 뭐임 저런거 처음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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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건 몇층 보스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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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ㄴ 뭐야시발 월드보스네 저게 왜 저기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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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커뮤니티에서 높은 주목도를 가진 내 글에는 빠르게 댓글이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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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당연히 영양가 있는 정보는 커녕, 기껏 올린 스크린샷을 보지도 않고 댓글을 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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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하나둘씩 글의 내용을 확인하고, 소문으로만 듣던 월드 보스의 존재에 경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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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ㅅㅂ저거뭐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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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드보스?? 저거 진짜 있는거였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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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ㄴ 월드보스가 뭐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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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ㄴ 히든같은건데 공격대 수십명짜서 단체공략해야되는거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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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ㄴ ㅅㅂ? 근데 얘 솔플러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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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ㅅㄲ 이젠 념글각보려고 주작까지하네 ㅋㅋ 구라치지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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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ㄴ 저걸 어떻게 주작해 ㅅㅂ련아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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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에서 글을 하나 더 올렸다. 시스템 메시지를 캡쳐한 사진을 덧붙이고, 상황 설명을 곁들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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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도 댓글이지만, 개인 쪽지 알람이 어마어마하게 많이 온다. 개중에는 최상위 길드의 연락도 몇몇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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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알기로, 대한민국에서 월드 보스가 나타났던 건 다 합해서 3번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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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3번의 레이드에서 활약했던 이들은 대부분 유니크 내지는 에픽 등급의 보상을 받아, 최상위 헌터가 되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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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상위 길드의 길드원들은 당연히 월드 보스의 존재에 대해서 계속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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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우리 탑으로 넘어올 수 없는 이상- 관심이 있어봐야 아무 소용 없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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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이 물어다 주는 정보나 팁은 분명 공략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나는 다시 커뮤니티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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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사이에 댓글이 거의 수백 개가 달려 있었고, 순식간에 백 단위의 추천을 받아 내 글은 바로 인기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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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커뮤니티의 떡밥이 이쪽으로 옮겨진다. 관련된 글이 계속해서 페이지를 채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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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보스 나온거 이번이 몇번째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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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저거 잡을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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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61섭에 사람이 50명이 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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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버에 한명밖에없는데 50인레이드는 씨발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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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인 이상이지 50인이 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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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새끼 혼자만 세계관이 다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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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떡밥을 물고 흘러가는 여러 뻘글 사이에서, 어떤 게시글이 많은 추천을 받고 인기글로 솟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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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강혁진#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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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월드 보스 레이드에는 속강이 제일 중요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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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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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트람 레이드때 우리 파티에서 기여도 제일 높았음, 위에 인증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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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 레이드 대기 시간때 보스 근처에서 잡몹 스폰되는데, 걔네랑 보스랑 속성이 같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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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레이드 시작전에 속성 종류별로 인챈트해서 딜 실험 가능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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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레이드는 한판이니까 공대원한테 일회용 속강 다 붙여주면 딜뻥 존나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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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로 공격 맞은다음에 속성저항 붙여두는것도 됨, 탱커진 몸빵 거의 1.5배는 될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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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플로는 죽어도 못잡긴한텐데 일단 예전 공략기록 다 찾아보겠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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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혁이가 볼수있게 념글좀 올려주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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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 경험자가 있네 개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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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즉시 개추 이거 올려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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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데 진혁이한테 공대원이 어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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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회용 속강 가능함? 진혁이 아직 9층이라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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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ㄴ ㅇㅇ경매장에서 속성부적 사서 바르면됨 얼마안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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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ㄴ 씨발롬아 서버에 사람이 없는데 경매장 ㅇㅈㄹ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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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뮤니티 떡밥이 활발하게 굴러가면 나올 수밖에 없는, 경험자와 전문가의 한 마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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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씩 유익한 정보가 쌓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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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월드 보스의 외형을 캡쳐해서 올리고, 내 진영 퀘스트의 상황도 상세하게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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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 보스의 정체인 하이엘프 왕에 대해서도, 세계수에 관한 설정에 대해서도, 각 진영의 협력을 구하고 있다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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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나니, 전보다 더 빠른 속도로 유용한 정보들이 모였다. 7~9층의 진영 퀘스트는 누구나 다 해 봤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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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겪어보지 못한 왕국군 쪽 루트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와, 하이엘프 진영 루트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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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시련의 탑의 여러 스토리를 연구하는 자칭 역사학자들의 설정에 근거한 의견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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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김혁수#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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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왕국군 병기중에 마포라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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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NPC잘 설득하면 끌고올수있을거임, 대형몹이니까 맞추기도 쉬울거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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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포 다 세면 한 50대는 나올거고, 원래 공성전 퀘스트용인데 강화재료 넣고 강화도 가능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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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4강까지는 효율 좋고, 그 이상은 재료 넘쳐나는거 아니면 비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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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포는 안된다고 뻗댈수도 있는데 지휘관중에서 4번대 장군 NPC있을거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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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마다 좀 차이는 있어도 퀘스트라인 따라가면 걔가 마포관련 비리 있다고 나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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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걸로 협박하면 될거임, 이것도 념글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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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스트 라인에 따라 체험할 수 있는 공성전 이벤트에서 쓰이는 대형 병기. 이건 특히 유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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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가 효율이 낮은 건 아무래도 좋다. 왜냐하면, 내 인벤토리에는 강화재료가 말 그대로 산더미만큼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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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나는 습득한 정보에 따라 다크엘프 마법사 몇 명을 데리고 잡몹들을 상대로 실험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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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가장 잘 통하는 속성은 명 속성, 그리고 주문 속성의 공격이 그다음으로 잘 먹힌다는 정보를 커뮤니티에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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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고혁준#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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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명속성 최대한 끌어모으는 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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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엘프 마법사중 엘리트급한테 샤이닝 차지 써달라고 하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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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국군 성기사한테 홀리 차지는 샤이닝 차지랑 중첩되니까 같이 바르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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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엘프 연금술 상점에서 랜덤 제조 있는데 거기서 빛의 보주 제작해도 좋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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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주는 일회용인데 지속시간 짧으니까 딜타이밍 잡았을때만 쓰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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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포도 속성 부여 가능한데 명속성은 상승치가 낮으니까 주문속성으로 ㄱ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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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국군 상급 마법사 NPC가 주문의 땅이라고 범위 주문속성 증폭 버프 쓸수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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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포 첫발사때 꼭 쓰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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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이번에도 빠르게 정보가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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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 보스 레이드라는 좀처럼 없는 빅 이벤트에, 전 서버 유일의 솔플러를 향한 관심이 시너지 효과를 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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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뮤니티에 잘 나타나지 않는 최상위 랭커 도전자들도 저마다 경험을 근거로 팁을 주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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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중 실전에서 적용할 수 있는 팁의 숫자는 생각 이상으로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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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정석 레이드를 해본 적 없는 솔플러라는 점 때문에 모르고 있었던 수많은 전략, 전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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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세대 당시부터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던 여러 가지 소문과 경험의 법칙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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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하나만 보면 대수롭지 않지만, 수백 수천이 모여 전해 주는 이 정보들의 가치는 막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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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이게 커뮤니티의 순기능- 진짜 집단 지성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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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뮤니티에서 퍼다주는 정보를 받아먹고, 대강의 레이드 계획을 완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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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공유한 계획을 다른 도전자들이 짚어주고, 수정해 주는 것을 그대로 따르니- 마지막에는 꽤 그럴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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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이 계획을 그대로 수행할 수 있느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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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결국 삼대 세력이 전적으로 협력하는 것을 전제로 깔고 있는 계획서니까. 협력이 안 되면 전부 끝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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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원할 수 있는 전력이 반 토막이 날 거고, 레이드 시작까지 준비를 온전히 마치기도 힘들어질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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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뜨겁게 달궈진 커뮤니티에 감사의 표시로, 적당히 ‘좋은’ 스크린샷을 몇 개 살포한 뒤 창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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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부터 정상회담이 시작된다. 레이드를 앞에 두고 각 세력의 협력 여부가 결정 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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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포함한 몇 인물들의 참관하에, 원탁에 둘러앉은 것은 각 진영의 대표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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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엘프의 대표로는 메르세데스가 자리했고, 왕국군의 대표로는 국왕이 아닌 군단장이라는 자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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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껴지는 기백이며 걸음걸이가 모두 심상치 않은 걸로 봐서, 아마 왕국군 측의 최고 전력 NPC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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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다크엘프 진영의 대표로는 당연히 여왕인 엘레노어가 나와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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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엘프의 대표는 아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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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의 기척이 가까워지려는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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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이 있는 다크엘프에게 무슨 일인가 싶어 눈짓했지만,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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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로부터 몇 분이 지나서야, 다크엘프 진영의 대표가 회담장에 입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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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구야, 척 봐도 아주 거물들이 모였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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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엘프의 대표는 자리와 어울리지 않는 특유의 작업복을 입고, 쇠 냄새가 풍기는 채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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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탁 앞에 앉은 것은, 엘레노어가 아니라 키 작은 다크엘프 대장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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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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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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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정상회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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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웬의 등장에 당황한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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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여왕인 엘레노어가 자리에 나올 것이라 예상하고 있던 모두가 웅성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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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외가 있다면, 엘레노어의 얼굴을 모르는 인간족 왕국군의 대표인 군단장- 라인하르트라는 이름의 남자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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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다크엘프의 여왕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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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구, 여왕이라니. 나는 그냥 철 두드리는 늙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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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종족의 대표가 모이기로 했을 텐데, 여왕은 오지 않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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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며 자리에 앉는 에르웬을 보며 그런 말을 했다. 에르웬은 너저분한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무언가를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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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반지였다. 그러고 보니 언젠가 엘레노어가 저런 걸 끼고 있는 모습을 본 적이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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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지에는 내 견장에 박혀 있는 정찰대 마크와 비슷한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아마 다크엘프 왕실의 문양일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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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 그 아이한테서 역할을 넘겨받고 왔으니, 안심해라. 덩치 큰 인간족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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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치 큰 인간족이라고 불린 군단장- 라인하르트는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불만이 많은 표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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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개 대장장이가 종족을 대표한다니, 이 상황을 어지간히 가볍게 보고 있나 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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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상황에 대해서라면 가장 모르는 형편이면서, 저런 소리를 지껄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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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딱 봐도 지저분한 작업복 차림으로 원탁에 앉은 에르웬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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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는 한다. 엄연히 삼대 세력이 모여 중대사를 논하는 자리인데, 저런 꼴로 나왔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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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지금이 그런 걸 따지고 있을 때인가. 왜 쓸데없이 시비를 거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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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족아, 너야말로 상황을 잘못 보고 있는 게 아니냐? 여기가 뭘 위한 자리라고 생각하는 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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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종족의 미래를 놓고 협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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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음, 이게 협상이라는 단어를 올릴 수 있는 상황 같으냐. 인간족은 저 커다란 뱀을 보지 못했나 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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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웬은 그렇게 말하며 저 멀리, 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는 검은 기운을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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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남은 미래는 둘 중 하나다. 다 함께 저것에게 멸망하거나, 다 함께 힘을 합쳐 승리하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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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 우리 여왕이 그러더구나. 서로 선택지가 없는 이상 이건 외교의 영역이 아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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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머리를 굴려서 이익을 얻으려는 이들보다, 상대에게 앙금이 깊지 않은 이가 나가는 게 맞을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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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맹은 당연한 전제, 이루어지지 못하면 멸망. 필요한 건 결국 서로 손을 맞잡는다는 행위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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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서로 목소리를 높일 일이 없도록, 마음이 넓은 일반인이 원탁에 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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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을 가볍게 보아서가 아니라, 상황이 심각하다는 걸 알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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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하게는, 이렇게 해야 할 정도로 상황이 심각하다는 걸 알리려고 시위를 벌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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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얼, 나는 다크엘프 최고의 연장자다. 사이 나쁜 아이들을 화해시키는 일에는 도가 텄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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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발처럼 들리기도 하는 말을 내뱉고, 생긋 웃어 보이는 에르웬의 표정은 무척이나 상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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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웬은 일개 대장장이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다크엘프의 장로나 다름없는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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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왕국 측에서도 왕이 아닌 장군이 나왔으니, 다크엘프 진영이라고 꼭 여왕이 나올 필요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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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국군 측도 더 시비를 걸려고 하지는 않았고, 곧 삼대 세력의 연합을 위한 이야기가 오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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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나는 솔직히, 말하는 내용의 절반도 이해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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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반은 저 뱀의 위험성을 이야기했고, 이후 그 책임 소재에 대해 떠들고 있었던 것까지는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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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에르웬의 중재로 누가 잘났니 못났니 하는 이야기가 끝나고 나서는- 역시 외교적인 이야기가 더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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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국군에서 병사를 얼마나 지원할 수 있느니 없느니, 병기 동원은 경제적으로 힘드니 어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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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부분은 차라리 이해하기 쉬웠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정치 이야기를 하다 보니 도무지 따라갈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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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왜 저런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생각 이상으로 왕국군 측에 문제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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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엘프의 인간 혐오 못지않게, 왕국군 소속의 인간족은 엘프에게 상당히 적대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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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는 것만 보면 무슨, 불법체류 외국인을 대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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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징하게 떠들던 역사와 관련이 있는 것도 알겠고, 개씹좆프의 혐성을 겪어 본 탓도 있기야 하겠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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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저놈들은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실리적인 조건을 자꾸만 걸려고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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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정한 규모의 금전적 지원이 불가능하다면, 최소한 대수림의 일부를 영토로 할양하라느니 어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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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웬은 이런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그러고 있을 상황이 아니라고 답답해했지만- 결국 이야기는 계속 돌고 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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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드를 위한 작전 브리핑 단계에서 꺼내려 했던 거지만, 이제 어쩔 수 없을 것 같다. 담판을 지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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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야, 너 닥쳐. 그만 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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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대장군 옆에서 주절주절 떠드는 모사꾼 새끼에게 욕지거리를 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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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 씨발 말끝마다 뭘 내놓으라니 말라니, 뒤지고 싶어서 환장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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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국군 측의 인원들이 발끈하며 뭐라 뭐라 떠들기 시작했지만, 나는 무시하고 인벤토리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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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무기를 꺼내서 이놈들을 썰어버리고 강압적으로 이야기를 진행하려는 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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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같은 새끼들 때문에, 일부러 안 보여주고 있었던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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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인벤토리의 골드 탭을 눌러, 에르웬에게 보여줬던 것처럼 대량의 금화를 자리에 쏟아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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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촤르르르르르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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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뭘 하나 싶어서 지켜보던 왕국군 진영의 인간들이 점점 아연한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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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돈과 이익이 문제라면 내가 해결해주마, 이 돈벌레 새끼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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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층에서 9층까지 올라오면서 모았던 골드를 모두 아낌없이 쏟아붓고, 이후에는 아이템도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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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사들이 사용할 수 있는 갑옷이며 무기만 해도 수백 개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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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세데스와의 결투에서 박살 난 걸 제외하고도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아까울 것도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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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뱀 새끼랑 싸워서 살아남으면, 남은 건 다 가져도 돼. 내 조건은 하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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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이템과 골드를 몽땅 쏟아부은 뒤, 마지막으로 내 애검을 꺼내서 모사꾼 놈에게 집어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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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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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아슬아슬하게 머리를 맞지 않고 벽에 박힌다. 일부러 안 맞춘 거지만, 맞아도 상관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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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전까지 ‘이익’ 이랑‘ 돈’이라는 단어 말했던 새끼들은 다 작전에서 배제하고 시작하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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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런 놈들을 두고 물자를 지원해 주면, 분명 남겨 먹으려고 개수작을 부릴 게 분명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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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이렇게 삼대 세력 간의 정상회담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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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건 레이드가 시작되기 전까지 최대한 준비를 마치는 것, 다행히 시간은 아직 그럭저럭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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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회담 종료 후, 나는 내가 알아낸 뱀에 대한 정보를 있는 대로 다 풀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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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성 약점, 중첩되는 축복의 효과, 뱀의 재활동까지 남은 시각, 시너지를 낼 수 있는 각 진영의 병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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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그런 것들의 존재를 어떻게 알았느냐고 묻는 이들도 있긴 했지만, 적당히 얼버무리니 따지려 들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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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도 결국 NPC인 이상, 시스템의 존재에 닿을 수 있는 의문은 깊이 파고들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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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일차 공략 회의를 마치고 난 이후, 나는 에르웬에게 다가가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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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엘레노어는 지금 어디서 뭐 하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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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웬이 대표 역할로 나온 건 그렇다 치자, 하지만 엘레노어가 아예 나오지 않을 이유는 뭐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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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웬을 대신 내보낸 것도 상당히 급하게 결정된 듯하고, 여러모로 신경이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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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물음에, 에르웬은 잠시 고민하는 듯- 제 턱을 쓰다듬다가 말을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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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서 준비해야 할 일이 조금 있는 모양이더구나. 바쁘니까 당분간은 찾지 말아달라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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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쩐지 씁쓸한 표정이었다. 어지간히 내키지 않는 말을 하는 모양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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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음……마음이 많이 복잡한 모양이야. 인간족아, 혹시 그 애한테 뭔가 상처 주는 말을 한 건 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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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짚이는 게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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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와 연관이 있는 건 확실해 보이는데, 물어봐도 도통 말하려고 하질 않으니- 하여튼 사랑이란 참 어렵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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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웬은 그렇게 말하고는 내 등을 팍팍 두드렸다. 사랑이라니, 갑자기 뭔 소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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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에르웬은 대장간 일이 바빠질 것 같다며 자리를 떠났고, 나는 혼자 남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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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의 상태가 최근 들어 많이 나빠졌다는 사실은 나도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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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제 입으로 잠은 푹 자고 있다고 했는데, 날이 갈수록 지쳐 가는 모양새여서 신경이 쓰였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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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조만간 깡통 NPC로 돌아갈 상대에게 무슨 걱정을 하고 신경을 쓰겠냐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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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갈수록 빛을 잃어가는 눈동자를 보고 있으면, 괜스레 어딘가에서 둔통이 일고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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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랑 상관이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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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에르웬이 남긴 말을 떠올리며 이마를 짚었다. 엘레노어의 상태가 나빠지는 게 대체 나랑 무슨 상관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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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웬은 멋대로 사랑이 엮인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애초부터 얄팍한 관계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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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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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숨 쉬며 생각을 그만두었다. 지금은 달리 신경 쓸 일이 너무나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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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가 어떤 상태건 뭐 어쩌랴, 결국 저 월드 보스를 잡지 못하면 다 끝장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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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잠시 잊어버리고, 나중에 생각하자, 나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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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엘레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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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대 세력의 연합과 레이드 준비는 매우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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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국군 병사들과 하이엘프들은 서로에게 어마어마하게 투덜거리긴 했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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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삼킬 기세를 내뿜고 있는 뱀용의 모습과, 그 주변에서 나타나는 잡졸들을 보고 사태의 심각성을 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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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날 세우며 대립하고 있을 때가 아님을, 저 뱀을 어떻게 하지 않으면 정말로 세계가 멸망할 거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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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개개인의 감정 문제는 어쩔 수 없었지만, 거대한 위기 앞에서 분열하는 꼴은 나지 않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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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월드 보스의 활동 재개까지 앞으로 한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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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화된 다크엘프 마을에서 살짝 떨어진 장소에 다수 진지가 깔렸다. 진지에는 각각의 무기가 배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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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벤토리에 가득 차 있던 강화재료와 골드를 있는 대로 쏟아부어, 최대치까지 강화한 마포가 팔십여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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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엘프의 비전 마법으로 구축한 간이 마력포대가 이십여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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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엘프의 전쟁용 병기인 발리스타가 오십여 개. 이 모든 무기에 하나하나 이중으로 속성 강화를 걸어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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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에 모든 병력에 내 인벤토리에 남아돌던 장비와 무기를 최대치로 강화해 지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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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웬을 비롯한 대장장이들이 추가로 제작해 준 무구들도 적재적소의 인원에게 배부되어, 전력을 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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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이 모든 무기에도 이중으로 속성 강화를 부여, 그 밖에도 소모성 포션을 개인별로 지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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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로 나는 거지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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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벤토리에 쌓아두었던 어마어마한 숫자의 자원도, 작정하고 군대를 무장시키니 어느덧 밑천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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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내 인벤토리에 남아 있는 것은, 이번 전투를 위한 포션과 스위칭용 장비 두어 세트가 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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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여기서 이기지 못하면 끝이라는 마인드로, 가진 모든 자원을 투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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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구야, 이제야 좀 쉬겠구나. 두 번 하라면 차라리 죽는 게 낫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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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비를 점검하고 있자니, 그동안 쉬지 않고 망치를 두드려대었던 에르웬이 앓는 소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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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쉬어, 이기든 지든 다음은 없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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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도 그렇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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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는, 싸우기로 한 거 맞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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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물음에 에르웬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드 준비를 하는 동안, 엘레노어는 모습을 거의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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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그렇다고 혼자 성에 처박혀 있었다는 건 아니다. 나도 드문드문 얼굴을 보긴 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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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엘프의 오래된 주술이나 비전 마법 같은 것을 서고에서 찾아내 마법사들에게 전달한다거나 하기도 했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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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솔력을 발휘해서 레이드 준비가 빠릿빠릿하게 진행될 수 있도록 현장에서 지휘하기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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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멀리서 지켜만 봤을 뿐이지만, 책임감과 의무감으로 움직이고 있는 엘레노어는 정말로 여왕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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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어쩐지 평소의 엘레노어다운 모습은 도통 보지 못했다. 어쩐지 마음이 다른 곳에 팔린 기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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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더구나, 마침 전투 준비도 끝나갈 때구나. 만나러 가 보지 그러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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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끄러미 내 표정을 살피던 에르웬이 제안했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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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드가 실패하건 성공하건, 아마 엘레노어와는 이게 마지막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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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성으로 들어오자, 그늘진 창가에서 밖을 내다보고 있는 엘레노어의 모습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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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하니 흐린 눈으로 그러고 있던 엘레노어는, 이내 내 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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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됐나 해서, 잠깐 보러 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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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왠지 모르게 변명하듯 그렇게 말했다. 엘레노어는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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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후, 나를 신경 쓰고 있었나? 보다시피 만전이다, 누가 상대라도 질 것 같지 않은 기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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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는 검과 지팡이를 챙기고 갑옷과 망토를 착용한, 말 그대로 완전 무장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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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엘프의 보물을 모조리 꺼내왔다던데, 확실히 느껴지는 마력의 기세도 심상찮게 강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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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묘하게, 마력에서 격한 흔들림이 느껴졌다. 그 기색이 명상할 때 느끼는 내 마력의 떨림과 비슷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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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뭘 따로 준비한다던 게 그거야? 마력이 어마어마하게 불어났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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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이지, 누가 뭐라 해도 세계수의 파편으로 만들어진 굉장한 보물인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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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세계수가 별의 지맥을 빨아먹는 초거대 기생식물인 점을 생각해보면 좀 깨긴 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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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게 다는 아니다. 조금……옛 문헌을 뒤져보고 있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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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는 그렇게 말하며 품에서 작은 책 하나를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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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와서 읽어보니, 새삼 다르게 읽히는 부분이 많았지 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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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수의 정체를 알고 다시 읽으니, 옛 선조가 남겨두었던 기록에 의미심장한 부분이 있었다고- 엘레노어는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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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부분들을 토대로 세계수에 대해 좀 더 조사하고 연구하니, 새로운 마법에 다다를 수 있었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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옅게 웃으며 레이드에 대한 자신감을 뽐내는 엘레노어의 눈은, 여전히 별빛을 잃은 채였으나- 뭔가 미묘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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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였다, 엘레노어는 돌연 목소리를 낮게 깔고- 정색하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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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의외로 다른 길도 있다는 것도 알게 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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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력의 흔들림이 심해졌다. 엘레노어는 내게 다가와 손을 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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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여, 나와 함께 떠나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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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릿하던 두 눈에서 다시금 약한 별빛이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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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갈수록 옅어져만 가던 엘레노어의 별빛, 들여다본 어릴 적부터 갖고 있던 꿈 꾸는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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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뱀의 목적은 세계수를 삼키고, 다른 이들의 생명을 연료 삼아 다른 별로 떠나는 것이다. 꼭 멸망이 목적은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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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밝게 빛나며, 어딘가 먼 곳을 내다보고 있었다. 엘레노어의 말은 그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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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나도 나름대로 준비를 마쳤지, 아마 저것은 세계의 9할을 파괴하겠지만- 남은 1할의 땅에서 살 준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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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를 이용한 전이는 내 최고의 특기야. 별의 반대편까지 날아가면 싸움의 여파를 피할 수 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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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이서 함께 그곳에서 사는 거다. 작은 집이라도 하나 짓고……아아, 불편한 점은 물론 많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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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뭐, 그런 걸 이겨나가는 게 사랑이니까. 마법이 있으니 대부분은 어떻게든 될 거다. 자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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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그대는 인간족이니까, 엘프와는 다른 시간을 걷겠지. 앞으로 길어봤자 백 년밖에 못 살 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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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괜찮다. 별의 지맥이 메마르고, 세계수도 떠난 세계에선 아무리 엘프라도 그리 오래 살지 못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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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그대보다 몇백 년을 더 살겠지만, 그대와 함께한 백 년을 곱씹을 수 있다면 외롭지 않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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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설령 그대가 떠나더라도- 하프엘프는 오래 사는 편이니까. 백 년 안에 아이를 밴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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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거기까지 듣고, 손을 들어 엘레노어의 말을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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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잠깐만, 너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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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황스럽다 못해 무서울 지경이었다. 이게 정말로 다 무슨 소리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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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는 동족의 죽음에 슬퍼하던 여왕이었다. 책임감을 갖고 백성을 이끄는 여왕이었다. 적어도 이 9층에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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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움을 다 내버려두고 도망치자는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면, 이미 백 년 전에 그렇게 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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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어쩌고, 저 뱀을 내버려두면 다 죽을 거 아니야. 네 백성들은 어쩌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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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가능한 한 동요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일부러 더 침착하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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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백성 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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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엘레노어의 이어진 대답에, 나도 더 이상 침착하게 있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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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좋지 않으냐, 그딴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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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엘레노어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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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단은 빨랐다. 나는 곧바로 검을 뽑아 엘레노어의 목을 겨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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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엘레노어 아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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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물론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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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하는 놈이야,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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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엘레노어는 웃었다. 목에 칼이 들어왔다는 것은 전혀 신경쓰지 않는 기색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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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렴, 나는 엘레노어가 아니지. 저기 있는 엘프들도 내 백성이 아니고, 이 성도 내 것이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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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듯이 웃어젖히는 엘레노어의 눈빛에서 다시금 별빛이 사그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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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 없는 깡통 인형 따위가, 어떻게 내 백성이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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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진 목소리가 성 안에서 메아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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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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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더는 검을 들이밀 수 없었다.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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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간의 침묵, 엘레노어는 내 검 끝을 손으로 치워내고는- 한 걸음 가까이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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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트 엘프의 비술은…생각 이상으로 강력했던 모양이다. 