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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14 21:31:5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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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리베르타스의 별

그동안 내가 에픽 퀘스트에 파악한 것을 정리하자면 이렇다.

하나, 에픽 퀘스트는 고도의 자아를 가진 다수의 엘리트 NPC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둘, 에픽 퀘스트는 그 원본이 되는 퀘스트와 큰 진행 방식은 다르지 않으나, 난이도가 매우 높다.

셋, 에픽 퀘스트의 보상은 시스템이 퀘스트의 진행 과정에 따라 다르게 지급한다.

이 세 가지 특징을 종합해서 한 줄로 평가하자면, 자유도가 높다고 할 수 있겠다.

NPC들의 자아가 보통보다 강한 만큼, 내 행동 하나하나가 다른 반응과 서브 퀘스트를 낳는 것이다.

어찌 보면 에픽이라는 단어에 굉장히 부합한다고도 할 수 있겠다. 말 그대로 서사적이다.

삼대 세력의 갈등 속에서 태어나는 서사에 내가 직접 개입하는 형태.

9층의 광경이 커뮤니티에서 보던 것과 여러 차이가 있는 것도, 내가 이들의 서사에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지금 눈앞에 나타난 이 퀘스트는, 아마 내 존재가 엘레노어의 서사와 밀접한 연관이 있기 때문이겠지.

[에픽 : 다크엘프의 서 - 여왕의 명]

설명 : 백 년간의 전쟁 속에서 다크엘프는 점점 열세에 몰렸습니다.

배움도 성장도 빠른 인간족의 왕국은 백 년 전과는 비교되지 않을 만큼 강해졌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인간을 좋아하는 다크엘프들이 왕국군과의 싸움에서 망설임을 얻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게다가 오만하고 건방진 하이엘프들도 호전적으로 덤벼 오고 있으니, 다크엘프들에겐 쉴 시간이 없습니다.

전쟁을 지휘하며, 모든 것을 책임지고 있는 여왕에겐 더욱 그렇습니다.

여왕의 어깨에 지워진 짐을 덜어줄 수 있는 것은 당신뿐입니다.

여왕의 명령을 수행하여, 그녀를 도우십시오.

[퀘스트 목표]

  1. 여왕의 명령을 완수하기(진행 상황에 따라 변경됩니다).

내가 깨 왔던 어떤 퀘스트보다 그 내용에 군더더기가 없었다. 목표가 명령 완수 하나뿐이라니.

물론, 9층의 진영 퀘스트 내용은 원래 이렇다. 그 명령이 다양한 서브 퀘스트로 분화되어서 그렇지.

그런데 엘레노어가 내게 내린 명령은 어딜 봐도 ‘동침’ 이었다.

물론 퀘스트 목표가 ‘엘레노어와 뜨거운 밤 보내기’ 이딴 식으로 나와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정황이나 맥락을 보면 그게 완수 조건일 것 같단 말이지.

“아, 이 정도로 왜 그러느냐! 진짜 딱 손만 잡고 잔다니까!”

“퍽이나 그렇겠다!”

“원래 손잡고 자다 보면, 다른 곳도 잡을 수 있고 그런 거다!”

아니나 다를까, 엘레노어는 미친 소리를 하고 있었다. 보상이 뭐건 간에 이건 안 된다.

물론 엘레노어는 매력적이다. 다크엘프들에 대부분 그렇지만, 내가 눈으로 본 사람 중에서 가장 섹시하니까.

그래서 안 되는 거다. 성욕을 떨치지 못하고 육체관계를 맺고 나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을 테니까.

이미 7층에서 다소의 정신적인 교감을 나눈 것만으로도 크게 흔들리고 말았다.

거기에 육체적인 교감까지 더해지고 나면, 엘레노어가 깡통이 된 이후를 견딜 수 없을 거다.

“그냥 곁잠만으로 괜찮다니까!”

어떻게든 엘레노어의 바람을 바꿔야 한다.

**

우선은 엘레노어가 왜 대뜸 이런 소리를 하는지 알아야만 했다.

한 차례 기억을 공유하고 사념을 나누었기 때문일까, 나는 엘레노어의 눈만 봐도 대강의 감정을 알 수 있다.

지금 엘레노어의 눈은 어딘가 이상했다. 자유를 갈망하며 반짝이고 있던 별빛이 크게 사그라졌다.

“요즈음 잠자리에 들기가 무척 어렵다.”

엘레노어는 나와 한참 간 씨름한 뒤에야, 간신히 진심을 말해주기 시작했다.

“그대가 떠난 이후, 무척 오래도록 전쟁을 지켜보았다. 숲쟁이 놈들, 그리고 인간족 왕국, 많이도 죽고 죽였지.”

“약혼을 깨고 숲쟁이 놈들과 싸울 생각을 할 때는, 이런 일이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어렸던 거야.”

“언제든 눈을 감으면 망자들의 비명이 들려, 지난 백 년간 스러져간 동포들의 목소리가- 한순간도 그치질 않아.”

엘레노어는 전대 여왕이 말했던 것처럼, 전쟁을 겪으며 무척이나 괴로워하고 있었다.

“정당한 싸움, 정당한 보복, 그런 문제가 아니었어. 잔인함을 잔인함으로 되갚으려 한 대가겠지.”

그리고, 전대 여왕과 똑같은 언어를 그 입으로 자아내고 있었다.

“방식이야 어쨌든, 대화로 풀려고 했던 어머니의 방식은 틀리지 않았던 거다.”

정당함과는 관계없이 활시위를 놓은 순간, 함께 앉아 대화하기 전까지 모두가 고통받을 뿐이라고.

