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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보이지 못했다는 쪽에 가깝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딱히 할 말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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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 수 없다. 아니 사실, 뭐라 할 말이 있는 것이 이상하다. ‘야 그거 니 기타 아니고 니 기타인 거 같은데, 그걸 니가 왜 들고 있냐?’ 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게 도대체 무슨 미친 소리지…’ 하고 생각한 후 상대를 안 해주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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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그것이 당연하다고 느껴지는 것은 명전 밖에 없다. 나머지 둘은 명전이 곧 수연이요 수연이 곧 명전이라는 것을 몰랐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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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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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 대신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반문하는 혜인. 준홍은 그에 대답하기보다는 잠시 침묵하며 기타를 다시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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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스트랫. 원본 블랙 스트랫과는 완전 상이한, 그냥 자연스럽게 낡은 형태. 트레몰로 암의 고무 손잡이는 금속으로 교체되어 있고, 노브는 크롬 도색. 전반적으로 볼 때, 이건 명전 선생님의 기타가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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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홍은 몇년 전 서명전의 집에 묵으면서 그의 기타를 몇번 만져본 적 있었다. 그리고 그 때 봤던 기타는, 지금 그가 손에 들고 있는 기타와 완전 똑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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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어떻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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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 기타가 여기에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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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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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일은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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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지금 이해가 잘 안 되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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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인은 침묵하고 있는 준홍을 보며 입을 열었다. ‘이건 명전 선생님의 기타’이며, ‘학생이 어떻게 이걸?’ 이라는 말 뜻이 무엇이겠는가. 저 기타의 소유주는 네가 아닌데, 이걸 왜 들고 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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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왜 남의 것을 네가 들고 있느냐는 뜻 아니겠는가. 그 말인 즉슨, 수연이 남의 것을 훔쳤다는 것인데… 혜인은 수연을 의심하기보다는, 수연의 달라진 모습을 믿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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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애가 그 기타를 훔치기라도 했단 건가요? 제가 듣기에는 그런 식으로밖에 안 들리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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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아니 그런 말은 아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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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인의 가시돋힌 말에 준홍은 순간 정신을 차렸다. 그는 그런 의미로 말한 것이 전혀 아니었기에, 손을 내저으며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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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이 기타는… 어… 아니 일단 설명부터 드려야 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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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홍은 기타를 탁자 위에 내려놓고, 아무 말 하지 않고 있는 수연을 보았다. 표정을 읽기 힘든 얼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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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타는, 뭐 모델명이라던지 이런 것들이 있긴 한데… 그보다도… 제가 존경하던 기타리스트, 서명전 선생님의 기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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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건 알겠는데요. 그럼 저희 아이가 그 분에게 기타를 훔쳤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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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분은 얼마전에 돌아가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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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홍의 말에 혜인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왠지 모르게 고인이라도 모독한 느낌. 하지만 준홍의 의도는 그게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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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돌아가시는 날까지도 이 기타를 들고 계셨구요. 경찰이 이 기타를 습득했었으니까요. 그러니까 따님 분이 이 기타를 훔쳤다는 말씀을 드리려고 했던 건 전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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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에 혜인은 마음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수연이가 훔친 게 아니구나. 확실히 마음을 고쳐먹은 것이었구나. 그런 생각을 가지고 바라본 수연은, 왠지 모르게 살짝 굳은 표정으로 준홍을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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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이 돌아가신 건, 장례식이 끝난 뒤에야 알 수 있었습니다. 워낙 요즘 두문불출 하시던 분이라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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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스로 소식이 닿아 찾아뵈었을 때는 이미 집주인 분께서 시체 인수하셔서 장례식을 간략하게 치르시고, 자택을 정리하셨더군요. 그래서 장례식장에 찾아뵙지도 못했고, 선생님의 유품 정리 같은 것도 불가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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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까운 일이긴 하지만… 그래서 그 일이랑, 이 기타가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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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 속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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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인의 질문에 준홍은 살짝 망설임이 느껴지는 대답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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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타의 행방은… 요즘 한국 기타리스트들 사이에서 가장 뜨거운 주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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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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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냐하면 ‘서명전’의 기타였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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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홍은 잠깐 침묵하다, 다시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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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기타리스트들 사이에서, ‘서명전’이라고 하면… 반쯤 신으로 추앙받는 분이었습니다. 세션 기타리스트 중에서는 첫 번째라고 부를만한 실력이시고, 한국 기타리스트를 통틀어도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실 분이시니까요. 대한민국에서 2번째로 펜더의 엔도서(각주 1)가 되실 뻔 하기도 하셨고… 본인께서 거절하셨지만요. 저도 상당히 존경하는 분이었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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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 기타는, 그런 명전 선생님께서 15년 넘게 사용하던 기타입니다. 특별한 일이 있는게 아니라면 항상 이 기타만 사용하셨어요. 저도 몇번 본 적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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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에 혜인은 수연을 바라보았다. 그런 기타가, 왜 수연의 손에 들려 있단 말인가? 그리고 왜 수연은 아무 말이 없는가? 뭔가 얽힌 사연이라도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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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말해서, 기타리스트로써 이 기타에 욕심이 나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일 겁니다. 왜냐하면 그런 분의 기타니까, 쳐 보고 싶기도 하고… 수집할 가치도 있는 거죠. 그리고 실제로 바로 행동에 들어간 사람도 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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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장례식 주관하신 집주인분에게 그 사람이 들은 이야기가, 선생님 돌아가시고 장례식 치른 후에, 누가 와서 기타를 가져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로 기타의 행방은 알 수 없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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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 기타가 지금 제 눈 앞에 있으니, 놀랄 수 밖에 없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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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홍은 기타를 살짝 쓰다듬은 후 고개를 들어 수연을 바라보았다. 무표정한 얼굴로 기타를 바라보고 있는 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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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그 할머니가 말했던 애는, 이 애일 확률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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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오지 않았던 장례식 이후, 느닷없이 찾아와 자신이 그 기타를 구매하기로 되어 있었다며 기타를 가져갔다는 의문의 여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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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한가지 더 있다. 돌아가신 뒤, 느닷없이 버스킹에 참가하겠다며 리플을 달았던 명전 선생님의 뮬 아이디. 그리고 핸드폰으로 찍힌, 해당 버스킹 영상에 나와 노래를 부르고 기타를 치던 여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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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황상 그 둘과 여기 있는 이 ‘하수연’은 동일인물일 것이다. 그렇게 볼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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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것은, 뭘 의미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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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홍은 머리를 필사적으로 굴려보았지만, 딱히 답이 나오는 건 아니었다. 당사자부터가 별 말 없이 앉아있기만 하기도 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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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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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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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와중, 마침내 입을 뗀 수연. 준홍은 수연의 입에서 어렵사리 나온 말이… 과연 어떤 것일까 기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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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방송부터 하시죠. 이미 시간이 다 된 것 같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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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것은 준홍이 기대하던 말이 아니었다. 그렇게 말하며 싱긋 웃는 수연과, “어머,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어버렸네.” 라고 말하는 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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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네. 일단 들어가… 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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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을 말하는 수연 앞에, 준홍은 그렇게 말할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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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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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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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태연한 표정 안에 당황스러운 마음을 숨기며, 대충 생각나는 말을 주워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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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소개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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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유튜브에서 White Room 채널을 운영하고 있는 하수연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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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를 배운 지는 얼마나 되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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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정확하게 기억은 안 나는데, 얼마 안 된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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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레 유튜브 인터뷰를 하면 나오는 질문들 이후, “그럼 White Room님 기타 치시는 영상 한번 보고 넘어갈까요?” 라는 준홍의 말을 들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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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환장할 노릇이군. 한국 최고의 세션 기타리스트? 한국 기타리스트 중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 내 기타를 수집하려는 사람들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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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심정으로, 마음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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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가 무슨 헛소리인지. 명전은 준홍이 늘어놓은 이야기가 상당히 어처구니 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아니 뭔 세손가락이니 세션 넘버원이니… 미친 놈들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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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이 기타를 잘 친다는 것은, 명전 또한 인정하는 사실이었다. 명전 또한 실력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상태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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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세 손가락이니, 최고의 세션이니 하는 이야기는… 좀 그렇지 않나. 세상에 기타를 잘 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들에 비하면, 명전은 태양 앞의 반딧불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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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그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하수연’으로 되살아나기 전까지의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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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확실히 달랐다. 현재 그에게 부족한 것은, 체력과 기타리스트로서의 명성… 그리고 작사능력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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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뭐… 일단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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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이 가진 기타리스트로서의 능력을 읊어대는 것은 나중에 해도 될 일이다. 지금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해야 할지 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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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뭐라고 말해야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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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저는 서명전입니다. 죽은 다음 일어나보니까 이 몸에서 일어났어요. 그래서 기타를 가지러 가서 40만원에 할매한테 뜯어왔죠. 그게 제가 이 기타를 가지게 된 이유입니다.” 라고 말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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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아니라면, 뭐 중고 장터에서 샀다고 해야 할까? 어떤 양아치 고딩이 파는 거 사 보니까 이 기타였다! 걔가 나한테 40만원 주고 천만원 넘는 기타를 팔아치웠다! 라고 말을 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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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 다 전혀 통할 것 같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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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그 기타를 위해서 집주인 할매한테까지 갔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럼 아마 ‘하수연’이 기타를 사간 것까지 알아냈을 것이다. 당시 ‘하수연’의 정확한 인상착의까지는 몰라도, 여고생이 사갔다 정도는 알아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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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해명을 하지 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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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을 떠올렸다. 아니, 생각해보면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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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해명을 왜 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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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 칼이라도 들이밀고 뺏은 것도 아니고, 불법적인 루트로 장물을 구매한 것도 아니다. 그는 정당하게 집주인 할매와 거래해서 기타를 받아왔다. 그게 전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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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면 뭐, 그냥 서명전 씨랑 아는 사이였다고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어차피 죽었기도 했고, 말이야 짜 맞추면 되는 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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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생각하던 명전은, 좋은 생각 하나를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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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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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선생님, 기타 연주 한번 들려주실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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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혹시 뭐 원하시는 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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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로 없습니다! 편하신 거 치시면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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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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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말을 남기고, 수연은 이펙터를 세팅하기 시작했다. 시빌워 빅모프, 부나 딜레이. 퍼즈페이스, 와우페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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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펙터조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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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 선생님이 사용하던 세팅 일부가, 저 학생의 페달보드에 들어가 있었다. 완전한 세팅본은 아니었지만, 핵심 이펙터들은 다 들어가 있는 그런 세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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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명전 선생님과 뭔가 관계가 있는 건가? 그래서 저런 세팅까지 다 물려받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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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홍이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완료된 세팅. 수연은 기타를 든 채로 카메라 중앙에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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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일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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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곡 치실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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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듣는 사람의 즐거움으로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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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갑자기 시작된 연주. 꽤나 익숙한 멜로디와 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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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Manhattan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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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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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ric Johnson의 Manhattan. Cliffs of dover에 가려지긴 하였으나, Eric Johnson이 만들어낸 최고의 곡 중 하나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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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역시, 명전 선생님이 좋아하던 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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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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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타 진짜 잘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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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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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성년자분 맞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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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니 ㅠㅠㅠㅠ 이분 기타 들으니까 자괴감이 느껴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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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말 잘 치시네요. Eric Johnson은 쉽지 않은데, 톤부터 테크닉까지 완벽하게 재현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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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홍은 수연의 기타를 감상하며, 동시에 기시감을 느꼈다. 뭔가 익숙한 느낌. 어디에서 들은 것 같은, 상당히 오래 전부터 얼마 전까지도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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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홍은 눈을 크게 떴다. 익숙함의 정체는 바로… 스트러밍 패턴이었다. 기타 연주자가 가지는, 일종의 지문과도 같은 고유한 패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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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명전 선생님의 연주에서 느껴지던 스트러밍 패턴이… 이 아이의 연주에서도 그대로 느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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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홍은 연주를 감상하는 척, 눈을 감고 깊게 고민했다. 뭔가 떠오를 것 같기도 한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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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례식 이후 갑자기 찾아온 여자아이는, 무슨 맡겨놓은 것마냥 기타를 가져갔다고 했다. 그리고 어느 날 출현했던 명전 선생님의 뮬 아이디, 그 다음 나타난 블랙 스트랫을 사용하는 여고생 버스커. 기타를 배운지 얼마 안되었다는 이야기. 선생님의 이펙터 세팅과, 스트러밍 패턴. 비슷한, 아니 아주 흡사한 곡 취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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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모든 것을 종합해서 생각해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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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오는 결론은, 단 하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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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제자인가? 명전 선생님이 마지막에 거둔 제자? 재능을 알아보고 가르치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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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까운 것은, 준홍이 일반적인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길가에서 돌연사를 한 양반이 여고생의 몸에서 성별이 바뀌어 살아났을 것이라는 상상력 같은 건, 절대 발휘하지 못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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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YSTE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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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은 곡명을 벼락같이 외친 후, 리듬을 타기 시작했다. 이름을 들은 관객 일부는 못마땅해하고, 일부는 어떤 곡인지 잘 모르는 눈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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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아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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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대부분의 관객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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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하면, 락에 익숙하고 00년대 이후 노래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한번쯤은 들어봤을 곡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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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시작되는 키보드로 편곡된 강렬한 신디사이저 사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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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오는 드럼의 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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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발하는 기타. 리듬을 타며 연주를 하는 기타의 역동적인 동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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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와 다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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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스는 무감정한 표정으로 모니터 스피커에 발을 올린 후 베이스를 거칠게 튕겨내고 있었다. 살짝 불안하고 거친… 정제되지 않은 듯한 핑거 피킹. 그러나 그렇기에, 곡의 분위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어울리는 연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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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해는 떨어지기 직전. 불길한 자주색 석양이 마지막 절규를 뱉어내는 하늘이 창 밖으로 보이는 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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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번도 끊기지 않고 계속되는 베이스라인은, 특별하게 세팅된 스피커와 맞물려 사람들을 반쯤 마비시키기에 충분했다. 스피커 앞단에 선 사람들은, 공기가 떨리는 것을 넘어 마사지기로 머리를 두드리는 듯한 느낌을 받을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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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메이션이 약간 다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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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정하나 변하지 않은 채… 계속해서 베이스를 끊임없이 치고 있는, 살짝 화려한 화장의 여고생을 보며. 아윤은 그녀가 봤던 첫 번째 공연을 떠올렸다. 용산에서 봤었던 그 공연에서는, 기타가 전면에 나오고 나머지는 뒤쪽으로 살짝 빠지는 형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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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지금은 베이스가 왼쪽 앞에 따로 나와 있고, 나머지 밴드원들은 각자 따로 자리를 잡은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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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덕에 아윤은, 첫 번째 공연 때 멀어서 못 봤던 베이스를 자세히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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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이 굵고, 전반적으로 쭉쭉 뻗어나가는 체형. 키도 크고, 손도 크고. 그 외에도 여러모로 큰 부분이 많은… 아무튼 그런 여자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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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엄청 멋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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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이 장소에서 공연을 맞이하기 전까지, 아윤은 수많은 고난과 역경을 헤쳐왔다. 밴드 SNS는 어디 있는 건지, 얘들은 도대체 뭐하는 애들인지… 바닥부터 정보를 긁어모으던 과정과, 그리고 그 과정에서 본 인터넷 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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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에 친숙한 아윤이 보기에도, 악의가 들어간 글들이 다수 존재했다. 기타의 실력을 찬양하면서, ‘아 근데 베이스는 좀…’ 같은 코멘트를 남기는 방식. 일명 ‘긁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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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윤은 밴드 음악을 좋아하긴 했지만, 딱히 잘 아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가 데려온 친구들 또한 마찬가지. 악기의 조화가 어쩌고 기타가 어쩌고 베이스가 어쩌고, 잘 모르는 이야기. 지금 치고 있는 베이스가 얼마나 잘 치는지도, 사실 감이 잘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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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런 건 잘 몰라도, 이것만은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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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스라는 거… 엄청 멋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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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정 없는 얼굴은 굳은 의지를 나타내는 것 같다. 허나 화려하게 움직이는 손가락은, 잔잔한 수면 밑에서 떠 있기 위해 노력하는 백조의 발이 어떤 것인지 잘 말해주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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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모습에, 아윤은 애니메이션에서도 베이스 캐릭터는 항상 멋지게 나왔던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아키야마 미오, 야마다 료, 이마이 리사 등. 어쩐지 모르게 그녀는 예전부터 베이스 캐릭터를 좋아했던 것 같은 느낌도 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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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몸은 객관적이지 않다. 외부의 감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의 기준대로 보정하여 받아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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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적인 예가 눈 앞의 코다. 원래라면 인간은 눈 앞의 코를 계속해서 의식할 수 밖에 없다. 허나 뇌의 보정 때문에, 인간은 코를 의식하지 않은 상태로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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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상황 또한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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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파라독스의 사운드 세팅은, 다른 모든 소리를 묻어버릴 정도는 아니지만, 흔히들 말해지는 '안 들리는 악기'의 이미지 정도는 박살낼만큼 충분히 큰 사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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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의도적인 부분이었다. '아무튼 크면 소리가 좋게 들린다' 라는 트릭을 위해 의도적으로 베이스를 강조한 세팅이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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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서의 베이스 실력은 괜찮은 수준. 하지만 명전은 ‘괜찮은 수준’으로 들리기를 원하지 않았고… 그 이유로 공연장의 세팅은 세밀한 조정을 거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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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 따라,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듣는 힙스터를 제외한 나머지 관객들은, ‘와 베이스 진짜 잘 친다'라는 인상을 가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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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밴드는 그러한 인상을 확실히 새기기 위해… 하나의 장치를 더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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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이막스를 알리는 고음과 함께 일시적으로 시작되는 인스트루멘탈 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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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의 환호와 함께, 시작되는 연주. 그리고 이후에는, 원래라면 화려한 기타 솔로가 들어가야 하는 부분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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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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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스 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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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솔로가 볼륨을 줄이며 뒤로 빠지고, 그 자리를 베이스가 메우며… 16비트의 베이스 솔로가 몰아친다. J-rock 풍의 슬랩 연주를 조금 섞은, 고음역대를 강조한 베이스 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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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까지 그루비한 모습만 보여주었던 베이스의 화려한 슬랩에 환호를 보내는 관객들. 제이락 코스프레냐며 코웃음을 치는 사람도 있지만, 비율은 많지 않다. 그보다는 어떻게 이렇게 잘 섞었냐는 감탄이 주를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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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라면 이런 식 연주는 아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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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를 연주하며 명전은 이서를 곁눈질했다. 한치도 떨지 않고, 실수하지도 않은 채 냉정하게 베이스를 연주하는 이서. 평소에 헤실헤실 웃고 다니던 것과는 정 반대의 모습. 인기몰이를 꽤나 할 것 같은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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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명전이 계획하던 건, 이른바 'Thunderfingers'로 칭해지던 더 후(The who)의 존 엔트위슬(John Entwistle) 풍 베이스 솔로. 벼락같은 스피드로 무자비하게 리듬을 난타하는 스타일의 솔로가 이 곡에 더할나위 없이 어울리리라 생각했지만, 이서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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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런 쪽이 더 나은 것 같아. 슬랩 자체가 좀 멋지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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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말하며 이서가 가져왔던 베이스 라인은, 곡에 꽤나 잘 녹아들었다. 과하지 않으면서도 적당히 슬랩이 들어가 화려함을 보여주는 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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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산이 잘 먹혀들어간 모양인지, 이서가 서 있는 앞쪽의 관객들은 베이스 슬랩을 보며 연신 감탄성을 내질렀다. 보컬이 끝나자 다시금 터져나오는 환호. 밴드는 마지막까지 에너지를 끌어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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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럼과 신스, 베이스와 기타를 동시에 내려치며 끝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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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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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금 터져나오는 박수. 머리를 쓸어올리는 이서를 카메라로 찍는 관객들도 있다. 아무래도 그들의 계산이 제대로 적중한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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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들으셨나요. 저희 베이스가 좀 잘 하죠. 이번에 한번 보여드리려고, 이런 곡을 택했습니다. 원래 베이스가 안 들리는 악기라고 하잖아요? 들린다는게 뭔지 한번 보여드리고 싶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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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뭐… 클럽 파라독스에 오신 것을 다시 한번 환영합니다! 저희는 Group Sound입니다. 저는 메인기타이자 보컬, 하수연. 저기 저 친구는, 베이스이자 서브보컬, 최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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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드 한명한명을 소개할 때마다 쏟아지는 환호성. 첫 번째 곡을 감명깊게 들은 모양인지, 이서가 소개될 때 큰 박수가 이어진다. 다음은 현아, 서하. 의외로 서하가 소개될 때 아는체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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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곡 밖에 안 된다는 게 좀 아쉬운 부분이긴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저희는 아직 신생 밴드이니까요. 좀 길게 뵐 날이 있긴 하겠죠. 아무튼 뭐… 이번에는 자작곡입니다. 곡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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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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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직도 찾고 있어, 만나지 못했던 그날의 너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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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어지는 솔로. 완전히 세팅된 스피커와 이펙터를 끼고 나오는 톤은, 유튜브에서 보여주었던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곡절이라는 것을 체화시킨 듯한 소리에, 무슨 음악이 나와도 개의치 않고 춤을 추던 사람도 굳어버린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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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분간 몰아치던 파도는, 어느새 잠잠해진다. 언제 그랬냐는 듯 잔잔해진 클럽. 명전은 기타를 짧게 튕기고는 마이크를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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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지금까지 Group Sound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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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전과는 다른 성격의 박수. 이전의 박수가 실력에 대한 환호였다면, 지금의 박수는 곡에 대한 몰입의 댓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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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재밌었다.” “집에 갈까?” “왠지 다음 공연은 굳이 뭐 안 들어도 될 것 같은데…” 같은 소리를 하는 관객들. 명전은 쓰게 웃으며 장비를 정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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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이런 곡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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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 좀 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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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신경을 쓴 수준이 아닌데… 이 정도면 블루스 락 밴드를 하는 게 낫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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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의 이야기에, 서하가 대답했다. 하지만 명전은 그런 방향으로 정하고 싶진 않았다. 가능하고 안하고를 떠나서, 딱히 뭐… 몇십년 넘게 했던 걸 죽고 되살아난다음에도 또 하기도 그렇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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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곡은 내가 도맡아서 작곡을 하긴 했지만… 이 다음부터는, 아마 이 애들이랑 이야기를 해 봐야겠지. 하고 싶은 음악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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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생각을 하며 명전은 고개를 들었다. 무대 끝 쪽에 쭈그려 앉아, 관객으로 온 여자애들 몇명과 이야기를 나누는 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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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을 때긴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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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좋아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과, 그것을 실제로 느끼는 것은 차원이 다른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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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의 수천만명이 자신을 싫어한다 하더라도, 한명의 팬이 싸인지를 들이밀고 “너무 영광이에요 싸인 한장만 부탁드립니다…!” 라고 한다면… 그 경험을 잊지 못해 살아가는 사람이 많다. 명전은 피식 웃고는, 기타를 챙겨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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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잘 봤습니다. 뭐 긴 말 필요 없고, 공식 라인업에 들어가는 걸로 하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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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어떤 식으로 공연을 하게 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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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에 오너는 종이 몇장을 건넸다. 클럽 파라독스의 규칙이 이리저리 써있는 종이. 명전은 그것을 훑어보고는, 뒤로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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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게 요약하면… 한달에 최소 공연 횟수가 있구요. 그리고 그 이상으로 공연을 할 수도 있습니다. 매달 초 다음 달의 스케줄을 정하게 되고, 특별한 일이 있지 않은 한 스케줄에 따라 공연을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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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산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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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라면 세금 떼고 5:5입니다. 저희는 카운팅 페이(각주 1)를 택하고 있지 않으므로, 매일 입장수익에서 세금 떼고 5:5죠. 5에서 아티스트분들이 갈라 가지는 거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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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너는 그 대목에서 잠시 멈칫하고는 목을 가다듬었다. 5:5로는 안 된다는 것을, 본인 스스로도 잘 아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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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보면 알거든. 우리는 어딜 가도 관객을 끌어모을 수 있는 타입의 밴드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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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고생 4명이 밴드를 한다. 외모는 다들 괜찮은 수준에, 음악은 딱히 가리지 않는다. 어느 누가 궁금해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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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여러분들은 저희가 7:3으로 정산해드리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입장수익은 그런 식으로 돌아갈 거고… 나머지 금액은 뭐, 음료 및 안주 판매 금액은 순수 저희 몫이구요, 현장 판매 굿즈는 제작비 제외하고 담당 아티스트가 9를 가져가고 저희가 대행으로 1을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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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그 정도면, 상당히 괜찮은 수준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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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하의 대답. 명전 또한 같은 생각이었다. 카운팅 페이를 하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파라독스는 이미 상위권 클럽. 하지만 7:3 정산에, 굿즈 판매까지 있다고 하니 충분히 괜찮은 조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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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외에 따로 조건이 있느냐는 물음에, 명전은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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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서는 이 주소로 보내주세요. 좀 검토를 해 봐야 할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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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아 네,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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왠지 모르게 식은땀을 흘리는 오너. 그런 오너를 두고, 명전과 아이들은 클럽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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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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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우리는 실전 연습장을 얻은 셈이지. 돈이 벌릴 루트도 만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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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은 커피를 쭉 빨아들였다.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빨대를 통해 그녀의 입에 호쾌하게 빨려들어갔다. 춥지도 않은가? 하고 이서는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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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우, 힘들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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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 뭐 실력은 많이 올랐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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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 일주일은 이제 연습 못 나올 것 같아. 밀린 일이 너무 많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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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의 선언에 테이블에 널부러지는 아이들. 이서 또한 서하와 마찬가지였다. 갑자기 커버곡을 바꾸는 바람에, 최근에는 만사를 다 미뤄놓고 연습을 해 왔으니… 이제는 더이상 다른 일을 미룰 수가 없는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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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이제는 당분간 한시름 놓은 건가? 이제 좀 쉴 수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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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소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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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희망이 담긴 이서의 물음에, 수연은 한쪽 눈썹을 치켜들며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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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정부지원사업 대비해야지. 쉴 틈이 어디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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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맞추는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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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에 고개를 끄덕인 수연. 서하는 정말로 궁금했다. 이미 자신은 충분히 맞추고 있다. 유진 언니와 베이스, 키보드 오빠. 수연과 서하 자신에 비하면 정말로 비교가 되지 않는… 그런 실력을 가진 사람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하는, 충분히 그들이 따라올 수 있을 만큼 연주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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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뭘 더 맞추라는 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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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맞추고 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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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너는 딱히 연주를 맞춘 적이 없어. 오히려 저 사람들이 너한테 맞추고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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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 소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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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하의 심기를 건든 어휘는 ‘오히려’였다. 오히려. 도대체 누가 누구에게 맞춰주고 있다는 걸까. 서하 자신의 실력을 따라오기에도 급급한 저 사람들이, 도대체 뭘 맞추고 있다는 걸까? 서하는 진심으로 궁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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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드 사운드의 핵심은 조화와 화합. 같이 가는 것.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충분하면 충분한 대로. 보컬, 기타와 베이스, 드럼과 키보드. 다섯 개의 악기가 하나로 어우러지는 것이 밴드의 핵심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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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하의 물음에 턱을 살짝 매만지더니,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며 입을 열기 시작한 수연. 서하는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보자 하는 심정으로 수연의 이야기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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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너는 지금 다른 밴드원들을 리드하고 있어. 아니 리드하고 있다기 보다는, 억지로 끌고가는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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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지로 끌고 가는 게 아니라, 그 사람들이 못 따라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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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억지로 끌고 가는 거지.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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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억지로 끌고 가는 건가. 서하는 잠시 손끝을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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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의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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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생각하기에는, 오히려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묶여 있는 것 같았다. 충분히 치고 나갈 수 있는데. 드럼을 잘 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보여줄 수 있는데. 텅 비어버린 사운드를 꽉 채울 수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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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밴드에서는 다른 사람들에게 발목이 붙잡힌 채, 그저 박자만 맞추기만 하고 있는 신세다. 이게 뭐가 맞추지 않는 것이고, 뭐가 다른 사람들이 그녀에게 맞추고 있다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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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정 못 하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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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그녀에게 던져진 수연의 질문. 서하는 고개를 들어 수연을 바라보았다. 자신보다 한살 어린 아이. 하지만 마주본 그 눈동자는, 그녀가 봐왔던 누구보다도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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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하나만 생각해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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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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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지금 네가 잘 치니까. 다른 사람들이 너를 따라와줘야 된다고 생각하지. 그런데 나는 어떻게 하고 있는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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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질문에 서하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 보니 수연의 연주는, ‘그룹 사운드’에서나 여기에서나 동일한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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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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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하 본인이 느끼기에도, 자신의 연주는… ‘그룹 사운드’때와 비교하면 턱턱 걸리는 느낌이 있었다. 애들끼리 합주하던 때를 떠올리며 드럼을 치면, CCM 밴드원들은 이내 꼬여버리거나 따라오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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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수연은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은 연주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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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저게 가능한 걸까? 서하는 강렬한 의문을 느꼈다.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다고 해도, 다른 사람들의 단순한 연주에 맞춰주면서… 어떻게 저렇게 할 수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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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추고 있는 것 같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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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그런데 어떻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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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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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은 대답 대신 캔커피를 홀짝였다. 이어지는 것은 말이 아닌 침묵. 도통 답을 해줄 기미가 없는 수연을 보고, 서하는 갑갑함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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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그게 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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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네가 알아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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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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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당한 대답에 서하는 반문했다. 하지만 수연은 할 말 다 했다는 듯 연습실로 돌아가려다, 발을 멈추고 그녀를 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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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에게 연주를 보여주고 싶다고 했지. 좋은 연주를. 잊혀지지 않는 그런 걸. 만약 그런 걸 보여주고 싶다면, 이 문제를 풀어야 할 걸. 좋은 연주란 뭘까. 음악이란 뭘까. 조화란 뭘까… 하나만 말해주자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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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은 씩 웃었다. 지금 이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는. 하지만 왠지 모르게 어울리는. 그런 미소가 그녀의 입에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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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기술이 좋은 음악을 담보하진 않아. 결국 음악은 머리로 하는 게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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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수 없는 소리를 하며, 수연은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 서하는 멍하니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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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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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뜻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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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이 던지고 간 문제를 서하는 도저히 풀지 못했다. 며칠을 고민해봐도 답을 제시할 수 없어 서하는 수연에게 대놓고 물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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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결국 답이 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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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네가 알아내야 된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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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답을 모르겠다고 하자 수연이 던져준 것은, 그녀의 말로는 ‘힌트’였다. Cream이 2005년 Royal Albert hall에서 했던 재결성 공연 DVD. 다른 세션 한명 없이 에릭 클랩튼, 잭 브루스, 진저 베이커 3인만이 무대에 올라 했었던 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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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걸 보면 대충 알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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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통 감이 잡히지 않는 수연의 이야기를 듣고, 서하는 교회 창고를 뒤져 DVD 플레이어를 꺼내 몇번이고 그 공연을 다시 돌려보았다. 지나가던 집사들이 “사단의 음악을 들으면 안 돼.” 라고 해도 서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2024년에 무슨 헛소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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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번이고 돌려본 결과, 서하는 한가지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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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저히 모르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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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어렴풋이 느껴지는 것 같긴 했다. 전성기였던 60년대를 한참 지난 사람들. 얼굴을 봐도, 육체를 봐도 늙은 것이 한참 느껴지는. 목소리도 마찬가지. 올라가지 않는 목소리와 늙어버린 육체를 이끌고 선 세 명의 뮤지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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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연주는, 어디도 비어있지 않았다. 적어도 서하는 그렇게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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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음향 기술적으로 메꾼 것도 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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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히 있겠지. 열대가 넘는 스택 앰프. 다양한 이펙터. 오디오 보정. 그 외 수많은 기술들이 그들의 공연에 들어갔을 것이다. 서하도 그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거기에는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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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그녀 자신의 밴드, ‘그룹 사운드’의 공연을 돌려봤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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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어있지만 비어있지 않은 것 같은 수연의 연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그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서하는 수십번이고 그들 자신의 공연을 보았다. 그 공연에도 있었다. 말로 할 수 없는 무엇인가가. ‘테크닉’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뭔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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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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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당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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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CM 공연은 오후에 있을 예정이었다. 수연은 그 시간에 맞춰 오기로 했기에, 서하는 딱히 할 일이 없었다. 교인들과 집사, 권사분들이 이리저리 바쁘게 오가고. 밴드 멤버들도 자신이 할 일을 맡아서 행사를 준비하는 가운데, 서하는 탁자에 앉아 턱을 괴고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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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오랜만에 만난 아이들과 이야기라도 좀 했지만, 다들 눈치를 보다 일을 하러 가버리고. 그렇게 혼자 남아 버린 상황에, 서하는 핸드폰이나 만지작거릴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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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럴거면 그냥 수연이 빨리 오라고 할 걸 그랬나. 같이 이야기나 좀 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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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서하 본인도 지금 지루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전혀 관계없는 외부인인 수연이가 와서 가만히 앉아만 있다면… 얼마나 지루하겠는가. 서하는 머리를 흔들어 그 생각을 털어버린 후, 크림 콘서트나 한번 더 봐야되지 싶어 이어폰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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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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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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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서하를 불러세운 것은 교회 안수집사의 목소리였다. 성큼성큼 다가와 그녀에게 말을 거는 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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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 목사님 30분 뒤에 오신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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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요? 빨리 오시네. 오후에 오신다고 하지 않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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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랑 점심 드시러 빨리 오시는 거라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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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에 서하는, 짐짓 아무렇지도 않게 “알겠어요.”라고 대답은 했지만… 좋아지는 기분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녀의 진로에 대해, 음악에 대해 좋지 않은 이야기를 했더라도… 결국 그들은 서하의 부모였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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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지냈니? 교회는 잘 나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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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만난 엄마의 첫 인사. 서하는 좋았던 기분이 다운되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원래 그런 사람들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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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네. 잘 나가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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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그분께서는 언제나 지켜보신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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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하는 아무 말 없이 아버지와 어머니를 안은 후, 자리에 앉았다. 가족끼리 만난 그 자리에서, 단 한순간만이라도 신앙이니 신실이니 교회니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걸까. 이미 이해하기로 했던 일이지만, 그래도 서운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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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어떻게 지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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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뭐… 학교 다니고, CCM 밴드 하고. 그러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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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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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계시죠. 맨날 무릎 아프다고 그러세요. 주물러 드려도 힘드신가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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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물음에 서하는 대답했다. 요즘 자신은 어떻게 지내고 있는 걸까. 얼마 전에는 한창 바빴는데, 왜 바빴더라. 과거의 일을 되짚어가던 서하는, 부모님에게 말하지 않았던 것 하나를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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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맞다. 엄마, 아빠. 저 그 말 안한 게 있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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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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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밴드 오디션 프로에서 우승했어요. 상금도 탔어요. 1억원. 박 집사님한테 이야기하긴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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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지급되지 않은 상금. 수연이네 어머님이 다 받아서 세금 최대한 줄인 다음 나눠주신다고 했던 그 돈. 서하는 부모님이 깜짝 놀랄 것이라고 생각했다. 오디션 프로 우승에다가, 상금 1억원까지? 어느 부모가 놀라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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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드 오디션 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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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그, 현아랑. 다른 학교 후배들이랑. 같이 나가서 우승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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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됐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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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하한다. 그런 곳에서 우승하는 건 좋은 일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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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이 지어주는 흐뭇한 미소. 서하는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 이 정도 결과라면 엄마 아빠가 인정해주실 만 하지 않을까. 밴드 공연까지도 갈 필요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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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계속 할 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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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기에는 상냥하지만, 많은 의미를 담고 있는 말. 서하는 좋았던 기분이 단순간에 추락하는 것을 느꼈다. 계속 할 거냐니. 계속 할 거냐니… 그게 무슨 이야기인가. 계속 할 거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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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의 말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이야기는 계속되었으나, 사실상 그것은 이야기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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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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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을 수 없는, 넘지 못하는 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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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하와 부모님 사이에 쌓인, 언제부터 있었는지도 모를 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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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하는 그 벽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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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기에는 너무나도 높고, 무너트리기에는 너무나도 견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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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그저, 벽 앞에 쭈그려 앉을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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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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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하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공연 직전이었다. 대기실 안, 서하의 앞에는… 그녀를 걱정스럽게 보고 있는 다른 밴드원들과 수연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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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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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의 걱정스러운 목소리. 하지만 서하는 그저 짜증날 뿐이었다. 도대체 왜, 부모님은 그렇게 말한 걸까.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생기게 된 걸까. 도대체 왜, 이런 일에 놓여버린 걸까. 도대체 왜, 나는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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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드 먼저 준비해주세요. 서하는 제가 데리고 갈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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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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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의 말에 유진과 밴드원들이 자리를 떴다. 남은 것은 서하와 수연. 아무 말 없이 침묵만이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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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서하. 힌트를 하나 더 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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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상황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야기. 하지만 서하는 고개를 들었다. 수연의 담담한, 그러나 단단한 눈길이 그녀에게 향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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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의 마음, 기분을 잘 반영할 줄 아는 음악인이 결국은 끝까지 남는 법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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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무슨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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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생각해봐. 3분 정도 남았으니까, 마음 정리 좀 하고 무대에 올라오면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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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말한 후, 수연은 대기실 밖으로 나가버렸다. 서하는 잠시 자신의 손을 쳐다보다가, 축 늘어트렸다. 리허설도 못한 채 공연 직전인가. 이래서야 공연을 망칠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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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치면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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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는 생각은 그런 것 뿐이었다. 망치면 어떠한가. 아무리 연주를 잘 해도. 오디션에 우승을 해도. 재능을 보여도. 결국 부모님이 보는 것은 그놈의 신앙, 그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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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를 맡은 집사의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다. 서하는 그저 멍한 채로 드럼 앞에 앉아 있을 뿐이었다. 유진이 다가와 이야기를 하는 것도, 베이스나 키보드 오빠가 이야기를 하는 것도 잘 들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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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는 것은 오직 하나. 1년 동안 매일 봐 왔던, 수연의 연주 시작 제스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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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하는 본능적으로 드럼을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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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주가 시작되고 곡이 진행된다. 생각하기 전에 손은 움직인다. 결국 수연의 말에 따라 ‘밴드원에게 맞춰서’ 빈 공간을 허망하게 휘젓는 듯한 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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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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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은 대체 왜 그렇게 말을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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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할 거냐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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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할 게 분명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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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디션 프로로도 부족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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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면 그냥, 음악을 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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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정을 할 생각이 없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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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증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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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게 짜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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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들어먹지 않는 밴드원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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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늘어나지 않는 실력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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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의 아리송한 이야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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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로 맞춰진 연주도, 비어버린 소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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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지금, 왠지 모르게 자기 멋대로 튀어나가는 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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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받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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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왜 자신은 이러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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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가 뭐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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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내버려둔 채로 그들은 지방으로 떠났다. 자신들이 하고 싶은 일을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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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나는 왜 슬퍼해야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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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마음에 들지 못해 힘들어해야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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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내가 그들에게 인정을 받아야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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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하는 이 모든 것들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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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에게 털어놓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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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로 다 할 수 없는 그 무엇인가를, 자신의 마음을… 남들에게 내보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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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럼의 소리가 바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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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원래 그랬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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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트로놈과 같았던 그 소리에는, 조금씩 색채가 더해져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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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붉은 색. 어쩌면 푸른 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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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다른 색깔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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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꽃봉우리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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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꽃봉우리는, 그녀의 손 끝. 드럼 스틱에서 하나씩 피어오르고 있다. 풍부하고 다채롭게 회관을 물들이며 퍼져나가는 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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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서하는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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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의 마음, 기분을 잘 반영할 줄 아는 음악인이 결국은 끝까지 남는 법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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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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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수연이가 말한 그것이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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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바로 감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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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감정하게 울리던 드럼에 색이 입혀진다. 차이는 크지 않다. 남들이 듣기에는, 약간 달라졌네 하는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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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나비의 날갯짓이 태풍을 불러오듯이, 작은 변화는 더 큰 변화를 이끌어냈다. 결과는 극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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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클래식 콘서트에 온 듯한, 적막했던 분위기는 이제 없다. 풍부해진 드럼의 사운드. 넘실거리는 박자. 연습때와는 완전 달라진 분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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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럼 비트 하나마다 담긴 슬픔과 외로움, 절망과 분노, 환호와 기쁨. 복잡하고 다양한 감정이 담겨 가끔 튀는 소리를 보면 아직은 미숙함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래도 충분하다. 밴드원들은 완전히 달라진 소리에 의아해하면서도 나름의 감정을 조금씩 풀어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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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결과는 확실하다. 일반적인 ccm과는 좀 다른 분위기지만, 어찌되었든 사람들을 일어서게 만들기에는 충분하다. 누구도 시키지 않았는디 자발적으로 일어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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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위에서 적당히 연주를 해 드럼을 돋보이게 하며, 명전은 회랑 안의 사람들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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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를 한 것 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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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서하는 충분히 재능이 있는 아이이니 그럴 줄 알고 있었다. 개인의 슬픔으로 인해 깨달을 줄은 몰랐지만, 어찌되었든 감정을 실을 수 있게 되어서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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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그는 그러지 못했다. '하수연'이 된 후에야 깨달은 것이지만, 과거의 '서명전'은 감정에 기반한 연주를 제대로 펼쳐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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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 명전은 다른 식의 연주를 할 수 있었다. 치열한 계산에 따른 연주. 이 타이밍에 기타를 이런 식으로 몇번쯤 떨리게 하면,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 듣는다는... 뭐 그런 식의 연주. 완벽한 테크닉으로 만들어낸 가짜 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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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몸에 들어와서야 연주에 '진짜 감정'을 실어내는 법을 알아낸 명전이지만, 그것을 가르쳐주는 것은 불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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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가르쳐주고 싶지도 않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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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의 기회를 뺏는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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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이 없다면 성장하지 못한다. 하지만 너무 단단한 벽이라면 무너트리지 못한다. 명전이 생각하기에 이번 벽은, 서하에게 알맞는 강도였다. 너무나도 시기적절하게 찾아온. 동기부여까지 해 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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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내용물이 ccm이라는 건 비종교인인 명전으로서는 좀 불편한 일이었지만, 어찌되었든 좋다. 사람의 감정을 움직일 수 있는 연주를 해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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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서하는 계속 발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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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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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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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말에 윤 목사는 고개를 돌렸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미묘한 표정을 지은 아내. 항상 단호하게 살아왔던 그녀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표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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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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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하의 연주, 봤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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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몇년만에 본 딸의 연주는, 이전과 몰라보게 달라져 있었다. 그의 말에 드럼 스틱을 조물락거리던, 스네어를 퉁기며 웃던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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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이상 그 시절의 서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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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갖 감정을 표출하며 드럼을 두들기던 딸. 사람들을 일어서게 만들고, 자유자재로 움직이게 만들던. 난생 처음 보는 딸의 모습에 윤 목사와 아내는 할 말을 잊어버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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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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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잘못 생각한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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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목소리는 왠지 모르게 떨리고 있었다.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그는 가만히 천장을 보았다. 천장에는 특별히 뭔가가 있지는 않았다. 언제나처럼의 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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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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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 말할 수 없어, 윤 목사는 그저 그렇게 답할 뿐이었다. 하루가 그렇게 또 스러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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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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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아의 입시가 끝난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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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는 수연에게서 ‘중요하게 할 말이 있으니 오늘 저녁에 무조건 연습실으로 와라’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도대체 얼마나 중요한 이야기이기에, 불참은 허용하지 않는다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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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악기를 들고 올 필요까지 없다는 걸 보면, 연습 이야기는 아닐 텐데. 뭘 이야기를 하려고 그러는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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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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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착한 연습실에는 이미 서하가 자리잡고 있었다.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화려한 플리스를 입고 드럼 의자에 앉아 머리를 매만지고 있던 서하는, 이서를 보고는 인사를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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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언니 뭐 좋은 일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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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아보이는 말투와 목소리. 이서는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물어보았다. 그 말에 “아니, 별 일 없어.”라고 대답하는 서하. 하지만 그렇지 않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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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왠지 기분이 좋아 보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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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습이나 할까. 혹시 베이스 가져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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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수가 들고 올 필요 없다고 해서 안 들고 왔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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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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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중얼거리고는 드럼을 두들기기 시작하는 서하. 이서도 아는 곡이었다. 몇번이고 합주를 했던, 그래서 너무나도 익숙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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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운드가 좀 다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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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는 생각했다. 서하는 칼같이 드럼을 치는 편이었고, 그것을 자랑스러워 하는 편이었다. 스스로 “수십번을 쳐도 똑같은 사운드가 나오게 해야지.”라고 말했을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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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지금 들리는 사운드는 이전과는 조금 달랐다. 뭐랄까 조금 더 풍성하고 활기찬… 어떤 부분에서 다른지 확실하게 잡지는 못하겠지만, 느낌은 명백하게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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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깨달음이라도 얻은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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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는 얼마 전에 접하기 시작한 새로운 컨텐츠를 떠올렸다. 웹소설. 그 중 남성향 웹소설을 보면, 남자 주인공이 막 혼자서 칼 몇번 휘두르다가 ‘크아악 깨달았다’ 라고 외친 후 갑자기 엄청나게 세져서 적도 다 패 죽이고 그렇게 하는데, 서하도 일종의 그런 ‘깨달음’을 얻은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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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는 고개를 흔들어 그런 생각을 지워버렸다. 아무래도 웹소설을 너무 많이 본 것 같았다. 마치 기타만 치던 노인이 수연이 몸에 빙의해서 대신 기타를 치고 있다 같은 그런 황당한 수준의 생각 아닌가. 그런 인생에 단 하나도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은 생각은 애초에 하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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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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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님! 올만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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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는 사이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현아였다. 달려가 현아를 껴안자, 기어가는 목소리로 “숨막혀요…”를 말하는 현아. 장난기가 동한 이서는, “쮜쮜쓰로 질식사 시켜버리기~”를 외치며 현아를 더 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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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닫히지 않는 문을 보았다. 문 바깥에는 수연이 있었다. 왠지 모르게 2500%의 경멸과 한심함을 담은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면서, 수연은 연습실 문을 닫았다. 정적이 감도는 가운데, 터벅터벅 계단을 내려가는 발소리가 연습실에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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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을 쫒아가 연습실로 다시 데리고 온 이후(수연은 왠지 모르게 “다 큰 처녀가 그런 식으로 남을 놀리고 그러면 안 된다.”라는 말을 헀다. 도대체 누가 누구한테 그러는 건지), 수연은 커피를 4잔 타온 후, 종이 수십장을 꺼내 테이블 위에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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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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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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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은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가죽 다이어리를 펼쳤다. 내용을 슬쩍 본 이서는 경악할 정도로 놀랐다. 단 하나도 꾸며져 있지 않은 다이어리. 노트 안에는 고풍스러운 궁서체 샤프 글씨 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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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게… 여고생의 다이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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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혀 그런 것 같지 않아보이는 다이어리를 수연은 잠시 쳐다본 후,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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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현아는 그동안 수고 많았어. 서하야 뭐 진로 고민은 그다지 하지 않는다고 했고. 이서 너도 그렇게 미래를 신경쓰지 않는다고 했으니, 이제부터는 장기 계획을 좀 잡고 실행해도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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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 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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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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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은 그렇게 말한 후 책상 위에 깔린 종이 한장을 집어 모두에게 건넸다. 그 종이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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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 사운드 정규 앨범 1집 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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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 앨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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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는 그렇게 반문했다. 그 뒤로 “저희… 앨범 내는, 건가요?”, “벌써?” 같은 반응이 이어진다. 정규 앨범이라. 이서가 이전에 들었던 바로는, 앨범은 보통 8곡 이상을 일컫는다고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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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획이지, 뭔가 당장 낸다는 건 아니야. 앨범 내용물도 없는데 어떻게 발매를 하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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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 만들어놓은 거 있지 않나? EP라던가, 뭐 그 다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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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긴 하지만, 그런 걸 쓰고 싶지는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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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은 팔짱을 끼며 말했다. 이서는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런 걸 쓰고 싶지 않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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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nk floyd의 전성기는 언제일까. 많은 의견이 있겠지만, 나는 The Dark Side of The Moon을 Pink floyd의 전성기라고 생각해. The Wall도 분명 명반이지만, 너무 한쪽 색깔이 짙은 앨범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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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은 계속해서 설명했다. 두 앨범간의 차이는 무엇일까. 단 하나만을 들라고 한다면, 멤버들의 참여도를 말할 수 있을 것이라고. 앨범 프로듀싱에 모든 멤버가 참여했던 The Dark Side of The Moon과, Roger Waters와 David Gilmour만이 참여한 The W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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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방식이 다른 방식보다 우월하다고 할 수는 없어. 음악을 하는 데에 정답이란 없으니까. 하지만 내 생각에, 밴드의 건강을 위해서는 모든 멤버가 프로듀싱에 참여해야 된다고 생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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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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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이번 앨범에는, 너희들이 만든 곡도 넣을 거야. 내 생각에는 최소 3곡씩. 최소 12곡에서 15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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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아의 말에 수연은 그렇게 대답했다. 12곡에서 15곡. 최소 8곡이 앨범이라고 했으니, 최소 조건보다는 훨씬 많은 트랙 수. 그렇게 많이 곡을 만드는 이유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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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번 정규 앨범의 최종 목표는… 단독 콘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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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은 종이 한장을 더 집어 건네주었다. 콘서트 홀의 규모가 나와 있는 종이. 홍대 근처의, 약 2500석 가량의 규모를 가진 공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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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정규 앨범으로, 그리고 그 활동으로… 이 공연장을 매진시킨다. 그게 내가 세운 이번 앨범의 장기 목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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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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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짝 동요하는 듯한 다른 멤버들. 명전은 쓰게 웃었다. 그럴 만 하지. 현아가 주현과의 콜라보에서 재즈 곡을 만들었던 것을 제외하면, 나머지 아이들은 작곡에 관여한 적이 전혀 없다. 그리고 작곡에 흥미도 보이지 않았고. 단지 이서가 작사를 하고 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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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명전은 밴드 멤버들이 작곡에 무조건 참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는 밴드의 건전성도 있지만, 어찌 보면 당연한 문제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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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술적으로만 봐도 4명의 머리가 1명의 머리보다 쓸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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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 본인이 무슨 Roger Waters라던가 Robert Fripp, David Bowie, Paul Mccartney와 같은… 그런 역사에 남을 천재라면, 혼자서 다 하는게 나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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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럴 거면 밴드를 왜 하는가. 그냥 ‘하수연과 떨거지들’이라거나 ‘하수연과 세션들’같은 걸 하면 되는 일이다. 게다가 위에 언급한 기라성같은 천재들도 밴드 멤버들의 도움을 받아 곡을 작곡했단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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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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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을 깬 것은 서하의 목소리였다. 살짝 당황한 듯한 그녀의 안색. CCM 공연 이후 줄곧 싱글대던 서하의 표정은, 방금 전 그 이야기를 듣고 살짝 변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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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곡에 참여한다, 뭐 그런 건 괜찮아. 충분히 할 수 있고, 오히려 맡겨달라고 하고 싶기도 해. 그동안 심심하기도 했고. 그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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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하는 공연장의 관객 수를 톡톡 두드렸다. 2500석. 그 동작에 명전은 서하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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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0석을 매진시킨다는 건 아예 다른 이야기야. 국내에 2500석을 매진시킬 수 있는 락 밴드가 몇이나 있지? 열 손가락 안에 꼽지 않나? 특히 우리처럼 아직 인디 씬에 머무는 밴드라면 더더욱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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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리적인 반론. 이서는 뭔가 할 말이 있어 보였지만, 명전은 일리가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보통 한국의 인디 밴드는 매우 잘 풀렸을 때 천석 이상 규모의 단독 공연까지 3년에서 5년 정도의 시간이 걸린다. 그 전에는 라이브 하우스를 전전하고, 200명 이상을 들게 하기도 힘들어하는게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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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 사운드는 이미 백명 이상의 공연을 경험해봤지만, 타인의 시선으로 보면 그것은 일종의 천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시운이 모두 맞아떨어져 생긴 기적같은 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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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명전은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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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야 타인의 이야기다. 명전은 충분히 자신이 있었다. 2500석을 매진시킬 자신이. 왜냐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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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우리는, 적극적으로 나갈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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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극적으로 나가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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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인기는 인디 밴드씬이 잘 되길 바라는 사람들의 기대에 힘입은 것이나 다름 없어. 평소 공연에 100명 미만의 인원을 동원하는 밴드가, 앨범을 4천장이나 팔 수 있었던 이유가 뭐겠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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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는 앨범으로 음악을 듣는 사람이 없다. 다 멜론, 스포티파이, 유튜브 뮤직… 그런 음원 스트리밍 사이트를 사용한다. 그룹 사운드도 그런 트렌드에 맞추어, 스트리밍 사이트에 음원을 올려놓은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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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앨범을 사준 사람들이 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굳이 앨범을 사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이 앨범을 샀다는 것이다. 응원의 의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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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우리는 뛰어넘어야 해. 그 사람들의 응원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인디씬을 뛰어넘어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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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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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이야기인지 모르겠다는 다른 아이들의 표정. 명전은 마지막 한방을 준비했다. 아이들이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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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우리는 이제 ‘상업적 영업 방식’을 채택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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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업적 영업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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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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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말인지 감을 잡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앉아있는 세 명의 아이들. 명전은 종이를 건네주고는 말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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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락 밴드 시장은 현재 이원화되어 있는 상태지. 메이저 씬에 진입한 밴드와 그렇지 않고 인디에 머무르는 밴드. 이 둘은 연결되어 있는 것 같지만 실은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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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락 음악이 활성화되어 있는 만큼, 메이저(メジャー)/인디즈(インディーズ)가 확실하게 나뉘어 있다. 나누는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지만, 공통적으로는 유명 레코드 회사에 소속되어 앨범을 내고 음악으로만 먹고 살면 메이저. 그렇지 않으면 인디즈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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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이와 다르다. 뚜렷한 기준이 없어 구별하긴 힘들지만, 명전은 메이저 밴드를 ‘레거시 미디어에 다수 출연할 수 있을 정도의 파급력을 가진 밴드’로 정의하는 편이었다. 왜냐하면 명확하게 타겟만을 노려 송출되는 뉴미디어와 다르게, 레거시 미디어(TV, 라디오 등)은 타겟을 설정하지 않고 송출되기 때문에 전방위적인 인지도를 얻을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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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의 왕이 되거나, 메이저의 말석에 오르거나. 2500석이라는 건 둘 중에 하나는 해야 가능한 수치지. 그리고 내가 생각하기에는, 우리는 인디의 왕이 되기보다는 메이저에 올라가는 게 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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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인디보다 메이저에 올라가는 게 더 어렵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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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하의 물음은 살짝 불만족스러운 뉘앙스였다. 인디 씬에 오래 몸을 담았던 서하에게는 조금 납득하기 어려운 이야기일 수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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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으로만 보자면 당연히 그렇긴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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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는, 다른 아이들을 차례차례로 가리켰다. 이서, 현아, 서하. ‘하수연’ 자신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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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우리는 4인 걸즈 밴드잖아. 음악적 요인 말고 외적 요인으로 인기를 얻을 수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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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길 컨텐츠가 너무도 적어서, 매주 새로 발매되는 음반이 어떤 것인지 찾아보던 시대는 이미 지나버렸다. 세상에는 즐길 것이 너무도 많다. 원한다면 음악 한번 안 듣고도 인생을 영위할 수 있을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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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세상에서 ‘우리가 하는 음악이 좋다면 세상은 결국 우리를 알아줄 거야’ 라는 정신으로 밀고 나간다면… 잘 되면야 좋겠지만, 현실적으로는 굶어죽기 딱 좋은 마인드이다. 굳이 논리적인 근거를 들지 않아도, 홍대 인디씬에 가 보면 음악 하다가 굶어죽기 일보 직전이라 탈출버튼 누르는 사람들이 허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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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만든 음악이면 모든 게 다 되던 시대는 이미 갔어. 아니, 그런 시대가 있었는지 없었는지도 잘 모르겠네. 아무튼 우리의 음악을 들려주기 위해서는 결국 외적 요인에 의한 홍보가 필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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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음악은 분명 팬들을 만들고, 콘서트에 오는 팬 수를 늘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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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게 얼마나 걸릴지는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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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적으로 말하면, 그들이 발매한 타이틀 곡 하나가 차트 1위를 기록할 만큼 떴다고 해도… 콘서트 관객 수는 늘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 사람들이 들은 것은 차트에 올라간 개별적인 곡 하나지, ‘그룹 사운드’라는 락 밴드의 음악이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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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지는 않을 것 같은데. 그래도 곡 들어봤다 이러면 콘서트 가볼만 하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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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콘서트 얼마 하는지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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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는 의문을 제기했다. 그에 대답한 명전. 이서는 턱을 잠시 쓰다듬더니, “3만원? 4만원? 잘 모르겠어.” 라고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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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똑같은 홀에서 공연한 밴드가 11만원 받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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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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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지르는 이서와, 핸드폰을 꺼내 열심히 계산기를 두드리는 현아. “2억7천5백만원…!” 이라는 현아의 목소리가 들린다. 2억 7천 정도인가. 꽤나 금액이 많긴 하다고 명전은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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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11만원을 받지는 않겠지. 좀 낮춰서 금액 책정을 할 것 같긴 한데… 너 같으면 그냥 곡 하나 들어봤다고 11만원 주고 콘서트 갈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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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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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문이 막힌 이서는 잠시 손을 매만지면서 뭔가 생각을 하고 있었다. “2억 7천만원…” 이라고 계속 중얼거리는 현아를 무시한 채, 명전은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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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절대 싸이가 아니다. 아는 건 강남스타일 밖에 없어도 길가다 ‘챔피언’, ‘새’, ‘아버지’, ‘연예인’ 등 들어본 노래가 많은 그런 레벨의 가수가 아니기 때문에, 11만원 정도는 아니더라도 그 정도의 고액을 주고 콘서트를 보러 올 사람은 코어 팬층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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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코어 팬층이라는 것이 그렇게 쉽게 생길 수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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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 명전은 수십년을 살면서 대부분의 유명 락 밴드 음악이라면 다 들어봤지만, 정작 콘서트는 직업적으로 참여한 것 아니면 따로 가 본적이 없었다. 그가 특이한 것도 있지만, 보통 사람들은 콘서트에 잘 안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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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명전은, 빠른 밴드의 성장을 위해서 ‘상업적 영업 방식’을 택하기로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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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그래서 ‘상업적 영업 방식’이라는 게 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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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그 부분은 잘은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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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연’이 잘 모른다는 이야기를 하자, 눈에 띄게 동요하는 아이들. 매일같이 모든 걸 아는 것 같이 이야기를 해 왔기에, 저렇게 이야기를 하는 수연은 매우 어색한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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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어쩔 수 없다. 잘 모르는 게 맞았으니까. 오히려 잘 아는 척을 하는 것이 더 위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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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서명전’으로서 겪었던 일들은 세션, 공연, 그 외 연예계 일 몇개… 순수한 기타리스트로서 살며, 내는 앨범마다 다 말아먹고 다녔던 명전이다. ‘앨범의 성공’이라던지 ‘적합한 홍보 수단’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것은 매우 당연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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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성공한 방식을 써먹어 보는 게 제일 좋겠지. 인디밴드의 영업방식같은 건 많긴 하지만, 4인조 여성 밴드는 좀 드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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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는 것은 아니다. 명전이 아는 음악 하는 후배들 중에서도, 한국의 4인조 여성 밴드는 꽤 있었다. 대부분 다 잘 되지 못한게 문제긴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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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걸즈 밴드나, 아니면 한국의 여자 아이돌을 따라해볼 생각이야. 일본 걸즈 밴드 보다는 한국 여자 아이돌 쪽이 훨씬 더 가깝겠지. 예를 들어서 자체 컨텐츠, 개인 방송, 뮤비 촬영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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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에 희망찬 미래를 떠올리는 느낌의 이서. 뭔가 표정이 일그러지는 현아와,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인 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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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 지향하는 밴드의 모습이 다르다보니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했다. 진심으로 음악만 하고 싶은 사람도 있겠고, 그냥 뭐 유명해지고 그러면 좋은 애도 있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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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확실히 결정된 거는 아니니까. 내가 세운 목표나 방법이 그렇다는 거고, 우리끼리 이야기하면서 좀 노선을 틀 수도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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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이야기를 해 보자. 명전은 그렇게 말을 끝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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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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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에 만날 때까지 하고 싶은 정규 앨범의 컨셉을 정해오라며 숙제를 내준 수연. 이서는 머리를 긁적거리며 컴퓨터를 이리저리 뒤졌다. 어떤 컨셉으로 가야 될지 몰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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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냥 아무거나 해도 좋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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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는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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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처음 수연을 만나서 “밴드 하자!”라고 이야기했을 때, 지금 같은 그림은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그냥 고등학생들의 우당탕탕 밴드 일기! 같은 느낌을 생각했다 해야 할까. 아름다운 1년 했잖아? 하고 해체하는 뭐 그런… [케이온]이나 [봇치 더 락], [뱅드림] 같은 컨텐츠에 나오는, 그런 고교 밴드를 생각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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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에 와서는, 완전 본격적인 일이 되어버린 느낌이었다. 정규앨범을 기획하고, 2500석 콘서트를 기획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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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억 7500만원이라고? 그럼 나한테 떨어지는 건 얼마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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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반으로 나눠도 1억 3천. 그 중에 4분의 1만 가져가도 3400만원. 세금으로 30% 뜯긴다고 생각해도 약 2천만원. 공연 한번에 2천만원을 버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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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가서 4년동안 공부(를 가장한 농땡이)를 한 다음 취직을 하면 어떻게 될까. 대학에서 정신을 차리면 모르겠지만, 대충 흘러가는 대로 살면 연봉 3천 초반이면 많이 받는 거고 4천 5천은 꿈도 못 꾸는 연봉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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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인생을 맞이하리라고 생각했던 이서에게 갑자기 들이닥친 금액, 2천만원. 이서는 들뜰 수 밖에 없었고, 그와 동시에 가라앉을 수 밖에 없었다. 아무튼 그 돈을 벌려면 정규앨범을 잘 뽑아야 하는데, 당장 생각나는 게 없으니. 그냥 재미있는 거 하면 다 잘 된다! 라는 생각으로 꾸리기 시작한 밴드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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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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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와 같은 변화가 싫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좋았다. 맥락없이 인생 어떻게 사나~ 라고 생각하면서 살아왔던 삶에 목표라는 것이 생기긴 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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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고민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다는 것 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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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이서! 밥 먹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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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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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는 머리를 긁적거리며 방 바깥으로 나왔다. 식탁에는 남동생이 앉아 있었다. 오랜만에 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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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이현. 너는 누나 오랜만에 보고 인사도 안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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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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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동생의 뒤통수를 시원하게 후리고 싶었지만, 이서는 참았다. 남동생이 귀여워서 그런 것이 아니라 엄마가 있는 앞에서 그랬다간 본인도 맞을 것이 분명하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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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야. 밴드 잘 되어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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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팸을 집어 먹으며 ‘이게 밥이고 한식이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던 이서에게 날아든, 엄마의 질문. 이서는 스팸을 씹어 삼키고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고민했다. 잘 되어가는 건지, 안 되어가는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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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앨범 발매해야 한다는데, 컨셉을 잡아오래요. 4명이서 컨셉 잡아보고 이야기하자고 하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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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적인 밴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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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다, 이서는 남동생을 슬쩍 쳐다보았다. 아무 말 없이 밥을 먹고 있는 남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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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누나가 밴드 하는거 알고는 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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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드 한다고? 내가 어떻게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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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오는 대답은 뭔가 약간 이상했다. 아무런 티를 안 내려고 노력하지만, 오히려 그 노력이 수상한 느낌을 주는 대답. 이서는 남동생의 눈을 쳐다보았다. 필사적으로 눈을 돌리는 최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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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 왜 이래. 너 뭐 범죄라도 저질렀어? 왜 자꾸 누나 눈을 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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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아니거든. 누나 밴드 한다는 거 전혀 몰랐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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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쩍은 무브먼트를 보여주는 남동생을 보고, 이서는 이 녀석 뭘 숨기고 있지 하고 생각했다. 그 궁금증을 해소시켜 준 것은 엄마의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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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요즘 누나 밴드 누구 좋아한다고 난리치더만. 누구더라? 하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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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가요? 푸핳ㅎ핳ㅎ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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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치심에 얼굴이 붉어진 남동생을 두고, 이서는 크게 웃었다. 오랜만에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으므로. “수연이 사인이라도 받아줄까? 응?”하며 남동생을 놀리는 일은 정말로 유쾌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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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이 붉어진 채 씩씩대며 간 남동생을 두고, 이서는 계속 밥을 먹으며 고민했다. 정규앨범의 컨셉을 도대체 뭘로 정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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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예전에 락 들으셨다고 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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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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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거 들으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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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 앨범의 컨셉에 참조하기 위해 이서는 엄마의 과거를 참고하기로 했다. 일전에 들었던 바로는 어린 시절에 꽤나 락을 들었다고 하던데. 그런 저력이 있다면, 어느정도 컨셉에 도움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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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서의 엄마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되려 방에 들어가버렸다. 갑자기 왜 저러시나, 뭐 하러 가신 건가 싶은 시간이 지난 후 그녀의 엄마가 꺼내온 것은 사진 앨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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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엄마 옛날 사진 있어. 옛날에는 많이 놀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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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을 되새기는 듯한 엄마의 목소리. 이서는 그 말을 들으며 앨범을 폈다. 가장 최신 사진은 엄마와 아빠가 단정하게 옷을 입은 채 껴안은 사진이었다. 00년대 초반 정도 되어보이는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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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앨범을 천천히 앞으로 넘겨보았다. 어느샌가 아빠는 사라지고, 엄마만 남았다. 그리고 그 다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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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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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당히 거친 그래피티를 배경으로, 담배를 문 채 형언할 수 없는 머리스타일을 하고 있는 그녀의 엄마. 뒤 쪽을 보면, 펑크 밴드가 뛰어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이건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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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도 그 시절에 꽤나 잘 놀았지. 이 뒤에 있는 건 너도 알지? 크라잉넛. 여기 뒤에 이 사람이 노브레인의 이성우야. 그냥 알바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까 나중에 음악 하고 있더라. 한참 옛날 시절이긴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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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지금의 ‘조신해보이는’ 모습을 가진 엄마(물론 모습만 그랬다)가 이런 과거가 있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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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살다가 너희 아빠 만나면서 지금처럼 바뀌었단다. 그래도 재미있는 시절이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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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중얼거리는 엄마를 두고, 이서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마치 “엄마와 아빠는 섹스를 해서 너를 낳았어.”라는 이야기를 들은 초등학생처럼, 계속해서 굳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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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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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컨셉을 보여달라고 말을 하긴 했는데… 제한을 두지 않고 자유롭게 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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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은 살짝 어처구니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녀의 손에는 3명의 정규 앨범 컨셉 서류가 팔랑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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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이건 너무한 거 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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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의 손에 팔랑거리고 있는 것은 3장의 종이. 그곳에는 각자 제출한 정규 앨범의 컨셉안이 기입되어 있었다. 현아는 저걸 굳이 A4로 출력해서 읽고 있는 게 참으로 늙은이같다고 생각했지만, 굳이 입으로 내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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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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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뭐 그렇게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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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말을 꺼낸 서하. 하지만 명전은 그 말을 듣고 격분한 기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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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가 그렇게까지는이야, 뭐가. 앨범 컨셉을 생각하려면 예를 들어서 장르. 음악의 컨셉. 전체적인 컨셉. 이 정도는 나와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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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서하의 A4 용지를 내려놓았다. 그녀의 구상이 잔뜩 담긴 종이. 장르는 그루브 메탈. 서하의 소망과 취향이 듬뿍 담긴, 일종의 모독적인 서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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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밴드 이야기 하랬더니 자기 하고 싶은 거나 써 놓은 서하거는 그렇다 치자. 너희들은 뭐냐 이게? 한 명은 그냥 [신나는 노래]를 적어오질 않나, 한 명은 [아니메 락]이라는데, 아니메 락이 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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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의 질타를 피해간 것에 안심하며 혼자 킥킥대고 있는 서하를 내버려둔 채, 명전은 다른 아이들을 거세게 몰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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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 들어가서 조별과제 할 때 이러면 너희들 진짜 욕먹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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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님도, 대학… 안 들어가보셨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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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말이 그렇다는 거지 말이! 여튼 그 이야기는 그만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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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자신의 나이를 까먹고 젊은 꼰대 짓을 하다가, 그 점을 지적하는 현아의 말에 당황해 말을 돌렸다. 아무튼 그가 생각하기에는 이런 컨셉 가지고는 정규앨범을 제작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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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내가 기준을 하나 마련해줄게. 장르를 구분하지 말고, 어떤 컨셉을 정해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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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말해도 컨셉이 뭔지 잘 모르겠는데. 뭐 어떻게 잡으라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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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의 불만섞인 목소리에 명전은 앨범 하나를 꺼내들었다. 한국 인디 록에 길이 남을 명반. [언니네 이발관]의 [가장 보통의 존재]. 소프트하고 미니멀한 사운드와, 심도깊은 가사. 그리고 형언할 수 없는 감정선이 흐르는 동안, 명전은 음악에 집중하고 있는 아이들에게 이야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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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곡을 쓰자는 게 아니라, 컨셉이 무엇인지 알려주고 싶은 거야. 이 곡은 처음부터 끝까지 ‘가장 보통의 존재’라는 컨셉을 유지하고 있지. 아니면 예를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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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또 한장을 꺼내들었다. 흑인 음악을 그렇게 좋아하는 취향은 아니지만, 가끔 생각이 나는 음반. Kendrick Lamar의 To Pimp A Butterf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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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음반이라던가. 흑인에 대한 폭력과 착취. 그 외 기타 등등… 그런 것들을 총체적으로 다루고 있는 앨범. 아니 뭐 이정도까지 나갈 필요도 없고, 우리 저번 EP를 생각해봐. 그때 내가 어떤 느낌으로 곡을 썼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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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이 첫 Ep, [Plastic Nostalgia]에서 구현하고자 했던 것은 ‘겪어본 적 없는 환상향’이었다. 경험한 적 한번 없으나, 미디어에서 수도 없이 주입되어온. 그런 무의식적 이미지들을 음악을 통해서 기억의 전면으로 부상시키고, 겪어보지 못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왠지 겪었던 것 처럼’느끼게 만드는. 그럼으로서 Plastic Nostalg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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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할 필요는 없어. 거창하지 않을 필요도 없어. 너희들이 그냥 지금 가지고 있는 생각. 예를 들어 미래에 대한 두려움? 좋아. 갑자기 우주에서 외계인이 침공한다면? 좋아. 뭐 그런 것들. 생각을 엮어 노래로 만들 수 있을 만한 것들. 그런 것들을 제시해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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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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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말해도, 잘 될 리가 없었다. 그리고 그것에 명전은 딱히 실망하지 않았다. 당장 앨범 제작 지휘자인 본인도 뭔가 잘 안 나오는 상황인데, 그와 다르게 수십년의 경험도 없는 다른 아이들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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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2500석 올해 안에 달성하라고 칼 들고 쫒아오는 것도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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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의 원래 계획은 15000석 콘서트였다. 그것을 위한 첫 번째 걸음이 2500석 콘서트인 것이고. 15000석이라는 게 무슨 장난감 놀음도 아니고, 속되게 말해 ‘1티어급 아이돌’ 정도는 되어야 채울 수 있는 수치이니… 그렇게 급하게 갈 필요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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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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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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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와중 날아온 말 소리는, 이유나의 것이었다. 일전에 유튜브 촬영때 만난 뒤로 명전에게 계속해서 같이 곡 작업을 하자고 이야기하던 사람. 전직 여자 아이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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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어쿠스틱 음반을 내고 싶다는 그녀의 요청에 따라 세션으로 들어온 상태였다. 일단은 싱글을 해 보고, 꽤 호응이 좋다면 앨범을 기획해보자는 이야기를 들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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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그렇게 안 될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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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글을 듣는다고 해서 앨범을 들어주는 것은 아니다. 요새는 죄다 파편화되어 있다보니 어떤 곡이 잘 된다고 해서 그 다음 곡이 무조건 잘 된다는 보장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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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지점에서 명전은 여러모로 할 말이 있긴 했지만, 그냥 그만뒀다. 돈 주는 사람 말 잘 들으면 그걸로 끝이니까. 추가로 근무를 해 준다고 해서 보수가 갑자기 생기지 않는다. A/S는 요청이 들어왔을 때나 하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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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도 이제 정규 앨범을 내야 하는데, 그 건으로 고민이 있는 상태라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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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 앨범? 그걸 왜 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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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말하던 유나는, 잠시 후에 뭔가를 떠올린 듯한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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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러고 보니 밴드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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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직 아이돌이자 현재에도 소속사에서 프로듀싱을 해 주고 있는 유나에게는 분명 생소한 개념일 것이다. 당장 이번 싱글이 첫 셀프 프로듀싱이라고 하니까. 본인의 말로는 한번 시험삼아 해 보라고 했다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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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전부 다 자작곡으로 넣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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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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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하네. 원래 밴드는 전부 다 자작곡 쓰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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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그런 건… 아니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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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에야 약간 셀프 프로듀싱을 못 하는 밴드는 이상한 놈들이다! 라고 말하는 분위기가 강해졌지만, 옛날에는 아니었다. 당장 비틀즈만 해도 2집인 With the Beatles까지는 곡을 사서 썼으니까. 물론 비틀즈의 2집은 1963년에 나오긴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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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저희는 뭐, 아마 다 자작곡 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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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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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이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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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에 수긍하는 듯 “아~”라고 말하는 유나. 그럴 수 밖에 없다. 작곡가들이 무슨 시장바닥에 나와서 5만원 10만원에 곡을 파는 것도 아니고. 잘 나온 곡들은 몇백 몇천만원 한다. 당장 작년을 뜨겁게 달군 fifty fifty의 Cupid의 곡 가격이 9천달러였다고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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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우리의 스타일에 맞는 곡을 찾기도 힘들 것이고, 찾는다 한들 사는 가격도 비쌀 것이고. 결정적으로 몇백 주고 샀는데 그게 흥할 거라는 확신도 없다. 이런 상황인데 어떻게 곡을 사서 밴드를 하니 뭐니 하겠는가? 자작곡 만드는 게 훨씬 나은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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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뭐, 저희는 프로듀서도 없고. 홍보나 그런 것도 스스로 돌려야하다보니까, 이것저것 다 따지고 그러면… 곡을 사고 이러는 거 자체가 좀 시간도 없고 이리저리 힘들다고 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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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그럼 인디밴드는 아예 처음부터 끝까지 다 알아서 하는 거야? 소속사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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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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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신 신기하다는 듯 탄성을 지르는 유나. “그게 가능해?”라는 물음에, 명전은 어깨를 으쓱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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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그때 그 출연했던… 그거도 소속사 안 끼고 한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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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그때 방송 한번 나가야되지 않나 싶어서. 물론 목적은 달성 못하긴 했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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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에요 여고생’의 이미지를 갈아치우기 위해 나갔던 유튜브 방송. 하지만 성과라곤 하나도 없이 그냥 다에요 여고생의 이미지가 더 강해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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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속사에 들어갈 생각은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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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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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속사라. 명전은 그 단어를 입에서 되뇌어보았다. 들어가면 좋긴 하겠지. 인력지원도 잘 해주고. 홍보도 돌려주긴 할 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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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은 있긴 합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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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래? 혹시 생각해놓은 소속사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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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제 마음대로 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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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가고 싶다 생각한다고 해서 서울대를 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생각으로 일이 가능했다면 명전은 이미 60, 아니 70억 인구가 모두 그의 음악을 듣는 슈퍼 아티스트가 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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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혹시, 우리 소속사 한번 와볼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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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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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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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소속사 본사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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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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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이 이쁘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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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화이트로 도배된 소속사의 로비. 소속사의 이름으로 만들러진 Led 등만이 색을 내비치고 있는 가운데, 유나는 안내데스크로 걸어가 직원에게 몇마디를 했다. 잠시 뒤 열리는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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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와, 들어와. 뭐 우리 집은 아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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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대, 혹은 4대 기획사에 들 정도로 거대한 회사는 아니다. 하지만 그래도 유나의 회사는, 사옥을 따로 두고 연습실도 넣어놓을 수 있는 정도의 소속사였다. 그래도 어디 가서 “소속사가 어디에요?”에 대답하면, “오 거기?”라고 말은 들을 수 있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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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도를 걷는 동안 흥미 없는 척 가만히 걸어가면서도, 은근슬쩍 고개를 돌려 시설을 확인하는 수연. 그 모습을 보고 유나는 수연 모르게 웃었다. 그 모양이 너무 귀여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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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러는 게 더 귀엽다는 걸 모르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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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일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다. 여고생 치고는 너무도 딱딱한 말투를 사용하기에 물어봤더니, ‘다에요 여고생’의 이미지를 타파하기 위해서 그러고 있다는 대답을 했던 수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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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렇게 발버둥칠수록 더 귀여워질 뿐이다. 갭이 생기지 않는가. 안 그러는 척 하면서 은근슬쩍 쳐다보는 행동이라던가. 괜히 위엄있는 척, 어른스러운 척 하면서 방송 나가서는 여고생처럼 말투 쓰겠다고 ‘~요’를 하다가 ‘다에요’가 되어버린다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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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모든 노력 자체가, 성인이 된 입장에서는 그저 귀여울 뿐이었다. 마치 성인이 되기 위해서 까치발을 들고 어떻게든 발돋음을 하려는 초등학생을 본 것 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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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러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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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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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런 생각을 유나는 능숙하게 마음 속 깊은 저 멀리로 보내버렸다. 프로이니만큼 능숙하게 대항하는 것도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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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 있는 것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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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뇨, 전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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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심스러운 눈길로 유나를 몇초동안 바라보던 수연은, 이내 고개를 돌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유나는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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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걸 지적해주면, 이런 귀여운 모습을 보기 힘들 것이라고.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별 말 하지 않는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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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의 유나 소속사 방문이 뜬금없이 결정된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수연 자신은 ‘그냥 아는 사람이 오라고 하는 가보다~’ 라고 생각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전혀 다르게 받아들였다. 이를테면 ‘크게 될 슈퍼스타의 재목에 미리 투자하는 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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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나 또한 그러했다. 그리고 그렇기에, 소속사의 내부가 아닌 외부인이 소속사에 아무런 제지 없이 들어올 수 있던 것이다. 유나가 “얘는 진짜 우리 쪽에 끌어들일 수 있으면 대박 난다니까요.”라는 말을 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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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쪽은 연습실이고. 여기는 녹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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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습실이랑 녹음실이 나뉘어 있는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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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연습실은 기본적으로 아이돌 분들이 퍼포먼스 연습할 때 쓰고. 녹음실은 녹음 할 때. 뭐 이정도는 기본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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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에요 여고생’이라는 훌륭한 셀링포인트에, 부족하지 않은… 오히려 넘치는 실력. 그리고 뒤에 따라올 3명의 여고생 밴드원까지. 모든 것이 다 완벽한 인재. 그 결과 경영진 또한 ‘하수연’을 영입하는데 동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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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정도라고? 걔가 그 정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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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단 한명, 최근 영입된 사외이사를 제외하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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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클을 건 사람은, 유나도 잘 아는 사람이었다. 회사의 남돌을 프로듀스하기 위해서 영입된 외부 프로듀서이자 사외이사. 락에 대한 신념을 계속 가지고 있는 사람. 회식때마다 “락 네버 다이!”를 외치면서 윤도현 밴드의 곡이나 김경호의 곡을 매일 불러제낀다는 그런 사람. 흘러간 80년대 90년대 락만을 이야기하면서 “대중음악은 죽었다!”를 외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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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들어본 적은 있긴 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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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본 적 있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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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봤지. 나는 락덕후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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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나는 스스로 ‘나는 어떤 분야의 덕후다’ 라고 지칭하는 것이 상당히 미묘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냥 관두었다. 본인이 뭐 그렇게 생각하는데 어떻게 하겠는가. 상대가 마블 폰케이스를 쓰고 어울리지도 않는 스냅백을 가끔 쓰고 다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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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유나 씨랑 같이 나왔던 방송 봤어요. 그 방송 볼때는 잘 치긴 하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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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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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정도인가 싶은 거죠. 즉시적으로 영입할, 뭐 그 정도는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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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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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나는 즉시 반박을 하려다가 이내 말을 끊었다. 생각해보니 그럴 만 했다. 김광석의 노래 이후 수연이 제대로 된 실력을 보여주었던 부분은, 방송에 나오지 않은 부분이었다. 방송만 보았다면 저렇게 반응하는 것이 당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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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수연이는 엄청 잘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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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으로 보는 것과 실제로 보는 것이 얼마나 차이가 있는데. 그렇게 생각하며 유나는 속으로 분노했다. 이사 정도의 레벨에게 불만을 표출하지는 않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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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한번 볼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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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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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생각 없이 서 있던 수연에게 날아든 질문. 유나는 잠시 경직되었다가, 외부 프로듀서의 말이 ‘영입할 의사가 있다’임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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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보여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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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말입니까? 어떤 것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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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짝 황당한 듯이 되묻는 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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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곡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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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수연에게 날아든 것은 사외이사의 당돌한 한마디였다. 수연은 잠시 황당하다는 듯 사외이사를 쳐다보다, 기타를 끌러메고 열려 있는 연습실의 앰프로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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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이 긱백에서 꺼내든 것은 검은색 기타였다. 뭔가 알아본듯 짧게 탄성을 내뱉는 사외이사를 두고, 수연은 아무 말 없이 기타를 튕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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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곡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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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곡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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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곡인지, 언제 만들어졌는지 전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노래. 하지만 수연의 입에서 나오는 활기찬 목소리와 기타 소리는 절로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들뜨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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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뒤, 이어지는 기타 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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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주 기타리스트의 그것처럼 비주얼적으로 화려하다거나 그렇지는 않다. 하지만 확실하게 귀를 잡아채는 리듬이 그곳에 있었다. 무슨 곡인지 알아내려 오만 표정을 다 일그러트린 채 곡을 듣고 있던 사외이사조차, 그 솔로를 듣자 표정이 풀렸다. 자신의 자존심보다 앞에서 펼쳐지는 명연이 훨씬 중요하다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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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곡이 끝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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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들었어요. 혹시 어떤 곡인지 알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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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alan parsons project의 Games people play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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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란 파슨스… 이름은 들어봤는데, 실제로 들어본 건 이게 완전 처음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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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처음 사외이사가 보여주었던, 살짝 실력을 의심하는 듯한 분위기. 그 분위기는 이미 사라진지 오래였다. 마치 보석이라도 보는 것 마냥 눈을 반짝이며 수연을 바라보는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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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격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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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는 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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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잠시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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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나는 그 모습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속으로 잠깐 내쉬고는 수연을 다시 데려가려 했다. 하지만 그녀를 붙잡은 것은 사외이사의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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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가수보다는 내가 더 잘 알 수 밖에 없으니까. 같이 시설을 좀 소개해주고 싶은데.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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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쪽은 이제 홍보팀. 만약 수연 학생이 우리 쪽으로 들어오게 되면, 이제 이 분들이랑 친해야 할 거에요. 이 분들이 열심히 일을 해 줘야 우리가 이제 돈을 벌 수 있는 거거든? 파하하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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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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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전의 기타 연주를 들은 후. 사외이사는 수연에게 완전 꽂혀버렸는지, 수연을 이리저리 끌고 다니며 시설을 소개해주고 있었다. 홍보팀, 인사팀, 재무팀, 총무팀… 모든 사람들에게 다 도장을 찍겠다는 기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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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루하지는 않을까 생각하며 유나는 수연을 바라보았지만, 다행히도 수연은 이리저리 메모를 하면서 설명을 듣고 있었다. 소속사가 하는 일에 흥미가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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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몇분을 더 돌아다녔을까. 원래라면 유나가 안내해줬어야 할 사옥을 전부 다 자신이 안내해준 후, 사외이사는 수연을 휴게실에 앉힌 채 자신이 커피까지 뽑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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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정도로 마음에 들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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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법 하긴 하다고 유나는 생각했다. 기타 잘 치는 사람은 많고 얼굴 이쁜 여자애들도 많으며 스타성 있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기타도 잘 치고 얼굴도 이쁜데 스타성까지 있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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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외이사는 아이돌 프로듀스를 위해서 스카웃된 사람이긴 했지만, 락을 좋아한다 했으니 락 쪽의 프로듀스도 한번쯤 해 보고 싶었겠지. 그런 와중에 저런 인재가 나왔으니, 당연히 저렇게 극진하게 대접할 수 밖에 없을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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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그럼 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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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를 뽑아놓고 담소를 나누던 사이, 서류를 가지고 슬쩍 들어오는 인사팀 직원. 이사는 그 직원을 보더니 기다렸다는 듯 말을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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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서류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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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수연을 보았다. 수연 또한 할 말이 있는 듯, 잠시 기다렸다가 입을 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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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그럼 저도 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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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요. 이제 계약 설명을 좀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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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집에 가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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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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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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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간 맴도는 침묵. 이사도 유나도, 인사팀 직원도, 수연도 일순간 멈춰버린 상태. 그 침묵을 깬 것은 수연의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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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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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오늘 뭐, 입사한다고 온 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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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저는 그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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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수연아. 소속사 들어갈 생각 있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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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생각이 있다는 거지, 그게 곧 들어간다는 이야기는 아니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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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당하다는 듯 둘을 쳐다보는 수연의 표정. 수연은 그렇게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유나에게 “다음 세션 때 연락 부탁드립니다.” 하고 사라졌다. 남은 세 사람 사이에 맴도는 것은 침묵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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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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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어처구니 없긴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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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나네 소속사에서 나온 명전은, 당황스러운 기분을 가다듬으며 생각했다. 자신은 그냥 소속사에 한번 가보겠다는 이야기를 한 것 뿐인데, 어느새 계약을 하지 않겠냐는 제안까지 들으니 매우 황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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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면 그래서 그런 거였나 싶기도 했다. 굳이 뭐 관계도 없는 사외이사라는 사람이 자신에게 음악을 들려달라고 한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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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명전은 그냥 잊어버리기로 했다. 어차피 유나를 제외하면 두 번은 안 만날 사람이다. 게다가 유익한 지식을 가르쳐주기도 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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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속사가 하는 일이 참 많긴 하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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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반 프로듀싱, 마케팅, 홍보, 영업, 법무, 그 외 스케줄 조정, 코디 등. 명전이 막연하게 하다보면 어떻게든 손에 익겠지라고 생각하던 것들. 소속사에서는 그 모든 것들을 대행하면서 소속 아티스트가 자신의 활동에만 전념하게끔 해 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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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생각하면 좀 아쉽기는 했다. 하지만 명전은 애초에 레이블도 들어가지 않으려 했던 사람. 1년 전 주현과 휘석이 제안했었던 소속사 [엔트라인] 영입 건도 그때 당시 거절한 판에, 유나의 소속사에 들어갈 리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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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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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블 확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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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혹시 생각 있으신가 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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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를 마시며 한가로이 테이블에 앉아 다이어리를 끄적이고 있던 엄마, 혜인에게 명전은 그렇게 말을 건넸다. 다이어리를 덮고는 명전을 바라보는 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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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용방안을 찾아보고 있긴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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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이 생각한 방향은, ‘엄마’가 구입했던 레이블… [레이블 에코사운드]를 확장하는 것이었다. 완전한 소속사는 아니지만, 애초에 인디 레이블들 중에서도 소속사와 비슷한 형태를 띄고 운영되는 곳들이 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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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그런 레이블들이 소속사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소속 가수나 밴드를 케어하는 것은 아니긴 했다. 하지만 그거야, 사람 영입해서 기능 늘리면 되는 일 아닌가. 엄마가 사장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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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식으로 확장을 하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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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제가 생각했을때는, 지금은 그냥 인디 밴드들 음원 유통 정도만 해 주고 수수료 받고. 그 정도만 하고 있는 상황이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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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의 말에, 혜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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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딸을 지원해주기 위해서 충동적으로 구입했던 기업, [레이블 에코사운드]. 원래 혜인은 [레이블 에코사운드]를 가지고 뭔가 사업을 해 볼 생각이 있었지만, 구입해놓고 보니 너무나도 손 댈 곳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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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은 이리저리 새어나가고 있지 않나, 회계나 업무는 그야말로 주먹구구로 이루어지고 있지 않나… 그 때문에 일단 구조 개편과 영업이익 개선 정도만 해 놓고, 나머지는 다 나중으로 미뤄놓은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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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생각에는 기존 레이블들처럼 프로듀서도 영입하고. 거기에 더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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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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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사처럼 마케팅 파트도 이제 신설해서, 좀 본격적으로 가면 좋지 않을까 생각을 하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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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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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인은 뒷목을 매만지고는, 딸을 바라보았다. 바라는 눈치가 있어 보이는 모양새. 하지만 혜인은 그 바램을 들어주기가 좀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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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하면 그런 쪽으로 가면, 아예 돈을 쏟아붓는 형태가 되는 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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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인이 [레이블 에코사운드]를 구매하면서 생각했던 것은, 일종의 인디 음악 플랫폼이었다. 플랫폼을 만들어 음원 구매를 쉽게 하고, 차트나 팟캐스트, 라디오 같은 매체도 만들고. 시장 내부의 플레이어가 되기 보다는, 그냥 플랫폼을 만들어서 시장 자체를 먹어버리자는 게 혜인의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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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녀의 딸, 수연이 제시하는 방향은 정 반대였다. 프로듀서와 마케팅 팀을 영입해서 레이블로 가자는 것. 아예 전통적인 레이블처럼 되자는 것 아닌가. 사업성이 나오지 않는다고 보기는 힘들지만, 그렇다고 잘 나온다고 할 수도 없었다. 일종의 도박에 가까운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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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혜인은 수연에게 이유를 물어볼 수 밖에 없었다. 어머니가 아닌 사업가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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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쪽으로 가면 엄마가 레이블에 투자를 너무 많이 해야 할 것 같은데. 애초에 이미 구축되어 있는 인력을 활용할 수 있는 쪽으로 가는 게 맞지 않니? 다른 소속사에 들어가는 게 훨씬 더 낫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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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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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인의 말에, 명전은 말문이 막혔다. 논리적으로 보면 타당한 이야기였다. [레이블] 딱지가 붙어있어봐야 인디 레이블. 처음부터 끝까지 쌓아올려야 하고, 그 과정에서 돈도 많이 들긴 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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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다른 소속사로 들어가면, 활동방침에 대한 강요는 있을지언정… 시간이나 비용 등을 충분히 아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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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혜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방안을 선택할 이유가 있느냐고 묻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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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리적으로 생각하면 없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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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그렇게 생각했다. 정말 합리적으로 생각해보면, 굳이 이 길을 선택할 필요가 없었다. 그냥 소속사에 들어가면 된다. 명전 정도의 실력이라면 소속사에 들어가자마자 마치 에스컬레이터에 탄 것 마냥 자동으로 방송이니 뭐니 이런 것들을 다 뚫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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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연’의 얼굴이 방송에 나오고, 유튜브로 수도 없이 재생되고. 음악도 마찬가지겠지. 그냥 퍼스트 클래스에 탄 것마냥 편안하게 모든 것이 흘러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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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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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소속사에 들어가면… 일단 우리 밴드 애들이랑은 같이 못 할수도 있고. 게다가 제가 원하는 음악을 못 할 수도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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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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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의 표정이 굳어지고, 입에서는 조금씩 진심이 흘러나온다. 혜인은 허리를 편 채 딸의 이야기를 조금씩 들었다. 사고 이후, 항상 어른스러운 체를 해 왔던 아이의 진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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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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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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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엄마가 레이블까지 샀는데, 제가 그걸… 그걸 버리고 그러면 안 되니까. 꼭 이 레이블을 키워야겠다. 뭐 그런 생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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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렇게 하자는, 뭐 그런 거에요. 그녀의 딸은 민망한 듯 횡설수설하며 말을 얼버무렸다. 그 말을 들은 후, 혜인은 잠시 정지했다가… 딸에게 다가가 딸을 와락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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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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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자!! 수연이가 하고 싶은 거 다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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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딸, 수연을 끌어안은 채로 혜인은 집이 떠나가라 외쳤다. 방금 전까지 가지고 있던 그놈의 ‘사업가적 마인드’ 같은 건 이미 다 내다버린지 오래였다. 이렇게까지 딸이 부탁하는데 뭘 못해주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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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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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 세워진 곳은 홍대 인근의 어딘가였다. 번화가라고는 하기 힘든, 젠트리피케이션이 한참 진행중인 것 같아 보이는 곳. 있는 것이라고는 편의점과 음식점 몇개, 가게 몇개. 그리고 주택 정도 밖에 없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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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회사 여기 아니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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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사 마무리되면 이쪽으로 옮길 거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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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의 말에, 혜인은 그렇게 대답하고는 공사를 한참 하고 있는 건물로 다가갔다. 1층은 유리창으로 뚫려 있는 상가. 2층과 3층은 사무실 정도 되어보이는 건물. 공사는 1층과 지하 정도가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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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층은 사무실이랑 스토어로 사용하게 될 거야. 밴드 굿즈 같은 것들 팔고, 일반적인 사무 같은 거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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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이라 그런지 공사가 잠시 멈춰있는 현장. 이리저리 잡동사니가 어질러져있는 현장을 능숙하게 가로질러가며, 혜인은 명전에게 그렇게 설명했다. 저 안쪽은 사무실. 저기는 화장실. 저쪽은 직원들 탕비실. 저기서부터 여기는 굿즈 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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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 밑으로 내려가면, 여기서부터는 이제 연습실이랑 녹음실. 이쪽은 녹음실이고, 이쪽은 연습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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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음설비가 완전 쫙 깔려있는 지하. 명전은 감탄을 하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렇게 철저하게 방음설비를 갖춰놓은 곳은 그도 그다지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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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비는 어떤 게 들어올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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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이제 수연이 너 의견 듣고 진행하려고. 엄마는 잘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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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에 명전은 꿈에 빠져든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가 이제까지 사용하고 있던 준홍의 작업실도 괜찮은 곳이었지만, 여기와 비견할 곳은 아니었다. 그야말로 최첨단 방음 설비와 편의시설이 들어와 있는 곳. 게다가 혜인의 말로는, 이제 음악 장비까지 다 명전 자신이 넣을 수 있는 곳이라고 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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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잔뜩 들떠 이곳저곳을 살피며 신나게 구상을 하고 있는 딸을 보며, 혜인은 피식 웃었다. 그녀가 이 공사를 시작한 것은 필시 저렇게 즐거워 하는 모습을 보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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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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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사 현장을 돌아본 후 그들이 향한 곳은 인근의 카페였다. 적당히 엔티크한 카페에서 혜인이 해 준 이야기를 듣고, 명전은 커피를 뿜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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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계산하기로는, 충분히 가능할 것 같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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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그게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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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낙천적 해석이 아닌가. 명전은 방금 들은 이야기를 소화해내기 위해서 머리를 굴렸다. 정리해보면 결국 이러한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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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이전에 털어놓았던 이야기를 듣고, 혜인은 ‘딸의 소망’을 이뤄주기 위해서 [레이블 에코사운드]를 전격적으로 개편하기로 했다고 한다. 그녀가 원래 계획했던 인디 뮤직 플랫폼에 더해서, 레이블과 마케팅 홍보 기능까지 갖춰놓은 그런 기업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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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보여주었던 공사 현장은 그 일환이었다. 공사가 마무리되면 에코사운드를 그쪽으로 이사하고, 연습실/녹음실 대여 사업을 벌이면서 인디 레이블을 확장한다. 동시에 레이블을 플랫폼화하기 시작하는 그런 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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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최초에는 이 모든 걸 동시에 할 계획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디지털 플랫폼화를 먼저 이뤄냄으로써 수익 구조를 만든 다음, 오프라인 플레이스를 만든다… 는 것이 최초 혜인의 계획이었다고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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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계단식 계획이 지금처럼 바뀐 것은, ‘딸의 소망’을 이뤄주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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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엄마도 조금 느낀 게 있다보니까. 처음부터 과감하게 투자를 해서 공격적으로 나가야 되지 않을까 생각을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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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낙천적인 기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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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인의 이야기를 듣고, 명전은 그렇게 생각을 했다. 물론 사업이라는 게 다 잘 될 것을 생각하고 투자를 하지, 안 될 것을 생각하고 투자를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혜인보다 조금 더 오래 음악에 몸을 담아본 명전으로서는, 걱정이 될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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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어련히 계산기를 두드려 봤겠지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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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혜인이 속칭 ‘딸바보’라고 한들, 그녀의 본질은 사업가. 아무런 채산도 없이 단지 딸이 하기를 원했다는 이유만으로 투자했을 리가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걱정되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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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도 다 생각이 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수연이 너는 하고 싶은 음악을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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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마음을 읽었는지, 자신을 걱정하지 말라고 하는 혜인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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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 수 없다. 내가 열심히 일하는 수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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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명전은 그 말에 오히려 확신이 더 굳어졌다. 자신이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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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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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앨범 컨셉 회의 3회차. 1회차의 실망스러운 모습을 뒤로 한 채, 2회차를 넘어 3회차까지 도달한 회의는 상당히 정돈된 느낌이었다. 서로 차분히 자신이 할 말을 하는 분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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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회차가 그 꼬라지였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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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뭐 할지만 주구장창 이야기하다가 결국 “그걸 왜 하냐고! 안 팔린다고!”로 감정이 폭발했던 회의. 일본에서 패션가지고 감정 상했던 일 이후로 처음 있었던 싸움. 그때 아무래도 많이 반성했던 모양인지, 다들 조금 분위기가 가라앉은 모양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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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셉은, 이전의 것을 쭉 이어가는 것이 좋다고… 생각,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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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아의 말에 서하는 팔짱을 꼈다. 무슨 말인지 들어나 보자는 태도였다. 그 모습에 현아는 살짝 위축이 된 느낌이었지만,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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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 저희가 시도한… 시도한? 컨셉은… 일종의 청춘, 뭐 그런 것이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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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 뭐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조금 다르게 말할 수는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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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주제를 이어가야, 사람들이 좀… 좋아해주지 않을까. 저는 그렇게 생각을 하는데… Ep에서 J-rock이었던 분위기가, 예를 들어 갑자기 정규앨범에서, 메, 메탈이 된다거나… 그래버리면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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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에 현아에게 눈을 부릅뜨는 서하. “히엑…”이라고 소리를 내며 살짝 무서워하는 기색의 현아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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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비슷하게 생각해. 이미 우리는 장르를 확정지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이미 그룹 사운드의 장르는 이거다, 뭐 그런 식으로 각인해버렸다는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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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오 같은 건 모던 락이잖아? 아직 확정되었다고 볼수는 없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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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오디션이니까 특수하다고도 볼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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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하의 반론에, 반박하는 이서. 명전은 그 분위기를 흥미롭게 쳐다보았다. 대체로 이서와 현아는 J-Rock 쪽으로 가고 싶어하는 분위기였고, 서하는 끝까지 ‘메탈’을 고수하고 싶어하는 듯한 모양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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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겠어. 아무튼 일관성을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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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두 명. 하지만 반론은 기다렸다는 듯 즉시 튀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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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락 밴드를 보던 지금 밴드를 보던, 장르를 바꾸는 것은 흔히 있어왔던 일이야. 굳이 우리가 EP에서 J-Rock적인 분위기를 보여주었다고 해서 그걸 계속 가져갈 필요가 없는 거지. 왜 그래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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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하의 대답은 반론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듯 단호했다. 그에 현아는 뭔가 할 말이 많은 듯 입을 열려고 했지만, 명전은 손을 들어 이야기를 제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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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 그만. 오늘도 결국 결정 못 할 것 같은데, 그럼 여기까지 이야기하고 오늘은 그냥 끝내는 걸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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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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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이 별 생각 없이 진행했던 앨범의 컨셉 회의는, 의외로 난항을 겪고 있었다. 밴드 멤버들 각자가 하고 싶은 것이 의외로 달랐기 때문이다. 명전은 그를 타협해서 조절하고 싶었지만, 제시된 컨셉이 그녀들의 내면에서 나온 목소리인 만큼 절충안을 만들어내기가 굉장히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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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각이 잘못된 거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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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멸하는 맥북의 커서. 명전은 그 커서를 가만히 노려보았다. 뭔가 작업방식이 잘못된 것일까. 거창하게 ‘아이들의 의견을 수용해서 정규앨범을 제작하겠다!’ 라고 하다 보니, 더욱 더 뭔가 안 되어가는 느낌. 점점 더 미궁에 빠져가는 것 같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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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전’일 시절에는 전부 겪어보지 못했던 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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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옛날을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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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에는, 창작의 재능이 밑바닥을 쳤다는 것만 제외하면… 그는 정말 하고 싶은 대로 살았다. 기타를 가르치고자 하면 가르쳤고. 잠적을 하고자 하면 잠적을 했으며. 돈을 벌어야 할 때는 다시 나와 세션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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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말로 유아독존의 삶을 산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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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에는 뭐, 이것저것 고려하면서 살 필요가 없으니까 편했지. 그냥 재미없거나 귀찮게 괴롭히는 사람들 많으면 심산유곡에 들어가서 기타나 붕붕 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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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 비하면 지금은 매여있다는 느낌이라고 명전은 생각했다. ‘엄마’와 매일 만나야 했고, 학교에 가야 했고, 친구들과 놀아줘야 했고, 인간관계도 관리해야 했으며, 밴드 아이들과도 만나야 했고, 밴드와도 연습을 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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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과는 정 반대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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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구속하는 것들이 많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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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걸 다 휙 내던지고 떠날 수 있었던 이전과는 다르게, 더이상 내던지고 떠날 수 없게 되어버린 그런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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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괴로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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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자신에게 물음을 던져보았다. 이전과 같이 살지 못해 괴롭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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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아닌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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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혀 나가지 못하는 음반의 진도. 혜인이 해준 ‘이 정도까지?’라고 할 만큼의 지원. 수많은 팬클럽들의 기대. ‘친구들’과의 우정. ‘서명전’이 ‘하수연’으로 살던 동안 덕지덕지 붙은, 이전의 삶에서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많고 각별한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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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것들을 다 포기하고 뒤돌아 예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을 정도로, 그는 매정한 사람이 아니었다. 예전의 삶도 그렇게 즐거운 삶이 아니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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왠지 모르게, 그는 어린 시절에 봤었던 동화 하나를 떠올렸다. 거기에서 누군가는 그렇게 말했다. ‘네가 오후 네시에 온다면 나는 오후 세시부터 행복해질 것이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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얽매임 없이 혼자서 해버리면, 뭐든지 쉽겠지. 거추장스러운 것 없이. 얼마나 쉬운가. 반대할 사람도 없고 절충할 의견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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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게 뭐가 재미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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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혼자 남은 사람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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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워드 프로그램을 눌러 닫고는, DAW를 키고 기타를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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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은 자신의 이야기, 라고 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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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Ep에서 명전이 만들어냈던 것은… 그의 이야기는 아니었다. ‘하수연’의 재능과 감성을 빌려 만들어낸 이야기. Plastic Nostalg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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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제는 그의 이야기를 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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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그가 느끼고 있는 감정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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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짝 부끄러울 수도 있고, 어쩌면 듣기 싫어할지도 모르지만… 그동안 하지 못했던. 그러나 해야만 했던. ‘서명전’의 수십년 평생을 들여도 한번 하지 못했던, 혹은 하고 싶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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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이야기들을 들어놓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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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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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회의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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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는 연습실의 계단을 걸어올라가며, 조금 피곤하다는 생각을 했다. 수연의 제안에 따라 시작된 컨셉 회의. 세 번이나 했음에도 불구하고 뚜렷한 결과가 나오지 않는 회의에, 이서는 점점 피로하다는 느낌을 받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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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그래도 좀 눈에 보이는 거라던가… 그런 게 있으면 그나마 좀 나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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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것 하나 없이 서로가 하고 싶다는 것만 들이밀고 있는 상황. 이서는 살짝 고개를 흔들어 부정적인 생각을 털어버린 후, 연습실에 입장했다. 이미 기다리고 있는 세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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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왤케 빨리 다녀 다들. 약속시간 철저하게 지키는 거 보니까 완전 모범시민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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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시간은 원래 철저하게 지키는 거…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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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고정관념! 깨버려야 한다니까. 21세기가 뭐야? 그 뭐냐, 자기 PR의 시대라잖아. 시간을 따라가지 말고, 시간이 따라오게 만들어야지. ‘시간이 따라오는 여자’ 얼마나 간지나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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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미친 사람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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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시덥잖은 잡담을 나누며, 이서는 연습실에서 커피를 한 잔 내렸다. 점점 떨어져가는 캡슐의 양을 보면 이번에 한번 사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냥 내버려둬도 누군가가 채워놓긴 하겠지만, 연습실도 공짜로 이용하는데 이런 것 쯤은 충분히 해줘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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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그럼 이제 지겹고 귀찮은 회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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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전에 잠시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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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스레를 떨며 앉으려 하는 이서를 제지한 것은, 수연의 말이었다. 어리둥절해하는 이서와 다른 아이들을 남겨둔 채, 수연은 연습실의 컴퓨터로 걸어가 조작을 하며 등을 돌리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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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가 4번째 회의를 하는데. 아무것도 정해진 게 없이 그냥 이야기만 하고 있는 상황이라서… 일단 그냥 내가 뭔가를 만들어 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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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곡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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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어떤 컨셉을 정하고 만든 건 아닌데… 일단 들어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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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은 그렇게 말하고 음악을 틀었다. 이서는 가만히 눈을 감고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들었다. 명확하게 어떤 장르라고는 할 수 없는 그런 노래. 하지만 어렴풋이 머릿속에서 간질거리는, 그 어떤 느낌이… 그런 이미지가 마치 안개 낀 저 너머에서 손짓하는 듯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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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느낌의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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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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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분 정도의 곡이 끝나고, 잠시 찾아온 정적. 그 속에서 수연이 그렇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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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끝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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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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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하의 질문에 수연은 그렇게 대답하고는 커피를 한 모금 홀짝였다. 살짝 식어버린 머그컵 안 한쪽 구석에는, 수증기에 맺혀버린 물방울들이 서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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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기타로 라인만 잡았고. 멜로디는… 확정은 아니라고 해야 하나. 초안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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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로서는 기타 라인 한 줄과, 허밍으로 잡은 멜로디. 그리고 DAW로 찍은 것이 분명해보이는 간단한 4박자 드럼 비트 하나. 그 외에는 존재하지 않는 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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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서는, 그리고 현아와 서하는… 곡에 잠재된 힘을 느낄 수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을 매료시킬만한 힘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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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명은… 글쎄, 뭐라고 해야 할까. 아직 짓지는 않았는데, 일단은 ‘얽매임’이라고 지어놓는 게 낫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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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말하며 머리칼을 살짝 꼬는 수연. 그 모습을 보며 이서는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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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얽매임’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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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것에 얽매인다는 것일까. 하지만 구속받지 않기를 원하는 그런 분위기는 아니었다. 조금 더 쾌활한. 부정적이라기보다는 긍정적인 느낌. ‘얽매임’을 탈출하기보다는 받아들이고 있다는 그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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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소 개인적인 감정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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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Ep는 좀 우리가 겪었던 일과는 거리가 먼 것들이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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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을 작곡했던 수연이나, 작사를 했던 이서나. 편곡과 연주에 참여했던 다른 아이들이나. 1집의 이야기는, 그녀들의 일상과는 좀 떨어진 이야기였다. 사춘기(라고 하기엔 좀 험했지만)를 겪었던 수연에게나 해당할 노래가 있었을까. 최소한 작사를 했던 이서는 그렇게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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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지금은 조금 다르다. 단지 제목만 들었을 뿐이지만, 이서는 이것이 분명 수연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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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뭐, 이런 느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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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의 말에 생각에 빠진 듯한 나머지 둘. 이서는 세 명을 잠시 쳐다보다가, 하고 싶은 말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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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컨셉으로 가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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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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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이야기를 하는 거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이런 식으로 간단하게 멜로디로 만들어서, 그 다음 완성은 전체가 다 같이 하는. 그런 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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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말하며 이서는 생각했다. 어쩌면 처음부터, 장르니 뭐니 그런 것들보다… 하고 싶은 이야기를 생각했어야 됐을지도 모른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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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주말에 출연자 진짜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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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부를만한 사람이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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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를만한 사람 말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을 찾아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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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래서 부를 수 있는 사람 찾아오면 성혁 피디님이 자르잖아요. 그러면서 왜 자꾸 사람 찾아보라고 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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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끈해서 그에게 삿대질을 하는 작가. 성혁은 민망한 목소리로 “아니 영 아닌 애들만 데려오니까 그렇지…” 라고 대답했다. 그 말에 더 분개해서 “전에 그 데려온 애들도!” 라며 말을 이어가는 메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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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혁은 딴청을 피우는 척 하며 창문 바깥을 바라보았다. 사람 속도 모르고 불어대는 바람아. 너 어디 가려는 그 길 멈추고 나에게 출연자를 데려다 주렴. 물론 그 출연자는 꽤나 화제성도 되면서도, 노래도 괜찮으면서도, 말솜씨도 좋으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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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저는 이제 더 데려올 사람이 없어요. 인맥 다 끌어다 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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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씨, 그러면 진짜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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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라디오 피디였다. 매일 22시부터 24시. 그다지 인기가 많지는 않은, 오히려 없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의 시간. 아주 심야는 아니지만 그래서 더욱 더 인기가 없는… 그런 라디오를 책임지는 피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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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경씨는 뭐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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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쪽도 뭐 없다고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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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오. 그냥 불렀던 사람 부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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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성혁의 혼잣말에 “제발 좀 그렇게 좀 하세요!”를 외치는 작가. 하지만 전혀 그럴 것 같지 않은 기색에, 메인 작가는 한숨을 푹 쉬었다. 그런 그들의 대화를 방해한 것은, 보조 작가의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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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저 괜찮은 사람 한명 알긴 하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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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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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하수연’이라고 들어보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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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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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혁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의 앞에는 ‘하수연’이 노래를 부르는 영상이 틀어져 있었다. ‘인베이전 2024’에서의 콘서트, ‘버스킹 버스킹’에서의 노래, ‘김지연의 음악편지’에서 나왔던 세션 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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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반적으로 나쁘지 않은 모습이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충분했다. 보컬 실력이라던지, 외모라던지, 화제성이라던지, 기타 실력이라던지. 그런 전반적인 것들이 전부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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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죠? 완전 블루칩이라니까요. 노래도 잘 부르고. 얼굴도 완전 이쁘고. 기타 실력도 진짜 장난 아니고. 거기에다가 이런 영상 보면 엄청 귀엽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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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긴 하네. 어디서 이런 애를 찾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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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유명해요. 뭐 엄청은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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왠지 모르게 정보의 습득 경로를 얼버무리는 듯한 보조 작가. 성혁은 잠시 이상하다는 듯 작가를 쳐다보고는, 다시 영상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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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희야. 이 애, 연락처는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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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메일은 있긴 한데, 정확하게는 좀 더 연락해봐야 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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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시간안에 못 맞추지 않나? 괜찮긴 한데, 다른 사람을 찾아보는 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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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아니아니! 제가 꼭 연락해볼게요. 충분히 시간안에 맞출 수 있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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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짝 자신감을 잃은 말투로 대답하던 보조작가. 하지만 다른 사람을 찾아봐야 할 것 같다는 메인 작가의 말에, 보조 작가는 마치 그 사람 아니면 안 된다는 듯 화들짝 놀라며 근로의욕을 불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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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락되면 나한테 바로 말해주고. 수경씨한테는 확정되면 말해주는 걸로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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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제가 어머니한테 말씀을 드려 보겠습니다. 따로 전화 안 드리면 허가 됐다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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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출연해주시는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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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그럼 그 날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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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그 날 뵙겠습니다! 통화해주시고 출연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날 꼭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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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뇨, 제가 더 감사합니다. 아무튼 그날 뵙겠습니다. 수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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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감사합니다를 계속 말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렇게 끊긴 전화. 명전은 잠시 핸드폰을 쳐다보다가 탁자에 내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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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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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려온 전화는, 라디오 출연 섭외 전화였다. 매일 저녁 22시부터 24시까지 하는 ‘최수경의 늦은 밤 콘서트’. 몇년동안 이어왔던 프로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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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경이인가. 꽤 오랜만에 보게 되겠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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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크가수 최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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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어엿한 중견가수가 되어버린 그녀였지만, 첫 시작은 그의 제자로서였다. 기타를 멘 채로 “기타 배우러 왔는데요. 아저씨가 제일 잘 한다면서요.”라고 말하던 수경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거의 몇십년이 지난 뒤의 일이라, 이제는 수경도 제대로 기억 못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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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오래 살고 볼 일이야. 예전에는 라디오 DJ다 하면 진짜 무슨 날아다니는 사람들만 그런 거 하는 시대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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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옛날을 떠올려보았다. 즐길 거리가 텔레비전과 라디오밖에 없던 시절에는, 정말로 라디오 DJ의 권력이 강하던 때였다. DJ니 PD니 하던 놈들이 부르면 와서 술값 내고 곡 하나 틀어주겠다 하는 말 하나만 듣고 돌아가던 게 비일비재하던 시대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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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라디오를 듣는 사람도 별로 없다는 게, 그로서는 너무나도 어색했다. 세상이 언제 이렇게 바뀌어버렸는지. 더이상 청취자 여러분 운운하면서 실시간으로 소통하는 디제이들은 보지 못하는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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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안타깝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런 ‘실시간 소통’ 같은 건, 요즘 사람들이 유튜브를 통해서 훨씬 진화된 방식으로 이미 다 하고 있다는 걸 까먹은 것이 실로 꼰대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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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보다 이거부터 해야 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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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그렇게 생각하며 방을 나섰다. 바깥에는 엄마가 커피를 마시며 노트북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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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부탁 하나 해야 할 것 같은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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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어떤 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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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심야 라디오 나가야 돼서 근로 허가 필요할 것 같은데, 허가 좀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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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진짜니?? 라디오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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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생각 없이 말한 이야기에 갑자기 “그런 일이 있었으면 진작 말을 해야지!”라며 갑자기 연락을 돌리려 시도하는 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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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그런 혜인을 말리려 하다가, 한숨을 한번 내쉬고는 그냥 가만히 내버려두었다. 저런 상태로 들어간 혜인은 말리기 대단히 피곤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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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보다 뭔가 준비를 해야 되겠지. 좀 충격적인 걸 해야 할까, 아니면 뭔가 임팩트에 남을 만한 그런 걸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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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인이 이런 감성 소화하기 쉽지 않은데 대단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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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메이어의 환생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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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존메이어 살아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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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충격 존메이어 살아계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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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가 제일 좋아하는 곡 중 하나인데 ㅠㅠ 이거 부른 사람이 누구인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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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영상에 나와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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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의 원곡 재현이네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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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솔직히 말해서 존메이어만큼은 못침 냉정하게 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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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그정돈 아닌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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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그냥 급이 다른데 무슨소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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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귀가 있으면 알 수 있을텐데 ㅋㅋ 이분 안타깝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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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에 진짜 보기 드문 수준급 여성 기타리스트가 나온 것 같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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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윤은 이미 수백번은 본 영상을 다시 한번 더 돌려보았다. 달려있는 수백개의 댓글들이 이 영상의 인기를 증명해주는 듯 했다. 더 고무적인 것은, 댓글이 한때 달리고 끝난 게 아니라 계속해서 달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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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혹시 이거 부른 여자분 다른 노래도 들어보고 싶은데 아시는 분 있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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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더 듣는 사이 달린 댓글. 아윤은 번개같이 [부르신 분 성함은 하수연입니다. 현재 인디밴드 그룹사운드 리더 맡고 있어요~ http://youtube.com/~~ 참조해보세요!] 라고 댓글을 달았다. 이렇게 또 한명의 팬을 늘린 것 같아 뿌듯한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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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보다 이제는 좀 활동해주지 않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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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분 진짜 숨찾이나 유싱 이런거 안나와주려나 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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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숨찾 나오면 진짜 대박일듯 솔직히 이분만한 사람이 없을 것 같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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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유튜브 댓글들이 울부짖고 있는 [경연 프로그램 나와주세요!] 라던가 그런 것들은 이제는 바라지도 않는다. 아윤이 생각하기에도 수연은 그런 프로그램에 딱 어울리는 인재상이었지만, 문제는 그냥 활동 자체가 없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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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떡밥 없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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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뭐라도 올라오지 않았을까 켜 본 트위터. 아윤은 멈춰버린 그룹 사운드의 트위터를 잠시 바라보다가, 다시 어플리케이션을 껐다. 대체 이 비활동기는 언제 끝날 것인가. ‘버스킹 버스킹’과 한승고등학교 축제 영상으로 인해 살짝 늘어나는 것 같던 그룹 사운드의 인기는, 본체의 활동이 없는 바람에 죽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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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규 유입 팬들에게 “예전에는 파라독스에서 한달에 한번 공연을 하긴 했는데…” 라고 말해봤지만, 지금 공연을 안 하니 무슨 소용인가. 아윤은 한숨만 쉴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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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나보다는 그 애들이 더 걱정이긴 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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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이야 뭐 덕질 대상이 걱정되지만 그건 그냥 걱정일 뿐이다. 팬들의 생계라던지 그런 부분에 영향이 오는 것은 없다. 하지만 활동이 정지된 그룹 사운드 본인들은 어떻겠는가? 아윤은 그런 생각을 하며 그냥 믿고 기다리기로 했다. 언젠간 활동을 재개할거라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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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뭐 떡밥 없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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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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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아온 트위터 DM에, 아윤은 그렇게 대답했다. 신규 유입 팬이자 수연의 축제 공연 영상을 제공해주었던, 고마운 고등학생. 하지만 그런 사람이 이야기를 한다 한들 그 부탁을 들어줄 수는 없었다. 없는 것을 만들 순 없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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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내가 대형 유튜버를 해봐? 그래서 이제 그룹 사운드에 광고안건을 하나 맡겨봐? 그렇게 하면 떡밥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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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윤은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며 팬카페를 켰다. 그녀와 같은 처지의 사람들과 슬픔을 같이 나누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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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팬카페에는 그녀의 생각과 다른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온통 환호하고 좋아하는 사람들만 몰려 있는, 그런 평소와는 완전 다른 분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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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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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기대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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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브 실수하는거 아닐지 걱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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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대가 약간 아쉽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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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등. 불과 몇시간 전만 해도 우중충했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돌변한 상황. 그녀는 어색해하며 게시판의 글을 휙휙 뒤로 넘겼다. 원인은 단 하나. 누군가가 남긴 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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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국에 종사하는데 수연님 나오신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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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라디오 프로그램 관련해서 이야기 들었는데 수연님이 게스트로 나오신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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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야 프로그램이긴 한데 게스트 좀 짱짱해서 나올법한 한 그런 곳인가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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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서 라이브도 하신다고 하니까 본방사수 꼭 하셔야 할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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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헐 어느프로그램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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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제가 그것까진 알려드릴수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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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ㅋㅋㅋㅋㅋ 이분 본인이 섭외하셨나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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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야??? 미성년자인데 되실라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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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요즘 미자도 허락받으면 된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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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헐 대박 저도 허락받고 야간알바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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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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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이브?? 미쳤다 밴드 전체 나오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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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그건 힘들 듯… 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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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라이브에 밴드가 다 나오기 힘들죠 아마 본인만 나오실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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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ㅠㅠㅠㅠ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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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로는, 해당 프로그램이 어떤 프로그램인지 추리하는 글들이 쭈루룩 이어져 있었다. ‘말은 못하지만 은근슬쩍 흘리는’ 스태프의 태도에 사람들은 대부분 그 프로그램이 어떤 프로그램인지 찾아낸 것으로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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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 가수. 엄마가 좋아하던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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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DJ는, 아윤은 들어본 적 없는 사람. 하지만 아윤의 부모 세대는 좋아하는 그런 가수. 그녀는 이런 DJ랑 우리의 가녀린 ‘하수연’이 제대로 소통할 수 있을지 궁금해하며, 그 날을 손꼽아 기다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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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대본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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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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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경은 작가가 건네주는 대본을 받아든 후, 대충 읽기 시작했다. 언제나 그렇듯 평범한 인사로 시작한 대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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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겨울 밤이 되면 그런 고민 하지 않나요? 창문으로 들어오는 냉기가 달갑지 않다가도, 커튼을 치면 저 바깥 밤하늘이 제대로 보이지 않아 답답하고 숨이 막히는 것 같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가 돈 조금 더 내지 하고 보일러를 약간 세게 트는 게 일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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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갑습니다! 오늘도 여러분의 심야를 책임지는, 늦은 밤 콘서트의 최수경입니다.]… 수경은 별 문제 없어보이는 대본을 쭉 넘기다가, 문득 생각이 닿아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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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게스트 온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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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게스트는 2부에 들어오기로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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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에 수경은 파라라락 대본을 넘겼다. 넘어간 페이지에는 ‘하수연’, ‘그룹 사운드’, ‘EP’ 등의 글자가 알알히 박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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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 하는 애야? 어떤 노래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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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그… 어떤 노래더라. 성희야! 어떤 노래라고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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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아, 기본적으로 락이랑 블루스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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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스? 희안하네. 이 나이에 블루스 하기도 쉽지 않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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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경은 그렇게 말하고는 대본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이리저리 상대방을 칭찬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진 스크립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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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수경은 이 내용이 조금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없는 말을 지어내서 하는 것은 그녀의 취향이 아니었기에. 진실로 그녀의 칭찬을 받을 수 있는 아이인가, 궁금증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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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 공연 좀 보자. 가능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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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잘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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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분 정도 되는 공연 영상 2개를 본 후, 수경이 그렇게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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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정도로 잘 해요? 저는 잘 모르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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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너는 나랑 같이 프로그램 한게 한참 됐는데 아직도 음악을 모르니. 이 정도면 진짜 엄청 잘 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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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경은 의아해하는 피디에게 영상의 이곳저곳을 가리키며 설명을 시작했다. 이 부분은 어떤 주법을 활용한 것이고, 이 부분은 어떤 방식으로 친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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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컬도 나쁘지 않지만, 이 애 진짜 기타를 잘 치는 걸. 이 정도 실력이면 자기 나잇대에는 적수가 한명도 없겠는데. 아니, 그냥 나보다 잘 치는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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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정도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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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제발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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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해서 실력에 감탄을 하던 수경은, 대본을 쭉 훑어보더니 몇개의 부분을 자기가 직접 수정했다. 주로 수연을 소개하는 멘트와 관련된 부분이었다. 그렇게 대본을 훑어나가던 수경은, 대목 하나를 보고 꽤나 놀란 듯 큰 소리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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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이 애 명전 선생님 제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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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그게 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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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아해하는 메인 작가. 수경은 잠시 추억속에 빠진 듯한 눈을 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설명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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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릴 때. 가요제 우승하고 가수로 이제 데뷔해야겠다 싶었을 때… 그때 음반사가 아직 실력이 엄청 좋지는 않다고 나한테 레슨 붙여줬었거든. 그래서 한 1년 반 기타 배웠는데, 그때 이 사람한테 배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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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 스승님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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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 옛날에는 좀 찾아뵙기도 했는데, 요즘엔 연락도 안 닿고 뭐 그렇기도 해서 제대로 못 찾아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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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그 분도 부르는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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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브 작가의 말에 수경은 아련한 듯한 눈빛을 하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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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가셨어. 작년에 돌아가셨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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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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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좀 마음이 안 좋았는데. 연락 안 닿은 지 몇년이 되어서, 돌아가셨다는 소식도 못 들었지. 마지막 제자?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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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경은 대본에서 몇 가지 부분을 더 고치고는, 다시 한번 공연 영상을 틀어서 보았다. 다른 것보다, 계속해서 흘러나오는 공연의 기타소리에 그녀는 집중을 하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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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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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 당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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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갔다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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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국에 그녀를 데려다준 후, 혜인은 회사로 다시 사라졌다. 일 하고 있다 끝날때 쯤 다시 온다고 하던데. 역시 사장의 일은 그만큼 바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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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헛소리를 중얼거리며 도착한 곳은, 라디오 방송국이었다. 입구에 기다리고 있던 누군가는, 수연을 보자마자 바로 손을 들고 달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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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연 님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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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네,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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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반갑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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왠지 모르게 명전을 보고 벌벌 떨기 시작한 사람. 명전은 그 모습이 상당히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냥 내버려두었다. 사람이 좀 몸이 약할 수도 있지 뭐 그런 것 가지고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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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다다른 라디오 스튜디오에는, 이미 사람이 몇명 와 있었다. PD로 보이는 꽤나 나이 든 중년 아저씨. 마찬가지로 메인 작가로 보이는 꽤나 나이 든 아줌마 한명. 그 외 스태프.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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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나이가 들긴 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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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년 전, 어릴 때 본 얼굴이긴 했지만… 명전은 수경을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꽤나 심술난 듯 남을 쳐다보는 저 눈빛. 달라진 게 그다지 없다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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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하수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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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안녕하세요. 최수경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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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때도 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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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하… 그러셨습니까? 정말 힘드셨겠습니다. 그래도 그분이 그럴 생각은 아니셨을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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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에요. 분명히 나 울릴려고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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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허… 그럴 것 같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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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호하게 말하는 수경. 명전은 그에 답하면서도 등에 땀이 흐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얘는 어디서 ‘하수연’이 ‘서명전’의 제자라는 이야기를 들은건지 모르겠는데, 갑자기 그 이야기를 꺼내더니 방송 맞춰볼 생각은 안 하고 주구장창 ‘서명전’의 욕만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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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경이 누나가 울 뻔 했다니 상상이 안 가는데요. 도대체 어떤 분이셨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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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 호랑이였어. 음 하나만 틀려도 소리 막 펑펑 지르시고. 나 진짜 몇번이나 연습실 뒤에 가서 울었다니까. 수연 학생은 그런 적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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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저는 그런 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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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되시고 수연 학생이 이쁘니까 완전 천사표 되셨나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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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명전의 말에, 코웃음을 치며 반응하는 수경. 명전은 이 어처구니 없는 음해를 어디부터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 ‘내가 서명전이다!’ 라고 하면서 반응을 할 수도 없고. 게다가 그가 필사적으로 변호를 해주면, “왜 그렇게 그 시절의 일을 잘 알아요? 태어나지도 못했을 시기인데?” 하면서 이상해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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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모로 불리한 싸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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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대표적으로 생각나는 이야기가 하나 있어. 기타 배운 지 몇개월 된 다음 일인데. 그날도 이제 나보고 너무 못한다고 타박을 하시는거야. 그런데 이제 그날 소속사 사장님이 와서 이제는 데뷔 시켜야 할 것 같다고. 레슨 그만둬야 될 것 같다고 하시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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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됐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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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지금 수경이가 얼마나 잘하고 있는데! 라고 하면서 기타 더 배우면 진짜 대성할 거라고. 나 모르게 그렇게 침튀겨가면서 이야기를 하시는거야. 조금만 더 배우면 진짜 완전 천재 기타리스트 되는데, 지금 여기서 놓기에는 너무 아깝다고. 막 무릎까지 꿇어가면서 그러시는데… 그런 다음 이제 사장님 가니까 나는 아직 멀었다고 더 배우라고, 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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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앞에서 칭찬해주는 거는 정말 자제를 하시던 분이였지, 라며 회상을 끝마치는 수경. 명전은 몸에 열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저런 일은 이제 기억도 안 나는데 본인은 기억을 하고 있단 말인가. 게다가 무릎까지? 아무래도 수경이 잘못 기억하고 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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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스승님이셨지… 수연 학생한테는 어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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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저한테는 뭐. 그냥 평범하게 기타를 가르쳐주셨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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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기타 실력 보면, 그러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엄청 혹독하게 가르쳤을 것 같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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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경은 그렇게 말을 맺더니, 꿈결속에 빠진 눈빛을 하며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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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반을 많이 파시지는 못하셨지만… 서 선생님은 정말, 기타를 정말 잘 치셨지. 내가 이때까지 뵈었던 사람중에는 외국 사람 다 통틀어서도 제일 잘 치셨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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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말하며 수경은 명전을 쳐다보았다. 마치 자신을 시험하는 듯한 표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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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스승님의 제자인 수연씨는, 얼마나 기타를 잘 칠 수 있을까. 얼마나 노래를 잘 할까. 기대가 되는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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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 그럼 잠시 광고 듣고 오겠습니다. 2부에는, 깜짝 놀랄만한 게스트 한분이 계시니까! 많은 청취 부탁드리겠구요. 어떤 분이냐는 질문도 들어오네요. 제가 당장 말씀드리는 것은 조금 그렇고, 조금 있다가의 즐거움으로 남기겠습니다. 벌써 누구인지 맞추신 분도 계시네요. 네! 광고 듣고 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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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일 없이 마무리된 방송의 1부. 문을 열고 나온 수경은 명전을 보고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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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곡은 좀 기니까, 들어가서 세팅 하고 있으면 될 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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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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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를 멘 채로 들어가 있으니 세팅을 도와주기 위해서 엔지니어와 스태프 한명이 들어왔다. 이것은 여기에 연결하면 되고, 이것은 여기… 들고 온 페달보드와 기타가 척척 연결된 후 명전은 가볍게 기타를 튕겨보았다. 완전히 흡족한 사운드는 아니지만 그래도 충분히 만족할만한 그런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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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그럼 이제 오늘의 게스트를 소개해볼 시간인데요. 여러분, 알고 계신가요? 2024년은 락의 원년이라는 것을? 아하하, 농담입니다. 2024년에는 딱히 별 일 일어나지 않았죠. 하지만 대한민국 락에 지각변동이 일어날만한 해인 것은 분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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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한 스케일의 소개문을 읽어내려가는 최수경. 명전은 어처구니없다는 감정을 숨긴 채로 수경을 바라보았다. 방송국 한번 나갔다가 “연예계에는 빈말 하는 사람 밖에 없어요!” 하면서 질질 짜던 시절이 엊그제같은데, 어느새 저런 말도 천연덕스럽게 할 수 있는 아이가 되어버렸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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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락 리스너분들에게 기대를 받고 있는! 화제의 밴드 그룹 사운드! …의! 기타리스트이자, 보컬이자, 리더인… 하 수 연 기타리스트 모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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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갑습니다. 기타리스트 하수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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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반갑습니다. 가수 최수경이라고 합니다! 혹시 제 노래 들어보신 적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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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몇곡 들어봤습니다. ‘남은 것들에 대하여’라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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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제 노래 들어봤다는 학생은 처음 봅니다. 엄청 신기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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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스레를 떨며 코너를 진행해나가는 수경. 명전은 가만히 대본에 따라 이야기를 해 가며 수경의 이야기를 맞받았다. 별 문제될 것 없이 진행되던 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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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면 저랑 수연 학생은 일종의… 뭐라고 해야 할까요. 동문? 그 무협지에 보면 나오는. 그런 거라는 거 알고 계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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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뇨, 전혀 몰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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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14님, ‘거짓말 치지 마세요.’ 라니, 진짜라구요. 2456님, ‘수경님이랑 저분이랑 나이 한 50살 차이는 날 듯.’ 이라니! 50살은 아냐! 사람을 뭘로 보고 그러는 거야. 50살까지는 아닙니다. 그 정도는 아니에요. 저를 가르치신 ‘서명전’ 기타리스트가, 하수연 학생도 가르치셨다고 하거든요. 그래서 동문 관계라는 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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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말하고는 수경은 너스레를 떨었다. 자기가 예전에 ‘서명전’ 기타리스트에게 뭐 이런저런 가르침을 받았는데. 그게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있고 이해가 되던 것도 있는데, 참 어릴때는 고생 많이 했다느니. 그 양반 참으로 고약했다느니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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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날 뭐라고 하기만 하면 어디 뒤에 가서 울고, 울지 말라고 뭐라 하면 미성년자인데 술 먹고 담배피고 와서 나한테 “아저씨는 맨날 뭐라그래요!!”하고 소리지르던 녀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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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스승님이 저한테는 그러시지 않으셨습니다.”라는 말 밖에 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의 신세를 원망했다. 뭐 어떻게 할 것인가. 갑자기 자신에게 ‘서명전’이 빙의했다는 설정으로 “네이놈 수경아!! 거짓말을 일삼는 네년의 입을 꼬매버리리라!!” 이런 소리를 할 수 없는 것이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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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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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마지막으로… 이런 곳에 나왔는데 라이브 한번 안 들어볼 수 없겠죠. 한곡, 아니 두곡. 세곡? 글쎄요… 네곡? 시간이 약간 있긴 한데. 가능하실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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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충분히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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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그렇게 말하고는 피디를 쳐다보았다. 부스 바깥에서 나오는 오케이 사인에 명전은 잠시 기타를 튕겨보았다. 별달리 튀지 않고 잘 나오는 사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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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곡은 어떤 것으로 하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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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드 차원으로 나왔다고 하면 밴드 곡을 바로 연주를 할 텐데… 멤버들도 없고, 저희가 현재 발표된 자작곡이 그다지 많지 않다보니. 일단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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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곡을 연주해야 할까. 그는 머릿속에서 곡의 리스트를 살짝 뒤져보았다. 앞서 그의 기타실력에 대해서 한참 이야기가 된 것을 생각하면, 그래도 좀 실력을 내보일 수 있는 곡을 선정해야 할 텐데. 그러면서도 무식하게 그냥 갈기기만 하지는 않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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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essiah Will Come Again로 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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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명전은 전조 없이 노래를 시작했다. 노래라기보다는 그냥 막연한 읇조림을. 이해하지 못하는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는 스태프들과 놀란 눈을 하는 수경을 무시한 채. 아주 작게 기타를 울리며 조금씩, 그냥 말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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읇조림이 끝난 후 울리는 기타. 뭐라 말 못할 감정을 담은 음 하나하나가 퍼지며, 아까 전까지만 해도 쾌활했던 스튜디오를 순식간에 침묵속으로 몰아넣었다. 소리 하나라도 섞여 들어가는 것을 자제하게 만드는, 그런 엄숙한 분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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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일 없이 흐르는 강물은 겉으로만 보면 잔잔해보인다. 하지만 그 표면에는 무한대의 움직임이 있다. 지금 스튜디오에 울려퍼지는 소리도 그러했다. 수면 아래 수천미터는 넘어가는 고래가 잠자고 있는 것처럼. 손으로 튀어오르는 힘은 그 잔여물에 불과한 것처럼. 직선적인 음인 것 같아 보여도, 자세히 들어보면 끊임없이 흔들리고 요동치며 청자에게 어떤 감정을 가져다주는 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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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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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연주를 들으며 수경은 생각했다. 자신의 스승, ‘서명전’이 가끔 가다 치던 곡. 읇조리는 가사와, 날카롭게 청자의 심장을 후벼파는 기타 사운드가 특징적인 바로 그런 곡. ‘가장 위대한 백인 무명 블루스 기타리스트’의 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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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y Buchanan의, The Messiah Will Come Ag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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넥의 중반부부터 끝까지. 레가토로 그 전체를 훑어버리는, 손을 혹사시키는 부분이 연주된다. 저 아이는 그러면서도, 단 하나의 노트도 놓치지 않고. 단 하나의 표현도 얼버무리지 않은 채… 평이한 모습으로 연주를 했다. 마치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듯. 그냥 일상적인, 바람 하나 소박히 불고 넘어간 거리의 풍경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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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그녀의 스승과도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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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첫 곡 잘 들었습니다. 어유, 청취자 분들 반응이 엄청 쏟아지고 있네요. 4233님, ‘정말 잘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2526님, ‘혹시 녹음해놓은 거 튼 거 아닌가요? 라이브라는 게 믿기 힘드네요’ 아유, 전혀 아닙니다. 제 바로 앞에서 치셨어요. 그 외에도 청취자들의 문자가 엄청 오고 있는데요, 일단 곡 소개를 좀 해주실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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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곡은, Roy Buchanan의 The Messiah Will Come Again이라는 곡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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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몇분 전, 듣는 사람들의 귀와 취향을 뒤흔들어 놓을 정도로… 그렇게 테크니컬한 연주를 펼쳤다고는 믿지 못할 모습으로. 자신은 아무 것도 한 적이 없다는 듯 얌전하게 곡을 소개하는 하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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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모습을 보며, 최수경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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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이지,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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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해낸 일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이런 건 진짜 아무것도 아니야’ 라고 말하는 듯한. 오히려 이런 일을 하지 못한 너희들이 이상한 것 아니냐? 라고 해석될 수도 있을법한, 그런 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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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다, 그녀의 스승 ‘서명전’과 닮은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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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지간은 닮는다고 하던데, 결국은 그렇게 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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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경은 쏟아져 들어오는 청취자들의 사연을 읽어주며 그렇게 생각했다. 그동안 봐 왔던 ‘서명전의 제자’들은 확실히, 명전과는 완전 다른 느낌의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결국 늘그막에, 죽기 직전에… 그 자신과 똑같은 사람 한명을 만들고 만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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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우, 문자들이 너무 많이 들어와서 다 읽지를 못하겠네요. 아무튼 다들 감사합니다. 반응이 너무 격렬하신데, 문제는 저희가 아직 다 끝난 게 아니에요. 아직 한 곡 더 남았거든요. 그렇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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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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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수경의 물음에, 하수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엔 어떤 곡일까. 수경은 대본을 읽으며 하수연을 슬쩍 쳐다보았다. 눈가에 내려앉은 속눈썹이 처연하리만큼 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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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다음 곡은… 이번에는 어떤 곡인지 소개부터 부탁드릴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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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죄송합니다만… 이번 곡은 아직 어떤 곡인지 이름을 붙이지 못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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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그럼 혹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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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저희가 이번에 정규 앨범을 내기 위해서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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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이 들리자, 스튜디오 한쪽 구석에서 덜컹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수경은 그 쪽을 이상하다는 눈치로 쳐다보았지만, 따로 말을 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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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곡은, 아마 정규 앨범에 수록이 될 것 같습니다. 아직 명확하게 완성된 곡은 아니지만… 가사도 정말 일부분만, 초본으로만 붙었지만요. 어찌되었든 기타로 들려드릴 수 있는 부분만 들려드리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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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오… 그럼 완전, 영어로 하면 익스클루시브(Exclusive)라고 하죠? 저희 라디오에서 독점 공개를 하는 거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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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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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영광인걸요. 아까 그 곡을 듣고 나니까 더더욱 기대가 되는데요. 그럼 곡 한번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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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수경은 그렇게 말하고는, 마이크를 자신의 입에서 슥 치웠다. 이후 스튜디오는, 다시즘 정적. 들리는 것은 수연이 연주를 준비하는 듯 부스럭대며 앰프와 기타를 매만지는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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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후 손 끝에서 풀려져나오는 기타 소리에, 최수경은 순간적으로 소름이 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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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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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번뜩 쳐든 것은, 그녀 뿐만이 아니다. 녹음실 밖에서 녹음을 하고 있던 피디도. 메인 작가도. 저 멀리 떨어져 있던 서브작가도. 엔지니어도. 모두 다 고개를 들어 수연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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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다. 똑같은 형태의 기타. 똑같은 앰프. 세팅값은 조금 다를 수 있으나 음색 또한 비슷하다. 하다못해 피크조차도 바뀐 것이 하나도 없다. 달라진 것이라고는 앉은 자세 정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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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하수연의 손에서 펼쳐진 음은, 아까 전과는 확실히 달랐다. 뭐라고 해야 할까. 생동감이 더해졌다는, 아니 어쩌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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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이 들어갔다는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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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늘도 저 열차에 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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흘러가는 강물도 저 멀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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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월의 흐트러짐도 하나도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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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관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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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수 없는 노랫말. 의미보다는 음운을 더 강조한 듯한 가사. 기타도 가사도 목소리도 발구름도, 모든 것은 흘러가는 강물과도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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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망의 저편 숲속의 어딘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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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위에 세워진 회색 십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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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빛 안개는 너를 위한 건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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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목소리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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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희는 눈을 감았다. 서브 작가로서 라디오가 제대로 돌아가고 있는지 봐야 했지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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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듣고 있는 이 노래가 중요했으니까. 이 기타가, 이 보컬이, 이 분위기가… 그런 것들이 중요했으니까. 다른 것이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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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도 달라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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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은, 이제까지는 현장에서 듣던 것이 아니라서 그럴지도 모른다. 혹은 단지 이전에 부르던 노래가 지금과는 다른 것이라서 그럴지도. 혹은… 이유는 많다. 가져다 붙이려면 어떤 것이든 붙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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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 어떤 이유도, 지금 성희가 느끼고 있는 이 감정을 설명할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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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소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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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수경은 생각했다. 그때 당시에는 몰랐지만, 가수로서 충분히 성장한 지금에는 알 수 있는 것. 그녀의 스승, ‘서명전’이 끝까지 가지지 못했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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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처럼 완벽에 가까운 연주를 선보이던 그녀의 스승이 힘들어하던 것. 그녀 최수경이 수십번을 조언했지만, 결국 그들의 사이만 멀어지게 만들고 말았던 것. 그럼으로서 스승의 죽음을 알게 하지 못했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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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스승의 마지막 제자는, 스승이 가지지 못했던 것을 마음대로 풀어내고 있었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발전할 여지는 충분히 많지만… 사람들의 반응을 이끌어내고, 청자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는 충분할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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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게 재능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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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경은 잠시 눈을 감고 노래를 감상했다. 이제까지의 모든 생각은 다 잊어버리고, 그저 노래를 듣기만 했다. 나비의 첫 번째 날갯짓을 감상하는 기회는 흔치 않다고 생각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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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것은 곧 바다를 건너가, 지구 반대편에서 폭풍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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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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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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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과 아이들은, 리모델링한 신사옥의 1층에 모였다. 라디오의 홍보효과도 모니터링할 겸, 혜인이 “그룹 사운드의 레이블 관련 건으로 아이들에게 알려주고 싶은 게 있단다.” 라는 말을 듣기도 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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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이지? 그보다 수연이 너 라디오 나간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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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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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 완전 대박이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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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정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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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정도라니까. 조금 있다가 보여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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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이야기를 나누며 들어간 신사옥. 아이들이 “와 엄청 좋아졌어.” 라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명전은 안에서 걸어나오는 두 사람을 볼 수 있었다. ‘하수연’의 어머니, 이혜인과… 한 사람은, 한번도 보지 못했던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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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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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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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숙이며 인사한 명전과 아이들. 혜인은 인사를 받아주고는, 90도로 깍듯이 절을 하고 있는 여성을 일으켜 소개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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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 이제 우리 레이블의, 특히 너희들의 마케팅을 도와주실 정유영 과장님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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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정유영입니다! 와! 다들 정말 이쁜 애들밖에 없네요. 눈이 완전 호강하는 느낌? 이전 회사에서도 이런 애들은 진짜 보기 드물었어요!! 사장님, 혹시 우리 회사 밴드는 기준이 외모인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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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혀 아닙니다. 아무튼 정유영 과장님은… 기획사 아이돌 파트에서 마케팅 담당하시다가, 이제 우리 회사로 이직하게 되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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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부탁드려요! 그리고 실례일지도 모르지만, 혹시 여러분 MBTI가 어떻게 되세요? 제가 그런 거 엄청 좋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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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인의 말이 끝나자마자, 순식간에 말을 쏟아내는 ‘마케팅 담당’. 다른 아이들이 어버버대며 상대의 페이스에 말려나가는 사이, 명전은 한 발짝 떨어져 질린듯이 ‘정유영’을 쳐다보았다. 소개받은 지 몇초 되지도 않았는데 순식간에 사람의 기를 빨아들여버리는 그런 느낌의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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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 학생~! 어, 혹시 수연 학생은 MBTI가 어떻게 되나요? 저는 ESFP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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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런 명전에게 따라들어오며 갑자기 MBTI인지 뭐시깽이인지를 묻는 유영. 명전은 “아, 제가 그런 걸 해 본적이 없어서요.” 라고 하며 유영을 떨쳐내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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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TI 검사 해보신 적 없나요? 그럼 이 참에 해보면 되겠다! 마케팅적으로도 그런 건 해 봐야 한다고요. 왜냐하면 이제 팬층이 다들 MBTI를 향유하는 그런 타겟이다보니까! 요즘 아이들은 대부분 다 MBTI로 스몰톡을 시작하잖아요. 나는 I야, 나는 E야… 뭐 그런 이야기들! 그런 거에 적응하기 위해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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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살려다오. 도대체 내가 왜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 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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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명전의 속마음은 누구에게도 전해지지 않았다. 저 멀리 뒤에서, 나머지 세 명이 ‘나는 살았다’ 라는 표정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이 보였다. 비겁한 배신자 녀석들. 이 고난에서 빠져나가면 반드시 복수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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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다시 한번 소개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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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히 리모델링이 끝난 건물. 깔끔하고 나즈막한 카페의 분위기를 내는 앞쪽 스토어와, 늦은 가을 오후 5시 경 나른한 햇빛을 받으며 고양이들이 꾸벅꾸벅 잠들것만 같은 느낌의 사무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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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사무실 안에, 10명이 넘는 사람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하수연’의 어머니 ‘이혜인’과 못 보던 사람들 몇명. 그리고 그룹 사운드 일행까지. 혜인은 그룹 사운드에게 다른 사람들을 소개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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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여기 분들은 전에도 봤겠지만, 에코사운드 분들. 먼젓번에 한번 보셨죠 여러분도? 일전에 말했다시피 이제 회사의 운영방식도 많이 바뀔 거에요. 그렇다보니까 여러분들도 아티스트를 잘 알아두셔야 할 것 같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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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갑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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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숙이는 직원들. 명전도 덩달아 ‘그룹 사운드’의 리더 격으로 맞답했다. 그리고 나머지 아직 소개받지 못한 두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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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영 과장님은 아까 말씀드렸지? 이제 저희 [레이블 에코사운드]의 마케팅 영역을 담당해주실 분이에요. 아이돌 기획사 출신이시고, 앞으로 이제 마케팅 관련해서 실무적인 부분이나 뭐 그런 거는 다 이 분이 담당하실 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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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갑습니다! 정유영입니다! 아 제가 과장이라니, 약간 실감이 안 되는데! 그래도 이제 여러분하고 친해지고 그러면서 제품 홍보도 하고, 우리 레이블 홍보도 하고 그러려고 노력을 해야겠죠. 저는 원래 아이돌이 주력인 기획사에 있었어서 이제 인디 밴드라는게 어떤 식으로 돌아가는지 잘은 모르긴 하는데 그래도 이제 조금씩 노력을 하다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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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그만. 아무튼 정 과장님이셨고. 이 쪽은… 고경민 부장님. 이제 저도 다른 회사 사장이고 하니까, 이 회사에만 신경을 쓸 수가 없거든요? 그래서 전반적인 운영이라거나 하는 부분은 다 이제 고 부장님에게 위임을 할 겁니다. 그렇게 다들 알아주시면 될 것 같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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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안녕하십니까. 고경민 부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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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케팅을 담당한다는 정 과장… 그야말로 인간 자체가 요란하고 활기찬 그런 사람과는 다르게, 고경민 부장은 상당히 차분한 느낌이었다 딱 할 말만 하고 다닐 것 같은 그런 분위기의 직장인. 안경을 쓰지는 않았지만, 왠지 쓴다면 날카로운 스타일을 쓸 것 같은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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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둘은 잘 맞긴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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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그렇게 생각하며 그가 말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되는대로 말을 주워섬기는 스타일은 아니고, 중간에 말을 고르기 위해 한 템포씩 쉬어가는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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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원래 다른 인디 레이블… 위저드레몬 쪽에서 기획, 총무, 프로듀싱… 관련으로 일을 했었습니다만. 이번에 이혜인 사장님께서 같이 한번 해보지 않겠느냐고, 좋은 오퍼를 주셔서. 이렇게 여러분과 함께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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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좋아요. 그럼 이제 다 같이 박수~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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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에 고개를 꾸벅 숙이는 고경민 부장과, 같이 고개를 숙이되 살짝만 숙인 후 두 손을 이리저리 흔들며 반응하는 정유영 과장. 반응도 완전 다르다고 생각하며, 명전은 이어지는 혜인의 이야기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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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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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이제까지 진척된 앨범의 상황을 좀 들어보고 싶습니다. 사장님께서는 음악에 대해서 잘 모른다고 하셨어서요. 멤버들에게 여쭤보라는 말만 하시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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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현재까지의 상황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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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경민의 말에, 명전은 현재까지 진척된 상황을 설명했다. 컨셉은 명확하게 정해지지는 않았으나, 아무튼 ‘우리의 이야기’ 라는 느낌으로 가는 중. 수록곡은 12곡에서 15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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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완전하게 작곡이 끝난 곡은 없다. 3곡 정도가 시안이 잡혀 있긴 하지만, 그게 전부. 발매시기라거나 다른 건 다 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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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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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히 빛나던 정유영의 눈에서 광도가 조금 줄어드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고경민은 별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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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하게 진행되고 있네요.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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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하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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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을 수 없다는 듯 반문하는 정유영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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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합니다. 메이저 기획사는 어떤 방식으로 작업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여기는 인디 레이블이니까요. 프로듀싱을 맡아주는 사람도 없이 멤버들이 직접 다 했을테니까, 이렇게 될 수 밖에 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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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파부터 오메가까지 타인의 손이 닿는. 아이돌이 개입한 부분이 있다고 하면 오히려 그게 화제가 되고 세일즈포인트가 되는 게 K팝이고 아이돌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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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드는 그와 다르다. 물론 아직도 기획사의 철저한 설계 아래 태어나는 밴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한국 인디판에서는 그런 밴드들이 매우 드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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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앨범 프로듀싱이라는 게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부분도 아니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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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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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돌이랑 다르게 밴드는, 만듬새가 미흡하더라도 밴드 구성원들 자신이 스스로 만들어냈다는 것… 그런 느낌이 나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음, 적절한 설명을 하자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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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경민은 턱을 잠시 쓰다듬다가, 인터넷을 뒤적거리며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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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 순대국밥집이나 곰탕집. 그런 곳을 간다고 쳐요. 정 과장님이 정말 마음에 드는, 백일 중에 백일 끼니를 때우고 싶은 그런 집을 발견했다고 칩시다. ‘할머니 손맛!’ 이러면서 광고하는. 그런데 거기가 알고 보니까 기업에서 만드는 곰탕 키트 떼와서 만드는 곳이었어요. 그럼 기분이 좋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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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그다지 상관없을 것 같기도 하지만… 뭔가 좀 속은 느낌도 날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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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겁니다. 사실 밀키트는 대기업이 맛 비율을 정확하게 신경써서 만든 거니까 그게 더 맛이 있을 수도 있거든요. 하지만 밴드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것보다는 그냥 맛이 없어도 할머니가 만든 진짜를 원하는 그런 사람들인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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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경민의 그런 설명에 명전은 좀 미묘하다는 생각을 했다. 다들 뭐 그런 것 같지는 않고, 사실은 그냥 누가 작곡했는지는 별로 신경을 안 쓸텐데. 하지만 뭐 남이 다른 식으로 생각은 할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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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기획사가 처음부터 끝까지 다 만들었다! 라고 하면 오히려 위화감이 들어서 좋아하지 않는 리스너들이 많습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저희는 그냥 도와주는 사람들인 거죠. 물론, 이제 저희가 붙었으니까 작업속도는 빨라져야 하겠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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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라져야 한다고 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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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경민의 마지막 말에, 최이서가 우려섞인 질문을 던졌다. 경민은 그 질문에 머리를 슬쩍 긁은 후 대답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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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다음 앨범의 완성이 어느 정도 걸릴지를 알아놓고 싶은데요. 언제까지 완성 가능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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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요. 지금 진척 속도로 보면 좀 오래 걸릴 것 같긴 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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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범을 만들자는 이야기는, 현아의 입시가 끝난 다음에 나왔다. 그리고 지금은 슬 합격자 발표가 날만한 시기. 그 동안 완성된 것이라고는 단 한곡도 없는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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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염없이 시간을 내버릴 수는 없으니 일단은 6개월 안에 최종본을 만드는 걸로 하죠. 최종본이라는 건, 앨범이 디지털이든 실물이든 재생 가능한 형태로 존재하는 걸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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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개월인가. 명전은 머리를 꼬며 생각했다. 촉박한 것 같기도 하지만, 그렇게 촉박하지 않은 것 같기도 한 시간. 딱 적당한 정도. 다른 아이들의 기색 또한 비슷했다. 목적 없이 교양으로 영어공부를 하다가 갑자기 토익시험을 쳐야 된다는 말을 듣고 마음을 다잡는 것 같은 그런 풍경이라고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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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도 열심히 한번 서포트를 하겠습니다. 혹시 작곡에 필요하신 자료라던가, 샘플이라던가. 협업하고 싶은 작곡가도 좋습니다. 곡 제작에 필요하신 게 있다면 언제든지 연락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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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경민은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숙였다. 명전은 작게 박수를 쳤다. 그 박수는 조금 뒤, 약간 더 커진 형태로 사무실에 울려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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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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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제 차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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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경민의 말이 끝난 후. 정유영 과장이 아이패드를 든 채로 쾌활하게 외쳤다. 그녀의 뒤에는 이미 프로젝터가 켜지고 있는 상태였다. 고경민 부장은 전혀 사용하지 않았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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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으로 업무를 시작하게 된 건 오늘이긴 한데! 그동안 여러분들이 해 온 활동을 보면서… 저는 생각했어요. 왜 이런 아이들이 뜨지 않았을까? TOP 100위에 들어간 곡도 많고! 앨범도 어, 인디밴드 치고는 꽤나 팔았고! 게다가 오디션에서 우승까지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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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영의 큰 목소리가 사무실에 울려퍼졌다. 명전은 좀 시끄럽다고 생각하면서도, 턱을 괴고 그 이야기를 주의깊게 들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명전 자신도 의문이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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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가지 요인이 있겠죠! 제가 그걸 바로 맞출 수 있다면 저는 연봉이 엄청나게 높지 않았을까요! 엄청난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거니까! 여러분과도 일할 기회를 잃어버리게 되고. 어떻게 보면 다행이네요! 여러분과 일할 기회를 놓치지 않게 되어서. 아무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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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살짝 뜸을 들이고는, 아이패드를 움직여 프로젝터에 그림 하나를 띄웠다. 뭔가 복잡한 그래프가 들어가있는 그림. 특정 시기마다 치솟았다가도, 그 이후 확 내려간 그래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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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분석한 결과는 바로, 여러분들이… 흔히 말하는 ‘노를 젓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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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를… 안 저었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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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제대로 이해한 것이 맞냐는 듯, 질문을 던지는 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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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맞아요.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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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영은 그 뒤로 복잡한 그림들을 몇가지 띄우기 시작했다. 이런저런 자기 주장의 근거가 될만한 자료들. 명전이 보기에는 전반적으로, 특정 시기에 그룹 사운드가 만들어냈던 버즈량을 나타내는 자료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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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것들을 보면 오디션 이후에! 그렇게 긴 시간은 아니지만요. 다에요! 이거 엄청 귀여웠어요! 아무튼 다에요 이후에! 이렇게 버즈량이 확 뛰어오르면… 이제 컨텐츠를 만들어내면서 유튜브 알고리즘을 유도하고, 관련해서 컨텐츠를 찾는 사람들을 유도했어야 하는데! 그런 게 없었다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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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영의 주장은 이러했다. 오디션 같은 기회들을 잡기 위해서는, 후속으로 컨텐츠를 만들어내야 한다. EP의 경우에는 페스티벌로 관심도를 끌고 나갔고, 오디션에 참석함으로써 충분한 관심을 유도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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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그 오디션이 끝난 다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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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정유영)이 생각하기에는’ 자체컨텐츠라던지 방송 출연이라던지 섭외라던지 하다못해 싱글 발매라던지. 그런 것들을 만들어내면서 관심을 유도했어야 하는 시기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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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 사운드는 공연 한번 한 다음 일본에 휙 가버리고 그 이후에는 활동을 중단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오디션 당시에 얻었던 버즈량이 사그라들어버렸다. 그렇게 되다보니 지금까지 온 것이다… 라는 게 유영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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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은 되긴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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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그렇게 생각했다. 적어도 일어난 현상을 설명하기에 저것보다 적합한 논리는 없는 것 같아 보였다. 사람들이 소식을 궁금해 할 시기에 갑자기 사라지면, 다들 쟤는 뭐 아무것도 없나보다 할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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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뭐, 인기가 있어봤어야 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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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머리를 살짝 꼬았다. 이 부분에서는 사실 명전의 탓도 컸다. 다들 밴드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니 자신이 잘 이끌었어야 하는데. 그런데 뭐 성공을 해 봤어야 성공을 어떻게 하는지 알 것 아닌가. 만약 그가 저런 것들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릴 수 있는 사람이었다면 그렇게까지 인기가 없진 않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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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이제는 정규앨범을 발매하고, 콘서트도 하고! 그럴 테니까 별 문제는 없어요. 지나간 일들은 모두 잊어버리자고요. 그런데 우리가 가진 또 하나의 문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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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문제가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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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어요. 그것도 아주 심각한 문제! 정말로! 정말 심각한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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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의 질문에 정유영은 몸서리를 치는 시늉을 하며 아이패드의 자료를 넘겼다. 또다시 제시되는 그래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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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이거는 진짜 심각하네. 저게 말이 되나요? 이거 뭔가 문제 있는 거 맞는 거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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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아요. 문제 있어요! 제 생각에는 이런 결과가 나오면 안 되면서도, 사실 이런 결과가 나올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왜냐하면 이제까지 진행이 되어 온 일들이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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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젝터에 비춰진 자료는, ‘하수연’, ‘최이서’, ‘정현아’, ‘유서하’ 등, 밴드 멤버들의 이름. 밴드 관련 키워드들의 버즈량을 시각화한 것이었다. 상당히 높은 버즈량으로 화제도가 높다고 생각될 수 밖에 없는 ‘하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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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 반해, 바닥을 치는 나머지 멤버들의 버즈량. 그나마 ‘최이서’는 좀 형편이 나았으나, ‘정현아’와 ‘유서하’는 누가 낮다고 하기에도 좀 그럴 정도로 상당히 버즈량이 낮은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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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꼴등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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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 ‘2등’인 이 몸이 보기에는 그게 그거인 것으로 보인다만… 왜 ‘범부’끼리 순위를 나누고 있는 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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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2등이냐? 어차피 별 차이도 안 나는 것 같아 보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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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보다 약한 자의 말은 듣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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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의 머리채를 잡으려고 하는 시늉을 하는 서하와, 낄낄 웃으며 일어서서 도망가는 이서. 명전은 한심하다는 듯 둘을 쳐다보고는 머리를 꼬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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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방송 같은 곳에 출연한 것은 저 밖에 없으니까, 이런 결과가 나오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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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해요! 뭐 그것 뿐만이 아니라, 제 생각에는 밴드라는 게… 기타와 보컬이 주로 노출될 수 밖에 없는 그런 환경이지 않나 싶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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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어쩔 수 없는 거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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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그렇게 말을 했다. 원래 밴드는 기타와 보컬이 다 해먹기 마련인 집단이다. 그 유명한 이야기도 있지 않은가. ‘베이시스트를 하고 싶다는 사람은 우리 중에선 없었다. 우리가 생각하는 베이시스트란 항상 제일 뒤에서 연주하는 뚱뚱한 녀석이였다’ 같은. 굳이 베이스가 아니더라도 드럼이나 키보드에게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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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atles의 Paul McCartney나, Pink floyd의 Roger Waters. The Who의 John Entwistle처럼, 베이스인데도 부각이 되는 게 특이한 사람들인 것이다. 아니면 Motörhead의 Lemmy Kilmister처럼 본인이 리더를 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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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간에 이렇다고 해서, 출연 요청이 없는데도 갑자기 우리가 멤버분들을 막 방송에 들이밀 수 있는 것도 아니거든요. 그런데 제가 밴드는 잘 모르지만… 적어도 아이돌은! 멤버의 인기가 고르게 분포되는 게 좋아요. 그래서 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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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영은 잠시 말을 멈추고는, 사무실 안의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한명씩 눈동자를 맞추며 신뢰감을 주려는 듯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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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체 컨텐츠를 제작해보는 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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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 하고 떨리는 핸드폰. 명전은 아무 생각 없이 핸드폰을 꺼냈다. 아무리 핸드폰을 걷지 않는다지만, 수업시간에 과감하게 핸드폰을 꺼내는 그 태연함에 다인이 질겁한 사이… 명전은 들어온 이메일을 확인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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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드 파이오니어 참여 확정 및 일정 지연에 대한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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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은 대충 제목에서 예상할 수 있는 정도였다. 밴드 파이오니어 사업에 참여해주셔서 감사하다. 참여 확정되셨다. 그런데 뭐 사업이 뭐 아무튼 뭔가 있어서 연기가 되었다. 1개월 내지는 2개월 뒤 시작할 것 같은데 양해 부탁한다. 꼬우면 그만둬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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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건 항상 제때 제때 가는 법이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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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쓰게 웃으며 핸드폰을 가방에 넣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보니, 선생이 그를 상당히 열받은 표정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책에 고개를 박는 시늉을 하자, 넘어가는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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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학년이라고 다시 개기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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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메일을 제때 확인해야 해 어쩔 수 없어. 비즈니스가 있다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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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의 대답에 다인은 피식 웃었다. 밴드 활동이 잘 되어가는 것 같고, 사과를 하러 다닌다는 것도 얼추 끝나가는 것 같고. 여러모로 다행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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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 선배 일만 잘 마무리 되면 좋겠는데, 아무래도 그건 힘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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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 또한 성주희와는 친분이 있는 사이가 아니라 일이 어떻게 되어가는지는 잘 몰랐지만, 권지혜의 말로는 아직도 칼을 갈고 있다고 했다. 그런 걸 보면, 어떤 식으로든 절대 곱게 넘어갈 수는 없을 듯 보이는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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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본인이 생각이 있다고 했으니까 어떻게든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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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인은 하품을 했다. 