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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Authored-By: Claude Opus 4.5 <noreply@anthropic.com>
2025-12-14 21:31:5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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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어설픈 결정

성장의 기쁨은 몸이 불타는 고통보다 아득히 크다.

고통에 대한 내성 따위가 없음에도, 내가 에메랄드 와이번의 공격을 계속해서 맞아줄 수 있던 이유다.

새로 터득한 두 종류의 내성 스킬은 각각 마법 공격 전반과 주문 속성의 피해를 감소시켜주는 것.

커뮤니티에 검색해보니, 성질을 변화시키지 않은 자연 상태의 마력이 가지는 속성을 ‘주문 속성’ 이라고 하는 모양이다.

거기에 마법을 이용한 여러 방해 효과 같은 것도 대부분 주문 속성으로 판정된다는 듯하다.

그렇다면 무속성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 같지만, 시스템이 그렇다면 그냥 그런 거겠지 뭐.

아무튼, 이로서 퀘스트 목표인 비취의 영약을 얻는 것에 성공했다.

죽을 뻔했던 것치고는 다른 전리품이 없어서 좀 아쉬운 점도 있지만, 크게 불만은 없다.

애초에 나는 딱히 보상을 원해서 여기에 온 게 아니었으니까.

다크엘프 여왕에게 세계수에 대해 묻기 위해, 영혼이란 존재에 대해 무언가 답을 얻기 위해, 그래서 온 거다.

내가 느끼고 있는 엘레노어의 거대한 존재감의 정체를 알고 싶어서.

그걸 알아서 뭘 어쩔거냐고 묻는다면 딱히 할 말은 없다. 솔직히 나도 이유를 모르겠으니까.

그냥 언제나처럼 무시하고 지나가면 될 뿐인 일이다.

NPC가 NPC처럼 행동하는 게 뭐가 어때서, 한 번 생각을 고쳐먹었다지만 다시 고치면 그만 아닌가.

엘레노어와 공유했던 사념과 기억도, 서로 간에 나누었던 정서적인 교류도, 모두 없던 것으로 치면 될 뿐.

그냥 예전으로 돌아가는 것뿐이다. 문제가 될 만한 건 아무것도 없다.

지금도 나는 이토록 순조롭게 성장하고 있지 않나.

[비취의 영약]

손에 들린 영약을 내려다보니 갑자기 기분이 불쾌해졌다.

보상이 없어도 괜찮다니,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비효율적인 생각을 하게 된 걸까.

괜히 짜증이 치밀어 올라, 손에 들린 영약을 내던져 버릴까 잠시 고민했지만 이내 그만두었다.

뭐, 이건 퀘스트니까. 게다가 에픽 퀘스트니까. 다 깬 퀘스트를 굳이 포기할 이유는 없지.

가슴 속에서 위태롭게 요동치는 마력을 진정시키며, 나는 던전을 빠져나왔다.

**

다크엘프의 마을로 돌아온 나는 곧바로 여왕에게 접견을 요청했다.

엘레노어의 정혼자라는 신분 덕분에 여왕을 만나는 것은 어렵지 않았고, 금방 영약을 전달할 수 있었다.

퀘스트 완료 보상은 대단한 것 없이 그냥 경험치와 골드, 그리고 여왕과 말을 섞을 기회가 전부였다.

영약이 효과가 없다거나, 접견을 거부하면 어쩌나 했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끼익.

삐걱거리는 침대에 등을 기댄 여왕이 나를 노려본다. 여전히 마른 고목 같은 눈동자다.

“내게 묻고 싶은 것이 있다고 했나.”

여왕의 목소리는 7층에서 들어본 것과는 조금 달랐다. 전보다 한껏 바짝 눌어붙은 목소리다.

“세계수에 대해 궁금한 게 몇 가지 있어서, 다크엘프 중에서 당신만큼 잘 아는 사람은 없을 거 아냐.”

“옳다.”

“사실, 질문을 추려서 온 건 아니라서 진짜로 ‘몇 가지’인 건 아니야, 알고 있는 걸 전부 듣고 싶은데.”

여왕은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노인보다는 화석에 가까운 나이 때문인가, 정물처럼 보이는 움직임이다.

그리고 이어서, 대뜸 말을 내뱉었다.

“포레스트 엘프가 가진 왕홀과 나이트 엘프가 가진 왕관에는 세계수에게 간섭할 힘이 있다.”

마치, 내가 무엇을 알고 싶어하는지 이미 눈치채고 있었던 것처럼.

“그 힘을 이용하면, 순환하는 혼의 흐름에 간섭할 수 있다.”

그리고 곧바로 덧붙였다.

“끝이다. 이제 그대는 세계수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

더 이상 자신이 알려줄 수 있는 건 없다고.

**

흐린 빛을 띤 여왕의 눈동자가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나는 여왕이 하는 말을 쉽게 믿을 수 없었다. 세계수에 대해 내가 모르던 건 그것뿐이라니.

하지만 아무리 캐물어도 여왕의 대답은 같았다. 그게 전부라고, 세계수에는 어떤 숨겨진 비밀도 없다고.

여왕은 그 후, 세계수에 대해 자신이 아는 것을 모조리 말해주기 시작했다.

하지만 개중 새로운 사실은 없었다. 여왕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에르웬이 말해준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한숨을 내쉬었다. 영혼에 대해서도, 세계수에 대해서도, 새롭게 알게 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허무한 기분이다. 나는 고작 경험치 조금과 골드 조금을 위해서 그 고생을 한 거였나.

“포레스트 엘프에게 물어봐도 답은 같을 것이다. 그들도 나도 모르는 비밀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아.”

