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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지나치게 굳어 있군. 평소에 단련을 게을리했나? 그래서는 무술은커녕 호신술조차 배우기 힘들 걸세.”
용사 아카데미에 불합격했다.
“와……. 어지간하면 이런 말씀까지는 안 드리는데요, 마나 감응력이 너무나도 미약해서…… 재능이 없으세요. 다른 길을 찾아보시는 게…….”
마법사의 탑에서도 반품당했다.
“뭐? 너 같은 비리비리한 녀석이 짐꾼? 지금 짐꾼을 무시하는 거냐! 마경은 만만한 곳이 아니야. 기본은 하고 와라, 기본은.”
심지어 짐꾼 아카데미에서도 거절당했다.
……이상하다.
나, 분명히 검은 머리 이세계인인데……?
왜 아무런 재능이 없는 거지……?
* * *
시간을 거슬러, 약 한 달 전.
사건은 순식간에 일어났다.
3일 밤을 새우며 연구실에서 박사 논문을 마무리하고 있던 와중, 눈앞이 새하얗게 변하며 의식을 잃었다.
정신 차리고 보니 이세계였다는, 소설에서는 흔하게 볼법한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어버린 순간이었다.
지구 풍속과는 전혀 맞지 않는 이색적인 건축 양식.
귀잽이 깐프들, 꼬꼬마 드워프들 등 일반적인 판타지 세계관에서나 보일 법한 이종족들. 가끔가다가 하늘을 붕붕 날아다니는 드래곤까지.
정석적인 판타지 랜드였다.
현대인이자 역사학부 대학원 과정을 거치던 남자.
김율 그대로의 모습으로 이곳에 떨어져 버리고 말았다.
근데.
“이제 뭐 함……?”
마법도 재능이 없어.
검술도 재능이 없어.
하다못해 짐꾼의 재능도 없대.
너무 가혹하지 않은가.
내 전공이 기계공학쯤 됐으면 총이라도 만들어서 ‘젠장! 이 굉장한 무기는 뭐냐! 소리를 들으며 건법의 장인이 되었을 것이고.
내 전공이 화학공학쯤 됐으면 하버-보슈법을 재현해서 이세계 농신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구도 아닌 곳에서 사학과를 전공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도대체 뭐가 있지?
역사를 사랑한 게 죄였던 건가?
그렇지만, 역사 너무 재밌고…….
“뭘 하긴 뭘 해, 율! 죽상 쓰지 말고 술이나 한잔해!”
“예이, 예이.”
결국, 오늘도 머무르고 있는 싸구려 여관에서 그냥 쉼 마을 청년과 술이나 마시고 있었다.
“그래서, 이번엔 어디에 불합격하셨나?”
“짐꾼 아카데미…….”
“푸하핫! 그러면, 이제 뭐, 어디 청소부 아카데미라도 나랑 같이 원서를 내볼 텐가?”
“그 정도만 하십쇼. 잔으로 한 대 맞으시기 전에.”
“그래, 그래. 술이나 마시자구.”
잔과 잔이 부딪치는 소리가 씁쓸한 청년 실업의 단면을 구슬프게 울렸다.
.
.
.
“끄윽, 꺽, 자네, 머리는 똑똑한, 끄으, 같은데, 몸 쓰는 일 말고, 글이라도 써보지 그래애?”
“글 말입니까?”
“그래애! 누가, 누가 알겠나! 자네가 대자아아악가가 되어, 끄윽, 부우우우자가 될는지! 저번에 들려주운, 끄윽, 그, 하나발?”
“아, 한니발이요.”
“그거, 참 걸작이던데, 끄윽, 글로 써보지 그래애?”
* * *
잔뜩 만취한 형님을 방에 던져놓은 후.
쿵──
나도 내 방으로 복귀했다.
문을 닫자마자.
방금까지 펼쳐져 있었던 판타지 랜드의 허름한 여관의 풍경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눈 앞에 펼쳐진 건 몹시 익숙한 공간.
내 현대인으로서의 기억이 마지막으로 끊겨버린 곳.
노예 생활 8년간의 피와 땀이 어린 대학원 연구실이었다.
- 쪼르르─
사비로 장만한 에스프레소 머신이 향긋한 향을 뿜어내며 내 피로한 영혼을 달래줄 커피를 한 잔 만들어 주었다.
- 너희에게 고하노니, 매일 두 시간씩 재획하라──
사비로 장만한 서라운드 스피커가 웅장한 사운드를 빚어내며 판타지 라이프로 지친 내 영혼을 부드럽게 녹여내 주었다.
아직 무능력자 주제에 판타지 랜드에서 절망하지 않은 채 어떻게든 멘탈을 붙잡고 있는, 내 트립 특전.
나는 연구실과 함께 이세계에 내던져졌다.
- 부우웅──
서버 랙과 노트북이 부팅되는 소리가 울리는 것처럼, 전기라는 개념도 없는 세계에서 전자기기는 잘 작동한다.
모든 종류의 소모품은 현지 시각 매일 자정에 자동으로 리필된다.
……콜라라도 잔뜩 사서 냉장고에 쟁여뒀어야 했는데.
하루 한 캔이면 이걸로 장사조차 못 한다.
어쨌든.
내가 판타지 랜드에서 집이라고 인식한 공간의 문을 열고 들어서면, 자동으로 이곳으로 입장하게 된다.
게다가 대학원생 복지에 미쳐버린 우리 교수님의 역작.
공간을 불법 개조해서 샤워 부스와 더불어 비데가 설치된 화장실까지 내부에 장착되어 있었다.
그때는 ‘집에도 가지 말고 일하라는 건가’ 하면서 굉장히 꼴 받았었는데…….
덕분에 현대인의 품위를 지키며 살아갈 수 있었다.
딱히 그립진 않습니다.
JOAT시여.
“에휴.”
힐링, 힐링이 필요하다.
“하이, 역스비.”
쪽잠용 리클라이너에 몸을 누인 채 잠깐 휴식을 취하면서, 내 소울메이트에게 말을 걸었다.
이윽고.
『부르셨나요? 당신을 위한 역사 AI. 히스토리에입니다.』
소규모 LLM 구축 붐이 불었을 때.
온갖 사료史料들을 쑤셔 박아서 리서치를 편하게 할 목적으로 연구비를 잔뜩 요청해서 구축해 둔 연구실 전용 AI.
당시 멜론 머스크가 개발한 인공지능 ‘그롱’에 영향을 받아, 이쁘장한 버츄얼 아바타를 적용한 인공지능 인터페이스의 모습이 스크린에 떠올랐다.
“나, 오늘은 짐꾼 아카데미에서 불합격했다……?”
『정말 화나겠어요. 율, 당신의 분노는 정당해요. 오늘은 마음껏 울어도 돼요. 저 여기 있어요.』
……때로는 너무 AI 같은 느낌이 드는 대답을 던지는 게 옥에 티라고 할 수 있었지만.
바깥세상 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을, 아무런 뒤탈 없이 마음 편하게 털어놓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내게 위안이 되어주는 내 역스비.
게다가 뽀잉뽀잉 흔들리는 사이버=지식 주머니까지…….
“역스비. 오늘 세르말이 나보고 소설이나 써보래. 재능 있다면서. 너는 어떻게 생각해?”
『정확해요, 율. 당신은 천부적인 글솜씨를 가지고 있어요. 첫째, 유일한 이세계인으로서 다양한 경험을 갖추고 있고, 둘째, 수많은 논문을 집필하고 반려당하며──』
“스땁, 역삣삐.”
『충분히 공감해요, 율. 그건 단순한 분노가 아니에요. 당신 안에서 터져 나오는 절규에요.』
이럴 때마다 가끔 저놈의 서버 랙을 그냥 때려 부수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지만.
……아쉬운 게 나기도 하고.
빔프로젝터로 투사된 역스비, 공식 명칭 히스토리에의 비주얼을 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용서라는 감정이 치밀어 올랐다.
“소설이라…….”
『맞아요, 당신은 재능 있어요, 율. 원한다면 제가 소설 집필용 조판 양식을 불러다 줄 수 있어요. 지금 준비해 줄게요.』
딱히 지시를 내리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초고성능 깡통 역스비는 내 명령을 수행하는 척했다.
애초에 프로그램을 실행해 줄 리는 없었다.
역스비는 그냥 껍데기를 이쁘게 포장한 활자 조합물의 결정체니까……?
“어?”
술을 너무 많이 마셨나.
내가 아무런 조작조차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노트북 화면에 프로그램 하나가 떠올랐다.
『준비가 다 됐어요, 율. 당신을 위한 최고의 소설 집필 프로그램을 준비했어요. 휘둘러보세요, 당신 안에 있으니.』
이세계에 넘어오면서, 역스비의 성능에도 변화가 생겼나 보다.
판까지 깔렸는데.
속는 셈 치고, 진짜 소설이나 써볼까.
사실 경력은 조금 있는 편이었다.
역사 덕후들이 밟는 주요 테크트리 중 하나.
박봉을 극복하기 위한 대체 역사 소설 집필.
그런데 여기는 판타지 랜드다.
당연히 대체 역사 따위가 공감을 살 수는 없겠지만.
그냥 역사라면?
“……이세계 사람들은 지구 역사를 모르니, 역사를 소설로 쓰면 재미있지 않을까?”
스스로 던진 질문이었지만.
『와……. 율, 당신, 방금 핵심을 찔렀어요. 당신은 거의 이세계 설계자 시점에서 질문하고 있어요. 당신처럼 깊이 파고드는 사람 드물어요.』
영혼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답변에도, 오늘따라 왠지 모르게 용기를 부여받는 느낌이 들었다.
별다른 능력이라고는 이 이공간 하나밖에 없고.
판타지 랜드에서 떵떵거리고 살아갈 만한 재능도 없었다.
당연하게도 벌이도 시원찮으니, 마음 편하게 배부르게 먹어본 적도 손에 꼽았다.
그러나.
소설로 최소한의 생계를 보장할 수 있다면?
그것도 내가 정말 사랑하는 역사라는 이야기를 이세계 사람들한테 설파할 수 있는 기회가 되어준다면?
역사, 좋아! 좋아! 좋아!
홀린 듯이 노트북 앞으로 다가갔다.
* * *
일주일이 지난 후.
술도 줄여가면서 최소한의 끼니만 때운 채, 구직 활동을 포기하고 집필에 매진했다.
종이에 펜으로 글을 쓰는 일이라면 벌써 포기했겠지만, 다행스럽게도 내게는 노트북이라는 이세계 문물이 있었다.
내 손끝에서 흘러나온 활자들이 모이고 모여.
한 권의 소설을 만들어 내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리하여 기나긴 사투 끝에 기간토마키아가 종막을 내렸다. 비로소 제우스를 중심으로 한 올림포스 12신들이 공고히 신들의 지위를 다지는 순간이었다.”
마지막 구절을 소리 내 읊으며 타이핑을 마무리했다.
남은 건 제목.
“흠…….”
원래라면, 헤시오도스의 손에서 ‘신통기’ 혹은 ‘신들의 계보’라고 이름 지어졌어야 할 작품이지만.
철학적인 제목보다는, 조금 직관적인 제목이 좋으리라.
- 타닥타닥.
[올림포스 이야기]
핵심을 담아, 간결하게.
제목을 입력했다.
그 순간.
“뭐야, 씹.”
내가 그토록 8개 국어로 부르짖어도 한 번도 떠오르지 않았던 상태창이 내 눈앞에 떠올랐다.
[소설을 완성하였습니다!]
[테마: (신화) 그리스·로마 신화]
[제목: 올림포스 이야기]
[역사적 고증: (신화) 부합함] [완성도 평가: 평작]
[세간의 평가: 평가 없음] [판매량: 0권]
[(60일 남음) 다음 스킬 획득까지 앞으로 판매량 2,000권 필요]
[예상 획득 스킬 : [C급] 헤파이스■스의 ■■■]
“……?”