따뜻한 햇살에 잠이 쏟아지는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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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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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된 것 같네요. 고생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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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고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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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녹음부스에서 걸어나와, 준홍이 건넨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세션때 탐앤더슨을 빌려준 댓가로, 뜨고 있는 녹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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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니 그때 기타 쓰지도 않았는데 굳이 이걸 녹음해줄 필요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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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미 녹음도 다 뜬 상태이고 하니, 명전은 그렇게 쪼잔하게 굴지 않기로 했다. 결국 이런 유무형의 자산은 쌓아 놓으면 도움이 되는 것이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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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공연 하셨던거 잘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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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응? 그 날 오셨던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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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뇨. 파라독스는 유튜브로 라이브를 틀어주는 곳이라서요. 출연한다기에 보고 있었죠. Hysteria의 해석이 아주 멋졌어요. 신스 편곡도 그렇고, 특히 베이스도 정말 괜찮았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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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그 말에 괜히 본인이 으쓱해지는 느낌이었다. 아무튼 초보 그 자체였던 애가 초보 티를 벗어던지고 다른 사람, 그래도 프로 세션의 칭찬까지 받을 정도가 되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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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한 게 아니고, 그 친구가 했어요. 베이스 친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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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꽤나 재능이 있는 모양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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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긴 하죠. 뭐 엄청날 정도는 아니더라도… 남들 앞에서 베이스 칠 정도는 되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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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에, 준홍은 나이가 한참 든 노인을 상대하는 듯한 느낌을 잠시 받았다. 뭐,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명전 선생님에게 배운 아이 아닌가. 제자인 만큼 그런 부분을 닮았을 수도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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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면… 준홍은 수연에게 전해줄 소식 2가지를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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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일단 제 친구가 기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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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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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인터뷰 한번 해볼 생각 있어요? ‘이것이 인디다’ 시리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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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에 명전은 예전 기억을 떠올렸다. ‘이것이 인디다’ 인가. 장르를 가리지 않고, 인디 락 그룹을 소개한다고 명성이 자자했던 기사 시리즈. 명전 또한 몇개 읽어본 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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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거 맛 갔다고 하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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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샌가부터 영 기사 질이 안 좋다고 이야기가 나왔던 것 같은데. 아니, 그냥 뭐 거기에 실리지 않은 밴드들의 질시였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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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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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나쁘지 않은 것 같은데요. 아무래도 기사를 한 줄이라도 더 받는 게 홍보에 도움이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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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긴 한데, 어… 밴드원들에게 물어보긴 하겠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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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아해하는 준홍의 표정. ‘왜 그런 기회를 놓치는…?’ 같은 생각을 하는 듯 했다. 하지만 명전은 또 명전대로 생각이 있었기에 꺼낸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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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굳이 기사에 나 봐야 큰 의미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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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의 목적은, 불특정 다수에게 밴드를 홍보하는 것이 되겠지. 하지만 명전이 생각하기에, 그룹 사운드는 최소한 현재 시점에서는 홍보가 필요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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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공연을 못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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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미성년자고,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인 탓에 공연을 뛰지 못한다. 그러므로 홍보를 해 봐야? 관심을 받는 시기를 헛되이 날릴 뿐이다. 그럴 바에는 그냥 신비성을 고수하는 쪽으로 가는게 낫다. 돈이 부족한 것도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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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두 번째, ‘하수연’의 과거 문제가 있었다. 밴드를 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하수연 본인에 대해 밝혀야 할 텐데, 아무리 기사며 언론이 구세대의 것들이라 해도 파급력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면? 대비를 갖춰놓지 않은 상태에서 학폭으로 기사가 펑! 그러면 그가 세워놨던 계획이고 뭐고 다 날라가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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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아무튼 이유가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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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시다면야… 일단 친구에게는 인터뷰를 안 하는 쪽으로 이야기를 해 놓겠습니다. 그런데 좋은 기회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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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긴 하지만 아무래도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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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 얼버무리는 수연을 보고, 준홍은 ‘과도한 관심을 받고 싶지 않다는 건가?’ 같은 생각을 했다. 하지만 두 번째 소식은, 분명 그녀에게 관심을 어느정도 가져다 줄 수 밖에 없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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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하나 더 전해드려야 할 소식이 있는데. 이건 수연 양에게도 좋은 소식일 수 있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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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이야기인지 몰라 가만히 그를 쳐다보는 명전에게, 리플렛 한장을 건네오는 준홍. 어떤 공연의 정보가 담겨 있는 리플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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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명전은 그 리플렛를 본 뒤… 문자 그대로 경악을 금치 못했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에서 리플렛이 흘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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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게 진짜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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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격을 받은 수연의 표정을 보고, 준홍은 아차 싶었다. 아직 회복도 안 되었을 수 있는데 너무한가 싶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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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좀 민감한 부분이긴 하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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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더이상 미룰 수도, 멈출 수도 없다고 준홍은 생각했다. 일종의 정신적 지주이신 분 아닌가. 더이상 미루었다가는 남들의 기억에서 잊혀지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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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될 수 있는 한 꼭 참석을 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의발전인(衣鉢傳人)이시잖아요. 마음이 안 좋으시더라도 방문이라도 좀 해주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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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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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그 말을 듣긴 했으나, 그 이야기가 제대로 귀에 들어오지는 않았다. 충격에 휩싸여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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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하면 그가 본 문구는 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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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전 추모 콘서트] 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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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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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리플렛을 앞에 놔두고 고민했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애초에 자신의 추모 콘서트 같은 걸 하는게 말이 되냐 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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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말이 되긴 했다. 왜냐하면 음악인이라는 놈들은, 원래가 아무튼 ‘~ 기념 콘서트!’ 같은 것을 벌이기 좋아하는 부류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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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 벌어진 일이겠지. 콘서트는 하고 싶고, 해야 할 것 같고… 뭐 할 만한 거 없나? 아 얼마 전에 서명전이가 죽었었지. 그거 추모한답시고 콘서트 하면 안 되나? 올 사람도 많을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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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추모 콘서트라고 하면 내 곡을 불러야 하는데, 내 곡을 부를 만한 게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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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다른 건 몰라도 이전의 자기 자신에 대한 객관화는 확실히 잘 되어 있는 사람이었다. 기타 실력은 엄청나지만, 작곡 같은 것에는 전혀 재능이 없는 기타리스트. 솔로 앨범 몇개를 냈지만 다 말아먹고, 세션계에서나 이름을 떨쳤던 기타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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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명전을 기념할만한 곡이 있을리가 없지 않은가. 그렇다고 뭐, ‘서명전 씨가 이 곡 세션에 참여했으니 이 곡을 부르죠!’ 라고 할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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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수 있을 법 하긴 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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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고개를 뒤로 젖히고 천장을 바라보았다. 이걸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빠져야 하나, 말아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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웬만하면 빠지고 싶은 게 그의 솔직한 소감이긴 했다. 애초에 본인이 살아있는데 - 물론 뭐 사회적으로는 죽었다만 - 죽었다고 추모 콘서트를 하고, 그 콘서트에 본인을 불러다가 ‘흑흑흑 서명전 선생님 왜 돌아가셨나요’ 라고 울기를 바라는 게 지금 상황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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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대외적으로 '하수연'이 '서명전'의 제자인 것을 내세우며 활동을 하고 있다는 거였다. 이 상황에서, '아 추모 콘서트는 좀' 이러면 완전 호로자식으로 보일테지. 슬픔을 이겨내지 못했다 같은 소리를 하려고 해도, 아주 신나게 잘 살아가고 있는데 뭐 어떻게 그런 말을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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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세상은 서명전이 하수연이라는 것을 몰랐으니, 그냥 안면몰수하고 참석해도 문제될 것은 없다. 하지만 중요한 건 세상이 아니라 명전의 수치심이었다. 명전은 자기 자신을 추모하는 상황을 버틸 수 있을 만한 인내력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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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아, 잠시 들어가도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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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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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의자에 몸을 맡긴 채로 힘 없이 대답했다. 들어오는 이혜인 씨. 그녀는 뭔가 말할 듯이 슬금슬금 들어오더니, 명전의 앞에 놓인 리플렛을 보고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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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전 추모 콘서트…? 그, 기타 선생님이라고 한 그 분 아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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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뭐… 어… 허…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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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 콘서트까지 하나보네. 진짜 엄청난 사람이었는가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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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이 차마 대답을 못 하는 사이, 리플렛을 집어 든 이혜인 씨가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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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어… 혹시 이 분이 어떤 곡 내셨는지 수연이 너는 아니? 그래도 가르쳐주신 분인데, 한번 들어봐야 할 것 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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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8번지 가로등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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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열심히 굴리다, 생각나는 곡 하나를 말했다. 그래도 그 곡은 꽤나 괜찮게 작곡을 했던 것 같은데. 다른 사람들의 평가는 다 안 좋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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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유튜브에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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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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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그래도 어… 다른 곡은 있을 텐데. '푸른 밤 저 편에' 같은 곡도 불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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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들어본 것 같은데, 음… 그거 변주희 선생님 곡 아니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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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분도 불렀어요… 커버곡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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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그렇게 대답했다. 1집 이후 도통 안 되는 작곡에 분개해, 한국의 에릭 클랩튼이 되겠답시고 내놓았던 커버곡. 성적이 꽤나 좋기는 했는데… 정확히 말하면, 그 곡만 좋았다. 그 외에는 영 60년대를 답습했다는 이야기들만 가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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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 좋네~” 라며 유튜브에서 그의 곡을 듣는 이혜인 씨를 보며, 명전은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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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일까, 왜 ‘서명전’의 곡이 없는데 왜 ‘하수연’이 정신적 고통을 느끼는 것일까. 왜 ‘하수연’은 여기 이 자리에서 ‘스승’의 안타까운 역사를 말하고 있어야 되는 것일까. 왜 ‘하수연’이 ‘서명전’의 부끄러운 역사에 고통받아야 하는 것인가. 명전은 그냥 갑자기 기절하고 싶다는 생각만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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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체컨텐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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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자체컨텐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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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영의 말에, 명전은 순간 자신이 잘못 들은게 아닌가 생각했다. 자체 컨텐츠… 뭘 말하는 걸까. 자체 제작 컨텐츠? 그게 뭘 의미하는 거지. 하지만 그 생각은 이내 사라졌다. 얼마 전 배운 용어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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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체컨텐츠, 줄여서 자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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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적 의미와는 전혀 상관없이, 이 ‘자컨’이라는 말은 요즘 ‘아이돌이 자체적으로 제작한 컨텐츠’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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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말해 아이돌들이 자기들끼리 리얼리티 찍거나 Vlog 찍거나, SNS 이벤트 하거나 기타등등… 아무튼 다른 방송사나 컨텐츠 제작사의 힘을 빌리지 않고, 자체적으로 팬들을 위하거나 끌어모으기 위해서 제작한 것을 자체컨텐츠라고 하는 것이다… 라고 ChatGPT가 가르쳐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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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나도 신세대에 많이 적응했단 말이지. 그런 신세대 컨텐츠도 사용해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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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모르는 것을 ChatGPT에 찾아봤다는 것을 뿌듯하게 생각하며, 물론 그렇게 생각하는 거 자체가 늙은이의 증명이라는 것은 모르는 채로… 명전은 계속해서 정유영의 말을 경청했다. 흥미로운 이야기였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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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락밴드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그리고 만약 제가 락밴드의 방식에 적응하길 원했다면, 사장님이 저를 뽑지도 않으셨을 것 같구요! 아무튼 제가 생각하기에는, 여러분들은 충분히 자컨으로 흥할 수 있는 타입의 그룹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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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렇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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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말을 자르고 들어오는 고경민의 질문. 살짝 불쾌할 수도 있는 타이밍이었으나, 정유영은 싱글싱글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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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하면! 일단 네 명이 다 이쁘잖아요! 이쁘면 다 됩니다! 이게 얼굴 합이 좋으니까, 일단 지루하던 말던 간에 얼굴 보고 다 풀리는 그런 감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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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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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의 혼잣말. 명전도 그럴 것 같다 생각했다. 이쁘고 잘생기면 집안 가산까지 다 거덜내서 주는 시대인데, 영상 하나 못 봐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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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아무래도, 일단 십대들이다보니까! 제가 여러분과 대화를 많이 해 보지는 않았지만, 십대들이 하는 컨텐츠는 일단 뭘 해도 재미있어요! 에너지라는 게 있거든요. 주요 소비자층인 20대 30대들은, 이쁜 십대 여자애들이 웃는 거만 봐도 재미있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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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말하고도 한참을 자컨의 정당성에 대해서 설파하는 정유영. 명전은 머리를 살짝 꼬며 멤버들을 보았다. 나름대로 생각이 있어 보이는 듯한 세 명의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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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는 꽤나 흥미가 있는 것으로 보였고, 현아는 음… 뭐 평소와 같이 걱정 가득한 모습. 서하는 불만이 있어 보이는 눈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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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긴, 서하는 ‘아이돌’ 비슷한 게 아니라 ‘정통 락 밴드’를 하고 싶어하는 눈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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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일모도원(日暮途遠)이라는 말이 있듯이 아무튼 가릴 것은 없다. 게다가 이미 이전에 ‘상업적 영업 방식’을 채택하겠다고 말까지 하지 않았는가. 저 정도는 그냥 뭉개고 가도 된다. 나중에 뭐 부루퉁하게 입 댓발 나와서 “나 하기 싫다고!”라고 하면 아무튼 달달한 거나 마라탕 같은 거 먹이면 풀어질 것이라고 명전은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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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그러면, 어떤 자컨을 하게 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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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좋은 질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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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영은 다시 아이패드를 넘겼다. 소개되는 여러가지 유형의 ‘자컨’들. 명전조차도 이름 꽤나 들어본 아이돌들이 나오는 컨텐츠가 여럿 예시로 제시되자, 이서가 “오~” 하며 탄성을 질렀다. 서하도 짐짓 안 그러는 척을 하면서도, 슬쩍슬쩍 관심을 보일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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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컨텐츠들은 제가 제작에 참여한 것들입니다! 물론 전체 다 제가 만든 건 아니구요! 몇개는 진짜 일부 정도만 참여했고, 몇개는 좀 주도적인 아이디어를 낸 수준이지만요. 아무튼 이 중에 하나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여러분들의 이미지를 해칠 뭔가 그런 건 하지 않을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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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래서 어떤 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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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비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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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의 즐거움으로 남겨두세요! 라며 싱글대는 정유영. 명전은 잠시 뭐라고 말하려다가, 그냥 관두었다. 하긴, 미리 알고 있어봐야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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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NEW! 과오 | GROUP SOUND | 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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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아는 차트 사이트를 응시했다. 오디션 이후 잠시 차트에 머물렀던 그들의 곡. 활동을 중단한 후에는 장르음악 차트의 하위권에서나 볼 수 있었던 곡이었는데, 어느새 메인 차트까지 올라와 있는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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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수연님의 라디오 덕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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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수경의 늦은 밤 콘서트]. 현아 자신도, 소맛님(이서)도, 호랑(서하)도 들어보지 못했던 그런 라디오. 수연만이 “아니 이걸 안 들어봤다고?”라며 반응한 후, 왠지 늙은이 취향이라는 말에 화를 냈던 프로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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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에 그녀와 다른 아이들은, 수연의 라디오 출연에 큰 기대감을 가지지 않았다. 단지 ‘기성 미디어’ 출연에 의의를 두었을 뿐. 그것은 수연도 마찬가지였어서, “뭐 그냥 출연하면 좋은거지. 나쁠 거 없지 않나?” 라는 말만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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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것은 착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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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이 라디오에서 불렀던 곡은 총 4개(원래는 2개만 부르기로 되었지만, 앵콜을 받아 2곡을 더 불렀다). 커버곡이었던 메시아 어쩌고. 아직 완성되지 않은 정규앨범의 곡 하나. [과오]. [잿빛의 나날들]. 그 중 처음 반응이 온 것은 [잿빛의 나날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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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aylist 요즘 당신이 좋아할만한 요즘 감성 한국 락 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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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은 “음악 도적놈들”이라며 엄청나게 혐오하는 모습을 보여주긴 했지만, 그런 수연조차 부정할 수 없는 것이 요즘 플레이리스트의 위력이다. 잘 만든 플리, 흥하는 플리는 조회수가 백만 이백만을 넘기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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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는, [잿빛의 나날들]의 차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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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잿빛의 나날들 | GROUP SOUND | Plastic Nostalg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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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메인 차트가 아니라 락/메탈 차트였지만, 저 밑으로 내려갔던 곡이 다시 50위권 안에 들어갔다는 것은 엄청나게 고무적인 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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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 소식을 뒤쫒아온 것이 바로, [과오]의 부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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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에 라디오에서 들은 곡인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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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오 유튜브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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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요즘 락밴드들이 스킬이 많이 늘었다는 게 느껴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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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모던락 별로 안 좋아합니다만 이런 곡은 들을 만 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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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대형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잠시 화제가 되고 그쳤던 이전과는 달리, 이번 라디오 송출은 [과오]를 음악 커뮤니티에서 뜨거운 화제가 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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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락의 희망이냐 아니냐, 이런 곡이 흔치 않은 것인가 아닌가, 너희는 맨날 늙은이들이라서 늙은 곡만 듣고 최신 곡은 안 듣는 것이다 등등… 수많은 복잡한 반응이 있었지만, 아무튼 중요한 것은 [과오]가 ‘음악 좋아하는 사람들’의 귀에 들어갔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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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기성 미디어… 라디오가 아직도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게 놀랍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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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아는 그렇게 생각하며 회사 계정을 통해 EP의 판매량을 체크해보았다. 많이 팔려봐야 몇장 수준이었던 근래 판매 추세와 달리, 최근에는 그래도 백장 단위로 판매가 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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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함께 공식 채널의 구독자도 상당히 오른 추세. 물론 수연의 개인 채널인 [White Room]에 비견될 정도는 아니었고, 아직 실버 버튼도 받지 못한 상황이었지만… 아무튼 발전했다는 것은 확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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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보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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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밴드의 발전에 히죽대며 노트북을 보고 있던 현아. 갑자기 치고 들어온 목소리는 수연의 것이었다. 살짝 느긋한, 하지만 대답을 강요하는 위압적인 느낌도 가진. 평소 수연의 목소리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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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에 현아는 고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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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 밴드의 간판 곡인 [과오]가 TOP 100 차트 안에 진입했고, [잿빛의 나날들]은 락/메탈 차트 순위권에 올라 있으며, 앨범 판매량도 늘었고, 공식 유튜브 구독자도 상당히 많아졌구요… 그리고 그 외에도 수많은 호재요인이 있어요. 예를 들어 이제 이런 글 같은 걸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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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자신의 뜻을 전달해야 할까. 현아는 수많은 자료들을 통해 자신이 분석한 것을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그리고 한참 고민한 결과, 현아는 자신의 뜻을 완벽하게 요약하는 말을 내놓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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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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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가 좋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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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을 기다리게 한 후 나온 대답이 ‘좋아요’라는 것에 살짝 열이 받은 수연. 절로 한쪽 눈썹이 치켜올려지며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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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 히에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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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님 진정해~ 진정해. 괜찮아요. 수연이는 안 물어. 야생동물이 아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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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마침 나타난 이서의 뒤로 은근슬쩍 피해버리는 현아. 이서는 그런 말을 하며 현아를 이리저리 쓰다듬었다. 그 광경을 본 수연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말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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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사람을 애 다루듯이 그래. 현아가 너보다 어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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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안 어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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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아니, 뭐 그런 걸 이야기하려고 했던 건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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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할 말이 없어졌는지 입을 살짝 다물었다가, 다른 이야기를 하는 수연. 이서는 집요하게 말꼬리를 물며 추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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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그런 걸 이야기를 하려고 했던 게 아니야. 딱 봐도 그런 이야기 하려고 했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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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그 이야기는 그만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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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그만해 뭘! 저거 봐. 자기 불리한 이야기 나오면 그냥 도망간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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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는 할 말이 없어졌는지 슬쩍 자리를 뜨려는 수연을 붙잡았다. 하지만 수연은 “커피 사 올게.”라는 말을 남기고 부리나케 사라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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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있다가 촬영인데 어디 가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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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생각하며, 이서는 서하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아무튼 날이 갈수록 점점 뻔뻔해지고 있는 수연이었다. 처음에는 안 저랬던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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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촬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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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블 사무실. 간단하게 촬영을 할 수 있게 마련된 공간. 명전은 촬영용 대형 카메라를 옆에 두고 화이트보드를 가리키는 정유영 과장을 쳐다보았다. 의욕이 넘치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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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에 말했던 것처럼 자체 컨텐츠를 할 예정인데요! 첫 촬영이니만큼, 막 엄청난 걸 할 건 아니구요, 간단하게 여러분들을 유튜브 시청자들에게 소개하는…? 그런 느낌의 컨텐츠로 마련해봤습니다! 이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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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드마커가 화이트보드에 마찰되는 소리가 들린다. 한참 끼익끼익댄 후, 완성된 글자는 ‘첫 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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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들의 첫 인상! ‘첫 인상을 알아봅시다!’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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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유아적인 거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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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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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 황당한 기분에 한치의 망설임 없이, 상처되는 말을 바로 뱉어버린 명전. 아차하는 심정이었으나 정유영은 전혀 개의치 않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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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인상은 중요합니다! 그리고 의외로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어요. 과연 우리 하수연 리더님의 첫 인상은 어땠을까! 이서는? 현아님은? 서하님은? 과연 밴드원들에게 어떤 인상으로 다가왔을까! 그리고 지금의 인상은 어떨까! 멤버들은 서로를 어떻게 생각했고,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그것을 알아보는 게임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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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세를 주려는 듯 살짝 말을 끊은 정 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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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감없이! 솔직하게 쓰는 것! 그리고 답변에 상처를 받지 않는 것! 그게 중요해요! 여러분들이 막 서로를 아껴주겠다고 “저는 누구를 처음 봤을 때부터 천사라고 생각했어요~” 이런 거 안 통합니다! 그렇게 생각할 사람이 있을리가 없잖아요! 이미지 관리 하지마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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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렇게 생각할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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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관리 하지마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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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영의 삿대질에 살짝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은 서하. 그 모습에 명전은 ‘하늘이 무너져도 쟤가 그렇게 생각했을 것 같지는 않은데’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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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는, 하수연 양의 첫 인상입니다! 수연 양은 ‘자기가 생각하는 자신의 첫인상’을, 다른 세 분은 ‘하수연 양의 첫인상’을 바로 적어주세요! 고민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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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그 말에 잠시 생각을 한 후, 종이에 상당히 긴 문장을 적었다. 평소에 그가 가지고 있던 생각이었다. 하지만 다른 아이들은 뭔가 망설임 없이 하나의 단어를 적은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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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 이… 일! 됐습니다! 그럼 이제 수연 양의 ‘자기가 생각하는 자신의 첫 인상’을 들어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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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제가 생각하기에는 ‘자신이 자신의 인상’이라는 걸 생각할 수 없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결국 인상이라는 건 타인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다보니까, 내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런 건 사실 크게 상관이 없고. 자기가 생각하는 자기의 이미지는 그냥 자기가 그렇게 생각할 뿐인, 일종의 자신에 대한 과대평가… 그런 이미지가 아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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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잘 들었습니다! 아무튼 뭐, 약간 좀 이상하긴 한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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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첫 인상 카드를 들고 자신의 철학을 이리저리 설명하던 명전은, 정유영의 말에 말문이 막혔다. 아니 사람이 자기 철학을 설명하는데… 어? 이게 세상이 이래서야 되겠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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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이제 다른 사람들의 대답을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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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에, 그는 살짝 기대했다. 명전 자신은 [자기가 자기를 평가할 수는 없다]라고 말했으나, 실제로는 어느정도 가지고 있는 이미지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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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짝 진지하면서도 차가운. 그러면서도 실력이 있는. 뭐 그런 느낌 아닐까. 아무래도 외모적인 측면도 있고, 나라는 인간이 가진 이미지 자체가 좀 그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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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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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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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는 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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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명이 든 종이는 철자 자체는 달랐지만, 결국 똑같은 뜻을 가지고 있었다. “푸하학!” 이라며 반쯤 졸도할 듯 웃음을 참는 정유영을 무시한 채, 명전은 눈을 가늘게 뜨고 세 사람을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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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가자 이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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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든 그와 눈을 마주보려는 것을 피하고 있는 아이들을 보며, 명전은 서늘하게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오늘 펜에 피를 묻혀야 할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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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풓흫ㅎㅎ으헣헉헉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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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 웃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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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중얼거림에도 불구하고 웃음을 멈추지 못하고 계속 깔깔대는 정유영. 1분 정도를 계속 그러고 있다가, “아… 재밌었어요!”라며 종이를 한장씩 더 나눠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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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이제 첫 인상 말고, 현재의 인상을 써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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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저한테는 상처밖에 안 남는 것 같습니다만. 굳이 더 할 필요가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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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 무슨 소리야! 지금 저 맑은 눈빛들이 안 보이세요?” 정유영의 말에 명전은 세 아이들의 눈을 쳐다보았다. 최대한 눈을 초롱초롱하게 떠보이는 아이들. “양아치니 일진이니 그런 건 그냥 다 과거에 불과하다는 거죠. 첫 인상이 좋지 않았다 한들 현 인상이 안 좋다고는 말하지 못하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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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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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거기에 대해서도 확신할 수는 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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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무슨 소용이냐고. 명전은 오만상을 찌푸린 채 정유영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맑게 웃으며 종이를 작성하기를 독촉했다. 다른 세 아이들은 이미 뭘 써야할지 고민을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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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적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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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머리를 살짝 꼬며 생각했다. 우선 첫 인상이 ‘양아치’라는 것은 가감없이 그를 공격하겠다는 선전포고에 가까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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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실을 통해 추측해 볼 수 있는 ‘하수연’의 현재 인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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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최대한 부정적으로 자신의 행보를 되돌아보았다. 자화자찬은 그의 성격에 맞지 않았으나, 이 상황에서는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이미 망해버린 그 자신의 이미지를 어떻게든 살려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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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이들을 만나고 나서 했던 일은… 매일 연습 정도일까. 연습 시키는 사람. 매일 부정적인 이야기하는 사람, 독재자… 뭐 그런 이미지가 아닐까. 그렇다면 그것을 중화시킬 수 있는 단어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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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외로 남의 말을 잘 들어주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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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점에서 생각해보면, 자기 자신은 의외로 남의 말을 잘 들어주는 편이었다. 이서나 현아, 서하가 하는 말을 절대 무시하지 않고. 나름대로 의견을 수용해서 반영을 하고. 남이 안좋은 말을 해도 얼굴 붉히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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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면, 그게 사실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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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내키지 않는 심정으로 적던 단어. 하지만 몇초 동안에 생각은 정 반대로 바뀌었다. 그가 생각하기에는, 이 말은 딱 그에게 어울리는 단어였다. 그렇게 생각하며 종이에 끄적끄적 적은 것은, 요즘 유행어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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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그럼 수연 양의 ‘자기가 생각하는 현재 인상’은… [대인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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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하학! 대인배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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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정도로 웃는 이서. 다른 아이들의 모습도 정도는 다르지만 비슷했다. 어떻게든 웃음을 참는 현아와 피식피식 웃어대고 있는 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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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인배가 뭐가 어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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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대인배! 글쎄요, 꽤나 괜찮은 대답이긴 하네요! 그럼 다른 밴드원들의 인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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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영의 말에 세 사람 모두 덮어놨던 종이를 들어보였다. 거기에 적인 단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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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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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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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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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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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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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분개했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현명해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가지고 ‘틀니’니 ‘틀딱’이니 그렇게 말하는 것 자체가 버르장머리 없는 행동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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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시당초 ‘틀니’라는 말 자체가 너무나도 무례한 이야기였다. 아니 자기들은 이빨 안 좋아질 거 같은가? 게다가 그의 이빨은 죽기 전까지 튼튼했다. 틀니는 커녕 임플란트도 한 적이 없는, 충치 하나 없는 그런 튼튼한 이빨이었는데. 그것을 가지고 어디가 틀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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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수연이 너무 옛날 사람 같아요. 예전에도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욜로’보고 요즘 유행하는 단어라고 하질 않나, 핸드폰 같은 거로 뭐 보기 힘들다고 출력해서 보고 있지 않나. 뭐 먹자고 하면 무조건 국밥 먹자고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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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 이서는 그가 작성한 종이를 가리켰다. ‘대인배’라는 요즘 유행어가 적힌 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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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대인배’라는 거도 그래. 요즘 저런 단어 쓰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그 뭐야 스타크래프트? 그런 거 하는 늙은 분들이나 저런 단어 쓰지. 아무튼 총체적으로 약간 사고 난 다음에 정신이 한 30년 먼저 늙어버린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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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말할 것 까진… 없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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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심하다는 듯 이서를 멈춰세우는 현아. 하지만 그런 현아의 종이에도 선명하게 적혀 있는 [노인]이라는 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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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언니도 수연이가 좀 그런 끼가 있으니까 노인이라고 적은 거 아냐. 쟤 좀 완전 늙은이 다 됐다고. 가방 뒤져보면 홍삼캔디나 누룽지 캔디 이런거 있을지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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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는 그렇게 수군대며 명전을 공격했다. 하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홍삼캔디를 들고다니는 것은 진정으로 진실이었으므로 더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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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그럼 다른 사람은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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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마음에 상처만을 입힌 ‘하수연의 첫 인상 & 현 인상’이 종료된 후. 이 상황을 불러온 정유영은 아주 쾌활하게 다음 타자를 찾기 시작했다. 그런 유영의 말에, 이서가 손을 들고 의견을 피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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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이제 그만하면 안 될까요? 충분히 한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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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 개소리야. 빨리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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퉁명스럽게 뱉은 말에, 옆에서 들려오는 “수연이 빡쳤나봐.”라는 소리. 그는 더 화가 났다. 지금 이 상황에 화가 안 나고 배기겠는… 아니, 이런 태도는 어른스럽지 못하다. 아이들은 아이들답게 굴 수 밖에 없다. 이럴수록 침착하게, 화를 내지 않고 어른답게 굴어야 이미지가 좋아지는 법이라고 명전은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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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안 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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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거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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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안났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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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거 봐, 진짜 화났다니까. 막 이 악물고 말하는 거 봐. 완전 화난 사람 표정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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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화를 그는 간신히 참았다. 참을 인자 셋이면 살인도 면한다는데 어떻게든 참아야 한다. 어차피 이제 곧 공수가 전환될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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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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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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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뭐, 첫 인상이고 지금 인상이고 다 좋지 않을까? 그럴 수 밖에 없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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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첫 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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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잡한 패션으로 지구의 자원을 낭비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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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위터에서 만난 약간 컨셉 잡는 이상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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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알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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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현 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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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근히 자기가 베이스에 재능있다고 자꾸 어필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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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에는 착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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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알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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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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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저는… 그래도 제가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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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첫 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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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음침한 게 친구 없어 보이는 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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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엄청 많은 사람(인터넷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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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꿉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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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현 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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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타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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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여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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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가 좀 이상해졌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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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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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뭐 나쁜 말을 들을 게 없는 거 같은데. 나만한 사람이 어디 있다고. 드럼 실력 좋지, 옷 잘입지, 교우관계 좋지, 기타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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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첫 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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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력도 안 되면서 깝쭉대는 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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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 잘난척 하는 재수없는 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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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때 봤던 착한 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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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현 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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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거울 보고 자기가 잘생겼다면서 자화자찬 하고 있었음. 나르시시스트적 성향이 있는 것 같은데 아무래도 교정이 필요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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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패션을 좀 더 공부해야 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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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다니다가 조금 이상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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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맞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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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감없이 이야기하라던 정유영 과장마저 아연실색하게 만드는 첫 인상과 현 인상. 점점 강도가 에스컬레이트해가는 것이 그야말로, 상호확증파괴라는 것이 이런 것일까 하고 명전은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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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베이스에 재능 있는 거 아냐? 아니 사실이잖아? 1년만에 나만큼 따라오는 사람이 어디있다고? 이거 완전 진짜 실화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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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 호랑 저거 진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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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묻지 마. 그보다 너 저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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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너도 그랬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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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말로 상처만 남은 자체컨텐츠. 명전은 그 가운데에서 커피를 홀짝 들이켰다. 그는 이미 수도 없이 두들겨맞았기 때문에 딱히 더 상처를 입을 것이 없었다. 원래 매도 먼저 맞고 시작한다고 하던데, 지금 그의 심정이 거기에 적합한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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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좀 너무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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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생각하며 그는 자신이 써낸 대답을 다시 쳐다보았다. 조금 너무한 것 같기도 했다. 이서는 베이스에 재능이 있는 것이 맞았으며, 현아는 이제 더이상 음침하지 않고, 서하 또한 뭐, 십대는 다들 그러는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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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생각하던 그는, 자신이 받은 인상표를 보고 다시 생각을 바꾸었다. 틀니라니. 진짜 너무한 것은 저 애들 아닌가. 게다가 쟤들도 자기들끼리 막 서로 공격하고 그랬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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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봐도 그는 잘못한 것이 없었다. 자신이 공격받은 만큼 돌려주는 것이 당연했다. 물론 명전이 살아온 세월은 다른 아이들보다 몇배는 차이났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는 17세 여고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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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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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울해진 분위기를 환기하려는 듯 정유영은 박수를 한번 쳤다. 그리고 그녀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나머지 4명을 당황시키기에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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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첫 인상, 현재 인상을 알아봤으니… 다음 코너를 진행해보죠! 다음 코너는… ‘서로에게 칭찬 해 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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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와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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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와서라뇨! 다들 이제 가감없이 속에 있는 말을 털어냈으니까, 그 다음에는 이제 서로를 보듬어주는 시간이 되어야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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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처구니없다는 듯 중얼거리는 이서와, 그에 답하는 유영의 말. 명전은 옛날에 봤던 예능 하나를 떠올렸다. 그 뭐야, ‘그랬구나’ 였던가? 나쁜 말 다 늘어놓고 “그랬구나~” 해버리는. 지금 이 상황이 약간 그런 느낌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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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는 용서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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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저 애들이 먼저 자신보고 ‘양아치’니 ‘틀니’니 그런 이야기를 했지만. 자신이 아니면 누가 용서를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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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내가 먼저 손을 내밀어야겠지. 이 애들이 어떻게 그런 일을 먼저 하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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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사람의 감정이라는 게 그렇다. 한번 삐뚤어져버리면 바로잡는 것도 힘들다. 왜냐하면 다들 손을 먼저 내미는 것 자체가 지는 것이라고 생각하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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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진정으로 이기는 사람은, 손을 먼저 내미는 사람이다. 자신의 미욱함을 인정할 수 있는 사람이 진짜 어른이고 진짜 강자인 법. 어린 아이들에게 진심이 되어버린 그가 잘못한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살기를 수십년을 더 살았는데, 도대체 애들에게 왜 자신이 이러고 있는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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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 수 없지. 틀니라고 놀림받는다지만, 그것 자체가 어른스럽다는 이야기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그 어른스러움을 보여줄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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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한 어른스럽게, 이 애들의 장점을 칭찬해주면서… 그렇게 훈훈하게 자체 컨텐츠를 마무리짓는, 그런 광경을 보여주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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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처음은 우리의 리더! 하수연 양이 다른 멤버들에게 이야기를 해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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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영의 말에, 명전은 그렇게 생각하며 애들 앞에 섰다. 이서, 현아, 서하. 그가 ‘우선은 이서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 볼까…’ 하며 머릿속을 뒤지기 시작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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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앞의 이서는, 목소리를 내지 않은 채 입모양으로만 말을 전달했다. 아주 명확하게.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바로 무슨 말인지 알아차릴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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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 은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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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이 개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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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바로 손에 들고 있던 종이를 이서에게 집어던졌다. 방금 전까지의 생각은 다 잊어버린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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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영 끝! 수고하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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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수라장이 된 사무실. 정유영 과장의 말에, 바깥에서 커피 기계를 만지작거리고 있던 직원이 안으로 들어와 정리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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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사무실 한켠으로 밀려난 네 명 사이에서는, 알 수 없는 긴장감이 돌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한마디 꺼내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한마디 튀어나오기만 하면 그때부터 전쟁이 시작될 것 같은 그런 긴장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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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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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팽하게 이어지던 긴장감을 깬 것은, 수연의 입이었다. 아까 전과는 다르게 매우 차갑게 가라앉아있는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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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 죄가 있는 세 사람은 안 돌아가는 목을 삐걱거리며 수연을 쳐다보았다. 평소보다도 더 표정이 없는. 감정이 없는… 눈빛의 하이라이트가 완전히 날아가버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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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쯤 광기에 잠식된 그런 얼굴을 한 수연이 그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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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아, 아니~ 내가 그런 말을 하려고 했던 게 아니라~ 응? 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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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그 외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서는 제발이 저렸는지 그 말이 튀어나오자마자 다급하게 변명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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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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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처구니 없다는 듯한 말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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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그그, 있잖아. 우리도 말이 좀 심했다고 생각해. 응? 근데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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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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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사적으로 말을 주워섬기고 있던 이서의 말을 끊은 것은, 옆에 가만히 앉아 있던 밝은 갈색머리의 소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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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가 아니라고 생각해… 요… 소맛님만… 그런 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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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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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는 엄청난 충격을 받은 듯 현아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에너지가 담길 수 있다면 강철마저 뚫었으리라 생각되는 그런 눈빛을 받고도 절대 이서 쪽을 보려고 하지 않는 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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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신감에 치를 떨며 이서는 서하 쪽을 쳐다보았다. 마치 그 쪽에는 구세주라도 있는 것마냥 행동하며. 하지만 서하는 피식 웃으며 턱으로 수연을 가리켰다. 너의 짐은 너 혼자 지라는 듯한 행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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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나만 그런게 아니잖아! 남들도 다 그랬다고! 어? 지금 쟤들도 다…! 다 양아치니 틀딱이니 그랬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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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야 장난으로 그런 거지. 방송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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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나도 방송으로 그랬어! 아니 그보다, 너희들도 다 서로 공격했잖아! 이거 봐, 이거. 나한테 들어온 거. [패알못], [난잡한 패션으로 지구의 자원을 낭비하고 있음]! 게다가 [트위터에서 만난 약간 컨셉 잡는 이상한 사람] 이건 뭐냐고! 이거 빈님이 작성한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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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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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긴 뭐가 아냐! 여기 중에서 트위터에서 나랑 만난 사람이 당신밖에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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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든 자신에게 돌아올 수연의 응징을 받아넘기기 위해서, 과장된 동작을 펼치며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기 시작한 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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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이러지 말자. 응? 같이 가는 밴드원들끼리 막 불화가 생기고 이러면 좀 그렇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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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청춘만화에 나오는 가련한 주인공처럼, 이서는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고 열성적으로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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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이 너도 맨날 말한 거 아냐? 밴드는 항상 같이 가야 한다. 밴드는 하나가 되어야 한다. 우리가 이게 지금 그냥 자체컨텐츠에 했었던 그런 거 하나 때문에 감정이 상하고 그러는 건 좀 아닌 거 같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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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이 상하게 할만한 말은… 소맛님 혼자… 만 한 게…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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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히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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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는 탁자 위에 올려져 있던 종이를 돌돌 말아 현아의 정수리에 내려쳤다. 팍! 하는 소리와 함께 현아가 “히엑!” 하며 거북이처럼 목을 움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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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수연아. 우리는 이제 하나가 될 차례야. 이런 사소한 일 하나때문에 서로 보복하고 그랬다가는 이제 계속될 자체컨텐츠에서 살아남을 수가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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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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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의 열띤 웅변. 그 말이 끝나자, 수연은 크게 숨을 들이쉰 후 한숨을 푹 쉬었다. 아이들은 수연의 그런 움직임에 팽팽하던 사무실의 분위기가 한순간에 풀려가는 것을 느꼈다. 저렇게 선을 넘었는데도 용서를 해 줬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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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해. 응? 다시는 그렇게 안 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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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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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의 말에 그렇게 답을 하며, 수연은 이서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이서는 싱글벙글 웃으며 손을 맞잡고 악수를 했다. 단단히 쥐어진 1초간의 악수. 그 이후 이서는 손을 풀었지만, 자신의 손은 계속해서 잡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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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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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할 줄 알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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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은 이서의 손을 꽉 잡은 채, 이서에게 그렇게 선고했다. 그리고 사무실에서는 “으아아악!” 하고, 높은 데시벨의 비명이 울려퍼졌다. 꽤나 고생을 좀 할 것 같은 느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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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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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시험 개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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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윤은 영혼까지 털린 채로 털레털레 걸어 자취방에 돌아왔다. 컴퓨터를 키지도 못한 채, 샤워만 대충 하고 침대에 털썩 몸을 던진 다음 핸드폰을 들어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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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만사가 다 괴롭다. 이럴 땐 영혼의 양식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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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녀가 애정하는 밴드, 그룹 사운드는 컨텐츠를 올릴 기미가 전혀 없었다. 그 사실에 그녀는 통곡을 하며 트위터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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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위터의 분위기는, 그녀가 예상하던 것과 천지 차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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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제발 뭐 좀 올려줘!!] 라며 절규하던 사람들. 그마저도 점점 사그라들어가던 타임라인은, 이전의 모습은 단 하나도 보이지 않은 채 정월날의 츠키지 시장마냥 엄청날 정도로 붐비고 있고… 상주하던 사람들은 로또라도 맞은 것마냥 행복해하고 있는, 그런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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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윤은 그 모습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이게 무슨 일인가. 천천히 훑어본 타임라인에는 공통적으로 하나의 유튜브 링크가 걸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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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000. 새단장 및 시작] https://youtube.com/dodwqpo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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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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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얼마만에 올라온 공식 유튜브 영상인가. 지난번 라디오 출연으로 일용할 양식을 한번 얻긴 했지만, 그것이 유튜브 영상만큼 영양가가 있지는 않았다. 아윤은 그보다 뭔가 더 ‘덕질’을 할 만한 컨텐츠가 필요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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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게다가 그냥 평범한 덕질 영상이 아니라! 자컨이라는 대박이 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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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000. 새단장 및 시작] 이라는 뭔가 거창한 제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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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가 베이스를 든 썸네일이 있는 3시간짜리 [나는친구를놀리지않겠습니다] 영상도 있었지만… 일단 그 영상은 무시한 채로, 그녀는 기대감을 가지고 영상을 재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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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혼잣말을 뱉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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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 미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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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 새 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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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자기하게 꾸며진 문구와 함께 소개되는 사옥. 홍대 인근의 작은 빌딩을 리모델링한 듯한 회사. 소속 아티스트의 굿즈와 커피까지 팔고 있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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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로도 이어지는 화면. 인재 영입. 앞으로의 계획. 정규앨범, 그 외 다른 이야기들. 앞으로 수많은 컨텐츠들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는 증거. 뛰던 가슴을 더욱 더 세차게 요동치게 만든 것은, 레이블 소식의 소개가 끝난 다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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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들의 첫 인상! ‘첫 인상을 알아봅시다!’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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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안 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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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거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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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안났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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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아아아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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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윤은 마음껏 절규했다. 눈치를 볼 사람들도 없었기 때문에. 소리를 지르다가 트위터에 들어가보니, 그녀와 비슷한 상태인 사람들이 몇 있었다. 몇분 간격으로 크아아악 하며 너무나도 좋아하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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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컨텐츠의 취지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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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중간에 삽입된 편집도, 꽤나 공을 들인 것 같아 보기 좋았다. 예산이 많이 들어간 것 같지는 않았으나 뭔가 아는 사람이 했다는 건 확실하게 보이는 영상 퀄리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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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우리 아이들을 좋아하시는 팬분들에게, 우리 아이들이 어떤 아이들인지? 밴드가 어떤 상태인지? 를 보여드리자는 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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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아악새로운직원분너무감사합니다ㅠㅠㅠㅠ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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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짜미치겟으뮤ㅠ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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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응을 올리자마자 따라붙는 다른 트위터리안. 아윤은 심장을 부여잡고 자신이 얼마나 이 영상을 좋아하는지 연설 아닌 연설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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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악의적인 거 아니야 이 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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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님만… 하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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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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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영상을 재미있게 만들어준 것은, 생각치도 못한 부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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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드의 리더, 카리스마 기타. 전직 일진 혹은 양아치, 그리고 상당한 미모. 분명 학창시절에 만났다면 꼼짝없이 말 한번 못 걸고, 말이 걸려왔더라도 기 죽어서 “미안해!”를 외칠 것 같은 그런 아이, 하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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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에 아윤은 기대했다. 오히려 수연이 조금 눌리는 모습도 있지 않을까 하고. 하지만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기에, 아윤은 그 부분에 있어 전혀 생각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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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런 애들은 보통 다른 친구들을 막 휘어잡는 타입이긴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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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하수연이 보여주는 영상 내 모습은, 그런 인상과는 완전 반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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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왜 틀니고, 노인이야? 나는 완전 멀쩡한 여자 고등학생이라고. 17세 학생이라니까. 내가 왜 저런 취급을 받아야 되는지 모르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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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위의 놀림에 화를 참지 못하고 부들대는 것이 그대로 보이는 수연의 모습. 그리고 틈을 놓치지 않고 사정없이 놀려대는 밴드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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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즌멀쪙한고등학쉥이라거~~ 냬갸왜저런취그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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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이서가 심했다. 그야말로 한치도 쉬지 않고 계속 놀려대는 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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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미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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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가서 수연선배 한번 놀려보고싶어요 ㅠㅠㅠ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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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볼꼬집어보고그러고싶음 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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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짓을 하면 진지하게 진짜 혼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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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윤의 덕질메이트, 한승고 1학년에게 날아온 DM. 아윤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그 마음을 이해할 것 같았다. 아무리 편집이 들어갔다 한들… 저런 자컨을 보면 누가 수연을 미워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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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행복 그 자체인 자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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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자체 컨텐츠 쪽으로 넘어가자면. 일단 문제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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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컨이 업로드된지 며칠 후 열린 정규 앨범 프로듀싱 관련 회의. 고경민의 말에 명전은 머리를 꼬았다. 확실히 문제가 있는 컨텐츠긴 했다. 그를 그렇게 취급한 영상이었으니까. 하지만 경민이 말하는 건 그런 쪽의 문제가 아닌 것 같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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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문제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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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이 자료를 봐주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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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실 벽면에 프로젝터로 쏴지는 자료. 명전은 무의식적으로 눈을 가늘게 뜬 채 몸을 뒤로 젖혔다. 뭔가 도표나 그래프등이 막 그려진 것이 보이긴 했는데, 어떤 식으로 해석을 해야 할지는 감이 안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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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표와, 이 지표. 보시면 총 조회수는 점점 늘어나고 있는데… 정작 저희 영상에 댓글을 한번도 달지 않은, 즉 신규로 유입된 사람들은 얼마 되지 않는 것이 보이고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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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경민은 그렇게 말하며 계속해서 자료를 넘겼다. 이러쿵 저러쿵. 복잡한 데이터들. 그리고 그 데이터들에 대한 해석. 명전은 대충 반 정도는 알아들었고, 반은 알아듣지 못한 상태로 계속해서 화면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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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이렇게 해서, 이번 자컨 영상에 대한 초반 추이를 보았습니다만… 결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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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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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뜸을 들이는 고경민. 그 모습이 답답했는지 질문을 던지는 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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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컨텐츠가 지금 저희 팬층에서는 상당히 높은 조회수와 호응도를 보이고 있다는 겁니다. 내부에서 상당히 반복해서 열성적으로 소비를 하고 있고, 이와 관련되서 팬 커뮤니티 반응도 매우 좋다는 것.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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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경민이 제시한 다른 자료. 이리저리 수치가 적혀 있는 것에 대해, 경민은 해설을 곁들여 설명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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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규 유입 자체가 적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유입된 유저가 바로 이탈해버리는, 그런 일은 일어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아요. 실제로 팬클럽 유입 또한 영상 업로드 이후에 유의미하게 발생하고 있는 상태고. 그런데 문제는 유입 자체가 적다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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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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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팔짱을 끼었다. 일리가 있는 말인 것 같긴 했다. 그들이 찍은 것은 이른바 ‘자체컨텐츠’. 내부 팬층을 위한 창작물. 그렇기에 내부 사람들만 돌려보는 것 자체는 너무나도 당연한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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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그룹 사운드의 내부 팬층’이라는 게 터무니없이 작다는 거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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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정도 외부 유입을 가져와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아닌 모양이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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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근데, 우리가 다른 사람들한테 밥상을 차려줄 수는 있어도 밥을 막 억지로 먹일 수는 없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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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하의 말에, 고경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명전 또한 그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이 정도까지 만들어줬는데 그걸 안 먹으면, 그런 사람들을 어떻게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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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 때문에 제 생각에는… 사람들이 유입될만한 컨텐츠를 만들어 줘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 시점에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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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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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자컨이 이제 제작되는 시점. 이 시점에 이번 앨범 및 밴드의 디자인 컨셉을 결정하고, 화보를 낸다던가 하면… 상당히 유입을 이끌어 올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예를 들어서 이런 것들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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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경민이 든 자료를, 명전은 눈을 가늘게 뜨고 고개를 내밀어 쳐다보았다. 밴드 의상 몇개, 아이돌 의상 몇개. 그도 알아볼만한 그런 정상적인 의상들 사이에서, 위화감이 드는 사진이 하나 있었다. 살짝 왜색이 있는 프릴이 치렁치렁 달린 분홍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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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무슨, 이 사람 큰일 날 사람이네. 우리가 저런 걸 어떻게 입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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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프릴 치마를 가리키며 외쳤다. 눈에 흙이 들어가도 저런 건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차라리 늙은이라 해라. 얼굴만 내미는 유교적인 의상을 입는 것이 낫지 저런 의상을 입을 수는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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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정규 앨범 녹음 진행 상황에 대하여 설명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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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인과 고경민, 정유영, 그 외 레이블 직원들과 그룹 사운드 밴드원들. 정규 앨범 제작 관련자 모두가 소집된 프로듀싱 정규 회의. 고경민은 그렇게 말하며 레이저포인트를 잡고는, 프로젝터 한 쪽을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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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제작중인 곡은 총 10곡. 그리고 현재 녹음이 진행되고 있는 곡은 3곡. 완성된 곡은 현재 1곡입니다. 진척도는 약 20% 정도이며, 예상보다는 좀 느리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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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경민의 말에, 혜인이 볼을 살짝 쓰다듬었다.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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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전에 수연이에게 말을 들었을 때는… 수록곡이 12곡에서 15곡 정도 된다고 이야기를 들었는데요. 현재 10곡 정도 진행중이라면 진척도가 훨씬 높아야 하는 것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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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설명하기 약간 좀 미묘하지만… 보통은 앨범을 만들기 위해서 딱 그 앨범에 필요한 곡만 제작하지는 않습니다. 훨씬 많이, 예를 들어 2배수 3배수를 제작한 다음 아닌 건 추려내고 다듬어서 세트리스트를 맞추는 쪽으로 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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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설명에 명전은 일화 하나를 떠올렸다. Beach boys의 Brian Wilson이 자신들의 앨범 Smile의 세트리스트를 40년이 넘는 시간동안 완성하지 못했고, 결국 미완성 상태에서 릴리즈를 해버렸던 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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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하면 12곡 앨범을 위해서 12곡을 만든다면 분명 부족한 퀄리티의 곡이 나올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보통은 일단 곡을 많이 만들어낸 다음 퀄리티를 엄선해서 앨범에 곡을 수록합니다. 그래서 음악가들이 미공개 곡들이 많은 것이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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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경민의 설명에 혜인은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모습을 본 경민은, 시선을 돌려 명전과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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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한에 맞출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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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솔직히 말하면 글쎄요. 자신이 없긴 합니다. 아시다시피 곡이라는 게 만들어야겠다! 라고 다짐을 한다고 해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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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그렇게 말하며 아이들을 슬쩍 쳐다보았다. 왠지 모르게 경민이 했던 이야기에 충격을 받았는지 자기들끼리 “아 그러면 나 곡 더 만들어야 되는 거야?” 라고 쑥덕이는 녀석들. 명전은 이마를 짚었다. 이 녀석들도 몰랐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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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기한은 최대한 지켜야 하는 법이죠. 일단 해 보고, 정 안 된다 싶으면 일정을 미루는 쪽으로 가야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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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기를 기도하는 수 밖에 없겠죠. 곡 작업이라는 건 밴드 멤버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니까요. 그래도 뭐… 만약 곡 구매가 필요하다거나, 프로듀서가 필요하시다면 말씀 꼭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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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드에게는 어찌보면 치욕스러울 수도 있는 이야기. ‘자체 프로듀싱을 못 하는 밴드’. 고경민의 말은 부드러웠지만, 속에는 ‘기한 못 지키면 외부 프로듀싱을 고려하겠다’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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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기필코 아이들을 재촉해야겠다 다짐하며, 고경민이 띄운 다른 자료를 보았다. 앨범 관련 사항들이 이리저리 적힌 P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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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진행해야 할 것은, 앨범 컨셉 관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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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정한 거 아니었나요? 수연이가 곡을 들고 왔던 걸로 기억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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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의 이야기에, 경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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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습니다. 전반적인 컨셉은 그걸로 마무리되긴 했지만… 이제는 구체적인 이미지가 필요한 작업을 들어가야 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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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필레이션 앨범(보통 히트곡을 모은 음반)이 아닌 이상에야, 앨범은 어떤 주제를 가지고 만들어지게 된다. 그 주제는 사상일 수도 있고, 이야기일 수도 있으며, 하나의 경험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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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 지금 정해진 컨셉은 제가 생각하기에는 ‘우리들의 이야기’ 뭐… 그런 느낌이지만, 이게 좀 지나치게 넓은 감이 있다고 보고 있거든요. 팬들이나 일반 사람들에게야 ‘우리들의 이야기를 모은 앨범입니다.’ 라고 설명하면 그만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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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말하며 고경민이 띄운 것은, 다양한 앨범들의 커버와 뮤비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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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드는 우리가 디자이너나 영상감독님들한테 가서 ‘우리들의 이야기라는 컨셉입니다.’ 라는 말만 해가지고는 일이 안 되니까요. 제목. 앨범 표지. MV. 의상. 단독 콘서트를 할 거라고 하셨으니, 콘서트 무대 컨셉 등. 이런 것들을 하나로 묶는 이미지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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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 경민은 설명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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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앨범의 내용물이 다 만들어진 다음 작업에 들어갈 것이라면, 당장 지금 정할 필요는 없다. 세트리스트까지 다 나온 다음 그것을 고려해서 디자인을 하면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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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렇게 되면, 6개월 안에 만든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진다. 다 만든 다음 거기에서 컨셉을 따온다면 당연히 시기적으로 늦어질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역도 마찬가지다. 6개월 안에 따로따로 하는 것은, 앨범 작업의 시간 자체를 줄여버리는 것이므로 마찬가지로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이… 고경민의 설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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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략 무슨 말인지는 알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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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가 처음에 멤버들에게 [Entangle](가칭)을 들려줌으로서 앨범의 전반적인 컨셉을 제시하긴 했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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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을 뭔가 정제된 이미지로 만들어낸 것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들은 아이들이 알아서 그 곡을 어떤 느낌이구나 한 다음 자기들의 생각에 따라 컨셉을 구현해내는 방식이었고, 그 때문에 아이들 간에 컨셉의 온도나 편차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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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민의 말은, 그런 것을 막음과 동시에 다른 사람들에게도 컨셉을 설명할 수 있도록 보다 해석이 쉽고 구체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내자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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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다음 ‘앨범의 이미지’와 함께, ‘유입용 컨텐츠’를 만들자고 하며 경민이 추가 설명자료로 들고온 것이 그 프릴 달린 의상이었다. “이 앨범의 경우는 매우 모범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라는 설명까지 덧붙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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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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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의 외침에 어안이 벙벙해진 표정을 지은 고경민.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아니 멈출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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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단위의 시간을 여자로 살아오면서, 입을만한 옷은 다 입어봤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도 자존심이라는 것이 있고 정서라는 것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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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무너져도 그가 짧은 탱크탑에 핫팬츠를 입을 수는 없는 것처럼, 프릴 달린 이상한 일본 아이돌풍 드레스도 마찬가지였다. 해도해도 너무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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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절대 저런 것 안 입을 겁니다. 저한테 강요할 생각일랑 꿈에도 꾸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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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이걸 입자는 게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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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자는 게 아니면 그런 걸 왜 가져왔다는 말입니까? 네? 그거 자체에서 이미 의도가 있다는 것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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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이 떠나가라 외치는, 평소보다 말투가 많이 흔들리는 그녀의 친구. 이서는 머리를 긁었다. 얼마 전부터 계속 생각하던 거지만, 이제는 확실해졌다. 그녀의 친구 ‘하수연’은 킥보드 사고때 뇌가 좀 망가진게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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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지 않고서야 저렇게 사람이 바뀔 수가 있겠는가. 별로 안 친하던 시절 인스타그램에 맨날 반쯤 헐벗은 사진 올리던 애가, 이제는 무슨 프릴 치마 하나 입는 거에도 완전 발작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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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유교걸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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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수, 진정 좀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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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을 하게 생겼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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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고 부장님이 당장 입자는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잖아.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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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에 잦아든 것 같은 ‘하수연’의 움직임. 그러나 이서가 잠시 수연의 등을 토닥이는 사이, 현아의 발언이 옆에서 쏜살같이 날아와 수연을 덮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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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 애초에, 옛날에 보면… 인스타에도 막, 그런 막, 저런 거보다 더 한 거… 그런 거 많이 올리셨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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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없는, 아니 악의가 있을지도 모르는 현아의 직설적인 발언. 그 말에 수연은 잠시 굳어있다가 발작적으로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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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내가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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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긴 뭐가 아니야. 너 맞잖아. 그때 나 완전 놀랬어. 밴드 들어왔을 때는 엄청 조신하게 입고 있던 한살 어린 여자애가, 인스타에 가보니까 무슨 그때 중학생이었는데 반쯤 헐벗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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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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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교복 치마를 엉덩이 보이기 직전까지 끌어올려놓고. 07년생 이런거 해쉬태그로 올려놓으니까 나도 웬만한 거는 그냥 무시하는데 내 안의 유교드래곤이 막 깨어나는 게 느껴지더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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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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왠지 모르게 진실성이 느껴지는 수연의 외침. 하지만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비웃는 서하와 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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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아. 엄마는 그런 거 진짜 좋지 않다고 생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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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인의 그런 말에 정말 미쳐버릴 것 같이 부들부들대는, 하지만 엄마라 아무 말도 못하고 있는 수연. 그 틈을 타 이서는 잠시 수연의 등을 토닥이고는, 고경민에게 질문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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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이제 저런 것처럼… 잘 만들어진 이미지는 잘 만들어진 앨범과 어쩌고. 그런 걸 만든다는 게 부장님이 말하고 싶으신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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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그렇습니다. 뭐 어쩌면 그게 역이 되었을 수도 있긴 합니다만, 아무튼 우리 정규 앨범 제작에 있어 일종의 이미지 가이드라인을 만들자는 것은 확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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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그 꼴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차분하게 말을 이어나가는 고경민 부장. 이서는 억울해서 죽으려고 하는 상태의 수연(도대체 왜 그런지는 모르겠으나)을 힘으로 눌러 앉히고는, 머리를 긁었다. 이미지라.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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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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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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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의 세션. 명전은 세션을 위해서 만난 한국 메이저 락 밴드, 테일러드의 리더 김철연에게 지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가 정규앨범의 근황을 궁금해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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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다들 그러는 법이긴 하죠. 첫 앨범이니까. 아니 첫 앨범은 아닌가? 여러분 EP도 냈잖아. 그때는 그런 일 없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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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는 제가 다 만들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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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뭐 그럴 수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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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혼자 만들면 아무래도 그런 게 편하지~” 라는 중얼거림에, 명전은 속으로 동감했다. 혼자 다 하면 이리저리 귀찮은 일 안 겪어도 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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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뭐 같이 하고, 사람들 많이 끼는 게 앨범 퀄리티가 나오는 편이니까. 디자이너가 있었다면 조금 편하긴 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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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일러드는 디자이너 있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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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야 뭐, 외주 주죠. 의상은 코디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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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의 질문에 철연은 그렇게 답하며 이리저리 설명을 해 주었다. 앨범 표지나 MV같은 건 다 외주. 전체적인 디자인 컨셉은 그냥 자기들끼리 고민. 그 외 의상디자인이나 그런 건 다 코디네이터 사용하고, 무대 디자인도 외주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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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 도맡아 하는 직원이 있으면 편하긴 하지. 근데 무슨 큰 회사 아닌 이상에야 그렇게 막 직원을 뽑을 수가 없으니까. 그거 외주인력 말고 내부직원으로 뽑으려면 디자인 팀 자체를 채용을 해야 될 걸? 거의 다섯명 정도 뽑아야 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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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한 명으로 안 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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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세상에 그런 걸 누가 한명이 다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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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연의 말에 명전은 머리를 꼬았다. 옛날에는 그냥 음반사 여직원 한명이랑 외부 인력 한명이 붙어서 저런 디자인 일 다 처리했던 것 같은데. 디자인이야 그냥 다 비슷비슷한 거 아닌가. 내나 다 예술하는 애 데려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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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이러니까 자꾸 꼰대 소리를 듣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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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머리를 흔들어 그런 생각을 지워버렸다. 점점 더 아이들의 놀림이 심해지는 만큼, 그도 옛날 사고방식을 버려야 했다. 언제까지 놀림만 받고 살 것인가. ‘서명전’의 사고방식을 가져가면 가져갈수록, 허구한 날 꼰대라며 놀림받는 일이 늘어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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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뭐, 옛날 생각 나네. 그렇지 않냐? 우리도 옛날에 이랬잖아. 앨범 막 제작할 때 허둥지둥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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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긴 했죠. 그런데 우리는 이쪽보다는 고생이 덜 했던 거 같은데? 아무래도 디자인이니 의상이니 그런 걸 신경 안 써도 됐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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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생각을 하는 명전을 앞에 두고, 철연과 동료들은 자기들의 옛날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명전은 그런 이야기를 조금은 귀를 기울여 들었다. 그보다 까마득한 후배들이었지만, 그래도 앨범 제작에 있어서는 따라갈 수 없을 정도의 베테랑이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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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때요. 우리 뭐 앨범 예전에 작업했던 자료나 이런 것들 한번 볼래요? 참고가 될지도 모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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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에, 그런 철연의 제안이 들어왔을 때 흔쾌히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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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와요, 들어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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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 방문했던 장소와는 아예 다른 곳. 꽤나 멀끔했던 연습실과는 다르게, 생활감이 상당히 묻어 있는 공간. 안쪽에서 들리던 음악소리가 잠시 멈추더니, 누군가가 고개를 내밀었다. 보니 테일러드의 드럼을 맡은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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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웬일이야? 오늘 안 온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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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오늘 우리 수연 씨 앨범 작업 관련해서 좀 이야기좀 할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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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슥 들어가버리는 드럼. 철연은 웃으며 방 한쪽 테이블 자리를 권했다. 몇명의 사람이 앉았는지 모를 정도로 닳아버린 가죽 의자 위에 명전은 몸을 올렸다. 쿠션은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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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이제 우리 밴드 멤버들 개인 연습실이에요. 옛날에는 여기에 한층 더 터서 녹음실에 단체 연습실까지 뒀었는데, 이제는 안 그러고 있지. 아무래도 돈도 많이 들고, 장비도 교체해주고 이러는 게 좀 힘들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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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이 자리에 앉자 철연은 책장에서 수북하게 뭔가를 꺼내왔다. 테일러드의 앨범과 노트, 그림, 그 외 기타 등등. 워드프로세서로 작성된 것 같은 자료도 있고, 수기로 작성된 게 분명한 자료도 있었다. 난잡하게 그려진 낙서라던가 앨범 아트에 대해서 정말 대략적으로 설명된 그림도 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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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는 이제 우리가 3집 만들 때 썼던 거에요. 그때 한참 컴퓨터 아트가 유행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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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연의 말에 명전은 철연이 건넨 3집을 쳐다보았다. 딱 그런 느낌이었다. 90년대 세기말에 막 만들어지던 이상한 느낌의 컴퓨터 아트. 그때는 저런 게 유행하긴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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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건 보통 어떻게 제작하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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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우리는 뭐 누가 전담해서 하지는 않았어요. 보통은 담배 뻑뻑 피우면서 “앨범아트 어떻게 하냐?” 막 이런 소리나 하다가, 이제 술 먹고 머리 싸매다가 누가 아이디어 내면 그게 옳다 그르다 그런 이야기들 막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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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에 명전은 머리를 살짝 꼬았다. 테일러드는 한참 저평가를 받던 시절에도 디자인 컨셉 하나는 좋다는 이야기를 듣던 밴드였다. 후배들이 이야기하기로는 “디자인 전공 한 사람이 있는 것 같다던데요.” 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고, 명전 또한 “내 앨범 아트가 저 정도였으면 좀 더 팔리지 않았을까?” 라면서 당시에 있던 친구에게 한탄한 적도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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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실제로 보면 그냥 술 먹고 담배 피다가 막 생각해낸 그런 거였단 말인가. 뭔가 실망스러운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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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디자인이라는 게 뭐 그렇게 거창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어요. 지금 수연 학생은 뭔가 컨셉 아트를 하나로 관통하는, 그런 대단하고 거창한 그런 이미지를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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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연은 그렇게 말하며 커피를 홀짝였다. 그 말에 명전은 뭔가 찔린듯한 느낌을 받았다. 실제로 그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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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그 고 부장이라는 분도 그렇게 생각하진 않았을 것 같고. 내 생각에는 어찌되었든 뭔가 이미지가 필요하니까 그렇게 말을 한 것 같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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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걸 어떻게 만드느냐가 문제입니다. 디자인이라는 걸 해보질 않았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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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 봐. 그게 거창하게 생각하는 거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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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자 위에 올려진 서류 더미. 그 안에서 철연이 찾아낸 것은 복잡하게 낙서된 수십장의 종이였다. 무슨 말인지도 모를 악필과 고풍스러운 글씨체. 그 외 이것저것 등이 적혀있는 무지 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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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우리가 앨범 컨셉 잡고 아트 만들고 기획하고… 이럴 때 막 썼던 거거든요. 이거 보면, 그냥 막 썼어. 브레인스토밍? 이라고 하지? 밴드 멤버들 모아다가 막 던지고. 되던 안되던 이야기를 막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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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멤버들이랑 이야기는 많이 합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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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거 말고. 그런 이야기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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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연은 손을 잠시 쥐었다 폈다 하다가, 앉아서 그를 바라보았다. 명전은 마치 그 폼이 포장마차에서 소주 한잔을 앞에 둔 노가다 아재 같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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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 학생은 미성년자니까 술을 먹으라는 이야기는 못 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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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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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내가 말하고 싶은 건, 뭔가 밴드 차원에서 결정해야 할 일이 있다. 그럴 일이 있다 그렇다면 그냥 멤버들끼리 진솔한 이야기를 한번 해보라는 거에요. 왜냐하면 결국 창작을 하는 사람은 처음엔 자기 이야기를 할 수 밖에 없거든. 왜냐하면 본인이 제일 잘 아는 게 그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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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에 명전은 최근에 만들었던 곡을 떠올렸다. 처음은 아니었지만, 손 가는대로 만들어졌던… 이번 앨범의 컨셉을 잡은 [Entangle]. 그것은 ‘서명전’이 ‘하수연’의 삶을 살면서 느꼈던 것을 풀어놓은 곡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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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들끼리 그런 이야기를 허심탄회하게 하고. 예를 들어서 “나는 이 곡을 어떤 의도로 작곡했는데, 너희들은 이 곡을 들을때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냐?” 같은 그런 느낌인거지. 물론 좀 부끄럽겠지만 아무튼… 그렇게 막 늘어놓다 보면, 결국엔 답이 나올 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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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하면 여러분의 앨범은 곧 여러분의 이야기니까. 철연은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커피를 한번 더 홀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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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블 에코사운드의 사무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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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꽤나 들락날락거리는 근무시간과는 다르게, 저녁 시간이 되면 이 곳에는 한명밖에 남지 않는다. 음반 판매 및 커피 관련 코너에 종사하는 아르바이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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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오세요… 어? 수연아! 이 시간에 갑자기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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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애들이랑 회의 좀 하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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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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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의 뒤로 옹기종기 따라온 세 명. 알바생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세 명의 인사를 받아주었다. 그런 그녀에게 명전은 커피 네 잔을 구매한(안타깝게도 회사 카페라고 해서 막 공짜로 커피를 주지는 않았다) 후, 회의실에 들어와 자리에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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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는 밤을 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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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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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어진 명전의 결연한 중얼거림에, 아이들은 처음 듣는 소리인 것처럼 화들짝 반응했다. 그럴 수 밖에 없었다. 이야기도 하지 않고 합의도 보지 않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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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안에 앨범 컨셉 및 이미지… 이거 안 정하면, 내일 학교 못 간다고 생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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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희번덕거리는 명전의 눈빛에, 세 아이들은 일단 고개를 끄덕이고 봤다. 저렇게 약간 돌아버린 상태의 ‘하수연’은 정말 막기가 힘들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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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요약하자면 이런 거지? 우리가 만든 곡을 다 들어보고. 그 다음 아무튼 브레인스토밍을 해서, 오늘 안에 뭐 어떻게든 이전에 고 부장님이 말한 그런 걸 만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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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의 말에 명전은 고개를 끄덕였다. 거칠게 요약하자면 그랬다. 철연의 말처럼 서로의 창작물을 공유하고, 떠오르는 것을 마구 던져본다. 그러다 보면 뭔가 나오지 않을까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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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노트북도 가져왔지. 이때까지 너희들이 만든 곡을 한번 들어보자고. 이 참에 이제 정리 좀 해서 들어갈 곡 안 들어갈 곡 추리고, 들어갈만한 곡은 편곡으로 넣고. 이래야 될 것 같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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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좀 부끄러운데. 1:1로 하면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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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을 하며 이서는 뒷목을 쓰다듬었다. 얼굴이 살짝 붉어진 것을 보면, 공연히 말만 하는 게 아니라 실제로 부끄러운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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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돼. 여기 있는 사람들 다 밴드 멤버인데, 무슨 오디션 심사 받는 것도 아니고 왜 그렇게 해야 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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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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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소리를 내는 이서. 명전은 그런 모습을 무시한 채로, 다른 아이들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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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부터 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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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에 침묵이 감도는 회의실. 평소라면 뭐든지 내가 먼저 하겠다며 나설 이서도, 자신감이 넘치던 서하도 감감무소식이었다. 현아야 뭐 원래 이런 거에서는 절대 안 나서는 사람이긴 했지만, 다른 둘이 침묵하는 것은 상당히 의외라고 명전은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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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가위바위보로 정해. 먼저 곡 발표할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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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눈치만 보고 있던 세 명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마냥 느릿느릿 손을 내밀었다. 눈빛을 보아하니 딱 봐도 영원히 비기기만 하자 같은 그런 눈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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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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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영원히 비길 수 있는 가위바위보는 없다. 현아의 패배로 끝난 첫 대결. 반쯤 덤블링을 할 기세로 좋아하는 이서를 두고 현아는 고개를 떨구었다. 마치 곧 죽을 거라는 소식을 들은 것 같은 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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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좀 있으면 자기들도 할 텐데 왜 저러는건지 모르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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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광경을 보며 명전은 생각했다. 결국 조삼모사 아닌가? 원래 매는 먼저 맞는게 이득이라고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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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곡은, 여, 여기까지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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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상형 모니터링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던 곡이 멈춘다. 명전은 머리를 살짝 꼬고는 방금 들은 곡을 머릿속으로 정리해보았다. AOR, 혹은 퓨전 재즈… 한국 혹은 일본식 표현으로 말하자면, 시티 팝(City Pop). 3분 정도의 길이를 가진 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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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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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정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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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퍼런스가, Plastic Love랑 Out of Time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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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네! 맞아요. 그 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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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완전 다 좋지는 않았지만, 명전은 일단 다른 아이들의 창작 의욕을 꺾지 않기 위해서 곡에 안 좋은 소리는 하지 않기로 했다. 아무튼 아이들이 처음으로 만든 곡 아닌가. 곡이야 다듬으면 되는 거지. 확실히 수록한다고 말은 못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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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의도로 만든 곡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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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으… 뭐라고 해, 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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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의 말에 우물쭈물하던 현아는, 계속되던 명전의 시선에 결국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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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인, 인천공항… 그 가던 날 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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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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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새벽에 가로등을 보는데, 가로등이 너무… 너무, 약간 감성적…이라고 해야 하나… 그 가로등, 은, 매일같이 거기 있는 거잖아…요. 사람들이 있건, 없건, 오던 말던… 간에, 항상 그 자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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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아는 그렇게 말하며 손을 꼼지락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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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미래도 그렇잖아요. 결국 어찌되었건 사람들은… 결국 자기의 자리에, 서… 살아가야 하는… 데. 오는 사람들을 지나보내면서… 약간 그런 느낌을 받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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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그런 느낌이라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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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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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아의 말에 명전은 머리를 살짝 꼬았다. 이야기하고 싶은 게 있긴 했지만… 일단은 메모로 끝내고, 다음 사람의 곡을 들어봐야 할 차례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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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명이 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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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UCK THE CHURCH. 가칭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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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노골적인 거 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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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에 서하는 프핳, 하며 웃었다. 정말 대놓고 의도가 그려지는 곡이었다. 딱 봐도 그런 곡 아닌가. 교회 좆까, 종교 좆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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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우리 교회에서 공연하고 난 다음, 너 가고 나서… 나는 결국 깨달아버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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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깨달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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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 종교는 그냥 해롭기만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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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을 하고 뿌듯해하는 서하의 얼굴. 명전은 참으로 할말이 많긴 했지만, 일단은 참았다. 이 대목에서 입을 열면 말이 상당히 길어질 것 같았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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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하가 들려준 곡은 マキシマム ザ ホルモン(맥시멈 더 호르몬) 풍의 하드코어 곡이었다. 어떤 장르라고 하기는 약간 애매한… 뭔가 강렬한 사운드와 상대에 대한 증오를 전달하고자 하는 그런 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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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앨범에 들어갈 수는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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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천장을 쳐다보며 그렇게 생각했지만, 일단은 넘기기로 했다. 다음 곡도 그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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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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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일단 어떤 풍 음악 듣고 쓴건지는 바로 알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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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의 대답을 요구하는 외침에, 명전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딱 봐도 ZUTOMAYO, ヨルシカ(요루시카), YOASOBI… 요즘 틱톡이나 혹은 다른 유튜브, 혹은 인터넷에서 유행하는… 그런 소위 말해 ‘니코동’ 발 음악. 살짝 다운되어있으면서도 통통 튀고, 그러다가 갑자기 극적인 템포를 만들어내는 그런 곡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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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의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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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도라… 놀랍게도 매우 진지하고 심각한 의도가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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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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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최근에 겪은 사건이 있단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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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는 그렇게 말하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세계의 중대한 비밀이라도 말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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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요약하자면 별 이야기 아니었다. ‘학교에서 나랑 놀던 애가, 얼마전에 가보니까 이제 내 뒷담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애는 사실 나한테 와서도 그 애 뒷담을 하고 있었다. 도대체 나는 누구를 믿어야 하는 걸까?’ 라고 짧게 줄일 수 있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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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사회에서의 친구 관계란 결국 진짜가 아니라 가짜라는 거지. 위선과 위선이 뒤덮혀있는… 진정한 친구 관계. 진짜를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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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우 심각하게 중얼거리며 먼 곳을 바라보는 이서. 그리고 살짝 동감하는 듯한 두 명의 사이에서 명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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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흐흐흡… 흐헉… 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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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지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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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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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저히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이서의 얼굴이 토마토보다 붉어지긴 했는데,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 사람의 생리현상이라는 게 막기 힘든 것 아니겠는가 원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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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이제 슬 감이 올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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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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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로도 몇개의 곡이 더 이야기가 된 후, 명전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피곤한 가운데 화색이 도는 아이들의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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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명의 시선을 받으며, 명전은 머리를 살짝 꼬았다. 그가 듣기에, 아이들의 의견은 결국 한마디로 요약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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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중2병, 아니 그건 너무 심했고. 사춘기 이야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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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들으면 어떻게 반응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명전이 생각하기에는 그랬다. 아무리 생각해도 ‘철없는 십대의 생각’ 그 이상을 벗어나기가 힘든 주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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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 수 없긴 했다. 아니 당연한 것일지도 몰랐다. 왜냐하면 이 아이들의 나이가 바로 그 시기니까. 감정이 폭발하고 자의식이 자라나고. 세상 모든 것들이 전부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줄 아는 나이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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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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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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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이 온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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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의 독촉. 명전은 잠시 “음… 그게 말이지.” 라고 입을 열었다, 다시 닫았다. 이걸 말을 해줘도 될까. 머리를 살짝 꼬고 입을 열려 했다가, 좀 아닌 것 같아서 다시 닫았다. 그러나 아이들도 알 필요는 있으니 다시 말을 하려고 했다가, 그래도 조금 심한 것 같아 입을 닫았다. 그게 한 세번 쯤 반복되자, 이서에게서 살짝 낮은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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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답답하게 만드는 방법이 두 가지가 있는데, 첫 번째는 하던 말을 끝까지 안 하는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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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는 입을 닫는 이서. 명전은 이서가 말을 하기를 기다렸지만,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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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는 뭔데? 왜 말을 안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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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연수 니가 그러고 있는 게 딱 그거라고. 너는 왜 말을 안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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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했던 행위를 그대로 돌려받은 명전. 그는 천장을 잠시 쳐다보았다. 이 가혹한 진실을 들려줘야 하는가. 하지만 언제까지 진실을 외면한 채로 살 수는 없는 법. 그는 숨을 살짝 들어쉬었다 내쉰 후,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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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내가 너희들의 곡을 들어본 결과… 너희들의 곡과 내 곡을 포함해서, 이 곡들에서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앨범의 메인 주제. 즉 이미지는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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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의 입만 쳐다보고 있는 세 명의 아이들. 그는 그 앞에서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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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기본적으로… 다들 중2, 아니 그 뭐냐. 이게 공격하려는 의도가 아닌 건 좀 이해를 해 줬으면 좋겠는데, 아무튼 ‘사춘기 청소년’… 아니다, 그냥 ‘중2병’으로 하자. 딱 그런 이미지가 떠오르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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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에 격해지는 세 명의 움직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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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 소리야!”, “아니…!”, “전혀 아닌데. 너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등. 격렬하게 부정하며 그런 의도가 아니었음을 증명하려는 것이 좀 웃겨 보여 명전은 웃었다. 그러자 이를 악문 발음으로 “비웃지 마라…” 라고 중얼거리는 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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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애초에 공격하려는 의도가 아니라고 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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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딱 봐도 놀리려고 한 거면서 공격하려는 의도가 아니라니 그게 무슨 소리냐? 언니 진짜 얘 완전 하라구로(腹黒, 겉과 속이 다름을 가리키는 일본어)라니까. 자기 아닌 척 그러면서 “니가 그렇게 알아들은 거겠지~” 막 이러는데 완전 한대 때려주고 싶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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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라구로가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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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서부터 물어보는 거야? 같은 표정으로 서하를 쳐다보는 이서. 현아가 서하에게 하라구로의 어원에 대해서 설명해주는 동안 명전은 이서에게 말을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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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너희들 실제로 사춘기 맞잖아. 그리고 요즘 그 시기를 중2병이라고 하고. 나는 사실을 말했을 뿐이라고. 사춘기가 부끄러워? 중2병이 부끄럽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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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왜 공격 의도가 아니라고 해명한 건데? 그냥 그런 이야기 했을 때부터 지금부터 비웃음 들어가겠습니다~ 네~ 이러던 거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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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애, 애초에… 수연 님 저희랑 같은 나이… 아니 저보다 어, 어리시면서… 자기는 아닌 척 하는, 거… 굉장히 치사하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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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내가 언제 아닌 척을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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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아. 너 지금 말하는 뉘앙스가 ‘너희들 다 중2병이다. 나만 빼고.’ 같은 느낌이잖아. 그런데 그게 더 중2병 같은 거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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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운 탓인지 혹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인지. 아무튼 전방위적으로 들어오는 공격을 필사적으로 방어하며 명전은 생각했다. 이 녀석들 배려해줘서 이야기 안 하려고 했더니, 괜히 공격만 당하고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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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그런 이상한 아수라장이 정리된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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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든 진정을 시킨 아이들을 두고, 명전은 왜 앨범의 메인 주제를 ‘중2병’으로 느껴지는지, 그리고 왜 그렇게 가져가야 하는지 설명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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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우리가 만든 곡에 전반적으로 깔려 있는 정서가 그거잖아. 그걸 왜곡할 수는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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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래도 중2병은 그렇지 않을까? 팬들도 ‘저희 앨범 주제가 중2병이에요!’ 라고 말하면 좀 부정적일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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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의 중얼거림에, 명전은 곧바로 반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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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왜 팬들에게 그 이야기를 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럴 필요는 없지. 이건 그냥 우리가 앨범을 제작하는데 쓰는 가이드라인일 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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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 그는 브레인스토밍을 위해 끄적였던 자료를 툭툭 쳤다. 사춘기, 청소년, 교우관계, 기타 등등. 아이들이 의도했던 것들이자, 십대 이십대들이 실제로 겪고 있는 이야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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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우리 팬들은 10대 20대… 많아봐야 30대 정도잖아. 그런 사람들을 잡기 위해서는 이런 쪽으로 나가는 게 좋지. 실제로 겪었고, 겪고 있는 이야기니까. 바로 공감이 될 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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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 명전이 읽었던 책 중에 하나에는 이런 내용이 나와 있었다. 대중예술이란 결국 소비자에게 공감을 어떻게 끌어낼 수 있느냐 하는 것이라고. 소비자에게 공감을 이끌어내면 이끌어낼수록 더 높은 평가를 받고 팔리게 되는 것이 바로 대중예술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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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그들이 하고 있는 것은 그런 ‘공감’이라는 것이 힘든 매체이긴 했다. 음악에서 바로 창작자의 의도를 읽어내기란 어려운 일이니까. 하지만 다다익선이라고 공감이 가는 주제로 곡을 만들면 더 좋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 명전의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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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너희들에게 들려줬던 곡… Entangle을 통해서 내가 그동안 느꼈던 걸 진실되게 풀어놓고자 했어. 그리고 그에 대한 대답으로 너희들은 이런 곡들을, 이런 의도로 작곡해서 나한테 들려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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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세 명의 눈동자를 마주 쳐다보았다. 시선을 피하는 사람도 있고, 마주보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어느 사람의 시선에서도 거짓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진실된 감정이 머물고 있는 그런 눈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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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럽더라도 이야기를 하자. 우리의 생각을 털어놓자. 멋져보이려고 거창한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어. 세계평화니 과학문명이니 어쩌고 저쩌고, 그런 이야기는 나중에 해도 돼. 처음에는 우리의 이야기를, 진실로 우리가 겪었던 이야기를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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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미국시장에는 컨트리가 유행하고 있다고 한다. 명전은 컨트리를 딱히 좋아하지는 않아서 크게 들어본 곡은 없었지만, 관련해서 기사를 읽어본 적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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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기사는 말했다. ‘Rich Men North of Richmond와 같은, 그런 진솔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한 노래들이 인기를 끌고 있다. 대중들은 이제 공감을 원한다. 수없이 많이 불려진 TV속 인터넷 속 스타의 이야기보다는, 자신들과 근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원한다. 그런 시대다.’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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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야 사람들이 우리의 음악을 들어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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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그렇게 말을 끝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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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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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집에 갔어야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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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득이 깔끔하게 끝난 시점에서, 다른 건 전문가들의 손을 빌려 다음에 정하자… 그렇게 말하고 자리를 떠났어야 됐다고 그는 생각했다. 만약 그렇게 했다면, 지금 이 상황은 맞이하지 않았을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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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걸 왜 못 입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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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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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수 너 전에도 그러더니. 응? 프릴 달리고 이런 거에 왜 막 그렇게 유교걸처럼 구는 거야. 아까는 뭐 중2병이니 사춘기니 그런 걸 왜 부끄러워하냐고, 그냥 평범하게 다들 지나가는 시기라고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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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랑 이거랑 다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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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르긴 뭐가 달라. 이런 거 사람들 다 평상복으로 입고 다니는 옷이라고. 평상복을 입는게 부끄러워? 그게 왜 부끄럽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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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놀릴 수 있으니 놀린다’라고 말하는 듯한 이서의 공격. 명전은 그런 이서를 잠시 외면한 채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냥 집에나 갈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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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의 발단은 별 것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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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늦은 거, 의상 컨셉도 정하고 갈까. 시간도 어중간하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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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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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중간하게 늦어버린 시간. 그 시간을 효율적으로 소모하자는 서하의 제안에 동의한 명전과 다른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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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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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ANDAL이라거나 SILENT SIREN의 공연 복장. 무난하지만 개성있는 의상 등을 보면서, 어떤 식으로 무대를 조성하고 어떤 식으로 의상을 입을지 대략적으로 구상하던 네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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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야기는 갑자기 빠른 속도로 다른 방향을 향해 질주하기 시작했다. 이서의 주도로 인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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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멘헤라 컨셉은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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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멘… 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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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의 말에 명전은 미간을 찌푸렸다. 일전에 서하랑 이서 둘이서 막 패션 가지고 싸울 때 들어본 단어 같기는 한데. 일본 패션인가? 하며 무의식적으로 바라본 서하의 얼굴은, 왠지 웃음을 참는 표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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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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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아니. 멘헤라 좋긴 하지. 그리고 우리가 멘헤라계의 전문가가 또 있긴 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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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 멘헤라 하면 또 떠오르는 사람이 있지. 완전 전문가. 양산형, 지뢰계, 멘헤라 전부 섭렵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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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또 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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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형은 뭐고 지뢰계는 또 뭐야. 그게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왠지 두 사람의 반응이 불안한 명전이었다. 영 좋지 않은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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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관심 있어? 입어볼 생각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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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지 알아야 입어볼 생각을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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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어볼거면 알려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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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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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이서를 바라보았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딱 봐도 “그래 내가 입어줄테니까 알려주라.”라고 말하기를 기대하는 눈치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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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한번 입어줄게. 그냥 한번 입어보면 되는 게 뭐가 문제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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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인간관계란 한번쯤 져 줄 필요가 있다. 명전은 그렇게 생각하며 이서에게 한번 굽혀주었다. 무슨 옷인지는 모르겠다만 그냥 입기만 하면 되는 것 아닌가. 뭐 그렇게 크게 문제가 될 것도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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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흐흫. 너 진짜 입어본다고 했다? 멘헤라가 뭔가 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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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는 그렇게 말하며 노트북으로 사진 몇장을 보여주었다. 그 사진에 명전은 기겁했다. 얼마 전 그가 봤었던, 프릴이 잔뜩 달린 진짜 ‘여성스러운’ 복장. 절대 입고 싶지 않은 그런 느낌의 옷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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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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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입어볼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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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을 본 그의 고함에 이서는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내가 무슨 잘못을 했냐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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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이건 아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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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노트북을 앞에 두고 마른 세수를 했다. 이전 고 부장에게도 그랬지만, 하늘이 무너져도 그가 저런 옷을 입을 일은 없었다. 치마나 이런 건 어떻게든 용납한다 해도 저런 건 아니었다. 왠지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에서 거부감이 올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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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나 이건 못 입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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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아까 입는다며? 혹시 너 약속 해 놓고 막 그거 깨고 이럴 건 아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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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흐흐핳 웃음 소리를 내며 슬금슬금 그에게 접근하는 이서. 명전은 이서의 체중이 자신에게 실리기 전에 빠르게 이서를 떼어내려 했다. 하지만 체급이라는 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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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떨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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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입는다고 말하기 전까지 안 떨어질거임. 유서! 빨리 붙어봐. 얘 지금 도망갈라고 한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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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씁, 어딜 도망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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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를 떼어내려고 몸짓하자 갑자기 들러붙어 몸을 고정시키는 서하. 명전은 꼼짝없이 붙들린 채 노트북의 화면을 바라보았다. 프릴이 추렁추렁 달려있는 옷. 왠지는 모르겠으나 절대 입기 싫은 그런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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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니가 아까 그냥 입어보면 되는거냐고 그랬잖아. 그냥 입으면 되는 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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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냥 싫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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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 가끔 보면 진짜 이상하다니까요. 그냥 평상복이잖아. 이게 부끄러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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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안 부끄럽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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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의 힘에서 풀려나기 위해 이리저리 몸부림치던 명전은, 그렇게 빼액 소리를 질렀다. 어떻게든 대답을 논리적으로 파훼할 속셈으로.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명전의 기대와는 전혀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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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왜 부끄러워? 나는 이해가 안 되는데. 그냥 옷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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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옷이라기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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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는 몰라도, 내 생각엔 니가 지금 지나친 의미부여를 하는 거라니까. 그냥 옷일 뿐이야. 프릴이 달렸다고 싫어하는 것 같은데, 프릴 달린 거 입었다고 막 음악 실력이 -1000 되고 이런 거 아니잖아? 게다가 뭐 비슷한 걸 안 입어본 것도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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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그 말에 침묵했다. 하긴 그랬다. 그는 이때까지 수도 없이 ‘여성스러운’ 일들을 겪어왔다. 예를 들면 속옷 착용이라던지, 생리라던지, 그 외 기타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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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것들에 대해 거부감을 가진 적도 있었으나, 이제는 자연스러워진지 오래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마음 속에서는 아직도 거부감을 느끼는 일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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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잔재인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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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그렇게 생각해보았다. 과거의 잔재. 그럴 수 밖에 없기도 했다. 그가 살아온 세월은 지금 여성으로 살아온 세월보다 수십배는 더 길다. 그런 생활 습관과 생각, 윤리감각… 그런 것들이 쉽사리 바뀔리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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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또 돌이켜 생각해보면, 어찌보면… 결국 바뀌어야 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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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하면, 다른 삶을 살겠다고 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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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살아난 다음 첫 날 떠올렸던 생각. 이전의 삶을 그만두겠다, 이전의 삶의 방식을 그만두겠다. 음악을 위한 삶을 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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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그때 떠올렸던 생각은 지금 이 상황과 큰 연관이 없긴 했지만, 다시 한번 생각해보면… 그는 지금 그 시절의 관성대로 살아가고 있었다. 새로운 것을 시도하기를 두려워하고, 바뀐 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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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그의 눈 앞에 닥친 일은 아주 사소한 일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런 일들에 대고 ‘나는 바뀌지 않겠다’ 라고 말하면 말할수록, 결국 그는 이전으로 돌아가는 게 아닐까. 하지 못했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했었던 일만 하게 되는 삶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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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았어. 입어볼게, 입어볼테니까 좀 풀어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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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온몸의 힘을 풀었다. 그런 명전의 반응에 이서는 놀란 듯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서하는 그런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으며 이서를 보고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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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얘 입어본다고 해놓고 안 입을수도 있는 애니까 계약서 쓰게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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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야겠다. 잠시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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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말하며 이서가 일어나는 순간, 그는 자리를 박차고 뛰어나갔다. 우당탕하며 의자가 넘어지는 소리와, 파파팍 하는 그의 뜀박질 소리가 동시에 났다. 뒤에서 “야!!”, “쟤 도망간다! 잡아!!” 라는 소리가 들리는 것을 무시한 채로 그는 점원에게 인사도 하지 못한채 이십만원치 정도 먹은 무전취식자처럼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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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의 삶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거랑 프릴 달린 옷 입기 싫다는 거랑 무슨 상관이냐. 내가 싫다는데 뭐 굳이 이유를 붙일 필요는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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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도 그를 묶어놓을 수 없고, 원하지 않는 것을 시킬 수 없다. 자유를 향한 발걸음은 무엇보다 가벼운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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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탈출의 자유를 느낀지 얼마 되지 않아, 그는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핸드폰과 지갑을 놓고 왔기 때문에. 핸드폰이야 달라고 할 수는 있지만 거기 달린 카드가 없으면 버스를 탈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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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그는 터벅터벅 걸어와 회사로 들어갔다. 그리고 들어가자 마자 이서와 서하에게 사로잡혀 계약서 작성을 강요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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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이런 거 안 해도 입어본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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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입어볼거면 튀긴 왜 튀었어? 딱 봐도 안 입을라고 그런 거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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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든 물적 증거를 남기지 않고 넘어가려는 그에게, 펜과 종이를 들이밀며 서명을 강요하는 이서와 서하. 그는 한숨을 푹 쉬고는 종이에 자신의 이름을 적었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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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자신이 도망을 가긴 했지만, 아이들이 입어달라고 하면 뭐 언젠가는 입지 않았을까. 세상에 정이라는 게 얼마나 사라졌는지 느끼기 시작한 그였다. 물론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 벌어진 일이라는 것은 염두에 두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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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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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을 열자 귀를 기울이는 나머지 아이들. 명전은 이 말을 해도 될까 살짝 망설였지만, 그냥 하기로 했다. 이미 그렇게 하겠다고 한 상황에서 도피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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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의 범위를 넓혀보자. 가능한 모든 걸 다 선택해본다는 느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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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 소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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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입는다 어쩌고 저쩌고. 그런 거 생각하지 말고, 그냥 모든 의상을 다 선택지에 넣어보자는 거지. 거절하지 않을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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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답은 돌아오지 않았으나, 대신 표정은 돌아왔다. 절대 믿지 못하겠다는 그런 느낌의 얼굴들. 그는 억울했지만, 아무튼 자기가 지은 죄가 있으니 뭐라고 하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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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입어볼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다른 것도 한번 보자고. 굳이 우리가 멘헤라인지 뭔지, 그거에 한정될 필요가 없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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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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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프릴이다 치마다 하면 바퀴벌레를 본 일본풍 애니메이션 여고생마냥 비명을 지르며 싫어하는 수연을 그냥 놀리고 싶어서 멘헤라 컨셉을 가 보자고 했던 이서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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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 또한 멘헤라 지뢰계 토요코키즈 등등의 컨셉의 옷을 즐겨 입었고 지금도 그런 풍으로 돌아다니긴 했지만, 굳이 그걸 무대에서까지 가지고 올라가고 싶진 않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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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연’의 대국적인 양보로 인해 극적 타결된 협상. 그로 인해 의상 디자인 탐색은 상당한 진척도를 보일 수 있었다. 부정적인 이야기보다는 긍정적인 피드백이 더 많이 오갔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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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 이 정도로 정리되는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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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는 핸드폰 타이핑을 마치고 입을 열었다. 카카오톡의 ‘자신에게 보내는 카톡’에는 방금 전까지 찾았던 컨셉 몇가지가 실려 있었다. 지뢰계, 마법소녀, 교복, 정장, 고딕풍 드레스, 테크웨어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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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게 제일 마음에 들긴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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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말하며 이서가 가리킨 것은 테크웨어 컨셉의 의상들이었다. 2017~18년쯤에 한번 유행을 탔다가 사라지고, 그 다음 최근 들어서 다시 한번 유행을 타기 시작한 컨셉. ‘[옷의 기능적 면모]를 중시하는 것처럼 보이는’ 의상을 입는 그런 패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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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좀 유니크해보이지 않나? 간지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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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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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머리칼을 살짝 꼬았다. 그가 생각하기에는 그냥 주머니 주렁주렁 달리고 줄 주렁주렁 달린 그런, 작업복에서 컬러만 검은색으로 바꾼 그런 느낌의 옷들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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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이렇게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않기로 했지. 긍정적으로. 변화를 긍정적으로. 매사 긍정적이게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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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쁘지 않은 것 같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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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컨셉이랑도 잘 어울리긴 하네. 아이돌 중에서도 저런 옷 입은 사람들 있지 않았어? 내 기억엔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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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중얼거리는 서하를 두고, 명전은 메모를 한 종이 몇장을 툭툭 정리하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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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대략적인 컨셉은 정하긴 했으니까. 다음 회의때 들고 가서 이야기를 하는 걸로 하자. 우리가 아무리 어떻다 저떻다 해도 이제 회의 가서 뒤집힐 수도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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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될 수도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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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하지. 이건 컨셉일 뿐이고 의상이 어떻게 나올지는 모르는 거니까. 아무튼 앨범 디자인이니 컨셉이니 관련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여기까지인 것 같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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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잠시 말을 끊고는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이제는 이 아이들의 영역.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의 지분이 더 큰 영역이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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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우리가 할 일은 곡을 만드는 거야. 제일 중요하고, 제일 시급하며, 제일 시간이 많이 걸릴 일이지. 최대한 좋은 곡을 뽑기 위해서 노력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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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방학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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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 밖으로 내뿜은 한숨이 하얗게 부서져 사라진다. 그는 그렇게 롱패딩을 꼭 싸맨 채 부들부들 떨며 길을 걸었다. 오랜만에 낙원 상가에 갈 일이 생겼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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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zzmaster는 오랜만에 써 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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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전’으로 살았던 세월동안 그가 주력으로 다루었던 악기는 Stratocaster였다. 물론 세션을 위해서 Suhr나 PRS, Michael Tuttle, Anderson같은 브랜드도 많이 썼고, 개인적으로 Les paul 또한 좀 써보긴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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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zzmaster같은 기타는 그다지 다뤄보지 않았다. 그런 류의 기타가 고난이도의 기술을 요구한다던가 하는 것은 아니고, 그냥 오프셋(Offset, 바디가 대칭을 이루지 않는 악기) 기타는 그의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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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Jazzmaster를 구입하려고 하는 이유는, 타이틀로 계획하고 있는 곡의 사운드 때문이었다. 몽환적이며 노이지한, 슈게이징적 사운드를 한번 구현해보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Jazzmaster 특유의 사운드를 스트랫으로 구현하기에는 조금 귀찮은 감이 있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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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렇게 추운 날에 굳이 들고 가겠답시고 나올 필요가 있었을까. 그냥 택배 시키면 되는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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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그렇게 궁시렁대며 추운 바깥에서 발걸음을 빠르게 놀렸다. 그렇게 뛰듯이 걸어가는 그를 멈춰세운 것은, 스쳐지나간 누군가가 갑자기 지른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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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잠시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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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전 스쳐지나간 사람이 지른 소리. 그는 무슨 문제라도 있나 싶은 생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이십대 초반의 대학생이 분명해보이는 여성. 알지도 못하고, 본 적도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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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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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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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하수연… 님 맞죠? 기타 치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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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맞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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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대답해주자, 갑자기 눈을 번쩍 뜨면서 “헐, 대박 대박. 와 나 진짜 이거 진짜 완전 처음이네.”라고 중얼대는 여성. 이야기를 들어보니, 혹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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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완전 팬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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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 진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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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뇨, 괜찮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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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앞에 놓인 커피를 홀짝 마셨다. 팬인 것이 분명한 여성은 머그컵을 두 손으로 잡고 있었다. 뜨거워 보이긴 했지만, 두 손으로 잡았음에도 불구하고 바들바들 떨리는 컵을 보면 어떤 상황인지 알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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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완전 그 어… 이렇게 유명인… 유명인? 유명인… 분을 만나는 건 처음이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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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제 팬이라고 하시는 분을 만나는 건 처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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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서명전’의 젊었던 시절에는 팬이라고 하는 사람들을 꽤나 만나긴 했으나… 아무튼 ‘하수연’으로 만나는 것은 아예 처음이었기에, 그는 신기한 마음에 커피를 사주었다. 당장 상대는 연하에게 얻어먹어야 한다는 사실이 상당히 부담스러운 듯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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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얼마전에 입덕… 공연 보고 팬 되었는데요! 수연님 나온 유튜브나 방송 엄청 재미있게 봤어요. 특히 ‘인베이전 2024’랑 ‘버스킹 버스킹’. 그리고 최근에 만든 그 자컨 그거도 진짜 재밌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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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감사합니다. 저는 그거 완성본을 보진 않아서, 재미있었을지는 의문이긴 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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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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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는 사람이 살짝 움찔하고, 카페에 두런두런 앉아있던 사람들이 슬쩍 쳐다볼 정도로 큰 소리. 그렇게 소리를 빽 지른 여성은, 잠시 흥분했다는 듯 다시 차분하게 앉아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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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재미있었어요. 완전 정말! 그거 뿐만이 아니고, 그냥 수연님이 나온 그런 컨텐츠 전체가 다 재미있었달까… 기타도 완전 잘 치시고, 얼굴도 완전 잘 치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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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얼굴을 잘 친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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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아뇨!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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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진짜네… 라며 영문을 모를 말을 중얼거리는 여성. 그는 무슨 말인지 잘 알아듣지 못했지만, 아무튼 상대가 그를 칭찬하려고 했다는 것 정도는 알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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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후로도 여성은 연신 떠들었다. 자신이 언제 유입된 사람인지. 자신이 ‘하수연’과 ‘그룹 사운드’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이번에 나온 컨텐츠가 얼마나 재미있었는지. Plastic Nostalgia가 얼마나 좋은 음반인지, 라디오에 나왔던 신곡은 언제 나오는 것인지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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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근데! 이거 조금 실례되는 말일수도 있는데! 어… 혹시 해도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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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말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그냥 하셔도 상관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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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떠들던 상대방이 말을 멈춘 것은, 미발표 신곡 이야기 즈음에서였다. 해도 되는 말인지 모르겠다며 잠시 입을 닫았던 상대방은, ‘하수연’의 이야기에 용기를 얻었는지 입을 다시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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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혹시 요즘 활동은 안 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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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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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외라는 듯 반문하는 그에게, 여성은 손을 휘저으며 의사를 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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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뇨아뇨아뇨! 그… 정규앨범 지금 만들고 계신다고는 들었어요. 그런데 혹시 활동은 안 하시나 해서… 싱글이라던가! 그런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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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당장 계획은 세우고 있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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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렇구나… 그럼 정규앨범 나오신 다음엔! 그때는 공연 하신다는 이야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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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것 같습니다. 그런데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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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아함에 그는 질문을 던졌다. 그 이야기에 상대는 “아니아니! 아니에요! 그 뭐 그냥! 그냥 여쭤본거라!” 라는 대답을 한 후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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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제가… 막 친구들한테! 영업이나 이런 걸 좀 몇번 해 봤는데. 자컨이나 서바이벌 이런 거 보고 재미있다고는 하다가도… 활동을 안 한다, 곡이 몇곡 없다 이러면서 그냥 노래만 몇번 듣고 말고 그러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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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으로서의 아쉬움을 토로하는 여성. 그는 가만히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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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연’ 혼자만이 아닌, ‘그룹 사운드’가 무대에 서지 않은지 몇개월의 시간이 지났다. 그리고 앞으로도 몇개월 동안은 올라갈 일이 없다. 팬이라면 충분히 고통스러울만한, 나중에 가서는 ‘얘들 활동 안 하니까 팬 그만둬야겠다’ 라고 생각할만한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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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인기가 있어봤어야 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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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머리칼을 살짝 꼬았다. ‘서명전’이었던 시절 아주 짧았던 전성기(그마저도 주인공은 아닌)을 제외하면, 그를 기다렸던 사람들은 세션 의뢰자랑 레슨생 정도밖에 없었다. 그의 음악도 그의 무대도 전혀 기다림의 대상이 아니었기에, 그는 ‘하수연’이 되어서도 그냥 그 시절 그대로의 감각으로 음악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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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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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그, 어… 부담드리려고 한 말은 아니니까요! 좋은 앨범 부탁, 부탁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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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잃은 그를 보고 여성은 어떤 생각을 했는지, 고개를 연신 숙이며 사과를 하고는 “저… 가보겠습니다! 시간 뺏어서 죄송했습니다!” 하고 자리를 떠났다. 이제야 먹을만하게 식은 상대방의 커피를 두고 그는 오랫동안 생각을 했다. 커피에 냉기가 깃들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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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서, 제 생각에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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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범 프로듀싱 회의. 앨범의 전반적인 컨셉과 의상 디자인에 대해 밴드원들이 생각한 것을 전달한 후. 뒤이어 이어진 수록곡 회의에서 그는 손을 들고 자신의 의견을 천천히 설명했다. 이런 일이 있었고, 이런 생각이 들었다 같은 이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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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의 공백기가 너무 긴 것 같습니다. 그 사례 뿐만이 아니고, 실제로 팬들 반응을 봐도 공백기가 너무 길어서 우리를 영업? 전도? 아무튼 그런 걸 할 수가 없다. 그런 의견들을 상당수 봤거든요. 물론 제가 본 의견이 팬 여론의 전부는 아니겠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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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끄덕이는 고경민. 명전은 살짝 멈춰 속으로 말을 고르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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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정규앨범 발매 전에 싱글을 먼저 선공개를 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EP에서 했던 것처럼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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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그 생각을 안 해본 것도 아닙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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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끝나자, 고경민 부장이 뒤이어 이야기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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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가 있긴 합니다. 선공개 싱글이 확실히 위력적인 홍보수단은 맞는데… 일단은 예산이 너무 들어요. 선공개 싱글을 효과적으로 사용하려면 그 싱글만 가지고 단독으로 아트를 만들고 MV를 찍고, 홍보를 돌려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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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 앨범만 발매를 하면 타이틀에만 해당 작업을 하면 되지만, 선공개 싱글을 만들 경우 그 곡에도 해당 작업을 해야 하니… 비용이 지금의 방식보다 훨씬 많이 든다는 것이, 경민의 주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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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 부분은 일단 아웃풋이 나온다고 생각하면 돈을 들이면 되는 문제인 것 같은데. 크게 문제될 부분 아니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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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장 모드에 진입한 혜인의 이야기에, 고경민 부장은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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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것보다 큰 문제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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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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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정이 다 밀려요. 지금 앨범 제작에 6개월. 하지만 선공개 싱글 발매하고 그거 작업하고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앨범 작업은 뒤로 밀릴 수 밖에 없습니다. 몸이 두개가 아니니까요. 죽어라 밤 새지 않는 한 무조건 뒤로 밀릴 수 밖에 없고, 그럼 그것도 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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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공개 싱글에 부정적 의견을 나타내는 고경민. 그리고 그 말이 일리가 있었는지, 살짝 뺨을 매만지며 깊이 고민을 하는 혜인. 침묵에 빠져든 회의실 안에서 명전은 밴드 아이들을 슬쩍 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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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의 생각으로 고민을 하고 있다가, 그와 시선을 마주치는 아이들. 무슨 생각을 했는지 점점 일그러지는 아이들의 표정을 외면한 채, 그는 다시 고개를 돌려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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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일정을 맞출 수만 있으면 선공개 싱글이 안 좋을 이유가 없는 거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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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긴 하죠! 선공개 싱글은, 약간 아이돌의 싱글과는 좀 다르긴 하지만! 아무튼 많은 기획사에서 아이돌의 영업 방식으로 사용하고 있는 매우 검증된 방식이에요! 게다가 타이틀곡이랑은 다른 맛을 줄 수 있어서 팬들이 더 좋아하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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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활한 목소리로 그의 의견을 지지하는 정유영. 명전은 다시 한번 더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그가 따로 말은 하지 않았지만, 왠지 아이들은 그가 하려는 말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입모양으로 ‘살려줘’를 말하는 것 같은 이서와, 처량한 눈빛을 보내는 나머지 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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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해 보죠. 못할 거 없을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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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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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경민의 반문. 명전은 태연하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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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한 빠른 시간… 뭐 이를테면 일주일, 이주일 내라던가. 그 안에 선공개 싱글 작업하고, 편곡까지 다 끝내고, 연습해서 녹음 하고. 그러면 가능한 것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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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그게 가능할까요? 가능하면야 좋긴 하겠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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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은 죽어서 자는 거라고 하잖아요. 원래 젊을 때 고생은 사서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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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우리는 동의 안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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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뒤에서 빼액 들려오는 이서의 고함. 하지만 그는 그 말을 무시했다. 원래 밴드는 리더 말에 따라가는 거다. 밴드원 의견은 중요하지 않다. 그의 말이 곧 법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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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기브 앤 테이크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받아가려는 것이 있으면 줘야하는 것도 있는 법이다. 그냥 달게 받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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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아, 저녁 먹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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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를 마쳤던 어젯밤부터 굳게 닫힌 방문. 혜인은 걱정스럽게 그 방문을 쳐다보았다. 그녀의 딸이 뭔가 꽂히는 것이 있을 때마다 식음을 전폐하고 그것에 몰두하는 경향이 있다는 건 이전의 밤샘 사건으로 알고 있었지만, 오늘은 좀 심할 정도였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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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러진 건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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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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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걱정을 한 사이 들려온 대답.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밥을 떴다. 그러는 사이 방에서 나온 그녀의 딸을 보고, 혜인은 내적 비명을 질렀다. 무슨 눈 밑이 검어진 게 판다 수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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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밤새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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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그런 것 같은데요. 지금 몇 시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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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18시 3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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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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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하니 잠시 서 있다가, 느적느적 걸어와 수저를 놓는 수연. 혜인은 뭐라고 해야 할지 고민하다 그냥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했다. 뭐, 젊으니까 하루쯤 밤새워도 되긴 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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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게 드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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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너도 맛있게 먹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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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없으면 어색하게 느껴질 정도가 된 식사 인사. 수연은 언제나처럼 밥숟가락을 떠 눈앞의 음식을 기계적으로 섭취해 나갔다. 그런 모습을 보며 혜인은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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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말했던 일정… 그거 될 것 같니? 힘든 거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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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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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에 수연은 숟가락을 내려놓더니 손을 쫙 펴 손가락을 하나둘씩 접기 시작했다. 왠지 아날로그적인 귀여운 행동에 혜인의 마음이 따뜻해지는 동안, 그녀의 딸이 머리를 살짝 꼬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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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들 것 같지는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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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경민 부장님이 6개월 말씀하시긴 했지만, 굳이 그렇게 빡빡하게 안 지켜도 되니까. 알잖아? 엄마가 사장인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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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나게 피곤해 보이는 수연을 보며, 혜인은 그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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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도 사업도, 물론 이익 극대화 및 기업 확장을 위해서 벌인 일이기도 하지만… 결국은 몇 년 동안 넓어진 거리를 좁히기 위해, 그녀의 딸을 위해 시작한 것들이었다. 무리한 일정을 통해 사업이 성공해 봐야, 그녀의 딸이 행복하지 못하다면 그렇게 할 이유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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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괜찮아요. 일정이 약간 빡빡하긴 하지만… 그 정도야 뭐. 충분히 할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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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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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을 마치고 수연은 다시 수저를 들었다. 다시금 침묵이 감도는 가운데 끝난 식사. 딸이 일어나 커피포트에 물을 올리는 동안, 혜인은 문득 하나가 궁금해져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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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지금 작업하는 건, 원래 쓰던 곡을 쓰려고 하는 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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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요. 지금 미리 만들어놨던 곡은 선공개 싱글에 안 맞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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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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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답 대신 맥심 커피믹스 2개를 타 넣고는, 믹스 봉투로 커피를 휘휘 젓는 수연. 두어 번 탁탁 친 후 봉투를 버린 다음에야 수연은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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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적으로 타이틀 곡이라던지 선공개 곡이라던지… 그런 곡들은 사람들이 듣기 편한, 확실히 대중적인 곡을 선호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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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의 설명이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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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로 타이틀 곡이라는 개념이 없이 리드 싱글과 싱글 컷을 통해서 앨범 활동을 하는 다른 나라들과 달리, 한국은 앨범 내에서 1~2곡 정도만 타이틀 곡으로 선정하여 활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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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만큼 타이틀 곡은 다른 곡과 다르게 대중성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 듣자마자 ‘이 밴드/가수/아이돌/기타 등등… 곡 좋은데, 다른 곡도 들어볼까?’라고 생각하게끔 만드는 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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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반대로 말하면, 타이틀 곡을 제외하면 앨범 내의 곡은 대체로 좀 자유로운 분위기로 만든다는 것이 된다. 즉 현재 앨범에 들어갈 곡 중 타이틀 외의 다른 곡은 완전 대중적이라거나 하는 곡은 아니다… 라는 수연의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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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곡들은 선공개 싱글이라고 하면 아무런 소득 없이 흘러갈 수밖에 없는 곡들이니까… 선공개 싱글을 내는 의미가 없죠. 그러니까 새로운 곡을 만들 수밖에 없는 거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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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괜찮니? 가능할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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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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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걱정에 수연은 희미하게 웃었다. 크기가 작긴 하지만, 아무런 우려나 걱정도 들어가지 않은 그런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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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로디는 찍어놓은 거 많아요. 시간 날 때 만들어놓은 것들… 그런 것 중에 이번 앨범이랑 어울리는 곡으로 해서, 좀 다듬고 편곡도 좀 괜찮게 해서 만들면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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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수연은 머리를 반쯤 위로 쓸어 넘겼다. 긴 머리칼이 손에 밀려 바스스 부서지며 그녀의 얼굴이 확연히 드러났다. 분명 피곤해 보이는, 살짝 초췌해 보이는 얼굴이지만… 할 일을 다 했다는. 혹은 이미 모든 걸 끝냈다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자신감이 머무는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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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해 보세요. 엄마가 들어도 계속 들을 수밖에 없는… 이게 만약 어머니의 딸, ‘하수연’이 만들지 않았더라도 듣게 되는. 그런 곡을 만들어서 들려드릴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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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딸은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일어나 방으로 향했다. 혜인은 잠시 멍하니 앉아 있다가, 흐뭇하게 웃었다. 딸의 성장을 지켜보는 것은 언제나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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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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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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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손을 올리며 마이크에 말했다. 바로 멈추는 노래. 잠시 침묵이 이어지더니, 스피커를 통해 그의 목소리가 녹음실 안으로 흘러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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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까 그랬잖아. 너 지금 자꾸 노래를 하려고 하고 있다니까. 왜 자꾸 사운드를 올리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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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이게 노래가 하다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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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음실 내에서 반박하는 이서. 하지만 그는 바로 그 말을 끊어버리며 마이크를 계속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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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소리를 낮추라는지 내가 설명을 해 줄게. 부르는 사람 입장에서야… “우어우엉ㅇ엉어어어~~!” 막 이렇게 부르고 싶겠지. 그런데 생각을 해 봐. “지금 여기——!! 에—!! 서—!!! 이렇게 노래를 부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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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적으로 드높이 올라가는 목소리. 시원시원하게 치고 올라가는 음에 다들 감탄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명전은 전혀 만족하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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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두번이야 괜찮은데, 너 같으면 이렇게 감정 힘 빡 주고 부르는 노래를 계속 듣고 싶겠어? 그런 노래가 땡길 때는 있는데 스트리밍에 넣고 계속 돌리지는 않을 거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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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그렇긴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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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계속 강조하는 게 지금 우리 노래가 밝은 노래잖아. 그러면 웃는 느낌으로 노래가 들어가야 해. 뭔 말인지 알지? 볼륨 다운 하고. 살짝 웃는다는 느낌으로. 조곤조곤 말하듯이. 그럼 다시 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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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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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음 1일 차가 끝난 후. 물먹은 솜처럼 늘어진 상태가 되어 바닥에 널브러진 이서를 그는 호쾌하게 밟고 지나갔다. “억!”이라며 고통을 호소하는 이서를 무시한 채로, 그는 디카페인 커피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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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컬 녹음 하루 했는데 힘들다고 그러면 어떻게 하냐. 지금 진행 상태 보면 3일은 해야 할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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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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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진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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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이 꺼지라 한숨을 내리 쉬는 이서. 그는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이미 바깥은 어둑어둑해지다 못해 별이 빛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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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음 과정이 쉽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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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쉰 까닭인지 합주 템포를 맞추는 데만도 몇 시간. 합주를 통해서 완벽하게 실력을 끌어올리는 데만 해도 며칠. 그리고 그 실력을 토대로 악기를 녹음하는 데에도 며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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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그는 앞으로 3년은 마음고생을 안 해도 되겠다고 할 정도로 마음고생을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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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기 디렉팅 중간에 질책을 듣고 수그러든 아이들을 다시 달래고, 이상한 식의 연주를 하면 다시 호통을 치고. 괜히 예술성 발휘하지 말라고 뭐라고 하고, 나름의 개성은 살려야 하니까 너무 정석대로 연주하지는 말라고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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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도 녹음 과정에서 떠오르는 영감을 통해 편곡을 손보고, 수정하고. 그러다 보면 다시 재녹음을 떠야 하는 일이 생기고. “왜 다시 녹음해야 하는 건데? 그냥 가면 안 돼?”라는 반응이 나올 때까지 아이들을 밀어붙이고. 현아는 중간에 울면서 녹음실을 나가버릴 정도로 험난한 과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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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an Wilson의 심정이 이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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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앨범을 40년 동안 고쳤다는 그 광기에는 미치지 못하겠지. 그가 겪은 일은 Smile까지 가지 않아도, 한국의 ‘가장 보통의 존재’에도 비기지 못할 일이었다. 앨범 연기를 다섯 번을 하고, 한 곡의 믹싱을 11번을 했다는 음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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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왠지 그 심정 자체는 이해할 것 같았다. 키보드는 파트 수정과 재녹음을 합쳐 거의 열 번 정도 녹음을 떴다. 오죽하면 현아가 녹음실에서 뛰쳐나갔을 때, “연수, 지금 현아 언니가 너 보면 더 울 테니까 그냥 내가 갈게.”라며 이서가 갔을 정도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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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노력한 보람은 있는 것 같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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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긴…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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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물음에, 연습실 구석에서 자기 파트를 혼자 연습하던 현아가 말했다. 초췌해 보이는 얼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들어가는 시기라는, 인생 최고의 황금기에 음반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는 것이 상당히 억울할 수도 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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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보드, 진짜 잘 녹음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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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그렇게 말해놓고도… 녹, 녹음 한 번 더 했잖아, 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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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뭐 더 좋은 게 떠오르는데 어떻게 하나. 아무튼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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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머리를 살짝 꼬았다. MV의 제작사는 이미 결정되었고, 어떤 컨셉으로 제작이 될지도 얼마 전에 제안서가 왔다. 며칠 후면 촬영에 들어갈 것이고, MV와 무대 등에 활용할 의상도 이번 주 내로 배송이 될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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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곡은 내가 생각하기에… 이번에는 진짜 기대해 봐도 좋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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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평소에 즐겨 쓰던 블루스 스케일에 기반한 코드가 아니라, 머니 코드(Money Chords. 히트곡들이 많이 사용하는 코드)를 사용하여 만든 곡. 길이는 3분가량. 듣자마자 확 귀를 잡아챌 수밖에 없는 중독성 있는 베이스 리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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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위의 반응도 좋았다. 그의 친구, 이서와 서하, 현아, 혜인의 직원들뿐만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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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이번 신곡이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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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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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이거… 칼 단단히 갈았네. 귀에 막 꽂히는 거 보면 이번에 한번 차트 등반해 보겠다. 작정한 것 같은데. 맞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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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습니다. 이번에 일 한번 내봐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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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일러드의 김철연뿐만 아니라, 음대 교수인 채호근, 세션 기타맨 임준홍, 발라드 가수 주현, 라디오의 최수경, 그 외 기타 등등… 수많은 음악 관계자에게 곡을 들려주었을 때도, 호평밖에 나오지 않은 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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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만 더 고생하자. 부와 명예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으니까. 앞으로 얼마 안 남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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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속물…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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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현아의 말에 그는 슬쩍 현아를 째려보았다. 히에엑, 하는 소리와 함께 현아는 다시 키보드에 머리를 박고 연습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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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아무튼 정말로 얼마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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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존나 재미없네. 뭐 재밌는 거 없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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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친구는 그 말에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도대체 뭘 하고 있나 옆에서 쓱 봤더니, 인스타 영상을 보고 있었다. 재미없는 건 쓱 내리고, 재미있는 건 한 10초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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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도파민 중독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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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래, 지도 그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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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에 대답은 없었다. 그녀는 ‘시발…’이라 중얼거리며 유튜브를 열었다. 인스타도 지겹고, 틱톡도 지겹다. 유튜브는 다른가? 유튜브도 사실 지겹다. 인스타틱톡유튜브 무한으로 3개를 돌려가면서 그냥 카페에서 시간 낭비나 하고 있는 신세가 바로 그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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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시발 오늘도 이러다 시간 다 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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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공부하러 가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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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느금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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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친구는 그 말에 중지를 들어 올려 그녀의 얼굴에 디밀었다. 손을 휘둘러 치워버려도 다시 한번 더 돌아오는 중지. 이빨로 물어버리니 “미친년아!!” 라는 욕설이 돌아왔다. 카페 사람들이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지만, 시선은 금세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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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오 씹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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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의 중얼거림을 무시하고, 그녀는 유튜브 메인화면을 쳐다보았다. 볼 것도 없고, 할 것도 없고. ‘음악이나 들어야겠다.’라고 들어간 유튜브 뮤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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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관성으로 [둘러보기]를 누르고, [최신]을 눌러 최신음악으로 들어갔다. 딱히 달라진 것 없이 어제와 같은 음악 리스트… 라고, 생각했는데, 리스트 하단에 못 보던 이름이 하나 박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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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너 그룹 사운드라고 들어본 적 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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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들어본 거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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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소파에 누워 인스타로 무한 도파민 공급을 받고 있던 친구가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친구에게 유튜브 뮤직 화면을 보여주었다. 선명하게 박혀 있는 곡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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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정원 | Group Sound | 4.4천 회 재생 | 공중정원 | 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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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네… 어… 그… 오디션! 오디션, 그… 어쩌고 우승했다던 애들인 거 같은데. 락밴드, 학폭, 오디션 어쩌고저쩌고… 아닌가? 맞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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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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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런 재미있는 일이.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며 인터넷을 바로 켜서 찾아보았다. 그룹사운드 학폭. 나온 것은 별로 재미없는 결과였다. 친구에게 사과, 모두가 다 받아줌, 학폭 누명, 쌍방 폭행 기타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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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뭐야. 그냥 지들끼리 치고받은 거라는데? 존나 노잼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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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어떤 애들인지 면상이나 보려고 기사를 클릭했다. 그리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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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시발, 존나이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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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뭐가 이쁜데… 헐 미친. 대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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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인상. 저 멀리 너머를 보는 듯한 표정의 사진. 그녀는 기사에 올라온 사진을 흘린 듯이 쳐다보다가, 바로 유튜브 뮤직을 켜 노래를 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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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재생되는 음악. 리듬감 있는 드럼, 그 이후로 흘러나오는 베이스 리프는, 손가락이 저절로 탁자를 톡 톡 치게 했다. 아직 곡이 다 끝나지도 않았지만, 그녀는 이 곡과 사랑에 빠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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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 앨범 하나 내지 않고도 오디션을 우승한 밴드’라는 타이틀을 가졌던, 그리고 그런 타이틀을 가지고도 몇 개월 동안 휴식기를 가지며 잠적해 버렸던 밴드 Group Sou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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멤버 전원이 미성년자에다가 현업 여고생이기 때문에 학업 문제로 활동할 수 없다는… 너무나도 정당하고 합리적인 이유의 활동 중단. 그러한 이유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의 활동 중단에 대해서 대놓고 불만을 토해내기 힘들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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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악의를 토해내는 사람들은 분명히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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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오디션 우승해놓고 활동 안 할거면 도대체 왜 나온 거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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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이라도 내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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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거면 그냥 Mystica 우승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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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들 원래 활동 안 하는 밴드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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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아쉽네 그때 활동했으면 지금쯤 팬 많았을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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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그냥 이기적인 행동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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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 힙스터. 한국 인디 락의 발전 기회를 망쳤다고 보는 사람들부터 그냥 자신이 좋아하던 밴드가 우승하지 못했다는 이유까지. 그들은 신나게 Group Sound를 씹고 뜯고 맛보고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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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중 몇몇은 정말로 어처구니없고 악의적인 이유 - 그냥 마음에 안 든다, 암탉이 울면 나라가 망한다 등 - 으로 Group Sound를 음해하고 중상모략했다. Group Sound가 인디 락 힙스터 커뮤니티의 공적 아닌 공적이 되고, 인디 락의 부흥 기회를 날려버린 밴드가 될 때까지는 정말 얼마 남지 않은 듯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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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 Sound의 정규 1집… 그 앨범의 선공개 싱글, [공중정원]이 발매되기 전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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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곡 미쳤다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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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불협화음을 일으킬 것만 같은 요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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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즈마스터에서 나오는 노이지(Noisy)한, 슈게이즈(Shoegaze) 풍의 몽환적인 멜로디와 사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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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반대되는 Rickenbacker 4001에서 뿜어져나오는 빈티지한 사운드와 J-Rock 내지 재즈스러운 베이스 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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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백그라운드 키보드 멜로디와 곡 내에서 빈 공간이라는 것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적절하게 삽입된 신디사이저와 사운드 샘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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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 제일 아래에서 신나게 연주되며 때로는 곡을 전체적으로 리딩해나간다는 인상을 주고, 때로는 시기적절하게 기본 리듬을 깔아주며 자신의 몫을 다하는 드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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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나지막하게 읊조리다가도 청자가 원하는 타이밍에 정확하게 고음을 질러주며, 듣는 사람에게 방긋방긋 웃는 듯 혹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춤을 추게 하고 싶은 생각을 들게 하는 보컬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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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개의 구성요소가 모두 조화롭게 어우러지며, 누구나 들어도 ‘이건 계속 듣고 싶은데?’라던가 ‘플레이리스트에 추가해야겠다.’라는 생각을 들게 하게끔 만드는 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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락 커뮤니티는 그야말로 불타올랐다. 정통 락 밴드가 한국 음원시장 1위를 ‘잠시나마’라도 차지한 것이 언젯적 일인가. 연 단위로 거슬러 올라가야 할 일이며, 순위권 내에 장기간 머무는 것은 대중들에게 많이 들려져 ‘너무나도 메이저해진’ 곡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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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락의 부흥 같은 것은 꿈도 꿀 수 없었다. 그저 한 번씩 터져주는 시기에 ‘이번엔 진짜 붐이 오나?’ 싶었다가, ‘그러면 그렇지’ 하고 돌아설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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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공중정원]은 달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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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백히 중흥기를 끌고 오거나… 혹은 그 불씨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되는 곡. 물이 들어올 때 노를 젓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물을 만들어버릴 수 있는 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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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붐 오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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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음악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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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나 요즘 새 밴드들 너무 곡 구리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 진짜 놀란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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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 하나만 들었는데 음반사야겠다고 생각한거 완전 처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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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클럽 가입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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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들 라이브 들어보신 분? 잘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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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완전 개잘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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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결과 [공중정원]은 일반 락 리스너들의 호평을 넘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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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는 좋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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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반인들은 좋아할 곡이긴 함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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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절 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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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들도 메이저 노리는가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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힙스터들조차도 굴복시켰다. 그리고 음원 릴리즈 2일차. 아직 프로모션 단 하나 돌리지 않은, 입소문조차 퍼지지 못한. 순수한 유입으로 도달한 수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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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기 급상승 음악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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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 6.5만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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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으로 프로모션이 시작되고 입소문이 퍼지기 시작하면, 도대체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기대를 하게 되는 정도의 지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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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실에 침묵이 감돈다. 프로젝터로 띄워진 화면은 검은색. 정유영은 아무 말 하지 않고 천천히 마우스를 옮겨 메뉴를 하나씩 클릭해 갔다. 마지막으로 클릭한 것은, [차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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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위부터 10위까지는 기대하지 않는다. 대신 정유영은 휠을 휙 돌려 맨 밑으로 향했다. 100위부터 천천히 올라가는 사이 긴장감은 더해진다. 그리고 90위쯤 봤을 때, 위쪽에 친숙한 글자가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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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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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명을 지르듯 내뱉는 이서. 그녀가 가리킨 프로젝터 화면에는, 선명하게 [공중정원]이 자리 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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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에 환호성을 지르는 사람들. 아주 난리가 난 최이서. 박수를 치는 유서하. 혼자서 흐흫흫 웃음을 흘리고 있는 정현아. 주먹을 쥐고 기뻐하는 고경민 팀장과, 서로 정말 힘들었다며 위로를 하는 직원들. 당장 케이크를 사러 뛰어나갈 기색인 이혜인 사장까지. 하수연은 사장님의 손에 휘둘려 이리저리 고개를 흔들리고 있었다. 어지럽지도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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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영 과장은 안도의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이전 회사에서 마케팅 팀에 있을 때에는, 그저 팀원으로 지내며 열심히만 일할 뿐 책임을 지지는 않는 삶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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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책임을 지는 자리란 이 얼마나 무거운가. 그녀는 이전 회사의 팀장이 보고 싶었다. 입은 험해도 잘해주는 사람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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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론 차트도 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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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론은 지금 봐도 별 소용 없을 거예요. 무조건 안 올라가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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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나서 외치다가 시무룩해진 최이서를 보고는 설명을 요구하는 표정을 보여주는 하수연. 새끼를 잡아먹으려는 뱀을 본 어미의 눈빛에, 정유영은 빠르게 설명을 시작했다. 멜론 차트는 비수기 제외하면 아이돌들이나 트로트 가수들이 내내 스트리밍 돌리고 있는 곳이다. 특히 지금 시즌에는 컴백한 사람들도 많아서 빈집털이도 불가능할 것이다… 라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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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저번에 올라갔던 건 운이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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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오 말씀하시는 거죠? 그건 오디션도 있었으니까! 그 화력도 좀 더해지지 않았을까 생각하네요! 그리고 아무래도 오디션 주최 쪽에서 프로모션을 좀 돌려줬을 것 같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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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연의 물음에 답하며, 정유연은 자신이 선택했던 방식을 되돌아보았다. 표준 지표가 된 멜론 쪽을 노리는 것이 음원 마케팅의 정석이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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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녀는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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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위가 몇 위니, 지표가 얼만지를 두고 싸우는 아이돌들과 다르게, 지금 이 [Group Sound]는 음악 소비층에 실제로 다가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 어찌됐든 주류음악인 아이돌 노래… K-POP과는 달리, 밴드 사운드는 아예 외따로 떨어진 영역이니까. 식탁 위에서의 자리싸움을 걱정하기보다는 식탁에 올라가는 것부터 걱정해야 하는 장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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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택한 방법은 바로 유튜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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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츠와 플레이리스트, 그리고 유튜브 뮤직 내부의 프로모션. 차트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는 류의 프로모션은 하지 않는다. Top 100을 돌리는 멜론 사용자들과는 다르게 유튜브 뮤직 사용자들은 알고리즘이나 플레이리스트를 통한 스트리밍 방식으로 음악을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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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방식의 결과는 뭐… 지금 눈앞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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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이 좋아서 그런 거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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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프로모션을 퍼부어도 망곡을 명곡으로 올려놓을 수는 없다. 기껏해야 평곡 수준일까. 하지만 프로모션을 안 한다 해도 명곡은 결국 명곡. 자리를 찾아가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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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앞으로 더 올라갈 일만 남았으니까요! 정규앨범 발매 기간까지, 열심히 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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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어도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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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 내내 틀어줄 테니까 기회를 잘 잡아야 돼. 알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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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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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는 선생님한테 하고. 나는 그냥 같은 사람한테 배운 인연으로 해 주는 정도니까. 별 다른 의미는 없어. 알겠지? 그럼 끊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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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들어가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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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전화를 끊었다. 그러자 주위에서 느껴지는 시선. MV 촬영 중에 전화를 받아서 그런지, 스태프와 밴드 멤버들이 죄다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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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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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경ㅇ… 최수경 씨… 가 아니라, 가수… 어… 디제이님. 디제이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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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전에 라디오 나갔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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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의 말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옛 제자, 최수경. 라디오의 인연으로 가끔 카카오톡이나 전화를 주고받는 사이가 된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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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히 이번 선공개 싱글 건으로 연락을 한 적도 없었는데, 어떻게 들었는지 그에게 전화가 와서 “라디오에서 송출해 주겠다”라는 이야기를 했다. 아무런 대가를 받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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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좋네. 대박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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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 뭐. 상당히 도움이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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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감흥이 없어 보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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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뭐… 그런 건 전혀 아닌데. 엄청 고마운 기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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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머리를 살짝 꼬았다. 최수경이 충분히 좋은, 돈을 주고도 사기 힘든… 그런 기회를 제공해 준 것은 맞다. 심야 라디오지만 송출도 해 주고, 곡에 대해 특별히 소개까지 해 주고. 아직 이야기는 안 했지만, 주말에는 밴드 전원을 불러 라디오에서 토크까지 하겠다고 하니 수경의 입장에서 이보다 더 좋은 기회를 줄 수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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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거기에 방방 뛰면서 기뻐하기에는, 이번에 그가 받은 기회가 너무나도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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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닷없이 자기 콘서트 투어에서 “이거 커버 한번 해도 되나?”라고 물어본 테일러드의 김철연. SNS에 [제가 최근 즐겨 듣고 있는 곡이에요~]라며 곡 링크를 올려주었던 발라드 가수 주현. 팬들과 함께 하는 라이브 방송때 “요즘 좋은 곡이 있어서요!” 라며 홍보 아닌 홍보를 해 주었던 Projeckt 6의 류진. 유튜브 방송때 은근슬쩍 홍보를 해준 전직 아이돌 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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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외에도 그가 만났던 수많은 사람들이 그들 Group Sound의 신곡 [공중정원]을 자발적으로 홍보해 주고 있었다. 셀럽들은 SNS나 라이브 방송 같은 것으로, 세션이나 일반인들은 주위에 입소문을 내는 것으로. 참으로 고마운 일이었기도 하고, 얼떨떨한 일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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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좀 착하게 살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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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하게 살면 복을 받는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는 그 말을 믿지 않는 대표적인 사람 중 한 명이었다. 하지만 일이 이즈음 되자, 그는 그동안 지켜왔던 신념을 깨고 최대한 착하게 살아야 하나 고민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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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일단 MV 촬영부터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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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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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의 이야기에 그는 다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쏟아지는 예민한 눈길에, 그는 자신이 MV 촬영 중이었다는 것을 깜빡했다는 걸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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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다시 들어가겠습니다. 옷매무새 좀 정돈좀 하고 갈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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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비 감독의 말에 다시금 들어오는 스태프들.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주고, 각도 슬쩍 잡아주고. 아무 소리 내지 않고 쓱쓱 옷을 정리해 주는 폼이 매우 능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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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말인데… 괜찮은 마스터링 스튜디오 없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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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갑자기 왜요. 싱글은 나온 거 나름 나쁘지 않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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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제가 한 거라서, 별로 마음에 안 들어가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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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말에 준홍은 고민에 빠진 표정을 했다. 쉽사리 나오지 않는 대답. 물론 기대도 그다지 크게 하지 않았다. 준홍이 세션계에서 잔뼈가 굵다지만 음반의 최종 작업인 마스터링(Mastering. 믹싱 이후 최종적으로 음원을 조정하는 과정)에 참여를 하는 인물은 아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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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믹싱도 수연 학생이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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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P때는 그냥 대충 했고. 과오는 뭐… 거기서 해 줬고. 이번 곡은 시일이 급해서 일단 제가 감각적으로 막 짜맞추긴 했는데… 앨범 릴리즈 될 때는 제대로 된 스튜디오에 맡겨서 해결하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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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 그냥 본인이 배우는 게 낫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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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일에 시간 들여가면 공수가 안 맞죠. 믹싱은 몰라도 마스터링은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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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에 준홍은 고개를 끄덕였다. 용어 사용이 묘했지만, 하수연이 저러는 것이 하루 이틀 일도 아니고. 그냥 그러려니 했다. 아마 서명전 선생님께 영향을 크게 받은 모양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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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잠시 전화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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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드폰 화면에 뜬 모르는 전화. 명전은 잠시 고민을 하다가, 일단 바깥에 나가서 받기로 했다. 070이었다면 일말의 망설임 없이 끊어버렸겠지만… 핸드폰 번호인 만큼 일단 받아보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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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전화받았습니다. 하수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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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여보세요? 하수연 선생님이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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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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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려온 목소리는 꽤나 앳되었다. 살짝 맹맹대고 어린 것이, 마치 저번에 전화를 했었던 라디오 서브 작가 느낌이었다. 목소리 자체는 엄청 다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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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어… Group Sound에서 기타 치시는, 하수연 선생님. 맞으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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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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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네… 어, 저는… EBS 앰플리파이어 나우, 에서 섭외를 담당하고 있는 작가 강성윤이라고 하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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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에 그는 눈이 확 뜨였다. EBS? 앰플리파이어 나우? 분명 들어본 적이 있는 프로그램이었다. 상대가 입을 떼기 전 그는 필사적으로 기억의 창고를 뒤졌다. 그러니까 어… 거의 한 십 년 정도 계속 방송하는, 상당히 호평받는… 그런 음악 라이브 프로그램이었던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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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가 이번에, Group Sound 편을 진행하려고 하는데… 혹시 가능하신 부분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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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S 앰플리파이어 나우(Amplifier N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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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이 넘게 이어지고 있는 EBS의 간판 음악 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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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 년을 넘게 진행해 오고 있는 라디오 프로그램이나 음악 프로그램에 비하면 짧은 역사라고 할 수 있지만, 이쪽은 나름의 강점이 있다. 교양 방송국인 EBS에서 주관하는 만큼 수익과 화제성을 ‘전혀’ 생각하지 않은 채, 제작진의 주관과 소신대로 아티스트들을 부른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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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약 200석가량의 아주 작은 공간. 약간 과장해서 말하면 뮤지션의 모공까지 볼 수 있는 인접한 거리에서, MR 하나 틀지 않고 모든 것을 라이브로 진행한다. 어찌 보면 강박에 가까운, 어찌 보면 순수한 뮤지션의 기량을 테스트하는 그런 프로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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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초대형급 뮤지션들이 출연하는 프로그램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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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son Mraz, Twenty one pilots와 같이 월드 스타로 뜨기 전 세계를 돌며 공연하는 해외의 아티스트, LOUNDESS나 Fourplay와 같이 해외에서는 유명하나 한국에서는 그렇지 않은 뮤지션들. 아직 빛나지는 못했으나 곧 성공할 것이 분명한 인디즈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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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이들을 부르는 것으로 유명한 프로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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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것은 역으로 말하자면, 기회이기도 했다. 교양프로그램이라고 해도 공중파. 게다가 이미 양질의 퀄리티를 자랑하는 것으로 유명한 프로. 메이저 입성을 위한 한 발자국이라고 말할 수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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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S Amplifier Now는 그런 위치의 프로그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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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레이블과 이야기를 해 보겠다고 한 후, 그는 전화를 끊었다. 이런 기회를 회사가 반대할 리가 없으니, 그의 결정이 곧 밴드의 결정이며 회사의 결정이 될 것이기 때문에(확신은 없지만 아무튼) 굳이 회사와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었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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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그렇게 한 것은, 그가 답변을 잠시 미루고 싶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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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앰프나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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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연해 본 적은 없지만 이야기는 꽤 많이 들었던 프로그램. 10년대 음악계에 인디 붐이 잠시 일었던 때에도, 앰프나우가 상당한 역할을 했다. 지금은 워낙 미디어가 많아 그 정도의 위세는 당연히 없겠지만, 레거시 미디어에 출연한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 파괴력이 있는 법. 듣는 사람들도 없을 것 같은 라디오 한번 출연했다고 올라간 인지도를 보라. 그런 점에서 보면 그냥 고민할 필요 없이 당장 수락해야 할 일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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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상태로 나가도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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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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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시장에 발매된 것은 단지 신곡 하나, [공중정원]. 앨범의 제목조차도 ‘Album 1(가칭)’인 상태고, 나머지 곡들은 한창 작업 중. 편곡과 재녹음, 구성 변경 등을 거듭하며 어떻게든 작업은 이루어지고 있고, 합주와 공연 자체는 가능한 상태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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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번 일정을 잡게 되면, 일정이 더 빡빡해지는 것은 막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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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최근 집에 가는 일이 드물 정도였다. 적정 수면 시간과 조깅과 같은 간단한 컨디셔닝 운동을 제외하고는, 그는 혜인이 제발 집에 들어오라고 할 정도로 내내 회사 작업실에 박혀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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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아직 나는 할만한 여지가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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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다른 아이들이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혹사에 가까운 일정을 소화하며 개인의 삶을 거의 포기한 채로 따라오고 있는 아이들. 물잔에서 물이 흘러넘치기 직전까지 아이들을 밀어붙여 놓았는데, 여기서 물을 더 넣을 수 있을까. 폭발하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이니, 아마 힘들 것 같다는 답변이 돌아올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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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또 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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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경민과 정유영, 밴드 멤버들만을 불러놓고 열린 임시 회의. 관련 사항을 알려주자 고민하는 듯한 두 명. 하지만 그들과 다르게, 이서는 별것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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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가하는 데 별 문제 없어. 야 왜 그런 걸 걱정해. 그냥 하면 되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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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저도 괜찮, 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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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문제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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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과는 달리 너무나도 흔쾌하게 동의하는 아이들. 그는 잠시 당황했다. 아무리 아이들이 밴드에 진심이라고 할지라도 십 대. 얼마 되지 않는 기간이라고 하지만 시간을 다 뺏어가는 일을 저렇게 흔쾌히 동의할 리가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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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아이들은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는 경향이 크다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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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그런 생각을 하며 아이들과 눈을 마주치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반쯤 죽어있는, 영혼이 없는 눈. 현아가 자주 보는 콘텐츠에서 나온 표현으로는 ‘하이라이트가 사라진 눈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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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분히 할 수 있어! 문제될 거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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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제될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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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중얼거림은, 이서의 외침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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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야! 잠이야 죽어서 자면 되는 거고 노는 거야 나중에 놀면 되는 거지! 지금 아니면 기회가 없다! 연습하러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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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아니면… 못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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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문제 없어, 아무 문제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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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라밸이라는 게 없던 시대의 말을 하는 아이들. 서하는 약간 정신이 나간 것 같기도 하고. 고 팀장과 정 과장이 너무나도 대견하다는 듯 멤버들을 바라보고 있는 사이, 그는 천장을 잠시 바라보았다. 지금 밴드 멤버들이 말하고 있는 것들은, 죄다 그 자신이 이야기했던 것들이다. 아이들을 몰아붙여 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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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하다… 내가 미안해… 이 정도까지 원하진 않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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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없이 그에게 채찍질 당한 결과 반쯤 세뇌된 상태의 아이들. 영혼 없는 호두까기 인형처럼 “할 수 있다”만 되풀이하는 모습을 보며, 그는 창밖을 잠시 바라보았다. 나는 도대체 아이들을 데리고 무엇을 하는 것인가. 어른으로서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했다는 그런 죄책감이 그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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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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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갑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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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이쪽은 하수연 기타리스트님이실거고. 여기 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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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회사 정유영 과장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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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정유영입니다! 반갑습니다! 여기 명함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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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고마워요 고마워요. 아니 일단 자리에 앉으시고. 커피 다 식는다 식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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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S 내의 작은 회의실. 아메리카노 몇 잔과 다과가 올라가 있는 테이블에 그는 자리를 잡았다. 정유영 과장은 눈에 보이는 모든 사람에게 명함을 줄 기세였다. 심지어는 딱 봐도 잡무 하고 다니는 인턴과 청소 아주머니에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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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사전에 이야기는 얼추 들었죠? 우리 직원한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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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부 사항까지는 듣지 못했고, 출연 일시와 시간 정도만 들었습니다. 다른 것은 들은 게 없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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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에 피디는 이마를 살짝 매만졌다. 어디부터 말해야 하는지 고민을 하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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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일시는 이전에 들은대로가 맞고. 시간은 이번에 그룹 사운드 특집을 할 거니까 1시간 그대로 쓸 수 있어요. 실제로는 뭐 좀 편집 들어가고 이러다 보면 세팅이다 뭐다 해서 한 1시간 반에서 2시간 정도? 할 것 같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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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시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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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머리칼을 살짝 꼬았다. 2시간이면 그들이 가진 곡을 전부 내놓아도 채우지 못하는 시간. 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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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발표곡이나 라이브 버전으로 길게 연주하고 이래도 되는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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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런 건 당연히 가능하지. 그러고 보니 그룹 사운드가 곡이 그만큼 있진 않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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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저희 정식 릴리즈곡은 저번 Ep랑 이번 싱글, 그리고 오디션에서 내놨던 곡 정도입니다. 그래서 아마 곡 수가 부족하니, 미발표곡과 커버곡을 사용해야 할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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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에 피디는 머리를 긁적이며 침묵했다. 잠시 생각을 하는 듯한 시간이 지나간 이후, 반쯤 벗겨진 머리가 끄덕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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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요. 어차피 우리가 풀방송 떼어가지고 하는 것도 아니고, 커버곡 같은 거 걸릴 거 있으면 그냥 떼서 유튜브 올리고 이러면 되니까. 별 문제 없지. 게다가 미발표곡을 우리 쪽에서 공연해주는 건 오히려 우리가 고마운 부분 아닌가? I’m Yours처럼 될 지 누가 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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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son Mraz의 히트곡, I’m Yours. 그 곡이 전 세계 최초로 공식 송출된 곳이 바로 EBS였다는 것은 한국 음악 팬이라면 대부분 알고 있을 만한 일화다. 피디가 말하는 것은 바로 그 부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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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예술을 직접 하는 사람들도 그렇지만, 이제 플랫폼… 이라고 할까. 뭐 잡지나 신문이나 유튜브나. 우리는 방송이지. 그런 이제 언론? 언론이라고 하긴 좀 그런가. 아무튼 일종의… 미디어 종사자들한테도 약간 그런 게 있거든요, 자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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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디는 그렇게 말하며 이마를 살짝 쓰다듬었다. 왠지 모르게 그의 머리에서는 땀이 묻어나왔다. 원래 열이 많은 체질일까 하고 그는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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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중에는 다양한 게 있겠지만, 저한텐 그런 게 있습니다. 마치 “내가 말했지!”라고 하고 싶은 그런 느낌. 내가 얘 뜰꺼라고 했지! 내가 뜬다고 했잖아! 일종의 안목 자랑이라고 해야 하나. 어, 뭐라고 해야 하나. 저점매수? 그래, 저점매수. 내가 이 사람을 제일 저점에서 매수했다. 얘는 이제 상승밖에 안 남은 애라서, 내가 제일 쌀 때 매수했다. 이런 내 안목을 증명하고 싶은 그런 욕구가 있단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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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말하며 피디는 그를 쳐다보았다. 조금의 오만과 약간의 자신감을 담은, 세월에 의해 날카롭게 단련된 눈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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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 사운드는… 뭐 곡 자체는 그렇게 많이 낸 건 아니지만. 이렇게 성장세가 빠른 밴드는 별로 없었어. 보통 인디밴드들은 그래도 음반 내고 한 3~4년 정도는 그냥 막 바닥 닦으면서 돌아다니는데. 이 정도로 빨리 올라온 밴드는 손에 꼽지. 특히 이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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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손길이 가닿은 곳은 노트북의 재생 화면이었다. [공중정원]. 인기 급상승 음악 #6. 피디는 다른 화면도 보여주었다. 멜론 실시간 차트 맨 밑에 슬쩍 보이는 그들의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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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한지 1년 정도밖에 안 되는 시간… 그야말로 단기간에 메이저 데뷔를 눈 앞에 둔 밴드는, 한국 역사를 뒤져봐도 드물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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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디는 그렇게 말하고는 자료를 툭툭 쳤다. “이제 실무적인 거 좀 이야기해볼까.”라는 말에, 정유영 과장이 “감사합니다! 저 그럼, 무대 구성이랑 연출 범위가 어느 정도 되는지까지 제가 혹시 알 수 있을까요…?”라는 말이 이어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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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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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내가 여길 왜 와야 하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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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왔으면 그냥 아가리 여물고 그냥 봐. 자꾸 징징댈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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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투덜거림에, 옆에 있던 그녀의 친구가 어깨를 팍 쳤다. 친구는 어느새 옷을 갈아입은 상태였다. 공구로 진행했다던가 뭐라던가 하는 검은색 오버핏 하프집업 플리스에는, 대문짝만하게 ‘Group Sound’라는 글자가 박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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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야구팬이냐? 그런 거 입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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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이 뭘 안 내준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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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들부들대는 친구. 그녀는 어처구니없다고 생각했다. 얼마 전 카페에서 할 거 없다고 징징대다가 무슨 이상한 밴드 곡 하나 발견했다고 소리 지르던 게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굿즈니 뭐니를 사고 이제는 자기가 어디 공연에 당첨됐다며 같이 가자고 막 소리를 지르는 열성 팬이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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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은근 사람 많네. 별로 없을 것 같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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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신청자가 4천명이 넘었다고. 내가 진짜 너 표 완전 만들어준거나 다름없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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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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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이런 공연에 4천 명이나 신청하는가. 그녀는 이해가 안 된다고 생각했다. [공중정원]인가하는 노래는 분명 좋았고 그녀의 친구가 막 들이밀어서 들은 다른 노래들도 분명 좋긴 했다. 하지만 그 정도인가, 그렇게까지 응모가 몰리고 할 정도인가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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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가 입장 줄인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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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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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는 그렇게 말하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따라가면서 행렬을 주의 깊게 쳐다보다, 뭔가 생각과는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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왠지 모르게 락이니 밴드니 하는 것들은 태반이 늙은 사람들이 듣는 음악일 줄 알았는데. 지금 모여있는 사람들은, 글쎄. 딱 봐도 30대를 넘는 사람이 드물 것으로 보이는 분위기. 대부분이 다 10대 20대. 남녀 성비도 비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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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안녕하세요! 저는 그룹 사운드 팬클럽 회장, 김아윤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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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을 서서 입장을 기다리고 있자, 갑자기 들려오는 목소리와 박수 소리. 옆쪽을 보니 세 명 정도의 남녀가 종이가방 몇 개를 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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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그룹 사운드 공연을 기념해서! 저희 팬클럽에서 비공식 굿즈를 만들게 되었는데요… 혹시 이걸 나눠드리려고 하는데, 괜찮으실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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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에 서 있는 대부분이 “네~!”를 외치는 동안, 그녀는 줄을 다시 한번 쓱 쳐다보았다. 남매로 보이는 두 명. 왠지 번듯한 직장인일 것 같은 여성. 친구들끼리 같이 온 게 분명해 보이는 여고생 집단 등. 다양한 구성의 관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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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이거 대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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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는 와중에 그녀의 친구는 회장이라던 여성에게서 ‘굿즈’를 받아 들고는, 연신 감탄을 터트렸다. 보니 꽤 잘 디자인된 애니메이션풍의 캐릭터였다. 짧은 단발머리를 하고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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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받으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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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네.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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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 또한 굿즈를 받아들었다. 반쯤 깐 머리를 하는 기타를 든 캐릭터. 그에 질투심이 가득한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는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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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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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거랑 안 바꿀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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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싫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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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빨을 들이미는 친구를 무시한 채, 그녀는 굿즈를 주머니에 넣었다. 마침 입장할 시간인지 스태프가 줄을 들여보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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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장한 공간은 매우 어둑했다. 무대 앞쪽으로는 아예 보이지 않게 어둠으로 가려진 상황에서, 보라색 스포트라이트가 드문드문 관객석을 비추고 있을 뿐이었다. 관객들은 의자를 더듬고 표시등을 찾아가며 자신의 자리를 찾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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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분위기 개쩔지 않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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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어두워서 불편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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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씨~발 예술도 모르는 년” 같은 타박이 친구에게서 날아왔지만, 그녀는 아주 간단히 무시했다. 하루 이틀 있는 일 아니었으므로. 그렇게 어둠을 더듬어 앉은 자리는 우연히도 무대 정면이었다. 라이브를 확실히 볼 수 있는 자리. 행운에 환호하는 친구를 두고, 그녀는 눈앞의 어둠을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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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속에서 한 명이 걸어 나오자, 그녀는 흠칫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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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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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란 것은 그녀뿐만이 아닌 듯했다. 순간적으로 얼어버린 분위기. 하지만 어둠에서 걸어 나온 사람은,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듯 평이하게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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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 사운드, 하수연입니다. 정말 오랜만입니다. 오디션 이후로 얼마만인지, 여러분을 뵙게 되어 정말 반갑습니다…라는 생각이 드네요. 어떻게 이 자리를 만들어주신 EBS 및 스태프 여러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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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를 알 수 없는 어미. 관객석에서 까르르 웃음이 터졌지만, 그녀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저게 무슨…? 하지만 그녀의 친구는 이미 약간 영혼이 나간 듯 “씨발… 존나귀여워…”같은 소리를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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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흠! 아무튼. 오늘의 공연은… 특정한 순서는 없습니다. 하지만 제가 생각하기에 여러분들이 방금 전까지 듣고 계셨을 곡. 그리고 듣고 오셨을 곡. 그 곡부터 시작하는 것이, 가장 적합하지 않을까. 저는 아무튼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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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과 함께, 무대 저 뒤에서 빛이 달려든다. 순간적으로 밝아지는 환경, 눈이 부셔 가늘게 뜬 눈 사이로. 별빛을 뒤에 둔 아이들이 무대 위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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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시작합니다. [공중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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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리스트 서명전 추모공연 알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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뮬인으로서도 활동하셨던 기타리스트 서명전 선생님께서 돌아가신지 꽤 시일이 지났습니다. 돌아가신 것에 대한 추모의 시간도 가질 수 없었기에, 늦었지만 이제라도 음악으로나마 서명전 선생님을 보내드리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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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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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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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장료 : 무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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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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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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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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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의 인간이자 한명의 기타리스트로서, 한국 세션 음악사에 족적을 남긴 서명전 선생님의 추모공연에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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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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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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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션 부탁드렸을 때 조금 불친절하셨어서 속으로 많이 궁시렁거렸드랬죠. 그날따라 약간 까칠하시더라구요. “뭐 이렇게 쳐달라는 거 아닙니까?” 같은 느낌으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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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뭐 기타 잘치면 다인가? 사람이 되어야 할 거 아냐 ㅆ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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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렉션 맡아준 친구랑 저랑 그렇게 막 녹음실 밖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딱 녹음을 시작하시는데 와~~! 정말 화가 다 풀려버릴 실력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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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저희는 생각도 안 하고 있었는데, 이런저런 트랙이 더 필요할 것 같다며 녹음을 더 해주시는 거 보고 엄청 감동받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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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렉션 친구랑 술 마실때면 가끔 취해서 “야 그때 그런 일 있었는데~!” 같은 소리 하는데, 갑자기 이렇게 되셨다니… 오늘은 술을 많이 마실 것 같네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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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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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전쌤 돌아가셨나요?? 아니 이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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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어…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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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큰 별이 또 졌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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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est Com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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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좀 어이가 없었어요 ㅠㅠ 작년 말에 명전쌤한테 세션 맡겨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느새 저런 소식을 들어버려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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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인분들에게 알려야겠군요 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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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슈트 형님 방송에서 듣기로는 제자가 있는 걸로 아는데, 그 친구가 나올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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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그런 사람이 있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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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명전형님 아이디 쓰시더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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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홍대 레전드 버스킹 여고생’으로 유명합니다. 한번 유튜브에 찾아보세요~ 뮬인분들이랑 공연하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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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네 확실히 있는 걸로 압니다. 기타 정말 잘치더라구요~ 유튜브 라이브에서 봤는데. 그날 볼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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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카페 소파에 몸을 푹 묻은 채로 커피를 쪽 빨았다. 아이스 카푸치노가 빨대를 따라 호쾌하게 입으로 빨려들어가며, 공기를 들이마시는 소리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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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고파? 커피 더 마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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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럴 거 까지는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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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이 있은 이후로, 첫 밴드 정기 회의. 매번 만나는 카페에서 열린 회의였고, 별 다른 문제는 없었지만… 명전은 도통 집중을 하지 못했다. 온통 신경이 한 쪽으로 몰려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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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 있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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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 있긴 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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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아의 말에, 명전은 대충 대답하며 머리를 쓸어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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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를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과거의 내가 죽었는데 추모공연을 한다고 해서, 현재의 나랑은 아무런 관련이 없지만 아무튼 신경쓰인다’ 라는 이야기는 도저히 허황되지 않게 전달할 방법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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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쟤가 심란한 이유, 난 알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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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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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선생님 추모공연 하잖아. 맞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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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에 명전은 까득거리며 씹고 있던 얼음을 뿜었다. 푸흡! 하는 소리와 함께 테이블에 흩어지는 얼음과, “아 더러워!” 같은 소리와 함께 꺄악대는 여고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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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아가 건네준 티슈로 입을 닦으며, 명전은 도대체 어떻게 이서가 그걸 알아냈는지 궁금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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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우리 밴드 이야기 찾아보면 전부 다 수연이 이야기밖에 없고, 그걸 더 찾아보면 전부 다 ‘서명전 선생님의 제자!’ 같은 소리밖에 없는데 그걸 어떻게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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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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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탄식을 내뱉었다. 그리고 그런 명전을 가만히 둔 채, 현아는 서하에게 “서명전 선생님이 누구야? 유명한 사람이야?” 라고 질문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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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션 기타리스트로 유명하지. 기타치는 사람 중에 나이 좀 든 사람이거나 프로 지망해서 앨범 내는 사람, 뭐 그런 쪽이라면 대부분 다 아는 사람이긴 해. 나도 알고 있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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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정도면 들어봤을 법 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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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션 기타리스트니까. 당사자랑 관련 있는 사람이 여기 있어서 뭐라 말은 못하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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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 명전의 눈치를 보는 서하. 명전은 개의치 않는다는 듯이 손을 슬쩍 휘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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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로 신경 안 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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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에, 서하는 현아에게 조곤조곤 설명을 해 주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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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션 기타리스트, 서명전. 십대부터 기타를 치기 시작한, 한국에서 테크닉으로는 독보적인 기타리스트. 하지만 작곡 실력은 테크닉만 못했다는 평이 지배적이며, 서명전의 곡 중 꽤나 평이 좋았던 곡은 대부분 다른 사람이 써 준 곡이거나 커버곡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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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난 테크닉으로 유명했던 기타리스트긴 해. 예를 들어 거스리 고반(Guthrie Govan)이라던가, 제이슨 리차드슨(Jason Richardson)이라던가. 숀 레인(Shawn Lane)이라던가. 그 분을 실제로 만나본 사람들은 거의 뭐 그정도의 테크닉을 가진 기타리스트였다고 말을 하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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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관심이 없는 척 하면서 은근슬쩍 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아무튼 칭찬을 들어서 기분이 나쁜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기분이 좋아지는 것은 그의 잘못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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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문제는, 그런 기타리스트들은 테크닉적인 부분을 넘어서 자기만의 고유의 스타일을 완성했고, 그걸 자작곡이나 연주 등에서 증명했지만… 서명전 선생님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는 거지. 기타리스트로서는 대성했어도, 뮤지션으로서는 조금 부족한 사람이었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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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정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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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 기분은 바로 추락했다. 뭐, 저런 이야기가 안 나올수가 없다고 명전은 생각했다. 어쩔 수 없는 것 아니겠는가. 사실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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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나무위키도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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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하와 현아가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 이서가 핸드폰 화면을 보며 말했다. 나무위키? 음… 인터넷 검색을 하다 보면 자주 걸리는 그 사이트 말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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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적혀 있네. [한국 최고의 세션 기타리스트 중 한명으로 거론되는 인물. 어쿠스틱으로는 어떤 굇수(…)에 밀리는 감이 있지만, 일렉트릭 계열에서는 독보적인 실력을 보여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 [다만 작곡 실력은 기타 실력에 못 미치는 편으로, 대부분의 음반이 좋지 못한 평가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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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부분은 아니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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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죽은 자신의 평판 개선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이미 죽었는데 어떻게 하겠는가. 그리고 실제로 그가 어떻게든 냈던 음반들 중 ‘많은’ 수의 음반이 좋지 못한 평가를 받았던 것은 맞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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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가 생각하기에, 어쨌든 그의 음반들 중 좋지 못한 평가를 받은 건 ‘많은’ 음반이었지 ‘대부분’의 음반은 아니었다. 그래도 개중에 몇개는 괜찮다는 소리는 들었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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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여기 그렇게 써 있는데? [명성에 비해서 평이한 연주가 많거나, 후대 기타리스트들의 스타일을 지나치게 따라했다는 평론가들의 비판이 있었다.] 라고 되어 있단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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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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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아. 기타 스승님한테 안 좋은 이야기가 쓰여 있어서 마음이 안 좋은 건 알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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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하라는 이서의 말에, 명전은 이 몸에서 태어난 뒤 난생 처음으로 이서에게 소리를 지를 뻔 했다. 이거 완전 모함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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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명전이 창작력이 부족한 사람이었다곤 하지만, 그래도 명전 자신이 생각하기엔… 그의 기타실력에 미치지 못할 뿐이지, 그래도 일반적인 수준정도는 된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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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3집만 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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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이 냈던 3집은, 그나마 평론가들에게 꽤나 괜찮은 평을 받았던 앨범이었다. [서명전이 아닌 다른 기타리스트였다면 충분히 좋은 평가를 받을 앨범]이라는 건, 아무튼 객관적으로 보면 좋은 앨범이라는 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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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 수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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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가 어쩔 수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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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결연하게 소파에서 몸을 일으킨 후,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원래는 참석하지 않는 쪽으로 가닥을 잡으려고 했었지만… 이런 음해를 듣고서는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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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도 콘서트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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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웬 콘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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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전 추모 콘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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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 콘서트까지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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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동그랗게 뜬 세명을 두고 명전은 준홍에게 카톡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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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서트 참가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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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결정 하셨습니다~ 다른 분들도 좋아하실 거에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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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서명전’의 제자된 몸으로써, ‘서명전’의 음악이 어떤 것인지 진심을 다해 보여주리라… 물론, 그 과정에서 좀 ‘창작’이나 ‘과장’이 들어갈 수는 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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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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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기타 한대를 멘 채로 준비가 한창인 콘서트 홀에 들어섰다. 꽤나 음향과 장비가 좋은 것으로 유명한 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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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빌리는 데 돈도 꽤나 들었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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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그 사실에 대해 감동을 받기보다는, 도대체 뭐하러 이러고 있나 싶은 생각부터 들었다. 아니 죽고 나서 상다리 부러지게 제삿상 차리는 것도 아니고. 도대체 왜 이러고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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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이런 식으로 생각해봐야 부질없는 일일 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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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각자 추모의 방식이 있는 법이겠지. 명전은 죽은 당사자니까 조금 억울한 것일 뿐, 지금 이 판을 벌이고 있는 사람들이 딱히 잘못한 것은 없다. 명전은 그런 생각을 하며 한숨을 쉬고는 스테이지 뒤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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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오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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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을 맞이한 것은 준홍이었다. 반갑다는 듯 다가온 준홍에게 악수를 건네는 사이, 뭔가 슬쩍슬쩍 다가오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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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아는 얼굴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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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의 생각과는 달리, 공연을 하겠다고 찾아온 사람들의 수는 꽤나 많았다. 박성호, 손영철, 정이수, 이상훈… 그와 어느 정도 교류가 있던 사람들도 있고, 교류가 끊겼던 사람도 있고, 마지막까지 교류를 하던 사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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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가씨가 명전이 제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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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맞습니다. 아니 상훈 선생님 아가씨라고 하면 요즘에는 큰일난다니까요. 아주 잡혀들어가요. 뭔 이상한 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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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너 나한테나 그럴 수 있지 명전이한테 그런 소리 했으면 바로 뺨 맞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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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혀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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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근거도 없는 유언비어를 퍼트리고 있는 사람들을 보며, 명전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생각을 했다. 아무리 당사자가 없다고 해도 그렇지 날조가 너무 심한 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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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잘 왔어요. 마음이 편치 않을텐데 어떻게 용기를 내줘서 고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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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뭐…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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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갈아가면서 악수를 하는 사람들. 덕담을 하는 사람도 있고, 나잇값 못하고 은근히 지분거리는 영감도 있었다. 명전은 그런 영감에게 경멸의 표정을 아끼지 않고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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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이 밑에서 얼마나 배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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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보여주실 수 있습니까? 선생님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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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그런 질문들이 오가는 가운데, 누군가가 모두의 주목을 받을만한 질문을 하나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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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명전 선생이 남겼던 곡 같은 거 있나? 미공개 곡이라던가, 아니면 뭐 말년에 좀 녹음을 했던 곡이라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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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짝 조용해진 분위기 속에서, 누군가가 “글쎄, 그런 게 있을까…” 와 같은 혼잣말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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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그런… 게 있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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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명전은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그 반응에 오오오~ 라는 탄성이 이어진다. 기대감이 섞인 대화들도 오가는 가운데, ‘하수연’은 자신이 절대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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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럼 스틱이 부딪친다. 탁, 탁, 탁, 탁. 네 번의 신호가 끝날때 쯤에는, 사람들의 눈도 빛에 적응해 있었다. 그리고 그들 앞에 펼쳐진 것은 압도되는 광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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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크리트 정글을 떠올리게 만들 정도로 높이 솟아오른 앰프. 밴드원들이 발 들일 틈도 없게끔 빽빽히 세워진 조형물. 짧은 폭의 무대 위에 네 명의 밴드원들이 서 있었다. 모두 다 개성적인 복장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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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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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를 정면으로 마주보고 있는 사람은, 친구가 그토록 칭찬하고 좋아했던 밴드의 리더 ‘하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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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입은 독특한 형태의 의상은, 요새 트렌드라는 ‘테크웨어’로 보였다. 하지만 훨씬 더 정돈된 모습. 거기에서 느껴지는 날카로움과 적막함을 군데군데 달린 프릴이 메워주고 있다. 과하지도 촌스럽지도 않게 들어간 프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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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무대에 울려퍼지는 쫀득하고 경쾌한 소리는, 그녀의 주의를 돌리기에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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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 요상하게 생긴 네 줄 기타를 들고 있는, 마이크를 앞에 둔 긴 머리의 여성. 그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분명해보이는 소리는, 음원의 그것과는 달랐다. 훨씬 경쾌한, 마치 날아갈 것 같은 그런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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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지막히 일어나 창밖을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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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멀리 하늘에 뭔가 떠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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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쳐다봐도 알 수가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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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학 원형도넛 그리고 공중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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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른하게 중얼거리듯, 혹은 읇조리듯. 하지만 리듬에 따라 흘러가는 가사는 마치 랩을 듣는 것 같다. 따라갈 수 없는 고유의 리듬에 따라 계속 읇어지는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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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라이브가 낫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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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나선 오늘의 날씨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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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과 번개를 동반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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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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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지 흐린지 모르는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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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만 보고서 터벅터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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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랬다. 