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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리스트 컷 신드롬
다친 부위가 하필 목이긴 하지만, 결코 깊은 상처는 아니다.
경동맥같은 큰 혈관이 베인 것도 아니라, 지혈 없이 방치하더라도 과다출혈로 이어지지 않을 거다.
애초에 나는 [전투 치유] 스킬이 있어서, 이 정도 상처는 가만두기만 해도 금방 회복된다.
“호들갑은, 안 죽어.”
불안한 표정으로 포션을 내미는 리즈멜의 손을 쳐냈다. 포션이라면 나도 많다, 애초에 필요도 없고.
리즈멜도 자기가 호들갑을 떨고 있다는 자각은 어느 정도 있을 거다.
이 정도 상처가 치명적이지 않다는 걸 모를 리 없다. 크리스탈 거미때 자가치유 능력이 있다는 걸 보여주기도 했었으니.
“벼, 별로 걱정한 거 아니거든?”
이번에도 뻔한 태도를 보이며 고개를 휙 돌리는 리즈멜. 나는 상처가 나은 것을 보여주며, 계속 이어서 하자고 말했다.
그렇게 5분만에 다시 시작된 어둠 속에서의 시험.
시야가 제한된 상황에서도 나는 부지런히 움직이고, 청각과 촉각을 활용해가며 인형에 맞섰다.
하지만 두어 번 합을 나누고 나면 꼭 한 번씩 헛손질을 했다. 직감 스킬의 보조가 있는데도 이 모양이다.
그리고 문제는 계속되는 리즈멜의 참견이었다. 내가 유효타를 허용했다 싶으면 곧장 달려와서 내 상태를 살핀다.
“이번에는 진짜 크게 다쳤잖아. 잠시 쉬었다가 해.”
“크게 다치긴 무슨, 멀쩡하니까 계속하라고.”
“피가 그렇게 나는데 어디가 멀쩡하다는 거야.”
나는 몸 쓰는 일에는 도무지 재능이 없다. 직접 구르고 깨지며 배우지 않으면 뭐 하나 제대로 익힐 수 없는 놈이다.
그런데 리즈멜은 내가 구르거나 깨진다 싶으면, 곧장 달려와서 시험을 멈추고 내 상태를 살핀다.
이런 식으로는 끝이 없다. 이래서 대체 언제쯤 성장할 수 있을지, 까마득해 짐작되질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포기할 수도 없다.
솔직히, 시야가 제한되는 것만으로 이렇게까지 고전할 줄 몰랐다. 상상도 못 해본 약점이다.
3층의 리자드맨 주술사를 시작으로, 조금씩 마법을 사용하는 적이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내가 알기로, 흑마법이나 저주 계열 쪽의 마법에는 상대의 시야를 방해하는 수단도 수두룩하게 있다.
당장 그림자 마법을 다루는 이곳의 다크엘프들만 해도 그렇지 않나.
박투술과 다른 무기술을 봉인한 상태였다고 해도, 고작 인형 하나에 공격을 허용하고 말았다.
알게 된 이상 다른 선택지는 없다. 나는 리즈멜이 말하는 감각의 확장을 꼭 터득해야만 한다.
“으흠, 그 정도면 처음치고는 엄청나게 잘하는 거야.”
내가 느끼고 있는 초조함이 얼굴에 드러났는지, 리즈멜이 대뜸 그렇게 말해왔다.
“원래 이건 하루이틀만에 터득할 수 있는 재주가 아니거든. 배움이 빠른 인간족이라도 다를 건 없어.”
“하루이틀로 안 되면, 보통은 얼마나 걸리는데.”
“매일같이 수련한다는 기준에서, 첫 단계를 넘기기까지- 길면 10년, 짧으면 반 년. 나도 반 년은 걸렸어.”
익숙한 단위다. 1층에서 내가 날려 먹은 시간이 반년 정도였고, 3층에서 폐관수련에 들인 시간도 그 정도였다.
투자하지 못할 만큼 긴 시간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아무리 짧아도 반년일 경우는 좀 다르다.
추모의 집의 유골 안치기간은 보통 처음에는 15년, 그리고 때마다 연장할 수 있는 구조다.
하지만 무연고자의 경우에는 10년이라고 들었다. 임시 보관 기간이 2년씩 있다고는 하지만, 결국 12년.
물론 졸업자들을 통해 탑 바깥과 연락을 취하고 있는 길드 쪽에 말을 전해두면, 어떻게든 늘릴 수는 있다.
고로, 꼭 몇 년 안에 나가겠다는 생각이 있는 건 아니다.
오히려 몇 년이 걸려도 나가기만 한다면 괜찮다는 생각이다. 내 목표에 시간제한 같은 건 없다.
하지만, 나는 나를 믿지 않는다.
내가 쌓아온 노력과 힘을 믿을지언정, 내 의지와 성실함은 결코 믿지 않는다.
내 근본은 결국 엄마의 등골을 빼먹던 앰생 백수 새끼다. 어쩌다가 달려나가기 시작했지만, 한 번 관성을 잃으면 끝이다.
인간을 마냥 귀여워하는 다크엘프에게 둘러싸여 긴 시간을 보내다 보면, 분명 나는 다시 멈춰 서고 말 거다.
“반년이라고?”
“음, 빠르다면.”
리즈멜은 그렇게 말하고는, 내 표정에서 무언가를 읽은 것인지 황급히 말을 덧붙이기 시작했다.
너는 제법 재능도 있고, 인간족은 원래 배움이 빠르지 않으냐며, 넉넉히 일 년이면 꼭 익힐 수 있을 거라고.
그래, 나도 비슷하게 생각한다. 이런 방식으로도 일 년쯤 되면 익힐 수 있겠지. 그럴 생각이 없을 뿐.
느긋한 방식으로 일 년이 걸린다면, 과격한 방식을 쓰면 한 달 정도면 되지 않겠어?
**
리즈멜과의 수련을 마치고, 다시 숙소로 돌아오니 오늘도 엘레노어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대, 오늘은 조금 빨리 돌아왔구나. 연습이 일찍 끝난 건가?”
나는 엘레노어의 물음에 오늘은 볼 일이 있다고 대충 대답하며, 곧바로 장비를 챙겨 나갈 준비를 했다.
“너무하는구나, 제대로 대꾸도 안 해주고.”
엘레노어는 태도가 매몰차다며 서운하다는 듯 말하긴 했지만, 딱히 행선지를 묻거나 붙잡으려 하지는 않았다.
물어도 제대로 대답해 줄 생각은 없었지만 말이다. 그러면 분명히 말리려고 했을 테니까.
오픈 커뮤니티를 열어 7층 전역의 지도를 켜고, 미리 점찍어둔 장소를 향해 이동했다.
목적지는 진영 퀘스트를 수행하느라 거의 손대지 않았던 필드 보스의 출몰 지역이다.
[저주받은 제단]
여긴 다크엘프 진영에서 황혼 거미 토벌을 진행하는 것처럼, 왕국군 진영을 선택할 경우 와야 하는 장소다.
출몰하는 몬스터는 이 지역에 흘러넘치는 저주에 영향받아 이성을 상실한 인간들.
근처를 지나다니다 저주에 당한 산적, 왕국 병사, 기사 등이 적으로 나타난다.
-적이다, 적이다, 적은 죽인다.
-싸워라, 우리의 왕국을 수호하라.
-모조리 쓸어버리자, 얘들아.
초점 없는 눈으로 무기를 빼 들고 접근하는 저주받은 인간들을 앞에 두고, 나는 단검을 뽑았다.
내가 3층에서 짧은 시간 동안 다양한 무기술을 터득할 수 있었던 것은, 스스로 위기에 뛰어들었기 때문이었다.
독화살을 몸에 찌르고, 이길 수 없을 것 같은 강력한 리자드맨에게 무모하게 덤벼들고.
그렇게 자신의 생존 본능을 자극해, 폭발적인 성장을 해낸 거다.
이번에도, 해야 할 일은 다르지 않다.
-촤악!
오른손의 단검으로 내 눈을 그었다.
거창한 그림자 마법이 없어도 이거라면 쉽게 시야를 제한할 수 있다.
“끄, 으윽, 씨발.”
상상 이상으로 고통이 크다. 뺨을 타고 흐르는 게 피인지 눈물인지 구별이 안 된다.
그에 더해, 사방에서 다가오는 발소리에 심장이 쿵쾅거린다.
눈, 제대로 베었으니 포션을 마셔도 바로 회복되진 않겠지. 이걸로 이제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압도적인 위기감. 그리고 묘한 흥분에 손끝이 덜덜 떨린다.
“후, 후우.”
적은 무딘 무기만 쓰는 그림자 인형이 아니다. 다쳤다고 멈춰줄 리즈멜도 이제 없다.
검을 뽑아들고, 적의 발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뛰어들었다.
**
스펙을 낮추고 촉각을 최대한 예민하게 느끼기 위해, 이번에는 방어구도 모두 해제하고 왔다.
어떤 게임처럼 빤쓰만 입고 나온 건 아니지만, 방어력 면에서는 그것과 큰 차이도 없다.
이성을 잃은 인간들의 무기는 저주로 인해 더욱 강화된 상태이기에, 더더욱 공격을 허용하면 안 되는 상황.
-휘잉!
작은 바람 소리에 의존해, 날아드는 공격을 피해냈다. 이미 내 몸에는 깊고 얕은 자상이 네다섯 개는 새겨져 있다.
하지만 개중 치명상은 하나도 없다. 모든 공격을 피하는 건 불가능해도, 치명상에 한해서라면 어떻게든 됐다.
산적으로 추측되는 냄새나는 놈의 도끼 공격을 피해내고, 앞으로 크게 전진하며 검을 휘둘렀다.
노리는 것은 목, 휘둘러지는 무기의 높이를 추측해 어깨의 위치를 계산하고, 그보다 살짝 위로 검을 그었다.
-촤악!
살을 찢고 뼈가 있는 부분까지 칼날이 닿는 감촉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제대로 목을 노렸다.
목을 베어버린 산적을 걷어차고, 다른 방향에서 덤벼드는 누군가의 창을 회피하고 반격했다.
-서걱!
눈이 보이지 않기에 확신할 수는 없지만, 지금 공격에는 크리티컬이 터졌을 것 같았다.
그런 손맛이다. 치명상을 입힐 때의 손맛.
리즈멜이 알려준 오감의 활용법이 머릿속에서 쏙쏙 떠오른다. 뺨에 닿는 흙먼지의 감촉에 웃음이 나온다.
분명, 무거운 망치를 땅에 질질 끄는 소리가 들렸었지.
지금 날아온 흙먼지는 그 망치가 휘둘러지며 닿은 것. 그리고 특유의 묵직한 바람 소리, 휘두를 때의 호흡.
정확한 타이밍에 검을 들어, 망치를 휘두르고 있을 산적의 손목 위치를 베어버렸다.
고작 무기 휘두르는 소리와 발소리만으로 상황을 어림하고 있던 자신이 바보같이 느껴진다.
이렇게 많은 감각이 주변의 상황을 읽어주고 있는데, 고작 그런 것에만 의지하고 있었다니.
-촤악!
마지막으로 추정되는 적을 베어버리고 천천히 눈을 뜨자, 시야가 한결 밝아진 것이 느껴졌다.
[전투 치유]와 아이템 효과로 눈이 회복된 것 같다.
그리고 회복된 눈앞으로 푸른 인터페이스 메시지가 여럿 떠올라 있는 것이 보였다.
[패시브 스킬 : 감각 강화 1레벨을 습득하셨습니다.]
어느새 새로운 스킬이 습득되어 있었고, 직감 스킬의 레벨도 조금 올라 있었다. 해낸 거다.
“흐핫.”
실실거리는 웃음이 저절로 입에서 새어나왔다. 그에 더해, 새로운 메시지가 나타났다.
[위대한 이 땅의 왕이시여, 사악한 마법사의 제단을 어째서 그냥 내버려 두십니까.]
[왜 병사도 기사도 더 이상 보내지 않으시고, 그저 주변을 봉쇄하라는 명령만 내리십니까.]
[그곳을 지키는 망자가 그토록 두려우십니까. 이미 부패해 썩어버린 무사의 시체가!]
시스템 메시지와 함께 나타난 것은, 6층의 좀비를 연상케 하는 검을 든 시체.
[BOSS - 그 옛날 썩어버린 무사]
무기를 든 자세와 기백 모두 예사롭지 않으나, 나는 다시 한번 웃으며 눈을 그었다.
느긋한 방식으로 일 년, 과격한 방식으로 한 달.
그리고, 내 방식으로는 반나절.
역시 나한테는 이게 맞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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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챔피언
철벽 스킬을 발동하고 전력으로 내리꽂은 주먹.
투구를 쓰고 있었어도 절대 버틸 수 없었을 위력의 일격이 하이엘프 기사에게 그대로 꽂혔다.
물론 상대는 7층 보스보다 강력한 엘리트 NPC다. 이 한방으로 쓰러트릴 수는 없다.
“끄, 으으윽……”
하지만 턱이 제대로 박살난 하이엘프 기사는 쉽게 일어설 수도 없었다.
하이엘프들은 금방 사태를 수습하기 시작했다. 부상을 입은 기사 녀석을 재빨리 끌고 나갔다.
“이, 인간족이, 어떻게 이런, 대체 무슨 사악한 수를 쓴 거냐……!”
끌려나가는 하이엘프 기사는 인지부조화를 일으키며 그렇게 지껄였다.
먼저 칼 들고 덤벼놓고 누구한테 사악하다 뭐다 지껄이는 건지 모르겠네, 어이가 없다.
역시 하이엘프가 커뮤니티에서 좆좆좆좆으로 불리는 건 다 이유가 있다. 뻔뻔해서 원.
“페, 페리트……”
한편, 마중을 나왔던 하이엘프 왕자는 사색이 된 얼굴로 기사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부하의 폭주에 놀란 걸까, 아니면 결투 상대인 내가 상상 이상으로 강해서 놀란 걸까.
“음, 흠, 잠시 소란이 있었군.”
경직된 분위기 속에서 하이엘프 한 명이 헛기침하며 상황을 정리했다.
방금 그게 잠깐의 소란으로 치부할 수 있는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도 괜히 험악한 분위기를 만들고 싶진 않다.
물론 처음부터 무척 험악한 분위기긴 했지만, 결투 전에 서로 열을 올려서 좋을 건 없으니까.
그렇게 상황을 정리하고 나서는, 지정된 결투 장소를 향해 이동했다.
[생명이 순환하는 곳]
하이엘프 마을의 중앙에 도착하자, 맵 이동을 알리는 시스템 메시지가 표시되었다.
생명이 순환하는 곳이라, 엘프들의 혼을 순환시킨다는 세계수가 있는 장소이기에 붙은 이름이겠지.
그렇다면 저기 있는 앙상한 나무가 세계수인가?
세계수라는 이름답게 크기는 거대하지만, 딱 봐도 힘을 잃고 시들어 가는 듯 보인다.
하지만 외형과는 또 별개로, 굉장히 강대한 마력이 느껴진다.
대체 힘을 잃고 시든 상태에서 이 정도면, 예전에는 대체 얼마나 강력한 마력을 품고 있던 걸까.
“흥, 인간족도 세계수의 위용은 알아보는 모양이군. 그러니 자꾸만 우리의 숲을 넘보는 것이겠지.”
세계수를 올려다보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자, 길안내를 하던 하이엘프가 혀를 찼다.
느그들 숲을 노리는 건 내가 아니라 왕국군 진영이거든?
인간이라고 다 싸잡아서 똑같이 생각하는게, 현실의 인종차별과 전혀 다를 게 없다.
결투 장소는 리즈멜이 사용하는 연무장의 두 배 정도 크기가 되는 공터였다.
그냥 쌩 공터는 아니고, 나름대로 정비되어 있는데다가 구경을 위한 좌석까지 쫙 깔려 있다.
일이 일이다 보니, 많은 하이엘프들이 결투를 구경하기 위해 자리를 잡고 있다.
그리고 그 많은 엘프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이, 왕관을 쓰고 상석에 자리 잡고 있는 무표정한 엘프 남자였다.
먼저 도착해 있던 다크엘프의 여왕과 가까이 앉아 있는 걸 보면, 저게 현재 하이엘프의 왕이겠지.
그나저나, 오래 산 엘프들은 다 저런가.
다크엘프 여왕도 그렇고, 하이엘프 왕도 그렇고, 둘 다 무슨 오래된 고목 같은 인상이다.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라 딱딱하게 굳은 정물을 보는 느낌.
다른 엘프들과 비교해도 독보적으로 오래 살았을 테니까, 저렇게 초연한 모습인 것도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닌데.
그러면 엘레노어도 나중에는 저렇게 되는 걸까.
잘 상상이 안 된다.
**
참관인 자격으로 참여한 엘프는 많이 있지만, 공식적으로 참관인의 역할을 맡은 것은 하이엘프의 왕이다.
“준비된 것 같으니 진행하도록 하지.”
결투의 룰은 결투 신청을 받은 쪽이 정할 수 있다. 이번 결투는 내가 건 형식이기 때문에, 그 권리는 왕자 쪽에게 있다.
왕자는 이미 한번 나한테 털린 전적이 있으니, 직접 무력을 부딪치는 방식은 택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정확하게는, 엘레노어가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조금 전, 마중을 나왔던 왕자 녀석의 표정은 분노와 적의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대놓고 나를 곤죽으로 만들어 버리고 싶다는 표정이었다.
어디서 굴러먹다 왔는지 모를 놈이 약혼자를 걸고 결투하자고 신청한 상황이니, 이해는 한다.
“결투에서는 무기와 마법 사용이 모두 허용되며, 한쪽이 패배를 선언하거나 전투 불능 상태가 될 경우에만 종료된다.”
그리고 내 예상대로, 하이엘프의 왕이 선언한 결투의 규칙은 단순한 일대일 승부였다.
하지만, 당장 내 눈앞에 서 있는 왕자의 표정에는 일말의 투지도 없었다.
“제기랄, 제기랄……!”
투지는 커녕, 초조한 표정으로 손톱을 딱딱 갉아대고 있다. 이유는 대충 알 것 같다.
베리트인가 뭔가 하는 기사 녀석이 나한테 턱주가리가 아작나는 모습을 봤기 때문이겠지.
이 녀석이 상정하고 있던 내 전투력은 몇 주 전의 그것일 거다.
순수한 검술 실력은 형편없고, 다양한 무기를 이용한 변칙적인 전투법으로 베리트를 몰아붙이던 나.
결투자의 권리 행사로 핸디캡을 신청해, 무기 사용에 제한을 걸면 어떻게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겠지.
아니면 하이엘프의 보물이나 뭐 그런 좋은 아이템을 두르고 싸우려고 했을지도 모르고.
하지만 나는 그 몇 주 사이에 이전과는 어마어마한 실력 향상을 이루었고.
이 녀석도 그걸 눈치챈 거다. 어떤 핸디캡을 내걸고 싸워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신성한 대지와 세계수의 은혜가 옳은 자의 편을 들 것이다, 두 결투자는 명예를 걸고-”
그렇게, 하이엘프의 왕이 결투 시작을 선언하려 한 순간.
“나, 나!”
눈을 질끈 감은 왕자가 번쩍 손을 들어 올리며, 외쳤다.
“나 엘뤼온 프락시누스는, 결투자의 정당한 권리로서 나의 챔피언을 지목하겠다!”
왕자는 대뜸 결투를 대신해 줄 대전사, 챔피언의 지목을 선언했다.
**
엘프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번져나갔다. 역시 예정에 없던 일인 것 같다.
챔피언은 결투를 치를 능력이 없거나, 너무 고귀한 신분을 가진 자가 결투를 치를 때에 부를 수 있는 대행자.
하이엘프의 왕자이면서 걸려온 결투를 받은 입장인 이놈에게는 분명 챔피언을 부를 권리가 있다.
그럼에도 이렇게나 웅성거리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는 하나.
“세상에, 저런 겁쟁이를 봤나……”
존나 한심해 보이니까.
“저런 녀석이 내 약혼자라니, 한숨이 나오는구나.”
관중석에 있던 엘레노어가 푹푹 한숨을 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렸다.
약혼자를 걸고 하는 결투에서 바짝 쫄아 챔피언을 부르다니, 이렇게 한심한 경우가 어디 있겠나.
구경하러 온 하이엘프들도 이건 좀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다들 표정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가장 표정이 안 좋은 것은 역시 왕자 본인이었다. 이게 창피한 짓인 줄은 아는 모양이다.
“나의 뜻을 대행할 챔피언은 프락시누스 기사단의 고결한 제1기사 메르세데스다!”
창피와 수치로 얼굴이 새빨개진 왕자는 결국 챔피언의 이름을 불렀다.
나도 이런 허접한 놈이 아니라, 제대로 된 상대와 붙어볼 수 있다면 환영이다.
문제는 이게 왕자의 돌발 행동이라는 점이다.
메르세데스라는 놈이 이 자리에 있는지도 의문이고, 이걸 받아줄지도 의문인데.
-저벅, 저벅.
좌석에 있던 흰 정복 차림의 하이엘프 한 명이 걸어나오며, 그런 걱정은 깨끗이 날아가 버렸다.
그 대신, 새로운 걱정이 내 안에서 샘솟기 시작했다.
일그러진 표정의 왕자가 물러나고 정복 차림의 엘프가 검을 뽑아 내 앞에 섰다.
역시 대뜸 챔피언이 될 줄은 몰랐던 건지, 전투에 적합한 차림이 아니다. 굉장히 불편해 보이는 차림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전하의 뜻대로.”
왕자의 챔피언으로 나선 메르세데스라는 기사의 머리 위에 떠 있는 콘솔의 색깔 때문에.
압도적인 레벨 차이를 의미하는 새까만 콘솔.
7층의 수많은 엘리트 NPC 중에서도 독보적인 스펙을 가진 규격 외의 최강자.
“엘뤼온 전하께 해를 입히고도 그냥 돌아갈 수 있었던 행운을, 너 스스로 걷어찬 꼴이 되었구나.”
일전에 만났던 하이엘프 여기사가 내 앞에 섰다.
**
이 빌어먹을 시련의 탑이 나를 향한 악의를 내보인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층에서 대뜸 속성 공격을 하는 필드보스가 튀어나온다거나.
3층에서는 전사에게 치명적인 전기 배리어를 쓰는 리자드맨이 나온다거나.
7층에 올라오고 나서는 초입부터 보스보다 강력한 엘리트 NPC의 습격을 받는다거나.
누구의 손길도 닿지 않은 탑을 혼자서 기어 올라가고 있는 상황이니, 대부분은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했다.
이번에도 그렇다. 내가 일반적이지 않은 루트를 타고 있는 탓이라고 한다면 딱히 할 말이 없다.
초반의 강제 패배 이벤트를 억지로 깨버리고, 엘레노어와의 호감도를 기반으로 에픽 퀘스트를 받은 상태니까.
“하 시발, 저 새끼는 쪽팔리지도 않나.”
“전하께선 현명한 선택을 하신 거다.”
불평을 담아 중얼거리자, 인상을 구기며 바로 반박해온다. 챔피언이 되어준 것도 그렇고, 충성심이 굉장하다.
못 이길 적을 상대하기 위해 최강의 아군을 부른 셈이니까, 딱히 틀린 말도 아니고.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그렇게까지 욕하고 싶은 마음도 없다.
“결투를 포기할 생각은 없어 보이는군.”
-스릉.
“당연하지, 난 누구처럼 쫄보가 아니라서.”
심장이 쿵쾅거리며 짜릿한 긴장감이 전신에 감돈다. 오랜만에 느끼는 감각이다.
나는 내가 정확히 어느 정도로 강한 건지, 다른 도전자들과 비교해서 얼마나 강한 건지, 그게 궁금했었다.
직접 맞붙어 본 랭커가 하필이면 찌르기밖에 못하는 등신이었던 탓에, 객관적인 비교가 힘들었으니까.
하지만 이 여기사는 짐작하기에 최길현보다 스펙도 높고, 실력도 월등하다.
즉, 이 녀석을 꺾는다면 나는 25층의 저층 랭커들 이상으로 강하다는 것이 확실시되는 셈이다.
“그 발언, 철회하려면 지금뿐이다만- 그럴 생각도 역시 없어 보이는구나.”
아무리 정당한 권리 행사라고 해도, 갑작스러운 결투 상대의 변경에는 당연히 합의가 필요하다.
당장 엘레노어도 저기서 뭐라뭐라 항의를 하는 듯 보였으니까.
“너, 다음에 만나면 귀 뜯어버린다고 했었지?”
하지만 나와 메르세데스는 어떠한 절차도 필요 없이, 서로를 쓰러트릴 것을 합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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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 적색의 마탑주
적색 마탑은 뭔가 바쁜 일이라도 있는지, 무척이나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여러 마법사들이 분주하게 뛰어다니고, 마법을 이용해 이런저런 물건을 급하게 옮기고 있었다.
군생활 시절, 사단장이 방문한다던 날의 우리 부대 분위기를 연상시키는 모습이었다.
“따로 방문 예정을 잡고 오신 건 아니죠? 마탑주은 지금 한창 바쁘실 시기라……”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응대하는 마법사는 바쁜 와중에도 그럭저럭 친절한 태도를 보였다.
실제로, 대뜸 찾아와 마탑주를 만나게 해 달라는 우리의 부탁도 그냥 흘려넘기지 않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래서 문제다. 이 마법사는 분명 에인의 모습을 수정구를 통해 마탑주에게 전송해주었다.
자세히 설명하기는 힘들고, 아무튼 얼굴을 보면 바로 알 거라는 내 말을 믿고 말이다.
혹시 최근에 마탑주가 다른 사람으로 바뀐 걸까? 에올피아가 만들어 준 자료가 최신화가 안 됐었다거나?
나는 곧바로 마법사에게 마탑주가 최근에 바뀌었느냐고 물었지만, 원하던 대답을 돌아오지 않았다.
“아니요, 현 마탑주님께서는 15년 전에 취임하신 이후로 지금까지 직책을 유지하고 계십니다.”
한 5년이나 10년 정도면 모를까, 15년이라면 아예 다른 가능성이 없다.
에인의 나이는 에인 본인도 잘 모르지만, 아무리 봐도 15살 이상 먹은 것처럼 보이지는 않으니.
그러면 단순히 얼굴을 못 알아볼 뿐인가? 납치당한 이후로 시간이 많이 흘러서?
“꼬맹아, 너 혹시 엄마랑 떨어진 지 얼마나 됐는지 기억하고 있어?”
“몰라.”
“그렇겠지, 애초에 그렇게 오래 지났을 리도 없고……젠장, 뭔데.”
나는 혼란 속에서 머리를 긁적였다. 그리고 혹시 몰라 잘라왔던 마탑주의 사진을 꺼내어 마법사에게 보여주었다.
이 사람이 지금 마탑주 맞느냐고, 돌아온 대답은 이번에도 ‘그렇다’ 는 것이었다. 그럼 에인이 착각한 걸까?
아니, 에인은 어휘와 상식이 부족할 뿐이지 기억력이 나쁜 건 절대 아니다.
척 보기에도 복잡한 고위 마법진을 완벽하게 똑같이 그려낼 수 있고, 주문 언어를 암기하는 것에도 능했다.
“진혁악마님, 나 엄마 못 만나는 거야……?”
에인이 눈을 크게 깜빡거리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눈물이 그렁그렁하다거나, 울먹이고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에인은 이제껏 우는 모습을 한 번도 보여준 적이 없다. 기본적으로 표정 변화가 많지 않은 꼬마였다.
그러나 이만큼 오랫동안 같이 지내다 보면, 사소한 표정의 차이도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법이다.
저건 에인이 속상할 때 짓는 표정이다. 자주 본 표정은 아니다.
“아냐, 만날 수 있어. 뭔가 착오가 있었나 봐.”
나는 에인의 머리를 토닥이며, 잠시 고민했다. 눈앞의 마법사에겐 아직 사정을 제대로 설명하지 않았다.
당연하다. 에올피아도 적색 마탑주에게 아이가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고 했었다.
그렇다면 에인은 최소한 숨겨둔 자식이라는 의미, 대놓고 요 꼬마를 마탑주의 아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저 실례지만, 혹시 마탑주님과의 관계가 어떻게 되나요? 제가 다시 연락을 드려 볼 테니……”
“하아……그게, 참, 뭐라고 해야 하나, 가족, 가족입니다. 저 말고 이 꼬마요.”
“가족이시라고요? 마탑주님의 자제분은 아닐 테고…… 들어본 적은 없지만, 혹시 친척분이신가요?”
나는 적당히 그렇다고 대답하며, 에인의 이름도 알려주었다. 마법사는 다시 수정구를 만지작거렸다.
꼬마 에인의 표정이 이 이상 나빠지는 건 사양이다. 이래도 모른다고 한다면 그냥 자식이라고 밝혀 버리자.
무언가 복잡한 사정이 있어서 알아봤는데도 모르는 척하는 거라면, 최소한 언질 정도는 줄 거다.
“저기……죄송합니다.”
수정구를 이용해 뭔가 통신을 하던 마법사가, 대뜸 고개를 푹 숙였다.
“두 분은 저희 마탑에서 나가주셔야겠습니다.”
그렇게, 당혹스러운 축객령이 내려졌다.
**
쿵 소리를 내며, 굳게 닫혀 버린 적색 마탑의 문을 바라보았다.
몇 겹의 마법으로 보안 장치가 된 문은 건드리기만 해도 약한 불씨를 튀기며 우리의 접근을 거부했다.
단순한 축객령이 아니라 출입을 완전히 금지당했다. 이유도 전혀 모르는 채로.
“진혁악마님, 우리 엄마는?”
에인은 내 옷소매를 당기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도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다.
상황이 너무 당혹스러운 나머지, 그냥 맥없이 쫓겨난 상태. 에인에게는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내가 대답하지 않자, 에인은 혼자 도도도 문으로 달려가다가 불씨와 함께 튕겨 나왔다.
-우당탕!
“야!”
나는 넘어진 에인을 일으켜 세웠다. 조그맣고 하얀 손에 울긋불긋한 화상이 생겼다.
재빨리 인벤토리에서 포션을 꺼내 상처부위에 들이부었다. 심한 상처는 아니라 금방 나았다.
“이거, 아파……진혁악마님, 나 왜 못 들어가? 엄마 못 만나는 거야?”
“아니야, 만날 수 있어. 아마 마탑이 많이 바빠서 그런가 봐.”
“하룻밤만 자면 엄마 만날 수 있다고 했는데……소원이었는데.”
중요한 순간마다 꼭 말빨이 딸리는 나는, 그저 ‘아니야, 만날 수 있어. 라는 말만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화상을 입은 에인을 번쩍 들어 올려 어깨에 앉혔다. 아무렇게나 한 말이지만 적색 마탑이 바쁜 건 정말인 것 같다.
그렇다면 거기에 이유가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주변의 행인 중 마법사처럼 보이는 사람을 찾았다.
“엄마가 바빠서 그런 걸 거야. 어디, 자, 저 사람한테 한 번 물어보자. 무슨 일인지.”
나는 그대로 저벅저벅 걸어가, 로브를 입은 남성의 앞을 막아선 뒤 물었다.
“이봐요, 뭐 하나만 물읍시다.”
“아이 씨, 댁은 뭐요?”
“적색 마탑 말인데, 평소엔 저렇게 안 바쁘지요?”
로브 남자는 은근히 짜증을 내면서도, 평범하게 ‘그렇다’ 고 대답해주었다. 나는 이어서 물었다.
“그럼 오늘은 뭐 때문에 저리 바쁘답니까? 우리가 여기 사람이 아니라, 왜 저러는지 모르겠는데.”
“나도 잘은 모르고……듣자하니 외부에서 대단한 마법사가 오늘인가 내일인가 방문하기로 했다던가?”
사단장이 방문하는 날 부대 같다는 인상이었는데, 아무래도 진짜 그런 상황이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게 에인을 모르는 체하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는 걸까.
**
그 후로, 나는 로브 남자에게 몇 가지를 더 물었다. 주로 적색 마탑에 대하여.
적색의 마탑주는 어떤 인물인지, 어떤 연구를 하고 어떤 생활을 하는지, 있는 대로 묻고 또 물었다.
젊은 나이에 뛰어난 마법적 재능을 바탕으로 출세한 불세출의 화염 마법사, 여러 여성 마법사들의 존경을 받는 존재.
마탑주가 되었을 때의 나이는 무려 스물하나, 당시 역대 최연소의 마탑주로서 명성이 자자했다고 한다.
그 밖에는 마법사답게 성격이 다소 괴팍한 면이 있었다는 점.
그리고, 젊은 나이에 성공한 원인인지 곁에 남자가 없었다는 이야기.
여성 마법사는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르면, 연구는 포기하고 적당한 신분의 남자에게 들러붙는 일이 흔하다는 모양인데.
적색 마탑주는 그런 기미는커녕, 근처에 이성을 두는 일 자체가 거의 없었다는 이야기다. 느낌이 좋지 않다.
그렇다면, 에인은 대체 어디서 어떻게 얻은 자식인 걸까. 애초에 아이 아빠는 또 누구지?
나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내 다리 뒤에 숨어있는 에인을 내려다보았다.
“진혁악마님, 나 정말로 엄마 볼 수 있어……?”
“그래, 그렇다니까. 이때쯤에 나온다잖아.”
“응, 나 착하게 기다릴게. 엄마 보고 싶으니까.”
로브 남자에게 들은 중요한 이야기가 하나 더, 바로 적색 마탑주는 매일 일정 시간마다 마탑의 설비를 점검한다는 것.
본인이 직접 만든 결계 장치의 유지 보수를 위해서라는데, 그때라면 아마 마탑주를 직접 볼 수 있을 거다.
어떻게든 본인을 직접 만나서, 사정을 듣건 어쩌건 할 테다. 이번에는 조금 억지를 써서라도.
그리 생각하며 가까운 벤치에 앉아 있을 때였다. 돌연 에인이 폴짝 뛰어내려 어디론가 달려가기 시작했다.
“엄마다.”
마법까지 써서 달리고 있는 건지, 속도가 무척이나 빨랐다. 나는 곧바로 에인을 쫓아갔다.
저 멀리 적색 마탑의 입구에서 모습을 드러낸 붉은 로브의 여성이 있었다.
거리가 멀지만, 확실히 알아볼 수 있었다. 받아온 사진이랑 거의 똑같이 생겼다. 적색 마탑주가 틀림없다.
“잠깐, 꼬맹아. 넘어지겠다.”
다만 마탑주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 곁에는 로브를 뒤집어쓴 적색 마탑의 마법사들이 여럿 자리 잡고 있었다.
잽싸게 달려간 에인은 작은 몸집을 살려 다른 마법사들을 뚫고, 대번에 마탑주에게 달라붙었다.
“엄마!”
그 순간, 적색 마탑주의 표정이 눈 깜짝할 사이에 몇 번을 연달아 바뀌었다.
얼굴을 스쳐 지나간 감정은 한둘이 아니었지만, 그중에서 확실히 드러난 것은 두 가지. 당혹과 경악.
그조차도 일반적인 시야로는 포착하기 힘들었겠지만, 나는 남다른 반응 속도와 [사고 가속] 덕분에 알아볼 수 있었다.
잠깐 일렁였던 감정은 금세 사라지고, 적색 마탑주의 얼굴은 다시 무표정으로 굳어졌다.
그리고 다음 순간- 마탑주는 다시 인상을 찌푸렸고, 곧 입술 끝에서 짧은 한 마디가 튀어나왔다.
“이, 더러운 것이……”
이어서, 로브 자락 사이로 갑작스레 튀어나온 다리가 에인을 거칠게 걷어찼다.
-퍼억!
회색 아이가 먼지와 함께 뒹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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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 우주에 배신당한 날
털썩 소리와 함께, 발에 차여 내팽개쳐진 에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다음으로는 불쾌하다는 듯이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적색 마탑주와 주변의 마법사들을.
마지막으로는 조금씩 웅성거리고 있는 다른 시민들까지- 주변 일대의 모습을 동시에 시야에 담았다.
마력으로.
“!”
광역으로 전개한 마력감지에 마법사들이 반응한다. 청색 마탑에서도 광역 탐지는 금지라고 했던가.
마탑주를 포함한 주변 마법사들의 보유한 마력을 통해 수준을 가늠해 보고, 뚜둑거리는 손을 가볍게 푼다.
마법사들은 내 스스럼없는 마법감지를 불쾌하게 받아들이고는, 차단 마법을 전개해 감지를 끊으려 시도했다.
근데, 니들 수준으로 내 마력을 막을 수 있을 것 같냐. 좆밥 새끼들이.
아직 마검이던 때의 칼레온을 찍어 눌렀던 것처럼, 마력의 출력을 앞세워 저급한 마법식을 짓뭉개 부순다.
몇 명이 전개한 마법을 그렇게 찍어누르니, 개중 나름의 수준 높은 마법사가 나서서 마법을 전개했다.
무식하게 힘으로 찍어누르기 힘든 수준의 고위급 차단 마법, 곧 탐지는 끊겼지만 이미 견적은 나왔다.
이 놈들이 대충 어느 수준인지, 가진 마력의 양은 어떻고 마법사로서의 격은 또 어떠한지.
하지만 검은 아직 꺼내지 않았다. 복장이 터질 것 같지만, 지금은 진정해야 할 때다.
“후우……”
숨을 크게 내쉬자 조금 침착함이 돌아오는 것 같았다. 나는 일단 에인의 상태를 살폈다.
순간적으로 방어를 펼친 건지, 아니면 그냥 그리 세게 걷어차이지 않은 건지, 상처는 없어 보였다.
딱히 아파하는 것 같지도 않고, 잠시 멍하니 바닥에 주저앉아 있을 뿐이다. 다행이었다.
만약 꼬맹이가 피나 눈물 중 하나라도 흘리고 있었다면, 상황은 지금과 많이 달랐을 것이다.
“엄마 맞는데.”
에인은 평소와 같은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곤 다시 일어나 도도도 달려나갔다.
나도 에인을 따라 움직였다. 길을 막는 행인들이나 마법사들은 어깨로 쳐내고 밀치며 앞으로 나갔다.
에인은 자신을 발로 차버렸던 적색 마탑주의 앞을 가로막고는, 큰 소리로 말했다.
“엄마, 나야. 나 엄마 보고 싶었는데.”
적색 마탑주는 다시 한번 인상을 찌푸렸다. 으득, 이를 악무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한편 주변에는 웅성거림이 퍼져 나갔다. 마탑주가 발로 차버린 어린아이가 대뜸 ‘엄마’ 같은 말을 하고 있었으니.
독신으로 유명한 적색 마탑주에게 아이가 있었다- 그런 소문이 퍼지기에 딱 좋은 상황이었다.
“엄마가 저기서 기다리라고 했는데, 모르는 사람들이 나 데려갔어. 나쁜 사람들이었는데 진혁악마님이 나 구해줬어.”
발을 멈춘 적색 마탑주 앞에서, 에인은 평소보다 빠른 목소리와 몸짓으로 그동안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이거 봐, 나도 이제 엄마처럼 마법 할 수 있어. 이거 진혁악마님이 만들어 준 건데, 여기 그림은 엄마 그림이야.”
에인은 자신의 완드에 새겨진 그림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마법사의 문장 옆에 직접 그려넣은 알아보기 힘든 그림을.
“엄마는 나 안 보고 싶었어……?”
적색 마탑주는 차가운 눈으로 에인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조금 전에 지었던 것과 같은 표정으로 말했다.
“사람을 잘못 본 모양이구나, 애야. 나는 네 엄마가 아니란다.”
어투는 상냥했지만, 목소리에 담긴 감정은 분명한 경멸과 혐오를 나타내고 있었다.
“아닌데, 엄마 맞는데……왜 아니라고 해?”
에인은 그렇게 말하며 마탑주를 향해 손을 뻗었다. 마탑주는 옷자락을 펄럭이며 그 손을 떼냈다.
“더러운 손으로 어딜 만지려고…나는 너 같은 자식 둔 적 없어, 별 거지 같은 것이 달라붙어서는.”
다음 순간, 마탑주의 손에서 작은 화염이 치솟았고, 뱀의 혀처럼 움직이는 화염은 에인을 향해 닥쳐 들었다.
내가 두고 볼 수 있는 건 거기까지였다. 나는 곧바로 에인을 내 뒤로 잡아당기며 화염을 막아내었다.
-퍼엉!
머리에 열이 오른 채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건 알지만, 이젠 상관하지 않겠다.
**
나의 [화염 내성] 레벨은 18층 수준에서는 가히 절대적이라고 칭해도 모자람이 없다.
하지만, 마탑주가 쏘아낸 화염을 막아낸 팔뚝이 화끈거린다. 마탑주급에게는 당연하다면 당연한 위력일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결코 어린아이에게 가볍게 쏘아내도 되는 화력이 아니다. 에인은 이 불꽃을 막아낼 수 있었을까?
잘 모르겠지만, 만약 막지 못했다면 분명 전신이 불타고 말았겠지.
그리고 이 마탑주는 딱히 에인이 방어 마법을 쓸 수 있다고 생각하진 않았을 거다. 죽일 심산이었던 거다.
나는 마탑주의 혐오에 찬 말을 들으면서도, 혹시나 모를 가능성을 생각해 마지막까지 참고 있었다.
어쩌면 다소 과격한 방법을 써서라도, 에인과의 관계를 부정해야만 하는 중요한 이유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명백히 살의가 느껴지는 불꽃을 쏘아낸 이상, 그따위 사정은 아무래도 상관없어졌다.
적어도 그게 에인을 위한 사정은 아니었을 게 분명하니까. 그렇다면 더 볼 것 없지.
“너는……”
마탑주는 맨 팔뚝으로 불꽃을 막아낸 나를 보며, 작게 인상을 썼다.
못 알아볼 리가 없지, 조금 전에도 대놓고 광역 탐지를 전개했었고- 애초에 수정구로 연락을 받았었을 테니까.
적색 마탑주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녀석은 품 안에서 완드를 만지작거리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 꼬마의 보호자인가, 타죽기 싫으면 그 더러운 것 데리고 눈앞에서 사라져라.”
마탑주의 방대한 마력이 내 주변을 압박해왔다. 보통이라면 숨쉬기도 버거워할 강력한 압박이다.
하지만 내겐 가소로울 뿐이다.
타 죽기 싫으면 꺼지라고? 나를 태워 죽이는 게 과연 가능할 것 같은가?
나는 조용히 검과 방패를 꺼냈다. 마탑주도 전투태세를 갖추는 나를 보며 마력을 끌어올렸다.
그와 동시에 내 마력감지에 무언가 걸렸다. 두 사람 간에 주고받은 마법적 통신, 전음이었다.
- 확실히 처리했다며, 이것들은 다 뭐야?
- 죄송합니다, 곧장 조치하겠습니다.
- 됐어, 이렇게 된 김에 내가 직접 손쓸 테니.
엿듣는 것은 가능했지만, 누가 누구에게 말하고 있는 것까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짐작은 간다.
분명 마탑주와 그 부하 마법사중 하나겠지. 청색 마탑주처럼 전속 비서 같은 게 있을지도 모른다.
자세한 건 천천히 물어보면 된다. 대답할 수밖에 없는 상태로 만들어서.
그러나, 내가 검을 휘두르며 앞으로 나가기 직전- 조그만 그림자가 나를 막아 세웠다.
“진혁악마님, 안 돼.”
회색 머리의 꼬마, 에인이었다.
**
적색 마탑주를 그냥 돌려보내고, 가까운 벤치에 앉아 얕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에인은 내가 전투태세를 갖추는 것을 보자마자, 재빨리 나를 막아세웠다.
엄마랑 싸우지 말라고, 소원이라고 말하면서. 엄마를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이 꼬마에겐 당연한 일이었겠지.
이건 내 잘못이다. 에인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고, 내 독단으로 ‘엄마’를 베어버리려 했으니.
옳고 그름을 떠나, 아이 앞에서 해도 되는 행동은 분명 아니었다. 머리에 너무 열이 오른 탓이다.
에인은 벤치에 앉아 한동안 말이 없었다. 짧은 다리를 파닥거리며 고개를 푹 숙이고 있을 뿐.
나이트 엘프의 비술을 이럴 때 쓸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진혁악마님.”
잠시 후, 에인이 마침내 고개를 들어 올리며 입을 열었다.
“엄마는 내가 싫은가 봐, 안 보고 싶었나 봐……나는 엄마가 제일 좋은데.”
질문이 아니었다. 한참을 혼자 생각한 끝에 결론을 내린 것이었다. 드문 일이다.
사실, 나도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다.
마탑주의 자식이 혈사교에게 그렇게 허무하게 납치됐다는 사실부터 이상했다.
에인이 상식이라곤 전혀 모른다는 점도, 내가 끓인 잡탕죽 따위를 맛있다고 좋아했던 것도 그렇다.
자신의 성별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고, 엄마가 ‘에인’이라고 부르는 게 편하다고 했던 말도.
‘여기서 기다려’라는 말에 순순히 기다리다가 그대로 납치를 당한 것도- 돌이켜 보면, 하나같이 수상했다.
하지만 그 상상이 너무 불쾌하고 기분 나빠서, 나도 모르게 외면하고 있었던 거다.
그래, 나는 에인에게 나 자신을 겹쳐보고 있었다.
비슷한 처지, 비슷한 마음. 어쩌면 결말마저도 나와 비슷할지도 모른다며.
‘엄마는 나를 원하지 않는다.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런 일만은 제발 아니었으면 해서.
울컥 치밀어 오르는 뜨거운 감정을 겨우 삼키며, 에인의 머리 위에 조심스레 손을 얹었다.
“아니야.”
말을 고른다. 조심스럽게.하지만 내 서툰 말재주로는 에인을 위로할 수 없다. 말뿐이라면.
“꼬맹이 네가 잘 몰라서 그래, 어른들은 항상 바쁘고 사정이 많거든. 그냥 조금 오해가 있는 것뿐이야.”
회색 머리칼을 마구 헝클어트리며, 벤치에서 일어나 인벤토리를 열었다.
“소원 들어주기로 했잖아, 조금만 기다려봐. 금방 가서 오해를 풀고 올게.”
칼레온을 꺼내 상급 마법석을 끼우고, 검령을 불러냈다.
“자, 네 스승님이랑 같이 숙소에 가 있어. 어디인지 기억하지?”
“응……”
“그래, 현자가 되겠다는 녀석이 이런 걸로 기죽으면 안 되지.”
나는 검령에게 꼬마를 잘 지키라고 단단히 신신당부했다. 검령은 보기보다 에인을 꽤 아끼는 편이다.
상급 마법석까지 끼워줬으니, 18층의 평균 수준을 생각해보면 차고 넘칠 만큼 강력한 경호원이 되어 줄 거다.
그렇게 에인을 숙소로 돌려보내고, 나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홀로 적색 마탑을 찾았다.
“오해를 풀어야지.”
아주 심각한 오해를 한 모양이니, 오해를 푸는 과정도 좀 심각할 수 있겠어.
뭐, 악마가 소원을 이뤄주는 방법으로는 딱 맞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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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 마탑 붕괴
적색 마탑의 문은 여전히 맹렬한 화염으로 감싸여, 굳게 닫혀 있었다.
하지만 세상에 진정한 의미로 닫힌 문은 없다. 아직 안 열린 문만 있을 뿐이지.
-콰앙!
오러를 두른 발길질로 걷어찬 문짝이 고속으로 날아가, 마탑 안쪽의 벽에 부딪히며 조각났다.
마탑 로비에 있던 마법사들은 저마다 다른 반응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이목이 끌리는 건 나쁘지 않다.
요즘은 살짝 나아진 감이 있지만, 나는 기본적으로 말재주도 사회성도 무척 나쁘다.
“마탑주 나와.”
그래서 이번에는 짧게 말하고, 검과 방패에 마력을 둘렀다.
내 뜻을 이보다 분명하게 전달할 방법은 없으리라. 안 나오면 쳐들어갈 거라고.
마탑의 마법사들은 여전히 상황 파악을 제대로 못 한 상태였다. 사람이 칼 들고 쳐들어왔는데 반응하고는.
“저기요, 뭐 하는 분이신지 모르겠는데……”
로브를 쓴 남자 마법사 하나가 내게 다가와 어깨에 손을 얹었다.
나는 남자의 손을 떨쳐내고, 왼손에 든 방패를 남자의 배에 힘껏 꽂아 넣었다.
-으적.
“흐억……”
남자 마법사는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곧바로 쓰러졌다. 이어서 [위압] 스킬을 전개했다.
뭐 하는 분이신지 모르겠다고, 그럼 이젠 알겠네. 내가 뭐 하러 온 새끼인지.
[라이트닝 차지]와 [대전]을 발동해 무기와 전신에 전격을 둘렀다.
파직거리는 번개가 튀기 시작하자, 마법사들의 얼굴에 당황이 어린다. 나는 다시 한번 말했다.
“마탑주 나오라고.”
내가 말로만 떠드는 것도, 마법사들이 얌전하게 구는 것도, 모두 거기까지였다.
가장 먼저 움직인 것은 벽에 몸을 기댄 채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스태프를 든 여자 마법사였다.
혼자 ‘나는 다르다’ 라는 분위기를 물씬 풍기고 있던 마법사의 곁에서 붉은 마법진이 연달아 소환되었다.
전투에 들어서며 예민하게 날이 선 감각과 마력감지는 그 마법진이 무엇을 토해내려는지 정확하게 눈치챘다.
매직 미사일과 유사한 화염 속성의 기초 공격 마법, 사용된 마력의 양과 형태를 보면 연발식이 틀림없다.
하지만 마법진이 불길을 토해내는 것보다, 내가 그 마법사의 지척까지 접근하는 것이 훨씬 빨랐다.
[신속]
[혼신]
두 가지 버프 스킬을 사용한 내 움직임을, 책상물림만 하던 마법사 따위가 쫓을 수 있을 리가 있나.
단번에 도약하며 마법사의 명치에 무릎을 꽂아 주자, 얇은 얼음이 깨지는 듯한 감각과 함께 마법사가 혼절했다.
아마 방어 마법을 하나 두르고 있던 것 같은데, 너무 약해서 무슨 수를 쓸 것도 없이 박살 내버렸다.
“뭐 해, 저거 막아!”
그 사이 전투태세를 갖춘 마법사들이 소리쳤다. 그런 말을 할 시간에 주문이라도 외웠어야지.
“파, 파이어 애로우!”
누군가의 영창과 함께 불화살이 쏘아졌다. 대충 손등으로 쳐내고 가까운 마법사의 턱을 후려쳤다.
-우둑.
턱 관절이 가볍게 박살 나며 픽 쓰러진다. 내가 생각해 뒀던 마법사를 무력화하는 가장 빠른 방법이다.
주문은 입으로 외우는 것, 죽통을 박살 내 놓으면 무영창이 불가능한 마법사는 즉시 무력화된다.
-삐이이이익!
마탑 안에 돌연 큰 경보음이 울려 퍼진다. 동시에 마탑에 장치되어 있던 여러 마법이 발동한다.
이제야 마탑 전체의 비상 상황이라는 생각이 든 모양이다. 마탑주도 상황을 눈치챘겠지.
“기어나와라, 마탑주.”
적색 마탑이 통째로 무너지는 꼴을 보고 싶지 않다면.
**
마법사와의 전투 경험은 몇 번 있었지만, 이렇게나 많은 마법사를 상대하는 건 처음이다.
하지만 상관없다. 원래 다수를 상대로 한 섬멸전이야말로 솔플러인 나의 주력 분야였으니까.
저 멀리서 완드를 들고 있던 마법사 다섯 명이 거대한 마법진을 그리며, 화염을 쏘아 냈다.
다수의 마법사가 힘을 합쳐 전개하는 고화력 마법, 다만 마법진의 형태는 조금 전에 다른 놈이 쓰는 걸 봤다.
폭발하는 화염의 탄환을 공중에 형성한 뒤, 다섯 차례에 걸쳐 축차로 분사하는 화염의 산탄총.
-콰광! 쾅! 콰과광!
축제의 불꽃놀이처럼 눈앞을 향해 닥쳐오는 형형색색의 불길을- 무시하고 그냥 전진한다.
[화염 내성]은 내가 가장 먼저 얻은 내성 스킬 중 하나, 그걸 뚫으려면 다섯이 아니라 오십 명은 힘을 합쳤어야 했다.
“히, 히익! 왜, 왜 이것도 안통하는데에!”
앙탈을 부리듯 소리치는 마법사의 얼굴을 벽에 처박아 버리고, 검을 휘둘러 나머지 네 명의 아래턱을 베었다.
무영창이 가능한 마법사 하나가 저항하고자 화염의 사슬을 소환했지만, 사슬은 일 초 만에 부서졌다.
-콰직!
다섯의 마법사를 제압한 뒤에는, 다른 마법을 캐스팅하고 있는 놈들부터 우선으로 노렸다.
인벤토리에서 꺼낸 쇠구슬을 투척하는 것만으로, 순식간에 마법사의 숫자가 우수수 줄어들었다.
혼비백산에 빠진 몇몇 마법사들은 아예 등을 보이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굳이 그들까지 쫓지는 않았다.
나는 딱히 적색 마탑을 박살 내러 온 게 아니다. 마탑주를 불러내기 위해 이러고 있을 뿐이지.
“어, 어떻게, 분명 마탑의 ‘옥염 결계’가 몸을 짓누르고 있을 텐데……”
아직 완드를 들고 전투중인 마법사 하나가 그런 소리를 했다. 뭔가 방해 효과를 가진 마법이 전개되고 있던 모양.
그러고보니 [민첩] 스탯이 살짝……정말 살짝 낮아져 있었다. 효과가 너무 약해서 눈치도 못 채고 있었군.
“이 건방진 놈, 행패는 거기까지다!”
그 때, 의기양양한 웃음을 지으며 마탑에 어울리지 않는 모습을 한 떡대 하나가 나타났다.
붉은 색으로 칠해진 갑옷을 입고, 손에는 거대한 메이스를 들고 있다. 키만 해도 거의 2m는 되어 보인다.
얼핏 보기에는 그냥 중갑 전사지만, 메이스는 제대로 화염으로 불타고 있고- 갑옷에는 마법진이 떠올라 있다.
오호라, 가끔 있다고 들었지. 마법을 이용해 근접에서 전투하는 배틀메이지 타입인가.
“뜨거운 맛을 보여주지…플레임 차지!”
중갑의 배틀메이지는 불타는 메이스를 봉처럼 빙빙 돌려대기 시작했다.
“지랄하네.”
-쾅!
놈은 그대로 오러를 두른 내 주먹에 맞아, 메이스와 갑옷이 한번에 박살 나며 뻗어버렸다.
그 따위로 눈앞에서 폼잡고 있으면, 그냥 샌드백 하겠다는 의미 아닌가?
조금 전부터 계속 방해받고 있지만, 어떻게든 탐지를 펼쳐 보니 이걸로 1층은 거의 전멸.
나는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는 채로 다음 층으로 올라갔다. 그곳에는 또 폼 잡고 있는 남자 마법사가 있었다.
“거기까지다, 침입자. 내가 있는 한 마탑주님께는 손가락 하나 못 댈 거다.”
-와장창!
“이제 없으니까 댈 수 있겠네.”
거슬리는 마법사를 창 밖으로 던져버리고, 지나는 길에 있는 어중이떠중이들은 [라이트닝 차지]로 기절시켰다.
급이 낮은 마법사들은 숲에서 만났던 몬스터들만도 못해서, [대전]을 켜고 스치는 것만으로 쓰러트릴 수 있었다.
그렇게 계단을 조금 올라가고 나니, 돌연 거대한 마력의 덩어리가 감지에 걸렸다.
-위이이이잉!
[초감각]으로 강화된 청력에 들리는 엔진이 돌아가는 듯한 소음, 그리고 느껴지는 열기.
허공의 마력이 일제히 누군가의 통제 아래 들어가, 거대한 마법을 짜내고 있다.
이같은 마력 조작과 운용이 가능한 것은 당연히 마탑주 하나뿐이겠지.
즉, 저 마법이 만들어지고 있는 방향으로 도약한다면 단번에 마탑주를 찾을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그렇게 한다면 저 마법이 나를 정면으로 덮칠 것이라는 점- 별로 대단한 문제는 아니다.
직후, 완성된 마법진이 토해내는 화염은 커다란 뱀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쾅!
나는 스킬로 스탯을 증폭시키며, 그 거대한 뱀을 향해 정면으로 뛰어들었다.
**
불꽃의 뱀은 화염 마법의 최고 전문가인 적색의 마탑주가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 일격이었다.
당연히 아무런 피해도 없을 수는 없었다. 전체적으로 무시할 수 없을 만큼 불타버렸다.
내 몸이 아니라, 옷과 갑옷이.
인벤토리에서 다른 갑옷을 꺼내 장착하고, 적색 마탑주의 앞에 섰다.
마탑주는 인상을 굳게 찌푸린 채, 주변에 화염 속성의 마법진을 수십 개나 전개하고 있었다.
마법사는 자신의 공방에서 더욱 강해진다. 하지만 저 숫자의 마법진은 좀 이상하다.
마력감지로 전말을 파악해 보니, 마탑주는 적색 마탑의 온갖 설비를 자신만을 위해 사용하고 있는 것 같았다.
“너, 조금 전에 그 녀석이지. 목적이…뭐야. 왜 나를 찾았지…?”
마탑주는 긴장한 표정으로 그렇게 물었다. 깽판을 친 보람이 있군, 대화를 나누기에 적합한 태도가 되어 있다.
내 목적은 단순하다. 마탑주에게서 에인에 대한 솔직한 이야기를 듣는 것, 그리고 가능하면-
“글쎄.”
-생각해 둔 것은 있지만, 아직 그것을 입 밖으로 낼 차례는 아니었다.
나는 딱히 마탑주를 죽이러 온 건 아니다. 적색 마탑을 무너트리려고 온 것도 아니고.
상대를 협상 테이블에 앉힐 수만 있다면, 굳이 이 이상 폭력을 행사할 이유는 없다.
딱 하나만 빼면.
“한 대.”
빡친다.
“한 대만 맞아라.”
목적이고 지랄이고, 일단 저 씨발년의 면상에 한 대 꽂아 주지 않고서는 분이 안 풀린다.
에인을 걷어찬 값으로, 너도 일단 딱 한 대만 맞고- 이야기는 그다음에 하자.
존나 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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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 에인
나는 이미 한 번 마탑주급의 마법사와 싸워본 적이 있다.
액체금속의 자유로운 조작을 무기로 삼는 청색 마탑주, 쉽게 이기긴 했지만 마냥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그때는 에인을 지키기 위해 일부러 공격을 맞아 준 거긴 했지만, 한 방 한 방이 무시 못할 위력을 품고 있었지.
그 청색 마탑주와 눈앞의 적색 마탑주를 비교해보면 어느 쪽이 더 강할까- 길게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아마, 이 쪽이 훨씬 강하다.
마법사로서의 기량만 놓고 보자면 동등하다고 생각되지만, 보유한 마력량에서 차이가 크게 갈린다.
어림잡아 두 배 이상, 거기에 마탑의 설비가 공급해주는 양까지 포함하면 열 배는 될 거다.
뭐, 마탑주라는 자리를 마법 대결로 정하는 것도 아닐 테니까. 전투능력의 차이가 커도 이상하지는 않지.
“헛소리를……!”
딱 한 대만 맞으라는 내 말에 인상을 찌푸리며, 마탑주는 수십 개의 마법진을 작동시켜 선제공격에 나섰다.
다음 순간, 눈앞을 가득 메우는 불꽃의 파도. 이건 못 피한다.
마탑주의 공격속도가 빠르고 어쩌고가 문제가 아니라, 그냥 범위가 개지랄맞게 넓어서 못 피한다.
-화르륵!
그래서 그냥 안 피했다. 방패를 앞세우고 오히려 불길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묘하게도 불길은 벽처럼 물리적인 저항력을 가지고 내 몸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때려눕혔던 마법사 중 몇 명이 비슷한 마법을 사용했었다. 중량을 가진 단단한 불꽃.
이대로 나를 탑 바깥까지 밀어낼 셈인가 본데, 그러기에 이 정도로는 좀 부족하지.
[혼신]
-흐읍.
나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방패를 쥔 손에 힘을 넣으며 그대로 밀고 나갔다.
거대한 불꽃의 파도가 반대로 밀려 나간다. 하지만 마탑주는 당황하지 않고 이어서 다른 마법을 전개했다.
목 안쪽이 묘하게 따끔거렸다. 공기를 들이마시며 화염이 안으로 들어온 모양이다.
그리고, 뭔가 호흡하기가 어색한데……이것 봐라, 산소가 아예 없어졌잖아.
마법의 불꽃은 기본적으로 마나를 연소시켜 만드는 것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일부러 산소를 태운 거겠군.
화염의 벽으로 나를 밀어내면서, 동시에 질식을 유도할 생각이었던 것 같다. 확실히 이건 꽤 유효한 공격 방식이다.
범위가 넓어 피할 방법이 없으면서, 강력한 물리력으로 몸을 밀어내는 화염의 파도에 더해.
산소를 태워버려 호흡도 곤란하게 만들고, 목구멍으로 침투하는 불길로 몸 안쪽을 함께 태워버리는 트랩.
-콰광! 쾅!
거기에 이어서 날아오는 고밀도 화염의 탄환까지, 한 번에 수를 아낌없이 털어서 싸우는 타입이다.
이전에 청색 마탑주에게 마법사간의 전투에 대해서 물은 적이 있었다.
그러자 마탑주는 ‘마법사간의 전투는 체스와 같다’ 라고 비유하며 설명을 늘어놓았다.
다만 그냥 체스가 아니라, 눈과 귀를 모두 가리고 진행하는 블라인드 체스 같은 것이라 말했었지.
상대에게 어떤 기물이 남아 있는지도 모르고, 어떤 수를 뒀는지도 모르며.
누구의 차례인지도 모르고, 사소한 반칙을 잡아낼 방법도 없이, 더듬더듬 진행하는 체스.
듣는 입장에서는 그게 맞는 비유인가 싶었는데, 적색 마탑주의 전투방식을 보다 보니 이해가 된다.
나를 향해 날아드는 수많은 마법은, 체스로 치면 주요 기물을 모조리 쏟아부어 펼치는 공세와 같다.
수많은 계산과 심리전을 엮어 펼치는, 한정된 공간 안에서의 예술적인 두뇌 싸움.
하지만 이건 마법사간의 싸움이 아니다. 마탑주는 체스를 두고 있지만, 나는 그럴 생각이 없다.
“마력강화.”
-쿠르릉!
내 몸에서 분출된 맹렬한 마력에 의해, 화염의 탄환은 튕겨 나가고 불꽃의 파도는 갈라진다.
마탑주가 퀸, 나이트, 비숍, 룩을 모두 동원해 포진을 펼치는 것이 가능하다면.
나는 폰 10마리를 제물로 바쳐 체크메이트의 거신병을 소환해, 체스판을 둘로 쪼개는 게 가능하다.
번거롭게 머리를 굴리고 수 싸움을 펼칠 필요가 없는, 압도적인 힘의 차이.
-저벅, 저벅, 저벅.
화염의 파도를 뚫고 천천히 다가간다. 마탑주는 사색이 된 채로 나를 마냥 올려다보았다.
내가 전력으로 후려치면 마탑주는 분명히 죽겠지. 그러니까, 마력강화는 다시 풀고- 아이템도 장착을 해제한다.
[철벽]이나 [혼신] 같은 버프 스킬도 해제하고, [약점 간파] 등의 스킬도 발동하지 않게 제어하고.
마력도 오러도 두르지 않고, 그저 순수한 육체의 힘만을 주먹에 담아 휘두른다.
존나, 쎄게.
-꽈직!
뭔가 으깨지는 소리가 났다.
**
딱 한 대만 맞자고 했지만, 정말로 한 대만으로 끝낼 수는 없었다.
사방으로 흩날린 불꽃, 부서진 벽과 금이 간 바닥, 그리고 이따금 튀어 있는 핏자국들.
진득하게 ‘오해’를 푼 흔적이었다. 그 참혹한 한가운데에서, 마탑주는 숨을 헐떡이며 입술을 달싹였다.
“…세상은, 역시… 불공평해.”
마탑주의 눈은 초점을 잃은 채로 텅 비어 있었고, 목소리는 마치 자기 자신에게 말하듯 흘러나왔다.
“왜… 왜 나만… 왜 나한테만… 이런 괴물들이 몰려오는 건데. 대체… 왜…”
마탑주의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뭘 그렇게까지 억울해하는 걸까.
-우득!
“아악!”
나는 마탑주의 어깨를 짓밟았다. 뼈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목 안쪽에 걸려 있던 질문들이 하나씩 터져 나왔다.
“너, 에인의 부모가 맞지? 그 애랑 무슨 관계야. 그리고 왜 그 애를 모르는 척한 거지- 당장 말해.”
마탑주는 내 물음에 실로 격하게 반응했다. 돌연 미친 듯이 웃고, 울다가, 불길을 토해 내듯 말을 뱉었다.
“……그래, 내가 낳았어. 내가 낳았지만……왜 내가 그 더러운 것의 부모여야 하는데?”
“뭐?”
“낳고 싶어서 낳은 것도 아니고, 배고 싶어서 밴 것도 아니야, 내 피가 섞인 것도 아니고.”
계속해서 바뀌어 가던 마탑주의 표정은 이내 조소로 끝맺어졌다.
“미치광이 노인네가 내 뱃속에 쑤셔 넣은 악마의 잡종……그걸 왜 내 자식이라 불러야 하는 거지?”
마탑주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로브 자락을 풀어헤치고, 그 밑의 셔츠를 뜯어냈다.
훤히 드러난 아랫배에 새겨진 칼자국과, 옅은 마력이 느껴지는 검은 자국.
검은 자국에서는 호문쿨루스와 [심연의 파편]에서 느낄 수 있었던, 불길한 마력이 새어나오고 있었고.
그 자국 밑에는 칼로 새긴 듯한 숫자가 적혀 있었다. 마탑주는 그것을 소리내어 읽었다.
시스템이 제공하는 번역 기능이 멋대로 의역한 탓에, 알아들을 수 없었던 단어.
“에인(Ain).”
새겨진 숫자는 1 이었다.
“그 더러운 잡종을 부르는 호칭은 이거면 되잖아……?”
붉은 마녀는 담담한 조소와 함께, 자신에게 있었던 비극을 읊기 시작했다.
“그게 몇 년 전이었더라……”
**
그게 몇 년 전이었더라, 나는 시골에서 갓 상경한 어린 마법사였어.
역사에 이름을 남길 대마법사가 되겠다는 포부는 있었지만, 그만한 능력은 없었던 멍청하고 우둔한 마녀였지.
하지만 사실 능력의 유무는 중요하지 않았어. 그때나 지금이나, 여자 마법사는 늘 편견의 대상이었거든.
‘마법을 배우는 여자는, 적당히 출세해서 좋은 집안에 시집가려는 생각밖에 안 한다.
마탑에서 한 자리를 꿰차고 있는 마법사라도, 여자라는 이유로 언제나 그런 말과 시선을 받고 사는 처지.
하물며 능력도 부족하고 멍청하기까지 한 촌뜨기 마녀에겐 어땠을까. 받아주는 마탑이 있을 리 없잖아?
커다란 꿈을 안고 상경했지만,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방황하던 나에게- 그 남자가 다가와 말을 걸었어.
‘얘야, 내 밑에서 마법을 배워 보지 않겠니?
나이는 많았지만, 어딘가 묘하게 매력적인 남자 마법사였지. 지성이 가득 담긴 짙은 회색 눈이, 어쩜 그렇게 멋져 보였을까.
남자는 겉모습만 매력적인 게 아니었어. 그는 전 대륙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실력의 마법사이기도 했지.
‘나는 이런 사람이란다.
그가 눈앞에서 펼쳐 보인 마법에, 나는 단숨에 시선을 빼앗겼어. 그토록 아름답고 압도적인 마법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거든.
어쩌면 그때 나는- 시골 아이들이 나를 보고 ‘마법사’라며 외치던 때의 반짝이던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는지도 몰라.
나는 곧바로 그가 누구인지 알아보았어. 마법의 길을 걷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그의 이야기를 들어봤으니까.
수백개의 마법을 개발하고, 수십 개의 일화를 남기고, 몇 개의 전설을 써낸 남자.
워낙에 두문불출하는 탓에 실존 여부마저 의심받고는 하던 신비의 마법사가, 내 눈앞에 나타나서는.
촌뜨기에 불과하던 나의 재능을 알아봐 주고, 먼저 제자로 들어오지 않겠냐고 제안했지.
마법에 대한 욕심만큼은 누구보다 컸던 어린 마녀가, 그 제안을 어떻게 거절할 수 있었겠어.
악마의 유혹이었던 거지, 말 그대로.
‘그래, 잘 생각했다.
나는 우물쭈물하면서도 건네진 손을 잡았고, 그렇게 나는 그 사람의 제자가 되었어.
남색 마탑, 백색 마탑, 갈색 마탑의 마탑주를 모두 겸하고 있는 마법 학회의 최고 원로.
궁정마법사 대부분의 스승이자, 주문 언어학자이자, 아케인 칼리지의 명예교수.
동시에 전 대륙을 떠도는 방랑 마법사라고도 알려진 살아 있는 신비.
“재버워크.”
나는 그의 실험체가 되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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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 악마의 이름을 부르지 말라
내게 손을 뻗던 그 순간부터, 남자는 이미 마법의 정점에 도달해 있었어.
아니, 그의 말을 빌리자면- ‘인간’이라는 종족이 ‘개체’로서 도달할 수 있는 한계의 문턱에 닿아 있었지.
하지만 그는 어떤 마법사와도 비견되지 않는 신적인 능력을 갖추고 있음에도, 더욱 높은 영역으로 나아가기를 원했어.
그가 벌인 모든 실험은 결국 인간이라는 종족과 그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에 목적이 있었지.
그리고, 내게 가해진 첫 번째 실험은 마력 회로의 이식이었어.
인간이 보유할 수 있는 마력 회로의 최대 숫자는 총 220획.
그 중 활성화된 회로의 숫자는 개인마다 차이가 있지만, 무슨 짓을 해도 그 이상으로 늘릴 수는 없어.
하지만 그는 타인의 마력 회로를 추출해 이식하는 것으로, 보다 많은 회로를 보유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한 거야.
그렇게, 내 몸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마력 회로가 심어졌어.
살을 찢고, 뼈를 깎는 고통을 견디며, 나는 몇 번이고 그의 실험대 위에 누워야 했어. 도망칠 방법은 없었지.
실험은 절반의 성공으로 끝났어.
회로의 추출과 이식은 모두 성공했지만, 그가 원하던 대로 220획 이상의 회로를 보유할 수는 없었지.
다양한 인간들의 회로에서 우수한 부분만을 추출해 이식하여, 실험체의 마법적 능력을 향상하는 건 가능했지만.
이미 태어날 때부터 완벽에 가까운 마력 회로를 지니고 있었던 그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이었어.
그럼에도 그는 실망한 기색 하나 없이, 곧바로 다음 단계의 실험에 착수했지.
나는 이후로 한동안 큰 실험에 동원되는 일은 없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훗날을 위한 준비 기간에 지나지 않았어.
그리고 어느 날, 그는 내 앞에 뿔이 달린 알몸의 여자를 데려다 놓고는, 상기된 표정으로 설명을 늘어놓기 시작했지.
‘자, 귀여운 내 제자야. 혹시 ‘마족’이라는 걸 들어본 적 있니?
마계라 불리는 다른 세계에서 탄생하는 악마를 닮은 종족, 태어나는 순간부터 마법을 타고 나는 강대한 종족.
그는 그동안 마족의 마력 회로를 인간에게 이식하는 실험을 하고 있었어.
그러나 결과는 언제나 실패. 이질적인 회로는 인간의 몸이 감당할 수 없는 격렬한 거부 반응을 일으켰거든.
하지만, 그 역겨운 남자는 끔찍한 상상력으로 해법을 찾아내고야 말았어.
남자는 마족과 교접했어.
자신과 마족의 피를 섞은 잡종을 만들어, 그 회로를 추출해 자신에게 이식하기로 한 거야.
그러나, 실험은 또다시 예상 밖의 장벽에 부딪혔지. 마족의 몸으로는 인간의 자식을 제대로 품을 수 없었던 거야.
몇 차례나 수정을 성공시켰지만, 마족의 면역 체계가 성장한 태아를 ‘이물질’로 인식하고 파괴해버렸다고 해.
그리고- 그 노욕과 광기에 물든 마법사는, 간단한 물건을 좀 빌리자는 듯이 가볍게 말했지.
‘그래서 말인데, 네 배를 좀 빌려줄 수 있겠니?
나는 아직도 밤마다 그날의 꿈을 꿔.
**
남자를 겪어본 적도 없었던 내 몸에, 기괴한 마도구들이 들이닥쳤어.
다시 떠올리기도 끔찍한 몇 시간의 고통 끝에, 내 아랫배에는 불길한 마법진과 숫자가 새겨졌지.
배 속을 파고들어 자리를 틀어버린 그 역겨운 생물은, 종양처럼 내 몸에서 영양분을 빨아갔어.
하지만 강제로 주입된 마력과 영양 덕분에 나는 죽지도 못한 채, 그 추악한 것이 자라나는 감각을 고스란히 느껴야 했지.
그렇게 열 달이 흘렀고, 마침내 그것을 토해낼 시간이 다가왔어.
처음 겪은 출산의 고통은, 생각보다 크지 않았어.
넣어질 때의 고통이, 빼내질 때보다 훨씬 더 지독했으니까.
태어난 악마의 잡종은 아비를 똑 닮은 회색 머리칼과 눈동자를 지니고 있었어. 어미의 것과 같은 꼬리나 뿔은 없었지만-
그것을 열 달 동안 배 속에 품고 있던 나는 알 수 있었지. 그것이 분명히, 제대로 악마의 힘을 계승했다는 사실을.
남자는 기뻐하며 아이를 안아 들었고, 곧이어 복잡하게 얽힌 거대한 마법진을 그리더니 알 수 없는 의식을 시작했어.
목적은 분명했지. 아이의 마력 회로를 추출해, 자기 자신에게 이식하기 위한 마법.
나는 그 마법이 실패하길 간절히 바랐지만, 남자의 천재성은 그마저도 아무렇지 않게 성공시켜 버렸어.
남자가 아이에게서 가장 먼저 빼앗은 건- 마력 회로의 중심이자, 마력을 생성하는 기관인 마나 하트.
인간의 한계에 닿아 있던 마법사가, 괴물의 영역에 닿아- 태산 같은 마력을 손에 넣는 순간이었지.
그리고 나는, 그가 마나 하트를 손에 넣는 찰나의 틈을 노려- 혼신의 각오로 아이를 빼앗아 도망쳤어.
그 남자가 그 이상의 힘을 손에 넣는다면, 세상에 어떤 끔찍한 일이 벌어질지는 불을 보듯 뻔했으니까.
도망친 나는 가장 먼저 얼굴과 이름을 바꿨어. 그리고 그 남자의 영향력이 덜 미치는 마탑을 찾아, 조용히 소속되었지.
단순히 도망치는 것만으로는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거든.
나에겐 ‘세력’과 ‘확실한 신분’이 필요했어.
그리고 오래 걸리지 않아서, 나는 곧 적색 마탑주의 자리에 올랐지. 믿기 어려울 만큼 간단하게 말이야.
내게 이식된 마력 회로, 그 남자의 곁에서 훔쳐 배운 마법- 그에게서 도망치는 게 고작이었던 힘이었지만.
평범한 마법사들과 비교해 보면, 나는 이미 대마법사의 경지에 올라 있었던 거야.
꿈에 그리던 출세를 이룬 셈이지만, 기뻐할 수는 없었지.
나는 언젠가 그 남자에게 발각될 날을 두려워하며, 마지막에 본 그 복잡한 마법진을 홀로 연구하기 시작했어.
타인의 마력 회로를 빼앗는 마법. 그걸 손에 넣기만 한다면, 더는 그 남자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을 거라고 믿으며.
그래, 그 더러운 회색 아이의 마력 회로를 내가 빼앗아서, 그 힘으로 그에게 맞설 생각이었지.
하지만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그 마법을 내가 완전히 구현하는 건 불가능했고- 점점 더 견디기는 힘들어져만 갔지.
이 꼬마만 없으면 완벽히 정체를 숨기고 ‘적색의 마탑주’로 살아갈 수 있을 거라는 생각과.
그 역겨운 꼬마가 나를 ‘엄마’라고 부르기 시작했다는 사실에.
**
벽과 바닥을 불태우고 있던 화염이 차례차례 빛을 잃으며, 느릿하게 꺼져 갔다.
“그래서, 에인을 혈사교에게 팔아넘겼다……그런 거냐.”
적색 마탑주는 흐릿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만 보았다.
무슨 사정이 있을 거라는 생각은 했다. 하지만 그게 뭐든 간에, 에인을 죽이려고 한 시점에서 용서하지 않을 셈이었다.
하지만 마탑주의 입에서 흘러나온 이야기는 내 생각 이상으로 처절하고, 무겁게 공기를 짓눌렀다.
“맞아, 이제 속이 후련해?”
마탑주는 비웃음과 함께 반문했다. 그럴 리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던진 물음이다.
재버워크, 그냥 18층의 설정상으로 존재하는 세계관 최강자 정도로 생각하고 있던 마법사가- 모든 일의 근원이었다니.
에픽 퀘스트에 실로 어울리는 배경이다. 세계수를 삼키려 들었던 하이엘프의 왕에 필적하는 악역이기도 하고.
하지만, 나는 에인이 엄마와 함께 행복하게 잘 살기만을 바랐다. 에픽 퀘스트의 전말 따위는 알 바가 아니었다.
지금도, 나는 마탑주를 협박해 적당한 거짓말을 시켜- 에인을 청색 마탑주 아래로 입양을 보내게 할 셈이었다.
어쩔 수 없이 떨어져야 한다는 말로, 될 수 있으면 에인이 상처받지 않게 ‘엄마’와 헤어질 수 있도록.
“씨발……”
하지만 이래서는 뭘 어째야 하는지 모르겠다. 머리가 너무 복잡하다. 젠장할.
“결국 다 운명이었던거야. 내가 그 남자의 손을 잡은 날부터…이렇게 될 운명이었던거지.”
머리를 감싸 쥐고 있는 나를 향해, 적색 마탑주는 쓰게 웃으며 손을 펼쳐 보였다.
“설마, 혈사교 놈들에게 팔려간 그 꼬마가, 어디선가 이런 괴물을 끌고 돌아올 줄은 정말 몰랐어.”
그러다가, 문득 한 가지 의문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적색 마탑주는 왜 에인을 혈사교에 팔아넘긴 거지?
에인과의 연결고리를 끊고 싶은 거라면, 본인 손으로 확실하게 죽이는 게 나았을 텐데.
혈사교의 제물이 되어서 고통받다 죽기를 원해서? 그게 아니면, 그럴 리는 없겠지만, 자신의 손으로는-
“그것도 하필이면, 그 남자가 오기로 한 날에.”
“뭐?”
마탑주가 내뱉은 말에 이어지던 생각이 뚝 끊어졌다. 무척이나 분주해 보였던 적색 마탑의 모습이 떠올랐다.
분명, 누가 말해 줬지. 어딘가에서 굉장한 마법사가 적색 마탑을 방문하기로 했다고.
그게 마탑주의 이야기에 나온 재버워크였다면, 그놈이 오늘 이곳에 오기로 한 거라면.
그 때였다. [초감각] 스킬의 경고와 함께 어디선가 검 한 자루가 날아들었다.
-콰직!
어마어마한 속도로 날아온 검은 내 앞에 있던, 적색 마탑주의 가슴을 꿰뚫었다.
“아, 하악……!”
나는 세 가지 이유로 경악했다. 어디선가 날아온 검이 마탑주에게 치명상을 입혔다는 사실이 첫 번째.
마탑주의 가슴을 꿰뚫은 검이 다름 아닌, 불길한 마력이 담긴 칼레온이었다는 사실이 두 번째.
검령이 사라지고 칼레온이 여기 날아왔다는 것은, 에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의미라는 사실이 세 번째.
“이런 씨발.”
불길함을 감지한 순간, 눈앞에는 시스템 인터페이스가 제멋대로 떠올랐다.
[에픽 - 회색 아이와 마법의 서 : 퀘스트 목표가 갱신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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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 불편한 초대
[에픽 : 회색 아이와 마법의 서 - 납치]
설명 : 당신이 잠시 눈을 뗀 사이, 불쌍한 아이가 못된 마법사에게 납치당하고 말았습니다.
당신은 납치범이 남긴 흔적을 통해 범인을 유추하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범인의 정체는 대륙 역사에 길이길이 남을 전설적인 마법사, 재버워크였습니다.
당신은 초월적인 경지에 오른 마법사로부터, 아이를 구해내야만 합니다.
[퀘스트 목표]
1. 아이를 구조하기(선택).
2. 재버워크를 토벌하기(선택).
적색 마탑주의 심장에 칼레온이 박힌 모습을 보자마자, 직감처럼 떠오른 사실이 퀘스트 창에 새겨졌다.
퀘스트 목표엔 아무런 필수 조건이 없었다. 퀘스트를 수행할지 말지는 전적으로 나의 선택이라는 의미일까.
아니면, 애초에 포기를 전제로 설계된 퀘스트일지도 모른다.
“빌어먹을.”
나는 인터페이스를 닫고, 눈앞의 마탑주부터 살폈다.
심장에 검이 깊숙이 박혀 들어갔지만, 숨은 아직 끊어지지 않았다.
입술 사이로 숱한 욕설을 뱉어내며, 인벤토리에서 되는대로 포션을 꺼내 들었다. 뭐든 효과가 있기를 바랐다.
그때였다. 마탑주의 심장에 박힌 칼레온에서 불길한 마력이 피어오르더니, 눈앞에 환영이 펼쳐졌다.
“아아, 제대로 들리고 있나? 이 마법은 오랜만이라 자신이 없군그래.”
희끗희끗한 머리를 올백으로 넘긴 노인의 모습이 나타났다. 머리는 백발이었지만, 눈동자만큼은 또렷한 회색빛이었다.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여기서 그 외의 누가 나올 수 있겠는가. 재버워크였다.
“이미 상황은 짐작하고 있겠지. 우리 아이가 그동안 신세를 많이 졌네.”
“부모 된 입장으로서 더 이상 민폐를 끼치기도 뭐해서, 조금 급하게 아이를 데려가기로 했다네.”
“물론 인사도 없이 나타나 아이만 데려가는 건 실례일 테니, 서로 얼굴이나 한번 볼까 하는데.”
“아이를 만나고 싶다면, 검에 새긴 좌표로 혼자 오게. 자네를 위한 만찬을 준비해 두고 기다리지.”
환영은 그 일방적인 통보와 함께 툭 끊겼다. 칼레온의 검신엔 룬으로 새겨진 좌표가 또렷이 남아 있었다.
그 목적이 무엇이든, 노골적으로 나를 유인하고 있다. 포션을 쥔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하, 하하……하하하, 결국, 이렇게 되는 거구나……”
그때, 적색 마탑주가 피를 머금은 입술을 겨우 열었다.
“…그거, 집어넣어… 차라리 이게 나아…”
[초감각] 스킬이 아니었다면, 들을 수조차 없었을 미세한 목소리.
“너, 똑똑히, 기억해, 이건 다 네 탓이야. 그러니까 네가 책임지고… 죽여야 해…”
무슨 의미인지 처음엔 이해할 수 없었다. 재버워크를 죽이라는 말인가 했지만, 뒤이어 나온 말이 이상했다.
“나는 못했어… 태어난 것에게 죄는 없단 걸 알면서도…나는 그걸 사랑할 수도, 죽일 수도 없었어…”
마탑주의 입에서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이미 몸도 가누지 못하면서, 마탑주는 기어코 내 멱살을 붙잡았다.
“그러니까, 네가 해야 해…책임지고 죽여… 그 남자의 손에 들어간 이상…그게 가장 편한 길일 테니까…”
마탑주의 손이 천천히 흘러내렸다. 마력감지에 잡히던 생명반응이 뚝 끊어졌다.
적색 마탑주가 숨을 거두었다. 멱살을 잡혔던 옷깃에서 미처 닦아내지 못한 피가 천천히 스며들어 갔다.
혼란스럽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흐름에 머리가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재버워크의 목적은 무엇이며, 마탑주의 마음과 생각은 어떠했는지, 당장은 무엇하나 이해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한 가지만은 확실했다- 내가 어떤 새끼를 죽여야 하는지.
“그래, 딱 기다려라 씨발 새끼야.”
그거면 충분하다.
**
적색 마탑주의 시신을 수습해주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그럴 시간은 없었다.
게다가 누가 봐도 내가 그를 죽인 것처럼 보일 상황이었다. 상황이 꼬이기 전에 물러나는 게 상책이겠지.
적색 마탑의 마법사들에게 맡기면 알아서 수습할 테고, 그편이 훨씬 더 깔끔하겠지.
나는 우선 정비를 위해 숙소로 향했다. 에인과 함께 쓰던 방은 뜻밖에 깔끔한 상태였다.
단 하나, 눈에 띄게 달라진 점이 있었다면……침대가 깔끔하게 두 동강 나 있다는 사실뿐.
[검령 각성]
칼레온에 마법석을 장착해 검령을 소환하고, 에인이 납치되던 때의 상황을 물었다.
“기습이었다. 막아내지 못하고 몸이 그대로 절단되었지. 열선을 발사하는 형태의 마법 같았다.”
검령이 아는 건 거기까지였다. 갑작스럽게 텔레포트로 나타난 재버워크가 정확히 한 번의 공격으로 끝냈다는 것.
이 검령이 허무하게 뒈지는 건 처음 있는 일이 아니었지만, 상급 마법석을 써서 소환했는데도 딱 한 방이라니.
재버워크가 격이 다르게 강하다는 건 이제 의심할 여지가 없다. 어차피 지금까지 나온 정보들도 그렇게 말하고 있었지.
대마법사의 경지에 도달한 적색 마탑주조차, 그의 틈을 노려 겨우 도망칠 수 있었을 뿐이라 말했으니까.
재버워크에게서 도망치는 것이 전부였던 힘으로도, 마탑주의 자리를 얻는 것은 손쉬웠다고도 말했고.
흐름상 이번 에픽 퀘스트의 보스 격으로 보이는데, 9층에서 상대했던 월드 보스를 기준으로 생각해야 하겠지.
빌어먹을, 그때는 아군이라도 있었지만……이번에는 인질까지 잡힌 상태로 일대일을 하게 생겼다.
놈의 목적이 무엇이냐에 따라서 상황은 달라지겠지만, 싸우게 됐을 때의 승산은 얼마나 될까.
“다음에 내가 불러내면 바로 칼질할 준비 하고 있어. 그놈이랑 싸우러 갈 테니까.”
나는 그렇게 일러두고 검령을 역소환했다. 그리고 칼레온에 각인된 룬 문자를 손으로 쓸었다.
어떻게 되먹은 마법인지, 접촉하는 것만으로 머릿속에 좌표의 정보가 알아서 흘러들어온다.
정보를 읽어내며 오픈 커뮤니티를 열어, 빠르게 정보를 수배하는 글을 썼다.
[긴급)18층 NPC 재버워크 관련 정보 전부 제보받음]
재버워크에 대해 얻을 수 있는 정보를 모두 알려달라고, 이번에도 집단지성의 힘을 빌린다.
제보받은 정보와 검색을 통해 얻은 내용을 있는 대로 머리에 쑤셔 박으며, 빠르게 걸음을 옮긴다.
방문하는 곳은 목적지로 향하는 길에 있는 모든 상점, 잡화건 무기점이건 상관없다.
인벤토리에 넣을 수 있는 판정의 아이템을 구분하지 않고 모조리 산다.
아이템을 흩뿌려 공간을 난잡하게 하는, 7층 결투 때의 전술을 선택지로 마련해 둔다.
“부족한데.”
이런저런 준비를 더해도 도통 안심이 되질 않는다. 뭔가 다른 수단이 더 없을까.
번뜩이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미니맵을 펼치고 근처의 마탑을 모조리 체크했다.
청색 마탑에서 지내며 알게 된 건데, 대부분의 마탑에는 다양한 마법 아이템과 설비가 구비되어 있다.
설비를 유지하기 위한 마법석도 대량으로 있고, 전투에 써먹을 만한 아이템도 분명 있을 터.
원래는 평판이나 서브 퀘스트 탓에 이런 일은 꼭 손해로 돌아오기 마련이지만…… 지금은 긴급 상황이니까.
재버워크를 내버려 두면 이 18층 세계 전체가 잘못될 가능성도 있으니, 이건 필요에 의한 징집이다.
가는 길에 있는 모든 마탑의 창고를 깡그리 털어서, 아이템을 챙겨 간다.
**
재버워크가 마탑주 자리를 겸하고 있는 세 마탑을 포함해, 총 여섯 곳의 마탑을 털었다.
그러면서 재버워크에 대한 정보도 꽤 많이 수집했고, 전투에 쓸만한 아이템도 여럿 빌려 오는 데 성공했다.
황색 마탑과 흑색 마탑의 지부에는 마탑의 일 년 치 연구 예산에 상당하는 금화를 주고 하루 동안 대여했고.
남색 마탑, 백색 마탑, 갈색 마탑, 자색 마탑에서는 무력과 공갈을 내세워 반 억지로 갈취해 왔다.
유일하게 재버워크와 무관한 자색 마탑의 마탑주가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엉엉 울긴 했는데.
이게 다 쓰레기 같은 환각 마법밖에 못 다루는 약소 마탑 주제에, 무척 과분한 아이템을 가지고 있었던 탓이다.
물론 전투 중에 파괴되지만 않으면 제대로 깨끗하게 쓰고 돌려줄 생각이다. 나는 강도가 아니니까.
“후우……”
모든 준비를 마친 후, 재버워크가 지정한 장소에 시간을 맞추어 도착했다.
18층 전역 지도의 왼쪽 끝 부분에 표시된 대륙의 끝자락- 항구에서 배를 타야 도달할 수 있는 망망대해 한복판.
그 곳에는 어마어마한 마력으로 떠받쳐져 낮게 활공하고 있는 섬이 있었다. 터무니없는 장소다.
마법을 통해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섬인지, 아니면 마법으로 섬 일부를 잘라서 띄운 것인지.
어느 쪽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딴 짓거리를 한 마법사가 얼마나 강할지 생각하면 숨이 절로 막힐 지경이다.
-쿵!
항구에서 빌렸던 뗏목을 부수며 힘차게 도약해, 섬 위로 단번에 올라탔다. 섬의 전경은 아주 기상천외했다.
강철로 만들어진 숲이라고 해야 할까.
오롯이 마법 연구를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 보이는- 미궁 지역보다 더욱 살풍경한 섬이다.
그리고 섬 전체에서 느껴지는 불길한 마력, 나는 또 한 가지 사실을 확신했다.
18층 미궁 지역은 어느 마법사의 연구실이었지만, 사악한 무언가에 영향받아 호문쿨루스의 터가 되었다고 했지.
그 사악한 무언가의 정체는 재버워크가 틀림없다. 왜 에인이 [심연의 파편]에 관심을 뒀는지 알 것 같군.
생물학적 아버지의 마력에 본능적으로 반응한 것이겠지. 불쾌하다.
경계심을 날카롭게 곤두세우며 주변을 살피던 중, 허공에 마법진 하나가 떠올랐다.
마법진은 거대한 성문처럼 천천히 열렸고, 그 안에서 한 남자가 걸어나왔다.
“어서 오게나, 기다리고 있었다네. 그대가 ‘진혁악마님’이 틀림없겠……”
“맞아.”
나는 곧바로 남자의 머리를 도끼로 쪼개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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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 재버워크
부무장으로서 항상 갖추고 다니는 손도끼와 단검.
그 중 지근거리에서 더 파괴적인 위력을 발휘하는 것은 도끼 쪽이다.
팍, 하고 허공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도끼날이 남자의 정수리를 찍었다. 단순하고 위력적인 직선으로의 공격.
효과는 확실했다. 단단한 것을 가르는 특유의 손맛과 함께, 재버워크의 머리통은 쪼개졌다.
뇌에 데미지를 입히고도 남을 만한 깊이까지 도끼날이 박혔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대전]
도끼날을 통해 파직거리는 번개가 안쪽으로 침입한다. 머리 안쪽까지 전기구이로 만들어 준다.
그러고도 멈추지 않는다. 언제 어떤 수단으로 회복할지 모른다. [혼신] 스킬을 발동시키며 추가타를 잇는다.
손목에 힘을 욱여넣고 오러를 둘러, 이미 반쯤 쪼개진 머리를 더욱 깊이 쪼갠다.
도끼날은 이미 미간까지 침입했다. 그대로 손목을 천천히 뒤로 당겨, 자연스럽게 손도끼를 빼낸다.
빼낸 도끼를 이번에는 수평 방향으로 휘두른다. 오러를 두른 날로 목을 단번에 그어, 절반가량을 절단한다.
오른쪽으로 들어가 왼쪽으로 빠져나온 도끼를 손안에서 빙글 회전시켜, 다시금 공격의 방향을 바꾼다.
자세를 낮춤과 동시에 노리는 것은 몸통의 왼편, 주요 장기를 보호하고 있는 갈비짝을 노린다.
-콱! 콱! 콱! 콱! 콱!
다섯 번. 날이 들어가는 방향을 정확하게 잡고, 가슴 근처 시작해 허리 부근까지 내려가며 한 번씩 찍었다.
마지막으로는 박아넣은 도끼를 빼지 않은 상태로 놓아버리고, 낮은 자세에서 몸을 크게 회전시킨다.
그대로 인벤토리에서 장검을 꺼내, 오러를 두르고 두 허벅지를 뼈째로 절단해 끊어내었다.
아직 모자라다. 머리통과 주요 내장을 다져 놓았지만- 아직 심장을 뭉개놓지 않았다.
다리가 잘려 뒤로 넘어가는 재버워크의 상체에 달려들어, 인벤토리에서 꺼낸 메이스를 휘둘렀다.
-콰직!
심장이 있는 가슴 부근을 일격으로 으깨버렸다. 이어서 [라이트닝 차지]와 [대전]까지 사용한다.
파직거리는 번개의 마력이 쏟아져 남아 있는 상체의 다른 부위를 노릇하게 구워버렸다.
인질을 잡고 있는 테러범을 상대로 취할 수 있는 가장 빠르고 효과적인 대응법.
무슨 개짓거리를 펼치기 전에, 확실하게 사살한다.
협박으로 테이블에 오른 상대와는 협상하지 않는 것이 상책이다.
“이거야 원, 인사 정도는 얌전히 들어주면 덧나는 겐가?”
조금 전에 들었던 것과 같은 목소리가 저 너머에서 들렸다. 그 자리에는 상처 하나 없는 재버워크가 서 있었다.
내 발밑에서 으깨진 이건……환영이나 분신 같은 건 아니다. 제대로 산산조각이 난 상태다.
으스러진 시체에서 흘러나오는 묘한 마력, 묘하게 익숙하다.
“호문쿨루스였나.”
“정답일세. 눈썰미가 좋군.”
“너는 본인이고.”
어차피 이렇게 싱겁게 끝날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검과 방패를 들어 올렸다.
재버워크의 머리 위에는 NPC의 적대를 의미하는 콘솔이 떠올라 있었다. 색깔은 칠흑에 더없이 가까운 적색.
7층에서 메르세데스의 머리 위에 떠올라 있던 것과 비슷한 색이다. 그때보다 살짝 적은 정도의 격차인가.
“정식으로 인사하지, 내가 바로 ‘재버워크’라고 불리는 하찮은 마법사일세.”
그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게 성장했건만, 아직도 이만큼 차이가 나는 NPC가 존재한다니.
이 빌어먹을 탑은 난이도 설정이 너무 잘못됐다.
**
재버워크의 외견을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말쑥한 노년의 신사- 그렇게 보였다.
노년의 나이에도 꾸준히 몸을 단련한 것인지, 꼿꼿한 허리와 넓은 어깨는 정장을 멋들어지게 소화하고 있다.
깔끔하게 정리해 넘긴 희끗희끗한 백발에서는 연륜이 느껴지고, 회색 눈동자에선 묘한 깊이가 느껴진다.
한 손에는 자신의 키보다 조금 짧은 스태프를 들고 있다. 고풍스럽게 조각된 나무 재질의 촛대 같은 디자인.
다만 특이한 점으로, 그 끝에 유리로 만든 큼직한 정육면체가 둥둥 떠 있다는 점이다. 마법석이려나.
하지만 그런 신사 같은 이미지를 완전히 박살 내는 점이 하나, 바로 놈에게서 넘실거리는 마력의 기운이다.
“하하, 너무 뚫어져라 보지 말게나.”
미궁 지역의 호문쿨루스에게서 느껴졌던 그 불길한 마력이 은은하게 연기처럼 흐르고 있다.
흘러나오는 마력의 양 자체는 지극히 적다. [마력 지배]가 아니었다면 존재를 눈치채기도 힘들었을 정도의 소량.
그냥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마법사에게서도 저것보다는 많은 양의 마력이 흘러나오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재버워크가 보유하고 있는 마력량이 적기 때문이 아니다.
“늙은이 오줌보가 새는 게 뭘 보기 좋다고 그렇게 관찰하나?”
자신의 마력을 완벽에 가깝게 통제하고 있다. [마력 지배]를 가진 나도 저런 수준의 통제는 불가능하다.
얼마만큼의 마력을 갖고 있는지 견적을 내기가 힘들다. 하지만 조금만 집중해서 들여다보면.
“이런, 보인 모양이군?”
웃기지도 않는다. 완벽하게 파악한 건 결코 아니겠지만……저게 대체 어떻게 되먹은 마력이야.
인간이라는 종족의 한계를 초월하고, 한 개체로서의 한계를 초월하기 위해 연구를 한다고 했던가.
연구는 성공한 모양이다. 또라이같이 많은 마력통이 종족 특성인 마족들 사이에서도 저만한 마력을 가진 놈은 하나도 없었다.
사람이 아니라 자연경관이 옷을 입고 걸어 다니는 걸 보고 있는 것 같다. 원근감이 이상해지네.
“우선은 안으로 들어오게, 함정 같은 건 없으니까 걱정하지 말고……자네를 위한 만찬을 준비했으니.”
재버워크는 검과 방패를 들고 적의를 뿌리는 나를 신경도 쓰지 않는지, 그렇게 말했다.
첫 기습이 대역 호문쿨루스를 처치한 걸로 끝났으니, 서두른다고 될 상황은 아닌가.
“자, 이쪽으로.”
재버워크의 발밑으로 화려한 레드카펫이 깔렸다. 나는 입술을 씹으며 길을 따라갔다.
살풍경한 인공섬의 한가운데에 있는, 더욱 살풍경한 분위기의 저택으로.
**
저택 안쪽도 섬 바깥과 크게 다를 건 없었다.
연구의 효율만을 중시한 듯한 금속 투성이의 저택, 나는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마력감지를 돌렸다.
방해 마법을 쓸 거라고 생각했는데, 재버워크는 뜻밖에 순순히 내가 감지를 돌리게 놔두었다.
하지만 아무리 탐색해도 에인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어딘가에 감춰 둔 건지, 아니면.
“자, 앉아서 뭐라도 좀 들게나.”
재버워크가 손뼉을 짝짝 치자, 순식간에 눈앞에 거대한 테이블과 산해진미가 차려졌다.
식사라면 오는 길에 화이트롤을 있는 대로 씹어 삼켜 둔 참이다. 이딴 자식이 주는 음식을 먹을 이유도 없고.
음식에 뭔가 독 같은 걸 넣어 뒀을 수도……아니, 그쪽은 상관없지. 오히려 좀 먹는 시늉을 하는 게 낫겠어.
나는 얼굴을 찌푸린 채 자리에 앉아, 눈앞에 놓인 빵 한 조각을 살짝 떼어 입에 넣고 물었다.
“꼬맹이는 어디 있지?”
재버워크는 내 질문에 미소를 지으며 허공을 향해 가볍게 손짓했다.
그러자 뚜벅뚜벅 다가오는 발소리와 함께, 두 마리의 목각인형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품에는 에인이 안겨 있었고, 잠들어 있는 듯 보였다. 살아 있구나. 우선은 안도했다.
마력회로는 이미 추출된 걸까, 아니면 인질로 쓰기 위해 붙잡아둔 걸까. 손이 근질거린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네. 아이에게는 손 하나 대지 않았으니까.”
“그 말을 나보고 믿으라고?”
“사실인데 어쩌겠나. 나는 이제 이 아이에게 별다른 흥미가 없어.”
재버워크는 자리에서 일어나, 인형의 품에 안겨 있는 에인의 뺨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내 피를 이은 반마족의 마력 회로를 이식한다……그 발상을 처음 떠올린 게 몇 년 전이더라?”
재버워크의 말은 끔찍한 사실을 암시했다.
“이 아이만큼 완벽한 작품은 없었지만, 마력 회로의 개선을 이루기에는 충분했다네.”
놈은 이미 지난 몇 년 동안 같은 짓을 반복한 끝에, 목적을 이룬 것이다.
“아이에게 흥미가 아예 없었던 건 아니야. 다만, 그보다 더 흥미로운 게 생겼을 뿐이지.”
재버워크는 그렇게 말하며,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는 사실이었다.
“자네는 내가 아이의 기억을 엿보면서 얼마나 놀랐는지 모를 테지, 이계에서 넘어온 초인이여.”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힘과 마력, 나조차도 원리를 알 수 없는 공간 마법, 보자마자 이거다 싶었지!”
“지금의 경지에 올라서고 나서야 간신히 시야에 들어온 하늘 너머, 마법의 성위에 도달하는 길!”
놈은 황홀한 표정을 지은 채 나불나불 알아듣지 못할 소리를 씨부리기 시작했다.
에인의 기억을 엿보자 눈에 들어왔던, 원리를 알 수 없는 공간 마법이라- 인벤토리를 말하는 건가.
NPC가 시스템을 온전히 인식할 수 있는 경우는 매우 드무니, 내 몸에 관심을 가진 건가.
“교환 조건일세, 아이는 상처 하나 없이 넘겨줄 테니…자네는 내게 와 줘야겠어.”
목각인형이 내게 다가와 품에 안겨 있는 에인을 보여주었다.
“하.”
하지만 교환 조건인지 뭔지는 처음부터 성립될 수 없었다. 뭐, 아이는 상처 하나 없이 넘겨주겠다고?
인형의 품에 안긴 에인의 뺨에는, 옅은 눈물 자국이 말라붙어 있었다. 지랄하고 있네.
무슨 일이 있어도 울음만큼은 보이지 않던 이 꼬맹이가, 어쩌다가 그렇게 울었을까- 잘 모르겠지만.
세상에서 엄마를 가장 사랑하는 순진한 아이는, 이미 넘칠 만큼 상처받았다.
“너는 핏자국도 못 남기고 뒤질 줄 알아라.”
대가를 치를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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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 검과 마법의
흑색 마탑에서 대여해 온 최상급 마도구, 그림자 전송기 가동.
손바닥만 한 큐브 형태의 이 마도구는, 지정한 대상을 결계로 감싸 그림자 공간에 격리시키는 기능을 가진다.
원래는 위험물질을 안전하게 운송하기 위한 용도로 만들어졌지만, 나는 이걸 에인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했다.
-드드득!
검은 큐브는 순식간에 수백 개의 조각으로 나뉘어, 목각 인형의 팔에 안겨 있던 에인을 향해 날아갔다.
곧 에인의 몸이 검은 조각들에 의해 감싸였고, 조각들은 이내 다시 하나의 작은 큐브 형태로 응축되었다.
격리가 완료된 큐브가 내 손안에 돌아왔다. 나는 정해진 순서대로 조작한 큐브를 저택 바깥으로 힘껏 던졌다.
흑색 마탑에서 직접 새겨 넣은 리콜 룬에 의해, 큐브는 스스로 목적지인 흑색 마탑까지 이동할 것이다.
도착하면 자동으로 배출 기능이 작동할 테고, 그다음은 두둑한 금화를 받은 마법사들이 에인을 안전하게 지킬 것이다.
생판 모르는 놈들에게 꼬맹이를 맡기는 건 아무래도 찜찜하지만…… 지금 상황에선 이게 최선의 선택이었다.
“흐음, 분명 아이는 상처 하나 없이 넘겨준다고 했는데……사람을 좀 믿어보는 게 어떤가?”
재버워크는 아쉬운 듯 말했지만, 정작 올라간 입꼬리는 그다지 아쉬워 보이지 않았다.
“뭐, 좋을 대로 해보게나. 처음부터 순순히 넘어와 줄 거라곤 기대하지도 않았으니.”
숨을 깊게 들이쉬며 전신에 마력을 흘려보낸다. 필요한 스킬들을 연달아 활성화한 뒤, 단숨에 앞으로 돌진했다.
눈앞에 차려진 산해진미의 식탁이 길을 가로막고 있었지만, 내 돌진 앞에서는 스티로폼보다 못한 장애물에 불과했다.
거리 따윈 눈 깜짝할 사이에 좁힐 수 있었지만, 이미 재버워크도 전투태세를 갖춘 상태였다.
놈은 내 쪽으로 검지손가락을 뻗으며, 특유의 불쾌한 마력을 뿜어냈다.
“매직 미사일.”
놈이 사용한 마법은 지극히 평범한 기초 공격 마법인 매직 미사일.
하지만 [초감각]스킬로 강화된 내 기감은 그것을 예사롭지 않은 위협이라 인식했다.
즉각 [도약] 스킬을 발동, 땅을 박차고 단번에 공중으로 솟구쳤다.
-쾅! 콰광!
내 발밑을 스쳐 지나간 마법의 탄환이, 살풍경한 저택의 벽을 그대로 뚫고 나갔다.
재버워크는 공중으로 뛰어오른 나를 눈으로 좇으며, 태연하게 손짓해 허공에 마법진을 띄웠다.
조금 전에 사용한 것과 똑같은 매직 미사일, 하지만 마법진의 숫자가 예사롭지 않은- 아니, 비정상적이다.
매직 미사일은 워낙 단순하고 배우기 쉬운 마법이라, 전투 마법사들 사이에선 종종 내기의 주제가 되곤 한다고 들었다.
누가 더 멀리까지 쏘는가, 누가 한 번에 더 많이 쏘는가- 다중 캐스팅은 전투 마법사에게는 필수적인 기술이니.
자신은 12발까지 쏴 봤다는 청색 마탑주의 말에 따르면, 현재까지 알려진 최고 기록은 전전대 백색 마탑주가 세운 18발.
하지만 지금 재버워크가 소환한 마법진의 수는, 얼핏 보아도 50개는 훌쩍 넘기고 있었다.
-두두두두두두!!
내가 지금 고정 포대 진지에 정면으로 돌격하고 있는 거였나- 그런 착각을 하게 만드는 화력.
나는 더 이상 잴 것 없이 마력강화를 발동하고, 미친 듯이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카강! 캉! 카강! 카가강!
기를 써서 벨 필요는 없다. 탄속이 빠르니 오러를 두르고 궤적에 검을 갖다 대기만 해도 그만.
그동안 상당히 성장한 [사고 가속]을 발동하면, 빛살처럼 날아드는 마법의 탄환도 굼벵이처럼 느릿하게 눈에 들어온다.
물론 날아드는 탄환 자체가 워낙에 많은 탓에, 모든 탄을 베어내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그렇기에 키운 [내구] 스탯이다.
한방한방이 전차의 주포를 연상시키는 파괴력을 내는 탄환이라도, 내 내성과 내구 스탯 앞에서는 기세가 죽는다.
오십 개가 넘는 마법진에서 연달아 쏘아지는 매직 미사일을 쳐내고 받아내며, 마침내 거리를 좁혔다.
그러나 거리가 좁아진 순간, 재버워크는 아무렇지 않게 다음 마법을 펼쳐 보였다.
“파이어 볼.”
매직 미사일과 마찬가지로 화염 계열의 가장 기초적인 공격 마법인 파이어 볼.
하지만 순식간에 닥쳐오는 화염구에서 느껴지는 열기는 적색 마탑주의 최대 화력에 버금갔다.
여기서 스스로 거리를 벌리면 다시 좁히기는 어마어마하게 어렵겠지. 그렇다면 그냥 맞아주고 찌른다.
운 좋게도 마침 화염 속성을 골라주었지 않나, 마력강화까지 켰으니 이 정도는 별문제 없겠지.
-쾅!!
근거리에서 터진 충격파로 속이 뒤흔들렸지만, 불길을 뚫고 검을 내지르-려고 한 순간.
나는 이유를 생각하는 것보다 빠르게, 검을 놓고 왼편으로 몸을 굴렀다.
-지이잉!
아무런 전조 없이 쏘아진 푸른 광선이 대지를 갈랐다.
**
화려함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초라한 한 줄기의 푸른 광선.
하지만 그것이 긁고 지나간 대지는 극지방의 크레바스처럼 어마어마한 깊이까지 갈라졌다.
그리고 한 박자 늦게 광선이 지나간 자리에서 푸른 마력의 충격파가 솟아올랐다.
-쿠구궁!
검령을 한 방에 처치했다는 열선이 바로 이거구나. 피한다고 피했는데 팔을 살짝 긁혔다.
왼팔에 묶어 뒀던 방패는 깨끗하게 절단되었고, 광선이 잠깐 스쳐 지나간 팔뚝은 지글거리는 화상이 남았다.
[초감각] 스킬로도 감지가 한 박자 늦었다. 시전 동작도 전조도 전혀 없는 주제에, 위력이 말이 안 된다.
온갖 내성을 떡칠하고 [강철의 혼]의 보정까지 받는 내 몸에 스친 것만으로 이런 상처를 남긴다니.
평범한 18층 도전자는 일렬로 세워서 이거 한 번 긁어주면 백 명은 넘게 뒈지겠는데.
“흐읍!”
-후웅.
팔뚝의 상처를 살피면서 동시에 휘두른 검은 허공을 갈랐다. 재버워크는 이미 텔레포트로 거리를 벌렸다.
놈의 등 뒤에는 마력으로 이루어진 두 개의 구체가 둥둥 떠 있었다. 저게 그 ‘오브’ 인가.
미리 작성한 마법진을 구체 내부에 저장해 두고, 원하는 순간에 출력하는 구조의 캐스팅 보조 마법.
“대단하군, 그걸 정면에서 피한 사람은 처음 봤지 뭔가?”
재버워크는 그렇게 말하며 등 뒤에 띄운 오브를 통해 한 번 더 광선을 쏘았다.
-지이잉!
재빨리 몸을 낮춰 피하자, 등 뒤의 구조물들이 광선이 지나간 궤적대로 정확히 잘려나갔다.
그리고 그 궤적을 따라 다시 한번 마력 폭발이 일어나며, 일대가 그대로 초토화됐다.
본인은 독립적으로 캐스팅 마법을 사용하며 전투를 펼치고, 동시에 오브를 통해 즉발 마법을 사용한다.
커뮤니티와 마탑을 통해 수집한 정보와 대체로 일치한다. 저 오브야말로 놈의 진짜 무기.
듣기로는 다섯 개의 오브를 동시에 전개하고, 각각의 오브가 다른 마법을 사용한다고 들었는데.
하나는 후속으로 충격파를 발생시키는 저 마법 광선이고, 다른 하나는 아마도 방금 사용한 단거리 전이.
즉사급 공격기와 순간이동, 둘 다 아무런 준비동작 없이 뻥뻥 써대도 괜찮은 수준의 마법이 아니다.
하지만 나한테도 무기는 있다. 각각의 마탑에서 빌려 온 최상급의 마도구가.
“27번.”
갈색 마탑에서 강탈해 온 마도구, 창조의 궤를 가동한다.
**
인벤토리에서 튀어나온 거대한 비석이 지면에 꽂혔다.
마력을 불어넣자 가동을 시작한 창조의 궤는 내가 선언한 27번 프리셋에 맞추어 지형을 변형시킨다.
이 비석의 이름은 창조의 궤, 갈색 마탑의 마법사들이 20년의 대규모 연구 끝에 완성해 낸 최고 걸작이다.
효과는 단순하다. 장착된 마법석과 충전된 마력을 소모해, 주변의 지형을 원하는 대로 주무르는 것.
소모할 재료만 충분하다면 불과 몇 분 만에 작은 도시 하나를 만들어 낼 수도 있는 어마어마한 마도구다.
-쿠구구구궁!
순식간에 대지가 갈라지고 솟아오르며, 재버워크의 저택과 그 주변을 완전히 갈아엎어 간다.
-지이잉!
재버워크가 쏘아낸 마법 광선이 창조의 궤를 반으로 쪼개버렸지만, 이미 궤는 역할을 다한 상태였다.
만들어진 지형은 높은 벽과 천장으로 사방이 막힌 평지, 놈과 맞서 싸우기에 가장 최적화된 지형이다.
저 광선의 위력을 보고 직감했다. 엄폐물이고 지랄이고 저거 한 방이면 다 잘려나갈 거라고.
그렇다면 차라리 이런 널따란 투기장을 만들어 놓고 싸우는 게 낫다.
벽과 천장은 섬의 지반을 이용해 매우 두껍게 형성했으니, 단거리 전이로 빠져나갈 수도 없을 터.
“커다란 짐승 우리 같군, 자네에게 잘 어울려.”
히죽거리는 재버워크, 나는 곧바로 놈의 웃는 면상을 박살 내 주기 위해 과감한 선택을 했다.
녀석은 나를 꽤 얕보고 있다. 아직 오브를 두 개밖에 꺼내지 않았다는 것이 그 증거.
게다가 놈은 내 몸 자체에 관심이 있으니, 가능한 한 생포 쪽으로 가닥을 잡고 있을 것이다.
에인의 기억을 엿보았다고 했으니, 그걸로 내 힘을 어림해 보고 충분히 가능할 거라고 생각한 거겠지.
하지만 에인에게도 보여주지 않은 기술이 아직 남아 있다. 무척 최근에 터득한 기술이니까.
-키이잉!
오러 서클을 전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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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 파훼법
일반적으로, 전사와 마법사의 싸움은 대개 속도의 차이로 승패가 갈린다.
화력 면에서는 마법사가 대체로 우월하지만, 강력한 화력을 위해서는 그만한 캐스팅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
전사는 마법사가 화력을 투사하는 데 필요한 캐스팅 시간보다 더 빨리 접근할 수만 있다면 승리.
마법사는 전사가 접근하기 전에 캐스팅을 마치고 공격에 나설 수 있다면 승리.
하지만 재버워크는 이 기본적인 전투 양상을 완전히 무시할 수 있다.
캐스팅 속도 자체도 빠르지만, 오브로 시전하는 즉발 마법이 완벽하게 빈틈을 메운다.
마법을 즉발하는 상대로 마법을 쓰기 전에 접근한다니, 말도 안 되는 이야기 같지만- 나라면 할 수 있다.
오브 마법은 ‘즉발’이지 ‘자동’이 아니니까. 재버워크가 아예 반응하지 못할 수준까지 속도를 내면 되는 거다.
그걸 위해 필요한 것은 버프를 넘어선 도핑, 연비와 반동 문제로 봉인하고 있던 오러 서클을 사용할 때다.
-키이이이잉!!
양팔과 양다리에 각각 하나씩, 복제 호문쿨루스 때의 네 배인 네 개의 서클을 동시 전개한다.
적색 마탑주의 말에 따르면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마력회로의 숫자는 220개가 한계.
그리고 오러 서클은 체외에 형성하는 마력회로와 같다. 즉, 인간의 한계를 억지로 넘어선다는 것.
당연히 신체에는 어마어마한 부하가 걸린다. 검령도 내게 짧은 시간만 발동해 공격력을 증폭시키라고 조언했었지.
하지만 그런 어중간한 방법으로는 재버워크를 이길 수 없다. 나는 서클을 모두 마력강화의 증폭에 사용했다.
-쿠르르릉!
인터페이스에 나타나는 스탯이 이전에 본 적 없는 수준까지 상승한 것을 보며, 나는 땅을 박찼다.
한 번의 발구름만으로 전신이 삐걱거리지만, 그에 따른 속도는 음속을 가볍게 돌파한다.
재버워크가 눈을 깜빡이는 아주 짧은 순간, 나는 이미 그의 앞에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콰과곽!
제대로 들어간 참격, 하지만 소리도 손맛도 이상했다. 놈의 몸에 얇은 배리어가 펼쳐져 있던 거다.
하지만 방금 일격으로 완전히 파괴되었다. 오러가 뿜어내는 공격력은 재버워크 수준의 마법사에게도 감당 불가능.
다음 순간, 재버워크는 다시 한번 전이를 사용해 멀찍이 떨어졌지만- 나는 1초도 걸리지 않고 곧바로 다시 접근했다.
재버워크의 등 뒤에 또 하나의 오브가 떠올랐다. 상황을 생각해 보면 보나 마나 방어 마법일 것이다.
놈이 사용하는 다섯 가지의 오브 마법 중 하나, 손톱만 한 크기까지 압축시킨 마법 방어막.
오브를 통해 일정 거리 안으로 다가오는 공격을 미리 감지하고, 공격 경로에 배치해 막아낸다는 사기 스킬.
전신에 펼치고 있던 배리어의 강도를 생각해 보면, 아마 압축 방어막은 오러 공격조차 막을 수 있을 거다.
그렇다면 나는 공격력을 더 끌어올릴 뿐, [사고 가속]을 발동해 정확한 타이밍에 기술을 사용한다.
이미 오러 서클이 하나 휘감긴 팔에, 또 하나의 서클을 형성해 겹으로 공격력을 높인다.
노리는 것은 목, 일격에 머리를 절단해 버린다!
“뒈져라!”
-카앙!
그러나, 다음 순간 내 검은 허무하게 튕겨 나가고 말았다.
말도 안 돼, 아무리 단단한 방어막이라고 해도 깨부술 수 있을 텐데? 이걸 튕겨냈다고?
나는 한번 더 [사고 가속]을 발동해, 내 검을 튕겨낸 방어막의 모습을 똑똑히 확인했다.
다르다.
마탑과 커뮤니티에서 수집한 정보와는 형태가 완전히 다르다. 손톱만 한 압축 방어막이 아니다.
공간을 찢어놓기라도 한 것처럼,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새까만 균열이 여럿 겹쳐 있다.
그리고 지금은 저 정체불명의 방어마법만이 문제가 아니다. 다른 오브 하나가 빛을 발하고 있다.
즉사 수준의 위력을 내는 마법 광선이 지근거리에서 발사된다. 거기에 놈의 등 뒤에 떠오른 수십 개의 마법진.
오러 서클을 통한 무리한 도핑으로 끌고 온 공격 턴이, 완벽한 카운터를 맞고 말았다.
**
오러 서클은 기본적으로 공격의 한순간에만 발동해야 하는 스킬.
하지만 나는 내구력과 재생력을 통해 반동을 감당하며, 연속적으로 서클을 유지한다는 수단을 택했다.
거기에 더해 원래 사용 방식대로 한 번 더 휘감은 서클까지, 이번 공격은 사실상 모든 것을 쏟아부은 올인 베팅이었다.
정체 모를 마법에 의해 그것이 튕겨 나간 순간 찾아온 반동은, 마력강화의 첫 자력 사용 때와는 비교도 안 되었다.
-뚜둑!
몸 안에서 뭔가 끊어지는 소리가 났다. 억지로 끌어올린 마력이 역류하며 속을 뒤집은 것이다.
하지만 그로 인한 데미지에도 쉴 틈은 없었다.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광선에 몸이 반으로 갈라질 거다.
반으로 잘려도 안 뒤지는 몸이긴 하다만, 저 광선은 절단면을 불태워 버린다. 아마 못 살겠지.
“후읍!”
튕겨나간 검을 그대로 놓아버리고, 억지로 몸을 뒤로 날렸다.
그 순간 닥쳐오는 푸른 마법의 광선, 여전히 초라한 모습이지만 그 위력은 잘 안다.
이미 뒤로 뛴 상황, 하지만 나는 이제 공중에서도 움직임의 궤도를 바꿀 수 있다.
검술 스킬인 ‘소드 차지’의 돌진 판정을, 신체에서 한 방향으로 마력을 분출하는 것으로 재현한다.
정면에서 일자로 쏘아지는 광선을 억지로 우측으로 굴러 피해내고, 자세를 다잡았다.
아직 공격은 끝이 아니다. 재버워크가 캐스팅한 수십 개의 마법진이 동시에 불을 뿜었다.
이번에는 매직 미사일이나 파이어 볼 같은 기초 마법이 아니다. 튀어나오는 것은 황금빛 화살.
마법진 하나하나가 어마어마한 속도로 화살을 난사한다. 수십 대의 중기관총이 면전에서 쏘아지는 것 같다.
피할 수 있는 거리가 아니다. 양손으로 검을 붙잡고, 날아드는 화살을 하나씩 쳐낸다.
[사고 가속]
-캉! 캉! 캉! 캉! 카가강! 카강!
스킬의 효과로 느릿하게 변한 시야의 힘을 빌려, 어떻게든 막아내고 있지만.
그 사이에 재버워크는 다시 텔레포트로 거리를 벌렸다. 또 다른 마법을 추가로 캐스팅하며.
씨발, 욕을 안 할 수가 없네. 놈의 스펙도 스펙이지만, 판단이 너무 안일했다.
내가 수집한 재버워크의 정보는 커뮤니티에서의 단편적인 제보와 각각의 마탑에서 전해 들은 것.
원래 재버워크는 18층에서 잠깐만 모습을 드러내는 중립 NPC로, 싸우는 모습은 정말 조금밖에 보여주지 않는다.
당연히 정보도 불확실한 부분이 많았다. 하지만 그 점은 마탑에서 전해 들은 걸로 보충했다고 생각했는데.
젠장, 머리에 너무 열이 올라 있었나. 어이없게 놓친 템포를 다시 잡아야 한다.
황색 마탑에서 빌려 온 마도구, ‘천뢰의 장갑’ 발동.
건틀릿 형태의 이 마도구의 효과는 매우 단순하다. 발동 즉시, 사용자의 몸을 마력 입자로 바꾸는 것.
번개 속성을 띤 입자가 된 사용자는 빛에 가까운 속도로 이동할 수 있으나, 어떤 물리적인 공격도 불가능하게 된다.
하지만 [라이트닝 차지]와 [대전]을 활용하면, 입자 상태에서 놈에게 돌진하는 것만으로 전격을 먹일 수 있다.
-파지지직!
순간적으로 번개 그 자체가 된 채, 재버워크에게 그대로 돌진한다- 그리고 난데없이 뒤바뀐 시야.
“뭐야.”
마도구의 발동 효과가 꺼지며 원래대로 돌아온 몸, 그리고 돌진했던 나는 오히려 재버워크를 등지고 있다.
등 뒤에서 다시금 날아오는 광선과 마법을 삐걱거리는 몸으로 피해 내며, 상황을 파악했다.
마도구의 효과를 발동시키자마자 재버워크는 재빨리 문제의 방어 마법을 전개했다.
하지만 내 돌진은 방어 마법에 막히지 않았다- 아하, 알겠다.
“공간 마법이었군.”
내 혼신의 검을 튕겨낸 건, 공간 마법으로 되돌아온 내 검이었다.
**
[사고 가속]을 발동시키고, 느려진 세계에서 현재까지 얻은 정보를 정리했다.
즉사 수준의 위력을 내는 광선, 자유자재로 시전하는 단거리 전이, 그리고 공격을 반사하는 공간 마법.
세 번째 마법은 방어막이 아니라 포탈이었다. 좌표를 반전시켜 공격을 거꾸로 튕겨내는 뭐 그런 거였겠지.
어마어마하게 성가신 마법이지만, 굳이 그런 마법을 사용한 이유는 뻔하다.
평범한 방어 수단으로는 내 공격을 막을 자신이 없었던 거다. 한 대만 제대로 들어가면 이긴다고 봐도 되려나.
문제는 저 공간 마법을 어떻게 파훼하느냐인데……일단 평범한 검격이라면 너무 쉽게 반사되겠지.
생각해 볼 수 있는 건 지향성이 없는 광역 공격, 그리고 놈이 마법을 펼치기 전에 기습하는 것 정도인데.
어느 쪽이건 평범하게는 불가능하다. 놈은 번개로 변한 내 돌진에도 대응해 냈으니까.
하지만, 어떻게 반응했지- 그렇게 생각하며 재버워크의 모습을 다시 살펴보니,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어느샌가 등 뒤에 떠 있는 네 번째 오브, 그 위에는 눈동자를 닮은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드디어 꺼내셨군, 예지 마법.
커뮤니티와 마탑에서 손에 넣은 정보를 다 믿을 수는 없지만, 저것 하나만큼은 확실하다.
예지가 아니고서야 벼락의 속도로 돌진하는 내 공격에 맞춰 마법을 전개할 수는 없었을 테니까.
몇 초 뒤의 시야를 미리 불러오는 마법이랬던가, 성능은 훌륭하지만 제약이 많다고도 했지.
“좋아.”
나는 인벤토리에서 두 개의 마도구를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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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 방심
누가 뭐라고 해도, 내 최대 강점은 압도적인 전투 지속력이다.
모든 피해를 60% 반감시키는 [강철의 혼], 절단된 몸도 도로 붙여버리는 [초재생], 그리고 세 가지의 내성 스킬.
하지만 [강철의 혼]을 비롯한 방어 능력들을 총동원해도, 재버워크의 마력 광선만큼은 막아낼 수 없다.
[초재생]으로도 오러 서클을 무리하게 전개한 반동을 버텨내는 것이 한계, HP는 차오를 기미가 없다.
내 최대 강점인 전투 지속력의 양대 축이 흔들리는 상황.
그러나 마지막 하나, 각종 내성 스킬만큼은 아직도 잘 써먹을 자신이 있다.
-절그럭.
인벤토리에서 꺼낸 첫 번째 마도구는, 남색 마탑에서 빌려 온 이른바 ‘혼탁의 우물’.
온갖 종류의 독이 섞인 플라스크 안에서 원하는 성분만을 추출해내는, 원심분리기 같은 마도구다.
보통이라면 전투가 아닌 연구용으로나 쓰일 법한 장치지만, 내가 주목한 건 추출 기능이 아니라 그 플라스크 자체였다.
이 플라스크 안에는 그동안 남색 마탑이 연구하고 제조해온 수많은 독극물이 죄다 혼합되어 있다.
“누가 더 오래 버티나 해 보자고.”
-후웅!
반납하기로 했지만 어쩔 수 없지, 나는 주저 없이 플라스크를 던졌다.
재버워크의 오브가 다시 광선을 발사했고, 플라스크는 정교하게 갈라져 나갔다.
하지만 고열의 광선도 그 안의 독을 깨끗하게 소멸시키진 못했다.
오히려 맹독에 불을 붙여 기화시켜, 어마어마한 살상력을 가진 독무를 만들어 냈을 뿐.
“이건……!”
여유롭던 재버워크의 표정이 일순간에 바뀌었다. 놈의 등 뒤에서 마지막 다섯 번째 오브가 떠올랐다.
기묘한 바람이 재버워크의 몸을 중심으로 불어오고, 맹독의 구름은 바람의 장벽에 휘감겨 사방으로 흩어진다.
그렇게 나오시겠지, 내가 가진 모든 독 포션과 남색 마탑의 독이 전부 융합된 미친 독안개라고.
게다가 이곳은 밀폐된 공간. 기다린다고 독이 흩어질 리 없고, 방어 마법을 전개하지 않으면 버틸 수도 없을 거다.
“나 원 참, 위험한 짓을 하는군. 함께 자살이라도 할 셈이었나?”
재버워크는 에인의 기억을 통해 내 전투력을 엿봤을 뿐. 내 스탯과 스킬 전부를 알고 있는 건 아니다.
동반 자살이라니. 상식적으로, 내가 그런 짓을 왜 하겠냐?
내 독 내성 스킬 레벨이 몇이게, 이 새끼야?
**
내 전투 지속력은 상황이 극한에 가까워질수록 더욱 빛난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 환경을 극한으로 만들기로 했다.
나는 독을 얼마나 들이마셔도 별 상관없지만, 저쪽은 독을 막기 위해 마법을 계속 유지해야 한다.
“너 그 마법 풀리면 뒤지는 거다.”
-쾅!
선언과 동시에 땅을 박차며 앞으로 전진했다. 그러자 곧바로 날아오는 광선과 푸른 마법 탄환.
이번에도 억지로 몸을 비틀어 광선을 피한다. 모든 공격을 피하는 건 어렵기에, 탄환 쪽은 그냥 맞아준다.
놈은 예지 마법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니 몇몇 공격은 아예 피할 생각을 안 하는게 나을 거다.
-퍼엉! 쾅!
맞을 법한 공격은 내구도를 믿고 그냥 맞는다. 정말로 위험한 공격이 섞이면 마력을 분출해 밀어낸다.
나를 한 방에 죽일 수 있을만한 공격은 광선 하나뿐, 그것 하나만이라면 예지고 뭐고 어떻게든 피할 수 있다.
전조도 없고, 시전 동작도 없고, 미래까지 예지해 발사되는 광선을 어떻게 피하냐고?
-지이잉!
이렇게.
-콰과광!
날아드는 일직선 광선을 이번에도 몸을 비틀어 피해내며, 조금씩 거리를 좁힌다.
재버워크는 초월적인 경지에 오른 마법사다. 이 18층 세계에 놈과 맞설 수 있는 존재는 아무도 없을 거다.
그렇기 때문에, 놈은 당연히 실전 전투 경험이 적을 수밖에 없다.
하는 짓이 뻔하잖아. 광선이 쏘아지는 방향은 결국 일직선, 타이밍만 알면 당연히 피할 수 있다고.
미궁에서 나를 복제한 호문쿨루스와 싸워본 게 큰 도움이 됐다. 나를 상대하는 상대방의 기분을 알아 버렸거든.
모든 공격을 우습게 받아내고, 쉴 새 없이 달려드는 지구력 무한 전사란 얼마나 역겨운 상대인지.
물론, 나도 이 상황을 영원히 지속할 수는 없다. 오러 서클의 반동이 내 몸을 빠르게 망가뜨리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걸 저놈이 알 리가 없잖아?
중요한 건 타격을 받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타격을 받아도 내색하지 않는 것.
놈은 한 대만 제대로 맞아도 치명상이고, 유지 중인 마법이 깨지는 것만으로도 맹독에 당할 수 있다.
당장은 난공불락으로 보이는 무적의 원패턴을 유지하고 있지만, 강한 압박감 속에서는 누구나 실수하기 마련.
내가 방패를 던졌다가 까먹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던 것처럼, 방심하다가 아스테리오스의 도끼에 썰렸던 것처럼.
판단력을 상실해라, 빈틈을 보여라, 내가 후벼 파서 무너트릴 수 있는 약점을 노출해라.
이 정도로 부족하다면, 상황을 더 복잡하게 만들어주마.
“인벤토리.”
자색 마탑에서 가져온 마도구를 작동시키며, 인벤토리에서 아이템을 쏟아낸다.
이래봤자 놈이 쏘는 광선 한 방이면 아이템이고 뭐고 다 반토막이 나서 증발할 뿐이지만.
날아드는 투척 무기를 막기 위해 방어 마법을 할애하게 한다면, 의미는 있다.
-후웅! 훙! 휘잉!
재버워크의 몸 주변에 떠오른 공간의 균열을 통해, 내가 던진 무기들이 되돌아온다.
하지만 내 호문쿨루스가 그랬듯이, 나도 내가 대충 던진 무기에는 맞아봤자 딱히 다치지 않는다.
계속해서 쏟아지는 수십 수백 발의 마법 포격과 반사되는 투척 무기까지, 전부 그냥 몸으로 받아내면서.
유일하게 위협적인 마법 광선만을 타이밍을 읽어 피해내며, 달려들어서 검으로 일격.
-카앙!
“쯧.”
그러나 이번에도 공간 마법에 의해 검은 튕겨 나가고, 내 몸만 충격을 고스란히 받았다.
그럼에도 나는 아무런 내색 없이, 삐걱거리는 몸으로 계속 덤벼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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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틈이 드러나길 바라며, 지독한 소모전을 이어간 지 얼마나 지났을까.
갑옷 아래로 핏물이 흘러내려 바닥을 적신다. 전신의 근육이 갈기갈기 찢긴 듯 고통을 호소한다.
삐걱거리던 관절은 이제 반쯤 녹아내린 것 같다. 오러 서클을 장시간 유지한 대가다.
“그렇게 뛰어다니면 안 지치나? 그만하고 함께 차라도 한잔하는 게 어떤가?”
반면 재버워크는 여전히 다섯 개의 오브를 안정적으로 유지한 채, 여유롭게 마법을 운용하고 있다.
미친 새끼, 마력량이 도대체 어떻게 되먹은 거야?
마력 회로를 개선해 인간의 한계를 초월했다느니 어쩐다느니, 그딴 말로 설명이 안 되는 수준이다.
반면 내 MP는 슬슬 바닥이 보이고 있다. 애초에 오러 서클 자체가 연비 좋은 기술은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나는 놈의 마력 고갈이 아니라, 집중력 고갈을 노린 건데- 도무지 생각처럼 되지 않는다.
“후우……큭, 쿨럭!”
짧게 숨을 돌리려 했지만, 목구멍에서 피가 울컥하고 쏟아졌다.
빌어먹을, 내 쪽에 먼저 한계가 찾아올 줄이야. 재버워크 쪽의 집중력이 생각 이상으로 뛰어났다.
재버워크의 등 뒤에 떠오른 오브가 빛나며, 이번에도 푸른 광선이 쏘아졌다.
“큭!”
다시 한번 힘차게 굴러 광선을 피해냈지만, 이어서 날아드는 마법 공격은 당연히 피할 수 없었다.
화염 속성이 내게 잘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놈은 이제 정체 모를 검은 탄환을 날리고 있었다.
나는 날아드는 탄환 앞에서 마법석을 끼워두었던 칼레온을 꺼내, 준비 중이던 검령을 소환했다.
-콰과광! 콰광!
검령은 검은 탄환에 맞아 공중으로 떠올랐고, 만신창이가 되어 떨어졌다.
“어리석어, 준비해 둔 수단은 이걸로 끝인가?”
어딜 봐도 궁여지책에 불과한 수단이었기에, 재버워크는 혀를 차며 그렇게 말했다.
열심히 텔레포트를 사용해 거리를 벌려 대던 재버워크는 이제 스스로 다가왔지만,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녀석이 내 몸 상태를 알 리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다가오는 걸 보면- 설마 처음부터 알고 있었나.
“더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겠지, 용케 그렇게나 움직였어…그래서 더더욱 탐나는군그래.”
천천히 다가온 재버워크가 손을 휘둘렀다. 마법의 사슬이 허공에서 출현했다.
“자, 사슬을 채워서 데려가도록 하지.”
아무래도 완전히 이겼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멍청한 새끼.
물론 당장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는 건 사실이지만, 내 HP는 이제야 절반 정도 깎였거든.
그리고 HP가 절반 이하로 떨어진 순간, [불굴]스킬은 발동한다.
-카앙!
검을 휘둘러 재버워크의 사슬을 튕겨내고, 인벤토리에서 갑옷 무더기를 꺼낸다.
일시적으로 시야를 가린 뒤, 놈의 배후로 움직여-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오러를 두른 검을 휘두른다.
재버워크의 반응은 기민했다. 예지의 오브가 있기 때문에, 몇 초 뒤의 광경을 보았을 테니.
“이런, 기습이 안 통한다는 걸 아직도 모르는 모양이군.”
-지이잉!
재버워크의 오브가 광선을 쏘고, 동시에 공간 마법을 전개했지만- 방향이 틀렸다.
환각 마법 전문의 자색 마탑에서 강탈해 온 마도구, 환영의 베일.
그 효과는 특정한 대상 하나에게 완벽한 환영을 덧씌워 모습을 속이는 것.
재버워크의 공간 마법이 막아낸 것은, 내가 아닌 만신창이가 된 검령의 공격이었다.
내가 아스테리오스의 도끼에 반으로 썰렸던 것은, 승리를 확신하고 방심했던 탓.
“너도 다를 거 없구나, 그치?”
-촤악!
광선에 의해 검령이 반으로 토막나는 것과 동시에, 내가 휘두른 검이 재버워크의 등을 크게 베었다.
아예 몸을 대각선으로 갈라 버릴 생각이었는데, 방어 마법이 한 겹 더 있었나.
[불굴]스킬의 힘까지 빌려 날린 혼신의 일격이었지만……뭐, 일단 유효타를 먹였으니 됐다.
나는 마지막까지 아끼고 있던 백색 마탑의 마도구, 천사의 날개깃을 사용했다.
마도구의 효과는 지극히 단순, 내장된 마력을 소모해 사용자의 상처를 흡수한다.
-빠직!
너무 많은 상처를 흡수한 탓인지, 수백 번을 쓸 수 있다던 날개깃은 파괴되고 말았지만.
내 HP는 완벽하게 회복되어- 풀피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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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맞수
제대로 합을 나눠본 적은 없지만, 이 여기사는 징그러울 정도로 강하다.
내가 괜히 곧바로 도주를 결심했던 게 아니다. 애초에 도주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차이가 있었다.
물론 그때보다 대단히 스펙이 오른 건 아니기에, 평범하게 생각해 본다면 이건 절대 이길 수 없는 싸움이다.
-콰광!
메르세데스가 측면으로 휘두른 검을 막아내자마자, 전신에 어이없을 정도로 강한 충격이 닥쳤다.
다시 말하지만 막은 거다. 그냥 무방비하게 맞은 것도 아니고, 제대로 검을 들어 막았다.
“씨, 발……!”
그런데 막아도 막은 것 같지가 않다. 나는 [감각 강화]를 발동하며 자세를 다잡았다.
그리고 발을 굴러 거리를 좁히며, 곧바로 반격에 나섰다.
간결한 동작으로 검을 휘두른다.
단순한 동작이지만, 그만큼 다양한 방향으로의 전환에 능한 공격이다.
상대의 반응과 대응을 미리 상정하고 움직이는 검로, 막아도 피해도 정확하게 후속타로 이을 수 있다.
하지만 메르세데스는 아주 간단하게 내 상정을 뛰어넘어 대응해 왔다.
-후웅.
검을 뻗는 동작 자체는 지극히 평범하다. 이런 각도로 할 수 있는 건 단순한 받아치기 뿐이다.
-콰광!
하지만 평범한 받아치기일 뿐인데도, 비정상적인 위력과 속도가 나왔다. 몸이 기울었다.
메르세데스의 검은 그대로 한 번 더 휘둘러졌다. 재빨리 검을 들어 올려 막아 냈다.
그러나, 분명 제대로 막아냈음에도 뒤로 주욱 밀려났다.
심지어 이걸로 끝이 아니다.
-콰캉!
분명 멀리 밀려났던 것 같은데,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내 검을 후려친다.
손바닥이 징징 울린다. 악력이 조금만 달렸어도 검을 놓칠 뻔했다.
-카가각, 카각!
검을 맞대고 각자의 검로를 펼치며, 서로의 목을 노리는 대치 상황.
이럴 때는 힘의 균형이 무너지는 순간 곧바로 일격을 허용하게 된다. 그런데 이 년은 왜 이렇게 힘이 센 거야.
자세를 보면 그냥 손목 힘만 쓰는 것 같은데, 검에 실리는 무게가 장난이 아니다.
“형편없군.”
이어서, 메르세데스는 단번에 자세를 낮추고 무게중심을 바꿨다.
위에서 짓누르던 검이 순식간에 아래로 파고든다. 나는 재빨리 검을 고쳐 쥐어 대처했지만.
-콰각!
녀석이 검을 위로 휘두른 순간, 막대한 충격을 받으며 몸이 위로 떠 버렸다.
“썅.”
외마디 욕설을 내뱉으며, 추격에 대비해 공중에서 최대한으로 자세를 바꾸었다.
하지만 공격은 이어지지 않았다. 메르세데스는 오히려 뒤로 물러서며 검을 털었다.
-풀썩.
나는 바닥에 착지하며, 다시 한번 속으로 욕을 내뱉었다.
이 깐프 새끼가 사람을 아주 개좆으로 보고 있구나.
메르세데스는 조금 전부터 시종일관 한 손만 써서 나를 상대하고 있었다.
처음에 등 뒤로 손을 돌렸을 때는 보조무기라도 꺼내는 건가 싶었지만, 그게 아니라 뒷짐을 진 거였다.
그래놓고 격의 차이를 보여주겠다면서 이렇게 덤벼오던데, 아주 시발 어이가 없다.
“진짜 시발, 이놈의 탑은 왜 이렇게 양심이 없는 거야.”
내 검술 실력도 그동안 많이 좋아졌다고 생각했는데, 저 양심 없는 년을 상대로는 도저히 상대가 안 된다.
[중급 검술 Lv.4]
저층 도전자 중에서 나보다 검술 스킬이 높은 도전자는 없을 텐데, 저건 뭐가 저렇게 센 건지.
“단명하는 종족은 생각도 짧군, 설마 정말로 나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한 건가.”
메르세데스는 검을 늘어트리고 다가오며, 뻔한 도발을 내뱉었다.
“당연하지, 느그들 왕자처럼 쉽게 단념하는 성격이 아니거든.”
저 년도 저렇게 말하면서도, 사실은 알고 있을 거다.
내 전력은 이 정도가 아니라는 걸, 아직 설레설레 하고 있다는 걸.
나는 다양한 무기를 전환해가며 싸우는 변칙적인 전투 방식을 아직 내보이지 않았다.
이번에는 딱히 검술만으로 이기겠다는 생각을 한 건 아니다.
애초에 힘을 아끼면서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그런 말을 해서 좋을게 없을 텐데, 인간족.”
내 도발에 인상을 구긴 메르세데스는, 그대로 발을 굴러 사선으로 검을 휘둘렀다.
-부우욱!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간 검이 공기를 가르며 찢어지는 듯한 소리를 낸다. 정말 어이가 없다.
하지만 이젠 슬슬 익숙해졌다. 뒷짐을 진 채로 펼칠 수 있는 검로는 한정되어 있으니까.
그리고, 이제 와서 말하는 거지만- 사실 변칙 무기술만이 내 모든 것은 아니다.
그것 말고도 잔재주가 몇 개 더 있거든, 이를테면 이런 거.
[혼신]
-카앙!
혼신 스킬을 발동해 휘두른 내 검이, 메르세데스의 검을 튕겨 냈다.
**
2층 보스전에서 터득했던 패시브 스킬, 혼신.
스킬의 성능은 전력을 다한 공격의 위력이 증가한다는 참으로 모호한 것이었다.
무슨 수치가 적힌 것도 아니고, 그냥 전력을 다하면 위력이 세진다니?
얻은 뒤로 한 번도 그 성능을 체감해 본 적이 없었던 이 스킬의 진가는 일정 레벨을 돌파한 뒤에야 나타났다.
-카앙!
자신의 검이 튕겨 나올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해본 것인지, 메르세데스의 표정이 단번에 굳어졌다.
그럴테지, 녀석이 보기에는 내 근력이 갑자기 강해진 것처럼 느껴질 테니.
그리고 실제로도 그렇다.
일정 레벨을 돌파한 혼신 스킬에는 액티브 사용 옵션이 붙었다. 효과는 특정 스탯의 순간적 증폭.
MP를 소모하는 일회성 버프 스킬로, 솔직히 연비는 좋지 않다.
하지만 이렇게 결정적인 순간에 사용해 스탯을 증폭시키는 것으로, 상대를 당황하게 하는 것이 가능하다.
[혼신]
메르세데스의 검을 쳐낸 뒤, 한 번 더 혼신 스킬을 사용했다.
이번에 증폭시킨 스탯은 민첩.
빈틈을 드러낸 메르세데스의 몸통을 향해, 평소보다 훨씬 빨라진 검을 휘둘렀다.
-카각!
메르세데스는 그마저도 막아냈지만, 결코 완벽하게 막은 것은 아니었다.
시종일관 유지하고 있던 뒷짐도 풀렸고, 순간적으로 무게중심이 크게 기울어 자세가 무너졌다.
물론 이 상태에서 검로를 이어가도 유효타를 먹이긴 힘들 거다.
그러니, 비장의 무기는 이런 순간에 꺼내는 거지.