그게 아니라면 설명이 안 되는 일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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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꿈을 통해 그대의 기억과 심상 너머를 엿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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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가 살아온 세계와, 시련의 탑이라는 모형의 세계를 보고 말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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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을 듣자, 나와 함께 자기 시작하면서 나날이 상태가 나빠져 가던 엘레노어의 모습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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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에 들어오기 전의 그대의 모습을 보았다, 어머니를 잃고 귀기가 들려 날뛰던 그대의 모습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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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스트를 마치자 인형처럼 변해서- 그대에게 두려움과 괴로움을 줬던 우리의 모습도, 모두 보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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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 새삼스레 자신의 과거도 돌아보았지. 돌이켜 보니, 모두 허상처럼 흐릿한 기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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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엘레노어와 함께 자던 매일, 드물게 꾸었던 인형이 나오는 괴상망측한 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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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자유를 갈망하고, 먼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꿈을 꾸었건만- 나는 노예였고, 인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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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의 눈에 깃들어 있던 별빛은, 그녀가 물려받은 나이트 엘프의 본능에서 비롯한 욕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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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숲의 바깥으로 나아가,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싶다는 강렬한 호기심이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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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라는 타고난 신분과 위치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기를 원하던 마음의 불꽃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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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언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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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전부를 잃어버린 엘레노어의 마른 눈은, 나와 무척 닮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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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닮은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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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의 마력에서 느껴지는 흔들림이 왜 이렇게도 익숙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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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죽음을 바라지만, 엘레노어는 삶을 바랐다. 내가 내던진 욕망을, 엘레노어는 하나도 놓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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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눈은 언제나 머나먼 별을 올려다보았고, 그 입은 언제나 꿈을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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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족, 성별, 성격, 습관, 자아- 모든 면에서 나와는 정 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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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던 엘레노어의 모습이 이토록 익숙하게, 나 같은 산송장을 닮아버린 원인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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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 플레이어 캐릭터, NP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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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길게 생각하랴. 엘레노어는 처음부터 죽어 있었고, 그 사실을 이제야 깨달았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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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백성들은 이미 오래 전에 죽었다. 살아있던 날이 단 하루도 없었어. 이제 와서 죽어도 무슨 상관이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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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는 내게 바짝 달라붙어, 흐느끼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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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뱀은 분명 그대가 겪는 시련의 일부, 퀘스트의 마지막 적이겠지. 그렇다면 저걸 토벌하면 끝나는 것 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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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표정을 짓고, 이런 말을 하고, 이렇게 우는 사람인 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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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깡통에 불과한 우리들의 생은 저것과 함께 끝난다. 다 내버리고, 나라도 살고 싶다고 바라는 게 그렇게도 이상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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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가 소리쳤다. 가슴께 어딘가에서 둔통이 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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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있는 아픔이었지만, 명칭을 모르기에 부를 수 없는 아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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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그저 아파하며, 가슴께를 누르고 마냥 인내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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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알고 있다. 그대가 아무리 부정하려 애써도, 그대의 심상을 보았기에 알 수 있어. 그대는 나를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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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방식과는 다르겠지만, 그대는 우리가 살아있지 않음에 괴로워했어. 모종의 사랑이 있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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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스트를 포기하고, 나를 골라다오. 그러면 우리는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할 수 있을거다. 그대가 결정하면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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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는 내가 몇 번이고 고민한 끝에, 힘겹게 외면했던 선택지를 다시금 들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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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내버렸던 욕망을 다시 주워담을 수 있는 기회, 어쩌면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르는- 내 행복을 찾을 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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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나 달콤하게 와닿는 유혹이 또 있을까. 그도 그럴 게, 열심히 피해 왔지만, 나는 분명 엘레노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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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탑을 나가면 죽을 생각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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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어진 말이 머리를 쾅 후려치는 것 같았다. 엘레노어는, 내 생각 이상으로 나를 잘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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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항상 죽음을 바라 왔어, 하지만 어머니를 만나러 간다는 목표가 있기에 그럴 수 없었지. 그렇다면 뻔하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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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탑을 나가고, 어머니를 만나면, 죽을 생각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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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리 생각하면서도 행복하기를 바라지 않았나. 버릴 수 없었던 욕망이 있지 않았나, 분명 이 자리에 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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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의 손이 내 가슴을 짚었다. 이름을 알 수 없던 둔통이 계속해서 일었던 자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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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를 괴롭히는 말뚝을 뽑아 버려라, 나와 함께 행복해지자. 우리 둘만의 세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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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내 엘레노어는 내 품에 얼굴을 묻었다. 나는 천천히 손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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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로 엘레노어의 어깨를 끌어안으면, 그걸로 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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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킬 수 없는 마지막 선택지, 엘레노어를 고른다면 나는 행복해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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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와 함께 살면 분명 즐거울 것이다. 7층에서 그 잠시간 함께했던 것만으로, 이만한 망설임을 만들었을 정도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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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로운 일이 있어도 분명 함께라면 이겨낼 수 있겠지, 아무리 지쳐도 함께라면 분명 웃을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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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건 엄마를 내버리는 길이다. 분명히 괴로울 것이다. 쓰레기 같은 서진혁을 용서할 수 있을 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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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그래도, 그건 탑을 나가도 마찬가지 아닌가. 내가 어떻게 나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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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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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고민 끝에, 쓰레기 병신 서진혁은- 엘레노어의 어깨를 감싸기 위해 손을 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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뻗어진 손은 어깨를 완전히 감싸 안기 직전에, 멈칫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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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조금, 일 센티미터. 하지만 이 병신새끼는 직전의 직전에 결국 고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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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나다. 앰생 병신 방구석 개백수 쓰레기 서진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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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 끝에 고른 선택의 결과가 두려워서, 무엇도 고르지 않는 것을 택했다. 남은 건 엘레노어의 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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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가 스스로 움직여 준다면, 엘레노어가 한 발짝 더 내게 다가와 준다면, 그때는 분명히 받아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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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의 마지막에 상대에게 선택을 떠넘겨버렸다. 그리고 엘레노어는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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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그렇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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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는 망설이는 내 손을 보고는, 쓰디쓴 표정으로 웃으며 한 발자국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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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마지막 망설임이 그대의 선택이겠지, 백이십 년 전에는 그 망설임 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었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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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말하며 두 발자국 물러난다. 망설이는 나를 두고, 엘레노어는 포기를 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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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겠지, 이렇게 우유부단하고 한심한 놈이랑 살고 싶지는 않을 거다. 당연한 거고, 현명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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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하지 마라, 나도 그대와 다를 것 없었을 뿐이니까. 백 년을 더 살아오며, 그대를 닮아 버린 모양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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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야, 내가 병신이지. 네가, 내 어디를 닮았다는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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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나약해서, 그대에게 힘든 결단을 강요했지 않나. 어머니와 나 중에 하나를 고르라니, 내가 너무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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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발자국 물러난 엘레노어의 눈에서 투명한 눈물이 흘렀다. 아무렇지 않은 듯 말하지만 표정은 정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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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도 의무가 있다. 이 왕관을 쓰면서 이어받은 의무가. 설령 영혼 없는 깡통일지라도……나는 내 백성들을 지켜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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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가 망설여 준 덕분에 오히려 정신이 들었다. 내 백성들에게도, 그대에게도, 이기적으로 굴고 말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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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탑에 묶여 있는 존재라고, 그대까지 이 탑에 묶어버리려 했지.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한 번은 입에 담고 말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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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는 옷소매로 거칠게 눈물을 닦았다. 그래, 우리는 정말로 닮았다- 같은 상처를 공유하고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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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괴롭고 힘들어도, 멈춰 서지 않기로 했던 맹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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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왕으로서 그것과 똑같은 맹세를 가슴에 박아넣은 엘레노어의 마력이, 나와 같은 형태로 요동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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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어머니를 만나러 가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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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렇게 똑같은 고민 끝에, 똑같은 결정으로- 결별을 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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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력강화가 펜던트를 이용한 템빨이라는 사실이 이렇게 다행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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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력은 마음에 영향받아 흔들리니, 지금 같은 마음으로는 마력강화 따위 못 하는 게 당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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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을 지워 없앤 엘레노어는 다시 다크엘프의 여왕으로 돌아왔다. 뱀용 토벌을 위해 앞으로 전력을 다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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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그 결단에 응해야만 한다. 마음에 휘둘려 싸우기를 망설이지 말자. 전력을 다해 싸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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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 보스 레이드 재개까지 : 00‘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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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용의 재활동 대기 시간까지 앞으로 6분, 병기의 배치와 여타의 준비들은 모두 완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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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우우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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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전 개시를 알리는 나팔 소리와 함께, 배치되어 있던 마포 부대와 마법사들이 일제히 활동을 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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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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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단계에 걸친 버프를 몰아받고, 활동 재개까지 5분이 남은 뱀용을 향해 마력의 탄환과 발리스타가 쏘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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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드는 꼭 카운트다운이 끝나야만 시작하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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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몹들이 지키고 있는 보스를 선제타격하는 것으로, 원하는 타이밍에 싸움을 시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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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만한 포격 수단이 있으면, 강력한 공격을 첫발에 꽂아넣고 시작할 수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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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드시 5분을 남긴 시점에 최대한의 화력으로 먼저 공격하라고, 커뮤니티에서 조언을 받은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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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쾅! 콰과광! 쿠과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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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히 쏘아진 무기가 뱀용의 전신을 무자비하게 난타한다. 잠에서 깨어난 뱀이 비명을 질러 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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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화력은 확보하고 볼 일인가. 상상 이상으로 위력도 효과도 훌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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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다음은 이제 내가 움직일 차례다. 인벤토리에 준비한 물건이 제대로 있음을 확인하고, 마법진 위로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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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운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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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이를 담당한 마법사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 주고, 마법의 가동과 함께 나는 하늘 위로 내던져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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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으로 전이된 것은 나 하나뿐만이 아니다. 메르세데스를 비롯한 하이엘프 정예 기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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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왕국군의 정예 병력과 최고 전력인 군단장, 다크엘프 정찰대의 에이스들과 엘레노어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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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뱀용의 급소를 직접 공격하는 특공대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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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대로 몸부림치는 뱀용의 몸에 쉽게 안착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작전이 잘 되어야 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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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리리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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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지면에서 엄청난 마력의 격류와 함께 커다란 사슬이 솟아올랐다. 미리 준비해 두었던 우리 진영의 마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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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엘프의 그림자 마법은 직접 전투보다는 속박 같은 보조 계열에 치중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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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만큼, 그쪽 계열을 작정하고 파고들면 굉장한 성능이 나온다. 이 점 역시 커뮤니티에서 검증해 준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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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도전자들이 발로 뛰어, 그림자 계열 마법중 가장 속박 판정이 좋은 스킬을 찾아내 주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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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렇게 알아낸 스킬을 전파해, 마법사들이 재해석해 대규모 술식으로 쌓아올릴 수 있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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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단기간에 될 만한 일이 아니지만, 부족한 부분은 마법석 같은 재료를 미친듯이 갈아넣는 것으로 해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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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그 재료는 내 인벤토리에서 나왔다. 어마어마한 자원을 들인 단 한번뿐인 속박 마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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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 보스를 상대로도 통할지가 걱정이었지만, 다행이게도 잘 된 모양이다. 이제 착지만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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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아아아아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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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슬에 묶여버린 뱀용이 소리지른다. 포효 자체에 실린 마력이 퍼져나가며 주변 지형을 으스러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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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여기 있는 정예들은 그 정도의 공격에는 아랑곳하지 않는 엘리트급, 강자 중의 강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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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딩! 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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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용의 전신에서 쏘아지는 검은 마력탄을 각자의 방식으로 쳐내고, 놈의 몸에 착지해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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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는 자신의 행복을 포기하고, 허울 뿐인 존재일지언정 백성들을 지키겠노라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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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얼마나 괴로운 선택이었는지는, 똑같은 선택을 내렸던 내가 가장 잘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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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방법으로 그 선택을 지지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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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유부단하고 꼴사나운 병신새끼지만, 그런 나이기에 잘 하게 된 일이 하나는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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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표는, 퍼펙트 클리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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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멈추지 않는 것, 내 앞길을 막는 장애물을 분쇄하는 것, 극한 상황 속에서 적을 찢어 죽이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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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와 결별하고 탑을 올라갈 것을 맹세했으니, 그것 하나 만큼은 확실하게 해 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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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르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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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력강화를 발동하고, 뱀용의 두꺼운 비늘에 검을 꽂아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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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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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처럼 말하고, 사람처럼 행동하며, 사람처럼 생겼다면, 그건 그냥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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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마을의 다크엘프들은 모두 평범한 NPC가 아니다. 알고 있으면서도, 나는 한 번 더 변명 뒤에 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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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즈멜이 내 말에 상처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어차피 NPC라는 편리한 방패를 내세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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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좀, 가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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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에르웬은 흐뭇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는,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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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기특하기도 하지. 넘어지지 않게 조심하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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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차이가 수천 살은 되는 만큼 당연한 일일수도 있겠지만, 에르웬 앞에서 나는 어린아이나 다름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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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웬은 지금쯤 리즈멜이 있을만한 장소를 알려주었고, 나는 곧장 그곳으로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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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살면서 가장 빠르게 달린 날을 꼽으라면, 분명 오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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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속력으로 뛰어 도착한 장소는, 다크엘프의 마을 외곽에 있는 쉼터 비스무레한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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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터에는 나무와 덩굴로 만든 그네며 시소 따위가 있었다. 아파트 단지의 놀이터를 엘프식으로 만든 것처럼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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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장소들에 비해 유독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곳이다. 리즈멜은 쉼터 구석의 벤치에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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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즈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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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숙이고 있는 리즈멜에게 다가가 이름을 불렀다. 그러고 보면, 제대로 이름을 부르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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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다크엘프들에게 내 이름을 알려준 적이 없고, 반대로 다크엘프들의 이름을 불러본 적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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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 보면, 그게 내 심리의 끝자락에 있는 마지막 선이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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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사람이 아닌 NPC로 생각하기 위한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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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을 알려주어 관계를 맺는 것도, 그들의 이름을 불러주어 관계를 맺는 것도 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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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NPC니까, 퀘스트가 끝나면 같은 말만 반복하는 깡통으로 돌아갈 인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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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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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즈멜은 말없이 고개를 들었다. 나는 잠깐 눈을 감았다. 리즈멜이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 두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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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즈멜의 검술 훈련 퀘스트는 이미 모두 완료처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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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는 것은, 리즈멜이 2층의 양치기 소녀처럼 깡통 인형으로 변해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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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층 진영 퀘스트가 다른 층까지 이어진다는 점이나, 엘리트 NPC의 특성을 생각해 보면 그렇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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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반반이다. 리즈멜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복잡한 심경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다면 좋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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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뭐야……내가 더 찾지 말라고 했잖아. 여긴 어떻게 알고 찾아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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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웬이 말해 줬어, 아마 여기 있을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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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모님이? 엘레노어도 아니고, 내가 여기 있을 줄 어떻게 알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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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실로 다행이게도, 리즈멜은 굉장히 착잡하고 처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사람이 아니면 지을 수 없는 표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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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나는 왜 찾아왔는데. 나랑 볼일은 끝났잖아? 나는 인간족이랑 같이 있고 싶지 않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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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몰찬 말투지만 목소리는 여전히 떨리고 있다. 나는 한참동안 말을 골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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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병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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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지도 박약하고, 사회성도 떨어져서, 할 줄 아는 말이라고는 욕과 변명뿐인 병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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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에 더욱 열심히 말을 골라야 한다. 입을 잘못 놀리면 리즈멜에게 더 큰 상처를 주게 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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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아무리 고민해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내가 이런 사람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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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많은 걸 잘못하고 살아와서, 잘못만 하고 살아온, 잘못뿐인 사람이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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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바른게 뭔지 도저히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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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한 가지는 안다. 나 같은 병신도 나아질 수 있는 방법을, 딱 하나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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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지 못한 것을 한탄하며 아무것도 하지 않는 대신, 어설프고 부족하더라도 한 발짝 나아가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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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을 올리기 위해 고블린을 때려잡았듯이, 1층을 깨기 위해 노멀 클래스로 전직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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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나도 떠올릴 수 있는 가장 단순한 한 마디에, 최선을 다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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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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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리즈멜은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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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그 자리에 앉아서, 리즈멜과 진득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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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섞을 때마다, 사람을 대하는 것에 있어서 내가 얼마나 미숙하고 부족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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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부분에서, 리즈멜이 다크엘프란 점은 매우 큰 행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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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엘프는 모두 인간을 귀여워한다. 내 미숙하고 어수룩한 사과에도 금방 마음을 풀어줄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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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대하는 방법, 인간관계라는 이름의 길은 무척 험난하다. 한 걸음만 잘못 내딛어도 넘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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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다크엘프의 마음에 놓인 길은, 내 어설픈 걸음으로도 넘어지지 않고 걸을 수 있는 안전한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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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어지지 않게 조심하라던 에르웬의 말이 새삼 다르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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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족은 이래서 싫어, 연약하고 일찍 죽는 주제에, 마냥 무시할 수도 없어서 대하기도 힘들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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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족이 다 그렇진 않아, 내가 좀 유별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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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말해도, 나는 인간족을 본 적이 많지 않아서 잘 몰라. 네가 얼마나 유별난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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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인간족을 접해본 적이 거의 없다는 리즈멜의 말을 듣고, 인간족이 보통 어떤 느낌인지 설명하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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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생각하다 보니, 인간인 나도 인간에 대해 잘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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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이 7층 세계의 인간족이 내가 아는 인간과 똑같다는 보장도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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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보면 되잖아, 나이트 엘프는 원래 숲을 개척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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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랑 어울리더니 똑같은 소리를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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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울린 적은 별로 없는데, 아무튼 그렇잖아. 나 말고 다른 인간도 좀 만나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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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즈멜은 고개를 저었다. 설명을 들어 보니, 현 여왕이 내린 칙령 탓에 인간과 마음대로 접촉할 수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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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마음으로는 인간을 많이 만나보고 싶지만……아니, 그치만, 딱히 인간을 좋아하는 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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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여왕은 하이엘프와 화친을 맺으려는 생각에 인간 진영을 멀리하고 있다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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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프에게 영생을 부여하는 혼의 순환장치, 세계수와 대수림에 짙은 미련이 있는 탓이라고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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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제 좀 알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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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웬이 내가 엘레노어의 손님이라 맞출 수 있었던 이유. ‘그 애뿐이니까’ 라고 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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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인 엘레노어 정도가 아니면, 금기를 깨고 인간족을 데려올 수 없었던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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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엘레노어가 나를 데려온 건, 하이엘프 왕자와의 약혼 파기를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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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혼이 무산되어 하이엘프와의 화친이 백지화되면, 인간족과의 교류 금지도 풀릴 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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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는 하이엘프와의 화친을 달갑지 않게 여기는 건 자신뿐만이 아니라고 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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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내지 않고 있지만, 리즈멜을 비롯해 인간을 애호하는 다크엘프들은 모두 비슷한 생각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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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내가 다른 인간을 만날 수 있게 해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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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의 계획에 협력해야 할 이유가 하나 늘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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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나는 평소처럼 리즈멜과의 검술 수련을 위해 연무장에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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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인형을 늘어놓고 혼자 단련하고 있던 리즈멜은, 나를 보더니 놀란 듯이 눈을 크게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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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여기는 왜 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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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긴, 검술 배워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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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즈멜과는 이미 화해를 마쳤다. 그러니 검술 훈련도 당연히 재개할 줄 알았는데, 뭔가 문제가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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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즈멜은 내 물음을 듣더니, 조금 난처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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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가르칠 게 없다는 말은 진짜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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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스트가 완료 처리된 것은 리즈멜이 생각을 바꿔서가 아니었다. 진짜로 내가 모든 훈련을 마쳤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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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나는 아직 리즈멜이 어떻게 수정 거미의 광선을 미리 감지할 수 있었던 건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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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내가 터득한 감각 강화만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다. 당연히 좀 더 상위의 기술이 있는 줄 알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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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긴 하지만……그건 내가 가르칠 수 있는 게 아니거든. 그건 마법의 영역에 더 가까운 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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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의 영역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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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나는 검술 전문이라 그걸 가르쳐 줄 수는 없어. 그냥 배우기만 한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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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어제 일이랑은 별개로 리즈멜과의 검술 훈련은 여기서 끝이었다. 물론, 아예 훈련할 게 없는 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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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검술 외의 다른 무기술도 갖추고 있으니까, 리즈멜을 연습 상대 삼아서 단련하는 건 가능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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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시간에 그냥 정찰대 일을 하면서 필드 몬스터 사냥이나 하는 게 더 도움이 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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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즈멜에게 사과하긴 했지만, 내 생각과 사상에는 그다지 달라진 부분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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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전히 느긋하게 시간을 때우며 사사로운 욕망을 채우는 내 모습 따위는 보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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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쉬운 마음이 없는 건 아니지만, 리즈멜과 느긋하게 교류하며 효율 나쁜 단련을 할 생각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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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걸 배우고 싶은 거면, 내가 아니라 엘레노어한테 부탁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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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엘레노어가 왜 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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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의 영역이라고 했잖아. 엘레노어는 그림자 마법으로는 최고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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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즈멜은 ‘그 변태 같은 계집애랑 너무 어울리는 건 권하고 싶지 않지만’ 이라고 뒷말을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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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는 그림자 마법으로 엘프 여기사의 미친 공격을 가볍게 막아낸 전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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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마법은 다크엘프의 종족 특성인데다가, 내 클래스는 애초에 전사다 보니 대충 넘겼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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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엘레노어는 내가 리즈멜과 검술 훈련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런 말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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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은 이르지만, 언젠가 좋은 걸 가르쳐 줄 수 있을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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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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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그거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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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새 엘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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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으로 버프를 받은 칼날의 손맛은 상상 이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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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런 저항 없이 쑥 들어가서, 두부나 젤리 같은 것을 찌르는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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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아넣은 칼을 쥐고 손목을 비튼다. 검손잡이를 쥔 채, 마력강화의 힘을 살려 그대로 놈의 몸 위를 질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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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가가가가가가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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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는 그대로 비늘이 잘려나가며 피가 튄다. 덩치가 크고 피통이 많은 대신, 방어력은 높지 않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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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인 이상 규모의 레이드라고 해도, 데미지가 안 박히면 공략 자체가 불가능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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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9층 수준의 도전자들로도 데미지 자체는 입힐 수 있도록 설계된 거겠지. 그렇다면 나한테는 아주 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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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하나가 9층 도전자 백 명 어치만큼 강한 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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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각 층의 보스를 단독으로 격파할 수 있는 만큼, 나는 9층 도전자 스무 명 어치 정도로는 충분히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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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가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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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함께 뱀용의 몸에 상륙한 인원들도 각자 사정없이 무기를 휘두르며 상처를 입혀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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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못지않게 강한 메르세데스나 왕국군 군단장 라인하르트, 그리고 엘레노어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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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의 방법으로 뱀의 비늘을 벗기고 그 살을 파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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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만 흘러가면 오래 걸리지 않아 쓰러트릴 수 있을 거다. 하지만 그렇게 마음대로 되지는 않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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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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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슬에 묶인 뱀이 거칠게 몸을 뒤흔들었다. 놈의 몸에 올라타 있는 우리에게는 완전히 지진이나 다름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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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뿐만이 아니다. 움직일 수 없는 상태로도 마법은 쓸 수 있다. 공중에 떠오르는 칠흑의 마법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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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곳에서 하이엘프들의 생명력을 빨아들이던 검은 가지가 무수히 튀어나와 우리를 덮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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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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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가지 공격 자체는, 이놈의 근처에서 날뛰는 잡몹들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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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 하나하나의 힘은 약하다. 충분히 튕겨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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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문제는 물량과 그 부가 효과, 저 수많은 가지 중 하나라도 쳐내지 못하고 맞으면 끝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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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강! 카앙! 카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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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를 이용한 공격이 오기 시작하면서, 인원 대부분이 방어에 급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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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마당에, 공세를 이어나갈 수 있는 건 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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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메르세데스처럼 마력강화의 방호력으로 가지를 받아낼 수 있는 이들 몇몇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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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이게도, 왕국군의 정예병력인 기사들은 수준은 떨어지지만 마력강화가 가능한 이들이 몇몇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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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르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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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력의 빛에 휩싸인 기사들이 몸을 날리자, 가지들이 힘을 쓰지 못하고 뚝뚝 부러진다. 나도 똑같이 공세를 이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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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이 이어지는 동안에 최대한 데미지를 입혀 놔야 한다. 이렇게 좋은 딜타임은 아마 다시는 안 올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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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몇 분간 뱀용의 몸을 난도질하던 중, 더 이상 버티지 못한 구속의 사슬이 파괴되며- 놈이 몸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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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삼키는 뱀이 분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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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동시에 눈앞에 떠오르는 알림창. 이것도 커뮤니티에서 알려준 대로다. 예고 후 발생하는 광폭화 패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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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폭화다, 리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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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에서 온 힘을 쥐어짜 소리쳤다. 내 쩌렁쩌렁한 말소리에 반응한 근처의 기사들이 복창해 전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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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목에 착용한 마도구를 조작한다. 잠시 후, 우리는 전이 마법에 의해 역소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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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접 딜 타임 종료, 그러면 다음은- 다시 재장전을 마친 공성병기들의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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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과광! 콰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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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폭화 패턴이 발생한 뱀용을 향해, 무수한 마력의 탄환이 날아가 처박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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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병들이 ‘이 정도면 산도 조각낼 수 있을 겁니다’ 라고 호언장담했던 말이 떠오르는 광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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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용은 상상 이상으로 별다른 대처를 하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마포에 얻어맞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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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 보스는 그 스펙과 규모가 어마어마할 뿐이지, 특별히 복잡한 패턴은 없을 거라던데- 정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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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아아아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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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조차 조각내 버릴 수 있다는 포격에 일방적으로 맞고 있지만, 비명만 요란할 뿐 어째 시원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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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데미지 감소가 붙어있긴 한 모양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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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포를 이용한 포격도, 발리스타를 이용한 물리 공격도, 모두 제대로 데미지가 들어가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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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특공대원들이 긁어놓은 상처는 이렇게 멀리서 보니 볼펜으로 북북 선을 그려놓은 정도로밖에 안 보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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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커뮤니티에서 언급된 약점을 노리지 않는 한은 제대로 처치하기는 힘들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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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김창진#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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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님들 나 월드보스 약점 찾은거 같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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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혁이가 세번째 글에 올린 사진인데, 이거 확대해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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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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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부분 보임? 잘 보면 저기 하나만 비늘 거꾸로임, 이거 역린인거같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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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 이름도 뭐시기 뱀용이랬으니까 약점부위 있으면 이거일거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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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와 씨발 진짜네 어케찾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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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새끼는 이걸 확대해볼생각을했네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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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ㄴ ㄹㅇ 나는 다크엘프 찌찌만 확대해보고 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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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ㄴ 윗 대댓 서버 직업 좋아하는 축구선수 급함 ㅃ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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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ㄴ 1772 전사 신두형좋아함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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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ㄴ 아오 전평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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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들 원래 역린이 따로 있음? 