“어떻게 장담하지?”

“설령 무언가 비밀이 숨겨져 있더라도, 그게 그대와 무슨 상관이지. 이미 세계수는 시들어 힘을 잃었다.”

그것도 그렇다. 어차피 세계수니 영혼이니 하는 것에 대해 더 알아봤자 뭔가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여왕이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

여왕은 세계수에 미련이 있는 거 아니었나, 하이엘프의 화친 제안에 엘레노어를 내주며 응한 이유가 그거잖아.

“시든 고목에 무슨 미련이 남았을까, 나는 내 딸을 위한 평화를 원했을 뿐인 것을.”

“당신 딸은 그런 걸 원하지 않는 것 같던데.”

“호전적인 성향은 쉽게 고쳐지지 않지, 그 아이도 전쟁을 겪으면 생각이 바뀔 터다.”

여왕은 그렇게 말하고는, 먼 산을 바라보듯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나도 그랬지, 세계수를 독점하고 우리를 내쫓은 포레스트 엘프를 혐오했다. 왕이 되기 전에도, 왕이 된 후에도, 놈들을 쓸어버리고 싶었다.”

“박해를 받은 우리에겐 그럴 자격이 있었다. 놈들을 무찌르고 더 넓은 세상을 향해 나아갈 자격이.”

“하지만 누구보다 오래 살아오며 깨닫게 된 사실이 하나 있다. 전쟁은 결코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나는 다크엘프의 역사에 대해선 배경 설정 수준으로밖에 몰랐다.

“누가 쏜 화살이건, 얼마나 정당한 화살이건, 그것에 꿰뚫려 죽는 것이 누가 될지는 알 수 없다.”

“시위를 놓은 순간부터, 처음부터 해야 했던 일을 하기 전까지- 모두가 고통받을 뿐이지.”

여왕은 그렇게 말하며, 날카로운 눈으로 나를 째려보았다.

“한자리에 앉아서 대화하기 전까지.”

여왕은 분명 나를 원망하고 있었다.

**

여왕과의 긴 대화를 마치고, 밖으로 나와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아……”

이걸로, 엘프의 왕관과 왕홀을 이용하면 세계수와 영혼의 흐름에 간섭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알았다고 해서 뭔가 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내가 뭔 짓을 해도 그것들을 손에 넣을 수는 없을 테니까.

그리고 애초에 세계수가 시들어 버린 이상, 그것들을 갖고 있다고 해도 뭔가 할 수는 없을 거라고 한다.

엘레노어를 살아있게 하는 것, 내가 감지하고 있는 영혼으로 추측되는 무언가.

그걸 어떻게 할 생각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어쩐지 허무하다. 나는 정말로 뭘 하고 싶었던 걸까.

“상태창.”

퀘스트 보상을 받고 레벨이 하나 올랐다. 에메랄드 와이번을 통해 얻은 새 스킬이 눈에 띈다.

“스펙 끝내주네.”

등반중인 층수는 물론이요, 레벨에도 어울리지 않는 스펙을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나는 이미 솔로 플레이라는 점이 문제가 되지 않을 만큼 강해졌다.

아마, 이대로라면 시련의 탑을 클리어하는 것은 무난할 것이다.

솔직히, 작정하고 층수를 올리는 것에만 전념한다면 25층까지는 순식간일 것이다.

미궁 지역의 보물 상자도, 각 층에 숨겨져 있는 히든 요소도, 목숨 걸고 찾아다닐 필요까지는 없다.

이번 층에 오랫동안 머물며 단련할 필요도 딱히 없다. 마력 운용 연습이야 언제든 할 수 있으니까.

엘레노어.

리즈멜.

에르웬.

아무리 사람 같아도 결국 다들 NPC다. 퀘스트가 끝나면 그냥 깡통 키오스크로 변해버릴 존재들이다.

이 시련의 탑이 그렇게 설계된 걸 어쩌겠어. 나도 결국 탑의 시스템에 속한 존재인데.

탑이 보낸 초대장을 받고, 탑이 부여한 시스템으로 성장하고, 탑이 정한 방식대로 전진한다.

이대로만 가면 된다. 괜히 딴 길로 새지만 않으면 나는 충분히 목표를 이룰 수 있다.

“그래, 버리자.”

절대 멈춰 서지 않기로 정했잖아, 더는 미련 갖지 말자.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다른 욕망에 그랬던 것처럼, 잘라내고 버리면 그만.

수면욕도, 식욕도, 성욕도, 모든 것을 거세했다.

이 정도는 별것도 아니지.

**

다음 날, 나는 엘레노어를 찾아가 말을 걸었다.

“이번에도 정찰대의 일을 도와주겠다고?”

삼대 세력은 지금도 끊임없이 충돌하며 마찰을 벌이고 있다. 이미 전쟁은 차근차근 다가오고 있다.

이 퀘스트 속에서 도전자의 역할은, 당연히 자신이 속한 세력을 도와 우위를 확보하는 것이다.

그 방법은 당연히 여러 서브 퀘스트를 수행하는 것, 일정 숫자 이상의 퀘스트를 클리어하면 그걸로 2장은 끝이다.

결정한 이상 굼뜨게 움직일 생각은 없다. 최대한 빠르게 퀘스트를 깨고 9층으로 넘어간다.

“그대가 먼저 그런 말을 해주다니 무척 기쁘구나. 어디, 상으로 입맞춤이라도 해 줄까?”

“할 일이나 알려줘.”

“으음, 오늘따라 평소보다 더 쌀쌀맞구나. 어쩐지 처음 만났을 때가 생각나는걸?”

그렇겠지, NPC는 원래 이렇게 대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