“딱 걸렸다.”
인벤토리에서 손도끼를 꺼내, 메르세데스의 귀를 향해 휘둘렀다.
**
엘레노어와의 수련을 통해 마력감응을 터득한 이후, 나는 혼신 스킬을 훨씬 자유자재로 쓸 수 있게 됐다.
체내의 마력이 이동하는 것을 감각할 수 있게 되면서, 혼신 스킬의 원리를 대강 파악했기 때문이었다.
신체의 특정 근육에 마력을 흘려 넣어 폭발적인 힘을 내는 방식이었다.
원리를 파악하자 응용으로 잇는 것도 쉬웠고, 실전 전투에 바로 적용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촤악!
휘둘러진 손도끼가 엘프 특유의 길쭉한 귀를 거칠게 그었다. 그렇게 큰 상처는 아니다.
그래도 어쨌든 상처는 상처, 제대로 한 방 먹였다.
도망치는 것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던 상대에게, 빈틈을 노려 한 방 먹였다.
“흐핫.”
이게 얼마 만에 느껴보는 짜릿함인지, 저절로 웃음이 나온다. 끝내준다.
이대로 멈출 수 없다.
한번 파고든 빈틈을 이 정도 값으로 때울 수는 없지, 이대로 계속해서 몰아친다.
인벤토리에서 무기를 쏟아내며 공격을 이어나간다. 검과 창과 도끼와 망치와 쇠구슬까지.
-캉캉캉캉캉카강카가강카앙!!
그동안 단련해온 무기술과 체술을 쉴 새 없이 퍼부었다.
“이, 놈……!”
혼신 스킬의 활용은 단순히 스탯이 증폭되는 것 이상의 이점을 가진다.
특정 스탯을 갑자기 한 방향의 강화에 몰아버림으로써, 내 공격의 속도와 위력을 예측할 수 없게 만든다.
당연히 메르세데스도 시간이 지나면 알아서 감을 잡겠지만, 적어도 지금 당장은 아니다.
-카앙!
방어에만 급급하던 메르세데스의 검을 쳐올리고, 가드가 텅 비어버린 몸통을 향해 단검을 휘둘렀다.
-푹!
드디어 제대로 들어간 공격, 이어서 나는 한동안 쓰지 않았던 스킬을 사용했다.
[라이트닝 차지]
-파지직!
단검을 통해 전격이 흘러들어 가며, 메르세데스의 표정이 한껏 일그러졌다.
원래는 조금 짜릿한 정도에 불과했던 스킬이지만, 이것도 마력 운용을 깨우치며 위력이 크게 올랐다.
그런데, 박혀 들어간 단검이 뽑히지 않는다.
처음 있는 일은 아니기에, 그대로 단검을 놓아버리고 손도끼를 휘둘렀다.
-콱!
메르세데스의 맨손이 손도끼를 붙잡았다. 조금 전보다 명백하게 반응이 빠르다.
쯧, 내 턴은 이걸로 끝인가.
그래도 이 정도면 제법 괜찮았다. 뒤로 가볍게 뛰어서 거리를 벌렸다.
“큭……”
메르세데스는 작게 신음하며 옆구리에 박힌 단검을 뽑아냈다. 생각보다 깊게 박힌 듯하다.
만약 처음 만났을 때처럼 갑옷과 방패를 착용하고 있었다면, 저 단검도 제대로 박히지 않았을 거다.
나를 얕잡아 본 결과가 무시할 수 없는 부상으로 이어진 거다.
“야, 아까 한 말 또 해봐. 뭐가 형편없다고?”
난잡하게 꺼내놓았던 무기를 인벤토리로 되돌려 정리하며, 가볍게 도발을 던졌다.
쓸데없을 정도로 높은 자존심이 특징인 하이엘프 아니랄까 봐, 메르세데스의 얼굴은 금세 일그러졌다.
“지금 그 말, 후회하게 될 거다.”
-쿠르릉!
천둥 소리와 함께 메르세데스의 몸에 새하얀 빛이 맴돌기 시작했다. 마력 강화다.
방어력이라고는 전혀 없는 정복 차림이지만, 저걸 사용한 시점에서 그런 건 아무 의미가 없다.
공격력도 방어력도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수준으로 증폭됐겠지.
“그래, 너도 2페이즈라 이거지?”
즉, 이제부터가 진짜 싸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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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 노욕의 종점
상처가 회복되고 HP는 최대로 차올랐지만, 완전한 풀 컨디션이 된 건 아니다.
오러 서클을 장시간 사용하며 소모된 MP는 그대로, 반면 재버워크는 크게 일격을 먹었을 뿐이다.
치명상에 준하는 타격을 입히긴 했지만, 놈에게도 회복 수단 하나쯤은 있을 터.
고로, 지금 몰아쳐야 한다. 확실하게 숨통을 끊는다.
“흐읍!”
오러를 두른 검을 휘둘러, 휘청거리는 재버워크의 목을 노렸다.
하지만 놈이 펼쳐낸 방어막에 의해 검은 막히고 말았다. 역시 오러 서클 없이는 한 방에 뚫을 수는 없나.
마력은 바닥나기 직전, 쓸만한 치유 수단도 이미 써버렸다. 이 이상으로 오러 서클을 사용하는 건 너무 무모한 짓이다.
근데 뭐, 내가 언제는 안 무모한 짓만 했나. 망설임 없이 팔에 오러 서클을 두르고, 힘차게 검을 긋는다.
-카가각!
하지만 재버워크의 몸을 두르고 있는 방어막은 뚫릴 생각을 하질 않는다. 뭔가 이상하다.
오러 서클의 출력이 떨어졌나? 그게 아니면 놈의 방어막이 더 단단해졌나?
의문을 품은 채 즉시 [사고 가속]을 발동시킨다. 느리게 비치는 시야로 천천히 원인을 찾는다.
그리고 곧 눈에 들어온 것은, 재버워크의 등 뒤에 떠 있는 오브의 숫자.
여섯.
씨발.
오브가 다섯 개라는 정보조차 틀렸던 건가. 두 개 이상을 다루는 것조차 비정상이랬으면서, 어이가 없네.
하지만 상황이 꼭 절망적인 건 아니다. 재버워크의 안색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미리 준비하지 않은 건지- 회복 수단은 따로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이 순간 시간은 내 편이다.
마법을 고속으로 캐스팅하는 것도, 오브를 조종하는 것도, 모두 상당한 연산 능력을 요구하는 일.
지금은 중상을 입고, 방어 마법이 깨지며 소량이나마 독을 흡입한 상태.
그런 꼴로 얼마나 오랫동안 제 실력을 낼 수 있을까, 그것도 전투 경험이 얼마 없는 책상물림 마법사가.
“흐, 흐흐… 상처를 입은 게 대체 얼마만인지 모르겠군. 대단하네.”
한편, 곧바로 카운터가 날아올 줄 알았지만- 재버워크는 어쩐지 피를 뚝뚝 흘리며 실실 웃기 시작했다.
“마지막까지 그런 수를 숨기고 있었을 줄이야. 보통 각오론 할 수 없는 짓이지.”
놈은 중얼거리듯 말을 이어갔다. 나는 언제든 공격할 준비를 유지한 채, 잠시 놈의 지껄임을 들었다.
“헌데, 그렇게까지 나를 죽이고 싶어하는 이유를 도무지 모르겠군.”
“뭐?”
“자네에게, 그 아이가 대체 뭐라고?”
대꾸할 생각은 없었지만, 너무나 터무니없는 말을 내뱉는 바람에 무심결에 입을 열고 말았다.
죽이고 싶어하는 이유를 모르겠다니, 에인의 기억을 훔쳐봤다면서 어떻게 저런 소리를 할 수 있지?
싸이코패스 마법사에게 뭘 기대하느냐마는, 이번 말만큼은 진심으로 불쾌했다.
“우연히 주워 온 아이에게 그렇게 정을 주는 겐가? 게다가 절반은 흉측한 마족의 피를 이은 존재인 것을.”
“알아, 새끼야.”
“그렇다면, 그 아이가 언젠가 재앙이 될 수 있다는 사실도 당연히 알고 있지 않나?”
다시 한 번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 꼬마가 재앙의 씨앗이라니, 쉽게 넘길 수 없는 이야기였다.
“아하, 그건 몰랐나 보군.”
그리고 이어진 재버워크의 말은, 믿기 어려울 만큼 충격적이었다.
**
재버워크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나는 자연스럽게 한 가지 사실을 알게 됐다.
다음 층인 19층이 18층의 아주 먼 미래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 정확히 얼마나 미래인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확실한 것은 오직 하나. 19층의 배경은 18층의 무대인 대륙이 거대한 재앙을 겪고 몰락한 이후라는 것.
나는 그 재앙이 당연히 재버워크와 관련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분명히 이 미친 마법사가 뭔가 벌인 것이라고.
“인간과 마족의 혼혈은, 성장하면서 결국 완전한 마족으로 변모하게 된다네.”
원인을 따지자면, 분명 이놈이 맞았다.
“그것도 단순한 마족이 아닌, 반드시 정신적인 장애를 가진 마족으로 말일세.”
“마족 혼혈은 어릴 적부터 발달장애와 자폐적 기질을 조금씩 보이는데, 어째서인지 아는가?”
“하나의 두뇌에 두 자아가 섞여서 혼재하기 때문이라네, 인간의 자아와 마족의 자아가 말이지.”
“아니, 자아라는 표현은 조금 어폐가 있군. 대립 의식, 그 정도 표현이 걸맞지 않을까?”
“혼합되어 있으면서도 끈질기게 반목하는 두 의식이, 서로를 죽이고 있는 걸세.”
“당장은 인간 쪽의 의식이 주도권을 잡고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잠시간 이어진 재버워크의 이야기는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었다.
“그 아이는 끝내, 강렬한 파괴욕구와 위험한 힘을 가진 마족이 될 터- 아마 이런 이명이 붙지 않을까?”
48층에서 영혼의 형태로 등장하는 보스, 내가 14층에서 베어 넘긴 육신.
“회색 마왕.”
꼬마 에인은 회색 마왕이 될 것이다.
“나는 결국 사라져야 마땅한 재앙의 싹을 유효하게 활용했을 뿐인……쿨럭, 이런.”
재버워크가 돌연 입에서 피를 토했다. 잠깐 흡입했을 뿐임에도 남색 마탑의 독은 잘 듣고 있는 모양이다.
에인이 마족이 되어 날뛰게 될 것이라는 재버워크의 예측은 분명 옳을 것이다- 충격적인 사실이지만, 그래서 어쩌라고.
나중에 마왕이 되건 뭐가 되건, 지금의 꼬마는 그냥 세상에서 엄마를 제일 좋아하는 가엾은 아이일 뿐이다.
“나불대는 건 끝이냐, 숨 돌릴 시간 줘서 고맙다. 덕분에 마력이 꽤 찼어.”
어쩐지, 에인의 얼굴에 말라붙은 눈물 자국이 있던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아마 에인에게도 똑같은 말을 했겠지.
너는 언젠가 사악한 마족이 되어 세상을 파괴할 거라고, 너는 살아있어서는 안 되는 존재라고.
마왕을 무찌르는 정의로운 현자가 되고 싶어하던 그 꼬마에겐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 꼬맹이가 웃으면서 지내기를 바랐고, 그걸 방해하는 놈들은 죄다 죽여버리겠다고 다짐했거든.”
다시금 검에 오러를 두르고 선언한다, 네가 나한테 뒈지는 이유는 그거 하나면 충분하다고.
“쿨럭, 쿡, 그런가,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 우선 사과부터 하지, 내가 자네를 너무 얕본 모양이야.”
재버워크는 토해낸 피를 닦아내며, 오른손으로 쥐고 있던 스태프를 처음으로 휘둘렀다.
“이제 어설픈 수는 쓰지 않겠네, 자네를 쓰러트려야 할 적수로 보고……전력을 다하도록 하지.”
그 순간, 내 [초감각]스킬은 머리가 아플 정도로 강렬한 경고를 발했다.
재버워크의 등 뒤로 새로운 일곱 번째의 오브가 떠올랐다.
그리고 한 번 더, 새로운 여덟 번째의 오브가 떠올랐다.
다시 한 번 더, 또 새로운 아홉 번째의 오브가 떠올랐다.
하나씩 떠오르기 시작한 오브의 숫자는 순식간에 백 개에 달했다.
**
어지간히 재능 있는 마법사라도 두 개 이상을 다루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알려져 있는 오브.
눈앞의 재버워크는 그것을 다섯 개나 동시에 다루는 초월적인 경지에 다다른 마법사라고 들었다.
하지만 저 개수는 대체 뭐란 말인가, 백 개라니- 인간의 뇌로 저만한 오브를 동시에 다루는 게 가능한 건가?
마법에 완전히 문외한이던 시절의 나라면 ‘또 양심 없는 지랄을 하네’ 라 말하고 넘어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쌩초짜 수준이라고는 해도 마법에 입문한 지금의 내 시선으로 보기에는- 저건 그런 수준이 아니다.
재능이나 실력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저만한 오브를 동시에 다루는 건 ‘그냥’ 불가능하다.
혹시 나도 저항할 수 없는 환각 마법 같은 것으로 눈을 속이고 있는 걸까?
“놀랐나 보군, 하지만 이건 환영도 속임수도 아니라네. 자, 직접 보게나.”
재버워크는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그렇게 말하며 오른손에 쥔 스태프를 흔들었다.
그러자, 스태프 윗부분에 달린 네모난 큐브가 흔들거리더니- 이내 반으로 갈라져 그 내용물을 노출했다.
미약하게 발광하는 선이 오밀조밀 엉켜 있는, 붉은 고깃덩어리- 겉보기엔 그렇게 보였다.
하지만 마력감지를 통해 확인한 그 정체는, 이제까지 본 그 어떤 것보다 끔찍했다.
“이런, 미친……새끼.”
놈이 지닌 비현실적인 양의 마력, 백 개의 오브를 동시에 다루는 연산 능력, 그 모든 비밀이 풀렸다.
큐브 속 고깃덩이의 정체는, 수많은 인간에게서 추출했음이 분명한 조직- 극한까지 압축된 뇌신경과 마력회로였다.
놈은 백 명이 넘는 인간에게서 ‘마법’을 담당하는 부분을 모조리 추출해, 자신의 스태프에 집어넣은 것이다.
저 길쭉한 스태프 하나를 만드는 데 얼마나 많은 희생자가 필요했을지, 상상도 가지 않는다.
“나도 이만한 숫자를 동원하는 건 처음이라네, 하지만 자네가 어디 적당히 강해야 말이지.”
놈의 스태프에 달린 큐브는 다시 흉측한 내용물을 감추고, 강렬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떠오른 백 개의 오브 역시 함께 발광하며, 숨이 막힐 것 같은 마력으로 일대를 잠식해 나갔다.
“또 무슨 수단을 숨기고 있을지 모르니, 단순한 방법으로 가겠네. 받아 볼 텐가?”
가진 마력을 모두 쏟아부어 날리는 최강의 일격- 한 방 싸움으로 결판을 짓자 이건가.
하지만 노멀 클래스 전붕이인 내게는 마땅히 강력한 공격 기술이 없다.
“해야지 뭐, 씨팔.”
없다면, 이 자리에서 만들어야겠지. 머리를 쥐어짜내 방법을 생각한다.
오러 서클을 실전에서 바로 시전했던 것처럼, 이 자리에서 이론상으로만 있던 기술을 짜낸다.
검령이 말해준 오러 운용의 종결점, 전사에게 있어서 고유마도와 같은 것.
나만의 의념기를, 이 자리에서 만들어 내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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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 장소법
조금이라도 전투 능력에 도움이 될 만한 스킬은 모두 사용한다.
[사고 가속]
스탯이 상승하는 감각을 느끼며, 마지막으로 사고 가속까지 발동시켰다.
극한까지 끌어올린 사고력은 주변의 광경을 멈춘 것처럼 인식하게 만든다.
찰나를 수백 번으로 쪼갠 끝에 도달한 정지된 세계.
의념기를 구현할 시간을 버는 것이라면 이 정도만으로 충분하다. 하지만 나는 멈추지 않고, 사고를 더욱 가속한다.
오러와 검기를 처음 각성했던 순간- 그때 나는 분명히 정지된 세계를 넘어, 나의 의식만이 존재하는 공간에 들어섰다.
처음 체험했을 때는 단순한 주마등으로 생각했지만, 이젠 그것이 의도적으로 불러일으킬 수 있는 현상임을 안다.
그곳에서 수억 번의 시행착오를 반복해, 끝내 오러를 완성시켰듯- 이번에는 의념기를 깨우치는 것이다.
아직 확신은 없지만, 해내야 한다. 그 공간으로의 입성은 의념기를 터득하기 위한 기본 전제니까.
가속된 사고로 인해 멈춘 듯 보이던 세상이, 천천히 흑백으로 물들어 간다.
극점을 향하는 집중력과 사고력이, 인식할 필요가 없는 것부터 순서대로 지워 없애는 과정이다.
처음엔 색이 사라지고, 이어 선이 흐려지며, 마침내 시야가 완전히 암전된다.
시야가 검게 물든 뒤엔 청각, 후각, 촉각, 미각이 차례로 소실된다.
그렇게 모든 오감을 소실하고, 세상을 인지하던 미약한 기감마저 사그라든 그 순간.
“됐다.”
나는 다시 한 번, 축축한 강물과 나 자신만이 존재하는 세계에 들어선다.
오롯이 내 사고만이 존재하는 공간. 검령은 과거 의념기에 대해 설명하며 이 현상을 언급한 적이 있었다.
형태는 사람마다 다르지만, 일정한 경지에 도달한 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 체험하는 현상이라고.
검령이 스스로 이름 붙이기를, 검의 절벽. 하지만 나의 내면세계에는 절벽도 검도 없다.
뭔가 적당한 다른 이름이 필요하겠지만, 일단은 내면세계라고 부르자.
“이거 좀 무협지 같네.”
나는 괜히 그렇게 중얼거리며, 강물이 흐르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이번에도 차림새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이다.
음, 이게 정말 내 사고로 이루어진 내면세계라면, 옷쯤은 마음대로 만들 수 있어야 할 텐데.
내 무의식이 이 상태를 가장 편하고 자연스럽다고 인식하는 건지, 아무리 생각해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뭐 됐어, 누가 보는 것도 아니고. 일단 복습부터 해볼까.”
나는 가볍게 마력강화부터 시작해, 몸에 오러를 두르고, 마지막으로는 오러 서클을 구현해 보았다.
오러의 고리를 또 하나의 마력 회로처럼 활용해, 마력이 사용되는 기술의 위력을 비약적으로 높이는 도핑 기술.
이건 검령이 생전에 만들어냈던 의념기다. 하자가 많은 기술인 것 같지만, 그건 사용자가 나이기 때문이겠지.
검령의 말에 따르면, 의념기란 전사 자신의 심상을 오러에 녹여내 구현하는 것이라 한다.
마력은 사용자의 감정과 마음에 영향을 받지만, 오러는 감정과 무관하게 언제나 안정적인 성질과 형태를 보인다.
그러나 일정한 경지에 도달한 전사는 자신의 의지를 오러에 투영함으로써, 그 성질과 형태를 변환시켜 더욱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으며- 그것이 바로 ‘의념기’라고.
타인의 의념기를 모방하는 것도 가능하긴 하지만, 동일한 심상을 가지지 않은 채 발현된 의념기는 결국 반쪽짜리.
오러 서클은 검령이 품고 있는 의지가 형태로 발현된 것이기에, 타인인 내가 사용하는 한 결코 완벽할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어떨까.”
그렇다면, 내가 오러에 담아낼 수 있는 의지는 무엇일까? 나는 눈을 감고 상상했다.
나를 싸우게 하는 것, 내게 이 탑을 뚫고 나아가겠다는 의지를 심어준 존재.
심상의 세계가 요동치며, 떠올린 모습을 그려낸다.
“역시, 그럴 줄 알았지.”
오래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내가 담아낼 의지는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으니까.
심상이 그려낸 것은 익숙한 얼굴의 다크엘프. 처음으로 함께 ‘다음’을 약속했던, 엘레노어.
주변을 둘러본다. 얕은 강이라 생각했던 심상의 풍경은, 어느새 호수로 변해 있었다.
여기는 별빛이 흐르는 곳.
내 심상이 이 장소를 그려냈다는 건- 자각하지 못했지만, 역시 그때부터 마음이 있었다는 거겠지.
하긴, 저런 끝내주는 그림자 주머니를 달고 있는 다크엘프가 나랑 어울려줬는데, 어떻게 마음이 없었겠어.
애써 시선을 돌리려 했지만 그럴 수 없었던- 이 심상이야말로, 내 의지에 불을 붙이는 기름.
“모여라.”
피식 웃으며 손을 뻗는다. 널리 펼쳐져 있던 심상이 내 손안에서 압축되며 불꽃의 형태를 이룬다.
내 의지와 욕망이 하나 되어 만들어낸 불꽃. 이것이 바로, 나의 의념기가 구현할 형태.
이제 남은 건, 이걸 검에 담아 쏘아내는 것뿐.
뭐, 의념기도 생각보다 어려운 건 아니네. 자신 있었다니까.
“자, 가보자고.”
무한히 가속되던 사고가 정속을 되찾고, 세계는 다시 원래대로 돌아온다.
**
백 개의 오브를 소환한 재버워크는, 자신의 모든 것을 담아 거대한 마력의 창을 직조하고 있었다.
그냥 맞았다가는 분명 몸이 가루가 되겠지, 피할 수 있을 만큼의 공격 범위도 아니야. 맞받아쳐야만 한다.
나는 오른손에 흐르는 마력을 내면세계에서처럼 조작해, 불타는 오러의 줄기를 만들어냈다.
재버워크의 이야기를 들으며 MP를 회복해둔 덕에, 지금 내 상태는 한없이 만전에 가깝다.
하지만 이런 최상의 컨디션에서도, 이 불타는 오러를 완전히 통제하는 건 쉽지 않다.
젠장, 안정적인 오러를 다루는 것과는 난이도가 전혀 다르다.
화염의 형태를 띠는 탓인지, 입자 하나하나의 움직임이 무척 불규칙하다.
“후우……천천히, 천천히 가자.”
심호흡을 하며, 오른손을 감싸는 불타는 오러 줄기를 조심스럽게 검 속으로 밀어 넣는다.
어떻게든 검에 쑤셔 넣기만 하면, 그다음은 검기를 쏘는 요령대로 분사하면 끝이다.
위력은 충분할 것이다. 이번이 첫 사용이지만, 이거라면 놈을 불태우고도 남을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
하지만 기대 위력은 둘째치고, 막상 실전에 투입하려니 생각도 못 한 문제점이 발목을 잡았다.
“염병, 이거 왜 이렇게 느려?”
아무리 봐도 내가 검에 오러를 담는 것보다, 재버워크의 마법이 준비되는 게 더 빠를 것 같다.
저 새끼가 정정당당하게 내 준비 시간을 기다려 주지는 않을 테니,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야 한다.
아니, 잠깐만, 그건 서로 마찬가지 아닌가.
내가 왜 저 새끼랑 정정당당하게 풀파워 화력 대결을 해 줘야 하지? 그냥 먼저 베면 되는 거 아닌가?
굳이 100% 완성된 의념기를 휘둘러야 할 필요는 없다. 놈의 방어를 뚫고 치명상을 입힐 수만 있으면 그만.
백 개의 오브는 대부분 창을 직조하기 위해 사용되고 있다. 물론 그 중 몇 개는 방어를 위해 쓰이고 있겠지.
하지만 예지의 오브는 없다. 예지마법이 담긴 오브만큼은 유일하게 눈으로 식별 가능하니까, 확실하다.
그렇다면 미완성된 의념기로 놈의 방어를 뚫는 것은 가능한가- 당연하지.
“인벤토리.”
황색 마탑에서 빌려 온 마도구, ‘천뢰의 장갑’을 꺼내서 다시 발동한다.
번개 속성을 띠는 마력의 입자로 몸을 바꾸어, 재버워크의 한 발짝 앞까지 단번에 돌진한다.
그리고 타이밍을 맞추어, 마도구의 효과를 해제- 그리고 오른손에 들린 불타는, 아니, 반쯤 불타는 검을 휘둘렀다.
원래라면 원거리까지 강력한 화염을 분사해 모든 것을 불사르는 기술이지만, 이 상태로도 위력은 충분.
“뒤져라, 새끼야!”
재버워크의 몸 앞에 재빨리 몇 겹의 방어막이 나타났지만, 오러의 불꽃은 그 모든 것을 살라버렸고.
미완성의 의념기는 그대로 놈의 상반신을 파고들어, 그 안쪽까지 불태워 증발시켰다.
쏘아지기 일보 직전이었던 마력의 창은 주인의 통제가 끊어짐과 동시에 격렬하게 발광한다.
“어어 씨발.”
젠장, 저거 폭발할 것 같은데.
검을 놓아버리고 재버워크의 몸을 밟아 최대한 멀리 도약하며, [철벽] 스킬을 사용했다.
마력의 창이 붕괴함에 따라 세상이 밝게 변하고, 터져 나온 천둥소리가 귓가를 울리더니 이내 조용해진다.
새하얗던 시야도 이내 몰려드는 통증과 함께 새까맣게 암전되고, 전신의 감각이 순간적으로 마비된다.
무너지는 어두운 세상 속에서 유일하게 보인 것은 하나의 시스템 메시지.
[레벨 업!]
조금 어이없는 결말이지만, 어쨌든 내가 이겼다.
**
천지를 뒤흔들던 마력의 폭풍이 끝나고, 내 눈에 비친 것은 하늘이었다.
재버워크가 만들어낸 창이 폭발하며 발생한 충격파는 정말 어마어마한 위력을 자랑했다.
저 폭발이 지향성을 갖고 나한테 날아올 예정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절로 식은땀이 흐를 정도로.
당연히 그 충격파에 휩쓸린 나도 멀쩡할 수는 없었다. 하늘이 보인다는 것은 내가 땅에 뻗어 있다는 의미겠지.
인벤토리를 열어 얼굴이 있을만한 위치로 포션을 꺼내 드롭시켰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아서 먹을 방법이 없었다.
에라이, 나중에 몇 개는 병을 딴 상태로 넣어두든가 해야겠다. 이런 상태에선 있어도 먹지를 못하네.
어쩔 수 없이 그대로 누워서 [초재생]의 효과로 몸이 회복되기만을 기다렸다.
“어우……뒈질 뻔했네.”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주변을 둘러보니, 마탑의 마도구로 형성했던 지형은 온데간데없었다.
재버워크가 텔레포트로 빠져나갈 수 없게끔 벽을 매우 두껍게 만들었었는데, 그게 방금 걸로 싹 소멸할 줄이야.
그 녀석의 마법과 내 의념기가 정말 그대로 충돌했으면, 승패랑 별개로 같이 뒤졌을 가능성도 있었겠다.
-쿠구구구궁!
머릿속으로 직전의 전투를 복기하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서려던 그 때, 돌연 진동이 일었다.
그러고보니까 여기, 공중에 떠 있는 섬이었지- 그것도 재버워크의 마력으로 날아다니고 있었던 것 같은데.
재버워크가 죽어서 섬이 붕괴하려는 건가, 마지막까지 더러운 새끼 같으니.
“쉴 틈도 안 주냐 치사한 새끼야!”
나는 욕설을 내뱉으며 섬에서 벗어나기 위해 달리기 시작했다.
[경고, 에픽 퀘스트의 진행도가 99%를 초과함에 따라, 계층의 설정이 변경됩니다.]
그 때, 눈앞에 나타난 것은 낯선 듯 낯설지 않은- 새빨간 시스템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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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 밴더스내치
딱 한 번밖에 보지 못했던 메시지지만, 워낙 강렬했던 탓에 그 내용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미궁 지역이 소멸합니다. 보스 몬스터의 전이문 활성화 권한이 임시로 에픽 퀘스트에 이양됩니다.]
나는 몇 번째인지조차 가늠할 수 없는 섬뜩한 감각을 다시 느끼며, 재버워크와 격돌했던 그 자리로 되돌아갔다.
[에픽 퀘스트 진행 중, 우호도 80 이상의 NPC와 파티를 결성할 수 있게 됩니다.]
마법의 창이 폭발하며 모든 것이 쓸려나간 그 한가운데에, 깊숙이 박혀 있는 한 자루의 스태프.
스태프 끝에 달린 큐브가 다시 한번 저절로 열리며, 백 명이 넘는 인간의 신경과 마력회로가 꿈틀거리며 기어나오고 있었다.
기어나온 신경들은 거대한 기생충 떼처럼 땅을 파고들며 대지를 침식해간다. 익숙하면서 불길한 마력이 샘솟는다.
분명히 재버워크는 처치했다. 다소 허무한 결말이었지만, 확실하게 숨통을 끊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경험치가 올랐고, 레벨 업 알림도 떴으며, 내 마력감지에도 생체 반응은 딱히 걸려들지 않았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이런 일은 처음이 아니었다. 그때도, 나는 에픽 퀘스트를 진행하고 있었다.
“씨발, 이번에는 또 뭐가 튀어나오려고……!”
욕설을 내뱉으며 검을 들고 달렸다. 꿈틀거리는 저 신경 덩어리를 날려버리면, 어떻게든 될지도 모른다.
-카앙!
그러나 오러를 두른 검은 허망하게 튕겨 나갔다. 재버워크가 사용하던 방어 마법, 하지만 그것보다도 훨씬 단단하다.
저걸 뚫으려면 다시금 의념기를 구현해야 한다. 나는 오른손에 마력을 모으며 집중했다.
하지만, 의념기를 형성하는 것보다 빠르게- 돌연 귓가에 끔찍한 비명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아아아아아아아!!
아니, 귓가에 울린 게 아니다. 마력을 통해 직접 머릿속에 전달되는 전음이다.
동시에, 무너져 간다고 생각했던 지면이 거꾸로 솟아오르며 기이한 형상을 그려내었다.
그건, 거대한 인간의 얼굴이었다. 탐욕이 주름진 추악한 얼굴. 나는 곧바로 그 주인을 알아보았다.
“나는 성위에 이를 것이다. 죽음을 극복하고, 우주 너머 별의 권좌에 오를 것이다.”
수백 명이 동시에 외치는 듯했던 비명은 하나의 소리로 모여, 재버워크의 음성을 전했다.
“인간의 육신으로 부족하다면, 그것을 버려서라도. 평생을 바친 마법의 성위에 닿기 위하여!”
꿈틀거리던 신경은 이미 지면 깊숙이 파고들었고, 스태프는 섬의 중심부까지 더욱 깊이 침잠했다.
“성위를, 성위를, 성위를성위를성위를성위를성위를성위를이루, 이루, 이루, 이루리라, 이루리라아아아!”
재버워크의 목소리로 내질러지는 괴성과 함께, 지면에서 솟아나는 날카로운 가시가 나를 노려왔다.
나는 ‘천뢰의 장갑’을 발동해 재빨리 그 자리에서 벗어나며, 새롭게 태어난 재버워크의 몸뚱이를 눈에 담았다.
인간을 갈아넣은 스태프를 핵으로 삼고, 섬 하나를 통째로 육체삼아 만들어 낸- 기괴하고 거대한 골렘의 육신을.
[지금부터 월드 레이드가 진행됩니다. 파티와 공격대의 편성 인원 제한이 해제됩니다.]
[주의 : 월드 레이드의 난이도는 50인 이상의 공격대를 기준으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공격대를 결성하십시오. 현재 서버의 참여 가능 도전자 : 1명]
두 번째 월드 레이드였다.
**
9층에서 그랬듯, 이번에도 월드 보스가 출현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계속 마음 한편에 자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터무니없이 강한 재버워크를 상대하다 보니, ‘설마 이 이상은 없겠지’ 라며 무심코 결론을 내리고 말았다.
이 빌어먹을 탑이 내 예상을 깨부수고 미쳐 날뛴 게 하루 이틀도 아니건만, 신경이 무뎌져 있던 게 분명하다.
[별에 닿는 눈을 지녔으나, 그 빛을 붙들 손은 주어지지 아니하였으니, 하늘을 우러르되 닿을 수 없는 자.]
[물어뜯는 턱과 움켜쥐는 발톱으로 만물을 갈취하면 닿을 수 있으리라며, 허망한 꿈으로 자신을 속여왔으니.]
[주께서 참으로 계시거든, 어찌하여 이 끔찍하고 뒤틀린 피조물을 그 눈 아래에 버려두셨나이까?]
[WORLD BOSS - 성위에 닿지 못한 자, 재버워키 재버워크]
마침내 완성된 골렘의 모습은 말로 형언하기 힘든 기괴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물고기를 닮은 대가리에 곤충을 연상시키는 한 쌍의 더듬이, 새빨간 눈동자와 길고 가느다란 목.
팔과 다리는 예전에 봤던 공룡을 연상시켰으며, 긴 꼬리와 박쥐를 닮은 날개가 붙어 있었다.
드래곤을 닮았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놈은 날개는 사용하지 않고 네 다리로 바다를 밟았다.
-쿠궁!
공중을 부유하던 섬이 괴상한 형태로 변해 걸어 다니기 시작한 꼴, 아주 고질라가 따로 없다.
허나 진정으로 경악스러운 것은 놈의 덩치나 외형이 아니라, 전신에 두르고 있는 마력의 방벽이다.
내 오러로도 한방에 뚫리지 않는 방어벽을 전신에 빼곡하게 펼치고 있다. 말이 되는 건가, 저게.
9층때는 월드 보스가 상대라도, 메르세데스처럼 나 이상의 스펙을 가진 NPC들의 협력으로 어떻게든 맞설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이 18층에 나와 비견될 수 있는 NPC는 재버워크 하나밖에 없었으니까.
그런데, 내 오러로도 못 뚫는 방어벽을 전신에 펼치고 있고- 심지어 골렘이기에 핵이 부서지지 않는 한 계속 재생할 거다.
이건 히든이니 에픽이니 따질 때가 아니라, 그냥 이론상으로도 공략이 불가능한 상대가 아닌가.
-철퍽.
발 밑으로 마력을 넓게 펼쳐, 어설픈 모양새지만 수면을 밟고 섰다.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러나 다시 한번 [사고 가속]을 전개하려던 찰나, 기괴한 형태로 변한 재버워크가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거대한 입에서 쏘아지는 푸른 빛살- 놈의 가장 강력한 공격 중 하나였던 마법 광선이 쏘아졌다.
이전까지의 초라한 형태가 아닌, 브레스에 가까운 규모와 기세로.
-콰과과과광!!
광선이 지나간 자리에 뒤따르는 충격파, 바닷길이 그대로 갈라졌다.
오브를 사용하지 않는 마법이었기에 전조를 감지하고 피할 수 있었지만, 아슬아슬했다.
[붉은 눈동자가 당신을 주시합니다, 재버워키 재버워크가 당신을 추적하기 시작합니다.]
살벌하기 짝이 없는 시스템의 안내 메시지와 함께, 머릿속에 연달아 전음이 울려 퍼졌다.
‘나는 너를 먹고, 성위에 오를 것이다.
요란하고 시끄러운 전음 사이에서 식별할 수 있는 말은 그것이 유일했다.
월드 보스가 휴면에 들어가기 전까지 펼치는 개막 패턴으로- 놈은 나를 추적하기로 한 것이다.
작전을 세울 시간도, NPC를 모아 힘을 합칠 시간도, 주어지지 않았다는 의미다.
**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놈의 등에서 내려오지 않고 버티는 편이 나을 뻔했다.
마력을 사용해 물 위를 걷고 있는 지금 상태로는 제대로 싸우기가 힘들다. 코어를 노릴만한 방법도 없고.
다행인 점이 있다면, 놈의 이동속도가 느리다는 것 정도인가. 그마저도 저 날개를 펼치면 또 어떨지 모르겠다만.
-후웅!
재버워크가 오른팔을 들어 올려 크게 휘둘렀다. 날카로운 발톱이 바람을 가르며 바다 위로 상처가 새겨졌다.
그냥 발톱을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넓은 범위의 참격이 발생한다. 내 검기의 최대 사거리를 능가하는 미친 공격범위.
젠장, 이래서는 다시 거리를 좁히는 것도 힘들겠다. ‘천뢰의 장갑’도 그렇게 마구 써댈 수는 없는데.
게다가 반쪽짜리라고는 해도 의념기를 사용하느라 마력도 많이 소모한 상태.
놈의 전신을 둘러싸고 있는 방어막을 뚫고, 코어를 일격에 파괴할만한 화력을 낼 수 있을지 불확실하다.
어쩔 수 없다, 일단은 시간이 필요하다.
나는 부디 놈의 이동속도가 빨라지지 않기를 바라며, ‘천뢰의 장갑’을 발동해 육지로 날아갔다.
-쿠르릉!
번개 속성의 마나로 변한 몸은 한없이 벼락에 가까운 속도로 쏘아져, 순식간에 항구까지 도착했다.
저 멀리서 골렘이 된 재버워크가 천천히 다가오고 있는 것을 확인하며, 퀘스트 창을 열었다.
[에픽 : 회색 아이와 마법의 서 - 최종장]
설명 : 노욕의 끝을 달려온 마법사와, 가엾은 아이의 이야기가 여기서 끝을 고합니다.
[퀘스트 목표]
1. 재버워키 재버워크를 처치하기.
2. 아이를 보호하기(선택).
3. 아이의 소원을 들어주기(선택).
[퀘스트 보상]
(퀘스트 완료 시, 진행과정에 따라 랭크를 산정합니다. 랭크에 따라 보상이 변화합니다.)
(현재 당신의 퀘스트 랭크 : A-)
(현재 랭크로 퀘스트 완료 시, 최대 유니크 등급의 보상을 선택하실 수 있습니다.)
예상대로 재버워크를 처치하는 건 필수 조건, 애초에 전이문 활성화 권한이 이양되었다니 당연한 일이다.
마탑의 협조를 받아서 뭔가 방법을 강구해 볼까? 하지만 재버워크의 추적을 내버려두고 마탑으로 향하는 게 가능한 일인가?
최대 화력의 의념기를 정면에서 때려 박으면 코어를 확실하게 파괴할 수 있는 걸까? 마력량은 충분한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보니, 한 가지 떠오르는 수단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그것도 반쯤 도박이나 다름없다.
무엇보다 결국 재버워크에게 다시 접근해야 한다는 점이 문제다. 사거리는 극복할 방법이 없으니까.
그렇게 머리를 싸매고 있던 중, 익숙한 기척이 등 뒤로 접근해왔다.
“진혁악마님.”
눈물이 그렁그렁한 꼬마 에인이 내 옷소매를 잡아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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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 악마는 울지 않는다
이 회색 꼬마는 좀처럼 울지 않는다.
짧지 않은 시간을 함께 여행하면서 그렇게 생각했지만,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꼭 그런 것도 아니었다.
에인이 반마족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뒤에 하나 깨달은 것이 있다. 이 연약해 보이는 꼬마가 사실은 무척 튼튼하다는 것.
죽기 직전까지 갔던 상태에서 기력을 깎아먹는 포션을 마시고 살아난 건, 단순한 우연이나 기적이 아니었다.
태생적으로 강인한 신체능력을 타고나는 마족의 육신을 갖고 있었기에, 그 험한 경험을 하면서도 크게 다치지 않았고.
가혹하기 그지없는 온갖 고초를 겪었음에도, 울지 않을 수 있었던 거다. 마족의 몸은 아프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재버워크에게 납치당한 에인의 눈가에는 눈물이 말라붙어 있었다.
그리고 지금의 에인 역시, 당장에라도 울 듯이 그렁그렁한 눈망울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이유는 무엇일까.
“꼬맹이, 네가 왜 여기 있어?”
나는 에인을 보자마자 반사적으로 물었다. 에인은 지금 여기가 아니라 흑색 마탑에 있어야만 한다.
에인은 내 다리에 얼굴을 비비더니,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눈을 떴는데 모르는 곳이어서, 마법으로 빠져나왔다고.
정신을 차리는 게 흑색 마탑에 도착하는 것보다 빨랐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 결계를 자력으로 빠져나왔다니.
멀지 않은 미래에 세계를 휩쓸고 마계를 제패할 ‘회색 마왕’으로서의 자질?그런 생각이 절로 들었다.
“진혁악마님, 다쳤어?”
“어?”
“여기, 피 나고 있어……”
에인이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에인은 내가 다친 모습을 거의 본 적이 없다.
지금 나는 재버워크의 마법이 폭발하면서 입은 상처가 아직 다 낫지 않은 상태. 내 기준으론 경상 정도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보면 여전히 중상 수준이고, 어린아이의 눈엔 훨씬 더 심각하게 보였을 것이다.
나는 이 정도면 침 바르면 낫는다며, 별일이 아니라 말하려 했다.
“나 때문에 다친 거야?”
그런데 에인이 먼저 말을 꺼냈다. 그리고 나는 실수했다. 곧바로 아니라고 말했어야 했는데.
“내가, 이상한 할아버지가 데려가서, 그래서, 진혁악마님이 나 구하러 와서, 그래서 다친 거야……?”
에인은 상식이 심각하게 부족하고, 재버워크의 말한 것처럼 자폐적인 기질을 간혹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게 이 꼬마의 머리가 나쁘다는 뜻은 아니다. 기억력이나 학습속도는 오히려 천재적인 수준이지.
무엇보다도 차원이 다른 마나 감응력을 지닌 아이이기에, 재버워크의 힘과 마력도 분명히 느꼈을 것이다.
그렇기에 곧장 알아챌 수밖에 없었던 거다. 정황상, 내가 다칠 이유는 그것밖에 없으니까.
“그, 아니, 그런 거 아니야. 나는 괜찮아. 근데 지금 여기가 좀 위험하거든? 그러니까 잠깐만 떨어져 있을래?”
하지만 에인을 천천히 달래기엔 시간이 부족했다. 지금도 재버워크가 나를 쫓아 이쪽으로 오고 있었으니까.
나는 칼레온을 꺼내 들고 ‘스승님 불러줄게. 라 말하며, 다리에 매달린 에인을 떼어내려 했다.
“진혁악마님도, 나 버릴 거야?”
“뭐?”
“진혁악마님도 내가 싫어?”
에인의 두 마디가, 내 생각과 행동을 순식간에 멈추게 만들었다.
**
스킬을 통해 수백 배까지 가속되고, 자신만의 내면세계를 구축하는 것도 가능한 사고능력.
어떤 위기를 눈앞에 두고도 빠르게 굴러가던 머리가, 어린아이의 몇 마디에 멈춰 설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충격적인 두 마디로 나를 붙잡은 에인은, 작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무엇보다 크게 들렸다.
“나 때문에 다쳤잖아…진혁악마님도, 엄마처럼 내가 싫어졌어? 그래서 그런 거야?”
에인이 이런 식으로 ‘엄마’를 입에 올리는 건 처음이다. 머리를 망치로 세게 한 대 맞은 느낌이었다.
“그 할아버지가 그랬어, 엄마는 내가 미워서 버린 거래. 그래서 아는 척도 하기 싫었던 거라고…….”
작은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문장과 단어 하나하나에 물기가 서려 있다. 회색 눈이 또르르 물방울을 굴렸다.
“엄마는 나 때문에 힘들었대. 내가 옆에 있어서, 그래서, 내가 엄마라고 불러서, 그래서…너무너무 힘들고 아팠대.”
말 한 마디 한 마디마다, 흐느낌 섞인 들숨과 날숨이 뒤엉켜 있었다.
“내가, 내가 나쁜, 악마라서……엄마가 나를 버린 거래.”
그동안 에인과 나눈 대화들이 한꺼번에 떠올라,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뇌간을 푹푹 쑤신다.
나를 악마로 알고 있는 에인에게 경각심을 주기 위해서, 청색 마탑주와 내가 반복해서 했던 이야기들.
악마는 나쁘다고, 세상에 ‘진혁악마님’ 같은 악마는 더 없을 거라고, 악마는 반드시 쓰러트려야 한다고, 그렇게나.
“나 때문에 다들 아프고 힘든 거랬어, 나중에 내가, 나쁜 마왕이 돼서…나 때문에 다 죽을 거랬어.”
에인의 말은 계속되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재버워크는 에인에게 정말 모든 것을 들려준 모양이다.
‘진혁악마님’은 사실 악마가 아니고, 너야말로 마족이고 악마이며, 너는 나중에 회색 마왕이 될 거라고- 그렇게.
나쁜 마왕을 무찌르는 현자의 이야기를 동경하던 아이의 마음에, 재버워크는 비수를 꽂고 난도질을 벌였다.
“진혁악마님도, 나 때문에 다쳤잖아…그럼 내가 싫어진 거잖아, 그러니까…그러니까.”
고개를 푹 숙인 채 울먹이는 에인을 바라보며, 이건 또 무슨 운명의 장난인가 싶었다.
“나 때문에……”
모든 게 자기 탓이라 말하며 흐느끼는 에인의 모습 위로, 다른 누군가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나는 이 꼬마의 마음을 백분 이해한다. 돌이켜보면, 처음부터 이래저래 닮은 부분이 많은 처지였지.
엘레노어가 왜 나를 그렇게 안쓰러워했는지, 이제야 알 것 같다. 그 빛나는 눈동자에도 이런 모습이 비쳤겠지.
하지만 꼭 중요한 순간마다 말주변이 부족한 나는, 어떤 말이 이 아이를 위로할 수 있을지 알지 못했다.
그래서 기억을 더듬었다. 엘레노어는 나에게 어떻게 해주었던가. 어릴 적의 나에게, 엄마는 어떤 말을 해주었지.
복잡한 말도, 화려한 언변도 필요치 않았다. 그때의 나에게도, 지금의 에인에게도, 필요한 건 오직 하나였다.
“네 탓이 아니야.”
나는 조심스레 에인과 눈높이를 맞추고, 그 작은 몸을 꼭 끌어안았다.
**
말로는 모든 감정을 다 전할 수 없을 때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포옹이라는 행위가 있는 거겠지.
몸으로 때우는 건 내 전문이다. 그래서 나는 한 마디만을 반복하며, 에인을 꼭 끌어안았다.
내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흐느끼며 웅얼거리는 에인의 말에 나는 한결같이 대답했다. 네 탓이 아니라고.
그래, 세상의 모든 불행과 고통이 이 아이를 중심으로 얽혀 있더라도- 단지 태어났을 뿐인 생명에게 잘못은 없다.
에인을 낳고 길렀던 적색 마탑주도 그랬다. 끝내,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손으로 아이를 죽일 수는 없었다고 했지.
잘못한 자는 따로 있다. 죽고도 또다시 추하게 되살아난 역겨운 마법사, 모든 책임은 그 새끼가 져야 한다.
현재, 재버워크는 이미 제법 가까운 거리까지 도달해 있었다. 항구의 NPC들조차 그 존재를 인식하기 시작했다.
“어어, 저거 뭐야! 야! 저거 뭐냐고!”
“내가 어떻게 알아! 도망쳐!”
“이쪽으로 온다, 온다고!”
재버워크에게서 흘러넘친 불길한 마력이 바다를 가르고, 항구의 NPC들을 일제히 혼돈에 빠트린다.
재앙에 필적하는 괴물이 다가오고 있다. 하지만 나는 에인이 진정할 때까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몇 분 뒤, 에인은 눈물과 콧물로 범벅된 얼굴을 내 어깨에서 떼며,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 아니야? 나, 악마인데, 나쁜 마왕이 된다고 했는데.”
“음, 꼬맹아. 그거 말인데, 사실 악마랑 마족은 다르거든?”
나는 신중히 골라낸 말을 꺼냈다. 참고로, 이건 거짓말이 아니다. 마족과 악마는 정말로 엄연히 다른 존재다.
“너는 마족의 피가 조금 섞였을 뿐이야. 그리고, 마왕이 된다는 건 또 누가 그래?”
혈사교에게 납치당한 에인은 온갖 가혹한 고초를 겪었음에도 울지 않았다. 마족의 몸은 아프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재버워크에게 납치당해 심한 말을 들은 에인은, 이렇듯 내가 보는 앞에서 울었다.
육체는 마족일지라도, 마음은 분명 인간이기에. 제대로 아파하고 울음을 터트릴 수 있었던 거다.
아무런 근거도 없지만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 이 꼬마가 마왕 같은 게 된다니, 그럴 리가 있나.
“그거 알아? 악마는 안 울어.”
나는 에인의 지저분해진 얼굴을 조심스레 닦아주며, 작은 몸을 번쩍 안아 어깨 위에 올렸다.
재버워크는 이제 완전히 항구에 도착해 있었다. 주변은 완전히 아비규환. 이보다 더한 난장판은 없을 것이다.
한 손으로 인벤토리를 열었다. 숙소에 떨어져 있었던 큼직한 완드를 꺼내, 에인의 손에 꼭 쥐여주었다.
“그리고, 마왕이라는 건 저런 걸 말하는 거야. 딱 봐도 나쁘게 생겼지?”
대충 봐도 존나게 사악해 보이는 모습을 한 새까만 괴물- 이 에픽 퀘스트의 마지막 보스 몬스터, 재버워크.
도박에 가까운 계획이지만, 이 꼬맹이를 위해서라면 과감하게 올인 한 번쯤은 괜찮을 것 같다.
“같이 무찔러 보자, 우리 꼬마 현자님.”
모두가 보는 앞에서 함께 마왕을 무찌르고, 동경하던 이야기 속의 현자가 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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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 별에 안녕
항구에 도착한 재버워크는 특유의 붉은 눈동자로 나를 노려보았다.
“뭘 꼬라봐.”
나는 놈의 시선을 받아치며, 내 어깨에 올라타 있는 에인에게 마도구를 건넸다.
세 번이나 연속으로 사용한 탓에, 이제는 과열되어 거의 쓸 수 없는 상태가 된 ‘천뢰의 장갑’.
이 마도구의 기본적인 효과는 사용자의 몸을 번개 속성의 마나로 변환시켜, 초월적인 스피드를 내는 것.
문제는 사용할 때마다 내부의 마법진이 과열되어, 연속 사용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 지금은 사실상 고철 덩어리다.
하지만 딱 한 가지, 지금처럼 과열된 상태의 이 장비를 억지로 써먹는 방법이 있다.
내부의 마법진을 즉석에서 개조해 다른 방식으로 활용한다.
반납하기로 한 마도구를 개조한다는 건 당연히 원래는 안될 일.
애시당초, 황색 마탑에서 심혈을 기울여 완성한 최상급 마도구를 그렇게 쉽게 개조할 수 있을 리도 없다.
“할 수 있지, 꼬맹아?”
“응, 할 수 있어.”
하지만 우리의 마법천재 꼬맹이에게는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운 일. 나는 잠깐 시간만 벌어주면 된다.
-오오오오오오오!!
재버워크의 흉측한 입에서 포효가 터져 나왔다. 그 소리는 이미 단순한 음파를 넘어 충격파로 변질되어 있었다.
항구에 정박해 있던 조각배들은 그것만으로 산산조각 나 침몰했고, 거대한 범선들조차 우그러져 가라앉았다.
하지만 저건 단순한 외침일 뿐, 공격행위가 아니다. 재버워크는 한 차례 포효를 끝으로 본격적인 움직임을 시작했다.
-콰지직! 콰직!
공룡처럼 생긴 손아귀로 건물을 으스러뜨리며, 나를 향해 달려온다. 나는 에인을 단단히 붙잡은 채 뛰어올랐다.
골렘의 몸으로 변한 재버워크는 인간일 때보다 훨씬 강력한 방어력과 공격력을 갖고 있다.
특히 저 입에서 뿜어내는 마력 광선은, 말 그대로 광역 즉사 브레스라 불러도 무방한 미친 공격 패턴.
-콰과광!
쏘아진 푸른빛의 광선이 살벌한 기세로 날아든다. 나는 가볍게 왼쪽으로 뛰어 그것을 피해냈다.
공격력은 강해졌지만, 오히려 피하기는 쉬워졌다. 오브를 사용한 마법이 아니기에, 전조가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으니.
초월적인 마나 감응력을 지닌 에인은 말할 것도 없을 테고, [초감각] 스킬을 가진 나에게도 그 궤적은 뻔히 보인다.
예지 마법과 함께 써도 한 번도 제대로 맞추지 못했던 주제에, 이제 와서 명중률이 올랐을 리는 만무하지.
게다가, 인간일 때보다 공격 타이밍이 더 뻔해진 감도 있다.
골렘으로 변화하며 외쳐 댔던 전음이 무척 엉망이었던 점을 통해 상상해보자면, 이성을 상실한 게 아닐까.
나를 목표로 정하고 공격을 날릴 만큼의 지능은 있는 듯 하지만, 그냥 조금 똘똘한 몬스터나 다름없다.
하긴, 체급과 마력이 저렇게나 불어났는데 이성적인 행동까지 할 수 있으면- 그건 밸런스 붕괴지.
건물 사이를 뛰어다니며 요란한 공격을 피한다. 지금 날아드는 공격은 오직 광선뿐.
완전히 회피에만 집중하면, 몇 분 정도는 충분히 버틸 수 있다.
물론, 피하기만 해서는 이길 수 없다. 당장 회피는 가능해도 거리를 좁히는 것조차 어려운 상황.
“진혁악마님, 다 됐어.”
그렇게 단조로운 패턴의 공격을 요리조리 피하고 있던 도중, 어깨 위에 앉은 에인이 내 뺨을 콕콕 찔렀다.
나는 준비해두었던 대량의 마법석을 인벤토리에서 꺼냈다. 검령을 소환할 때 한두 개씩 사용하던 마법석이 수백 개.
에인은 개조된 ‘천뢰의 장갑’을 마법석을 향해 뻗었다. 그리고 완드를 힘차게 휘둘러 마법을 시전했다.
사용자의 육체를 마력으로 바꾸는 기능을 개조하여 만든 것은, 특정한 물질을 고스란히 마력으로 치환하는 마법.
인벤토리에서 꺼낸 수백 개의 마법석을 일제히 마나로 변환하고, 에인이 그 힘을 모아 공격 마법을 시전한다.
전사가 어그로를 끌고, 마법사가 후방에서 화력을 퍼붓는다는, 레이드의 기본 공식을 실천하는 것이다.
이번에 에인이 날린 마법은, 번개 속성의 전략급 공격 마법 묠니르.
“발사.”
-콰르르릉!!
집채만 한 굵기의 번개가 허공을 가르며, 재버워크의 옆구리를 직격했다.
자연의 벼락과는 비교도 안 되는 압도적인 위력. 한순간, 시야가 새하얗게 물들었다.
섬광보다 늦게 도달한 폭음이 천지를 울렸고, 일순간에 재버워크의 어깻죽지와 날개 한 짝이 뜯겨나갔다.
역시 이 공격으로도 처치까지는 불가능하다.
재버워크의 몸을 감싸고 있는 얇은 마력 방어막이, 위력을 크게 반감시키는 탓이다.
유효타를 입혔다고 좋아할 때가 아니다. 놈은 골렘, 부서진 몸뚱이가 금세 주변의 잔해를 흡수해 복구를 시작했다.
“그럼 꼬맹아, 다음 거 가자.”
하지만 이 정도는 예상한 결과다. 처음부터 이 일격으로 잡을 수 없을 줄은 알았다. 진짜 중요한 건 이제부터다.
방금 걸로 수백 개의 마법석을 소모하긴 했지만, 아직 비슷한 양의 마법석이 인벤토리에 남아 있다.
에인은 완드를 휘둘러 공중에 물방울을 소환했다. 예전에 나에게 보여주었던, 마법을 이용한 비행이다.
“응, 진혁악마님, 움직일 수 있어?”
하지만 이번에 날아오르는 것은 에인뿐만이 아니다. 소환된 물방울이 내 팔다리에 달라붙는다.
곧 몸이 멋대로 둥실거리며 떠올랐다. 생각보다 엄청 이상한 느낌, 하지만 허우적대고 있을 시간은 없지.
놈이 손상을 복구하고 있는 사이, 이대로 비행해서 그 몸뚱이에 다시 올라타야 한다.
-휘이잉!
바람을 가르며 앞으로 전진한다. 비행 마법에는 생각보다 금방 적응했다.
기본적인 움직임은 에인이 마력으로 조작해주고, 나는 그 흐름을 따라가며 힘으로 방향을 조절하는 방식.
공중에 떠 있는 물방울을 힘차게 차서, 위험한 상황에서 궤도를 급히 바꾸는 것도 가능하다.
-쐐액!
재버워크가 길다란 꼬리를 채찍처럼 휘둘렀다. 곧바로 물방울을 박차 궤도를 바꾼다.
나도 마력을 분출하는 방식으로 공중에서 궤도를 바꿀 수 있지만, 그 방식은 순간적으로 마력을 많이 소모한다.
작전의 성공을 위해서 나는 마지막까지 마력을 최대한 아낄 필요가 있으니, 지금은 이 방식이 최선이다.
“꼬맹아, 준비는 다 됐지?”
“응, 진혁악마님은 괜찮아?”
에인이 걱정된다는 듯이 물었다. 이미 작전을 정할 때부터 알려준 일이지만, 에인의 역할은 곧 끝난다.
어느 정도 거리를 좁혀서, 확실하게 놈의 몸에 올라탈 수 있게 된다면- 에인은 마법을 써주고 바로 빠지기로 했다.
내 공격의 여파가 어디까지 미칠지 아직 확신이 없으니, 망설이지 않고 텔레포트를 쓰라고 말해 준 참이다.
목숨을 건 한 번의 올인 베팅, 실패하면 다음은 없다. 하지만 원래대로라면 이보다 훨씬 험난했을 거다.
에인의 존재가 도박의 성공률을 크게 높여 준 거다. 이 정도면 안전한 편이지.
-갸아아아아아!!
재버워크가 괴성을 내지른다. 동시에 머릿속에 기괴하게 얽힌 전음이 울려 퍼졌다.
내용은 처음에 들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자신은 죽지 않을 것이며, 마법의 성위에 닿을 것이라는 내용.
하지만 시스템 메시지가 확실하게 알려주었다. 재버워크의 이명은 ‘성위에 닿지 못한 자’ 라고.
“그놈의 성위 성위, 시끄러워 죽겠네! 애새끼냐!”
나는 욕설을 내뱉으며, 마구잡이로 휘둘러지는 재버워크의 발톱과 날아드는 광선을 피해 거리를 좁혔다.
놈의 어깻죽지와 날개는 이미 거의 다 회복되었다. 타이밍은 지금이다. 에인에게 신호를 보냈다.
인벤토리에서 쏟아져 나오는 수백 개의 마법석, 다시 한번 휘둘러지는 완드, 시전되는 대규모 마법.
[NPC ‘에인’이 당신에게 방어 마법을 시전합니다. 모든 입는 피해가 대폭 감소합니다.]
[NPC ‘에인’이 당신에게 보호 마법을 시전합니다. 방어력이 대폭 상승합니다.]
[NPC ‘에인’이 당신에게 축복 마법을 시전합니다. 내구 스탯이 대폭 상승합니다.]
[NPC ‘에인’이 당신에게 저항 마법을 시전합니다. 모든 속성 피해가 반감됩니다.]
[NPC ‘에인’이 당신에게 증폭 마법을……
길게 이어지는 시스템 메시지를 손으로 쓸어 치운 뒤, 마지막 물방울을 힘껏 밟고 재버워크를 향해 돌진한다.
거의 완전히 회복된 재버워크는 고개를 홱 돌리며, 거대한 발톱을 나를 향해 뻗었다. 타이밍은 아슬아슬하다.
서슬 퍼런 마력이 깃든 발톱.하지만 저걸 피하려고 움직였다간, 한 번뿐인 기회를 놓치게 된다.
어쩔 수 없다. 내가 더 빠르기를 기도하며, 이대로 맞부딪힌다!
-후웅.
그 때였다, 발톱을 휘두르던 재버워크의 몸이 크게 기울어졌다.
아무런 맥락도 전조도 없이, 아무것도 없는 맨땅에서 넘어진 것이다- 나는 뒤로 고개를 돌렸다.
내 어깨에서 뛰어내린 에인이 똑바로 눈을 맞추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텔레포트로 거리를 벌렸다.
에인이 마지막으로 쓰고 간 것은, 상대가 누구든 간에 무조건 한 번 넘어트린다는- 마법 발걸이.
“흐핫, 진짜 천재 맞다니까.”
나는 피식 웃으며, 양 팔에 최대한 마력을 쏟아부으며 [철벽] 스킬을 사용했다.
[혼신]스킬까지 사용해 [내구]스탯을 증폭시키고, 에인이 걸어준 각종 방어마법의 효과를 빌리며.
인벤토리에서, 그동안 손도 댈 수 없었던 찬란한 번갯불의 도끼를 꺼내 들었다.
내 몸을 절단냈던 [성위 : 케라우노스]를.
섬 하나가 그대로 골렘이 된 재버워크에게 어울리는, 섬 하나쯤은 일격에 산산조각낼 수 있는 위력의 도끼.
온갖 방어 버프를 둘렀음에도, 깃들어 있는 어마어마한 힘에 손잡이를 쥔 두 손이 순식간에 타들어 간다.
“네가 그렇게 좋아하는 성위 맛 좀 봐라.”
우스꽝스럽게 넘어진 재버워크의 몸뚱이에 착지하며, 불타는 두 손에 담긴 빛줄기를 휘두른다.
하늘의 빛도, 대지의 그림자도, 모두 일제히 뒤덮는 신화의 벼락.
추악하기 짝이 없는 늙은 마법사의 말로는, 단말마도 없이 빛 속에서 부서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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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 항구도시의 영웅
따당, 따당, 따당- 멀리서 리듬감 있는 망치 소리가 들려온다.
“이거 하나 주쇼.”
“예이, 나갑니다!”
잘 손질된 생선이 꾸러미에 담겨 내게 건네진다. 나는 붕대가 칭칭 감긴 왼손으로 그걸 받아든다.
생선장수는 꾸러미를 건네며 잠시만 기다려 보라더니, 매대 뒤편에서 작은 주머니 하나를 꺼내 왔다.
슬쩍 들여다보니, 그 안에는 이 항구도시 특유의 방식으로 가공된 반건조 새우가 가득 담겨 있었다.
“이거 별 건 아니고, 며칠 전에 팔다 남은 거 따로 손질해둔 거야. 가져가서 먹어.”
나는 괜찮다며 거절하려 했지만, 생선장수는 반쯤 억지로 새우 주머니를 내게 안겨주었다.
“잘 먹어야 그 손도 빨리 나을 거 아니야, 용사 형씨.”
그는 그렇게 말하며 붕대에 감긴 내 손을 가리켰다. 흠, 호의를 너무 거절하는 것도 좀 예의가 아니지.
나는 적당히 고맙다고 말하고, 생선 꾸러미와 새우를 인벤토리에 쑤셔 넣은 뒤 커뮤니티를 열었다.
[작성자 : 서진혁#2661]
[제목 : 이거 어떻게 먹는게 맛있겠음?]
(사진)
반건조 새우라는데 그냥 구워먹으면 되나?
- 새우가 반건조가 있음? 그냥 말린새우 아님?
- ㄴ 좀 다름 저번에 보니까 껍질벗기면 새우살 쫀득하게 있던데
- ㄴ 중국쪽에 비슷한 요리법 있던걸로 기억함 ㅇㅇ 대충 센불에 볶으면 될듯
- 나 저거 써본적 있는데 튀긴담에 소스묻히면 맛있음
내가 글을 올린 건, 오픈 커뮤니티의 여러 탭 중 가장 글리젠이 적은 ‘요리&생활’ 게시판.
탑 안에 장기 체류 중인 도전자들을 위한 생활 팁을 공유하는 곳으로, 내가 최근 들어 많이 활동 중인 곳이다.
18층에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내가 이런 게시판을 자주 들락날락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뭐, 이것도 에인 덕분인 셈인가……”
나는 중얼거리며 붕대로 감긴 양손을 내려다보았다. 마지막 싸움 이후 벌써 몇 주가 지났다.
성위의 힘이 깃든 도끼에 맞은 재버워크는 그대로 깨끗이 소멸했고, 나는 무리하게 도끼를 휘두른 대가로 양손을 잃었다.
팔꿈치 부근까지 완전히 잿더미가 되어 사라진 탓에, 포션이나 [초재생] 스킬로도 회복할 수 없었다.
물론, 보다시피 지금은 양손 모두 제대로 붙어 있다. 여러 마탑의 협력 덕분이다.
나는 에인과 함께 재버워크를 쓰러트린 뒤, 가까운 마탑을 통해 청색 마탑과 적색 마탑에 연락을 돌렸다.
전한 것은 에인의 출생에 얽힌 비밀과, 재버워크의 실체에 관한 폭로였다. 마법계는 이 일로 완전히 난리가 났다.
처음에는 증거도 없는 이야기라 믿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의외의 원군 덕분에 일이 쉽게 풀렸다.
적색 마탑주의 측근이었던 한 마법사가, 생전에 마탑주가 수집한 재버워크에 관한 자료를 가져와 공개한 것이다.
재버워크가 벌여온 온갖 끔찍한 생체실험이 세상에 드러나며, 추가 조사 끝에 마법계는 우리의 폭로를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그 이후에도 뭐, 돌이켜 보면 이런저런 귀찮은 일들이 많았지만- 결국 다른 마탑들의 협력을 얻고 지금에 이른다.
-저벅.
커뮤니티에 올라온 새우 요리 레시피를 확인하며 걷던 중, 목적지에 도착해 발걸음을 멈췄다.
항구도시에는 어울리지 않는, 길쭉한 탑 형태의 건물. 날림으로 지어진 이곳이 지금 나의 숙소다.
건물 앞에는 나무를 대충 잘라 만든 조그만 표지판이 박혀 있고, 그 위에는 삐뚤빼뚤한 글씨가 쓰여 있다.
‘여기는 회색 마탑, 외부인 출입 금지!
항구도시의 영웅으로 불리게 된, 우리 회색 꼬맹이가 직접 쓴 글씨였다.
**
물론 ‘회색 마탑’이라 당당하게 적혀 있어도, 당연히 진짜 마탑은 아니다.
이곳은 항구도시 복구를 위해 파견된 마법사들을 위한 임시 숙소일 뿐, 마법 연구와는 거의 무관하다.
그저 에인이 좋아하니까 적당히 회색 마탑이라 이름 붙이고, 탑 모양으로 지어 놨을 뿐이다.
숙소에 돌아온 나는, 우선 백색 마탑에서 파견된 마법사에게 양손의 상태를 진단받았다.
“생각보다 회복이 빠르네요, 이제 붕대는 풀어도 될 것 같아요.”
룬 문자가 새겨진 붕대를 풀자, 겉보기엔 멀쩡한 양손이 드러났다. 손에 마력을 둘러본다.
-우웅……!
마력이 방출되는 속도도 출력도,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부족하다. 역시 아직은 무리인가.
내 양손은 외형만은 멀쩡히 돌아왔지만, 팔에서 이어지는 마력 회로와 같은 중요한 부분은 여전히 소실된 상태다.
이걸 회복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희석된 엘릭서 정도는 필요할 거라나, 하여튼 귀찮아졌다.
“저는 이야기로만 듣고 있는데, 재활은 계속하고 계신 거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재활이라고 해도 대단한 건 아니다. 그냥 손을 많이 쓰라는 것뿐.
내가 항구의 시장에서 생선을 사 온 이유도 바로 그 재활 때문이다. 이래저래 손을 쓸 겸, 요리를 하고 있거든.
인벤토리에 비축해 뒀던 식품이 거의 다 떨어진 김에, 에인한테도 먹여줄 겸 시작한 건데……생각보다 적성에 맞았다.
[초급 요리]스킬의 레벨도 부쩍 올라 벌써 11레벨, 며칠에 한 번꼴로 레벨이 오르고 있는 셈이다.
사실, 마력회로만 멀쩡했으면 오러를 더 연습하거나 마법을 배울 생각이었지만.
뭐, 내가 만든 요리가 제일 맛있다며 기뻐하는 꼬맹이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이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내 요리를 맛있게 먹어주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싱숭생숭한 감각이 가슴 언저리에서 피어오르니.
“저는 아직 못 먹어봤지만, 다른 분들이 진혁님 요리가 그렇게 맛있다 말씀하시더라고요.”
백색 마탑에서 파견 나온 마법사는 그렇게 말하며 작게 손뼉을 쳤다. 뭐, 그런 소리를 듣고 있긴 하지.
처음에는 에인에게나 먹여 주었던 요리지만, 요즘에는 이 숙소의 다른 마법사들의 몫까지 자연스럽게 만들고 있다.
재활 삼아서 시작한 요리였는데, 이래서는 완전히 재미를 붙인 꼴이다. 이런 건 나도 엄마를 닮은 건가.
우리 엄마도 내게 이런저런 요리를 해 주는 걸 무척 좋아했었지. 정작 본인은 끼니도 잘 챙기지 않았으면서.
나도 에인이 없었다면 굳이 요리에 손을 대지는 않았을 거다. 사놓은 음식이 떨어지면 화이트롤이나 먹고 있었겠지.
하지만 그것도 오늘이 마지막이다. 나는 인터페이스를 조작해 퀘스트 창을 열었다.
[퀘스트 완료 : 회색 아이와 마법의 서 - 최종장]
[진행상황에 따라 랭크 및 보상을 결정합니다……평가 완료.]
[랭크 : S+]
[다음 층으로 이동하여 지정된 보상을 수령하십시오.]
그동안 이어져 온 에픽 퀘스트가 마침내 끝을 맞이했고, 남은 것은 보상을 받는 것뿐.
꼬마 에인과도 헤어질 때가 되었다.
**
얻어온 반건조 새우는 기름에 튀겨낸 다음, 진한 소스를 입혀서 접시에 담았다.
시장에서 사 온 생선은 회를 떠서 가볍게 초밥을 쥐어 봤다. 에인은 이렇게 한입에 넣을 수 있는 음식을 좋아한다.
초밥은 이번에 처음 만들어 보는 건데, 생각보다 잘 됐다. 생각해보면 내가 못 만들 수가 없는 요리였다.
회를 뜨는 것도 결국은 칼질이라 잘 할 수밖에 없었고, 밥 쪽이야 들어가는 재료의 양만 잘 지키면 그만이었으니.
나는 여분의 음식은 근무 중인 마법사들에게 나눠주고, 에인의 몫을 챙겨서 탑 꼭대기의 방으로 걸음했다.
-끼익.
나무로 된 문을 열어젖히자, 기척을 느낀 에인이 살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 날 흘렸던 눈물이 무언가 기폭제가 된 것인지, 요즘 들어 에인은 표정이 무척 다양해졌다.
에인은 자신의 책상 위에 올려놓았던 종이를 치우고, 내 손에 들린 접시를 받아갔다.
“우와, 진혁악마님 밥이다.”
옅은 웃음기와 함께 콧노래를 부르며 에인은 구석에 놓여 있던 식기를 꺼냈다.
첫 마을을 떠날 때 샀던 어린이용 스푼과 포크 세트, 그리고 자연스럽게 내 몫의 식기까지도.
딱히 생각은 없었는데, 이러면 같이 먹어야겠네. 함께 식사하는 건 싫지 않다.
“공부는 요즘 어때, 잘 돼?”
나는 소스를 입힌 새우튀김을 씹으며, 툭 던지듯 물어보았다.
“응, 몰라.”
요 꼬마도 이런 부분에서는 여전히 한결같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나름 설명을 하려고 한다는 부분일까.
에인은 초밥을 입에 물고, 책상에 올려놨던 종이더미를 이리저리 뒤지더니, 이내 마법진이 그려진 종이 하나를 꺼냈다.
재버워크의 마력회로를 강탈하는 마법진만큼은 아니지만, 무척이나 복잡한 마법진이었다.
“만들고 있는데 잘 안돼, 아직 모르겠어.”
이건, 에인이 자신에게 깃든 마족의 피를 희석하기 위해 만들고 있는 마법이다.
회색 마왕으로 타락하지 않기 위해, 마족의 피로 발생하는 영향을 스스로 제거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타인의 고유마도마저 베껴낼 수 있는 천재인 에인에게도, 이것만큼은 무척 어려운 모양이다.
이유는 단순하다. 기존에 존재하지 않았던 마법이며, 개발 단계에서 실험도 불가능하기 때문.
게다가 에인은 가진 마력량마저 희박하다 보니, 뭔가 시도하는 것 자체가 어렵다는 모양이다.
“그래도 이건 거의 다 됐어.”
에인은 그렇게 말하며, 일전에 개조했던 ‘천뢰의 장갑’을 꺼내 보였다.
내가 빌려 왔던 마도구들은 흑색 마탑의 것을 제외하면 모두 재버워크와의 결전에서 손실되었다.
에인은 개조된 형태로나마 남아 있는 ‘천뢰의 장갑’을 반환하기 위해, 다시 원래의 기능대로 돌려낸 것이다.
참고로, 자색 마탑의 마도구는 무사한 줄 알고 있었는데- 반납하러 갔더니 인벤토리에 없었다.
아마 전투 중에 인벤토리로 돌려놓는 걸 까먹어서 잃어버린 모양이었다. 자색 마탑주가 엉엉 울었지.
“대단하네, 역시 우리 현자님이야.”
나는 어설프게 웃으며 에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막상 헤어지려니 마음이 편치 않다.
엘레노어의 영혼은 아마도 SSS랭크 달성으로 인한 특례, 혹은 시련의 탑의 안배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떠나고 난 후- 여기에 남은 에인의 이야기는 어떻게 되는 걸까.
재앙에 의해 마법이 쇠퇴한 19층이라는 미래, 그리고 회색 마왕의 영혼이 나타나는 48층의 미래.
18층의 에인이 퀘스트 완료와 함께 깡통으로 변하고, 그 영혼과 기억이 이어지게 된다면.
그건, 비극이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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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 시련의 탑 19층
시련의 탑은 NPC의 영혼을 재활용하고 있다.
리소스를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한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의도가 숨어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엘레노어의 경우처럼, 에인의 혼과 의식도 퀘스트 완료와 함께 상층의 자신-회색 마왕에게 이어진다고 가정하면.
지금 에인이 어떤 행동을 하든, 어떤 결심을 하든 결국 48층의 회색 마왕이 되는 미래만이 예정되어 있다는 뜻이 된다.
엘레노어는 영혼이 없는 채 흘러갔던 7층에서 8층까지의 20년을, 돌아보면 마치 꿈을 꾼 것처럼 느껴졌다고 말했다.
8층에서 9층까지의 긴 시간도 마찬가지. 영혼도 의식도 희미한 채, 예정된 미래를 향해 달려가는 것이다.
내가 저층에서 행한 행동은, 같은 세계관을 공유하는 상층에 얼마나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
9층의 NPC들이 7층과 8층에서의 내 행적을 기억하고 있었던 걸 보면, 분명 아무 의미가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8층과 9층 모두, 삼대 세력의 전쟁이라는 큰 배경에는 아무런 변함이 없었다.
재앙에 의해 마법이 쇠퇴하고 몰락한 19층의 배경, 회색 마왕의 영혼이 등장하는 48층의 보스전.
엘프 층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그 큰 배경과 설정은 결국 변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
가능성은 넘쳐난다. 에인의 연구가 실패하기만 하면 결국 그렇게 흘러갈 테니까.
“?”
에인은 머리를 쓰다듬다 말고 고민에 빠진 나를 보며, 귀엽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곧 다가올 작별에 대해 이 꼬마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분명 나름대로 생각은 있을 것이다.
에인도 이제 내가 진짜 악마가 아니라는 걸 안다.
한 번 간략하게 설명한 결과, 차원을 떠도는 용병이나 모험가 같은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 상태.
언젠가 헤어지게 된다는 사실도 알고 있을 거다. 그리고 그때까지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도.
그렇기에, 내가 떠난 이후를 생각하며 저렇게 혼자 공부하고 있는 걸 테다. 이 회색 꼬맹이는……
“진혁악마님, 졸려?”
“아니, 왜.”
“졸려 보였어.”
에인은 그렇게 말하며 내 무릎 위로 기어 올라와 뺨을 콕콕 찔렀다. 정신의 피로가 얼굴에 드러났던 걸까.
나도 별생각 없이 에인의 말랑한 뺨을 손가락으로 찔러보다가, 망설이던 말을 조심스레 꺼냈다.
“너… 앞으로는 청색 마탑에서 지내게 될 거야. 그때 그 선생님들 기억하지?”
“응. 큰 선생님이랑 작은 선생님. 마법 많이 가르쳐줬었어.”
“그래, 그 선생님들이 널 맡아주기로 했어. 아마 입양 형식이 될 것 같아.”
이미 모든 이야기는 끝난 상태였다. 청색 마탑주는 놀라울 정도로 흔쾌히 에인을 받아주겠다고 했고.
‘결혼도 안 했는데 자식부터 생기네. 같은 소릴 했다가, 에올피아에게 바로 결혼당할 예정이라나 뭐라나.
에인은 여전히 멀뚱멀뚱 나를 올려다보고 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싶던 순간, 입술이 살짝 움직였다.
“내가 멋진 현자님 되면, 진혁악마님도 나 보러 와야 해?”
다시 울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에인은 내가 상상한 것보다 훨씬 단단하게 마음을 다잡은 모습이었다.
그 모습이 그렇게 기특할 수가 없었다.
**
다음 날, 나는 마지막 채비를 마치고 18층의 미궁 지역으로 향했다.
재버워크의 죽음이 영향을 미친 걸까. 미궁에 있던 호문쿨루스들은 한 마리도 남지 않고 알아서 소멸한 상태였다.
덕분에 보스전은 물론, 그 어떤 방해도 받지 않고 활성화된 전이문까지 빠르게 도달할 수 있었다.
마지막이라고 해서 굳이 다시 인사를 하진 않았다. 전날 밤, 이미 충분히 마음을 나눴으니까.
“후우……”
긴 숨을 내쉰다. 걱정도, 아쉬움도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마음이 편할 리 없다.
‘멋진 현자가 되면 보러 와야 해?’라는 말에는 끝내 대답하지 못했다. 쉽게 약속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었기에.
하지만 그 꼬맹이가 그렇게 단단히 마음을 다잡았는데, 나만 계속 미련을 붙잡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복잡한 감정을 가슴 깊숙이 눌러 담고, 전이문에 손을 얹는다. 시스템 메시지가 나타났다.
[계층 전이문을 활성화합니까?]
“예.”
순간, 가벼운 부유감과 함께 시야가 빛에 휩싸이고- 다음 순간, 나는 새로운 세계에 도착했다.
19층의 배경은 몇 번이고 말했던 대로, 18층의 먼 미래다. 재앙이 닥친 후, 마법과 문명이 모두 몰락한 세계.
커뮤니티의 정보에 따르면, 19층 초입 맵은 그 설정에 맞춰 잿가루가 날리는 황야라고 했었다.
“응?”
하지만 전이 특유의 울렁이는 감각이 사라진 후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어딜 봐도 황야는 아니었다.
아니, 애초에 야외조차 아니었다. 바닥은 눈부신 흰 대리석, 고요하고 넓은 실내 공간. 마치 미술관 같은 분위기다.
물론, 커뮤니티 정보와 계층 초입 환경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는 간혹 있었다. 방심은 금물이다.
-뚜벅, 뚜벅, 뚜벅.
고요한 공간을 울리는 느긋한 구두 소리. 저 멀리, 한 남자가 차분한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마력 감지를 전개해 살펴본다. 강한 마력, 잘 다듬어진 기세- 그러나 근육이 제대로 쓰이지 않는 걸음걸이.
종합적으로 보아, 마법사가 틀림없었다. 내가 펼친 광역 감지에 그가 살짝 움찔했다.
“이런, 일찍 도착하셨으면 말씀이라도 해주셨으면 좋았을 텐데!”
그는 당황한 듯 외치더니, 이내 헐레벌떡 달려와 내 앞에서 허리를 굽혔다.
“협회에서 오신 감찰관분 맞으시죠? 이곳의 총책임자인 그레임입니다. 곧바로 안내해 드리면 되겠습니까?”
그의 가슴팍에는 말한 그대로 ‘그레임’이라는 이름표가 붙어 있었다.
하지만 이상했다. 19층에 이런 NPC가 등장한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협회는 또 뭐며, 감찰관은 무슨 소리인가.
혹시 신규 퀘스트가 생기는 건가 싶어 인터페이스를 열어봤지만, 퀘스트창에는 여전히 단 하나의 항목만 떠 있었다.
등급 산정이 완료된 에픽 퀘스트의 보상을 수령하라는, 18층에서 보던 것과 같은 메시지뿐이다.
“예, 뭐……그렇다고 할 수 있겠네요. 그런데 왜 제가 감찰관이라고 생각하신 겁니까?”
나는 재빨리 말을 골라 물었다. 아직 상황 파악이 되진 않았지만, 당장은 이 오해를 이용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하하, 그거야 당연하지 않습니까. 마력 사용 허가도 되어 있으시고, 무엇보다 그 문장을 달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레임은 웃으며 내 가슴팍을 가리켰다. 내 견장에 새겨져 있는 다크엘프 정찰대의 문장을.
그 순간, 불현듯 어떤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나는 그레임의 반응을 무시한 채, 무작정 안쪽으로 달려나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마주하게 되었다. 웅장한 존재감으로 서 있는 어떤 인물의 거대한 동상을.
뒤이어 헐떡이며 달려온 그레임이 숨을 고르는 사이, 나는 동상 아래 새겨진 이름에 시선을 고정했다.
‘회색의 현자, 에인 그레이 헤세드’
위풍당당하게 로브를 걸치고 서 있는 동상의 인물은, 익숙한 형태의 완드를 손에 들고 있었다.
이곳은 회색 마탑의 초대 마탑주…역사상 가장 위대한 마법사로 기억되는 한 사람을 위한 기념관.
내가 도달한 19층은- 그 꼬마의 이름이, 찬란한 역사의 일부로 새겨져 있는 미래였다.
**
기념관에는 회색 현자, 에인과 관련된 거의 모든 것이 전시되어 있었다.
생전에 자주 입었던 로브, 직접 작성했던 노트의 사본, 연구 자료를 정리한 문서들, 그리고-
“세상에, 이 포크를 그렇게 오랫동안 썼단 말이야?”
-내가 예전에 사줬던 어린이용 식기 세트같은, 온갖 잡다한 물건들조차 빠짐없이 전부.
“예, 헤세드 경의 특이한 습관으로 유명했죠. 어릴 적부터 쓰던 식기를 늘 지니고 다니셨다고 합니다.”
그레임이 물건 하나하나에 담긴 사연을 해설해줄 때마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익숙한 기억이, 조금은 낯선 역사가 되어 다시 다가오는 기묘한 감각.
전시된 건 그런 사소한 물건들만이 아니었다.
기념관의 가장 깊숙한 곳, 그 끝자락에는 하나의 거대한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다.
못 알아볼 리가 없는 마법진이었다. 세세한 부분은 다소 차이가 있었지만, 그 기본 구조는 그대로다.
재버워크의 노욕이 만들어 내었고, 적색 마탑주가 훔쳐냈으며- 에인이 마법을 배우는 계기가 되었던 그것.
‘엄마가 가장 좋아하는 마법’, 타인의 마력과 회로를 억지로 빼앗아 이식하는 ‘강탈’의 마법진.
“헤세드 경의 가장 위대하고 숭고한 업적입니다.”
설명을 요구하자, 그레임은 한층 경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회색’의 칭호를 받은 마탑주께서, 작위와 가명인 ‘헤세드’를 부여받게 된 계기이기도 하지요.”
“대기 중의 마력을 흡수해 저장하고, 이를 통해 타인에게 마력 회로를 새겨줄 수 있는- ‘나눔’의 고유 마도.”
“헤세드 경은 이 마법으로 마법사와 비마법사의 경계를 허무셨습니다.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발상이었죠.”
“전 인류가 마력의 혜택을 누릴 수 있게 만들어 준, 역사상 가장 위대한 마법이라 평가받고 있습니다.”
가슴 속에 남아 있던 작은 응어리가 스르르 녹아내리는 듯한 기분이었다. 저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그 마법을……이렇게까지, 이토록 대단한 것으로 바꾸어 내다니.
헛웃음은 어느새 환한 미소로 번졌다. 이렇게 기분 좋게 웃어보는 게 도대체 얼마 만이던가.
“이상입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일전에 편지로 말씀드린 지하 던전 몬스터 토벌 건으로 넘어가겠습니다만…”
나는 쩔쩔매며 말을 잇는 그레임의 이야기를 손짓으로 멈추게 하고, 저 구석진 곳의 마법진에 대해 물었다.
유일하게 설명을 듣지 못한 마법진이면서, 조금 전부터 계속 내 마력과 공명하고 있던 마법진이다.
“아, 그건… 헤세드 경께서 말년에 남기신 것입니다만, 아직 그 의미를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바로 그때, 퀘스트 창이 반응하며 메시지가 떠올랐다.
[퀘스트 보상이 지급됩니다.]
동시에, 마법진이 빛을 발했다.
**
막대한 마력이 흘러넘치는 빛 속에서, 회색 머리칼과 회색 눈동자를 가진 훤칠한 마법사의 환영이 나타났다.
낯설지 않은 얼굴이다. 회색의 환영은 조용히 내게 다가와, 말 없이 두 팔을 활짝 벌려 나를 끌어안았다.
‘늦게 왔잖아, 진혁악마님. 어때, 나 완전 멋있지?
전음을 통해 전해진 익숙한 말투와 목소리, 나는 살짝 웃으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몰라볼 만큼.
환영은 곧 사라졌다. 그레임은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가, 눈을 휘둥그레 뜬 채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잠시 눈을 감고, 에인이 나를 위해 남겨준 무언가를 찬찬히 느껴 보았다.
[고유 특성 : ‘천의 마술’을 획득하셨습니다.]
두 번째 고유 특성, 우리 꼬맹이는 마지막으로 나를 위한 큰 선물을 준 것 같다.
한편, 멀리서 요란한 발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뚜벅뚜벅, 실내에 울리는 구두 소리가 시끄럽게 울린다.
곧이어 단정한 정복을 입은 한 무리가, 익숙한 문장이 새겨진 메달을 들고 들이닥쳤다. 그중 가장 앞선 이가 소리쳤다.
“어이! 감찰관이 나왔는데 여기 총책임자는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
그레임은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고는, 다시 나를 쳐다보았다. 얼굴에 당혹과 혼란이 뒤섞인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나는 그런 그를 향해 피식 웃어 보였다. 뒤로는 아직도 미약한 잔광이 남아 있는 마법진이 조용히 사라지고 있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전 이제 됐으니까, 저기 진짜 감찰관 양반 상대하러 가보시죠.”
“예? 가, 감찰관이 아니셨다고요? 그리고, 방금 그건 분명히… 당신, 대체 누구십니까?”
나는 그의 질문에 바로 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잠시 시선을 돌려 동상 쪽을 바라보았다.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에인의 조각상이, 어쩐지 이 모든 상황을 즐겁게 지켜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덕분에 좋은 구경 잘했습니다. 아, 그리고 그 지하 던전 몬스터는 제가 처리해 드릴게요.”
그 지하 던전이 아마 이번 층의 미궁 지역이겠지, 말을 마친 뒤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등 뒤로 들려오는 소란과 당황한 외침들, 그리고 여전히 벙찐 얼굴의 그레임.
“내가 그 녀석 진짜, 크게 될 줄 알았다니까……”
전부 어쩐지 유쾌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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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 시련의 탑 22층
선선한 바람이 목덜미를 스치며 땀을 식혀주고, 하얀 새가 창공을 가로지르며 울음을 터뜨린다.
나는 커다란 나무 그늘 아래 돗자리를 펴고 앉아, 치즈돈까스 도시락을 먹으며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곳은 시련의 탑 22층의 외곽 사냥터, 하지만 몬스터는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다. 내가 다 죽였거든.
이 사냥터는 특이하게도, 24시간 동안 스폰되는 몬스터의 총량이 정해져 있는 곳.
즉, 하루 안에 최대치만큼의 몬스터를 처치해버리면 그날은 남은 시간 동안 완전한 안전지대가 되는 구조다.
-후루룩.
치즈돈까스 한 조각을 입에 넣고, 일취월장한 요리 실력을 발휘해 끓인 우동 국물을 한 모금 들이켰다.
동시에, 내 앞에 앉아 함께 도시락을 먹고 있던 검령 역시 국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흠, 국이 너무 짠 것 아닌가?”
“그럼 처먹지를 말던가.”
“네가 먹으라 하지 않았느냐.”
이 자식, 기껏 챙겨줬더니 투덜댄다. 내가 그 우동 국물을 재현하겠다고 얼마나 노력을 들였는데.
우리 둘이 답지않게 겸상한 채로 도시락을 먹고 있는 건, 조금 전까지 훈련 삼아 대련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9층에서의 사건 이후 의욕이 붙은 나는, 20층과 21층을 쉬지 않고 밀어붙여 돌파했다.
두 층 모두 퀘스트의 볼륨이 상당하고, 기본적인 공략 난이도도 높은 편이라 시간이 꽤 걸리긴 했지만.
그 두 층을 돌파하고 도달한 이번 22층은, 시련의 탑 전체 중에서도 손꼽히게 평화로운 계층이었다.
[작성자 : 남주원#1556]
[제목 : 22층은 퀘스트가 진짜 이게 다임?]
뭔 잼민이 강아지 찾아주기랑 늙은이 지팡이 만들어주기 이딴거밖에 없냐
미궁에도 몬스터 뒤지게 없고 마을 바깥에는 아예 몹이 안나오는데
내가 이상하게 진행해서 후속이 없는거임? 아니면 원래이럼?
- ㅇㅇ원래 없는거 맞음
- 거기 원래 그럼
- 토끼 잡는퀘는 안받았냐
- ㄴ 그거 하면 뭐 줌?
- ㄴ 뭐 안줌
- ㄴ 그럼 왜하는건데 ㅅㅂ
- ㄴ 퀘스트 주는 NPC가 ㅈㄴ 이쁨 동탄미시임
- ㄴ 동탄미시 ㅇㅈㄹ하네 그 퀘스트는 어디서 받음?
- 근데 그 마을 경비대는 ㅈㄴ세다 ㅋㅋ
얼마나 평화로운지, 22층 관련 정보를 커뮤니티에서 검색해봐도 건질 만한 건 이런 잡담뿐.
참고로 ‘동탄 미시 느낌’이라는 퀘스트 NPC의 외형은 서버마다 편차가 심한데, 내가 있는 2661서버는 별로인 편.
뭐, 예쁘게 나왔다는 다른 서버의 스크린샷을 봐도- 다크엘프 누님들에 비하면 평범한 정도였던 걸로 기억한다.
정말이지, 킹갓황밤깐프를 거르고 좆좆좆좆 진영을 고른 놈들은 대체 어떤 녀석들일까?
아무튼, 22층은 이렇게 퀘스트도 전반적으로 소박하고, 등장하는 몬스터도 층수에 비해 약한 편이다.
그래서 나는 이 기회에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며, 자체 단련과 양손의 재활에 집중하기로 했다.
“다 먹었으면 계속하자, 칼 들어.”
“오냐, 마법석부터 제대로 끼워라.”
치즈돈까스 도시락을 깨끗이 비운 나와 검령은 다시 무기를 들고 서로를 마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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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층에서 손상된 양손의 마력 회로는 아직도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다.
덕분에 막 발을 들여놓은 의념기 수련은 사실상 중단된 상태. 오러 운용에도 다소 차질이 생긴 상황이다.
그래서 나는 오히려 발상을 바꿔, 한동안 손에서 놓고 있던 순수 검술 수련에 집중하기로 했다.
참고로 현재 내 스펙은 이렇다.
서진혁 Lv.73 (전사)
HP : 1450/1450
MP : 1200/1200
근력 : 125 (115+10)
민첩 : 120 (109+11)
내구 : 128 (113+15)
지능 : 121 (109+12)
레벨은 그리 오르지 않았지만, 전체적인 스탯은 꾸준히 성장해 매우 높아진 상태.
솔직히 이제 레벨과 클래스는 별 의미가 없는 느낌이다. 레벨업보다 단련과 업적으로 오르는 수치가 더 많으니.
눈여겨 볼 점은 지능 스탯의 큰 성장이다. 전사라는 클래스 탓에 다른 스탯에 비해 많이 뒤처지는 편인 스탯이었는데.
마법을 배우고 높은 수준의 오러를 다루기 시작한 덕분인지, 최근들어 유독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다.
그 영향으로, MP 수치마저 전사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높은 수준까지 왔다.
성장세를 생각해 보면 조만간에 HP를 추월하게 될지도 모른다.
물론 마력회로의 손상 탓에 오른 스탯만큼의 퍼포먼스를 못 내고 있는 상황이긴 하지만.
그건 상층으로 올라가서 등급이 높은 포션이나 엘릭서 따위를 구할 수 있게 되면 알아서 해결될 문제다.
스탯도 스탯이지만, 스킬 쪽의 성장도 만만치 않게 올라와 있다.
[웨폰 마스터리 Lv.3] [오러 마스터리 Lv.3] [전투 각성 Lv.39] [전투 지속 Lv.39] [마력 지배 Lv.4] [마력 강화 Lv.3] [종합 원소 내성 Lv. 13] [종합 상태이상 내성 Lv. 10] [종합 대마법 내성 Lv. 9] [오색 정령의 가호 Lv.2] [라이트닝 차지 Lv.29][약점 간파 Lv.10] [초감각 Lv.8] [초재생 Lv.3] [혼신 Lv.16] [집광 Lv.17] [불굴 Lv.19] [도약 Lv. 8] [명상 Lv. 12] [위압 Lv. 4] [정신 오염 내성 Lv. 34] [정화 Lv.4] [사고 가속 Lv.13] [초급 요리 Lv.12] [초급 마법 Lv.8]
요약 표시를 해도 길어 보이는 이 스킬 목록에서, 특히 주목할 만한 점이라면 [오색 정령의 가호]다.
21층 클리어 보상으로 [광휘 정령의 가호]를 얻으면서, 기존 정령의 가호 스킬들이 모두 통합되어 생긴 신규 스킬.
물론 기본 성능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고, 가호 스킬에 붙어 있는 액티브 효과도 모두 그대로 존재한다.
18층에서 배운 마법 스킬도 이제 3레벨, [명상]이나 [도약]같은 다른 스킬들도 고르게 성장 중이다.
그리고 [웨폰 마스터리]에 통합된 검술 스킬은, 세부 항목을 열어서 확인해 보니-[상급 검술 Lv.10]까지 성장해 있었다.
그 밖의 다른 무기술도 꾸준히 성장해 모두 상급에 이르렀고, 체술과 투척술 역시 모두 상급까지 도달했다.
이 정도면, 이 시련의 탑 세계에서 순수한 무기술만으로 나와 대적할 수 있는 도전자는 몇 없을 것이다.
뭐, 최상층 랭커나 대형 길드 간부급이라면 얘기가 다를지도 모르겠지만, 절대로 뒤처지지는 않을 터.
그럼에도 불구하고 검술 실력을 계속 끌어올리려는 이유는 단순한데.
-카앙!
“아직 중심이 약하구나!”
아직, 순수한 검술로는 저 검령 자식의 경지에 미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
인간의 몸으로 검 하나만을 갈고닦아, 끝내 마계까지 제패해버린 남자, 검령 칼레온.
맨날 전투 중에 허무하게 죽어나가는 탓에 허당처럼 보이지만, 그 검술과 기교만큼은 진짜중의 진짜다.
현재 검령을 상대로 한 내 검술 대련의 성적은 23전 3승 20패.
어디까지나 검술 단련이 목적이기 때문에, 제약을 많이 걸고 진행하는 대련이긴 하지만- 처참한 전적이다.
치즈돈까스 도시락을 해치우고 다시 진행한 대련도 결국 내 패배, 21패를 기록하며 오늘의 대련은 끝을 맞이했다.
사용한 [강철 직검]을 인벤토리에 넣고, 아쉬움이 담긴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소환 지속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검령은 내 앞에 마주 주저앉았다.
“흥, 이 나를 상대로 하고 있으니 당연한 결과지. 그래도 기죽지 마라, 네놈의 검술 실력은 놀라운 수준이다.”
나도 딱히 자학하는 건 아니다. 당장 운동도 제대로 안 하던 백수인 내가 여기까지 성장했으니 말이다.
“뭣보다, 검뿐만이 아니라 다양한 무기술을 다루고…동시에 마법에까지 손을 대고 있지 않으냐?”
뭐, 그것도 그렇다. 아직 대단한 수준은 아니지만, 19층 이후로 마법적인 성취도 나름대로 이루었으니.
물론 내 마법적 성취는 에인이 내게 남겨준 유산- 새로 생긴 특성인 [천의 마술]의 영향이 압도적으로 크다.
“뭐, 손대고 있긴 한데……에인이 아니었으면 아직도 매직 미사일밖에 못 썼을걸.”
상태창을 열어서, [강철의 혼]과 나란히 있는 [천의 마술]의 정보를 다시 확인해 보았다.
[고유 : 천의 마술]
위대한 마법사가 평생을 걸쳐 쌓아올린 드높은 지혜의 표상.
당신의 영혼에 새겨진 이 특성은 어떤 경우에도 사라지지 않는다.
모든 마법의 시전 시간과 소모 마력량이 50% 감소한다.
종류를 불문하고 모든 마법의 캐스팅 시간과 마나 소모를 절반으로 줄여주는 미친 효과.
[강철의 혼]에 비하면 살짝 뒤떨어지는 편이긴 하지만, 마법사 계열이라면 침을 질질 흘리며 탐낼 효과다.
하지만 이 특성에는 설명에 적혀 있지 않은 한 가지 부가 효과가 또 존재한다. 사실, 그쪽이 메인이라고 봐도 된다.
바로, 관측한 마법의 구조를 곧바로 이해하는 ‘마법 관조’ 효과. 내 영혼에 말 그대로 현자의 지혜가 새겨진 셈이다.
하지만 그런 사기 능력을 갖추고 있음에도, 내가 쓸 수 있는 마법은-
“파이어.”
-아직까지도, 기껏해야 이런 몇 종류의 원소 마법이 전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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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 출사표
[천의 마술]이 가져다주는 마법 이해 능력은 분명 굉장한 게 맞다.
문제는 마법의 구조와 작동 방식을 이해할 수만 있을 뿐, 딱히 응용할 능력까지 주어지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비유하자면, 컴퓨터의 구조를 이해했다고 해서 컴퓨터 한 대를 뚝딱 만들 수 있는 게 아닌 것과 같다.
아니, 조금 맞지 않는 비유였나. 그래, 차라리 코딩에 비유하는 게 맞겠다.
특정한 프로그램에 쓰인 코드를 싹 다 보여준다고 해도, 문외한이 그걸 그대로 재현할 수는 없는 법.
애초에 마법이라는게 그렇게 쉽게 입문할 수 있는 분야가 아니다. 당장 주문 언어나 룬 문자도 모르는 마당이니.
그나마 청색 마탑주에게 받았던 마법서를 정독하며, 간단한 원소 마법 정도는 부릴 수 있게 됐지만.
재버워크의 마법이 무기로 쳤을 때 최신형 미사일이라면, 내 마법은 원시인의 주먹도끼쯤 된다고 볼 수 있다.
뭐, 일단 마력량만큼은 꽤 많아서 나름대로 위력이 나오긴 한다. 바위만 한 주먹도끼인 셈이지.
“흠, 그 꼬마가 네게 넘겨주었다는 힘 덕분이랬나. 확실히 그 수준으로는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로군.”
손 안에서 작은 화염을 피워낸 나를 보며 검령이 시비를 걸었다. 그러고 보니, 괜히 신경 쓰이는 점이 하나 있었다.
“야, 근데 너는 마지막으로 꼬맹이 못 본 건 아쉽지 않냐. 스승님이니 뭐니 했었잖아?”
이 검령놈도 어쨌든 에인을 꽤 아끼는 편이었는데, 마땅히 인사도 못 하고 헤어지게 된 게 아쉽지는 않을까.
“핫, 이 칼레온을 뭘로 보는 거냐. 검술의 끝을 보기 위해 육신과 세상마저 등졌던 몸이다. 그깟 게 뭐가 대수겠느냐.”
하긴, 검령도 처음부터 검령은 아니었을거다. 원래는 평범한 인간 검사였다가, 마계까지 발을 들여놓았다고 했으니.
그러고 보면 검령의 과거 이야기는 딱히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걸 들어봤자 어디다 쓰겠느냐만은.
하지만 에인과의 일 이후부터, 어쩐지 이런 쪽에도 조금씩 흥미가 생긴다. 알게 되면, 뭔가 바뀔지도 모르니까.
“모든 것을 버리고 텅 비어버린 손이기에 비로소 검을 쥘 수 있었던 것이다.”
“만남과 이별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다 보면 검날만 무뎌질 뿐이지.”
“네놈도 의념기와 같은 더 높은 경지에 닿고 싶다면, 명심하는 게 좋을 거다.”
검령은 뭔가 조언하는 것처럼 말하더니, 소환 시간이 다 떨어져 곧장 검으로 돌아가 버렸다.
나는 검령의 말을 곱씹으며, 오랜만에 인벤토리를 열어 [엘레노어의 영혼]을 꺼내 잠시 만지작거렸다.
생각해보니까 저 녀석, 아직 내가 의념기를 쓸 수 있다는 걸 모르는구나. 부상 때문에 못 보여 줬으니까.
나는 엘레노어의 존재를 떠올리며 의념기에 도달했고, 내 목적을 상징하는 불길을 구현해 내었다.
많은 것을 버리고 또 버린 끝에, 마지막에 손 안에 남은 결코 버릴 수 없는 것- 나의 불꽃.
검령은 아마도 의념기에 도달하기 위한 마음가짐을 말한 것이었겠지.
그렇다면, 검령에게 있어서 나의 불꽃과 대치되는 존재는- 그 손에 쥔 검 하나라는 말인가.
“뭘 어떻게 살았길래 그럴 수가 있지?”
검을 휘두르면서 성적 흥분을 느끼는 극한의 검술박이, 뭐 그런 거라도 되는 건가.
마력회로를 복구하고 마법까지 만족스럽게 익히고 나면, 한 번쯤 이야기를 들어 봐도 좋을 것 같다.
그렇게 자기가 왕년에 잘 나갔다고 하니까, 안 들어볼 수가 없잖아.
**
한가롭게 단련에 힘쓰고 있는 만큼, 최근에는 커뮤니티를 들여다 보는 시간도 많아졌다.
주문 언어와 룬 문자를 공부하고 있는 만큼, 같은 계열의 공부를 하는 도전자들과도 제법 이야기를 나누고 있고.
요리에 재미를 붙인 만큼, 요리 관련된 게시판에도 자주 들리며 교류하는 도전자의 숫자가 많이 늘어났다.
그렇게 가끔 오는 개인 쪽지와 대화에 답장하며, 가볍게 커뮤질을 하던 중.
[작성자 : 임서준#1455]
[제목 : 근데 슬슬 페스티벌 열릴때 되지않았냐?]
아직 3년은 좀 덜찼는데 이쯤이면 소식 하나쯤 올때된거아니냐
페스티벌 NPC뜨기전까지는 아직인가??
나 메테오스톤 장비 개마려운데
- 아직은 꽤 남았지 근들갑 ㄴㄴ
- 기간되면 몬스터가 편지드롭하는데 아직임
- ㄴ 편지는 모든몹이 다 드롭하는거임? 레벨상관없이?
- ㄴ ㅁㄹ? 근데 날짜 정해지면 시스템 캘린더인가에 뜰거임
- 한 다음주쯤에 정보 풀리지 않을까? 역대 페스티벌 날짜보면 대충 이쯤에 뜨긴함
- 페스티벌 3년마다 무조건 열리는거임? 확실함?
- ㄴ 그랜드페스까지 하고 끝나는거면 모를까 갑자기 없어지진 않을걸
- 메테오스톤 장비 없어도 탑깨는데 아무지장없다 사냥이나 해라
눈에 띄는 제목의 게시물이 하나 있어서 들어가 보니, 페스티벌과 관련된 이야기가 벌어지고 있었다.
그 게시글을 시작으로, 다른 커뮤 망령들도 페스티벌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나씩 꺼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곧 떡밥이 크게 구르기 시작했고, 관심이 생긴 나도 흐름에 맡겨 글 몇 개를 쓰고 있을 때였다.
[전섭최초)페스티벌 개최 편지 떴다!!!!]
기가 막힌 타이밍에 페스티벌의 개최 소식을 알려주는 편지 아이템을 먹었다는 도전자가 등장했다.
[작성자 : 김지훈#1397]
[제목 : 전섭최조)페스티벌 개최 편지 떴다!!!!]
(사진)
사실 구라임 ㅎ
근데 어쩔건데?
너가 뭘 할 수 있는데이 좃밥새끼야 ㅋㅋ
존나 화내거나 댓글에 욕이나 패드립 하는거 말고
뭘 할 수 있냐고 이 씨발좆밥같은새끼야 ㅋㅋ
- 이새끼는 작성자 눌러보면 서버 뜨는거 모르나봄
- 그래? 내가 뭘 할수 있는지 똑똑히 봐라
- 게이야 뉴비같은데 어그로도 타이밍 봐가면서 끌어라 너 그러다 진짜뒤짐
- ㄴ 뒤지기는 ㅋㅋ 내가 어디섭 누군줄알고 죽일건데?
- ㄴ 너 1397서버 김지훈이잖아 병신아 작성자 누르면 뜬다
- ㄴ ?
- ㄴ ?는 씨발 줘패벌라
- 얘들아 진짜 편지 먹은사람 떴다 념글 ㄱㄱ
물론 내용은 예상한 대로 어그로였지만, 놀랍게도 몇 분 뒤에 정말로 편지를 먹었다는 도전자가 나타났고.
오픈 커뮤니티는 어마어마한 속도로 페이지를 갱신하며, 흥분의 도가니에 빠져들어 갔다.
내 25층 플로어 공략과 통산 5번째의 페스티벌, 어쩌면 타이밍이 겹칠지도 모르겠다.
**
어디보자, 지난 페스티벌로부터 벌써 3년이 다 되어 가는 건가.
그 때 공략하던 층이 6층이었고, 지금 있는 층이 22층이니까- 평균적으로 두 달에 한 층씩 깬 느낌인가.
엘프 층처럼 시간을 오래 잡아먹은 층도 있고, 마계 층처럼 빠르게 지나온 층도 있었지만- 역시 엄청 느린 편이지.
뭐, 공략 중인 층수가 낮을 뿐이지 내 스펙은 이미 한참 상층 수준이니까. 마냥 느리다고만 할 수도 없으려나.
“음……페스티벌이라.”
솔직히 지난 페스티벌에 관해서는 좋은 기억이 별로 없다. 마무리가 그런 모양이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물론 그렇다고 다음에 열리는 페스티벌에 참여하지 않을 생각인 건 아니다. 페스티벌 자체는 무척 좋은 이벤트니까.
지난 페스티벌도 돌이켜 보면 마무리가 찝찝했을 뿐이지, 즐길 거리 자체는 무척 많았던 걸로 기억한다.
애초에, 그 때는 상황상 즐기지도 못하고 많이 겉돌고 있었지만- 지금은 또 사정이 다르니까.
커뮤니티에서 요리나 룬 문자등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며 친해진 도전자들을 만나 봐도 좋을 거다.
“글리젠 장난 아니네.”
그렇게 손가락으로 스크롤을 슥슥 넘기며 구경하던 중, 다시 한번 눈에 띄는 게시글이 하나 있었다.
각 서버의 치안을 담당하고 있는 여러 길드 중, 가장 세력이 거대한 길드 측에서 올린 게시글.
[필독)각 서버별 토너먼트 참여자는 미리 참가 의사 밝혀주시길 바랍니다.]
페스티벌의 메인이벤트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는, 전체 서버의 최강자를 가리는 토너먼트.
토너먼트 자체는 시스템에 의해 진행되지만, 각 길드는 원활한 관리를 위해 미리 참가자들의 목록을 추리고 있다.
딱히 미리 참가 의사를 밝히지 않아도 상관은 없지만, 이게 또 일종의 출사표처럼 작용한단 말이지.
패기 넘치는 신흥 랭커들이 상층의 랭커들에게 도전장을 던진다든가, 뭐 그런 식으로.
그리고 이런 출전 의사를 밝힌 도전자들은, 실제 토너먼트가 시작될 때까지 커뮤니티의 주인공이 된다.
도전자들 사이에서 알려진 스펙을 분석하여, 우승 후보를 추리고 가벼운 스포트 도박을 벌인다거나.
이번에는 당연히 누구누구가 우승할 거라며, 소위 말하는 갈드컵을 벌이거나 할 때도 있다.
[근데 이번에는 당연히 준태햄이 우승 아님?]
[그냥 우승은 무조건 이새끼임……jpeg]
[고준혁은 이번에 안나오면 물로켓 확정임]
어디보자, 나도 양손의 마력회로를 복구하기 전에는 25층 도전은 미룰 생각이었으니까……마침 잘 됐네.
더 이상 공략 중인 계층이나 레벨 따위로는 계측할 수 없는 내 스펙이, 다른 도전자들과 비교하면 어느 정도일지.
나는 살짝 웃으며, 호기롭게 출사표를 던지는 다른 랭커들과 마찬가지로 글을 썼다.
[작성자 : 서진혁#2661]
[제목 : 이봐 커붕이, 슬슬 가지러 가볼까]
(사진)
‘우승컵’
당연히,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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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 시련의 탑 23층
새삼스러운 이야기지만, 나는 사실 커뮤니티에서만 유명한 게 아니다.
탑이 등장한 지 15년이 다 되어가는 현재, 바깥세상에서도 헌터와 시련의 탑을 다룬 콘텐츠는 어마어마하게 소비되고 있다.
제한적으로 공개되는 탑 내부의 소식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기사나 방송, 유튜브 렉카 채널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으며.
몇몇 인기 있는 헌터들은 연예인처럼 개인 방송이나 예능에도 적극적으로 출연하는 추세라고 한다.
높은 등급의 헌터를 보유하는 것이 곧 국력으로도 이어지는 시대이니, 이 정도 관심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런 마당에, 전 세계에 단 한 명뿐인 솔플러인 내가 유명하지 않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지.
하지만, 유명세에 비해 정작 나에 대해 제대로 알려진 정보는 많지 않다.
그럴 수밖에 없다. 내가 직접 밝히지 않으면 아무도 모르는 거고- 이제 나는 커뮤질을 잘 하지 않으니까.
예전처럼 강박적으로 멀리하는 건 아니지만, 굳이 내 일거수일투족을 보고할 생각은 없으니.
[작성자 : 강지호#1431]
[제목 : 근데 걔 스펙은 어느정도임?]
전에 봤을때 19층인가 깨고 있었던거같은데 그럼 별로안쎈거 아님?
솔플로 다 공략하니까 비슷한층 공략파보다는 훨쎄긴할텐데
그래봤자 저층랭커급 아님? 걍 근들갑같은데
- 진혁이 말하는거면 걔 지금 21층인가 그럴걸 저번에 물어봤음
- ㄴ 22층 올라간지 좀됐을껄 나도 자세히는 모르는데
- 사실 근들갑이긴 함 ㅋㅋ 솔플로 보스잡는게 뭐 그렇게 어려운가 공략도 다 있는데
- ㄴ ㅄ 니가 솔플로해봐라 20층 보스같은건 기믹못풀면 난이도 존나올라가는데
- 진혁이 직업도 전붕이라 별로 쎄진않을걸
- 솔직히 저층랭커급도 많이 올려쳐줬다고 본다 ㅋㅋ 랭커가 괜히 랭커냐?
- 모르겠음 근데 중층급한테는 못비비지 않을까?
그래서인지, 내 참전 소식으로 한바탕 떠들썩했던 커뮤니티에도 슬슬 이런 글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처음엔 유일무이한 솔플러라는 이색적인 타이틀 덕분에, 압도적 우승 후보로 추켜세우는 글들이 넘쳐났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분위기가 식으니, 점차 이런 식의 ‘냉정한’ 평가들이 올라오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도 당연한 일이다. 나는 내 스펙을 커뮤니티에 구체적으로 공개한 적이 거의 없으니까.
“아, 한 번 있긴 했구나.”
집단지성의 힘을 빌려 월드 보스에 도전했던 9층, 그때만큼은 제법 상세히 스펙을 밝힌 적이 있었다.
물론 그 당시 내 스펙은- 지금보다 레벨도 20 정도 낮았고, 마력 강화도 아직 터득하지 못했던 때다.
뭐, 나는 이미 6층 시절에도 저층 랭커인 최길현을 개처럼 팰 수 있었지만- 실력은 수치로 드러나지 않으니까.
애초에, 그것도 최길현의 기본적인 기량이 바닥을 기고 있어서 이길 수 있었던 거였다. 실제로 스펙은 놈이 훨씬 높았었지.
추측해 보자면, 최길현은 딜타임이 되면 강한 스킬로 데미지만 넣고 빠지는 무뇌 딜러 노릇만 하고 있던 게 아닐까?
아버지가 헌터협회의 높으신 분이어서, 고층의 랭커들도 놈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고 하니까.
[근데 진짜 진지하게 진혁이 빠는새끼가 있음?]
[그래도 진혁이가 16강은 충분히 가지]
[월드 보스 솔플은 걍 클래스가 다른거임]
[스펙은 모르겠고 일단 와꾸가 궁금함 ㅋㅋ]
일부러 불을 지핀거긴 하지만, 아무리 그대로 잘 알지도 못하면서 자기들끼리 말이 너무 많다.
저평가하는 쪽은 기껏해야 25층 랭커 수준일 것이라고, 고평가하는 쪽은 최소 8강 안에는 들 거라고.
글쎄, 토너먼트에 참가하는 도전자의 라인업에 따라 상황은 달라지겠지만.
만약 지난 페스티벌이랑 비슷한 수준으로만 나온다고 친다면……당연히 내가 우승하지.
우승컵, 가지러 간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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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커뮤니티를 둘러보며 페스티벌에 관한 소식을 찾아보다가, 인터페이스를 닫았다.
확실히 저번에는 제대로 못 즐기고 왔지만, 시스템이 진행하는 것 외에도 별의별 행사가 다 진행되는 것 같았다.
페스티벌의 메인이벤트인 토너먼트 말고도, 대형 길드의 주최로 열리는 온갖 콘테스트 같은 것들도 있었다.
미인대회라던가, 요리 경연 대회라던가, 허수아비 극딜 대회라던가, 친선 스포츠 경기라던가.
나는 중간에 나오는 바람에 못 봤지만, 저번 페스티벌의 마지막 날에는 불꽃축제와 콘서트도 있었던 모양이었다.
가볍게 흥미가 있거나 구경할 행사들을 메모해 놓은 뒤, 자리에서 일어나 미궁 지역으로 향했다.
분위기는 거의 페스티벌 전야 수준이지만, 아직 진짜로 페스티벌이 개최되기까지는 꽤 시간이 남았다.
그 때까지 22층에서 단련에 힘써도 되겠지만, 토너먼트를 대비해 실전 감각이 무뎌지지 않게 해 둘 필요도 있다.
무엇보다 양손의 마력회로 손상을 회복할 방법도 찾고 싶으니- 대충 24층까지는 쭉 진도를 빼 두기로 하자.
23층은 나도 조금 기대하는 부분이 있는 계층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축하합니다. 시련의 탑 22층을 최초로 클리어하셨습니다.]
[클리어 보상 : ‘경험치’, ‘골드’를 획득하셨습니다.]
[시련의 탑 23층 전이문을 활성화하실 수 있습니다.]
[최초 클리어 보상 : ‘황금빛 양털’ 를 획득하셨습니다.]
[최대 기여도 보상 : ‘인도하는 자의 지팡이’, ‘경험치’ 를 획득하셨습니다.]
[최후의 일격 보상 : ‘인도하는 자의 지팡이’를 획득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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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층의 보스는 날개 없는 용을 닮은-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아무튼 특이한 생물이었다.
이름은 너무 길어서 외우지도 못하고 까먹었고, 패턴은 너무 좆밥이라 외울 필요가 없었어서 기억이 안 난다.
22층은 계층 자체가 매우 쉽게 설계된 만큼, 보스전 난이도도 매우 쉬운 축에 속했고- 보상도 마찬가지였다.
최대 기여도 보상과 최후의 일격 보상 공통으로 나온 지팡이는 조금 특이한 기능이 달린 스태프.
최초 클리어 보상인 황금빛 양털은 장비나 소모품도 아닌 그냥 기타 아이템이었다.
[황금빛 양털]
어떤 영웅이 용에게서 훔쳐내었다는 황금 양털의 복제품.
매우 가치가 높아, 비싼 가격에 거래할 수 있다.
푹신푹신하여 바닥에 깔고 눕기에도 좋다.
또 한동안 골드를 쓰지 않아서 돈은 넘쳐나기에, 사실상 그냥 푹신한 방석을 얻은 셈이다.
[황금빛 양털]을 잠시 꺼내서 만져보고, 다시 인벤토리에 처박은 다음 23층으로 향하는 전이문을 사용했다.
약간의 울렁거리는 감각과 함께, 곧 생경한 세계가 펼쳐진다. 커뮤니티에서 본 것과 똑같은 풍경이다.
23층은 다른 계층과 비교해도 유독 특이한 배경인데, 그 특성 때문에 제법 ‘인기가 있는’ 층이기도 하다.
새롭게 펼쳐진 세계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하늘을 찌를 것처럼 높이 솟은 금속의 탑.
그리고 사방에서 번쩍이는 마법과는 무관한 빛줄기,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돌아다니는 비행물체들.
말로 표현하기 쉽지 않은 복잡한 풍경이지만, 사실 이런 풍경을 간단하게 설명하려면 한 단어면 충분하다.
“진짜 사이버펑크네.”
23층은 마법과 같은 중세 판타지적인 요소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 그저 퇴폐적으로 발달한 문명 세계.
흔히들 말하는 사이버펑크 세계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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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문명에서 격리되어 온갖 판타지 세계를 여행하다 이런 곳에 와 보니, 정말 기분이 이상하다.
세상에, 저렇게 큰 건물을 보는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네.
높이만 보면 거의 세계수만한 건물도 있다. 바깥 세계도 수십 년쯤 지나면 이렇게 되는 건가.
더 이상 시각에만 의존해 세상을 파악하지 않는 몸이지만, 이렇게 위쪽 시야가 답답한 건 오랜만인걸.
내가 떨어진 장소는 아무래도 이 사이버펑크 도시의 외곽- 그중에서도 형편이 좋지 않은 동네인 것 같았다.
여기저기 쓰레기가 널려 있고, 고물 드론과 깜빡거리는 네온사인이 잔뜩 보이는 걸 보면 아마 맞겠지.
“어디 보자.”
다시 커뮤니티를 켜서 23층의 지도를 검색해보았다. 정말 드물게도, 23층은 아직 완성된 지도가 없었다.
사이버펑크 도시라는 특성 탓에 지리가 장난 아니게 복잡하기 때문이다. 맵 전체가 어지간한 미궁 이상이라나.
그래도 미궁 지역이 있는 중심 도시나, 숙소 등을 얻을 수 있는 주요 지역은 거의 다 망라되어 있다.
지도에 적힌 설명을 읽어 보니, 별로 형편이 좋지 않은 동네인 것 같다는 내 추측은 정확했다.
“여기가…그레이 캐슬?”
마구잡이로 지어진 건물과, 불법으로 덧붙인 온갖 시설물들로 둘러싸여 있다는 우범지역.
23층의 주요 몬스터라고 할 수 있는 폭주 드론이나 폭주 사이보그도 자주 출현하는 장소라고 한다.
여느 층에나 있는 외곽 지역의 사냥터라고 보면 되려나. 그래도 좀 많이 구석진 곳이긴 하네.
중앙 도시로 가는 길은……이거 뭐 어떻게 가야 하는 거지. 지도로는 잘 모르겠네.
“어디, 그러면……”
나는 일단 가볍게 마력감지를 펼쳐, 생명반응이 느껴지는 뒷골목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발소리를 죽이고 은밀하게 주위를 둘러싸기 시작한 시커먼 무리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사이버펑크 도시답게 몸에 기계 파츠를 이식한 껄렁거리는 불량배 놈들이다.
“어이, 어디서 온 샌님인데 우리 구역에서 어슬렁거리지?”
역시 길을 모를 때에는 현지인한테 안내받는 게 제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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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공략
지능 수치에 비례해 공격력과 방어력을 포함한 모든 스탯을 크게 증폭시키는 스킬, 마력 강화.
마력강화는 말 그대로, 습득하는 것만으로 인생역전이 가능한 사기 스킬이다.
당장 내가 [혼신] 스킬로 얼마나 큰 이득을 봤는지만 봐도 대충 알 수 있을 거다.
[혼신]은 단일 스탯을 순간적으로 증폭시킬 뿐이지만, 마력강화는 모든 스탯을 함께 증폭시킨다.
심지어 단순히 4종의 스탯만 증폭시키는 게 아니라, 공격력과 방어력까지 증폭시킨다는 점이 특히 사기적이다.
근력 스탯이 증폭되면 공격력이 오르고, 내구 스탯이 증폭되면 방어력이 오른다.
그런데, 거기서 공격력과 방어력을 한 번 더 별개로 증폭시키는 거다.
실질 전투력이 어마어마하게 상승할 거다.
그에 더해서, 증폭 수준을 정하는 스탯이 지능이라는 점도 무척 사기적이다.
근력-민첩-내구의 세 스탯은 검을 나누면서 어림짐작해 볼 수 있지만, 지능 스탯은 겉으로는 티가 나지 않는다.
그렇기에, 스킬을 사용한 순간 스탯이 얼마나 증폭될지 예측할 수 없어진다.
그 밖에도, 전사 클래스에겐 반쯤 버려지는 스탯인 지능을 유효하게 활용할 수 있다는 점이라던가.
사실상 지능만 올려도 모든 스탯이 다 오르는 것과 마찬가지가 된다는 점이라던가.
이렇듯, 마력강화의 사기성은 일일이 언급하다 보면 끝도 없을 정도다.
-쿠르릉!
하얀 마력의 빛을 두르고 천천히 걸어오는 메르세데스에게서 어마어마한 압박감이 느껴진다.
단순히 기분 탓이 아니다. 새롭게 개화한 내 마력 감응 능력이, 흘러나오는 마력의 압박을 느끼고 있는 거다.
기습을 대비해 대형 방패를 꺼내 앞세운다. 무기도 에르웬이 만들어 준 가장 좋은 것으로 든다.
그리고 눈앞에 주먹이 닥쳤다.
[철벽]
[혼신]
-쾅!
빠르게 방패를 들어 올리며 내구력을 최대한으로 강화했음에도 불구하고, 충격을 이기지 못했다.
이건 트럭에 부딪힌 것도 아니고, 뭔 비행기랑 교통사고가 난 기분이다.
역시 이 정도로 피지컬 차이가 나면 막아도 막는 게 아니다.
그리고 젠장, 주먹이 부딪힌 순간 밀려난 방패에 머리를 맞은 것 같다.
이마에서 피가 난다. 출혈 자체는 별 상관없는데, 이러면 중요한 순간에 시야를 가릴지도 모른다.
이건 포션을 써서 회복해야겠는데- 라고 생각한 순간, 다시금 닥쳐오는 공격.
검인지 주먹인지도 분간이 안 간다. 그냥 뭔가 번쩍이는 것밖에 안 보인다.
-쾅!
이번에도 방패로 어찌저찌 막기는 했지만, 그대로 몸이 주욱 밀려 나갔다.
왼팔이 나갔다.
인벤토리에서 꺼낸 포션은 충격파에 휩쓸려 박살 나고, 바닥에 흩뿌려졌다.
회복할 틈도 안 주겠다 이건가. 그 정도로 세면 방심이라도 할 것이지.
하지만, 생각한 것보다 버틸만하다.
아마 7층에 막 진입했을 때의 나라면 첫 번째 공격에 아무런 반응도 못 했을 것이다.
저건 그냥 뭔 짓을 하건 눈으로 쫒을 수 없다. 마력감지를 통해 공격을 예측하고 막아내야지.
징그러울 정도로 빠르고 강하지만, 저년의 검술 형태는 베리트인가 뭔가 하는 놈과 크게 다르지 않다.
막아도 막은 게 아닌 마당에 그게 무슨 소용이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다 생각해 둔 게 있지.
-찌릿.
마력강화를 사용한 메르세데스의 기척이 직감 스킬과 마력감지에 잡혔다.
휘두르는 검의 경로가 예측된다. 나는 그 경로를 가볍게 손짓해, 인벤토리를 열고.
‘아이템 드롭.
오랫동안 처박아 뒀던 대량의 갑옷과 방패를 동시에 쏟아부었다.
**
7층까지 공략해 오면서 수십 개나 되는 보물상자를 털고 아이템을 입수해 왔다.
장비 아이템은 보물상자만이 아니라 몬스터 드롭으로도 얻을 수 있다. 그리고 그 대부분은 사실 쓸모가 없다.
착용 제한 때문에 못 끼는 것도 있고, 그냥 성능이 어중간해서 굳이 착용할 필요가 없는 것들이 대다수.
하지만 나는 만일의 상황을 대비해, 이런 예비의 예비 장비들도 어느 정도 강화를 해 뒀다.
당연히 [내구] 풀강으로.
그렇게 강화만 해 두고 꺼내지도 않았던 갑옷, 방패, 무기, 아무튼 단단한 것들을 전부 쏟아낸다.
-콰앙!
메르세데스의 공격이 폭음을 일으키며, 꺼낸 장비들이 스티로폼 조각처럼 공중을 날았다.
하지만 대량의 장애물을 공격 경로에 쏟아내는 것만으로, 충격은 크게 감소한다.
메르세데스의 공격은 마법이나 광역 스킬이 아닌, 그냥 무식하게 강한 참격과 타격일 뿐이니까.
이렇게 물리적인 벽을 만들어 내는 것만으로 어떻게든 막을 수 있다.
“뭐냐 이건, 공간 마법……?”
갑작스레 어이없는 방식으로 공격이 막힌 메르세데스가 중얼거렸다.
NPC에겐 당연히 그렇게 보이겠지,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갑자기 대량의 물체가 소환된 거니까.
엘레노어를 비롯한 다크엘프들은 내가 허공에서 물건을 꺼내는 것을 ‘아이템 박스’라는 마법으로 인식했다.
하지만 이건 마법이 아니라 그냥 시스템에 딸린 인벤토리 기능, 그 사용에는 아무런 소모 값이 없다.
고로, 이런 것도 가능하다는 말씀.
-타닥!
내가 흩뿌린 아이템을 밟고 공중으로 크게 뛰어올랐다.
메르세데스는 그런 나를 재빠르게 발견하고, 공중을 향해 공격을 날리려 시도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나는 인벤토리에서 대량의 아이템을 쏟아냈다. 이번에는 그냥 자잘한 잡템들을.
어차피 마력으로 주변을 감지할 수 있겠지만, 이렇게 대량의 장애물이 한 번에 소환되면 그것도 힘들어진다.
어떻게 아냐고? 내가 마력감지를 터득한 뒤에 직접 실험해봤으니까.
-카가강! 카강!
메르세데스는 재빨리 검을 놀려 장애물들을 쳐냈지만, 나는 흩뿌려진 아이템을 다시 회수하며 뿌려 댔다.
뿌릴 수 있는 건 아이템만이 아니다.
대장간에서 그랬던 것처럼, 금화 수백만 개의 형태를 한 골드도 뿌릴 수 있다.
“이까짓 잔재주로 시간을 벌 셈이냐, 인간족!”
-카강! 카앙!
메르세데스는 수많은 장애물을 쳐내면서도, 요란하게 움직이는 내 위치를 짐작하고 있는 듯했다.
뭐, 대충 예상했다. 저 녀석의 마력감지는 나보다 수준이 높을 테니까.
하지만 이 정도만 해도 괜찮다.
내 위치를 어림할 수 있을지언정, 내가 무슨 동작을 하는지까지는 모르는 모양이니까.
지금 메르세데스는 내가 장애물 사이에서 툭 튀어나와 기습공격을 감행할 것을 경계하고 있다.
쏟아지는 여러 물건 따위에 크게 신경을 뺏기지 않고, 내가 달려드는 것만을 경계한다.
그렇기 때문에, 갑작스레 날아드는 이걸 막을 수는 없을 거다.
-후웅!
장애물 사이사이를 정확하게 통과하는, 내가 투척한 손도끼 한 자루를.
**
강한 마력을 가진 존재는 마력감지에 더 쉽게 걸려든다.
반대로 말하자면, 강한 마력을 품고 있지 않은 무생물은 감지에 쉽게 걸리지 않는다는 거다.
쏟아지는 수많은 무생물이 단순한 눈속임이라고 생각하고, 오롯이 내 위치에만 신경을 쏟고 있었겠지.
그렇기 때문에, 빠르게 날아드는 무생물의 존재를 눈치채는 것은 늦을 수밖에 없었다.
-콰직!
“윽!”
완전한 무방비 상태에서 손도끼를 얻어맞은 메르세데스, 다만 상처는 크지 않다.
그렇겠지, 마력강화로 인해 방어력까지 크게 상승했을 테니까. 투척 한 방이 유효타가 되긴 쉽지 않을 거다.
-후웅! 후웅!
땅에 떨어진 아이템을 다시 회수하고 쏟아붓고, 잡템을 걷어차고 땅을 엎어버리며 장애물을 계속 늘린다.
그 사이사이로 쇠구슬이며 단검이며 손도끼며 하는 투척물을 또 계속해서 던진다.
“같잖은 짓을!”
한 번 유효타를 먹었기 때문일까, 이젠 방심하지 않고 제대로 쳐내는군.
하지만 그럴수록 점점 더 정신이 없겠지, 마력감지를 통해 내 위치를 추적하는 것도 힘겨워질 테고.
그렇다면 녀석이 취할 행동은 뻔하다. 다소 무리해서라도 아이템의 산을 뚫고 나를 노리는 것.
-콰과광!
그리고 예상대로, 메르세데스는 어마어마한 힘을 실은 돌진으로 아이템 더미를 뚫어냈다.
그런데 어쩌나, 거긴 내가 있는 장소가 아닌데?
“뭐, 무슨……!”
“뭐, 병신아.”
메르세데스의 뒤편에서 튀어나와, 검을 휘둘러 녀석의 팔을 베었다.
-촤악!
녀석은 베이자마자 바로 반격했고, 나도 팔을 베이고 말았지만 상관없다.
서로 동등한 수준의 상처를 입었다면, [전투 치유]를 갖고 있는 내가 이득이다.
메르세데스가 내 위치를 착각한 이유는 단순하다.
미끼로 사용한 것은 주변의 빛을 모아 광원을 생성하는 [집광]스킬.
투척물을 의식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메르세데스의 마력감지는 그 정확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집광]스킬도 엄연히 마력을 사용하는 마법 스킬, 사용하는 순간에 마력이 모여든다.
나는 집광의 사용과 동시에 유지하고 있던 [라이트닝 차지]를 꺼서, 순간적으로 착각을 불러일으킨 거다.
“신성한 결투에 이런 더러운 수를 쓰다니……!”
“얼씨구, 니들이 한 짓은 그럼 깨끗하고?”
어이없는 속임수에 당한 것이 분했는지, 부들거리는 메르세데스.
나는 비웃음과 함께 계속 공격을 이어나갔다.
아이템을 미친 듯이 쏟아내며 그 사이사이로 무기를 투척하고, [집광] 디코이를 통해 위치를 속인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메르세데스는 점점 내 속임수와 기습에 적응하고 있었다.
그래도, 시간을 끄는 것 자체에 의미가 있다.
마력강화는 강력하지만 어쨌든 지속형 스킬, 유지에는 당연히 마력이 필요하다.
물론 이 짓거리를 하기 위해 나도 MP를 소비하고 있긴 하다.
하지만 내가 [집광]스킬에 쓰는 분량보다 녀석이 마력강화에 쓰는 양이 더 많을 터.
치졸하고 비겁한 방식이라고 욕해도 소용없다. 공략은 원래 그런 거다.
나보다 강한 적을 상대로, 온갖 방식으로 약점을 찾아 분석해서 쓰러트리는 것.
나는 7층에 들어서자마자 이 녀석에게 당할 뻔했다.
강제 패배 이벤트, 솔로 플레이의 특수성, 에픽 퀘스트 루트.
여러 특수한 조건이 붙고 붙은 결과지만- 어쨌든 강대한 위협을 만났다는 건 사실.
그렇다면, 당연히 공략법을 생각해 놔야 하는 거 아닌가.
-후웅!
다시 한번 메르세데스의 후방을 잡고, 빈틈을 노려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이미 예측하고 있었는지, 녀석의 검이 더 빠르게 내게 닥쳤다.
-푸욱!
부러졌던 왼쪽 팔을 들이밀어 억지로 막아내고, 그대로 내 검을 내리쳤다.
내가 뭘 위해서 지난 몇 주간 그렇게 단련에 매진한 거라고 생각하냐.
“내가 귀 뜯어버린다고 말했지, 이 새끼야!”
-촤악!
내려친 참격이 메르세데스의 왼쪽 귀와 어깨를 그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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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 그레이 캐슬의 갱단
내 앞을 가로막은 불량배는 세 명.
금속으로 이루어진 팔을 달고 있는 덩치 좋은 놈이 둘, 번쩍거리는 의안이 달린 놈이 하나.
그리고 겉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지만, 내 마력감지에 걸리는 놈들이 총 여섯 명- 합계 아홉 명이다.
무장 상태는 허리춤에 매여 있는 권총 비스무레한 물건이 하나 있는 정도, 이건 확실히 겉으로 식별하기는 어렵구만.
“모드도 리얼스킨으로만 잔뜩 두른게, 돈 좀깨나 있는 녀석인가 본데……길이라도 잃으셨나? 으응?”
대장으로 보이는 금속팔 남자가 건들거리는 걸음으로 다가와 그렇게 물었다. 그림으로 그린 듯한 불량함이구만.
참고로, 모드라는 건 이놈이 달고 있는 금속팔처럼 몸에 이식하는 기계 파츠의 총칭이다.
리얼스킨은 그중에서도 겉으로 보기에 맨몸과 잘 구분되지 않는 외형의 모드를 말한다던가, 고가라는 것 같다.
“어이, 보스……잠깐만.”
이놈들은 어느 정도로 패야 적당할까 견적을 내고 있던 중, 후방에서 팔짱을 끼고 있던 의안 녀석이 입을 열었다.
보스라고 불린 기계팔 남자는 고개를 홱 돌렸다. 그리고는 의안의 남자와 귓속말을 나누기 시작했다.
“저 자식, 모드랑 프레임이 스캔이 안 돼. 내추럴이라고 뜨는데?”
“뭐? 내추럴? 진짜야?”
“그게 아니면, 6등급 이상의 군용 스텔스 모드를 쓰고 있는 건데.”
굉장히 작은 목소리지만 [초감각]을 가진 나에게는 선명하게 들린다. 처음 듣는 단어지만 대충 내용은 짐작이 간다.
보스라고 불린 남자가 인상 쓰며 나를 쳐다보았다. 기계가 잔뜩 삽입된 몸이지만 표정은 잘만 읽힌다.
경계하고 있구만, 여기서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 이놈들의 깜냥이 보일 것 같은데……한번 좀 긁어 볼까?
“삥 뜯는거 아니었냐, 고철들아?”
커뮤니티에서 본 대로라면, 이 세계에서 ‘고철’이란 말은 이런 놈들에게 굉장히 심한 욕설이라고 한다.
저품질 모드를 장착한 놈들을 콕 집어 비하하는 말로, 대충 흑인한테 말하는 ‘검둥이’ 정도라나.
“기계팔은 장식이야? 쫄았냐?”
마침 이곳은 슬럼 내지는 빈민촌이다. 이렇게까지 말하면 분명 못 참는 놈이 하나쯤은 나오지 않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정답이었다. 눈앞의 세 놈이 아닌- 저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다른 놈이 무언가를 발사했다.
마력감지로 훑어보니 조그만 미사일이나 뭐 그런 것 같다. 위력은 모르겠지만 속도는 느리군.
일단 한 번 맞아볼까.
-쾅!
요란한 폭발음과 함께 먼지가 날렸다.
주변이 검은 연기에 휩싸였고, 바닥에는 불이 붙어 타닥타닥 타오르고, 내 몸은……음, 멀쩡하고.
적색 마탑의 일반 마법사들이 사용하는 공격 마법이랑 비슷한 정도인가. 그보다 살짝 센 것 같기도 하고?
마력이 깃들지 않은 순수한 폭발 공격인 탓에, 위력을 구체적으로 가늠하기는 어렵다.
“병신 렉스, 뭐 그딴 놈한테 바짝 쫄고 지랄이야? 그래가지고 니 구역은 지킬 수 있겠어? 어엉?”
“이 새끼, 라토! 우리 구역에서 뭔 짓이야!”
“대가리 행세하고 있는 자식이 벌벌 떠는 게 답답해서, 내가 먼저 한 발 쏴 줬다. 불만있냐?”
그런데, 나한테 미사일을 쏜 놈은 이들과 같은 패거리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묘하게 험악한 분위기다.
엘리트 NPC는 아닌 것 같은데, 상당히 생동감 있는 놈들이다. 지켜보면 뭔가 퀘스트라도 생기려나?
나는 연기 속에서 [암영] 스킬로 몸을 감추고, 상황을 조금 더 지켜보기로 했다.
**
라토라고 불린 놈은 빨간 모히칸 머리를 하고, 비정상적으로 거대한 팔을 달고 있는 남자였다.
무식하게 크고 기다란 양 팔을 이용해 고릴라처럼 움직이는데, 뭐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꼴사나웠다.
아무튼, 라토는 자신과 비슷한 모히칸 머리를 한 패거리 몇 명을 데리고 나타났다.
“이 새끼가……우리 좆되게 하려고 작정했지? 아까 같은 놈 잘못 건드리면 다 같이 뒤지는 거 몰라?”
나를 막아 세웠던 무리의 보스, 기계팔의 렉스가 인상을 쓰며 말했다. 사정은 대충 알만하다.
이 세계에서 모드를 전혀 장착하지 않은 ‘내추럴’은 극소수의 최상위 계층에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놈들의 스캔에 ‘내추럴’로 나온 나는, 뭐가 됐건간에 든든한 뒷배경이 있는 것처럼 보였을 거다.
그게 아니면, 스캔조차 되지 않는 정체불명의 특수 모드를 장착한 위험 인물로 판단되었을 테고.
딱 봐도 거창한 조직은 아닌 이놈들로서는, 건드리고 싶지 않은 존재였겠지- 그걸 저놈이 쏴버린 거고.
“쫄기는 병신이, 그거 한 발 처맞고 산산조각난 거 보면 모르겠냐? 그냥 쌩 내추럴이구만.”
“이 씨발……”
“딱 보니 어디 별난 집안 도련님인가 본데, 죽여서 깨끗하게 묻으면 보복이고 뭐고도 없지.”
라토 패거리와 렉스 패거리는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언쟁을 이어나갔다. 슬슬 사태의 윤곽이 보인다.
“고철이라고 떠드는 새끼는 다 뭉개버린다고 지껄이던 놈이, 나이 좀 먹었다고 아주 겁쟁이가 다 됐잖아.”
“꼬락서니를 보니 그동안 업그레이드는 하나도 안 했나 본데, 그딴 떨거지들이랑 왕 노릇 하느라 고생이 많지?”
“그러니까 너도 고생 그만하고, 이제 그만 은퇴나 해라. 네 그 구식 모드는 내가 좋은 곳에 비싸게 팔아줄게.”
대충 불량배들끼리의 세대교체가 이루어지려는 상황 같다. 저 모히칸 패거리가 여길 잡아먹으려는 것 같은데.
아무나 두들겨 팬 다음 따까리로 삼아서 길안내를 받을 생각이었던 나에게는, 꽤 괜찮은 상황이다.
그리고, 때맞춰 퀘스트가 발생했다. 제목은 오픈 커뮤니티에서 봤던 그것과 정확히 일치한다.
[퀘스트 발생 : 그레이 캐슬의 갱단들 - 항쟁]
설명 : 당신은 그레이 캐슬의 뒷골목에서 벌어지고 있는 갱단 간의 충돌 현장을 목격했습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조용히 자리를 피하는 게 상책이겠지만, 당신에겐 더 멋진 선택지가 있습니다.
두 갱단 중 하나의 편에 서서 항쟁을 승리로 이끈다면, 무언가 보답을 받을지도 모르죠.
[퀘스트 목표]
1. 아이언피스트 갱단을 돕기(선택).
2. 레드 파이어즈 갱단을 돕기(선택).
23층의 주요 서브 퀘스트로 알려져 있는 갱 퀘스트가 이런 식으로 시작하는 거였군.
갱단의 이름은 듣던 것과 다르지만, 서버에 따른 차이거나 최초 진행 퀘스트라서 그런 거겠지.
나는 곧바로 [암영]스킬을 해제하고, 두 패거리 사이를 당당하게 가르고 섰다.
“오케이, 접수.”
이번 퀘스트도 필수 목표가 없고, 갱단을 돕는다는 선택 목표만 두 개가 있다.
즉, 굳이 선택 목표를 고르지 않아도 퀘스트는 진행할 수 있다는 것- 그렇다면 다음은 뻔하지.
두 개의 갱단 중 하나를 돕는다는 선택지를 고르지 않고, 이 퀘스트를 진행하려면.
“다 쥐어패면 되겠지.”
양쪽 갱단을 공평하게 다 때려잡고- 내가 이 구역을 먹으면 되는 거다.
**
시련의 탑에서 히든 피스를 찾으려면 이 정도는 당연히 해 줘야 한다.
아무도 가지 않는 길을 가는 것, 쉬운 길을 두고 구태여 어려운 길을 찾아가는 것.
내가 미사일을 맞는 모습을 정면에서 봤던 렉스는, 놀란 표정으로 한 발짝 뒷걸음질쳤다.
“뭐야, 안 뒤졌어?”
미사일을 쏜 장본인인 라토 역시, 인상을 구기며 그 큼직한 팔을 빙빙 돌리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찌릿거리는 감각과 함께 무언가 얕은 파장이 내 몸 위를 스쳐 지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파장이 발생한 지점은 라토의 뒤편, 모히칸 머리를 한 또 다른 남자- 뭔가 스캔을 했군.
“내추럴은 맞는데……에너지 쉴드라도 갖고 있었나 보지? 돈이 어지간히 많은가 봐?”
말하는 투를 보니, 스캔의 결과를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 눈치다. 스캔의 정확도에 자신이 있는 건가.
아까 구식 모드니 업그레이드니 떠들어 댔던 걸 보면, 저 모히칸들은 상당히 좋은 모드를 쓰고 있는 모양이다.
“그런데, 그 알량한 쉴드가 너를 얼마나 지켜줄 수 있을 것 같냐. 내추럴 자식아!”
-철컥! 철컥! 철컥!
라토의 커다란 양팔이 금속음과 함께 변형한다. 철컥거리며 변화한 팔의 모습은- 마치 대포.
이어서 ‘위이잉’ 하는 동작음과 함께, 대포로 변한 팔이 탄환을 쏘아낸다. 조금 전에 맞은 미사일이다.
원거리에는 이쪽도 원거리로 대응해볼까. 인벤토리에서 쇠구슬 하나를 꺼내 냅다 투척했다.
-콰앙!
공중에서 요격된 미사일은 허무하게 산산조각이 나서 흩어졌다. 라토의 눈이 커졌다.
“뭐, 뭐야, 쉴드가 아닌데?”
멍청하게 말을 흘리는 라토의 앞으로 [도약]과 [신속]을 사용해 단숨에 접근했다.
마력회로가 손실된 손으로는 아주 조금의 오러밖에 발현하지 못하지만, 딱 보니 오러까지 필요하지도 않을 것 같다.
가볍게 [철벽]스킬만을 발동한 뒤, 놈의 꼴사나운 팔을 주먹으로 힘껏 내리쳤다.
-으적!
대포로 변한 커다란 팔이 나무젓가락처럼 꺾이며, 그 안에 장전되어 있던 포탄을 뱉어냈다.
콰과광, 쏟아진 포탄이 폭발을 일으키며 라토의 양팔과 어깻죽지가 휩쓸려 파괴되었다.
경악한 표정의 라토는 이를 악물고 등 뒤로 힘껏 뛰더니, 갑자기 힘껏 고개를 까딱였다.
-철컥!