조금 더 리듬이 활기찬 듯, 조금 더 사람들을 뛰어놀게 하는 듯. 만사에 호들갑을 떨지 말라던 친구는 이미 어깨를 들썩이고 있었고, 공연장의 어디에서든 조그마한 발구름 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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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를 알 수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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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떠 있기만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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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정원에 나는 끝없이 올라만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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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향한 내 마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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흘러가는 세월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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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부 모래 위에 휘청이며 넘어질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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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어때? 좋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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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릿지 부분에 들어가자 옆에서 팔을 쿡 찔러오는 친구. 그녀는 무슨 첫 곡부터 호들갑이냐고 말하고 싶었으나, 그 말이 쉽게 나오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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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좋고 재미있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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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다른 콘서트들을 가봤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콘서트는 커녕 라이브로 펼쳐지는 공연 자체가 이번이 처음. 게다가 밴드의 공연을 보는 것은 화면으로도 해본 적 없었다. 그러므로 공연문화에 있어서는 완전히 초심자라고 할 수 있는 그녀였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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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이 올라가 너를 바라볼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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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너를 딛고서 그곳에 가 섰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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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정원에 올라 뒤를 바라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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왠지 저 뒤에 몰려오는 파랑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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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그녀가 생각하기에도, 관객들 전체를 순식간에 몰입하게 만드는 밴드는 흔치 않을 것 같아 보였다. 지금 이 상황을 보라. 아까 전 나눠주던 굿즈를 거절한 사람들도 꽤 있었다. 그녀의 느낌상 30% 정도는 받지 않았던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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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눈에 닿는 범위 내의 모든 사람들이 음악을 즐기고 있다. 고개를 끄덕이든, 박수를 치든, 발을 구르든 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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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를 알 수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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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떠 있기만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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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정원에 나는 끝없이 올라만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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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향한 내 마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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흘러가는 세월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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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부 모래 밑에 파묻혀 사라질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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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절의 후렴구가 끝난 후, 기타 솔로가 이어진다. 원곡에서 들었던 것 보다 더 강렬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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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아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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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예 다른 소리와 아예 다른 음. 뭔지는 모르겠지만 음악의 느낌도 바뀌어버린 것 같은 느낌. 그녀의 친구는 이미 옆에서 소리를 지르고 있었고,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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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다른 사람들의 심정을 이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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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게 라이브라면, 올 수 밖에 없을 것 같기도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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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원에서 들었던 것은 혼자서 이어폰을 끼고 듣기에는 좋은… 적당한 정도의 기타 솔로. 하지만 지금 무대 앞 무표정한 여자아이의 손에서 터져나오는 것은 그것과 아예 다른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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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지는 모르겠지만 롤러코스터처럼 흔들리며 굉음을 쏟아내는 기타. 마치 피아노를 치듯 유려하게 흐르며 끌어올리고 잡고 흔들고 오며가며를 반복하는 손. 두 개의 조합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은, 이런 것을 들어보지 못했던 그녀의 인생을 비웃는 듯 강하게 귀와 그 속의 뇌를 후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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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첫 곡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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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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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물음에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이게 첫 곡이라니. 아직도 한시간 정도나 더 남은 시간은, 그녀를 행복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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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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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다시 한번 인사드립니다. 하수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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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숙인 그에게 박수가 쏟아진다. 스포트라이트를 다 받고 있어 빛나는 무대. 환한 빛으로 인해 관객석이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는 아무튼 다들 즐기고 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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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들으신 노래는, [공중정원]입니다. 재미있으셨나요? 여기서는 관객석이 잘 안 보여서, 아무튼 재미있으셨다고 생각하겠습니다.가사가 왜 그렇냐고 질문을 주신 분들이 많았어요. 약간 모호하고 좀 알아듣기 힘든, 뭘 의미하는 거냐고 여쭤보신 분들이 있었는데… 일단 제가 작사를 한 게 아닙니다. 저희 밴드 작사는 전부 다 베이스, 최이서 양이 담당하고 있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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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를 가리키자, 다들 또다시 박수를 보낸다. 이서는 약간 흥분한 듯 목소리를 높여 “안녕하세요!! 최이서입니다!! 베이스 담당하고 있습니다!! 네!!”라고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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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제가 그 가사의 어떤 대목을 짚어서 정확하게 어떻다, 라고 말하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어느정도 개입은 했지만… 아무튼. 하지만 곡 자체는 제가 만들었으니 설명을 드릴 수는 있을 것 같아요. 어떤 곡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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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머리칼을 살짝 꼬았다. 어디부터 설명해야 할까. 여러가지 비유를 떠올리던 그는, 곧 하나를 떠올리고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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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정원이라고 하면 보통은 그 만화영화… 애니메이션. ‘천공의 섬 라퓨타’를 떠올리시죠. 좀 그런 이미지 아닐까요? 공중에 떠 있는 섬에 꽃이 만발한. 하지만 실제로 존재했던 공중정원이란, 바빌론의 공중정원이라고 해서 땅 위에 건물인지 뭔지 아무튼 뭔가를 올리고. 그 위에 막 정원을 조성한 겁니다. 공중정원이 아니라 옥상정원, 빌딩정원 정도가 맞는 표현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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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들의 웃음 사이로, 이서가 고개를 휙 돌려 “진짜야??”라고 물어보았다. 거기에 더 커지는 웃음. 그는 어디부터 가르쳐야 될지 머리를 긁적이다가, 포기하고 다시 말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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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정원의 이상향이란 그런 거죠. 공중에 떠 있는 뭔가 그런. 하지만 실제의 공중정원은? 거기에는 턱없이 미치지 못한 그런 느낌. 뭐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이미 다 말해놓고 무슨 이야기냐고 하실 수도 있지만, 이제 뭐 대놓고 어떻게 만들었다 이러면 너무 멋이 없어 보이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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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번 더 웃음이 터져나온다. 그는 웃음이 잦아들기를 기다렸다가, 마이크를 잡았다. 이번에는 다른 노래다. 그가 보컬을 잡는 노래이자, 이전까지는 그들의 대표작이었던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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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오, 시작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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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급이네 역대급. 올해 했던 공연중에 제일 좋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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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이제 막… 시작했…, 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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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디의 덕담에 모두가 웃었다. 단 한명, 참지 못하고 내질러버린 현아를 빼고. 하지만 현아를 무시하면 모두가 다 행복하므로 모두가 현아를 무시했다. 살짝 삐진 것 같은 현아의 표정을 보는 사이, 피디가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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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중간에 못 들어본 곡들이 많더라고요. 그게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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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두 곡은 커버곡이고 나머지 곡들은 미발표곡입니다. 앨범에 들어갈 것도 있고, 아닌 것도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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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 그럼 여기 오신 분들 복받았네. 곡을 먼저 선행으로 듣고 가는 거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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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음을 한 것은 아니기에 언제든 수정이 될 수 있긴 하지만, 아무튼 그런 셈이긴 했다. 그렇게 생각하던 그에게 내밀어진 피디의 손. 그는 손을 잡고 악수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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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공연 좋았어요. 아까 앞에 보니까 막 팬들? 팬클럽? 있는 것 같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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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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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 리허설과 공연 준비에 바빠 보지 못했다. 만약 봤으면 인사라도 했을 텐데.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머리를 살짝 꼬았다. 다른 아이들도 생각이 다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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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우리 프로그램이, 팬클럽만 신청하는 그런 프로그램은 아니거든. 이거만 노리고 맨날 마우스 클릭하고 그런 사람들도 많아요.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엄청 소문도 잘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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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말하며 피디는 웃었다. 하긴 그럴 것 같긴 하다고 그는 생각했다. 이런 공연에 올 만한 사람들은 어지간하지 않고서야 오기 힘드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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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기대해봐도 좋을 겁니다. 아마 공연이 방송에 나가기도 전에 이미 효과가 막 터지지 않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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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S Amplifier Now, Group Sound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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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나 잘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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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미치긴 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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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반부 되니까 앉아있는 사람이 없음 ㅋㅋ 다 무대 밑에서 뛰어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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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최애 밴드 공연 갔다왔는데 진짜 너무좋았어… 커버곡도 너무 잘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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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발표곡 막 엄청 나온듯? 중간에 몇개는 앨범에 들어갈 곡이라고했는데 그건 잘리고 나올것같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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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화가 끝난 후 수없이 쏟아진 증언들. 200명 가량 되는 사람들이 쏟아낸다고는 믿기 힘든 커뮤니티 화력은, 그들이 얼마나 공연에 감동을 받았는지를 증명해주고 있었다. 음악 커뮤니티라면 어디든 [그룹 사운드가 누군데?]나 [나도 신청할걸] 같은 글이 공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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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움직임에 기름을 부은 것은, 공연 유출본이었다. 분명 개인 녹음 녹화가 금지되어있음에도 불구하고, 도대체 어떻게 했는지 모르게 올라온 영상들. 대부분이 공연장의 열기를 증명하듯 격렬하게 흔들리거나 하고 있었지만, 음악 자체는 비교적 명확하게 들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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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음악을 들은 사람들은 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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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범 무조건 사야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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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에 앨범에 나갈 곡 뭔지 아는 사람 있음? 살지말지 고민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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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이건 무조건 사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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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ㅅㅂ 스트리밍 안 올라가는 곡 있을거냐는건 뭐냐고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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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Group Sound의 앨범은, 무조건 잘 팔릴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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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로 하여금 플레이리스트에 올릴 수 밖에 없게끔 하는 마력이 있는 곡인 [공중정원]과는 다른 느낌의 곡들. 대중적이지 않은 느낌도 있고, 지나치게 옛날 느낌이 나는 곡도 있다. Group Sound 밴드 멤버들의 연령대에 그대로 들어맞는, 그런 풋풋한 곡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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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둘은 동일했다. 곡들 내부에서 어렴풋이 느껴지는 어떤 주제, 그리고 ‘좋은 음질로 느긋하게 감상하고 싶다! 소장하고 싶다! 계속해서 간직하고 싶다!’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느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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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정규앨범에 대한 기대와 함께, [공중정원]에 대해서 퍼지는 소문… “라이브 버전이 그렇게 좋다더라!”같은 이야기와 함께, 계속되는 청취자의 영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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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기 급상승 음악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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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 32만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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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점 퍼지는 입소문. 잘 모르는 사람도, 이름을 들어봤지만 그다지 듣고 싶지 않았던 사람도 한번쯤 뭔지는 모르겠지만 이제는 한번 들어보긴 해야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재생버튼을 누르려고 할 때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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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밍은 지금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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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대 인근 모 사무실에서 누군가가 외친 말에 따라, 뮤직비디오 하나가 유튜브에 업로드되었다. 화제의 곡, [공중정원]의 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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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비 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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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V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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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ㄱㄱㄱ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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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레벌떡 달려간 사람들은, 애니메이션 캐릭터 하나가 멍하니 카메라 바깥을 바라보고 있는 썸네일의 MV를 마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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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재생된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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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둑어둑한, 아무도 없는 교실. 그 안에서 연주를 하는 네 명의 아이들. 조명 하나 없이 들어오는 달빛에 의지해 찍은 연주 장면. 어둠 속에서 빛나는 기타와, 흘러 나오는 노래. 카메라는 요동치고, 격렬한 각도로 연주하는 밴드. 교실에서, 수많은 거울 앞에서, 빌딩 옥상에서, 그리고… 저 멀리 떠 있는 공중 정원이 인상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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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사람들이 주목한 것은, 조금 다른 포인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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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메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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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사 영상으로 표현된 밴드 멤버들의 연주는 필요한 곳에만 딱딱 들어가 있다. 그 빈 공간을 메운 것은, 밴드 멤버들은 전혀 등장하지 않는 순수한 애니메이션이다. 아마추어틱한 감성. 정리되지 않은 펜선. 알 수 없는, 그래서 신비한 색감과 셀화적인 느낌이 공존하는 작화. 의미를 알기 힘든 가사답게 난해한 내용. 단지 장면의 멋에 집중한, 그럼으로서 GIF나 틱톡, 숏츠, 릴스와 같은… 짧은 컨텐츠에서 빠르게 떠돌 수 있도록 그려진 그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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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용의 눈동자를 그려낸 것은… 시그니쳐로 들어간 애니메이션 댄스 동작이었다. 간단하지만 귀엽게, 그리고 손쉽게 따라할 수 있게. 후렴구에 들어가 하이라이트를 장식하는 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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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장면을 본 사람은, 누구나 직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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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무조건 반응이 터질 수 밖에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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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그저 평범한 뮤직비디오였다. 흔히 아이돌들이 제작하듯이 그룹의 매력을 최대한 보여주는 쪽으로 만들어진 뮤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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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 Sound가 가진 부정할 수 없는(누군가는 부정하고 싶겠지만) 장점 중 하나인 ‘얼굴’을 최대한 부각시켜, ‘우와 이렇게 이쁜 아이들이 밴드까지 한다니? 그런데 실력까지 완전 장난 아니죠? 당 장 봐’ 같은 느낌으로 만들려고 했던 MV. 팬들에게 전력으로 어필할 겸, 사장님 딸을 이쁘게 찍어 사장님에게 아부할 겸… 억 단위의 예산을 집행할 예정이었던 뮤직비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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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랬던 흐름은, 누군가의 말 한마디로 바뀌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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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평범하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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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드 멤버에게 MV를 어떤 식으로 만들 것이라는 이야기를 해주기 위해 소집했던 회의. 그 회의에서, 턱을 괴고 뮤비를 보고 있던 하수연이 했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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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왜요??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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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어… 뭔가 구체적인 건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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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말하는 수연의 표정에는, 뭔가 살짝 망설임 같은 것이 맴돌고 있었다. 전문영역에 내가 구태여 발을 들여놓을 필요가 있을까 같은 느낌. 하지만 정유영은 수연의 의견을 잠자코 들었다. 이런 곳에서 갑자기 힌트가 나오는 경우도 적잖아 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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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우리가 만들려고 하는게 전통적인 뮤직비디오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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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그렇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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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런 형태는 저 대기업도 만들고 뭐 어쩌고도 다 만들텐데. 뭔가 차별화가 안 되지 않을까요. 일단 만듬새부터 차이가 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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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 수연은 “뭐, 예를 들어서 애니메이션이라던가 그런 식으로 만들어도 될 것 같은데요. 요즘 그런 게 좀 유행인 것 같고, 얘들도 좋아할 것 같고.”라고 말을 맺었다. “야! 씹덕이라고 모든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게 아니야!” 같은 이야기를 이서가 하는 동안, 정유영은 잠시 그 이야기를 입속에서 되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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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뇌에 번개가 떨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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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수연의 제안이 완전무결하게 성공할 수 있으며, 엄청나게 참신한 이야기… 라고 할 순 없다. 이미 기존에 그런 식으로 가고 있는 뮤지션들이 있긴 했고 그들 중에서도 성공한 사람들이 많았으니까. 특히 일본 쪽 뮤지션들은 체감상 태반이 그런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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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방금 들은 수연의 이야기는, 첫 팀장의 무게감에 짓눌려있던… 그렇기 때문에 기존에 자신이 이전 회사에서 했던, 검증된 방식 그대로 가려고 했던 정유영의 발에 묶여있던 족쇄를 산산조각내기에는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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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영은 그 길로 회사 사무실에서 내내 밤을 샜다. 고경민 팀장이 “아이돌 회사는 원래 그렇게 일하나?”라고 말할 정도로. 그렇게 밤을 새가며 컨셉을 만들고 유명한 애니메이터를 찾아 돈을 퍼부어가며(그래도 실사 MV보단 저렴했다) 만들어낸 것이 바로, [공중정원]의 뮤직비디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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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 Sound ‘공중정원’ 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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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영이 노린 것은 꽤나 복합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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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한국 사회에 깊숙히 스며든 숏폼(숏츠, 릴스, 틱톡 등) 동영상과, 거기에 따라오는 ‘챌린지’ 문화. 이미 반쯤 대중화된 일본 애니메이션 감성. 아직도 수그러들 생각이 없는, 오히려 점점 더 강화되고 있는 것 같은 시티팝과 레트로 감성, B급 정서, 그 외 기타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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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모든 것을 한번에 잡아내기 위한 설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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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영의 다른 설계들 또한 훌륭하게 작용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치명적이게 작동한 것은 챌린지를 노린 시그니쳐 동작이었다. 아주 간단하게, 손을 이래저래 휘적이며 춤을 추는 장면. 누구나 다 따라할 수 있는 그런 장면. 하지만 중독성 있는 후렴구에 엮여들어가 임팩트를 남긴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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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장면을 본 사람 중 누군가가 #공중정원챌린지 같은 것을 만들어 올리는 데에는 그렇게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고, 그것이 틱톡에서 퍼지는 데 또한 그렇게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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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정유영이 코피를 터트려가며 작업하고 계산했던 MV. 그리고 그동안 쌓아오고 있었던 입소문. 신선한 음악에 대한 대중들의 목마름. 그리고 기타 등등 등에 힘입어 Group Sound의 뮤직비디오가 얻은 성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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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 283만회 | 6일 전 | 인기 급상승 음악 #4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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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말로, 예상 외의 성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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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게 해서, 현재는 300만회를 돌파한 상태입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더 오를 것이라고 예상됩니다! 왜냐하면 최근에 갑자기 외국어 댓글이 늘어나기 시작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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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야? 진짜 우리 영상을 300만명이 봤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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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처구니 없다는 듯 되묻는 혜인. 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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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만명이 본 건 아니고, 300만회를 봤다는 거니까… 실제로 본 건 한 몇십만명에서 최대 한 백만명 정도 되지 않을까요. 저렇게 짧은 영상은 보통 한번만 보지는 않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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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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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짝 얼어붙은 혜인. 그는 그 모습을 보면서 자신도 동감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그도 체감이 잘 안 됐다. 300만명이 봤다는 것도 놀랍지만, 300만명이 봤는데 인기 음악인가 하는 게 4위 밖에 안 된다는 게 정말 놀라울 따름이었다. 그 위의 영상들은 도대체 뭐란 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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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 영상의 조회수만으로는 현재 [공중정원] MV의 영향력을 측정하기 힘듭니다! 대부분의 조회수는 숏폼 영상에 몰려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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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말하며 정유영은 여러 영상들을 보여주었다. 최소 백만의 조회수가 넘어가는 틱톡, 릴스, 숏츠 영상들. 그 중에 몇몇은 정유영이 직접 어느 아이돌 그룹의 누구다, 혹은 어떤 셀럽이다 라고 소개까지 해주었다. 대부분이 다 뮤직비디오에 나오는 그 댄스를 따라하고 있는 모습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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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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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부분에서 정유영은 탕 하고 탁자를 내리쳤다. 얘 왜 이래? 라는 표정으로 보는 고경민 팀장을 무시한 채, 그녀는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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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불이 붙기 시작한 이상 불은 계속해서 타오를 겁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다 그렇듯이 옆에서 불이 타오를 수 있게 도와준다면 더 빨리 불타오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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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에 그는 불길함을 느꼈다. 당연한 이야기이긴 한데 왜 정 과장의 눈이 그를 향하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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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의미에서… 이 챌린지의 노래를 직접 만들고! 그리고 총 지휘까지 하고! 밴드의 리더까지 맡고 있는, 하수연 학생이 챌린지에 도전해주신다면! #춤춰보았다 라거나 #직접해봤습니다 라는 태그까지 달고 한다면 천만 조회수 이천만 조회수도 충분히 가능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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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안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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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단호하게 이야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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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매번 거절에 실패했던 사례와는 다르게, 그는 이번에야말로 거절에 성공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더 적합한 사람이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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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거 하면 재미있는데. 왜 안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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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걸 왜 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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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진해서 자신이 하겠다고, 잘 할 수 있다고 손을 들고 나섰던 이서. 덕분에 그는 전국민 앞에서 이상한 춤을 추며 귀여운 척을 하는 대참사를 겪지 않을 수 있었다. 그는 그 점에 고마워하며 커피를 홀짝 들이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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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보다 아까 그 프리미엄? 그 이야기는 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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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안 듣고 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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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들은건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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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필사적으로 이야기를 들었다. 그저 이해를 하지 못했을 뿐이었다. 선행이 어쩌고 티켓이 어쩌고 한정 상품이 어쩌고 저쩌고. 전용 한정 굿즈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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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말, 하면… 구독… 이라고 해야 할…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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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딱 막 불타오르는 시기에 영업 돌리겠다는 거겠지 뭐. 우리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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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긴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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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영이 나눠주었던 종이를 펴서 그에게 설명을 해주는 이서. 그녀의 등 뒤로 다른 아이들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등을 돌리고 이빨을 드러내는 이서를 가만히 바라보며, 그는 앞으로 해야 할 일에 대해서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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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습 버스킹인지 뭔지도 하고. 또 뭐였더라. 어디 유튜브도 나가고, 연예인들이랑 그런 거도 찍어야 된다고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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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가장 중요한 과제는 정규앨범 녹음이긴 했다. 물 들어올 때 노를 저어야 한다지만 여유가 될 때 새 노를 마련해놓는 것도 중요하니까.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머리를 쓸어넘겼다. 앞으로도 할 일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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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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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에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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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한 강의실을 빠져나온 다음, 현아는 사람이 없는 곳에서 축 늘어졌다. 사람이 많은 것이야 서울 사람으로서 매번 경험하는 일이지만, 그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보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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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도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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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정원]을 작업하고, 뮤비를 찍고, 릴리즈를 한 다음에도… 현아는 집 밖에 나갈 일이 없었다. 나간다고 하면 고등학교 졸업식 정도였을까. 그 때도 아이들이 드문드문 알아보긴 했지만 그녀는 그냥 고등학생들의 습성인 ‘남에게 관심 많음’을 발휘한 것 정도로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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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별 생각 없이 있다 맞이한 대학 생활은… 그녀와 같은 내향형 인간에게는 지옥과도 같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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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보는 사람이 너무 많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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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대라 그런 건지, 세상에서 제일 시간이 많다는 대학교 1학년들이라 그런 건지. 캠퍼스 내를 오가다 보면 꼭 한명씩 그녀를 알아보고 “혹시 공중정원…?” 라는 말을 건네왔다. 이 때 맞다고 해주면 위험하다. 싸인이나 사진 찍는 것은 부담이 없는 수준. 같이 틱톡을 찍자는 아이들이 하도 많은 탓에, 그녀는 매번 도망을 쳐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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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정대로 갔으면… 더 나았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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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랬었다간, 그냥 음대 자체를 못 들어왔겠지. 게다가 밴드 활동도 불투명해졌을 것이고. 여러모로 복잡한 심정에 고민하는 사이, 주머니에서 느껴지는 진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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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 여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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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지금 혹시 강의중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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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아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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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그러면 놀러 가도 되나? 우리 지금 잠시 시간 남아가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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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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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이 연예인들마냥 인파를 구름처럼 몰고 오지는 않았다. 하지만 현아는 분명히 볼 수 있었다. 수연과 이서에게 따라다니는 사람의 규모가, 사람을 귀찮게 하는 것을 넘어 방해를 할 정도로 많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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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괘… 괜찮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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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안 괜찮을 게 어디있어. 다 우리를 알아보고 응원해주는 사람들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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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안 괜찮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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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말하는 수연에게 “그런 말 하지 마.”라며 정권을 내지르는 이서. 수연이 이서를 째려보는 사이, 이서는 털썩 앉아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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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생활은 어때? 청춘을 막 즐기고 있어? 막 MT 가서 술게임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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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혀 안 했어요… 당장… 저번 주… 까지 녹음했잖, 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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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긴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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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입학식 전에 끝내주겠다며 호기롭게 외쳤던 수연이건만, 앨범 녹음은 저번주에야 끝마칠 수 있었다. 학교에 오는 시간을 제외하면 모든 시간을 녹음에 쏟아부어서 이뤄낸 결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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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재녹음 해야 할 것 같은데. 4번 트랙이 사운드가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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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너는 무슨 7번을 시켜놓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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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번이 아니라 100번을 해도 사운드를 좋게 뽑을 수 있으면 그렇게 해야 하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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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을 말하는 수연. 현아는 질렸다는 듯 그런 수연을 바라보았다. 앨범 퀄리티에 대해 수연이 보여준 집착은 그야말로 광기라고 해도 될 수준이었다.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 전부 컨트롤하기를 원했던 그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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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이고. 이미 믹싱이랑 마스터링 작업 들어가서 재녹음 할 수가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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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농담좀 그만해!! 진짜 우리 죽을 뻔 했어. 현아 언니는 이제 수업 시작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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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농담이 따로 있지, 라며 길길히 날뛰던 이서. 그러다 갑자기 다가와 “혹시 그, [공중정원] 부르신…?”이라고 묻는 사람의 말에 “아 맞아요! 반갑습니다!”라며 뛰쳐나갈듯 반응한다. 사진도 찍고, 틱톡을 찍는 건지 영상을 찍는 건지. 그녀들이 있는 테이블 쪽으로도 뭔가 영상을 찍는 것 같아서, 현아는 수줍게 브이자로 반응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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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님, 도 좀… 해야 할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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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말하자 영혼 없이 손가락 하트 모양을 보여주는 수연. 이서가 돌아와 “야 좀 제대로 해 줘야지!”라고 하는 말을 무시한 채, 수연은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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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너희들이 할 작업은 없어. 앞으로는 나랑, 이제 레이블 직원들이 해야 할 작업만 남은 거지. 아니 뭐 컨텐츠를 찍을 것도 있긴 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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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작업은 얼마 걸리는 게 아니니까. 수연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믹싱과 마스터링. 트랙리스트의 최종적인 결정. 그 외 음향과 관련된 모든 작업들. 밴드 멤버들이 도와주기 힘든 그런 영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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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이제 곧 정규앨범이 발매될 거니까. 현아 너는, 그때를 더 대비해야 할걸. 지금보다 더 유명해질 수도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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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은 그렇게 말을 끝맺었다. 그 말에 현아는, 지금보다 더 유명해지면 도대체 어떻게 되는 거지 생각을 했다. 지금도 사람들을 피해서 도망다니는데, 앞으로는 원격으로 수업을 들어야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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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꼭 해야 하는 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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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네 차례야. 너 밖에 남지 않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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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음에 비장하게 고개를 젓고는, 대답을 해 주는 이서. 그는 하늘을 쳐다보았다. 왜 내가 이렇게 되고 말았는가. 이런 일을 굳이 겪어야 되는 이유가 있는 것일까. 세상이 나에게 왜 이러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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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의 삶에서는 겪지 않았던, 그리고 겪을 생각도 없었던 일들이다. 하지만 단지 세상이 이렇게 바뀌어버렸다는 이유만으로, 그가 ‘하수연’의 삶을 살게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이런 일을 겪어도 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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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간단하게, 남의 의견을 무시해도 되는 걸까. 참으로 비정하고 무딘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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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끄럽고 빨리 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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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체컨텐츠 3화의 촬영 현장. 테마는 바로 ‘놀이공원 체험기’. 공원 운영 측의 협조를 받아 그들은 다양한 기구를 경험했다. 그 중 백미는 2가지였다. 자이로드롭과, 롤러코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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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아아아아아악-! 아아아악! 으햐아아아악! 어어억! 아악! 크억컥으헉헉으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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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러코스터에 할당된 컨텐츠는 바로, ‘누구의 비명이 가장 높은가?’. 멤버들과 스태프들은 다들 정현아, 혹은 최이서의 우승을 예상했지만… 지금 벌어지는 일을 보면, 그냥 안 봐도 하수연이 우승할 것으로 보였다. 지상까지 다 들릴 정도로 찢어지는 고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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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쟤 원래 이런 거 싫어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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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잘은 기억 안 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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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도살장인지, 아니면 놀이공원인지. 지나가는 사람들조차 쳐다보는 가운데 그들은 롤러코스터가 끝나길 기다렸다. 기구가 도착하자마자 후다닥 빠져나가버리는 일반인들 뒤 쪽에는, 만년 전에 영혼이 악마에게 먹혀버린 듯한 형상을 하고 있는 하수연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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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괘… 괜찮, 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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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는 ‘하수연’. 그는 생각했다. 예전의 삶에서는 이런 일이 전혀 없었는데. 이렇게 높은 것 무서운 것을 싫어하게 된 것은 ‘하수연’의 영향인가. 분명 죽을 일도 없고 무섭다는 것도 그냥 인위적으로 사람을 놀래키려는 것임을 머리로 잘 알고 있는데도, 몸 자체가 반응해버리고 있는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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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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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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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죽었으면 왜 안 일어나. 촬영하러 가야지. 시간 아까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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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그렇게 말하는 서하를 힐끔 노려보고는,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후들거리는 다리에 휘청이는 몸. 이서가 빠르게 그를 잡아주는 사이, 그는 하늘을 쳐다보고 한숨을 내뱉었다. 세상사 참 오래 살아 뭐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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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놀고 가고 싶은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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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에는 한명밖에 손을 들지 않았다. 유서하. 이서는 잠시 입을 삐죽대더니 다시 한번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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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집에 가고 싶은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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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라가는 두 개의 손. 정현아와 ‘하수연’. 배신당했다는 듯 눈을 크게 뜨는 이서를 둔 채로, 서하가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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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데 왔으면 놀고 가야지 왜 벌써부터 집에 가려고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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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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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집에 가서도 힘들다고 할 거고 가는 길에도 힘들다고 할 거잖아. 맨날 하는 말이라곤 힘들어요~ 지쳐요~ 집에가고싶어요~ 이 말 밖에 없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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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는… 오는 거… 제일 싫어, 했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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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에 침묵해버린 서하. 그런 서하를 내버려둔 채 그는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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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집에 가자. 나 너무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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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하 언니 말이 맞아. 이런 데 언제 와보겠어. 이제 좀 있으면 우리 더 유명해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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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하는 사이, 갑자기 누군가가 다가와 이서에게 “혹시 그룹사운드 아니세요?”라고 말을 걸었다. 맞다고 하고 네 명이 모여 같이 사진을 찍어준 다음, 이서는 다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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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거처럼 나중에는 아예 발도 못 들인다니까. 그런 말도 있잖아. 유재석은 가족여행도 못 간다고. 사람들이 다 와서 막 말걸고 사진찍어달라 이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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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뭘 어떻게 해도 더이상 놀이공원은 안 올건데. 나 아까 그러는 거 보고도 내가 올 거라는 생각을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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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불닭볶음면도 먹는 사람이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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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나눈 새에 시간은 지나간다. 어느덧 태양이 잠에 들려고 하는 시기. 저물어가는 주황빛 구름들이 공중을 메우고, 붉은 물감이 푸른색 하늘에게로 점점 퍼져나갈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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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 여기 왔는데, 그래도 사진이라도 찍고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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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말하며 이서는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한참 오래되어보이는 스마트폰. 그는 이전에 이서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저런 오래된 옛날 기기가 사진도 잘 나오고, 감성도 있다고 그랬던가. 전혀 아닌 것 같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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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찍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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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카봉을 든 채 알아서 포즈를 취하는 세 명. 그 사이에서 그는 작게 손을 들어올렸다. 아직은, 이 정도로 충분한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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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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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상반기에 릴리즈된 곡들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잊혀져버린 곡도 있고 대중들에게 각인된 곡도 있다. 널리 불려지는 곡도 있고 그저 누군가의 만족으로 끝난 곡도 있다. 음원차트 1위를 한 곡도 있고 차트에 들지조차 못한 곡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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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 중에서 떠들썩했던, 영향력이 있었던, 그리고 화제가 되었던 곡을 꼽으라면… Group Sound의 [공중정원]은 무조건 들어갈 것이었다. 사람들의 기준에 따라서는 세 손가락 안에도, 혹은 첫 번째로 꼽힐 수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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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정원]은, 그 정도의 임팩트를 가진 곡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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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류를 역행해버리는 듯한 밴드 음악. 메이저판에는 전례가 없었던 여성, 그것도 여고생 밴드. 자체 프로듀싱. 전혀 대중적이지 않은 장르. 하지만 누구보다 대중적인 프로모션 방법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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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그런 [공중정원]을 보고 그 뒤의 것들을 기대했다. [공중정원]은 단지 선공개 싱글일 뿐이다. 그렇다면 그것보다 더 신경을 쓴 것이 확실할 ‘타이틀’은 도대체 어떤 곡이 될 것인가? 비슷한 풍일 것인가? 아니면 완전 다른? 어떤 퀄리티? 어떤 장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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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S Amplifier Now에서 유출되었던 곡들과 현장 관람객의 발언 등을 들어보면, 대략적인 유추는 가능했다. 그야말로 ‘칼을 갈고 나왔던’ [공중정원]과는 다르게 소신을 지킨. 하지만 완전히 메인스트림과 괴리가 있지는 않은. 아니 어쩌면, 그렇게 하였기 때문에 더 듣고 싶은 것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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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궁금해하는 사람들은 한명씩 늘어나고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그곳에 집중되고 있었다. Group Sound 정규 1집, ‘별이 되어가는 것’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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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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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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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맞습니다. 더이상 바꿀 일은 없을 것 같아요. 아니 사실, 좀 더 고민하고 싶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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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악스러운 표정을 짓는 고경민. 그는 잠시 침묵했다가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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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없으니까요. 이젠 찍어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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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만족스러운 부분은 있었다. 더 좋은 앨범을 만들 수는 없었을까. 더 좋은 음원 소스를 뺄 수는 없었을까. 믹싱과 마스터링이 끝난 다음에도 결국 그는 수록곡에 손을 댔다. 그 결과 앨범에 들어가게 된 곡은 총 11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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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쩌면 그 곳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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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Chromat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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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공중정원(선공개 싱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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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벨몬트 유리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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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저녁 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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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사라져버릴 것만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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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Value of a varia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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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별이 되어가는 것(타이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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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까마귀의 깃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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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어느날 너는 내게 돌아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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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日暮途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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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중 11번 트랙은 피지컬 음반용 히든 트랙이었다. 그러므로 대중에게 공개될 곡은 총 10곡이며, 선공개 싱글을 제외하면 9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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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그가 계획했던 것은, 12곡에서 15곡 사이의 앨범이었다. B-Side까지 넣어 수록곡 자체를 엄청나게 늘리려고 했지만, 결국 그렇게 하지는 못했다. 마치 글을 퇴고해서 점점 깎아내듯이, 이번 앨범 또한 점점 깎아내다보니 그렇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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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확신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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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까지의 성공이 운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 이 다음부터, 정규앨범부터 거짓말처럼 내리막을 탈 수도 있는 일 아닌가. 자신이 선택한 것을 대중이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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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의 삶에서 그랬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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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금이라도 미룰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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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깨운 것은 고경민 팀장의 말이었다. 마주본 고경민의 얼굴에서는 불안감이 살짝 묻어나오고 있었다. 확신할 수 없다는, 여기서 진행시켰다간 되돌이킬 수 없다는 그런 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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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요. 이대로 갑시다. 이게 맞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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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앨범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아는 것은 그 자신이었다. 그런 그가 흔들리면 다른 사람에게 동요만 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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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조건 성공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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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그렇게 믿었다. 그가 살아왔던 시간과, 수없이 많은 음악을 들어왔던 세월… 그리고 그 모든 것들과, ‘하수연’의 재능이 합쳐진 결과를. 그럼으로서 그가 이뤄낸 것들을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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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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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이제, 말씀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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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실의 분위기는 굳어 있다. 그동안 다른 소속 인디밴드의 앨범을 발매하긴 했지만, 그것은 전통적인 인디밴드의 앨범 발매 방식에 따른 것으로서… 딱히 회사의 역량이 투입되었다거나 하는 그런 업무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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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Group Sound의 정규 1집은 이야기가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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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첫 Ep, [Plastic Nostalgia]의 앨범 판매량은 현재까지 총 4천여 장. 적은 판매량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첫 EP는 MV도 찍지 않았고 직원도 따로 쓰지 않았다. 앨범 아트 디자인만 대충 한 정도일 뿐, 나머지는 전부 밴드 멤버가 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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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별이 되어가는 것’은 다르다. 전격적인 프로듀싱, 외주 마스터링, MV제작, 외부 프로모션 등. 본격적인 아이돌 제작비 정도는 아니더라도, 충분히 많은 돈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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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에 초동 판매량은 무엇보다 중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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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매 직후 1주일 안에 판매된 앨범의 물량을 지칭하는 '초동 판매량'은, 팬덤의 규모를 측정하는데 아주 좋은 지표 중 하나다. 열렬한 팬이 아니고서야 앨범이 발매되자마자 사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기에. 여기서 측정된 팬덤의 규모는, 앞으로 Group Sound가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말해주는 지표나 다름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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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 1집의 초동 판매량은 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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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인은 손을 꽉 부여잡았다. [레이블 에코사운드]는 그녀가 운용하는 회사에 비하면 비교도 되지 않는 규모의 기업이었다. 기껏해야 하나의 팀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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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돈도 팀 규모로 먹는 것은 아니다. 실패한다면, 그 돈은 고스란히 회수불능채권으로 변해버리는 것이나 마찬가지. 그녀의 원래 기업은 사업 하나가 무위로 돌아간다 해도 나머지 잔재를 어떻게든 써먹을 방법을 찾을 수라도 있지만, 음반의 경우는 아예 그냥 쓰레기더미가 되어버리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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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발 그러지만 않았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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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녀의 딸도 상처를 입고 말 것이다. 그녀는 그게 제일 싫었다. 돈을 얼마 회수를 하고 하지 못하고를 떠나서, 자신의 결과물이 세상에 인정받지 못한다는 그런 감정이 얼마나 끔찍한지 알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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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47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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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실은 순간 적막에 빠져들었다. 다들 어떤 말을 꺼내야 할지 몰랐다. 정확히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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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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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혜인도 마찬가지였다. 잘 감이 오지 않아서. 저번 앨범은 4천장을 팔았다. 이번 앨범은 1주일동안 10,447장을 팔았다. 이렇게 보면 10배 정도 증가한 것이니, 확실히 높아졌다고 할 수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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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수치입니다. 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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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막을 끊어낸 것은 고경민 팀장이었다. 그는 안경을 살짝 밀어올리고는,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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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난 성공이라고 할 수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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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난 성공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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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대 후반 이후, 어떤 인디밴드도 초동 2천장의 벽을 넘지 못했습니다. 심지어는 음악 듣는 사람이면 모두나 알만한 대형 메이저 밴드도요. 현재 우리보다 유명하다는 밴드들도 다 천장 미만의 초동 판매량을 보였죠. 오늘날의 음반 판매라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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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들은 첫 EP에서 초동 1천장을 넘겼고, 두번째 앨범에서는 1만장을 넘겼다. 대형 기획사를 뒤에 낀 보이밴드들이나 가능할만한 수치, 웬만한 중소 기획사의 아이돌보다도 높은 수치를 기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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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아이돌들만은 못하다고 볼 수 있죠. 심심하면 1만장 2만장을 넘어버리니까요. 하지만 이것은 분명한 쾌거입니다. 그리고 인디밴드의 주된 수익원은, 사실 공연과 투어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음반으로 수익분기점에 거의 근접했습니다. 다시 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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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경민은 잠시 뜸을 들였다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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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부터는, 그냥 버는 게 다 수익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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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음악 씬의 주류가 음반에서 다운로드로, 그리고 스트리밍으로 전환된 이후. 이제는 초대형 메이저 가수, 혹은 전직 아이돌 출신들이나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되던 초동 음반 1만 장의 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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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밴드에게는 뚫릴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고, 그렇기에 누구도 건드리지 않았고 건드릴 생각도 없었던 그런 벽. 누가 뚫을지도 관심이 없었던 벽을 뚫은 것은… 혜성같이 나타난 여성 4인조 밴드, [Group Sound]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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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성과에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 성공 원인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자신들의 사례에 적용하거나, 새로운 시장을 개척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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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사람들이 분석해 낸 결과는, 대체로 다음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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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디밴드 씬 및 관련자들의 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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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말로 공전절후의 실력을 갖춘 기타리스트 ‘하수연’을 필두로, 죄다 기본 이상은 하는 4명의 멤버들. 게다가 연주 실력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작곡 및 작사, 편곡 실력까지 상당히 훌륭하다. 순수하게 곡만 봐도 충분히 흥행이 가능한 수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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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탓에 수많은 사람이 그들에게 기대를 걸었다. ‘테일러드’의 김철연부터 해서 수많은 사람이 Group Sound의 앨범을 홍보해 주었고, 수많은 인디 리스너들이 앨범을 사주었다. 이들로 인해 인디 밴드 씬의 중흥이 다시 이루어지길 빌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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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적절히 형성된 팬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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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적인 인디밴드라면, 1년 차에는 팬은커녕 알아보는 사람도 한 명 없어야 한다. 하지만 Group Sound는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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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말로 갑작스럽게 인디밴드 씬에 나타나더니, 클럽 파라독스의 정기공연 TO를 꿰차고. 그 다음 정부지원사업인 밴드 파이오니어에 참가해서 높은 순위에까지 올랐다. 그리고 그들의 서사를 마무리 지은 것은. [인베이전 2024]였다. 결성된 지 1년밖에 안 된 밴드라고는 믿기 힘들만 한 실력. 그리고 그들의 서사. 특히 ‘하수연’의 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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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소리 소문 없이 활동을 중단함으로써 팬층이 만개하지는 못했으나, 이미 기반은 형성된 상태. 그리고 계속되는 ‘하수연’의 개인 활동과 때마침 만들어진 자체 콘텐츠, [공중정원]으로 생겨난 유입은… Group Sound의 팬층을 견고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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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앨범 구성품 마케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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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지컬 음반에만 수록되고, 스트리밍 서비스로는 들을 수 없는 한정 트랙 ‘日暮途遠’. 그냥 평범한 트랙이면 모르겠으나, ‘하수연’의 ‘기타력’이 최고로 발휘된 트랙이라는 김수렬 평론가의 평론은 사람들의 호기심에 불을 붙여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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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누군가가 립을 따서 유튜브에 불법으로 올려도 금방 신고로 격추되는 상황. Group Sound의 팬을 자처하는 사람은 울며 겨자 먹기로 피지컬 음반을 살 수밖에 없었다. 4명의 포토 카드와 포스트 카드는 기본이며, 폴라로이드 카드, 스티커 등등. 굿즈로 사용할 수 있게끔 패키지의 형태도 통상적인 패키지와 다르게 조금 잘 꾸며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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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초회 한정판은 어떤가. 멤버들의 친필 사인이 포함된 카드 한 장을 얻을 수도 있으며, 리믹스나 따라 부르기가 가능하도록 전 곡의 Instrument와 작곡자 ‘하수연’의 곡에 대한 해설, 그리고 ‘작사가’ 최이서의 가사에 대한 해설. 게다가 각 앨범마다 랜덤하게 들어가 있는 미발표곡(발표 예정 없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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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효과적으로 발휘된 상술은, ‘한정트랙’ 이었다. 일반판에 들어간 ‘日暮途遠’ 뿐만 아니라… 한정판에 들어간 미발표곡들은 사람들이 지름을 참지 못하게 만들었다. 내가 좋아하는 가수의 노래를 내가 들어본 적이 없을 수도 있다고? 내 옆의 다른 사람은 들었는데? 그런 심리를 부추기는 수법. 아이돌 업계에 있었던 ‘정유영’의 노하우가 극한으로 발휘되었다고 할 수 있는 앨범 구성품 마케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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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외에도 여러 가지 요인들이 있었으나 많은 사람들이 공통으로 논한 요인은 충분히 벤치마킹할 수 있어 보였다. 하지만 조금 더 분석을 시도한 사람들은, 머지않아 하나의 결론에 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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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례는 따라 할 수가 없는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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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영 팀장이 사용한 프로모션 방법은, 살짝 색다르긴 하지만 완전 새로운 것은 아니다. 기존 마케팅 방법을 변용한 것일 뿐 새로운 마케팅에 패러다임 쉬프트를 일으킨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누구나 떠올릴 수 있고, 시도해 볼 수 있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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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하수연’과 Group Sound는, 어느 누구도 따라 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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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대표하는 최정상급 기타리스트들조차 입을 모아 “나와 비슷하다” 혹은 “나보다 더 잘 칠수도 있다”라는 말을 하게 하는 기타 실력. 트렌드를 능숙하게 따라가며 옛 장르와 적절하게 조합해 새로운 해석을 끌어내는 프로듀싱 능력까지. 게다가 그런 하수연을 보좌하는 3명의 밴드 멤버 또한, 엄청난 실력을 보여주었다. 슈퍼밴드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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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모션은 따라 할 수 있다. 마케팅 방법도 따라 할 수 있다. 팬층 형성 방법도 따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음악은 따라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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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에, Group Sound의 정규 1집은 그저 특수 사례만으로 남게 되었다. ‘실력이 안 되면 시도조차 하면 안 된다’는 말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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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많은 밴드를 꼽을 수 있겠지만, 현재 가장 인디씬을 달구고 있는 밴드라고 하면 당연히 Group Sound의 이름이 맨 처음 나올 것이다. 어쩌면 한국 음악씬 전체를 두고 물어봐도 같은 답변이 나올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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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astic Nostalgia] 이후 근 1년만에 발매한 정규 앨범인 [별이 되어가는 것]. 얼핏 보면 주제 없이 난잡하게 펼쳐져 있는 것 같고, 그저 듣기 좋은 음악을 모아놓은 것 같다. 심지어는 해설조차 없는 불친절한 앨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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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차분히 음악을 듣다 보면, 어느새 청자는 자신의 내면에서 주제가 슬그머니 부상해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신들의 삶에 대한 솔직한 이야기는, 치기어릴수 있는 주제이나 연령대를 생각하면 흐뭇해질 수 밖에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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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쩌면 그 곳에]와 [Chromatic]는 최근 유행하는 J-Rock의 문법을 따라 다양한 베이스 주법을 선보인 곡이다. 선공개 싱글이었던 [공중정원]은 슈게이징에 대중성을 부여한다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을 해 낸 트랙이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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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이틀 곡 [별이 되어가는 것]은 밴드 사운드의 극한을 추구한 듯한 느낌을 준다. 맥시멀한 악기들 위에 얹혀진 랩하는 듯한 톤 다운된 보컬. 블루스 풍의 기타는 살짝 지칠 수 있는 분위기에 감정을 불어넣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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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으로 히든 트랙, [日暮途遠]은 기타리스트로서의 ‘하수연’이 어떤 사람인지 제대로 보여준 곡이라고 할 수 있다. 살짝 난잡한 듯 나열되었던 10개의 곡은 히든 트랙에서 하나로 모아진다. 日暮途遠, 倒行逆施. 해석은 각자에게 넘길 수 밖에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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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록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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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쩌면 그 곳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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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Chromat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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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공중정원(선공개 싱글).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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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벨몬트 유리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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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저녁 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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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사라져버릴 것만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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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Value of a varia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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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별이 되어가는 것(타이틀).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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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까마귀의 깃털.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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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어느날 너는 내게 돌아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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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日暮途遠.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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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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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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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써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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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핸드폰에서 눈을 뗐다. 평론 웹사이트는, 이제는 젊어져 버린 그의 눈으로도 따라가기 어려울 만큼 촘촘하고 늙은 UI를 가지고 있었다. 무슨 글자가 이렇게도 빼곡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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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수 그거 이해 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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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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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쓴 거 있잖아. [까마귀의 깃털]. ‘언어의 비열한 융합과 섬세한 현실의 접점, 그리고 존재의 손실에 대해서 논하고 있는 이 곡은…’ 이거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던데. 좋게 써주긴 했지만, 나이 드신 분이라서 그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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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쉽게 쓰는 법을 모르시나 봐, 하고 중얼거리는 이서. 그는 반사적으로 ‘나이가 들었다고 해서 다 저런 식으로 의미를 알 수 없고 모호하게 글을 쓰는 것은 아니다’라는 취지로 변호할 뻔했지만,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멈추었다. 한두 번 당한 것이 아니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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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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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말하려던 사이 갑자기 걸려 온 전화. 모르는 전화번호에 그는 일단 경계부터 했다. 이번엔 또 어떤 스팸이고 보이스피싱인지. 하지만 전화 내용은, 기대했던 것과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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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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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네 하수연 학생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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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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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저 이펙터집 사장입니다~! 아닌게 아니라, 최근에 그 스승님 유품이라고 하는 그거! 그 이펙터 중에 하나가 들어와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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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장 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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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바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이서는 당황한 듯 눈을 잠시 굴리다가, 뭔지도 모른 채 그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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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맞지요? Electric Mistress V1. 1976년 생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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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장의 말을 무시한 채, 그는 이펙터를 들어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여러 가지로 남겨져 있는 무늬, 개조 흔적까지. 그의 것이 정확하게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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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제가 찾던 것이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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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다행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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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하다는 듯 가게를 둘러보고 있는 이서를 내버려둔 채, 그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게 얼마 만에 보는 그의 플랜저인가. 그의 시그니처 톤을 결정짓는 데 아주 중요하게 작용하던 장비. 이제는 정말 그의 장비를 다 되찾기까지 얼마 안 남은 것으로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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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거 찾는데 사연이 정말 많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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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것 같긴 합니다. 얼마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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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에 점장은 잠시 머리를 긁었다. 할 말이 있는 듯한 눈치. 그는 입을 닫은 채 말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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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얼마 전에 누가 찾아와서 그걸 팔려고 하더라고. 근데 Electic Mistress길래 이제 찾아봤는데 학생이 그때 지정해 줬던 그 물건이더라고? 그래서 사는 김에 이야기나 좀 했지. 이게 누구 유품이라더라. 그래서 누가 찾고 있다. 그러니까 갑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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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장은 화들짝 놀란 얼굴을 묘사하며 말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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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이러면서, 그게 누구냐는거야. 그래서 솔직히 말해주면 안 되긴 하지만, 학생 이름을 말해줬어요. 그러니까 이제 자기는 이거 돈 못받겠다면서, 그냥 그 학생한테 전달해달라 이러고 갔어요. 얼마전에 방송인가 거기 나왔다면서? 학생 알아봤고, 그거 생각나서 팔러 온건데… 뭐 어쩌고 저쩌고. 자기 이름은 말하지 말라고 하고, 그러고 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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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그래서 이거는 가격을 받을 필요는 없다는 거지. 그렇게 중얼거리는 점장의 말에, 그는 묘한 기분이 되었다. 고맙긴 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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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 얘가 말해주던데 도난장비라던데. 그러면 그 사람은 그냥 원래는 말 없이 쓱싹해버리던 거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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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그렇다고도 볼 수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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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심정도 그랬다. 애초에 유품을 멋대로 가져가 놓고서는 이제 와서 저런단 말인가. 뭐, 돌려받았으니까 괜찮긴 하지만. 아무튼 이번 앨범은 꽤 성공적인 것 같았다. 예상치 못한 이런 일도 일어나고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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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게 판매량은 현재 순항중입니다. 초동 판매량정도의 그런 수치는 나오고 있지 않지만, 충분히 팔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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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반 판매, 음원 수익, 유튜브 및 방송 출연, 기타 등등… 수많은 경로를 통해서 얻은 수입들. 고경민은 그 모든 것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혜인에게만 건네주었다. 다른 회사 직원들까지 알 필요는 없다는 이유로. 혜인은 자료를 건네받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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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회사는 순항중이네요. 앨범도 괜찮게 팔리고, 음원 수익도 있고… 그럼 고 팀장, 그러면 이제 전에 말했던 다음 단계로 넘어가게 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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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그렇습니다. 원래는 다음 단계에서 앨범 및 각종 비용 등을 회수할 예정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어느정도 좀 절약한 그런 느낌이 되지 않을까 싶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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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경민은 새로운 PPT를 키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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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꽤 많은 돈을 쓸 수 있게 되었죠. 좀 더 다양한 곳을 돌아볼 수 있게 되었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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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연 PPT의 정중앙에는, 타이포 하나가 떠 있다. 누구나 알 수밖에 없는 그 단어. 밴드라면 무조건 할 수밖에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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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삶의 그가 그토록 원했던. 그러나 하지 못했던. 단지 무대 옆 변두리에 서 있을 뿐, 주인공은 한 번도 되지 못했던… 바로 그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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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콘서트 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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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전’의 삶의 목표가, 그곳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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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것은 당장은 불가능한 목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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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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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팀장의 말에 약간의 실망을 담아 되묻는 혜인. 고경민은 그 말에 머리를 살짝 쓸어넘긴 다음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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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우리의 팬덤이 그만큼 성숙하지가 않았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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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반을 많이 팔았다고 해서 콘서트에 사람이 많이 오는 것도 아니고 콘서트에 사람이 많이 온다 해서 음반이 많이 팔리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둘은 아예 다른 종류의 컨텐츠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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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대의 음반은 굿즈, 소장품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이제는 CD 플레이어를 가진 사람보다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들이 더 많은 만큼, 음반 자체는 더이상 실용적으로 사용되지 않는 것이다. 포토카드, 포스트카드, 브로마이드 등의 부속품을 끼워주기 위한 도구로서 사용되는 것이 음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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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서트는 다르다. 콘서트는 일종의 경험을 파는 행위다. 몇시간 가량 되는 노래를 라이브로 들으며 순간의 해방감을 느끼는 그런 일. 사진이나 영상, 기억으로는 남을 수 있으나 물질적인 것은 남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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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컨텐츠는 소비형태도 다르고 소비층도 다릅니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음반은 굶으면 살 수 있는 가격이에요. 하지만 콘서트를 굶어서 가려고 하면 죽을 겁니다. 아예 가격 자체가 차이가 나죠. 예를 들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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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경민은 자료 한장을 흔들었다. Group Sound의 팬 연령대 분포를 알려주는, 음반 판매사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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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반 판매량 자료를 보면, 저희 팬층은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이 많은 것으로 나옵니다. 10대 초반도 좀 있구요. 매우 당연한 일입니다. [공중정원]이 히트한 방식은 SNS와 챌린지 문화를 통해서니까요. 당연히 그러한 포맷에 익숙한 연령대가 우리의 주된 팬층이 될 수 밖에 없죠.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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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이 없는 연령대라는 거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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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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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인의 말에, 고 팀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10대와 20대. 한국의 취직 연령대가 점점 느려지고 있는 지금, 10대와 20대의 금전적 역량은 그야말로 제로라고 할 수 있다. 물론 SNS에서는 명품이니 뭐니 자랑하고 골프니 어쩌고 저쩌고 하는 것이 요즘 시대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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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정하게 생각하면, 밥 사 먹을 돈 줄여가면서 주위에 과시를 하는 사람들은 흔하더라도 밥 사 먹을 돈 줄여가면서 콘서트를 가는 사람은 그다지 흔하지 않죠. SNS를 하는 것은 자기과시의 목적도 있는데, 콘서트를 갔다고 해서 그게 자랑이 되는 게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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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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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인은 머리를 긁으며 고 팀장을 바라보았다. 잘은 모르겠지만, 아무튼 일리가 있는 말이긴 했다. B2B를 주로 하는 그녀로서는 좀 골치아픈 이야기였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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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단독 콘서트 투어는… 아마 근시일 내에 하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하지만 장기적 목표로서 계속 가져가야된다는 의미로 일단 넣어본 것이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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왠지 모르게 자신을 살짝 노려보는 듯한 수연을 무시한 채로 고경민은 계속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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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이제 정규 2집, 혹은 싱글을 위한… 그런 기반작업을 실시하면서, 팬층을 다져나가는 것을 주요 목표로 잡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기반을 다지는 것이죠. 우리의 팬들이 10만원 넘는 콘서트 티켓을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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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만원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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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는 의문을 담아 외쳤다. 하지만 그 목소리의 대답은, 다른 쪽에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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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에는 대부분 콘서트 가격이 그 정도 해요! 티어가 높다, 비싸다 하는 콘서트의 경우에는 20만원도 가죠! 10만원은 정말 기본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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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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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기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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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더 낮게 받을 수는 있죠. 저희들의 이익을 깎아서.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우리는 결국 금전적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서 모인 집단입니다. 자선사업을 할 필요도 없고 할 이유도 없어요. 이미 대중의 합의는 콘서트 티켓에 10만원 이상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게다가 그걸 더 싸게 한다고 해서 안 올 사람이 오고 그러지도 않을 거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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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긴 하죠. 애초에 5만원이든 10만원이든 ‘돈을 아낌없이 쓸 수 있는 사람들만 와라’ 하는 가격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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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하의 대답에, 고경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PPT를 넘겼다. 거기에는 앞으로 Group Sound가 수행할 여러가지 일들이 적혀 있었다. 방송 출연, 소규모 라이브, 락 페스티벌 참여, 팬미팅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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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는 이제 다른 의미로 조금 바빠질 겁니다. 다들 최대한 노력해서 연내에 좋은 성과 거둘 수 있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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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민은 그렇게 말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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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지하철에서 나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목적지까지는 아직 한참 남았고, 예정된 시간까지도 한참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뭔가 긴장이 풀리지 않는 느낌이었다. 생전 처음 겪는 느낌. 물론 생전 처음이라고 해 봐야, 이십년도 안 되는 세월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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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긴장을 풀어준 것은 걸려온 전화였다. 친구의 이름이 떠 있는 스마트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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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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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지금 들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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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방금 도착했음.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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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니가 됐는데 나는 왜 안 돼? 이거 조작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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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아냐~ 야 그러게 착하게 살았어야지. 내가 전에 방청 티켓도 얻어줬으면 그만큼 착하게 살았어야 스택이 깎이는 거 아냐. 자꾸 침대 밖으로 안 나오고 사니까 그 꼴 난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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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아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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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나는 팬미팅 왔어~ 니는 절대 못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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뚝 끊겨버린 전화. 그녀는 폰 화면을 보고 낄낄 웃고는, 다시 걸음을 빨리했다. 미리미리 가 놔야 무료 굿즈 배포 같은 것도 받을 수 있는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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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 Sound의 첫 팬미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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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명칭은 Group Sound Premium이었지만, 공모를 통해서 정해진 별명은 [도넛단]이었다. 왜 도넛단인가? 하면 [공중정원]에 나온 [원형도넛]이라는 가사가 나왔고, 베이스이자 보컬인 ‘최이서’가 “원형도넛이요? 어… 제가 좋아해서, 그냥 그렇게 지었어요.”라고 말해서. 그냥 그렇게 되어버린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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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의 이름이 좋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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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구명예구민]이라는 뭔가 멋졌던 이름은, 공식 팬클럽이 되면서 갈려버렸다. 이유는 ‘정부조례 등에 있는 공식명칭이므로 혼동을 야기할 수 있어서’라나 뭐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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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아무튼 첫 팬미팅은 공식 팬클럽만 응모할 수 있는 추첨제로 진행되었다. 팬클럽 회비가 꽤나 비싼 느낌이라 좀 억울했던 참에, 무료로 팬미팅을 보게 해준다니 약간 치료가 된 그녀였다. 게다가 팬클럽 1기들은 거의 다 당첨된 것 같은 팬미팅이라(물론 그녀의 친구는 당첨되지 못했다) 더 좋았다. 뭔가, 사람들이랑 이제 같이 시작을 하는… 그런 느낌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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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즈 받아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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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미팅 장소에 도착하자, 군데군데 놓여 있는 의자들. 그리고 입구 쪽에서 전에 한번 들어봤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전 EBS 방송 당시에 굿즈를 나눠줬던 사람. 회장이라고 했던가. 그 사람이 총천연색 도넛 캐릭터가 그려진 아크릴 키링을 니눠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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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받아가세요~ 아! 학생, 전에 봤던 사람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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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어,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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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미팅 재미있게 봐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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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가 반갑게 건네는 인사에 그녀는 그저 머리를 긁적이고는, 다시 자리로 향했다. 기분이 뭔가 이상한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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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그룹 사운드의 리더, 하수연입니다. 이렇게 뭐, 팬미팅을 하게 되었는데. 굉장히 어색하네요. 누가 그러더라고요. 방송이나 인터뷰나 뭐 기타 등등… 그런 곳에서 말할 때는 제대로 말하더니 무대에만 서면 말이 좀 이상해진다, 두서없이 말한다. 뭐 그런 이야기가 있었는데… 여러분 잘 모르시는 것 같은데 이런 게 다 기술입니다. 무슨 기술이냐고요? 지금 이제 여러분 앞에서 시간끌기를 하는 거죠. 컨텐츠가 준비되고 어쩌고… 그런 걸 해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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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도 솔직한 수연의 말에 웃음이 이어진다. 그런 가운데 관중석 사이에서는 “다에요 한번만 부탁드립니다!”라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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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그거 누구야. 다에요? 어… 제가 정말 해드리고 싶은데, 지금 시간이 다 되어가는 것 같아서요. 이제 슬슬 다음 차례로 넘어가야… 왜. 어? 아직 한참 남았다고? 너 진짜 맞을래? 네, 다음 차례가 지금 진행된다고 하니까. 음… 아니, 지금 MC로 최이서 양이 스스로 자원을 하신 것 같아요. 아쉽네요. 여러분들과 좀 이야기를 장시간 나누고 싶었는데… 빨리 받아. 안 받으면 너 크로매틱 10시간 시킬 거야 내가. 네 그럼 최이서 양과 이야기 나누시구요, 저는 좀 있다가 다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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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안녕하세요! 최이서입니다! 오늘의 퀴즈! 자기 하기 싫은 거 하나 이야기 나왔다고 남한테 떠넘기고 가는 저런 무책임한 리더를 어떻게 해야 할까요? 1번! 탄핵한다! 2번! 가만히 둔다! 3번! 부끄러워하는 영상을 인터넷에 퍼트려서 마구마구 조리돌림… 야! 아퍼! 그만! 여러분 얘 보세요! 얘가 이렇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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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나오자마자 들어갔던 무대에서 뛰어나와 최이서를 마구마구 투닥투닥 때리는 하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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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외에도 수많은 웃음 포인트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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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에게 마음의 편지를 읽어주는 코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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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읽어볼게요. 수연아 오늘 이 코너를 빌어서 너에게 말할 것이 있어. 진지하게 말하는 거니까 좀 들어줬으면 좋겠다. 멤버 중에 옷을 정말 못 입는 사람이 있어. 누군지는 말을 안 하겠는데, 화려한 무늬의 옷을 입고 다니는 사람이야. 네가 최근에 입었던 옷이 그 사람의 영향을 받은 것 같은데, 늦기 전에 빨리 뇌를 세탁해서 그런 영향을 받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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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 진짜 미쳤다니까요. 무슨 자기가 패셔니스타인줄 아나봐. 야 진짜 내가 내 입으로 나 잘 입는다, 그렇게는 말은 안 하겠는데. 너는 그냥 지금 어디 메루카리(일본의 중고판매 사이트)에서 멘헤라 치면 나오는 거 그냥 무더기로 사다가 그거 돌려입는 그런 거 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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멤버중에 제일 싫은 사람을 고르는 코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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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내가 3표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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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물어보는, 거… 양심 좀 없다고… 생각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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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연수가 진짜 자각이 없어요. 언제 한번은 뭐더라? 우리 공중정원 녹음할 때. 막 택배가 큰게 들어오는거 보고 뭔지 궁금해했는데, 그 간이침대 있잖아요. 그거 녹음실에 다 설치해놓고 합주 다 맞출때까지 회사에서 못 나간대. 저는 농담인 줄 알았는데 진짜 안보내주더라고요? 그렇게 해 놓고 3표를 왜 받냐니 진짜 양심 없는 거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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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게임과 토크. 팬들의 질문을 받아주는 코너. 팬들이 원하는 말을 멤버들이 해주는 코너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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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2부에서 뵙겠습니다! 잠시 쉬도록 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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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너무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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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는 사인과 악수. 그리고 멤버들의 공연. 그녀는 몸이 두둥실 뜨는 듯한 기분을 받으며, 2부를 기다렸다. 정말 기분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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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죽겠다. 말을 너무 많이 했네. 야 거기 물좀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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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손이 없니, 발이 없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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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중얼거리며 물을 던져주는 서하. 그는 잠시 이죽거리고는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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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미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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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도 젊었을 적에는, 이 정도의 규모는 아니지만… 그래도 팬들을 모아놓고 뭔가를 한 적은 있었다. 예컨데 호프집에서 이삼십명 모여서 같이 술 먹고, 기타도 보여주고 그런 거. 공짜 술이라길래 나간 적도 있고 그가 적적해서 한두번씩 사람들을 모았던 적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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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 시절의 감각과 지금의 감각은 전혀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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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인지는 모른다. 이유는 알 수 없다. 살아왔던 세월이 달라서일지도, 마주한 사람들이 달라서일지도, 혹은 뭐… 아무튼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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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은, 지금이 더 즐겁다는 것이었다. 그 시절에는 술도 마시고 담배도 피고 아무튼 유흥이란 유흥은 다 했는데도 그렇다. 지금이 더 즐거웠다. 어째서인지는 모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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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긴 하다, 그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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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에 그는 고개를 들었다. 이서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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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긴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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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직원분한테는 좀 미안하긴 한데, 아무튼 그 대본대로 했으면 별로 재미없었을거라니까. 약간 좀 어… 우리한테 안 맞는 거라고 해야 하나, 뭐라 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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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 팬픽같은 느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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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어맞어. 현아의 말에 맞장구를 치는 이서를 둔 채로, 그는 머리를 살짝 꼬았다. 아무튼 2부는 공연인가. 스탠드에 걸려 있는 재즈마스터가 아닌, 하드케이스에 넣어 온 스트라토캐스터를 꺼내든다. 요즘은 그다지 공연에서 사용하지 않았던 블랙 스트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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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진심으로 쳐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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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튜닝을 손보았다. 많이는 틀어져 있지 않은 튠. 튜너를 봐 가며 아주 조금씩 헤드머신을 움직이는 사이, 테이블 위에서 웅- 하고 핸드폰이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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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누가 그거 좀 나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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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드폰을 가져다주는 현아. 그는 전화를 받은 다음, 전화를 어께에 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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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하수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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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세요? 아 수연 학생! 오랜만입니다. 잘 지내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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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아 네… 근데 혹시 어떤 분이십니까. 제가 연락처를 저장을 안 해 놔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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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어? 아~ 내가 그때 연락처를 안 줬던가? 철연이가 안 줬었나? 저 김지연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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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순간적으로 머릿속을 뒤졌다. 김지연이면… [김지연의 음악편지]의 김지연인가. 테일러드 김철연이랑 출연했던, 그 심야 음악 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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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안녕하십니까.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근데 혹시 어떤 일로… 제가 팬미팅 중이라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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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래요? 그럼 바로 본론부터 이야기할게. 우리 프로 출연할 생각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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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출연할 생각은 당연히 있긴 한데, 저희 회사랑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은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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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랑 이야기 해야 돼요? 인디 아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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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저희는 그래도 좀 그런 걸 관리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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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곳인 것 같네. 아무튼 출연한다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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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네… 음, 잠시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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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잠시 튜닝하던 기타를 내려놓고는, 아이들에게 “김지연의 음악편지 나갈 생각 있냐?”라고 물어보았다. 고개를 격렬하게 끄덕이는 아이들. 그는 다시 전화를 잡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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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는 긍정적이긴 합니다. 회사 입장은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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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랑 사이 안 좋아요? 왜 자꾸 회사 이야기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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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어머니 회사라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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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그럴 만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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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말을 멈췄던 지연은 그렇게 내뱉었다. 살짝 미묘해진 전화 통화. 그렇게 약 몇초간 지속되던 침묵은, 지연의 이야기에 끊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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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그럼 일단… 어머님이라고 해도 거절할 이유는 없으시겠지. 나도 피디한테 이야기를 해 볼게요. 우리 쪽도 피디랑 이야기가 된 게 아니니까, 이야기가 픽스되면 우리 섭외 쪽에서 연락이 갈 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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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알겠습니다. 좋은 하루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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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화가 끝나자, 아이들이 그에게로 몰려들었다. “그 밤에 하는 그거?” “지상파 아닌가?” 같은 이야기들. 그는 그런 이야기에 적당히 답해주며 생각했다. 뉴미디어가 점령한 시대 같지만, 아직도 레거시 미디어의 힘이 강력하긴 하다고. 지금 이 상황만 봐도 그랬다. 어찌되었든 TV에 나온다고 좋아하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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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나 그거 한번도 본 적 없는데. TV를 안 봐가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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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를… 아예 안 본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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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누가 TV를 봐. 우리 엄마아빠나 보지. TV에는 진짜 무슨 트로트랑 아이돌밖에 안 나온다니까. 나이든 사람 전용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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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든 사람 전용. 그냥 평범한 이야기지만, 왜 그 말이 그에게는 비수처럼 박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어째서일까. 오늘도 그는 이서의 무심한 말에 상처를 받았다. 아니 무심한 말이 아니라, 의도적인 이야기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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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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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정원]이 끝난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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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윤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아직도 옆의 누군가는 “의미를 알 수 없는, 그저 떠 있기만 한…”을 되뇌이며 노래의 여운에 빠져 있었다. 그럴 만 했다. 그녀도 그랬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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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 한명 한명과 눈을 마주치는 것이 가능해보이는 작은 규모의 홀. 들어온 음향과 무대 장비는, EBS Amplifier Now때와 맞먹는… 아니 그보다 더 한 것 같아보이기도 하는 그런 세팅이었다. 팬미팅으로 인해 적자를 보는 것이 아닌가 싶을 수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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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팬심을 극한으로 끌어올렸던 1부까지 포함하면… 이런 환경에서 펼쳐진 무대가 나쁠 가능성은 단 1%도 없었다. 모두가 다 소리를 지르고 떼창을 하고 난리가 난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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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위기가 너무 과열된 것 같기도 합니다. 누가 좀 실려가지 않을까 생각도 드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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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흥분한 가운데 끼얹어지는 수연의 차가운 말. 마치 불 속에 폭죽이라도 던진 듯 아니에요!! 더 해주세요!! 라는 말이 관객속에서 튀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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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콘서트를 온 게 아니라 팬미팅을 온 거니까… 흥분은 다소 가라앉히시구요. 앞으로도 차례가 좀 많이 남았으니까요. 그리고 아무래도 저희 곡을 계속 하다 보니까 여러분들께서 호응이나 반응을 하실 수 밖에 없는, 그런 것 같은데… 일단 분위기 전환 용으로 좋은 곡 하나 들려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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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말하며 수연은, 옆쪽에 놓여진 기타 스탠드로 걸어가 하나를 집어들었다. 똑같은 검은 색이긴 하지만, 이제까지 수연이 쓰던 것과는 다른 모양의 기타. Group Sound 결성 이후로부터 계속 사용해왔던, 아윤에게는 매우 익숙한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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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거… 는 뭐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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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눈치인 걸 알아본 것인지, 옆 자리에 앉은 사람이 아윤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녀가 “아 저건…” 이라고 설명을 해주려는 순간, 갑자기 곡이 시작된다. 이제까지는 완전히 다른, 헬리콥터가 날아오는 소리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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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은 때에, 저 멀리서 들려오는 듯한 딜레이를 먹인 기타 소리. 그리고 그루비한 베이스 라인. 아윤은 순간 미발표곡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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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건, 우리 애들이 쓰는 스타일의 곡은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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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정지을 수는 없겠지만.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때, 수연이 마이크에 대고 외친 곡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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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other brick in the W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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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들어보는 제목과 가사. 중독성 있는 베이스와 적당한 스트로크. 아윤은 단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곡이었고, 팬미팅에 참여한 다른 사람들도 그런 듯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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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루브한 리듬에서 비롯되는 디스코풍의 라인은,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조차도 리듬을 타게 만들기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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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곡이 진행되다, 4명의 합창과 함께 아주 짤막하게 끝날 것 같은 분위기의 곡. 하지만 살짝 아쉬움을 느끼던 아윤의 마음을 읽었는지, 아니면 원래 그런 것인지… 몇초의 공백 동안 드럼만 울리던 무대 위로, 모든 스포트라이트가 한 점. 수연에게로 집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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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아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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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시작되는 무대. 뭔가 보여줄 것만 같은 분위기에, 사람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거기에 대답하는 듯 시작된 연주는 꽤나 경쾌했다. 수연이 많이 사용하는, 울부짖는 듯한 느낌이 아닌… 라인을 그대로 살려서 들어온 마치 춤을 추는 듯한 느낌의 솔로. 리듬을 타며 연주를 하는 세 사람 사이로, 스포트라이트를 오롯히 혼자 받으며 기타를 튕기고 있는 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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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랑 조금 다른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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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윤은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가늘게 뜨고 수연을 바라보았다. 진지한 표정, 떨군 고개. 기타도 지면도 쳐다보지 않고, 그 사이의 어딘가를 멍하니 바라보는 눈. 모든 것이 다 똑같다.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데도 뭔가 위화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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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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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주의깊게 수연을 바라보던 아윤은, 이내 다른 점을 발견했다. 발 뒤꿈치. 전체적인 몸의 리듬. 미동없이 기계처럼 기타를 연주하던 이전과는 다르게, 최소한 지금의 수연은 발을 살짝식 구르고 몸을 움직이며 리듬을 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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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심정의 변화가 있을지는 모른다. 음악을 즐기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오늘만 그런 것인지.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며 쳐다본 수연의 얼굴에는, 살짝 미소가 걸려 있는 것 같아서… 아윤은 기분이 좋았다. 그녀가 좋아하는 사람이 약간 더 행복해진 것을 보았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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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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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좀 힘들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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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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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 Sound의 섭외 건 관련으로 프로그램 PD를 찾아간 지연. 그러나 그녀가 들은 것은 전혀 예상 밖의 이야기였다. 뻔히 빈 자리인 것을 아는데도 힘들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하는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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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왜 안 되는데. 왜 안돼! 너 니가 좋아하는 애들 꽂을라고 그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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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누나! 좀 진정 좀 해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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멱살을 잡고 흔드는 김지연을 떼어낸 피디는, 잠시 옷매무새를 바로잡고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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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자리가 빈 건 맞긴 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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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긴 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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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똑바로 하라며 눈을 부라리는 지연. 하지만 피디는 말을 철회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한두번 있는 일이 아니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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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걔네 급이 안 돼요, 그 자리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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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뭔 소리야? 그런 게 어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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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나, 우리 현실을 봅시다. 나도 걔들 좋아해. Group Sound? 내 아들래미가 걔들 팬이거든? 얼마전에 앨범도 샀더라. 그런데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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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러니까 왜 안 되는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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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에 피디는 한숨을 쉬고는, 책꽂이를 뒤적거려 서류를 꺼내 지연에게 보여주었다. 날짜별로 출연자 리스트가 정리되어 있는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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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연은 자신이 원하던 날짜를 찾아 같이 출연하는 멤버의 리스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피디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알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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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자리가 있는 건 맞는데, 얘들 봐요. 얘네는 1군급 아이돌. 얘는 탑급 래퍼. 얘는 국내 최정상급 싱어송라이터. 이 자리에 신인 밴드 애들을 끼워넣는다고? 할 짓이 못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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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래도, 못 넣을 건 없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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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나. 현실을 봐야 된다니까. 걔들 공연이야 제대로 하고 녹화야 제대로 찍히겠지. 그런데 이쪽 기획사도 그렇고 분량적으로도 얘네를 생략을 할 수 밖에 없다니까? 내가 안 그러고 싶어도 그쪽에서 푸시도 오고, 심지어 얘는 몇년만에 방송 출연하는 건데. 그 밴드 애들이 나오면 오히려 불쌍해지는 거라니까. 분량을 못 받을 거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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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네가 그 분량 편집 좀 제대로 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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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를 긁적거리는 피디. 지연은 생각했다. 이 애가 누구를 밀어준다거나 뒷돈을 받고 편집을 한다거나, 그런 타입의 인간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윗선의 압박을 거절하는 타입의 인간도 아니다. 무엇보다 자기 자리와 시청률을 우선하는, 평범한 타입의 피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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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레전드급 무대 찍으면 그 쪽으로 돌릴 수는 있긴 하겠지. 그런데 지상파잖아요. 그리고 확률적으로 따지면 이 세명이 무대를 찢어놓을 확률이 더 높을 걸. 얘네 다 라이브도 잘하잖아. 안 그래도 어디 스포츠인지 어떤 기자 새끼는 아직 이거 자료 나가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드림매치인가 뭔가 하면서 야부리를 존나게 털고 있더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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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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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도 이해할만 했다. 지금에야 어느정도 지위에 올라 어느 곳에 가든 존중을 받는 가수가 되었지만, 옛날에는 그녀도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리고 다른 출연진에 밀리고 눌려서 제대로 된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던 적도 많았다. 아마 이 녀석은, 그걸 걱정하는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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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뭐, 다른 날로 미루자고 해요. 출연 약속 했다며? 내가 출연은 시켜줄테니까, 어… 어디보자. 좀 많이 뒤긴 한데, 이 쯤으로 하고. 날짜 빈 날 생기면 땡겨준다고 하고. 그쪽에서도 이렇게 막 박터지는 날에 출연해가지고 찡기고 이러는 거 별로 안 원할 것 같은데.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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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그럴 것 같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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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지연은 납득했다. 후배를 챙겨주는 것도 챙겨주는 거지만, 벌써부터 새싹이 짓밟히고 그러면 안 되지 않겠는가. 잘 자라도록 보호를 해 줘야 하는 것이지, 화분 채로 바깥에 집어던지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하는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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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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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뭐, 좀 힘들 것 같긴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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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면 그 날은 계속 빈 날이 되는 겁니까? 출연자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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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안 물어보긴 했는데, 아마 그렇지 않을까 싶어요. 그리고 사실 걔들만 출연해도 상관없긴 하거든. 아무튼 뭐… 관련해서 무슨 일 생기면 전화 한번 줘요. 일정 픽스는 내가 정해지는 대로 바로 다시 연락 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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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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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고, 미안하네 내가. 이렇게 뭐 잡아준다고 말은 했는데… 뭐 그렇게 되어버려가지고. 어쩔 수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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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뇨, 괜찮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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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례적인 인삿말 이후 전화가 끊겼다. 그는 잠시 검은 화면이 뜬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그러는 사이, 혜인의 말이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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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출연, 안 되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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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것 같아요. 뭐, 출연자들이 너무 쟁쟁해서 같이 출연시키기가 좀 그렇다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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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뭐, 그쪽에서 그렇게 말한다면 그런 거겠지. 다른 날로 잡아준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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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그렇게 말하긴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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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계속해서 꺼진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뭔가 마음이 좀 불편했다. 아니 불편하다기보다는, 음… 뭔가 알 수 없는 감정. 최근에는 느기지 못했던 그런… 열이 받는다고 해야 하나. 답답하고 짜증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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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승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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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한숨을 쉬고, 자기자신의 상태를 되돌아보았다. 그게 맞는 것 같았다. 호승심. 1군급 아이돌? 탑급 래퍼? 최정상 싱어송라이터? 같이 출연하는 것, 좋다. 아무래도 시청자들이 보길 원하는 건 Group Sound보다는 그 쪽이겠지. 일리가 있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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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일리가 있다고 해서, 납득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아니 만약 그에게 선택지를 줬다면 오히려 납득을 했을지도 모른다. 결국 Group Sound에게 필요한 건 방송 분량이며 홍보니까. 괜히 끼어들어가서 치고박고 싸울 필요도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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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걸 왜 니들이 멋대로 결정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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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되어버렸다 한들, 그는 한때… 아니, 죽기 직전까지도 한국 최정상의 기타리스트였다. 아니 솔직히 말해서… 그의 입으로 한번도 꺼내놓은 적이 없는 이야기지만, 테크닉만 보자면 전세계를 이야기해야 할 정도였다. 그런데 한낱 한국의 심야 음악 프로그램의 출연자도 못 이긴다고 생각하다니. 그것도 자신의 의사는 묻지도 않고, 피디가 그걸 결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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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이라면 수긍했으리라. 그 시절에는, 결국 '음악'은 할 수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그는 머리를 쓸어넘긴 후 전화를 집어들었다. 뚜루루 하는 신호음이 그의 귀에 들려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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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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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늑한 한옥에 자리잡은 카페. 백열등 불빛이 부드럽게 빛나며 사람들의 등을 쓸어주는 분위기 속에서, 그 말은 수연의 입에서 나지막하게 흘러나왔다. 아무런 일도 아닌 것 같지만, 아무런 일이 아닐 수가 없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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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그러니까 정리를 해 보자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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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는 잠시 손을 들어 시선을 주목시킨 후, 하나씩 손가락을 꼽아가며 이야기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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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김지연의 음악편지인가, 거길 나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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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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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같이 출연하는 게스트가 그 누구야, 아무튼 그 탑급 그런 사람들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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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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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저쪽에서 다른 날짜에 나오라고 이야기를 해 줬는데, 너는 지금 그렇게 할 수 없다고 하는 거지? 그 날짜에 들어가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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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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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그거 맞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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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는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녀 또한 그들의 음악에 자부심이 있는 건 사실이었지만, 그래도 현실적으로 생각을 해 봐야하는 것 아니겠는가. 그 길 밖에 없다면 험난한 길이라도 가야겠지만, 햇살이 쨍쨍하게 비치는 기분 좋은 산책로가 있는데 굳이 용암에 몸을 던질 이유가 없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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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힘들 것, 같은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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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나는 수연이가 맞는 거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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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멤버들 사이에서도 갈리는 의견. 이서가 잠시 고민하는 동안, 수연이 대답을 내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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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그 사람들 사이에 끼여서 출연을 하게 되면, 묻힐 가능성도 있겠지. 우리가 공연을 괜찮게 한다 해도 다른 사람들이 원하는 건 우리가 아니니까 편집이 될 수도 있겠고, 실수라도 하면 바로 잘릴 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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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냉정하게 생각하면 그렇게 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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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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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지려던 이서의 말을, 수연은 한 손을 들어 끊었다. 반론을 허락하지 않는 단호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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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으로 생각해보면 어때. 그 사람들 사이에서 묻히지 않는다면? 오히려 우리가 더 공연을 잘 해버린다면? 그러면 엄청난 관심을 끌게 되는 거야. 아무리 팬심이 있다 한들 객관적으로 뛰어난 공연이 있으면 그 쪽으로 관심이 돌아갈 수 밖에 없단 말이지. 그렇게 되면 어떨 것 같아? 지금보다 훨씬 더 강력하게 홍보가 될 수도 있는 거라고. 예를 들어 무슨 유튜브 동영상처럼, ‘탑급 아이돌 씹어먹은 여고생 밴드 덜덜덜’ 이런 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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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래도 좀 그렇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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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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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조에 분명한 감정을 담고 이어지는 수연의 말. 이서는 수연을 쳐다보았다. 평소처럼 무표정 같아 보이지만, 조금 달랐다. 눈동자에 맺힌 불길은 마치 용광로처럼 불타오르고 있다. 휘몰아치는 감정의 격류가 그녀에게까지 전해질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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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솔직히… 열받아. 그렇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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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받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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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받는다… 분하다. 뭐 어떤 느낌인지 정확히 설명하긴 힘든데. 아무튼 그냥 화가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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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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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아는 그야말로 ‘그정돈가’ 하는 표정으로 수연을 쳐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이서가 보기엔 수연은 정말로 진지했다. 이전에는 단 한번도 본 적 없는 표정. 밴드를 하기 전에도, 한 다음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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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무표정으로 있던 그 시선 속에는 약간의 지루함이 섞여 있었다. 마치 모든 일을 관조하는 듯. 자신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듯. 매사를 진지하게 대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그렇지 않은… 감정 없이 바라보던 아이가 바로 수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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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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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포기한 것도 아니고, 저쪽에서 포기를 시켰잖아. 선택권도 주어지지 않은 채로. 단지 그 사람이 생각하기에 ‘너희는 급이 안 된다’라는 이유로. 물론 그쪽에서는 우리를 생각해준 거긴 해. 하지만 나는 이대로는 못 받아들이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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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의 말을 들으며, 이서는 진심으로 좀 아닌 것 같다고 생각했다. 물론 화가 나는 일이긴 하지. 그렇다고 해서 일부러 거기에 도전을 할 필요가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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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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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뭐… 그렇게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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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맛님…도, 그렇게 생각하신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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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뭐 그렇게 생각까진 안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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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는 목을 살짝 주물렀다. 뻐근했던 느낌이 살짝 사라져 기분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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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럼 그냥 하면 되는 거니까. 뭐 그래도 정규앨범때보다 더 힘들게 연습은 안 할거 아냐. 내 말 맞지?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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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은 농담조로 말하며 수연을 쳐다본 이서. 하지만 수연은 대답하지 않고, 그저 그녀를 가만히 쳐다볼 뿐이었다.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들어, 그녀는 다시 질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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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맞지? 그때보단 덜 연습할거지? 왜 그렇게 대답을 안해, 불길하게. 대답 좀 해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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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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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김지연의 음악편지 페이블스, 씩 인디, 유영 출연… 신생 밴드 ‘Group Sound’ 도전장 내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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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이거 씨벌 이거 어디에서 퍼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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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해서 일을 하는 와중, 프로그램 관련 기사가 떴다며 들고온 막내. 내용을 받아본 피디는 바로 팀원들을 소집했다. 당장 어제 결정된 내용인데 오늘 기사가 이렇게 뜰 정도면, 어디서 흘러나갔다는 거 아닌가. 물론 프로그램에 심각한 누를 끼치는 그런 일은 아니었다. 굳이 비공개로 해야 될 일도 아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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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런 식으로 기사가 나갈 일도 아니지 않은가. 그는 인쇄한 A4를 탁탁 책상에 치며 팀원들에게 이야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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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얘들이 들어와 준거 엄청 고마운 거야. 솔직히 얘들 없었으면 그 자리 펑크라고. 이 새끼… 아무튼, 이 놈들 노래도 별로 안 부르려고 몇곡 제한까지 걸어놨는데. 얘네 밴드 없었으면 음악프로인데 농담따먹기나 내보낼 뻔 했잖아. 그런데 어? 이 좀 배려를 해 줘야지… 누구냐 이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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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대답이 없는 팀원들. 서로 눈치만 보는 것이, 자진 신고는 전혀 하지 않을 듯 했다. 게다가 그도 여기서 더 밀어붙이긴 애매했고. 뭔가 심각한 해를 끼친 것도 아닌데 진심으로 한명 두명 잡아가며 뭐라 할 수는 없는 노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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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골때리네 이거. 일단 다 나가봐. 거, 재현아. 너는 그 기자한테 전화해서 이야기좀 해 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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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어떻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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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새끼 거! 형이 말한 거 안 들었냐? 니가 퍼트렸지? 야 일로와봐. 너 좀 맞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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휙 도망가버리는 직원을 보며, 그는 한숨을 쉬었다. 아무래도 마음이 쓰이는 애들이었다. 언젠가는 공개가 될 테지만, 저렇게 악의적인 느낌으로 기사가 나가면 안 될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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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디의 예상대로, 인터넷은 난리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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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사운드 얘들 누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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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전장 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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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좆듣보새끼들이 지랄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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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 그정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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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내용 가관이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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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레기질 아님? 진짜 이럴 수가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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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에게 알려진 내용은 별 것 없었다. Group Sound의 출연이 처음에는 고사되었다가, 밴드의 요청으로 다시 성사되었다는 것. 그냥 그러려니 할만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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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연예부 기자들이 누군가. AI도 그들보다 어그로를 잘 끌 수는 없다. 2줄도 안 되는 ‘실제 있었던 일’은 군데군데 살을 붙여 10줄짜리 ‘실제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로 재탄생했다. 그 결과는 다음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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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신생 밴드 Group Sound는 그들의 강력한 요청에 따라 ‘김지연의 음악편지’에 출연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미 유명 아이돌 페이블스(Fables), 래퍼 씩 인디(Sick Indi), 싱어송라이터 유영이 출연하기로 확정된 것을 듣고도, ‘충분히’ 자신이 있고 그들 사이에서 경쟁할 수 있다며 강력하게 출연 의사를 밝혔다는 후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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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허위사실창조율 100%에 가까운 그들의 전적과는 달리… 이번 대안현실은 놀랍게도 사실과 매우 근접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기자들은 ‘사실을 때려맞추는 것’보다 ‘기존 출연진의 팬들을 화나게 만들어서 기사를 클릭하게 하는 것’을 원했고, 그게 매우 잘 먹혀들어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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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결과 인터넷은 아주 난리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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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좀 살짝 기세가 죽긴 했지만, 그래도 아직 1군급 아이돌이라고 불리며 음반을 백만장 단위로 팔아치우고 있는 남돌, 페이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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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발 공연좀 해 달라, 음반좀 내 달라, 믹테라도 내 달라, 아니면 그냥 돈이라도 가져가달라… 그 외 팬들의 무수한 원성을 들으면서도 꿋꿋히 자기 할 일만 하고 있기로 유명한 래퍼, 씩 인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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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한국에서는 가창력으로 인정받은지 오래. 요즘에는 일본에서 투어까지 하며 무도관 공연까지 성공시킨 아이돌 출신 싱어송라이터, 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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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셋을 속되게 말해 ‘따버리겠다’며(왜곡이 있지만) 도전장을 던진, 2010년 이후 최고의 데뷔를 이뤄낸 인디밴드 Group Sound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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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그 날을 기대하고, 그냥 어그로를 끌고 싶은 사람들은 팬덤들을 돌아다니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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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페이블스 인스타 라이브했는데 그룹사운드인가 걔들 이야기듣고 비웃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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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씩인디 무물하는데 페이블스 그룹사운드 그이야기 나오니까 표정 굳으면서 혀낼름거리더라 ㄷㄷㄷㄷ 씩인디가 혀낼름거리면 진짜 빡친거라던데 ㄷㄷㄷ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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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영언니 음악편지 이야기 나오니까 정색했어요 ㅠㅠㅠㅠ 부담심하신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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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걔들이 그랬다더라~] 라며 말을 지어내고 라이브에 난입해서 헛소문을 퍼트린다. 그 소문은 재생산되어 팬덤에게 유입되고, 팬덤의 일부는 또 과민반응해 헛소리와 욕설을 늘어놓는다. 그럼 그것은 다시 또 재생산되고, 재생산되고, 재생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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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놈의 음악편지 씨벌거 그만좀 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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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분위기는 달아오르고, 시간은 점점 흘러간다. 평상시라면 별 것 아닌 스타들의 동시 출연. 하지만 왠지 모르게 대결의 장이 되어버린 ‘김지연의 음악편지’의 방영시간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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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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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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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다시 시작된 연주. 하지만 그는 손을 들어 연주를 멈추게 했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박을 맞춘다, 합주를 한다… 그 이전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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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뭐 우리 갈구는 거 아니면 좀 이야기를 해 봐. 아까부터 계속 하다가 그만두고 하다가 그만두고 그거밖에 안 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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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하고 있던 그에게 말을 던진 것은 서하였다. 살짝 날이 선 것 같은 말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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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부족한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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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돌아오는 의아한 표정들. 그럴 법 했다. 타이틀인 ‘별이 되어가는 것’은, 그야말로 맥시멀한 사운드를 추구한… ‘부족함’이라는 개념 자체가 부족하다고 할만한 곡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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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가 안 되는데. 뭔가 부족하다고? 부족한 게 있나? 지금 이 트랙에 뭔가 더 넣을 게 오히려 없어 보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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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긴 해. 그리고 이 곡을 만들 때도, ‘부족함’이 없게 해야 된다고 생각을 했고. 애초에 그런 곡이었으니까. 그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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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머리를 꼬았다. 왠지 이대로는 안 된다는, 그런 이상한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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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 출연을 결정하고 나서, 그는 출연자들의 무대를 계속 돌려보았다. 그리고 계속해서 생각했다. 이 사람들을 이길만한 그런 방법이 무엇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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씩 인디, 유영, 심지어 페이블스까지. 전부 다 자신들의 영역에서 ‘부족함’이라는 게 없는 가수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최정상급 남돌이니 래퍼이니 가수라고 불리는 사람들이고, 그렇기 때문이 인기가 많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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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과연 어떤 것이 필요할까. 아니, 이대로 가도 충분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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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부족한데. 뭔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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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다시 한번 머리를 꼬았다. 임팩트를 주기 위해서. 저들을 뛰어넘기 위해서.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부족한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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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족함이 부족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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뜬금없게도 그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힌트를 얻은 느낌도 들었다. 부족함의 부재. 그들이 만든 곡에는 부족함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뭔가 부족한 것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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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한번쯤은 덜어낼 필요도 있지 않을까. 맥시멀한 방향에서, 미니멀한 방향으로. 그리고 그 미니멀함의 끝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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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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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쟤들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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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그렇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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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남돌로서는 과장 약간 보태 ‘원로급’이라는 이야기를 듣는 아이돌, 페이블스. 리더 유혁은 복도를 멍하니 쳐다보다가, 멤버의 말에 4명의 여자애들이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쟤들이 그 아이들인가. 소문의 그 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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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 그거 알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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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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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쟤들, 우리 회사랑도 연관 있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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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쟤들이 우리랑 무슨 상관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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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걔들 있잖아요. 밴드 하는 애들. 뭔 식스인가 하는 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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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너는 후배들 이름도 기억 못해? Projeckt 6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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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내는 듯한 유혁의 말에, 막내는 머리를 긁적이며 겸연쩍은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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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걔네들 중 한명이 쟤들이랑 얽힌 게 있잖아요. 뭐 바이럴 비슷하게 해줬다던데. 그리고 저 리더 애가 이뻐서, 좀 막 비벼보고 그랬대요. 바로 개같이 까이긴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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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바이럴을 해? [공중정원]? 그거 곡 자체는 엄청 좋던데. 그건 바이럴이 필요없는 곡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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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 말고, 이전 음반이래요. 한참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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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혁은 그 말에 스포티파이를 켜 Group Sound를 검색해보았다. [별이 되어가는 것] 이전에, [Plastic Nostalgia]라는 음반이 하나 있었다. 딱히 재생수는 높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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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곡 듣고 감동해서 라이브때 울고 그랬대요. 그래가지고 막 바이럴 되고 그랬다던가 뭐라던가. 암튼 그래서 뭐…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하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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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실없게 그게 무슨 소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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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식 웃으며 유혁은 안경을 벗고 콘텍트렌즈를 꼈다. 이제 슬 공연 리허설 시간이었다. 저 아이들은… 인사는 나중에 오겠지. 그때 이야기나 좀 나눠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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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순서는 그들이 처음이고, Group Sound가 마지막이었다. 그것이 피디의 배려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다. 단지 그는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사람들의 공연을 다 본 다음에 펼쳐지는, 영광이 있을 수도 있고 치욕만 받을 수도 있는 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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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혁은 그렇게 생각하다가, 잠시 바깥에 걸어나가보았다. “어디 가요?” 라는 말에 “잠시 무대좀 보러.”라고 대답하며. 왠지 모르게 궁금했다. [공중정원]은 잘 들었지만, 과연 저 애들이 진짜 ‘인디 밴드 씬을 부흥시킬 최후의 희망’이라는 이야기를 들을 정도로… 그 정도로 뛰어난 애들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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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허설 무대로 다가서자, 그를 알아본 스태프들이 인사를 건네왔다. 그 소리에 리허설을 준비하던 밴드 아이들도 잠시 돌아보더니,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마주 인사를 받아주고는 그는 팔짱을 끼고 기다렸다. 그의 등장으로 인해 잠시 멈추었던 리허설이 다시 시작되고, 드럼이 스틱으로 신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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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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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렁찬 박수와 함께 끝난 유영의 공연. 그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손을 살짝 모았다. 떨려오는 손끝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그녀가 노래를 잘 부르는 것은 유영의 팬으로서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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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공연은 특별했다. 평소와는 달리 힘을 빡 주고 공연을 했다는 느낌. 조금 더 표현력에 힘을 주고, 조금 더 높은 소리를 내고. 그가 봐온 유영의 라이브 중에서는 열손가락 안에 꼽을 만한 그런 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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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 두 팀한테 자극이라도 받은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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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고 보면 잘은 모르겠지만… 앞의 그 남돌, 페이블스인가 하는 애들이나, 래퍼라는 애나… 둘 다 뭔가 좀 더 무대에 힘을 준 그런 느낌이 있긴 했다. 둘의 음악에 대해서는 잘 몰랐음에도 불구하고 재미있게 즐길 수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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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에 대해서 잠시 고민하다가, 그는 그냥 생각을 그냥 놓아버렸다. 그냥 대첩이니 대결이니 하는 기자들의 호들갑에 좀 자극을 받은 거겠지. 그래도 약간 재미있긴 했다. 다들 연예계 생활이 몇년인데, 아직까지도 그런 호승심이 남아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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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무대 준비시간 잠시 가지겠습니다. 공연은 15분 뒤에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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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영원히 이어질 것만 같던 박수도 끝나고, 소강 상태에 접어든 공연장. 스태프의 안내에 따라 일어나는 사람들. 그는 핸드폰을 보고는 잠시 고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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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갈까. 지금 가면 버스 탈 수 있을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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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의 공연은… 그도 들어봤던 [공중정원]을 부른 락 밴드 아이들의 차례였다. 그도 좋게 들었던 곡인 만큼 라이브를 보고 싶긴 했지만, 그렇게 막 엄청나게까지 보고 싶은 건 아니었다. 지금 빨리 나간다고 해 봐야 과제의 진행상황이 극적으로 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집에 가는 시간은 버스 시간표 때문에 몇시간씩 차이가 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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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갈등하던 그는, 곧 몸을 일으켜 빠져나가려고 했다. 이제 막 신곡을 낸 아이들인 만큼… 굳이 지금 라이브로 안 봐도 다른 곳에서 볼 수 있을 기회가 있지 않을까 싶어서. 몇몇 관객들도 그와 비슷한 생각인지 슬그머니 일어나 짐을 챙기고 바깥으로 나가려는 듯한 행동을 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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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런 관객들을 잡아놓은 것은, 무대로 들어오는 업라이트 피아노(작은 피아노)였다. Group Sound의 곡을 많이 들어본 건 아니지만, 최소한 [공중정원]에는 저런 어쿠스틱 피아노가 필요하지는 않을 텐데.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머리를 긁적거렸다. 생각과는 다른 느낌의 무대가 펼쳐질 것 같은 느낌이 그의 발을 붙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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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 그냥 오늘 잠 좀 적게 자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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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짐을 내려놓았다. 화장실에 갔다가, 담배 한대 피우고 오면 준비가 다 끝나있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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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들어온 공연장. 아까보다 인원이 조금 줄어들었는지, 빈 자리가 드문드문 보였다. 그리고 세팅이 완료된 무대는, 뭔가 약간 이상했다. 음악은 좋아하지만 음악 장비는 잘 모르는 그로서는 정확하게 뭔가를 짚어낼 수는 없었지만, 아무튼 있어야 될 것이 없는 듯한 광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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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분 뒤에 시작하겠습니다~ 모두 자리에 앉아주시길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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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지던 상념을 깬 것은, 무대 시작 시간을 알리는 스태프의 외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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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불이 훅 꺼지며 무대 위에 잔잔한 스포트라이트가 켜지고. 의례적인 박수와 함께 무대 저편에서 네 명의 여자아이들이 걸어들어왔다. 의상은… 좀 독특했다. 빈티지하달지, 에스닉하달지… 풍성하고 개성있는 스타일. 그가 [공중정원]으로 봤던 것과는 전혀 다른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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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또 다른 것이 하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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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와 드럼을 제외한 두 명이 들고나온 악기는, 그들이 원래 사용하던 일렉트릭 기타와 베이스 기타가 아니었다. 어쿠스틱 기타와 어쿠스틱 베이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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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과는 전혀 다른 악기를 든 모습. 미약하지만, 그도 바로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빠르게 퍼져가는 관객석의 동요. 그러는 사이 자리에 앉은 아이들은, 아무 말 없이 바로 연주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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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긋하고 차분하게 울리는 기타. 부드럽게 얹혀지는 피아노. 설명하긴 힘들지만, ‘둥’과 ‘톡’의 어디 중간쯤에 있는 소리를 내며 함께 걸어가는 드럼. 두텁지만 따뜻한 소리를 내는 베이스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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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치도 못한 광경에 그는, 아니 관객들은 전부 가만히 무대를 보고만 있었다. 그리고 울려퍼지는 베이스의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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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 않았던 숙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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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함 속에는 거북이가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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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의 나는 매점 앞에 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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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어가는 토끼를 바라보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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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껴지는 감정은 우선은 차분함이었다. 마치 갓 구워진 빵을 먹는 것처럼 따뜻하고 향기롭게 넘어가는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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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이는 사흘 전에 떠나버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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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애는 어딜 가는지 모른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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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내린 첫 눈의 그림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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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번 더 네게 찾아올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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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더할 나위 없이 적합한 것은 보컬이었다. 노래를 부르기보다는 나른하게 중얼거리는 듯한 음성. 그 어떤 악기보다도 낮게 깔리는 말소리는 자근자근히 분해되어가며 사람들에게 스며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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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잿빛이여, 내게로 돌아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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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트라이트도 꺼진다. 그리고 무대는 잠시 어둠으로 물든다. 그 사이 쏟아진 박수는, 분명 의례적이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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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태프들이 앞쪽에 5개의 의자를 가져다 놓는 동안, 그는 자리에 앉아 핸드폰을 잠시 보았다. 그러는 사이 김지연이 들어와 자리에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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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그럼… 이번에는 꽤나 좀 장비가 많긴 한데요. 이제 마지막 게스트를 모셔볼까요. 인디밴드 성공의 신화! 미소녀 밴드! Group Sound를 모셔보겠습니다. 큰 박수로 맞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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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조명 밑에 가려져 있던 아이들이 들어와 앉는다. 얼굴이 제대로 보이는 순간, 관객석 사이에서 “헉” 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옆 자리에 앉은 여자 한명은 “레전드…”라고 중얼거리기까지 했다. 그도 동감이었다. 다들 이뻤지만, 기타를 맡은 아이는 진짜 작정이라도 하고 온 듯한 외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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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전에 한번 만났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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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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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가 이어지고, 인터뷰가 시작되자 김지연이 처음 던진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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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는 일렉 들고 나오셨잖아요. 그리고 제가 알기로 [공중정원]이나 지금 이 곡, [잿빛의 나날들]… 저도 참 좋아하는 곡인데요, 이 곡도 일렉 곡이고. 그런데 오늘은 어쿠스틱이네요? 전원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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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아무래도 오늘 무대가 좀… 뭐, 무대에 변화를 줬다고 해야 될 것 같습니다. 약간… 음, 저희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었다…고 해야 할지. 아무튼 그런 느낌입니, 아니 그런 어… 생각이 들었다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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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씹듯이 마무리하고는, 마구 머리를 꼬며 민망해하는 기타 멤버. 관객들 사이에서 웃음이 튀어나오거나 “귀엽다.”라는 말이 들려오는 가운데, 김지연은 정신없이 웃으며 이야기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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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흫흫, 전에 봤을때도 그렇고 너무 귀엽네요. 그럼 이제 방송 출연을 했으니, [공중정원]과 음반, [별이 되어가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 주실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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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 한번에 자그마한 토크 한번씩. 무대가 진행될수록 사람들의 반응도 커져갔다. 특히 반응이 좋았던 것은, [공중정원]의 무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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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른하게 읇어지는 랩이 쏟아지는 [공중정원]의 음원과는 달리, 이번 라이브는 정 반대였다. 악기의 개입을 최대한 줄인 채, 억누르고 있던 힘을 풀어낸 듯 노래를 부르는 보컬. 전혀 색다른 분위기의 음악에 사람들은 열광했고, 그도 마찬가지였다. 어떤 부분은 이 라이브 버전이 더 좋은 것 같기도 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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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이제 마지막 곡입니다. 여러모로 좀 아쉬운 부분이 들긴 하는데… 원래 만남이 있으면 이별이 있는 법이라고 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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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 중 몇몇이 “안돼!!” “앵콜!!” 이라고 소리를 지른다. 그 소리에 와르르 웃는 관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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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가 여러분의 귀가 시간을 위해서 더 공연을 할 수는 없어요. 그리고 아시겠지만 이 친구들 두명이 미성년자라서 집에 가야 되거든요? 양해를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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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 옆에 앉아 있던 김지연 또한 웃으면서도, 마이크를 잡고 말했다. 그 말에 한번 더 터지는 웃음. 밴드 멤버들은 어느새 자리에 앉아 악기를 잡고 있었다. 그리고 어두워지는 조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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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시작하겠습니다. ‘별이 되어가는 것’, 들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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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에서 나지막하게 말이 들려온다. 그리고 백색 스포트라이트가 수연에게로 떨어진다. 그녀 앞에는 마이크가 있다. 앞서 불렀던 세 곡과는 다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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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기타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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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삐 움직이는 손. 유려하게 흔들리는 멜로디. 차분한 피아노. 드럼은 아주 살짝만. 베이스는 나지막하게 흘러가며 마치 콘트라베이스처럼 따뜻하게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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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이 슨 울타리를 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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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봇대를 넘어 또 그 앞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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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형 도넛을 파는 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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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한 일상의 매일이 여기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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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스를 맡았던 아이보다 더 낮은 목소리. 일상의 이야기를 말해주는 듯한 톤. 차분하게 내려앉은 목소리는 사람들을 진정시킨다. 마치 주말의 저녁처럼. 어두컴컴하고 따뜻한 집 안에서 티비를 보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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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각대는 연필 소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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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인지 짜증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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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해도 나갈 순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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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앞엔 여럿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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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하나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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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씩 연주가 고조된다. 그는 가만히 앉아 손을 꽉 쥐었다. 왠지 모를 긴장감. 치솟아오르는 분위기. 무대 위에 올라가 있는 것은 단지 4명. 전자악기 하나 없는 그런 공연인데… 왜 이리도 꽉찬 느낌이 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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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후렴구에서, 완전히 폭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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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면대의 칫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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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붙은 비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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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때가 낀 거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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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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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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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이 되어 갈지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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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히 뒤바뀐다. 조명도, 연주도, 분위기도, 보컬도… 그 외 모든 것이. 마치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 차디찬 겨울을 나던 매화가 일순간에 피어나듯. 꽃 하나 없이 빽빽하던 나무는 눈을 깜빡이는 순간 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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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겨신은 신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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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중충한 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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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교길의 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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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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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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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이 되어 갈지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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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이 되어가는 것일지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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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항상 그렇듯이, 열흘 넘기는 꽃이 없듯이… 곡은 끝이 난다. 언제 그랬냐는 듯 아주 잠잠하게. 막연히 읊조리는 마지막 말은, 마치 미련과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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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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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를 마치고, 프로그램도 마치고. 그와 밴드원들은 일단 대기실에 가 소파에 드러누웠다. 4곡 정도밖에 안 되는 공연이지만, 그야말로 모든 것을 다 뽑아낸 느낌이었기에. 그런 그들을 일으켜 세운 것은 쿵쿵 하고 두들겨지는 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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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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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대박이야, 대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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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말을 외치며 들어온 사람은, 프로그램의 피디였다. 마치 그를 껴안을 것 같이 무식하게 밀고 들어오더니,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달은 표정으로 몸을 물리는 피디. 하지만 기세는 멈출 생각을 하지 않은 채, 소파 하나를 차지하고 푹 몸을 꺼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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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연 학생, 진짜 잘 했어요. 정말 기대이상, 아니 애초에 기대를 안… 안 하지는 않았는데, 이 정도가 될지는 꿈에도 몰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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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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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하다고 할 수 밖에 없겠네. 진짜 최고의 무대를 뽑아준 것 같은데. 관객들 봤어? 완전 난리났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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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말하며 피디는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많이 흥분한 모습. 그럴 만 하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가 보기에도 관객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으니까. 앞의 공연 3개도 분명 좋았고, 관객들의 반응 또한 좋았지만… 객관적으로 판단해 볼 때, 그들이 펼친 공연이 좀 더 좋은 호응을 받은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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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거 보도자료 뿌려야 하나?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네. 어… 아니다. 미안한데 나 빨리 가볼게요.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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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생각났는지 빠르게 사라져버리는 피디. 조용해진 대기실에서 그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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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끝났지 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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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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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진짜 죽을 뻔 했다. 나 머리가 띵해. 실수 안 하려고 진짜 집중 엄청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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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말하며 비칠비칠 들어와 안겨드는 이서. 그는 이서를 떼어내려 했다가, 손을 내렸다. 이렇게 칭얼대는 것을 이해할 만큼 빡센 일정이었으므로. 얼마 안 되는 시간 안에 어쿠스틱 편곡을 하고, 거기에 다들 숙달되도록 연습을 하고, 그 다음은 계속되는 합주. 시키는 그조차 아이들이 불쌍하다고 생각할 정도의 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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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고난 끝에 얻어낸 열매는 정말 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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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럽게 선택한 어쿠스틱 편곡은 바로, Nirvana가 MTV Unplugged에서 보여주었던 공연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었다. 이전까지는 그냥 '실력도 안 되는데 파워코드나 치면서 소리만 질러대는 미친 놈들' 취급을 받았던 Nirvana를 '세계 최고의 락 밴드'로 만들어줬던 공연. MTV Unplugged in New Yo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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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Nirvana가 그 공연으로 자신들의 평가를 뒤집어냈던 것처럼, Group Sound도 이 공연으로 평가를 뒤집어내기를 바랐다. 1군 아이돌이니, 탑급 래퍼니, 최정상급 싱어송라이터니… 그런 것들이 그들의 앞길을 막을 수는 없다는 것을 보여주길 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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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가 생각하기에는… 최소한 현재의 평가보다는 올라가지 않을까 싶었다. '초동 1만장을 판 신생 밴드'에서, '충분히 탑급 뮤지션들과 경쟁할 수 있는 수준'이라는 인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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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 안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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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혁은 잠시 핸드폰을 보며 서 있다가, 동생의 말에 문득 고개를 들었다. 이미 짐을 다 챙겨 나갈 준비를 하고 있는 멤버들. 그는 잠시 머리를 긁다가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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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숙소 들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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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있어요? 왜 같이 안 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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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잠시 할 일이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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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에 수군수군대는 멤버들. “저거 봐 저 형 또…” 라는 말이 오간다. 그는 이마를 짚으며 멤버들의 이야기를 가만히 들었다. 물론 전적이 있었긴 했다. 기사도 한번 떴었고. 그런데 그때 딱 한번 있던 일 가지고 계속 저러고 있는 걸 보면 참 그랬다. 어떻게 멤버라는 녀석들이 믿어줄 생각을 안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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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걔들 연락처를 좀 받아놔야 할 것 같은데. 될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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멤버들에게 인사를 한 후 그는 Group Sound의 대기실로 걸어갔다. 음흉한 목적으로 그러는 것은 아니고, 그도 이제 슬슬 솔로 활동을 해야 될 시기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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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의 밴드에 피쳐링을 해 줬다던가, 아니면 저쪽 애들이 반주를 맡아줬다던가… 그런 식으로 나가면, 서로 좋은 일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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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그의 아이돌 경력을 따져보면, 굳이 그런 식의 홍보를 할 필요가 없긴 했다. 그가 솔로 활동을 시작한다 해도, 페이블스 팬들이나 그의 개인팬들이 어디 가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어딜 가든 몰려와서 사 주고 홍보를 해 줄 것이다. 그게 팬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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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대중예술인이란 결국 대중들의 관심을 먹는 존재다. 그냥 개인 팬, 아이돌 팬… 그런 사람들에게만 관심을 받아가며 끼니를 잇기만 할 것이라면, 굳이 솔로 활동을 할 필요도 없다. 따뜻한 집 내버려 두고 바깥에 나가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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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생각하며 도착한 Group Sound의 대기실에는, 뜻밖에도 선객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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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혹시 의향 있으면 한번 연락 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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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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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말하고는 대기실을 나가는 여자. 개인적으로 알지는 못하지만 음악은 많이 들었던 가수, 유영이다. 그에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사라지는 모습을 보며, 그는 왠지 모르게 조바심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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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라보 제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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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그렇게 급하다거나, 무게를 둔다거나 하는 일은 아니었다. 단지 그냥 ‘연락처 받아 놓고, 생각 나면 한번 연락 해보지 뭐…’ 하는 심정이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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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 Sound의 오늘 라이브는 엄청나게 훌륭했고, 머지않아 스타가 될 것도 분명해보였다. 특히 오늘 무대가 그랬다. 출연 결정할 당시에 이야기를 듣지 못했으니, 분명 저 밴드는 기사가 떴을 즈음에 출연을 결정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이전에는 어쿠스틱 무대를 보여준 적이 없었으니, 출연이 결정된 이후 무대를 준비해왔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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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무대의 퀄리티는, 그 합리적인 생각을 부정하게 만들 정도로 훌륭했다. ‘이거 예전부터 준비하던 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저런 실력이라면, 안 뜨고 싶어도 몇년 안에 금새 메이저로 올라오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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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관적으로 볼 때, 페이블스는 초동 몇백만장을 팔아치우는 K-Pop의 주축 중 하나. 유혁 본인은 그 페이블스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멤버로서, 본인의 솔로앨범만 해도 초동 몇십만장을 찍을 정도였다. 굳이 그가 먼저 손을 내밀 필요는 없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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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방금 그 모습을 보니 이상하게도 조급함이 느껴졌다. 마치 괜찮은 옷을 마음속으로 찜해놓고 다른 걸 보고 있는데 손님이 들어와서 그 옷을 이리저리 들춰보는 상황이라고 해야 할까. 안 살 수도 있고 산다고 해도 재고가 있을 수도 있는데, 괜히 지금 안 사면 영영 놓쳐버릴 것 같은 그런 이상한 느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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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의 효과는 즉시적으로 드러나진 않았다. ‘피디가 극찬하고 싱어송라이터는 구애하고 아이돌은 전전긍긍’하는 무대를 펼쳤다 할지라도, 해당 프로그램을 보러 간 관객들 중 98%는 기존 출연자들의 팬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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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남들이 “야 걔들 어땠어?”라고 하면 “진짜 잘하긴 하더라.”라고 대답하거나, 자신들의 플레이리스트에 그 곡을 올려놓는 정도의 움직임만을 보였다. 그 탓에 이번 ‘김지연의 음악편지’는 EBS Amplifier Now 정도의 선제적 파급력을 지니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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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에 Group Sound의 언플러그드(Unplugged. MTV Unplugged에서 유래했으며 ‘전기를 쓰는 음악’을 ‘전기를 쓰지 않는 악기’로 녹음했다는 뜻) 공연의 반응은, 공연 당일로부터 좀 지난 방영일에나 퍼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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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그램의 방영 순서는, 공연이 펼쳐졌던 순서와 같았다. 기존 가수들이 맨 앞에, Group Sound가 맨 뒤. 평소와 다를 것 없이, 할 것 없어 리모콘을 만지작거리던 사람과 음악 자체를 좋아하는 사람, 프로그램의 팬, 그리고 출연자들의 팬들만이 보는 방송이 시작된 뒤에도… 인터넷 세상은 이전과 같았다. 단지 출연자들의 팬과 일부 커뮤니티 이용자들만이 평소와는 다르다는 것을 느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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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잠잠하던 커뮤니티와 SNS는, 아주 느리지만 확실하게 불이 붙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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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편지] 레전드 찍고 있는 음악편지.av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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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네 공연 뭐임? 완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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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정원 혹시 어쿠스틱 곡도 나왔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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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연의 음악편지 속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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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가만히 티비 키고 있었는데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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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 Sound의 팬들과 관계자들을 제외하면 누구도 기대하지 않은 공연. 그게 누군지도 모르거나, 알아도 관심이 없거나 하여 기대 자체를 가지지 않았던 방송. 하지만 방송을 끝까지 본 사람들은, Group Sound의 차례 이전에 나왔던 퍼포먼스가 기억이 남지 않을 정도로 깊은 인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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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결과는 즉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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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리 노 저어!!” 라는 피디의 절규와 함께 업로드된 방송 편집본. 누구도 동작원리를 알 수 없는 신비한 알고리즘에 의하여 선택된 그 영상은, 하루도 되지 않아 몇십만 뷰를 돌파하며 인기 급상승 동영상에 여유롭게 안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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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에서는 [제발 무편집본좀 주세요]라고 울부짖는 사람들이 많았으며, 그런 사람들을 대상으로 [여기 무편집본 있어요]라고 링크를 줘서 ‘어쩌고 박사님을 아세요?’로 보내버리는 일이 흔하게 일어났다. Group Sound의 공식 채널이나 [White Room] 채널에도 제발 관련 영상좀 찍어달라는 댓글이 넘쳐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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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레이블 에코사운드]는, 정확히는 정유영 과장은 그걸 놓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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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연의 음악편지’ 화제의 공연! 그룹 사운드가 직접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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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댓글이 있네요. ‘이런 식으로 곡을 편곡할 생각은 도대체 어떻게 한 거냐, 진짜 천재다’. 여기에 대해서 한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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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음악을 많이 들으신 분들께서는 잘 아시겠지만 언플러그드라는 개념이 있어요. MTV에서 나온 건데, 가장 유명한 언플러그드 공연은 Eric Clapton의 공연과 Nirvana의 공연입니다. 제가 이번에 편곡한 쪽은, Nirvana보다는 Eric Clapton에 가까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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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yla라는 곡이 있는데, 한번 들어보셨을지는 모르겠지만 원곡은 엄청 경쾌하게 쭉 치고나가는 곡이거든요. Eric Clapton이 Derek & The Dominos 에 있을 시절에 만든 곡인데, 당대 최고의 멤버들이 참여한 만큼 무시무시할 정도로 좋은 곡이죠. 특히 슬라이드 기타 솔로라던가, 후반의 피아노 코다라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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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Clapton은 Unplugged에서 layla를 아예 다른 식으로 바꿔버리거든요. 메인 멜로디만 딱 들어내서 남기고, 템포도 확 낮추고. 솔로도 간결하게 넣고 피아노 코다는 없애고. 재해석이라기보다는 재창조의 느낌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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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편지’에서 나온 언플러그드 공연에 대해서 Group Sound의 멤버가 설명하는 영상. 곡 자체도 잘 뽑혔는데, 편곡이 어떤 의도로 되었는지, 어떤 포인트에 힘을 주었는지… 그런 것들부터 시작해서. 곡 자체에 대한 해설(Plastic Nostalgia의 2개 곡)이라던지, 작사 방법(담당은 최이서)이라던지. 무대 연출(담당은 유서하)에 대한 이야기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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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영상을 몇번이고 돌려본 다음 ‘뽕’이 찬 사람에게는, 무엇보다도 달고 단 디저트라고 할 수 있는 영상. 알고리즘을 통해서 ‘김지연의 음악편지’ 영상을 보고, 무대를 몇번 돌려본 다음 해설 영상을 본다. 그 다음 다시 ‘김지연의 음악편지’ 영상을 보고, 다시 해설 영상을 보는 그런 루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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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것들이 생길 정도로 ‘음악편지’ 공연은 파급력이 있었다. 원래라면 그저 ‘탑급 뮤지션들이 지상파에서 공연 했다더라’로 끝날 일. 하지만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듯, 그 날의 방송과 그 여파는 [공중정원]과 비슷할 정도로 불타오르며, ‘탑급 뮤지션들’이 아닌 Group Sound만의 무대를 만들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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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열린 비정기 회의. 혜인까지 참석한 가운데, 고경민은 준비된 자료를 프로젝터에 띄우며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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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의 성공은 하수연 학생의 공이 거의 99%, 아니 100%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회사의 기여도는 거의 없다시피 했죠. 아티스트 본인이 스스로 방송을 따 오고, 편곡을 다 하고… 기획 쪽에 있는 입장으로서 상당히 부끄러웠습니다. 저희가 아티스트를 케어하고 기획을 해야 하는데, 오히려 따라가는 입장이 되어버리니 그냥 차려진 밥상에 숟가락만 얹는 그런 게 되어버린 게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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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뇨, 그러려고 한 건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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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경민의 진심이 담긴 사과 비슷한 말에 그는 당황했다. 아니 뭐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고경민은 진짜 그렇게 생각하는지, 상당히 부끄럽다는 표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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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지금 ‘음악편지’ 방송으로 인해서 하락세에 접어들었던 스트리밍 순위나 재생 수 등이 다시 상승세로 접어들었어요! 게다가 [Plastic Nostalgia] 음반도 확실히 재생수가 늘어나기 시작했구요! 이전에 찍어놓고 다 판매하지 못했던 한정판 LP도, 이번에 전부 판매를 완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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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음악편지’로 인해 상승한 재생 수, 순위, 매출 등의 데이터를 보여주는 정유영 과장. 특히 음악편지 무대 해설 영상은, 별 준비도 하지 않은 채 아무 스튜디오나 빌려 들어앉아 떠오르는 대로만 이야기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몇십만 조회수를 기록하며 쑥쑥 치고 올라가고 있는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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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정원]은 우리가 의도한 대로였고 그 효과를 제대로 사용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별이 되어가는 것]의 판매량을 그만큼이나 뽑아낼 수 있었던 것은, [공중정원]의 홍보전략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이번 ‘음악편지’는 사실, 예측하지 못한 상황에서 맞이한 기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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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그 말이 맞았다. 정유영 과장의 두뇌를 한계까지 뽑아내다시피 해서 세워진 치밀한 계획. 우연처럼 보였지만 필연에 가까웠던 [공중정원]과 [별이 되어가는 것]의 마케팅. 그러나 지금의 ‘음악편지’에서 비롯된 사건은, 너무나도 계획 밖의 일들이었다. 그런 만큼 기회를 잡기 위해서는 빨리 움직여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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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 때문에 저희는 지금 3가지 일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이 기회를 계속 이어나가기 위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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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그 말에 뒤의 세 사람을 돌아보았다. 제발 거짓말이라고 말해달라는 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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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엄청나게 무리한 일정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아마 제일 고생해야 하는 분은 아마, 수연 학생일 것 같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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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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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그에게 돌아오는 화살. 그는 눈을 크게 뜨며 고경민을 바라보았다. 잘못 들은 것인가 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확실히 그를 고생시킬 것이라는 느낌의 말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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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는 언플러그드 음반입니다. 정규 앨범 정도는 아니고. EP 정도로 계획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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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에 그는 머리를 맞은 듯 멍해졌다. 언플러그드 EP. 저번 정규 앨범때가 떠올랐다. 수십번을 재믹싱하고 마스터링해가며 어떤 것이 나은지 고민했던 나날. 그야말로 여가시간을 전부 쏟아부어가며 고생했던 일. 그 일을 다시 또 겪어야 한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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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는 2번째 Ep입니다. 이 쪽은 약간 가벼운 느낌으로 가고 싶습니다. 이때까지 낸, 혹은 낼 3개 음반의 경계에 있는 느낌이랄까요. 청자를 배려한 느낌의 음반을 좀 만들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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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흐흡! 하며 웃음을 참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말에 그는 고개를 팍 돌려 옆을 쳐다보았다. 범인일 것 같았던 이서와 현아는 그를 불쌍하다는 듯 쳐다보고 있었고, 서하만이 웃음을 참으며 그의 눈을 피하려 노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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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런 분위기는, 고경민의 다음 이야기에 깨어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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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세 번째는… 라이브 투어입니다. 전국을 다 돌 계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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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벼락이라도 맞은 듯 조용해진 나머지 세 명. 그 분위기를 깬 것은, 현아의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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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조금, 무리한 것… 아닐까요… 그리고, 지방 공연도… 사람이, 많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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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정이 많이 빡빡하긴 합니다. 하지만 더 늦출 순 없고… 우리가 콘서트 홀을 빌리지는 않을 겁니다. 좀 다른 방식으로 접근할 예정입니다. 성공할지는 모르겠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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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부적인 이야기를 해 보자면… 일단 언플러그드 음반 제작은, 성공을 노리는 것 보다는 실험에 가까운 시도가 될 것이라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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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경민의 말은, 정유영 과장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이 의문을 가지게끔 만들었다. 성공을 노리는 것이 아닌 실험에 가까운 시도라니. 이제 정규 1집을 만든 밴드가 그런 시도를 할 여력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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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런 의문이 곧바로 질문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따라붙는 정유영의 설명이 있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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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고 팀장님이 이전에 말해주셨다시피 저희의 주요 소비층은 10~20대에요! 그리고 그 소비층들이 구매력을 가지기는 쉽지 않고. 그렇다면 우리는 매출을 증대시키기 위해서 어떤 전략을 취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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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영은 그렇게 말하며 PPT를 띄웠다. ‘아이돌 산업’과 ‘밴드 산업’이 비교된 P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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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돌은 팬층 장사를 활용하죠! ‘가챠’라던가. 그런 방법은 저희도 좀 활용한 바가 있습니다! 하지만 다들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그런 방법은 ‘음반 판매’에는 효과적이지만 ‘공연 수익’에는 효과적이지 않아요. 한 사람이 음반 100장을 살 수는 있지만 한 사람이 티켓 100장을 사거나 100명치 입장을 할 수 없으니까요! 게다가 지방 공연 같은 걸 해버리면 더더욱 그렇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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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현재 우리의 주요 소비층을 확장하려는 시도를 해야 합니다. 아이돌식 앨범 판매가 매출은 많이 나올지는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건전하지 못한 방법이에요.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 제일 좋은 것은 앨범 수익보다는 공연 수익으로 돈을 버는 겁니다. 뭐 이것은 개인적인 생각이니 중요하지 않고, 아무튼 언플러그드 앨범이 중요한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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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경민은 그렇게 말하며 수치를 하나 제시해주었다. 방송사를 통해서 제공받은 ‘김지연의 음악편지’ 언플러그드 공연 유튜브 데이터. 이것 하나 제공받는데 정말 고생했다고, 고경민은 푸념을 하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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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시면 아시겠지만 지금 저희 주요 소비층… 여기 보이시죠. [공중정원], [별이 되어가는 것]. 둘 다 1~20대 소비자가 주력인 영상이지만, 언플러그드 공연 버전은 달라요. 반반입니다. 게다가 언플러그드 공연의 경우에는 간접 유입으로 들어와서 머무는 경우가 꽤나 많습니다. 저희 본채널의 [공중정원]과는 다르게 말이죠. 이런 것들을 볼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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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가 내린 결론은! ‘언플러그드’ 공연은 ‘확실하게’ 논타겟 소비자, 그러니까 주요 시소비자층이 아닌 사람들을 불러모으는데 유효한 결과를 가져오고 있어요! 이번 음반 제작은 이것이 단지 지상파 방송으로 인한 일시적인 효과인지, 아니면 소비자층 확대를 위한 발판이 될 수 있을 것인지! 그걸 알아보기 위한 시도라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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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짝 긴장된 느낌으로 말을 마친 두 사람. 혜인은 그 둘을 바라보고는, 잠시 노트에 뭔가를 끼적이다가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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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요. 무슨 말인지 잘 들었어요. 그러니까 내가 이해한 걸 이야기를 해 보자면, 결국 소비자층을 늘리자는 거네. 그런데 이제 그 ‘논타겟 소비자층’은 우리가 지금 주요 소비자층으로 잡고 있는 ‘앨범 몇장씩 사 주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냥 듣기만 하는 사람들이니까 음원 실적이 뽑힐지는 몰라도 음반 판매 실적은 안 뽑힐 거고, 그러니 단기적인 성공이나 매출을 보장할 순 없다. 이 이야기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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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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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여서, 이제 언플러그드 공연은 차후 연계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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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젝터의 PPT가 다음 장으로 넘어간다. 계획 3. 라이브 투어. 고경민은 그 중 한 부분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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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브 투어에서도 도움이 될 겁니다. 왜냐하면 일단 ‘제 생각’으로는, 저희가 다닐 투어 지역에 장비를 전부 펼칠 수 없을 수도 있고 그렇거든요. 예를 들어 자그마한 라이브 카페. 노상 공연장. 노인정이라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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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정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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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마 참지 못한 듯, 이서는 뜨악하다는 목소리로 태클을 걸었다. 하지만 고경민은 당연하다는 듯 답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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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멀리 지방에서는 노인정 외에는 사람이 없는 경우도 있으니까요. 뭐 일단 이건 과장이고, 실제로는 그렇게까지 하진 않을거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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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와 다른 멤버들이 노인정 안에서 악기를 뜯는 자신들을 상상하는 사이, 고경민은 자료를 혜인에게 건네며 말을 끝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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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일차적으로는 언플러그드 음반의 제작이 시급합니다. 현재의 분위기를 이어가야 하니까요. 이왕 이렇게 된 것, 다들 열심히 해보는 방향으로 가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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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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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예상외로 언플러그드 음반 제작은 잘 돌아가지 않았다. 그것도 생각치도 못한 부분에서 방해를 받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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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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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제가 듣기로는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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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없다니. 다른 것도 아니고, 그게 없다면 그냥 음반 제작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다. 그는 그 말을 믿지 못하고 다시 한번 물었다. 고경민은 이런 것으로 거짓말을 하는 성격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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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없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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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저희 방송분 오디오 녹음 데이터는 따로 없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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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그 말에 머리를 감싸쥐었다. 고경민 또한 상당히 심각한 표정이었다. 그럴 만 했다. 그도 한때 사운드 엔지니어에 몸담았던 사람이기에 중요성을 알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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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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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피디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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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오랜만이에요. 일은 잘 되가나? 완전 대박 쳤던데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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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써주신 덕분에 잘 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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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경민은 선물을 사들고 ‘김지연의 음악편지’ 피디를 방문했다. 언플러그드 음반의 제작을 위해 데이터를 받고자 해서. 하지만 그런 경민의 제안에 피디는 무슨 말이냐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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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거 있냐고? 아니, 우리는 그런 거 안 만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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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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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고 팀장이 사운드 쪽에만 있었어서 잘 모르나보네. 우리는 최종 아웃풋이 비디오인데 왜 그런 걸 녹음하겠어요. 나는 그렇게 아는데. 자세한 건 나도 잘 모르긴 하지만. 그런데 그건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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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저희가 이번에 반응이 좋아서… 라이브 음반으로 좀 출시를 해보고자 하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소스가 좀 필요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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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그거 엄청 좋은 아이디어네. 옛날 MTV처럼 하려는 거지? 그런데 내 기억에 따로 녹음 안 했던 것 같아. 이거 우리 음감 연락처인데 한번 물어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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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감독 또한 마찬가지로 그러한 데이터는 없다고 답변을 해 주었다. 있다 한들 마스터에서 아웃풋으로 나가기 전 마지막으로 녹음한 정도가 있을 뿐, 각 채널별로 녹음을 뜨지는 않는다는 설명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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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그들이 그 데이터를 구매해서 라이브 음원을 제작할 생각이었다는 것이다. 오리지널 데이터를 적법한 방법을 거쳐 구매한 후, 저작권 문제를 해결하고 재믹싱과 마스터링을 거칠 예정이었는데, 그 방법 자체가 아예 날아가버린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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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필요하면 저작권 클리어한 다음에 마스터 오디오 소스 줄 수 있다고는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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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 그냥 무편집본 말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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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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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질끈 눈을 감았다. 음반을 만들기 위해서 그런 것은, 글쎄. 누가 칼 들고 협박하면 쓸 수야 있겠지만, 그 말인 즉슨 누가 칼 들고 협박을 하지 않으면 쓰지 않겠다는 것이다. ‘성공하지 못하는 것을 전제로 한’ 음반이니 그런 걸 그냥 써도 될지도 모르지만, 그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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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러면, 이거 어떻게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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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녹음을 들어가는 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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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도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긴 한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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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그렇게 말하며 머리를 꼬았다. 그 이야기를 듣기 전, 최초부터 들었던 생각. 4곡이 아니라 6곡, 7곡 대상이라면 라이브 음원을 살릴 게 아니라 재녹음을 해야 하지 않나 하는. 왜냐하면 라이브 음원은 4곡인데, 나머지 3곡은 새로 녹음할 예정이니까 서로 안 어울릴 수 밖에 없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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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는 금방 그 생각을 접었다. 이미 사람들이 만족하는 쪽의 소스가 있는데 굳이 재녹음을 할 이유가 없다. 그냥 추가녹음 느낌으로 해서 음원 릴리즈하는 쪽으로 가는 게 낫지 않나 생각했는데… 이렇게 되어버리면 아예 다른 문제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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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수는 있는데, 그때 그 분위기가 안 나올 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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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큰 문제. 아이들의 반쯤 악에 받친, ‘인정받겠다’ 혹은 ‘제발 끝나라’라는 그런 분위기. 그리고 그가 듣기에도 귀신 들린 듯 연주를 했던 그의 기타 등. ‘음악편지’의 라이브 연주에는 그런 재현이 힘든 요소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그리고 그 점 때문에 사람들이 그 연주를 좋아하는 것이기도 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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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확실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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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애들 이제야 막 쉬고 있는데, 불러다가 그때 그 느낌으로! 라면서 몰아붙여봐야 뚱땅거리는 소리밖에 안 날 걸요. 그럼 사람들이 음원 듣느니 그냥 라이브 듣겠다고 그럴 거고, 심한 경우에는 녹음한 게 왜 이러냐고 말 나올 수도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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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운 이야기. 고민에 빠진 고경민을 슬쩍 쳐다본 후, 그는 머리를 쓸어넘겼다. 아무래도 애들이랑 이야기를 좀 해 봐야 될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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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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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들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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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 역시 그렇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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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은 그렇게 말하고는 한숨을 푹 쉬었다. 그 말에 이서는 자신이 잘못한 것은 없음에도, 왠지 모를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더 도와줘야 하는데 못 해주는 그런 기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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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일났네. EP를 안 낼 수도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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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 음원으로는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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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능하긴 한데… 그러고 싶지는 않어. 굳이 그럴 거면 그냥 EP를 낼 필요가 없을 것 같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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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에 휩싸인 수연을 보고, 이서는 여러가지 생각이 들었다. 요즘 너무 고생한다는 생각도, 도움이 되고 싶다는 생각도, 좀 쉬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그동안 자신을 굴렸으니 업보라는 생각도, 그 외 다른 것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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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진짜, 너무 바빠보이긴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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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는 요즘 수연에게 뭘 하러 같이 가자는 이야기를 못 꺼내고 있었다. 학교/밥/잠 외에는 모두 작업에 투자하는 사람에게 무슨 염치로 그런 말을 하겠는가. 양심이 있으면 그런 말을 하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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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좀 숨을 돌렸으면 하는 것도 사실이었다. 저렇게까지 자신을 혹사할 필요가 있을까. 쉬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수연이 요즘 하는 ‘전투적으로 휴식하기’가 아니라, 진짜 기분도 전환하고 마음도 놓는 것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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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예 새로운 느낌으로 가는 건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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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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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그런 느낌으로 수연에게 말을 던졌다. 무슨 이야기냐는 듯 그녀를 지긋이 쳐다보는 수연. 살짝 당황하면서도, 이서는 제스쳐를 해 가며 설명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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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전환 좀 한다고 생각하고! 라이브때는 우리 말이지, 솔직히 너무 비장했잖아. 막 응? 이거 안 먹히면 안 된다. 승리 아니면 죽음뿐이다. 그런 느낌으로 막 칼 잔뜩 갈고 나와서. 근데 이제 이런 방향이 먹히는 것도 알았으니까, 응? 좀 즐겁게 가는 것도 좋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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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는 당황했다. 그녀의 말에, 수연이 눈을 번쩍 뜬 채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거… 괜찮은 것 같은데…” 라고 중얼거린 후 수연의 입이 열린 방향은, 이서가 아니라 다른 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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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아. 부탁이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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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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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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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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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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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좀 좁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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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도면 엄청 넓은거지. 안녕하세요~ 어디 가! 너도 인사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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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나는… 멤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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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음실에 우르르 몰려들어오는 사람들. 뒤에 따라오다 잡힌 현아는, 자신의 동료 멤버에게 고개를 90도로 숙여 인사를 하고 말았다. 그 모습에 깔깔대던 여대생들은, 현아의 모습이 귀엽다는 듯 이리저리 만지거나 작업실이 신기한 듯 구경을 하거나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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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이서! 맞죠! 베이스 하시는 분. 이 분은 유서하! 드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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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맞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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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베이스 완전 좋아하거든요. 특히 그 악세사리! 그거 그거 맞죠? 저도 좋아해요. 야 너도 이거 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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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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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엄청 귀엽지 않아? 이 분이 달고다니는 거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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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개좋아. 혹시 이거 어디에서 사셨어요? 이름이 뭔가요? 혹시 이런 거 파는 마켓 같은 데가 있는 거에요? 패션 센스도 좋으신데, 편집샵 같은 거 다니시는 거에요? 여기 옆쪽 분도 옷 엄청 잘입으신다. 무늬 너무 이뻐요. 혹시 그거 브랜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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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와 서하에게 인사를 한 후. 그래도 한 ‘인싸력’ 한다고 생각하던 이서가 스몰토크의 세례에 파묻혀 바스스 사라져버릴 것 같다는 느낌이 들 때쯤, 녹음실로 들어온 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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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하수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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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리더 분이시죠! 안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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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 이쁘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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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박. 초 미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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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돌이네 아이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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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와 서하를 잡고 말로 후드려패던(물론 본인들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사람들의 타겟이 전환된 사이, 이서는 안도의 한숨을 작게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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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도 저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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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저 정도는 아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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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말하며 이서는 수연이 당하고 있는 상황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머리 제품 뭐 쓰냐, 얼굴 너무 이쁘다, 진짜 귀엽다, “혹시 볼좀 만져봐도 돼요?”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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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저렇게 완전 다른 사람들을 데려올 수가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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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아와는 전혀 맞지 않을 것 같은 사람들 아닌가. 아니, 그 때문에 현아의 친구가 된 것일지도. 아무튼 이서는 그렇게 생각하며 그녀들이 내려놓은 짐을 바라보았다. 바이올린, 콘트라바스, 클래식 기타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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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언플러그드 음반 재녹음을 위해 찾아온, 현아의 친구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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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날씨가 많이 풀리긴 했죠? 이제 이러다가 어느새 여름 되고 이러는 계절입니다. 세상도 그렇고 날씨도 그렇고 많이들 바뀌어 가는 것 같아요. 저 어릴때만 해도 봄은 확실한 봄이었고, 가을도 확실한 가을이었는데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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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명전 선생님을 만난 것도 상당히 오래 되었습니다. 건강이 안 좋다는 이야기를 풍문으로 듣기는 했는데, 어느날 연락이 안 되셔서 수소문을 들어보니 돌아가셨다고 하더군요. 청천벽력이 아닐 수가 없었습니다. 슬픔을 지나보내고 나니 이 시간이 되어버렸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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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갑작스럽게 개최된 서명전 선생님의 추모 콘서트에 와주신 것에 대해서 환영의 말씀을 드립니다. 한국 음악에 족적을 남기셨던 명전 선생님을 추모하기 위하여, 많은 뮤지션 분들께서 영상으로나마 메세지를 보내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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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서트가 시작되고, 명전이 기억하던 사람 중 한명이 MC에 올라 이야기를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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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편지를 보내온 사람 중 대부분은, 그가 세션을 녹음해주었거나 오며가며 본 게 전부인 유명 뮤지션들이었다. 친분이 있던 유명 뮤지션 중 일부는 직접 오기도 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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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아무튼 추모해주겠답시고 몰려와서 이것저것 하고 있는 걸 보니, 살짝 뭉클해지는 부분도 있긴 했다. 누가 돈 주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 모여서 자신을 기억해준다는 게 좀 고마운 일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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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정작 나는 여기 살아있는데 나를 두고 죽었다고 하는 걸 보니 참 미묘하단 거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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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머리를 꼬며 대기실로 들어갔다. 약 3~4시간 정도 이어질 예정인 콘서트였기에, 대기실에는 사람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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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드는 사람들 소리는 일종의 장례식장을 연상케 했다. 테이블 하나를 놓고 새우깡에 소주를 까고 있는 영감들. 어찌저찌 끌려와 이게 무슨 일인지 파악도 못한 채 앉아있는 젊은 뮤지션들. 콘서트 진행하느라 이리저리 정신없이 오가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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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에게도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들이 있긴 했지만, 명전이 생각하는 ‘요즘 여고생 같은 행동’ - 아 예 정도만 하고 흥미 없다는 것 어필하기 - 을 몇번 하자, 대부분 다 자기들 할일이나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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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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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명전을 불러세운 것은, 콘서트의 스태프였다. 곡명 몇개가 적혀 있는 종이를 들어보이는 스태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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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이 곡 하시는 거 맞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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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그리고 한두곡 정도 더 있긴 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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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있다고요? 혹시 악보가 있으신가요? 지금이라도 악보를 주셔야 가능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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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뇨, 기타 솔로로 칠 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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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에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사라지는 스태프. 명전은 의자에 앉아 기타를 꺼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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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짝 연습이나 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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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끄러운 대기실 안에서 들리지도 않을 소리로 기타를 튕겨본다. 미약하게 들리는 기타 소리는, 마치 대도시의 광장에서 홀로 기타를 연주하는 것 같은 착각을 들게 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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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그 감성이라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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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이런 거추장스러운 일은 왜 하는 거냐?” 라는 그의 말에 “감성이 중요하다고!!” 라고 외치던 이서나, “기왕이면 이쁜 게 더 좋지 않아?” 같은 이야기를 하던 다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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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의 ‘서명전’이라면 전혀 이해를 하지 못했을 부분이었으나, 여고생들과 몇달 동안 부대껴 지내던 세월이 영향을 준 것인지… 그도 점점 뭔가 그 ‘감성’이라는 것을 점점 깨달아가는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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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제말이 그 말이 아니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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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오늘 칠 곡을 튕겨보던 중, 갑자기 대기실 구석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살짝 높은 목소리. 사람들의 주목이 이어지는 가운데에도 목소리는 계속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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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이 형님이 위대한 기타리스트인 건 인정을 한다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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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럼 그냥 인정을 하면 되는 거 아니냐? 뭘 가타부타 덧붙이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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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슬쩍 고개를 내밀어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해보았다. 그와 영 의견이 맞지 않았던 기타 후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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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여년 전 쯤 한번 크게 싸우고 그 뒤로는 얼굴을 안 봤는데, 여기 온 건가. 술을 꽤나 마신 건지 얼굴이 불콰해진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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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기타리스트지, 위대한 뮤지션이 아니잖아요. 우리 까놓고 말합시다. 그 형의 기타 테크닉이 위대했지 뭐 다른 게 위대하다, 예를 들어 작곡 실력이 위대했던 게 아니잖아요. 솔직히 말해서 그냥 곡은 졸라 못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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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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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에 언성을 높이는 사람과, 이어지는 만류의 목소리. “아니 내가 틀린 말 했어?” 같은 이야기가 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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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린 말은 아니긴 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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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머리를 살짝 꼬고는, 기타를 치는데에 집중했다. 그가 생각해도 좀 치사한 짓이긴 하지만, 아무튼 오늘 이후로는 그나마 ‘서명전’의 평판이 좀 나아질 예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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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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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그, 그룹사운드인가 하는 밴드. 맞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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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네 맞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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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에는 알아보는 사람이 전혀 없는 그들이었다. 학교에서도 친한 친구들이나 “이서 너 밴드한다며~ 올~” 이나 “현아야, 밴드 하면 예대 입시는 괜찮아?” 같은 소리를 하지, 바깥에 나가면 그냥 여고생 3명이 다니고 있네~ 정도의 감상밖에 듣지 못하는 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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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곳에 와서는, 벌써 열명이 넘는 사람이 그들을 알아보고 인사를 나누었다. 싸인까지 해달라는 사람도 있어, 이서는 한번도 해보지 않은 싸인을 이 자리에서 구상하느라 골머리를 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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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알아보는 사람이 많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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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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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뭐야, 패러독스? 거기 공연이 아무래도 효과가 있었나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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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아무래도 이런 데 오는 사람들은 음악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니까. 게다가 그날 공연이 ‘서명전의 제자 하수연이 꾸린 밴드’ 뭐 그런 걸로 유명했던 모양이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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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하의 부연설명에, 고개를 끄덕이는 나머지 둘. 그런 와중에도 은근슬쩍 옆에 와서 “싸인 좀 부탁합니다.” 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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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근데 여기 지금 천명 넘게 있는 것 같은데 천명 중에 수십명이면 비율이 엄청 낮은 거 아닐까? 아직 멀었긴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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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긴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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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는 무대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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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잠시 쉬는 시간이지만… 생전 처음 들어보는, ‘서명전’이 썼다는 곡이 연주되기도 하고, 그가 세션으로 섰다는 곡이 연주되기도 하고, 그가 좋아하던 곡이 연주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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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로써는 ‘서명전’이 수연이의 스승님인 만큼, 좀 긍정적인 부분으로 바라보고 싶긴 했지만… 아무래도 ‘서명전’의 자작곡은, 나머지 두 그룹에는 못 미치는 면이 있었다. 박수나 반응도 좀 적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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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그렇고, 얘는 왜 우리랑 같이 공연을 안 선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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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기대한 부분도 없지 않아 있었다. 이런 곳에서 공연을 서면, 그 자체로 이미 인지도가 상승할 수 있는 거 아닌가. 하지만 수연은 단 한번도 그녀들의 의사를 묻지 않았다. 그냥 묵묵히 뭔가를 준비하고 있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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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 아쉬운 마음을 느끼며, 이서는 다시 무대에 집중했다. 이제 수연이 나올 차례였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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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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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무대는… 이전 무대들과는 살짝 연령대가 맞지 않을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이 자리에 누구보다 잘 어울리시는 분이기도 하죠. 서명전 선생님의 제자 분이신, 밴드 ‘그룹 사운드’의 하수연 기타리스트 모셨습니다. 큰 박수로 맞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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쏟아지는 박수와 함께, 명전은 기타를 들고 무대로 나섰다. 노인이거나 중년이거나 했던 사람들이 주로 서던 무대에 여고생이 서게 되어서일까, 이전에 나왔던 유명 뮤지션보다 기분상 박수가 왠지 더 큰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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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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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마이크를 잡고 인사와 함께 몇마디를 했다. ‘서명전’과 ‘하수연’의 추억 같은 걸 대충 지어내고, 뭐 이런저런 일이 있었다 등등. 정말 기타를 많이 가르쳐주셨다. 그런 이야기를 주워섬기자 박수를 치는 관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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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첫 곡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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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그렇게 말하며 관객석을 둘러보았다. 이서와 현아, 서하가 그와 눈이 마주치자손을 흔들어왔다. 그도 손을 슬쩍 흔들어주고는,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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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명전 선생님이 좋아하던 곡으로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들어주세요. Eric Clapton - Tearing Us Apart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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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럼스틱이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경쾌한 멜로디의 리듬 기타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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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스크래치를 한번 쓱 긁고는, 리드 기타를 힘차게 연주했다. 에릭 클랩튼의 후반기 곡 답게, 팝적인 사운드가 상당히 들어가 있는 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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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보컬과 남성 보컬로 나뉘어 있는 곡이니만큼, 메인 파트는 명전이 부르지 않기로 했다. 베이스를 맡은 명전의 후배는, 어떻게든 클랩튼을 따라하기 위해서 목을 연신 긁어대며 노래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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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명전의 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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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까지의 공연에서는 그다지 사용하지 않았던 고음을 연신 뽑아내며, 명전은 경쾌하게 노래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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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어지는 베이스 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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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관객들에게 박수를 유도하며, 저 멀리의 이서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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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릭 클랩튼의 라이브에서는 보통 네이선 이스트(Nathan East)와 같은 전설적인 베이시스트가 무대에 선다. 물론 그 사람이 직접 온 것은 아니지만, 명전은 이서가 타인의 연주를 듣고 조금이나마 자극을 받았으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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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그 이유만 가지고 쟤들을 안 세운 건 아니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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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스 솔로에 이어 따라오는 기타 솔로를 연주하며 명전은 생각했다. 더 근본적인 이유는, 저 애들과 공연에 서기 위해서 연습을 같이 하게 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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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를 못 친단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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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이 기획한 ‘서명전 평판 개선 프로젝트’를 수행하기 힘들어질 것이 분명하므로, 명전은 밴드 애들을 공연에 부르지 않았다. 단지 그 이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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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 곡을 마치자, 쏟아지는 우레와도 같은 박수. 수연이 꽤나 성실하게 관객의 반응을 유도한 탓에, 이전과는 달리 감정이 섞인 환호나 박수등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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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곡은, 명전 선생님께서 마지막으로 남겼던 곡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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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호가 잦아들자, 마이크를 든 수연. 그녀의 말에 관객석이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뒤의 스태프들이나, 연주를 마치고 앞줄에 앉아 관람을 하고 있던 뮤지션들 사이에서는 약간의 소요가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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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중의 한 곡을 들려드리겠습니다. 어쿠스틱 곡이구요, 이름은 [무제 12]입니다. 당신께서 그렇게 지어놓으셨고, 제가 이름을 따로 붙이지는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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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은 그런 관객의 술렁임 따위는 자신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듯, 스태프에게 어쿠스틱 기타를 건네받은 후 의자에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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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짝 당혹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연주가 시작된다. 모든 소리가 멈춘 가운데, 조금씩 연주되는 어쿠스틱 기타의 스틸 스트링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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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랑찰랑하는 사운드는, 관객들에게 꽤나 오래 전의 기억을 떠오르게 했다. 사운드도, 멜로디도, 불러일으키는 감정도 상당히 옛날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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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들은 자신도 모르게 무대에 선 사람을 다시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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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치가 크고, 꽤나 늙었으며, 흰 머리가 가득한… 꼬장꼬장한 외모의 기타리스트. 무대에서 기타를 치고 있는 사람은, 그 사람이어야 할 것 같은 분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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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렇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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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 위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은, 머리를 길게 기르고… 살짝 버거워 보이는 크기의 어쿠스틱 기타를 공들여 치고 있는 여자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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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조금씩 분위기는 바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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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6~70년대 시절의 블루스와 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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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의 음악에 대한 무비판적인 수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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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매우 익숙했던, 평범하게 혹평을 들을 것 같던 ‘서명전’의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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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파는 트로트 테이프마냥, ‘좋았던 시절’만 반복하고 있었던, 그리고 반복하고 있던 그 음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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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시간을 거슬러오르듯, 곡이 진행될수록 점점 더 색채를 바꿔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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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만의 세상에 갖혀 텔레비전만 보던 늙은이가, 고집을 꺾고 스마트폰을 배워나가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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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습실에는 음악이 흐른다. 혜인의 전폭적인 지원을 통해 구축된 오디오 세팅을 통해 흘러나오는 노래. 적당히 차분한, 하지만 경쾌한. 저녁 노을을 배경으로 그림자를 파트너 삼아 춤을 추고 싶어지는 그런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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もうダンスダンスダンス 誰も気づいてな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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ジェメオスよりも ゆうもわな落書き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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もうステイステイ捨てる 下積み正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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嫌味に費やすほど 人生長くない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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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를 들으며,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원래’라면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을 계열의 노래. 하지만 이 몸의 영향인지, 혹은 이서의 영향인지. 그것도 아니면 더 많은 것을 받아들이게 되었는지. 뭐, 아무튼 시각이 넓어졌다는 점에서는 좋은 일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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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들을 뵙자고 한 이유는, 현아에게서 이야기를 들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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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들 사이에서 “반말 하는 사이야?”라는 말이 작게 오간다. 고개를 끄덕이는 건지, 아닌 건지 애매모호한 현아의 몸짓. 그는 그냥 무시하고 계속 이야기를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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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편지에서 했던 언플러그드 공연을 녹음해서 음원으로 발매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원래라면 라이브본을 그냥 편집해서 음원화하려고 했지만, 사정이 있어서 그건 안 되고. 그러다보니 그냥 통짜로 녹음을 하자, 그런 생각이 들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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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그냥 평범한 프로 세션들을 부르려고 했다. 오케스트라까지는 아니고, 밴드에 현악기 몇개를 낀 언플러그드 세팅으로. 그렇게 연습 좀 한 다음 평범한 정규 앨범처럼 녹음을 하고. 세션들도 한 1프로 2프로 정도 사용해서 녹음을 하고 발매하는 그런 평범한 앨범의 발매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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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는 그의 욕심 때문이었다. ‘더 품질이 좋은 음악을 위해서’라기보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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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것의 느낌을 좀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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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가 말했던 이야기. “좀 즐겁게 가는 것도 좋지 않을까?” 라는 말. 의외로 사람들은 연주자가 표현하고자 하는 감정 상태를 쉽게 알아챈다. ‘바람난 연인을 그리워하며 자신의 행적을 후회하는 남성’ 같은 그런 복잡한 감정 같은 건 알아차리기 힘들지만, 아무튼 ‘즐겁다’와 ‘슬프다’ 정도는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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どうでもいいから 置いてっ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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あいつら全員同窓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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ステンバイミー 自然体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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シャイな空騒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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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점에서, 그는 이번 언플러그드 음반에 ‘연습실에서 친구들끼리 즐겁게 잼을 하는 것이 녹음된’ 그런 느낌을 주고 싶었다. 마치 지금 흐르고 있는 음악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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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번의 녹음을 위해서 모이고, 목표를 달성하자마자 헤어지는 그런 관계로는 안 된다. 마치 Eric Clapton의 공연에서 Nathan East가 보여주는 것 같은, 서로 계속 합을 맞춰보면서 흥겹게 연주를 했던 사람들만이 낼 수 있는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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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음악은 프로 세션들을 데리고는 할 수 없다. 자질이 아니라 비용의 문제다. 아무리 [레이블 에코사운드]가 ‘하수연’의 부모 이혜인이 운영하는 것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큰 이익을 보지 못할 게 뻔한 음반을 하루 몇백만원씩 부어가면서 제작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래서 실력적 부분이 아쉽더라도 저렴한 현아의 친구들을 부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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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우리도 나름 괜찮게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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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아. 물론 현역 밴드에 비하면 좀 그렇긴 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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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의 그 말을 들은 현아의 친구들은, 웃으며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살짝 자존심이 상한 것인지, 아니면 열이 받은 것인지. 그런 느낌을 보여주고 있었다. 서하가 이서의 귀에다가 “저 언니들 좀 열받은 것 같은데.”라고 속삭일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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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긴 그렇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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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서가 ‘프로’라고 불리고 있긴 하지만, 저 사람들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서가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할 실력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아무리 프로에 비견할 수 없다 할지라도, 그래도 음대생들이라면 어디 가서 음악 못한다는 이야기는 듣지 않을 실력. 게다가 현아가 다니는 음대는 국내에서 수위에 드는 곳이니, 나름대로 자존심이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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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혹시, 수연…이? 말투가 원래 저런가? 저런 느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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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추측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수연이 나가자마자 현아의 친구들이 질문을 던져왔다. 이서와 서하는 난감한 듯 웃으며 “흫핳… 원래 저래요. 약간 좀 어… 저런 느낌이죠.” 라고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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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치는 건 알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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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천재들은 원래 저런다고 하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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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 좀 상처받긴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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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에 살짝 부루퉁해진 것 같은 현아의 친구들. 대체적으로 ‘그래도 우리도 꽤 친다고!’ 같은 느낌의 대화를 하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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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 합주 해보면 알 거에요… 좀 힘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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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 우리도 다 입시 해본 사람들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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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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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시때가 진짜 힘들었지. 그렇지 않아? 진짜 몇시간을 내내 연습만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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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감까지 내보이는 그녀들을 보며, 이서는 생각했다. 뭐… 겪어보면 알지 않을까. 수연의 미친듯한 실력을. 그리고 지옥에서 강림한 마귀와도 같은 악랄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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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괘… 괜찮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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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려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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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는 시간. 축 늘어진 친구들을 보며 현아는 상태를 확인했다. 대부분 다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듯한 모습. 그녀는 그럴 만 하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음악을 시작한 이래로, 세상 어느 누구도… 심지어 그녀의 예대입시를 가르쳤전 선생이나 교수들조차도, 수연보다 혹독하게 하는 사람은 없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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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지금 녹음을 할 건데 피아노를 그렇게 푸시하면 어떻게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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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올린! 몰아쳐야죠! 좀 더 리듬을 타고! 지금 다들 신나서 템포 올렸을때는 같이 따라와줘야 할 거 아니에요. 아까 말했잖아요. 우리는 아마추어. 그냥 칼같이 메트로놈 딱 딱 틀어놓고 할 거면 여러분들 제가 부른 이유가 하나도 없어. 그냥 연주를 느끼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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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스, 둘 다 안 묻히게. 개별적으로. 두개 다른 악기잖아. 느낌을 살려줘야지 둘이서 왜 문대고 같이 앉아있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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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처음 밴드를 시작했을 때가 생각나는 광경에, 현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녀도 음대 입시를 겪어보긴 했지만, 수연이 해주는 피드백만큼 밀도있고 힘든 것을 겪어본 적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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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산증인도 있지 않은가. 재능이 있다곤 하지만, 베이스를 친 지 1년 정도밖에 안 되는 애를 프로 무대에서 무리없이 연주를 할 수 있게끔 만든 것이 바로 수연의 피드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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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좀 쉴게요. 커피 한잔씩 마시고들 합시다. 어떤 거 드실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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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이 그렇게 주문을 받고 사라지자, 입을 열기 시작하는 그녀의 친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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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진짜 빡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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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교수님이 대학원생들 잡는 줄 알았네. 원래 이래? 오늘만 피드백 세게 하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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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아니요… 오늘은 좀, 약하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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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약한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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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연실색하는 표정에, 현아는 살짝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확실히 수연의 피드백은 안 당해본 사람은 모른다. 발라드 가수 주현과의 콘서트 세션에서도, 어디 가서 무시 절대 안 당할만한 프로들을 모아놓고도 거의 폭격에 가까운 피드백을 했던 수연이니까. 게다가 누구도 반박을 하지 못할 정도였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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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에는, 좀 더 심했어요… 요즘은… 다들 실력이 좋아져… 가지고, 나아졌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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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밴드 시작했을 때! 저 진짜 합주 4시간 한다 치면 3시간은 저만 엄청 갈궜다니까요. 그렇게 하지마라, 이렇게 쳐라, 이렇게 쳐라… 귀 터지는 줄 알았어요. 취미로 배운지 1년 정도밖에 안 된 사람한테도 그렇게 막 엄청 갈궜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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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밖에 안 됐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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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들짝 놀라는 현아의 친구들. 그 중 한명은 뭔가 우물우물거리더니, 상당히 미안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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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나 이서… 보고 좀 부족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했거든. 저 나이때 밴드 데뷔 할 정도면 엄청 어릴때부터 쳤을 텐데 하면서. 그런데 1년밖에 안 됐다고 하니까… 완전 말이 안 되는 수준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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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성해야겠다며 그녀는 한숨을 푹 쉬었다. 그런 그녀를 이서가 살짝 우쭐해진듯한 느낌으로 위로하는 사이, 서하가 그런 분위기에 기름을 끼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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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이는 밴드 시작 시점에 1년도 안 배웠을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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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에 잠시 침묵이 이어지다, 폭발적인 반응이 올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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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말이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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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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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실력이 진짜 2년도 안 된 거라고? 말도 안 된다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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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재능차이 개레전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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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감탄사를 늫어놓으며 수연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는 친구들. 무슨 두살때부터 기타만 친 애인 줄 알았다던가, 10년동안 최정상급 세션한테 레슨을 받은 실력이라던가, 기타 등등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그러던 와중 누군가가 뭔가 심각한 사실을 깨달았다는 듯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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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런데, 우리한테 피드백을 해 주는 건 우리 악기 쪽까지 다 알고 있다는 거잖아. 그게 가능해? 그렇게 짧게 배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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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그게 재능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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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의 말에 뭔가 숙연해진 분위기. 현아는 그런 분위기 속에서도 뭔가 재미있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 친구들이 하고 있는 생각은, 현아가 수연을 봤을 때 했던 생각 그대로의 것이었다. 결국 사람은 다 똑같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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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뭐, 다시 제대로 해 보죠! 재능있는 사람은 있게 두고, 우리는 또 우리대로 해 나가야 되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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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침울한 분위기를 깨트리는 듯 외친 이서의 말에 다시 떠들썩해진 연습실. 커피를 잔뜩 사들고 들어온 수연만이 분위기를 파악하지 못한 채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사람들을 바라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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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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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로도, Group Sound와 현아의 친구들은 시간이 날 때마다 연습을 거듭했다. 몇주 몇달동안 세션에 몰두한 것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꽤나 많은 시간을 합주에 투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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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유는 수연의 말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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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드리브는 익숙함과 여유에서 나옵니다. 그냥 보고 치고, 따라가기에 급급한 사람들은 절대로 그런 걸 가질 수가 없어요. 시도한다 해도 어울리지 않는 경우가 많구요. 걷기도 전에 뛰려고 하는 건데, 불가능할 수 밖에 없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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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정도 연습을 했으니 이제 녹음을 해도 되지 않겠냐던 다른 사람들과 회사 직원들의 의견. 거기에 반대를 하며 수연이 내세운 주장이 저것이었다. ‘날것’, 혹은 ‘즐거운 것’. 그런 수연이 내고 싶은 언플러그드 음반의 분위기는, 이 정도 수준가지고는 안 된다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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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수연의 지론에 따라 그들은 연습을 거듭했다. 나중에 가서는, 많게는 아니더라도 돈을 받고 오는 현아의 친구들이 “돈을 벌어가는 건 좋지만 너무 힘들다…” 라는 말을 할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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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연습을 했던 결과, 그들은 결국 수연에게서 원하는 말을 얻어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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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략 80%까지는 올라온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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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만족할만한 말은 아니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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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야 80%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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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100%는 만들기 힘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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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에 어처구니 없다는 듯 중얼거린 이서.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모습이었다. 수연이 그들을 몰아붙이는 모습을 보면, 아직도 한참 먼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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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 녹음 단계로 들어가도 될 것 같긴 하네요. 100%야 뭐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니까 제외하고. 하루 날 잡고 좀 장비 좋은 녹음실 빌려가지고 녹음해보면 괜찮은 라이브 나올 것 같기도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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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호성이 터져나와야 할 것 같은 대목이었지만, 왠지 현아의 친구들은 침묵하고 있었다. 그렇게 살짝 분위기가 이상해지려던 찰나, ‘친구들’ 중 누군가가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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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지금까지 엄청 연습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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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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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아깝다고 생각하지 않아? 이번 녹음 한번 하고 끝나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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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에 이서는 수연을 쳐다보았다. 수긍하는 듯한 표정. 그리고 이어진 말은, 꽤나 재미있을 것 같은 내용을 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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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말인데, 우리 학교 축제가 곧 있거든… 혹시 거기에서 한번 우리 무대에 서 보는 건 어떨까? 진짜 라이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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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좀 힘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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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제안에 그는 일단 거부의 의사부터 밝혔다. 놀랐는지 밴드 멤버들이 그를 쳐다보고, 특히 현아는 입을 열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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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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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니. 우리는 이제 프로고, 회사에 소속되어 있으니까. 우리 마음대로 움직일 수도 없고, 그렇게 해도 안 되는 거고. 예를 들어 현아 네가 학교에서 공연을 한다 그러면 개인적으로 그냥 하는 공연이 되겠지만, 우리 밴드 멤버 전체가 나가게 되면 문제가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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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케이스는 일반적인 버스킹, 무료 공연과는 조금 다른 성격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러한 것들은 그들이 최초에 홍보목적으로 설계를 해서 한 공연이지만, 이번은 그냥 ‘죄송한데 무료로 행사 한번만 뛰어주세요’ 라고 하는 것 아닌가. 성격이 완전 다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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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괜찮은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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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그렇게 생각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독단적으로 회사랑 아무런 상의도 없이 공연을 할 수는 없어. 만약에 뭐 예를 들어 세션의 댓가로 우리가 공연을 해 준다 그런 거라면 모를까. 많이는 안 나갔지만 그래도 세션비는 꼬박꼬박 나갔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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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에 수긍하는 현아의 친구들. 하지만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이 기회를 활용할 방법을 좀 찾아보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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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축제만큼 돈이 되는 것도 없긴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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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서트와 페스티벌과는 비교가 될 수 없는 노동강도. 3~4곡만 부르는 게 일반적이요, 7~10곡 정도 불러주면 엄청난 ‘혜자’ 라고 불리는 것이 대학축제. 그 시장에 진입할수만 있다면, 요즘 유행하는 말로 ‘돈을 복사하는’ 게 가능한 시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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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에 그는 이 기회를 계속 가져가고 싶었다. 잘 살리면, 꽤나 좋은 성과를 얻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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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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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좋은 기회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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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은 따로 참석하지 않은 비정기 회의. 그의 말을 들은 고경민 팀장은 턱을 쓰다듬으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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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축제가 대목인 것도 맞고! 대학… 특히 음악대학에서 ‘음대생들을 뛰어넘는 실력을 보여주는 미성년자들’이라는 그림을 보여주는 건 인터넷에서 충분히 이슈몰이를 할 수 있는 사안이긴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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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우리가 무작정 좋은 기회라고 해서 달려들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게 문제인 거겠죠. 저쪽에서 공식적으로 초청을 한 것도 아닌데 우리가 무대에 서는 거라면, 무대 세팅은? 다른 비용적인 부분은? 그리고 우리가 우리의 값어치를 깎는 것이 좋은 행동인가? 뭐 그런 일들이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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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을 들으며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막연히 거부감이 들었던 것이 조금 구체화가 되어가는 느낌. 여러 부분에서 손해를 볼 수 있는 그런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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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기회라고 생각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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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축제에 출연을 할 수 있다면, 그리고 그 출연을 통해서 실제 대학 축제의 수요층에 ‘그 밴드 다른 대학 축제 나왔는데 엄청 좋더라’ 라는 이야기가 나갈 수 있다면… 분명 상당한 수익을 올릴 수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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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맛보기로 공연을 보여주면, 나중에 얘들이 콘서트에 오는 효과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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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그렇게 생각을 하며 다른 둘을 바라보았다. 서로 몇마디 이야기를 나누더니, 이윽고 입을 여는 고경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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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 학생 말처럼, 이것저것 다른 것들을 따져본다 할지라도… 이게 좋은 기회인 것은 확실합니다. 그럼 이제 저희의 차례인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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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차례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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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이런 일이 있을때마다 손만 놓고 가만히 여러분들, 특히 수연 학생이 해결책을 가져오기를 기다리는 것은 너무 양심이 없는 일이니까요. 이번 문제는 제 쪽에서 학교와 이야기를 한번 해 볼 테니까, 밴드 여러분들은 음악에 집중을 하고 계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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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고경민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정유영. 그는 몇마디 입을 열까 하다가 그대로 관두었다. 그렇게 생각을 하지는 않았지만, 아무튼 본인들이 뭔가 해보겠다고 하니까. 굳이 거기에 있어 그가 끼어들 이유는 없겠지. 이것저것 하느라 바쁘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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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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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꽤나 공고해진 Group Sound의 팬덤, [도넛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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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도넛단들 사이에서, 며칠 전부터 돌고 있는… 꽤나 신빙성이 있지만 믿기 힘들고 검증되지 않은 소문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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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친구한테 들었는데, 이번에 그룹 사운드인가? 하는 걔들이 우리 대학교 축제에 나온다던데? 친구의 친구가 학생회에 있는데, 그 학생회 애들이 막 그걸로 이야기하는 거 들었다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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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거 친구의 친구가 한 이야긴데’라는 말의 무게란 ‘이거 그냥 거짓말인데’ 혹은 ‘그냥 해보는 이야기인데’ 와 같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즉 아무런 신빙성이 없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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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Group Sound의 팬들은 그들의 ‘덕질 대상’이 연관되어있다는 이유만으로 이성을 잃고 계속해서 정보를 찾아다녔다. 그 대학에 다니는 재학생의 SNS를 염탐하고, 하루에 한번씩 서치를 돌리고. 그런 수많은 노력의 결과 끝에, 그들이 얻어낸 결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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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축제에 오는 거 맞는 것 같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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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의 친구의 친구가 거기 학생인데, 친구의 친구의 친구의 친구가 그룹 사운드의 키보디스트 ‘현아’랑 친한 사이라더라. 그런데 이번에 언플러그드 음반 관련해서 녹음한다고 막 같이 이것저것 하다가… 얼마전에 어쩌고 저쩌고 해서 출연 결정 된 모양이다’ 라는 사돈의 팔촌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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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지 못할 이야기를 누군가는 열렬히 믿었고, 누군가는 그 이야기를 믿는 자신을 입증하기 위해 그 날 모든 일정을 캔슬하기까지 했다. 누가 더 믿음이 신실한가에 대한 치킨 레이스. 그날 공연이 없다면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한강에 가야 할 정도의 무모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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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런 ‘믿음이 신실한’ 사람들에게 내려진 복은 바로, 대학교의 축제 포스터였다. Group Sound의 이름이 선명하게 찍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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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 좆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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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은 매 학기에 4번 있지만 Group Sound의 ‘첫 대학교 공연’은 이게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게다가 거의 첫 오프라인 행사이자, 그녀의 친구의 언니의 친구가 알려준 말에 의하면 ‘김지연의 음악편지’에서 했던 것과 같이 언플러그드 공연이라고 한다. 이런 것을 어떻게 놓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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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며 발을 성큼성큼 내딛었다. 첫 대학교 방문. 엄마가 “동기부여 하러 대학교도 좀 가보고 그래라!” 라고 했을때도 안 간 대학교인데, 이렇게 온 것이 조금 아이러니하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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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뭔가 좀 좁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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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퍼스가 몇개로 나뉜 대학이라고 했던가. 그래서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그녀는 발을 계속해서 옮겼다. 이리저리 너질러지듯이 있는 부스를 지나, 강의를 들으러 다니는 듯한 사람들을 지나친다. 악기니 화구통이니 등을 메고 있는 사람도 꽤나 있는 것이, 확실히 예대 느낌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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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오늘 우리 애들 축제 공연 오시는 분들 있나요? 굿즈 배포하려고 하는데 어디가 좋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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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이 열릴 예정인 듯 열심히 설치되고 있는 무대. 그 근처 나무 밑 벤치에 자리를 잡은 그녀는, 트위터를 보고 답신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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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지금 근처에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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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즈 배포할만한 장소가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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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안 되고 이쯤 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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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팬클럽 회장에게 답을 해 준 후, 그녀는 잠시 앉아 핸드폰을 보았다. 할 일 없이 이상한 이야기나 하면서 떠들고 있는 커뮤니티를 지나, 오늘의 축제 라인업을 들여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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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이 정도면 우리 밴드도 엄청 무게감 있다는 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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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 Sound를 제외하면 모두 다 이름을 들어본, 아니 음악까지 들어본 사람들. 그런 연예인들 사이에 Group Sound가 끼여 있으니, 그녀 자신의 어깨도 으쓱해지는 기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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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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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니 언제왔는데. 자리 이리 잡을라면 존나 빨리온 거 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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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한 한시간쯤 전에. 너 진짜 나한테 뭐 줘야 된다니까. 이렇게 친구 자리까지 잡아주는 사람이 어딨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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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맡아둔 자리에 앉는 친구. 그녀의 말에 친구는 대꾸조차 하지 않으며 뭔가를 건넸다. Group Sound의 못 보던 굿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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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회장님이 이거 배포하더라. 니 안받았을 거 같아서 가져왔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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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오오~ 좀 놀 줄 아는 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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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니냐? 그런 말 쓰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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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공연히 과장된 몸짓을 취하며, 그 굿즈를 받아들었다. 생각지도 못한 선물. 그렇게 굿즈를 잠시 살펴보다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무대위에 오른 첫 타자는 남자 아이돌이었다. 환호성을 지르는 관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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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들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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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엔 노래 좀 들었는데… 훗, 이제 나는 ‘진짜’ 노래라는 걸 좋아한달까? 이런 ‘가짜’ 노래는 이제 나한테 안 먹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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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드충 다 됐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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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며 잠잠히 아이돌의 공연을 바라본다. 농담조로 말하긴 했지만 확실히 그랬다. 예전에는 분명 자신도 옆의 사람들처럼 귀가 터져라 비명을 지르고 좋아했을 것 같은, 잘생긴 남자 아이돌인데. 이제는 왜 심드렁해진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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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 대한 대답은 이후에 찾을 수 있었다. 몇명의 차례가 지난 다음, 여러가지 세팅을 하기 시작한 무대. 악기들이 차곡차곡 놓이는 무대 위로 올라온 MC가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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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무대! …는 아닙니다만, 오늘의 반쯤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무대! 이 대학에 다니시는 재학생분들이 올라오는 바로 그 무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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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라는 대답이 이어진다. MC는 이리저리 관객들과 말을 주고 받았다. 누구인지 궁금하지 않느냐, 재학생들이 무대에 오를 정도니 정말 대단하다 등등. 그런 가운데 녹음 및 녹화라도 하려는 등 다른 세팅도 차곡차곡 준비되는 모습이 보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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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그럼 이제 준비가 끝났으니, 맞아주세요! Group Sound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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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레와 같은 박수와 함께 등장한 사람들은, 그녀가 수많은 시간을 버려가며 이곳에 온 이유. Group Sound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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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갑습니다. 저희가 데뷔한지 얼마 안 됐는데, 이렇게 알아보시는 분들이 많을 줄은 몰랐습니다. ‘김지연의 음악편지’ 보신 분 계십니까? 그걸로 저희를 아셨다면, 혹시 손 좀 들어주십시오. 아 네 많이 계시는군요. 반갑습니다. 저희가 그 방송으로 많이 뜨긴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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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그렇듯 장황한 인삿말을 늘어놓는 수연. 그녀는 그런 농담에도 히히덕거리며 주위를 슬쩍 둘러보았다. 아까와는 다르게, 분명 대학생이 아닐 연령대 사람들의 비율이 높아진 것 같은 기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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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무대는, 이 위대한 … 대학 재학생 여러분. 여기 계신 키보디스트 분도 여기 대학 재학중이신데요, 1학년으로.” 그 순간 함성을 터트리는 관객들. “우리 위대한 키보디스트 ‘정현아’ 선생님과, 친구분들과 함께 준비한 언플러그드 공연입니다. 정말 솔직하게 말해서, 진짜 오랜 시간 준비했으니까… 재미있게 들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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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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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플러그드 공연을 위해 몇명의 사람들이 더 입장한다. 거기에 환호를 보내는 관객들. 그녀는 박수를 치며 생각했다. 들은 바가 있긴 했고 그녀는 기대감이 크긴 했다. 한정 공연이라니, 팬으로서는 절대 놓치지 못할 기회니까. 하지만 축제의 열기와 어울릴지는 좀 의문이기도 했다. ‘음악편지’에서 들려주었던 것은 조금 차분한 분위기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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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주세요, [공중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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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둑어둑해진 조명. 명암이 확실하게 나뉜 무대. 그림자로 인해 가려진 멤버들의 얼굴. 사람들은 불안해하면서도 가장 익숙한 곡으로 시작해서 그런지, 일단 환호를 보낸다. 그녀는 우려섞인 심정으로 무대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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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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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전에 ‘음악편지’에서 했던 거랑 완전히 다른 느낌…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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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리기 시작한 음악은, 이전의 무대와는 달리… 훨씬 더 쾌활한 느낌의 무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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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지막히 일어나 창밖을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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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멀리 하늘에 뭔가 떠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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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쳐다봐도 알 수가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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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학 원형도넛 그리고 공중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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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곡과는 전혀 다른, 훨씬 빨라진 템포. 베이스와 드럼이 전면에 나서고 무대 뒤에 자리한 사람들이 현악기를 울리기 시작한다. 마치 작은 오케스트라를 보는 듯. 아니면 흥청망청 취한 밴드가 연주하는 신나는 재즈 음악을 듣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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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나선 오늘의 날씨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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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과 번개를 동반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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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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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지 흐린지 모르는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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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만 보고서 터벅터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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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뀐 것은 음악 뿐만이 아니다. 무대 위의 분위기도 그러했다. 그림자가 드리운 무대 위에서 베이스, 최이서는 반쯤 춤을 추듯 세트장을 거닌다. 다른 악기를 연주하는 학생들도 마찬가지로 리듬을 타듯 몸을 움직이며 악기를 연주한다. 그리고 제일 극적인 변화는, 수연에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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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를 알 수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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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떠 있기만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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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정원에 나는 끝없이 올라만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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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향한 내 마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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흘러가는 세월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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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부 모래 위에 휘청이며 넘어질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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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가만히 무표정으로 기타를 연주하거나 노래를 부르거나 하던 수연. 하지만 오늘의 분위기는 다르다. 분명 미소가 어려있을 것 같은 그림자 진 얼굴 밑으로, 끊임없이 박수를 치거나 발을 구르거나 하는 몸. 어색하지만 뭔가 귀여운 몸짓은 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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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분위기는 금새 관객들에게 스며든다. 평소에 볼 수 없던 연예인에 환호하던, 열광에 젖었던 아까 전의 공연과는 다르다. 의자에 앉았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일어서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발을 구르거나 고개를 까딱인다. 귀로 듣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느끼는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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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음악이 무대에 자리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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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는 모자를 벗어 이마의 땀을 훔쳐냈다. 밤이라고 한들 이제 점점 더워질 계절. 조금 쌀쌀할까봐 입었던 옷이 거추장스러워질 정도의 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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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저희도 갈 시간이 되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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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이 그렇게 말하자마자, “가지마!!”와 비슷한 함성 소리가 관객석에서 쏟아진다. 어차피 다들 이런 식으로 반응을 해 주겠지만, 영혼 없는 반응이라기에는 확실히 진심이 실려있는 것 같아 이서는 기분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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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존(부처)께서 비구들에게 이르기를, ‘은혜와 사랑으로 만난 것은 이별하지 않는 것이 없다(恩愛合會, 無不別離.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라고 하셨죠. 만남이 있으면 이별이 있고, 이별 뒤에는 또다시 만남이 있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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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뜻모를 소리를 하는 수연. 무대에만 서면 저런 이야기를 늘어놓는 아이가 되는 걸 보면, 사람이란 정말 알 수 없다고 이서는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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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무대에서 작별할지라도 언젠가는 만나게 되겠죠. 그날까지 모두 건강하게 계시길 바라겠에요! … 저희는 이만 이제 마지막 곡으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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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에 말을 씹어버린 수연은, 사람들의 반응에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을 맺었다. 