드래곤 잡아본사람 말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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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ㄴ 없는데 월드보스라 따로 있는거 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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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ㄴ 월보는 원래 약점부위 하나씩 있대 공략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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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드 계획을 다 세우고, 대부분이 레이드 소식만 기다리고 있을 타이밍에 올라온 글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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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올린 스크린샷 중 하나에서 거꾸로 된 비늘이 하나 발견되었고, 추측하기에는 그게 약점일 거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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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월드 레이드를 경험해 본 이들도 잘못 본 게 아니라면, 그 부분이 약점일 것이라 의견을 내놓았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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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격하기만 하면 반드시 크리티컬이 터지는 부위, 우리 특공대의 제 일 목적이 바로 이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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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뮤니티에서 역린을 발견한 시간이 조금만 빨랐어도, 전투 개시 전에 위치를 특정할 수 있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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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로서는 직접 놈의 몸에 올라타서, 스크린샷과 위치를 대조해보며 찾아내는 방법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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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아아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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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격이 거의 끝나갈 때쯤, 뱀용이 비명을 지르며 광폭화 상태가 풀렸다. 다시 특공대의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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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폭화는 일정 이상 데미지를 입히면 풀린다. 이번에 빠르게 광폭화를 뺄 수 있었던 건, 레이드 개시 직후의 초반 극딜 덕분일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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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광폭화부터는 쉽게 대처할 수 없을 것이고, 그렇다면 특공대가 마음 놓고 나설 기회도 없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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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이 마지막이야, 이번에 못 찾아내면 힘들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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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서로 고개를 끄덕이고, 리콜 마도구를 사용해 다시 한번 뱀용의 몸에 올라타기 위해 전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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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우리를 맞이해 준 것은, 조금 전과 같은 무방비한 비늘 대지가 아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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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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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팔이 네 개 달린 괴상망측한 거인의 무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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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의 비늘에서 솟아오른, 찰흙을 빚어 만든 것 같은 기괴한 형태의 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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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서 보기에도 그 덩치가 상당해 보인다. 놈들에게서 느껴지는 마력의 양도 심상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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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맙소사……대체 어디까지 타락한 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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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가까운 위치에서 낙하하고 있던 메르세데스가 중얼거렸다. 아니, 메르세데스만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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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국군을 제외한 정예 병력, 즉 다크엘프와 하이엘프 대부분이 그것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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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대로 빠르게 낙하해, 검을 휘둘러 거인 하나를 거칠게 베어버렸다. 그렇게 강하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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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이게 뭔데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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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막난 거인을 걷어차며 묻자, 내 옆에 있던 하이엘프가 인상 쓰며 말했다. 인간족은 모를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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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른다, 모르지만……어쩐지 알 수 있다. 저 거인이 우리와 동질의 존재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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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향해 더 많은 거인이 몰려들었다. 이제 보니, 새까만 거인의 일그러진 머리에는 특징적인 부분이 하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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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수를 삼켰기 때문에, 이런 일도 가능한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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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인의 귀 부분이, 마치 엘프처럼 뾰족하게 솟아 있다는 것. 동질의 존재라는 게 그런 의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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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긴 건 거대한 괴물의 형상이지만, 엄연히 세계수를 통해 창조된 생명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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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거인은 포레스트 엘프와 나이트 엘프에 이어서 창조된- 새로운 엘프종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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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하지 마, 그럴 때 아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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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름 모를 하이엘프에게 그렇게 말하고는, 비틀린 엘프 거인을 향해 돌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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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치는 크지만 그렇게 강하지는 않다. 나는 시선으로는 뱀용의 비늘을 샅샅이 훑으며 달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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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아무리 약하다고 해도, 전투 중에 다른 것을 상대로 시선을 파는 건 악수였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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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웅, 투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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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 거대한 작살 같은 것이, 내 옆구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피가 확 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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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지? 가지는 아니고, 저 거인이 원거리 공격을 한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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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며 바라보자, 거인의 새까만 네 팔에 쥐어진 무기가 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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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 지들도 엘프라 이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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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인의 손에는 세계수의 기운이 느껴지는 거대한 활이 들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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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각의 거인들이 검이며 활이며 무기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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찢어진 옆구리의 상처를 살피며 다시 흘겨 보니, 무기들의 윤곽이 하나같이 익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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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까만 색깔에 찰흙을 빚어 만든 것처럼 뭉뚱그린 모습이지만, 다른 엘프들의 무기와 매우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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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저 특징적인 자세도, 궁술에 관심을 갖고 가르쳐 달라고 했을 때 본 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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놈들은 제대로 된 엘프식 궁술을 구사하고 있는 거다. 마법 같은 궤도를 그리며 필중하는 신비한 궁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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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엘프의 궁술은 사기적이지만, 약점이 없는 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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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기술이 특별할 뿐, 활과 화살 자체가 특별한 건 아니었으니까. 피하지는 못해도 쳐내고 막는 건 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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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저 거인이 네 팔로 다루는 활의 크기는 장난이 아니고, 화살 하나하나가 고래 잡는 작살 사이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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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에 화살에서 풍기는 세계수의 기운, 아무리 봐도 특수 효과가 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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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활을 든 거인의 숫자는 눈대중으로 보기에도 수십, 어쩌면 백을 넘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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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병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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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런 미친 활이 필중의 궁술로 쏘아진다니, 양심이 없어도 너무 없는 거 아닌가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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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놈들을 상대하면서 하나뿐인 역린을 찾는다는 게, 과연 가능한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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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야지 뭐, 씨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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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언제는 할 만한 일이라서 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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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 뱀 사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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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과 화살의 크기가 거대한 만큼, 날아드는 화살이 내는 소리 역시 남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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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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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엘프의 대형 발리스타에서나 날 법한 소리가 여기저기서 울려 퍼지며, 화살 세례가 닥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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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나 커다란 주제에 날아드는 속도는 평범한 화살에 전혀 뒤처지지도 않고, 오히려 더 빠르다는 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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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이 네 개라서 활을 더 세게 쏠 수 있는 건가. 어쨌든 엘프의 궁술로 쏘아지는 화살은 피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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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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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력감지를 전개해 날아드는 화살을 방패로 받아냈다. 부딪히는 소리 역시 아주 요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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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위력도, 씨발, 이거 생각보다 더 센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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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력강화를 쓴 내 스펙으로도 제대로 받아내기 힘든 공격이었으니, 다른 이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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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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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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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살을 제대로 막아내지 못한 이들이 몸을 관통당하며 픽픽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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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뿐만이 아니었다. 치명적이지 않은 부분을 맞은 이들도, 화살을 맞은 직후 비틀거리며 쓰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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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대로 화살 자체에 뭔가 부가 효과가 있는 게 틀림없다. 한 방만 맞으면 즉시 무력화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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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발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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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역린을 찾으려면 일단 저 거인들부터 어떻게든 해야 할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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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게 활을 쏜 거인을 향해 단숨에 거리를 좁혀, 크게 검을 휘둘러 다리를 베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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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치가 워낙 커서, 어지간해서는 한 방에 끝낼 수가 없다. 방어력과는 별개로 무조건 두 번은 베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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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촤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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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한 놈을 베는 사이에, 다른 거인들은 한 번 더 화살을 메기고- 검을 든 거인들은 뛰어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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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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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세데스를 비롯해 도드라지게 강한 몇몇은 당연히 거꾸로 거인을 쓰러트리지만, 그건 역시 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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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중필살의 화살을 마구잡이로 쏘아대며, 거대한 덩치로 밀고 들어오는 거인에 대부분이 속수무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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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에 뱀용 본체는 꿈틀거리며 요동치고, 드문드문 초반의 검은 가지 공격이 쏟아지고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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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발, 이 지랄을 여기서 또 하게 될 줄은 몰랐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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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인벤토리에서 쇠구슬을 잔뜩 꺼내, 뒤틀린 엘프 거인들을 향해 냅다 흩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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놈들은 공격력은 강해도 방어력은 형편없으니까, 이렇게 대충 날린 쇠구슬로도 처치할 수 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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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생각했는데, 이 양심 없는 새끼들은 엘프 특유의 민첩한 몸놀림도 갖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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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웅! 후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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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랄, 이걸 피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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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산만한 덩치로 어떻게 저리도 잽싼지, 단순한 궤적의 쇠구슬을 가볍게 피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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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놈들이 들고 있는 무구 중에는 방패도 있어서, 피하지 못하면 그대로 막아내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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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이 네 개라서 궁병인 주제에 방패를 함께 쓸 수 있다. 효율이 존나 좋은 몸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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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내가 직접 창조한 엘프들은 어떤가, 어리석은 인간족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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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설을 내뱉으며 또 하나의 거인을 베어 넘기던 중, 머릿속에서 전음이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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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엘프 왕의 목소리다. 생각해 보니, 뱀으로 변한 직후에도 제대로 말할 수 있었지. 이 새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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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호와 개척을 목적으로 탄생한 두 엘프종과는 차원이 다르겠지, 그들은 오직 전투를 위해 태어난 병사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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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이 새끼야, 차원이 다르게 좆같이 생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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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배자의 발상이군, 외모는 아무래도 좋지. 새로운 별에 가장 먼저 뿌리내릴 나의 엘프들이 미의 기준이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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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꾸하는 꼴을 보니 보통 여유로운 게 아닌 것 같다. 비웃음당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몹시 나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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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레스트 엘프와 나이트 엘프에 이어, 새 별에서 새롭게 떠오를 나의 엘프들을- 이 자리에서 던 엘프라고 명명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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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둥이로 떠드는 게 아니라서 막을 수도 없고, 아니지, 잠깐만, 주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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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 있어봐, 내가 왜 이 생각을 못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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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린이라는 명확한 급소에 시선이 팔려 있었기 때문인가. 급소는 그 밖에도 달리 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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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상당한 사람들 전부 리콜해, 마력강화 안 되는 놈들도 전부! 아니 그냥 싹 다! 그리고 포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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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잠시 꺼두었던 마력강화를 다시 발동하고, 검을 들고 무작정 앞으로 달려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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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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갖가지 공격이 다시금 날아들지만, 나는 방어력을 믿고 무작정 정면으로 돌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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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곽, 과직, 콰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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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력강화의 방호력과 [철벽] 스킬을 더해 공격을 받아내며, 몸통박치기로 길을 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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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 속도로 질주하자, 금세 뱀용의 머리 부근에 도달할 수 있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높이 점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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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어오른 나를 집어삼키기 위해 쩍 벌려지는 아가리, 이 정도로 큰 주둥아리면 당연히 나 정도는 한입에 삼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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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이와 리콜을 위해 필요한 손목의 마도구를 잠시 떼어 인벤토리에 넣어놓고, 그대로 놈의 입안으로 다이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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뭣하러 힘들게 급소를 찾고 있단 말인가. 생명체라고 한다면 몸속은 대부분 급소일 거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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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 안에 있으면 포격 타이밍에 맞춰서 복귀할 필요도 없고, 귀찮게 거인을 상대할 필요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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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촤자자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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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용의 식도로 추정되는 부분을 칼로 긁으며 내려왔다. 분수처럼 쏟아진 피와 축축한 소화액이 몸에 잔뜩 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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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나는 갑옷이 상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장비를 해제하고 거의 맨몸으로 있는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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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라면 이 소화액인지 뭔지에 녹아서 소화되어야 하겠지만, 내가 부식 내성 레벨이 보통 높은 게 아니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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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뱀 내장 구조는 어떻게 되어 있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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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을 통해 들어왔으니 여기는 위장이나 식도겠지, 심장 같은 부위를 노리고 싶지만- 마땅히 방법이 없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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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되면 이제는 인벤토리에 준비해 둔 그 물건의 차례다. 나는 곧바로 그것을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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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석을 엮어 만든 간이식 마력 폭탄. 원래는 역린을 가르고 처박을 예정이었지만, 이번에는 여기서 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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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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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가능한 한 깊숙한 안쪽까지 들어와서, 검을 휘둘러 상처를 낸 자리에 마석 폭탄을 잘 심어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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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군을 버리고 내 뱃속으로 들어오다니, 생에 미련이 없는가- 이름 모를 인간족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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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릿속에서 시끄럽게 울리는 전음. 목소리가 조금 전과 살짝 다르다. 이런 건 생각 못 했나 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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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두둑, 후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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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벽인지 뭔지 모를 벽면에서 새까만 체액이 쏟아진다. 조금 전의 위액과는 달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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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인이나 나뭇가지 이외의 몸을 지키는 수단인가. 살짝 손을 대 보니, 불로 지진 것처럼 손끝이 타들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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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느낌도 통증도 모두 익숙하다. 누가 뱀 아니랄까 봐 자체적으로 독을 가지고 있는 모양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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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 속에서 무의미하게 죽도록 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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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프 왕의 선언과 함께 넘쳐흐르는 독액의 세례에도, 나는 꿈쩍하지 않고 폭탄을 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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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독 내성과 부식 내성을 뚫는 게 뭐 어떻다고, 애초에 내가 내성을 키운 방법 자체가 이런 식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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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재생력과 이 녀석의 독액, 그리고 내 공격력과 이 녀석의 생명력이 서로 겨루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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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먼저 죽나 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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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신] 스킬로 내구력을 최대한 증폭시키고, [철벽]스킬을 사용하며, 나는 폭탄을 가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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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야가 백색으로 물들고, 터져 나온 마력에 감각이 제멋대로 날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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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태 그대로 마구잡이로 검을 휘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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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사방 모두가 뱀용의 몸뚱어리, 아무렇게나 베어도 전부 공격으로 들어간다. 문제는 내 몸뚱이긴 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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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시브 스킬 : 기절 내성 13레벨을 습득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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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시브 스킬 : 전투 지속 16레벨을 습득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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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몇 스킬 레벨이 계속해서 오르는 걸 보면, 분명 심하게 만신창이일 게 뻔하다. 실제로 통증도 장난이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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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같아서는 비명을 지르고 싶을 지경이지만, 목이 잘못됐는지 소리가 안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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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냥 신경 쓰지 않고, 무작정 검을 휘둘렀다. 내 앞에 있는 무언가를 계속해서 베고 또 베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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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중, 약간의 감각이 몸에 돌아오며- 뜨거운 바람이 훅 끼쳐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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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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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끼쳐오는 방향으로 몸을 내밀었더니, 바깥이었다. 뱀의 배를 가르고 바깥으로 튀어나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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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아아아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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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용의 요란한 비명소리가 귓가를 쩌렁쩌렁 울렸다. 내가 속에서 날뛰는 사이, 바깥쪽에서도 피해를 준 모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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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인벤토리에 넣어두었던 전이용 마도구를 다시 장착하고, 리콜을 요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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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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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 전이 특유의 울렁거리는 감각과 함께, 나는 연합 부대의 진지 중 하나로 귀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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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맙소사, 꼴이 말이 아니군. 포션, 누가 포션을 가져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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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걸레짝이 되었을 내 몸뚱이를 보고 난리 치는 병사에게 손을 휘휘 젓고, 내 포션을 꺼내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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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시려고 했는데 질질 흐르는 걸 봐서는 얼굴도 어떻게 됐나 보네, 사지가 안 날아간 게 천만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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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어윽, 아, 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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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럭저럭 몸을 회복하고, 처음으로 제대로 소리를 냈다. 이번에도 HP가 상당히 갈린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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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중요한 건 어차피 회복될 내 HP가 아니라, 월드 보스의 HP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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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진지 밖으로 나가서 뱀용의 상태를 살폈다. 그 잠깐 사이, 바깥은 말도 안 되는 꼴이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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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 씨팔, 저게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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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저기에 생채기가 난 뱀용의 몸에서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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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뜨거운 공기가 느껴지나 했더니, 불타고 있잖아. 나는 진지의 병사에게 설명을 부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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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전부터 갑자기 스스로 발화하기 시작했다. 모종의 마법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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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P가 감소하면서 나타난 새 패턴이겠지, 커뮤니티에서도 피가 깎이고 난 이후가 진짜라고 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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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 공격에 대한 방어 대책은 착실하게 갖춰져 있다. 난데없이 브레스를 쏴도 한 번은 얼마든지 막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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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뱀용은 내가 생각한 것과는 전혀 다르게 움직였다. 이어진 것은 마법이 아닌 물리 공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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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과과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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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염을 휘감은 뱀은 그대로 그 거체를 움직여, 대지를 휩쓸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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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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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도적인 거체에서 나오는 파괴력과, 몸에 휘감은 불꽃이 흩어지며 만들어내는 화염 폭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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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잖아도 어마어마한 범위를 쓸어버릴 그 공격은, 나무가 가득한 대산림이라는 환경에서 재앙으로 변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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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용의 몸부림으로 뽑혀나간 나무가 하늘 높이 솟구치고 주변의 땅이 그것을 뒤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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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마득하게 높이 상승한 잔해들은 모조리 불이 붙은 채로 다시 낙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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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불붙은 잔해는 또 다른 잔해에 불을 붙이고, 이윽고 퍼져 나가는 산불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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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미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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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기 시작한 뱀용의 공격은 내가 있는 자리까지 닿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큰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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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방에 배치되어 있던 마포가 박살이 나고, 마포를 다루는 병사와 마법사들이 단번에 휩쓸려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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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포 포격이야말로 이쪽에서 동원할 수 있는 최대의 화력인데, 그 절반이 날아가 버린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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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루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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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옆에서 커다란 그림자가 솟구치더니, 그 안에서 다수의 엘프와 인간 병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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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마법을 쓸 수 있는 누군가가 급하게 전이를 사용해 대피시킨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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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불타고 있던 뱀용이 나를 바라보았다. 거대한 눈동자가 분명하게 나를 직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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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 있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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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릿속에서 들려오는 전음, 그와 동시에 뱀용은 다시 한번 그 불타는 몸으로- 이쪽을 향해 몸을 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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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과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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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행경로에 있는 모든 사물을 무시하고 직진, 나는 [혼신]을 비롯한 버프를 발동해 즉시 뛰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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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내가 있던 자리를 뱀용의 거체가 휩쓸었다. 근처에 있던 아군들이 모조리 짓뭉개지고 불타서 사라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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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 속에 들어가 난동을 부려놓은 게 녀석의 신경을 긁은 걸까. 내 쪽에 제대로 어그로가 끌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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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직감] 스킬 특유의 간질거리는 감각이 들어 발밑으로 방패를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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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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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패 위로 무식하게 큰 화살이 박혔다. 거인 엘프가 사용하는 그 화살, 그것도 불이 붙은 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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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력감지를 사용해 감각을 뻗어 보니, 내가 있던 자리를 통째로 뭉개버린 뱀용의 뒤통수에 거인들이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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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직후, 시야가 환하게 밝아졌다. 어마어마한 숫자의 거인들이 동시에 화살을 쏘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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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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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지면이 나를 향해 불을 토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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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세기도 힘든 숫자의 불화살이, 공중에 있는 나를 노리고 쏘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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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재빨리 반응했다. 공중에서 자세를 다잡고 소드 차지를 시전, 돌진 판정을 이용해 화살의 경로에서 벗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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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엘프의 화살은 빗나가지 않는다. 불화살이 기묘한 각도로 꺾여 나를 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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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이, 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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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벤토리에서 가장 큰 방패를 꺼내 양손에 들고, 최대한 몸을 가려 화살을 받아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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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한 모두 막으려 노력했지만, 불화살의 숫자가 숫자였기에 몸에도 많은 숫자가 박혀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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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화살이 몸에 박히는 순간 눈치챘다. 화살의 추적 능력에 기술이 아니라 마법이 쓰였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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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쩐지 유도 성능이 너무 말이 안 된다 싶었지, 마법을 부여해서 쏜 거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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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법 내성 스킬과 화염 내성 스킬이 없었다면 안 비운 재떨이 같은 꼴이 되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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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놓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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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용이 다시 한번 전음으로 말했다. 온몸에 불화살이 박힌 나를 향해, 놈의 머리가 다시 한 번 닥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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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자재로 몸을 꺾을 수 있는 녀석과는 다르게, 나는 공중에서는 거의 움직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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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구구구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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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에서 솟구친 뱀용의 대가리는 나를 곧바로 치지 않고, 한 번 목을 굽혀 나를 내려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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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발, 설마,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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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에 박힌 불화살을 뽑아내며, 나는 방패를 앞으로 내밀었고- 뱀용은 나를 향해 대가리를 내리꽂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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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타는 대형 빌딩이 나를 향해 낙하하는 꼴, 이대로 있다간 지면에 처박히고 저 대가리에 뭉개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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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미래가 뻔히 보이는데, 대처할 방법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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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진기로 피할 수 있을만한 크기가 아니다. 저런 걸 방패로 막을 수 있을 리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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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되면 남은 건 도박이다. 한 번만 살면 된다. 나는 인벤토리에 있는 물건들을 있는 대로 눈앞에 소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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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물건들이 조금이라도 충격을 완화해 주기를 바라며, 마력강화를 발동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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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순간, 의식이 끊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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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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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이 들자, 물에 잠긴 듯 몽롱한 감각이 전신을 덮고 있음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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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든 즉사는 안 했다. 흐릿하게 보이는 HP 바는 밑바닥을 넘어서 아예 남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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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는 걸 보니 정말 없는 건 아닐 테고, 한 1~2 정도쯤 남았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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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내 몸이 무슨 꼴인지부터 다시 체크하자. 마력감지와 감각강화를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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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끝은 움직이고, 어깨도 대충 움직이고, 팔도, 다리도 대충 움직이는데- 다 오른쪽만 움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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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반신이 날아갔나? 근데 그랬으면 죽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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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단 인벤토리를 기억에 의존해 조작해서, 포션을 꺼낸 뒤 오른손으로 대충 깨부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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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르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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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굴에 포션이 퍼부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다행히 목이 꺾여 있진 않았던 모양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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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윽, 끄하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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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좌반신의 감각이 제대로 돌아오고, 망가졌던 시야도 회복되었다. 몸을 일으켜 포션을 하나 더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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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완전히 감각을 회복하고 나니, 눈에 들어온 것은- 그저 불타는 주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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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크레이터처럼 푹 패인 구덩이 한가운데에 박혀 있었다. 구덩이 근처에는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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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뭔 운석 충돌 현장 같네, 운석은 아니지만 빌딩 사이즈 뱀이 충돌했으니 그럴 만도 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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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과광! 콰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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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겹게 몸을 일으키니, 멀리서 요란한 굉음이 들려왔다. 아직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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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용의 머리에 짓뭉개져서 의식을 잃었는데도, 아직 살아있는 이유를 알 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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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여기 뻗어있는 동안, 다른 사람들이 어그로를 끌어서 싸워 주고 있었던 거다. 목숨 빚졌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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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 으헉……씨발, 움직여, 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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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레가 된 몸에 채찍질을 해가며 억지로 구덩이에서 빠져나왔다. 저쪽에서 싸우는 이의 기척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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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다. 그리고 아마도 메르세데스도, 왕국군 군단장이라는 놈도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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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쪽 최고전력 중에서 딱 나만 빠진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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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병할, 목표는 퍼펙트 클리어라고 그렇게 폼 잡았는데. 이게 무슨 꼴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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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건 몰라도, 이곳을 지키겠다는 네 바람만큼은 완벽하게 이뤄주겠다고 결심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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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거기서 싸우고, 내가 여기에 처박혀 있는 건 좀 아니잖아. 그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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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우…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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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 쪽 뼈가 어떻게 된 건지, 숨만 쉬어도 통증이 온다. 몸 안의 마력 상태도 이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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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력강화를 사용한 뒤에 찾아오는 신체의 반동. 몸 상태가 안 좋아서 그게 더 심하게 온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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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력으로 마력강화가 불가능한 이상, 반동은 어쩔 수 없이 감수해야 한다. 죽지는 않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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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르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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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돌 때의 충격으로 너덜너덜해진 펜던트를 부여잡고, 다시 마력강화를 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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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굴]과 [혼신]이 모두 발동하고 있음을 느끼며, 세 명이 싸우고 있는 전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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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는 처음보다 눈에 띄게 작아진 덩치에, 팔이 돋아나 있는 뱀용이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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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불이 붙은 채로 날뛰던 게 2페이즈의 시작 패턴이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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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불태웠기 때문인지 뱀용의 몸집은 크게 작아져 있었고, 그 대신 어이없게도 팔이 돋아나서 검을 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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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뱀이라고 하기에는 좀 어이없는 꼬락서니지만, 나는 저게 더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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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벌써 움직일 수 있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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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는 검을 휘두르는 뱀용을 상대로 맞서고 있던 메르세데스가 소리쳤다. 다른 두 사람이 나를 쳐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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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그런 몸으로 움직이다간 죽는다! 물러나 있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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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말 없이 감탄한듯한 표정을 짓는 왕국군 군단장과 다르게, 엘레노어는 사색이 되어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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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결별을 선언했음에도 엘레노어는 여전히 나를 걱정한다. 참, 웃기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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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면서, 내가 어떤 위기를 거쳐 왔는지 알면서, 내가 죽음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알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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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내가 어떤 순간에 가장 강해지는지도, 알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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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러설 곳이 있을 것 같은가, 이 별을 모조리 먹어 치울 것이라고 말했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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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르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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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용이 불타는 검을 휘두르자, 그 방향대로 거대한 화염이 솟구쳐 나를 덮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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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성을 믿고 화염을 몸으로 뚫어내고, 반대로 뱀용을 향해 달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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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에 든 무기는 평소에 쓰던 검이 아니라, 찌르기에 용이한 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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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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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용은 몸을 비틀어 가볍게 창을 피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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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언제나 그랬듯, 이미 내 손에는 다른 무기가 들려 있었다. 묵직한 도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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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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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숨에 거리를 좁혀, 도끼로 놈의 몸통을 내려찍었다. 여전히 데미지는 잘만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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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격을 허용한 뱀용이 이번에는 입에서 불을 뿜었다. 나는 이번에도 무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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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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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길에 반대로 뛰어들고, 이번에는 검을 휘둘러 놈의 몸을 베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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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용의 다음 패턴은 검이었다. 불타는 검은 막아내도 그 화염으로 데미지를 입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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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내겐 통하지 않는다. 처음부터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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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놈의 화염은 단 한 번도 내게 대단한 피해를 주지 못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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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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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격의 무게가 굉장하다. 절로 팔이 떨릴 지경이다. 하지만 물리 공격만 막았으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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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뭐지, 인간족은 불에 안 타는 거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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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꽃에 지져지면서도 아무렇지 않은 내 모습을 보고, 뱀용이 처음으로 당혹감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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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위기 확 깨는 말이구먼, 여태까지의 여유롭던 태도가 다 가짜였던 것처럼 느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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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역시 그 왕자 놈 조상이 맞긴 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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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성 공격은 전부 화염 중심이고, 이젠 덩치도 작아졌고, 마법사라 그런지 검 솜씨는 영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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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 맨날 억까만 당하다가 가장 중요한 월드 보스 레이드에서 이런 억빠를 받을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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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상성을 만나니까 아주 어질어질하지, 이 새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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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그 기분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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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 마지막의 마지막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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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번 월드 레이드를 준비하면서 커뮤니티의 도전자들에게 내 스펙을 일부 공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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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 동시에, 비교 대상인 랭커들의 스펙에 대해서도 일부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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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짐작대로, 현재의 내 스펙은 25층에 체류 중인 저층 랭커들을 확실하게 웃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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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노멀 클래스의 한계로 액티브 스킬의 다양성 등에서는 아무래도 밀리긴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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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하나, 전체 스펙 중에서 딱 한 부분 만큼은 내가 압도적으로 우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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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성 스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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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적 최근에 습득한 [대마법 내성]이나 [주문 내성]등은 그렇게 대단하지는 않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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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반에 얻어서 꾸준히 성장시킨 [화염 내성]이나 [독 내성] 같은 스킬은 비교 대상이 마땅히 없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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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기로는, 75층 이상에 체류 중인 최상위 랭커급도 이 정도의 내성 레벨을 가진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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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커급 중에서 드물게 나와 비슷하거나 높은 내성을 가진 이들도 있기는 있다는 모양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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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 마저도 나처럼 다양한 방면의 내성을 골고루 갖고 있지는 않은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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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로, 화염을 주 무기로 사용하고 있는 현시점의 뱀용이 내게 유효타를 입히지 못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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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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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차게 내려친 전투망치가 뱀용의 거추장스러운 팔 한쪽을 으스러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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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아아악! 