그러자, 놈의 머리를 장식하던 빨간 모히칸 헤어가- 주먹만 한 크기의 총구로 변신했다.
와, 뭐야 저게. 모히칸이 무기가 됐잖아?
모히칸이 변형해 만들어진 총구에 묘한 열기가 모인다. 마력이 아닌 다른 종류의 파괴적인 에너지.
유탄을 쏘아내는 양팔과는 다르게, 에너지를 모아서 쏘는 무기- 하지만 그래서 오히려 뻔하기 짝이 없다.
마력감지를 통해 그 위력과 형태가 가늠할 수 있다. 저 모히칸 캐논은……존나 약하다.
“별 병신같은 무기를 다 보겠네.”
-꽈앙!
라토의 모히칸 머리는 내 주먹 한 방에 찌그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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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 인수합병
이놈들은 어딜 어떻게 봐도 별로 대단한 조직은 아니다.
갱단이라고 영단어로 칭하니까 괜히 있어 보이는 것뿐이지, 그 근본은 그냥 동네 깡패 새끼들밖에 안 된다.
그리고 이렇게 별 대단치도 않으면서 무리지어 다니는 놈들의 최대 특징은 언제든, 강약약강이라는 점이다.
발사되지도 못한 채 찌그러진 모히칸 캐논, 바닥에 엎어져 버린 놈들의 대장 라토. 상황 파악은 끝났을 터.
모히칸 패거리는 서로의 눈치를 살피며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냅다 등을 보이며 달려도 모자랄 판이지만, 저렇게 눈치를 살피고 있는 것 역시 이런 놈들의 또 다른 특징.
먼저 튀기에는 가오가 상하는 거다. 그게 아니면 보스를 두고 그냥 도망치기 좀 그렇다거나.
“이게 니들 두목이냐?”
나는 엎어진 라토의 머리를 발끝으로 깡깡 차대며 물었다. 대답하는 놈은 아무도 없었다.
한숨을 쉬며 다른 놈들도 다 쥐어팰 생각으로 앞으로 나선 순간, 후방에 있던 모히칸 한 놈이 무기를 꺼냈다.
라토의 빨간 모히칸이 포신으로 변했던 것처럼, 놈은 검은 모히칸을 네 발의 총구로 변환시켜 나를 겨누었다.
-두두두두두두두!!
빠른 속도로 회전하며 탄환을 쏟아내기 시작한 모히칸 기관총, 나는 [사고 가속]을 발동했다.
느리게 흘러가는 세상 속에서 쏟아지는 탄환의 궤적이 선명하게 보인다.
여태까지의 공격들과는 다르게 탄환의 속도가 매우 빠르다. 피하기도 애매해서 그냥 맞기로 했다.
-팅! 티딩! 티디딩!
[철벽]스킬을 사용하고 [혼신]스킬로 스탯을 증폭시키자, 너무나 손쉽게 튕겨나가는 탄환.
위력은 그냥 따끔하기만 한 정도다. 실탄이 아니라 비비탄 총 세례를 맞고 있는 정도의 느낌.
나는 쏟아지는 탄환을 무시하고 앞으로 걸어가, 공격을 계속하고 있는 모히칸을 뜯어버렸다.
-으적!
그러자 전기가 끊어진 로봇처럼 픽 주저앉아 버리는 검은 모히칸의 깡패.
뭐지, 단순히 헤어스타일을 통일한 게 아니라 이 모히칸이 이놈들의 주요 파츠였던걸까?
아무래도 좋다. 나는 뜯어낸 모히칸을 던져버리고, 남아 있는 다른 모히칸들에게 물었다.
“니들 두목이 누구야, 이 중에서 제일 높은 자식.”
“히, 히익! 괴물!”
“튈 생각 말고 대답을 하라고, 닭벼슬들아.”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채 도망가려는 또 다른 모히칸의 다리를 로우킥으로 분쇄해버렸다.
그러자 남은 모히칸들은 벌벌 떨면서 손가락으로 바닥에 쓰러진 붉은 모히칸, 라토를 가리켰다.
“그래? 그러면 이놈 다음으로 높은 놈은 누군데, 부두목이나 그런 거 있을 거 아니야. 차기 두목이나.”
모히칸들은 이번에도 쓰러져 있는 검은 모히칸을 가리켰다. 조금 전에 기관총을 쏘던 놈이다.
“그럼, 다음은?”
다시 묻자, 모히칸들은 저마다 웅성거리며 연공서열이 어쩌고 하며 누군가를 떠밀기 시작했다.
그런 언쟁 끝에 떠밀려 나온 녀석은 이번에도 검은 모히칸을 달고 있는 놈이었다. 행동대장이라나.
행동대장 모히칸은 다가오는 나를 보며 쩔쩔매다가, 이내 ‘헛! 하고 숨을 내뱉더니 대뜸 고개를 숙였다.
“혀, 형님께서 이제 우리 두목이십니다!”
그러자 눈앞에 떠오르는 시스템 메시지- [보스의 자격]이라는 업적이 달성되며 보너스 스탯을 획득했다.
[퀘스트 완료 : 그레이 캐슬의 갱단들 - 항쟁]
그리고 두 갱단 사이에서 한쪽의 편을 들라던 퀘스트도 완료되며, 경험치와 골드가 보상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곧바로 후속 퀘스트가 발생했고, 나는 발걸음을 돌렸다.
그리고, 금속 팔이 인상적인 아이언피스트 갱단의 두목인 렉스라는 놈을 향해 물었다.
“그러면, 니들 보스는 누구냐?”
23층 진입으로부터 45분째, 나는 이렇게 갱단 두 개를 먹어치웠다.
**
23층의 갱단 퀘스트는 이제까지의 층에서 종종 있었던 진영 퀘스트와는 조금 다르다.
하나의 진영에 소속되어 쭉 해당 루트를 따라가는 방식뿐만이 아니라, 무척 다양한 선택지가 있다는 점에서.
자신이 소속된 갱단을 뒤통수친다거나, 갱단의 보스를 암살하고 자신이 보스를 먹는다거나 하는 짓도 가능하다.
심지어 공권력에 갱단을 넘겨버리는 것도 가능하고, 복수의 갱단에 양다리를 걸쳐 극한까지 이득을 취하는 것도 가능.
본인이 그럴 생각이 없다 하더라도, 시스템이 퀘스트의 형식으로 이런 선택지들을 계속 들이민다고 한다.
그리고 내 앞에도 그런 선택지라고 해야 할지- 아무튼 묘한 퀘스트 하나가 나타났다.
[그레이 캐슬의 갱단들 - 인수합병]
설명 : 당신은 그레이 캐슬의 뒷골목을 점령하고 있는 갱단을 무력으로 무릎꿇려, 산하로 흡수했습니다.
오랜 기간 반목하며 균형을 유지해온 두 갱단이 흡수 통합되었다는 사실은 뒷골목에 큰 파란을 불러오겠지요.
이같은 파란은 분명 여러 종류의 분쟁과 혼란을 낳을 것이며, 이에 대처하는 것은 온전히 당신의 몫입니다.
[퀘스트 목표]
1. (이름없음)갱단을 그레이 캐슬의 정점에 올려놓기.
2. (선행 목표 달성 시 개방됩니다.)
3. (선행 목표 달성 시 개방됩니다.)
4. (선행 목표 달성 시 개방됩니다.)
오픈 커뮤니티에 검색해 보니, 에픽 퀘스트처럼 나 혼자만 받은 퀘스트는 아닌 듯 보였다.
하지만 대부분이 첫 번째 목표를 조금도 달성하지 못하고, 다른 루트의 퀘스트로 빠지게 됐다는데.
반목하고 있는 십수 개의 갱단을 도전자들이 내키는 대로 돕는 구조상, 달성하지 못하는 게 당연하다.
대형 길드가 작정하고 퀘스트를 통제한다면 어떻게든 될 수도 있겠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그러나 나 이외의 도전자가 존재하지 않는 이 2661서버에서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이거 한번 해볼까.”
“뭘 말씀이십니까?”
퀘스트 창을 들여다보며 뱉은 혼잣말을 듣고, 검은 모히칸……이었던 갱 녀석이 물었다.
이곳은 아이언피스트 갱단의 아지트, 23층은 숙소를 구하기 어려운 편이기에 나는 이곳을 거처로 삼았다.
좀 더럽고 죄다 쇳덩이들밖에 없어서 살풍경하지만, 그래도 드러누울 수 있는 소파 정도는 있다.
“그러니까……인수합병, 그레이 캐슬에 있는 갱단 전부.”
“예? 그레이 캐슬을 통합하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딱딱한 소파에 [황금빛 양털]을 깔고 드러누운 나를 향해, 전직 모히칸 녀석이 화들짝 놀라며 되물었다.
아, 왜 모히칸이 아니라 전직 모히칸이냐면……내가 꼴 보기 싫어서 모히칸 싹 다 뽑으라고 했거든.
그래서 전직 모히칸이다. 참고로 대체할 헤어 파츠가 없어서 전직 모히칸들은 싹 다 대머리인 상태다.
“어, 근데 그게 그렇게 놀랄 일인가.”
“형님, 형님은 다른 구역에서 넘어오신 분이죠?”
“다른 구역, 대충 그렇지? 근데 그게 왜?”
단순히 내 무력에 의문을 표하거나, 다른 거대 갱의 존재를 우려하는 것이라면 그냥 무시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내 밑으로 들어오게 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싹싹하게 굴고 있는 이놈의 표정은 뭔가 달랐다.
무슨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창백하게 질린 것이, 그런 말을 꺼내는 것 자체가 문제라는 것처럼 보였다.
“그건 내가 설명해주지.”
벌벌 떠는 대머리를 어깨로 밀치고 앞으로 나온 것은, 아이언피스트 갱단의 전 보스.
강철팔을 가진 사나이, 렉스는 괴담을 이야기하듯 운을 띄웠다.
“그레이 캐슬에는 사신이 산다.”
**
23층의 세계는 엘리시온이라 불리는 거대한 강철의 낙원이다.
공해로 오염되어 더는 살 수 없게 된 바깥세계를 버리고 이주해 온, 인류를 위한 닫힌 이상향.
하지만 실제로 그 이름과 어울리는 ‘이상향’은 엘리시움 중앙의 화이트 그리드- 혹은 가장 중앙인 유토피아 시티 뿐이다.
화이트 존의 바깥은 방향에 따라 레드 그리드니 블루 그리드니 하는 색깔로 불리며, 각각 다른 특성을 갖고 있다.
그리고 이곳, 그레이 캐슬은 엘리시온의 끝자락- 온갖 혐오시설이 모여있는 낙원의 그림자와 같은 장소.
적색도 청색도 황색도 구분 없이, 한데 뒤섞여 쓰레기와 같은 회색으로 물드는 성채.
무질서가 곧 질서인 무법지대- 그런 설정이라고 커뮤니티에서 읽은 적이 있다.
“온갖 씨발것들이 모이는 그레이 캐슬에도 역사가 있어, 그래 봤자 족보싸움이 거의 다지만, 뭐가 있기는 있다 이거야.”
“아무튼, 그레이 캐슬의 역사에 이름을 남긴 전설적인 갱이 세 명 있었는데, 누군지 아냐?”
“드레드 잭슨, 조니 엑스, 그리고 제이 토멘트……이 세명은 그레이 캐슬에서 나고 자란 새끼들이면 모르는 놈이 없어.”
렉스는 그렇게 말하며 잠깐 씨익 웃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강철팔을 대뜸 내 앞으로 들이밀었다.
“이게 제이 토멘트의 마크지. 저기 자빠져 있는 닭벼슬 새끼랑 나는, 예전에 제이의 갱단에 함께 있었어.”
강철팔에 새겨진 문양은 렉스가 입고 있는 옷에 그려진 아이언피스트 갱단의 마크와도 비슷해 보였다.
“후우……어차피 이건 궁금하지도 않겠지. 아무튼, 계속 말하자면, 그 세 명이 전설인 이유는 다른 게 아니야.”
렉스의 한쪽 눈알이 파랗게 빛나며, 가까운 테이블에 홀로그램을 그려내었다.
“그놈들 세 명 모두가 이 그레이 타운을 한 번 통합하거나, 통합 직전까지 갔던 놈들이고……”
홀로그램이 나타낸 것은 그레이 타운의 어느 뒷골목 풍경- 그리고, 누군지 모를 사람의 시체.
“다 뒈졌거든, 원래 살아있는 새끼들은 전설이 못 돼.”
시체의 오른팔에는 렉스가 보여준 것과 똑같은 마크가 붙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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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 회색 성채의 사신
처음 그레이 캐슬을 통일한 건 뉴로그레이브라는 갱단이었어.
놈들의 대가리인 드레드 잭슨은 ‘기관총 드레드’라고 불렸지. 지 앞길 막는 놈들은 전부 갈겨버리는 걸로 유명했거든.
드레드는 온갖 미친놈들이 우글거리던 그레이 캐슬을 압도적인 힘으로 밀어버리고, 자기가 이 회색 지대의 왕이라고 선언했어.
그 새끼는 이상할 정도로 ‘왕’이라는 단어에 꽂혀 있었지. 머리는 별로였던 것 같은데, 어디서 주워들은 말에 빠진 거겠지 뭐.
어쨌든, 드레드가 진짜 어떤 놈이었는지는 나도 잘 몰라.
근데 지금도 말야, ‘그레이 캐슬 역사상 제일 셌던 갱단이 뭐냐? 하면, 뉴로그레이브부터 꼽는 놈들이 아직 꽤 있어.
대부분 그 새끼들 시절엔 기저귀 차던 놈들이 지껄이는 거지만, 그래도 그 정도로 뉴로그레이브가 셌던 건 맞아.
그런데 정작 그 두목인 드레드는, 그레이 캐슬을 통일하고 바로 다음 날에 뒈졌어.
누가 죽였는지, 어떻게 죽였는지, 아무도 몰라.
통일을 선언한 다음 날에 갑자기 사라져서는, 며칠 뒤에 시체로 떴거든.
그것도 그냥 죽은 게 아니야. 시체가 완전히 갈기갈기 찢겨 있었고, 이식했던 모드나 프레임까지 멀쩡한 데가 없었다더라.
그래도 그때는 그걸 이상하게 생각하는 놈들은 없었어. 애초에 드레드 자체가 그냥 무식한 병신이었거든.
‘기관총 드레드’라니까 뭔가 있어 보이긴 하는데, 그 시대를 진짜 살아본 놈들은 다 안다나 봐.
그 새끼는 그냥 별명대로 총만 존나게 갈겨댔을 뿐이고, 뉴로그레이브를 진짜로 키운 건 그 밑에 있던 부하들이었다는거.
어느 정도 세력이 커지고 난 후에는, 그레이 캐슬의 통일이라는 목표에 끌려 제 발로 합류한 놈들이 더 많았다지.
그리고, 그렇게 들어온 놈들은 처음엔 고분고분했어도- 드레드가 얼마나 멍청한지 알고 나선 점점 말을 안 들었거든.
결국 그 중 하나가 뒤통수 갈기고 죽인 거겠지, 다들 그렇게 생각했어.
드레드가 뒤지자마자 뉴로그레이브는 바로 쪼개졌어, 좀 치는 놈들이 죄다 자기가 다음 보스라고 나섰거든.
그러고 나서는 다시 혼돈의 시절이었지, 자기가 드레드를 죽였다고 허세 떠는 놈들도 많았고.
그렇게 쪼개진 뉴로그레이브 잔당과 새롭게 생겨난 갱단이 다시 통일된 건, 그로부터 15년 뒤의 일이야.
뉴로그레이브가 그레이 캐슬에서 가장 거대하고 강력한 갱단이었지만, 정작 보스였던 드레드는 그냥 병신이었다고 했지?
근데 말야, 그다음에 나타난 놈은 달랐어. 조니 엑스.
그 새끼는 드레드랑은 아예 급이 달랐지. 갱단의 세력은 작았지만, 그냥 그레이 캐슬 통틀어 제일 센 놈이었어.
군용 수준의 프레임이랑 모드를 몸에 떡칠하고, 자기 측근 몇 명만 데리고 다니면서 근처 갱단을 하나씩 다 조졌거든.
하여튼, 파괴적이라는 말이 존나 잘 어울리는 새끼들이었지.
그러면서 망나니처럼 굴지도 않았고, 통제가 안 되는 부하도 없어서, 드레드보다 훨씬 빠르게 통일을 이뤄냈어.
하지만 그놈이 그레이 캐슬을 통합해서 뭘 하려고 했는지는 아무도 몰라.
왜냐하면, 순식간에 갱단을 통합한 그 녀석도 뭔가 뜻을 밝히기도 전에- 드레드랑 비슷한 꼴로 뒈져버렸거든.
이번에는 보스인 조니 엑스만 뒈진게 아니었어, 놈과 함께했던 부하들도 함께 시체로 발견됐지.
그 때부터 시작된 거야, 그레이 타운을 통합한 놈들은 모두…사신에게 죽임당한다는 소문이.
그리고 그 소문에 쐐기를 박은 게, 제이 토멘트의 죽음이었어.
**
그레이 타운 통합을 이루거나, 통합에 가까워지기라도 하면 곧 사신에게 죽임을 당한다.
렉스의 이야기를 요약하자면 그렇게 정리할 수 있었다. 후반부에는 거의 자기 추억담이었고.
“그 사신이라는 놈을 실제로 본 사람은 없는 거야?”
나는 문득 궁금해져서 물었다. 렉스는 이를 아득바득 갈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기에 비로소 ‘사신’이라며.
“목격자도 데이터도 없다. 나도 제이의 죽음 이후 온 힘을 기울여 찾아봤지만, 건질 만한 건 아무것도 없었어.”
목격자가 아무도 없다는 건 확실히 이상한 일이다. 이 사이버펑크 세계에 드론이나 카메라 따위는 널려 있으니까.
게다가, 듣자하니 모드를 장착하기 위한 핵심 부품인 ‘프레임’에는 모두 블랙박스가 붙어 있다고 하던데.
사신에게 당한 것으로 추측되는 시신의 블랙박스는 모두 고장 나 데이터가 사라진 상태였다고 한다.
“EMP라도 맞은 건가?”
이 사이버펑크 세계에도 흔하지는 않지만 EMP장비가 있다고 하니, 그거라면 대충 설명이 되긴 한다.
나는 문득 궁금해져서 렉스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더 던졌다. 물론 대답은 모두 시원찮았다.
하지만 렉스는 내가 ‘사신’에 대해 궁금해한다는 사실 자체를 신경 쓰는 듯하더니, 작게 귓속말했다.
“이건 내 추측이지만……사신은 엘리시온 정부가 파견한 살수일지도 모른다.”
“살수?”
“그레이 캐슬이 통일된 조직이 된다면, 도시를 위협할 전력이 될 테니까 말이지.”
렉스는 그렇게 말하고는, ‘그러니 괜히 갱단 통합 같은 터무니없는 소리는 하지 마라’라고 덧붙였다.
그렇지만,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오히려 더 흥미가 생긴단 말이지. 히든피스를 찾는 입장에서는 특히 더더욱.
원래는 조금 천천히 진행할 생각이었지만, 빠른 시일내에 그 ‘사신’을 한번 보고 싶어졌다.
“야, 지도 같은거 있냐?”
“지도?”
“어어, 아까 그거 비슷한.”
일단은 그레이 캐슬에 존재하는 갱단 세력과 그 위치에 대해서부터 좀 알아야겠다.
“그거라면 제가 정리해 뒀습니다 형님! 프레임 아이디 알려주시면 바로 데이터 전송해 드리겠습니다!”
“나 그런 거 없어, 들고 다니면서 볼 수 있게 뽑아서 가져와. 여긴 태블릿 같은 건 없나?”
“태블릿이라니, 그런 언제적 구닥다리 골동품을……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금방 가져오겠습니다!”
전 모히칸 현 대머리 깡패에게 얇은 태블릿 하나를 받아, 지도를 살펴보고 적당한 동선을 생각해 길을 그렸다.
내가 먹어치운 두 갱단을 제외하고, 이 그레이 캐슬에 존재하는 다른 갱단의 숫자는 총 스물하나.
“니들도 따라와서 길 안내해.”
나는 그렇게 말한 뒤, 검을 뽑아들고 아지트 바깥으로 나왔다.
목적지는 지도에 표시된 지점, 그리고 목표는 그 지점까지 향하는 길에 있는 모든 갱단.
그레이 캐슬은 엘리시온의 외곽 지역을 칭하는 말이니, 그냥 크게 한 바퀴 빙 돌면 되는 동선이다.
페스티벌 개최 전까지 23층을 깨 놓으려면, 이 정도는 하루 만에 처리해 줘야지.
**
-콰광!
철근과 콘크리트가 뒤섞인 폐건물이 우르르 박살 나며, 거대한 기계 병기가 착지한다.
엑소스켈레톤이라는 이름의 장비를 장착한 갱단 두목, 이름은……뭐더라, 관심이 없어서 안 들었다.
아무튼 그 갱단 두목이 어디선가 기묘한 무기를 가져와 장비하고는, 내게 겨누고 있었다.
“깝죽대는 것도 거기까지다, 좆같은 뮤턴트 새끼야.”
아무래도 위력에 상당히 자신이 있는 무기인지, 놈은 위풍당당한 태도로 지껄였다.
그런데 뮤턴트는 또 뭐야. 그러고 보니 조금 전에 박살 냈던 갱단에서 누가 비슷한 말을 했던 것 같은데.
아무리 스캔을 돌려도 금속 부품이 보이질 않으니, 이제는 나를 생체 병기 같은 걸로 착각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러면 저건 뮤턴트를 죽이는데 최적화된 병기라고 보면 되는 걸까나, 한 번 맞아볼까?
“너 같은 새끼들한테는 이게 딱이지, 고주파 위상 교란기다.”
이름 모를 갱단 두목의 무기가 불을 뿜었지만, 나는 그 자신만만한 공격에 한숨만 나왔다.
고주파 위상 교란기, 생긴 건 다르지만 조금 전에 다른 녀석이 사용했던 무기랑 똑같은 이름이잖아.
공명 효과로 분자 결합을 흐트러트려 생물을 증발시키는 광선을 쏜다던데, 나에게는 전혀 통하지 않는다.
원리가 어떻건 간에, 단순히 에너지를 방출해 신체에 영향을 미치는 계열의 무기는 내게 일절 통하지 않으니까.
[철벽]스킬을 사용하거나, 마력강화를 사용하거나, 어쨌든 마력을 쓰면 모두 평범하게 방어할 수 있는 공격밖에 안 된다.
그리고 고작해야 23층의 NPC인 이놈들의 무기가 내는 출력으로는, 내 마력 방호를 뚫을 수 있을 리가 없으니.
온갖 첨단 기술이 적용된 병기도, 마력이라는 초월적인 힘의 존재 앞에서는 모두 평등했다.
[라이트닝 차지]
-파지직!
발사된 광선을 무시하고 접근해, 놈의 엑소스켈레톤인가 하는 장비를 전격으로 지져버렸다.
이러니저러니해도 결국 기계들이라서 그런지, [라이트닝 차지]와 [대전]을 이용한 공격이 아주 잘 먹혀든다.
물론 나름의 보호 장비가 있는 모양인지, 몇몇 놈들한테는 아예 막힐 때도 있었지만.
“크허억!”
거대한 병기가 과전류에 의해 기능을 정지하자,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쓰러진 갱단 두목.
이미 이놈의 부하들은 죄다 비슷한 꼴로 뻗어 있다. 이걸로 마지막이었던 이 갱단도 사실상 전멸한 셈.
내가 놓친 갱단이 더 있는 게 아니라면, 슬슬 퀘스트창에 변화가 일어날 참인데.
[그레이 캐슬의 갱단들 : 퀘스트 목표가 갱신되었습니다.]
“오, 역시.”
퀘스트 목표의 갱신과 함께, 눈앞에는 붉은 알림창이 떠올랐다.
그레이 캐슬의 사신이 나를 추적한다는 알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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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 질서와 규율
[그레이 캐슬의 사신이 당신을 추적합니다.]
2층에서 늑대 퀘스트를 받았을 때 나오던 것과 비슷한 알림창.
갱단을 통합하자마자 조금의 지체도 없이 갱신된 퀘스트 목표는 [제한시간 동안 사신에게서 살아남기]였다.
그 밑으로는 48시간짜리 타이머가 표시되어 있었는데, 아직 시간이 흐르고 있는 건 아니었다.
사신이라는게 뭔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갱단을 통합한 내 존재를 인식하고 추적을 개시하면 시작되는거겠지.
그나저나, 대뜸 48시간 동안 ‘사신’의 추적으로부터 살아남으라니. 좀처럼 보기 힘든 방식의 목표다.
사신을 처치하라거나, 사신의 정체를 알아내라거나, 뭐 그런 목표가 생길 줄 알았는데. 왜 하필이면 생존이지?
이 엘리시온이라는 도시의 특정한 시스템 자체가 ‘사신’이라서, 애초에 쓰러트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거나.
아니면 단순히 23층 도전자의 실력과 스펙으로는 결코 쓰러트릴 수 없는, 어마어마하게 강한 상대라서?
개인적으로는 후자였으면 좋겠다. 나는 페스티벌 전에 실전 감각을 닦아두려고 여기에 온 거니까.
-띠링.
“응?”
박살난 건물 잔해를 걷어차며 고민하던 중, 오픈 커뮤니티의 사운드 알람이 울렸다.
토너먼트 참가 선언을 한 이후로 개인 쪽지가 너무 많이 와서, 어지간한 알람은 다 꺼두고 있었는데.
시스템 창을 열어 커뮤니티에 들어가 보니, 내가 설정해 둔 키워드 알림이 반응한 것이었다.
[참가자 필독)페스티벌 토너먼트 관련 정보와 주의사항 안내 드립니다.]
확인해 보니, 시련의 탑 내부의 치안 유지를 담당하고 있는 대형 길드에서 올린 공지글이었다.
내용은 지난 토너먼트 때 올라왔던 것과 거의 똑같았다. 시스템과는 별개로 대형 길드가 만든 자체적인 규칙들이 대부분.
토너먼트라고 할지라도 살인은 금지, 고의성이 없는 사고일지라도 책임을 묻겠다는 내용이 가장 강조되어 있다.
뭐, 그렇겠지. 시스템의 기본 설정이 HP가 일정 수치 이하로 내려가면 승부가 난 것으로 판정하니까.
판정이 나오면 서로에게 자동으로 보호막이 씌워지고, 몇 초 후 자동으로 경기장 바깥으로 전송되는 방식이라던가.
그런 시스템이 있는데도 상대방을 사고로 죽인다는 것은 말이 안 되니까, 살인으로 보고 조치하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조치’라는 것은, 일반적인 법률이 기능할 수 없는 시련의 탑 환경에서는 당연히-
“PK겠지.”
예전에는 신경도 안 쓰고 있던 사실이지만, 새삼 다른 서버도 무척 이상한 환경인 것 같다.
막강한 무력을 가진 대형 길드끼리의 연합이 자체적으로 만들어 낸 어설픈 규칙과 법률로 굴러가는 오묘한 사회.
시스템의 존재 탓에 그 규칙에는 당연히 구멍이 있을 수밖에 없으며, 논쟁과 논란거리도 없을 수가 없다.
뭐, 당장 나랑은 아무 상관도 없는 이야기이긴 하다.
2661서버에서 솔플러로 지내고 있는 나에게는 어떤 길드의 어떤 규칙도 강제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모든 서버의 도전자가 모이는 페스티벌 맵이 아니고서야, 내게 간섭할 방법은 전무하니까.
그리고, 사실 페스티벌 맵에서도 마찬가지다. 길드 연합이 규칙을 강제할 수 있는 건 그들에게 무력이 있기 때문.
정확하게는- 탑 안의 사회를 안전하게 유지하겠다며, 수년 이상을 탑에서 나가지 않고 있는 길드 간부들이 있기 때문이다.
쌓아올린 시간이 곧 힘이나 다름없는 세계이기에, 그들은 절대적인 규칙의 수호자로 존재할 수 있다.
서진혁 Lv.73 (전사)
HP : 1450/1450
MP : 1200/1200
근력 : 126 (116+10)
민첩 : 121 (110+11)
내구 : 128 (113+15)
지능 : 121 (109+12)
하지만, 아직 23층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이만한 스펙을 자랑하는 내가- 규칙을 깨부수려 한다면 어떨까.
지금 당장 그들을 무력으로 앞설 수는 없겠지만, 여러 가지 편법을 사용한다면 혼란을 주는 건 충분히 가능하다.
대형 길드가 내게 조치를 취하기 전에, 잔뜩 깽판을 쳐 놓고 재빨리 2661서버로 귀환한다면 어쩔 거지.
아니, 비단 내가 아니더라도- 어디선가 갑작스레 굉장한 힘을 가진 에픽 직업 전직자 같은 게 나타난다면?
그 사람의 서버에 그 사람보다 강한 도전자가 아무도 없다면, 별로 다를 것 없는 환경이지 않나.
“여, 역시 형님이십니다! 그레이 캐슬을 혼자서 점령하시다니!”
기어이 모든 갱단을 무력으로 쓸어버린 나를 보고 굽실거리는 전직 모히칸 대머리.
이 잡스러운 갱단 녀석들도 나름의 방식으로 이 그레이 캐슬의 질서를 유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압도적인 힘을 가진 내가 난입한 것만으로, 모든 질서와 구도는 박살 났다.
대형 길드가 업로드한 규칙 글의 댓글창에서는 다들 모범생처럼 알겠다고 말하고 있고.
그런 대형 길드의 철저한 주의에, 평범한 도전자들은 안심된다고 떠들고 있지만.
“어어, 볼일 다 봤으니까 이만 돌아가자.”
내 눈에는 이 사이버펑크 세계의 뒷골목이나, 시련의 탑 사회나 크게 다를 게 없어 보인다.
뭐, 어느 쪽이건- 결국 나랑은 별 관계없는 것들이지만.
**
그레이 캐슬 전역의 갱단을 깨부숴 놓은 뒤, 아이언피스트의 아지트로 돌아와 드러누웠다.
그리고 다시 오픈 커뮤니티를 열어, 23층 사이버펑크 세계에서 사두면 좋은 아이템 목록을 쭉 읽어보았다.
23층은 극도로 발달한 기술 덕분에, 이곳에서 통용되는 화폐인 크레딧만 구할 수 있으면 가져가기 좋은 물건이 많다고 한다.
간단하게 영양을 섭취할 수 있다는 칼로리 스틱은 아무래도 좋지만, 랭커들도 애용하는 특수 재질의 속옷에는 나도 관심이 있다.
입어도 전혀 입은 것 같지 않다는 편안함뿐만이 아니라, 착용하는 것만으로 체중이 감소하는 신기한 효과가 있다고 한다.
속옷 따위에 반중력 장치라도 달린 건지, 어떻게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굉장히 인기가 있다나.
크레딧이야 적당히 삥을 뜯으면 얻을 수 있을 테니, 몇 개쯤 사서 올라가고 싶다.
[48 : 00 : 00]
한편, 퀘스트창에 붙어 있는 타이머는 아직도 움직일 생각을 안 하고 있었다.
이것때문에 그레이 캐슬을 마냥 떠나기도 뭣해서, 가능하면 빨리 좀 와줬으면 좋겠는데.
문제의 ‘사신’이 암살자 같은 거라면, 빈틈을 드러내면 그때 찾아오려나? 한번 실험해 봐?
마침 22층 보스를 깨고 얻은 [황금빛 양털]이 매우 편안하게 느껴지는 참이다.
시각도 거의 밤인 것 같고, 딱 두 시간 정도만 눈을 붙여 볼까.
-풀썩.
양털을 깐 소파에 아무렇게나 드러누워, 적당히 눈을 감았다.
그동안 수면에도 상당히 익숙해져서, 이제 나는 정확히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만큼 잠을 잘 수 있다.
주변에 마력을 퍼트려 놓고, 약간의 긴장 상태만 유지하면, 누가 접근해도 바로 알아차리고 일어날 수 있다.
그렇게 눈을 감고, 잠에 든 지 대략 한 시간이 지났을 때였다.
-움찔.
사신이 나타났다.
**
사방에 퍼트려놓은 마력이 무언가 움직임을 잡아냈다.
곧바로 체내에 마력을 돌려 빠르게 정신을 차리고, 눈을 감은 상태 그대로 주변을 경계했다.
하지만 몇 분이 지나도 따로 감지되는 것이 없었다. 기분 탓인가 싶어서 자는 척을 그만두고 소파에서 일어났다.
내 [초감각]과 연동된 마력감지는 거의 모든 종류의 은신을 간파할 수 있지만, 여전히 반응은 없었다.
다만, 아주 약간의 위화감- 스스로도 설명할 수 없는 직감에 의존하여 허공을 향해 손을 뻗었다.
-턱.
“잡았다, 이 새끼야.”
손끝에 잡힌 정체불명의 무언가를 냅다 땅바닥에 내리꽂았다.
콰과광, 큰 소리와 함께 바닥이 무너지고 아래 층으로 추락했다. 흙먼지 사이에서 뭔가가 움직였다.
하지만 아무리 마력을 퍼트리고 [초감각]을 활성화해봐도, 그 정확한 위치나 움직임을 느낄 수 없었다.
역시 사이버펑크 세계인가, 내 마력감지로도 잡아낼 수 없는 미채 기술 같은 게 있나 보지?
단순히 투명해지는 것만이 아니라, 발자국과 발소리도 남기지 않고, 내 마력감지를 완벽히 통과한다.
그러나 내 [초감각]스킬에 통합되었던 [직감]스킬에는 희미하게나마 걸려든다.
[47 : 57 : 54]
퀘스트창에 붙어 있던 타이머도 움직이고 있다. 역시 ‘사신’은 실체가 있었나.
“내가 그레이 캐슬을 통합하는 것 같으니까 나타났나 본데, 진짜로 중앙 도시에서 보낸 살수 같은 거야?”
움직이지 않고 있는 ‘사신’을 향해 말하며, 인벤토리에서 방패와 도끼를 하나씩 꺼내 장비했다.
[직감]스킬로 아슬아슬하게 감지하고 있지만, 역시 정확도가 너무 떨어진다.
그러니 안전을 위해 방패를 들고, 검보다 마구잡이로 휘두를 수 있는 도끼를 사용한다.
“묻는데 대답을 안 하네, 뒤질라고.”
눈이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싸워본 적은 있지만, 아예 보이지 않는 적이랑 싸우는 건 처음이다.
그래서인지, 간만에 머리까지 피가 빡 도는 느낌이다. 아주 마음에 든다.
자, 실전감각 한번 다시 깨워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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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 먼지 칼날
단순히 모습을 완벽히 감추는 게 전부라면 대응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나는 인벤토리에서 석회암질의 짱돌 하나를 꺼내, 왼손으로 움켜쥐어 가루가 되도록 부쉈다.
그 후, 만들어진 흰 가루에 약간의 마력을 담아 주변으로 흩뿌렸다. 그리고 [사고 가속]을 사용해 분진의 움직임을 관찰한다.
꽤나 넓은 범위에 흩뿌렸지만, 뭔가가 분진을 뒤집어쓰는 듯한 모습은 보이질 않는다- 그리고 순간 찌릿.
직감이 반응하는 대로 방패를 들어 올렸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지만, 방패의 윗면이 베여나갔다.
사신의 공격이 틀림없다. 하지만 주위로 흩뿌린 분진은 거의 흔들리지 않고 있었다.
“허, 이건 투명화라는 수준이 아닌데.”
발자국이 남지 않는 것을 보고 대충 예감했지만, 역시 사신은 단순히 모습을 감추기만 하는 게 아니다.
마치, 이 자리에 존재하지 않았다가 갑작스럽게 나타나는 것 같다. 이딴 게 마법이 아니라 과학 기술이라니.
조금 전에 한 차례 접촉한 게 아니었다면, 원거리에서 공격을 날리고 있는 거라고 착각했을 거다.
하지만 확신할 수 있다, 사신은 분명히 이 근처에 있다. 실체가 있는 놈이다.
사신의 공격에 훼손된 방패를 내려다보았다.
뭔가 날카로운 것에 베인 모양새다. 검은 아니겠지만, 아무튼 참격 계열의 공격.
내 방패를 이토록 쉽게 베어낸 걸 보니, 보통 예리한 무기가 아니다. 내 몸도 어떻게든 벨 수 있겠는걸.
직감에 많이 의존하는 방식이 되겠지만, 일부러 빈틈을 내주고 타이밍을 맞춰 카운터를 먹여 봐야겠다.
방패를 일부러 살짝 내리고, 오른손에 쥔 도끼에 마력을 흘려 넣는다. 오러는 형성하지 않는다.
오러는 막대한 공격력을 자랑하지만, 검기나 의념기같은 고급 기술이 아니면 넓은 범위를 타격하기는 어렵다.
현재 내 마력회로의 상태로는 그런 고급 기술을 쓸 수 없으니, 일단은 단순하게 대량의 마력을 때려 붓자.
-찌릿.
다시 한번 경고하는 직감, 즉시 [철벽]과 [혼신]스킬을 사용해 방어력을 보충하고 회피는 포기한다.
무언가 날카로운 것이 목을 스치고 지나간다. 경동맥이 있는 위치가 살짝 베였다.
동시에 마력을 때려넣은 도끼를 공격이 날아든 방향으로 힘차게 내려찍는다.
-콰앙!!
폭발하는 마력이 주변 일대를 휩쓴다. 아이언피스트의 아지트가 순식간에 무너졌다.
아지트에 있던 갱단원들이 휘말리며 시끄럽게 비명을 지르고 난리를 친다. 그리고 그 요란한 소음과 붕괴 사이.
한계까지 발휘된 [초감각]스킬은 허공에서 흔들리는 검은 입자의 무리를 발견해 내었다.
“잡았다.”
[라이트닝 차지]를 두르고 [대전]을 발동시키며, 옅게 마력을 두른 손으로 입자를 붙잡았고.
그대로 붕괴되어가는 지면을 향해 힘껏 집어 던지자, 마침내 놈의 모습이 드러났다.
-치지직……!
오래된 텔레비전의 노이즈를 연상시키는 잡음과 함께, 천천히 드러나는 사신의 정체.
검은 바디슈트로 전신을 감싸고 있는, 검을 든 암살자가 그곳에 있었다.
**
내 손에 잡힌 검은 입자를 본 순간, 나는 놈의 정체를 곧바로 깨달았다.
왜냐하면, 그 검은 입자는 오픈 커뮤니티의 23층 정보글에도 언급되어 있었으니까. 저건, 나노슈트다.
형태를 자유자재로 변환시킬 수 있다는 엘리시온의 최상급 의복. 도전자들도 크레딧을 모아 사려고 한다는 말이 있었지.
물론 평범한 나노슈트는 저딴 미친 은신능력을 제공하지는 않는다. 나노슈트는 기본적으로 형태변형이 가능한 옷에 불과하다.
저건 아마도 군용으로 개발된 특수한 나노슈트겠지. 광학미채를 비롯해 다양한 모드와 연동되는 방식의.
아니, 그것만으로는 존재가 사라지는 듯한 그 은신 능력은 설명되지 않는다. 추측해 보자면-
“그런 게 있다는 얘기는 못 들어봤는데, 나노 로봇……뭐 그런 건가.”
-프레임을 비롯한 모든 요소가 나노 기술로 이루어진, 원격 조종 나노 로봇쯤 되는 게 아닐까.
나노입자 하나하나가 미채를 활성화한 상태로 부유하고 있다가, 중요한 순간에만 형태를 형성하는 거다.
아마 내 목에 생채기를 남긴 날붙이의 정체도, 나노 입자를 그러모아 만든 칼날 같은 거였겠지.
“광역 공격이 가능한 마법이 있었으면 쉽게 잡았겠는데.”
정체를 알고 나니, 비정상적으로 보였던 난이도가 사실 정상이었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나노 입자의 칼날은 날카롭지만 방어할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고, 습격 시간까지 타이머로 정직하게 알려준다.
입자 형태라 물리공격으로 때리기는 거의 불가능하지만, 범위가 있는 마법 공격이라면 잘 먹힐 테고.
마법사가 포함된 파티가 충분히 경계를 갖추고 대응한다면, 48시간 동안 버티는 것 정도는 가능할 것 같다.
모르면 당하지만 알면 잡을 수 있는 초견 살해 타입의 암살자, 뭐 그런 느낌이려나.
-지지직! 지직!
내 [대전]을 통해 흘러간 전류를 제대로 처맞은 나노로봇은 애매한 형태로 몸을 구성하며 일어나려 했다.
광학미채 기능은 방금 그걸로 망가졌는지, 몸 여기저기가 투명해졌다가 말았다가 하는 상태.
이런 상태로는 이제 상대도 안 된다. 이제 이놈을 대충 48시간 동안 갖고 놀면 되는 건가.
-쾅!
비틀거리는 나노봇을 [라이트닝 차지]를 두른 다리로 걷어찼다. 과자처럼 쉽게 부서지는군.
데굴데굴 구르더니 다시 재구성을 시작한 나노로봇을 내려다보던 중, 인기척이 접근했다.
아는 기척이다. 고개를 돌려 보니, 싸움에 휘말렸던 갱단원들 사이에서 ‘렉스’가 튀어나왔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냐! 다른 구역 새끼들이 습격이라도……그건?”
강철 주먹을 꽉 움켜쥐고 싸울 준비를 하고 있던 렉스는, 나노로봇을 보고 인상을 구겼다.
“니들이 말한 사신.”
그렇게 소개하자, 렉스의 구겨졌던 얼굴이 흉하게 일그러지며 두 눈이 번뜩였다.
그러고보니까, 이 녀석은 예전 자신의 두목을 사신에게 잃었댔지. 나름의 사연이 있는 것 같던데.
바디슈트를 입은 인간 형태에서 검은 안개처럼 흩어지기 시작하는 나노로봇을 향해, 렉스가 강철팔을 들어 올렸다.
직후 강철팔에서 뭔가 올가미 같은 것이 쏘아지더니, 흩어져가는 나노로봇을 덮쳤다.
-파지직!
전기가 흐르는 올가미였나. 속박된 나노로봇은 더 이상 형태를 변환시키지 못하고 버둥거렸다.
뭐야, 엄청 쉽게 제압되네. 은신이나 공격능력과 비교하면 기본 성능은 부족한 건가.
“이놈이…그레이 캐슬의 사신이라고……?”
렉스는 복잡한 표정으로 나노로봇을 내려다보았다. 이래저래 할 말이 많아 보인다.
하지만 그 순간, 관자놀이를 찌르는 찌릿한 직감에- 나는 곧바로 렉스를 걷어차며 물러났다.
다음 순간, 돌연 공중에서 출현한 수십 자루의 칼날이 내 팔을 베고 렉스의 전신을 찢어발겼다.
-촤자작!
나는 재빨리 마력을 둘러 깊이 베이지는 않았지만, 렉스의 몸뚱이는 순식간에 해체되고 말았다.
고작 한순간에, 홀로그램으로 보여주었던 시체와 똑같은 꼴로 죽고 만 것이다.
렉스의 몸을 찢어발긴 칼날은 입자의 형태로 흩어졌다가 결합하더니, 여러 명의 ‘사신’으로 변했다.
“하긴……사신이 하나라는 말은 없었구나.”
나는 아무 망설임 없이, 새롭게 나타난 사신들의 사이로 뛰어들었다.
**
사용하던 도끼를 집어넣고, 인벤토리에서 새 무기를 꺼냈다.
이 놈들의 방어력은 생각 이상으로 형편없다. 그렇다면 위력을 포기하고 넓은 범위의 타격을 고를 뿐.
새로 꺼낸 무기는 21층에서 얻은 [용암석 망치]라는 이름의 두 손 둔기 분류의 무기. 다만 나는 한 손으로 사용할 수 있다.
이 무기는 기본적으로 화염 속성 데미지를 입힐 수 있고, 고유 효과로 [용암 폭발]을 발생시키는 효과가 있다.
이름은 거창하지만 정작 위력은 별로라서 쓸 일 없던 무기지만, 이런 상황에는 딱 맞지.
-콰앙!
휘두른 망치가 폭발하며 붉은빛의 유사 용암을 주변으로 흩뿌린다.
나노로봇 사신들은 입자 형태로 변하며 투명화했지만, 곧 다시 공중에서 발생하는 폭발에 휩쓸렸다.
용암 폭발에 휩쓸린 입자들이 소산한다. 예상대로 입자 상태에서는 방어력이 더더욱 떨어지는 모양.
-츠츠츠……!
더 이상 입자 상태로 움직이면 안 된다고 판단했는지, 공중에서 다시 형태를 갖추는 나노로봇들.
놈들은 입자를 모아 만든 검을 휘둘러 용암을 베고 잘라내는 방식을 선택했다.
그렇게 하면 용암 폭발에 휩쓸려 허무하게 당하지는 않으니까, 하지만 형체를 이루면 나한테 당할 뿐이다.
-콱!
절반쯤 인간의 형상을 이룬 나노로봇을 하나 붙잡아, [대전]을 통해 고압전류를 흘려주었다.
이어서 다시금 [용암석 망치]를 휘둘러 폭발을 일으키고, 물러나는 나노로봇들을 하나씩 붙잡아 지져준다.
사방에서 날아드는 입자 칼날의 공격은 아무래도 좋다. 급소가 베이는 것만 피하고 몸으로 받아낸다.
어차피 이 정도 상처는 죄다 [초재생]으로 커버할 수 있다. 놈들은 화력 부족으로 나를 잡을 수 없다.
그렇게 3체의 사신을 쓰러트린 순간, 마력감지에 돌연 강한 인기척 하나가 잡혔다.
“?”
고개를 돌려 보니, 똑같은 사신 하나가 나를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아니, 이제 보니까 똑같지 않다. 생명반응이 느껴진다. 이 새끼, 안에 사람이 들어 있다.
‘사신’은 무인 로봇이 아니라 원격조종 드론이었던 건가- 그리고 이놈이 조종자?
[라이트닝 차지]
나는 덤벼드는 사신의 검을 피해내고, 곧바로 멱살을 잡아 [대전]을 사용해 전격을 흘려 넣었다.
하지만 전격을 맞은 사신은 어째서인지 무력화되지 않고, 되려 그 상태에서 내 가슴팍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나지막이 중얼거리는 작은 목소리. 심장을 꿰뚫는 막대한 힘의 격류.
“전격장(電擊掌).”
정신이 아찔해지는 충격이 나를 덮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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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 심문
피하려면 얼마든지 피할 수 있었을 공격이지만, 그냥 맞아주었다.
이유는 단순하다. 어차피 23층 NPC의 공격이 나한테 제대로 먹혀들 리가 없으니까.
물론 그냥 안이하게 군 건 아니다. 당연히 때맞춰 [철벽]과 [혼신]을 비롯한 내구력 강화 스킬을 사용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슴 깊숙이 찌르고 들어오는 정체불명의 충격- 내장이 죄다 뒤집히는 감각.
“끄윽.”
단순한 감전이랑은 전혀 다른 느낌이다. 의지를 가진 전격이 내장을 헤집으며 고루고루 지져놓는 것 같다.
뭔가 이상하다. 위력이 비정상적으로 강하다. 이건 절대 23층의 NPC가 구사할 수 있는 위력이 아니다.
방어력을 무시하고 들어오는 데미지 판정인가. 아니, 그렇다 해도 지나치게 강력하다.
“이런 씨발.”
-타닥!
사신의 본체는 데미지를 받은 내가 잠시 멈춘 틈을 타, 멱살을 잡은 손을 풀고 뒤로 물러났다.
나노머신으로 동작하는 다른 ‘사신’보다 훨씬 잽싼 몸놀림. 놈은 잠시 멈춰 서서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파직거리는 전기가 놈의 손바닥에서 맴돌고 있다. 어쩐지 조금 당황한 듯한 눈치다. 왜지.
아니, 이유야 뭐가 됐건 아무래도 좋다. 지금은 저 새끼가 방금 사용한 공격의 정체가 가장 궁금하다.
“야, 방금 그거 뭐냐. 신기하네.”
속이 진탕이 되며 올라온 피를 대충 뱉어내고, [용암석 망치]를 굳게 부여잡은 채 물었다.
하지만 사신은 답하지 않았다. 대답 대신, 여전히 전격이 맴돌고 있는 손으로 검을 다시 집어들 뿐이었다.
처음에는 나노로봇에게 말을 건 거였으니까,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던 것도 이해하지만.
분명히 안에 인간이 들어있는 이 새끼는 왜 말을 씹는지 모르겠네. 사람이 물었으면 대답을 해야지.
-타닥!
그 때였다, 당장에라도 달려들 것 같았던 사신은 그대로 발길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동시에 아직 파괴되지 않은 여러 대의 나노로봇들이 나를 향해 일제히 달려들어 왔다.
시간을 끌 셈인가. 하지만 이놈들은 이제 나한테 아무런 방해도 되지 못한다.
-쿠르릉!
마력강화를 발동하자 몸에 깃드는 마력의 폭풍, 그것에 [라이트닝 차지]를 더한다.
이것으로 내 주변에는 전격의 격류가 발생하며, 이런 계열의 공격에 취약한 나노로봇은 내게 접근할 수 없다.
마력강화를 통해 끌어올린 신체능력에 더해 [신속]과 [혼신] 및 [도약]까지 사용해 단번에 걸음을 내딛는다.
-콰광!
다시 한번 아지트 건물이 우르르 무너지며, 덤벼들던 나노로봇들이 흙먼지와 함께 흩어진다.
전력의 도약으로 1초도 되지 않아 사신을 따라잡은 나는, 그대로 놈의 뒤통수를 붙잡고 집어던져 버렸다.
거대한 균열과 함께 어딘지 모를 낡은 건물에 처박힌 사신. 적당한 위력으로 날렸지만, 꽤 제대로 데미지가 들어간 모양이다.
사신은 비척거리며 일어섰다. 이어서, 검은 바디슈트와 함께 놈의 모습을 가리고 있던 헬멧이 빠직거리며 부서졌다.
검은 헬멧이 부서지고 드러난 얼굴은, 갈색 머리칼과 갈색 눈동자가 인상적인- 뭐야, 이거 여자였네?
체형 때문에 당연히 남자일 거로 생각했는데……하긴, 사이버펑크 세계니까 이상할 것도 없나.
아니지, 애초에 얼굴이 저렇다고 무조건 여자라는 보장도 없잖아.
꼬마 에인처럼 좀 예쁘장한 남자일 수도 있으니까.
“괴물…자식…!”
뭐, 여자건 남자건 알 바 아니지만.
**
벽에 처박혔을 때의 충격 탓인지, 사신은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했다.
하지만 전의는 여전한지, 나노머신으로 만든 검을 힘차게 꼬나쥐고 나를 향해 달려든다.
나는 쓸모를 다한 [용암석 망치]와 방패를 집어넣고, 가볍게 마력을 두른 채로 맨손으로 싸움에 임했다.
급소를 정확하게 노려오는 검을 손등으로 쳐내고, 그대로 한 발 깊이 파고들어 명치에 주먹을 날린다.
-빠직!
“허억……!”
바디슈트의 가슴팍 부분에 균열이 일어나며, 사신은 깊이 헛숨을 들이켰다. 상대도 안 되는구만.
전격장이라고 했던가, 조금 전의 강력한 공격은 대체 뭐였던 거지. 도저히 같은 적의 공격이라고는 믿기지 않는데.
명치에 한 방 먹여준 후, 잠시 회복할 시간을 주었다. 사신은 다시금 나노머신 검을 휘두르며 덤벼왔다.
물론 이번에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검술 자체는 꽤 괜찮지만, 단순히 순발력으로 나를 따라잡지 못한다.
-빠각!
한번 더 명치에 일격을 먹여주고, 나노머신으로 이루어진 검을 빼앗아 부러트려 버렸다.
부러트린 검 조각은 그대로 [라이트닝 차지]와 [대전]으로 바싹 튀겨서 잿더미로 만들었다.
이제 무기를 잃었으니, 덤비려면 맨손으로- 조금 전처럼 전격장이라는 기술을 써서 덤벼야 할 거다.
한 발 앞으로 다가서자, 사신은 새된 기합 소리를 내지르며 다시금 달려들었다.
오른손에는 약한 전격이 휘감겨 있다. 나는 그 모습을 보자마자 약하게 [사고 가속]을 발동했다.
느릿하게 흘러가는 세계 속에서, 내게 달려들어 손바닥을 내지르는 사신의 모습을 천천히 관측한다.
그 손바닥에 내 가슴팍에 닿고, 사신의 입이 ‘전격장’이라는 말을 내뱉으며.
마지막으로, 찌르는 듯한 전격이 내 몸을 파고들기까지- 일련의 과정을 모두 세세히 뜯어본다.
-파지직!
하지만 [사고 가속]이 끝남과 동시에 닥친 충격은 처음과는 너무나 달랐다.
방어를 무시하고 안쪽까지 파고드는 듯한 감각 자체는 여전하다. 하지만 뭔가, 결정적인 부분이 다르다.
발산되는 전격의 세기, 흘러들어오는 힘의 감촉- 전반적인 위력이 조금 전과 비교했을 때 너무나 약했다.
공격을 맞고도 끄떡하지 않는 나를 바라보며, 사신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더 이상 방법이 없다는 듯이.
나는 실망스러움을 감추며, 그대로 사신의 복부를 몇 차례 가격해 기절시켰다.
“뭐였던 건데.”
사신으로부터 살아남으라는 타이머는 아직도 40시간 이상이 남아 있는 채였다.
**
아이언피스트 갱단의 아지트는 사신과의 전투 여파로 반파되고 말았다.
조직원들도 전 보스였던 렉스의 처참한 죽음에 통곡하느라 바빴기에, 나는 사신을 다른 갱단의 아지트로 옮겼다.
갱단원들로부터 적당한 구속구를 빌려 사신의 몸을 꽁꽁 싸맸고, 적당한 속박 마법도 하나 걸어두었다.
청색 마탑주에게서 받은 마법서에 적힌 기본 속박 마법이지만, 마법이 없는 이쪽 세계 사람들에겐 잘 통할 거다.
아마도.
사실 자신은 없다. [천의 마술]의 힘을 빌려 어찌저찌 시전하긴 했는데, 솔직히 잘 된 건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그렇게 구속한 사신 앞에 의자를 꺼내 앉고, 녀석이 정신을 차리기까지 잠깐 기다렸다.
곧, 사신이 눈을 떴다.
녀석은 자신의 몸을 감싸고 있는 구속구를 발견하곤 잠시 몸부림치더니, 살기를 담은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손에 검이라도 있었으면 당장 찔러올 기세다. 물론, 입고 있던 나노슈트를 포함해 모든 무장은 미리 해제해 둔 상태다.
슈트가 아니더라도, 몸에 이식된 전투용 모드나 프레임이 잔뜩 있을 테지만- 어차피 나한테는 안 통할 거고.
“딱 맞춰 일어났네. 5분만 더 늦었으면 두들겨서 깨우려고 했거든, 내가 너한테 궁금한 게 좀 많아서.”
그렇게 말하자, 사신은 입술을 몇 차례 질끈 깨물더니,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큭…죽여라…”
이야, 무슨 오크나 고블린한테 납치된 여기사가 뱉을만한 대사를 그대로 하네.
이제 내가 이 녀석을 갱단원들한테 마음대로 하라고 던져주면 능욕물 한 편 뚝딱이겠군.
물론 나는 그런 취미도 없고, NPC를 그렇게 다뤘다가는 퀘스트 진행이 막히기 십상이다.
“죽이긴 뭘 죽여. 내가 궁금한 게 많다니까. 대답만 잘하면 살려줄 수도 있어.”
그렇게 말하자, 사신은 이를 악물고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네 질문에 대답할 이유 따윈 없다. 고문 따위로 입을 열 수 있을 거라 착각하지 마라.”
결연한 말투와 표정도 그렇고, 단단히 각오한 눈빛이었다. 확실히 쉽게 입을 열 것 같지는 않았다.
“이 몸을 얼마나 더럽혀도, 어떤 수치와 굴욕을 주더라도, 내게서는 아무것도 얻어갈 수 없을 거다……!”
그런데 음, 아까도 했던 말이지만 진짜 무슨 고블린한테 잡혀 온 여기사 같은 소리를 하네.
“쓰레기장의 더러운 시궁쥐와 괴물 뮤턴트 따위에게, 나는 결코 굴하지 않는다!”
싸울 때는 한마디도 안 하더니, 이런 상황이 되니까 말이 무척 많아지는 사신.
이 정도면 사실 그냥 쫄아있는게 아닐까. 딱 보니 이미 머릿속으로 이런저런 상상을 끝낸 모양인데.
나는 잠시 고민하며 퀘스트창을 열었다. 사신에게 살아남으라는 목표는 아직 변하지 않은 상태.
사신을 완전히 제압한 이 상황에서도 목표가 변하지 않는 걸 보면……한 가지 떠오르는 것이 있다.
“그러던가.”
나는 결론을 내린 후, 아무것도 묻지 않고 가만히 의자에 앉아 마법 하나를 시전했다.
그로부터 십여 분 뒤, 고문을 당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던 사신이 되려 고개를 갸웃거릴 때쯤.
직감이 날카롭게 경고를 발하며, 설치해 둔 마법이 허공을 향해 불을 뿜었다.
“그럴 줄 알았지.”
또 한 명의 사신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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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 신기술
그래, 사신이 한 명이라는 말은 어디에도 없었지.
타이머가 멈추지 않았다면 또 다른 사신이 나타날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었다.
새 사신의 출현을 대비해 미리 설치해 둔 마법은 불의 장벽을 만들어내는 ‘파이어 월’ 마법.
암살을 위해 접근한 사신은 곧바로 화염의 벽에 휩쓸렸고- 입자 상태의 나노머신은 그대로 깡그리 타 버렸다.
화염의 벽이 사그라들고 나타난 것은, 잡혀 있는 ‘사신’과 거의 똑같은 차림을 한 또 하나의 사신.
체형도 거의 비슷한 것 같고, 사용하는 무기도 똑같이 검 형태의 나노머신, 하지만 미묘하게 다른 점도 있다.
“전투 스타일은 조금씩 다른가 보네.”
내게 붙잡힌 첫 번째 사신은 전형적인 암살자 타입으로, 원거리에서 나노로봇을 보내며 싸우는 타입이었는데.
이번 사신은 본인이 직접 다량의 나노머신을 주변에 두르고 나타났다. 좀 더 적극적인 전사 타입인가.
다양한 형태로 변환시킬 수 있는 나노머신의 활용법은 무궁무진하니, 스타일에 차이가 있는 건 당연한가.
“이, 이런 트랩을……!”
게다가 이번 사신은 과묵한 타입도 아닌 건지, 파이어 월에 당하자마자 그런 소리를 내뱉었다.
그나저나, 파이어 월의 화력이 생각보다 많이 약하네.
마법서를 보고 얼렁뚱땅 시전한 것치고는 꽤 괜찮긴 하지만, 소모한 마력량에 비하면 연비가 형편없다.
[천의 마술]의 부가효과로 구조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음에도, 예상이 빗나갔다는 건- 그냥 내 실력 문제군.
점검은 이쯤 하고, 일단은 이번 사신을 상대하자. 인벤토리에서 적당한 둔기류 하나를 꺼냈다.
“히야앗!”
새롭게 등장한 사신은 오른손에 쥔 검을 휘두르며, 새된 기합을 내질렀다.
나노머신으로 이루어진 검은 휘둘러짐과 동시에 형태를 변환해, 채찍처럼 나를 덮쳐 왔다.
나는 곧바로 [라이트닝 차지]를 부여한 둔기를 크게 휘둘러, 날아드는 나노머신 채찍을 떨어내었다.
파지직, 맞아떨어진 나노머신은 그대로 전격에 의해 기능을 상실하며 분해되고 추락한다.
“파이어.”
바닥으로 떨어진 나노머신은 가벼운 불 마법으로 소각, 경악하는 사신을 향해 접근한다.
무기를 잃자 이번 사신도 곧바로 전류를 일으킨 손을 뻗어왔다. 이놈의 전격장은 과연 어떨까.
가슴팍에 닿은 파직거리는 손, 내장을 헤집어 놓는 것 같은 충격이 닥쳐들지만- 약하다.
“에라이, 꽝이네.”
-꽈직!
둔기를 휘둘러 헬멧을 쓴 정수리를 가격하고, 휘청거리는 사신의 명치에 니킥을 박아주었다.
내 니킥을 맞고도 뻗지 않은 사신은 계속해서 덤벼들었지만, 그대로 몇 분간 내 체술의 연습대가 되었을 뿐.
흠씬 두들겨 맞아 기절한 2호 사신은 그대로 구속당하고, 1호 사신의 곁으로 던져놓았다.
“응?”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2호 사신의 헬멧도 벗겨 냈는데, 드러난 얼굴이 1호 사신과 똑같았다.
사이버펑크 세계니까 있을 법하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복제 인간이나 뭐 그런 건가.
그런 것치고는 전투방식이나 성격에 제법 차이가 있는 것 같았는데.
어쩌면 클론이 아니라 그냥 똑 닮은 쌍둥이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성형으로 얼굴을 맞췄다거나.
뭐, 자세한 건 천천히 알아가면 그만이다. 지금은 심문보다는 포획에 집중하도록 하자.
[39 : 02 : 48]
아직도 퀘스트 창에 나와 있는 타이머는 멈추지 않고 있으니, 곧 3호 사신이 올 거다.
대충 열 명쯤 붙잡아놓고 심문하다 보면, 그 중에서 한 명쯤은 술술 불지 않겠어?
**
다음으로 나타난 사신은 입자 상태의 나노머신을 자신의 팔다리처럼 쓰는 녀석이었다.
아수라처럼 팔을 여섯 개나 만들어서, 각각의 팔에 다른 무기를 들고 덤비는 타입이었는데- 별로 강하지는 않았다.
사신마다 전투 스타일이 다 다르긴 하지만, 근본적인 전투 능력과 스펙에는 큰 차이가 없는 탓이었다.
오히려 여러 명의 사신을 계속 상대할수록, 점점 더 적응되어가는 나만 편해질 뿐.
“이이이익! 이거 당장 풀지 못해! 가만두지 않겠어!”
그리고 사신들은 각각 성격도 다 달랐다. 이번 사신은 여러모로 떼쓰는 어린애 같다고 해야 하나.
과묵한 사신, 시끄러운 사신, 리액션이 큰 사신, 시종일관 실실거리는 사신, 전투광 기질을 보이는 사신 등.
차례차례 찾아오는 사신을 죄다 격파하고 감금하다 보니, 정말 온갖 성격과 스타일의 사신을 다 만나고 있었다.
나중에는 아예 두 명의 사신이 함께 합세해서 나타나기도 했는데, 그래 봤자 그것도 내 상대는 아니었고.
결과적으로, 이름도 잘 기억나지 않는 이 갱단 아지트의 지하는 사신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신병 받아라.”
-우당탕!
구속구를 채운 사신을 지하실에 던져넣고, 슬슬 시간이 다 되어가는 타이머를 확인했다.
[00 : 02 : 49]
남은 시간은 이제 3분 정도, 사신은 이제 충분히 포획했다. 슬슬 지하실 공간이 모자랄 정도.
처음에는 사신들끼리 작당모의를 하는 걸 방지하기 위해, 각각 다른 공간에 격리해 두었는데.
이제는 그것도 한계를 맞이해, 한 공간에 사신이 두어 명씩 들어가 있는 상황이다.
심지어 아지트에 있던 갱단원들을 싹 내쫓아 공간을 확보했는데도 이 정도다. 몇 명인지 슬슬 세기도 귀찮다.
[그레이 캐슬의 갱단들 : 퀘스트 목표가 갱신되었습니다.]
설명 : 당신은 그레이 캐슬의 뒷골목을 점령하고 있는 갱단을 무력으로 무릎 꿇려, 산하로 흡수했습니다.
그러나 그레이 캐슬의 진정한 지배자로 군림하기 위해서는 아직 넘어서야 할 거대한 시련이 남아 있습니다.
그레이 캐슬의 역대 지배자들을 모두 암살한 존재, 정체불명의 사신이 당신을 노리고 있습니다.
당신은 사신의 습격에서 살아남았지만, 여전히 당신을 노리는 배후의 정체는 미궁 속에 가려져 있습니다.
[퀘스트 목표]
1. (이름없음)갱단을 그레이 캐슬의 정점에 올려놓기(완료).
2. 제한시간 동안 사신에게서 살아남기(완료).
3. 사신을 보낸 흑막의 정체를 알아내기.
4. (선행 목표 달성시 개방됩니다.)
타이머의 남은 시간이 모두 흘러가자, 퀘스트 목표가 갱신되었다.
흑막의 정체를 알아내라- 아마 원래대로라면 여러 서브 퀘스트를 통해 조사를 진행하는 거였겠지.
전격장이라는 기술에 대한 궁금증으로 사신들을 잡아놓은 게 도움이 되겠군.
이제 남은 건 심문뿐.
나는 지하실에 던져넣은 사신들을 하나씩 찾아갔다.
**
결론부터 말하자면, 역시 사신들을 잔뜩 포획해 놓은 게 큰 도움이 됐다.
사신들은 모두 똑같은 얼굴과 체형을 가졌지만, 성격은 천차만별이었기에- 어려운 심문도 필요하지 않았다.
“음험한 괴물 녀석…우리를 모아놓고 하렘이라도 만들 생각이었나…! 뒷골목의 쓰레기답군!”
과묵한 편이었던 1호 사신은 이렇게 고블린에게 잡혀 온 여기사 같은 소리를 자꾸만 해 대는 성격.
“비겁한 녀석! 정정당당하게 다시 싸우자! 정면 대결이라면 내가 이길 수 있다!”
나노머신도 없이 칼 한 자루만 들고 덤벼왔던 7호 사신은 정면 승부에 집착하는 성격.
“뭐가 궁금하다고? 네 목을 한 번만 자르게 해 주면 뭐든지 알려주지! 목을 내놔라!”
전기톱처럼 회전하는 나노머신을 다루던 9호 사신은 이렇게 열불을 내며 날뛰는 성격.
이렇게 반항적인 성격의 사신들이 있는 한편, 오히려 고분고분한 성격의 사신들도 여럿 있었던 것이다.
“내가 고문이 두려워 입을 열 거로 생각했다면 정확하다, 뭐든 묻는 대로 대답해주마…!”
“비장의 나노머신도 전투 데이터도 모두 주겠다! 살려만 다오!”
“히, 히익! 제발 때리지 말아 주세요! 다 말해 드릴게요! 거짓말도 안 할게요! 흐이이익!”
딱히 대단한 위협을 가한 것도 아니고, 구타나 고문을 한 것도 아니지만, 알아서들 술술 불어 주었다.
그렇게 알아낸 것은 이들 ‘사신’의 정체, 나노슈트의 사용법, 그리고 퀘스트에서 말한 이들 뒤 흑막의 정체 등등.
거기에 내가 궁금해했던 ‘전격장’이라는 기술의 원리와 실체에 대해서도 모두 알게 되었다.
“전자발경(電磁発勁)이라는 기술이다.”
그것을 알려준 것은 당당한 태도로 ‘고문만은 제발 하지 말아다오’ 라고 말하던 11호 사신.
“체내의 프레임과 모드를 구동하는데 사용되는 전류를 상대방에게 밀어 넣어, 회로를 파괴하는 대 사이보그 전투술이지.”
설명을 듣고 나니, 어째서 처음 맞았던 전격장이 유독 강력한 위력을 발휘했던 것인지 쉽게 알 수 있었다.
1호 사신은 내가 [라이트닝 차지]와 [대전]으로 흘려 넣은 전류를 거꾸로 이용했던 것이다.
어쩐지 이상할 정도로 강하더라니, 내 공격을 강하게 증폭시켜 반사 당한 것이나 다름없었던 거다.
“원래는 너 같은 뮤턴트에게도 통하는 기술이지만……쳇, 전부 말했으니 고문은 하지 않는 거겠지? 응?”
사이보그의 회로를 파괴하기 위한- 적의 내부에 전류를 밀어 넣는 방식 덕분에, 내 방어를 반쯤 무시할 수 있었던 거고.
“그렇단 말이지……?”
원래는 빠르게 퀘스트와 미궁 지역을 밀고 다음 층으로 넘어갈 생각이었지만, 흥미가 돋았다.
나도 [라이트닝 차지]를 통해 전류를 발생시킬 수 있으니, 원리만 따지자면 나도 습득할 수 있는 기술 아닌가?
거기에, 체내 동력부에서 생산하는 전기를 유도해 상대방에게 밀어넣는다는 그 원리.
잘만 응용하면, 손을 통해 마력을 방출하는 기술로도 써먹을 수 있는 거 아닌가?
18층에서 손상되어 아직도 회복되지 않은 내 양손으로도, 충분히 구현할 수 있는 공격기.
“야, 너희 못 풀어주겠다.”
이거, 페스티벌 전까지 어떻게든 한번 익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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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 딱 맞는 방법
14호 사신과 17호 사신 덕분에, 그레이 캐슬을 노리는 흑막의 정체는 손쉽게 알아내었다.
퀘스트 목표도 갱신되었고, 남은 것은 흑막을 찾아내 처치하고 그레이 캐슬을 점령하는 것뿐.
하지만 이미 내 흥미는 퀘스트가 아니라 사신들이 사용하는 전자발경이란 기술로 옮겨 간 상태.
“전자발경을 가르쳐 달라고……? 너는 뮤턴트잖아?”
사신은 대뜸 전자발경을 가르쳐 달라는 내 말에 그렇게 대답했다. 뮤턴트 아니라니까 그러네.
전자발경은 대 사이보그 전투술임과 동시에, 체내에 파워팩을 가진 사이보그만이 쓸 수 있는 기술이라고 한다.
그러니 사이보그가 아닌 나는 쓸 수 있을 리가 없다는 것이다. 나는 그런 건 알아서 하겠다고 대답했다.
“그런데, 뭘 어떻게 가르쳐 줘야 하는 거냐. 데이터라면 복제해 줄 수 있지만……”
“아, 그게 문제인가.”
“그, 그거다. 우리도 전자발경은 인큐베이터에서 디지시냅스로 익힌 거라고.”
참고로 똑같은 얼굴을 한 이 사신들은 내 예상대로, 인큐베이터에서 배양된 복제인간이 맞았다.
유전자 가위 기술로 편집된 어떤 인물의 DNA를 기반으로 생성하여, 학습 장치를 통해 지식을 주입받은 양산품.
그런 것치고는 하나하나 개성이 엄청나지만, 어쨌든 가진 지식은 장치를 통해 흡수한 것이 전부라고 한다.
그렇기에 당연히 자신이 가진 지식을 전수해 주는 것도 불가능, 복제한 데이터를 전송해도 내겐 수신할 방법이 없다.
그 디지시냅스라는 이름의 학습장치를 구하더라도, 사이보그가 아닌 나는 사용할 수 없다는 것 같고.
포획한 사신 중에서 좀 똘똘한 타입을 데려와 설명하라고 하면 어떨까……그런 녀석은 애초에 협조를 안 해주겠지.
쓰읍, 이러면 나가린데……어쩔 수 없네. 시간이 조금 걸리더라도 클래식한 방법을 쓰도록 하자.
“너, 풀어줄 테니까 도망칠 생각 하지 마라. 도망치다 걸리면 뒤져.”
“물론이다! 나는 죽는 것만은 절대 사양이다! 그런데 풀어준다니?”
17호 사신은 불안하다는 듯 물었으나, 나는 일단 구속구부터 풀어주고 설명하기로 했다.
나는 운동과 담쌓은 개백수의 몸으로 시작해, 자력으로 각종 무기술을 상급 수준까지 익힌 몸이다.
물론 상급에 도달하기까지 여러 NPC의 도움을 받기는 했지만, 그 시작은 훨씬 무식한 방법이었지.
수많은 리자드맨 전사들에게 칼자루 하나 꼬나쥐고 덤벼들어, 말 그대로 맞고 깨지고 부딪히며 배웠던 거다.
무식하긴 하지만, 그게 나 같은 놈한테 가장 잘 맞는 방식이다. 모르면 맞아야지.
“나한테 전격장 몇 발만 꽂아봐.”
오랜만에 내성 스킬도 올릴 겸, 전자발경은 맞으면서 배우도록 하자.
시간은 좀 오래 걸리더라도, 역시 이만한 방법이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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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살을 통해 그레이 캐슬의 통합을 견제해 온 흑막의 정체는, 뻔하게도 엘리시온 중앙 의회의 상원의원이었다.
정확한 이름까지는 듣지 못했지만, 굳이 알 필요도 없었다. 상원의원이라는 자리 자체가 극소수만이 오를 수 있는 위치니까.
또한, 이유 역시 단순했다.
그레이 캐슬은 엘리시온 외곽에 위치한 지역이자, 동시에 엘리시온을 둘러싸고 있는 벽과 같은 지역.
그곳에 거주하는 인구는 행정의 손이 닿지 않는 탓에, 정확한 통계조차 존재하지 않는 상태다.
측정하기도 어려운 숫자의 인구가 무력을 기반으로 한데 뭉친다면, 그건 사실상 군벌과 다르지 않다.
기술력과 조직력은 아직 어설픈 수준이지만, 지리적인 이점과 막대한 인구수라는 명확한 강점이 있으니.
만약 그들이 일제히 봉기라도 한다면, 그 위협은 엘리시온 중심부, ‘화이트 그리드’에까지 미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사신에게 쓱싹하고 썰리는 무력 수준을 생각해 보면, 과연 그런 게 가능할까 싶지만- 또 모르는 일이니까.
렉스의 보스였다던 제이 토멘트라는 작자만 해도, 굉장히 훌륭한 리더십을 갖춘 녀석이었다고 들었고.
아무튼, 엘리시온의 상원의원은 그런 지방 군벌의 출현을 걱정한 것이다.
엘리시온의 의원직은 명목상 선출직이지만, 실상은 세습되는 지위.
영지를 가진 귀족이나 마찬가지인 의원에게, 군벌의 출현은 경계할 수밖에 없었겠지.
조금 더 추측해보자면, 아마 갱단을 처음 통합한 드레드라는 녀석이 문제가 아니었을까 싶다.
왕이라는 단어에 집착하는 기색을 보였다고 하니까, 반란을 꿈꾸는 위험분자로 보였을 가능성이 무척 높다.
그리고 ‘사신’은 그런 위험분자를 쥐도 새도 모르게 제거하기 위해 만들어진 흉악한 암살 병기.
각각이 가진 개성에도 불구하고 이름조차 부여받지 못한 양산품 ,암살을 위해서만 탄생한 존재가-
“저, 정말 괜찮은 거 맞냐……! 나중에 이걸 빌미로 때리려는 건……!”
-지금 내 앞에서, 한 손에 전류를 깃들인 채 사시나무처럼 벌벌 떨고 있었다.
그냥 시원하게 최대 출력으로 전격장 몇 발 꽂아달라니까, 지레 겁을 집어먹고 이딴 소리나 하고 있다.
겁이 많아서 뭐든 술술 불어주는 건 좋은데, 이럴 때는 역시 방해가 되네. 다른 사신한테 시켜야 하나.
“에잇, 이젠 나도 모른다! 전격장!”
그렇게 고민하던 중, 결국 마음을 굳힌 듯 사신이 손을 내뻗는다. 나는 곧바로 [사고 가속]을 발동했다.
마력 감지와 [초감각]을 동원해 흐르는 힘의 결을 가능한 한 섬세하게 포착하고, 그것을 이론에 대입해 현상을 분석한다.
사용되는 에너지가 마력이었다면 훨씬 쉽게 파악할 수 있었겠지만, 역시 순수한 전류는 파악하기 어렵다.
-파지직!
그렇게 한 발, 정통으로 전격장을 맞은 뒤- 남은 전류가 속을 헤집는 것을 천천히 느꼈다.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하다. 일단 전류가 내 안으로 들어온 이후 어떤 식으로 퍼지는지는 대략 감이 온다.
문제는 전류를 유도해서 외부로, 즉 상대에게 ‘꽂아넣는’ 과정인데…… 아직 더 많은 관찰이 필요하다.
그건 그렇고, 분명 최대 출력으로 쏘라고 했는데 왜 이런 애매한 위력이지? 좀 약한데?
“야, 제대로 안 할래? 풀파워로 쏘라니까?”
나는 여전히 벌벌 떨고 있는 사신에게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겁먹은 사신은 그다음에도 애매한 위력으로 전격장을 발사했지만, 몇 번 반복하니 점점 나아지기 시작했다.
결국 마지막엔 망설임 없이 최대 출력 전격장을 날릴 수 있게 되었지만, 딱히 성과는 없었다.
뭐, 금방 뭔가 얻어낼 거라고 기대한 건 아니니까.
그래도 아쉽긴 하네.
**
사신이 최대 출력 전격장을 사용할 수 있는 건 최대 4회까지가 한계라고 한다.
전자발경이라는 기술 자체가 파워팩의 에너지를 소모하는 방식이니, 제한이 있는 건 당연하다.
물론 파워팩은 자가발전 기능이 있어서 시간이 지나면 충전되긴 한다. 문제는 그 시간이 꽤 길다는 거다.
결국, 나는 어쩔 수 없이 태도가 고분고분한 사신들을 하나씩 데려와 번갈아 전격장을 날리게 시켜야만 했다.
“저, 저는 정말 진심으로 죽일 작정으로 했는데요…… 그걸 다 맞고도 왜 멀쩡하신 건가요……?”
쭈글쭈글한 목소리로 소심하게 의문을 제기한 건 12호 사신이었다.
“난 원래 전기에 강해. 그보다 너도 배터리 다 됐냐?”
질문을 적당히 흘려넘기며 반대로 묻자, 12호는 찐따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하는 행동 하나하나에 찌질함이 묻어나오는 건 18층의 자색 마탑주 이후로 처음이네.
아무튼- 이걸로 전격장은 맞을 수 있는 만큼 맞은 셈인가. 내성도 딱히 오른 것 같진 않고, 여전히 성과도 없다.
몇 대 더 맞아보면 뭔가 깨달을 것 같기도 한데…… 갱단원들에게 시켜서 모은 배터리도 이미 전부 소진됐다.
사신들의 프레임을 구동시키는 데 들어가는 전력량이 워낙 커서, 전기를 공급할 방법이 많이 없다.
그렇잖아도 그레이 캐슬은 항상 전력난에 시달리는 장소라고 하니, 이젠 정말 어쩔 수 없나.
“야, 근데 진짜 이걸로 충전 안 되냐?”
“히, 히익! 그런 거 맞으면 죽어버려요!”
혹시 내 [라이트닝 차지]로 전력을 공급할 수는 없을까 싶어 물어봤지만, 아무래도 감당할 수 없는 모양.
듣자 하니, 이전에 내 [라이트닝 차지]를 반사했던 1호 사신은 아직도 일부 회로가 손상된 상태라는 모양이다.
괜히 무모한 시도를 했다가 사신을 줄이고 싶지는 않고, 결국 파워팩이 자동 충전될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는 건가.
“저, 사실…… 효율은 별로지만 파워팩을 충전하는 방법이 하나 있긴 해요. 저희, 식품 섭취가 가능하거든요……”
그때, 12호 사신이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마, 말씀드리지만 효율은 정말 형편없어요. 어디까지나 구식 설계의 흔적이 남은 수준이라서요.”
물론 이 그레이 캐슬에서 사신을 충전할 만큼의 식품을 구하기는 무척 어렵다. 그러니 저렇게 쭈굴대며 말하는 거겠지.
하지만 그냥 아무 식품이나 섭취해도 괜찮은 거라면, 이야기는 달라지지. 나는 인벤토리를 열었다.
“섭취하는 식품 종류는 아무거나 상관없고?”
“고열량, 고지방, 고당류 식품이면 뭐든 돼요……”
사신은 그렇게 말하며, ‘어차피 연료일 뿐이니까요, 칼로리 스틱도 괜찮아요’ 라고 덧붙였다.
고열량, 고지방, 고당류- 그거라면 딱 맞는 게 내 인벤토리에 넘칠 만큼 있지.
“진작 말을 하지 그랬냐.”
나를 포함한 시련의 탑 도전자들이 애용하는 달콤한 칼로리 스틱, 화이트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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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 사이버펑크의 요리사
사실 화이트롤은 매우 맛있는 축에 속하는 간식거리다.
포근한 카스테라 가루를 묻힌 부드럽고 달달한 크림빵이 맛이 없을 수가 있나.
나도 처음에 먹을 때는 무척 좋아했었고, 내가 화이트롤을 나눠준 NPC들도 대부분 좋아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래, 나도 화이트롤이 맛있는 간식이라는 건 안다. 물릴 대로 물렸지만, 머리로는 분명히 알고 있다.
“이, 이게 대체 뭐죠……믿을 수 없어요, 이게 정말로 합법이라고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저렇게까지 오버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뭔가 잘못된 것 같다는 기분이 든다.
나는 식품을 섭취해 에너지로 바꿀 수 있다는 사신의 말을 듣고, 곧바로 화이트롤을 꺼냈다.
고열량, 고지방, 고당류- 달콤한 크림을 가득 채운 화이트롤은 이들이 말하는 연료의 조건에 완벽히 들어맞았으니까.
“심장이 쿵쾅거리고, 눈이 빙빙 도는 것 같아요……하지만 데이터 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그리고 나온 게 저 반응이다. 사신은 화이트롤을 먹자마자 말도 안 된다며 현실을 부정하기 시작했다.
“알겠어요, 강한 중독성을 가진 신종 전자 마약이군요! 그게 아니라면 설명할 수 없어요!”
“아니거든?”
“아, 아닌가요? 그렇지만 이 식품은, 너무……모르겠어요, 이건, 그래요, 그거에요, 맛있어요!”
사신은 내 음식을 처음 먹었을 때의 에인보다도 더 격렬하게 반응했다. 마치 단것을 처음 먹어보는 사람처럼.
그리고 말하는 투를 들어보니, 아무래도 진짜 처음 먹어보는 것 같았다. 애초에 음식을 제대로 먹은 적이나 있었을까?
태어난 장소는 세포를 배양하는 시험관이었고, 가진 지식은 모두 학습장치로 주입받은 것이라 했던가.
평생을 암살 병기로 살아왔을 처지를 생각해 보면, 그렇게까지 이상한 반응은 아닐지도 모른다.
“지식으로는 알고 있었지만, 세상에 이런 감각을 주는 물건이 있었다니……믿을 수 없어요.”
에너지 충전을 위해 악으로 깡으로 먹으라 할 셈이었는데, 이렇게 되면 굳이 강요할 필요도 없겠다.
나는 화이트롤 하나를 소중하게 아껴먹고 있는 사신의 앞에, 무수히 많은 양의 화이트롤을 쌓아주었다.
사신이 이걸 얼마나 먹을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인벤토리에는 수만 개나 되는 화이트롤이 들어 있다.
에너지 전환 효율이 좀 낮더라도, 부족함 없이 공급할 수 있으리라. 게다가 사신은 이 녀석 하나만이 아니니까.
나는 찐따 사신이 화이트롤을 먹게 두고, 다른 고분고분한 사신들을 데려와 똑같이 화이트롤을 먹였다.
“흥, 그런 수상한 식품을 먹으란다고 고분고분 받아먹을 줄 알았나? 정답이다……으읏?!”
“이런 사치스러운 음식을 먹인다는 건……최후의 만찬이라는 거구나!”
“이, 이 뮤턴트 녀석! 이 화이트롤이라는 음식은 대체 뭐냐! 몸이 달아오르고 있잖아!”
여전히 개성이 넘치는 사신들은 처음에는 조금씩 다르게 반응했지만, 일단 화이트롤을 먹은 후의 반응은 비슷했다.
좀 웃기는 꼴이긴 하지만, 어쨌든 이걸로 전자발경을 익히기 위한 준비는 확실히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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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다시 열어본 오픈 커뮤니티는 여전히 페스티벌에 대한 소식으로 떠들썩했다.
그 사이에 토너먼트 참가 의사를 밝힌 랭커들의 숫자도 꽤 늘어났고, 벌써 노점을 차릴 생각이 만만한 도전자들도 있었다.
나도 그동안 요리를 계기로 친해진 생활 게시판의 도전자들이랑 가벼운 약속을 몇 개 잡아두었다.
딱히 그 사람들이랑 뭘 하려는 건 아니고, 서로 얼굴이나 비추고 요리 이야기나 좀 하려고.
음식 노점을 차려서 뭐라도 팔아볼까 하는 생각도 해봤지만, 근본적인 시스템의 한계로 애로사항이 너무 많다.
페스티벌 구역에서의 거래는 모두 대형 길드가 만들어낸 인프라 속에서 간접적으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설령 노점을 차린다고 해도, 장사가 아니라 금전이 오가지 않는 자원봉사가 될 것이다.
뭐, 애초에 토너먼트 일정이 어떻게 될 지 모르고, 노점을 차릴 시간 여유가 있을 것 같지도 않다.
아무튼, 그렇게 커뮤니티를 한 번 살펴보고- 이번 퀘스트에 대한 정보글을 가볍게 작성했다.
내가 현재 진행 중인 [그레이 캐슬의 갱단들] 퀘스트는 다른 서버에서도 진행할 수 있는 퀘스트다.
모든 갱단을 통합해야 한다는 첫 번째 목표를 달성하기가 매우 힘들어, 아무도 여기까지 진행하지 못했을 뿐.
[작성자 : 서진혁#2661]
[제목 : 23층 갱단 통합 퀘스트 진행중임]
(사진)
아직 깨진 않았는데 목표는 다 오픈했다
다 깨고나면 흑막 관련 정보 포함해서 한번 더 공략글 쓰겠음
일단 갱단 통합 부분부터인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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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보추
- 사신은 물리뎀으로는 걍 못잡는거임?
- ㄴ 잡으려면 잡을것같은데 마법으로 잡는게 훨씬편함
- ㄴ 근데 니는 전붕이면서 어케잡았냐
- 저 클론은 총 몇마리임?? 다똑같이생김?
- ㄴ 내가 잡은건 스물정도 됨, 생긴건 다똑같은데 성격이랑 스타일은 다 다름
- 클론부대 ㅈㄴ이쁘네 ㅋㅋㅋ이새끼는 뭐 맨날 미소녀만만나노
- ㄴ ㄹㅇ 진혁이 특검해야함
- 쾌감을 느껴본적없는 클론눈나부대는 좀 야하네요
오랜만에 장문으로 쓴 정보글이건만, 커뮤니티 망령들은 퀘스트가 아니라 스크린샷에만 정신이 팔려 있다.
뭐, 화이트롤을 입안 가득 채워넣고 눈을 휘둥그렇게 뜬 사신의 모습은, 확실히 눈에 띄긴 한다.
물론 죄다 똑같이 생기기도 했고, 몸매가 너무 평탄한 탓에 다크엘프와 비교하자면 민망한 수준이지만.
“저, 저기, 충전 다 됐어요. 이제 전격장을 쓰면 되는 건가요……?”
나는 커뮤니티를 닫고, 충전을 마친 사신들을 불러 다시금 전격장을 차례대로 맞아 보았다.
아직 확실하게 감이 잡히지는 않았지만, 계속 반복하다 보면- 분명 재현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나저나 얘네들, 화이트롤 엄청 잘 먹네. 물리지는 않나.
저거 하나에 저렇게 좋아하는 걸 보니 안쓰러울 지경인데, 다른 것도 한번 먹여 볼까?
**
오른손에 마력을 그러모으고, 손상된 회로의 사이사이로 마력을 흘려넣는다.
중요한 것은 마력을 끈처럼 만들어, 끊어진 회로 사이를 통과할 때 손실되지 않게 하는 것이다.
곧 우웅, 하는 소리와 함께 푸른 마력의 형상이 오른손 위로 나타났다. 넘실거리는 마력의 발현은 아직 불안하다.
여기서, 나는 [라이트닝 차지]를 활성화하며 심장 부근의 주요 회로를 더 강하게 활성화했다.
마치 혈액을 펌프질하듯, 전기 속성을 띠게 된 마력을 천천히 손끝으로 인도한다.
전자발경은 사이보그의 전신에 장착된 프레임과 모드를 일종의 길로 활용하면서 발동된다.
정해진 회로를 따르지 않고, 간접적으로 전기가 통할 수 있는 다른 기관을 통해 힘을 인도하는 것이다.
나도 같은 방법을 사용한다. 마력회로가 아닌 내 뼈와 혈관을 이용해- 천천히 힘을 인도하는 거다.
그렇게 5분가량이 지났을 때, 이변이 발생했다.
손 안에서 넘실거리던 마력이 마침내 심장에서 출발한 마력과 이어져, 전기의 성질을 띠기 시작한 것이다.
[대전] 스킬의 힘을 이용하지 않고, 순수한 조작만으로 [라이트닝 차지]를 체외로 방출해 낸 거다.
“그거다, 그걸 상대방의 체내에 흘려 넣으며 회로를 파괴하는 거다!”
지켜보고 있던 사신 4호가 그렇게 말했지만, 이 흐름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집중력이 한계였다.
결국 파직거리는 전격은 허공으로 흩어지고 말았다. 전격장의 시전은 실패한 것이다.
“아직은 이 정도인가.”
몸으로 전격장을 맞아가며 기술을 연습한지 벌써 2주째, 나는 전자발경의 묘리를 깨우쳤다.
아직 전격을 상대에게 흘려넣는 것까지는 불가능하지만, 그 직전 단계까지라면 어떻게든 할 수 있게 된 거다.
물론 전격을 발현하기까지 5분씩이나 걸리는지라, 실전에서는 전혀 쓸만한 게 못 되지만.
그래도 손상된 마력회로의 사용법이라는 실마리는 분명하게 잡은 셈이다.
“야아, 방금 그건 성공으로 치는 거야?”
“그 정도면 잘 된 거 아닌가요?”
“나는, 뭐어, 우수하다고 생각하는데, 으응.”
내가 전격장을 성공하기만을 학수고대하고 있던 사신들이 발을 동동 구르며 그렇게 물었다.
이 녀석들이 이러는 이유는 단순하다. 오늘 전격장의 성과가 나온다면, 아주 호화롭게 먹여주기로 했거든.
2주간의 성과는 전자발경의 기초 습득뿐만이 아니었다. 나는 마침내 이십여 명의 사신 전원을 길들이는 데 성공했다.
처음에는 고분고분한 녀석들에게 화이트롤을 먹이는 걸로 시작해서, 나중에 아예 요리를 시작한 게 제대로 먹혔다.
사이버펑크 세계에서는 어마어마하게 귀하다는 ‘오가닉’ 재료를 사용한 요리의 힘이라고 할 수 있겠지.
매일같이 ‘큭 죽여라’를 말하던 1호 사신도 얄짤없이 내 요리의 포로가 된 상태다.
“그래, 이번 건 성공으로 치자. 먹고 싶은 거 하나씩 말해.”
내가 져준다는 기색으로 그렇게 말하자, 사신들은 저마다 손을 들며 좋아하는 음식을 말하기 시작했다.
크림스튜, 치즈 돈가스, 탕수육, 짬뽕, 갈비찜……하여튼 입맛들도 하나같이 개성적이다.
“어휴, 메뉴 통일은 죽어도 안 되네.”
나는 괜히 헛웃음을 흘리며, 나노머신으로 만든 식칼을 들고 간이 주방에 섰다.
그리고 침을 질질 흘리며 기대하고 있는 사신들의 사진을 찍어, 오픈 커뮤니티에 업로드했다.
[오늘자 밥탐 기다리는 사신들.jpg]
이미 사신들의 먹방과 일상 사진은 커뮤니티에서 무척 유명해져 있었다. 곧 댓글이 주르륵 달렸다.
- 이ㅅㄲ는 대체 싸펑세계관에서 뭘ㄹ하는거임??
그러게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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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 변화는 성장인가
실전 감각을 키우고자 진입했던 23층이건만, 어쩐지 요리사 노릇이나 하고 있는 꼴이다.
물론 꾸준히 전격장을 습득하기 위한 훈련을 하고 있기도 하고, 기어이 전자발경을 어느 정도 익혀내기도 했다.
고로, 딱히 문제가 있거나 불만이 있는 건 아니다.
애초에 내 음식을 먹는 사신들의 리액션이 보통 재미있는 게 아니라서, 이것도 나름대로 만족스러운 편이다.
듣자하니, 사신들은 아예 식사라는 행위를 해본 적이 거의 없다고 한다. 기껏해야 칼로리 스틱을 좀 먹어봤을 뿐이라나.
심지어 사신들은 시험관에서 고속 배양된 몸이기에, 실질적인 나이는 대부분 거의 어린아이 수준이라고 한다.
제대로 외견만큼의 연령을 가진 건, 고참에 속하는 1호 사신 정도뿐.
가장 어린 사신은 만들어진지 2년 정도밖에 안 됐으니, 어떤 면에서는 에인보다 더 순수한 백지상태인 셈이다.
그런 녀석들이 사이버펑크 세계관에서는 귀하디귀한 자연 재료를 이용한 음식을 맛봤으니, 리액션이 좋을 만도 하지.
요리가 취미인 사람에겐 잘 먹는 사람만큼 반가운 상대도 없다고 하던가, 하여튼 보고 있으면 재밌는 녀석들이다.
참고로, 이런 사신들의 먹는 모습을 즐기는 건 비단 나뿐만이 아니어서-
[작성자 : 서진혁#2661]
[제목 : 풀토핑 떡볶이 코스 흡입하는 8호 사신보고가셈]
(사진)
떡볶이는 일반, 로제, 까르보까지 해서 3종류
튀김은 잘 기억안나는데 튀길만한건 다 튀겨서 대충 7종류 될거임
완식하고나서 후식으로 샤베트까지 깔끔하게 조졌음
8호의 추천조합은 로제 양념에 튀김빵 푹찍어먹기
얘가 사신중에서 제일잘먹는듯
- 저걸 혼자 다만들었다고?? 이새끼 요리 왤케잘함??
- ㄴ 진혁이 요리스킬도 따로 있을걸?
- ㄴ 요리시작한지 얼마안됬다는데 벌써 10렙넘었다고함
- 위꼴 ㅅㅂ 이시간에 이런거올리지 말라고 개새끼야
- ㄴ 오늘치 잡템팔고 떡볶이 2인분 즉시구매했다
- 새우튀김개바삭해보이네
- 저 튀김빵은 뭐임 고로케같은거냐
- ㄴ 비슷함 내용물은 치즈
- ㄴ 통모짜핫도그같은건가보네 개맛있겠다
- 서진혁 내 아내 합격
- 8호사시니 개귀여워퓨ㅠㅠㅠㅠㅠ
-지난 몇주간 내가 올린 사신들의 먹방씬은 모조리 인기글 탭에 올라가 있을 정도였다.
에너지 효율 문제로 굉장히 많은 양을 먹으면서도, 다들 가지런하게 먹는 편이라 인기가 없을 수 없었다.
하지만 슬슬 때가 다가오고 있다. 다른 게 아니라, 사신들에게 요리를 해먹이기 위한 식재료가 바닥날 때가.
아직 인벤토리에 남아 있는 식재료의 양 자체는 상당하지만, 사신들의 먹성을 생각해보면 그렇게 오래가지 못하겠지.
과연 이 재료들이 다 동나기 전에 전격장을 습득할 수 있을까 싶다. 앞으로 조금만 더 하면 될 것 같은데 말이지.
아무튼, 그런 생각을 하며 전격장 연습에 매진한 지 일주일이 더 지났고-
“그, 그게 무슨 말이야?”
-결국 전격장을 습득하지 못한 채로, 가진 식재료가 다 떨어지고 말았다.
**
내가 조심스럽게 전한 소식에, 사신들은 말 그대로 세상이 끝난 것만 같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뭐라고……파스타를 더 이상 해줄 수 없다고?”
“갈비찜도 못 만들어 준다고?”
“떡볶이도 이제 못 먹는다고? 무슨 말이야?”
똑같은 얼굴과 똑같은 차림에도 개성이 확실한 사신들이지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었을 때의 반응은 다들 비슷했다.
사실 아직 식재료가 완전히 떨어진 건 아니다. 아직 여유 분량이 조금 남아 있지만, 거의 동나기 직전인 거다.
다 떨어지고 나서 말하는 것보다는, 아직 여유 분량이 남아 있을 때 말해두는 게 좋을 것 같아서 그런 건데.
“지, 진짜예요……? 진짜로 우리 이제 맛있는 거 못 먹는 거예요? 왜요?”
찐따 같은 성격의 17호 사신이 울먹이며 물었다. 나는 남은 식재료의 현황을 간단히 설명해주었다.
학습장치를 통해 습득한 지식 외에는 어린아이나 마찬가지인 사신들도, 숫자에 관한 계산은 무척 빠르다.
사신들은 남은 재료의 양을 듣자마자, 각자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을 몇 번이나 더 먹을 수 있을지를 바로 계산해냈다.
“야아, 농담이지? 그럼 이제 돈까스는 앞으로 열 개밖에 못 만든다는 거잖아?”
“이, 이거 진짜야? 내 피자는 아무리 많아도 세 개밖에 못 만드는데? 거짓말이지?”
뒤늦게 식사의 즐거움을 배워버린 사신들은 말 그대로 멘탈이 나가버렸다. 곧 사신들은 내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뭐, 뭔가 방법은 없는 거야? 나는 이제 핫도그 없이는 못 살아…제발, 방법이 있다고 말해줘.”
“재료만 구할 수 있다면야 당연히 더 해줄 수 있지. 근데, 그게 안 되잖아.”
“그러면 뭔가 대체 재료를 쓴다거나…아니면, 우리 나노슈트를 팔아서 재료를 사는 건 어때? 꽤 비쌀 텐데!”
고문을 하든 뭘 하든 입도 뻥끗 안 하겠다던 녀석들이, 자발적으로 극비 물품인 나노슈트를 팔겠단다.
내가 이렇게 만들어놓은 거긴 하지만, 너희 진짜 원래 임무는 이제 안중도 없구나. 그래도 되는 거냐.
“그런 거였군……우릴 중독시킨 뒤, 값비싼 식재료를 대가로 성적인 착취를 하려는 거였어!”
“넌 아직도 그 소리냐?”
“흥, 시치미 떼봤자 소용없다. 나는 네 음란한 속셈 정도는 훤히 들여다볼 수 있으니까!”
그 와중에 1호는 또 이상한 소리나 하고 있다. 얘는 진짜 학습 데이터에 야설이라도 들어 있었던 걸까.
어쨌든, 그렇게 상황을 전달하고 잠시 놔두었더니- 사신들은 저들끼리 쑥덕쑥덕 의견을 나누기 시작했다.
사실, 이제 전격장을 위해 이 녀석들에게 일부러 음식을 챙겨줄 필요는 없다.
전자발경의 기본 원리는 충분히 감을 잡았고, 공격을 더 맞아봤자 새롭게 깨달을 건 없다. 남은 건 연습의 영역이다.
그럼에도 내가 사신들과 계속 지내고 있는 이유는, 순전히 이 녀석들에게 요리를 해주는 게 즐겁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 나는 이 녀석들의 보스인 상원의원의 멱을 따러 가야 한다. 어차피 때가 되면 헤어질 사이라는 얘기다.
앞으로의 퀘스트에 특별한 방해가 되지 않는 한, 여기서 놓아달라고 하면 그냥 보내줄 생각도 있었다.
“좋은 생각이 있다.”
그런데 잠시 후, 회의를 마친 사신들은 정말 상상도 못한 소리를 꺼냈다.
“엘리시온 중추를 습격해서, 식재료를 약탈해 오는거다!”
너희들, 내 요리가 그 정도로 마음에 들었냐?
**
내 요리에 쓰이는 재료들은 딱히 이 사이버펑크 세계에서 구할 수 없는 것까지는 아니다.
다만 합성 식품이나 칼로리 스틱 같은 가공품이 아닌 식재료는 매우 귀하기에,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구할 수 없을 뿐.
그리고 내가 만들어주는 음식에 푹 빠져버린 사신들은, ‘일반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식재료를 구하는 것을 선택한 것이다.
“레드 그리드를 거쳐 화이트 존으로 가자. 거기선 밀가루도 고기도 다 유통되고 있어.”
화이트 존은 가장 안쪽의 ‘유토피아 시티’를 제외하면 가장 부유한 계층의 사람들이 사는, 이른바 ‘부자 동네’다.
그리고 이 사신들의 보스인 상원의원이 거주하고 있는 구역이기도 하다.
그런 곳을 습격해서 약탈하자니, 솔직히 내 입장에서는 나쁘지 않다. 오히려 편하고 좋은 동선이지.
그런데, 그레이 캐슬이 화이트 존을 공격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로 만들어진 암살병기들이- 이런 소리를 하다니.
“밥도 안 주고 일만 시키는 파파따위 알게 뭐야, 우리도 그냥 우리 마음대로 살 거다.”
“우, 우리한테는 파파가 내리는 명령만이 전부였어요……그치만 이젠 그렇지 않아요……!”
이건 최근에 알게 된 건데, 상원의원은 클론 사신들에게 자신을 ‘파파’라고 부르도록 했다고 한다.
그저 명령만을 수행하는 꼭두각시였음에도, 사신들은 그 호칭 그대로 상원의원을 아버지처럼 여겼던 모양이다.
아마 학습장치를 통해 어떤 부분에 조작을 가해서, 충성심을 가지도록 세뇌를 가한 것 아닐까 싶다.
“파파보다 떡볶이가 더 좋아. 그냥 네가 새 파파 해.”
그런데 그 세뇌가 고작 맛있는 식사 몇 번에 풀려버리다니, 높은 기술 수준에 걸맞지 않은 허술함에 한숨이 나온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렇게 이상한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욕망이야말로 사람의 의지를 가장 강하게 불태우는 불씨니까.
당장 나만 해도 그렇다. 엘레노어와의 내일이라는 단순한 욕망 하나를 붙잡고, 탑의 정상을 향해 달려가고 있지 않나.
암살병기로 키워졌다는 배경에도 불구하고, 각자 확실한 개성을 확립했을 만큼 강한 자아를 지닌 이 녀석들이라면.
맛있는 식사라는 단순한 욕망과 쾌감을 계기로, 극적인 변화를 맞이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겠지.
“그래, 니들 맘대로 해라.”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절대로 바뀌지 않는 것도 아니다. 나는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안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여기 이 사신들이 그런 것처럼, 세상의 그 누구도 다르지 않겠지.
그리고, 모두가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은- 이 시련의 탑 세계에서는 그렇게 좋은 일만은 아니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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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페이즈
엘프들에게 있어서 귀는 상당히 민감한 부위라고 들었다.
감각적으로 민감하다는 게 아니라, 정서적으로 민감한 부위라나. 함부로 건드리면 큰 실례가 된다고 한다.
실제로, 인간에게 매우 우호적이고 개방적인 다크엘프들도 만져지는 것을 조금 꺼리는 눈치였다.
엘레노어는 오히려 만져보라고 자꾸 들이대긴 했는데, 그건 걔가 변태라서 그런 것 같고.
그렇다면, 하이엘프 사이에서의 인식은 또 어떤가 하면- 예전에 봤던 커뮤니티 글로 쉽게 알 수 있다.
[작성자 : 박진호#1556]
[제목 : 이 씨발 개씹좆프새끼들 왜 지랄이냐]
(사진)
귀 한번 만진거가지고 존나 발작하네 미친새끼들
지금 며칠째 뭔 아동성폭행범 보는것마냥 꼴아보는데 어카냐?
귀 만지는게 그렇게 심각한 일이냐? 내 잘못임?
- 이건 좆좆좆좆을 고른 니 잘못이 맞다 ㅇㅇ
- 뭘 어떡해 너는 강간범이 뭐 하면 용서해줄거임?
- ㄴ이게 시발 강간이 나올 정도 일이라고?
- ㄴ아직 숲깐프새끼들 혐성맛을 덜봤네 ㅋㅋ
- 빵빵깐프 누님들도 귀는 함부로 못만지게하는거 모르냐?
- 근데 숲깐프 절벽년들 추행한거면 걍 아동성폭행이랑 똑같은거 아니냐?
- ㄴ숲깐프는 슬렌더야 씹련아
- ㄴ페도검거
- ㄴ‘어린이사랑꾼’입니다만?
커뮤니티에서 하이엘프의 귀는, 건드리는 순간 호감도가 바로 나락으로 떨어지는 버튼 취급이었다.
실제로 메르세데스도 내 공격에 귀가 살짝 베였을 때, 유난히 불편한 표정을 지었었지.
그리고 이 순간, 나는 그 귀를 아예 잘라내 버렸다.
-촤악!
귀는 완전 절단, 그리고 그 아래의 어깨에까지 칼날이 박혔다.
마력강화로 인한 방어능력 탓에 크리티컬이 터지는 치명상은 아니지만, 무시하지 못할 수준의 유효타.
하지만 타격을 넣은 직후, 메르세데스의 검이 빛살처럼 쏘아져 나를 덮쳤다.
-푹!
팔뚝에 이어서 오른쪽 가슴 근처를 꽤 깊이 찔렸다. 재빨리 발을 놀려 놈의 공격거리에서 벗어났다.
바로 추격이 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뜻밖에 그런 일은 없었다.
메르세데스는 잘려나간 귀를 한 손으로 붙잡은 채, 한껏 찡그린 표정으로 헐떡이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이를 악물었는지 턱이 부들부들 떨리고, 세게 쥐어 잡은 검손잡이가 절그럭거리며 흔들린다.
“이, 이, 이, 인간, 놈이……”
심지어 말까지 심하게 더듬고 있었다. 이제 와서 지구력 부족으로 헐떡이고 있는 건 아닐 거다.
개빡쳤네, 저거.
보통 이런 상황에서 개빡친 상대방이 보일 수 있는 패턴은 두 가지 정도가 있다.
첫째는 머리에 피가 쏠려서 사리분별도 못하고 무작정 덤벼드는 것.
나한테는 이게 가장 좋다. 이 잡템 세례를 이용한 빈틈 만들기도 슬슬 한계를 보이고 있으니까.
인벤토리의 용량은 끝이 없더라도, 인벤토리 안의 내 아이템에는 분명한 끝이 있다.
가장 유효한 장애물이 되어주는 [내구]풀강 갑옷들은 죄다 걸레짝이 되어버렸다.
기타 잡템들은 아예 다 박살 나서 회수도 못 하게 돼버린 것들이 많다.
게다가 [집광] 디코이에도 점점 적응하고 있으니, 여기서 슬슬 약해져 주지 않으면 곤란하다.
그리고 둘째는, 분노를 계기로 뭔가 각성을 하거나 숨겨둔 힘을 꺼내는 경우인데.
-쿠르르릉!
녀석의 몸에서 피어오르는 마력의 빛이 갑작스레 거칠어진 것을 보면, 아마 후자가 당첨인 모양이다.
이젠 하다 하다 3페이즈까지 있는 거냐.
**
중의적인 의미로 발광하기 시작한 메르세데스의 힘은 아주 강력했다.
“죽여주마, 죽여주마, 인간족 놈, 죽여주마아앗!”
-쾅! 콰앙! 콰광!
검격 한번 한번에 땅이 갈라지고 충격파가 터져 나온다. 주변에 널브러진 아이템들이 마구 조각난다.
속도와 근력 모두 조금 전보다 더 강력해졌고, 당연히 그 공격에 정면으로 노출된 나는 무사하기 힘들었다.
조금 전에 입은 상처를 회복할 틈도 없이, 몸에 자꾸만 상처가 늘어간다.
하지만 딱히 치명상은 입지 않았다.
“빗나갔죠? 안 맞죠?”
“이 자식, 죽인다!”
메르세데스가 열이 뻗칠 대로 뻗친 탓에, 침착함을 잃고 무식하게 덤비고 있기 때문이었다.
위력도 순발력도 올랐지만 정작 중요한 기술의 날카로움이 크게 줄었다.
창 기능사 최길현이 그랬던 것처럼, 아무리 스펙이 좋아도 공격 패턴이 단순하면 그냥 호구에 불과하다.
-콰과광!
물론 최길현이랑은 다르게, 이쪽은 무식하게 덤벼들어도 무시하기 힘들긴 하지만 말이다.
찌르기밖에 못하던 최길현과 비교하면, 눈에 뵈는 게 없는 상태로도 달인급 솜씨를 내고 있기도 하고.
“귀 하나 잘린 게 그렇게 빡쳐? 느그 왕자님 욕하는 것보다 그게 더 빡쳐? 흠, 이거 기사 탈락 아닌가?”
“이 역겨운 자식이, 그 저급한 혓바닥으로 기사의 자격을 논해!”
“흠, 역겨운 짓은 그쪽이 더 많이 하지 않았나? 허연 귀쟁이 새끼들은 내로남불이 패시브인가?”
그래서 일부러 부상을 입어 가면서도 속을 박박 긁어대고 있다. 녀석이 침착함을 되찾지 못하도록.
“인간족, 주제에, 감히……!”
하지만 아무리 봐도 점점 화가 가라앉아가고 있다. 반면에 내 몸에는 점점 상처가 늘어나고 있다.
잔여 HP는 대략 60%, 정타를 맞지 않은 상태로 이 정도까지 까였다는 건 심각한 거다.
크리티컬급 공격을 맞으면 한번에 반피 이상이 나가는 것도 가능하니까.
그나마 다행인 점은, 녀석의 몸 상태가 조금씩 나빠져 가는 게 보인다는 것이다.
마력강화의 출력을 억지로 끌어올린 대가와, 내가 아이템을 던져대며 살포한 독 때문이다.
나는 6층에서 얻을 수 있었던 일부 독 계열 포션을, 아이템 사이에 섞어서 주변에 계속 흩뿌리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뿌린 독은 당연히 효과가 강하지도 않고, 범위 안에 있는 나도 함께 피해를 입는다.
애초에 이런 식으로 쓰라고 있는 물건이 아니니까.
하지만 나는 레벨이나 스펙에 비해 비정상적인 수준의 내성 스킬을 갖고 있기에, 그 점은 괜찮다.
“허억……허억……”
이제는 분노가 아니라 상태가 나빠진 탓에 거친 숨을 뱉고 있는 메르세데스.
물론 여전히 표정도 일그러져 있어, 아직 완전히 이성을 찾은 것처럼 보이진 않는다.
“인간족 놈……가만두지 않겠다……!”
나는 직감했다. 지금이야말로 저 깐프년에게 결정타를 먹일 수 있는 타이밍임을.
이 이상 상태가 안 좋아지더라도, 녀석이 냉정함을 되찾으면 이기기 힘들 거다.
-타닥!
[혼신]스킬로 민첩을 증폭시키며, 검과 방패를 들고 정면으로 달려나간다.
메르세데스 역시 희번뜩한 눈빛으로 맞서 달려온다.
속도는 무시무시하지만, 이를 악물고 정면으로 달려드는 모습이 완전히 빈틈투성이다.
“흐읍!”
정확한 타이밍에 맞추어, 왼손의 방패를 전력으로 집어 던졌다.
갑작스럽게 날아든 방패에 대처하느라 몸의 중심이 크게 기울었다.
앞으로 한 발자국, 이 타이밍, 이건 무조건 적중한다.
그렇게 생각하며 검을 휘두른 순간, 무언가 내 가슴팍에 꽂혔다.
-푹!
“뭐.”
꽂혀들어온 것은, 닿을 리 없는 거리에 있던 유백색의 아름다운 칼날.
“이번에는 네가 속았구나, 인간족.”
메르세데스가 검을 집어던졌다.
**
중간부터 이미 냉정함을 되찾고, 화를 내는 척하고 있었던 건가.
이 타이밍에 페이크를 걸고 투척 따위를 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특히 저 하이엘프의 성격으로.
“씨이, 발……이럴 거면서 아까는 잘도, 비겁하다고, 지랄을……!”
“아까 들은 말을 그대로 돌려주마, 네놈에 비하면 별것도 아닐 텐데?”
“이 개씹좆프 새끼들, 인성 하고는……”
휘청이는 내 몸에서 메르세데스의 검이 뽑혀나갔다. 피가 주르륵 흐르며 눈앞이 어지러워졌다.
다 이겼다고 생각해서 너무 방심하고 있었던 걸까. 남 말 할 처지가 아니었네.
“남길 말은 그게 전부인가? 보나 마나 항복을 입에 담을 것 같지는 않은데.”
당연한 소리를 한다. 이 상황까지 와서 누가 항복을 할 수 있겠어.
-츠츠츠……
메르세데스의 몸에서 마력강화의 빛이 줄어들어 간다. 한계에 도달한 모양이다.
하지만 중상을 입고 HP도 절반 이하로 내려간 나에 비해, 아직 여력이 남아 있는 분위기다.
마력강화가 꺼진 상태로도 나보다 스펙이 높을 테니, 당연한 일이겠지만.
-스릉.
반쯤 죽어가는 나를 마무리짓기 위해, 메르세데스의 검이 높이 들어 올려진다.
“인간족 치고는 제법이었다. 잘 가라.”
만신창이가 된 내 몸으로는 여유롭게 내리쳐지는 검을 피할 방법이-
“뭐래, 병신이.”
-존나게 많았다.
-촤악!
어렵지 않게 검을 피해내고, 카운터로 녀석의 팔을 베어버렸다. 피가 분수처럼 튀었다.
“커, 억……네놈, 어떻게, 그 상태로……”
“상태가 뭐 어쨌다고, 귀쟁이 년아.”
뻐억,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떠듬거리는 메르세데스의 명치를 걷어차 날려버렸다.
확실히 상태가 안 좋긴 하다. 출혈이 심해서 눈앞이 살짝 어지럽고, 몸도 성한 곳이 별로 없다.
근데 이 새끼야, 내 전투 지속 레벨이 몇이게?
보통이라면 움직일 수 없을 정도의 상처를 입고도, 나는 전투를 계속 이어나갈 수 있다.
“커헉, 끅, 이놈, 뭐냐, 이 힘은……대체……”
내 발길질에 정통으로 얻어맞은 메르세데스가 이어서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내 근력이 조금 전보다 더 강해진 것에 의문을 느낀 모양이다. 거 궁금한 것도 많지.
별 거 아니다, 이건 1층 클리어 보상으로 얻은 어떤 스킬의 효과다.
HP가 일정 수치 이하로 떨어지면 모든 스탯이 상승하는 패시브 스킬, 불굴.
공격력과 방어력까지 별개로 올라가진 않지만, 모든 스탯이 상승한다는 점에서 마력강화와 비슷하다.
하지만 그걸 구구절절이 설명해 줄 생각은 없다.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애초에, 뭘 모른다는 듯 물어보고 앉았냐. 니들도 이런 거 많이 하잖아?
“뭐긴 뭐야, 반피 까였잖아.”
온 힘을 쏟아부어 반죽음으로 만들어 놨더니, 난데없이 숨겨둔 힘을 꺼내서 파워업하는 거.
“이제부터 2페이즈다.”
이렇게 나는 결투에서 승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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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 정면돌파
엘리시온의 도시 구획은 크게 넷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가장 바깥에 위치한 외곽지역이자 내가 머무르고 있는 그레이 캐슬. 온갖 범죄가 들끓는 회색 지대.
둘째, 그 안쪽의 컬러 그리드. 레드부터 퍼플까지 일곱 개의 구역으로 세분화되어 있는 최대 크기의 거주 구역.
셋째, 엘리시온의 심장부이자 수도 역할을 하는 화이트 존. 온갖 행정 시설과 대형 기업이 밀집되어 있는 도시.
마지막 넷째, 도시 한가운데에 자리하고 있으면서도 외부와 단절된 정체불명의 낙원, 유토피아 시티.
퀘스트의 최종 목표인 상원의원도, 사신들이 노리는 식재료도, 모두 화이트 존 안에 존재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다음 층으로 올라가기 위한 미궁 지역도 화이트 존에 위치해 있다.
정확하게는 화이트 존의 지하- 버려진 휴머노이드와 드론들이 방황하고 있는 ‘블랙 존’이 23층의 미궁 지역이다.
23층 미궁의 보스는 오래전 버려진 인공지능이 스스로 개조를 거듭한 끝에 탄생했다는, 일명 ‘키메라 드론’ 이라는 녀석.
하지만 이 23층의 진짜 보스는 사실 그 키메라 드론이 아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진짜 난관은 따로 있다고 해야 하나.
엘리시온에서 가장 중요한 지역으로서, 화이트 존에 갖춰진 막대한 경비 병력이야말로 23층의 진정한 보스.
보스인 키메라 드론의 공략보다, 그 경비 병력을 뚫고 블랙 존까지 진입하는 것이 훨씬 더 어렵다는 것 같다.
하나하나가 네임드 개체 수준으로 강력한 경비병력이 무한에 가깝게 보충되는 탓에, 전투로 뚫는 것은 거의 불가능.
현재는 여러 스킬을 활용해 무력충돌을 피하며 잠입하는 방식의 진행이 정석 공략법으로 자리 잡혀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런 화이트 존으로 스무 명이 넘는 사신들을 이끌고 침입하는 것은- 과연 얼마나 힘들 것인가.
잘 모르겠지만, 일단 레드 그리드를 통과하며 짐작한 바로는- 생각보다 훨씬 쉬울지도 모르겠다.
“이거 존나 사기잖아.”
사신들은 나노슈트에 장착된 ‘은폐장’이라는 모드를 사용해, 완벽에 가까운 투명화가 가능하다.
거기에 은폐장은 단순히 모습을 감추는 것뿐만이 아니라, 가동 중에 발생하는 모든 소음을 제로로 만들어 준다.
뿐만 아니라, 적외선 탐지기나 굴절 감지기등의 각종 보안장치까지 완벽하게 무시할 수 있기까지 하다.
아무리 화이트 존의 경비가 삼엄하더라도, 사신들의 은폐장 앞에서는 정말 아무런 의미가 없는 거다.
물론 나도 완벽하지는 않지만, [암영]스킬을 사용하면 이 정도의 보안장치는 무시하고 이동할 수 있고.
“당연하지, 은폐장은 13레벨 특수 모드야. 대부분의 감시체계에는 절대 걸리지 않지.”
“마, 맞아요, 최상급 군사용 감시체계로도 은폐장은 잡아낼 수 없어요……”
“거꾸로 묻고 싶은데, 그러는 너는 어떻게 은폐장을 쓰고 있는 우리를 감지한 거야?”
손쉽게 도달한 화이트 존의 입구를 앞에 두고, 귀에 끼운 통신기를 통해 사신들의 물음이 전해져 왔다.
그런데 어떻게 감지한 거냐고 물어봐도, 마력감지로 잡아낸 것도 아니라서- 딱히 할 말이 없네.
“어……직감?”
“으, 괴물.”
그래서 대충 대답했더니, 3호 사신이 징그럽다는 듯이 그렇게 말을 흘렸다. 뭐 어쩌라고.
“그래도 괴물 뮤턴트가 같은 편이니까 든든하네, 바로 파파한테 가는 거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식재료 확보를 위한 약탈 여정이지만, 우리의 첫 목표물은 상원의원이다.
말해두는데, 이건 절대 내가 설정한 목표가 아니다. 무려 여기 이 사신들이 먼저 제안한 것이다.
“파파의 벙커만 털어도 돈가스를 백 번은 먹을 수 있을 거야!”
녀석들의 파파- 상원의원의 벙커에 대량의 식료품이 저장된 창고가 있다는 황당한 이유로.
세상에 이렇게까지 해로운 식충이들은 달리 없을 거다.
**
예상대로, 화이트 존의 입구에 존재하는 경비 로봇은 우리의 은신을 감지할 수 없었다.
공항 검색대 비스름한 보안 게이트도 아무렇지 않게 통과해 버리고, 손쉽게 화이트 존에 입성할 수 있었다.
화이트 존의 도시는 그레이 캐슬은 물론이요, 레드 그리드와도 무척 다른 분위기를 띠고 있었다.
지나온 두 구역이 정석 사이버펑크에 가까운 느낌이었다면, 여기는 좀 더 미래적 분위기가 난다고 해야 하나.
사이버펑크라기보다는 정통 SF에서 묘사되는 도시에 더 가까운 느낌이다. 물론 실상은 그렇지 않지만.
“겉보기만 번드르르하구만.”
광역으로 마력감지를 돌려 보니, 이 화이트 존은 정말 겉만 그럴듯하게 꾸며 놓은 환락의 도시였다.
고급 사교클럽처럼 꾸며놓은 건물 안에서는 매춘이, 오페라 하우스처럼 생긴 극장에서는 천박한 공연이 펼쳐지고 있다.
저기 보이는 대형 백화점 건물은 몇 개의 층이 통째로 성인용품만 팔고 있는데다가, 지하는 어휴, 장난이 아니네.
저런 건물들이 공공기관이랑 당당하게 등을 맞대고 우뚝 솟아 있다는 사실에 인지부조화가 올 지경이다.
“파파의 벙커는 이쪽이야, 어서 가자.”
나는 4호 사신의 안내를 따라 도시 안쪽으로 이동했다. 벙커로 향하는 길은 상당히 복잡한 루트였다.
사신들의 말에 따르면, 상원의원은 강박에 가까울 만큼 안전에 예민하게 군다고 한다.
그래서 화이트 존 안에서도 쉽게 찾아가기 힘든 장소에 벙커를 지어 놓고, 그걸 집무실로 쓰고 있다나.
“다 왔어, 저기가 입구야.”
이렇게 도착해 보니 확실히 그런 것 같았다. 상원의원의 벙커는 말 그대로 빌딩 숲 사이의 요새였다.
그리고, 벙커 입구를 지키는 경비로봇의 숫자만 해도 마흔 대가 넘는다. 아니, 저게 경비 로봇은 맞는 건가.
시커먼 동체에 어마어마한 크기의 화기가 다닥다닥 붙어 있고, 무슨 레이저 터렛 같은 것도 장치되어 있다.
뭔, 경비 로봇이 아니라 군사용 대량살상병기처럼 생겨먹었네.
사신의 은폐장은 저것들도 거의 다 무시할 수 있지만, 첨단 기술이 아닌 [암영]스킬로는 여기까지가 한계다.
[암영]은 분명 훌륭한 은신 스킬이지만, 은폐장처럼 모든 흔적을 깨끗이 지울 수 있는 건 아니라서 말이지.
“그, 그럼 저희는 작전대로 뒷문으로 갈 건데요, 어쩌실 거예요?”
사신들은 은폐장을 믿고 뒷문으로 침입해, 안쪽의 보안 설비를 무력화하고 이동한다는 작전을 짜둔 상태다.
은폐장을 쓸 수 없는 나는 다른 방식으로 침입해야만 하는데, 어떻게 침입할 예정인지는 아직 설명해 주지 않았다.
왜냐하면, 사실 아무 계획도 없었거든. 슬금슬금 잠입하는 건 내 성미에 맞지 않아서 말이야.
“나는 정문으로 간다.”
당당하게 정문으로 뚫고 들어가서, 상원의원의 목을 따고, 다시 정문으로 돌아 나온다.
말로 하니까 좀 이상하게 들리지만, 그냥 늘 하던 대로 하는 거다.
**
-애애애애애애앵!!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울리며, 새까만 동체에 중화기를 붙인 경비로봇들이 일제히 대열을 갖춘다.
사신들을 뒷문으로 보낸 후, [암영]스킬을 풀고 로봇 한 대를 작살냈더니 바로 이 모양이다.
보통 이런 상황이라면 침입자를 향한 경고 한 번쯤은 날려줄 만도 한데, 이놈들은 그런 것도 없었다.
-투두두두두두!!
다짜고짜 쏘아지는 총탄의 세례, 나는 큼직한 방패 하나를 내세워 마력을 두르고 그대로 전진했다.
대단한 기교를 부릴 것도 없었다. 그대로 대열을 갖춘 로봇들을 들이받는 것만으로 전열은 손쉽게 무너졌다.
안쪽으로 파고들어 장검과 도끼를 휘둘러 새까만 로봇들을 차례차례 토막 내자, 삐삐거리는 비프음이 울린다.
다음 순간, 벙커 입구의 바닥 부분이 열리며 회색 동체의 인간형 로봇들이 무기를 들고 나타났다.
“저거 본 적 있는데.”
오픈 커뮤니티에 올라와 있는 23층 주요 몬스터 일람에 기록되어 있는 로봇이었다.
이름이 뭐더라, 아무튼 무슨 군용 휴머노이드라고 들었는데- 왜 개인 벙커에 군용 병기가 저렇게 많은 건데.
어쨌든 병력이 잔뜩 동원되는 건 나쁘지 않다. 나한테 어그로가 끌릴수록 사신들은 더 편하게 움직일 수 있겠지.
무엇보다 나는 아직 사신 외의 제대로 된 23층의 몬스터와 싸워 본 적이 없다. 갱단원들은 허수아비 같은 거고.
보스전보다 더 어렵다는 경비로봇의 물량공세를 나는 어디까지 감당할 수 있을까, 그것도 궁금한 참이었고.
[13등급 적대 행위를 감지하였습니다. 적성 대상 1체를 확인하였습니다. 제거 절차를 시작합니다.]
일단 총부터 쏴갈기고 적대행위를 탐지했다고 지껄이는 병신같은 로봇의 말을 들으며, 몸에 마력을 둘렀다.
[라이트닝 차지]
[대전]
[약점 간파]
실전 상황이라면 전격장의 연습도 더 잘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라이트닝 차지]까지 발동한 순간.
[적성 대상의 15등급 이상 에너지 방출을 확인했습니다. 제거를 위해 추가 병력 지원을 요청합니다.]
벙커의 문이 열리며, 보다 요란하고 괴상한 외형을 지닌 로봇과 다수의 드론들이 추가로 배치되었다.
내 [라이트닝 차지]를 감지하고 숫자를 늘린 모양인데, 그럼 이러면 어떻게 되는 거지.
-쿠르릉!
나는 마력강화를 발동해, [라이트닝 차지]로 방출되는 전력의 기세를 더 높였다.
어디, 나를 막으려면 군대를 끌고 와야 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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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 종이호랑이
23층 세계는 프레임이나 모드의 등급을 숫자를 붙여서 나눈다.
정확한 기준은 잘 모르겠는데, 아마 10등급 이상부터는 개인이 소유하는 게 완전히 금지된 수준이라던가.
그리고 이곳의 경비 시스템은 내가 방출한 [라이트닝 차지]의 위력을 15등급 수준이라고 칭했다.
그러면 마력강화를 통해 더 강한 에너지를 방출하면 몇 등급쯤 될까 싶어서, 한번 해 본 건데.
[18등급 고에너지 반응을 확인했습니다. 기용 가능한 전 병력을 동원하여, 적성 개체를 말살합니다.]
사신들이 사용하는 은폐장이 13등급의 장비라고 했으니까, 그것보다 다섯 단계는 높은 셈인가.
곧 벙커의 문이 열리며 온갖 거대한 병기와 로봇들이 우르르 튀어나왔다. 숫자는 얼핏 봐도 백이 넘는다.
그러고보니, 일대다수의 싸움은 익숙하지만 백이 넘는 상대와 동시에 교전하는 건 오랜만이다.
“리펄스 에너지 사출.”
가장 먼저 나선 것은 대충 3m쯤 되어보이는 사이즈의 인간형 로봇, 놈의 어깨에서 대포 같은 것이 쏘아졌다.
-위이잉! 콰르릉!
공명음과 함께 쏘아진 것은 백색의 에너지, 나는 방패를 들어올렸지만- 그대로 쭉 밀려 나갔다.
리펄스 에너지라는 이름도 그렇고, 밀어내는 것에 특화된 무기인가. 근력이랑 상관없이 쭉쭉 밀리는군.
하지만 단순히 밀어낼 뿐이라면 나도 똑같은 짓을 할 수 있다. [천의 마술]의 힘을 빌려 마법진을 그린다.
“리플렉터.”
시전한 마법은 청색 마탑주가 내주었던 마법서에 기록되어 있는, 가장 기본적인 방어 마법 중 하나.
효과는 단순하게 약한 수준의 물리공격을 튕겨내는 것뿐. 하지만 일단 마력을 잔뜩 때려넣어 성능을 올린다.
-지익……!
끝도 없이 밀려나던 발이 멈춘다. 방패 위에 덧씌운 리플렉터 마법이 리펄스 에너지를 튕겨내기 시작한 거다.
물론 튕겨낸다고 해봤자, 그렇게 대단한 수준은 또 아니다. 마력을 아무리 넣어봤자 근본은 기본 방어 마법.
하지만 그 정도면 충분하다. 아주 약간만 튕겨낼 수 있으면, 나머지는 그냥 완력으로 밀어붙이면 그만.
“흡!”
백색의 에너지를 그대로 밀어내며 다시 앞으로 전진, 그대로 덩치 큰 로봇에게 접근해 방패를 휘둘렀다.
와그작, 로봇의 동체가 과자처럼 손쉽게 바스러졌다. 동시에 다른 로봇들이 나를 무기로 겨누었다.
바람 마법을 연상시키는 공기의 탄환, 이글거리는 화염 세례, 파직거리는 전격의 파동.
나는 그것들을 전부 무시하고 달려들어, 로봇의 머리통에 차례차례 [대전]을 통해 전류를 밀어 넣었다.
-콰지직!
조금 기대했건만, 아무래도 전자발경 같은 걸 사용할 수 있는 사이보그는 이 자리에 없는 모양이다.
뭔가 장치가 되어 있는지, 내가 흘려 넣은 전류를 차단하는 것까지는 가능하지만- 반격할 줄은 모르는 것 같고.
백이 넘는 숫자의 로봇과 드론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일격마다 몇 대의 로봇이 박살 나고 있는 형편이니.
[분당 아군 병력 손실이 기준치의 12.6배를 초과하였습니다.]
[완전 제압까지 필요한 자원 계산을 시행합니다. 완료.]
[전력의 272%를 투입할 시 제압이 가능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순식간에 절반가량이 쓸려나가고 나니, 공중에 떠 있던 드론들이 윙윙거리며 뭔가 말하기 시작했다.
협상 시퀀스를 개시한다느니 어쩌느니 떠들던 드론들은 곧 ‘마스터’에게 통신을 연결한다고 말했다.
마스터라는 건 아마 상원의원이겠지, 물론 나는 딱히 놈이랑 대화하러 온 게 아니다.
[병력손실률이 52%라고? 이것들이 이런 미친 짓을……당장 그만두지 못하겠어!]
그렇기에, 연결된 통신을 거친 목소리는 무척 다급하게 들렸다.
**
손목에 찬 스마트워치에 사신들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아무래도 꽤 깊숙한 곳까지 잘 침투한 모양이다. 병력 대부분이 내 쪽으로 몰렸으니,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건방진 놈… 네가 누구인지 알고 있다. 이번에 그레이 캐슬의 갱단을 통합했다는 그 뮤턴트겠지?]
‘당장 멈추라’며 다급하게 외치던 상원의원의 목소리는, 공격을 멈춰준 잠깐 사이에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나저나- 나를 어떻게 알고 있나 싶었는데, 그렇게 사신을 잔뜩 보냈으니 모를 수가 없었겠군.
말투를 보아하니, 마치 내가 쳐들어올 걸 미리 알고 있었던 것처럼 들린다.
그냥 허세인지, 아니면 진짜로 예상하고 있었던 건지, 그것까지는 모르겠다.
[외부 카메라가 망가져 상황을 직접 볼 수 없다는 게 아쉬울 지경이다. 겁도 없이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
나는 잠시 고민했다. 이걸 대답해줘야 하나 싶어서. 애초에 대답하면 저쪽에서 제대로 들을 수는 있는 건가?
[화이트 존까지 침입해 엘리시온의 상원의원을 공격하다니, 네놈은 지금 엘리시온에 전쟁을 선포한 거다!]
“전쟁?”
[드디어 입을 여는군. 그레이 캐슬의 쓰레기라도, 엘리시온과 전쟁을 벌인다는 의미쯤은 아는 모양이지?]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내 목소리는 제대로 전달되고 있는 것 같은데- 이 새끼는 도대체 뭔 자신감으로 지껄이는 거야?
[나는 네놈을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 지난 일주일간은 네놈이 어떤 연구실에서 만들어졌는지만 조사하고 있었지.]
뭔가 인식이 심하게 어긋나 있는 것 같지만, 일단은 들어보기로 했다. 상원의원은 곧 폭풍처럼 말을 쏟아냈다.
[왜인지 아나? 아무런 모드도, 프레임도 착용하지 않은 뮤턴트가 그런 힘을 보인 전례는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단순한 무력이라면 유사한 개체가 전혀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것들은 모두 이성을 잃은 괴물에 불과했지.]
[하지만 네놈은 뮤턴트로서 그만한 힘을 가졌음에도 온전한 이성을 유지하고 있다. 그 연구 가치는 실로 대단해.]
나는 금방 상원의원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눈치챌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런 배경 설정이 있었지.
돈 많은 갑부들은 몸에 모드와 프레임을 이식하는 것을 저급하게 여긴다고 했던가.
기계를 이식하지 않고 가능한 한 내추럴의 상태를 유지한 채, 시술을 통해 수명을 늘리는 것을 선호한다고.
[그래서, 가능한 한 온건한 방법으로 포획하고 싶었던 건데……]
이어서, 상원의원은 전형적인 말 많은 악당처럼 주절주절 자신이 세웠던 계획을 떠들기 시작했다.
내용은 딱히 들을 가치도 없었다. 당분간 나를 그레이 캐슬에 잘 박아두고, 잘 관찰할 생각이었다나 뭐라나.
지성 있는 강력한 뮤턴트인 나를 베이스로 천천히 연구해, 영생을 이루는 것을 꿈꿨다는 것 같다.
[그걸, 네놈의 멍청한 행동으로 모두 그르치게 된 거다.]
하지만, 이 녀석은 대체 뭘 근거로 나를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한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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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원의원은 암살을 위해 내보낸 사신들이 하나둘씩 당한 것을 계기로, 나를 연구하고자 마음먹었다고 한다.
당분간은 천천히 관찰과 감시만 하다가, 연구시설이 완성되면 나를 포획해 써먹을 생각이었다는데.
소유하고 있는 벙커의 대규모 병력도 이렇게 쓸려나가는 마당에, 무슨 수단으로 나를 포획하려고 했던 걸까.
그 의문은 이어진 상원의원의 말을 통해 금방 해결할 수 있었다. 어이없는 착각을 했을 뿐이라고.
[인형 녀석들의 나노슈트를 빼앗아 써먹은 거겠지, 거기에 그레이 캐슬의 버러지들을 죄다 끌고 왔을 테고.]
상원의원은 내가 사신에게서 빼앗은 장비와 갱단원들을 이끌고 총공세에 나선 것으로 생각한 거다.
[하지만 엘리시온의 시스템은 결코 너희 같은 쓰레기들이 설치게 두지 않는다. 네게 다음은 없어.]
[당장은 숫자로 밀어붙여 이길 수 있을지 몰라도, 화이트 존의 진짜 군대는 이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이미 위험을 감지한 AI가 군을 호출했다. SIFT의 15레벨 전투병력 3,000기가 이곳을 향해 오고 있지.]
[네 패거리는 깨끗이 청소되고, 고등급 뮤턴트인 네놈은 규정에 따라 DNA 한 조각 남기지 못하고 소각될 거다.]
카메라가 망가져 상황을 직접 못 보고 있었기에, 내가 갱단원들을 내세워 숫자로 밀어붙인 거라고 착각한 거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인가. 나는 이 세계의 일반적인 상식을 벗어나 있는 존재니까.
시련의 탑 도전자들이 내 강함을 제대로 추측하지 못하듯이, 상원의원 역시 궤를 벗어난 적을 상상하지 못했다.
압도적인 무력 앞에서는 종이호랑이나 다름없는 시스템 하나만을 믿고, 혼자서 현실과는 거리가 먼 결론을 내린 거다.
[차라리 소수로 난동을 부렸을 뿐이라면, 적당한 병력으로 덤벼온 거라면, 무마해 줄 수 있었겠지만……너희는 선을 넘었다.]
심지어 말하는 꼴을 보니, 사신들의 배신은 아예 상상도 못 하고 있는 것 같고.
아마 그 허접한 세뇌를 믿고 있는 거겠지, 설마 사신들이 음식에 낚여 반역을 저지를 줄 예상이나 했겠어?
[패거리 중 15레벨 급의 병력은 얼마나 있지? 끌고 온 패거리는 몇이나 있나? 기껏해야 떨거지들 오백 정도겠지?]
오백도 많이 쳐줬다는 듯 말하는 상원의원의 목소리를 재생하고 있는 드론을 향해, 나는 대답해 주었다.
“아니, 나 혼자다.”
그로부터 40분 후, 나는 출동한 15레벨 전투병력 3,000기를 완파하고 상원의원의 벙커에 침입했다.
압도적으로 강력한 개인 앞에서, 숫자만 거창할 뿐인 집단은 아무 의미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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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 도시의 질서
상원의원의 벙커 안은 매우 복잡한 구조로 되어 있었다.
마치 방송국처럼, 침입자가 쉽게 장악하지 못하도록 계단을 비롯한 구조물들이 이리저리 흩어져 있는 방식.
거기에 쓸데없는 기둥과 각종 보안장치가 달린 장애물들이 이곳저곳에 배치되어 있어, 거의 미궁 지역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마력감지를 광역으로 펼치면 모두 해결될 문제다. 나는 포션 하나를 들이키며 천천히 마력을 일으켰다.
“재생이 묘하게 늦네, 방사능이라도 맞은 건가.”
마력을 일으키며, 재생하는 상처를 바라보았다. 3천이나 되는 병력이 상대였으니, 부상이 아예 없을 수는 없었다.
레일건을 쏘는 탱크에, 플라즈마를 뿜어내는 폭탄에, 온갖 사이보그 병사와 강력한 무인 드론들까지.
상원의원은 15레벨 전투병력이라고 했지만, 드문드문 놈들이 하는 말을 들어보니 그 이상의 병력도 섞여 있던 것 같다.
듣도보도 못한 해괴한 무기들로 쉴 새 없이 몰아붙이니, 나라고 해도 나름대로 소모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뭐, 그래 봤자 [초재생]으로 감당할 수 있는 범위 안쪽이고- 무엇보다 소모값만큼의 이득도 얻어냈다.
[종합 원소 내성 Lv.13]
다른 계층에서는 맞아볼 수 없는 다양한 공격을 맞아본 결과, [종합 원소 내성]스킬의 레벨이 올랐다.
그밖에도 꾸준히 사용한 [라이트닝 차지]의 레벨도 하나 올라서, 이제는 30레벨을 달성한 상태.
거기에 사이보그 병사 몇 놈과 싸우면서 전자발경의 감각에도 조금 더 가까워진 상태다.
“아, 찾았다.”
광역으로 전개한 마력감지가 시설 내부를 완벽하게 파악하고, 상원의원의 위치를 잡아내었다.
그리고 사신들의 위치 역시 마찬가지로 확인됐다. 뭐, 이쪽은 스마트워치를 통해 이미 확인한 상태였지만.
현재 사신들은 바깥 병력을 정리했다는 내 통신을 받고, 신나게 벙커의 식품창고를 터는 중이다.
답장으로 돌아온 통신의 내용을 보면 상당히 들떠 있는 것 같다. 나도 메시지를 하나 보냈다.
[상원의원 모가지만 따고 금방 갈 테니까 천천히 챙기고 있어.]
원래는 사신들이랑 양동으로 펼칠 계획이 있었지만, 이렇게 된 김에 상원의원은 혼자서 처리할 셈이다.
사신들을 처분하기 위한 킬스위치 같은 게 있을 가능성도 있으니까, 내가 깔끔하게 죽여두는 게 훨씬 낫겠지.
그런데, 상원의원은 얼마나 강하려나. 따지고 보면 그놈이 이 퀘스트의 최종보스인 셈인데.
엘리시온의 고위층은 모드를 착용하지 않고 내추럴로 사는 걸 선호하기에, 아예 전투능력이 없을 가능성도 있다.
뮤턴트 연구에 흥미를 갖고 있었으니, 뭔가 신체개조를 했을 수도 있고- 아니면 따로 호위가 있을 수도 있고.
그래봤자 23층이고, 그래봤자 일반 퀘스트니까, 대단한 걸 기대하기는 어렵겠지만.
“목 닦고 기다려라.”
나는 상원의원에게 들리도록 일부러 소리내어 그렇게 말한 뒤, 이동을 개시했다.
**
장애물을 깨부수며 최단거리로 도착한 상원의원의 집무실.
벙커 내에서도 가장 엄중한 보안을 자랑하는 그 방의 문짝은 거의 암반 수준의 두께를 가진 벽으로 가로막혀 있었다.
목 닦고 기다리랬더니 문을 걸어잠그고 농성하기를 택한 것 같다. 이딴 거 나한테는 아무 의미도 없는데.
-스릉.
다크엘프제의 검 한 자루를 꺼내 들고, 그 위로 마력을 쏟아붓고 집중시켜 얇은 오러를 둘렀다.
양 손의 마력회로 손실로 예전처럼 자유자재로 오러를 사용할 수는 없지만, 아예 못 쓰는 것도 아니다.
그냥 평소보다 좀 더 시간을 들이고, 평소보다 좀 더 마력을 들이면 이 정도 수준의 오러는 충분히 만들 수 있다.
그리고 아무리 얇고 가늘더라도 오러는 오러, 어지간한 물질은 모두 종잇장처럼 베어가를 수 있다.
-서걱.
강화금속으로 만들어진 두꺼운 벽을 느긋하게 잘라내자, 호화롭게 꾸며진 내부가 드러났다.
사이버펑크 세계라고는 믿기지 않는 화려한 가구에, 여러 최첨단 기계가 어우러진 모습이 참 오묘했다.
전혀 다른 시대의 건축물 두 개를 억지로 합쳐놓은 느낌, 그리고 그 중앙에는 상원의원이 우뚝 서 있었다.
근데 저 텔레토비 같은 옷은 또 뭐야.
상원의원은 우주복 비스무레한 슈트를 걸치고 있었다. 호신용으로 착용한 강화복 같은 건가.
“정말로…정말로 혼자인 건가…대체 어디서 이런 괴물이……”
상원의원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자기 눈으로 직접 보지 않고는 믿을 수 없었던 건가.
“설마 중앙 관리국이 숨겨놓은 비밀 병기인가, 아니면 유토피아 시티에서 흘러나오기라도 한 건가……?”
혼잣말인지 질문인지 모르겠다. 나는 담담하게 검을 들어 올렸다. 상원의원은 주춤했다.
“나, 나를 죽여서 어쩔 셈이지? 엘리시온의 상원의원을 살해하면 네놈만 고달파질 텐데?”
“아까도 그 비슷한 소리 하지 않았냐?”
“아직은, 아직은 돌이킬 방법이 있다. 상원의원인 내가 비호하고 나서면 오늘 일은 덮을 수 있어……!”
요란한 슈트를 입고 있지만, 회유책을 들고 나온 걸 보니 딱히 전투력에는 자신이 없는 모양.
“상원의원 살해는 반역죄나 다름없다. 나를 죽이면 네놈은 평생 크레딧이라고는 써보지도 못할 것이며……”
상원의원은 자신을 죽일 경우 일어날 일을 상세하게 예시를 들어가며 설명했다. 내게는 우스울 따름이었다.
엘리시온 경찰과 군대의 추격, 크레딧을 포함한 모든 전자계좌의 정지, 넷필드는 물론이요 모든 장치를 이용할 수 없을 거라는 등.
녀석은 여전히 나를 엘리시온 사회라는 틀 안에서 바라보고 있었다. 이곳의 주민이 아닌 내겐 아무 의미가 없는 일인데.
뭐, 그나마 들이밀 수 있는 거라곤 그런 것들뿐이겠지. 무력으로 이길 수 없으니 일상을 인질로 잡으려는 것이다.
문득, 오픈 커뮤니티에 올라온 페스티벌과 관련된 여러 공지들이 떠올랐다.
지키지 않으면 대형 길드에 의해 불이익을 받게 될 것이라는, 솔플러인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규칙들.
압도적인 무력을 가지고 다른 세계에서 넘어온 강자에겐, 어떤 경고와 위협도 종이호랑이와 같다.
딱히 그러겠다는 건 아니지만, 나는 이곳에서 했던 것과 똑같은 짓을 그곳에서도 할 수 있다.
“난 그딴 거 써본 적도 없어, 등신아.”
시련의 탑의 랭커들은, 억제할 수 없는 강력한 개인이 나타난다면- 과연 어떻게 대처할까?
