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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Authored-By: Claude Opus 4.5 <noreply@anthropic.com>
2025-12-14 21:31:5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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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디폴트 오류

거대한 컴퓨터를 보호해야 할 외장은 모조리 뜯겨있고, 흉하게 드러난 내부 부품들의 모습은 기괴하기 짝이 없다.

마치 가죽을 벗겨 낸 대형 짐승을 보는 것 같다. 이 컴퓨터의 모습에서 그나마 볼 만한 것이라고는, 정면에 달린 작은 디스플레이뿐.

그 조그만 디스플레이는 웃음 모양의 이모티콘을 띄운 채,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스피커를 통해 말을 전해 왔다.

[어서오십시오, 유토피아 관리 시스템 A2-33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아마도 이게 유토피아 시티를 관리하고 있는 메인 컴퓨터, 이 도시의 기괴한 모습을 설명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

하지만 뭘 물어봐야 할지 모르겠다. 어떻게 물어봐야 할지도 모르겠고. 아니, 그보다도 이거- 수상쩍다.

사신들의 몸에 들어가 있는 것과 비슷한 파워팩 수백 개가 컴퓨터 본체에 다닥다닥 붙어 있다.

저 징그러운 외형도 그렇고, 유토피아 관리 시스템이라는 설명도 그렇고, 암만 봐도 히든 보스 같은데.

“유토피아 시티의 역사를 알고 싶어.”

나는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마력을 끌어올리며, 컴퓨터를 향해 그렇게 말했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고장난 건 아닌 것 같은데- 잠시 고민하고 있자니, 컴퓨터의 부품 몇 개가 움직이더니 내게 입력장치를 들이밀었다.

작은 마이크가 달려 있고, 익숙한 형태의 자판이 붙어 있는……그러니까, 키보드로 입력하라는 건가.

-타닥, 타닥, 탁.

자판을 두드려 말한 것과 똑같이 입력하자, 디스플레이가 반짝거리며 다시금 스피커가 울리기 시작했다.

[A2-23의 데이터베이스로 답변할 수 없는 내용입니다. 장착된 A2-11의 데이터를 불러옵니다, 3초가 소요됩니다.]

곧이어 디스플레이에 표시된 이모티콘 모양이 바뀌었다. 이전 것보다 앙증맞게 웃는 표정이었다.

[큐레이터 기능을 활성화했습니다. A2-23의 데이터베이스를 참고하여 유토피아의 역사를 자세히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스피커에서 출력되는 목소리도 바뀌었다. 활달한 기계음은 노이즈가 섞인 채로 설명을 시작했다.

[유토피아 프로젝트는 전후력 1163년에 시작된 ‘행성 자원 고갈 및 오염에 따른 인류 이주 계획’의 총칭입니다.]

[이는 환경오염과 자원 고갈로 더 이상 인류가 살 수 없게 된 행성에서, 인류 보존을 위한 낙원을 만드는 계획이었습니다.]

[전후력 1160년에 발발한 제5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유토피아 프로젝트의 본격적인 시동은 1168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작은 디스플레이에서 이런저런 화면이 지나갔다. 이쪽 세계의 역사를 알지 못하는 나로서는 알아보기 힘든 자료들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예 이해할 수 없을 정도는 아니었다. 언뜻 보기에는, 지구와 매우 비슷한 환경이었으니까.

물론 완전히 똑같은 건 아니다. 십여 년 전 시련의 탑과 게이트가 출현하며 지구의 환경과 사회는 극적으로 바뀌었으니까.

현재 지구는 게이트의 몬스터들에게서 채취한 코어나 마력자원을 이용해, 지하지원 의존을 크게 줄인 상태다.

[계획 초기의 낙원 프로젝트는 잔여 자원을 활용해 전 인류의 5%를 보존할 수 있을 것으로 예정되었으나……]

하지만 이 23층 세계의 과거는 달랐다. 마력을 비롯한 이계의 자원 없이, 순수하게 행성의 자원만을 이용해온 세계.

[유토피아 건설 진행 중 발생한 환경 악화의 영향으로, 보존 가능 수치를 1%로 재설정해야만 했습니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것은, 탑이 나타나지 않은 지구의 미래일지도 모른다.

**

컴퓨터가 설명해준 유토피아는, 한정된 자원으로 인류가 존속하기 위해 만들어진 작은 낙원이었다.

가능한 모든 방식으로 추출한 잔여 행성자원을 통해, 영구히 존속될 수 있을만한 숫자의 인류만을 이 땅에 남기는 것.

그 존속 가능한 인류의 숫자는 첫 계산 당시에는 5%였으나, 이후에는 1%로 설정되었고- 그게 이 낙원의 예정된 인구수였다.