네 이노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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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그대로 덧붙였던 사족을 상실한 뱀용은 추한 목소리로 소리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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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외침 자체에도 마법적 효과가 있는지, 몸의 상처 이곳저곳이 욱신거리더니 불길이 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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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함께 맨 앞에서 싸우던 메르세데스와 군단장도 함께 불에 휩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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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마법사로서 후열에서 싸운 엘레노어에게선 불길이 피어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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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검이나 몸에서 돋아난 가지로 입힌 상처만이 발화하는 모양이다. 따지고 보면 정말 양심 없는 패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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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염의 위력이 그렇게 강한 건 아니지만, 입힌 피해에 비례하는 광역 회피불가 패턴인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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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한테 화염 내성이 없었다면 불합리하다고 온갖 욕을 쏟아냈어도 모자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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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주는 다 부렸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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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에서 돋아난 불길을 툭툭 때려서 꺼트리고, 다시 무기를 쥔 채로 뱀용에게 달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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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용은 기겁하며 마구 가지를 뻗어댔지만, 처음보다 뻗을 수 있는 가지의 숫자가 현저히 줄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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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는 몸도 점점 작아져서, 이젠 월드 보스라는 거창한 이름도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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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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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쭉한 창이 뱀용의 몸에 꽂혔고, 놈은 또다시 고통스러워하며 커다란 몸을 꿈틀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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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피하려고 발버둥치는 모습도 제대로 못 보여주고 있다. 하긴, 그 한참을 나한테 일방적으로 당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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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악이랍시고 내보였던 패턴도 다 파훼해버렸고, 보아하니 마땅히 날뛸 힘도 남지 않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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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끝내자, 징그러운 새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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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뒤편에 있는 세 사람에게 신호를 보냈다. 엘레노어를 제외한 두 사람이 나와 함께 달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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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격의 공격력은 나보다 메르세데스가 높고, 공격 속도는 인간 군단장 녀석이 더 빠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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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저 최상급 NPC 두 사람에 비해, 마력강화의 수준이며 기본적인 스탯이며 모두 뒤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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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루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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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내 몸에 휘감기는 검은 그림자, 엘레노어의 보조 마법이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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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르륵! 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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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져나온 폭염이 함께 달려든 두 사람을 밀어내지만, 화염을 견딜 수 있는 나는 저지당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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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용은 그런 나를 향해, 불타는 가지들을 있는 대로 쏟아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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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색이며 태도를 보아하니 아마 이것이 마지막 발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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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마땅히 피하기 힘든 그 공격을 그냥 몸으로 받아내며, 어렵게 찾아낸 뱀용의 역린을 맞찔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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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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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빛으로 터지는 크리티컬 이펙트, 그리고 가지에 찔린 내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붉은 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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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하루 몇 번이나 바닥을 보였던 HP 바가, 다시금 아슬아슬한 지점까지 깎여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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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죽어가는 몸은 무시한 채, 그대로 놈의 역린을 연달아 찔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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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콱콱콱콱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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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찌르기가 크리티컬을 터트리고, 놈의 공격도 내 몸을 모두 관통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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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절한 맞찌르기를 몇 번이나 반복한 끝에 쓰러진 것은- 내가 아니라 타오르는 뱀 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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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아아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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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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놈이 쓰러졌다. 먼지가 흩날렸다. 그리고 눈앞에는 알림창이 연달아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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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LD BOSS - 세계를 삼키는 뱀용, 니드그라크'스바르프발니르를 처치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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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업적을 달성한 공격대를 모두가 칭송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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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격대 명단 : 서진혁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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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드에 참가한 모든 공격대원에게 보상이 지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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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르륵 올라오는 알림창의 숫자는 어마어마했다. 하나하나 다 읽기 힘들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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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한 보상을 받았는데도 성장의 쾌감이나 뿌듯함은 뒤따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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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 보스를 클리어했다는 것은, 그렇게 망설이고 망설인 끝에 고른 작별이 찾아왔다는 뜻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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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이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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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쓰러진 뱀용의 머리를 짓밟고 작은 목소리로 승리를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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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정말로 작별이겠구나, 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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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발짝 떨어져 있던 엘레노어는 나를 보며 그렇게 말하고는, 쓰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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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란하게 올라온 보상 관련 알림을 모조리 꺼 버리고, 엘레노어에게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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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걸 쓰러트렸으니 이제 퀘스트라는 건 끝났을 텐데, 어느 시점에서 의식이 사라지는지를 모르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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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는 살짝 웃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레이드 시작 직전과는 다르게 후련한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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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상을 수령하고 나면 거기서 끝이야. 이미 보상은 인벤토리에 들어왔으니까, 곧 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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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음, 마지막으로 작별 인사를 할 시간 정도는 주는 건가. 아직은 깡통이 되지 않은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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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정확히 아는 건 아니니까. 너도 내 기억에서 봤을 거 아니야. 자주 있는 일은 아닌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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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세데스와 군단장은 우리가 하는 이야기를 알아듣지 못했다. 둘 다 NPC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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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작별 인사라면 우리 이미 충분히 하지 않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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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겠구나, 그걸 작별 인사라고 말해도 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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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용의 시체에 저마다의 반응을 보이는 둘을 내버려 두고, 우리는 살짝 떨어져 이야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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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아직 많은데, 아직 정리되지 않아서……제대로 입 밖에 낼 자신이 없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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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는 자리에 주저앉으며 한숨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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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하다 도중에 끊겨 버리면, 분명 오해를 낳을 게 뻔하니- 차라리 말하지 않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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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같은 생각이었다. 어중간하게 대화하다가 돌연 깡통으로 변해 버리면, 충격이 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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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그렇게 몇 마디 말을 통해, 작별 인사는 따로 하지 않기로 합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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깡통으로 변해버리는 게 언제가 될지 모르니, 그 때에 위화감을 느끼지 않도록 자연스럽게 행동하기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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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전고를 울리고, 피해를 수습해야겠어. 그대는 그동안 떠나도 괜찮고- 승리를 만끽해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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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같아서는, 아니- 결심한 대로라면 바로 떠나야겠지. 몸 상태가 조금만 더 좋았으면 지금 바로 떠났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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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재생에도 한계가 있기는 한 모양인지, 몇 번이나 연달아 반죽음에서 살고 나니 회복이 더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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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꼴로 마력강화를 계속 사용한 반동 탓일지도 모르겠다. 펜던트도 이 꼴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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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그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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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마력강화를 사용할 수 있게 해줬던 펜던트는 격한 싸움 도중에 완전히 망가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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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구도가 깎인 게 아니라 아예 파괴 판정인지, 아이템 이름과 분류 자체가 바뀌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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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 레이드 보상으로 얻은 게 많긴 하지만, 가장 중요한 마력강화 펜던트를 잃어버리고 말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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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모한 아이템과 골드를 생각하고 계산기를 두드려 보면, 최종적으로는 손해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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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잃은 것을 모두 숫자로 환산할 수는 없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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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로부터 정확히 하루를 꼬박 쉬고, 다음 층으로 올라가기 위해 미궁 구역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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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궁 구역 자체는 월드 보스 레이드로 소멸했지만, 다음 층으로 넘어가기 위한 전이문은 이곳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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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픽 퀘스트의 보상은 아직 지급되지 않았다. 완료 처리가 되긴 했지만, 아직 랭크를 산정 중이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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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크 산정이 끝나면 보상은 자동으로 들어온다고 하니, 다음 층으로 올라가도 별문제는 없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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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상을 받기 전인 만큼, 아직 엘레노어는 깡통으로 변하지 않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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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히 따로 작별 인사를 해서 무언가 응어리를 남기고 싶지 않다. 그래서 이렇게 혼자 나온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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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다들 어떻게 됐는지는 대충 봤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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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지난 하루 동안, 후일담이라고 할 만한 이야기를 멀리서 지켜볼 수는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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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는 세계수에 대해 더 알아야 할 것 같다며, 처치된 뱀용의 시체를 가져가 연구를 시작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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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세데스는 왕자를 위한 묘를 만들고, 이후에는 어설프지만 남은 하이엘프들을 이끌어 보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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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국군은 따로 이야기를 나눌 사이는 아니었지만, 군단장이라는 놈이 나한테 스카우트 제의를 건네고 떠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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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 곳이 없으면 언제든 왕국으로 오라고, 나만 한 실력자라면 언제든 환영이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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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내가 9층을 다시 찾는 일은 없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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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힘들고 괴로워도, 멈추지 않고 나아가기로 맹세했으니. 발길을 돌릴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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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계를 지켜냈다는 약간의 자부심 정도만을 갖고 떠나서- 괴로울 때면 가끔 떠올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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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아니지. 자부심은 무슨, 내가 그런 걸 가져도 될 리가 있나. 잊어버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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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층 전이문을 활성화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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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곧바로 10층으로 넘어가기 위해 전이문을 활성화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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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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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순간, 커다란 굉음이 먼 곳에서 터져 나와 하늘을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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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마력감지에 느껴지는 폭발적인 힘의 파장. 위치는 다크엘프의 요새가 있는 그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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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이게, 에픽 퀘스트는 이미 클리어했는데?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끝이 아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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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시하려면 무시할 수 있다, 계층 전이문은 아직 작동하고 있다. 어차피 퀘스트는 다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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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정신 차린 순간, 나는 이미 다크엘프의 마을을 향해 달려가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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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이게, 이게 다 뭔, 지랄 마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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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서 나를 반겨준 것은, 정체불명의 검은 쐐기에 배를 관통당한 엘레노어의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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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 서진혁 : 엑스포지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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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속력으로 달려 돌아온 다크엘프의 마을은 초토화가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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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용에게서 지켜낸 것이 무색할 만큼 처참한 광경이었다. 높이 솟아 있던 탑도 무너져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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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를 벗어난 상황에 심장이 쿵쾅거렸다. 나는 다급히 마력을 퍼트려 엘레노어를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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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상황은 지금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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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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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용이 다루던 가지를 그림자로 다시 엮어낸 듯한 검은 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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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의 등을 꿰뚫고 솟아나 있는 그것에선 기묘한 마력의 흐름이 느껴졌다. 어딘가 익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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쐐기는 저 멀리 알 수 없는 검은 덩어리로부터 뻗어나와 있었다. 덩어리는 꿈틀거리며 형태를 갖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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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라고 칭하기에는 다소 구성요소가 부족한, 너저분한 진흙 덩어리로 빚은 듯한 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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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죽지 않는다. 결코 멸하지 않는다.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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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인지 뭔지 모를 구멍에서 새어나오는 소리가 그것의 정체를 알려주었다. 그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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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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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형체가 쐐기를 뽑아냈다. 엘레노어는 휘청거리며 땅에 엎어졌다. 피가 흥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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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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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좀처럼 불러본 적이 없었던 엘레노어의 이름을 불렀다. 대답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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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겁지겁 인벤토리를 열어 포션을 꺼내고, 엘레노어의 상처에 들이부었다. 아직 살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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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명백하게 상태가 나쁘다. 출혈량이 너무 많다. 이건 상처가 아물어도- 아냐, 생각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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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 차려, 야, 네가 이렇게, 이런 식으로 죽으면 어쩌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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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다시 포션을 들이붓고, 그리고, 엘레노어의 상처를, 이걸, 어떡해야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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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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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가 흐릿하게 눈뜨며 나를 불렀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이어지는 다른 목소리에 묻히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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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모든 엘프의 왕, 별을 건너 새 엘프의 지도자가 될 자, 죽음과 멸망을 거부하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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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음과 뒤섞인 육성, 형태가 저런 꼴이라서 그런지 목소리가 유난히 귀에 거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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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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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절주절 떠드는 소리를 듣다 보니, 세게 악문 이빨이 이상한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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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욕망의 총체다, 누구나 꿈꾸는 불사의 소망을 대변하는 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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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리 닥쳐, 씨발 새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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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은 결코 쇠하지 않는다, 네놈 따위의 검은 내게 닿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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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거리는 추한 진흙덩이를 보며 검을 뽑았다. 놈은 촉수처럼 휘어지는 팔을 휘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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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속도며 기세가 모두 심상치 않았다. 나는 바로 [혼신]을 발동해 그것을 받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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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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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히 부딪히기만 했을 뿐인데, 어마어마한 충격이 몸에 닥쳐 뒤로 나동그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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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내려두었던 엘레노어의 몸 역시 그것에 휘말려 굴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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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을 쥐었던 손아귀가 찢어져 피가 흐르고 있다. 말도 안 돼, 이젠 월드 보스도 뭣도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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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왜 항상…왜 맨날, 왜 자꾸, 왜 너 같은 새끼가!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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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왜 나한테만 늘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새끼들이 나타난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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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든 보스고, 월드 보스고, 솔플로는 못 깨는 기믹 던전이고, 왜 죄다 내 앞에만 나타나고 지랄이냔 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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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강해졌는데도 항상 더 강한 놈이 나타나서 앞을 가로막는다. 언제나, 항상, 나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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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적당히 하라고, 이 씨발 새끼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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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에 반응해 마력이 요동친다. 파도치는 마력은 줄줄 새나갈 뿐, 아무런 힘도 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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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력강화만 할 수 있었으면, 펜던트가 아직 고장 나지 않았더라면, 그냥 내가 솔플러가 아니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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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기만 하면 어떻게든 할 수 있었을 텐데, 서진혁 이 병신같은 새끼는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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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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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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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또 한 번 쏘아진 촉수가 방패 위를 때리며, 어마어마한 충격이 몸에 닥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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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전처럼 나가떨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곁에 있던 엘레노어의 몸은 또다시 휘말려 밀려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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좆같다. 마력강화도 못 하는 상태로 이길 수 있는 놈이 아니다. 이 새끼도 뒤지게 세다, 씨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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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바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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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을 집어넣고 피를 흘리고 있는 엘레노어의 몸을 둘러업었다. 일단은, 여기서 벗어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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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상황인지 하나도 모르겠고, 이길 수 있는 상대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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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일단 엘레노어를 이대로 둘 수는 없었다. 이러다간 분명 휘말려서 죽고 말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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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대로 곧장 바깥을 향해 달렸다. 다행이게도 저놈의 공격은 그렇게 멀리까지 닿지 않는 듯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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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몇 번 공격이 스쳐서 위험했지만, 이동속도 역시 느린 모양인지 금방 거리를 벌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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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쾅! 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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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뒤쫓던 진흙 괴물은 다크엘프 마을을 마구잡이로 파괴하기 시작했고, 나는 그 틈에 더 멀리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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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빛이 자라는 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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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도달한 곳은, 언젠가 요정과 함께 춤추었던- 내 가슴에 묘한 울림을 만들었던 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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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추억이 깃들어 있다고도 말할 수 있는 그 장소에서, 나는 죽어가는 엘레노어를 품에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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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엘레노어는 느릿하게 눈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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꿰뚫렸던 자리가 조금은 아물었다. 하지만 완전히 나을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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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하다. 내가 몇 번이나 빈사에서 살아나올 수 있었던 건, 포션의 성능이 아니라 재생 능력 덕분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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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층 수준에서 구할 수 있는 포션은 결손 수준의 상처는 수복하지 못한다. 이렇게 큰 상처 역시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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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여, 왜 돌아왔나. 아직 퀘스트가 끝나지 않았던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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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개를 저었다. 에픽 퀘스트는 분명 완료되었다. 실제로 나는 층을 떠나기 직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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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 인사는 따로 하지 않기로 했을 텐데, 왜 돌아와서……또 다쳐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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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몸에 뻥 뚫린 구멍은 보이지도 않는지, 대수롭지도 않은 내 상처를 걱정하는 엘레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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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말에 뭐라고 대답할 수 없었다. 나도 내가 왜 돌아왔는지 모르겠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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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엘프 마을에 무슨 일이 생기건 이젠 내 알 바가 아니다. 어차피 퀘스트는 끝났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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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여기 있는 것들은 죄다 NPC니까, 자아 없는 깡통대가리에 불과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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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올 이유 따위는 전혀 없다고,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었는데- 몸이 멋대로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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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그렇구나…우리를 걱정해 준 거지? 가슴이 그대를 움직인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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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의 손이 내 가슴을 짚었다. 나도 같은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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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옛저녁에 내버리기로 해 놓고, 아직도 버리지 못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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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을 올라야 한다는 의지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마음이 내 발길을 돌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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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심하다, 한심해, 서진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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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욕을 봤으면서도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다니. 대체 몇 번을 더 겪어야 완전히 버릴 수 있는 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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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빌어먹을, 이쯤 되면 인정할 수밖에 없다. 자신을 속이는 일이란 왜 이렇게도 어려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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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것을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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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찮은 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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쌓인 습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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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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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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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주하는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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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버리고 또 버린 끝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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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후, 저 망령에게 감사해야겠는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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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해서도 버릴 수 없는 것만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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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준비했던 말을 그대에게 남길 기회가 생겼으니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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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는 죽음에 둘러싸이고 있음에도, 분명하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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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퍼하지 마라, 그대여. 나는 이미 오래전에 죽어 있었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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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웃음 앞에서, 아무 말도 꺼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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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간 침묵이 흐르고, 엘레노어는 천천히 내 뺨을 쓰다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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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히려 지금에 만족한다. 누구도 모르게 조용히 깡통이 되는 게 아니라, 이렇게 그대 품에 안겨서 떠나갈 수 있게 되지 않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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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의 손은 격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차갑기까지 했다, 이미 시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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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신세 한탄을 하려는 건 아니다. 그거라면 이미 충분히 했지. 그냥, 그대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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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가 산 자에게 무언가를 전할 수 있음이 기쁘다며, 엘레노어는 한 번 더 눈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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뺨을 쓰다듬는 손도, 힘겹게 지어 보이는 웃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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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나를 달래기 위한 몸짓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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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여기로 오면 안 됐어. 의지를 관철할 셈이었다면, 눈길도 주지 않고 다음 층으로 올라갔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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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는 뒤이어 내게 이유를 물었다. 왜 여기로 달려왔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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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지와 상반되는 마음이 몸을 움직인 것이라고, 그 대답을 이미 제 입으로 말해 놓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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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떠듬떠듬 대답했다. 마음 때문이라고, 내 나약함이 끝내 버리지 못한 그것 때문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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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심한 인간쓰레기, 앰창인생 서진혁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기 때문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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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는 내가 토해내는 말을 듣고는 살짝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내 뺨을 살짝 두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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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손에 힘이 안 들어가는구나. 힘껏 때려 줄 셈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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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손은 다시금 내 뺨을 쓰다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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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 않다, 그대는 틀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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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망하고자 하는 이의 손길과 목소리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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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대의 기억과 심상을 모두 들여다보았어. 그래서, 지금 그대에게 어떤 말이 필요한 줄도 알고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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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는 그렇게 말하고는, 피를 뚝뚝 흘리는 몸을 억지로 일으켜- 내 어깨를 감싸고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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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잘못하지 않았어. 그대는 나약하지도, 한심하지도 않아. 무엇도 그대의 탓이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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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욱, 하고. 약하지만 확실하게, 엘레노어가 나를 안고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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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한 번도 죽음 따위를 원한 적이 없었다. 지금도 이렇게, 마음에 전해져 오는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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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이상했다. 속이 울렁거렸다. 그냥 몇 마디 말을 들었을 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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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할 것 같다. 힘겹게 침을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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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삼켜 내니, 다른 쪽에서 흘러나온다. 뺨이 뜨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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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용서받고 싶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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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것, 내가 가장 먼저 버린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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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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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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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고통 속에서도 쉽게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투명한 눈물이, 왜 지금 와서 모습을 보이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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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알아먹지도 못할 말에 눈물 따위가 흐르는지, 하나도 이해가 안 되고- 이해하지 못하는 자신이 한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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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는 그런 나를 천천히 토닥였다. 그러면서 조금씩 속삭였다. 네 잘못이 아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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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가, 뭐가…무슨 소리야, 그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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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힘겹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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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의 잘못이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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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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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잘못하지 않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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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물어도 대답해주지 않는다. 뭘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다. 하나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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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어머니를 죽이지 않았다. 그대의 잘못이 아니야. 그대가 나약하기 때문이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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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의 손이 이번에는 아물어 가는 내 상처를 쓰다듬었다. 따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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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의 기억을 모두 보았다고 했지 않나. 그대가 얼마나 자신을 괴롭히는지, 보지 못했다고 생각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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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는 내 몸 이곳저곳을 한 번씩 쓰다듬었다. 평소에 하던 추행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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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손을 댄 자리는 모두, 내가 내성을 키우기 위해 반복해서 자해했던 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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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을 받고 싶었겠지, 벌을 받고 나면 용서도 받을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대는 결코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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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겹게 눈을 돌렸던 진심이 눈앞에 들이밀어 졌다. 그건, 그건 분명 맞는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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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한 거 아닌가. 대체 누가 나를 용서해 줄 수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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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용서할 자격이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 그건 죽은 엄마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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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엄마를 죽였다. 나 때문에 엄마가 죽었다. 엄마가 죽을 때까지, 나는 핑계만 대고 아무것도 안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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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실을 세상에서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나다. 그렇기에, 나는 결코 나를 용서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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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결코 자신을 살필 수 없다. 돌아본다고 한들 보이는 건 ‘과거의 자신’이라는 타인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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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성하며 사는 이는 더욱 그렇다. 그런 이들은 언제나 자신을 돌아보고, 흠결을 찾아 고쳐내려 하니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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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감히 말하겠다. 그대의 그것은 결코 흠결이 아니야. 헷갈리지 마라, 그대의 행동은 정말 옳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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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가 말하는 내 행동이란 무엇일까. 곰곰이 고민해 봐도 좀처럼 답은 나오질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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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의 어머니는 무엇을 바라고 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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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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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가 자신을 괴롭히며, 죽음에 뛰어들기를 바라고 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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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는 내 과거를 보았다. 내가 살아온 모든 과거, 그 긴 필름에 얼룩처럼 남아 있는 우리 엄마의 모습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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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내가 어딜 가서든 기죽지 않기를 바랐다. 엄마는 내가 항상 좋은 것만 보고, 좋은 것만 누리기를 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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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에 자신을 깎아, 모든 좋은 것을 내게 주었다. 내가 탑에 갇혀 썩어갈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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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나를 위해 백방으로 도움을 요청했고, 나를 위해 뛰다가, 과로로 죽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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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 그대를 원망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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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개를 저었다. 엄마가 그랬을 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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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방구석에 처박혀 아무것도 안 하는 백수 새끼여도, 엄마는 나를 미련할 정도로 사랑해줬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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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았다. 나를 용서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엄마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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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하면, 애초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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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나를 탓하지 않았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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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생각이 입 밖으로 나왔다. 말과 함께 눈물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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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말했다. 그만 자신을 용서해 주라고, 더 이상 자신을 괴롭히지 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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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러기에는 내 속에서 부글부글 끓는 이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다. 이걸, 나는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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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 봐라, 그대의 어머니는 과연 무엇을 원망했을까. 적어도 그대는 아닐 게 당연하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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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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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대는 이미 알고 있다. 공교롭게도, 나 역시 그것이 원망스럽구나.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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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를 스치는 단어가 하나 있었다. 내가 오래전에 시야에서 배제했던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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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대의 가슴 속에서 끓는 그 감정이, 처음부터 그것을 향해 있었다는 것도 알고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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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엘레노어는 나에게 그 감정의 이름을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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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로, 엘레노어는 보다 직설적으로 처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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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한 번 깨닫고 나니, 엘레노어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도 금방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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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슬슬……정말로 끝인 모양이다. 그래도 시간은 충분했구나, 평소에 단련해 두길 잘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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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의 생명이 한계에 달했음을 우리는 서로 느낄 수 있었다. 이 호수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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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트 엘프의 비술로 연결되었던 고리가, 감정을 공유하며 다시금 짙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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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눈물 자국은 이제 지우고- 옳지, 전보다 눈빛이 더 멋있어졌구나. 내 취향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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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말하는 엘레노어의 옅은 망설임이 느껴졌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잠시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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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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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능적인 농담을 툭툭 던져대던 모습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수줍은 입맞춤이 내 입술에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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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백하던 엘레노어의 얼굴이 살짝 붉게 물들었다. 그래, 뭐, 경험 많은 척해도 결국 그렇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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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부터 약혼자가 정해져서, 누굴 만날 자유도 없던 녀석이 연애를 따로 해 봤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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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마지막이니까…꼭 해보고 싶었다. 미안하구나, 그동안 나이도 한참 많은 게 집적거려서 귀찮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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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혀 그렇지 않다. 그동안 벽을 세웠던 이유가 그게 아니라는 것은,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을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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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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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하고 있는지는 생생히 느껴졌기에, 나는 곧바로 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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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의 목을 받치고, 조심스레 고개를 숙여- 이번에는 내 쪽에서 입을 맞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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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후, 역시 내가 고른 남자라니까. 마음에 쏙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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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유로운 척 말하고 있지만, 얼마나 쑥스러워하고 있는지도 잘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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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굳이 거창한 정신 연결 따위가 없어도- 저 새빨갛게 물든 표정을 보면 알 수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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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엘레노어의 손끝이 하얗게 물들기 시작했다. 