흔적이라고는 귀가 빨개진 것 뿐. 다시 조명이 암전되고 싸늘한 그림자가 무대를 뒤덮은 가운데… 드럼의 신호에 힘입어 이서는 베이스를 치고, 수연은 마이크에 다가가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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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그 언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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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집에 가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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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바랜 냉장고 안에 들어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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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몬트 유리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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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스 하나 하나의 노트마다 흥겨워하는 사람들. 다른 것은 필요가 없다. 효과음이라던지 조명 효과라던지 호응을 유도하는 말들이라던지. 전혀 필요하지 않은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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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씩 난 가끔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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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병 안의 액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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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어떤 것인지 궁금해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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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질끔 감고 마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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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를 치는 수연을 보며 이서는 생각했다. 이서 자신의 말에 따라 ‘날것’, ‘즐거운’ 공연을 강조하던 수연. 하지만 그렇게 연습을 하면서도, 이서는 수연이 거기에 동참해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언제나처럼 차갑게 연주를 하는 그런 모습만이 상상되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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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이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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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마셨던 액체는 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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왠지 모르게 들어 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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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좋아하는 음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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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친구가 보여주는 전혀 다른 모습에, 이서는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어색하지만 확실하게 ‘무대를 즐기는’ 모습. 평소처럼 고개를 숙이고 가만히 기타만을 연주하는, 인터넷에서 [저년 동상이냐?] 라는 이야기를 들을 정도의 모습이 아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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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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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어떻게 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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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냉장고 안의 유리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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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일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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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그렇게 입속에 되뇌이며 베이스 솔로를 쳐나가기 시작했다. 어느새 어디서 생겨났는지, 기타를 뒤로 매고 탬버린까지 치며 사람들에게 손을 작게 흔들어주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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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춤추고, 그렇지 않다면 앉아서 박수를 친다. 학생 뿐만 아니라 구경 나온 다른 사람들도 있다. 모두가 하나되어, 다음 차례라고는 잊어버린 채 즐겁게 놀고 있는 광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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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좋은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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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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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응이 뜨거운 것은 그 날 관객의 상태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신나게 환호하며 즐겁게 놀던 관객들 중에는, 만족했는지 집에 가버리는 사람들도 많았으니까. 이후 마지막 무대에 선 가수가(이름값이 상당한 사람이었다) 그런 분위기에 당황할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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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번 언플러그드 공연은, 그런 목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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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공연을 통해 수익을 얻고 이름값을 알린 것은 확실히 좋았지만… 원래의 목적인 ‘소비자층의 확장’을 달성하지 못했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공연 한번 하자고 한 일도 아니고, 수익적으로는 이득이지만 기회비용을 따지자면 손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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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목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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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단언하기는 힘듭니다만, 확실히 우리의 의도대로 가고 있는 것 같아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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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하게 달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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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다 들어온 것은 아니지만… 멜론 쪽에서 들어온 데이터라던가, 유튜브 쪽에서 들어온 데이터를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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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경민은 그렇게 말하며 프로젝터를 띄웠다. 조회수 중 1~20대 사용자와, 그 외 연령대 사용자의 비율을 나타내주는 차트. 기존의 음원과 달리 언플러그드 음원은 확연히 다른 분포를 보여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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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론에서는 그런 기능을 지원하지는 않습니다만, 유튜브는 알고리즘이 있다보니, 간접적으로 플레이리스트에 포함되거나 유입되는 시청층이 꽤나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 중 대부분이 한번 곡을 듣고 이탈하기보다는, 계속해서 곡을 듣는 현상이 발생하고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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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타겟으로 지정했던 30~50대 연령층이 의도대로 끌려오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그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해보자라는 식의 프로젝트이긴 했지만, 어찌되었든 성공하는 것이 더 좋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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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반 판매량의 경우, 이번 음반의 경우 따로 특전 등을 지급하지 않고 사전 예약을 통한 한정 수량 발매만 하게 된 관계로… 그렇게 판매량 자체는 높지 않습니다. 약 2천장 정도 판매되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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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특전 같은 걸 넣는게 좋았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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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짝 후회된다는 듯한 혜인의 말. 하지만 정유영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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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음반은 그런 목적으로 설계된 게 아니니까요! 특전 같은 걸 발매하게 되면 수량을 맞추기가 힘들어져서, 재고가 발생될 위험이 큽니다! 게다가 음악 자체도 기존 음반을 재녹음한 것일 뿐이기 때문에… 안 한 것이 훨씬 나았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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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습니다. 실물 음반은 어디까지나 덤일 뿐이고, 중요한 건 음원과 공연 실황의 재생수 및 파급력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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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리밍용 음원으로 발매된 이번 언플러그드 음반, [休息(휴식)]은 총 24트랙으로 이루어져 있다. 녹음실에서 녹음한 기본 음원 8곡, 현아의 대학교 축제에서 녹음한 라이브 음원 8곡, 카페나 도서관, 혹은 다른 휴식 공간에서 부담없이 틀 수 있도록 제작한 인스트루멘탈(Instrumental, 반주) 8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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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st로는 카페 등에서 배경음악으로 재생되는 것을 노리고, 기본 음원은 플레이리스트에 자연스럽게 들어가는 것을 노린다. 라이브 음원의 경우에는 듣는 사람이 무의식적으로 ‘이 밴드 라이브 공연 영상 없나? 한번 보고 싶은데’라는 생각이 떠오르도록 관객들의 반응을 조금 많이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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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전략은 상당히 좋은 결과를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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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브 무편집 풀영상, 조회수 약 20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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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기 좋게 곡마다 나눠놓은 영상, 평균 조회수 약 45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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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조회수는 계속 오르는 중이었으며, 그가 봐도 명확하게 다른 시청자층이 유입됨을 알 수 있었다. 왜냐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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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득 노래 듣고 있었는데. 갑자기 유투브가 추천해 준 노래. 정말 마음에 드네요. 건행하시고 성료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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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래가 재미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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얫날 배철수 시나위 산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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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 밴드들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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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이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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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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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아이돌 노래가 판치는데 이런 밴드 나와줘서 좋긴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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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는 이장르를 좋아하진 않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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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밴드는 진짜 노래 자체를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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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이 아니라 기가막히게 잘부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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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을 그렇게 많이 보는 것은 아니지만, 간혹 가다 [공중정원]이나 [별이 되어가는 것]의 댓글을 보면 보이는 것과는 전혀 다른 느낌의 내용. 인터넷 사용에 익숙하지 않은 연령층의,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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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정하기는 싫지만, 예전의 나랑 비슷한 느낌의 내용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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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인터넷 놈들이 그가 글을 적을 때마다 [-틀-]이니 [늙은이], [틀딱;;] 같은 댓글을 달았는지 알 것 같다 생각하며, 그는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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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이제, 예전에 계획했던 대로 다음 EP 제작으로 들어가면 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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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너 뭐 일 끝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일을 하려고 하냐. 너 워커홀릭이야? 아니면 무슨 돈 필요해? 악기 사고 싶은 거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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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겁하며 외치는 서하. 하지만 그는 머리를 살짝 꼬며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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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물 들어온 김에 노를 젓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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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그만 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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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망섞인 현아의 푸념을 그는 외면했다. 놀거 다 놀고, 할거 다 하면서 음악 하면 도대체 어떻게 성공을 하겠는가. 때로는 포기하는 것도 있어야 하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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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기적 매출을 보자면 그 쪽이 나을 수도 있습니다. 대학 축제로 물꼬를 트기도 했으니, 방송 출연 하면서 EP 준비하고 다시 릴리즈하면서 적극적으로 행사를 돌면 수익이 확실히 증대되겠죠. 페스티벌 쪽도 돌 수 있겠구요.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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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경민은 PPT를 확확 넘겨 문구를 하나 제시했다. 최초에 그가 설정했던 목표. ‘단독 콘서트 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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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계획한 것은 이 쪽이니까요. 한정된 팬층을 잡기보다는, 전연령/전국적 인기를 얻는 것이 중요하겠죠. 그렇기 때문에 일단은 라이브 투어 계획을 세울 생각입니다. 계획이 진행되는 대로 말씀드릴테니… 일단은 쉬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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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식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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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의자에 앉았다. 정말로 간만에 찾아온 휴식기. 그렇게 오래 가는 것도 아닐 것이고, 당장 섭외나 스케줄 같은 것이 오면 나가야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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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아까 본 아이들의 모습이 아른거려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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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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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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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뭐라고 말을 꺼내기도 전에, 흡사 노예해방이라도 맞이한 듯 난리를 치며 뛰어나가던 세 사람. 그런 모습을 보고도 “야 내가 생각해놓은 게 있는데…” 라면서 뭔가 제시하기는, 그가 아무리 일에 미친 사람이라고 해도 좀 그랬다. 저렇게 좋아하는데 어떻게 막을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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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뭔가 이 기간에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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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 게릴라 버스킹이라던가, 송캠프(단체로 숙박을 하며 작곡을 하는 일)라던가, 아니면 숙박 합주라던가. 그런 재미있는 일이 많이 있는데. 그런 것을 하지 못한다는 게 참으로 아쉽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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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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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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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생각하며 노트북을 키자, 갑자기 방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 비척비척 나가보자 혜인이 옷을 잔뜩 차려입은 채 기다리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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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무슨 일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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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오랜만에 쉬잖아. 엄마랑 같이 쇼핑 좀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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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에에… 별로 안 가고 싶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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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소리 하는 거야. 같이 가야지. 엄마가 하는 소리라고 생각하지 말고, 사장님이 하는 소리라고 생각해. 응? 명령이야, 명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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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예전보다는 낫다는 게, 그가 지금 하고 있는 생각이었다. ‘딸과 정말 오랜만에 나온 쇼핑!’이라는 생각으로 그를 무슨 옛날 바비인형처럼 끌고다니며 옷을 이것저것 입혀보던 예전의 혜인과는 달리, 지금의 혜인은 상당히 침착해진 편이었다. 걸음걸이부터 상당히 느긋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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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 사자. 진짜 잘 어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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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 이미 너무 많이 산 거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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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울리는 옷은 사야지. 수연아. 음식은 먹으면 결국 없어지고 집은 남한테 보여줄 수도 없어. 의식주중에 제일 중요한 게 의, 즉 옷이란다. 응? 옷에 돈 아끼면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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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옷 갈아입히기는 그칠줄을 몰랐지만. 그는 쇼핑백을 들고 혜인을 계속 따라갔다. 그칠 줄 모르는 혜인의 쇼핑욕구를 막은 것은, 그에게 온 전화 한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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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저 전화 좀 받아야 될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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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어? 어 그래! 잠시 여기 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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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핑백을 잠시 벤치 옆에 내려놓은 후, 핸드폰을 본다. 화면에 떠 있는 수신자는 호인예대의 채호근 교수였다. 오랜만에 보는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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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하수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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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수연학생! 나 채호근입니다. 오랜만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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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교수님, 오랜만입니다. 잘 지내시죠? 제가 먼저 전화드렸어야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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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부를 묻는 미사여구가 잠시 오간다. 그 다음, 채호근 교수는 바로 본론을 물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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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 학생, 최근에 시간 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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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이제 좀 휴식기로 들어갈 것 같긴 합니다. 왜 그러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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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얼마 전에 부탁이 하나 들어와서. 기타리스트들끼리 뭔 방송을 하나 한다는데, 적합한 사람이 없어서 피디가 막 나한테까지 전화를 돌리더라고. 혹시 해볼 생각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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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다들 스케줄 없는 거 아는데 왜 이렇게들 다 거절하는 건지 모르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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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그램 회의실. 임종훈 PD는 팔짱을 끼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조용한 회의실 내에서 그의 말만 떠다닌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 그는 목소리를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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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섭외 한 사람 없어? 이거 뭐… 야 김성진. 너 그 뭐냐, 친한 사람 있다면서? 그 쪽 사람이랑은 연락 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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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그쪽도 거절을 해가지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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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이씨… 니가 데려올 수 있다며! 돌겠네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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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훈은 머리를 싸맸다. 평소에 다른 프로그램 제작한다고 하면 수도 없이 기획사에서 자기 애들 좀 넣어달라고 이야기 들려오고 이러는 게 보통인데. 왜 그가 큰 마음 먹고 제작하는 프로그램은 출연을 고사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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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특별히 문제가 되는 프로그램을 제작하겠다는 것도 아니다. 그저 그는 이번 ‘락 밴드 붐’에 편승해서, 그가 좋아하는 락 음악을 조금 부흥시켜보고 싶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게 먹힐지 안 먹힐지 모르겠으니, 일단 파일럿 프로그램으로 간을 보겠다는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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왠지 모르게 제안을 하는 족족 거절당하고 있는 상황이 지금이었다. 아니 직접 무대에 나와서 음악을 들려주는 기회를 주겠다는데 왜 거절을 하냐 이 말이다. 밴드 차원에서 부르는 게 아니라서 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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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약간 짐작은 가긴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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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왜. 왜 그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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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뭐냐. 음… 뭐, 피디님이 그런 의도를 가지고 하신 건 아니지만. 그런데 그 분들이 이거 서로서로 비교하는 거 아니냐고 생각하는 거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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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훈은 몸을 살짝 젖히며 눈썹을 찡그렸다. 왜? 왜 그렇게 생각한다는 걸까. 비교한다고 생각하면 말이야 되지만은 비교할 생각으로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이 전혀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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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거 아닌데 왜 비교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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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처음 기획하실 때 저희한테 서로 음악을 바꿔서 쳐본다고 하셨잖아요. 그거 혹시 바뀌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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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대로인데. 그대로 설명도 했고. 그래야 재미있지 않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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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출연을 제의한 기타리스트들은 유명한 사람들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 사람 나온다더라! 무조건 봐야겠다!’라고 할정도의 그런 사람들은 아니었다. 그러니 조금 다이나믹한, 예를 들어 Led Zeppelin의 Jimmy page가 Pink floyd의 David Gilmour와 악곡을 교환해서 친다거나. 다이나믹함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그런 포맷으로 결정한 것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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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그러면 서로 막 비교하는 느낌이 들어버리잖아요. 나름대로 자존심도 있을텐데 무대에서 막 삑사리나거나 이러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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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무슨 십대 이십대도 아니고 그런 거 가지고 그러겠어. 나잇살 먹은대로 먹은 양반들이. 설마 그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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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말하면서도, 그는 왠지 그 이유가 맞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100% 그 이유만 있는 것은 아니겠지. 스케줄이 안 맞는다던가, 집안 사정이 있다던가. 하지만 영향을 주는 부분은 확실하게 있을 것 같은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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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 수 없다. 그냥 젊은 애들도 부르자. 기타 잘 치는 애들 리스트 좀 뽑아다가 나한테 올려줘. 내가 좀 수소문해볼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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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훈은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제는 아쉬운 소리를 해야 될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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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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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튼 그렇게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자세한건 나도 잘 몰라요. 내가 그 피디를 잘 아는게 아니라서. 내 친구의 제자라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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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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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머리를 살짝 꼬며 대답했다. 그 말에 채호근 교수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워섬겼다. 내 친구가 누구인데, 걔가 왜 그 피디를 제자로 삼게 되었냐면… 요샛말로 하면 TMI, Too Much Information이라고 하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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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말을 들으며 그는 생각했다. ‘기타리스트들끼리 나와서 소개를 하고, 서로의 곡을 바꿔 부르거나 유명한 곡을 커버하는 식의 파일럿 프로그램’이라. 말로만 들어보면 그렇게 막 성공할 것 같지는 않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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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 학생한테 세션 맡기고 싶다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문제라니까. 나한테도 소개해달라고 아주 난리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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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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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앨범 들어보고 기타 너무 잘쳤다고 도대체 누구냐고 막 물어본단 말이지. 그때 그룹 사운드의 하수연 기타리스트라고 하면 막 자기도 세션 좀 한번만 부탁하고 싶다고… 언제 한번 놀러와요. 밥이라도 사주고 싶으니까. 그리고 요즘 우리 손자들이 나 보고 아주 난리라니까. 수연 학생이랑 아는 사이다 이러니 사인 한번만 받아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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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의 특성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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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어느새 연령대 높은 사람들과 자신을 분리해서 보는 것이 가능해졌다. 그렇기에 그는 나이 든 양반들의 이야기는 약간 지루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계속 이야기를 들었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외형 말고는 그다지 차이점이 없다는 것을 모르는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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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만약에 생각이 있으면 아까 그 불러준 번호로 연락을 하면 됩니다. 이틀 뒤까지 연락을 주면 된다고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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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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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어진 전화. 그가 잠시 핸드폰을 보고 있는 사이, 혜인이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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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 섭외 전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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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네. 피디가 직접 한 건 아니고, 다른 쪽에서… 그 자주 가는 곳 있잖아요. 대학 교수님. 거기서 연락이 왔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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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 그 교수님 신경 진짜 많이 써주시네. 언제 한번 선물이라도 들고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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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필요까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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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채호근 교수도 자기가 필요하니까 이렇게 하는 것일텐데 말이지. 하지만 혜인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었다. “원래 사람들끼리 선물 주고받고 이러는 게 별 거 아닌 것 같아 보여도, 인상에 남고 기억에 남고 그러는 거야.” 라며 선물을 검색해보는 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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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래서 내 주위에 사람이 없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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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그런 생각을 하며 머리를 살짝 꼬았다. 물론 그가 죽기 전에 사람이 없었던 것은, ‘인간관계 관리 실패’ 보다는 ‘성격이 지랄맞음’ 때문이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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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는 게 맞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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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생각했다. 평범한 상황이라면 나가는 게 맞다. 스케줄도 비고, 여유도 있다. 나가야 될 이유도 있다. 아무튼 지상파니 인지도도 높아질 것이고, 출연료도 있고… 여러모로 손해보다는 득이 될 것이 많아 보이는 방송이었다. 왜냐하면, 애초에 ‘실력’으로 밀릴 이유가 전혀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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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다른 것이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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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전까지는 분명 ‘스케줄 잡고 일하는 게 낫지 않나’ 라는 생각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진짜 일이 닥쳐오자 ‘아 그냥 쉬고 싶은데’ 라는 생각이 든다. 이미 ‘어쩔 수 없네 쉬어야지’ 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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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는 게 맞는데… 아, 나가기 싫다. 이게 번아웃이라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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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은 그냥 쉬고 싶은 것에 불과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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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노트북을 스크롤했다. 요즘 들어 밥 먹고 음악에만 전념하다 보니… 짜투리 시간을 활용하기 위해 만든 새로운 취미, ‘커뮤니티 탐방’을 이번 결정에 활용해보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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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개장한 OO OOOO 오늘 근황.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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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장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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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미어터질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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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경기 안좋다더만 살판난사람 개많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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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st] 경기어렵다 해도 돈 많은 사람 존나 많음 ㅋㅋ 오늘 명품도 다 쓸렸다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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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st] ㄴ 그런거에 현타가 왜 옴? 좌빨새끼냐? ㅉ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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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st] 굳이 지금 왜 가는거임? 사람 없어진 다음 가면 되는데 1일차에 가놓고 사람 많다 타령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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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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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젊은 사람들이 징징대는 건 옛날에 안 살아봐서 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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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이야기 하면 다 틀니라고 하는데 그 시절 살아봤으면 그냥 말을 못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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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백화점이 있길 했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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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씨, 이런 거 보고 있을 때가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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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어느새 침대에 누워 이불을 덮은 채, 이미 익숙해져버린 아이폰으로 타자를 치고 있었다. [어쩌고 저쩌고.jpg], [어쩌고 저쩌고.mp3]과 같은 제목. 요즘 말로 ‘도파민 중독’을 유발하는 컨텐츠들. 클릭을 유도하는 제목과 교묘하게 댓글을 달게 만드는 내용. 그런 마력에 빠져서 게시글에 댓글을 달고 다닌게 몇개인지 알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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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언제 이렇게 되어버린 것인지 알 수 없다고 생각하며, 그는 그런 컨텐츠들이 발목을 붙잡는 것을 어떻게든 떼어냈다. 이용자가 많은 대형 커뮤니티들을 지나, 그가 가끔씩 들어오는 커뮤니티에 진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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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이 앨범 너무 좋은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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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락의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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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거품 100%라고 생각하는 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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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전에 비욬 음악 듣고 놀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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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한대음 수상 확정인 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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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구매한 바이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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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비슷한 커뮤니티이긴 하지만, 그래도 음악 관련된 글들이니 뭔가 마음이 평온해지는 기분. 그는 그런 감정을 느끼면서 우선 밴드의 이름을 검색해보았다. 그룹 사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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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듣고있는 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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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 Sound 공연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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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 좋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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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잘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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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솔직히 노래는 좋은데 가사는 잘 모르겠음 그냥 좆본 니코동출신 밴드새끼들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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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그래도 좋은거 많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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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그냥 안맞는거지 그런감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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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에 어쿠스틱 한거도 좋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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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내 밴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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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사는 내 잘못이 아니니까.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몇개의 커뮤니티를 더 돌아보았다. 밴드의 이름이 박힌 게시물들은, 대부분 음악에 대해서 칭찬을 하고 있는 글들이 많았다. 가장 나쁜 평도 ‘음악은 좋은데 내 취향에는 안 맞다’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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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그렇게 커뮤니티를 좀 더 돌아보다가, 자신이 왜 이 일을 시작하게 되었는지 깨달았다. 소위 ‘기타리스트 예능’의 출연에 대해서 고민해보고자 그랬던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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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런 시시한 짓이나 하고 있다니… 애초에 커뮤니티 탐방 같은 걸 해서 그런 결정에 도움이 되는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썩어빠진 일이다. 그는 그렇게 나약해진 자신의 정신에 채찍질을 하며, 마지막 한번의 검색을 해보기로 결심했다. 자신의 이름을 넣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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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음악이라는 게 들을땐 모르는데 해보면 실력차이 확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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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처음에 들을때는 몰랐는데 기타 쳐보니까 실감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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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매하게 잘치는 애들이랑 진짜 거장들이랑 터치부터 시작해서 확차이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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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력차가 안날수가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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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잘치는 사람들한테 물어보면 확실히 난다더라 어떻게 치느냐에 따라 그 사람 인생도 알 수 있다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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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혹시 그분이 에릭클랩튼 불륜 예언은 안하셨다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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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많이 나지 ㅋㅋㅋ 안쳐보면 모름 거품낀애들 진짜 많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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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ㄹㅇㅋㅋ 특히 여자들중에 기타치는애들 거품 존나 많이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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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하수연 <- 이년이 거품 최고봉임 빨아주는 사람은 존나많은데 정작 곡 보면 기타 별 거 안침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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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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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이불을 박차고 일어났다. 아니 무슨… 무슨 이런 황당한… 스크롤을 내려보니, 밑으로 쭈우욱 이어져 있는 댓글들. ‘하수연’이 실력이 있느냐 없느냐로 막 싸움이 붙고, 여러 사람들이 참관하고 있는 그런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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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유치찬란한 이유이지만, 그는 이 글을 보고 출연을 결심했다. 이 이름도 모를 악플러놈에게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보여주기 위해서. 과연 알아볼 실력이 있을까는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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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 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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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회, 많아봐야 2회 방영에 그칠 파일럿 프로그램이지만… 제작 회의의 규모는 큰 편이었다. 아무래도 출연자의 수가 많고, 스케줄 조정도 필요한 상황이었으니까. 막내들이 바쁘게 움직이며 다과를 준비하고 세팅을 하는 사이, 사람들이 속속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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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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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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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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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인 사람은 대충 봐도 열명 이상. 기타를 멘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서로 알아보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하지만 굳이 서로 알아보지 않더라도, 눈짓과 눈치로 알음알음 서로에 대해서 알고 있다는 분위기였다. 같은 씬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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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새 기타 사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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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새로 사가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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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 좋네. 나도 레스폴 살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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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정도 모여가는 분위기가 되자 사람들의 입이 열린다. 서로의 근황을 물어보고, 모르는 사람은 인사를 하고. 선배가 있다면 고개를 숙이고, 후배가 있다면 인사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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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화기애애해지는 분위기 속에서, 누군가가 말을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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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거, 줄쟁이들끼리 있으니 누가 한곡 뽑아봐야 할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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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생각 없이 뱉은 것 같은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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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 말은 거미줄처럼 방 안에 퍼져 사람들을 꼼짝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아주 미약하지만, 분명 있다는 것은 알 수 있는 긴장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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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한번 쳐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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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와중에 누군가 나선다. 오~ 하는 감탄사와 이어지는 연주. “야 잘하네~” 하는 덕담과 박수. 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은근슬쩍 감정들이 떠돈다. ‘내가 더 잘하는 것 같은데’나, ‘저 사람 잘하는데… 괜히 나왔나?’ 하는 생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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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한번 쳐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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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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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다들 잘하네. 나도 쳐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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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적인 것은 아니다. 어쩌면 ‘기술’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는 생겨날 수 밖에 없는, 자연스러운 분위기. 선배나 후배의 실력에 자극을 받고, 부족함을 인정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겸허하게 물러나기도 하지만, 누군가는 ‘사실 아까는 그냥 손풀기였고 나는 이정도로 잘 침’이라고 말하기 위해서인 듯 격렬한 연주를 선보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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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살짝 달궈지던 분위기를 깬 것은, 어느 한 인물의 등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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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을 열고 등장한 것은, 대기실의 성별과 연령대와는 전혀 연관이 없을 법한 여자아이. 살짝 차가운 인상의 여고생. 하지만 여기 있는 그 누구보다도 화제가 되고 있는 최신예 기타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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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 십니까. 여기… 대기실 맞습니까? 제가 잘못 온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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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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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요석을 연상시키게 하는 윤기를 가진 검은 머리는 어깨 너머까지 내려온다. 회의실의 조명빛이 피부에 반사되어 찬란한 빛깔을 내는 가운데, 차가운 눈동자에서 빚어지는 시선은 좌중을 살짝 주눅들게 했다. 그러나 당장이라도 냉엄하게 다른 사람을 질타할 것 같은 입술에서는, 기대와는 다른 말이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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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잘못 온 것 같은데…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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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뇨, 그 오늘 프로그램 회의 하러 오신 분 아니세요? 밴드 오브 기타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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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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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여기 맞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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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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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를 방불케 하는 절대적인 성비, 남성 100%을 자랑했던 회의실 안에 들어온 단 1명의 여성. 성비가 약간 변동되었다고 해서 딱히 무슨 일이 일어나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지만, 왠지 모르게 언행을 조심하게 되는 상황. “누구야?”, “모르겠는데.”나 “저 사람 그 그룹사운드 아닌가?”, “맞나? 아닌 것 같은데.” 같은 이야기들도 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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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묘한 분위기 속에서, 하수연은 그런 것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몇몇 아는 기타리스트에게 가서 인사를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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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여기서 뵙습니다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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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오랜만이네. 잘 지내지? 아니 이런 말은 좀 그렇구만. 요즘 최고의 주가를 달리는 사람한테 잘 지내냐고 물어보는 건 좀 그런 이야기긴 하네. 으핳ㅎ핳! 아 손 선생님. 여기는 제가 아는 학생입니다. 하수연이라고, 요즘 유명한 [공중정원], 그거 만든 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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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거! 잘 들었어요. 아주 통통튀는 음악이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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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식으로 몇번 세션을 같이 했던 기타리스트와 이야기를 나누고, 그 김에 다른 사람들을 소개받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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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요수아의 한성진 선생님 맞으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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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맞는데, 혹시 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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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저는, 그룹 사운드라고 작게 밴드 하고 있는 하수연이라고 합니다. 유튜브 재미있게 보고 있고 [창조론]도 정말 좋게 들어서, 한번 인사한번 드리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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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래요? 어이구 반갑습니다. 아 생각해보니까 하수연이라고 하면, 그 명전 선생님 제자분 맞으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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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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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고, 배분으로 치면 완전 대선배시네~ 호영아! 여기 니 선배님 오셨다. 뭐하냐? 빨리 인사 안 드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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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사람들은 잘 알지도 못하는, 혹은 워낙 명성이 높기에 접근하지도 못하는 원로 기타리스트들. 하지만 ‘하수연’은 아주 스스럼없이 다가가며 그들에게 인사를 주고받았다. 그런 모습에 사람들의 호감도가 올라간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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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작 본인은 전혀 다른 생각을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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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그냥 구석에 가만히 앉아있기만 해도, 이 녀석들이 다들 자동으로 들어와서 인사를 하고 그랬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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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옛 기억을 떠올렸다. 원로 취급을 받던 시기쯤 되서는, 세션으로 나간다 해도 그 날 출연하는 밴드 애들이 다들 와서 그에게 인사를 하고는 했다. 그런 예의범절이 살아있던 때도 있었는데, 지금은 어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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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가장 막내 취급일 ‘하수연’이 원로들에게 인사를 하는데, 다른 놈들은 멀뚱멀뚱 앉아만 있다. 이게 나라가 이래서야 제대로 될 게 하나도 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자기 유리할 때는 ‘옛날이 좋았지’, 자기 불리할 때는 ‘늙은이들은 이래서 안돼’라는 기적의 논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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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다들 오셨을까요? 혹시 안 오신 분… 성진현 기타리스트님? 계시네요. 윤명환 기타리스트님? 계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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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는 사이에 작가가 들어와서 인원체크를 한 뒤 나간다. 몇분 있다 들어온 것은 꽤나 풍채가 좋은 피디였다. 나이가 꽤 들어 보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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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 다들 모이셨네요. 북적북적하니 이게 마음에 듭니다. 반갑습니다! 임종환 피디입니다. 저랑 안면 있으신 분도 계시고, 아닌 분도 있으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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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스레를 떨던 피디는, 턱을 잠시 쓰다듬으며 사람들을 둘러보더니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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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너무 경직된 분위기네. 우리 이러지말고 어차피 뭐, 그래도 몇시간 정도 찍을 건데. 자기 소개나 한번 하고 넘어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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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그런 거 할 연령대인가?” 하던 분위기는 금새 가라앉는다. 결국 갑의 말은 따라야 하는 법이니까. “아이고, 안녕하십니까. 한성진입니다.” 와 같이 쭉 이어지던 인사’는, 하수연’의 차례가 되어 잠시 멈춘다. 더벅머리 젊은이들과 ‘메탈정신’으로 덥수룩한 사람들 사이에서, 이질적인 분위기를 피우며 일어난 여자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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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 세요. 저는 그룹 사운드의 리더를 맡고 있는 하수연입니다. 이 자리에 계신 분들과 같이 서기에는 너무 경력이 짧긴 하지만…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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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셉은 대충 이 정도고… 다들 뭐 우려하시는 부분이 있다고 알고 있는데, 그런 쪽으로는 편집 안 할거니까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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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그램 설명. ‘각자의 밴드를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소개하고, MR을 활용하여 서로의 곡을 쳐 봄으로써 일종의 콜라보레이션 효과를 통해 흥미를 유도한다’라는 컨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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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르게 보면 ‘이거 경쟁유도 아닌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나오기에 아주 쉬운 포맷. 그렇기에 피디는 설명이 끝나자마자 바로 이야기를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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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이거 그냥 파일럿 프로그램이니까. 간 보자는 거지 시청률 막 끌어올리고 이럴라는 거 아니거든요. 걱정하지 마시고, 실력 한번 보여주신다 생각하고 부담없이 재미있게 찍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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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에 일단 동의하는 참가자들. 빡세게 연습 좀 해야겠다며 중얼거리는 사람들이 생겨나는 동안, 피디는 한 30분 쉬자는 이야기를 하며 바깥으로 나갔다. 다시금 적막해진 대기실 속에서 사람들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고, 그는 기타를 끌러매어 이리저리 매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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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스트랫 들고 올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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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이 되어가는 것] 음반에서는 재즈마스터를 쓰긴 했으나, 이것은 언제까지나 일시적인 일일 뿐. 그의 주 악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스트랫이었다. 그렇기에 약간 아쉬움을 느끼던 찰나, 그의 앞에 누군가가 와서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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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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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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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들어보니 누군가 앞에 서 있었다. 그냥 평범한 기타리스트. 아까전에 분명 소개를 듣긴 했는데, 누구인지는 잘 모르는 것을 보면… 그다지 유명하지는 않은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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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이야기 들었는데. 그룹 사운드의 하수연 기타리스트님이시라고요. 맞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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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네,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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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안녕하세요. 저는 카프카의 신상우라고 하는데요. 이번에 [공중정원] 내신 거 진짜 잘 들었거든요. 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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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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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답을 하고는 다시 기타를 쳐다보려 했다. 그냥 인사 한번 건네러 온 사람인 것 같아서. 하지만 눈 앞의 사람은 전혀 갈 생각이 없는 모양인지, 그가 기타를 잡기 전에 바로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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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제가 궁금한 게 있어서 그러는데, [공중정원] 관련해서 좀 여쭤봐도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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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음… 네. 말씀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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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궁금한 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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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운을 띄우며, 상대방은 작곡이론적인 이야기를 엄청 물어보았다. 머니코드 사용하셨던데 원래는 블루스 스케일 쪽을 사용하시지 않았냐. 스트랫 말고 재즈마스터 쓰신 이유는 뭐냐. 이 부분에서 이렇게 표현한 게 상당히 새로운데, 이유가 궁금하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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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뭘 이런 걸 물어보냐는 생각을 하며 친절하게 대답을 해 주었다. 머니코드를 쓴 이유는 당연히 흥행을 위해서다. 하지만 머니코드를 쓴 곡은 당연하게도 먹던 걸 또 먹는 맛이니 지루하게도 느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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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 때문에 재즈마스터를 활용한 슈게이징 사운드를 사용해서 그런 친숙함을 지우고 참신함을 넣는다. 그와 동시에 J-Rock의 베이스 진행 방식을 참고하여 그 분위기를 배가한다… 와 같은 이론적인 이야기. 그리고 기타의 운용방식에 대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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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예를 들어서 이렇게 쳐야 되는 부분이 있잖아요. 그런데 이걸 음… 뭐라 설명하기가 그런데. 이렇게 따다닥 치면 별 거 아닌데도 듣기에는 딱 리셋이 되는 그런 분위기가 있거든. 졸고 있는데 갑자기 옆에서 어깨를 탁 치게 만드는 듯한 느낌인데, 이 다음에 싸비(후렴구)를 딱 넣게 되면 처음에는 이질적이다가도 그 다음에 확 집중이 되는 그런 느낌이 있는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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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별 생각 없이 기타를 만지작거리며 그런 이야기를 늘어놓다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주위에 뭔가 몰려 있는 사람들. 그 중의 누군가는 “저도 좀 질문이 있는데요.” 같은 소리를 했다. 그런 분위기에 그가 흠칫 놀란 사이 사람들 사이에서 누군가가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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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친구가 이론에 빠삭하네. 혹시 서 선생님이 그런 것도 가르쳐주셨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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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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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순간 고민했다. 여기서 맞다고 이야기하면 ‘서명전’의 명예를 드높일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도리어 다른 식으로 생각할지도 모른다. “서명전 그 인간은 자기도 곡 못쓰면서 제자 여자애 가스라이팅이나 했다더라.”식으로. 그렇게 고민하는 사이 누군가가 옆에서 그 이야기를 되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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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님, 서 선생님이 기타는 잘 쳐도 작곡은 못 하셨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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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이론은 알 수도 있지. 그 저번에 추모콘서트 때 유작 연주한 거 있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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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긴 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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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을 보며, 그는 반박하고 싶은 욕구를 억지로 참았다. 역시 인터넷이 옳았다. 세상에서 제일 참기 힘든 욕구는 반박하고 싶은 욕구라고. 그게 아니라고? 이런, 참지 못하셨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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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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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가 끝나고, 피디는 참가자들에게 “혹시 유튜브 하시는 분들 이번 파일럿 프로그램 이야기 한번만 부탁드리겠습니다! 아직 저희가 홍보 돌릴 단계는 아니긴 해서, 이런 이야기가 있다고만 좀… 하하하.”라는 당부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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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상 무료 홍보를 부탁한 셈이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출연하기로 한 이상, 자기들도 좀 프로그램의 효과를 받으려면 홍보를 열심히 해야 하는 상황. 누군가는 울며 겨자먹기로, 누군가는 별 생각 없이 라이브를 켜서 이야기를 했다. 홍보라는 티는 안 내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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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러고 보니까 오늘 프로그램 회의 갔다왔습니다. 기타리스트들 모아서 하는 프로인데요, 누구누구 있어가지고… 그런 거 말해도 되냐는 분이 계시네요. 거기 피디분이 자유롭게 말해도 된다고 하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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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 오늘 내가 말이지. 방송국에 갔다 왔는데. 어? 줄쟁이들 다 모아가지고! 방송을 하겠다고 말이지. 피디님이 음청나게 이게 계획이 있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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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만간에 재미있는 방송 하나 할 것 같아요. 길게는 아닌데… 오늘 회의 들어가보니까 기타 치시는 분들 잘 치는 분들 많더라고요. 나이 드신 분들만 있으신 게 아니고, 요즘 젊은 분들 있잖아요. 잘 치시는 신예분들. 그런 분들도 있어서. 이게 재미있을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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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저 오랜만에 방송 나갑니다. 네 반갑습니다. 어떤 방송이냐고요? 아마 기타리스트들끼리… 대결? 그런 건가? 잘은 모르겠네요. 네 저도 저녁 방금 먹었고요. 콘서트는 어, 좀 기다리셔야 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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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의 파급력은 아주 미약하다. 파도라기보다는 그냥 시냇물에 가까운 그런 움직임. 하지만 많은 기타리스트들이 SNS나 라이브, 주위 입소문 등으로 이야기를 하게 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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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션의 팬들에게도, 그리고 음악의 팬들에게도 점점 그 소식이 퍼져갔다. “지상파에서 오랜만에 밴드 관련해서 큰거 온다더라!!” 하는 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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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소식들의 중점에 있는 것은, 한 인물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 날 회의에서 가장 깊은 인상을 남겼던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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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나는 진짜 처음에 곡만 잘 쓰는 애일 거라고 생각했어. 그럴 수 밖에 없다니까? 모든 악기는 결국 세월이라는 게 있다니까. 데릭 트럭스가 완전 천재잖아. 근데 그 사람도 스무살쯤 돼서야 만개를 했어. 걔는 뭐 1년밖에 안 배웠다매? 이게 그냥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잘 치기가. 근데 들어봤는데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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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기타 실력이라는 건 좀 우열을 가리기 힘들다고 생각해요. 모두가 다 잘하는 분야가 있거든. 그런데 그 분 연주 들으니까 그, 롤 같은 거 보면 그런 말 있잖아요? 벽 느낀다고. 딱 그런 느낌이었어. 벽이 느껴지더라고. 내가 저거보다 잘 칠 수가 있나? 그 생각을 하니까 막 연습을 하는 거 자체가 좀 무의미하다고 해야 하나? 저게 재능인가? 최근에 좀 우울했어요 그거 때문에. 그래도 계속 해야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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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가신 서 쌤이 이제 무협지로 따지면 내 사조라 캐야 하나. 그니까 내를 가르친 분이 서 쌤한테 배우셨고. 그담에 나를 가르친긴데. 이제 가는 서 쌤의 직계 제자니까 나한테는 사숙이라카죠? 그런긴데. 와… 내는 이게 왜 서쌤이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가르칬는지 알긋같더라고. 딱 누가 연주해보라캐서, 가가 이제 누구 스트랫 잡고 딱 지미의 All along the Watchtower! 완전 근본이제. 그거 연주하는데 그냥 와… 걍 욕밖에 안 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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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말을 맞추지는 않았다. 그저 프로그램 이야기를 하는데, 감명이 깊었던 순간에 대해서 말을 할 뿐. 하지만 너무나도 공통적으로 나오는 이야기에 사람들은 ‘이거 바이럴 아니냐?’ 라는 의견을 내기도 했고, 다른 사람에게 찾아가 “도대체 그 분은 얼마나 잘하는 거에요?” 라고 묻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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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기타리스트 하수연’에 대한 소문은 인터넷에서 서서히 증폭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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캔맥주를 든 채로 소파에 털썩 주저앉는다. 옆의 와이프가 “먼지 날린다!” 라고 소리를 지르는 것을 무시한 채, 그는 맥주를 한잔 들이키고는 리모콘을 잡았다.오늘 방송을 한다고 하도 호들갑을 떨던 바로 그 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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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드 오브 기타리스트라고 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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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직장인 밴드 동료들이 “무조건 봐야 된다!”라며 호들갑을 떨던 방송. 아마추어긴 해도 나름 기타리스트인지라 흥미는 있었지만, 딱히 볼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워낙 주위에서 호들갑을 떠는 데다가, 좋아하는 기타리스트 중 한명도 나온다고 하여… 와이프의 리모콘까지 뺏어가며 시청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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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 뭐볼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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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치는 사람들 나오는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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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그 밴드 그거 안하면 안되나? 아들 봐줄 시간도 없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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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에 얼마나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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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락 무슨 좋지도 않은 노래인데 그걸 한다고 맨날천날… 노래가 좋기라도 하든가. 시끄럽게 막 지지고 볶고 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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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말했잖아? 그냥 이야기 그만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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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아내의 말을 바로 끊고는 핸드폰을 집어들었다. 밴드 동료들의 [시작한다] 등의 카카오톡. 그는 그것을 보며, 과연 프로 기타리스트들의 연주가 그에게 어느 정도의 영감을 줄 수 있을지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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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좀 줄여주면 안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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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니가 들어가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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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곡의 연주가 끝나고. 아내의 말에 퉁명스럽게 답을 하고는, 그는 카카오톡으로 답장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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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정도 할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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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10년 박으면 될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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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ㅋㅋ 우리 다 늙어죽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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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쯤되면 윤환형님 드럼도 못 칠듯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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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저정도에 10년이면 빠른거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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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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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를 막론하고 나오는 기타리스트들. 20대도 있고, 60대도 있다. 서로의 곡을 쳐 가며 애드립도 하고, 정석대로 치기도 하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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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기대 안 했지만 뭔가 눈이 뜨이는 느낌이 있긴 했다. ‘저기에서 저걸 저렇게 친다고?’ 같은 생각이 드는 장면들. 그가 연습했던 곡도 몇개 있었기 때문에 더더욱 그랬다.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는 느낌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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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게 잘치는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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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치는거지. 내가 할라면 10년은 걸릴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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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오래 걸린다고? 그짓말 아이가? 저게 뭐라고 10년이나 걸리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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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쳐 보기 전에는 모르지, 라고 생각하며 그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방송 화면을 보았다. 방송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보면 이제 하이라이트 부분이 나올 것 같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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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정도로 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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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한테는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이 다음 차례에 나올 사람에게는 그도 그런 의문을 가지고 있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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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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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한국 음악 시장에서 가장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밴드 ‘Group Sound’의 리더이자 기타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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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로서는 [공중정원], [별이 되어가는 것] 모두 잘 듣긴 했으나… 인터넷에서 그렇게 막 극찬을 하고, 그가 자주 가는 뮬과 같은 곳에서도 [2020년대 한국 최고의 기타리스트는 이미 나와버린 것 같습니다] 같은 글이 올라올 정도인가… 싶은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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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MC의 멘트를 들었다. “하수연 기타리스트님 모시겠습니다. 큰 박수로 맞아주세요!” 라는 말과 함께 쏟아지는 박수. 특별취급인지 백밴드들과 아까 연주했던 기타리스트까지 한명 나와있는 가운데 하수연이 등장해 자리에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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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쟤 아이돌이가? 아이돌도 나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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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냥 기타치는 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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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런 아가 기타를 친다고?” 라는 와이프의 말을 흘려넘기며 그는 방송을 계속 보았다. 근황 이야기. 이번 프로그램 준비 단계 이야기. 그리고 어떤 곡을 할지 묻는 이야기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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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곡을 하실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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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조금 긴 곡이 될 것 같은데… Sultan of Swing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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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말하며 하수연이 말해준 노래는, 그가 모르는 것이었다.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노래. 하지만 그와는 상관없이 음악은 시작된다. 드럼 스틱의 신호와 함께, 흥겨운 멜로디로 출발하는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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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한다기보다는 흥얼거림에 가까운 보컬. 하지만 쾌활한 느낌의 드럼과 베이스, 그리고 적재적소에 들어가는 리드 기타에 의해 연주되는 흥겨운 멜로디가 그런 단점을 덮어준다. 옆에 앉은 아내에게서 느껴지는 미약한 리듬이 그를 증명하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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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이 곡 좋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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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가 잠시 연주되며, 줌인되는 하수연의 오른손. 엄지와 검지, 중지로 피크 없이 핑거피킹을 하고 있는 모습에 그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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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거피킹이야 할 수 있다지만, 저 경력에 저런 게 가능하다고? 그리고 마치 핑거피킹으로만 쭉 기타를 쳐 온 사람마냥 저런 표현이 가능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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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는 사이 노래는 끝난 것 같았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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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악기들이 조금씩 연주에서 물러나는 가운데, 전면으로 기타가 맹렬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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넥 위에서 펼쳐지는 손가락의 발레. 리듬감 있게 몰아치다가도 어느샌가 물러서있고, 속주인가 싶다가도 흔들리는 음에 감탄을 할 수 밖에 없는 그런 연주. 화면 속의 모든 사람은 뛰거나, 춤을 추거나, 박수를 치거나 하고 있다. 베이스도, 리듬 기타도, 드럼도, 피아노도, MC도, 관객들도, 카메라조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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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움직임을 이끌어내고 있는 리드 기타리스트 하수연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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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를 듣지 않아도 흥겨움이 느껴질만큼 팔짝팔짝 뛰며 기타를 연주한다. 놀라운 것은 그렇게 연주를 하면서도 흔들림이 없다는 것이었다. 녹음인가 착각할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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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클라이막스에 다다라, 결국 마무리와 함께 연주가 끝났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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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무의식적으로 시계를 보았다. 10분 이상 지나버린 시간. 카톡도 마찬가지. 마치 저 음악을 듣는 동안, 시간이 멈춰버린 것 같은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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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뭐고?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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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던 것은 그 뿐만이 아닌 듯 했다. 음악을 듣는 동안 내내 고요했던 아내의 외침. 아내는 부산을 떨며 뭔가를 준비해야겠다며 일어나려다, 그에게 말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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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정도 할라면 얼마 연습해야되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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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었다 깨어나도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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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믄 죽었다 깨어나도록 연습해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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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을 듣고 울컥하던 그의 마음은 함의를 깨닫자마자 사라졌다. 저렇게 될 수 있을때까지 연습하라는 건, 밴드를 계속 하라는 것 아닌가. 고맙습니다 하수연 씨. 당신은 저의 귀를 정화시켜주셨고, 가정의 평화조차 지켜주셨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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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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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를 조금 돌려서, 그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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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주가 끝난 직후 무대 뒤 대기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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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을 끝낸 뒤 돌아온 그를 반겨줬던 것은 ‘무수히 많은 악수의 요청’이었다. 어떻게 그렇게 기타를 잘 치냐는 이야기가 대부분이었고, 핑거피킹은 언제 배웠냐, Sultan of Swing은 좀 오래된 노래인데 혹시 서명전 선생에게 배운 것이냐, 나랑 같이 올드 블루스 트리뷰트 밴드 꾸려볼 생각 없냐 리드 기타는 네가 해도 된다 등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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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연습하면 된다.”류의 이야기를 남기고, 그 외의 제안은 일단 다 보류한 채 빠져나왔다.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뭔가를 요구하고 있었기에. 하지만 보류는 거절이 아니었고, 그렇기에 연락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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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아무래도 그건 좀 힘들 것 같습니다. 현재로서는. 음 저도 밴드를 하고 있는지라. 네. 다시 한번 생각해보라고요… 네, 일단 알겠습니다. 현재는 조금 힘드니, 다음에 한번 연락주십시오. 네. 알겠습니다. 들어가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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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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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를 끊자마자 질문을 던져오는 이서. 그는 대답 대신 한숨을 푹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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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무대 이후로 하루가 멀다하고 연락을 해오는 사람들. 문제는 한 사람이 계속 거는 게 아니고, 거기 있던 사람 대부분… 혹은 그 사람에게서 연결된 사람, 그리고 방송을 보고 또 물어보고 어쩌고 저쩌고. 아무튼 다 똑같은 사람이 아니라서 “아 그만걸라고요!”를 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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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그 방송 괜히 나갔다 싶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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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일중독이라는게 고쳐지기가 힘들거든. 그래서 막 일을 안 하면 손발이 벌벌 떨려서 자기 스스로 막 일을 찾아다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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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하게 자신을 놀려대는 서하를 한번 째려보고는, 그는 커피를 홀짝 들이켰다. 그런 여러모로 귀찮은 일이 생긴 것을 제외한다면, 방송의 효과 자체는 좋았다. 유튜브 조회수의 상승이라던가, [공중정원]이나 [별이 되어가는 것]의 순위 상승이라거나(Sultan of Swing과 Dire Straits, Mark Knopfler에 대해서 언급하는 한국인이 많아진 건 예상 외였다) 하는 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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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것보다 고무적인 것은, 그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더욱 더 많아졌다는 것이었다. 어느 정도의 빈도인가 하면, 이제는 버스를 타면 꼭 그를 알아보는 척 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 사진을 찍어가는 사람도 많았다. 바로 지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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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저, 저기! 하수연 기타리스트님 맞으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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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네. 혹시 어떤 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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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를 내려놓자마자 들려온 질문. 그는 고개를 돌리며 최대한 상냥한 표정을 짓고자 했다. 옆에서 그 표정을 본 이서가 못 참고 웃음을 터트리는 것을 보고, 그는 탁자 아래로 손을 슬쩍 내밀어 이서의 허벅지를 꼬집었다. 탄탄해서 잘 꼬집히지 않기에 세게 콱 잡았더니, “크아악!!”하고 비명을 지르는 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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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 무, 무슨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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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별 일 아니에요. 뭐 혹시 사진… 같은 거 필요하신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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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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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샌가 세명으로 늘어나버린 사람들. 그는 일어서서 한명씩 사진을 찍어주었다. 그 중 한명은 Group Sound의 팬이고, Group Sound Premium을 들기까지 했다기에 멤버 전원과 사진을 찍고 사인까지 해주었다. (이서는 기념이라며 자기 가방에 달려있던 열쇠고리까지 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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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이 진짜 위력이 미친 것 같아. 이제 티비 보는 사람 많이 없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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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긴 한데… 이제는, 티비 방송도 유튜브에, 올리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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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막 이야기를 나누는 아이들. 그는 대충 흘려들으며 유튜브를 틀어보았다. 뭔가 재미있는 것이 없을까 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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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런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왠지 모를 유튜브 영상이었다. 익숙한 사람이 찍혀 있는, 그리고 영어로 제목이 되어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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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ltan of Swing Korean girl Cover - Best one E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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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 42만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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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e of the Finest covers I’ve heard of this song. Damn sol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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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들은 이 곡 커버 중에 제일 훌륭한 커버다. 솔로는 그냥 개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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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lead guitarist executed his part flawlessly. Outstanding co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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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드 기타리스트는 자기 파트를 완벽하게 해내버렸다. 경이로울 정도의 커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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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itar solo was just insane. I thought he was reincarn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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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he not de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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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솔로가 미쳤다. 나는 그가 환생한 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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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걔 안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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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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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무슨 일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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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는 그렇게 말하며 수연의 핸드폰을 쳐다보았다. [Sultan of Swing Korean girl Cover - Best one EVER!!] 라는 미묘한 제목을 달고 있는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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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드폰 카메라로 녹화한 것이 분명해보이는 화질. Sultan of Swing의 앞 부분, 보컬이 나오는 파트는 아주 일부분만 녹화된 영상. 전문적인 유튜버도 아닌지 구독자는 오십명 정도에, 영상이라곤 아파트에서 개랑 놀아주는 조회수 200정도의 영상 2개, 그리고 방금 그 영상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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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제목에 진실성이 있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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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락이나 설명 하나도 없이, 그저 집에서 방송을 녹화해서 올려놓은 것 뿐인 그 영상은… 며느리도 모르는 알고리즘의 선택을 받아 조회수가 가파르게 올라가고 있었다. 당장 영상을 보고 있는 지금도 조회수가 오르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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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아는 사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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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냥 추천에 뜨길래 봤는데 나네. 그런데 Best one Ever는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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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중얼거리는 수연. 이서는 “자신감을 좀 가져!”라며 수연의 어깨를 툭툭 치고는, 댓글을 쳐다보았다. 영어라서 무슨 말인지 잘 알지는 못하지만… 아무튼 [Fucking insane], [Awesone], [Brilliant!], [Expert performance!!] 같은 말들이 마구마구 달려있는 걸 보면, 아무래도 칭찬 같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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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치는 걸 보고 잘 치는 거라고 하는데 그게 뭐가 문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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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잘 치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수연의 그 말에 서하가 무심코 “개 재수없다.” 라고 중얼거렸다. “내가 세계 1위는 절대 아니지. 당장 원작자가 살아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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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용어구지 그런 걸 뭘 그렇게 받아들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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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좀 그렇지 않나?” 라는 수연에게, 이서는 “늙은이야?” 라고 말했다. 이렇게 말하면 수연이 긁히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과연 그 생각대로 눈을 찌푸리며 이빨을 드러내는 모습. 이서는 그 모습이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도대체 왜 저러는지는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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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뭐, 누가 네 연주 좋다고 올렸는가보지. 그렇게 생각하면 되지 뭐. 저 사람이 우리한테 무슨 일 할 것도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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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핸드폰을 수연에게 넘겨주었다. 뭐, 그렇게 지나갈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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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지나갈 일인 줄 알았는데… 며칠이 지난 후. 이서는 자신의 유튜브 알고리즘이 온갖 이상한 리액션 비디오로 물든 것을 목격했다. [Sultan of the Swing Korean girl Cover REACTION!!] 같은 제목을 달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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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도 다 비슷했다. 조잡한 영상 혹은 공식 송출된 영상에 나오는 기타 솔로를 보고, 머리를 싸잡고 “Oh My GOD!!” 등을 외치는 장면. 혹은 근엄하게 중얼중얼거리는(아마 기타에 대한 내용 같았다) 늙은 외국인이나, 젊은 백인 남성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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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왠지 웃기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하고, 자랑스럽기도 해서… 그런 영상을 쭉 훑어보았다. 그리고 한 영상 한 영상을 볼 때마다 소위 말하는 ‘뽕’에 가득 찼다. 여기 언급되는 ‘월클급 기타리스트’가 바로 우리 밴드 기타리스트이고, 내 친구란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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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영상을 다 보고 나자, 그녀의 알고리즘은 또 한번 뒤바뀌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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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액션 비디오인 것은 비슷했다. 하지만 리액션의 대상이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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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ck Ladies from South Korea (‘Group Sound’ Rea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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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AT A ROCKSTAR!!! First Time UK Reaction - ‘Group Sound’ Rea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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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반응] 그룹 사운드를 처음 본 외국인 리액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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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RST TIME WATCHING Group Sound - 공중정원 Rea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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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사 알아듣지도 못하는데 노래만 듣고 외국인들 오열한 이유 Group Sound - 별이 되어가는 것 리액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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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이상 하수연이 아닌, Group Sound 밴드 자체에 대한 리액션들이 수도 없이 많이 올라와 있었다. 한국인들이 올린 것도 있고, 외국인들이 올린 것도 있다. 조회수는 각양각색. 한국인이 쓴 것으로 보이는 댓글이 주를 이루지만(그 중에 절반은 그들의 팬이라기보다는 그냥 ‘국뽕’을 느끼고 싶은 사람들 같아 보였다), 외국인도 적잖게 있는 것으로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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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음악 듣는 외국인들도 있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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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며 리액션 비디오를 몇개 보았다. 진심으로 감탄하는 것처럼 보이는 영상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 조회수를 빨아먹기 위한 걸까. 그렇게 턱을 괴고 영상을 보던 이서는, 뭔가 좋은 생각 하나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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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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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체 컨텐츠를 찍어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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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 1층의 카페. 커피를 사러 온 손님에게 사인과 사진을 찍어준 후 문을 닫고 들어오자마자 이서가 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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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턱을 쓰다듬으며 ‘언제부터 얘가 이렇게 회사를 생각해줬나’ 라는 생각을 했다. 아니 회사를 생각해준 게 아니라, 어쩌면 유영 과장의 일을 대신해주고 있는 것일지도. 뭐, 아무튼 좋은 일이다. 최소한 싫어하는 것보단 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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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내가 얼마전에 리액션 비디오를 봤는데 말이지. 이게 재미있기도 한데, 이걸 가지고 뭔가 재미있는 걸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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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는 그렇게 말을 하며 리액션 비디오 하나를 틀어주었다. 그의 기타 실력에 관한 영상이었는데, 대략 이런 소리들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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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이걸 한번 보라고. 핑거 피킹으로 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이렇게 사운드가 깨끗한지. 이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야. 진짜 엄청난 연습이 필요한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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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렇게 말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데, 어, 만약 이 영상을 보고 ‘이거 진짜 개쩌는걸. 기타 한번 배워봐야겠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당장 그만두길 바래. 아마 너는 절대 이렇게 될 수 없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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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렇게 되기 위해서는 정말 엄청난 시간이 필요해. 아마 그녀는 수도 없이 기타 줄을 잡았을 거야. 글쎄, 최소 십년 정도는 필요하지 않을까… 뭐? 2년이라고? 사기 치지 마. 2년? … 세상에, 이건 조작일 수 밖에 없을 것 같은데. 어떻게 이런 실력이 2년만에 나온다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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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반응을 보이는 유튜버. (그는 국외세션 경험 탓에 영어를 충분히 잘 알아들을 수 있었다. 말하기는 안 되었지만) 그는 그 심정을 이해했다.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되었지만, 사실 그와 같은 기타리스트는 물리적으로 절대 존재할 수 없었다. ‘기타에만 수십년 이상 매달려 온 사람이 죽어서 여고생의 몸에 들어간다’ 라는 상상을 도대체 누가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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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걸로 뭘 하자는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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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서하의 질문에, 이서는 잠시 재미있는 일이라는 듯 싱글거리더니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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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액션의 리액션을 찍어보는 건 어때? 자체 컨텐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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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액션의 리액션? 그건 또 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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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액션 비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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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략적으로 통용되는 정의로 말해보자면, ‘어떤 영상 등을 보고 반응하는 장면을 찍은 비디오’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K-pop 아이돌들이 화려하게 춤을 추는 영상을 보고 머리를 싸잡으며 “Oh My god!”이나 “That’s Crazy!”, “I Love it!!” 등을 외치는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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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컨텐츠가 왜 소비되는거 하면, 재미가 있어서이다. 내가 보는 것도 아니고 남이 보는 것이 도대체 뭐가 재미가 있는가?? 에 대해 말해보자면, 일종의 인정욕구나 마찬가지다. 자신이 좋아하거나 관심을 가지고 있는 대상이 나와 다른 타인에게서 인정받는 그런 상황 자체가 재미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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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리액션의 리액션이라고 하면, 그가 이해하기로는 Group Sound를 보고 리액션을 하는 외국인의 리액션 비디오를 보고 우리가 리액션을 하자는 것일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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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을 것 같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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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의 그 말에, 그는 머리를 살짝 꼬았다. 그로서는 약간 미묘하긴 했지만… 리액션 비디오를 잘 선택하면 괜찮은 컨텐츠가 될 것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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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 [“이 사람은 무슨 악기나 이펙터를 쓰는 거지?”] 같은 대답을 보고 그의 이펙터 세팅을 이야기해준다던가, 혹은 다른 사람의 감상을 들어본다던가. 그렇게 생각해보면 또 재미있을 것 같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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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들은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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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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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을 것 같은데.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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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아이들의 말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 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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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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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아이들이 하는 일은, 그의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그는 최대한 진지하게 임하고자 했다. 얼마 안 되는 시간동안 진지하게 영상을 찾아서, 최대한 정확하게 답변을 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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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우. 이 톤이 도대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궁금한 걸. 한번 이 기타리스트에게 물어보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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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기본적으로 제 톤은 말이죠. 기타리스트 David Gilmour의 톤을 기초로 하고 있는데요. 당시 톤을 구현할 때의 이상향은 The Dark Side of the Moon 시절의 톤과, P.U.L.S.E. 투어 시절의 톤 2가지를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Binson Echorec, Fuzzface, Big muff, Electric Mistress 등을 사용하고 있구요, 세팅값 같은 경우는… 지금 여기 가져오지 않아서 보여드리기 애매한데. 조금 나중에 한번 보여드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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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가 진짜 최고네요. 어떻게 이런 연주를 할 수 있게 된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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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적으로는 연습입니다. 저 같은 경우는 매일 새벽에 일어나서 운동을 하고, 연습… 구체적으로는 크로매틱이나 스케일, 피킹, 테크닉 연습 등을 1시간 정도 합니다. 크로매틱의 경우에는 잘 되면 200에서 220, 240까지 올릴 때도 있구요. 그 다음 학교를 갔다 와서 다시 연습을 1시간 정도 하고, Spotify를 뒤져서 기타 사운드가 괜찮게 들리는 곡이 있다 하면 귀카피로 일단 쳐 봅니다. 하루에 1~2곡 정도는 습득을 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구요. 그렇게 다 하고 나서도 시간이 남으면, 뭐 다른 것도 해주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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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다른 아이들은 전혀 그렇지 않아 보였다. 예를 들어 이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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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들어본 결과, 그룹 사운드는 정말 최고의 한국 밴드 중 하나인 것 같아. 단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다른 멤버에 비해 베이스의 실력이 약간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어. 기타는 굳이 말 할 필요가 없고, 드럼과 키보드도 애드리브가 자유로운데. 베이스는 좀 갇혀있는 느낌이 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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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너 어디살어!! 마! 어드레스! 외국에 산다고 해서 막 말 함부로 하는 거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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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액션 영상을 찍는 것인지, 자기 욕을 듣고 화를 내는 것인지. 그는 이서에게 핀잔을 줄까 했지만, 다른 아이들을 보고 참았다. 이서가 오히려 ‘선녀’로 보였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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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보디스트가 약간 좀 아쉬운 감이 있어. 존재감을 조금 더 부각시킬 수 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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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밴드, 알지도 못하면서… 해 보기나 했… 나요? 그렇게 말 할 거면… 와서 해 보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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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이러면 리액션이 아니지 않나? 라고 그는 생각했다) 가만히 듣고 있다가, 욱했는지 그런 소리를 하는 현아. 하지만 그녀조차도 약과로 보이게 만드는 것이 바로 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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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나 이 음악 듣고 눈물이 나왔어. 정말 아름다운 음악인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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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 그정돈가. 그 정도는 아니지 않아요? 내가 보기에는 이 사람, 그냥 조회수 빨아먹고 싶어서 이러는 것 같아. 우리 노래가 막 그렇게 눈물을 좍좍 뽑아낼 정도의 그런 노래는 아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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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자마자 딱 느꼈지. 이 노래는 정말 최고다! 올해 들은 노래 중에서 이 곡만한 게 없는 것 같아. 이건 진짜 진심이야! 정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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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분 이렇게 리액션 비디오 찍으신 다음에 다른 영상에서 또 비슷한 멘트 하셨던데요. 솔직하게 말해. 그냥 돈 벌고 싶은 거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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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리액션의 리액션인지, 아니면 난장판인지. 그렇게 막 자기들 마음대로 카메라를 빌려다가 영상을 찍은 아이들. 그는 우려가 많았지만 일단 가만히 있었다. 하고자 하는 아이들의 의욕을 막기는 조금 그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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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렇게 영상을 찍었으니까, 이제 정 과장님한테 가져다 주면 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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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그런데 괜찮을, 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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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안 괜찮아? 우리가 알아서 일을 해 왔는데! 오히려 칭찬을 해 주시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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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말을 하는 이서를 앞세우고, 영상을 들고 보무당당하게 사무실에 진입한 그와 멤버들. “우리끼리 자체 컨텐츠를 찍어 왔어요!” 라는 말에 기뻐하던 정 과장의 얼굴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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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걸 어떻게 채널에 내보내겠어요. 외국인이나 다른 유튜버 비하했다고 엄청 욕 먹을 걸요? 무조건 논란 생길 수 밖에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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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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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당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바뀌고 말았다. 이서와 다른 아이들을 갈구더니, “왜 이런 걸 안 말리셨어요.”라고 타겟을 바꾸는 정 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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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저는 최소한 제대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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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 한게 문제가 아니라, 이거 그대로 나갔으면 우리 완전 망할 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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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영 과장이 화 비슷한 것이라도 내는 것을 한번도 본 적 없던 아이들은, 살짝 얼어붙은 채 정 과장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그는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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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울하다… 나는 열심히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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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연대책임이라는 것이 있다라는 것을, 그는 다시 한번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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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좌절된 이서의 꿈(은 아니었지만). 하지만 정유영 과장은, 그 아이디어 자체는 좋다고 생각했는지 조금 다른 방식으로 컨텐츠를 제작하기로 했다. 멤버십 라이브 QnA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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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질문이 들어왔습니다. ‘수연님은 화장품 어떤 거 쓰시나요?’… 여기서 이야기하면 광고가 될 것 같아서 굳이 말씀드리지는 않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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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머리를 살짝 꼬았다. [헉], [말해주세요 ㅠㅠㅠ], [알고싶음] 같은 글들이 올라오는 채팅창. 하지만 말해줄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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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모르는데 어떻게 말해주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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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 자체도 잘 안 하고, 해야 할 때는 혜인이 가르쳐준 대로만 하고, 만약에 화장품이 다 떨어지면 이전이랑 똑같은 것 사다달라 해서 쓰고 있는 상황인데. 그런데 “저 화장품에 대해서 잘 모릅니다.” 라고 하면 뭔가 좀 이상하게 들릴 테니까, 답변을 안 하는 게 나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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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이 쓰는 거 저 알아요. 전에 여행갔을 때 봤어. 대부분 시세이도 거 같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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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는 왜 그렇게 잘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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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좀 잘 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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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어처구니 없는 표정으로 이서를 바라보았다. 그가 보라고 화장품을 들이밀고 나 시세이도 거 쓴다!! 라고 광고한 것도 아닌데 도대체 어떻게 본 건지. 제품명을 말해달라는 채팅에 “기회가 되면 알려드릴게요.” 라고 말한 후, 이서와 서하에게 들어온 질문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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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나? ‘이서님과 서하님의 패션 대결에서는 누가 이겼는지 궁금합니다…’ 그러게요. 일본 여행때 뭐 자기들끼리 중고 옷 가게 가서 막 싸우던 건 기억이 나는데… 대결을 한 적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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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의 영역을 존중하기로 했어요. 끝이 안 나는 문제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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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질문에 이서는 쾌활하게 대답했다. 이전에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리던 모습은 하나도 없는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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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죠. 아무래도 계속 가게 되면 결국 제가 이길 수 밖에 없으니까. 줏대 없이 그냥 유행하는 아이템만 끼고 다니는 애는 이게 근본이라는 게 없어가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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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뭐라 그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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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투닥거리기 시작하는 두 명. “무슨 동묘에서 주워올 아줌마같은 무늬 옷이나 입고 다니면서…”, “그 네가 입은 옷 트위터에 가면 이상한 병신계 멘헤라계 이런 애들이 막 그렇게 입고 다니는데 따라 입은 거 아니지?” 등의 험악한 발언이 오가는 사이, 그는 둘의 마이크를 빠르게 빼버린 다음 다른 이야기를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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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질문을 좀 읽어볼게요. ‘저거 저렇게 둬도 되는 거 맞나요?’ 맨날 저러니까 별 상관 없어요. 원래 애들은 싸우면서 자라는 거라고 하잖아요. 그런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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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님… 호랑보다 어리잖아요… 그러면서, 맨날 저랑 호랑한테 반말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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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연령이 더 높으니까 상관 없습니다. 네 다음 질문. ‘수연님을 보고 기타를 연습중인데 하루에 몇 시간 정도 쳐야 잘 치게 될까요?’ 음… 제 생각에 하루에 몇시간 정도 쳐야라는 질문은 적합하지 않아요. 정확히는 하루에 몇시간을 안 쳐야 되느냐가 적합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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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사람을 쳐다보는 듯한 현아의 시선을 눈치채지 못한 채, 그는 계속해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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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 한 2시간 정도는 기타를 안 치고, 나머지 시간은 전부 기타를 쳐야 이제 좀 실력이 느는 겁니다. 처음에 쳐 보면 손이 아프고 그럴 수도 있는데, 그럼 이제 지판을 외우거나, 아니면 악력기를 좀 하거나. 이미지트레이닝을 하거나, 그도 저도 아니면 이제 체력을 키우기 위한 운동을 해야 됩니다. 저 같은 경우는 학교에서 악력기를 쓰고 있는데… 손가락 악력기라고 손가락만 따로 이렇게 쥘 수 있는게 따로 있거든요? 그거 하나랑, 아이언마인드에서 나온 이렇게 손을 필 수 있는 고장력 고무밴드 하나랑. 일반 손 악력기 이렇게 3개. 그 정도를 사용하고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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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내친김에 제대로 보여주기 위해 셔츠의 양팔을 걷어올렸다. 전완근이 명백하게 갈라진 것이 보이는 두 팔. 채팅창이 경악을 금치 못하는 사이 그는 기타를 치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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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치는 사람들 보면 대부분 여기가 엄청 두꺼워요. 이게 그럴 수 밖에 없거든요. 스트로킹 이렇게 하다보면 근육이 발달될 수 밖에 없는 거라서. 이서도 보면 아마 장난 아니지 않을까. 아 하긴 쟤는 살이 쪄가지고 뭐 그런 거랑 연관이 없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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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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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말싸움이 끝났는지 갑자기 덮쳐오는 이서. 거구(여성 기준)에 치여 날아가며 그는 생각했다. 더러워서라도 빨리 좀 커야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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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체 컨텐츠의 촬영이 끝난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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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모인 회의. 그는 턱을 괸 채로 PPT를 쳐다보았다. 뭔가 기대할 내용이 많아 보이는 목차. 직원 한명이 나눠주는 자료를 받아 뒤적거려보니, 말로만 떠들썩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도 뭔가 내용이 있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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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도 이렇게 다들 모여주셔서 감사드리고… 본격적인 내용 전달에 앞서 간단하게 몇가지만 말씀드리자면, 일단은 첫 번째 정산이 있을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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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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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까지는 아니죠. 음반 판매나 음원 수익도 있고, 게다가 출연한 곳도 몇 군데 있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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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쑥 튀어나온 이서의 질문에 대답을 해 주며, 고경민은 자료의 몇 군데를 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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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언플러그드 음반 판 것도 있고, 현아 님 대학 축제 출연비도 꽤나 받았습니다. 음악편지 출연이나 뭐 이것저것 있다 보니까… 그런데 금액이 그렇게 크지는 않습니다. 아무래도 이전에 뮤직비디오 제작비라던가 이런 것들을 깎고 들어가다 보니까. 자세한 것은 따로 나눠드린 정산서를 참조하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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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을 하자 바로 봉투를 열어 정산서를 펴 보는 서하. “아싸, 오늘 저녁엔 무파마 먹어야지.” 라는 중얼거림에, 그는 측은한 나머지 “오늘 내가 소고기 사줄게.” 라는 말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다른 아이들이 자기도 끼겠다는 말을 하고, 혜인이 반쯤 그렁거리는 눈으로 “오늘 회식 하자!!”를 외치는 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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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경민은 그런 상황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야기를 계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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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전에 말씀드렸던 것과 같이 라이브 투어의 구체적인 계획이 나온 상황이므로, 일단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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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장으로 넘어간 PPT가 비추고 있는 것은, 전국의 특별광역시들과 그 외 큰 규모의 도시들. 그 외 작은 도시들도 몇몇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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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은 특별시와 광역시는 기본이고, 각 도마다 한 곳씩 정해서 규모에 따라 공연을 벌일 예정입니다. 예를 들어 순천에서는 400석 규모의 공연이 있을 예정이고, 창원시 같은 경우는… 좀 조율을 하고 있는 상황이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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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전국을 다 도는 거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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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인의 중얼거림. 고경민은 고개를 끄덕인 후, 다음 장을 보여주었다. 공연장소와 날짜가 확정된 PPT. 날짜나 공연장이 확정되지 않은 시 또한 있는 걸 보니, 아직도 조율중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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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맞습니다. 수익이 크지는 않을 것이고, 오히려 손해일 수도 있다는 점은… 이전에 사장님에게 한번 말씀을 드렸던 부분입니다. 물론 투어 전체로 보면 분명 흑자일테지만, 당장 단기적으로 보면 손해를 보는 콘서트가 있다는 이야기죠. 예를 들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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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경민이 띄워주는 작은 창 하나. 공연이 확정되었다는 어떤 한 도시의 공연장. 규모는 꽤나 있어보였으나, 사진을 보면 좀 많이 열악해보였다. 공연장이라기보다는 강당이라던가 극장 같은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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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규모임에도 불구하고 매진을 하기는 좀 쉽지 않은 상황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콘서트를 하는 이유는, 전에도 말했다시피 ‘인지도’ 때문이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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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적인 공연을 함으로서, 적자가 날지라도 전연령대적인 홍보효과를 얻겠다던 고경민의 말. 계획대로 되면 참 좋겠지만, 그것이 쉬울까는 의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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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전국 투어를 한다고 해서 뭔가 홍보효과가 극적으로 일어날까요. 그냥 기사 몇개 나고 끝일수도 있을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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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점은 저도 인지하고 있습니다. 화제를 끌어모으지 못하는 전국 투어는 확실히 그냥 예산낭비일 뿐이겠죠. 그렇기 때문에 일단 준비하고 있는 게 있는데, 하나는 마지막 조율 단계에 있구요. 하나는 얼마 전에 들어온 제안입니다만, 활용할 수 있을 것 같아 계획에 끼워 넣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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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장으로 PPT가 넘어가자, 다른 멤버들이 “오~” 하는 감탄사를 냈다.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지만, 약간 그러고 싶은 기분이 되긴 했다. 확실히 무게감이 있긴 하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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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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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담배를 한대 물었다. 휘휘 날아가는 연기가 마치 일을 떠나보내지 못하고 사무실에 매여 앉아있는 그를 조롱하는 듯 했다. 성질만 나서 담배를 베란다에 집어던지고는 짓밟은 후, 다시 욕지거리를 하며 쓰레기통에 집어넣는다. 그러고는 다시 또 담배를 핀다. 그야말로 광인의 행각이 아닐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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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형 팀장님? 퇴근 안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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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일이 있는데 어떻게 퇴근을 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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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상관이에요. 내일 하면 되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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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형은 한가한 소리 하지 마라, 하고는 컴퓨터 앞에 앉았다. 아직 채워지지 못한 라인업 빈칸 몇개가 그 자리에 있었다. 헤드라이너는 다 차 있었으나, 헤드라이너 바로 밑의 서브라이너가 비어 있는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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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빈칸을 도대체 누구로 채워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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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더로 올라갈 정도까진 아닌데, 그렇다고 밑으로 내릴 그런 레벨은 아닌… 그런 애들이 필요한데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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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형은 꽤나 역사가 있는 락 페스티벌의 공연 기획 책임자였다. 이제는 정통 락페라고는 보기 힘들지만, 모습을 변화시킴으로서 오히려 대중성을 사로잡은 페스티벌. 그리고 해마다 괜찮은 인디밴드를 발견하기로 유명한 페스티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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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자찬이긴 하지만, 그는 그 명성의 30% 정도는 자신에게 지분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의 뛰어난 촉은 적중률이 상당히 높았으니까. 문제는, 그 촉이라는 게 올해는 발동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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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에서 올릴 수도 없고, 위에서 내릴 수도 없다. 그렇다면 새로운 인재를 발굴해야 하는데, 서브라이너급 무게감을 가진 애들이 쉽게 나오냐 이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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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해외 밴드로 채울까.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자료를 뒤적거려보았지만, 쉽게 나올 리가 없었다. 서브라이너급 해외 밴드가 쉽게 찾아질 리도 없거니와 찾아진다 해도 지금 섭외가 가능할지가 문제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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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하시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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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아까 안 갔냐? 지금 빈칸채우기 하고 있지. 골아프네 이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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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온 부사수에게 그는 모니터를 보여주었다. 휑하게 비어있는 서브라이너 하나와, 일반 라인업 몇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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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그 애들한테 연락하신다더니 그건 어떻게 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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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마. 그거는 그냥 해 본 소리지 걔들이 여기 낄 급이 아니지. 그래서 일반 라인업으로 들어오라고 했는데 거절했어. 그날 스케줄이 있다던가 뭐라던가…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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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지금 생각나는 애들이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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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짱을 끼고 선 부사수. 세형은 그 모습을 보고 있다가, 그녀에게 손을 휘휘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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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너도 뭐 딱히 나오는 것도 없구만. 그냥 퇴근해. 나는 좀 더 보고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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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아! 생각났다, 생각났다. 그 애들 있잖아요. 그… 그 누구냐. 걔들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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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걔들이 누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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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 사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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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 사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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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사수의 말에, 그는 턱을 긁적였다. 생각을 안 해본 것은 아니었다. Group Sound라고 하면, 현재 한국 밴드 씬에서 가장 핫하다고 할 수 있는 밴드. 게다가 사운드가 엄청나게 빡센 것도 아니기에 그들에게도 어울리는 라인업.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Group Sound에게 컨택을 하지 않은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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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신생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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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식으로 발표한 곡이 스무곡 남짓이던가. 유명하긴 하지만, 보유 곡 수부터 너무 작은 밴드. 그렇기에 락페스티벌의 관객을 만족시킬 수 있을까 의문이라 부르지 않았던 밴드가 바로 Group Sound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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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노래나, 화제성으로 보면 서브라이너로서의 가치가 있다. 하지만 비어있는 것은 토요일이 아니라 금요일의 서브라이너. 금요일은 락페에서 가장 중요시되는 요일이며, 헤드라이너는 보통 그 해 락페의 간판을. 그리고 서브라이너는 '대중적인 인지도가 상당히 높거나, 혹은 락계의 터줏대감 급'을 부르는 자리다. 급이 안 되는 락밴드를 내보내겠다고 하면 '얘들 약먹었나? 이번 락페 좆망했네'라는 이야기를 한번쯤 들을만한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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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모험을 해볼 가치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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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시점에서 가장 핫한 밴드를 페스티벌에 데리고 온다? 그것도 서브라이너로? 혹자는 모험이라 하겠지만, 그가 보기에는 성공할 확률이 실패보다 높았다. 충분히 승산이 있는 일이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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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걔들 한번 데리고 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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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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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경민이 Group Sound 멤버들에게 보여준 것은, 그 ‘락 페스티벌 출연 제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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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브 투어에 대한 본격적인 홍보 수단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경민은, 투어의 스타트를 페스티벌로 끊고 거기에 더해서 페스티벌에서 “저희 라이브 투어 합니다!” 같은 방식의 홍보를 해볼 계획이 있었다. 그렇기에 역제안을 할 계획이었으나… 오히려 페스티벌 쪽에서 들어온 오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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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동의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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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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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활한 이서의 말과 함께 결정지어진, Group Sound의 GGRF(Grand Groove Rock Festival) 출연. 경민은 곧바로 페스티벌 측에 출연 의사를 전달했고, 일은 일사천리로 처리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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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GRF 2nd Line-up Announce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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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규 라인업을 발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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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19:30 ~ 20:40 Group Sou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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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 Sound의 출연이 발표된 당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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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최대’의 타이틀을 달지는 못했지만, GGRF도 엄연한 대형급 락 페스티벌이다. 페스티벌 출연경험이 몇번은 있고, 단독 콘서트나 전국, 해외 투어 정도는 펼칠 수 있는 레벨의 뮤지션이어야 GGRF 급의 ‘메인 스테이지 서브 헤드라이너’ 자리에 설 수 있다… 인식되는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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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위치에 Group Sound가 선다고 발표되었으니, 음악 커뮤니티가 난리가 난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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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락페 1일차 메인 서브라이너 그룹사운드 ㅋ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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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이거 맞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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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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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세가 엄청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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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돈없는데 ㅅㅂ 장기팔아야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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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아 언니가 돈은 없어도 신장은 있어 팔면 티켓값은 나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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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의 의견은 대략 셋으로 나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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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쟤들 노래 엄청 좋던데 꼭 가봐야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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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페 가볼만한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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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고민하고있었는데 결심했음 가봐야지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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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 갈등된다 쿠팡 좀 뛸까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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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 Sound의 출연에 좋아하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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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출연에 서브헤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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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세 미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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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이르지 않나? 노래는 확실히 좋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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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인업 미치긴 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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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이르지 않나 생각하면서도, 서브라이너급 뮤지션의 탄생을 축하하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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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ㅋㅋㅋㅋㅋ ㅅㅂ 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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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하나 정규 하나 있는 새끼들을 서브에 올리는게 말이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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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페 좆망했네 ㅋㅋ 매년 갔는데 올해는 안갈듯 뭔 ㅅ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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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쟤들 무대에서 보기엔 돈아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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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에 차 키보드를 두들기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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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커뮤니티나, 일반 커뮤니티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Group Sound의 서브라이너 출연을 환영했다. 음악방송에는 나오지 않았다 한들 지상파에 나오면서 그들의 역량을 증명한 밴드. ‘음악편지’에 나왔던 언플러그드 공연이나, 대학 축제에서 보여주었던 모습은 Group Sound를 소위 ‘일반인픽’으로 만들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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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음원차트에서도 장기간 머무르면서 ‘일시적 거품’이나 ‘바이럴’ 같은 것이 아닌, 진짜 사람들이 많이 듣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밴드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서브라이너가 아니라 헤드라이너로 서야 되는 거 아니냐는 의견도 일부지만 나올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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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 Sound의 출연을 이르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태양에 가까이 다가갔다 날개가 녹아 추락한 이카로스처럼 그들의 너무 빠른 성공이 독이 되지 않을까 생각하는 것일 뿐으로… 출연 자체는 환영하는 쪽이었다. 음악 팬 입장에서 혜성같이 등장한 락 밴드를 싫어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그것도 국내 밴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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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물 끓여 마시라고 있는 호텔 커피포트에 속옷을 빨래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처럼, 세상에는 오만 사람들이 다 있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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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부류가 그런 부류였다. 그들은 이번 일을 계기로, 자신이 좋아하는 밴드가 락페에 올라가지 못했다던가 그냥 젊은 애들이 잘나간다던가 음악이 마음에 안 든다던가 하는 이유를 들어 Group Sound에 대한 온갖 악의적인 발언을 비공개 커뮤니티나 SNS에서 일삼았다. 주로 하수연의 과거에 대한 이야기라던가, 최이서가 SNS에 올린 사진 등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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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들 이거 뭐하는 거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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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설 및 비아냥 캡쳐 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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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나 음습하네 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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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렇게 비공개 커뮤니티에서 들끓던 유언비어는, 팬클럽 중 누군가가 캡쳐해서 끌어냄으로서 진압되었다. 탈커뮤를 하거나 타 커뮤니티에 박제되고, 심하게는 신상이 털리기까지. 그렇게 오늘도 커뮤니티의 하루가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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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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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더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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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쉬자!! 나 못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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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외치고는 베이스를 메고 드러누워 버린 이서. 들이쉬고 내쉬는 호흡이 스트랩에 결박된 가슴을 조금씩 흔들어놓고 있었다. 그는 그 모습을 보다가, 다가가 이서의 팔을 걷어차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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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리 일어나. 연습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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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 3시간 연속 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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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시간 연속 한게 중요하냐? 지금 못 맞췄다는 게 중요한 거지. 3시간을 연습한 게 아니라 지금 3시간을 그냥 땅바닥에 내다버린 거나 마찬가지인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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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함을 지르는 이서를 두고, 그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중요한 것은 ‘연습한 시간’이 아니다. ‘연습으로 무엇을 이뤄냈는가’가 중요하다. 십 분을 연습했어도 목표를 이뤄냈다면 알찬 연습인 것이고, 천 시간을 연습했어도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다면 시간을 버린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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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작 3시간 밖에 안 했는데 드러눕다니 요즘 너무 많이 해이해진 것 같긴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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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드 초창기에는 어땠는가. 그냥 모이자마자 연습부터 했고 시간 같은 건 계산하지 않았다. 물집이 잡히면 잡힌대로 악기를 잡았고 팔이 아프면 아픈대로 연습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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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이를 악물고 연습을 한 결과가 지금인데, 이제는 능숙해져서 더 연습을 알차고 오래 할 수 있는 것에 감사해야지 왜 3시간밖에 안 했다고 드러눕는가. 기강을 잡아야 되지 않을까 하고, 그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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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쉬고들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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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어떻게 기강을 잡아야 할까. 그가 어릴 적에 당했던 것처럼 종아리에 회초리질이라도 할까… 라고 생각하고 있던 사이, 정유영 과장이 커피와 디저트를 사가지고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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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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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남자친구가 있어서요!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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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친구 있으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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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한 6년쯤 된 거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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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를 사왔다 싶더니 갑자기 테이블에 앉아 연애 이야기를 하는 이서와 정 과장. 뭐가 그렇게 궁금한지 이것저것 물어보고 있는 이서를 두고, 그는 쿠키를 베어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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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맛이 이상한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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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거! 진저브레드(생강쿠키)인데요! 맛있지 않나요? 생강맛이 엄청 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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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맛이 희안하다고 생각하며, 그는 쿠키를 그냥 바로 입에 털어넣었다. 그러고 있던 그에게 다가온 것은 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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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스티벌 무대는 어떻게 구성할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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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그쪽에서 이야기를 해 줘야 알겠지만… 작년에 사진 보면 알지 않을까. 그리고 뭐 페스티벌이니까 일단 무대 연출 같은 건 좀 힘들 것 같긴 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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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좀 해 봐야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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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해 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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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에 고개를 끄덕이는 서하. 그는 “혹시 뭐 결정된 거 있으면 이야기 좀 해 주고.” 라고 말한 후, 커피를 살짝 마시고서 펜을 잡았다. 쉬는 김에 공연 구성에 대해서 좀 생각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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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그때 바이테일러드 했던 때랑은 완전 다르게 구성을 해야겠지. 시간도 다르고, 관객들의 구성도 다르고, 규모도 다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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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테일러드 페스티벌은 1일 최대인원 5천명 정도의 규모를 가진 페스티벌이었다. 인디 계열에서는 엄청날 정도로 크지만, 본격적인 상업 페스티벌 레벨에서는 작은 수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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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GGRF는 3일간 최대 관객 10만명을 논하는 거대 규모의 페스티벌이다. 1위의 15만명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2일간 1만명을 동원하는 바이테일러드와는 산술적으로만 봐도 10배의 격차가 있을 정도의 레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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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시간이나 관객의 기대치 또한 다를 것이니, 지금까지의 구성대로 가면 분명… 뭐, 욕은 먹지 않더라도 실망할 관객들이 조금 있으리라고 그는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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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하면 그의 밴드 Group Sound는, 항상 색다른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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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전통 아닌 전통이 이번 페스티벌에 이어지지 않을 이유도 없겠지. 고 팀장 말마따나 투어 홍보도 해야 되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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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머리를 긁적이고는, 펜을 들었다. 관객들에게 보여줄 몇가지 새로운 것을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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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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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락페는 완전 처음이네. 아니, 이런 곳 자체가 처음이긴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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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대한민국의 여학생답게 아이돌 덕질을 하던 시기를 지나 애니메이션 덕질을 하고. 애니메이션 음악 덕질을 하던 것이 불과 얼마 전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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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웃도어보다는 인도어파에 가깝던 것이 바로 그녀, 아윤이었는데. 어느새 그녀는 락 페스티벌에 혼자 오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것도 다른 밴드들은 잘 모르는 상태로. 단 한팀만 보겠다는 일념을 가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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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뭔가 재미있는 것 같긴 하다. 처음에 생각하던 건 무슨 문란한 파티 그런 거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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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스티벌은 반쯤 나체인 상태의 언니 오빠들이 돌아다니고, 서로 음악에 맞춰 부비부비 춤을 추는 그런 거 아닌가? 라고 생각했던 그녀였다. 하지만 그런 것과는 전혀 다른 광경에, 그녀는 안심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당연했다. 그녀가 봤던 건 락 페스티벌이 아니라 일렉트로닉 뮤직 페스티벌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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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어디 계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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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푸드존에 있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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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 저 아직 못들어감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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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게 놀고들 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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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ㅠㅠ 부럽다 미자는 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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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미엄(팬클럽) 한정 공식 디스코드. 오늘 페스티벌에 오는 사람과 가지 못한 사람, 갈 수 없는 사람의 부러움이 뒤섞인 가운데 모이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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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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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회장님 오셨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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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회장 아니에요 으흐흫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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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목질을 방지하기 위해 닉네임으로만 서로를 부르고 연락처 교환은 안 하는 가운데, 락페에 대해서 잘 아는 것 같은 회원이 그들을 이끌었다. 메인 스테이지에 갔다가 서브 스테이지에 갔다가. 푸드존에 들르기도 하고, 락페의 문화를 소개해주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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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락 페스티벌만의 특별한 문화는 슬램, 모싱 등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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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뭔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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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특이한 댄스인데, 나중에 직접 보시면 감이 올 거에요. 보통 이제 중간에 보면 막 공간 비워놓은 그런 데가 있을텐데, 거기가 이제 슬램존인 거죠. 거기서 슬램도 하고, 모싱도 하고, 월 오브 데스도 하고… 뭐 그런. 원래는 좀 다른 장르, 주로 하드코어나 펑크 같은 거에서 하는데 요즘엔 이상하게 건수만 보이면 슬램을 해가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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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칭 ‘락페잘알’이 그렇게 문화를 소개해주는 동안, 아윤은 무대를 바라보았다. 전혀 알지 못하는 밴드지만, 무대를 장악하고 있다는 것이 확실히 느껴지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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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공간을 비워놓고 뭔가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저것이 ‘락페잘알’이 말한 그 슬램인가 모싱인가 하는 그것 같았다. 조금 과격하기도 해서 생소하지만 즐거워보이는 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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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음악을 감상하고 있던 아윤이 위화감을 느끼기 시작한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공연이 한창 진행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뭔가 점점 자리를 비우는 사람들. 보던 것을 멈추고 다른 곳으로 가고 있는 모습을 보며, 아윤은 왜 저러나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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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으로 식중독이라도 걸린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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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사람들이 막 빠지고 있지 않아요? 아직 공연중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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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맞다! 지금 빨리 가야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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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윤의 말에 갑자기 정신을 차린 듯 외치는 ‘락페잘알’. 그 외침에 문득 아윤은 주변을 돌아보았다. 걷는 사람도 있고, 뛰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다 전원 메인 무대를 향해 가고 있는 것은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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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다 왜 가는거에요? 아직 다음 무대 한참 남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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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리 안가면 앞에 자리가 없어요! 우리 애들을 못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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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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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에 아윤은 바로 몸을 돌려 이동하기 시작했다. 우리 애들을 못 본다니 이게 무슨 소리인가. 그럴 수는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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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렇게 생각한 것은 그녀 뿐만이 아닌 듯, 메인 무대로 가는 길에는 이동하는 사람밖에 없었다. 아까 전 한참 사람이 붐비던 푸드존은 갑자기 휑해졌다. 방금 전까지 먹던 것이 분명한 닭꼬치와 맥주 같은 음식들도 그냥 놓여 있을 정도로. 한참 늘어서있던 화장실의 줄도 엄청 짧아진 상황이었다. 한시간 정도는 참을 수 있다는 걸까. 모든 걸 다 내려놓고 갈 정도로, 우리 애들이 인기가 많다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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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일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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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윤은 그렇게 생각하며 메고 왔던 카메라를 슥 꺼냈다. 저 멀리서, 그녀의 ‘아이돌’… 하수연이 기타를 멘 채로 무대에 등장하는 것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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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전까지 펼쳐진 메탈 밴드의 공연. 그는 깃발을 어깨에 걸친 채로, 만족스럽게 스테이지를 벗어났다. 아직 공연이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땀에 온통 젖어버려 불쾌하긴 했지만, 오랜만에 제대로 된 슬램을 할 수 있어서 만족스러웠다. 이 정도는 놀아줘야 락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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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공연이 누구더라. 메인 서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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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며 생각해보니, 요즘 인기가 많은 애들인 Group Sound였다. 메인에 서브로 설만한 자격은 있고 사람들도 좋아할 것 같긴 하지만, 그가 놀기에는 조금 미묘한. 왜냐하면 뭔가 방방 뛰거나 슬램을 치거나 모싱을 추거나… 그런 과격한 놀이를 하기에는 조금 심심한 노래들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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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메인 스테이지에 진입했다. 사람들이 다 여기 몰렸는지 빼곡하게 서 있는 가운데, 거대한 깃발을 휘날리는 채로. 조금씩 비켜주는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면서 다른 깃발들이 모여 있는 슬램존 쪽으로 향했다. 그러는 사이 공연이 시작되려는지, 기타가 마이크를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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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하수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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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장이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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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크웨어에 프릴, 사이하이 삭스라니. 걸그룹인지 아니면 락밴드인지. 두개의 정체성이 혼재된 듯한 복장을 한 그녀는, 사람들의 주목을 받으며 느긋하게 말을 이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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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기다리신 분도 있을 것 같고, 저희를 처음 보는 분도 있을 것 같고. 저희의 음악을 들어본 분도, 아닌 분도 계실 것 같구요. 하지만, 모두가 즐길 수 있는 공연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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락밴드보다는 가요무대에서 인사를 하는 노년 가수의 느낌이 나는 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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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주세요, [공중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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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 감상은, 와아아아-! 하는 소리에 묻힌다. 경쾌하게 튀기는 베이스 슬랩. 그도 많이 들어봤던 노래, [공중정원]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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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들 대표곡이 이거일텐데, 이걸 첫 번째로 시작해버린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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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지막히 일어나 창밖을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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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멀리 하늘에 뭔가 떠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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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쳐다봐도 알 수가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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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학, 원형도넛, 그리고 공중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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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곡부터 터져나오는 떼창. 기타가 손을 저으며 떼창을 유도하는 동안, 베이스는 열심히 피킹을 하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살짝 어려운 리듬에도 불구하고, 단 한 파트도 놓치지 않고 따라 부르는 관객들. 그는 그 모습을 보며 인기가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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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거 말고도 많다, 그런 자신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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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에 그렇게도 생각했다. 보통 히트곡은 공연의 하이라이트 부분에 넣어놓기 마련이다. 하지만 Group Sound는 그와 달리 히트곡을 맨 처음으로 배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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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를 알 수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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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떠 있기만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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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정원에 나는 끝없이 올라만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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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향한 내 마음도! 흘러가는 세월도! 전부 모래 위에 휘청이며 넘어질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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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를 먹먹하게 할 정도의 떼창. 그는 생각했다. 이렇게 초반부에 기대감을 높여 놓으면, 후반부에는 도대체 어떤 것을 보여주려는 걸까. 보통은 별 거 없지만, 이 애들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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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면대의 칫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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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붙은 비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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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때가 낀 거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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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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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느으으은!! 별이 되어어어 갈 지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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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는, [공중정원] 만은 못하지만 버금가게 히트했다고 볼 수 있는 [별이 되어가는 것]. 만만찮게 터져나오는 떼창에 모여있던 팬들과 아윤은 행복해했다. ‘나만의 작은 밴드’였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락페에서도 떼창이 터져나올 정도가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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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렇게 빨리 템포를 가져가도 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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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윤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락페는 잘 모르지만, Group Sound의 곡이 몇개 없다는 것 정도는 안다. 있는 곡들은 대부분 사람들이 들어 봤지만, 70분짜리 공연인데. 후반부에는 무슨 없는 곡이라도 만들어 부르겠다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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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이 되어가는 것일지도! 몰! 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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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는 가운데 [별이 되어가는 것]이 끝나고, 빠른 템포로 시작되는 다음 곡. 휘몰아치는 곡의 향연에 박수를 보내면서도 아윤은 생각했다. 집에서 듣던 것과 곡이 다르다고. 현장감의 문제가 아니라, 템포나 음정, 리듬… 아무튼 뭔가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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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슬 중반부로 접어드는 공연. 그는 조금씩 리듬을 타며 무대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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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진짜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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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정원], [별이 되어가는 것], [벨몬트 유리병], [그 거리를 뛰어넘어], [잿빛의 나날들]. Group Sound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 곡들이 초반부터 줄줄히 쏟아진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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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의 반응이 줄어든 것을 보면, 이제부터는 명백히 팬들만 아는… 잘 모르는 곡의 시간이 될 것이 분명했다. 락페에서 극도로 꺼린다는, ‘자기들만 아는 노래’가 나오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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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리듬을 타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아니 멈출 수 없었다. 그것은 왜일까. 이들의 노래가 신나거나, 댄서블하거나, 다때려부수거나… 아무튼 그런 노는 데에 적합한 그런 것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계속 머무르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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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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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로는 알 수 없지만, 몸으로는 느껴진다. 확연히 빨라진 템포. 살짝 식어든 분위기는, 마치 들끓는 용암의 표면만을 보는 듯한 느낌이다. 얇디 얇은 거죽 아래에는 저 깊은 땅 속 아래에서부터 끓어올라가는 열기가 존재한다. 지금 그가 느끼는 현장의 분위기가 딱 그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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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본능적으로 깃발을 들어올렸다. 아무런 맥락없이 휘날리던 깃발들이 조금씩 그에게로 모인다. 아는 깃발도 있고, 모르는 깃발도 있다. 자주 보는 얼굴들에게 인사를 하며, 그는 공간을 넓혀 슬램핏(Slam fit. 슬램을 하기 위해서 만드는 임의의 공간)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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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들려온 것은, 그가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베이스 리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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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처음만 해도 쫀득하게 슬랩을 치던 톤의 베이스였는데. 지금은 육중하게 무거워진 그런 느낌. 저음이 뭔가 물리적으로 무대 아래로 밀고 내려와 그들을 밀어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을 때, 무대에서 곡명이 외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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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rnstun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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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다가온 드럼의 굉음과 함께 그들을 덮친 디스토션 톤. 머릿속으로는 아까전과 별반 다른 것이 없다고 느끼면서도, 몸은 다르게 반응한다. 이것은 분위기 자체가 바뀌었다. 마치 냄비 안에서 물이 끓어오르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개구리처럼, 어느새 스테이지는 송두리째 변화해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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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곡이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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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윤은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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훨씬 느린 템포와 침체되는 분위기. Group Sound의 첫 EP, [Plastic Nostalgia]에 수록되었던 그녀의 최애곡 중 하나. 잔잔하게 우울에 잠기고 싶을 때 듣는 곡이었던 [Sternstunde]는, 어느새 굉음을 내는 기타와 거의 두 배는 빨라진 템포로 그녀를 맞이하고 있었다. 강력하게 울리는 드럼과 웅웅대는 저음, 강력한 효과음. 그리고 그 위에 올라간 카랑카랑한 보컬과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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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이 일어나려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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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어! 뛰어! 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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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십분 전, 시작때만 해도 얌전히 노래를 부르던 ‘도넛단’은 어느새 락페의 광신도가 되어 쉼없이 점프를 하고 있었다. 체력이 바닥나는 것도 모르는 채로. 그녀는 이어지던 생각을 포기하고, 분위기에 합류해 점프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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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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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잠시 숨을 골라주세요. 이제 시간상으로 거의 마지막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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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돼!!” 라는 고함소리. 하지만 베이스는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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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들어보신 분도 있으실지도 모르겠지만! 앨범을 사셔야 들을 수 있는 곡이지만! 무대에서 한번 불러보고 싶었던 곡이에요! 들어주시길 바랍니다… 일모도원(日暮途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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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숨을 고르다가 고개를 번쩍 쳐 들었다. 들어보고 싶었지만, 오프라인 앨범 한정이라는 이야기에 들어보지 못했던 바로 곡. 기타 솔로가 그야말로 환상적이라는 그 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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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은 저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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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길은 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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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거꾸로 걸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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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야할 일들을 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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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에 잠잠해지는 스테이지. 얕게 깔리는 애트모스피어. 숨을 몰아쉬며 잠시 멈추는 관객들과, 시그니쳐 손동작을 선보이는 몇몇 팬들. 잠잠히 연주되는 기타. 그 위에 덮어지는 보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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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손이 힘을 잃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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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야 할 일을 못하게 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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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저 너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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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시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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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히 빛날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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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나나, 나나, 나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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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려온 것은 허밍. 베이스가 아니라 기타의 마이크에서. 따라부르라는 신호인지, 두어번 반복되던 허밍은 곧 관객들의 목소리에 묻힌다. 박자에 맞춰 손을 오르고 내리며 조금씩, 또 조금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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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나나, 나나, 나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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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기타는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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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보드도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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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이지에 들리는 것은, 박자를 알리는 드럼과 베이스. 관객들의 떼창. 의문을 표할새도 없이 무대에서 던져진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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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준비 되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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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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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가 작아!! 뭐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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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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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더!!! 뭐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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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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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습니다!! 그러면 이제, 하수연 지휘자님의 지휘를 따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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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력한 스트로크가 울려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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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페지오 위에 얹힌 그 소리는, 사람들의 자세를 자연스럽게 낮춰버렸다. 무릎을 굽히고, 고개를 숙이고. 조금씩 리듬을 타며, 다가올 미래를 대비한다. 넓어지는 슬램 핏들. 뒤로 물러난 관객. 충격에 대비하는, 핏 안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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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순간,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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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박자 다음이다. 이제 올 것이 온다. 종아리가 자연스럽게 부풀고, 발끝에 힘이 들어간다. 고개를 슬쩍 들어보니, 다들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 이제 진짜다. 곧 온다, 다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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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들에게 온 것은, 폭풍과도 같은 드럼의 몰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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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와옹아앙아아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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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커를 찢어버릴 정도로 울리는 기타. 그를 압도해버리는 관객들의 함성. 앉아 있던 사람은 사력을 다해 점프하고, 슬램 핏 내의 사람들은 혼신의 힘을 다해 서로와 부딪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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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폭탄이라도 터진 듯한 에너지가 스테이지에 감돌았다. 모든 힘을 다 쏟아낸 후, 만족감을 느끼는 관객들. 메인 헤드라이너는 보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라고 생각을 하는 사람들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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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끝나지 않은 기타의 소리가, 그들을 다시 한번 자연스럽게 일으켜 세웠다. 좀비처럼 함성에 스러지며 거대한 서클핏을 형성하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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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둘! 셋! 넷! 뛰어! 뛰어! 멈추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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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스의 육성과 기타의 선율은, 모든 힘을 쏟아낸 메인 스테이지의 사람들을 마치 항아리 속 코브라를 다루는 것마냥 자신들의 의도대로 이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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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 Sound의 연주가 끝난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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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락페 실시간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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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사운드가 걍 다 개찢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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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그냥 집에갈라다가 지금 지쳐서 쉬는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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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브스테 헤드 못보겠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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ㅅㅂ존나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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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뭔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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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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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드 안보고 간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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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걔들 노래 좋긴한데 찢을 게 있음? 왜 지침? 뭐 억슬램이라도 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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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걔들 자체가 ㅅㅂ 슬램 서클핏 이런거 존나 유도하면서 사람들 실신시킴 지금 메인 난장판임 쓰러져서 쉬는사람 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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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그룹사운드 안보고 좀 밥먹고 헤드 보러 갈라고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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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봤으면 진짜 피눈물나게 후회했을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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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이브랭스 좋은밴드인건 아는데 솔직히 이거만큼 할거라고 생각안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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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인은 걍 맨뒤에서 들어야겠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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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ㅅㅂ 뭔일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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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나도 갈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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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새끼들 낚시하는 거 같지가 않은데 ㅋㅋ 후기가 다 이런 거 보면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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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서브스테이지 대참사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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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브 헤드 올라왔는데 사람들이 스테이지 반도 안채움 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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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사운드 애들이 메인에서 다찢어가지고 그냥 존나 지쳐서 다 쉬는중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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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솔직히 지금 집에가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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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정도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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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진짜존나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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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연 실황 빨리 안올라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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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위기는 너무나도 급격하게 가라앉았다. 무대가 망했다거나, 참사가 났다거나 하는 이유는 아니다. 단지 방금 펼쳐진 무대가 너무 좋았을 뿐. 그 때문에, 마치 마약이라도 맞은 듯 도파민을 끊임없이 분출하며 날뛰어대던 관객들이… 순식간에 현실로 돌아왔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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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한가지 이유가 더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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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저희 라이브 투어 곧 할 예정이에요!! 많은 관심 부탁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오늘 너무 즐거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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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들이 차마 자신들의 다리로 서지 못할 정도로 뛰어놀게 한 다음, 공연을 마치면서 했던 말. ‘곧 Group Sound의 콘서트가 있을 예정이다’ 라는 이야기. 그 이야기는, 사람들의 머리에 어떤 생각을 심어주었다. ‘곧 라이브 투어가 있을 예정이라는 것은, 지금쯤 예매를 한다는 거겠지?’ 라는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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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 인해 사람들은 불쌍한 서브 스테이지 헤드라이너를 찾아가기보다는, 주저앉아 “야 얘들 라이브 투어 어디서 예매하는데?” 를 외쳐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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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딱 이 시점에 맞춰 올라간 라이브 투어 예매 일정 안내 게시물은, 음악 커뮤니티에서 ‘짤’로 공유되며 사람들의 뇌리에 ‘Group Sound Nationwide Live Tour’를 각인시켰다. 전국 각지를 돌며 작은 도시든 큰 도시든, 대부분의 시도에 방문한다는 컨셉의 투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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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경민이 생각하던 시나리오대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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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주는 계속해서 이어진다. 한 곡이 끝나려나 싶었더니, 소녀는 연속해서 다른 곡을 연주하기 시작한다. 마치 하나인 것 처럼 느껴지는, 그러나 상반되는 두 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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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성은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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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건이 있었음을, 그럼으로써 달라졌다는 것을 암시하는 듯한 곡. 질척이는 과거에 대한 이별과, 새로운 미래에 대한 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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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랑거리는 기타 소리는, 몇 분간 끊임없이 노래하다 이내 잠든다. 우레와도 같은 박수가 터져나오기 직전, 소녀는 손을 살짝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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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하지만 곡이 하나 더 남았습니다. 박수는 그 다음에 부탁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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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은 걸어가 일렉 기타를 다시 잡고는 앰프 세팅을 했다. 기대감이 섞인 침묵 속에서, 조금씩 이어지는 기타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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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가 내린 밤 하늘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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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쳐오던 수많은 별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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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둘씩 일렁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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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밤의 창문을 열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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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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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홍은 눈을 가늘게 떴다. 명전 선생님의 노래 중 유일하게 노래방에 수록되었던 곡. 아주 가끔 술자리에서 같이 노래방에 가면, 부르는 것을 볼 수 있었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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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곡은 별다를 것 없는 올드 블루스였다. 슬픔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는 스타일의 노래. 은은하게 비치는 감정의 편린 외에는, 흥겨운 기타와 드럼 소리만이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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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의 난 그립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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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며가던 행복을 맞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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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언젠가 수없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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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왔던 시간을 좇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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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홍이 느끼기에, 그 시절의 노래들은 대부분 그랬다. 물론 그가 그 시절을 살지는 않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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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자가 끊어질 정도의 슬픔조차 시간의 모래에 묻으면 언젠간 사라지는 일이라고 생각했기에 그랬을지도 모른다. 혹은, 나타내지 않는 것이 성숙이라고 생각했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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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어도 명전 선생님은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았다. 슬픈 노래도 슬프지 않게, 옛 것을 그대로 따르던 사람. 과거를 존앙하고 미래를 사양하던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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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오늘도 또 내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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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이러고 있을지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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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어제도 또 모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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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고 또 바랬던지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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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저 아이는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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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을 솔직하고 과감하게 표현한다. 격류와도 같은 연주와 노래. 치솟아오르는 회한. 불타오르던 후회는 어느새 재가 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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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아침 봤었던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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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집 앞의 새였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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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그저, 눈을 감고 듣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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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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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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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를 마치고 내려온 수연. 잠시 콘서트가 쉬는 틈을 타, 수연에게 많은 사람들이 달라붙어 이야기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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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 너무 잘 들었어요!!”, “기타 언제부터 쳤나요?” “우리나라의 미래가 밝은 것 같습니다.” 등등. 그는 그 모든 질문들에 대해 짧게 대답하거나, 웃어 넘기며 대기실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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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대기실에서 들려오는 이야기는 아까와는 좀 다른 성격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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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사람들이 하수연’의 기타실력과 ‘서명전’의 가르치는 실력을 칭찬하는 가운데, 몇몇에게서는 의심에 가득찬 발언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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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거 명전 형님이 작곡한 거 맞나?”, “쟤가 작곡한 거 아냐?” 같은 의문 섞인 이야기나, “스승님 생각하는 마음이 너무 극진한데” 같은 비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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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심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누가 의심을 하지 않겠는가. 몇십년 동안 작곡에 소질을 보인 적 없던 사람이 갑자기 죽기 직전 제자를 들이면서 각성해서 괜찮은 노래를 만들었다? 믿기 어려운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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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인이라면 믿을 이야기지만, 그들은 뮤지션이다. 그런 일이 일어나기는 상당히 힘들다는 것을 그들은 안다. 그런 이야기를 믿는 것보다, 늙은 스승이 늘그막에 탐욕이 도져 제자의 것을 뺏었다고 생각하는 게 더 간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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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씨. 내가 정말 미안한데, 자네 스승님을 욕보인다, 이런 건 아니고. 진정하고 들어줬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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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 ‘서명전’과 친했으나, 어느 날부터 대립하게 되었던 늙은 뮤지션. 그 뮤지션은, 떨리는 목소리로 수연에게 질문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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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명전이가 그 곡을 만든 게 맞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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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눈빛에는, ‘사실 네가 만들거나 관여를 한 게 아니냐?’ 라는 질문이 어려 있었다. 그 질문에 수연은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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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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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 그녀가 기타에서 꺼낸 것은, 상당히 낡은 작곡노트. 이것이 '서명전'의 글씨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으나… 상당히 오래 전 글을 배웠다는 게 느껴지는, 세월과 연륜이 가득한 고풍스러운 필체가 빼곡히 담긴 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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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께서 완전 다 만드신 건 아닙니다. 여기도 보시면 제가 부른 곡과 좀 다른 부분이 많긴 하죠. 여기도, 여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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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이 짚어주는 부분은 실제로 수연이 다르게 불렀던 부분. 둥글둥글한, 딱 봐도 ‘여고생 글씨체’인 것이 적혀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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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메인 멜로디는 아니다. 메인 멜로디는 처음부터 끝까지 수정되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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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곡도 같아요. 제가 수정한 부분은 일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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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걸 언제 만들었다고 이야기를 들은 적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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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오, 따로 들은 적 없습니다. 애초에 이 노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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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은 자신이 들고 온 기타 케이스를 가리켰다. 케이스 안쪽 숨겨진 비밀 주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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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안에서 꺼낸 거라서요. 저 안에 뭔가가 있는 줄 몰랐습니다. 선생님 추모 콘서트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것저것 뒤져보다 보니 나온 거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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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은 그런 말을 하고 노트를 바라보았다. 상당히 낡아버린 노트. 살짝 눈시울이 붉어진 수연의 눈동자를 보고, 사람들은 누군가의 말년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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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된 길을 걸어왔던 세월. 자신이 옳은 줄만 알고 기고만장했던 초반과, 뭔가 잘못되었음을 알고도 인정하지 않던 중반. 더이상 되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아버린 후반의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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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말년에 제자를 거두고 제자의 재능에 자극을 받았다. 수십년 동안 걸어왔던 자신의 길에서 내려와, 아무도 모르게 틈틈히 새로운 곡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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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 곡은 생전에 빛을 보지 못했다. 스승은 죽었고, 노래는 그대로 어둠 속에서 길을 잃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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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가 다시 그것을 들추고, 지금 이 자리에서 연주하기 전까지는. 그에게 영감을 준 당사자가 연주하기 전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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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가 숨을 킁 들이쉬었다. 누군가는 아무것도 아닌 듯 입을 크게 벌려 하품을 하거나, 눈을 세차게 깜빡이거나, 아무도 모르게 눈가를 훔쳤다. 왠지 모르게 그런 사람들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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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사람들 가운데에서, 수연은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스승의 마지막을 추억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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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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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심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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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그저 ‘아무리 그래도 작곡 실력이 보통은 됐다’ 라고 말하기 위해서 벌인 일이었다. 죽은 사람의 명예 같은 거 챙겨봐야 뭐 하겠냐만, 아무튼 명전이 ‘서명전’이었던 것 자체는 사실이니 화가 날 법 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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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그가 의도한 부분은 이미 한참 전에 넘어선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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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에서 방송을 하거나 영상을 올리는 늙은이들 대부분이 “우리가 명전이를 저평가했는데, 말년에 그런 곡 쓴 거 보니까 정말 살아만 있었다면 싶더라. 명전이가 그립다.” 같은 말이나 하고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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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살아 있었으면 그런 곡 못 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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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노트북을 덮고는 머리를 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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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전’으로 살아 있던 때의 그는,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머리가 살짝 굳어 있던 것 같았다. 이건 이런 장르이니까 이런 느낌으로 이렇게 써야 해. 쓰다가 좋은 느낌의 뭔가가 튀어나와도, 아니 이건 내가 원한 게 아니니까 버리고 원래대로 가자… 뭐 이런 일들의 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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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하수연’이 되고 나서는, 이 아이가 원래 가지고 있었던 창의력과 재능… 뭐 여튼 그런 것들과 함께, 머리가 말랑해진 느낌이 들었다. 이전에는 거북했거나 혹은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던 것들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고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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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그가 ‘서명전 추모 콘서트’에서 보여주었던 곡은, ‘하수연’이 되었기에 쓸 수 있었던 곡인 것이다. ‘서명전’이었다면 절대로 쓰지 못했을 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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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이미 일어난 일이니 어쩔 수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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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그렇고, 명전은 요즘 뭔가 충동적으로 움직인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전이었다면 확실히 하지 않았을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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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생각해보면… 이 애의 재능이 나에게 영향을 준다면, 이 애의 성격 또한 나에게 영향을 주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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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노트북을 덮은 채 가만히 생각해보았다. 충분히 있을 법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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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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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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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에서 어깨를 치는 충격에, 명전은 “크헉.” 소리를 내며 눈을 떴다. 그를 노려보는 음악 선생과, 옆에서 꼴 좋다는 표정을 하며 그를 비웃고 있는 다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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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그래도 대놓고 그렇게 자고 있는 건 좀 아니지 않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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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아…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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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고개를 한번 푹 숙이고는, 음악 교과서를 붙잡았다. 요즘 고등학생들이 음악도 배우나? 수능이니 뭐니 하느라 바쁘지 않나. 어차피 자신 외에 다른 애들 또한 죄다 딴짓 하는 건 마찬가지인데, 왜 나만 잡고 있는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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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다음 시간에는 악기 수행 평가를 볼 거에요. 곡은 아까 정해준 곡 중에서 골라서. 악기가 없는 사람은 리코더나 단소, 악기를 다룰 줄 아는 사람들은 본인 악기를 가져오면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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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이 마칠 무렵, 음악 선생은 그런 이야기를 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대충 리코더나 가져와서 불어야겠군…’ 이라고 생각한 명전과 달리, 다인은 완전 신난 기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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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아 너 기타 가져와서 쳐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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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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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그럴까? 헣헣ㅎㅎ헣” 하며 수연이 자신의 실력을 뽐낼 기회를 받아들일 줄 알았던 다인. 하지만 돌아온 수연의 대답은 너무나도 달랐다. 전혀 그럴 생각이 없다는 눈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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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왜! 이럴 때 한번 보여 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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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찮은데… 기타 엄청 무겁고, 게다가 뭐 그렇게까지 점수 받아야 하는 것도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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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라며 중얼거리는 명전. 그러나 다인은, 자신이 원하는 대답을 얻을 때까지 명전에게서 떨어질 기색이 전혀 없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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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GRF가 끝난 다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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락페 글이 올라올만한 커뮤니티들은, 대부분 다 난리가 났다. 주로 Group Sound 관련 이야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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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차 고양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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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stic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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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들 홍대 패왕인걸로 아는데 여기서 봐서 상당히 반가웟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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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근본메탈밴드답게 놀기도 좋더라 사람은 좀 적긴 했는데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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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퀄이 좋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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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러볼라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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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 기대했던 밴드 중 하나지만 들었을땐 상당히 실망이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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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팅을 잘 못한건지 뭔지 사운드가 다 묻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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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컬도 불안하고 믹싱이 안된건지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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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지슬램이 화룡점정이었음 무슨 시발 잔잔한곡에 슬램치고 있는거보고 웃겨서 영상찍으니까 뭐라고 하더라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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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튼 좀 듣다가 그냥 나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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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사운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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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제일 기대 안했던 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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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까지 나는 얘들을 현재 락씬 최대의 거품밴드라고 생각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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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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걍 이새끼들은 음악 자체를 잘함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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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할말없고 걍 가서 들어보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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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에 라이브투어 하던데 얼마가 되던 예매하는게 남는 장사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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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년 안에 월드투어 돌면서 한국에 없을 애들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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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나 기타같은거 좋아해서 하수연 기타 쓰는거 봤는데 재즈마스터에 커스텀 엄청 한 것 같더라 세팅이 궁금해짐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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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체로 무슨 최면어플이라도 맞았나 왤케 다들 이런반응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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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걍 안가보면 모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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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가보면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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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ㅋㅋㅋ 얼마전까지 그사 그냥 개씹거품밴드라고 까던 놈이 회개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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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처음에 얼굴보고 오 했는데 나중에는 얼굴이고 뭐고 볼 시간 없음 그냥 존나 뛰어노느라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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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이브랭스 트윗 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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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velength @waveleng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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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페스티벌 무대 정말 좋았습니다! 약간 관중들이 지쳐있었던 게 느껴지던데, 앞선 무대를 보니 이해가 되더군요. 그들의 공연을 보고 우리도 팬이 되어버렸으니까요. 아래의 음악을 들어보세요! 그녀들은 최고의 밴드 중 하나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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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youtub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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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들 뭔데 그룹사운드 기습찬양하고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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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걍 가서 들어보면 안다니까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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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중정원 아닌게 의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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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공중정원 말고 일모도원이 하이라이트였음 나는 솔로 그렇게 잘 치는 사람 한국사람중엔 못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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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 걔네 음악 다 들어본 거 같은데 왜 저건 모르는 곡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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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저거 피지컬 앨범 한정 음원임 ㅋㅋ 에코사운드 어디 뭐 인수되고 난 다음에 장사 엄청 잘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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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하나의 불호도 없이, 완벽하게 호평으로 점령된 커뮤니티. 오히려 보지 않은 사람들이 이런 현상을 보고 [아니 바이럴 아니냐?] 라고 말했다가, 역바이럴이니 힙스터 소리를 들으며 쫒겨나는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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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Group Sound가 호평을 받은 이유는, 단지 무대의 수준 뿐만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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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그사 공연 보면서 오랜만에 슬램뽕맞고 펑크 들으러 다시 가고 싶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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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뭔 락페 가면 다 억슬 억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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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잔한 곡에 슬램하고 뭔 여성 슬램존 이런거 만들고 앉아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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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한거는 핏도 안만들고 슬램한다음에 남한테 눈치주고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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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지랄 보면서 하 이제 나도 개틀딱 됐나보다 요즘락페 진짜 적응 안된다 싶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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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사운드 공연 보니까 곡을 그냥 슬램 서클핏 이런거 다 할 수 있게 편곡을 해 놓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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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간 나눠 놓고 이제 멤버들이 리드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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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스가 막 마이크들고 이야기하고 키보드가 분위기 만들어주고 드럼이 템포 잡아주고마지막에 기타가 슬램 들어갈때 뽕 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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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유도하면서 급해지고 이러면 사람들 탈 안 나게 템포조절 해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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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노래도 노래인데 그 공연 역량 자체가 말도 안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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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어떻게 저렇게 할 수 있는지가 의문임 무슨 공연 짬 10년 20년 먹은 밴드마냥 그렇게 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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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너무 좋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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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할배가 글 쓴거보니까 진짜 좋았나보네 ㄷㄷㄷ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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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걍 나는 오늘부터 그룹사운드 수호단 되기로했다 얘들 공연 나오는거 다 보러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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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할배 얘들 공식 팬클럽도 있음 가입하면 선예매 혜택 준다고 함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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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ㄹㅇ? 당장 가입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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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사람들이 증언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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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그냥 무대에 올라가서 우리 이런 곡 합니다 들어주세요~ 네 감사합니다 같은 공연이 아니라, 관객들과 진정으로 ‘호흡하는 공연’. 그로 인해 진정으로 사람들을 뛰놀게 했다는 그런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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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증언이 나온 상태에서 발표된 Group Sound의 전국 라이브 투어 발표는, 음악 커뮤니티를 긴장 상태로 몰아넣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일단 표를 사고 봐야 된다는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기 시작하고, [진지하게 프리미엄 가입해봐야 하나?] 라는 고민을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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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구비공식명예구민 @GRPSNDFCnonOf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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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박 ㅠㅠㅠㅠ 오늘 무슨 택배 온다길래 시킨 게 없는데?? 싶었는데 온거 까서 보니까 우리애들 친필 사인 시디 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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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구비공식명예구민 @GRPSNDFCnonOf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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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락페 기념 팬서비스로 프리미엄 가입 전원한테 피지컬 음반 뿌린거래요 ㅠㅠ 애들 전원 사인한 거 보고 진짜 행복해서 가슴터지는줄… 프리미엄 가입한 과거의 나 너무나도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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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팬클럽 회장인 아윤이 올린 사진 한장. Group Sound Premium 회원을 위한, 멤버 전원 친필 사인 피지컬 앨범. 페스티벌 버전 음악 자체는 전체 다 유튜브로 무료 공개되었으나, 친필 사인 피지컬 앨범은 프리미엄 회원들만을 위해 제작되어 발송된 한정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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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 인해 팬서비스까지 확실하게 해준다는 것이 증명된 이상, 프리미엄 가입을 막을 심리적 장벽은 없었다. 늘어나는 가입자와 그 가입금은, Group Sound의 매출 중 한 축을 담당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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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솔직히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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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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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별 일이 없어도 모이게 된 회사 사무실. 현아는 학교 강의를 들으러 간 상황이라, 모인 것은 세 명 뿐. 노트를 보며 고민을 하고 있던 그를 상념의 바다에서 끌어낸 것은 이서의 목소리였다. 뭔가 불만이 가득한 듯한 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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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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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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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이제 막, 어디 음악방송 이런 데 나올법 하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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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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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야기인가. 그는 머리를 살짝 꼬았다. 물론 나올법하긴 했다. [공중정원]과 [별이 되어가는 것]은 이미 차트에 뿌리를 박은지 오래. 요새 말로 ‘로봇’이나 ‘스밍 총공’ 없이는 발을 들여놓기 힘들다는 멜론 실시간 차트에서도 점점 오르고 있는 순위를 보면, 그들의 곡이 대중적 인기를 얻고 있는 건 분명해보이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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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친구들이 그런다고. 너 이제 막 진짜 유명해진 거 같은데 왜 음악방송에는 안 나오냐고. 자랑하고 싶은데 나오질 않는다고 막 뭐라그러더라고. 내가 문제는 아니잖아 그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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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내 친구들도 그랬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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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친구들, 다인수현채린 3인방. 요즘 밴드 활동에 집중하느라 그 녀석들에게 소홀했더니, 너를 우리가 도와준 것이 얼마인데 같이 놀아주지도 않고 우리를 이렇게 대우하느냐며 마구 뒹굴길래 표 나오는 대로 공짜로 주겠다며 달래놓긴 한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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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 3명도 그런 소리를 했었다. 음악방송에 왜 안나오냐고. 뭐시기, 뮤직뱅크라던가 그런 것들. 꼭 그런 곳에 나와야 하는가 싶긴 했지만, 어찌됐든 아이들에게는 그런 곳에 나오는 것이 성공의 척도 중 하나인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그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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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밴드들도 안 나오잖아. 나와봐야 핸드싱크 하고. 그거 이유 알어? 물론 당연히 모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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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말을 좀 기분나쁘게 한다. 내가 왜 당연히 모를 거라고 생각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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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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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모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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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클을 걸고는, 이서의 대답에 피식거리며 비웃는 서하. 하지만 주먹을 쥐어보이는 이서의 대답에 살짝 수그러든 모습이었다. 역시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까운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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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쟤는 어째 더 힘이 세진 것 같은 느낌이 든단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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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방은 기본적으로 이제 밴드 세팅이 안 되어있다보니까, 밴드 세팅을 할라면 돈이 들지. 그게 전에 누가 말하기로는 1회에 1억정도 든다고 했던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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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억?? 야 지랄좀 그만해. 뭔 1억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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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 지랄이야. 진짜라니까. 그래서 밴드들 안 나오고 나와도 핸드싱크 하는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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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노트로 시선을 돌렸다가, 시끄러움에 노트를 덮었다. 싸움인 건지, 대화인 건지. 예전에는 그래도 데면데면한 사이더니 일본 갔다 와서는 하루가 멀다하고 저렇게 으르렁거리고 있는 녀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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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우리 팬클럽 숫자 봐. 엄청 늘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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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화제가 전환되었는지, 핸드폰을 붙잡고 그렇게 말하고 있는 이서. 얼마나 늘었는지 보려는 그의 동작에 이서가 핸드폰을 보여주었다. 확실히 많이 늘긴 한 숫자. CD 발송때보다 두배는 늘어난 것 같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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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이전처럼 그 사인 또 시키는 건 아니겠지? 손 다 부서지는 줄 알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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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는 안 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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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의 말에, 그는 그때의 기억을 회상했다. 이틀인가 걸렸던 사인. 확실히 손이 아프긴 했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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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사람 이렇게 많으면, 좀 있으면 그냥 팬클럽만 가지고 서울콘 사람들 다 채우는 거 아냐? 그럼 이제 일반인들은 티켓팅 구경도 못하고 그러는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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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가능하겠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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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능할 수도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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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가입비가 7만원이 넘는 걸 그렇게 많이 가입을 하겠냐. 대한민국에 무슨 부자들만 사는 것도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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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번 충돌하고 있는 두 명을 보며, 그는 생각난 김에 지방 투어의 무대에 대해서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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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에 맞는 스테이지 설계나 음악 편곡을 좀 해야 할 텐데. 현장을 보고 했으면 좋겠지만, 그게 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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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팀장이 줬던 자료. 콘서트가 예정되어 있는 곳들의 위치. 콘서트 홀도 있고, 작은 공연장도 있고, 아예 공연장이 아닌 곳도 있다. 대부분이 정규 콘서트를 벌일 수는 없는 열악한 환경. 좀 큰 카페 수준인 곳도 있는 걸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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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데는 공연이 가능한가. 고 팀장이 다 생각이 있긴 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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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생각했다. 이런 곳에 출장을 가서 공연을 한다면, 인력을 최소화한다 할지라도… 이동만으로 적자가 분명해보이는 그런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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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적인 인지도를 가지기 위해서라지만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그저 인디 밴드 최초 전국 투어 타이틀을 얻고 싶어서? 친근한 밴드, 전국적 밴드라는 이름을 얻고 싶어서 이런 것을 기획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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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봐온 고경민 팀장은, 그런 사람이 아니긴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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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머리를 매만지며 그렇게 생각했다. 분명 뭔가 생각하고 있는 일이 있어서 이렇게 하려는 것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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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하려고 하는 일은, 사실 전무후무한 일이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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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말하는 고경민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는 생각했다. 하긴 그렇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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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공연장 리스트를 보셨으니 아실테지만, 지방 공연은 일부 대형 홀 외에는 다 적자입니다. 그 폭이 대단하지는 않겠습니다만, 도대체 어느 인디밴드가 적자를 무릅쓰고 지방까지 가서 공연을 하며 전국적인 인기를 얻으려고 하는가. 그렇게 생각하신 분도 계실 것이고, 실제로 사장님도 저에게 그 이야기를 하시긴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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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끄덕이는 좌중들. 고경민은 회의실 내를 슥 훑어보더니, 옆에 쌓인 자료를 하나씩 배포해주었다. 뭔가 익숙한 로고가 찍힌, ‘우리 회사’에서는 만들지 않는 형식의 자료. 외부에서 온 것이 분명해보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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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은 협의 중이었던 일이라 여러분들께 말씀드리지 못했지만, 이제는 협의가 완료되었기에 투어 장소도 확정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기에 여기서 여러분들에게 소개해드리고자 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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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경민은 그렇게 말하며 회의실의 문을 열었다. 한번도 보지 못했던 사람들의 등장에, 이혜인과 정유영을 빼고는 다들 술렁이는 사람들. 그 또한 마찬가지의 심정이었다. 저 사람들이 뭐기에 갑자기 소개를 하는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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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우리 라이브 투어 다큐멘터리 제작을 맡아주실, 제작진 여러분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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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던 생각은, 경민의 말에 끊겼다. 그가 눈을 찌푸리며 잘못 들었나 생각하는 동안, 이서가 “네?”라는 외마디를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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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전국 라이브 투어는 이 분들과 함께 진행할 겁니다. 네. 우리는 이제, 우리의 밴드 투어 일정 전체를 다큐멘터리로 만들 예정입니다. 지상파에서 방영할 목적으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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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우선 귀를 의심했다. 잘못 들었나? 하지만 주위 사람들의 표정을 보면, 잘못 들은 것은 아닌 듯 했다. 다들 믿지 못하겠다는 낌새. 혜인과 정 과장만이 평온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사전에 언질을 받은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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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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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일단 여기 이 분들을 소개하자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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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민의 말이 끝나자, 잠시 멀거니 서 있던 젊은 남성이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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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저는 전정식 PD라고 합니다. 현재 교양국에서 다큐멘터리 제작팀에 속해 있고, 음… 약간 부끄럽긴 하지만 다큐멘터리 제작 총괄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잘 부탁드리겠구요, 여기는 저희 직원들인 박민재 촬영감독, 이준호 작가, 김하은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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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씩 소개를 마치자, 아까 자신을 소개했던 전정식 피디가 다시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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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저희가 시즌을 맞이해서 새로운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기로 했었는데요, 명확한 소재가 없던 차에 고경민 팀장님이 저희 쪽으로 컨텍을 해 주셔서요. 상당히 좋은 기회라고 생각을 했고, 여러모로 합의를 거쳐서 이렇게 여러분과 촬영을 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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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라고 고개를 숙이는 전정식 PD. 전통적인 ‘방송국놈들’과는 다른 자세에 그의 호감도가 약간 상승하는 동안, 다른 사람들의 박수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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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 제가 전국 투어 이야기를 드렸었죠. 그 때부터 이 일을 계획하긴 했는데, 사실 이게 다른 기업과 협업을 한다는 게 상당히 불확실한 일이다보니까 확정이 나기 전까지는 멤버분들께 제대로 된 말씀을 못 드렸습니다. 그 부분은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고, 대신 사장님과 정 과장이랑 좀 이야기를 했는데… 좋다고 하시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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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도 몇가지 이야기를 더 한 경민은, “이제부터는 전 피디님이 이야기를 해 주실 겁니다.” 라며 물러섰다. 그렇게 자리를 잡은 전정식 PD는, PPT부터 우선 올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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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다들 PPT 같은 걸로 설명을 하려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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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제작 취지에 대해서 조금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제 여러분도 그 취지에 대해서 이해를 하시고 계신 게 좋으니까요. 말씀을 드리자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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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어간 PPT는 이미지 하나를 비췄다. 무수히 많은 K팝 다큐멘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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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돌… 로 상징되는 K팝 다큐멘터리는 엄청 많아요. 심각한 것에서부터 유쾌한 것까지. 하지만 한국 음악 산업이라는 게 순수히 K팝으로만 이루어진 것인가? 전혀 아니거든요. 힙합도 있고, 일반 가수들도 있고, 밴드들도 있고. 제 취향도 그렇고 해서 저희는 그런, 대형 기획사를 바탕으로 들어오는 가수들보다는 뭔가 이런 자생하는 인디밴드의 이야기를 찍어보고 싶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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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번 띄워주는 PPT는, [공중정원]과 [별이 되어가는 것]의 성적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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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지금 음악 차트가 보면 아이돌 노래, 힙합, 아니면 방송에서 유명해졌다거나 이미 유명한 사람들의 노래잖아요? 그런데 이제 여러분들은 그냥 입소문 하나로 차트를 뚫어버리고, 페스티벌도 참여하시고, 공연도 하시고… 남이 보기에는 일종의 신화같은 그런 이야기인데. 그렇기 때문에 이런 여러분들의 이야기를 찍어서 보여주는 것이, 경직된 한국 음악시장을 뭔가 타파해나갈만한 그런 힌트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으로 다큐멘터리를 찍으려고 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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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거창한 거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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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디의 말이 끝나자 갑자기 몸을 훅 숙여 속삭여오는 이서. 그는 귀에서 덮쳐오는 간지러움에 잠시 몸을 틀었다가, 나지막히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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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기획의도는 다 거창한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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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우리가 뭔가 뭐 타파를 한다느니 뭐니 하는 건 좀 부담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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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저 사람들이 다 알아서 그림을 만들어 줄 거야. 방송국 놈들이 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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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국 놈들이라니, 너 뭐 방송국 사람들이랑 많이 일해본 것처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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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가 제기한 의문에 그가 입을 다무는 동안, 전정식 PD의 이야기가 계속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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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 때문에 일단 저희는 여러분들의 라이브 투어 기간동안 동행하면서, 일어나는 일들을 찍을 예정입니다. 공연 뿐만이 아니라 여러분들의 생활 모습이라던가, 무대 뒤쪽에서 준비하는 모습. 그리고 밴드 뿐만 아니라 기획사 직원분들의 모습. 그를 통해서 지금 한국 인디밴드 씬이 배출해낸 기린아, 그룹 사운드의 저력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리고 한국 음악 시장은 과연 그룹 사운드의 어떤 것을 본받아서 더 발전해 나가야 되는가. 그런 것들을 촬영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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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의 촬영은 라이브 투어가 이루어지는 시점인 고등학교 여름 방학부터 시작된다. 그렇기에 첫 촬영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는 않은 상황. 정식은 이 시간을 최대한 활용하기로 결심했다. 촬영이 다 끝나고, 편집하는 시간에 혹시 모를 추가 촬영까지 생각하면 공개 일자까지 빡빡한 일정이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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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활용방법은, 다큐멘터리에 삽입될 인터뷰를 미리 따놓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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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용 지인을 좀 추천해달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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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실제 촬영 자체가 어떻게 될지는 모르니 당사자들의 인터뷰를 미리 따 놓을 수는 없다. 이렇게 저렇게 하자~ 하고 인터뷰를 따 놨는데 갑자기 정 반대의 이야기가 나와버리면 그냥 그 인터뷰는 쓸모없는 것이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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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주변인의 인터뷰를 따놓을 수는 있다. 이런 류의 다큐멘터리라면 들어갈 수 밖에 없는 ‘성장 환경’이라던가, ‘음악을 시작하게 된 계기’라던가, ‘주변인들의 평판’ 같은 다큐멘터리에 들어가게 되면 마치 적절하게 들어간 향신료마냥 맛을 더해주는 그런 재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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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위해서 정식은 밴드 멤버들과 회사 직원들에게 질문지를 건넸고, 거기에 대해 인터뷰를 할 수 있을만한 지인을 추천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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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는 좀 특이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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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을 받아 인터뷰 제안을 한 대다수의 사람들은 흔쾌히 인터뷰에 응했는데, 여기서 정식은 약간 특이한 점을 느꼈다. 다른 멤버 - 최이서, 정현아, 유서하 - 의 경우 가족이나, 친구, 레슨 선생 정도가 대부분이었다. 유서하가 ‘같이 음악을 몇번 했었던 홍대 씬 뮤지션들’ 몇명을 추천한 것이 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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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하수연이 추천한 사람은, ‘평범한 고등학생’이 가질 수 있는 교우관계의 사람들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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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일러드 김철연에, 여기는 교수도 있고. 어디 홍대 클럽 오너, 세션 뮤지션, 김지연 가수도 있네. 들어본 사람들이 많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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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식은 머리를 긁적였다. 하수연이 추천해준 리스트를 보면, 그 나이 학생이 괜한 공명심으로 “저 이런 분들까지 알거든요?”라는 말을 하며 아는 사람들의 이름을 다 불렀다, 라고 생각할만한 그런 사람들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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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양반들이 다 인터뷰를 해주겠다고 했단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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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연이 무슨 돈이라도 빌려준 걸까. 뭐 그로서는 좋았다. 그런 쟁쟁한 인물들이 인터뷰를 해 준다면, 다큐멘터리의 흥미도도 더 올라가는 법이니까. 그는 그런 긴가민가한 마음으로 인터뷰를 따러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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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랑 하수연 학생의 관계 말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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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이전에 질문지는 보내드렸는데, 인터뷰를 수락해주신 배경도 궁금하기도 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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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지금은 하수연 학생과 교류를 이어나가고 있지만, 처음에는 ‘서명전’ 기타리스트 때문에 하수연 학생을 만나게 되었죠. 아무래도 그 서명전의 마지막 제자라는 타이틀이 있다 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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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전의 마지막 제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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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는 대체로 다 비슷했다. 하수연의 음악적인 재능 - 그녀가 얼마나 기타를 탁월하게 치는지, 그녀가 얼마나 작곡을 기가 막히게 하는지 - 에 대한 이야기나, 천재성을 가지고 있다고밖에 생각되지 않는 일화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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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이야기들 위주로 인터뷰가 진행되면서도, 꼭 한번은 ‘서명전’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그는 대부분의 이야기를 “아 뭐 그렇군요.” 라는 식으로 받아넘겼지만, 호원예대의 채호근 교수는 구체적인 이야기를 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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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서명전과 관계된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내가 듣기에는 그냥 그 이야기 자체만으로도 상당히 흥미로운 지점이 있었어요. 좀 휴먼드라마 같은 느낌이 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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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먼 드라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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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이 있으면 이제 뭐, 글쎄. 가정사긴 하니까 뭐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해 줄지 안 해줄지는 모르겠지만. 좀 물어보는게 괜찮을 것 같더라고. 재미있는 이야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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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그저, ‘Group Sound’라는 밴드에 대해서만 다룰 생각이었던 다큐멘터리. 하지만 정식이 찾아간 대부분의 ‘하수연이 추천한 지인’들은, 하수연의 기타 실력 뿐만 아니라 하수연의 삶까지도 이야기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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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야기를 듣고, 그는 Group Sound 이전의 하수연에 대해서 찾아보았다. [Invasion from Seoul 2024]나, [정부지원사업 2024 Band Pioneer] 등에 얽힌 이야기들. 그때 당시 나왔던 기사들이나, 인터넷 커뮤니티 관련 이야기. 해명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떠돌고 있는 근거 없는 소문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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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다큐멘터리의 클라이막스는 휴먼 드라마긴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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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무미건조하게 사실만을 보여주는 그런 다큐멘터리는 결국 재미가 없다. 스토리라는 게 없기 때문이다. 결국 인간은 이야기에 얽매인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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펭귄을 찍는 다큐멘터리도 펭귄의 삶에 대해서만 건조하게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그들이 얼마만큼의 위험을 감수하고 먹이를 구하러 가는가,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 그러면서도 얼마나 새끼를 위하는가, 이런 위대한 자연이란 도대체 어떤 것인가. 그런 이야기들을 하며 다큐멘터리의 흥미를 유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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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생각하기에는, 이 ‘하수연의 삶’은 충분히 다큐멘터리에 스토리텔링을 부여할 수 있을만한 소재로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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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다 파고들지도 않았는데, 단순히 나열된 사건만 봐도 재미있지 않은가. 불량 소녀가 노년의 기타리스트를 만나 짧은 시간동안 기타를 배우고, 스승이 죽은 이후 개과천선하여 음악계를 진동시키는 사람이 된다. 무슨 영화로 만들어도 될만한 그런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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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쪽으로도 조금 편집을 해 봐야겠는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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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노트에 메모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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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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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흐르고, 어느덧 라이브 투어 첫 날. 서울 모처의 어느 작은 공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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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매진이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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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홀 규모가 얼마 안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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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보기에는 고팀장님이 초반에는 너무 작은 홀을 잡으신 것 같던데. 조금 큰 데 잡아도 괜찮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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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당시에는… 확신이 없으시지 않으셨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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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들으며, 그는 홀으로 들어갔다. 이미 간략하게 세팅 자체는 되어 있는 무대. 하지만 사운드 세팅은 이제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제까지와는 아예 다른 환경의 그런 곳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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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의 콘서트는 맨 마지막에 있을 예정이고, 이번 공연은 출사표 비슷한… 그냥 조촐한 라이브 정도의 공연이라고 할까요. 프리뷰 같은 거라고 생각해주시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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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문에 표도 프리미엄 한정으로만 팔았다는 고경민 팀장의 이야기를 떠올리며, 그는 ‘이러니까 다들 프리미엄 가입하겠다고 하는구만.’ 이라고 생각했다. 고경민 팀장이나 정유영 과장이나, 팬들 돈 울궈내는데에는 아주 도가 튼 인간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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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긴, 그렇게까지 마케팅을 하고 장사를 하니까 우리가 이렇게 막 적자나는 공연도 할 수 있는 거고, 저런 팀들도 들어와서 우리 촬영할 수 있는 거고 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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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생각하며 세팅을 끝낸다. 세팅은 오랜만에 정석적이다. [음악편지]나 대학 축제때 보여주었던 어쿠스틱 세팅이라거나, 페스티벌때 보여주었던 페스티벌식 하드락 세팅은 아니다. 혹은 EBS Amplifier Now 당시에 보여주었던 배경이 완벽하게 갖춰진 그런 세팅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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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에는 옛날 락 밴드들의 공연이 그러듯이 붉은 색 페르시아 카펫이 깔려 있다. 딱 그 정도의 세팅. 마치 몇개월 전 얼마 되지 않는, 몇명 혹은 몇십명의 관객만을 데리고 하던 클럽 파라독스에서의 공연. 그것을 오마쥬하는 듯한 세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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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무대 컨셉은 약간 카페에요. 우리가 연주하는 음악을 들으러 관객분들이 오시는, 그런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저희도 사전에 입장해서 있을 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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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 앞에서 무대 컨셉을 설명하는 서하. 그러는 사이 시간은 점점 흘러가고, 이윽고 공연 시간. 다큐멘터리 촬영 카메라가 돌아가는 가운데, 팬들이 속속 입장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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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2시간 정도 공연을 한다고 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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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미리 안내받은 일정에 대해서 떠올렸다. 공연을 촬영한 다음, 간단한 백그라운드 인터뷰 촬영 후에 오늘 일정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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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은 오후부터 움직이기 시작한다고 하니, 오늘 밤에는 양껏 마실 수 있다. 그는 오늘은 어떤 메뉴를 먹을지 고민하며 카메라를 돌렸다. 다큐멘터리 촬영에 대한 고지를 받고 들어가는 관객들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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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입장한 관객들은 대부분이 놀라고 있었다. 그들이 입장하기도 전에 먼저 밴드들이 들어와 있으니 그런 것일까. 몇몇 관객들은 무대 쪽으로 내려가 밴드 멤버들에게 사진을 찍어도 되냐고 묻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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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요! 대신 한분씩만 올라와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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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스를 맡은 멤버의 말에 따라 줄을 서고, 한 명씩 올라가 멤버들과 사진을 찍어가는 광경은… 상당히 오랜 시간 카메라를 잡아 온 그에게도 꽤나 생소한 광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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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다들 철저하게 팬과 거리를 두고, 팬들에게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 것을 일종의 전략으로 가져가는 애들도 있는데. 저렇게 거리감 없이 다가가는 것을 보면… 인디 기획사라서 택할 수 있는 전략이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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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죄송하지만 이제 공연을 시작해야 해서. 혹시라도 지금 사진을 못 찍으신 분들은 나중에 줄을 서 주시길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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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윽고 시간이 되어, 기타를 맡은 멤버의 말에 따라 자리로 돌아가는 관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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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오늘 라이브 컨셉은, 아무래도 이런 분위기인 만큼 다들 아셨겠지만… 조금 편안하게. 팬미팅과 콘서트의 중간쯤 되는. 그런 느낌으로 가려고 합니다. 실제로 공연 시간도 2시간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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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아요! 아무래도 저희가 프리미엄 가입하신 분들에게 너무 소홀했던 부분이 있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이제 이런 식의 컨텐츠를 기획하게 되었는데, 어떠신가요 여러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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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좋아요!” 라는 외침이 관객석에서 들려오는 가운데 웃는 밴드원들. 그는 카메라를 계속해서 돌리며 촬영을 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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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이 되어가는 것]과 그 외 다른 몇몇 곡들이 공연된 후. 잠시 관객들과의 소통 시간인지, 밴드 멤버들은 악기를 옆에 두고 테이블에 앉았다. 스태프 중 한명이 질문을 할 사람을 모집하자, 순식간에 올라가는 손들. 그 중 한명에게 마이크가 건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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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안녕하세요! 저는 혹시, 어, 평소에 멤버 분들 뭐 하시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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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가 뭐 하냐고요.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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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습 할 때 말고 말씀하시는 거죠? 저는 일단 애니메이션 보고! 아니면 옷 구경. 최신 애니메이션은 따라가지를 못해서, 완결난 거 위주로 보고 있어요! ‘던전 밥’, ‘수성의 마녀’ 같은 거. 넷플릭스에 올라온 거 위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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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저는… 저는 요즘 과제밖에 안 해서… 사실 누가 막, 엄청 연습 시키는 바람에… 뭔가 다른 거, 할, 그, 시간이 없다… 고 해야 하나… 원래 평소에는요? 음… 트윗… SNS 같은 거 하고 있어요. 계정… 요? 못 가르쳐 드릴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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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어, 드럼 세션 하고. 재미있는 거 찾아다니는데요. 요즘엔 청바지에 빠져 있네요. 청바지라는 게 의외로 재미있거든요 볼 수록. 이게 연도마다, 그리고 형태마다 약간 레거시가 있다고 해야 하나 그런 게 있거든요. 혹시 그거 아시나? 일본의 청바지들은 대부분 다 리바이스 청바지를 베껴서 나온 거. 예를 들어서 EVISU같은 브랜드는, LEVIS에서 L을 빼고 U를 붙여서 만든 거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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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연습밖에 안 합니다. 연습 말고요? 작곡. 편곡. 운동. 그거 말고 뭐 하냐고? 따로 하는 거 없는데. 장난치지 말고? 진짜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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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자신의 삶을 사는 가운데, 뭔가 숙연해지는 대답을 하는 한 사람. 그 외에도 여러가지 질문이 오가는 가운데, 누군가가 수연에게 질문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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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리더님에게 하나 여쭤보고 싶은데… 혹시 수연님의 플레이리스트가 있다면, 혹시 추천 가능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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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나도 궁금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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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귀를 살짝 기울였다. 다큐멘터리를 찍기 위해서 들은 것이긴 하지만, [별이 되어가는 것]이나 [Plastic Nostalgia] 같은 음반에 수록된 음악들은, 그가 생각하는 ‘락 밴드’라는 그런 이미지에 맞지 않게 상당히 세련된 느낌이었다. 그런 음악을 만드는 밴드의 리더는 평소에 뭘 듣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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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지금 당장 떠오르는 음악, 음. 요즘 들은 걸로 하자면… 일단 Howling Wolf의 Smokestack Lightnin, Muddy Waters의 Mannish Boy라던가. Crossroads도 있긴 하지만 저는 Cream 버전을 더 좋아하고요. Eric Clapton의 Cocaine과 Tearing Us Apart, Breaking Point, Cream의 Wheel of Fire와 Disraeli Gears 앨범 전체… 그것 외에도 많긴 한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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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음악들은, 전혀 들어보지 못한 곡들이었다. 그래도 Eric Clapton의 이름 정도는 들어봤다고 해야 하나. 그 외에는 대부분 모르는 곡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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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로 옛날에 명곡이 엄청 많습니다. 제 음악도 대부분 거기에 근간을 두고 있고… 물론 이런 음악이 사실 지금 들으면 지루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을 할 수가 있는데. 전혀 아니거든요. 음악이라는 게 좋은 이유가, 예전의 것이라고 해서 전혀 식상하거나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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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도 정도껏이지, 60년 전 음악은 좀 너무한 거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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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의 심정을 대변해주듯 옆에서 치고 들어오는 베이스. 하지만 수연은 흔들리지 않고 대답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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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엔 근본이 있어야 하는 법이야. 건물 같은 것도 봐라. 기초공사가 탄탄할수록 이제 제대로 된 건물이 지어지는 법이라고. 그냥 아무런 어? 감상도 그래. 탄탄하게 음악의 역사를, 그래 뭐. 블루스를 듣지는 않더라도 그런 락의 계보를, 팬분들은 안 들으셔도 되는데 너희들은 좀 들어봐야 되는 거 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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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점 멤버에 대한 비난으로 이어지는 그런 이야기. 저래도 되나 싶은 시점에, 수연은 계속 이어지려던 자신의 말을 끊고는 다른 이야기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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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뭐… 이제 다음 곡은 일단은 미발표곡인데요. 괜찮으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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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들의 우렁찬 “네!!”라는 함성 소리. 그는 옆의 스태프에게 반사적으로 “이거 찍어도 됩니까?” 라고 물어보았다. 그러자 바로 뛰어올라가 밴드 멤버들에게 물어보는 스태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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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K 사인이 나오자마자, 그는 배터리를 갈았다. 혹시라도 신곡을 찍지 못하면 안 되니까. 중간에 다큐멘터리 홍보용으로 쓸 수도 있겠고. 그러는 사이 수연은 이때까지 쓰던 기타 말고 다른 것을 집어들었다. 노란색에 웬 악어 스티커가 붙어 있는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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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곡은, 정말 아무런 신호 없이 바로 시작되었다. 정확하게 같은 타이밍에 들어오는 악기들. 기타의 쫀득하고 경쾌한 사운드와 함께 다채롭게 이루어지는 하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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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한 사람이 여기에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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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길이 바로 눈앞에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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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걸 택할지도 모르는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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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연히 하날 골라 길을 나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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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 자체는, Group Sound가 [공중정원]이나 [별이 되어가는 것]에서 보여준 것과는 다른 곡이다. 오히려 그 이전의, 어떤 음악인지는 모르겠으나 상당히 오래된 것 같은… 락 음악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그가 생각하기에는, 오히려 컨트리 같은 것에 가까운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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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엽이 지고 허무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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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론 폭풍이 몰아 닥칠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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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돌아가는 길은 저 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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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눈을 감고라도 걸을 수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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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듣기에는 편하다. 음악을 약간만 손보면, 약간 오래된 개인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듣기 좋은 음악 같은. 흥겹게 흥얼거릴 것 같은 그런 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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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삶이 흐르고 번져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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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걷는 걸 멈출 순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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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눈 앞 길도 보이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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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파편처럼 흩어질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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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더 길었으면 좋을 것 같은 곡인데. 어쿠스틱으로 쳐봐도 좋을 것 같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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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곡을 흥얼거렸다. 귀가 즐거운, 발표만 되면 플레이리스트에 꼭 넣을 것 같은. 젊은 아이들 뿐만이 아니라 그와 같은 나이가 든 사람도 꽤나 즐겁게 들을 수 있을 법한 그런 곡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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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공연 이후, 투어는 순조롭게 이어졌다. 수도권에서 했었던 1천석 가량의 라이브 2번은 둘 다 매진되었고, 그 다음 충청권으로 들어와 했었던 700석 가량의 콘서트도 만석은 아니었지만 꽤나 사람이 들어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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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도라고 하면 뭔가 엄청 시골 같은 느낌이었는데, 전혀 아니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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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 야. 지방도 사람 사는 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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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그렇긴 한데… 뭔가 지방이라고 하면 좀, 좀 그런 느낌 아냐? 뭐 없을 것 같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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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의 말에 그는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뭐, 생각해보면 서울 바깥을 나가본 적 없고 서울 안에서만 살았으면 이럴 법 한가. ‘서명전’은 지방에도 많이 내려갔었고 산 속에서 살아본 경험도 있었기에 달랐지만, 과연 그 기억이 없었다면 어떤 반응을 보여주었을지는 잘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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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이야기 혹시라도 바깥에 막 하시면 안 돼요. 요즘에 진짜 큰일 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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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영의 우려 섞인 말에 이서는 밝게 알겠다는 말을 했다. 그 모습을 보며 그는 차 바깥을 쳐다보았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것 마냥 쏟아지는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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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 온다고 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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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은 아니고 그냥 장마 아닌가… 나도 일기예보 안 봐서 잘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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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행사는, 괜찮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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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관있나? 어차피 우리는 실내에서 공연 할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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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그들은 다음 목적지로 달렸다. 내일 콘서트가 있으므로, 조금은 쉬어놔야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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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 소리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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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끄러워진 바깥. 닫아놓은 문으로도 들어오는 소리에, 그는 잠에서 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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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얼대는 말소리가 방문 근처에서 자고 있는 그에게 들려와 깬 것 같았다. 누군가가 통화를 하고 있는 것 같았는데, 여기 있는 세 명은 다 드러누워서 기절 상태니… 정유영 과장인가. 무슨 일이길래 안에서 사람 자는데 신경도 못 쓰고 저렇게 통화를 하고 있는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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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친구가 바람이라도 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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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갔다. 인기척에 돌아보는 정유영 과장의 얼굴은, 정말로 새파랗게 변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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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 났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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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어… 어… 잠시, 잠시만요. 팀장님 잠시만요. 제가 조금 있다 다시 전화 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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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전화를 끊더니, 심호흡을 한번 하고 그를 바라보는 정유영 과장. 그 눈빛에 그는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설마… 아니겠지. 설마 그와 관계된 건 아니겠지. 그는 왠지 손발이 저려오는 걸 느꼈다. 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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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 우리… 내일 콘서트장 못 쓴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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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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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대답이 돌아와, 그는 순간적으로 힘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아니 그런 문제가지고 그렇게 심각하게… 아니, 생각해보면 진짜 심각한 문제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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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왜 못 쓴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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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비 많이 왔잖아요. 거기 비가 새가지고, 지금 음향장비가 다 나갔대요. 수리하려면 며칠 걸린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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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무슨 콘서트 홀이 비가 샌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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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하게 소집된 회의. 고 팀장, 정 과장, ‘하수연’, 총무팀 박 대리, 다큐멘터리 팀에서 팀장 대리로 나온 이준호 작가까지(이런 상황까지 촬영을 해야 한다고 카메라를 가지고 나왔다). 최소한의 인원이 모인 상태에서, 그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도대체 어떻게 해먹으면 콘서트홀이 비가 샌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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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이미 일어난 일이고, 지금은 대책을 강구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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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홀 같은 건 없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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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어요. 제일 근처에 있는 게 옆쪽 동네에 있는 건데 차타고 한시간은 가야 되고. 좌석도 여기보다 작을 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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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그쪽 빌리는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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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공무원이라서 지금 연락해봐야 안 받을 걸요. 받아도 스케줄이 비어있을지 아닐지도 모르고. 게다가 1시간 거리로 장소가 바뀌면, 그건 환불해줘야 하는 사유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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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외무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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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도 비 온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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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무팀 박 대리의 말에, 마른세수를 하는 고 팀장. 그는 머리를 살짝 꼬았다. 정상적인 공연은 애초에 불가능해보이긴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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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쿠스틱 공연 같은걸로 하는 건 어때요? 그 홀에서 하면 되지 않나? 전기 안먹고 그렇게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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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능하긴 한데… 그럴거면 애초에 어쿠스틱이 필요가 없죠. 배터리 돌려가지고 홀에서 쓰면 뭐, 아니다. 그만한 출력 내는 무선 앰프가 있나… 아무튼 가능하긴 할 것 같은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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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대답에, 살짝 화색이 도는 고 팀장. 하지만 그런 기색을 끊고 들어오는 정 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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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야기 저도 해 봤는데, 애초에 지금 홀 자체를 못 쓰는 상황이래요. 이게 조명도 안 되고, 물 샜으니까 좌석도 다 맛 갔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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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미치겠네. 공무원이라는 양반들이 시설 점검 안 하고 뭐 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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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상을 쾅 쳐버리는 고경민. 정유영 과장이 ‘외부인 있는 데서 그런 식으로 하지 마라’ 같은 식의 눈치를 주는 사이, 총무팀의 박 대리가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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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생각에는 아무튼 정상적인 공연이 불가능해 보여서… 일단 환불은 무조건 진행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괜히 어떻게든 다른 형태로 진행했다가 계약 불이행으로 걸려서 환불 맞으면 그게 더 골치아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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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미치겠네. 그럼 그냥 취소해주고 오늘은 공 친다음에, 다른 콘서트로 넘어가는 게 제일 낫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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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수 밖에 없을 것 같은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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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팀장의 말에 동의하는 다른 사람들. 고경민이 “사장님하고 통화 좀 해봐야겠습니다.”라고 말하고 사라진 동안, 그는 머리를 쓸어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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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뭐 할 방법이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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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불 자체는 막을 길이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기에서 콘서트를 벌이지 못하는 것 또한 좀 그렇다. 잘은 몰라도, 아무튼 여기도 만석(滿席, 자리가 다 참) 가까이 사람들이 찬 걸 보면 어찌됐든 기대를 하고 있던 사람들이 많았다는 건데. 천재지변이라 한들, 그런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리는 일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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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뭐 공연장이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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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팔짱을 끼고 천장을 올려다보다가, 그는 시선을 느꼈다. 다큐 촬영팀의 이준호 작가. 딱히 별 생각 없이 쳐다본 것인지, 이내 시선을 돌리는 상대방이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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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모습을 보고 그는 갑자기 예전의 기억 하나를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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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가수의 콘서트를 돌 때의 일인데, 생각해보면 이 근처였고, 방송 나갔고… 거기가… 거기가 지붕이 있는 야외무대였던 것 같은데. 물 안 들어오는 상태에서 공연할 수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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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서 하면 되는 거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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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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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환불해주고 그만인 일.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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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해결해주고 그 과정이 다큐로 나가면, 무조건 뜰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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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지변으로 인한 전액 환불. 하지만 그걸로도 모자라서 팬들을 위한 무료 콘서트까지. 당장은 손해볼지 몰라도, 나중으로 가면 엄청난 이득이 될 절호의 기회로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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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인과 통화를 하고 돌아온 고경민,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놓고 그는 자신이 생각한 것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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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알기로는 이 근처 공원에 지붕이 있는 야외 공연장이 있습니다. 정확하게는 공연장이라기보다는… 공원 내에 지붕이 있고 무대가 있는 그런 시설이 있는 것 뿐이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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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하자마자, 다른 사람들은 그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건지 알아차린 듯 했다. 그는 그런 낌새에 종지부를 찍듯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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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전액 환불은 감수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건 그냥 현실이에요. 하지만 전액 환불을 하고 그만둔다면, 공연을 보기 위해서 예매한 사람들의 돈은 돌아올지 몰라도 그 기회는 날아가버리는 것이니까. 기회 보상 차원에서 공연을 한번 보여드려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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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 팀이 있는 만큼, 그는 언어를 조금 순화시켰다. 하지만 역시 짬이 있는 만큼, 그 말을 듣고 머리를 잠시 굴리다 고개를 끄덕이는 팀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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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습니다. 제가 생각해도 그런 쪽으로 가는 것이 나을 듯 하고… 위치가 어디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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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민의 말에 그는 지도상의 위치를 짚어주었다. 다행히도 아주 멀리 떨어진 곳은 아닌 그런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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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홀 대관팀이랑 이야기를 하고, 여기 관계자랑 시청 관련 과랑 협의를 좀 해보겠습니다. 그동안 정 과장은 박 대리랑 수연 학생 데리고 가서 공연장 규모 좀 파악하고… 공연 할 수 있는 곳이겠다 싶으면 빠르게 장비 대여하고, 취소 안내하면서 동시에 그쪽으로 오라고 이야기도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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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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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영의 대답. 고경민은 고개를 끄덕인 후 바로 숙소 바깥으로 나가 사라졌다. 그리고 정유영이 부산스럽게 나갈 준비를 하는 동안, 그는 다른 아이들을 깨웠다. 지금 현재 상황을 전달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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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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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일정대로라면 한 3~4시간 뒤에나 일어나야 할 아이들. 그렇기에 비몽사몽한 상태의 아이들이 이해할 수 있게끔, 그는 전력을 다해 설명했다. 그 결과가 방금 전 받은 서하의 질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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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능하냐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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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거기 천석 정도 홀이었잖아. 그리고 오늘 음향 세팅이나, 곡 리스트들도 다 거기에 맞춰서 짜여진 거였고. 그런데 갑자기 야외공연장 형태가 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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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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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든 수준이 아니라… 내가 보기엔 너라도 이건 거의 불가능하다고. 리허설을 할 수 있을 시간이 되면 모를까 지금 시간상 리허설을 하고 들어갈 수도 없다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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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전에는 리허설을 꼭 하고 들어간다. 어떤 문제가 생길지 모르니까. 그것은 무대공연을 하는 사람들의 철칙과도 같은 것이다. 음향을 세팅하고, 계획된 무대와 다른 점을 점검하기 위해서는 필수인 것이 리허설이며, 그 때문에 Group Sound도 철칙을 계속 지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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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그게 불가능했다. 왜냐하면 허가가 안 나니까. 그 공간을 빌릴 수 있을지도 모르고, 빌린다 해도 음향 장비가 바로 도착하는 것도 아니며, 세팅을 할 시간조차 빡빡하다. ‘공연장도 아닌 곳’에서 ‘비가 내리는 날씨’에 ‘리허설 없이 공연’이라니, 공연으로서는 최악 중의 최악 중의 최악의 선택이라고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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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보기엔… 사람들에게 실망스러운 경험을 시켜주는 것 보다, 그냥 환불을 하고 넘어가는 게 나아. 너를 믿지 못하는 게 아니라, 현실적으로 이건 불가능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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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건 걱정하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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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와는 달리,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지는 서하의 말투. 하지만 그는 부드럽게 말을 끊었다. 불가능해보이는 일? 맞다. 기존에 해왔던 연습, 기존에 계획된 무대… 그런 것들을 다 물리치고, 아무것도 없이 원점에서 시작한다. 매우 힘들어보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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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는 그것을 부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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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수 있어. 내가 할 수 있다는 게 아니야. 우리가 할 수 있다는 거지. 이때까지 겪어왔던 일들에 비하면, 이런 건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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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손을 뻗어 다른 아이들의 손을 모았다. 살짝 떨려오는 손들. 항상 태연한 척 해도, 심드렁한 척 해도, 괜찮은 척 해도… 결국 이 애들도 어린 아이들이다. 18살, 19살. 아직 20대조차 되지 못한. 이런 한번도 겪어보지 못한 일이 생기면, 패닉에 빠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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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하지 말고 나를 믿어. 우리는 오늘, 관객들에게… 확실하게 최고의 공연을 선사할 수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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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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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을 꼽아가며 기대하고 있던 Group Sound의 공연 당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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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오전에 갑자기 날아든 문자는, 그의 기분을 확 잡치게 만들었다. [공연 장소로 예정되었던 … 콘서트 홀의 장마 누수로 인한 시설 피해로 이번 Group Sound … 공연은 취소되었습니다. 불편을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티켓 금액은 전액 환불될 예정이며…] 라는 내용의 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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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뭐 일이 이래. 하필 내가 보러가는 날 보러가는 홀에서 누수가 터진다고? 시발 세상이 나를 억까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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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Group Sound의… 팬이라고 할 것까진 아닌 사람이었다. 그들의 음악을 전부 들어본 건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유료 팬클럽이니를 가입하고 라이브 영상을 하나하나 다 찾아보며 자체 컨텐츠 같은 것도 볼 정도는 아닌. 그냥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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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그가 만만치 않은 비용을 들여 Group Sound의 공연에 가겠다고 마음을 먹은 이유는, 역시 접근성이었다. 연극이니 뮤지컬이니 어쩌구니 이런 것들은 가끔 시 지원 받아서 올지는 몰라도 가수나 밴드 콘서트 같은 건 진짜 드물게나 온다. 그런데 우리 동네에 내가 들어본 음악을 하는 애들이 온다? 이건 갈 수 밖에 없지… 가 의식의 흐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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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온다면 팬 되려고 했는데, 역시 취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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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그렇게 한숨을 쉬며 핸드폰을 책상 위에 덮어놓았다. 그냥 일이나 해야 될 모양이었다. 하지만 다시 한번 울리는 핸드폰의 진동. 이번엔 또 무슨 스팸문자냐… 생각하며 쳐다본 화면에는, 예상 외의 이야기가 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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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Group Sound 콘서트 취소와 관련하여, 예상치 못하게 피해를 겪으신 Group Sound 팬 여러분들을 위하여 무료 야외 콘서트를 아래와 같이 진행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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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공연 일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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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료 공연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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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 있어요 대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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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그 문자를 보고 눈을 의심하는 사이, 옆 자리의 여직원이 질문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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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아, 아니. 별 일 아닌데. 어, 음… 김 주임, 혹시 그룹 사운드라고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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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 사운드… 어… 들어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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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노래는? [공중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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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건 알죠! 혹시 그거 부른 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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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이 그룹 사운드였구나. 어, 가수가 아니라 아이돌인가?” 라고 혼잣말을 하는 김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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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오늘 걔들이 여기 와서 콘서트 하는 날이거든. 나도 그거 보러 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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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요? 재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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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공연장에 물 새서 취소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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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와, 그럼 못 보시는 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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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오늘 그 거기 그… 공원 야외공연장 있잖아. 오늘 공연 취소됐다고, 거기서 무료 공연 한다던데. 가 볼 생각 있으면 김 주임도 가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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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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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옷을 갈아입고 공원으로 향했다. 아직도 지지 않은 해. 부슬부슬 내리는 비가 꽤나 운치가 있었다. 더운 것은 짜증났지만, 그래도 비가 내리는 날이라 버틸 만 한 것 같은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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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씨, 그래도 사람 많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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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외공연장 근처에 도착하자, 꽤나 많은 사람들이 서성이고 있었다. 공연장 무대 안에는 최소한의 바리케이트가 쳐 져 있고, 지붕 밑으로는 사람들이 세팅되어있는 의자에 앉아 있거나, 혹은 돗자리를 깔고 있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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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공연장에서 공연이 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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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우산을 접고 무대 근처로 다가가보았다. 바삐 오가는 스태프들 사이 서 있는 네 명의 여자아이. 악기를 잡고 이런저런 소리를 내 보는 걸 보면, 저 애들이 Group Sound인 것이 분명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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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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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팅되어 있는 의자 중 하나에 앉아 잠시 기다리고 있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세팅이 완료되었는지 인삿말이 들려왔다. 하지만 팬들의 박수나 환호도, 그들의 말도 공연장에 떨어지는 빗소리에 묻혀 제대로 잘 들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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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열악한 환경에서 공연을 하게 되어 정말로 죄송합니다. 갑자기 콘서트 홀에 누수가 일어났다고 해서… 하지만 인생이라는 게 이런 일 저런 일 있는 법 아니겠습니까. 어찌되었든 여러분과 저희가 정식 콘서트에서 만나지는 못했다고 하더라도, 이런 특별한 자리에서 만나게 되었다는 점에 감사를 해야 할지… 뭐 세상 일은 생각하기 나름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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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소리는 조금 더 거세진다. 나름 크게 소리를 내고 있던 스피커도 그 소리에 살짝 묻힌다. 지붕 바깥에는 이미 거의 다 져 가는 노을과, 그 그림자를 받아 찬란하게 빛나는 빗물이. 무대에 있던 기타를 멘 소녀는, 지붕을 잠시 바라보고는 어깨를 으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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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시작하겠습니다. 들어주세요, [별이 되어가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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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쿠스틱 버전의 [별이 되어가는 것]. 그도 많이 들어본 노래였지만, 이번엔 또 약간 달랐다. 라이브 느낌을 주기 위해서일까, 아니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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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이 슨 울타리를 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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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봇대를 넘어 또 그 앞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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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형 도넛을 파는 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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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한 일상의 매일이 여기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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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이 진행되면서, 그는 뭔가를 깨달았다. 전면으로 나선 것은 키보드다. 상당히 아름다운, 마치 독주곡과 같은 느낌으로 멜로디를 연주하고 있는 키보드. 기타는 적절하게 도움만 주고 있고, 베이스와 드럼은 존재감 정도만 드러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혀 비어있지 않은 것 같은 곡. 이것은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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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빗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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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차게, 혹은 약하게. 제 멋대로 울리는 빗소리가 지붕 캔버스를 강타하는 바로 그 소리. 후두두둑 떨어지거나 스르륵 흐르거나. 미약하지만, 지붕 밑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들을 수 있는. 지금 눈 앞의 아이들은, 그 소리를 이용해서 연주를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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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면대의 칫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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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붙은 비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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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때가 낀 거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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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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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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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이 되어 갈지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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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고 있던 베이스와 드럼이, 2절부터 들어오기 시작한다. 잠잠했던 곡에 열기가 더해지고, 끓어오르는 분위기. 사람들이 박수를 치는 가운데 그는 공연장 옆을 둘러보았다. 뭔가 점점, 마치 노래에 꼬인 것처럼…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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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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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개의 곡을 끝낸 후. 그는 잠시 손을 풀며,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왠지 계획했던 것보다 훨씬 많아진 듯한 인파. 딱 봐도 오늘 공연 예매했던 사람들보다 많은 것 같은 느낌에, 그들의 주력 팬층인 2030과는 전혀 거리가 먼 연령층도 있었다. 물론 그런 사람들이 예매를 하고 공연을 왔을 수도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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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무료로 누가 공연한다고 하니까, 한번 와 본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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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머리를 꼬았다. 뭐, 좋은 일이었다. 애초에 전국 투어를 계획한 것 자체가 전 연령대에 다가가자는 것이었으니까. 그런 시도는 조금 더 있다가 이루어질 예정이었지만, 여기에서 우선 접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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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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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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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상념을 깨운 것은 어느새 바리케이드 근처로 다가온 노인 한명이었다. 스태프들이 부리나케 뛰어가는 사이, 노인은 더 접근하지는 않고 다만 목소리를 높여 이야기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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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듣고 싶은 노래가 있는데, 여기에는 노래 부르는 사람이 몇 없어가지고. 혹시 노래 하나만 불러줄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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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뭐, 네. 