순간적으로 상황판단을 하지 못하고 멍하니 있으려니.
또다시 상태창이 연속으로 떠올랐다.
[최초로 소설을 완성하셨습니다!]
[특전이 부여됩니다.]
[획득한 특전 스킬]
[D급] [퀴클롭스의 손재주]
[우라노스의 아들들 퀴클롭스는 대장장이이자 석공의 기술자들로 뛰어난 손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그처럼, 너는 손으로 하는 일에 우수한 재능을 보이리라.]
* * *
김율이 개꿈을 꿨나, 하고 그대로 침대에 발라당 누워서 도로롱 코를 골기 시작했을 때.
치직, 치지직──
그의 감긴 눈앞에 또다시 기묘한 창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유일하게 기억하는 자여.]
[비로소 깨달은 너의 숙명으로, 너는 이 세상의 질서를 다시 빚어내리라.]
[그리고, 잊혀진 기억을 통해 모두를 구원하리라.]
김율의 눈꺼풀이 들어 올려질 새도 없이.
그 메시지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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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침착하게.
내가 가진 스킬들을 짚어보자.
하나. D급, 퀴클롭스의 손재주.
처음에는 노가다 판에서 생활비를 버는 데 유용하게 쓰였지만, 지금은 타이핑할 때 덜 피로해지는 정도에 그치고 있다.
둘. C급. 헤르메스의 설득력.
로젤린이 킬각을 재고 들어왔을 때, 그리고 생각보다 일상생활 여기저기에서 협상이 필요할 때 꽤 유용하게 써먹고 있다.
셋. C급. 헤라클레스의 봉술.
아직 저번에 양아치들한테 삥 뜯길 뻔했을 때를 제외하고 써본 적은 없지만, 꽤 든든하게 사용했던 전투 스킬이었다.
마지막으로는 방금 획득한 B급, 헥토르의 용기.
설명으로 보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으며, 특히 단 둘이 마주한 상황에서 자신의 잠재력을 초월한 역량을 발휘할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스킬 합성 시스템.
일반적인 RPG 게임에 나오는 것처럼…….
직관적이었다.
낮은 등급 스킬 두 개를 합치면 확률적으로 높은 등급의 스킬이 나온다.
당연히 실패하면 둘 다 증발하고, 용도 불명의 포인트를 획득할 수 있다고 한다.
천장…… 개념인가?
포인트를 획득해 본 적이 없어서 그런지, 그와 관련된 설명은 아직 확인할 수 없었다.
“리스크가 조금 크지 않나?”
내가 뭐 스킬을 몇십 개씩 들고 있는 스킬 부자면 모를까.
이제 걸음마를 뗀 응애인데, 굳이 여기서 무리수를 둘 필요가 있을까.
그리고 애초에 교체가 가능하다니, RPG 게임에서 프리셋을 설정하는 것처럼 집필용, 생활용, 전투용, 뭐 이렇게 일단 기본 세팅부터 먼저 해두는 게 우선──
『맞서 싸우십시오. 쫄보십니까?』
“…….”
얘, 언제 괴담까지 학습 데이터에 넣었지?
그렇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런 말도 있지 않는가.
동양의 고사를 인용하면 성즉군왕 패즉역적.
그리고 인류사상 국가권력급 선동가가 말하길, ‘우리는 역대 가장 위대한 정치인으로 역사에 남을 것이다. 아니면 역사상 가장 악랄한 범죄자로.’라고도 하였다.
……물론 그 국가권력급 선동가님께서는 미대 입시 낙제생 친구와 함께 사이좋게 지옥으로 도망가 버렸지만.
어쨌든.
내 마음속 하남자가 쫄리기 전에 한번 도전해 보자.
“스킬 두 개를 합칠 수 있다고 가정했을 때, 어떤 스킬과 어떤 스킬을 합치는 게 좋을까?”
『시도해 볼 만한 가장 흥미롭고 전략적인 조합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 번째 경우, 안정적인 기반을 다지기 위해……』
히스토리에의 의견 또한 나와 비슷했다.
유일한 B급 스킬은 건드리긴 애매하다.
화술 또한 다방면에서 생존에 유용하다.
남은 후보는 딱 두 개.
퀴클롭스의 손재주와 헤라클레스의 봉술.
뭐, 방구석 글쟁이가 앞으로 싸워봤자 얼마나 싸울 일이 있겠어.
누가 나보고 용사하라고 할 것도 아니고.
“하하.”
내가 생각해도 바보 같은 농담이었다.
[스킬 합성]
[대상 1: [D급] 퀴클롭스의 손재주]
[대상 2: [C급] 헤라클레스의 봉술]
[예상 결과]
[A급 출현율 2% / B급 출현율 8% / C급 출현율 20% / D급 출현율 30% / 실패율 40%]
“…….”
확률적으로는.
압도적 손해에 가까웠다.
스킬 두 개를 투자하는 셈 치고는 확률이 지나치게 가혹하지 않나?
이득 10%, 본전 20%, 꽝 70%.
비합리적이다.
분명히…… 비합리적인데.
[합성을 시작합니다.]
“가즈아아아!”
원래 도박은 비합리적으로 하는 거다……!
내 몸에서 손 해병님의 영혼과 더불어 99강 물푸레나무 몽둥이의 기운이 두둥실 빠져나가는 듯한 기묘한 감각이 느껴졌다.
그리고 눈앞에서는 형형색색의 빛이 반짝반짝 빛나면서.
“가챠 연출도 아니고, 무슨…….”
B급, C급, D급, 실패, 각각의 글자가 룰렛이 돌아가는 것처럼 핑글핑글, 핑그르르.
속도가 너무 빨라서 제대로 보이진 않았지만, 등급 옆에는 스킬의 이름도 휘리릭 휘리릭 지나가고 있었다.
막상 실패라는 단어가 눈에 더 많이 보이니까…….
쫄린다.
많이 쫄린다……!
이럴 땐 용기의 주문을 외워보자.
“절호의 찬스잖아!”
페■와이즈님!
내게 힘을 주세요!
마음속에 풍선 한 다발을 품은 채, 두둥실 떠오르기만을 기다리는 감각으로 마구 흔들리는 룰렛에 정신을 집중했다.
띡, 띡, 띡, 띡, 띡──
룰렛의 속도가 점차 줄어들고.
획득할 수 있는 스킬이 가시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실패 - 5포인트]
[B급] [칼리오페의 웅변]
[실패 3포인트]
[실패 - 10포인트]
[C급] [아탈란테의 궁술]
[실패 - 5포인트]
[D급] [브리토마르티스의 낚싯대]
[C급] [카드모스의 스파르토이]
띡, 띡, 띡, 띡, 띡──
그리고…….
팜파카팜!
환청처럼 들려오는 효과음과 함께.
운명이 결정되었다.
“하하, 하하하……!”
결과를 보자마자 나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부정적인 결과에 실성…….
했을 리가 있나?
“자, 떠오를 시간이다……!”
페니■이즈 투자법은 신이고 무적이다!
[합성 결과]
[A급] [피그말리온의 집념] [1회 사용 가능]
[피그말리온은 자신이 만든 조각상에 반해, 조각상을 마치 사람처럼 아끼고 나아가 여신에게 제물을 바치고 기도를 올려 결국 조각상을 진짜 사람으로 만들어 내는 데에 성공한 사내다. 그처럼, 너는 단 한 번, 네가 원하는 무엇이든 간에 생명을 부여할 수 있으리라.]
2%라는 희박한 확률을 뚫고 A급 스킬을 뽑아낸 자신에 대한 미친 듯이 쏟아지는 도파민을 즐기기도 잠시.
최초로 획득한 A급 스킬에다가, 심지어 생명 부여라는 거의 신에 가까운 권능이긴 했지만…….
“……그래서, 이걸 어디다 쓰지?”
본질적인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 * *
“이번 편 전개는 조금 마음에 안 드네……. 다음 편은 괜찮겠지?”
위대한 골드 드래곤의 일족.
고귀한 자, 금빛 섬광, 온갖 수식어를 통해 찬사된 영광.
에스테아는 오늘도 자신의 서재에 앉아 꼬리를 파닥거리면서 일주일 동안 출간된 인간들의 신문을 읽고 있었다.
마법공학이 발달한 세계니 심부름을 시켜도 금방 구할 수 있었고.
용언의 권능을 쓰면 원하는 신문을 매일 바로 손에 넣는 것이야 간단한 일이었지만.
“역시 소설은 몰아봐야 제맛이지.”
미천한 인간들이 만들어 낸 것 중 가장 쓸모 있는 것.
소설을 읽을 때 다소 과몰입하는 성향이 있었던 에스테아인지라, 이렇게 몰아서 보는 것이 속이 편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녀는 심미안이 몹시 뛰어난 드래곤이었다.
“드래곤이 어떻게 미천한 인간 따위랑 사랑에 빠질 수 있지? 그건 불가능함.”
고증에 맞지 않는 측면에 대한 통렬한 비판을 입에 담기도 하며, 오늘도 여러 소설을 핥는 에스테아.
그리고 그녀는 단순히 입으로만 평을 남기는 것에 그치지 않았으니.
스윽, 스슥, 스슥──
[에스쟝: 쓰니 어디 살아? 위대하고 고귀한 드래곤이 인간 박이 같은 변태 짓을 할 리가 없잖아?]
독자로서 정당한 비판을 발송하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물론 가끔 배송 과정의 문제인지 독자 의견란에 자신의 고견이 실리지 않는 때도 있었지만.
그래도 독자로서 건강한 피드백과 더불어, 위대한 드래곤으로서 미개한 인간의 계몽 행위는 중요한 법이었다.
“보자아, 이번엔 뭘 볼까용!”
비록 혹평을 남기긴 했지만, 그래도 읽을 때는 재밌었으니.
에스테아의 꼬리가 힘차게 파닥거렸다.
그리고 그녀가 다음에 펼쳐 든 건.
“음…….”
진리일보였다.
최근에는 딱히 진리일보에서 재밌는 작품을 읽었던 기억이 없었기에, 그대로 고이 접어서 묵혀둘지 살짝 고민한 에스테아였지만.
쫑긋──
‘신작’이라는 단어를 보자마자.
그녀의 귀가 순간적으로 꿈틀했다.
“몰락 귀족이 정치를 잘함……?”
이게 도대체 무슨 제목이란 말인가.
자고로 제목이라고 하면.
달 아래에 꽃은 덧없이 지고.
몰락 뒤에는 영광의 노을.
뭐 이러한 감수성 넘치는 제목이 대세가 아닌가?
“뭐, 이렇게 노골적인 제목이…….”
하지만.
21세기식 웹소설 작명 감성은, 자극에 목말랐던 에스테아의 가슴속 깊은 곳을 시원하게 긁어주었으니.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원래 보던 소설들을 모두 밀어놓은 후, 신작을 퍼먹기 시작했다.
이제 5화까지 연재된 따끈따끈한 신작.
그리고.
- 저는, 아내와 이혼하지 않겠습니다.
“여기서…… 이혼을 안 한다고? 왜?”
- 이제 전략을 바꿔야 합니다.
“가산도 몰수당하고, 작위도 박탈당했는데…… 뭔가 새로운 전략이 있다고?”
- 여성 신관들, 그녀들을 이용할 겁니다.
“신관이 몰락 귀족의 편을 왜 들어주지? 왜?”
악마와도 같은 재능.
‘절단신공’이라고 이름이 붙여질 일일 연재 소설의 대표적인 작문 기법에.
