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dd 3 AI agents (writing, revision, story-continuity specialists) - Add 4 slash commands (rovel.create, write, complete, seed) - Add novel creation/writing rules - Add Novelpia reference data (115 works, 3328 chapters) - Add CLAUDE.md and README.md 🤖 Generated with [Claude Code](https://claude.com/claude-code) Co-Authored-By: Claude Opus 4.5 <noreply@anthropic.com>
207 lines
10 KiB
Markdown
207 lines
10 KiB
Markdown
|
||
87. 리베르타스의 별
|
||
|
||
그동안 내가 에픽 퀘스트에 파악한 것을 정리하자면 이렇다.
|
||
|
||
하나, 에픽 퀘스트는 고도의 자아를 가진 다수의 엘리트 NPC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
||
|
||
둘, 에픽 퀘스트는 그 원본이 되는 퀘스트와 큰 진행 방식은 다르지 않으나, 난이도가 매우 높다.
|
||
|
||
셋, 에픽 퀘스트의 보상은 시스템이 퀘스트의 진행 과정에 따라 다르게 지급한다.
|
||
|
||
이 세 가지 특징을 종합해서 한 줄로 평가하자면, 자유도가 높다고 할 수 있겠다.
|
||
|
||
NPC들의 자아가 보통보다 강한 만큼, 내 행동 하나하나가 다른 반응과 서브 퀘스트를 낳는 것이다.
|
||
|
||
어찌 보면 에픽이라는 단어에 굉장히 부합한다고도 할 수 있겠다. 말 그대로 서사적이다.
|
||
|
||
삼대 세력의 갈등 속에서 태어나는 서사에 내가 직접 개입하는 형태.
|
||
|
||
9층의 광경이 커뮤니티에서 보던 것과 여러 차이가 있는 것도, 내가 이들의 서사에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리라.
|
||
|
||
그리고 지금 눈앞에 나타난 이 퀘스트는, 아마 내 존재가 엘레노어의 서사와 밀접한 연관이 있기 때문이겠지.
|
||
|
||
[에픽 : 다크엘프의 서 - 여왕의 명]
|
||
|
||
설명 : 백 년간의 전쟁 속에서 다크엘프는 점점 열세에 몰렸습니다.
|
||
|
||
배움도 성장도 빠른 인간족의 왕국은 백 년 전과는 비교되지 않을 만큼 강해졌기 때문입니다.
|
||
|
||
어쩌면, 인간을 좋아하는 다크엘프들이 왕국군과의 싸움에서 망설임을 얻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
||
|
||
게다가 오만하고 건방진 하이엘프들도 호전적으로 덤벼 오고 있으니, 다크엘프들에겐 쉴 시간이 없습니다.
|
||
|
||
전쟁을 지휘하며, 모든 것을 책임지고 있는 여왕에겐 더욱 그렇습니다.
|
||
|
||
여왕의 어깨에 지워진 짐을 덜어줄 수 있는 것은 당신뿐입니다.
|
||
|
||
여왕의 명령을 수행하여, 그녀를 도우십시오.
|
||
|
||
[퀘스트 목표]
|
||
|
||
1. 여왕의 명령을 완수하기(진행 상황에 따라 변경됩니다).
|
||
|
||
내가 깨 왔던 어떤 퀘스트보다 그 내용에 군더더기가 없었다. 목표가 명령 완수 하나뿐이라니.
|
||
|
||
물론, 9층의 진영 퀘스트 내용은 원래 이렇다. 그 명령이 다양한 서브 퀘스트로 분화되어서 그렇지.
|
||
|
||
그런데 엘레노어가 내게 내린 명령은 어딜 봐도 ‘동침’ 이었다.
|
||
|
||
물론 퀘스트 목표가 ‘엘레노어와 뜨거운 밤 보내기’ 이딴 식으로 나와 있는 건 아니다.
|
||
|
||
하지만 정황이나 맥락을 보면 그게 완수 조건일 것 같단 말이지.
|
||
|
||
“아, 이 정도로 왜 그러느냐! 진짜 딱 손만 잡고 잔다니까!”
|
||
|
||
“퍽이나 그렇겠다!”
|
||
|
||
“원래 손잡고 자다 보면, 다른 곳도 잡을 수 있고 그런 거다!”
|
||
|
||
아니나 다를까, 엘레노어는 미친 소리를 하고 있었다. 보상이 뭐건 간에 이건 안 된다.
|
||
|
||
물론 엘레노어는 매력적이다. 다크엘프들에 대부분 그렇지만, 내가 눈으로 본 사람 중에서 가장 섹시하니까.
|
||
|
||
그래서 안 되는 거다. 성욕을 떨치지 못하고 육체관계를 맺고 나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을 테니까.