아는 노래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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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그럴 필요는 없지만, 그는 그러겠다고 했다. 그 말에 곡명을 말해주는 노인. 다행히도 아는 노래에다가, 기타만 있어도 되는 노래였기 때문에… 그는 “잠시만 앉아 계세요 어르신.” 이라고 대답하고는, 마이크를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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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쉬는 시간이었는데, 어떤 분께서 곡을 하나 신청해주셔서. 제가 아는 노래이다보니 반가워서 한번 들려드리려고 합니다. 괜찮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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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하는 소리. 그는 대답을 들은 후, 멜로디를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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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나 옛날 노래다. 그가 기타를 잡고 열의를 불태우던 시기의 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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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이 양반 뭔가 좀 아는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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튕기는 기타 소리에, 곡을 알아들은 몇몇 사람들이 박수를 치기 시작한다. 공연장 안, 의자에 앉은 사람들보다는 외곽으로, 혹은 저 바깥에서 우비를 쓰거나 우산을 쓴. 그런 사람들에게서 반응이 터져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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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만 더, 천천히 걸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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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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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기타를 치던 것을 관두고, 아까 곡을 불러달라고 했던 노인을 보았다. 눈물을 글썽이는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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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노인이 어떤 이유에서 그에게 곡을 불러달라고 했는지는 모른다. 그저 그는, 치유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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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이제 다음 곡 가보겠습니다. [어쩌면 그 곳에], 들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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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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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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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장마도 막지 못한 환호… 진정한 예술을 나는 그들 ‘Group Sound’에게서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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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이란 무엇일까. 음악, 무용, 연극 등을 보이는 것을 말한다. 이런 공연을 본다는 것은 우리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해주고, 우리의 인생을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데 목적이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지방은 이러한 공연 내지 문화생활을 제대로 즐기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인프라와 수익성의 문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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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깝지만,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문제다. 문화인도 사람이고, 그들도 돈을 벌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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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여기 이곳에, 당장 어제에. 나는 진정한 예술을 그들에게서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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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내용으로 지역 언론에 난 기사는, 뭔가의 발단을 알리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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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수로 인해 음향장비를 사용할 수 없게 되어 공연을 취소하게 되었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라고만 말하고, 그냥 지나가도 되는 일이다. 그러나 Group Sound는 전액 환불만을 해 준 것이 아니라, 부족한 환경 속에서도 공연을 보여주기 위해서 고군분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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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결과가 그 날 저녁의 무료 공연이었다. 야외 공연장 안에 사람들이 다 못들어가서, 바깥에서 우산이나 우비를 쓰고 노래를 들어야 했던 그 공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들 듣고싶어했던 그런 공연. 관객들과 진정으로 호흡하는 것이 그대로 느껴졌던 그런 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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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는 무조건 기사로 써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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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그 공연에 참석했던 기자가 찍어온 사진을 보고… 지역 언론의 편집장이 그렇게 말한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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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하면 그동안 이런 전례가 없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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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 공연이 취소되는 경우는 많다. 아티스트 본인의 책임이든, 천재지변이든, 지역 문제든, 수익성 문제든. 그리고 그렇게 취소된 공연은 돌아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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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주민은 그렇게 문화생활의 기회를 박탈당한다. 아티스트들에게는 그저 한 번의 공연일 뿐이지만, 지역주민에게는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기회인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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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Group Sound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전액 환불을 하고도, 대관료와 장비 대여비를 내면서… 그들의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공연을 펼쳤다. 형식적인 그런 것이 아니라, 그 날 공연에 오지 못한 모든 사람들이 들어올 수 있을만한 스케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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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누가 이런 일을 그저 ‘그럴 수도 있지’ 라며 받아들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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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물결은 단순히 지역 언론에서만 그치지 않았다. 점점 넓어지고 커지며, 잔잔하지만 단단한 파장을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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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의 역할’… 밴드 Group Sound, 천재지변으로 인한 공연 취소에도 불구하고 무료 공연으로 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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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많은 분들께 음악을 들려드리고 싶었습니다” Group Sound 하수연, 무료 공연의 취지 밝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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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밴드 전국 투어 근황.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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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하게 보면 단지 무료 공연을 1회 해준 것에 불과한 일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무료 공연’을 해주었다는 것 보다는 ‘공연 취소가 자기들 책임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에게 음악을 들려주어야 한다고 무료공연을 개최’한 것에 주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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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결과 Group Sound의 선행은, 다양한 경로로 퍼지기 시작했다. 인터넷 뉴스, 라디오 뉴스, 지상파 한 꼭지, 커뮤니티 베스트 게시판 등… 헤드라인을 지배할 정도로 떠들썩한 것은 아니었지만, 사람들에게 ‘아 Group Sound라는 밴드가 좋은 일을 했구나’라고 각인시키기에는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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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청, 밴드 Group Sound 및 [레이블 에코사운드]에 감사장 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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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 밴드는 지방문화활동의 증진을 위해 힘써주는 활동으로 지방의 다양한 음악문화를 증진하는데 귀여한 공이 크므로 이 감사장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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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위와 같은 감사장을 대리로 누군가가 수여받을 때 쯤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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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어어어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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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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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이미 제주로 가는 배에 몸을 싣고 있었다. 상당히 만신창이가 된 모습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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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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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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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괜찮지… 어어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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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절로 가, 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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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쯤 걷어차다시피 그를 밀어낸 서하. 그는 서러워하면서도, 저절로 굴러가 옆에 자리를 잡았다. 어지러워 죽을 것 같으면서 토할 것 같으면서도 또 묘하게 토는 안 나오는 이런 기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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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배멀미가 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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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를 타자고 한 것은 그의 아이디어였다. ‘서명전’ 시절부터 가지고 있던 그의 버킷리스트 중 하나가, 심야 선박 여행이었기 때문이다. 굳이 배를 타고 갈 필요 없이 부산에서 전날 짐을 보내놓고 그들은 비행기로 가도 되는 일이었으나, 그는 “배 타는게 더 재미있지 않을까?”라는 이야기를 하며 일행들이 배를 타게 유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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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결과가 이 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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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굴러다닐거면서 배 타자고는 왜 했냐? 그냥 편하게 자고 내일 비행기 탔으면 훨씬 나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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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서 들려오는 서하의 핀잔. 평소같았으면 뭐라고 이야기라도 했겠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냥 시름시름 앓으며 객실에 처박혀 천장을 보고 있다가, 다시 또 밀려오는 구토감에 괴로워하다가, 다시 또 누웠다가를 반복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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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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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얼마 지난 후, 자정을 넘긴 시각. 그는 괴로움에 굴러다니면서도 어떻게든 멀미약을 사다 먹고 일어났다. 괴로워하고만 있으면 그가 이 여행을 택한 목적이 없어진다. 힘들더라도 즐겨야 하지 않겠는가, 밤 여행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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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저리 밤의 배를 둘러본다. 매점도 가 보고, 1등실도 가 본다. 크루즈마냥 그렇게 화려하지는 않고 그저 실용적인 모양새를 하고 있는 배지만, 그는 그것이 좋았다. 한참 차이나긴 하지만 그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그런 감성이었기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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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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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천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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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스크림을 하나 물고, 구토감을 필사적으로 참아가며 갑판으로 향한다. 도착하자 뻥 뚫린 검은 하늘이 그를 반겨준다. 주위에 보이는 것은 수평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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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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촘촘히 박혀 있는 별들. 그가 어릴 적에나 볼 수 있었던, 이제는 도시의 불빛 덕에 보지 못한 지 수십년이 넘은 그런 별들. 여름인데도 불구하고 살짝 싸늘한 공기와, 배에 부딪혀 철썩대는 파도. 휘청대는 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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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수평선. 아득한 망망대해에, 아무도 없이 나 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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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의 기억을 떠올린다. 장소는 다르지만. 바다가 아니라 산이었지만. 풍경은 같다. 하늘을 수놓고 있는 별, 싸늘한 공기. 이 세상에 마치 나 혼자밖에 없는 듯한 그런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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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의 기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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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는, 지금에 비하면 정말 아무것도 없는데. 그런데도 즐거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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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걸 알지 못했으니 오히려 즐거웠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가 음악을 순수하게 즐기지 못했던 것도 그 때문일지도 몰랐다. 그냥 좁은 우물에서 내가 최고다 라고 하며 살았으면 행복했을텐데. 더 높은, 절대 닿을 수 없는 기라성 같은 사람들이 있음을 깨달았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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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좀 나아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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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을 얻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다르게 생각하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일까. 이유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는 지금, 음악이 즐거웠다. 이 순간과 같은 풍경을 보던 바로 그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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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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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일정을 말씀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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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말하며 일정을 읊는 고경민 팀장. “일정 하나 외에는 전부 다 관광이니까요. 부담없이 노시면 됩니다.” 라는 말에 이서는 다른 아이들과 함께 환호성을 질렀다. 옆에서 수연도 뭔가 호응을 해 주려고 했던 것 같지만, 멀미의 여파인지 “그에에엑” 같은 소리밖에 나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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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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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으욱. 엑.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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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일정은… 이제 저희가 송악산이랑 가파도 쪽에 가서 이전에 말씀드렸듯이 MV 소스 촬영을 할 예정입니다. 장비랑 허가는 이미 다 나 있는 상태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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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의 등을 잠시 토닥거려 준 후, 이서는 이전에 고경민이 말해주었던 것을 떠올렸다.아직 명확하게 어떤 곡의 MV를 만들지는 정해지지는 않았지만, 소스로 활용할 수 있게끔 좀 촬영을 하려고 한다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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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에 다큐멘터리 팀의 협조를 얻어서 좀 다음 곡에 대한 기대감도 살려본다, 뭐 그런 느낌이었던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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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 가면 장비 설치되어 있다고 했었지. 즉석으로 공연도 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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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며 수연을 들고, 마련된 차에 몸을 실었다. 제주도는 처음이라 두근거리는 마음을 숨기기가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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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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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월의 바닷가를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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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아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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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재의 바닷가를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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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아아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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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설록에도 가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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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로 온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오랜 시간 즐길 수는 없었지만, 이서와 아이들(수연 제외)은 필사적으로 제주도를 즐겼다. 현무암이 가득한 바다. 그리고 싱그러운 자연. 일본과 비슷하게 지평선이 보이는 그런 이질적인 풍경. 말고기. 고기국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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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즐겁게 몇 시간 정도의 여행을 즐기면서 도착한 곳은, 송악산이었다. 관광지라서 그런지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곳. 촬영을 하기 위해서인지 꽤나 정돈된 곳에 앰프와 이것저것들이 미리 날라져 있었다. 그리고 와서 무슨 일인지 구경하고 있는 사람들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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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이대로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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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는 문득 궁금해졌다. 사람들이 다 지켜보고 있는데 이대로 가는 걸까? 그런 시선으로 스태프 중 한명을 쳐다보았더니, 스태프가 “사람들이 있어야 좀 그림이 나온다네요.” 라는 설명을 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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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뭐 어떻게 해야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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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이 그렇게 중얼거리는 사이, 무슨 일인지 궁금해서 기웃대던 관광객 사이 초등학생 같아 보이는 애 한명이 슥 빠져나와 그들에게로 왔다. 엄마로 추정되는 사람이 “재후야!!”라고 소리를 치는 사이, 그 아이가 이서에게 질문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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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그룹사운드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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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맞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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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엄마! 이 사람들 유명한 사람들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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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고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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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에 사인을 받겠다느니, 사진을 찍겠다느니 해서 슬금슬금 모여드는 사람들. 이서는 수연을 바라보았고, 수연은 고경민 팀장을 바라보았다. “시간은 충분하니까요.” 라는 그의 말에 밴드는 어느정도 팬 서비스를 해 준 후, 악기를 잡고 잠시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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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영은 뭐 어떤 식으로 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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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곡을 쳐 보시면, 저희가 한번 잡아보고 필요한 구도가 있으면 어떻게 잡아달라 뭐 그런 식으로 주문을 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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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일단 아무거나 쳐 볼까요? 혹시 저희 아시는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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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가 그렇게 질문을 던지자, 사람들 사이에서 환호성과 함께 신청곡이 튀어나왔다. 다들 아는 [공중정원]과 같은 것들. 그 중에 [잿빛의 나날들]을 외치는 사람도 있었는데, 그 말을 들은 수연이 “잿빛의 나날들 하자.” 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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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그럼 한번 쳐 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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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잠시만요. 사람들 좀 물리고… 저희가 신호 드리면, 그때 연주 부탁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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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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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이루어진 즉석 콘서트. 촬영을 하거나 그녀들을 보는 사람들이 더욱 많아진 가운데, 이서는 한 곡을 마치고 물병을 들이켰다. 으프프픕. 급하게 마셨더니 물이 이리저리 흘러, 약간이지만 옷이 젖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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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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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로 닦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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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건을 건네주는 수연. 물을 닦느라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든 사이, 이서는 주위를 슬쩍 둘러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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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영을 하고 있는 사람들, 카메라를 들고 있는 스태프들, 저 멀리 팔짱을 끼고 지켜보는 회사 사람들. 그리고 티셔츠를 거의 나시처럼 만들어 입고도 “더워!”라고 외치는 서하와, 말 없이 그냥 해파리처럼 늘어져 있는 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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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수연이. 분명 더운 것은 마찬가지일 텐데, 아무런 변함 없이 가만히 서 있는 아이. 그녀는 미동도 없이 하늘을 바라보며 뭔가 떠올리려는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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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이 너는 안 더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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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덥다고 말할수록 더 더운 법이야. 안 덥다고 생각하면 안 더워지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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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말도 안 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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헛소리를 하냐, 라고 말하려는 순간. 예고도 없이 수연이 기타를 튕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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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말은 해 줘야 시작을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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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생각하며 이서는 베이스라인을 떠올리려고 했다. 어떤 곡이었더라. 대충 이렇게 울리면서 들어가면 될 것 같은데… 라고 하며 치던 근음. 하지만 생각나는 게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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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곡이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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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소했다, 그 멜로디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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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짝 쓸쓸하면서, 혹은 황량하면서. 마치 홀로 아무것도 없는 집에 남아 가만히 손을 쳐다보는, 그런 애니메이션의 한 장면이 떠오르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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왠지 기대감이 드는. 지금까지의 여정은 힘들었지만, 앞으로 나아갈 길은 왠지 모르게 희망찰 것 같은 그런 멜로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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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근음을 계속 울렸다. 마치 멜로디가 따라오라는 듯 손짓을 하는 듯 해서. 건너편에서 고민을 하고 있던 서하도 드럼을 조금씩 울리기 시작했다. 현아 또한 마찬가지로, 낮게 깔리는 피아노 소리가 들어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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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음악인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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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는 그렇게 생각하며 손을 계속해서 움직였다. 지속될 것 같던 그 멜로디는, 어느새 음을 닫으며 끝나버렸다. 작은 박수가 이어지는 사이 그녀는 참고 있던 숨을 뱉어냈다.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곡. 완전히 새로운 곡을 맞춰가는 것은 처음 겪어본 일이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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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만든 곡… 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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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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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아의 질문에 수연은 머리를 살짝 꼬았다. 뭔가 고민하는 것 같을 때면 나오는, 늘상 있는 그녀의 손버릇. 그렇게 꼬아놓던 머리칼을 풀어낸 다음, 수연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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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든 곡… 이라고 하긴 애매하지. 만들고 있는 곡이지. 방금 전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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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든 곡… 이라고 하긴 애매하지. 만들고 있는 곡이지. 방금 전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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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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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말이 되냐는 듯 대답한 이서. 서하나 현아나, 말을 꺼내지는 않았지만 비슷한 심정인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수연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채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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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상을 떠올리는 것 자체는… 방금 전까지는 아니고, 어제 밤. 어제 밤이 아니고 오늘 밤이구나. 오늘 밤에 생각을 하긴 했는데. 멜로디를 완성한 건 여기 와서 완성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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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우리 오늘 점심으로 고기국수 먹었지. 그거 맛있더라.”라는 이야기를 하는 듯 평온하게 입을 여는 수연. 다들 황당하다는 듯 수연을 바라보고 있는 사이, 고경민은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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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애들이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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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어처구니 없을 정도의 실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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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경민은 인디 음악 종사자로서, 음악을 만든다는 것이 어느 정도의 무게를 가지고 있는지 잘 아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렇기에, ‘갑자기 떠오른 악상으로 곡을 만든다’라는 신화 같은 것은 믿지 않는 타입의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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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ns N’ Roses의 ‘Sweet Child O’ Mine’이나, 크라잉 넛의 ‘말 달리자’ 같은 곡들은 5분만에 만들어진 것으로 유명한데, 그는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MSG를 쳐도 적당히 쳐야 하지 않겠는가. 5분만에 멜로디를 만들었다고 해도 믿기 힘든데, 5분만에 곡을 다 만들어? 어처구니 없는 소리였다. 자신들의 천재성을 과장하기 위해서 이야기하는 그런 상투적인 농담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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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니저 시절부터 수많은 밴드들을 매니지하면서, 그리고 직위가 올라가 프로듀싱도 맡으면서. 이 회사에 들어오고, 지금처럼 바쁜 시기엔 힘들어도 좀 여유가 나면 Group Sound 외의 다른 밴드도 봐 주면서… 그의 생각은 공고해지면 공고해졌지, 약해지지는 않았다. ‘뮤지션의 천재성’이란 결국 어떤 파박! 하는 재능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수도 없이 쌓아올린 백그라운드에서 온다는 것이 그의 지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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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수연을 보면, 그렇게 굳어졌던 ‘뮤지션의 천재성’에 대한 생각도 허물어지는 것이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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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분은 아니고, 하루만에 혹은 몇시간만에… 혹시 모르지. 저렇게 말해놓고, 진짜 방금 만들었을지도. 원래 그런 아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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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천재성을 드러내는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아이. 다들 어떻게든 “우리 음악 잘해요!!”나 “얘 천재에요!!”라고 자기어필을 해 대며 필사적으로 마케팅을 하는 시대에, 아무 말 없이 자기 할 것만 하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진 재능이 너무나도 커서, 그것이 드러날 수 밖에 없는 아이, 하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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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방금 친 거 괜찮긴 했는데. 드럼이나 키보드는 괜찮았는데 베이스가 좀 너무 그냥 밋밋했어. 나는 이것만 하고싶다… 그런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전혀 뭔가 나설 생각이 없는 그런 류의 베이스인데, 내가 그런 거 싫어하는 거 알지? 그렇게 어중간하게 가져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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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을 듣고는 연극이라도 하는 듯 과장되게 부들부들 떨더니, 갑자기 베이스를 내려놓고는 내던지듯 오체투지로 엎드리는 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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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가 죽일 놈입니다! 이렇게 안이하게 음악을 하려고 하다니! 송구하옵니다 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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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켜보던 관객들의 웃음이 터지고, 서하는 어처구니 없다는 듯 웃으며, 현아는 자신이 당한 것도 아닌데 얼굴이 빨개진다. 재미있다는 듯 과연 어떻게 할지 바라보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면서도, 수연은 무감정하게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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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안이하게 음악 하는 거 반성했으면 됐고, 다음 번에는 좀 더 잘 쳐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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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어~ 하는 사람들의 탄식. 그 말을 듣자 이서는 언제 그랬냐는 듯 일어나 무릎을 탁탁 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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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나 매정한 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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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헛소리 하지 말고 악기나 잡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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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녜 알겠쉼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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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정대는 말투에도 불구하고 전혀 받아줄 것 같지 않은 수연의 분위기. 이서는 베이스를 메다 말고 달려가 수연을 퍽퍽 쳤다. 마치 허수아비 흩날리듯 “아억!” 하며 휘청이는 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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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응징을 마치고 베이스를 잡은 이서와 아이들에게서 다시 음악이 울려퍼지기 시작한다. 기타에서 울려퍼지는 멜로디 자체는 비슷하지만, 그 외의 것들은 확실히 다르다. 조금 더 다이나믹해진 드럼과 베이스. 그리고 질감이랄까 뭔가 많이 달라진 키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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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랑 다르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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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거 같은데… 진짜 라이브로 만드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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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 어떻게 그러겠어. 다 짜놓은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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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광경을 팔짱을 끼고 보고 있던 경민에게, 주위 사람들의 말이 들려온다. 그는 픽 웃고 말았다. 그래, 저것이 당연한 반응이다. 그런 일이 가능할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다. 그렇게 했다고 주장하는 뮤지션은 많아도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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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버킷리스트라고 했는지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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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흘러가는 말처럼 수연이 했던 이야기. “즉석에서 곡을 작곡해서 공연을 해 보고 싶은데요.” 같은 이야기였던가. 저런 반응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 반응의 끝을 보기 위해서라도 그런 일을 한번쯤 할 법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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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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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영 자체는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몰려든 사람들을 배경으로 연주하는 장면. 어느 부분에 강세를 주고 어느 부분에 힘을 빼야 되는지는 피촬영자로서 잘 모르는 부분이었지만, 아무튼 열심히 노력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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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아쉬운 점이 하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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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을 완성을 시켰어야 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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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연습실도 구할 수 없고, 앰프조차도 틀어놓기 힘든 그런 환경. 미니 앰프 정도야 민폐를 감수한다면 어떻게든 호텔방에 틀어놓을 수 있겠지만 다른 사람들의 평안을 방해해가며 그렇게까지 뭔가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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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에 그는 고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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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그 곡을 하고 싶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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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니 차례니까 빨리 심기나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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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왜 이상한 소리야. 푸르대콩 필요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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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필요한데요… 뭐 주실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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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꼭 줘야 하나? 그냥 받아가면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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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싫으면… 그냥 심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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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탄식했다. 도대체 세상이 왜 이러는가. 서로 돕고 살기도 힘든데 어떻게든 이득 하나 더 챙기겠다고. 이놈의 보난자(Bohnanza. 농사를 짓는 컨셉의 보드게임)가 뭐라고 저렇게까지 하는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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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봐도 너 필요한 거 같은데 그냥 가져가라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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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별로… 지금 어차피 3금화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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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금화 노리는 건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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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연수 진짜 구질구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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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고개를 젖혔다. 그가 저런 소리까지 들어야 하는가? 하지만 ‘꼴등은 하루동안 심부름 하인 하기’의 벌칙은 너무 강렬했기에, 어떻게든 할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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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내가 푸르대 한장 더 줄게. 그럼 이제 4금화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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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정도면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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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그거 빈님 좋은 일만 해주는 거라고! 왜 1금화를 그냥 주는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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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옆에서 떽떽거리는 게임 잘 알지도 못하는 녀석의 말은 무시했다. 1등이 중요한 게 아니라 꼴등을 하지 않는 것이 중요한 것 아닌가. 현아가 어찌되든 서하가 어찌되든, 이서보다 앞서나가기만 하면 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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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말했지, 너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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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 꼴등. 이죽대는 이서를 외면한 채, 그는 현실을 믿지 못하고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보았다. 분명히 계산대로 했는데 왜 이렇게 된 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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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마구 떠밀며 “야, 빨리 가서 아이스크림 사와.”라고 말하는 서하에게 밀려, 그는 숙소 바깥으로 튕겨져 나왔다. 찝찝하긴 하지만, 그래도 서울보다는 나은 8월의 밤 공기가 그를 반겼다. 그는 편의점에 들어가며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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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곡을 꼭 하고 싶은데. 어떻게 완성을 시켜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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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인 멜로디를 맡을 기타 파트는… 이미 다 완성이 되었다고 해도 무방한 상황. 하지만 베이스, 드럼, 키보드는 미완성된 상태 그대로였다. 소리를 마음껏 낼 수 있는 환경에만 애들을 데려다 놔도 뭔가 괜찮은 것을 만들 수 있을 것 같긴 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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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상태로 보면, 너무 밋밋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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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기타에게 끌려갈 뿐인 악기들. 물론 그렇게 내버려 둔다 한들 뭔가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충분히 들을 수 있고, 충분히 즐길 수 있다. 하지만 관객들이 즐길 수 있는 것과 만든 사람이 납득을 하느냐는 다른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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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허설 때 약간만 잡아주고, 본 공연에서는 애들한테 맡겨놓는 쪽으로 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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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까지 그들이 공연을 했던 방식은, 연습 당시에 애드리브의 틀을 어느정도 잡아놓고 가는 방식이었다. 어느 느낌까지는 허용이 되고, 어디까지는 안 되고. 그렇기 때문에 이전 무료 공연 당시에 리허설 없이 갔던 것이 좀 도박적인 일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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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가 생각한 방식을 택하게 되면, 아예 처음부터 끝까지 즉흥으로 치는 게 된다. 리허설 때 어느정도의 선은 잡아줄 수 있지만, 그 선을 어느정도까지 해석하느냐는 아이들에게 달렸다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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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명에게 그럴 역량이 없는 것은 아니다. 본인들은 어떻게 생각할지는 몰라도, 그가 생각하기엔 차고 넘칠 실력. 하지만 자유를 꿈꾸는 동물조차, 묶인 시간이 오래되었다면 사슬을 풀자마자 즉시 튀어나가지 못한다. 사슬이 있는 것처럼 행동하며 간을 보는데, 사람은 어떠할까. 다들 내켜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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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생각하며 들어선 가게는 점원이 아무도 없었다. CCTV 하나와 키오스크 계산기, 그걸로 끝. 출입을 막는 것도 아무것도 없고 그냥 아이스크림 냉장고만 덩그러니 놓여 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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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걸 보면… 그냥 밀어붙이는 것도 방법 아닌가 싶긴 하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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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가게를 둘러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옛날이었어봐라. 가게를 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 바로 다 털린다. 그거 때문에 신고를 해? 쪼잔한 거 가지고 신고하지말라고 경찰에게 조인트를 까이거나, 도둑 잡으려고 뭘 좀 줘야 하는 시대였다. 교통경찰 하면 단속 뇌물로 차 뽑는다는 이야기가 즐비한 시대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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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지금 이 가게를 보라.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건 말건, CCTV 하나만 믿고 밀어붙이는 거다. 사람이 지키면 훔쳐갈 사람도 극적으로 줄어들텐데 그런 건 경찰에게 맡기고 이익을 극대화하는… 글쎄. 그는 이런 마음가짐이 그 자신에게도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하며 아이스크림을 든 채로 숙소 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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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게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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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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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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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 오늘 어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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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저녁에 갈 데 있어서 안됨. 수고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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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학원을 마치고. 친구들의 이야기도 전부 무시하고. 저녁 학원을 엄마 모르게 탈주한 채로, 그녀는 빠르게 편의점에서 저녁 먹을 것을 산 다음 오늘 Group Sound의 공연이 펼쳐지는 공원으로 향했다. 좌석이 특별히 정해지지 않은 야외 공연이었기에, 빠르게 자리를 잡아놓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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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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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가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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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려가는 중에도 걸려오는 전화. 학교 친구 중 한명이 빨리 오라며 독촉하는 바람에, 그녀는 체면이고 뭐고 다 내팽개친채로 두 팔을 달리기 선수처럼 흔들며 후다다닥 언덕을 뛰어올라갔다. 캐리어를 질질 끄는 관광객들이 그녀를 이상하게 보는 것이 느껴졌지만, 그런 건 상관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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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놓치면 진짜 못 간단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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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이었던가. 지방에서 공연이 취소되었다고 무료 공연을 보여줬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녀는 “아니 뭔 육지면 그냥 갈 수 있잖아!” 라고 외쳤었다. 육지에 사는 사람들이라면 기차니 버스니 타고 다 갈수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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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는 배나 비행기 아니면 못 간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영영 기회가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평생 학원 한번 빼먹지 않고 나쁜 짓 하나 저지르지 않고 살아온 모범생 부현지가 이렇듯 학원을 탈주하고 Group Sound의 공연에 오게 된 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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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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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헉ㅎ… 으헥… 죽겠다. 나 죽는다. 나 죽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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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걸로 안 죽어. 빨리 일로 와. 너 자리 잡으면 나 굿즈 사러 가야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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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잔을 주는 그녀의 친구. 현지는 숨을 고르며 자리를 잡고는 “나 이거 좀 사다 줘.” 하며 친구를 보냈다. 육지에서 오는 배송비도 비싸고, 온라인은 죄다 품절이기에 이런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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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하고는 몇살 차이도 안 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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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문득 그렇게 생각했다. 그녀가 밴드Group Sound를 좋아하는 이유는, 음악이 좋아서도 있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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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그녀가 현재 가지지 못한 것. ‘자유로운 삶’을 그대로 체현하고 있다는 것이 컸다. 여고생 시절부터 밴드를 만들다니, 그야말로 자유의 상징 아닌가. 네명 다 고등학생 신분일 때 밴드를 만들고, 음악을 하며 차트에 줄세우기… 정도까진 아니더라도 자기들 노래를 다수 올리는. ‘걸크러쉬’ 그 자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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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래도 원탑은 수연 언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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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밴드원들에게는 미안한 이야기지만, 그녀는 Group Sound의 밴드원들이 수연보다 확실히 뒤쳐진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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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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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엄청난 외모나 작곡 실력… 그런 것을 다 제외하고 봐도. 뭔가 그 알 수 없는 연륜의 아우라. 즉석에서 만들어내는, 사람들을 미치게 하는 솔로 등… 비슷한 나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역량. 그런 ‘하수연’을 그 누가 싫어할 수 있겠으며, 누가 다른 밴드원과 같은 급이라고 생각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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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더 좋은 밴드로 갈지도 몰라. 더 나은 밴드원들이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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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며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곧 있으면 공연이 시작할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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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갑습니다. 밴드 그룹 사운드 입니다. 일단 인사는 곡으로 드렸다고 생각하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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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 수연의 말. “정식 인사 부탁드려요!” 라고 외치자, 왁자지껄하게 웃음이 터진다. 그런 현지의 말에 “그럼 인사를 제대로 해 볼까요. 저는 그룹 사운드의 리더 하수연이구요…” 라는 말이 이어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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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노래는, 음… 저희가 어제 와서 만든 곡인데요. 완전 신곡이고, 약간 좀 미흡할 수도 있습니다. 좀 즉흥적인 면이 있으니까 감안하시고 들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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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말에 그녀는 눈이 번쩍 뜨였다. 신곡! 이전 공연에서 미발표곡이 나온 경우가 있다곤 했지만, 그것도 첫 공연이었기에 나온 것이라고 생각해서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이렇게 완전 라이브로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생기다니. 그녀는 떨리는 두 손을 잡아 쥐며, 옆의 친구에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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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대박. 너 셀카봉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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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다 챙겨왔지. 니 것도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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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성이 철저한 친구에게 찬사를 보내며, 그녀는 셀카봉에 핸드폰을 채우고 녹음 준비를 했다. 그러는 와중, 시작되는 노래는 확실히, 이전에는 전혀 들어본 적 없는 곡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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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늘하고 막막한. 음 하나하나가 검은 안개 속에서 나타났다가, 적막 속으로 떨어지는 듯한 그런 피아노 소리. 느리게 울리던 선율은 어느 순간 멈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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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악기도, 공연장의 조명도. 마치 한 순간 세상이 정지한 것 같은 그런 공백. 그런 어둠 속에서 수연의 목소리가 울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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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뤄져 가던 일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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붙잡아 왔던 세월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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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련이라는 것을 볼 수 있다면 저 목소리에 진득하게 묻어있으리라. 흘러내리는 그 감정은, 침잠하는 본질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너무나도 강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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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오래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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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없었던 일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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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막한 바다로 흘러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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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금 시작되는 멜로디는 기타의 것이다. 복잡하지 않고 단순한, 가느다랗게 흐르는 단 하나의 선율. 하나 켜진 스포트라이트 밑에는 수연이 서 있다. 검은 기타를 들고, 고개를 살짝 숙인 채, 마이크만을 바라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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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수많은 별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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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봐왔던 지평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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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피 우는 목소리는 혼자만이 느끼는 것이 아니리라. 같이 들려오는 기타 소리는, 울린다기보다는 걷고 있다는 표현이 어울린다. 마치 힘겹게 하나씩 계단을 오르듯. 하나의 음, 그리고 또 하나의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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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시간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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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리는 고함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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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없는 것일 뿐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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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가느다랗게 속삭이던 기타는, 보컬이 끝난 후 갑자기 튀어오르며 사람들을 깨운다. 희미하게 조명이 들어오고, 내리쬐는 두 번째 스포트라이트는, 이서를 비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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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의 스트로크를 배경으로 한 채, 처음에는 단순하게. 낮게 울리던 저음은 어느새 리듬감 있는 비트로 발전하고, 통통 튀기 시작한다. 정박, 다시 또 엇박, 그리고 또 정박. 복잡하게 교차해가며 울리던 베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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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세 번째 스포트라이트. 서하와 드럼이 그 아래에 있다. 크게 휘두르는 드럼 스틱에 의해 내려쳐지는 4번의 온음. 그 다음에는 16박의 연타. 마지막 한 번의 끝맺음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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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 밝아지는 공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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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웠던 때 스태프들이 빠르게 장식을 해 놓은 것인지, 텅텅 비어있었던 무대는 화려한 꽃들과 싱그러운 식물들로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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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전까지 우울하게 울려퍼지던 멜로디는, 분명 비슷하지만 다른 느낌으로. 엄청난 쾌활함으로 변해 현아의 손끝에서 태어나고 있다. 다른 3개의 악기를 배경으로 뛰어노는 피아노의 음율은 마치 댄스홀에서 흥에 겨워 제멋대로 춤추면서도, 그 움직임과 춤선이 모두 다 아름다워 찬사를 보내게 하는 한명의 무용수를 보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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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뤄져 가던 일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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붙잡아 왔던 세월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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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아까 전의 음색과는 판이하게 들리는 수연의 목소리. 덕지덕지 묻어 있던 검정색 감정을 씻어버린 것 같은 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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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오래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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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없었던 일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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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막한 바다로 흘러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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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사도, 리듬도 아까 전과 같은데, 쭉 뻗어나가는 고음과 거기에서 느껴지는 청량함은 판이하게 다른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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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시작할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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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책의 한 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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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뀐 가사는… 약간 의미를 알 수 없었던 지난날의 Group Sound가 만들어냈던 가사와는 다르게, 직접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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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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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 한자루를 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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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글귀를 써내려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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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떠한 하나의 이야기를 암시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은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현지는 그렇게 생각했다. Group Sound의 노래 가사는 전부 다 이서가 쓰는 것으로 유명하지만… 이것은 분명, 수연이 썼을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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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수 밖에 없을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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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뻔뻔할지도 모른다. 동정을 받고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솔직하게 느껴지는 감정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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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보컬이 끝난 후, 마무리될 것 같았던 분위기의 곡. 하지만 그러면서도 연주를 멈추지 않는 악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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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면 아래에서 공기방울을 올려보내며 조금씩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것 같던 분위기는, 단계적으로 가열되다 이내 수증기를 확 하고 뿜어냈다. 일정한 궤도를 맴돌며 연주되던 3개의 악기는 어느새 탈선한다. 키즈 카페에 아이들을 풀어놓은 것처럼 마구 파바박 튀며 제멋대로 나아가기 시작하는 세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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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놀라운 것은, 그런 분위기 속에서도 어울리지 않는 음, 분위기를 망치는 음은 단 한번도 연주되지 않았다. 조금씩 변화하는 멜로디, 모티프, 하모니. 그러나 주변의 흐르는 물길들을 받아들이면서도 변화 없이 흘러가는 거대한 강물처럼, 곡의 거대한 테마는 변하지 않고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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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중심에는 기타가 있다. 3개의 악기를 보조하는 듯한 역할을 하면서도, 세 아이들이 키즈카페를 뛰어나가지 않도록 보호하는 보호자처럼. 몸짓으로서, 음으로서, 신호로서. 지휘자처럼 세 명을 조율하는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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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역할만을 맡고 있던 기타가 전면에 나서자, 사람들의 박수가 터져나왔다. 조금씩 빨라지는 템포. 그에 맞춰 수연이 무대 앞으로 걸어나왔다. 그리고 무대를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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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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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지하려던 스태프의 몸짓도 허망하게, 수연은 마치 사람들이 비킬 것을 안다는 듯 태연하게 한발짝씩 걸음을 옮겨가며 사람들을 가로질렀다. 평소처럼 무감정하지는 않은, 마치 자신이 있는 이 공간을 실감하고자 하는 듯한. 그런 눈빛이 사람들을 훑고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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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녀는 피크에서 손을 떼고, 왼손만으로 기타를 연주하며…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어보이다가, 눈 앞의 사람 한명에게 손을 내밀었다. 악수라도 하자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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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개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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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가 흘리는 탄식. 현지도 동감이었다. 조금 안 좋은 자리였더라도 자신이 저기 있었다면! 그러나 어쩌면, 다른 사람들과도 다 악수를 해 줄지도? 하지만 수연은 악수를 한 후, 뭔가를 털어내기라도 한 듯 후련하다는 표정을 하며 무대 위로 다시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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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금 울려퍼지는 메인 멜로디. 이제는 아예 두배 정도로 빨라진 템포. 길었던 연주의 끝을 실감하는 듯 관객들이 환호성을 지르는 가운데, 기타가 메인 리프를 연주한 후… 일시에 멈추는 연주와 그로 인해 생기는 공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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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공백은, 관객들의 우레와도 같은 박수가 메꾸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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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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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가는 날의 공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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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모자를 깊게 눌러 쓰고 에어팟을 꽂은 채로, 유튜브 화면을 쳐다보았다. 불과 어제의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떠 있는 공연 직캠. 어떤 것으로 녹화했는지는 몰라도 꽤나 화질과 음질이 좋아서, 사람들의 댓글이 많이 달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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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두번째 곡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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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ㅠㅠㅠㅠ 개부럽 나는 왜 못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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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공연 기대됨 ㅠ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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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방학인데 그냥 이거 투어나 따라다니면서 전국여행할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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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사운드 폼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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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락도 락이라는 걸 오늘 알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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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풀어주세요 ㅠㅠㅠ 더보고싶어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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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매 공연마다 레전드를 찍는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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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접을 떠는 댓글들. 처음에는 소름이 돋았던 그런, 요새말로 하면 ‘억빠’하는 댓글들이었지만 이제는 많이 적응되었다. 그냥 뭐 그를 그만큼 좋아하는 거겠지… 하고 웃어넘길 수 있을 정도로. 간혹 ‘오늘은 또 어떤 참신한 내용으로 나를 웃겨줄 것인가’ 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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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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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념에 빠져있던 그를 깨운 건, 이서의 손길이었다. 어깨를 툭툭 친 후 그를 부르는 이서. 아까 면세점 구경 간다면서 세 명이서 활기차게 달려가더니, 어느새 혼자 여기 와 있네… 하고 생각하며 그는 에어팟을 귀에서 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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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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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하나 물어볼 게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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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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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어볼 게 있다고 말해놓고는 말을 꺼내기가 힘든 건지 우물쭈물하는 그녀. 그의 한쪽 눈썹이 올라가는 것을 본 후, 이서가 말을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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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가사 말이지… 그거, 혹시… 혹시 그거, 너 이야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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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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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아니… 아니, 그냥. 그냥 뭐 궁금해서. 원래 가사 안 썼잖아. 어제 리허설때까지만 해도 허밍으로만 했고. 그런데 갑자기 가사를 썼길래, 그냥 궁금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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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혀 그냥 궁금해하는 기색이 아닌 것 같은 이서의 표정. 하지만 그는 잠시 머리를 살짝 꼬다가, 어깨를 으쓱대며 이야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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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그런 건 다, 받아들이기 나름 아닐까. 뭐라고 말하긴 힘들지. 너도 가사 만들때 이거는 이거다라고 사람들한테 알려주지 않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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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뭐… 으, 어… 그렇긴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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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말을 하던 이서는, 뭔가 짐작하려는 눈빛을 그에게 보내다 “나 잠시 화장실좀 갔다 올게!” 하며 사라졌다. 전혀 화장실을 가고 싶어하는 그런 눈치는 아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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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는 그저 피식 웃었다. 이서가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별 상관 없다. 이제는 털어버릴 때도 되었다고 생각했고, 기회가 왔기 때문에 쓴 것일 뿐. 그렇게 뭔가 무게를 준 것도 아니요, 그의 삶에 큰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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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지나가는 하나의 노래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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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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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 사운드 전국 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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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식 명칭, ‘Group Sound Nationwide Live Tou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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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투어를 시도한 밴드는 많고 많았고, 성공 사례도 너무나도 많아 특별히 이야기할 것은 못 된다. 당장 올해, 그리고 작년, 그리고 재작년… 웬만한 밴드들은 대부분 해마다 혹은 2년, 3년마다 전국 투어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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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인디 밴드의 전국 투어는, 그렇게 흔한 일은 아니다. 지상파 방송에 몇번은 나오고 차트에 여러번 오르내린 밴드 정도는 되어야 가능한 일. 그리고 그런 밴드조차도 광역시나 큰 도시를 도는 것이 고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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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에, Group Sound가 벌인 일은 그야말로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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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작기로는 오십석, 혹은 공연장도 아닌 그런 곳. 수익이라고는 전혀 나지 않을 것 같은 그런 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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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Group Sound는 거침없이 그런 곳에 발을 들이밀며 공연을 해나갔다. 하루 걸러 하루 공연을 하는 것은 기본이요, 어느 도시에서 공연을 한 다음 날 바로 다른 도시에서 공연을 하는 일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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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말로 적자를 감수하는 미친 짓. 공연계에 발을 담그고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다 ‘저런 건 그냥 파산하려고 하는 짓이다’ 라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의 무모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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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 결과는 그야말로 폭발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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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에게 자신있게 들려줄만한, 그런 ‘입소문’ 조차 아주 강력한 마케팅 수단이다. 지인에게 소개한다는 것. 단지 그것뿐인 행위이지만, 현존하는 어떤 마케팅 수단보다 확실하게 신규 고객을 유치할 수 있다. ‘아는 사람’에게 신뢰도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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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소개라는 것이 그러할진데, ‘밴드가 직접 와서 음악을 들려주는 행위’는 어떠할까. 평소라면 전혀 듣지 않았을, 아니 존재조차 모를 그럴 밴드. 지상파에 나오면 채널을 돌리거나, ‘이 시끄러운 음악은 뭐냐…’ 라고 생각하며 몇초 듣다가 그칠 그런 곡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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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 음악의 제작자가 직접 그들에게 다가와서 들려주는 것은, 피할 수도 없었고 피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논타겟 소비자’. 기존의 Group Sound를 소비하던 사람들이 아닌, 그 외 다른 연령대의 소비자들이 직접 관람을 하고. 그리고 입소문을 듣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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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점점, 그들이 목표했던 대로 ‘바닥에서부터 인기를 다져가며’… Group Sound는 점점 서울로 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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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투어의 마지막을 장식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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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 기사 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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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습실에서 기타를 치고 있던 김철연은,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멤버 중 한명. 살짝 흥분된 목소리에 그는 저 녀석이 도대체 무슨 소식을 가져온 것인지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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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걔네 있잖아요. 그룹 사운드. 서울콘 표 팔린거 기사 봤는데 대박이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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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 봤지. 근데 그거 좀 된 기사 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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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제 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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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동업자 소식은 제때 챙겨 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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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그렇게 핀잔을 주고는 다시 기타를 바라보았다. Group Sound의 흥행과 그 여파. 그가 몇십년이 넘게 해왔던 음악의 방향을 바꿀 생각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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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지금 한창 음악을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엄청난 영향이 가지 않을까. 한국 시장에서 밴드로도, 그리고 저런 음악으로도… 충분히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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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그 애들의 성공은 좀 천재성에 기인한다는 거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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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그때 형이 오프닝 오퍼 넣은 것도 얘들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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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렇긴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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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연은 얼마 전의 일을 떠올렸다. 아끼는 후배들이 하는 첫 공연인데, 표를 얼마 팔지 못할까봐 넌지시 “우리가 오프닝 서 줄까?” 라고 물어봤었다. 물론 테일러드와 Group Sound의 팬층이 좀 갈리긴 하지만, 그래도 어느정도 효과는 있지 않을까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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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거절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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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그랬어요? 저는 하는 줄 알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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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그때의 대답이, “저희 힘으로 한번 해보겠습니다.” 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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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걔네가 거기 잡았다고 해서 물어봤었는데, 괜찮다고 하더라고. 솔직히 지금 뭐 거기급으로 갈 수 있는 밴드들이 없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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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짝 자존심이 상하기도 했지만, 그 이상으로 대견하기도 했던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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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팬층이 아무리 약해졌다 한들, 그래도 아직 네임밸류라는 것이 있다. 당장 그들의 이름을 건 페스티벌까지 개최하지 않는가. 그런 ‘이름 있는 밴드’가 오프닝을 서준다는 것은, 꽤나 유혹적인 일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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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거절했다. 그리고 철연은, 승낙했다고 해서 그리 실망하진 않았겠지만… 거절의 이야기를 듣고 오히려 기분이 좋아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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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안 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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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이제 그런 데 못 가지… 아니 그래도 갈 수는 있는데, 아마 관객들이 별로 안 들걸. 여자애들이면 진짜 1군급은 돼야 그 이상 급으로 갈 수 있을 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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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옛날 일을 생각했다. 흔히 늙은이들이 말하는 ‘락의 전성기’가 아니더라도, 00년대… 그 정도만 해도 밴드들의 힘이 아직 살아있긴 했었는데. 물론 ‘그 사건’이 터지면서 와장창 쓸려나가긴 했지만. 여러모로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버린 사건이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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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또 뭘 보여줄지 궁금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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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그렇게 말하며 핸드폰을 잠시 쳐다보았다. 많고 많았던 다른 라이브를 모두 마친 뒤, 이제 마지막 서울 콘서트만 남아 있는 Group Sound의 콘서트 일정. 어떤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던 위대하지만 무모한 일정을 소화해내고, 이제 마지막을 남겨둔 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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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처음 정부지원사업… [Band Pioneer] 당시 그들을 봤을 때, 유망한 아이들이라고는 생각했지만. 그래서 차후 미래가 기대될 것이라고는 생각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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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도까지 올라오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 누가 상상했겠는가. 논란 같은 것들을 다 뚫어버리고 [Invasion From Seoul 2024]에서 우승한 뒤, 공백기를 가졌다가… 정규 1집 [별이 되어가는 것]으로 한국 인디밴드 역사에 남을 성공을 거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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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 지상파에 출연하고, 역대급 공연을 보여주고. 그 뒤에는 제정신이 박힌 사람이라면 누구도 시도하지 않을 미친 일정의 투어 공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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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할 자격이 있는 애들이야. 그 애들이 성공 못 하면, 우리나라 음악의 미래는 없는 거라고 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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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그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들의 다음 행보가 절로 궁금해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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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이 하나 마무리되자, 입이 풀릴 것 같았던 분위기 사이에서 올라가는 손 하나. 그 움직임에 사람들은 바로 말을 끊었다. 일종의 학습된 본능에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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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습니다. 좋긴 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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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좋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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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서두에는 좋다고 이야기를 해 놓고, 안 좋다는 이야기만 주구장창 늘어놓을거면 도대체 왜 좋다는 이야기를 하는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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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하는 의문이 들긴 했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대놓고 물어볼 수는 없었다. 다른 부분에서 수연을 ‘긁는 것’은 체감상 무제한의 자유가 허락되어 있는 듯 했지만, 음악적인 부분에서는… 그런 시도라도 했다간, 바깥으로 끌려나가서 도대체 어떤 이야기를 들을지. 그녀조차도 무서울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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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들어보니까 스트링 파트가 좀 살아줘야 돼요. 마디 하나를 더 밀고, 힘을 좀 더 주는 게 나을 것 같아. 스타카토 느낌으로 짧게 빰, 빰, 빰… 이런 식으로 스트링을 활기차게 가져가주고. 브라스 파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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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저리 연주에 관한 사항을 이야기하는 수연. 상당히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저렇게 지시를 내리고 있으니 다른 세션들이 반발할 만도 하지만, 전혀 그런 기색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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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긴 전에 수연이랑 일해본 사람들이라고 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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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만큼 수연에 대해서 잘 알 것이다. 저 애의 실력이나, 성격 같은 것들을. 그래서 저렇게 순한 양들처럼 가만히 지시를 듣고 있는 거겠지. 서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좀 찡해진다는 생각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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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우리가 세션으로 들어가는 입장이었는데, 어느새 이제는 우리가 세션을 쓰는 입장이 되어버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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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의 콘서트에서 경험했던 세션 일. 당시에만 해도, ‘이렇게 세션도 하고 이러면서 이제 차차 경험 쌓아나가다 보면 성공하겠지’ 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세션을 하는 사람에서, 세션을 주는 사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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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럼? 드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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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어?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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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들으니까 조금씩 흔들리더라.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네가 흔들리면 안 돼. 지금 우리가 의도적으로 신을 내고 흥분하는 느낌이지. 그런데 거기에 말려서 니가 흥분해서 멘탈 상태가 바뀌면 우리 연주도 다 말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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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장되는 이야기. 서하가 바짝 쫄아든 사이, 수연은 머리를 살짝 꼬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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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스랑 드럼 둘 다 견고하게 버텨줄 수 있으면 모르겠는데, 우리 베이스는 아마 니가 그렇게 막 나가기 시작하면 자기도 모르게 ‘어? 저게 맞나?’ 이러면서 따라갈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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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건… 어… 맞는 것 같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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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마 부정하지 못하는 이서의 모습을 보고, 수연은 한숨을 푹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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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항상 차갑게. 신을 내면서도 니가 항상 최종선상에 서 있다, 그런 생각을 하고. 그렇게 좀 스탠스를 가져가줬으면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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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고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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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습이 마무리되고, 세션들이 다 떠난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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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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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를 옮겨 잠시 카페에 자리잡은 네 사람. 혹독한 연습에 지쳐 반쯤 드러누운 세 명과 달리, 수연은 노트에 뭔가를 적고 있었다. 뭔가가 쭉 적혀 있는 노트. 이서가 다가서며 그것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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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리스트. 그 연출회사 쪽에서 마지막으로 최종 점검 해달라고 하길래, 마지막으로 보고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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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는 글이 아니라 반쯤 낙서로 뒤덮혀 있었다. 정규앨범과 Ep, 미발매곡과 미공개곡이 온통 뒤섞여 있는 그런 셋리스트. 의외인 것은, 이제까지의 셋리스트와는 다르게 조금 정석적인 느낌이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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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정원]이 거의 마지막이네. 요즘엔 다 첫번째에 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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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너무 많이 써먹기도 했고. 이제 이런 콘서트에서는 정석적인 게 좋아. 이전에는 좀 관심도를 집중시킬 필요가 있었던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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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은 그렇게 말하면서 골똘히 그 종이를 쳐다보았다. 위로 화살표를 올렸다 내렸다 하는 모양이 조금 재미있어, 이서는 자신도 모르게 손가락 하나로 수연의 볼을 찔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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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것은 뭐하냐는 듯한 차가운 눈빛. 절로 찌그러드는 자신을 느끼며, 이서는 자리에 앉아 빨대를 쭉 빨아댕겼다. 호로록 하고 들어오는 차가운 라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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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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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는 튕겨나듯이 의자에서 몸을 바로했다. 오늘 중요한 일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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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그 다큐멘터리 1화 공개되잖아. 그거 혹시 너희 집에서 봐도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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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라는 듯한 수연의 표정. 하지만 서하는 그 표정을 무시한 채, “그런 거는 같이 보긴 해야지.” 라고 중얼거리며 이서에게 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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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에서 보면, 그 다음에는 집에 가는 거 맞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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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 소리야. 밤 늦었는데 자고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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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집이 무슨 호텔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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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처구니없다는 듯 중얼거리는 수연. 하지만 그 소리는, 이미 놀 작정을 하고 있는 세 사람에게 전혀 들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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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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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 Sound 다큐멘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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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한지 이제 1년밖에 안 되는. 그러나 현재 한국 음악 시장에서 가장 뜨거운 밴드… Group Sound를 주제로 한 다큐멘터리가 만들어진다고 했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각양각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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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사 차원에서 Group Sound를 밀어주는 거냐는 반응도 있었고, 전폭적으로 밀어줘야 할 밴드라는 이야기도 있었으며, 쟤들이 뭐길래 다큐를 만드냐 하는 이야기도 있었다. 그야말로 각양각색의 반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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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공통적인 반응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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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왠지 재미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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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도시 몇개만 돌고 끝내는 ‘명목상 전국 투어’가 아닌, 웬만한 곳은 다 가보는 진정한 전국 투어. 그리고 그걸 진행하는 사람들은, 현시점 음악 시장에서 가장 뜨거운 밴드이기도 하지만 상당한 외모를 가진 여자 4명이기도 했다. 게다가 같이 도는 레이블 사람들까지 있으니, 이야깃거리가 안 생기려고 해도 안 생길 수가 없는 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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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다큐멘터리의 공개 시점은, Group Sound의 전국 투어가 끝나기 전이다. 완결편까지 나오려면 전국 투어가 끝나야 하겠으나, 이 공개 시점이 시청자에게 ‘현재 진행되는 일에 대한 다큐멘터리’ 라는 감각을 주기에는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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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기대를 한다는 느낌이란 말이지. 그러니까 우리 이야기지만 안 볼수가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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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옷으로 갈아입은 채, 거실에서 혜인이 가져다준 과자를 먹으며 그렇게 말하고 있는 이서. 여자만 있어서 그런지 여러모로 노출된 부분이 많았지만, 그는 다른 것보다 과자 부스러기가 이불에 떨어지는 게 너무 신경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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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그거 이불 치우고 먹어. 부스러기 떨어지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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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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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치우는 건 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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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아! 괜찮아 그런거. 이서야 그냥 먹어도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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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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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인의 말을 듣고는, 혀를 베 내미는 이서. 그는 그 혀를 잡아당겨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참았다. 아무튼 친구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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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안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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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있으면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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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워를 마친 후, 머리를 털면서 나오는 현아의 질문에 핸드폰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대답하는 서하. 피식거리는 웃음이 뭔가 음흉한 느낌이었다. 도대체 뭘 보고 있는 건지, 커뮤니티 사이트 같긴 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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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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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윽고 시간이 되자, 이서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는 그 말에 천장을 잠시 바라보았다. 남들과 같이 보기는 좀 그런, 그런 인터뷰가 있긴 했는데. 오늘 그 내용이 안 나왔으면 좋겠다는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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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왜 여기서 지금 이러고 있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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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여기서 보니까 진짜 살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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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반부. 투어와 다큐멘터리의 목적을 설명하고, Group Sound가 어떤 밴드인지 보여주고. 도대체 어떻게 과거 영상을 구한 것인지, 처음 학교에서 콘서트 했던 것 뿐만 아니라 파라독스에서 콘서트한 영상도 들어간 다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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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다큐멘터리 제작 팀의 정보 수집 능력에 감탄하며 커뮤니티의 헤드라인들을 슥 훑어보았다. 다큐멘터리가 커뮤니티에 굳이 헤드라인으로 언급될 정도로 그런 화제가 되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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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우리 그때 저렇게 분위기 안 좋았던가? 아니지 않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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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방송이라는 게 그렇지. 저걸로만 보면 완전 불화설 생길만한 그런 밴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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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의 질문에 그는 턱을 괴고 답했다. 방송이라는 게 항상 그렇지. 조금이라도 흥미가 생길 내용을 파는 것이 바로 방송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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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기분이 어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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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뭐… 별 생각 없었다? 그냥 피드백이니까. 건전한 거죠. 저한테 악감정이 생겼다 뭐 그런 이유로 이야기를 하는게 아니니까요. 음악적인 이야기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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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다큐멘터리가 그들이 이전에 경험했던 [Invasion From Seoul 2024] 급의 방송은 아니었던지, 금새 ‘별 일 아니었다’라고 수습해주는 모습. 안도의 한숨을 쉬는 다른 아이들을 보며, 그는 참 다들 호들갑이 심하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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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이번주에는 안 나오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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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상, 이제 슬슬 다큐멘터리가 마무리 될 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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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은근히 재미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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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부끄러운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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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다 그래. 목소리 녹음한거 들어봐도 좀 부끄럽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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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아이들이 각자의 소감을 이야기하는 가운데, 그는 그가 인터뷰했던 파트가 이번주에 나오지 않은 것에 안도하고 있었다. 뭐 엄청난 문제가 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런 파트는 같이 보기는 좀 애매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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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더 이야기해주실 수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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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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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흘러가던 이야기가 조금 요동친다. 나오던 것은 Group Sound 멤버들의 과거 이야기. 최이서, 유서하, 정현아의 과거에 대한 이야기를 짤막하게 짚고 넘어가던 다큐멘터리는… ‘하수연’의 대목에서 멈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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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는, 사실 좀… 방송에서 하기 힘든 이야기라고 생각해서 남들에게는 절대 이야기하지 않으려고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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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오는 것은 ‘그녀’의 어머니, 이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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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사건 이후로도, 수연이 이야기가 계속 나오는 걸 보면서… 물론 수연이가 저지른 잘못이지만. 결국 이야기를 해야 하는 시점이 언젠가는 오겠구나 싶더라고요. 그래서 그냥 이 참에 이야기를 좀 할까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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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아이들이 귀를 바짝 세운 사이, 그는 머리를 빙빙 꼬며 혜인을 슬쩍 바라보았다. 결국 이 이야기가 나오는구나. 첫 방송이라, 시선을 끌어야 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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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재성… 수연이 아빠고, 제 남편이죠. 수연이가 엇나가기 시작한 시점이 그 때에요. 수연이가 초등학생 때, 수연이 아빠가 죽었거든요. 과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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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랑 수연이 아빠는 20대에 결혼했어요. 우리 둘은 초등학교 시절부터 소꿉친구였고, 중학생쯤부터 연애를 시작했고. 운이 좋게 둘 다 머리가 좋아서, 상당히 좋은 대학을 갔어요.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결혼을 했고, 같이 사업을 시작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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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이를 낳고, 저희 둘은 수연이를 키워가면서 사업을 확장했어요. 상당히 잘 나갔죠. 괜찮은 사업체였어요. 매출도 잘 나왔고, 여러모로 잘 됐어요. 그리고 수연이가 초등학생 쯤에, 저는 잠시 사업과 수연이를 애기아빠한테 맡겨놓고 해외에 나왔어요. 사업을 확장하려면 더 공부가 필요한 것 같았고, 애기아빠도 거기에 동의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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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몰랐어요. 어느 날, 전화가 왔더라고요. 국제전화로. 하재성 씨가 죽었다. 그 이야기를 들었을때, 저는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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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잠시 쉬어가는 타이밍. 하필 오늘 나오는 게 그 파트인가. 고개를 돌린 세 아이들의 표정은 참으로 뭐라 설명하기 힘들다고, 그는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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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 그는 이야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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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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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거, 우리가 들어도 되는 이야기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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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마디는 서하에게서 나왔다. 역린을 건드린 사람 마냥 미약하게 두려움을 품고 있는 듯한 말투에, 그는 피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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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방송으로 공개된 건데 ‘들어도 되는 이야기’는 뭔가. 단지 원하지 않았던 것은, ‘이런 일’이 생길까봐 오늘 방송을 타지 않길 원했던 것 뿐이었다. 이런 내용을 같이 보면 어색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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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방송으로 나오면 안 되는 이야기였으면 엄마도 인터뷰 안 했고, 나도 이야기 안 했지. 좀 있으면 내 이야기도 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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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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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하게 귀국을 했어요. 수연이가 진짜 덩그러니 있더라고요. 그때는 사이가 좋았으니까, 껴안고 엄청 같이 울었어요.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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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속에서는 엄마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그에게도 어렴풋이 기억이 있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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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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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을 수습할 겨를도 없었어요. 남편의 친족분들, 그 외 다른 사람들… 어떻다 저떻다 너무 많이 싸웠어야 했고, 그보다 더 급한 건 사업이었죠. 해외에 떠나있던 동안 제가 팔로우업하지 못했던 사안이 너무 많았고, 애기아빠가 저랑 이야기하지 않고 벌였던 일들도 많았어요. 저는 그걸 수습해야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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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간동안, 저한테는 잠이라는 게 없었어요. 집에 들어오지도 못했죠. 수연이에게는 ‘돈 올려뒀으니까 이걸로 뭐 먹어’ 같은 이야기 밖에 못 했어요. 그렇게 몇년을 보내고 나니, 사업이라던지 하는 부분은 정상화가 되었지만… 정작 수연이와 저는, 정상화가 되지 못했던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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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는 그 뒤로 계속해서 이어진다. 이야기의 무게추는 ‘이혜인’에게서 ‘하수연’으로 넘어왔다. 재연배우를 쓴 화면에서, 누군가가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시고. 비행을 저지르는 것이 보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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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자신’이 했던 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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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고 할 말이 없는 일들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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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면속의 ‘그’는, 그렇게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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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다쳤던 것이 1년도 더 된 일이고. 아무래도 점점 기억이 돌아오긴 하니까… 그때의 일이 이제는 점점 생각이 나거든요. 솔직히 말해서 엄마를 많이 원망했던 것 같아요. 아빠랑 사이가 좋았거든요. 엄마가 유학 갔을 때도, 아빠랑 많이 놀았고. 근데 이제 아빠도 시간이 안 나는 날이 반복되다가… 언제였더라. 갑자기 전화가 왔어요. 아빠가 쓰러졌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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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의 기억’이 난다. 감정 같은 건 글쎄, 이제는 그다지 떠올리지 못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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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의 ‘하수연’은, 정말 분노에 차올라 있었다. 죽어버린 아빠, 자신을 신경쓰지 못한 채 다른 일을 하러 다니는 엄마. 사사건건 자기를 괴롭히는 아빠의 친척들에, 지나갈때마다 수군수군대는 학교의 아이들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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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돌아버리기 좋은 환경이었었다. 그리고 실제로 돌아버렸기에, 자신이 그런 일을 저질렀던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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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몇 년 동안 있었죠. 뭐 좋은 이야기는 아니니까, 굳이 디테일까지 이야기는 안 해도 될 것 같고… 그냥 그렇게 됐어요. 안 좋은 시기였죠. 아이들에게도 못되게 굴었고… 사과를 받아준 아이들에게는, 정말 고맙다는 말 밖에 못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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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야기는 잠시 표류한다. 몇 가지 설명을 덧붙이며, 그에 대한 ‘감동적인 연출’을 보여주는 다큐. 그는 머리를 살짝 꼬며 혜인을 바라보았다.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해보이는데, 애들 앞에서 울 생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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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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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뭐라 말하지 말고, 일단 더 봐. 이거 보니까 이 다음 이야기까지 나오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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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섣불리 이야기를 꺼내려는 이서를 제지했다. 아마 저 이야기가 나온 것을 보면, 그 다음에 이어지는 이야기도 분명 나올 수 밖에 없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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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이야기도 들어볼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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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이야기하기 좀 부끄럽고 복잡한 부분이 있긴 한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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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하게 언제 어디서 며칠에 일어난 일인지는, 저도 만난 시기는 기억이 안 나요. 어떤 일으로 만났는지는 기억이 나는데. 제가 술에 취해서 어디 구석에 처박혀 있을 때, 노인ㄴ… 선생님이 와서 챙겨줬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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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제가 기타 들고 있는 것 같은데, 한번 쳐 보라고 막 그랬었어요. 그래서 선생님이 기타를 쳐 줬고, 저는 그걸 듣고 나도 한번 쳐보겠다면서 기타를 잡았죠. 그때 아마 몇분만에 곡 하나를 쳤을 거에요. 그때 저는 저한테 재능이 있는 걸 알았고, 노인… 선생님은 나한테 배우고 싶으면 언제 여기로 와라… 그런 이야기를 듣고, 그리고 한동안 배우게 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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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문만 무성했으나, 누구도 알지 못했던 이야기. 당사자인 수연의 입을 통해 풀리는 그 비화는, 너무도 드라마같은 스토리였다. 일찍 죽은 아버지와, 가정을 팽개치고 바깥으로 도는 엄마. 그것 때문에 삐뚤어진 아이가, 우연히 기타를 가르쳐주는 멘토를 만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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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네라고 자꾸 부르려는 것 같은데… 얼마 안 봤는데도 불구하고 정말 가까운 사이였던 것 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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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하는 그렇게 생각했다. 인터넷의 다른 사람들도 비슷한 의견인 것 같았다. SNS를 통해 찾아볼 수 있는 Group Sound의 팬들은, 한강을 형성할 정도로 펑펑 울고 있었고, 매사에 부정적이기로 은근 유명한 ‘그룹사운드 마이너 갤러리’ 녀석들도 이번에는 조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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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뭐, 남들한테 나 기타 배운다 이렇게 떠들고 싶지는 않아서. 그리고 기타를 배운다는 것 자체도, 뭔가 심도깊게 배우려고 했다 그런 생각도 아니었어요. 어디까지나 여흥이라고 해야 하나. 어차피 집에는 들어가기 싫고, 바깥에 돌아다니면 다 돈이고. 그러니까 이제 영감님 집에 가서 기타 배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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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배우고 있었는데, 어느 날 뭐… 술 먹고 그렇게 된 거죠. 같이 마시던 애들은 친한 애들은 아니었는데, 그냥 기분 좋아서 같이 타고 가다가 휙~ 하는 바람에 이제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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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일어나보니, 기억은 별로 없었다고 했다. 이전의 자신과 이후의 자신이 같은 사람인지도 잘 실감이 안 나는 그런 상태. 단지 기억에 남은 것은 기타와 선생님. 하지만 그렇게 찾아간 선생님은 이미 죽은 지 오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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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부터 이야기는 들었어요. 너는 꼭 음악 해야 한다. 그런데… 뭐, 별 생각 없었는데. 이제 돌아가셨다고 하니까. 어쩔 수 없구나. 할 수 밖에. 이런 느낌이었는데… 이제 이서가 저랑 밴드를 하자. 그런 이야기를 한 거죠. 그 뒤로는 이제 다들 아시는 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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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떨어져라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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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가 끝난 후. 왠지 모르게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 이서를 몇번 밀어내려다가 포기한 채, 그는 그렇게 말하며 핸드폰을 쳐다보았다. 친구, 지인, 기타등등… 수많은 사람들에게서 안부를 묻는 카카오톡이 와 있었다. 심지어는 답장을 하는 와중에도 계속 도착하고 있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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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어헣ㅎ헣으허흐흑ㅎ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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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야 웃기네. 당사자인 내가 그냥 이러고 있는데 니가 왜 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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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그렇긴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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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에다가 얘 지금 울어서 옷 다 젖었음. 엄청 찝찝해. 좀 떨어져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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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든 이서를 떼어낸 다음, 그는 주방으로 다가가 물을 한잔 마셨다. 그를 그렁그렁한 눈으로 쳐다보는 엄마. 그는 “쟤들 가면 이야기 하죠.” 라고만 말하고는, 소파에 돌아와 앉았다. 다시 엉겨붙으려는 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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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찮으니까 저리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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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치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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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치만은 무슨 그치만이야. 나는 괜찮아. 괜찮다고 하는 게 더 안 괜찮아보인다는 그런 말 하지 말고, 진짜 괜찮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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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그렇게 말하며 핸드폰을 다시 들었다. 어느새 밀린 답장. 답을 해 주는 시간에도 또 다시 오는 답장을 받아내며, 그는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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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의 이야기는, 전반적으로 다 날조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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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까지는 남들이 알아서 받아들이도록 내버려두었다. 왜냐하면 디테일적인 부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자신이 없었으니까. 기억이 있었다고는 하나, 자신의 기억이라기보단 약간 ‘책에서 찾아보는’ 느낌의 것들이었기 때문에, 그는 고육지책으로 그런 방법을 택할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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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저 자리에 나온 김에, 그는 이야기를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이제는, 그 기억들도 ‘찾아보는’ 게 아니라 자신의 일부가 된 상태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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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좀 말이 되게 만들려고, 진짜 엄청 머리를 굴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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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면, 완전한 날조라고도 할 수도 없는 이야기였다. ‘하수연’과 ‘서명전’이 만난 것은, 어찌되었든 논리적으로는 사실인 이야기 아닌가. 단지 만난 장소가 실제하는 현실이 아니라는 것이 다를 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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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연과 서명전… 이제는 둘 다 나 자신. 거짓말을 했다고는 보기 힘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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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카카오톡을 바라보았다. 답장을 하다가는 하루가 내내 다 갈 것 같은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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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 1화가 나간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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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커뮤니티가 일거에 폭발하는 일은 없었지만, 효과는 분명하게 나타났다. 흔히들 말하는 ‘짤’의 형태로 다큐멘터리 캡쳐본이 인터넷에 돌기 시작했고, 그런 자료들은 Group Sound의 팬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선명하게 Group Sound를 각인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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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라마도 아니고 이게 말이 되나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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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타까운 사연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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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 음악 그래도 꽤 듣는편인 것 같은데 서명전이 누구인지 모르겠는데 알려줄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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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한국 세션계에서 세손가락 안에 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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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한국 기타계 go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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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뭔 고트야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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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실력만 보면 고트지 내가 기타 좀 쳐봐서 아는데 그분 펜더 엔도서 제의까지 받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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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나 안타깝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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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ㅠㅠㅠㅠㅠㅠ 이번에 콘서트 하는거 다음에 가야지 하고 스킵했는데 꼭 가봐야겠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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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로 이야기되는 것은 2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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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다큐멘터리에 나온 Group Sound의 투어 첫 번째 공연. 소프트한 느낌으로 펼쳐진 무대는, ‘아이돌 공연’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색다른 느낌을 주었다. 게다가 다큐멘터리에서 발표된 신곡은, 마일드하게 사람들에게 접근하기 좋은 곡. 누군가가 발빠르게 녹음해서 올린 유튜브 영상은, 조회수가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는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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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하수연’의 과거. [Invasion From Seoul 2024]로 한번 커뮤니티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하수연의 과거는, 다큐멘터리로 다시 재조명되며 엄청난 서사를 쌓아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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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제기되었고, 해결되긴 했지만 간혹 인터넷에서 나돌던 ‘학교폭력’ 관련 이야기는… ‘저런 불우한 과거를 가지고 있는 애라면 그럴 수도 있지’ 라는 여론에 다 휩쓸려가고 말았다. 남은 것은 동정과 안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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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결과, Group Sound는 단지 1화만으로 상당한 인지도를 쌓아올릴 수 있었다. 이전까지는 음악을 즐기는 사람들 정도나 알던 이름이었지만, 이제는 현실에서도 “아 걔들 그 인터넷에서 봤는데?” 라는 이야기가 심심찮게 나올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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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다 [레이블 에코사운드], 특히 고경민 팀장과 정유영 과장이 의도한 대로였다. 하지만 다큐멘터리의 다른 모든 것이 의도한 대로 돌아갔다고 해도, 정작 그들이 정말로 원했던 것… 일종의 단기적 목표였던, ‘서울 콘서트 티켓 매출 상승’에는 단 하나도 기여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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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하면, 이미 매진이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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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쁜 오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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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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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 그거좀 갖다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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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야야 넘어간다 잡아 잡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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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쁘게 설치되고 있는 무대를 보면서, 그는 직원들과 함께 걸었다. 옆에는 외주 회사에서 나온 콘서트 연출 감독과, 다큐멘터리 촬영 감독이 같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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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보시는 것처럼 모니터 달려 있구요. 이제 아무래도 뭔가 환경적으로 튀어나온다던가 그런 건 전혀 안 되니까. 아무래도 조명 컨트롤이 들어갈 거고… 약간 타워처럼 들어갈거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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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이야기했던 거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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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문제 없습니다. 저희가 다 검토했고, 충분히 가능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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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를 거닐며, 이리저리 점검을 한다. 아직 완전히 다 설치되지는 않은 시설물들이지만, 그는 경험을 통해 대략적인 그림을 유추해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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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케일 진짜 크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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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주문했고 회사에서 컨펌을 내긴 했지만… 이렇게 돈을 들여도 되는 건가, 싶을 정도의 장비들. 과거 세션 시절 다녔던 콘서트에서도 쉽게 보지 못했던 스케일. 하지만 그는 고개를 털어 그 생각을 지워버렸다. 돈은 언제든 벌 수 있지만, 첫 라이브 투어의 마지막 콘서트는 다시 할 수 없는 일이다. 아끼지 말아야 하는 것이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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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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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무심코 그렇게 중얼거렸다. 마지막 콘서트가 하루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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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있다가 뵙겠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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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생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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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션들의 합창과 함께 박수가 이어진다. 밝은 표정으로 일어나는 사람도 있고, 긴장되어 보이는 기색이 역력한 사람들도 있다. 대표적으로 현아의 친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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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나 긴장돼 어떡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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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거…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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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가 별 거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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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어쿠스틱 공연을 계기로 인연을 맺었던 현아의 친구들은 이번에도 세션을 서 주기로 했다. 학교 축제와는 질적으로든 규모적으로든 비교가 안 되는 스케일 탓에, 상당히 긴장한 모습을 하고 있는 여대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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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하다보면 다 하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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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뭘 하다보면 다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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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밴드에서는 움츠려 지내며 비슷한 걱정을 하고 받는 현아를 보며, 그는 생각했다. 저렇게 친구들 사이에서는 의지되는(아마 그럴 것이겠지) 모습을 하는 걸 보면, 확실히 사람은 서는 곳이 바뀌면 모습도 양식도 다 바뀌는 법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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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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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카페 갔다 오면서 슬쩍 가봤는데 벌써부터 줄 선 사람도 있더라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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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입장은 순서대로 하면 되는 건데 줄은 왜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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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즈 사야 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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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에 커피 구매 겸 정찰을 갔다 온 이서의 보고. 황당하다는 듯한 서하의 중얼거림에, 이서가 대답했다. 그는 둘이서 주고받는 그런 촌극을 보면서 크로매틱을 가볍게 해 보았다. 손이 휙휙 돌아가는 것이 컨디션이 좋은 듯 했다. 툭툭 쳐 보다가, 손 가는 대로 곡을 하나 쳐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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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무슨 노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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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모르나? 세션 가면 가끔 연주하는데. Every breath you tak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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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세션을 가보면 치는 노래. 특히 딜레이가 제대로 먹었나 테스트를 할 때 많이 치는 곡. 손에 쫀득하게 달라붙기도 하고 해서 상당히 유명한 곡인데. 이걸 모르나 하고 그는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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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션 가면 이제 중년 아재 노인네들이 막 이거 연주하면서 코러스 넣어달라고 난리치고 그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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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그런 데 많이 가본 것 처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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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니 그렇게 들었다는 거… 가 아니라 실제로 세션 많이 돌잖아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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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가? 하고 갸웃거리는 이서. 그는 입을 비죽거려보이고는, 공연장을 둘러보았다. 오늘 다 매진이라고 했었지. 매진될까 싶은 생각도 있었지만, 진짜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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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하면 현실이 그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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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이 곳을 빌리자고 했을 때, 모든 사람이 반대를 했었다. 그 밑급의 공연장을 빌려 매진을 시키는 것이 더 경제적일 거라는 이야기를 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곳을 빌리게 된 것은, 그가 강력히 주장했던 것이 컸다. 역사와 전통이 있는 곳. 그래서 더 빌리고 싶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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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더 윗급 빌리자고 할 걸 그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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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종 유명 아티스트들이 내한을 올 때 쓴 곳. 매진이 되고도 암표가 돌고 인터넷에 ‘그룹사운드 콘서트 가고 싶은데 어떻게 하냐’ 라는 글이 도는 걸 보면, 한 급 더 올려도 될 뻔 했다고 그는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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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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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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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숨 자러 가야겠다. 뭔 일 있으면 깨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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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말에 눈을 번쩍 뜨는 이서. 표정은 마치, ‘이 상황에서 잠이 온다고?’ 같은 느낌이었다. 서하는 옆에서 “너는 지금 잠이 오냐?” 라고 실제로 말하고 있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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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뭐 그럼 어떻게 할 거야. 공연 시작까지 한참 남았는데 기다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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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건 아니라도 뭔가… 연습이라도 좀 할 수 있지 않나. 자는 건 좀… 긴장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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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을 몇번이나 했는데 이런 거에 아직도 긴장을 해. 그냥 한숨 자고 한 30분 전에 깨어나서 손 풀면 그걸로 그만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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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손을 흔들며 대기실로 사라지려고 했다. 좀 늘어지게 잔 다음 일어나면 기분도 상쾌하고 좋을 테니까. 하지만 그런 그의 목덜미를 잡은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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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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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좀 자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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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자러 가신다고요?! 무슨 소리에요!! 할 게 얼마나 많은데!! 메이크업도 해야 하고 유튜브 자컨용 인터뷰도 찍어야 하고 팬분들 선물 인증샷도 찍어야 하고 화환 같은 것도 감사 인사 해야 하고 얼마나 많은데!! 빨리 오세요 이 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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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게 많다며 수연을 불러다가 그를 질질 끌고 가는 정유영 과장이었다. 그는 돈까스 먹으러 가자고 했다가 치과 끌려간 아이처럼, 멤버들의 폭소에 복수심을 불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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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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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없이 늘어선 줄의 끝에서, 세윤은 드디어 자신이 기다리던 물건을 받을 수 있었다. 이번 공연 한정으로 발매된 옷들과 응원용 굿즈. 특히 한정 훈장(인지 키링인지 아무튼 그렇게 생겼다)과 옷들이 이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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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질도 굿즈… 라고 생각하기보다는 일반 브랜드 옷 같은 느낌이고. 이건 진짜 달고 다녀도 일코 가능할 것 같은 디자인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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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에 자부심이 있는 두 멤버가 있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꽤나 공들여 만든 것이 분명해보이는 굿즈들. 그녀는 줄을 꼬박 선 다른 사람들의 질시섞인 시선을 받으며 당당하게 콘서트 회장 안으로 진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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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마련된 콘서트 회장을 보고, 잠시 멈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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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을 꺼서 의도적으로 어둡게 해 놓은 회장. 희미하게나마 비쳐 발을 헛디딜 염려는 전혀 없도록 만들어놓은, 360도 무대. 무대 안 쪽은 어둠으로 가려져 있어 전혀 보이지 않는 가운데, 바닥을 수놓은 야광 불빛이 마치 반딧불이들의 행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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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윤!! 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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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누나 이름을 막 부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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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자리에 가 있던 그녀의 남동생, 세현. 그녀는 투덜투덜대며 자리에 앉아 무대를 바라보았다. 점점 어둠에 적응하는 시야. 무대 안쪽에는 희미하게, 많은 것들이 놓여 있었다. 오늘 뭔가 보여주려고 하는 걸까. 이렇게 세팅을 해 놓는 것 부터가 돈이 엄청 깨질텐데. 이 애들 돈을 안 벌려고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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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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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윤은 이전 그녀의 덕질 대상이었던(지금도 하고 있긴 하지만) 주현을 떠올렸다. 이곳보다 더 관객이 많아 급이 높다고 표현되는 공연장을 주로 사용하는 주현이지만, 그는 가수 활동을 한지 벌써 10년차가 넘어가는 사람. 주현도 이 즈음에는 버스킹 정도나 하거나 했지, 콘서트는 꿈도 꾸지 못했다고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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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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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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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에서 들린 건, 세현의 탄성. 핸드폰으로 뭔가를 찾아보던 것 같던 그는, 이내 자신이 원하던 걸 찾았는지 세윤에게 화면을 들이밀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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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좀 봐. 락 밴드는 거의 뭐 전멸이고. 여돌 중에 여기 매진시킬 수 있는 그룹은 거의 뭐 1군급은 돼야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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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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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현이 내민 자료에는, 유명한 기획사들에서 간판으로 밀어주는 아이돌들의 이름이 보인다. 턱 없이 모자란 수치도 있고, 비슷비슷한 수치도 있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그런 애들과 Group Sound가 비슷한 수치를 기록했다는 것이겠지. 인디밴드인데도 불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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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밴드들 공연도 몇번 가 봤는데 지금 여기만큼 사람 많이 온 건 처음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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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정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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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윤은 그런 대화를 세현과 주고받으며, 잠시 기다렸다. 이윽고 공연 시간이 되자 안내 방송이 나간다. 부스럭거리며 카메라를 숨기는 사람들이 보이는 가운데, 어두워지는 회장의 조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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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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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성거리는 사람들. 세윤은 빠르게 핸드폰을 내려놓고, 한 장면도 놓치지 않겠다는 의지를 담아 어두운 회장을 응시했다. 그리고 파바바바박- 하는 소리와 함께 켜지는, 공중에 매달린 대형 스크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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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어어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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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가 숨을 몰아쉬는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강렬하게 내리쬐는 스포트라이트. 무대의 중앙에는, 네 명의 멤버가 뭔가 포즈를 취하며 사방으로 서 있었다. ‘모 만화’에서 나오는 아이돌 포즈를 한 것으로 보이는 이서와, 살짝 움츠러들어있는 현아. 고개를 바짝 쳐들고 자신만만하게 웃고 있는 서하와, 머리를 빙빙 꼬며 관객들을 응시하는 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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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네 명이 자신들의 자리를 잡으며, 음악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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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에서 울려퍼진 것은, 바로 그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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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짝 낮은 템포, 리드미컬한 베이스. 인트로에서 상당히 바쁘게 움직이는 베이스는, 이서의 실력이 얼마나 발전했는지를 실감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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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 않았던 숙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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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함 속에는 거북이가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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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의 나는 매점 앞에 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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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어가는 토끼를 바라보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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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윤은 옛날에 봤던 영상 하나를 떠올렸다. 약간 조잡하게, 핸드폰 카메라로 녹화되었던 그런 영상. 이 곡, [잿빛의 나날들]이 처음 공연되었던 홍대의 버스킹 무대. 왜 나는 이때 홍대에 없었어서 이 풍경을 보지 못했던 걸까 생각하게 만들었던 그 날의 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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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곡은, 그 영상을 떠올리게 만드는 느낌이었다. 저 멀리서 읊조리는 듯한 음성. 아련하게 중얼거리는 이서의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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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파른 언덕을 넘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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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이는 우리를 기다리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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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와 나는 내일의 열차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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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하얀 사과를 베어물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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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영상 이후로도 Group Sound는 많은 공연에서 [잿빛의 나날들]을 부르긴 했지만, 그녀가 생각하기엔 이 버전이 최고였다. 앨범의 정식 발매 버전이 나은지, 이 버전이 나은지 우열을 가리기가 힘들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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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이는 사흘 전에 떠나버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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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애는 어딜 가는지 모른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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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내린 첫 눈의 그림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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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번 더 네게 찾아올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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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날 것 같았던 곡이 갑작스럽게 멈춘다. 감성에 젖어 있던 관객들은, 약간 의아한 기색을 보낸다. 하지만 그 중 앞 줄에 앉은 몇몇 사람들은, 뭔가 낌새를 눈치챈 듯 웅성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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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서가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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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안녕하세요! 그룹 사운드의 리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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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 소리 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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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이자 보컬! 도내최고미소녀! 최이서 인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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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는 양심이 없어, 양심이. 원래 저렇게 입는 애들은 패션도 그렇고 그냥 남들 거 도둑질만 하고 다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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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긴…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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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럽게 시작된 만담. 하지만 뭔가 평소대로의 Group Sound 같은 분위기에, 사람들이 왁자지껄하게 웃었다. 이서는 그렇게 몇 마디를 더 하며 너스레를 떨다 수연에게 마이크를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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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그룹 사운드의 리더이자 기타를 맡고 있는, 기타리스트 하수연입니다. 반갑습니다. 오늘 이렇게 많이들 모여주셨는데요. 제가 듣기에는 매진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저희가 공연장을 잘못 잡은 걸지도 모르겠네요. 어떠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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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족해요!!”, “더 큰 곳으로 잡아주세요!!” 같은 고함소리가 울려퍼진다. 남녀가 섞인 그 목소리는, Group Sound의 팬층이 어떤 느낌인지 잘 알게 했다. 그 말에 수연은 싱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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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될 줄 알았더라면, 더 사람들이 많은 곳으로 잡았을텐데요. 저희도 아쉽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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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많은 분들이 오셔서 저희의 공연을 관람했더라면… 아무래도 이게 수익이라는 게 있지 않나요? 그게 좀 극대화되긴 했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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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닷없이 들어오는 이서와 돈 이야기. 사람들의 웃음이 다시 한번 터진 가운데, 이서가 능글맞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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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잖아요~ 오늘 다들 이 곳에, 엄청나게 큰 결심을 하시고. 비싼 돈과 시간까지 지불해가시며 오셨잖아요? 저희가 이걸 다 만족을 시켜드려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이제 다음 공연도 오시고 이러시면서, 저희의 공연 퀄리티도 상승하고 여러분들의 삶의 질도 상승하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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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과 함께, 무대의 조명 색이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바뀐다. 자주색과 섞인 듯한, 오묘한 푸른 빛. 그리고 투두두두두- 하는 효과음과 함께, 강렬한 노을색 빛의 기둥이 시계방향으로 무대 바깥에 세워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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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아래에는 각자 한 명씩이 있다. 누군가는 피아노를, 누군가는 기타를. 누군가는 트럼펫 류를, 누군가는 스트링 류를.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이상한 악기도 있고, 마이크만을 앞에 둔 코러스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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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하기 위해서! 저희가 준비했습니다! 콘서트 사양 세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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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핏 봐도 열명이 훨씬 넘어보이는 세션들. 첫 콘서트에 투입하기에는 지나치게 많은 것이 아닌가 걱정이 들 정도의 인원.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인원들이 만들어낼 화려한 사운드에 기대감이 들 정도의 인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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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잿빛의 나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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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관객들의 맹렬한 박수를 배경음악으로 둔 채로… 이서의 외침과 함께, 현악기들이 화려한 소리를 내며 연주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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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닷없이 학교 정문에 등장한 검은색 개인 택시. 학교에 무슨 택시를 타고 오는 애가 있나. 지각할 타이밍도 아닌데… 하며 아이들이 궁금해하는 사이, 한 소녀가 내려 트렁크에서 길쭉한 무엇인가를 꺼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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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은근슬쩍 훔쳐본 얼굴은, 어디서 많이 보던 형태를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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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인상에 살짝 눈꼬리가 올라간. 전혀 순하지 않아보이는, 무표정으로 상대를 응시하면 뭔가 굳어질 것만 같은… 하수연의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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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모습을 보고 몇몇은 무의식적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최근 많이 바뀌었다고 하나 악명은 쉽게 사라지지 않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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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기타 하드케이스와 캐리어를 각각 한 손에 든 수연은, 아이들을 보고 손을 흔들려다… 두 손이 봉쇄되었음을 눈치채고 멋쩍은 듯이 웃음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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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연~ 그거 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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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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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웬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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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다인이 뭐 수행평가때 치는 거 안 보여주면 옥상에서 뛰어내릴거라고 무슨 소리를 창문 깨지도록 질러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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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념을 내뱉은 수연이었지만, 딱히 적대적이라거나 진심으로 귀찮다던가 하는 분위기는 따로 없었다. 그저 친구를 가볍게 타박하는 듯한 말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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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대답에, 아이들 사이에서 저도 모르게 살짝 긴장되었던 분위기가 풀어진다. 하지만 수연은 그에 대해서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학교 안으로 캐리어를 끌고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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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악기를 마음대로 가지고 오라고 이야기는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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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감해 하는 음악 선생의 눈치. 명전은 그에 대해서 대답을 하기보다는, 눈을 연신 빛내고 있는 옆의 다인을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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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그냥 리코더로 보고 싶었는데, 얘가 자꾸 기타를 가져오라고 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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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뭐! 수행평가에 진심인 건 좋은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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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내가 아니면 또 어디서 나 기타 잘 친다~ 이러면서 자랑을 하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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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데 많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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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다인의 이야기에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을 짓고는, 살짝 치워진 음악실 중간에 의자를 놓고 앰프를 그 위에 올려놓았다. 무선 앰프라, 앰프 세팅을 하는 지랄이 필요없어 다행이라고 명전은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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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은 어떤 거 할 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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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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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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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야기를 듣고 당황하는 음악 선생. 사실 명단에 반쯤 장난으로 넣어놓은 곡이고, 요 몇년 동안 시도하려는 아이 조차 한명도 없었던 곡. 아이들에게 괜찮은 곡 하나 들려주자는 느낌으로 넣어놓았던 곡인데, 왜 갑자기 이 애가 하겠다고 나서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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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를 좀 친다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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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일렉 기타로 치는 곡도 아니다. 프란시스코 타레가(Francisco Tárrega)가 살아있던 시절에는 일렉기타라는 것 자체가 없었으니까. 단 한번도 멈추지 않는, 계속해서 이어지는 트레몰로 주법이 인상적인 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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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칠 거야? 그 곡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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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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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의 단호한 말에, 선생은 가방 안에 넣어놓았던 야마하의 사일런트 기타를 꺼냈다. 통기타를 휴대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일종의 조립식 기타. 아이들의 수행평가에 반주를 하기 위해서 가져온 도구. 그 신기한 외관에 아이들은 두번째로 오~ 하는 찬사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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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이 먼저 반주 시작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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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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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반주를 떠올렸다. 어떤 음으로 시작하더라? 그녀도 쳐 본지는 한참 된 곡이라, 떠올리기 쉽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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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가민가하면서 치기 시작한 반주에 이내 메인 기타가 따라붙는다. 클래식 기타 특유의 따뜻한 소리가, 톤 조절을 통해 약간이나마 재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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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미친 하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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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왤케 잘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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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쟤가 저러면 우리 전부 다 빵점 아님? 상대평가 아냐 이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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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평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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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의 찬사와 한심한 대화가 이어지는 와중에, 수연의 트레몰로가 계속 이어진다. 클래식 기타를 계속 쳐온 사람 만큼의 탄현 실력은 아니나, 고등학생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의 실력을 보여주는 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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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들을 것도 없이 만점이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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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초 정도의 연주한 시점에서, 음악 선생은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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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연주는 멈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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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상시에는 듣기 힘든, 공을 들인 라이브 연주. 지금 연주하고 있는 학생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이런 곡은 꼭 학생들에게 들려주고 싶었기 때문에… 그녀는 연주를 멈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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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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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가 끝난 후. 한 곡만 더 연주해달라는 아이들에게 붙잡혀, 명전은 필립 세이스(Philip Sayce)의 Alchemy를 연주해주었다. 그러자 무슨 썰물처럼 우루루 도망가버리는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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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들어주던 다인도, 곡이 끝난 다음 “너무 잘하는데… 내 취향은 아닌 것 같아. 너무 늙은 분들 취향 아냐?” 라는 말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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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정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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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필립 세이스 정도면 나름대로 젊은 음악가 아닌가 하고 명전은 생각했다. 당장 Alchemy는 2012년 곡이고… 라고 생각해보니, 2012년이 벌써 10년 전이었다. 세월은 왜 이리도 빨리 가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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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그렇게 푸념하며, 짐을 들고 복도 끝으로 걸어갔다. 중앙 계단을 이용할 수도 있었지만, 왠지 어린 시절에 각인된 DNA가 그로 하여금 중앙 계단을 못 쓰게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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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와중, 들려오는 베이스 소리와 환호 소리. 가감없이 뿜어지는 저음은, 바닥을 진동시키며 그의 발로 이어지는 듯 했다. 저도 모르게 가 본 다른 반에는, 이리저리 기웃대는 고등학생들에 묻힌 누군가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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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수연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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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내민 것은, 최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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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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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들이 베이스 좀 쳐봐달라고 해서. 최근에 혼자 연습한 곡 몇개 쳐주고 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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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주는 유튜브에 맡긴 채, 베이스와 보컬만을 부르고 있던 최이서. 그런 아이들에게 환호하던 와중, 갑자기 난입한 하수연에 의해 삽시간에 조용해지는 교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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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이 많이 변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몇년 동안 종로 지역에서 살면서 봤던 모습이 워낙 뇌리에 남았기에 아이들은 자동적으로 반응할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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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 언니도 기타 쳤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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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와의 친분으로 2학년 교실에서 음악을 듣고 있던 1학년 아이. 살짝 주눅이 든 기세로 물어보는 질문에, 수연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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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지 모르나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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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상황에 무표정으로 일관하는 (기억을 잃은) 수연. 하지만 이서는 이제 조금이나마 수연의 표정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하며, 수연에게 말을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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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이 곡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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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대충은 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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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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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물어보고도 돌아온 대답에 경악하는 이서. 수연은 한심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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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제발 이거 좋다고 들어보라고 제발 한번 쳐보자고 맨날천날 광고해댄 그 곡 아니냐. 귀에 피가 날 지경이라 귀로 따서 한두번은 쳐 봤지. 아까 초반부도 들었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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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그럼 같이 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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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의 말에 눈치를 보며 조금씩 오~ 소리를 보내는 아이들. 수연은 한숨을 푹 쉬고는, 하드케이스에서 기타를 꺼냈다. 갑자기 결성된 공연과, 다시금 쏟아지는 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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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는 꽤 활기차게 웃었다. 요즘 십대들 사이에서 갑자기 불기 시작한 일본 음악 열풍. 이서는 근원이 그 쪽이었기에, 남들 앞에서 보여줄 기회가 있지 않을까 싶어 즐겁게 연습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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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다가온 음악 수행평가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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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는 못이기는 척 하며 베이스를 들고 왔고, 만점을 받았고, “베이스 들고 온 김에 몇곡 칠 수 밖에 없겠네~” 같은 태도로 아이들에게 곡을 연주해주었다. 틱톡에 나올 법한 곡 몇개를 쳐 주자 꽤나 신나하던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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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신청받은 곡 또한 틱톡에 꽤나 올라오던 곡이지만, 이서가 좋아하는 곡이기도 했다. 하지만 약간 아쉬운 면이 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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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은 모르니까, 하이라이트 부분 외에는 다 리듬만 쳐 줄게. 대충 애드립으로 때우면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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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의 말에 이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톤을 조절하는 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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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무슨 상황인지 하고 눈치를 보는 아이들과, 뭔가 핸드폰을 든채로 촬영을 준비하고 있는 아이들 사이에서… 연주의 준비를 마친 수연을 보고, 이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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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시작되는 기타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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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 친다’라고는 전혀 생각할 수 없는 손놀림에 아이들이 놀라는 사이. 이서는 적절한 타이밍에 베이스를 넣고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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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지는 랩 파트를 넣으려는 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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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에서 살짝 뭉그러진 웅얼거림이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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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일에 이서는 노래를 부르는 것 조차 잊을 뻔 할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 그 하수연이 랩이라니. 게다가 이런 노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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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랩이 아니잖아 저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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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히 들어보니, 랩처럼 들어보는 웅얼거림이었다. 그럼 그렇지. 수연이가 저런 걸 다 외우고 있을 리가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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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는 그렇게 생각하며 계속해서 슬랩을 쳤다. 들리는 것은, 기타와 베이스. 그리고 리듬을 맞춰주는 아이들의 박수 소리와 발구름 소리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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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밴드가 이곳에서 공연을 하는 듯 꽉 찬 사운드. 그 사운드의 근원은, 이번에는 꽤나 정확하게 랩을 읊은 수연의 손에서 나오고 있었다. 마치 손이 4개라도 되는 듯 끊임없이 왔다갔다 하며 소리를 비우지 않는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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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실화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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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되는 연주에, 귀가 예민한 아이들은 깨달을 수 있었다. 저렇게 바삐 움직이면서도, 베이스를 전혀 묻어버리지 않고 있다. 오히려 살짝 미숙한 베이스의 장점만 살려주거나, 부족한 점은 슬그머니 덮는 듯한 연주가 지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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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돋보일 수 있던, 멋지거나 이뻐보일 수 있던 모든 기회를 독식하던… 이전의 자신과는 이별한 지 오래라고 말하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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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곡의 중반을 장식하는 파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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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는 무의식적으로 노래를 부르지 않은 채 수연을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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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 또한 이서를 쳐다보았다. 노래를 부르지 않고 뭐하냐는 눈빛으로, 기타를 계속 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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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찰나였지만 순간적으로 묘해진 분위기. 이서는 뻘쭘하다는 듯 노래를 다시 부르며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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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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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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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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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겨오는 이서를 명전은 떼어냈다. 긱백을 멘 채라면 그냥 손으로 밀어냈겠으나, 괜히 하드케이스를 가져온 탓에 그럴 수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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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거워! 좀 떨어져라. 지금 안 그래도 이거 두개때문에 진짜 죽을 것 같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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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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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에, 명전의 어깨에 턱을 괴고 있던 이서가 명전의 캐리어를 낚아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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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냥 줘. 어차피 택시 불러 놨으니까. 몇분 기다리면 올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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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역시 부잣집 아가씨. 저는 걸어가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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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워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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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운동하는 셈 치고 걸어가지 뭐. 그렇게 무거운 것도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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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에 명전은 이서를 바라보았다. ‘하수연’ 또한 여자로써는 큰 키긴 했지만, 얘는 무슨 볼때마다 쭉쭉 자라는 느낌이었다. 키 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부분에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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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히 명전은 헛기침을 했고, 이서는 얘가 왜 이러나 하는 눈길로 명전을 쳐다보았다. 그렇게 살짝 조용해진 분위기 사이에서, 울려오는 벨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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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그런 거 좀 바꿔… 벨소리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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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하지도 않은데 바꿔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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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폰 기본 벨소리가 울리는 와중에, 명전은 하드케이스를 잠시 내려놓고 전화를 받았다. 들려온 목소리는 익숙한 남자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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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 학생! 저 임준홍입니다. 통화 괜찮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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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뭐 지금 집에 가는 중이라. 어떤 것 때문에 그러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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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 얼마전에 저희 추모공연 했었잖아요? 수연씨가 기억할라는지 모르겠는데 그때 누가 오셨어요. 인사를 하셨던가? 여튼 그분이 수연씨 공연 너무 잘 봤다고 선물 주고싶다고 하시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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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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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뜬금없는 선물 타령인가 싶어, 명전은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 표정은, 순식간에 환희의 표정으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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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슨 에코렉(Binson Echorec), 그것도 서명전 선생님이 사용하시던 거를 구했다고 하시는데… 이거 관련해서 이야기를 하시고 싶다고 하시는데요. 오늘 방문 가능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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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게요!! 감사합니다!! 지금 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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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처럼 듣지 못하는 환희에 찬 명전의 목소리에, 이서는 깜짝 놀라 물러섰다. 하지만 명전은 그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당장 그의 장비를 찾으러 가야 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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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어디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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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비! 장비 찾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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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가면 안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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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의 말에, 명전은 이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뭔가 호기심이 가득한 얼굴. 뭐, 안 될 것은 없긴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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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링 콰르텟. 바이올린1, 바이올린2, 비올라, 첼로. 신디사이저로는 살리기 힘든 스트링 특유의 음색이 울려퍼지며 좌중을 압도한다. 뒤이어 들어오는 것은, 브라스 트리오다. 트럼펫, 트럼본, 색소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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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구성만 해도 평범한 밴드 세션의 구성을 한참 뛰어넘은 상태이지만, 그 외에도 더 있는 세션. 리듬 기타, 봉고와 콩가 같은 퍼커션, 탬버린을 든 코러스, 클래식 피아노 등. 작정하고 꾸린 것이 엿보이는 세션들의 등장과, 그들이 뿜어내는 사운드에 관객들은 열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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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만난 그 날의 내 마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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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파도와도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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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나를 조금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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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아가게 만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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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잿빛의 나날들]이 끝나자마자, 예고없이 바로 시작되는 [이 거리를 뛰어넘어]. 한때 Group Sound의 인기를 이끌었던, 봄 내음이 흠뻑 나는 사랑노래의 등장에 사람들은 다시 한번 박수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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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제 이 미묘한 거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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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와 뛰어넘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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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며 떠도는 이 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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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에게 선물하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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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곡, [잿빛의 나날들]. 살짝 가라앉은 분위기에 처음은 잔잔하게 시작하는가 했던 관객들. 하지만 밴드와 세션들이 무대 중앙에서 펼치는 활기찬 연주는, 사람들을 저절로 들썩이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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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여러분! 박수! 박수! 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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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에 더 불을 지핀 것은 절묘하게 곡을 주고받는 두 명의 보컬이었다. 주로 노래를 부르는 것은 최이서였지만, 관객들의 호응이 필요하다 싶을 땐 아주 자연스럽게 하수연에게로 보컬이 넘어간다. 그리고 호응 유도가 끝난 다음에는, 다시 또 자연스럽게 최이서에게 보컬이 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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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연습이라도 한 것 같은 그런 묘기. 공연을 보다 보면 은근슬쩍 한두번씩 보여진 광경이긴 했지만, 이렇게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은 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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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애들 보컬도 진짜 천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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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저렇게 연습을 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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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그 언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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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집에 가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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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바랜 냉장고 안에 들어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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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몬트 유리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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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런 의문을 가질 새도 없이, 공연은 계속된다. 쉼 없이 몰아치는 음악. 쾌활하고 신나게. 관객들의 몰입을 단 한시도 끊어놓지 않겠다는 듯, 관객들이 ‘저거 팔 괜찮나?’나 ‘체력 바닥나는 거 아냐?’ 라고 생각할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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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이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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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마셨던 액체는 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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왠지 모르게 들어 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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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좋아하는 음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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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러면서도, 연출은 지속적으로 변한다. 쾌활함이 유지되면서도 때로는 어두침침해지고, 때로는 조명의 기둥이 관중석을 비춘다. 중앙제어를 통해 응원봉이 빛의 파도를 만들고, 폭포수처럼 섬광이 흘러내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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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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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어떻게 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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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냉장고 안의 유리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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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까지 고민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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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윤은 생각했다. 콘서트 티켓 가격은, 결코 싼 돈은 아니었다. 그녀에게는 큰 마음 먹고 진짜 각오를 해야 지출할 수 있는 돈. 아마 그녀의 남동생도 마찬가지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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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 때문에 고민했다. ‘최애’를 보기 위해서 돈을 지출할 것인가? 돈을 아껴야 하는데. 물론 그런 결심 따위는 공연장 앞에 놓여 있는 굿즈들을 보고 바로 녹아버렸지만, 당장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엄청난 고민에 휩싸여있었다. 표를 취소하면 남매 합쳐 이십만원이 넘는 돈이 다시 생기고, 굿즈로 인한 예상 외 지출도 없을 것이며, 저녁에는 편하게 침대에 누워서 핸드폰이나 할 수 있는데. 공연이야 누군가가 찍어 온 유튜브로 보면 되는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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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길 잘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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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 드는 생각은 만약 취소했더라면… 그야말로 두고두고 후회할 일이 하나 생겼을 것 같다는 거였다. 돈이야 벌면 되고 시간이야 만들면 되지만, 이 날의 이 공연은 두번 다시는 볼 수 없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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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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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점 무르익어가는 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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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면대의 칫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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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붙은 비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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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때가 낀 거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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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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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별이 되어 갈지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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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겨신은 신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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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중충한 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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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교길의 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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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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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별이 되어 갈지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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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반만 해도 이서가 유도해야 했던 호응은, 점점 분위기가 무르익어가며 자동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그들의 대표곡 중 하나인 [별이 되어가는 것]에 이르러서는, 아주 자연스럽게 이서가 관객석에 마이크를 넘기고 관객들이 그것을 받아 부르는 광경이 나올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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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잠시 쉴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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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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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이 되어가는 것]이 끝나자, 자연스럽게 이서가 멘트를 쳤다. 잠시 쉬어가자는 제안에 거부하는 관객들. 난처한 듯 “여러분 저희도 힘들어요!”를 외치는 이서와, 공연장 전체에 울리는 사람들의 웃음을 들으며 그는 피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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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여러분 오래 앉아 계셨으니까. 이제 공연의 마지막을 위해서, 우리 한번 스트레칭을 해 보도록 합시다에요. 자 어깨를 피시고, 척추도 곧게 세우시고. 턱도 집어넣으시고. 디스크 걸리면 몇천만원 날아간다고 하지 않나요? 저희가 여러분의 음악 뿐만 아니라, 건강까지 책임지겠습니다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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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NS를 볼 때마다 ‘다에요 여고생’ 타령이 나오기에, 일부러 쓴 ‘다에요’ 체에 환호성을 보내는 팬들. 일부러 썼음에도 불구하고 얼굴이 살짝 붉어지는 것을 느끼며, 그는 머리를 빙빙 꼬며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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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날이 올 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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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말해서 그는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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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전’이었던 시절에는, 어릴 때라면 모를까… 나중에는 그냥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번 곡은 꽤나 잘 썼으니, 진짜 떠서 콘서트가 가능할 것 같다.”라고 스스로에게 말해왔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도 자신을 잘 알았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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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하수연’이 된 뒤에는… 물론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도 했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자리잡고 있었다. 과거의 실패, 그리고 음악 시장의 현실. 그것이 그를 사로잡고 있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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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공연장을 빌리자고 주장할 때도 그랬다. 성장세는 좋았지만, 객관적으로 보면 채우기 절대 불가능해보이는 좌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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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는 왠지 모를 오기로 주장했다. ‘여기는 역사와 전통이 있는 공연장이고, 나는 여기로 하고 싶다. 혹시 모르지 않느냐. 우리가 다 채울 수 있을지.’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는 생각했다. 다 채우는 건 불가능하겠지. 하지만 한번이라도 공연을 서 보고 싶다. 그 무대에서, 주인공이 된 상태로, 관객들을 바라보고 싶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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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꿈은 이루어졌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매진이라는 형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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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충체육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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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초의 돔 경기장. 한국 최초의 복싱 세계 챔피언. 제 1회 천하장사 씨름대회. 좀 불명예스럽지만, 유신 정권 당시 ‘통일주체국민회의’까지. 그 외 수많은 행사와 경기들이 이 곳에서 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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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수많은 락스타, 밴드들이 이 공연장에서 공연을 하길 원했다. “장충에서 공연을 하는 것은 성공했다는 지표다.”라고 말한 사람도 있었다. 그도 그 중에 한명이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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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이제 하이라이트! 다들 알고 계실 바로 그 곡! 굳이 말씀 안 드려도 아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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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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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의 스트레칭을 다 끝냈는지, 이서가 쾌활하게 외쳤다. 거기에 응답하는 관객들. 그리고 네 번의 드럼스틱 소리가 울려퍼지며, 여기 있는 사람들이라면 모두가 다 알 그 베이스 전주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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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지막히 일어나 창밖을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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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멀리 하늘에 뭔가 떠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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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쳐다봐도 알 수가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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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학 원형도넛 그리고 공중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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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관객석에서 터져나오는 우렁찬 노랫소리에, 그는 수십년 경력을 잃고 집중을 놓칠 뻔 했다. 한국인이 떼창으로 유명한 것은 그도 안다. 그도 한국인인 만큼, 어떤 심정인지 아주 잘 아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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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떼창을 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뮤지션의 입장에서 받아들이는 것은 아예 다른 문제다. 이서 또한 마찬가지인 모양으로, 잠시간 말을 잃은 채 베이스만 튕기고 있다가… 싱글거리는 표정으로 마이크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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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번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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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지막히 일어나 창밖을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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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멀리 하늘에 뭔가 떠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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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쳐다봐도 알 수가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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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학 원형도넛 그리고 공중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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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하지 않아도, 아주 자연스럽게 처음으로 되돌아가는 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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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나선 오늘의 날씨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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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과 번개를 동반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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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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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지 흐린지 모르는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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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만 보고서 터벅터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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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충체육관을 꽉 채운 5천명의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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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가 작사하고, 다른 아이들이 편곡에 참여했으며, 그가 작곡한 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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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십년이 넘는 인생을 살면서, 단 한번도 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아니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그런 광경이 존재한다는 것 조차 생각하지 못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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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일이 지금 앞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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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를 알 수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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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떠 있기만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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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정원에 나는 끝없이 올라만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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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향한 내 마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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흘러가는 세월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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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부 모래 위에 휘청이며 넘어질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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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랫소리를 배경으로, 그는 서 있던 곳에서 벗어나 무대를 돌면서 관객들을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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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움직임에 노래를 부르면서도 환호성을 지르며 박수를 보내는 관객들. 리듬에 맞춰 박수를 치고, 발을 구르면서. 마치 오늘이 그들의 가장 행복한 날인 것 마냥 끝없이 호응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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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모습에, 그는 한참 예전의 일을 떠올렸다. 가졌던 꿈도 다 퇴색된 채로 그저 음악을 업이라고 생각했던 시절의 일. 전성기를 흘려보낸지 오래였던 락커의 세션 밴드 마스터로 일할 때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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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소주를 두 병쯤 마시고, 알콜에 절여진 상태로 그 락커에게 물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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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돈도 안 되는 공연, 왜 하는 거요? 그냥 집에서 배때지나 긁는 게 더 남겠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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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 락커는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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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관객석 밑에 수천명이 이제 저만 바라보고 있는 모습. 그렇게 사람들이 전부 다 저만 쳐다보고, 제 동작에 전부 다 반응해주는… 그런 일을 겪어보면, 다른 일 못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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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는, 그 말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세션이든 밴드든 무대에 서는 것은 똑같지 않은가 하는 그런 심정으로. 네가 뭐 별거냐 하는, 그런 반감으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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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제는 알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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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많은 관객들이 있었던 페스티벌도 갔다.적긴 하지만 열성적으로 반응해주었던 다른 라이브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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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는 지금에야 그 말을 실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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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말로 그의 몸짓 하나, 동작 하나. 그 모든 것에 반응해주고, 즐거워하고, 호응을 보내주는 사람들. 어둠 속에서 응원봉 하나의 불빛을 보내며, 모두가 마음을 맞춰 노래를 부르며… 무대 위에 올라가 있는 ‘주인공’만을 바라보는 이 광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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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너무도 원했던 광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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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를 알 수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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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떠 있기만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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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정원에 나는 끝없이 올라만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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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향한 내 마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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흘러가는 세월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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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부 모래 밑에 파묻혀 사라질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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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릿한 걸음을 걸어, 자리로 와서. 그는 고개를 떨군 채로 노래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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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들면 누군가 알아볼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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떨리는 음정을 숨길 수 없을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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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는 이를 악물었다. 사람들의 목소리가 그의 감정을 덮어주길 기원하면서,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하기를 바라며, 이뤄진 꿈에 대한 아무도 모를 이야기를 읊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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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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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정원]이 끝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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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워진 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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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네가 수많은 길들 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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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중에 하나의 길을 선택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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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에게 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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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 말아야 한다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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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리스트에 미리 나와있던 노래, 과오. [Invasion from Seoul 2024]에서 나왔던, 수연의 과거를 상징하는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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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노래는, 다큐멘터리 1화가 방영되고 수연의 과거가 어느정도 밝혀진 지금… 너무나도 절실하게 사람들에게 와닿았다. 어떤 의미인지 누구나 알 수 있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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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네가 수많은 길들 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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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를 선택하고 후회한다 할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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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너에게 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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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 말았어야 한다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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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의 너는 눈물을 닦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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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의 너는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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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의 너는 무릎을 꿇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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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의 너는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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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렴구에 흘러나오는 떼창은 너무나도 자연스럽다. 당시의 공연을 떠올리게 하는 그 분위기. 사람들은 나지막하게 읇조리며, 응원봉을 좌우로 흔들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연장을 울리게 하는 목소리로 노래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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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너는 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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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디로 가고 싶었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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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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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의 마지막을 직감한 듯. 관중석에서 쏟아지는 박수. 밴드의 아이들과 세션들이 고개를 연신 숙여보였고, 몇몇 아쉬운 사람들은 “한 곡 더! 한 곡 더!”를 외쳤다. 그러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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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여러분, 이렇게 들어가시는 거 아쉽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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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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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 생각은, 기분좋게 배신당했다. 갑자기 마이크를 잡고 이야기를 하는 수연. 뭔가 앵콜이 나올 것 같은 분위기에 우렁찬 환호로 대답하는 관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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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곡을 들려 드리기 이전에 들려드리고 싶은 곡 하나가 있는데요. 저희 곡은 아닌데, 이런 날이 오면 꼭 한번 불러보고 싶었던 곡인데… 혹시 괜찮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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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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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번 더 터지는 우렁찬 답변. 수연은 뭔가 쓰게 웃은 후, 밴드원들에게 이야기를 했다. 잠시 웅성이는 무대 위. 이서와 현아는 뭔가 세션들에게 이야기를 전달하려는 듯 무대를 내려가고, 서하만이 자리를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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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금 꺼지는 조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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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하나만 남아 있는 스포트라이트는, 무대 위 단 한 사람만을 내리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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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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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이런 곳에서 부르는 노래는 다들 잘 아는 노래를 불러야 하는데요. 이 곡은 다들 모르실 것 같은데… 뭐, 일단 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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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호 없이, 갑자기 시작한 노래는… 그들 Group Sound의 음악과는 정 반대의 느낌이다. 감정이 그다지 들어가지 않은 흥겨움. 그리고 세월이 느껴지는 멜로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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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주세요. 서명전, ‘집 앞의 새’…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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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치 못한 짐이 우수수 들어오자 눈살을 찌푸리는 택시 기사. 궁시렁대는 노인네를 무시한 채, 명전은 택시에 탑승한 후 목적지를 변경했다. 갑자기 장거리로 변한 운행에 택시 기사는 180도 태도를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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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어디 가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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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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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의 물음에 짧게 대답한 후, 명전은 이혜인 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지금 뭐 일 있어서 강남 가는 중이에요. 네. 태우러 오신다고요? 그럴 필요 없을 것 같은데. 일단 보고 연락 드릴게요.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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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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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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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챙겨 주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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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 귀찮기도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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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의 푸념에, 이서는 살짝 당황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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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그래도 그렇게 챙겨주고 걱정해주시는데 귀찮다는 건 좀 그렇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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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해주고 챙겨주고 하는 건 고마운 거고, 귀찮은 건 귀찮은 거고. 둘은 다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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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런 호로자슥을 봤나… 하며 속으로 궁시렁대는 택시기사. 하지만 여고생 둘은 계속해서 이야기를 나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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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뭐, 다 걱정해서 그러는 거긴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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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너네 엄마만큼 막 어? 챙겨주고… 그런 엄마가 잘 없다니까. 우리 엄마는 뭐 신경도 안 써. 우리 아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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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심코 말을 내뱉다, 이서는 순간적으로 입을 멈췄다. 수연의 아빠는… 이서가 들은 소문으로는, 수연이 어릴 때 돌아가셨다고 했다. 언제인지는 정확하게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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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수연 앞에서 아빠 이야기를 하는 것은 일종의 금기에 가까웠다. 본인이 지랄을 하는 것도 물론 있지만, 아무튼 가족이 죽은 사람 앞에서 그러긴 좀 그렇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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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수연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었다. 무표정 속에 슬픔을 숨기고 있지 않을까 해서 자세히 봐도, 딱히 그런 것은 없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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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잃어버려서 그런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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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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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의 걱정과 달리, 명전은 별 생각이 없었다. 일단 남의 아버지 아닌가. 원래의 아버지와도 그다지 사이가 안 좋았는데 - 사실 그 시절 사람들은 다 이랬다 - 문득 들어온 남의 몸, 게다가 이미 죽은 사람까지 신경 쓸 이유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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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애의 과거를 뒤져봐도 뭐, 희미한 기억들 뿐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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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연’이 어렸던 시절 기억을 떠올려보면, 꽤나 화목한 가정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가 죽고 나서는 싸늘한 가정이 되었다. 이혜인 씨와 ‘하수연’이 틀어진 것은, 그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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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그렇게 중요한 일은 아니다. 그냥 그렇게 떠올리고 넘어갈 일에 불과하다고, 명전은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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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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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갑습니다. 호인예대 교수 채호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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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그룹 사운드 기타리스트 하수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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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안녕하세요! 그룹 사운드, 베이시스트 최이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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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의 어느 스튜디오. 명전과 이서가 들어가자, 준홍이 인사를 하며 그들을 안내했다. 들어선 방은 꽤나 고풍스러운 사무실. 고집이 세 보이는 노인이 컴퓨터를 들여다보고 있다 그들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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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요. 앉아요 앉아 다들. 여기 임준홍 군은 다들 아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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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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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저는, 처음 뵙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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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에 명전은 이서를 보고 한쪽 눈을 치켜들었다. 이런 상황이면 대충 아 예 예 해야지. 아무리 넉살 좋은 척 해도 인생 경험은 아직 부족한 아이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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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요? 그러면 지금이라도 소개를 해 주게, 준홍 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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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네. 저는 세션 기타리스트 임준홍이라고 하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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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닷없이 벌어지는 촌극. 명전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어색한 듯 소개를 하는 이서와 준홍. 호근은 그 이야기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다가, 끝나자마자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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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에 공연은 잘 봤어요, 수연 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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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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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전 그 친구가 참, 안타깝게 갔지. 그렇게 건강이 안 좋은 줄 알았으면 연락이라도 해 볼걸 그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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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근 선생님, 명전 선생님이랑 친분 있으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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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말 안 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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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홍의 질문에 호근은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전혀 안 했다는 듯 고개를 젓는 준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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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 씨랑은 흠… 뭐 그렇게 거창하게 ‘친분’ 이라고 말할 것 까지는 없긴 했지. 실제로 만난 건 일 하면서 많이 만났고, 그 외에는 오며가며 술자리에서 몇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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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 또한 비슷한 정도로 기억하고 있었다. 술자리에서 몇번이라 해봐야 그다지 이야기를 나눈 기억은 없었고, 일적으로 많이 만난 사이. 솔로 음반에 세션으로 많이 작업을 해줬던 정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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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떠셨습니까, 명전 선생님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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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음… 여기 뭐 직접적인 관계자가 있어서 뭐라 말을 하기가 힘들긴 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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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튀어나온 준홍의 질문에, 호근은 꽤나 난감한 기색이었다. 하지만 준홍이 질문을 취소하기 전, 명전이 먼저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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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괜찮으니까 하셔도 됩니다. 그 어… 선생님의 평판이 좀 궁금하기도 하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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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가. 하긴 뭐 나쁜 말을 할 것도 아니긴 하니까, 말은 해도 되겠지. 기타 실력 하나는 최고… 라고 말해봐야 이미 다들 아는 사실이니까. 그건 안 와닿을 것 같고, 아무래도 내가 느낀 명전 씨는, 좀 자기 세계에 갇혀 있다는 느낌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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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근은 커피 한잔을 살짝 들이킨 후,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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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랄까, 그 친구랑 이야기를 나눠보면 최신 트렌드에는 엄청 빠삭했어. 받아들이는 속도도 빨랐고. 그런데 정작 본인이 곡을 쓰거나 창작을 하거나 할 때는, 그 이상으로 나가질 못 하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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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의미에서, 이번에 수연 양이 들려줬던 곡은… 수연 양이 좀 손을 봤다고 해도, 상당히 훌륭했어요. 참 그런 곡을 쓸 정도였다면, 좀 더 오래 살았으면 괜찮은 음반을 꽤나 만들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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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아무튼 그런 이야기를 하려고 한건 아니니까. 호근은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수연을 바라보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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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오라고 한 건, 준홍 군에게 들어서 알겠지만. 수연 양이 명전 씨의 장비를 모으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서지요. 내가 얼마전에 중고로 이걸 샀는데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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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말하며 그가 올려놓은 것은, 빈슨 에코렉 2(Binson Echorec 2). 전 세계 음반 판매 2위, 록 음악 음반 판매 1위에 빛나는 전설의 명반인 The Dark Side of the Moon을 녹음할 당시에, 데이비드 길모어(David Gilmour)가 썼던 에코 유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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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데이비드 길모어 또한 1977년 이후로 장비를 바꾸었고, 현재는 에코렉의 복각 장비에 가까운 부나 딜레이 이펙터를 사용하고 있었지만… 명전의 메인 톤은 1970년대의 데이비드 길모어를 지향하고 있었기 때문에, 꼭 모아야 할 장비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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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 내가 어떻게 명전 씨 건지 알았냐. 여기 보면, 본인이 왠지 이름을 써 놨어요. 이 안에. 도난당할까봐 그랬던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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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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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다른 부분, 이를테면 개조 및 수리의 흔적 - 자신이 직접 했던 부분들이니 - 으로 이미 본인의 장비인 것을 확신한 상태였다. 그런데 저런 걸 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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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니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명전은 과거를 떠올려보았다. 혹시라도 훔쳐가서 원래부터 자기것이었던 것 마냥 행세하는 사람들 잡으려고 저렇게 적어 놨었던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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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내가 그냥 수집용으로 산 거긴 하지만, 뭐 여러가지로 이걸 내가 수집용으로만 사서 묵혀놓는 것도 아니다 싶고. 어찌됐든 이펙터라는 건 쓰라고 만드는 물건이니. 이번에 만나기도 했고, 유망한 기타리스트에게 선물한다는 느낌으로 수연 양에게 주려고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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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호를 하기는 약간 이른 이야기다. 명전은 마지막 문장에 주목했다. 주려고 하는 데와, 주겠다는 명백히 다른 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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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려고 하시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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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 찾고 있다면 알겠지만, 이게 한두푼 금액이 아니라서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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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홍의 말에, 호근이 대답했다. 하긴, 쉽게 남에게 주겠다고 말할 수 있는 금액은 아니긴 하지. 그렇게 생각하던 명전을, 이서가 툭툭 두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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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게 얼마짜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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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에 샀을지는 몰라도, 중고가로 치면 몇백만원 하긴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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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정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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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의 속삭임에, 명전 또한 속삭임으로 대응했다. 생각치도 못했던 가격에 경악을 하는 이서. 하지만 뭐, 충분히 있을 수 있는 가격 아닌가. 1970년대에 만들어진 유니크한 목적을 가진 대체불가능한 물건이 2024년도에도 작동을 한다? 어떤 것인들 비싸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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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수연 학생에게 물어볼게요. 내가 이걸 구매한 가격이 600만원입니다. 200 정도는 부담을 할 테니, 혹시 400만원 정도는 낼 수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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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무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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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얼마 전 일본에서 직구한 미펜 텔레캐스터를 떠올렸다. 장난감처럼 쓸 겸 해서 산 기타였는데, 그 기타를 안 샀더라면 저 돈을 그대로 지불할 수 있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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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당연한 이야기지. 학생 신분에 400만원이 있을 리도 없을 거고. 그럼 두번째 제안인데, 혹시 호인예대에 들어올 생각 있나요? 그럼 이런 이펙터 쯤 바로 줄 수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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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뇨, 전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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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의 단호한 대답에, 얼굴이 살짝 굳어진 준홍.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근은 거절당할 줄 알았다는 표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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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이건 그냥 이야기를 해 본 거에요. 나도 교육자인 만큼 제자 욕심을 가질 수 밖에 없으니까… 그럼 이건 어떤가. 내 앨범에 기타 세션을 서 주는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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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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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펙터에 대한 댓가는, 대충 그렇게 정리가 된 것 처럼 보였다. 채호근 교수의 앨범 전곡에 기타 세션을 다 서 주고, 외주비 일부는 이펙터로 받는 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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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는 장사긴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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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호근 교수 정도면, 그래도 아직 이름값이 남아 있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의 앨범에 풀 세션을 선다는 것은, 돈도 돈이지만… 기타리스트로써 이름을 조금씩 알려나가는 데 충분히 도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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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내가 준홍 군에게 들었는데, 밴드 그… 지원사업 참여한다고 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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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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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듯 준홍에게 말했던 것이, 벌써 저기까지 갔는가. 저 양반도 참 말 옮기기 좋아한다고 명전은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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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다른 프로그램에 심사위원으로 참가해봐서 알지만… 경연 비슷하게 이루어지는 것들은, 재미있는 일을 불러오긴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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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근은 이전의 일을 떠올렸다. 예전에는 그 아주 조금의 기회 하나를 얻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암투가 오갔던가. 떳떳한 것 부터, 그렇지 않은 것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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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모도 작고, 정부에서 주관하는 것이다보니 그럴 거라고는 생각을 안 하지만… 아무튼 밴드 끼리 서로 대결을 하는 거니까, 마음을 대차게 먹는 게 좋을 거에요. 수연 학생 밴드 말고도, 젊은 애들 중에 좀 하는 애들이 들어가긴 했더구만. 게다가 수연 학생은 전에 들어보니까, 개인 신상적으로 좀 안 좋은 일이 있다고 하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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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네. 반성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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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심하는 게 좋을 거에요. 아무튼 돈이 얽힌 일은,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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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근은 그렇게 말을 끝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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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어느 정도 준비는 되어 있긴 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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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그렇게 생각했다. 잘 맞아들어가기만 한다면, 꽤나 흡족한 결과를 가지고 올 대책이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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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치면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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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이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이서가 연주 준비를 마쳤다. “같이 온 학생은 베이스를 치나?” 라고 물어본 호근 덕에, 갑자기 예대 교수 앞에서 베이스를 치는 꼴이 된 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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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쳐 보세요. 자신 있는 곡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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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근의 말에, 이서는 베이스를 이래저래 뜯기 시작했다. 몇분간의 연주 후, 곡을 마친 이서에게 호근이 질문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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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친지 얼마 안 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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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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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것 같긴 해. 연주가 아직 거칠고, 튀어나가려는 점이 있어. 특이한 건, 어느 부분은 누가 콕 집어서 지도해준 것 마냥 가지런한데 어느 부분은 튀어나가 있단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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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의 연주를 평하는 호근. 그 평을 듣고, 이서는 슬쩍 수연을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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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생각 없어 보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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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어찌됐든 재능 자체는 있어 보이는데. 레슨은 받고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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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그만뒀어요. 이래저래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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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 종로구에 산다고 했죠? 이쪽으로 한번 연락해봐요. 내 제자가 그 근처에 사는데, 꽤나 베이스를 잘 치는 애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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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근은 명함 한장을 이서에게 건네주었다. 이게 웬… 같은 느낌으로 명함을 받아든 이서는, 약간 떨떠름한 심정을 숨기며 명함을 주머니에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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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는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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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밴드 파이오니어 힘 내길 바랍니다. 그리고 앨범 녹음 관련해서는, 일정 잡히는 대로 연락 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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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나 괘씸한 생각을 하는 이서를 내버려둔 채, 호근이 남긴 말에 명전은 고개를 끄덕였다. 요 며칠 간 쉬긴 했으니, 이제는 다시 달릴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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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 위키에 적혀 있는 이야기. [방문객이 적다고 할만한 수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많다고 하기에도 적합하지 않다]. 클럽 파라독스를 요약한 가장 적절한 문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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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대 인디 밴드 씬에 있어, 파라독스의 역할은 일종의 입구에 가까웠다. 밴드이기만 하면 오픈마이크에 받아줌으로서 다양한 장르를 포괄하고, 그를 통해 씬에 사람을 유입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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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은, 파라독스에서 꽤나 단련된 사람들을 각자의 영역으로 나눠 다른 클럽으로 보낸다. 이를테면 메탈은 MM으로, 재즈는 리버홀으로. 그렇게 사람들을 분류해서 보내고, 혹시나 코어한 분위기에 지친 사람들은 다시 붙잡아놨다, 새로운 장르로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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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으로써 ‘모두의 고향’ 역할을 하는 것이 클럽 파라독스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파라독스’의 단골은 몇명 없었다. 왜냐하면 다들 잠시 들렀다 가는 곳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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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런 파라독스도 점점 분위기가 달라지고 있었다. 가장 큰 것은,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 사이에서 돌기 시작한 일종의 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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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16시에 파라독스에 가면 재미있는 것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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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을 들은 사람들 대부분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무시했다. “아니 애초에 파라독스 영업시간이 18시부턴데 16시에 거길 왜 가냐?”, “이게 나폴리탄 괴담인가 뭔가 그거냐?” 같은 이야기를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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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다녀온 사람 몇몇이 “야 진짜 좋아. 재밌고.” 같은 이야기를 남기고, 계속해서 토요일 16시에 파라독스를 방문하기 시작하자... 사람들의 궁금증은 더욱 더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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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레밍들마냥, 점점 토요일 16시에 파라독스를 방문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마치 선두에서 무엇이 있는지는 잘 모르는 채, 그저 선두에 서서 따라가기만 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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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분명 레밍과 16시 파라독스의 차이점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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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밍들은 단체로 낭떠러지에서 사망하지만, 파라독스는 공연을 한번 보고 나면 한명이 둘이 되고 두세번 후면 세네명으로 늘어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늘어난 사람은, 분명 한둘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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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렇게 사람이 많아진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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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게. 이젠 뭐 앞에서 애들 보려면 십분은 빨리 나와야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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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전, 아윤은 클럽 바깥으로 잠시 나오며 주위에 안 들릴 만한 목소리로 살짝 푸념했다. 그런 그녀의 푸념을 받아주는 친구들. 그녀와 친구들이 최근 덕질을 하기 시작한 밴드, ‘그룹 사운드’가 이 클럽에서 공연을 시작한지는 약 한달 정도 된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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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첫 날 공연때는 너무 이른 타임 공연이라고 코빼기도 비치지 않던 사람들이, 이제는 꽤나 많이 모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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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점점 늘어나기도 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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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윤이 그룹 사운드의 첫 공연을 보러 왔을 땐, 진짜 몇몇 사람들 밖에 없는 상태였다. 아윤과 “진짜 재밌어?” 하고 반신반의하며 온 친구들, 왠지 모르게 있는 어르신 한두명, 술 취한 대학생 두어 명, 이 시간에 클럽이 왜 열었나 하고 와본 사람 몇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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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마이크 당시 몰렸었던 사람과는 확연하게 차이가 나는 수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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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지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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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나 많은 사람들이 이 시간에도 공연을 보기 위해 와 있다. 처음과는 확연히 달라진 규모. 그냥 한번 와본 것 같은 사람, 진짜 애니에서 나왔던 것처럼 마냥 벽에 팔짱을 기대고 있는 힙스터 남자, 미성년자 공연임에도 불구하고 은근슬쩍 외부에서 주류를 반입해 온 사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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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아윤이 보기에도 관객들의 구성이 상당히 다양하다는 것이었다. 왠지 ‘락 들을 것 같이 생긴’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던 오픈마이크 때와 달리, 지금은 연령대나 패션에서 드러나는 성향이 상당히 다양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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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아직 뭐, 클럽을 가득 메울 수준은 아니라는 것에 아윤은 감사함을 느꼈다. 아니, 감사해야 하는 건가. 자신이 좋아하는 밴드가 성공하는 것이 더 좋은 일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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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또 이 아이들이 떠버리면, 그때는 이렇게 와서 못 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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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으로써 가져야 할 자세는 과연 무엇일까. 잘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이렇게 가까운 사이에서 볼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은 욕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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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당한 내적 갈등을 겪고 있던 아윤을 깨운 것은, 누군가의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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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들! 여기서 뭐 해요? 안 들어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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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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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유행하는 히메컷 머리에, 초록색 베레모를 쓰고 재킷을 걸쳐 입은 귀여운 모양새의 베이스, 최이서. 체격은 좀 귀엽다고 하긴 무리가 있었지만, 아윤의 눈에는 그런 것 조차 너무 귀여워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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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 헉! 이, 이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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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요왜요? 안 들어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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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연덕스럽게 슬쩍 달라붙는 이서와, 횡재했다 생각하는 아이들. 이런 운이 있나 싶어 입고 있던 그룹 사운드 티셔츠에 사인이라도 해달라고 하려는 찰나, 뒤에서 말이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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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들어가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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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잠시만. 여기 어… 팬? 팬분들이라고 해도 될까요?? 팬~ 팬분들이 계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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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의 옆으로 고개를 내민 것은, 기타 하수연. 최이서보다 하수연을 더 좋아하는 아윤의 친구들이 격하게 반응하는 사이, 아윤은 이서에게 가방에서 준비해 온 선물 하나를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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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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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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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링인데! 키링. 걸고 다니면 이쁠 거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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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메이션 마스코트 키링. 이서는 아주 자연스럽게 키링을 자기 재킷에다가 걸고는, 사진을 찍어달라는 듯 브이자 포즈를 취했다. 그리고는 이내 사라지는 두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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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찍었어? 와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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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사진 안 찍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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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사진 찍어봐야 인생에 남는 거 없고, 진짜 중요한 건 기억과 감각이다 이러면서 악수를 해 주더라고. 막 덕담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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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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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종 거절법인가? 근데 코멘트가 좀 묘하지 않나? 덕담은 뭐지? 아윤은 그렇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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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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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악수만 해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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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순간은 기억에 남기는 거야. 핸드폰 쪼가리니 뭔 이상한 기계니 뭐니 이런 거로 찍은 다음 처박아놓고 안 보는게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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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사진 찍기 싫으면 말을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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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찍기 싫은게 아니라니까… 어휴, 말해봐야 뭐 하겠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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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또 영문 모를 소리를 하는 수연. 이서는 그러려니 하며 대기실에 들어섰다. 메트로놈을 대기실 중앙에 둔 채 살짝 맞춰보고 있던 현아와 서하가 둘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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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뭐, 오늘 공연은 그냥 예정대로 하고. 이전에 말했듯이, 오늘 공연 다음에 이제 정부지원사업 관련 이야기를 좀 해볼텐데요. 혹시 정말 갑자기 시간이 안 되는 사람?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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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을 불러모은 다음, 수연이 꺼낸 이야기는 수개월동안 귀에 못이 박히게 들어왔던 ‘정부지원사업’ 관련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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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이 이야기를 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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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라면 지금쯤 이미 심사에 들어가는게 정상이라고 했던가. 하지만 몇개월 가량 밀린 관계로 이번달 말에야 온라인 심사에 들어간다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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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지는 수연의 이야기. 온라인 심사 이후에는 뭐 top 8을 선정해서 다시 오프라인 경연 후 마지막으로 2팀을 선정한다… 뭐 그런 이야기. 그 말에, 이서는 이전에 서하에게서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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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지원사업… 밴드 파이오니어? 그거 관련해서 이야기 들은 적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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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나는 이야기를 꽤나 듣긴 했으니까. 참여하는 사람도 근처에 있고, 지인도 있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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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습이 잠시 쉬는 사이, 합주실 바깥에서 만난 이서와 서하. 살짝 어색해진 분위기에 이서는 급하게 질문을 던졌다. 다행히도 서하는 아주 자연스럽게 그 질문을 받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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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말했지? 아는 오빠 밴드가 그냥 광탈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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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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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처음 이야기 나왔을 때 했던 거 같은데. 아무튼 어… 내 기억엔, 올해 지원금이 밴드 당 상금만 600만원. 앨범 제작비 400만원. 기성 뮤지션이랑 콜라보 제작 지원에, 페스티벌 공연기회까지. 이거보다 혜택이 좋은 사업이 몇개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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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 미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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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탈 천만원에 콜라보에, 페스티벌이라. 이서는 왜 수연이 이 사업에 한번 지원을 해보자고 한지 알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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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이 사업은 신인 밴드들 대상이거든. 5년. 그러니까 보이기로는 경쟁도 그렇게 빡세지 않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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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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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예선도 그냥 녹화 떠서 온라인으로 보고. 그러니까 허들이 진짜 낮아보이지. 근데 그거때문에 경쟁이 오히려 치열해. 왜냐하면 해볼만해보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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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만 해도 온라인 예선에 백팀 넘게 참가했다고 했던가. 게다가 이제 올해는 빈집일거라는 이야기도 있어서, 올해가 더 치열할 것 같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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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 그랬던 이야기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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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은 뭐, 올해는 상금도 오르고 확실한 우승후보도 없고 이래서 엄청 치열할 것 같다 이 이야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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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서는 그런 것 쯤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들이 열심히 하면 되는 일 아니겠는가. 결국 궁극적인 승리는 실력자들이 거머쥐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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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간에 공연한지도 꽤 됐죠? 한달 쯤 됐던가요? 뭐 그렇게 안 된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뒤죽박죽인 저희 세트리스트를 들어주셔서 항상 감사하다는 말씀을 전해드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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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곡 하나가 끝나고, 차분한 목소리가 공연장에 퍼져간다. ‘뒤죽박죽인 세트리스트’ 에서 터져나오는 관객석 곳곳에서의 웃음소리를 보면, 관객들은 그것 또한 이 밴드의 매력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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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신청곡을 트는 라디오를 듣는 것처럼, 미리 정해진 몇개의 곡 외에는 맥락 없이 튀어나오는 곡들. 밴드 곡이라는 것을 제외하면, 공통점이 없다. 메탈이 나올 때도 있었고, 제이팝이 나올 때도 있었고, 애니메이션 곡이 나올때도 있었고, 블루스가 나올 때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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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연주들은, 대다수가 100%가 아니었다. 7~80%의 퀄리티를 보여주는 곡들. 원곡에 비하면 미흡한 부분이 많았고, 이런저런 빈 곡도 존재하는 그런 연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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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곡들을 관객들이 사랑할 수 있었던 것은… 지금 관객들 앞에서 마이크를 잡고 있는 기타의 연주 실력이 컸다고, 대다수의 관객들은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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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또 미안하다는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아요. 오늘도 갑자기 난데없이 예정에 없던 커버곡을 치고 싶어져서요. 제가 새로운 장비를 구한 까닭에… 오늘 연주에 이걸 꼭 써 보고 싶어서, 이렇게 세트리스트를 바꿔버리게 됐는데요. 좀 연습을 하긴 했는데, 미흡할 수도 있으니 미리 사과말씀부터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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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 괜찮아! 같은 응원이 이어진다. 수연은 손을 살짝 풀더니, 현아를 보고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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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시작합니다. Pink floyd, Us and Th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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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신호와 함께 섬세하게 터치되기 시작하는 현아의 커즈와일 키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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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환적인 소리와 함께, 원래는 색소폰 소리가 들려왔어야 할 자리를 기타가 메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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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없었던 딜레이와 패닝이 들어간 기타 톤은, 사람들의 감각을 묘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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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전까지만 해도 꽤나 신나는 곡에 이리저리 흔들리던 관중들은, 이번에는 또 묘하게 사람을 침착하게 만드는 멜로디에 조금씩 움직임이 잦아들어가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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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 또한 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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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이 페달을 밟으며 교체한 톤은, 순간적으로 잠에 취한 듯 잠들어버린 관객의 분위기를 순식간에 되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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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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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럼의 필인과 함께, 웅장한 사운드가 배경에 깔린다. 호소력이 짙은 목소리가 정원 이백명이 약간 안 되는 클럽의 무대를 가득 채워낸다. 하지만 그것은 일시적인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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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들이 그 감각을 온전히 다 느끼기도 전에, 치솟았던 소리는 전부 사라지고 몽환적인 피아노만이 다시 남고. 그들은 물 밖에 건져졌다 다시 물 안으로 들어간 듯한 느낌을 받으며, 절제된 감정의 격류를 온전히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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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지는 나레이션과 기타 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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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슨 에코렉을 사용해 극한까지 끌어올린 공간감은, 스피커를 통해 관객들로 하여금 클럽 내부가 우주라도 된 것 마냥 광활하게 느껴지게 만들었다. 수 없이 가까이에 붙어 있는 사람들이지만, 닿을래야 닿을 수 없는 것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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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 한 가운데 던져진 상태로,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으며 막연히 은하를 맴도는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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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잘하는데? 쟤들이 고등학생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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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운드에 관객들이 압도되어있는 동안, 관객석 맨 끝. 벽에 주루룩 붙어 있던 사람들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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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이번에 밴드 하기 시작했다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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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 말도 안되는…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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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이 어처구니 없다는 듯 되묻는 여성과,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는 남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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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쟤들 우리가 이길 수 있나? 지금 상태로도 솔직히 자신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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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하는 거 확실히 맞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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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이리저리 오가는 가운데… 이제까지 입을 열지 않고 있던, 키가 큰 남자가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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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더는 떨어지면 안 돼. 이제는 정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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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든 해야 돼. 그 말은, 그 남자의 입에서 잠시 맴돌다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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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저는 우리 밴드, 그룹 사운드의 베이시스트인 최이서라고 합니다. 오늘 제가 찍는 영상은요, 아무래도 첫 유튜브다 보니까! 저희 연습 영상을 보여드리려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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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맛님 뭐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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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소맛님 아니라니까요. 이서라고 해 이서라고! 지금 유튜브 영상 찍는 중. 어디다가 올리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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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릴 데가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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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이 유튜브에 올려보고, 반응 좋고 이제 밴드가 더 커지면 우리 밴드 유튜브 만들어서 거기 올리는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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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남의 유튜브에 올릴 필요 있나요? 지금부터라도 올리면 되는 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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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봐 주는 사람이 중요하다고, 이런 건. 기껏 올렸는데 조회수 10이고 100이고 이러면 슬프잖아. 다른 유튜브를 활용해서 일단 개척을 해 놓고, 그 다음 계속 이어나가는거지. 응? 이게 전략이고 이게 영업인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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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습실의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명전이 본 것은, 하라는 연습은 안 하고 셀카봉을 들고 이것저것 말을 하고 있는 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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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하냐? 맨날천날 놀고만 앉아있으려고 하고. 연습이나 들어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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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지금 유튜브 찍는다고오~ 구독자분들, 여러분 이 채널의 주인이 원래 저런 모습의 사람이거든요. 유튜브 찍을 때 막 사근사근하고 차분하게 안녕하십니까? 이러면서 막 그러는 거 자체가 이게 좀 가식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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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한숨을 푹 쉬고는 이서의 핸드폰을 팍 뺏어들었다. 둘려달라고 앵겨붙는 이서. 나머지 둘이 흥미롭게 쳐다보는 와중에, 명전은 이서에게 핸드폰을 돌려주고는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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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생방송이라도 하는 줄 알았네. 뭐 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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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각에, 우리도 이제 슬슬 유튜브 같은 걸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밴드 유튜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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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랑 이게 무슨 상관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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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상관이냐니! 뉴진스 못 봤어 뉴진스? 그 유튜브에 실제 여고생 컨셉으로 뭐 올리고 막 그랬잖아. 뭐더라? 아무튼 그런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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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뭐라 횡설수설하기는 하는데, 명전이 이서의 이야기를 대충 요약해보자면 이랬다. 뉴진스가 신곡을 냈을 때 진짜 여고생인 것 마냥 컨셉을 잡고 일종의 페이크 다큐멘터리를 했고, 그게 성공하지 않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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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우리도 그런 걸 해보는 게 어떤가? 거기에다가 우리는 실제 여고생이기도 하고, 실제 밴드 파이오니어 도전 과정을 찍는 거니까 오히려 좀 더 효과가 증폭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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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 그냥 브이로그 같은 거 아냐? 뭐~ 도전 브이로그. 수능 백일 전 브이로그 이런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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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짝 어처구니가 없어진 명전의 심정을, 서하가 대신해서 말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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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어? 그런 거… 는 아니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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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이서. 너 혹시 배터리가 탈착식이면 편하지 않을까 생각해본 적 있어? 이제 핸드폰 뒤에 뚜껑이 열리고, 배터리가 탈착식으로 들어가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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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그렇게 생각해본 적은 없는데, 괜찮은 거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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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의 질문에, 아무 생각 없이 자연스럽게 대답을 하는 이서. 그 대답에 명전은 아무 말 없이 천장을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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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세상이 이렇게 되어도 되는 건가? 아무리 젊은 애들이 옛날 문물에 대해서 모른다고 해도 말이지. 아주 나중에 가면 삐삐 같은 거 보고 “왜 이런 거 썼지? 핸드폰을 가지고 다니는 게 훨씬 편한데.” 같은 이야기를 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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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뭐, 이서의 과거에 대한 존중 결여 문제를 빼놓고 보자면, 아이디어는 괜찮아 보였다. 밴드 파이오니어 도전 과정을 유튜브로 담는다... 그 뿐만 아니고, 그냥 밴드의 삶 자체를 유튜브로 담는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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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종의 도전기 같은 게 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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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창작물이 빼어나다 한들,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이 주는 실제감보다는 못한 것이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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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과 아이들이 정부지원사업에 도전하고, 하나둘씩 단계를 밟아가며 우승하고, 앨범을 내는… 그 과정을 제대로 찍어내 유튜브에 올릴 수 있다면, 명전의 유튜브 또한 꽤나 성장할 것이 분명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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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은 거 같긴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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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 한번 해 보자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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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명전의 유튜브가 최근 성장세가 주춤하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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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창기에야 1일 1개의 영상을 올렸고, 그래도 3월 초까지는 2~3일에 1개씩은 영상을 올렸었는데. 3월 초부터 지금까지는 워낙 뭐 일들이 많아서, 영상을 올릴 틈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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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분 어디가셨나요? 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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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나… 나 추워… 켁켁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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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로운 기타 곡을 연습해야. 하는데. 곡이 올라오지 않고. 있군요. 어디 아프신.곳은.ㅇ벗는지. 궁금합니다. 모쪼록 잘 지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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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창에는 영상 좀 알려달라는 아우성들이 많았으나, 구독자는 확실히 늘어 2만명 후반대까지 붙었다. 수익도 식비 정도는 나오긴 했지만… 에코렉과 퍼즈페이스, 빅머프 등을 되찾았음에도 불구하고 명전의 페달보드를 복구하려면 아직 갈길이 먼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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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하면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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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그럼 처음부터 다시 영상을 찍는 거야. 아까 내가 찍은 그 부분부터 다시. 아니다, 그냥 이렇게 영상이 나가는 것 자체가 더 재미있을 것 같아. 이게 더 자연스럽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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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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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불이 살짝 붙었다가, 쌀쌀한 봄바람에 훅 꺼져버린다. “아이 씨발~” 소리와 함께 다시 켜지는 라이터. 이번에는 불을 제대로 붙이려는지, 담배에 빨간 빛이 옮겨 붙자마자 훅 들이쉬는 소리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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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성아. 거기 스튜디오 몇시부터 쓸 수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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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만요. 확인해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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쭈그려앉아 핸드폰으로 스케줄을 확인하는 희성. 그러는 동안, 남자는 담배를 깊이 들이마셨다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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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임에도 불구하고 길가에 자욱이 퍼지는 담배 연기. 길을 오가던 사람 몇몇이 담배 냄새에 인상을 찌푸리고, 일부는 그를 쳐다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얼굴을 찌푸리며 시선을 되돌려주자, 아무 일 없다는 듯 쫄아서 가버리는 행인들. 그런 모습이 자못 유쾌해 그는 낄낄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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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 3시라는데요? 3시 픽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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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시? 왜? 저번주에 11시라고 하지 않았나? 오전에 뭐 빈다고, 예약 안 들어오면 우리가 쓸 수 있게 해준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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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거는 비었을 때 가능하다는 이야기였죠… 아무튼 다른 팀이 어제 예약을 했다고 하더라고요. 거기 촬영부터 해야 할 것 같다고 3시부터 가능하다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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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뭔… 우리가 거기를 몇번을 이용을 했는데 시발, 우리 편의를 봐 줘야 할 거 아냐. 진짜 단골 대접 조또 안해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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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골 대접이랑은 다른 거 아닌가 하고 희성은 생각했지만, 대답을 하진 않았다. 말해봐야 딱히 바뀌는 것은 없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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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윤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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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도착했다던데요. 오라고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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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스튜디오로 바로 오라 그래. 이준성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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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고 있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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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새끼는 뭐, 씨발 뭘 오고 있대? 이제야 일어나 있겠지. 하여간 뭔 외부에서 사람 데려와봐야 쓸모가 없다니까. 밴드를 무슨 개 좆으로 알아. 음악을 할 자세가 안 되어 있어. 누구는 인생 갈아가면서 이러고 있는데 지는 뭐 집이 잘 산다 이거지. 아오 씨발새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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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의 계속되는 투덜거림에, 희성은 귀를 막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언제부터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 분명 같이 밴드를 시작할 때만 해도 멋있고 괜찮은 형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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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희성과 남자는 묵묵히 스튜디오로 걷기 시작했다. 그러던 와중, 갑자기 그에게 던져진 물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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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성아. 뭐 그 빌린다는 애들한테, 다음에 빌리면 안 되냐고 물어보면 어떨까? 우리 급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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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당연히 안 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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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뭐, 별로 급한 일도 아닐 것 같은데. 우리는 지금 오늘 아니면 시간이 없잖아. 급해봐야 우리가 더 급하겠지 걔들이 급할까? 견적 한번 보고, 비켜달라고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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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될 것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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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새끼야! 말이라도 해 보는 거지. 씨발 뭔 그렇게 부정적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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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욕 세례를 얻어맞은 희성. 길가의 사람들이 다 쳐다보는 가운데, 남자는 “아니 새끼 진짜 말귀 못알아듣네…” 등을 중얼거리며 계속해서 걸었다. 희성은 그 뒤를 묵묵히 따라갔다. 흔히 있는 일이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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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서하?? 너 왜 여기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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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이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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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성과 남자가 도착한 곳은, 홍대의 어느 스튜디오 앞. 이미 도착해있던 경윤은, 누군가와 같이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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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성아. 저거 서하 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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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맞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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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쟤가 왜 여기 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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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사람은, 유서하. 홍대 인디 씬에서 나름 기대받던 드럼 유망주. 드럼 실력도 아가리도 둘 다 좋아 조금만 더 성장하면 홍대 메탈씬의 기둥이 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되었던… 다른 밴드의 형 말을 빌리자면, '산삼보다 좋다는 고삼 여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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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리던 형들도 많은 걸로 알았는데, 왜 갑자기 온 거지? 그런 사람들 피해서 도망간 거 아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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뺀질나게 홍대 라이브클럽 등을 뚫고 돌아다니던 애였는데, 작년 하반기부터 갑자기 사라져서 나타나지 않기 시작했다. 그 때문에 무슨 해괴한 소문이 다 돌던 참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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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왠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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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저 오늘 녹음하러 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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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녹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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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서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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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규식 오빠. 희성 오빠. 오빠들은 여기 왠 일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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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하를 만나자마자 목소리를 살짝 깔기 시작한 규식. 그런 모습을 은근히 한심하게 생각하며, 희성은 서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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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녹음하러 왔지. 우리 여기 단골이라. 오전에 비어 있다길래 좀 무료로 쓸 수 없을까 하고 왔는데… 너는 뭐 녹음하러 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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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저희 밴드 파이오니어 녹음하러 왔어요. 오빠랑 언니들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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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드 파이오니어. 그들 또한 해당 지원사업에 참가하기 위해서 이 녹음실에 온 상황이었다. 그렇게 이야기가 이어지려는 와중, 스튜디오의 문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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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하. 안 들어오고 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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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잠시만. 아는 분들이 있어서. 금방 들어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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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을 열고 바깥을 내다본 사람은, 이마가 살짝 까진 채로 머리를 길게 넘긴 여자아이. 상당한 외모에 희성과 규식이 살짝 멈춘 사이, 고개를 살짝 숙이더니 스튜디오에 들어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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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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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밴드 리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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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하 너 밴드 해?? 그래서 홍대 안 왔구나? 밴드 하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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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이런저런 잡담이 이어진다. 뭐 어떻게 밴드 하게 되었냐, 하는 음악은 뭐냐, 인원 구성은 어떻게 되냐… 호기심 20%, 서하에 대한 성적 관심 30%, 그리고 경쟁자에 대한 적대감 50%으로 가득찬 질문에… 서하는 겨우겨우 대답을 이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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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고생 4인조 밴드라고? 장르는 블루스, 제이팝, 애니 음악, 얼터락…? 뭔… 너는 메탈을 해야지, 뭔 이상한 걸 하고 앉아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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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 서하 여기 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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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서하가 그런 거 가리는 애냐? 서하야. 너 왜 그래. 너 지금 그러고 있으면 안 된다니까. 그때 오빠가 키워준다고 했잖아. 뭐 이상한 친목 밴드 같은 거 하면서 시간낭비 같은 거 하지 말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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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으로 서하를 아껴준다는 듯 열렬히 감정을 토해내는 규식. 경윤 또한 “재능낭비 하면서 아마추어들이랑 놀지 마.” 같은 대답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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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저희 다 음악 잘 한다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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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생이 잘해봐야 뭘 얼마나 잘한다고. 너 정도 되는 애들이어야 진짜 잘하는 거지. 야. 오빠 봐라. 어차피 그 시절 친구들 진짜 도움 안 돼. 어차피 음악 할 거면, 밴드 하고 음악 하고 하면서 인맥 쌓고 그러는 게 진짜 도움이 되는 거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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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성은 이 촌극이 도대체 언제까지 갈지 궁금했다. 서하는 전혀 생각도 없는 것 같고, 쟤들이 하는 음악을 들어본 적도 없는데…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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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다른 사람들은 눈치를 채지 못한 것 같지만, 서하의 표정이 점점 안 좋아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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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하. 아직도 이야기 안 끝났나? 이미 녹음 시작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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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와중에, 다시 열리는 스튜디오 문. 아까 봤던 여고생이 뚜벅뚜벅 걸어와 그들 앞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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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금방 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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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방 오려면 아까 왔어야지. 죄송한데, 녹음을 해야 돼서요. 애좀 데려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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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더니 서하를 데리고 들어가려는 여고생. 상황이 종료되기 직전, 갑자기 규식이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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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요. 저희도 밴드 하는 사람들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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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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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녹음 참관 가능할까요? 아주 잠시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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왠지 모를 적대감과, 경쟁자를 제끼기 위해 정탐을 하자는… 그런 무의식적 생각이 바탕이 되어 나온 규식의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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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오빠, 아니 저희 그 지원사업 녹화해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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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보는 건 괜찮잖아. 그것도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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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라면 서하가 거절해야 할 상황. 그러나 그래도 지인이고 연장자라 그렇게 칼같이 거절 하지도 못하는 미묘한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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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참관하시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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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뭐, 궁금해서요. 새로운 신인 밴드라고 하고, 뭐 실력도 궁금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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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식의 말투에는 미처 숨기지 못한 감정들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다른 사람들도 다 알아챌 수 있을 만큼 진한 흔적들이었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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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그러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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왠지 모르게 수연은 살짝 웃음을 지으며, 그들의 참관을 허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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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의 인테리어는 온통 하얀색이었다. 하얀색 의자, 하얀색 가구, 하얀색 벽면. 다른 것은, 보랏빛 계열의 조명. 최근 유행하는 인테리어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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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향 설비라거나 하는 것들은 중간정도는 하지만, 나머지는 다 부족하다. 의자도 몇개 없고(인테리어를 망친다는 이유로) 주위에 편의시설도 부족하고, 교통편도 좋지 않다. 스튜디오 내에 들어와 있는 악기도 몇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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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에 평상시에는 그런 사정을 잘 모르는 신생 밴드들과, 규식의 밴드 정도만이 이 스튜디오를 이용하는 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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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런 대목때에는, 나름 장사가 잘 되는 편이었다. 왜냐하면 비주얼이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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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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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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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사람들. 괜히 인사했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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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있는데 인사 하는 건 당연한 일이야. 일이 귀찮아진다 한들 봤다면 인사를 하는 게 도리지. 상태 안 좋은 사람이 난리치는 걸로 너무 신경쓰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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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하의 대답에, 수연은 신경쓰지 않는다는 듯 이야기했다. 괜히 이상한 사람들 끼어들어와서 뭘 본다니 참관한다느니 신경이 쓰일 법 한데도, 수연은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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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쟤를 보면 보면 진짜 인생 2회차라도 되는 것 같은 느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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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당히 정확한 추리지만, 서하는 그를 말도 안되는 상상이라고 치부했다. 그러고는 기자재들을 준비하다가, 입구 쪽을 흘끗 쳐다보았다. 의자에 앉아 이야기를 하고 있는 세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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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도 그다지 좋아하던 사람들은 아니었다. 서하가 메탈이 최고의 음악이라고 하던 시절에나 교류가 조금 있었던 사람들이지, 이제 와서는 그냥 클럽 오며가며 술 몇잔 받아마신 게 전부인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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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오늘은 강제로 밀고 들어오질 않나, 팔짱을 끼고 무슨 심사라도 하는 것 마냥 저러고 있질 않나. 밴드 파이오니어 참가라고 하니까 더욱 더 달라붙는 그런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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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저 사람들도 참가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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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를 굴리던 와중에 서하는 그런 생각을 떠올렸다. 조금 더 생각을 해 보니, 꽤나 일리가 있는 것 같았다. 왜 기분이 나빠졌는가는 잘 모르겠다만, 기분이 나빠졌다고 해서 남의 밴드 음악을 꼭 듣고 싶다고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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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서하 또한 여자였고, ‘그런 것들’에 대해서도 알고는 있었다. 그렇기에 어느 측면에서는 왜 화를 내는지 알 것 같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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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지금 저러고 있는 건 그거랑은 전혀 별개의 문제 아닌가. 경력이 쌓인 밴드임에도 불구하고 무례하게 저렇게 밀고 들어온다는 것은, 분명 목적이 있어 보이는 행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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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사람들 누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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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내가 아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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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하는 인사하고 와야겠다는 이서를 붙잡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는 이서의 시선과, 처음보는 사람들을 경계하는 현아의 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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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저 사람들 계속 있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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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몇곡 듣다 나갈 거라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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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하의 말에, 이서는 머리를 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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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그 우리, 유튜브 찍고 있잖아. 저 사람들 나와도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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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이서가 그런 말을 했었더랬다. 나와도 될까? 서하는 고민을 잠시 하다가, “그냥 들어내면 되지 않을까?” 라고 대답했다. 뭐, 찍는게 큰 문제가 되겠는가. 어차피 최종 결과물로만 안 나오면 되는 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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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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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그러면 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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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와중에 평온하게 기기들을 조정하고, 녹음 준비를 하고 있는 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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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손부터 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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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은 그렇게 말하고는, 기타를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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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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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식은 팔짱을 낀 채로 돌아가는 꼴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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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련이라고는 단 하나도 없어보이는 아이들의 움직임. 이것저것 바쁘게 돌아다니며 부산을 떠는 베이스와 키보드, 그리고 자신들이 불편한지 자꾸 쳐다보는 서하. 아이들이 준비하는 것을 가만히 보고만 있는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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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판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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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식의 말에, 희성과 경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전혀 정돈되지 않은 모습. 스튜디오든 연습실이든, 돈을 아끼기 위해서는 최대한 빨리 정리를 해야 한다. 그러나 그런 건 전혀 신경쓰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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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가기는 글른 거 같지 않아요? 오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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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그렇긴 하지. 좀 보다가 서하한테 밴드 터지면 우리 쪽으로 오라고 해야겠어. 이준성이 그놈, 드럼도 좆도 못치는데 자꾸 처 늦기만 하고. 걔 쫒아내고 서하 넣으면 딱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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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게. 서하 들어오면 딱 좋을 것 같지 않아요? 준성 오빠 너무 음침하고 좀 별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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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하 본인은 하겠다고도 말하지 않았는데, 이미 그녀의 미래는 결정이 되어버린 상황. 희성은 참 한심하다고 생각하며 연주 준비를 갖춘 밴드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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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규식이 형 말이 맞긴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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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애들이 어떤 음악을 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모습을 보면, 딱히 음악을 잘할 것 같진 않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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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봐도 그렇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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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성의 편견일지도 모르지만… 세상에서 밴드와 가장 거리가 먼 인종을 꼽아본다 하면, 한국 여고생은 무조건 들어가지 않을까 싶었다. 물론 서하도 한국 여고생이긴 하지만 좀 별종인 케이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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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랑 베이스 자세부터 봐라. 기본이 안 되어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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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랩을 최대한 축 늘어트린 채 연주를 하려는 기타, 자기가 지미 헨드릭스라도 되는 것 마냥 왼손잡이임에도 불구하고 오른손 베이스를 쓰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베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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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하다면 사소한, 그냥 넘어갈 수 있는 부분임에도 불구하고 트집을 잡고 궁시렁거리는 규식과 경윤. 희성은 또한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나, 굳이 저렇게 트집까지 잡을 건가 싶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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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들의 생각은… 연주가 시작됨과 동시에 180도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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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바뀔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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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볍게 손을 푸는 듯한 표정으로, 아무런 징조 없이 갑자기 시작된 기타의 연주. 구름 위를 떠도는 듯 평온하게 오가는 손가락과는 달리, 기타에서 연주되어 앰프로 뛰쳐나오는 소리는 명확하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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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과는 전혀 다른 연주에, 희성은 저도 모르게 규식을 바라보았다. 기타리스트로서 저 연주를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궁금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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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규식의 반응은 희성이 생각했던 그대로였다. 여고생 나잇대라고는 전혀 생각할 수 없는 연주를 듣고 충격을 받은 모습. 살짝 벌어진 입과 커진 눈동자는, 그의 충격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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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게 말이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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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모로 파락호적인 삶을 살고 있었으나, 규식 또한 꽤나 이름 있는 밴드의 기타리스트다. 나름 재능도 있고, 기타를 오래 치기도 해서… 레슨과 밴드로 밥벌이를 하며 ‘나 정도면 기타 잘 치지’ 라고 할만한 실력의 소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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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눈 앞에서 펼쳐지는 광경은, 그런 규식의 상식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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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고생이라곤 믿기 힘들 연주를 선보이며, 유려한 터치로 멜로디를 이끌어나가는 소녀. 규식은 그를 보며 압도되는 기분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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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냥 저 프레이즈만 연습한 것일 수도 있어. 요새는 기본기 없이 그냥 프레이즈 연습을 하는 애들이 많다고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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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식은 그런 생각을 하며 이를 악물었다. 저런 어린 아이가 자신보다 잘 친다는 것을 인정해버리면, 지금까지 쌓아왔던 자신의 세월이 너무나도 허무하게 무너질 것 같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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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런 생각을 뒷받침할만한 증거도 있었다. 아무도 연주에 들어오지 않고 있지 않은가. 밴드원에 대한 아무런 배려 없이, 자기 프레이즈만 연습했다는 증거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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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 생각은, 타이밍을 맞춰 베이스가 슬쩍 들어오면서 깨졌다. 음악과는 전혀 거리가 멀어 보이던 화려한 화장의 여고생이 보여주는 정석적이고 깔끔한 베이스 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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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은 키보드, 드럼. 순차적으로 들어온 악기들은, 살짝씩 맞지 않는 구석이 있긴 했다. 그러나 불협화음을 내며 그대로 연주를 하기보다는, 음량을 줄이거나 박자를 늦추거나 하면서 서로에게 자신을 맞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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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모든 과정을 조율하는, 기타의 지휘에 따라 물 흐르듯 흘러가는 연주. 지휘라거나 몸짓이라거나 말이라거나, 그런 것은 하나도 없었지만… 규식 또한 기타리스트였기에, 기타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연주를 하고 있는지 정도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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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곡 자체는 난잡하다. 완전 쌩 라이브로 들어간다, 이것 하나 외에는 그다지 볼 일이 없는 연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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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식은 이를 악물었다. 이것이 자작곡이다… 라고 한다면, 작곡 실력은 영 기대만 못하다. 실력이 뛰어나면 뭐 하는가. 결국 중요한 것은 곡이다. 그들이 있는 곳은 밴드씬이지 세션 씬이 아니다… 같은 생각으로. 눈 앞의 여고생 밴드를 폄하하고 있던 규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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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잼(Jam, 밴드의 즉흥합주)도 끝냈고, 손도 풀었으니까… 이제 카피 곡 한번 쳐 보고, 녹화 들어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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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연주가 끝난 후, 기타를 맡은 아이가 건넨 이야기에… 규식은 자신의 마음 속에서 무엇인가가 부러지는 듯한 소리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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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게 잼이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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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애들은 죄다 기타가 끌어준 느낌이니 그렇다 치고, 기타가 저걸 잼으로 쳤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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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가능한가? 