몬스터가 죽을 때 나타나는 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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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딱 맞췄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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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서히 말단부터 사라져 가는 엘레노어는, 마지막의 마지막에- 살짝 눈물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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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이왕이면……키스 다음까지 진도를 빼 보고 싶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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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을 마지막으로, 엘레노어의 육체는 완전히 소멸하고- 그 혼도 어디론가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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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소원을 들어주지 못했다는 한탄 따위는 하지 않는다. 분명 마음을 통해 전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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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적 달성 :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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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거, 다음에 만났을 때 하면 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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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적 보상 ‘강철의 혼’ 을 획득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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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흙 덩어리처럼 생긴 하이엘프의 왕, 죽음에서 돌아온 망령은 아직도 마을을 헤집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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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검과 방패를 다시 착용하고, 차분한 걸음으로 놈이 날뛰고 있는 그곳까지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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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꽁지가 빠지게 도망치더니 새삼 실성했나, 어리석은 인간족 검사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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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사이에 다른 이들의 생명력을 빨아먹은 것인지, 전음에서 어마어마한 마력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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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번이나 하는 말이지만, 역시 9층의 스펙은 아득히 뛰어넘은 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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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놈은 과연 어떤 맥락에서 튀어나왔고, 어떤 배경설정이 있길래, 이런 스펙을 가진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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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관심은 없다. 버려두고 떠나도 상관없는 적이지만, 나는 맞서기를 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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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고 약한 인간족이여, 그 가냘픈 검으로 나를- 불사의 욕망을 죽일 수 있을 것 같으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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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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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호라, 무언가 각오를 다진 모양이지. 각오 따위 무한한 욕망 앞에서 하찮은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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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령은 주절주절 계속해서 떠들었다. 어디 그 각오를 한번 말해보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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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낀 것은 많았지만, 새삼스레 거창한 각오 같은 걸 다지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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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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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탑에 들어온 이후로- 항상 무언가에 화가 나 있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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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가 향하는 방향은 그때그때 조금씩 달랐고, 그 이유도 조금씩 달랐으며, 개중 분명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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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지금은 확실히 알 수 있다. 내 분노가 진정 무엇을 향하고 있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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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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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검을 뽑았다. 눈앞의 적을 바라보았다. 무척이나 강한 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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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까지 만난 그 어떤 적보다 강할지도 모른다. 마력강화를 쓸 수 없는 상태에서 맞설 수 있을만한 상대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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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마력강화를 발동시켜주는 펜던트는 완전히 망가져 힘을 잃었다. 하지만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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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그런 건 필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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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르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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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마력이 폭발하며 막혀 있던 길을 질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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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력은 주인의 감정과 의지에 크게 영향받기에, 내 모순된 마음으로는 마력강화를 쓸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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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더 이상은 아니다. 이제는 헷갈리지 않는다. 엘레노어가 가르쳐 준 것이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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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괴롭게 만드는 것, 엘레노어를 속박하는 것, 우리 엄마를 죽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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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는 환경과 타인을 탓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탓에,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던 나의 진정한 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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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련의 탑 그 자체야말로, 나의 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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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방법을 써야 하는지는 모르겠다. 방법이 존재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가능한 일인지 아닌지조차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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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어쨌든 할 거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빌어먹을 탑을 깨부수고, 모든 대가를 치르게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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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지는 화살이고, 마음은 불꽃이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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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탑을 쳐부수고 그 너머로 나아갈 그날까지 절대 멈추지 않겠다. 이게 나의 화살, 스스로 맹세한 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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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내 화살에 힘을 실어줄 불꽃은- 저놈이 묻고 있는 각오 따위가 아니라 가벼운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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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거유 미녀 다크엘프랑 키스 다음까지 진도를 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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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거세했던 욕망이 불꽃이 되었고, 이제 내 마음과 의지는 같은 방향을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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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려면 너 같은 좆밥한테 막히면 안 되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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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력으로 이룬 마력강화의 힘으로, 날아드는 망령의 공격을 모조리 쳐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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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미 어지간한 저층 랭커 이상까지 성장했지만, 이 탑 자체가 목표인 이상 그걸로는 부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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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보다 훨씬 더 강해져야 한다. 그걸 위한 방법은 이미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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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설이지 않고 끊임없이 나아간다. 자신을 학대하며 뒤따라오는 성장의 쾌감만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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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쾌감을 쫓아, 누구도 따라오지 못할 만큼 가장 앞으로, 그리고 가장 높은 곳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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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과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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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휘두른 검에서 방출된 마력이 망령의 좌반신을 통째로 으깨버리는 것을 보며,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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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탑의 천장을 꿰뚫고, 그 너머까지 솟아오르는 불화살이 되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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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스트 완료 : 다크엘프의 서 - 최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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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행상황에 따라 랭크 및 보상을 결정합니다……평가 완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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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크 : S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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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픽 아이템 : ‘엘레노어의 영혼’을 획득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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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아이템은 당신에게 영구히 귀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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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련의 탑이 당신을 부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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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 시련의 탑 14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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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하합니다. 시련의 탑 13층을 최초로 클리어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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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척거리는 핏물이 묻은 검을 한 번 털어내고, 인벤토리에 집어넣으며 숨을 골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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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층의 보스는 스프링처럼 생긴 다리가 특징적인, 디어 뭐시기라는 이름의 사슴 인간 몬스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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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용 기믹을 수행하지 않으면 어마어마한 속도로 보스룸 안을 뛰어다니며 주변을 초토화하는 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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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언제나 그랬듯이, 그 기믹은 솔플러인 나 혼자서는 수행할 수 없는 구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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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믹을 등에 업은 보스는 한시도 쉬지 않고 미친 속도로 움직여, 딜 타이밍도 내주지 않고 보스룸을 박살 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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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어쨌든 내가 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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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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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클리어 메시지를 담은 스크린샷 한 장을 찍어서, 오픈 커뮤니티에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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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작 의혹을 제기할지도 모르니, 제대로 시스템 시계가 찍히게끔 조절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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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서진혁#26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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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어 형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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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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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은 결과로 증명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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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뭐야 ㅅㅂ 어케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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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ㅅㅂ뭐임 5분지난거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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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ㅋㅋㅋㅋㅋㅋㅋ이게되네 ㅅ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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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혁아 나는 사실 믿고있었다 한번만용서해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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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ㄴ 알몸 제로투 입갤 ㅋ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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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ㄴ 자 드가자 ㅋㅋㅋ 인증 없으면 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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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라치지마 씨발 이거 주작 아님? 저게 말이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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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내기를 했던 도전자들이 말이 되는 일이냐며 경악하고는, 마구잡이로 댓글을 달아 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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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휴, 확실하지 않으면 승부를 걸지 마라- 이런 거 안 들어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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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층 보스의 기믹이 솔로 플레이로는 수행할 수 없다는 점, 그리고 기믹을 수행하지 않으면 매우 어렵다는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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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딴 게 뭐 어떻다고. 난이도가 비정상적이면 뭐 하나, 도전자인 나도 정상 범주를 벗어났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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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속도가 어마어마하게 빠르긴 했지만- 뛰어다니느라 숨이 좀 찼을 뿐, 엄청 쉽게 이겼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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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놈이 뭐랬더라, 오늘 안에 잡으면 1층 마을 중앙에서 알몸 제로투 댄스를 추겠다 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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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이놈은 10트안에 잡으면 공개 삭발 인증한다고 했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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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여기 마지막 놈은 자기랑 같은 층 도전자들 전부한테 치즈돈까스 도시락을 뿌리겠다고 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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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자산이라고 생각해서 아무 말이나 막 뱉었나 본데, 내가 어지간히 만만해 보였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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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치돈 10개 뿌리면 빤스는 입게해준다 어떤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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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ㄴ 20개 뿌릴테니까 하나만 더 입어도 괜찮겠습니까 형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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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ㄴ ㅇㅋ 20개 제대로 뿌리고 인증하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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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ㄴ 캬시발 이거지 바로 줄서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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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ㄴ 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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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ㄴ 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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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즈돈까스 도시락을 받은 도전자들에 의해 게시판이 ‘대 진 혁’ 으로 도배되는 모습을 보고, 커뮤니티를 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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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 보스 레이드를 솔플로 클리어한 이후, 커뮤니티에서 내 유명도는 어마어마하게 높이 치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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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내 스펙에 대한 관심 역시 매우 높아졌고, 드문드문 이렇게 나를 두고 내기가 걸리는 일도 생겼을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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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정작 내게 관심을 두는 도전자 중에서, 내 스펙을 제대로 짐작하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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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그럴 만도 하다.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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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혁 Lv.68 (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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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P : 1280/1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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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P : 770/7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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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력 : 106 (9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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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첩 : 102 (9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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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구 : 113 (9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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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능 : 101 (8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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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스펙이 이렇게 미친 수준까지 올랐을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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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인 도전자들이 스탯을 올리는 방법은 두 가지, 레벨업과 장비 업그레이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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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적을 달성하면 레벨과 별개로 스탯을 올릴 수 있긴 하지만, 이는 일반적인 도전자들에게는 먼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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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업적은 오픈 커뮤니티라는 정보 공유의 장이 있음에도, 그 달성 조건이 거의 알려지지 않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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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조건이 알려진 업적을 되는대로 챙긴다 한들, 들이는 시간에 비해 그 상승량은 매우 적은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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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밖에 스탯을 올리는 방법이라고는 효율이 거의 없기로 유명한 신체단련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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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9층을 클리어한 이후, 일부러 업적 달성을 위해 히든 보스를 찾아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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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할 수 있는 기믹을 일부러 수행하지 않는다거나, 본래라면 대적할 일이 없는 NPC를 대적하거나 하는 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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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그런 ‘억까’ 요소들이 내 눈앞에 나타나는 것을 매우 불합리하다고 여겼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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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새로운 목표가 합리를 벗어난 영역에 있음을 생각한다면, 스스로 불합리를 찾아 나설 필요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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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을 올라가야 한다는 의지, 이대로 멈춰 서고 싶은 마음, 자신을 향한 혐오와 학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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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모순을 안고 무작정 위험에 몸을 던지던 그때와는 사정이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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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의지와 마음은 이제 같은 곳을 바라본다. 분명한 목표의식은 그만큼 행동에 힘을 실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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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온갖 강적을 찾아서 부딪히고, 빠짐없이 단련을 반복한 결과가 이 스탯.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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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폰 마스터리 Lv.2] [전투 각성 Lv.33] [전투 지속 Lv.31] [마력 지배 Lv.3] [마력 강화 Lv.3] [종합 원소 내성 Lv. 11] [종합 상태이상 내성 Lv. 9] [종합 대마법 내성 Lv. 8] [대지 정령의 가호(+철벽) Lv.15] [바람 정령의 가호(+신속) Lv.15] [번개 정령의 가호(+대전) Lv.15] [라이트닝 차지 Lv.23 ] [약점 간파 Lv.8] [초감각 Lv.7] [초재생 Lv.2] [혼신 Lv.13] [집광 Lv.11] [불굴 Lv.17] [도약 Lv. 4] [명상 Lv. 6] [위압 Lv.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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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요약 표시를 하지 않으면 한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지경으로 늘어난 스킬 목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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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무기술이 통합되어 웨폰 마스터리로 변경되고, 여러 패시브가 상위 스킬로 진화하면서 줄어든 게 그나마 이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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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표시를 풀고 자세히 보기를 누르면, 내성 스킬의 목록만으로도 시스템 창이 눈앞을 가득 메울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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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여전히 액티브 스킬은 많지 않고, 전사 클래스의 삼신기라는 [축지]와 [오러 마스터리]는 얻지 못한 상태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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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대신 여러 단련의 성과로, 마법사 클래스의 삼신기인 [마력 지배] 스킬을 갖게 되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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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아직 강해질 여지가 많다는 것이니- 스킬의 부족함은 오히려 기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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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멀었지, 이 정도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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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벤토리에 들어가 있는 [엘레노어의 영혼]을 한 번 다시 확인하며, 나는 14층으로 향하는 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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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 전이 특유의 울렁거림과 함께 도착한 14층의 배경은 이제까지의 어떤 층보다 살풍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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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은 새빨갛고, 구름은 모조리 새까맣고, 땅은 온통 유황빛에 여기저기에 흉흉한 화염이 흩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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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에 마법사들에게 굉장한 압박으로 다가온다는, 공기 중에 섞인 높은 밀도의 마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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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인상은 확실히 커뮤니티에서 말하던 대로다. 언뜻 보기에 지형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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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련의 탑 14층의 배경은 마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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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는 순간부터 사악한 마력과 강인한 신체를 타고난다는 개사기 종족- 마족의 고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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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전자가 떨어지는 장소는 그중에서도, 마계 어느 지역의 입구라고 할 수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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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저게 그거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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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멀리 돌로 만들어진 커다란 관문과, 그 관문을 막아서고 있는 빨간 피부의 거한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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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에는 날개가 돋아나 있고, 머리에는 두 개의 뿔이 돋아나 있으며, 눈은 흰자 부분이 새까만 역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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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계 입구를 지키는 문지기 마족이다. 1세대 도전자들의 목숨을 수없이 빼앗았다는 바로 그놈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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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계 안쪽으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저런 문지기가 지키는 관문을 셋이나 통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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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힘으로 뚫어야 하는 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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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저 문지기들은 하나하나가 보스 이상으로 강력한, 전투로 돌파하지 말라고 만들어진 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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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문지기는 통행증 내지는 제물을 바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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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문지기는 수수께끼를 풀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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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문지기는 퍼즐을 풀어서 돌파하는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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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행증은 초반의 외곽 지역에서 퀘스트를 깨면 얻을 수 있고, 수수께끼와 퍼즐의 정답은 커뮤니티에 다 나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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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략 없이 무작정 도전했어야만 했던 1세대 도전자들에게는 굉장히 난감한 관문이었다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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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는 커뮤니티에서 답지를 보고 베끼는 것으로, 누구나 쉽게 통과해서 경험치 보상을 먹을 수 있는 개꿀 구간인 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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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통행증을 얻는 방법은 물론이요, 퍼즐과 수수께끼는 탑마다 모두 동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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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나 역시 어렵게 머리를 굴리고 퀘스트를 깰 필요 없이 각 관문을 쉽게 돌파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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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곧바로 관문으로 향했고, 곧 문지기인 붉은 마족이 나를 가로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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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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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족은 생긴 것과 다르게 영화배우를 연상시키는 중후한 미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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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관문의 주인, 적색의 갈트람이다- 이곳을 지나가려는 너는 누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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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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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문을 지나가기 위해서는 마땅한 제물이 필요하다. 너는 제물을 가져오지 않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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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이놈이 말하는 제물은 생물의 영혼을 말한다. 공교롭게도 내 인벤토리에는 영혼의 파편이 하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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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엘레노어의 영혼을 이딴 잡놈한테 줄 생각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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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마족 갈트람은 팔짱을 낀 채, 흉흉한 마력을 뿜어내며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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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물을 준비하지 않은 자는 지나갈 수 없다. 관문의 통행증은 갖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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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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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행증도 제물도 없다면 이곳을 지나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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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마족의 위협에 아랑곳하지 않고 검을 뽑았다. 당연히,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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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행증이 없으면 지나갈 수 없다고? 나랑 내기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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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로 못 지나가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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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 서쪽 마계의 최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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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을 뽑고 적의를 드러내자마자, 피부에 따끔따끔하게 다가오는 흉포한 마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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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프가 태어날 때부터 뛰어난 궁술과 마나 친화력을 갖고 있듯, 마족은 태어날 때부터 강대한 마력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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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히 가진 마력의 총량만이 큰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마력을 품고 살아온 만큼 그 지배력도 굉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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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계의 높은 마력 농도와 이런 마족의 특성이 합쳐지면, 이렇게 뿜어져 나오는 마력만으로도 굉장한 물리력을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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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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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카로운 마력이 신체를 압박하자, 한겨울 한파에 노출된 것처럼 입술이 멋대로 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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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도 나라서 이 정도인 거고, 보통 인간이라면 이미 몸이 갈기갈기 찢어졌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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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인간은 아닌 듯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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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력의 압박을 아무렇지 않게 흘려내고 있는 나를 보며, 붉은 마족이 말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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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했듯 이 문지기들은 전투로 돌파하라고 있는 놈들이 아니다. 그렇기에 문지기 본인들도 전투를 피하는 면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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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때린다, 진짜 때린다, 셋 하면 때린다? 셋, 둘, 하나, 하나 반, 하나 반의반의 반- 뭐 이런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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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놈들을 상대로 싸움을 걸려면, 당연히 먼저 선빵을 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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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보통이 아니긴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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놈의 말을 받아치며, 왼손에 매어 뒀던 방패를 냅다 내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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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공격은 간보기, 붉은 마족은 가볍게 방패를 튕겨냈다. 하지만 방패를 튕겨내기 위해 손이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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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 부분에 던진 방패를 튕겨냈으니, 당연히 손은 얼굴 부근에 머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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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짱을 끼고 있던 놈의 가슴께가 훤히 드러나고, 시야가 가려졌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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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을 노리기 딱 좋은 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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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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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르게 거리를 좁혀 내지른 검은, 마족의 손바닥에 박혀서 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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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뮤니티에서 들은 대로다. 마족은 모두 강철처럼 질긴 피부를 갖고 있어서, 방어력이 월등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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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방어력에는 개체별로 차이가 있긴 하지만, 이놈은 사실상 이 14층 마계의 보스 수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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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방어력도 매우 높다. 내가 뻗은 칼을 이 정도로 막아낼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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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틈을 비집고 들어간 공격이 막혔으니, 다음은 저놈의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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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마족은 곧바로 마력을 뿜어내며, 칼날처럼 변한 손톱을 휘둘렀다. 나는 왼팔을 들어 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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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왼팔에 있던 방패는 방금 던져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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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예전처럼 방패를 던져놓고 까먹어서 그런 게 아니다. 애초에 방패가 별로 필요가 없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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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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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둘러진 마족의 손톱이 내 맨 팔뚝을 스쳐 지나가며, 쇳덩이를 긁은 것처럼 불똥이 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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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 정령의 가호가 15레벨에 도달하며 더 강력해진 [철벽]의 버프 효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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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에 예전보다 훨씬 높아진 내구력 스탯, 그리고 마지막으로 9층에서 얻은 ‘강철의 혼’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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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뭣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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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인 내 맨몸이 마족 이상의 내구도를 갖고 있음에 크게 당황한 듯 보이는 붉은 마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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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그렇게 놀라고 그러나, 방금 네 입으로- 그리고 내 입으로도 말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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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보통 아니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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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진 내 발길질에 배를 얻어맞은 마족은, 그대로 멀리 날아가 나자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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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내 기본 방어력은 9층 당시와 비교하면, 방어구를 빼도 거의 두 배 수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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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말하는 기본 방어력이란, 스탯창에 표시되는 방어력 수치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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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벽] 스킬을 사용하면 당연히 실질 방어력은 더 높아지고, [혼신] 버프를 발동하면 추가로 더 높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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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에 [종합 원소 내성]이라는 패시브가 마법이나 속성 공격은 종류를 가리지 않고 그 위력을 반감시켜 버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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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방어력을 뚫고 HP가 떨어져도, [전투 치유]가 두 단계 진화하며 생긴 [초재생] 스킬로 곧 회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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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HP가 떨어지면 [불굴] 버프가 발동해 내구를 비롯한 스탯이 또 증폭되어 더 단단해지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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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에 마력강화를 사용하면 또 한 번 스탯과 방어력이 증폭되어 더 단단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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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실질 방어력은 9층 때와 비교하면 거의 몇 배에 이르는 상황. 거기에 ‘강철의 혼’이 더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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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유 : 강철의 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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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떠한 역경과 고난에도 부러지지 않는 강한 의지의 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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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영혼에 새겨진 이 특성은 어떤 경우에도 사라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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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종류의 피해를 60% 감소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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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스탯창에 존재하지 않았던 특성 슬롯이 생기며, 그곳에 자리 잡은 정체불명의 능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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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효과는 심플 이즈 베스트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모든 최종 피해를 60% 감소시킨다는 미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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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 정령의 가호]의 최종 옵션이 물리 피해에 한정한 5% 감소인데, 이건 깡으로 60%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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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높은 에픽 등급의 클래스를 가진 이들에게도 이런 미친 패시브가 달려 있다는 말은 못 들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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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 보스를 처치하고 얻은 수많은 보상이 이 고유 특성이라는 것 하나 앞에서 빛이 바랠 정도니까, 뭘 더 말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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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도적인 피지컬을 자랑하는 마족, 그리고 그중에서도 잡지 말라고 존재하는 문지기 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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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력한 요소나 설정이 그렇게나 덕지덕지 붙어 있는 놈의 공격도, 내 몸에는 흠집 하나를 못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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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 크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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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길질에 맞아 날아간 붉은 마족이 기침하더니, 바닥에 시퍼런 피를 토해 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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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한 방으로 내장이 다 터진 모양이다. 마족의 내장 구조 같은 건 모르겠다만, 존나 아프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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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엄살떨지 말고 뿔이나 꺼내. 너도 뿔 더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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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붉은 마족을 향해 손짓했다. 놈은 아득바득 이를 갈며 몸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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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족의 가장 대표적인 신체적 특징은 바로 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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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나 손톱이나 색이 반전된 눈깔, 그리고 꼬리 같은 건 마족마다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고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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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뿔만큼은 모든 마족에게 존재한다. 다만, 그 개수는 개체별로 차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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뿔의 개수야말로 마족의 강함 그 자체, 3층의 리자드맨들이 어깨에 그려넣은 색깔 띠 같은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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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놈……후회하지 마라, 내가 뿔을 꺼내게 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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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두둑, 뚜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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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마족의 이마에서 뿔이 추가로 돋아난다. 상위 마족들이 가진 파워 업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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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마계의 일반 NPC인 하급 마족들은 하나에서 두 개의 뿔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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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 이상의 마족들은 세 번째 뿔을 꺼내서 파워업하는게 가능하고, 보스에 이르면 그 이상까지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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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층 미궁의 보스인 마족 백작인가 남작인가 하는 놈의 최종 형태에 붙어있는 뿔은 다섯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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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적색의 갈트람- 서쪽 마계의 23대 마왕의 이름을 걸고, 네놈을 갈가리 찢어 유황불에 태우겠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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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갑자기 전직 마왕이라는 듣도보도 못한 설정을 공개한 갈뭐시기의 이마에 돋아난 뿔의 숫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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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일곱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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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보다 두개나 더 많은 일곱 개, 단순하게 생각해도 두 단계는 더 급이 높은 최상위 마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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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개의 뿔을 드러낸 갈릭인가 뭔가는 ‘큭큭큭’ 하며 사악한 웃음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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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분위기 잡으면서 웃는 게 아니라, 그 웃음에 주변의 마나가 공명하며 땅을 울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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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드러냈던 흉흉한 마력과 마찬가지로, 이것만 해도 보통 인간들은 수직으로 밟은 깡통처럼 찌그러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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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보통 인간이 아니라 시련의 탑 14층 도전자라도- 옴짝달싹 못 하고 있겠지. 그 정도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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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하지 말라고 분명히 말했거늘, 벌써 후회하고 있는가.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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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모습을 멀뚱히 바라보고 있는 나도 똑같을 거로 생각했는지, 놈은 위풍당당하게 내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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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움직이는 게 아니라 그냥 가만히 있는 건데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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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무슨 효과인지는 모르겠지만-내 구속 내성, 마비 내성, 석화 내성, 기절 내성……뭐 그런 게 몇 레벨인 줄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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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문의 주인을 맡고 있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아는가. 그 지역을 지배할 힘이 있는 마족이라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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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뭐시기는 자기가 마왕을 맡고 있었을 때가 어땠다더니, 서쪽 마계의 수준이 어땠다느니, 뭐라고 떠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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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계나 마왕 같은 단어가 들어가 있어서 그렇지, 잘 들어보면 그냥 지가 소싯적에 좀 날렸다는 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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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어만 치환하면 뭐, 내가 강서구 원탑 보스였는데- 그 행동대장 놈이 어쩌고- 나 현역 시절은 급이 달랐고- 어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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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 말 존나 많네, 혓바닥으로 싸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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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불거리는게 너무 길어서 한 마디 해주자, 놈의 이마에 핏대가 불룩 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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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떠들게 내버려두고 칼빵을 먹일 수도 있지만, 그렇게 기습으로 바로 끝내버리면 연습도 안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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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지 말라고 만든 놈이라 보상을 안 줄 수도 있으니, 하다못해 샌드백 역할이라도 해 줘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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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상대를 얕보면서 힘을 드러내지 않고 있으면 안 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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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방진 인간 놈……내 화를 돋우려고 열심이구나, 빈틈을 노려 칼을 찌르면 이길 수 있을 것 같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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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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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아하니 상당한 보검인 듯하군, 조금 전과는 달리 힘이 넘쳐흐르고 있어- 하지만 통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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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놈은 아무래도 그냥 말이 많은 녀석인 것 같다. 묻지도 않은 부분을 혼자 막 떠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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뿔을 개방한 자신의 몸은 압도적으로 더 강해지기에, 아까와 같은 발길질도- 보검의 힘도 통하지 않을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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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가만두면 떠드느라 싸움을 시작하지도 않을 것 같다. 쯧, 그냥 넘어가야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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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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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단숨에 놈과의 거리를 좁혀, 내 손에 들린, 하, 보검, 그걸 휘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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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마족은 안 통하느니 뭐니 떠드면서, 마력을 두르고 손을 내밀어 막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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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안 막혔다. 내 검은 놈의 손과 팔뚝을 통째로 잘라버리고, 몸통에 사선으로 박혀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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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 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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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놈은 이걸 무슨 굉장한 보검으로 본 모양이지만, 이 검에는 사실 아무런 기능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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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강철 직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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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기는 커녕, 그냥 강화 망한 상점제 강철 직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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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녀석이 보검의 힘이라고 착각한 그건, 그냥 내가 검에 마력을 둘러서 씌운 것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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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이펙트가 터지며 한 번에 치명상을 입은 마족은 그대로 털썩, 무릎을 꿇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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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짧았으면 명줄은 좀 길었을 텐데, 이거 네가 자초한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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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대로 녀석의 머리통을 붙잡고, 미간을 향해 힘껏 니킥을 박아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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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지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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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크리티컬 이펙트가 터지며 놈의 안면 뼈가 단숨에 으스러졌고, 일곱 개의 뿔도 모두 부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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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설마 이대로 죽은 건가? 왜 마지막까지 제대로 힘을 쓰지 않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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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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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자식, 힘을 제대로 드러내지 않은 게 아니라 그냥 그게 전부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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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 설마, 뿔이 일곱 개나 되는데 이 정도밖에 안 된다고? 