그 고통의 크기는 내가 감히 헤아릴 수 없었다. 백 년이라니, 내 평생을 쏟아야 간신히 가늠할 수 있을 거다.

언제나 제 욕망이 바라는 대로, 마음이 시키는 대로 행동하던, 그 엘레노어가 이렇게 되기까지의 시간.

내가 걸음 한 번으로 그냥 지나쳐 버린 시간이- 엘레노어의 눈에 깃든 별빛을 흐리게 한 거다.

“물론, 그렇다고 그 재수 없는 왕자 놈이랑 혼인했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왜, 후회하는 거 아니었어?”

“그놈이랑 맺어졌으면, 이렇게 그대와 다시 만나 이야기하는 일도 없었을 거 아니냐.”

엘레노어는 천천히 나와 눈을 맞추었다. 흐려졌던 별빛이 조금은 다시 돌아와 있었다.

“백이십 년 전부터, 그대와 함께하는 시간은 언제나 특별했어. 쉬이 설명할 수 있는 느낌은 아니다만은.”

“구태여 비유하자면, 생기가 돈다고 해야 할까.”

“그대가 없는 동안은 항상 죽어 있는 듯했고, 그대와 함께 있는 동안은 다시 살아난 기분이었지.”

엘레노어의 그 말을 들은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후후, 너무 이상한 말인가?”

생각해 보면, 엘레노어는 처음부터 그랬다. 어렴풋한 기억이다.

‘그대, 뭘 그렇게 멍하니 바라보고 있나?

그 혼욕탕에서, 엘레노어는 내가 퀘스트 창을 보고 있다는 걸 인식하고 있었다.

**

일반 NPC들은 눈앞에서 대놓고 시스템 창을 보고 있어도 그걸 인식하지 못한다.

무언가를 보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고, 그냥 혼자서 넋 놓고 있는 것처럼 여긴다.

하지만 엘레노어는 내가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그 뿐만이 아니다. 엘레노어는 나이트 엘프의 비술로 내 기억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면서 간접적으로 시련의 탑의 존재를 엿보았고, 내가 모종의 시련에 도전하고 있다는 것도 인식했다.

이건 절대 평범한 일이 아니다.

인벤토리를 이용해 상식을 벗어난 전투법을 써도, 공간 마법 같은 것으로 인식하는 게 NPC 아닌가.

마력도 못 다루는 놈이 허공에서 마구 무기를 뽑아내 휘둘러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메르세데스와의 싸움에서는 마력 운용을 깨우친 상태였기에, 공간 마법이라고 생각해도 이상하지 않았지만.

이젠 이름도 기억이 안 나는 하이엘프 기사 놈과 처음 싸울 때는, 의문을 가질 만도 했는데 말이다.

애초에 내 전법을 보며, 무기를 얼마냐 많이 다루는 거냐고만 지껄여댔었지.

마력 운용이나 마법에 대해 무지한 에르웬 정도만이 ‘아이템 박스겠거니’ 하고 넘어갔었다.

‘에픽 퀘스트는 고도의 자아를 가진 다수의 엘리트 NPC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내가 정리한 에픽 퀘스트의 특징은 틀렸을지도 모른다. 아니, 확실하게 틀렸다.

8층에서 에픽 퀘스트의 시작을 끊은 건 에르웬이었다.

리즈멜이야 그렇다 쳐도, 에르웬은 절대로 엘리트 NPC가 아니다.

그냥 흔한 대장간 NPC일 뿐인데도, 엘리트 NPC 이상의 자아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에픽 퀘스트가 완료되면, 이들은 모두 원본대로 자아를 상실하고 깡통이 되어버린다.

즉, 에픽 퀘스트가 모든 NPC들에게 고도의 자아를 부여한다고 봐야 한다.

그렇다면, 원래부터 인간에 가까운 면을 갖고 있는 최상급 엘리트 NPC는 어떻게 되는 걸까.

엘레노어는 퀘스트가 완료된 이후에도 그나마 덜 기계적인- 불쾌한 골짜기 수준의 반응을 보여주었다.

그런 엘레노어가 에픽 퀘스트를 통해 더 강한 자아를 얻은 결과가, 시스템의 인식인 거라면?

“그대여, 왜 그러지?”

이게 어떤 의미인지는 모르겠다. 그냥 깡통이 조금 덜 깡통이 된다고 달라지는 건 없을 터.

하지만, 만약 엘레노어가 시스템의 영향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운 것이라면- 털어놓을 수 있는 거 아닐까?

내가 그동안 시스템에 대해 털어놓지 못했던 건 단순히 심리적인 이유만이 아니었다.

애초에 털어놓아 봤자 NPC들은 듣지도 못하니까. 오픈 커뮤니티에서도 그랬었다.

[걍 퀘스트 NPC랑 말할때는 롤플레잉 한다고 생각하셈]

사람에 가까운 반응을 보이는 NPC를 상대로, 시련의 탑에 대한 주제를 막 말하면 안 된다고.

시스템에 존재하는 모종의 차단책으로, 탑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NPC는 모두 똑같은 반응을 보인다.

못 듣거나, 본인이 이해할 수 있는 개념으로 치환하여 듣거나, 이야기 자체를 돌리려고 한다.

하지만 그런 방식으로 넘길 수 없을 정도로 이야기를 계속 이어나간다면, NPC의 설정이 리셋되어 버린다.

리셋되는 설정의 정확한 범위는 모르지만, 결코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겠지.

나는 엘레노어를 바라보았다. 엘레노어도 나를 바라보았다. 눈이 맞았다.

“이게 맞는 건지 모르겠는데.”

퀘스트 창을 가볍게 흘겨보며, 나는 말했다.

“진짜 손만 잡고 자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