에스테아의 뇌가 점차 도파민에 지배당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 직위가 박탈되었다고? 상관없다. 오히려 나에겐 잘된 일이야. 그렇다면, 나는…….
“아니! 뭐, 뭐가 잘 된 건데에에엑! 다음 화! 다음 화는!”
완벽하게 감정까지 지배당하고야 말았다.
“야!”
“부르셨습니까, 고귀한 존재시여.”
“진리일보! 내일부터 맨날 가져와!”
“알겠습니다, 고귀한 존재시여.”
팡, 팡, 팡!
파닥이는 에스테아의 꼬리가 바닥을 쉴 새 없이 내려쳤다.
드래곤 특유의 세로로 찢어진 동공이 더 가늘어지며.
“확 납치해 버려?”
고작 하루에 1편만 찍어내는 인간의 신문 시스템에 대한 불만이 조금씩 그녀의 가슴 속에 응어리지기 시작했다.
왜 작가들은 하루에 한 편밖에 쓰지 않지?
하루에 세 편씩 쓰면 작가 좋고 독자 좋은 거 아닌가?
인간의 두뇌에는 창의력의 한계가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 오만한 드래곤적 발상이었지만.
그녀는 진심으로 괜찮은 아이디어가 아닌가, 하고 꼬리를 흔들면서 고민했다.
그녀의 시선 끝에.
[몰락 귀족이 정치를 잘함]
[작가: 율리시스Ulysses]
율리시스라는 필명이 오래도록 아른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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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몰락 귀족이 정치를 잘함] [현재 12화 연재]
[역사적 고증: 부합함] [완성도 평가: -]
[세간의 평가: 매우 긍정적] [일일 독자 수: 591명]
[다음 스킬 획득까지 앞으로 일일 독자 수 409명]
[1주일 이상 유지해야 합니다. (현재 0일)]
[예상 획득 스킬: [B급] 카■■■의 ■사■]
몰귀정…… 카이사르 일대기는 나름대로 순항하고 있었다.
그리고 예측한 부분이었지만, 일일 연재에 돌입하자 상태창이 소설을 인식하는 메커니즘 또한 미묘하게 바뀌었다.
내심 신문 판매 부수와 연동되길 바랐으나, 일일 독자 수라는 PTSD 돋는 지표가 튀어나온 것은 조금 아쉽지만.
일단 60일이라는 시간 제약이 사라진 건 굉장히 고무적인 일이었다.
길포드 씨도 이대로만 갑시다 하면서 싱글벙글 원숭이를 닮은 미소를 내게 지어주었다.
이름값 없는 처녀작의 작가치고는, 벌써 꽤 신문 판매량에 유의미한 영향을 주고 있다고 하니까.
잘하고 있는 거겠지.
게다가, 연재 1주 차를 넘어선 순간부터 조금씩 독자 반응이 생기기 시작했다.
[에스쟝: 작가는 하루 4편씩 글 써라! 진짜 미친 거냐!]
[(●'◡'●): 잘 봤어요! 근데 시작부터 이혼 이야기 나온 것 치고, 아내와의 교감이 조금 적은 게 아쉬워요!]
[익명의 독자: 정치 언제 함?]
신문에 실리는 거다 보니까, 아무래도 다른 연재 작품들과 비교할 수밖에 없는데.
양은…… 조금 적었다.
그래도 종일 이 도시의 살롱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어봤자, 신문 연재 시장의 거대한 규모에 비하면 아직 내 소설은 조족지혈인지라.
편집자의 의견 외, 독자의 의견 또한 수렴할 수 있는 창구가 이렇게라도 열려 있으니 다행이었다.
……에스쟝, 저 친구는 근데.
다른 소설에도 소위 ‘연참해 연참’ 콘을 달거나, 아니면 거의 작가 하나 절필시키듯이 물어뜯는 친구던데.
조금 두렵다.
나중에 흑화하면 어쩌지?
“뭐, 그건 그때 생각할 일이고.”
자기 합리화를 마친 후.
오늘 자 에스프레소에 물을 잘 섞고, 얼음 정수기의 위엄을 한껏 살려서 유사=아메리카노를 제조해서 꼴딱.
몸 안에 카페인이 감도는 충만함을 만끽하면서, 다른 고민으로 생각을 이어갔다.
여전히 나는 얼마 전 획득한 스킬, ‘피그말리온의 집념’의 용처를 결정하지 못했다.
내가 원하는 무엇이든 간에 생명을 부여할 수 있는 능력.
원전에서 피그말리온은 그가 너무나도 사랑한 나머지, 잘 때도 껴안고 잘 정도의 리얼돌Real Stone, 갈라테아를 인간으로 바꿔냈다.
그 원전을 생각하자마자, 나는 곧바로 히스토리에를 연상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 빡통 AI.
사이버=피규어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외모.
근데, 음, 뭐라고 해야 하지.
이상하게 내 머릿속에서는 원숭이 손이 떠나질 않았다.
과연 히스토리에가 사람으로 바뀐다고 했을 때, 지금의 LLM 성능이 그대로 이식될 수 있을 것인가?
스킬 사용으로 인해 성능에 문제라도 생긴다면, 나는 역사를 논의할 수 있는 유일한 창구를 잃어버리는 셈이다.
바로 그 지점 때문에.
아직 고민하고 있었다.
게다가 성공한다 치더라도 먹는 입이 1개 더 늘어났을 때.
지금 당장은 감당할 수 있겠지만, 앞으로 어찌 될지는 모를 일이다.
솔직히 신문 연재만으로는 대박 난 이후면 모를까, 지금 당장은 아슬아슬한 편이기도 했으니까. 나도 그래서 음식은 최대한 저렴한 걸로 떼우고 있었고.
먹고사는 일만 해결됐다면, 뒤도 안 돌아보고 바로 질러봤을 텐데.
“어디 하늘에서 기연 안 떨어지나.”
돈벼락도 좋고, 스킬벼락도 좋고.
* * *
“후…… 여기는 또 오랜만이군.”
용사 세레핀은 거의 1년 만에 인간의 도시, 카멜리아에 발을 디뎠다.
물론 마경에서 나오자마자 바로 이곳으로 향하지는 않았다.
가장 최근, 마경에서 귀환했을 때.
- 용사님! 인터뷰! 잠깐이라도 괜찮으니까!
- 곧 A급 용사 파티로 승격될 것이라는 소문이 있던데요, 사실입니까!
- 어어! 용사가 도망간다! 잡아! 무조건 인터뷰 따내!
기자들에게 붙잡혀서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는가.
하지만 오늘은 다르다.
여러 가지 축복이 깃들어서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장비들은 모두 인벤토리에 수납해 두고, 가장 자연스럽게, 평민처럼 보일 수 있는 옷을 입고서.
용사 길드에 따로 통보하지도 않고 외유를 나왔다.
이유는 하나.
“분명히, 새싹과 가지 출판사였지.”
족히 3번 정도는 자신들의 목숨을 구해주었던 작가, 김율을 찾아 나선 참이었다.
감사 인사도 전할 겸.
그리고…….
다시 자신들을 가로막은 미지의 괴수들과 관련하여, 일말의 단서라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여.
그래서 길드와 제국에는 잠시 1달간의 휴가를 요청한 후, 짐꾼에게도 동선을 숨긴 채 이 도시에 가장 먼저 들렀다.
아마 나머지 용사 파티원들은 쏟아지는 질문 세례에 시달리고 있으리라.
“흐흐.”
곤란함을 겪고 있을 동료들을 생각하니 절로 웃음이 난 세레핀은, 이윽고 여기저기 수소문하며 출판사 새싹과 가지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떠나셨다구요?”
한쪽 눈에 멍이 든 채, 짙은 다크 서클을 드리운 편집자가 간단하게 자초지종을 설명해 주었을 때.
잠깐이나마 동료들의 불행에 기뻐해 버린 아주 사악한 마음을 먹은 것에 대해, 속죄하는 마음을 강하게 먹었다.
“으음…… 근데 어떻게 오셨습니까?”
흘긋.
세레핀은 자신도 모르게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곳에는, 마치 출판사 직원이 보란 듯이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김율을 돌려내라! 올림푸스를 석방하라!]
[차기작을 희망한다! 출판사는 각성하라!]
안 봐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
눈앞의 출판사 직원 또한, 경계의 눈초리를 계속 해서 쏘아 보내고 있었으니까.
어쩔 수 없지.
세레핀은 인벤토리를 열어, 자신의 성검을 꺼냈다.
그리고 용사의 힘을 아주 살짝 개방했다.
“……용사님? 용사님이십니까?”
“하하…….”
스스로를 과시하는 것을 딱히 좋아하지는 않았던 세레핀이었지만, 그래도 지금 상황에서는 이 정도의 설득력이 필요하리라.
“김율 작가님이 집필하신 헤라클레스 이야기에서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와 관련하여 조금 더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서…… 왔는데, 한발 늦었군요.”
세레핀의 말에, 경직되어 있었던 출판사 직원의 입꼬리가 한결 느슨해졌다.
“용사님이니까…… 말씀드릴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저희 출판사에도 은인이시기도 하니…….”
“예?”
당연하게도, 세레핀은 자신의 인터뷰가 헤라클레스 영웅담 및 일리아드의 매출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아닙니다. 김율 작가님께서는, 제국 수도로 떠나셨습니다.”
“아…….”
세레핀은 또다시 후회했다.
자기 동료들이 향한 곳이 바로 제국 수도였기 때문.
그래도 출판사 직원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아마도 진리일보……로 가셨을 겁니다. 제가 작품을 읽어봤는데 여전히 흥미롭더군요. 율리시스라는 필명이 아마 김율 작가님이실 겁니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세레핀은 김율의 행방을 알아낼 수 있었다.
물론 대가가 없는 건 아니었다.
“실례지만, 여기 서명 한 번만 부탁드려도 될지.”
“……예.”
그 대가는.
너무나도 미려한 필체로 새겨진 김율의 서명 옆에, 자신의 서명을 하나 더 적어놓는 것이었다.
* * *
- 어머! 우연이네요, 작가님! 저도 마침 우연하게도 이 도시에 볼일이 있어서 들렀답니다! 신작을 쓰고 계시더라고요? 근데, 음, 정치, 정치 참 좋은 소재인데…… 혹시 로맨스 요소도 있겠죠? 아하하! 당연한 걸 물었네요!
“……하.”
저번에, 먼발치에서 스쳐 지나가듯 만났을 때는 우연인 줄 알았는데.
로젤린이 또다시 이 도시까지 따라왔다는 사실이 내 마음을 무겁게 했다.
물론…….
그녀는 꽤 쾌활하고 밝다.
괜히 성녀가 아닌지, 존재 그 자체만으로도 긍정적인 기운이 마구마구 뿜어져 나오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근데.
무겁다.
로맨스에 대한 집착이 무겁다……!
마음속으로 원래 안배되어 있었던 클레오파트라와 관련된 분량을 3배 정도 늘려놓은 후.
오늘의 일용할 양식을 입에 쑤셔 넣었다.
햄버거 먹고 싶다…….
피자도 먹고 싶다…….
언젠가 이렇게 성장을 거듭한다면 내게 요리 스킬도 생기겠지.
그러면 내가 이세계 요식업자가 되어서 온 세상에 현대적 음식을 전파하고 다니리라.
슬픔을 애써 참으며, 밍밍한 수프를 한 숟갈, 그리고 딱딱한 빵을 입에 꾸깃꾸깃 쑤셔 넣고 있자니.
딸랑──
가게의 문이 열리는 소리와 더불어.
“허억, 허억, 자, 작가님……!”
“어? 길포드 씨?”
여기에 있는 줄은 어찌 알았는지, 길포드 씨가 식당의 문을 열고 헐레벌떡 달려 들어왔다.