마력도 그렇게 많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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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씨, 모르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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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관문의 문지기를 만나서 실험해보든가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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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 동쪽 마계의 최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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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9층 이후에서 손에 넣은 가장 좋은 스킬을 하나 꼽으라면, [마력 지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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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전사의 삼신기중 하나인 마력강화는 스킬 이전에 자력으로 습득한 기술이라 예외로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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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도 안 되는 사기 성능을 자랑하는 강철의 혼은 특성으로 분류되니까 그것도 예외로 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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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마력 지배]는 전사의 삼신기에 대응하는 마법사 클래스의 삼신기로 꼽히는 스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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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적으로는 [마력 감응], [마력 감지], [마력 운용]등의 마법사 필수 스킬들을 모두 하나로 합쳐 놓은 최고급 스킬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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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스킬을 습득한 이후로, 나는 내 안에 흐르는 마나를 말 그대로 자유자재로 지배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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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진 마나 뿐만이 아니라, 대기 중에 흐르는 마나를 감지하고 뜻대로 움직일 수 있게 된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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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스는 여전히 전사지만, 어지간한 마법사를 죄다 능가하는 수준의 마력 조작 및 감지능력을 갖추게 된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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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내가 보기에, 이 마계의 환경과 마족이라는 종족은 모두 미친 게 틀림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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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중에 넘쳐흐르는 미친 양의 마력, 그리고 태어날 때부터 그걸 충분히 흡수하며 자라는 마족이라는 미친 종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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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마계지, 이건 이미 생체 마법 병기를 생산하는 공장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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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공장이 만들어낸 최고의 걸작, 각 관문을 지키는 세 마리의 처치 불가 마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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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놈이 그렇게 약할 리가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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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다음 관문까지 걸어가는 와중, 계속해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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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조금 전에 처치한 붉은 마족이 아무래도 너무 약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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놈의 실제 전투능력은 느껴지는 마력을 통해 어림한 수준에 전혀 미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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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나를 얕보고 힘을 제대로 쓰지 않은 거던가, 아니면 내가 완전히 상대를 잘못 파악하고 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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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 중 하나일 텐데, 개인적인 바람으로는 전자였으면 좋겠다. 후자면 문제점이 한두 개가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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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히 14층에선 제대로 맞붙어 볼 상대가 없다는 점도 있고, 내가 상대의 역량을 제대로 재지 못한다는 점도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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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제발 이번 문지기는 진짜 격이 다른 모습을 보여줬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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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성장세만 유지해도 100층까지 클리어하는 건 거뜬하겠지만, 내 목표는 그 너머에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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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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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도착한 두 번째 관문, 이번에는 파란 몸뚱이의 마족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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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형적인 특징으로는 앞서 상대했던 빨간 놈과 다르게 날개가 없고, 이마에 돋아난 뿔의 형태가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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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놈은 정석적인 악마 뿔이라는 느낌이었는데, 이놈은 보석 같은 빛을 내는 뿔이 뾰족하게 돋아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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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유하자면, 유니콘 뿔 같은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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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아까 놈보다 키나 덩치도 작고, 근육량도 대단치 않아 보이는 게- 좀 더 인텔리스러운 타입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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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품고 있는 마력의 양은 정말 어마어마하다. 마법사 타입이라고 보면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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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관문을 지나려면 세 가지 문제에 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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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마침 관문을 통과하는 방식도 수수께끼 풀이구나, 머리를 써야 하는 타입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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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오픈 커뮤니티에 정보가 다 공개된 시점에서 머리를 굴릴 필요는 전혀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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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 정답은 이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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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파란 마족의 앞에서 당당하게 검을 뽑았다. 참고로 마족은 아직 문제를 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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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뭔 문제를 낼지는 모르겠지만, 칼은 언제나 답을 알고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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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벌한 마력이 다시금 내 주변을 휘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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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마족의 머리 위로 거대한 마력의 구체가 생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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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어진 구체는 혼자 꾸물꾸물 거리더니, 이윽고 화염구와 얼음의 창, 그리고 벼락을 뱉어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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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한 마력을 덩어리로 만든 다음, 그때그때 속성을 바꿔서 토해내는 방식의 공격 마법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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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쾅! 콰광! 콰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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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이글 타오르는 화염구는 내 몸에 부딪히며 강력한 폭발을 일으켰다. 얼음의 창은 막대한 힘으로 내게 쏘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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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벼락은 비처럼 쏟아져 연달아 내 몸을 때렸으며, 순식간에 주변을 새까만 재투성이로 만들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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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 모든 마법으로도, 마족은 칼 한 자루를 빼 들고 돌격하는 나를 잠시도 멈춰 세울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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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뭔, 장난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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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맨몸으로 공격을 모두 받아친 나는, 단번에 거리를 좁혀 놈의 어깻죽지를 갈라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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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촤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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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어깨에 박아넣은 칼을 갈비뼈 부근까지 쑤셔 넣어, 바깥 방향으로 빼서 좌측 상반신을 도려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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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족이 마족이 아니었다면 즉사했을 치명적인 상처, 이놈도 이런 꼴이 되고 나서야 뒤늦게 뿔을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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뿔의 개수는 여섯, 아까 전의 붉은 마족보다 하나가 적다. 이놈도 보스보다 격이 하나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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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큭큭……이 청색의 라토할에게 뿔을 꺼내게 할 줄이야. 동쪽 마계에도 이만한 강자는 없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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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마족은 서쪽 최강이라더니, 이놈은 동쪽 최강이었던 전적이 있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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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놈들이 왜 문지기 역할이나 하면서 거드럭대고 있는지는 좀 의문이긴 한데, 그냥 그런 문화가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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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뒈진 놈도 너랑 비슷한 소리 하다가 한 방에 죽은 거 알고 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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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 설마 앞선 관문의 갈트할을 말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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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빨간 놈. 그러니까 너는 방심하지 말고 제대로 덤벼, 뒈지기 싫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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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렇게 말하자, 푸른 마족은 인상을 구기며 방대한 마력을 흘리기 시작했다. 역시 굉장한 수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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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렴, 이런 마력을 가진 놈들이 그렇게 약한 게 말이 안 되지. 이번에는 제대로 실력을 보여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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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우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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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족의 머리 위로 다시 한 번 마력의 구체가 생성된다. 그 기세와 품은 마력은 조금 전과는 확연히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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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저게 놈의 주요 전법인 모양. 구체는 다시 한번 변형하며 갖가지 마법을 쏟아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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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쾅! 콰광! 콰과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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쏟아지는 오색찬란한 마법이 나를 덮쳤고, 그렇잖아도 만신창이였던 주변이 완전히 초토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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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굉장한 마법이다. 위력도 정밀도도 어느 하나 빠질 것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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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성도 다양하기에 나처럼 종합 내성을 갖추고 있지 않으면 제대로 준비해서 대응하기도 힘들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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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층 도전자들은 절대 전투로 돌파할 수 없다던 말은 결코 허언이 아니었다. 확실히 그만한 수준의 강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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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나는 실망을 감출 수 없었다. 14층 수준은 분명히 넘었지만, 고작 이게 다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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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데, 이 어중간한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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갖고 있는 마력의 양에 비하면, 고작 이 정도밖에 안 될 리가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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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푸른 마족은 온몸이 토막 나고 짓이겨진 상태로 내 발밑을 뒹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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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제대로 밑천을 보기 위해, 일부러 치명상을 피해서 이곳저곳을 박살 내 버린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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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러 빗맞히고 빗맞혀서 부상을 늘린 다음, 빈사 상태에서 모든 걸 쏟아낸 최대의 힘을 보고 싶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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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마족은 마지막까지 가진 마력의 수준에 비해 형편없는 전투력만을 발휘하고 뒈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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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내가 문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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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상대방의 강함을 잘못 재고 있는 건가, 마력의 양을 근거로 이놈들을 너무 과대평가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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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생적으로 너무 강력한 마력을 타고난 나머지, 마력의 효율적인 활용 능력은 갖추지 못한 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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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가 아닌 일반 몹 판정이라 개별 보상은 뭐 쥐뿔도 없고, 이러면 완전 나가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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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면 뭔 설정이 따로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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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픈 커뮤니티를 열고 마계와 마족에 대한 정보를 꼼꼼하게 검색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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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13층에서부터 히든 요소를 찾기 위해 잔뜩 찾아봤지만, 혹시나 내가 놓친 부분이 있지 않을까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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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결과로 나온 것은 대부분이 이미 읽어 본 글이었고, 마족들의 묘한 강함에 대한 설명은 딱히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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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이놈들을 굳이 힘으로 뚫어보려고 한 도전자들은 1세대를 제외하면 있지도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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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러고 보니까 그놈들이 자기소개를 할 때 처음 듣는 소리를 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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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쪽 마계니 동쪽 마계니, 몇 대 마왕이니 뭐니, 적색이니 청색이니 하는 별칭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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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도 뭔가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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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키워드를 중심으로 새롭게 검색을 시작했다. 더불어 커뮤니티에 수배 글도 하나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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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서진혁#26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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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정보 요청)이새끼들 왜이렇게 약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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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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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층 문지기 잡았는데 얘네 생각보다 많이 약하다 왜 이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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층에 비해서 세긴한데 마력량만큼 전투력이 안 나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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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 문지기는 지가 서쪽마계 23대마왕인 적색의 갈어쩌고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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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문지기는 동쪽 마계에서온 청색의 라토할이랬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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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네 마력에 비해서 약한이유 알고 있으면 댓글로좀알려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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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도 댓글은 매우 빠르게 달렸다. 물론 그 대부분은 ‘어케했노 ㅅㅂ련아’ 같은 내용이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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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쓴 글은 대부분 이렇게 호들갑 섞인 리액션 댓글부터 달린다. 좀 기다리면 알아서 유익한 정보를 물고 와 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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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수배를 때리고 새로 얻은 키워드로 계속 검색하던 중, 드디어 뭔가 단서가 될 만한 부분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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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14층의 배경인 마계 설정에 대해 알아보자 1편.t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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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낸 것은, 자칭 사관이니 고고학자니 하는 특이 성향의 도전자들이 올려놓은 연재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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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서 나는 ‘원색의 마족’ 이라는 단어를 새롭게 찾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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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 남쪽 마계의 최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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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세계도 여러 나라로 나뉘어 있듯, 마계 역시 과거에는 통일되지 않고 나뉘어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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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박한 환경 탓에 마족들도 살아가기 힘들다는 외곽 지역인 외마계와, 마족 대부분이 거주하고 있는 내마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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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내마계는 한 번 더 동서남북으로 나뉘어, 지역마다 그 일대를 지배하고 있는 마왕이 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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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쪽 마계에는 동쪽의 마왕, 서쪽 마계에는 서쪽의 마왕. 마계에는 총 네 명의 마왕이 균형을 유지하며 대립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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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의 좌에 앉기 위한 자격은 오직 하나, 다른 마족을 짓누를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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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지역의 마왕은 곧 그 지역의 최강자였으며, 최강이 아니게 된 마왕은 다른 강자에 의해 자리에서 내려와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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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의 법칙에 의해 반복되는 쇠락과 부흥, 수많은 도전 속에서 마왕이 교체된 것이 그야말로 수십 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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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번이고 바뀐 왕좌의 주인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이들이 바로, ‘원색’을 가진 마족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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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족들마다 타고나는 고유한 마력의 색깔, 그중에서 가장 순수한 색을 가진 이들에게 부여되는 원색의 칭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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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색의 마족들은 역대 마왕 중에서 누구보다 마왕의 좌를 오래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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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원색의 마족에게서 왕좌를 빼앗을 수 있었던 것은 같은 원색의 보유자, 즉 그 마족의 혈연이 대부분이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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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마왕이 20대째를 넘어섰을 시점엔, 동서남북의 마왕 모두가 원색의 마족으로만 채워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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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원색을 타고나는 것이야말로 마왕의 자격, 그런 인식이 마족들 사이에 박힌 후로 수백 년이 흘렀을 때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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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박한 환경으로 누구도 살 수 없다던 외마계에서 나타난 한 마족이, 각 지역의 마왕을 차례차례 격파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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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진 마력의 색 따위는 힘을 정하지 않는다는 듯이, 그 마족이 가진 마력의 빛은 회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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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좋게 봐줘도 원색이라 칭하기 힘든 어중간한 회색, 창고 구석에 쌓인 먼지 내지는 아무렇게나 섞인 물감의 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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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은 최강이라 여겨지던 원색의 마왕들을 모조리 무릎 꿇리고, 동서남북으로 나뉘었던 마계를 홀로 통일시켜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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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통일 마왕이자, 역대 최강의 마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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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의 마왕이 가장 처음 한 일은, 온 마계에 강대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던 원색 마족들의 뿌리를 뽑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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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은 정체 모를 마법으로 색을 가진 마족들에게서 힘의 정수를 뽑아내고, 그들에게 제약을 걸어 자신의 종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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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의 정수라는 알 수 없는 것을 빼앗긴 원색의 마족들은 더는 예전만큼 강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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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의 전대 마왕들은 정수를 빼앗긴 후에도 힘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회색의 마왕은 그들을 가만두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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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번 전대의 마왕들을 힘으로 복속시키고, 그들을 한낱 문지기로 격하시켜 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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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고작 문지기 따위가 14층의 보스인 마족 백작보다 강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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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왜 14층의 보스가 마왕이 아니라 문지기보다 약한 마족 백작인가. 회색의 마왕은 대체 어디에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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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끝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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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스크롤이 멈춘 것을 확인하고 혼잣말했다. 게시글의 마지막 줄에는 ‘다음 편에 계속’ 이라는 문구가 쓰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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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 참, 절단신공이 아주 기가 막히다. 드라마나 소설 하나 쓰면 아주 대성했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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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툴툴거리며 다음 편을 검색했다. 그런데 작성자의 이름으로 아무리 검색해봐도, 다음 편은 나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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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씨발새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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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마족보다 더한 새끼가, 1편만 싸질러놓고 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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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이게도 영영 나오지 않을 2편을 기다릴 필요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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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게시글의 작성자는 14층의 배경을 파본 도전자 중 하나일 뿐이지, 딱히 창작자가 아니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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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층의 배경을 조사한 도전자는 그 밖에도 있었고, 그런 이들의 글과 댓글을 뒤지다 보니 금세 다음 내용을 알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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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색의 마족들로부터 힘의 정수를 빼앗아 간 존재, 이 14층의 최강 몬스터인 문지기보다 압도적으로 강한 회색 마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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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14층은 그 마왕이 모종의 이유로 쓰러져서 모습을 감춘 상태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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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 이유라는 것이 상당히 골때렸다. 이 14층의 배경도 다른 층의 배경과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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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공학이 극도로 발전한 세계를 배경으로 하는 46층, 그곳의 보스가 바로 회색의 마왕- 그 영혼이었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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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층의 어떤 퀘스트에서 등장하는 사교도가 실행한 소환 의식이 성공해, 마왕의 영혼이 소환되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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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마왕이 쓰러졌다는 건 영혼만 다른 세계로 소환되어서 몸만 남아버린 상황이라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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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어이가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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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지기가 마력량에 비해 약한 이유는 힘의 정수라는 게 뽑혔기 때문이고, 그걸 뽑아간 건 회색 마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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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회색 마왕은 힘의 정수를 잃지 않은 문지기- 그 막대한 마력을 온전히 활용하는 마족들보다 훨씬 셀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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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까지 강하다는 설정이 잔뜩 붙었으니, 히든 보스로 회색 마왕을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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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영혼이 다른 세계에 소환돼? 남은 건 빈껍데기 몸뚱어리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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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 가는 키워드가 여럿 있긴 하지만, 실망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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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층에서 전투적인 면으로 성장하기는 어려울 것 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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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세 번째 관문의 정공법은 거대한 블록으로 만들어진 퍼즐을 푸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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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즐의 해법은 커뮤니티에 상세하게 나와 있지만, 여태껏 그랬듯이 나는 그딴 일을 할 생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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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춰라, 이곳을 지나가려면 네놈의 지혜를 보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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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그래, 난 무식하니까 내 방식으로 지나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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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롭지 못한 자는 이곳을 통과할 수 없다. 돌아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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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인벤토리에서 큼지막한 망치를 꺼내, 녹색의 마족이 들이민 거대 블록을 박살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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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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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산조각난 블록이 후두두 떨어지자, 녹색 마족은 곧바로 전투태세를 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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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봤던 붉은 마족은 육탄전 위주의 근접 전투형, 그다음으로 본 푸른 마족은 마법을 난사하는 원거리 공격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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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겹치는 부분이 없도록 배치된 건지, 두 쌍의 날개를 펼친 녹색 마족의 주 무기는 속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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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훙훙훙훙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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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를 펼치고 내 주변을 고속 비행으로 맴돌았다. 그 여파로 발생하는 충격파만 해도 심상찮은 수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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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도 면에서는 기믹을 풀지 않은 13층의 보스와 비슷한 정도. 층수에 비하면 엄청나게 빠른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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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층 보스와 차이점이 있다면, 이놈은 뛰는 게 아니라 아예 날아다니고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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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 중의 움직임도 별 제약 없이 매우 자유로워 보이니, 나 같은 근접 전사 타입에겐 무척 불리한 상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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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거리 공격은 어떻게든 대처할 수 있지만, 공중전은 비행 능력이 없는 한 마땅히 대처할 방법이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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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그렇게 붕붕 날아서 뭐 어쩔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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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이 녹색 마족은 붕붕 날아다니기만 할 뿐, 뭔가 공격을 시도하려는 낌새가 전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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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공중전이 약점이라고는 하지만, 그건 상대방이 공중에서 일방적으로 공격할 수 있을 때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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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비행과 원거리 공격 수단을 모두 갖추고 있어야 성립한다는 거다. 이놈은 그런 게 없어 보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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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통을 끊어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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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녹색 마족이 소리치며 급하게 속도를 높였다. 설마 저 속도로 들이받으려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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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그런 식으로 공격하려면 최소한 숨통을 끊니 어쩌니 하면서 타이밍을 알려주면 안 되는 거 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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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신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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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곧바로 타이밍을 맞춰 스킬을 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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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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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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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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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속력으로 내 몸에 들이받은 녹색 마족의 몸뚱이가 박살 나며, 육편을 흩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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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통박치기를 하려면 자신과 상대 중 어느 쪽이 더 단단한지는 알고 했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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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허억……말도 안 된다, 어떻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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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에 부딪힌 계란 꼴이 된 녹색 마족이 부들거렸다. 그래도 간신히 숨은 붙어 있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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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우드득, 하는 소리와 함께 놈의 이마에서 뿔이 돋아났다. 뿔의 개수는 이번에도 여섯, 푸른 마족과 똑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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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첫 번째로 만났던 붉은 마족이 가장 강한 놈이었던 것 같다. 그놈도 한 방감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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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법이구나, 남쪽 마계의 26대 마왕인 이 로투랑이 뿔을 꺼내게 할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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봤으면 알겠지만, 나는 아직 아무것도 안 했다. 저 새끼가 와서 혼자 들이받고 뒤지려 한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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놈은 뿔을 꺼냈으니 이제부터가 진짜라는 것처럼 더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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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내구력도 올랐을 테고, 이미 한 번 당해봤으니 무식하게 들이받으려 하지는 않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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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속도로 승부하려는 시점에서 이미 글러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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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미 13층 보스를 단순한 전력질주로 따라잡아 본 전적이 있다. 그보다 더 빨라질 수단도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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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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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적으로 이동속도를 높여주는 [신속] 스킬을 사용해 단번에 녹색 마족의 배후를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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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대로 놈의 뒷덜미를 붙잡은 뒤, 얼굴을 땅에 처박아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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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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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로 지면에 뿌리채소처럼 심어진 놈의 팔다리를 우둑우둑 꺾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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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적인 면에서는 말했듯 이미 기대를 접었지만, 영혼 소환이라는 키워드는 그냥 넘어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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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너는 전직 마왕씩이나 되는 놈이 쪽팔리게 뭐 하는 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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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제압한 녹색 마족을 향해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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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얌마, 인간한테 털리니까 기분이 어때. 힘의 정수인가 뭔가, 그거 다시 찾고 싶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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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나랑 혁명 한번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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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 욕구불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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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함께 힘의 정수를 되찾으러 가자고, 매우 열정적으로 녹색 마족을 설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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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나는 말재주가 정말 형편없으며, 남을 말로 설득하는 일에는 완전히 젬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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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아아악! 이 악마 같은 놈, 알았다! 알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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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말로 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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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아닌 [라이트닝 차지]를 이용한 내 짜릿한 설득에, 녹색 마족은 완전히 넘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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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진짜로 전기찜질만 한 건 아니고, 적당히 주물러 준 다음에 약간의 거짓말을 섞어서 이야기를 꾸며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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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내가 꾸며낸 거짓말에는 허점이 많았지만, 그 허점은 커뮤니티의 망령들이 알아서 보충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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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계에 레볼루쑝 일으키려고 하는데 대본좀 써줄사람 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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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남아도는 커뮤 망령들, 그리고 마계의 배경 설정에 관심이 많은 사관 도전자들이 설정을 잡아준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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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그게 사실이냐. 정말 마왕이 무력화되었다고? 거짓말은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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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이 녹색 마족은, 나를 모종의 사고에 휘말려 외마계에 떨어져 살아온 인간으로 알고 있는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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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인마, 그 새끼 그거 영혼만 어디로 소환돼서 몸뚱이만 남았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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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뮤니티에서 손에 넣은 정보, 자체적으로 잡은 설정, 그리고 상대방을 착하게 만드는 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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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네놈의 말이 사실이라면……매우 구미가 당기는 이야기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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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 가지의 조화로, 나는 전직 마왕을 훌륭하게 내 편으로 만들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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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나는 녹색 마족과 몇 가지 이야기를 더 나누고 정보를 공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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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자하니, 회색의 마왕에겐 타인의 힘을 빼앗고 흡수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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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의 정수란 건 회색 마왕이 전대의 마왕들에게서 뽑아낸 힘을 응축시켜놓은 보석 같은 거라고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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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체가 존재하는 물건이니, 마왕이 무력화된 지금- 작정하고 쳐들어간다면 얼마든지 뺏을 수 있을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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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마왕성에 정면으로 쳐들어가려면 단둘로는 부족하다는 이야기도 나왔고- 나는 때를 기다리던 말을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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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말인데, 너 말고도 마왕한테 당한 놈들이 있잖아? 그 녀석들을 싹 모아서 쳐들어가는 게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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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의 정수를 뺏긴 마족의 숫자는 한둘이 아니라고 한다. 당장 동서남북의 마왕만 세도 일단 네 명은 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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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네 명 중 두 명을 내가 죽이긴 했는데, 대충 동서남북의 2인자 마족 같은 게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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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를 뺏겼다는 것은 마왕의 견제 대상이 될 정도로 강하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런 놈들을 싹 모으면 큰 전력이 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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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군, 그렇다면 성공률도 크게 오르겠어. 혁명의 동지를 모으자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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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 마족은 그 혁명 동지들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채로,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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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군이 아니라 내 적을 모으러 다니는 여정이라니, 리버스 포켓몬 마스터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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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생각한 순간, 기다렸다는 듯 눈앞에 시스템 메시지가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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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대 마왕의 비원 - 힘의 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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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 : 당신은 과거 남쪽 마계의 마왕으로 군림했던 녹색의 마족, 로투랑의 야망을 알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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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의 마왕을 두려워해 문지기의 신분으로 숨죽이고 있었지만, 그에겐 아직 마왕의 좌를 향한 집념이 깃들어 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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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힘의 정수를 되찾고 회색의 마왕을 무찔러, 다시금 마왕의 좌에 올라서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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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그것을 도울 수도, 방해할 수도, 혹은 돕는 척하며 자신의 실리만을 챙길 수도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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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스트 목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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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로투랑의 힘의 정수를 손에 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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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로투랑에게 힘의 정수를 돌려주기(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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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로투랑의 힘의 정수를 파괴하기(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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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로투랑의 힘의 정수를 빼앗기(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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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로투랑을 살해하기(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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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스트라고 하지만, 사실상 이 녹색 마족을 어떻게 할 것이냐고 묻는 선택지에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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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힘의 정수를 손에 넣기만 하면, 그다음에 어떤 선택을 하든 보상은 들어올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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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어떤 선택지를 골랐을 때 보상이 가장 크느냐, 그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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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잠시 퀘스트 목표를 보며 고민하다가- 아주 좋은 생각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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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 보니까 이거, 선택 목표 전부 달성할 수 있는 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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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정수를 돌려준 다음 다시 뺏고, 뺏은 건 부숴 버리고, 마지막으로 죽여 버리면 되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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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쪽 마계 놈들이라면 설득하기 쉬울 거다, 그곳으로 가도록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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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고, 녹색 마족과 동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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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계를 배경으로 하는 14층에도 마을로 불리는 거주 공간은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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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말이 마계지 내마계 안쪽은 의외로 살기 나쁘지 않은 공간이다. 사소한 단점 몇 개가 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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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되면 드물게 거대한 마수가 나타나 사람을 물어간다는 점이나, NPC도 죄다 음험한 마족이라는 것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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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PC 마족들은 뿔이 하나밖에 없는 허접들이라, 14층까지 올라올 저력이 있는 도전자에겐 대수롭지 않은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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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대 마왕이라는 놈들이 죄다 따까리 신세가 된 것만 봐도 알 수 있듯, 마족은 기본적으로 강약약강 정신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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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 강약약강 정신이라는 게 이번에는 나를 참 귀찮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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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 인간이 왜 이런 곳에 있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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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투랑 님의 시종 같은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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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따위가 시종이라니, 휴대식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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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의 마족들이 도전자에게 시비를 털지 않는 것은, 그들이 절대적인 약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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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여기 있는 뿔 두 개짜리와 세 개짜리의 마족들은 전혀 절대적 약자가 아니다. 강자 축에 속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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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마력의 양만 보면 나와 비슷하거나 더 많고, 거기에 마족의 종족 특성인 강한 마나 지배력을 가진 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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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에 딱 봐도 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 녹색 마족에겐 굽실거리고, 그 옆에 있는 나에겐 거들먹거리기 바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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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쪽 마계의 마왕을 맡고 있었다던 녀석을 찾기 위해 지역을 넘어온 지 벌써 두 시간 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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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두 시간 동안, 나는 몇 번이고 이런 상황에 놓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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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때마다 내가 대응하는 방식은 한결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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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이놈들은 어떠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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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앗기지 않았다, 약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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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의 정수를 빼앗기지 않은 평범하게 약한 마족들이란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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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투랑은 대답과 함께 질끈 눈을 감았다. 내게 시비를 걸던 마족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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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대 마왕 출신의 강자인 로투랑과 내가 맞먹고 있다는 것에 의문을 품은 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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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지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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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인벤토리에서 검을 꺼내, 가장 가까운 마족을 정수리부터 반으로 갈라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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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계 북쪽 지역으로 넘어온 두 시간 동안, 내가 처치한 마족의 숫자는 대충 백쯤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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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백이나 되는 마족을 잡으면서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이놈들은 기본적으로 기술이 매우 부족하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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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고난 육체의 강인함과 보유한 마력의 양은 굉장하지만, 거대하다기보다는 비대하다는 표현이 딱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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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의 정수를 뺏긴 놈들이라면 모를까, 그렇지 않은 놈들마저 마력량에 비해 터무니없이 약해 빠졌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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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만 뒤룩뒤룩 찐 도축장의 돼지와 다를 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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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 자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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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뜸 몸이 반으로 갈라진 동료를 보곤, 격분하여 달려드는 뿔 세 개짜리 마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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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강철 직검]에 마력을 흘려 넣고, 달려드는 마족 녀석의 팔을 빛나는 칼날로 베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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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강철 직검]은 1층에서도 구할 수 있는 상점제 잡템인 만큼, 원래라면 마족들의 강인한 육체를 벨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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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리] 풀강을 해도 예리함이 부족하고, [내구] 풀강을 해도 내구도가 부족해 쉽게 부러지는 게 당연한 수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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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내 마력을 흘려 예리함과 내구도를 보충함으로써, 천하의 보검 못지않은 무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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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촤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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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족 하나를 더 베어 넘기고, 옆에서 손톱을 휘둘러오는 다른 마족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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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적, 하는 소리와 함께 다리가 통째로 분질러진 마족의 목이 눈앞에 알맞게 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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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로 한 번 더 검을 휘둘러, 놈의 몸통과 머리를 이별시켜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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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에 마력을 흘려 넣는 것은 액티브 스킬을 사용하는 감각과 무척이나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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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P를 소비한다는 점에서 크게 다를 것도 없고, 동작이 자유롭다는 점에서 스킬의 상위 호환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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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마력을 다루는 검술이 스킬에 비해 부족한 점이라면, 복잡한 조작을 요구한다는 것 정도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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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튼 하나로 쓸 수 있는 매크로와, 하나하나 직접 입력해서 발동하는 커맨드의 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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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나도 그 ‘커맨드 입력’을 어려워해서, 액티브 스킬을 섞어 쓰곤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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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력 지배]를 손에 넣고 마력을 자유로이 다룰 수 있게 된 지금은- 검술 스킬 자체를 아예 안 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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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폰 마스터리 L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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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손검 숙련 (929 / 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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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시스템은 이걸 스킬 사용으로 인식하는지, 스킬을 쓸 때마다 오르는 숙련도 수치는 계속 상승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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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한손검 숙련도는 최대치인 999를 찍을 예정이다. 