|
||
|
||
이미 7층에서 다소의 정신적인 교감을 나눈 것만으로도 크게 흔들리고 말았다.
|
||
|
||
거기에 육체적인 교감까지 더해지고 나면, 엘레노어가 깡통이 된 이후를 견딜 수 없을 거다.
|
||
|
||
“그냥 곁잠만으로 괜찮다니까!”
|
||
|
||
어떻게든 엘레노어의 바람을 바꿔야 한다.
|
||
|
||
**
|
||
|
||
우선은 엘레노어가 왜 대뜸 이런 소리를 하는지 알아야만 했다.
|
||
|
||
한 차례 기억을 공유하고 사념을 나누었기 때문일까, 나는 엘레노어의 눈만 봐도 대강의 감정을 알 수 있다.
|
||
|
||
지금 엘레노어의 눈은 어딘가 이상했다. 자유를 갈망하며 반짝이고 있던 별빛이 크게 사그라졌다.
|
||
|
||
“요즈음 잠자리에 들기가 무척 어렵다.”
|
||
|
||
엘레노어는 나와 한참 간 씨름한 뒤에야, 간신히 진심을 말해주기 시작했다.
|
||
|
||
“그대가 떠난 이후, 무척 오래도록 전쟁을 지켜보았다. 숲쟁이 놈들, 그리고 인간족 왕국, 많이도 죽고 죽였지.”
|
||
|
||
“약혼을 깨고 숲쟁이 놈들과 싸울 생각을 할 때는, 이런 일이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어렸던 거야.”
|
||
|
||
“언제든 눈을 감으면 망자들의 비명이 들려, 지난 백 년간 스러져간 동포들의 목소리가- 한순간도 그치질 않아.”
|
||
|
||
엘레노어는 전대 여왕이 말했던 것처럼, 전쟁을 겪으며 무척이나 괴로워하고 있었다.
|
||
|
||
“정당한 싸움, 정당한 보복, 그런 문제가 아니었어. 잔인함을 잔인함으로 되갚으려 한 대가겠지.”
|
||
|
||
그리고, 전대 여왕과 똑같은 언어를 그 입으로 자아내고 있었다.
|
||
|
||
“방식이야 어쨌든, 대화로 풀려고 했던 어머니의 방식은 틀리지 않았던 거다.”
|
||
|
||
정당함과는 관계없이 활시위를 놓은 순간, 함께 앉아 대화하기 전까지 모두가 고통받을 뿐이라고.
|
||
|
||
그 고통의 크기는 내가 감히 헤아릴 수 없었다. 백 년이라니, 내 평생을 쏟아야 간신히 가늠할 수 있을 거다.
|
||
|
||
언제나 제 욕망이 바라는 대로, 마음이 시키는 대로 행동하던, 그 엘레노어가 이렇게 되기까지의 시간.
|
||
|
||
내가 걸음 한 번으로 그냥 지나쳐 버린 시간이- 엘레노어의 눈에 깃든 별빛을 흐리게 한 거다.
|
||
|
||
“물론, 그렇다고 그 재수 없는 왕자 놈이랑 혼인했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
||
|
||
“왜, 후회하는 거 아니었어?”
|
||
|
||
“그놈이랑 맺어졌으면, 이렇게 그대와 다시 만나 이야기하는 일도 없었을 거 아니냐.”
|
||
|
||
엘레노어는 천천히 나와 눈을 맞추었다. 흐려졌던 별빛이 조금은 다시 돌아와 있었다.
|
||
|
||
“백이십 년 전부터, 그대와 함께하는 시간은 언제나 특별했어. 쉬이 설명할 수 있는 느낌은 아니다만은.”
|
||
|
||
“구태여 비유하자면, 생기가 돈다고 해야 할까.”
|
||
|
||
“그대가 없는 동안은 항상 죽어 있는 듯했고, 그대와 함께 있는 동안은 다시 살아난 기분이었지.”
|
||
|
||
엘레노어의 그 말을 들은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
||
|
||
“후후, 너무 이상한 말인가?”
|
||
|
||
생각해 보면, 엘레노어는 처음부터 그랬다. 어렴풋한 기억이다.
|
||
|
||
‘그대, 뭘 그렇게 멍하니 바라보고 있나?’
|
||
|
||
그 혼욕탕에서, 엘레노어는 내가 퀘스트 창을 보고 있다는 걸 인식하고 있었다.
|
||
|
||
**
|
||
|
||
일반 NPC들은 눈앞에서 대놓고 시스템 창을 보고 있어도 그걸 인식하지 못한다.
|
||
|
||
무언가를 보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고, 그냥 혼자서 넋 놓고 있는 것처럼 여긴다.