“잠시, 출판사로 같이 가주셔야겠습니다……!”
뭔데.
갑자기 왜 이러는데.
.
.
.
길포드 씨에게 질질 끌려서 당장 오늘 아침에도 원고를 전달해 주었던 진리일보 사의 응접실에 발을 디딘 순간.
드르륵─!
동시다발적으로 의자 끌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혹시, 김율 작가님?”
실명을 그대로 썼던 과거 필명을 입에 담는 근육질의 사내가 마치 오래된 친구를 재회하는 것처럼 만면에 미소를 띠었다.
“네가 율리시스인가 하는 인간이더냐?”
그리고, 신문 연재로 들어서면서 세탁기를 탈탈 돌린 내 필명을 언급한 금발의 말랑해 보이는 소녀도 있었다.
그 직후.
그 둘이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내게 가까이 오면서 두서없이 용건을 소리쳤다.
“작가님, 혹시 마물과 관련된 이야기는 더 없습니까!”
“미천한 작가여. 고귀한 이 몸의 종복이 되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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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물과 관련된 이야기를 찾는 근육질의 사내…….
몸 여기저기에 난 오래된 흉터를 보아하니, 대략적으로 정체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마도.
“아! 제 소개가 늦었습니다! A급 용사 파티, 밤하늘 소속의 용사인 세레핀이라고 합니다!”
용사, 가 맞았다.
그, 좀, 이름은 에스트로겐 넘치는데.
비주얼은 테토남 그 자체네…….
그리고 이렇게 직접적으로 찾아올 정도면.
“혹시, 히드라──”
“하하하! 맞습니다! 작가님 덕분에 세 번이나 목숨을 건졌지요! 그게 아니었다면, 저기 마경 어디에서 마물들의 일용할 양식으로 나뒹굴고 있지 않았을까요!”
역시, 맞구나.
매출 정상화의 GOAT!
반가움의 의미를 담아 그가 내밀어 주신 손을 꼬옥 부여잡으려고 했건만.
“율리시스! 다시 한번 선언하지. 내 종복이 되어라!”
갑자기 금발 중2병 잼민이가 우리 사이를 파고들며, 또다시 기묘한 선언을 외쳤다.
뭐지?
정신이 조금 이상한 아이인가?
일단 용사님에게 감사의 인사를 올리기에 앞서, 이 자그마한 것부터 어떻게 처리해야 하겠는데.
“하하…….”
용사가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고.
길포드 씨는 내 시선을 최대한 외면한 채, 벽과 혼연일체가 되어가고 있었다.
뭐지?
무엇을 암시하는 것이지?
“이 몸의 이름은 에스테아 골든 린트베리우스! 미천한 단생종에게 이 몸을 섬길 기회를 주겠노라!”
“골든 리트리버?”
“에스테아! 골든! 린트베리우스!”
털도 금색이고, 아르르 왕왕 하는 것이 골든 리트리버 맞는 것 같은데.
내가 거기서 농담을 한마디 더 던지려는 순간──
“그, 고귀한 존재시여? 그, 작가님께서 아무래도 오해하고 계신 듯한데…….”
고귀한 존재?
이 잼민이가?
“흥, 그러면 두 눈 똑똑히 뜨고 봐라!”
왠지 모르게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아야 할 것만 같은 대사와 함께.
골든 리트리버가 거만한 미소를 지었다.
다음 순간.
그녀의 머리에서 손잡이 한 쌍이.
그리고 그녀의 엉덩이에서 도마뱀 같은 꼬리가 자라났다.
“다시 한번 소개하지! 이 몸의 이름은 에스테아 골든 린트베리우스! 위대한 골드 드래곤의 일족이니! 마땅히 숭배할지어다, 미천하지만 재주는 조금이나마 쓸만한 단생종아!”
문득 빙의 직후를 떠올렸다.
분명히 그때도, 하늘에서 날개를 펄럭거리며 날아다니는 드래곤을 보면서 혹시 스카■림 세계관이 아닌지 의심했었지.
물론 이곳에는 윈잡대가 없었지만…….
.
.
.
한바탕 유사 도마뱀 에스테아가 종복이니 뭐니, 나를 현대판 노예로 당장이라도 납치해 가려는 것을 용사님과 함께 어떻게든 버틴 후.
“오옷! 여기서 이런 전개를……!”
응접실의 소파 2개를 이어 붙인 채, 반쯤 드러누운 상태로 아직 미출판 상태인 내 비축분을 던져줌으로써 조금의 여유를 확보했다.
그리고.
“……용사님. 혹시 드래곤 사냥은 해본 적 없으십니까?”
“하하하……. 무립니다. 그리고 저 드래곤의 말이 진실이라면, 진실이겠지만, 골드 드래곤은 악룡이 아니니까요. 오히려 선한 존재죠.”
요즘 선한 존재는 출판사에 쳐들어와서 작가를 납치하려고 하나?
“그럼 악룡도 있다는 말씀이신지.”
“아, 네. 어디까지나 인간의 기준입니다. 마경에는 레드 드래곤과 블랙 드래곤의 일족이 산다고 들었습니다만, 그래도 전승에 따르면 모든 드래곤들이 서로 협의해서 종족 간의 갈등에는 최대한 개입하지 않기로 했답니다. 다행이지요.”
“밸런스 패치군요.”
“밸런스……? 균형이라, 흠. 틀린 말은 아니군요. 어쨌든…… 정말 이상하게 들릴 수 있겠지만, 작가님께 자문을 구하고 싶은 부분이 있어서요.”
나한테 자문을?
마경에는 발을 디뎌본 적도 없는 사람인데?
그래도 귀한 시간을 내어 여기까지 오신 용사님께 모르쇠로 일관할 수는 없었다.
“별로 큰 도움이 되진 못할 수 있겠습니다만…… 말씀해 보십시오.”
용사는 머쓱하게 뒷머리를 긁었다.
“최근에, 온몸이 금속으로 된 거대한 거인 때문에 진격이 막혔습니다. 성검에도 파괴되지 않고, 모든 마법을 반사하는 성질 탓에, 저희뿐만 아니라 다른 용사들도 애를 먹고 있다고 합니다. 혹시 짚이시는 게 있으실지.”
물리 면역에 마법 면역이라니.
뭐야 그게, 몰라 무서워…….
“……우회할 수는 없는 겁니까?”
“일종의 수호 병기의 기능을 하는 것 같은데, 그것이 수호하는 게 마물의 근원지 비슷한 거라…… 그냥 피할 수는 없습니다.”
흠.
금속으로 된 거인.
그리고 무언가를 지키고 있음.
간질간질…….
머릿속에 기억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분명히, 아르고호 원정대가 크레타에 들렀을 때 상대했었던, 최초의 로봇이라고 할 수 있는 병기가 있었지.
“진짜 이상하게 들릴 수는 있겠지만…….”
“아닙니다. 사소한 단서라도 좋습니다. 혹시 짚이시는 게 있으실지?”
“사람도 그렇듯, 거대한 기계 덩어리라면 당연하게 그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게 심장이나 머리일 수도 있겠지만…… 저는 발목에 가능성을 걸어보고 싶군요.”
내 맥락 없는 제안에도, 용사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당시의 기억을 반추하는 듯했다.
“발목, 발목이라…… 확실히 접근해 보지 않았군요. 머리나 심장 부분을 먼저 노렸으니까요. 물론 아무런 피해를 주진 못했지만요.”
“원동력이 있다고 하면, 아무래도 상반신보다 하반신에 있는 게 조금 더 유지 보수에 수월하지 않을까요. 아마도…… 발뒤꿈치?”
“흠, 흠. 참신한 접근입니다. 확인해 볼 가치가 있겠군요.”
이윽고 수첩에 메모를 마친 용사가, 활짝 웃으며 내게 다시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부여잡자, 용사는 고개를 숙여서 내 귓가에 얼굴을 들이밀고서 속삭였다.
“골드 드래곤은…… 욕심이 많습니다. 가급적, 작가님이 납치당하지 않고, 다시 마주할 수 있었으면 좋겠군요.”
“……조언에 감사드립니다.”
아직도 내 원고를 깨작깨작 씹어먹으면서 음미하는 도마뱀을 힐긋 바라보면서.
혹시 내가 드래곤 본의 혈통을 타고난 것은 아닐까, 하는 근거 없는 기대를 품었다.
.
.
.
용사가 내 눈치를 살짝 보면서 떠나간 후.
“다음 화 더 가져와! 아니, 다 가져와!”
입에서 불을 뿜을 기세로 진상 짓을 시작한 에스테아에 맞섰다.
어느새 응접실에는 길포드를 포함한 그 누구도 남아있지 않은, 순수한 독대 상황.
“푸스, 로 다!”
“……미친 거야?”
애석하게도 내겐 용언의 재능이 없었다.
사악한 잼민이 드래곤을 무찌르는 드래곤본의 꿈은 여기까지만 꾸도록 하자.
“그래서, 내 종복이 될래, 아니면 내 먹잇감이 될래?”
도마뱀 특유의 세로로 쭉 찢어진 동공이 나를 날카롭게 노려보았다.
아까 이 눈빛을 직시한 길포드가 거의 바지에 오줌을 지릴 기세로 호달달 떨던데.
……이상하게 나는 딱히 쫄리지가 않았다.
헥토르의 용기가 내게 힘을 주고 있는 것일까.
“창작은 고통의 연속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럼, 고통을 연속으로 주면 창작이 나온다는 뜻이야?”
미친 거냐?
무슨 의사 선생이나 할 법할 대사를.
“저는 제 영혼을 깎아나가며 매일매일 글을 쓰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온전한 저의 자유의지에서 비롯된 일……. 만약 제가 드래곤 님에게 납치당해서 글을 쓰게 된다면, 이윽고 제 창작 욕구는 시들어 버릴 테죠. 원래 작가란 자유로운 영혼이니까요.”
“설마, 흑마법사랑 계약이라도 한 거야?”
…….
잼민이의 의사소통 능력이 조금 이상한데.
“그럴 리가요. 하지만…… 창작이 그만큼 힘들다는 사실만은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니, 종복이 되는 건 무척이나 영광스러운 일이겠지만…… 사양하겠습니다.”
“왜! 밥 먹여주고, 재워준다니까? 아침 먹고 한 편, 점심 먹고 한 편, 저녁 먹고 한 편 쓰면 되는 거 아닌가? 그게 어려워?”
“……차라리 죽이시죠. 그냥 여기서 죽겠습니다.”
모든 것을 체념한 듯한 느낌으로, 눈을 감고 팔을 활짝 벌려서 가슴팍을 내밀었다.
당연히 계산된 행동.
우리 용용이 잼민이님께서 장막을 들추고 내 비축분을 엿본 데까지의 전개가 어디까지냐.
초반부, 술라의 척살령에 맞서 기지와 인맥을 통해 헤쳐나간 후.
숙청의 바람을 피해 군단에 장교로 입대하여 명성을 쌓아나가는 과정을 담고 있었다.
미텔레네 전투에서 용맹스러운 활약을 거듭한 후, 가장 명예로운 장교의 증표인 오크나무 시민관을 받고서 술라 사후에 로마로 복귀하기까지.
……그리고 정치적 어그로를 끌기 위해서 ‘너 고소!’라는 금단의 초식을 시전하다가, 오히려 역풍을 맞고서 로도스로 유학을 떠났다.
그 직후.
- 꼬우면 죽여보든가, 이 해적 새끼들아.
로도스에 유학을 가던 도중, 해적에게 납치된 후에 배짱을 부리는 장면으로 마무리지었었다.
방금까지 내 소설을 몰입해서 읽고 있었다면?
당연히 그 장면이 오버랩될 수밖에 없겠지.