전 인류의 1%, 지구를 기준으로 생각해보면 7천만 정도의 인간만이 이 ‘유토피아’에서 살아남아 역사를 이어갈 것이었다.

하지만 현재 유토피아 시티에는, 7천만은커녕 7명의 인간도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을 흉내 내는 기계들뿐이다.

물론 바깥의 엘리시온에 거주 중인 인간의 숫자를 헤아려보면, 그에 근접한 수치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래서, 지금 여기는 왜 이 모양이 된 건데?”

나는 저도 모르게 말을 내뱉었다. 대답하지 않는 컴퓨터를 보고 한숨을 내쉬며, 다시 자판을 두드렸다.

[A2-11의 데이터베이스로 답변할 수 없는 내용입니다. A2-23의 메인 데이터를 불러옵니다, 3초가 소요됩니다.]

그러자 컴퓨터는 다시금 시스템을 바꾸었다. 내가 처음 마주쳤던 유토피아 관리 시스템이 다시 떠올랐다.

[해당 질문에 답변하기 위해서는 유토피아 프로젝트가 목표를 달성한 전후력 1203년의 데이터 열람이 필요합니다.]

[경고, 열람이 필요한 데이터 F97-2199는 일급 정신 장애 및 치명적 자살 증후군을 유발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데이터 열람 전, 이하의 향정신성 약물을 모두 복용한 후 유서를 작성하여 주십시오. 뇌전성 모르핀 정제 2mg……]

시스템은 이름만 들어도 심상찮은 마약성 약물의 목록을 줄줄이 나열했다. 물론 나는 그런 걸 갖고 있지 않다.

애초에 내성이 너무 높아서 죄다 한 사발씩 들이켜도 별 효과는 없겠지만……대체 왜 그런 걸 권하는 거지.

짐작도 안 간다. 나는 [정신 오염 내성]스킬을 믿고, 다시금 자판을 두드려 해당 데이터를 재생할 것을 명령했다.

[유토피아 프로젝트는 목표 달성 이후, 상정되지 않은 외부 요소의 간섭으로 보유 자원을 손실했습니다.]

[손실한 자원은 ‘아스트라’로 임시 명명된 에너지원으로서, 기원이 해석되지 못한 미지의 자원입니다.]

[본 관리 시스템 A2-23은 해당 자원의 손실 이후의 측정 데이터를 토대로, 인류종 보존 가능 수치를 재설정했습니다.]

시스템은 아무렇지 않게 자신이 새로 계산한, 보존 가능하다고 판단된 인류의 숫자를 화면에 띄웠다.

[영구 보존 가능 인구 : 0명]

이 시스템의 개발자는, 보존 가능한 인류의 숫자가 0으로 계산되었을 때를 상정하지 않은 것이다.

**

유토피아의 시스템은 영구 보존이 가능한 숫자의 인류를 지키기 위해, 모든 수단을 강구하게 짜여 있었다.

보존 가능한 인구가 10명이라면, 그 10명을 존속시키기 위해 도시의 시스템을 스스로 개편하게 되어 있는 거다.

하지만 ‘외부 요인’의 개입으로 모종의 주요 자원을 손실하자, 그 수치가 0명이 되었고- 이는 치명적인 오류를 낳았다.

시스템은 영구 보존 가능한 인류 0명을 위해 도시 전체를 개편했고, 그 개편 끝에 지금의 유령도시가 완성된 것이다.

0명의 인류를 위해 존재하는 공허한 낙원. 시스템은 프로그래밍의 빈틈에 빠져 무의미한 행동을 반복한 것이다.

[자원의 소모 없이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노동용의 휴머노이드를 제조해 투입하였으며……]

디스플레이는 그동안 시스템이 들려온 갖가지 노력을 표시하고 있었다. 하나같이 낭비에 불과하지만 말이다.

“그럼 엘리시온은……결국 멸망한다는 건가?”

유토피아 시스템의 계산으로는, 남은 자원을 어떻게 사용하든 인류는 절대 영구 존속할 수 없다.

그렇다면 유토피아 시티 바깥에 존재하는 엘리시온의 인구는, 미래에 자원 부족으로 완전히 소멸하게 된다는 뜻.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이 세계에는 예정된 멸망이 닥쳐든다. 마치 세계수가 뿌리내린 9층의 세계처럼.

물론 내가 신경을 써야 할 일은 아니다. 모르는 세계가 언젠가 망하든 말든 내가 알 게 뭐람.

하지만 이 세계에 남은 사신들을 생각하면,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이 하나쯤은 있다.

-타닥, 타닥.

나는 천천히 자판을 두들겼다. 시스템에게 설명을 요구하며, 천천히 명령을 입력했다.

0명의 인류를 영구 보존하겠답시고, 괴상한 낭비를 하고 있는 시스템에게- 상황을 알려주기 위해.