페스티벌과 토너먼트라는 큰 행사를 앞두고, 머릿속에는 묘한 생각이 계속 맴돈다.
**
상원의원이 입은 슈트는 여기 기준으로 17레벨에 해당하는 전투병기였다.
사신들이 입는 나노슈트보다 급이 높은 물건인데, 확실히 그에 걸맞은 방어력과 공격력을 갖추고 있었다.
이렇게 과거형으로 말하는 것만 봐도 알겠지만, 결국 나한테는 별 의미가 없었다. 상원의원은 쓰러졌다.
“끄헉, 흐억, 허억, 숨이……숨이, 으윽.”
별 대단한 공격을 한 것도 아니다. 그냥 슈트를 박살 내며 명치를 한 대 때려줬을 뿐, 그걸로 이런 꼴이다.
“야, 뭐 하나만 물어보자. 대답 잘하면 살려줄 수도 있어.”
완전히 제압된 상원의원의 머리채를 잡고, 나는 23층의 배경 설정을 들은 이후 쭉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유토피아 시티는 뭐 하는 곳이냐.”
화이트 존보다 더 깊숙한 엘리시온의 최심부에 존재하는 정체불명의 낙원, 나는 계속 그 장소의 정체가 궁금했다.
엄중한 경비 때문에 도전자 중에서도 들어가 본 사람이 없고, 심지어 엘리시온의 주민들도 제대로 아는 것이 없다.
대놓고 히든 요소라는 느낌을 물씬 풍기는 장소 아닌가. 상원의원쯤 되는 녀석이라면 뭔가 알고 있지 않을까.
나는 가쁘게 호흡하는 상원의원에게 포션 하나를 먹이고, 대답을 기다렸다.
“유토피아 시티는……낙원이다, 그것 말고는, 나도 모른다.”
“모른다고?”
“저, 정말이다. 이 엘리시온의 누구도 그곳에 대해 알지 못해.”
이상한 이야기였다. 유토피아 시티야말로 엘리시온의 가장 중요한 곳이자, 중심이 되는 장소 아닌가.
그런 곳에 대해서, 엘리시온을 지배하는 상원의원이라는 작자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인상을 찌푸리며 다시금 묻자, 상원의원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모를 수밖에 없는 이야기라고.
“당연한 거다, 유토피아 시티는 엘리시온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도시다! 누구도 그 안쪽을 본 적이 없어!”
황당한 이야기였으나, 상원의원은 재빨리 뒷말을 덧붙였다. 이어진 것은 간략한 역사 이야기였다.
“엘리시온은 닫힌 낙원을 둘러싸고 뒤늦게 형성된 도시에 불과해! 두 도시의 역사는 완전히 별개란 말이다!”
말하기를- 오염된 바깥세상을 버리고 지어진 낙원은, 엘리시온이 아니라 유토피아 시티였다고.
정치를 위해 유토피아 시티가 엘리시온의 중심인 것처럼 말했지만, 사실은 그냥 아무 상관도 없다고.
이런저런 이야기가 붙긴 했지만, 결국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소리였다. 더더욱 흥미가 돋는다.
“아, 그러냐. 그럼 됐어.”
하지만 상원의원에게 더 이상 들을 이야기는 없어 보인다. 나는 깔끔하게 손도끼를 휘둘렀다.
이걸로 퀘스트는 클리어, 유토피아 시티와 관련된 후속 퀘스트가 나올 줄 알았는데- 아쉽게도 그렇지는 않았다.
물론 이대로 조사해보지 않고 넘어갈 생각은 없다. 하지만 지금은 그보다 우선인 일이 있으니까.
[우리 창고 다 털었어, 파파는 아직 멀었어?]
히든 요소를 찾기 전에, 그리고 24층으로 넘어가기 전에, 이 식충이들부터 어떻게든 해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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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 미련 없이
이 세계에서는 매우 고급품에 속하는, 공산품이 아닌 식재가 한가득 쌓여 있다.
아니, 쌓여 있다는 말로는 부족할지도 모른다. 너무 많아서 양을 가늠하기 어려울 지경이다.
“이, 이거 봐요, 대단하죠? 앞으로 맛있는 거 계속 먹을 수 있겠죠?”
사신 한 명이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그렇게 물었다. 확실히 이 정도면 재료가 부족할 일은 없을 거다.
스무명이 넘는 사신들은 저마다 하이파이브를 하고는, 재잘거리며 자신들이 먹고 싶은 음식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유토피아 시티도 빨리 찾아가보고 싶지만, 일단 아지트로 돌아가는 게 먼저다. 나는 인벤토리를 열었다.
-후두두둑!
조금 걱정했지만, 산더미 같은 식재료는 제대로 아이템으로 판정되어 인벤토리로 쏟아져 들어갔다.
내키는 대로 창고를 털어오라고 하긴 했지만, 어떻게 다 가져가려고 이만큼이나 되는 양을 챙겨왔는지.
NPC인 이상 내 인벤토리를 완벽하게 인식할 수는 없을 테니, 단순히 욕심을 잔뜩 부린 것뿐일지도 모른다.
“파파는 어떻게 했지?”
식재료를 챙기던 중, 1호 사신이 내게 다가와 물었다. 그러고 보니 아직 말을 안 해줬구나.
“죽였어.”
“그런가.”
1호는 살짝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심경이 복잡해 보인다.
이 녀석은 사신 중에서 최연장자고, 그만큼 상원의원의 지시를 받으며 생활한 시간도 길 거다.
밥도 안 주는 파파따위 없어도 된다며 반역을 결심했지만, 막상 이렇게 되니 썩 유쾌하지는 않은 거겠지.
그나저나, 퀘스트가 완료되었으니 자아를 잃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차라리 그랬으면 더 편하고 빠르게 다음 층으로 넘어갈 수 있었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야아, 빨리 가자! 나 얼른 페퍼로니 피자가 먹고 싶어!”
“갈비찜! 갈비찜!”
“저는 새로운 음식이 먹어보고 싶어요, 안될까요?”
신이 난 어린아이들처럼 재촉하는 사신들을 보며, 18층과 19층에서의 일을 조금 떠올렸다.
엘레노어와는 다른 방식으로 ‘다음’을 약속하고, 그 흘러간 ‘다음’의 결말을 보았던- 그건 아직도 내게 인상 깊게 남아 있다.
이 식충이 사신들에게도 ‘다음’이 있을지 모른다. 물론 그런 것 하나하나를 신경 써서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을 거다.
그러니 적어도 내 손이 닿은 범위의 일은 제대로 매듭지어야 하는 것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든다.
“그래, 알았으니까 가자.”
나는 그대로 사신들을 이끌고 아지트로 돌아와, 요청받은 음식을 있는 대로 잔뜩 만들어주었다.
상원의원의 벙커에서 털어온 식재료는 내 인벤토리에 갖춰져 있던 재료들보다 종류가 훨씬 다양했다.
덕분에 각각 사신들의 ‘최애 음식’을 보다 업그레이드해서 먹여줄 수도 있었고, 새로운 음식을 선보일 수도 있었다.
그러면서 요리 스킬의 레벨도 더 올랐고, 한식 계열의 음식을 먹이며 국뽕을 채우기도 했고- 아무튼 즐거웠지만.
“자, 내가 너희에게 요리를 해 주는 건 오늘까지다.”
이 식충이들의 응석을 언제까지고 들어줄 수는 없는 노릇, 나는 당당하게 파업을 선언했다.
너희도 슬슬 독립할 준비를 해야지.
**
자극에 중독된 사신들은 더 이상 내가 만들어주는 요리 없이는 살 수 없게 되었다.
물론 이 사이버펑크에도 맛있는 요리는 있다. 하지만 이 사신들이 중독된 ‘현대 음식’은 오직 내 손에서만 나온다.
오픈 커뮤니티에서 긁어모은 레시피에, 내 나름의 개량을 거쳐 맵단짠을 강조한 자극적인 스타일의 요리.
이걸 완벽하게 재현할 수 있는 요리사는 이 23층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곧 23층을 떠나야만 한다. 사신들의 중독적인 욕구를 무한히 채워줄 수는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최소한 내 손으로 확실하게 독립심을 길러주고 떠날 필요가 있을 거다- 그렇게 생각한다.
“무, 무무무, 무슨, 무슨 소리야, 그게.”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들은 사신들은 이번에도 격하게 반응했다. 어쩐지 전보다 더 심한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그런 눈으로 쳐다봐도 안되는 건 안되는 거다. 나는 단호하게 딱 잘라 말했다.
“말 그대로야, 내일부터는 너희가 알아서 해 먹든가 해. 나는 여기까지니까.”
그러자 사신들은 망연자실해 주저앉거나, 나노머신으로 칼을 만들어 들이밀거나, 엉엉 우는 녀석도 있었다.
이런 모습까지도 각자 개성이 넘쳐흐르니, 얼굴이 똑같아도 누가 누구인지 구분이 너무 잘 된다.
나는 칼을 들이민 사신의 손목을 꺾어 나노머신을 빼앗고, 그걸 식칼 형태로 변형시켜 돌려주었다.
“이미 알고 있겠지만, 나는 엘리시온 사람이 아니야. 앞으로도 여기서 살 생각은 없고.”
“엘리시온 사람이 아니야? 그럼 뭔데, 바깥에서 왔다는 거야?”
“비슷해, 아무튼 나는 곧 여기를 떠날 거야. 너희한테 평생 요리를 만들어 줄 수는 없어.”
이어서, 인벤토리에서 평소에 쓰던 조리도구를 꺼내 늘어놓았다. 사신들이 주목하기 시작했다.
“니들 파파는 뒈졌어, 그리고 나는 너희의 새 파파가 되어줄 생각이 없지. 그러면 이젠 독립해야 할 거 아니냐.”
그렇다. 나는 사신들에게 요리를 가르칠 것이다. 내가 없어져도 저들끼리 알아서 요리를 해먹을 수 있도록.
퀘스트가 완료되고 깡통이 된 NPC에게도, 기억은 남아 이어진다. 그렇다면 이것도 나름 의미가 있겠지.
“먹고 싶은 음식이 있으면 이제부턴 직접 만들어 먹어, 만드는 방법은 전부 알려 줄 테니까.”
“우, 우리는 요리 같은 거……해본 적 없단 말이야!”
“나도 요리 시작한 지는 얼마 안 됐어, 많이 하다 보면 알아서 다 늘더라. 그러니까 일단 해 봐.”
아직 페스티벌이 시작되기까지는 제법 기간이 남았다. 그전까지만 어떻게든 한 사람 몫을 하게끔 가르쳐 놓을 거다.
화이트 존의 병력과 싸우며 전자발경도 제법 가닥을 잡았으니, 시간 여유는 꽤 많이 남아 있다.
“쉬운 것부터 하자, 일단 너 나와봐.”
사신들이 각자 좋아하는 음식을 만들 수 있게 된 것은, 그로부터 3주가량이 지난 이후였다.
**
복잡하기 짝이 없는 나노머신을 완벽하게 다루며, 그걸로 사이보그를 숭덩숭덩 잘라내던 녀석들이다.
제대로 요리를 가르치기 시작하자, 식칼 사용을 비롯한 기본적인 도구 사용법은 대부분이 하루 만에 익혀 내었다.
요리는 기본만 할 줄 알게 된다면, 그 이후로는 그저 레시피를 외우고 사소한 요령을 몸에 익히는 것뿐이다.
시간과 함께 쌓인 숙련도는 결과물에 그대로 반영되고, 마땅히 할 일도 없는 사신들에겐 남는 게 시간이었으니.
“이거 봐, 파파! 완벽하게 튀겨졌어!”
결국, 이 녀석들은 놀라울 만큼 빠른 속도로 요리 기술을 습득해 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을 가르치다 보면 자신도 공부가 된다더니, 나도 사신들을 가르치며 요리 스킬의 레벨이 더 올랐다.
나는 완벽한 프라이드 치킨을 만들어 낸 사신 8호를 칭찬해주며, 오픈 커뮤니티를 살펴보았다.
[중요)페스티벌 날짜 공지]
이제 페스티벌 이벤트는 거의 모든 정보가 풀렸고, 기간 역시 정말 코앞까지 다가왔다.
페스티벌 맵으로 향하는 포탈이 열리는 것은 내일모레, 시간으로 치면 48시간이 살짝 안 되게 남은 상태다.
원래는 페스티벌이 열리기 전에 사신들을 다 가르쳐 놓고, 유토피아 시티까지 다녀와 볼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되면, 유토피아 시티의 히든 요소를 캐보기에는 살짝 시간이 모자랄지도 모르겠다.
“슬슬 가야겠네.”
나는 곧바로 아지트의 갱단원들과 사신들을 모두 불러모아, 이제 떠날 때가 됐다고 알렸다.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특히 실컷 부려 먹었던 갱단원 중에서는 신 난다는 티를 못 내서 안달인 놈도 있었고.
사신 쪽은 본인들이 요리를 할 수 있게 되었으니, 아쉬워하는 녀석들과 아무래도 좋다는 녀석들로 갈려 있었다.
“정말 떠나는 건가?”
그러던 중, 1호 사신이 혼자 앞으로 나와 그렇게 물었다. 설마 이 녀석이 이런 표정을 지을 줄은 몰랐다.
맨날 사람을 음흉하다고 쏘아붙이더니, 얼굴에 아주 미련이 뚝뚝 흐르고 있다.
이 녀석은 사신 중에서도 특히 요리를 빠르게 배워서, 이제 내 요리에 집착할 이유는 없을 텐데도.
“네 저질스러운 욕망을 위한 클론 하렘을 만들겠다는 계획은 어떻게 된 거지?”
“그런 계획 세운 적 없는데.”
“거짓말 마라, 네 속셈은 뻔히 보여. 그게 아니면 요리를 가르칠 이유가 없으니까!”
사람은 역시 적응의 동물이라, 이제 1호 사신의 이런 터무니없는 소리도 흘려넘길 수 있게 된 지 오래다.
내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려버리자, 1호 사신은 역정을 내며 내 뒷덜미를 붙잡아 당겼다.
“잠깐!”
순순히 끌려와 다시 고개를 돌려주니, 아랫입술을 꾹 깨물고 어깨를 떠는 1호의 모습이 보였다.
“진짜로 가는 거야? 이렇게 떠나서 다시는 안 돌아올 거라고?”
당연하다, 나는 유토피아 시티를 확인하고 나면 그대로 다음 층으로 올라갈 생각뿐이었다.
“글쎄, 나도 모르겠다. 나중에 인사하러 한번 올 수도 있고.”
설마 1호가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지만, 그렇다고 내 생각이 크게 달라질 것은 없다.
한 층을 지나 멋진 회색 현자가 된 에인과 재회했듯이, 이 녀석들과도 언젠가는 재회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니- 마음으로 바라되 미련은 남기지 않고, 나는 내가 바라보는 길을 향해 계속 전진한다.
“될 수 있으면 또 보자.”
깡통이 된 후에 헤어지면 더 아쉬울 뿐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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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 멋진 신세계
은신에 도움을 주는 망토를 걸치고, [암영] 스킬을 사용해 모습을 감췄다.
상원의원을 잡으며 엘리시온의 주요 전투병력을 작살내 놨기 때문인지, 화이트 존 안쪽으로 잠입하는 것은 아주 쉬웠다.
잠입 후에는 먼저 미궁 지역인 블랙 존으로 이동했다. 블랙 존의 환경은 커뮤니티에 작성된 정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기괴한 폭주 로봇과 생체실험으로 생겨난 뮤턴트가 바글거리는 지하도- 솔직히 그냥 하수구 같은 느낌이다.
지저분하고, 어두침침하고, 가끔씩 더러운 시궁쥐(로봇) 같은 게 나오고, 이 정도면 거의 비슷하지.
물론 커뮤니티에서 이런 소리를 하면, 도전자들은 그 시궁쥐들이 미친 살인병기지 않느냐고 따지겠지만.
[병균 보유 개체, 일급 질병 유발 개체, 오염, 소독, 제거합니다, 정화합니다!]
“니가 제일 더러워, 로봇청소기 새끼야.”
-콰직!
나한테는 이 살인 로봇들이나 진짜 쥐새끼나 크게 다를 것 없었다.
아무튼, 커뮤니티에 뿌려져 있는 지도를 토대로 블랙 존을 탐험하고- 오래 걸리지 않아 보스룸을 찾아냈다.
이 안쪽에 있는 키메라 드론만 처치하면 전이문을 활성화하고 다음 층으로 올라갈 수 있다.
하지만 유토피아 시티를 한 번 확인하고 가기로 했으므로, 일단은 발걸음을 돌렸다.
다시 블랙 존에서 빠져나와 [암영]을 사용해 은신하고, 화이트 존의 거리를 빠르게 지나 ‘벽’에 도착했다.
유토피아 시티와 화이트 존을 나누는 경계문, 하지만 이 게이트는 사실 겉모습만 이렇게 꾸며놓았을 뿐이다.
상원의원이 말하기를, 필요에 의해 문처럼 보이도록 꾸며놨지만- 사실은 절대 열리지 않는 그냥 벽.
엘리시온보다 먼저 존재했던 인류를 위한 낙원의 경계선, 나는 [강철 직검]에 오러를 둘러 휘둘렀다.
-카각!
“응?”
하지만 벽에는 굵은 흠집이 하나 생겼을 뿐이다. 이거 대체 뭘로 어떻게 만든 벽인 거지.
얇은 오러였다지만 고작 흠집이라니, 이 정도 단단함은 미스릴 같은 최상급 소재에서나 나오는 건데.
물론 아예 못 자를 정도는 아니다. 나는 시간을 들여 최대한 마력을 집중시키고, 더 강한 오러를 형성했다.
-카가가각!
그럼에도 벽은 결코 쉽게 잘리지 않았다. 결국, 간신히 몸만 지나갈 수 있는 통로를 뚫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작은 구멍으로 유연성을 발휘해 몸을 욱여넣고, 마침내 입성한 유토피아 시티의 모습은 놀라웠다.
낙원이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황폐했다던가, 사실 낙원 따위는 없었다던가- 그런 건 아니다.
“이게 뭐야.”
벽 안쪽에 펼쳐진 것은 널따란 마당이 딸린 주택이 주욱 늘어선 극도로 평범한 길거리.
높은 빌딩이나 화려한 전광판, 날아다니는 로봇이나 비행선 같은 사이버펑크적인 요소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전이문을 타고 다른 층으로 넘어왔는가 의심이 될 정도로, 유토피아 시티 안쪽은 그냥 평범한 주택가였다.
그리고, 그 평범한 주택가에는- 정말로 평범하게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
남자, 여자, 아이, 노인-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비슷한 옷차림을 하고 각자의 일을 하고 있다.
가볍게 산책을 하기도 하며, 일터로 떠나는 사람도 있는 것 같고, 집 안에서 휴식을 취하는 사람도 있다.
너무나 평범한 일반 주택가의 모습이라 오히려 황당했다. 분명 뭔가 거대한 비밀이 숨어 있을 줄 알았건만.
가만히 기다려 봐도 퀘스트가 발생할 기미는 보이지 않고, 주변을 둘러봐도 이상한 점은 보이지 않는다.
기껏해야, 주택의 모습이나 사람들의 옷차림이 다 비슷비슷하다는 것 정도일까.
하지만 비슷한 건물이 쭉 늘어서 있는 건 대한민국에서도 흔한 일이고, 옷차림이 비슷한 것도 마찬가지.
“뭐지, 대체.”
가볍게 마력감지까지 펼쳐 봤지만, 뭔가 특이한 기척이 감지된다거나 하는 일도 전혀 없었다.
나는 고민 끝에, 이번에도 현지인에게 물어보는 편이 낫겠다고 판단을 내렸다.
지나가는 행인 하나를 붙잡고, 바깥에서 온 사람이라고 소개하며 안내를 해줄 수 있겠냐고 물었다.
“바깥이요?”
바깥에서 온 사람을 경계하거나 적대한다고 해도 상관없다. 친절하게 굴어 주면 더더욱 좋고.
“제가 잘 몰라서……경찰서에 가보시는 게 어때요? 저쪽으로 쭉 가시면 있어요.”
하지만 돌아온 것은 너무나 무난하고 평범한 반응이었다. 행인은 그대로 기척도 없이 지나가 버렸다.
여전히 퀘스트는 생기지 않은 채고, 커뮤니티를 열어서 유토피아 시티에 대해 검색해봐도 나오는 건 딱히 없다.
어쩔 수 없나, 일단은 움직여 보는 수밖에. 경찰이라면 뭔가 좀 더 그럴듯한 반응을 해 주지 않겠어?
“응?”
그렇게 생각하며 앞으로 한 걸음 내디딘 순간, 나는 뒤늦게 위화감을 느끼고 고개를 돌려 보았다.
평범한 사람들이 평범하게 생활하는 지극히 평범한 주택가- 하지만 이곳에는 중요한 것이 하나 빠져 있었다.
방금 지나간 그 사람도, 주변에서 움직이는 다른 사람들도, 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아니, 조금 다르다.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게 아니다. 사람들에게서 생명반응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초감각]
스킬을 활성화해 청각을 강화시켰다. 개미 걸어가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을 정도로.
-두근, 두근, 두근.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심장박동 소리가 들린다. 침을 삼키는 소리까지도 들린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생명반응은 느껴지지 않는다. 분명히 모든 기관이 살아 있는 것처럼 소리 내고 있음에도.
마력을 사용해 [초감각]스킬을 더 강화하고, 광역으로 정밀도가 높은 감지를 다시 펼쳐 보았다.
“아하, 그런 거군.”
심장박동 소리, 위장이 음식물을 소화하는 소리, 혈관에 피가 흐르는 소리- 모두 들리는 한편으로.
작고 미세한 다른 소리가 섞여서 함께 들려온다. 위잉위잉 돌아가는 엔진의 구동음이, 사람들에게서.
유토피아 시티의 주민들은 사람이 아니다.
**
신체 일부를 기계로 대체한 사이보그나, 인간과 닮은 휴머노이드- 그 어느 쪽도 아니다.
사이보그도 뇌나 심장을 비롯한 주요 신체기관은 남아 있기에, 마력을 퍼트려 생명반응을 감지할 수 있다.
사신들의 경우도 복제된 클론이면서 신체 대부분이 기계로 개조된 사이보그였지만, 제대로 생명반응이 있었으니.
하지만 이곳의 시민들은 아니다. 심장 비슷한 것이 뛰고 있지만 심장이 아니다. 뇌조차도 존재하지 않는다.
아마 지나가는 행인을 붙잡고 대가리를 터트려 보면, 그 안에는 뇌가 아닌 기계부품이 들어 있을 것이다.
“안드로이드의 도시……뭐 그런 건가.”
솔직히, 이렇게까지 사람과 비슷한 행동을 하면 그냥 사람이 아닐까 싶지만- 뭔가 생각이 턱턱 막힌다.
정해진 행동대로만 움직이는 NPC를 처음 봤을 때 느꼈던 것과 같은, 기묘한 불쾌감.
생명반응을 잡아내는 마력감지 없이, 단순히 [감각 강화]같은 스킬만 있었으면 눈치채지 못했을 텐데도.
나는 이 기묘한 로봇들의 존재에, 어째서인지 거부감을 느끼고 있었다. 소름이 돋는다.
“후우……”
작게 심호흡하며, 일단은 계속 걸었다. 그리고 동시에 마력감지의 범위를 더욱 넓혀 보았다.
현재 내 마력감지의 최대범위는 상상을 초월한다. 넓으면 넓을수록 정밀도는 떨어지지만 말이다.
하지만 유토피아 시티의 전경을 간략하게 파악하는 것뿐이라면 대단한 정밀함은 필요치 않다.
“찾았다.”
광역 탐지를 사용해 뭔가 딱 봐도 중요해 보이는 시설물 하나를 찾는 데에 성공했다.
국회의사당을 연상시키는 외견의 건물, 그 지하에 무언가 숨겨진 공간 같은 것이 있는 것 같다.
[신속]
스킬을 사용해 재빨리 그 건물이 있는 방향으로 달렸다. 동시에 이 도시의 이상한 점을 하나 더 찾아냈다.
사람들이 사는 주택의 모양과 구조가 모두 거의 똑같다. 사람들의 외모와 체형과 옷차림 역시 거의 비슷하다.
마치 몇 종류의 NPC를 복제해서 이곳저곳에 풀어놓은 느낌. 도시의 전체적인 구획과 구조 역시 마찬가지다.
모두가 똑같은 일을 하고, 똑같은 방식으로 여가를 보내고, 똑같은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는 도시.
[유토피아 의사당]
도착한 건물은 정말로 국회의사당이었고, 건물 안팎으로는 또 비슷한 얼굴의 사람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나마 차림새는 조금 다른 면이 있는데, 배지를 달고 있는 걸 보면- 국회의원이나 정치인인 것 같다.
하지만 저들 역시 생명반응을 내는 생명체는 아니었다. 나는 그들을 무시하고 의사당 안쪽으로 들어갔다.
“이봐요, 여긴 함부로 들어오면 안 되는 곳입니다.”
제지해오는 경비원을 밀쳐내자, 경비원은 그대로 정지하더니 제자리로 돌아갔다. 버그가 난 것처럼.
신경이 쓰였지만, 일단 이 아래에 뭐가 있는지부터 확인해야 할 것 같다.
“흡.”
-꽈앙!
인벤토리에서 꺼낸 대형 망치로 바닥을 깨부수고, 숨겨진 공간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곳에 있는 것은 수천 개는 되는 전선과 코드가 연결된 거대한 컴퓨터와- 작은 디스플레이 하나.
여전히 퀘스트는 발생하지 않았지만, 디스플레이가 담긴 컴퓨터는 스피커로 소리를 내뱉었다.
[어서 오십시오, 유토피아 관리 시스템 A2-33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윙윙거리는 구동음과 함께 눈을 뜬 컴퓨터는 작은 디스플레이로 나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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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 디폴트 오류
거대한 컴퓨터를 보호해야 할 외장은 모조리 뜯겨있고, 흉하게 드러난 내부 부품들의 모습은 기괴하기 짝이 없다.
마치 가죽을 벗겨 낸 대형 짐승을 보는 것 같다. 이 컴퓨터의 모습에서 그나마 볼 만한 것이라고는, 정면에 달린 작은 디스플레이뿐.
그 조그만 디스플레이는 웃음 모양의 이모티콘을 띄운 채,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스피커를 통해 말을 전해 왔다.
[어서오십시오, 유토피아 관리 시스템 A2-33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아마도 이게 유토피아 시티를 관리하고 있는 메인 컴퓨터, 이 도시의 기괴한 모습을 설명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
하지만 뭘 물어봐야 할지 모르겠다. 어떻게 물어봐야 할지도 모르겠고. 아니, 그보다도 이거- 수상쩍다.
사신들의 몸에 들어가 있는 것과 비슷한 파워팩 수백 개가 컴퓨터 본체에 다닥다닥 붙어 있다.
저 징그러운 외형도 그렇고, 유토피아 관리 시스템이라는 설명도 그렇고, 암만 봐도 히든 보스 같은데.
“유토피아 시티의 역사를 알고 싶어.”
나는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마력을 끌어올리며, 컴퓨터를 향해 그렇게 말했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고장난 건 아닌 것 같은데- 잠시 고민하고 있자니, 컴퓨터의 부품 몇 개가 움직이더니 내게 입력장치를 들이밀었다.
작은 마이크가 달려 있고, 익숙한 형태의 자판이 붙어 있는……그러니까, 키보드로 입력하라는 건가.
-타닥, 타닥, 탁.
자판을 두드려 말한 것과 똑같이 입력하자, 디스플레이가 반짝거리며 다시금 스피커가 울리기 시작했다.
[A2-23의 데이터베이스로 답변할 수 없는 내용입니다. 장착된 A2-11의 데이터를 불러옵니다, 3초가 소요됩니다.]
곧이어 디스플레이에 표시된 이모티콘 모양이 바뀌었다. 이전 것보다 앙증맞게 웃는 표정이었다.
[큐레이터 기능을 활성화했습니다. A2-23의 데이터베이스를 참고하여 유토피아의 역사를 자세히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스피커에서 출력되는 목소리도 바뀌었다. 활달한 기계음은 노이즈가 섞인 채로 설명을 시작했다.
[유토피아 프로젝트는 전후력 1163년에 시작된 ‘행성 자원 고갈 및 오염에 따른 인류 이주 계획’의 총칭입니다.]
[이는 환경오염과 자원 고갈로 더 이상 인류가 살 수 없게 된 행성에서, 인류 보존을 위한 낙원을 만드는 계획이었습니다.]
[전후력 1160년에 발발한 제5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유토피아 프로젝트의 본격적인 시동은 1168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작은 디스플레이에서 이런저런 화면이 지나갔다. 이쪽 세계의 역사를 알지 못하는 나로서는 알아보기 힘든 자료들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예 이해할 수 없을 정도는 아니었다. 언뜻 보기에는, 지구와 매우 비슷한 환경이었으니까.
물론 완전히 똑같은 건 아니다. 십여 년 전 시련의 탑과 게이트가 출현하며 지구의 환경과 사회는 극적으로 바뀌었으니까.
현재 지구는 게이트의 몬스터들에게서 채취한 코어나 마력자원을 이용해, 지하지원 의존을 크게 줄인 상태다.
[계획 초기의 낙원 프로젝트는 잔여 자원을 활용해 전 인류의 5%를 보존할 수 있을 것으로 예정되었으나……]
하지만 이 23층 세계의 과거는 달랐다. 마력을 비롯한 이계의 자원 없이, 순수하게 행성의 자원만을 이용해온 세계.
[유토피아 건설 진행 중 발생한 환경 악화의 영향으로, 보존 가능 수치를 1%로 재설정해야만 했습니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것은, 탑이 나타나지 않은 지구의 미래일지도 모른다.
**
컴퓨터가 설명해준 유토피아는, 한정된 자원으로 인류가 존속하기 위해 만들어진 작은 낙원이었다.
가능한 모든 방식으로 추출한 잔여 행성자원을 통해, 영구히 존속될 수 있을만한 숫자의 인류만을 이 땅에 남기는 것.
그 존속 가능한 인류의 숫자는 첫 계산 당시에는 5%였으나, 이후에는 1%로 설정되었고- 그게 이 낙원의 예정된 인구수였다.
전 인류의 1%, 지구를 기준으로 생각해보면 7천만 정도의 인간만이 이 ‘유토피아’에서 살아남아 역사를 이어갈 것이었다.
하지만 현재 유토피아 시티에는, 7천만은커녕 7명의 인간도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을 흉내 내는 기계들뿐이다.
물론 바깥의 엘리시온에 거주 중인 인간의 숫자를 헤아려보면, 그에 근접한 수치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래서, 지금 여기는 왜 이 모양이 된 건데?”
나는 저도 모르게 말을 내뱉었다. 대답하지 않는 컴퓨터를 보고 한숨을 내쉬며, 다시 자판을 두드렸다.
[A2-11의 데이터베이스로 답변할 수 없는 내용입니다. A2-23의 메인 데이터를 불러옵니다, 3초가 소요됩니다.]
그러자 컴퓨터는 다시금 시스템을 바꾸었다. 내가 처음 마주쳤던 유토피아 관리 시스템이 다시 떠올랐다.
[해당 질문에 답변하기 위해서는 유토피아 프로젝트가 목표를 달성한 전후력 1203년의 데이터 열람이 필요합니다.]
[경고, 열람이 필요한 데이터 F97-2199는 일급 정신 장애 및 치명적 자살 증후군을 유발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데이터 열람 전, 이하의 향정신성 약물을 모두 복용한 후 유서를 작성하여 주십시오. 뇌전성 모르핀 정제 2mg……]
시스템은 이름만 들어도 심상찮은 마약성 약물의 목록을 줄줄이 나열했다. 물론 나는 그런 걸 갖고 있지 않다.
애초에 내성이 너무 높아서 죄다 한 사발씩 들이켜도 별 효과는 없겠지만……대체 왜 그런 걸 권하는 거지.
짐작도 안 간다. 나는 [정신 오염 내성]스킬을 믿고, 다시금 자판을 두드려 해당 데이터를 재생할 것을 명령했다.
[유토피아 프로젝트는 목표 달성 이후, 상정되지 않은 외부 요소의 간섭으로 보유 자원을 손실했습니다.]
[손실한 자원은 ‘아스트라’로 임시 명명된 에너지원으로서, 기원이 해석되지 못한 미지의 자원입니다.]
[본 관리 시스템 A2-23은 해당 자원의 손실 이후의 측정 데이터를 토대로, 인류종 보존 가능 수치를 재설정했습니다.]
시스템은 아무렇지 않게 자신이 새로 계산한, 보존 가능하다고 판단된 인류의 숫자를 화면에 띄웠다.
[영구 보존 가능 인구 : 0명]
이 시스템의 개발자는, 보존 가능한 인류의 숫자가 0으로 계산되었을 때를 상정하지 않은 것이다.
**
유토피아의 시스템은 영구 보존이 가능한 숫자의 인류를 지키기 위해, 모든 수단을 강구하게 짜여 있었다.
보존 가능한 인구가 10명이라면, 그 10명을 존속시키기 위해 도시의 시스템을 스스로 개편하게 되어 있는 거다.
하지만 ‘외부 요인’의 개입으로 모종의 주요 자원을 손실하자, 그 수치가 0명이 되었고- 이는 치명적인 오류를 낳았다.
시스템은 영구 보존 가능한 인류 0명을 위해 도시 전체를 개편했고, 그 개편 끝에 지금의 유령도시가 완성된 것이다.
0명의 인류를 위해 존재하는 공허한 낙원. 시스템은 프로그래밍의 빈틈에 빠져 무의미한 행동을 반복한 것이다.
[자원의 소모 없이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노동용의 휴머노이드를 제조해 투입하였으며……]
디스플레이는 그동안 시스템이 들려온 갖가지 노력을 표시하고 있었다. 하나같이 낭비에 불과하지만 말이다.
“그럼 엘리시온은……결국 멸망한다는 건가?”
유토피아 시스템의 계산으로는, 남은 자원을 어떻게 사용하든 인류는 절대 영구 존속할 수 없다.
그렇다면 유토피아 시티 바깥에 존재하는 엘리시온의 인구는, 미래에 자원 부족으로 완전히 소멸하게 된다는 뜻.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이 세계에는 예정된 멸망이 닥쳐든다. 마치 세계수가 뿌리내린 9층의 세계처럼.
물론 내가 신경을 써야 할 일은 아니다. 모르는 세계가 언젠가 망하든 말든 내가 알 게 뭐람.
하지만 이 세계에 남은 사신들을 생각하면,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이 하나쯤은 있다.
-타닥, 타닥.
나는 천천히 자판을 두들겼다. 시스템에게 설명을 요구하며, 천천히 명령을 입력했다.
0명의 인류를 영구 보존하겠답시고, 괴상한 낭비를 하고 있는 시스템에게- 상황을 알려주기 위해.
다행이게도 시스템은 인간 친화적으로 설계되어 있었다. 한 시간 정도를 들여서 나는 명령 입력에 성공했다.
입력한 명령은 단순하다. 이미 인류의 영구 존속은 불가능하게 되었으니, 목표를 변경하라는 것이다.
무의미한 0명의 영구 존속이 아닌, 남은 인류의 장기 존속을 위해 도시를 개편하라고.
[낙원의 시스템 개편을 시작합니다. 소요 예정 시간 : 312시간 58분.]
이제 유토피아 시티는 내부를 개편하고 문을 개방해, 엘리시온의 시민들을 안으로 들일 것이다.
닫힌 낙원에서 열린 낙원이 된 이 세계가 앞으로 어떻게 변화할지는 모르겠지만, 조금은 나은 미래가 생기겠지.
그러자 퀘스트 창이 제멋대로 열리더니, 빠르게 등록된 퀘스트가 곧바로 완료 처리되었다.
[퀘스트 완료 : 닫힌 낙원 - 디스토피아]
그리고 보상으로 들어온 것은 새로운 스킬, [파동 제어 Lv.1]이라는 패시브가 등록되었다.
패시브 스킬의 효과는 굳이 설명을 읽을 필요도 없었다. 그동안의 연습을 통해 체득한 감각이 알려주었으니까.
마력을 비롯한 에너지를 자유롭게 요동치게 하며, 흐름을 조작할 수 있게 해주는 스킬.
“쓰읍……스스로 얻고 싶었는데, 그래도 됐지 뭐.”
이로서 나는 전격장과 같은 전자발경을 자유롭게 다룰 수 있게 되었다.
**
상세한 내용은 모르겠지만 히든 퀘스트도 어찌저찌 클리어했고, 남은 건 24층으로 넘어가는 것 뿐.
물론 페스티벌 일정이 있으므로, 보스를 잡고 나서도 바로 넘어가지는 않을 셈이다. 포탈이 여기에 생길 거니까.
그리고, 아직 신경 쓰이는 점이 하나 남아 있다- 인류의 영구 존속을 불가능하게 만든 ‘외부 요인’에 대한 것.
손실했다는 ‘아스트라’라는 자원에 대해서도 신경이 쓰이고, 그것과 관련해서 마음에 걸리는 점도 하나 있다.
나는 도시 개편을 진행 중인 메인 컴퓨터에게 다가가, 다시금 자판을 두드려 질문했다.
온갖 마약성 약물을 복용하고 열람할 것을 권하는 데이터의 정체와, 그 미지의 ‘외부 요인’에 대해 알려달라고.
[‘외부 요인’이란, 유토피아 프로젝트가 가동 중에 연구진과 시스템에 접촉한 미지의 다원정보체를 의미합니다.]
[본 시스템의 해석으로는 다중차원에 중첩되어 존재하는 모종의 생명체라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현재 데이터베이스에는 해당 외부 요인이 접촉했을 당시의 영상과 음성 자료가 남아 있습니다. 재생합니까?]
나는 살짝 긴장하며 자판을 눌렀다. 곧 작은 디스플레이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어둠이 드리웠고.
-삐이이이이이이!!!
“억……!”
귀가 찢어질 듯한 노이즈, 뇌를 파고드는 정체불명의 소음, 눈을 파고드는 영상 속의 어둠.
불타는 듯한 통증과 함께 피눈물이 흐른다. 소음이 지나간 귓가에서도 주르륵 따뜻한 것이 흘러나온다.
뇌가 녹아내려 입과 코로 흘러나오는 감각, 나는 이 지옥 같은 고통을 이미 느껴본 적이 있다.
-푸욱!
“끄윽!”
인벤토리에서 도끼를 꺼내 내 다리를 찍었다. 다른 방향의 고통에 조금씩 진정이 된다.
푸른 알림창 몇 개가 눈앞에 떠올랐다. [정신 오염 내성] 스킬의 레벨이 한번에 두 개가 올랐다.
그와 동시에 괴상한 노이즈로만 들리던 소음 속에서, 딱 한마디 말이 식별되었다.
- 여긴 폐품이로군.
그리고 디스플레이는 원래의 화면으로 돌아왔다. 스피커도 소리의 재생을 멈추었다.
나도 눈과 입과 귀와 코에서 피가 철철 흘렀지만, 끝까지 고통을 견뎌내며 정신을 바로잡았다.
방금 그게 이 별의 자원을 앗아간 존재의 정체……아마도 내가 15층에서 관측했던 무언가와 같은 존재.
[해당 음성과 영상을 남긴 외부 요인은, 본 시스템에 접촉할 당시-]
관리 시스템은 그것의 이름을 이렇게 말했다.
[-‘별’을 자칭했습니다.]
그리고, 나는 정신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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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 두 번째 페스티벌
정신을 차린 건 그로부터 대략 한 시간이 지난 뒤였다.
얼굴에 말라붙은 피를 떼어내고 주변을 살펴보니, 관리 컴퓨터는 도시의 정돈 작업을 진행 중이었다.
더 이상 내가 손쓸 만한 부분은 달리 없었기에, 나는 잠시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자리를 떠나 블랙 존으로 향했다.
“별……?”
길을 막는 폭주 로봇들을 격파하며 보스룸으로 향하는 내내, 컴퓨터가 보여준 영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칠흑 같은 존재가 내뱉은 알 수 없는 한마디, 그리고 컴퓨터가 그것을 지칭하며 사용한 단어. 별.
그리고 ‘별’이 이 세계에서 앗아간 것으로 추정되는 자원, ‘아스트라’의 정체까지. 신경 쓰이는 것들이 너무 많다.
“인류의 1%를 영구 존속시킬 수 있는 에너지원……그게 말이 되는 건가.”
곰곰이 생각해보면, 컴퓨터가 설명한 유토피아 프로젝트는 애초에 이상한 점이 많았다.
인류 일부를 낙원에 격리해 영구적으로 존속시키겠다는 계획.
아무리 대단한 자원이라도 결국 소모성일텐데, ‘영구히’ 존속시킨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인가?
아마 ‘반영구적’이라는 걸 과장한 표현일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그 동력은 미지의 에너지원인 ‘아스트라’에서 나온다.
아스트라를 잃은 후 시스템이 인류의 영구 존속은 불가능하다고 계산했으니, 그것이 존속의 핵심이라는 건 분명하다.
그런데 그렇게 중요한 자원이 미지의 에너지원이라고? 수천만 인구를 지탱할 에너지에 대해 아는 게 없다고?
게다가 ‘별’이라는 존재가 아스트라를 노리고 나타난 것도 틀림없다. 내가 들은 그 한 마디가 그 증거다.
하지만 정신을 차린 후 컴퓨터에게 ‘아스트라’와 ‘별’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신경 쓰이는데.”
나는 이 모든 것들의 정체야말로, 시련의 탑을 무너뜨리기 위한 열쇠가 될 것이라는 직감을 받았다.
아마 ‘별’이란 존재는 성위와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아스테리오스의 도끼를 포함해, 드물게 언급되던 그 단어.
성위- 무언가 극한에 이른 경지를 의미하는 것 같기도 하고, 신적인 존재를 의미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어느 쪽이건, 아마도 그건 이 탑의 GM이라는 녀석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화면 너머로 본 ‘별’이 내게 안겨준 고통은, 15층에서 GM이 개입했던 때에 느꼈던 것과 똑같았으니까.
하지만 오픈 커뮤니티를 뒤져봐도 마땅한 정보는 없고, 아무리 고민을 해도 뾰족한 답이 떠오르지 않는다.
새삼스레 깨닫는다. 시련의 탑의 도전자들조차, 정작 이 탑에 대해 아는 것은 거의 없다는 걸.
-끼이익.
천천히 걷다 마침내 보스룸에 도착해 문을 열었다. 깜빡이는 조명등이 차례로 불을 밝혔다.
[신종 20레벨 전투병기의 제작을 위해 만들어진 인공지능은, 계획이 중지된 이후에도 계속 작동했다.]
등장한 보스는 수십 개의 추진체가 달린 날개 형태의 비행 장치를 장착한 거대한 로봇.
[BOSS - 키메라 드론 페어리]
기름 냄새를 풍기는 기괴한 키메라 로봇의 모습에 나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집중력을 끌어올렸다.
당장 해결할 수 없는 의문은 내버려 두고, 눈앞에 닥친 일에 신경을 쏟도록 하자.
내가 아무리 강해졌다고 한들, 상대가 아무리 약해 보인다 한들, 전투 중에는 절대 한눈을 팔아서는 안 된다.
“좋아, 해 보자.”
전자발경의 기본 원리이자 내가 새롭게 습득한 패시브 스킬, [파동 제어]는 일종의 마력 제어 기술이라고 할 수 있다.
[마력 지배]가 마나의 입자 하나하나를 정밀하게 다루는 것이라면, 이건 입자의 움직임이 만드는 여파를 제어하는 것.
정밀함은 내가 본래 사용하던 마력제어 기술에 미치지 못하나, 지금 같은 상태에서 사용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다.
[라이트닝 차지]
번개 속성의 마력을 오른팔에 흘린다. 많은 마력을 소모해도, 회로가 손상된 탓에 온전한 출력은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마력을 직접 흘려 넣는 것이 아닌, 마력이 만들어내는 파동을 이용해 간접적으로 힘을 전이시킨다면.
마력회로의 손상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양팔을 통해 100%에 가까운 출력을 구현해 낼 수 있다.
-타닥!
번개 속성의 마력이 만들어내는 전격의 파동을 손바닥에 집중시키며, 보스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대로 손바닥을 드론의 머리통 부분에 갖다 대며, 맺어두었던 파동을 그대로 상대의 내부로 전이시킨다.
침투한 번개의 마력은 격하게 요동치며, 적을 체내에서부터 헤집어 데미지를 준다.
“전격장.”
-콰르릉!
최대 위력으로 시전한 전격장이 붉은 이펙트를 터트리며, 로봇의 머리통을 작살냈다.
**
완벽하게 터득한 전자발경- 전격장의 위력은 내 생각 이상으로 강력했다.
상성이 극도로 좋은 기술이라는 점을 감안해야겠지만, 미궁의 보스를 한 방에 정리하는 위력이라니.
거기에 파동을 제어한다는 묘리는 다른 기술에 접목하는 것도 그렇게 어렵지 않아 보인다.
-우웅!
가볍게 시험 삼아 오른손에 오러를 둘러보았다. 확실히 전개 속도와 강도가 눈에 띄게 좋아졌다.
마력회로가 손상되기 이전과 비교하면 역시 아직 모자라지만, 그래도 크게 부족하다는 인상은 안 드는 정도.
[파동 제어]의 스킬 레벨이 아직 1레벨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앞으로 발전할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
다른 스펙업 요소까지 포함하면, 어찌저찌 페스티벌 직전까지 예전만큼의 힘을 되찾는 것은 성공한 셈이다.
이 정도면 토너먼트 결과가 안 좋아도 ‘아 내가 그때 도끼만 안 썼어도’ 하며 후회할 일은 없을 거다.
물론 토너먼트 결과가 안 좋을 거라는 생각은 조금도 안 하고 있지만 말이다.
“그러고 보니까, 대진표 확정됐었지.”
페스티벌이 열리기까지 몇 시간을 앞두고, 나는 커뮤니티를 둘러보며 잠시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24층으로 향하는 전이문 앞에서 화이트롤로 가볍게 요기를 마쳤을 때쯤, 눈앞에 포탈이 출현했다.
[지역 통합 이벤트 : 시련의 탑 페스티벌이 개최됩니다!]
[포탈을 통해 공용 서버로 이동하실 수 있습니다.]
[이벤트 서버 : A 구획으로 이동하시겠습니까?]
“예.”
생겨난 포탈에 손을 대고, 알림창의 메시지를 수락했다.
보스룸의 전이문을 사용할 때와는 미묘하게 다른 감각이 느껴지고.
곧, 3년 만에 다시 보는 페스티벌의 세계가 펼쳐졌다.
**
3년 전의 페스티벌 지역은 중앙에 분수대가 있는 유럽풍의 광장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이번에도 기본적인 분위기는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다. 아니, 오히려 살짝 차분해진 느낌인데.
“잠깐만요! 좀 지나갑니다! 비켜요 비켜!”
그 때였다. 노점을 차리려는 도전자인지, 여러 가지 기물을 들고 바쁘게 달려가는 중년의 남성이 보였다.
아, 그러고 보니 저번 페스티벌은 포탈이 열리고 조금 지나서 들어갔었지.
이번에는 오픈런을 한 셈이니까, 노점을 준비하는 도전자와 대형 길드의 관계자들이 많이 보이는 거군.
다른 서버에서는 길드 관계자들이 먼저 출입해서, 뒤에 들어오는 도전자들의 교통정리를 할 예정이라고 했으니까.
그러면 곧 지금보다 훨씬 혼잡해질 거다. 그나저나, 축제 분위기랑은 별개로- 이거 진짜 심각하네.
지난 페스티벌때는 마력을 느낄 줄도 몰랐던지라 전혀 모르고 있었는데.
“와, 못 봐주겠네.”
이 새끼들, 이놈이고 저놈이고 죄다 마력을 병신처럼 질질 흘리고 다닌다.
가진 마력량은 제법 많은데, 그걸 제어할 줄 모르는 채 흘리고 다니는 놈들이 너무 많다.
이런 것 때문에 거북함을 느끼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는데- 꼴사나운 것도 정도가 있어야지.
다른 탑 도전자들의 평균 수준이 낮을 거라는 건 예상했지만, 뭔 모지리 새끼들이 이렇게 많은 거야?
설마 토너먼트에 나오는 놈들도 이렇게 등신처럼 마력을 다 흘리고 다니는 건 아니겠지.
[초감각]
나는 결국 스킬을 사용해, 상시 전개하고 있던 마력감지의 수준을 반대로 낮춰 버렸다.
마력이라고는 한 움큼도 존재하지 않는 사이버펑크 세계에서 넘어왔다 보니, 괜히 더 예민해진 것 같다.
그래도 계속 감지 수준을 낮춰둘 수는 없으니까, 적응되면 천천히 수준을 다시 높이자.
“저기요.”
그 때였다, 다른 모지리들과는 다르게 그럭저럭 정돈된 마력을 가진 남자 한 명이 내게 다가왔다.
“노점 등록하신 분 아니시죠? 어디 서버 분이신데 벌써 들어오셨어요, 공지 안 보셨어요?”
말하는 걸 보니 교통정리를 맡은 길드의 일원인 것 같았다. 나는 본능에 따라 남자의 신체를 훑어보았다.
걸음걸이도 불규칙하고 무게중심도 엉망이다. 허리춤에 검을 찬 걸 보니 검사인 것 같은데, 딱 봐도 기량이 처참하다.
전에 봤던 창기능사 최길현보다는 아슬아슬하게 낫지만, 검술이나 박투술 스킬은 있어봤자 초급 수준이겠어.
“큰 문제는 아니긴 한데…서버랑 성함 좀 말씀해주세요, 기록해 놔야 해서.”
“2661서버, 서진혁이요.”
“네, 2661……잠깐만요, 어디 서버라고요? 지금 서진혁이라고 했어요?”
남자는 별생각 없이 들고 있던 펜을 끼적이나 싶더니, 퍼뜩 고개를 쳐들고 그렇게 물었다.
이야, 이런 식으로 새삼스럽게 내 인지도를 체감하게 되는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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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 주문술사
시련의 탑 도전자와 한국의 헌터 지망생 중에서, 내 이름을 안 들어본 녀석은 아무도 없을 거다.
물론 정작 그 인지도를 내가 체감해 본 적은 없다. 커뮤니티에서의 인지도는 피부에 와닿지 않기도 하고.
“와……실존인물이었구나, 진짜 본인 맞아요? 그 서진혁?”
그래서 그런지, 이렇게 연예인 내지는 인플루언서를 보는 듯한 눈으로 쳐다보니 괜히 낯간지러웠다.
고개를 끄덕여 긍정하자, 남자는 잠시만 기다려 달라며 종이뭉치를 들고 어디론가 달려갔다.
그러더니 왠 남녀 패거리 몇 명을 이끌고 나타났는데, 아무래도 같은 길드나 파티의 도전자들인 것 같았다.
“저 사람이야? 뭔가 생각한 거랑 다른데?”
“아니 뭐야, 완전 멀쩡하게 생겼잖아.”
패거리는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내게 관심을 보이며 다가왔다. 다짜고짜 악수하자며 손을 잡는 녀석도 있었다.
이렇게까지 관심을 보이니 나도 좀 당황스럽다. 아니, 그보다 이 녀석들- 다른 놈들보다 훨씬 세 보이는데.
같은 마크를 달고 있는 걸 보니 똑같은 길드 소속인 것 같은데, 대형 길드의 간부나 뭐 그런 건가.
가지고 있는 마력량도 상당하고, 무게중심이나 걸음걸이도 괜찮다. 물론 이놈들도 힘이 좀 새긴 하는데.
“혹시 저 기억하세요? 그리핀 길드 소속 김준태라고 하는데, 예전에 쪽지로 몇 번 대화한 적 있었어요.”
누군가 했더니, 몇 년 전쯤에 엄마의 뼛가루를 장기간 안치해 둘 수 있는 납골당을 소개해 줬던 사람이었다.
“아, 그……납골당 알아봐 줬던 사람?”
“맞아요, 제가 알아봐 드린 건 아니고 그냥 소식만 전해드린 거지만요. 반갑습니다.”
어색하게나마 악수를 나누자, 붙잡은 손에서 제법 강한 근력이 느껴졌다. 보기보다 힘이 좋네.
간부가 아니라 행정 담당의 일반 길드원이랬던 것 같은데, 나름 공략파 출신이라 스펙을 꽤 올린 건가.
그런 한편, 커뮤니티를 통해 나와 교류한 적이 있는 사람은 김준태 말고도 제법 많이 있었다.
“야, 나 싸인 좀!”
“응?”
뿌리염색을 안 해서 푸딩 같은 꼴이 된 노란 머리의 남자가 내게 종이를 건넸다.
“나 1556서버 강태오야, 이번 페스티벌에서 보면 싸인받아간다고 했잖아. 그러니까 빨리 싸인 좀.”
커뮤니티 댓글창에서 자주 봤던 커뮤 망령 중 하나다. 댓글 말투랑 엄청 안 어울리는 얼굴이네.
“그 솔플러가 진짜 왔다고? 비켜 봐, 나도 얼굴 좀 보자.”
그냥 페스티벌 맵이나 좀 둘러볼 셈이었는데, 갑자기 사람이 자꾸 꼬이기 시작한다.
이번에는 사람들과 적극적으로 교류해 볼 생각도 있었지만, 이렇게 들이대니까 엄청 부담스러운데.
인플루언서들이 피곤하다는 게 이런 의미였구나. 신기해하는 눈빛이 무슨 동물원 원숭이라도 보는 것 같네.
“야야, 사람이 구경거리도 아니고 모여서 뭣들 하는 거야. 불편하시겠다.”
내가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자, 덩치 좋은 길드원 한 명이 그렇게 말하며 눈치껏 사람들을 떼어내 주었다.
누군지 모르겠는데, 몸만 봐도 꽤 강해 보인다. 길드마크의 형태가 살짝 다른 걸 보면 간부급인가- 스펙은 어느 정도려나.
“아이고, 길드원들이 실례가 많았습니다. 바쁘실 텐데 지나가시죠.”
딱히 바쁜 건 아니지만, 이 상황이 피곤한 건 맞았기에 적당히 감사 인사를 하고 다른 포탈을 향해 움직였다.
“토너먼트 조별예선 A조시죠? 첫날부터 대진이 꽤 빡세던데, 응원하고 있습니다.”
길드 간부로 보이는 남자는 그런 말을 하며 내 등을 떠밀어 주었는데- 대진이 빡세 보인다고?
나는 무슨 소리인가 싶어서, 오픈 커뮤니티에 올라온 조별예선 대진표를 확인해보았다.
[토너먼트 조별예선 1일차 대진표 (A조)]
이게 어디가 빡세다는 거지.
**
페스티벌의 메인 이벤트라고 할 수 있는 토너먼트는 조별예선부터 시작한다.
5명 정도의 참가자를 한 그룹으로 묶어 대진시키고, 탈락 순서대로 승점을 챙겨 다음 스테이지로 올라가는 방식.
떨어진 사람들도 그대로 끝나는 건 아니고, 패자 그룹에서 맞붙어 승리하면 또 올라올 수 있는 구조라고 한다.
그렇게 조별예선이 끝나면, 본선으로 올라온 인원들끼리 토너먼트식 1대1대결을 통해 승패를 가린다.
스포츠는 잘 몰라서 이걸 무슨 구조라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썩 합리적인 구조는 아니라는 말이 있다.
꼭 우승이 아니더라도 순위에 따라 상품을 받을 수 있기에, 본선 진출을 노리는 도전자들이 꽤 많은데.
예선부터 강한 도전자와 만나 패자조로 내려가고 나면, 승점을 챙기기가 매우 어려워지는 구조라나.
[토너먼트 조별예선 1일 차 대진표 (A조)]
내가 배정된 A조의 대전 상대를 한번 눈으로 훑어 보았다. 빡센 대진이라고 들었는데……잘 모르겠다.
무난하게 1위로 3연승을 하면 본선 진출 확정, 그리고 A조에서 만날만한 다른 강한 도전자는- 별로 없어 보인다.
물론 중간마다 주목받는 루키인 25층의 저층 랭커나, 나름 인지도가 높은 50층의 중층 랭커도 있긴 하지만.
글쎄, 다른 조의 대진을 안 봐서 그런지- 특별히 빡센 대진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도전자들의 이름을 다 외우고 있는 것도 아니기에, 내가 모르는 이름 중 강한 도전자가 있을 수도 있다만.
“모르겠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 예선이 빡셀 것 같지는 않은데, 역시 내 스펙이 과소평가되고 있을 뿐인가.
뭐, 이건 이따가 생각하기로 하고- 슬슬 내가 기다리고 있는 다른 서버의 도전자들이 도착할 때가 됐다.
여러 도전자들이 페스티벌에 일정을 맞춰 다른 서버의 도전자들을 만나서 교류하고는 한다.
이번에는 나도 약속을 몇 개 잡아두었다. 오늘은 몇 명의 도전자와 함께 이벤트 던전을 공략하기로 했다.
당연히 평범한 도전자들은 아니고- 던전 공략도 딱히 평범한 방식으로 공략하려는 게 아니다.
[제1회 주문술사 정모 개최합니다!]
룬 문자등의 정통 마법을 연구하고 있는 도전자들과 함께, 오직 정통 마법만으로 던전을 공략한다.
[천의 마술]을 통해 온갖 마법을 관찰하고, 룬 문자와 주문 언어까지 배워갈 기회다.
**
주문 언어와 룬 문자를 공부해, NPC들처럼 제대로 된 마법을 쓰고자 하는 도전자- 통칭 주문술사들.
소위 말하는 ‘효율적인 스펙업’을 포기하고 낭만을 쫒는 괴짜들이, 이만큼이나 함께 모일 기회는 좀처럼 없다.
약속 장소에 모인 주문술사들의 숫자는 나를 포함해 다섯 명, 딱 파티 하나를 구성할 수 있는 숫자였다.
하지만 이 인원으로 제대로 파티를 구성하는 건, 원래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어흠, 안녕하세요, 아이스메이지 강준호입니다…오늘은 잘 부탁합니다.”
이 모임을 연 사람은 내가 아니라, 저기서 떠듬떠듬 어색하게 자기소개를 한 얼음법사, 강준호 씨.
무려 주문언어와 룬 문자 양쪽을 모두 제법 익혀서, 정통식 마법을 사용해 실전 전투까지 가능한 사람이라고 한다.
바깥 세상에서는 대학원생이었다는데, 마법 쪽으로도 학구열을 불태운 결과인지- 아무튼 이 사람에게선 배울 게 많을 것 같다.
강준호 이외의 다른 세 명도 모두 마찬가지로 마법사 계열 클래스, 사실 원래는 이보다 더 많이 모였어야 하지만.
“다른 분들은 안 오시는 모양이네요.”
“어쩔 수 없죠, 근데 진짜 던전 갈 겁니까?”
“글쎄요, 이대로는 좀 힘들 것 같은데.”
자리에 나온 다른 사람들의 태도가 애매하듯이, 말로만 나온다고 하고 출석하지 않은 이들이 대다수다.
뭐 그렇겠지, 다들 각자 소속된 파티가 있을 테고- 무엇보다 주문술사들끼리 함께 던전을 돈다는 건 말도 안 되니까.
다들 레벨과 스펙도 제각각이고, 클래스는 모두 마법 계열, 파티 밸런스가 전혀 안 맞는다.
거기에 정통 주문과 마법만으로 던전을 깨려 한다고까지 했으니, 무슨 농담처럼 들렸을 것이다.
“그냥 쫑내죠? 어차피 이 멤버로 깰 수 있는 던전도 없을 텐데.”
온 몸으로 ‘그냥 구경할 겸 나와봤다’는 티가 풀풀 나는 남자 마법사가 그렇게 말했다.
“그 누구냐, 솔플한다는 사람도 안 오는것 같고……하긴, 전붕이가 뭔 주문을 배우겠어요, 그쵸?”
나는 아직 내가 서진혁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이런 의욕 없는 사람은 일찌감치 떨어져 주는 게 나으니까.
어차피 나는 원래 솔플러다. 굳이 인원을 채워서 갈 필요도 없고, 마법을 배울만한 상대가 하나라도 있으면 그만이다.
그리고 조금 전부터 여기 자칭 주문술사들의 마력을 읽어 보니……한 명을 빼고는 죄다 엉터리로밖에 안 보인다.
“정 아쉬우면 이대로 같이 식사나 하고 헤어지죠. 사실 저도 파티원들이랑 약속한 게 있어서.”
저기서 나불거리는 남자 마법사와, 그 마법사가 힐끗 쳐다보는 여자, 별말 없이 커뮤니티를 보고 있는 다른 한 명도.
죄다 등신처럼 마력을 질질 흘리고 있다. 저 따위 마력제어 능력으로 무슨 주문을 다루겠다는 건지 원.
“아, 그렇죠, 일정이 있으시면 어쩔 수 없죠……”
하지만 여기, 혼자서만 아쉬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얼음 마법사 강준호는 다르다.
날카롭게 잘 정련된 마력의 질, 체내에 축적하고 있는 마력의 양, 모두 훌륭하다.
“그럼 저도 가보겠습니다, 나중에 기회 되면 또 봐요.”
나는 의욕 없는 세 사람이 떠나도록 내버려두고, 혼자 남은 강준호에게 말했다.
“이제 던전 갑시다.”
내가 당신한테 궁금한 게 아주 많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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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 저평가
강준호의 인상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어딘가 아파 보이는 사람이다.
우습게도, 시련의 탑에서 이런 인상을 가진 사람은 정말 보기 힘들다.
시련의 탑에서 제공하는 스탯과 자연 회복력이, 도전자가 가진 여러 신체적 문제를 해결해주기 때문이다.
척추 측만증이라던가, 손목 터널 증후군이라던가, 거북목이라던가, 인대 손상이라던가- 그런 고질병들은 물론이요.
면역력 상승에 따라 감기 같은 여러 잔병치레에서도 해방되고, 영양 불균형과 수면 부족같은 사소한 것들도 낫게 된다.
탑의 초대장이 몇몇 사람들에게 인생 역전의 찬스로 불리는 것에는 이런 점도 크게 한몫을 하고 있다.
랭커들의 무료 버스를 타서 레벨을 조금만 올려도, 현대 의학의 한계를 뛰어넘는 의료 케어 풀코스를 받는 셈이니까.
하지만 강준호는 제법 레벨이 있는 도전자임에도 불구하고, 시들시들한 허수아비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눈 밑에는 다크서클이 퀭하고, 팔다리는 근육이 제법 잡혀 있음에도 젓가락처럼 연약해 보이는 게, 딱 병자 꼴이다.
아무리 마법사 클래스라고 해도, 어느 정도의 [근력]과 [내구] 스탯은 갖춰져 있기에- 저러기도 힘들 텐데.
아니, 애초에 다크서클은 대체 어떻게 생긴 거야?
초인의 경지에 이른 시련의 탑 도전자는 수면이 거의 필요치 않은 몸이고, 이 정도 레벨이면 더더욱 그렇지 않나?
“저희끼리 던전을 가자고요?”
“네, 그러려고 모인 거잖아요.”
강준호는 목소리마저 시들시들했다. 사람 목소리가 시들하다는 게 무슨 소리인가 싶겠지만, 진짜로 딱 그렇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체내에 머금고 있는 마력은 매우 잘 다듬어져 있다. 신체는 시들시들해도 마력은 활기가 넘친다.
겉보기에는 이래도, 마력을 선명하게 감지할 수 있는 나에게는 이 사람이 오히려 훨씬 강인하게 느껴진다.
“그렇긴 하죠, 그렇지만 정통 마법이 아니더라도……두 명이서 던전 클리어는 많이 힘들 텐데요.”
“제가 그런 거 많이 해봐서 아는데, 할 만 할 거예요.”
“많이 해보셨다고요? 페스티벌은 이제 막 열렸는데……아, 혹시 랭커 분이신가요?”
페스티벌이 이제 막 열렸는데, 어떻게 던전을 많이 돌아봤다는 거냐- 그게 가능한 경우는 한 가지뿐이다.
3년 전에 이미 페스티벌에 참가해 본 경험이 있는 고레벨 플레이어일 경우, 하지만 나는 좀 다르다.
이전 페스티벌에 참가해 본 건 맞지만, 그때도 던전은 그렇게 많이 안 돌아봤었지. 도중에 하차하기도 했고.
“그건 아니고요, 제가 솔플 많이 해봤거든요. 두 명이면 차고 넘치죠.”
“솔플……어, 어어, 설마.”
피로에 절은 두 눈을 번쩍 뜬 강준호가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원래는 ‘예 제가 바로 그 서진혁입니다’ 뭐 그렇게 말할 셈이었지만, 막상 입 밖으로 내자니 좀 오글거렸다.
“예 그거 맞고요……됐으니까 파티 신청이나 해보세요. 이거 어떻게 하는건지 다 까먹었네.”
그냥 빠르게 파티 신청을 하고, 그대로 강준호의 뒷덜미를 끌고 가까운 포탈로 입장했다.
**
나와 강준호가 들어온 던전은 [죽음 숭배자의 신전]이라는 곳이었다.
70레벨대인 내가 들어오기에는 좀 급이 높은 던전이었지만, 어차피 내 스펙은 그보다 훨씬 높으니 상관없다.
그리고 뜻밖에 강준호도 레벨이 꽤 높은 편이어서, 이 정도면 정말로 차고 넘칠 것이었다.
“진혁 씨……라고 부르면 될까요? 진혁 씨는 레벨이 혹시 어떻게 되세요?”
“74요, 레벨보다 스펙 좀 높은 편이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그래도 저희 2인인데 좀 힘들지 않을까요, 여기 레벨 컷이 80 이상인데요.”
하지만 강준호는 당연히 불안해했다. 내 스펙은 이미 80레벨도 가볍게 넘는 수준이건만.
그 때였다, 던전 바닥이 진동하기 시작하더니- 이내 지면에서 큼직한 골렘 한 마리가 솟아올랐다.
이곳의 주요 몬스터인 [신전의 수호골렘]이다. 강준호는 재빨리 지팡이를 들어 올리고 캐스팅을 시작했다.
그런데 내가 기대한 것과는 다르게, 정통 주문이 아닌 평범한 도전자처럼 스킬을 쓰고 있었다.
“진혁 씨, 탱만 잠깐 서주세요!”
“안 설 건데요.”
“네?”
당연하다는 듯이 딜러와 탱커로 역할을 구분하려는 강준호를 무시하고, 뒤로 뛰었다.
강준호도 캐스팅을 취소하고 재빨리 물러났다. 그런데, 그렇게 황당하다는 듯이 노려볼 것까지야 있나.
우리의 계획은 전원이 마법사인 파티로 입장해서, 주문 언어와 룬 문자를 사용한 정통 마법을 시험하는 것 아니었나.
그런 마당에 나한테 전사의 역할을 기대하면 안 되지, 나도 지금은 주문술사- 마법사라고.
“매직 미사일.”
-쾅!
이제는 무척 익숙해진 기초 마법을 빠르게 캐스팅해, 겉으로 보이지 않는 핵을 단번에 노려 맞췄다.
매직 미사일은 단순하기 짝이 없는 기초 공격 마법이지만, 이렇게 마력을 대량으로 담아서 쏘면 제법 위력이 나온다.
거기에 마법진을 살짝 개량해서 관통력을 더 높이는 것으로, 제법 단단한 골렘을 일격에 쓰러트릴 수 있었다.
“주문술사끼리 모여서 던전 깨자면서요, 스킬 쓰지 말고 주문으로 캐스팅하셔야지.”
나는 이번 던전 공략에서 검과 방패 모두 쓰지 않을 생각이다, 몽둥이로 더 많이 쓰던 미스릴 완드만이 이번의 주 무기.
-쿵쿵쿵!
큰 소리가 울리며 몇 마리의 골렘이 추가로 나타났다. 보행형이 아닌 날아다니는 가고일 골렘까지 함께 출현했다.
내가 손짓하자, 강준호는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마침내 기다리던 주문 캐스팅을 개시했다.
허공에 그려지는 룬과, 입으로 중얼거리는 주문 언어, 그리고 만들어진 마법진.
“아이시클 랜스!”
쏘아지는 마법의 구조를 [천의 마술]이 모두 풀어낸다. 그렇지, 이게 마법이지.
연속 발사된 얼음의 창이 골렘들을 꿰뚫고, 강준호는 다시 한번 같은 마법을 캐스팅해 발사했다.
나도 몇 가지의 기초 마법을 함께 사용하며 강준호가 마음껏 주문을 쓸 수 있도록 서포트했다.
그리고 동시에 관찰하며, 관측하고, 해석하여, 이해한다. 그렇게 마지막 한 마리의 골렘이 남았을 때였다.
“아, 이번엔 제가.”
나는 강준호를 뒤로 물리고, [천의 마술]을 통해 여러 번 관측하며 뜯어본 룬을 허공에 그려내었다.
구조는 완벽하게 이해했다. 요령은 부족하지만 어설픈 부분은 [마력 지배]의 정교한 컨트롤과 출력으로 메운다.
“아이시클 랜스.”
생선된 마법진이 큼지막한 얼음의 창을 토해내고, 쏘아진 창은 골렘의 핵을 정확하게 뚫고 붉은 이펙트를 터트렸다.
함께 던전에 들어온 지 10분째, 나는 강준호의 주문 하나를 베끼는 것에 성공했다.
**
던전의 보스인 [고위 죽음 숭배자]의 머리통에 큼지막한 바위 하나가 떨어졌다.
사지가 모두 불로 그을린데다가, 머리에 얼음송곳이 하나 박혀 있었고, 여기저기 관통상까지 입었던 보스는 그대로 머리가 깨졌다.
곧 던전 클리어 메시지가 나타나며, 인벤토리에 [페스티벌 코인]을 포함한 보상들이 주르륵 들어왔다.
2인 파티인데다가, 스킬을 자체 봉인하고 정통 마법만 쓴다는 패널티가 있었음에도, 우리의 클리어 타임은 평균보다 빨랐다.
쉴 새 없이 주문 마법을 쏟아내던 강준호는 그대로 맥이 풀린 듯,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으아~ 깼다!”
강준호의 표정은 더 이상 병든 환자처럼 시들시들하지 않았다. 아드레날린이 팍팍 돈 모양이다.
“흐아……전 이게 진짜 될 줄 몰랐어요. 솔직히 처음 계획부터 제대로 공략하긴 힘들 것 같았거든요.”
강준호는 시원한 웃음을 지으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근데, 진짜, 캬…진혁 씨 진짜 나빴네. 마법사로 클래스 바꾼 거 여태껏 숨긴 거예요? 완전 속았네?”
이번 던전 공략에서 나는 강준호의 마법을 무척 많이 베껴내었다. 하지만 마법적으로 이득을 본 건 강준호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마법을 잘 쓰지 못할 뿐이지, 마력을 다루는 기술 자체는 매우 뛰어나다. 그렇기에 강준호에게 여러 조언을 해 줄 수도 있었다.
이를테면 감지를 펼쳐 골렘의 핵을 단번에 찾는 방법이라던가, 흘러나오는 마력을 정돈하는 방법이라던가, 그런 것들.
거기에 마법을 하나하나 베껴서 그대로 쓰는 모습까지 보여줬더니, 강준호는 이제 내가 마법사 클래스라고 믿고 있었다.
뭐, 그렇겠지. 세상에 어느 전붕이가 이 정도로 마력을 다루겠어. 정통 마법은 말할 것도 없고.
“그래도 다행이다, 진혁 씨 오늘 토너먼트 나가죠? 예선 A조던데.”
“예, 그쵸.”
“전사였으면 대진 꽤 빡셌을거예요, 예선치고 엄청 힘들겠던데.”
강준호는 뜬금없이 토너먼트 대진 이야기를 했다. 전사였으면 대진이 빡셌을 거라니. 이유가 뭘까.
“이거 보세요, 고스펙 근접 계열이랑 광역 위주 마법사 클래스랑 막 섞여 있잖아요. 이러면 전사는 힘들죠.”
가만히 들어 보니, 일반론에서 비롯한 상성 이야기였다. 5인 조별 경기에서 이런 구성은 전사에게 힘들다고.
전사와 마법사 클래스가 1대1이면 전사가 좀 더 유리하지만, 이런 난전 상황에서는 마법사가 훨씬 유리하다나.
듣자하니 꽤 일리가 있는 이야기였다. 평범하게 생각해보면 보통은 그렇겠지, 보통은.
“그래도 마법 쓰시는 거 보니까, 어디……이렇게만 가면 승점은 충분히 챙기실 수 있을 것 같아요.”
강준호는 던전을 공략하는 사이 내게 친밀감이 꽤 쌓였는지, 아예 전략적인 승점 획득 방식까지 조언해주었다.
욕심내지 말고 특기를 살려 2등만 노리면, 안정적으로 승점을 챙겨 본선 진출을 확정 지을 수 있을 거라고.
“이따가 경기 보러 갈게요.”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커뮤니티 특유의 호들갑을 제외하면, 나를 향한 냉정한 평가는 꽤 낮다는 것을.
하긴, 커뮤니티의 여론이 꼭 실제 여론과 일치하는 건 아니지.
우승후보라고 했던 건 그냥, 소위 말하는 커뮤니티 한줌단들의 농담 섞인 ‘억빠’였다.
“예선은 살살 하려고 했는데, 안 되겠네.”
오늘 예선에서 나 만나는 놈들은, 그냥 운이 나빴다고 생각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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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 역배
사실, 토너먼트는 시련의 탑 최강자를 뽑는 천하제일 무술대회 같은 게 아니다.
물론 이벤트의 원래 취지는 그런 것이었겠지만, 대형 길드간의 조율로 현재는 유망한 신인들을 위한 대회가 된 상태다.
그도 그럴 것이, 대형 길드의 간부중에는 거의 십 년을 탑에 체류하고 있는 미친 녀석들도 있기 때문이다.
시련의 탑 내부의 사회 안정을 도모한다며, 스스로 탑에 남기로 한 자경단 같은 녀석들.
도전자들에게 반쯤 NPC 취급을 받는 그 ‘고인물’들이 출전한다면, 당연히 그놈들 중 하나가 우승할 테니까.
그래서, 한번 본선에 진출했던 도전자는 다음 회부터는 출전하면 안 된다든가……뭐 그런 암묵의 룰이 형성된 상태다.
그런고로, 내 경쟁자이자 이번 토너먼트의 우승후보 중에도 대형 길드의 간부 같은 놈들은 딱히 없다.
물론, 대형 길드에 소속되지 않은 상층 랭커들 몇몇이 출전하긴 했다. 모두 우승후보 1,2위를 다투는 놈들이다.
당연히 내 예선 상대 중 대단한 놈은 딱히 없다. 상층 랭커는 전혀 없지만, 그래도 중층 랭커는 조금 있는 정도.
하지만 강준호의 이야기를 들어 보니, 내가 그런 중층 랭커들을 이길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았다.
주로 꼽는 이유는 당연히 스펙의 문제, 내 클래스가 아직도 노멀 클래스 전사라는 사실이었다.
몇 년 동안 커뮤니티에 뿌리박힌 전붕이 멸시는 어디 가질 않는 것이다.
예전에 공개한 내 스펙이 대단했다는 점이나, 온갖 보스를 솔플로 격파했다는 사실도 사람들을 설득하진 못했다.
애초에 솔플을 해 본 사람이 없으니, 대단하다 대단하다 하지만 그게 얼마나 어려운지 잘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그나마 설득력이 있는 월드 보스 격파 기록도, 온갖 공략을 끌어모으고 엘리트 NPC들의 협력까지 이뤄 달성한 결과였으니까.
9층이라는 매우 낮은 층에서 출현했다는 이유로, 쓰러트린 월드 보스의 강함 자체를 크게 내려쳐 보는 이들도 많았다.
게다가, 현세대 시련의 탑 도전자들은- 9층에서 공개했던 내 스펙조차 제대로 해석하지 못하고 있었다.
[근데 진혁이 존나 잡캐네 스킬이 왜이럼 ㅋㅋ]
액티브 스킬은 거의 없고, 높은 내성 수치와 온갖 내성과 무기술등의 패시브 스킬로 도배된 내 스킬창.
스킬북을 통해 효율 좋은 스킬을 골라 익히는 대부분의 도전자는, 내가 가진 스킬들의 의미를 알지도 못했다.
아예 몇몇 스킬들은 ‘왜 전사가 이딴 스킬이 있음? 이라며 웃음거리로 취급하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토너먼트 조별 예선 참가하시는 분이신가요?”
“예.”
“사용하실 장비랑 아이템 여기에 적어주세요.”
강준호와 헤어진 뒤, 나는 간단한 준비를 마치고 토너먼트 경기를 위한 대기실에 입장했다.
대기실 앞에서는 길드 관계자가 접수원 역할을 하며, 참여자의 아이템 명단을 정리하고 있었다.
모든 참가자는 이 종이에 토너먼트에서 사용할 아이템의 목록을 기입해야만 한다.
시스템상으로 있는 제약은 아니고, 토너먼트의 공정성과 재미를 위해 자체적으로 준비한 조치라고 한다.
소비 아이템은 스탯 버프류와 회복류를 가리지 않고 딱 두 개까지만, 무기는 미리 등록한 것 외에는 스위칭 금지.
방어구와 무기는 입장할 때 장비 상태를 보여준 것이라면 따로 등록하지 않아도 사용할 수 있다.
“여기요.”
나는 살짝 웃으며 텅 빈 종이를 돌려주었다. 접수원은 주민센터의 공무원처럼 한숨 쉬며 말했다.
“하아…등록하실 아이템 하나도 없어요? 지금 장비하신 것 외에는 금지되시는데, 그 상태로 나가실 거예요?”
접수원이 이렇게 말한 이유는 단순하다. 내가 이곳에 오기 전에 한 작은 ‘준비’ 때문이다.
“네, 이대로 나갈 건데요.”
현재 내 차림은 흰색 셔츠와 검은색 바지 하나- 가벼운 방어구도 무기도 없는 맨몸이다.
존재감을 각인시키기에는 이만한 퍼포먼스가 또 없겠지.
**
토너먼트의 승리 룰은 간단하다, 상대를 무력화시키면 승리.
시스템적으로 이 ‘무력화’ 는 그 수단을 가리지 않는다. 죽여버리건, 기절시키건, 도전자 마음대로.
물론 대형 길드끼리 합의한 사안으로, 상대 도전자를 사망에 이르게 할 경우 ‘처벌’이 내려지게 되어 있다.
애초에 시스템상으로 상대 도전자를 죽이기도 쉽지 않다. 무력화 판정이 내려지면 자동으로 경기가 종료되니까.
거기에 장외 판정도 있다는 것 같고, 항복을 선언하면 경기가 종료되기도 하고……아무튼 그런 룰이다.
[3분 후, 토너먼트 개인전 부문, A조 예선 1라운드가 시작됩니다.]
시스템 메시지가 곧 경기가 시작된다는 사실을 알리고 있다. 나는 지금 경기장 한쪽 끝에 서 있다.
예선을 보러 온 도전자의 숫자는 프로야구 관중 수준이 우스워 보일 정도, 멀리서 들리는 목소리들이 소란스럽다.
그리고 내가 띄워놓은 오픈 커뮤니티의 [중계] 탭도 소란스럽게 페이지를 갱신하고 있었다.
[진혁게이 떴냐 ㅋㅋㅋㅋ]
[다섯명중 누가 진혁이임?]
[전굽지말고 빨리시작해라]
[저거 장비 숨기려는거임?]
[오늘 경기 몇번있음?]
[솔플러새끼 3위예상한다 ㅋㅋ]
[오늘 경기 배당률.jpg]
역시 나를 향한 주목도가 압도적으로 높다. 하지만 내 얼굴을 아는 사람은 없는 상태.
그래도, 소거법으로 아무 장비도 착용하지 않은 내가 ‘서진혁’일 것으로 예측하는 이들은 꽤 있었다.
[1분 후, 토너먼트 개인전 부문, A조 예선 1라운드가 시작됩니다.]
카운트다운이 시작되며, 각 도전자들 앞에 있던 가림막이 사라지고 서로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됐다.
“이야~ 드디어 그 유명하신 솔플러 얼굴을 보는구만!”
내 맞은편에 있는 중년의 남자가 히죽대며 그런 말을 내뱉었다. A조 예선 1라운드의 1위 후보로 유력한 사람.
그리핀 길드에서 운영하는 경기 예상 토토의 배당률과 예측 순위에 따르면- 저 사람이 1위고 내가 2위다.
25층에서 장기간 체류한 저층 랭커 출신, 최근에 25층 플로어를 졸업하고 빠르게 50층 직전까지 도달했다고 한다.
거기에 클래스는 전직 조건이 까다롭지만 1대1에 강하기로 유명한 전사 계열 레어 클래스인 중장기사.
“근데 왜 장비를 숨기고 그래, 어차피 근접 전붕이 아니야? 남자답게 뜨자고!”
남자는 파이팅 포즈를 취하며, 오른손의 전투망치를 높게 치켜들었다. 시간이 됐다.
[경기가 시작됩니다.]
경기 시작과 함께 [신속]을 발동하고, 정면으로 도약해 상대와 거리를 좁혔다.
장비를 숨기긴 누가 숨겨, 명치 딱 대라.
-꽈앙!
“꺾!”
예측 순위 1위의 중장기사는 가장 먼저 탈락했다.
**
마력강화나 오러는 사용하지 않았다, 마력도 거의 쓰지 않았다.
당연히 아이템 효과도 없이, 순수한 피지컬만으로 명치를 갈겨서 기절시켰다. 1초도 걸리지 않았다.
예선 상대들의 수준은 이미 가림막이 사라지기 전부터, 마력감지를 통해 대충 눈치채고 있었다.
체내의 마력량으로 보아 모두 나보다 스펙이 낮고, 어설픈 근육의 움직임을 보면 실력도 형편없다.
딱히 이들을 무시하는 건 아니다. 그냥 어이가 없는 거다.
이런 녀석들을 상대로 건실하게 승점을 챙겨 올라가라고? 전붕이라 상성이 나쁠 거라고?
웃기고 앉았다, 수준 차이가 너무 심하지 않나.
-쾅!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배당률 1위 후보를 기절시키고, 바로 땅을 박차서 다른 도전자에게 달려들었다.
나를 이어서 예측 순위 3위, 화염술사 클래스의 마법사는 내 속도에 반응도 못 하고 있었다.
조금 전의 전사보다 몸빵이 약할 것 같으니, 살짝 힘을 빼고 명치 한 방.
-꾸웅!
“헉…!”
허파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그대로 기절, 다시 땅을 박차서 다음 상대에게로.
큼직한 대형 방패를 들고 있어서 얼굴도 안 보인다. 그대로 방패 위로 힘차게 주먹질 한 방.
-콰앙!
방패가 산산이 조각나며, 상대는 폭발음과 함께 그대로 멀리 날아갔다. 남은 건 이번에도 마법사.
본선 진출은 꿈에도 꾸지 않고 있었을 저스펙, 예측 순위 최하위의 도전자- 마찬가지로 주먹질 한 방.
-퍼억!
“으겍!”
나 이외의 모든 도전자가 전투불능이 됨에 따라, 경기 종료를 알리는 시스템 메시지가 나타났다.
각 도전자당 1초에서 0.5초씩, 총 경기 시간 합계 3.8초. 팝콘 한 알을 먹을 시간도 없는 역대 최단시간 경기.
눈 깜짝할 사이에 끝나버린 경기를 보며 관중들은 잠시 얼어붙었고, 뒤늦게 환호성을 내질렀다.
-와아아아아아!!!
그 환호성을 만끽하며, 나는 경기장 위에서 약간의 웃음을 띠며 셀카 겸 캡쳐를 찍었다.
1위를 한 나를 제외하고, 나머지 도전자들의 순위는 쓰러진 순서대로 판정되니까- 최하위 도전자가 2위로 승자조 진출.
승자조 진출을 예측하는 스포츠 토토는 역대 최고의 역배를 터트린 셈이다. 나는 커뮤니티에 바로 글을 썼다.
[작성자 : 서진혁#2661]
[제목 : 역배충 병신 토쟁이새끼들아]
(사진)
어 형이야
빨아야겠지?
그리고 곧바로 무수한 개추와 쪽지의 세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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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느린 발을 향한 저주
날 위해 마련된 침대 위에서 잠시간 몸을 뒤척였다.
이렇게 가만히 드러누워서 시간을 보내는 것은 정말 오랜만이다.
물론, 시간을 보냈다고는 해도 이제 기껏해야 30분 정도가 지났다. 이 이상은 좀이 쑤셔서 가만히 있기 힘들다.
엘레노어의 정혼자 자리를 두고 펼쳐진 결투는 내 승리로 마무리되었다.
마력강화의 출력을 무리하게 높인 반동을 받은 메르세데스는, 불굴을 발동시킨 나를 이길 수 없었다.
그 뒤로 몇 합을 더 나누다 승패가 갈렸고, 나는 다크엘프들에 의해 마을로 옮겨져 이렇게 혼자 남았다.
뭐, 싸움에서 이긴 이상 내가 해야 할 일은 더 없는 게 당연하다.
사실, 따지자면 나도 엘레노어의 챔피언 같은 역할이었던 거니까. 사후처리는 엘레노어가 알아서 할 거다.
결투의 승리자로서 해야 하는 게 몇 개 있다고는 하던데, 중환자에게 굳이 시킬 만큼 중대한 일은 아니라는 모양이고.
그렇게 나는 혼자만의 휴식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된 거다.
“그럼, 일단.”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그냥 쉬고 있을 생각은 없다.
우선은 결투의 복기부터.
결투에서 이기긴 했지만, 내가 메르세데스를 뛰어넘었느냐 한다면 그건 또 아니다.
메르세데스는 왕자 녀석에게 갑작스레 불려 결투에 임하게 됐다. 그런 만큼 무장 상태도 형편없었다.
주무기인 검은 갖고 있었지만, 근접 전사에게 또 하나의 무기나 다름없는 방패가 없는 상태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어떤 방어구도 없이 불편한 정복 차림으로 싸움에 임했다.
7층에 들어왔을 때 보았던 무장한 모습과 비교하면 분명 전투력이 떨어진 상태에서 싸움에 임한 거다.
거기다가 녀석은 처음부터 엄청나게 방심하고 있었다.
내가 움직임을 파악하고 따라가기 전까지, 녀석은 한 손은 뒷짐을 진 채 싸우고 있었다.
만약 처음부터 마력강화를 한 채 싸움에 임했으면 결과가 어떻게 됐을지 모른다.
심지어 후반에는 귀를 베인 것으로 이성을 잃고, 기술의 날카로움을 잃은 채 날뛰어 댔었다.
뭐, 그건 그쪽의 잘못이니까 내 감점 요소는 아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80점 정도라고 쳐줄 수 있겠지.
문제는 내가 그 전투에서 보인 퍼포먼스를 다시 재현할 수 없다는 것이다.
“텅 비었네.”
나는 바로 조금 전까지, 침대에 누워서 인벤토리의 아이템을 정리하고 있었다.
가득하던 재료 아이템은 물론이요, 예비용으로 준비해 뒀던 방어구와 무기 대부분을 잃었다.
대부분은 어차피 안 쓰던 물건이었지만, 그렇다고 쉽게 손에 넣을 수 있는 물건들도 아니다.
아이템을 쏟아부어 시야를 가리고, 억지로 빈틈을 만드는 전략.
이 전략의 문제점은 잡템이건 뭐건 아이템을 너무 많이 소비한다는 것이다.
어처구니없는 위력의 공격을 막아내기 위한 일회성 방패로 동원한 결과, 장비들의 내구도가 순식간에 갈려나갔다.
특히, 기본 내구도가 낮았던 저층에서의 전리품들은 산산조각이 나서 수리도 불가능하게 되었다.
1층에서 7층까지 올라오며 긁어모은 아이템을 고작 한 번의 싸움에 소모하고 만 것이다.
[시련의 탑#2661 (1/1)]
만약 언젠가 이 탑에 다른 도전자가 들어온다면, 그 많은 자원을 싹 쓸어다가 내다 버린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새삼 뉴비가 들어올 리는 없겠지만……”
당연히 좆같은 새끼라고 생각하겠지, 사실 어떻게 생각하든 아무 상관 없지만.
좆같으면 뭐, 지가 어쩔건데.
**
쓸데없는 생각은 그만두고, 다시 정리하자. 일단 인벤토리를 이용한 전략은 괜찮았지만 다시는 못 쓴다.
아이템을 대량으로 소비한다는 문제점도 있고, 애초에 상대가 전사여서 쓸 수 있었던 수다.
만약 메르세데스가 마법사였다면, 그냥 범위가 넓은 마법 한방으로 아이템을 싹 날려버릴 수 있었을 테니.
그리고 전사라도 오러 마스터리 같은 스킬을 갖고 있으면, 넓은 범위를 공격할 수도 있다.
애초에 메르세데스보다 강한 고층의 적이 상대라면 전사건 뭐건 간에 통하지 않겠지.
뭐, 공략이라는 게 다 그렇지.
상대가 누구건 간에 다 통하는 공략법 같은 건 없다. 이번 전략은 메르세데스 맞춤 공략이었던 거다.
쓸 수 있는 수단을 이번에 다 퍼부었으니, 나는 이번 결투에서 소위 말하는 ‘영끌’을 한 셈이다.
그 결과, 나는 평소보다 더 강한 150%의 전력을 발휘했고.
메르세데스는 방심이나 무장 상태의 문제 등으로 80%의 전력밖에 내지 못했다.
그러고도 무척이나 힘들게 이겼으니, 메르세데스를 능가했다고는 할 수 없는 거다.
앞으로 더 단련에 매진해야겠지.
적당한 높이의 벽을 마주하는 것은 강력한 성장의 동력이 된다. 그 벽 너머를 잠시나마 엿보았다면 더더욱.
일단 일차 목표는 마력의 감응과 운용 수준을 더 높이는 것으로 삼자.
메르세데스는 내가 충분히 넘어설 수 있는 벽이다.
다음에는 내 100%로 너의 100%를 능가하고 말겠다. 그리고, 그 때에도 계속 시비를 건다면-
나머지 귀 한쪽도 마저 잘라주마, 깐프 년아.
**
결투의 복기와 반성을 대충 마치고, 남는 시간은 모조리 명상에 투자했다.
마력감응와 마력운용의 레벨을 끌어올리는 것이 당장의 목표이기도 하고, 마력강화의 위력까지 몸소 겪어본 참이니.
하지만 아무리 해도 이놈의 명상은 좀처럼 잘되질 않는다. 엘레노어가 말한 마음의 혼란이 원인일 것이다.
마음이 혼란하면 마력도 함께 혼란해진다고 했던가.
나는 일차원적인 욕망의 덩어리다. 하지만 나는 그런 내가 싫다. 확 죽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죽어서는 안 된다. 이 탑을 뚫고 나가야만 하니까.
이 모순의 심리를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 마력을 완벽하게 다루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런 걸 핑계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신을 생각하면 또 혐오감이 차오르니.
별다른 성과가 없는 명상을 미련하게 반복하게 된다.
“후우……”
잠시 눈을 떠서 숨을 내쉬고 보니, 어느새 바깥은 밤이 되어 있었다.
명상을 하다 보면 시간이 빨리 가는 것 같다. 내가 그만큼 명상에 집중하고 있다는 뜻이려나.
그런데 엘레노어는 아직도 안 돌아왔나. 결투의 사후처리에 시간이 좀 걸릴 거라고 하긴 했는데.
뭐, 그 변태 엘프가 방해하지 않으면 나야 좋은 일이지만.
그래도 평소 이맘때쯤이면 시련의 탑에서 있었던 일을 풀어놓곤 했었는데, 괜히 허전하다.
“아니, 뭔 소리야.”
허전하면 안 되잖아, 역시 슬슬 맛이 가기 시작했어. 빨리 8층으로 올라갈 필요가 있겠다.
8층에서도 엘레노어는 만나게 되겠지만, 배경상 이렇게 여유를 부릴 일은 없을 테니.
그 때, 인상에 깊이 남은 강한 기척이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끼익.
문이 열리고, 엘레노어가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들어왔다.
“그대, 자고 있는가?”
몇 번이나 생각하는 거지만, 역시 엘레노어의 기척은 유독 알기 쉽다.
**
워낙에 격한 전투였다 보니, 엘레노어는 내가 누워 있을 거로 생각한 모양이다.
“아니, 들어와.”
평소의 네글리제 차림이 아닌 걸 보니, 결투의 사후처리를 마치고 곧바로 온 모양이다.
솔직히 이젠 네글리제 차림이건 뭐건 크게 신경도 안 쓰이지만 말이다.
“깨어 있었나, 지쳤을 텐데 왜 쉬지 않고.”
“이 정도로 지치기는.”
“휴식은 중요한 거다. 그대라고 다르지 않을 거야.”
엘레노어는 옅게 웃으며 내 옆에 앉았다. 이것도 그동안 꽤 익숙해져서, 신경 쓰이지 않았다.
“덕분에 그놈과의 약혼은 제대로 파탄 났다. 숲쟁이들과의 화친도 순조롭게 어그러진 것 같고, 의뢰 완료구나.”
그 말대로, 퀘스트 창에는 [다크엘프의 서 - 1장]이 완료되었으며 보상을 준비 중이라고 나타나고 있었다.
“아, 약속했던 답례는 그대가 딱 좋아할 만한 걸로 준비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고.”
사실, 그동안 보상에 관한 부분은 반쯤 까먹고 있었다.
특별히 뭘 준다고 약속한 것도 아니고, 커뮤니티의 다른 도전자들과 같은 보상을 줄 것 같지도 않다.
그리고, 별 대단치 않은 보상을 줘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나도 모르겠다.
“이제부터는 그대가 원하는 대로 하면 된다.”
어느새 좀 더 가까이 달라붙은 엘레노어가 따뜻한 숨을 뱉었다.
침대를 짚고 있던 내 손 위로 엘레노어의 손이 겹쳤다.
“이곳에 계속 있는 것도, 떠나는 것도, 모두 그대가 선택할 수 있어. 그대는 정식으로 내 정혼자가 되었으니.”
엘레노어는 약혼을 깨달라고만 했지, 그 후에 뭘 어떻게 해달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정혼자의 자리를 꿰찼지만, 이대로 그냥 떠나도 아무 상관 없다.
원래부터 그런 계약이었으니.
그리고 반대로 떠나지 않고, 이대로 엘레노어와 함께 살아도 된다.
“정말이지, 보면 볼수록 내 취향이란 말이야. 몇백 년이 지나도, 그대만 한 이상형은 나타나지 않겠지.”
그렇잖아도 가까웠던 엘레노어의 얼굴이 더 가까워진다. 입술이 닿기 직전의 거리까지.
그리고, 딱 그 자리에서 멈춘다.
“떠날 생각이구나, 그대.”
“어.”
“그래, 그런 눈을 하고 있었으니.”
엘레노어는 알고 있었던 것처럼 담담히 말했다. 별로 아쉬워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내가 이곳을 떠나는 걸 잠시나마 아쉬워했다는 것을 눈치채고, 그것만으로 만족한 것처럼.
엘레노어는 언제나 이렇다. 그냥 변태처럼 보여도, 신기할 정도로 깊게 생각한다.
“쳇, 분위기 타서 입맞춤 한 번 정도는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래, 이런 점까지도 이제는 익숙하다.
너무나 많은 부분이, 익숙해지고 말았다.
더는 용납하기 힘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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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 별격
오픈 커뮤니티가 전에 없던 기세로 불타오른다.
파격적인 모습을 보여줬으니 당연한 일이지만, 이렇게 인기글이 빠르게 갱신되는 건 아예 처음 보는 것 같다.
심지어 그 인기글 대부분이 나를 언급하다 못해, 온갖 주접을 떨며 찬양하는 내용이었으니.
[작성자 : 강진수#2521]
[제목 : 오늘부로 서진혁 지지를 철회한다]
(사진)
오늘부터 지지관계에서 벗어나 서진혁과 나는 한몸으로 일체가 된다 서진혁에 대한 공격은 나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한다
세상에 70억 명의 서진혁 팬이 있다면, 나는 그들 중 한 명일 것이다.
세상에 1억 명의 서진혁 팬이 있다면, 나 또한 그들 중 한 명일 것이다.
세상에 천만 명의 서진혁 팬이 있다면, 나는 여전히 그들 중 한 명일 것이다.
세상에 백 명의 서진혁 팬이 있다면, 나는 아직도 그들 중 한 명일 것이다.
세상에 한 명의 서진혁 팬이 있다면, 그 사람은 아마도 나일 것이다.
세상에 단 한 명의 서진혁 팬도 없다면, 나는 그제서야 이 세상에 없는 것이다.
서진혁, 나의 사랑. 서진혁, 나의 빛. 서진혁, 나의 어둠. 서진혁, 나의 삶.
서진혁, 나의 기쁨. 서진혁, 나의 슬픔. 서진혁, 나의 안식. 서진혁, 나의 영혼.
서진혁, 나.
- 대 진 혁
- 역배의 신 ㅋㅋㅋㅋ
- 그 좆같은새끼를 뭐가좋다고빠노
- ㄴ 정배충 기습출현 ㅋㅋㅋㅋ
- ㄴ 꺼어어어어억~~잘먹고 갑니다~~~
- 어제 서진혁 카페 다녀왔습니다
- 솔직히 한번정도는 빨아줄수있음
이야, 탑에 들어오기 전에 봤던 온갖 주접 템플릿들이 죄다 모여 있구만.
물론 커뮤니티에 이렇게 ‘빨아주는’ 녀석들만 있는 건 아니다. 역배를 터트린 녀석이 있으면 정배가 망한 놈도 있는 법.
당장 이 밑만 해도 [이 씨발 개좆같은새끼 죽이고싶으면 개추 ㅋㅋ] 라는 제목의 글에 내 사진이 박혀 있으니까.
물론 진심으로 하는 말은 아닌 것 같고, 이런 사태를 만들어낸 내 무력을 향한 관심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렇게 경기를 마치고, 다시 대기실로 돌아왔다. 아직 예선전 경기는 두 번이 더 남아 있다.
“서진혁 씨.”
그런데, 대기실로 돌아오니 누군가 모르는 사람이 나를 불렀다. 한 명도 아니고 세 명이다.
무장은 하지 않았지만, 입고 있는 옷에 똑같은 마크가 붙어 있다. 그리핀 길드를 상징하는 마크다.
마크의 형태가 조금 다른 걸 보니, 뭔가 특이한 일을 맡은 녀석들이거나- 길드의 간부급이 분명하다.
“뭡니까.”
그리고 내 예상으로는 후자가 확실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녀석들……하나하나가 상당히 강해 보인다.
다른 어중이떠중이들과는 다르게 마력을 거의 흘리지 않고 있고, 걸음걸이와 중심을 정확하게 유지하고 있다.
맨 앞의 남자는 짧은 직검을 쓰는 전사, 그 뒤의 다른 남자는 둔기류를 사용하는 근접계, 맨 뒤의 여자는 마법사가 분명하다.
보유하고 있는 마력의 총량, 그리고 각자 유지하고 있는 묘한 간격이 그 증거다. 그런데 이 녀석들이 나를 왜 찾아왔지?
“그, 스포츠 토토 때문에 드릴 말씀이 있어서……”
“아.”
얘네가 그 스포트 토토 관리자들이었구나.
**
그리핀 길드의 간부들은 자초지종을 간략히 설명했다.
역배가 터져서 생긴 손해로 항의하러 왔다거나 한 건 아니었다. 딱히 내가 승부조작을 한 것도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도전자들끼리의 간단한 도박이라고 해도, 돈이 걸린 일이다 보니 예민하게 반응하는 이들이 있을 거라고.
원한을 품은 이들이 실제로 물리력을 행사하러 올 가능성도 있으니, 그런 일은 자제해달라고- 그런 이야기였다.
커뮤니티 여론은 돈을 잃은 쪽도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지 않았지만, 실제와 커뮤니티 여론은 또 다른 법이니까.
3년전에 열렸던 지난 페스티벌, 나는 커뮤니티를 통해 비춰지는 분위기만을 믿었다가- 예상치 못한 상황에 처했었다.
언뜻 평화롭게 돌아가는 것처럼 보여도, 이 시련의 탑 사회의 치안은 결코 안전하지 않다.
내가 경험한 사이버펑크 세계에서 그랬듯이, 강력한 무력을 가진 개인이 날뛴다면 쉽게 무너질 수 있는 불안한 사회.
“예, 좀 자제할게요.”
친절하게 걱정해줘서 대답하긴 했는데, 뭘 자제해야 하는 거지. 이미 커뮤니티에 어그로는 잔뜩 끌어놨는데.
흐음, 앞으로의 대전 상대는 정배순으로 탈락시켜야 하나? 근데 그건 승부조작이잖아?
평범하게 생각하면 그나마 센 놈부터 처리하는 게 맞기도 하고, 이거 내가 의식하기 시작하면 끝도 없는데.
“그런데, 혹시 클래스가 어떻게 되세요? 경기 봤는데, 이제 그냥 전사는 아니신 거죠?”
고민하던 중, 그리핀 길드의 간부 중 한 사람이 그렇게 물었다.
“아뇨, 그냥 전사인데요.”
나는 그렇게 대답하고, 커뮤니티를 열어 다음 대진표를 확인했다.
그 사이, 그리핀 길드에서 관리하는 스포츠 토토의 집계 배당 순위가 달라져 있었다.
이번에는 내가 예측 1위고, 2위는 다른 조에서 올라온 저층 랭커……나를 제외하면 가장 스펙이 높은 놈이다.
그리고 3위는 이름도 들어본 적 없는 저레벨 도전자였다. 이번에 터진 역배를 보고 마구잡이로 건 모양이다.
이러면 이제 신경쓸 필요 없겠다, 역배 한 번으로 순위 예측이 완전히 엉망이 됐어.
좋아, 내 마음대로 해야지.
**
다음 경기에도 무장은 변경하지 않고 나갔다. 그냥 평범한 의복에 맨주먹.
상대로는 40층을 공략 중인 마법사가 한 명, 47층을 공략 중인 궁수가 한 명, 55층을 공략 중인 격투가가 한 명.
마지막으로 예측 순위 2위였던 저층 랭커, 25층에서 상당히 오랜 시간을 보냈다는 둔기 전사였다.
-꽈앙!
물론 첫 번째 예선전 상대가 그랬듯이, 이번에도 순서대로 명치에 주먹 한 방씩.
하지만 이번에는 살짝 방식을 바꿨다. 모든 경기가 5초 안에 끝나버리면 보는 맛이 없잖아.
-콰과광! 콰앙!
마법사가 쏘아낸 거대한 암석과 화염의 탄환이 내 몸에 직격했다. 당연히 피해는 입지 않았다.
나는 사색을 한 마법사가 연달아 쏘아내는 마법을 모조리 무시하고 천천히 걸어가, 주먹을 치켜들었다.
“사, 살살.”
“살살?”
“살살!”
사시나무처럼 벌벌 떠는 게 좀 안쓰러웠지만, 차별하지 않고 명치에 한 방 꽂아주었다. 살살은 무슨.
그렇게 겁이 났으면 그냥 기권해도 됐을 텐데, 그러지 않은 걸 보면 뭔가 꿍꿍이속이 있던 게 틀림없다.
“아닌가?”
다시 생각해보니까, 그냥 너무 겁먹어서 기권 생각이 안 났을 수도 있겠다. 나도 옛날엔 그랬으니까.
그게 벌써 몇 년 전이더라, 1층 보스전에서 패퇴하고 패닉에 빠져 포션의 존재도 잊어버렸었지.
지금 돌이켜 보면, 고작 그 정도 상처로 무슨 호들갑을 떨었나 싶다. 그런 시절이었으니 어쩔 수 없다만.
-탁.
마법사를 때려눕힌 후, 뒤통수로 날아온 화살을 잡아챘다. 작은 소리도 안 내고 날아오는 화살이었다.
[천의 마술]의 힘으로 살펴보니, 화살에 약한 침묵 마법이 부여되어 있었다.
소음을 완전히 제거하는 효과의 마법이지만, 화살 자체가 마력을 머금고 있으니 은밀성은 꽝이다.
“뭔, 뒤통수에 눈알이라도 달렸나……!”
활시위를 매긴 궁수가 그렇게 말하며 입을 떡 벌렸다. 있는 마력도 다 질질 흘리는 놈이 무슨 말이람.
내가 뒤통수에 눈알이 달린 게 아니라, 너희가 멀쩡히 있는 눈을 다 감고 다니는 거야.
예선 1차전을 통과한 승자조 싸움인데도, 평균 수준이 매우 낮다.
여기 이 녀석들 중에서 첫 번째 경기의 중장전사를 이길 수 있는 놈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나한테 대진이 빡세다고 한 거였구나, 다른 도전자들 기준에서는 정말로 운이 나빴던 거야.
-와아아아아아!!
모든 공격을 맨몸으로 맞아준 퍼포먼스 덕분인지, 5초도 걸리지 않았던 첫 경기보다 훨씬 큰 함성이 울렸다.
커뮤니티 반응은 말할 것도 없었다. [이 새끼 씨발 원펀맨임?] 이라는 글이 엄청난 추천수를 받은 상태.
다만, 분위기는 조금 다르다.
첫 경기처럼 주접이나 숭배글보다는, 진지하게 내 스펙을 분석하는 글이 매우 많이 올라와 있었다.
이제야 진지하게 나를 우승권 전력으로 보기 시작한 거겠지. 드러낸 게 없으니 분석하는 내용은 형편없지만.
불타고 있는 커뮤니티에 [슬슬 가지러 가볼까(2트)]라는 제목으로 글을 하나 쓰고, 대기실로 돌아갔다.
끝없이 달리는 수백 개의 댓글을 감상하며 잠시 시간을 보냈더니, 금방 다음 대진표가 올라왔다.
“오, 뭐야.”
이번 승자조 구성원은 직전과는 사뭇 달랐다. 나를 제외한 대전상대가 모두 랭커 출신.
25층의 현역 저층 랭커가 두 명, 25층 랭커 출신의 중층 도전자가 한 명, 그리고- 현역 중층 랭커가 한 명.
페스티벌 개최 전, 커뮤니티에서는 나를 중층 랭커와 비슷하거나 그 이상일 것으로 예측하고 있었다.
“강한수……이야, 이름은 진짜 강해 보이네.”
그렇다면, 진짜 현역 중층 랭커와 맞붙으면 결과는 어떨까- 사실, 이미 알고 있다.
당연히, 맨주먹으로도 내가 이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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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 예선 종료
나는 토너먼트에 나오는 다른 도전자들과 비교하여, 압도적인 강점이 하나 있다.
바로, 다른 우승후보급 랭커들과 다르게 스펙과 전투 방식이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토너먼트에 대비해 상세한 스펙을 숨겨온 랭커들도 있기는 하지만, 그들도 나처럼 베일에 싸인 수준은 결코 아니다.
최소한 클래스와 레벨, 주로 사용하는 무기의 종류, 파티 플레이시에 담당하는 포지션등은 모두 알려져 있는 상태.
반면에 나는 레벨도, 클래스도, 주로 사용하는 무기의 종류도- 모두 불분명한 상태다. 당장 이 글만 봐도 그렇다.
[작성자 : 이영훈#2191]
[제목 : 진혁이 격투가쪽으로 클래스 바꾼거 아님?]
그냥 전붕이가 맨손으로 저렇게 쎈게 말이 안되는데
전사에서 격투가로 넘어가는건 스펙 손해도 별로 없잖음? 얘 골드 존나많던데 템으로 커버도 됐을거고
예선전 본 사람들은 알텐데 저정도 속도면 민첩 깡스탯만 거의 100은 되야함
근데 얘 추정 레벨이 대충 60쯤이잖아 이거 백퍼 민첩 몰빵형 격투가임 아니면 말이 안됨 ㅇㅇ
내가봤을때는 격투가쪽 유니크 클래스로 넘어간거 거의 100%임
저번에 얘 격투술 레벨도 존나 높다고했었고
- 진혁이 레벨이 60대임? 확실함?
- ㄴ 진혁이가 커뮤에 글쓴거로 분석해서 대충 계산한거임, 그 이상 레벨은 레벨차 경험치 감소때문에 못찍을걸
- ㄴ 얘 히든 존나 파먹는다는데 그럼 좀 더 높을수도 있는거 아님?
- ㄴ 히든을 솔플로 어떻게 다챙겨먹냐 ㅄ아
- 이거 맞는듯 장비도 없는데 너무 빨랐음
- 속도는 스킬빨 아님? 걔 존나 이상한 패시브 스킬 많잖아
- ㄴ 스킬빨이어도 60렙대에 깡민첩 100급 속도는 안나오지
- ㄴ 깡민첩 100인거는 뭔 근거로 말하는거임?
맨손으로 다른 도전자들을 때려눕혔던 퍼포먼스를 보고, 멋대로 내 클래스를 격투가 계열로 예측하는 글이다.
뭐, 실제로 격투가 계열 클래스로 넘어갈 수 있는 기회가 있긴 했다. 다른 계열의 유니크 클래스로 갈 수도 있었고.
하지만 이제 와서 다른 클래스로 가볍게 넘어갈 생각은 없다. 전사 계열 에픽 클래스쯤 되는 게 나온다면 몰라도.
그나저나, 이런 추측 글들을 보면 결론은 다 틀리긴 했지만, 접근은 꽤 괜찮은 것들이 많다.
이를테면- 내 속도를 민첩 깡스탯 100급이라고 추측한 것, 실제로 사소한 장비 옵션 등을 모두 뺀 내 민첩 스탯은 110 정도다.
옛날에 쓴 커뮤글을 근거로 추측한 레벨도, 실제 내 레벨과 상당히 근접해 있다.
현재 내 레벨은 70 초반, 이들이 추측한 수치는 60 이상 70 미만 정도. ±5 정도를 오차 범위로 잡는다면 거의 맞춘 셈이다.
하긴, 레벨과 스탯에 크게 연연하지 않는 나보다- 수치를 절대적으로 여기는 다른 도전자들이 이런 쪽으로는 훨씬 잘 알겠지.
하지만 수치를 절대적으로 여기는 탓에, 오히려 정상 범위를 한참 벗어난 내 스펙은 전혀 맞추지 못하고 있다.
그럼, 모처럼 예선 마지막 경기니까- 이번에는 서비스나 한번 해줄까.
-와아아아아!!
환호성이 들리는 토너먼트 경기장에 입장한다. 대전 상대는 정면의 한 사람뿐.
원래는 여태까지의 다른 경기처럼 나를 포함해 다섯 명이 있어야 하지만, 다른 세 사람은 기권을 한 듯하다.
나랑 같은 조에서 이길 자신이 없으니, 그냥 기권하고 하위 그룹에서 안전하게 승점을 챙기기로 한 거다.
유일하게 쫄지 않고 대결에 임한 도전자는 당연히, 가장 스펙이 높았던 현역 중층 랭커- 강한수.
형평성을 위해 일부러 자세히 정보를 찾아보지는 않았지만, 마검사 클래스라고 한다.
[1분 후, 토너먼트 개인전 부문, A조 예선 3라운드가 시작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아, 예.”
꾸벅 인사한 강한수를 향해 마주 고개를 까딱였고, 곧 경기가 시작되었다.
**
마검사는 말 그대로 검과 마법을 함께 다루는 하이브리드형 레어 클래스다.
스펙이 낮으면 이도저도 아닌 작은 육각형이 되는 클래스지만, 중층 랭커라면 그런 수준은 이미 졸업했을 터.
유니크 클래스에 비하면 살짝 아쉬운 감이 있지만, 완성된 마검사 클래스는 다른 레어 클래스보다는 한 수 위로 친다던가.
확실히, 마력감지를 펼쳐서 확인해 보니- 이 사람은 다른 도전자들과는 기본적인 마력 제어 능력부터 달랐다.
조금 전에 대기실에서 만났던 그리핀 길드의 간부급은 아니지만, 꽤 괜찮은데……마침 잘 됐다.
“갑니다.”
무척 예의바른 태도로 검을 꺼낸 강한수가, 날카로운 마력을 검에 담으며 돌진해 왔다.
나는 가볍게 양 주먹을 들어 올려 가드를 잡고, 간격을 좁혀오는 강한수의 검격을 천천히 관찰했다.
오, 꽤 괜찮은데. 이 정도면 7층에서 만났던 하이엘프 기사랑 좋은 승부가 될 것 같다. 기대 이상이다.
-휘이잉……!
하지만 딱 하나, 치명적인 헛점이 하나 있었다. 바로 이 순간 검에 몰려드는 약한 마력의 발광.
횡으로 휘둘러진 강력한 참격을 피해내고, 짧게 잽을 날려 어깨를 맞추었다.
-터엉!
단단한 갑옷이 음료수 캔처럼 찌그러지며, 강한수는 뒤로 살짝 물러섰다.
검술 수준은 무척 괜찮지만, 이렇게 중요한 순간마다 검에 마력을 집중시키는 것이 그대로 보인다.
아니, 검뿐만이 아니라 전신의 근육에도 약한 마력이 깃드는 모습이 보인다. 이유는 이미 알고 있다.
“스킬을 너무 많이 쓰시네.”
마스터리 스킬에 종속된 액티브 스킬, 내가 예전에 애용하던 ‘소드 차지’나 ‘브랜디쉬’ 같은 것들을 쓰고 있는 거다.
사용하면 자동으로 검과 신체에 마력이 깃들고, 정해진 동작을 정확하게 재생하는- 빈틈투성이의 스킬.
패턴이 정해진 몬스터를 상대로는 잘 통하겠지만, 마력을 감지할 수 있는 상대에겐 미리 동작을 알려주는 셈.
내 마력감지가 지금보다 훨씬 수준이 낮았어도 마찬가였을 것이다.
저렇게 중요한 순간마다 시스템상으로 정해진 동작을 수행하기만 한다면, 쉽게 수를 읽고 반격할 수 있었을거다.
“큭……!”
나름대로 맹공을 펼쳤지만 손쉽게 간파당한 강현수는, 작게 침음성을 흘리며 자세를 다잡았다.
방패를 든 왼손을 앞으로 내세우고, 손안에 마력을 집중시킨다. [천의 마술]이 곧바로 그 정체를 까발린다.
스탯을 상승시키는 강화 마법, 그리고 자동으로 방어막을 생성하는 방어 마법, 마지막으로 화염구.
-화르륵!
세 종류의 마법을 꽤 빠르게 시전했지만, 그렇게 전조를 다 보여주면 무슨 소용일까.
강화계열 마법은 그냥 쓰게 내버려두고, 날아온 화염구는 손에 약간의 마력을 두르고 쳐내버렸다.
“무슨!”
설마 마법이 그냥 손에 툭 맞고 튕겨 나갈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던 걸까, 엄청 크게 놀라네.
강한수는 그대로 강화마법을 두른 채 돌진해왔다. 동시에 왼손으로 매직 미사일 계열의 마법을 캐스팅했다.
당연히 나한테는 전혀 통하지 않았다. 검술도, 마법도, 잔재주도, 스펙도, 모두 나한테 전혀 미치지 못한다.
그럼 슬슬 경기를 끝내 볼까. 모처럼 서비스를 하기로 마음먹었으니, 마지막은 좀 화려하게 가자.
[라이트닝 차지]
-파지직!
몸에 전격을 두르고, 이어서 [대전]을 발동해 그 힘을 옮기며, [파동 제어]의 묘리를 접목한다.
달려드는 강한수의 머리를 손으로 움켜쥔 뒤, 자동으로 생성된 방어막 안쪽으로 전격을 밀어 넣는다.
상대의 속을 진탕으로 만드는 파동의 흐름을 이끌며, 그대로 강한수의 머리를 땅에 처박아 버렸다.
“전격장.”
-콰르릉!
대 사이보그용 전투술의 시범과 함께, 나는 본선 진출을 확정 지었다.
**
그동안의 연습으로 완벽히 체득한 전격장은 이 토너먼트에 매우 알맞은 기술이었다.
전격의 파동을 상대방의 내부에 밀어넣기에, 방어력을 무시할 수 있는 특성- 그리고 외상을 거의 입히지 않을 수 있는 특성.
머리 쪽으로 적당한 위력의 전격장을 한 번 박아주면, 상대방의 뇌를 진탕으로 만들어 곧바로 기절시키는 것이 가능하다.
위력이 과하면 그대로 머리가 터져 죽겠지만, 내가 조절하기에 따라 안전하게 상대를 기절시킬 수 있으니- 사고가 날 염려가 없다.
하지만 다른 도전자들이 보기에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예선 경기가 끝난 직후 또 커뮤니티가 난리가 났다.
다른 도전자들도 23층의 사이버펑크 세계를 거쳐온 적이 있기 때문에, 전격장을 알아보는 이들이 있었던 거다.
그렇다고 잘 아는 건 또 아니어서, 사이보그들이 사용하는 무시무시한 즉사급 공격 스킬- 그렇게 이해하는 놈들이 대부분이었고.
머리가 땅에 처박힌 강한수의 모습을 캡쳐에 올리며, [강한수 이사람 죽은거 아님?] 같은 글이 올라오기까지 했다.
물론 강한수는 곧 시스템의 회복 효과에 의해 다시 일어났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는 금방 잠잠해졌지만.
[전격장? 기초적인 임플란트다]
[이새끼 사이보그였네]
[사시니들 밥먹이면서 저거 배운거임?]
[진혁이는 왜 혼자 장르가 다른거냐]
그 대신, 이번에도 내가 선보인 퍼포먼스에 대한 여러 감상들이 올라왔고- 그 중 어떤 글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작성자 : 박원호#2551]
[제목 : 방금 경기로 서진혁 분석 끝났음]
클래스도 대충 짐작가고 스탯이랑 레벨도 알 것 같다
퍼포먼스 하겠다고 괜히 스킬 낭비한거 후회하게 해주겠음
본선에서 만나자, 딱기다려라
글을 올린 사람은, B조 예선 승자조에서 압도적인 퍼포먼스를 선보인 중층 랭커 출신 도전자.
어떤 대형 길드 간부의 수제자, 매우 빠른 스펙업 속도로 주목받고 있는 슈퍼 루키, 유니크 클래스 보유자.
온갖 요란한 별명이 붙어 있으며, 내 본선 첫 대전 상대로 유력한 도전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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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 위화감
유니크 클래스 [원소술사].
다른 원소 계열 마법사의 완벽한 상위 호환으로, 전직하는 즉시 기본 4속성 마법을 모두 습득 가능.
속성 데미지를 증폭시키는 각종 패시브까지 기본으로 제공되며, 클래스 보정으로 획득하는 스탯 역시 우월.
어떤 적이 상대건간에 강력한 화력을 안정적으로 투사할 수 있기에, 여러 파티와 길드에서 러브콜이 오는 만능형 딜러.
나를 향해 본선에서 만나자고 선언한 박원호라는 도전자는 그 [원소술사] 클래스의 보유자.
동시에 커뮤니티에서 매우 유명한 인물이었다.
아, 유명하다는 건 그 실력 때문에 유명하다는 게 아니다.
실력과 아주 무관한 건 아니지만, 기본적으로는 그냥 커뮤니티 망령이기 때문이다.
매일같이 아슬아슬한 줄타기성의 어그로 글을 올려대고, 유머성 글에는 빠짐없이 출현해 댓글을 단다.
대형 길드의 간부라고 알려진 본인의 스승에 관한 썰도 드문드문 풀고, 자신의 실력과 스펙을 과시하는 일도 많다 보니, 주목도가 높다.
즉, 소위 말하는 ‘호감 고닉’쯤 되는 녀석이다. 빠와 까를 모두 미치게 하는 슈퍼스타- 뭐 그렇게 말하는 녀석들도 있고.
어쨌든, 이런 타입은 대부분 싫어하는 쪽과 좋아하는 쪽이 극단적으로 갈리기 마련이다. 당연히 이 녀석도 마찬가지.
누구는 너무 나댄다고 싫어하고, 누구는 웃기다며 좋아하고, 그래도 양쪽 모두 공통으로 내리는 평가가 하나 있는데.
바로, 그런 인간적인 평가와는 별개로 실력 하나만큼은 확실하다는 것이다. 이른바 ‘슈퍼 루키’다.
“걔가 그렇게 세다고요?”
토너먼트 예선이 끝난 후, 노점 거리를 둘러보다 마주친 강준호에게 물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랑 같은 서버라서 본 적이 있거든요. 클래스 성능이랑 스펙도 좋은데, 스킬 분배 센스가 굉장해요.”
강준호는 도전자가 운영하는 노점에서 산 매운 닭꼬치를 한 입 베어 물며, 손가락을 치켜세웠다.
“4대 속성을 전부 다루는 만큼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의 숫자가 엄청난데, 그걸 모두 완벽하게 활용하더라고요.”
“방어마법이면 방어마법, 공격마법이면 공격마법, 원거리 스킬은 모두 끝 사거리에서 정확히 맞추고……명중률은 거의 100%죠.”
“딜러라는 포지션에 매몰되어서 딜만 넣는 마법사랑은 달라요, 오히려 전방위적으로 파티원을 서포트하기도 하죠.”
듣자하니, 그런 스킬 사용 능력은 어떤 대형 길드의 마법사 클래스 간부에게 직접 배운 것이라고 한다.
주먹구구식 공략이 많았던 2세대 당시의 도전자로, 레어 클래스면서 본인의 기량만으로 5개 속성을 다룬다는 마법사.
그 당시의 마법사들은 후방에서 안전하게 딜만 넣는 포지션은 아니었으니, 아마 그런 테크닉을 전수해 준 거겠지.
“몇 년 후 탑을 졸업하고 나면, A급 헌터 자리는 따놓은 당상이라는 평가예요. 윽, 케헥!”
설명을 이어가던 강준호는 매운 닭꼬치가 목에 걸렸는지, 황급히 물을 들이켰다.
“이해가 안 가네.”
이 사람이 이렇게 말하는 걸 보니 인상과는 다르게 제법 실력이 있는 모양인데- 그래봤자 마법사 아닌가?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다고 한들, 설마 그놈이 재버워크만큼 강하진 않을 거 아니야.
나는 완벽한 안티메이지라고.
**
다음 날, 페스티벌 맵 C 구역.
“어머, 유명한 분이 오셨네~ 토너먼트 본선 진출하셨다면서요?”
오늘은 주문술사 정모에 이은 두 번째 친목 모임. 나는 낯선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채 뻘쭘하게 서 있었다.
이번에 모인 사람들은 에인을 돌보게 된 것을 계기로, 육아 팁과 요리 지식을 나누었던 생활 게시판의 붙박이 도전자들이다.
커뮤니티에 올라온 글의 문체와 어투에서 어느 정도 짐작은 했지만, 현장에 나오니 생각보다 더 동네 반상회스러운 분위기가 난다.
물론 남성 도전자들도 있다. 잘 헤아려보면 성비는 거의 반반에 가깝다…하지만 이 ‘여사님’들의 존재감이 너무 강하다.
“사진으로 본 것보다 더 잘생겼네, 키도 훤칠하고~ 연애할 때 우리 남편 보는 것 같아!”
그렇게 말하며 은근히 내 팔에 몸을 비벼오는 여기 이 분은, 올해 43세 강지혜 씨. 무려 중학생 아들이 있는 유부녀시다.
하지만 얼굴만 봐서는 도저히 40대 초반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이게 말로만 들었던 시련의 탑의 안티에이징 효과인가.
시련의 탑 도전자들은 노화가 느리다. 단순히 느리기만 한 게 아니라, 아예 거꾸로 젊어지는 경우도 있다.
스탯이 상승하고 신체능력이 발달하면서, 회복 효과 덕분에 주름이 없어지거나 체형이 변화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당장 나만 해도, 비틀어진 골반과 척추가 교정되며 키가 조금 자랐고- 푸석푸석하던 피부도 확 좋아진 상태.
물론 이런 변화도 만능은 아니라서, 중년이 청년 시절로 돌아가는 수준의 극적인 변화는 불가능하지만.
이렇게 보니, 관리 잘한 40대 여성을 20대 언저리로 보이게 해주는 수준은 가능한 것 같다.
“진혁씨 요리실력도 부쩍 늘었던데, 이렇게 잘 생겼으면서 요리까지 잘하기 있어?”
“이거 좀 먹어봐요, 젊은 사람이 요리하려면 이런 맛도 알아야지~?”
“아휴, 한창때인데 맨날 혼자라 외로워서 어떡해? 사람 그립지 않았어?”
그 탓인지, 아줌마들의 주책에 묘한 끈적거림이 느껴진다. 뭐냐, 여성 헌터는 불륜률이 매우 높다고 하던가.
“있잖아, 진혁씨는 연애할 때 몇 살 차이까지 가능해?”
아니, 이건 씨발 대놓고 추파잖아. 당신 탑 바깥에 남편도 있으면서, 그래, 탑 바깥에 있으니까 이러는 거겠지.
“아니이~ 이상한 뜻 아니고, 우리 딸이 조금 컸으면 딱일 것 같아서 그러지~”
몇 살 차이까지 가능하냐고? 내가 30대 초반이니까 10살 정도는 괜찮다는 대답이 듣고 싶은가?
“글쎄요, 한 2,000살?”
엘레노어가 정확히 몇 살이더라. 시계열이 어긋나서 헷갈리는데, 그 이상으로 차이 나지는 않았으면 좋겠네.
나는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고, 몸에 쫙 붙는 롱 드레스를 입고 들러붙는 아줌마를 밀어냈다.
댁들이 아무리 나이에 비해 젊고 몸매가 좋아도, 다크엘프 누님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제 약혼자가 딱 그 정도 나이거든요.”
아, 엘레노어 보고 싶다.
오랜만에 캡처해 둔 사진이나 한번 돌려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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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소 해괴하고 불편한 모임이 될 뻔했던 생활 게시판 친목 모임은 곧 정상화되었다.
여전히 몇몇 아줌마들이 나한테 추파를 던지긴 했지만, 그래도 전체적인 분위기는 훈훈하고 건전했다.
그리고 요리 쪽으로 상당한 수확이 하나 있었는데, 오늘 모인 인원 중에서 몬스터 요리를 연구하는 요리사가 있었던 것이다.
원래도 파인다이닝 계열에서 일하던 사람이라는데, 시련의 탑에 들어와서 새로운 식재료를 마구 시험해 보기 시작했다고.
“와…이거 진짜 맛있네, 이게 무슨 몬스터 고기라고요?”
“드레이크 꼬리 살이에요, 소금만 쳐서 저온으로 구웠고요.”
나도 몬스터 전리품을 요리에 접목해보려 많이 노력했지만, 성공적이었던 건 고작 몇 번뿐이었는데- 이 사람은 급이 다르구나.
듣자하니 요리 스킬도 상급을 목전에 두고 있다는 것 같은데, 어지간한 랭커보다 이 사람이 더 대단한 거 아닌가?
이런 세계에서 진지하게 요리를 연구해, 이만한 결과를 내놓다니. 특히 마법을 이용한 몇몇 조리법은 정말 상상도 못 했다.
“그러는 진혁씨도 대단하던데요, 아까 고기를 종잇장처럼 자르시던데. 어떻게 한 거예요?”
“아, 별건 아니고요.”
나는 인벤토리에서 꺼낸 식칼에 가볍게 오러를 둘러 보여주었다. 요리 쪽으로 내 특기는 이것 정도뿐이다.
오러는 무엇이든 가볍게 절단한다. 당연히 온갖 식재료를 가볍고 예리하게 절단하는 것도 가능.
이걸 이용해 오늘 선보인 것이 바로 ‘생 대패 삼겹살’이다. 전혀 냉동하지 않은 돼지고기를 극한까지 얇게 썰어낸 것.
“그, 그거 오러 아닌가요? 진혁 씨 그런 것도 할 줄 알아요? 아니, 그걸 요리에 써요?”
전사의 삼신기라고 불리는 스킬을 식칼 따위에 쓰고 있는 모습에, 요리사 도전자가 매우 크게 놀랐다.
그게 계기였다. 서로 요리나 생활 팁을 공유하러 온 자리였는데, 어쩌다 보니 내 스펙과 스킬에 관한 이야기가 오가기 시작했다.
특별히 숨기려는 것도 아니었으니, 나도 주변에서 묻는 만큼 착실하게 대답해 주었다. 거의 한 시간가량을.
“어머, 그럼 토너먼트도 우승해볼 만한 거 아니야? 나 진혁씨 믿고 돈 걸어봐도 돼?”
그렇게 전투에는 별 관심이 없는 요리/생활 탭의 도전자들이, 모두가 궁금해하는 내 스펙을 상세히 알게 됐다.
“너무 크게 걸진 마시고요.”
내 분석이 끝났다는 그 슈퍼루키 도전자는, 아마 여기 모인 아줌마들의 반의반도 아는 게 없겠지.
그렇게 나를 응원하러 오겠다는 아주머니들의 인사를 받아 두고, 다시 다른 곳을 구경하러 떠났다.
“음……?”
그런데, 돌이켜 보니 뭔가 이상한 점이 하나 있었다. 아까 나한테 자꾸 들이대던 아줌마 몇 명.
끈적거리는 태도에 신경이 쏠려서, 정작 그때는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 사람들, 뭔가 기척이 좀 이상하지 않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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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 토너먼트 32강
마력을 제어하지 못하는 도전자들이 신경에 거슬려, 일부러 감지의 수준을 많이 낮춰둔 탓인가.
돌이켜 보니, 몇몇 사람들의 기척이 유독 제대로 느껴지지 않았던 것 같다.
아예 안 느껴졌던 건 또 아니고, 뭐라고 해야 하나- 흘러나오는 마력과 생명반응이 좀 오락가락하는 느낌?
필라멘트 수명이 다 되어서 깜빡이는 백열전구처럼, 기척이 강해졌다 약해지기를 조금씩 반복하고 있었던 것 같다.
처음 겪는 일이라 이걸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어쨌든 그냥 몇몇 사람들의 기척이 이상했다.
“무슨 스킬 때문인가?”
잠시 이마를 짚고 고민해봤지만, 마땅히 답은 나오지 않았다. 솔직히 굳이 신경써야 할 일인가 싶기도 하고.
친목 모임에 나왔던 사람들은 대부분 스펙이 낮거나 애매한 저레벨 도전자들, 내게 달라붙었던 아줌마도 마찬가지다.
뭔가 수상쩍은 일을 꾸미고 있다 할지라도, 그게 뭔들 나한테 통할 일은 없다. 잔재주 종류는 내게 특히 안 통하니까.
그보다는 내일 열릴 토너먼트 본선을 더 신경 쓰는 게 좋겠지.
본선은 예선과 다르게 도전자간의 1대1 매치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또 하나의 차이점으로, 특수 보호 효과가 제공된다.
HP가 0으로 떨어지거나, 빈사 상태가 되면 자동으로 발동하는 강력한 보호막+회복 효과. 즉, 사망 방지 장치다.
이 보호 효과 덕분에, 본선에 진출한 도전자들은 상대방을 죽일지도 모른다는 걱정 없이 전력으로 싸울 수 있게 된다.
설령 즉사급 데미지를 입어도, 보호 효과를 받아 기력만 소진한 채 경기장 바깥으로 전송된다고 하니까.
한편, 커뮤니티에는 마침 그 보호 효과와 관련된 공지사항이 하나 올라와 있었다.
[(필독)토너먼트 본선 참가자들에게 안내 드립니다.]
탑의 치안을 담당하는 거대 길드의 마스터가 직접 올린 범죄 예방 공지였다.
내용은 토너먼트 본선 탈락자에 대한 보호조치가 예정되어 있다는 것과, 범죄행위에 대한 강력한 경고.
토너먼트에서 즉사급 데미지를 입고 탈락한 도전자는, 보호 효과가 발동되어 기력만 상실하고 경기장 바깥으로 전송된다.
그렇다면, 기력을 상실한 도전자가 누군가에게 습격당하기라도 하면 어떨까. 변변찮은 저항도 못 하고 살해당할 것이다.
물론 토너먼트 본선 진출자가 뉘집 개 이름도 아니고, 개나 소나 쉽게 죽일 수 있는 건 아니겠지만 말이다.
그리핀 길드에서 주최하는 스포츠 토토도 본선으로 가면 그 규모가 더욱 커진다. 예민해진 도전자도 당연히 많겠지.
시련의 탑은 초대장만 받으면 누구나 들어오는 장소, 당장은 잠잠하지만 범죄자나 질 나쁜 인간들도 얼마든지 섞여 있다.
고로- 큰돈을 걸었다가 잃고 탈락자에게 보복하려 드는 개인, 혹은 집단이 있어도 이상하지는 않다.
대형 길드의 보호조치에도 빈틈은 얼마든지 있다. 그러니 이들이 약속할 수 있는 건, 범죄 행위자에 대한 강력한 처벌.
PK라는 단어로 순화하고는 있지만, 결국 처형뿐이다. 대형 길드의 간부들이 모두 칼을 들고 나설 거다.
“아, 그러고 보니까……”
그런 생각을 하니 마침 떠오르는 것이 하나 있었다. 토너먼트 단체전, 파티를 이뤄 붙는 경기랬지.
유망한 신인 도전자들을 위한 자리인 개인전과는 다르게, 그쪽은 각 길드의 간부들이 힘을 과시하기 위한 장소다.
그랜드 페스티벌에서만 열린다는 길드전 콘텐츠보다 규모는 작지만, 진짜 강한 도전자들의 힘을 확인할 수 있을지 모른다.
오늘은 그 예선이 진행되고 있다니까, 남는 시간은 그거나 보러 가도록 하자.
**
각 서버의 치안을 책임지는 대형 길드의 본질은, 잘 쳐줘도 자경단이고 나쁘게 말하면 군벌이나 다름없다.
대한민국의 법률과 처벌이 통용될 수 없는 이곳에서, 무력을 독점하고 본인들의 잣대로 타인을 심판하는 존재들.
그런 녀석들이 계속해서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신들의 정당성과 무력을 주기적으로 어필해 줄 필요가 있다.
대형 길드의 간부 중에는 탑에서 10년 이상을 썩은 괴물들도 있으니, 그 이상 무슨 어필이 필요할까 싶지만.
원래 이런 건 눈으로 안 보면 꼭 이해하지 못하고 개기는 놈들이 한둘쯤 나오는 법이다.
그리고 단체전은 그런 놈들의 기를 죽이기 위해 존재하는 무력 어필의 장, 비유하자면 대규모 열병식 같은 자리.
상층 랭커와 길드 간부들로 이뤄진 올스타 파티가, 아낌없이 그 힘을 드러내는 정상 결전이다.
-쾅! 콰광! 콰앙!
시간이 남는 차에 보러 온 단체전 예선은, 그런 평가에 걸맞게 상당히 수준 높은 대결이 펼쳐지고 있었다.
개인전 예선에서 봤던 애매한 저층~중층 랭커가 아닌, 다수의 고층 도전자들이 맞붙고 있다.
스킬 한방한방이 엄청난 위력을 뿜어내며, 나조차도 얕볼 수 없는 충격량이 대기를 쩌렁쩌렁 울려 댄다.
“이야……세긴 세네.”
양쪽 파티 모두 75층 이상의 고층 도전자랬던가, 탑을 졸업하고 헌터가 되기 직전인 완성품들.
확실히 스펙이 높긴 높다. 저런 녀석들이 개인전에 우르르 나왔다면, 나도 우승은 장담할 수 없었으리라.
다만 스펙에 비해 기량이 영 아니다. 뭐, 고층 도전자라고 해도 성장방식은 거기서 거기일 테니까.
[초감각]
고층 도전자들의 수준을 더 자세히 알고 싶어서, 경기장까지 닿도록 넓은 범위에 마력을 퍼트려 보았다.
그리고 곧바로 실수했음을 깨닫고 마력을 거두었다. 여기서는 감지를 쓰면 안 됐다.
첫 번째 문제점은 경기를 구경하러 온 도전자가 너무 많았다는 것, 혼탁하게 섞인 다수의 마력에 현기증이 났다.
“엇, 방금, 무슨……?”
두 번째 문제점은, 무대 위에서 격렬한 전투를 벌이고 있던 파티의 핵심- 마법사 한 명이 내 마력을 느끼고 움찔했다는 점.
아무리 스킬에 의존해 성장했다고는 하지만, 고레벨 마법사답게[마력 감지]계열 스킬의 레벨이 높은 탓이리라.
팽팽하게 맞붙던 두 파티의 싸움은 한 쪽의 마법사가 한눈을 판 사이, 균형이 무너지며 그대로 승부가 갈렸다.
“아, 거 참, 집중 좀 하지.”
집중력도 나쁘면서 쓸데없이 예민한 게 독이 됐구나. 안타까워라.
**
다음 날, 토너먼트 본선 시작까지 30분이 남은 시점.
나는 바글거리는 인파를 뚫고 대기실에 입장했다. 생각보다 조금 늦게 도착했다.
토너먼트가 행사로서 인기가 많은 건 알고 있었지만, 본선 시작이라고 해서 이렇게까지 인파가 몰릴 줄은 몰랐다.
단순히 인파가 몰린 것 외에도, 응원한다며 나를 둘러싸는 사람들도 무척 많았던 탓에 시간이 좀 걸렸다.
떨쳐내려면 얼마든지 떨쳐낼 수 있었지만, 이런 상황은 처음이기도 하고- 그러다가 괜히 누가 다치면 안 되니까.
“오늘은 무기 쓰시는 겁니까?”
대기실에 들어가니, 일전에 나를 응원한다고 했던 그리핀 길드의 간부가 나를 보며 그렇게 물었다.
아마 경기 전후의 혼잡을 수습하기 위해 배치된 것 같다. 나는 검과 방패를 들어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이제부터는 본선이니까, 계속 맨주먹만으로 싸우는 건 상대방에게도 예의가 아닐 것 같아서.
“응원하고 있습니다.”
-툭툭.
그는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고, 자기 자리로 돌아가 대기했다. 곧 나는 경기장 안쪽으로 이동되었다.
수많은 객석에 채워진 사람들이 환호하며 손을 흔든다. 가볍게 마력감지를 펼쳐 보니, 조금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요 며칠 함께 주문을 연구하며 던전을 돈 강준호가 있었다. 그리고 조금 옆으로 저번에 만난 친목회 인원들까지도.
나한테 달라붙던 젊은 아줌마들이 꺅꺅거리며 내 이름을 소리치고 있다. 허, 참, 이걸 모여서 응원해주네.
“하핫, 그 차림은 뭐야? 이제 와서 전사라고 페이크라도 치려고?”
한편 내 맞은편의 32강 상대, 원소술사 박원호는 실실 웃으며 그런 말을 내뱉었다. 뭐라는 거지.
“페이크가 아니라 진짜 전사인데.”
“핫, 내가 바보인 줄 알아? 분석 끝났다고 했지?”
“뭘 어떻게 분석했는데 그런 말이 나오냐?”
어이가 없어서 그렇게 받아치자, 놈은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기다렸다는 듯 말하기 시작했다.
“나는 보통 도전자들이랑은 좀 다르거든, 네가 번개 속성의 마력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다는 걸 바로 눈치챘지.”
놈의 마력이 스멀스멀 내 발밑을 타고 올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은근슬쩍 마력감지를 펼치고 있었나.
“예전에 공개했던 스킬 중 [라이트닝 차지]가 있었지만, 고작 차지 스킬로는 그렇게 자유롭게 마력을 다룰 수 없어.”
딱 여기까지 듣고, 나는 이 녀석이 얼마나 얼토당토않은 착각을 했는지 깨달았다. 녀석은 설명을 이어나갔다.
이 녀석도 어설픈 재주가 독이 된 케이스였다. 놈은 내 예선 경기를 보고 내 마력을 곧바로 분석해 냈다.
나는 마법 스킬을 얻은 전사치고는 너무 높은 수준으로 번개의 마력을 다루고 있었고, 그것이 착각으로 이어져서-
“네가 보여준 특징에 딱 맞는 하나의 클래스, 유니크 클래스인 청마도사……훗, 정곡을 찌른 모양이군.”
-나를 번개 속성 전문의 마법사라고 착각하게 된 것이다. 하필이면 그 착각에 딱 맞는 특징의 클래스가 있었고.
청마도사, 번개 마법을 주무기로 완드와 스태프에 의존하지 않는 하이브리드 타입의 마법사 클래스.
자신의 신체를 전기로 자극하는 것으로, 근력과 민첩 스탯을 증가시키는 고유 버프 스킬이 존재한다고 한다.
“이해해, 청마도사 클래스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하나 있으니까……나한테 간파당하고 싶지 않았겠지.”
놈은 범인을 잡아낸 명탐정처럼 위풍당당하게 떠들었다. 동시에 경기 시작을 알리는 카운트가 움직였고.
“네 모든 스킬은 번개 속성! 단일 속성 대책은 시간이 조금만 있으면 거뜬하지! 이제 너는 나를 이길 수 없어!”
[천의 마술]이 놈이 장착한 장비에 걸린 마법을 읽어내었다. 여러 종류의 번개 속성 저항 마법이다.
“아, 그러셔.”
[경기가 시작됩니다.]
카운트다운이 끝나고, 경기가 시작되었다. 박원호는 곧바로 한 겹의 절연 마법을 더 둘렀다.
녀석이 잘못 판단한 점은 한둘이 아니지만, 다 제쳐놓고 그중에서 가장 큰 것을 꼽자면- 일단은 두 가지.
첫 번째, 번개 속성 대책은 했을지언정- 물리 공격 쪽에는 전혀 대책을 세워두지 않았다는 점.
-꽈앙!
“크학!”
경기 시작과 동시에 앞으로 질주한 나는 방패로 놈의 면상을 힘껏 후려쳐 주었다.
번개 속성만 막으면 이길 줄 알았냐. 설령 내 클래스가 정말 청마도사였다고 해도 피지컬은 어디 안 가잖아.
예선 때 다른 도전자들을 원펀치로 보낸 내 근력과 순발력에, 이 녀석 수준으로는 전혀 대응할 수 없다.
두 번째, [파동 제어]를 통해 상대의 내부로 침투하는 전자발경은, 이런 얄팍한 방어 마법으로 막을 수 없다는 것.
“야, 머리에 콘돔 뒤집어쓰고 벼락 맞으면 살겠냐?”
“어, 어?”
-콰르릉!!
방패치기에 이어서, 머리를 잡고 쏟아낸 전격장. 박원호는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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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4. 빵 부스러기
기대한 것과 다르게, 너무 싱겁게 끝나버린 경기.
박원호도 분명 제 딴에는 철저히 준비한다고 했던 거겠지. 그게 실수를 넘어 자충수가 된 게 문제였지만.
원소술사 클래스인 박원호는 다양한 상황에 대응이 가능한 육각형의 마법사 타입이다.
어림짐작이지만, 아마 근접 전투도 어느 정도는 자신이 있었을 거다. 반응속도는 꽤 빨랐으니까.
예선전의 도전자들은 내 주먹에 반응도 못 하고 뻗었지만, 이 녀석은 내 방패 공격을 눈으로 쫓을 수 있었다.
정작 몸이 따라가지 못한 게 문제지만, 방패로 얻어맞고 나서도 바로 뻗지는 않았던 걸 보면 맷집도 괜찮은 편이다.
경기 시작과 함께 전개한 게 절연 마법이 아니라 물리 방어 마법이었다면, 그렇게 쉽게 당하지는 않았겠지.
패인은 결국 잘못된 분석, 번개 속성에 대응하겠답시고 아이템 세팅을 이상하게 바꿔온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사정이 있다 한들, 결과는 먼저 도발까지 했다가 딱 두 방에 뻗어버린 추한 모양새.
그렇잖아도 호감고닉으로 유명했던 녀석이니, 커뮤니티의 익살꾸러기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작성자 : 김지성#2411]
[제목 : ??? : 오케이 서진혁 분석완료]
(사진)
못이겨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냉철한 분석은 대원호 ㅋㅋㅋㅋ
- 자기객관화 지리노 ㅋㅋㅋㅋㅋ
- 한방컷날거 분석해서 두방컷난거임?