얼마 나이도 되어보이지 않는데? 실은 아주 어릴 때부터 기타를 잡았던 걸까? 아니면 엄청난 재능의 소유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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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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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번민하던 와중, 앞쪽에서 들려온 물음. 규식은 자신이 저도 모르게 의자에서 일어나 앞쪽으로 향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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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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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식은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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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은 이야기는 많았다. 어디 연주 틀어놓고 그냥 핸드싱크 한 거 아니냐? 우리 밴드에 들어오지 않을래? 기타 너무 잘 친다. 혹시 작곡 할 생각 있어? 남자친구 있냐?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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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규식의 뇌를 거쳐, 입으로 뱉을 수 있는 이야기는 하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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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기타 배운지 얼마나 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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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열한 의도가 느껴지는 질문이라고 규식은 스스로 생각했다. 배운지 얼마나 됐겠는가. 그래도 오년 십년은 넘지 않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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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기간과 자신의 기간을 비례해서, 그냥 저 아이는 나보다 약간 재능이 높을 뿐이다. 나와 재능이 비슷한데, 다른 영역으로 발전시켰을 뿐이다… 그렇게 자신을 위안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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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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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도를 알 수 없는, 혹은 알 수 밖에 없는. 그런 규식의 질문에 희성과 경윤은 규식을 당황한 듯 쳐다보았고… 수연은 모호한 웃음을 지으며 질문에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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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일년 됐나요. 얼마 안 된 거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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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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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사람들은 왜 왔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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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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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쓰게 웃었다. 끝까지 의도를 알지 못하는 이서와, 대충 짐작만 하고 있는 현아와 다르게… 명전은 상대를 보자마자 의도를 알 수 있었다. 딱 봐도 시비걸고 싶은 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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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런 사람들은 옛날에도 있었다.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지 못하고, 남을 깎아내리는 것에 주력하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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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깝긴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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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명전 또한 재능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그로 인해서 느껴지는 벽이라는 게 뭔지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아마 현재 한국에서 가장 재능이라는 것에 대해 고민해보지 않았을까 싶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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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저러는 건 좀 그렇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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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하게 생각해보면… 자기들끼리 재밌게 놀기 위해서 만든 밴드를 보고, 갑자기 심술이 나서 쳐들어온 프로 놈들 아닌가. 자기들은 어떻게 생각했을 지 모르지만, 문자로 써놓고 곰곰히 생각해보면 그냥 미친 행각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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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명전은 그런 사람들을 얌전히 달래서 돌려보낼 성격은 확실히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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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들 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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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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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을 열고 들어온 서하에게 이서가 질문을 던졌다. 보내고 왔는지, 사과부터 하는 서하. 명전은 머리를 살짝 꼬고는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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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한테 뭐라고 안 하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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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별 말 안 했어. 그냥 미안하다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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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할 것 까지야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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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생각했다. 서하가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잘못이 있다면, 그냥 친하게 지낼 사람들을 잘못 선택한 것일 뿐이지. 물론 서하의 옛날 모습을 생각해보면, 원래는 서하도 저렇게 살았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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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생각해보면, 초반에 내가 버릇을 고쳐준 게 의외로 효과가 있었던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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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생각을 하며, 명전은 다시 기타를 집어들었다. 이미 시간을 많이 낭비했으니, 이제는 진짜 지원사업 제출용 녹화를 해야 할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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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제자인가? 명전 선생님이 마지막에 거둔 제자? 재능을 알아보고 가르치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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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생각하던 준홍은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명전 선생님의 제자라고 생각하는 게 제일 합리적이긴 했지만, 또 제자라고 생각하고 아까 일을 생각해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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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라고 한다면, 기타의 출처를 물어보았을 때 제자라고 밝히면 될 일이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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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준홍은, 그 이상으로 설득력이 있는 가설을 찾지 못했다. 당연하다. 준홍은 기타를 잘 친다는 것을 제외하면 평범한 시민. 괴력난신 같은 것은 전혀 믿지 않는 과학적 사고를 가진 자랑스러운 21세기 대한민국 국민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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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 준홍은, 밝히지 않은 것을 추궁하기보다는… 그 사실을 밝히지 않은 이유를 생각해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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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히지 말라는 말을 들은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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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되는 이유라고 준홍은 생각했다. 왜냐하면 명전 선생님은 까다롭기도 했지만, 약간 특이한 사람이기도 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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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 선생님에게서 기타를 배운 것은 준홍 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세션 기타리스트 몇몇도 그 시기 명전의 집에 묵으며 기타를 배운 사람들이 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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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명전은, 그들에게 단 한번도 ‘스승’이니 ‘선생님’이니 기타를 가르쳐 주셨느니 뭐 그런 말을 허락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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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배웠으면 배운 거지, 무슨 스승이며 선생님이며… 할 짓 없으면 집에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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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말하며 쫒아내는 게 전부. 그 때문에 씬에는 명전을 존경하는 기타리스트들이 꽤나 있었지만, 딱히 모임을 만들거나 뭉치거나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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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하면 서로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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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애한테도 그렇게 말하신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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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그렇다면, 제자라고 말을 하지 못할 수 밖에 없다. 스승이 그렇게 말을 했는데, 제자가 어떻게 ‘나 그 사람에게서 배웠소’라고 말을 하겠는가. 당연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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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느낌으로 혼자 납득을 하는 준홍의 표정을 보며, 명전은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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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그렇게 말해둬서 다행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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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옛날의 자신에게 감사했다. 그가 어디 가서 자기가 기타 가르쳤다고 말하지 말라고 했던 것은, 명전이 가진 자괴감과 타인에 대한 질투심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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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를 잘 치면 뭐하는가. 정작 중요한 ‘음악’에서는 자신이 훨씬 뒤떨어지는데. 내가 누구를 가르쳤소 걔가 내 제자요 하고 거들먹거리고 다니는 것 자체가 쪽팔리는 일이라고, 당시의 명전은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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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명전은 죽었고, 수연만이 남았으니… 누구도 이유를 평생 알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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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방송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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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이 Eric Clapton의 Change the world를 연주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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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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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와 진짜 감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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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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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쩌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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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의 미래가. 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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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클랩튼 영감 불륜남인데 왜 저렇게 좋아하나요? 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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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링이 장난 아니네요 ^^ 연주 잘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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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들었습니다. 여러분 어떠셨나요? 진짜 잘 치신다구요? 그렇죠? 저도 엄청 놀랐습니다. 감동도 했구요. 한국에 이런 실력의 기타리스트가, 그것도 이렇게 젊은, 게다가 이렇게 이쁜 사람이 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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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저리 잔뜩 올라오는 채팅. 준홍은 멘트를 주워내며 방송을 진행했다. 자신이 요 근래에 들어본 기타 곡 중에 제일 좋았다, 실력이 진짜 10대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굉장하다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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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White Room… 님께서는 따로 예대 같은 곳이나, 이런 곳은 지망하지 않으시는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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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저는 뭐 따로 그런 쪽으로 갈 생각은 없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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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기타 치는 거만 들어보면, 예대는 그냥 문 부수고 들어가실 수 있을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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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홍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갈 수 있다면 가는 게 이득 아닐까? 준홍 또한 예대 출신이기도 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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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굳이 그런 데를 가야 할까요. 배울 것도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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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자신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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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명전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그는 필드에서 모든 것을 배우고 습득했던 사람이기에, 뭔가를 배우기 위해서 학원이니 학교니 가야 한다는 이야기에 공감하기가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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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클리라거나 이런 데는 생각 안 해보셨어요? 국내 아니더라도 외국에는 충분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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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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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토모 후지타(Tomo fujita) 같은 엄청난 실력의 기타리스트들이 포진하고 있는 버클리라면, 배울 것이 있기도 할 것이다. 존 메이어(John Mayer)도 버클리 출신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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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명전은 자신만의 스타일을 완성한 기타리스트였다. 존 메이어조차도 버클리를 중퇴한 마당에, 몇십년 넘는 세월동안 기타를 쳐 본인의 스타일을 완성한 명전이… 굳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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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생각이 바뀔 수는 있겠지만, 일단 지금으로써는 고려하고 있지 않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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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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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홍은 채팅방을 바라보았다. [예대 무시하나?], [잘 치긴 하는데 부족한 면도 있는 것 같은데;;] 같은 채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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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채팅을 밴하면서, 그는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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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감이 넘치는 건 좋은데, 확실히 오만한 곳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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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그럴 수 있을 만한 실력이었다. 만약 준홍이 저 나이때 저 실력이었다면, 세상을 모두 자신의 발 아래 둔 것처럼 행동했을 것이다. 능히 그럴 수 있는 실력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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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논란을 만들 수 있는 화법이기도 했다. 인터넷 커뮤니티 같은 데서 [예대 가는 새끼들 = 그냥 실력 좆도 없는 병신들 이라고 말한 여고생.jpg] 라고 요약될 수 있는 내용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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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평범하게 초대만 한 유튜버였다면, 어떻게 되든지 간에 그냥 내버려뒀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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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의 제자로 추정되는 이상, 그대로 내버려둘 수도 없는 일. 준홍은 이것 외에도 어느정도 지원을 해 줘야겠다고 생각하며, 다음 멘트를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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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슬 라이브도 끝나가는데요, 혹시 마지막으로 자작곡 연주 괜찮으시다면 한곡 들을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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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자작곡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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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잠시 생각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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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처음 협의를 할 때는, 그의 두번째 자작곡을 치기로 협의를 했었다. 왜냐하면 그 때는 첫 밴드곡이 완성되지 않은 시점이었으니까. 하지만 이메일이 오가는 동안, 밴드곡의 편곡은 완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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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에 명전은 오늘 방송 전 준홍에게 다른 곡을 칠 것이라고 이야기를 하려 했는데… 무슨 중요하지도 않은 기타 관련 이야기 때문에, 사전에 미리 말을 하지도, 파일을 건네주지도 못한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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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뭐, 괜찮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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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다른 소리가 없는 게, 그의 실력을 드러내는 데 더 좋을 수도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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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배킹 트랙이 없다면, 좀 심심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그 부분을 기타 실력으로 커버해내면, 오히려 찬양을 받게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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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잠시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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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명전은 그렇게 하기로 했다. 살짝 난감해하다, 이내 고개를 끄덕이는 준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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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홍이 안내 멘트를 하는 동안, 명전은 뒤로 살짝 빠져서 장비를 손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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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주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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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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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번에 화이트 룸 님께서 연주하실 곡은… 현재 몸담고 계신 밴드에서 만든, 첫 자작곡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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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과 함께, 이런저런 이야기를 소개하는 준홍. 시청자들은 그 이야기를 들으며, 약간의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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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를 잘 치는 건 알겠는데, 그 정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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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사람들은, 그 사람이 얼마나 기타를 잘 쳤는지에 대해서 잘 알아보지 못한다. 이 채널을 구독하고 라이브를 들을 정도의 리스너라고 해도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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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하면, 실제로 해보지 않으면 모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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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든지 그렇다. 볼 한번 차본 적 없는 사람이 프리미어 리그의 스트라이커 중 누구의 실력은 병신이고 누구는 갓이니 뭐니를 논한다. 실제로 축구장에서 만나면, 공에 발 한번 대지 못하고 털릴 수 있는 실력임에도 불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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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그것이 엄청난 잘못이라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원래 그러는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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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렇기에 사람들은, 보이는 것을 추구하고 보이지 않는 것을 배격한다. 화려해보이는 테크닉에 집착한다. 실제로는 단단한 기본기가 몇배는 더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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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수연이 기타를 튕기기 시작했을 때, 라이브를 보던 사람들은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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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고수는, 기본기에서부터 차이가 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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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혀 평탄하게 이어지지 않는 연주. 굽이치는 물결처럼, 몰아치는 파도처럼… 빠졌다가 들어오고, 나아갔다 물러나는 리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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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박자가 살짝씩 어긋남에도 불구하고, 위화감 없이 진행되는 곡. 펜타토닉과 블루노트 스케일을 기반으로 한, 구슬픈 멜로디가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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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실력에 맞지 않는 곡을 연주했을때의 급함이라던가, 박자를 파악하지 못해 아무렇게나 치는 듯한 느낌이라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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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것은 단 하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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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면 속의 그녀는, 음 하나하나를 전부 다 통제하고 있다. 자신의 의도를 온전히 담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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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팅이 점점 잦아들기 시작한다. 키보드를, 혹은 자판을 두드리느라 곡을 하나라도 놓칠 수 없다는 의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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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흐르는 허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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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에 절묘하게 섞여들여가며… 라이브를 듣는 사람들을, 어떤 풍경 하나로 인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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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은, 바람이 치던 겨울날이었던 것 같다. 창문 바깥으로 싸락눈이 조금씩 내리던 그 날. 약속 시간이 되어가는데, 너에게서는 어떤 소식도 닿지 않았던 그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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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쪽 카페 구석에 앉은 줄쟁이가, 블루지한 음색으로 기타를 연주하고 있는 카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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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 바깥을 다시금 바라본다. 왠지 모르게, 시간은 이미 다 된 것 같다. 카페 한 구석에 걸린 괘종시계는 약속시간으로부터 30분이 훌쩍 지났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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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오지 않는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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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 카운터로 향한다. 전화를 요청하고, 다이얼을 돌려 너의 집으로 전화를 걸어본다. 전화를 받은 너의 가족은, 이미 네가 나갔다는 이야기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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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값을 카운터로 내던지고, 바깥으로 뛰어나갔다. 너의 집까지 계속해서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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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너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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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락눈이 계속 내리고, 눈발이 점점 거세지는데도 너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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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와 너의 집을 수십번을 오갔어도, 너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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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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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직도 찾고 있어, 만나지 못했던 그날의 너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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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컬의 끝과 함께, 이때까지 잔잔하게 울던 기타가 포효한다. 싸락눈이 몰아치던 그 날 밤, 몇번이고 말라붙은 눈으로 거리를 오가던 그 사람의 심정을 말해주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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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임없이 고조되던 솔로는, 클라이막스에 도달한다. 이제까지는 보여주지 않았던 속주와 함께, 인위에 의해 흔들리는 피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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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정없이 뒤틀리는 음정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것을 전혀 껄끄럽게 느끼지 않았다.오히려 사람들은 그것이 감정이라고 생각했다. 말로만 들었지 실제로는 느껴보지 못한, 기타 연주의 필링(feeling)이 바로 그것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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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클라이막스를 지나, 잔잔하게 가라앉는 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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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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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를 듣자마자, 준홍은 박수를 그야말로 사정없이 쳤다. 자신의 손이 붉어지고, 엄청나게 아프다는 것을 깨달을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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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악! 아이고, 너무 세게 쳤네. 아무튼… 엄청나다고밖에 말할 수 없는 연주였습니다! 세상에, 진짜 10대 기타리스트에게서 이런 감정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는… 단 한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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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홍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이런 재능을 알았기에, 명전 선생님께서 이 아이를 제자로 두신 걸까. 마치 돌아가신 명전 선생님이 다시 돌아오신 것 같은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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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곡의 이름이 뭔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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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과 같이, 들끓다 못해 평소보다 5배는 빨라진 채팅방을 보며 준홍은 질문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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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의 너 입니다.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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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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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곡을 연주할 저희 밴드는… Group Sound. 그룹 사운드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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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그렇게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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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하는 핸드폰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녹화가 있던 이후로 계속해서 울려대는 카톡. 홍대에서 싸돌아다니던 시절 만났던 사람들이 보내오는 것들이었는데, 대답해주는 것도 한두번이지 이제는 정말 지칠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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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짓이 없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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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규식 오빠와 일행이 스튜디오에서 나갈 때, 분명 마음이 안 좋긴 했다. 딱 봐도 수연의 재능에 마음이 꺾여버린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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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을 좋아하지 않기도 했고, 무례하게 행동하는 부분도 있긴 했지만… 그렇다고 저렇게까지 상처받아야 할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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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마음은, 그날이 지나고 나서 싹 사라지고 말았다. 도대체 무슨 말을 주위에 했는지는 모르겠다만, 왜 이렇게 자신을 귀찮게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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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와중에 또다시 울리는 핸드폰. 잡아들고 보니 또 카톡이다. 그대로 무시하려고 했지만, 이번에는 꽤나 친한 오빠여서 그대로 무시하기도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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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톡을 열자 보이는 메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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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밴드 기타 잘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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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식이가 벽느끼고 기타 접고싶다고 술먹고 주절거리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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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해가지고 막 밴드 관두고 폐관수련하러 갈거라던데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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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오!! 그만 좀 보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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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하지도 않은 메세지에, 서하는 최대한 사회성을 발휘해서 답장을 보냈다. 쏟아지는 메세지들의 내용에 근거해서 대충 추측을 해 보자면, 뭐… 그 날 수연이의 실력을 보고 충격을 받아서 주위에 떠벌리고 다닌 모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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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너무 많이 떠벌린 탓에 곳곳에서 서하에게 카톡이 오고 있다는 거였다. 게다가 쏟아지는 카톡 중엔 [너희 밴드 기타가 한승고 하수연 맞아?] 같은 좀 수상한 낌새를 풍기는 카톡도 있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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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솔직히 벽을 느낄 만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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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하는 처음 수연을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불과 몇달 전.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기고만장해하던 자신에게, 천외천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었던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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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적인 연수로 치면 얼마 되지 않는 서하도 그러할진대, 다른 사람들은 어떻겠는가. 아무리 서명전 선생님이 가르쳤다고 한들 불가해할 정도의 재능. 재능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을 모두 범재로 만들어버릴만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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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술궂은 면은 좀 그렇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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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건도 그렇고, 다른 일도 마찬가지. 서하와 수연과 처음 만났을 때 있었던 일도, 최근에 수연이 말하기로는 “그때 너무 기고만장해있어서 좀 기강을 잡고 싶었지.” 라는 이유로 수연이 일부러 의도한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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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그 덕에 정신을 차리긴 했지만… 조금 너무하지 않았나? 아니 뭐… 사실 그때 싸가지 없었던 건 사실이니까. 그리고 규식 오빠가 싸가지 없게 군 것도 사실이고… 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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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생각해보면, 내가 나이가 많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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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뜩 감상에 빠져 있던 와중, 서하가 문득 떠올린 생각. 수연의 나이는 고2, 서하는 고3. 십대때는 나이 하나 차이가 절대적인데도 불구하고, 수연은 처음 봤을 때부터 지금까지 쭉 그런 건 모르겠다는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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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또 수연이 이서마냥 “서하 언니~” 하며 앵겨붙고, 서하에게 살갑게 대하는 상상을 해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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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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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약간 우주적인 공포를 느끼게 된 서하였다. 그런 건 있어서는 안 될 것 같다, 그런 느낌? 왠지 이서가 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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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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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그럼 백화점 좀 갔다가 근처 카페에 있을게. 끝나면 연락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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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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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의 단답에 혜인은 괜히 명전의 옆구리를 간지럽혔다. 이를 악물고 웃지 않으려 버티는 명전의 얼굴을 보고, 실실 웃으며 백화점으로 사라지는 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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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 갈수록 장난끼만 늘어간단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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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을 뭘로 아는 거냐… 같은 생각은 해봐야 소용이 없다. 객관적으로 보면 자신은 그녀의 딸이니까. 몇개월 살아본 결과 뭔가 점점 적응해가는 것 같은 느낌도 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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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그런 쓰잘데기 없는 생각을 하며 눈 앞의 건물로 발을 옮겼다. 녹음 스튜디오가 2층이라고 했던가? 오늘은 2프로 정도 세션을 할 거라고 했으니, 이펙터 값 치고도 한 삼십만원 정도는 벌어갈 것으로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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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수연 학생. 잘 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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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다시 또 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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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에 들어가자, 이전에 봤던 채호근 교수가 명전을 반겼다. 악수를 나누고, 이런저런 근황을 이야기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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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음을 시작하려면 시간이 좀 더 있어야 하긴 했지만, 명전은 이야기도 할 겸 그냥 빨리 도착했다. 호근과는 그래도 음악적으로 말이 좀 통하는 사이였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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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커피를 홀짝홀짝 마시며, 명전과 호근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옛날 밴드가 어쩌고, 사이케델릭 락이 어쩌고. 프록 락과 프록 메탈이 가야 할 길은 어디인가, 핑크 플로이드를 프록으로 볼 수 있는가? 같은 그런 그 시절의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한번쯤 생각해봤을 사소한 이야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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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대화를 끝낸 것은, 누군가가 스튜디오에 들어오며 던진 인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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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교수님! 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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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박피디. 오랜만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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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보다는 약간 나이가 들어보이는, 평범한 체격의 아저씨. 공연히 선글라스를 낀 것을 보면 뭔가 성격이 유추가 되는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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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쪽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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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번에 앨범 세션 기타 해줄 친구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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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습니까? 아이고 반갑습니다. 박휘석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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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휘석 씨가 내민 명함에는, [박휘석 음악감독]이라고 적혀 있었다. 음반사 명도 같이 적혀 있었는데, 꽤나 이름이 있는 음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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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갑습니다. 저는 드릴 명함은 없고… 하수연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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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하수연?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인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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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의 이름을 듣고는 고개를 이리저리 기우뚱대는 휘석. 그런 모습에 호근이 웃으며 “서명전 씨 제자야.” 라고 말해주었다. 하지만 휘석은, 그 때문에 ‘하수연’을 알아보는 것이 아닌 모양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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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들어본 이름인데… 아! 김감독! 그 사람 맞지요? 김감독이 잡았는데 꺼지라고 했다던 그 여고생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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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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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소리인가 하고 쳐다보는 호근. 참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더니, 이게 딱 그 꼴이었다. 명전은 얇은 한숨을 살짝 쉬고는 그때 일어난 사건을 설명했다. 처음 세션 서러 갔는데 김재훈이라는 사람이 무시하고 어쩌고 저쩌고. 그래서 뭐 어떻게 했고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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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거 재미있었어요. 이야기 들었을 때. 김재훈 씨가 참 실력은 있지만, 여러모로 이야기가 많다 보니… 한번쯤 누가 그렇게 해주긴 해야 했지.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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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를 안 내려고 노력하는 말과는 다르게, 웃음이 가득한 얼굴. 딱 봐도 그 ‘김재훈’이라는 사람을 별로 안 좋아했던 듯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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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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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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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와중, 시간이 되어 슬슬 도착하는 사람들. 잡담은 이제 그만 나누고, 녹음에 들어갈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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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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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시간의 녹음 후, 살짝 지친 세션들에게 주어진 휴식시간. 명전은 왼손 스트레칭을 하며 계단을 내려갔다. 담배라도 한대 피고 싶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필 수 없음을 아쉬워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담배를 끊을 수 있었음에 고마워해야 하는 것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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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의점에서 캔커피를 구입하고는 따서 한번에 들이킨다. 스튜디오 내에는 분명 품질이 좋고 맛있는 커피들이 즐비했지만, 명전은 왠지 모르게 이 캔커피를 좋아했다. 과거에 대한 향수랄까,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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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주 좋던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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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에서 들려온 목소리. 고개를 돌려보니, 아까 소개받았던 박휘석 프로듀서였다. 명전은 대답 대신 고개를 으쓱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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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기타를 누구로 하지 막 고민을 하고 있었는데, 교수님이 자기가 봐놓은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고. 막 엄청 잘하는 애가 있다고. 반신반의했는데 과장이 아니었네. 오히려 교수님이 과소평가하지 않았나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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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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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일단 고마워서 인사는 하지만, 약간 의심스럽다는 생각을 하며 휘석을 쳐다보았다. 아무런 맥락도 없이 그냥 칭찬만 하려는 건가? 뭐 그런 사람도 있겠지만, 보통 저 나이 정도 되면 그런 사람은 별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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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말인데, 혹시 뭐 OST 녹음해 볼 생각 없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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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그렇지. 뭐, 좋은 기회긴 하다고 명전은 생각했다. OST라. 어떤 생각일까? 이 사람 앞에서 보컬 같은 걸 보여준 적은 없다. 보여준 것은 오로지 기타와 얼굴, 그리고 김재훈 감독을 엿먹였다는 실적 뿐. 그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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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OST인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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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세션으로 녹음 해 주고, OST 메이킹 영상 찍어주면 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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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명전의 예상이 맞았다. OST는 대충 작곡가 붙여서 팔아먹고, 메이킹 영상으로 여고생 기타리스트! 이러면서 어그로 한번 끌어보겠다는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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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환영할만한 일이다. 어찌됐든 돈이 벌리는 일이니까. 하지만 명전은, 지금 시점에서는 돈보다 더 고려하고 싶은 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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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을 녹음하는 것 자체는 상관이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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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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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개인이 하는 거 말고, 밴드로 하고 싶은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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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드? 그건 좀 곤란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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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연’ 개인의 화제성만을 뽑아먹고 싶었는지, 그런 제안을 하자마자 바로 난색을 표하는 휘석. 하지만 명전은 그를 설득하려들기보다는, QR코드 하나를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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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뭔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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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공연 QR코드입니다. 시간 날 때 한번 보시고, 생각 있으시면 연락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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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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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짝 난감하다는 듯 웃는 휘석을 뒤로한 채, 명전은 다시 스튜디오로 발을 옮겼다. 명전의 생각대로라면, 휘석은 저 영상을 보자마자 바로 명전에게 연락해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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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수 밖에 없다. 왜냐고? 여고생 기타리스트 하나만 보고 OST를 찍자느니 뭐니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 양반인데, 여고생 4명으로 이루어진 밴드라면 어떻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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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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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의 예상은 그대로 적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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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요. 밴드곡으로 하나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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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학교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명전에게 걸려온 전화. 휘석은 어제 밤 영상을 보고 오늘 내내 고민을 했다고 이야기를 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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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로써는 모험이긴 해요. 원래 밴드곡이 없었거든. 그런데 밴드곡 자리를 하나 만들자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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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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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손해를 봤다는 듯한 휘석의 이야기. 뭐 어쩌라는 건가 싶었지만, 일 주는 클라이언트에게 그렇게 대답해서는 안 된다. ‘서명전’ 일 시절에도 그랬는데, ‘하수연’인 현재는 더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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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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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 휘석이 꺼낸 이야기에, 명전은 자신이 살아온 세월에도 불구하고 “고민 좀 해보겠습니다.” 라고 할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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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재즈 풍 밴드 음악… 을 해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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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잘못 들었나 하며 되물은 이서의 말에, 명전은 고개를 끄덕였다. 전혀 잘못 들은 것이 아니다. 그런 쪽의 음악을 해달라고 한게 맞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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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장면에 삽입될지, 어떤 분위기일지는 나중에 지정을 해주겠다는데… 당장 곡 자체는 저런 분위기라고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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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연’의 몸에 들어오고 나서, 명전은 작곡과 편곡에 어느정도 자신이 붙은 상태였다. 자신이 아는 분야, 뭐 블루스라던가 락이라던가… 좀 더 나가면 약간의 메탈이나 팝까지. 그런 쪽은 어느정도 해볼만 하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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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클래식이며 재즈라니? 나일론 기타(클래식 기타)를 잡아본 적은 있다만 그냥 세션에서 클래시컬한 사운드를 내기 위해서 잡은 거지 명전이 그 쪽에 소양이 있다는 건 아니었다. 애초에 듣지도 않는 음악을 어떻게 만들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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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들 것 같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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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긴 한데… 너희들이랑 이야기는 해 봐야지. 밴드 차원으로 들어 온 이야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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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거듭해보았지만, 결국 거절하는 쪽으로 가닥이 잡혀가는 가운데… 이때까지 침묵하고 있던 현아가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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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보는 게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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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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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가능할 것 같은데… 우리 정도면요. 약간 좀, 저도 클래식 작곡을 잘 하는 건 아니고 재즈 쪽이긴 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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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쪽에서 들려오는 대답. 그 말에 갑자기 이서가 벌떡 일어서 현아를 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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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아가현아~ 역시 언니야. 최고 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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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엑, 소맛님 무거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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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거우라고 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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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격이 한참 차이나는 이서에게서 켁켁대며 겨우 벗어난 현아. 흐엑대며 숨을 약간 고르더니, 다시 말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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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인 재즈 음악이라던지 이런 걸 요구하는 게 아니잖아요? 어디까지나 재즈/클래식 풍 밴드 음악이니까. 그 정도면 제가 좀 잡고, 수연 님이랑 다른 분들이 도와주면 가능할 것 같기도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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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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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팔짱을 낀 채로 천장을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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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아의 작곡 실력은… 딱히 검증된 것이 없다. 본인은 자신감을 표현하지만, 그것이 실제로 발현될지 발현되지 않을지는 모른다. 곡 의뢰를 받아놓고 대가리만 깨다가 마감 기한 놓치고 평판이 안 좋아지는 일만 생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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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뭐, 그런 일이 있으면 있는대로 또 헤쳐나가는 게 인생의 즐거움 아니겠는가? 뭐든지 한번에 잘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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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하수연’의 재능이 있는 상황인데, 솔직히 말해서 일단 틀만 잡히면 쓸 수 있는 음악 하나쯤 만들 수 있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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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한번 해 보자. 어차피 녹화도 했겠다, 일정도 비는 참이니까… 이번에는 현아 위주로, 프로젝트 한번 해 보는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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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그런 생각을 하며 현아의 제안을 수락했다. 제대로 된다면, 밴드의 음악에 꽤나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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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를 치다가도, 문득 드는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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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렇게 말하는 게 맞았나? 그냥 나도 못하겠다고 이야기를 했어야 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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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생각이 들면, 또 머리를 박고 “아 괜히 말했어…”라고 자책을 한다. 몇분 정도 있다가, 다시 “아니, 해볼 만 하니까 했지!” 라고 말한다. 그 다음 멜로디를 짜 보고, 다시 후회해서 머리를 박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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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현아의 생활패턴이었다. 학교에서는 멜로디를 고민하느라 머리를 싸매고. 연습은 제대로 집중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다른 아이들에게 말하자니? 현아 본인이 호기롭게 해보겠다고 나선 일이라 도움의 손길조차 요청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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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왜 그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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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생각해보라. 다른 아이들은 전부 다 밴드에 어떻게든 도움이 되고 있다. 이서는 특유의 쾌활한 성격으로, 서하는 인디 밴드에서 쌓인 노하우로. 수연은 말할 것도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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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현아 본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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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실제의 그룹 사운드 밴드원들이 현아에 대해서 그렇게 생각하고 있진 않았다. 하지만 현아는 자존감 낮은 사람 특유의 착각으로 인해… 왠지, 자신이 존재감 없이 제 자리만 지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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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에 그녀는, 살짝 무리인 것을 알면서도… 자신이 활약할 수 있는 분야인 것을 알자, 과감하게 지원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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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그 결과는, 수십 수백번의 후회로 돌아왔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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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한스 짐머 같은 사람도 의뢰 받은 다음 이걸 내가 왜 했을까 하면서 후회한다니까, 나 정도는 괜찮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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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아는 그렇게 자신을 달랬다. 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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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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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감독 박휘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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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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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OST를 만들기 위해서 음악감독과 미팅을 했을 때. 그때 당시 음악감독은, “원래 이렇게 작곡하는 팀이랑 컨택을 하는게 흔하지 않은 일이긴 해요.” 라는 대답을 했었다. 그냥 이메일이나 메신저 정도로 주고받는게 보통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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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도 불구하고 직접 미팅을 하러 온 이유는… 딱 봐도 알 수 있었다. 음악감독 뒤에 붙은 촬영 카메라. 수연이 말했던 것처럼, ‘4인조 여고생 밴드’를 OST의 마케팅으로 써먹으려 한다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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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어쩔 수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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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아는 그렇게 생각했다. 자신이 유튜브나 어디 공개를 못 할 외모도 아니고, 유명해지면 유명해지는 대로 예대 입시에 플러스가 있다. 아무튼 좋은 거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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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드라마는 프리프로덕션 단계가 끝났어요. 저희는 쪽대본으로 나가는 제작사는 아니라서 대본도 이미 다 나왔고. 어떤 파트에서 여러분의 음악이 들어갈지도 대충 나왔습니다. 물론 대본 전체를 보여줄 순 없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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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석은 종이 한장을 내밀었다. 꽤나 잘 꾸며진 양식에, 어떤 장면에 대한 정보가 이것저것 잘 적혀 있는 문서. 남주인공과 여주인공이 대립하고, 대립하는 과정에서 뭐 어쩌고 저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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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저희는 어떤 식의 곡을 만들어드리면 되는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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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의 질문에, 휘석은 턱을 살짝 긁다가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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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멜랑꼴리하고, 그 약간 달콤쌉싸름하면서도, 살짝 위기감도 있으면서도 쫀득하고 간질간질하게 사랑싸움을 하는 그런 재즈곡이었으면 좋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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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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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석의 입에서 나온 말에, 현아는 순간 외계어를 들은 듯한 기분을 느꼈다. 저게 무슨 소리인가? 멜랑꼴리하고 달콤쌉싸름하고 어쩌고 저쩌고? 그게 뭔데 씹덕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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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이해가 잘 안 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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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이 상황이 있잖아. 남주랑 여주가 은근슬쩍 코믹하기도 하고 약간 긴장되는 느낌으로? 그러니까 이제 막 서로 좋아하면서도 서로 좋아하는 걸 모르고, 어떻게든 주도권을 잡으려고 하는 그런 느낌인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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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아는 “그렇게 말해도 잘…” 이라고 대답하려 했으나, 그런 현아의 대답을 막는 수연. 그녀가 상대 감독과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사이, 현아는 ‘소맛님이 왔으면 이해를 잘 했으려나?’ 같은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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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대충 그렇게 만들어주면 돼요. 금액은 멜로디 + 컨셉이 나오면 컨펌 1회 거치고 선금 지불될 거고, 완성되면 곡 받고 잔금 지불하는 걸로. 시간은 많이는 못 줘요. 일정 말해준 그대로 가니까 참고하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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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알겠습니다. 저작권은 어느 쪽으로 귀속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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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딧은 여러분이 다 가지고, 재산권은 우리로 귀속되는 걸로. 음원 수익은 알죠? 기본 디폴트로. 여러분은 저작/실연자니까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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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외 뭐 잡다한 조항들을 이야기하더니, 휘석은 마지막으로 할 이야기가 있다며 무게를 잡고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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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밴드에 대해서 잘 몰라요. 밴드 같은 건 여러분이 잘 알겠지. 근데 나는 이런 드라마 OST에서는 전문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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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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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사람은 물 안먹으면 죽지. 무슨 당연한 소리를 하고 있냐는 듯 현아는 속으로 빈정댔다. 그에 반해 수연은 착실히 대응하는 모습. 그런 자세가 마음에 드는 모양인지, 휘석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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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OST에서 제일 중요한 게 뭐라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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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몰입을 시켜줄 수 있는 요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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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도 괜찮네. 하지만 그보다는 말이죠… 이 주인공들이 차마 입으로 꺼내지 못하는, 행동으로 보여주지 못하는 그런 감정을 보여주는 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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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외로 제대로 된 이야기에, 현아는 반쯤 닫고 있던 귀를 은근슬쩍 다시 열었다. 희석은 목이 살짝 탄다는 듯 커피를 홀짝이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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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 뭐 저런 장면 있잖아. 저 장면에서 등장인물의 심리는 어떻겠어? 나는 가기 싫어. 그런데 네가 와 줬음 좋겠어. 근데 그걸 대본에 쓴다? 너무 유치해져. 하지만 배경에 흐르는 OST라면 어떨까? 관객들은 OST와 드라마 장면을 분리하면서도, 또 의외로 동일시해서 보는 그런 면이 있단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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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석은 그런 식으로 설명을 몇번 더 하고는, 카페를 나갔다. 이제까지는 대부분 뜬구름 잡는 소리였으나, 마지막에 설명한 이야기 덕에 현아는 약간 감을 잡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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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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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때? 할 수 있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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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괜찮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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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말하는 현아를 보고, 명전은 잘 되었다는 생각을 했다. 솔직히 피디가 너무 뜬구름 잡는 소리만 하는 거 아닌가 싶었는데, 어떻게 잘 알아들으니 다행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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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좀 걸리는 게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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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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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의 말에, 현아는 살짝 망설이는 표정을 보였다. 왜 저러는 걸까. 혹시 휘석 저 양반이 무슨 좆같은 눈빛이라도 보낸 건가? 여고생한테 수작 좀 부려보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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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좋아한다, 멜랑꼴리한 사랑… 그런 게 뭔지 잘 감이 안 오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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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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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굴 좋아해본 적이 없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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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가. 명전은 머리를 꼬았다. 하긴, 사랑이라는 감정이 경험하지 못하면 좀 뭐라하기 쉽지 않은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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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저 나이쯤 되면 사랑이니 연애니 그런 것들은 한번쯤은 경험해보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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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했는지 모를 명언 하나. ‘사랑이란 악마이며 불이며 천국이며 지옥이다. 쾌락과 고통, 슬픔과 후회가 거기에 함께 살고 있다’. 딱 명전이 살아왔던 삶 그 자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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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생각해보면, 어린 시절의 자신은 자거나 기타를 치거나 연애를 하거나 그것밖에 안 했던 것 같다고 생각하며… 명전은 자신의 풍부한 연애경험에 근거해 조언을 해주려다 급하게 입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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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애가 연애를 해 봤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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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까지 살아오면서 떠올린 기억들 중에, 딱히 그런 기억은 없었다. 그냥 남자들을 가지고 노는 걸 좋아했다 그 정도? 외모로 농락하는 것을 즐겼을 뿐, 진지한 관계까지는 가지 않았던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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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 님은… 그런 경험 있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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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어, 아, 음… 음, 어, 음,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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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들어온 급습에, 명전은 당황했다. 뭐라고 말해야 하는가. 과거의 삶을 기반으로 있다고 해야 하는가? 그런데 그건 거짓말이고. 근데 조언은 해 줘야 할 거 아닌가? 그렇게 말하려면 또 거짓말을 하게 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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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퇴양난인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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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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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한 멜로디로 구성된 곡이 끝나자, 명전은 버튼을 눌러 마이크를 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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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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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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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아가 완성해왔다고 보여준 라인은, 명전이 보기에는 꽤나 괜찮았다. 기승전결이 확실하고, 살짝 간드러지며 속삭이는 듯한 멜로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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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이걸 어떻게 곡으로 완성하냐는 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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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완성하면 되는 거 아닌가? 뭐 특별한 문제가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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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클래식이랑 재즈를 좀 들어보긴 했지만… 제가 만드는 게 클래식이고 재즈인가? 약간 그런 느낌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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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현아에게 들리지 않게 살짝 웃었다. 현아의 고민은, 창작자에게는 흔히 있을 법한 것이었다. 이게 맞나? 뭐 그런 느낌. 이게 락이 맞나? 이게 블루스가 맞나? 이게 메탈이 맞나? 기타 등등. 젊은 애들이 하는 가장 대표적인 고민이 저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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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라는 건… 붙이고 만드는 게 아니야. 만들고 붙이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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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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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자세한 설명을 위해 책상에 살짝 땡겨앉았다. 숨결이 마이크에 다가가 바슬거리며 부서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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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휘석 그 양반이, 클래식/재즈 풍의 음악을 만들어달라고 한 건… 진짜 그 장르 음악을 만들어달라고 한 게 아냐. 시청자가 듣기에 그렇게 들리는 음악을 만들어달라는 거지. 그러니까 그런 것에 지나치게 몰두할 필요는 없어. 다른 사람이 듣기에 좋다, 이러면 그냥 그걸로 충분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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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의 말에 “오…” 하며 대답하는 현아. 그리고 그녀의 말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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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건 그렇다 해도, 편곡적인 부분에서… 제가 약간, 뭐라 그래야 하나. 이걸 어떻게 진짜 곡으로 완성시켜야 할지 잘 감이 안 와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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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곡이야 뭐, 어차피 밴드 일이니까… 우리가 단체로 하면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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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그렇게 대답했다. 뭐, 실제로는 명전이 대부분을 도맡아서 하게 되겠지. 이서나 서하에게 맡기는 것도 재밌겠지만, 이건 밴드 차원에서 이뤄지는 첫 외주 작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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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다른 아이들에게 맡겨놨다가 말아먹거나 평가가 안 좋아진다거나 하는, 그런 일을 만들고 싶진 않았다. 아이들이 재능을 발휘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믿고 맡기는 것 보다 명전 본인이 직접 손을 대서 그런 일이 없도록 하는 게 제일 깔끔한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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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하지 마. 어떤 사람이 들어도 좋다는 평이 나올 수 밖에 없도록 만들어 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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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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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곡 좋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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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얼 밴드 사운드로 녹음되지는 않은, 미디로 찍은 것이 선명하게 들리는 곡 초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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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데군데 적절하게 꽂혀주는 드럼과, 부드러운 터치를 보여주는 베이스, 기타. 라인을 명확하게 잡아주는 키보드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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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드 보컬로 들어간 목소리는 살짝 낮아 더 마음에 들었다. 백밴드의 연주, 기승전결이 뚜렷한 멜로디… 휘석이 주문했던 그 ‘긴장감’을 완화시키는 듯한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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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내정된 가수가 없었다면, 이 목소리의 주인을 보컬로 쓰고 싶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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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참, 기대 이상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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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석은 그렇게 생각했다. 세션에서 보여준 실력과, 들려주었던 밴드 곡을 들어봤을 때… 어느정도 퀄리티가 나올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하지만 사실 그게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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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무난한 밴드 곡 하나 나오고, 그게 끝. OST 메이킹 과정에서 찍은 영상들을 공개하고, 여고생 밴드의 녹음 현장과, 아이들의 인터뷰까지. 그런 쪽에서 화제를 좀 끌어오려고 했던 휘석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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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은데요? 이게 진짜 그 감독님이 말했던, 그 여고생 애들? 메이킹 필름 찍는다는 그거? 걔들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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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아. 이거 미디로 찍기만 한 건데, 기대 이상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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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션에서 그 기타 여고생이 보여주었던 실력은, 가히 충격에 가까웠다. 본인이 자제하지만 않았어도, 몇십년 경력의 채호근 교수까지 잡아먹을 정도의 기타 실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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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밴드의 베이스(얘는 좀 부족했다)나 키보드, 드럼들도 꽤나 잘 치는 편이었으니… 그런 연주가 더해지고, 좋은 가사만 붙는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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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확실히 뜰 것 같다. 수형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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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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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감독한테 이야기해서, 아니 아니다. 내가 전화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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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석은 스태프가 전화하면 무게감이 좀 떨어질 것 같다는 생각에, 본인이 직접 전화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몇번의 신호 후에, 들리는 것은 살짝 짜증이 섞인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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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이감독님! 저 박휘석입니다. 오늘 뭐 촬영 잘 안되세요? 아니아니, 뭐 그런 게 아니고. 이번에 우리가 OST 만들잖아요? 이거 완전 대박이 하나 있는데. 벌써 녹음 들어갔냐고요? 아니 그건 아니고. 초안이 들어왔는데, 어? 이감독님 직접 이야기 들어보면 난리날 정도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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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석은 이리저리 이야기를 떠들며 간을 살짝 보았다. 어찌됐든 여기가 오케이가 돼야, 그 다음 스텝으로 넘어갈 수 있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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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래서 제가 전화를 왜 했냐면, 이번에 우리 뭐 OST 선공개 곡 지금 찾고 있잖아요? 이 곡으로 가면 어떨까 싶어가지고. 네. 아니, 가수는 미공개로 아니 이거 곡만 들어도 좋아요. 근데 왜 공개 안하냐고? 아니 미공개를 해야, 가수랑 딱 이제 이거 오픈 됐을때 진짜 빅 쇼크를 줄 수 있다니까. 어디세요? 지금 시간 되면 제가 가서 직접 말씀드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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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석이 명전과 아이들에게 설명해준 마케팅 방법은 다음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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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선 OST 곡을 선공개한다. 이 때 가수와 작곡가, 세션은 비공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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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대해서 휘석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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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가수는 유명한 사람 쓸 거야. 왜냐하면 내정이 되어 있으니까. 미공개인데 왜 유명한 사람 쓸 거냐고? 미공개 OST로 나가도 다 음색이나 목소리 들어보면 알음알음 다 알 수 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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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석의 말은 이러했다. 팬들에겐 ‘우리 가수님 정체가 공개되면 어떨까?’ 하는 기대감을 줘서 자발적 홍보를 하게 만들고, 대중들에겐 가수와 작곡가를 추리하는 즐거움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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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가수를 추리하면 추리했지 작곡가를 추리하는 사람이 있을까? 작곡가와 실연자를 궁금해하는 사람이 있을까? 그런 사람은 없지 않을까 하는 아이들의 물음에, 휘석은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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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대로라면 당연히 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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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이제는 아니라는 말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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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들이 궁금해하는 사실은 진짜 대중들이 궁금해서 궁금해하는 걸까? 아니야. 대중들의 궁금증은 매체가 만들어낸 거야. 물어보지도 않은 것에 대해서 근처에서 자꾸 이야기를 해 대면서 ‘궁금하지? 그렇지??’ 라고 하면 대부분 궁금해지기 마련이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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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석이 아는 척 하며 주워섬긴 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정도 대중매체의 본질을 꿰뚫고 있는 이야기였다. 21세기, 아니 그 전부터 사람들은… 자신이 진정으로 보길 원하는 것이 아니라, 매체와 그 제작자들이 보여주길 원하는 것을 보는 사회에 살고 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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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자꾸 여러분에 대한 떡밥을 뿌릴 거에요. 지금 만들어질 드라마는 뭐 엄청날 정도는 아니더라도, 꽤나 관심을 받고 있는 드라마거든. 그러면 이제 사람들은 반응을 할 수 밖에 없어. 첫 번째는 가수를 공개하고, 그 가수가 그런데 같이 녹음했던 밴드 애들이 너무 좋더라, 이렇게 말을 하면 이제 사람들은 아니 도대체 뭐가 좋다는 건데? 식으로 반응을 하게 되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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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OST와 가수를 공개하고, 그 기세를 몰아 여고생 4명이 결성한 밴드 + 곡 메이킹 영상 + 그 외 기타사항을 내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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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이 우리 회사에 소속이 되어 있었다면 정말 매끄럽게 돌아갈 수 있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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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석은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듯 이야기했다. OST 메이킹 영상, 밴드 생활 영상, 리얼리티 프로그램 등등을 찍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 연예인 데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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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석은 그 모든 것을 손만 뻗으면 잡을 수 있는 기회라는 것 마냥 눈 앞에 두고 흔들어댔고, 다른 아이들은 은근히 거기에 혹하는 것 같았지만… 명전은 딱히 그럴 생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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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낌새가 심상치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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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날아왔던 카톡. ‘하수연’의 과거와 관련해서 사과를 했던 아이에게 온 것이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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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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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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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요즘 뭐 밴드 관련해서 하고있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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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알았어? 뭐 지원 사업 같은 거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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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조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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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애들도 그렇고 얼마전에 나한테도 은근슬쩍 너 옛날 일에 대해서 물어보는 사람들이 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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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별 생각 없다고 말했는데 다른 애들은 어떨지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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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야기를 듣고, 명전은 올 게 왔구나 싶었다. 물론 대책은 착실하게 세워놓긴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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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에게도 사과를 했고 - ‘하수연’의 기억이나, 다인, 채린, 수현 등의 친구들, 혹은 당시 피해자들이 기억하지 못하는 애들을 제외한다면 - 약간 위선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지만 봉사활동도 꾸준히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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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동안 만난 음악계 대선배(명전은 이 표현이 참 미묘하다고 생각했다)들에게 명전의 과거에 대한 밑밥도 전부 깔아놓았고, ‘하수연 킥보드 사건’ 당시 술을 같이 마셨던 애들과도 이야기를 좀 해 놓은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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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일이 있었다’라는 사실 자체를 없애버릴 수는 없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성주희’라는 사람의 존재가 가장 걸림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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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되게 이야기를 좀 맞추긴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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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에 정통한 것 같은 학교 3인방의 도움을 받아, 어떻게든 대응방안을 마련하고 자료를 정리해놓은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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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명전은, ‘음반제작사’에 소속되어 회사까지 참여하는 대난장판을 만들고 싶진 않았다. 자칫하면 ‘학폭 과거 숨기고 회사 들어갔다가 회사까지 망하게 만들었다!’ 라는 누명을 쓰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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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그래도 하지도 않은 일 - 죽었다가 일어나보니 학폭 저지른 애 몸에 있는데 도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 에 고생하는 판에, 그런 누명까지 쓰면 진짜 돌아버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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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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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턱을 괸 채로 화면을 바라보았다. 아무튼 그런 식으로 일이 전개되고 있었다. 휘석의 방송가 짬은 헛되게 먹은 게 아닌 모양인지, 진짜 그의 말대로 점점 선공개 OST의 밴드에 대한 궁금증이 조금씩 증폭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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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시 주현님 ㅠㅠㅠㅠㅠ 음색 개깡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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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와 진짜 재즈천재 무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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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ㅅㅂ 이새끼는 얼굴도 잘생기고 노래도 잘부르고 곡도 잘뽑고 세상이 왜 이따구냐? 존나 불공평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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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말은 험한데 죄다 주현님 칭찬인게 웃김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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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님이 인스타에서 이 곡 만드신 밴드 진짜 기대해도 좋다는데 혹시 아시는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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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2222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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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ㄹㅇ 개궁금… 인스타에 물어봐도 절대 안가르쳐주세요 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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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봐야 가수에 대한 관심만 못하긴 했지만, 어쨌든 관심도가 높아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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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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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그 아저씨 말대로 잘 되고 있긴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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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습실에서 맥북을 쳐다보고 있는 와중에, 걸려오는 이서의 이야기. 명전은 노트북의 화면에서 눈을 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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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공개되고 영상도 나오고 하면 이제 우리도 아이돌 밴드 비슷하게 될 수 있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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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리지. 아니 뭐 될 수 있을지도 모르긴 하겠지만… 너도 알겠지만, 내가 과거가 뭐 이것저것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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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개월 전이긴 했지만, 명전은 밴드 아이들에게 그의 과거사에 대해서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아무튼 과거는 잘 기억이 안 나는데 내가 학폭 관련해서 뭔가 이슈가 있었고, 그것 때문에 밴드 관련해서 말이 나올 수 있고, 뭐 이것저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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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연’에 대해서 잘 알던 이서는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지만, 나머지 둘은 상당히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다. 특히 기억에 남던 것은, “그게 진짜 실제로 있던 일이 아니었다고요?” 라며, ‘하수연’이 후배들 세워놓고 일열종대로 뺨을 쳤다는 소문을 이야기해주던 현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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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상식적으로 그런 일을 했겠냐고. 당연히 그런 적 없다. 명전도 그 소문 들었을 땐 기겁해서 이리저리 수소문을 해 봤는데, 그냥 부풀리고 부풀려진 루머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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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미성년자가 술 먹고 킥보드 타다 날라가서 죽지도 않으므로, 명전은 ‘하수연’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이해하기를 그냥 포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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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이제 곧 발표일이긴 해. 이제 그거 발표되면, 오프라인 공연 준비해야겠지. 그럼 지금처럼 이렇게 널널하게는 연습 못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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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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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의 말에, 이서는 죽는 듯한 시늉을 했다. OST 관련 녹음을 할 때, 분명 수연보다는 널널하게 해줄 줄 알았던 현아에게서 제 2의 수연을 느끼고 상당히 괴로웠던 차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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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또 그 지옥같은 연습에 돌입한단 말인가. 이서는 눈 앞이 깜깜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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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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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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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고 가수님. 오랜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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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 교수님 또 뵙네요. 일년만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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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대 모처, [2024 밴드 파이오니어 심사]이라고 붙어 있는 회의실.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이, 서로 고개를 숙이고 악수를 해가며 반가움을 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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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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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요… 이제 웬만한 밴드들은 다 수상을 하지 않았나. 올해는 좀 유력한 후보가 보이지 않던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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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더 뭔가 치열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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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위원은 네 명. 유명한 락 밴드의 리더, 음대 교수, 유명 프로듀서, 음악방송 피디. 두 명은 몇 년 동안 심사를 맡아왔고, 두 명은 새로 심사를 맡게 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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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 방식은 별 것 없다. 정해진 양식과 기준에 따라 각자 채점을 하고, 동순위자가 생길 경우 토론을 통해서 의견 합의를 이끌어낸다. 마지막까지 의견 합의가 안 될 경우 다수결로 결정하지만, 웬만하면 이 지경까지 가는 일은 거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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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하면 딱 들어보면 감이 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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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일반적인 세금 나눠먹기형 공모전의 심사위원이 아니라, 꽤나 오랜 세월 이어져 온 사업의 심사위원. 음악계에 두 발을 전부 넣어 놓은 사람들으로써, 그들의 판단이 빗나가는 일은 웬만하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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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올해 듣기로는, 유력한 우승후보가 한 팀 있다고 하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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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요? 저는 못 들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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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 혼성팀인데, 약간 제이팝쪽으로 해서 트랜드를 제대로 수입한 모양이에요. 올해 음반 낸게 대박이라고 하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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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후배들이 또 나타난 모양이네. 이래서 밴드씬은 흥미롭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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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는 와중에, 누군가가 서류를 뒤적거리다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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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저도 이야기 하나 들었어요. 재미있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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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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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전 기타리스트님 제자가 있다고 하더라구요. 이번에 밴드 시작했다고. 주현이 형이 추모 콘서트 갔다 와서 칭찬을 엄청 하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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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 친구. 이런 말 하긴 그렇지만, 저도 만나봤어요. 꽤나 싹싹한 여자애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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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휴식 가졌다 촬영 들어가겠습니다. 40분에 시작 할 테니까 그때 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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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영 감독의 말에, 스태프들이 몸을 일으켰다. 명전은 커피를 쭈욱 빨아들이면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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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사불란하게 촬영 준비를 하러 빠지는 사람들. 은근슬쩍 담배 피러 가는 사람들. 조금 있다 시작할 거니까 지금 나는 쉬어도 되겠지 하고 핸드폰을 보는 사람까지. 그냥 평범한 촬영 현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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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자꾸 긴장되네. 미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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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은 명전 뿐인 것 같았다. 고개를 옆으로 돌려보니, 3명이 전부 다 긴장이 되어서인지 얼굴이 살짝 파래진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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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뭐 그렇게 긴장을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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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긴장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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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껏해야 인터뷰 찍는 거고, 어차피 조회수도 얼마 안 나올 텐데 뭘 그렇게까지 긴장을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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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팩트를 제시했다. 2022년 밴드 파이오니어 TOP 6의 인터뷰 조회수는 2천회가 안 된다. 2023년? 1500회 가량. 그렇다면 2024년은? 뭐 비슷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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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말해서 명전은 굳이 이 인터뷰 왜 찍나 싶은 느낌이었다. 명전 본인의 채널에 올려도 저 조회수보다는 많이 나올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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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인터뷰를 찍을 이유가 있긴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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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에 대한 리뷰를 찍으면 어떠려나 싶었다. 뭐 저 인터뷰를 찍을 때 뭐 어땠고, 어떤 걸 물어봤고, 이거 말했는데 잘렸고, 이거 말했는데 이건 나갔고, 이건 좀 왜곡됐고… 그런 걸로 조회수 좀 뽑아먹고 그러면 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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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그럼 인터뷰 촬영 들어갈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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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생각하는 와중, 스태프의 신호. 잠시 다른 데 가서 뭔가 딴짓을 하고 있던 아이들이 착착착 의자에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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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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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그룹 사운드에서 기타를 맡고 있는, 리더 하수연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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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그룹 사운드의 베이스 담당, 최이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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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그룹 사운드에서 키보드를 담당하고 있는, 정현아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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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드럼의 유서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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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이렇게 말하면 좀 오만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저는 왠지 저희가 뽑힐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왠지 느낌이? 그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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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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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만들자고 했어요! 아니 사실, 저도 밴드를 막 하겠다! 이렇게 생각한 적은 없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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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 나고 나서, 아. 아 뭐, 제가 좀 사고가 크게 난 적이 있습니다. 그 다음에 회복하고, 이제 기타를 들고 낙원에 갔는데 이서를 딱 만난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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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친다는 거 하나도 몰랐거든요! 그런데 갑자기 기타를 친다고 해서. 막 이야기 하다가, 다음날인가? 기타 한번 쳐달라고 했는데 진짜 완전 와… 어이가 없을 정도로 잘 치더라고요. 그래서 바로 이야기했죠. 어이 오마에! 나의 동료가 되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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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어이가 없었습니다. 뭘 믿고? 지금 와서 이야기하는 거지만 실력차도 엄청 났죠. 그때는 뭐, 사실 살짝 재능 좀 있는 취미반 1년 다닌 일반인 수준? 딱 그 정도. 그 뒤로 제가 사람 만들어 줬다고 봐야죠. 근데 웃긴 건, 그 다음에 이 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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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들이 아니라 언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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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니? 언니라고 해야 되나? 현아 언니? 서하 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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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거 하지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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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결성 1년만에 이런 자리에 올라오게 되어서 약간 얼떨떨하긴 한데요. 기왕 이렇게 된 거 그냥 사고 한번 치고 싶습니다. 1등 꼭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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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분들 자신감 무엇?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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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라독스의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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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타분 진짜 외모 미쳤다 ㅠㅠㅠㅠㅠ 공연 어디가서 볼 수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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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홍대 파라독스 가면 매주 토요일에 공연하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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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타… ㅋㅋ… 종로구에서 유명한 애였는데 ㅋㅋ~ 나는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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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뭔일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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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푸씨처럼씨발흘리기하지말고그냥말을해라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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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켜ㅓㅓㅓㅓㅓ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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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이 말대로 된거야? 저렇게 밴드 하자고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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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거짓말을 했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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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영상을 보던 다인의 질문에, 명전은 그렇게 대답했다.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키득대는 3인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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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러면 사고나고 회복하자마자 바로 기타 사러 갔다고? 도대체 기타에 얼마나 진심이었던거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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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내가 좀 그러긴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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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는 기타 배운다 티도 안 내놓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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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도 없고, 뭐 살짝 어렴풋이 기억나는 건 좋은 기억도 아니고. 이 참에 정신 차리고 기타나 쳐야겠다 싶어서, 그렇게 된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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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그렇게 타임라인을 정리했다. 실제로는 아니었지만, 이 아이들이 도와준다 해도 굳이 실제 있었던 일을 전부 다 이야기할 필요가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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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에게 비밀을 이야기하고, 그 비밀을 지켜달라고 하는 것은 멍청한 일이다. 진짜 비밀인 일은 애초부터 말을 하지 않아야 하는 법. 입 밖에 나가도 괜찮은 것만 이야기를 하고, 입 안에 있어야 하는 것은 입 안에 두는 것이 명전이 터득한 삶의 지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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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 이건 말해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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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얼마전에 내가 OST 참가한 곡이 있는데. 우리 이름은 아직 공개 안 되긴 했는데, 곧 있으면 공개가 될 거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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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그런 게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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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선공개된 OST를 보여주었다. 그 제목을 보고 놀람을 금치 못하는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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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박. 이거 진짜 나도 요즘 듣던 건데. 이걸 수연이 니가 만들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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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든 게 아니고, 우리 밴드가 만든 거지. 편곡은 내가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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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이거 막 틱톡에 유행하고 그런다니까. 나는 별 생각 없이 들었는데, 막 밴드 누구냐고 지랄났던데. 주현도 어그로 존나 끌고. 그런데 그게 너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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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휘석이 제시한 방향이 확실히 맞긴 했던 모양이다. 이런 평범한 아이들에게까지 밴드가 누구냐 하는 궁금증을 가지게 할 정도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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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어디 가서 말해도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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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안 남았으니까 그래도 되지 않을까. 어차피 그쪽에서도 이미 흘리고 있을 것 같고. 막 인터넷에 누구다 이러면서 어그로 끄는 거만 아니면 될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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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햐~ 친구 잘 둔 덕에 이제 막 유명인 아는 척도 해보고 좋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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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소리를 하며 명전에게 치대던 아이들. 다인이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고개를 번쩍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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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너희 뭐 오프라인 공연 이런 건 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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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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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티켓 좀 주라. 학교 애들 다 데리고 공연 갈게. 요즘 너 밴드한다는 이야기 돌면서 막 애들 엄청 궁금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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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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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라는 다인의 질문에, 명전은 “아무래도 전에 한 일이 있다보니까.” 라고 대답했다. 그 말에 낄낄 웃는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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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별로 신경도 안 쓸걸. 예전에야 그랬지만, 너 사과하고 다니고 나서는 이제 그런 애들도 없어. 아 신경 쓰는 애들 있긴 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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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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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지혜가 너 왜 그렇게 됐냐고 술빨고 담배피던 그 시절이 그립다고 막 전에 그러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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걔는 왜 그러지? 명전은 그런 생각을 하며, 머리를 살짝 꼬았다. 이번주에 온라인 경연 촬영 하고, 그 다음주에 오프라인 경연 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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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주에 공연할 것 같은데, 만약에 티켓 같은 거 나오면 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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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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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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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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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이 없어도, 온라인 경연 영상을 보는 사람들에게 감사 인사는 해야 한다. 그 뿐만 아니라, 카메라 너머에서 관객이 평상시처럼 열렬히 응원을 하고 있다고 간주하고 공연을 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공연의 열기가 제대로 전해지지 못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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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그런 생각을 하며, 무대를 내려왔다. 온라인 경연을 관람하고 있던 스태프들의 박수가 이어졌다. 꽤나 열띤 분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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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잘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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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사운드 1등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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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태프들 중 몇몇이 난데없이 외친 괴성. 와르르 웃음이 쏟아진다. 스태프들 중에서도 팬이 생긴 것 같아, 명전은 기분이 약간 좋아졌다. 어디 누구든 팬이 생기는 건 기분 좋은 일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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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스태프들을 지나 심사위원들 앞으로 갔을 때, 명전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느낌을 받았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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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 사운드 여러분들, 잠시 들어오시겠어요? 중요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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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이런 걸로 상당히 예민한 시기에요. 그래서 솔직히 말해서 아직 그럴 단계는 아닌 것 같은데, 우리가 정부랑 연계도 되다 보니까 여러분을 부를 수 밖에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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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꺼낸 것은, 이전에 추모 콘서트 건으로 명전과 친분이 조금 생긴… 꽤나 유명한 락 밴드의 리더였다. 그래도 저쪽에서 농 몇번은 던질만한 사이가 되었는데, 무게를 잡고 있는 것을 보면 좀 심각한 이야기 같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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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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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에서 말했다고는 말할 수 없는데, 하수연 양 관련해서 제보가 들어왔어요. 학교폭력 관련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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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게 왔나. 명전은 머리칼을 쓸어올린 후, 아이들을 보았다. 불안해하는 눈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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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쪽에서도 뭐 소문 정도로 들었다… 이러면서 이야기를 하긴 했지만, 아무튼 요즘… 특히 연예계에서 관련 사건이 계속 터지고 있는 이 시국에, 학폭 관련해서는 예민할 수 밖에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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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소문 단계이고, 어찌됐든 당사자인 여러분의 이야기를 들어봐야 할 것 같아서 소명 기회를 드리고자 하는데요. 혹시 관련해서 뭐 이야기 할 거라도 있으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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락 밴드 리더를 시작으로, 한두마디씩 꺼내놓는 이야기… 충분히 납득이 갈 만한 이야기였다. 소문만 듣고는 제재할 수 없으니, 소명 기회를 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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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명에 응하면 어떻게 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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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저희 쪽에서도 조사를 좀 해봐야겠죠. 그리고 수연 양도 관련해서 증거 같은 게 있다면 제출을 해야 될 것 같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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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에게는, 이 때를 위해서 차곡차곡 모아온 것들이 있었다. 그걸 터트리면, 어떻게든 뭐 출전은 이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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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란은 좀 되더라도, 어찌되었든 당장 가릴 수 없는 일이니까. 그렇다면 어떻게든 된다. 그게 좋다는 게 아니라, 한국이라는 사회가 그렇다. 아무튼 반대 의견이 있으면 ‘논쟁거리’로 취급하고 ‘피곤하다’라고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많은 사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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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지금보다는 훨씬 안 좋은 환경이겠지. 하지만 감수해야 할 일이다. ‘하수연’의 삶을 살고 있는 한, 어쩔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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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저희 쪽에 피해자가 직접 이야기를 한 게 아니다보니까요. 저희도 뭐라 이야기를 하기 조심스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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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생각하며 소명을 하겠다고 이야기를 하려는 와중, 들려온 한 마디. [피해자가 직접 이야기를 한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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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만, 이거… 논란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논란을 해결하는 방향으로 끌고 갈수도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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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의 머릿속에 뭔가 번뜩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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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문제든,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상황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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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 인식 전에 해결부터 하려고 하면 제대로 된 해결책이 나오지 않는다. 못이 필요한 곳에 나사를 박고, 나사가 필요한 곳에 못을 박는다던가 하는 그런 일이 발생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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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명전이 처한 문제는 어떠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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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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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눈 앞에 다가온 위기. ‘하수연’의 좋지 않은 과거… 에 대해 떠도는 소문을 심사위원들에게 누군가 흘렸다. 그 때문에, 심사위원들은 명전이 해명하기를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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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위기를 넘어가는 것은, 매우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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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하면 ‘피해자’가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소문을 주워들었다’ 라는 이야기를 할 뿐, 실제 근거도 없고 증언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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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그런 일이 없다고 부인하거나, 혹은 그런 일이 있었다 하더라도… 명전이 이때까지 해왔던 일들을 공개하고, ‘나는 이만큼 반성하고 있다’ 라고 이야기하면 된다. 어차피 지금 제보가 들어온 것은 소문에 불과하니, 그 정도만 해도 주최측도 납득을 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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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세상 일이 그렇게 쉽게 돌아갔다면, 지구가 이모양 이꼴이지도 않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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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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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에 있을 위기. 명전이 오디션 등 방송가에 발을 들이며 활동을 시작할 때, 언제인지는 모르나 ‘무조건’ 찾아올 수 밖에 없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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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연’의 과거를 정리하기 위해서 부지런히 돌아다녔던 명전도 건드릴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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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성주희’의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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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 어떻게 돌아갔냐는 사실 상관 없어. 그 애가 입을 열게 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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쟤도 술 같이 먹었고 담배도 같이 폈고 삥도 뜯었대요!! 라고 말해봐야 소용없다. 일단 자극적인 이야기부터 터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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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오르는 신생 밴드 보컬 학교폭력 논란?’ 같은 기사들부터 시작해서, 명전이 해명을 할 때까지… 아니 그 이후로도 계속해서 논란이니 논쟁이니 하면서 뷰 수를 뽑아먹으려고 난리를 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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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성주희’의 존재 때문에, 명전은 정말 수도 없이 고민을 했다. 어떻게 대응해야 하나? 어떻게 포지션을 가져가야 하나? 아니 그 전에, 대응을 할 수 있는 방법이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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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를 하고 어떻게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던 다른 아이들과 달리, ‘성주희’는 ‘하수연’에게 원한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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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을 준다? 합의를 한다? 들리는 이야기로 보자면, 합의를 해도 깨고 ‘하수연’을 엿먹이기 위해 입을 열 사람이 성주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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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명전은 정공법으로 대응하기로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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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의 사과를 등에 업고, ‘어차피 너도 술 먹고 다른 사람 삥 뜯었잖아!’ 라고 몰아치는 방법. 그 과정에 생기는 이미지의 하락은, “본토 락 밴드는 다 이렇다” 라고 하는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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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방금 전 이야기를 듣기 직전까지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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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가… 직접 이야기를 안 했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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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의 되물음에, 심사위원들은 아차 하는 표정이 되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 다시 표정을 수습하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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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그쪽 밴… 아니, 뭐, 아무튼 직접적인 피해자분이… 네.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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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황했는지 튀어나오는 말실수. 좋다. 밴드가 제보를 했고, 피해자는 없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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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만약 소명을 포기하게 된다면, 어떻게 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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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의 말에, 잠시 의견을 나누는 심사위원들. 스태프와 몇마디 말을 하더니, 담당자와 감독까지 들어와서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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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아. 그만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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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시간이 생긴 틈에, 이서가 살짝 불안한 눈치로 질문을 던져왔다. 명전은 쓴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하고는, 생각에 다시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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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제. 여기서 소명을 하고 그게 받아들여져서 잘 풀린다고 하더라도, 그 다음에는 분명 성주희가 나타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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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성주희가 나타난다면, 아마 밴드 파이오니어 당시에 했던 해명들까지도 싸잡아서 거짓말 취급 당할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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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너무나도 자명한 일이다. 물론 거짓말인 것 또한 밝혀지겠지. 하지만 그 때는, 이미 이미지가 추락한 상황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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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지금은 성주희가 나타나지 않아, 명전의 말에 반박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렇지만 ‘학교폭력 의혹’은 맴돌고 있는 상황. 여론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고, 그에게 증언을 해줄 사람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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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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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도 아직 내부 결정을 내린 것은 없습니다. 촬영 도중에 들은 이야기라서요. 그래도 아마 포기했다고 하는 걸로 끝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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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회의가 끝난 듯, 답변을 하는 심사위원. 명전은 짧게 숨을 내쉰 다음,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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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두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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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상황에서는 한번 접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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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론이 그에게 우호적일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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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망받는 기타리스트’이자, ‘앞으로가 기대되는 밴드’이며, ‘아까운 인재’ 일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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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명전의 이미지가 괜찮으며, '공식적으로' 뭔가 말하지 않아 트집이 잡히지 않을 시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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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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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저희가 그만둔 사유는 말하지 않는 것과, TOP 6 영상은 공개해주시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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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에, 다시 또 회의를 하기 시작하는 심사위원. 잠시 기다리자, 그 정도는 해주겠다는 답변을 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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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이 고개를 끄덕이자, 살짝 소강상태가 된 분위기. 그는 침울한 표정인 아이들의 어깨를 두드렸다. 이 아이들에게는 미안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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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너무 침울해하지 마라. 걱정하지도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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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 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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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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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을 그렇게 위로해주는 동안, 파장이 된 분위기 속에서 심사위원 한명이 다가왔다. 유명 락 밴드 리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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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학교폭력 한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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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하면, 지금부터 시작할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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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다가올 ‘성주희’의 위협을 이겨내고, 논란 자체에서 벗어나기 위한… 요샛말로 말하자면, ‘빌드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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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전에 말했던 것처럼, 기억을 잃기 전 일이라 잘 기억은 안 나요. 그래도 저는 최대한 성실히, 이전의 제가 했던 일들에 대해서 사과를 하고 다녔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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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그런데 왜 이런 소문이 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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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살짝 힐난하는 듯한 질문에… 상당히 착잡한, 그러면서도 분한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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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제 생각에는 아마… 어렴풋이 도는 기억이지만, 예전에 애들한테 삥 뜯고 다니는 선배와 싸운 적이 있거든요. 아마 그 선배가 퍼트린 게 아닐까 생각을 해요. 애들 삥 뜯는 거 보고 저랑 싸웠는데, 그때 이후로 눈만 뜨면 제 욕을 한다고 하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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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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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의 계획을 거칠게 요약하면 이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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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재 명전과 ‘그룹 사운드’ 밴드는 꽤나 촉망받는 상태이다. OST 녹음도 했고, 밴드 파이오니어 본선에도 올라가고, 파라독스에도 출연하는 등의 일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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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런 상황에서 밴드 파이오니어를 그만두면, 다들 ‘그룹 사운드’에 무슨 일이 있나 궁금해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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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파이오니어를 그만두고도, 활동은 계속 정상적으로 한다. 그럼 왜 그만두었냐는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 생길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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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그들을 상대로 밑바닥부터 여론전을 벌인다. 친구들의 동정심을 자극하고, 팬들에게도 은근히 암시를 뿌린다. 그럼으로써 ‘성주희’가 나타나기 전 미리 신뢰도를 낮춰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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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그렇게 되면 이후 오디션이나 다른 방송을 참가하고, 성주희가 나타나 증언을 한다 해도… 이미 저 시기때 만들어놓은 팬층과 친구들이 성주희의 신뢰도를 초반부터 박살내는 증언을 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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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 된 계획이라기보다는 곡예에 가깝다. ‘그룹 사운드’라는 밴드가 밴드 파이오니어를 그만두었다! 같은 것은 이혜인 씨 집에서나 이슈가 될 일이지, 다른 사람들에게 그렇게 이슈가 될 일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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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명전이 가만히 있었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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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푸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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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시간 전 업로드 | 조회수 25,02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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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은 그런 생각도 해요. 내가 노력해도 안 되는 일이 있구나. 그리고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도 있구나. 억울한 일이 있어도 받아들여야 하는구나. 뭐… 원래 다 그런 거 아닐까 하고 생각하고 다니긴 했는데. 그래도 약간 좀 북받치는 건 어쩔 수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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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ㅠㅠ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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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니 왜그래요 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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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슨 일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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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밴드 파이오니어 하시다가 갑자기 그만두셨는데 뭐 안 좋은 일 때문인 거 같음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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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헐 노래 개좋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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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질문 하나만 읽고 자러 갈게요. 주현님! OST 밴드는 언제 소개해 주세요? 아… 그거 좀 어, 좀 약간 안타까운 일이 생겨서. 당장 공개는 힘들 것 같아요. 솔직히 엄청 기대했거든요. 그 친구들 너무 잘 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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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헐 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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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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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 그 밴드 알거같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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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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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ㅍㅍ픂ㅍㅍㅍㅍㅍㅍ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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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헉 밴드 누구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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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저도 막 그 친구들 이름 이야기하고 다니지는 않는데, 어떻게 소문이 막 돌더라고요. 제 친구들도 ‘야 너 그 OST 누구누구랑 작업한 거 맞지?’ 물어보던데. 그래도 머지 않아 어떻게든 그 친구들 보여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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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가 하던 그 밴드 심사 프로, 뭐 누구 그만뒀다며? 명전 선생님 제자라고 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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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그거 사연 내가 들어봤는데. 진짜 안타깝더라. 그 친구가 명전 선생님 제자잖아? 그런데 약간 그 좀 일진처럼 살던 앤데, 명전 선생님 만나고 기타 배우면서 이제 막 개과천선 하고 있었나봐. 그런데 선생님 돌아가시고, 본인도 충격받아서 사고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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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수연이 소문 들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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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거. 흐흫흐… 솔직히 좀 꼬시다 싶긴 하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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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너는 걔가 얼마나 사과하고 다녔는지 알면서도 그런 이야기를 하냐? 이야기 들어보니까 예전 기억은 거의 없는 수준이라고 하더만. 그런데도 막 사과를 하고 다니던 애한테 그런 말 할 생각이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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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밴드 파이오니어] 그룹 사운드 | TOP 6 온라인 경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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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니 노래 개좋은데 왜 그만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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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프에서 보고싶어요 ㅠ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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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인 사정이라는데 후 그 개인사정 정말 밉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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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타리스트 안좋은 소문 있다던데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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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아니 그 안좋은 소문 좀 나도 압시다 씨빨 도대체 뭔 소문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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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유언비어 퍼트리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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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ㅋㅋㅋㅋ 종로구 고등학교인지 뭔지 이야기 나오던데 내 동생이 종로구 고딩인데 그 애 이야기 들어보니까 이제 완전 개과천선 했다던데? 막 선배가 삥뜯는 거 보고 덤볐다는 이야기도 있고 그러더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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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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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미친 의적 ㄷㄷㄷ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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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그야말로 다양한 채널을 활용해서 물밑 여론 작업에 들어갔다. 자신의 유튜브, 세션 인맥, 친구들, 그 외 기타 등등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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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론전의 단점은, 맞붙는 세력이 있을 때 사람들이 피곤해한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와 흥미로운 이야기인데?’ 하다가도 계속 이야기가 오가면서 오락가락하다보면 ‘아니 그래서 뭐 어쩌자는 거야’ 싶게 된다. 그러다 보면 이제 이야기에 흥미를 잃고, 피곤하다는 말을 하며 관심을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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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그런 ‘관심을 끄는’ 것을 노리는 여론전도 있다. 이슈를 계속 만들고 여론을 들끓게 해서 결국 “아니 둘 다 잘못했네!” 이러고 말게 함으로써 사람들의 시선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그런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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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지금 명전의 손에서 행해지는 여론전은, 두 쪽 어디에도 해당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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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격을 할 ‘성주희’는 돌아가는 상황 자체를 모르고 있고, ‘소문’을 심사위원 귀에 들어가게 한 밴드는 밴드 파이오니어에서 그들을 탈락시켰으니 별 생각 없이 만족하고 있는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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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말로 무주공산인 상태에서, 명전이 일으킨 ‘여론’은 그야말로 들불처럼 번져나가고 있었다. 밴드니 음악이니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조금씩이나마 ‘그룹 사운드’에 대해서 들어보았을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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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명전은 그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들은 더 큰 주목이 필요했다. ‘그룹 사운드’가 직접적으로 어필되지는 않지만, 관심 자체는 받을 수 있는 그런 성격의 주목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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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명전은, 전화를 한통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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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주현입니다. 아 네 이사님. 네? 어… 걔들이요? 네. 제 콘서트에 세션을 설 수도 있다고요? 그 애들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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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쉬자. 10분까지 쉬고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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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에 악기를 정리한 다음, 잠시 바깥으로 나가는 아이들. 그 후 명전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영 갈피를 못 잡고, 시무룩한… 요샛말로 하자면, ‘멘탈이 깨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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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 수 없긴 했다. 아무리 사전에 명전에게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들, 몇 주 동안 해왔던 노력이 남의 이야기 한번에 물거품으로 돌아간다는 건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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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삼십대, 아니 그를 넘어서 나이 먹을 만큼 먹은 사람들도 그걸 버티기가 힘들텐데 저 애들은 어떻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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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좀 심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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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일주일 정도면 꽤나 아이들이 회복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일주일 후에 본 아이들은 전혀 회복한 기색이 아니었다. 계속 우중충한 상태. 마음도 저 멀리 떠난 것 같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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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고민하는 동안 하나둘씩 들어오는 아이들. 여전히 표정은 어둡다. 그 표정들을 보며 명전은 머리를 살짝 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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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 지나면 다들 괜찮아질 줄 알았는데, 아니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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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의 말에 움찔하는 아이들. 명전은 쓰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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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들에게 뭐라고 하는 게 아냐. 문제의 발단은 결국 나한테 있으니까. 하지만 지나치게 걱정을 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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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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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을 열려다 다시 닫는 이서. 명전은 계속 말을 해보라는 제스쳐를 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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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이 네 결정을 뭐 욕한다거나, 비난한다거나 그러려는 건 아닌데… 학폭 문제는 계속 따라다니는 거 아닐까? 지금 이 순간을 넘겨도, 결국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건 아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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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의 말에, 명전은 머리를 다시금 살짝 꼬았다. 명전의 계획대로라면, 학폭 문제는 어떻게든 깔끔하게 해결이 될 예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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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어떻게 해결에 대한 믿음을 주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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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의 머릿속에는 계획과 세부사항이 다 들어가 있지만, 다른 아이들은 그렇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믿음을 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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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하지 마. 올해 안에 내가 해결할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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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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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믿어. 네가, 아니 너희들이 생각하는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테니까. 내가 어떻게든 해결할테니까, 너희들은 신경쓰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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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그 반응에, 이리저리 왔다갔다 하던 표정이 침착해지는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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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상황에서는, 뭐가 어떻고 저떻고 논리적으로 말하기보다는 강한 안심감을 주는 것이 중요한 법이다. 말이 길어지는게 안 좋다는 이야기가 괜히 나왔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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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보다 이 상황에서 연습을 해 봐야, 뭐 그다지 도움도 안 되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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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이유로, 명전은 일단 아이들의 기분을 풀어주는 방법에 대해서 고민해보았다. 기분전환도 하고, 음악에 대해 다시 동기부여를 시킬 수 있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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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를 되돌아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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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땅한 방법이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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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름돋는 현실에 명전은 입 안이 썼다. 그도 그럴 것이, ‘하수연’이라면 모를까 ‘서명전’은 그런 걸 알 리가 없었다. 그는 기분전환을 위해서 선택할 수 있는 게 유흥과 운동 밖에 없는 시대에 산 사람이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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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마땅한 방법이 있지 않을까? 분명 찾아보면 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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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보았다. 아이들이 기분전환도 하고, 다시금 음악에 동기부여를 할 수 있는 방법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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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히 떠오르는 게 없어, 명전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렇다면, 결국 고금동서에 널리 적용되었던 고전의 방법을 사용할 수 밖에 없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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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만. 전화좀 하고 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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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빠르게 전화를 걸었다. 몇번 신호가 간 다음, 들려오는 목소리. 명전은 대답을 하면서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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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일단 바쁘게 해주는 게 답이다. 바쁘면 그런 생각도 못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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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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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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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지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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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례적인 휘석의 인사에, 명전은 잘 지내지 못했다고 대답했다. 휘석은 난감하다는 듯 쓴 웃음을 흘리다, 명전 앞의 의자에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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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잘 해결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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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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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석의 물음. ‘문제’라는 것은, 학교폭력 관련 건을 의미한다. 명전은 경연에서 자진사퇴 결정을 내린 직후, 바로 휘석에게 전화해 ‘메이킹 영상을 공개하면 안 된다’고 이야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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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전혀 납득을 하지 못하던 휘석이었지만 - 어디서 돈 받았냐고 물었었지 - 학교폭력 관련이라고 하니 바로 조용해졌었다. 요즘 워낙 시끄러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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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쪽으로 오지 그래요. 우리가 다 해결해 줄 수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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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이 입을 열려는 찰나, 휘석이 말했다. 자신감 넘치게 말하고 있는 것을 보아, 가능한지 불가능한지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휘석은 그걸 가능하다고 믿고 있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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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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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명전은 그 제안을 거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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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음반제작사, 나아가 기획사를 끼게 되면 일은 수월해진다. 휘석 뿐만 아니라, 다른 회사를 가도 마찬가지겠지. 어떤 식으로든 훌륭히 무마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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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런 일들의 대가는 어떻게 될까? 그냥 우리 기획사에 들어와줘서 고마워요~ 하고 베풀어지는 은혜에 불과할까? 감사하게 받아들이면 될 문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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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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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가 없는 호의는 없다는 것을, 명전은 이전 삶의 경험으로 잘 알았다. 학폭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회사에 들어가면 어떻게 될까? 노예계약으로 묶일 수도 있고, 심지어 문제 해결을 도와주겠다고 해 놓고는 해결은 커녕 그냥 투어 뺑뺑이만 돌리다가 방치당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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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에 명전은, 이 문제가 해결되기 전까지는 기획사라든지 음반사라든지를 찾아갈 생각이 전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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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이렇게 보자고 한 거는, 진짜 그 건 때문인가? 주현 콘서트 세션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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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맞습니다. 고려해주셨으면 좋겠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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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석은 골치아프다는 듯 머리를 긁었다. 아무튼 이전의 문제는, 이사의 말도 있고 해서 어떻게든 해결이 됐다. 하지만 이 아이들이 콘서트 세션을 선다? 그건 좀 다른 문제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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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휘석은 얼마 전 이사가 그에게 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걔들은 진짜 잡기만 하면 대박나는 애들이야. 무조건 잡아! 호의를 베풀어! 우리 없으면 아쉽게 만들어!” 였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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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휘석도 그 이야기에는 어느정도 동의하는 편이었다. 여고생 4명 밴드에, 실력까지 있다? 이건 실패하는 게 오히려 힘든 수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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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건 휘석 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전부 아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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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휘석이 “그룹 사운드라는 애들 연락처 알아?” 라고 넌지시 질문을 들은 적만 해도 몇번인가. 음반제작사나 연예기획사들이 ‘미소녀 밴드’와의 계약을 위해서 발에 땀이 나게 뛰고 있다는 것은, 이제는 모르는 사람이 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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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아직까지는 우리 쪽에 우선권이 있긴 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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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락처를 찾아 헤매는 다른 회사들과 달리, 휘석의 회사 [엔트라인]은 리더 하수연과의 끈이 이어져있는 상태. 그 탓에 이런저런 이야기도 나누며 계속 어필을 할 수 있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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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이 애들이, 정확하게 말하면 ‘하수연’이 휘석의 회사인 [엔트라인]에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다는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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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어쩌겠어. 이사가 웬만한 요구는 그냥 들어주라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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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석은 뭔가 더 해볼까 하다, 그냥 관뒀다. 뭐 윗 사람이 시키는 대로 해야지. 어쩌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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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님하고 이야기해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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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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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이네요. 잘 지내셨어요 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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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본 주현과 아이들이 인사하는 사이, 명전은 주현 측 직원과 인사를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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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건은 좀 있다가 설명드리겠지만… 저희 팀장님이 말씀하신 그대로에요. 원래 주현 씨가 콘서트때 세션을 쓰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이사님이 갑자기 지시를 하셔서, 일단 들어나 보자는 이야기가 됐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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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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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원은 약간 못마땅한 기색으로 이야기를 계속했다. 콘서트 팀, 음향 팀에서 네거티브 - 본인 표현이었다! - 한 이야기가 나오면 바로 리젝. 두 팀에서 다 마음에 든다고 해도 가수가 영 아니라고 하면 리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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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뭔가 건덕지가 생기면 다 리젝이라는 거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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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석은 분명 이쪽 회사랑 이야기가 되었다고 이야기를 했었다. 건너건너 들은 이사의 이야기 또한 마찬가지였고. 하지만 현장의 판단은 다르다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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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당연한 일이라고 명전은 생각했다. 이 ‘주현’이라는 남성 가수는 꽤나 이름이 있는 모양이었으니까. 회사가 명령하면 아 네! 알겠습니다! 이러면서 제깍제깍 따르는 사람들은 신인밖에 없다. 어느정도 머리가 굵어지면 말을 안 듣는 게 당연한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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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조건은 여기까지구요. 만약 세션 테스트를 받아들이실거라면 아까 알려드린 날짜까지 답변 말해주시고, 곡 준비해오시면 됩니다. 악보라던가 뭐 그런 건 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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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말에, 생각에 잠긴 듯 보이는 4명의 여고생. 그녀는 속으로 한숨을 푹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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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지, 하여튼 이사고 사장이고 뭐 간부진이라는 놈들이 도대체가 도움이 안 돼. 콘서트 준비하기도 바쁜데, 난데없이 전화 걸어와서 “주현 콘서트에 세션 써 줘야 할 것 같은데 가능한가? 검토 좀 해봐.” 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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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MR이 아니라 밴드로 라이브를 하면 사운드가 전반적으로 더 생동감있게 나온다는 것은, 그녀도 잘 아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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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여고생 4명으로 이루어진 밴드가 주현의 세션을 서면, 화제가 될 것이 분명하다는 것 또한 그녀도 잘 아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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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콘서트가 누구의 콘서트인가. ‘주현’의 콘서트 아닌가. 왜 자꾸 곁다리에 집중을 하고 있냐고. 가수 본인은 그냥저냥 지원 해주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왜 이상한 걸로 자꾸 뽑아먹으려고 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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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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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답은 이메일로 주세요. 일이잖아요. 문서로 남겨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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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로 보이는 아이의 대답에,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퉁명스러운 대답을 했다. 옆에서 그녀를 툭 치는 주현의 행동에 정신을 살짝 차린 직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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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어쩔 수 없는 거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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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애들이 잘못한 게 없다는 건 그녀도 알았다. 하지만 미운 걸 어떻게 하는가. 저 애들은 그냥 제안을 했을 뿐이겠지. 하지만 저 애들의 제안이 없었다면 이런 시간낭비 또한 없었을 텐데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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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 SNS와 유튜브 채널, ‘White Room’ 유튜브 채널까지. ‘Group Sound’가 가진 소통창구는 꽤나 많은 편이었다. White Room 채널을 제외하면 딱히 업데이트가 되지 않는다는 점을 제외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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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위터(X라고 부르긴 좀 그랬다)는 개설 이후 트윗 몇개만 올리고 끝. 공식 유튜브 채널은 개설만 되어 있다. 하수연의 개인 채널인 White Room은 그룹 사운드 관련 컨텐츠는 전혀 올라오지 않는 채널이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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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애들은 홍보를 할 생각이 없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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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윤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녀가 몇달동안 공연을 다니면서 본 밴드들은 공연이 끝난 후 홍보나, 관객과 친목질을 하는 식으로 밴드에 대한 어필을 계속 하는 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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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 비하면 그룹 사운드는, 공연 자체는 자주 하지만… 끝난 후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하고 싸인 몇번 해주고 사진 좀 찍은 다음 가버리는, 홍보 같은 거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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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를 그룹 사운드의 팬 1호로 정의하는 정아윤으로써는 도저히 참고 넘길 수 없는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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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아윤은 행동했다. ‘Group Sound Social Club’이라는 트위터를 만들고, ‘그룹 사운드 비공식 팬클럽’이라는 이름을 걸고. 카페도 만들어 이것저것 올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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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활동을 계속 하다보니 어느새 사람들도 꽤 모인 상황이… 바로 지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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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드 파이오니어 상황 어떻게 되었는지 아시는 분 계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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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경연 너무 잘 나와서 홍보 돌리고 투표하러 갔더니 투표 목록에 그룹 사운드가 없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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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된건지 잘 모르겠는데 설명해주실분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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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최한테 문의해보니까 사퇴했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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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헐?? 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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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개인사정이라고만 함 ㅠㅠ 안 알려주려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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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Top 6 온라인 경연 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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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놓고 말해서 다른 밴드랑 우리 밴드랑 엄청 차이나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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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진사퇴 안했으면 거의 무조건 우승 각이던데 왜 자진사퇴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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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게요 무슨 이유로 사퇴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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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밴드에 물어보신 분 없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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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SNS는 원래 잘 안하고 개인 채널도 최근 업로드/라이브 없고 공연도 담주에나 할 예정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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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헉 무슨 일 생긴 거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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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의전화 제가 걸어서 심사위원분이랑 통화까지 해봤는데 개인사정이라고 알려줄 수가 없다네요; 밴드 쪽에서 밝히질 않기를 원했다고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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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카페에 올라오는 게시물들은 대다수가 ‘상황을 알 수 없어서 답답하다’ 라는 글이었다. ‘카페장님은 혹시 모르시나요?’ 같은 글도 있었지만, 아윤이 알고 있었다면 알려줬지 그냥 자기 혼자 알고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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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윤은 답답한 마음에 관련 영상이나 몇개 찾아보았다. 혹시 리플에 뭔가 적혀있지 않을까 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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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유튜브 영상을 뒤지던 와중 목격한 리플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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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승고 하수연 종로구에서 유명한 학폭러였음 ㅋㅋ 아마 그거때문에 사퇴한거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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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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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윤은 리더 하수연의 얼굴을 떠올렸다. 설마 그 애가 학폭? 얼굴이 이쁘긴 하지만 화장도 안 하고 다니는 애인데. 분위기로만 따지면 학폭은 하수연보다는 베이스인 최이서 쪽이 더 어울렸다. 화장도 화려하고, 덩치도 크고. 그런 느낌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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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가설 자체는 충분히 신빙성이 있다고 아윤은 생각했다. 물론 믿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가 최초로 잡은 최애그룹이 학폭밴드라니 이 무슨 미친 소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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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생각으로 인터넷을 뒤져본 결과는 좀 참담했다. 최소한 지금은 몰라도 과거에는 ‘좀 놀았다’ 라는게 느껴지는 글들이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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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지금은 별 문제 없을 수도 있는 거 아냐? 개과천선 했을 수도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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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그럴 가능성은 이제까지의 학폭 사례를 보면 상당히 희박했지만, 아윤은 넘치는 애정으로 그런 사례들을 다 무시하며 인터넷을 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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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정신을 차려보니 한승고 앞. 세상에서 제일 기 센 나이의 청소년들에게 쭈글쭈글해져가며 이리저리 말을 붙여보던 와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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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이는 왜 찾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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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난 사람은, 자신을 ‘박다인’이라고 칭하는 아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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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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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쉬는 동안 이야기 좀 하자. 모여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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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의 말에, 이서와 아이들은 옹기종기 테이블에 앉았다. 그러나 수연은 가방 쪽으로 가서 뭔가 주섬주섬하더니 에그타르트와 디저트 몇개를 꺼내와 늘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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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이거 뭐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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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들 먹으라고 사 왔어. 무슨 유명한 카페라던데 줄이 너무 길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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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당히 먹음직스러운 디저트들이 놓여 이서는 입맛을 다셨다. 하지만 수연 앞에는 놓여 있지 않은 디저트. 이서는 수연에게 먹으라고 과자를 들이밀었지만, 수연은 손을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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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들 많이 먹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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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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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나는 진짜 괜찮아. 그리고 일단 먹으면서 들어. 대충 기한 안에 연습 자체는 충분히 다 될 것 같거든. 애초에 보컬 위주 곡이고, 연주에 초점을 둔 그런 곡들이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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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뭐 어려운 곡은 없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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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는 에그타르트를 우물거리면서 생각했다. 주현이라고 하면, 그래도 대 사재기 시대인 지금에도… 멜론 상위권에 자기 신곡을 올려놓을 수 있는 체급의 발라드 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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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만큼 뭔가 곡도 엄청 어렵거나 숙달하기 힘들 것이라는 편견이 있었는데, 전혀 달랐다. 모든 요소가 철저하게 보컬을 보조하게 만들어진 그런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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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과음이라던지 뭐 그런 것들이 많아서 일반 밴드라면 조금 어렵겠지만, 우리는 키보드가 있으니까 충분히 가능해. 현아가 수고해주면 좋겠고… 편곡을 더 해 보고, 안 되는 부분은 다른 세션 멤버 불러서 해결하는 수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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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이걸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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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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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의 질문에 수연은 머리를 살짝 꼬았다.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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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평범하게 생각하면, 이대로 계속 연습하면 될 일이지만. 그 쪽에서 이야기를 하는 뉘앙스 같은 걸 보면, 이걸로는 분명 부족하다고 하면서 우리를 세션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 같단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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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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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우리한테 말하던 표정이라던가, 뭐 그 외에 이것저것… 들어보면 일이 늘어나서 귀찮은 게 아니라, 우리가 끼어든 거 자체를 안 좋아하는 것 같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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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는 수연의 걱정이 살짝 과한 것 아닐까 생각했다. 설마 그렇게까지? 하지만 또 생각해보면, 마지막에 “문서로 남겨야죠.” 같이 막 훈계하던 것도 그렇고, 진짜 그런 의도였나 싶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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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어떻게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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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일의 발단이 우리가 이번 OST 재즈 세션 서주는 게 어떨까? 시작된 거거든. 콘서트에서 세션을 서 주면 어떨까에서, 전체 세션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같은 느낌으로. 근데 실무측에서 영 안좋아한단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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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가. 이서는 살짝 눈을 돌려 고민하고 있는 수연의 얼굴을 보았다. 그쪽에서 요청을 해 온게 아니었단 건가. 수연이가 직접 발로 뛰어서 따온 일이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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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뭉클해지는 느낌이었다. 수연이는 학교폭력이라는 누명, 아니 누명은 아닌가… 아무튼 당사자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위해서 이런 건수까지 가져왔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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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아무 생각 없이, 이전의 실패에 축 처져서… 의욕 없이 악기를 치며 ‘일 들어왔으면 그냥 해야지’ 하는 생각이나 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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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생각을 한 후, 이서는 일단 아무말이나 던져보기로 했다. 살짝 가라앉은 분위기를 띄우고, 밴드의 의욕을 다시 되살리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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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나 생각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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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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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뭐, 구체적인 건 아닌데… 우리가 단순하게 세션을 서 주는 걸 넘어서… 저쪽에서 얘들이랑 일하면 무조건 대박난다. 뭐 그런 생각을 심어주면 어떨까? 얘들 아니면 이거 해줄 사람 없다, 그런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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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그렇게 깊은 고민 없이 뱉은 말이었다. 막연히 그냥, 아무나 할 수 있는 이야기. 하지만 그 이야기에 수연은 뭔가 힌트를 얻은 듯 살짝 생각에 잠겼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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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를 한번 바꿔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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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살짝 읇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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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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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님. 그 애들 세션으로 쓸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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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이사님의 이야기도 있었으니 써야 되지 않을까요. 밴드 사운드는 한번쯤 써보고 싶기도 했고, 모든 콘서트를 다 쓰라는 것도 아니고 그냥 서울콘에만 쓰면 된다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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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의 말에, 살짝 표정이 굳어지는 직원. 주현은 대답 대신 씩 웃고는 직원에게 가서 일 보라고 이야기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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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곤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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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직원 또한 주현과 오래 일한 사람이었다. 정확히는, 주현과 일하는 사람은 대부분이 오년 이상 같이 일해온 사람들이었다. 그런 만큼 일처리도 빠르고 깔끔했으며, 콘서트라던지 앨범이라던지 그런 일들이 대부분 주현에 딱 맞게 이루어지는 면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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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런 만큼 너무 고여있다는 느낌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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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일도 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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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자신들의 업무 루틴이 깨지니 부정적일 수 밖에 없긴 하겠지. 몇년 동안 잘 유지된, 스케줄이 딱딱 들어맞던 업무가 갑자기 들어온 애들 때문에 일그러진다고 생각하면 주현도 좀 불쾌감이 들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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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스태프들은 그 불쾌감 이상으로 그 밴드 아이들을 배척하고 있었다. “실력이 없을 것 같은데.” 라거나 “요즘 밴드 쓰는 콘서트가 어딨어? 그냥 흘러간 유행이지….” 같은 말을 일부러 주현에게 흘리곤 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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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고이긴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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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은 회사 내에서 자신의 팀이 받고 있는 평판을 떠올렸다. 자기들끼리는 잘 놀지만 신입은 절대 적응 못하는 팀이라던가.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처음에는 이해를 못 했는데… 이번 일을 보고 나서는 좀 알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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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쪽으로 가시면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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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생각에 잠겨 있는 와중, 반대편 복도에서 들려오는 퉁명스러운 목소리. 그리고 타박타박거리는 발소리들. 밴드를 하는 아이들이 도착한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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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 정말 좋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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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은 저 애들에게서 받았던 OST 곡, [만남이 끝나기 전에]를 떠올렸다. 쫀득쫀득하고 간질간질하면서도 살짝 긴장감이 느껴지는 재즈풍 밴드 곡. 매일 발라드만 불렀던 주현에게 꽤나 신선한 자극이 되어주었던 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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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곡 외에는 이전의 곡들과 다 똑같겠지. 애초에 세션 밴드를 서는 입장으로 온 애들이니까. 그는 약한 아쉬움을 느끼며 연습실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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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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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 연주가 끝나고, 아주 미약한 박수가 살짝 들려왔다. 주현은 ‘아이고…’ 라는 생각을 하며, 박수를 크게 쳐주었다. 그러자 따라서 들어오는 박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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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요. 잘 했어요. 확실히 밴드곡이다보니까 이게 그냥 MR이랑 느낌이 다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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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보니 지금 우리 콘서트 환경에 안 맞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밴드 여러분들이 열심히 하신 건 알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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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이 칭찬의 의도로 꺼낸 말을, 갑자기 가로채서 이상한 방향으로 돌려버리는 무대 담당. 그 말을 받아, 몇명의 직원들이 서로 “아 좀 아닌 것 같아.” 라던지 “굳이 이거 바꿀 필요 있어? 이전이 나은 것 같은데.” 같은 이야기를 주현이 들을 수 있는 음량으로 해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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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좀 긍정적인 방향으로 생각을 해 보자고요. 계속 MR만 하니까. 밴드로 바꾸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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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환경이 그렇지 않아요, 주현님. 지금 저희는 MR 최적화 환경이고. 밴드 들어온다 하면 세팅부터 다 바뀌는데, 그렇다고 해서 막 좋아질 것 같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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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하기 싫은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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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뭔가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냥 일을 늘리고 싶지 않아하는? 기존에서 굳이 더 잘할 필요 있나? 같은 의도가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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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그의 콘서트 팀은 매년 업무를 개선해나가고 있었다. 영상이라던지 무대효과라던지 많은 부분에서. 하지만 그것은 그들이 원한 방향으로써의 발전일 뿐. 이 사람들에게 밴드는 그들이 안주하고 있는 환경 자체를 바꿔버리는 그런 느낌인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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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은 한숨을 쉬었다. 이렇게까지 반대를 하는데, 주현이 뭐라 밀어붙일 명분은 없다. 물론 공연이나 기타 이런저런 것에 있어 결정권은 가수에게 있긴 하다. 그러나 주현에게는, 스태프들을 다 척져가면서까지 저 밴드 아이들의 손을 들어줄 이유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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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이사님한텐 그냥 혼나지. 어차피 내가 주력 상품인데, 혼내도 얼마나 혼내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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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생각을 하며 미안하다고 입을 열려던 주현은, 동작 하나에 입이 막혔다. 절묘한 타이밍에 올려진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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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곡만 들어주시고, 그 다음 결정하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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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은 그렇게 말하고는, 옆에 세워놓은 다른 기타를 잡고 튕기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들은 멜로디지만, 확연히 다른 연주. 주현이 주력으로 삼는 멜로딕하고 글루미한 발라드보다 훨씬 더 내려가는 느낌의, 구슬픈 연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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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은 블루스에 익숙하지 않다. ‘부루쓰’ 에는 익숙할지는 몰라도. 반대로 블루스를 해보려고 하는 사람들은 많긴 하지만, 소득을 얻은 사람은 몇명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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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스 애호가들 중 누구도 그 이유를 알지는 못했다. 당연하다. 그걸 알 수 있다면 음악의 신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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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것이 블루스 곡이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은 아니다. 대세 장르가 되지 못하는 것일 뿐이지, 곡 하나쯤은 성공할 수 있다. 오히려 메인스트림에는 없는 생소함을 줌으로써, 성공 정도가 아니라 대박을 터트릴 수도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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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상황이 딱 그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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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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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은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분명 주현이 듣고 있는 곡은, 주현의 대표곡인 [어느 그늘진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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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초에 잠시 유행했던, 락발라드 붐 때 살짝 재해석을 섞어 불렀던 노래다. 적당히 고음이라 남자들이 노래방에서 도전하기도 좋고, 이지리스닝을 추구한 곡이기에 들었을 때 한번쯤 ‘아 다시 들어볼까?’ 할 수 있도록 만든 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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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멜로디와 가사는 분명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들려오는 사운드는 너무나도 생소하다. 보통의 락발라드에서 나오는 살짝 슬픈 느낌의 사운드보다 훨씬 내려간. 리듬도 약간 다른 것 같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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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그늘진 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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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너를 만나러 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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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보컬을 전면에 내세웠던 주현의 오리지널 곡과는 다르게 기타가 전면에 들어갔다는 것. 가이드 보컬임에도 불구하고 훨씬 더 힘을 빼고 부르는… 보컬을 마치 악기 취급하는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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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그늘진 날 맞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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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좋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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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톤 미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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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이 팔짱을 끼고 가만히 듣고 있는 동안스태프들 사이에서 조금씩 그런 혼잣말이 들려온다. 하지만 혼잣말을 한 사람들은, 주현이 딱 봐도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노골적인 주위의 시선을 받고 침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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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는 사이 곡은 클라이막스로 치닫는다. 그리고 터져나오는 보컬과 함께, 이내 그 보컬을 잊게 만드는 압도적인 기타 사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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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하게 기타를 연주하는 것만 들어보자는 이유로 가져온 펜더 럼블 25W 앰프가 찢어지는듯한 굉음을 내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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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리 무어의 노래에서 따온게 분명한 듯한 톤. 분명 소녀가 들고 있는 기타는 스트라토캐스터임에도 불구하고, 레스폴의 중후함을 그대로 재현한 것 같은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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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으로도 모자라, 소녀는 왼손을 마치 숙련된 기타리스트마냥 끊임없이 흔들고 오른손을 자유자재로 움직이며 멜로디를 요동치게 만들고 있다. 그야말로 8~90년대, 팝이 살짝 섞인 블루스 락의 표본이라고 할만한 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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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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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참지 못하고 터져나온 주현의 작은 탄성. 소리는 작았으나 주위 스태프들을 다 집중시키기에는 충분한 음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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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연주의 끝에 소녀는 짧게 피크를 끊어쳐… 소리를 정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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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이정도로 편곡을 좀 해 봤는데요. 콘서트 팬서비스 용으로 좀 어떠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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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보다는 살짝 큰 박수소리는 다시 쏙 들어간다. 주현은 그런 상황을 한심하다는 눈으로 쳐다본 후 다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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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곡을 그쪽 밴드에서 한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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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크게 뭔가 한 건 아니구요. 밴드 사운드로 바꾸고, 리듬은 블루지하게. 기타를 좀 전면으로 내세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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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뜻 듣기에는 겸손해보이는 말. 하지만 주현은 수연의 표정에서, ‘너는 이걸 좋아할 수 밖에 없다’ 라는듯한 자신감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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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실제로도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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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곡 자체로도 주현은 부족함을 느끼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것 있지 않은가. 똑같은 음량으로 계속 음악을 듣다 보면, 언제부터인가 ‘뭔가 소리가 좀 작지 않나?’ 라고 느끼게 되는 것. 그래서 음량을 더 올리게 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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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주현이 느끼는 것도 그랬다. ‘여기서 좀 더 뭔가 나가고 싶은데…’ 라는 생각 자체는 매번 하고 있었다. 하지만 곡을 손대기엔 또 그래서 매번 그냥 ‘아니 뭐, 그냥 똑같은 곡 부르자.’ 하고 콘서트 때 재해석만 어느정도 하는 수준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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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곡은, 완전히 맛을 틀어버린 것도 아니면서… 기존의 곡에 살짝 질린 주현의 입맛을 충족시켜주는 절묘한 곡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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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문제는 이런 곡 조차 스태프들이 반대하고 있다는 거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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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만 따로 사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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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은 우선 그런 생각부터 했다. 저 애들은 내보내고 곡만 산다? 그런데 누가 그렇게 하겠는가. 미친 사람이 아닌 이상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곡을 인질로 잡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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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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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스태프들을 쓱 둘러보았다. 영 못마땅한 표정이 3할, 나머지는 별 생각 없거나 저 애로 했으면 좋겠다는 느낌의 표정. 주현은 내적으로 한숨을 푹 쉬고는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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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상당히 마음에 들거든요. 다른 연주도 괜찮았고, 이번 편곡도 그렇고. 혹시 세션을 하는 걸로 되면, 다른 곡들도 편곡하실 마음이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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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그래야 할 필요성이 있거나, 그럴만한 사유가 있다면 하겠죠. 곡이 좋다거나, 이런 쪽으로 해보면 어떨까 한다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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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감이 넘치다 못해 살짝 오만한듯한 대답. 하지만 처음이었다면 모를까, 이제는 주현도 저 애들이 저럴만한 애들인 것을 안다. 기타는 물론이고, 베이스니 키보드니 드럼이니 전부 다 락에는 문외한인 주현이 듣기에도 꽤나 실력이 있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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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그냥 곡을 판매하시는 건 어떤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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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자, 스태프 중 하나가 급했는지 살짝 더듬으며 말했다. 주현이 최초에 했던 생각. 그리고 그 말에 대한 대답은 주현이 예상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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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매하고 싶지는 않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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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대답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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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참에 우리 팀도 약간 인적쇄신 같은 걸 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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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은 이리저리 고민하다, 그런 생각이 도달했다. 이미 저 애들을 쓰지 않는다는 선택지는 그의 머릿속에서 사라진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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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 수 없지 않은가. 실력적으로도 충분하고, 매력적인 편곡조차 해 온 상태. 이걸 거절할 이유는 없음에도 불구하고, 스태프 중 일부는 아직까지도 불만에 가득 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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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할 수 있는 수준의 밴드라면 모르겠다. 하지만 귀가 있다면 들어봐서 알 것 아닌가. 충분히 훌륭한 상태인데, 이 밴드를 쫒아낸다면 이사에게 무슨 소리를 들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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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야겠다. 최근에 우리 팀이 너무 고이기도 했고, 살짝 새 출발한다는 느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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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은 그렇게 생각했다. 결코 이 밴드를 선택해야 하기 때문에 그러는 것은 아니다. 인적 쇄신을 하는 김에, 이 밴드를 빌미로 삼는 것이다… 적어도 그는 그렇게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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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에, 그는 그의 행동에 확신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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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 밴드를 세션으로 쓰기로 결정했습니다. 혹시 이의 있으신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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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에 번쩍 올라간 손 몇개와, 주저주저하다 살짝 가라앉는 손들. 주현은 그 손들을 바라보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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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손 드신 분들은, 이따가 저랑 면담 좀 하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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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늘하게 내뱉어진 주현의 말. 불과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나마 유지되던 분위기가, 그 말 한마디에 와르르 추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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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게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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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런 말까지는 안 하려고 했는데. 죄송하지만 스태프분들, 도대체 지금 이 팀이 누구 팀인가요? 스태프 여러분들을 위한 팀? 아니면 저를 위한 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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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거리는 듯한 목소리가 주현의 목에서 튀어나간다. 그 목소리는 조금 높아지려다가, 부외자가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다시 낮아진다. 그의 눈짓에 따라 스태프 한명이 밴드 아이들을 데리고 나가고, 장비는 허겁지겁 치워지고, 나머지는 집을 어질러놓고 처벌을 기다리는 강아지마냥 가만히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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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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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커피를 쭉 빨았다. 뭔가 이상하게 요즘은 단 커피가 좀 땡기는 기분. 예전에는 달다고 해 봐야 카페 라떼에 평상시에는 아메리카노였는데. 최근에는 이서가 시키는 무슨 왱알앵알프라뭐시기 이런 거도 꽤나 잘 마시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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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왠지 그런 것도 지나치게 안 달단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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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한국인이었기 때문에, ‘너무 안 단 디저트가 최고의 디저트다’ 라는 원칙을 고수하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이서가 먹는 류의 음료는 그냥 설탕 범벅이었는데. 요 몇달 새에는 뭔가 쭉쭉 넘어가는… 체질이 바뀌어서 그런 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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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회사에서 다른 이야기는 없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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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이야기를 하긴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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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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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네 회사에 소속될 생각 없냐고. 작곡가가 그랬거든. 전담 작곡가 및 밴드로 들어오시면 대우 무조건 해 주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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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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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내가 이야기했지. 그 박휘석인가 하는 분도 그 이야기 하셨는데, 안 하기로 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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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동안 편곡을 하면서 인터넷을 뒤진 결과, 명전은 [엔트라인]이 꽤나 큰 회사라는 것을 알아낼 수 있었다. 회사의 메인 상품이 되는 아이돌 한명과, 주력 상품이 되는 주현과 다른 가수 몇몇. 그리고 소규모 남돌 여돌 각각 한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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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칭해지는 3대 기획사라거나 그 밑의 뭐 탄탄한 중견 기획사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그 밑은 되는? 3티어? 3티어라고 하면 뭔가 좀 없어보이는데, 그래도 이름은 들어본 가수들이 많은 그런 소속사. 명전의 첫 인상보다는 훨씬 크다는 느낌이었지만… 글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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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사가 아니면, 레이블은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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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는 핸드폰을 보며 화장을 살짝 다듬다가, 거기에서 눈을 돌려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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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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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드는 기획사보다 레이블 같은 데에 소속되지 않아? 나는 그렇게 아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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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긴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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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블인가. 글쎄, 레이블도 음… 굳이 필요성이 있나. 국내 인디 레이블도 꽤나 성장하긴 했지만, 명전은 그런 쪽을 바라보지는 않았다. 그런 곳에 소속될 바에는 그냥 따로 활동하는 것이 낫다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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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유명 레이블이라면 생각해볼만 하지. 예를 들어서 뭐 EMI라던지, 콜럼비아라던지, 하베스트, 캐피톨 같은 초 거대 레이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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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블은 관심 없긴 한데… 음, 생각해보면 EP나 싱글 같은 것도 슬 내봐야 할 시점이네. 그런 쪽은 매니지 끼는 게 낫긴 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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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범 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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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범이 아니고 EP, 싱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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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그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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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혀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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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그거 아냐? 라는 표정을 하고 있는 이서를 보고, 명전은 한숨을 푹 쉬었다. 이 가련한 중생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렇게 고개를 젖히고 있던 명전의 시야 사이로, 어디서 많이 봤던 여고생 두명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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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됐다. 연습이나 들어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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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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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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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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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를 데리고 연습실에 들어서니 들려오는, 이전과는 다른 스태프들의 인사 소리. 살짝 훑어보니 인적 구성이 꽤나 바뀐 느낌이었다. 이전에 봤던 꼬장부리는 사람들은 몇명 없어지고 그 대신 다른 사람들이 몇명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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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세션이 몇명 더해진 구성. 우리 밴드만 붙어서 하는 것도 ‘가능은’ 하지만, 그러면 사운드가 비어있다고 보일 수도 있기 때문에… 명전의 판단에 의해 추가된 세션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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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잘 모르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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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애들도 있고, 늙은 양반도 있다. 공통점은 딱히 유명한 세션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 밴드의 보조로 들어가기 때문일까, 아니면 이런 쪽에는 익숙하지 않아 일어난 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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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저희가 밴드를 써서 하는 무대는 이게 처음이다보니까… 리허설이 안 익숙할 수 있어요. 그래서 어, 그 리더? 세션 리더분을 뽑아야 할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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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드 마스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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굵직한 목소리가 세션 기타 쪽에서 들려온다. 살짝 덩치가 있는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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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뭐, 밴드 마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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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원래 이런 건 경력이나 실력으로 뽑는 거라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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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말하면서, 주위를 훑어보는 세션 기타. 아무런 의미가 담겨있지 않은 동작이라기에는, 너무나도 의도가 명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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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기타의 몸짓에, 그저 명전은… ‘경력이든 실력이든 뭘로든 밴드 마스터는 무조건 내가 될 수 밖에 없지 않나?’ 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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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의 덩치는 크다. 검정색 티셔츠에는 어느 밴드인지 모를 밴드의 로고. 목에는 금목걸이가 걸려 있고, 팔은 온통 문신 투성이. 머리는 빡빡 깎았고, 스크래치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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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차별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외형에서부터 뭔가 느껴지는 게 있다. 딱 봐도 뭔가 성격이 느껴지는 사람 있지 않은가. 괜히 목소리 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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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드 마스터를 한다고 해서 뭐 수당 같은 것을 주는 것도 아닌데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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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장 차기 좋아하는 사람인가? 명전은 그렇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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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드 마스터란, 세션 밴드를 총괄하는 자리다. 진행도 하고, 가수가 알 수 없는 부분을 캐치해서 알려주기도 하고. 곡에 따라 편곡을 하기도 하고, 가수의 피드백에 따라 세션들의 조정을 거치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경력도 필요하고, 실력도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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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단지 그것 뿐이다. 뭐 득이 되는 건 없다. 귀찮은 일만 가득할 뿐인 자리다. 아, 물론 어느 콘서트의 밴드 마스터 했다 이러면 좀 세션 경력상 플러스가 되는 부분이 있긴 하지만. 딱 그정도에 불과한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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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아 나는 밴드 마스터 안 할래~’ 라고 손을 놔버릴 수도 없다. 잘하는 밴드 마스터가 들어오면 티가 안 나지만, 못하는 밴드 마스터가 들어오면 확 티가 나는 자리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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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력과 실력을 논했던 남자의 말 이후로, 딱히 대답이 없던 사람들. 태경은 불안한 심정으로 세션들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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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미동도 없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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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해주면 안 되나? 저 사람 왠지 성격 안 좋을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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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길가다 보이는 사람이라면 별 문제 없다. 하지만 태경은 세션 밴드와 소통을 담당하는 스태프로서, 그래도 성격이 좀 괜찮은 밴드 마스터와 일을 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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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하면 주현의 팀에는 ‘세션 밴드 담당’이라는 업무가 이제까지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누군가한테 물어볼 수도 없고, 저 사람이 어처구니 없는 요구를 해도 그게 맞는지 아닌지 알 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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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이의 없으시면 제가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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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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굵직한 남자의 목소리에 답하며 올라온 손. 태경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손의 주인이 누구인지 바로 찾아보았다. 메인 세션 밴드의 리더, 하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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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드 마스터는 아무래도 총괄직이니까. 메인 세션 밴드인 저희 쪽에서 맡아야 할 것 같은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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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인 세션 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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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그런 게 있었나… 하는 눈치로 태경을 쳐다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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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하더라도. 어찌됐든 저희가 밴드 여러분 요구대로 다 따라가야 하는 것은 아니잖아요. 아무래도 경력도 짧아보이신 것 같은데. 세션적인 부분을… 음, 혹시 좀, 아시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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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가 세션을 알기나 하냐?’ 같은 느낌의 질문. 하지만 수연은 침착하게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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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력적인 부분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짧기는 하죠. 하지만 실력이라거나, 뭐 지식이라던가. 그런 쪽에서 딱히 모자라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데요. 세션 일도 잘 알고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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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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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참으로 가당찮다는 느낌으로 반문했다. 보통 저 나이 정도 되면 저렇게 거칠게 반응하지는 않는데. 근데 태경이 듣기에도 말이 안 되는 부분이긴 했다. 주로 물리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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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고등학교 2학년이 지식도 좋고 실력도 좋은데 세션 일도 잘 알겠는가? 주현 팀에 세션 밴드가 안 들어온 거지 태경이 세션들과 소통하는 일을 안 해본 게 아니었기에, 태경은 저게 말이 안 되는 소리라는 걸 잘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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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런 걸로 무시하긴 좀 그런데. 어리시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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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경은 ‘그게 말이 되나요?’ 라는 말이 뒤에 생략되어 있다고 생각했으며, 현장의 스태프와 나머지 세션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기싸움처럼 보이는 현장에 돌아가는 고개들. 하지만 수연은 씨익 웃으며 이야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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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중요한가요? 실력이 중요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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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력 이야기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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왠지 모르게 무시당했다고 생각하는지, 목소리 톤이 낮아지는 세션. 수연은 살짝 웃고 있었고, 다른 사람들은 이게 무슨 일인지 하는 심정으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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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잘 칩니까? 나도 어디가서 기타 못 친다는 소리 듣는 사람은 아닌데. 좀 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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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뭐, 밴드 마스터가 기타 잘 친다고 되는 일은 아니잖아요. 편곡도 하고, 뭐 소통도 하고. 그런 점에서 메인 밴드 리더인 제가 맡는 게 편하긴 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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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션 기타의 더 낮아진 목소리에, 수연은 뭔가 이상하게 돌아가는 상황을 수습하기 위함인지 말을 살짝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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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잘 치시냐구요. 밴드 리더시면 잘 치시겠네. 어느정도 치십니까? 이 정도는 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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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태경이 보기에는, 세션 기타는 이미 살짝 흥분한 상태 같았다. 왜 저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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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애한테 무시당한다고 느껴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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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수도 있겠다고 태경은 생각했다. 딱 봐도 경력이고 뭐고 자기보다 못 해보이는데, 메인 밴드 리더니 실력도 지식도 너보다 좋으니… 그런 말을 들으니 열이 뻗치는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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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는 사이, 세션 기타는 뭔가 앰프에 줄을 연결하고 속주를 보여주었다. 그리고는 뭔가 빠르게 튕겨내는 줄. 상당히 빠른 속주에, 스태프들은 오~ 하는 목소리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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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수연은 헛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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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주로 기타 실력이 평가가 되나요? 세션 어느정도 하셨으면, 그런 걸로는 전혀 안 된다는 거 아실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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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정도는 치냐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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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뭐, 음… 허허. 뭐 그 정도는 평범하게 칠 줄 아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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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자포자기로 대답했다. 이 사람은 도대체 왜 이러는 건지. 속주로 알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무슨 캐논락 치던 시절 어린 애들도 아니고, 딱 봐도 40대는 되어 보이는데 왜 그런 허상에 집착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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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말이 길어지지 않고 그냥 ‘실력’으로 평가하자는 이야기는 좋다. 복잡하지 않고 편하니까. 설득의 과정을 거칠 필요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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앰프에 줄을 꽂고, 살짝 노브를 만진다. 이 앰프로 완벽하게는 만들어낼 수 없으나 어느정도는 재현이 가능하다. 싱글 코일로 낼 수 있는 헤비한, 하지만 스트랫의 색깔은 지우지 않는 정도로 톤을 정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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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 발을 몇번 구르고는… 명전은 기타를 치기 시작했다. 명전이 손을 풀 때 가끔 연주하곤 하는 곡 중 하나인, 잉베이 말름스틴(Yngwie Malmsteen)의 Far Beyond The Sun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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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는 세션 기타의 표정을 쳐다보았다. 처음에는 가소롭다는 듯 쳐다보다가, 조금 있다가는 믿을 수 없다는 듯 표정이 일그러지다, 나중에는 표정 자체가 아예 멍하게 변해버리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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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거나 말거나 수연의 연주는 계속해서 이어진다. 세션 기타는 약 30초 정도의 연주를 보여주었지만, 수연은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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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는 모르겠지만, 뭔가 약간 클래식한 느낌도 나는 메탈 속주곡을 거의 5분 정도 연주하고 있다. 주위 사람들은 연주를 말리기는 커녕 연주에 푹 빠져 있는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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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도면 됐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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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음을 끝내고, 수연은 기타에게 되물었다. 이미 혼이 빠져버린 표정이던 기타는, 그 말에 아무 말 없이 목을 긁적이더니 짐을 챙겨서 밖으로 나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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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기타 구해야 할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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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태프 중 누군가의 중얼거림에, 낮은 헛웃음이 퍼져간다. 이서는 ‘그러게 왜 쟤한테 갑자기 시비를 걸어서는…’ 같은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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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로 시작한 세션 연습은 순조로웠다. 리듬 기타를 빼고 연습을 해야 하는 불편함이 있긴 했지만 어쩔 수 없는 것 아닌가. 뭐 그렇게 중요한 파트도 아니니, 다음 주에 새로 들어오면 그때 다시 맞춰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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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지 않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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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는 시간을 받아 다들 연습실에서 나간 사이. 캔커피를 까 마시는 명전에게 다가온 서하가 그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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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세상 어디에 쉬운 일이 있겠냐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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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가끔 그런 말 할때 진짜 노인네같은 거 혹시 자각하고 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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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뜨끔했다. ‘진짜 노인네 같은 거’ 가 아니라 진짜 노인네긴 했으니까. 하지만 서하는 그런 명전의 기색을 눈치채지 못한 채, 의자에 털썩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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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그 사람은 왜 그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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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지. 내 생각에는… 아마 나이 때문에 화난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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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관으로 연령대를 추측해보면… 마흔 넘는 나이. 게다가 세션계에 이리저리 발을 걸치고 있던 명전이 이름 하나 들어보지 못했던 세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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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사정을 섵불리 추측하는 것은 좀 그렇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나이 문제 같았다. 딱 봐도 어려보이는 여자애가 콘서트 메인 밴드 리더를 하고 있는데, 자기는 세션 리듬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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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나이보다 실력이 중요하다’ 이런 이야기 하고 있으면, 안 그래도 정서 불안정하다는 ‘예술 하는 놈들’이 화가 안 날리가 없다. 명전도 재능 있는 젊은 애들에게 화를 내본 적이 좀 있었으니, 처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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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그거랑 나한테 직접 그러는거랑은 다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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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그 사람은 이제 우리랑 연관 없으니까. 그런데 진짜 콘서트 세션 밴드 정도 되니까, 엄청 신경써야 될 것도 많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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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긴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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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서트 세션단의 규모는 그야말로 천차만별이다. 그냥 간략하게 예닐곱명만 꾸려서 하는 경우도 있고, 서른명 마흔명이 들어가는 콘서트도 있다. 예를 들어 스트링 파트(클래식에서 사용되는 현악기들), 타악기(드럼 및 봉고 등등), 저음부, 기타(리드, 리듬1, 리듬2, 리듬3…), 캐스터네츠나 탬버린, 하모니카 같은 기타 악기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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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이 느끼기에 이 정도 규모 세션단이면 그렇게 막 규모가 있는 편은 아니었다. 스트링 파트 있고, 리듬기타에 리드기타. 그리고 그 외 몇몇 특수 악기들과 밴드. 하지만 서하는 단독 드럼으로서 뭔가 책임감을 느끼는 것 같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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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안 잡아주면 뭔가 다 흔들리는 느낌이야. 우리는 그래도 우리끼리 호흡도 다 맞췄고, 게다가 수연이 네가 완전 칼박이니까 혹시라도 내가 흔들리면 너를 보고 맞추는 부분도 있는데… 다른 사람들은 그걸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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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무 약하게 했나? 드럼이 박자를 못 맞춰? 이거 안되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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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에 히이익- 하는 표정을 짓는 서하. 명전은 흐흫 웃으며 캔커피를 탈탈 털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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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이런 거 한번 겪어보면, 실력 엄청 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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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하지 않는가.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 상황을 자신의 뜻대로 부릴 수 있을 때까지, 어떻게든 연습을 하고 맞춰나가다보면… 어느새 실력이 부쩍 늘어있는 자기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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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되네, 콘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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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그런 이야기를 하긴 이르지 않나? 아직 몇번 연습이 더 남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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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 좀 깨지 말아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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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하의 말에 명전은 다시금 웃었다. 아이들에게 이런 실없는 농담을 던지는 것이, 점점 즐거워지고 있는 나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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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게 드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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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그래. 너도 맛있게 먹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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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습적인 인사를 하고는 밥을 한 숟가락 퍼서 입에 넣는다. 별 말 없이 진행되는 식사지만, 가시방석에 앉은 듯 불편했던 처음과는 달리 이제는 나름 익숙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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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서트는 이번주 주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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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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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도 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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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권 있는지 좀 물어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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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의 대답에, “고마워~” 라고 대답하는 혜인. 그는 겸연쩍은 듯 웃으며 계속 밥을 먹기 시작했다. 밥 한 큰술, 야채와 김치 한 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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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왠지 먹는 게 자꾸 땡긴단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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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량은 확실히 늘었다. 하지만 체중은 그다지 늘지 않았다. 성장기일까? 고등학생이라면 그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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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형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을 안 쓰고 사는 명전이었지만… 딱 하나, 체격이나 체력에 대해서는 좀 관심이 많았다. 키가 180이 넘던 ‘서명전’의 몸으로 사용하던 기타나 장비들. 어떻게 해도 ‘하수연’으로는 쉽게 쓸 수 없는 것들이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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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도 말고 덜도 말고 170만 넘어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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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달리기 5km와 악력 운동, 간단한 맨몸 운동 등을 하고 있긴 했지만… 그걸로는 체격의 한계를 벗어나긴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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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악기나 물건을 들 때 힘이 딸려 이서에게 “이거 좀 들어 줘.” 라고 부탁하는 일이 많았는데, 그 때마다 휙휙 물건을 들어대는 이서를 보며 부러움을 느낄때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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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애는 따로 운동을 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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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생각해보면, 이서의 체형은 불가사의했다. 스케줄상 - 명전은 코칭을 해야 했기에 이서의 스케줄을 대충 알고 있었다 - 운동을 할 짬이 거의 안 나올 텐데. 그런데 체격도 좋고, 힘도 좋고, 몸…매? 아무튼 그런 것도 좋다. 역시 유전자인가? 혜인의 키도 큰 편이 아닌 걸 보면, ‘하수연’도 똑같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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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너희는 그런거 안 만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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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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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범 같은 거. 이리저리 작곡을 많이 했다고 들었는데, 정작 엄마는 수연이 곡을 들어본 적이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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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범. 명전은 그 단어를 곱씹어보았다. 앨범이라. 지원사업에 합격했다면 모를까 떨어진 시점에서 앨범에 대해서는 그다지 생각한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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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확실히 필요성이 있긴 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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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명전이 만든 곡들은 일부가 유튜브에 초판본만 올라가있는 정도였고… 그 곡들도 많이 바뀌었다. 오죽하면 파라독스에서 똑같은 곡을 들어놓고 “왜 그 곡은 안 하나요?” 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였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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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것들을 한번 정리해주는 것도 필요하다. 팬들의 원활한 소비와, 홍보, 그 외 기타 등등… 밴드로써의 본격적인 한 걸음을 딛기 위해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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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다못해 차후에 오디션을 나갈 때에도 EP 하나쯤은 들고 나가야 면이 서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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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 계획은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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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그런 생각을 하며, 혜인에게 답을 들려주었다. 꽤나 기뻐하는 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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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획 서면 엄마한테 말해줘. 엄마도 계획하고 있는 게 있어서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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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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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의미심장한 이야기에 명전은 턱을 살짝 긁었다. 무슨 계획하는 게 있다고… 홍보를 위한 단독 콘서트 같은 거라도 기획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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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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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이 마지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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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주가 끝난 후. 몇 주 동안 이어져왔던 ‘일련의 피드백 후 다시 연주 재개’를 기다리는 사람들. 하지만 자리에서 일어나 마이크를 드는 수연의 첫 마디는 조금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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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스트링 파트 박지환 님. 김혁수 님. 이지연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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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은 한명 한명의 이름을 거명하며 박수를 유도했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쏟아지는 박수. 살짝 울컥한 사람도 있고 즐거워하는 사람도 있고 후련해하는 사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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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수 밖에 없다. 수연은 자신의 밴드를 다루듯이 콘서트 세션을 다루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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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링! 방금 전 연주에서 삑이 엄청 났어요. 그런 느낌이 아니라고 이야기 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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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는 여기서 치고 달려야 된다고. 리듬 기타가 딩딩딩딩~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니까요. 이렇게 좡좡좡좡-! 하고, 풀스로틀 달려 나가듯이 들어가야 된다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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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여기서 주현님이 고음을 쫙 지르는 애드리브를 했잖아요. 그럼 어때요? 백그라운드도 폭발하는 듯한 그런 분위기를 줘야 한다고. 그런데 지금 다른 곳은 다 잘 되는데 키보드 섹션에서 그게 제대로 안 나오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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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지금 세션 밴드의 취지를 살리기 위해서 사람들이 애드립을 하고 있는데. 맞춰주는 사람 있고. 그냥 나는 모르겠다 하고 원래대로 치는 사람 있고. 맞추는 것도 제대로 맞추는 게 아니라 어어어 하면서 휘청휘청대는 사람 있고. 그러니까 지금 어그러지고 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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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밴드에요. 그것도 주현 가수님 인생 최초로 시도하는 세션 밴드 콘서트. 차별성을 보여주려면 이런 애드립 같은 건 무조건 따라갈 수 있어야 한다니까. 일단 맞출 생각을 하세요. 어그러지는 건 내가 다 커버할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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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도적인 실력을 바탕으로 몰아치는 피드백. 반발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실력과 논리에 전부 침몰당했다. 남은 것은 공허한 눈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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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눈빛이 돌아오는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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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서 조금 더. 오케이. 지금 손가락이 너무 굳었어요. 이런… 이런 식으로. 쭉 펴고. 팔꿈치에 힘 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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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드립을 하려면 그런 식으로 하면 안 되고. 이렇게 뚱땅뚱땅… 보다는. 살짝 스윙을 섞어서. 알겠어요? 지금 이 곡은 재즈 타입이잖아요. 여기서 스윙이 들어오면, 우리가 다 맞춰준다고. 과감하게 들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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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악기와 파트를 막론하고 들어가는 피드백. 그리고 그 피드백을 따르면 실력이 올라가는 신기한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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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션들이 수연을 존중… 아니 반쯤 숭배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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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우리 밴드의 드럼 유서하, 키보드 정현아, 베이스 최이서까지. 모두 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연습 끝나고 깔끔하게 헤어지면 되는데, 굳이 고개 숙여가면서 분위기 만들다가 회식하는 뭐 그런 게 싫어서 지금 인사를 드립니다. 연습 끝나시면 바로 가시면 될 것 같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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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 사이에서 터져나오는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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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덧붙일 말이 있을 것 같진 않습니다. 이제까지 진짜 수고 많으셨구요. 남은 시간 깔끔하게 연습 끝내고, 리허설 날 뵙도록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주현 님과 맞춰보고 끝내도록 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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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의 바람과는 다르게 세션 연습이 끝나자마자 전부 다 흩어지는 그런 일이 일어나진 않았다. 다들 끝나자마자 수연에게 붙어서 이런저런 말을 걸고 있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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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저희가 꼭 연락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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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요즘 프로젝트를 하고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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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선생님 추천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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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딸이 기타 배우려는데, 혹시 레슨이 가능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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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드 단위로 세션도 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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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처한 듯 명함을 돌리며 대응을 하고 있는 수연. 이서는 신기한 듯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분명 처음에는 “그냥 적당히 해야지.” 라고 말했었는데. 어느새 진심으로 다른 사람들을 가르쳤고, 결국 저렇게 되어버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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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여분 쯤 더 기다리자, 결국 흩어지는 사람들. 이서는 웃으며 수연에게 다가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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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기 폭발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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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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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 늘어나면 좋아해야 할 텐데, 수연은 영 퉁명스러운 표정이었다. 이미 일이 많아서 그런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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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바빠. 시간이 좀 있으면 괜찮을텐데. 학교도 다녀야 하고, 다른 루트로 들어오는 일도 받아야 하고. 다 일이고 돈이니까 받긴 하겠지만… 그래도 다행인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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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은 명함 하나를 들어보였다. 평범한 세션의 명함. 하지만 수연이 보여준 뒷면에는, [희귀 악기 및 이펙터 전문 도/소매] 라고 적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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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거라도 하나 건졌다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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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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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니, 명전 선생님 이펙터를, 좀 구해달라고 하려고. 어떻게 하나쯤은 구할 수 있지 않을까 싶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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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윤과 세현은 주현의 팬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세윤이 열성팬이었고 세현은 누나 혼자 불안하다고(심심하다고) 끌려다니는 것에 가까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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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두 남매는 오늘 매우 불안한 상태였다. 세윤은 주현이 난생 처음 시도하는 ‘세션 밴드 콘서트’가 제대로 돌아갈까 하는 걱정에, 세현은 콘서트가 개판으로 끝나고 누나가 집에서 난장판을 벌일까 하는 걱정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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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되는 거 맞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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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잘 되겠지. 왜 자꾸 그래? 그 사람들도 프로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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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주현 오빠 라방할 때 보면 진짜 이상한 거에 많이 속는단 말이야. 이번에도 뭐 이상한 사람들한테 속아서 밴드니 뭐니 한다는 거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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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동네 학예회도 아니고 그게 가능하겠냐는 말은 세현의 속으로 삼켜졌다. 그런 말을 해 봐야 등짝이나 맞을 것이 분명하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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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그런 걱정을 해. 년차가 얼마나 된 가수인데. 사기를 당하기도 힘들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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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도 알잖아. 사기가 방심할 때 제일 당하기 쉽다는 거. 오빠도 그런 것일지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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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윤은 쓸데 없는 걱정을 떠들며 세현과 콘서트장으로 걸어갔다. 암표 방지를 위해 신분증과 티켓을 교차검증하는 탓에 잔뜩 늘어선 줄. 지루한 입장 줄을 기다리며 세윤은 다시 한번 더 정보를 찾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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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콘서트 왔는데 이번 서울콘 MR아니고 밴드라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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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능한 부분일까요? 콘서트 망쳐지는 거 아닌지 모르겠네요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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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가수분들 밴드로도 콘서트 다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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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밴드가 라이브 느낌 살릴 수 있고 좋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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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R이면 너무 짜맞춘 느낌이 있죠 애드립이나 이런거는 아예 준비해오셔야 하니까 현장에서 느낌 오는대로 바로 갈 수가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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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밴드도 실력 안 좋은 밴드들 오면 영 그렇던데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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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콘서트장에 가면 그런게 신경쓰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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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은근 신경쓰여요 ㅠ 전에 팠던 다른 가수가 밴드 바뀌니까 약간 맛도 바뀌더라고요 그런게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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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에 세션 서는 밴드는 아예 밴드가 따로 있던 것 같더라구요 http://x.com/G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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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자신과 비슷한 걱정을 하고 있는 것 같아 세윤은 그냥 휴대폰을 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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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밴드가 아무리 개판친다 해도 주현 오빠가 커버를 해 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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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윤은 잘 모르지만… 밴드의 장점은 애드립 같은 것을 자유롭게 내지를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MR로 할 때도 완벽했던 주현인데, 애드립의 고삐가 풀려버린 주현은 어떨까?? 상상만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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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정 기분나쁜데 좀 어떻게 하면 안 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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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현의 핀잔에 세윤은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이미 많이 줄어든 줄. 입구를 지나가니, 탁 트인 콘서트장이 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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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좀 콘서트장 큰데 잡아도 될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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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도 다 전략이라니까. 일부러 희소성을 높여서 노이즈를 일어나게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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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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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언비어를 퍼트리는 무도한 자를 진압한 후 세윤은 자신의 자리에 가서 앉았다. 1열이긴 하지만 살짝 구석인 곳. 그 탓에, 사람들이 말하던 ‘세션 밴드’가 잘 보이는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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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가 나오고, 진행을 시작한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이 시대가 낳은 최고의 가수 주현의 자랑스러운 팬 여러분들 환영합니다!!” 팬들을 띄워주는 낯간지러운 멘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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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세윤은 ‘빨리 주현 오빠나 불러오지.’ 같은 생각을 했다. 그렇게 생각하는 동안 슬슬 등장하는 세션 밴드 구성원들이 눈에 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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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저기 사람들 온다. 저 사람들이 밴드인가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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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네. 막 엄청 늙은 사람들은 아니네? 밴드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늙지 않았나…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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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현은 무대 한쪽을 가리켰다. 딱 봐도 성인은 아니어보이는 여자애 4명이 들어오는 모습. 스태프 아르바이트라도 하나 싶었는데, 계속 쭉쭉 들어오더니 세션 밴드 맨 앞 자리에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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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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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가 작은 사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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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윤은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키 큰 사람은 잘 모른다고 해도, 다른 아이들은 아무래도 어려보이는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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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대 애들을 밴드로 쓰는 건… 좀 아니지 않나? 진짜 누구한테 속은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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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 갑자기 이렇게 주현 오빠가 잘 되던 콘서트 방식을 바꿀리가 없다니까. 누구한테 속은 게 분명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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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천재는 많다. 주현 역시 어린 시절부터 천재로 유명했다(고 팬카페 썰로 들었다). 그렇지만 천재가 많다 하더라도, 보이는 사람이 다 천재인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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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관점에서 세윤은 지금 밴드로 나온 아이들이 연령대를 극복할만큼의 연주를 보여줄 것이라고 믿기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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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발 콘서트만 망치지 말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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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마음에 세윤은 두 손을 모아 기대했다. 오랜만의 단콘인데 몰입이 깨질 정도의 사고만 치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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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몇 시간 후... 새로운 덕질 대상이 생겨날 미래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못한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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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유튜브 영상은 며칠 뒤에 올라갈 거에요. 그럼 좋은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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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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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면을 향해 두 손을 흔들다가, 방송이 종료되었다는 사인을 보고는 내린다. 그와 함께 열리는 스튜디오 문. 총총총 걸어온 이혜인 씨가 명전을 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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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딸 연주 너무 잘하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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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너무 놀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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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학부모가 했다면 ‘어휴 시팔 무슨 개 헛소리나 하냐’ 같은 생각을 떠올리면서, 아유 따님 연주 너무 잘하죠~ 하며 아첨이나 하고 말았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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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의 실력, 준홍이 생각하기에는… 모든걸 다 제하고 객관적으로. ‘서명전의 제자’라는 타이틀을 제하고 봐도, 정말 훌륭했다. 당장 프로로 데뷔해도 될 정도. 아니 그보다, 어느 오디션 프로에서 기타 관련 심사위원으로 등장해도 될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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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우리 딸, 언제 이렇게 기타를 잘 치게 됐는지 모르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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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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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홍은 그런 식으로 살갑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 모녀를 바라보다가, 질문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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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 학생은, 명전 선생님의 제자인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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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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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시간을 끌며 선뜻 뭐라고 대답하지 않았다. 마치 그 시간을 그냥 지나보내면 별 일 없을 것이라고 믿는 청소년처럼 행동했다. 처음처럼 계속 대답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준홍에게 신뢰를 줄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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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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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그 의도가 먹혔는지, 혼자서 납득하더니 대화를 끝내는 준홍. 혜인은 그런 준홍을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도대체 저 아저씨는 아까부터 왜 그 ‘명전’이라는 사람에게 집착을 하고 있는 걸까? 기타 잘 치는 것은 알겠는데, 그게 그 정도인가? 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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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뭐 오늘 영상 찍는 것 즐거웠구요. 몇가지 이야기를 드리고 싶은 부분이 있는데, 잠시 괜찮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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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홍은 그렇게 말했다. 젊은 유망주… 아니 ‘서명전 선생님의 마지막 제자’에게, 지원해줘야 할 것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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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준홍의 유튜브에 올라 온 영상을 바라보았다. 라이브 영상의 조회수는 그렇게 많지 않지만, 편집본의 조회수는… 나름 꽤나 나오고 있었다. 한 오만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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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린지 얼마 안 된 것을 생각하면, 꽤나 훌륭한 편이라고 명전은 생각했다. 준홍의 채널 영상 중에는, 10만을 넘기는 게 몇개 없었으니까. 100만짜리 영상 두어개가 있긴 했지만, 나머지는 거의 다 몇만에 불과했다. 그런데 벌써 5만이라. 꽤나 성적이 좋은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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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고위대한 기타리스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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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자와 기교,,훌륭한 연주솜씨에 듣기가 너무나 좋습니다 몇번을 들어도 감동적이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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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와~ 개인적으로 전자기타 안좋아 했는데, ㅡ음악에 아는건 없지만 정말 계곡에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젖어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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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ㅠㅠ 곡 진짜 너무 대박이네요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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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 달리는 댓글들을 보면, ‘하수연’보다는 ‘서명전’에 가까운 느낌이긴 했지만… 아무튼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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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ite ro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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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iteroomguitar 구독자 13,843명 동영상 12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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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자신의 채널을 바라보았다. 방송이 나간 직후, 꽤나 많이 올라온 구독자. 꾸역꾸역 1만명까지 올라온 것이 얼마 전인데, 준홍의 채널에 나가고 나니 3천명이 붙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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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래서 다들 홍보니 뭐니 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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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조회수도 꽤 올랐다. 이전에는 백 이백씩 꼼지락대며 오르던 조회수가, 단번에 천 이천씩 뛰어올랐다. 이전에 플레이리스트인가? 에 올라갔던 2번째 자작곡은 20만 정도를 기록하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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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우려가 되는 것은, 시청자층이었다. 40대 50대가 제일 많다고 표시된 통계. 달린 댓글들도 준홍의 채널에서 봤던 댓글과 비슷하다. 예의 바르고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이야기하고는 있지만, 뭔가 젊은 기색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댓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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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방향으로 가는 게 맞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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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댓글들을 본 후, 명전은 자신의 감각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이제까지는 꽤나 괜찮게 채널을 운영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보니 뭔가 아닌 것 같았다. 예의는 바르되, 전혀 활기차보이지 않는 시청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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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 본인도 그랬지만, 늙은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의 취향을 말하지 않는다. 더이상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남들도 좋아해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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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젊은 사람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남들도 좋아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계속해서 자신의 관심사를 전파하려고 노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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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에 젊은 층을 팬의 기반으로 삼는 것이, 늙은 층을 팬의 기반으로 삼는 것보다 훨씬 유리한 것이다. 그리고 그 이론에 따르면, 명전의 채널은 성장 가능성이 낮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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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뭔가 그 신비한 알고리즘인지 뭔지에 선택받지 못한다면, 영 힘들어 보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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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라도 신세대 곡들을 커버하는 쪽으로 가 볼까? BTS, Newjeans, Blackpink같은 K팝 아이돌이나 젊은 층이 좋아하는 Yoasobi, 米津玄師, ヨルシカ 같은 인터넷 출신 아티스트들을 커버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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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그런 생각을 하며, 아무 생각 없이 유튜브를 스크롤했다. 그리고 보이는 영상 하나. [일반인 출신 기타리스트의 감성 넘치는 연주 ㅎㄷㄷㄷ] 라고 되어있는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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왠지 모르게 익숙한 썸네일에 홀려 눌러보니, 쇼츠인가 뭔가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흘러나오는 연주는, 그가 일전에 준홍의 방송에서 연주했던 바로 그 밴드곡. 조회수는? 50만이 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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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개 씨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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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문득 혈압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콘텐츠 ID의 개념은, 이서가 시간을 들여 설명해준 끝에 겨우 이해할 수 있었다. 아무튼 자신의 채널에 올리면, 도둑질해가는 놈들이 즈그 채널에 올려도 그 돈을 명전 자신이 먹는다는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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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거는? 명전 자신의 채널에 올리지도 못했으니 아직 뭐 조치도 취해지지 못할 것이고… 영상이 곡 전체를 다 담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클라이막스와 솔로를 포함한 일부분. 그리고 명전 본인이 자신의 밴드를 소개한 파트도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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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단단히 열받은 상태로 댓글을 눌러보았다. 이 도적놈이 올린 걸 좋아하는 녀석들의 꼬라지를 좀 보자.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댓글을 써놨을지 궁금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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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ㅠㅠㅠㅠㅠ 풀버전 기대하고 잇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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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침에 듣고 있는데 마음이 편안해지는 느낌이네요 좋아요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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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부 마치고 정말 지쳐있었는데 알고리즘에 이게 첫번째로 떴어요. 덕분에 기력회복하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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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에 진짜 나지막히 읊조리는거 정말 최고,,, 혹시 저 기타리스트분 누군지 아시는 분 계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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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이거 다른 채널에서 연주한거 그대로 그냥 가지고 온 거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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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헐 미쳤나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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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곡 장르가 블루스라고 하더라고요,, ㅠㅠ 블루스라고 하면 늙은 분들 듣는 그런 음악인 줄 알았는데 너무 감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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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찾아보니까 저 여성분 밴드 이름이 ‘Group Sound’래요!! 유튜브 채널이랑 공연 영상 올려놓을테니 꼭 한번 보고 가세요!! http://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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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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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이분 올려드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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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고정 부탁드려요 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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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댓글을 보고, 머리를 살짝 꼬았다. 그런가. 젊은 애들도 이런 곡을 좋아해주는 건가. 아직까지는 내 감각이 먹히고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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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판단을 하며, 명전은 눈가를 살짝 훔쳤다. 늙으니까 이제 이런 작은 일에도 눈물이 다 나네. 젊은이들의 응원이 고맙게 느껴지는 건, 이게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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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저작권 위반으로 신고는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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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단호하게 [신고] 버튼을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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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진짜 연습실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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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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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와 현아는, 연습실 소파에서 뒹굴대며 말했다. 이전에 다녔던 합주실은… 뭔가 없다거나 하진 않았는데 딱히 있던 것도 없었다. 의자 몇개, 드럼, 키보드가 전부. 그야말로 가성비 그 자체인, 반지하 합주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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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지금 수연이 얻어온 이 연습실은? 천국 그 자체였다. 소파도 있고, 커피 머신도 있고, 과자도 이것저것 있고, 기타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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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의 합주실에서는 쉬는 시간엔 무조건 바깥에 나가서 앉아있어야 했는데. 이제는 그러지 않아도 된다! 그야말로 천국 그 자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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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자나 커피 같은 건 우리가 먹은 만큼 채워놔야 해. 이걸 위해서 회비를 걷고 싶은데, 동의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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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하와 함께 들어오는 수연의 말. 이서는 흔쾌히 동의한 후, 칙촉을 깨물었다. 폭력적인 초코칩의 맛이 입안을 달콤하게 물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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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여기는 어떻게 알게 된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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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말했던 유튜브 채널 출연. 그쪽에서 여기랑 연결시켜줬어. 유망한 밴드에게 지원을 해 주겠다고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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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은 그렇게 말하며 놓여있던 악력기를 잠시 만지작거렸다. 준홍과 서하가 아는 사이라는 건, 상당히 의외인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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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하는, 제가 눈여겨 보고 있던 드럼인데… 수연 학생과 밴드를 하게 되었다니 정말 다행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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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말을 했었던가. 무슨 사이인지는 몰라도, 아무튼 친분이 있는 것은 확실해보였다. 하긴 뭐 저런 실력을 가지고 밴드씬에서 주목을 받지 못하면 오히려 그게 이상하긴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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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몇가지 이야기를 짚고 넘어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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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그렇게 말하며 테이블로 다른 아이들을 불러모았다. 소파에 뒹굴다가 슬슬 모이는 밴드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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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두번째 곡도 다 완성됐네요. 이서가 작사에 고생을 해 줬고, 편곡도 두분 다 고생해주셨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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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이자를 그리는 이서. 명전은 살짝 웃은 다음, 말을 계속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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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우리 곡에 대한 크레딧 정리를 하긴 해야 할거에요. 저작권료가 발생하는 부분이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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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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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깔끔하게 짚고 넘어가는 게 제일 좋지. 음악을 그냥 한때만 하고 넘어갈 거라면 모를까, 계속해서 음악을 한다고 생각하면… 무조건 정리를 해야 돼. 안 그러면 싸움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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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크레딧을 제대로 정산하지 않아 싸움이 났던 밴드들을 생각해보았다. 금전적 문제로 여럿 해체되긴 했지. 애초부터 깔끔하게 했으면 되는 것을, 괜히 정이니 뭐니 이러다가… 지금 생각해보면 참 미련했던 시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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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오픈마이크. 다들 이제 얼마 안 남은 거 알죠? 이젠 진짜 얼마 안 남았으니까, 조금만 더 열심히 합시다. 가야 할 길이 먼데 그런 클럽 오디션에서 떨어질 수는 없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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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을 하며 명전은 아이들의 표정을 슬쩍 훑어보았다. 다들 결연하다… 기 보다는, 연습이 너무 힘들어서 실전은 오히려 쉬울 것 같다는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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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지원사업인가 그거 끝나면 좀 쉴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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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아마 그러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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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그러지 않을 거라고 명전은 생각했다. 오픈마이크, 지원사업, 그 다음은 밴드 오디션 프로그램. 이미 스케줄이 다 꽉 들어차 있는 상황이긴 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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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말해줄 필요는 없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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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라고 하지 않는가. 바쁜 시기도 한번 경험해봐야 느긋한 시기의 소중함을 알게 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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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주가 시작되었는데, 들려오는 소리는 익숙하지만 생소하다. 익히 들어본 멜로디가 전혀 들어보지 못한 느낌으로 연주되고 있다. 분명 [어느 그늘진 날]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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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R이 아니라 밴드로 연주되기 때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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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하기에는 사운드의 느낌이 다르다고 세윤은 생각했다. 아예 들어보지 못한 생소한 느낌은 아니지만 흔하게 들어본 것도 아닌 것 같은 느낌의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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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그늘진 날] 또한 슬픈 느낌을 내는 발라드다. ‘락발라드’라고 하던가? 아픈 사랑과 이별에 대한 가사와 주현의 특기인 파워풀하고 호소력있는 고음이 잔뜩 들어가 있는 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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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지금 연주되고 있는 [어느 그늘진 날]의 간주는 조금 달랐다. 이전의 [그늘진 날]이 여자친구랑 깨진 20대 남자애가 술 먹고 청승부리며 노래방에서 부를 것 같은 노래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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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그늘진 날]은 진짜 인생에서 크나큰 아픔을 겪은 사람이 그를 잊어버리기 위해 절규하며 부를 것 같은 노래라고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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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그늘진 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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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너를 만나러 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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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꺄아아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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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문점을 가지던 와중 들려오는 보컬에, 세윤은 반사적으로 비명을 질렀다. 동시다발적으로 들려오는 천둥같은 함성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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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무대 스크린으로 주현의 모습이 띄워지자, 다시 한번 또 크게 함성이 내질러진다. 세윤은 있는 힘껏 비명을 내지르다가, 귀를 막고 있는 세현의 등짝을 두들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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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간 만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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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길을 걸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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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성이 가라앉고 난 후 팬들이 처음 느낀 감정은 기분 좋은 당혹감이었다. 곡이 왜 이러지? 이런 곡을 낸 적은 없었는데. 특별히 콘서트판으로 편곡을 한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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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당혹해하면서도 ‘특별 콘서트 버전 편곡’을 듣는다는 것에 행운을 느꼈다. [어느 그늘진 날]은 주현의 대표곡 중 하나이지만, 뭔가 특색있는 곡이라고 하긴 힘든 평범한 이지리스닝 락발라드 곡이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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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그늘진 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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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어디에도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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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점 요동치는 멜로디. 몸서리쳐지는 상실감. 울부짖어지는 슬픔. 하지만 그 모든 감정은 수면 아래로 꼭꼭 눌러담아져 있다. 수면 위로 드러난 빙산의 일각을 보면 수면 아래의 거대함을 짐작할 수 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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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나는 누구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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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의 길을 걸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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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보다 더 몰입되는 느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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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윤은 본능적으로 그렇게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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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없이 많은 주현의 콘서트를 참석하면서 이렇게 초반부터 관객을 휘어잡고 몰입시킨 콘서트는 없었다. 초반부터 감정적인 노래를 불러서라기에는 이전에도 이런 구성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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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는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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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윤은 실없이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에게 바로 이유가 덮쳐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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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찾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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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곡대로라면 끝도 없이 내질러져야 할 클라이막스. 하지만 들리는 것은 절제된 고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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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관객석의 고조된 감정들이 식어버리기 직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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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타 소리가 폭발했다. 살짝 거칠고 중후한 톤을 가지고 하늘 끝까지 올라가는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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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함께 스크린에는 세션 밴드의 화면이 띄워진다. 시선을 살짝 내리깐 상태로 보컬의 감정을 그대로 이어받아 내지르는 기타 솔로. 직선으로 쭉 뻗어나가면서도 유려하게 굽이치는 그 연주를… 가느다란 두 손으로 구현해내는 여자아이의 모습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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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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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인물이 띄워짐으로 인해 생겨난 웅성거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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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것은 한순간이다. 관객들은 금새 연주에 몰입했다… 정확히 말하면 기타 연주가 관객들로 하여금 몰입에서 벗어나는 것을 허용하지 않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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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들으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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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석에서 네-! 라는 소리가 쏟아진다. 세윤 또한 대답을 내지르며 세현이 뭘 하고 있는지 곁눈질로 쳐다보았다. 대답 대신 고개를 연신 흔들며 감동의 박수를 치고 있는 세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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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익숙한 곡인데 전혀 다른 연주가 나와서 놀라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번 콘서트를 위해 특별히! 준비된 곡이에요. 우선 그 전에, 세션 밴드분들부터 소개를 드리겠습니다. 스트링 파트 박지환 님! 김혁수 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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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이 한명한명을 호명할 때마다, 스크린에 세션의 모습이 띄워진다. 저마다의 포즈를 하며 인사를 하는 세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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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오늘 세션 밴드의 메인! 이 곡의 편곡을 맡아주신! 밴드 ‘그룹 사운드’ 의 메인 베이스 최이서 님! 키보드 정현아 님! 드럼 유서하 님! 마지막으로… 밴드 마스터 하수연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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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레와도 같은 박수가 쏟아지는 가운데, 밴드 멤버들의 반응은 각자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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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글벙글 웃으며 손을 흔드는 최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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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운지 키보드 뒤로 숨는 정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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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럼 연주를 짤막하게 보여주는 유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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엷게 웃으며 고개를 살짝 숙이는 하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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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밴드 세션들, 연습하느라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 하수연 님은 그야말로 천재 그 자체입니다. 방금 들으셨던 곡은, 하수연 님이 혼자서 [어느 그늘진 날]을 며칠만에 편곡해서 만드신 거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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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습 일화를 설명하다가 하수연의 천재성을 찬양하기 시작한 주현. 꽤나 감명이 깊었는지, 주현의 ‘하수연’ 찬양 토크는 스태프가 다음 곡을 시작하라는 신호를 보낼때까지 계속해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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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일을 시작하게 된 계기인, 드라마 OST [만남이 끝나기 전에] 를 연주한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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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 곡보다 더 큰 박수와 함성을 뒤로한 채, 명전은 빠르게 스태프에게 손짓을 하며 장비 세팅에 들어갔다. 콘서트의 클라이막스가 되는 부분을 준비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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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곡, 블루스 곡을 부르기로 됐잖아요? 이 김에 뭔가 발라드 가수로만 되어있는 제 이미지를 바꾸고 싶은데. 콘서트에서 부를만한 곡이 없을까요? 유명하면서도 안 유명하고, 뭐 그런 락 관련 곡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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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습 당시 주현이 명전에게 던졌던 질문. 명전은 ‘아니 왜 세션한테 이런 질문을 하고 앉아있나’ 싶었지만, 주현으로써는 당연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딱 봐도 천재같아 보이는 아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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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 또한 자신을 재능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진짜 천재가 있다면 나이고 경력이고 간에 그런 사람에게 의견을 듣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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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하면서도 안 유명한 곡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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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좀 알려져서 노래 좀 파는 사람은 들어봤지만, 약간 좀 색다르고 신선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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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곤란한 질문이었지만 명전은 몇초 정도 고민하다가 대답을 해 주었다. 주현은 그 곡에 대해서 “너바나 곡 아니에요?” 라고 말했지만, “데이비드 보위 곡이에요.” 라는 수연의 말에 벙어리가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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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는 세션 밴드 구역은, 작은 라이브클럽처럼 꾸며져 있다. 옹기종기 세션 밴드들이 모여 앉은 가운데 주현은 작은 의자에 앉아 말을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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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곡은, 제가 좋아하는 곡 중 하나를 커버하려고 합니다. 커버곡은 꽤나 오랜만이고, 단콘에서는 완전 처음이네요. 오늘 처음으로 시도하는 게 뭔가 많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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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하 하며 웃는 주현과, 괜찮다, 좋다 등을 연발하며 박수를 치는 관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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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들어가겠습니다. 데이비드 보위(David Bowie)의 The Man who sold the world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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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사적으로 터져나온 박수와 함께 곡이 연주되기 시작한다. 데이비드 보위의 심정을 그대로 나타낸 듯한 사이케델릭하면서도 불안한 느낌의 리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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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들려온 나지막히 읇조리는 듯한 주현의 목소리는 관객들에게 작은 충격을 주었다. 항상 발라드만 불러오던 주현이 이런 곡도 시도할 수 있구나. 확실히 바뀔때도 되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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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기타, 하수연이 더블링을 시작했을 때… 관객들은 두번째 충격을 받았다. 이것은 그냥 순수한 충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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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잘 어울렸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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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윤은 정신이 번뜩 들었다. 주현의 유도에 따라 관객석에서 울려퍼지는 천둥과도 같은 박수 소리. 그녀 또한 무의식적으로 치고 있던 박수를 이어나가며… 정신을 잃어버릴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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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쳤다.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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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년이 넘게 주현을 덕질해오면서, 그리고 단콘을 다니면서, 음방을 사수하고 앨범을 들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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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윤은 한번도 주현에게 이런 면모가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영원히 감미롭거나 슬픈 발라드를 불러줄 것이며, 그녀 또한 영원히 그런 곡을 들으며 만족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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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생각의 담장은 오늘부로 허물어져버렸다. 바로 무대 중앙에서 기타를 치고 있는 여고생에 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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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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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an Who Sold The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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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이 나는지 연신 2절을 반복하며 관객들에게 떼창을 유도하고 있는 주현. 스크린은 빠르게 글자를 띄우며 관객들에게 어떤 부분을 불러야 할지 보여주었으며, 관객들은 떠듬떠듬이나마 리듬을 따라가며 난생 처음 듣는 노래를 떼창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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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과정은, 저 여고생에 의해서 매끄럽게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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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윤은 볼 수 있었다. 기타를 연주하며 연신 눈짓과 몸짓으로 밴드를 지휘하는 ‘하수연’을. 발구름과 고개, 그리고 세윤으로써는 알 수 없는 비언어적 동작으로… 계속해서 이어지는 주현의 애드립을 자연스럽게 따라갈 수 있도록 밴드를 유도하는 ‘하수연’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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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애들 이름이 뭐라고 했지? 아까 주현 오빠가 뭐라고 소개를 해 줬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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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윤은 자연스럽게 그런 생각을 떠올렸다. 하지만 떠오르는 게 없어, 그녀는 콘서트가 끝난 후 팬카페에 질문글을 올리기로 결심했다. 그녀와 같은 결심을 하고 있는 사람의 수가 상당히 많을 줄은 꿈에도 모른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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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고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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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서트가 끝나자, 스태프들과 세션 밴드가 모여서 서로 우렁차게 인사를 했다. 그리고 쏟아지는 박수. 주현은 박수를 치다 바로 명전에게 걸어와 악수를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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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씨, 정말 고생 많으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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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뭘… 저는 별로 한 게 없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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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돈 받고 이정도 일 해 줬으면 세상 사람들 다 굶어죽겠다’ 라고 명전은 생각했지만, 그런 말은 꺼내면 안 된다. 원래 신인은 손해봐가면서 일을 해 줘야 하는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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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진짜 고생 많으셨어요. 수연씨가 없었더라면 이렇게 만족스러운 콘서트는 못 했을 겁니다. 혹시 서울콘 말고 지방콘에 합류하실 생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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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학교를 가야 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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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렇죠! 학생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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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연쩍은 듯 웃는 주현. 머리를 살짝 꼬는 명전을 두고, 주현은 말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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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정말 도움이 많이 되었습니다. 이전부터 뭔가 이제는 좀 다른 음악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많이 있었는데… 수연 님과 우리 ‘그룹 사운드’ 밴드 여러분들 덕에, 동기부여를 받은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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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 주현이 꺼낸 것은, 명함 두장이었다. 주현의 연락처와 이메일이 적혀 있는 명함과, 뭔지 모를 명함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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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라도 음반이라거나 음원 발매하실 생각 있으시다면, 그리고 뭐 남자 보컬이 필요하시다면… 한번 연락주세요. 꼭 피쳐링 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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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쪽은 음반 관련해서 제가 잘 아는 분들인데요. 믹싱 마스터링 관련해서는 국내에서 3대 기획사 포함하고도 다섯손가락 안에 들어갈만한 분들입니다. 스케줄이 꽉차계시긴 한데, 저랑 친하셔서 제가 소개했다고 하면 작업 해주실 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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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두 명함을 받아들고는 주현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멀어지는 주현의 모습을 보며, 이서와 아이들이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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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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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믹싱 스튜디오 명함. 그리고 연락 주면 피쳐링 해준다고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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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대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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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호하는 아이들을 두고 명전은 생각했다. 이런 것도 생겼으니 확실히 Ep 제작에 들어가기엔 적절한 시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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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이거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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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윤은 자신도 모르게 혼잣말을 내뱉었다. 하룻밤만에 치솟아 있는 팬카페의 회원 수.