다행이게도 시스템은 인간 친화적으로 설계되어 있었다. 한 시간 정도를 들여서 나는 명령 입력에 성공했다.

입력한 명령은 단순하다. 이미 인류의 영구 존속은 불가능하게 되었으니, 목표를 변경하라는 것이다.

무의미한 0명의 영구 존속이 아닌, 남은 인류의 장기 존속을 위해 도시를 개편하라고.

[낙원의 시스템 개편을 시작합니다. 소요 예정 시간 : 312시간 58분.]

이제 유토피아 시티는 내부를 개편하고 문을 개방해, 엘리시온의 시민들을 안으로 들일 것이다.

닫힌 낙원에서 열린 낙원이 된 이 세계가 앞으로 어떻게 변화할지는 모르겠지만, 조금은 나은 미래가 생기겠지.

그러자 퀘스트 창이 제멋대로 열리더니, 빠르게 등록된 퀘스트가 곧바로 완료 처리되었다.

[퀘스트 완료 : 닫힌 낙원 - 디스토피아]

그리고 보상으로 들어온 것은 새로운 스킬, [파동 제어 Lv.1]이라는 패시브가 등록되었다.

패시브 스킬의 효과는 굳이 설명을 읽을 필요도 없었다. 그동안의 연습을 통해 체득한 감각이 알려주었으니까.

마력을 비롯한 에너지를 자유롭게 요동치게 하며, 흐름을 조작할 수 있게 해주는 스킬.

“쓰읍……스스로 얻고 싶었는데, 그래도 됐지 뭐.”

이로서 나는 전격장과 같은 전자발경을 자유롭게 다룰 수 있게 되었다.

**

상세한 내용은 모르겠지만 히든 퀘스트도 어찌저찌 클리어했고, 남은 건 24층으로 넘어가는 것 뿐.

물론 페스티벌 일정이 있으므로, 보스를 잡고 나서도 바로 넘어가지는 않을 셈이다. 포탈이 여기에 생길 거니까.

그리고, 아직 신경 쓰이는 점이 하나 남아 있다- 인류의 영구 존속을 불가능하게 만든 ‘외부 요인’에 대한 것.

손실했다는 ‘아스트라’라는 자원에 대해서도 신경이 쓰이고, 그것과 관련해서 마음에 걸리는 점도 하나 있다.

나는 도시 개편을 진행 중인 메인 컴퓨터에게 다가가, 다시금 자판을 두드려 질문했다.

온갖 마약성 약물을 복용하고 열람할 것을 권하는 데이터의 정체와, 그 미지의 ‘외부 요인’에 대해 알려달라고.

[‘외부 요인’이란, 유토피아 프로젝트가 가동 중에 연구진과 시스템에 접촉한 미지의 다원정보체를 의미합니다.]

[본 시스템의 해석으로는 다중차원에 중첩되어 존재하는 모종의 생명체라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현재 데이터베이스에는 해당 외부 요인이 접촉했을 당시의 영상과 음성 자료가 남아 있습니다. 재생합니까?]

나는 살짝 긴장하며 자판을 눌렀다. 곧 작은 디스플레이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어둠이 드리웠고.

-삐이이이이이이!!!

“억……!”

귀가 찢어질 듯한 노이즈, 뇌를 파고드는 정체불명의 소음, 눈을 파고드는 영상 속의 어둠.

불타는 듯한 통증과 함께 피눈물이 흐른다. 소음이 지나간 귓가에서도 주르륵 따뜻한 것이 흘러나온다.

뇌가 녹아내려 입과 코로 흘러나오는 감각, 나는 이 지옥 같은 고통을 이미 느껴본 적이 있다.

-푸욱!

“끄윽!”

인벤토리에서 도끼를 꺼내 내 다리를 찍었다. 다른 방향의 고통에 조금씩 진정이 된다.

푸른 알림창 몇 개가 눈앞에 떠올랐다. [정신 오염 내성] 스킬의 레벨이 한번에 두 개가 올랐다.

그와 동시에 괴상한 노이즈로만 들리던 소음 속에서, 딱 한마디 말이 식별되었다.

  • 여긴 폐품이로군.

그리고 디스플레이는 원래의 화면으로 돌아왔다. 스피커도 소리의 재생을 멈추었다.

나도 눈과 입과 귀와 코에서 피가 철철 흘렀지만, 끝까지 고통을 견뎌내며 정신을 바로잡았다.

방금 그게 이 별의 자원을 앗아간 존재의 정체……아마도 내가 15층에서 관측했던 무언가와 같은 존재.

[해당 음성과 영상을 남긴 외부 요인은, 본 시스템에 접촉할 당시-]

관리 시스템은 그것의 이름을 이렇게 말했다.

[-‘별’을 자칭했습니다.]

그리고, 나는 정신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