|
||
|
||
하지만 엘레노어는 내가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
||
|
||
그 뿐만이 아니다. 엘레노어는 나이트 엘프의 비술로 내 기억을 들여다보았다.
|
||
|
||
그러면서 간접적으로 시련의 탑의 존재를 엿보았고, 내가 모종의 시련에 도전하고 있다는 것도 인식했다.
|
||
|
||
이건 절대 평범한 일이 아니다.
|
||
|
||
인벤토리를 이용해 상식을 벗어난 전투법을 써도, 공간 마법 같은 것으로 인식하는 게 NPC 아닌가.
|
||
|
||
마력도 못 다루는 놈이 허공에서 마구 무기를 뽑아내 휘둘러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
||
|
||
메르세데스와의 싸움에서는 마력 운용을 깨우친 상태였기에, 공간 마법이라고 생각해도 이상하지 않았지만.
|
||
|
||
이젠 이름도 기억이 안 나는 하이엘프 기사 놈과 처음 싸울 때는, 의문을 가질 만도 했는데 말이다.
|
||
|
||
애초에 내 전법을 보며, 무기를 얼마냐 많이 다루는 거냐고만 지껄여댔었지.
|
||
|
||
마력 운용이나 마법에 대해 무지한 에르웬 정도만이 ‘아이템 박스겠거니’ 하고 넘어갔었다.
|
||
|
||
‘에픽 퀘스트는 고도의 자아를 가진 다수의 엘리트 NPC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
||
|
||
내가 정리한 에픽 퀘스트의 특징은 틀렸을지도 모른다. 아니, 확실하게 틀렸다.
|
||
|
||
8층에서 에픽 퀘스트의 시작을 끊은 건 에르웬이었다.
|
||
|
||
리즈멜이야 그렇다 쳐도, 에르웬은 절대로 엘리트 NPC가 아니다.
|
||
|
||
그냥 흔한 대장간 NPC일 뿐인데도, 엘리트 NPC 이상의 자아를 가지고 있었다.
|
||
|
||
그리고 에픽 퀘스트가 완료되면, 이들은 모두 원본대로 자아를 상실하고 깡통이 되어버린다.
|
||
|
||
즉, 에픽 퀘스트가 모든 NPC들에게 고도의 자아를 부여한다고 봐야 한다.
|
||
|
||
그렇다면, 원래부터 인간에 가까운 면을 갖고 있는 최상급 엘리트 NPC는 어떻게 되는 걸까.
|
||
|
||
엘레노어는 퀘스트가 완료된 이후에도 그나마 덜 기계적인- 불쾌한 골짜기 수준의 반응을 보여주었다.
|
||
|
||
그런 엘레노어가 에픽 퀘스트를 통해 더 강한 자아를 얻은 결과가, 시스템의 인식인 거라면?
|
||
|
||
“그대여, 왜 그러지?”
|
||
|
||
이게 어떤 의미인지는 모르겠다. 그냥 깡통이 조금 덜 깡통이 된다고 달라지는 건 없을 터.
|
||
|
||
하지만, 만약 엘레노어가 시스템의 영향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운 것이라면- 털어놓을 수 있는 거 아닐까?
|
||
|
||
내가 그동안 시스템에 대해 털어놓지 못했던 건 단순히 심리적인 이유만이 아니었다.
|
||
|
||
애초에 털어놓아 봤자 NPC들은 듣지도 못하니까. 오픈 커뮤니티에서도 그랬었다.
|
||
|
||
[걍 퀘스트 NPC랑 말할때는 롤플레잉 한다고 생각하셈]
|
||
|
||
사람에 가까운 반응을 보이는 NPC를 상대로, 시련의 탑에 대한 주제를 막 말하면 안 된다고.
|
||
|
||
시스템에 존재하는 모종의 차단책으로, 탑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NPC는 모두 똑같은 반응을 보인다.
|
||
|
||
못 듣거나, 본인이 이해할 수 있는 개념으로 치환하여 듣거나, 이야기 자체를 돌리려고 한다.
|
||
|
||
하지만 그런 방식으로 넘길 수 없을 정도로 이야기를 계속 이어나간다면, NPC의 설정이 리셋되어 버린다.
|
||
|
||
리셋되는 설정의 정확한 범위는 모르지만, 결코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겠지.
|
||
|
||
나는 엘레노어를 바라보았다. 엘레노어도 나를 바라보았다. 눈이 맞았다.
|
||
|
||
“이게 맞는 건지 모르겠는데.”
|
||
|
||
퀘스트 창을 가볍게 흘겨보며, 나는 말했다.
|
||
|
||
“진짜 손만 잡고 자는 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