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겠지만, 트위터의 팔로워도 확실히 증가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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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 무슨 일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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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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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이 팔려 있던 아윤에게 던져지는 교수의 질문. 생각해보니, 지금은 수업 중이었다. 주위 사람들이 다 쳐다보는 가운데, 아윤은 바로 고개를 숙이고는 다시 수업을 듣는 척 했다. 그러자 아윤에게서 사라지는 시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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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이거 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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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혹스러울 정도로 올라가 있는 수치들. 아윤은 대략적인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게시물을 슬쩍 둘러보았다. [주현님 콘서트 보고 가입했습니다], [콘서트에서 너무 멋졌어요], [콘서트 최고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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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콘서트? 나도 모르는 콘서트가 있었단 말인가 하고, 아윤은 생각했다. 콘서트 비슷한 것은 파라독스에서 하는 공연 밖에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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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서트 촬영 영상이랑 사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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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an who sold the world 치는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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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님 보러 갔는데 진짜 하수연양 너무 이뻤어요. 이번 주 파라독스 공연도 티켓팅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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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몇장도 같이 올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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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을 보면… 주현이 노래를 부르고, 그룹 사운드 아이들이 주현 주변에서 악기를 치고 있다. 강의 때문에 영상의 소리를 들을 수는 없었지만, 확실히 열기가 느껴지는 콘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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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백 밴드? 서포트? 아무튼 그런 거로 출연했구나. 대단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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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은 그녀도 잘 알 정도의 가수. 그런 가수의 콘서트에 지원을 나갈 정도면, 애들이 확실히 성장하긴 했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아윤은 스크롤을 슥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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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핸드폰을 떨어트릴 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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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어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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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돌 팬들이나 사용하는… 속칭 ‘대포’로 찍은 게 분명한 하수연의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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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공 하나하나가 보일 것 같은 화질임에도 불구하고, 잡티 하나 없는 피부. 살짝 숙인 고개, 엄숙해보이는 눈동자. 흐르고 있는 한 줄기 땀과 앙다문 입술은, 그녀가 얼마나 연주에 신경을 쓰고 있는지 보여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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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밑으로도, 몇장 더 있는 멤버들의 사진들. 수연, 수연, 수연, 이서, 현아, 서하. 죄다 미소녀들이라, 아윤은 눈이 즐겁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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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근데 잠시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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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게시글을 탐방하며 정신없이 덕질 컨텐츠를 주워먹던 아윤은, 번뜩 정신이 들었다. 이 녀석들… 이제 내 경쟁자 아닌가? 다 파라독스에 몰려올 거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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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아윤이 큰일났다는 심정으로 헐레벌떡 들어간 파라독스의 홈페이지는… 트래픽 다운으로 뻗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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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뵙네요. 들어오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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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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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기타를 등에 맨 상태로 가게에 들어갔다. 코에 들어오는 건조한 공기. 쇳내음이 섞인 냄새. 왠지 눅눅해보이는 분위기임에도 불구하고, 항온항습을 완벽하게 갖춘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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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펙터에 구애받지 않으실 실력 같은데. 굳이 그런 희귀 이펙터를 찾으시는 이유가 있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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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님 유품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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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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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자기 자신을 자신의 스승이라고 말하는 데에 익숙해진 명전은, 얼굴색 하나 바뀌지 않고 거짓말을 했다. 그 말에 살짝 숙연해진 상대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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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스승님이 어떤 분이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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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전 기타리스트님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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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그렇게 말하고는, 가게를 슥 둘러보았다. 이펙터 수집가들이 오면 넋을 놓고 둘러볼 것 같은 환경. Peterson Strobe Tuner와 같은, 희귀하다고 하는 것들이 전시장 위에 놓여 있고… 이펙터 몇개는 뭔가 알 수 없는 문구와 함께 유리 장식장에 들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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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건 뭔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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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저건 제프 벡(Jeff Beck)이 Blow by Blow 녹음할 당시에 사용했던 Colorsound Overdrive입니다. 원본이고, 제가 제프 벡에게 컨펌까지 받은 물건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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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런 물건이 있단 말인가? 아니 이 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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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이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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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미 헨드릭스(Jimi Hendrix)가 Band of Gypsys를 녹음할 당시에 ‘사용했다고 이야기되는’ Arbiter FuzzFace에요. 이건 당시에 지미 헨드릭스가 죽어서 컨펌은 못 받았고, 확실치도 않아서 뭐라 말하긴 그렇지만… 그때 당시에 생산되었던 물건은 확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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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쪽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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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데이비드 길모어(David Gilmour)가 The Dark side of The moon을 녹음했을 당시에 사용된 Colorsound Power Boost, 속칭 Mysterious Orange로 말해지는 이펙터랑 동일 제품이에요. 리이슈 버전이 아닌 1970년대 생산본이고, 18V 제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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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를 둘러봐도 눈이 돌아갈만한 제품 뿐이라 명전은 잠시 머리가 멍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특히 저 컬러사운드 파워 부스트는, 명전이 생전에 소문만 듣고 구경도 해보지 못한 물건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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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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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자신만의 톤을 가지고 있긴 했다. 하지만 그 톤의 출처는 데이비드 길모어. 명전이 사용하던 장비인 빈슨 에코렉도, 빅 머프도, 이제 찾아야 하는 다이나컴프와 챈들러 튜브 드라이버도. 전부 다 데이비드 길모어가 사용하던 장비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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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중에 하나 정도 추가되는 건, 나쁘지 않은 것 아닌가? 게다가 ‘오리지널’ 데이비드 길모어의 톤에 가까워지는 일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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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명전은 이내 그 생각을 단념했다. 물론 길모어는 세계 최고의 기타리스트고(라고 명전은 생각했다) 그의 톤이 매력적인 것은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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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언제까지나 계속 남을 따라하기만 할 것인가. 결국 자신의 것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남을 따라하기를 그만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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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그 때문에 이전의 ‘서명전’은 실패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실패가 두려웠기에 검증된 길만을 가려 했고, 그 길을 벗어나고 싶지 않았으며, 사고가 경직된 채로 할 수 있는 것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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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지금은? 엄청나게 성공한 것은 아니지만, 이전보다는 나은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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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하수연’의 몸에 들어와 그녀의 재능을 가지게 된 것도 있겠지만… 음악을 즐기게 되면서, 더이상 남을 따라하지 않게 된 게 큰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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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그런 생각을 했다. 이제는 남을 따라하는 것을 넘어, 자신의 사운드를 만들어나가야 할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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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뭐, 내 오리지널 장비는 찾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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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블에 앉자, 이내 나오는 커피. 카누의 밍밍한 향기를 느끼며 명전은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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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dler Tube Driver를 찾고 싶은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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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쪽에 좀 있긴 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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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그렇긴 한데, 제 스승님이 사용하던 물건이라서요. 작고하신 다음에 시장에 나온 튜브 드라이버가 있으면 한번 물건 알아봐주실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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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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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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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려오는 환호를 뒤로 하고, 명전과 아이들은 대기실로 향했다. 평소보다 훨씬 많은 관객에 꽤나 흥분한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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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서트 보고 온 사람이 많나봐. 원래 저 정도 아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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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사장님이랑 이야기 해 봤는데, 홈페이지가 터질 수준이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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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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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악을 금치못하는 이서와 현아. 그리고 신이 나서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는 서하를 두고, 명전은 생각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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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서트의 효과가 의외로 엄청 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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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이 콘서트 세션 출연을 결정했던 것은 아이들의 마음을 다잡기 위해서기도 했지만, 적극적 음악 소비층에 대한 홍보를 위해서기도 했다. 콘서트에 올 정도로 적극적인 소비층은, 보통 팬층의 코어가 되어줄 수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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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기껏해야 조금 늘어나고 말 것이라고 생각했던 관객의 수는, 명전의 생각보다 훨씬 많이 늘어 있었다. 라이브클럽 입장권 완판이라는 흔치 않은 일을 해낼 정도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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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내 유튜브 시청자도 늘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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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동안 완만하게 증가하고 있던 명전의 유튜브 구독자수는, 콘서트에 출연한 직후 팍 치솟았다. 아직 구독자 10만이 가시권에 보일만한 수치는 아니지만, 확실히 늘어나긴 한 구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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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고무적인 것은, 영상의 조회수도 확실히 늘었다는 것이다. 원래 조회수가 잘 나오던 커버 영상 외에도, 학교 3인방이 찍으라고 강권한 브이로그와 공연 영상에도 조회수가 들어가는 모양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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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런 이벤트 없이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하면… ‘신비로운 알고리즘’ 때문인가 하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콘서트가 개최된 후 이런 일이 발생했다는 것은, 분명 콘서트의 영향이 유튜브까지 미칠 정도라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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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에 대한 관심이 엄청 많다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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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현상에 대한 의견을 구했을 때, 다인은 그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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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사람들이 ‘그룹 사운드’에 대한 흥미 정도의 관심이 있다면, 유튜브나 트위터 같은 곳에 검색하고 말 일이다. 검색결과가 잘 나오지도 않으니 버즈나 조금 일으키고 끝날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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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지금 추세를 보면? 유튜브 구독자도 늘어나고, ‘비공식’ 팬카페의 회원과 트위터의 팔로워도 늘어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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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어느정도 흐름을 탔다는 걸 의미한다… 고 나는 생각해. 왜냐하면 신규 유입된 사람들이 또 다시 막 이야기를 할 거잖아. 지금 이 그룹이 개쩔어요, 막 노래를 잘 해요. 속칭 ‘노이즈’를 막 만든단 말이야. 그러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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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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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들이 만들어낸 노이즈를 보고, 다른 사람들이 또 유입이 되겠지. 그럼 그게 또 다시 반복되고, 반복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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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명전은 다인의 그런 해석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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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근히 인터넷에 대해서 잘 안단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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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많이 하는 걸까? 명전은 그런 생각을 잠시 해보다 다시 원래 주제로 돌아갔다. ‘그룹 사운드’에 대한 늘어난 관심과 그들에 의해서 생겨날 노이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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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 노이즈는 오래갈 수가 없다. 지금 ‘그룹 사운드’가 가진 것이 몇개 없으므로. 기껏해야 파라독스 공연(요즘은 커버곡과 잼으로 돌려막고 있는 느낌이었다) 정도일까. 그 외에는 명전의 미발표곡, 드라마 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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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생각해보면, 확실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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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를 만들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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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 사운드’에 집중된 관심을 지속적으로 타오르게 하기 위해서는 장작을 넣어줘야 한다. 그리고 밴드의 장작으로는, 좋은 노래만한 것이 없다. 명전은 그렇게 확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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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를 만드는 것은 좋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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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만들어야 될까? 가 현재 명전이 가진 최대의 고민이었다. 물론 써놓은 곡은 많다. 그동안 공연하고, 지원사업에 나가고 등등 하면서 쓴 곡들은 충분히 EP를 낼 수 있는 수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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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명전은 이전의 곡을 재활용하기보다는 새로운 곡을 쓰고 싶었다. 밴드의 시작을 알린다는 느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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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그래서 어떤 곡을 써야 할지 감이 안 온다는 거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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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수 있는 것은 많다. 블루스, 하드락, 사이케델릭, 얼터, 프록, 그 외 기타 등등… ‘서명전’이었다면 모르겠으나 ‘하수연’으로는 어떤 것을 할 수 있느냐가 아니라 어떤 것을 할 수 없느냐고 묻는 것이 더 빠른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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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정작 하고 싶은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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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그 지점에서 애매함을 느꼈다. 나는 이제 뭘 하고 싶은 걸까? ‘서명전’의 연주력과, ‘하수연’의 천재성을 가진 ‘나’는… 이제 어떤 곡을 써야 할까? 어떤 연주를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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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로 가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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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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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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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에서 먹고 올래? 맘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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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그런 제안을 하는 다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세상이 도대체 왜 이렇게 되어버렸는지. 그 뭐야, 어? 라떼인가? 아무튼 말이야, 나 어릴 적에는 점심시간에 밖에 나간다? 상상도 못할 일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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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식도 맛있는데 왜 나가? 오늘 돈까스잖아. 굳이 나갈 필요 없을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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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래~ 언니가 사줄게.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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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의 반문에, 수현이 치근덕거리며 명전에게 달라붙었다. 거기에 또 달라붙는 채린. 명전은 손을 휘둘러 떼어내고는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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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찮지도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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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안에서 먹으면 될 텐데. 학교 급식이 뭐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양념코다리강정 - 명전은 코다리를 좋아했지만, 도저히 이 학교 급식으로 나온 코다리는 좋아할 수가 없었다 - 같은 게 나온 것도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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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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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물러설 것 같지 않은 아이들을 보며, 명전은 한숨을 쉬고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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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예의상 가디건은 걸친 채로, 뒷문으로 은근슬쩍 나간다. 하지만 다인과 아이들은 학교 마크가 찍힌 교복을 당당하게 내세운 채로, ‘숨어야지!’ 같은 과장된 움직임과 시시덕거림을 앞세운 채 슬쩍슬쩍 밖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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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연수때문에 늦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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햄버거 가게에 도착하자, 꽤나 많이 와 있는 아이들. 다인은 그런 외침을 한번 터트리더니, 나 화났다 식의 과장된 움직임으로 테이블에 가서 털썩 주저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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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이나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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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싸이버거~ 감자 추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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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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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할게. 연수 너는 뭐 먹을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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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키오스크 앞에 가서 선 채린의 말. 명전은 자신도 싸이버거를 먹겠다고 하고는, 다인과 마주앉았다. 테이블에 엎드려 있다 프흐흫흫 웃는 다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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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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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재밌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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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을 게 뭐가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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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고생의 감성은 도저히 이해를 할 수가 없다고 명전은 생각했다. 허락되지 않는 행위를 하는 것? 그런 것에서 오는 배덕감? 그렇다고 하기에는 뭔가 좀 시원찮은 행위인데. 점심시간에 바깥에 나와서 햄버거 먹는 게 그렇게 재미있는 일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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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권지! 오랜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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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이 어린 아이들의 감성을 이해하기 위해서 팔짱을 끼고 고민하던 사이, 근처로 온 누군가에게 건네지는 인사. 퉁명스럽게 시비를 걸던 권지혜가 그곳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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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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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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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생각 없이 반갑게 인사를 건넨 다인과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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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명전은, 얘가 왜 또 이러나 싶은 심정이었다. 오며가며 만날때마다 뭐라뭐라 시비 걸고 핀잔 주고 그러는 것 같은데. 무슨 옛날 만화영화에 나오는 악역 같은 포지션인가? 그런 쪽을 노리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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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음악 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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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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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가운 분위기가 될 줄 알았던 아이들의 생각과 달리, 살짝 감도는 긴장감. 권지혜는 음식을 받아오기 위해 카운터를 맴도는 채린의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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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할 생각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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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뭐 한때 하고 안 할까? 내가 음악을 그만두길 원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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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대답에, 지혜는 피식 웃고는 일어났다. 명전은 도대체 얘가 뭘 원하는가 싶었지만, 지혜는 뭔가 말해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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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다. 나중에 연락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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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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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는 사라져버리는 권지혜. 명전은 영문을 알 수 없어 다인을 쳐다보았지만, 다인은 다시금 프흐흐 웃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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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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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말해줄게~ 햄버거나 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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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인은 대답 대신 그렇게 얼버무리고는, 채린이 가져온 햄버거를 한입 물었다. 행복한 표정을 짓는 아이들. 감자튀김을 트레이에 쏟아놓고, 케찹을 찍어 먹으며 연신 별 거 아닌 이야기를 나누는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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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이야기에 참여하지 않은 채, 잠시 턱을 괴고 매장 내를 둘러보았다. 학교 근처에 있어서인가, 어딜 봐도 학생들 뿐. 다들 뭔가 즐거운 표정으로 같이 온 아이와 이야기를 나누며 식사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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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아. 안 먹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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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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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을 때 힘들지 않게 햄버거를 꾹 누른다. 그 다음 살짝 짓눌린 햄버거를 베어 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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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이었다면 질색할 인스턴트 소스와, 부담스러울 정도로 튀긴 치킨 커틀렛과 빵, 그리고 그 외 기타 등등의 조화. ‘하수연’이 되었을 초기에도 마찬가지로 싫어했던 것들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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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제는 막힘 없이 입 안으로 들어간다. 도리어 예전처럼 슴슴한 곰탕이라던지 죽이라던지 하는 것들보다는, 이런 강하고 자극적인 음식들이 더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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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뺨에 소스 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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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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햄버거를 세번째 쯤 베어먹었을 때, 수현이 그렇게 말하며 티슈로 명전의 뺨을 닦아주었다. 괜히 싱글거리는 아이들의 표정을 보며, 명전은 묘한 감정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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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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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언제 연습했는지 모를 안무를 열심히 추고 있는 세 명. 명전은 아이폰 카메라를 든 채로 아이들이 추는 춤을 녹화하고 있었다. 열심히 춤을 추다가 갑자기 삐끗하는 채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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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씨! 아 채린~! 뭐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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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거 자꾸 틀리네. 왜 이렇게 어렵지? 이 부분 막 어렵진 않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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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습을 해 와야 될 거 아냐 이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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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작을 틀린 채린에게 마구마구 핀잔을 주고 있는 아이들을 두고 명전은 촬영을 종료했다. 촬영을 해 달라고 해서 해 주고 있긴 하다만 도대체 왜 이러고 있는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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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하고 있는 이유가 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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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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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틱톡에 올리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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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아이들에게 물었다. 그러자 생각에 잠기는 듯한 표정이 된 3인방. 제일 먼저 입을 연 것은 수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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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도 있고, 이번에 축제 할때 이걸로 나가려는 것도 있고… 무엇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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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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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말해서 이때 아니면 못 하잖아. 그렇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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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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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인의 말에, 명전은 무의식적으로 반문했다.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어서. 그리고 그것은 다른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는지, 동일하게 반문하는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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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사실 언제 해도 상관은 없긴 하지. 하지만 이런 건 지금 아니면 못하잖아. 우리도 대학교 가고, 취업시장 가고, 그러면 뭐 할 시간도 없고 할 나이도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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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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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마음속으로 그 이야기를 굴려보았다. 지금 아니면 못 한다. 진짜 그런가 싶기도 했지만, 진짜 그런 것 같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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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아닌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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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거든. 맞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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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맞다 아니다 이야기를 나누는 3인방을 내버려두고, 명전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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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의 일들은, 확실히 그 이후의 일들보다… ‘밀도’가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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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지금 이때. 별 것 아닌데도 불구하고 친구들과 같이 하면 뭔가 재미있고 행복한. 인생 전체로 보면 별 것 아닌 몇년에 불과하지만… 인생 전체를 살아가면서 다시금 추억하고 추억하는 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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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에 최대한 즐겁게 보내야 하는 시기다. 이후의 인생이 힘들다면, 추억삼아 버텨나갈 수 있도록. 이후의 인생이 즐겁다면, 원동력으로 한발 더 뻗어나갈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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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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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빨리 시작해봐. 찍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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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뭐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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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아이들의 쓰잘데기 없는 말다툼을 끊었다. 명전의 말에, 뜬금없이 뭐냐고 물어보면서도 아이들은 다시 자리를 잡고, 노래를 틀고, 춤을 추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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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에 따라 춤을 추는 아이들. 어설프게 틀리는 부분도 있고, 혹은 잘 해석한 부분도 있다. 제멋대로 하는 부분도 있고, 제대로 잘 따라한 부분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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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이 아이들의 연습 페이스대로라면… 절대 원곡과 흡사한 퍼포먼스가 나올 수 없을 것이다. 그런 건 충분한 시간을 들여 연습에 연습을 거듭해야 나올 수 있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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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런 건 상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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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것은 결과물이 아닌 과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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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너와 우리가 함께 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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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핵심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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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연습은 캔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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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무슨 일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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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잠시 중요한 게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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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일은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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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따로 말해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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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겠다는 대답을 들은 후, 명전은 카카오톡을 껐다. 그는 이런 식으로 일정을 급하게 변경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부모님 상 같은 거라도 나는 게 아니라면, 웬만하면 일정을 다 소화하는 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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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지금은… 뭐 부모님 상 정도는 아니더라도 그 정도로 급한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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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저녁은 안 먹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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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무슨 일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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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뭔가 떠오르는 게 있어서요. 방문은 열지 말아주세요. 집중이 깨질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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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혜인 씨에게도 미리 말해둔 후 명전은 방문을 닫았다. 딱 뭔가 떠오를 것처럼 머릿속이 간질간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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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셉은… 그걸로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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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행을 따라간다고 욕을 먹을지도 모르겠다. 혹은, ‘서명전’을 아는 사람이거나, ‘서명전’의 제자로 ‘하수연’을 아는 사람이라면… 이 양반이 왜 이상한 거 하고 있는지 물어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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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아무래도 괜찮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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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도 어려본 시절 없이 늙을 수는 없다. 그렇기에 모두가 겪어본 시절이고, 그렇기 때문에 모두에게 공감대를 살 수 밖에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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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난하다못해 진부하지만… 그렇기에 다시금 호명한다 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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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 나이대라면, 더할 나위 없이 적절한 그런 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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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면, EP를 제작하기에 적당한 레퍼런스도 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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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밴드… 사일런트 사이렌(Silent Siren). 연령대가 살짝 맞지 않는 부분도 있지만, 구성 자체는 적절하다. 키보드를 포함한 4인 여성 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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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사는, 글쎄. 이서에게 맡길까. 멜로디와 편곡은 명전 본인이 하면 되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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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로디를 만들어본다. 어떤 느낌으로 가야 할까. 청춘이라고 하면 느껴지는, 푸른 하늘에 떠 있는 구름 한점과 같은 그런 싱그러운 멜로디? 너무 단순한 해석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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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점심의 하늘을 생각해본다. 살짝 우중충했고, 비는 내리지 않지만… 흘러가는 구름은 꽤나 많았던 하늘. 그런 어둑어둑한 분위기 속에서도 아이들은 꽤나 쾌활하게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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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식으로 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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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쾌활한 느낌을 주고 싶지는 않다. 그러므로 단조로. 템포는 살짝 느릿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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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는 메인 멜로디를 연주하고. 베이스는 J-Rock식의 리드미컬한 라인을, 사운드를 줄여서 연주시키고. 드럼은 통통 튀는 사운드를 준다. 키보드는 약간 멀리에서 들려오는 것 같은 아련한 느낌으로. 음악을 듣는 사람들이, 과거의 자신을 추억할 수 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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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마지막으로, 오늘 춤을 추던 아이들의 영상을 틀어본다. 춤을 추다 실패할때마다 중간중간에, 서로 장난식으로 다투면서 이야기를 하던 그 대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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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대화들을 배경 화이트노이즈로 만들어 넣는다. 어느 고등학교 하교길을 걷는 것처럼. 들려오는 아이들의 이야기 소리를 배경으로, 청춘의 한 페이지를 써내려가고 있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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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은, 글쎄. 어떤 것으로 지을까 하다가, 명전은 문장 하나를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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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오라, 잿빛의 나날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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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 밥 먹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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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인은 문을 두드려보았다. 하지만 열리지 않는 문. 기색 조차 없다. 어젯밤, 수연이 방에 들어간 이후로 이 문은 단 한번도 열리지 않았다. 심지어 등교시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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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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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원 이후로, 수연은 단 한번도 제시각에 일어나지 않은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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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일어나야 하는 시각보다 더 일찍 일어나, 이불을 개고 커피를 마신다던지 하는 잡일을 먼저 처리하고.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키고, 빗자루로 이런저런 곳을 청소하고. 그러다가 혜인이 일어나면, 혜인이 차린 밥을 같이 먹고. 항상 그랬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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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루틴이 깨졌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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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문은 열지 말아달라고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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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 밤에 작업을 하다가 늦게 잔 걸까? 그래서 아직까지도 자고 있는 걸까? 그런데 이제는 일어나야 학교에 갈 텐데. 혜인은 잠시 망설이다가 문 손잡이를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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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수연이 자고 있다면, 학교에 연락해서 조금 늦는다고 하자. 하루쯤 지각한다 해도 별 일 없을 것이다. 수연이 대학을 평범하게 진학할 것도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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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수연이는 예대를 가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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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발전해버린 생각을 하며, 혜인은 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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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경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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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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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드셋을 낀 채로, 노트북 화면에 골똘히 몰입하고 있는 수연. 눈 밑이 퀭하게 내려온 것이, 설마? 혜인은 수연에게 달려가 어깨를 툭툭 쳤다. 느릿하게 혜인을 바라보는 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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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엄마. 방문 열지 말라고 부탁드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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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아! 지금 아침이야. 설마 밤 샌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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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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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쯤 내려온 눈으로 노트북 가장자리를 응시하더니, 눈이 번쩍 뜨이며 소스라치게 놀라는 수연. 마우스로 이것저것 움직이더니, 바로 헤드폰을 내려놓고는 샤워실로 급하게 뛰어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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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아 오늘 학교 쉬어! 밤 새 놓고 무슨 학교야. 엄마가 선생님한테 말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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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뇨, 학교 가야돼요. 출석을 빼먹으면 안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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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당탕! 하는 소리가 화장실에서 들리고는, “악 차거!” 하는 수연의 비명이 들린다. 사고 이후로는 항상 침착하고 정리되어 있던 애가, 오늘은 왜 저러는지. 하지만 왠지 자기 나잇대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해서, 혜인은 웃음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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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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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오라, 잿빛의 나날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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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 12,853회 / 1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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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가사는 붙이지 않은 곡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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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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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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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튜브 곡 들으면서 뭔가 울컥한 건 처음이네요. 아름다운 가사가 붙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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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느낌으로 쓰신 건지 알 것 같아요 ㅠㅠㅠ 허밍 진짜 대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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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나는 이런 어른이 되어버렸을까? 왜 나는 이렇게 늙어버렸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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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염병떨고있네 씨발 ㅋㅋㅋ 중2병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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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그냥 지나가세요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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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이런 새끼들때문에 우리나라 인터넷이 이모양 이꼴인거임. 이제는 조금만 감상적이어도 중2병이냐고 지랄을 함 ㅉ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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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식 발매 기원 1일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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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데 약간 곡명이 옛날 느낌 나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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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흠;; 그정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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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분 프로인가요? 알고리즘으로 들어왔는데 진짜 미쳤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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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아이돌 노래 밖에 없어서 진짜 지루한데 이런 노래 나와주니 정말 감사 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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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좀 회사일에 지치고 그랬는데, 이 곡 들으면서 힐링이 되는 느낌이 드네요 옛날 학교 다닐 시절의 저는 너무나도 활기찼는데 왜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요. 곡이 완성될 날만을 기다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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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소 /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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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현은 댓글창에 글을 써 놓고, 입력을 누를지 말지 망설였다. 너무 주접으로 보이는 것 아닐까? 하지만 다른 사람들도 대부분 다 그러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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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들의 소리가 들리는데, 이게 사라질때 멀어지는 효과가 나는 걸 보면 등교길이나 하교길 같네요. 아마 잿빛의 나날이라는 것은 그때 당시에는 지루하다고 느꼈던 어린 시절인 것 같습니다. 멜로디도 허밍도 어린 시절을 추억하게 만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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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사도 나오지 않은 곡을 가지고 벌써부터 추리를 하고 있지 않은가. 이런 걸 보면, 세현은 아직 양반인 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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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타쿠인 누나와 살면서, 오타쿠가 벌이는 오만 주접 행각들을 보고… 나는 절대 저렇게 되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했던 세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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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이 다 되어가지고 티켓팅에 열을 올리고, 굿즈를 사고. 자기 인생부터 살아야지 왜 남의 인생을 챙겨주는가? 세상에서 제일 쓸데 없는 것이 연예인 걱정이라고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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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 다짐은 아주 처참하게 깨져버렸다. 누나인 세윤과 같이 갔던 주현의 콘서트에서 본 여고생 밴드. 메인은 주현이었지만, 세윤과 세현은 밴드가 잘 보이는 곳에 앉았고. 그렇기에… 그들에게 빠져들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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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그 곡 들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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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을 작성할지 말지 갈등하던 찰나 불쑥 들어온 누나. 무턱대고 턱턱 걸어오더니, 댓글창을 보고 연신 웃어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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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학교 다닐 시절의 저는 너무나도 활기찼는데 왜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요? 프하핳ㅎㅎ흫헣ㅎㅎ헉ㅎ킇ㅎㅎ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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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웃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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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깨를 한대 세게 때리자, “악 아퍼!” 라고 하며 슥 물러나는 세윤. 세현은 댓글을 지워버린 후, 누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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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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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도 그 곡 들었나보네. 엄청 좋지? 나 진짜 눈물났어. 여기 봐봐. 눈시울 뻘거진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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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내가 왜 당신 눈시울을 봐야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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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닥투닥대던 남매는 잠시 상황을 종료하고 다시 한번 곡을 들어보기로 했다. 서로의 감상을 공유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이 곡을 어떻게 영업해야 할지 포인트를 떠올리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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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재생되지 않는 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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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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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번 더 눌러봤지만, 여전히 재생되지 않는다. 그리고 새로고침을 했을 때… 보이는 것은, 비공개 처리된 영상이라는 메세지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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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이거 왜 이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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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남매는, 몇분 후 커뮤니티에 올라온 메세지를 볼 수 있었다. [실수로 영상을 올렸습니다 ㅠㅠ] 라고 되어 있는 공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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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을 빨리 다운로드 받아놓을 걸 하는 후회를 해 봐도, 이미 늦은 시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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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말했던 것처럼, Ep를 만들 생각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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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라독스 공연을 위한 정기연습일. 하지만 왠일인지 수연은 연습을 빨리 끝내고는, 근처 카페로 향했다. 무슨 일인지 몰라 옹기종기 따라가던 세 명. 그런 그들에게 수연은 그렇게 말하고는, 커피를 쭉 빨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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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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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안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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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그런 이야기 한번 하긴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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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가 뭐지? 이서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들어본 이야기 같긴 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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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는 통상적으로 4~7곡 정도 넣는 음반을 말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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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감해하는 이서에게 들어온 서하의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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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EP는 앨범이 아닌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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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하게는 좀 다르지… 수록곡 갯수에 따라서 1개부터 3개면 싱글. 4개부터 7개면 EP. 일본에서는 미니앨범이라고도 부르고. 그리고 8개 이상이면 앨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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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갯수에 큰 의미가 있나? 다 똑같은 앨범이고 음악이고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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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긴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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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하는 종이 한장을 쓱 끌어오더니, 뭔가를 적었다. 싱글, EP, 앨범의 차이라고 하며 이런저런 것들을 적어나가기 시작하는 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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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에서는 ‘앨범’을 정규 커리어로 쳐줘. 왜인지는 뭐 복잡한데, 아무튼 다른 거는 다 부가적인 거… 말하자면 외전 같은 걸로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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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좀 다르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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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싱글이고 EP고 다 커리어로 보지. 예를 들어 극단적으로 보면 우리가 EP 2개에 싱글 1개를 냈다? 그럼 한국에서는 그래도 음반 좀 낸 밴드잖아. 그런데 외국에서는 아무것도 한 거 없는 밴드로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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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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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그런 것들이 그다지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니까. 아무튼 나는 이번 EP는 그냥 내가 총괄해서 만들려고 하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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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은 그렇게 말하며 사유를 설명했다. 시간이 부족하고, 의견 받아서 진행하면 통일성이 없고, 기타 등등. 꽤나 납득이 가는 이유였기에, 이서와 아이들은 별 불만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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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한 곡은 이미 나왔어. 한번 들어봤으면 좋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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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폰을 내미는 수연. 이서는 먼저 이어폰을 받아 곡을 들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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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두 가지 충격에 휩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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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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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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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도 이서의 취향에 딱 맞는 음악이었다. 약간 일본 애니메이션이랄까, 그런 쪽의 느낌도 많이 나고. 나지막히 퍼지는 허밍과, 브릿지마다 아련하게 들려오는 아이들의 이야기는 뭔가 알 수 없는 노스텔지어를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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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사가 없는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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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이서 네가 만들어줬으면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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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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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 이서 자신이 작사했던 가사가 마음에 드는 걸까? 작을 이번에도 맡기겠다는 수연에게 이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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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두 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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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은 좀 너무 늙은 느낌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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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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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에 왠지 모르게 화들짝 놀라는 수연. 이서는 살짝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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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오라, 잿빛의 나날이여… 뭔가 너무 돌아오라 청춘아 뭐 이런 느낌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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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가. 나는 약간 일본 풍의 제목을 지었다고 생각했는데. 애초에 레퍼런스도 그 쪽에서 잡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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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을 들은 이서는 약간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소년이여 신화가 되어라]나 [소년이여 내게로 돌아와] 같은 느낌인가. 말하고 보니 다 소년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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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한국어로 옮겨놓으니까 뭔가 너무 늙은 노래 같아. 帰れ, 灰色の日々라고 하면 뭔가 있어보이는데… 돌아오라, 잿빛의 나날이여 이러면 뭔가 좀 나이 든 분이 청춘을 되새기는 느낌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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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그럼 이름은 바꿔야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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왠지 모르게 한번 더 당황하다가, 시무룩해진 목소리로 대답하는 수연. 그때 봤었던 어머님이 지어준 제목인가? 그렇다면 탈룰라일 것 같다고 이서는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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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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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반유통을 어떻게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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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를 만들기도 전에 이런 고민을 하는 것이 좀 웃기긴 했지만, 아무튼 중요한 부분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창작물이라는 것은 만든다고 다가 아니니까. 남에게 알려져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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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홍보도 홍보지만 유통도 문제가 있었다. 디지털 싱글도 아니고 EP 정도면, 실물 음반을 찍는 것이 보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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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음반을 직접 만든다고 하면 CD 케이스 구매하고, CD 사와서 굽고, 프린트 부착하고, 내부 속지 넣고, 기타 등등… 그런 작업을 일일히 다 하거나. 혹은 그런거 해 주는 업체와 직접 컨텍을 해서 가격협상을 하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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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그걸 언제 다 하겠는가? 레이블에 맡기지. 그런데 레이블에 맡기자니? 이런저런 문제가 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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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를 발매하자니 이런 문제가 생기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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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모로 골치가 아픈 상황이라, 명전은 골머리를 싸맬 수 밖에 없었다. 그냥 레이블을 들어갈까? 들어가면 아무래도 EP 뿐만 아니라 홍보나 여타 다른 부분에서 장점이 많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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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또 들어가자니 이런저런 부분이 걸린단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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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레이블에 들어가게 되면 그 레이블의 음악적 성향에 제약을 당할 수 밖에 없고, 음반을 원할 때마다 낼 수도 없다. 그 외 다른 문제들도 많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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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이블을 들어가는 것 자체가 편한 것 또한 사실이기에… 명전은 여러모로 고민을 할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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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아. 저녁 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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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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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숨을 내쉬기보다는,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예를 들어 밥 먹기 같은. 명전은 그렇게 생각을 하며 식탁에 앉았다. 꽤나 먹음직스럽게 구워진 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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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전에 엄마가 말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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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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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범. 혹시 만들 계획 있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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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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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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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있긴 하죠. 만들려고 곡도 작곡하고 있구요. 전에 밤샜던 게 그 곡 만들려고 했던 거라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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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의 대답에 얼굴이 밝아지는 혜인. 왜 그러냐고 명전이 묻기 전, 혜인이 먼저 말을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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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됐다. 엄마가 얼마 전에 레이블을 하나 샀거든. 그쪽에서 앨범 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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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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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블을… 샀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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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저히 믿기지 않는 혜인의 말에, 명전은 어이가 없어서 반문부터 했다. 아무리 혜인이 돈이 많다 한들 개인의 돈으로 회사를 살 정도였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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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정확하게 말하면 산 건 아니야. 산건 아니고, 투자를 좀 크게 한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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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반응이 돌아올 줄 몰랐다는 표정으로, 혜인은 자신이 한 일을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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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수연이 음악활동을 하는 걸 보고, 혜인도 음악에 대한 관심이 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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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그런데 이게, 사람만 잘 고르면 수익이 꽤나 잘 벌릴 사업 같더라. 게다가 초기 자금이 엄청 필요한 것도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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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그렇다면 레이블을 사면 수연도 밀어주고 좋지 않을까? 사업구조의 다변화도 꾀할 수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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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과정을 거치다보니, 이렇게 되었다는 게 혜인의 설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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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샀다는 이야기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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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과연 팔불출 어머니의 마음인가, 혹은 사업가의 마음인가. 사업에 사사로운 감정이 개입되어도 되는 건가? 거 어디 유튜브 보니까 코스피가 오너 리스크인지 뭔지로 저평가받는다는데. 다 이런 것 때문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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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산게 아니라니까! 수연아. 엄마는 그냥 투자를 한 거야. 미래에 대한 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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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미래에 대한 투자 맞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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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 샀다고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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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무룩한 혜인의 대답을 들으며, 명전은 생각했다. 세상 어느 엄마가 “아! 우리 딸이 음악 하는데 음반사를 사야겠다!” 라고 하나. 걱정도 과하면 방해가 된다. 애들은 놓아서 키우는 거지, 언제까지 우쭈쭈 할 것인가. 실패할 줄도 알고, 인생의 쓴 맛도 봐야 어른이 되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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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머리를 꼬다, 갑자기 다른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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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엄마’는 돈이 얼마나 많은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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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인이 돈이 이렇게 많다면, 굳이 뭔가 이렇게 세션 돌면서 돈 벌 필요가 없지 않나? 돈 필요할 때마다 “엄마 돈좀 주세요.” 이러면 “그래 수연아!” 이러면서 막 줄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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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생각을 하던 명전은, 고개를 흔들어 그 생각을 털어버렸다. ‘엄마’의 돈은 ‘엄마’의 돈일 뿐. 필요하면 지원을 받겠지만, 그 외에는 자력으로 버는 것이 이치에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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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그래서, 이번에 제 EP를 그쪽에서 내라는 말씀인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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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 그래서 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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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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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랑 같이 그 레이블에 가보지 않을래? 사실 엄마는 레이블에 대해서는 잘 몰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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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무슨 소리인가 하는 명전을 두고, 혜인은 다시 설명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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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블의 경영상태는 서류상으로 볼 땐 나쁘지 않아 보이는데, 제대로 운영을 하려면 좀 쳐내야 할 부분이 있을 것 같다. 내부 사정도 제대로 체크하고, 직원들의 상태도 점검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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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엄마의 편견일지는 몰라도, 음악하는 사람들은 좀… 그런 게 있잖아? 예술 이해 못하면 무시하는. 약간 그런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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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다곤 할 수 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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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수연이랑 같이 갔으면 좋겠어. 수연이는 음악을 하니까. 좀 말이 통할 거 아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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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종로구에 산다고 서울 강남 사람이랑 말이 통하겠는가? 명전은 혜인의 이야기가 그런 레벨의 이야기라고 생각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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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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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그런 대답이나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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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사무실 근처에 주차되는 벤츠 S클래스를 바라보았다. 내리는 사람은 2명. 직장인 여성이 분명해보이는 사람 한명과, 교복을 입은 여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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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주주님? 투자자님? 아무튼 오신다고 하니까. 다들 정신 차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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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갑자기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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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라. 퇴근 시간 전쯤에 오신다고 했는데, 내가 오늘 급하게 출장을 나가야 해서. 애들 사고치게만 하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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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말을 하고 자기 혼자 도망가버린 사장을 원망하며, 팀장은 직원들이 사고를 제발 치지 말아달라고 기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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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젊은 애들만 뽑았더니, 약간 개념이 없는 부분도 있는 것 같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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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장이 ‘음악에 뼈를 묻으러 왔습니다!’ 라고 말하는 애들만 뽑은 걸로 아는데. 그러다보니 일은 열심히 하는데… 그 외의 부분이 영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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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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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저는 김숙희 팀장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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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에 들어가자 인사를 해 오는 직원들. 사람들의 수는 적다. 40대 정도로 보이는 팀장과, 20대 정도의 직원 몇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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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럭키금성이 찍힌 선풍기, 낡았지만 쌩쌩해보이긴 하는 에어컨과… 대비되는 최신형 컴퓨터들. 영 궁핍해보이는 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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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이런 일은 젊지 않고서야 못 하는 일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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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예전의 일을 떠올려보았다. 확실히 그가 살았던 시절에도 음반사나 레이블에 소속된 직원들이 돈을 잘 벌진 못 했지. 하지만 쪼들려가는 신세에도 사업을 계속 하거나 그런 쪽에 계속 종사했던 사람들은, 아무래도 음악 산업에 공헌하겠다는 신념의 소유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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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것이 대단한 것 같기도 하고, 미련한 것 같기도 하고. 인생을 내던지는 일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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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쪽에 앉으세요! 그 커피… 저희가 있는 게 그다지 없어서. 종혁아! 저기 투썸 가서 커피 좀 사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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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에요~ 괜찮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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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뇨 그래도 투자자님 오셨는데. 아메리카노? 카페라떼? 아 라떼요. 따님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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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대답을 하고는 사무실을 다시 둘러보았다. 그 사이 자기 카드를 건네주는 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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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저희 대표님이 오늘 출장을 가셔가지고. 오시는 줄 알았으면 안 잡으셨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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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뇨 뭐… 그렇게 신경쓰실 필요는 없구요. 자료나 몇장 보고 커피 한잔 하고 가려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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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돌아온 직원. 커피와 디저트 한두개를 탁자에 올려두더니, 봉지에 가득한 디저트들은 자신들이 먹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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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게 맞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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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를 사오랬는데 디저트는 웬말이요, 그걸 자기들이 다 까먹는 상황. 명전은 화를 낼까 했지만, 그냥 내버려두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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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 서포트 해준답시고 회사를 산 사람에게 몇만원치 디저트값이 그렇게 크게 와닿겠는가. 당 땡길때기도 하겠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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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수입원은 이전에 듣긴 했는데요. 관련 자료를 볼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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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자료가… 여기 있긴 한데. 지금 정리가 안 되어 있어가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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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름만 파악하려는 거니까요. 서류만 봐서는 알 수 없는 부분이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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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합니다. 잠시만요. 희주야, 음원 판매 관련 서류 좀 다 뽑아와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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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준비 안 되어있는데요… 라는 대답에 미간을 찌푸리는 팀장. 혜인은 커피를 홀짝 마시더니, “일단 준비되어 있는 것만 보여주세요.” 라고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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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해보자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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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장과 혜인이 서류를 정리하는 걸 보면 대충 끝난 것 같은 분위기. 그 사이에서 명전이 들은 것만 정리해보면, 레이블의 상황은 다음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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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통대행 등을 맡으며 관리하고 있는 곡은 총 5천여 곡. 관리하고 있는 밴드와 가수 등은 약 100여 그룹이며, 직접 관리하고 있는 인원수는 약 30명 정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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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곡 심사는 내부 직원들이 한다. 그렇게 꼼꼼하지는 않고, 손해를 보는 부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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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프로듀싱 팀이나 연습실 같은 것은 없다. 자체 프로듀싱을 해 와야 하며, 필요시 외부 인력 및 장소를 소개시켜줄 수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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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인디 차트 및 굿즈 샵, 실물 음반 제작 등을 대행한다. 이 때 미술작가들과 협업을 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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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봐야 될 부분이 많겠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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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이 듣기에도 그런데, 혜인이 듣기에는 어떻겠는가. 하지만 혜인은 사회인답게 미소를 지으며 다른 것에 대해서 묻기 시작했다. 주로 음악 관련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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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이번에 투자를 하긴 했지만, 레이블에 대해서는 잘 아는 게 아니라서요. 주로 어떤 업무를 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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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전문분야였던 아까 전과 달리, 지금은 좀 다른 분야라서 그런 것일까. 싸늘했던 목소리는 나긋나긋하게 변해 있었다. 풀어진 분위기에, 신나게 자신들의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하는 직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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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택을 오는 것들을 걸러내는 것 자체가 힘들단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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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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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죠. 잘 모르실 수도 있는데, 음악이라는 게 이게 훈련이 되어 있어야 하거든요? 듣는 게. 그냥 들어서 듣기 좋다~ 하는 건 일반인들이나 듣는 이지리스닝 곡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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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같은 인디 레이블은 그 이상의 뭔가를 추구해야 하는데. 이게 훈련이 안 되면 잘 모르죠. 많이 들어봐야 알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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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사람이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준다는 것이 좋은 건가. 팀장의 미간이 점점 찌푸려짐에도 불구하고, 직원들은 이야기를 두서없이 늘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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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모르시겠지만~”, “아니 이런 게 좀 음악하는 사람들은 잘 아는데. 일반인들은 잘 몰라요.”, “잘 아는 사람들은 다 알죠. 훈련이 되어야 알 수 있어요. 들어보셔도 잘 모를 거에요.” 같은… 은연중에 남을 무시하는 이야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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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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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가질 수 있는 습관이고, 누구나 할 법한 말투. 하지만 상당히 중요한 사람을 만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스스럼없이 저런 말을 구사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게다가 아까 들어봤을 땐 직원들의 귀가 그렇게 좋은 것 같진 않았는데, 저런 식으로 말을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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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저트 건’과 엮어서 생각해보면… 직원들의 근무 행태는 말 안해도 뻔했다. 아마 혜인이 전원 권고사직 형태로 잘라버리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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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생각하면, 저런 말 쯤 대충 뭐 흘려넘겨도 될 일이긴 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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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저렇게 “한번 들어보신다구요? 잘 모르실텐데…” 라고 말을 듣고 있는 사람은, 뭐가 어찌되었든 ‘엄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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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그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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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좀 무례하신 것 같은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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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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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자꾸 너는 모른다, 우리는 잘 안다… 그런 식으로 은근슬쩍 저희를 무시하시는지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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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묵히 있던 ‘투자자’의 딸이 갑자기 내뱉은 말. 살짝 당황스러워진 분위기를 수습하기 위해, 직원 중 한명인 지혜가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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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시하는 게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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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시하시는 거 맞지 않나요? 아무리 들어도 그런 것 같은데, 그럴 자격이 되는지도 솔직히 잘 모르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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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혁은 그 말이 어처구니 없다고 생각했다. 자신들을 무시한다고 말하며 직원들을 무시하고 있지 않은가. 자기들은 무시해도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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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근데 사실 저희 말이 맞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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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말이 맞다고요? 뭐가 맞아요. 아까 들어보니까 심사한 곡에 대해서 수익도 뭐 그렇게 잘 나오는 편이 아니라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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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합니다. 저희 직원들이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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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의 말에 바로 사과를 하며, 종혁에게 사과하라고 눈치를 주는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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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종혁은 사과를 할 마음이 없었다. 정확히는 저 말을 듣기 전까지는 ‘투자자’에게 사과할 마음이 있었으나, 저 이야기를 들으면서 ‘삔또’가 확 상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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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말이야 잘못 한 건 잘못 한거고. 투자자면 다인가? 음악을 모르는 것은 사실 아닌가? 자기들이 들으면 뭐 잘 아나? 경영적인 부분은 존중해주고, 음악적인 부분은 존중받고. 이래야 하는 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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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좀 심하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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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심한건 여러분들이겠죠. 길거리에 돌아다니는 사람한테도 그런 말이 실례가 될 텐데 투자자한테 그렇게 말해도 됩니까? 그쪽도 뭐 그렇게 재능있고 그래보이진 않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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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수연아. 엄마는 괜찮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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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과열되어버리는 분위기에, 말리기부터 하는 ‘투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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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종혁은 이미 이까지 온 상황에 더 물러설 수 없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여기에서 사과해봐야 쪽팔리기만 하고 수습은 안 될 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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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혁이 지금은 음악을 안 하고 있지만, 그래도 옛날에는 기타 좀 치고 음악 좀 하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무슨 투자자 명함 들고 들어와서 깝쭉거리나. 그것도 본인도 아니고 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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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음악 모르는 것 같은데 우리가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거 아니에요? 투자는 고마운데, 돈 내시면 단가요? 우리도 잘 모르면 그쪽은 뭐 잘 알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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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혁! 너 뭔 미친 소리야. 이 새끼 지금 뭐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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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이 그렇게 쉽습니까? 들으면 성공하는 곡 바로 알게? 아니 뭐 저보다 음악 잘 안다고 생각하시면 저기 뭐 기타라도 몇번 쳐보시든가. 악기는 다룰 줄 알고 말하시는 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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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각한 분위기에서 난데없이 흡 웃는 투자자. 그리고 ‘딸’은, 약간 어이없다는 듯 기타를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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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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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는 어떻게 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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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쳐 주니까 조용해지던데. 분위기 완전 박살나고. 나중에 대표인가 그 사람이 전화와서 미안하다고 막 엄마한테 사정사정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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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사람이 진짜 있긴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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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별 사람 많잖아. 왜 내 근처에만 이런 사람들이 꼬이는지는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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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커피를 쭉 빨아들였다. 그러고는 어떻게 됐을까? 짤렸을까? 아마 정리하는 수순으로 가겠지. 애초에 혜인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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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 수 없긴 해. 그런 곳은 열정만 가지고 적은 페이 받아가면서 일하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아무래도 그런 부분에서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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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는 적게 받고 일 안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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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든 본 적도 없는 사람을 쉴드쳐주려던 이서는 서하의 말에 침몰했다. 그렇게 웃던 분위기. 명전이 주현에게 온 쓰잘데기 없는 안부 확인 카톡을 읽고 대답을 해 주는 동안, 다시 이서가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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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사람들이 대단하긴 한 거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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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가? 회사 인수한 사람 불러다놓고 음알못 취급하는 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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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아니라… 뒤가 없는 것 같은 느낌? 한국인은 본능적으로 뒷일을 두려워한다잖아. 최악의 상상을 하고 살고. 그런데 그런 사람들은 뒷 일 같은 것은 전혀 생각을 안 하잖아. 대단하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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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어떻게 되지? 라고 중얼거리는 이서. 그 말에 명전은 갑자기 곡의 영감이 떠올랐다. 뒷 일은 생각하지 않는다는 그런 모습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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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 일은 생각하지 않는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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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와서 노트북을 앞에 둔 채, 명전은 이서의 말에 대해서 생각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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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시절의 추억. 난로에 도시락을 데워 먹던 어린 시절. 그 시절의 명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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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아니면 안 된다 같은 생각을 하긴 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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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머리가 커지고 나서도 기타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을 했던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그 때는 그게 더 심했던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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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일아. 나는 비틀즈가 되거나, 혹은 절벽에서 몸을 던지거나 둘 중에 하나만 하겠다.”라고 말했던 것 같은 기억도 있다. “씨벌 그게 뭔 소리여” 라고 홍일이가 대답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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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당시에는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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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실패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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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일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은채로, 그저 ‘나는 기타로 성공하겠어!’라고 외칠 수 있었던 계기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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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으로, 명전은 옛날에 보았던 고시엔 경기 하나를 떠올렸다. 두 투수 다 결승전에서 15회 완투를 하고, 다음날 또 9회까지 완투를 했던가. 대회 내내 950개의 공을 던지고, 결승전에서는 이틀 간격으로 24이닝을 던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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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을 지탱했던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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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은 아프지 않았을까? 여기서 이렇게 자신을 혹사하면, 그 다음은 어떻게 될까 하고 생각해보지 않았을까? 미래에 대한 걱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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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명전은 얼마 전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아무 생각 없이 투자자 앞에서 말을 내뱉고. 뒷 일이 어떻게 되는지는 생각하지 않은 채, 현재 자신의 감정에만 충실했던 그 사람. 십대와는 살짝 거리가 멀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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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은 왜 그렇게 행동했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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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 일이 두렵지 않았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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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쳐오지 않은 미래보다 맞닥뜨린 현재가 더 중요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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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올린 생각 중 하나는 중립적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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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는 긍정적이고, 하나는 부정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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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통점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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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에 자신을 내맡겼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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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보다는 감정으로 행동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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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삶의 방식을 좋다고 나쁘다고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저 다른 것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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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에 명전은, 그 찬란함에 대해서 노래할까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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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을 내팽겨친 채로, 단지 던지고 싶고, 지금이 아니면 할 수 없다는 이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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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자신을 불태워버리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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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염이 지나간 후, 숲이 다시금 살아날지… 폐허가 될지는 모를 일이지만. 아무튼 불꽃 자체는 아름다운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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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는, 잠시 생각한 후 그러지 않기로 했다. 불꽃은 찬란하다. 찬란하고 찬란하지만, 동시에 덧없지 않은가. 한번의 불꽃을 위해서 인생을 불태우다니. 그 불꽃이 그만큼 가치가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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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대신 그 다음을 이야기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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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마가 휩쓸고 난 다음의 숲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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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버린 재가 양분이 되어, 새로운 싹을 피울지도 모르고… 혹은 그대로 죽어버린 숲이 될지도 모르지만. 누군가는 그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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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전부 내던질 필요는 없다는 것을. 순간의 감정에 모든 것을 내맡길 필요는 없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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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던진 자의 슬픔에 대해서 노래함으로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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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다시금 키보드를 잡았다. 느린 템포의 단조 곡인 것은 이전 곡과 같다. 구성도 동일하다. 드럼, 키보드, 기타, 베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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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박자는 살짝 위태위태한 5분의 4박. 멀리서 아련하게 들려오는 사이렌 소리를 반복적으로 넣는다. 불안감과 긴장감을 조성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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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기의 비중은 어떻게 둘까. 명전 자신이 기타를 잘 다루니, 이번 곡에서도 기타를 메인으로 둘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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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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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는 정말 최소한으로만 둔다. 중간중간에 들어가는 사운드로만. 그리고 스트링을 조금 넣는다. 살짝 장송곡의 느낌이 나게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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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브는 뭐, 어떻게든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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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 안되면 이 곡은 라이브 안 하면 될 일이다. 그리고 키보드는… 스트링과 같이 곡을 따라오게끔 만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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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것은 드럼과 베이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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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드럼에는 5분의 4박으로 모자라, 끊임없는 변박을 준다. 서하가 연주가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고생을 좀 해 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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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반해 베이스는 튀지 않는 리프로, 화려함 없이. 오로지 리프에 기반한 연주만. 단조로운 기반 위에서 드럼이 춤출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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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장송곡 같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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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어놓고 나니 너무 처지는 느낌이다. 드럼이 춤추고, 베이스도 살아있긴 하지만… 보컬 라인이 들어간다고 해도 처진 것을 살릴 수는 없을 것 같다. 애초에 그 정도로 부를 생각도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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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의 전체적인 그림을 다시 한번 조망해본다. 춤추는 드럼 아래서, 연주되는 단조로운 베이스. 간혹 가다 스트로크만 연주하는 기타. 그리고 불안하게 들려오는 사이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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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배경. 화마에 휩싸여 불타버린 피안을 묘사하기 위한 파도 소리를 넣어본다. 희미한 철썩임과 대해에서 들려오는 사이렌 소리. 뱃고동 소리도 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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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곡이 시작할 때, 키보드 트레몰로를 넣어본다. 떨려오는 느낌을 주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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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작업은 이걸로 된 걸까. 그렇다면 다음은 어떻게 할까. 곡에서 지속적으로 느껴지는 회한을 내버려 둘 것인가, 해소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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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음악적 취향은, 그대로 내버려두는 것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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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가면 너무 암울한 곡이 되어버리겠지. 듣는 재미도 없고. 그렇다면 어떻게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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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팔짱을 끼고 DAW를 쳐다보았다. 기타를 넣는 것이 무난하고 자신도 있다. 하지만 너무 무난한 선택이고, 재미도 없다. 기타는 최소로 넣고, 이 곡에서 자신의 역할은 보컬로 한정하고 싶은 것이 명전의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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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하이라이트를 줘야 된단 말이지… 그렇게 고민하던 명전은, 하나의 결론에 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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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악기를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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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스 스케일의 트럼펫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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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는 사람이 회한을 극복해낼 수 있도록. 슬픔을 승화시키는 블루스처럼, 결국 불탄 숲에도 비가 내리면 새싹이 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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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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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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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너무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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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범 세션을 위해서 오랜만에 만난 수연. 그런 수연이 들려준 노래를 듣고, 채호근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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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 학생이 몇살이라고 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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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2학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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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근데 고등학생 2학년이 이런 곡을 만들면… 나 같은 늙은이는 무슨 곡을 만들란 말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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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이 들려준 이야기에 의하면, 이 곡은 젊은 사람들이 순간의 감정에 모든 것을 맡기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의미로 쓴 곡이라고 했다. 과연 그것이 곡으로 가능한지는 둘째치고, 일단 발상부터가 좀 남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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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나이 때는 모든 것을 불사르겠다, 그런 곡을 쓰지 않나? 사랑에 인생을 바치겠다. 노래에 모든 것을 바치겠다. 그런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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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전체로 보면 너무나도 사소한 일들. 하지만 그것을 너무나도 중대하게 여기고, 그를 위해 모든 것을 걸겠다고 하는. ‘하수연’은 분명 그런 연령대였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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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써 온 곡은 왜 이렇게 동년배같은 느낌인지. 나이를 먹어도 몇배는 더 먹은 것 같은 아이지만, 실상은 여고생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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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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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 정도 맞아요. 겸손해 하지 말고 평가를 그대로 받아들이세요. 내가 이렇게 후학을 칭찬하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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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님 뭐 하세요? 무슨 문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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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둘이서 이야기를 나누던 와중, 끼어들어온 드럼 세션. 호근은 양해를 구하고 그에게도 노래를 들려주었다. 드럼이 감탄하는 사이 하나둘씩 모여드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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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수연 학생이 만든 거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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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저 나이때 뭐 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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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천재다 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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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운지 1년밖에 안 됐다고 하지 않았어요? 이게 진짜 재능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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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세션들의 반응에 살짝 얼굴이 빨개지는 수연. 호근은 박수를 쳐 주의를 환기하고는, 세션들을 자리로 다 돌려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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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식으로 발매할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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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로 생각하고 있긴 한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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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음이 끝난 후, 다과상이 어느새 준비된 스튜디오 밖에서 호근은 커피를 들어올리며 물었다. 그 말에 답하는 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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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통 밴드라면 정규 앨범부터 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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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긴 한데, 지금은 좀 빨리 앨범을 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이 되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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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말하며 수연은 사정을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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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밴드는 현재 파라독스에서 공연을 하고 있는데, 최근에 정부지원사업에서 떨어졌다. (수연은 이 부분을 호근에게 상세하게 늘어놓았고, 호근은 상당히 분노했다) 그리고 주현의 콘서트에 세션 밴드로 참여했는데, 그게 계기가 되어서 팬들이 꽤나 많이 모여들고 있다는 이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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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부분이 있어서, 조금 빨리 일을 진행하려고 하거든요. Ep를 한 4~5곡 정도 해서. 프로듀싱 좀 붙이고, 홍보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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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있는 생각이긴 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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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석적인 루트라고 호근은 생각했다. 물론 예전의 밴드들이 하던 방식은 아니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변화해버린 음악 산업인데 아쉬운 놈이 따라가야 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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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레이블에 낼지는 정했습니까? 레이블도 꽤나 중요한 요소긴 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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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레이블은 어때요? 음악 엄청 좋던데. 내가 많이 팔아줄 자신이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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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근의 말에, 갑자기 사냥감을 발견한 사자마냥 달려드는 사람들. 서로 자신의 레이블에 오라고 난리치는 세션들이었지만, 수연은 “이미 레이블은 정했어요.” 라는 대답으로 다 물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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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문제가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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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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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블이 좀 인디라서, 홍보가 안 되는 상황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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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홍보… 같은 소리가 이어진다. 아마 이 사람들도 별다른 방법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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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도 그럴 것이, 만약 ‘곡과 앨범을 띄울 수 있는 좋은 방법’이 있으면 락이 왜 이 꼴이겠는가? 이미 그 방법 쓰고 락 전성시대 왔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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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문제는 어딜가도 다 마찬가지긴 하겠지. 지금 내가 이렇게 앨범 내는 것도 뭐… 몇장이나 팔리겠어요? 그래도 음악 활동은 계속 이어가야 하니까 하는 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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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교수님 앨범은 좀 잘 팔리는 편이죠. 저는 얼마전에 냈던 거 알아보니까 육백장 팔렸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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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정도면 그냥 안 내는게 이득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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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세션들의 대화. 명전은 그가 아무리 홍보를 하지 않는다 해도 음악이 저 정도로 안 팔릴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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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아무튼 홍보 자체는 해야 했다. 존재를 모르는데 어떻게 구매를 하겠는가. 바이럴마냥 수요 없는 공급을 돌리지는 않더라도, “이런 곡이 있습니다. 한번만 들어보실래요?” 정도는 되어야 사람들이 존재를 아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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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이런 곡이 있습니다. 한번만 들어보실래요?” 를 어떻게 하냐는 것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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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끼리 이야기해봐야 답 안나오긴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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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션 중 한 사람의 이야기를 계기로, 슬슬 파장되는 커피 타임. 명전은 어떤 식으로 홍보를 돌려야 할지 계속해서 고민을 해 봤지만, 뭔가 뾰족한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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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정확히 말하면 뾰족한 수는 많았다. 대부분이 좀 그렇다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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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 뭐 음원 사재기라거나, 바이럴 같은 거 돌리면 충분히 뜰 만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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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엔 틱톡 바이럴인가? 하는 게 대세라고 했던가. 아무튼 돈을 어떻게든 끌어와서 그런 바이럴에 부어버리면 홍보는 잘 될 터. 하지만 그렇게 하고 싶진 않다는 것이, 명전의 솔직한 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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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근처 사람들한테 들려줘도 되죠? 뭐 미공개곡이라서 공개하면 곤란하다던가 그런 거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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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혀 없습니다. 듣고 표절만 안 해주시면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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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상도덕이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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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말을 남기고 헤어지는 세션들. 명전은 딱히 좋은 생각을 떠올리지 못한 채 그냥 집으로 향할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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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그것은 필연이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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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오늘 방송은 여기까지 할… 까 하는데. 음. 더해달라고요? 방금 카톡 소리 뭐냐고요? 그러게요. 뭐지. 재현이형이 왜 이 시간에 카톡을 보내. 무슨 노래를 보냈는데? 틀어달라고요? 어 잠시만요. 이거… 틀어도… 돼요? 답장이 없네. 그냥 틀어도 되지 않을까요? 한번 들어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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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의 곡이 흘러흘러 들어가, 메이저 기획사의 보이밴드 멤버에게까지 흘러 들어가… 느닷없이 시청자가 수천명이 넘는 인스타 라이브에서, 그대로 재생되어버린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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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돌이 씬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는 사람들의 생각과는 다르게, 한국 메이저 음악 시장에는 의외로 밴드도 존재한다. 문제는… 그 밴드들은 대부분 다 아이돌 그룹처럼 사용된다는 것이고, 소비된다는 것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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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 기획사에서 나오는 프로젝트형 그룹, 라이브에서의 립싱크, 음원 차트 싸움, 싱글 및 EP 위주의 발매 등등. 그들 자신과 팬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일반인들이 보기에는 그냥 또 다른 아이돌 그룹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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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명 ‘류진’, 본명 ‘서진우’는 그런 그룹에 소속된 뮤지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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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인생 여정은, 그가 받는 인식과 비슷했다. 어느 날 기획사의 스카우트를 받고 서울로 상경해서 연습하다 보이밴드로 데뷔해서 성공한 인생. 자기 자신은 ‘특별하다’ 라고 느끼겠지만, 타인이 보기에는 ‘전형적이네’ 라고 생각할만한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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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은? 남들과 비슷하게, ‘내가 뭘 하는 거지?’ 같은 느낌으로, 시키는 대로 하는 삶을 살고 있는… 보이밴드 ‘Projeckt 6’의 멤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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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도 작곡 하시나요? 네 합니다. 오늘은 어떤 곡 만들어볼까요? 좋은 곡 만들어달라고요? 제가 작곡은 이제야 공부하고 있어서요,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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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 중 하루. 그가 인스타 라이브를 키는 시간. 은근슬쩍 올라오는 [퇴물] 같은 긁는 채팅은, 메이저 소속 몇년의 짬을 통해 본능적으로 시선 밖으로 내보내버리며, 진우는 팬들과 소통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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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에 그거 뭐냐고요? 머리를 맑게 해주는 음료입니다~ 아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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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짝홀짝 맥주를 마시며 진우는 오늘도 프로그램을 만졌다. 작곡보다는 팬들과 이야기를 하는 시간이 더 많았지만, 그래도 몇달 동안 뭔가를 한 보람이 있는 모양인지… 뭔가 조금 완성되어가는 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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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오늘 방송은 여기까지 할… 까 하는데. 음. 더해달라고요? 방금 카톡 소리 뭐냐고요? 그러게요. 뭐지. 재현이형이 왜 이 시간에 카톡을 보내. 무슨 노래를 보냈는데? 틀어달라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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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시점은 처음으로 돌아온다. 아무 생각 없이, 술 한잔 걸친 진우가 그룹 사운드의 미공개곡을 유출시킨 그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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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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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소속사의 작곡가 형, 성재현이 보내온 [잿빛의 나날들]이라는 노래. 진우는 맥주도 한잔 한 김에, 살짝 취한 상태에서 그 노래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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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처음에는 놀랐다. 그 다음에는 침묵했고, 끝날 무렵에는 눈시울이 붉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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잿빛의 나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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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제목과, 가사도 붙지 않은 곡이었지만… 진우는 이 곡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왠지 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특히 곡의 분위기가, 자신의 인생을 그대로 말해주는 것 같아 더더욱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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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이 너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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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처음 스카웃을 받았을 때. 그는 이제는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만 하며 살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르며, 작곡을 하며. 좋은 사람들과 함께, 좋은 음악을 만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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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현실은? 연습, 연습, 연습. 젊었던 시절은 이미 지나간지 오래. 눈을 감았다 뜨니 다가온 군대. 그의 청춘은 덧없이 사라졌다. 그런 억울함은 회한이 되고, 그 회한마저도 사라진 것이 지금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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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곡은, 그의 옛 시절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듯 했다. 찬란했던 시절을 추억하게 만드는 듯 했다. 그 시절에 누려야 했던 즐거움을, 조금이나마 보상해주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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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저 보여요? 막 눈물난다니까. 큽! 죄송합니다. 술… 머리가 맑아지는 음료를 한잔 했더니, 이게 감정 조절이 안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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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진님 곡 뭐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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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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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곡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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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헐 유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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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거 올리면 안 되는 거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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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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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이드 보컬 분 노래 너무 좋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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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큰일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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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팅창은 미발매곡을 유출한 것 아니냐며 난리를 피우고 있었지만, 진우는 노래에 심취해버리고 술에 취해버린 탓에 그 채팅들을 자세히 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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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좋네요. 이런 곡 받았으면 진짜 좋겠다. 밴드곡. 만드신 분이 누구지? 아, 그냥 재현이형이 보낸 거구나. 들어보라고. 어, 이름이 안 나와있네… 응? 이거 어…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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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황한 듯한 진우의 목소리를 들은 사람들의 반응은, 3가지로 나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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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Projeckt 6의 충직한 팬. 지금 뭔가 사고가 터진 것 같으니, 빠르게 커뮤니티로 달려가서 사건을 덮고 ‘류진’의 인스타 라이브를 종료시키기 위해서 전력을 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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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별 생각 없는 팬. 이건 미공개 유출곡이 분명하니, 빠르게 립을 따 놔야 한다. 미리미리 들어놓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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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Projeckt 6의 안티팬. ‘류진’이 사고를 친게 분명하다. 빠르게 곡을 따놓고 이놈이 사고를 쳤다고 동네방네 소리를 지르자. 프로젝트 식스 류진 논란.jpg 정도면 적절한 제목일 것 같다. 동네사람들 이것 좀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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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태를 수습하지 못하고 어떻게 해야 되나 얼타면서도, 곡이 좋아 술 취한 머리로 한번 두번 더 재생한 진우. 그런 진우를 뜯어말리는 팬, 립을 따는 팬, 논란거리를 어떻게든 만들려는 안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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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그룹이 뭉쳐 만들어낸 어처구니 없는 시너지는, 한밤의 인터넷 전체는 아니더라도 한 모퉁이 정도는 충분히 태울 화력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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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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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일어나자, 명전에게 와 있는 엄청난 양의 카카오톡. 보이스톡도 오고, 뭐 다른 톡도 오고. 잘때는 알림을 무음으로 설정해놨기에 망정이지, 진동이나 소리로 알림을 설정해놨으면 잠을 못 잘 수준이었겠구나 하고 명전은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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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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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혀 모르는 사람한테도 막 카톡이 와 있는 걸 보면 무슨 일이 있는 건가? 어디어디 인터넷 신문 기자입니다 같은 톡도 있고. 보이밴드 Projeckt 6 멤버 류진입니다… 이건 뭐야? 그런 사람이 나한테 카톡을 왜 보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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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머리를 굴려보다가, 그냥 나중에 생각하기로 했다. 급하면 전화 오겠지. 저런 일들보다 스트레칭하고 청소하고 하는 일이 더 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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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이 너 이거 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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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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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교시 쉬는 시간이 되자마자 우당탕탕 뛰어들어온 이서. 아이들에게 인사를 할 틈도 없이 달려온 이서는, 명전에게 핸드폰 화면을 들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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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미 명전은 봤던 것이었다. 아니 봤던 것을 넘어, 당사자에게 연락도 받았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것인지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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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이 왜 우리 곡을 광고… 뭐야, 광고? 아무튼 그걸 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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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잘 모르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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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밤에 자고 일어나니까 느닷없이 일어난 일. 세션 일 하면서 알게 된 사람들은 [곡 판매한 건가요?] 라고 물어보고 있고. 인터넷 신문에 ‘Projeckt 6 류진 신곡 유출?’ 같은 기사가 떠 있고, 그 곡은 명전이 “이거 홍보좀 부탁드립니다.” 라고 말하며 돌렸던 곡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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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잿빛의 나날들]이라고 이름을 바꾸었던 그의 곡은, 어느새 Projeckt 6인가 하는 그룹의 미발표곡이 되었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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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몇 White Room의 팬들에게 유튜브에 올렸었던 인디밴드 [Group Sound]의 [돌아오라, 잿빛의 나날이여]에 대한 표절곡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고(명전이 자꾸 곡 구성을 조금씩 바꾸었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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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바람에 그 보이밴드는 밤새 표절밴드가 되어버린 상황. 제발 해명이든 도움이든 뭐든 우리랑 이야기좀 해달라고 막 기획사니 밴드 당사자니한테서 카톡이 날아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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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전역이 불탄다… 까진 아니라도, 당사자들은 꽤나 급해보이는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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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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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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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의 물음에, 명전은 머리를 꼬았다. 어떻게 해야 할까? 제일 쉬운 것은, 그냥 “그거 표절 곡 아니고 우리 곡이에요.” 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럼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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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좀 아쉽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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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럴을 알아서 막 돌려주고 있잖아. 그 뭐야? 어… 홍보가 복사가 되고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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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과감하게 자신이 학습한 MZ 유행어를 사용했지만, 이서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살짝 낙담한 명전을 무시하며 이서는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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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저 사람들 곤란해 보이는데 좀 어떻게 해 줘야 하는 거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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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그렇긴 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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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서 홍보를 해 주고 있는 마당에, 굳이 뭐하러 먼저 가서 그래야 하는가 하고 명전은 생각했다. 안 그래도 이 일이 좀 홍보가 되고 있긴 한가 싶어서 인터넷을 좀 찾아봤는데, 진짜 홍보가 되고 있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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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표절곡인지 뭔지 그거 들어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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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ㅇ좋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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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돌이 눈물흘린 이유 알것같았음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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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표절이면 좀 많이 실망스러울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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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히 베꼈다고 밴드 팬들이 그러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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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ㄹ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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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절 아닙니다 그 밴드 분이 자기 곡 홍보해달라고 돌리신 정황 있습니다 자꾸 유언비어 퍼트리시면 PDF 따서 소속사에 보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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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네 PPT 많이 따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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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짜 나도 눈물찔끔 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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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직 고등학생인데 노래 들으면서 눈물나는거 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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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고딩이 왜 그노래를 듣고 눈물이남? 웃기네 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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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그 곡 만든애들은 누구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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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모르겠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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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ㄱㅊ 아무도모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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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디밴드라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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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대 파라독스에서 매달 한두번씩 공연하는 인디밴드 Group Sound입니다!! 저희도 못 들어본 미공개곡이지만 ㅠㅠ 많이 들어주세요!! 트위터랑 팬카페도 방문해주세요! https://twitter.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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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헐 기타 개이쁨 ㅅㅂ 뭐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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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조금 내버려두고 추이를 보자. 가만히 있으면 있을수록 우리가 이득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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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무한정 그렇게 뭉개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중간 과정이 뭔가 이상해서 그렇지, 원론적으로만 보면 저쪽 아이돌? 밴드? 아무튼 그 멤버는 딱히 잘못한 게 없었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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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포도 명전이 시작했고, 들어달라고 홍보까지 했다. 이런 상황에서 끝까지 “아 우리 홍보 되고 있는 중이니까 여러분이 난감하건 말건 나랑 상관 없음” 이라고 우기기엔 명전의 낯짝은 너무 얇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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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어떻게 사과를 하고, 받아줄 것이고, 뒷일은 어떻게 수습할 것이냐는 과정을 거쳐… 직접 얼굴 보고 사과하겠다고 온 그 류진인가 뭔가 하는 멤버의 표정을 봤을 때, 명전은 앞으로 귀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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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안녕하세요. 류진, 서진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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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안녕하세요. 하수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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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 정신이 빠진 것 같은 얼굴. 옆에 서 있던 남성이, 그런 표정을 한 진우을 툭 쳤다. 동공이 원래대로 돌아오는 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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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그 곡. 잿빛의 나날들? 만드신 작곡가 님 맞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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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제가 만들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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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에 오~! 하며 옆에서 터져나오는 탄성. 명전은 한숨을 참으며 진우의 표정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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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에 주현인가 걔도 자꾸 귀찮게 카톡 보내고 그러던데. 얘도 그러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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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봐도 영 맛이 간 얼굴. 명전은 그냥 상대방을 빨리 돌려보내고, EP 작업이나 하고 싶어졌다. 이제 슬 다음 곡도 만들어야 할 차례인데. 어떻게 영감을 얻을 곳이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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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곡이랑 편곡 실력 너무 좋던데. 혹시 밴드 그만두게 되면 연락해요. 유망주 자리는 항상 비어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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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빠진 상태에서 끌려나가는 진우를 뒤로 하고, 자신의 명함을 건네는 사람. 명함에는 [제작 2센터 차석 프로듀서 김승후] 라고 적혀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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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주 곡도 받으시나요? 데모 형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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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환영입니다. 그래도 그 잿빛 어쩌고 하는 곡 류는 좀, 우리 회사의 전문이 아니라서. 아무튼 연락 한번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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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을 팔아서 돈을 버는 루트도 있긴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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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한번도 생각해보지 못했을까? 하긴, 곡을 만들면 밴드에 가져다 쓰기 바빴지 다른 곳에 팔아넘길 생각은 한번도 못 했으니까… 뭐 그렇다고 곡을 팔 것 같진 않지만. 아무튼 뭔가 인맥 하나가 더 생겼다는 데에 만족해야 할 것 같다고, 명전은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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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묘하게 담배가 땡기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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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 쓰는 데 스트레스를 받아서 그런 걸까. 금연껌이라도 사서 씹거나 패치라도 붙여야 하나. 그런데 미성년자한테 그런 걸 팔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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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쓸데없는 생각이나 하다가… 갑자기 명전의 뇌리에 뭔가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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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러고 있지 말고, 그냥 첫 번째 곡을 EP의 선공개 곡으로 내보내면 안 되나? 그러면 이 기세를 더 확실히 이어갈 수 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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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공개. 최초에는 신선했을지 몰라도, 이제는 무난한 홍보 전략으로 꼽히고 있는 방법이다. 앨범의 기대감을 높임과 동시에, 미리 화제를 끌어오는 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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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명전이 선공개를 고려하지 않았던 이유는… 앨범을 그냥 한번에 공개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선공개를 하게 되면 “맛보기로 보여드릴게요.” 같은 느낌으로 김을 빼는 것 같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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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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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명전은 그렇게 생각했고, 그 때문에 선공개에 대해 무의식적인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으나… 상황이 이렇게 되어버렸는데, 굳이 그런 태도를 고수해야 할까. 그렇게까지 지켜야 할 정도로 대단한 신념도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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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이제 슬 녹음을 들어가야 하는 시기이기도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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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 수록곡은 5개. (가칭) 잿빛의 나날들. (가칭) Sternstunde. 현재 초안만 잡아놓은 곡 하나와, 아직 구상하지 않은 2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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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를 다 완성한 다음 연습을 들어가는 게 좋을지도 몰랐다. 연습한 곡이 EP에 들어간다고 확신할 수도 없는 것이고, 아무래도 상 차려지기도 전에 밥 먹는 건 좀 그렇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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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4인 전부 학생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지금부터 연습을 시작하지 않으면, 생각해놓은 스케줄에 맞추지 못할지도 몰랐다. 첫 번째 곡은 그렇다고 쳐도, 두 번째 곡은 서하를 혹사하는 곡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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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들한테 물어보고 정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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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곡의 녹음을 시작하고, 그 김에 아이들에게 의견도 조회해보고. 별 의견 없으면 선공개를 통해서 화제를 이어가는 쪽으로 가야겠다고… 명전은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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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것도 이야기를 해야 하는 거 아닐까 하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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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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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공개 여부에 대해 결정하고 나서, 회의를 마칠까 했더니… 현아에게서 날아온 한마디. 그 말에 명전의 표정은 신기하다는 쪽으로 변했다. 평소에 의견을 잘 제기하지 않는 현아가 저렇게 말하고 드는 게 좀 색달랐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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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공개를 한 다음 단계. 어떤 식으로 EP를 알리냐를 정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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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확실히 그렇긴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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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아의 말을 듣고 명전은 고개를 끄덕였다. 1곡을 선공개로 푸냐 마냐도 물론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EP와 밴드의 흥행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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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면, 사람들의 관심이 몰린 상태에서 선공개 하나만 하고… 그 다음 EP를 발매하는 걸로 끝내면 좀 아쉽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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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느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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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공개만 듣고 이제 아~ 이게 그 노래구나. 하고 끝나버리는? 그런 느낌. 화제를 이어나가지를 못한다는 거지. 선공개와 EP 사이가 비어버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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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지는 서하의 의견을 듣고, 명전은 생각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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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있는 의견이긴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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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 또한 그 부분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시간이 붕 떠버리니까. 그 시간을 줄일 수 있다면 좋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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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적으로는 무리다. 전곡이 완성되려면 아직도 시간이 더 필요하기 때문에. 아무리 ‘하수연’이 천재적 재능을 가지고 있다 한 들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건 불가능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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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당장 공개할 수 있는 건 2곡. 하지만 연습도 해야 하고, 녹음도 떠야 하니까… 그런 걸 고려하면, 근 시일 내에 릴리즈를 할 수 있는 곡은 [잿빛의 나날들] 1곡 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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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에 명전은 아이들에게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평소대로라면 자신이 결정을 내렸겠지만. 이전부터 고민해봐도, 딱히 떠오르는 방안이 없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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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 때문에… 홍보를 한다고 하면, 곡 릴리즈가 아니라 다른 부분에서 홍보를 해야 하는데. 어떤 방법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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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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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의 중얼거림과 동시에 찾아온 침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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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그랬던가.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문제가 무엇인지 파악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하지만 명전은 그 이야기를 인정할 수 없었다. 해결방법을 모르고 문제만 파악해봐야 무슨 소용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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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이번에 예기치 않은 바이럴이 터진 것도 엄청난 운에 가까웠다. 다시 그런 걸 기대할 수도 없는 노릇. 이번에는 운이 좋았지만 앞으로도 그럴 거라는 보장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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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를 찍는 건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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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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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이로그라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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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의 말에 명전은 머리를 살짝 꼬았다. 가만 보면, 이서는 이전부터 묘하게 브이로그라던지 그런 것에 집착하는 것 같은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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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이로그만 찍어서 될 일은 아닐 것 같은데. 우리 일상을 보여준다고 해서 뭔가 되는 일이 아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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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리스마틱한 기타 연주자의 실체는 여고생? 미소녀 밴드의 일상을 알아보자!! 같은 제목 걸고 화장하고 막 쇼핑하고 인생네컷 찍고… 그런 거 보여주면 어떻게 안 되나? 얼굴 이쁜 거 보여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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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그럼 니 얼굴 보여줘라. 왜 자꾸 내 얼굴을 팔아먹으려고 하니? 너도 어디 뭐 문제있는 것도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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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럴까? 으흫흫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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띨하게 웃고 있는 이서를 보면서, 명전은 한숨을 쉬었다. 음악을 잘 할 생각을 해야지 자꾸 이상한 거 하려고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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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이 화장하는 거 찍으면 확실히 조회수는 나올 것 같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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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까지 그러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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슥 한마디를 넣는 서하. 명전은 다시 한번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던져진 마구잡이식 제안. 온라인 콘서트는 어떠냐, 팬싸인회는 어떠냐, 챌린지는 어떠냐, 틱톡 바이럴은 어떠냐, 아무튼 아무거나 찍어보는 건 어떠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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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적으로 쓸모있는 이야기를 해 봐. 이상한 이야기만 하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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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상황에서 현실적으로 쓸모있는 이야기를 할 수 있으면 홍보업계에 취직을 했지 밴드는 안 할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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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일리가 있는 이야기군. 명전은 머리를 살짝 꼬고는, 헛소리들을 흘려넘기며 골똘히 생각을 했다. 아무래도 별 방법 없을 것 같은데, 그냥 초심으로 돌아가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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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방법 있다. 좋은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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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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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님한테 부탁하는 거야. 홍보해달라고. 좋지 않나? 인스타 같은 데 한번 올리면 효과 엄청 좋을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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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방법이라는 이서의 말. 그러나 명전의 미간은 심각하게 찌푸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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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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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이제 그 사람이랑 얽히고 싶지 않다. 자꾸 카톡 보낸단 말이야. 귀찮아 죽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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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사소한, 공연 잘 마쳤다느니 뭐니 선물 주고 싶다느니 곡 구매가 가능하냐느니 하는 식으로 왔던 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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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예계 인맥도 만들 겸, 최대한 친절하고 상냥하게(이 부분에서 명전은 그야말로 엄청나게 노력했다) 대응을 해 줬더니… 이제는 업무 외적인 부분으로도 자꾸 연락이 오고 있었다. 뭘 먹었냐, 기타 배워보고 싶은데 뭘 사야되냐, 어떻게 왼손 운지를 잡아야 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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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그래도 그 뭐야. 이번에 그 사람, 어? 류진? 진우? 아무튼 그 양반도 지금 자꾸 카톡 보내서 돌아버릴 것 같은데. 이번에 빌미 만들고 그러면 진짜… 아무튼 힘들다고 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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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주현님 정도면 충분하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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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의 이야기에 왠지 기분이 나빠진 것 같은 이서를 둔 채로, 서하가 그런 이야기를 꺼냈다. 돈에, 인맥에. 성격도 착실하고. 남녀관계 더러운 소문도 없고. 유명하고. 기타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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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기분 나쁜 소리 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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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이게 왜 기분이 나빠? 연애 이야기 하는 게 뭐가 문젠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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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음악이랑 결혼해서 다른 곳에 신경쓸 겨를이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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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헛소리로 헛소리를 일축하고는, 탁자를 내려치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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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정공법으로 가자. 일단 공연부터 보여주는 거야. 다른 건 나중에 생각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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챌린지고 브이로그고 틱톡이고 뭐고 전부 다음의 일. 릴리즈와 쇼케이스부터 하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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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라독스에서 할 수도 있지만, 우리를 보러 오는 사람밖에 없을 테니 좀 그렇고. 홍대 야외공연장을 임대해서 버스킹 형식으로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게 제일 좋을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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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공개 릴리즈와 함께 버스킹을 하면서, 커버곡으로 어그로 끌고 신곡을 선보인다. 다인 3인방 데려와서 바람잡이 하고, 팬들에게도 야외공연 하니 보러오라는 식으로 유도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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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 말마따나 외모도 활용한다. 도저히 입기 싫지만 그 날은 좀 짧은 치마도 입고, 화장도 하고. 그럼 외모에 끌린 사람들도 오겠지. 관계자 아닌 척 사진도 찍고 하면 화제가 돼서 홍보가 좀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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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아이들을 두고, 명전은 어떻게 하면 이 방안을 극대화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뭔가 좋은 방법 없을까… 아. 하나 있긴 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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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조금 간 다음, 반대편에서 들려오는 반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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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네 교수님. 저 수연입니다. 잘 지내시죠? 그 부탁을 하나 드리려고 하는데요. 친구분 있으시죠? 김수렬 평론가님 아시죠? 뭐 좀 부탁드리려고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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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렬은 음악 평론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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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업계에서 원로 대우를 받는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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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우들에게 “이제는 좀 쉬어도 안 되냐?” 라는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아직도 정력적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코어 음악 팬들에게는, “그래도 김수렬픽이면 믿고 들을만하다” 라는 이야기를 듣는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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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주요 무대는 밴드 웹진이다. 매 주마다 새로 발매된 밴드들의 음원들을 정리하고, 짤막하게 한줄평을 하고, 일부는 장문평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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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문평의 이름은 ‘주목할만한 음악’. 김수렬의 추천 마크를 단 음악들은, “우리 음악 수렬픽 달았어요!” 라고 마구마구 자랑을 하거나, 보도자료를 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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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에 그는 바쁜 사람이었다. 매일매일 새 노래를 듣고. 라디오에 나가서 평론도 하고. 밴드 공연 체크도 하고. 공정성을 기하기 위해서 음반사 사람들과는 식사도 하지 않는다. 음악계에서 교류하는 사람들이라곤, 어린 시절 만났던 몇몇 사람들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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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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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렬은 마스크를 한 채로, 홍대 어딘가의 야외공연장 근처로 다가섰다. 마침 준비를 하는 모양인지, 이리저리 오가는 여고생 4명과 떠들썩하게 모여 있는 관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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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오늘 화제의 밴드 ‘Group Sound’의 취재를 왔다. 친구 채호근 교수에게서, “그 친구들이 라이브를 한다던데. 자네도 들어본 적 있나? 그 애들?” 이라는 이야기를 듣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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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한 공정하게 심사를 하려고 노력하는 수렬이었지만, 다만 처음 활동을 시작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지켜오는 그만의 규칙이 있다면… [라이브를 잘 하면 가산점을 더 준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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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역 여고생 4명. 완전 생초짜 베이스. 클래식 지향인 것 같은 키보드. 인디 유망주였던 드럼. 그리고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잘 치는 기타라고 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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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밴드 구성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무슨 근본없는 바이럴인가 싶었다. 그렇기에 친구 앞에서 “이제는 바이럴 아닌 척 하고 연습생들 내보내서 밴드 활동 시키는 거냐?” 라고 분통을 터트리기도 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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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들리는 소문들은, 그의 생각과는 반대. 학교 축제와 애니메이션 커버를 거쳐 파라독스에 정착한 후, 달에 1~2번 정도 공연을 선보이고 있으며. 정부지원사업인 ‘밴드 파이오니어’에 참가해서 8강에 진출하였고, 최근에는 주현의 콘서트에 세션 밴드로 참가하는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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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행보를 보면, 착실하게 성장의 계단을 밟아가고 있는… 요 근래 가장 촉망받는 인디밴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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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소문대로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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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밴드를 다루는 독립 레이블로 유명한(최근에 누군가한테 팔렸다는 소문이 있었다) [레이블 에코사운드]에서 최근 릴리즈된 선공개곡, [잿빛의 나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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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 자체는 상당히 좋았지만, 일단 라이브를 들어보고 평가하기로 했다. 곡을 잘 만들어놓고 라이브를 이상하게 하는 밴드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 밴드도 그 중 하나일지도 모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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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갑습니다. 밴드 Group Sound, 그리고 리더를 맡은 기타 하수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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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쯤 깐 이마, 찰랑거리는 머리. 두께감이 있는 맨투맨과 체크무늬가 들어간, 길이가 허벅지 반 정도 되는 플리츠 스커트. 종아리를 살짝 가리는 흰색 양말과 앙증맞은 흰색 신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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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들에게서 쏟아지는 박수. “이쁘다!” 같은 류의 환호성도 외쳐지지만, 기타는 익숙한 일이라는 듯 신경쓰지 않으며 관객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이어지는 밴드 멤버의 소개. 베이스 최이서, 키보드 정현아, 드럼 유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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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듣긴 했지만 진짜 죄다 이쁜 아이들 뿐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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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모로 뽑고 연습을 혹독하게 시키기라도 한 것일까? 하고 수렬은 생각했다. 리더로 보이는 아이가 제일 이쁘고, 나머지는 살짝 편차가 있긴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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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트위터로 공지드렸듯이, 오늘은 저희가 신규 발매할 EP의 선공개곡인 [잿빛의 나날들]과… 그 외 미공개곡을 위주로 공연을 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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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괜찮으시죠? 라는 말에 환호성으로 답하는 사람들. 수렬은 그런 관객들을 슥 훑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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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야외공연장은 공연을 볼 틈이 없을 정도로 빽빽하다. 미리 소식을 듣고 찾아온 것 같은 팬들과, 뭔지도 모르고 일단 구경이나 하자고 온 것 같은 행인들. 영상을 찍고 있는 것 같은 여고생들 등. 팬들인 것 같아 보이는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인파를 정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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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렇게 사람들을 정리하고 있는 골수팬들은… 전혀 인디 밴드씬이랑 관계가 없을 법한 사람들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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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하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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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렬은 음악 평론가지 인디 전문가가 아니었지만, 인디 밴드 씬이 어떤 식으로 돌아가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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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런 수렬이 평가하기에, 인디씬의 가장 큰 문제는… 즐기는 사람만 즐긴다는 것이다. 밴드는 신인이 나오는데 소비자는 새로운 사람이 들어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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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룹 사운드’는 그 명제를 거스르고 있었다. 인디와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을, 홍대의 허름한 인디 밴드 공연장으로 끌어온다. 파라독스 사장이 “이대로 가면 빌딩 사겠다!!” 라고 환호성을 질렀다는 말은 아마 과장이 아닐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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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어떻게 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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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렬은 생각의 화로를 태우다, 덮어서 꺼버렸다. 평론가는 씬의 구조를 고민할 필요가 없다. 음악에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면 되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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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시작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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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이, 전면에 나온 베이스가 그렇게 외쳤다. 그리고 시작되는 음악은, 요즘 유행하고 있는 일본의 밴드곡. 발랄한 가사와 율동, 기괴한 뮤비의 내용으로 틱톡에서 인기를 끈다던 그런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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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곡은 커버곡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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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평론가인 수렬의 입장에서는 약간 실망스러운 선택이다. 하지만 관객을 끌어들여야 하는 야외공연에서는 더할 나위 없이 적합한 선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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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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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이라도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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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곡보다 좀 더 화려한 연주 때문일까. 이미 발디딜 틈 없이 빼곡함에도 불구하고 이끌려오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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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웃대던 커플은 어느새 나무에 기대서 음악을 듣고, 보드를 타고 가던 젊은이는 보드 위에 올라서서 목을 쭉 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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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이제 저희의 신곡이자, 첫 곡을 들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들어주세요, [잿빛의 나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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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곡 몇 개가 끝난 후, 드디어 시작된 선공개곡의 연주. 드럼스틱이 4번 쳐짐과 동시에 악기들이 음을 발한다. 음원보다 살짝 더 낮은 템포. 더 리드미컬한 베이스. 과하다고 생각해서 덜어냈던 것일까? 아니면 대중성의 문제로? 이유를 알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실력 문제로 발생한 일은 아닌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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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 않았던 숙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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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함 속에는 거북이가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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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의 나는 매점 앞에 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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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어가는 토끼를 바라보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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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멀리서 읊조리는 듯한 음성. 살짝 난해한 가사는, j-rock의 감성을 살리기 위해서 일부러 그렇게 만든 것일까. 야외 공연을 위해 설치된 포터블 앰프로도 확연하게 느껴지는, 아득하고도 아련한 감정이 그를 약하게 휘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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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렬은 '그룹 사운드'의 평가를 한단계 위로 조정했다. 음원을 그대로 복사하는 것도 못해, 열화판 수준의 공연을 선보이는 어중이떠중이 밴드와는 확실히 다른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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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파른 언덕을 넘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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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이는 우리를 기다리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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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와 나는 내일의 열차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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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하얀 사과를 베어물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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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원에서 들려주었던 풍부한 fx는 없지만 수렬은 그 공백을 느끼지 못했다. 음원보다 더 활발히 움직이는 기타와 키보드 때문일까. 비교하자면… 담백하고 깔끔한 원본, 그리고 끈적하지만 풍부한 라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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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이는 사흘 전에 떠나버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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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애는 어딜 가는지 모른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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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내린 첫 눈의 그림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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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번 더 네게 찾아올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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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잿빛이여, 내게로 돌아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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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의 끝에, 모든 악기가 다 멈추고. 간결하게 멜로디만을 연주하던 기타만이 독백과 같이 끝을 맺는다. 울려퍼지는 박수. 수렬은 자신도 무의식적으로 박수를 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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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공연 보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는 미공개 곡을 들려드리도록 할게요. 아직 제목은 따로 정하지 않았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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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게 울리는 환호성. 기타는 고개를 끄덕이자, 드럼이 빠른 템포로 스틱을 4번 친다. 그리고 시작되는 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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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까지 연주되었던 낮은 템포의 곡들과는 다르게, 확 올라가는 bpm. 앰프를 통해 뿜어지는 기타의 톤도 다르다. 미들로우를 확 날려버린 경쾌한 소리. 그리고 그에 맞춰 달리는 드럼과, 베이스, 키보드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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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만난 그 날의 내 마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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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파도와도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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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나를 조금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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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아가게 만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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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스를 맡은 아이가 내는, 발랄하면서도 귀여운 목소리. 사랑빛 노래에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느낌의 창법과 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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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만난 오늘의 내 마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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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위의 종이배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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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의 나보다 조금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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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임없이 요동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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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렬은 격동하는 한국에서, 대쪽같은 소신을 지켜가며 살아왔던 사람이다. 그의 삶은 전투적이었고, 평화롭다기보다는 쪽배에 의지해 격랑을 헤쳐나가는 것에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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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런 인생을 살아온 수렬에게도, 이 노래는 뭔가 간질간질함을 느끼게 했다. 왠지 자신도 어릴 적, 자신의 아내와 여름 밤길을 걸으며 사랑을 속삭였던 것 같고. 청춘을 노래했던 것 같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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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나는 선을 보고 결혼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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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공개곡을 릴리즈하면서, 이 밴드는 [이번 EP에서는 우리가 지금 느낄 수 있는 감정들을 노래하겠다] 라는 이야기를 했었다. 수렬은 [잿빛의 나날들]을 들으면서 ‘이게 과연 그런 노래인가?’ 라고 생각했지만, 이 노래는 그런 수렬의 마음을 완전히 돌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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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제 이 미묘한 거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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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와 뛰어넘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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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며 떠도는 이 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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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에게 선물하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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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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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주가 끝나자, 베이스가 그렇게 외치며 꾸벅 인사를 했다. 그리고 쏟아지는 박수. 팬들이 외치는 환호성과, 행인들의 “얘들 뭐야?”, “혹시 이 밴드 이름이 뭔지 아시나요?” 같은 이야기들이 섞여 잠시 아수라장이 된 공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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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렬은 자리를 뜨며 장문평의 이름을 어떤 것으로 정할지 고민했다. 신인 천재 밴드 등장! 은 너무 상투적인 느낌이고. 인디 밴드에 혁명이 시작되다! 같은 것은 너무 거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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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수렬은 그렇게 쓰고 싶은 마음이었다. 최소한 지금 이 순간만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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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인디씬에서 주목받고 있는 밴드라고 하면, 꽤나 많은 밴드를 꼽을 수 있겠지만… 필자는 과감하게 그 중 필두를 ‘그룹 사운드’라고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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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식발매한 음원 하나 없이 클럽 파라독스를 매진시킨 전력이 있는 밴드. 천상의 실력을 가진 기타리스트가 있기로 유명한 밴드. 밴드 구성원들이 모두 상당한 미모를 가진 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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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들이 누리는 유명세에 비해, 실제의 성과는 매우 미진했던 것이 사실이다. 정식발매한 음원 하나 없다는 것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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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뿐만 아니라, 편곡과 연주 역시 훌륭하다. 기타의 연주는 훌륭하지만, 밸런스를 해치지 않을 정도로 들어가 있다. J-Rock의 문법에 영향을 받되, 그대로 따라가지 않고 한국식으로 재해석한 면 또한 신인 치고는 과감한 행보. 단지 아쉬운 것은 믹싱과 마스터링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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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곡을 듣고 누가 이들이 신인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인가. 대가의 경지에 이르른 기타 연주와, 적절하게 배치된 베이스, 키보드, 드럼. 감히 말하건데, 이들이 2024년 한국 밴드씬에 등장한 것은 축복이라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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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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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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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극찬이구만, 극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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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인터넷 탭을 껐다. 그의 노림수가 분명 먹힐 것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잘 먹힐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무엇이 김수렬의 감정을 이렇게 자극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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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채호근 교수에게 부탁했던 것은 하나밖에 없었다. 라이브 공연이 있다고 말해달라, 단지 그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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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호근 교수는 “수렬이가 그런 습관이 있긴 하지만… 그걸 어떻게 아는 건가요?” 같은 질문을 했지만, 명전은 얼버무리며 넘겼다. 뭐 어떻게 설명을 하겠는가. “제가 전생에 서명전이었는데요, 김수렬 평론가한테 직접 들은 이야기입니다.” 라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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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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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호평을 써주니까 좋기는 하다만, 김수렬 평론가는 그가 ‘서명전’이던 시절에 항상 그의 앨범에 악평을 하던 사람이었다. 1.5점 내지 2점을 주는 게 보통이었던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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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에 남는 문장은 [대가의 솜씨로 빚어낸 80년대 싸구려테이프 멜로디], [기타만 잘 쳐서 되는 일이 아니다] 등. 평을 볼 때마다 분노해서 전화를 걸고는 했었다. “나는 평론가니까 솔직하게 쓰는 게 맞는 겁니다.” 라는 정론을 듣고 화만 났을 뿐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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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전부 이전의 일이다. 결국 지금 낸 곡이 4.5점을 받았으면, 그걸로 족한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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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쓰. 그거 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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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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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박, 대박. 막 그 이런 거 어디 기사 같은 거로 뜨는 거 아냐? 그런 걸 우리가 받아보니까 신기하네. 잡지 같은 데 실리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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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잡지는 안 나오고, 아마 인터넷에 실리겠지. 뮤지카가 이제 실물로 나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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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이제는 조금씩 잊혀져가고 있는 ‘서명전’ 시절의 기억을 떠올렸다. 2000년대까지는 실물로 나왔던 것을 기억하는데, 그 이후로는 사보지를 않아서 잘 모르겠다는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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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나온대. 나 연습 끝나면 서점 좀 가야겠어. 사서 들고있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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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평론 받을 일 많을텐데 그런 거를 굳이 들고 있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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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의 말에 이서는 대체 그게 무슨 소리냐?? 라는 표정으로 명전을 쳐다보았다. 너무 영감 같은 소리였나 싶어, 명전은 고개를 돌리며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척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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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이제 EP 작업도 슬 다 끝나가는 상황이고. 발매가 되면, 그때 다시 또 리뷰가 뜨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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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그거도 사지 뭐. 첫 싱글! 첫 앨범! 기념할 거는 많으면 많을 수록 좋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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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적이어서 좋구만. 명전은 그렇게 생각했다. 아무튼 이제는 EP를 완성하고, 믹싱과 마스터링을 하고, 발매하는 일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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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범이 발매될 날이 기다려지는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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믹싱과 마스터링을 맡길 사람을 찾아야 한다는 것도 문제고, 이제부터는 쉴 틈이 없이 달려야한다는 것도 문제다. 그 다음 홍보를 하는 것 또한 문제다. 마지막 단계까지 왔음에도 불구하고, 명전과 아이들 앞에 놓여있는 문제는 아직도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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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명전은, 그런 것들은 지금 당장은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잿빛의 나날들]의 리뷰를 보며 웃고 떠들고 있는 세명을 보고 있으니 더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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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즐기려고 하는 일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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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천연색의 나날들이 눈 앞에 가득한데, 굳이 그 순간을 지나친 후… 잿빛의 기억을 돌이켜 되살려보려고 노력할 필요는 없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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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박한 소묘, 그러나 그에 어울리지 않는 컬러로 그려진 노을빛 언덕 위에는, 교복을 입은 무채색의 소녀가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뛰어가는 거북이와 유영하는 고래. 밤하늘과 태양이 공존하는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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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춘기를 막 벗어난 아이들의, 불안하게 흔들리면서도 미래를 긍정하려 하는 정서를 담은 것 같은(적어도 그림작가는 그렇게 주장하는)… 그룹 사운드의 첫 EP, [Plastic Nostalgia]의 앨범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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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의 장르는 대부분 팝과 J-Rock의 혼용. 그러나 일본 음악이 유행하고 있는 현재의 세태에 따라간 것이라고는 할 수 없는 만듦새. 곡마다 세부적인 장르는 각자 다르지만, 컬러는 비슷한 앨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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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곡은 총 5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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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공개곡인 [잿빛의 나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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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수록곡은, 현역 뮤지션들에게 찬사를 받았던 곡인 [Sternstun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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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일상의 즐거움을 담담하게 노래한 [누가 고기 좀 사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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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변만화하며 종잡을 수 없이 뒤척이는 감정을 이야기한 [내비쳐진 손가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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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타이틀인 [그 거리를 뛰어넘어]는 선공개곡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의 타이틀곡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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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잿빛의 나날들]이 과거에 대한 형언할 수 없는 그리움에 가까운 무언가를 말하고 있다면, [그 거리를 뛰어넘어]는 발랄하며 아기자기하며 간질간질한 사랑을 속삭이는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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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잿빛의 나날들]과 다른 곡들이 평단과 인디, 그리고 힙스터의 취향을 제대로 저격함과 동시에… [그 거리를 뛰어넘어]를 타이틀로 넣음으로써 일반 대중들의 공략까지 시도한다는 과감한 시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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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과감한 시도는, 꽤나 성공적인 결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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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아무도 들어주지 않은 채 사라진 평범한 인디 밴드의 곡처럼, 순위권에도 진입하지 못한 채 가만히 머물러있던 그들의 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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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들은 “우리 애들 곡 너무 좋아요!!” 라며 홍보를 시도했지만, 그 곡을 들은 사람들이 “와 좋네~” 정도만 해줄 뿐 뭔가 유명세가 확산되는 징조는 전혀 없었던 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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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조금씩, 아주 조금씩… 사람들이 좋아요를 누르고. 누군가가 [이 곡 좋다~ 처음 들은 밴드인데 신인인 듯?] 등의 트윗이나 게시물, 스토리를 올리고. 그것을 본 사람들이 다시 또 전파를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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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다지 영향력이 없는 유튜버들의 플레이리스트에 올라가고, 그게 다시 또 영향력이 큰 유튜버의 플레이리스트에 올라가고… 그것을 반복하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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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인디락밴드 수준.av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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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거리를 뛰어넘어 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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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잿빛의 나날들 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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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락이미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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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EST] 요새 멜론보면 좆이돌노래만 나오는데 이런 노래 들으니까 좋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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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EST] (박다인이 찍어서 바이럴인 것처럼 퍼트린 하수연이 V자 하고 있는 사진 링크) 외모미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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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EST] 이번에 새로 EP 내면서 데뷔한 인디밴드인데 홍대에서 유명한 애들임 파라독스 가면 매달 공연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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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플레이리스트에 추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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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니 근데 ㄹㅇ 노래좋네 얘들 어디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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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인디인거같은데 소속사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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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 이런음악이 더 많아져야하는데 ㅅ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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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와 같은 식으로, 인터넷 커뮤니티 한구석을 살짝씩 달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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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먹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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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말에, 현아는 치고 있던 피아노의 연주를 멈추었다. AUX 단자에 꽂아놨던 스피커를 빼고, 저녁 연습을 위해 미리 헤드폰을 끼워놓고 일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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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묵히 이루어지는 식사. 현아는 아무 말 없이 밥을 씹어 넘겼다. EP가 발매된 후로 밴드 연습은 줄어든 상태니, 이 참에 빨리 입시 연습을 해 놔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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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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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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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생각으로 전투적으로 밥을 먹어가던 현아에게, 현아의 어머니가 말을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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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그… 밴드인가 그거, 계속 할거니? 이제 입시 준비 본격적으로 해야 할 때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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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야기에, 현아는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다. 작년부터 몇개월 간, 입시에 도움이 된다는 핑계로 계속해왔던 밴드 활동. 요 근래에는 그런 말도 하지 못하고 “때 되면 그만둘 거에요.” 라는 핑계로 얼버무리고 있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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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아는 아직 자신의 진로를 결정하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었지만(사실은 둘 다 하고싶은 마음이 컸다), 현아의 엄마가 보기에는 입시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 초중고등학교 내내 준비해왔던 입시인데, 이제와서 그런 장난으로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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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 되면 그만둘 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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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그게 도대체 몇번째 이야기니. 엄마가 생각하기에는 이젠 진짜 그만둬야 할 때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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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괜찮다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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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아. 너 진짜 이럴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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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씩 높아지는 언성. 그러나 서로의 얼굴이 붉어지기 직전, 굵은 목소리가 나직하게 끼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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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계속 하는 것도 좋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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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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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에, 뜬금없다는 듯 질문을 던지는 현아의 어머니. 현아의 아버지는 대답 대신 핸드폰을 보여주었다. 멜론 일간 차트. 종합 차트는 아니었지만, 록/메탈 장르에서 96위로 차트인한 [그 거리를 뛰어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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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오늘 젊은 애들한테 물어봤는데, 신인 밴드가 차트에 들어오기는 상당히 힘든 일이라고 했어. 그런데 어찌되었든 들어온 거잖아? 충분히 재능이 있다는 이야기 같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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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그렇지, 애가 몇년을 준비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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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짝 누그러진 목소리와 내용. 하지만 현아는 섣불리 승낙을 요청하기보다는, 아버지의 말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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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뭐든 현아가 원하는 쪽으로 가는 게 중요한 거 아닐까. 그리고 나는 예전부터 말했지만… 솔직히 말해서, 피아노 치는 걸로 먹고 살기도 힘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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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밴드인가 뭔가하는 걸로는 쉽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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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도 어렵겠지만, 이미 현아는 증명을 했잖아. 차트에 들어가는 걸로. 이거면 안심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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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는 부모님. 현아는 그 모습을 보면서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음 이야기가 어떻게 풀릴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좋은 방향으로 가게 될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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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론 차트 일간 록/메탈 부분 82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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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이후의 성적이 어떻게 될지는 잘 모르겠으나, 현재까지는 82위가 최고 성적인 것으로 보였다. 종합차트에는 차트인하지 못했지만, (일본 기준으로는) 아직 메이저데뷔도 못한 밴드가 일간 차트에 들어간 것은, 그야말로 이례적인 성공이라고 봐야 할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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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기타를 지하철 바닥에 내려놓고, 거북목 방지 자세를 취한 채로 핸드폰을 눈 앞에 올려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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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아의 아이디어가 맞아떨어지긴 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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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명전은, [Sternstunde]를 타이틀곡으로 밀고자 했다. [잿빛의 나날들]도 조금 대중적인 곡(최소한 본인은 그렇게 생각했다)이니, 타이틀곡은 인디 팬층에게 충분히 어필할 수 있는 곡으로 가야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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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현아의 의견은 달랐다. “우리가 흥행을 노리기 위해서는 타이틀곡을 좀 더 대중적인 걸로 가져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라는 것이 현아의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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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처음에 그 의견을 수용하지 않았다. 어차피 인디 수준에서 대중적이어봐야 별 소용이 없다는 이유로. 그러나 지속적인 어필로 인해 “그래, 뭐 그렇게 해 보자.” 라고 수용을 했는데… 결과는 꽤나 좋았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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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리스트라던가, 이런 쪽으로 들어갈 것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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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단문물에 대해서 나름대로 많이 배웠다고 생각하고 있는 명전이었으나, 아직도 부족함을 느끼게 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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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도 그럴 것이, 직접 겪어보지 않은 이상 노인네가 어떻게 ‘단독으로 듣기 좋은 노래’가 아니라 ‘플레이리스트에 섞여들어갈 만큼 무난하고 좋은 곡’이기에 뜨게 되었다는 설명을 어떻게 받아들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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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겪어도 겪어도 이해가 안 된다고 생각하며, 명전은 도착역을 확인했다. 내릴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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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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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반가워요 히트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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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분 먼저 도착한 스튜디오. 안에는 기타를 옆에 둔 채로 핸드폰을 하고 있는 준홍이 있었다. 명전은 준홍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처음에야 한참 어린 후배에게 고개를 숙인다는 것이 적응이 되지 않았지만, 이제는 그냥 평범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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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이 양반도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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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전’ 시절까지 합치면 상대가 안 될 경력이었지만, ‘하수연’으로만 보자면 기타를 시작한지 이제 1년, 세션 일을 시작한지는 1년도 안 된 아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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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뮤지션의 세션을 서는 것도 모자라, 자신을 리듬 기타쪽으로 밀어내고 리드 기타에 올라앉았는데. 그에 대해 그다지 불쾌한 티를 내지 않는다는 것 자체가 경이로운 일이었다. 명전 자신이었다면 격노했을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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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적 좋던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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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종합차트에 혹시 들 수 있지 않을까? 했는데 무리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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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 종합차트에는 못 들지. 일간 차트에 들어간 것만으로도 대단한 거죠. 지금 종합차트에 들어가있는 락이 뭐가 있더라? 세네개 정도 되나? 순수 밴드곡만 치면 훨씬 줄어들수도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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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홍은 그렇게 말하며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꽤나 낡아버린 핸드폰. 뭔가 조작하는 것 같더니, 허탕을 치고는 다시 집어넣으며 말하는 준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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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아무래도 미국이나 일본처럼 앨범차트를 잘 운용을 안 하다보니까. EP 성적을 받아보긴 힘들 거에요. 그리고 음원 수입도 뭐, 그다지 나오지는 않을 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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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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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있다면 다행인데, 뭐 원래 밴드는 다 그런 법이니까… 에코사운드가 인디에서나 이름있는 레이블이지 메이저에는 비빌래야 비빌 수 없는 레벨이고. 한 1~2년 정도는 인디 레벨에서 고생 좀 해야 될 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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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잘 알고 있는 사실이라 딱히 대답할 말도 없었다. 하지만 준홍이 보기에는, ‘이제 좀 뜨나 싶었는데 비관적인 현실을 강제로 알게 되어버린 아이’ 처럼 보였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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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그렇게 비관적으로 생각하진 말고. 좋은 소식도 있을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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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소식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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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홍의 입에서 나온, 도저히 짐작할 수 없는 이야기. 명전이 그게 무슨 소리인가 생각하는 동안, 조금씩 스튜디오에 들어오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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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수연 학생! 오랜만입니다. 그때 이후로 처음 뵙던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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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오늘의 녹음을 의뢰한 사람. 밴드 파이오니어의 심사위원이자, 유명 락 밴드 [테일러드]의 리더. 그리고 이제는 솔로 앨범까지 내기로 결심한 김철연이 그곳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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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드 기타는 오늘 분량 끝! 잠시 쉬고 다른 악기 녹음 들어갈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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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음실의 내부 스피커가 울리며, 바깥쪽에 있는 철연의 말을 전달한다. 명전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기타를 들고 녹음실에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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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도대체 어떻게 그렇게 기타를 잘 치는 건지 궁금하네. 무슨 비법이라도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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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습밖에 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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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연의 물음에, 명전은 당연하다는 듯 답했다. 그처럼 다른 몸에 빙의라도 하는 게 아닌 이상, 연습 외의 방법이 있겠는가. 천재라고 불리는 모든 기타리스트들은 다 손에 피가 터질만큼 연습을 했다. 명전 또한 마찬가지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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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에 그거는, 더 스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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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를 가지고 왔더니 생각이 나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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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ngle Sound(한국말로는 찰랑찰랑 톤)를 잘 쓴 사람은 많지만, 그 중 유명한 한명을 꼽아보라 하면 The Smith의 Johnny Marr를 말하는 사람이 10명 중 5명은 될 것이다. Marr는 더 스미스 활동 초반에 텔레캐스터를 자주 사용했고, 명전은 오늘 철연의 요구대로 텔레를 가져오다가 Marr를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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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거 의도한 건 아니었는데. 확실히 내 생각보다 좋은 사운드가 들어갔어요. 녹음도 엄청 빨리 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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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연은 그렇게 중얼거리더니, 잠시 뜸을 들이다가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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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젓번에 그 일 있잖아요. 파이오니어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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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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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사정 알아보니까 좀… 우리 쪽 판단이 성급했던 것 같아요. 사실 그런 건 좀 더 알아볼 수 있는 거였는데. 기관 쪽에서도 그렇고 우리도 그렇고 사실 이게 그런 문제가 걸려 있으면 정상적인 사고가 안 되어버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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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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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말하는 명전을, 철연은 뭔가 복잡한 시선으로 쳐다보더니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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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말인데. 이번에 우리 밴드 주도로 페스티벌을 주최하려고 하거든요. 그 때 혹시 무대에 서볼 생각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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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뻐근한 목을 이리저리 당기며 교실 바깥으로 나섰다. 분명 눈을 뜨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새 책상에 고개를 처박고 잠이 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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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계속 자면 목디스크 올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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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베개라도 사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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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교사들 앞에서 목베개를 한 다음 “그거 왜 했어?” “잘때 목디스크 올 것 같아서요.” 라고 하면 절대 용납해주지 않을 것 같은데. 아니, ‘하수연’은 MZ 세대니까 아무튼 용납을 해 주려나 하고, 명전은 MZ에 대한 과대해석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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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보다, 이럴거면 왜 개학을 한 거지. 나 때도 이랬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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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오래 전 일이라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아무튼 그때는 겨울방학을 마치고도 뭔가 수업을 했던 것 같은데… 아무튼 뭔가 가르치고 이랬던 거 같은 기억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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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문에 명전은 겨울방학이 끝나기 전에 아이들의 수준을 올려놓고자 했고, 그 때문에 좀 가혹하게 몰아친 감이 있었는데… 정작 개학을 해 보니 아무것도 안 하고, 며칠 후부터 봄방학이 또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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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이럴 거면 개학 왜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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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담배를 피고 싶어져, 명전은 무의식적으로 바지에 손을 넣었다. 하지만 나오지 않는 담배. 언젠가 어느 편의점 하나를 뚫어야겠다고 생각하며, 그는 바람이나 쐴 겸 테라스 쪽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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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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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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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목 아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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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긴 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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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수연아, 이거 먹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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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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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라스로 가는 길, 그동안 안면을 익혀놓은 아이들에게 손을 흔들어주자… 돌아오는 반응들. 그 중에는, 얼마 전 그가 사과했던 아이도 있었다. “아니 이렇게 막 사과할 정도는 아닌데…” 라고 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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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자를 먹고 있다 건네는 남자아이에게 고개를 저으며, 명전은 테라스의 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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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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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라스에 모여 있는 여자애들. 명전은 대충 손을 흔들어주고, 난간에 기대어 학교 바깥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살짝 숨통이 트인다고 생각했을 때, 옆의 아이들 속 누군가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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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수. 요즘 찐따들한테 막 사과하고 다닌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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흘긋 쳐다본 아이는, 4반의 권지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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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며 가며 그에게 인사를 하고, 시비인지 뭔지 애매모호한 이야기를 자꾸 해대는 아이. 예전 수연의 기억을 뒤져봤었을 때는 희미하긴 하지만 뭔가 친구였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좀 친했던가… 애매한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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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걔들이 왜 찐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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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흫크킇흫흐흫… 연수 성격 다 죽었네? 예전이었으면 그런 찐들 바로 싸다구 후렸을 거면서. 왜 그렇게 착한 척 하고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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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벅터벅 다가오더니, 명전 앞에 서는 권지혜. 뭔가 위압적인 분위기를 내고 싶어하는 것 같은데, 명전이 보기에는 그냥 고등학교 여학생이 가오를 잡는 것으로밖에 안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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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드 같은 거 한다매. 방송 데뷔하려고 밑밥 깔고 과거 세탁할라고? 그래서 일부러 찐들한테 아이고 제가 옛날에 학폭 좀 했는데 봐주세요~ 하고 좀 빨아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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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면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겠네. 그런 이유가 아니었다면, 사과해야겠다고 생각을 떠올리지조차 못했을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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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명전의 대답에, 지혜는 과장되게 오~ 하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깔깔거리며 비웃는 주위의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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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 완전 개 별로인 거 알아? 안 받아주면 어떻게 할 건데? 그럼 방송 안 나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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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그렇게 될 수도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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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그렇게 대답한 후, 손을 흔들어 인사한 후 교실로 다시 향했다. 인생은 참 길지만, 저런 패거리질에 낭비할 시간은 없음을 저 애들이 알아야 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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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쟤 진짜 요즘 왜 저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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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라. 뭐 잘못 처먹었나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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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이 사라진 후 그렇게 뒷담을 나누는 아이들 사이에서, 권지혜는 표정을 굳히고 테라스의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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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이 저지랄하는 거 좀 꼴보기 싫은데, 주희 선배한테 말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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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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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와중 던져진 한 아이의 제안. 그러나 다른 아이들이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지혜가 정색하며 말을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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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 자퇴까지 해 놓고도 선배니 뭐니 지랄이야. 좆퇴물년 그냥 신경쓰지 말고, 쟤도 그냥 냅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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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권지 니 아까 쟤 저러고 다니는거 뭐 별로 안좋아하는 거 같더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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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그래도 친구가 씨발 잘 살아보겠다는데 거따대고 지랄을 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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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는 테라스 구석으로 걸어들어가 전자담배를 물었다. 내뿜은 숨에 색은 있었지만, 냄새는 그다지 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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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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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천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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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드폰을 꺼내든 후, 어디에 찍어야 할 지 이리저리 찾는 남자. 서하는 “이쪽에 찍어주세요.” 라며 카드기를 가리켰다. 계산을 한 후, 나가는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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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하는 다시 의자에 앉은 후, 핸드폰에서 음악을 재생했다. 왼쪽만 낀 에어팟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은, Pantera의 Walk. 엄청날 정도로 좋아하는 곡은 아니었지만, 꽤나 자주 듣는 곡이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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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이 5~80년대의 블루스를 좋아하듯이, 서하 또한 흘러간 음악을 좋아했다. 8~90년대, 메탈의 전성시기에 나왔던 음악들. 블루스만 딱 짚어서 좋아하는 수연과는 다르게, 메탈이라면 다 섭렵하는 게 좀 다른 점이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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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난해한 음악은 좀 그렇단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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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의 사람들… 특히 현아가 부르기를, ‘세상을 왕따시키는 여자’ 유서하. 하지만 그런 서하에게도 친구는 있다. 같은 음악 취향을 공유하는 친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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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세상 모든 것을 비웃는 데에 특화된 친구들. 누구는 이래서 음악이 병신이고, 누구는 이래서 쓰레기다. 하지만 내가 듣는 음악은 좋다. 일반인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음악. 뭐 내가 병신이라고? 나는 내가 병신임을 아니까, 너보다 내가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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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는 같이 계속 어울렸었다. 점점 애들의 취향이 서하로써는 이해하기 힘든 쪽으로 파고들어가기 시작해도 뭐, 그러려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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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요즘 들어서는 그 아이들과 껄끄러워졌다. 특히 작년에 수연과 현아, 이서와 밴드를 결성하고 난 뒤로는 더. 왠지는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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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하는 잠시 그렇게 곡을 듣고 있다가, 다른 곡으로 돌렸다. 그녀와 밴드원들이 녹음한 첫 곡. ‘그날의 너’. 그리고 드럼을 치는 시늉을 하며 상상으로 연습을 했다. 좀 더 그루비한 연주를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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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와중 웅- 하며 우는 핸드폰. 화면을 열어보니, 와 있는 카톡 메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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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뭐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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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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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하는 살짝 망설이다가, 답장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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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거 안하긴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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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드 하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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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ㅋㅋ 보긴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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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에, 서하는 잠시 멈칫했다. 봤다고? 그녀의 연주를? 왠지 모르게 부끄러워지는 듯한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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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생하지말고 돌아와라 메탈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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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 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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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ㅋㅋ 이상한 애니송이나 치고있더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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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하는, 이 애가 원래 이런 애라는 것을 알긴 했다. 이 애 말고도 다른 애들도 그랬다. 자기들끼리도 서로 디스를 하고, 네 음악 구리다고 이야기를 하고. 그런 니 음악은 더 구리다고 이야기를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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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애들이었으니, 저런 ‘고생하지 말고’ 같은 이야기는… 놀랍게도 꽤나 순한 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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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는 좀 치던데 나머지는 다 허접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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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정돈 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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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가 아니야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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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 너는 메탈 해야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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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거 하지말고 메탈이나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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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거. 서하는 잠시 천장을 바라보았다. 이상한 건가? 그런 건 아닌 것 같긴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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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의 서하였다면, [너도 좆같은 거 만드느라 고생하지 말고 노가다나 하러가라] 같은 말로 되받아쳐 줬을 것이다.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사이기도 했고, 그런 말을 해도 상처받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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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왠지 모르게, 서하는 그렇게 되받아치기가 껄끄러웠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단지, 그냥 그렇게 하면 안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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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가 너무 잘쳐서 기타에 붙어살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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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애들은 뭐 잘 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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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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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뭐 진지하게 할거면 쩌리 두명 버리고 가는게 맞는거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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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스 그냥 씹유기하는게 맞겠더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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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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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하는 자신도 모르게 말을 내뱉었다. 그 말에 움찔하는 편의점 내 손님. 서하는 급하게 입을 막고는, 손님에게 고개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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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뭔 소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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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ㅋㅋ 맞지않나 솔직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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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신발언) 솔직히 개팩트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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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하는 순간 화를 낼까, 아니면 어떻게 말을 해야 할까 고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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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는 충분히 노력하고 있는 애다. 충분히 노력을 하고 있음을 넘어서, 손이 부르트도록 베이스를 치고 남는 시간에 수연이 만든 곡에 대해서 작사까지 하고 있는 애다. 자비로 레슨을 받고, 새벽까지 베이스를 연습하면서 실력이 일취월장하고 있는 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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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애를 쩌리라고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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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열심히 연습하는 애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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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습이야 하겠지 못해서 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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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들한테도 못 따라가더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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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그 학교 축제 영상만 본 거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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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 외에 따로 연주한 게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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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잔뜩 난 상태에서, 서하는 다른 연주 영상을 보내주려고 하다가… 그냥 관뒀다. 어차피 무슨 말을 해도, 결국 [그래도 다른 사람들 못따라가는 건 맞구만] 이라는 소리밖에 나오지 않을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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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뭐 당분간 메탈은 안 할거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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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ㅋㅋㅋ 고생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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왠지 모르게 몸에 열이 오른다고 생각하며, 서하는 이서에게 카톡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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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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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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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늦게 날아오는 카톡. 서하는 “쉴때는 핸드폰만 붙잡고 있음 으흐흫ㅎㅎ” 같은 소리를 이전에 했었던 걸 떠올렸다. 그렇다면 쉬진 않고 있다는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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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습하고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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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ㅇ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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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수연이가 가르쳐준부분이 좀 막혀가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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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쳐보고 있는데 좀 되는거같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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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하는 이서를 처음 봤을때를 떠올렸다. 연습실 한 구석에서, 베이스를 뚱땅뚱땅 치고 있던 애. 현아와 수연의 발목을 붙잡고 있다고 느낄 정도의 실력이었던 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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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서의 실력도 많이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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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맹이 시절부터 피아노를 쳤던 현아와, 초등학교 시절부터 교회에서 드럼을 쳤던 서하와는 아직도 간극이 크긴 했지만… 베이스를 시작한지 이제 1년이 넘었다는 걸 생각해보면, 엄청난 발전 속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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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열심히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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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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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하는 건 당연한 거 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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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하의 카톡에, 이서는 뜬금없는 소리를 한다는 듯 답장을 보내왔다. 그렇지. 열심히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 카톡이나 키보드를 할 시간보다, 악기를 붙잡고 있는 시간이 더 길어야 하는 것 또한 당연한 일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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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공연에 애들을 초대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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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하는 그런 생각을 떠올렸다. 자신의 친구들도, 이런 마음가짐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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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테일러드 인디 록 페스티벌(BYTAILORED INDIE ROCK FESTIV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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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있어보이는 이름이지만, 실은 한국 메이저 락 밴드 중 손에 꼽을 만한 밴드인 테일러드(TAILORED)가 주최하는 페스티벌이라는 뜻이다. 규모는 4~5천여명 정도로 작고, 역사는 개최 8년차에 접어든… 홍대 인디씬 기반 락 페스티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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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페스티벌이 다른 페스티벌과 차별화되는 점은 바로, 페스티벌에 박혀 있는 이름 답게 언제나 헤드라이너로는 테일러드가 서지만… 그 외에는 테일러드가 ‘직접’ 선택한 인디 밴드들이 선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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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탓에, 바이테일러드를 통해서 공연 무대에 데뷔하게 되는 인디밴드도 있다. 그런 밴드들은 통칭 ‘테일러드픽’ 이야기를 들으며 순식간에 체급을 높여나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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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2일차 헤드라이너는 테일러드로 고정이니… 올해의 1일차 헤드라이너는 누가 될 것인가, 즉 올해 테일러드가 선정한 최고의 인디 락밴드는 누구인가가 호사가들의 주목을 받는 포인트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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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에 이름을 알리고 싶은 인디밴드라면 누구나 다 무대에 서고 싶은 페스티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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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그거 들었냐? 그 천안에 박민석. 부모님 상이 갑자기 났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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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런 페스티벌의 주최자들인 테일러드는, 상당한 위기를 맞이한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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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어쩌다가. 이거 뭐 단체로 조문이라도 가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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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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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정도면 얼마를 해 줘야 되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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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례식 안 가봐서 모르겠는데…” 같은 이야기나 하릴없이 늘어놓으며 술을 마시던 와중. 밴드의 베이스를 맡고 있는 한종현이,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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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민석이 걔 배고픈 소크라테스 보컬 아니냐? 그럼 이번에 무대 못 서는 거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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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에 순간 굳어버린 테일러드 멤버들. 밴드의 리더인 철연은, 자신부터 그것을 생각해야 됐다며 내심 자책을 했다. 하지만 누가 생각했든 무슨 상관인가. 일이 터졌으면 수습을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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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걔네 타임이 몇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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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18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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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상적인 페스티벌들은 보통 12시~1시부터 일정을 시작하고, 00시 자정에 일정을 마무리한다. 바이테일러드도 마찬가지로 13시부터 일정을 시작하고, 보통 30~40분 공연하고 2~30분 정도 세팅을 하며 휴식을 하는 쪽으로 일정이 잡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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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까닭에, 18시부터 19시 타임이면 꽤나 중량급인 라인업이라고 할 수 있었다. 저녁 타임에 들어가는 팀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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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 그쪽에 들어갈 팀이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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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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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테일러드의 깐깐한 안목에 의해 대부분의 밴드가 이미 걸러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른 타임의 밴드들을 밀어넣기에는, 뭔가 찜찜한 부분도 있었다. 상당히 고심해서 라인업을 짠 부분이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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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걔들 체급 정도 되는 밴드 중에 섭외 안한 밴드들이 많긴 한데, 솔직히 좀 구려서 그런 애들은 부르고 싶지 않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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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긴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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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연은 담배를 입에 물며 생각했다. 매년 라인업을 짜는데 고생을 하는 편이지만, 특히나 올해는 고생이 심했다. 며칠 밤을 새우며 라인업에 대해서 고민을 했던 탓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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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런 라인업을 손을 봐야 한단 말인가. 철연은 도대체 어떤 식으로 라인업을 조정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넣을 만한 밴드가 없는 것이 아니라, 그 타임에 넣고 싶은 밴드가 없다는 게 문제였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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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밴드 없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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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으면 이미 넣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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멤버들과 그런 말을 주고받으며 철연은 소주를 한잔 입에 털어넣었다. 그 씁쓸한 맛에 입을 다시며 다시 잔에 소주를 채워넣다가, 철연은 갑자기 머릿속에 뭔가 생각이 스쳐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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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그 애들이 이번에 EP를 냈던가. 라이브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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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은 상당히 좋았다. 요즘 유행하는 일본풍 락에, 서브컬쳐풍 해석을 곁들인 곡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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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만 특이하게 잘 쓰는 애들이라면 모르겠으나, 연주력 또한 기본기 탄탄한 3인방에 초월적인 실력을 가진 기타리스트가 있으니 상당히 좋은 편이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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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라독스의 오너이자 철연도 아는 형인 강성민의 이야기에 의하면, 라이브 실력도 상당히 탁월하다고 했다. 심지어 그 ‘김수렬’ 아저씨도 보장했다는 이야기도 들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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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이라면 이전에 있었던 일… 하지만 그것은 철연이 나름대로 조사해본 결과 헛소문일 가능성이 매우 높았고. 그 외에는 라이브로 들고 나올 곡이 몇개 안 된다는 것이었는데… 이 부분은 뭐, 알아서 해결하라고 해야겠지. 커버곡을 연주하는 방법도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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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연은 그렇게 결심하고,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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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내가 요즘 보고 있는 애들이 있는데. 좀 경력이 없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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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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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연의 제안을 듣고, 명전은 당장 답을 주지 못한 채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전달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들은 아이들의 첫 반응은 바로 의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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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페스티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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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이 너 요즘 개그가 많이 늘은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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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속고 오신 거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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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5단계 같은 거창한 과정을 거치지는 않았지만, 3명의 아이들은 각자 다 명전이 말한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 시간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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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그럴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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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드 결성한지 1년도 안 됐는데 EP를 내자마자 멜론에 차트인을 하고, 이제는 페스티벌에 출연까지 한다니. 락 전성기 시절 밴드들이나 이럴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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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철수의 말처럼, 락이 곧 음악이었던 시절에나 가능한 일이다. 그게 아니라면, 그 뭐냐… 류진인가 뭔가 그 사람처럼 대형 기획사에서 나오는 보이밴드 정도나 가능한 일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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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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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왜 이런 걸로 거짓말을 치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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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거듭 확인 질문을 한 뒤 바로 튀어나가서 어딘가로 전화를 걸기 시작한 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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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테일러드면 진짜 큰 건데. 이까지 와버렸다는 게 실감이 안 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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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런 이서를 두고 서하가 중얼거렸다. 살짝 복잡한 감정이 섞여있는 중얼거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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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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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나랑 음악하던 오빠들이 바이테일러드 나가고 싶다고 막 그러던게 생각나서. 다들 열심히 음악은 하는데, 결국 나간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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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내가 나가게 되어버렸네 하며, 서하는 멋쩍게 웃었다. 그 말에 명전은 서하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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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이 보이지 않음에도 끊임없이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다. 노력을 보답받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언젠가는 돌아오리라 믿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다. 명전 또한 그러한 부류의 사람이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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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비웃을 수는 있다. “재능이 없는 사람들”이나 “애초에 안 되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이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직접 본다면, 그런 말을 하기는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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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서하도 그런 것이겠지. 치열하게 노력하고 있던 사람들이 아니라 자신이 이렇게 기회를 얻어버리니 좋으면서도 뭔가 미묘한 느낌이 있을 것이다. 슬픈 감정 같은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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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노력해서 이뤄낸 일이니까, 그렇게 마음쓰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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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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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사람들이 안타깝긴 하지.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것이기도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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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스스로가 그런 유형의 사람이었기에 잘 알았다. 분노, 좌절, 갈망. 나는 왜 저렇게 되지 못할까. 나도 저렇게 될 수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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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실한 것은, 슬픔에 쓰러질지언정 남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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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에게 일어난 일의 이유를 남에게서 찾는 것. 처음이야 어렵지만 그 다음은 쉽다. 한번 두번 그렇게 남의 탓으로 돌리다 보면, 결국 자신에게 일어난 일은 전부 남에게서 기인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고. 결국 남을 망치는 것 뿐만 아니라 자신도 망가지게 된다. 더 이상 성장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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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사람의 말로는 보통 2가지다. 마음이 꺾여 은퇴하거나, 아니면 끝도 없이 남을 비방하며 하찮은 인생을 살아가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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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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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깝다고 해서 어떻게 할 거야. 만약 이 기회를 포기하고 남에게 줄 수 있다고 해도, 그럼 그 기회를 받지 못한 다른 사람은? 경쟁의 길을 걷기로 선택해버렸다면, 그런 감정은 버리는 게 정신건강에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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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의 말에, 서하는 천장을 잠시 쳐다보았다. 생각에 빠진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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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참가를 하실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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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나는 좀 반대긴 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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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들려오는 현아의 말에, 명전은 아무 생각 없이 답했다. 그러고 다시 서하를 보니 눈이 튀어나올 것 같은 표정. 조금 전만 해도 “내가 이런 기회를 받아도 되는 건가?” 같은 소리 하지 않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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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왜 반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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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뭐 별다른 이유는 없고. EP니 뭐니 하면서 엄청나게 연습 달렸는데 페스티벌까지 참가하려면 다시 또 연습을 해야 하니까. 나는 상관 없지만, 너희들이 좀 쉬어야 하지 않을까? 현아 입시 일정도 있고 이것저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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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입시 문제 해결했으니까 상관 없어요. 부모님이랑 이야기도 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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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에 명전은 현아를 바라보았다. 이제 아주 밴드 쪽으로 가기로 작심을 한 건가. 어쩌면 저 선택이 현명할지도 모른다. 밴드는 이미 페스티벌까지 나갈 수 있는 수준이 되었는데, 예대 나왔다고 해서 피아노로 먹고 살기 쉬운 건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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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한 사람 살린 것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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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일지도 모르지. 아무튼 명전은 그렇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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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테일러드 인디 락 페스티벌 @BTLRDFESOFFCIAL ・ 1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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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차 18:00 ~ 19:00 공연 예정이었던 [배고픈 소크라테스] 밴드는 밴드 내부 사정으로 인해 공연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 안타깝게도 이번 페스티벌에 불참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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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테일러드 인디 락 페스티벌 @BTLRDFESOFFCIAL ・ 1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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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 인해 비게 된 1일차 18:00 ~ 19:00 타임의 공연은 최근 데뷔한 인디밴드 [Group Sound]로 대체됨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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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 사운드 EP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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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 사운드 공연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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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테일러드 인디 록 페스티벌] 트위터에 올라온 두개의 트윗. 그 트윗의 여파는, 한국 인디씬에 크지는 않더라도 충격을 주기에는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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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테일러드 뭐냐 이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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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 트윗 2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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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사운드가 씨발 누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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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석이햄 어디갔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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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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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ㄹㅇ임이거?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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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니 듣는곡없는데 소크라테스 하나만 보고 예매했더만 ㅅㅂ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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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사운드가 누구인지 알아보자.av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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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브 공연 저열하게 딴 영상.av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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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의 가슴이 크게 흔들리는 영상.av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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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도면 된거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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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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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궈궈던~ 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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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몸승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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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니 무슨 젖흔드는거 원툴인애들임? ㅅㅂ 김철연 이새끼한테 접대해줬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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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오 철연햄 씨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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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바이테일러드 공연 예매했는데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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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 트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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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 좋아해서 엄청 기대했는데 ㅠㅠ 얘들 뭐야? 웬 여자애들 4명 밴드가 있음? 제이락임?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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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래는 좋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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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아니 노래좋은건 알겠는데 왜 소크라테스를 밀고 들어오는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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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들어봤지만 솔직히 얼굴이쁜거보면 그냥 얼굴믿고 들어오는애들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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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테일러드가 직접 선정했을텐데 그런 일이 일어나겠음? 생각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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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그럼 2020년에 물병사건은 왜 일어났는데 ㅋㅋ 테일러드라고 다맞는거아님 정신차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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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데 들어봤는데 노래 진짜 좋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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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솔직히 별로인데 뭔소리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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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타이틀곡 말고 들어보면 좋아; 영어제목인 곡 듣고 놀랬음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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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 사운드의 곡이 록/메탈 차트에 진입했다 한들 그것은 타이틀곡인 [그 거리를 뛰어넘어]가 이뤄낸 성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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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거리를 뛰어넘어]는, 인디 씬 리스너들의 화력을 받아 차트에 진입한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갓반인’들의 선택을 받아 차트에 진입한 곡. 게다가 힙스터를 자처하는 인디 씬 리스너들이라면 반드시 싫어할 수 밖에 없는, 평범하게 사랑과 청춘을 노래하는 곡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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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그룹 사운드가 받은 반대는 엄청난 수준이었다. 어느 정도였냐면, 이때까지 바이테일러드 페스티벌의 공식 계정이 받았던 리트윗 횟수 1위의 기록을 가볍게 깨 버렸을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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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대부분은 불평이나 욕이었다. [이게 말이 됨?], [이상한 애들 말고 제대로 된 애들 데려오세요.], [하… 여자애들 데려와서 뭘 하겠다고 ㅡㅡ], [난 진짜 락알못인데 더 알못인 사람들 데려오는 것 같다]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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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대부분은 그룹 사운드의 노래를 들어보지 않았으며, 들어볼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심지어는 그들에 대해서 알아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저 욕부터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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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말이 되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원래 악플러라는 집단이 그렇다. 말도 안되는 행동을 태연하게 저지르면서 “나를 이렇게 만든 너희가 잘못된거다”라는 소리를 하는 자들만이 악플러가 될 수 있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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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런 여론에도 불구하고, 마치 개가 짖어도 기차는 간다는 것 마냥 바이테일러드 주최측과 그룹 사운드는 잠잠했다. 그러는 사이, 페스티벌의 시간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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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다. 이거 봤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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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시간. 친구 둘과 놀고 있던 다인에게, 옆 반 아이가 다가와서 말을 걸었다. 핸드폰 화면에 띄워져 있는 페스티벌 시간표. 그곳에는 ‘Group Sound’ 라는 이름이 띄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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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처음 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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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수연이네 밴드 아닌가? 뭐 전에 밴드 한다고 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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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 반 친구의 말에, 다인은 기억을 떠올려보았다. 뭔가 건수가 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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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얼마전에 이야기했던 게 그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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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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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연수가 막 자기 어디 나가게 됐다고 그랬잖아. 페스티벌인가 뭔가. 그게 이거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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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린의 말에, 다인은 어렴풋이 그런 기억이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러고 보면 그런 이야기를 했던 것 같기도 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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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 근데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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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알고 있으면 초대권 같은 거 있나 물어보려고 했지. 원래는 수연이 찾아왔는데 수연이가 없어가지고. 혹시 다인이 너한테라도 있나 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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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가 쭈뼛대며 물어보는 모습에 다인은 격세지감을 느꼈다. 입학 당시만 해도 수연에게 툭툭 괴롭힘을 당하던 아이였고, 그 때문인지 수연이 바뀐 다음에도 믿지 않으며 거의 마지막까지 사과를 받아주지 않던 애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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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수연이를 직접 찾으며 초대권을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단 말인가. 수연이의 평판이 엄청 회복하긴 했다고 다인은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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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나 초대권 받은 거 같음. 원하는 애들 있으면 주라고 했던 거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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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못받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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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그때 없어서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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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와중에 이야기를 듣고 있던 수현이, 뭔가 생각났다는 듯 종이를 꺼내 옆반 애에게 건네주었다. 뛸 듯이 기뻐하며 연신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사라지는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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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바뀌긴 했다 애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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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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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를 만지작거리며, 다인은 창밖을 잠시 쳐다보았다. ‘평판을 개선한다’ 라는 수연의 전략은 확실히 먹혀들어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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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에 퍼진 소문까지는 어떻게 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피해자… 또는 한승고 아이들이 더이상 수연을 ‘학교폭력을 일삼는 일진’으로 여기지 않는 것은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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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겨진 헛점들 또한 존재한다. 그런 것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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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로써, 내가 도와줄 수 밖에 없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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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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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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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애들이 걔들이라고? 우리 전 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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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던락을 표방하는 인디 밴드, [윤현준밴드]. 밴드의 리더이자 보컬인 현준은 무의식적으로 자신 밴드의 멤버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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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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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돌아오는 답변. 저 애들이 테일러드의 김철연 선배가 꽂아넣은 ‘그룹 사운드’ 애들이 맞단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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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다 이쁘게 생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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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션 중 한명이 그렇게 중얼거렸다. 현준 또한 동감이었다. 어떻게 죄다 저런 애들을 뽑아온 것인지. 실력이 아니라 외모로 밴드를 결성한 건가 싶은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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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애들 곡 들어본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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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틀은 들어봤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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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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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좀, 이지리스닝 같던데. 곡이 안 좋은 건 아닌데 뭔가 너무 무난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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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스의 말에, 현준은 머리를 긁었다. 인디씬에 들려오는 소문 - ‘김철연이 드디어 노망났다’, ‘김철연이 바람 피운다’, ‘김철연이 대형 기획사랑 연결돼서 신생 아이돌 밴드 만든다더라’ - 같은 것들은, 현준은 전혀 신경쓰지 않는 편이었다. 다른 밴드의 이야기 따위 아무래도 좋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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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별 신경 안 쓰고 싶어도, [윤현준밴드]의 리더인 윤현준으로써는 신경을 쓸 수 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현준은 다른 페스티벌에 한두번 나가보긴 했지만, 바이테일러드로 치면 저 애들과 마찬가지로 첫 출전인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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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위기 띄우는 건 솔직히 자신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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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밴드는 무난한 모던 락을 하는 밴드였다. 한 곡이 끝나고 박수는 받을 수 있을 지언정 뛰어노는 분위기는 만들 수 없는 곡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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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배고픈 소크라테스]는 그들과 다르게 노는 분위기 자체는 끝내주게 조성한다는 펑크록 밴드. 라이브도 굉장하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가 있어, 그 분위기를 이어가면 되겠구나 하고 안심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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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일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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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준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대기실 밖으로 나섰다. 리허설이 이어지고 있는 와중, 안면 있는 밴드들 몇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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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윤영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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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가리 공연 준비 잘 되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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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야 딱 어? 그냥 맞춰보기만 하면… 딱 살아있네~ 되는 거지. 방금 하고 왔는데 다 맞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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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 몇년 전 유행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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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조금을 시시덕거리던 현준과 상대 밴드. 말이 끊긴 타이밍에, 상대가 갑자기 질문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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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전 타이밍 밴드가 걔들이라매? 그 뭐시기, 여고생 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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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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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쁘냐? 얼굴은 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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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에 현준은 살짝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상대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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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여미새 새끼. 잘하냐 뭐 그런 소리도 아니고 그냥 바로 얼굴 어떻냐? 이야기부터 박네. 여친도 있는 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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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어? 인간도 생물이야. 그리고 생물의 어? 최중요사명이 뭐냐? 자손 번식이라고. 나는 그런 번식의 사명을 수행하는 거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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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처럼 미친 소리를 하는 상대를 두고, 현준은 외모를 설명해주었다. 한 명은 가슴이 크고, 히메컷이고, 화장이 진하고, 개성있는 복장을 하고 있다. 한명은 가슴이 작고, 긴 머리고, 머리를 반쯤 깠고, 화장이 연하고, 온통 검은색 복장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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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은 어떤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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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그 멜론차트 들어갔다는 곡 들어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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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 Sound]라는 이름이던가. 현준도 가끔 가는 파라독스에 매달 정기적으로 출연한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라이브를 가서 공연을 들어본 적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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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 또한 마찬가지였다. 방금 전 밴드 세션의 이야기를 듣고 [그 거리를 뛰어넘어]라는 곡을 듣긴 했지만, ‘잘 만든 곡’이라는 느낌은 받았어도 엄청나다는 느낌을 받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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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쳐줘도 수작, 딱 그 정도일까. 락에 친숙하지 않은 통칭 ‘갓반인’들은 좋아할 노래긴 하지만… 글쎄, 현장 관객들이 좋아할까. 그냥 찬물 확 끼얹는 노래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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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근데 철연햄 픽이라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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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긴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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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들은 거 있는 거 아닌가? 아니면 진짜 뭐 받기라도 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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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리는 바에 의하면, [에코사운드]를 산 사람이 저 그룹 사운드 밴드 가족이라는 이야기도 있다던데… 라고 중얼거리는 상대. 현준은 어처구니 없는 소리 하지 말라고 웃어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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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코사운드 성사장님이 자기 레이블 관리 엄청 할텐데 그걸 왜 팔아? 팔렸다는 거도 헛소문일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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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진짜라니까. 얼마전에 내 친구가 에코사운드에서 릴리즈할라고 방문했는데 직원들이 다 바뀌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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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명 그냥 나갔나보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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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중얼거리며 현준은 한숨을 쉬었다. 이걸 어떻게 하나. 내 공연만 잘 하면 되는 거긴 하지만, 아무래도 관객들을 만족시키려면 전 타임도 중요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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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쟤들 올라가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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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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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에 올라가는 아이들. 키보드가 두세대 설치되고, 기타도 한두대 올라가고. 전반적으로 꽤나 무거워보이는 라이브 세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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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렇게 할 게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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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준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다른 밴드들보다도 훨씬 라이브 세팅이 무거워보이는 그런 느낌. 저걸 다 쓸 수도 있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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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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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휴, 죽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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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윤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아이돌을 덕질할 때에도 이런 페스티벌 공연 같은 것은 와본 적이 없었는데. 사인회 가려고 시디를 열심히 산 적은 있었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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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가 이런 비싼 돈을(1일권이 8만원이나 했다) 주고 락페에 오게 된 건지 모를 일이었다. 이래서 덕질 대상은 제대로 잡아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온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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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인 건… 그렇게 교통이 불편하진 않았고, 날씨도 마찬가지라는 것. 약간 덥긴 하지만 뭐 이정도면 버틸 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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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 4시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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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랫소리가 들려오는 걸 보면, 이미 공연은 시작된 모양이었다. 속되게 말해서 ‘뽕을 뽑으려면’ 저런 공연도 보면서 놀아야겠지만, 굳이 그럴 마음이 들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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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경이나 할 겸 산책이나 좀 하다가, 그룹 사운드 애들 보고. 그 다음 후반부에 유명한 밴드들 공연 보고, 집에 간다. 그것이 아윤의 계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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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빨리 가보자. 지금 빨리 자리 잡아야 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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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밀지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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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와중, 호들갑을 떨며 지나가는 남녀. 커플은 아닌 것 같고, 남매인가? 아윤은 그렇게 생각하며 맥주 판매 부스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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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주 한잔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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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천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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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윤은 그 가격을 듣고 놀랐다. 의외로 싸네? 이런 데에서 파는 음식들은 대부분 다 후려친다는 인상이 있는데, 맥주 가격은 전혀 아니었다. 500ml에 5천원이면 뭐 커피라고 생각하고 마셔도 될 수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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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코야끼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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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알에 만삼천원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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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그런 아윤의 생각은, 순식간에 개박살나버리고 말았다. 30분동안 줄을 서서 받은 타코야끼는 20알에 만삼천원이라는 미친 가격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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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어느나라 타코야끼가 20알에 만삼천원이냐고. 그러나 아윤은 울며 겨자먹기로 음식을 받아들었다. 어찌되었든 저녁은 해결을 해야 할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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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이 다음에 소크라테스 아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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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공연장 뒤쪽에 주저앉아, 타코야끼를 우물거리며 다른 팀의 공연을 구경하고 있던 아윤. 그녀의 귀로 불만섞인 소리가 들려왔다. 공연장의 타임테이블을 보며 왜 이렇게 되었냐고 불만을 표하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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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이럴거면 안 왔지. 얘들은 누군데? 뭔 또 듣도 보도 못한 애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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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즈밴드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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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 걸즈밴드야 씨~~~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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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구잡이로 내뱉는 욕과 불만들. 아윤은 하늘을 바라보며 타코야끼를 다시 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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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바뀐지 한참 됐는데 왜 아직도 그걸 모르지? 이 정도면 그냥 지능 문제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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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애들이 무슨 잘못이 있냐 하며 뺨이라도 한대 후리고 싶었지만, 민주시민으로써의 훌륭한 자세를 가지고 있는 아윤은 그를 참을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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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을 보고 말하든가. 우리 애들만큼 라이브 잘하는 애들이 어디 있다고. 진짜 이서, 현아, 서하, 수연이 죄다 연주력도 미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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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시렁대던 아윤은, 핸드폰을 열어 SNS를 켰다. 그리고 #바이테일러드를 검색하니, 방금 전과 비슷한 이야기들이 우수수 쏟아졌다. 그룹사운드가 누구냐, 김철연 돈 받은 거 아니냐(이 이야기는 계속 나오더라)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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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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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실제로도, 앞쪽 밴드의 마무리 인사와 동시에 빠지는 사람들이 보였다. 다른 밴드와는 다르게 눈에 띌 정도로 빠지는 사람들. 아윤은 타코야끼 상자와 맥주컵을 쓰레기통에 집어던지고는 일어서서 앞을 향해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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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들이 공연 안 보면 나는 앞에서 놀 수 있어서 좋긴 하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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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분이 씁쓸해지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 애들만큼 공연 잘 하는 애들 없는데. 같이 보면 분명 재미있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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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또, 팬이 많이 늘어나면 파라독스에 자리 없을 것 같고… 오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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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들은 누구야?”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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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개짜증나네. 소크라테스 왜 안나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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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애들이 왜 올라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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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얘들 음악 들어본 적 있냐?” “음악 개쩌는데. [잿빛의 나날들] 진짜 완전 개 돌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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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 사운드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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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고생들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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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쟤들 이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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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파를 헤쳐가며, 아윤은 그런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었다. 그룹 사운드를 아는 사람들은 소수. 나머지는 누구인지 모르거나, 아무 생각 없거나, 불만을 표하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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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아윤이 생각하기에 이 모든 것들은… 일거에 뒤집어지리라. 우리 애들이 연주를 시작하기만 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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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안녕하세요. 그룹 사운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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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팅이 완료되었는지, 수연의 건조한 말소리가 스피커로 나지막히 흘러나온다. 약간의 반응만을 보이는 관중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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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가 누구인지 잘 모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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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에는, 조금 더 큰 반응이 돌아왔다. 약간의 웃음들, “너희가 누군데!!”하는, 술에 취한 듯한 고성과 다시 쏟아지는 웃음. “알아요!!” “그룹 사운드요!!” 하는 일부 팬들의 반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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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저희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이 누구인지 잘 모르는 건 마찬가지에요. 우리 서로 모르는 사람들끼리 굳이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을 필요가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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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런 신호 없이, 수연의 등 뒤에서 드럼이 조금씩 울리기 시작한다. 심벌과 탐탐이 낮게 소리치며 연주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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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이상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중요한 건 음악이니까요.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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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의 기타가 울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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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인디 록의 발전사를 다 읊으려고 한다면 길고 긴 5700자로도 불가능하다. 태초에 미8군이 있었으며, 그곳에서 한국의 락이 태동하기 시작하였으며… 인디 락의 본격적인 시작은 홍대를 기반으로 했던 라이브클럽 ‘드럭’을 위시한 펑크 락과 PC통신을 기반으로 해서 결성한 모던 락… 어쩌고 저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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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저리 적기에는 지나치게 장광설이 될 것이고, 말 한마디 보탤 역사의 산증인들 또한 남아있어 ‘이 말이 곧 진리요 정전(正典)이니라’ 라고 말할 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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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분명한 것은 인디 락도 결국 락이다. 그리고 현재까지 남아있는 락 리스너들은, 매일같이 ‘나는 틀니 음악들은 듣지 않는다’며 ‘Too Mainstream’한 음악에 대한 거부감을 말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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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도 결국 락을 즐기는 사람이다. 즉, ‘근본’을 맞이했을 땐… 호응을 할 수 밖에 없는 그런 운명에 처해있는 인간들이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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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는 음이 되지 못한 소리를 내밀었다. 시험삼아 울린 게 분명한 소리와 함께, 낮게 울던 드럼이 잦아든다. 그리고 공연장은 침묵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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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음악이 나올지 궁금해하던 관객들이 슬슬 ‘실수인가?’ 라고 생각하던 바로 그 때, 수연이 기타를 다시 튕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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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타토닉 스케일 기반의 셔플리듬이 분명한, 바로 그런 사운드. ‘걸즈 밴드’나 ‘여고생 밴드’에 어울리지 않는 그런 블루스풍의 사운드가 공연장의 스피커를 통해서 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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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어디서 많이 들어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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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생각하는, 자신이 락 꽤나 들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 점점 기억 속을 뒤지기 시작할 때쯤에… 수연이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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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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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설이 차마 되지 못한 마지막 마디가 관계자석을 살짝 맴돌다 사라진다. 다음 날 19시 공연을 책임질, ‘뮤직임마서울’의 김태종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지른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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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아 왜 그러냐? 앉아라. 안 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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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주병을 기울이며 철연은 무심하게 말했다. 