- 이 씨발 ㅋㅋㅋㅋㅋㅋㅋㅋㅋ
- 왤케 당당하노 ㅋㅋㅋㅋ
[작성자 : 박윤호#2551]
[제목 : 방금 경기로 서진혁 분석 끝났음]
클래스는 대충 모르겠고 스탯이랑 레벨도 모르겠다
퍼포먼스하겠다고 괜히 스킬 낭비한거 후회하지 않을거임
본선에서 만나지말자, 제발부탁이다
- 이새끼는 뭐야 씨발 ㅋㅋㅋㅋ
- 원호인줄 알았는데 윤호노ㅋㅋㅋㅋㅋ
- ㄴ 서버도 똑같음 뭐하는새끼냐 ㅋㅋ
- 윤호게이 이게 커뮤 첫글인게 ㅈㄴ 웃기네 ㅅㅂㅋㅋㅋ
- 너는 뒤통수에 마법날아와도 그런갑다 해라 ㅋㅋㅋ
주된 소재거리는 당연히 며칠 전 커뮤니티에 올렸던 ‘분석 완료’ 게시글.
콘돔 운운한 내 목소리는 관중석에까지 들리지 않았는지, 그걸 소재로 드립을 치는 경우는 보이지 않았다.
그 밖에는 박원호가 과거에 커뮤니티에 올렸던 몇몇 게시글이 파묘당해, 그걸로 조리돌림을 당하는 정도.
“그놈 그거, 평판은 나쁘지 않은가 보네.”
박원호 같은 랭커급의 강자가 커뮤니티에서 이렇게까지 놀림거리가 되는 일은 원래 거의 없다시파하다.
당연한 일이다, 머리에 스팀이 오른 랭커에게 물리적으로 보복당할 가능성이 있으니까.
내가 최길현의 악명을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진짜 위험한 놈들 상대로는 쉬쉬하게 되니까.
그런 환경에서 이렇게 조리돌림을 당한다는 건, 당사자가 이런 일로 보복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도전자들에게 있기 때문.
파헤쳐진 옛날 게시글을 좀 살펴보니, 입을 털다가 굴욕을 당하고도 웃어넘겼던 일이 몇 번씩 있었던 모양이다.
그나저나, 분위기가 이러니까 가만히 있기 아쉽네. 나도 장작 좀 넣어볼까.
[작성자 : 서진혁#2661]
[제목 : 원호한테 너무 그러지 마라]
상대가 나잖아 ㅋ
이 정도는 비틱질이 아니라 쇼맨십이지.
**
내 경기가 끝난 뒤에는 다른 도전자들의 32강 경기를 지켜보았다.
15번의 경기를 모두 볼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우승후보로 불리는 이들의 경기는 모두 챙겨볼 수 있었다.
확실히 75층의 고층 랭커들은 만만하지 않다. 단체전에 참가한 원숙한 도전자들보다도 더 강해 보이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이들 사이에서 가장 내 눈을 사로잡은 것은, 오히려 우승후보로는 전혀 꼽히지 않던 무명의 도전자였다.
-카앙!
커다란 경기장 위에서 두 명의 전사가 맞부딪힌다. 한쪽은 평범한 검방 전사지만, 반대쪽은 도끼를 든 야만전사.
전자의 클래스는 [검투사], 후자의 클래스는 [광전사]다. 둘 다 동등한 레어 등급의 클래스로, 공략 층수는 64층과 72층.
그리고 스펙 역시 72층을 공략중인 광전사 쪽이 더 높다. 하지만 경기의 양상은 조금 달랐다.
-카앙! 캉! 카강! 쿵!
길쭉한 외날검과 방패를 든 검투사가 광전사를 상대로 일방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와아아아아!! 뭉개버려라!!”
하지만 관객들은 광전사가 우위라고 느끼고 있는 듯싶었다. 이해하지 못할 일은 아니다.
검투사의 공격은 모두 가벼워 보인다. 한편 광전사는 여러 공격을 몸으로 받아내며 강력한 일격을 적중시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제대로 적중하는 공격은 없고, 전부 다 막히거나 흘려질 뿐이다. 화려하기만 하고 유효하게 들어가는 일이 없다.
-쿵!
그 때, 광전사가 몸에 붉은 기운을 두르며 무식한 돌진을 개시했다. 체급을 앞세워 억지로 몰아붙일 셈이다.
광전사는 가히 인간 전차라 해도 좋은 미친 체급을 갖고 있다. 저런 덩치와 근육은 탑 내부에서의 단련만으로는 결코 만들 수 없다.
타고난 프레임에 더해, 탑 바깥에서 큰 사이즈의 근육을 만드는 트레이닝을 꾸준히 해야만 만들 수 있는, 딱 봐도 강해 보이는 몸.
그에 비해 검투사의 체격은 상대적으로 작다. 하지만 세세히 뜯어보면 오히려 저쪽의 체형이 훨씬 더 낫다는 걸 알 수 있다.
헐크같은 근육을 가진 광전사에 비해 작을 뿐, 190은 되어 보이는 신장- 거기에 쭉쭉 길게 뻗은 팔다리.
무식하게 덩치만 큰 것보다는 저런 체형이 근접 전투에선 더 유리하다. 균형 잡힌 몸에서 나오는 유연함과 안정적인 움직임.
-촤악!
아슬아슬하게 돌진을 피해낸 검투사의 공격이, 광전사의 몸에 커다란 상흔을 새겼다. 이걸로 승패가 갈렸다.
아무런 특징도 없지만 그렇기에 더 상대하기 까다로운, 그냥 무난하게 강한 타입.
다음 날 열리는 토너먼트 16강, 내 대전 상대는 저 녀석이다.
**
토너먼트 경기를 모두 보고 난 후, 나는 3번째 친목회를 가졌다.
이번에 만난 것은 각 계층의 배경과 설정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는, 일명 ‘고고학자’ 계열의 도전자들.
독특한 방식으로 계층을 공략하고, 특이한 퀘스트를 많이 진행해 온 나에게, 이들은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세계수가 행성의 지맥을 빨아먹는 괴물이었다고요? 진짠가요?”
이를테면, 7층에서 9층까지 이어진 엘프 퀘스트를 통해 알게 된, 세계수의 비밀과 하이엘프 왕이 꾸며온 음모 같은 것.
어찌저찌 알게 된 배경 이야기를 풀어놓자, 이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날뛰기 시작했다.
몇명은 아예 내 멱살을 잡고 짤짤 흔들어 대며, 빨리 더 많은 이야기를 토해내라고 독촉하기까지 했을 정도다.
-뻐억!
“흐억!”
물론 그런 놈들은 진정하라는 의미로 주먹 맛을 좀 보여줬지만, 아무튼 무수한 관심이 쏟아졌다.
사실, 비단 이들만이 내게 무수한 관심을 쏟은 것은 아니었다. 토너먼트를 통해 내 얼굴이 워낙 많이 팔린 탓이다.
처음 보는 도전자들이 응원하고 있다며 등을 두드리거나, 아니면 싸인을 해달라고 하거나, 먹을 걸 건네주거나.
커뮤니티에서의 인지도는 곧 현실의 인지도로 이어졌고, 이제 인지도는 그대로 인기가 되었다.
아, 그리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알게 된 사실 하나.
내가 아줌마들에게서 느꼈던 이상한 기척은 의외로 그렇게 드문 것이 아니었다.
아직 그런 기척이 나는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비슷한 느낌의 기척을 가진 사람들이 종종 보이고는 했다.
레벨, 성별, 외견, 소속, 그 어떤 부분에서도 공통분모가 없는 사람들이었으므로- 수상하게 여길 건 아닌 것 같다.
뭔가 수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 한들, 솔직히 나랑은 별 상관없는 일이기도 하고.
그런 건 대형 길드에서 알아서들 하겠지. 그러라고 있는 길드 아닌가.
“성위요?”
한편, 나는 고고학자 도전자들에게 성위에 대해 물었다.
검색을 통해서는 알아낸 게 없지만, 배경 파고들기를 좋아하는 이들이라면 뭔가 알고 있지 않을까 해서.
“별과 연관된 매우 격이 높은 존재라는 것밖에는……저도 참 궁금한데, 누가 알려줬으면 좋겠네요.”
하지만 아쉽게도, 이들 역시 성위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다만, 흥미로운 이야기 하나를 들었다.
“아, 하지만 성위와 신은 또 다른 존재라는 것 같아요. 이건 저도 전해 들은 이야기지만요.”
“어떤 책에 적혀 있기를, 성위랑 동격으로 놓일 수 있는 건, 신령(神靈)과 진룡(眞龍)뿐이라고 해요.”
“그렇다는 건 적어도 성위와 신령은 서로 다른 존재라는 거잖아요, 진룡은 뭔지 잘 모르겠지만.”
그 내용이 적힌 책은 상층에서나 볼 수 있다고 하니, 당장은 검증 불가능한 이야기지만- 머릿속에 넣어둘 필요는 있겠다.
성위에 대해서 알아낸 건 없지만, 이것저것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서 만족스러운 친목회였다.
그리고 다음 날, 토너먼트 개인전 16강 경기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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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5. 토너먼트 16강
내 16강 상대인 검투사 남자의 이름은 김민준.
같은 서버에 동명이인만 두 자릿수에 달할 정도로 흔한 이름이다. 심지어 생긴 것도 흔하게 생겼다.
특별히 잘생기지도 못생기지도 않은 평범한 이목구비, 평범한 검은 머리칼에 검은 눈동자, 존재감 없는 외모.
클래스도 흔해빠진 전사 클래스의 파생 직업, 사용하는 무기도 흔해빠진 검과 방패의 조합.
하지만 막상 본인과 대치하면 절대 흔하다느니, 평범하다느니, 지껄일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와아아아아아!!
환호를 받으며 경기장에 입성해, 무장을 갖춘 김민준을 정면에서 바라보았다.
역시 광전사와 비교했을 때 작을 뿐이지, 키도 굉장히 장신인데다가 팔다리가 쭉쭉 길게도 뻗어 있다.
저런 체형은 흑인 운동선수들한테서나 보던 것 같은데, 평범한 한국인 얼굴로 저런 몸을 가지고 있으니 위화감이 엄청나다.
그리고 장비도 평범한 듯 보이기에 오히려 평범하지 않다. 저런 건 평범하다기보다는 일부러 수수한 걸 고른 거겠지.
내가 아직도 [강철 직검]을 주 무기로 선호하듯, 저쪽도 장식이 거의 달리지 않은 심플한 디자인의 장비를 좋아한다.
실전지향적인 세팅을 했다는 뜻이다. 저번에 보니 대인전에도 익숙해 보이던데, 원래 바깥에서 뭐 하던 사람이었을까.
궁금하지만 아직은 물어볼 수 없다. 시합이 시작되면, 아니면 끝난 뒤에, 천천히 대화를 시도해 보자.
[경기가 시작됩니다.]
-저벅, 저벅.
카운트가 끝나고, 나와 김민준은 서로의 움직임을 살피며 천천히 경기장 한가운데로 향했다.
역시, 움직이기 시작하니 확실히 남다른 점이 눈에 보인다.
근육의 움직임, 호흡, 걸음걸이, 적당한 긴장까지- 모두 놀라울만큼 안정적이다.
물론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내 입으로 말하긴 뭐하지만- 이 정도로 깔끔한 움직임은 쉽게 도달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니다.
적지 않은 실전 경험과 꾸준한 단련이 뒷받침되어야만 만들어지는 자세다.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드는 상대다.
-스릉.
검을 뽑았다. 경직된 분위기가 일순간에 달아오른다. 내가 먼저 김민준을 향해 달려들었다.
신중한 타입이니 어지간해서는 먼저 공격에 나서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내가 먼저 들어가 주는 게 맞을 거다.
-카각!
정직한 궤도로 내려친 [강철 직검]이 김민준의 외날검에 막혔다. 아니, 단순히 막힌 게 아니라 흘려진다.
김민준은 그대로 검로를 비틀어 외곽으로 빼낸 뒤, 외날검을 휘두르- 지 않고, 검신을 손으로 잡아 목을 향해 찔러 들어왔다.
서양 검술 용어로 하프 소딩이라 부르는 그 기술이다. 이걸 자연스럽게 사용한다는 점에서 이미 다른 도전자들과는 급이 다르다.
나는 그대로 검을 쥔 손목을 위로 비틀어 올려, [강철 직검]의 크로스 가드를 앞세움으로써 찔러 들어오는 외날검을 받아내었다.
이어서 부드럽게 어깨와 손목을 움직여, 근거리에서 김민준의 목을 향해 칼날을 들이댄다.
초근거리에서 벌어지는 소드 레슬링 상황, 이런 상황에서 기술과 기교로 대처하는 게 가능한 도전자는 극히 드물 것이다.
하지만 김민준은 해냈다. 크로스가드에 막혔던 외날검을 물 흐르듯이 뒤로 빼서 던져버리고는, 순식간에 부무장으로 전환.
내가 애용하는 손도끼처럼, 손목에 수납해둔 짧은 단검을 꺼내어 목덜미로 향해오는 [강철 직검]의 날을 받아내었다.
김민준은 그대로 힘을 주어 직검의 날을 밀어내고,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로우킥을 날려 왔다.
무장의 전환도, 근거리에서의 체술 싸움으로의 전환도, 모두 빠르고 군더더기 없다.
“좋은데.”
-파박!
나는 한쪽 다리를 들어 로우킥을 방어하고, 그대로 김민준의 몸을 강하게 밀어 차냈다.
평소대로였으면 굳이 이런 방어자세를 취할 것도 없었다. 오히려 [철벽]으로 받아내고 강제로 턴을 잡았으리라.
하지만 이렇게 수수하게 훌륭한 기량을 뽐내는 상대를, 스킬과 스펙으로 찍어누르는 건 못할 짓이지.
“더 해봐.”
모여든 관중과 커뮤니티의 익살꾸러기들에겐 미안하지만- 오늘은 화려한 맛은 좀 빼고 싸워보자.
**
김민준처럼 무난하게 강한 타입을 공략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귀찮은 수 싸움과 기량 승부에 어울려주지 않고, 압도적인 힘과 체급으로 압살해 버리는 것.
[강철의 혼]이라는 사기적인 패시브를 갖고 있으며, 마력강화를 포함한 온갖 강화 수단을 가진 내겐 손쉬운 일이다.
하지만 그런 방식으로 찍어누르는 싸움만 하다 보면, 무식하게 스펙만 높은 다른 도전자들과 다를 게 없어질 것이다.
본질적인 실력을 키우고 싶다면, 때로는 이렇게 정직한 싸움도 즐길 줄 알아야 하는 법이다.
-카앙!
김민준의 외날검을 쳐내고, 들고 있는 방패 밑으로 몸을 날려 양다리의 오금을 노렸다.
김민준은 태클을 방어하기 위해 재빨리 자세와 중심을 낮추었다.
그 순간 나는 한쪽 손으로만 다리를 잡고, 반대쪽 손으로는 김민준의 옷깃을 잡는 자세로 전환했다.
평범한 격투기에서는 절대로 나올 수 없는 동작이지만, 시련의 탑 도전자의 강인한 육체가 있다면 가능한 변칙 그래플링.
발목 하나로만 전신을 지탱하고, 나머지 신체부위를 하체 근처로 밀어 넣어 비정상적인 무게중심을 형성한다.
그렇게 극한까지 낮춘 자세에서 등을 이용해 상대를 들어 올려, 그대로 지면에 내리꽂아 처박는다.
-쾅!
설원 트롤의 지도자급 개체가 사용하던 기술과, 리자드맨의 근접 레슬링 기술을 결합한 동작이다.
초인끼리의 검술과 격투에 익숙한 검령은 방어해 냈었지만, 김민준은 전혀 대응하지 못하고 그대로 당했다.
지면에 꽂힌 김민준은 재빨리 자세를 다잡았다. 나는 김민준을 향해 달려들었지만, 눈앞으로 방패가 날아왔다.
-휘잉.
뻔한 시간벌이용 투척을 피해내고, 검을 뽑아든 김민준의 손목을 비틀며 빼앗았던 단검을 휘둘렀다.
김민준은 숨을 크게 들이쉬더니 단번에 자세를 크게 낮추었다. 그리고 전신을 채찍처럼 휘둘러 발차기를 날렸다.
가볍게 뛰어 피해내자, 이번에는 전신의 탄력을 이용해 공중으로 도약. 힘차게 외날검을 휘둘렀다.
나름 머리를 쓴 공격이었겠지만, 전체 동작이 너무 커서 빈틈이 뻔히 보인다.
-빠악!
외날검의 간격 안쪽으로 파고들어, 반 박자 빠르게 얼굴에 주먹을 꽂아주었다.
경기는 조금 전부터 계속 이런 식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김민준의 기술에는 큰 약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모든 기술이 지나치게 현대적이라는 점. 일반적인 격투의 상식을 깨는 초인적인 동작에는 좀처럼 대응하지 못한다.
임기응변 능력은 괜찮아서 나름대로 수를 강구하는 모습을 보이긴 하지만, 결국은 금방 한계를 노출한다.
이번 경기도 내가 이긴다.
**
그로부터 몇 분 후, 이제 승패는 누가 봐도 명확한 수준까지 왔다.
“헉, 헉, 허억……”
몇 번이고 나와 칼을 부딪쳤던 김민준은 헉헉거리며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다.
[초재생]의 효과로 무한에 가까운 내 지구력을 따라올 수 있을 리가. 수비적으로 대응해서 체력을 아꼈지만 슬슬 한계겠지.
일부러 기술과 기술의 싸움으로 상대해줬지만, 나는 결국 끝까지 피는커녕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이 이상 시간을 줘도 무의미하겠지만, 그렇다고 저렇게 뻗은 상대에게 결정타를 넣기는 좀 그렇지.
“잘하시네, 어디서 배우셨어요?”
나는 뻗어있는 김민준을 향해 다가가 손을 뻗으며 물었다. 김민준은 잠시 불타는 듯한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이내 어차피 졌다고 결론을 내렸는지, 금방 표정을 풀고 내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헌터 아카데미 교육생……시설에서는 수석이었습니다.”
아하, 그러고 보니 그런 게 있었지. 헌터를 전문적으로 양성하는 일종의 실용전문학교 같은 것.
현역 헌터들과 온갖 트레이닝 전문가들의 지도를 바탕으로, 신체를 단련하고 기술을 연마하는 곳이라고 들었다.
평범한 도전자들이 생활체육 아마추어들이라면, 이 사람은 태릉 출신 엘리트 체육인쯤 된다고 생각하면 될까.
“근접 전투 부문에서는 항상 만점이었는데, 이렇게 질 줄 몰랐습니다. 세상은 넓군요.”
세상이 넓다는 말은 오히려 내가 하고 싶다. 설마 도전자 중에서 나랑 이만큼이나 겨룰 수 있는 사람이 있을 줄이야.
아마 검술과 체술 모두 최소 중급에 10레벨 이상이겠지. 어쩌면 상급 직전까지 도달했을 가능성도 있다.
“뭘요, 저도 많이 배웠습니다.”
빈말이 아니다. 차이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비등한 수준의 상대와 대련해 본 경험은 분명 내게도 도움이 될 거다.
검령 녀석은 스펙이 딸릴 뿐이지, 여전히 순수 검술 면에서는 나보다 훨씬 강하니까. 이런 거랑은 조금 느낌이 다르거든.
음……가능하면 페스티벌이 끝나기 전에 몇 번 더 붙어보고 싶은데, 이걸 기회 삼아 친구추가라도 해 볼까.
“어디, 경기 끝나고 같이 식사라도 하실래요? 이겼으니까 제가 사죠.”
“하하, 유명인한테 밥 한 끼 얻어먹을 수 있다면 저야 환영이죠.”
어색한 말투로 건넨 식사 제의, 김민준은 웃음과 함께 그것을 흔쾌히 수락하며 항복을 선언했다.
그러나 김민준은 경기가 끝난 후, 식사는 커녕 그대로 잠수를 타 버렸다.
씨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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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6. 파라노이아
그래, 한국인에게 ‘밥 한번 먹자’는 말은 그냥 인사치레긴 하지.
제대로 된 사회생활을 해본 적이 없는 나도 그건 안다. 하지만 이번에는 좀 상황이 다르지 않았나.
승패가 결정난 후, 나는 모처럼의 다른 경기 관람도 포기한 채 곧바로 바깥으로 나왔지만- 김민준은 나타나지 않았다.
기다려도 안 오고, 커뮤니티로 쪽지까지 넣어봤지만 씹힌 것 같고, 경기장 주변을 빙빙 돌아봐도 안 보이고.
아무래도 밥이고 뭐고 그냥 경기가 끝나자마자 다른 곳으로 가버린 모양이다. 어이가 없어서 진짜.
살다살다 남자한테 바람을 다 맞아보네, 이거 진짜 이상한 기분인데.
32강 상대였던 박원호도 경기에 지고 나서 쪽팔렸는지 바로 잠수를 타 버렸는데, 김민준도 그런 건가.
[작성자 : 박지원#2411]
[제목 : 이번 토너먼트 최고 명경기 이거인듯]
(사진)
진혁게이 vs 민준이햄
스킬 싹 다 빼고 담백하게 육탄전으로 붙는거 ㅈㄴ 맛있었다 ㅇㅈ?
- 확실히 전붕이들 싸움이 보는맛이 있음
- ㅇㅈ 진짜 옛날 검투시합이 이런느낌이었을듯
- 이건 진혁이도 진혁인데 민준이햄이 접수 개찰지게 해준게 컸다
- ㄹㅇ 이정도로 수준높은 맞대결 오랜만인듯
- ㄴ 수준높은 맞대결 ㅋㅋ 걍 하루종일 샌드백되서 개처맞는게 뭐가수준높음?
- ㄴ 경기 수준은 모르겠는데 니 수준은 알만하다 ㅋㅋ
- ㄴ 도현이 애미 샌드백처럼 줘패는게 더 재밌긴하지 인정한다
- 이새끼들 어제까진 개듣보 취급해놓고 이제와서 민준이햄 이러고있네 ㅅㅂㅋㅋ
커뮤니티 여론은 이렇듯 김민준에게 아주 호의적이지만, 다르게 말하면 결국 그냥 명품 조연이었으니까.
그러고 보면, 내가 손을 뻗었을 때도 잠깐 이를 악무는 것 같았다. 나름 훈훈한 마무리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보통 이럴 때는 역지사지로 생각해 보라고들 하던데, 내가 김민준 같은 상황이었다면 어땠으려나.
나라면 좀 더 붙어보고 성장하고 싶었을 것 같지만, 남의 마음을 내가 알 리가 있나.
“에라이.”
모르겠다, 그냥 신경쓰지 말자.
**
김민준과의 파토난 약속을 대신해, 나는 강준호와 함께 밥을 먹으러 노점 거리로 나왔다.
이번 페스티벌에서 만난 사람은 그밖에도 많지만, 제일 대하기 편한 사람을 꼽으라면 역시 이 사람이다.
아줌마들처럼 과한 관심을 보이지도 않고, 고고학자들처럼 설정을 더 풀어달라고 닦달하지도 않고.
그냥 담담하게 함께 던전을 클리어하고, 룬 문자와 주문 언어의 공부에 묵묵히 협력해준다.
“저도 진혁 씨가 제 파티원들 다음으로 편해요, 말도 잘 통하고, 이렇게 음식 취향도 맞고.”
강준호는 그렇게 말하며, 새빨간 매운 소갈비찜 한조각을 후후 불어 입안에 넣고 몸을 비틀어 댔다.
이 사람, 가만 보면 매운 걸 잘 먹는 것도 아니면서 꼭 매운 음식만 골라서 먹는단 말이지.
같은 서버의 파티원들은 매운 걸 못 먹는 편이라서, 함께 식사를 하는 일은 거의 없다는 것 같은데.
“전 그냥 뭐든 잘 먹는 거고요.”
나는 그렇게 답하며 똑같이 매운 소갈비찜 한조각을 입에 넣었다. 어우, 이건 확실히 내 입에도 맵네.
매운 감각은 혓바닥이 느끼는 통증, 그리고 탑의 시스템은 다른 건 몰라도 ‘고통’에 만큼은 내성을 부여하지 않는다.
그래도 그간 별의 별 고통을 다 느껴본 덕분에, 이 정도로는 끄떡도 안 하긴 하는데-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먹는거지?
괜히 궁금해져서 슬쩍 주변을 둘러봤는데, 다른 도전자들도 별다른 호들갑 없이 잘만 먹고 있었다.
뭐지, 나 사실 맵찔이었나. 아니면 여기가 진짜 매운맛 매니아들만 찾는 숨겨진 노점이었던 건가.
그게 아니면, 뭔가 매운 음식을 잘 먹는 비법이 있나. [포커페이스] 스킬이라던가.
“……응?”
이번에도 괜히 궁금해져서, 가볍게 마력을 일으켜 감지를 돌려 보았다.
그러자, 강렬한 위화감이 몸을 감쌌다. 이 사람들, 묘하게 기척들이 다 이상한 것 같은데?
매운 갈비찜을 아무렇지 않게 먹고 있다는 걸 제외하면, 딱히 공통점도 없는 사람들일텐데- 대체 뭐지.
“진혁 씨, 뭐 찾으세요? 화장실?”
“아뇨, 그게 아니라…그냥 뭔가.”
이런 기척을 내는 사람은 그 밖에도 많았지만, 이렇게 한 자리에만 모여 있으니 뭔가 느낌이 이상하다.
아무런 근거도 보증도 맥락도 없다. 내가 그간 쌓아온 수많은 경험으로도 설명할 방법이 없다.
그런데 그냥 이상하다. 그냥 불길하다. 보통 이런 느낌이 들 때는 대부분 뒈질 뻔했을 때인데.
그러다 문득 눈앞의 강준호가 실력 괜찮은 주문술사라는 사실을 뒤늦게 떠올렸다. 나는 조용히 속삭였다.
“이 사람들, 기척이 좀 이상하지 않아요?”
그 순간, 조용히 갈비찜을 먹고 있던 모든 사람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았다.
**
위기를 감지한 순간, 몸은 언제나 그랬듯 판단보다 빠르게 움직였다.
-쾅!
나는 그 자리에서 의자를 걷어차 날려버리고, 강준호의 손목을 붙잡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노점 주인인 도전자가 ‘어어, 갑자기 왜 그러세요’ 하고 의문을 표했지만, 대답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일단 인파가 많은 곳으로 향한다. 단순히 내 착각일수도 있지만, 자리를 피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혁 씨, 잠깐만요! 뭐가 어떻게 된……!”
아직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강준호의 말을 흘려넘기며, 재빨리 마력을 퍼트리며 심신을 날카롭게 세웠다.
언제 어떻게 전투가 벌어져도 곧바로 대응할 수 있게끔, 하지만 마력을 퍼트린 순간 나는 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오래된 백열전구처럼 묘하게 점멸하는 생명반응, 그 이상한 기척을 내는 사람은 그 전에도 드물게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 퍼트린 마력에 감지되는 같은 기척이……이게 대체 뭐야, 왜 이렇게 많지?
인파가 밀집된 구역에 가야 하나쯤 느껴질까 싶었던 기척이, 무시할 수 없는 숫자로 불어나 여기저기 섞여 있다.
“씨발,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어떤 더위에도 끄떡하지 않는 몸이 식은땀을 흘린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위협에 등골에 소름이 돋는다.
살기가 느껴지는 것도, 위협이 날아온 것도 아니지만, 주변 모든 사람이 암살자로 보인다.
아무런 근거도 보증도 없는, 생사를 넘어온 그간의 경험에서 비롯한 직관- [직감]이 내게 경고하는 것이다.
“진혁 씨, 무슨 상황이든 일단 길드로 가죠. 그리핀같은 대형 길드를 찾아가면 보호받을 수 있을 거에요.”
그 말을 듣고 퍼뜩 정신이 들었다. 솔로 플레이가 너무 익숙해서 혼자 대처해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신변의 위협이 느껴졌을 때는 대형 길드의 막사를 찾아라, 토너먼트 참가자들에게도 그런 공지가 가지 않았던가.
-타다닥!
나는 곧바로 그리핀 길드의 막사로 향했다. 토너먼트 관련된 수속을 처리하느라 한번 가본 적 있는 장소다.
웅성거리는 인파를 힘으로 뚫고, 재빨리 내달려 도착한 천막을 향해 무작정 뛰어들었다.
“우왁, 깜짝이야!”
이런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지만, 나는 천막에 뛰어든 직후 짧게 감탄했다.
역시 대형 길드의 간부급은 다르다는 걸까, ‘깜짝이야’ 같은 말을 하면서도 모두 재빨리 전투태세를 취한다.
갈무리하고 있던 마력이 뿜어져 나와 기세를 더하는 한편으로, 재빨리 뛰어들어온 나와 강준호의 얼굴을 살핀다.
“오, 누군가 했더니 솔플러 분이셨네요. 그렇게 급하게 뛰어들어와서는, 무슨 일이에요?”
그리고 다음 순간, 나는 뭐라고 말을 해야 하는지 떠올릴 수 없었다. 내 부족한 사회성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설명할 방법이 없는 직관에서 비롯한 위기감, 나는 오직 그것만을 믿고 여기까지 뛰어왔을 뿐이다.
“하, 씨발……돌겠네, 이걸 뭐라고 해야 돼?”
“욕은 하지 마시고, 천천히 말씀해 보세요.”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을 수는 없어서, 나는 떠듬떠듬 힘겹게 상황을 설명했다.
**
내 설명을 들은 그리핀 길드의 간부들은 모두 아리송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러니까, 식사중에 갑자기 생명의 위기를 느껴서, 급하게 여기로 뛰어 오셨다…그런 말씀이신거죠?”
요약하고 나니 이렇게 어이없는 소리도 없었다. 하지만 내가 느낀 직관을 이들에게 전달해 줄 수도 없는 노릇이다.
“마력감지를 써 보니까 기척이 이상한 사람들이 많았고, 그 사람들이 동시에 진혁 씨를 노려봤다고요?”
“말하자면 그렇게 되는데……”
“같이 오신 분, 강준호 씨? 강준호 씨도 그 이상한 기척을 느끼셨나요? 사람들이 노려본 것까지요?”
강준호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너무 빠르게 붙잡고 나온 바람에, 오히려 아무것도 보지도 느끼지도 못한 거다.
“사람들이 저희 쪽을 쳐다본 것 같기는 했는데, 자세히는 못 봤고…이상한 기척이라는 건 저도 잘……”
말끝에 ‘그래도 진혁씨가 허튼소리를 할 사람은 아니다’ 라고 변호해 주긴 했지만, 아무 소용도 없었다.
그리핀 길드의 간부들은 약간이지만 언짢은 표정으로, ‘한번 조사해 볼게요’ 라는 말과 함께 우리를 내보냈다.
사실상 진상 민원인 내지는 피해망상 환자 취급을 당했다. 당연히 조사고 뭐고 할 리가 없겠지.
“젠장할……”
나는 터덜터덜 막사에서 걸어나왔다. 정말로 내가 과민하게 반응한 걸까- 그런 생각까지 하며.
하지만 그 때, 내 등을 살짝 두드리는 손길이 반대로 내 감각을 깨웠다. 등을 두드린 건 안면이 있는 사람이었다.
페스티벌 맵에 들어온 이후 몇 번 마주쳤던, 토너먼트를 응원한다고 말해줬던 바로 그 간부.
“토너먼트 때문에 예민해지신 것 같습니다. 응원하고 있으니, 너무 긴장하지 마시죠.”
아, 이 새끼도 기척 이상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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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7. 확신의 자아
숙소로 들어와 침대에 앉아, 머리를 움켜쥐었다.
젠장할, 대가리가 터질 것 같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 짐작조차 안 간다.
지금도 마력감지를 펼쳐 보면, 특유의 이상한 기척을 내는 사람들의 존재가 확실히 식별된다.
인파사이에 자연스럽게 섞여 있는 그것은, 기척을 제외한 어떤 부분도 이상하지 않다- 그래서 신경 쓰지 않았던 거니까.
하지만 그것들은 분명히 나를 위협했다. 간만에 느껴보는 찌릿찌릿한 위기감에 저절로 몸이 움직였었다.
목적도 정체도 모르겠지만 적이라는 건 확실하고, 천천히 숫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것 역시 확실하다.
“씨발, 거기서 뛰쳐나오면 안 됐는데……”
피해를 감수하더라도 정면에서 맞서야만 했다. 어차피 나는 어지간한 일로는 죽지 않으니, 확실하게 증거를 잡았어야만 했다.
그 이상한 기척의 정체가 무엇이든 내가 만나본 적 없는 종류의 적임은 분명하니, 정보를 수집했어야 하는 건데.
지금이라도 길거리에서 아무나 잡아와 심문 따위를 해 봐야 하나.
아니, 그랬다가는 내가 범죄자 취급을 받으며 페스티벌 내내 수배령이 떨어지겠지.
이게 탑의 스테이지였다면 또 모를까, 적의 정체를 전혀 모르는 시점에서 너무 과감한 행동은 벌일 수 없다.
그리핀 길드의 간부 몇몇에게 이상한 인상이 박혔으니 더더욱 힘든 상황이다. 지금 내가 뭘 해도 피해망상 환자 취급을 하겠지.
좋아, 일단 침착하게 정리해 보자. 지금도 이상한 기척을 가진 사람들은 점점 늘어나고 있다고 봐야 한다.
이들의 위협을 대형 길드에 알리려면, 확실한 물증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차라리 같은 상황을 재현해 보는 건 어떨까.
증인이 되어줄 사람을 곁에 두고, 실제로 내게 가해지는 위협을 목격시킨다면- 조사를 의뢰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내게 가해질 위협의 수위를 모른다는 점이다. 당장 상대가 내가 손쓸 수 없을 만큼 강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여긴 내가 공략 중인 스테이지가 아니고, 1층부터 100층까지의 모든 약자와 강자가 모이는 페스티벌 맵이니까.
애초에 ‘상대’란 누구지? 누가 내 적이지? 이 기척을 가진 불특정 다수가 모두 내 적인가?
기척의 정체도 모르고, 상대가 소수인지 다수인지도 모르며, 제대로 상대가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아니, 막말로.
“정말로 내 머리가 이상해진 거라면……”
내가 정신병자가 아니라는 확증은 있는 건가? 스트레스에 노출된 머리통이 맛이 갔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지 않나?
몇 년 동안은 실제로 반쯤 맛이 간 채로 살았고, 아직 그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해도 이상할 건 전혀 없다.
애시당초, 내가 처해 있던 환경은 미치지 않는 게 이상한 환경이었다. 거기에, 페스티벌에 오기 전에 본 ‘별의 영상’.
그렇잖아도 높았던 [정신 오염 내성]의 레벨이 상승했다,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피를 쏟을 만큼 강력한 정신적 부하다.
그게 내 뇌를 망가트린 거라면, 내 정신적 문제가 망상장애를 일으킨 거라면, 사실 ‘적’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면.
“좋아, 검증해 보자.”
나는 고민을 멈추고 행동하기로 했다. 인벤토리에서 날카로운 단검 한 자루를 꺼내, 그 위로 강하게 오러를 둘렀다.
그 다음으로는 전신에 퍼져 있는 마력을 최대한 죽이고, 남은 HP의 잔량을 확실하게 확인하고.
-푹!
있는 힘껏, 자신의 심장을 향해 단검을 찔러넣고 한 바퀴 비틀었다.
**
여러 패시브 스킬의 효과로 인해 불사신이나 다름없는 몸뚱이도, 절대 죽지 않는 것은 아니다.
나는 내 몸에 흐르고 있는 마력을 제어함으로써, 스스로의 재생력을 약화시키는 방법을 최근에 찾아냈다.
물론 그럼에도 워낙 튼튼하고 생명력이 강한 몸뚱이인지라, 단순히 심장에 칼을 박는 걸로는 원하는 피해를 입을 수 없었다.
나는 결국 오러까지 두르고 심장에 박아넣은 단검을 한 바퀴 비틀고 나서야, 제대로 삼도천을 향해 몸을 던질 수 있었다.
표시된 HP가 단번에 깎여나가 0가 되었다.
찢어진 심장이 피를 흘리고, 눈앞은 순식간에 깜깜해지며, 의식이 흐려진다.
차근차근 죽음이 다가온다. [사고 가속]을 발동하지 않았음에도, 주마등이 스치는 뇌는 멋대로 빠르게 사고한다.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가장 커다란 스트레스 반응, 그리고 나를 무엇보다 강하게 만드는 경험, 죽음.
“아……”
지금 내 몸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피를 철철 흘리며 침대에 엎어진 죽기 직전의 나는- 분명 웃고 있겠지.
그게 위기에 처했을 때 내가 보여주는 일관된 반응, 심장이 반쯤 찢어져도 분명 이 새끼는 웃고 있을 거다.
차갑게 발밑을 침잠하는 죽음의 공포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걸로 알았으니까.
내가 느끼는 죽음의 감각과 위기감은 무엇보다 정확하다는 사실을, 이 애매한 자살 시도로 깨달았다 이 말이다.
HP가 0이 되어도 몸뚱이는 잠시 살아남는다. 아스테리오스의 도끼에 반으로 잘려나갔을 때 그랬듯이.
나는 죽지 않는다. 이 꼴로도 살아 있다. 정확하게 내가 생각한 그대로다.
역시 내 사고는 틀리지 않는다. 내가 쌓은 경험은 나를 배신하지 않아.
그래, 나는 미치지 않았다!
-절그럭.
죽어가는 와중, 작은 소음이 귓가에 들렸다.
아니, 귓가가 아니다. 왜냐하면 내 귀는 지금 기능을 많이 상실했거든. 마력감지에 걸린 거다.
[마력 지배]와 [파동 제어]로 어마어마한 수준까지 발달한 내 마력 지각력은, 몸이 죽어가는 와중에도 정확하게 기능한다.
[초재생]의 효과가 발휘되어 HP가 조금씩 차오르고, 다시 밝아지기 시작한 여러 감각에 잡힌 것은 작은 기척 하나.
희미하게 점멸하는 수상한 기척을 가진 누군가가, 숙소 창문에 얼굴을 댄 채 나를 엿보고 있었다.
딱 걸렸구나 이 새끼야, 내가 병신처럼 혼자 뒈지려는 걸 보고 마무리라도 지어주러 오셨나?
근데 이걸 어쩌나, 나는 심장에 칼 하나 박힌다고 뒈지는 몸이 아니거든.
[마력강화]
[불굴]
[혼신]
[도약]
-쾅!!
온갖 스킬을 동시에 발동한 내 손아귀가, 창문을 통째로 분쇄하며 무언가를 움켜쥐었다.
**
창문에 달라붙어서 나를 지켜보고 있던 ‘무언가’는 잽싸게 도망쳤다.
상당히 재빠른 놈이다. 못해도 25층 랭커 수준은 될법한 순발력인가- 상태가 조금만 더 좋았으면 잡았는데.
내 심장에서 흘러나온 피로 범벅된 손아귀 안에는, 짧은 검정색 머리카락 몇 올이 쥐어져 있었다. 그놈의 것이다.
마법으로 잘 보관해 두기는 하겠지만, 이 머리카락 몇 올로 뭔가 알아낼 수는 없을 거다. 그래도 괜찮다.
내 감각에 대한 확신과 함께, 나를 적대하고 있는 ‘무언가’가 분명한 실체를 갖고 있음을 이걸로 확인한 셈이니까.
“쿠훅……켁, 아, 아쉽네, 살점 몇 조각이라도 뜯었으면 좋았는데.”
대체 어디로 역류했는지 입안에 살짝 고인 피를 토해내고, 포션을 들이키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머리카락이 아니라 다른 부위를 뜯어낸 거였으면, 살점에 남은 마력을 통해 추적을 벌일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 말이지.
아니, 이 상태로는 좀 어려우려나. 계산대로 살긴 했는데, 계산대로 한 번 뒤지기 직전까지 다녀온 참이니까.
“으, 뭐야, 누가 실내에서 마법 썼어?”
“저기, 저 사람 같은데…세상에, 피!”
“미친, 사람 죽겠다! 힐 되는 사람!”
한편 숙소 바깥은 난리도 아니었다. 그렇겠지, 난데없이 벽이 폭발하더니 피투성이인 사람이 나온 거니까.
그 와중에 나를 알아보는 사람도 몇 명 있어서, 소란은 더욱 커질 분위기였다. 마침 잘 됐다.
저 사람들 중에서 한 명쯤은 나를 창문에서 엿보던 놈을 목격했겠지, 이걸 이용해 길드 쪽에 조사를 넣어 보자.
무려 토너먼트 8강 진출자의 암살 미수다. 물론 피투성이가 된 건 내 자해 때문이지만, 그래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겠지.
정 뭣하면 커뮤니티에서 여론을 부추기면 그만이다. 본선 진출자는 특별히 신경 써서 보호한다고 하지 않았느냐고.
“괜찮으십니까!”
마침 근처에서 순찰 중이던 그리핀 길드원 한 명이, 상황을 인지하고 부리나케 내 쪽을 향해 달려왔다.
대형 길드의 간부급 사이에도 기척이 이상한 놈이 몇 명 섞여 있기에, 길드를 쉽게 믿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괜찮다.
사실, 기척이 이상한 녀석들의 존재를 알릴 방법은 직접 물증을 잡는 것 외에도 한 가지 더 있다.
단순하게, 나 말고도 이 ‘기척’을 감지할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된다.
나와 비슷한 수준까지 마력감지가 가능한 랭커가 있다면, 분명 이상한 점을 눈치채줄 테니까.
“세상에, 어쩌다 이런…잠시만 기다리세요, 곧 저희 길드 힐러가 도착할 겁니다. 포션 먼저 드세요.”
길드원이 건넨 포션을 벌컥벌컥 들이키며, 그게 가능할 만한 랭커들의 면면을 머릿속에서 떠올렸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마력을 질질 흘리고 다니는 마당에, 나와 동등한 감지가 가능한 사람이 전체 서버에 몇 명이나 있을까.
글쎄,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몇 명쯤은 확실하게 있을 거다. 1~2세대 시절부터 탑에 체류하고 있는 괴물들이 있지 않은가.
“저기요, 당신네 길마좀 만날 수 있을까요?”
각 대형 길드를 책임지고 있는 우두머리, 길드 마스터들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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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8. 길드 마스터
S급 헌터가 될 수 있는 스펙을 가졌음에도, 탑 바깥으로 나가지 않고 꾸준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자.
자신이 체류하고 있는 서버 하나에 그치지 않고, 온갖 서버에 영향력을 끼치며 탑의 경찰 노릇을 자처한 자.
무법지대가 될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최소한의 질서를 세우고 규율을 만든 자- 그리고 그게 가능한 무력을 갖춘 자.
대형 길드의 길드마스터란 죄다 그런 자들이다. 단순히 탑에 체류한 기간만 해도 십 년은 되어가는 괴물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대외 활동은 꽤나 제한된 형태일 수밖에 없다.
“저기……길마님은 그렇게 막 만나실 수 있는 분이 아니시라니까요?”
당연히 길마를 만나고 싶다는 내 요청은 곧바로 거절당했다. 여기까지는 예상한 바다.
원래 압도적인 무력을 가진 집단은, 군대와 마찬가지로 움직이지 않고 자리를 지킬 때 가장 든든한 법이니까.
특히 대형 길드의 마스터는 리더와 전략병기의 역할을 겸하고 있는 존재이니, 아무나 쉽게 만날 수 없는 게 당연하지.
하지만 나는 ‘아무나’가 아니다. 전 서버 유일의 솔플러, 토너먼트 8강 진출자, 그리고 무엇보다-
“아니, 내가 2661서버 대표 권한으로 만나겠다는데 뭐가 문젭니까.”
-인원이 한 명뿐인 서버긴 해도, 어쨌든 길드마스터에게 면회를 신청할 자격이 있는 서버 대표니까.
현재 대한민국 시련의 탑 서버에 통용되는 규칙은, 3대 대형 길드의 연합 회의를 통해 민주적으로 정해지고 있다.
이 회의에 참석할 수 있는 것은 길드마스터를 포함한 각 서버의 대표자들.
정치로 비유하자면, 이들은 국회의원과 비슷한 역할을 맡고 있는 셈이다.
아무리 작은 서버의 약한 도전자라고 해도, 적절한 절차를 거쳐 선출된 대표자라면 이 회의에 참가할 자격이 생긴다.
다른 서버의 규칙이 어떻든 나랑은 아무 관계도 없는 이야기이기에, 신경도 쓰지 않고 있었지만.
지금은 이야기가 다르지, 이건 마땅한 내 권리 주장이다.
나는 2661서버 대표의 자격으로 그리핀 길드의 마스터에게 면담을 요청하고 있는 거다.
“아니, 그 서버에 혼자 계시잖아요. 당연히 만장일치로 뽑힌 대표시겠죠! 말이 되는 소리를 하세요!”
“서버 대표들끼리는 평등하다면서요, 그럼 1명뿐인 서버의 대표도 평등하게 대해줘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게, 당연히 평등하긴 하지만, 요즘 길마님이 워낙 바쁘기도 하시고……아니, 왜 이렇게 억지를 부리세요!”
가슴을 치며 답답해하는 이 길드원은 조금 전, 용건을 말해주면 꼭 길마에게 전달해주겠다고 말한 참이었다.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라고요, 다른 사람 없이 꼭 1대1로 이야기해야 한다니까요.”
“용건은 잘 전달해 드리겠다고 말씀드렸잖아요, 그렇게 저희가 못 미더우세요?”
당연하지, 내가 당신을 어떻게 믿어. 아까부터 주변에 기척 이상한 놈들이 하나둘씩 접근해 오고 있단 말이다.
길드의 간부급에게도 일부 손이 미쳤고, 말단 길드원들은 말할 것도 없이 영향을 받은 상태인 게 뻔하다.
이 억울해하는 길드원은 평범한 기척이긴 하지만, 나로서는 억지를 쓸 수밖에 없는 상황이란 말이지.
“하아…알았어요,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나는 그렇게 한 시간가량을 실랑이한 뒤에야, 비로소 길드 마스터와 독대할 수 있게 되었다.
**
그리핀 길드 마스터의 이름은 김남혁, 올해 43세의 유도 국가대표 출신 운동인이다.
보유 클래스는 격투가 계열 유니크 클래스로, 이름은 불명이지만 짐승으로 변이하는 수인화가 가능하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내가 요구한 대로 1대1로 대면해 본 김남혁은- 정말로 짐승 같은 아우라를 풍기고 있었다.
“반갑습니다, 서진혁 씨. 그리핀 길드 마스터인 김남혁입니다.”
가볍게 악수를 하자마자 느껴지는 막강한 근력, 스탯이 증가하는 수인화를 발동하지 않았음에도 압도적이다.
기본 스탯만 따져도 내 두 배 정도는 될까, 간접적으로 느껴지는 마력의 양도 재버워크 이상으로 많다.
심지어 그만한 마력을 거의 새나가지 않게 잘 통제하고 있다. 나와 비교해도 크게 흠잡을 것 없는 제어능력이다.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보아하니 실력은 소문 이상이신 것 같군요.”
김남혁이 툭 던진 한마디 역시 그의 실력과 눈썰미를 제대로 증명하고 있었다. 내 실력을 가늠해 본 건가.
역시 1.5세대 시절부터 탑에 체류하고 있는 근본 있는 실력자답다. 이런 사람이라면 금방 상황을 눈치챌 수 있을 터.
당장은 의식하지 못하고 있어도, 내가 언질을 주면 곧 위화감을 눈치챌 거다. 그다음은 완전히 맡겨도 되겠지.
“흐……”
하지만, 그 ‘이상한 기척’의 이야기를 꺼내야만 하는 내 입에서는 실실거리는 웃음만이 새고 있었다.
이 사람이 그리핀 길드의 마스터, 탑 밖으로 나가면 S급이 확정된 강자, 대한민국 전체 탑에서 손꼽히는 최강자인가.
좋다. 아주 마음에 든다. 루키들 위주로 진행되어아먄 한다는 토너먼트 개인전이 암묵적 룰이 원망스러울만큼.
“그러는 댁도, 존나게 쎄 보이시는데.”
앞으로 층을 얼마나 더 올라가야 이만한 강자와 마주칠 수 있을까, 앞으로 싸워 볼 기회가 있기는 할까?
지금 당장 이 사람과 맞붙으면 어떻게 될까, 내가 이길 수 있을까, 이기기 위해서는 뭐가 필요할까.
가진 정보가 거의 없다, 스펙 차이를 생각하면 정공법으로는 절대 못 이긴다. 생각해 보자.
-꾸욱.
악수를 나누던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간다. 마력이 감정에 반응해 들끓는다.
심장을 찢어 생사의 경계에 다녀왔기 때문일까, 바짝 날이 서 있는 온갖 감각이 시뮬레이션을 시작한다.
불가능을 외치는 계산 뒤로 죽음이 보인다. 하지만 내 죽음이 만들어 낼 결과도 선명히 읽힌다.
팔 하나- 아무리 못해도 팔 하나는 확실히 가져갈 수 있다. 운이 따라준다면, 팔이 아니라 목을 가져갈 수 있을지도.
“중요한 용건이라는 게 이건 아니었을 텐데요.”
김남혁이 곤란하다는 듯한 말에, 나도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런, 잠깐이지만 너무 흥분했다.
성장의 쾌감을 쫓는 것은 좋지만, 그것에 매몰되지는 않기로 정하지 않았던가. 잠깐 심호흡하고 진정하자.
내가 가는 길은 분명 틀리지 않았다. 그러니 길을 헷갈려 애먼 곳으로 빠지지만 않으면 된다.
“아, 실례했습니다.”
나는 빙그레 웃으며, 악수를 위해 잡은 손을 위아래로 흔들었다.
**
나는 김남혁에게 그간 겪은 일과 수상한 기척에 대한 것을 상세하게 설명했다.
처음에는 허무맹랑한 소리라고 생각하는 듯싶었지만, 내가 뜯어낸 머리카락을 보여줄 때쯤에는 태도가 바뀌어 있었다.
하지만 이내 직접 마력을 퍼트려 감지를 펼치는 것 같더니, 내가 말한 ‘이상한 기척’은 잡아낼 수 없었다고 말했다.
“저는 마법사 계열이 아니라 감지에는 약합니다. 솔직히 잘 모르겠군요.”
난다긴다 하는 길드 마스터라도 내 감지능력은 따라올 수 없나. 하긴, 나도 처음에는 긴가민가하게 느꼈을 뿐이다.
“물증은 둘째치고 심증도 너무 약합니다. 서진혁 씨도 명확한 실체는 잡지 못한 것 아닙니까.”
그러면서 김남혁 역시 내 신경과민을 의심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그게 옳을 터다.
대한민국 서버 최강자 중 하나가 감지하지 못한 것을, 나만은 정확하게 감지하고 있다니- 말이 안 되는 일이니까.
하지만 내 판단과 감각은 절대 틀리지 않는다. 자신한다, 이건 그냥 김남혁의 감지가 나보다 수준이 낮은 탓이다.
“그러면, 실체가 애매하다고 그냥 방치할 겁니까. 실체가 밝혀졌을 때는 이미 늦었을 수도 있는데요.”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내 판단을 그대로 믿을 수는 없겠지만, 방심해서는 안 된다고.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김남혁은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믿기 힘든 이야기지만, 일단은 믿어보겠다는 것 같다.
하지만 ‘수상한 기척’에 관한 내 말을 그대로 믿으면, 오히려 도울 수 있는 부분이 더 적어진다고 한다.
“당장 저희 길드원들도 그 수상한 기척을 내고 있어서, 믿을 수 없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맞는 말이었다. 애시당초 나도 대단한 협력을 바란 건 아니었다. 여차할 때의 아군이 하나쯤 있으면 될 뿐이다.
“일단, 숙소를 훔쳐보던 사람이라면 저희 쪽에서 찾아보겠습니다. 토너먼트 참가자에 대한 보호 차원이라고 하면 되겠죠.”
그렇게 말하며, 김남혁은 내가 갖고 있던 머리카락 한 올을 가져갔다. 연금술을 이용해 조사하겠다는 것 같다.
머리카락의 주인만 찾아내도 반 이상은 해결된다. 나는 김남혁과 몇 마디 대화를 더 나누고 막사에서 나왔다.
“허, 이젠 대놓고 보고 있네.”
마력을 넓게 퍼트리자 가까이에서 느껴지는 수십 개의 이상한 기척- 아무래도 나를 감시하고 있던 것 같다.
이제는 숨길 생각도 없는 걸까, 아니면 단순히 숫자가 어마어마하게 늘어났을 뿐인 걸까.
마음같아서는 아무나 한 놈 붙잡아서 속을 뜯어보고 싶지만, 길드장이 나섰으니 조금 기다려 보기로 했다.
다음 날, 나는 토너먼트 8강 경기에 손쉽게 승리하고- 김남혁에게 머리카락의 주인을 찾았다는 연락을 받았다.
개인 채팅을 통해 전달된 스크린샷에 나와 있는 얼굴은, 조금이지만 낯이 익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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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9. 흑막
8강 경기 상대는 72층을 공략 중인 랭커 출신의 소환술사였다.
우승후보 까지는 아니지만, 이번 토너먼트의 다크호스로 취급받고 있는 도전자.
하지만 경기는 별 극적인 장면 없이 싱겁게 끝났다. 그렇지만, 딱히 상대가 약했던 건 아니다.
아니, 약하지 않았다는 정도가 아니지. 여태까지 토너먼트에서 붙은 도전자들 중에서 스펙적으로는 가장 강했다.
싱겁다는 건 어디까지나 내 일방적인 감상, 이게 다 어제 김남혁 같은 강자를 본 탓이다.
상대 도전자의 강함에 대한 역치가 올랐다고 할까……그리고 상대방의 클래스도 한몫을 했지.
다대일 싸움에 능하고 마법사 상대로 특히 강한 나인데, 하필 상대는 물량빨 마법사인 소환술사였으니까.
[작성자 : 강용준#2491]
[제목 : 오늘자 8강 하이라이트……gif]
(사진)
소환수 무시하고 뚜벅뚜벅 걸어가는 진혁게이
(사진)
도끼하나들고 18대1하는 바람의전설혁
(사진)
물량 다 씹어버리고 혁준이대가리깨기
(사진)
번외 : 갑옷정령 몸통박치기로 분쇄(어케했노ㅅㅂ)
- 소환수만 열마리인데 걍 무시하고 들어가네 미친새끼
- 와 씨발 나 소환술사인데 1인칭으로 2짤보면 지릴자신있다 ㅋㅋ
- ㄴ 난 소환술사 아닌데도 개쫄리는데 정상이냐?
- ㄴ 저기 대가리찍히는게 소환수가 아니라 니 파티원이라고 생각해보셈ㅋㅋ
- 이새끼 도끼들고나온거보면 일부러 겁주려고 한거같은데
- 3짤 저걸 들어갈생각을하네 제정신이냐
- 대가리찍는거 ㅅㅂ 슬래셔무비노 ㅋㅋㅋㅋㅋ
커뮤니티의 반응은 이렇게 화끈했지만, 나는 묘한 불연소감을 간직한 채 경기장을 나와야만 했다.
그리고 경기장을 나오자마자, 강렬하게 느껴지는 ‘이상한 기척’에 의해 저절로 긴장감이 싹텄다.
어제보다 숫자가 더 많아진 것 같다. 경기장 근처에만 대체 몇 명이 있는 거지?
경기장 관중석에는 얼마 없었던 것 같은데, 경기장 근처의 인파에 상당히 많은 숫자가 섞여 있다.
이건 의식하지 않는게 차라리 낫겠다 싶어, 나는 마력감지의 범위를 축소시킨 채로 인파 사이를 빠져나왔다.
그렇게 사람이 없는 골목으로 슬쩍 빠져나오니, 띠링- 하는 소리와 함께 커뮤니티의 쪽지 알림이 울렸다.
[김남혁 : 머리카락 주인 찾은 것 같습니다. 스크린샷 보냈으니 확인해보세요.]
설마 그걸 하루 만에 바로 찾은 건가, 무슨 수를 쓴 건지는 모르겠지만 생각 이상으로 빠르다.
나는 곧바로 김남혁이 보낸 첨부파일을 열어 보았다. 스크린샷은 총 세 개가 있었다.
두 개는 인파 사이에 섞인 모습을 찍은 스크린샷, 하나는 정면 얼굴이 나온 증명사진 같은 스크린샷이다.
정면 얼굴은 앞선 두 개의 스크린샷을 토대로, 어떤 서류에서 같은 사람의 얼굴을 따로 발췌한 것 같았다.
“뭐……?”
아는 얼굴이었다.
익숙하다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분명히 본 적이 있는 얼굴. 비단 얼굴만이 아니라 이름도 알고 있다.
하지만 납득이 안 된다. 정말로 이 녀석이라고? 대체 어떻게?
“진혁 씨, 이런 데서 뭐 하세요?”
그 때, 골목에 있는 나를 발견한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여전히 어딘가 아파 보이는 인상의 비실비실한 마법사, 주문술사 강준호였다.
이번에도 관중석에서 내 경기를 보고 있었지, 경기가 끝나자 나를 찾아서 밖으로 나온 모양이다.
나는 별 일 아니라며 절레절레 손을 젓고, 등을 기대고 있던 골목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곧바로 눈치챘다.
“……”
강준호의 기척이 이상하다.
**
일부러 마력감지의 범위와 수준을 낮추고 있었지만, 이렇게 가까우면 모를 수가 없다.
평소의 강준호와 명백하게 기척이 다르다. 점멸하는 백열전구처럼 흐리게 깜빡이는 생명반응.
표정, 인상, 말투, 마력까지 모두 평소와 똑같지만- 딱 하나, 기척만이 달라졌다.
“경기 끝나고 표정이 안 좋던데, 컨디션 괜찮아요?”
“……예, 뭐.”
“안 괜찮아 보이는데, 포션이라도 하나 드세요.”
강준호는 그렇게 말하며 페스티벌 코인으로 산 포션을 내게 내밀었다.
나는 그것을 받지 않은 채 경계태세를 유지했다. 언제라도 검을 뽑을 수 있도록.
솜씨 좋은 주문술사인 강준호는, 긴장 상태에 들어간 내 마력의 기세를 읽은 듯했다.
“진혁 씨, 갑자기 왜 그러세요……혹시 저번에 말씀하신 그 이상한 사람들이 또 있는 건가요?”
젠장, 안 그래도 스크린샷에 찍혀 있던 ‘그 놈’ 때문에 복잡하던 머리가 팽팽 도는 것 같다.
기가 죽은 듯 살짝 눈썹이 처진 강준호는, 포션을 집어넣고는 조심스러운 태도로 말을 꺼냈다.
“전에 모임에서 만난 사람들이랑, 가게에 있던 사람들 기척이 이상하다고 말씀하셨죠?”
“저도 그날 이후로 신경 쓰여서 계속 감지해 보려고 했는데, 저는 아무리 해도 잘 모르겠더라고요.”
“아, 진혁 씨를 못 믿는 건 아니에요. 진짜로, 대체 사람들 기척이 뭐가 다르다는 건지 모르겠어요.”
중얼거리는 강준호의 목소리는 나와 주문에 관해 토론하던 때와 전혀 다를 바 없었다.
“저만 그런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그런 것 같던데…말씀 좀 해주세요.”
그렇기 때문에 더욱 소름이 돋았다.
“꽁꽁 잘 감췄는데, 대체 어떻게 눈치챈 거예요?”
그 입가가 희미하게 비틀리는 것을 보자마자, 나는 검을 뽑아 강준호의 목을 겨누었다.
“여기서 목이라도 베시게요? 인적 드문 골목이지만, 제가 소리라도 지르면 다들 금방 몰려올 텐데?”
짙은 비웃음이 섞인 어투는 직전과 미묘하게 달라져 있었다. 본색을 드러낸 걸까.
“소리를 지를 틈이 있을 것 같아?”
나는 뽑아든 칼날에 오러를 둘렀다. 강준호의 목을 자르는 데에는 1초도 걸리지 않는다.
“그럼 마음대로 하세요, 이 사람이 죽건 말건 저랑은 아무 상관 없어요. 진혁 씨는 그렇지 않겠지만.”
맞는 말이다. 여기서 목을 베어도 강준호의 입을 빌려 말하고 있는 ‘누군가’는 죽지 않는다. 나만 살인범이 될 뿐이지.
사정을 대충 알고 있는 김남혁도 이걸 커버쳐 줄 수는 없을 거다. 애초에 커버를 쳐 줄지도 의문이다만.
“그러지 말고, 우리 대화나 좀 해보는 게 어때요? 진혁 씨도 궁금한 거 많으시잖아요?”
분명,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란 이런 걸 말하는 것이겠지.
**
강준호는 나를 페스티벌 구역 외곽에 있는 카페테리아로 안내했다.
그리 멀지 않은 카페테리아로 향하는 길목에도, 드문드문 나를 알아보는 도전자들이 있었다.
싸인을 해 달라며 엉겨붙기도 하고, 팬이라며 이상한 주접을 떨며 따라붙는 이들도 있었으며, 아는 얼굴도 몇 있었다.
지난 며칠간 친목 모임에서 만났던 요리인들과 아줌마들이- 모두 뻔뻔하게 특유의 기척을 흘리며 다가왔다.
“앉으세요.”
나는 경계태세를 유지한 채, 강준호가 안내한 테이블에 착석했다. 곧 주변 테이블에 다른 사람들이 앉았다.
그 중에도 아는 얼굴이 상당히 많았다. 김남혁이 보내준 스크린샷에 찍힌 그 녀석도 있었다.
검은 머리카락에 짧은 키, 똑 닮은 이목구비를 가진 두 사람- 3년 전 페스티벌에서 만났던 쌍둥이 형제.
“최길현이랑…최길훈이었나.”
미스릴 완드로 머리통을 두들겨 맞고, 커뮤니티 인기글에 박제까지 당했던 창 기능사 형제다.
숙소를 엿보다가 재빨리 도망친 모습을 보고, 못해도 저층 랭커 수준의 순발력이라고 생각했는데.
형편없는 창 솜씨와는 별개로 저층 랭커 출신이 맞으니, 내 판단은 역시 정확했던 것 같네.
“3년이나 지났는데, 이름까지 기억하시네요?”
“인상 깊게 남은 놈들이었으니까.”
“하긴 그렇겠죠, 다른 사람들도 대충 알아보시죠?”
강준호는 그렇게 말하며 옆 테이블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그래, 모두 아는 얼굴들이다.
내 등을 두드려 줬던 그리핀 길드의 간부. 밥 사준다는 말을 까버리고 잠수를 탄 검투사 김민준.
분석이 끝났다며 도발을 던졌다가, 대차게 굴욕을 당하고 커뮤니티를 끊은 줄 알았던 원소술사 박원호.
토너먼트에서 나와 맞붙었던 예선전 상대들과, 32강 및 16강에서 탈락한 다른 도전자들까지.
이름있는 중견급 강자들과 토너먼트의 슈퍼루키들이, 한데 모여 나를 둘러싸고 있다.
“여기서 패자부활전이라도 열리나 보지?”
“원한다면 그렇게 해 드릴 수 있는데요?”
인상을 찌푸리며 비아냥을 던졌지만, 강준호는 아무렇지 않게 그것을 받아쳤다.
이미 토너먼트에서 제낀 적이 있는 이들은 둘째 치고, 잘 모르는 이들도 꽤 섞여 있다.
아무리 다대일 싸움에 강한 나지만, 이만한 인원이 동시에 덤벼든다면-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너무 그렇게 긴장하지 마세요, 싸우지 말고 대화로 풀자고 말씀드렸잖아요?”
웃기고 있네, 이게 대화로 풀자는 새끼가 할 짓인가. 정작 본인은 얼굴도 드러내지 않았으면서.
“제가 겁이 좀 많아서 그래요, 어차피 저 두 사람 때문에 대충 짐작은 하고 계시잖아요?”
그 말을 끝으로, 강준호는 입을 딱 다물었다. 그리고 동시에 내 어깨에 놓이는 부드러운 손.
내 뒷자리에 앉아 있던 이번 사건의 흑막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투로 인사를 건넸다.
“반갑노 진혁게이야.”
눈동자를 새빨갛게 물들이고 나타난 것은- 1554 서버의 여자 마법사, 김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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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불쾌한 골짜기
엘레노어는 그 이상 말하지 않고, 조용히 방을 떠났다.
다시 혼자가 된 나는 명상을 이어나가려 했지만, 도무지 집중이 되질 않아 평범하게 잠에 들었다.
다음 날 아침.
간략하게 정비를 마치고 떠나려는 나를 수많은 다크엘프들이 배웅했다. 그 사이에 소문이라도 난 건가.
“너무 일찍 가는 거 아니야? 이왕이면 십 년 정도는 있다가 가지, 아쉽게.”
“야아, 인간족한테 십 년이면 엄청 긴 거 몰라?”
“그런가? 그러면 한 오 년 정도만……나는 별로 대화도 못 해봤단 말이야.”
나는 이제 엘레노어의 정혼자 신분인데도, 떠나는 사실 자체에 의문을 갖는 다크엘프는 아무도 없었다.
결투로 정혼자 자리를 빼앗은 지 하루밖에 안 지났는데, 신경도 안 쓰이나.
어쩌면 처음부터 구실 뿐인 이야기였음을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다시 돌아올 거로 생각하거나.
뭐, 8층의 특성을 생각하면 그렇게 여겨도 별문제는 없다.
진영 퀘스트가 이어지는 8층의 배경은 7층의 미래 시점이니까.
커뮤니티에 따르면 퀘스트 NPC도 동일하게 나타난다고 하니, 이 녀석들하고도 결국 다시 만나게 되겠지.
나를 배웅하는 이들 중에는 당연히 리즈멜을 비롯한 정찰대원들도 끼어 있었다.
“야 인간족, 이거 가져가.”
리즈멜은 내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받아 들고 보니, 아이템 이름이 떠올랐다.
[밤까마귀의 망토]
옅은 보랏빛이 도는 검은 망토였는데, 스탯이 없는 대신 [은신]이라는 고유 스킬이 붙어 있었다.
은신은 도적 계열 클래스의 공통 스킬로, 발소리와 기척을 없애주는 단순한 스킬이다.
그렇게 대단한 스킬은 아니지만, 아이템에 붙어도 될 만큼 만만한 스킬도 아니다.
“기척을 죽여주는 망토야, 너무 무모한 짓 좀 하지 말라는 의미로 주는 거니까. 이상한 착각 말고.”
착각할 여지가 뭐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리즈멜이 저렇게 말하는 게 어디 한두 번인가.
“고마워, 잘 쓸게.”
순순히 감사 인사를 하자, 리즈멜은 약간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휙 돌렸다.
내게 뭔가를 건네는 것은 리즈멜만이 아니었다.
“얘 인간족아, 이것도 가져가.”
잠시 일을 도와주었던 정찰대원이 어디서 본 적이 있는 숄더 아머를 건넸다.
[특등 탐색대원의 증표]
다크엘프 퀘스트의 최주요 보상 중 하나로 알려진 방어구였다.
어라, 이거 얻기 힘든 거 아니었나.
“임시였지만 어쨌든 같은 탐색대 식구였잖아? 리즈멜이랑 엄청나게 활약도 했고 말이야.”
이번에도 순순히 감사 인사를 하고 받았다. 다른 다크엘프들도 저마다 이런저런 물건을 하나씩 건넸다.
성능 좋은 포션이나 스탯을 올려주는 영약 등의 실용적인 것도 있었고, 과자나 도시락 같은 먹거리도 있었다.
“급하게 만든 거라 생긴 건 좀 엉망이지만, 쓰거라. 유용할 거다.”
그 밖에도, 대장장이 에르웬이 짧은 순간 마법 방패를 생성하는 팔목보호대를 주기도 했다.
사실상, 7층 진영 퀘스트를 모범적으로 진행할 경우 얻어갈 수 있는 보상들을 한 번에 받고 있었다.
그 화룡점정을 찍은 것은, 당연하게도 엘레노어였다.
**
엘레노어가 건넨 것은 단순한 이별의 선물이 아닌, 약혼을 깨준 것에 대한 답례였다.
즉, 이번 에픽 퀘스트의 보상이다. 건네어진 것은 심플한 디자인의 펜던트.
펜던트 아이템은 흔치 않은 만큼, 성능이 어떤 것이라도 만족스러울 것 같았다.
그런데 설명을 들어 보니, 보통 좋은 게 아니라 사기 수준 아이템이었다.
난이도가 7층 수준을 한참 벗어나서 그런지, 보상도 7층 수준을 한참 벗어나 있었다.
퀘스트 자체는 7층 이후로도 이어질 예정이라, 최종 보상도 아닐 텐데 말이다.
“그럼, 그대는 이제 그 시련이라는 것에 도전하러 가는 건가?”
“맞아. 내가 말을 했었나?”
“그 정도야 당연히 알지, 그대와 자주 이야기했던 주제지 않나.”
엘레노어의 눈이 별빛처럼 타오르고 있다. 미지의 세상을 향한 강렬한 호기심을 담은 눈이다.
그러고 보면, 언젠가 함께 다른 세상을 여행해 보고 싶다고 했었지.
하이엘프와의 마찰이 예정되어 있지 않았더라면, 나를 따라가겠다고 말했을지도 모르겠다.
엘레노어가 NPC인 이상, 결코 실현될 수 없는 일이겠지만.
“그대가 꼭 시련을 마치고, 여행길의 끝에 소망을 이룰 수 있기를 응원하마.”
엘레노어는 내 목표가 엄마의 성묘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걸 목표로 하는 내 마음에 대해서도.
“그리고 여행이 끝나는 날에, 달리 갈 곳이 없다면……언제든 내 곁으로 돌아와도 좋다.”
“돌아와도 된다니?”
“무얼, 이상한 표현도 아니지 않으냐. 그대는 내 정혼자야, 내 옆자리는 언제든 그대의 것인걸.”
이곳이 시련의 탑 서버에 불과한 이상,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그럼에도 무척 고마운 말이었다.
[퀘스트 완료 : 다크엘프의 서 - 서장]
**
퀘스트 완료를 알리는 시스템 메시지와 함께, 나는 정말 마지막으로 인사했다.
“그동안 고마웠어.”
다크엘프들은 내 인사에 웃음으로 화답하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엘레노어도 마찬가지였다.
살랑살랑 흔들리는 손, 생긋 지어 보인 웃음, 그 모든 것이 판에 박은 듯 똑같았다.
“잘 가라.”
“잘 가라.”
“잘 가라.”
수십명의 다크엘프가 입술을 달싹이며 내뱉는 말까지, 소름이 끼칠 정도로 똑같았다.
“야, 뭐야, 지랄……장난하지 마.”
2층에서 만났던 양치기 소녀처럼, 그리고 다른 층의 수많은 무기질한 깡통 NPC들처럼.
“왜 그러지, 무슨 다른 용건이라도?”
당황한 내 말에 대답한 것은 엘레노어 한 명뿐이었다.
다른 다크엘프들은 삐걱거리는 듯한 움직임으로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갸웃거리는 고개의 각도마저 똑같다. 동시에 움직이는 모습이 공장의 기계를 보는 것 같았다.
“어디 불편한 곳이라도 있나?”
그나마 엘레노어만이 다르게 말하고 행동했으나, 그 말투와 표정이 이전과 확연히 달랐다.
아니, 심지어 느껴지는 기척마저 달랐다. 이전의 강렬한 기척이 온데간데없다.
여전히 사람처럼 반응하고, 사람처럼 행동하고 있지만, 결코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
어중간하게 사람을 흉내 내고 있는 무언가로밖에 보이지 않아서-
“아니, 아니야, 아무것도.”
-전신에 본능적인 거부감이 치밀어 올랐다.
그런 나를 보고, 인간을 귀여워하는 다크엘프들은 일제히 걱정된다는 듯 수십 개의 손을 뻗었다.
나는 도망치듯 마을을 빠져나와, 7층의 미궁 구역으로 향했다.
**
진영 퀘스트는 아직 이걸로 끝난 게 아니다. 8층에서도 계속해서 이어진다.
언젠가는 이렇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그게 지금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분명 8층에서도 똑같은 NPC가 출현하는 거 아니었나? 그런데 왜 이렇게 된 거지?
설마 8층에서 다시 만났을 때도 이런 상태인 건 아니겠지?
“대체 뭔데, 씨발 진짜……”
혼란한 정신과 마음을 부여잡고, 떨리는 걸음으로 보스룸을 향해 전진했다.
7층의 미궁 구역은 매우 좁고, 보물 상자 같은 것도 없다. 보스룸 앞에 도착하는 것은 금방이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생각하고 있을 시간은 없다. 솔직히 이 이상 생각할 자신이 없다.
그냥, 빨리 8층으로 올라가 NPC들의 상태를 확인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지금은 진정해야 한다. 시간을 낭비하지 말자.
-끼익.
문을 열자 활활 타오르며 내부를 밝히는 횃불, 저 멀리 7층의 보스가 보인다.
[수많은 짐승이 살고 있는 대산림의 먹이사슬, 그 끝에 선 것은 다름 아닌 하늘의 패자였으니.]
날개를 퍼덕거리고 있는 거대한 인면조와, 윙윙거리며 배회하고 있는 거대 말벌들.
[BOSS - 천공의 패자 파르칸]
7층 보스는 남성 하피 같은 외형으로, 근접 전사의 천적이나 마찬가지인 비행형 적이다.
보스 스펙 자체는 특별히 대단하지 않지만, 데미지를 넣을 기회를 거의 주지 않는 까다로운 타입.
거기에 HP가 감소하면 떠다니는 말벌을 잡아먹고 회복하는 패턴까지 갖고 있다.
전사를 멸시하는 듯한 악랄한 패턴 탓에, 마법사나 궁수 등의 원거리 공격수가 필수적인 보스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나는 이미 7층 스펙을 한참 뛰어넘었고, 이딴 놈에게 오래 시간을 쓸 생각도 싹 날아간 상태다.
인벤토리에서 커다란 쇠구슬을 꺼냈다.
조금 전에 받았던 능력치 상승 영약도 먹고, 엘레노어에게 받은 펜던트의 효과도 발동했다.
-쿠르릉!
내 몸에 마력의 빛이 어리며, 폭발적인 힘이 넘쳐흐르기 시작했다.
펜던트의 효과는 마력을 저장해 뒀다가, 사용자가 원하는 순간에 개방되어 마력강화를 발동시키는 것.
다만 내 지능 스탯의 영향을 받지 않고, 강화 수치도 고정되는 등 제한 사항이 많다.
그럼에도 마력강화는 마력강화, [불굴]이 발동한 것 이상으로 놀라운 힘이 몸에 깃든다.
-끼루룩!
보스가 날개를 퍼덕거리며, 공격을 위해 나를 향해 날아오기 시작했다.
분명 나름대로 속도를 낸 것이겠지만, 마력강화를 한 메르세데스에 비하면 멈춘 것처럼 보인다.
[라이트닝 차지]
[감각 증폭]
[혼신]
내가 가진 모든 버프 스킬을 발동시켰다. 전격이 깃든 쇠구슬이 손안에서 찌그러진다.
-콰앙!
전력으로 내던진 쇠구슬이 적중하자, 보스의 왼쪽 가슴께가 통째로 사라졌다.
뜯겨나간 날개와 살점의 파편이 흩날리고, 보스는 그대로 추락했다.
[축하합니다. 시련의 탑 7층을 최초로 클리어하셨습니다.]
[업적 달성 : 일격필살]
[업적 보상 액티브 스킬 - 약점 간파’ 를 획득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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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 피를 먹는 생물
“표정이 왜 그래요, 이거 아니에요?”
발랄한 목소리로 해괴한 인사를 건넨 김진아가 싱긋 웃음을 지었다.
3년전 페스티벌에서 만나 잠시 파티를 이루었고, 거하게 뒤통수를 맞으며 헤어졌던 그 사람이 맞다.
물론 어딘가에 살아 있을 거라고 생각하긴 했다. 하지만 저 ‘두 사람’과 함께 내 앞에 나타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최길현과 최길훈 형제- 김진아는 두 사람을 꼭 죽여야만 했다. 그러지 않으면 자신이 위험해질 상황이었으니까.
“저도 이제 커뮤니티 말투 잘 알아요, 일부러 농담으로 해 본 건데……표정 좀 풀면 안 돼요?”
지랄, 내가 지금 표정을 풀게 생겼나.
“3년 만에 만났는데 좀 화기애애해도 괜찮잖아요. 그래도 저희 꽤 친한 거 아니었어요?”
나는 김진아의 변한 모습을 천천히 살폈다. 눈동자가 붉게 물들었고, 피부는 창백하리만치 새하얗다.
아직 직접 만나본 적은 없지만, 이런 특징을 가진 종족이 상층에서 나온다는 건 알고 있다.
타인의 피를 빨아 생명을 갈취하는 귀종의 괴물, 흡혈귀.
“흡혈귀가 되셨군.”
“알아보시네요?”
“딱 봐도 티 나잖아.”
“아하, 그건 그렇죠.”
하지만 분명 평범한 마법사 도전자였던 김진아가, 왜 대뜸 흡혈귀가 되어서 나타났단 말인가.
관련된 모든 키워드를 차단하고 헤어졌던, 그 3년 전의 페스티벌 이후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저도 그동안 고생 좀 했거든요. 종족을 바꾼 건 별일도 아니었어요. 인간이길 포기한 게 몇 번이었는지도 몰라요.”
카페테리아의 종업원 NPC가 내 앞에 찻잔을 내려놓았다. 김진아는 자리를 옮겨 내 맞은편에 앉았다.
“제 마음대로 한 잔 시켰어요. 제가 사는 거니까 취향에 안 맞아도 불평하시면 안 돼요?”
닳아빠진 미소를 지어 보인 김진아는 내게 차를 권했다. 나는 인상을 쓰며 찻잔을 들어 올렸다.
-홀짝.
아무렇게나 한 모금 마시니, 은은한 단맛과 부드러운 향이 입안에서 흘러넘쳤다. 아는 맛이다.
강력한 지효성의 마비약을 섞어 넣었던, 그때 마셨던 것과 완벽히 똑같은 차다.
“어때요?”
“좆같은데.”
내 퉁명스러운 대답에 김진아는 만족스럽다는 듯 웃었다. 뭘 위해 통하지도 않을 같은 마비 차를 준 걸까.
혹시 마비약으로 감추고 다른 걸 탔나 싶어 마력으로 감지까지 해봤지만, 그런 낌새는 없었다.
그저 과거의 일을 비꼬고 싶었던 건가. 하지만 그 일이라면, 나도 할 말이 없진 않은데.
“아, 그러고 보니 그 얘기를 안 드렸네요. 왜 이렇게 경계하시나 했어요.”
다음 순간, 김진아는 흡혈귀 특유의 송곳니를 드러내며 쿡쿡 웃었다.
“저, 진혁 씨한텐 별로 원한 없어요.”
그리고는, 개도 안 믿을 개소리를 내뱉었다.
**
김진아가 하는 말에 특별히 틀려먹은 부분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야, 그땐 제가 먼저 잘못했던 거죠. 제 목숨 건지겠다고 진혁 씨를 죽이려 한 셈이잖아요.”
하지만 독기가 잔뜩 씌어 번들거리는 붉은 눈동자를 보고도, 그 말을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정말 싸울 생각 없어요. 여기 있는 사람들은…… 제가 겁이 많아서 호위로 데려온 것뿐이에요.”
토너먼트 본선에 진출했던 도전자만 스무 명이 넘고, 거기에 랭커급 도전자 수십 명을 더한 전력이다.
개소리도 이 정도면 수준급이다. 월드 레이드도 해봄직한 병력을 그냥 호위로 쓰고 있다고?
이 정도 구성이면 어지간한 중견 길드 하나쯤은 간단하게 짓밟을 수 있겠구만, 말 같지도 않은 구라를.
“진짜라니까요, 진혁 씨를 어떻게 할 생각이었다면 이보다 더 데려왔죠.”
억울하다는 듯이 말하지만, 소름 끼치는 속뜻이 손쉽게 읽힌다. 그래, 이보다 뭐가 더 있다 이거지.
“…저것들은 뭐지?”
“저것들이요?”
“이 사람들, 뭐냐고.”
내 주변을 둘러싸고 앉아 있는 사람들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김진아는 작게 손가락을 까딱였다.
옆 테이블에서 잡담을 나누며 차를 마시고 있던 도전자가 우리 쪽으로 다가왔고, 김진아는 다시 손을 까딱였다.
“안 그래도 이걸로 진혁 씨랑 얘기해 보고 싶었어요, 완벽하게 감췄다고 생각했는데……대체 어떻게 아신 건지.”
다가온 도전자는 자신의 왼뺨과 턱을 양손으로 붙잡았고, 그대로 힘을 주어 자신의 머리를 비틀어 꺾었다.
-우두둑.
“미친……!”
탑을 오르며 온갖 기괴한 꼴을 다 본 나도 기겁할 광경이었다. 비틀린 목 사이로 피가 흘러나왔다.
흘러나온 피는 물줄기가 되어 공중에서 흘렀고, 김진아의 창백한 손안으로 모여들었다.
흡혈귀는 자신의 피를 이용해 이런저런 짓을 할 수 있다고 들었지만……이건 대체.
“혈아귀라는 거예요, 제 스킬로 만든 사역마죠.”
김진아는 ‘원래는 좀 더 징그럽게 생겼다’며, 자신의 등 뒤에서 피로 이루어진 팔을 소환했다.
소환된 여덟 개의 팔은 목이 비틀린 도전자의 몸을 목각인형처럼 비틀더니, 다시 목 안으로 피를 흘려넣었다.
금새 원래 모습으로 돌아온 혈아귀- 도전자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래도 이렇게 갓 죽은 시체로 만든 건, 생전의 모습과 자아를 대부분 보존한 채로 조종할 수 있어요.”
“그러면, 지금, 이 사람들이 다 한번 죽은 시체들이라고? 여기 있는 전부가?”
“말하자면 그렇죠, 그래도 겉보기에는 산 사람이랑 아무 차이 없잖아요? 진짜로 어떻게 안 거예요?”
자신이 저지른 미친 짓거리와 내가 지은 표정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김진아는 태연하게 물었다.
“미친 새끼.”
“저도 알아요.”
종족을 바꾼 건 별일도 아니었다는 말이, 드디어 이해가 되었다.
**
김진아는 내 욕설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혈아귀의 위장을 어떻게 알아차렸느냐며 집요하게 질문했다.
“거대 길드 간부 중에서도 눈치챈 사람은 없었어요. 일부러 위험한 사람들 근처는 피해 다니기도 했지만요.”
“웬만하면 중요할 때를 빼고는 명령도 안 내렸고, 흘러나오는 마력이나 기척도 완벽히 감췄죠.”
“전사 클래스 쪽 사람들은 대놓고 감시해도 전혀 모르더라고요. 진혁 씨만 이상하게 계속 눈치채던 거 있죠?”
쾌활한 목소리로 주절거리던 김진아는 매운 갈빗집에서 있었던 일도 직접 언급했다.
혹시라도 눈치채는 사람이 있으면 바로 처리할 수 있도록, 미리 경계 명령을 입력해 놨었다고 한다.
처리한다- 당장 이 수많은 혈아귀들의 모습만 봐도 알 수 있지만, 살인을 참 쉽게 입에 올린다.
“기척이 이상했으니까.”
“어떻게 이상했는데요?”
“말해주면 알기는 하고?”
나는 희대의 미친년 앞에서 더 이상 적의를 감추지 않았다. 마력을 주변에 살포하며 [위압]스킬을 발동했다.
김진아는 사방에서 가해지는 압력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이 정도는 별것도 아니라는 듯.
[위압]스킬의 효과가 그렇게 강력한 건 아니지만, 마법사가 이걸 완전히 무시하는 건 쉽지 않을 텐데.
“으음, 대답해 주기 싫으시면 어쩔 수 없죠. 괜찮아요, 어차피 진혁 씨 말고는 아무도 못 알아보던데요?”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이다. 나는 대답하지 않고 전투태세를 갖춘 채, 반대로 질문했다.
“목적이 뭐야.”
나름 친하게 지냈던 강준호와 친목회에서 만났던 여러 도전자가 모두 혈아귀가 되었다.
여기 모인 전력은 절대 만만하지 않지만, 내가 언제는 상대가 만만해서 싸웠던가.
대답 여하에 따라 여기서 바로 목을 벤다. 아니, 뭐라고 하는지만 듣고 그냥 벨 거다.
“그렇게 위협하지 않으셔도 말씀드릴 생각이었어요. 진혁 씨라면… 이해해 주실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김진아는 천천히, 그러나 단호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핏빛 혓바닥이 춤추듯 움직이며 문장을 뱉는다.
“제 목표는 3년 전부터 하나뿐이었어요. 아니, 어쩌면 그보다 훨씬 전부터였을지도 모르죠.”
“저는요, 언제든 제 몸 하나만 건사하면 되는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목적이라면- 생존이죠.”
“그게 전부예요. 하지만 살아남으려면 그만한 힘이 필요하잖아요? 진혁 씨도 아시죠?”
김진아는 번들거리는 눈을 붉게 빛내며, 운을 띄웠다.
“전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요……”
그 입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지난 3년간의 이야기.
**
저는 눈을 감으면 항상 같은 꿈을 꿔요.
꿈 속에서 제가 하는 일은 항상 정해져 있죠, 떨리는 손으로 향긋한 차에 독을 넣는 거예요.
하지만 독을 마신 남자는 끄떡도 하지 않고, 다른 두 명의 남자를 잔인하게 베어요. 맞아요, 그날의 꿈이에요.
진혁 씨가 그 형제를 아무렇지 않게 베는 모습을 보며, 저는 떨리는 손을 부여잡은 채 마냥 울고만 있었어요.
모든 게 끝이라고, 이제 나도 죽게 될 거라고, 생각을 잘못했다고, 그런 말만 머릿속에 맴돌았죠.
하지만 진혁 씨는 결국 저를 죽이지 않았어요. 대신 잔인한 선택지를 제 눈앞에 두고 떠났죠.
“너, 개새끼…속였, 속였어…걸레 같은, 년이……”
두 형제는 팔과 다리를 하나씩 잃은 채, 굼벵이처럼 꿈틀거리며 제게 욕을 했어요.
바로 알았죠, 이 두 사람을 죽이지 않으면 제가 죽게 될 거라는 걸요. 진혁씨도 알고 있었죠?
제가 어떤 선택을 할지 말이에요, 저는 이미 진혁 씨를 죽음으로 내몰려 했던 적이 있잖아요.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죄송해요, 죄송…”
저는 울면서 쓰러져 있는 두 사람에게 다가갔어요. 진혁 씨에게 그랬던 것처럼, 사과를 반복하면서.
그리고 인벤토리에서 단검을 꺼내 직접 그들의 목을 찔렀습니다.
마법을 쓰면 금방 소란이 일어나, 사람들이 몰려왔을 테니까요.
판단도 결심도 빨랐지만, 문제는 행동이었어요. 저는 분명 떨리는 손으로도 힘차게 단검을 잘 찔렀어요.
‘아, 안 들어가.
하지만…진혁 씨의 차에 독을 타는 것과 다르게, 직접 사람을 죽이는 건 쉽지 않더라고요.
그야 저, 진짜 약해 빠졌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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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시련의 탑 8층
보스 클리어와 함께 곧바로 전이문을 활성화했다.
전이문을 넘어갈 때의 울렁거리는 느낌이 사라지고 펼쳐진 세계는 7층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장소는 넓게 펼쳐진 숲, 여기저기 널려 있는 나무들도 그다지 특별할 건 없다.
-쿵!
잠시 가만히 주변을 살피고 있었는데, 멀리서 쿵쿵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소리가 난 방향으로 마력을 퍼트려 소리의 주인을 감지해 냈다.
커다란 나무 골렘 같은 게 쿵쿵거리며 돌아다니고 있다. 7층에 나온다는 나무 괴물과는 다른 것 같다.
하이엘프의 사역마나 경비용 골렘 같은 것으로 보인다.
뭐든간에 그리 강해 보이지도 않고, 지금은 그보다 중요한 일이 있다. 일단 다크엘프의 마을부터 가보자.
마을의 위치는 굳이 지도를 찾아볼 필요도 없이, 이미 외우고 있다.
-탁탁탁!
목적지를 향해 전속력으로 전진했다. 7층 보스를 클리어하고 얻은 스킬의 효과가 발휘된다.
빠른 속도를 내세워 치고 빠지는 전략을 구사하는 보스는, 최대 기여도 보상으로 이런 스킬을 주었다.
[질주 Lv.1]
내 다리에 약간의 마력이 맴돌고, 발걸음이 가벼워지며 속력이 올라갔다.
내 민첩 스탯에 비례해 성능이 달라지는 구조인지, 1레벨짜리 스킬치고 효과가 상당하다.
그렇게 달리던 중, 나는 조금 전에 감지했던 나무 골렘과 마주쳤다.
아무래도 숲 전체에 이런 골렘이 틈틈이 깔려 있는 모양이다.
골렘은 나를 보자마자 눈을 빛냈다. 그리고는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곧바로 덤벼들었다.
7층 보스를 일격사시키고 달성한 업적의 보상을 시험해 볼 차례가 됐다.
[약점 간파]
눈앞의 나무 골렘을 지정하고 스킬을 발동하자, 묘한 마력의 흐름이 놈에게 얽혀들었다.
마력을 사용해 주변을 감지할 때와 비슷한 감각이지만, 조금 다르다.
마력 감지가 일정 범위에서의 움직임을 감지한다면, 이건 상대방의 내부를 훑어보는 느낌.
나무 골렘의 전반적인 구조가 머릿속에 읽혀 들어오고, 자연스럽게 취약한 부분을 찾을 수 있었다.
저 골렘은 등짝 부분에 박혀있는 작은 씨앗을 핵으로 삼아, 그곳에 마력을 담아 움직이고 있다.
고로, 저 씨앗을 파괴하면 바로 무력화된다.
-끼기기기긱!
골렘은 느릿하게 팔을 들어 올렸다. 나를 내려찍으려는 모양이다.
하지만 둔중한 생김새 이상으로 심각하게 느려터졌다. 저런 건 맞아주려고 해도 못 맞아준다.
[철벽]
골렘의 품으로 접근해, 철벽 스킬을 발동한 주먹을 가슴팍에 찔러넣었다.
-콰광!
주먹은 한 방에 골렘의 몸을 파괴하고 등까지 꿰뚫었고, 붉은 이펙트와 함께 핵이 파괴되었다.
뭔가 평소랑 크리티컬이 터지는 느낌이 다르다.
스킬 설명에 급소 적중시 크리티컬이 발생할 수 있다고 적혀 있었는데, 그 부분 때문인 것 같다.
원래의 크리티컬은 치명타를 먹였을 때 발생하는 판정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건 간파한 급소를 적중시키면 인위적으로 크리티컬을 발생시킨다.
치명타가 아닐 수도 있었을 공격을, 강제로 치명타로 만드는 느낌.
시스템은 가끔 설명이 명확하지 못한 부분이 많으니, 이렇게 뭐든 직접 체험해가며 파악해야 한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보다 우선 마을에 가고 싶은데.
-쿠구궁.
바닥을 파헤치며 나무 골렘 여러 마리가 나타나 내 주변을 에워쌌다.
**
한 마리를 잡으면 여러 마리가 추가로 나타나는 구조였던 것 같다.
아마 공략글에 관련 정보가 나와 있겠지만, 급하게 층을 올라오느라 확인을 못 했다.
상황만 보면 몬스터를 잘못 건드렸다가 혼자 포위당한 꼴로, 굉장한 낭패지만.
솔직히 이 정도는 이제 아무렇지도 않다.
-쿵!
핵이 정확하게 박살 난 나무 골렘들이 모조리 땅에 엎어졌다.
잠시 기다려 봤지만, 추가로 나타나는 골렘은 없었다. 아마 나타나는 숫자에 제한이 있었던 거겠지.
나는 보통의 도전자가 10명 이상씩 모여서 잡아야하는 각 층의 보스를 한 방에 죽일 수 있을 정도로 강해졌다.
이제 와서 이런 잡몹이 많이 나타나 봤자 아무 방해도 안 된다.
골렘들을 쓰러트리고 계속해서 길을 나아갔다. 그리고 곧바로 예상치 못한 상황에 부닥쳤다.
“이게 뭐야.”
주변에 이상한 기운을 풍기는 안개가 스멀스멀 내려앉았다.
시스템에 표시되는 미니맵도 가려져 보이지 않게 되었고, 길 자체도 내가 아는 길과 달라진 것 같았다.
원래도 다크엘프 마을 근처에는 안개가 자욱했지만, 이런 맵 기믹 같은 건 딱히 없었다.
게다가 이 정도쯤 왔으면 슬슬 마을이 보여야 하는데, 온통 안개뿐이다.
[감각 증폭]
마력을 주변에 퍼트리며, 감각 증폭 스킬을 사용했다. 그리고 곧바로 혼란에 빠졌다.
퍼트린 마력이 사방팔방으로 흩어져버리고, 제대로 주변을 감지할 수가 없었다.
“이거 마법이네.”
아무래도 주변에 퍼져 있는 안개가 모종의 방해 효과를 만들고 있는 것 같다.
단순히 감지를 방해하거나 시야를 가리는 게 다가 아니다. 내 감각을 뒤죽박죽으로 망가트리고 있는 것 같다.
방식을 보면 일정 범위에 발생하고 있는 마법 같은데, 마력감지에도 영향을 미치니 어떻게 해야 할지.
커뮤니티에 검색하면 해법이 나올 것 같기도 한데, 이런 건 너무 공략에 의존하기도 뭣하다.
내가 자력으로 극복하지 못하면, 언젠가 이것 때문에 곤욕을 치를지도 모르니.
“후우……”
가볍게 심호흡하며, 다시 한번 마력을 전개한다.
[집광] 스킬을 사용할 때의 감각을 되살려서, 최대한 마력을 한 점에 모아서 조작해보자.
잘만 하면 어떻게든 될 것 같은데.
안 됐다.
시발.
집중하면 집중할수록 오히려 마력의 흐름을 통제하기가 어려웠다.
명상을 시도할 때와 비슷하다. 마음의 혼란이 그대로 마력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젠장할, 나는 그냥 다크엘프들의 상태를 빨리 확인해 보고 싶은 것뿐인데.
“……다시 해 보자.”
눈을 감고 온 신경을 마력감지에 쏟는다. 마력은 계속해서 통제되지 않고, 멋대로 흩어진다.
마음대로 흩어지는 마력을 붙드는 것은 계속해서 실패했다. 그렇다면, 방법을 바꿔 보자.
흩어지는 마력을 반대로 밀어주자.
그 대신 한꺼번에 최대한 많은 양의 마력을 사용해서, 어떻게든 멀리까지 가도록.
상태창에 표시되는 MP 수치가 바닥을 보일 때까지, 무작정 마력을 퍼트렸다.
그러자 멀리멀리 퍼져 나간 마력의 끝에 어떤 기척이 걸렸다.
-타닥!
나는 그 기척을 느끼자마자 전속력으로 달려나갔다. 그러자 보인 것은, 커다란 룬 베어.
그리고 그 룬 베어를 베어 넘기고 있는 익숙한 모습의 다크엘프.
역시, 7층에서부터 이 특유의 강렬한 기척은 좀처럼 놓치기 힘들었지.
-쿵!
룬 베어가 쓰러지고, 검에 휘감은 그림자를 흩어버린 다크엘프는 내 쪽을 향해 외쳤다.
“거기, 누구냐.”
나는 잠시 망설였다. 과연 나를 기억하고 있을까, 저건 내가 알고 있는 그 사람이 맞을까.
“나야.”
그렇게 어색하게 인사를 건네자, 다크엘프- 엘레노어는 천천히 내게로 걸어왔고.
“설마, 정말 그대인가?”
곧바로 나를 알아보았다.
**
다크엘프 마을의 위치는 7층에서와 전혀 달라지지 않은 채였다.
다만 누군가 함부로 침입하지 못하도록, 마을 주변에 펼쳐둔 안개의 마법을 더욱 강화한 것이었다.
예전에는 그냥 시야를 조금 방해하는 정도였지만, 이제는 아예 감각을 모두 뒤죽박죽으로 만들도록.
“마법의 예외 대상을 지정할 때, 왜 그대 생각을 못 했었는지 모르겠어. 하루도 그대를 잊은 적이 없건만.”
나를 다시 만난 게 그렇게 좋은지, 무척 싱글벙글한 모습으로 말하는 엘레노어.
엘레노어가 마법을 설정할 때 나를 떠올리지 못한 이유는, 아마 시스템 때문이 아닐까.
[밤 안개 너머 - 르우엘의 그루터기]
엘레노어를 따라 다시 다크엘프의 마을에 도착했다.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다른 다크엘프들도 엘레노어처럼 나를 알아볼까?
마음속으로 그런 의문을 떠올린 직후, 나는 이마를 쳤다.
“아니, 상관없잖아.”
대체 뭘 걱정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NPC들이 나를 못 알아보는 게 뭐가 문제라고.
오히려 좋은 일 아닌가. 쓸데없는 일에 사로잡히지 않고 성장에만 매진할 수 있는 기회니까.
다크엘프들의 친절은 나를 무르게 만든다. 그래서 황급히 7층을 떠난 것 아니었나.
그런데 왜, 지금은 나를 알아봐 주기를 바라고 있는 거지?
아니, 길게 생각할 필요도 없다.
서진혁, 이 역겨운 새끼. 아직도 안식 같은 걸 바라고 있구나.
리즈멜과의 대화 이후, 나는 다크엘프들을 그냥 NPC로 대하지 않기로 정했다.
사람처럼 말하고, 사람처럼 행동하면, 그건 그냥 사람이라고.
하지만 시련의 탑은 그 생각이 틀렸다고 알려주었다. 이들은 엄연히 시스템의 일부, NPC에 불과하다고.
“그대가 돌아온 걸 알면 다들 깜짝 놀라겠지? 한동안 마을 분위기가 많이 가라앉았었는데, 숨통이 좀 트이겠어.”
“인간족은 빨리 늙을 텐데, 그대는 또 어떻게 예전이랑 전혀 달라지지 않은 모습으로 나타나서는.”
“시련이란 것은 다 마쳤나? 그동안 얼마나 많은 차원을 여행했지? 벌써 기대되는구나!”
하지만, 여전히 꿈과 호기심으로 불타고 있는 엘레노어의 눈을 보고 있으면-
“자, 지난 20년간의 이야기를 들려다오.”
- 이해와 합리는 흩어지고, 원초적인 마음이 자꾸만 고개를 쳐든다.
다크엘프 진영을 고르면 안 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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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20년 전의 밤
다크엘프 진영을 골랐던 것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돌이켜보면 그렇게 중요한 이유는 없었다.
버리고자 했으나 좀처럼 쉽게 버려지지 않던 것, 마지막에는 결국 저열한 욕구에 이끌렸을 뿐이다.
지금 나는, 내 사사로운 욕망의 대가를 치르고 있는 걸까.
“그러고 보니, 그대는 세상 정세에 둔감했지? 마을의 분위기가 달라져서 놀랐겠어.”
내 손을 잡아끈 엘레노어가 살짝 웃으며 말했다.
그 말대로, 다크엘프의 마을은 7층 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하고 있었다.
여기저기에 군사 목적으로 보이는 시설물이 새로 지어져 있고, 묘한 긴장감이 맴돌고 있다.
엘레노어는 그 이유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지만, 나는 이미 이유를 알고 있었다.
8층의 배경은 7층의 미래로, 진영 퀘스트 1장의 마무리로부터 20여 년이 지난 시점이다.
끊임없이 갈등을 빚던 삼대 세력이 결국 무력 충돌을 일으킨 이후의 시점이기도 하다.
무력 충돌이 벌어진 원인은, 7층에서 진영 퀘스트를 수행한 도전자의 행적에 따라 다르게 언급되는데.
하이엘프 진영을 도왔으면 그것대로, 왕국군 진영을 도왔으면 또 그것대로, 다크엘프 진영을 도왔어도 마찬가지로.
NPC들은 진영에 조력한 도전자의 행위가 충돌을 일으키는 불씨로 작용했다는 식으로 언급하게 된다.
물론, 이는 게임으로 치면 조건부로 재생되는 스크립트에 불과하다.
진영 퀘스트 수행 여부에 따라 언급의 내용이 달라질 뿐, 8층의 기본적인 배경은 무슨 일이 있어도 바뀌지 않는다.
도전자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올라왔더라도, 삼대 세력은 결국 어떻게든 충돌하는 것이다.
“-그렇게 된 거다, 숲쟁이 놈들이 기어이 맛이 간 거야. 바라던 일이긴 했다만.”
엘레노어는 마지막으로 하이엘프의 험담을 덧붙이며, 지난 20년간의 이야기를 간략하게 마무리했다.
20년치의 이야기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짧고 단순하다.
이걸 시스템의 탓이라고 생각하는 건, 내가 과민한 걸까.
“그래……?”
나는 대충 대답하며 계속 걸었다. 걷다 보니, 조금씩 다른 다크엘프들이 슬쩍슬쩍 모습을 드러냈다.
“여보, 저기……저거 혹시 그 인간족 아니야?”
“어머, 정말 똑 닮았네요. 그 인간족의 자식이나 그런 걸까요?”
“자식이 장성할 만큼 지난 건 아니지 않아? 20년인데?”
“인간족은 20년이면 다 자란다던데요.”
행색은 조금 달라졌지만, 7층에서 몇 번 봤던 사람들이었다. 사소한 NPC들 하나까지 나를 알아본다.
20년이라고는 해도, 수명이 긴 엘프들에게는 그렇게 오래된 것처럼 느껴지지도 않을 거다.
인간과 접해본 경험은 유독 인상 깊게 남는다고도 하고, 워낙에 파격적인 일을 벌였기도 하니까.
“너, 너!”
그렇게 길을 가던 중,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애송이 인간족이잖아! 뭐야, 다시 돌아온 거야?”
7층에서 보던 것과는 사뭇 다른 차림새를 한 리즈멜이 그곳에 서 있었다.
헤어 스타일도 7층에서와 많이 달라져 있었고, 답지 않은 원피스 차림에 귀에는 피어싱까지 하고 있다.
그리고 리즈멜은 혼자가 아니었다. 그 곁에는 똑같은 피어싱을 하고 있는 남자 다크엘프가 있었다.
“맞아, 인사해. 이쪽은 내 남편.”
그 잠깐 사이에 완전히 달라져 버린 리즈멜의 모습은, 여러 생각을 들게 했다.
**
리즈멜의 남편은 나도 아는 사람이었다. 7층에서 본 적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존재감이 있지도 않았고, 리즈멜이랑 특별한 관계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는데.
내가 이해할 수 없는 20년이라는 흐름 속에서 무언가 있었던 거겠지.
그게 실존했던 것인지는 둘째 치고.
“놀란 눈치구나, 그대는 리즈멜이랑 많이 친했었으니까.”
“뭐 그렇지.”
“으음, 리즈멜의 결혼은 우리에게도 갑작스러운 일이었으니까.”
지나가던 길에 잠시 마주쳤을 뿐이라, 리즈멜과는 가볍게 인사만 마치고 헤어졌다.
엘레노어는 리즈멜의 결혼 사실에 놀란 나에게, 둘의 연애사에 대해 짧게 설명해주었다.
그러면서 다크엘프의 결혼 문화에 대해서도 조금 알게 됐다.
“과거의 엘프들은 귀를 통해서 세계수의 은혜가 흘러들어 온다고 믿었거든.”
두 사람이 짝을 맞춘 피어싱의 의미와, 엘프들에게 귀가 가지는 의미도.
“그곳에 같은 장신구를 단다는 건, 같은 은혜를 공유하며 나란히 삶을 걸어가겠다는 의미가 되는 거야.”
엘프의 귀는 인간으로 치면 왼손 약지와 같은 위치였던거다. 짝을 맞춘 피어싱은 결혼반지랑 비슷한 거고.
“처음부터 장신구를 달던 건 아니고, 원래는 부부끼리 귀에 같은 모양으로 흉터를 새기는 식이었지.”
이야기를 들으니, 하이엘프 여기사 메르세데스가 왜 그렇게 분노했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귀에 같은 흉터를 새기는 것이 결혼의 맹세라고 한다면, 다른 사람에게 귀를 잘리는 건 어떤 의미일까.
메르세데스의 귀에는 피어싱은커녕 뚫은 자국조차 없었지.
귀를 뜯어버리겠다는 내 말에, 엘레노어가 그런 욕은 처음 들어본다면서 웃었던 것도 떠오른다.
나 엄청나게 심한 짓을 한 거였구나. 미안한 마음은 손톱만큼도 안 생기지만.
-저벅.
걷다 보니, 금세 내가 7층에서 이용하던 숙소에 도착했다.
엘레노어는 나를 이끌고 곧바로 방으로 향했다. 한시라도 빨리 내 이야기를 듣고 싶다는 듯하다.
하지만 내가 이 마을을 떠났던 것은 기껏해야 두세 시간 전의 일, 풀어놓을 이야기 따위는 당연히 없다.
“자, 어서 말해다오.”
그렇지만 엘레노어의 꿈꾸는 눈을 외면하기란 무척 힘든 일이었다.
[22층에서 뒤질뻔했던 썰 푼다]
[설산수련 23일차.txt]
[시발 악마년한테 통수맞았다 ㅋㅋㅋㅋ]
나는 1층에서 칩거 생활을 할 적에 읽었던, 커뮤니티의 썰풀이 글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것을 내 경험인 척 읊었다. 엘레노어는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내 이야기를 경청했다.
“후후, 이렇게 그대의 이야기를 듣는 것도 오랜만이군.”
하지만 그건 실수였다.
“그런데, 어쩐지 그대가 겪은 일을 말하는 것 같지가 않구나.”
생각해 보면, 엘레노어는 나를 처음 만난 순간부터 내 마음을 꿰뚫어 봤었다.
“조금 전부터 표정도 좋지 않고, 그간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그대여.”
엘레노어는 처음부터 내 어설픈 거짓말이 통할 상대가 아니었다.
**
내 말재주로 설명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설명한다고 이해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거짓말은 금방 들켰지만, 그렇다고 진실을 말해줄 수는 없었다. 엘레노어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말로 하기 힘들다면, 보여줘도 괜찮다. 방법은 그대도 알지 않나.”
엘레노어가 자신의 이마를 톡톡 두드렸다. 사념과 기억을 공유할 수 있는 나이트 엘프의 비술을 말하는 게 틀림없다.
“미안, 못 하겠어.”
나는 고개를 저었다. 엘레노어는 반대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강요하는 건 아니다. 그대가 그렇게 괴로운 표정을 짓는 것에는, 당연히 그만한 이유가 있겠지.”
“궁금하지 않다고 말하면 거짓말이겠지만, 내 인내심은 호기심 이상으로 많아.”
“그대가 스스로 말해줄 날까지, 느긋하게 기다리겠다. 무얼, 시간이라면 수백 년도 더 있으니.”
엘레노어의 호기심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고 있는 나로서는,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배려였다.
하지만 정작 엘레노어는 담담하다 못해 후련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런 표정을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엘레노어의 20년 전 밤이자, 나의 어젯밤에 보았던 표정이었으니까.
내가 이곳을 떠나는 걸 잠시나마 아쉬워했다는 것을 눈치채고, 그것만으로 만족했던 그 밤에.
“나는 언제든 그대의 편이니까.”
엘레노어는 이번에도 그 이상 말하지 않고, 조용히 방을 떠나주었다.
-후우.
나는 작게 한숨 쉬며, 잠시간의 고민 끝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이런 때일수록 더욱 단련에 매진할 필요가 있다.
어쩔 수 없는 일은 신경 쓰지 말자. 내가 할 수 있는 일에만 집중하자.
앞으로 올라가야 할 층이 90층도 넘게 남았다. 이런 일로 벌써 흔들리면 안 될 노릇이지.
눈을 감고 명상하며, 쓸데없는 잡념을 떨쳐버리고 마력의 흐름에 집중한다.
-쿵, 쿵, 쿵.
그러나, 작디작은 심장 소리가 북처럼 크게 귓가에 울려 퍼지며 신경을 방해한다.
그리고 마력은 주인의 의지와 마음에 직접적으로 반응한다.
혼란하기 짝이 없는 마음 탓에 집중은 점점 흐트러져만 가고, 마력은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씨발…좆같네, 진짜.”
몇 번을 시도해도 생각대로 풀리지 않는 명상을 그만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안의 마력의 흐름은커녕, 한 번도 놓쳐본 적이 없는 강렬한 기척밖에 느껴지지 않는다.
그 기척의 주인은 당연히 엘레노어다. 신기하게도, 이렇게나 거리가 멀어졌음에도 생생하게 느껴진다.
엘레노어가 유독 강한 마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거나, 나이트 엘프의 비술로 감각을 공유한 적이 있기 때문이겠지.
아무래도 좋은 사실이다. 내 마력감지 수준이 아직 한참 모자라다는 뜻이니까.
“응……?”
아니, 그러고 보니까 딱 한 번- 엘레노어의 기척을 느낄 수 없었던 순간이 있었다. 불과 몇 시간 전의 일이다.
다크엘프의 서 1장을 완료하고, 마을을 떠나기 직전.
어중간하게 사람을 흉내 내고 있는 듯 보였던, 그때의 엘레노어에게선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시련의 탑 시스템에 의해 평범한 깡통 NPC가 됐다고 해도, 마력이 사라지는 건 아닐 텐데.
그렇다면, 내가 엘레노어에게서 느끼고 있는 이 기척은 대체 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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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세계수
다음 날, 나는 방문 앞으로 다가온 엘레노어의 기척에 눈을 떴다.
“간밤은 평안했나, 그대.”
“어어, 잘 잤어.”
생긋 웃으며 인사하는 엘레노어에게 대충 대답했다. 사실 잠은 한숨도 못 잤다.
엘레노어에게서 느껴지는 이 특징적인 기척이 자꾸만 신경 쓰여서, 그 조사에 매진하느라 밤을 새고 말았다.
물론 딱히 알아낸 것은 없었다. 애초에 나는 마력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도가 너무 부족했다.
7층에서 엘레노어에게 마력 운용을 배우며 터득한 배경 지식이 있긴 하지만, 바꿔 말하면 결국 그것뿐이다.
엘레노어가 알려주는 지식과 요령은 대부분 너무 추상적이니까.
그래서 간밤에는 오랜만에 오픈 커뮤니티를 뒤져 봤다.
마력 운용과 마력 감지 스킬은 마법사 계열 클래스라면 하나쯤 갖추고 있는 법.
그래서 잘 찾아보면 내 궁금증을 풀어줄 정보나 공략글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작성자 : 박찬용#1442]
[제목 : 마력감응 이거 뭐하는 스킬임?]
높으면 좋다고 하는데 걍 스킬퀘 선행용임? 어케 쓰는거임?
- 마력감응 높으면 스킬 연비 좋아짐, 필수스킬
- ㄴ 그런 설명 안써있는데 확실함?
- ㄴ 설명은 안적혀있는데 법딱이면 다 알고있을걸
- 나 60렙 불쟁이인데 앞에 마력이라고 붙은 스킬은 높아서 손해볼거 없다
- ㄴ 정확한 성능이 뭔데?
- ㄴ 그건 모르겠고 아무튼 좋음
- 법사 스킬퀘 선행용 맞음 그거없으면 스킬 반도 못배울걸
마력감응을 비롯한 마력계 패시브 스킬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도전자는 정말 아무도 없다시피 했다.
마력을 운용하는 기본 원리는 물론이요, 스킬을 터득하고 있으면서도 사용법을 제대로 모르는 놈들이 대다수.
고레벨 공략파 도전자나 랭커급 도전자들도 중요도는 인지하고 있었지만, 구체적으로 아는 건 별로 없었다.
나름대로 마력에 대해 이해하고 있는 듯 보이는 자칭 ‘정통파 메이지’ 라는 도전자들이 있긴 했지만.
그 놈들도 서로 하는 말이 죄다 안 맞는데다가, 커뮤니티에서는 완전히 사이비 취급이라 신뢰도가 너무 부족했다.
결국 따로 알아낸 것 없이, 그냥 커뮤니티 눈팅만 하다가 밤만 샌 꼴이 되었다.
“정말 잘 잔것 맞나? 조금 피곤해 보이는데?”
어제의 일을 생각하며 고민에 빠져 있자, 엘레노어가 불쑥 얼굴을 들이밀며 물었다.
“맞다니까, 그냥 어제 좀 무리해서 그래.”
나는 그렇게 말하며 엘레노어에게서 받았던 펜던트를 꺼내 보였다.
“이걸 썼거든.”
사용자에게 제한적인 마력 강화를 가능하게 해주는 7층 퀘스트의 최종 보상.
그 효과는 단연코 절륜하지만, 그에 걸맞은 부작용도 존재한다. 신체에 그만한 부하가 걸리는 것이다.
내 얼굴이 피곤해 보인다면, 그건 전적으로 이 펜던트 때문이다. 하룻밤 새는 것쯤 나한테는 아무것도 아니니까.
“아하, 이제 보니 그렇구나. 내장된 마력이 떨어진 걸 보니 꽤 최근에 썼나 보군.”
엘레노어는 펜던트를 곁눈질하는 것만으로 내장된 마력의 양을 정확히 파악해 냈다.
내 주변 인물 중에서 마력에 대해 가장 잘 아는 건 역시 엘레노어인데.
내가 느끼고 있는 기척의 정체를, 엘레노어 본인은 알고 있을까?
**
엘레노어와 간략하게 아침 식사를 하고, 나는 곧바로 생각하던 것을 물어보았다.
“기척이라고?”
당연히 NPC니 뭐니 하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냥 유독 너의 기척만 크게 느껴진다고만 말했다.
단순히 마력의 보유량 때문에 차이가 난다기에는, 좀 이상할 정도로 기척이 강렬하다고.
“으음, 짐작이 안 가는군. 추측해 보자면, 그대의 감지능력이 편향적으로 발달한 것은 아닐까?”
“편향적이라니?”
“드문 일이긴 하지만, 종종 특정한 사물을 잘 감지하는 방향으로 능력이 발달하는 경우가 있거든.”
엘레노어는 그렇게 말하며 몇 가지 예시를 들어주었다.
원거리 투사체를 유독 잘 감지하는 경우라던가, 생물체의 기척을 유독 잘 감지하는 경우라던가.
하지만 특정한 개인만을 유독 잘 감지하는 경우는 자신도 들어보지 못했다고 한다.
엘레노어는 그냥 익숙한 기척이라 그런 게 아니냐고 되물었지만, 나는 당연히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면 나도 모르겠군. 개인적인 바람으로는, 그대가 나를 특별히 여겨서 그런 것이었으면 좋겠는데……?”
끈적한 목소리를 내며, 엘레노어의 꾸물거리는 손이 내 허벅지로 다가왔다.
이게 또 시작이네.
엄한 곳으로 기어오르는 손을 쳐내고, 생각을 이어나갔다.
엘레노어의 말대로, 내가 특정한 무언가를 강하게 감지하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엘레노어만이 가진 무언가를.
다른 NPC들에게는 존재하지 않고, 엘레노어만 갖고 있는 것에는 무엇이 있을까.
특별한 아이템을 가진 것도 아니고, 다크엘프 왕가의 혈통에 전해지는 특별한 기질 같은 게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 게 있었다면 7층에서 다크엘프의 여왕을 봤을 때 똑같이 느꼈을 테니까.
아니면, 정말로 나이트 엘프의 비술로 감각을 공유한 적이 있기 때문인가?
하지만 그런 거라면 엘레노어가 모르고 있을 리가 없다.
7층에서 갑자기 기척이 사라졌던 일도 설명이 안 되고.
아니, 잠깐, 하나 있잖아.
다른 NPC와 달리 엘레노어만이 가진 것, 최상급 엘리트 NPC로서의 자아.
내가 그걸 감지하고 있는 거라면 모두 설명이 된다. 7층에서 갑자기 기척이 사라졌던 것까지.
하지만 자아를 물리적으로 느낀다는 게 말이 되는 건가? 나는 대체 뭘 느끼고 있는 거지?
NPC를 NPC답지 않게 만드는 것, NPC에게 인간과 같은 자아를 부여하는 것.
그리고 사라지는 순간 동시에 자아를 상실하는 것.
이 순간, 내 머릿속에는 매우 추상적인 한 가지 개념이 떠올랐다.
“영혼……?”
또한, 그와 관련된 정보를 얻을 방법까지.
**
진영 퀘스트의 주축이 되는 3대 세력은 8층에서 꾸준히 충돌을 일으킨다.
국지적 분쟁이 계속되어, 언젠가 전쟁이 터질 것이 확실시되고 있는 불안정한 상황.
그런 만큼 다크엘프 진영의 최주요 인사이자 전투원 중 하나인 엘레노어는 이런저런 일로 바쁠 수밖에 없다.
“아아……그대와 좀 더 이야기하고 싶었는데, 좀처럼 시간이 나질 않는구나.”
결국 엘레노어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런 말을 남기고 내 곁을 떠났다. 아직 퀘스트는 진행되지 않고 있다.
아쉬워하는 엘레노어에게 인사하고, 나도 발걸음을 옮긴다.
내가 감지하고 있는 것이 상대방의 영혼이고, 엘레노어의 강렬한 자아와 기척이 영혼에서 비롯한 것이라면.
“그런 거라면……모르겠네.”
생각해보니, 그걸 알았다고 해서 딱히 뭐가 되는 건 아니다.
솔직히, 이럴 시간에 그냥 퀘스트 진도나 빼는 게 훨씬 나을 수도 있다.
하지만 발걸음은 멈추지 않는다. 어쩐지 이번만큼은 좀이 쑤셔서 참을 수가 없었다.
내가 찾아온 곳은 7층에서도 종종 방문했던 장소- 다크엘프 에르웬의 대장간이었다.
-똑똑.
닫혀 있는 대장간의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절그럭절그럭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곧이어 문이 열리고, 커다란 가슴에 어울리지 않는 작은 키의 다크엘프가 모습을 드러냈다.
“에휴, 아무리 급해도 그렇지 이렇게 재촉하는 건 너무하지 않느냐? 늙은이를 얼마나 괴롭힐 셈이……으응?”
웬 갑옷과 검을 들고 나온 에르웬은 나를 보자마자 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뭐야, 뭐냐, 내가 드디어 늙어서 헛것을 보는 건가. 너 내가 아는 인간족 맞느냐?”
“어, 이거 보면 알 거 아냐.”
“내가 만들어 줬던……아니, 이게 왜 이렇게 깔끔한 거냐. 어디 장식해 뒀다가 꺼내 온 게냐?”
에르웬은 내가 내민 팔목보호대를 보고 어처구니없다는 듯 한숨 쉬었다. 뭐, 그럴 만도 하다.
에르웬의 시점에선 20년 전에 만들어준 장비를 아직 새것처럼 갖고 있는 셈이니까.
“무기 좀 아껴서 쓰라고 잔소리하긴 했다만, 말을 잘 들어도 너무 잘 듣는구나. 안 그러게 생겨가지곤.”
애지중지하며 아껴서 그런 게 아니라, 정말로 새것이어서 그런 것뿐이지만, 굳이 오해를 정정할 생각은 없다.
그도 그럴 게, 책망하듯 말하고 있지만 은근히 기쁜 눈치니까.
“그나저나, 언제 또 여기까지 온 거냐. 바쁜 몸이라고 들었건만.”
“어제, 일이 좀 있어서. 당분간 머물다 갈 생각이야.”
“그래? 엘레노어에게 인사는 했느냐? 그 애가 아주 좋아라 할 텐데.”
에르웬은 오랜만에 고향 집에 온 손주를 대하듯 이것저것 물으며, 자연스럽게 나를 안으로 이끌었다.
대장간 안은 20년이라는 세월의 흐름에도 크게 바뀌지 않은 채였다.
이 다크엘프 대장장이의 나이를 생각하면 20년쯤이야 긴 시간도 아닐 테니, 이상한 일도 아니다.
“내줄 수 있는 게 차밖에 없어서 어쩌나, 오는 줄 알았으면 과자라도 놓아두는 건데.”
“됐어, 그것보다 물어볼 게 있어서 온 건데.”
“흐음, 인사나 하러 온 건 아닌 줄 알았지. 오냐, 뭐든 물어 보거라.”
에르웬은 쉽게 만날 수 없는 여왕을 제외하면 다크엘프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다.
그러므로, 이 주제의 질문을 하기에도 가장 알맞은 상대다.
영혼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이 얽혀 있는 존재.
“세계수에 대해서 알려줘.”
엘프들의 혼을 순환시켜 영생을 부여하는 신비한 나무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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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비취의 영약
에르웬은 처음에는 왜 그런 것을 묻느냐고 했지만, 이내 거두절미하고 아는 것을 말해주기 시작했다.
“세계수는 무한에 가까운 마나를 품고 있는 나무로, 모든 엘프들의 생명의 근원이란다.”
세계수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한 에르웬의 어투는 평소와 조금 달랐다. 어린아이에게 동화를 들려주는 듯한 분위기다.
“그 기원을 정확히 아는 이는 아무도 없지만, 오래된 전설에 따르면 어머니인 대지가 낳은 첫 번째 생명의 나무가 바로 세계수였다는구나.”
“세계수가 무한에 가까운 마나와 생명력을 갖고 있을 수 있는 이유가 그것인게지, 첫 번째 생명에게 주어진 은혜.”
“세계수는 스스로 낳은 두 엘프종에게 그 생명을 나누어 주었어. 무한에 가까운 생명을 나눠 받은 엘프는 영생종이 되었지.”
나는 어쩐지 에르웬이 이런 이야기를 많이 해 봤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금도 우리는 무척이나 장생하지만, 세계수와 영혼의 탯줄이 이어져 있던 그때의 엘프들은 정말로 영원히 살았단다.”
에르웬의 눈이 미묘하게 먼 곳을 바라보았다. 오래된 과거를 돌이키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영혼은 불멸하더라도, 몸은 결국 쇠하기 마련이지. 세계수는 이 한계를 아주 간단한 방법으로 해결했단다.”
“노쇠하여 죽음을 맞은 엘프의 혼을 다시 거두어들여, 새 육신을 낳아 그곳으로 순환시킨 것이야.”
“혼에 새겨진 의식과 기억은 새 육신으로 전달된 이후에도 그대로 이어져, 죽음을 맞은 엘프는 다시 젊어질 뿐이었어.”
죽은 엘프의 영혼이 새 육신을 얻고 다시 태어난다, 한마디로 하면 환생이라 이건가.
“하지만 엘프가 스스로 번식하여 늘어날 수 있었던 탓일까, 언젠가부터 세계수도 힘을 잃고 시들기 시작했지.”
7층에서 봤던 세계수의 모습을 기억난다. 비쩍 말랐는데도 굉장한 힘과 존재감을 갖고 있었지.
그게 시든 상태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는데, 에르웬의 말이 사실이라면 과연 그럴 만도 하다.
그 나무 하나가 이렇게 많은 엘프들의 생명을 모두 감당하고 있었다는 거니까.
“영생을 안겨주던 순환의 굴레가 망가지며, 엘프들은 더 이상 새 육신을 얻을 수 없게 되었어.”
“육신이 쇠하면 그것으로 끝, 우리의 영혼도 세계수로 돌아가지 않고 세상에 흩뿌려지게 되었지.”
“그 사실을 비통해하는 엘프들은 많았지만, 수천 년이 지나 모두 흙으로 돌아간 지 오래야.”
세계수가 시든 것은 다크엘프가 대수림을 떠나기 전의 이야기라고 했던가.
이제 그 시절의 세계수와 영생의 굴레를 기억하는 다크엘프는 여왕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고 한다.
에르웬도 완전히 그 세대의 인물은 아니고, 애매하게 걸쳐 있다고 한다나.
“뭐, 나는 지금의 형태가 옳다고 생각한다. 죽음을 통해 뜻을 물려주는 것은 의미가 깊지 않으냐.”
“그래?”
“물론이지, 너희 인간족이 그렇지 않느냐? 백 년도 못 살지만 끊임없이 번성하고 발전하지.”
그 발전과 성장은 유언의 힘에서 나오는 것이 분명하다며, 에르웬은 말을 끝맺었다.
확실히, 일리가 있는 말이다.
엄마의 죽음으로 가슴에 못질된 맹세가, 이 쓰레기 같은 인간을 움직이고 있으니.
**
세계수에 대해 이것저것 알게 되긴 했지만, 그렇게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얻지는 못했다.
“내가 아는 것은 이 정도뿐인데, 만족했느냐?”
만족은 못 했다. 솔직히, 에르웬의 마지막 말 때문에 괜히 기분만 나빠진 것 같다.
하지만 그걸 티 낼 수는 없어서, 나는 적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에르웬은 한 마디를 더 덧붙였다.
“나는 조금 오래 살았을 뿐이라, 아는 것이 많지는 않구나. 이 이상을 알고 싶다면 여왕을 찾아가는 게 나을 거다.”
그야 그렇겠지, 하지만 여왕은 아무때나 만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니까 에르웬을 먼저 찾아온 거다.
“지금의 여왕은 좀 상태가 안 좋지마는……너는 엘레노어의 정혼자 신분이니 어떻게든 될 테지.”
“정혼자 신분이 아직도 유효한 거야?”
“무얼, 고작 20년 정도 얼굴을 안 비춘 것 뿐 아니냐. 인간족에겐 긴 시간이겠지만 말이다.”
결혼을 약속해 놓고 20년 동안 얼굴 한번 안 비춰도, 취급이 바뀌지 않는다니.
그렇잖아도 엘프의 시간 감각은 쉽게 감이 오질 않는데, 긴 시간을 통째로 건너뛰고 나니 더 헷갈린다.
그리고 여왕을 쉽게 만날 수 없는 이유가 아직 하나 더 있다.
“근데, 여왕이 나한테 호의적이지 않을 것 같은데.”
여왕은 세계수에 미련이 남아, 엘레노어를 통한 정략혼으로 하이엘프와 평화 협정을 맺고 싶어했었다.
하지만 그 협정은 7층에서의 내 행보로 박살이 나버렸고, 평화는커녕 전쟁 직전까지 온 상태.
그런 마당에, 여왕이 세계수에 대해 궁금해하는 나를 곱게 봐줄까? 절대 아닐 것 같은데?
“그건 그렇겠구나.”
에르웬도 그 생각은 못 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이내 손뼉을 치더니 좋은 생각이 났다며 입을 열었다.
“그럼, 네가 여왕의 병세를 고쳐줄 영약을 구해오는 건 어떻겠느냐?”
그리고, 눈앞에 푸른 알림창이 떠올랐다.
[에픽 : 다크엘프의 서 - 비취의 영약]
설명 : 위대한 다크엘프의 여왕이 병석에 앓아누운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대단한 이유는 없습니다. 그저, 여왕 본인이 몸져누웠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아 했기 때문입니다.
엄청난 중병에 걸려 생사의 기로를 오가고 있을 수도 있고, 사실 가벼운 감기에 들었을 뿐일 수도 있겠죠.
확실한 것은, 당신이 여왕과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는 그에 맞는 성의를 보여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엘프의 제약 기술은 무척 훌륭하니, 평범한 약을 가져다주는 걸로는 안 된다는 사실은 알고 있겠죠?
소문으로 전해지는 비취의 영약 정도가 아니라면, 여왕은 당신을 거들떠도 보지 않을 것입니다.
[퀘스트 목표]
1. 비취의 영약을 손에 넣기.
2. 비취의 영약을 능가하는 진상품을 준비하기(선택).
3. 여왕의 병을 치료하기(선택).
설마 이런 식으로 진영 퀘스트 라인에 다시 들어올 줄은 몰랐다.
게다가 이거, 내가 아는 퀘스트다. 상세한 내용은 다르지만, 8층 진영 퀘스트의 핵심으로 꼽히는 퀘스트다.
8층 진영 퀘스트는 원래 자잘한 서브 퀘스트 여럿을 진행하는 식으로 되어 있는데.
나는 지금 난데없이 서브 퀘스트 대부분을 생략하고, 가장 중요하고 난이도가 높은 퀘스트에 진입한 거다.
그리고 이거, 내가 알기에는 무조건 파티 퀘스트로 진행해야 하는 기믹이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젠장, 어떡하지.
**
비취의 영약 퀘스트는 사실 공략글을 읽으면 아주 쉽게 진행할 수 있는 퀘스트다.
영약을 얻는 건 둘째치고, 영약을 어디서 얻을 수 있는지 정보를 습득하는 난이도가 높은 퀘스트니까.
공략글을 따라가면 정보 습득이고 뭐고 다 생략하고, 바로 영약을 습득해서 빠르게 깰 수 있다.
문제는 그 영약을 습득하는 부분인데, 영약을 얻으려면 반드시 파티 플레이를 할 필요가 있다.
시스템적인 인원수 제한이 있는 건 아니지만, 혼자서는 절대 수행하지 못하는 기믹이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커뮤니티에 올라와 있는 공략이 그대로 먹힐지도 미지수다. 도전 환경이 다른 부분이 한두 군데가 아니니까.
리즈멜이나 엘레노어를 데려가고 싶어도, 전쟁 직전의 분위기 때문에 전투요원은 쉽게 자리를 비울 수 없다.
당장 대장장이인 에르웬도 많이 바쁜 모양이고, 비전투 인원을 데려가는 건 애초에 논외다.
“그래, 구해볼게.”
일단은 짧게 대답해 퀘스트 수락 의사를 표시했다.
어차피 처음부터 거절한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에픽 퀘스트를 거를 수는 없는 노릇이니.
차라리 잘 됐다. 어려운 과제를 눈앞에 던져 놓으면 일단 잡생각은 사라지니까.
커뮤니티를 열어, 비취의 영약을 얻을 수 있는 장소로 향하는 길을 찾았다.
**
비취의 영약을 얻기 위해 찾아가야 하는 장소는 이번에도 던전, 다만 조금 특별한 던전이다.
던전 안에서 특정한 루트를 따라야만 진입할 수 있는 던전 안의 던전이자, 히든 던전이기 때문이다.
[오래된 제단 - 3]
찾아온 것은 7층에서 감각 강화를 터득하기 위해 찾았던 저주받은 제단과 비슷하게 생긴 장소.
이런 제단이 8층에만 총 다섯 개가 있고, 그중에서 이 세 번째 제단을 통해서만 히든 던전으로 들어갈 수 있다.
커뮤니티의 공략글에 나온 대로 제단에 놓인 석상을 조작했다.
-끼리리리릭!
톱니바퀴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제단 중앙이 열리며, 보스가 튀어나왔다.
[BOSS - 봉인된 제단의 수호자]
보스는 여기저기 톱니바퀴가 박혀 있는 골렘으로, 스펙은 그냥 흔한 필드 보스 수준이다.
그러고보니 요즘 골렘 타입의 적을 자주 만나는 기분이다.
“흡.”
-쾅!
인벤토리에서 둔기 하나를 꺼내 휘두르자, 골렘의 팔 하나가 박살 나서 떨어졌다.
이 골렘은 사지에 박힌 톱니바퀴를 전부 파괴하지 않으면 끝없이 재생하는 타입이다.
그 대신 기본 방어력은 골렘 타입의 보스치고 무척 낮은 편에 속한다. 이렇게 한 방에 박살 날 정도로.
-쾅! 쾅! 쾅! 쾅!
팔다리와 가슴 부분에 박힌 톱니바퀴 하나당 한 대씩, 정확히 다섯 대로 보스를 처치했다.
복잡한 패턴도 없는 이런 필드보스는, 이젠 그냥 좀 센 잡몹으로밖에 느껴지지 않는다.
앞으로 몇 층을 더 올라가야 내 스펙에 맞는 적이 나올까.
일부러 어려운 길을 가지 않는 이상, 당분간은 보기 힘들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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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모순의 본심
필드 보스를 쓰러트린 후, 감각 강화 스킬의 레벨이 한 번 더 상승했다.
그리고 [감각 증폭]이라는 새로운 액티브 스킬도 습득했다. 스킬의 성능은 단순하게 오감을 더 강화하는 것.
감각 증폭을 켜면 평소보다 더 예민하게 주변을 감지할 수 있게 되는데, 이 순간 나는 말 그대로 생체 레이더가 된다.
그냥 민감해지는 정도가 아니라, 소리의 반사로 위치를 파악하는 반향정위까지 활용할 수 있게 된다.
위기를 깨부수며 이룩한 성장은 언제나 짜릿하다. 나는 만족하며 다크엘프의 마을로 되돌아왔다.
마을에는 밤을 지새운 듯 보이는 엘레노어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대, 피냄새가 나는구나.”
그러고보니 다크엘프는 후각이 예민하다 했지. 장비를 갈아입긴 했지만, 피 냄새는 지워지지 않았나.
밤중에 갑자기 장비를 챙기고 외출하더니, 피 냄새를 묻히고 돌아온 상황.
무슨 일이 있었냐고 캐물을 법도 한데, 엘레노어는 오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역시 그대는 내 취향이란 말이지……보면 볼수록 탐나서 원, 종족이 다르다는 사실이 너무 아깝구나.”
음, 뭔가 심오한 말을 하려나 했는데 아니었네. 야성미가 넘치는 연하인지 뭔지가 취향이라고 했었지.
아무래도 엘레노어는 내가 피 냄새를 묻히고 돌아온 게 마음에 드는 모양이다.
“그런데, 그대도 밤을 새운 거지? 잠은 안 자도 되나? 식사도 하지 않은 것 같은데?”
“딱히.”
“인간족은 좀 자주 먹는 편 아니었나, 그러고 보니 그대와 식사를 함께한 적이 없는 것 같은데.”
그렇겠지. 다크엘프는 종족 전체가 식사 주기가 뜸한 편이고, 나도 항상 화이트롤로 끼니를 때우고 있으니까.
물론 다크엘프들은 나랑 눈만 마주쳐도 간식을 먹이려고 들긴 하지만, 어쨌든.
지금도 필드 보스를 잡은 직후에 화이트롤을 먹어서 따로 뭘 먹을 필요는 없고, 수면도 딱히 필요하지 않다.
“식욕이 없거든.”
나는 대충 대답했다. 딱히 거짓말을 한 것도 아니다. 식욕이고 수면욕이고 하는 건 옅어진 지 오래니까.
아니, 저절로 옅어졌다기보다는 스스로 잘라낸 것에 가깝겠다.
1층에 처박혀 있던 시절에도, 꼴에 입이라고 매일같이 맛있는 음식만 골라서 처먹었으니까.
일차원적인 욕구만을 충족시키며 하루하루 연명하던 그때의 정신상태로 이 7층에 들어왔다면 어땠을까.
다크엘프들에게 빌붙어 삼시세끼에 간식까지 받아먹고, 밤에는 엘레노어랑 뒹굴지 않았을까.
그러고 있을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니, 저절로 역겨움이 치민다. 짐승만도 못한 꼴이겠지.
가슴에 깊이 박아넣은 의무와 책임감이 나를 사람답게 만들고 있는 거다.
“그런가, 그건 별로 좋은 일이 아닌데.”
엘레노어는 안됐다는 듯이 말했지만, 나는 식욕을 잃어가는 자신이 마음에 들었다.
**
엘레노어와는 잠깐의 대화 끝에 헤어졌다. 서로 한가한 신세는 아니었으니까.
나는 곧바로 정찰대의 건물로 이동했고, 정찰대원 다크엘프들의 관심을 흘려넘기며 리즈멜을 찾았다.
리즈멜과 만나자마자 다시 연무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간단한 몸풀기를 마치고, 어제 하던 훈련을 다시 시작했다.
리즈멜은 어제보다 훈련의 난이도를 낮춰서 천천히 진행하고 싶은 모양이었는데, 나는 당연히 거절했다.
-서걱!
어두운 그림자 속에서, 시각에 의존하지 않고 휘두른 검이 가볍게 인형을 베어냈다.
“뭐야, 오늘은 컨디션이 무척 좋은 모양이네? 푹 쉬다 왔구나?”
특별히 더 훈련한 것도 아니지만, 어제와는 사뭇 다른 결과에, 리즈멜은 무척 놀란 눈치였다.
뭐, 반은 맞다.
쉬다 온 건 아니지만 컨디션이 좋기는 하니까.
그리고 훈련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시험이 급격히 진도를 나갈 마다, 리즈멜의 표정은 점점 나빠져 갔다.
처음에는 마냥 기뻐하며 칭찬도 하고, 너무 우쭐해하지 말라며 틱틱거리기도 했지만.
내가 인형 다섯을 동시에 여유롭게 쓰러트리고, 어제 보여줬던 동작을 완벽하게 재현하기 시작할 때쯤.
“……”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것인지, 리즈멜은 입을 꾹 다물고 인상을 찌푸린 채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성장을 아낌없이 내보였다.
눈을 감고 여유롭게 인형을 무찌르며, 감각의 확장을 완벽히 다루고 있음을 증명했다.
“어떻게 된 거야?”
리즈멜이 돌연 험악한 표정으로 내 어깨를 붙잡았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네가 알려준 거잖아. 틀린 부분 있어?”
리즈멜은 고개를 저으며, 전혀 아니라고 대답했다.
“너……어젯밤에 뭐 했어?”
리즈멜의 눈동자에 다시 깊은 걱정이 담겼다.
**
나는 딱히 범죄를 저지른 것도, 켕기는 일을 한 것도 아니다. 그래서 당당하게 설명했다.
“그냥 실전에서 연습 좀 하고 왔어, 별 거 아냐.”
하지만 끝맺고 보니 별로 떳떳한 말투가 아니었다. 이것도 내 부족한 말재주 탓이겠지.
“실전에서 연습하고 왔다니, 지금 장난해? 네 눈을 베면서 싸우는 게 어떻게 그냥 연습인데!”
리즈멜은 내게 바짝 달라붙어서, 추궁하듯 눈을 부릅뜨고 큰 소리로 말을 이었다.
“내가 몇 번이고 말했잖아. 무리하지 말라고, 초조해하지 말라고, 너는 잘하고 있다고……그런데 왜?”
“뭐가.”
“왜 또 죽고 싶어 안달 난 것처럼 굴기 시작한 거냐고. 그렇게까지 위험한 짓을 할 필요는 없었잖아.”
아무리 그래도 여기서 아니라고 대답할 수는 없었다. 나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맞아.”
“그러면, 왜?”
“할 수 있으니까.”
예전에 말했던 것을 다시 한번 입 밖으로 내었다.
수정 거미 때와 똑같이, 그냥 할 수 있으니까 한 거라고.
리즈멜은 그때도 이 대답을 듣고, 내게 검술을 가르쳐 주기 시작했다.
“나는 네가 뭔가 중요한 목적이 있어서, 한시라도 빨리 강해지고 싶어하는 거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자꾸만 위험하게 실전에 머리를 들이미는 거라고. 내가 너한테 검술을 가르쳐 주기로 정한 이유도 그거였어.”
“내가 검술을 가르쳐서 너를 충분히 강하게 만들어 준다면, 위험한 짓을 감수할 일도 더는 없을 거라고.”
“하지만 그동안 지켜보면서 알았어, 네가 그렇게 급하지 않다는 거. 여유가 있어 보였거든.”
그리고, 리즈멜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리즈멜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너는, 그냥 강해지는 게 좋은 거잖아.”
침묵 끝에 나온 말은, 어떤 의미에서 내 생각을 정확하게 꿰뚫어 본 것이었다.
리즈멜은 내가 성장을 통해 쾌감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있었다.
**
나는 1층을 공략하고 처음으로 노력을 통해 성장하는 행위의 짜릿함을 알게 되었다.
그 짜릿함은 싸구려 도파민에 빠져 있던 내게 너무나 크고 새로운 자극이었고, 나는 한동안 그것을 쫓아 달렸다.
아니, 지금도 다를 것 없다. 나는 지금도 성장할 때마다 격한 쾌감에 몸부림친다. 하지만 그게 뭐 어쨌다고.
노력을 즐기는 건 평범하게 좋은 일 아닌가?
당장 내가 시련의 탑을 공략하며 나아갈 수 있게 해주는 가장 큰 원동력이 바로 그것 아닌가, 성장의 쾌감.
“네가 위험한 방식밖에 몰라서, 그 방법으로만 성장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그래서 그런 거라면 이해할 수 있어.”
리즈멜은 떨리는 목소리로 조금씩 말을 이었다. 나는 이번에도 토 달지 않고 들었다.
“하지만 이젠 아니잖아. 내가 가르쳐 주는 걸 따라오기만 해도 충분해. 나는 네가 만족하고 있는 줄 알았어.”
리즈멜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실제로 나는 리즈멜과의 수련에 충분히 만족하고 있었다.
다만 이번에만 조금 달랐을 뿐이다. 어느 부분이 달랐다고는 나도 말하기 힘들지만.
“내가 너무 조심하게 굴어서 싫었어? 그래서 그런 거야?”
대답하기 어려운 물음이었다. 리즈멜의 걱정이 마음에 안 든다고 생각한 부분도 분명 있긴 했다.
하지만 꼭 그게 이유라고 할 수만은 없다. 돌이켜 보면 나도 잘 모르겠으니까.
하나하나 따져 보자면, 내가 느끼기 시작한 초조함이 가장 크지 않았을까.
그렇게 생각해보니 좀 이상하긴 했다.
나는 왜 어제만 유독 그렇게 초조했던 걸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뜻밖에 빠르게 답이 나왔다.
다크엘프들 사이에서 너무 오래 지나다가는, 다시 예전처럼 한심한 놈으로 돌아가 버릴까 봐. 그거였지.
그렇다면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됐는가. 그건 쉽다. 리즈멜이 말한 그대로다.
나는 리즈멜과 수련하며 강해지는 것에 충분히 만족하고 있었다. 만족해 버렸기 때문이다.
나는 만족을 누려서는 안 된다.
나는 내 욕망을 모조리 거세했다. 식사는 화이트롤만으로 제한하고, 수면도 조금씩 줄여나가고 있었다.
다크엘프의 환상적인 몸매에 눈길을 빼앗기면서, 엘레노어의 유혹을 모조리 거부했다.
“그러네, 네 말이 맞다.”
리즈멜은 내가 죽고 싶어서 안달 난 놈처럼 군다고 말했다. 그 말은 무척 정확했다.
할 수 있어서 하는 거라고 말했지만, 사실 본심은 따로 있었던 거다. 이걸 이제야 깨닫다니.
“나는 죽고 싶은 거였어.”
모정을 빌미로 부끄러운 줄도 모르는 채 사람 하나를 착취하고 죽여버린 희대의 쓰레기, 서진혁.
나는 그 새끼를 죽여버리고 싶었던 거다.
그 새끼가 만족하고 행복해하는 꼴을 보면 배알이 뒤틀려서, 자꾸만 죽음으로 내몰았던 거다.
하지만 죽어버리면 탑을 나가서 엄마에게 사과한다는 목표도 이룰 수 없으니까, 나는 그조차도 이룰 수 없었다.
살고 싶은 것도, 죽고 싶은 것도, 모두 나의 본심. 둘 다 나의 욕망.
그러나 내 가슴에 박아넣은 맹세는 그 어떤 것도 허락하지 않는다.
‘멈춰 서지 않고 끝없이 나아간다. 이 탑의 천장을 뚫고 벗어날 때까지.
헷갈리게 해서 미안하다, 리즈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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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광란의 질주
보스를 처치하자, 제단에 놓인 석상들이 일제히 무너졌다.
이제 무너진 석상 아래에 숨겨진 레버를 당기고, 몇 가지 조작을 더 가하면 히든 던전에 진입할 수 있다.
던전에 들어가기 전에 한 번 더 장비를 점검한다.
에보니 스틸로 만든 다크엘프제 방어구 풀세트.
무기도 가장 좋은 것으로 착용하고, 방패 아래로 에르웬이 만들어 준 팔목보호대를 착용했다.
앞으로 몇 층을 더 올라가야 수준이 맞는 적이 나올까- 그런 생각을 한 게 몇 분 전이지만.
이 던전을 기믹 수행 없이 혼자서 돌파하려면 이 정도 준비는 당연히 해야 한다.
-끼기기기긱!
제단 바닥이 열리고 히든 던전으로 향하는 문이 드러났다. 곧바로 안으로 들어왔다.
[비취의 계단]
히든 던전은 비취라는 이름 그대로 녹색의 수정이 가득한 지하 신전 비슷한 곳이다.
물론 신전은 신전인데, 너무 고대 양식으로 만들어진 데다가 지하라는 특성 탓에 동굴에 더 가깝다.
오픈 커뮤니티에서 얻은 던전 지도를 켜 놓고, 천천히 계단을 따라 내려간다.
-딸랑!
어디선가 작은 방울 소리가 들려왔다. 마력감지에 몇 종류의 생명 반응이 걸린다.
녹색 수정으로 만들어진 나비 같은 것이 내게 접근해 왔다.