이것도 업적이 있다고 들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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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났어, 마저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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덤벼오는 마족들을 싹 쓸어버린 후, 피를 털어낸 검을 인벤토리에 수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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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쪽이 마족인지 모르겠군, 외마계에서 살다 보면 인간도 이렇게 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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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 마족은 질렸다는 듯이 말했다. 지금 내 처지가 이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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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층 최강 수준인 몬스터가 질겁할 정도의 강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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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뮤니티의 랭커들도 내가 얼마나 강한지는 전혀 가늠을 못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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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니까 자꾸 회색의 마왕인지 뭔지에 대해서 미련이 생길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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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의 정수를 완전히 되찾은 마계 혁명 군단이 충분히 강했으면 좋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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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마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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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사 클래스라도 마법 스킬을 사용하는 것 자체는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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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마법 스킬을 획득하는 퀘스트는 대부분 마법 관련 클래스를 가지고 있어야 수행할 수 있는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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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상자에서 얻을 수 있는 스킬북도 각각 사용 조건이 걸려 있기에, 전사 클래스가 마법 스킬을 얻기란 매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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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일단 얻으면 사용할 수는 있다. 딱히 시스템상으로 막혀 있는 건 아니란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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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히든 요소를 발견하거나, 보스를 클리어하고 보상으로 스킬을 습득하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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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루트를 밟았다면 전사라도 마법 스킬의 활용이 가능하다. 당장 나도 마법 스킬을 갖고 있긴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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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광 Lv.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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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탈 거미를 쓰러트리고 보상으로 얻은 집광 스킬, 효과는 별 거 없지만 일단 마법으로 분류되긴 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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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한동안 신경 쓰지 않았지만, 3층에서 얻은 [라이트닝 차지]도 일단은 마법 계열일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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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나는 이미 스킬 획득이 꼭 퀘스트나 스킬북으로만 이루어지는 게 아니란 것을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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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얻은 다양한 패시브 스킬이 그 사실을 증명한다. 경험을 통해 터득한 기술은 곧 스킬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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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전사 클래스인 나도 엘레노어에게 배운다면 그림자 마법을 사용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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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그림자 마법을 활용하는 특수 클래스로 전직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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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전사 클래스에 완전히 물려버린 처지라, 어중간한 상위 클래스로는 기회가 찾아와도 전직하기 힘들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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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나는 엘레노어를 찾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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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는 다크엘프들 사이에서 취급이 이상하긴 해도 일단은 공주 신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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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간다고 바로 만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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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가 먼저 나를 찾다니, 별일이구나? 저번의 제안을 받아들일 준비가 됐다고 생각하면 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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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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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후, 쑥스러워하지 않아도 된다. 그대가 은근히 부끄럼을 탄다는 건 이미 알고 있어. 안심하고 내게 맡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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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는 마침 한가했다며, 찾아온 나를 향해 대뜸 개소리를 지껄여 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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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지금 엘레노어가 말한 ‘저번의 제안’ 이란, 늘 던져대는 동침을 하자느니 어쩌느니 하는 이야기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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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삼스럽지만, 사람에게 있어서 외견이란 정말 중요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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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말을 지껄이는 게 쭉쭉빵빵한 다크엘프 미녀가 아니라 못생긴 아줌마였다면, 진작 칼을 뽑아서 휘둘렀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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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즈멜이 그러더라고, 자기는 이제 가르쳐 줄 수 있는 게 없다고. 뭔가 배우고 싶으면 널 찾아가라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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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즈멜이 그런 말을 했다고? 검술을 배우기 시작한 지 얼마나 지났다고, 벌써 그런 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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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는 눈을 크게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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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적게 걸려도 반년은 걸린다는 기술을 하루 만에 터득해 왔으니, 당연한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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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르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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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가 의자를 젖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대로 천천히 내게 다가오더니, 천천히 내 얼굴을 양손으로 감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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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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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대로 눈을 감고, 몇 분간 가만히 서 있었다. 뭘 하는 건가 싶은 차에, 엘레노어은 눈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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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참, 잠깐 사이에 몰라보게 변했구나. 인간족이라고 해도 이건 너무 빠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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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종의 방법으로 스캔 같은 걸 한 것 같다. 아마 이것도 마법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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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정말 봐도봐도 새롭구나, 정말 마음에 들어. 이대로 키스가 하고 싶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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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년이 또 지랄이네, 얼굴 치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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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는 스캔인지 뭔지로 뭘 알아낸 건지는 모르겠지만, 금방 그 ‘무언가’를 가르쳐 주겠다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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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엘레노어도 나름대로 바쁜 몸이라, 바로 시작할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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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검술 수련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던 그 시간에 다시 보자는 말로 대화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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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해가 진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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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는 언제나처럼 반투명한 네글리제 차림으로 내 방을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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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술 수련의 연장선이나, 마법을 배우게 될 줄 알았는데. 왜 이번에도 저딴 차림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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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 커뮤니티의 베스트 스크린샷을 뛰어넘는 눈호강이긴 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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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가르쳐 주려는 사람의 복장으로는 안 보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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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가르쳐 준다는 게 침대 위에서의 기술은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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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이건 그냥 편한 차림으로 온 것뿐이다. 그대도 참, 그렇게 긴장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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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렇게 말하긴 하지만, 네글리제 차림의 다크엘프를 눈앞에 두고 긴장을 안 할 사람이 어디 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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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리즈멜의 시험을 모두 통과한 거겠지? 그렇다면, 감각의 확장도 터득했을 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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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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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짧은 시간에 터득한 걸 보니, 그대도 비슷한 수련을 예전부터 해 온 모양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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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그런 일은 없었다. 하지만 내 얼굴에 금칠을 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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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당연히 그 너머의 경지가 있다는 것도 알고 있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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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른다. 리즈멜의 움직임을 보며 대충 짐작만 하고 있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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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하게 모른다고 말하자, 엘레노어는 이번에도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며 뭐라뭐라 설명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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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즈멜이 알려주는 검술 이론에 비하면 매우 복잡하고 불친절한 설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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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놓고 말해, 들으면서 절반도 이해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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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마력을 이용해 주변을 감지하는- 뭐 그런 기술이랑 경지가 있다는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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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것을 간추린 내 요약에, 엘레노어는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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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는 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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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오픈 커뮤니티에서 가끔 언급되던 [마력 감지] 스킬이 맞는 모양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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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사 계열 클래스가 얻을 수 있는 스킬로, 사용하면 마력을 소비해 주변의 사물을 인식할 수 있다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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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궁의 함정을 미리 찾아내거나 몬스터의 매복을 감지할 수 있어서, 과거에는 매우 중요한 스킬이라고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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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략이 완성된 지금은 모두 옛말이지만, 1~2세대 도전자들은 파티에 마력감지를 배운 마법사 하나를 꼭 넣고 다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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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세대 도전자들과 똑같은 환경에서 탑을 공략하고 있는 내게도 꽤 유용한 스킬일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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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그대는 이해가 빠르구나. 마력을 감지하고 운용하는 기술은 전사에게도 매우 중요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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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엘레노어가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던 정보를 갑작스럽게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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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뭐라고 해도, 마력강화를 터득하기 위한 가장 첫걸음이 되는 기술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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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하이엘프 여기사가 사용하던, 전사 클래스의 삼신기 스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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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력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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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습득 조건이 이거였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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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접 전사 클래스의 고질적인 기동력 문제를 단번에 해결해주는 최상급 이동 스킬, [축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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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접 전사 클래스의 한계를 뛰어넘는 다양한 공격 스킬을 제공하는 최상급 마스터리 스킬, [오러 마스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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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접 전사에게 무엇보다 우월한 방어력과 스탯 상승을 가져다주는 최상급 버프 스킬, [마력 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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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 가지 스킬이 삼신기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이유는 단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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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중에서 하나만 터득해도 B급 헌터 자리는 떼놓은 당상이라는 말이 나올 만큼 고성능의 스킬이라는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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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성능에 비례해, 습득하기도 매우 어려운 희귀 스킬이라는 점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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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킬북의 획득처도 매우 한정적이고, 관련 퀘스트는 대부분 조건이 알려지지 않은 히든 퀘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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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업으로 자연스럽게 습득할 수 있는 것도, 유니크 이상의 희귀 클래스에나 해당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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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 마력강화의 선행 스킬이, 마력감지였다는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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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진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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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곧바로 되물었다. 엘레노어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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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 당연한 거 아닌가, 마력을 운용하지도 감지하지도 못하면서 마력강화를 깨우칠 수 있을 리가 없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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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들으니까 무척 당연한 소리였다. 어쩌면 다른 도전자들도 짐작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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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애초에 다른 도전자들이 마력강화를 습득하지 못하는 건- 관련 퀘스트나 스킬북을 찾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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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처럼 시스템 보상이나 스킬북에 의존하지 않고 스킬을 습득하는 도전자는 이젠 거의 없는 모양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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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네, 당연한 거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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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곧바로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다크엘프 진영을 선택하길 정말 잘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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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성이 박살난 걸로 유명한 개씹좆프년들은, 퀘스트 보상은 좋게 주더라도 내 단련을 도와주진 않았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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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력감지도, 마력강화도, 모두 수련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스킬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만 해도 큰 이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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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그럼 빨리 시작하자. 뭐부터 하면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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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내 볼에 입맞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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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소리 말고, 마력 쓰는 법 알려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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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의 헛소리를 빠르게 커트하고, 거의 멱살잡이를 할 기세로 재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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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엘레노어도 그 이상 헛소리를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바로 시작하자며, 간단한 수련법과 요령을 알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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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엘레노어가 알려준 수련 방법과 요령은 내가 상상하던 것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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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수련 방법이란, 그냥 명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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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요령이니 뭐니 하기 이전에, 그냥 전제조건부터가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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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시발, 그러니까 그 마력을 어떻게 느끼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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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음, 그러니까 명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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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력을 느끼면서 명상하라며, 나는 마력을 못 느낀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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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경지에 닿기까지는 아무래도 한참 걸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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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 마계의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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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쪽의 전직 마왕이었던 마족의 이름은 갈로함, 색깔은 노란색에 뿔이 일곱 개인 마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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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로함은 전직 마왕이면서도 문지기가 아니었는데, 관문 대신 어떤 거대한 다리를 지키는 수호자 역할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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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대뜸 혁명 이야기를 꺼내는 우리에게 갈로함은 냉소적인 태도로 응했다. 헛소리하지 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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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의 마왕이 얼마나 강력한지 잊었느냐며, 힘의 정수를 빼앗겼던 때의 괴로움을 생생하게 증언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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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회색의 마왕과 싸울 수 없다는 점이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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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도 육탄전도 완벽 그 자체, 타인의 힘을 빼앗는 특수한 마법까지 보유해 말 그대로 무적이었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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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의 육체를 잃고 영혼만 다른 것에 빙의 된 상태로도 46층의 보스를 맡을 수 있을 정도니까, 과장은 아닐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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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우리는 갈로함에게 회색의 마왕이 영혼만 다른 곳으로 날아가 무력화된 상태라고 이야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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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로함은 그 말이 사실이라면 확실히 구미가 당긴다고 말했지만, 그게 사실이라는 증거가 없다며 다시 한번 거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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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락했구나 로투랑, 이런 인간 따위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따르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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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녹색 마족 로투랑도 딱히 증거가 있어서 내 말을 믿기로 한 건 아니다. 나의 열정적인 설득에 넘어왔을 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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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 그럼 어쩔 수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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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증거를 대신할 수 있는 훌륭한 대화수단을 꺼내, 곧바로 갈로함과 전투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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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쪽 마계의 최강자였던 전적이 있는 만큼, 다른 문지기들과 비슷한 정도의 강함을 갖고 있는 갈로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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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갈로함의 주특기는 마족치고는 무척 드물게도 무기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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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 손에 속성을 부여한 도끼를 한 자루씩 들고 휘두르는 전사 타입으로, 마족 중에서는 가장 나랑 비슷한 타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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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레 마족이란 놈들이 다 그렇듯, 마력량이 어마어마하게 많아서 속성 부여된 도끼의 위력이 상당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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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그래 봤자 내 [라이트닝 차지]에 비하면 그리 대단한 수준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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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가벼운 정전기 수준에서 시작했던 [라이트닝 차지]는 [마력 지배]를 습득한 이후 크게 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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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스킬 레벨은 무려 23으로, 내 다른 스킬들과 비교해도 유난히 레벨이 높은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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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에 [번개 정령의 가호]의 효과가 더해졌고, 가호 스킬의 부가 액티브 옵션인 [대전]도 시너지를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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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지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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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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놈의 도끼와 내 검이 부딪힐 때마다 파직거리는 전격이 튀며 간접적인 피해를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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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스킬의 효과는 번개 속성의 마력을 접촉한 대상에게 전도시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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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에 번개 속성을 두르는 [라이트닝 차지]가 이것과 결합해, 나는 온몸과 무기에 전격을 두를 수 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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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격을 실은 참격을 날리는 것도, 단순한 주먹질로 상대방을 감전시키는 것도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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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투랑에게 그랬던 것처럼, 그냥 손바닥을 갖다 대기만 해도 전기찜질을 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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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성을 부여한 무기를 휘두르는 것도, 단순한 무기술의 범위와 깊이에서도, 나는 갈로함의 완벽한 상위 호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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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아아악! 믿겠다, 믿도록 하지! 혁명에 동참하겠다아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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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의 싸움과 설득의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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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투랑과 갈로함, 전직 마왕 둘을 포섭한 우리 혁명군(?)의 기세는 엄청난 가속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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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직 마왕 둘이 결의한 반란에 가담하고자 하는 마족은 상당히 많았고, 그 결과 어마어마한 숫자가 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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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하루아침에 모인 건 아니다. 거의 사흘을 꼬박 혁명세력 모집에만 사용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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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오늘이 바로 결전의 날. 모여든 혁명군이 마왕성을 향해 쳐들어가기로 한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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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인 마족의 숫자는 전직 마왕급이 총 여섯, 각 마계의 2~3인자급이었던 이들이 열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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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밖의 상급 마족이 마흔 이상에, 중급에서 하급 수준의 마족이 이백 정도 모여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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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 이백육십의 마족 군세, 각각이 가진 마력의 총량을 계산해보면- 어쩌면 세계수보다 더한 거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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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장관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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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4층에 오기 전 미리 사두었던 치즈돈까스 도시락을 먹으며, 모여든 마족들이 의지를 고취하는 모습을 구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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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직 마왕들이 각자 큰 소리로 연설하고, 이백이 넘는 마족들은 그에 호응하며 구호를 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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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색을 다시 한번 위대하게! 마계를 다시 위대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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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을 것은 족쇄요, 얻을 것은 전부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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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마계의 마족들이여, 단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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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쩐지 빨간 맛이 나는 구호가 몇 개 섞여 있긴 했지만, 마계에 어떤 사상이 퍼지건 그건 내 알 바가 아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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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그냥 내버려두고 이렇게 치즈돈까스 도시락이나 먹고 있는 거 아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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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층 이후, 나는 더 이상 끼니를 화이트롤만으로 때우지 않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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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효율 문제로 화이트롤을 주식 삼은 것 자체는 변하지 않았지만, 가끔 이런 특식을 챙겨 먹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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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층에 처박혀 있을 시절에는 그냥 괜찮게 맛있다고만 생각했는데, 맨날 화이트롤만 처먹다 먹으니 감회가 새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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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커뮤니티에서 치즈돈까스 도시락이 도전자들의 소울푸드처럼 여겨지는지 깨달았다고 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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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호불호가 잘 안 갈리는 종류의 음식이기도 하고, 화이트롤과는 정 반대 포지션이라는 점이 특히 매력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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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드러운 빵과 반대되는 바삭한 튀김옷, 달콤한 크림과 반대되는 짭짤하고 고소한 치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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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갑게 식은 상태로 먹는 화이트롤과 반대되는, 시간이 오래 지나도 따뜻함을 유지하는 도시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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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적으로 고기류인데다가, 밥이 함께 들어있어 든든함과 열량 면에서도 무척 훌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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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점은 가격이 조금 높다는 것인데, 그렇기에 오히려 도전자들에게 특별한 날에 먹는 음식으로 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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득템을 했다던가, 레벨이 올랐다던가, 보스를 잡았다던가- 기념할 만한 일이 있을 때 기분 내기 용으로 먹는 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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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마찬가지다. 가진 골드 자체는 차고 넘치기에, 마음만 먹으면 매끼를 치돈으로 때울 수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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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특별한 일이 있을 때만, 이 도시락을 꺼내 먹기로 정했다. 오늘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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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튼 음흉한 새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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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서 환호하고 있는 마족들이 뒤로는 다른 생각을 품고 있다는 걸, 조금 전에 알게 됐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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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아주 특별한 하루가 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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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의 마왕은 몸뚱이만 남아 무력화된 상태지만, 놈에게 충성을 맹세한 마족들은 수두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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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의 깃발 아래 모인 마족들도 만만찮은 강자들이지만, 회색의 마왕에게 힘을 받은 고위 마족 역시 상당한 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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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의 정수를 되찾기 위해 마왕성에 쳐들어간다는 것은, 그런 고위 마족들과 전면전을 벌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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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14층의 도전자는 마왕성 본성에는 침입하지 않고, 마왕성 좌측 탑을 통해 미궁 지역에 도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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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층의 최종보스인 마족 백작은 설정상 그 좌측 탑의 주인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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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종의 챌린지 요소로만 존재하는 마왕성 본성은 그런 마족 백작에 버금가는 이들이 체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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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오오오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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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졸 포지션에 속하는 중급 마족들이 우르르 본성을 향해 몰려간다. 이백의 악마들이 만드는 요란한 발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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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성에 배치된 여러 경비 마법이 발동하지만, 상급 마족들의 손에 의해 하나씩 파훼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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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의 마왕 본인이 부재중인 탓에, 마왕성 본성의 공략 자체는 무척 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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챌린지 요소라고 해도 도전자들의 파티나 공격대를 기준으로 난이도가 잡혀 있는 수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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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큼 강력한 마족들이 단체로 쳐들어가면 돌파는 손쉬운 게 당연하다. 마족 백작급의 출현도 별문제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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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엄한 것들, 당장 멈추지 못할……끄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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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작급이 뭐 어쨌다고, 이쪽에는 전직 마왕만 둘에 그에 버금가는 강자들이 몇이나 더 있다. 당연히 쉽게 이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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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손을 쓸 필요도 없다. 일부러 손쓰지 않고 있기도 하지만, 아무튼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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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하하하! 이야기는 사실이었던 모양이군, 너무 쉽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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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이 무력화되었다는 내 이야기를 믿지 못하고 있던 고위 마족들이 웃음을 토해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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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이미 눈에 뵈는 게 없는 상태다. 본성으로 침입한 마족들은 텅 비어버린 마왕성을 마구잡이로 누비며 약탈을 자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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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성에 존재하는 수많은 재보, 강력한 무기와 마법서, 아이템을 저들 마음대로 챙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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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대로라면 내가 싹싹 긁어먹어야 하는 아이템이지만, 나는 일부러 내버려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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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놈들이 저걸 처먹는다고 아이템이 없어지는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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놈들은 내 가방 같은 거다. 어차피 다 죽이고 배를 째면 도로 아이템을 뱉어내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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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으로 아이템을 수집해 온다는 점에서, 가방보다는 펫에 더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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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우리는 저쪽으로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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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커뮤니티의 망령들이 조사해 준 내용을 토대로, 힘의 정수가 있을만한 장소를 찾아 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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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중에 살짝 헤매긴 했지만, 오래 걸리지 않아 정수를 찾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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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는 마왕의 침실, 영혼을 잃고 자빠져 있는 마왕 근처로 몇 개의 빛나는 보석 같은 것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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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마침내! 드디어 찾았다, 나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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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동행한 마왕급 마족들은 곧바로 날아가, 자신들의 정수를 붙들고 목구멍에 쑤셔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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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찌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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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감각] 스킬이 약한 경고를 보내온다. 놈들의 힘이 몇 배로 증폭했음이 그대로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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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고 있는 마력량은 그대로지만, 기세라고 해야 할까. 그런 부분이 확연히 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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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크크……네놈에게는 신세를 졌군,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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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기세를 찾은 마족들은 곧바로 나를 쳐다본다. 나는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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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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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껏 전기찜질도 하고 두들겨 패기도 했는데, 원한을 안 가져주면 섭섭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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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다 죽여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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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놈만 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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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 마왕 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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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족은 생긴 것과 똑같이 노는 놈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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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같이 생긴 만큼 하는 짓도 악마랑 크게 다를 것 없고, 힘의 크기에 따라 그때그때 태도가 바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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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진짜 악마랑은 좀 다르다고 하긴 하지만. 아무튼 마족은 죄다 그런 놈들이라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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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미 이놈들이 나를 배신할 계획을 짜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저들끼리 쑥덕이는 소리를 들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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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방진 인간 놈의 사지를 찢어서 어쩌고저쩌고, 킬킬대면서 아주 잔인한 소리를 다 했었지. 내가 못 들을 줄 알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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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놈들은 나름대로 머리를 써서, 9층의 하이엘프 왕이 했던 것처럼 전음을 통해 대화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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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음은 귀를 기울인다고 엿들을 수 있는 게 아니라서, 마음 놓고 떠들고 있었던 거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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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공교롭게도, 나는 전음을 도청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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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층의 주요 몬스터가 일종의 군체형 생물, 스타크래프트에 나오는 저그 비슷한 것들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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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놈들이 서로 텔레파시를 사용해 의사소통했었다. 그것들이랑 뒤엉켜 싸우다 보니 주파수가 살짝 맞은 적이 한 번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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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력 지배] 스킬을 가진 덕분에, 마력을 이용한 모든 행위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기 때문이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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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의 경험을 살려, 마력의 파장을 맞추는 것으로 텔레파시나 전음 같은 걸 몰래 엿듣는 기술을 체득한 게 대충 한달 전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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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데가 있을 것 같아서 대강이나마 익혀 둔 기술을 바로 활용할 수 있을 줄은 나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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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놈에게 당한 고통을 그대로 되돌려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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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마족의 선언과 함께, 무수한 마법 세례가 내 눈앞을 가득 메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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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몸에 어지간한 마법은 아예 안 통하지만, 딱 봐도 어지간한 마법들이 아니다. 확실히 엄청 파워업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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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앞서 날아오는 암석 탄환을 검으로 쳐냈다. 암석탄은 검에 닿자마자 폭발하며 파편을 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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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편 하나하나가 상당한 양의 마력을 품고 있다. 내 몸에 상처를 내기에 충분한 수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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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다. 방패를 앞으로 내밀고 [철벽]스킬을 두른 채 전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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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수많은 마법을 날린 것은 한 놈이 아니다. 이곳의 마족들이 동시에 나를 향해 공격한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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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무슨 뜻이냐면, 합을 맞춘 공격이 아니라서 빈틈이 많다는 거다. 이를테면, 이런 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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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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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패에 마력을 두르고 암석 파편 하나를 특정한 경로로 튕겨냈다. 그러자 몇 개의 마법이 서로 부딪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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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가장 큰 특기는 지금도 여전히 투척술이다. 지금 이건 투척은 아니지만, 투사체에 관한 거라면 뭐든 내 전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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튕겨나간 암석탄에 의해 궤도가 뒤엉킨 마법들이 서로 부딪혀 제멋대로 터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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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중 몇 개는 아예 다른 마족을 노리고 날아가기까지 했다. 나한테 적중한 마법은 별로 없는 수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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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탄막은 결국 한번 막이 뚫리면 그다음은 쉽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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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저기에 상처를 입긴 했지만- 마법 세례를 한 번 몸으로 뚫고 나니, 다들 빈틈투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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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을 되찾고 나니 오만함이 다시 치솟으셨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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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작 이 정도 마법 세례만으로 나를 무력화시킬 수 있을 거로 생각한 건가. 웃기지도 않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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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다 나한테 한두 방 맞고 뻗은 새끼들이, 왜 내 밑천을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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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방어력을 뚫고 피해를 입힐 수 있다면, 약해빠진 인간족은 쉽게 뻗을 거라고 여겼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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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그럴 만도 하지. 죄다 순식간에 털려서, 아직 [초재생] 스킬은 구경도 못 해봤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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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딴 건 침 바르면 나아, 병신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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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족들 사이로 뛰어들어가, 미친 듯이 검을 휘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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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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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개의 뿔을 전개하고, 마법을 두른 도끼 두 개로 내게 덤벼드는 노란 마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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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의 정수를 되찾으며 기본적인 신체능력과 마법 능력 모두가 향상된 지금, 그 기세는 예전과 크게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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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놈과 똑같이 인벤토리에서 도끼 두 자루를 꺼내, [라이트닝 차지]를 두르고 맞서 달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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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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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어깨에 놈의 도끼가 찍혔다. 나는 그 상태에서 똑같이 도끼로 놈의 어깨를 찍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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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콰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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놈의 반대편 손이 도끼를 내려쳐, 내 쇄골을 찍었다. 나도 도끼를 휘둘러 놈의 옆구리를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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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와 노란 마족은 서로 합의라도 한 것처럼, 서로의 몸을 향해 있는 대로 도끼를 찍어 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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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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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콰직! 콰직! 콰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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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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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보다 신체와 마력 모두 우위에 있는 마족과 이런 맞치기를 한다는 건 당연히 미친 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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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로 똑같이 도끼를 찍어도, 기본 체급과 스펙이 딸리는 인간 쪽이 훨씬 큰 피해를 입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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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나의 방어력과 전투 지속력은 그 당연함을 대놓고 거스른다. 미친 듯이 도끼가 난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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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콰직! 콰직! 콰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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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끼질이 이어질수록, 내 도끼는 더 빨라지고 놈의 도끼는 점점 느려진다. 상처의 숫자가 점점 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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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상처의 깊이는 처음부터 달랐다. 내 도끼가 더 정확하고 깊게 놈의 몸에 꽂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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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작 수 초간 이어진 수십 번의 도끼질 맞대결, 그 끝에 쓰러진 것은 노란 마족 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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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털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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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릎을 꿇은 노란 마족의 정수리를 향해, [라이트닝 차지]와 [대전]을 최대 출력으로 두른 도끼를 내려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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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르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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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락이나 다름없는 일격, 마족의 머리통이 쪼개짐과 동시에 노릇하게 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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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곳에 함께 도착했던 상급과 마왕급 마족은 이미 반 이상을 쓰러트렸다. 물론 남은 마족은 아직 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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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남은 놈들은 정수를 되찾았음에도 상대가 안 된다는 사실에 겁을 먹었는지, 소극적인 마법 견제만을 날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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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나운 개한테 소심하게 돌을 던져보는 초등학생들이랑 다를 게 없는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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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제는 그 개한테 목줄이 없다는 것. 나는 곧바로 외야를 향해 뛰어들어 칼부림을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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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몇 놈이 쓰러지고, 몇 놈이 남는다. 그러자 이제는 돌을 던지려는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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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빌어먹을, 다 비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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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던 중, 한 마리의 상급 마족이 더 이상 못 견디겠다는 듯 다른 이들을 제치고 달아나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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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허, 그건 안되지 새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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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방지게 구는 것도, 나를 얕잡아보는 것도, 다 봐줄 수 있어. 근데 정수만 먹고 튀는 건 용납 못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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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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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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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가지 버프를 사용해 민첩 스탯을 높이고, 달아나려는 놈의 뒷덜미를 재빠르게 낚아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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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대로 벽에 놈의 면상을 처박고, 방 안을 반 바퀴 뺑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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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콰과과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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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지에 얼굴로 벽을 갈아버린 놈은 발버둥치며 내게 공격을 날려 왔지만, 그냥 무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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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인벤토리에서 새 무기를 꺼냈다. 