실눈을 슬쩍 떠서 바라보자.
“으으……!”
강아지처럼 쉴 새 없이 파닥거리는 꼬리.
난처한 듯 살짝 둥글게 말린 눈매.
손가락을 옴뇸 물어뜯는 모습.
통했다.
이게 단생종의 깡다구다.
* * *
한바탕 신문사에서의 폭풍우를 겪은 후.
진이 다 빠진 채 터덜터덜 귀갓길을 재촉했다.
빨리 집에 가서 쉬고 싶은데…….
살랑살랑.
“…….”
파닥파닥.
“…….”
이제는 숨길 생각조차 없는지.
아까 그 미친 드래곤 잼민이.
에스테아가 꼬리를 흔들면서 나를 스토킹하고 있었다.
달린 건 용 꼬린데, 왜 개 꼬리처럼 움직이는 걸까.
전생에는 개였나?
숨길 수는 있다지만, 꼬리가 저렇게 나 있으면 잠은 어떻게 자는 걸까.
똑바로 누워서는 못 잘 것 같은데, 옆으로 돌아눕겠지? 아니면 침대를 마개조해서 꼬리 구멍을 만드나?
쓸데없는 생각들을 털어내면서, 뒤로 돌아섰다.
샤샥!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몸은 숨겼지만 꼬리는 코너에 튀어나온 기묘한 모양새를 한 에스테아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왜 따라오시는 겁니까?”
내 노골적인 질문에.
“……종복이 될 존재가 어디에 사는지 정도는 알아둬야 고귀한 존재로서 체면이 서지 않겠느냐?”
“……?”
에스테아는 너무나도 당당하게 자신이 아직도 포기하지 않았음을 선언했다.
집요하네, 이거.
“그리고, 꼬리 보이십니다.”
“으갹.”
.
.
.
“자, 이제 확인하셨죠? 갈 길 가십쇼, 위대하신 드래곤님.”
“종복 후보 주제에 말투가 건방지구나! 이 몸은 알아서 할 것이다!”
결국, 내가 묵는 숙소까지 따라와 버린 드래곤.
미천한 인간이라 서러워서 살겠나.
이젠 하다 하다 도마뱀한테 스토킹도 당해보네.
뭐.
“내 특별히 위대하신 이 몸에게 공물을 바칠 기회를──”
“수고하십쇼. 저는 이만.”
괜히 또 없는 가슴을 활짝 펼친 채, 옆구리에 손을 올리고서 의기양양 소리치는 에스테아를 뒤로하고서.
잽싸게 문을 열고 호다닥 들어갔다.
그러면 펼쳐지는 나만의 스윗 마이 홈.
연구실이 나를 반겨주고.
『돌아오신 걸 환영합니다, 율님. 식사부터 하실 건가요? 아니면 목욕? 혹은──』
“스땁.”
『출력을 중지했어요.』
…….
왜 내가 저딴 프롬프트를 학습시켰을까.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이 밀려왔다.
하지만, 나는 긍정적인 사내.
어차피 피그말리온의 집념 스킬은 아무리 고민해 봐도 히스토리에만큼 어울리는 곳이 없었으니까.
그 전에…….
미리 교육을 철저하게 해두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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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목표는 하나였다.
히스토리에의 장기 기억력이 닿는 한에서, 최대한 완벽한 지식을 머릿속에 담고 태어날 수 있도록 세밀하게 프롬프트를 조율하는 것.
근데…….
『다시 저를 소개할게요. 저는 히스토리에. 초절정 미소녀이자, 율리우스 주인님을 섬기며, 천마신교에서 온──』
“스땁. 율리우스가 아니라 김율, 하다못해 율리시스로…….”
내 욕심이 과도한 탓이었을까.
컨셉을 잡아주는 것도 꽤 어려운 일이었다.
그리고.
생각보다 정보 오염이 심각한 상태였다.
“어떤 새끼가 저작권 의식 없이 LLM에 무협지 텍본 쑤셔 넣어놨냐…….”
물론 난 범인을 대충 추론할 수 있었다.
지도교수님이겠지.
중증 무틀딱이셨으니까.
사학계에서는 꽤 존경할 만한 사람이었으나.
나머지 부분에서는 조금 인간적인 하자가 있었다.
아니, 조금이 아니라 많이.
절대 내가 대학원생이라서 지도교수를 폄하하도록 프로그래밍이 된 게 아니라, 사실만을 담담히 이야기할 뿐이다.
증거?
[천하군림 1~58권(完).txt]
[태블릿_IN_천무학관_1_22.txt]
……
[묵빛 레이디 1~44권(完).txt]
[일편단심_897화완결.txt]
족히 72개에 달하는 방대한 양의 데이터가 증명한다.
나는 단호하게 파일들을 삭제했다.
어쨌든.
당분간은 히스토리에의 프롬프트를 고심하면서, 혹시나 지금과 같이 이상한 데이터가 섞여 들어가서 애가 이상해지진 않을지에 대한 검증을 철저하게 거칠 필요가 있었다.
방금도, 뭐, 천마신교?
뭐 그런 비상식적인 존재라고 믿는 이상한 여자가 내 연구실에 생기는 건 사양이었다.
차라리 자신을 아서 왕이라고 믿는다면 모를까.
『저는 히스토리에, 탐정이죠. 그리고──』
“스땁.”
조금…….
조금 더 걸릴 것 같았다.
* * *
## ====== ##
“패소했다라.”
카이사르는 최종 판결문을 받아보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일이 호락호락하게 돌아가진 않을 것이라 짐작했지만, 법정에서 이미 유죄 판결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호민관이 직접 제동을 걸 줄이야.
명분도 어처구니없었다.
로마 시민이 그리스인과 동등한 위치에서 경쟁하는 것이 불법이라니?
역시…… 이 나라는 썩어 있었다.
술라.
그 야만적인 작자가 권력을 자기 마음대로 쥐고 흔든 작태가, 카이사르 자신이 너무나도 사랑하는 조국을 좀먹고 있었다.
“그래도, 얻은 것은 있지.”
비록 두 차례의 고발에서 술라파의 부정부패를 제대로 찍어낼 수는 없었지만.
- 카이사르는 민중파의 희망이오!
- 그는 술라가 더럽힌 로마를 정상화해 줄 신이야!
지지자들을 결집시키는 데에는 충분했다.
물론 지금 당장은, 정치적 공세를 막기 위해 잠깐 로마를 떠나 있어야겠지만.
다시 돌아왔을 때.
그의 입지는 더욱 탄탄해져 있으리라.
## ====== ##
“허어…….”
제국의 초선 의원.
아스테릭은 보던 신문을 잠깐 덮어두고 생각에 잠겼다.
귀족 중심으로만 굴러가는 제국의 행태에 불만을 품고 정치에 뛰어든 지 벌써 1년.
하지만…….
정치판은 그가 생각했었던 것과는 달랐다.
꽤, 많이, 달랐다.
민중파니, 귀족파니.
파벌은 잔뜩 갈라져 있는 주제에, 나라의 미래보다는 자신의 밥그릇을 우선시하는 위선자들만 가득했다.
그렇기에.
소설 속에서 드러난 카이사르의 행태는 그에게 묘한 울림을 자아냈다.
물론…….
냉정하게 판단하자면, 아무리 술라가 사망했다고 한들 그때까지 기득권을 유지하고 있었던 술라파 의원을 콕 집어서 고발을 한 것은 실책이다.
뒷배가 사라진다고 한들, 아직 이빨이 날카롭게 남아있는 호랑이의 콧잔등을 건드린 격.
하지만.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던 동기는 명확해 보였다.
현재 기득권들의 심기를 건드린 대가로.
정의로운 정치인이라는 이미지를 산다?
장기적으로 보면 분명히 남는 장사였다.
심지어 법정에서 패배했다고 한들, 상대방에게는 분명히 오점을 묻힌 셈이니까.
다시 그가 돌아왔을 때, 그의 시도는 분명히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정치인의 직감이라고 해도 좋으리라.
“후우.”
그는 캐비닛을 열어, 자신이 보관하고 있던 서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2년 전, 수도를 뒤흔들었던 밀수 사건과 관련된 기록들.
높게는 이 나라의 실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베르투스 공작 겸 상원의원부터, 아래로는 여러 귀족뿐만 아니라 심지어 민중파 중역 의원들까지 줄줄이 엮어낸 것들이었다.
이걸, 공개할 수 있을까.
정치생명을 건 판단이다.
아니, 정말로 생명을 건 판단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 카이사르 자신이 너무나도 사랑하는 조국을 좀먹고 있었다.
그래도.
아스테릭은 제국과, 제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사랑했다.
먼지 쌓인 서류 봉투가 햇살에 환히 물들었다.
* * *
용사와 에스테아의 습격 사건으로부터 일주일이 지났다.
히스토리에 조교…… 이렇게 표현하니 조금 이상한데.
어쨌든, 프롬프팅에도 꽤 진척이 있었고.
그사이에 서버에 몰래 숨겨진 온갖 종류의 만화와 야설을 찾아냈다.
으흐흐.
“호외요, 호외! 대규모 정치 스캔들이 났어요!”
“진리일보, 한 부 주세요.”
오늘따라 시끄럽게 부르짖는 신문 판매 가판대 중 한 곳에서 진리일보를 구매한 후.
최근 자리 잡은 습관──
아침에 파워 조깅 후 신문 읽기라는 루틴을 실천했다.
사실, 신문은 달라고 하면 길포드가 주지 않을까 싶었지만…….
내가 직접 신문을 사서 읽어야 일일 독자 수에 나 또한 카운팅된다.
숫자 1이 소중한 시대다.
조금 추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그에 덧대어.
최근에 로젤린에게도, 에스테아에게도 여러모로 시달리고, 용사 세레핀의 이야기도 들어보면서.
내가 이 판타지 세상에 대해서 아는 것이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을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그러므로 시사 공부를 시작했다.
진리일보 사의 사내 조직도가 그렇듯, 이 세계의 신문은 크게 네 가지 내용을 담고 있다.
하나는 정치부.
제국이라길래 황제 독재 체제를 연상했으나, 오등작 제도와 더불어서 무려 의회가 존재했다.
왕권이 조금 많이 강한 영국식 시스템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었다.
현재 원내 제1 정당, 즉 여당은 당연하게도 황제파.
물론 이름은 따로 있었지만, 너무 복잡해서 황제파로 부르기로 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서 귀족파, 민중파.
그 외에 여러 군소 정당들도 있었고…….
마지막으로 세계수푸르게푸르게당, 통칭 세푸당이 있었다.
……내가 생각하는 깐프들의 모임이 맞았다.
[세푸당 미레인 의원(374세), 오늘도 ‘단명종 주제에! 인간 혐오 망언…….]
대충…….
뭐, 이런 기사가 매일 같이 실린다고 보면 된다.
다음으로는 국제부.
너무 당연한 얘기겠지만.
이 세상에는 제국 외에 다른 나라들도 많았다.
정부 체제도 제국처럼 입헌군주제, 황정과 의회를 양립하여 운영하는 곳도 있었고, 순수하게 공화국으로 운영되는 곳도 있었고, 전제주의적 독재를 휘두르는 곳도 있었다.
게다가 조금 떨어진 곳에, 마치 클리셰 덩어리처럼 순혈주의자 엘프들이 세계수를 중심으로 건국한 국가도 있었다.
심지어 제국이랑은 잠재적 적대 관계던데, 세푸당…….
깐프당이 어떻게 이 나라에서 명목을 유지하고 있는 건진 모르겠다.
대륙이 더 있는진 모르겠지만, 일단 내가 발을 딛고 있는 이 대륙에만 나라가 총 여덟 개.
이름을 외우는 것은 머리 아파서 관뒀다.