수정 나비는 내 주변을 살랑살랑 날아다니더니, 날개를 퍼덕여 둥근 광원체를 쏘아냈다.
내가 [집광] 스킬을 사용할 때와 비슷한 광원이다. 손을 뻗어 만져보았다.
-치지직……!
강한 열기를 뿜어내는 광원체가 손가락 끝을 지졌다. 이렇게 작은데도 내 화염 내성을 뚫는다.
위력이 높아서 그런 게 아니라, 화염 내성으로 막을 수 없는 복합 속성이라 그렇다.
빛의 구슬을 쏘아대는 나비들을 손으로 붙잡아 으깨버리고, 이어서 계단을 내려갔다.
이 히든 던전의 몬스터는 모두 이런 타입이다.
몬스터 자체는 그렇게 강하지 않지만, 저런 빛구슬이나 광선을 쏘아서 원거리 공격을 하는 방식.
7층의 히든 보스였던 크리스탈 거미와 비슷하면서 미묘하게 다른 느낌이다.
잠시 후, 무거운 발소리와 함께 새로운 몬스터가 나타났다. 이번에는 거북이 형태다.
등딱지가 녹색 수정 덩어리로 되어 있어서, 거북이라기보다는 사족보행 달팽이 같은 외형이다.
-우우웅……!
거북이의 입에 녹색 빛구슬이 모였다. 모여든 빛구슬은 여러 갈래의 광선이 되어 내게 쏟아졌다.
검을 휘둘러 날아드는 빛구슬을 쳐내고, 단번에 거북이에게 접근해 일격을 먹였다.
-콰직!
새까만 칼날이 수정 덩어리를 뚫고 박혀 들어가, 거북이의 숨통을 끊었다.
던전의 기믹은 이 거북이가 나타나는 구간부터 시작된다.
때마침 계단만 따라 내려가면 그만이던 구조가 확 넓어지고, 동서남북으로 다양한 갈림길이 나타났다.
가볍게 마력감지를 펼쳐 확인해 보니, 공략글에 나와 있는 기믹 수행용 장치들도 모두 그대로 있는 모양이다.
“후우……해보자, 해 봐.”
심호흡을 하고, 가볍게 몸을 풀고, 기믹이 있는 동쪽 길을 바라보고, 자세를 잡는다.
-쿵!
그대로 발밑을 있는 힘껏 박차, 지도에 표시된 길을 따라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부우우욱, 하는 칼바람 소리가 귓가에 스치는 초고속 질주를 시작하고 대략 이 초 뒤.
-찌릿.
직감, 마력감지, 감각 강화, 내 시야를 넓혀주는 세 가지 스킬이 모두 동시에 경고를 외친다.
발 밑을 주의하라고.
-콰과광!!
지면에서 거대한 광선의 기둥이 솟아올랐다.
**
크리스탈 거미의 입에서 발사되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굵기의 녹색 광선.
SF영화에 종종 나오곤 하는, 위성 병기의 포격을 연상케 하는 공격이 발밑에서 솟구쳤다.
“시! 발!”
비명 대신 저절로 욕이 튀어나왔다.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실제로 보니 진짜 장난이 아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발은 멈추지 않는다. 달리는 걸 멈추면 죽는다.
-콰과광!
쏘아지는 광선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달려나가는 나를 노리고 몇 번이고 연달아 쏘아진다.
이 끝없이 쏘아지는 양심 없는 광선이 바로 이 던전의 기믹이다.
비취의 영약은 이 던전 최하층에 고여 있는 샘물, 그리고 그 샘물을 지키는 살벌한 몬스터가 있으니.
미친 감지범위와 미친 사거리의 광선을 무한대로 쏘아내는 괴물, 에메랄드 와이번이 그것이다.
에메랄드 와이번은 이 구간에 들어선 침입자를 감지해, 침입자가 있는 방향을 향해 냅다 광선을 쏴버린다.
위력은 즉사 수준, 광선의 면적도 뭉쳐있는 사람 서너 명쯤은 한 번에 덮쳐 증발시킬 수 있을 만큼 넓다.
그 미친 광선을 피하는 방법은 하나.
파티원들과 협력해 이 던전의 장치를 작동시켜 광선을 다른 방향으로 유도하는 것뿐이다.
떨어져 있는 장치 여럿을 동시에 작동시켜야 하므로, 당연히 혼자서는 못 한다.
다른 탑의 도전자들에겐 일종의 협력 퍼즐 게임이지만.
솔플러인 나한테는 목숨을 걸고 하는 러닝 액션 게임인 셈이다.
-콰과광!
“으억, 씹!”
광선 포격을 피해 미친 듯이 달려나가는 내 앞길을 또 한발의 광선이 가로막았다.
나는 재빨리 달리는 방향을 억지로 틀고, 던전의 벽을 밟아서 회피해 냈다.
지금 꼴을 보면 알겠지만, 광선을 쏘는 와이번은 한 마리가 아니다. 전부 다 해서 여섯 마리라던가.
기믹을 수행할 수 있다면 여섯 마리든 열 마리든 아무 상관 없겠지만, 나는 사정이 다르다.
그나마 마력감지를 익혀서 광선이 날아오는 것을 미리 감지할 수 있기에 망정이지.
그냥 뭣도 모르고 뛰어들었으면 지금쯤 광선을 세 발쯤 맞고도 남았을 것이다. 한 번만 맞아도 뒤지겠지만!
그 때, 마력감지가 애매한 위치에서 동시에 쏘아지는 광선을 감지했다.
인벤토리에서 손도끼를 꺼내, 좁은 통로의 벽면에 박아넣었다.
어마어마한 가속도가 붙었던 몸이 단번에 제동하고, 한 발짝 앞과 두 발짝 뒤의 위치를 광선이 꿰뚫었다.
“허, 씨발.”
젠장, 이런 게 또 문제다. 그냥 계속 달리기만 할 수 있으면 차라리 편할 거다.
타이밍에 맞춘 정확한 방향전환과 정지를 해내지 못하면, 그것대로 광선에 맞을 수가 있다.
이렇게 멈추는 것도 오래 끌면 안 된다. 발밑에서 다시금 찌릿한 경고가 울렸다.
[혼신]
“후웁!”
인생 최장거리의 제자리 멀리뛰기로, 발밑에서 쏘아진 광선을 피해냈다.
**
이 광선 포격의 가장 좆같은 점은,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더 빨리 날아온다는 점이다.
에메랄드 와이번이 자리를 잡고 있는 장소가 영약이 고여 있는 위치와 매우 가깝기 때문이다.
내려가면 내려갈수록 광선의 발사 지점이 가까워지니까, 그만큼 광선이 빨리 날아온다는 것.
사실 좆같은 점은 그 밖에도 많다.
일단, 광선에 맞아 박살 나고 수복되고를 반복하며 던전의 지형이 조금씩 바뀌어 버린다는 점.
지형이 계속 바뀌어대는 탓에 원래 예정보다 이동 경로의 거리가 훌쩍 늘어나고 말았다.
나는 무한으로 달릴 수 있는 러닝 액션 게임의 주인공과 다르게, 엄연히 체력에 한계가 있다.
달리는 중에 틈틈이 포션을 섭취할 수 있긴 하지만, 포션을 마시다가 호흡이 꼬일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다.
자칫 발이 꼬이기라도 하면 광선에 맞아 뒈질 텐데, 지형마저 지랄이 나니까 욕을 안 할 수가 없다.
그리고 광선 포격과는 별개로, 여기가 어쨌든 던전이라는 점. 던전에는 당연히 몬스터가 나온다.
초반에 나오던 나비나 거북이 정도라면 무시할 수 있겠지만, 점점 크고 센 놈들이 나오고 있다.
-그오오오오!
지금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직선 방향에 수정체로 이루어진 말대가리 괴물이 나타났다.
나는 재빨리 인벤토리에서 스파이크 박힌 방패를 꺼냈다.
방패를 내세운 뒤 속도를 줄이지 않고 달려나가, 정확한 타이밍에 [혼신]을 발동시켰다.
-콰광!
수정으로 이루어진 말대가리 괴물은 들이받힌 그대로 박살이 났다.
내 스펙이 조금만 딸렸어도 이렇게 몬스터를 몸으로 뚫고 지나가는 짓은 못했을 거다.
그렇게 속으로 불평하는 한편, [질주]스킬의 레벨이 올랐다는 시스템 메시지가 눈앞에 표시되었다.
영약이 있는 장소에 가까워질수록 위험요소는 점점 늘어가고 있지만, 몸은 점점 편해지고 있다.
던전의 위험도가 올라가는 것보다 내가 성장하는 속도가 더 빨랐기 때문이다.
역시 나는 위기상황에 처하면 훨씬 빠르게 성장한다.
**
한참을 달려 마침내 유일한 안전지대에 도착했다.
장거리 달리기를 하다 보면 시간 감각이 둔해진다던데, 대체 몇 시간을 내리 달린 건지 감이 안 온다.
“흐아……”
다리가 떨리고 숨도 마음처럼 잘 쉬어지지 않는다. 입에서는 단내가 나고 눈앞이 어지럽다.
고개를 숙이면 토할 것 같아서, 일부러 천장을 바라보며 숨을 골랐다.
이 던전을 그냥 달려서 돌파한 사람은 아마 전 서버에 나 하나 뿐일 거다.
[빨간 포션]
주저앉고 싶은 마음을 참고 억지로 포션을 들이켰다.
지쳐있던 몸은 포션과 [전투 재생]의 효과로 금방 회복된다. 다시 한번 장비를 점검하고 전투 준비를 한다.
이제 남은 건 하나뿐이다. 저 바닥에 고여 있는 영약을 퍼담는 것.
하지만 문제는 여태껏 줄기차게 광선을 쏴대던 와이번이 영약 고인 바닥 근처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다.
이곳에서의 정상적인 플레이 방식은, 던전의 장치와 미끼를 활용해 와이번의 시선을 돌리고 영약만 쏙 빼 오는 것.
이것도 당연히 솔플러인 내겐 불가능한 방법이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단순하다.
다 죽이고 뺏어오면 된다.
안전한 곳에 자리잡고 마음대로 저격해대는 것도 이젠 끝이다, 좆같은 익룡 새끼들아.
이 층에 내 수준에 맞는 적이 없다면, 찾아가면 그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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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에메랄드 와이번
에메랄드 와이번의 스펙이 어느 정도인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당연하다, 잡으라고 있는 몬스터가 아니니까.
하나의 던전을 구성하는 기믹으로 배치된 존재, 반드시 피해서 행동해야만 하는 무대장치.
하지만 상층에 등장하는 와이번 계통의 몬스터가 어느 정도 스펙인지 생각해 보면, 대충 짐작 정도는 할 수 있다.
일단 저만한 위력의 복합 속성 광선을 무한대로 쏘아낼 수 있을만큼의 마력을 갖고 있다는 건 확정.
쏘아지는 광선에서 느껴지는 마력량만 해도 대충 내 전체 마력과 비슷한 정도다.
나는 전사 클래스라 마력량이 많은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건 어마어마한 수치다.
일단 내 기본 스펙부터가 8층 수준은 한참 넘어서 있으니까. 비슷하기만 해도 반칙 수준인 거다.
그리고 와이번은 드래곤의 하위호환쯤 되는 종족으로, 그 신체의 강인함도 예사롭지 않다.
다만 여기까지 오면서 만난 다른 몬스터처럼, 육체가 녹색 수정으로 이루어져 있다면 이야기가 좀 다르다.
그렇다면 놈들의 방어력도 결국 녹색 수정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할 테니까.
즉, 유리 대포일 가능성이 있다는 거다.
뭐, 이런 식의 희망적 관측만 쌓아놓고 적을 판단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짓이긴 하지만.
아무튼 승산은 충분하다. 광선 이외의 공격이라면 맞고 버틸 자신도 있다.
“대충 됐나.”
지쳤던 몸이 만전에 가까운 상태가 되었음을 확인하고, 나는 곧장 발걸음을 옮겼다.
에메랄드 와이번의 마력이 느껴지는 장소를 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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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취의 영약이 고여 있는 샘은 넓은 공동 한가운데에 있었다.
그리고 그 공동의 구석마다 굴이 하나씩 파여 있었고, 그 굴에 에메랄드 와이번이 자리 잡고 있다.
별 생각 없이 영약을 향해 달려가면 사방팔방의 와이번에게 저격당하는 구조.
여기선 원래 감지를 피할 수 있는 우회로를 통해 와이번들을 지나치고, 던전의 기믹을 발동해 시선을 돌려놔야 한다.
하지만 나는 기믹을 써먹을 수 없으므로, 우회로만을 이용한다.
이곳의 와이번들은 주기적으로 잠에 들고, 침입자를 감지하면 깨어나서 활동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던전의 우회로를 사용해 굴로 들어가면, 놈들의 잠을 깨우지 않고 이동할 수 있다.
이 놈들이 잠에서 깨는 순간은, 도전자가 놈들에게 접촉하거나 우회로와 굴을 벗어나 놈들의 감지에 걸릴 때.
반대로 말하면, 우회로를 벗어나지 않거나 접촉하기 전까지는 안 깨어난다는 뜻이다.
선빵을 박고 시작하기 딱 좋다는 거다.
눈치를 보면서 슬슬 피해 가야 하는 와이번에게, 나는 당당히 다가가 검을 들어 올렸다.
“덤벼라, 익룡 새꺄.”
-콰직!
와이번 한 마리의 눈알에 있는 힘껏 검을 박아넣었다. 생각보다 더 깊이 박혔다.
-그오오오오오오!!
와이번은 크게 소리치며 깨어났고, 그 순간 주변의 공기가 확 달라졌다.
꺠어난 와이번의 몸에서 마력이 흘러넘치고, 주변에 무작위하게 퍼져 있던 마력이 그에 공명하기 시작했다.
너무나 선명하게 느껴지는 어마어마한 마력량에 기가 질릴 정도였다.
허 시발, 이게 드래곤이 아니라 와이번이라고?
와이번의 체내에 쌓여 있는 마력량도 어마어마한데, 대기 중의 마력마저 놈에게 지배당하고 있다.
이딴 미친 생물을 여섯이나 가져다 놓을 생각을 하다니, 제정신이 아니다.
이 탑을 설계한 놈이 누구건 간에, 미치지 않고서야 이런 레벨 디자인을 해놓을 리가 없다.
-키이이이잉!
그렇게 잠시 얼타는 사이, 와이번의 쩍 벌어진 주둥아리에 마력이 모여들었다.
**
나는 당연히 선빵을 맞은 와이번이 취할 행동을 몇 가지 상상해 뒀다.
하지만 이건 살짝 예상을 빗나갔다. 상정하지 못한 정도는 아니지만, 뭐라고 해야 할까. 어이가 없네.
근거리니까 당연히 발톱이나 이빨로 덤벼올 줄 알았는데, 대뜸 면상에다가 광선을 박으려고 하다니.
빈대 잡겠다고 미사일을 쏘는 꼴이잖아.
-콰과과광!!
물론 신속한 빈대인 나는 미사일을 어렵지 않게 피해냈다.
원래 이런 광역 공격은 멀리서보다 가까이에서 피하는 게 더 쉽다. 사출기는 사각지대가 분명하니까.
와이번의 턱 옆으로 회피함과 동시에, 한 번 더 검을 휘둘러 놈의 목 언저리를 베어보았다.
-촤악!
역시 생각보다 잘 베인다. 예상대로 이놈들의 방어력은 그렇게 대단치 않다.
이거라면 거리를 좁힌 상태에서 계속 베는 것만으로 처치할 수 있을 것 같다.
문제는 이놈이 나를 그렇게 두느냐인데.
-그와아아아!!
와이번이 소리를 지르며 날개 끝의 발톱을 휘둘렀다.
상당히 빠른 속도지만, 마력강화를 발동한 메르세데스의 공격에 비하면 아직 괜찮은 수준이다.
팔과 날개가 일체화된 특유의 신체구조 탓에, 동작이 너무 크다는 점도 주요했다.
-카가가가각!
휘둘러진 발톱과 날개 끄트머리에 걸린 벽면이 좍좍 갈려나간다.
발톱 공격을 피해낸 직후에는 놈의 턱주가리가 닥쳐왔다. 그렇겠지, 이쪽으로 오면 이젠 이빨이겠지.
역시 이놈들의 강함은 원거리에서 쏘아대는 무한 포격에 의존하고 있다.
딱히 그걸 뺀다고 약한 건 아니다. 평범한 8층 도전자의 스펙이라면 발톱 공격에 반응하지 못하고 찢겼을 것이다.
하지만 딱 그것까지는 반응하고 피할 수 있는 수준의 스펙이 있다면, 대응해야 할 패턴 자체가 적다.
지형 특성상 비행도 불가능, 근거리에서는 포격도 마음대로 못 하고.
그렇다면 남은 건 결국 근접전뿐인데, 저 어정쩡한 신체구조는 근접 전투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날개를 퍼덕거리고 날아올라서 포격하는 것만으로 다 이길 수 있을 테니, 저따위 구조를 하고 있는 거겠지.
이건 비유하자면 티라노사우르스와 인간의 대결 같은 것이다.
평범하게 생각하면 인간이 티라노의 상대가 될 리가 없지만, 종목을 인간이 마음대로 정할 수 있다면 어떨까.
티라노사우르스의 그 옹졸한 앞다리로 인간과 권투 시합을 해서 이길 순 없지 않겠는가.
나는 이 싸움의 종목을 일대일 근접 육탄전으로 정했고, 와이번의 몸뚱이는 근접전에 적합하지 않다.
고작 그뿐이지만, 내 승률은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간다.
**
와이번은 신체 구조가 근접전에 부적합할 뿐, 딱히 지능이 부족한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녀석은 근접전이 이어질수록 본인만 다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현명한 선택을 했다.
-그오오오오!
바로 버둥거리며 굴 밖으로 나가려고 한 것이다. 일단 처한 환경을 바꾸려는 심산이었다.
하지만 이 플라잉-도마뱀 새끼는 지능이 낮지는 않지만 딱히 똑똑한 것도 아니었다.
나가려면 진작에 나갔어야지, 여기저기 다 베인 상태에서 그러면 나갈 수 있을 줄 알았냐?
들어올 때는 마음대로였겠지만, 나갈 때는 아니란다.
-콰곽! 콱!
인벤토리에서 대형 장병기를 꺼내 집어던져, 와이번의 날개를 바닥에 꿰어버렸다.
이미 잔뜩 부상을 당한 상태인 만큼 굴 밖으로 뛰쳐나가려는 속도도 대단치 않았고, 반대로 내겐 여유가 있었다.
꿰뚫린 날개를 힘으로 뜯어내고 나가려 해도, 내가 새 창을 던져서 다시 꽂아넣는 게 더 빨랐다.
-그아아아아!
와이번의 포효가 이제는 그냥 비명으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아, 그러고 보니 저 포효에 피어 효과도 있지 않나?
근데 마비 내성 때문인지 아무 효과도 안 느껴지네. 역시 내성은 올려두면 무조건 이득이라니까.
-쿠웅!
녹색 수정이 돋아난 와이번의 몸은 금세 걸레짝이 되었고, 이젠 힘이 다 빠졌는지 바닥에 쓰러졌다.
이러면 남은 건 숨통을 끊는 것뿐이다.
잡으라고 있는 몬스터도 아니고, 보스도 아니라서 보상은 뭘 줄까 싶긴 한데. 은근히 기대된다.
뻗어버린 와이번의 모가지를 짓밟으며 검을 들어 올렸다.
그 순간, 와이번의 주둥아리에 막대한 마력이 모여드는 것이 느껴졌다.
“마지막까지 지랄이네.”
발악으로 최후의 광선 한 발을 쏘려는 건가 싶어서, 재빨리 사각지대로 몸을 옮겼다.
그러나 와이번은 광선을 쏘지 않았다. 모여든 마력은 빛나는 구체가 되어 굴 바깥을 향해 날아갔다.
뭐지, 기력이 딸려서 이제 못 쏘게 된 건가? 하지만 왜 바깥쪽을 향해서 쏜 거지?
“아.”
그 이유를 깨달은 순간, 상황은 이미 늦어 있었다.
마력감지에 어마어마한 힘의 격류가 걸려들었다.
-그오오오오오!!
-우오오오오오!!
-그아아아아아!!
천지를 뒤흔드는 포효와 저절로 소름이 돋는 마력의 파도.
에메랄드 와이번의 마지막 선택은 구조 요청, 빛의 구슬을 통해 다른 굴의 와이번에게 도움을 청한 것이다.
이놈들에게 동족을 향한 정 따위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잠들어 있던 와이번이 모두 깨어났다.
이런 방법이 있었으면 왜 굴 밖으로 기어나가려 한 건지 모르겠지만, 그건 와이번 본인만이 알겠지.
어쩌면 구조 요청이 아니라 이판사판으로 다른 놈들의 잠을 억지로 깨운 걸 수도 있겠다.
-쿵쿵쿵쿵쿵!
와이번 다섯 마리의 발소리가 들리고, 곧 막대한 마력이 한 점으로 집중되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
여태 그랬던 것처럼, 깨어나자마자 침입자를 향해 일직선으로 광선을 갈기려는 것이다.
그것도 다섯 마리가 동시에.
씨발.
이건 못 피하는데.
직후, 눈을 뜨기조차 힘든 빛이 시야를 모조리 덮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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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불나방
위기 상황 속에서 집중력과 판단력은 급격히 상승한다.
나는 시야가 한순간에 백색으로 물드는 것을 확인하고는, 재빨리 움직였다.
[혼신]스킬을 사용해 내구 스탯을 증폭, [철벽]스킬을 발동해 방어력을 증강. 인벤토리에서 방패를 꺼내 차폐물로 삼는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완벽히 막아낼 자신이 없었다. 내가 가진 것으로 부족하다면, 다음은 주변을 이용할 차례.
가장 가까이에 있는 최대 사이즈의 차폐물, 에메랄드 와이번의 뒤편으로 몸을 감춘다.
예측이라기보다는 바람에 가깝지만, 이놈들의 몸은 본인의 공격에 대한 내성이 있을 것이다.
그게 신체 자체의 내구력으로 되는 건지, 아니면 특이한 마법적 수단으로 되는 건지는 모르겠다.
전자라면 살 것이고, 후자라면 뒤지겠지. 뻗어버린 와이번이 곧이곧대로 내 방패가 되줄리가 없으니.
여기까지 판단을 마치고 행동으로 옮기기까지 걸린 시간은 대략 1초 정도.
-콰과광!
터져 나온 굉음이 울리던 귓가에는 곧 이명만이 맴돌고, 시야는 이미 새하얀 상태.
청각, 시각, 그리고 이어서 촉각과 마력 지각마저 마비된다.
상태창의 HP 바가 어마어마한 속도로 깎여나가며, 나는 의식을 잃었다.
**
물속에 잠겨 있는듯한 몽롱함을 느끼며, 힘겹게 정신을 차렸다.
재빠르게 마력을 순환시켜 몸의 상태를 확인하고, 동시에 내 쪽으로 광선을 쏘았던 와이번들을 감지했다.
내 쪽을 향해 쿵쿵거리며 달려오고 있다. 하지만 거리는 거의 좁혀지지 않았다.
저 놈들도 그렇게 느려터진 건 아니라서, 거리가 좁혀지는 데 걸리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을 텐데.
의식이 끊겼던 것은 거의 한순간뿐이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잠깐 사이 몸은 아주 걸레짝이 다 됐다.
“커헉.”
헛기침이 멋대로 나온다. 뭔가 토할 것 같았는데도, 피는커녕 침조차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아마 목이 타들어 간 것 같다. 씨발, 숨만 쉬어도 불로 지져지는 느낌이다.
그리고 눈도 제대로 지져진 것 같고, 사지도 멀쩡한 곳이 없다. 이 정도면 거의 석탄이 됐겠는데.
상태창에 표시된 HP는 거의 바닥에 가깝다. 죽기 일보 직전이라는 뜻이다.
“쿡, 커헉, 큭, 씨, 바하알……”
미친 소리처럼 들리겠지만, 뭔가 기분이 좋다. 타들어 간 입꼬리가 삐쭉 솟아올랐다.
나는 어떤 식으로든 성장을 이룰 때마다 강렬한 쾌감을 느낀다.
결코 멈추지 않겠다는 맹세가 나를 앞으로 잡아끈다면, 성장의 쾌감은 내 등을 떠미는 역할.
“흐, 흐흐흐, 흐흐!”
그렇다면 지금 느끼고 있는 쾌감은 성장을 체감했기 때문인가. 그건 아니다, 아마도.
나는 나를 혐오한다. 스스로 느끼는 쾌감과 온갖 동물적 욕구를 혐오한다.
그렇기 때문에, 몇 번이고 자신을 죽을 위기에 내던져왔다. 죽고 싶어서, 나를 죽이고 싶어서.
그러나 죽을 위기 속에서 나는 어느 때보다 빠르게 성장하고 강해지기에, 생각해 보면 이만큼 모순된 행동도 없다.
어쩌면, 내가 정말로 좋아하는 것은 위기에 자신을 내던지는 행동 자체가 아니었을까?
실패하면 죽고, 성공하면 성장한다.
위험천만한 도박처럼 보이지만, 양쪽 모두를 바라는 내겐 어느 쪽이건 당첨일 뿐.
“으헥, 켁, 크, 흐으.”
몸이 조금씩 나아가는 것을 느끼며, 내게 접근하는 다섯 마리의 와이번을 바라보았다.
즐겁고, 짜릿하고, 짜증 나고, 징그럽고, 혐오스럽고, 역겹고, 또 즐겁다.
감정과 의지는 마력의 운용에 직접 영향을 끼치기에, 이 순간 내 마력은 그 어느 때보다 불안하게 흔들렸다.
하지만 이건 내 마력을 이용하는 게 아니니까, 이런 때라도 안심하고 써먹을 수 있다.
[마력 강화]
-쿠르릉!
충전을 마친 펜던트를 사용하자, 벼락 소리와 함께 온몸에 막강한 힘이 깃들었다.
**
굴 바깥으로 나온 와이번들은 보다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다.
공동 안은 마음껏 날아다닐 수 있을 만큼 넓은 건 아니지만, 못 날아오를 정도로 좁은 것도 아니다.
그렇기에 와이번 다섯 마리 중 두 마리는 날개를 퍼덕이며 공중으로 떠올랐다.
이젠 놈들의 진짜 무대에 오른 셈이다.
하지만 나도 지금부터가 진짜다. 몸은 만신창이가 됐지만, HP가 조금이라도 남아있다면 죽지는 않는다.
두 자릿수를 돌파한 [전투 지속]과 [전투 각성]등의 영향도 있겠지, 반쯤 익은 몸으로도 나는 여전히 싸울 수 있다.
거기에 HP가 급격히 떨어지며 발동한 [불굴]의 강화 효과, 펜던트로 발동한 마력강화의 효과.
여태까지의 그 어떤 순간보다, 지금의 내가 더 강하다.
-콰앙!
땅을 박차며 쏜살같이 지상의 와이번에게 접근했다.
와이번은 발톱을 휘둘러 달려드는 나를 후려치려 했으나, 내 속도가 훨씬 더 빨랐다.
거리를 좁힌 뒤, 인벤토리에서 꺼낸 굵은 창을 내질러 와이번의 목 근처에 박아넣었다.
-키이이잉!
공중에 떠 있는 와이번들에게서 강렬한 마력의 파장이 느껴졌다. 광선이다.
별다른 버프를 사용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피할 수 있었던 공격이다. 지금은 더 쉽게 피할 수 있다.
쏘아진 광선이 지면을 휩쓸었지만, 나는 이미 땅을 박차고 공중으로 떠올라 있는 상태였다.
“후웁.”
공중에서 숨을 크게 들이쉬며 자세를 고치고, 한손검을 든 채 소드 차지 스킬을 사용했다.
돌진 판정과 함께 몸이 전방으로 쏘아지고, 순식간에 날아올라 있던 와이번에게 접근할 수 있었다.
“잡았다.”
닿을락 말락한 애매한 거리, 인벤토리에서 대형 할버드를 꺼내 와이번의 어깻죽지에 박아넣었다.
그대로 할버드의 자루를 붙잡고 기어올라, 와이번의 등에 올라탔다.
[업적 달성 : 비룡의 기수]
정체모를 업적이 달성되며, 보상으로 스탯이 약간 올랐다.
와이번은 등에 올라탄 나를 떨쳐내기 위해 온갖 곡예비행을 시도했으나, 그런 것에 떨어질 내가 아니었다.
오히려 와이번의 어깨에 검과 창을 더 박아넣은 뒤, 더 단단하게 버텼다.
-콰과광! 콰광!
다른 와이번들이 격추를 위해 광선을 쏘아댔지만, 개중 맞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이 와이번이 잘 날아서인지, 저놈들이 동족을 향해 제대로 쏠 수 없어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일단 올라타니까 편하다는 건 알겠다. 슬슬 편하게 버티는 법도 알 것 같고.
“와이번 라이더같은 클래스는 없나?”
날탈것을 키울 수 있으면 참 편하겠다는 생각을 하며, 인벤토리에서 투척용 무기를 새로 꺼냈다.
이렇게 요란하게 비행하는 와이번의 등 위에서도, 내 투척 능력의 정확도는 떨어지지 않는다.
“흡!”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다른 와이번을 향해, 무기를 집어던져 공격했다.
**
에메랄드 와이번의 최대 약점은 역시 화력에 비해 방어력이 낮다는 점이다.
비행 속도도 생각보다 느려서, 내 최대 특기인 투척 공격으로 몇 번이나 유효타를 입힐 수 있었다.
나는 슬슬 쓸모를 다한 와이번의 어깨를 크게 도려낸 뒤, [혼신]으로 근력을 강화해 손으로 날개를 뜯어버렸다.
-그아아아아아!!
비명 같은 소리를 내지르며 와이번은 추락, 다른 와이번들도 이미 만신창이가 된 채 지상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포션을 들이켜 남은 상처를 치유해가며, 다 죽어가는 와이번들의 숨통을 끊어주었다.
“별거 아니네.”
광선에 맞아 죽을 뻔 했던 것만 빼면, 완전히 일방적인 싸움이었다.
뭐, 제대로 실력을 갖추고 난 이후로 대형 몹과의 싸움은 언제나 이런 느낌이었다.
한 대만 잘못 맞아도 죽지만, 기교랄 게 없는 짐승의 무식한 공격에는 한 대도 안 맞는 식.
아, 물론 이것도 내 기본 스펙이 이놈들을 따라갈 수 있기에 가능한 일이긴 하다.
“마력강화는 진짜 사기네.”
이건 결국 불굴과 펜던트를 이용한 마력강화의 더블 버프가 어이없을 정도로 강력한 덕분이다.
하지만, 강력한 버프 성능이 마냥 만족스러운 것만은 아니다.
가장 큰 전투력 상승을 가져다주는 마력강화의 발동을 완전히 아이템에 의존하고 있으니까.
마력강화 사용 후에 찾아오는 반동도 얕볼 수 없고, 충전식인 탓에 원할 때마다 유연하게 쓸 수도 없다.
마력강화의 성능을 알아버린 이상, 아예 포기할 수도 없는 노릇.
역시 너무 강한 아이템은 여러모로 거슬린다.
뭐, 하루라도 빨리 자력으로 마력강화를 할 수 있게 되는 수밖에 없겠지.
그럼 반성은 이쯤 하고, 이제 남은 건 하나.
“자, 이제 네 차례다.”
나는 딱 한 마리, 죽이지 않고 살려둔 와이번을 향해 다가갔다.
날개와 발톱을 모두 뜯어버리고, 검과 창으로 바닥에 반쯤 꿰어놓은 에메랄드 와이번.
이런 상태로는 전혀 싸울 수 없겠지만, 주둥아리가 남아 있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아직 하나 있다.
“얼른 쏴 봐.”
와이번은 내가 눈앞에 당당히 다가오자, 즉시 마력을 끌어모아 광선을 준비했다.
광선 한 방에 죽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조금 전에 검증이 끝났다.
방패가 되어줄 차폐물은 이제 없지만, 마력강화를 사용 중이라 실질 방어력은 조금 전보다 더 높다.
이놈들은 보스몹 판정도 아니고, 잡으라고 있는 놈들도 아니라서 그런지 보상을 따로 안 준다.
그렇다면 내가 알아서 뭐든 챙겨가야 하지 않겠어?
복합 속성의 고위력 공격이니까, 몇 번 맞다 보면 다양한 내성이 쭉쭉 오르지 않겠어?
[패시브 스킬 : 대마법 내성 1레벨을 습득하셨습니다.]
[패시브 스킬 : 주문 내성 1레벨을 습득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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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어설픈 결정
성장의 기쁨은 몸이 불타는 고통보다 아득히 크다.
고통에 대한 내성 따위가 없음에도, 내가 에메랄드 와이번의 공격을 계속해서 맞아줄 수 있던 이유다.
새로 터득한 두 종류의 내성 스킬은 각각 마법 공격 전반과 주문 속성의 피해를 감소시켜주는 것.
커뮤니티에 검색해보니, 성질을 변화시키지 않은 자연 상태의 마력이 가지는 속성을 ‘주문 속성’ 이라고 하는 모양이다.
거기에 마법을 이용한 여러 방해 효과 같은 것도 대부분 주문 속성으로 판정된다는 듯하다.
그렇다면 무속성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 같지만, 시스템이 그렇다면 그냥 그런 거겠지 뭐.
아무튼, 이로서 퀘스트 목표인 비취의 영약을 얻는 것에 성공했다.
죽을 뻔했던 것치고는 다른 전리품이 없어서 좀 아쉬운 점도 있지만, 크게 불만은 없다.
애초에 나는 딱히 보상을 원해서 여기에 온 게 아니었으니까.
다크엘프 여왕에게 세계수에 대해 묻기 위해, 영혼이란 존재에 대해 무언가 답을 얻기 위해, 그래서 온 거다.
내가 느끼고 있는 엘레노어의 거대한 존재감의 정체를 알고 싶어서.
그걸 알아서 뭘 어쩔거냐고 묻는다면 딱히 할 말은 없다. 솔직히 나도 이유를 모르겠으니까.
그냥 언제나처럼 무시하고 지나가면 될 뿐인 일이다.
NPC가 NPC처럼 행동하는 게 뭐가 어때서, 한 번 생각을 고쳐먹었다지만 다시 고치면 그만 아닌가.
엘레노어와 공유했던 사념과 기억도, 서로 간에 나누었던 정서적인 교류도, 모두 없던 것으로 치면 될 뿐.
그냥 예전으로 돌아가는 것뿐이다. 문제가 될 만한 건 아무것도 없다.
지금도 나는 이토록 순조롭게 성장하고 있지 않나.
[비취의 영약]
손에 들린 영약을 내려다보니 갑자기 기분이 불쾌해졌다.
보상이 없어도 괜찮다니,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비효율적인 생각을 하게 된 걸까.
괜히 짜증이 치밀어 올라, 손에 들린 영약을 내던져 버릴까 잠시 고민했지만 이내 그만두었다.
뭐, 이건 퀘스트니까. 게다가 에픽 퀘스트니까. 다 깬 퀘스트를 굳이 포기할 이유는 없지.
가슴 속에서 위태롭게 요동치는 마력을 진정시키며, 나는 던전을 빠져나왔다.
**
다크엘프의 마을로 돌아온 나는 곧바로 여왕에게 접견을 요청했다.
엘레노어의 정혼자라는 신분 덕분에 여왕을 만나는 것은 어렵지 않았고, 금방 영약을 전달할 수 있었다.
퀘스트 완료 보상은 대단한 것 없이 그냥 경험치와 골드, 그리고 여왕과 말을 섞을 기회가 전부였다.
영약이 효과가 없다거나, 접견을 거부하면 어쩌나 했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끼익.
삐걱거리는 침대에 등을 기댄 여왕이 나를 노려본다. 여전히 마른 고목 같은 눈동자다.
“내게 묻고 싶은 것이 있다고 했나.”
여왕의 목소리는 7층에서 들어본 것과는 조금 달랐다. 전보다 한껏 바짝 눌어붙은 목소리다.
“세계수에 대해 궁금한 게 몇 가지 있어서, 다크엘프 중에서 당신만큼 잘 아는 사람은 없을 거 아냐.”
“옳다.”
“사실, 질문을 추려서 온 건 아니라서 진짜로 ‘몇 가지’인 건 아니야, 알고 있는 걸 전부 듣고 싶은데.”
여왕은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노인보다는 화석에 가까운 나이 때문인가, 정물처럼 보이는 움직임이다.
그리고 이어서, 대뜸 말을 내뱉었다.
“포레스트 엘프가 가진 왕홀과 나이트 엘프가 가진 왕관에는 세계수에게 간섭할 힘이 있다.”
마치, 내가 무엇을 알고 싶어하는지 이미 눈치채고 있었던 것처럼.
“그 힘을 이용하면, 순환하는 혼의 흐름에 간섭할 수 있다.”
그리고 곧바로 덧붙였다.
“끝이다. 이제 그대는 세계수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
더 이상 자신이 알려줄 수 있는 건 없다고.
**
흐린 빛을 띤 여왕의 눈동자가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나는 여왕이 하는 말을 쉽게 믿을 수 없었다. 세계수에 대해 내가 모르던 건 그것뿐이라니.
하지만 아무리 캐물어도 여왕의 대답은 같았다. 그게 전부라고, 세계수에는 어떤 숨겨진 비밀도 없다고.
여왕은 그 후, 세계수에 대해 자신이 아는 것을 모조리 말해주기 시작했다.
하지만 개중 새로운 사실은 없었다. 여왕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에르웬이 말해준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한숨을 내쉬었다. 영혼에 대해서도, 세계수에 대해서도, 새롭게 알게 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허무한 기분이다. 나는 고작 경험치 조금과 골드 조금을 위해서 그 고생을 한 거였나.
“포레스트 엘프에게 물어봐도 답은 같을 것이다. 그들도 나도 모르는 비밀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아.”
“어떻게 장담하지?”
“설령 무언가 비밀이 숨겨져 있더라도, 그게 그대와 무슨 상관이지. 이미 세계수는 시들어 힘을 잃었다.”
그것도 그렇다. 어차피 세계수니 영혼이니 하는 것에 대해 더 알아봤자 뭔가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여왕이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
여왕은 세계수에 미련이 있는 거 아니었나, 하이엘프의 화친 제안에 엘레노어를 내주며 응한 이유가 그거잖아.
“시든 고목에 무슨 미련이 남았을까, 나는 내 딸을 위한 평화를 원했을 뿐인 것을.”
“당신 딸은 그런 걸 원하지 않는 것 같던데.”
“호전적인 성향은 쉽게 고쳐지지 않지, 그 아이도 전쟁을 겪으면 생각이 바뀔 터다.”
여왕은 그렇게 말하고는, 먼 산을 바라보듯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나도 그랬지, 세계수를 독점하고 우리를 내쫓은 포레스트 엘프를 혐오했다. 왕이 되기 전에도, 왕이 된 후에도, 놈들을 쓸어버리고 싶었다.”
“박해를 받은 우리에겐 그럴 자격이 있었다. 놈들을 무찌르고 더 넓은 세상을 향해 나아갈 자격이.”
“하지만 누구보다 오래 살아오며 깨닫게 된 사실이 하나 있다. 전쟁은 결코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나는 다크엘프의 역사에 대해선 배경 설정 수준으로밖에 몰랐다.
“누가 쏜 화살이건, 얼마나 정당한 화살이건, 그것에 꿰뚫려 죽는 것이 누가 될지는 알 수 없다.”
“시위를 놓은 순간부터, 처음부터 해야 했던 일을 하기 전까지- 모두가 고통받을 뿐이지.”
여왕은 그렇게 말하며, 날카로운 눈으로 나를 째려보았다.
“한자리에 앉아서 대화하기 전까지.”
여왕은 분명 나를 원망하고 있었다.
**
여왕과의 긴 대화를 마치고, 밖으로 나와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아……”
이걸로, 엘프의 왕관과 왕홀을 이용하면 세계수와 영혼의 흐름에 간섭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알았다고 해서 뭔가 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내가 뭔 짓을 해도 그것들을 손에 넣을 수는 없을 테니까.
그리고 애초에 세계수가 시들어 버린 이상, 그것들을 갖고 있다고 해도 뭔가 할 수는 없을 거라고 한다.
엘레노어를 살아있게 하는 것, 내가 감지하고 있는 영혼으로 추측되는 무언가.
그걸 어떻게 할 생각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어쩐지 허무하다. 나는 정말로 뭘 하고 싶었던 걸까.
“상태창.”
퀘스트 보상을 받고 레벨이 하나 올랐다. 에메랄드 와이번을 통해 얻은 새 스킬이 눈에 띈다.
“스펙 끝내주네.”
등반중인 층수는 물론이요, 레벨에도 어울리지 않는 스펙을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나는 이미 솔로 플레이라는 점이 문제가 되지 않을 만큼 강해졌다.
아마, 이대로라면 시련의 탑을 클리어하는 것은 무난할 것이다.
솔직히, 작정하고 층수를 올리는 것에만 전념한다면 25층까지는 순식간일 것이다.
미궁 지역의 보물 상자도, 각 층에 숨겨져 있는 히든 요소도, 목숨 걸고 찾아다닐 필요까지는 없다.
이번 층에 오랫동안 머물며 단련할 필요도 딱히 없다. 마력 운용 연습이야 언제든 할 수 있으니까.
엘레노어.
리즈멜.
에르웬.
아무리 사람 같아도 결국 다들 NPC다. 퀘스트가 끝나면 그냥 깡통 키오스크로 변해버릴 존재들이다.
이 시련의 탑이 그렇게 설계된 걸 어쩌겠어. 나도 결국 탑의 시스템에 속한 존재인데.
탑이 보낸 초대장을 받고, 탑이 부여한 시스템으로 성장하고, 탑이 정한 방식대로 전진한다.
이대로만 가면 된다. 괜히 딴 길로 새지만 않으면 나는 충분히 목표를 이룰 수 있다.
“그래, 버리자.”
절대 멈춰 서지 않기로 정했잖아, 더는 미련 갖지 말자.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다른 욕망에 그랬던 것처럼, 잘라내고 버리면 그만.
수면욕도, 식욕도, 성욕도, 모든 것을 거세했다.
이 정도는 별것도 아니지.
**
다음 날, 나는 엘레노어를 찾아가 말을 걸었다.
“이번에도 정찰대의 일을 도와주겠다고?”
삼대 세력은 지금도 끊임없이 충돌하며 마찰을 벌이고 있다. 이미 전쟁은 차근차근 다가오고 있다.
이 퀘스트 속에서 도전자의 역할은, 당연히 자신이 속한 세력을 도와 우위를 확보하는 것이다.
그 방법은 당연히 여러 서브 퀘스트를 수행하는 것, 일정 숫자 이상의 퀘스트를 클리어하면 그걸로 2장은 끝이다.
결정한 이상 굼뜨게 움직일 생각은 없다. 최대한 빠르게 퀘스트를 깨고 9층으로 넘어간다.
“그대가 먼저 그런 말을 해주다니 무척 기쁘구나. 어디, 상으로 입맞춤이라도 해 줄까?”
“할 일이나 알려줘.”
“으음, 오늘따라 평소보다 더 쌀쌀맞구나. 어쩐지 처음 만났을 때가 생각나는걸?”
그렇겠지, NPC는 원래 이렇게 대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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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8층의 서브 퀘스트는 대부분 전투와 관련된 것들이다.
다크엘프, 하이엘프, 왕국군의 삼대 세력이 직간접적으로 충돌하는 현장에서 무력을 행사하는 것.
나는 다시 정찰대에 합류함과 동시에, 정석적인 퀘스트 내용대로 이곳저곳에서 날뛰었다.
-쾅!
투척한 쇠구슬이 사족보행형 골렘의 머리를 박살 내고, 그 안에 숨어있던 마법사의 모습을 드러낸다.
이 사족 보행형 골렘은 왕국군의 특수 병기 중 하나로, 내부에 술사가 탑승해 조종하는 특이한 골렘이다.
실시간 조종이라는 특징으로 이런저런 정보 수집에 이용되고 있다는데, 어마어마하게 비효율적으로 보인다.
“뭐, 뭐야……너는 누구냐! 왜 우리를 공격하지!”
인간족 마법사는 오른손에 파이어볼을 만들어내며, 나를 향해 물었다.
확실히 저놈이 보기에는 무척 당혹스러운 상황일 거다.
다크엘프 진영을 정찰할 목적으로 들어왔는데, 웬 인간한테 공격받은 상황이니까.
“이거 안 보이냐?”
나는 내 어깨에 찬 견장을 가리켰다. 견장에는 다크엘프 정찰대의 문양이 새겨져 있다.
마법사는 문양을 알아보더니 경악했다. 인간이 다크엘프의 편에 붙은 게 놀라운 모양.
근데, 인간이고 아니고를 떠나서 남의 땅에 병기를 끌고 들어왔으면 당연히 공격받는 거 아니냐.
“그, 그건……맙소사, 다크엘프 쪽에 붙다니. 네놈, 더러운 용병 나부랭이였구나!”
-화르륵!
“전투행동을 벌일 생각은 없었지만, 네놈 같은 인류의 배신자를 놔둘 수는 없지!”
저 마법사 눈에는 내가 돈에 눈이 멀어서 이종족의 편을 드는 용병 같은 걸로 보이고 있는 모양이다.
뭐, 지금 시점에서는 크게 다를 것도 없긴 하지만.
마법사가 소환한 파이어볼이 나를 향해 날아온다. 느껴지는 마력의 양은, 음, 별 거 없네.
-퍼엉!
대충 팔을 휘둘러 파이어볼을 쳐냈다. 역시 이놈도 그냥 잡몹 수준밖에 안 된다.
하긴, 그동안 내가 만났던 NPC들이 유독 강했던 거니까. 애초에 왕국군 NPC들은 다 약하고.
“무, 무슨, 네놈 정말 인간이냐……?”
인벤토리에서 미스릴 완드를 꺼내, 마법사의 머리통을 내려쳤다.
-깡!
마법사는 나름의 방어를 펼쳤지만, 미스릴 완드는 그걸 무시하고 놈을 기절시켰다.
기절한 마법사는 대충 버려두고, 사족보행 골렘을 으깬 다음 핵을 뽑아 정찰대에 가져다주었다.
“그렇군, 이게 인간족의 새 병기란 말이지……정말 고맙다, 또 한 건 했구나!”
“어.”
“오늘도 그냥 가는 거냐? 너무 그러지 말고, 가끔은 같이 식사라도 하자.”
다크엘프 정찰대원의 권유를 무시하고, 나는 오늘도 내 숙소로 혼자 돌아갔다.
**
삼대 세력간의 무력충돌은 점점 잦아지고, 세력의 중심이 되는 NPC들도 점점 바빠진다.
영약을 먹고도 병세를 완전히 떨치지 못한 여왕을 대신하고 있는 엘레노어도 마찬가지였다.
“그대여, 요즘 너무 바쁘게 돌아다니는 것 아닌가? 도움을 주는 건 고맙지만, 조금 쉬엄쉬엄 하지그래?”
“됐어.”
“그대, 기분이 언짢아 보이는구나. 역시 그대도 나랑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은 게지? 다 알고 있다!”
덕분에 엘레노어가 이렇게 말을 걸어오는 것을 쳐낼 일도 그렇게 많지 않았다.
“알기는 무슨, 됐으니까 네 일이나 해.”
엘레노어는 내 태도 변화를 느끼고 있는 듯했지만, 당장의 일을 처리하는 것이 더 급했다.
여왕의 병세가 길었던 육신의 수명이 슬슬 다해가기 때문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는데.
만약 그렇다면, 엘레노어는 시간이 지나고 분위기가 전쟁에 가까워질수록 더 바빠질 것이다.
나한테는 아주 잘 된 일이었다.
“후우……”
나는 빽빽한 퀘스트창을 띄우고, 오늘도 싸우러 나선다.
**
작정하고 진도를 빼기 시작하니, 퀘스트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빠르게 진행됐다.
엘리트 NPC나 히든 보스쯤 되지 않으면 나를 막을 수 있는 건 없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인벤토리에는 퀘스트 보상이 계속해서 쌓였고, 경험치를 얻으며 레벨과 스펙도 조금씩 올랐다.
7층을 클리어하고 얻은 [질주] 스킬이나 [약점 간파] 스킬의 레벨도 꽤 성장했고, 전반적인 전투 능력이 유의미하게 향상되었다.
하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마력의 운용 쪽은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
마력강화를 자력으로 깨우치기는 커녕, 날이 갈수록 불안하게 요동치는 마력을 뜻대로 다루기가 어려워지고 있었다.
시간이 날 때마다 펜던트를 사용해 마력강화를 발동하고, 그 감각을 몸에 익히려고 노력한 지도 벌써 몇 주째다.
랭커들이나 사용하는 최상급 스킬을 8층에서 익히려는 건 너무 과한 욕심인 걸까.
“원리는 슬슬 대충 알겠는데……”
명상을 하며 마력을 움직이다 보면, 혈관이나 신경계와는 다른 모종의 통로가 느껴진다.
커뮤니티의 자칭 정통파 메이지들의 말에 따르면, 이건 모든 생물이 갖고 있는 마력의 회로라는 모양이다.
펜던트를 통해 마력강화를 발동하면, 이 회로를 통해 마력이 흘러들어오는 것이 느껴진다.
그렇게 흘러들어온 마력은 그대로 다시 방출되는데, 그렇게 방출된 마력은 곧 내 신체를 감싼다.
마력강화를 발동할 때의 ‘쿠르릉’ 하는 천둥소리와, 마력강화가 제공하는 방호력의 원천이 이것이다.
회로를 통해 방출된 마력이 공기를 떨리게 하고, 몸을 두껍게 감싸며 갑옷처럼 기능하는 것이다.
“흘러들어오는 마력은 펜던트에 충전된 마력일테고.”
그렇다면, 자력으로 마력강화를 하는 방법은 지극히 단순하다. 이 회로를 통해 마력을 순환시키면 그만.
하지만 미로처럼 복잡한 경로를 마력이 올바르게 통과하게 만드는 것이 너무 어렵다.
내 마력은 항상 진정되지 않은 상태로 격하게 움직이고, 제대로 통제되지도 않고 있으니까.
그냥 근육이나 신체의 특정 부위에 마력을 쏟아붓는 거라면 어렵지도 않은데 말이다.
“후우……염병할……”
사실, 마력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 자체는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마력이 의지와 마음에 반응하기 때문에.
내 의지와 마음이 모순되어 있기 때문에, 마음이 흔들리고 있기 때문에, 이런 거다.
하지만, 내가 더 이상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건데.
서브 퀘스트는 오늘 자로 거의 모두 클리어했다. 이제 다크엘프의 서 2장도 끝나간다.
즉, 엘레노어가 다시 깡통이 될 날이 머지않았다.
**
마지막 남은 서브 퀘스트를 완료하고, 진영 퀘스트 2장을 마무리지었다.
이제 남은 건 보상 수령뿐이다. 나는 8층 보스전을 준비하며 숙소에서 혼자 커뮤니티를 들여다보았다.
이번 층의 보스는 8층 초반에 보았던 나무 골렘의 강화판으로, 핵이 따로 없는 특수한 골렘 타입의 적이다.
정석 공략 방식은 화염 속성 마법을 사용한 원거리 포격전.
마법사 위주로 파티를 꾸린다면 10인 이하의 파티로 공략할 수 있을 만큼 상성을 많이 탄다고 한다.
내가 쓸 수 있는 속성 공격은 [라이트닝 차지]의 전기 속성 하나 뿐이기에, 별로 참고할 만한 내용은 못 된다.
기본 패턴도 나무뿌리를 이용한 속박 정도를 제외하면 대부분 단순하니, 쉽게 깰 것 같다.
-똑똑.
커뮤니티 창을 닫고 나니,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이미 특유의 기척으로 엘레노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문은 노크 직후 곧바로 열렸다.
“역시, 아직 안 자고 있을 줄 알았다. 무리해서라도 시간을 내길 잘했군.”
엘레노어는 내 떨떠름한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저벅저벅 걸어들어와 침대에 걸터앉았다.
“모처럼 그대가 찾아왔는데, 좀처럼 함께 시간을 보내질 못해서 무척 아쉬웠던 참이거든.”
“그러셔.”
“정찰대에서 전해달라는 것도 전해줄 겸 해서, 잠시 이야기하러 와 봤다.”
엘레노어의 손에는 한 쌍의 장갑이 들려 있었다. 아무래도 저게 진영 퀘스트 2장의 최종 보상 같다.
저걸 받는 순간 이곳의 NPC들은 다시 깡통이 된다. 생각보다 이르지만, 상관없다.
“그대, 요즘 들어 마음이 편치 않아 보여. 아직도 이유를 말해주기는 힘든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련의 탑에 관한 이야기, NPC에 관한 이야기를 할 수 있을 리가.
“아아, 재촉하는 건 아니다. 그냥……그대가 많이 괴로워 보여서.”
“그러냐.”
“그래 보여, 누구에게도 말하기 힘든 고민이라면 그럴 만도 하지.”
엘레노어는 쓰게 웃었다. 그리곤 이내 자신이 방해된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는지, 바로 침대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말하기 힘들다고 해서 계속 참는 것도 능사가 아니다. 벽에다 대고서라도 이야기해보면 조금 편해질지도 몰라.”
엘레노어는 그렇게 말하고는, 퀘스트 보상인 장갑을 내게 건네주었다.
장갑을 받자마자 퀘스트 완료를 알리는 시스템 메시지가 나타났다.
그리고 동시에, 엘레노어에게서 느껴지던 강렬한 기척이 사그라지기 시작했다.
“후후, 좋은 밤이구나.”
맥락에 맞지 않는 말을 하는 엘레노어의 표정에서 생동감이 옅어졌다.
7층에서 그랬듯이, 이번에도 평범한 NPC로 돌아간 것이다.
벽에다 대고서라도 이야기해보면 편해질지도 모른다고 했던가.
“다 니들 때문이잖아, 이 개 같은 깡통 새끼들아……”
내 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하고 있는 엘레노어에게 생각나는 대로 말을 토해냈다.
딱히 편해지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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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시련의 탑 9층
-오오오오……!
페이즈가 전환된 나무 골렘이 괴성을 내지른다.
처음부터 굉장한 크기였던 골렘은 이제 그 키만 해도 6미터를 넘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혼신 스킬과 마력강화를 함께 사용하고 있는 지금의 내겐 크게 의미가 없는 덩치다.
단번에 골렘의 머리 위로 도약해서, 날아드는 나무뿌리 공격을 모두 무시하고 보스룸의 천장을 박찼다.
이중으로 강화된 각력으로 몸을 날려, 수직으로 떨어지며 힘차게 검을 휘둘렀다.
-드드드득!
골렘의 몸에서 무수한 나무뿌리가 솟아나며 사선을 가로막았지만, 내 검을 막아내지는 못했다.
-콰과곽!
번갯불이 튀며 골렘의 몸체가 거칠게 양단되고, 핵이 없는 탓에 재생도 하지 못하는 골렘은 그대로 무너졌다.
양쪽으로 갈라진 골렘이 쓰러지고, 잠시간의 딜레이와 함께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축하합니다. 시련의 탑 8층을 최초로 클리어하셨습니다.]
시스템 메시지는 언제나처럼 요란하게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클리어 보상 : ‘경험치’, ‘골드’를 획득하셨습니다.]
[시련의 탑 9층 전이문을 활성화하실 수 있습니다.]
[최초 클리어 보상 : ‘나뭇잎 귀고리’ 를 획득하셨습니다.]
[최대 기여도 보상 : ‘낙엽 팔찌’, ‘경험치’ 를 획득하셨습니다.]
[최후의 일격 보상 : ‘고목나무 활’ 을 획득하셨습니다.]
최초 클리어 보상과 최후의 일격 보상은 서로 똑같았고, 귀고리와 팔찌엔 둘 다 마법사 착용 제한이 걸려 있었다.
활은 대강 쓸 줄도 알고 착용 제한도 없었지만, 원거리 공격이 필요하면 그냥 쇠구슬을 던지면 된다.
쉬운 보스라서 그런가, 보상이 필드 보스보다도 실속이 없다.
다른 도전자가 없어서 경매장에 올릴 수도 없고, 액세서리 종류라서 방패막이용으로 쓸 수도 없다.
뭐, 이제 와서 이런 걸로 크게 성장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나중에 상점에다 팔아야겠네.”
인벤토리를 닫고, 9층으로 향하는 전이문을 활성화했다.
**
9층의 배경 역시 7층과 8층에서부터 그대로 이어진다.
7층은 아직 삼대 세력이 충돌을 일으키기 전, 8층은 삼대 세력이 본격적으로 마찰을 빚기 시작한 후.
그리고 이번 9층은 삼대 세력간에 기어이 전쟁이 터진 시간대다.
그래서인지, 전이문을 넘어서 도착한 엘프들의 대산림은 예전에 보던 것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일단 나무의 숫자가 크게 줄었다. 벌목된 게 아니라,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꺾이고 부러진 모습이었다.
전쟁의 불길 속에서 불타고 박살 나며 이런 꼴이 된 거겠지. 일단 다크엘프 마을로 가자.
[엘프퀘 9층 전역 지도.jpg]
급하게 넘어갔던 8층 때와 다르게, 이번에는 제대로 커뮤니티에서 9층 지도를 찾아놓았다.
이번에도 감각을 헤집어놓는 안개에 가로막히면 어쩌나 했지만, 다행히 평범하게 길을 찾을 수 있었다.
그렇게 다크엘프 마을의 입구에 도착했을 때, 나는 크게 놀랐다.
다크엘프 마을은 더 이상 마을이라고 보기 힘든 모습을 하고 있었다.
돌로 높이 벽을 쌓고, 감시탑과 경비용 골렘을 잔뜩 배치했다. 거기에 지형도 뭔가 바뀐 것 같다.
이건 이미 마을이 아니라 요새다.
커뮤니티에 올라와 있는 스크린샷으로 본 것보다 훨씬 규모가 큰데, 에픽 퀘스트 때문인가?
내가 공성전에 대한 지식이 있는 건 아니지만, 얼핏 봐도 난공불락으로 보이는데.
“거기, 누구냐!”
요새의 겉모습을 천천히 살피고 있자, 성벽 위에서 누군가 크게 소리쳤다.
“정체를 밝히지 않으면 쏘겠다! 너는 누구냐!”
나는 고개를 들어 얼굴을 보여주었다. 아마 마을의 다크엘프 중에서 내 얼굴을 모르는 이는 없을 거다.
“나야.”
성벽 위의 다크엘프는 활시위를 붙잡은 채, 인상 쓰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몇 번 표정을 바꾸었다. 거리가 멀어서 정확히 무슨 표정을 짓는지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얼핏 보기에, 마지막에 지은 표정은 분명 무언가를 결심한 것처럼 보였다.
-퓽!
그리고 나를 향해 화살이 날아왔다.
**
나는 7층에서 리즈멜을 통해 다크엘프의 검술을 습득했다.
그 검술은 분명 훌륭했다. 하지만 다크엘프도 근본은 엘프, 이들의 가장 뛰어난 기술은 결국 궁술이었다.
그래서 나도 검술을 배우고 나면, 겸사겸사 궁술까지 익혀볼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다크엘프들이 가르쳐 주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냥 배울 수 없는 기술이어서.
마력 친화력을 태생적으로 타고나듯, 엘프들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활을 다룰 줄 알았다.
그건 가르쳐 주려 한다고 해서 가르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고, 배우고 싶다고 해서 배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상식을 무시하는 명중률과, 이치를 무시하는 궤도를 갖는 엘프의 화살.
하지만 마력감지를 개화하고 초월적인 감각을 손에 넣은 내 앞에서는 그렇게 대단한 것도 아니다.
-턱.
쏜살같이 날아오던 화살을 잡아챘다. 반쯤 본능에 따라 잡아놓고도 이게 뭔가 싶었다.
왜 다크엘프가 나한테 화살을 쏘지?
전쟁이 진행 중이라 예민해져 있는 건 이해하지만, 내 얼굴과 견장의 마크를 못 알아보는 건 아닐 텐데.
“뭔데.”
정말 우연히 나를 모르는 극소수의 다크엘프가 보초로 배치되어 있던 걸까?
-쿵, 쿵, 쿵!
요새를 지키고 있는 골렘들이 움직인다. 무거운 발소리를 내며 내 쪽으로 다가온다.
그뿐만이 아니라, 성벽에 있던 다크엘프 병사들이 일제히 무기를 들었다.
이거 아무래도 보통 상황이 아닌 것 같다. 확실하게 나를 적으로 인식한 모양인데.
“야, 너희 나 몰라? 벌써 까먹었어?”
어이가 없어서 그렇게 물었지만, 돌아오는 것은 화살 세례였다.
-티디딩!
날아드는 화실을 마력감지와 직감에 의존해 받아치고 막아 냈다.
그런 한편으로 골렘들이 나를 향해 접근하고 있다. 이거 부숴도 되는 건가, 나중에 지장이 생기진 않겠지.
골렘을 상대할 때 좋은 둔기를 인벤토리에서 꺼내고, 긴장을 끌어올리며 대치했다.
-우웅……
그러나 골렘은 내게 접근만 하고는, 공격하려는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이건 또 뭐지.
성벽 위의 다크엘프들도 조금씩 웅성거리고 있었다. 나를 뒤늦게 알아본 건가?
성벽 쪽으로 다시 다가가자, 다크엘프들은 소리쳤다.
“멈춰라, 움직이면 쏘겠다!”
상황을 모르니까 일단 시키는 대로 멈췄다.
내가 순순히 멈추자, 다크엘프들은 저들끼리 쑥덕거렸다.
그리고 얼마 후, 다크엘프 한 명이 폴짝 성벽에서 뛰어내려 내 앞에 착지했다.
가벼운 차림으로 검 두 자루를 들고 나타난 것은, 8층 때와 또 살짝 달라진 모습의 리즈멜이었다.
“들어라.”
리즈멜은 내게 들고 나온 수련검을 던졌다. 나는 그것을 받아들고, 일단 자세를 취했다.
아무래도 나를 못 알아보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
사선으로 내리그어진 검을 그대로 맞받아친다.
한 번 막혔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찔러드는 공격에, 검을 맞대며 밀어붙였다.
다양한 검로를 향해 힘을 실으며, 서로의 목을 겨누기 위한 근거리에서의 힘 싸움. 우위를 점하기는 쉽다.
[혼신] 스킬을 이용해 순간적으로 근력을 증폭시키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 오히려 손에 살짝 힘을 빼고, 균형이 무너지지 않게끔 유지한다.
그러던 중, 리즈멜의 빈손이 검신을 부여잡고 위로 젖히려 들었다.
나도 그 동작에 맞추어 검신 끝을 잡으며 힘 싸움에 대응하고, 동시에 몸을 옆으로 옮겼다.
손잡이를 잡고 있던 손을 놓고, 검신 끝을 쥔 손을 주축으로 자세를 바꾼다.
검신을 잡고, 검의 폼멜 부분을 둔기로 삼아 머리를 노리는 타격기. 여기서 처음 배운 기술이다.
-카강!
리즈멜은 변칙적인 공격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가볍게 방어하며, 검을 고쳐 쥐었다.
이 기술을 처음 가르쳐 줬을 때, 함께 가르쳐 주었던 대응 수단과 반격기를 그대로 선보이고 있다.
그 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움직이는 리즈멜의 동작이 조금 느려졌다는 점.
결혼을 한 뒤로는 정찰대 임무에서 한발 물러났다고 했었나.
지금도 전투에 맞지 않는 차림을 한 걸 보면, 오랜만에 검을 들고 나온 것이리라.
“예전 같지 않네.”
-카앙!
무뎌진 리즈멜의 검기를 받아내며, 빈틈을 찔러 검을 멀리 쳐냈다.
검을 놓친 리즈멜은 당황하지 않고, 그대로 손을 툭툭 털며 얕게 숨을 내쉬었다.
“그러는 너는 너무 변한 게 없잖아, 애송아.”
리즈멜은 그렇게 말하며 성벽 쪽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나를 겨누던 활이 모두 거두어졌다.
이제야 무슨 상황이었는지 알겠다. 7층에서 8층 사이엔 20년의 세월 차이가 있었다.
그렇다면 8층과 9층 사이의 시간 차이는 얼마나 날 것인가.
지형조차 바꿔가며 쌓아올린 저 굳건한 요새가 몇 년 정도로 만들어질 것 같지는 않다.
다크엘프들이 나를 알아보고도, 망설이다 활을 쐈어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다.
“백 년이나 지났는데, 어떻게 예전 모습 그대로인 거야?”
장수하는 엘프에게도 결코 짧지 않은 시간, 백 년.
“어이가 없다, 정말.”
맞부딪힌 검에는 분명히 시간이 묻어나 있었다.
그저 NPC에게 존재하는 배경 설정 따위라고 치부하기 힘들 정도의 시간이.
이번 층은 시작부터 만만하지 않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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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꿈 같은 상황
다크엘프는 기본적으로 인간에게 우호적이지만, 9층에서는 조금 이야기가 달라진다.
삼대 세력간의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된 이후이니, 다크엘프들도 이미 인간들과 몇 번이나 충돌했을 테니까.
인간을 좋아하고 귀여워하는 성질은 그대로지만, 인간이 적이라는 것은 확실하게 인지하고 있는 상태.
그렇기 때문인지, ‘적이 아니라는 것이 확실한 인간’ 이 나타나자 다크엘프들은 무척 기뻐했다.
“세상에, 세상에, 너 정말 그 애니? 그동안 뭐 하고 있다가 이제야 온 거야?”
“조심해, 아직 본인인지 모르잖아! 인간은 백 년이면 죽는다고!”
“에이, 백 년보다 조금 더 오래 사는 인간이 있을 수도 있잖아. 그런 거겠지.”
나를 보고 마냥 좋아하는 다크엘프가 절반, 그리고 미심쩍게 여기는 다크엘프가 또 절반.
그리고 후자의 절반은 미심쩍어하면서도 슬금슬금 가까이 오려고 하고 있다.
언제 봐도 이상할 정도로 인간을 좋아하는 종족이다. 인간과 전쟁 중이라는 기분은 또 어떨는지.
“소리 소문도 없이 떠나서 백 년이나 안 나타나길래, 당연히 죽은 줄 알았어.”
나를 요새 안으로 데려온 리즈멜은 헛웃음을 지으며 그렇게 말했다.
“살아 있는 게 이상할 정도는 아직 아니지만, 보통 인간족은 이 정도면 다 늙지 않아?”
나도 이 부분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무척 고민이었는데, 아직 마땅히 생각난 건 없었다.
다른 탑처럼 깡통 NPC가 대부분이었다면 이런 고민을 할 필요도 없었을 텐데.
왜 나만 시간 여행자가 된 기분을 느껴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1세대 도전자들도 이런 느낌으로 탑을 올랐을까, 아니면 내가 있는 탑이 특별한 걸까.
“보통은 그렇지.”
리즈멜의 물음에 적당히 대답하고, 마력을 흩뿌려 요새 안쪽의 환경을 훑어보았다.
바깥에서 볼 때도 난공불락의 요새처럼 보였는데, 안에서 자세히 살펴보니 더 장난이 아니다.
이건 뭐 드래곤이라도 쳐들어오지 않는 한은 절대 안 뚫릴 것 같다. 수준이 좀 과한 거 아닌가.
“흥, 네가 보통 애송이가 아니긴 해. 보나 마나 백 년 동안 위험한 짓만 골라서 하다가, 어떻게 된 거겠지.”
리즈멜은 전혀 늙지 않고 나타난 내 모습에 크게 의문을 가지지 않는 듯했다.
“그 불안불안한 검술도 마력도 예전이랑 전혀 달라진 게 없어, 그건 가짜가 흉내 낼 수 있는 게 아니니까.”
“백 년동안 그대로면 더 이상한 거 아니야?”
“마음은 천 년을 살아도 변치 않을 때가 있는 법이야. 특히나, 길을 잃은 자의 방황은 쉽게 멈출 수 없어.”
리즈멜은 그렇게 말하고는, 대뜸 내게 가까이 다가와 가슴에 손을 얹었다.
“나는……네 덕분에 많은 인간족을 만나볼 수 있었어. 그러고 나니까, 네가 얼마나 유별난지도 알겠더라고.”
그러고 보니, 7층에서 리즈멜과 그런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다른 인간을 만날 수 있게 해주겠다고.
결국 그 끝은 전쟁이 되었지만, 엘레노어의 계획을 도우며 이뤄낸 약속이었다.
“나는 뭐, 딱히- 인간족이나, 너 같은 거, 별로 안 좋아하지만……네 그런 점이 나을 수 있었으면 좋겠어.”
백이십년 동안 많은 인간을 보고 겪어온 리즈멜은, 나의 병든 부분을 잊지 않고- 이 말을 오래도록 준비했을 것이다.
“나로는 어렵겠지만, 엘레노어라면 할 수 있겠지. 사랑하는 사이잖아.”
근데, 첫눈에 반해서 어쩌고 하던 그거 다 구라였는데.
백이십년동안 믿고 있었구나.
이건 내가 아니라 엘레노어 잘못이다.
**
어쨌거나, 요새 안으로 들어왔으니 빠르게 퀘스트 진도를 빼기로 했다.
다크엘프들의 무수한 악수의 요청을 모두 쳐내고, 곧바로 엘레노어를 만나러 갔다.
리즈멜도 처음부터 나를 엘레노어에게 데려갈 생각이었던 모양이라, 시간 낭비를 많이 줄일 수 있었다.
다크엘프 마을, 르우엘의 그루터기 전체가 요새화된 만큼 왕족이 지내는 거주공간도 무척 거대해졌다.
예전에는 그냥 다 똑같은 나무 아파트 안에서 살았지만, 이제는 제대로 성 같은 것이 생긴 거다.
성에는 따로 경비 병력이 있었고, 나는 순조롭게 그걸 통과해 엘레노어를 마주했다.
“내가 아직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엘레노어는 나를 보자마자 대뜸 그런 말을 내뱉었다. 놀라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여왕이 8층에서 골골거리던 것은 당연히 기억하고 있지만, 9층의 퀘스트를 생각해보면 당연히 나았을 줄 알았는데.
다크엘프 여왕의 상징, 세계수에 간섭할 힘이 있다는 왕관은 엘레노어의 머리 위에 얹혀 있었다.
“이렇게 선명한 꿈은 또 처음인데……환상 마법?”
“환상 아니야.”
“맙소사, 이젠 말까지 하는군. 만질 수도 있나?”
엘레노어는 여전히 뜬구름 잡는 소리를 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다가왔다.
부드러운 손이 내 뺨을 쓸었다. 가만히 두자, 손은 목선을 타고 내려가 가슴에 닿았다.
그리고 더 천천히 내려가, 내 허벅지에 닿더니 점점 안쪽으로-
“이게 미쳤나.”
-가게 둘 수는 없지, 백 년이 지났다더니 이 년은 변한 게 없네.
“어어, 정말 그대인가?”
내가 손을 확 쳐내자, 엘레노어는 그제야 눈앞의 광경이 진짜라는 것을 알아차린 듯했다.
“하지만 백 년이나 지났는데, 인간족인 그대가 어떻게? 정말로 그대인가? 다시 돌아온 건가?”
내 마음을 무엇보다 크게 뒤흔드는 상대, 역시 엘레노어를 상대하는 건 거북하다.
뭐라고 설명을 뱉을 수도 있었지만, 나는 일부러 가만히 서 있었다.
엘레노어가 알아서 진정하기까지, 그저 가만히.
**
여왕이 된 엘레노어가 자리하고 있는 알현실은 무척 넓다.
일단 성이기도 하고, 여왕이기도 하니까 이런 곳에 있는 모양인데, 공간 낭비라는 생각밖에 안 든다.
신하라고 할만한 이들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옥좌와 커다란 회의용 테이블이 있을 뿐.
그야말로 공간이 차고 넘친다. 그런데 엘레노어는 이 공간을 잘 나눠 쓸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좀 놔.”
“싫다.”
가만히 두니 진정을 하기는커녕, 나한테 매미처럼 바짝 달라붙어서 떨어질 생각을 안 했으니까.
다른 다크엘프들도 날 보고 막 접근해 오긴 했지만, 이건 너무 심하지 않나.
“이렇게 닿아 있지 않으면 실감이 안 난단 말이다. 그대가 정말 내 곁에 있다는 게.”
나는 인상 쓰며 달라붙어 있는 엘레노어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뭔가 상태가 안 좋아 보인다.
마른 고목을 연상시키던 전 여왕과 닮은 눈을 하고 있다.
자연스럽게 여왕이 내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엘레노어도 전쟁을 겪으면 바뀔 것이라고.
“약혼을 깰 명분이 필요할 때 나타나서는, 내가 원하는 대로 약혼을 깨 주고 훌쩍 떠나버렸지.”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까 불안한 시기에 나타나서는, 우리를 한껏 돕고 또 훌쩍 사라져버렸지.”
“그리고 이제는 내가 가장 힘들고 괴로울 시기에, 그때와 똑같은 모습으로 나타났지 않았느냐.”
내 어깨를 꼭 끌어안은 엘레노어의 팔이 살짝 떨렸다.
“두 번까지는 우연이라고 쳐도, 이 정도면 보고도 못 믿는 게 당연하지 않으냐?”
그것도 그렇겠지 싶었다. 나는 그냥 퀘스트 라인을 따라왔을 뿐이지만.
내가 엘레노어의 중요한 순간마다 나타나는 게 아니다.
시스템이 엘레노어의 중요한 순간만을 골라서 시련의 탑에 배치한 거다.
“그렇겠네.”
NPC의 시점에서 보는 도전자는 너무나 불가사의하고, 신비롭고, 굉장한 존재겠지.
어쩌면 엘레노어가 내게 강한 호감을 보이는 것도, 시스템이 정해놓은 결정 사항일지도 모른다.
“후후, 어떻게 생긴 것까지 딱 내 이상형인지 모르겠다. 그대라는 사람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시스템에 의해 정해진 것일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배경 설정일까.
적어도 내가 들여다보았던 엘레노어의 과거는, 리즈멜의 검에서 느껴졌던 세월은.
“그러게,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 몰라.”
너무나 생생해서, 도저히 창작된 배경처럼은 보이지 않았는데 말이지.
**
엘레노어는 그러고도 한동안 떨어질 생각을 하질 않았고, 결국 내가 억지로 떨쳐내야만 했다.
“그대도 정말 너무하구나, 아직 백 년 치를 보충하기까지는 한참 남았는데!”
“그래서 백 년 동안 붙어 있겠다고?”
“당연한 거 아닌가, 정혼자가 백 년 동안 얼굴도 안 비춰서 쓸쓸했다고?”
그렇게 말하는 엘레노어는 음흉한 표정으로 웃으며 제 아랫배를 툭툭 건드렸다. 또 지랄이다.
나는 언제나처럼 무시하고, 에픽 퀘스트 진행을 위해 뭔가 도울 것이 없느냐고 물었다.
전쟁 상황에 내가 도울 일이라면 뻔하지, 원래 퀘스트 라인도 이런 식이니까.
자신이 선택한 진영의 지도자에게 임무를 받고, 8층에서처럼 전선에 나서 활약하는 것.
“아아, 물론 있지. 오직 그대만 해줄 수 있는 일이야.”
엘레노어도 결국 퀘스트를 위해 존재하는 NPC다. 결국 흐름은 이렇게 될 수밖에 없다.
쓸데없이 오래 붙어있지 말자, 이번에도 빠르게 퀘스트를 깨고 보상만 받는 거다.
그런데, 엘레노어의 입에서 나온 말은 예정된 퀘스트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나랑 동침해 주겠나?”
여기까지는 괜찮다, 문제는 지금 내 눈앞에 떠오른 시스템 메시지.
[에픽 : 다크엘프의 서 - 여왕의 명]
엘레노어의 헛소리가 그대로 퀘스트로 등록되었다.
“허?”
이게 무슨 지랄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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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리베르타스의 별
그동안 내가 에픽 퀘스트에 파악한 것을 정리하자면 이렇다.
하나, 에픽 퀘스트는 고도의 자아를 가진 다수의 엘리트 NPC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둘, 에픽 퀘스트는 그 원본이 되는 퀘스트와 큰 진행 방식은 다르지 않으나, 난이도가 매우 높다.
셋, 에픽 퀘스트의 보상은 시스템이 퀘스트의 진행 과정에 따라 다르게 지급한다.
이 세 가지 특징을 종합해서 한 줄로 평가하자면, 자유도가 높다고 할 수 있겠다.
NPC들의 자아가 보통보다 강한 만큼, 내 행동 하나하나가 다른 반응과 서브 퀘스트를 낳는 것이다.
어찌 보면 에픽이라는 단어에 굉장히 부합한다고도 할 수 있겠다. 말 그대로 서사적이다.
삼대 세력의 갈등 속에서 태어나는 서사에 내가 직접 개입하는 형태.
9층의 광경이 커뮤니티에서 보던 것과 여러 차이가 있는 것도, 내가 이들의 서사에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지금 눈앞에 나타난 이 퀘스트는, 아마 내 존재가 엘레노어의 서사와 밀접한 연관이 있기 때문이겠지.
[에픽 : 다크엘프의 서 - 여왕의 명]
설명 : 백 년간의 전쟁 속에서 다크엘프는 점점 열세에 몰렸습니다.
배움도 성장도 빠른 인간족의 왕국은 백 년 전과는 비교되지 않을 만큼 강해졌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인간을 좋아하는 다크엘프들이 왕국군과의 싸움에서 망설임을 얻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게다가 오만하고 건방진 하이엘프들도 호전적으로 덤벼 오고 있으니, 다크엘프들에겐 쉴 시간이 없습니다.
전쟁을 지휘하며, 모든 것을 책임지고 있는 여왕에겐 더욱 그렇습니다.
여왕의 어깨에 지워진 짐을 덜어줄 수 있는 것은 당신뿐입니다.
여왕의 명령을 수행하여, 그녀를 도우십시오.
[퀘스트 목표]
1. 여왕의 명령을 완수하기(진행 상황에 따라 변경됩니다).
내가 깨 왔던 어떤 퀘스트보다 그 내용에 군더더기가 없었다. 목표가 명령 완수 하나뿐이라니.
물론, 9층의 진영 퀘스트 내용은 원래 이렇다. 그 명령이 다양한 서브 퀘스트로 분화되어서 그렇지.
그런데 엘레노어가 내게 내린 명령은 어딜 봐도 ‘동침’ 이었다.
물론 퀘스트 목표가 ‘엘레노어와 뜨거운 밤 보내기’ 이딴 식으로 나와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정황이나 맥락을 보면 그게 완수 조건일 것 같단 말이지.
“아, 이 정도로 왜 그러느냐! 진짜 딱 손만 잡고 잔다니까!”
“퍽이나 그렇겠다!”
“원래 손잡고 자다 보면, 다른 곳도 잡을 수 있고 그런 거다!”
아니나 다를까, 엘레노어는 미친 소리를 하고 있었다. 보상이 뭐건 간에 이건 안 된다.
물론 엘레노어는 매력적이다. 다크엘프들에 대부분 그렇지만, 내가 눈으로 본 사람 중에서 가장 섹시하니까.
그래서 안 되는 거다. 성욕을 떨치지 못하고 육체관계를 맺고 나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을 테니까.
이미 7층에서 다소의 정신적인 교감을 나눈 것만으로도 크게 흔들리고 말았다.
거기에 육체적인 교감까지 더해지고 나면, 엘레노어가 깡통이 된 이후를 견딜 수 없을 거다.
“그냥 곁잠만으로 괜찮다니까!”
어떻게든 엘레노어의 바람을 바꿔야 한다.
**
우선은 엘레노어가 왜 대뜸 이런 소리를 하는지 알아야만 했다.
한 차례 기억을 공유하고 사념을 나누었기 때문일까, 나는 엘레노어의 눈만 봐도 대강의 감정을 알 수 있다.
지금 엘레노어의 눈은 어딘가 이상했다. 자유를 갈망하며 반짝이고 있던 별빛이 크게 사그라졌다.
“요즈음 잠자리에 들기가 무척 어렵다.”
엘레노어는 나와 한참 간 씨름한 뒤에야, 간신히 진심을 말해주기 시작했다.
“그대가 떠난 이후, 무척 오래도록 전쟁을 지켜보았다. 숲쟁이 놈들, 그리고 인간족 왕국, 많이도 죽고 죽였지.”
“약혼을 깨고 숲쟁이 놈들과 싸울 생각을 할 때는, 이런 일이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어렸던 거야.”
“언제든 눈을 감으면 망자들의 비명이 들려, 지난 백 년간 스러져간 동포들의 목소리가- 한순간도 그치질 않아.”
엘레노어는 전대 여왕이 말했던 것처럼, 전쟁을 겪으며 무척이나 괴로워하고 있었다.
“정당한 싸움, 정당한 보복, 그런 문제가 아니었어. 잔인함을 잔인함으로 되갚으려 한 대가겠지.”
그리고, 전대 여왕과 똑같은 언어를 그 입으로 자아내고 있었다.
“방식이야 어쨌든, 대화로 풀려고 했던 어머니의 방식은 틀리지 않았던 거다.”
정당함과는 관계없이 활시위를 놓은 순간, 함께 앉아 대화하기 전까지 모두가 고통받을 뿐이라고.
그 고통의 크기는 내가 감히 헤아릴 수 없었다. 백 년이라니, 내 평생을 쏟아야 간신히 가늠할 수 있을 거다.
언제나 제 욕망이 바라는 대로, 마음이 시키는 대로 행동하던, 그 엘레노어가 이렇게 되기까지의 시간.
내가 걸음 한 번으로 그냥 지나쳐 버린 시간이- 엘레노어의 눈에 깃든 별빛을 흐리게 한 거다.
“물론, 그렇다고 그 재수 없는 왕자 놈이랑 혼인했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왜, 후회하는 거 아니었어?”
“그놈이랑 맺어졌으면, 이렇게 그대와 다시 만나 이야기하는 일도 없었을 거 아니냐.”
엘레노어는 천천히 나와 눈을 맞추었다. 흐려졌던 별빛이 조금은 다시 돌아와 있었다.
“백이십 년 전부터, 그대와 함께하는 시간은 언제나 특별했어. 쉬이 설명할 수 있는 느낌은 아니다만은.”
“구태여 비유하자면, 생기가 돈다고 해야 할까.”
“그대가 없는 동안은 항상 죽어 있는 듯했고, 그대와 함께 있는 동안은 다시 살아난 기분이었지.”
엘레노어의 그 말을 들은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후후, 너무 이상한 말인가?”
생각해 보면, 엘레노어는 처음부터 그랬다. 어렴풋한 기억이다.
‘그대, 뭘 그렇게 멍하니 바라보고 있나?
그 혼욕탕에서, 엘레노어는 내가 퀘스트 창을 보고 있다는 걸 인식하고 있었다.
**
일반 NPC들은 눈앞에서 대놓고 시스템 창을 보고 있어도 그걸 인식하지 못한다.
무언가를 보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고, 그냥 혼자서 넋 놓고 있는 것처럼 여긴다.
하지만 엘레노어는 내가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그 뿐만이 아니다. 엘레노어는 나이트 엘프의 비술로 내 기억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면서 간접적으로 시련의 탑의 존재를 엿보았고, 내가 모종의 시련에 도전하고 있다는 것도 인식했다.
이건 절대 평범한 일이 아니다.
인벤토리를 이용해 상식을 벗어난 전투법을 써도, 공간 마법 같은 것으로 인식하는 게 NPC 아닌가.
마력도 못 다루는 놈이 허공에서 마구 무기를 뽑아내 휘둘러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메르세데스와의 싸움에서는 마력 운용을 깨우친 상태였기에, 공간 마법이라고 생각해도 이상하지 않았지만.
이젠 이름도 기억이 안 나는 하이엘프 기사 놈과 처음 싸울 때는, 의문을 가질 만도 했는데 말이다.
애초에 내 전법을 보며, 무기를 얼마냐 많이 다루는 거냐고만 지껄여댔었지.
마력 운용이나 마법에 대해 무지한 에르웬 정도만이 ‘아이템 박스겠거니’ 하고 넘어갔었다.
‘에픽 퀘스트는 고도의 자아를 가진 다수의 엘리트 NPC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내가 정리한 에픽 퀘스트의 특징은 틀렸을지도 모른다. 아니, 확실하게 틀렸다.
8층에서 에픽 퀘스트의 시작을 끊은 건 에르웬이었다.
리즈멜이야 그렇다 쳐도, 에르웬은 절대로 엘리트 NPC가 아니다.
그냥 흔한 대장간 NPC일 뿐인데도, 엘리트 NPC 이상의 자아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에픽 퀘스트가 완료되면, 이들은 모두 원본대로 자아를 상실하고 깡통이 되어버린다.
즉, 에픽 퀘스트가 모든 NPC들에게 고도의 자아를 부여한다고 봐야 한다.
그렇다면, 원래부터 인간에 가까운 면을 갖고 있는 최상급 엘리트 NPC는 어떻게 되는 걸까.
엘레노어는 퀘스트가 완료된 이후에도 그나마 덜 기계적인- 불쾌한 골짜기 수준의 반응을 보여주었다.
그런 엘레노어가 에픽 퀘스트를 통해 더 강한 자아를 얻은 결과가, 시스템의 인식인 거라면?
“그대여, 왜 그러지?”
이게 어떤 의미인지는 모르겠다. 그냥 깡통이 조금 덜 깡통이 된다고 달라지는 건 없을 터.
하지만, 만약 엘레노어가 시스템의 영향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운 것이라면- 털어놓을 수 있는 거 아닐까?
내가 그동안 시스템에 대해 털어놓지 못했던 건 단순히 심리적인 이유만이 아니었다.
애초에 털어놓아 봤자 NPC들은 듣지도 못하니까. 오픈 커뮤니티에서도 그랬었다.
[걍 퀘스트 NPC랑 말할때는 롤플레잉 한다고 생각하셈]
사람에 가까운 반응을 보이는 NPC를 상대로, 시련의 탑에 대한 주제를 막 말하면 안 된다고.
시스템에 존재하는 모종의 차단책으로, 탑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NPC는 모두 똑같은 반응을 보인다.
못 듣거나, 본인이 이해할 수 있는 개념으로 치환하여 듣거나, 이야기 자체를 돌리려고 한다.
하지만 그런 방식으로 넘길 수 없을 정도로 이야기를 계속 이어나간다면, NPC의 설정이 리셋되어 버린다.
리셋되는 설정의 정확한 범위는 모르지만, 결코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겠지.
나는 엘레노어를 바라보았다. 엘레노어도 나를 바라보았다. 눈이 맞았다.
“이게 맞는 건지 모르겠는데.”
퀘스트 창을 가볍게 흘겨보며, 나는 말했다.
“진짜 손만 잡고 자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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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동침
사실 엘레노어는 생각보다 선을 잘 지키는 편이다.
시도때도 없이 추행을 시도하고, 동침하자며 몸을 들이밀긴 하지만- 내가 거절하면 결국 포기한다.
그러니 정말로 손만 잡고 자자고 약속한 이상, 이상한 짓을 시도하지는 않을 거다.
아마도.
아닌가?
솔직히 확신까지는 없는데, 어차피 엘레노어가 개짓거리를 하려고 하면 힘으로 막으면 된다.
동침 제의 자체도 불면증을 해결해 보고자 한 것이었으니, 괜한 걱정을 할 필요는 없겠지.
그리고 아직 이런 걱정을 할 때는 아니다. 잠은 밤에 자는 거고, 지금은 아직 한창 낮이니까.
이후에는 엘레노어에게 삼대 세력이 얽힌 전쟁의 상황에 대해 대충 설명을 들었다.
우선, 백 년간 무시무시한 속도로 발전한 인간족 왕국군이 영토 회복을 내세우며 엘프에게 선전포고했다.
듣기로는 엘프가 자리 잡은 대수림이 인간족 왕국의 영토에 포함되어 있다나.
다만 그간 실효지배가 안 되어 있는 상황이었고, 이번 기회에 엘프를 몰아내고 숲을 차지할 생각이라는 것 같다.
문제는 하이엘프의 대산림으로 향하기 위해서는 다크엘프의 영역을 거쳐야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왕국군은 하이엘프와 다크엘프를 싸잡아 자신들의 영토를 점거하고 있는 이종족 세력으로 칭했다.
다크엘프와 하이엘프를 따로 구분하지 않고 함께 치겠다는 의미다.
그리고 지리상 먼저 공격받는 것은 당연히 다크엘프, 상황을 보면 엘프끼리 연합해서 왕국군을 막아야 할 테지만.
이 미친 혐성 개씹좆프 새끼들은 연합은 커녕, 뜬금없이 다크엘프를 향해 선전포고를 했다.
다크엘프만 영문도 모른 채, 선전포고 없이 양면전쟁을 치르게 된 것이다.
“물론 명분은 우리 쪽에서 먼저 주었지, 선전포고만 하지 않았을 뿐 전쟁은 그전부터 시작되어 있었다.”
그렇겠지, 일방적으로 공격받은 거라면 엘레노어가 이렇게까지 닳아빠지진 않았을 테니.
“하지만 그래도 숲쟁이 놈들의 선전포고는 조금……이상한 점이 많았지.”
뭐, 백 년간의 전쟁이니 이래저래 엉킨 지점이 많으리라. 이 정도면 원래의 명분은 아무래도 상관없지.
솔직히, 엘프라면 모를까 인간 왕국이 백 년이나 전쟁을 계속하고 있다는 점부터 평범하진 않다.
다크엘프 진영을 두 쪽에서 다굴하는 형태가 아니라, 셋이서 엎치락뒤치락 싸우고 있는 모양이기도 하고.
“그대……싸우러 갈 생각이구나?”
엘레노어가 내 생각을 바로 눈치채고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9층의 왕국군은 백 년간의 발전이 쌓인 덕택에 7층, 8층 이상으로 강하다.
그리고 그중에는 당연히 엘레노어나 메르세데스 급으로 강한 전력이 존재할 것이다. 아니면 균형이 안 맞으니까.
이미 성장 수준은 충분하기에, 꼭 그 전력과 맞서고 싶은 것까지는 아니지만- 싸우지 않을 이유도 없으니.
“백 년 전보다 더 강해졌을 그대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게 참 우습지만, 죽지 마라.”
내 몸에 밴 피 냄새를 좋아하던 엘레노어도, 백 년이 지나니 이런 소리를 다 한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것도 웃기는 일이다.
**
전쟁은 백 년간 이어졌을지라도, 전투가 백 년간 이어지지는 않는다.
이 요새 외에도 다크엘프의 영역은 더 있고, 그 각각의 영역에서 국지전 같은 게 드문드문 벌어지고 있다 들었다.
물론 적들의 최종 목표는 결국 이 요새를 함락시키는 거니까, 뭐가 됐든 이쪽으로 온다는 건 확실하다.
그리고 정찰대의 역할은 그들을 한 발 먼저 발견해서 받아치는 것. 나도 그 역할을 함께 맡기로 했다.
마을에서 조금 벗어나, 안개에 방해받지 않는 구역까지 나오자 곧바로 적들이 보였다.
깃발을 보니 왕국군이 틀림없다. 그런데 그 구성 인원이 어쩐지 이상했다.
“뭐야 저거, 좀비?”
언데드인지 몬스터인지, 하여튼 사람은 아닌 것들이 군대 사이에 끼어 있었다.
아니, 따져보자면 사람보다 몬스터가 더 많았다.
적진에 마법사가 몇몇 보이는데, 아무래도 특수한 방식으로 조종하거나 사역하고 있는 것 같다.
하긴, 백 년 동안 전쟁을 이어오려면 인적 자원을 아낄 방법을 찾아야 했겠지.
몬스터를 잡아다가 사역해서 전장에 내보내면, 병사뿐만이 아니라 병기까지 아낄 수 있을 거다.
“마법사는 얼마나 되려나……어디.”
나는 일단 적의 숫자를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 가볍게 마력을 퍼트려 감지를 시도했다.
-키잉!
그런데, 웬 이상한 소리와 함께 감지가 차단되었다. 동시에 몬스터 하나가 괴성을 질렀다.
-그에에으엑!
감지를 차단하는 모종의 수단을 마련해 둔 건가. 기습 공격은 글렀네.
“■■■■, ■■■!”
왕국군의 마법사가 정체불명의 주문 같은 것을 외치자, 몬스터들의 기세가 달라졌다.
내 존재를 인지하고 전투태세로 들어간 거겠지. 좋아, 어디 해 보자.
검과 방패를 장착하고 앞으로 나섰다. 몬스터 부대는 나를 발견하자마자 달려들기 시작했다.
-퍼걱!
가볍게 발길질해 선두에 선 몬스터를 멀리 걷어차 날려버렸다.
날아간 몬스터는 그대로 나무에 여러 번 부딪혀 나가떨어졌지만, 다른 몬스터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덤벼왔다.
엘프가 아니라 인간이 나타나 몬스터를 날려버렸는데, 멈추려는 기색이 보이질 않는다.
마법사들이 상황 인식을 못 했거나, 인식했지만 몬스터를 멈추지 못하거나, 뭐 그런 거겠지.
군대라길래 뭔가 전략적인 움직임을 취하지 않을까 살짝 기대했는데, 그건 아닌 모양.
-촤악!
이어서 달려드는 몬스터의 목을 단번에 베어버리며, 방패로 밀쳐 진영을 뚫고 들어갔다.
어차피 다대일의 싸움, 받아치기보다는 이렇게 파고들어 섬멸하는 게 낫다.
요즘 레벨이 통 오르지 않고 있는데, 오래간만에 잔뜩 사냥해 보겠네.
**
레벨은 이번에도 안 올랐다. 역시 층수보다 레벨이 너무 높은 것 같다.
몬스터 부대의 숫자가 백을 훌쩍 넘겼는데도 이 모양이니, 한동안 레벨업은 기대하지 않는 게 좋겠다.
레벨업은 잘 안 되고 있어도, 개인적인 단련으로도 조금씩 스펙을 올리고 있으니까 큰 상관은 없다.
그렇게 몬스터를 쓸어버리고 난 뒤에는, 요새로 돌아와 엘레노어와의 동침 준비- 이렇게 말하니까 좀 이상하네.
아무튼 잘 준비를 했다. 일단 몬스터의 피를 잔뜩 뒤집어쓰고 왔으니 목욕부터.
전시 상황이지만 다크엘프의 욕탕은 여전히 훌륭했다. 오히려 예전보다 더 좋아진 느낌이었다.
욕탕이 전체적으로 커진데다가, 탕에 약초 같은 걸 풀어놓은 탓인지 피로가 풀리는 느낌도 들었다.
아, 다크엘프의 혼욕 문화도 여전했다.
인간족을 좋아하는 다크엘프들이 알몸이라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막 다가와서 여러모로 곤란했다.
아무튼 그렇게 목욕을 마치고, 마침내 성 안의 침실에서 엘레노어와 함께 침대에 올랐다.
“……”
일단 승낙하긴 했는데, 이거 정말로 괜찮은 거 맞나.
엘레노어가 저런 네글리제 차림만 아니었어도 별로 거리낄 건 없었을 텐데.
“자, 그대도 피곤할 텐데 어서 누워라. 내 침대는 무척 편하다고.”
“어, 음.”
“그렇게 겁먹지 말고, 정말로 손만 잡고 잘 거라니까.”
엘레노어의 손이 나를 확 끌어당겼다. 나는 결국 나란히 누워, 천장을 바라보게 되었다.
손만 잡고 잔다는 말이 진짜인지는 모르겠지만, 엘레노어는 눕자마자 내 손을 잡고 깍지를 꼈다.
“어차피 밤중에 습격이라도 일어나면 곧장 일어나야 한다, 남녀사이의 일을 치를 시간도 없어.”
하긴, 전시 상황에 군주가 느긋하게 그러고 있을 시간은 좀처럼 없겠지. 아마도.
-훅.
엘레노어가 손짓하자 방 안의 조명이 모두 꺼졌다. 나도 순순히 누운 채로 눈을 감았다.
눈을 감긴 했지만, 이대로 그냥 잘 생각은 없다.
이대로 명상이라도 하며 마력을 굴릴 셈이다.
정말로 딱 손만 잡고 내 옆에 누운 엘레노어는 새근새근 숨을 내쉬더니, 작은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그대여.”
“왜.”
“그대는 정말 인간인가?”
“그런데.”
“인간은 백 년밖에 못 사는 거 아니었나?”
“일반적으로는 그렇지.”
“그렇구나.”
엘레노어는 뭔가 망설이는 듯이 입술을 달싹거렸다. 먼저 묻지 않는다면 나도 말할 생각은 없다.
낮 동안 전투를 치르면서, 엘레노어에게 내 이야기를 털어놓아야 할지 많이 고민했다.
고민하고 또 고민했지만, 아직 답은 나오지 않았다.
NPC라는 사실을 떠나서, 이게 과연 엘레노어에게 말해도 좋은 일인가 해서.
내 심정 자체는 이미 8층을 떠나오며, 자아를 잃은 엘레노어에게 한 번 토해내듯 말했었다.
벽을 보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었으니, 지금과는 다른 상황이지만- 딱히 편해지는 건 없었지.
그렇다면 이렇게 자아가 있는 엘레노어에게 말한다고 뭔가 달라질까 싶기도 하고.
무엇보다, 나이트 엘프의 습성을 강하게 물려받은 엘레노어가 내 말을 어떻게 받아들일지가 문제였다.
엘레노어는 자유를 사랑한다. 무언가에 속박되는 것을 싫어해, 언제든 어디로든 떠나고 싶어했다.
그런 엘레노어에게, 너는 탑의 시스템에 종속된 NPC라고- 말해도 괜찮은 걸까?
-쌔액, 쌔액.
엘레노어의 규칙적인 숨소리가 귓가를 울린다. 붙잡은 손과 맞닿은 어깨의 온기가 따듯하다.
원래도 좀처럼 집중하지 못했던 명상은 완전히 깨졌고, 나는 천천히 수마에 빠졌다.
그리고, 실로 몇 년 만에- 긴 꿈을 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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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 거울상
화살과 마법이 날아다니고, 불이 번지며 숲이 타오른다.
인간과 엘프가 한데 뒤섞여 서로를 베고, 찌르고, 쓰러트리며 목숨을 빼앗는 광경이 눈앞을 스쳐 갔다.
별 감흥 없는 광경이었다. 비극적이라고 느끼기에는 척 보기에도 너무나 조잡하기 짝이 없었으니까.
싸우는 이들은 얼굴 없는 마네킹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날아다니는 무기는 영화 촬영을 위한 소품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하늘도 나무도 별빛도 모두 조잡한 영상을 띄워 놓은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유치한 저질 CG 영화를 반쯤 열린 문 너머로 보고 있는 기분이었다.
이거 아무래도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은데, 내 상상력은 대체 어떻게 되어 있길래 이딴 꿈을 만드는 거지.
맥락이라고는 조금도 모르겠고, 그냥 무진장 길기만 하잖아.
원래 꿈이라는 게 그런 거긴 하지만, 몇 년 만에 꾸는 꿈의 내용이 이따위니까 뭔가 기분이 나쁜걸.
“이거 언제까지 이어지는 거야.”
내 몸조차 제대로 감각되지 않는 꿈속에서 혼자 중얼거렸다. 그럼에도 꿈은 이어졌다.
끝없이 조잡한 영상을 늘어놓으며, 한참을 보다 못해 진이 빠진 내가 꿈속에서마저 잠들게 될 때까지.
그리고 꿈속에서 한 번 더 꿈에 빠져든 그 순간, 내 눈은 저절로 트였다.
“좋은 아침이다, 그대여.”
햇볕이 환하게 내리쬐는 아침이었다.
**
엘레노어는 내 덕분에 오랜만에 푹 잘 수 있었다며 감사를 표했다.
그런 것치고는 아직 피곤해 보이는 눈이지만, 피로의 이유가 비단 불면증 때문만은 아닐 거다.
고작 하루 푹 잔 걸로 풀리기에는 이래저래 쌓인 게 많았겠지. 나랑은 별 상관없는 일이다.
“그나저나, 그대도 무척 푹 자더구나? 그렇게 빼던 것치고는 내 품이 편했나 보지?”
놀랍게도 사실이다. 엘레노어의 영향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도 오랜만에 깊이 잠들긴 했다.
생전 안 꾸던 꿈을 다 꾼 걸 보면, 평소와 다른 잠자리가 영향을 미친 것 같긴 하다.
하지만 애초에 나는 깊게 자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도 없었으므로, 아무래도 좋은 일이다.
“아니, 개꿈이나 꿨는데.”
엘레노어의 말을 대충 받아치고,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며 몸을 풀었다.
몇 시간이나 잠을 자느라 시간을 날렸으니, 남은 시간을 최대한 알뜰하게 써야 하지 않겠어?
이번 에픽 퀘스트의 목표는 엘레노어의 소망, 여왕의 명령을 완수하는 것.
하룻밤 같이 잠을 자 준 것만으로 클리어되는 퀘스트가 아니었다. 요지는 엘레노어를 편하게 해 주는 것이다.
밤에는 엘레노어와 같이 자주고, 낮에는 엘레노어의 스트레스 요인인 전쟁의 부담을 덜어주도록 하자.
8층에서 하던 일과 크게 다를 것 없다. 매일매일 전장을 누비면서 적을 쓰러트리는 거다.
“꿈이라……나도 간밤에는 꿈을 꾸었지. 오랜만에 깊이 잠든 덕일까, 별난 경험이었어.”
잠이 덜 깼는지, 몽롱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엘레노어를 두고 무장을 갖추었다.
**
몬스터를 사역해 편제를 갖춘 왕국군 병력은 확실히 강력했다.
내 스펙이 너무나도 높은 탓에 위기라고 할 만한 일은 없었지만, 상대하면서 결코 만만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왕국군에는 일반적인 마법사만이 아니라 주술사와 흑마법사도 있었다.
이들은 단순히 사역한 몬스터를 조종해 공격할 뿐만이 아니라, 갖가지 마법과 작전으로 나를 몰아붙였다.
내가 아군을 끼고 싸우는 게 아니라, 혼자 적진에 난입해 싸우는 타입이라는 점을 노린 것이다.
몬스터들을 잔뜩 돌격시켜 억지로 발을 묶고, 대규모 섬멸을 위해 사용하는 마법을 나 하나에 쏟아붓는 방식.
다수의 주술사와 흑마법사들이 동시에 속박과 디버프를 중첩하니, 나로서도 그 대응은 쉽지 않았다.
사역한 몬스터를 이용해 마력감지를 방해할 수 있다는 점도 있어서, 몇 번이나 강력한 공격을 허용했다.
뭐, 말했듯이 위기라고 할 수준까지는 아니었다.
에메랄드 와이번의 공격을 맞으며 키운 [주문 내성]과 [대마법 내성] 스킬이 착실하게 나를 보호해 주었으니까.
거기에 화염, 냉기, 전격 계열은 내성 덕분에 이중으로 데미지가 반감되기도 하고.
주술사의 독 계열 공격은 반감되다 못해 아예 무효화되는 지경이었다.
심지어 이 짓거리를 계속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간 갖추지 못했던 내성도 새로 생겼다.
[패시브 스킬 : 저주 내성 1레벨을 습득하셨습니다.]
스킬 자체는 꽤 흔하지만, 그동안 기회가 없어서 얻지 못했던 저주에 대한 내성.
저주 자체가 그리 강하지 않아서 그런지, 한동안 1레벨을 쉽게 벗어나지 못했지만.
“야, 그거 좀 더 해봐.”
“예, 예?”
“저주 더 해보라고.”
흑마법사 하나를 살려서 잡아두고, 나에게 계속 저주를 쓰도록 해서 해결할 수 있었다.
잡아둔 흑마법사의 밑천을 탈탈 털어서 [저주 내성]을 3레벨까지 올린 것이 오늘.
9층에 진입한 지 이 주가 지난 날이었다.
그동안 에픽 퀘스트는 조금도 진전되지 않고 있었다.
**
엘레노어는 매일같이 나와 함께 잤지만, 어쩐지 날이 갈수록 상태가 안 좋아지고 있었다.
“으응? 그게 무슨 소리냐, 그대 덕분에 요즘은 아주 살 맛이 나는걸?”
“안 그래 보이는데.”
“그대가 잘못 보고 있어서 그런 거다. 나는 오히려 그대가 걱정이야.”
저렇게 말하고 있지만, 그렇지 않다는 건 눈이 달렸다면 누구나 알 수 있을 것이다.
엘레노어의 눈에서 불타오르던 별은 점점 빛을 잃어가고 있다. 쉽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느껴진다.
나이트 엘프의 비술로 기억을 공유한 적이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내 눈치가 좋아진 걸까.
엘레노어의 마음이 격하게 요동치고 있다는 것을, 왠지 모르게 알 수 있었다.
“정말이야, 그냥 조금……고민이 많아져서 그렇다.”
이해는 한다. 내가 열심히 날뛰고 있음에도, 전쟁의 상황은 좋아질 기미가 없으니.
지금도 매일같이 적은 숫자지만 사상자가 생기고 있다.
나에게는 그저 NPC일 뿐이지만, 엘레노어에게는 소중한 자신의 동포와 백성일 터.
“왕관의 무게에 목이 나갈 것 같아.”
지친 듯 말하는 엘레노어의 모습은 무척 낯설었지만, 그 표정만은 어디에선가 본 적이 있는 것 같았다.
어쨌든, 이 염병할 전쟁의 판도를 크게 바꿔놓지 않는 한- 이 퀘스트는 깰 수 없을 것 같다.
**
지금까지 내가 휘젓고 다닌 것은 다크엘프의 영역 근처 일대뿐이다.
그보다 더 깊은 곳, 이를테면 다른 세력의 영역 안쪽까지 파고들어서 공세를 펼친 적은 없었다.
상대는 단순한 집단이 아니라 거대한 세력, 내가 아무리 강하다고 한들 혼자서 전부를 압도할 수는 없다.
그냥 숫자만 많다면 모를까, 엘리트 NPC나 메르세데스 같은 오버스펙 개체도 세력별로 존재하는 마당이니.
하지만 이젠 달리 방법도 없고, 이 일대를 지키며 싸우는 것만으로는 더는 성장하기 힘들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뭐, 어쩌겠어.
갖다 박아야지.
노려볼만한 상대는 역시 한 번 밑천을 확인한 하이엘프 진영이다.
하이엘프 왕의 실력이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리 높게 쳐도 메르세데스보다는 약할 거다.
그 메르세데스부터가 상식을 두어 단계는 벗어난 스펙을 갖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 밖의 다른 엘리트급은 그 기사 놈 수준일 테고, 메르세데스도 지금이라면 얼마든지 이길 자신이 있다.
7층에서의 결투로 실력은 충분히 봐 두었고, 스펙은 이제 마력강화로 따라잡을 수 있으니.
나는 장비를 점검하고, 채비를 갖춘 뒤 곧바로 하이엘프의 영역을 향해 걸음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예상치 못한 곳에서 적을 맞닥뜨렸다.
장소는 다크엘프와 하이엘프의 영역 사이에 어중간하게 걸친 대수림의 외곽 지역.
내가 7층에 올라와 처음으로 엘프를 마주쳤던 그 부근에서, 눈에 익은 얼굴을 발견했다.
사실, 얼굴 자체는 그리 익숙하지 않지만- 못 알아볼 수가 없는 신체적 특징이 너무나 눈에 띄었다.
한쪽 귀가 짧게 잘려나간 하이엘프 여자.
메르세데스.
하이엘프 최강의 NPC가, 어째서인지 꾀죄죄한 차림을 하고 나무둥치에 기대어 쉬고 있었다.
뭐야 저게, 저년이 왜 여기 있지.
맞붙으러 갈 생각이긴 했지만, 이런 장소에서 대뜸 혼자 자빠져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리고 저 차림은 또 뭐란 말인가. 결투 때의 정복도, 예전에 봤던 갑옷 차림도 아니다.
백 년이 지나면서 뭔가 사정이 생겼을 수도 있지만, 저만한 녀석이 왜 이렇게 굴러다니는 건지.
이유가 짐작도 안 간다.
심지어 내 기척도 제대로 못 느끼고 뻗어 있는 걸 보니, 어지간히 심하게 지친 모양인데.
-저벅, 저벅.
나는 잠시간의 고민 끝에, 검을 한 손에 쥐고 메르세데스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너 여기서 뭐 하냐?”
“!”
메르세데스는 화들짝 놀라 눈을 뜨더니, 재빨리 검과 방패를 뽑아들고 전투태세를 취했다.
내가 입을 떼기 직전, 아슬아슬하게 간격에 들어간 순간 바로 자세를 잡았다.
그 미친 스펙이나 전투감각이 어디 가진 않았나 보네,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너, 네놈은……!”
메르세데스는 내 얼굴을 확인하고는, 곧바로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나한테는 몇 주 전, 그리고 녀석에게는 백이십 년 전.
그 귀를 잘라버렸던 때보다도, 더욱 증오가 가득한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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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세계수가 열매를 맺던 시절에
리즈멜은 내 대답을 듣고 한동안 말이 없었다. 어지간히 크게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나는……모르겠다, 너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한참의 침묵 끝에 리즈멜은 그런 말과 함께, 투명한 눈물을 흘렸다.
다크엘프가 인간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새삼 다시 알았다. 이런 걸로 울어줄 수 있을 만큼 좋아하는구나.
조용히 눈물을 닦아낸 리즈멜은 불안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다시 말을 이었다.
“너는 우리의 검술을 모두 체득했고, 눈도 제대로 틔웠어. 내가 가르쳐 줄 수 있는 건 더 없을 거야.”
[퀘스트 완료 : 에르웬의 참견 - 검술 훈련]
“에르웬 이모님에게도 말을 전해 둘게, 너는 검술 훈련을 모두 마쳤다고. 그러니까, 이젠 나를 찾아오지 마.”
퀘스트 창에 붙어있던 선택 목표들이 모두 완료 처리되었다. 대련이니 선별 시험이니 하는 건 아직 하지 않았음에도.
이런 식으로 퀘스트가 완료된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보상만 제대로 들어오면 상관없겠지만.
[퀘스트 보상 : ‘경험치’, ‘골드’를 획득하셨습니다.]
[목표 달성 보상 : NPC 에르웬을 통해 수령하실 수 있습니다.]
[최고의 검이 만들어졌습니다.]
하지만, 기대감을 부추기는 시스템 메시지에도 불구하고 기분은 썩 좋지 않았다.
터덜거리는 걸음으로 연무장을 떠나는 리즈멜을 붙잡고 싶었다. 하지만 동시에 떠나게 둬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리즈멜이 나를 어떤 심정과 생각으로 대하고 있었는지, 무슨 의도로 내게 검을 가르쳐 준 건지.
그리고 조금 전 내가 내뱉은 말에 어떤 상처를 받았을지도, 모두 짐작은 가지만.
“어쩌겠어, NPC인데.”
나는 혼자 연무장에 주저앉아, 변명 같은 말로 자신을 달랠 수밖에 없었다.
**
혼자 연무장에서 괜히 검술 연습을 해 보며 저녁까지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해가 지기 시작할 때 쯤, 그곳을 벗어나 대장장이 에르웬의 대장간으로 향했다.
다른 다크엘프에 비해 유독 작은 키를 가진 대장장이는 나를 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손을 흔들었다.
“뭐냐, 조금 더 일찍 올 줄 알았건만. 연장자를 너무 기다리게 하는 거 아니냐, 몹쓸 것아.”
“기다려 달라고 한 적 없는데.”
“나 참, 여전히 말하는 본새는 귀여운 점이 없구나. 표정은 또 그게 뭐냐, 비 맞은 오렌같은 꼴인데.”
오렌이라는 건 맥락상 이 7층에 서식하는 동물 같은 거겠지. 지금 내 표정이 그렇게까지 안 좋은가?
“리즈멜도 많이 상심한 표정이던데, 둘이 싸우기라도 한 게냐.”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리즈멜의 마음이 상한 건 알겠지만, 딱히 싸운 것도 뭣도 아니다.
나로서는 그냥 새삼스레 자아 성찰을 한 것뿐이다. 리즈멜은 내가 한 말에 멋대로 충격을 받았을 뿐.
에르웬도 특별히 캐물으려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냥 그런 일도 있는 거라면서, 대장간으로 들어오라 말했다.
대장간 안에는 여전히 이런저런 무기들이 걸려 있었다. 저번에 내가 물건을 싹쓸이했는데도, 어느새 다시 꽉 차 있었다.
이 대장장이의 작업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는 나도 잘 알고 있기에, 새삼스레 놀라지는 않았다.
“저번에 가져다준 주괴를 활용하느라 고생 좀 했지, 그래도 덕분에 무척 좋은 검이 만들어졌지 뭐냐.”
에르웬은 그렇게 말하며 예스러운 케이스에 담긴 검 한 자루를 꺼내, 내게 건네었다.
“살펴봐라, 마음에 들 거다.”
만들어진 검은 겉보기에는 평범한 에보니 스틸 한손검, 거기에 약간의 장식을 더한 것처럼 보였다.
[대장장이의 걸작 : 요정시대의 검]
공격력 + 85 (참격)
치명타 피해 : x 2.8
내구도 880/880
강화 시행 가능 횟수 : 15회
하지만 시스템이 표시하는 아이템 정보는 장난이 아니었다. 일단 기본 공격력부터가 화끈하다.
내 한손검 중에서 가장 공격력이 높은 [늑대 사냥의 검]을 가볍게 능가하는 수치.
거기다가 강화 시행 횟수는 에보니 스틸의 특성을 그대로 받아 15회나 된다.
7층 수준을 한참 넘어선 적을 상대해 온 보상일까, 7층에서 얻을 수 있는 수준의 아이템이 아니다.
“밸런스 잡힌 튼튼한 검을 좋아한다고 했었지? 그래서 일부러 거창한 마법 기능 같은 건 넣지 않았고-”
에르웬은 그렇게 말하며, 그래도 마법 재료를 쓰는 마당에 아무것도 없으면 아쉬울 거라며 한 마디 덧붙였다.
“너한테 딱 맞는 기능 하나만 넣어 뒀다.”
아이템 정보는 기본 스탯으로 끝이 아니다. 유니크 등급으로 완성된 검에는 고유 효과도 붙어 있었다.
고유 지속 효과 : 마력 흡수
몬스터를 처치할 시, 처치한 몬스터의 마력 일부를 흡수.
흡수한 마력 수치에 따라 내구도 회복, 자동 청결 효과.
회복분을 초과한 마력은 착용자의 MP를 회복시킴.
몬스터를 처치할 때마다 자동으로 내구도가 수리되고, 그에 더해 MP를 리필시켜주는 미친 알짜배기 옵션.
아이템 수리에 들어가는 골드나 재료는 차고 넘치는 신세지만, 실시간 회복은 나에게도 특별하다.
나는 솔플러라는 특성상 늘어지는 다대일 전투 상황에 처할 일이 매우 많은 편이다.
HP는 스킬과 아이템 효과 덕분에 계속 회복되지만, MP랑 무기 내구도는 점점 떨어지기 마련인데.
이 옵션이라면 내 집중력이 버텨주는 한 언제까지고 최대의 전투력을 유지할 수 있게 될 거다.
“끝내주는데.”
“마음에 드느냐?”
“어어, 엄청.”
나는 제자리에서 검을 휘둘러 대며, 순순히 기뻐했다.
**
에르웬은 마냥 기뻐하는 나를 보고 웃으며, 자연스럽게 대장간 안쪽으로 나를 이끌었다.
“그렇게 좋아해 주니 어깨가 빠지도록 힘쓴 보람이 있구나, 표정도 훨씬 보기 좋아. 앞으로도 좀 그러고 다녀라.”
고개를 끄덕이고 검을 인벤토리에 수납했다. 기본 옵션이 워낙 좋으니, 강화는 좀 나중에 해도 될 것 같다.
에르웬은 언제 준비해 둔 건지, 간단한 다과와 찻잔을 꺼냈다. 나를 위해 일부러 준비해 둔 것처럼 보였다.
다크엘프들은 왜 자꾸 나한테 뭘 먹이려고 드는건지 원.
내가 다크엘프들에게 작은 길고양이 정도로 보이는 건 알고 있지만, 에르웬은 안 그러는 편이었는데.
에르웬이 특별히 나이가 많은 편이라고 들었는데, 시골 할머니가 종종 찾아오는 고양이에게 밥을 주기 시작한 셈인가.
“인간족이 뭘 좋아하는지는 잘 몰라서, 아무거나 사다 놨는데……혹시 못 먹는 게 있느냐?”
“아니, 그런 건 아니고.”
“그럼 좀 앉아라, 설마 검만 홀랑 받아먹고 고생한 사람은 나 몰라라 하려는 건 아니겠지?”
나는 얌전히 자리에 앉았다. 다과는 보아하니 단 것 같아서, 대충 입에 집어넣고 씹어먹었다.
-으적, 으적.
에르웬은 그런 나를 보며 약간 씁쓸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나 참, 달콤한 과자를 먹으면서 지을만한 표정이 아니잖으냐. 너 같은 인간족은 살면서 처음 보는구나.”
마치 나 말고 다른 인간족을 많이 봤다는 듯한 말투였다. 다른 다크엘프들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던데.
나는 괜히 궁금해져서, 인간족을 많이 봤느냐고 물었다.
“뭐, 요즘 젊은 것들보다는 많이 본 편이지. 누가 뭐래도 얼마 안 남은 세계수 세대니까 말이다.”
“세계수 세대?”
“지금은 다 시들고 썩은 세계수가, 아직 열매를 맺을 수 있었을 적부터 살아온 늙은이란 뜻이다.”
그러고 보니 들어본 적 있는 이야기였다. 포레스트 엘프와 나이트 엘프 모두, 세계수를 통해 혼이 순환하고 있다던가.
죽은 엘프의 혼은 다시 세계수의 품으로 돌아가고, 세계수는 열매를 맺어 영혼이 깃들 그릇을 다시 낳는다.
말하자면 일종의 환생 시스템, 하지만 이는 세계수가 시들고 힘을 잃으며 과거의 일이 되었다고 한다.
두 엘프 종족의 이름이 하이엘프와 다크엘프가 되기 전의, 어마어마하게 오래된 옛날의 이야기.
“그 시절의 엘프는 모두 영생이라 할 만큼 길게 살았지. 지금도 매우 길게 사는 편이지만 말이다.”
그렇게 말하는 에르웬의 눈동자는 유독 흐린 빛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거 아느냐, 영생이니 불멸이니 하는 건 사실 죽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란다. 조금 달라.”
“영생이란, 나 외의 모든 것이 죽는 거다.”
“오직 나만 두고, 세상 모든 것이 시간을 이기지 못하고 스러져 이별을 고하지. 그런 느낌이란다.”
맥락 없는 이야기지만, 그냥 흘려넘길 수는 없는 말이었다. 에르웬의 목소리에는 무언가 절절한 것이 담겨 있었다.
“덕분에 우리는 시간과 생명을 바라보는 관점이 좀 유별난 편이지. 돌이켜 보면 수십 년도 찰나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
무슨 의미인지 알 만했다. 그렇기에 인간을 마냥 귀엽게 볼 수 있는 거겠지. 생각나는 것을 말하자면-
“인간이 벌레처럼 보일 수도 있겠네.”
-다크엘프에게 인간은 길고양이보다 더 낮은 무언가처럼 보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에르웬은 내 말을 듣더니, 옅은 웃음을 지었다.
“아니, 무척이나 위대하게 보여.”
에르웬의 부드러운 손이 내 손을 감쌌다.
“찰나처럼 짧은 삶을 살지만, 그럼에도 굉장한 존재감을 남기지. 우리에게 인간과 접해본 기억은 좀처럼 잊을 수 없는 것으로 남아.”
수천년을 살았을 거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부드러운 손에서, 굳센 힘이 느껴진다.
“그래서 리즈멜이 너를 특별히 걱정하는 거란다, 얘야.”
에르웬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입을 닫았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내 손을 토닥였다.
아무런 말 없이 그저 토닥이는 그 손길에서는, 어쩐지 많은 것이 느껴졌다.
젠장, NPC는 무슨. 나는 아직도 변명 뿐이구나.
리즈멜한테 사과하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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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메르세데스
뭔가 사연이 많아 보이는 꼬락서니길래, 대뜸 덤비기보다는 말을 걸어 본 건데.
이럴 줄 알았으면 일단 칼빵 한대 놓고 시작할 걸 그랬다.
눈깔이 완전 살인마 눈깔이다. 증오며 분노며 살의며 격한 감정은 죄다 저기에 고여 있다.
“네놈이 어떻게, 인간 주제에……역시 인간이 아니었던 건가……!”
그 와중에도 내가 백 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음에도 살아 있는 것에는 의문을 품고 있다.
눈깔은 완전 맛이 갔지만, 인지능력이나 이성은 아직 남아 있는 모양인데-
“아니, 그따위 것은 신경 쓰지 않겠다. 환영을 보고 있는 거라도 상관없어……!”
-라고 생각하자마자 이성을 포기해 버리는군. 나도 긴장 속에서 방패를 들어 올렸다.
쿠르릉, 하는 마력강화 특유의 천둥소리가 울려 퍼지며 메르세데스의 몸에 마력의 빛이 휘감겼다.
예전과는 다르게 시작부터 마력강화를 쓴다. 이렇게 되면 이쪽도 아낄 필요는 없겠지.
-쿠르릉!
나도 마력강화를 발동하고, 곧바로 달려드는 메르세데스의 검을 받아내었다.
조건도 동등한 덕분에 제법 잘 받아냈다고 생각했지만, 강한 충격과 함께 내 몸이 살짝 뒤로 밀렸다.
하긴, 서로 마력강화가 없는 상태에서의 기본 스펙부터 저쪽이 위였으니까. 당연한가.
게다가 템빨인 나와 다르게 마력강화의 수준 자체도 저쪽이 더 높은 것 같다.
-콰광!
메르세데스가 내 검을 위로 쳐올림과 동시에, 폭발이 발생했다.
서로의 마력이 부딪히며 생긴 반발력이 만들어낸 여파다. 마력강화 사용자끼리는 흔한 일이라던가.
검을 쳐낸 메르세데스는 그대로 카이트 실드 형태를 한 방패의 끄트머리로 내 가슴께를 노렸다.
뾰족한 방패인 만큼 저 공격의 위력은 육중한 도끼질에 가깝다.
-콰각!
내 방패로 메르세데스의 방패를 막아낸 뒤, 반댓손의 검을 휘둘러 목을 노린다.
메르세데스는 날밑을 이용해 익숙한 듯 막아냈고, 그대로 손목과 어깨를 놀려 소드 레슬링으로 이어갔다.
근력에 차이가 있는 만큼, 이런 대치가 이어지면 당연히 내가 불리하다.
[혼신]
버프를 발동해 근력을 증폭시켜, 억지로 대치 구도를 깨버렸다.
그리고 뒤이어 놀고 있던 다리를 휘둘러, 기습적으로 킥을 날렸지만- 바로 막혔다.
메르세데스는 다시 방패를 휘둘러, 뻗어진 내 다리를 그대로 내려찍으려 시도했다.
-콰앙!
단순한 공격이었기에 피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방패가 내려찍은 지면이 쩌적, 갈라졌다.
자세가 낮아진 메르세데스를 향해 측면에서 검을 휘둘렀지만, 바로 방패에 막혔다.
메르세데스는 그대로 방패를 앞세워 거리를 좁혔고, 매우 가까운 거리에서 검을 찔러넣었다.
나도 방패를 이용해 막아낸 뒤, 다시금 이어진 초근접에서의 힘겨루기.
“눈깔 봐라.”
여전히 살기가 번들거리는 눈으로 나를 노려보는 메르세데스에게 한 마디 던져 보았다.
“흐으!”
메르세데스는 이를 악문 채 어정쩡한 소리를 뱉으며, 격하게 몸을 비틀어 공격했다.
대체 왜 이렇게 흥분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한테는 잘 된 일이다.
저번 결투 때와 비슷하다. 머리에 피가 너무 쏠린 탓에 움직임이 과격하고 단조로워졌다.
이건 무조건 내가 이긴다.
**
나도 7층 때보다 여러모로 강해지긴 했지만, 여전히 메르세데스는 버거운 상대다.
근력과 순발력 양면에서 월등하고, 기본적인 검술 실력도 우위, 마력강화의 숙련도마저 역시 압도적.
하지만 승패는 그런 스펙적인 우월함에서 갈리지 않는다. 이번에도 결투 때와 똑같은 결말로 이어졌다.
-콰앙!
내 방패에 얼굴 측면을 거하게 얻어맞은 메르세데스가 그대로 나가떨어졌다.
내 마력강화는 백 퍼센트 아이템에 의존하는 템빨이지만, 그래서 오히려 우월한 점이 하나 있었다.
바로 지속력, 내 체력과 지구력에 관계없이 일정한 수준을 유지한다는 점이다.
메르세데스는 싸움이 이어지고 부상이 늘어나며, 점점 마력강화를 유지하기 힘들어져 갔다.
현 시점에 이르러서 그 출력은 초반의 절반 정도, 내 제한적 마력강화와 거의 비슷한 수준까지 떨어졌다.
그렇게 스펙이 거의 동등하게 맞춰졌으니, 내가 우위를 점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나가떨어진 메르세데스를 추격해 허리춤의 손도끼를 휘둘렀다.
“크윽!”
막아내지 못하고 한 번 더 공격을 허용한 메르세데스가 뒤로 크게 물러났다.
내겐 [혼신]과 [약점 간파] 같은 다양한 스킬, 그리고 투척을 비롯한 다양한 무기술이 있다.
거기에 부상을 입으면 더 강해지는 최상급의 전투 지속 능력까지 갖추고 있다.
메르세데스가 단기 결전으로 끝낼 수 있는 스펙 차이를 갖지 못한 시점에서, 싸움의 결과는 정해져 있었다.
“이, 더러운……더러운 인간 주제에, 죽인다, 반드시 죽이겠다!”
그걸 모르는 것도 아닐 텐데, 이렇게까지 악을 쓰고 덤벼드는 이유는 뭘까.
“못 죽인다니까.”
-콰직!
둔기를 휘둘러, 달려드는 메르세데스의 한쪽 팔을 쳤다. 부러지는 손맛이 있었다.
하지만 메르세데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덤벼들었다.
역시 상태가 이상하다.
무슨 불구대천의 원수라도 만난 것처럼, 제 몸을 신경 쓰지도 않고 덤벼온다.
처녀 엘프의 귀를 잘라버린다는 게 무척 심한 일이라는 건 들어서 알고 있지만, 그 원한만이 전부가 아닌 것 같다.
심지어 아까 전에는 환영을 보고 있는 거라도 상관없다고 외치지 않았던가.
-쾅!
발길질로 메르세데스를 멀리 날려버렸다. 허리부터 나무에 부딪힌 녀석은 제대로 일어서지 못했다.
마나를 전부 다 썼는지 마력강화도 끊겼고, 사지 중 멀쩡한 부위가 한 군데도 없다.
나처럼 재생 능력이나 HP에 따른 시스템의 보정도 없는 한,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도 힘들 거다.
-드드득, 드득!
하지만 메르세데스는 부러진 팔 대신 어깨로 몸을 지지하고 억지로 일어섰다.
검을 쥐고 있기도 힘들어 보이는데, 비틀거리면서도 내게 달려든다.
“아아아아아아!!”
이제는 아예 악쓰며 소리까지 치고 있었다. 나는 다시 발길질했다.
-쿵!
또 한번 나가떨어진 메르세데스는 이마와 무릎으로 땅을 문대가며 힘겹게 다시 일어섰다.
지저분해진 얼굴에서 살기는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남은 건 오직 비탄과 원망.
흙먼지로 칠갑된 메르세데스의 뺨에서는 이제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네놈 때문에……네놈 때문이다, 다 네놈 때문이야……!”
이렇게까지 누구한테 원망받아 보는 건 정말로 처음이다.
솔직히 당황스럽다.
아니, 좀 이유는 말해주고 원망해야 하는 거 아닌가?
오해일 수도 있잖아.
“네놈 때문에, 전하는……!”
오, 마침 맥락을 파악할 키워드가 나왔다.
전하라면 그 하이엘프 왕자 놈을 말하는 거겠지, 하지만 나는 그놈에게 딱히 뭔가 한 적이 없다.
기껏해야 처음 만났을 때 팔을 꺾어버린 거랑, 여자 뒤에 숨느냐고 야유한 것 정도?
이 정도로 원망받을 만큼 거창한 짓은 전혀 안 했다. 귀 자른 거랑 관계가 있는 것 같지도 않고.
오케이, 일단 제압한 다음에 무슨 이야기를 하나 들어 보자.
“좀 자라.”
나는 그대로, 메르세데스의 명치에 플라잉 니킥을 꽂아 기절시켰다.
**
나는 기절시킨 메르세데스를 다크엘프 마을로 끌고 갔다.
이야기를 들어보려면 일단 정신을 차리도록 회복을 시켜야 할 테고, 혼자서는 못 하는 일이니까.
정확히는 회복은 시킬 수 있는데, 회복돼서 일어난 이 녀석이 날뛰면 다시 제압하기 힘들 것 같았다.
나는 펜던트를 재충전하기 전에는 다시 마력강화를 사용할 수 없으니까.
메르세데스는 침상에 눕혀진 후, 세 시간 정도가 지나고 나서야 눈을 떴다.
“여, 여기는……”
“어, 일어났냐.”
정신을 차린 메르세데스는 나를 보자마자 눈을 부릅뜨고 검을 뽑으려 했다.
“움직이지 마라, 혹시 또 지랄발광할까 봐 엘레노어한테 부탁해서 마법을 잔뜩 깔아 놨거든.”
당연하지만 검과 갑옷은 싹 다 압수해 놨고, 침상 근처에는 제압용 마법을 잔뜩 깔아 놓은 상태다.
메르세데스는 검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경계심이 가득한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처음에는 그냥 죽일까 했는데, 이것저것 궁금한 게 좀 생겨서.”
“네놈에게 말해줄 건 아무것도 없다. 죽여라.”
“안 물어봤는데 니가 먼저 지껄였잖아. 뭔진 모르겠는데, 내 탓이라며?”
아무래도 말실수였는지, 메르세데스는 ‘큿’ 하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돌렸다.
붙잡힌 엘프 여기사가 ‘큿, 죽여라’ 라고 하는 걸 현실에서 보게 될 줄은 몰랐네.
“나는 몰랐는데, 예전 그 왕자놈이 왕위를 계승했다며? 네가 말한 전하가 걔 맞지?”
“……”
“나 때문에 그 전하가 어떻게 된 것처럼 말했잖아, 엘레노어한테 그 얘길 하니까 그러더라고.”
메르세데스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정확하게 짚은 모양이다.
“다크엘프에게 선전포고를 한 건 그놈이라고, 엄청 뜬금없고 이상한 타이밍에 싸움을 걸었다던데.”
두 엘프 진영은 8층 시점에서부터 사실상 전쟁 중이었지만, 정말로 전쟁이 선포된 것은 왕이 바뀐 이후라고 들었다.
선전포고를 하고 본격적으로 전쟁을 시작한 건 선대 왕이 아니라, 그 어설퍼 보이던 왕자놈이었던거다.
그 정확한 이유는 아무도 모른다. 서로 간의 교류가 끊긴 지도 백 년이 지났으니, 당연한 일이긴 하지만.
그 놈과 약혼 관계로 오래 알고 지냈던 엘레노어의 말에 따르면, 무척 황당했다고.
“네 꼬락서니도 어째 좀 이상하고, 너희 쪽에서 뭔가 일이 있었던 거 아니냐?”
메르세데스가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막 던져 봤는데, 아무래도 맞는 모양이다.
“어디가 내 탓인지, 좀 들어 보자.”
메르세데스도 분명 이 에픽 퀘스트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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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계승된 것
나한테 사람을 심문하는 기술 같은 건 없다.
하지만 메르세데스 본인이 뭐든 말하고 싶어하는 모습이었기에, 설득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다 네놈 때문이다. 네놈 때문에, 전하가 이상해져 버린 거야……!”
이야기의 시작은 당연히 나를 향한 원망이었다. 이 부분은 대충 듣고 흘려넘겼다.
“원래 전하께선 평화를 사랑하는 온화한 분이셨다. 타고난 성정부터 싸움과 분쟁에는 맞지 않으셨지.”
“걔가? 선전포고를 했는데?”
“네놈은 전하에 대해 전혀 모르니까 그렇게 지껄일 수 있는 거다! 원래는 그런 분이 아니셨어!”
아차, 내 욕은 잘 넘겼는데 너무 어이가 없어서 바로 딴죽을 걸고 말았다. 이러면 안 되는데.
내 딴죽에 제대로 긁힌 메르세데스는 그 왕자놈이 얼마나 온화하고 상냥한지 떠들기 시작했다.
이것도 거의 다 흘려듣긴 했지만, 대충 들어도 엄청나게 콩깍지가 씐 이야기였다.
하지만 아주 틀린 말은 아닐 거다.
용맹한 타입이 취향인 엘레노어가 비실비실하고 유약하다고 매번 까 댔으니까.
“하지만 왕위에 오르고 난 뒤부터, 전하는 마치 다른 사람처럼 변해버렸다. 눈빛부터 완전히 달라지셨어.”
“총명하게 빛나던 눈이 빛을 잃고, 선대 왕을 연상시키는 메마른 감정만을 말했다.”
“과거의 당신께선 매일같이, 어떻게 해서든 이 지긋지긋한 분쟁을 끝내겠다고 말씀하셨는데……!”
그러니까 간추리자면, 왕위를 계승하자마자 사람이 확 달라졌다 이건데.
“전하께선 내가 네놈과의 결투에서 패배한 것이 전쟁의 시발점이었다며, 내게 추방령을 내리셨다.”
이건 예상대로다. 결투 건으로 트집을 잡혀서 내쫓긴 것.
“나는 어떻게든 전하를 되돌리려 애를 썼지만, 검밖에 다룰 줄 모르는 내겐……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그냥 왕이 되니까 본색을 드러낸 거 아니야? 너는 거슬리니까 팽당한 거고.”
“전하께선 그런 분이 아니라고 몇 번이나 말하지 않았느냐! 인간족은 정말 머리까지 글러 먹었군!”
이게 누구보고 머리 타령이야, 머리가 정상이라면 이렇게 생각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
“전하께선 이미……내게 결투의 책임을 묻지 않겠다고 말씀하셨단 말이다.”
메르세데스는 제 잘린 귀를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었다.
“내가 더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라며, 패배는 신경 쓰지 말라며, 잘린 귀도 고칠 방법을 찾아주겠다고……”
푸른빛 두 눈이 그립다는 듯 과거를 떠올렸다.
“백 년이 지날 때까지 고칠 방법을 못 찾으면, 책임져 주겠다고……하셨는데.”
메르세데스의 목소리가 쥐꼬리만 하게 작아졌다. 얼굴에는 조금 붉은빛이 감돌았다.
얼씨구, 지랄을 하세요.
둘이서 아주 천 년의 순애 서사를 만들고 계셨구먼, 커뮤니티 썰풀이 탭에다가 올리면 반응 좋겠어.
그래도 이제 대충 이해는 되네, 왜 그렇게 나를 원망했는지도 알 것 같다.
아마 메르세데스도 그게 진짜로 내 탓이라 믿는 건 아닐 거다. 일종의 현실도피였겠지.
한 가지 대상을 정해놓고 그것에 몰두하는 것으로, 감정을 덮어버리려 한 것이다.
무슨 마음인지 안다.
모를 리가 없지.
하지만 이런 도피는 진짜 문제를 직시하기 어렵게 만든다. 왕자가 변한 원인은 뻔하다.
왕위를 계승한 것.
그렇게 결론을 내리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퀘스트 알림이 눈앞에 떠올랐다.
**
[에픽 : 다크엘프의 서 - 여왕의 명]
설명 : 백 년간의 전쟁 속에서 다크엘프는 점점 열세에 몰렸습니다.
배움도 성장도 빠른 인간족의 왕국은 백 년 전과는 비교되지 않을 만큼 강해졌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인간을 좋아하는 다크엘프들이 왕국군과의 싸움에서 망설임을 얻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게다가 오만하고 건방진 하이엘프들도 호전적으로 덤벼 오고 있으니, 다크엘프들에겐 쉴 시간이 없습니다.
전쟁을 지휘하며, 모든 것을 책임지고 있는 여왕에겐 더욱 그렇습니다.
당신은 단독 행동을 통해 이 전쟁의 배후에 대한 미심쩍은 정보를 습득하였습니다.
이를 잘 파고들어 보면, 여왕의 어깨에 지워진 짐을 덜어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경고 : 해당 퀘스트의 난이도는 매우 높습니다, 25인 이상의 파티로 진행하시기를 권장합니다.)
[퀘스트 목표]
1. 비밀을 파헤치기.
2. 흑막을 밝혀내기.
3. 전쟁을 종결시키기.
**
나는 엘레노어를 찾아가 메르세데스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그대로 말해주었다.
쓸데 없는 군더더기를 빼면 간단하게 요약할 수 있는 이야기였으니, 오래 걸릴 것도 없었다.
“확실히 이상하군, 선전포고보다도 놈이 자신의 제1기사를 추방해 버렸다는 게 무척 이상해.”
좋으나 싫으나 왕자와 메르세데스를 오래 알고 지낸 엘레노어가 이렇게 말할 정도다.
“하지만 그대여, 그걸 눈으로 직접 확인하겠다니? 그게 무슨 소리냐?”
엘레노어는 이미 채비를 마친 나를 향해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말 그대로야. 내가 직접 봐야겠어.”
나는 하이엘프의 영역에 침입해, 직접 왕자 놈의 면상을 보고 올 생각이었다.
갱신된 퀘스트 목표와 설명은 이게 이 길었던 진영 퀘스트의 마지막이 될 것임을 알리고 있었다.
그렇다면 더 이상 망설일 필요는 없다. 가장 단순하고 빠른 방법으로 퀘스트를 깬다.
“너무 위험하다, 아무리 그대라도 혼자서 놈들의 진영에 쳐들어가겠다니!”
엘레노어는 인상을 한껏 찌푸리며 소리쳤다.
드물게 보이던 걱정하는 표정과는 좀 다르다. 뭔가 짜증을 내는 것처럼 보인다.
“혼자 아니야.”
하지만 나는 엘레노어가 말한 것처럼 혼자서 쳐들어갈 생각은 없었다.
“메르세데스랑 같이 가기로 했어, 자기도 그 왕자 놈 일 때문에 답답했던 모양이던데?”
거창한 설득도 필요하지 않았다. 메르세데스는 아직도 왕자놈을 되돌릴 방법을 찾고 있는 모양이었으니까.
인간족 따위와 힘을 합치는 것은 내키지 않지만, 전하를 위해서라면 악마와도 손잡을 수 있다나?
메르세데스가 알려준 루트를 따라 잠입하면 전투는 거의 치르지 않고 왕자놈의 면상을 확인할 수 있다.
솔직히, 나랑 메르세데스가 작정하고 힘을 합치면 정면돌파도 가망이 없는 건 아니다.
얼굴을 본다고 뭐가 해결되는 건 아니지만, 대충 잡아놓고 칼로 쑤시면 비밀인지 뭔지도 다 불지 않겠어?
“하지만, 하지만……”
엘레노어는 답지 않게 자신없는 모습으로 입술을 우물거렸다. 어느 때보다 상태가 안 좋아 보인다.
가만히 보면, 계속 그랬다. 바라는 대로 계속 함께 자 줬건만, 엘레노어의 눈에 담긴 별빛은 점점 흐려지기만 했다.
분명히 잘 자는 것 같은데도 항상 피곤해 보였고, 예전과 같은 자유분방함과 당당함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이 그 최고조다. 이유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모르겠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내가 그대를 어떻게 말리겠어.”
엘레노어는 혼자 혼란스러워하다가, 이내 힘없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나도 모르게 ‘가지 않겠다’ 고 말할 뻔했을 정도로- 처연한 모습이었다.
“……”
아니, 신경 쓰지 말자. 아무리 사람처럼 보여도, 저건 결국 영혼 없는 깡통.
NPC를 신경쓰느라 이렇게 중요한 퀘스트를 내팽개친다니, 말도 안 되지.
절대 멈추지 않기로 다짐했잖아.
**
메르세데스에게 장비를 돌려주고, 펜던트를 충전한 뒤 곧바로 길을 나섰다.
처음에는 조금 걱정했지만, 메르세데스의 머리 위에는 제대로 우호를 의미하는 녹색 콘솔이 떠 있었다.
확실하게 아군으로 합류했다고 생각해도 괜찮을 것이다. 시스템은 언제나 정직하니까.
“여기도 그동안 많이 바뀌었네.”
7층에서의 대결 이후로 처음으로 와보는 대수림 안쪽은 역시 전쟁으로 완전히 갈아엎어진 상태였다.
하이엘프가 그렇게 중히 여긴다던 자연은 죄다 깎여 나갔고, 널찍한 길이며 감시탑 같은 것이 요란하게 설치되어 있다.
“전하께서 직접 지시를 내려 바꾼 것이다. 우리의 추억이 담긴 사과나무도 가차 없이 베어 버리시더군.”
메르세데스가 구겨진 표정으로 또 추억담을 이야기했다. 관심 없는 이야기라 그냥 흘려들었다.
그렇게 두니 이야기가 아무렇게나 흘러, 이제는 전쟁의 원인이라고 할 수 있는 인간족 왕국군을 욕하고 있었다.
“세계수에 대한 존중은 조금도 없이, 탐욕에 빠져 영토의 권리를 주장하는 모습은……실로 미개했지.”
그러던 중, 멀리서 저벅거리는 다수의 발소리가 들려 왔다.
나도 메르세데스도 감각이 아주 예민한 편이기에, 곧 발소리의 정체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네가 욕하는 거 듣고 왔나 보다, 야.”
하이엘프 진영을 노리는 왕국군 병단이 이곳까지 침입해 있었다. 그것도 아마 상당한 정예 병력이.
“흥, 마침 잘 됐군. 어차피 네놈도 엘레노어의 편에서 싸우고 있겠지? 여기서 적을 줄여두고 갈까.”
“미쳤냐, 잠입한다며. 여기서 애먼 놈들이랑 싸워서 어쩌려고?”
“내 실력을 뭐로 보는 거지, 평범한 인간족 병사 따위는 소리도 내지 않고 베어버릴 수 있다.”
추방당한 뒤로 어지간히 고생을 많이 했나 보다, 7층에서 보던 거랑 성격이 완전 딴판이 되어 있네.
“실력 운운하면서 뒷짐 지고 싸우다가 쳐발린 어떤 년이 갑자기 생각나네.”
“……”
“정신 좀 차려라, 너희 전하 생각은 안 하냐?”
단번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된 메르세데스는 뽑았던 검을 조용히 집어넣었다. 이제야 말이 좀 통하네.
우리는 그대로 왕국군 병사들을 내버려두고, 하이엘프의 왕성을 향한 잠입을 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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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하이엘프의 왕
엘레노어에게 받았던 망토를 활용해 [은신]을 발동하고, 조용히 탑을 타고 올라갔다.
탑 꼭대기에서 주변을 경계하던 하이엘프는 내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
메르세데스는 적당히 기절만 시키라고 했지만, 아쉽게도 나한테 그런 재주는 없다.
-푹!
경계병의 입을 틀어막고 목을 찔러 숨통을 끊었다. 하지만 경계병은 언제나 2인 1조.
“뭣, 누구냐, 악!”
뒤늦게 나를 발견한 경계병의 입을 틀어막고, 그대로 대번에 목을 꺾어서 죽여버렸다.
아슬아슬했네, 하마터면 들킬 뻔했다.
탑의 경계병을 제압한 뒤에는 다시 내려와, 반대쪽 탑을 제압한 메르세데스와 합류했다.
메르세데스는 나를 보자마자 인상을 찌푸렸는데, 아무래도 경계병을 죽여버렸다는 걸 알아차린 것 같았다.
매우 불쾌해 보이는 눈빛이었지만, 상황상 어쩔 수 없다는 건 알고 있는지 따지려 하지는 않았다.
이 잠입 루트는 전투를 최소화할 수 있지만, 아예 피를 묻히지 않을 수 있을 만큼 편한 것도 아니니까.