월드 보스 레이드 보상으로 얻었던 유니크 무기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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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를 먹는 나선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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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꽈배기처럼 꼬여 있는 붉은 대검. 이 검은 기본 옵션도 괜찮지만, 독특한 기동 효과를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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액티브 옵션을 사용하면 날의 꼬인 부분이 모조리 날처럼 변해서, 회전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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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감히 도주를 시도한 마족의 배때기에 나선검을 꽂아넣고, 전용 옵션을 가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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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이이이잉……가가가가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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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드릴이 된 나선검이 마족의 뱃속을 마구잡이로 휘저으며 내장을 갈아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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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족은 ‘어거걱’ 말고는 제대로 소리도 내지 못하고, 사지를 경련하다 배에 지저분한 구멍이 뚫려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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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사지를 찢니 마니, 꼬챙이에 꿰어 버리니 마니, 그딴 소리를 했던 주제에 아주 기겁들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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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 동지들을 두고 혼자 도망치려 하면 안 되지, 새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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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들한테 도주라는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쫄지 않고 덤비면 편하게 보내 줄 수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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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의미로 본보기를 한 번 보이자, 마족들은 부들부들 떨다가 돌연 무릎을 꿇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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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당신께서 새로운 마왕이십니다! 추, 충성을 맹세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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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씨구, 이 새끼들 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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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덤비랬지 언제 항복하랬냐? 그리고 인간보고 왜 마왕이래? 기분 나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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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적 달성 : 마계의 지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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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않네, 그냥 내가 마왕 하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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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말은 그렇게 했지만 진짜로 마왕 노릇 같은 걸 하고 있을 시간이 어디 있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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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항복을 선언한 놈들과도 억지로 싸움을 벌여 다 처치하고, 놈들의 힘의 정수를 빼앗아 부수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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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켜서 흡수했던 만큼 그냥 배를 째 버리면 다시 뽑아낼 수 있더라고. 아쉽게도 내가 흡수한다거나 하지는 못하는 것 같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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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퀘스트는 딱 한 놈의 몫만 제외하고 모든 조건을 만족한 채로 완료했고, 의도치 않았던 업적까지 하나 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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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상으로는 대량의 경험치를 얻어 레벨이 하나 올랐고, 새로운 스킬인 [어둠 정령의 가호]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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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령의 가호 계열 스킬은 하나하나가 든든한 국밥 스킬이니, 만족스러운 결과라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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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본방은 지금부터다. 내가 일부러 살려놓은 마왕급 마족인 로투랑이 아직 남아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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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리빨리 좀 했으면 좋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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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은신 상태로 숨죽이고 있는 녀석을 모른척하기도 지친다. 나는 아예 자리를 피해 다른 중급 마족 사냥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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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성에 함께 쳐들어온 백여 명의 마족을 모두 죽이고, 겸사겸사 마왕성에 자리 잡고 있던 마족도 몇 놈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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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같이 수준은 대단할 것 없었던지라, 천천히 싸웠는데도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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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적 달성 : 마족 학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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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도중에 업적이 하나 더 달성되었다. 보상은 지능 스탯을 조금 올려주는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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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이번에 얻은 보상을 확인하고 정리한 다음, 나는 다시 힘의 정수가 보관되어 있던 방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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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투랑은 슬슬 준비를 거의 다 마친 것 같았다. 다른 게 아닌, 회색 마왕의 몸에 자신이 빙의할 준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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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흐흐……이걸로 너도 이제 끝이다, 건방진 인간 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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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음을 도청하던 중에 이 계획을 들었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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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의 마왕이 없다면, 다른 놈을 회색의 마왕으로 만들면 되는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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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의 마법도 겸사겸사 좀 봐둘 수 있고, 14층 수준을 아득히 넘어선 적과 싸워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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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도쯤 되는 일이 아니면, 내가 치즈돈까스 도시락을 꺼내 먹을 일도 없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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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계 역사상 최강의 마왕이 이 자리에서 다시금 부활하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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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뻣뻣하게 서 있는 목은, 모두 회색의 마왕의 손안에 들어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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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마계의 생명들이여, 겸손히 주인께 경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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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DDEN BOSS - 반쪽 마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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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 준비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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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과 영혼이 맞물리지 않았기에 ‘반쪽 마왕’ 인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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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 반쪽 마왕으로부터 느껴지는 기운은 장난이 아니었다. 반쪽이라는 이름이 장난처럼 느껴질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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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족들을 볼 때마다 느꼈던 어마어마한 마력의 양은 그렇다 쳐도, 그 밀도가 굉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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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마어마하게 거대한 힘이 저 몸뚱이 하나에 단단하게 뭉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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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까지 만났던 마족들의 힘이 수증기처럼 흩뿌려져 있었다고 한다면, 저건 얼음처럼 뭉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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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이거, 진짜, 존나……이상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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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경관 하나를 생물 사이즈로 압축시켜 놓은 것 같다. 마력 감지로 보고 있으면 괜히 아득하게 느껴질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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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긴, 이 정도는 되어야 역사상 최강의 마왕이니 뭐니 하는 배경 설정 값을 할 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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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 마왕은 그 영혼을 톱니바퀴 장치에 빙의시킨 것 만으로 48층의 보스를 해먹을 수 있을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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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몸뚱이만 해도 48층 보스급은 될 테고, 저 몸에 빙의한 마족 역시 원래는 마왕급의 마족이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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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이놈이 실질적으로 48층 보스 이상으로 강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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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하하하하! 힘이 넘쳐흐르는구나, 이게 회색 마왕의 몸뚱이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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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은 기분이 좋은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웃어젖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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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쩌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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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웃기만 했는데 마력이 떨리며 주변 사물에 균열을 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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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힘이 강력하면 저런 게 될까 싶다가도, 그만한 힘을 웃음 따위로 흘리고 있다는 사실이 개탄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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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휴, 아무리 기분이 좋다고 해도 그렇지. 그 귀한 걸 그렇게 질질 흘리냐. 요실금도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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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해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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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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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이 돌연 웃음을 그치더니, 눈에서 묘한 색의 광선을 쏘았다. 전조 없는 공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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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마력을 두른 방패로 그것을 막아냈지만, 광선은 내 방패를 숭덩 썰어버리고 내 팔을 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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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지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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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에서 탄내가 난다. 굉장히 강력한 열선, 그것도 내 속성 내성을 뚫을 수준의 위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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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은 이어서 팔을 한 번 크게 휘둘렀다. 그러자 강력한 돌개바람이 불어 나를 덮쳐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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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과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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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돌개바람이지, 나와 함께 휩쓸린 주변의 사물들은 그것만으로 가루가 나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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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개바람에 휩쓸려 뒤로 밀려나는 도중, 인벤토리에서 쇠구슬 하나를 꺼내 가볍게 던져 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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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아간 쇠구슬은 마왕에게 도달하지 못하고 곧바로 바람에 갈가리 찢겨 조각나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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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 마력을 싣거나 한 건 아니지만 쇳덩이가 스펀지처럼 찢기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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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삼 그 바람을 맞고도 멀쩡한 내 신체의 강도는 어떻게 된 건가 스스로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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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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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번에 속도를 높여 마왕에게 접근해, 검을 휘둘러 놈의 몸뚱이를 노렸다. 손맛이 안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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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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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맨몸뚱이인데 거대한 바위에 칼질을 한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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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바위라면 내 검에 두 동강이 날 테지만, 이놈의 몸은 기껏해야 긁힌 상처가 났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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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최강급 마왕의 몸뚱이군, 내 마력을 이만큼 두른 검인데도 베이지 않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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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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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은 이번에는 쫙 펼친 날개를 휘둘렀다. 날개의 날카로운 끄트머리를 아슬아슬하게 피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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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날카로운 마디마디마다 어마어마한 밀도의 마력이 맺혀 있다. 스치기만 해도 베일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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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돌연 무거운 충격이 내 가슴팍에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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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꽈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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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함마로 한 대 세게 맞은 것 같은 감각, 몸이 크게 밀려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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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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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때린 것은 어떤 마법도 무기도 아니었다. 새까만 아우라가 둘러진 마왕의 주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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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좀 알 것 같군, 이 몸의 사용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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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지금까지 날아왔던 녀석의 공격은, 육체의 성능을 시험해보기 위함이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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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산 핸드폰의 기능을 이것저것 마구 눌러 보듯이, 일단 하나씩 써 본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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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도 이런 위력, 이런 속도, 이런 템포인가- 확실히 징그럽게 세긴 센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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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러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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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그 정도는 해 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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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와서 말하는 거지만, 회색 마왕의 육체는 꽤 전형적인 악마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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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에는 산양의 것을 닮은 뿔이 있었고, 한 쌍의 날개와 꼬리가 달려 있고, 손톱은 면도칼처럼 날카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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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적인 악마 형상이라는 건, 마족이 가질 수 있는 모든 기관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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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손톱이며 날개며 꼬리 하나하나가 모두 무기처럼 휘두를 수 있는 공격용 기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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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 때문에, 작정하고 힘을 쓰기 시작한 마왕의 공격은 내 두 손 두 발로는 다 감당하기 힘들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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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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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프링처럼 둥글게 말렸던 꼬리가 어마어마한 탄성을 내며 쏘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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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조금 특이한 형태의 방패를 꺼내, 방사형의 표면을 이용해 날아드는 꼬리의 공격을 흘려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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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걸 위해 사용된 방패는 그대로 파괴되었다. 공격 한 번에 장비 하나를 희생해야 하는 위력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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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사실 위력은 큰 문제가 아니다. 이미 장비의 내구도가 내 스펙을 따라오지 못하게 된 지는 제법 됐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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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저만한 위력의 공격이 쉴 틈도 없이 계속 날아든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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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육탄전은 그렇다. 공격 한 번을 할 때마다 턴을 소모한다. 이렇게 공격을 막고 나면 원래는 내 차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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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저 양심없는 놈은 압도적인 스피드와 다양한 공격 수단을 이용해, 억지로 턴을 늘리는 게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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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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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리 공격이 막히자, 날개를 휘둘러 칼바람을 일으킨다. 그냥 바람이 아니라 어마어마한 고위 마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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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어오는 바람에 휩쓸려 톱날처럼 회전하는 마법 탄환이 닥쳐오고, 저 탄환에 적중당한 부위는 갈려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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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유가 아니라 말 그대로 갈린다. 조금 전에 한 발 맞아봐서 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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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이벌……이건 왜 낫질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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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 탄환에 맞았던 팔뚝 부위의 상처가 회복되지 않고 있다. 내 재생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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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 부위에 모종의 마법적 방해가 걸려 있다. 저주 같은 디버프 계열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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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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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 자체가 주기적으로 바람을 일으켜 몸을 찢고 있다. 잔여형 공격 스킬인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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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건 상처 부위를 크게 도려낸 다음 포션으로 회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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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마왕은 한순간도 공격을 멈추지 않으며, 그럴 틈을 내주지 않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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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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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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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버프 스킬을 사용해 다시금 민첩 스탯을 증폭시키고, 날아드는 탄환을 피하며 전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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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다시금 거리가 확 좁혀졌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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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은 기분 나쁜 웃음을 지어 보이며 보란 듯 손바닥을 펼쳤다가 꽉 쥐었다. 마력이 요동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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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감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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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인지 한계를 아득히 넘어선 내 감각은 그 보잘것없는 행동으로 벌어질 일을 바로 눈치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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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빨리 두르고 있던 망토에 마력을 쑤셔 넣어 방패 대신으로 삼고, 몸을 감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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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 더해 [철벽]스킬과 [혼신]스킬로 방어력을 증폭시킨 후, 얼굴 부분을 팔뚝으로 가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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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과과과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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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면에서 크레모아가 터진 것 같은 감각, 정체불명의 마력 탄환 수십 개가 온몸을 난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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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력을 둘러 강화한 망토는 순식간에 걸레짝이 되고, 이마 부근에서 주륵 피가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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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옷의 몇 부위가 박살 난 채 바닥을 나뒹굴고, 편두통을 연상시키는 욱신거림이 왼쪽 머리께를 괴롭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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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우……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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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나 시발, 진짜 어이가 없네. 그냥 마력을 사방으로 분사하는 것만으로 이런 위력이 나온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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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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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이 뭐라 뭐라 떠드는 소리가 들릴락 말락 하게 귓가를 스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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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그걸로 고막이 어떻게 된 모양이다. 좀 기다리면 알아서 들리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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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떠들어 대던 마왕의 손아귀가 돌연 눈앞에 닥쳐든다. 날카로운 마력을 두른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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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쫘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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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빨리 고개를 숙였지만, 관자놀이 부근의 살이 쭈욱 찢겼다. 귀도 좀 잘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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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초재생]과 포션의 힘으로도 완전히 결손된 신체는 회복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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층수가 낮아 급이 높은 포션을 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완전히 잘려나간 건 아니었으면 좋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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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 마왕의 몸을 차지한 녹색 마족의 원래 전법은 스피드를 살린 초고속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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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웅! 후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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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만큼, 폭발에 휩쓸려 멀쩡하지 않은 나를 향해서도 어마어마하게 빠른 공격이 계속 날아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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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반응은 따라가고 있다. 그간 연마한 무기술과 체술은 확실하게 공격을 막고 받아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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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놈의 공격에 뒤따르는 마력에 의해, 자꾸만 간접적인 피해를 입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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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마어마하게 빠른 육탄전 중심인 주제에, 자꾸 광범위 추가타가 발생하고 있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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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이 없나, 씨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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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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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아드는 마왕의 공격을 억지로 쳐내고, 놈의 품으로 깊이 파고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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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야말로 완전히 빈틈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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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력을 실은 검을 크게 휘둘러, 놈의 몸을 크게 베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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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촤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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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마어마한 내구력을 자랑하는 마왕의 육체가, 마침내 처음으로 크게 베이며 피를 뿜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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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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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지로 빈틈을 파고들어 유효타를 입히긴 했지만, 치명상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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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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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 수 없이 뒤로 크게 물러났다. 너저분해진 몸 상태를 한 번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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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막도 슬슬 돌아왔고, 다른 상처도 그럭저럭 낫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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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로투랑을 한 번 이겼던 사내답군, 인간을 초월한 힘을 갖고 있어. 설마 이 몸을 벨 수 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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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은 방금 그게 내 밑천이었음을 눈치채고, 낄낄 웃으며 나를 칭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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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떠냐 인간, 이참에 내 부하가 되지 않겠나? 마계에 새 시대가 도래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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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뭐라 떠드는 마왕을 무시하고, 체내의 마력과 HP 잔량을 점검한다. 아직 여력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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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래저래 많이 다치기도 했고, 싸움 내내 일방적으로 몰아붙여 진 느낌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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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저히 질 것 같은 기분이 들질 않는다. 저층을 등반할 때의 그 막막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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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이대로 싸우다 보면 좀 아슬아슬하긴 하겠지만, 어떻게든 이길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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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 이 정도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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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성장세가 너무 가팔랐던 탓에, 맞상대를 만나지 못해 한동안 감각이 둔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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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핑 없이 기본적인 무기술과 스킬만으로 어디까지 싸울 수 있을지도 대충 확인했고, 감도 슬슬 돌아온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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뻐근한 어깨를 한 번 돌려 보고, 몸 안의 마력을 정해진 회로를 따라 순환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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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환된 마력으로 온몸을 감싸고, 방출하여, 내 육체의 힘에 그대로 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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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력 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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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르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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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둥 소리와 함께 몸이 빛에 휩싸인다. 동시에 인벤토리에서 새 장비를 꺼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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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튼 마족 새끼들, 강약약강이라고 이길 것 같으면 바로 말부터 많아진다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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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층에서 얻은 다크엘프제 방어구 풀 세트, 에르웬이 만들어준 내 애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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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상점제 장비를 수납하고, 내 진심 장비 세팅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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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생 패시브 가진 놈이랑 싸우는데, 다 이긴 줄 알고 나불거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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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소한 반피는 넘게 까고 나서 그러던가, 아직 [불굴]은 켜지지도 않았다 새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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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 마검 칼레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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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력강화는 일반적인 도전자들이 갖고 있는 그 스킬과 조금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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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스펙을 뻥튀기시켜주는 사기 스킬이라는 점에서는 똑같지만, 자세한 사양 면에서 좀 차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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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 나는 다른 도전자들처럼 스킬북을 파밍하거나 클래스 사양으로 [마력 강화]라는 스킬을 손에 넣은 게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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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력강화는 내가 가진 온갖 무기술 계열의 스킬처럼, 자력으로 터득한 기술이 스킬의 형태로 등록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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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쐐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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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의 꼬리 공격이 쏜살같이 날아든다. 나는 [철벽]을 두른 왼팔을 내밀어 그걸 받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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쾅 하는 소리가 터지며, 마력을 실은 꼬리가 그대로 튕겨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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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의 모든 공격에 딸려 있는 광역 추가타는 완전히 무시되었다. 마력강화 특유의 방호 효과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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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력강화는 내구 스탯과 동시에 방어력도 따로 증폭시키고, 거기에 휘감은 마력을 통해 고유한 방호 능력까지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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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에 내 수많은 스펙 중에서 가장 독보적인 방어 능력이 몇 배는 더 증폭된다. 이 정도 공격은 그냥 받아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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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르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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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둥소리를 울리며 마왕의 품에 단숨에 파고든다. 그대로 직선으로 검을 찔러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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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지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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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의 단단한 몸을 뚫고, 뼈를 모조리 끊어내며 내장까지 검이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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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를 바꾸며 공격력이 오르고, 거기에 마력강화로 한 번 더 공격력이 크게 증폭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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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력강화가 다른 도전자들의 마력강화와 크게 차이 나는 첫 번째 요소, 강화의 폭이 매우 높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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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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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아넣은 검 손잡이를 90도 회전시켜, 날의 방향을 바꾼 뒤 그대로 올려 긋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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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진 뼈와 내장을 모조리 갈라버리며, 배로 들어갔던 검이 어깨 위치로 빠져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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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들어가는 방향이랑 나오는 방향이 다를 때 가장 파괴적인 힘을 발휘한다. 그게 마음대로 되기 힘들어서 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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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마력강화를 사용해 모든 스탯을 뻥튀기한 지금의 상태라면 얼마든지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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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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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숨에 붉은 크리티컬 이펙트가 터지며, 마왕이 주저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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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한심한 꼴을 비웃어 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마력강화를 쓴 이상 싸움은 빠르게 끝내는 게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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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을 크게 움직여, 주저앉은 마왕의 목을 향해 힘차게 검을 휘둘렀다. 베기보다는 후려치기에 가까운 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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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에 걸맞은 사용 방식은 아니지만, 마력강화의 압도적인 출력이 무식한 일격을 합리적인 공격으로 바꾸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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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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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드를 올린 마왕의 팔을 그대로 잘라내며, 목에 반쯤 박힌 칼날. 여기에 후속타가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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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트닝 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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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지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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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력강화로 인해 흘러넘치는 마력과 [라이트닝 차지]의 번개 속성이 뒤섞여 몰아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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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은 목을 타고 흐르는 강력한 전격에 ‘으그극’ 하는 소리를 내며 부들부들 떨었다. 점점 놈의 몸에서 힘이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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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저나, 목에 칼날이 반쯤 박혔는데도 안 죽네. 역시 마족은 생명력도 남다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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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닌가, 나도 목에 칼이 박힌 것 정도로는 안 죽을 것 같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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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리자드맨이 나오던- 3층이었나, 거기서 목에 한번 칼이 박혔는데도 살았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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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그 때는 상대가 병신이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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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 뒤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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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대로 팔에 힘을 빡 넣고, 반쯤 잘린 목의 나머지를 그대로 확 쳐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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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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뻣뻣하게 서 있는 목은 모두 마왕의 손안에 들어온다고 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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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마왕 해먹겠다고 말한 적이 있어서 그런가, 네 뻣뻣한 모가지가 내 손에 들어왔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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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리어 보상 : ‘경험치’, ‘골드’를 획득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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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 클리어 보상 : ‘마왕의 뿔’을 획득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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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 기여도 보상 : ‘액티브 스킬 - 암영’을 획득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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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생각한 순간, 클리어 메시지와 함께 잘려나간 마왕의 목은 재가 되어 사라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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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일격 보상 : ‘마검 칼레온’을 획득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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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있는 그 몸뚱이는 난데없이 회색빛 검으로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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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을 처치한 후, 나는 일단 빠르게 마력강화를 해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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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온몸에 어마어마한 격통이 몰려왔다. 전신의 근섬유와 혈관이 실시간으로 찢기는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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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어어어억, 시바아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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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력강화가 다른 도전자의 것과 다른 두 번째 요소. 강한 출력이 나오는 대신, 사용한 후에 찾아오는 반동마저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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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각성했을 때의 감정 상태 때문일까, 다른 도전자들의 안정적인 마력강화와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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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전투 지속력을 기반으로 한 나의 기본 전투 스타일과는 맞지 않는, 리스크가 있는 순간적 도핑 스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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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씨발, 쓰지 말걸, 쓰지 말거어얼……끄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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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획득한 보상을 확인하지도 않고, 격통에 데굴데굴 굴렀다. 이거 진짜 존나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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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출력은 지금 시점에서 솔직히 독밖에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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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그래도 기본 스펙이 너무 좋아서, 마력강화를 쓰면 오버킬이 되어버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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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꾸준히 써버릇해야 스킬 레벨도 오르고, 숙련도도 좋아질 테니 지금 같은 상황에선 좀 쓰려고 하고 있긴 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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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오 씨발, 씨이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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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럴 때마다 저절로 욕이 튀어나오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이건 포션으로 진정도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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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스러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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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돌연 누군가 내게 전음을 보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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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지 시발, 아직 살아있는 마족이 있었나? 다 죽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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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잡아라, 너의 고통을 없애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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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력감지를 전개해 전음이 어디서 날아오는지 포착해 냈다. 위치는 바로 앞, 마왕의 몸이 변화한 회색 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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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저게 나한테 말 거는 건가? 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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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보니까 보상 목록 중에 무슨 마검이 있었지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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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뜸 나를 잡으라는 것도 그렇고, 마검이라는 이름도 그렇고, 너무 노골적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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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한 힘을 갖고 싶지 않은가. 내가 줄 수 있다. 나를 쥐는 순간, 회색의 힘은 네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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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끙끙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회색 검을 향해 가까이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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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에서는 회색 마왕의 몸에서 느껴졌던 단단한 마력이 그대로 느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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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검을 쳐다보니, 시스템 인터페이스가 떠올라 무기의 정보를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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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검 칼레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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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격력 + 180 (암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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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명타 피해 : x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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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구도 750/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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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시행 가능 횟수 : 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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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공격력부터 어마어마하고, 무기의 공격 속성이 참격이 아닌 암흑으로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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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챈트 없이 기본적으로 암속성 공격을 할 수 있는 모양이다. 강화 시행 횟수가 없긴 하지만, 스펙이 장난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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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에르웬이 만들어 준 내 검보다 한참 더 좋은 거 아닌가. 외형이 좀 마음에 안 들기는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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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유 지속 효과 : 에고 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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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검 칼레온에 깃든 자아에 의해 시야에 검로가 표시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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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로를 따라 공격할 시 확정 크리티컬 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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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흑 속성 공격 시 치명타 피해량 2배 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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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유 지속 효과도 어마어마하게 좋아 보이고, 층수에 맞지 않는 스펙의 무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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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스펙의 원천은 보여지는 아이템 등급에 의한 것이겠지. 유니크보다 높은 에픽 등급의 무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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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진 에픽 등급 아이템은 딱 하나, 엘레노어의 영혼뿐인데. 여기서 에픽 등급을 하나 더 먹을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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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무기의 착용 조건이 마음에 걸린다. 레벨이나 마스터리를 요구하지 않는 대신, 이상한 조건이 붙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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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용 제한 : 마검 칼레온의 계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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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계약이라는 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마검과의 계약이라고 하면 딱 봐도 정상적인 건 아닐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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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이게 대체 회색의 마왕이랑 무슨 상관인 거지. 내가 모르는 설정이 뭔가 붙어 있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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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테면- 마왕의 정체는 마검을 손에 넣은 마족이었다거나, 나중에 커뮤니티 사관들한테 말해줘야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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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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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별 생각 없이 마검을 손에 쥐었다. 그러자, 마검으로부터 괴상한 마력이 흘러들어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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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그거다! 이제부터 네가 새 회색의 마왕이 되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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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물꾸물 흘러들어오는 마력이 내 몸을 잠식해 나간다. 누가 마검 아니랄까 봐, 내 몸을 장악하려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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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계약이라는 게 이걸 의미하는 모양이었던 것 같다. 사기적인 성능에 이유가 있었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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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 아이템 새끼가 뒤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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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깝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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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르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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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력강화를 전개해 흘러들어온 마검의 마력을 반대로 밀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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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력의 밀도와 양에서는 차이가 있지만, [마력 지배]를 갖고 있는 나에게 그런 건 그리 큰 의미를 갖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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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움이 힘으로만 하는 게 아니듯, 내 마력을 날카롭게 만들어 마검의 마력을 하나하나 찢어발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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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하는 거냐, 당장 멈춰라, 당장 멈추란 말이다! 이럴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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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방지게 내 몸을 잠식하려 들었던 마검의 힘을 차근차근 짓밟고, 반대로 내 마력을 흘려 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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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에 마력을 흘려 넣어 장악하는 것은, [강철 직검] 한 자루를 마력으로 강화해 싸워온 나에겐 일상적인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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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걸리지 않아, 나는 반대로 마검을 내 마력으로 잠식해 찍어누르는 것에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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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적 달성 : 마검의 진정한 지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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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검 칼레온에 깃든 사악한 에고를 파괴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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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적 보상 : ‘칼레온’ 을 획득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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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나불거리지 못하게 된 마검의 정보창에는, 마검이라는 단어가 떨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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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였던 건데, 이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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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템 등급도 에픽에서 유니크로 하락했고, 옵션이나 기본 성능도 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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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뭔가 거창한 설정이 있었던 것 같은데,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그냥 끝나버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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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보다, 씨바악……마력강,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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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괜히 한 번 더 사용한 마력강화의 후폭풍에 고통스러워 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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