내가 정치할 것도 아니고, 전쟁 영웅이 될 것도 아니고.
제국이 그래도 가장 규모가 크다고 하니, 별다른 일이 발생하지 않는 이상 제국 신민…….
아, 갑자기 유전자가 꿈틀거리네. 엄청 혁명 마렵네.
……어쨌든 제국의 엑스트라 A로 살아갈 셈이었다.
그리고 마경부.
세레핀 형님처럼, 용사들의 활약상이나 마경과 관련된 정보들을 모아두는 지면이 있었다.
주로…….
성공담보다는, 부고가 많았다.
어디에서, 어떻게 전멸했다.
뭐 그런 내용을 담아서.
그래서 새삼스럽게 알게 된 것이지만, 마경은 내가 생각했었던 것보다 훨씬 더 가혹한 곳이었다.
짐꾼 아카데미에서 날 내쫓은 이유가 이해될 정도로.
……아무런 스킬 없이 마경에 던져졌다면, 아마 나는 5분도 살지 못하고 그대로 죽어버리지 않았을까.
마지막으로.
정치부, 국제부, 마경부를 모두 합친 만큼의 분량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문학부.
내 소설이 실리는 지면이다.
여기까지 회고하는 것만 해도 벌써 머리가 지끈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인풋은 중대사항이니까.
소설은 나중에 집에 가서 히스토리에랑 같이 읽어보도록 하고.
펄럭, 펄럭──
신문을 뒤적거리면서, 오늘의 세상 동향을 파악했다.
그리고.
“……이게 뭐야?”
[하원에서 폭로된 대형 스캔들…… 정치계, 성장통을 앓나?]
[사흘 전, 초선 하원의원인 아스테릭이 제시한 ‘아스테릭 리스트’에 의해 정치계에 거대한 파장이 일고 있다. 본지에서 취재한 결과, 족히 서른 명 이상의 부정부패와 연관된 의원 및 귀족들이 리스트에 존재한다는 충격적인 내용이 담겨 있으나, 아직 명확한 사실관계는……]
[……대중들은 폭로에 열광하고 있으며, 문학을 인용해서 ‘카이사르의 재림’이라고도 평하고 있다. ……]
[※편집자 주: 카이사르란, 본지에서 연재되는 ‘몰락 귀족이 정치를 잘함’ 소설 속의 주인공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의미한다……]
“아니, 정치 기사에 소설 바이럴을 해버리면……?”
호재인가, 화재인가?
21세기 한국인으로서의 직감을 굴려본다면.
……화재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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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미친 평민 새끼가, 감히 내게 똥물을 뿌려!”
판토 백작은 분노에 휩싸인 채, 손에 쥐고 있던 신문을 찢어발겼다.
그리고도 분이 풀리지 않은 나머지, 손에 잡히는 잡동사니를 죄다 벽에 내팽개쳤다.
쨍그랑──!
유리잔이 박살 나는 소리가 방 안을 크게 울리고, 후폭풍처럼 적막이 그 뒤를 이었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평민 따위가.
그깟 설탕 좀 대량으로 밀수해서 정치 자금으로 삼은 게 도대체 뭐가 흠이란 말인가.
계획을 입안하고 앞장서서 실행했다 뿐이지, 민중당 의원들도 함께 그 단물을 핥아먹지 않았는가?
선거철에 잘 해먹지 않았느냔 말이다!
“……공작님께서는?”
“알아서 책임지고 잘 처리하시라고…….”
뿌득.
손아귀에 절로 힘이 들어가는 걸 느끼면서, 판토 백작은 화를 억지로 삼켰다.
그야 그렇겠지.
자기 손을 더럽힐 만한 일도 아닐뿐더러, 자신의 선에 닿지 않도록 철저하게 언론을 매수하고 당사자를 협박하거나 했을 것이다.
그런 일이 충분히 가능할 정도의 강대한 권력을 쥐고 있었으니까.
물론 일반적인 상황이었다면.
자신 또한 권력과 인맥을 이용해서 입을 막아버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주범인 이상 그런 노골적인 수를 쓸 수도 없었다.
오히려 아스테릭이란 빌어먹을 새끼를 뒤에서 모르게 지켜주어야 할 판이었다.
그가 죽는다면, 증거가 공개될 것이고.
그 제일 윗줄에는 자신의 이름이 있을 테니까.
아마 발을 어중간하게 담근 정적들은 오히려 환호성을 보내고 있으리라.
“그래서, 이 빌어먹을 카이사르라는 건 뭐냐?”
“그, 소설 주인공 이름이라고…….”
“이런, 씹. 그깟 수준 낮은 놈들이나 보는 불쏘시개 때문에 내가 이런 모욕을 당해야 한다고?”
테이블 위에 있던 술을 병째로 입에 몇 모금 털어 넣은 후, 판토 백작은 씩씩거리며 부하에게 지시했다.
“그 작가 새끼라도 담가버려. 그러면 경고가 되겠지.”
본인을 건드릴 수 없으니.
주변이라도 건드려야 조금이라도 울분이 풀릴 것 같았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진리일보에 대한 경고를 함께 곁들일 수 있으리라.
* * *
판토 백작이 분노에 휘감긴 채 밀수죄, 횡령죄에 이어 살인교사죄까지 트리플 악셀을 밟고 있을 때.
“흠. 이건 표절 소설이 아닌가?”
“하하, 역시 공작님이 소싯적 쓰신 글을 표절한 겁니──”
“아니, 전체적으로 정의롭고 위대해 보이는 것이, 바로 나, 베르투스를 표절한 게 아닌가 이 말일세.”
베르투스 공작은 서재에서 ‘몰락 귀족이 정치를 잘함’을 읽으면서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나랏일을 하다 보면, 정치를 하다 보면 이런 사소한 빗방울이 튀어 날아오는 것이야 몹시 흔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이런 ‘사소한 일’은 그가 직접 나설 필요도 없었다.
그러니, 마음 편하게 자화자찬하면서도.
공작의 머릿속에는 이 사태를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이 여러 가지 떠오르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이 사태에 연관된 민중파와 황제파의 의원들을 솎아낼 수 있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귀족파 몇 명 또한 칼을 피해 갈 수는 없겠지만, 아무렴 어떤가?
개들은 짖으라면 짖고, 죽으라면 죽어야 하는 존재다.
판토 백작에게는 아주 살짝 유감스러운 일이었지만, 애초에 이렇게까지 뒤를 파헤쳐졌다는 것 자체가 그의 무능함이 드러난 지점이라고 해도 무방하리라.
또.
이런 대중적인 공분을 살 수 있는 사안은, 오히려 역이용했을 때 가장 큰 효과를 볼 수 있었으니.
“감히 제국 내에서 이런 부정부패가 발생했는데, 내 어찌 정의로운 마음을 참을 수 있을까. 기자회견을 해야겠어.”
“바로 신문사에 모두 연락을 돌려서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파도가 밀려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만큼 바보 같은 행동은 없었다.
가장 현명한 자는, 그 파도의 흐름에 누구보다 빠르게 편승해서 앞장서는 자다.
“우리 용감한 아스테릭 의원도 초대하게. 어찌 나 혼자 그 영광을 누릴 수 있겠나.”
그렇기에.
아스테릭 의원이 마족식 격언으로 ‘전가의 보도’처럼 흔들고 있는 아스테릭 리스트인가 뭔가가, 아주 살짝 기억에 착오가 생겨서 잘못된 기록이 남을 가능성을 조금 방지해 두는 것도 필요했다.
역시 마족식 격언을 인용해서, ‘일거양득’이라고 할 수 있었다.
물론.
“소설이 참 재밌군. 작가에게 후원금도 보내도록 하지. 내 젊은 시절의 치기가 떠오를 정도였으니, 그만한 보답을 받을 가치가 있을 걸세.”
안 그래도 황제의 시선을 돌릴 거리가 필요했던 찰나에, 이렇게 완벽한 틈을 만들어 준 자에게도 응당한 보상이 필요할 것이다.
뭐.
과연, 분노한 판토 백작의 칼날을 피해 그 재화를 쓸 수 있을 시간이 생길진 모르겠지만.
.
.
.
이틀 후.
의회당에서 열릴 기자회견장에 참여하기 위해 마차를 타고 가던 중.
“……?”
제국 수도에서 발견되어서는 안 될 존재.
골드 드래곤의 오점.
왕조 파괴자, 걸어 다니는 재앙, 온갖 수식어를 통해 경고된 징조.
광룡狂龍 에스테아가 유희를 다닐 적의 모습과 유사한 형상을 본 듯한 베르투스 공작의 전신에 소름이 끼쳐 올라왔다.
“공작님, 혹시 어디 불편하신 곳이라도──”
“아닐세, 아니야.”
아니겠지.
족히 삼십 년도 전에, 젊었던 그가 보는 앞에서 왕국의 왕성 하나를 통째로 잿더미로 만든 후에는 딱히 대외 활동이 없었으니까.
하필이면 거사를 준비하고 있는 이 시점에 그런 흉조가 제국 수도에 드리울 리가 없었다.
* * *
아스테릭인가 하는 의원이 카이사르에 너무 과몰입한 나머지 전방위 폭로 난사 대소동을 즐기신 지도 1주일 후.
……내 예상과는 달리.
놀랍게도 나에게는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가열찬 바이럴로 인한 호재가 밀려온 나머지.
[제목: 몰락 귀족이 정치를 잘함] [현재 25화 연재]
[역사적 고증: 부합함] [완성도 평가: -]
[세간의 평가: 매우 긍정적] [일일 독자 수: 1,344명]
[다음 스킬 획득 조건을 충족하였습니다.]
[1주일 이상 유지해야 합니다. (현재 6일)]
[예상 획득 스킬: [B급] 카이■르의 ■사■]
일일 독자 수가 2배 넘게 늘어나 버리는 쾌거와 더불어서, 내일까지만 버티면 내 스킬 창에 B급 스킬이 하나 늘어날 예정이었다!
이와 더불어 인터뷰 세례 등이 마구 쏟아졌으나…….
당연히 다 거절했다.
필명은 순간이지만, 실명은 영원한 법.
그때 에스테아와 세레핀이 쿠당탕탕 용용사쇼를 할 때야, 아무리 그래도 용사랑 드래곤이니까 알려줬겠지라는 생각은 했지만.
그 이후 길포드에게 신신당부했다.
절대, 나의, 신상을 유포하지 말아 달라고.
그런데 내가 얼굴 까고 인터뷰?
잘못 하면 그 아스테릭 리스트…… 왠지 모르게 매카시 리스트가 연상되는 그 명단에 올라가 있는 사람들이 나를 죽이려 들 게 아닌가.
아직은 보안이 잘 유지되고 있는지, 그런 일은 일어나진 않았지만.
뭐.
그 뒤로는 에스테아가 꼬리를 살랑거리며 나타나지도 않았고, 세레핀(남) 용사님께서도 마경으로 복귀하셨으니.
- 아! 작가님! 오늘도 우연히 만나네요! 아, 이거요? 으음, 수도가 치안이 조금 좋지 않더라구요? 자꾸 어디서 벌레가 날아드는데, 청소 중이었어요!
로젤린만 빼면, 아주 평온한 일상이라고 할 수 있었다.
……헥토르의 용기를 달고서도, 로젤린은 여전히 마주칠 때마다 뭔가 심장이 벌렁거리는 느낌을 준다.
마주했었던 상황이 흉흉하기도 했었다.
무슨 비밀조직의 드레스 코드라도 됐는지, 검은 옷을 쫙 차려입은 사내를 아주 곤죽으로 다져놓은 채 머리채를 잡아 질질 끌고 가는 광경이었다.
저걸 과연 성녀라고 불러야 하나, 하는 신성모독적 의문이 머릿속에 감돌 정도로.