그 말에 자신의 반응이 과하다는 것을 자즉했는지, 불콰한 얼굴로 자리에 앉는 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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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태종이 살짝 과한 반응을 보였을 뿐, 관계자석에 앉아 있는 2일차 밴드들과 공연이 끝난 1일차 밴드들의 반응은 태종과 강도만 다를 뿐 비슷했다. 저게 뭔지 도대체 믿을 수가 없다는 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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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수 밖에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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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연은 내심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도 파라독스의 강성민에게 라이브클럽 공연 영상을 받아보지 않았다면, 절대 믿지 못했을 광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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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누가 믿겠는가. 고등학교 2학년 밖에 되지 않은 여고생이 저런 연주가 가능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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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자석에서 누가 경악을 하건 간에 연주는 계속 이어진다. 느긋한 템포는 관객들이 조금씩 몸을 들썩일 수 있게 하고, 기타를 연주하는 수연의 리듬을 타는 몸짓은 그러한 용기를 더 북돋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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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뭐야?”, “뭔진 모르는데 신나는데.”, “씹근본!!”, “와 진짜 뭐임?” 등의 말소리가 오가는 가운데, 아까 들려왔던 것 같은 술 취한 목소리가 우렁차게 “Crossroads!!” 라고 고함을 질렀다. 그 말에 미소를 띠며 연주를 계속하는 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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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커버곡이긴 하나, 정통 블루스였던 Robert Johnson의 [Cross Road Blues]나 Eric Clapton의 [Crossroads]와는 살짝 다르다. 템포는 확연하게 낮춰졌으며, 좀 더 댄서블하게 변한 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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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시작된 1차 기타 솔로는 관객석과 관계자석에 충격을 주기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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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느긋하게, 하지만 청자의 귀에 확실하게 꽂혀들어가는 소리. 0점 맞기가 100점 맞기보다 어렵다는 말처럼, 어느 것 하나 정확한 것이 없는 리듬과 음정은… 역설적으로 연주자의 정확도를 말해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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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럼으로써 사람들은, 지금의 기타연주가 진정으로 살아있는 연주라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깨닫게 되었다. 아무런 의도 없이 곡을 ‘재생’ 하기 위해서 치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곡을 ‘연주’ 하고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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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가 끝나자마자 다시 시작된 보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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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진짜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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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무슨 노래인지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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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라. 그냥 개쩐다는 거만 알고 있으면 되는 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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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락 듣는다는 애가 이 곡도 모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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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절때와 다르게, 사람들의 움직임이 확연하게 늘어나고 있었다. 사람들이 빠져나간 만큼, 관객이 움직일 수 있는 범위도 넓어진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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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몇분 전 아무런 움직임 없이 차갑게 공연장을 바라보고 있던 관객들은, 얼마 지나지 않은 지금에 와서는 마치 인간이 밥 주기를 기다리는 잉어들처럼 무대를 바라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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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다음, 다시 한번 연주되는 기타 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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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연주에 태종은 다시 한번 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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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으로 울리기 시작하는 블루지한 기타 톤. 왼손과 오른손의 움직임에는 화려함이란 없고 단지 의도에 따른 정확함만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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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울려대는 소리는 다르다. 수연의 손 아래에서, 소리는 천변만화하는 어택과 디케이, 서스테인과 릴리즈를 보여주고 있다. 어디 하나 의도치 않게 나는 소리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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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어처구니 없는 연주에 관객들마저 움직임을 멈추고, 입을 살짝 벌린 채 무대를 보고 있다.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시간,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상황,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사람에게서… 전혀 생각하지 못한 일을 겪고 있다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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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게 말이나 되냐? 이거 사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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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은 나름대로 나이를 먹은 사람이고, 블루스와 블루스 락에 상당히 오랜 세월을 바친 사람이다. 외국이라면 모르겠으나 국내에서는 블루스로 본인을 능가할만한 사람이 몇 없다고 자신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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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지금 저 아이가 보여주고 있는 것은? 진정으로 뛰어난 재능은 세월마저도 뛰어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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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는 가운데, 거의 4분 가량 지속된 솔로가 끝나간다. 철연은 그 연주에서, 이것이 계획한 것이 아니라 즉흥적으로 이루어진 솔로라는 것을 깨닫고 경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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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해도 너무한 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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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타임의 밴드를 아예 죽여버릴 셈인가. 도대체 얼마나 진심인 건가. 철연은 몇분 전 관계자석에 슬쩍 올라온, 다음 타임 밴드인 [윤현준밴드]의 윤현준을 바라보았다. 얼굴에 피가 완전 다 빠져나가 새파래진 기색의 현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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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준아. 너 지금 여기서 이럴 때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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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네, 네? 어, 으, 어… 네, 아 네. 네. 어, 빨리 내려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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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는 우당탕 내려가버리는 현준. 철연은 관계자석 좀 더 뒤쪽을 바라보았다. 맥주를 홀짝이고 있던 나머지 1일차 밴드 아이들은 다 내려간지 오래. 1일차 헤드라이너인 [메르키쉬드]의 조우현만이 밴드 구성원들과 머리를 긁적이며 무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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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현야. 너는 안 가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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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건 지금 내려가봐야 소용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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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말하더니, 밴드 구성원들을 내버려두고 철연의 테이블에 털썩 앉는 우현. 공연은 솔로가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멈추지 않은 상태로 바로 다음 곡을 연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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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rnstunde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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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곡과 다르게, 열화와 같은 환호성을 보내는 관객들. 아까 전과는 훨씬 느린 템포와 우울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던 원곡과는 다르게, 블루스풍으로 편곡된 Sternstunde가 밴드의 손끝에서 연주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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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은 쟤들 아셨어요? 저런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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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당연히 알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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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도 철연은, ‘사실 이 정도일줄은 몰랐지만’ 이라는 말을 마음속으로 숨겼다. 선배의 위상을 깎아먹는 이야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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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쟤들이 밴드 파이오니어 나왔을 때부터 알았어. 와 이거 심상치 않다고 생각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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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요? 근데 TOP 8에는 없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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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정이 있어서 그래. 나중에 술자리에서 이야기 해 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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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치부에 가까운 이야기가 드러날까봐 살짝 찔린 철연은, 이야기를 바로 마무리해버리고는 무대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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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월의 어느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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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하얀 새를 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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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을 리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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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에 가득한 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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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의 장기인 기타는, 이번 곡에서는 단지 스트로크만 울릴 뿐이다. 하지만 블루지한 음색이 묻어나오는 목소리는 그 공허감을 막으며 관객을 통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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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전까지만 해도 관객석에 퍼져 있던 댄서블한 분위기는 이미 없다. 사람들은 셔플 리듬과 남아있는 여운에 따라 관성으로 몸을 움직이면서도, 곡의 분위기를 받아들여 절제된 동작을 보여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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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큰일났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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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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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현의 중얼거림에, 철연은 의문을 표했다. 뭐가 큰일났다는 걸까? 하지만 우현은 아무 말 하지 않고 위스키를 한잔 쭉 들이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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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너 좀 있다가 공연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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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억. 아니 몇시간 뒤니까 뭐… 아무튼 저런 애들이 나와버렸으니. 한동안 인디이나 락씬도 시끌시끌해지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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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긴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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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스타의 탄생은, 긍정적인 일로만 가득한 것이 아니다. 유입되는 사람들과 그로 인해 벌어지는 일들. 누군가는(아마 파라독스 사장이겠지) 떼돈을 벌겠지만, 누군가는 수입이 줄어들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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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의 차이에 음악을 접고 악플러로 전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어떻게든 따라잡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영향을 받아 블루스를 시작한다거나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방향이 어찌되었든, 아무튼 뭔가 떠들썩해질 것은 확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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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동안… 뭔가 ‘얘들이다!’ 라고 말할만한 그런 애들이 없긴 했지. 자랑은 아닌데, 우리 이후로 없었던 것 같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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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형네만한 밴드는 좀 많지 않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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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연은 우현을 살짝 째려보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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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들이 얼마나 빨리 커질지 모르겠어. 다만 확실한 건, 몇년 안 걸릴 것 같다는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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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 찾아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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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거리의 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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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어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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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리 가고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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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의 보컬이 나지막하게 울리며, 스트로크만 치던 기타가 다시 울부짖기 시작했다. 마지막의 트럼펫 솔로를 대체하는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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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치의 움직임 없이, 눈을 감은 채로. 고개는 살짝 떨군 채 침묵하며 바삐 움직이는 손과 다르게, 음은 아까보다도 더 격렬하게 울어댄다. 파도가 치는 북해, 험난한 여정 속에서도… 저 멀리 보이는 등대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듯. 희망 한 가닥이 섞인 멜로디가 격렬한 아밍과 함께 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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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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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만난 그 날의 내 마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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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파도와도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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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나를 조금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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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아가게 만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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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을 장식하는 [그 거리를 뛰어넘어]. 이서의 노래를 따라 부르고 있는 관객들. 전혀 모르는 노래였음에도 불구하고 1절만에 후렴구를 외워버린 관객들을 보면, 그 집중도를 알 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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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구요!! 다시 한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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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만난 그 날의 내 마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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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기 가수라도 된 것 마냥, 계속해서 다시! 를 외치며 신나하는 이서. 수연의 박수를 따라 치며, 노래를 따라 불러주는 행복한 표정의 관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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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모습을 보며 아윤은 살짝 빈정이 상했다. 이렇게 잘들 놀 것이면서 도대체 아까는 왜 그랬는가? 아까 이 공연은 볼 필요 없다면서 자리를 떠난 녀석들은 왜 대부분 돌아왔는가? 계속 다른 데 처박혀서 자리 차지 하지 말고 놀고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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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 수 없지. 우리 애들이 잘하는 탓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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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오늘 공연 미쳤다. 원래 얘들 이러나? 파라독스에 못 가봤는데. 너 그거 무조건 예매해. 진짜 못하면 죽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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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았다고 좀… 아까부터 왜 자꾸 그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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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와중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아윤은 고개를 돌렸다. 아까 마주친 듯한 남녀 둘. 파라독스를 꼭 가봐야겠다는 이야기에, 아윤은 본능적으로 핸드폰을 꺼냈다. 빨리 예매를 해 놔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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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아윤은 핸드폰을 다시 내렸다. 그리고 미소를 지으며 기타를 치고 있는 수연을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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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깟 예매 아무래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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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순간을 조금이라도 더 즐기는 것이 훨씬 중요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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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잿빛의 나날들]에서도 이 애들이 말했듯이, 추억이란 결국 잿빛으로 변하는 것. 낡은 사진첩에 고이 모셔두는 것보다는 빛나고 있는 현재가 훨씬 중요한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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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윤은 가만히 공연을 바라보다가, 충동적으로 사진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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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의 미소가, 무대를 배경으로 싱그럽게 피어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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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기타 배운지 1년밖에 안 됐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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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뭐. 그렇긴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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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스티벌 2일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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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차 18시 타임에 일어났던, 그야말로 폭풍과도 같은 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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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로 인해 “제가 평소에 이런 거 절대 안하는데요…” 라고 말하며 호응을 유도하고 팬서비스를 하며 어떻게든 열기를 끌어올리려 했던 19시 타임의 [윤현준밴드]나, “오늘 공연 보러 온 분들, 전부 멀쩡하게 집 못 갑니다!!” 를 외치며 필살기를 꺼내들었던 1일차 헤드라이너 [메르키쉬드]의 조우현과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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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대에 자극을 받아 자존심을 지키고자 필사적으로 공연을 했던 다른 밴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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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을 다한 1일차 밴드들과 2일차 밴드들은 웃고, 아직 공연을 하지 않은 밴드들은 부담감에 시달리며, 공연을 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초대권을 받아 들어온 밴드들은 ‘나도 이렇게 열띤 공연을 하고 싶다!’ 라고 생각하고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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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저녁 자리에서 던져진 질문. 아니, 질문보다는 비명에 가깝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에 수연이 겸연쩍은 듯 대답을 하는 광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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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해질만도 했으나… 사람들은 계속해서 수연의 입에서 나오는 대답을 듣고 기절할듯이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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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그럴 수 밖에 없다. 1일차 18시에 보여졌던 [그룹 사운드]의 퍼포먼스는 분명 경이로운 수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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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탄한 기본기를 가진 드럼과 키보드, 베이스. 그리고 그 위에서 춤추듯이 연주된 기타. 수십년의 경력을 가진 사람조차 쉽게 할 수 없다 할 정도의 감성을 담은 블루스 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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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후 던져진 질문들에 수연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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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시작한지 얼마나 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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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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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드 시작한지 얼마나 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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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개월 안 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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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곡 시작한지 얼마나 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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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개월 안 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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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뭐 어릴 때 음악 하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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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미 어린데요. 그리고 안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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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대답만을 했다. 과연 그것이 사실일까를 따지는 것 이전에… 1년 약간 안 되는 경력으로 저정도의 음악을 연주하는 것이 과연 가능은 한 것일까? 저것이 천재성이라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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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그런 생각을 품은 채로 수연의 근처를 계속해서 맴돌고 있었다. ‘꽤나 괜찮은 재능을 가졌다’ 라고 생각되는 베이스 소녀 최이서에게는 그다지 관심을 가지지 않은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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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맞다. 수연 학생 그, 서명전 기타리스트한테 배우셨다는 이야기가 있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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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그렇긴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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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에 서명전이 누구인데? 라고 묻는 사람들. 기타리스트 몇몇은 아연한 기색을 내비치며 이야기를 했다. 어떻게 서명전을 모를 수가 있냐? 너 그럼 채호근이 누군진 알어? 같은 이야기가 오가는 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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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 학생. 혹시 안 되는 일정 있어요? 내가 다음 투어 오프닝 밴드를 구하려고 하는데, 해 볼 생각이 있는지 해가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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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연의 그런 말에, 다들 “오오오~” 하는 감탄사를 내뱉었다. 바이테일러드 페스티벌 참가와 함께 테일러드 투어의 오프닝 밴드 참가는, 한국 락씬에 큰 영향을 미치는 테일러드가 밀어주는 밴드라는 명확한 징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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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확실하겐 모르겠네요. 이번에 그 오디션 프로… 인베이전인지 뭔지 그거 참가하게 될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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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금 들려오는 감탄사. 테일러드의 제의를 거절하는 인디밴드가 있을 지 몰랐다는 느낌의 절반. 그리고 밴드 오디션 프로그램인 인베이전 프롬 서울(Invasion from Seoul)에 참가하냐는 느낌의 절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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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나 거기 나가려고 했는데.” “너 나가면 무조건 광탈이지.” “다른 밴드한텐 말 안해줘야겠다. 걔들도 한번 혼나야지 킄킄컥” 같은 소리들이 오가는 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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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녀석들은 또, 내 앞길을 막는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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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생각하는 한명의 사람이 있었다. 모던 락 혼성 밴드인 [울림 스톤즈]를 이끄는 리더이자 보컬인 정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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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지원사업 [밴드 파이오니어] 당시, 하수연의 학폭 의혹을 심사위원들에게 익명으로 제보함으로써 [그룹 사운드]의 탈락을 이끌어냈던 사람. 그리고 그러고도 결승전에 진출하지 못했던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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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쟤들 그때 걔들 맞지?” “그런 것 같은데.” “그럼 우리 오디션 그냥 포기할까?”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지 않나.” 같은 멤버들의 이야기가 그의 옆에서 이뤄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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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력 우승후보를 제거했음에도 불구하고 탈락했던 밴드 파이오니어 이후, 영 패기를 잃은 것 같은 멤버들. 우진은 그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무튼 다시 하면 되는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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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디션엔 나가야지. 그리고 쟤들도 탈락시켜야 할 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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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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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진의 말에, 밴드 멤버 중 한명이 무슨소리 하냐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우진은 그에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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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락시킬 수 있는 애들은 빨리 탈락을 시켜야지. 한명이라도 줄이는 게 이득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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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 그거 별 근거도 없는… 뭐 그런 이야기라고 들었는데? 그리고 쟤들 진짜 잘하는 애들인데 그렇게 해봐야 무슨 의미야. 같이 참가해도 그냥 냅두는게 낫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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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너는 학폭범을 그대로 냅둘 거냐? 학폭은 영원한 학폭이야. 그리고 내가 다 생각이 있어. 알아놓은 것도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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멤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우진은 이야기를 듣지 않고 오히려 성을 냈다. 그리고 자신의 말에 자신이 잡아먹혀들어가는 모습을 보여주며, 우진은 주위에 들리지 않게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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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딜 말이야. 다들 진지하게 하고 있는데. 자기는 1년밖에 안 되었다고 깝싸질 않나. 음악이 좆으로 보여? 저런 새끼들이 있어가지고 내가 결국 못 뜨는 거라고. 씨발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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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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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진짜 개쩔지 않냐? 좋은 셀카봉을 쓴 이유가 있다니까. 이 누나가 괜히 몇만원 들여서 산거 아니라는 거 알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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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좀 그만해. 몇번을 이야기하는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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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윤의 촬영본을 보며, 세현은 그렇게 세윤에게 핀잔을 주었다. 또다시 날아오는 등짝 스매쉬. 하지만 세현의 감각은 그 고통보다는 화면에 집중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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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애들 이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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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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멘헤라 패션처럼 차려입은 이서. 메탈헤드라는 것을 알 수 있게 입은 서하와, 단정하게 입은 현아. 그리고 공연 중앙의 수연은… 그 음악 답게 뭔가 복고풍으로 입은 느낌이었다. 검정색 슬랙스와 구두. 버튼 하나를 푼 하얀색 셔츠. 살짝 오버핏의 원버튼 재킷을 어깨에 걸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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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도 그냥 미쳤어. 파라독스에서 이런 식으로 공연을 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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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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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현은 핸드폰을 켜서 인터넷 커뮤니티를 바라보았다. 며칠 전만 해도 그룹 사운드가 도대체 뭐하는 놈들이냐, 그냥 완전 낙하산 아니냐, 김철연한테 뭘 해줬길래 그러고 있는 거냐… 같은 소리를 하던 커뮤니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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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락의 창시자.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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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 사운드 공연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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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으면 개추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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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로 개같이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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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ㄹㅇ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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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또 근들갑떠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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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그룹사운드를 몰라? 씨ㅣㅣㅣㅣㅣㅣ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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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솔직히 근들갑 거르고 그냥 공연 자체가 또라이였음 기타 ㅅㅂ 그냥 존나잘침 존메이어 강림한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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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씹메이어가 누군데? 이시대의 기타히어로는 ‘하수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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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 에릭 왜 회의를 시작하지 않는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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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성인 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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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하수연’이 오지 않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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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롤링스톤즈 선정 21세기 최고의 기타리스트 ‘하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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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솔직히 노망난 노인네보다 하수연이 더 잘치면 개추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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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안티백서보다 잘치는거는 그냥 개 팩트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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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 외에도, 트위터나 다른 SNS를 봐도 호평 후기가 엄청나게 올라오고 있었다. 불평 후기 같은 것들은 10:1이니 100:1이니 하는 비율 이전에, 거의 존재하지 않는 수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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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빨리 이거 보라고. 편집 잘 했는지 못 했는지 봐야 할 거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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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냥 니가 알아서 하면 되는데 왜 지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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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나의 잔소리에, 세현은 그렇게 답하면서도 화면을 보았다. 이 개같은 ‘누나’의 일이라면 죄다 훼방을 놓고 싶은 것이 사실이지만, 적어도 [그룹 사운드]와 관계된 일이라면… 절대 그렇게 할 수 없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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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한국에서 음반을 판매할 시 수익이 어떻게 분배되는가에 대해서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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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최종 소비자가에서 세금이 제해지면 90%의 금액이 나온다. 이 다음 ‘보통’ 유통사는 50퍼센트 정도를 받고, 기획사가 30%정도를 받는다. 나머지는 실연자와 저작권자가 나눠가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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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룹 사운드의 EP에는 기획사가 존재하지 않는다. 도매/소매상 또한 존재하지 않으며, 유통사는 매우 후하게 계약을 체결해주었다. (여기서 독자들은 이래서 부모를 잘 둬야 한다는 것이라는 교훈을 얻을 수 있겠다) 그리고 실연자와 저작권자는 [그룹 사운드]로 동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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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룹 사운드는 바이테일러드 페스티벌 공연 이후로, 인디씬을 뒤흔들만큼 경이적인 EP판매량을 기록했다. 일반 앨범과 한정판인 소장용 바이닐을 포함하여 2,500장 정도를 판매했는데, 이는 데뷔밴드라는 걸 감안했을 때 불가능한 기록에 가깝다. 그렇다면 과연 밴드에게 돌아갈 수익은 얼마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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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만원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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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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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커피를 빨대로 쭉 빨아들이고는, 어안이 벙벙해진 아이들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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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여기서 천만원이 그대로 너희 주머니로 들어가는 건 아니지. 저작권자는 나니까, 거기에 따라 수익이 분배될 거고. 통상적으로 저작권자와 실연자의 수익 배분율은 10:6. 그러니까 일단 인당 백만원 정도 분배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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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에 환호성을 지르는 세명의 아이들. 하지만 명전은 손을 들어 막고는 다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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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머지 6백만원 중 나한테 일단 240만원이 들어오고. 이서한테도 240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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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나한테 240만원을 더 준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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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사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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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금 환호성을 지르는 이서. 그러고 있는 아이를 뒤로한 채, 명전은 “나머지 120만원 중 30만원씩 너희들에게 돌아가. 그러므로 서하 130만원, 현아 130만원 정도겠네.” 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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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이렇게 음반수익 많이 받는 밴드는 처음 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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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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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인디밴드는 음반 하나 팔아봐야 십만원 정도 들어오나? 그 정도 수준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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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하는 그렇게 중얼거리다 현아에게 대답을 해 주었다. 하긴, 요새는 피지컬 음반이 아니라 스트리밍이 대세가 된 시대라 음반 수익이라는 걸 기대하기 어렵긴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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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몫은 400만원 정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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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반 판매라는 걸 제껴놓고 보면 큰 돈이라고 할 수 있다. 4백만원은 분명 거금이니까. 하지만 코피 터져가며 음반 제작에 매달리고 녹음비용까지 들여가며 번 돈이 4백만원이라고 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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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관적으로 볼 때는 좀 아쉬운 것이 사실이다. 당장 명전이 세션 돌면서 번 돈만 해도 4백만원을 훌쩍 넘으니까. 만약 그 시간동안 세션을 풀로 돌았다면? 모르긴 몰라도 몇배는 더 벌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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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돈으로 뭐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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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어쩌겠는가. 한국에서 음악이라는 것이 그런 것인데. 그리고 저렇게 아이들이 돈을 어디 쓸지 행복해하는 것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들지도 않았다. 최저시급도 안 나올 돈임에도 불구하고 행복해하는 걸 보니 더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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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기나 사 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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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그래도 나 포데라로 바꿀까 고민이었어. 포데라가 엄청 좋다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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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백만원으로는 포데라 못 사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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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아의 말에 시무룩한 표정이 된 이서. 서하는 낄낄 웃으며 여행이나 가자고 제안을 했다. 4명이서 여행 가면 재밌지 않겠냐는 이야기. 물론 재미있을 것 같긴 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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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은 올해 끝나고 생각을 해 보자. 당장 입시도 있고, 중요한 것도 있고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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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게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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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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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이전 바이테일러드 페스티벌 2일차 저녁에 자신이 남들 앞에서 이야기했던 말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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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자신에게 이것저것 부탁하는 일이 그다지 없으나, 이것만은 좀 하지 않을래? 라며 강요 아닌 강요를 하던 이혜인 씨의 얼굴과, 그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이제까지 해왔던 ‘평판 좋아지기 작업’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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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오디션 프로에 나갈 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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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블에서 방송할 예정인 오디션 프로그램, [인베이전 프롬 서울(Invasion from Seoul)]. 그룹 사운드의 다음 행선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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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베이전 프롬 서울(Invasion from Seoul). 락 씬에서 인베이전이라고 하면 당연히 떠오를 수 밖에 없는 브리티쉬 인베이전(British invasion, 비틀즈로 대표되는 영국의 락 밴드가 미국 음악 시장에 충격을 준 사건)에서 이름을 따온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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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From Seoul을 붙인 것은, 이 밴드 오디션을 통해서 선발된 밴드가 서울 인베이전으로 불릴만한 파급력을 가지길 원해서일까. 일개 방송국의 오디션 따위에 ‘인베이전’의 칭호를 붙이다니 어찌 오만하다고 하지 않을 수 있는가 하고 명전은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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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생각은 명전만 한 것이 아닌 듯 했다. 1회 인베이전 프롬 서울은 나름 락 애호가들에게는 꽤나 좋은 반응을 얻었지만 대중적으로 뭔가 크게 되진 않았다고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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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진은 ‘더 좋은 밴드를 뽑고, 더 큰 규모로 일을 벌이면 더 확실하게 반응이 올 것이다!’ 라는 뉘앙스의 기사를 냈다지만 명전은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대충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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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이상 락이 대중에게 먹히지 않는 시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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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의 락은 곧 음악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락은 음악의 한 갈래일 뿐이다.” 라는 배철수의 말처럼, 음악시장은 더 이상 락 밴드가 모든 것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시장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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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제작진이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리고 한국 락의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이냐 같은 건 지금 단계에서는 아무래도 좋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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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명전에게 중요한 것은, ‘엄마’가 출연해보라고 요청한 그 오디션에서 어떻게 우승하느냐지, 그 다음 일이 아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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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디션 나가신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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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그렇게 되긴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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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를 홀짝이는 명전을 보며, 주현은 이것도 먹으라며 쿠키를 밀어주었다. 꽤나 비싼 쿠키였고 맛도 있었기에 아무런 의도가 없다면 감사히 먹었을 명전이었지만… 이제는 그 호의가 어디에서 나오는 지 알기에, 굳이 손대고 싶지 않은 것이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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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안 먹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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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배 불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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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빼놓고 다이어트 하는 거 아니지? 너 진짜 뺄 곳도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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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녹음을 하고 싶다며 밴드를 부르고는, 커피나 한잔 하자며 데려온 주현이 데려온 카페. 그 카페에서 이서는 주현이 밀어준 과자를 냉큼 받아먹고 있었다. 흐뭇한 웃음을 짓는 주현을 보고 명전은 나이 먹을 만큼 먹은 양반이 저러고 싶나라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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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닌가? 이 모든 게 그냥 나의 과잉대응일 뿐인가? 그냥 30대 청년이 후배들을 위해서 뭐 먹이고 싶을 뿐인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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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주현은 불순한 의도로 행동하고 있는 것이 맞았지만, 천 길 물속 조차 모르는 명전이 한 길 사람 속을 알 수 있으랴. 명전은 그렇게 고민하다가,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는 선에서 현 상태를 유지하자고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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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밴드 오디션이라고 하면, 그 서울 인베이전인가 그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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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뭐 아신다거나, 그쪽 관련해서 하시는 일이라도 있으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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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의 질문에 주현은 고개를 저었다. 그도 방송가에 오래 있긴 했지만 모든 것을 다 아는 건 아니었다. 이 밴드를 소개시켜준 박휘석 피디라면, 방송가에 어느정도 연줄이 있으니 그런 것들을 잘 알지도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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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그냥 노래만 부르고 다니는 사람이라 그런 건 잘 몰라서, 뭐라고 말씀드리기는 그렇긴 한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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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은 짜증이 나기도 했다. 아무리 미성년자라도 그렇지 이 정도로 신호를 주면 생각은 해볼 법 하지 않나. 내가 당장 뭐 하자고 했나? 밥 먹고 좀 보고 그 정도는 할 수 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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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그도 고생을 상당히 했던 만큼, 방송가에 발을 들여놓은 후배들을 위해서는 조언을 해 줘야 한다. 괜히 이상한 것에 말려들어서 하지도 않은 말을 했다 뭐 그런 고생을 하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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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촬영에 들어가면… 카메라가 켜진 상태에서는, 방송국 피디들이 묻거나 시키는 것에 대해서는 무조건 세번 생각하고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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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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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아의 물음. 서하는 고개를 끄덕이고 있고, 이서는 아무 생각 없이 과자를 먹고 있었다. 명전은 주현의 말이 무엇일지 생각해보았다. 방송가 놈들이 악랄한 것은 유명하긴 하다만, 그걸 세 번 까지 생각할 필요가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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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편 때문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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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죠. 방송국 편집이라는게 악랄한 부분이 있긴 하지만, 오디션은 더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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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은 옛날 일 하나를 떠올렸다. 사귀었던 오디션 출신 아이돌 한명이 말해주었던 이야기다. 자신은 분명히 쓸데 없는 주제에 “별 관심 없어요.”라고 대답했었는데, 돌고 돌아 보니까 그 대답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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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주목하고 있는 다른 참가자가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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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별 관심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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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예고편에 나가버려서(특정할 수 있는 단서를 다 준 채로 면피용 모자이크만 했다고 한다) 몰매를 맞고, 어떻게든 해명을 했더니 정작 본편에는 그런 장면이 없었다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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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일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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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있는 일이에요. 제가 직접 들었던 이야기고. 물론 그 오디션 프로는 너무 과해서 욕을 많이 먹었다고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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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비슷한 일이나 약간 강도가 낮은 일 정도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할 수 있는 게 2024년의 방송가 사람들이다. 한번 두번 생각하라는 것으로는 부족하고, 세번 생각하는 것이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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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너무 두려워할 필요는 없죠. 적당히 자극적인 말도 해 줘야 방송에 들어가고, 인기도 끄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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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을 잘 하면 되는 거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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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현아의 말에 주현은 고개를 저었다. 방송을 해보지 않은 사람들이 착각하는 부분이 바로 저 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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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은 애초에 공정한 경쟁이 아니다. 제작측에서 밀어주고 싶은 쪽은 분량을 더 주고, 영 아닐 것 같은 쪽은 분량을 줄인다. (조작까지 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 경우는 범죄 취급을 받아서 요즘엔 좀 줄어들었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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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어찌되었든 최종 결과에는 개입하지 못하더라도 최종 결과를 내는 과정 자체에는 타인이 개입할 수 있는 것이 방송이다. 음악만 잘 한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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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성을 보여주지 않으면 분량을 받을 수 없죠. 물론 여러분들 같은 경우는 인원 구성이라던지 외모라던지 하는 부분이 이미 스타성이긴 하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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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이서와, 쑥쓰러워하는 현아. 별 생각 없어 보이는 서하를 두고 명전은 당연히 그렇겠지 하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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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목의 집중 정도는 다르겠으나, 요즘 세상은 미소녀 여고생 4명이 모여서 밖에서 막춤을 춘다거나 고래고래 소리만 지른다고 해도 다 쳐다보면서 응원하는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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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런 애들이 제대로 된 음악을 한다? 그리고 실력도 좋다? 음악도 근본이 있는 음악이다? 어떻게 안 좋아할 수 있고 분량을 안 줄 수 있겠는가. 현대 문명에 어둑한 명전이라도 그 정도는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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락 밴드 오디션 프로그램인 인베이전 프롬 서울 - 약칭 인베이전 - 1회의 룰은 아래와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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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참가 대상 밴드들은 10분 가량의 퍼포먼스를 녹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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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녹화된 퍼포먼스는 일정 시간대에 유튜브로 방송되고, 이 때 시청자들은 각 밴드의 퍼포먼스에 대해서 투표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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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를 통해 선발된 16개의 밴드들은 본선에 진출하여 경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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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이 때 ‘멘토’들은 각 밴드를 선발하여 일종의 프로듀싱을 하고, 그를 통해 계속해서 경쟁해나가는 방식을 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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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각 편마다 탈락자를 내는 방식으로 방송이 진행되며, 이 때 투표는 현장 관객 20%, 온라인 관객 50%, 전문가 30%로 결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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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 룰이 2회차에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것은 아니다. 1회차가 흥행했더라면 그대로 적용될 확률이 높으나, 1회차는 오디션 프로 치고는 범작이라는 결과를 내면서 방영이 종료되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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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방식이 달라질 것으로 예상되는 것은 ‘본선 진출’ 부분이었다. 1회에는 유튜브 스트리밍을 통해 사전에 참가 밴드들을 시청자의 손을 통해서 걸러냈으나, 2회에서는 그러지 않을 것이라는 추측이 대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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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유는 단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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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청자들은 자신이 보고 있는 사람들이 특별하기를 원한다. 자신과 같은 시청자들이 투표해서 뽑은 사람이기를 원하는 게 아니라, 전문가들이 심사해서 이미 ‘특별한 실력을 가졌다’ 라고 검증받은 사람들이기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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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하면 그 편이 여러모로 편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인간은 자신의 안목에 대해서 신뢰하지 않는다. 자신의 귀, 눈, 혀, 그 외 기타 등등은 좋아한다는 신호를 보냄에도 불구하고 뇌, 정확하게 말하면 ‘나는 높은 예술 감각을 가지고 있소’ 라고 요약되는 ‘체면’이 거부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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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거 좋아하는데?” 라고 방금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옆에서 “그거 좆구린데 왜 좋아하냐?” 라고 하면 ‘근데 거짓말이고 사실 걔들 별로 안 좋아했어’ 같은 태도를 취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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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따르면, 자신이 좋아하게 된 밴드가 ‘시청자 손에 의해서 뽑혀올라간 밴드’ 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는 것 보다, ‘전문가들에 의해 뽑힌 특별한 밴드’ 라고 꼬리표가 달려있는 것이 여러모로 좀 더 좋아하기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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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그런 까닭에 명전은 [인베이전]에 대해서 대비를 하고 있긴 했지만, 완전히 확실하게 대비를 하고 있진 못했다. 박휘석 음악감독이나 보이밴드 류진을 통해서 얻어온 소식도 ‘포맷이 변경될지도 몰라요.’ 같은 불확실한 소식들 뿐이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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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다음 행선지가 오디션으로 정해졌다 한들, 아직 공고만 되었을 뿐 참가신청을 받고 있지도 않는 오디션에 참가할 수는 없는 일이다. 명전도 그것을 알았기에, 우선 해야 할 일부터 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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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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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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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의 홈페이지를 쳐다보며 그렇게 말하는 이서에게, 명전은 그런 말 밖에 해 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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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악기라는 것은 본인의 만족. 자기가 원하는 사운드를 내는 것이 최고의 악기인 법이다. 명전 또한 당시의 벌이로 치면 수천만원짜리 기타도 살 수 있었지만, 굳이 펜더 커스텀 샵의 블랙 스트랫을 들고 다닌 이유가 있다. (물론 커샵 블랙 스트랫 또한 현재가 천만원이 넘어가는 고가 기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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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여기가 일본이라면 직접 가서 쳐보라는 이야기를 해 줄 수 있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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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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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챠노미즈라던지 가면 악기점 엄청 많으니까. 아니면 이시바시 같은 데 가면 되고. 어찌되었든 한국처럼 눈탱이 맞을 염려가 없으니까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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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악기 상가라고 할만한 곳은 낙원상가밖에 없다. 그리고 낙원은, ‘서명전’ 일 때에도 은근슬쩍 어떻게든 해쳐먹으려던 장사꾼들이 즐비하던 곳이다. 요즘은 많이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뭔가 찜찜한 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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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가서 '한번 쳐 봐도 될까요?' 이러면 바로 짜증부터 내는 곳이 낙원이다. 친절한 곳도 많다지만, 낙원에 뺀질나게 드나드는 사람들이 아니라면 그런 가게가 많은지, 친절한 가게가 많은지 알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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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 반해 일본은 한국에 비하면 거의 천국이라고 할만한 악기 시장을 가지고 있다. 악기 골라야 되는 사람이 오챠노미즈를 가면 악기 고르다가 밥때 놓쳐서 굶어죽는다는 말이 왜 나왔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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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뭐 한국 웹사이트에서 보지 말고, 이시바시라던가 구매대행 웹사이트 쪽도 봐. 다른 건 몰라도 펜더나 희귀매물 같은 건 거기 통해서 구하는 게 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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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의 말에, 화면이 뚫어져라 워윅의 프렛리스 베이스 - 잭 브루스가 크림(Cream) 재결성 공연때 쓰던 것과 같은 모델이었다 - 를 보던 이서가 눈을 돌렸다. 살짝 맛이 간 것 같은 표정에 명전은 당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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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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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악기를 사는 건 포기해야겠어. 낙원에 사고 싶은 악기가 너무 없거나 비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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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어쩌려고. 이제 애들 올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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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일정은, 정산금을 가지고 낙원에 가서 쇼핑을 하는 것이었다. 비싼 감이 있지만 낙원밖에 만져보고 악기를 살 곳이 없으니, 출혈을 감수하면서. 그리고 장비 업그레이드도 하고, 커피나 마시면서 오디션을 어떤 식으로 준비해야 할지도 생각해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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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오늘을 그렇게 보낼 생각이었지만, 이서의 생각은 조금 다른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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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백화점에 갈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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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뭐? 가서 뭐 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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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디션용 옷 사야지. 그리고 좀 있으면 이제 완전 여름인데, 수영복도 사고. 수연이 너도 여름인데 놀러가야 할 거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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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영복? 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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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음악에 담을 쌓았다가 갑자기 음악을 급격하게 들이부어 혹사된 하수연의 귀가 그렇게까지 나빠지지 않았다는 것에 감사해야 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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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명전은 전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잘못 들었으면 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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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영복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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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무슨 소리인가. 나 좀 놀아본다 하는 21세기 현대인들 정도는 애송이로 취급할만한 향락을 즐겨본 명전마저도 남성의 몸으로 여성의 수영복을 입는다는 그런 일은 해 본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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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하다. 명전은 남성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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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여성의 몸으로 여성의 수영복을 입는 것이니까 다르지만, 그거야 남들이 그렇게 본다는 거고 명전 자신은 좀 다르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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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치마나 미니스커트 같은 것들은 버텼더래도 수영복은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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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렁헐렁한 느낌이 좀 곤란하더라도, 짧은 반바지 입었다고 생각하면 그것으로 그만인 일이었다. 그리고 의외로 적응도 빨리 되어서 남들 앞에서 속옷 보여주는 일도 없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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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수영복은 속옷 그 자체 아닌가. 젖지 않는 팬티와 브라를 입고 남들 앞에서 “이거 속옷 아닙니다~” 라고 하는 꼴이다. 대명천지에 그게 무슨 말도 안되는 일인가? 속옷을 보여주다니 부끄럽지도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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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명전은 남성 시절에 해외에서 누드비치 방문하면서 속옷 뿐만 아니라 그 밑의 무언가도 내놓고 다닌 적이 많았지만, 다들 알다시피 나이가 들면 예전 기억은 잊혀지기 마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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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여자도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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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런 수영복이니 하는 것은 ‘아가씨’나 ‘여자애들’ 같은 그런 여자들이 입는 옷이지, 자신이 입을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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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초창기에는 믹스커피만 마시고 국밥만 먹으며 대충 옷장에 있는 옷 걸치고 나다니다가, 이제 와서는 달달한 커피에 마라탕 엽떡 잘만 먹고 애들이 와서 “야 이게 유행하는 건데~” 이러면서 하자 하면 안내키는 척 가서 해준 다음 은근히 사진 나한테도 에어드랍 해 달라고 하는 사람이 할 말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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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원래 사람은 자기인식이라는 것이 중요하다. 남이야 어찌되었든 사람이 어떻게 자기 자신을 인식하고 있느냐는 것은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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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꾀병 부리는 애도 ‘집에 가고 싶다’ 라고 생각하면서 꾀병 부리면 절대 못 빠진다. ‘나는 진짜 머리가 깨질 정도로 아프다!’ 라고 생각하면서 바둑 두던 관우마냥 계집애같은 비명을 질러야 빠질 수 있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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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명전의 심정은 계집애같은 비명을 지를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어찌됐든 “삼삼이다! 이건 무효야!” 를 외치며 집에 가고 싶어하는 관우 정도는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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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탈주하려고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명전은 기타를 잘 치는 것이었지 힘이 좋은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빠져나가려고 해도 이서가 슬 끌어와버리면 탈탈 털리면서 질질 끌려와야 되는데 뭘 어떻게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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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번의 시도 끝에 그는 포기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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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행선지, 오타쿠 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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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요즘 유행하는 건데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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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아가 소개한 것은, 잘생긴 남자들이 여러 형태로 그려진 그림. 그 그림들은 아크릴 쪼가리에 그려져 있거나, 쿠션에 그려져 있거나, 스티커로 되어 있거나, 데포르메 되어 있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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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로 유행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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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뭐냐면, 버추얼 유튜버라는 건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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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명전은 현아의 설명을 들으면서 여러모로 어질어질함을 느꼈다. 가상의 캐릭터가 있는데 이 캐릭터는 흡혈귀라는 설정인데 사실 좀 멍청한 면이 있어서 그런 면에서 시청자들에게 어필하는… 어쩌고 저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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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그런 가상의 캐릭터를 연예인으로 만들었다는 거지? 어디 만화나 영화 이런데 나온게 아니라. 그리고 사람들은, 아니 현아 너는 그런 가상의 캐릭터를 좋아하는 거고. 그래서 이런 걸 사는 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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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런 게 아니라, 쿳쨩은 진짜 귀엽다니까요. 그리고 실존하는 사람이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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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거 맞는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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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도 들어도 무슨 말인지 모를 것 같은 이야기를 내버려둔 채, 명전은 아크릴 스탠드 하나를 집어들었다. 푸른 색 계열의 교복을 입고, 마작패를 들고 있는 장발 머리의 캐릭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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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마음에 드세요? 학생회장이라는 캐릭터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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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이 학생회장이야? 이름을 정말 성의없이 지었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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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게 아니라 직책이 그렇다는 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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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캐릭터는 마작을 좋아하는데 정말 진심이고, 어쩌고 저쩌고. 명전은 점점 말이 길어지기 시작하는 현아를 두고 창밖을 잠시 바라보았다.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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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행선지, 옷 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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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이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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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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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비슷비슷 한 거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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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소리 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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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곤해서 의자에 주저앉아 있는 명전을 뒤로 하고, 아이들은 옷을 보면서 시시덕거리고 있었다. 패션에 민감한 이서와 의외로 뭔가 잘 아는 것 같은 서하. 그리고 별 생각 없어 보이는 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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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현아 쟤는 좀 심하네. 나도 저정도 차이는 알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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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때부터 여성인 현아보다 여성 옷을 잘 안다는 시점에서 이제는 뭔가 좀 위화감을 느낄 법도 했지만, 명전은 아무튼 그렇게 생각했다. 원래 현대인의 덕목은 자기세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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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도 입어 볼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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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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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지 말고 입어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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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취향에 안 맞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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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는 과연 그렇겠다고 생각했다. 어디 ‘중요한 무대’에서나 치마 같은 거 입는 정도지 원래 저 애의 취향은 검고 하얗고 포멀한 거 두르는 스타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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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이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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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괜찮은 것 같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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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아무 위화감 없이 그 옷을 받아들고는, 탈의실에 들어갔다 나와 옷을 보여주었다. 아이들의 오~ 하는 시선. ‘내가 여자도 아니고’ 한 것은 얼마 안 된 일이건만 어느새 여성복을 사고 있는 것은 그의 잘못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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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사람은 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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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길 가다가 갑자기 쓰러져서 죽은 나이 든 인간이 술 먹고 킥보드 타다 머리깨져서 죽은 여고생 몸에 빙의하는 극단적인 상황을 가정하지 않는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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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때 나랑 같이 공 차던 애가 고등학교 와서 만나니 침 찍찍 뱉고 담배 피우는 그런 애가 되어 있는 일은 흔하다. 물론 그 역도 마찬가지다. ‘쟤는 평생 딸배나 하다 죽겠군’ 하던 애가 어느새 견실하게 가다판에서 땀흘리며 노력하는 청년이 되어 있는 일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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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것처럼 명전도 많이 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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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이 그렇게 봐주지 않는데, 언제까지고 자신을 21세기보다 전쟁이 가까운 시절에 태어난 사람으로 취급하긴 힘들다. 명전의 의지가 약하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 자체가 원래 그런 생물이 못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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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다. 그리고 명전은 인간이므로, 명전은 적응했다. 남들이 보는 시선 그대로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그 예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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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거 못 입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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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런 형태의 수영복은 절대 입을 수 없다는 것이 명전의 의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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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쁠 것 같은데. 수연이 피부가 하얗잖아. 이런 검은 비키니 입으면 딱 어울릴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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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나 입어라! 나는 못 입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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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까? 내가 입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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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행선지, 수영복 가게. 명전의 신경질적인 대답에도 불구하고 싱글거리며 탈의실에 들어간 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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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는 사이, 점원이 슬쩍 다가오더니 “대학생분들이세요?” 라고 물어보았다. 아니라고 하니 “아니 저분이 너무 크셔서… 크헣… 죄송합니다…” 라고 하며 사라지는 점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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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울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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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런 말을 하며 나오는 이서를 보고, 명전은 잠시 할 말을 잊었다. 속옷 위에 올라간 수영복이라 좀 언밸런스하긴 하지만, 대체로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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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런 걸 봐도 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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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왠지 자괴감이 몰려왔다. 이러고 있어도 되는 것일까? 내가 이 애들 사이에서? 아니 뭐 못 할 건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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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이제 너도 입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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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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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이 내지른 비명은 아무튼 말에 가까우려고 노력은 했다는 게 느껴지는 수준이었다. 그리고 명전은 왜놈 피해 도망치던 선조마냥 빠르게 대피해보려고 했으나, 전주 이씨가 아니라서 그런지 이서에게 바로 잡히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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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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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잡힌 댓가는 래쉬가드 착용이었다. 배꼽이 살짝 드러난 크롭 래쉬가드 상의와, 하이 웨이스트형 노멀컷 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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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신 자신의 사진을 찍고 인스타에 올려야겠다며 호들갑을 떨고 있는 아이들을 보며 명전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이혜인 씨가 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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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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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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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싱글대는 현아의 얼굴을 보며 명전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솔직히 피곤했고, 옷을 이렇게까지 사야 하는 이유가 뭘지 알 수 없었다. 옷이야 시간 날때 사면 되는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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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소리야. 그렇게 생각하니까 그렇게 우중충한 옷만 입고 다니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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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어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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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뱃지나 쓰잘데기 없는 MGM 명품 가방 등 우중충한 것 입고 다니기로는 명전에 충분히 비견될 수 있는(적어도 명전은 그렇게 생각했다) 이서의 말에, 명전은 반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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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은 자기를 나타내는 거라니까. 응? 밴드들도 막 그런다고 하잖아. 패션 가지고 어필을 하고… 나는 잘 모르지만. 비틀즈도 예전에 무슨 패션의 붐을 일으키고 그랬다던데, 우리도 의상 같은 걸 맞춰야 하는 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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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틀즈는 모드 패션의 발상자들은 아니지만 유행시키는데에는 상당한 공헌을 했다. 이서는 엉겁결에 그 점을 짚은 셈이지만, 명전은 그보다는 좀 더 강한 생각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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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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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까지의 명전, 아니 ‘하수연’ 또한 의상을 활용해본 적은 있다. 중요한 거리 라이브때 일부러 이목을 끌 만한 치마를 입고 나간다던가. 라이브 녹화때도 마찬가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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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것은 그저 이목을 끌려는 수단에 불과했다. 단순히 ‘이쁘면 더 잘 봐주겠지’ 정도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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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명전이 떠올린 생각 또한 그와 비슷하다. 하지만 결론이 비슷할 뿐, 과정이 비슷하다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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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로버트 플랜트가 금발머리에 웃통을 까지 않는 프론트맨이었다면 어땠을까? 시드 비셔스가 그런 또라이가 아니었다면? 액슬 로즈가 정장을 입은 건장한 남성이었다면? 커트 코베인이 나른한 그런지 패션을 한 금발머리 남자가 아니라, 그냥 말쑥한 사람이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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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한들 그들의 음악성이 죽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지금의 인기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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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은 분명 밴드의 인기에 영향을 미친다. 그것이 크나크다고 할 수는 없지만, 무시할 수도 없는 수준이다. 음악적인 인기가 아니라 대중의 인기라고 생각하면 더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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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명전은 모종의 이유로 대중의 인기를 얻어야 하는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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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그런 쪽으로 한번 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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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도할 수 있는 것은 뭐든지 해 본다. 그것이 명전이 이번 오디션 우승을 위해서 세운 지침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비키니를 입을 것은 아니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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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초빙된 전문가의 손에 의해서 세심하게 설계된 코디를 맞춘다고 할지라도, 무대에 서면 그 옷들이 튀어나가 이제 나의 시간이다 하며 노래 부르고 악기 연주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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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그런 건 다 부차적인 이야기다. 중요한 것은 연습. 그것도 엄청난 양의 연습이 필요했다. 그러므로 명전은 그 날 자신을 백화점에서 고생시킨 값을 10배로 받아내겠다는 듯 애들을 쥐잡듯이 몰아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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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비싼 워윅 베이스 들고 도대체 뭐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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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스에 적응을 못 했을 수도 있지만 아무래도 상관없다. 적응을 해 오지 못한 본인의 잘못이지 명전의 잘못이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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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브감 주겠다고 필인 넣는 건 좋아. 그런데 그 다음 박자가 흐트러지면 아무런 소용이 없잖아. 중요한 건 박자와 음정, 그리고 강세. 그게 안 되는데 나 잘합니다 하고 연주를 뽐내봐야 무슨 소용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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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드럼도 지금 쉬었다고 그러는지 아니면 EP 냈다고 이제 뭐 메이저 밴드 됐다고 그러는지 모르겠는데 박이 안 맞고. 왜 이러는 거야? 우리 지금 진짜 메트로놈 틀어놓고 처음부터 하나 둘 셋 넷 하나 둘 셋 넷 이러면서 연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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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까지는 내 박자를 보고 맞춰도 되지만, 이제는 아니라니까. 왜 자꾸 나를 보고 맞추려고 하냐? 베이스하고 드럼이 박자를 제대로 맞춰줘야 기타가 튀어나가든 말든 할 거 아냐. 내가 조금만 엇박으로 틀어도 둘 다 우당탕탕 하고 있는데 이걸 뭐 어떻게 해야 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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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연습에 명전은 과감하게 아이들을 혼냈다. 풀이 죽은 모습이 불쌍하긴 했지만, 이 때 아니면 기회가 없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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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파에 딱 바람 들어갈 시기 아닌가. 뭔가 자기가 이뤄낸 것 같고, 이제 나도 프로 같고.그런 생각은 빠르게 깨부숴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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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하면 오디션은 본격적인 경쟁이니까. 내가 잘한다고 해서 끝나는 게 아니다. ‘남보다 잘 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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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키보드는 그닥 혼낼 게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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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이 그렇게 생각하며 말을 멈추는 사이, 연습실 책상에서 요란하게 진동소리가 났다. 핸드폰인가. 받아든 전화는 박휘석 피디의 것이었다. 뭐 세션 외주라도 주려고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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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하수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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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나 박휘석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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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피디님. 어쩐 일로? 세션 의뢰라도 있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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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런 거 아니고. 내가 뭐 그런 일이 있어야만 전화를 거는 사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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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뜻은 아니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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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들어도 뭔가 소식을 가지고 온 것 같은 뉘앙스. 명전은 참 까다롭다고 생각하며 기름칠을 조금 해주었다. 제가 그런 게 아니고. 언제 한번 뵈어야 하는데 참 시간이 안 나서 아쉽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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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뭐냐하면… 얼마전에 뭐 오디션 프로? 인베이전 프롬 서울? 그거 정보 좀 알아봐달라고 했잖아요? 내가 오늘 관련 스텝들이랑 밥 먹다가 이야기를 해 봤거든. 근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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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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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 현장 라이브로 심사를 한다던데? 예선 밴드 전부 다. 현장 관객들 불러다 놓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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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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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자신이 잘못 들었나 했나. 그게 무슨 소리인가. 완전 라이브라고? 오디션 프로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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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 라이브는 당연히 아니지. 본편에는 녹화 방송이 올라갈 건데, 예선 공연 자체는 관객 앞에서 라이브로 치뤄진다는 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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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그렇지 하고 명전은 생각했다. 예선을 완전 라이브로 치른다는 것이 가능키나 하겠는가. 만약 참가팀이 50팀이라고 한다면, 각각 10분씩 공연해도 앞뒤로 세팅시간 5분씩 20분이다 하면 1000분이다. 이 정도면 정규 프로 하나 정도 나오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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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관객 앞에서 라이브로 치뤄지는 것도 불가능 할 것 같은데요. 밴드가 얼마나 많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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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야 내가 피디가 아니니까 아니니 알 수가 없지. 하지만 라이브로 치뤄진다는 건 확실한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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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로 몇가지 이야기를 더 한 후, 힘내라는 덕담 한마디와 함께 통화를 종료하는 박휘석 피디. 명전은 천장을 잠시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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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 라이브가 아니라고 해도, 어떤 방식으로 치뤄질 지 도저히 짐작이 안 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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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브 방송이 아니라고 할지언정 시간이 드는 것은 마찬가지다. 1천분이 방송으로 송출되지 않는 것일 뿐이지 녹화가 되어야 하는 점은 똑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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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하려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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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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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회 인베이전 프롬 서울 방송은, 아예 흥행이 박살나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엄청나게 흥행하지도 않았다. 락 씬 자체에서는 꽤나 흥미를 불러일으켰고 음악에 대해 관심이 많은 사람은 재미있게 봤다지만, 그것이 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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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회 인베이전을 통해 발굴된 밴드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유명세를 좀 타긴 했지만, 뭔가 거창하게 ‘인베이전’ 이라는 이름을 따와 붙인 것 만큼 활약도가 있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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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베이전을 만든 방송국인 Mtown에서는 도대체 왜 이런 결과를 맞이했는지 궁금해했다. 음악성이 걸출한 밴드들을 가져다놓고, 흥미로운 경연을 보여주었다. 밴드 풀도 좋고 경쟁 구도도 좋았고 나온 음악도 좋았고 비주얼도 좋았고 아무튼 다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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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흥행에는 실패했다. 뭐가 문제인가. 고민하던 경영진은, 어떤 이유인지 알아내기보다는 확실하게 2회를 흥행시킬 수 있을만한 인력을 투입하기로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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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적인 감정이 중요하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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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욱 피디는 담배를 피우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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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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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town이 만들어낸 전설적인 오디션 프로그램의 시즌 2를 담당했던, 그리고 그 시즌 2를 흥행시켰던 피디다. 그가 맡았던 시즌 2는 그야말로 전 국민이 그 프로그램을 본다고 할 정도의 흥행을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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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부정적인 반응 또한 엄청날 정도였다. 대표적인 장면이라 하면, 탈락한 연습생들이 눈물을 흘리며 퇴장하는 롱테이크 장면과 그 후 즉시 나가는 본인 및 다른 연습생의 탈락 소감 인터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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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방심위의 권고, “이런 식의 잔인한 프로를 내보내도 되는가!” 하는 수많은 디스 기사를 불러왔다. 인터넷에서 사람들이 윤발놈 개새끼 죽이니 마니 이러는 것은 네거티브 반응으로 기록하기도 뭣한 수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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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 인해 시즌 2의 역사적인 흥행에도 불구하고 Mtown은 윤동욱을 하차시킬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성공을 위해서라면, 독약인 것을 알면서도 먹어야 할 때가 있는 법. 경영진은 다른 업무를 하고 있던 윤동욱 피디를 인베이전의 메인 피디로 올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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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무슨 소리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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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몰입하기 위해서는, 긍정적인 감정만을 줘서는 안 돼. 부정적인 상황을 주고 그게 개선되어가는 걸 보여줘야 제대로 몰입이 되는 거지. 그런 점에서 인베이전 1회는 너무 부정적 감정이 부족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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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욱은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아름다운 경쟁? 공정하고 정의로운 과정? 다 좋은 이야기다. 하지만 그런 것으로는 사람을 몰입시킬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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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이런 방식대로 라이브를 하면 무조건 공정하지 못하다는 이야기가 나올 텐데요. 어떻게 감당하시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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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말한 것은 김지원 피디였다. 윤동욱을 메인 피디로 발탁하긴 했으나, 메인 피디의 폭주를 조금이나마 막아낼 참으로 Mtown이 붙인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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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원은 동욱이 제시한 예선 방식이 참으로 황당하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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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대, 강남, 신촌, 그 외 다른 지역에서 이루어지는 라이브. 보장된 관객들이라고는 자발적으로 지원받아 초청되는 관객단 30명 뿐.밴드들은 그들 앞에서 라이브를 하고, 점수를 받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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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청된 관객단 외에도 행인들 또한 투표가 가능하며, 중복은 걸러진다. 점수는 5점 만점이며, 총합과 평균 둘 다 중요하다. 이 점수와 녹화된 영상을 보고 평가하는 전문가 점수 둘을 합쳐 예선 진출이 결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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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시간은 아침 9시부터 저녁 9시까지다. 밴드의 공연 시간은 준비시간까지 합쳐서 45분. 그 이상을 넘기면 자동 탈락된다. 공연 순서는 랜덤으로 결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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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조건 말이 나올 수 밖에 없는 방식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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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원은 그렇게 생각했다. 중복을 거른다고 해도 팬들이 와서 투표하는 것은 어떻게 막는가? 사람들 없는 9시 타임에 걸리는 것은 또 어떻게 하고? 위치 선정은 또 어떻고?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논란 투성이인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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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당을 왜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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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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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하잖아. 랜덤. 그거면 되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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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동욱의 대답은, 속칭 ‘알빠노’ 였다. 누가 오디션 참가하라고 칼 들고 협박이라도 했나? 불리한 조건이 있더라도 음악 잘 하면 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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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공정하게 랜덤으로 돌렸어. 안 좋은게 나왔다? 극복하는 건 밴드가 알아서 해야 할 일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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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은 어떻게 감당하시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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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원아. 너 아직도 방송을 모르냐? 욕을 먹는다는 건 노이즈가 발생한다는 거야. 노이즈가 발생하면? 사람들은 본다. 이런 당연한 사실을 모르다니, 아직 멀었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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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욱은 쯧쯧대며 담배를 한대 더 물었다. 그가 뿜어내는 연기를, 지원은 켁켁대며 흩어냈다. 동욱은 웃음을 흘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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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방송 나가는 건 본선부터. 랜덤 돌려서 안 좋은 시간 장소 걸려서 탈락하는 애들? 걔들 어차피 원래부터 안 될 애들이고, 시청자들은 걔들의 병신같은 모습만 볼 거야. 왜냐하면 우리가 그거만 보여줄거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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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럼 기존 팬들이 와서 투표하는 건요? 그건 어떻게 막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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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걸 왜 막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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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원은 정신나갔냐는 듯 동욱을 쳐다보았다. 동욱은 단지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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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그냥 시간 장소를 랜덤으로 보내기만 하면 돼. 그걸로 우리 책임은 끝이다. 팬들이 몰려가서 투표를 했다? ‘자발적 행동’을 어떻게 막을 건데? 게다가 그 정도의 열성 팬층이 있으면, 그런 팬층이 시청자로 붙어주면 그 자체로 이미 이득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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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층이 없는 밴드는 손해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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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이런 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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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욱은 샘플 몇개를 틱틱 쳤다. 메이크업을 받은 밴드들의 얼굴. 혼신의 보정이 가해져 누구나 미남미녀로 보이는 사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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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선 참가 밴드가 확정되고 나서, 이 사진을 바이럴 더해서 쫙 뿌릴거야. 그럼 이제 밴드는 조또 몰라도 얼굴만 보고 좋다고 중얼거리는 미친 애들이 와르르 붙을 걸. 어필 영상도 찍을 거고. 물론 그건 자기들이 알아서 지들 돈 내고 찍어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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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동욱의 말에, 지원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느낌밖에 들지 않았다. 방송 초반 어그로를 위해서 저렇게까지 한단 말인가. 왜 그가 맡았던 시즌 2가 대성공했는지, 그리고 욕도 엄청난 규모로 먹었는지 알 것 같은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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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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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가 신청이 종료된 다음 발표된 방식에, 명전은 난감함을 넘은 황당함을 느꼈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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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함은 개나 줘버렸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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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다른 의미로 보면 또 공정하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누구나 다 망할 확률이 있다는 거니까. 하지만 그거야 추첨을 돌리기 전의 이야기고, 추천을 돌린 다음은 어떻게 하는가? 쓰레기 장소, 쓰레기 시간을 뽑은 사람은 그냥 자기 운이나 탓하면서 탈락하면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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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너무한 거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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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의 심정을 그대로 대변해주는 이야기가 옆에서 튀어나왔다. 어처구니 없다는 듯한 이서의 말투. 자신이 제대로 읽은 게 맞는지 계속 확인을 하고 있는 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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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은 완전 개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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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하는 자신이 읽던 커뮤니티를 슬쩍 보여주었다. 사전 사진 촬영때 스튜디오에서 슬쩍 봤던 사람들의 얼굴이, 상당한 창작과정을 거쳐 인터넷에 실려 있었다. 그 밑에는 [대박이다], [솔직히 얼굴합 보면 얘들이 최고인듯], [여기 보컬 진짜 와꾸 미쳤다] 같은 댓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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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도 들어보기 전에 일단 얼굴 보고 결정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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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저쪽 판은 저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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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아이돌도 파 봤다는 듯 이서가 아는 척을 했다. 얘는 안 해본 게 뭘까 하고 생각하며, 명전은 인터넷 게시글을 좀 더 뒤져보았다. 바이럴 마케팅이 성공적이었던 건지, ‘인베이전’ 관련 글들이 꽤나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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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중에는 밴드의 음악에 대한 이야기도 많았으나, 대부분은 얼굴과 ‘케미’에 대한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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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드 오디션인데 이래도 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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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시즌 메인 피디가 그 아이돌 오디션 하던 사람이라잖아. 그래서 그런 거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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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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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 사운드’에 대한 긍정적인 반응들도 있었다. 일단 팬들이 올린게 분명한 [우리 애들 미모봐 ㄷㄷㄷㄷ] 같은 글. [얘들은 여자 밴드인가?] 하는 글이나, 음악 관련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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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분명한 것은, 긍정적인 반응이던 부정적인 반응이던 그 수가 적다는 것이었다. 정확한 수치로 말할 수는 없지만, 평균 정도에서 머무는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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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선 통과 가능할까? 이런 방식이면 솔직히 자신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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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긴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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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평가도 붙긴 한다지만 기사를 보면 그 비중이 높은 것 같지 않다. 그리고 아무리 우리가 음악을 잘한다고 한들 영 안 좋은 시간에 안 좋은 지역에 걸려버리면 어떻게 할 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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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악조건을 극복하면 더 빛나는 법이지. 그런 것을 극복하는 게 오히려 더 드라마틱해서, 방송에 더 나올지도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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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아무튼 더 생각해봐야 소용이 없다. 다음 주면 예선 라이브가 시작되니, 연습만이 답인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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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기훈은 IT 계열 종사자로서, 강남에 출근하는 불쌍한 개발자였다. 음악과는 그다지 연관이 없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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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하루는 평범하다. 7시 반쯤에 나가서 9시 출근을 하고, 7시쯤에 퇴근해서 8시 반쯤에 집에 온다. 와이프가 데려 와서 돌보고 있던 아이들과 혼신의 힘을 다해 놀아주고, 집안일도 하고, 이것저것 하다 보면 어느새 잘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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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일상을 보내는 탓에 육아에 시달려 주말 출근은 웬만하면 하지 않으려고 하는 기훈이었지만, 이번 토요일은 아침에 나올 수 밖에 없었다. 다음 주에 있을 서비스 오픈에 만전을 기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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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진짜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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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붐비는 강남역. 곧 10시인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사람이 많다는 게 말이 되는지. 기훈은 그렇게 생각하며 9번 출구를 지나 직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는 와중 들려오는 노래와 박수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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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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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식적으로 쳐다본 그곳에는 허우대 멀쩡하고 잘 생긴 남자 밴드가 연주를 하고 있다. 그리고 붙어 있는 카메라와, 뭔가 메모를 하는 듯한 30명 정도 되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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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처에는 네다섯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밴드를 향해 열심히 응원을 보내고 있다. “아케테리아 잘한다~!”, “곡 좋아요!!”, “잘생겼다 최종훈!” 같은 외침. 그에 호응을 해주기도 하면서 열심히 연주하는 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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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방송 촬영이라도 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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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훈은 그렇게 생각하며 핸드폰을 들었다. [버스킹 방송], [밴드 버스킹], [강남역 버스킹 밴드] 등. 검색을 돌려본 결과 그는 지금 진행되고 있는 것이 오디션 프로그램 [인베이전 프롬 서울]의 라이브 예선임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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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참가 밴드 수 60개, 그 중 본선에 진출하는 것은 30개… 2:1이면 그래도 후한 것 아닌가 하고 기훈은 생각했다. 원래 오디션 프로는 몇백대 일 몇천대 일 한다고 하지 않나. 아무리 밴드라고 한들 2:1이면 충분한 경쟁률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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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그는 걸음을 멈추고 노래를 들었다. 평소라면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주말 출근이기에 그 정도는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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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 잘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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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를 들으며 기훈은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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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훈은 음악에 대해서 잘 몰랐다. 그가 아는 것이라곤, 고등학생 시절 듣던 SG워너비나 버즈, 소녀시대, 원더걸스와 같은… 지금 아이들에게 이야기하면 틀니 소리 들을 법한 그룹들. 기훈이 음악을 꺼려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굳이 찾아 듣는 류의 인간도 아니었기에… 그의 음악은 거기에서 멈춘지 오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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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런 그가 듣기에 눈 앞의 밴드는, 꽤나 괜찮게 음악을 하고 있었다. 고음 시원시원하게 올라가고. 기타 드럼 베이스 등등 박자 잘 맞고. 나쁘지 않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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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로 하여금 안내판에 세워진 QR 코드를 찍어서 이것저것 조사까지 해 가며 투표를 하게 만들 정도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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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밴드는 음악 다 저정도 해야 되는 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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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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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하는 거 맞지만, 굳이 그가 몇분의 시간을 들여가며 투표까지 해줘야 할 정도일까. 그는 곰곰히 생각했고, 결론을 내렸다. 그 정도는 아닌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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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를 잘 하긴 하지만, 그게 그의 취향은 아니었다. 게다가 노래를 잘 한다는 것도 어디까지나 일반인의 기준으로 생각하는 것. 저 애들이 어디 락 페스티벌에 서 있다고 생각하면… 그는 공연에 만족하지 못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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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훈은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살짝 저은 후, 직장으로 다시 발을 옮겼다. 그를 보고 잠시 희망을 가졌었던 팬들의 눈빛만 그 자리에 처량하게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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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퇴근을 위해서 직장 바깥으로 나와 다시금 강남역 9번 출구로 걸어가기 시작한 시간은 19시 27분 정도였다. 이제는 날이 어둑해지고, 사람들이 상당히 많이 오가는 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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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훈은 아까 그 곳을 지나가며 흘긋거렸다. 아직도 뭔가 촬영하고 있나 해서. 아까 봤던 기사에 의하면 좀 길게 촬영을 한다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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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곳에는 그의 기대를 배반하지 않은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여전히 모여 있는 사람들과 카메라. 아까와 다른 것은, 밴드에게 비춰지는 조명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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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그 사람들인가? 아니 다른 애들이네. 여자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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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 위에 올라간 등장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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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무대 위에 여자들이 4명 올라가 있는데, 그게 아이돌이 아니라니. 음악과 담을 쌓은 그에게도 상당히 생소한 광경이었다. 각자 악기를 붙잡고 있는 것 또한 그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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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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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복장은 요새 아이들이 붙잡고 있는 유튜브에서 나오던 걸그룹을 살짝 연상시키는 느낌이었다. 검은색 위주의 스트릿한 복장. 맵시 있게 차려입은 느낌. 아직 음악을 듣지도 않았지만, 그 복장에 기훈은 자신도 모르게 무대 앞으로 슬쩍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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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다음 곡은, 커버곡으로 하나 보여드리겠습니다. A.R.B의 Private girl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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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나 많은 사람들이 운집해있는 가운데… 기타를 잡은 여자아이가 그렇게 말했다. 이윽고 터져나오는 딱 들어도 거친 것 같은… 육중한 기타 소리와 함께 열리는 아이의 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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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은 심플하다. 간단한 멜로디를 연주하는 기타와 간결한 드럼. 낮은 근음을 울리는 베이스와, 배경을 담당하는 키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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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하지는 않으나 기본이 탄탄한 연주는, 그런 것 잘 모르는 기훈에게도 꽤나 좋은 음악으로 들려왔다. 계속되는 연주를 들으며, 기훈은 저도 모르게 자신이 한발짝씩 무대로 다가서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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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입력이라는 것이 이런 것일까. 들어보지도 못한, 무슨 소리인지도 모르는 가사와 음악. 하지만 사람들은 좋아하고 있고, 그 또한 계속해서 음악을 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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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집에 가야 애들을 볼 수 있는데. 어제 저녁은 회식이라 아이들이랑 놀아주지 못해서, 오늘은 꼭 집에 빨리 들어가기로 약속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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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 이유는 뭘까. 저 아이들이 이뻐서, 노래가 좋아서… 등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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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생각하기에 제일 큰 이유는, 이때 아니면 듣기 힘든 음악이라고… 그가 직감적으로 느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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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소하는 듯한 목소리는 그에게 저도 모를 감정을 일으켰다. 가사도 내용도 모르지만, 그는 자신이 아내와 연애를 할 시절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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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아주지 않던 사랑과, 엇갈리던 감정과 표현들. 활기찬 악기 속에서도 느껴지는 것은 한줄기 슬픔. 지금은 행복하게 살고 있지만 그랬던 시절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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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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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금 쏟아지는 박수. 기훈 또한 박수를 치다가, 억지로 발길을 돌렸다. 이제는 정말 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그에게 보인 것은, QR코드가 붙어 있는 안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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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분 정도는 더 괜찮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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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력을 다해서 놀아주면, 아이들은 괜찮아 할 것이다. 조금 늦게 퇴근했다고 하면 될 일 아니겠는가. 그는 그렇게 자신을 위로하며 설문조사를 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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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선 최종 심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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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예선 평가는 심사위원들이 저번 주말에 있었던 예선 영상을 보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완벽하게 공연을 재현할 정도의 세팅은 아니지만, 어느정도의 객관적 평가는 가능할 수준으로 녹화된 영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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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동욱은 이것이 너무 심심하다고 생각했는지, 며칠 전 급하게 심사과정을 하나 더 추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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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심사위원들은 그게 너무 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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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돈 준다니까 하긴 했지만, 윤피디 진짜 미친 인간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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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쳤으니까 이런 기획을 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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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가수 출신 심사위원의 말에, 중년의 작곡가 심사위원이 한숨을 푹 쉬면서 말했다. 세상에, 녹화 영상을 틀어놓고 밴드 구성원들을 들여보낸다음 같이 보면서 심사를 하고 잘못된 점을 지적하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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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오디션은 반복이 안되기라도 했지. 이거는 영상 틀어놓고 공개처형 하라는 거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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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윤동욱 피디가 노리는 그림이 그것일 거라고, 작곡가는 생각했다. ‘주제도 모르고 도전한 밴드를 프로들이 후벼파는’ 그런 구도를 원하는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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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싹 보이는 애들은 칭찬 위주로 가라니, 그건 좀 다행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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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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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아이돌 프로듀서 심사위원의 말에, 작곡가는 고개를 저었다. 그 말은, 후벼파여서 떨어지는 ‘수준미달 밴드’와 ‘싹이 보여서 칭찬받는 밴드’를 극명하게 나누기 위함일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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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잔인한 속셈이지만, 돈을 받기 위해서는 그럴 수 밖에 없다. 뭐 어쩌겠는가. 연예계라는 것이 그런 법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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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너무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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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의 말에 명전은 고개를 쓱 돌려보았다. 내용이 100% 들릴 정도는 아니지만, 심사장에서 다른 밴드 아이들이 수모를 당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볼 수 있는 느낌의 대기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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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밴드 사람들도 전부 다 앉아 차례를 기다리며 속삭이고 있다. 돌아가는 카메라에 처음은 다들 긴장했으나, 이제는 다들 마음을 놓은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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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 않나? 저렇게 막 몰아세울 필요가 있나? 제작진도 너무한 거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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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말 안하는 게 좋을 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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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도 그렇게 생각해 말을 꺼내려는 찰나, 현아가 이서에게 속삭였다. 그 말에 흠칫하는 이서. 명전 또한 마찬가지 심정으로 현아를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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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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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지금 카메라 돌아가는 거, 저 밴드들 혼나는 거 리액션 잡으려고 하는 거 같은데요. 지금 여기서 다른 밴드들 하는거 보이는 것도 마찬가지고요. 오디션 프로가 다 그렇잖아요. 안 한걸 했다고 막 악편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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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에 쥐죽은 듯 멈춰버린 이서. 명전은 어처구니 없다는 눈빛으로 현아를 바라보았다. 그게 사실이냐?? 라는 물음에 사실이라고 눈빛으로 답하는 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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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가 없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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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정도까지 해야 되나? 명전은 머리를 긁다가, 그냥 무표정으로 자신을 만들었다. 어릴 적 봤던 불경이나 떠올려야 할 것 같았다.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 시조견 오온개공도 일채고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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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 부분은 어떤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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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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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분명 여러분이 릴리즈한 원곡을 들어봤거든요. 그런데 라이브와 많이 다른데, 이 라이브가 그것보다 낫지도 않아요. 곡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도 못하는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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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에 순식간에 의기소침해진 밴드. 기타는 할말이 있는 듯 고개를 들었다가 다시 떨구기를 반복했지만, 심사위원은 그들에게 말을 시킬 생각이 없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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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박자도 다 틀리고. 공연 영상 좀 넘겨보면, 관객들도 다 아는 수준이고. 이래가지고 뭘 공연을 하겠습니까, 공연을. 박자 못 맞춘다고 다 나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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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격 바톤은 다른 사람들에게 넘어간다. 가수 출신 심사위원은 가창력의 문제를 지적하고, 작곡가 출신은 곡 자체의 문제를. 밴드 출신은 공연의 문제를 지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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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뭐 좋은 공연 잘 봤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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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떨구고 나가는 밴드. 심사장 옆쪽에 마련된 악기들은 이번에도 사용되지 못했다. 윤동욱 피디는 싹수가 보이는 밴드가 있으면 저 악기를 사용해서 연주하는 장면을 뽑아달라고 했지만, 그런 밴드들은 좀 드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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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다음 밴드는 좀 기대가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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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위원 중 한명은, 그렇게 생각했다. 이전에 많이 들어본… 그리고 최근 장안에 화제가 되고 있는 이름. 그러는 사이 나가는 밴드에게 문을 열어준 진행요원은, 다음 밴드의 이름을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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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 사운드 분들 들어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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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 사운드 분들 들어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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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가 되자, 진행요원이 소리쳐 그룹 사운드의 이름을 불렀다. 이서는 잔뜩 긴장한 채로 번뜩 일어선 다음 주위를 살짝 둘러보았다. 다음은 우리 차례라는 듯 바라보는 시선과, 긴장한 현아와 서하. 수연만 살짝 졸린 기색으로 멍하니 앞을 쳐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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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 사운드, 맞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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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 들어간 곳은 아까부터 계속 보고 있던 심사장. 심사위원들의 정면, 그들이 앉을 곳으로는 프로젝터 스크린을 통해 밴드의 영상이 나온다. 양 옆으로는 스피커가 몇조 설치되어 있고, 한쪽 구석에는 악기가 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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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 사운드 일원이 마련된 의자에 앉자, 중앙에 있는 심사위원이 그렇게 서두를 던졌다. 느긋하게 이어지는 수연의 “네, 맞습니다.” 하는 대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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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드 명의 유래를 알 수 있을까요? 좀 익숙한 이름이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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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게. 이서 또한 그것이 궁금했다. 우리 밴드는 왜 이름이 그룹 사운드인가. 뭔가 익숙하지 않은 이름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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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수연은 입을 떼고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70년대 80년대에는 밴드(Band)를 두고 그룹 사운드(Group Sound)라고 부르기도 했죠. 거기에서 따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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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군요. 확실히 복고풍 음악을 하는 만큼 밴드 이름 또한 복고풍으로 지은 감이 있다고 보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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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위원은 그렇게 말하고는, 프로젝트 스크린으로 영상을 재생했다. 강남역에서 예선 라이브를 위해서 했던 연주들. 우리의 EP에 들어가 있는 것도 많았지만, 수연이 즉흥적으로 “이거 쳐 보자” 라는 식으로 연습시켰던 것도 많았다. 대표적인 것이 Private gi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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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평가부터 바로 말씀드릴게요. 여러모로 조화가 안 되는 부분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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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는 왠지 [두둥!] 하는 효과음을 들은 것 같았다. 보통 방송 편집이라는게 다 그런 식 아닌가. 일단 임팩트 있는 그림을 만들고 시작을 하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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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를 따라가질 못해. 물론 다른 파트가 실력이 뒤떨어지는 건 아닙니다. 그런데 기타는 혼자서 이미 저 멀리로 튀어나가 있어요. 물론 본인은 그걸 알아서 자제하는 게 보이긴 하는데, 원래 송곳이라는 게 주머니에 넣어도 튀어나오기 마련이거든. 그래서 좀 그런 부분이 문제가 있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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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곡 위주로 공연을 한 것도 조금 아쉬운 부분이 있네요. 본인들의 곡으로 공연이 들어갔으면 어땠을까. 그리고 이것도 아까 그거랑 연관이 있는 건데, 다른 파트들이 커버곡 해석에 있어서 좀 미흡한 면이 있다 싶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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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윽고 쏟아지는 평가들. 이서는 조금 쭈그러드는 것을 느꼈다. 물론 수연에 비해서 우리가 좀 뒤떨어지는 면이 있긴 했지만, 직접적으로 이야기를 들으니 좀 상처가 되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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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점은 이 정도로 하고. 장점 이야기를 좀 해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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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이게 단점을 이야기를 해 줘야 하는데, 이게 찾기가 쉽지 않네 흫흫흐… 좀 어거지로 만든 게 있지. 그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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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 같은 소리가 심사위원들 사이에서 흘러나온다. 어거지로 만든 단점? 희망적인 이야기에 이서는 고개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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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자작곡 부분에서. 작곡이랑 작사 센스가 좋아요. 멜로디도 좋지만 그보다 더 좋은 건 앳모스피어를 만드는 능력. 편곡이라고 하죠. 좀 과한 면이 있지만 충분하고… 작사는 어, 곡에 딱 어울린다는 느낌. 라임 굽히는 것도 좋고 분위기도 만족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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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주력도 탄탄하고요. 제가 만약에 밴드 프로듀싱을 했다면, 이런 식으로 했을 것 같아요. 각 멤버 전부 다 기본기가 탄탄하게 잡혀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아무래도 어린 학생들은 약간 화려한 거에 치중하는 면이 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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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신 이어지는 칭찬 세례. 작곡과 편곡 능력이 좋다, 테크닉적인 부분보다 기본기에 충실하려는 그런 게 엄청 마음에 든다 등. 이어지는 칭찬들의 끝에는, 당연히 나올 것 같았던 이야기가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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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이거 안 들어볼 수가 없거든. 하수연 양! 심사 하면서 진짜 너무 듣고 싶었어요. 한 곡만 보여줄 수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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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어떤 곡을 보여드려야 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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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거나 좋아요, 아무거나. 마음에 가는 거 한번 쳐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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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에 고심하던 수연은, 무대 한 쪽에 놓여 있는 기타에 다가갔다. 레스폴을 집어들려던 수연은, 멈칫하더니 옆에 있던 해괴한 기타를 집어들었다. 넥이 2개인, 붉은 색 깁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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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그거 쓸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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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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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짝 무게에 휘청이더니, 괴물같은 형태의 기타를 잡고는 피크를 몇번 튕겨보았다. 하지만 잘 나지 않는 소리. 수연이 고개를 갸웃대는 사이, 스태프가 나와서 수연에게 뭔가를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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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튜닝이 안 되어 있다고 하네요. 장식용으로 가져다 놓은 거라고… 아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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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지는 웃음 소리. “Stairway to heaven을 들었어야 하는데!” 하는 장발머리 심사위원의 탄식이 이어진다. 수연은 살짝 웃고는 레스폴을 집어 연주를 시작했다. 레스폴 특유의 강렬하고 중후한 기타 소리가 스피커에서 뿜어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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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ey for noth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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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디션에서 흔히 보이는 복잡하고 현란한 연주는 없다. 수연이 보여준 것은, 느긋한 발구름과 그에 따른 연주. 하지만 심사위원과 밴드원들, 진행 스태프마저도… 가볍게 박수를 치거나 발을 까딱이는 등, 심취한 듯한 반응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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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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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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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하지. 진짜 4DX 기술이 미쳤다니까. 아까 탱크 막 포탄 쏘는데 진동하는 거 느꼈어? 막 와장창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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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는 날. 현아의 주도로 보러 온 ‘걸즈 운드 판쩌’ 인가 뭔가 하는 애니메이션. 잘 아는 것 같은 둘은 열성적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서하는 인터넷으로 뭔가 찾아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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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기술 발전이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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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본 애니메이션의 스토리는 잘 이해가 안 되었지만, 아무튼 기술 자체는 대단하다고 명전은 생각했다. 탱크의 움직임에 따라 좌석이 움직이고, 진동이 오는 등. 일종의 연동형 어트랙션을 탄 것 같은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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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진짜 오아라이 한번 가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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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까요? 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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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아라이는 왜? 이 애니메이션이랑 연관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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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오아라이 배경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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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을 내버려둔 채 진행되고 있는 이야기. 이번 여름에 오아라이를 가니 마니, 밴드 수익금으로 가면 진짜 좋겠다느니. 근데 미성년자가 혼자서 여행을 갈 수가 있나? 명전은 문득 그게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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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이 너도 갈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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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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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핸드폰을 들어 일정을 확인해보았다. 꽤나 가득 차 있는 세션 일정. 그래도 여름 휴가철에는 군데군데 비어 있는 것이 보였다. 명전은 일정을 대답해준 후, 기왕 인터넷을 킨 김에 커뮤니티를 뒤져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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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인베이전 라인업 얼굴 ㄷ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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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들 전반적으로 이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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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인업 완전 미쳤다 이거 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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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들 사진 찍은거 ㅋㅋㅋㅋ 개웃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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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들 귀여운데 이름 좀 가르쳐 줄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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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반적으로 꽤나 기대를 하고 있는 분위기. 그 기대가 음악이 아니라는 건 조금 아쉬운 점이 있었지만, 명전은 그러려니 하기로 했다. 주목을 받으면 어찌됐든 음악을 듣는 사람이 한두명은 있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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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선 티저 영상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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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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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와중에 보이는 글에 명전은 홀린듯 영상을 눌러보았다. 흘러나오는 영상은, 밴드들의 연주와 심사위원들의 질책, 그리고 전혀 그런 의도가 아닌 것 같아 보이는 비웃음(추정)과 언뜻 흘러나가는 말싸움 장면. 그리고 그 뒤에 박히는 [Invasion from Seoul] 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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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런 일들이 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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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겠는데. 다른 밴드 이야기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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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고개를 으쓱했다. 전혀 본 적 없는 장면들. 그런데 뭐 방송이 저러는 게 하루 이틀 일인가. 그냥 그러려니 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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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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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촬영분을 찍기 위해서 들른 곳은, 본격적인 촬영 스튜디오였다. 꽤나 거창한 무대가 세워져 있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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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다시 한번 찍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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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음걸이에도 뭔가 각이 보이는 건지, 네다섯 밴드 중 하나는 꼭 추가촬영이 들어가고 있다. 그냥 걷는 거 찍으면 안 되나 싶어도 그게 아닌 모양. 게다가 예선에 참가한 60개의 밴드를 모두 끌어모으는 것을 보면, 오늘 탈락자를 발표할 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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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인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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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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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의 중얼거림에 반응하는 이서. 눈망울을 커다랗게 하고 명전을 쳐다보는 걸 보면, 왜 잔인하다고 하는지 잘 모르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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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선에는 밴드 30팀만 올라간다고 했잖아. 그런데 60팀이 다 들어오고. 공연을 한다고 해도, 오늘 촬영시간 생각해 보면 절대 다는 못 할 거고. 그럼 여기 온 사람 중 반은, 탈락하는 모습만 찍으러 온 거라고 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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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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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비즈니스 세계는 냉정하다지만 이렇게까지 냉정할 필요가 있나. 명전은 잠시 그런 생각을 했지만, 이내 고개를 흔들어 그 생각을 지워버렸다. 어찌됐든 저 사람들은 선택을 한 셈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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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가운데 촬영이 마무리되어가는 것이 보였다. 마치 콜로세움처럼, 60팀의 밴드가 수직 원형으로 앉아있는 모습은 장관 그 자체였다. 명전은 단지 이 그림 하나만을 위해서 이런 세트를 만든 걸까 하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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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지네요. 뭔가 애니에서 볼 법한 그런 구도네요 이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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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아의 소감과 함께, 걸어나온 방송 스태프. 안내되는 오늘의 촬영 일정은… 탈락 씬과 선발씬을 찍고, 다음 라운드의 방식 안내. 그 다음 각자 30팀 앞에서 10분 정도 공연을 하는 장면을 찍고 마칠거라고 한다. 촬영 시간은 16시간 정도라고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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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질문 있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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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그 말에 손을 번쩍 들었다. 시선이 집중되는 가운데, 말을 하라며 손짓을 하는 스태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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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네명은 미성년자인데, 밤 10시 되면 퇴근해도 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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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혀 기대하지 못한 질문에 터져나오는 웃음. 스태프는 멋쩍은 듯 “여쭤봐야 될 것 같지만, 아마 그럴 거에요.” 라고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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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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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모스크바 소셜 클럽] 또한… 탈락입니다.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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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의 말과 함께 다시 한번 더 꺼지는, 밴드 앞의 전광판. [모스크바 소셜 클럽]이라고 불린 밴드는 고개를 푹 떨구었다. 호명은 이어지지 않는다. 한 팀 한 팀 이름을 부르고, 스크린으로 심사 장면이 재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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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아는 패턴을 알 것 같았다. 호평이 먼저 나오는 밴드는 거의 무조건 떨어진다. 혹평이 먼저 나오는 밴드는 거의 무조건 붙는다. 시청자에게 긴장감을 주기 위해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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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나온 밴드 또한 마찬가지로, 호평이 먼저 나와버렸다. [엘리안테]라고 했던가. 호평을 듣고 좋아하는 모습이었지만, 그 뒤로 나오는 혹평과 MC의 탈락 멘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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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30팀의 선발이 모두 끝났습니다. 선발된 30팀은 여정을 이어가겠죠.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새로운 시작을 위해서 떠나갈 30팀을 위해서! 박수 한번 쳐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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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자를 위로하는 박수. 하지만 여유있는 승자의 박수와 자신들을 위로하는 패자의 박수는 사운드와 방식부터 차이가 나고 있었다. 현아 또한 여유롭게 박수를 치며 옆을 슬쩍 보았다. 눈시울이 약간 붉어진 채 격렬하게 박수를 치는 이서와, 별 생각 없어 보이는 서하와 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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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제! 본격적인 본선! 이 시작되기 전… 광고 한번 듣고 가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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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 근고여~ 하는 소리가 밴드 중간에서 튀어나온다. 그리고 안내에 따라 내려가는 나머지 30팀의 밴드. 탈락하지 않은 밴드 중 몇몇은 자리를 비우려고 하지만, 스태프의 제지에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광고 멘트는 그냥 촬영용 멘트였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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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제 여러분께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이 화면을 봐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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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린 속에 보이는 것은 살짝 복잡하게 그려진 PPT. 고개를 들이민다고 해서 잘 보일리도 없건만, 현아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앞으로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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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려진 것은, 30개의 밴드 마크 또는 이름. 그리고 위에 올라간 것은, 멘토 6팀의 이름. 각 멘토는 4개의 팀을 담당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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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부터는 다시 또 경쟁입니다! 여러분들의 공연, 그리고 다시 또 공연! 여러분들의 색깔을 가장 잘 나타낼 수 있는 곡으로! 멘토의 픽을 받아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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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MC는 한 박자 쉬고는, 다시 큰 소리로 멘트를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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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1라운드 공연은… 기존에 발표되지 않은! 완전히 새로운 곡으로 진행하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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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성이는 밴드들. MC는 밴드의 반응을 무시한 채로 스크린쪽으로 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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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점에서 두개 궁금하신 점이 생기겠죠. 첫째! 멘토에게 선택받지 못한 밴드는 어떻게 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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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린에 떠오르는 문구는, REPECHAGE. 문구 밑에는 [레파차지 : 패자부활전]이라는 내용이 적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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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라운드에 선택받지 못한 밴드는, 이후에 있을 패자부활전에서 다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 작곡을 하라는 것은 좋다. 그런데 ‘주제’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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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는 잠시 뜸을 들이다, 큐카드를 든 손으로 카메라 정면을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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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는 바로… ‘이상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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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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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의 말에, 여지껏 잠자코 있던 수연이 무슨 뜬금없는 소리 하냐는 듯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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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장르이던, 양식이던 좋습니다! ‘이상향’을 나타낼 수 있는 음악을 가지고 오십시오. ‘우리는 이런 음악을 하고 싶다! 우리의 목표는 이것이다!’ 라고 한 곡으로 설명할 수 있는 바로 그런 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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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게 가능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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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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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아가 그렇게 생각하는 와중에, 말을 마친 MC가 무대에서 내려갔다. 그 다음 올라오는 스태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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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녹화는 0화, 1화 분량이구요. 다음 주는 오늘 말씀드린 미션을 바탕으로 2화 분량을 촬영할 겁니다. 그 점 알아주시면 좋을 것 같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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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아는 어느새 올라온 메인 PD를 바라보았다. 윤동욱이라는 이름이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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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곡 주제는 말씀드렸다시피 ‘이상향’입니다. 설명을 더 돕자면, ‘여러분들이 현 시점에서 가장 하고 싶은 음악’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죠. 물론 다른 해석도 좋습니다. 간단해도 좋고, 복잡해도 좋습니다. 극단적으로는 “나는 떴다떴다 비행기를 하고 싶어” 라고 하면서 그걸 가져오셔도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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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디의 말에 밴드들 사이에서 터져나오는 웃음. 그러나 실제 웃음보다는 리액션에 가까운 반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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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채점 자체는 절대평가로 이루어지니까 떴다떴다 비행기를 가져오시면 당연히 낮은 점수를 받겠죠? 감안하셨으면 좋겠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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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한 곡만 아니면 된다는 건가요? 예를 들어서 다른데서 공연을 했는데, 뭐 정식 음원으로 발매한 적은 없다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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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디의 말이 끝나자, 웅성대는 밴드 속에서 누군가가 불쑥 질문을 던졌다. 그 질문에 피디는 슬쩍 웃더니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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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가능은 하지만, 적발시에는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점 말씀드리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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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디의 기분나쁜 빙글거림에 움찔하는 밴드맨. 피디는 설명을 계속해서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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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주에는 멘토들이 4팀씩 픽을 하고, 선택받지 못한 6팀은 아까 안내받은 것과 같이 패자부활전 그룹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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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성대는 밴드들. 2화만에 6팀을 떨군다니 너무하지 않나? 하는 발언도 새어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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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크지는 않다. 다들 각오했기 때문일지, 패자부활전이라는 마지막 안전장치가 있기 때문인지, 30팀 중 6팀이면 비율상으로는 적다고 생각해서 그런 것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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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섭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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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에서 들려오는 이서의 말. 표정을 보면 근심걱정이 가득해보인다. 현아는 “그렇네요~” 라고 대답을 하며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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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곡 미션… 이라는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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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방송보다는 애니메이션을 더 많이 보는 현아지만, 어찌됐든 오디션 프로그램의 구조 정도는 알고 있다. 그런 지식에 비춰보자면, 이번 미션은 참가자들의 역량을 테스트하는 미션으로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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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님이 그랬던 거 같은데. 오늘 곡은 제일 자신있는 거로 가지고 오라 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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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드가 가장 잘하는 것과, 밴드가 가장 하고 싶은 것. 이 둘을 번갈아 보여주는 것이 제작진의 의도가 아닐까 하고… 현아는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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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로세움과도 같은 세트 중앙에 악기들이 설치된다. 보통의 공연처럼 ‘내려다보는’ 것이 아니라, ‘올려다보는’ 형태. 관객은 위에 있고, 밴드는 아래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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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역전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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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까지 이들은 팬들을 몰고 다녔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사람들에게 선택받아야 하는 처지이다. 관심을 받던 우상에서 관심을 받아야만 하는 대상으로의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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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아이러니함이, 대중들이 오디션 프로를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가 아닐까. 동욱은 그런 잡생각을 하며 팔짱을 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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락에 대해서는 문외한인 윤동욱에게 경영진이 느닷없이 꽂아버린 프로그램, [인베이전 프롬 서울]. 수단과 방법을 (최소한의 선은 지키면서) 가리지 않고 어떻게든 흥행시키라는 말에, 동욱은 몇개월 동안 프로그램 구성에 대해서 고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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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어지는 예선. 이 또한 난관이었다. 심사야 일반인+전문가가 해준다지만, 동욱 또한 메인 프로듀서의 입장에서 어떤 밴드가 유망하니 분량을 더 줘야 하고 어떤 밴드가 글러먹었으니 분량을 안 줘야 하는지 알아야 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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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피가 터져가며 밴드들의 음악을 들었고, 밴드 음악과 장르에 대하여 공부를 했으며, 예선 영상도 봤다. 그렇게 밤을 수도 없이 샌 끝에, 동욱이 내린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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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싹수가 보이는 애들은 드물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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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회가 18개 밴드라고 했던가. 하지만 2회는 30개 밴드다. 그 중 1회와 중복되는 밴드는 몇개 되지도 않고. 이에 대해서 인베이전 2회를 기획한 경영진은, 대책없이 “규모가 크면 아무튼 흥행이 되겠지!” 라는 말을 했다고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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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정신나간 생각이 아닌가? 아무튼 뭔가 늘리면 다 될거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미친 사람의 발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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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하산 새끼가 그렇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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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욱은 그렇게 푸념하면서 공연을 시작한 밴드를 바라보았다. 현장에서 라이브로 들으니 색다른 맛이 있긴 했지만, 쟤들은 여전히 별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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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생각하기에, 여기 나온 밴드들은 대충 4부류로 나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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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괜찮아보이는 녀석들. 음악과 비주얼이 둘 다 좋거나, 한쪽이 모자라긴 해도 약간 모자란 정도. 예를 들어 저기 보이는 [쿠바미사일위기], [설가향], [4인조도적단], [Muzaku] 같은 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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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실력은 좀 낮아도 팬덤이 공고한 녀석들. 주로 기획사를 등에 업은 보이밴드들이다. Projeckt 6의 후배를 자처하면서 나온 [TWR]라거나, 중소 기획사였던 [2MAJOR], 대형 기획사 소속의 [WEKIDS] 같은 밴드. 이런 쪽은 그래도 팬덤빨로 길게 갈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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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아무것도 안 되어보이는 녀석들. 딱 봐도 1라운드 2라운드쯤에 광탈할만한. 오디션 프로 본선에 올라올 정도로 음악을 잘 하긴 하는데… 그 이상은 안 되는. 특출나지 않고 비주얼도 마찬가지인. 예를 들어 지금 공연하고 있는 [울림 스톤즈]라거나 [NOTK], [N8 R1der] 같은 어정쩡한 부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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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마지막 네번째, 제일 골치아픈 부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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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런 애들이 제일 다루기 골아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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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욱은 세트 중턱쯤에서 심드렁하게 턱을 괴고 있는 여고생을 보았다. ‘하수연’이라고 했던가. 저 애가 소속한 [Group Sound]라거나, 저기 밑에 몰려 있는 [Mystica] 정도가 4번째 부류에 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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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의 문제점은 음악을 잘한다는 것이다. 음악프로에서 그게 뭐가 문제가 되겠냐만은, 실제로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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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도록이면 비주얼 좀 되는 남자 밴드 애들로. 어? 동욱아. 무슨 말인지 알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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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메인 피디로 꽂아넣었던 박 이사가 했던 말. 2회 인베이전의 제작을 지원한 기업인 [C:RSKY]가 ‘음악성’과 ‘비주얼’을 다 잡는 보이밴드를 원하며, 그 때문에 이 프로그램 제작을 지원했다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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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놓고 조작 같은 건 취향이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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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욱은 그렇게 생각하며 [Mystica]를 쳐다보았다. 그래도 저 쪽은 비주얼이 너무 아니라서, 실력이 좋아도 금방 떨어져나갈 것 같긴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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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 Sound]는 비주얼도 출중하다. 여고생 4명으로 이루어진 팀이라니! 제작 발표회때 이 소식이 기사로 나가면 도대체 어떤 반응이 몰려올지. 게다가 실력 또한 문외한인 동욱이 듣기에도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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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더 문제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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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팀 들어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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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태프의 말에 다시금 부산하게 움직이기 시작하는 밴드들. 동욱은 생각을 계속해서 이어나가다가 이내 놓아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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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지원사한테 청탁을 받은 사람은 '박 이사'고, '윤동욱'은 이 프로그램을 흥행시키기만 하면 되는 사람이다. 회사에 대가리가 깨져도 박 이사가 깨지겠지, 그는 아닐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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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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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룰이 복잡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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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룰이 적혀진 책자를 들여다보다가 책상에 내팽겨쳤다. 경쟁을 유발하기 위해서 이런저런 룰을 추가할 것이라고 알고는 있었지만 뭐가 많아도 너무 많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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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긴 하죠. 프로그램 진행 쪽에서는 변수를 최대한 만들 수 있는 룰이 좋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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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아가 책자를 집어들며 말했다. 명전도 그런 점은 알고 있긴 했지만, 그래도 최대한 단순화하는 게 시청자에게 좋은 방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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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왜 기존에 발표된 곡이 아니어야 한다고 이야기를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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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생각에는 이거 때문인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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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의 중얼거림에, 현아가 프로그램 참가 당시에 썼던 계약서를 꺼내들어 한 곳을 짚어주었다. [프로그램 참가자가 특정 조건 내에서 제작한 음원의 저작권은 아래의 조건 하에서 당사에 양도될 수 있습니다] 밑에 설명이 잔뜩 적힌 문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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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 수입 때문인 거 같아요. 기존에 만들어놓고 묵혀놨던 곡 같은 경우는 저작권 양도가 애매해지는 것 같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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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건 또 언제 봤어. 대단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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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헤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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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의 중얼거림에 현아는 흐물흐물하게 웃었다. 몇장이 넘는 계약서 언저리에 적혀 있는 문구를 다 읽었단 말인가. 명전은 이런 세부 조항 같은 건 ‘서명전’ 시절에도 잘 안 읽었다. 때문에 실연비 편곡비 못 받은 곡도 많았는데, 그렇다고 해서 버릇이 고쳐지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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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서. 혹시 아는 밴드들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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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또 그런 별명이 생긴 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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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잠시 끊긴 틈을 타 이서가 서하에게 질문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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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던데. Mystica 같은 경우는 메탈계에서 실력으로 알아주는 밴드였고. 4인조도적단도 하드락 잘 친다고 유명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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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하가 질문에 대답하는 동안, 명전은 참으로 흉흉한 별명이라고 생각하며 천장을 잠시 올려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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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향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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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 만큼 살아 본 명전으로서는 ‘음악적 이상향’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었다. 물론 그 또한 옛날 음반을 들으면서 ‘Good old days’를 떠올리고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옛날 음악이 좋다’를 ‘옛날 음악이 최고다’로 바꾸어서 이야기하고 싶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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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이상향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닿지 못하는 곳’을 말하는 것이다. 살아있는 자는 살아있기에 이상향이 계속 움직이고, 죽은 자는 죽었기에 이상향에 영영 도달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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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뜬구름 잡는 소리 같은데. 그냥 아무거나 만들어야 하나? 잘 만들 수 있는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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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시점에서 가장 하고 싶은 음악]이라고 보면 좀 명확하지 않아? 예컨데 수연이 너는 블루스라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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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고 매일 블루스를 치고 싶은 건 아니지. 일년으로 치면 한 300일 정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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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정도면 그냥 매일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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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잠시 헛소리를 한 다음, 황당해하는 이서를 두고 생각에 다시 빠졌다. 어떤 곡이 좋을까. 선호로 따지자면 명전이야 블루스를 하고 싶긴 하지만, 그것은 ‘서명전’으로서의 선호이지 [Group Sound]의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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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아이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최소한 명전은 그렇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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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경쟁이니까, 좀 힘을 빼고 하는 게 좋을까? 얕보고 들어오면 잡아먹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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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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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에 빠진 명전의 중얼거림. 그를 끊은 것은 현아의 단호한 단호한 목소리였다. 그 말에 갑자기 조용해진 테이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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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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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무의식적인 명전의 반응에, 현아는 자신이 목소리를 내놓고도 금새 주눅이 든 표정이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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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성질낸 거 아냐. 말 해봐. 아니 진짜 성질낸 거 아니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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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순간 소라게가 되어버린 것 마냥 쏙 들어가버린 현아. 잠시간의 실랑이 끝에, 명전은 그런 현아를 다시 끄집어내고는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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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제 생각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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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생각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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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제는 사실상 자유 주제인데, 초반 라운드에 이런 주제는 더 안 올거라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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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가? 그럴 거 같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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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아의 말을 들은 이서가 중얼거렸다. 그 모습에 현아는 탄력을 받은 듯, 살짝 더 높아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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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할 수 있을 때 최대한 강하게 나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1등 어드밴티지 같은 것도 있을 수 있고, 다음 진행방식이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우리가 강하면 강할수록 다른 밴드들이 우리를 선택할 확률이 낮아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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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현아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어 '배틀로얄' 같은 거라면 약자들이 뭉쳐 강자를 이기는 경우도 존재하겠지. 하지만 명전이 참여한 것은 밴드 오디션 서바이벌. 그런 것은 있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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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초장부터 박살을 내 놓을까. 오늘은 얌전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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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장을 왜 박살을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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뜬금없는 이서의 질문에, 명전은 이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너무나도 순진무구한 그 표정. 그는 그저 '얼마 전에 신문에서 문해력이 감소하고 있다느니 뭐니 그러더니, 산증인이 여기 있었구나…' 하고 탄식 할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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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녹음한 걸 한번 들어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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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그렇게 말하고는, 스튜디오로 들어갔다. 살짝 주눅든 표정으로 들어오는 아이들. 그리고 재생되는 곡. 일반인이 듣기에는 별 문제 없이 무난하게 진행되는 수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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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명전의 표정은, 그리고 다른 아이들의 표정은 달랐다. 아무 말 없이 나머지 셋을 쳐다보는 명전과, 은근히 고개를 돌리며 시선을 피하는 다른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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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운드가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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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잘 안 맞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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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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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에, 대답하지 못하는 셋. 명전은 머리를 한번 쓸어올린 다음, 한숨을 한번 쉬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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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처음에는 서로 맞추는 것만 해도 힘들었고, 당장 할 일이 급했으니까 어느정도 넘어가는 면이 있었고. 사실 두 번째도 마찬가지였지. 게다가 카피 곡이니까, 아무래도 사운드 레퍼런스도 있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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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너희들이 만져서 완성시킨 곡을 이제 녹음하고 공연하겠다고 생각하니까, 이게 마음만큼 잘 안 되지? 내가 좀 더 돋보였으면 좋겠다. 좀 더 주목받고 싶다. 그런 생각으로 마음이 흔들리고 있는 건가? 그래서 자꾸 멋대로 튀어나가고 이런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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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명전이었다면 그냥 바로 엎어버렸겠지만… 지금의 ‘하수연’은, 그럴 필요까지는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엎지는 않더라도 따끔한 질책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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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공연, 지지난 공연에서는 그냥 넘어갔을 일이지. 그렇게 생각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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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어, 아, 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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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식적으로 긍정의 대답을 했다가, 화들짝 놀라 다시 부정을 하는 이서. 명전은 살짝 웃고는, 다시 말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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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공연은, 학교 축제. 솔직히 말해서 부담 없이 쳐도 되는 레벨. 그 때는 축제 사운드 환경 자체가 워낙 안 좋다보니 제대로 들리지도 않았을 거고, 그래서 사람들이 잘 몰랐을 거야. 게다가 그런 것을 알 정도의 레벨도 아니고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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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공연은, 결국 일본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잖아. 규모가 크긴 했지만, 본질적으로 그 사람들은 음악을 좋아한다기보다는 그냥 그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거고… 그렇기 때문에 그 곡을 듣고 싶어하는 거지. 그래서 두 번째 공연때도 그렇게 너희들을 몰아붙이진 않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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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에, 이서는 살짝 숙이고 있던 고개를 홱 들었다. 내가 잘못 들은 것 같은데, ‘그렇게 몰아붙이진 않았다’? 하지만 수연의 표정은 너무나도 진심 같아 보였다. 오히려 자신이 너무나도 아이들을 놀려둔 것 같아 죄책감을 가지는 듯 보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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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세 번째 공연. 오픈마이크. 첫 번째 공연과 두 번째 공연, 세 번째 공연의 차이점이 뭐라고 생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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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모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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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모는 오히려 오픈마이크 쪽이 작지. 저기는 많아봐야 수십명? 진짜 많으면 백명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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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정도로 작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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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제가 알 것 같은데. 리스너들의 성향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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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를 주고 받고 있는 둘을 내버려둔 채 대답하는 현아. 명전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둘을 향해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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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공연은, 글쎄… 한 5백명쯤 되었을라나. 훨씬 더 됐을 수도 있지. 저번 공연은 250명 정도 됐을 거고. 이번은 뭐 작게 잡아서 50명이라고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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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점점 더 줄어드는데, 이번 공연에 심혈을 기울여야 되는 이유가 뭘까? 정답은, 리스너의 성향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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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학교에 있던 사람들 전부를 끌고 온 학교 축제. 애니메이션 좋아하는 사람들인 애니메이션 공연. 그거랑 다르게, 클럽 오디션은 그 클럽에 죽치고 사는 살면서 음악만 듣는 사람들을 관객으로 두고 공연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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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머리를 살짝 꼬았다. 명전같이 나이가 많은 사람도, 소위 말해 ‘홍대병’이니 ‘인디부심’에 대해서는 들어본 바가 있다. 라이브 클럽 한 구석에 처박혀서 무슨 평론가라도 된 양 구는 관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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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들의 기준에 맞으면 열광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무시하고 반응을 보이지 않고. 다 들리게 비난까지 일삼는 사람들도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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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공연에 와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것마냥 구는 사람들. ‘이런 음악 들어주는 거 우리밖에 없어’ 라고 생각하는 그런 부류들. 서하도 익히 많이 봤던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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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라이브 클럽의 관객들 대부분이 그런 것은 아니다. 소수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런 관객들이 있다는 걸 경험해보지 못한 아티스트는, 처음 그들을 겪었을 때 심한 충격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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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 차리자. 날은 꽤 남았지만 연습할 시간은 좀 부족해. 다들 일정이 있다며? 그만큼 연습의 강도를 높였으면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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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기타를 한번 훑고는, 연습실 구석으로 걸어가 메트로놈을 켰다. 똑, 딱, 똑, 딱 거리기 시작하는 메트로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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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다시 해보자. 곡 그대로의 연주만 해. 다른 기교 넣으려고 하지 말고. 기본부터 완벽하게 하고, 그 다음으로 넘어가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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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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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습끝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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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워를 한 후, 머리도 말리지 않고 침대에 드러누운 이서. 그녀를 맞이한 것은 친구의 카톡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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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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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를 틀어올린 뒤, 이서는 의자에 앉았다. 무릎 위에 올린 베이스에서는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넥을 보면, 어… 스트링을 교체해줘야 할까? 내일 합주 쉬니까… 오늘치 연습을 하고, 줄 풀어놓고, 내일 교체를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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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습어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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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빡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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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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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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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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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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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게 뭐하러 밴드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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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연 성격상 존나 빡세게 굴릴게 뻔한거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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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이 성격이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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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좆같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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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사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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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쨩 요즘에 야사시하다고!! 죽고싶냐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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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는 키득거리며 카톡을 잠시 한 뒤, 베이스를 튕겼다. 그냥 생각나는 리듬에 따라 슬랩을 한번 넣어보기도 하고, 살짝 필인을 넣어보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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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뭔가 만족스럽지 않은 느낌.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를, 살짝 빠진 리듬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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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합주만 해도 그랬다. 수연이는 전체적인 합주 밸런스 문제를 계속 지적했고, 개인의 연주를 딱히 지적하지는 않았지만… 하지만 이서 본인도 알만한 문제를 수연이 모를 것 같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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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연이 멘탈 안털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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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털리긴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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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주실, 공연장에 들어가기 전의 수연과 들어간 다음의 수연은 완전 다른 사람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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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서 보면, 대부분 고개 숙이고 반에서 자거나 멍하니 담요 덮어쓰고 애들 손에 이끌려 급식 먹으러 가고. 반에서 아이들 사이에서 늘어져서 대답 대충대충 던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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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음악을 할 때는 완전 달랐다. 목소리를 가라앉히고 조곤조곤히 “리듬감있게 제대로 쳐.”나 “지금 튀어나오려고 하지 마. 네가 메인인 파트가 아니라고. 자아를 죽여.” 같은 소리를 할 때 보면, 시선을 마주할 때 마다 얼어붙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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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걔가 너무 몰아붙이는 거 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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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레스 많이 받는 거 같은데 좀 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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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습해야지 뭘 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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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렇게 하는 것 또한, 밴드원을 생각해주기에 하는 일이겠지. 이 밴드를 자신의 밴드라고 받아들였기에, 밴드의 실력을 높이려고 하는 것이라고 이서는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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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든건 사실이긴 해. 하지만 받아들여야지. 수연이 뿐만 아니더라도… 현아 언니나 서하 언니 둘 다 나보다 수준이 높은 게 사실이야. 그걸 따라가기 위해서, 나는 계속해서 노력해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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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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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힘겹게 트렁크에서 기타 2개를 들어올렸다. 그를 본 기사가 “어이구!” 라 외치며 짐을 들어주려 했지만, 명전은 고개를 저어 거절했다. 어차피 스튜디오 안까지 따라오지도 못할 텐데 들어줘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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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펜더면 충분하지, 뭐하러 탐앤더슨을 가지고 오라고 하는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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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의 무게에 신음하며, 명전은 속으로 푸념을 내뱉었다. 준홍의 소개로 맡게 된 세션. 꽤나 금액을 준다기에 “아 그정도면 무조건 해야죠~” 같은 소리를 했지만, 당장 컨텍을 했을때 나온 소리가 “써나 앤더슨 가져오셨으면 좋겠는데요.”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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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더면 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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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저희 쪽은 펜더를 별로 안 좋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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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씨발 기타를 왜 부르냐? 좆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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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소리는 하지 못했다. 결국 세션은 클라이언트가 왕 아니겠는가. 아무리 명전이 잉베이 말름스틴에 근접할 정도의 펜더주의자라 한들, 돈 주는 클라에게 개길 수는 없다. 하지만 당장 써나 앤더슨을 살 수도 없는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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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명전은 준홍에게 “다음에 갖다드릴게요.” 하고 준홍의 스튜디오에 들러 연주할 약속까지 잡고 나서야, 겨우 기타를 빌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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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를 걸고, 다 왔다고 말한 뒤 몇분. 건장한 남성 한명이 내려오다가, 기타 두개를 지고 그에엑 거리고 있는 명전을 보고는 후다닥 뛰어와 기타를 받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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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말을 하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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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하나만 들어주세요. 괜찮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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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를 받아든 사람과 함께 올라간 스튜디오는, 준홍의 스튜디오보다는 작은 느낌이었다. 뭔가 녹음을 뜨고 있는 드럼. 누가 들어오는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옹기종기 모여 있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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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언제 들어가면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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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럼 뜨고 감독님한테 말씀드릴게요. 그럼 말해주실거에요. 저쪽에서 잠시 세팅좀 하시고 계시면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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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는 앞쪽으로 다시 가버리는 남자. 꼬라지를 보아하니 드라마 OST 같은 걸 뜨는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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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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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에 점점 저런 현상이 많아진다고 하던가. 드라마 회차 나오자마자 OST 작곡 들어가서 녹음 몇십분 전에 악보 나오고, 뭐 아무 이야기도 듣지 못한 채 녹음에 들어가야 하는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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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그렇게 생각하니 어처구니가 없어진 명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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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근데 임준홍 이 새끼는 존경하는 스승의 제자! 막 이러면서 지랄지랄하더니 무슨 낭떠러지에 새끼 던지는 사자도 아니고 이런 현장에 바로 밀어넣나? 여기서 삐꾸치면 그냥 바로 끝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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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기타 천재’ 같은 애들은, 절대 이런 현장에서 제대로 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익숙하지 않고, 호의적이지도 않은 환경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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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서 초조하게 스튜디오 안을 바라보는 감독이나, 근처를 오가면서 잡일을 하거나 연락을 취하는 스태프들. 전부 다 세션에게 호의적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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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도 촉박한데 헛수고 하고 있으면 얼굴 찌푸리는 건 당연지사요, “아니 씨팔!” 이라고 욕하는 것은 평범한 일이다. 그지랄하던 음악감독 못 버텨서 울며 튀어나간 피아니스트 한명때문에 전체 OST 녹음 망했던 일도 있다. 그때 감독 양반 그 다음주에 보니까 눈에 완전 멍 들어있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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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그런 생각을 하며 기타를 정비했다. 준홍이 빌려준 탐 앤더슨 드롭 탑 쇼티. 천만원 가까이 하는 가격의 기타. 인토네이션도 짱짱하고, 톤도 좋고… 싱험(싱글 픽업, 험버커 픽업)을 자유자재로 오갈 수 있는 것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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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펜더가 아닐 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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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와중, 아까 전 그를 데리고 왔던 남자가 그의 앞에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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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음 들어가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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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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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근데… 괜찮으시겠어요? 너무 어리신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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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요. 음악 들을 수는 있는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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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감독님이 들려주실 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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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에 명전은 기타를 가지고 감독 앞에 섰다. 감독은 ‘이거 뭐하는 놈이냐…’ 라는 시선으로 쳐다보다가, 다시 그를 데려온 남자를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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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씨 뭔데요? 여기 왜 들어왔어? 기타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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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션 기타리스트분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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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준홍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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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오신다고 하셨잖아요. 이 분이 대신 오신다고 해서 감독님이 오케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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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이 씨발놈아. 뭔 어린애를 데려와서 녹음을 씨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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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펜을 남자에게 집어던지더니, 일어나서 후 하며 숨을 내쉬는 감독. 질겁한 스태프들이 물러선 가운데, 명전은 태연하게 감독에게 손을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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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드 악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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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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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음 하셔야되잖아요. 코드 악보 주십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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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뭔, 아가씨 세션은 서본 적 있어? 임준홍 이 사람 안되겠네. 뭔 대타 구한다더니만 이상한 여자애를 데려와가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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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씩씩대더니, 핸드폰을 집어들어 전화를 할 기세의 감독. 명전은 머리를 한번 더 꼬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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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드 악보 주세요. 녹음 해야 될 거 아닙니까. 음악도 들려주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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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난할거면 빨리 나가요. 진짜 아가씨가 녹음하러 온 거 맞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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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다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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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손을 위아래로 흔들었다. 감독은 어처구니 없다는 듯 손을 쳐다보다, 핸드폰의 시계를 쳐다본 후, 다시 한숨을 쉬고 악보를 건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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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씨발 이게 뭔… 좆같은 일 음악감독 몇년 하면서 많이 겪었다 싶었는데 이런 일은 처음 보네 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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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한숨을 쉬며, 자포자기한 상태로 늘어진 감독. 눈이 죽은 걸 보니, 그가 녹음을 할 수 있다고는 절대 믿지 않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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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같아도 그렇게 생각하긴 하겠다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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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그 시선에 반박하는 대신, 옆 스태프를 쳐 음악을 틀어달라고 했다. 그에게는 호흡하는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저녁에 술 한잔 마시는 정도의 일에 불과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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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도적인 이미지를 주고 싶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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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노트를 끼적이다, 입술 위에 펜을 올렸다. 당시에는 “초장부터 박살을 내겠다!” 라고 했지만, 그렇게 본격적으로 뭔가를 하려고 하니 잘 안 나가는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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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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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와중 옆에 털썩 앉은 것은 다인이었다. 끼적이는 노트를 보고 이게 무언가 하고 쳐다보는 그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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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곡해? 안 듣고도 그게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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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하면 가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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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나 지금이나 악보 모르고 이론 몰라도 작곡 잘 하는 사람들은 많다. 하지만 명전은 그렇지 않았었고, 그 때문에 필사적으로 작곡 지식을 습득했다. 화성학부터 시작해서 블루스나 재즈 이론에 대한 것들을 마구잡이로 배웠던 적이 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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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작곡을 하는 것도 명전이 그 시절에 배웠던 이론들을 바탕으로 해내고 있는 것이었다. 굳이 곡을 쳐보지 않아도, 당시 배웠던 이론과 ‘하수연’의 재능이 합쳐지면 어느정도는 머릿속으로 구상이 가능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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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그런 게 가능하다 한들… 당장 다음 회차에 연주할 곡을 뽑아내고 있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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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인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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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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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도적인 게 뭐라고 생각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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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인은 무슨 말을 하냐는 듯 명전을 쳐다보았지만, 이내 고개를 들어 천장을 살짝 바라보았다. “압도적인 것?” 이라는 말이 그녀의 입에서 살짝 새어나왔다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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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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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말해줬잖아. 오디션 프로그램 나간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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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긴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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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과제가 ‘이상향’인데, 나는 이 주제로 남들이 “우리가 쟤들 이길 수 있겠지?” 라는 생각 자체를 못 하게 만들려고 하거든. 엄청난 실력을 보여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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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주억거리는 다인. 명전은 골치아프다는 듯 머리를 벅벅 긁고는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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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런 막연한 이미지만 있으니까 뭔가 떠오르는 게 없단 말이지. 그래서 물어보는 거야. 뭔가 떠오르는 그런 게 있나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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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그런 거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은 따로 없는데. 압도적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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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인은 팔짱을 끼고 고민에 빠졌다. 그런 와중 뒤늦게 들어오는 삼인방 중 2명. 명전은 수현과 채린에게도 똑같은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러자 갑자기 웃음을 터트리는 채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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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잘못 먹었냐? 왜 이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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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채 왜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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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린의 그런 모습에 놀라는 두 사람. 명전 또한 마찬가지였다. 얘가 갑자기 왜 이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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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압도적이라고 하니까 예전 생각 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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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예전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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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있잖아. 수연이가 주희 선배 싸다구 날리던 날. 그때 나는 진짜 ‘와 얘는 진짜 압도적인 미친년이다, 절대 건드리면 안 된다’ 라고 생각했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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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 한번 들었던 이야기. 채린은 그때의 심정을 다시 풀어놓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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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고 해야 하지? 우리 중3시절에 막 노는 여자애들 언니들 자기들끼리 기싸움하고 그랬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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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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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래서 뭐 술먹었으니까 선배한테 개기고 말대꾸 따박따박하면서 기싸움 안 지고 ‘아 나는 기존나쎈년임~’ 뭐 이런식으로 나갈 줄 알았는데. 바로 선배 뺨을 날리니까. 그때 사람들도 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와 얘는 안 된다. 뭔가 따라할 엄두가 안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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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난 채린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과거의 자신이 저질렀던 어처구니 없는 이야기를 듣다, 명전은 ‘압도적임’에 대한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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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할 엄두가 안 난다, 뭐 그런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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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어… 보통 선배 뺨 치는 걸 따라할 엄두가 나는 사람이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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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불쑥 튀어나온 명전의 질문에 살짝 당황한듯한 채린. “그러고 보니 다인 너 뭐 그거는 어떻게 됐는데. 주희 선배 이야기.” “권지가 그거 관련해서 말할거 나한테 있다고 하던데…” 같은 이야기가 이어지는 가운데, 명전은 아이들을 무시한 채로 작곡 노트에 음표를 끼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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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베이전 프롬 서울 2회차. 정식 명칭은 INVASION FROM SEOUL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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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회가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던 탓에 2회의 제작 여부가 상당히 불투명했고, 공식적으로는 제작발표회조차 들어가지 않은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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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름을 밝히지 않은 [밴드 오디션 프로 참가자 모집] 공고라던가, 서울 곳곳에 등장했던 밴드들의 촬영 장면이라던가, 최근 인터넷에 돌기 시작한 [인베이전 2024의 0화와 1화 분량은 촬영되었고 현재는 2화 분량이 촬영되고 있다]는 루머들을 볼 때… 인베이전 2024가 촬영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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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진짜 더럽게 방청하기 힘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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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여기에, 인베이전 2024를 누구보다 기다리고 있던 사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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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그게 어떻게 가능한지 모르겠지만, 반쯤 밀수하다시피 핸드백에 아빠백통(캐논의 망원렌즈를 말함)과 DSLR을 넣어온 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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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보이밴드 [2MAJOR]의 골수팬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2MAJOR]의 기타인 ‘한승윤’의 팬이었다. 유망한 연습생 시절부터 팬질을 하며, 한승윤의 남돌 데뷔를 자신의 대학 입시보다 소중하게 여겼던 그녀였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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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작 그녀 본인은 생각지도 못하게 대학을 잘 갔는데, 한승윤은 무슨 이상한 결정을 했는지 남돌이 아니라 밴드돌이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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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도 잘 치지도 못하는 놈이 도대체 뭔 지랄이냐 머리를 뜯으면서도, 그녀는 애정 50% 의무감 50%로 한승윤과 [2MAJOR]의 팬질을 계속해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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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쓰발. 콘서트나 시키고 예능 스케줄이나 잡던가 하지 이런 프로에는 도대체 왜 내보내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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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그런 푸념을 내뱉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솔직히 2MAJOR는 어떤 식으로든 이런 프로에 나와서 실력 조금이나마 보여주고 좀 뜨고 사진이나 몇장 건질 수 있으면, 그거로나마 만족해야 하는 처지의 그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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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다행인 것은, 최근에 뜬다는 [TWR]이나 [WEKIDS] 같은 돌밴드(솔직히 돌밴드란 점에서 그놈이 그놈이긴 했다)들도 이 프로에 나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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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좀 유명한 애들 있어서 다행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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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2MAJOR가 우승 못할 실력인 것은 그녀도 잘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혼자 인디밴드들 오디션에 꼈다가 광탈하는 건 전혀 다른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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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일이 일어나면 팬들은 고개도 못 들고 다닐텐데, 그나마 같이 탈락할 동지가 있어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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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 방지용 서약서를 쓰고, 방청객석에서 방송을 기다린다. 어둑하고 따뜻한 환경 탓에 슬 잠이 올 때쯤, 시작된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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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무대는, 밴드들의 자작곡 경연이 펼쳐질 예정입니다. 방청객 분들께서는 배부받은 투표기를 통해 투표를 하실 수 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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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표 방식 및 안내를 맡은 스태프의 멘트. 이후 잠시 더 기다리니 입장하는 밴드들. 무대를 정중앙에 두고, 좌우로 15팀씩 총 30팀이 계단식 무대에 앉아 대기를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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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많이 기다리셨습니다. 오늘의 첫 무대! 큰 박수로 맞이해주시기 바랍니다! 4인조도적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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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무대가 시작되고, 소개와 함께 4명의 밴드가 올라와서 자신들의 곡에 대한 설명을 시작한다. 어쩌고 저쩌고. 관객석에는 잘 들리지도 않아, 그녀는 핸드폰을 슬쩍 켜 이번 오디션의 밴드 명단을 살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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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인조도적단… A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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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인디밴드 빠가 만든 리스트. 30개의 밴드를 전부 정리하고, 장단점과 함께 티어와 우승 가능성까지 나눠놓은 자료. 이 자료에 의하면, 지금 공연을 하는 밴드는 A급에 속했다. 우승가능성이 충분히 있는 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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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도 나쁘지 않네. 노래는 솔직히 잘 안 들리지만. 음향 장비 때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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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전을 하면 뭐 하냐. 이런 기본적인 퀄리티에서 개좆소 티를 내는데… 라고 Mtown에 대해 푸념하며, 그녀는 2MAJOR의 위치를 다시 바라보았다. B급. 우승 가능성과 실력 모두 중간인 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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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인 것은 WEKIDS나 TWR도 똑같이 B급이라, ‘~ 선에서 정리’ 소리까지는 안 들어도 된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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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쟤들은 진짜 잘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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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드 이름이 [Mystica]라고 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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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전 뭔가 준비해온 것 같았는데 삐걱대다가 무대를 제대로 못 했던 [쿠바미사일위기](무려 A급이었다), 보컬이 삑사리를 냈던 [울림 스톤즈], 밴드 음악은 2MAJOR 외에는 그다지 들어본 것 없지만 그런 그녀의 귀에도 영 아닌 것 같이 들린 NOT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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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밴드들과는 확실히 다른 것 같은 느낌의 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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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팀은 Mystica를 픽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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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도 Mystica를 선택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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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이거 경쟁 이렇게 붙을 줄은 몰랐네. 그런데 이쪽도 픽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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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러면 나가린데… 일단 저희도 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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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인지, Mystica를 픽한 멘토 팀은 4팀이나 되었다. 그런 멘토 팀의 반응에 호들갑을 떠는 M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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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멘토 4팀이나 Mystica를 픽했습니다! 4파전인가요! 지금까지 픽을 아껴뒀던 것은 이 때를 위해서였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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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MAJOR는 한놈밖에 픽 안 하더니… 여기 경쟁 붙으려고 그런 거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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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픽을 받은 게 어디인가. 0픽 받고 바로 떨어진 밴드도 있는데. 그렇게 생각하며, 그녀는 흥미롭게 서로 선택받기 위한 멘토들의 입씨름을 지켜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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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찬밴드]를 픽한 멘토 팀은… 없었습니다. 안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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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전 공연을 마친 밴드는, 고개를 푹 떨구었다. 그러나 그럴만한 연주였다. 그녀가 듣기에도 뭔가 거창하게 하려고 했다는 것 정도만 느껴진… 픽을 받지 못하는 게 이해가 될만한 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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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밴드는 내려갔으나, 바로 진행 사인이 나오지는 않는다. 잠시 소강상태가 된 공연장. 세트 옆쪽을 보니 스태프들과 MC가 회의를 하는 듯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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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분이 지나고, “뭐지?”, “무슨 일 있나?” 라는 관객들의 웅성이기 시작하자… 산만한 상황을 정리하려는 듯 MC가 무대 위로 올라와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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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됨으로써, 벌써 6번째 0픽 팀이 나왔군요. 이런 상황이 올 것이라고 생각은 하지 못했습니다. 만약 멘토들이 픽을 전부 소진하지 않을 경우, 한번 더 차례가 돌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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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MC의 말에 시끄러워지는 공연장. “부활이 가능한 건가?” 라고 되뇌이는 사람도 있고, 자제하지 못해 대기석에서 “야쓰!!” 라고 소리를 지르는 밴드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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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상황이… 그녀가 생각하기에는 뭔가 이상했다. 왜 픽을 아끼고 있는 것인가. 4번이나 기회가 있다던데 그게 아낄 이유가 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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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긴 아까 룰 설명 들을 때, 멘토가 맡은 팀이 우승했을 경우 멘토에게도 상금이 나간다고 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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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생각해보면 이해가 될 만 했다. 뭔가 뒤에 유력한 우승후보가 있으면, 그 밴드를 픽하고 상금을 타갈 확률을 높인다 뭐 그런 전략인가? 그녀는 다시 한번 더 밴드의 리스트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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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S급이라는 Mystica도 4픽이잖아. 그럼 이 다음은 누가 남은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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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급에는 팀이 하나밖에 없는데… 라고 생각하며, 그녀는 핸드폰 화면의 일부를 가리고 있던 손가락을 치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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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드의 이름이 하나 더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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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드디어 이 차례가 되었군요. 많은 멘토 여러분들께서 기다리던, 바로 그 차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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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의 말에 갑자기 웅성거리기 시작한 밴드들. Mystica 때에도 그러긴 했지만, 지금은 강도가 훨씬 심한 느낌. 관객석에 들릴 정도의 목소리도 들린다. “쟤들이라고?”, “좆된다니까.” 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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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밴드들의 주목을 받으며 세트로 걸어내려오는 것은 4명의 여자아이들이었다. 밴드들 사이에 묻혀 보이지도 않을만한 체격의… 잘 쳐줘봐야 여대생. 적정 연령은 여고생으로 보이는 그런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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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촬영장은 그 어느때보다도 긴장감이 돌고 있었다. 마치 저 4명이, 여기 합친 모두들을 상대해도 이길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을 갖췄다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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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핸드폰의 스크롤을 쓱 내려 읽어보았다. 밴드의 설명이 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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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데뷔한 밴드. 보통 밴드들이 2~3년은 굴러야 가능한 앨범 발매, 클럽 정기공연, 페스티벌 데뷔 등을 1년만에 몰아서 도장깨기중인 밴드. … 현재 홍대 밴드씬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는 애들. … 이 밴드 기타 치는 거 듣고 넥부수고 기타접었다는 기타리스트들이 한둘이 아닌 수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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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밑으로도 휘황찬란한 미사여구가 잔뜩 붙어 있는 그런 내용. 그녀는 홀리기라도 한 것 마냥 스크롤을 다시 올려 밴드의 이름을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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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드의 이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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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끝난 세팅. 무대 중앙에 선 기타리스트는 머리를 쓸어넘기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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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그룹 사운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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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다는 것, 그리고 이쁘다는 것. 그것을 제외하면 4명에게 뭔가 특기할만한 사항은 없다. 제복 비슷한 느낌을 풍기는 무채색의 롱스커트 패션을 한 아이들은 저마다의 위치로 향해 자리를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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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명은, ‘신기루’입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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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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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물을 끼얹는 듯한 차가운 말투에, 그녀는 뭔가 빈정이 상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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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의 밴드들은 무대 위에 올라와서 말이라도 한두마디 하고 웃음이라도 짓고 시작을 했지만, 이 애들은 아니었다. 다른 관객들도 그녀와 마찬가지 심정인 듯 웅성임이 이어지긴 했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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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분위기가 오래 가진 않았다. 무대를 지켜보고 있는 밴드들의 긴장감을 관객들도 알 수 있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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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의 포문을 연 것은 키보드 소리였다. 느긋하게 늘어지듯 자락을 끌며 흘러가는 소리. 그 위에 얹어지는 것은 뭉툭하고 낮지만 그렇기에 달콤한 베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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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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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그렇게 특별하지 않다. 평범하게 울려퍼지는 기타의 소리. 그녀는 그래도 뭔가 다른가? 싶으면서도 어떤 점이 다른지를 명확하게 찾아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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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 밖의 세상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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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러지는 어스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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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지막히 읇조리는 목소리는 악기 소리와 비슷한 음량이다. 아니, 오히려 기타의 소리가 목소리를 묻어버리는 듯도 하다. 이때까지 공연했던 밴드들과는 정 반대의 분위기에 이질감을 느끼는 관객들. 벌써부터 투표 버튼을 눌러버리는 관객들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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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뒤에 반전이 있을 수도 있는데 벌써부터 누르는 건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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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의 분위기가 마음에 안 드는 것은 그녀 또한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다 듣고 투표를 해야 할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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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너머의 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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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그곳에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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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런 그녀도 ‘이거 진짜 뒤에 뭔가 있긴 한 건가? 그냥 힙스터병 걸린 밴드 아닌가?’ 라고 의심하기 시작할 때쯤… 관객들의 미몽을 깨우듯 일순간 맹렬하게 울리는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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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순식간에 잦아든다. 마치 그런 일은 없었다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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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쩌면 기타가 아닐지도 몰랐다. 그렇게 격렬하게 울린 소리임에도 불구하고 무대에 오른 밴드들에게는 별 움직임이 없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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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가의 민들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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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하늘 흘러가는 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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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순간의 소요를 뒤로 하고 심장박동처럼 조금씩 울리기 시작하는 드럼. 뭉툭한 소리는 스피커에서 나와 지면을 타고 흐르는 듯. 찰박찰박하게 흘러내린 드럼은 어느 새 발 밑까지 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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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다시 시작된 기타 연주에 그녀는 그제서야 ‘기타가 운다’ 라는 문장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의 덕질 대상인 2MAJOR의 한승윤이 가끔 인스타 라방에서 “기타 잘 치고 싶다. 기타를 울게 만들고 싶다.” 며 푸념했을 때… 그녀는 자신의 ‘최애’를 위로해주면서도, 기타라는 거 그냥 치면 되는 거 아닌가 생각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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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다’라는 것은 저런 것을 말하는 것이었구나 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승윤이 정말 저런 걸 하고 싶은 것이라면 기타를 쳐도 한참은 더 쳐야 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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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어느새 단순한 리프를 반복하면서도, 조금씩 음정을 높이며 분위기를 고조시키기 시작한 베이스와 피아노, 드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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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위에 올라간 기타는… 아직도 울고 있다. 아니, 이제는 울음이라기보다는 울부짖음에 가까운 굉음. 흉포한 연주는 산마루에서 닥쳐오는 눈사태와도 같이 관객을 휩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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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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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오늘 두번째로 그런 생각을 했다. 하지만 의미는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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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의 것은 부정이었으나 지금은 혼란이다. 더이상 멜로디를 연주하고 있지 않은 기타. 고개를 살짝 숙인 채 기타를 연주하고 있는 아이의 손 끝에서는 컨베이어 벨트에서 공산품이 내뱉어지듯, 규칙적인 또는 불규칙적인 사운드가 만들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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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스피커를 통해 나온 그 사운드는, 퍼져 나가 공간을 장악한다. 지배하고 굴복시킨다. 소리와 분노로 가득찬 공연장은 단 한 대의 기타에 의해 통제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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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영원할 것 같았던 순간에도 종말은 오기 마련이다. 컴퓨터 전원을 뽑아버리듯 뚝 끊긴 연주. ‘음악’이라기보다는 ‘소리 뭉치’에 가깝던 것이 사라진 이후 남은 것은 정적을 맞이한 황량한 무대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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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적 속에서 누군가가 벌떡 일어나 박수를 친다. 하나는 둘이 되고 둘은 여덟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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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모든 걸 버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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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너를 좇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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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움직임이 미처 다 확산되기 전에 다시 울리는 기타. 뻘쭘하게 서 있다 머쓱하게 앉는 참가밴드들을 뒤로 하고, 기타리스트는 그렇게 읇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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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무대는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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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잠시 멍하니 있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나만 이런 기분을 느끼고 있는 것인가 싶어서. 다행히도 그녀의 동지들은 꽤나 많았고, 다들 투표기에 몇 점을 입력해야 하는지 망설이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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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 또한 마찬가지였으나, 아무튼 점수를 입력했다. 이것이 과연 맞는 점수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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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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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중들의 투표가 끝나고, 멘토들이 선택을 진행할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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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루, 잘 들었습니다. 형식을 파괴했다고 해야 하나, 여러모로 굉장한 곡이었는데요. 어떤 곡이었을지 설명이 가능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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멘토 중 누군가의 질문에 수연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말을 고르는 듯한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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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가 이상향이잖아요. 이상향이라는 것은 이상적인 연주라고도 해석될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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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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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적인 연주가 무엇일까? 고민을 여러가지 하다 보니까 그런 생각이 들더라구요. 블루스나 재즈처럼, 틀을 정해놓지 않은 어떤 무작위의 즉흥연주야말로 이상적인 것이 아닐까? 가는 길이 곧 음악이 되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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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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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한 멘토의 표정. 그녀 또한 비슷한 심정이었다. 저게 무슨 소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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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냥 처음부터 끝까지 즉흥으로 쳤습니다. 따로 정해놓은 것 없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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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만, 그럼 밴드 전부가 그렇게 쳤다는 거에요? 그냥 이 무대 위에서 잼(JAM)을 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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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수연의 말에, 멘토 중 누군가가 못 참고 끼어들었다. 그 질문에 엷게 웃으면서 대답하는 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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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뇨, 그건 아니고. 기타는 전부 따로 정해놓은 것 없이 쳤구요. 키보드, 드럼, 베이스는 어떤 타이밍에 어떤 식으로 연주해야 한다, 그 정도만 정하고. 리듬이라던지 뭐 전반적인 부분에서. 예를 들어서 아까 연주를 끊은 부분도 그렇고, 그런 건 좀 정해놓고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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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진 세트장. 관객석의 누군가가 “말이 돼?” 라고 중얼거린 것 조차 크게 들릴 정도. 그녀 또한 동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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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런 연주를 즉흥으로 친다고? 그게 말이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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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소개를 들어 보니까 기타 친지 이제 갓 1년 정도 되었다던데. 저게 1년이면, 왜 한승윤은 아직도 뚝딱거리고 있는가? 아까도 영 이상하게 연주하더니. 보컬만 좋아가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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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굉장한 연주 잘 들었습니다. 그럼 혹시 멘토분들 픽 다 하셨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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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대로라면 질문이 더 나와야 할 타이밍. 하지만 정적이 찾아든 촬영장의 분위기 때문인지, MC가 치고 들어왔다.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멘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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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우선 관객 분들이 매기신 점수를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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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듣기로, 관객 점수는 100점 만점이며 평균을 매기는 시스템이라고 했다. 당장의 라운드에는 영향을 끼치지 못하지만, 다음 라운드 때 중요한 영향을 미칠 것이므로 점수를 높게 받아놓는 게 중요하므로… 대충 투표하지는 말아달라던 제작진의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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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 점수는…! 62… 점? 입, 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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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발표된 관객 점수에 그녀는 눈을 의심했다. 62점? 제대로 받은 게 맞나. MC도 당황한 기색으로 살짝 말을 더듬고, 밴드들의 자리에서도 “왜 저렇게 낮아?” 라는 소리가 흘러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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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점… 현재로써는 3번째로 낮은 관객 점수입니다. 그렇다면, 멘토의 픽은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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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색을 가다듬고 쾌활하게 외치는 MC. 그 소리와 함께 멘토들이 팻말을 들어 올린다. 올려진 팻말은 5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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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 Sound를 픽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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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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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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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도 픽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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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도 마찬가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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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 점수와는 완전 반대의 상황. 하지만 멘토들은 이를 예상이라도 한 듯 평온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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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stica의 4픽에 이은 Group Sound의 5픽! 이렇게 되면, 오히려 Group Sound를 픽하지 않은 팀에게 이유를 묻고 싶어지는데요. 혹시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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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일단 연주를 못 했다거나, 곡이 안 좋았다 그런 건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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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의 질문에 입을 떼기 시작한 멘토 ‘수락’. 그는 살짝 당황한 기색으로 뒷목을 주무르다가, 다시 말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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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전에 관객분들이 62점 주셨잖아요. 그런데 멘토들은 5픽을 했고. 저는 이게 어쩌면 상징적인 장면이라고도 보이거든요. 약간 괴리가 있다, 뭐 그런 느낌. 일단 방금 그 연주에서는 대중성? 이 안 느껴졌다고 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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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룹 사운드는 돈을 못 벌 밴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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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런 말이 아니고요. 왜 다 알면서 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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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에서 들어온 깐족거림에 급히 손사래를 친 ‘수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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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이게 상당히 중요한 오디션이고 무대인데도 불구하고, 패자부활전이 있다 해도 즉흥적인 연주를 가져와서 한다? 이거는 어, 에고가 굉장히 강하다고 할 수 있는 그런 거죠. 저희들은 저 팀을 다룰 자신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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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잘 들었습니다. 꽤나 일리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되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 나머지 멘토분들께서는 Group Sound를 픽을 해 주셨죠… 그럼 이제 멘토들의 시간입니다! 왜 Group Sound가 자신들을 픽해야 하는가! 그 이유를 말씀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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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의 호기로운 외침과 함께, 멘토들이 차례대로 자신들을 픽해달라고 어필하기 시작한다.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든 촬영 현장의 분위기에, 그녀는 은근슬쩍 카메라를 꺼내 한승윤과 2MAJOR 밴드들의 사진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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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봐도 잘 생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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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좁은 관객석에서 백통을 꺼내든 탓에 눈치를 주는 관객이 있었지만, 그녀는 딱히 신경쓰지 않고 사진을 몇장 더 찍었다. 오늘 여기 온 건 사실상 이 짓 하러 온 건데 남의 눈치를 봐서 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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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몇장을 더 찍은 후, 카메라를 집어넣을까 하다가… 무대에서 멘토들을 응시하고 있는 ‘하수연’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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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통으로 줌을 확 댕겼는데도 불구하고, 그녀의 본진인 2MAJOR에 꿀리지 않는 피부와 외모. 단아해보이는 얼굴은, 심드렁한 눈과 맞물려 약간 차가운 인상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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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그냥 온 김에 사진 찍는 거야. 혹시 데이터를 팔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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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자신에게 그렇게 되뇌이며 Group Sound 아이들의 사진을 찍어댔다. 왠지 모르게 한승윤과 2MAJOR보다 더 많이 찍은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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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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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점이 말이 돼? 이건 음해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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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 수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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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아포가토를 한입 떠 먹었다. 달콤한 아이스크림이 입안에 퍼져나가며, 지친 심신에 활기를 주었다. 메인 멜로디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즉흥으로 연주하는 일. 기타를 상당히 오래 쳐온 그에게도 상당히 지난한 일이었으며, 또한 난생 처음 해보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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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힘든 줄 알았으면 절대 안 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명전은 다시 한입 더 아이스크림을 입에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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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너 뭐 커피 시켜놓고 아이스크림만 먹냐. 그럴거면 그냥 아이스크림 시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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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 최씨, 남의 식습관에 참견 마시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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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는거야… 하며 중얼거리는 이서. 그리고 잠시 찾아든 정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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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괜찮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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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정적을 깬 것은 현아의 목소리였다. 듣기만 해도 앞으로의 일에 염려가 가득해보이는 느낌. 명전은 아이스크림을 한입 더 먹다가, 고개를 젖혀 천장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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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괜찮아도 어쩔 수 없지. 일이 벌어졌는데 어떻게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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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을 받은 것은 좋았다. 5픽이나 들어왔다는 것도 마음에 들었고, 압도적인 무대를 보여주어 밴드들이 그들에게 덤비지 못하게끔 하려던 것도 의도대로 된 것 같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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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대중성을 잡지 못한 탓에 받아버린 관객점수 62점. 30개 밴드 중 28위, 픽을 받은 밴드 중에서는 압도적인 꼴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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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미션이 나올 줄 알았으면 그런 식으로 안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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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 점수는 2라운드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과연 옳은 말이었다. 그 관객 점수로 인해 받은 그들의 2라운드 미션 곡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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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명 ‘병맛 뮤비’와 ‘중독되는 가사’로 유명한 노래 [비비드 오렌지]의 JUMPING! 이었기 때문이다. 일명 ‘엔진 춤’으로 유명한, 노래가 좋아서라기보다는 뮤비에서 춤 추는 게 웃겨서 뜬… 거의 십년은 더 된 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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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에 대해서는, 잠시 시간을 거슬러올라갈 필요가 있다. 그룹 사운드의 공연이 끝난 뒤 쯤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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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밴드는… 도화서 팀을 멘토로 선택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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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 매우 좋은 선택이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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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 반 진담 반이 섞인 멘티(Mentee) 쟁탈전. 무슨 도떼기 시장마냥 “그룹 사운드 여러분, 저희를 뽑으시면 입고 계신 옷 다 명품으로 바꿀 수 있게 해드리겠습니다.”, “저희랑 하시면 저희 음반 피처링 다 그룹 사운드에게 맡기겠습니다!!” 같은 공약이 난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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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가운데, 그룹 사운드의 선택을 받은 것은 싱어송라이터 ‘도연’과 솔로 기타리스트 ‘김진서’로 이루어진 멘토 팀, ‘도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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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도화서’를 멘토를 뽑은 이유로 “멘토가 되시기에 제일 진정성을 가지신 것 같아서요…” 를 들긴 했지만, 실은 ‘그다지 간섭 안 할 것 같아서’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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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멘토랍시고 들어와서 헛소리만 할 수도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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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그래도 프로 뮤지션이니만큼 나름 도움이 되는 조언을 하려고 노력은 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이 프로그램에 참여할 레벨의 밴드들에게나 유효한 것. 나이는 여고생이지만 경력은 교수급인 명전에게는 그다지 필요가 없는 조언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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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몇번의 공연이 이어진다. 그룹 사운드를 픽하기 위해서 아껴놨던 픽들이 아낌없이 사용되기 시작했고, 촬영 최후반부에는 MC가 “라스트 찬스입니다!! 픽을 바꿀 수 있는 기회!!” 같은 소리를 외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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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 실제로 픽을 바꿔버리는 멘토들, 그리고 천당에 있다 지옥에 떨어진 밴드나 지옥에서 천당으로 올라가는 밴드들이 생겨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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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모든 아비규환이 정리되고, 탈락할 6개 밴드가 선정되자… MC가 다시금 무대 앞으로 나와 진행 멘트를 외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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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선택받지 못한 밴드들은… 아직 끝이 아닙니다. 레파차지! 패자 부활전을 통해서 다시 한번 부활할 수 있는 기회가 올 것입니다. 지금 픽된 밴드들도 안심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지옥에서 돌아온 사자들이 당신의 목덜미를 덮칠 수도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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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띠게 외치던 MC는 잠시 숨을 고르고는, 진정한 기색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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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제 중요한 것이 하나 더 남았습니다. 다음 라운드의 미션! 이 과연 무엇이며. 그리고 오늘 투표된 관객 점수! 는 도대체 어떤 역할을 수행하는가? 궁금하신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여기에 해답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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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가 숏카드로 스크린을 가리키자, 강렬한 시각 효과와 함께 스크린에 타이포들이 나열되기 시작한다. 24개의 곡. ‘탄창소년단’이니 ‘노이즈’니 ‘걸프렌드’니, 명전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아이돌 이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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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라운드 미션은, ‘편곡’입니다. 현재 한국 음악 씬은 ‘아이돌’들이 이끌어나가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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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트에 등재된 곡 중 대부분은 꽤나 무난한 것들이었다. 대중들에게 잘 알려지고, 밴드 곡으로 편곡하기도 썩 괜찮은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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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라운드 미션은, 이 24개의 리스트에서 원하는 곡을 골라 그 곡을 편곡해오는 것입니다! 그를 통해 우리는 밴드 여러분들의 편곡 센스와, 창의력, 그 외 많은 요소들을 평가하려 합니다. 어떤 장르이든 좋습니다! 충격적이고 이색적일수록 좋은 점수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퍼포먼스 또한 가중치를 줄 것입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좋아야 한다’는 것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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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밴드들은 그런 대다수의 곡들보다 ‘일부 곡’들에 주목했다. 명전은 주위에서 “저건 절대 걸리면 안 될 것 같은데.”, “카트리나 뭐냐고…”, “그래도 점핑보단 낫지.” 같은 소리를 들었다. 뭐가 어떤 곡이기에 저런 말을 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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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저 밑에 있는 곡들 들어본 적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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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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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십년 전에 나온 곡들 아닌가. 이름은 들어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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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와 서하가 하는 말에, 명전은 머리를 살짝 꼬았다. 어떤 곡인지는 몰라도 주위의 반응을 보면 그다지 좋지는 않은 모양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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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 곡들을 선택하는 기준은…! 바로 관객 점수 순위입니다! 관객들이 여러분들의 퍼포먼스를 평가한 값을 바탕으로 선택 우선권이 주어집니다! 즉! 첫번째 선택권은 관객 점수 1위 [WEKIDS]에게! 그리고 관객 점수 최하위인 [Group Sound]는, 마지막 남은 곡을 할 수 밖에 없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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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악에 빠진 관객들의 반응. 하지만 명전은 뭐, 그렇게 문제 될 것 있나 생각했다. 어차피 아이돌 곡이라는 게 결국 듣기 위해서 나온 것들 아닌가. 그럼 별 문제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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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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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어떡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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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곡 회의. 하지만 나가지 못한 진도. 도대체 어디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를 곡을 들으면서, 명전은 머리를 싸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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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 년 음악 인생에서 이런 난관은 처음 겪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핸드폰 화면에서는 그런 그를 비웃기라도 하는 듯 여자 아이돌들이 V6 엔진을 모방한 듯한 춤을 추고 있었다. 츄리닝을 입은 채 손을 무릎위에 얹은 후 삐죽삐죽 튀어나오거나, 잔상을 남기는 듯 머리를 빙글빙글 돌리거나. 게다리춤을 추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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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사라도 얌전하면 모르겠으나, 그것도 전혀 아니었다. 시종일관 “점핑!” “팝 팝 팝!” 정도밖에 들리지 않는 가사. 그거 외에도 뭔가 외치긴 하는데 곡이 끝나고 나면 점핑! 팝 팝 업! 점핑! 팝! 날따라 뛰어! 팝 콘 처럼 ! 어쩌고 저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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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이 편곡 아이디어를 가지고 오긴 했다. 디스코풍 멜로디를 가다듬어 디스코 락처럼 만든다던가, 가사를 무시한 채 밴드 사운드를 첨가한 발라드 풍의 노래로 만든다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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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명전이 보기에는 죄다 별로인 아이디어였다. 너무 무난하거나, 기존 컨셉/가사와 어울리지 않는 등의 문제가 있는 아이디어들. 정작 본인은 손도 못 대긴 했지만, 아무튼 아닌건 아니라고 명전은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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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중독된다 은근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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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명전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왠지 모르게 츄리닝을 입은 이서와 현아가 뮤비의 춤을 따라하고 있었다. 비죽비죽 튀어나오는 폼과 은근히 맞지 않는 박자를 보면, 요즘 아이들이 왜 ‘킹받는다’ 라는 말을 하는지 알 법 했다. 이런 상황에서 쓰는 용어란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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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촬영이 언제라고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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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짓 없이 춤이나 따라 추고 있는 둘을 외면하고 있는 사이, 서하가 질문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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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일단 다음 촬영까지는 여유가 그래도 있는 편이긴 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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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멘토가 점검? 그런 거도 해야된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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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제일 문제야. 그 전까지 뭔가 아이디어가 나올 것 같지가 않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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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머리를 쓸어올렸다. 곡만 만든다고 생각하면 시간 자체는 그렇게 적지 않으나 곡 연습을 포함하면 꽤 빠듯한 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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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무슨 멘토 검사니 뭐니 하는 그런 것까지 있으니, 곡 컨셉을 얼마나 빨리 잡느냐에 따라 오디션의 등락이 달린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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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탈락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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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으로 하는 웬만한 일은 다 자신이 있는 명전이었으나, 이번 미션은 너무도 험난해보였다. 뽕짝 디스코풍 아이돌 팝을 들을만한 밴드 사운드로 만들라는 게 말이 되는지. 차라리 패자부활전을 노리고 탈락을 한 다음, 거기에서 다시 올라가는 게 맞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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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명전은 이내 그 생각을 접었다. 가능성이야 있긴 했지만, 어떤 미션이 나올지도 모르는데 섣불리 ‘그렇게 해야지~’ 하고 손을 놔 버려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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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1라운드 공연을 그런 식으로 한 이유가 무엇인가. 누구도 나를 탈락시킬 수 없다 하는,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는데. 그래놓고 2라운드 탈락을 해 버리면 천하의 웃음거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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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딱히 뾰족한 방안도 없는 것이 현실. 명전은 잠시 천장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떨궜다. 어떻게든 해야 하는데, 뭐 방법이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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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나 잠시 좋은 생각 났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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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고민에 빠져 있는 사이, 갑자기 이서가 소리를 빼액 지르며 연습실을 가로질러 달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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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진짜 좋은 생각 아니고 뭐 이상한 헛소리 하면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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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진짜 좋은 생각이라니까. 이 노래가 좀 그 뭐냐, 틀니들 말로 ‘병맛’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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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무심코 “틀니는 좀.” 이라고 중얼댔지만, 이서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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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이걸 한층 더 강화시키는 건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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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뭔 소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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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지금 막 이런…” 이서는 다시금 빙글빙글 돌다가 엔진 춤을 추는 등의 동작을 해 보였다. “거를 이제 극단적으로 강화시켜보자는 거지. 오히려 더 막나가는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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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말인지는 알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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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일리가 있는 이야기긴 했다. 아이돌 노래를 락으로 편곡하는 사례는 일찍이 많이 있어 왔다. [나는 가수다]에서 윤도현 밴드가 보여주었던 [Run Devil Run], 시나위가 보여주었던 [강남스타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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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명전이 그쪽을 고려하지 않은 것은, 현대문물에 익숙하지 못한 명전조차도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생각이라는 것이었다. ‘병맛’을 뒤틀어서 ‘멋지게’ 소화한다? 그렇게 해서 좋은 노래를 만든다? 너무 무난한 선택지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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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점에서 이서가 내놓은 컨셉은 꽤나 마음에 들긴 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극한으로 밀어붙이자 뭐 그런 느낌인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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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생각인데… 문제는 그걸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거거든. 이미 B급 정서의 노래인데 여기서 더 추가한다고 해 봐야 뭔가 더 될 것 같지가 않아. B급을 더 쌈마이하게 만들어서 C급으로 만든다고 해서 뭔가 좋아진다거나 웃겨지지는 않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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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긴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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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짝 시무룩해진 이서의 목소리. 명전은 팔짱을 끼었다가, 풀었다가, 머리를 꼬았다가, 다시 싸매기를 반복했다. 길은 보이는데 갈 수 없다니. 이걸 어떻게 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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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야야, 야. 이거, 이거 들어봐. 이걸로 가면 될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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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어깨를 흔들며 핸드폰을 들이미는 서하. 명전은 도대체 뭔가 하고 서하가 건넨 이어폰을 귀에 꽂은 후, 커피를 한모금 입에 머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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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들리는 노래에, 커피를 뿜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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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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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른 하늘에 커피 벼락을 맞은 이서가 비명을 질렀지만, 명전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귀에 꽂히는 이 드럼. 높은 톤의 보컬과 전혀 어울리지 않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어울리는 거친 사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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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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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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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베이전 2024의 제작이 공식적으로 발표된 후. 인터넷의 반응은 커뮤니티마다 조금씩 다르긴 했으나, 방향 자체는 일관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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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왜 그걸 2회를 만드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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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묘한 성공, 미묘한 시청률, 미묘한 실력, 미묘한 어쩌고 저쩌고. 망한 것도 아니지만 흥한 것도 아닌 인베이전 2023. 그 까닭에, 인베이전 2024가 제작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사람들의 수는 매우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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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인베이전 프롬 서울(Invasion from Seoul) 제작 메인 프로듀서는 윤동욱 피디… ‘잔인한 오디션’ 또 재현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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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여론은 빠르게 뒤집혔다. Mtown 오디션 사상 최고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윤발놈’ 윤동욱 피디의 귀환. 주종목인 ‘아이돌 오디션’은 아니지만, 윤동욱은 제작발표회에서 본인이 직접 “좀 더 발전한 재미를 보여드리겠습니다.” 라고 선언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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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탓에 ‘요즘 오디션은 뭐 맹맹해서 재미가 없다’ 라고 하던 열혈 오디션 시청층이 몰려들고, 그로 인해 생긴 노이즈가 다시금 라이트 시청자를 끌어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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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방영조차 되지 않은 오디션이 수많은 커뮤니티에 언급되기 시작하고, [윤동욱 저렇게 오디션 방송 복귀 시켜도 되는 거 맞아?], [요즘 윤리적인 방송이 얼마나 중요한데…], [아 ㅋㅋ 그냥 씨발 갓동욱 기대되면 개추 ㅋㅋ], [어차피 밴드도 딴따라인데 조리돌림 감당하고 데뷔하는 거 아님? 누가 칼 들고 협박함?] 같은 글들이 커뮤니티 상단에 조금씩 등장할 때 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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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반응들을 폭발시킨 것은, 0화 방영 초반부에 삽입된 한 인터뷰였다. 오디션장에 들어온 4명의 여성 밴드. 상당히 이쁜 여자아이가 자신을 “안녕하세요, 하수연입니다.” 라고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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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는 삽입된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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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 기타 친지는 얼마나 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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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 1년 살짝 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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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 어렵지 않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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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 어렵지 않죠. 그냥 다 배우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들이니까. 어렵다고 생각하는 게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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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 나오는 장면은 다른 참가자 밴드들이 기타를 치는 장면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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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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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어렵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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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심자이긴 한데, 배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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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적인 노력을 강조하는 듯한 참가자들의 대답. 그리고 그들을 무감정하게 쳐다보는 여성 참가자, '하수연'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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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기만 해도 제작진의 의도를 알 수 있을 법한 그런 장면에, 인터넷 커뮤니티들이 들썩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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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시간 분량으로 촬영된 0화의 중간 지점. 열심히 노력하며 ‘청춘’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고 있는 밴드 - 연주는 잘 하지 못해 예선 탈락된 밴드였다 - 의 뒤에, 앞선 밴드의 모습을 마치 힐난하듯 삽입된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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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해서 교차되는, ‘잘 하지 못하는 밴드’들과 그런 밴드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여성 참가자’의 편집. 웃음기 하나 없는 BGM과 긴장감을 주는 효과음. 그리고 헛웃음을 지으며 어이없어하는 심사위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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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 자기 소개를 해주실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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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 … 안녕하세요. 그룹 사운드의 하수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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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다시 굳게 입을 다물고 침묵하는 ‘하수연’. 누구라도 알 수 있을 법한 명백한 편집 의도에 인터넷 커뮤니티가 들끓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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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욱신 폼 살아있네 ㄷㄷㄷ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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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ㅅㅂ 뭐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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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셉 씨발 ㅋㅋㅋ 좆같이도 잡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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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쁘게 생겼으니까 욕받이로 쓰겠단거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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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들아 윤발놈 스타일이면 저기서 무조건 반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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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감탄과 화기애애만이 오갔던 그룹 사운드의 예선 심사장. 하지만 편집을 거쳐 나온 촬영본은, 칼날 위를 걷는 듯한 분위기였던 것으로 묘사가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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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위원 1 : 경력이 뭐 하나도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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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위원 2 : 아무것도 본 게 없잖아요 지금. 이걸 뭐 어떻게 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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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위원 3 : 아무리 뭐 공적 방송 이런 게 아니더래도 오디션인데. 이런 식으로 장난치듯이 하면 안 되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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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 밴드를 심사할 때 나왔던 평가들이 마치 그룹 사운드의 심사 때 나왔던 것처럼 편집되어 흘러나온다. 시청자들은 이런 오디션 프로가 통칭 ‘악마의 편집’을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눈에 보이는 정보를 그대로 받아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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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흐르던 방송은, 그룹 사운드의 연주를 보여주기 직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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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니모니모니모~ 모니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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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가 삽입되면서, 흐름이 끊겨버렸다. 쓸데없이 중독성 있고 사람 열받게 만드는 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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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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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에 찬 고함을 터트리며 소파에서 벌떡 일어난 이서. 명전은 그런 이서의 모습을 바라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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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왜 편집을 저따구로 해 놨냐고!! 우리 무슨 완전 미친년들 됐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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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이런 프로는 다 그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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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말이 되냐고~ 그걸 말이라고 하냐고~” 라고 외치면서 현아를 장난스레 잡아 흔드는 이서. 태풍 부는 날의 갈대처럼 흔들리며 처량하게 “하지마세요~”를 말하고 있는 현아를 내버려 둔 채, 명전은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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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이라는 게 원래 이런 것이라는 건 알고 있긴 했지만, 이 정도는 너무 심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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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 기타가 어렵지 않느냐는 이야기는 “누구나 다 음악을 할 수 있다” 라는, 초심자를 격려하기 위한 차원에서 한 말이었다. 그런데 편집을 거치고 나니 '기타가 어렵다는 놈들 다 나가 죽어야지' 같은 느낌이 되어버린 멘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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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죽이겠다는 느낌 같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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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하의 중얼거림. 그러는 동안 짧은 중간 광고가 끝나고, 다시 시작되는 방송. 격분하고 있던 아이들이 빠르게 착석하고, 밴드의 연주가 다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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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송출된 방송의 내용은 광고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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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내린 첫 눈의 그림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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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번 더 네게 찾아올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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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잿빛이여, 내게로 돌아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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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선때의 길거리 라이브. 나른하게 중얼거리는 호소력 있는 목소리와 그에 환호하는 관객들의 모습. 감탄을 금치 못하는 심사위원들의 교차편집. 커뮤니티의 반응은 삽시간에 뒤집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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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나 잘하네 ㄷㄷ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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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럴 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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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속친구들 다수 양성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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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오디션은 그냥 악편투성이인데 왜 그걸 바로 믿고 욕부터 박는지 모르겠네 ㅋㅋ 인류애 상실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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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미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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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에 예선 심사장에서 쳤던 기타 솔로 연주가 곁들여진다. 감탄한 듯 박수를 치는 심사위원들과, 심사장 바깥에서 그 연주를 듣고 머리를 싸매는 참가 밴드들. 심지어 1분 넘게 친 것임에도 불구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편집 없이 전체가 다 송출되는 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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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위원 1 : 저런 게 천재라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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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위원 2 : 기타를 치자마자 느꼈어요. 이건 그냥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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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위원 3 : 기뻐서 눈물을 흘릴 뻔 했어요. 우리나라 밴드계에 드디어 이런 인재가 나왔구나. 락 레볼루션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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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임없이 퍼부어지는 실력에 대한 긍정적인 편집. 낯간지러울 정도의 찬사가 이어진다. 다른 참가 밴드들의 인터뷰 또한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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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을 느꼈다고 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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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게 1년이라고? 듣자마자 자괴감이 진짜 엄청 밀려오는데,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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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쳐 온건 소꿉장난 같은 거란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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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런 편집들의 공통점은, ‘엄청난 실력’에만 방점이 찍혀 있다는 것. 화면 속의 ‘하수연’과 ‘그룹 사운드’의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편집 같은 건 전혀 없다. 무감정하게 무대 위로 올라와서, 기계적으로 완성도 높은 연주를 보여주는 듯한 밴드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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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 베이스를 시작한지는 몇년 되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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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 1년 반쯤 된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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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 어렵지는 않으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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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 그다지 힘들다고 느끼지는 않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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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이런 편집은, ‘하수연’ 뿐만이 아니라 ‘그룹 사운드’의 밴드원들에게 전부 들어갔다. 심지어는 ‘최이서’에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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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나는 또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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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면 속에 비치는 ‘최이서’는, 무감정한 기계처럼 베이스를 완벽하게 연주하는 모습. 그 모습에 이서가 경악을 금치 못하는 사이, 다른 밴드원들의 모습 또한 비슷하게 연출된다. ‘그룹 사운드’ 전체를, 천재적인 실력과 오만한 인성을 가진 밴드로 만들어버리는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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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래도 되는 거 맞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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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이 다른 밴드의 차례로 넘어간 후, 이서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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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너무 쓰레기처럼 나온 거 같은데. 약간 실력 믿고 남 무시하는 그런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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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 악의적이네 이거. 항의해야 되는 거 아냐? 내가 언제 저런 뉘앙스로 말을 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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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분명히 경력 이야기 했는데 그 부분 완전 잘렸어. CCM 밴드 했고 뭐 이런 이야기 다 없앴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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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원래 방송이란 그런 거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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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편’으로 인해 자신이 입은 피해가 더 크다며 장난스럽게 옥신각신하고 있는 아이들. 명전은 소파에 턱을 괴고 가만히 있다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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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는 내가 제일 많이 입은 거 아닌가? 나는 완전 싸가지 없는 애로 나왔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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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그건 사실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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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기대와는 전혀 다른 대답.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쳐다본 명전을 보고는, 밴드 멤버들은 어처구니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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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저건 그냥 평소의 너잖아. 너는 뭐 편집 같은 거 딱히 안 받은 거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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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저렇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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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 개 똑같음. 그냥 복사된 수준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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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날 ‘기타 친지 1년 됐어요.’ 라고 말한다음에 막 남들 앞에서 기타 실력 보여줘서 기만하고. 뭐야? 평소의 하수연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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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내가 평소에 언제 저랬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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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박을 해 보았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는 모습. 간만에 놀릴 건수를 잡아서인지 “냬걔평소에언제저랳는뎨~ 이지랄 크흐흫흫 너 완전 똑같다고~ 평소의 하수연이라고~” 라며 비웃는 이서를 보고, 명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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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명전 자신은 그런 의도로 말을 한 것이 아니니, 그렇게 받아들였다면 그 사람이 잘못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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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의 후반부는 주로 [TWR]이나 [WEKIDS] 같은 연예기획사 출신 보이밴드들, [Muzaku]나 [설가향] 같은 인디 밴드들 위주로 편집이 되어 있었다. 모두들 전부 노력하고 있으며, 꽤나 좋은 실력을 보여주고 있다는 듯한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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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개의 밴드가 차례로 전용 무대에 입장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끝난 0화를 보며, 아윤은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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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애들이 무슨 악당처럼 나왔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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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화 전반부의 편집은, 허접한 밴드들을 학살해버리며 등장한 오만한 천재 밴드 ‘그룹 사운드’에게 포커스를 맞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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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반해 후반부는, ‘훤칠한 비주얼과 상당한 실력, 그리고 괜찮은 인성을 가진 밴드’들 위주로 편집점이 잡혀 있었다. 이들의 지금 모습은 미약하나 발전하고 있으며, 이 오디션을 통해서 발전할 것이고, 결국 저 대악당 ‘그룹 사운드’를 무찌를 것이다… 그런 느낌의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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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커뮤니티 반응도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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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런 얼굴로 밴드를 한다니 믿겨지시나요? >>>TWR<<< 많은 사랑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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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만큼 위덜트 된 게 자랑스러운 날은 없었다 ㅠㅠㅠㅠ 예선 뚫은 WEKIDS 많은 사랑해주시구요 결승 가서 우승하자 얘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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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 사운드 쟤들 뭐 인디에서 유명함? 무슨 최종보스처럼 나왔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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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런 갓 인디밴드 Muzaku를 무려 라이브로 만나볼 수 있는 기회! 라이브 콘서트 많은 관심 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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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ㅆ발 꼬추밭에 여자밴드 나와서 눈정화될줄 알았더만 편집 꼬라지봐라 언냐들한테 금방 탈락될듯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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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디션에 저런 태도로 나오는 거 좀 아니지 않나? 자기들이 비틀즈라도 되는 줄 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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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커뮤니티를 돌아봐도, 이런 반응이 대다수. [윤가놈 이번 오디션 어그로용으로 쟤들 잡았네 ㅋㅋㅋ] 같은 글들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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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 정 반대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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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파라독스를 다니면서 받았던 인상과는 정 반대의 편집. 하지만 [우리 애들 저렇지 않아요 착해요 ㅠㅠㅠ] 같은 글이나 트윗들은, 넘쳐나는 홍보와 어그로성 글들에 의해 소리소문없이 묻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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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그래도 분량을 받은 게 어디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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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임없이 게시글을 올리다 지쳐, 아윤은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실력이 좋아도 편집을 거의 받지 못한 밴드도 있을테니까. 이런 식으로라도 분량을 받은 것에 만족해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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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 잘 봤어요? 편집이 너무하던데. 완전 그냥 기계들처럼 나왔던데 여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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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를 위한 중간 촬영. 스튜디오에 들어서자, 멘토 팀 [도화서]의 멘토인 ‘도연’이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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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렇다니까요. 특히 저! 완전 무슨 말 없이 베이스만 치는 그런 애로 나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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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스레를 떠는 이서의 모습에, 쿡쿡 웃는 도연. 옆의 기타리스트 ‘김진서’ 또한 가볍게 웃으며 말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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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오디션이라는 게 그렇고, 방송이라는 게 그래요. 나도 젊을때는 촬영 엄청 한게 잘리고, 싸가지없이 나오고 그럴때는 피디한테 가서 싸우고 막 그랬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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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신 적도 있어요? 어떻게 됐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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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어떻게 되긴. 그냥 헛소리 하지 말라고 까였지. 그 시절 방송이라는 건 그냥 피디가 갑이었어요, 갑. 지금도 마찬가지긴 하지만, 예전보다는 좀 낫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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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에 대한 이런저런 조언들이 조금 오가다, 촬영 감독이 “이제 시작하겠습니다~” 라며 신호를 준다. 그 말에 자세를 바로 하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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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그럼 이제 중간 점검을 해 볼 텐데요. 비비드 오렌지의 ‘JUMPING!’. 다른 밴드들이 마지막까지 남긴 곡인 만큼 분명 난이도가 있는 곡이라고 할 수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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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궁금해지는데, 이 곡이 나왔을 때 도연 씨는 몇살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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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곡이요? 제가 이제 막 대학 가면서 가수 준비할 때 같은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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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스물 후반이었던 것 같아요. 혹시 그룹 사운드 여러분들은 이 곡 나왔을 때… 초등학교는 들어갔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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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이서와, “저는 그때 1학년이었던 것 같아요.” 같은 대답을 하는 두 명. 명전은 양심상 그냥 가만히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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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세대차이 엄청나네. 초등학생? 이 곡 혹시 이전에 들어보긴 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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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서의 말에, 누구도 손을 들지 않았다. 충격에 빠진듯한 리액션을 하는 김진서. “내가 그렇게 늙었나?” 같은 중얼거림이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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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오래된 곡인 만큼, 트렌드도 많이 바뀌어서 어려웠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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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해버린 분위기를 되잡자는 듯 촬영을 진행해나가는 도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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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디스코풍이다보니까 밴드 풍으로 바꾸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혹시 컨셉이 정해졌을까요? 안 정해졌다면 오늘 저희랑 이야기하면서 정해보는 걸로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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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셉은 이미 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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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전은 그렇게 말을 하고는, 가져온 노트북을 열었다. 뮤비 하나가 띄워져 있는 화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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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저희와 거리가 좀 먼 분야다보니까, 직접적인 레퍼런스를 선정해서 좀 응용을 했는데요. 일단 이게 1차 레퍼런스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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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1차요? 2차가 있나요? 혹시 볼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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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에 노트북을 보여주는 명전. 유튜브 화면에는 곡명이 띄워져있음에도 불구하고, 도연과 진서는 해당 곡을 알아보지 못했다. 하지만 이서와 현아, 특히 서하는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서 웃음을 참지 못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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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비가 재생되자, 본격적인 무대가 보여진다. 그리고 청아한 여자아이의 음색과 함께… 흘러나오는 음악은 테크니컬하고 헤비한 사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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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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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에 등장한 것은, 3명의 일본 여자 아이돌이다. 프릴과 스커트로 장식된 의상. 그리고 귀엽고 깜찍한 외모와 율동, 목소리까지. 모두가 전형적인 ‘일본 아이돌스러운 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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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배경에 들려오는 음악이 헤비 메탈이라는 것만 제외한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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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가 1차 레퍼런스로 잡은 건, 일명 ‘카와이-메탈(Kawaii-Metal)’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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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제대로 보고 있는게 맞나 하는 표정으로 화면을 바라보고 있는 둘에게, 명전은 그렇게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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