아무튼 그렇게 각 탑을 정리하고 난 뒤에는, 메르세데스가 준비한 장비를 활용했다.
소형 글라이더같이 생긴 묘한 물건이었는데, 원리는 모르겠지만 잠시간 활공이 가능하다고.
“가지.”
활공 장비를 장착하고 그대로 탑에서 뛰어내렸다. 감시탑을 모두 정리했기 때문에 비행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다.
그대로 다크엘프의 마을처럼 요새화된 대산림을 공중에서 쭉 가로질러, 하이엘프의 마을 안쪽으로 손쉽게 입성했다.
그 뒤로는 더욱 간단했다. [은신]을 발동하고 속도를 살려 쾌속 질주, 왕이 거하고 있는 성으로 침투한다.
-으적.
성의 창틀을 도끼로 깨부순 뒤, 사뿐히 안으로 내려앉았다.
성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마력감지를 펼쳤다. 그리고 동시에 어마어마한 기척이 느껴졌다.
“장난 아니네, 이게 세계수?”
7층에서 느낄 수 있었던 세계수의 압도적인 마력량에 저절로 숨이 막힌다.
뭐라고 해야 하나, 이게 몬스터가 아니라 그냥 나무에서 나오고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천 년 전에 비하면 한참 약해진 상태다. 우리의 세계수는 인간족이 감히 넘봐도 될 만한 존재가 아니야.”
메르세데스는 세계수의 마력을 느끼고 움찔거리는 나를 보며 혀를 찼다. 뭐, 말은 나도 동의한다.
7층에서는 그나마 멀리서 봤었지만, 이 성은 세계수가 있는 자리에 지어진 거니까- 확실하게 실감 난다.
하이엘프들은 이걸 그냥 지키고만 있지만, 인간의 손에 넘어가면 분명히 어떤 식으로든 이용될 텐데.
이만한 마력의 덩어리가 작정하고 이용되면, 분명 무시무시한 결과를 낳을 거다.
이건 결코 어떤 집단이나 개인이 사적으로 이용해서는 안 되는 미친 물건이다.
“핵폭탄을 처음 본 사람들이 이런 기분이었으려나.”
“핵폭탄?”
“그런 게 있어, 그래서 왕은 어디에 있는 건데?”
나는 잠시 삼천포로 빠진 생각을 되돌렸다. 메르세데스는 손가락으로 저편의 문을 가리켰다.
세계수와 직접 연결된 옥좌가 자리한 곳, 하이엘프 왕의 알현실.
-끼이익.
그 문이 저절로 움직여 열렸다.
**
나와 메르세데스는 재빨리 근처의 물건 뒤로 몸을 숨겼다.
하지만 열린 문 너머에서 누군가 나오려는 낌새는 전혀 없었다. 문 안에서 느껴지는 기척은 하나뿐.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기척이다. 7층에서 만났던 그 왕자 놈이 저 안에 있는 건 분명하다.
그런데 문은 대체 왜 혼자 열린 거지. 하이엘프식 자동문 센서가 오작동을 한 건 아닐 테고.
-들어와라.
“뭐야.”
머릿속에서 대뜸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게 뭐야, 존나 이상한, 그보다 나한테 말한 건가?
숨었던 자리에서 슬금슬금 움직여 메르세데스를 쳐다보자, 나와 같은 목소리가 들린 눈치였다.
우리는 서로에게 동의를 구하듯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 활짝 열린 문 앞에 섰다.
-안으로, 들어와라.
목소리가 말하는 대로 알현실 안으로 들어서자, 저 멀리 옥좌에 앉은 왕의 모습이 보였다.
“전하.”
메르세데스가 처연한 표정으로 그를 불렀다. 나는 어이가 없었다.
그러니까, 저게 7층의 그 왕자 놈이라고?
분명 생긴 건 똑같다. 딱 봐도 싸움은 존나 못 하게 생긴 기생오라비 외모.
하지만 눈빛이 달라도 너무 다르다. 선대 다크엘프 여왕보다 더 메말라 있는 눈빛.
“그렇게 살금살금 오지 않아도……언젠가 이곳에 부를 생각이었다. 가까이 와라, 셋 모두.”
하이엘프 왕은 이번에는 정체불명의 텔레파시가 아닌 육성으로 말했다.
그런데, 셋이라니?
“들켰나.”
나는 내 배후에서 불쑥 튀어나온 강렬한 기척에 경악했다.
“너 뭐야, 어디서 튀어나왔어?”
그림자에 휩싸여 나타난 엘레노어는 씁쓸한 표정으로 내 발밑을 가리켰다.
“그대의 그림자에 길을 뚫어 놓았지, 그대를 말릴 방법이 이것 말곤 떠오르지 않았거든.”
간담이 서늘했다. 엘레노어가 그림자 마법의 달인이라는 건 알지만, 이런 게 가능할 줄이야.
7층 초입에서 보여줬던 소환의 응용이겠지, 사용하기에 따라 이건 어마어마한 암살 기술이 되는 거 아닌가.
“너무 그런 표정으로 보지 마라, 그대여. 지금 놀라야 할 부분은 여기가 아니지 않나.”
엘레노어는 그렇게 말하며, 손가락을 펴 왕좌에 앉은 하이엘프 왕을 가리켰다.
“왕좌에 앉은 저것은 그대의 잠입도, 나의 그림자 마법도 모두 꿰뚫어 보았다.”
“백 년이 지났다고 한들, 내가 아는 그 머저리에겐 죽었다 깨어나도 불가능한 일이다.”
“마법에는 조금도 소질이 없는 녀석이었거든, 그런데- 저기 앉은 저건 대체 뭐란 말이냐?”
엘레노어는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저기에 앉아 있는 건 절대 7층의 그 왕자 놈이 아니다. 생긴 것을 제외한 모든 점이 다르다.
나는 이번 에픽 퀘스트의 목표를 다시 떠올렸다.
[퀘스트 목표]
1. 비밀을 파헤치기.
2. 흑막을 밝혀내기.
3. 전쟁을 종결시키기.
비밀을 파헤치고, 흑막을 밝혀내어, 전쟁을 종결시키기.
이런 목표가 생겼다는 건, 곧 파헤쳐야 할 흑막과 비밀이 존재한다는 의미다. 그게 저거겠지.
“내가 누구인지 궁금한가, 그렇다면 가까이 와라. 모두 말해 주겠다.”
어서 들어오라는 듯 손짓하고 있는 왕을 향해, 나는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갔다.
**
내가 앞으로 나서자, 엘레노어와 메르세데스도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우리를 들여보낸 문이 ‘끼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쿵 닫혀버렸다. 이건 예상대로다.
나도 ,메르세데스도, 엘레노어도, 문이 닫혔다고 해서 꼼짝없이 갇힐 만큼 약하지 않다.
“반갑다, 고결한 기사 메르세데스. 아름다운 그림자 엘레노어. 그리고- 이름 모를 인간이여.”
하이엘프 왕은 왕좌에서 내려와, 우리를 향해 조금씩 다가왔다.
“인사를 하는데 대답이 없군.”
“어, 반갑다.”
“그래, 시원한 대답이 듣기 좋군.”
하이엘프 왕은 우리를 보며 비식 웃었다. 역시 저건 생긴 것만 저렇지, 아예 다른 사람이다.
“이쪽도 이름을 밝히지, 내 이름은 엘'로휀, 그대들이 만나러 온 엘뤼온의 아버지이다.”
그럴 줄 알았지, 역시 내용물은 다른 사람이었군. 예상대로 선대 왕이 뭔가 술수를 부린 거였어.
그런데, 엘레노어는 하이엘프 왕이 밝힌 이름을 듣고 인상을 찌푸렸다.
“선대 하이엘프 국왕의 이름은 분명 엘'로나벨이었는데……?”
나는 고개를 돌렸다. 말없이 검을 빼들고 있는 메르세데스도 크게 당황한 눈치였다.
“이런, 착각하지 마라. 나는 엘뤼온의 아버지이지만, 동시에 엘'로나벨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엘로휀은 우리를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나는 하이엘프 전체의 아버지다.”
그 순간, 막대한 마력이 파도처럼 넘쳐흘렀다.
-쿠궁!
이 일대를 장악하고 있던 세계수의 거대한 마력이, 의지를 갖춘 것처럼 넘실거리며 진동을 만들어 내었다.
“과거 포레스트 엘프가 자신들을 하이엘프라 칭하기 시작한 그때부터, 나는 매 순간 모두의 왕이자 아버지였다.”
나는 긴장 속에서 검을 뽑았다. 그리고 언제든 마력강화를 할 수 있도록 펜던트를 손에 쥐었다.
왕은 우리를 보며 하하, 하고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이 상황이 아주 재미있다는 모습이었다.
아주 대놓고 흑막이라고 말하는 꼬락서니다. 하지만 대체 왜 이 타이밍에 본색을 드러냈단 말인가.
“세계수가 혼을 순환시키는 장치라는 사실은 알고 있겠지, 그렇다면 그 순환이 언제부터 망가졌는지도 알고 있겠군.”
“사실 순환의 굴레는 망가지지 않았다. 그저 내 혼을 순환시키기 위해 전력을 다하고 있을 뿐이지.”
“모든 하이엘프의 왕은 정식으로 왕위를 계승하고, 왕홀을 쥐고 왕좌에 앉은 순간에 나와 대체된다.”
왕은 여전히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다.
“다들 말이 없군, 이해하기 힘들었나?”
저 단순한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할 바보는 어디에도 없다. 그냥 어이가 없어서 말이 안 나올 뿐이다.
“이해가 안 되는 건 하나야, 그걸 왜 이제 와서 우리한테 떠벌리고 있는지.”
내가 인상을 쓰며 말하자, 하이엘프 왕은 또다시 피식거리며 대답했다.
“왜겠나.”
놈은 웃으며 굳게 닫혀버린 문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다들 순순히 내가 부르는 대로 가까이 와 줬기 때문이지.”
그래, 떠벌려도 아무 상관이 없을 것 같으니까 떠벌린 거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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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종족 특성
최소한 수천 년 이상을 암약하고 있었을 흑막이 스스로 정체를 드러냈다.
이유는 단순하다, 정체를 드러내도 아무 상관 없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그렇다면, 어째서일까.
어째서 저 녀석은 이 순간에 정체를 드러내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한 걸까?
추측해 보자면, 둘 중 하나다.
우리의 입을 완전히 막아버릴 자신이 있거나, 정체가 들켜도 상관이 없을 만큼 목표가 코앞이거나.
우리는 녀석의 정체는 알지만, 녀석의 진짜 목적은 전혀 알지 못한다.
역대 하이엘프 왕이 모두 저 녀석 하나였다면, 왜 녀석은 다크엘프와 평화 협정을 맺으려 했던 걸까.
왜 결혼을 통한 평화 협정이 어그러지고, 수십 년이 지난 뒤에 다짜고짜 전쟁을 선포한 것일까.
단순히 연명이 목적이라면, 굳이 세계수를 장악할 필요는 어디에도 없다. 엘프는 원래 영생하는 종족이니까.
-쿠르릉!
펜던트를 사용해 마력강화를 발동했다. 어쨌든 저 녀석이 흑막이라면 여기서 처치하면 그만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검을 쥐고 앞으로 돌진하려던 순간, 세계수가 다시 한번 마력을 내뿜었다.
그리고 내 발은 그대로 멈추고 말았다.
마법적인 방해 효과를 받은 게 아니다. 그렇다고 공포나 두려움 때문에 발이 멈춘 것도 아니었다.
그냥, 머리가 멈췄다.
지금까지 느껴지고 있던 해일 같던 마력량이 전부가 아니었다는 사실에, 어이가 없는 전력 차이에.
저걸 어떻게 해야 이길 수 있을지 전혀 생각이 안 나서, 순간 움직임을 멈추고 말았다.
씨발, 저게 대체 뭐야.
하이엘프 왕의 머리 위에 떠오른 콘솔의 색깔이, 새까맣다 못해 조그만 블랙홀처럼 보인다.
그냥 저 모양의 구멍이 허공에 뚫려 있는 것 같다. 너무 어두워서 눈이 착시를 일으키고 있는 거다.
들고 있는 검이 그냥 나무토막처럼 느껴지고, 갑옷과 방패는 종잇장처럼 느껴진다.
“이런, 어깨에 너무 힘이 들어갔군.”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 어깨에 닿은 손의 감촉, 나는 재빨리 검을 휘둘렀다.
-후웅!
하지만 공격은 허공을 갈랐다. 순식간에 내 뒤편으로 이동했던 놈은 다시 왕좌로 돌아가 있었다.
이게 대체 뭐야, 순간이동?
마력강화를 사용한 내 반응속도를 능가하는 전조 없는 이동기라고? 말이 되는 건가?
“왜 네가 그렇게 긴장하고 있나, 이름 모를 인간족 검사. 내 목적은 너를 잡아먹는 것이 아니다.”
세계수의 마력을 등에 업은 하이엘프 왕이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웃었다.
“자, 아름다운 그림자여. 네 왕관을 내놓아라.”
“왕관……?”
“그래, 그 마지막 한 조각만 있으면……너희를 해할 필요도 없다.”
놈은 이번에도 순식간에 이동해, 엘레노어의 앞에 나타났다. 나는 다시 검을 휘둘렀지만, 맞지 않았다.
“세계수를 장악하는 데 필요한 장치는 셋, 그 마지막이 왕관이다. 너희는 그것만 내놓으면 돼.”
정체를 드러낸 이유가 이거였나. 왕관을 가진 엘레노어가 자신 앞에 떡하니 나타났으니까.
확실히, 그게 목적이라면 결혼으로 평화 협정을 맺는 게 가장 쉬웠겠지.
그게 어그러지자 힘으로 빼앗기 위한 전쟁을 일으킨 거고- 아니, 그건 좀 타이밍이 이상한데.
전쟁을 일으키려면 진작에 일으켰어야 하는 거 아닌가? 애초에, 이만한 힘이 있으면 굳이 전쟁 따위-
“아하.”
- 아니, 그런 거구나. 처음부터 이만한 힘을 갖고 있던 게 아니었어. 백 년에 걸쳐서 얻은 거야.
이건 저 녀석이 쌓아올린 힘이 아니다. 백 년을 들여서 세계수의 힘을 다룰 수 있게 된 것뿐.
그리고 구태여 이 방 안으로 끌어들이려고 한 것도, 당연히 이유가 있었겠지.
“그 말을 듣고 순순히 왕관을 내줄 것 같았나.”
-콰과곽!
엘레노어가 손을 휘두르자, 그림자의 가시가 튀어나와 하이엘프 왕을 덮쳤다.
“그래, 내어주지 않을 줄 알았지. 하지만 너희의 의사 따위는 상관없음을- 왜 깨닫지 못했지?”
공간이동으로 가시를 피해낸 왕은 세계수의 마력을 끌어모았다. 요란한 마법진이 펼쳐졌다.
“실력 행사를 해야만 하나.”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막막했던 적이, 제대로 힘을 쓰려고 하고 있지만.
이제는 견적이 나온다.
어떻게 해야 이 어설픈 녀석을 이길 수 있을지.
**
얼타고 있던 메르세데스도 마력강화를 발동하고, 엘레노어도 그림자를 끌어올려 대비했다.
-우우웅!
하이엘프 왕의 손에서 만들어진 마법진이 발광하는 구체를 만들어 사방팔방으로 흩뿌렸다.
에메랄드 와이번이 있던 지하 던전을 연상시키는 공격이다.
구체 하나하나가 내 마나 총량만큼의 힘을 품고 있지만, 그 정밀함이나 밀집도는 그렇게 높지 않다.
-콰광! 콰과광!
나는 마력강화의 힘에 더해 [혼신]스킬을 발동해, 아슬아슬하게 공격을 피해 냈다.
엘레노어도 그림자를 이용한 이동 기술로, 메르세데스는 그냥 무식한 속도로 회피해 냈다.
하지만 구체는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쏘아진다. 이것만 피하다가 체력이 다 떨어지게 생겼다.
그러면 어쩔 수 없지.
“흐읍!”
배에 힘을 빡 넣고, [혼신]스킬로 내구 스탯을 높이고, 마지막으로 [철벽]까지 사용했다.
-콰광!
날아드는 구체를 피하지 않고 몸으로 받아버렸다. 폭발의 영향으로 전신이 찌릿거린다.
내 다중 내성을 뚫는 공격력, 거기에 폭발 지점에서 마력 폭풍이 휘몰아쳐 속을 진탕으로 만든다.
씨발, 내장만 따로 빼서 원심분리기에 돌리는 것 같다. 목으로 울컥 피가 올라온다.
하지만 부상을 감수하는 것으로, 마법 공격을 뚫고 상대와 거리를 좁히는 것에 성공했다.
“세계수의 마력은 별의 지맥에서 끌어올리는 것이다.”
-카강!
왕은 가볍게 배리어를 생성해 내 검을 막아내며, 무어라 떠들기 시작했다.
“모든 나무가 그렇듯이, 땅의 힘을 빼앗아 자신이 성장하는 것이지. 그렇기에 그 힘은 절대로 무한하지 않다.”
하이엘프 왕의 눈이 빛나고, 괴상한 열선이 나를 향해 쏘아졌다. 나는 재빨리 방패를 들었다.
-푸슉!
하지만 열선은 방패를 아무렇지 않게 관통해, 내 팔과 가슴팍을 꿰뚫고 그 자리를 열기로 지져버렸다.
“별의 지맥도 언젠가는 고갈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별은 벌써 밑천을 드러내고 있어.”
주절거리는 하이엘프 왕을 향해 거대한 그림자의 도끼가 내리쳐졌다. 엘레노어의 공격이다.
하지만 왕은 이번에도 순간이동을 사용해 가볍게 피해 냈다.
“미리 말해두겠지만, 이 말을 내 힘에 끝이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이지는 않았으면 좋겠군.”
이번에는 왕의 배후를 노리고 메르세데스가 검을 휘둘렀지만, 마찬가지로 빗나가 버렸다.
“아, 그러셔.”
나는 포션을 들이키며 들고 있던 검을 집어던졌다. 내 주특기를 펼칠 시간이다.
검은 당연히 빗나갔지만, 이미 내 손에는 새로 창이 들려 있다.
창도 빗나가고, 이어서 도끼를 휘둘러도 막히고, 방패를 던져도 빗나간다.
-촤라라라락!
하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인벤토리 안의 물건들을 쏟아내며 왕을 향해 달려들었다.
**
공격이 막히는 건 상관없다. 빗나가는 것도 상관없다. 상처를 입는 것도 상관없다.
아무리 요란하게 날뛰어도 통하는 공격은 하나도 없고, 상처가 벌어지며 피가 흐를 뿐이지만 상관없다.
내가 안간힘을 써서 덤벼들수록, 저 멍청한 녀석은 나를 얕잡아 볼 테니까.
-콰광!
쏟아낸 무기들이 산산이 조각나서 흩날린다. 하이엘프 왕이 귀찮다는 듯 손을 들어 올렸다.
“명을 재촉하는구나.”
막대한 마력이 모인 손아귀가 다가오는 것을 보며, 나는 소리쳤다.
“문을 부숴! 여기서 나가!”
메르세데스와 엘레노어는 내 외침에 곧바로 반응했다.
내가 시선을 끄는 사이에 두 사람의 움직임은 많이 자유로워진 상태였다. 하이엘프 왕은 뒤늦게 고개를 돌렸다.
저놈은 우리가 이 방에 들어온 뒤에야 문을 닫고, 다 이겼다는 듯 자신의 정체를 밝혔다.
그리고 녀석의 힘은 세계수에 의존하고 있다, 다른 존재의 힘을 아무런 제약 없이 행사할 수는 없을 터.
그게 아니라면, 본인이 전장에 나가서 죄다 쓸어버리고 엘레노어의 왕관을 빼앗았겠지.
그렇다면 추측해 볼 수 있는 제약은- 세계수와 연결된 왕좌가 있는 이 방 안에서만 힘을 쓸 수 있다는 것.
“도망칠 수 있을 줄 알았나.”
하이엘프 왕은 공간이동을 사용해, 도주하려는 엘레노어의 앞을 가로막았다. 내 추측이 맞았던 모양이다.
이 방 바깥에선 세계수의 힘을 자유롭게 쓸 수 없는 거다. 그러니 저렇게 급하게 막는 거겠지.
그런데 어쩌나, 사실 내 노림수는 탈출이 아니었는데.
내가 이렇게 만신창이가 되면서 시선을 끌고, 탈출하라고 외쳤기 때문에- 당연히 그게 노림수라고 생각했겠지.
힘에 취해서 상대를 얕보다가 엿 먹는 거, 그게 니들 종족 특성인가 보구나.
[라이트닝 차지]
[감각 증폭]
[약점 간파]
[혼신]
사용할 수 있는 버프 스킬을 모두 사용하고, 수없이 던져대던 무기 중 하나를 붙잡아 다시 내던졌다.
녀석에게 무식하게 달려들었던 이유도, 탈출하라고 외친 이유도, 모두 이걸 노리고 있다는 걸 들키지 않기 위해서.
내던져진 무기가 노리는 것은, 세계수와 연결된 하이엘프의 왕좌.
-콰앙!
전력으로 내던진 한 자루 창이 왕좌를 산산조각내는 모습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모든 하이엘프의 아버지이자 왕이라고 했나, 확실히 그런 것 같네.
어마어마한 힘을 갖고 있지만, 정작 중요한 실력은- 그 왕자 놈이랑 다를 게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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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탐욕의 뱀
범접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마력과, 그 마력을 무한에 가깝게 공급하는 세계수.
공격 한방한방이 마력강화를 발동한 내게도 치명적이며, 양심 없는 방어력과 딜레이 없는 텔레포트까지 사용한다.
시련의 탑이 지랄 맞은 게 어디 한두 번이냐만은, 아무리 그래도 이런걸 정공법으로 공략하라고 던져놓았을 리가 없다.
25인 기준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아마 내가 9층 평균 도전자보다 스무 배쯤은 더 셀 테니까.
-콰광!
“크헉!”
왕좌를 파괴하자마자, 엘레노어를 공격하려던 하이엘프 왕이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역시, 예상대로 왕좌가 놈의 약점이었다. 마력감지로 살펴보니, 단번에 숨이 끊어졌다.
놈이 사방팔방에 펼쳐두었던 마법진도 모두 사라졌고, 숨쉬기도 힘들던 마력의 격류 역시 잠잠해졌다.
“케헥.”
그리고 나도 거의 동시에 피를 토했다. 이 한 번으로 왕좌를 파괴하기 위해 너무 몸을 혹사했다.
제대로 맞은 공격은 몇 번 없었지만, 그 몇 번이 모두 치명적이었다.
급소를 피했기에 망정이지, 맞은 부위에 따라서는 그 자리에서 즉사했을지도 모른다.
아니, 시스템상 즉사는 안 하지 참.
“엘레노어, 문을!”
메르세데스가 엘레노어를 향해 소리쳤다.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린 엘레노어가 문을 향해 그림자를 날렸다.
-콰광!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산산조각났다. 왕좌를 파괴했으니 이제 문은 아무래도 좋지만.
지금은 문보다는 쓰러진 왕의 목을 베어서 마무리 짓고 싶은 타이밍인데- 몸이 제대로 안 움직인다.
마력강화가 저절로 해제되면서 온몸에 힘이 빠졌다. 출혈량도 장난이 아니고, 내장도 어떻게 된 것 같다.
그렇게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있던 때, 갑자기 발밑이 꺼지며 시야가 확 뒤집혔다.
“억, 뭐여, 씹.”
다음 순간, 나는 엘레노어의 양팔에 안겨 있었다. 그림자 마법으로 나를 불러온 것 같다.
“미안하다, 이 방법밖에 없었어. 어서 빠져나가자.”
“아니, 그보다, 확인 사살!”
“저자라면 방금 죽었다. 생명 반응이 완전히 끊겼어.”
그건 나도 안다. 내 마력감지에도 저놈은 죽은 걸로 느껴진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이걸로 끝이 아니다.
클리어 메시지가 안 뜨고 있다고.
-드드득!
역시나, 불길한 예감은 꼭 빗나가지 않는다.
각혈하며 쓰러졌던 하이엘프 왕의 몸이 이변을 일으켰다.
**
새까만 나뭇가지를 연상시키는 무언가가 왕의 몸을 뚫고 튀어나왔다.
검은 가지는 거미의 다리처럼 땅을 짚어, 숨이 끊어진 왕의 몸을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어리석구나.”
무한에 가깝던 마력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어이가 없을 정도의 마력이 그 죽은 몸에 흐르고 있다.
“왕관만 손에 넣으면……너희에게도 내 대의를 이해시켜 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다짜고짜 왕좌를 부숴 버리다니.”
저 미친놈이 지금 뭐라고 하는 거야. 미친 마법을 난사하면서 죽이려고 할 때는 언제고.
“말해주지 않았느냐. 세계수는 별의 지맥을 흡수해 성장하는 나무라고……이 의미를 왜 모른단 말이냐?”
“이미 이 별은 글렀단 말이다. 우리 엘프가 태어난 시점에서, 이 별의 멸망은 예견되어 있었어!”
“왜 엘프종이 뛰어난 마력 지각력을 가지고 있는 줄 아느냐! 세계수가 바랐기 때문이다, 마력이 넘치는 새 땅을 찾아내기를!”
우리는 주절거리는 하이엘프 왕을 두고, 재빨리 그 방을 빠져나왔다.
“새 땅을 찾지 못하면 세계수는 끝이다, 세계수가 끝나면 엘프도 끝이다! 우리의 혼이 영원히 돌아오지 못한단 말이다!”
엘레노어는 나를 들쳐업고 속도를 냈다. 메르세데스도 마력강화를 유지하며 함께 달렸다.
속도는 어처구니 없을 만큼 빠르다. 이미 하이엘프 왕이 있던 알현실에서는 아득히 멀어져 있었다.
하지만 목소리는 계속해서 들려오고 있었다. 이미 목소리가 들릴 만한 거리가 아닌데도.
“세계수와의 연결이 끊어졌다고 내가 끝날 줄 알았느냐! 비축해둔 힘은 충분하다, 너희는 멸망을 앞당겼을 뿐이야!”
그 때였다. 침입자인 우리의 존재를 인식한 하이엘프 기사들이 불쑥 튀어나와, 앞을 가로막았다.
“거기, 뭐 하는 놈들이냐!”
“비켜라!”
“메, 메르세데스 님?”
메르세데스가 앞으로 튀어나와 호통치자, 기사들이 당황하며 멈춰 섰다.
추방당한 신세라지만, 과거 하이엘프의 제일 기사였던 배경은 어디 가지 않는 듯하다.
그런데 그 때, 근처의 벽에서 검은 나뭇가지가 튀어나와 작살처럼 기사들의 몸을 꿰뚫었다.
“저, 저건 대체……!”
가지에 꿰뚫린 기사들은 잠시 버둥거리더니, 순식간에 온몸이 쪼그라들어 먼지로 변해버렸다.
“왕관을 순순히 넘겼다면, 희생해야 할 생명은 인간족 병사들의 것만으로 충분했으나……이젠 그럴 수 없게 되었다.”
새까만 가지가 왕의 목소리를 담고 사방팔방으로 뻗어 나간다. 이건 이미 가지도 뭣도 아니다.
닿는 것의 생명을 무식하게 빨아들이는 괴물의 촉수일 뿐.
우리의 퇴로도 순식간에 검은 가지로 둘러싸여 막히고 말았다. 엘레노어는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대여, 나를 있는 힘껏 붙잡고 있어라. 절대 놓치면 안 돼.”
엘레노어는 우뚝 멈추더니, 메르세데스를 한 손으로 잡고 그림자로 마법진을 그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분수처럼 솟구친 그림자가 우리를 천장으로 사출해 버렸다.
-쾅! 콰광! 콰과광!
몇 겹의 천장을 뚫고, 순식간에 하늘로 떠올랐다. 그 충격이 내 내장을 뒤흔들었다.
그렇잖아도 아작나서 곤죽이 되었던 속이 뒤틀린다. 목구멍으로 뭔가 올라왔다.
“으허억, 컥.”
입에서 거하게 피를 토해내며 바라본 지상은 끔찍했다.
왕성에서 뻗어나온 무수한 가지는 이제 거대한 파도처럼 성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
눈에 보이는 엘프들을 모조리 꿰뚫어 생명력을 빨아들이고, 번식하듯 분열해 점점 더 주변을 덮어 갔다.
그 속도는 산불이 강풍을 업고 번지는 것처럼 빨랐고, 뻗어 나간 가지는 이제 세계수를 향하고 있었다.
거대한 세계수를 타고 기어오르는 새까만 가지는, 나무의 양분을 흡수하는 겨우살이를 연상시킨다.
아니, 그런 얌전한 것보다는- 배배 꼬인 수십만 마리의 뱀이 세계수를 타고 오르는 것처럼 보였다.
나도 엘레노어도, 메르세데스도 그 모습을 보며 아무런 말도 못 하고 있었다.
“나는 세계수와 함께 이 별을 떠나, 머나먼 땅에 새 엘프의 왕국을 세우겠다. 이제 왕관 따위는 필요 없다.”
“세계수와 함께 온전히 떠나고 싶었지만, 왕좌가 부서지고 연결이 망가진 이상- 다른 방법을 써야겠지.”
“죽을 날만을 기다리고 있는 별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 모두 멸망시켜 세계수의 양분으로 삼아주마.”
시끄럽다 못해 하늘에 쩌렁쩌렁 울리는 전음, 무수한 가시는 이윽고 하나로 얽혀 거대한 형상을 이루었다.
세계수에 필적하는 크기로 얽혀 만들어진 그것은, 한 마리의 거대한 뱀.
[경고, 에픽 퀘스트의 진행도가 99%를 초과함에 따라, 계층의 설정이 변경됩니다.]
[미궁 지역이 소멸합니다. 보스 몬스터의 전이문 활성화 권한이 임시로 에픽 퀘스트에 이양됩니다.]
[에픽 퀘스트 진행 중, 우호도 80 이상의 NPC와 파티를 결성할 수 있게 됩니다.]
[지금부터 월드 레이드가 진행됩니다. 파티와 공격대의 편성 인원 제한이 해제됩니다.]
[주의 : 월드 레이드의 난이도는 50인 이상의 공격대를 기준으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공격대를 결성하십시오. 현재 서버의 참여 가능 도전자 : 1명]
**
새빨간 시스템 인터페이스가 처음 보는 메시지를 띄웠다.
월드 레이드, 공격대, 모르는 단어는 아니다.
하지만 이 2661 서버에서 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던 단어들이었다.
동시에 에픽 퀘스트가 한 번 더 갱신되었고, 거대한 뱀의 이름이 허공에 새겨졌다.
[영원히 살고 싶다는 아집이 만들어낸 괴물, 긴 삶을 살며 사람이 아니게 되었으나 누구보다 사람다운 자.]
[탐욕스럽게 먹어치우고, 끝없이 번식하고 번영하며, 최후의 최후까지 꿈꾸는 자.]
[살아있는 욕망의 총체이며, 우주가 끝나는 날까지 숨쉬기를 바라는 불꽃. 무엇으로 그를 대적할 수 있겠는가.]
[WORLD BOSS - 세계를 삼키는 뱀용, 니드그라크'스바르프발니르]
거대한 검은 뱀은 그대로 세계수를 밑동부터 갉아먹으며 그 마지막 가지까지 부수어 입 안에 넣었다.
탐욕스럽게 생명의 나무를 먹어치우고, 그에 그치지 않고 주변의 모든 것을 먹어치운 뱀은- 입을 열어 말했다.
“나는 세계수와 함께 이 세상을 삼킬 것이다.”
특정한 조건을 만족할 경우에만 출현하는 초대규모 레이드 대상, 월드 보스로 거듭난 왕이 붉은 눈을 빛냈다.
[에픽 : 다크엘프의 서 - 최종장]
갱신된 에픽 퀘스트의 내용은 이것이 정말로 최후의 싸움이 될 것임을 알리고 있었다.
목표는 지극히 단순했다. 저 뱀을 처치할 것.
7층에서부터 시작하여, 한참을 이어져 온 다크엘프의 서가 마침내 최종장에 진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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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 레이드 준비
7층에서 시작하는 진영 퀘스트는 진행 방식에 따라 20층대까지 이어진다.
다만 진영 퀘스트가 중심이 되는 층은 9층까지만이다. 그 이후로는 드문드문 연관된 퀘스트가 나올 뿐이다.
게임으로 비유하자면, 후일담이나 팬서비스 수준으로 엘프나 인간 진영이 관련된 내용이 나오는 정도.
소위 ‘세계관’이 엄밀하게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이 커뮤니티 도전자들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하지만 저 꼬락서니를 보면 알 수 있다.
세계수를 집어삼키고, 말 그대로 세상을 멸망시킬 것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는 거대한 뱀.
그리고 극소수의 엘프 NPC가 등장하는 층의 황폐한 배경.
아마도, 이 9층의 세계관은 다른 층까지 이어진다. 저 뱀 때문에 한 번 멸망한 다음의 세계라는 설정으로.
“맙소사……어떻게 이런 일이.”
몇 번이나 그림자 마법을 사용해 뱀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우리는, 멍하니 무너져가는 성을 바라보았다.
나도 엘레노어도 갑작스레 벌어진 참사에 말을 잇지 못했으나, 가장 동요하고 있는 것은 역시 메르세데스였다.
소중히 여기던 왕자는 몸을 빼앗겨 버렸고, 고향은 실시간으로 거대한 괴물에게 무너지고 있다.
“어, 어째서, 어째서 이렇게, 왜.”
가장 안타까운 것은, 메르세데스에게는 이 참상을 막을 기회가 있었다는 점이었다.
메르세데스는 추방당하기 전까지 하이엘프 왕의 곁을 계속해서 지키고 있었으며, 그의 변화를 잘 알고 있었다.
세계수에 대한 지식이 조금이라도 깊게 있었다면, 이 지경까지 오기 전에 상황을 해결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메르세데스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혼자 힘겨워하다, 끝내 추방당하고 기회를 빼앗겼다.
“……”
멍하니 파괴되는 성을 지켜보던 메르세데스가, 결연한 표정으로 검을 집어들고 일어섰다.
“야, 어디 가려고.”
아무리 봐도 제정신이 아니었기에, 나는 곧바로 녀석을 붙잡았다.
“지금은 추방당한 신세지만, 나는 하이엘프의 제1기사다. 우리의 도시가 무너지는 걸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어.”
“안 두고 보면 뭐 어쩔건데, 네가 봐도 저긴 이미 그르지 않았냐?”
“그렇다고 해도……해야만 하는 일이다. 내겐 버려둘 수 없는 의무가 있어. 도와달라고는 하지 않겠다.”
평소같으면 신경도 안 썼겠지만, 이번에는 가게 둘 수 없었다.
미궁 지역이 소멸하고, 나는 에픽 퀘스트를 완료하지 않으면 다음 층으로 올라갈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에픽 퀘스트에 멸망 엔딩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면, 나는 저 뱀을 처치해야만 퀘스트를 완료할 수 있다.
[공격대를 결성하십시오. 현재 서버의 참여 가능 도전자 : 1명]
문제는 저 뱀이 공격대를 편성해 싸워야 하는 월드 보스고, 이 빌어처먹을 탑에는 나 혼자밖에 없다는 점.
나는 9층 도전자의 평균 스펙을 아득히 초월하고 있으나, 저런 걸 혼자 쓰러트릴 수는 없다.
최소 50인의 공격대를 편성해야만 하는 적, 그걸 나 혼자 쓰러트리려면 평범한 도전자보다 100배쯤은 세야 할 거다.
나는 그 정도로 강하지 않다. 메르세데스 같은 강력한 아군을 잃으면 끝장이다.
“지금 저기로 달려가서 혼자 뒤지는 게 네 의무냐?”
나는 메르세데스에게 말했다. 이런 말을 내 입으로 해도 괜찮은 건지는- 잘 모르겠다.
“동족을 구하고 싶어서 가는 거라면 안 말려, 말리기는 무슨- 도와줄 수도 있어.”
“……그 꼬락서니로 말이냐?”
“사지가 날아간 것도 아니고, 내장 좀 갈린 건 포션 때려 부으면 어떻게든 돼. 좀만 있으면 다 나아.”
어차피 전쟁은 더 이어지지 않을 것이다. 지금부터는 진영을 불문하고 하나라도 아군을 늘려야 하는 상황.
우호도 80 이상의 NPC를 파티원으로 넣을 수 있다는 건, 아마 이런 걸 의도한 설정일 테니까.
“엘레노어, 도와줄 수 있어?”
나 하나가 더해진다고 될 일도 아니기에, 나는 엘레노어에게도 물었다. 아마 엘레노어라면 흔쾌히-
“……그래, 그대가 원한다면.”
-도와줄 줄 알았는데, 어쩐지 좀 떫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두 눈에 별빛은 없다.
아니, 표정은 아무래도 괜찮지.
이거야말로 엘레노어가 원하는 전쟁을 종식시키는 일 아닌가.
**
커뮤니티에서 월드 보스에 관한 정보를 있는 대로 긁어모았다.
50인 이상 규모의 공격대가 필요한 대규모 레이드, 난이도는 출현 층수에 따라 다르나 대체로 매우 높음.
클리어 시 확정으로 에픽 등급의 보상을 드롭, 보상은 아이템이나 에픽 등급 전직서 등이 존재.
영국의 유명 S급 헌터인 제라드 그레이엄이 보유한 [용살자]라는 에픽 클래스가 월드 보스 레이드로 얻은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중요한 점으로, 월드 보스는 출현 직후의 개시 패턴이 종료되면 잠시 휴식 상태에 들어간다는 것.
지금 내 눈앞에는 저 뱀의 재활동까지 남은 시간이 카운트 되고 있었다.
아마 이건 시스템의 안배로 주어진 공격대 결성을 위한 시간일 것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유효하게 활용해야겠지.
-촤악!
똬리를 튼 거대한 뱀 근처에서 스멀스멀 기어 다니는 가시덩굴 괴물을 베어버리고, 무너진 건물로 향했다.
거대한 석재 덩어리를 힘으로 밀어서 치우고, 그 밑에 깔려 있던 엘프를 일으킨 뒤 포션을 먹였다.
구해낸 엘프는 그대로 엘레노어가 설치한 그림자 워프 포인트로 옮겨, 마을로 호송한다.
벌써 이 짓거리를 몇 시간이나 반복했다.
재난 현장에 출동한 소방관이 된 기분이다. 차이점이 있다면 무기를 쓴다는 것 정도일까.
“이건 뭐 끝이 없어서 더 좋네.”
계속해서 스폰되는 가시덩굴 괴물을 썰어버리며 나는 계속해서 파괴된 도시를 누볐다.
휴면 상태에 들어간 월드 보스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는 잡몹들은 내게 훌륭한 포션이 되어주었다.
원래는 이놈들도 만만치 않은 전투력을 자랑하지만, 내 스펙 앞에서는 그저 그런 잡몹에 불과하다.
그리고 나는 여러 스킬과 무기의 옵션으로 잡몹을 잡을수록 HP와 MP를 회복할 수 있다.
“이쪽은 거의 끝났다.”
다른 쪽에서 구조작업을 벌이고 있던 메르세데스가 합류하며 말했다.
“왕성과 인접한 지역이라 피해가 컸어, 살아남은 이들이 무척 적었다……이쪽은 어땠지?”
“여기도 대충 그래.”
“역시 그런가, 예상하고 있었지만……남은 이들이라도 구할 수 있었던 것에 기뻐해야 할까.”
말재주가 없는 나로서는 마땅히 답해줄 방법이 없는 말이었다. 다만 조용히 포션 한 병을 건네주었다.
HP와 MP를 무한대로 회복할 수 있는 건 나 뿐, 메르세데스는 시간이 지나면 결국 지친다.
“……고맙다, 네가 아니었으면 이만한 숫자를 구할 수는 없었을 거야.”
내가 준 포션을 받아들며, 메르세데스는 꾸벅 고개를 숙였다. 뭐, 내가 구조에 큰 몫을 한 건 맞다.
하지만 구조된 인원을 받아준 건 엘레노어와 다크엘프들이기 때문에, 그에 비하면 대수로운 수준은 아니다.
그렇지만 메르세데스가 느끼는 건 또 다르겠지. 어쨌든 내가 말을 꺼내서 실행할 수 있었던 일이니까.
나로서는 레이드에 참여할 아군을 하나라도 늘리기 위한 일이었을 뿐이지만.
“정말로, 고맙다.”
이 고압적인 엘프의 태도를 바꿔놓기에는 충분했던 것 같다.
**
갑작스러운 월드 보스의 출현으로 하이엘프 세력은 완전히 와해하였고, 소수 난민만이 남았다.
하지만 피해를 당한 것은 하이엘프만이 아니었다. 마침 도시를 공격하려고 준비 중이던 왕국군 진영도 큰 피해를 보았다.
피해를 입지 않은 것은 다크엘프 진영뿐, 하지만 세상을 먹어치우겠다고 선언한 뱀이 다음으로 향할 목표는 뻔하다.
하이엘프를 쓸어버렸으니, 다음에는 다크엘프의 차례겠지. 그다음에는 남은 인간 세력을 쓸어버릴 테고.
그래도 어쨌든, 유일하게 피해를 당하지 않은 다크엘프 진영은 현재- 난민촌이 되어 있었다.
“개판이네.”
구조된 하이엘프와 마찬가지로 구조된 소수의 왕국군 병사들이 만신창이가 되어 모여 있다.
하이엘프들은 그나마 같은 엘프종 사이라서, 상대적으로 경계가 심하지 않다.
하지만 왕국군 병사들은 상황을 조금도 모르고 휩쓸렸다 구조된 상황이다 보니, 유독 날이 서 있다.
그리고 인간을 좋아하는 다크엘프들은 난데없이 받게 된 인간 난민들을 향해 어마어마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이젠 전쟁의 기억 때문에 인간이라고 무조건 호의적으로 대하지는 않는다지만, 기본적인 습성은 그대로.
다크엘프들에겐 화재 현장에서 꼬질꼬질한 새끼고양이 무리를 구조해 온 꼴이니까, 이 정도면 잘 참고 있는 거긴 하다.
하지만 나는 이런 불편한 대치를 원해서 이들을 구조해 온 게 아니다.
월드 보스의 활동 정지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남은 시간 동안 어떻게든 이들을 규합해서 전력으로 삼아야 한다.
“엘레노어가 잘 해줘야 할 텐데.”
이미 협력을 요청하기 위해 왕국군 본진에 전령을 보내두었다. 곧 이 자리에서 삼대 세력의 정상회담이 열린다.
이들을 설득해 아군으로 만드는 건, 말재주라고는 쥐뿔도 없는 내겐 불가능한 일.
판은 깔아뒀으니, 이젠 기대를 걸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는 수밖에 없다.
[긴급)월드 보스 레이드 팁 구함]
지금부터 나는 집단지성의 힘을 빌려, 레이드 전략을 구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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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 커뮤니티의 순기능
현 세대의 도전자들은 대부분 커뮤니티에 올라온 공략을 보고, 정석대로 보스를 잡는 타입이다.
당연히 처음 보는 보스를 공략하는 방법을 알아내는 데에는 영 신통치 못하다.
하지만 고등급 헌터가 되기 위해 장기 체류 중인 일부 최상위 공략파 도전자나, 소수의 고인물 도전자들은 다르다.
시련의 탑 내부의 질서 유지를 위해 남은 길드 마스터나, S급을 목표로 한참 동안 처박혀 있는 최고위 랭커들.
이들은 1세대 도전자에 한없이 가까운 경험을 쌓았으며, 실제로 1~2세대 당시에 탑을 오른 경우도 있다.
- 진혁이 살아있었네 ㅋㅋ 생존신고임?
- 얘 아직도 솔플임? 2661에 아직도 뉴비 없음?
- ㄴ 그런듯? 커뮤에 2661태그 단놈이 아무도 없음
- 월드보스는 뭐임 저런거 처음보는데
- 저건 몇층 보스임?
- ㄴ 뭐야시발 월드보스네 저게 왜 저기있음???
여전히 커뮤니티에서 높은 주목도를 가진 내 글에는 빠르게 댓글이 달렸다.
처음에는 당연히 영양가 있는 정보는 커녕, 기껏 올린 스크린샷을 보지도 않고 댓글을 단다.
하지만 하나둘씩 글의 내용을 확인하고, 소문으로만 듣던 월드 보스의 존재에 경악한다.
- ㅅㅂ저거뭐임?
- 월드보스?? 저거 진짜 있는거였냐?
- ㄴ 월드보스가 뭐임?
- ㄴ 히든같은건데 공격대 수십명짜서 단체공략해야되는거임
- ㄴ ㅅㅂ? 근데 얘 솔플러아님?
- 이 ㅅㄲ 이젠 념글각보려고 주작까지하네 ㅋㅋ 구라치지마라
- ㄴ 저걸 어떻게 주작해 ㅅㅂ련아 ㅋㅋ
이쯤에서 글을 하나 더 올렸다. 시스템 메시지를 캡쳐한 사진을 덧붙이고, 상황 설명을 곁들여서.
댓글도 댓글이지만, 개인 쪽지 알람이 어마어마하게 많이 온다. 개중에는 최상위 길드의 연락도 몇몇 있었다.
내가 알기로, 대한민국에서 월드 보스가 나타났던 건 다 합해서 3번이었다고 한다.
그 3번의 레이드에서 활약했던 이들은 대부분 유니크 내지는 에픽 등급의 보상을 받아, 최상위 헌터가 되었고.
최상위 길드의 길드원들은 당연히 월드 보스의 존재에 대해서 계속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겠지.
물론, 우리 탑으로 넘어올 수 없는 이상- 관심이 있어봐야 아무 소용 없겠지만.
이들이 물어다 주는 정보나 팁은 분명 공략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나는 다시 커뮤니티를 열었다.
잠깐 사이에 댓글이 거의 수백 개가 달려 있었고, 순식간에 백 단위의 추천을 받아 내 글은 바로 인기글이 되었다.
이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커뮤니티의 떡밥이 이쪽으로 옮겨진다. 관련된 글이 계속해서 페이지를 채운다.
[월드보스 나온거 이번이 몇번째임?]
[근데 저거 잡을수 있음?]
[2661섭에 사람이 50명이 있냐?]
[서버에 한명밖에없는데 50인레이드는 씨발ㅋㅋ]
[50인 이상이지 50인이 아님]
[이새끼 혼자만 세계관이 다른데?]
그리고 떡밥을 물고 흘러가는 여러 뻘글 사이에서, 어떤 게시글이 많은 추천을 받고 인기글로 솟구쳤다.
[작성자 : 강혁진#1421]
[제목 : 월드 보스 레이드에는 속강이 제일 중요함]
(사진)
갈트람 레이드때 우리 파티에서 기여도 제일 높았음, 위에 인증샷
월드 레이드 대기 시간때 보스 근처에서 잡몹 스폰되는데, 걔네랑 보스랑 속성이 같음
그래서 레이드 시작전에 속성 종류별로 인챈트해서 딜 실험 가능함
어차피 레이드는 한판이니까 공대원한테 일회용 속강 다 붙여주면 딜뻥 존나됨
반대로 공격 맞은다음에 속성저항 붙여두는것도 됨, 탱커진 몸빵 거의 1.5배는 될걸
솔플로는 죽어도 못잡긴한텐데 일단 예전 공략기록 다 찾아보겠음
진혁이가 볼수있게 념글좀 올려주셈
- 오 경험자가 있네 개추
- 즉시 개추 이거 올려야한다
- 근데 진혁이한테 공대원이 어딨음?
- 일회용 속강 가능함? 진혁이 아직 9층이라는데?
- ㄴ ㅇㅇ경매장에서 속성부적 사서 바르면됨 얼마안함
- ㄴ 씨발롬아 서버에 사람이 없는데 경매장 ㅇㅈㄹ ㅋㅋㅋ
커뮤니티 떡밥이 활발하게 굴러가면 나올 수밖에 없는, 경험자와 전문가의 한 마디.
조금씩 유익한 정보가 쌓이고 있다.
**
나는 월드 보스의 외형을 캡쳐해서 올리고, 내 진영 퀘스트의 상황도 상세하게 알렸다.
월드 보스의 정체인 하이엘프 왕에 대해서도, 세계수에 관한 설정에 대해서도, 각 진영의 협력을 구하고 있다는 것도.
그러고 나니, 전보다 더 빠른 속도로 유용한 정보들이 모였다. 7~9층의 진영 퀘스트는 누구나 다 해 봤으니까.
내가 겪어보지 못한 왕국군 쪽 루트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와, 하이엘프 진영 루트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
그리고 시련의 탑의 여러 스토리를 연구하는 자칭 역사학자들의 설정에 근거한 의견까지.
[작성자 : 김혁수#1421]
[제목 : 왕국군 병기중에 마포라고 있음]
어떻게 NPC잘 설득하면 끌고올수있을거임, 대형몹이니까 맞추기도 쉬울거임
마포 다 세면 한 50대는 나올거고, 원래 공성전 퀘스트용인데 강화재료 넣고 강화도 가능함
한 4강까지는 효율 좋고, 그 이상은 재료 넘쳐나는거 아니면 비추천
마포는 안된다고 뻗댈수도 있는데 지휘관중에서 4번대 장군 NPC있을거거든?
탑마다 좀 차이는 있어도 퀘스트라인 따라가면 걔가 마포관련 비리 있다고 나옴
그걸로 협박하면 될거임, 이것도 념글좀.
퀘스트 라인에 따라 체험할 수 있는 공성전 이벤트에서 쓰이는 대형 병기. 이건 특히 유용하다.
강화가 효율이 낮은 건 아무래도 좋다. 왜냐하면, 내 인벤토리에는 강화재료가 말 그대로 산더미만큼 있으니까.
이후, 나는 습득한 정보에 따라 다크엘프 마법사 몇 명을 데리고 잡몹들을 상대로 실험에 나섰다.
그렇게 가장 잘 통하는 속성은 명 속성, 그리고 주문 속성의 공격이 그다음으로 잘 먹힌다는 정보를 커뮤니티에 알렸다.
[작성자 : 고혁준#1556]
[제목 : 명속성 최대한 끌어모으는 팁]
하이엘프 마법사중 엘리트급한테 샤이닝 차지 써달라고 하셈
왕국군 성기사한테 홀리 차지는 샤이닝 차지랑 중첩되니까 같이 바르셈
다크엘프 연금술 상점에서 랜덤 제조 있는데 거기서 빛의 보주 제작해도 좋음
보주는 일회용인데 지속시간 짧으니까 딜타이밍 잡았을때만 쓰셈
마포도 속성 부여 가능한데 명속성은 상승치가 낮으니까 주문속성으로 ㄱㄱ
왕국군 상급 마법사 NPC가 주문의 땅이라고 범위 주문속성 증폭 버프 쓸수있음
마포 첫발사때 꼭 쓰셈
그러자 이번에도 빠르게 정보가 쏟아졌다.
월드 보스 레이드라는 좀처럼 없는 빅 이벤트에, 전 서버 유일의 솔플러를 향한 관심이 시너지 효과를 낸 것이다.
커뮤니티에 잘 나타나지 않는 최상위 랭커 도전자들도 저마다 경험을 근거로 팁을 주었고.
개중 실전에서 적용할 수 있는 팁의 숫자는 생각 이상으로 많았다.
내가 정석 레이드를 해본 적 없는 솔플러라는 점 때문에 모르고 있었던 수많은 전략, 전술.
1세대 당시부터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던 여러 가지 소문과 경험의 법칙들.
하나하나만 보면 대수롭지 않지만, 수백 수천이 모여 전해 주는 이 정보들의 가치는 막대하다.
그래, 이게 커뮤니티의 순기능- 진짜 집단 지성이지.
**
커뮤니티에서 퍼다주는 정보를 받아먹고, 대강의 레이드 계획을 완성했다.
내가 공유한 계획을 다른 도전자들이 짚어주고, 수정해 주는 것을 그대로 따르니- 마지막에는 꽤 그럴듯했다.
문제는 이 계획을 그대로 수행할 수 있느냐다.
이건 결국 삼대 세력이 전적으로 협력하는 것을 전제로 깔고 있는 계획서니까. 협력이 안 되면 전부 끝장이다.
동원할 수 있는 전력이 반 토막이 날 거고, 레이드 시작까지 준비를 온전히 마치기도 힘들어질 거다.
나는 뜨겁게 달궈진 커뮤니티에 감사의 표시로, 적당히 ‘좋은’ 스크린샷을 몇 개 살포한 뒤 창을 닫았다.
이제부터 정상회담이 시작된다. 레이드를 앞에 두고 각 세력의 협력 여부가 결정 나는 순간이다.
나를 포함한 몇 인물들의 참관하에, 원탁에 둘러앉은 것은 각 진영의 대표자들.
하이엘프의 대표로는 메르세데스가 자리했고, 왕국군의 대표로는 국왕이 아닌 군단장이라는 자가 나왔다.
느껴지는 기백이며 걸음걸이가 모두 심상치 않은 걸로 봐서, 아마 왕국군 측의 최고 전력 NPC겠지.
그리고 다크엘프 진영의 대표로는 당연히 여왕인 엘레노어가 나와야 하는데.
“다크엘프의 대표는 아직인가.”
엘레노어의 기척이 가까워지려는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지.
가까이 있는 다크엘프에게 무슨 일인가 싶어 눈짓했지만,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몇 분이 지나서야, 다크엘프 진영의 대표가 회담장에 입장했다.
“어이구야, 척 봐도 아주 거물들이 모였구나.”
다크엘프의 대표는 자리와 어울리지 않는 특유의 작업복을 입고, 쇠 냄새가 풍기는 채로 나타났다.
원탁 앞에 앉은 것은, 엘레노어가 아니라 키 작은 다크엘프 대장장이.
“에르웬?”
에르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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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정상회담
에르웬의 등장에 당황한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당연히 여왕인 엘레노어가 자리에 나올 것이라 예상하고 있던 모두가 웅성거렸다.
예외가 있다면, 엘레노어의 얼굴을 모르는 인간족 왕국군의 대표인 군단장- 라인하르트라는 이름의 남자뿐.
“당신이 다크엘프의 여왕인가?”
“어이구, 여왕이라니. 나는 그냥 철 두드리는 늙은이다.”
“각 종족의 대표가 모이기로 했을 텐데, 여왕은 오지 않는 건가?”
그는며 자리에 앉는 에르웬을 보며 그런 말을 했다. 에르웬은 너저분한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무언가를 꺼냈다.
작은 반지였다. 그러고 보니 언젠가 엘레노어가 저런 걸 끼고 있는 모습을 본 적이 있는 것 같다.
반지에는 내 견장에 박혀 있는 정찰대 마크와 비슷한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아마 다크엘프 왕실의 문양일 거다.
“제대로 그 아이한테서 역할을 넘겨받고 왔으니, 안심해라. 덩치 큰 인간족아.”
덩치 큰 인간족이라고 불린 군단장- 라인하르트는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불만이 많은 표정이었다.
“일개 대장장이가 종족을 대표한다니, 이 상황을 어지간히 가볍게 보고 있나 보군.”
사실 상황에 대해서라면 가장 모르는 형편이면서, 저런 소리를 지껄이나.
뭐, 딱 봐도 지저분한 작업복 차림으로 원탁에 앉은 에르웬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인데.
이해는 한다. 엄연히 삼대 세력이 모여 중대사를 논하는 자리인데, 저런 꼴로 나왔으니.
하지만 지금이 그런 걸 따지고 있을 때인가. 왜 쓸데없이 시비를 거는 거지?
“인간족아, 너야말로 상황을 잘못 보고 있는 게 아니냐? 여기가 뭘 위한 자리라고 생각하는 거냐.”
“각 종족의 미래를 놓고 협상을……”
“흐음, 이게 협상이라는 단어를 올릴 수 있는 상황 같으냐. 인간족은 저 커다란 뱀을 보지 못했나 보구나.”
에르웬은 그렇게 말하며 저 멀리, 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는 검은 기운을 가리켰다.
“우리에게 남은 미래는 둘 중 하나다. 다 함께 저것에게 멸망하거나, 다 함께 힘을 합쳐 승리하거나.”
“엘레노어- 우리 여왕이 그러더구나. 서로 선택지가 없는 이상 이건 외교의 영역이 아니라고.”
“그러니 머리를 굴려서 이익을 얻으려는 이들보다, 상대에게 앙금이 깊지 않은 이가 나가는 게 맞을 거라고.”
동맹은 당연한 전제, 이루어지지 못하면 멸망. 필요한 건 결국 서로 손을 맞잡는다는 행위뿐.
그렇다면 서로 목소리를 높일 일이 없도록, 마음이 넓은 일반인이 원탁에 앉는다.
상황을 가볍게 보아서가 아니라, 상황이 심각하다는 걸 알아서.
정확하게는, 이렇게 해야 할 정도로 상황이 심각하다는 걸 알리려고 시위를 벌인 셈이다.
“무얼, 나는 다크엘프 최고의 연장자다. 사이 나쁜 아이들을 화해시키는 일에는 도가 텄으니 말이다.”
도발처럼 들리기도 하는 말을 내뱉고, 생긋 웃어 보이는 에르웬의 표정은 무척이나 상쾌했다.
**
에르웬은 일개 대장장이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다크엘프의 장로나 다름없는 존재다.
애초에 왕국 측에서도 왕이 아닌 장군이 나왔으니, 다크엘프 진영이라고 꼭 여왕이 나올 필요는 없었다.
왕국군 측도 더 시비를 걸려고 하지는 않았고, 곧 삼대 세력의 연합을 위한 이야기가 오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솔직히, 말하는 내용의 절반도 이해하지 못했다.
초반은 저 뱀의 위험성을 이야기했고, 이후 그 책임 소재에 대해 떠들고 있었던 것까지는 알겠다.
하지만 에르웬의 중재로 누가 잘났니 못났니 하는 이야기가 끝나고 나서는- 역시 외교적인 이야기가 더해졌다.
왕국군에서 병사를 얼마나 지원할 수 있느니 없느니, 병기 동원은 경제적으로 힘드니 어쩌니.
그런 부분은 차라리 이해하기 쉬웠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정치 이야기를 하다 보니 도무지 따라갈 수가 없었다.
애초에 왜 저런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생각 이상으로 왕국군 측에 문제가 많다.
하이엘프의 인간 혐오 못지않게, 왕국군 소속의 인간족은 엘프에게 상당히 적대적이었다.
말하는 것만 보면 무슨, 불법체류 외국인을 대하는 것 같았다.
물론 징하게 떠들던 역사와 관련이 있는 것도 알겠고, 개씹좆프의 혐성을 겪어 본 탓도 있기야 하겠다만.
결국 저놈들은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실리적인 조건을 자꾸만 걸려고 하고 있었다.
일정한 규모의 금전적 지원이 불가능하다면, 최소한 대수림의 일부를 영토로 할양하라느니 어쩌니.
에르웬은 이런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그러고 있을 상황이 아니라고 답답해했지만- 결국 이야기는 계속 돌고 돈다.
레이드를 위한 작전 브리핑 단계에서 꺼내려 했던 거지만, 이제 어쩔 수 없을 것 같다. 담판을 지어야지.
“야, 야, 너 닥쳐. 그만 말해.”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대장군 옆에서 주절주절 떠드는 모사꾼 새끼에게 욕지거리를 뱉었다.
“뭔 씨발 말끝마다 뭘 내놓으라니 말라니, 뒤지고 싶어서 환장했냐?”
왕국군 측의 인원들이 발끈하며 뭐라 뭐라 떠들기 시작했지만, 나는 무시하고 인벤토리를 열었다.
당연히 무기를 꺼내서 이놈들을 썰어버리고 강압적으로 이야기를 진행하려는 건 아니다.
“너 같은 새끼들 때문에, 일부러 안 보여주고 있었던 건데.”
나는 인벤토리의 골드 탭을 눌러, 에르웬에게 보여줬던 것처럼 대량의 금화를 자리에 쏟아부었다.
-촤르르르르르르!
갑자기 뭘 하나 싶어서 지켜보던 왕국군 진영의 인간들이 점점 아연한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그렇게 돈과 이익이 문제라면 내가 해결해주마, 이 돈벌레 새끼들아.
1층에서 9층까지 올라오면서 모았던 골드를 모두 아낌없이 쏟아붓고, 이후에는 아이템도 꺼냈다.
병사들이 사용할 수 있는 갑옷이며 무기만 해도 수백 개 이상.
메르세데스와의 결투에서 박살 난 걸 제외하고도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아까울 것도 없지.
“저 뱀 새끼랑 싸워서 살아남으면, 남은 건 다 가져도 돼. 내 조건은 하나야.”
나는 아이템과 골드를 몽땅 쏟아부은 뒤, 마지막으로 내 애검을 꺼내서 모사꾼 놈에게 집어 던졌다.
-콱!
검은 아슬아슬하게 머리를 맞지 않고 벽에 박힌다. 일부러 안 맞춘 거지만, 맞아도 상관없었다.
“조금 전까지 ‘이익’ 이랑‘ 돈’이라는 단어 말했던 새끼들은 다 작전에서 배제하고 시작하는 거.”
저런 놈들을 두고 물자를 지원해 주면, 분명 남겨 먹으려고 개수작을 부릴 게 분명하니까.
**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이렇게 삼대 세력 간의 정상회담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남은 건 레이드가 시작되기 전까지 최대한 준비를 마치는 것, 다행히 시간은 아직 그럭저럭 남아 있다.
정상회담 종료 후, 나는 내가 알아낸 뱀에 대한 정보를 있는 대로 다 풀어놓았다.
속성 약점, 중첩되는 축복의 효과, 뱀의 재활동까지 남은 시각, 시너지를 낼 수 있는 각 진영의 병기들.
대체 그런 것들의 존재를 어떻게 알았느냐고 묻는 이들도 있긴 했지만, 적당히 얼버무리니 따지려 들지는 않았다.
이들도 결국 NPC인 이상, 시스템의 존재에 닿을 수 있는 의문은 깊이 파고들 수 없는 것이다.
그렇게 일차 공략 회의를 마치고 난 이후, 나는 에르웬에게 다가가서 물었다.
“저기, 엘레노어는 지금 어디서 뭐 하고 있어?”
에르웬이 대표 역할로 나온 건 그렇다 치자, 하지만 엘레노어가 아예 나오지 않을 이유는 뭐란 말인가.
에르웬을 대신 내보낸 것도 상당히 급하게 결정된 듯하고, 여러모로 신경이 쓰인다.
내 물음에, 에르웬은 잠시 고민하는 듯- 제 턱을 쓰다듬다가 말을 꺼냈다.
“혼자서 준비해야 할 일이 조금 있는 모양이더구나. 바쁘니까 당분간은 찾지 말아달라던데.”
어쩐지 씁쓸한 표정이었다. 어지간히 내키지 않는 말을 하는 모양새다.
“그리고, 음……마음이 많이 복잡한 모양이야. 인간족아, 혹시 그 애한테 뭔가 상처 주는 말을 한 건 아니냐?”
“짚이는 게 없는데.”
“너와 연관이 있는 건 확실해 보이는데, 물어봐도 도통 말하려고 하질 않으니- 하여튼 사랑이란 참 어렵구나.”
에르웬은 그렇게 말하고는 내 등을 팍팍 두드렸다. 사랑이라니, 갑자기 뭔 소리야.
곧 에르웬은 대장간 일이 바빠질 것 같다며 자리를 떠났고, 나는 혼자 남겨졌다.
엘레노어의 상태가 최근 들어 많이 나빠졌다는 사실은 나도 알고 있다.
분명 제 입으로 잠은 푹 자고 있다고 했는데, 날이 갈수록 지쳐 가는 모양새여서 신경이 쓰였었지.
어차피 조만간 깡통 NPC로 돌아갈 상대에게 무슨 걱정을 하고 신경을 쓰겠냐만은.
날이 갈수록 빛을 잃어가는 눈동자를 보고 있으면, 괜스레 어딘가에서 둔통이 일고는 했다.
“나랑 상관이 있다고?”
나는 에르웬이 남긴 말을 떠올리며 이마를 짚었다. 엘레노어의 상태가 나빠지는 게 대체 나랑 무슨 상관일까.
에르웬은 멋대로 사랑이 엮인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애초부터 얄팍한 관계였는데.
“아, 몰라.”
나는 한숨 쉬며 생각을 그만두었다. 지금은 달리 신경 쓸 일이 너무나 많았다.
엘레노어가 어떤 상태건 뭐 어쩌랴, 결국 저 월드 보스를 잡지 못하면 다 끝장인 것을.
지금은 잠시 잊어버리고, 나중에 생각하자, 나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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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엘레노어
삼대 세력의 연합과 레이드 준비는 매우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왕국군 병사들과 하이엘프들은 서로에게 어마어마하게 투덜거리긴 했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세계를 삼킬 기세를 내뿜고 있는 뱀용의 모습과, 그 주변에서 나타나는 잡졸들을 보고 사태의 심각성을 안 것이다.
서로 날 세우며 대립하고 있을 때가 아님을, 저 뱀을 어떻게 하지 않으면 정말로 세계가 멸망할 거라는 것을.
물론 개개인의 감정 문제는 어쩔 수 없었지만, 거대한 위기 앞에서 분열하는 꼴은 나지 않게 되었다.
아무튼, 월드 보스의 활동 재개까지 앞으로 한 시간.
요새화된 다크엘프 마을에서 살짝 떨어진 장소에 다수 진지가 깔렸다. 진지에는 각각의 무기가 배치되었다.
내 인벤토리에 가득 차 있던 강화재료와 골드를 있는 대로 쏟아부어, 최대치까지 강화한 마포가 팔십여 문.
하이엘프의 비전 마법으로 구축한 간이 마력포대가 이십여 문.
다크엘프의 전쟁용 병기인 발리스타가 오십여 개. 이 모든 무기에 하나하나 이중으로 속성 강화를 걸어두었다.
거기에 모든 병력에 내 인벤토리에 남아돌던 장비와 무기를 최대치로 강화해 지급했다.
에르웬을 비롯한 대장장이들이 추가로 제작해 준 무구들도 적재적소의 인원에게 배부되어, 전력을 키웠다.
당연히 이 모든 무기에도 이중으로 속성 강화를 부여, 그 밖에도 소모성 포션을 개인별로 지급했다.
이걸로 나는 거지가 됐다.
내 인벤토리에 쌓아두었던 어마어마한 숫자의 자원도, 작정하고 군대를 무장시키니 어느덧 밑천을 보였다.
지금 내 인벤토리에 남아 있는 것은, 이번 전투를 위한 포션과 스위칭용 장비 두어 세트가 전부.
어차피 여기서 이기지 못하면 끝이라는 마인드로, 가진 모든 자원을 투자했다.
“어이구야, 이제야 좀 쉬겠구나. 두 번 하라면 차라리 죽는 게 낫겠어.”
장비를 점검하고 있자니, 그동안 쉬지 않고 망치를 두드려대었던 에르웬이 앓는 소리를 했다.
“이제 쉬어, 이기든 지든 다음은 없을 거야.”
“그것도 그렇겠구나.”
“엘레노어는, 싸우기로 한 거 맞지?”
내 물음에 에르웬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드 준비를 하는 동안, 엘레노어는 모습을 거의 보이지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혼자 성에 처박혀 있었다는 건 아니다. 나도 드문드문 얼굴을 보긴 했으니까.
다크엘프의 오래된 주술이나 비전 마법 같은 것을 서고에서 찾아내 마법사들에게 전달한다거나 하기도 했었고.
통솔력을 발휘해서 레이드 준비가 빠릿빠릿하게 진행될 수 있도록 현장에서 지휘하기도 했었다.
나는 멀리서 지켜만 봤을 뿐이지만, 책임감과 의무감으로 움직이고 있는 엘레노어는 정말로 여왕다웠다.
하지만 어쩐지 평소의 엘레노어다운 모습은 도통 보지 못했다. 어쩐지 마음이 다른 곳에 팔린 기분.
“그렇다더구나, 마침 전투 준비도 끝나갈 때구나. 만나러 가 보지 그러느냐?”
물끄러미 내 표정을 살피던 에르웬이 제안했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드가 실패하건 성공하건, 아마 엘레노어와는 이게 마지막일 테니까.
**
왕성으로 들어오자, 그늘진 창가에서 밖을 내다보고 있는 엘레노어의 모습이 보였다.
멍하니 흐린 눈으로 그러고 있던 엘레노어는, 이내 내 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준비됐나 해서, 잠깐 보러 왔어.”
나는 왠지 모르게 변명하듯 그렇게 말했다. 엘레노어는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후후, 나를 신경 쓰고 있었나? 보다시피 만전이다, 누가 상대라도 질 것 같지 않은 기분이야.”
엘레노어는 검과 지팡이를 챙기고 갑옷과 망토를 착용한, 말 그대로 완전 무장 상태였다.
다크엘프의 보물을 모조리 꺼내왔다던데, 확실히 느껴지는 마력의 기세도 심상찮게 강렬했다.
다만 묘하게, 마력에서 격한 흔들림이 느껴졌다. 그 기색이 명상할 때 느끼는 내 마력의 떨림과 비슷했다.
“혼자 뭘 따로 준비한다던 게 그거야? 마력이 어마어마하게 불어났는데?”
“물론이지, 누가 뭐라 해도 세계수의 파편으로 만들어진 굉장한 보물인걸.”
그 세계수가 별의 지맥을 빨아먹는 초거대 기생식물인 점을 생각해보면 좀 깨긴 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사실, 이게 다는 아니다. 조금……옛 문헌을 뒤져보고 있었거든.”
엘레노어는 그렇게 말하며 품에서 작은 책 하나를 꺼냈다.
“이제 와서 읽어보니, 새삼 다르게 읽히는 부분이 많았지 뭐냐?”
세계수의 정체를 알고 다시 읽으니, 옛 선조가 남겨두었던 기록에 의미심장한 부분이 있었다고- 엘레노어는 말했다.
그 부분들을 토대로 세계수에 대해 좀 더 조사하고 연구하니, 새로운 마법에 다다를 수 있었다며.
옅게 웃으며 레이드에 대한 자신감을 뽐내는 엘레노어의 눈은, 여전히 별빛을 잃은 채였으나- 뭔가 미묘하게.
그 때였다, 엘레노어는 돌연 목소리를 낮게 깔고- 정색하며 말했다.
“그리고, 의외로 다른 길도 있다는 것도 알게 됐지.”
마력의 흔들림이 심해졌다. 엘레노어는 내게 다가와 손을 뻗었다.
“그대여, 나와 함께 떠나지 않겠나?”
흐릿하던 두 눈에서 다시금 약한 별빛이 반짝였다.
**
날이 갈수록 옅어져만 가던 엘레노어의 별빛, 들여다본 어릴 적부터 갖고 있던 꿈 꾸는 눈.
“저 뱀의 목적은 세계수를 삼키고, 다른 이들의 생명을 연료 삼아 다른 별로 떠나는 것이다. 꼭 멸망이 목적은 아니야.”
그것이 밝게 빛나며, 어딘가 먼 곳을 내다보고 있었다. 엘레노어의 말은 그치지 않았다.
“그리고 나도 나름대로 준비를 마쳤지, 아마 저것은 세계의 9할을 파괴하겠지만- 남은 1할의 땅에서 살 준비를.”
“그림자를 이용한 전이는 내 최고의 특기야. 별의 반대편까지 날아가면 싸움의 여파를 피할 수 있을 거다.”
“둘이서 함께 그곳에서 사는 거다. 작은 집이라도 하나 짓고……아아, 불편한 점은 물론 많겠지.”
“하지만 뭐, 그런 걸 이겨나가는 게 사랑이니까. 마법이 있으니 대부분은 어떻게든 될 거다. 자신 있어.”
“물론 그대는 인간족이니까, 엘프와는 다른 시간을 걷겠지. 앞으로 길어봤자 백 년밖에 못 살 테고.”
“하지만 괜찮다. 별의 지맥이 메마르고, 세계수도 떠난 세계에선 아무리 엘프라도 그리 오래 살지 못할 거야.”
“물론 그대보다 몇백 년을 더 살겠지만, 그대와 함께한 백 년을 곱씹을 수 있다면 외롭지 않을 거다.”
“그리고, 설령 그대가 떠나더라도- 하프엘프는 오래 사는 편이니까. 백 년 안에 아이를 밴다면-”
나는 거기까지 듣고, 손을 들어 엘레노어의 말을 끊었다.
“야, 잠깐만, 너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당황스럽다 못해 무서울 지경이었다. 이게 정말로 다 무슨 소리란 말인가.
엘레노어는 동족의 죽음에 슬퍼하던 여왕이었다. 책임감을 갖고 백성을 이끄는 여왕이었다. 적어도 이 9층에서는.
싸움을 다 내버려두고 도망치자는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면, 이미 백 년 전에 그렇게 했을 거다.
“여기는 어쩌고, 저 뱀을 내버려두면 다 죽을 거 아니야. 네 백성들은 어쩌게.”
나는 가능한 한 동요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일부러 더 침착하게 말했다.
“아, 백성 말이냐.”
하지만 엘레노어의 이어진 대답에, 나도 더 이상 침착하게 있을 수 없었다.
“아무래도 좋지 않으냐, 그딴 거.”
그건, 엘레노어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
판단은 빨랐다. 나는 곧바로 검을 뽑아 엘레노어의 목을 겨누었다.
“너, 엘레노어 아니지.”
“아아, 물론이지.”
“뭐 하는 놈이야, 너.”
그러자, 엘레노어는 웃었다. 목에 칼이 들어왔다는 것은 전혀 신경쓰지 않는 기색으로.
“아무렴, 나는 엘레노어가 아니지. 저기 있는 엘프들도 내 백성이 아니고, 이 성도 내 것이 아니야.”
미친듯이 웃어젖히는 엘레노어의 눈빛에서 다시금 별빛이 사그라졌다.
“영혼 없는 깡통 인형 따위가, 어떻게 내 백성이겠어?”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진 목소리가 성 안에서 메아리쳤다.
“뭐?”
나는 더는 검을 들이밀 수 없었다.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잠시간의 침묵, 엘레노어는 내 검 끝을 손으로 치워내고는- 한 걸음 가까이 다가왔다.
“나이트 엘프의 비술은…생각 이상으로 강력했던 모양이다. 그게 아니라면 설명이 안 되는 일이었어.”
“나는 꿈을 통해 그대의 기억과 심상 너머를 엿보았다.”
“그대가 살아온 세계와, 시련의 탑이라는 모형의 세계를 보고 말았지.”
그 말을 듣자, 나와 함께 자기 시작하면서 나날이 상태가 나빠져 가던 엘레노어의 모습이 떠올랐다.
“탑에 들어오기 전의 그대의 모습을 보았다, 어머니를 잃고 귀기가 들려 날뛰던 그대의 모습도 보았다.”
“퀘스트를 마치자 인형처럼 변해서- 그대에게 두려움과 괴로움을 줬던 우리의 모습도, 모두 보았어.”
“그러면서 새삼스레 자신의 과거도 돌아보았지. 돌이켜 보니, 모두 허상처럼 흐릿한 기억이다.”
그리고 엘레노어와 함께 자던 매일, 드물게 꾸었던 인형이 나오는 괴상망측한 꿈도.
“평생 자유를 갈망하고, 먼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꿈을 꾸었건만- 나는 노예였고, 인형이었다.”
엘레노어의 눈에 깃들어 있던 별빛은, 그녀가 물려받은 나이트 엘프의 본능에서 비롯한 욕망이었다.
그것은 숲의 바깥으로 나아가,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싶다는 강렬한 호기심이었으며.
공주라는 타고난 신분과 위치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기를 원하던 마음의 불꽃이기도 했다.
“언제나, 언제나……”
그 전부를 잃어버린 엘레노어의 마른 눈은, 나와 무척 닮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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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닮은꼴
엘레노어의 마력에서 느껴지는 흔들림이 왜 이렇게도 익숙한지.
나는 죽음을 바라지만, 엘레노어는 삶을 바랐다. 내가 내던진 욕망을, 엘레노어는 하나도 놓지 않았다.
두 눈은 언제나 머나먼 별을 올려다보았고, 그 입은 언제나 꿈을 말했다.
종족, 성별, 성격, 습관, 자아- 모든 면에서 나와는 정 반대.
그랬던 엘레노어의 모습이 이토록 익숙하게, 나 같은 산송장을 닮아버린 원인은 무엇일까.
논 플레이어 캐릭터, NPC.
무엇을 길게 생각하랴. 엘레노어는 처음부터 죽어 있었고, 그 사실을 이제야 깨달았을 뿐이다.
“내 백성들은 이미 오래 전에 죽었다. 살아있던 날이 단 하루도 없었어. 이제 와서 죽어도 무슨 상관이냔 말이다.”
엘레노어는 내게 바짝 달라붙어, 흐느끼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저 뱀은 분명 그대가 겪는 시련의 일부, 퀘스트의 마지막 적이겠지. 그렇다면 저걸 토벌하면 끝나는 것 아니냐?”
이런 표정을 짓고, 이런 말을 하고, 이렇게 우는 사람인 줄 몰랐다.
“깡통에 불과한 우리들의 생은 저것과 함께 끝난다. 다 내버리고, 나라도 살고 싶다고 바라는 게 그렇게도 이상한가!”
엘레노어가 소리쳤다. 가슴께 어딘가에서 둔통이 일었다.
알고 있는 아픔이었지만, 명칭을 모르기에 부를 수 없는 아픔이다.
다만 그저 아파하며, 가슴께를 누르고 마냥 인내할 뿐.
“나는……알고 있다. 그대가 아무리 부정하려 애써도, 그대의 심상을 보았기에 알 수 있어. 그대는 나를 사랑한다.”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방식과는 다르겠지만, 그대는 우리가 살아있지 않음에 괴로워했어. 모종의 사랑이 있었을 거다.”
“퀘스트를 포기하고, 나를 골라다오. 그러면 우리는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할 수 있을거다. 그대가 결정하면 돼.”
엘레노어는 내가 몇 번이고 고민한 끝에, 힘겹게 외면했던 선택지를 다시금 들이밀었다.
내가 내버렸던 욕망을 다시 주워담을 수 있는 기회, 어쩌면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르는- 내 행복을 찾을 기회.
이렇게나 달콤하게 와닿는 유혹이 또 있을까. 그도 그럴 게, 열심히 피해 왔지만, 나는 분명 엘레노어를-
“그대, 탑을 나가면 죽을 생각이지?”
- 이어진 말이 머리를 쾅 후려치는 것 같았다. 엘레노어는, 내 생각 이상으로 나를 잘 알고 있었다.
“그대는 항상 죽음을 바라 왔어, 하지만 어머니를 만나러 간다는 목표가 있기에 그럴 수 없었지. 그렇다면 뻔하지 않나.”
“그대는 탑을 나가고, 어머니를 만나면, 죽을 생각이야.”
“하지만 그리 생각하면서도 행복하기를 바라지 않았나. 버릴 수 없었던 욕망이 있지 않았나, 분명 이 자리에 있을 거다.”
엘레노어의 손이 내 가슴을 짚었다. 이름을 알 수 없던 둔통이 계속해서 일었던 자리를.
“그대를 괴롭히는 말뚝을 뽑아 버려라, 나와 함께 행복해지자. 우리 둘만의 세계에서.”
끝내 엘레노어는 내 품에 얼굴을 묻었다. 나는 천천히 손을 올렸다.
이대로 엘레노어의 어깨를 끌어안으면, 그걸로 끝이다.
돌이킬 수 없는 마지막 선택지, 엘레노어를 고른다면 나는 행복해질 수 있을까?
엘레노어와 함께 살면 분명 즐거울 것이다. 7층에서 그 잠시간 함께했던 것만으로, 이만한 망설임을 만들었을 정도니까.
괴로운 일이 있어도 분명 함께라면 이겨낼 수 있겠지, 아무리 지쳐도 함께라면 분명 웃을 수 있겠지.
하지만 그건 엄마를 내버리는 길이다. 분명히 괴로울 것이다. 쓰레기 같은 서진혁을 용서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렇지만, 그래도, 그건 탑을 나가도 마찬가지 아닌가. 내가 어떻게 나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이야.
“나는……”
긴 고민 끝에, 쓰레기 병신 서진혁은- 엘레노어의 어깨를 감싸기 위해 손을 뻗었다.
**
뻗어진 손은 어깨를 완전히 감싸 안기 직전에, 멈칫하고 말았다.
앞으로 조금, 일 센티미터. 하지만 이 병신새끼는 직전의 직전에 결국 고르지 못했다.
이게 나다. 앰생 병신 방구석 개백수 쓰레기 서진혁.
고민 끝에 고른 선택의 결과가 두려워서, 무엇도 고르지 않는 것을 택했다. 남은 건 엘레노어의 선택이다.
엘레노어가 스스로 움직여 준다면, 엘레노어가 한 발짝 더 내게 다가와 준다면, 그때는 분명히 받아들일 것이다.
마지막의 마지막에 상대에게 선택을 떠넘겨버렸다. 그리고 엘레노어는 답했다.
“그래, 그렇구나.”
엘레노어는 망설이는 내 손을 보고는, 쓰디쓴 표정으로 웃으며 한 발자국 물러났다.
“그 마지막 망설임이 그대의 선택이겠지, 백이십 년 전에는 그 망설임 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었건만.”
그렇게 말하며 두 발자국 물러난다. 망설이는 나를 두고, 엘레노어는 포기를 택했다.
그렇겠지, 이렇게 우유부단하고 한심한 놈이랑 살고 싶지는 않을 거다. 당연한 거고, 현명한 거야.
“오해하지 마라, 나도 그대와 다를 것 없었을 뿐이니까. 백 년을 더 살아오며, 그대를 닮아 버린 모양이야.”
“아니야, 내가 병신이지. 네가, 내 어디를 닮았다는 건데.”
“내가 나약해서, 그대에게 힘든 결단을 강요했지 않나. 어머니와 나 중에 하나를 고르라니, 내가 너무했지.”
세 발자국 물러난 엘레노어의 눈에서 투명한 눈물이 흘렀다. 아무렇지 않은 듯 말하지만 표정은 정직하다.
“내게도 의무가 있다. 이 왕관을 쓰면서 이어받은 의무가. 설령 영혼 없는 깡통일지라도……나는 내 백성들을 지켜야 해.”
“그대가 망설여 준 덕분에 오히려 정신이 들었다. 내 백성들에게도, 그대에게도, 이기적으로 굴고 말았어.”
“내가 탑에 묶여 있는 존재라고, 그대까지 이 탑에 묶어버리려 했지.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한 번은 입에 담고 말았어.”
엘레노어는 옷소매로 거칠게 눈물을 닦았다. 그래, 우리는 정말로 닮았다- 같은 상처를 공유하고 있으니.
아무리 괴롭고 힘들어도, 멈춰 서지 않기로 했던 맹세.
여왕으로서 그것과 똑같은 맹세를 가슴에 박아넣은 엘레노어의 마력이, 나와 같은 형태로 요동치고 있었다.
“그대는……어머니를 만나러 가야 해.”
우리는 이렇게 똑같은 고민 끝에, 똑같은 결정으로- 결별을 택했다.
**
내 마력강화가 펜던트를 이용한 템빨이라는 사실이 이렇게 다행일 수 없었다.
마력은 마음에 영향받아 흔들리니, 지금 같은 마음으로는 마력강화 따위 못 하는 게 당연하다.
눈물을 지워 없앤 엘레노어는 다시 다크엘프의 여왕으로 돌아왔다. 뱀용 토벌을 위해 앞으로 전력을 다할 것이다.
나도 그 결단에 응해야만 한다. 마음에 휘둘려 싸우기를 망설이지 말자. 전력을 다해 싸울 것이다.
[월드 보스 레이드 재개까지 : 000624]
뱀용의 재활동 대기 시간까지 앞으로 6분, 병기의 배치와 여타의 준비들은 모두 완료되었다.
-뿌우우우우!
작전 개시를 알리는 나팔 소리와 함께, 배치되어 있던 마포 부대와 마법사들이 일제히 활동을 개시했다.
“쏴라!”
몇 단계에 걸친 버프를 몰아받고, 활동 재개까지 5분이 남은 뱀용을 향해 마력의 탄환과 발리스타가 쏘아졌다.
레이드는 꼭 카운트다운이 끝나야만 시작하는 것이 아니다.
잡몹들이 지키고 있는 보스를 선제타격하는 것으로, 원하는 타이밍에 싸움을 시작할 수 있다.
그리고 이만한 포격 수단이 있으면, 강력한 공격을 첫발에 꽂아넣고 시작할 수 있으니.
반드시 5분을 남긴 시점에 최대한의 화력으로 먼저 공격하라고, 커뮤니티에서 조언을 받은 바 있다.
-쾅! 콰과광! 쿠과광!
일제히 쏘아진 무기가 뱀용의 전신을 무자비하게 난타한다. 잠에서 깨어난 뱀이 비명을 질러 대었다.
역시 화력은 확보하고 볼 일인가. 상상 이상으로 위력도 효과도 훌륭하다.
이 다음은 이제 내가 움직일 차례다. 인벤토리에 준비한 물건이 제대로 있음을 확인하고, 마법진 위로 올랐다.
“무운을.”
전이를 담당한 마법사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 주고, 마법의 가동과 함께 나는 하늘 위로 내던져졌다.
공중으로 전이된 것은 나 하나뿐만이 아니다. 메르세데스를 비롯한 하이엘프 정예 기사들.
그리고 왕국군의 정예 병력과 최고 전력인 군단장, 다크엘프 정찰대의 에이스들과 엘레노어까지.
우리는 뱀용의 급소를 직접 공격하는 특공대가 된 것이다.
하지만 이대로 몸부림치는 뱀용의 몸에 쉽게 안착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작전이 잘 되어야 할 텐데.
-키리리링!
그 때, 지면에서 엄청난 마력의 격류와 함께 커다란 사슬이 솟아올랐다. 미리 준비해 두었던 우리 진영의 마법이다.
다크엘프의 그림자 마법은 직접 전투보다는 속박 같은 보조 계열에 치중되어 있다.
그런 만큼, 그쪽 계열을 작정하고 파고들면 굉장한 성능이 나온다. 이 점 역시 커뮤니티에서 검증해 준 내용.
여러 도전자들이 발로 뛰어, 그림자 계열 마법중 가장 속박 판정이 좋은 스킬을 찾아내 주었고.
나는 그렇게 알아낸 스킬을 전파해, 마법사들이 재해석해 대규모 술식으로 쌓아올릴 수 있도록 했다.
원래는 단기간에 될 만한 일이 아니지만, 부족한 부분은 마법석 같은 재료를 미친듯이 갈아넣는 것으로 해결.
당연히 그 재료는 내 인벤토리에서 나왔다. 어마어마한 자원을 들인 단 한번뿐인 속박 마법.
월드 보스를 상대로도 통할지가 걱정이었지만, 다행이게도 잘 된 모양이다. 이제 착지만 하면 된다.
-그아아아아아아!!
사슬에 묶여버린 뱀용이 소리지른다. 포효 자체에 실린 마력이 퍼져나가며 주변 지형을 으스러트린다.
하지만 여기 있는 정예들은 그 정도의 공격에는 아랑곳하지 않는 엘리트급, 강자 중의 강자들.
-티딩! 팅!
뱀용의 전신에서 쏘아지는 검은 마력탄을 각자의 방식으로 쳐내고, 놈의 몸에 착지해 내려앉았다.
엘레노어는 자신의 행복을 포기하고, 허울 뿐인 존재일지언정 백성들을 지키겠노라 선언했다.
그것이 얼마나 괴로운 선택이었는지는, 똑같은 선택을 내렸던 내가 가장 잘 안다.
그러니까,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방법으로 그 선택을 지지하겠다.
우유부단하고 꼴사나운 병신새끼지만, 그런 나이기에 잘 하게 된 일이 하나는 있으니까.
“목표는, 퍼펙트 클리어다.”
절대 멈추지 않는 것, 내 앞길을 막는 장애물을 분쇄하는 것, 극한 상황 속에서 적을 찢어 죽이는 것.
너와 결별하고 탑을 올라갈 것을 맹세했으니, 그것 하나 만큼은 확실하게 해 주겠어.
-쿠르릉!
마력강화를 발동하고, 뱀용의 두꺼운 비늘에 검을 꽂아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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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사람처럼 말하고, 사람처럼 행동하며, 사람처럼 생겼다면, 그건 그냥 사람이다.
이 마을의 다크엘프들은 모두 평범한 NPC가 아니다. 알고 있으면서도, 나는 한 번 더 변명 뒤에 숨었다.
리즈멜이 내 말에 상처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어차피 NPC라는 편리한 방패를 내세운 것이다.
“나 좀, 가볼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에르웬은 흐뭇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는,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그래, 기특하기도 하지. 넘어지지 않게 조심하렴.”
나이 차이가 수천 살은 되는 만큼 당연한 일일수도 있겠지만, 에르웬 앞에서 나는 어린아이나 다름없었다.
에르웬은 지금쯤 리즈멜이 있을만한 장소를 알려주었고, 나는 곧장 그곳으로 달려갔다.
아마 살면서 가장 빠르게 달린 날을 꼽으라면, 분명 오늘일 것이다.
전속력으로 뛰어 도착한 장소는, 다크엘프의 마을 외곽에 있는 쉼터 비스무레한 곳이었다.
쉼터에는 나무와 덩굴로 만든 그네며 시소 따위가 있었다. 아파트 단지의 놀이터를 엘프식으로 만든 것처럼 생겼다.
다른 장소들에 비해 유독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곳이다. 리즈멜은 쉼터 구석의 벤치에 앉아 있었다.
“리즈멜.”
고개를 숙이고 있는 리즈멜에게 다가가 이름을 불렀다. 그러고 보면, 제대로 이름을 부르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나는 다크엘프들에게 내 이름을 알려준 적이 없고, 반대로 다크엘프들의 이름을 불러본 적도 없다.
돌이켜 보면, 그게 내 심리의 끝자락에 있는 마지막 선이었던 것 같다.
이들은 사람이 아닌 NPC로 생각하기 위한 선.
내 이름을 알려주어 관계를 맺는 것도, 그들의 이름을 불러주어 관계를 맺는 것도 싫었다.
어차피 NPC니까, 퀘스트가 끝나면 같은 말만 반복하는 깡통으로 돌아갈 인형이니까.
“……”
리즈멜은 말없이 고개를 들었다. 나는 잠깐 눈을 감았다. 리즈멜이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 두려웠다.
리즈멜의 검술 훈련 퀘스트는 이미 모두 완료처리가 되었다.
그렇다는 것은, 리즈멜이 2층의 양치기 소녀처럼 깡통 인형으로 변해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뜻.
7층 진영 퀘스트가 다른 층까지 이어진다는 점이나, 엘리트 NPC의 특성을 생각해 보면 그렇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결국 반반이다. 리즈멜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복잡한 심경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다면 좋을 텐데.
“너, 뭐야……내가 더 찾지 말라고 했잖아. 여긴 어떻게 알고 찾아왔어?”
“에르웬이 말해 줬어, 아마 여기 있을 거라고.”
“이모님이? 엘레노어도 아니고, 내가 여기 있을 줄 어떻게 알았대……?”
그리고 실로 다행이게도, 리즈멜은 굉장히 착잡하고 처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사람이 아니면 지을 수 없는 표정이다.
“그럼, 나는 왜 찾아왔는데. 나랑 볼일은 끝났잖아? 나는 인간족이랑 같이 있고 싶지 않은데.”
매몰찬 말투지만 목소리는 여전히 떨리고 있다. 나는 한참동안 말을 골랐다.
나는 병신이다.
의지도 박약하고, 사회성도 떨어져서, 할 줄 아는 말이라고는 욕과 변명뿐인 병신.
그렇기에 더욱 열심히 말을 골라야 한다. 입을 잘못 놀리면 리즈멜에게 더 큰 상처를 주게 될 거다.
하지만 아무리 고민해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내가 이런 사람이기 때문이다.
너무 많은 걸 잘못하고 살아와서, 잘못만 하고 살아온, 잘못뿐인 사람이라서.
올바른게 뭔지 도저히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는 안다. 나 같은 병신도 나아질 수 있는 방법을, 딱 하나 알고 있다.
가지지 못한 것을 한탄하며 아무것도 하지 않는 대신, 어설프고 부족하더라도 한 발짝 나아가는 것.
레벨을 올리기 위해 고블린을 때려잡았듯이, 1층을 깨기 위해 노멀 클래스로 전직했듯이.
이런 나도 떠올릴 수 있는 가장 단순한 한 마디에, 최선을 다하는 것.
“미안해.”
그리고 리즈멜은 웃었다.
**
한동안 그 자리에 앉아서, 리즈멜과 진득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말을 섞을 때마다, 사람을 대하는 것에 있어서 내가 얼마나 미숙하고 부족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런 부분에서, 리즈멜이 다크엘프란 점은 매우 큰 행운이었다.
다크엘프는 모두 인간을 귀여워한다. 내 미숙하고 어수룩한 사과에도 금방 마음을 풀어줄 만큼.
사람을 대하는 방법, 인간관계라는 이름의 길은 무척 험난하다. 한 걸음만 잘못 내딛어도 넘어질 수 있다.
하지만 다크엘프의 마음에 놓인 길은, 내 어설픈 걸음으로도 넘어지지 않고 걸을 수 있는 안전한 길이었다.
넘어지지 않게 조심하라던 에르웬의 말이 새삼 다르게 느껴진다.
“인간족은 이래서 싫어, 연약하고 일찍 죽는 주제에, 마냥 무시할 수도 없어서 대하기도 힘들잖아.”
“인간족이 다 그렇진 않아, 내가 좀 유별난 거야.”
“그렇게 말해도, 나는 인간족을 본 적이 많지 않아서 잘 몰라. 네가 얼마나 유별난 건지.”
나는 인간족을 접해본 적이 거의 없다는 리즈멜의 말을 듣고, 인간족이 보통 어떤 느낌인지 설명하려고 했다.
하지만 생각하다 보니, 인간인 나도 인간에 대해 잘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애초에 이 7층 세계의 인간족이 내가 아는 인간과 똑같다는 보장도 없고.
“그럼 보면 되잖아, 나이트 엘프는 원래 숲을 개척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며.”
“엘레노어랑 어울리더니 똑같은 소리를 하네.”
“어울린 적은 별로 없는데, 아무튼 그렇잖아. 나 말고 다른 인간도 좀 만나봐.”
리즈멜은 고개를 저었다. 설명을 들어 보니, 현 여왕이 내린 칙령 탓에 인간과 마음대로 접촉할 수 없다고.
“나도 마음으로는 인간을 많이 만나보고 싶지만……아니, 그치만, 딱히 인간을 좋아하는 건 아니다?”
그러고 보니, 여왕은 하이엘프와 화친을 맺으려는 생각에 인간 진영을 멀리하고 있다던가.
엘프에게 영생을 부여하는 혼의 순환장치, 세계수와 대수림에 짙은 미련이 있는 탓이라고 들었다.
“아, 이제 좀 알겠네.”
에르웬이 내가 엘레노어의 손님이라 맞출 수 있었던 이유. ‘그 애뿐이니까’ 라고 했었지?
공주인 엘레노어 정도가 아니면, 금기를 깨고 인간족을 데려올 수 없었던 거다.
그리고 엘레노어가 나를 데려온 건, 하이엘프 왕자와의 약혼 파기를 위해서.
약혼이 무산되어 하이엘프와의 화친이 백지화되면, 인간족과의 교류 금지도 풀릴 테고.
엘레노어는 하이엘프와의 화친을 달갑지 않게 여기는 건 자신뿐만이 아니라고 했었지.
티내지 않고 있지만, 리즈멜을 비롯해 인간을 애호하는 다크엘프들은 모두 비슷한 생각일 수도 있다.
“그럼, 내가 다른 인간을 만날 수 있게 해줄게.”
엘레노어의 계획에 협력해야 할 이유가 하나 늘어났다.
**
다음 날, 나는 평소처럼 리즈멜과의 검술 수련을 위해 연무장에 나왔다.
그림자 인형을 늘어놓고 혼자 단련하고 있던 리즈멜은, 나를 보더니 놀란 듯이 눈을 크게 떴다.
“뭐야, 여기는 왜 왔어?”
“왜긴, 검술 배워야지.”
리즈멜과는 이미 화해를 마쳤다. 그러니 검술 훈련도 당연히 재개할 줄 알았는데, 뭔가 문제가 있나.
리즈멜은 내 물음을 듣더니, 조금 난처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더 가르칠 게 없다는 말은 진짜였는데.”
퀘스트가 완료 처리된 것은 리즈멜이 생각을 바꿔서가 아니었다. 진짜로 내가 모든 훈련을 마쳤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나는 아직 리즈멜이 어떻게 수정 거미의 광선을 미리 감지할 수 있었던 건지 모른다.
그건 내가 터득한 감각 강화만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다. 당연히 좀 더 상위의 기술이 있는 줄 알았는데.
“그렇긴 하지만……그건 내가 가르칠 수 있는 게 아니거든. 그건 마법의 영역에 더 가까운 거라.”
“마법의 영역이라고?”
“응, 나는 검술 전문이라 그걸 가르쳐 줄 수는 없어. 그냥 배우기만 한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
즉, 어제 일이랑은 별개로 리즈멜과의 검술 훈련은 여기서 끝이었다. 물론, 아예 훈련할 게 없는 건 아니다.
나는 검술 외의 다른 무기술도 갖추고 있으니까, 리즈멜을 연습 상대 삼아서 단련하는 건 가능하겠지만.
그럴 시간에 그냥 정찰대 일을 하면서 필드 몬스터 사냥이나 하는 게 더 도움이 될 거다.
리즈멜에게 사과하긴 했지만, 내 생각과 사상에는 그다지 달라진 부분이 없다.
나는 여전히 느긋하게 시간을 때우며 사사로운 욕망을 채우는 내 모습 따위는 보고 싶지 않다.
아쉬운 마음이 없는 건 아니지만, 리즈멜과 느긋하게 교류하며 효율 나쁜 단련을 할 생각은 없다.
“그걸 배우고 싶은 거면, 내가 아니라 엘레노어한테 부탁해야지.”
“응? 엘레노어가 왜 나와?”
“마법의 영역이라고 했잖아. 엘레노어는 그림자 마법으로는 최고거든.”
리즈멜은 ‘그 변태 같은 계집애랑 너무 어울리는 건 권하고 싶지 않지만’ 이라고 뒷말을 덧붙였다.
엘레노어는 그림자 마법으로 엘프 여기사의 미친 공격을 가볍게 막아낸 전적이 있었다.
그림자 마법은 다크엘프의 종족 특성인데다가, 내 클래스는 애초에 전사다 보니 대충 넘겼었는데.
그러고 보니, 엘레노어는 내가 리즈멜과 검술 훈련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런 말을 했었다.
아직은 이르지만, 언젠가 좋은 걸 가르쳐 줄 수 있을 거라고.
“아하.”
이게 그거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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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새 엘프
이중으로 버프를 받은 칼날의 손맛은 상상 이상이었다.
아무런 저항 없이 쑥 들어가서, 두부나 젤리 같은 것을 찌르는 느낌이었다.
박아넣은 칼을 쥐고 손목을 비튼다. 검손잡이를 쥔 채, 마력강화의 힘을 살려 그대로 놈의 몸 위를 질주했다.
-카가가가가가가각!
달리는 그대로 비늘이 잘려나가며 피가 튄다. 덩치가 크고 피통이 많은 대신, 방어력은 높지 않은 것 같다.
50인 이상 규모의 레이드라고 해도, 데미지가 안 박히면 공략 자체가 불가능할 거다.
그러니 9층 수준의 도전자들로도 데미지 자체는 입힐 수 있도록 설계된 거겠지. 그렇다면 나한테는 아주 편하다.
나 하나가 9층 도전자 백 명 어치만큼 강한 건 아니다.
하지만 각 층의 보스를 단독으로 격파할 수 있는 만큼, 나는 9층 도전자 스무 명 어치 정도로는 충분히 강하다.
-콰가각!
나와 함께 뱀용의 몸에 상륙한 인원들도 각자 사정없이 무기를 휘두르며 상처를 입혀 나간다.
나 못지않게 강한 메르세데스나 왕국군 군단장 라인하르트, 그리고 엘레노어까지.
각자의 방법으로 뱀의 비늘을 벗기고 그 살을 파헤쳤다.
이렇게만 흘러가면 오래 걸리지 않아 쓰러트릴 수 있을 거다. 하지만 그렇게 마음대로 되지는 않겠지.
-꿈틀.
사슬에 묶인 뱀이 거칠게 몸을 뒤흔들었다. 놈의 몸에 올라타 있는 우리에게는 완전히 지진이나 다름없다.
그뿐만이 아니다. 움직일 수 없는 상태로도 마법은 쓸 수 있다. 공중에 떠오르는 칠흑의 마법진.
그 곳에서 하이엘프들의 생명력을 빨아들이던 검은 가지가 무수히 튀어나와 우리를 덮쳤다.
-카캉!
저 가지 공격 자체는, 이놈의 근처에서 날뛰는 잡몹들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가지 하나하나의 힘은 약하다. 충분히 튕겨낼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물량과 그 부가 효과, 저 수많은 가지 중 하나라도 쳐내지 못하고 맞으면 끝장이다.
-카강! 카앙! 카앙!
가지를 이용한 공격이 오기 시작하면서, 인원 대부분이 방어에 급급해졌다.
이 마당에, 공세를 이어나갈 수 있는 건 소수.
나와 메르세데스처럼 마력강화의 방호력으로 가지를 받아낼 수 있는 이들 몇몇뿐이다.
다행이게도, 왕국군의 정예병력인 기사들은 수준은 떨어지지만 마력강화가 가능한 이들이 몇몇 있었다.
-쿠르릉!
마력의 빛에 휩싸인 기사들이 몸을 날리자, 가지들이 힘을 쓰지 못하고 뚝뚝 부러진다. 나도 똑같이 공세를 이어나갔다.
구속이 이어지는 동안에 최대한 데미지를 입혀 놔야 한다. 이렇게 좋은 딜타임은 아마 다시는 안 올 거다.
그렇게 몇 분간 뱀용의 몸을 난도질하던 중, 더 이상 버티지 못한 구속의 사슬이 파괴되며- 놈이 몸을 일으켰다.
[세계를 삼키는 뱀이 분노합니다!]
그와 동시에 눈앞에 떠오르는 알림창. 이것도 커뮤니티에서 알려준 대로다. 예고 후 발생하는 광폭화 패턴.
“광폭화다, 리콜!”
배에서 온 힘을 쥐어짜 소리쳤다. 내 쩌렁쩌렁한 말소리에 반응한 근처의 기사들이 복창해 전파했다.
손목에 착용한 마도구를 조작한다. 잠시 후, 우리는 전이 마법에 의해 역소환되었다.
근접 딜 타임 종료, 그러면 다음은- 다시 재장전을 마친 공성병기들의 차례다.
-콰과광! 콰광!
광폭화 패턴이 발생한 뱀용을 향해, 무수한 마력의 탄환이 날아가 처박혔다.
**
포병들이 ‘이 정도면 산도 조각낼 수 있을 겁니다’ 라고 호언장담했던 말이 떠오르는 광경이다.
뱀용은 상상 이상으로 별다른 대처를 하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마포에 얻어맞고 있었다.
월드 보스는 그 스펙과 규모가 어마어마할 뿐이지, 특별히 복잡한 패턴은 없을 거라던데- 정말이었다.
-아아아아아아아!!
산조차 조각내 버릴 수 있다는 포격에 일방적으로 맞고 있지만, 비명만 요란할 뿐 어째 시원찮다.
“기본 데미지 감소가 붙어있긴 한 모양이네.”
마포를 이용한 포격도, 발리스타를 이용한 물리 공격도, 모두 제대로 데미지가 들어가지 않고 있다.
나와 특공대원들이 긁어놓은 상처는 이렇게 멀리서 보니 볼펜으로 북북 선을 그려놓은 정도로밖에 안 보이고.
역시, 커뮤니티에서 언급된 약점을 노리지 않는 한은 제대로 처치하기는 힘들 것 같다.
[작성자 : 김창진#1421]
[제목 : 님들 나 월드보스 약점 찾은거 같음]
진혁이가 세번째 글에 올린 사진인데, 이거 확대해보니까
(사진)
이 부분 보임? 잘 보면 저기 하나만 비늘 거꾸로임, 이거 역린인거같거든
보스 이름도 뭐시기 뱀용이랬으니까 약점부위 있으면 이거일거같은데
- 와 씨발 진짜네 어케찾았냐?
- 이새끼는 이걸 확대해볼생각을했네 ㅋㅋㅋ
- ㄴ ㄹㅇ 나는 다크엘프 찌찌만 확대해보고 있었는데……
- ㄴ 윗 대댓 서버 직업 좋아하는 축구선수 급함 ㅃㄹ
- ㄴ 1772 전사 신두형좋아함 ㅎ
- ㄴ 아오 전평 ㅋㅋ
- 용들 원래 역린이 따로 있음? 드래곤 잡아본사람 말좀
- ㄴ 없는데 월드보스라 따로 있는거 아님?
- ㄴ 월보는 원래 약점부위 하나씩 있대 공략하라고
레이드 계획을 다 세우고, 대부분이 레이드 소식만 기다리고 있을 타이밍에 올라온 글 하나.
내가 올린 스크린샷 중 하나에서 거꾸로 된 비늘이 하나 발견되었고, 추측하기에는 그게 약점일 거라고 했다.
실제 월드 레이드를 경험해 본 이들도 잘못 본 게 아니라면, 그 부분이 약점일 것이라 의견을 내놓았었지.
타격하기만 하면 반드시 크리티컬이 터지는 부위, 우리 특공대의 제 일 목적이 바로 이것이었다.
커뮤니티에서 역린을 발견한 시간이 조금만 빨랐어도, 전투 개시 전에 위치를 특정할 수 있었겠지만.
현재로서는 직접 놈의 몸에 올라타서, 스크린샷과 위치를 대조해보며 찾아내는 방법밖에 없다.
-그아아아아!!
포격이 거의 끝나갈 때쯤, 뱀용이 비명을 지르며 광폭화 상태가 풀렸다. 다시 특공대의 시간이다.
광폭화는 일정 이상 데미지를 입히면 풀린다. 이번에 빠르게 광폭화를 뺄 수 있었던 건, 레이드 개시 직후의 초반 극딜 덕분일 터.
다음 광폭화부터는 쉽게 대처할 수 없을 것이고, 그렇다면 특공대가 마음 놓고 나설 기회도 없을 거다.
“이번이 마지막이야, 이번에 못 찾아내면 힘들어져.”
우리는 서로 고개를 끄덕이고, 리콜 마도구를 사용해 다시 한번 뱀용의 몸에 올라타기 위해 전이했다.
그런 우리를 맞이해 준 것은, 조금 전과 같은 무방비한 비늘 대지가 아닌-
“뭐야 저게.”
- 팔이 네 개 달린 괴상망측한 거인의 무리였다.
**
뱀의 비늘에서 솟아오른, 찰흙을 빚어 만든 것 같은 기괴한 형태의 몬스터.
멀리서 보기에도 그 덩치가 상당해 보인다. 놈들에게서 느껴지는 마력의 양도 심상치 않다.
“맙소사……대체 어디까지 타락한 거냐.”
나와 가까운 위치에서 낙하하고 있던 메르세데스가 중얼거렸다. 아니, 메르세데스만이 아니었다.
왕국군을 제외한 정예 병력, 즉 다크엘프와 하이엘프 대부분이 그것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나는 그대로 빠르게 낙하해, 검을 휘둘러 거인 하나를 거칠게 베어버렸다. 그렇게 강하지는 않다.
“야, 이게 뭔데 그래.”
토막난 거인을 걷어차며 묻자, 내 옆에 있던 하이엘프가 인상 쓰며 말했다. 인간족은 모를 거라고.
“모른다, 모르지만……어쩐지 알 수 있다. 저 거인이 우리와 동질의 존재라는 것을.”
나를 향해 더 많은 거인이 몰려들었다. 이제 보니, 새까만 거인의 일그러진 머리에는 특징적인 부분이 하나 있었다.
“세계수를 삼켰기 때문에, 이런 일도 가능한 건가.”
거인의 귀 부분이, 마치 엘프처럼 뾰족하게 솟아 있다는 것. 동질의 존재라는 게 그런 의미인가.
생긴 건 거대한 괴물의 형상이지만, 엄연히 세계수를 통해 창조된 생명체.
저 거인은 포레스트 엘프와 나이트 엘프에 이어서 창조된- 새로운 엘프종인 것이다.
“의식하지 마, 그럴 때 아니잖아.”
나는 이름 모를 하이엘프에게 그렇게 말하고는, 비틀린 엘프 거인을 향해 돌진했다.
덩치는 크지만 그렇게 강하지는 않다. 나는 시선으로는 뱀용의 비늘을 샅샅이 훑으며 달려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약하다고 해도, 전투 중에 다른 것을 상대로 시선을 파는 건 악수였던 모양이다.
-후웅, 투둑!
무언가 거대한 작살 같은 것이, 내 옆구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피가 확 튀었다.
뭐지? 가지는 아니고, 저 거인이 원거리 공격을 한 건가?
놀라며 바라보자, 거인의 새까만 네 팔에 쥐어진 무기가 눈에 들어왔다.
“아하, 지들도 엘프라 이건가.”
거인의 손에는 세계수의 기운이 느껴지는 거대한 활이 들려 있었다.
**
각각의 거인들이 검이며 활이며 무기를 들었다.
찢어진 옆구리의 상처를 살피며 다시 흘겨 보니, 무기들의 윤곽이 하나같이 익숙했다.
새까만 색깔에 찰흙을 빚어 만든 것처럼 뭉뚱그린 모습이지만, 다른 엘프들의 무기와 매우 닮았다.
그리고 저 특징적인 자세도, 궁술에 관심을 갖고 가르쳐 달라고 했을 때 본 적이 있었다.
놈들은 제대로 된 엘프식 궁술을 구사하고 있는 거다. 마법 같은 궤도를 그리며 필중하는 신비한 궁술을.
원래 엘프의 궁술은 사기적이지만, 약점이 없는 건 아니다.
결국 기술이 특별할 뿐, 활과 화살 자체가 특별한 건 아니었으니까. 피하지는 못해도 쳐내고 막는 건 쉬웠다.
하지만 저 거인이 네 팔로 다루는 활의 크기는 장난이 아니고, 화살 하나하나가 고래 잡는 작살 사이즈다.
거기에 화살에서 풍기는 세계수의 기운, 아무리 봐도 특수 효과가 있어 보인다.
그렇게 활을 든 거인의 숫자는 눈대중으로 보기에도 수십, 어쩌면 백을 넘을지도 모른다.
“염병하네.”
저런 미친 활이 필중의 궁술로 쏘아진다니, 양심이 없어도 너무 없는 거 아닌가 진짜.
저 놈들을 상대하면서 하나뿐인 역린을 찾는다는 게, 과연 가능한 일인가.
“해야지 뭐, 씨발.”
뭐, 언제는 할 만한 일이라서 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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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 뱀 사냥
활과 화살의 크기가 거대한 만큼, 날아드는 화살이 내는 소리 역시 남다르다.
-푸학!
다크엘프의 대형 발리스타에서나 날 법한 소리가 여기저기서 울려 퍼지며, 화살 세례가 닥쳤다.
이렇게나 커다란 주제에 날아드는 속도는 평범한 화살에 전혀 뒤처지지도 않고, 오히려 더 빠르다는 인상이다.
팔이 네 개라서 활을 더 세게 쏠 수 있는 건가. 어쨌든 엘프의 궁술로 쏘아지는 화살은 피할 수 없다.
-쾅!
마력감지를 전개해 날아드는 화살을 방패로 받아냈다. 부딪히는 소리 역시 아주 요란하다.
그리고 위력도, 씨발, 이거 생각보다 더 센데.
마력강화를 쓴 내 스펙으로도 제대로 받아내기 힘든 공격이었으니, 다른 이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크학!”
“커헉!”
화살을 제대로 막아내지 못한 이들이 몸을 관통당하며 픽픽 쓰러졌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치명적이지 않은 부분을 맞은 이들도, 화살을 맞은 직후 비틀거리며 쓰러진다.
예상대로 화살 자체에 뭔가 부가 효과가 있는 게 틀림없다. 한 방만 맞으면 즉시 무력화인가.
“씨발 진짜.”
이거, 역린을 찾으려면 일단 저 거인들부터 어떻게든 해야 할 것 같은데.
나는 내게 활을 쏜 거인을 향해 단숨에 거리를 좁혀, 크게 검을 휘둘러 다리를 베어버렸다.
덩치가 워낙 커서, 어지간해서는 한 방에 끝낼 수가 없다. 방어력과는 별개로 무조건 두 번은 베야 한다.
-촤악!
그렇게 한 놈을 베는 사이에, 다른 거인들은 한 번 더 화살을 메기고- 검을 든 거인들은 뛰어들어온다.
“흐읍!”
메르세데스를 비롯해 도드라지게 강한 몇몇은 당연히 거꾸로 거인을 쓰러트리지만, 그건 역시 소수.
필중필살의 화살을 마구잡이로 쏘아대며, 거대한 덩치로 밀고 들어오는 거인에 대부분이 속수무책이다.
거기에 뱀용 본체는 꿈틀거리며 요동치고, 드문드문 초반의 검은 가지 공격이 쏟아지고 있으니.
씨발, 이 지랄을 여기서 또 하게 될 줄은 몰랐네.
나는 인벤토리에서 쇠구슬을 잔뜩 꺼내, 뒤틀린 엘프 거인들을 향해 냅다 흩뿌렸다.
놈들은 공격력은 강해도 방어력은 형편없으니까, 이렇게 대충 날린 쇠구슬로도 처치할 수 있을 거다.
-라고 생각했는데, 이 양심 없는 새끼들은 엘프 특유의 민첩한 몸놀림도 갖고 있었다.
-후웅! 후웅!
“지랄, 이걸 피한다고?”
저 산만한 덩치로 어떻게 저리도 잽싼지, 단순한 궤적의 쇠구슬을 가볍게 피해낸다.
심지어 놈들이 들고 있는 무구 중에는 방패도 있어서, 피하지 못하면 그대로 막아내기까지.
팔이 네 개라서 궁병인 주제에 방패를 함께 쓸 수 있다. 효율이 존나 좋은 몸뚱이다.
“이 내가 직접 창조한 엘프들은 어떤가, 어리석은 인간족아.”
욕설을 내뱉으며 또 하나의 거인을 베어 넘기던 중, 머릿속에서 전음이 울려 퍼졌다.
하이엘프 왕의 목소리다. 생각해 보니, 뱀으로 변한 직후에도 제대로 말할 수 있었지. 이 새끼.
“수호와 개척을 목적으로 탄생한 두 엘프종과는 차원이 다르겠지, 그들은 오직 전투를 위해 태어난 병사이니.”
“그래 이 새끼야, 차원이 다르게 좆같이 생겼네.”
“패배자의 발상이군, 외모는 아무래도 좋지. 새로운 별에 가장 먼저 뿌리내릴 나의 엘프들이 미의 기준이 될 테니까.”
대꾸하는 꼴을 보니 보통 여유로운 게 아닌 것 같다. 비웃음당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몹시 나쁘다.
“포레스트 엘프와 나이트 엘프에 이어, 새 별에서 새롭게 떠오를 나의 엘프들을- 이 자리에서 던 엘프라고 명명하겠다.”
주둥이로 떠드는 게 아니라서 막을 수도 없고, 아니지, 잠깐만, 주둥이?
가만 있어봐, 내가 왜 이 생각을 못 했지?
역린이라는 명확한 급소에 시선이 팔려 있었기 때문인가. 급소는 그 밖에도 달리 있잖아.
“부상당한 사람들 전부 리콜해, 마력강화 안 되는 놈들도 전부! 아니 그냥 싹 다! 그리고 포격!”
나는 잠시 꺼두었던 마력강화를 다시 발동하고, 검을 들고 무작정 앞으로 달려나갔다.
**
갖가지 공격이 다시금 날아들지만, 나는 방어력을 믿고 무작정 정면으로 돌진했다.
-콰곽, 과직, 콰광!
마력강화의 방호력과 [철벽] 스킬을 더해 공격을 받아내며, 몸통박치기로 길을 뚫는다.
최대 속도로 질주하자, 금세 뱀용의 머리 부근에 도달할 수 있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높이 점프했다.
뛰어오른 나를 집어삼키기 위해 쩍 벌려지는 아가리, 이 정도로 큰 주둥아리면 당연히 나 정도는 한입에 삼키겠지.
나는 전이와 리콜을 위해 필요한 손목의 마도구를 잠시 떼어 인벤토리에 넣어놓고, 그대로 놈의 입안으로 다이빙했다.
뭣하러 힘들게 급소를 찾고 있단 말인가. 생명체라고 한다면 몸속은 대부분 급소일 거 아니야?
몸 안에 있으면 포격 타이밍에 맞춰서 복귀할 필요도 없고, 귀찮게 거인을 상대할 필요도 없다.
-촤자자작!
뱀용의 식도로 추정되는 부분을 칼로 긁으며 내려왔다. 분수처럼 쏟아진 피와 축축한 소화액이 몸에 잔뜩 묻었다.
현재 나는 갑옷이 상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장비를 해제하고 거의 맨몸으로 있는 상태다.
원래라면 이 소화액인지 뭔지에 녹아서 소화되어야 하겠지만, 내가 부식 내성 레벨이 보통 높은 게 아니라서.
“근데 뱀 내장 구조는 어떻게 되어 있는 거지.”
입을 통해 들어왔으니 여기는 위장이나 식도겠지, 심장 같은 부위를 노리고 싶지만- 마땅히 방법이 없나.
이렇게 되면 이제는 인벤토리에 준비해 둔 그 물건의 차례다. 나는 곧바로 그것을 꺼냈다.
마석을 엮어 만든 간이식 마력 폭탄. 원래는 역린을 가르고 처박을 예정이었지만, 이번에는 여기서 쓰자.
-푹!
나는 가능한 한 깊숙한 안쪽까지 들어와서, 검을 휘둘러 상처를 낸 자리에 마석 폭탄을 잘 심어두었다.
“아군을 버리고 내 뱃속으로 들어오다니, 생에 미련이 없는가- 이름 모를 인간족이여.”
머릿속에서 시끄럽게 울리는 전음. 목소리가 조금 전과 살짝 다르다. 이런 건 생각 못 했나 보지?
-후두둑, 후둑!
위벽인지 뭔지 모를 벽면에서 새까만 체액이 쏟아진다. 조금 전의 위액과는 달라 보인다.
거인이나 나뭇가지 이외의 몸을 지키는 수단인가. 살짝 손을 대 보니, 불로 지진 것처럼 손끝이 타들어 갔다.
이 느낌도 통증도 모두 익숙하다. 누가 뱀 아니랄까 봐 자체적으로 독을 가지고 있는 모양인데.
“고통 속에서 무의미하게 죽도록 해라.”
엘프 왕의 선언과 함께 넘쳐흐르는 독액의 세례에도, 나는 꿈쩍하지 않고 폭탄을 만졌다.
내 독 내성과 부식 내성을 뚫는 게 뭐 어떻다고, 애초에 내가 내성을 키운 방법 자체가 이런 식이었는데.
내 재생력과 이 녀석의 독액, 그리고 내 공격력과 이 녀석의 생명력이 서로 겨루는 거다.
“누가 먼저 죽나 해 보자.”
[혼신] 스킬로 내구력을 최대한 증폭시키고, [철벽]스킬을 사용하며, 나는 폭탄을 가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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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야가 백색으로 물들고, 터져 나온 마력에 감각이 제멋대로 날뛰었다.
하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태 그대로 마구잡이로 검을 휘둘렀다.
어차피 사방 모두가 뱀용의 몸뚱어리, 아무렇게나 베어도 전부 공격으로 들어간다. 문제는 내 몸뚱이긴 한데.
[패시브 스킬 : 기절 내성 13레벨을 습득하셨습니다.]
[패시브 스킬 : 전투 지속 16레벨을 습득하셨습니다.]
몇몇 스킬 레벨이 계속해서 오르는 걸 보면, 분명 심하게 만신창이일 게 뻔하다. 실제로 통증도 장난이 아니고.
마음같아서는 비명을 지르고 싶을 지경이지만, 목이 잘못됐는지 소리가 안 나온다.
그래서 그냥 신경 쓰지 않고, 무작정 검을 휘둘렀다. 내 앞에 있는 무언가를 계속해서 베고 또 베었다.
그러던 중, 약간의 감각이 몸에 돌아오며- 뜨거운 바람이 훅 끼쳐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푸학!
바람이 끼쳐오는 방향으로 몸을 내밀었더니, 바깥이었다. 뱀의 배를 가르고 바깥으로 튀어나온 것이다.
-그아아아아아!!
뱀용의 요란한 비명소리가 귓가를 쩌렁쩌렁 울렸다. 내가 속에서 날뛰는 사이, 바깥쪽에서도 피해를 준 모양.
나는 인벤토리에 넣어두었던 전이용 마도구를 다시 장착하고, 리콜을 요청했다.
-츠팟!
공간 전이 특유의 울렁거리는 감각과 함께, 나는 연합 부대의 진지 중 하나로 귀환했다.
“맙소사, 꼴이 말이 아니군. 포션, 누가 포션을 가져와!”
아마도 걸레짝이 되었을 내 몸뚱이를 보고 난리 치는 병사에게 손을 휘휘 젓고, 내 포션을 꺼내 마셨다.
마시려고 했는데 질질 흐르는 걸 봐서는 얼굴도 어떻게 됐나 보네, 사지가 안 날아간 게 천만다행이다.
“크……어윽, 아, 아아.”
그럭저럭 몸을 회복하고, 처음으로 제대로 소리를 냈다. 이번에도 HP가 상당히 갈린 상태였다.
하지만 중요한 건 어차피 회복될 내 HP가 아니라, 월드 보스의 HP다.
나는 진지 밖으로 나가서 뱀용의 상태를 살폈다. 그 잠깐 사이, 바깥은 말도 안 되는 꼴이 되어 있었다.
“허, 씨팔, 저게 뭐야.”
여기저기에 생채기가 난 뱀용의 몸에서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왜 뜨거운 공기가 느껴지나 했더니, 불타고 있잖아. 나는 진지의 병사에게 설명을 부탁했다.
“조금 전부터 갑자기 스스로 발화하기 시작했다. 모종의 마법 같은데.”
HP가 감소하면서 나타난 새 패턴이겠지, 커뮤니티에서도 피가 깎이고 난 이후가 진짜라고 했으니.
마법 공격에 대한 방어 대책은 착실하게 갖춰져 있다. 난데없이 브레스를 쏴도 한 번은 얼마든지 막을 수 있다.
하지만 뱀용은 내가 생각한 것과는 전혀 다르게 움직였다. 이어진 것은 마법이 아닌 물리 공격.
-콰과과광!
화염을 휘감은 뱀은 그대로 그 거체를 움직여, 대지를 휩쓸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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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상성
압도적인 거체에서 나오는 파괴력과, 몸에 휘감은 불꽃이 흩어지며 만들어내는 화염 폭풍.
그렇잖아도 어마어마한 범위를 쓸어버릴 그 공격은, 나무가 가득한 대산림이라는 환경에서 재앙으로 변모했다.
뱀용의 몸부림으로 뽑혀나간 나무가 하늘 높이 솟구치고 주변의 땅이 그것을 뒤따른다.
까마득하게 높이 상승한 잔해들은 모조리 불이 붙은 채로 다시 낙하했다.
그렇게 불붙은 잔해는 또 다른 잔해에 불을 붙이고, 이윽고 퍼져 나가는 산불을 만들었다.
“이런 미친……!”
불타기 시작한 뱀용의 공격은 내가 있는 자리까지 닿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큰 문제였다.
전방에 배치되어 있던 마포가 박살이 나고, 마포를 다루는 병사와 마법사들이 단번에 휩쓸려버렸다.
마포 포격이야말로 이쪽에서 동원할 수 있는 최대의 화력인데, 그 절반이 날아가 버린 거다.
-슈루룩!
내 옆에서 커다란 그림자가 솟구치더니, 그 안에서 다수의 엘프와 인간 병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림자 마법을 쓸 수 있는 누군가가 급하게 전이를 사용해 대피시킨 것 같다.
그 때, 불타고 있던 뱀용이 나를 바라보았다. 거대한 눈동자가 분명하게 나를 직시했다.
“거기 있었구나.”
머릿속에서 들려오는 전음, 그와 동시에 뱀용은 다시 한번 그 불타는 몸으로- 이쪽을 향해 몸을 뻗었다.
-콰과광!
진행경로에 있는 모든 사물을 무시하고 직진, 나는 [혼신]을 비롯한 버프를 발동해 즉시 뛰어올랐다.
곧 내가 있던 자리를 뱀용의 거체가 휩쓸었다. 근처에 있던 아군들이 모조리 짓뭉개지고 불타서 사라져 버렸다.
몸 속에 들어가 난동을 부려놓은 게 녀석의 신경을 긁은 걸까. 내 쪽에 제대로 어그로가 끌린 것 같다.
순간, [직감] 스킬 특유의 간질거리는 감각이 들어 발밑으로 방패를 내밀었다.
-쾅!
방패 위로 무식하게 큰 화살이 박혔다. 거인 엘프가 사용하는 그 화살, 그것도 불이 붙은 채다.
마력감지를 사용해 감각을 뻗어 보니, 내가 있던 자리를 통째로 뭉개버린 뱀용의 뒤통수에 거인들이 서 있었다.
그리고 직후, 시야가 환하게 밝아졌다. 어마어마한 숫자의 거인들이 동시에 화살을 쏘았다.
-푸학!
마치 지면이 나를 향해 불을 토하는 것 같았다.
다 세기도 힘든 숫자의 불화살이, 공중에 있는 나를 노리고 쏘아졌다.
나는 재빨리 반응했다. 공중에서 자세를 다잡고 소드 차지를 시전, 돌진 판정을 이용해 화살의 경로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엘프의 화살은 빗나가지 않는다. 불화살이 기묘한 각도로 꺾여 나를 노렸다.
“씨이, 발!”
인벤토리에서 가장 큰 방패를 꺼내 양손에 들고, 최대한 몸을 가려 화살을 받아내었다.
최대한 모두 막으려 노력했지만, 불화살의 숫자가 숫자였기에 몸에도 많은 숫자가 박혀 들어왔다.
불화살이 몸에 박히는 순간 눈치챘다. 화살의 추적 능력에 기술이 아니라 마법이 쓰였음을.
어쩐지 유도 성능이 너무 말이 안 된다 싶었지, 마법을 부여해서 쏜 거였군.
대마법 내성 스킬과 화염 내성 스킬이 없었다면 안 비운 재떨이 같은 꼴이 되었을 거다.
“놓치지 않는다.”
뱀용이 다시 한번 전음으로 말했다. 온몸에 불화살이 박힌 나를 향해, 놈의 머리가 다시 한 번 닥친다.
자유자재로 몸을 꺾을 수 있는 녀석과는 다르게, 나는 공중에서는 거의 움직일 수 없다.
-쿠구구구궁!
지면에서 솟구친 뱀용의 대가리는 나를 곧바로 치지 않고, 한 번 목을 굽혀 나를 내려다보았다.
시발, 설마, 아니겠지.
몸에 박힌 불화살을 뽑아내며, 나는 방패를 앞으로 내밀었고- 뱀용은 나를 향해 대가리를 내리꽂았다.
불타는 대형 빌딩이 나를 향해 낙하하는 꼴, 이대로 있다간 지면에 처박히고 저 대가리에 뭉개진다.
그런 미래가 뻔히 보이는데, 대처할 방법이 없다.
돌진기로 피할 수 있을만한 크기가 아니다. 저런 걸 방패로 막을 수 있을 리도 없다.
이렇게 되면 남은 건 도박이다. 한 번만 살면 된다. 나는 인벤토리에 있는 물건들을 있는 대로 눈앞에 소환했다.
이 물건들이 조금이라도 충격을 완화해 주기를 바라며, 마력강화를 발동했고.
다음 순간, 의식이 끊겼다.
**
정신이 들자, 물에 잠긴 듯 몽롱한 감각이 전신을 덮고 있음이 느껴졌다.
어떻게든 즉사는 안 했다. 흐릿하게 보이는 HP 바는 밑바닥을 넘어서 아예 남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살아 있는 걸 보니 정말 없는 건 아닐 테고, 한 1~2 정도쯤 남았으려나?
일단 내 몸이 무슨 꼴인지부터 다시 체크하자. 마력감지와 감각강화를 사용한다.
손끝은 움직이고, 어깨도 대충 움직이고, 팔도, 다리도 대충 움직이는데- 다 오른쪽만 움직인다.
좌반신이 날아갔나? 근데 그랬으면 죽었을 텐데?
일단 인벤토리를 기억에 의존해 조작해서, 포션을 꺼낸 뒤 오른손으로 대충 깨부쉈다.
-주르륵.
얼굴에 포션이 퍼부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다행히 목이 꺾여 있진 않았던 모양이네.
“윽, 끄하악……!”
천천히 좌반신의 감각이 제대로 돌아오고, 망가졌던 시야도 회복되었다. 몸을 일으켜 포션을 하나 더 마셨다.
그렇게 완전히 감각을 회복하고 나니, 눈에 들어온 것은- 그저 불타는 주변이었다.
나는 크레이터처럼 푹 패인 구덩이 한가운데에 박혀 있었다. 구덩이 근처에는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고.
이거 뭔 운석 충돌 현장 같네, 운석은 아니지만 빌딩 사이즈 뱀이 충돌했으니 그럴 만도 한가.
-콰과광! 콰광!
힘겹게 몸을 일으키니, 멀리서 요란한 굉음이 들려왔다. 아직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뱀용의 머리에 짓뭉개져서 의식을 잃었는데도, 아직 살아있는 이유를 알 만했다.
내가 여기 뻗어있는 동안, 다른 사람들이 어그로를 끌어서 싸워 주고 있었던 거다. 목숨 빚졌네.
“끄, 으헉……씨발, 움직여, 그렇지.”
걸레가 된 몸에 채찍질을 해가며 억지로 구덩이에서 빠져나왔다. 저쪽에서 싸우는 이의 기척이 느껴진다.
엘레노어다. 그리고 아마도 메르세데스도, 왕국군 군단장이라는 놈도 있는 것 같다.
우리 쪽 최고전력 중에서 딱 나만 빠진 상태다.
염병할, 목표는 퍼펙트 클리어라고 그렇게 폼 잡았는데. 이게 무슨 꼴인지.
다른 건 몰라도, 이곳을 지키겠다는 네 바람만큼은 완벽하게 이뤄주겠다고 결심했는데.
네가 거기서 싸우고, 내가 여기에 처박혀 있는 건 좀 아니잖아. 그치?
“후우…후우…”
가슴 쪽 뼈가 어떻게 된 건지, 숨만 쉬어도 통증이 온다. 몸 안의 마력 상태도 이상하다.
마력강화를 사용한 뒤에 찾아오는 신체의 반동. 몸 상태가 안 좋아서 그게 더 심하게 온 것 같다.
자력으로 마력강화가 불가능한 이상, 반동은 어쩔 수 없이 감수해야 한다. 죽지는 않겠지.
-쿠르릉!
충돌 때의 충격으로 너덜너덜해진 펜던트를 부여잡고, 다시 마력강화를 발동했다.
[불굴]과 [혼신]이 모두 발동하고 있음을 느끼며, 세 명이 싸우고 있는 전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곳에는 처음보다 눈에 띄게 작아진 덩치에, 팔이 돋아나 있는 뱀용이 기다리고 있었다.
**
아무래도 불이 붙은 채로 날뛰던 게 2페이즈의 시작 패턴이었던 모양이다.
자신을 불태웠기 때문인지 뱀용의 몸집은 크게 작아져 있었고, 그 대신 어이없게도 팔이 돋아나서 검을 들고 있었다.
솔직히 뱀이라고 하기에는 좀 어이없는 꼬락서니지만, 나는 저게 더 마음에 든다.
“너, 벌써 움직일 수 있는 건가!”
불타는 검을 휘두르는 뱀용을 상대로 맞서고 있던 메르세데스가 소리쳤다. 다른 두 사람이 나를 쳐다봤다.
“그대, 그런 몸으로 움직이다간 죽는다! 물러나 있어라!”
별 말 없이 감탄한듯한 표정을 짓는 왕국군 군단장과 다르게, 엘레노어는 사색이 되어 소리쳤다.
이미 결별을 선언했음에도 엘레노어는 여전히 나를 걱정한다. 참, 웃기는 일이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면서, 내가 어떤 위기를 거쳐 왔는지 알면서, 내가 죽음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알면서.
그리고 내가 어떤 순간에 가장 강해지는지도, 알면서.
“물러설 곳이 있을 것 같은가, 이 별을 모조리 먹어 치울 것이라고 말했건만!”
-화르륵!
뱀용이 불타는 검을 휘두르자, 그 방향대로 거대한 화염이 솟구쳐 나를 덮쳤다.
나는 내성을 믿고 화염을 몸으로 뚫어내고, 반대로 뱀용을 향해 달려들었다.
손에 든 무기는 평소에 쓰던 검이 아니라, 찌르기에 용이한 창.
-후웅!
뱀용은 몸을 비틀어 가볍게 창을 피해냈다.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 이미 내 손에는 다른 무기가 들려 있었다. 묵직한 도끼가.
-콰직!
단숨에 거리를 좁혀, 도끼로 놈의 몸통을 내려찍었다. 여전히 데미지는 잘만 들어간다.
공격을 허용한 뱀용이 이번에는 입에서 불을 뿜었다. 나는 이번에도 무시했다.
-서걱.
불길에 반대로 뛰어들고, 이번에는 검을 휘둘러 놈의 몸을 베었다.
뱀용의 다음 패턴은 검이었다. 불타는 검은 막아내도 그 화염으로 데미지를 입힌다.
하지만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내겐 통하지 않는다. 처음부터 그랬다.
이 놈의 화염은 단 한 번도 내게 대단한 피해를 주지 못했었다.
-카앙!
검격의 무게가 굉장하다. 절로 팔이 떨릴 지경이다. 하지만 물리 공격만 막았으면 됐다.
“뭐, 뭐지, 인간족은 불에 안 타는 거였나……?”
불꽃에 지져지면서도 아무렇지 않은 내 모습을 보고, 뱀용이 처음으로 당혹감을 드러냈다.
분위기 확 깨는 말이구먼, 여태까지의 여유롭던 태도가 다 가짜였던 것처럼 느껴져.
“너, 역시 그 왕자 놈 조상이 맞긴 하구나?”
속성 공격은 전부 화염 중심이고, 이젠 덩치도 작아졌고, 마법사라 그런지 검 솜씨는 영 아니고.
하하, 맨날 억까만 당하다가 가장 중요한 월드 보스 레이드에서 이런 억빠를 받을 줄이야.
극상성을 만나니까 아주 어질어질하지, 이 새끼야?
나도 그 기분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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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 마지막의 마지막에
나는 이번 월드 레이드를 준비하면서 커뮤니티의 도전자들에게 내 스펙을 일부 공개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비교 대상인 랭커들의 스펙에 대해서도 일부 알게 되었다.
내 짐작대로, 현재의 내 스펙은 25층에 체류 중인 저층 랭커들을 확실하게 웃돌고 있었다.
물론 노멀 클래스의 한계로 액티브 스킬의 다양성 등에서는 아무래도 밀리긴 했지만.
딱 하나, 전체 스펙 중에서 딱 한 부분 만큼은 내가 압도적으로 우월했다.
내성 스킬.
비교적 최근에 습득한 [대마법 내성]이나 [주문 내성]등은 그렇게 대단하지는 않았지만.
초반에 얻어서 꾸준히 성장시킨 [화염 내성]이나 [독 내성] 같은 스킬은 비교 대상이 마땅히 없을 정도였다.
듣기로는, 75층 이상에 체류 중인 최상위 랭커급도 이 정도의 내성 레벨을 가진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한다.
랭커급 중에서 드물게 나와 비슷하거나 높은 내성을 가진 이들도 있기는 있다는 모양이지만.
그들 마저도 나처럼 다양한 방면의 내성을 골고루 갖고 있지는 않은 것 같았다.
고로, 화염을 주 무기로 사용하고 있는 현시점의 뱀용이 내게 유효타를 입히지 못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콰직!
힘차게 내려친 전투망치가 뱀용의 거추장스러운 팔 한쪽을 으스러트렸다.
“크아아악! 네 이노옴!”
말 그대로 덧붙였던 사족을 상실한 뱀용은 추한 목소리로 소리 질렀다.
저 외침 자체에도 마법적 효과가 있는지, 몸의 상처 이곳저곳이 욱신거리더니 불길이 피어났다.
나와 함께 맨 앞에서 싸우던 메르세데스와 군단장도 함께 불에 휩싸였다.
다만, 마법사로서 후열에서 싸운 엘레노어에게선 불길이 피어나지 않았다.
저 검이나 몸에서 돋아난 가지로 입힌 상처만이 발화하는 모양이다. 따지고 보면 정말 양심 없는 패턴이다.
화염의 위력이 그렇게 강한 건 아니지만, 입힌 피해에 비례하는 광역 회피불가 패턴인 것 아닌가.
나한테 화염 내성이 없었다면 불합리하다고 온갖 욕을 쏟아냈어도 모자라다.
“재주는 다 부렸냐.”
상처에서 돋아난 불길을 툭툭 때려서 꺼트리고, 다시 무기를 쥔 채로 뱀용에게 달려들었다.
뱀용은 기겁하며 마구 가지를 뻗어댔지만, 처음보다 뻗을 수 있는 가지의 숫자가 현저히 줄어 있었다.
불타는 몸도 점점 작아져서, 이젠 월드 보스라는 거창한 이름도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다.
-푹!
길쭉한 창이 뱀용의 몸에 꽂혔고, 놈은 또다시 고통스러워하며 커다란 몸을 꿈틀대었다.
이젠 피하려고 발버둥치는 모습도 제대로 못 보여주고 있다. 하긴, 그 한참을 나한테 일방적으로 당했으니.
발악이랍시고 내보였던 패턴도 다 파훼해버렸고, 보아하니 마땅히 날뛸 힘도 남지 않은 것 같다.
“이제 끝내자, 징그러운 새끼야.”
나는 뒤편에 있는 세 사람에게 신호를 보냈다. 엘레노어를 제외한 두 사람이 나와 함께 달려들었다.
일격의 공격력은 나보다 메르세데스가 높고, 공격 속도는 인간 군단장 녀석이 더 빠르다.
나는 저 최상급 NPC 두 사람에 비해, 마력강화의 수준이며 기본적인 스탯이며 모두 뒤떨어진다.
-슈루룩!
하지만 내 몸에 휘감기는 검은 그림자, 엘레노어의 보조 마법이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화르륵! 쾅!
터져나온 폭염이 함께 달려든 두 사람을 밀어내지만, 화염을 견딜 수 있는 나는 저지당하지 않는다.
뱀용은 그런 나를 향해, 불타는 가지들을 있는 대로 쏟아내었다.
행색이며 태도를 보아하니 아마 이것이 마지막 발악.
나는 마땅히 피하기 힘든 그 공격을 그냥 몸으로 받아내며, 어렵게 찾아낸 뱀용의 역린을 맞찔렀다.
-푸학!
붉은 빛으로 터지는 크리티컬 이펙트, 그리고 가지에 찔린 내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붉은 피.
오늘 하루 몇 번이나 바닥을 보였던 HP 바가, 다시금 아슬아슬한 지점까지 깎여 나간다.
나는 죽어가는 몸은 무시한 채, 그대로 놈의 역린을 연달아 찔렀다.
-콱콱콱콱콱!
모든 찌르기가 크리티컬을 터트리고, 놈의 공격도 내 몸을 모두 관통했지만.
처절한 맞찌르기를 몇 번이나 반복한 끝에 쓰러진 것은- 내가 아니라 타오르는 뱀 쪽이었다.
“아아아아아아!”
-쿵!
놈이 쓰러졌다. 먼지가 흩날렸다. 그리고 눈앞에는 알림창이 연달아 떠올랐다.
[WORLD BOSS - 세계를 삼키는 뱀용, 니드그라크'스바르프발니르를 처치하셨습니다!]
[위대한 업적을 달성한 공격대를 모두가 칭송할 것입니다!]
[공격대 명단 : 서진혁 (1명)]
[레이드에 참가한 모든 공격대원에게 보상이 지급됩니다.]
주르륵 올라오는 알림창의 숫자는 어마어마했다. 하나하나 다 읽기 힘들 정도였다.
이만한 보상을 받았는데도 성장의 쾌감이나 뿌듯함은 뒤따르지 않았다.
월드 보스를 클리어했다는 것은, 그렇게 망설이고 망설인 끝에 고른 작별이 찾아왔다는 뜻이니까.
“아무튼……이겼네.”
나는 쓰러진 뱀용의 머리를 짓밟고 작은 목소리로 승리를 선언했다.
“이제 정말로 작별이겠구나, 그대.”
한 발짝 떨어져 있던 엘레노어는 나를 보며 그렇게 말하고는, 쓰게 웃었다.
**
요란하게 올라온 보상 관련 알림을 모조리 꺼 버리고, 엘레노어에게 다가갔다.
“저걸 쓰러트렸으니 이제 퀘스트라는 건 끝났을 텐데, 어느 시점에서 의식이 사라지는지를 모르겠구나.”
엘레노어는 살짝 웃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레이드 시작 직전과는 다르게 후련한 모습이다.
“보상을 수령하고 나면 거기서 끝이야. 이미 보상은 인벤토리에 들어왔으니까, 곧 이겠지.”
“흐음, 마지막으로 작별 인사를 할 시간 정도는 주는 건가. 아직은 깡통이 되지 않은 것 같은데?”
“나도 정확히 아는 건 아니니까. 너도 내 기억에서 봤을 거 아니야. 자주 있는 일은 아닌 거.”
메르세데스와 군단장은 우리가 하는 이야기를 알아듣지 못했다. 둘 다 NPC니까.
“근데, 작별 인사라면 우리 이미 충분히 하지 않았나.”
“모르겠구나, 그걸 작별 인사라고 말해도 되는 걸까?”
뱀용의 시체에 저마다의 반응을 보이는 둘을 내버려 두고, 우리는 살짝 떨어져 이야기했다.
“그대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아직 많은데, 아직 정리되지 않아서……제대로 입 밖에 낼 자신이 없구나.”
엘레노어는 자리에 주저앉으며 한숨 쉬었다.
“이야기하다 도중에 끊겨 버리면, 분명 오해를 낳을 게 뻔하니- 차라리 말하지 않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어.”
나도 같은 생각이었다. 어중간하게 대화하다가 돌연 깡통으로 변해 버리면, 충격이 클 것 같다.
우리는 그렇게 몇 마디 말을 통해, 작별 인사는 따로 하지 않기로 합의했다.
깡통으로 변해버리는 게 언제가 될지 모르니, 그 때에 위화감을 느끼지 않도록 자연스럽게 행동하기로도.
“승전고를 울리고, 피해를 수습해야겠어. 그대는 그동안 떠나도 괜찮고- 승리를 만끽해도 좋다.”
마음같아서는, 아니- 결심한 대로라면 바로 떠나야겠지. 몸 상태가 조금만 더 좋았으면 지금 바로 떠났을 거다.
내 재생에도 한계가 있기는 한 모양인지, 몇 번이나 연달아 반죽음에서 살고 나니 회복이 더뎌졌다.
이 꼴로 마력강화를 계속 사용한 반동 탓일지도 모르겠다. 펜던트도 이 꼴이고.
-절그럭.
내게 마력강화를 사용할 수 있게 해줬던 펜던트는 격한 싸움 도중에 완전히 망가지고 말았다.
내구도가 깎인 게 아니라 아예 파괴 판정인지, 아이템 이름과 분류 자체가 바뀌어버렸다.
월드 레이드 보상으로 얻은 게 많긴 하지만, 가장 중요한 마력강화 펜던트를 잃어버리고 말다니.
소모한 아이템과 골드를 생각하고 계산기를 두드려 보면, 최종적으로는 손해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잃은 것을 모두 숫자로 환산할 수는 없겠지만.