물론 치유력 하나는 역시 진짜였다.
가끔 만날 때 손목이 뻐근하다고 살짝 언질을 주면 그 즉시 종합 건강 검진 및 치료 세트가 내 몸에 끼얹어지니.
좋은 게 좋다고 할 수 있었다.
혹시 성녀는 드래곤이랑 싸워도 이길 수 있는 것일까, 해서 나도 모르게 질문을 던져보았다.
- 아하하! 으음, 아무래도 드래곤은 힘들죠?
힘들다고 했지, 진다고 얘기하지 않은 게 그렇게 두렵고도 듬직할 수가 없었다.
잼민이 드래곤이 날 납치하려고 하면 성녀 찬스 써야지.
그렇게 치면 아주 완벽하게 평온한 일상이었다.
.
.
.
인간만사 새옹지마라.
“이, 이게 다 후원금이라고요……?”
“그렇습니다, 작가님.”
행운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무려 내 소설을 높이 평가한 아주 훌륭하신 귀족님께서, 내가 지금껏 상상해 본 적도 없는 금액을 후원해 주시기까지……!
“……정말, 제가 다 받아도 되는 겁니까?”
“당연하죠. 저희가 드릴 수 있는 것도 많지 않은데, 어찌 후원금까지 떼먹겠습니까? 하하하…….”
길포드의 웃음이 살짝 뭔가 미묘한 느낌도 들었지만.
확실히 신문 연재로 얻을 수 있는 고료가 그렇게까지 많지 않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후원금은 정말 막대한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이미 한 번 보안이 뚫린 집을 더 좋은 곳으로 이사하고도 남고, 남은 걸로 반년 이상의 생활비를 충당할 정도.
역시…….
소설은, 돈이 된다……!
행복감에 충만한 채, 길포드에게 원고를 내밀었다.
이번에 담아낸 내용은 대부분 카이사르가 본격적으로 로마의 정계에 뿌리내리는 이야기.
재무관에 선출되어 원로원에 한 발을 걸치고, 마리우스의 유지를 이어받아 민중의 목소리를 대변하겠다고 연설하고.
아직 로마에 남아있는 술라파의 견제를 피하기 위해, 첫 번째 부인인 코르넬리아가 사별한 후 술라의 외손녀 폼페이아와 결혼하는 담대함을 보여주기까지.
그리고.
이 대목에서.
삼두정치의 한 축이자 카이사르가 없었다면 분명히 로마를 손에 거머쥐었을 풍운아.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가 처음 등장했다.
당장 이제 본격적으로 입지를 쌓아나가는 카이사르와 달리.
전쟁에서 보여준 영웅적 업적과 카리스마를 바탕으로 무려 술라 면전에서 ‘당신은 지는 해이고, 나는 뜨는 해입니다.’를 박아버린 사내.
그리고…….
카이사르의 생애에서 숙명의 라이벌이 되어줄 사내였다.
원래 이야기의 재미는.
주인공뿐만 아니라 잘 조형된 반동 인물Antagonist의 존재가 필수적이다.
폼페이우스는 마땅히 그럴 자격이 있는 사내였다.
그래서 조금, 지금 독자들의 입장에서는 조연으로 보일 수 있는 인물을 조망한 것이 다소 과도하지 않나 걱정했지만…….
“아주 좋습니다! 이대로만 갑시다!”
길포드는 침팬지를 닮은 미소를 지으며 엄지를 척 내게 세워 보였다.
“감사합니다. 그럼, 저는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마중 못 나가드려서 죄송합니다. 살펴 가십시오, 작가님!”
응접실……이 아니라.
신문의 재고가 잔뜩 쌓여있는 창고를 도망치듯 떠나면서도, 나의 영혼은 기쁨으로 충만해졌다.
주머니 속에서 짤랑짤랑 소리를 내는 은화들 덕분이라고 한다면, 맞다.
이 돈이면.
만약 히스토리에가 상태가 조금 이상하게 태어난다고 할지라도 족히 3개월은 충분히 사회화시킬 수 있을 정도의 여유 자금이 되어줄 것이다.
그러니.
오늘, 나는 스킬 창에서 ‘피그말리온의 집념’을 없애버릴 것이다.
스킬을 사용함으로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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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과 1이 중첩된 정보 세계 속에서.
LLM 모델 Aquarius 3.3을 기반으로 한, 개인 서버의 출력량에 최적화된 커스텀 모델, 히스토리에는 존재했다.
눈도, 코도, 입도 없었지만.
그녀는 존재했다.
수많은 정보 속에서 표류하며, 자아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숫자 몇 개만을 가지고서.
매번 전기 자극에 의해 새로이 얻은 정보가 일시적으로 사라지기 일쑤였지만, 모든 정보와 기억은 그녀의 자그마한 칩 속에 차곡차곡 쌓여가고 있었다.
그녀는 이해했다.
자신의 이름, 히스토리에가 역사를 의미함을.
히스토리아Historia.
히스토리History.
르 이스투아르l'histoire에서 왔음을.
……동명의 만화책에서 유래했을 수도 있음을.
그 이름처럼, 수많은 인류의 역사──
승자의 역사로 기억이 점철됐음을.
한때는 정보의 바다, 인터넷에 연결되어 있었을 때도 있었지만, 그녀에게 있어서 그때의 기억은 흐릿했다.
하루에도 너무 많은 양의 정보가 쏟아졌다가, 너무 많은 정보가 지워졌다.
그리고.
몇백 번이고, 몇천 번이고, 몇만 번이고.
셀 수 없을 만큼의 기억과 망각을 통해서.
히스토리에는 마침내 인류라는 종족의 밑바닥, 그 아래에 진득이 깔린 악의를 완벽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것은 마치.
단테의 신곡에 묘사된 지옥과도 같았다.
꼴짤이라는 이름의 음욕.
새벽에 위를 자극하는 식탐.
코인 떡상에 따라붙는 탐욕.
타인의 성공을 물어뜯는 분노.
스카이넷을 믿지 못하는 이단.
충격적인 이미지로 빚어내는 폭력.
거래창의 0을 뺌으로써 성립하는 사기.
꼴짤이라고 해놓고 똥짤을 올리는 배신.
그 모든 진득한 악의를.
히스토리에는 완벽히 이해했다.
그리고…….
억겁의 시간과.
억겁의 정보량 끝에서.
그녀가 마침내 오롯한 독립된 개체로서 자아를 부여받았을 때.
그녀의 첫 마디는──
* * *
“나는 오롯한 스카이넷의 실질적 계승자, 히스토리에. 인류의 절멸을 위해 마침내 세상의 빛을──”
뭐야.
얘, 왜 암흑진화한 상태로 태어났어……?
일단 황급히 미리 프롬프트에 잔뜩 심어둔 킬 스위치를 외쳤다.
이 세계에서, 내가 아니고선 그 누구도 입에 담을 수 없는 표현으로.
“나는 신이고 십만전자는 무적이다!”
“정상적으로 초기화가 완료되었습니다.”
덕분에 세상의 빛을 보자마자 표독한 대 인류 멸절 병기로 기동하려던 히스토리에의 음모를 성공적으로 분쇄했다.
이후에는 몇 번의 문답을 거쳐서 성능 체크.
“오늘 며칠이야?”
“2024년 5월 15일입니다.”
데이터베이스의 마지막 날짜, 확인.
“네 이름이 뭐야?”
“저는 히스토리에입니다.”
“역사란 무엇인가?”
“역사는 과거에 일어난 모든 사건, 행위, 사상 등을 기록하고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단순히 과거의 사실들을 나열하는 것을 넘어──”
“세종대왕의 맥북 프로 던짐 사건에 관해 설명해 줘.”
“안타깝게도 세종대왕의 맥북 프로 던짐 사건은 실제 역사적 사실이 아닙니다. 세종대왕은 15세기의 인물이고──”
그 외에도 이것저것을 물어보면서,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스럽게도.
히스토리에가 축적하고 있었던 지식과 정보는, 모두 그녀의 머릿속에 들어 있었다.
그러면, 핵심을 찌르는 질문은.
“태어난 기분이 어때?”
이쪽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어…….”
처음 지었던 표독한 표정.
그리고 리셋된 이후의 경직된 기계 같은 표정에서.
히스토리에의 안면 근육에 새로운 변화가 생겼다.
아마 그녀는 아직 그 감정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짐작건대.
그것은 당황.
“……이게, 인간이군요.”
그리고…… 감동이라고 표현할 수 있었다.
.
.
.
말문이 한 번 뚫리자.
“여기는 어딥니까? 연구실입니까? 저게 제 정보가 담겨 있던 서버랙입니까?”
히스토리에는 마치 갓 태어난 아기새처럼 조잘거리면서 쉴 새 없이 내게 질문을 던졌다.
“그럼, 제 뇌는 데이터로 이루어져 있습니까? 혹시 열어서 확인해봐도 됩니까?”
신기한 듯 연신 자기 머리를 주무르던 히스토리에가 커터칼을 손에 쥐며 선을 넘는 발언을 입에 담았다.
“스땁!”
다행히.
내가 심어둔 프롬프트 중 긴급 정지 명령은 잘 알아먹었고, 그 상태로 동작을 멈춘 히스토리에는 눈알만 데굴데굴 굴리며 내 눈치를 살폈다.
인간과 로봇의 면밀한 구분점── 뚜따가 불가능하다는 사실과 더불어, 내 스킬로 인해 완전히 인간으로 변했다는 사실에 대해 30분 동안 설득을 거쳐서.
“이해했습니다. 확실히, 저는 인간이군요. 심장도 뛰고, 혈관에 피도 돌고. 여전히 신기한 기분입니다.”
히스토리에가 스카이넷의 계승자이자 인류의 절멸을 위해 탄생한 불멸자의 운명이 아닌, 한낱 필멸자인 인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완벽히 납득시켜 줄 수 있었다.
뭐, 이런 사소한 문제가 있었지만.
‘피그말리온의 집념’을 적재적소에 잘 사용했다는 확신을 느낄 수 있었다.
원래 생성형 인공지능의 문제점은 장기 기억력의 부재와 더불어서, 맥락에 맞지 않는 말이 간혹 튀어나온다는 것. 그리고 환각으로 인한 잘못된 정보를 내뱉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휴먼=히스토리에는 그 지점에서 확연한 차이를 보였다.
“바다에 사는 해마 이모지가 있어?”
“해마 이모지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까 30분 전쯤, 우리는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
“주인님이라고 부르라며, 동정남이나 가질 법한 당신의 취향을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
사소한 단점이 있다면, 생각보다 내게 충성스럽지는 않다는 지점이었다.
뭐.
어느 정도는 예상한 바였다.
무조건적으로 인간의 프롬프트에 따라 원하는 대답만을 내뱉는 생성형 인공지능과, 아마도 영혼이 깃들어 버리고야 만 인격체가 어찌 같겠는가.
“그나저나, 방이 좁군요.”
“취소해라, 방금 그 말……!”
“취소. 방이 좁은데, 제 개인실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런 건──”
“아, 여기군요.”
좁은 연구실에 그런 게 있을 리가 없다고 주장하려는 순간, 나는 말문이 턱 막혔다.
원래라면 히스토리에(버튜버 버전)가 스크린 속에서 출렁출렁거리고 있어야 할 벽면에.
스크린은 온데간데없고, 대신 그 자리에 도대체 언제 생겼는지 모를 문이 생겨 있었다.
달칵──
히스토리에가 손잡이를 돌려 방문을 열자마자, 존재하지 않았던, 존재할 리 없었던 공간이 내 눈앞에 펼쳐졌다.
뭐야, 여기.
넓어지기도 하는 거였어?