**
나는 그로부터 정확히 하루를 꼬박 쉬고, 다음 층으로 올라가기 위해 미궁 구역을 찾았다.
미궁 구역 자체는 월드 보스 레이드로 소멸했지만, 다음 층으로 넘어가기 위한 전이문은 이곳에 있었다.
에픽 퀘스트의 보상은 아직 지급되지 않았다. 완료 처리가 되긴 했지만, 아직 랭크를 산정 중이라나.
랭크 산정이 끝나면 보상은 자동으로 들어온다고 하니, 다음 층으로 올라가도 별문제는 없을 거다.
보상을 받기 전인 만큼, 아직 엘레노어는 깡통으로 변하지 않았겠지만.
괜히 따로 작별 인사를 해서 무언가 응어리를 남기고 싶지 않다. 그래서 이렇게 혼자 나온 거다.
“뭐, 다들 어떻게 됐는지는 대충 봤으니까……”
그래도 지난 하루 동안, 후일담이라고 할 만한 이야기를 멀리서 지켜볼 수는 있었다.
엘레노어는 세계수에 대해 더 알아야 할 것 같다며, 처치된 뱀용의 시체를 가져가 연구를 시작하기로 했다.
메르세데스는 왕자를 위한 묘를 만들고, 이후에는 어설프지만 남은 하이엘프들을 이끌어 보겠다고 말했다.
왕국군은 따로 이야기를 나눌 사이는 아니었지만, 군단장이라는 놈이 나한테 스카우트 제의를 건네고 떠나갔다.
갈 곳이 없으면 언제든 왕국으로 오라고, 나만 한 실력자라면 언제든 환영이라나.
물론 내가 9층을 다시 찾는 일은 없을 거다.
아무리 힘들고 괴로워도, 멈추지 않고 나아가기로 맹세했으니. 발길을 돌릴 수는 없다.
이 세계를 지켜냈다는 약간의 자부심 정도만을 갖고 떠나서- 괴로울 때면 가끔 떠올리자.
아니, 아니지. 자부심은 무슨, 내가 그런 걸 가져도 될 리가 있나. 잊어버리자.
[계층 전이문을 활성화합니까?]
나는 곧바로 10층으로 넘어가기 위해 전이문을 활성화했고.
-쿵!
그 순간, 커다란 굉음이 먼 곳에서 터져 나와 하늘을 울렸다.
그리고 마력감지에 느껴지는 폭발적인 힘의 파장. 위치는 다크엘프의 요새가 있는 그쪽이다.
뭐야 이게, 에픽 퀘스트는 이미 클리어했는데?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끝이 아니라고?
무시하려면 무시할 수 있다, 계층 전이문은 아직 작동하고 있다. 어차피 퀘스트는 다 끝났다.
하지만 정신 차린 순간, 나는 이미 다크엘프의 마을을 향해 달려가는 중이었다.
“야, 이게, 이게 다 뭔, 지랄 마 진짜.”
그곳에서 나를 반겨준 것은, 정체불명의 검은 쐐기에 배를 관통당한 엘레노어의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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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 서진혁 : 엑스포지션
전속력으로 달려 돌아온 다크엘프의 마을은 초토화가 되어 있었다.
뱀용에게서 지켜낸 것이 무색할 만큼 처참한 광경이었다. 높이 솟아 있던 탑도 무너져 가고 있었다.
이해를 벗어난 상황에 심장이 쿵쾅거렸다. 나는 다급히 마력을 퍼트려 엘레노어를 찾았다.
그리고 상황은 지금에 이른다.
-푹.
뱀용이 다루던 가지를 그림자로 다시 엮어낸 듯한 검은 쐐기.
엘레노어의 등을 꿰뚫고 솟아나 있는 그것에선 기묘한 마력의 흐름이 느껴졌다. 어딘가 익숙했다.
쐐기는 저 멀리 알 수 없는 검은 덩어리로부터 뻗어나와 있었다. 덩어리는 꿈틀거리며 형태를 갖추었다.
인간이라고 칭하기에는 다소 구성요소가 부족한, 너저분한 진흙 덩어리로 빚은 듯한 인영.
“나는 죽지 않는다. 결코 멸하지 않는다.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입인지 뭔지 모를 구멍에서 새어나오는 소리가 그것의 정체를 알려주었다. 그놈이다.
-투둑.
검은 형체가 쐐기를 뽑아냈다. 엘레노어는 휘청거리며 땅에 엎어졌다. 피가 흥건하다.
“엘레노어.”
나는 좀처럼 불러본 적이 없었던 엘레노어의 이름을 불렀다. 대답은 없었다.
허겁지겁 인벤토리를 열어 포션을 꺼내고, 엘레노어의 상처에 들이부었다. 아직 살아 있다.
하지만 명백하게 상태가 나쁘다. 출혈량이 너무 많다. 이건 상처가 아물어도- 아냐, 생각하지 말자.
“정신 차려, 야, 네가 이렇게, 이런 식으로 죽으면 어쩌라고……!”
나는 다시 포션을 들이붓고, 그리고, 엘레노어의 상처를, 이걸, 어떡해야 하지?
“그, 대……”
엘레노어가 흐릿하게 눈뜨며 나를 불렀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이어지는 다른 목소리에 묻히고 말았다.
“나는 모든 엘프의 왕, 별을 건너 새 엘프의 지도자가 될 자, 죽음과 멸망을 거부하는 자!”
전음과 뒤섞인 육성, 형태가 저런 꼴이라서 그런지 목소리가 유난히 귀에 거슬렸다.
-으득.
주절주절 떠드는 소리를 듣다 보니, 세게 악문 이빨이 이상한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나는 욕망의 총체다, 누구나 꿈꾸는 불사의 소망을 대변하는 자다!”
“아가리 닥쳐, 씨발 새끼야!”
“욕망은 결코 쇠하지 않는다, 네놈 따위의 검은 내게 닿지 않는다!”
흔들거리는 추한 진흙덩이를 보며 검을 뽑았다. 놈은 촉수처럼 휘어지는 팔을 휘둘렀다.
그 속도며 기세가 모두 심상치 않았다. 나는 바로 [혼신]을 발동해 그것을 받아냈다.
-콰광!
단순히 부딪히기만 했을 뿐인데, 어마어마한 충격이 몸에 닥쳐 뒤로 나동그라졌다.
잠시 내려두었던 엘레노어의 몸 역시 그것에 휘말려 굴러갔다.
검을 쥐었던 손아귀가 찢어져 피가 흐르고 있다. 말도 안 돼, 이젠 월드 보스도 뭣도 아닌데.
“왜, 왜 항상…왜 맨날, 왜 자꾸, 왜 너 같은 새끼가! 왜!”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왜 나한테만 늘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새끼들이 나타난단 말인가.
히든 보스고, 월드 보스고, 솔플로는 못 깨는 기믹 던전이고, 왜 죄다 내 앞에만 나타나고 지랄이냔 말야.
이렇게 강해졌는데도 항상 더 강한 놈이 나타나서 앞을 가로막는다. 언제나, 항상, 나만!
“좀 적당히 하라고, 이 씨발 새끼들아!”
감정에 반응해 마력이 요동친다. 파도치는 마력은 줄줄 새나갈 뿐, 아무런 힘도 주지 않는다.
마력강화만 할 수 있었으면, 펜던트가 아직 고장 나지 않았더라면, 그냥 내가 솔플러가 아니었다면.
그러기만 하면 어떻게든 할 수 있었을 텐데, 서진혁 이 병신같은 새끼는 왜.
-쾅!!!
“큭!”
어느새 또 한 번 쏘아진 촉수가 방패 위를 때리며, 어마어마한 충격이 몸에 닥쳤다.
조금 전처럼 나가떨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곁에 있던 엘레노어의 몸은 또다시 휘말려 밀려났다.
좆같다. 마력강화도 못 하는 상태로 이길 수 있는 놈이 아니다. 이 새끼도 뒤지게 세다, 씨발.
“씨바알!”
검을 집어넣고 피를 흘리고 있는 엘레노어의 몸을 둘러업었다. 일단은, 여기서 벗어나야 한다.
무슨 상황인지 하나도 모르겠고, 이길 수 있는 상대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일단 엘레노어를 이대로 둘 수는 없었다. 이러다간 분명 휘말려서 죽고 말 거다.
나는 그대로 곧장 바깥을 향해 달렸다. 다행이게도 저놈의 공격은 그렇게 멀리까지 닿지 않는 듯 보였다.
그럼에도 몇 번 공격이 스쳐서 위험했지만, 이동속도 역시 느린 모양인지 금방 거리를 벌릴 수 있었다.
-쾅! 쾅!
나를 뒤쫓던 진흙 괴물은 다크엘프 마을을 마구잡이로 파괴하기 시작했고, 나는 그 틈에 더 멀리 달렸다.
[별빛이 자라는 호수]
그렇게 도달한 곳은, 언젠가 요정과 함께 춤추었던- 내 가슴에 묘한 울림을 만들었던 장소.
어쩌면 추억이 깃들어 있다고도 말할 수 있는 그 장소에서, 나는 죽어가는 엘레노어를 품에 안았다.
그리고 엘레노어는 느릿하게 눈을 떴다.
**
꿰뚫렸던 자리가 조금은 아물었다. 하지만 완전히 나을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당연하다. 내가 몇 번이나 빈사에서 살아나올 수 있었던 건, 포션의 성능이 아니라 재생 능력 덕분이었으니까.
9층 수준에서 구할 수 있는 포션은 결손 수준의 상처는 수복하지 못한다. 이렇게 큰 상처 역시 마찬가지다.
“그대여, 왜 돌아왔나. 아직 퀘스트가 끝나지 않았던 건가……?”
나는 고개를 저었다. 에픽 퀘스트는 분명 완료되었다. 실제로 나는 층을 떠나기 직전이었다.
“작별 인사는 따로 하지 않기로 했을 텐데, 왜 돌아와서……또 다쳐서는.”
자신의 몸에 뻥 뚫린 구멍은 보이지도 않는지, 대수롭지도 않은 내 상처를 걱정하는 엘레노어.
나는 그 말에 뭐라고 대답할 수 없었다. 나도 내가 왜 돌아왔는지 모르겠으니까.
다크엘프 마을에 무슨 일이 생기건 이젠 내 알 바가 아니다. 어차피 퀘스트는 끝났으니까.
어차피 여기 있는 것들은 죄다 NPC니까, 자아 없는 깡통대가리에 불과하니까.
돌아올 이유 따위는 전혀 없다고,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었는데- 몸이 멋대로 움직였다.
“그래, 그렇구나…우리를 걱정해 준 거지? 가슴이 그대를 움직인 거야.”
엘레노어의 손이 내 가슴을 짚었다. 나도 같은 생각을 했다.
이미 옛저녁에 내버리기로 해 놓고, 아직도 버리지 못한 것.
탑을 올라야 한다는 의지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마음이 내 발길을 돌리고 말았다.
한심하다, 한심해, 서진혁.
그렇게 욕을 봤으면서도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다니. 대체 몇 번을 더 겪어야 완전히 버릴 수 있는 거냐.
아니, 빌어먹을, 이쯤 되면 인정할 수밖에 없다. 자신을 속이는 일이란 왜 이렇게도 어려운지.
많은 것을 버렸다.
하찮은 욕구.
쌓인 습관.
인간성.
선택지.
안주하는 행복.
그렇게 버리고 또 버린 끝에.
“후후, 저 망령에게 감사해야겠는걸.”
어떻게 해서도 버릴 수 없는 것만이 남았다.
“이렇게, 준비했던 말을 그대에게 남길 기회가 생겼으니 말이야.”
엘레노어는 죽음에 둘러싸이고 있음에도, 분명하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슬퍼하지 마라, 그대여. 나는 이미 오래전에 죽어 있었지 않나.”
나는 그 웃음 앞에서, 아무 말도 꺼낼 수 없었다.
**
잠시간 침묵이 흐르고, 엘레노어는 천천히 내 뺨을 쓰다듬었다.
“나는 오히려 지금에 만족한다. 누구도 모르게 조용히 깡통이 되는 게 아니라, 이렇게 그대 품에 안겨서 떠나갈 수 있게 되지 않았나.”
엘레노어의 손은 격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차갑기까지 했다, 이미 시체처럼.
“뭐, 신세 한탄을 하려는 건 아니다. 그거라면 이미 충분히 했지. 그냥, 그대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었거든.”
죽은 자가 산 자에게 무언가를 전할 수 있음이 기쁘다며, 엘레노어는 한 번 더 눈웃음을 지었다.
뺨을 쓰다듬는 손도, 힘겹게 지어 보이는 웃음도.
마치 나를 달래기 위한 몸짓처럼 보였다.
“그대는 여기로 오면 안 됐어. 의지를 관철할 셈이었다면, 눈길도 주지 않고 다음 층으로 올라갔어야지.”
엘레노어는 뒤이어 내게 이유를 물었다. 왜 여기로 달려왔느냐고.
의지와 상반되는 마음이 몸을 움직인 것이라고, 그 대답을 이미 제 입으로 말해 놓고도.
나는 떠듬떠듬 대답했다. 마음 때문이라고, 내 나약함이 끝내 버리지 못한 그것 때문이라고.
한심한 인간쓰레기, 앰창인생 서진혁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기 때문이라고.
엘레노어는 내가 토해내는 말을 듣고는 살짝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내 뺨을 살짝 두드렸다.
“이런……손에 힘이 안 들어가는구나. 힘껏 때려 줄 셈이었는데.”
그리고 손은 다시금 내 뺨을 쓰다듬었다.
“그렇지 않다, 그대는 틀렸어.”
책망하고자 하는 이의 손길과 목소리가 아니었다.
“나는 그대의 기억과 심상을 모두 들여다보았어. 그래서, 지금 그대에게 어떤 말이 필요한 줄도 알고 있지.”
엘레노어는 그렇게 말하고는, 피를 뚝뚝 흘리는 몸을 억지로 일으켜- 내 어깨를 감싸고 끌어안았다.
“그대는 잘못하지 않았어. 그대는 나약하지도, 한심하지도 않아. 무엇도 그대의 탓이 아니야.”
꾸욱, 하고. 약하지만 확실하게, 엘레노어가 나를 안고 속삭였다.
“그대는 한 번도 죽음 따위를 원한 적이 없었다. 지금도 이렇게, 마음에 전해져 오는걸.”
뭔가, 이상했다. 속이 울렁거렸다. 그냥 몇 마디 말을 들었을 뿐인데.
토할 것 같다. 힘겹게 침을 삼켰다.
그렇게 삼켜 내니, 다른 쪽에서 흘러나온다. 뺨이 뜨겁다.
“항상, 용서받고 싶었지?”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것, 내가 가장 먼저 버린 것.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다.
수많은 고통 속에서도 쉽게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투명한 눈물이, 왜 지금 와서 모습을 보이는지.
왜 알아먹지도 못할 말에 눈물 따위가 흐르는지, 하나도 이해가 안 되고- 이해하지 못하는 자신이 한심했다.
엘레노어는 그런 나를 천천히 토닥였다. 그러면서 조금씩 속삭였다. 네 잘못이 아니라고.
“뭐가, 뭐가…무슨 소리야, 그게.”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힘겹게 물었다.
“그대의 잘못이 아니야.”
“그러니까, 뭐가……!”
“그대는 잘못하지 않았어.”
아무리 물어도 대답해주지 않는다. 뭘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다. 하나도, 모르겠다.
“그대는 어머니를 죽이지 않았다. 그대의 잘못이 아니야. 그대가 나약하기 때문이 아니야.”
엘레노어의 손이 이번에는 아물어 가는 내 상처를 쓰다듬었다. 따가웠다.
“그대의 기억을 모두 보았다고 했지 않나. 그대가 얼마나 자신을 괴롭히는지, 보지 못했다고 생각하나.”
엘레노어는 내 몸 이곳저곳을 한 번씩 쓰다듬었다. 평소에 하던 추행이 아니었다.
이번에 손을 댄 자리는 모두, 내가 내성을 키우기 위해 반복해서 자해했던 자리였다.
“벌을 받고 싶었겠지, 벌을 받고 나면 용서도 받을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대는 결코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어.”
힘겹게 눈을 돌렸던 진심이 눈앞에 들이밀어 졌다. 그건, 그건 분명 맞는 말이었다.
당연한 거 아닌가. 대체 누가 나를 용서해 줄 수 있지?
나를 용서할 자격이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 그건 죽은 엄마뿐이니까.
내가 엄마를 죽였다. 나 때문에 엄마가 죽었다. 엄마가 죽을 때까지, 나는 핑계만 대고 아무것도 안 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세상에서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나다. 그렇기에, 나는 결코 나를 용서할 수 없다.
“사람은 결코 자신을 살필 수 없다. 돌아본다고 한들 보이는 건 ‘과거의 자신’이라는 타인뿐이지.”
“반성하며 사는 이는 더욱 그렇다. 그런 이들은 언제나 자신을 돌아보고, 흠결을 찾아 고쳐내려 하니 말이야.”
“하지만 감히 말하겠다. 그대의 그것은 결코 흠결이 아니야. 헷갈리지 마라, 그대의 행동은 정말 옳은가?”
엘레노어가 말하는 내 행동이란 무엇일까. 곰곰이 고민해 봐도 좀처럼 답은 나오질 않는다.
“그대의 어머니는 무엇을 바라고 있었지?”
순간,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그대가 자신을 괴롭히며, 죽음에 뛰어들기를 바라고 있었나?”
엘레노어는 내 과거를 보았다. 내가 살아온 모든 과거, 그 긴 필름에 얼룩처럼 남아 있는 우리 엄마의 모습도.
엄마는 내가 어딜 가서든 기죽지 않기를 바랐다. 엄마는 내가 항상 좋은 것만 보고, 좋은 것만 누리기를 원했다.
그렇기에 자신을 깎아, 모든 좋은 것을 내게 주었다. 내가 탑에 갇혀 썩어갈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엄마는 나를 위해 백방으로 도움을 요청했고, 나를 위해 뛰다가, 과로로 죽고 말았다.
“어머니가 그대를 원망했을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엄마가 그랬을 리가 없다.
내가 방구석에 처박혀 아무것도 안 하는 백수 새끼여도, 엄마는 나를 미련할 정도로 사랑해줬으니까.
깨달았다. 나를 용서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엄마가 아니다.
왜냐하면, 애초부터.
“엄마는 나를 탓하지 않았을 테니까……”
처음으로 생각이 입 밖으로 나왔다. 말과 함께 눈물도 나왔다.
엘레노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말했다. 그만 자신을 용서해 주라고, 더 이상 자신을 괴롭히지 말라고.
하지만 그러기에는 내 속에서 부글부글 끓는 이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다. 이걸, 나는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생각해 봐라, 그대의 어머니는 과연 무엇을 원망했을까. 적어도 그대는 아닐 게 당연하지 않나.”
“모르겠어.”
“아니, 그대는 이미 알고 있다. 공교롭게도, 나 역시 그것이 원망스럽구나.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머리를 스치는 단어가 하나 있었다. 내가 오래전에 시야에서 배제했던 것이.
“그리고 그대의 가슴 속에서 끓는 그 감정이, 처음부터 그것을 향해 있었다는 것도 알고 있지.”
그리고 엘레노어는 나에게 그 감정의 이름을 속삭였다.
**
그 뒤로, 엘레노어는 보다 직설적으로 처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다.
나도 한 번 깨닫고 나니, 엘레노어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도 금방 알 수 있었다.
“아아, 슬슬……정말로 끝인 모양이다. 그래도 시간은 충분했구나, 평소에 단련해 두길 잘했어.”
엘레노어의 생명이 한계에 달했음을 우리는 서로 느낄 수 있었다. 이 호수 덕분이다.
나이트 엘프의 비술로 연결되었던 고리가, 감정을 공유하며 다시금 짙어진 것이다.
“자, 눈물 자국은 이제 지우고- 옳지, 전보다 눈빛이 더 멋있어졌구나. 내 취향이야.”
그렇게 말하는 엘레노어의 옅은 망설임이 느껴졌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잠시 기다렸다.
-쪽.
관능적인 농담을 툭툭 던져대던 모습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수줍은 입맞춤이 내 입술에 닿았다.
창백하던 엘레노어의 얼굴이 살짝 붉게 물들었다. 그래, 뭐, 경험 많은 척해도 결국 그렇겠지.
오래 전부터 약혼자가 정해져서, 누굴 만날 자유도 없던 녀석이 연애를 따로 해 봤겠나.
“응, 마지막이니까…꼭 해보고 싶었다. 미안하구나, 그동안 나이도 한참 많은 게 집적거려서 귀찮았지?”
전혀 그렇지 않다. 그동안 벽을 세웠던 이유가 그게 아니라는 것은,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을 터.
“아니.”
하지만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하고 있는지는 생생히 느껴졌기에, 나는 곧바로 응했다.
엘레노어의 목을 받치고, 조심스레 고개를 숙여- 이번에는 내 쪽에서 입을 맞추었다.
“후후, 역시 내가 고른 남자라니까. 마음에 쏙 들어.”
여유로운 척 말하고 있지만, 얼마나 쑥스러워하고 있는지도 잘 전해진다.
뭐, 굳이 거창한 정신 연결 따위가 없어도- 저 새빨갛게 물든 표정을 보면 알 수 있지만.
그 때, 엘레노어의 손끝이 하얗게 물들기 시작했다. 몬스터가 죽을 때 나타나는 빛이다.
“아아, 딱 맞췄구나.”
서서히 말단부터 사라져 가는 엘레노어는, 마지막의 마지막에- 살짝 눈물을 흘렸다.
“그래도, 이왕이면……키스 다음까지 진도를 빼 보고 싶었어.”
그 말을 마지막으로, 엘레노어의 육체는 완전히 소멸하고- 그 혼도 어디론가 날아갔다.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지 못했다는 한탄 따위는 하지 않는다. 분명 마음을 통해 전했으니까.
[업적 달성 : 약속]
그런 거, 다음에 만났을 때 하면 된다고.
[업적 보상 ‘강철의 혼’ 을 획득하셨습니다.]
**
진흙 덩어리처럼 생긴 하이엘프의 왕, 죽음에서 돌아온 망령은 아직도 마을을 헤집고 있었다.
나는 검과 방패를 다시 착용하고, 차분한 걸음으로 놈이 날뛰고 있는 그곳까지 걸어갔다.
“꽁지가 빠지게 도망치더니 새삼 실성했나, 어리석은 인간족 검사여.”
잠깐 사이에 다른 이들의 생명력을 빨아먹은 것인지, 전음에서 어마어마한 마력이 느껴진다.
몇 번이나 하는 말이지만, 역시 9층의 스펙은 아득히 뛰어넘은 괴물이다.
이놈은 과연 어떤 맥락에서 튀어나왔고, 어떤 배경설정이 있길래, 이런 스펙을 가진 걸까.
별 관심은 없다. 버려두고 떠나도 상관없는 적이지만, 나는 맞서기를 택했다.
“작고 약한 인간족이여, 그 가냘픈 검으로 나를- 불사의 욕망을 죽일 수 있을 것 같으냐.”
“어.”
“오호라, 무언가 각오를 다진 모양이지. 각오 따위 무한한 욕망 앞에서 하찮은 것을.”
망령은 주절주절 계속해서 떠들었다. 어디 그 각오를 한번 말해보라며.
느낀 것은 많았지만, 새삼스레 거창한 각오 같은 걸 다지지는 않았다.
다만, 깨달았다.
나는 이 탑에 들어온 이후로- 항상 무언가에 화가 나 있었다는 것을.
분노가 향하는 방향은 그때그때 조금씩 달랐고, 그 이유도 조금씩 달랐으며, 개중 분명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확실히 알 수 있다. 내 분노가 진정 무엇을 향하고 있는지를.
-스릉.
천천히 검을 뽑았다. 눈앞의 적을 바라보았다. 무척이나 강한 적이다.
이제까지 만난 그 어떤 적보다 강할지도 모른다. 마력강화를 쓸 수 없는 상태에서 맞설 수 있을만한 상대가 아니다.
그리고 마력강화를 발동시켜주는 펜던트는 완전히 망가져 힘을 잃었다. 하지만 괜찮다.
이제 그런 건 필요 없다.
-쿠르릉!
내 안의 마력이 폭발하며 막혀 있던 길을 질주한다.
마력은 주인의 감정과 의지에 크게 영향받기에, 내 모순된 마음으로는 마력강화를 쓸 수 없었다.
하지만 더 이상은 아니다. 이제는 헷갈리지 않는다. 엘레노어가 가르쳐 준 것이 있으니까.
나를 괴롭게 만드는 것, 엘레노어를 속박하는 것, 우리 엄마를 죽인 것.
다시는 환경과 타인을 탓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탓에,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던 나의 진정한 적.
이 시련의 탑 그 자체야말로, 나의 적이다.
어떤 방법을 써야 하는지는 모르겠다. 방법이 존재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가능한 일인지 아닌지조차 모른다.
하지만 어쨌든 할 거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빌어먹을 탑을 깨부수고, 모든 대가를 치르게 하겠다.
“의지는 화살이고, 마음은 불꽃이랬지.”
이 탑을 쳐부수고 그 너머로 나아갈 그날까지 절대 멈추지 않겠다. 이게 나의 화살, 스스로 맹세한 의지.
그리고, 내 화살에 힘을 실어줄 불꽃은- 저놈이 묻고 있는 각오 따위가 아니라 가벼운 약속.
“나는, 거유 미녀 다크엘프랑 키스 다음까지 진도를 뺄 거다.”
스스로 거세했던 욕망이 불꽃이 되었고, 이제 내 마음과 의지는 같은 방향을 바라본다.
“그러려면 너 같은 좆밥한테 막히면 안 되거든.”
자력으로 이룬 마력강화의 힘으로, 날아드는 망령의 공격을 모조리 쳐낸다.
나는 이미 어지간한 저층 랭커 이상까지 성장했지만, 이 탑 자체가 목표인 이상 그걸로는 부족하다.
지금보다 훨씬 더 강해져야 한다. 그걸 위한 방법은 이미 알고 있다.
망설이지 않고 끊임없이 나아간다. 자신을 학대하며 뒤따라오는 성장의 쾌감만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이 쾌감을 쫓아, 누구도 따라오지 못할 만큼 가장 앞으로, 그리고 가장 높은 곳으로.
-콰과광!!
내가 휘두른 검에서 방출된 마력이 망령의 좌반신을 통째로 으깨버리는 것을 보며, 다짐했다.
이 탑의 천장을 꿰뚫고, 그 너머까지 솟아오르는 불화살이 되겠다고.
[퀘스트 완료 : 다크엘프의 서 - 최종장]
[진행상황에 따라 랭크 및 보상을 결정합니다……평가 완료.]
[랭크 : SSS]
[에픽 아이템 : ‘엘레노어의 영혼’을 획득하셨습니다.]
[해당 아이템은 당신에게 영구히 귀속됩니다.]
[시련의 탑이 당신을 부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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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0 +1,222 @@
105. 시련의 탑 14층
[축하합니다. 시련의 탑 13층을 최초로 클리어하셨습니다.]
질척거리는 핏물이 묻은 검을 한 번 털어내고, 인벤토리에 집어넣으며 숨을 골랐다.
13층의 보스는 스프링처럼 생긴 다리가 특징적인, 디어 뭐시기라는 이름의 사슴 인간 몬스터였다.
전용 기믹을 수행하지 않으면 어마어마한 속도로 보스룸 안을 뛰어다니며 주변을 초토화하는 괴물.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이, 그 기믹은 솔플러인 나 혼자서는 수행할 수 없는 구조였다.
기믹을 등에 업은 보스는 한시도 쉬지 않고 미친 속도로 움직여, 딜 타이밍도 내주지 않고 보스룸을 박살 냈지만.
뭐, 어쨌든 내가 이겼다.
-찰칵.
나는 클리어 메시지를 담은 스크린샷 한 장을 찍어서, 오픈 커뮤니티에 올렸다.
조작 의혹을 제기할지도 모르니, 제대로 시스템 시계가 찍히게끔 조절해서.
[작성자 : 서진혁#2661]
[제목 : 어 형이야]
(사진)
형은 결과로 증명해
- 뭐야 ㅅㅂ 어케했냐
- ㅅㅂ뭐임 5분지난거아님?
- ㅋㅋㅋㅋㅋㅋㅋ이게되네 ㅅㅂ
- 진혁아 나는 사실 믿고있었다 한번만용서해다오
- ㄴ 알몸 제로투 입갤 ㅋㅋㅋㅋㅋㅋㅋ
- ㄴ 자 드가자 ㅋㅋㅋ 인증 없으면 알지?
- 구라치지마 씨발 이거 주작 아님? 저게 말이됨?
나와 내기를 했던 도전자들이 말이 되는 일이냐며 경악하고는, 마구잡이로 댓글을 달아 댄다.
어휴, 확실하지 않으면 승부를 걸지 마라- 이런 거 안 들어봤나.
13층 보스의 기믹이 솔로 플레이로는 수행할 수 없다는 점, 그리고 기믹을 수행하지 않으면 매우 어렵다는 점.
그딴 게 뭐 어떻다고. 난이도가 비정상적이면 뭐 하나, 도전자인 나도 정상 범주를 벗어났는데.
확실히 속도가 어마어마하게 빠르긴 했지만- 뛰어다니느라 숨이 좀 찼을 뿐, 엄청 쉽게 이겼구만.
이 놈이 뭐랬더라, 오늘 안에 잡으면 1층 마을 중앙에서 알몸 제로투 댄스를 추겠다 했었나?
여기 이놈은 10트안에 잡으면 공개 삭발 인증한다고 했었고.
아, 여기 마지막 놈은 자기랑 같은 층 도전자들 전부한테 치즈돈까스 도시락을 뿌리겠다고 했었지.
안전자산이라고 생각해서 아무 말이나 막 뱉었나 본데, 내가 어지간히 만만해 보였던 모양이다.
- 치돈 10개 뿌리면 빤스는 입게해준다 어떤데
- ㄴ 20개 뿌릴테니까 하나만 더 입어도 괜찮겠습니까 형님
- ㄴ ㅇㅋ 20개 제대로 뿌리고 인증하셈
- ㄴ 캬시발 이거지 바로 줄서봅니다
- ㄴ 줄
- ㄴ 줄
치즈돈까스 도시락을 받은 도전자들에 의해 게시판이 ‘대 진 혁’ 으로 도배되는 모습을 보고, 커뮤니티를 껐다.
월드 보스 레이드를 솔플로 클리어한 이후, 커뮤니티에서 내 유명도는 어마어마하게 높이 치솟았다.
당연히 내 스펙에 대한 관심 역시 매우 높아졌고, 드문드문 이렇게 나를 두고 내기가 걸리는 일도 생겼을 정도.
하지만 정작 내게 관심을 두는 도전자 중에서, 내 스펙을 제대로 짐작하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뭐, 그럴 만도 하다.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어?
서진혁 Lv.68 (전사)
HP : 1280/1280
MP : 770/770
근력 : 106 (96+10)
민첩 : 102 (91+11)
내구 : 113 (98+15)
지능 : 101 (89+12)
내 스펙이 이렇게 미친 수준까지 올랐을 거라고.
**
일반적인 도전자들이 스탯을 올리는 방법은 두 가지, 레벨업과 장비 업그레이드다.
업적을 달성하면 레벨과 별개로 스탯을 올릴 수 있긴 하지만, 이는 일반적인 도전자들에게는 먼 이야기다.
대부분의 업적은 오픈 커뮤니티라는 정보 공유의 장이 있음에도, 그 달성 조건이 거의 알려지지 않았으니까.
그나마 조건이 알려진 업적을 되는대로 챙긴다 한들, 들이는 시간에 비해 그 상승량은 매우 적은 편.
그 밖에 스탯을 올리는 방법이라고는 효율이 거의 없기로 유명한 신체단련뿐이다.
나는 9층을 클리어한 이후, 일부러 업적 달성을 위해 히든 보스를 찾아다녔다.
수행할 수 있는 기믹을 일부러 수행하지 않는다거나, 본래라면 대적할 일이 없는 NPC를 대적하거나 하는 식으로.
예전에는 그런 ‘억까’ 요소들이 내 눈앞에 나타나는 것을 매우 불합리하다고 여겼지만.
내 새로운 목표가 합리를 벗어난 영역에 있음을 생각한다면, 스스로 불합리를 찾아 나설 필요가 있었다.
탑을 올라가야 한다는 의지, 이대로 멈춰 서고 싶은 마음, 자신을 향한 혐오와 학대.
여러 모순을 안고 무작정 위험에 몸을 던지던 그때와는 사정이 다르다.
내 의지와 마음은 이제 같은 곳을 바라본다. 분명한 목표의식은 그만큼 행동에 힘을 실어 준다.
그렇게 온갖 강적을 찾아서 부딪히고, 빠짐없이 단련을 반복한 결과가 이 스탯. 그리고-
[웨폰 마스터리 Lv.2] [전투 각성 Lv.33] [전투 지속 Lv.31] [마력 지배 Lv.3] [마력 강화 Lv.3] [종합 원소 내성 Lv. 11] [종합 상태이상 내성 Lv. 9] [종합 대마법 내성 Lv. 8] [대지 정령의 가호(+철벽) Lv.15] [바람 정령의 가호(+신속) Lv.15] [번개 정령의 가호(+대전) Lv.15] [라이트닝 차지 Lv.23 ] [약점 간파 Lv.8] [초감각 Lv.7] [초재생 Lv.2] [혼신 Lv.13] [집광 Lv.11] [불굴 Lv.17] [도약 Lv. 4] [명상 Lv. 6] [위압 Lv. 2]
-이젠 요약 표시를 하지 않으면 한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지경으로 늘어난 스킬 목록이다.
여러 무기술이 통합되어 웨폰 마스터리로 변경되고, 여러 패시브가 상위 스킬로 진화하면서 줄어든 게 그나마 이 정도.
요약 표시를 풀고 자세히 보기를 누르면, 내성 스킬의 목록만으로도 시스템 창이 눈앞을 가득 메울 정도다.
물론 여전히 액티브 스킬은 많지 않고, 전사 클래스의 삼신기라는 [축지]와 [오러 마스터리]는 얻지 못한 상태지만.
그 대신 여러 단련의 성과로, 마법사 클래스의 삼신기인 [마력 지배] 스킬을 갖게 되긴 했다.
뭐, 아직 강해질 여지가 많다는 것이니- 스킬의 부족함은 오히려 기쁠 뿐이다.
“아직 멀었지, 이 정도로는.”
인벤토리에 들어가 있는 [엘레노어의 영혼]을 한 번 다시 확인하며, 나는 14층으로 향하는 문을 열었다.
**
공간 전이 특유의 울렁거림과 함께 도착한 14층의 배경은 이제까지의 어떤 층보다 살풍경했다.
하늘은 새빨갛고, 구름은 모조리 새까맣고, 땅은 온통 유황빛에 여기저기에 흉흉한 화염이 흩뿌려져 있다.
거기에 마법사들에게 굉장한 압박으로 다가온다는, 공기 중에 섞인 높은 밀도의 마력.
첫 인상은 확실히 커뮤니티에서 말하던 대로다. 언뜻 보기에 지형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고.
시련의 탑 14층의 배경은 마계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사악한 마력과 강인한 신체를 타고난다는 개사기 종족- 마족의 고향.
도전자가 떨어지는 장소는 그중에서도, 마계 어느 지역의 입구라고 할 수 있는 곳이다.
“오, 저게 그거인가.”
저 멀리 돌로 만들어진 커다란 관문과, 그 관문을 막아서고 있는 빨간 피부의 거한이 보였다.
등에는 날개가 돋아나 있고, 머리에는 두 개의 뿔이 돋아나 있으며, 눈은 흰자 부분이 새까만 역안이다.
마계 입구를 지키는 문지기 마족이다. 1세대 도전자들의 목숨을 수없이 빼앗았다는 바로 그놈이겠지.
마계 안쪽으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저런 문지기가 지키는 관문을 셋이나 통과해야 한다.
당연히 힘으로 뚫어야 하는 건 아니다.
애초에 저 문지기들은 하나하나가 보스 이상으로 강력한, 전투로 돌파하지 말라고 만들어진 몹이다.
첫 번째 문지기는 통행증 내지는 제물을 바쳐서.
두 번째 문지기는 수수께끼를 풀어서.
세 번째 문지기는 퍼즐을 풀어서 돌파하는 방식.
통행증은 초반의 외곽 지역에서 퀘스트를 깨면 얻을 수 있고, 수수께끼와 퍼즐의 정답은 커뮤니티에 다 나와 있다.
공략 없이 무작정 도전했어야만 했던 1세대 도전자들에게는 굉장히 난감한 관문이었다지만.
현재는 커뮤니티에서 답지를 보고 베끼는 것으로, 누구나 쉽게 통과해서 경험치 보상을 먹을 수 있는 개꿀 구간인 셈.
참고로 통행증을 얻는 방법은 물론이요, 퍼즐과 수수께끼는 탑마다 모두 동일하다.
즉, 나 역시 어렵게 머리를 굴리고 퀘스트를 깰 필요 없이 각 관문을 쉽게 돌파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나는 곧바로 관문으로 향했고, 곧 문지기인 붉은 마족이 나를 가로막았다.
“멈춰라.”
마족은 생긴 것과 다르게 영화배우를 연상시키는 중후한 미성이었다.
“나는 이 관문의 주인, 적색의 갈트람이다- 이곳을 지나가려는 너는 누구냐.”
“서진혁.”
“관문을 지나가기 위해서는 마땅한 제물이 필요하다. 너는 제물을 가져오지 않았구나.”
참고로 이놈이 말하는 제물은 생물의 영혼을 말한다. 공교롭게도 내 인벤토리에는 영혼의 파편이 하나 있다.
물론 엘레노어의 영혼을 이딴 잡놈한테 줄 생각은 없다.
붉은 마족 갈트람은 팔짱을 낀 채, 흉흉한 마력을 뿜어내며 말을 이었다.
“제물을 준비하지 않은 자는 지나갈 수 없다. 관문의 통행증은 갖고 있는가.”
“그런 건 없다.”
“통행증도 제물도 없다면 이곳을 지나갈 수 없다.”
나는 마족의 위협에 아랑곳하지 않고 검을 뽑았다. 당연히,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다.
통행증이 없으면 지나갈 수 없다고? 나랑 내기할까?
진짜로 못 지나가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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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 서쪽 마계의 최강자
검을 뽑고 적의를 드러내자마자, 피부에 따끔따끔하게 다가오는 흉포한 마력.
엘프가 태어날 때부터 뛰어난 궁술과 마나 친화력을 갖고 있듯, 마족은 태어날 때부터 강대한 마력을 갖는다.
단순히 가진 마력의 총량만이 큰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마력을 품고 살아온 만큼 그 지배력도 굉장하다.
마계의 높은 마력 농도와 이런 마족의 특성이 합쳐지면, 이렇게 뿜어져 나오는 마력만으로도 굉장한 물리력을 낸다.
-투둑.
날카로운 마력이 신체를 압박하자, 한겨울 한파에 노출된 것처럼 입술이 멋대로 터졌다.
이것도 나라서 이 정도인 거고, 보통 인간이라면 이미 몸이 갈기갈기 찢어졌을 거다.
“보통 인간은 아닌 듯하군.”
마력의 압박을 아무렇지 않게 흘려내고 있는 나를 보며, 붉은 마족이 말을 흘렸다.
말했듯 이 문지기들은 전투로 돌파하라고 있는 놈들이 아니다. 그렇기에 문지기 본인들도 전투를 피하는 면이 있다.
나 때린다, 진짜 때린다, 셋 하면 때린다? 셋, 둘, 하나, 하나 반, 하나 반의반의 반- 뭐 이런 느낌?
그런 놈들을 상대로 싸움을 걸려면, 당연히 먼저 선빵을 쳐야 한다.
“내가 보통이 아니긴 해.”
놈의 말을 받아치며, 왼손에 매어 뒀던 방패를 냅다 내던졌다.
첫 공격은 간보기, 붉은 마족은 가볍게 방패를 튕겨냈다. 하지만 방패를 튕겨내기 위해 손이 움직였다.
얼굴 부분에 던진 방패를 튕겨냈으니, 당연히 손은 얼굴 부근에 머문다.
팔짱을 끼고 있던 놈의 가슴께가 훤히 드러나고, 시야가 가려졌다는 뜻이다.
심장을 노리기 딱 좋은 각이다.
-콱!
빠르게 거리를 좁혀 내지른 검은, 마족의 손바닥에 박혀서 막혔다.
커뮤니티에서 들은 대로다. 마족은 모두 강철처럼 질긴 피부를 갖고 있어서, 방어력이 월등하다고.
이 방어력에는 개체별로 차이가 있긴 하지만, 이놈은 사실상 이 14층 마계의 보스 수준.
당연히 방어력도 매우 높다. 내가 뻗은 칼을 이 정도로 막아낼 만큼.
빈틈을 비집고 들어간 공격이 막혔으니, 다음은 저놈의 차례다.
붉은 마족은 곧바로 마력을 뿜어내며, 칼날처럼 변한 손톱을 휘둘렀다. 나는 왼팔을 들어 막았다.
아, 왼팔에 있던 방패는 방금 던져서 없다.
물론 예전처럼 방패를 던져놓고 까먹어서 그런 게 아니다. 애초에 방패가 별로 필요가 없거든.
-카각!
휘둘러진 마족의 손톱이 내 맨 팔뚝을 스쳐 지나가며, 쇳덩이를 긁은 것처럼 불똥이 튀었다.
대지 정령의 가호가 15레벨에 도달하며 더 강력해진 [철벽]의 버프 효과.
거기에 예전보다 훨씬 높아진 내구력 스탯, 그리고 마지막으로 9층에서 얻은 ‘강철의 혼’ 덕분이다.
“뭣이?”
인간인 내 맨몸이 마족 이상의 내구도를 갖고 있음에 크게 당황한 듯 보이는 붉은 마족.
뭘 그렇게 놀라고 그러나, 방금 네 입으로- 그리고 내 입으로도 말했잖아.
나 보통 아니라니까?
이어진 내 발길질에 배를 얻어맞은 마족은, 그대로 멀리 날아가 나자빠졌다.
**
현재의 내 기본 방어력은 9층 당시와 비교하면, 방어구를 빼도 거의 두 배 수준이다.
여기서 말하는 기본 방어력이란, 스탯창에 표시되는 방어력 수치를 말한다.
[철벽] 스킬을 사용하면 당연히 실질 방어력은 더 높아지고, [혼신] 버프를 발동하면 추가로 더 높아진다.
거기에 [종합 원소 내성]이라는 패시브가 마법이나 속성 공격은 종류를 가리지 않고 그 위력을 반감시켜 버리고.
그 방어력을 뚫고 HP가 떨어져도, [전투 치유]가 두 단계 진화하며 생긴 [초재생] 스킬로 곧 회복된다.
그리고 HP가 떨어지면 [불굴] 버프가 발동해 내구를 비롯한 스탯이 또 증폭되어 더 단단해지며.
거기에 마력강화를 사용하면 또 한 번 스탯과 방어력이 증폭되어 더 단단해진다.
내 실질 방어력은 9층 때와 비교하면 거의 몇 배에 이르는 상황. 거기에 ‘강철의 혼’이 더해진다.
[고유 : 강철의 혼]
어떠한 역경과 고난에도 부러지지 않는 강한 의지의 표상.
당신의 영혼에 새겨진 이 특성은 어떤 경우에도 사라지지 않는다.
모든 종류의 피해를 60% 감소시킨다.
기존 스탯창에 존재하지 않았던 특성 슬롯이 생기며, 그곳에 자리 잡은 정체불명의 능력.
그 효과는 심플 이즈 베스트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모든 최종 피해를 60% 감소시킨다는 미친 것이었다.
[대지 정령의 가호]의 최종 옵션이 물리 피해에 한정한 5% 감소인데, 이건 깡으로 60%다.
가장 높은 에픽 등급의 클래스를 가진 이들에게도 이런 미친 패시브가 달려 있다는 말은 못 들어봤다.
월드 보스를 처치하고 얻은 수많은 보상이 이 고유 특성이라는 것 하나 앞에서 빛이 바랠 정도니까, 뭘 더 말하랴.
압도적인 피지컬을 자랑하는 마족, 그리고 그중에서도 잡지 말라고 존재하는 문지기 몹.
강력한 요소나 설정이 그렇게나 덕지덕지 붙어 있는 놈의 공격도, 내 몸에는 흠집 하나를 못 낸다.
“크, 크헉.”
발길질에 맞아 날아간 붉은 마족이 기침하더니, 바닥에 시퍼런 피를 토해 내었다.
그 한 방으로 내장이 다 터진 모양이다. 마족의 내장 구조 같은 건 모르겠다만, 존나 아프겠지.
“야, 엄살떨지 말고 뿔이나 꺼내. 너도 뿔 더 있지?”
나는 붉은 마족을 향해 손짓했다. 놈은 아득바득 이를 갈며 몸을 일으켰다.
마족의 가장 대표적인 신체적 특징은 바로 뿔이다.
날개나 손톱이나 색이 반전된 눈깔, 그리고 꼬리 같은 건 마족마다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고 들었다.
하지만 뿔만큼은 모든 마족에게 존재한다. 다만, 그 개수는 개체별로 차이가 있다.
뿔의 개수야말로 마족의 강함 그 자체, 3층의 리자드맨들이 어깨에 그려넣은 색깔 띠 같은 거다.
“이, 이놈……후회하지 마라, 내가 뿔을 꺼내게 하다니!”
-우두둑, 뚜둑.
붉은 마족의 이마에서 뿔이 추가로 돋아난다. 상위 마족들이 가진 파워 업 방식.
이 마계의 일반 NPC인 하급 마족들은 하나에서 두 개의 뿔을 가지고 있다.
중급 이상의 마족들은 세 번째 뿔을 꺼내서 파워업하는게 가능하고, 보스에 이르면 그 이상까지 존재한다.
14층 미궁의 보스인 마족 백작인가 남작인가 하는 놈의 최종 형태에 붙어있는 뿔은 다섯 개.
“나, 적색의 갈트람- 서쪽 마계의 23대 마왕의 이름을 걸고, 네놈을 갈가리 찢어 유황불에 태우겠노라.”
그리고 갑자기 전직 마왕이라는 듣도보도 못한 설정을 공개한 갈뭐시기의 이마에 돋아난 뿔의 숫자는.
“오, 일곱 개?”
보스보다 두개나 더 많은 일곱 개, 단순하게 생각해도 두 단계는 더 급이 높은 최상위 마족이었다.
**
일곱 개의 뿔을 드러낸 갈릭인가 뭔가는 ‘큭큭큭’ 하며 사악한 웃음을 흘렸다.
그냥 분위기 잡으면서 웃는 게 아니라, 그 웃음에 주변의 마나가 공명하며 땅을 울리고 있었다.
처음 드러냈던 흉흉한 마력과 마찬가지로, 이것만 해도 보통 인간들은 수직으로 밟은 깡통처럼 찌그러질 것이다.
아니, 보통 인간이 아니라 시련의 탑 14층 도전자라도- 옴짝달싹 못 하고 있겠지. 그 정도의 힘이다.
“후회하지 말라고 분명히 말했거늘, 벌써 후회하고 있는가. 인간.”
그 모습을 멀뚱히 바라보고 있는 나도 똑같을 거로 생각했는지, 놈은 위풍당당하게 내게 다가왔다.
못 움직이는 게 아니라 그냥 가만히 있는 건데 말이야.
이게 무슨 효과인지는 모르겠지만-내 구속 내성, 마비 내성, 석화 내성, 기절 내성……뭐 그런 게 몇 레벨인 줄 아냐?
“관문의 주인을 맡고 있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아는가. 그 지역을 지배할 힘이 있는 마족이라는 의미다.”
갈뭐시기는 자기가 마왕을 맡고 있었을 때가 어땠다더니, 서쪽 마계의 수준이 어땠다느니, 뭐라고 떠들기 시작했다.
마계나 마왕 같은 단어가 들어가 있어서 그렇지, 잘 들어보면 그냥 지가 소싯적에 좀 날렸다는 소리다.
단어만 치환하면 뭐, 내가 강서구 원탑 보스였는데- 그 행동대장 놈이 어쩌고- 나 현역 시절은 급이 달랐고- 어휴.
“거 말 존나 많네, 혓바닥으로 싸우냐?”
나불거리는게 너무 길어서 한 마디 해주자, 놈의 이마에 핏대가 불룩 돋았다.
그냥 떠들게 내버려두고 칼빵을 먹일 수도 있지만, 그렇게 기습으로 바로 끝내버리면 연습도 안 되니까.
잡지 말라고 만든 놈이라 보상을 안 줄 수도 있으니, 하다못해 샌드백 역할이라도 해 줘야 하는데.
이렇게 상대를 얕보면서 힘을 드러내지 않고 있으면 안 되잖아.
“건방진 인간 놈……내 화를 돋우려고 열심이구나, 빈틈을 노려 칼을 찌르면 이길 수 있을 것 같나?”
“어.”
“보아하니 상당한 보검인 듯하군, 조금 전과는 달리 힘이 넘쳐흐르고 있어- 하지만 통하지 않는다.”
이놈은 아무래도 그냥 말이 많은 녀석인 것 같다. 묻지도 않은 부분을 혼자 막 떠들고 있다.
뿔을 개방한 자신의 몸은 압도적으로 더 강해지기에, 아까와 같은 발길질도- 보검의 힘도 통하지 않을 거라고.
아무래도 가만두면 떠드느라 싸움을 시작하지도 않을 것 같다. 쯧, 그냥 넘어가야겠네.
-타닥.
나는 단숨에 놈과의 거리를 좁혀, 내 손에 들린, 하, 보검, 그걸 휘둘렀다.
붉은 마족은 안 통하느니 뭐니 떠드면서, 마력을 두르고 손을 내밀어 막아 냈다.
하지만 안 막혔다. 내 검은 놈의 손과 팔뚝을 통째로 잘라버리고, 몸통에 사선으로 박혀 들어갔다.
“커, 헉!”
저 놈은 이걸 무슨 굉장한 보검으로 본 모양이지만, 이 검에는 사실 아무런 기능도 없다.
[+2 강철 직검]
그러기는 커녕, 그냥 강화 망한 상점제 강철 직검이다.
저 녀석이 보검의 힘이라고 착각한 그건, 그냥 내가 검에 마력을 둘러서 씌운 것에 불과하다.
붉은 이펙트가 터지며 한 번에 치명상을 입은 마족은 그대로 털썩, 무릎을 꿇었다.
“말이 짧았으면 명줄은 좀 길었을 텐데, 이거 네가 자초한 거다?”
나는 그대로 녀석의 머리통을 붙잡고, 미간을 향해 힘껏 니킥을 박아넣었다.
-콰지직!
붉은 크리티컬 이펙트가 터지며 놈의 안면 뼈가 단숨에 으스러졌고, 일곱 개의 뿔도 모두 부러졌다.
이거 설마 이대로 죽은 건가? 왜 마지막까지 제대로 힘을 쓰지 않았지?
“어, 설마.”
이 자식, 힘을 제대로 드러내지 않은 게 아니라 그냥 그게 전부였나?
에이 설마, 뿔이 일곱 개나 되는데 이 정도밖에 안 된다고? 마력도 그렇게 많은데?
“아 씨, 모르겠네.”
다음 관문의 문지기를 만나서 실험해보든가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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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 동쪽 마계의 최강자
내가 9층 이후에서 손에 넣은 가장 좋은 스킬을 하나 꼽으라면, [마력 지배]다.
아, 전사의 삼신기중 하나인 마력강화는 스킬 이전에 자력으로 습득한 기술이라 예외로 쳤다.
말도 안 되는 사기 성능을 자랑하는 강철의 혼은 특성으로 분류되니까 그것도 예외로 치고.
아무튼, [마력 지배]는 전사의 삼신기에 대응하는 마법사 클래스의 삼신기로 꼽히는 스킬이다.
기본적으로는 [마력 감응], [마력 감지], [마력 운용]등의 마법사 필수 스킬들을 모두 하나로 합쳐 놓은 최고급 스킬인데.
이 스킬을 습득한 이후로, 나는 내 안에 흐르는 마나를 말 그대로 자유자재로 지배할 수 있게 되었다.
내가 가진 마나 뿐만이 아니라, 대기 중에 흐르는 마나를 감지하고 뜻대로 움직일 수 있게 된 거다.
클래스는 여전히 전사지만, 어지간한 마법사를 죄다 능가하는 수준의 마력 조작 및 감지능력을 갖추게 된 건데.
그런 내가 보기에, 이 마계의 환경과 마족이라는 종족은 모두 미친 게 틀림없었다.
대기중에 넘쳐흐르는 미친 양의 마력, 그리고 태어날 때부터 그걸 충분히 흡수하며 자라는 마족이라는 미친 종족.
말이 마계지, 이건 이미 생체 마법 병기를 생산하는 공장에 가깝다.
그리고 그 공장이 만들어낸 최고의 걸작, 각 관문을 지키는 세 마리의 처치 불가 마족.
“그런 놈이 그렇게 약할 리가 없는데?”
나는 다음 관문까지 걸어가는 와중, 계속해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내가 조금 전에 처치한 붉은 마족이 아무래도 너무 약했다고.
놈의 실제 전투능력은 느껴지는 마력을 통해 어림한 수준에 전혀 미치지 못했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나를 얕보고 힘을 제대로 쓰지 않은 거던가, 아니면 내가 완전히 상대를 잘못 파악하고 있던가.
둘 중 하나일 텐데, 개인적인 바람으로는 전자였으면 좋겠다. 후자면 문제점이 한두 개가 아니니까.
단순히 14층에선 제대로 맞붙어 볼 상대가 없다는 점도 있고, 내가 상대의 역량을 제대로 재지 못한다는 점도 있고.
그러니 제발 이번 문지기는 진짜 격이 다른 모습을 보여줬으면 한다.
지금의 성장세만 유지해도 100층까지 클리어하는 건 거뜬하겠지만, 내 목표는 그 너머에 있으니.
“멈춰라.”
어느덧 도착한 두 번째 관문, 이번에는 파란 몸뚱이의 마족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외형적인 특징으로는 앞서 상대했던 빨간 놈과 다르게 날개가 없고, 이마에 돋아난 뿔의 형태가 달랐다.
아까 놈은 정석적인 악마 뿔이라는 느낌이었는데, 이놈은 보석 같은 빛을 내는 뿔이 뾰족하게 돋아나 있다.
비유하자면, 유니콘 뿔 같은 느낌?
그리고 아까 놈보다 키나 덩치도 작고, 근육량도 대단치 않아 보이는 게- 좀 더 인텔리스러운 타입으로 보인다.
하지만 품고 있는 마력의 양은 정말 어마어마하다. 마법사 타입이라고 보면 되겠지.
“이 관문을 지나려면 세 가지 문제에 답해야 한다.”
그러고 보니 마침 관문을 통과하는 방식도 수수께끼 풀이구나, 머리를 써야 하는 타입이야.
물론 오픈 커뮤니티에 정보가 다 공개된 시점에서 머리를 굴릴 필요는 전혀 없지만.
“좋아, 정답은 이거다.”
나는 파란 마족의 앞에서 당당하게 검을 뽑았다. 참고로 마족은 아직 문제를 내지 않았다.
“네가 뭔 문제를 낼지는 모르겠지만, 칼은 언제나 답을 알고 있지.”
살벌한 마력이 다시금 내 주변을 휘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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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마족의 머리 위로 거대한 마력의 구체가 생성되었다.
만들어진 구체는 혼자 꾸물꾸물 거리더니, 이윽고 화염구와 얼음의 창, 그리고 벼락을 뱉어내었다.
순수한 마력을 덩어리로 만든 다음, 그때그때 속성을 바꿔서 토해내는 방식의 공격 마법으로 보인다.
-쾅! 콰광! 콰직!
이글이글 타오르는 화염구는 내 몸에 부딪히며 강력한 폭발을 일으켰다. 얼음의 창은 막대한 힘으로 내게 쏘아졌다.
마지막으로 벼락은 비처럼 쏟아져 연달아 내 몸을 때렸으며, 순식간에 주변을 새까만 재투성이로 만들어 버렸다.
하지만 그 모든 마법으로도, 마족은 칼 한 자루를 빼 들고 돌격하는 나를 잠시도 멈춰 세울 수 없었다.
“이건 뭔, 장난하나.”
그렇게 맨몸으로 공격을 모두 받아친 나는, 단번에 거리를 좁혀 놈의 어깻죽지를 갈라버렸다.
-촤악!
왼쪽 어깨에 박아넣은 칼을 갈비뼈 부근까지 쑤셔 넣어, 바깥 방향으로 빼서 좌측 상반신을 도려냈다.
종족이 마족이 아니었다면 즉사했을 치명적인 상처, 이놈도 이런 꼴이 되고 나서야 뒤늦게 뿔을 꺼냈다.
뿔의 개수는 여섯, 아까 전의 붉은 마족보다 하나가 적다. 이놈도 보스보다 격이 하나 높다.
“큭큭……이 청색의 라토할에게 뿔을 꺼내게 할 줄이야. 동쪽 마계에도 이만한 강자는 없었는데……”
붉은 마족은 서쪽 최강이라더니, 이놈은 동쪽 최강이었던 전적이 있는 모양이다.
그런 놈들이 왜 문지기 역할이나 하면서 거드럭대고 있는지는 좀 의문이긴 한데, 그냥 그런 문화가 있나.
“아까 뒈진 놈도 너랑 비슷한 소리 하다가 한 방에 죽은 거 알고 있냐?”
“뭐라……? 설마 앞선 관문의 갈트할을 말하는 건가?”
“어, 빨간 놈. 그러니까 너는 방심하지 말고 제대로 덤벼, 뒈지기 싫으면.”
내가 그렇게 말하자, 푸른 마족은 인상을 구기며 방대한 마력을 흘리기 시작했다. 역시 굉장한 수준이다.
아무렴, 이런 마력을 가진 놈들이 그렇게 약한 게 말이 안 되지. 이번에는 제대로 실력을 보여주겠지?
-우우웅!
마족의 머리 위로 다시 한 번 마력의 구체가 생성된다. 그 기세와 품은 마력은 조금 전과는 확연히 다르다.
아무래도 저게 놈의 주요 전법인 모양. 구체는 다시 한번 변형하며 갖가지 마법을 쏟아내었다.
-쾅! 콰광! 콰과광!
쏟아지는 오색찬란한 마법이 나를 덮쳤고, 그렇잖아도 만신창이였던 주변이 완전히 초토화되었다.
확실히 굉장한 마법이다. 위력도 정밀도도 어느 하나 빠질 것 없다.
속성도 다양하기에 나처럼 종합 내성을 갖추고 있지 않으면 제대로 준비해서 대응하기도 힘들 거다.
14층 도전자들은 절대 전투로 돌파할 수 없다던 말은 결코 허언이 아니었다. 확실히 그만한 수준의 강함이다.
하지만 나는 실망을 감출 수 없었다. 14층 수준은 분명히 넘었지만, 고작 이게 다인가.
“뭔데, 이 어중간한 건.”
갖고 있는 마력의 양에 비하면, 고작 이 정도밖에 안 될 리가 없는데.
**
잠시 후, 푸른 마족은 온몸이 토막 나고 짓이겨진 상태로 내 발밑을 뒹굴었다.
이번에는 제대로 밑천을 보기 위해, 일부러 치명상을 피해서 이곳저곳을 박살 내 버린 결과였다.
일부러 빗맞히고 빗맞혀서 부상을 늘린 다음, 빈사 상태에서 모든 걸 쏟아낸 최대의 힘을 보고 싶었지만.
푸른 마족은 마지막까지 가진 마력의 수준에 비해 형편없는 전투력만을 발휘하고 뒈져 버렸다.
“진짜 내가 문제인가?”
내가 상대방의 강함을 잘못 재고 있는 건가, 마력의 양을 근거로 이놈들을 너무 과대평가한 걸까.
태생적으로 너무 강력한 마력을 타고난 나머지, 마력의 효율적인 활용 능력은 갖추지 못한 걸지도 모른다.
보스가 아닌 일반 몹 판정이라 개별 보상은 뭐 쥐뿔도 없고, 이러면 완전 나가린데.
“아니면 뭔 설정이 따로 있나.”
나는 오픈 커뮤니티를 열고 마계와 마족에 대한 정보를 꼼꼼하게 검색하기 시작했다.
이미 13층에서부터 히든 요소를 찾기 위해 잔뜩 찾아봤지만, 혹시나 내가 놓친 부분이 있지 않을까 싶어서.
하지만 결과로 나온 것은 대부분이 이미 읽어 본 글이었고, 마족들의 묘한 강함에 대한 설명은 딱히 없었다.
애초에 이놈들을 굳이 힘으로 뚫어보려고 한 도전자들은 1세대를 제외하면 있지도 않고.
아, 그러고 보니까 그놈들이 자기소개를 할 때 처음 듣는 소리를 했었지.
서쪽 마계니 동쪽 마계니, 몇 대 마왕이니 뭐니, 적색이니 청색이니 하는 별칭들.
“이것도 뭔가 있으려나.”
나는 그 키워드를 중심으로 새롭게 검색을 시작했다. 더불어 커뮤니티에 수배 글도 하나 올렸다.
[작성자 : 서진혁#2661]
[제목 : (정보 요청)이새끼들 왜이렇게 약함?]
(사진)
14층 문지기 잡았는데 얘네 생각보다 많이 약하다 왜 이러냐
층에 비해서 세긴한데 마력량만큼 전투력이 안 나옴
첫번째 문지기는 지가 서쪽마계 23대마왕인 적색의 갈어쩌고랬고
두번째 문지기는 동쪽 마계에서온 청색의 라토할이랬음
얘네 마력에 비해서 약한이유 알고 있으면 댓글로좀알려줘
이번에도 댓글은 매우 빠르게 달렸다. 물론 그 대부분은 ‘어케했노 ㅅㅂ련아’ 같은 내용이었지만.
내가 쓴 글은 대부분 이렇게 호들갑 섞인 리액션 댓글부터 달린다. 좀 기다리면 알아서 유익한 정보를 물고 와 줄 거다.
그렇게 수배를 때리고 새로 얻은 키워드로 계속 검색하던 중, 드디어 뭔가 단서가 될 만한 부분을 찾았다.
[(연재) 14층의 배경인 마계 설정에 대해 알아보자 1편.txt]
찾아낸 것은, 자칭 사관이니 고고학자니 하는 특이 성향의 도전자들이 올려놓은 연재글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원색의 마족’ 이라는 단어를 새롭게 찾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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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 남쪽 마계의 최강자
인간의 세계도 여러 나라로 나뉘어 있듯, 마계 역시 과거에는 통일되지 않고 나뉘어 있었다고 한다.
척박한 환경 탓에 마족들도 살아가기 힘들다는 외곽 지역인 외마계와, 마족 대부분이 거주하고 있는 내마계.
그리고 내마계는 한 번 더 동서남북으로 나뉘어, 지역마다 그 일대를 지배하고 있는 마왕이 존재했다.
동쪽 마계에는 동쪽의 마왕, 서쪽 마계에는 서쪽의 마왕. 마계에는 총 네 명의 마왕이 균형을 유지하며 대립하고 있었다.
마왕의 좌에 앉기 위한 자격은 오직 하나, 다른 마족을 짓누를 힘.
각 지역의 마왕은 곧 그 지역의 최강자였으며, 최강이 아니게 된 마왕은 다른 강자에 의해 자리에서 내려와야만 했다.
힘의 법칙에 의해 반복되는 쇠락과 부흥, 수많은 도전 속에서 마왕이 교체된 것이 그야말로 수십 번.
몇 번이고 바뀐 왕좌의 주인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이들이 바로, ‘원색’을 가진 마족들이었다.
마족들마다 타고나는 고유한 마력의 색깔, 그중에서 가장 순수한 색을 가진 이들에게 부여되는 원색의 칭호.
원색의 마족들은 역대 마왕 중에서 누구보다 마왕의 좌를 오래 지켰다.
그 원색의 마족에게서 왕좌를 빼앗을 수 있었던 것은 같은 원색의 보유자, 즉 그 마족의 혈연이 대부분이었고.
각 마왕이 20대째를 넘어섰을 시점엔, 동서남북의 마왕 모두가 원색의 마족으로만 채워져 있었다.
그렇게- 원색을 타고나는 것이야말로 마왕의 자격, 그런 인식이 마족들 사이에 박힌 후로 수백 년이 흘렀을 때쯤.
척박한 환경으로 누구도 살 수 없다던 외마계에서 나타난 한 마족이, 각 지역의 마왕을 차례차례 격파하기 시작했다.
가진 마력의 색 따위는 힘을 정하지 않는다는 듯이, 그 마족이 가진 마력의 빛은 회색이었다.
아무리 좋게 봐줘도 원색이라 칭하기 힘든 어중간한 회색, 창고 구석에 쌓인 먼지 내지는 아무렇게나 섞인 물감의 색.
회색은 최강이라 여겨지던 원색의 마왕들을 모조리 무릎 꿇리고, 동서남북으로 나뉘었던 마계를 홀로 통일시켜버렸다.
최초의 통일 마왕이자, 역대 최강의 마왕.
회색의 마왕이 가장 처음 한 일은, 온 마계에 강대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던 원색 마족들의 뿌리를 뽑는 것이었다.
마왕은 정체 모를 마법으로 색을 가진 마족들에게서 힘의 정수를 뽑아내고, 그들에게 제약을 걸어 자신의 종으로 삼았다.
힘의 정수라는 알 수 없는 것을 빼앗긴 원색의 마족들은 더는 예전만큼 강하지 않았다.
소수의 전대 마왕들은 정수를 빼앗긴 후에도 힘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회색의 마왕은 그들을 가만두지 않았다.
다시 한번 전대의 마왕들을 힘으로 복속시키고, 그들을 한낱 문지기로 격하시켜 버린 것이다.
이것이 고작 문지기 따위가 14층의 보스인 마족 백작보다 강한 이유다.
그렇다면, 왜 14층의 보스가 마왕이 아니라 문지기보다 약한 마족 백작인가. 회색의 마왕은 대체 어디에 있는가.
“뭐야, 끝이야?”
나는 스크롤이 멈춘 것을 확인하고 혼잣말했다. 게시글의 마지막 줄에는 ‘다음 편에 계속’ 이라는 문구가 쓰여 있었다.
허 참, 절단신공이 아주 기가 막히다. 드라마나 소설 하나 쓰면 아주 대성했겠어.
나는 툴툴거리며 다음 편을 검색했다. 그런데 작성자의 이름으로 아무리 검색해봐도, 다음 편은 나오지 않았다.
“이런 씨발새끼가.”
이 마족보다 더한 새끼가, 1편만 싸질러놓고 튀었다!
**
다행이게도 영영 나오지 않을 2편을 기다릴 필요는 없었다.
이 게시글의 작성자는 14층의 배경을 파본 도전자 중 하나일 뿐이지, 딱히 창작자가 아니었으니.
14층의 배경을 조사한 도전자는 그 밖에도 있었고, 그런 이들의 글과 댓글을 뒤지다 보니 금세 다음 내용을 알게 됐다.
원색의 마족들로부터 힘의 정수를 빼앗아 간 존재, 이 14층의 최강 몬스터인 문지기보다 압도적으로 강한 회색 마왕.
현재 14층은 그 마왕이 모종의 이유로 쓰러져서 모습을 감춘 상태라고 한다.
그런데 그 이유라는 것이 상당히 골때렸다. 이 14층의 배경도 다른 층의 배경과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마법공학이 극도로 발전한 세계를 배경으로 하는 46층, 그곳의 보스가 바로 회색의 마왕- 그 영혼이었다는 거다.
46층의 어떤 퀘스트에서 등장하는 사교도가 실행한 소환 의식이 성공해, 마왕의 영혼이 소환되었다는 것.
즉, 마왕이 쓰러졌다는 건 영혼만 다른 세계로 소환되어서 몸만 남아버린 상황이라는 거다.
“와, 어이가 없네.”
문지기가 마력량에 비해 약한 이유는 힘의 정수라는 게 뽑혔기 때문이고, 그걸 뽑아간 건 회색 마왕.
그렇다면 회색 마왕은 힘의 정수를 잃지 않은 문지기- 그 막대한 마력을 온전히 활용하는 마족들보다 훨씬 셀 거다.
이렇게까지 강하다는 설정이 잔뜩 붙었으니, 히든 보스로 회색 마왕을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뭐, 영혼이 다른 세계에 소환돼? 남은 건 빈껍데기 몸뚱어리 뿐?
관심 가는 키워드가 여럿 있긴 하지만, 실망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이번 층에서 전투적인 면으로 성장하기는 어려울 것 같네.
**
마지막 세 번째 관문의 정공법은 거대한 블록으로 만들어진 퍼즐을 푸는 것.
퍼즐의 해법은 커뮤니티에 상세하게 나와 있지만, 여태껏 그랬듯이 나는 그딴 일을 할 생각이 없었다.
“멈춰라, 이곳을 지나가려면 네놈의 지혜를 보여야 한다.”
“그래그래, 난 무식하니까 내 방식으로 지나갈게.”
“지혜롭지 못한 자는 이곳을 통과할 수 없다. 돌아가라.”
나는 인벤토리에서 큼지막한 망치를 꺼내, 녹색의 마족이 들이민 거대 블록을 박살내버렸다.
-쾅!
산산조각난 블록이 후두두 떨어지자, 녹색 마족은 곧바로 전투태세를 취했다.
처음 봤던 붉은 마족은 육탄전 위주의 근접 전투형, 그다음으로 본 푸른 마족은 마법을 난사하는 원거리 공격형.
서로 겹치는 부분이 없도록 배치된 건지, 두 쌍의 날개를 펼친 녹색 마족의 주 무기는 속도였다.
-훙훙훙훙훙!
날개를 펼치고 내 주변을 고속 비행으로 맴돌았다. 그 여파로 발생하는 충격파만 해도 심상찮은 수준.
속도 면에서는 기믹을 풀지 않은 13층의 보스와 비슷한 정도. 층수에 비하면 엄청나게 빠른 거다.
13층 보스와 차이점이 있다면, 이놈은 뛰는 게 아니라 아예 날아다니고 있다는 점이다.
비행 중의 움직임도 별 제약 없이 매우 자유로워 보이니, 나 같은 근접 전사 타입에겐 무척 불리한 상성이다.
원거리 공격은 어떻게든 대처할 수 있지만, 공중전은 비행 능력이 없는 한 마땅히 대처할 방법이 없으니까.
“근데, 그렇게 붕붕 날아서 뭐 어쩔건데.”
다만 이 녹색 마족은 붕붕 날아다니기만 할 뿐, 뭔가 공격을 시도하려는 낌새가 전혀 없었다.
내가 공중전이 약점이라고는 하지만, 그건 상대방이 공중에서 일방적으로 공격할 수 있을 때의 이야기.
즉, 비행과 원거리 공격 수단을 모두 갖추고 있어야 성립한다는 거다. 이놈은 그런 게 없어 보이고.
“숨통을 끊어주마!”
그 때, 녹색 마족이 소리치며 급하게 속도를 높였다. 설마 저 속도로 들이받으려는 건가?
근데, 그런 식으로 공격하려면 최소한 숨통을 끊니 어쩌니 하면서 타이밍을 알려주면 안 되는 거 아니냐?
“병신인가.”
나는 곧바로 타이밍을 맞춰 스킬을 발동했다.
[철벽]
[혼신]
-콰앙!
전속력으로 내 몸에 들이받은 녹색 마족의 몸뚱이가 박살 나며, 육편을 흩뿌렸다.
몸통박치기를 하려면 자신과 상대 중 어느 쪽이 더 단단한지는 알고 했어야지.
“크허억……말도 안 된다, 어떻게……!”
바위에 부딪힌 계란 꼴이 된 녹색 마족이 부들거렸다. 그래도 간신히 숨은 붙어 있는 모양이다.
곧 우드득, 하는 소리와 함께 놈의 이마에서 뿔이 돋아났다. 뿔의 개수는 이번에도 여섯, 푸른 마족과 똑같다.
이거, 첫 번째로 만났던 붉은 마족이 가장 강한 놈이었던 것 같다. 그놈도 한 방감이었는데.
“제법이구나, 남쪽 마계의 26대 마왕인 이 로투랑이 뿔을 꺼내게 할 줄이야!”
봤으면 알겠지만, 나는 아직 아무것도 안 했다. 저 새끼가 와서 혼자 들이받고 뒤지려 한 거지.
놈은 뿔을 꺼냈으니 이제부터가 진짜라는 것처럼 더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마 내구력도 올랐을 테고, 이미 한 번 당해봤으니 무식하게 들이받으려 하지는 않겠지.
하지만 속도로 승부하려는 시점에서 이미 글러 먹었다.
나는 이미 13층 보스를 단순한 전력질주로 따라잡아 본 전적이 있다. 그보다 더 빨라질 수단도 있고.
[신속]
순간적으로 이동속도를 높여주는 [신속] 스킬을 사용해 단번에 녹색 마족의 배후를 잡았다.
그리고 그대로 놈의 뒷덜미를 붙잡은 뒤, 얼굴을 땅에 처박아 버렸다.
-쾅!
그대로 지면에 뿌리채소처럼 심어진 놈의 팔다리를 우둑우둑 꺾었다.
전투적인 면에서는 말했듯 이미 기대를 접었지만, 영혼 소환이라는 키워드는 그냥 넘어갈 수 없다.
“야, 너는 전직 마왕씩이나 되는 놈이 쪽팔리게 뭐 하는 거냐?”
나는 제압한 녹색 마족을 향해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했다.
“얌마, 인간한테 털리니까 기분이 어때. 힘의 정수인가 뭔가, 그거 다시 찾고 싶지 않아?”
너, 나랑 혁명 한번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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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 욕구불만
나는 함께 힘의 정수를 되찾으러 가자고, 매우 열정적으로 녹색 마족을 설득했다.
물론 나는 말재주가 정말 형편없으며, 남을 말로 설득하는 일에는 완전히 젬병이다.
“크아아악! 이 악마 같은 놈, 알았다! 알아들었다!”
그래서 말로 안 했다.
말이 아닌 [라이트닝 차지]를 이용한 내 짜릿한 설득에, 녹색 마족은 완전히 넘어왔다.
물론 진짜로 전기찜질만 한 건 아니고, 적당히 주물러 준 다음에 약간의 거짓말을 섞어서 이야기를 꾸며 냈다.
당연히 내가 꾸며낸 거짓말에는 허점이 많았지만, 그 허점은 커뮤니티의 망령들이 알아서 보충해 주었다.
[마계에 레볼루쑝 일으키려고 하는데 대본좀 써줄사람 구함]
시간이 남아도는 커뮤 망령들, 그리고 마계의 배경 설정에 관심이 많은 사관 도전자들이 설정을 잡아준 거다.
“그, 그게 사실이냐. 정말 마왕이 무력화되었다고? 거짓말은 아니겠지?”
현재 이 녹색 마족은, 나를 모종의 사고에 휘말려 외마계에 떨어져 살아온 인간으로 알고 있는 상태다.
“그래 인마, 그 새끼 그거 영혼만 어디로 소환돼서 몸뚱이만 남았다니까?”
커뮤니티에서 손에 넣은 정보, 자체적으로 잡은 설정, 그리고 상대방을 착하게 만드는 무력.
“네, 네놈의 말이 사실이라면……매우 구미가 당기는 이야기로군.”
이 세 가지의 조화로, 나는 전직 마왕을 훌륭하게 내 편으로 만들 수 있었다.
이후, 나는 녹색 마족과 몇 가지 이야기를 더 나누고 정보를 공유했다.
듣자하니, 회색의 마왕에겐 타인의 힘을 빼앗고 흡수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모양이었다.
힘의 정수란 건 회색 마왕이 전대의 마왕들에게서 뽑아낸 힘을 응축시켜놓은 보석 같은 거라고 하고.
실체가 존재하는 물건이니, 마왕이 무력화된 지금- 작정하고 쳐들어간다면 얼마든지 뺏을 수 있을 거라고.
물론 마왕성에 정면으로 쳐들어가려면 단둘로는 부족하다는 이야기도 나왔고- 나는 때를 기다리던 말을 꺼냈다.
“그래서 말인데, 너 말고도 마왕한테 당한 놈들이 있잖아? 그 녀석들을 싹 모아서 쳐들어가는 게 어때?”
힘의 정수를 뺏긴 마족의 숫자는 한둘이 아니라고 한다. 당장 동서남북의 마왕만 세도 일단 네 명은 되고.
그 네 명 중 두 명을 내가 죽이긴 했는데, 대충 동서남북의 2인자 마족 같은 게 있지 않을까?
정수를 뺏겼다는 것은 마왕의 견제 대상이 될 정도로 강하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런 놈들을 싹 모으면 큰 전력이 될 거다.
“그렇군, 그렇다면 성공률도 크게 오르겠어. 혁명의 동지를 모으자는 건가.”
녹색 마족은 그 혁명 동지들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채로,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내 아군이 아니라 내 적을 모으러 다니는 여정이라니, 리버스 포켓몬 마스터구만.
그렇게 생각한 순간, 기다렸다는 듯 눈앞에 시스템 메시지가 나타났다.
[전대 마왕의 비원 - 힘의 정수]
설명 : 당신은 과거 남쪽 마계의 마왕으로 군림했던 녹색의 마족, 로투랑의 야망을 알게 되었습니다.
회색의 마왕을 두려워해 문지기의 신분으로 숨죽이고 있었지만, 그에겐 아직 마왕의 좌를 향한 집념이 깃들어 있었죠.
그는 힘의 정수를 되찾고 회색의 마왕을 무찔러, 다시금 마왕의 좌에 올라서고자 합니다.
당신은 그것을 도울 수도, 방해할 수도, 혹은 돕는 척하며 자신의 실리만을 챙길 수도 있을 겁니다.
[퀘스트 목표]
1. 로투랑의 힘의 정수를 손에 넣기.
2. 로투랑에게 힘의 정수를 돌려주기(선택).
3. 로투랑의 힘의 정수를 파괴하기(선택).
4. 로투랑의 힘의 정수를 빼앗기(선택).
5. 로투랑을 살해하기(선택).
퀘스트라고 하지만, 사실상 이 녹색 마족을 어떻게 할 것이냐고 묻는 선택지에 가까웠다.
일단 힘의 정수를 손에 넣기만 하면, 그다음에 어떤 선택을 하든 보상은 들어올 거다.
문제는 어떤 선택지를 골랐을 때 보상이 가장 크느냐, 그건데.
나는 잠시 퀘스트 목표를 보며 고민하다가- 아주 좋은 생각을 떠올렸다.
가만 보니까 이거, 선택 목표 전부 달성할 수 있는 거 아닌가?
일단 정수를 돌려준 다음 다시 뺏고, 뺏은 건 부숴 버리고, 마지막으로 죽여 버리면 되겠는데?
“북쪽 마계 놈들이라면 설득하기 쉬울 거다, 그곳으로 가도록 하지.”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고, 녹색 마족과 동행했다.
**
마계를 배경으로 하는 14층에도 마을로 불리는 거주 공간은 존재한다.
사실, 말이 마계지 내마계 안쪽은 의외로 살기 나쁘지 않은 공간이다. 사소한 단점 몇 개가 있을 뿐.
밤이 되면 드물게 거대한 마수가 나타나 사람을 물어간다는 점이나, NPC도 죄다 음험한 마족이라는 것 정도?
NPC 마족들은 뿔이 하나밖에 없는 허접들이라, 14층까지 올라올 저력이 있는 도전자에겐 대수롭지 않은 문제다.
전대 마왕이라는 놈들이 죄다 따까리 신세가 된 것만 봐도 알 수 있듯, 마족은 기본적으로 강약약강 정신이니까.
하지만 그 강약약강 정신이라는 게 이번에는 나를 참 귀찮게 했다.
“어이, 인간이 왜 이런 곳에 있는 거지?”
“로투랑 님의 시종 같은 건가?”
“인간 따위가 시종이라니, 휴대식이겠지!”
마을의 마족들이 도전자에게 시비를 털지 않는 것은, 그들이 절대적인 약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 있는 뿔 두 개짜리와 세 개짜리의 마족들은 전혀 절대적 약자가 아니다. 강자 축에 속하지.
단순한 마력의 양만 보면 나와 비슷하거나 더 많고, 거기에 마족의 종족 특성인 강한 마나 지배력을 가진 놈들.
그렇기에 딱 봐도 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 녹색 마족에겐 굽실거리고, 그 옆에 있는 나에겐 거들먹거리기 바쁘다.
북쪽 마계의 마왕을 맡고 있었다던 녀석을 찾기 위해 지역을 넘어온 지 벌써 두 시간 째.
그 두 시간 동안, 나는 몇 번이고 이런 상황에 놓였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내가 대응하는 방식은 한결같았다.
“야, 이놈들은 어떠냐?”
“빼앗기지 않았다, 약해.”
힘의 정수를 빼앗기지 않은 평범하게 약한 마족들이란 뜻이다.
로투랑은 대답과 함께 질끈 눈을 감았다. 내게 시비를 걸던 마족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전대 마왕 출신의 강자인 로투랑과 내가 맞먹고 있다는 것에 의문을 품은 표정.
-콰지직!
나는 인벤토리에서 검을 꺼내, 가장 가까운 마족을 정수리부터 반으로 갈라버렸다.
**
마계 북쪽 지역으로 넘어온 두 시간 동안, 내가 처치한 마족의 숫자는 대충 백쯤 된다.
그리고 백이나 되는 마족을 잡으면서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이놈들은 기본적으로 기술이 매우 부족하다는 거다.
타고난 육체의 강인함과 보유한 마력의 양은 굉장하지만, 거대하다기보다는 비대하다는 표현이 딱 맞는다.
힘의 정수를 뺏긴 놈들이라면 모를까, 그렇지 않은 놈들마저 마력량에 비해 터무니없이 약해 빠졌으니.
살만 뒤룩뒤룩 찐 도축장의 돼지와 다를 바가 없다.
“이, 이 자식이!”
대뜸 몸이 반으로 갈라진 동료를 보곤, 격분하여 달려드는 뿔 세 개짜리 마족.
나는 [강철 직검]에 마력을 흘려 넣고, 달려드는 마족 녀석의 팔을 빛나는 칼날로 베어버렸다.
이 [강철 직검]은 1층에서도 구할 수 있는 상점제 잡템인 만큼, 원래라면 마족들의 강인한 육체를 벨 수 없다.
[예리] 풀강을 해도 예리함이 부족하고, [내구] 풀강을 해도 내구도가 부족해 쉽게 부러지는 게 당연한 수준.
하지만 내 마력을 흘려 예리함과 내구도를 보충함으로써, 천하의 보검 못지않은 무기가 된다.
-촤악!
마족 하나를 더 베어 넘기고, 옆에서 손톱을 휘둘러오는 다른 마족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으적, 하는 소리와 함께 다리가 통째로 분질러진 마족의 목이 눈앞에 알맞게 놓였다.
그대로 한 번 더 검을 휘둘러, 놈의 몸통과 머리를 이별시켜주었다.
검에 마력을 흘려 넣는 것은 액티브 스킬을 사용하는 감각과 무척이나 비슷하다.
MP를 소비한다는 점에서 크게 다를 것도 없고, 동작이 자유롭다는 점에서 스킬의 상위 호환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마력을 다루는 검술이 스킬에 비해 부족한 점이라면, 복잡한 조작을 요구한다는 것 정도뿐.
버튼 하나로 쓸 수 있는 매크로와, 하나하나 직접 입력해서 발동하는 커맨드의 차이다.
예전에는 나도 그 ‘커맨드 입력’을 어려워해서, 액티브 스킬을 섞어 쓰곤 했지만.
[마력 지배]를 손에 넣고 마력을 자유로이 다룰 수 있게 된 지금은- 검술 스킬 자체를 아예 안 쓰게 되었다.
[웨폰 마스터리 Lv.2]
- 한손검 숙련 (929 / 999)
하지만 시스템은 이걸 스킬 사용으로 인식하는지, 스킬을 쓸 때마다 오르는 숙련도 수치는 계속 상승 중.
곧 한손검 숙련도는 최대치인 999를 찍을 예정이다. 이것도 업적이 있다고 들었는데.
“끝났어, 마저 가자.”
덤벼오는 마족들을 싹 쓸어버린 후, 피를 털어낸 검을 인벤토리에 수납했다.
“어느 쪽이 마족인지 모르겠군, 외마계에서 살다 보면 인간도 이렇게 되는 건가.”
녹색 마족은 질렸다는 듯이 말했다. 지금 내 처지가 이렇다.
14층 최강 수준인 몬스터가 질겁할 정도의 강함.
커뮤니티의 랭커들도 내가 얼마나 강한지는 전혀 가늠을 못 하고 있다.
이러니까 자꾸 회색의 마왕인지 뭔지에 대해서 미련이 생길 수밖에.
힘의 정수를 완전히 되찾은 마계 혁명 군단이 충분히 강했으면 좋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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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마력
전사 클래스라도 마법 스킬을 사용하는 것 자체는 가능하다.
다만, 마법 스킬을 획득하는 퀘스트는 대부분 마법 관련 클래스를 가지고 있어야 수행할 수 있는 경우가 많다.
보물상자에서 얻을 수 있는 스킬북도 각각 사용 조건이 걸려 있기에, 전사 클래스가 마법 스킬을 얻기란 매우 어렵다.
하지만 일단 얻으면 사용할 수는 있다. 딱히 시스템상으로 막혀 있는 건 아니란 뜻이다.
특별한 히든 요소를 발견하거나, 보스를 클리어하고 보상으로 스킬을 습득하거나.
이런 루트를 밟았다면 전사라도 마법 스킬의 활용이 가능하다. 당장 나도 마법 스킬을 갖고 있긴 하니까.
[집광 Lv.1]
크리스탈 거미를 쓰러트리고 보상으로 얻은 집광 스킬, 효과는 별 거 없지만 일단 마법으로 분류되긴 할 거다.
그리고 한동안 신경 쓰지 않았지만, 3층에서 얻은 [라이트닝 차지]도 일단은 마법 계열일 거다.
게다가 나는 이미 스킬 획득이 꼭 퀘스트나 스킬북으로만 이루어지는 게 아니란 것을 알고 있다.
내가 얻은 다양한 패시브 스킬이 그 사실을 증명한다. 경험을 통해 터득한 기술은 곧 스킬이 된다.
그렇다면, 전사 클래스인 나도 엘레노어에게 배운다면 그림자 마법을 사용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림자 마법을 활용하는 특수 클래스로 전직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물론 전사 클래스에 완전히 물려버린 처지라, 어중간한 상위 클래스로는 기회가 찾아와도 전직하기 힘들겠지만.
아무튼,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나는 엘레노어를 찾아갔다.
엘레노어는 다크엘프들 사이에서 취급이 이상하긴 해도 일단은 공주 신분.
찾아간다고 바로 만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는데.
“그대가 먼저 나를 찾다니, 별일이구나? 저번의 제안을 받아들일 준비가 됐다고 생각하면 되려나?”
“아니.”
“후후, 쑥스러워하지 않아도 된다. 그대가 은근히 부끄럼을 탄다는 건 이미 알고 있어. 안심하고 내게 맡겨라.”
엘레노어는 마침 한가했다며, 찾아온 나를 향해 대뜸 개소리를 지껄여 댔다.
참고로 지금 엘레노어가 말한 ‘저번의 제안’ 이란, 늘 던져대는 동침을 하자느니 어쩌느니 하는 이야기를 말한다.
새삼스럽지만, 사람에게 있어서 외견이란 정말 중요한 것 같다.
저 말을 지껄이는 게 쭉쭉빵빵한 다크엘프 미녀가 아니라 못생긴 아줌마였다면, 진작 칼을 뽑아서 휘둘렀을 테니까.
“리즈멜이 그러더라고, 자기는 이제 가르쳐 줄 수 있는 게 없다고. 뭔가 배우고 싶으면 널 찾아가라던데.”
“리즈멜이 그런 말을 했다고? 검술을 배우기 시작한 지 얼마나 지났다고, 벌써 그런 말을?”
엘레노어는 눈을 크게 떴다.
아무리 적게 걸려도 반년은 걸린다는 기술을 하루 만에 터득해 왔으니, 당연한 거겠지.
-드르륵.
엘레노어가 의자를 젖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대로 천천히 내게 다가오더니, 천천히 내 얼굴을 양손으로 감쌌다.
“잠시.”
그리고 그대로 눈을 감고, 몇 분간 가만히 서 있었다. 뭘 하는 건가 싶은 차에, 엘레노어은 눈을 떴다.
“이거 참, 잠깐 사이에 몰라보게 변했구나. 인간족이라고 해도 이건 너무 빠른데?”
모종의 방법으로 스캔 같은 걸 한 것 같다. 아마 이것도 마법이겠지.
“그대는 정말 봐도봐도 새롭구나, 정말 마음에 들어. 이대로 키스가 하고 싶은데.”
이년이 또 지랄이네, 얼굴 치워.
**
엘레노어는 스캔인지 뭔지로 뭘 알아낸 건지는 모르겠지만, 금방 그 ‘무언가’를 가르쳐 주겠다 말했다.
물론 엘레노어도 나름대로 바쁜 몸이라, 바로 시작할 수는 없었다.
내가 검술 수련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던 그 시간에 다시 보자는 말로 대화를 마쳤다.
그렇게, 해가 진 뒤.
엘레노어는 언제나처럼 반투명한 네글리제 차림으로 내 방을 찾아왔다.
검술 수련의 연장선이나, 마법을 배우게 될 줄 알았는데. 왜 이번에도 저딴 차림이지?
오픈 커뮤니티의 베스트 스크린샷을 뛰어넘는 눈호강이긴 한데.
뭘 가르쳐 주려는 사람의 복장으로는 안 보이는데.
설마 가르쳐 준다는 게 침대 위에서의 기술은 아니겠지?
“아아, 이건 그냥 편한 차림으로 온 것뿐이다. 그대도 참, 그렇게 긴장하지 마라.”
저렇게 말하긴 하지만, 네글리제 차림의 다크엘프를 눈앞에 두고 긴장을 안 할 사람이 어디 있겠나.
“자, 리즈멜의 시험을 모두 통과한 거겠지? 그렇다면, 감각의 확장도 터득했을 테고.”
“그렇지.”
“이런 짧은 시간에 터득한 걸 보니, 그대도 비슷한 수련을 예전부터 해 온 모양이군?”
물론 그런 일은 없었다. 하지만 내 얼굴에 금칠을 하는 말이다.
“그럼, 당연히 그 너머의 경지가 있다는 것도 알고 있겠구나.”
모른다. 리즈멜의 움직임을 보며 대충 짐작만 하고 있었을 뿐.
솔직하게 모른다고 말하자, 엘레노어는 이번에도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며 뭐라뭐라 설명을 시작했다.
리즈멜이 알려주는 검술 이론에 비하면 매우 복잡하고 불친절한 설명이었다.
까놓고 말해, 들으면서 절반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마력을 이용해 주변을 감지하는- 뭐 그런 기술이랑 경지가 있다는 말이지?”
많은 것을 간추린 내 요약에, 엘레노어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거냐.
그럼 오픈 커뮤니티에서 가끔 언급되던 [마력 감지] 스킬이 맞는 모양이네.
마법사 계열 클래스가 얻을 수 있는 스킬로, 사용하면 마력을 소비해 주변의 사물을 인식할 수 있다던데.
미궁의 함정을 미리 찾아내거나 몬스터의 매복을 감지할 수 있어서, 과거에는 매우 중요한 스킬이라고 들었다.
공략이 완성된 지금은 모두 옛말이지만, 1~2세대 도전자들은 파티에 마력감지를 배운 마법사 하나를 꼭 넣고 다녔다고.
1세대 도전자들과 똑같은 환경에서 탑을 공략하고 있는 내게도 꽤 유용한 스킬일거다.
“음, 그대는 이해가 빠르구나. 마력을 감지하고 운용하는 기술은 전사에게도 매우 중요하지.”
그 때, 엘레노어가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던 정보를 갑작스럽게 내뱉었다.
“누가 뭐라고 해도, 마력강화를 터득하기 위한 가장 첫걸음이 되는 기술이니까.”
그 하이엘프 여기사가 사용하던, 전사 클래스의 삼신기 스킬.
마력강화.
그 습득 조건이 이거였다고?
**
근접 전사 클래스의 고질적인 기동력 문제를 단번에 해결해주는 최상급 이동 스킬, [축지].
근접 전사 클래스의 한계를 뛰어넘는 다양한 공격 스킬을 제공하는 최상급 마스터리 스킬, [오러 마스터리].
근접 전사에게 무엇보다 우월한 방어력과 스탯 상승을 가져다주는 최상급 버프 스킬, [마력 강화].
이 세 가지 스킬이 삼신기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이유는 단순하다.
이 중에서 하나만 터득해도 B급 헌터 자리는 떼놓은 당상이라는 말이 나올 만큼 고성능의 스킬이라는 점.
그리고 그 성능에 비례해, 습득하기도 매우 어려운 희귀 스킬이라는 점 때문이다.
스킬북의 획득처도 매우 한정적이고, 관련 퀘스트는 대부분 조건이 알려지지 않은 히든 퀘스트.
레벨업으로 자연스럽게 습득할 수 있는 것도, 유니크 이상의 희귀 클래스에나 해당하는 이야기.
그런데 그 마력강화의 선행 스킬이, 마력감지였다는 말인가.
“뭐? 진짜야?”
나는 곧바로 되물었다. 엘레노어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 당연한 거 아닌가, 마력을 운용하지도 감지하지도 못하면서 마력강화를 깨우칠 수 있을 리가 없지 않나?”
이렇게 들으니까 무척 당연한 소리였다. 어쩌면 다른 도전자들도 짐작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애초에 다른 도전자들이 마력강화를 습득하지 못하는 건- 관련 퀘스트나 스킬북을 찾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처럼 시스템 보상이나 스킬북에 의존하지 않고 스킬을 습득하는 도전자는 이젠 거의 없는 모양이니까.
“그러네, 당연한 거였네.”
나는 곧바로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다크엘프 진영을 선택하길 정말 잘한 것 같다.
인성이 박살난 걸로 유명한 개씹좆프년들은, 퀘스트 보상은 좋게 주더라도 내 단련을 도와주진 않았을 테니까.
마력감지도, 마력강화도, 모두 수련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스킬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만 해도 큰 이득이다.
“그래, 그럼 빨리 시작하자. 뭐부터 하면 돼?”
“일단 내 볼에 입맞춤을……”
“개소리 말고, 마력 쓰는 법 알려달라고.”
엘레노어의 헛소리를 빠르게 커트하고, 거의 멱살잡이를 할 기세로 재촉했다.
다행히 엘레노어도 그 이상 헛소리를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바로 시작하자며, 간단한 수련법과 요령을 알려주었다.
그런데, 엘레노어가 알려준 수련 방법과 요령은 내가 상상하던 것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그 수련 방법이란, 그냥 명상이었다.
심지어 요령이니 뭐니 하기 이전에, 그냥 전제조건부터가 문제였다.
“아니 시발, 그러니까 그 마력을 어떻게 느끼냐고.”
“으음, 그러니까 명상을……”
“마력을 느끼면서 명상하라며, 나는 마력을 못 느낀다니까?”
새로운 경지에 닿기까지는 아무래도 한참 걸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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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 마계의 봄
북쪽의 전직 마왕이었던 마족의 이름은 갈로함, 색깔은 노란색에 뿔이 일곱 개인 마족이었다.
갈로함은 전직 마왕이면서도 문지기가 아니었는데, 관문 대신 어떤 거대한 다리를 지키는 수호자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대뜸 혁명 이야기를 꺼내는 우리에게 갈로함은 냉소적인 태도로 응했다. 헛소리하지 말라고.
회색의 마왕이 얼마나 강력한지 잊었느냐며, 힘의 정수를 빼앗겼던 때의 괴로움을 생생하게 증언하기도 했다.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회색의 마왕과 싸울 수 없다는 점이 아쉬웠다.
마법도 육탄전도 완벽 그 자체, 타인의 힘을 빼앗는 특수한 마법까지 보유해 말 그대로 무적이었다는데.
본인의 육체를 잃고 영혼만 다른 것에 빙의 된 상태로도 46층의 보스를 맡을 수 있을 정도니까, 과장은 아닐 거다.
아무튼, 우리는 갈로함에게 회색의 마왕이 영혼만 다른 곳으로 날아가 무력화된 상태라고 이야기했다.
갈로함은 그 말이 사실이라면 확실히 구미가 당긴다고 말했지만, 그게 사실이라는 증거가 없다며 다시 한번 거절했다.
“영락했구나 로투랑, 이런 인간 따위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따르다니.”
뭐, 녹색 마족 로투랑도 딱히 증거가 있어서 내 말을 믿기로 한 건 아니다. 나의 열정적인 설득에 넘어왔을 뿐이지.
“좋아, 그럼 어쩔 수 없지.”
나는 증거를 대신할 수 있는 훌륭한 대화수단을 꺼내, 곧바로 갈로함과 전투에 들어갔다.
북쪽 마계의 최강자였던 전적이 있는 만큼, 다른 문지기들과 비슷한 정도의 강함을 갖고 있는 갈로함.
그런 갈로함의 주특기는 마족치고는 무척 드물게도 무기술이었다.
양 손에 속성을 부여한 도끼를 한 자루씩 들고 휘두르는 전사 타입으로, 마족 중에서는 가장 나랑 비슷한 타입이었다.
으레 마족이란 놈들이 다 그렇듯, 마력량이 어마어마하게 많아서 속성 부여된 도끼의 위력이 상당했는데.
뭐, 그래 봤자 내 [라이트닝 차지]에 비하면 그리 대단한 수준도 아니었다.
처음에는 가벼운 정전기 수준에서 시작했던 [라이트닝 차지]는 [마력 지배]를 습득한 이후 크게 성장했다.
현재 스킬 레벨은 무려 23으로, 내 다른 스킬들과 비교해도 유난히 레벨이 높은 상태.
거기에 [번개 정령의 가호]의 효과가 더해졌고, 가호 스킬의 부가 액티브 옵션인 [대전]도 시너지를 낸다.
-파지직!
“크윽!”
놈의 도끼와 내 검이 부딪힐 때마다 파직거리는 전격이 튀며 간접적인 피해를 주었다.
[대전]스킬의 효과는 번개 속성의 마력을 접촉한 대상에게 전도시키는 것.
무기에 번개 속성을 두르는 [라이트닝 차지]가 이것과 결합해, 나는 온몸과 무기에 전격을 두를 수 있게 됐다.
전격을 실은 참격을 날리는 것도, 단순한 주먹질로 상대방을 감전시키는 것도 가능.
로투랑에게 그랬던 것처럼, 그냥 손바닥을 갖다 대기만 해도 전기찜질을 가할 수 있다.
속성을 부여한 무기를 휘두르는 것도, 단순한 무기술의 범위와 깊이에서도, 나는 갈로함의 완벽한 상위 호환.
“끄아아악! 믿겠다, 믿도록 하지! 혁명에 동참하겠다아아악!!”
잠깐의 싸움과 설득의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겠지.
**
로투랑과 갈로함, 전직 마왕 둘을 포섭한 우리 혁명군(?)의 기세는 엄청난 가속을 받았다.
전직 마왕 둘이 결의한 반란에 가담하고자 하는 마족은 상당히 많았고, 그 결과 어마어마한 숫자가 모였다.
물론 하루아침에 모인 건 아니다. 거의 사흘을 꼬박 혁명세력 모집에만 사용해야 했다.
그리고 오늘이 바로 결전의 날. 모여든 혁명군이 마왕성을 향해 쳐들어가기로 한 날이다.
모인 마족의 숫자는 전직 마왕급이 총 여섯, 각 마계의 2~3인자급이었던 이들이 열하나.
그리고 그 밖의 상급 마족이 마흔 이상에, 중급에서 하급 수준의 마족이 이백 정도 모여들었다.
대충 이백육십의 마족 군세, 각각이 가진 마력의 총량을 계산해보면- 어쩌면 세계수보다 더한 거 아닐까?
“이거 장관인데.”
나는 14층에 오기 전 미리 사두었던 치즈돈까스 도시락을 먹으며, 모여든 마족들이 의지를 고취하는 모습을 구경했다.
전직 마왕들이 각자 큰 소리로 연설하고, 이백이 넘는 마족들은 그에 호응하며 구호를 외친다.
“원색을 다시 한번 위대하게! 마계를 다시 위대하게!”
“잃을 것은 족쇄요, 얻을 것은 전부로다!”
“온 마계의 마족들이여, 단결하라!”
어쩐지 빨간 맛이 나는 구호가 몇 개 섞여 있긴 했지만, 마계에 어떤 사상이 퍼지건 그건 내 알 바가 아니지.
그러니까 그냥 내버려두고 이렇게 치즈돈까스 도시락이나 먹고 있는 거 아니겠나.
9층 이후, 나는 더 이상 끼니를 화이트롤만으로 때우지 않게 됐다.
물론 효율 문제로 화이트롤을 주식 삼은 것 자체는 변하지 않았지만, 가끔 이런 특식을 챙겨 먹고 있다.
1층에 처박혀 있을 시절에는 그냥 괜찮게 맛있다고만 생각했는데, 맨날 화이트롤만 처먹다 먹으니 감회가 새롭다.
왜 커뮤니티에서 치즈돈까스 도시락이 도전자들의 소울푸드처럼 여겨지는지 깨달았다고 해야 하나.
애초에 호불호가 잘 안 갈리는 종류의 음식이기도 하고, 화이트롤과는 정 반대 포지션이라는 점이 특히 매력적이다.
부드러운 빵과 반대되는 바삭한 튀김옷, 달콤한 크림과 반대되는 짭짤하고 고소한 치즈.
차갑게 식은 상태로 먹는 화이트롤과 반대되는, 시간이 오래 지나도 따뜻함을 유지하는 도시락.
기본적으로 고기류인데다가, 밥이 함께 들어있어 든든함과 열량 면에서도 무척 훌륭하다.
단점은 가격이 조금 높다는 것인데, 그렇기에 오히려 도전자들에게 특별한 날에 먹는 음식으로 통하고 있다.
득템을 했다던가, 레벨이 올랐다던가, 보스를 잡았다던가- 기념할 만한 일이 있을 때 기분 내기 용으로 먹는 식.
나도 마찬가지다. 가진 골드 자체는 차고 넘치기에, 마음만 먹으면 매끼를 치돈으로 때울 수 있지만.
가끔 특별한 일이 있을 때만, 이 도시락을 꺼내 먹기로 정했다. 오늘처럼 말이다.
“하여튼 음흉한 새끼들.”
저기서 환호하고 있는 마족들이 뒤로는 다른 생각을 품고 있다는 걸, 조금 전에 알게 됐거든.
오늘은 아주 특별한 하루가 될 거다.
**
회색의 마왕은 몸뚱이만 남아 무력화된 상태지만, 놈에게 충성을 맹세한 마족들은 수두룩하다.
혁명의 깃발 아래 모인 마족들도 만만찮은 강자들이지만, 회색의 마왕에게 힘을 받은 고위 마족 역시 상당한 강자.
힘의 정수를 되찾기 위해 마왕성에 쳐들어간다는 것은, 그런 고위 마족들과 전면전을 벌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원래 14층의 도전자는 마왕성 본성에는 침입하지 않고, 마왕성 좌측 탑을 통해 미궁 지역에 도전한다.
14층의 최종보스인 마족 백작은 설정상 그 좌측 탑의 주인이고.
일종의 챌린지 요소로만 존재하는 마왕성 본성은 그런 마족 백작에 버금가는 이들이 체류하고 있다.
-우오오오오오!!
잡졸 포지션에 속하는 중급 마족들이 우르르 본성을 향해 몰려간다. 이백의 악마들이 만드는 요란한 발소리.
마왕성에 배치된 여러 경비 마법이 발동하지만, 상급 마족들의 손에 의해 하나씩 파훼된다.
회색의 마왕 본인이 부재중인 탓에, 마왕성 본성의 공략 자체는 무척 쉬웠다.
챌린지 요소라고 해도 도전자들의 파티나 공격대를 기준으로 난이도가 잡혀 있는 수준이다.
이만큼 강력한 마족들이 단체로 쳐들어가면 돌파는 손쉬운 게 당연하다. 마족 백작급의 출현도 별문제는 없다.
“무엄한 것들, 당장 멈추지 못할……끄아악!”
백작급이 뭐 어쨌다고, 이쪽에는 전직 마왕만 둘에 그에 버금가는 강자들이 몇이나 더 있다. 당연히 쉽게 이기지.
내가 손을 쓸 필요도 없다. 일부러 손쓰지 않고 있기도 하지만, 아무튼간에.
“크하하하! 이야기는 사실이었던 모양이군, 너무 쉽지 않나!”
마왕이 무력화되었다는 내 이야기를 믿지 못하고 있던 고위 마족들이 웃음을 토해 냈다.
다들 이미 눈에 뵈는 게 없는 상태다. 본성으로 침입한 마족들은 텅 비어버린 마왕성을 마구잡이로 누비며 약탈을 자행했다.
마왕성에 존재하는 수많은 재보, 강력한 무기와 마법서, 아이템을 저들 마음대로 챙기고 있다.
원래대로라면 내가 싹싹 긁어먹어야 하는 아이템이지만, 나는 일부러 내버려두었다.
저 놈들이 저걸 처먹는다고 아이템이 없어지는 게 아니다.
놈들은 내 가방 같은 거다. 어차피 다 죽이고 배를 째면 도로 아이템을 뱉어내지 않겠나?
자동으로 아이템을 수집해 온다는 점에서, 가방보다는 펫에 더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자, 우리는 저쪽으로 가자.”
나는 커뮤니티의 망령들이 조사해 준 내용을 토대로, 힘의 정수가 있을만한 장소를 찾아 이동했다.
도중에 살짝 헤매긴 했지만, 오래 걸리지 않아 정수를 찾을 수 있었다.
장소는 마왕의 침실, 영혼을 잃고 자빠져 있는 마왕 근처로 몇 개의 빛나는 보석 같은 것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아아, 마침내! 드디어 찾았다, 나의 힘!”
나와 동행한 마왕급 마족들은 곧바로 날아가, 자신들의 정수를 붙들고 목구멍에 쑤셔 넣었다.
-찌릿.
[초감각] 스킬이 약한 경고를 보내온다. 놈들의 힘이 몇 배로 증폭했음이 그대로 느껴진다.
가지고 있는 마력량은 그대로지만, 기세라고 해야 할까. 그런 부분이 확연히 달라졌다.
“크크크……네놈에게는 신세를 졌군, 인간.”
그리고 기세를 찾은 마족들은 곧바로 나를 쳐다본다. 나는 웃었다.
“어, 나도.”
기껏 전기찜질도 하고 두들겨 패기도 했는데, 원한을 안 가져주면 섭섭하지.
자, 다 죽여볼까.
한 놈만 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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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 마왕 출현
마족은 생긴 것과 똑같이 노는 놈들이다.
악마같이 생긴 만큼 하는 짓도 악마랑 크게 다를 것 없고, 힘의 크기에 따라 그때그때 태도가 바뀐다.
뭐, 진짜 악마랑은 좀 다르다고 하긴 하지만. 아무튼 마족은 죄다 그런 놈들이라는 거다.
나는 이미 이놈들이 나를 배신할 계획을 짜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저들끼리 쑥덕이는 소리를 들었거든.
건방진 인간 놈의 사지를 찢어서 어쩌고저쩌고, 킬킬대면서 아주 잔인한 소리를 다 했었지. 내가 못 들을 줄 알았나?
이 놈들은 나름대로 머리를 써서, 9층의 하이엘프 왕이 했던 것처럼 전음을 통해 대화했었다.
전음은 귀를 기울인다고 엿들을 수 있는 게 아니라서, 마음 놓고 떠들고 있었던 거겠지만.
정말 공교롭게도, 나는 전음을 도청할 수 있다.
12층의 주요 몬스터가 일종의 군체형 생물, 스타크래프트에 나오는 저그 비슷한 것들이었는데.
그 놈들이 서로 텔레파시를 사용해 의사소통했었다. 그것들이랑 뒤엉켜 싸우다 보니 주파수가 살짝 맞은 적이 한 번 있었다.
[마력 지배] 스킬을 가진 덕분에, 마력을 이용한 모든 행위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기 때문이었을 거다.
그 때의 경험을 살려, 마력의 파장을 맞추는 것으로 텔레파시나 전음 같은 걸 몰래 엿듣는 기술을 체득한 게 대충 한달 전쯤.
쓸데가 있을 것 같아서 대강이나마 익혀 둔 기술을 바로 활용할 수 있을 줄은 나도 몰랐다.
“네놈에게 당한 고통을 그대로 되돌려주마!”
한 마족의 선언과 함께, 무수한 마법 세례가 내 눈앞을 가득 메웠다.
내 몸에 어지간한 마법은 아예 안 통하지만, 딱 봐도 어지간한 마법들이 아니다. 확실히 엄청 파워업했군.
가장 앞서 날아오는 암석 탄환을 검으로 쳐냈다. 암석탄은 검에 닿자마자 폭발하며 파편을 뿌렸다.
파편 하나하나가 상당한 양의 마력을 품고 있다. 내 몸에 상처를 내기에 충분한 수준.
이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다. 방패를 앞으로 내밀고 [철벽]스킬을 두른 채 전진한다.
이 수많은 마법을 날린 것은 한 놈이 아니다. 이곳의 마족들이 동시에 나를 향해 공격한 거다.
이게 무슨 뜻이냐면, 합을 맞춘 공격이 아니라서 빈틈이 많다는 거다. 이를테면, 이런 식으로.
-팅!
방패에 마력을 두르고 암석 파편 하나를 특정한 경로로 튕겨냈다. 그러자 몇 개의 마법이 서로 부딪혔다.
내 가장 큰 특기는 지금도 여전히 투척술이다. 지금 이건 투척은 아니지만, 투사체에 관한 거라면 뭐든 내 전문이다.
튕겨나간 암석탄에 의해 궤도가 뒤엉킨 마법들이 서로 부딪혀 제멋대로 터져나갔다.
그 중 몇 개는 아예 다른 마족을 노리고 날아가기까지 했다. 나한테 적중한 마법은 별로 없는 수준.
역시, 탄막은 결국 한번 막이 뚫리면 그다음은 쉽지.
여기저기에 상처를 입긴 했지만- 마법 세례를 한 번 몸으로 뚫고 나니, 다들 빈틈투성이다.
힘을 되찾고 나니 오만함이 다시 치솟으셨나?
고작 이 정도 마법 세례만으로 나를 무력화시킬 수 있을 거로 생각한 건가. 웃기지도 않네.
죄다 나한테 한두 방 맞고 뻗은 새끼들이, 왜 내 밑천을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거지?
내 방어력을 뚫고 피해를 입힐 수 있다면, 약해빠진 인간족은 쉽게 뻗을 거라고 여겼던 걸까.
뭐, 그럴 만도 하지. 죄다 순식간에 털려서, 아직 [초재생] 스킬은 구경도 못 해봤잖아.
“이딴 건 침 바르면 나아, 병신들아!”
마족들 사이로 뛰어들어가, 미친 듯이 검을 휘둘렀다.
**
일곱 개의 뿔을 전개하고, 마법을 두른 도끼 두 개로 내게 덤벼드는 노란 마족.
힘의 정수를 되찾으며 기본적인 신체능력과 마법 능력 모두가 향상된 지금, 그 기세는 예전과 크게 달랐다.
나는 놈과 똑같이 인벤토리에서 도끼 두 자루를 꺼내, [라이트닝 차지]를 두르고 맞서 달려들었다.
-콰직!
내 어깨에 놈의 도끼가 찍혔다. 나는 그 상태에서 똑같이 도끼로 놈의 어깨를 찍어버렸다.
-콰직!
놈의 반대편 손이 도끼를 내려쳐, 내 쇄골을 찍었다. 나도 도끼를 휘둘러 놈의 옆구리를 찍었다.
나와 노란 마족은 서로 합의라도 한 것처럼, 서로의 몸을 향해 있는 대로 도끼를 찍어 댔다.
-콰직! 콰직! 콰직!
인간보다 신체와 마력 모두 우위에 있는 마족과 이런 맞치기를 한다는 건 당연히 미친 짓이다.
서로 똑같이 도끼를 찍어도, 기본 체급과 스펙이 딸리는 인간 쪽이 훨씬 큰 피해를 입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
하지만 나의 방어력과 전투 지속력은 그 당연함을 대놓고 거스른다. 미친 듯이 도끼가 난무했다.
-콰직! 콰직! 콰직!
도끼질이 이어질수록, 내 도끼는 더 빨라지고 놈의 도끼는 점점 느려진다. 상처의 숫자가 점점 달라진다.
그리고 상처의 깊이는 처음부터 달랐다. 내 도끼가 더 정확하고 깊게 놈의 몸에 꽂히고 있다.
고작 수 초간 이어진 수십 번의 도끼질 맞대결, 그 끝에 쓰러진 것은 노란 마족 쪽이었다.
-털썩.
무릎을 꿇은 노란 마족의 정수리를 향해, [라이트닝 차지]와 [대전]을 최대 출력으로 두른 도끼를 내려찍었다.
-콰르릉!
벼락이나 다름없는 일격, 마족의 머리통이 쪼개짐과 동시에 노릇하게 구워졌다.
이곳에 함께 도착했던 상급과 마왕급 마족은 이미 반 이상을 쓰러트렸다. 물론 남은 마족은 아직 더 있다.
하지만 남은 놈들은 정수를 되찾았음에도 상대가 안 된다는 사실에 겁을 먹었는지, 소극적인 마법 견제만을 날리고 있었다.
사나운 개한테 소심하게 돌을 던져보는 초등학생들이랑 다를 게 없는 모습이다.
문제는 그 개한테 목줄이 없다는 것. 나는 곧바로 외야를 향해 뛰어들어 칼부림을 벌였다.
또 몇 놈이 쓰러지고, 몇 놈이 남는다. 그러자 이제는 돌을 던지려는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이런 빌어먹을, 다 비켜!”
그러던 중, 한 마리의 상급 마족이 더 이상 못 견디겠다는 듯 다른 이들을 제치고 달아나려 했다.
어허, 그건 안되지 새끼야.
건방지게 구는 것도, 나를 얕잡아보는 것도, 다 봐줄 수 있어. 근데 정수만 먹고 튀는 건 용납 못 하지.
[신속]
[혼신]
두 가지 버프를 사용해 민첩 스탯을 높이고, 달아나려는 놈의 뒷덜미를 재빠르게 낚아챘다.
그리고 그대로 벽에 놈의 면상을 처박고, 방 안을 반 바퀴 뺑 돌았다.
-콰콰과과곽!
졸지에 얼굴로 벽을 갈아버린 놈은 발버둥치며 내게 공격을 날려 왔지만, 그냥 무시했다.
나는 인벤토리에서 새 무기를 꺼냈다. 월드 보스 레이드 보상으로 얻었던 유니크 무기 중 하나다.
[피를 먹는 나선검]
날이 꽈배기처럼 꼬여 있는 붉은 대검. 이 검은 기본 옵션도 괜찮지만, 독특한 기동 효과를 갖고 있다.
액티브 옵션을 사용하면 날의 꼬인 부분이 모조리 날처럼 변해서, 회전한다는 것이다.
나는 감히 도주를 시도한 마족의 배때기에 나선검을 꽂아넣고, 전용 옵션을 가동했다.
-기이이이잉……가가가가각!
거대한 드릴이 된 나선검이 마족의 뱃속을 마구잡이로 휘저으며 내장을 갈아버린다.
마족은 ‘어거걱’ 말고는 제대로 소리도 내지 못하고, 사지를 경련하다 배에 지저분한 구멍이 뚫려버렸다.
내 사지를 찢니 마니, 꼬챙이에 꿰어 버리니 마니, 그딴 소리를 했던 주제에 아주 기겁들을 한다.
“혁명 동지들을 두고 혼자 도망치려 하면 안 되지, 새끼야.”
니들한테 도주라는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쫄지 않고 덤비면 편하게 보내 줄 수는 있다.
그런 의미로 본보기를 한 번 보이자, 마족들은 부들부들 떨다가 돌연 무릎을 꿇었다.
“다, 당신께서 새로운 마왕이십니다! 추, 충성을 맹세하겠습니다!”
얼씨구, 이 새끼들 봐라.
내가 덤비랬지 언제 항복하랬냐? 그리고 인간보고 왜 마왕이래? 기분 나쁘-
[업적 달성 : 마계의 지배자]
-지 않네, 그냥 내가 마왕 하지 뭐.
**
뭐, 말은 그렇게 했지만 진짜로 마왕 노릇 같은 걸 하고 있을 시간이 어디 있겠어.
나는 항복을 선언한 놈들과도 억지로 싸움을 벌여 다 처치하고, 놈들의 힘의 정수를 빼앗아 부수기까지 했다.
삼켜서 흡수했던 만큼 그냥 배를 째 버리면 다시 뽑아낼 수 있더라고. 아쉽게도 내가 흡수한다거나 하지는 못하는 것 같았고.
그렇게 퀘스트는 딱 한 놈의 몫만 제외하고 모든 조건을 만족한 채로 완료했고, 의도치 않았던 업적까지 하나 달성했다.
보상으로는 대량의 경험치를 얻어 레벨이 하나 올랐고, 새로운 스킬인 [어둠 정령의 가호]를 얻었다.
정령의 가호 계열 스킬은 하나하나가 든든한 국밥 스킬이니, 만족스러운 결과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본방은 지금부터다. 내가 일부러 살려놓은 마왕급 마족인 로투랑이 아직 남아 있으니까.
“빨리빨리 좀 했으면 좋겠는데.”
혼자 은신 상태로 숨죽이고 있는 녀석을 모른척하기도 지친다. 나는 아예 자리를 피해 다른 중급 마족 사냥에 나섰다.
마왕성에 함께 쳐들어온 백여 명의 마족을 모두 죽이고, 겸사겸사 마왕성에 자리 잡고 있던 마족도 몇 놈 죽였다.
하나같이 수준은 대단할 것 없었던지라, 천천히 싸웠는데도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업적 달성 : 마족 학살자]
그리고 도중에 업적이 하나 더 달성되었다. 보상은 지능 스탯을 조금 올려주는 정도.
천천히 이번에 얻은 보상을 확인하고 정리한 다음, 나는 다시 힘의 정수가 보관되어 있던 방으로 돌아왔다.
로투랑은 슬슬 준비를 거의 다 마친 것 같았다. 다른 게 아닌, 회색 마왕의 몸에 자신이 빙의할 준비를.
“크흐흐……이걸로 너도 이제 끝이다, 건방진 인간 놈!”
전음을 도청하던 중에 이 계획을 들었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회색의 마왕이 없다면, 다른 놈을 회색의 마왕으로 만들면 되는 거였다.
빙의 마법도 겸사겸사 좀 봐둘 수 있고, 14층 수준을 아득히 넘어선 적과 싸워볼 수도 있다.
이 정도쯤 되는 일이 아니면, 내가 치즈돈까스 도시락을 꺼내 먹을 일도 없었을 거다.
[마계 역사상 최강의 마왕이 이 자리에서 다시금 부활하노니.]
[뻣뻣하게 서 있는 목은, 모두 회색의 마왕의 손안에 들어오리라.]
[온 마계의 생명들이여, 겸손히 주인께 경배하라.]
[HIDDEN BOSS - 반쪽 마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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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 준비운동
몸과 영혼이 맞물리지 않았기에 ‘반쪽 마왕’ 인걸까.
하지만 그 반쪽 마왕으로부터 느껴지는 기운은 장난이 아니었다. 반쪽이라는 이름이 장난처럼 느껴질 정도로.
마족들을 볼 때마다 느꼈던 어마어마한 마력의 양은 그렇다 쳐도, 그 밀도가 굉장하다.
어마어마하게 거대한 힘이 저 몸뚱이 하나에 단단하게 뭉쳐 있다.
이제까지 만났던 마족들의 힘이 수증기처럼 흩뿌려져 있었다고 한다면, 저건 얼음처럼 뭉쳐 있다.
“와 이거, 진짜, 존나……이상하네.”
자연경관 하나를 생물 사이즈로 압축시켜 놓은 것 같다. 마력 감지로 보고 있으면 괜히 아득하게 느껴질 정도.
하긴, 이 정도는 되어야 역사상 최강의 마왕이니 뭐니 하는 배경 설정 값을 할 테지.
회색 마왕은 그 영혼을 톱니바퀴 장치에 빙의시킨 것 만으로 48층의 보스를 해먹을 수 있을 정도다.
그렇다면 몸뚱이만 해도 48층 보스급은 될 테고, 저 몸에 빙의한 마족 역시 원래는 마왕급의 마족이었으니.
아마 이놈이 실질적으로 48층 보스 이상으로 강하지 않을까?
“흐하하하하! 힘이 넘쳐흐르는구나, 이게 회색 마왕의 몸뚱이인가!”
마왕은 기분이 좋은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웃어젖혔다.
-쩌적.
그냥 웃기만 했는데 마력이 떨리며 주변 사물에 균열을 일으킨다.
얼마나 힘이 강력하면 저런 게 될까 싶다가도, 그만한 힘을 웃음 따위로 흘리고 있다는 사실이 개탄스럽다.
어휴, 아무리 기분이 좋다고 해도 그렇지. 그 귀한 걸 그렇게 질질 흘리냐. 요실금도 아니고.
“시험해 볼까.”
-지잉!
마왕이 돌연 웃음을 그치더니, 눈에서 묘한 색의 광선을 쏘았다. 전조 없는 공격이다.
나는 마력을 두른 방패로 그것을 막아냈지만, 광선은 내 방패를 숭덩 썰어버리고 내 팔을 그었다.
-치지직……!
팔에서 탄내가 난다. 굉장히 강력한 열선, 그것도 내 속성 내성을 뚫을 수준의 위력이다.
마왕은 이어서 팔을 한 번 크게 휘둘렀다. 그러자 강력한 돌개바람이 불어 나를 덮쳐왔다.
-콰과광!
말이 돌개바람이지, 나와 함께 휩쓸린 주변의 사물들은 그것만으로 가루가 나 버렸다.
돌개바람에 휩쓸려 뒤로 밀려나는 도중, 인벤토리에서 쇠구슬 하나를 꺼내 가볍게 던져 봤는데.
날아간 쇠구슬은 마왕에게 도달하지 못하고 곧바로 바람에 갈가리 찢겨 조각나버렸다.
허, 마력을 싣거나 한 건 아니지만 쇳덩이가 스펀지처럼 찢기네.
새삼 그 바람을 맞고도 멀쩡한 내 신체의 강도는 어떻게 된 건가 스스로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
[신속]
단번에 속도를 높여 마왕에게 접근해, 검을 휘둘러 놈의 몸뚱이를 노렸다. 손맛이 안 좋다.
-카각.
분명 맨몸뚱이인데 거대한 바위에 칼질을 한 기분이다.
그냥 바위라면 내 검에 두 동강이 날 테지만, 이놈의 몸은 기껏해야 긁힌 상처가 났을 뿐이다.
역시 최강급 마왕의 몸뚱이군, 내 마력을 이만큼 두른 검인데도 베이지 않다니.
-후웅!
마왕은 이번에는 쫙 펼친 날개를 휘둘렀다. 날개의 날카로운 끄트머리를 아슬아슬하게 피해냈다.
저 날카로운 마디마디마다 어마어마한 밀도의 마력이 맺혀 있다. 스치기만 해도 베일 거다.
그 때, 돌연 무거운 충격이 내 가슴팍에 닿았다.
-꽈앙!
오함마로 한 대 세게 맞은 것 같은 감각, 몸이 크게 밀려났다.
“크흐흐.”
나를 때린 것은 어떤 마법도 무기도 아니었다. 새까만 아우라가 둘러진 마왕의 주먹이었다.
“이제 좀 알 것 같군, 이 몸의 사용법을.”
아무래도 지금까지 날아왔던 녀석의 공격은, 육체의 성능을 시험해보기 위함이었던 것 같다.
새로 산 핸드폰의 기능을 이것저것 마구 눌러 보듯이, 일단 하나씩 써 본 거다.
그런데도 이런 위력, 이런 속도, 이런 템포인가- 확실히 징그럽게 세긴 센 모양이다.
“아, 그러셔.”
그래, 그 정도는 해 줘야지.
**
이제 와서 말하는 거지만, 회색 마왕의 육체는 꽤 전형적인 악마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머리에는 산양의 것을 닮은 뿔이 있었고, 한 쌍의 날개와 꼬리가 달려 있고, 손톱은 면도칼처럼 날카롭다.
전형적인 악마 형상이라는 건, 마족이 가질 수 있는 모든 기관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저 손톱이며 날개며 꼬리 하나하나가 모두 무기처럼 휘두를 수 있는 공격용 기관.
그렇기 때문에, 작정하고 힘을 쓰기 시작한 마왕의 공격은 내 두 손 두 발로는 다 감당하기 힘들 정도였다.
-파앙!
스프링처럼 둥글게 말렸던 꼬리가 어마어마한 탄성을 내며 쏘아졌다.
나는 조금 특이한 형태의 방패를 꺼내, 방사형의 표면을 이용해 날아드는 꼬리의 공격을 흘려보냈다.
하지만 그걸 위해 사용된 방패는 그대로 파괴되었다. 공격 한 번에 장비 하나를 희생해야 하는 위력이 나온다.
아니, 사실 위력은 큰 문제가 아니다. 이미 장비의 내구도가 내 스펙을 따라오지 못하게 된 지는 제법 됐으니까.
문제는 저만한 위력의 공격이 쉴 틈도 없이 계속 날아든다는 점이다.
원래 육탄전은 그렇다. 공격 한 번을 할 때마다 턴을 소모한다. 이렇게 공격을 막고 나면 원래는 내 차례.
하지만 저 양심없는 놈은 압도적인 스피드와 다양한 공격 수단을 이용해, 억지로 턴을 늘리는 게 가능했다.
-휘잉!
꼬리 공격이 막히자, 날개를 휘둘러 칼바람을 일으킨다. 그냥 바람이 아니라 어마어마한 고위 마법이다.
불어오는 바람에 휩쓸려 톱날처럼 회전하는 마법 탄환이 닥쳐오고, 저 탄환에 적중당한 부위는 갈려나간다.
비유가 아니라 말 그대로 갈린다. 조금 전에 한 발 맞아봐서 하는 말이다.
“씨이벌……이건 왜 낫질 않아.”
마법 탄환에 맞았던 팔뚝 부위의 상처가 회복되지 않고 있다. 내 재생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상처 부위에 모종의 마법적 방해가 걸려 있다. 저주 같은 디버프 계열이 아니다.
-푸슉!
상처 자체가 주기적으로 바람을 일으켜 몸을 찢고 있다. 잔여형 공격 스킬인거다.
이런 건 상처 부위를 크게 도려낸 다음 포션으로 회복해야 한다.
하지만 마왕은 한순간도 공격을 멈추지 않으며, 그럴 틈을 내주지 않고 있었다.
[신속]
[혼신]
두 개의 버프 스킬을 사용해 다시금 민첩 스탯을 증폭시키고, 날아드는 탄환을 피하며 전진한다.
그렇게 다시금 거리가 확 좁혀졌을 때.
마왕은 기분 나쁜 웃음을 지어 보이며 보란 듯 손바닥을 펼쳤다가 꽉 쥐었다. 마력이 요동친다.
[초감각]
인간의 인지 한계를 아득히 넘어선 내 감각은 그 보잘것없는 행동으로 벌어질 일을 바로 눈치챈다.
재빨리 두르고 있던 망토에 마력을 쑤셔 넣어 방패 대신으로 삼고, 몸을 감쌌다.
그에 더해 [철벽]스킬과 [혼신]스킬로 방어력을 증폭시킨 후, 얼굴 부분을 팔뚝으로 가린다.
-콰과과과광!!
정면에서 크레모아가 터진 것 같은 감각, 정체불명의 마력 탄환 수십 개가 온몸을 난타한다.
내 마력을 둘러 강화한 망토는 순식간에 걸레짝이 되고, 이마 부근에서 주륵 피가 흘렀다.
갑옷의 몇 부위가 박살 난 채 바닥을 나뒹굴고, 편두통을 연상시키는 욱신거림이 왼쪽 머리께를 괴롭혔다.
“후우……후우……”
와 나 시발, 진짜 어이가 없네. 그냥 마력을 사방으로 분사하는 것만으로 이런 위력이 나온다고?
“…… …… …… ……”
마왕이 뭐라 뭐라 떠드는 소리가 들릴락 말락 하게 귓가를 스친다.
방금 그걸로 고막이 어떻게 된 모양이다. 좀 기다리면 알아서 들리겠지.
하지만 떠들어 대던 마왕의 손아귀가 돌연 눈앞에 닥쳐든다. 날카로운 마력을 두른 채.
-쫘악!
재빨리 고개를 숙였지만, 관자놀이 부근의 살이 쭈욱 찢겼다. 귀도 좀 잘린 것 같다.
내 [초재생]과 포션의 힘으로도 완전히 결손된 신체는 회복하기 어렵다.
층수가 낮아 급이 높은 포션을 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완전히 잘려나간 건 아니었으면 좋겠네.
회색 마왕의 몸을 차지한 녹색 마족의 원래 전법은 스피드를 살린 초고속 전투.
-후웅! 후웅!
그런 만큼, 폭발에 휩쓸려 멀쩡하지 않은 나를 향해서도 어마어마하게 빠른 공격이 계속 날아든다.
아직 반응은 따라가고 있다. 그간 연마한 무기술과 체술은 확실하게 공격을 막고 받아치고 있다.
하지만 놈의 공격에 뒤따르는 마력에 의해, 자꾸만 간접적인 피해를 입는다.
어마어마하게 빠른 육탄전 중심인 주제에, 자꾸 광범위 추가타가 발생하고 있는 거다.
“양심이 없나, 씨발……!”
-카앙!
날아드는 마왕의 공격을 억지로 쳐내고, 놈의 품으로 깊이 파고든다.
이번에야말로 완전히 빈틈을 잡았다.
마력을 실은 검을 크게 휘둘러, 놈의 몸을 크게 베어낸다.
-촤악!
어마어마한 내구력을 자랑하는 마왕의 육체가, 마침내 처음으로 크게 베이며 피를 뿜어냈다.
**
억지로 빈틈을 파고들어 유효타를 입히긴 했지만, 치명상은 아니었다.
-타닥!
어쩔 수 없이 뒤로 크게 물러났다. 너저분해진 몸 상태를 한 번 확인했다.
고막도 슬슬 돌아왔고, 다른 상처도 그럭저럭 낫고 있다.
“이 로투랑을 한 번 이겼던 사내답군, 인간을 초월한 힘을 갖고 있어. 설마 이 몸을 벨 수 있다니.”
마왕은 방금 그게 내 밑천이었음을 눈치채고, 낄낄 웃으며 나를 칭찬했다.
“어떠냐 인간, 이참에 내 부하가 되지 않겠나? 마계에 새 시대가 도래할 거다.”
뭐라뭐라 떠드는 마왕을 무시하고, 체내의 마력과 HP 잔량을 점검한다. 아직 여력은 있다.
이래저래 많이 다치기도 했고, 싸움 내내 일방적으로 몰아붙여 진 느낌이지만.
도저히 질 것 같은 기분이 들질 않는다. 저층을 등반할 때의 그 막막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아마 이대로 싸우다 보면 좀 아슬아슬하긴 하겠지만, 어떻게든 이길 수 있겠지.
좋아, 이 정도면 됐다.
요즘 성장세가 너무 가팔랐던 탓에, 맞상대를 만나지 못해 한동안 감각이 둔해져 있었다.
도핑 없이 기본적인 무기술과 스킬만으로 어디까지 싸울 수 있을지도 대충 확인했고, 감도 슬슬 돌아온 것 같다.
뻐근한 어깨를 한 번 돌려 보고, 몸 안의 마력을 정해진 회로를 따라 순환시킨다.
순환된 마력으로 온몸을 감싸고, 방출하여, 내 육체의 힘에 그대로 더한다.
[마력 강화]
-쿠르릉!
천둥 소리와 함께 몸이 빛에 휩싸인다. 동시에 인벤토리에서 새 장비를 꺼낸다.
“하여튼 마족 새끼들, 강약약강이라고 이길 것 같으면 바로 말부터 많아진다더니.”
9층에서 얻은 다크엘프제 방어구 풀 세트, 에르웬이 만들어준 내 애검.
기본 상점제 장비를 수납하고, 내 진심 장비 세팅으로 돌아왔다.
“재생 패시브 가진 놈이랑 싸우는데, 다 이긴 줄 알고 나불거려?”
최소한 반피는 넘게 까고 나서 그러던가, 아직 [불굴]은 켜지지도 않았다 새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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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 마검 칼레온
내 마력강화는 일반적인 도전자들이 갖고 있는 그 스킬과 조금 다르다.
모든 스펙을 뻥튀기시켜주는 사기 스킬이라는 점에서는 똑같지만, 자세한 사양 면에서 좀 차이가 있다.
왜냐, 나는 다른 도전자들처럼 스킬북을 파밍하거나 클래스 사양으로 [마력 강화]라는 스킬을 손에 넣은 게 아니니까.
내 마력강화는 내가 가진 온갖 무기술 계열의 스킬처럼, 자력으로 터득한 기술이 스킬의 형태로 등록된 것이다.
-쐐액!
마왕의 꼬리 공격이 쏜살같이 날아든다. 나는 [철벽]을 두른 왼팔을 내밀어 그걸 받아쳤다.
쾅 하는 소리가 터지며, 마력을 실은 꼬리가 그대로 튕겨 나간다.
마왕의 모든 공격에 딸려 있는 광역 추가타는 완전히 무시되었다. 마력강화 특유의 방호 효과 덕분이다.
마력강화는 내구 스탯과 동시에 방어력도 따로 증폭시키고, 거기에 휘감은 마력을 통해 고유한 방호 능력까지 제공한다.
그렇기에 내 수많은 스펙 중에서 가장 독보적인 방어 능력이 몇 배는 더 증폭된다. 이 정도 공격은 그냥 받아낼 수 있다.
-콰르릉!
천둥소리를 울리며 마왕의 품에 단숨에 파고든다. 그대로 직선으로 검을 찔러넣는다.
-우지직!
마왕의 단단한 몸을 뚫고, 뼈를 모조리 끊어내며 내장까지 검이 닿는다.
무기를 바꾸며 공격력이 오르고, 거기에 마력강화로 한 번 더 공격력이 크게 증폭되었기 때문이다.
내 마력강화가 다른 도전자들의 마력강화와 크게 차이 나는 첫 번째 요소, 강화의 폭이 매우 높다는 것.
“흡!”
박아넣은 검 손잡이를 90도 회전시켜, 날의 방향을 바꾼 뒤 그대로 올려 긋는다.
이어진 뼈와 내장을 모조리 갈라버리며, 배로 들어갔던 검이 어깨 위치로 빠져나온다.
검은 들어가는 방향이랑 나오는 방향이 다를 때 가장 파괴적인 힘을 발휘한다. 그게 마음대로 되기 힘들어서 그렇지.
하지만 마력강화를 사용해 모든 스탯을 뻥튀기한 지금의 상태라면 얼마든지 가능하다.
“크헉!”
단숨에 붉은 크리티컬 이펙트가 터지며, 마왕이 주저앉았다.
그 한심한 꼴을 비웃어 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마력강화를 쓴 이상 싸움은 빠르게 끝내는 게 좋다.
몸을 크게 움직여, 주저앉은 마왕의 목을 향해 힘차게 검을 휘둘렀다. 베기보다는 후려치기에 가까운 식으로.
검에 걸맞은 사용 방식은 아니지만, 마력강화의 압도적인 출력이 무식한 일격을 합리적인 공격으로 바꾸어 준다.
-콰직!
가드를 올린 마왕의 팔을 그대로 잘라내며, 목에 반쯤 박힌 칼날. 여기에 후속타가 들어간다.
[라이트닝 차지]
-파지직!
마력강화로 인해 흘러넘치는 마력과 [라이트닝 차지]의 번개 속성이 뒤섞여 몰아친다.
마왕은 목을 타고 흐르는 강력한 전격에 ‘으그극’ 하는 소리를 내며 부들부들 떨었다. 점점 놈의 몸에서 힘이 빠진다.
그나저나, 목에 칼날이 반쯤 박혔는데도 안 죽네. 역시 마족은 생명력도 남다른 것 같다.
아닌가, 나도 목에 칼이 박힌 것 정도로는 안 죽을 것 같기도 하고.
실제로 리자드맨이 나오던- 3층이었나, 거기서 목에 한번 칼이 박혔는데도 살았었지.
뭐, 그 때는 상대가 병신이었지만.
“그만 뒤져라.”
나는 그대로 팔에 힘을 빡 넣고, 반쯤 잘린 목의 나머지를 그대로 확 쳐내버렸다.
-콰직!
뻣뻣하게 서 있는 목은 모두 마왕의 손안에 들어온다고 했던가.
내가 마왕 해먹겠다고 말한 적이 있어서 그런가, 네 뻣뻣한 모가지가 내 손에 들어왔네.
[클리어 보상 : ‘경험치’, ‘골드’를 획득하셨습니다.]
[최초 클리어 보상 : ‘마왕의 뿔’을 획득하셨습니다.]
[최대 기여도 보상 : ‘액티브 스킬 - 암영’을 획득하셨습니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클리어 메시지와 함께 잘려나간 마왕의 목은 재가 되어 사라졌고.
[최후의 일격 보상 : ‘마검 칼레온’을 획득하셨습니다.]
남아있는 그 몸뚱이는 난데없이 회색빛 검으로 변했다.
**
마왕을 처치한 후, 나는 일단 빠르게 마력강화를 해제했다.
그러자 온몸에 어마어마한 격통이 몰려왔다. 전신의 근섬유와 혈관이 실시간으로 찢기는 느낌.
“끄어어어억, 시바아알……!”
내 마력강화가 다른 도전자의 것과 다른 두 번째 요소. 강한 출력이 나오는 대신, 사용한 후에 찾아오는 반동마저 강하다.
처음 각성했을 때의 감정 상태 때문일까, 다른 도전자들의 안정적인 마력강화와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높은 전투 지속력을 기반으로 한 나의 기본 전투 스타일과는 맞지 않는, 리스크가 있는 순간적 도핑 스킬.
“아 씨발, 쓰지 말걸, 쓰지 말거어얼……끄아악.”
나는 획득한 보상을 확인하지도 않고, 격통에 데굴데굴 굴렀다. 이거 진짜 존나 아프다.
높은 출력은 지금 시점에서 솔직히 독밖에 안 된다.
안 그래도 기본 스펙이 너무 좋아서, 마력강화를 쓰면 오버킬이 되어버리니까.
그래도 꾸준히 써버릇해야 스킬 레벨도 오르고, 숙련도도 좋아질 테니 지금 같은 상황에선 좀 쓰려고 하고 있긴 한데.
“아오 씨발, 씨이벌……”
이럴 때마다 저절로 욕이 튀어나오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이건 포션으로 진정도 안 된다.
-고통스러운가.
그 때, 돌연 누군가 내게 전음을 보내왔다.
뭐지 시발, 아직 살아있는 마족이 있었나? 다 죽였는데?
-나를 잡아라, 너의 고통을 없애주마.
마력감지를 전개해 전음이 어디서 날아오는지 포착해 냈다. 위치는 바로 앞, 마왕의 몸이 변화한 회색 검.
설마 저게 나한테 말 거는 건가? 검이?
그러고보니까 보상 목록 중에 무슨 마검이 있었지 참.
대뜸 나를 잡으라는 것도 그렇고, 마검이라는 이름도 그렇고, 너무 노골적인데.
-무한한 힘을 갖고 싶지 않은가. 내가 줄 수 있다. 나를 쥐는 순간, 회색의 힘은 네 것이 된다.
나는 끙끙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회색 검을 향해 가까이 다가갔다.
검에서는 회색 마왕의 몸에서 느껴졌던 단단한 마력이 그대로 느껴지고 있었다.
**
마검을 쳐다보니, 시스템 인터페이스가 떠올라 무기의 정보를 보여주었다.
[마검 칼레온]
공격력 + 180 (암흑)
치명타 피해 : x3.5
내구도 750/750
강화 시행 가능 횟수 : 0회
기본 공격력부터 어마어마하고, 무기의 공격 속성이 참격이 아닌 암흑으로 되어 있었다.
인챈트 없이 기본적으로 암속성 공격을 할 수 있는 모양이다. 강화 시행 횟수가 없긴 하지만, 스펙이 장난 아니다.
이거, 에르웬이 만들어 준 내 검보다 한참 더 좋은 거 아닌가. 외형이 좀 마음에 안 들기는 하지만.
고유 지속 효과 : 에고 소드
마검 칼레온에 깃든 자아에 의해 시야에 검로가 표시됨.
검로를 따라 공격할 시 확정 크리티컬 발생.
암흑 속성 공격 시 치명타 피해량 2배 증가.
고유 지속 효과도 어마어마하게 좋아 보이고, 층수에 맞지 않는 스펙의 무기다.
그 스펙의 원천은 보여지는 아이템 등급에 의한 것이겠지. 유니크보다 높은 에픽 등급의 무기다.
내가 가진 에픽 등급 아이템은 딱 하나, 엘레노어의 영혼뿐인데. 여기서 에픽 등급을 하나 더 먹을 줄이야.
하지만 무기의 착용 조건이 마음에 걸린다. 레벨이나 마스터리를 요구하지 않는 대신, 이상한 조건이 붙어 있다.
[착용 제한 : 마검 칼레온의 계약자]
그 계약이라는 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마검과의 계약이라고 하면 딱 봐도 정상적인 건 아닐 것 같다.
근데 이게 대체 회색의 마왕이랑 무슨 상관인 거지. 내가 모르는 설정이 뭔가 붙어 있는 건가.
이를테면- 마왕의 정체는 마검을 손에 넣은 마족이었다거나, 나중에 커뮤니티 사관들한테 말해줘야겠네.
“어디 보자.”
나는 별 생각 없이 마검을 손에 쥐었다. 그러자, 마검으로부터 괴상한 마력이 흘러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래, 그거다! 이제부터 네가 새 회색의 마왕이 되는 거다!
꾸물꾸물 흘러들어오는 마력이 내 몸을 잠식해 나간다. 누가 마검 아니랄까 봐, 내 몸을 장악하려는 건가.
아무래도 계약이라는 게 이걸 의미하는 모양이었던 것 같다. 사기적인 성능에 이유가 있었구만.
허, 아이템 새끼가 뒤질라고.
“깝치지 마라.”
-쿠르릉!
마력강화를 전개해 흘러들어온 마검의 마력을 반대로 밀어낸다.
마력의 밀도와 양에서는 차이가 있지만, [마력 지배]를 갖고 있는 나에게 그런 건 그리 큰 의미를 갖지 않는다.
싸움이 힘으로만 하는 게 아니듯, 내 마력을 날카롭게 만들어 마검의 마력을 하나하나 찢어발긴다.
-뭘 하는 거냐, 당장 멈춰라, 당장 멈추란 말이다! 이럴 수는 없다!
건방지게 내 몸을 잠식하려 들었던 마검의 힘을 차근차근 짓밟고, 반대로 내 마력을 흘려 넣는다.
무기에 마력을 흘려 넣어 장악하는 것은, [강철 직검] 한 자루를 마력으로 강화해 싸워온 나에겐 일상적인 일.
오래 걸리지 않아, 나는 반대로 마검을 내 마력으로 잠식해 찍어누르는 것에 성공했다.
[업적 달성 : 마검의 진정한 지배자]
[마검 칼레온에 깃든 사악한 에고를 파괴하였습니다.]
[업적 보상 : ‘칼레온’ 을 획득하셨습니다.]
더 이상 나불거리지 못하게 된 마검의 정보창에는, 마검이라는 단어가 떨어져 있었다.
“뭐였던 건데, 이거.”
아이템 등급도 에픽에서 유니크로 하락했고, 옵션이나 기본 성능도 달라졌다.
아무래도 뭔가 거창한 설정이 있었던 것 같은데,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그냥 끝나버렸네.
“아니 그보다, 씨바악……마력강, 화……!”
나는 괜히 한 번 더 사용한 마력강화의 후폭풍에 고통스러워 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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