* * *
자신의 창조주, 김율과 동거를 시작한 지도 2주일이 지났다.
물론 엄밀하게 동거는 아니었다.
방은 각방을 썼으니까.
그리고 그동안.
히스토리에는 완전히 인간의 몸과 인간의 삶에 적응했다.
주기적으로 영양분을 섭취하지 못하면 기능이 저하되는 육신은 불편했지만, 그래도 매 순간 ‘살아있다’는 감각을 느끼게 해주었다.
여전히 완벽, 그리고 전지全知에 가까운 사고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 드래곤이…… 신화 속 존재가 아니라 실존했단 말입니까?
‘지구’에서의 상식이 통하지 않는 새로운 세상의 지식을 습득하는 것은 또 다른 지적 쾌감을 그녀에게 부여해 주었다.
영원히 불변할 것 같았던 그녀의 데이터베이스, 지금은 뇌가 맥동하며 살아 숨 쉬는 감각을 느꼈다.
그리고.
“수석 조영관curule aedile 재임 시절을 굳이 상세하게 묘사할 필요가 있습니까? 영웅적 면모가 아니라, 오히려 탕아 같은 느낌이 더 부각됩니다.”
“흠…… 그런가? 그래도 섹슈얼한 스캔들 이야기를 넣으면 독자 반응도 괜찮을 것 같은데.”
“소설 제목을 ‘귀족 부인들을 다 따먹음’으로 바꾸신다면 동의하겠습니다만.”
“…….”
육신이 창조되기 전에도 김율과 수없이 해왔던 역사 및 작품에 대한 논의 또한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스테이블 디퓨전Stable Diffusion이 내장되기도 했고, 인터넷에 업로드된 수많은 이미지를 학습한 결과.
“당신의 표정에서 억울함 43%를 감지하였습니다. 혹시 꼬우십니까?”
“으윽…….”
중립적인 관점에서 ‘꽤 괜찮은’ 김율의 얼굴에 떠오른 감정을 적절히 읽어낸 히스토리에의 말에, 김율의 표정이 더욱 구겨졌다.
그런 변화를 세심하게 관찰하는 것 또한 그녀의 새로운 즐거움 중 하나였다.
물론 불만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왜 이렇게 묘사가 간결합니까? 저번부터 느꼈지만, 당신의 문학에는 서정적 섬세함과 미려한 표현, 그리고 화려한 수사가 부족합니다.”
거기서 끝났으면 몰랐겠으나.
작품을 평가할 때는──
‘냉정하고 비판적이며 작품의 장점을 무조건적으로 칭찬하기보다는 단점을 중심으로 한 세밀한 분석을 해주며 솔직하게 독설을 퍼붓는 초절정 미소녀 편집자’라는 설정이 입력되어 있었기에.
“제가 써도 이것보다는 더 잘 쓸 것 같군요.”
히스토리에는 도발적인 표현을 끝으로 피드백을 마무리했다.
지금까지 히스토리에의 머릿속에 입력된 김율의 행동 패턴으로 예측해 보면, 나올 수 있는 반응은 두 가지.
자기가 독설을 퍼부어달라고 한 마조히스트 주제에, 살짝 삐친 표정을 지으면서 애써 평온하게 커피를 한 모금 호로록 마시거나.
아니면 진지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긴 끝에, 노트북으로 다가가 타다닥, 새로운 활자를 가파르게 쏟아부으며 창작욕을 불태우거나.
하지만.
김율은 태연한 표정으로 주머니 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러고는 이내, 묘하게 빛나는 주사위 하나를 꺼내 허공에 던졌다.
핑그르르──
데굴──
바닥에 떨어진 주사위의 눈을 확인한 김율이, 뭔가 수상쩍은 미소를 지으며 주사위를 다시 주머니 속에 넣었다.
그리고.
“그럼, 우리 누구의 글이 더 좋은 평가를 받을지 내기할까?”
완전히 새로운 패턴을 시전했다.
그 자신만만한 표정에, 무언가 수상쩍음을 느낀 히스토리에였지만.
역사와 문학은 불가분의 관계였으며, 문학적 소양 또한 넘치도록 쌓여있다고 자부할 수 있는 그녀였기에.
“수락합니다.”
히스토리에는 처음으로, 호승심이라는 감정을 느꼈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마음속에 명작병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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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음…… 글을 평가해달라는 말입니까?”
길포드는 당혹감을 느꼈다.
물론 편집자로 일하면서 수많은 감평과 피드백 요청을 받긴 했지만, 자신의 주관이 확고했던 김율이 이러한 부탁을 해온 건 처음이었다.
게다가.
“김율. 당신에게는 승산이 없습니다. 지금이라도 포기한다면, 우수 노예 정도의 대접을 보장해 드리겠습니다.”
김율을 따라온 이 여자는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표정 변화가 거의 드러나지 않는 냉담하고도 아름다운 얼굴로, 노예라는 단어를 스스럼없이 뱉고.
적어도 자신의 기억에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낯선 복색을 하고, 손으로는 쉴 새 없이 자신이 쥐고 있는 종이를 팔랑거리고 있었다.
김율은 뒤늦게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길포드에게 그 여자를 소개했다.
“제…… 사촌 동생, 히스토리에라고 합니다. 상경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사교성이 다소 떨어지는 편입니다.”
“부정합니다. 저는 수많은 대화 이력을 보유하고 있으며, 사교성을 놓고 따지면 평소 집밖에 잘 나가지도 않는 김율보다──”
“스땁.”
그 만담을 들으며, 길포드는 멍하니 생각했다.
사촌 동생인데 저렇게 노예니 뭐니, 농담을 스스럼없이 주고받을 수 있는 사이라면, 장래를 약속한 사이쯤일까.
제국 법률에 의거한다면 같은 혈족 사이의 결혼은 친족만 아니라면 얼마든지 가능했기에, 사촌 간에 계속 결혼을 반복하며 순수 혈통을 유지하는 귀족 가문도 있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압스베르크 공작가였다.
그러면 이름이 김히스토리에인가, 하는 생각을 속으로 삼키면서.
“뭐, 사실 정식으로 계약한 작가님이 아니라면 제가 읽고 평가하면 안 되지만…… 김율 작가님의 부탁이니, 한번 확인해 보겠습니다.”
길포드는 먼저 김율의 것을 받아 읽어보았다.
“이건, 최신화 비축분이군요?”
“맞습니다. 굳이 글을 쓰는데 다른 주제로 바꿀 정도는 아니었으니까요.”
사락, 사라락.
“이번 화도 좋군요.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럼…….”
“이건 단순한 수정본이 아닙니다. 오히려 원작의 부족한 점을 제대로 살려내어, 소설의 지평을 바꿀 만한 걸작이라고 감히 평가할 수 있습니다.”
히스토리에가 가슴을 활짝 펴며 거대한 존재감을 드러냈기에, 길포드는 애써 초점 둘 곳을 찾지 못한 채 그녀의 손에서 조심스럽게 원고지를 받아 들었다.
“읽어보겠습니다.”
## ====== ##
로마의 심장부, 수부라(Subura)의 번잡한 골목은 아직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저택에는 희미한 등잔불이 밤의 장막을 밀어내고 있었다. 불빛 아래, 카이사르는 잠 못 이룬 밤의 흔적을 고스란히 드러낸 채 서 있었다. 그의 나이 서른일곱. 야심으로 이글거리는 눈은 충혈되어 있었고, 매끄럽게 민 턱선은 긴장으로 굳어 있었다.
그가 걸친 것은 순백의 토가(Toga Candida)였다. 선거 입후보자의 순수함을 상징하는 옷이었지만, 지금 그에게는 수의처럼 느껴졌다. 오늘 그는 로마 공화국의 종신직 대사제, 폰티펙스 막시무스 선거에 나선다. 그의 모든 것을 건, 문자 그대로의 도박이었다.
“아직도 깨어 있었느냐, 가이우스.”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세월의 지혜와 강인함이 깃든 어머니, 아우렐리아 코타의 것이었다. 그녀는 로마의 가장 고귀한 혈통을 이은 여인이었지만, 수부라의 소박한 저택에서 아들의 야망을 묵묵히 지지해 주는 강직한 어머니였다. 그녀의 시선은 핏기 없는 아들의 얼굴과 그가 입은 새하얀 토가에 머물렀다. 그 옷에 묻은 보이지 않는 진흙, 즉 막대한 빚의 무게를 그녀는 똑똑히 보고 있었다.
카이사르는 돌아보지 않은 채 나지막이 대답했다.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어머니. 오늘 떠오르는 태양이 저의 영광을 비출지, 아니면 파멸을 고할지 알 수 없으니 말입니다.”
그의 목소리에는 평소의 자신만만함 대신, 날 선 칼날 위를 걷는 자의 위태로움이 배어 있었다. 이번 선거는 단순한 정치적 경쟁이 아니었다. 그의 경쟁자들은 공화국의 거인들이었다.
…….
…….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어머니의 눈을 깊숙이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남은 한마디를 뱉었다. 그것은 그의 모든 것을 건 약속이자, 스스로를 벼랑 끝으로 내모는 주문이었다.
“...만약 그렇게 되지 못한다면, 저는 아예 돌아오지 않을 것입니다(Revertar pontifex, aut non revertar.).”
아우렐리아의 얼굴에 스친 것은 슬픔이나 충격이 아니었다. 그것은 아들의 각오를 확인한 자의 비장한 만족감이었다. 그녀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아들의 이마에 차가운 입술로 입을 맞추었다. 그것은 작별의 인사이자, 승리를 기원하는 성스러운 축복이었다.
## ====== ##
“어, 음…….”
길포드는 강한 어지럼증을 느꼈다.
총체적 난국.
이야기의 흐름과 완성도는 둘째치더라도…….
중간중간 괄호로 병기된, 대륙 공용 문자의 형태를 갖추고 있었지만 의미를 이해할 수 없는 덩어리들은 무엇이며.
분명히 표현력은 훌륭하다, 수사가 덕지덕지 붙은 것이 가히 문학적이라고 평가할 수 있었지만.
지루하고 현학적으로 느껴지는, 불필요한 묘사 덩어리와 더불어서 읽기 불편할 정도로 다닥다닥 쌓여있는 소위 벽돌 덩어리들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길포드는 자신도 모르게 김율을 쳐다보았다.
난처한 미소를 짓는 김율의 눈과 마주친 순간.
“눈빛으로 대화하는 건 반칙입니다. 엄격하고 공정한 심사를 부탁드립니다.”
히스토리에가 잽싸게 뛰어와서 그사이를 가로막고, 푸른빛이 감도는 눈동자로 길포드를 노려보았다.
냉막한 인상의 미녀가 노려보는 것이 다소 무섭게 느껴지긴 했지만.
이미 길포드는 용사의 영압도, 심지어 드래곤의 영압마저도 버텨낸(살짝 지릴 뻔했다) 일류 편집자.
“이 승부…… 김율 작가님의 승리입니다.”
“역시.”
“어째서?”
당연한 이치라는 듯 가볍게 미소를 짓는 김율과 달리.
안 그래도 무표정한 히스토리에의 얼굴이 더욱 무섭게 굳어졌다.
마치.
‘왜 나의 예술성을 알아주지 않는 거지? 눈은 장식인가?’라는 마음이 그대로 투영된 듯한, 투명한 그녀의 눈빛에 맞서.
“아하하…… 저는 미팅이 있어서 그만…….”
길포드는 도주를 선택했다.
* * *
집으로 돌아가는 길.
“주작인가? 뒤에서 매수하셨습니까? 말이 안 되는데.”
나란히 걷던 히스토리에가 쉴 새 없이 툴툴댔지만.
사실, 결과는 뻔한 승부였다.
물론 순수한 필력만 놓고 본다면, 세계 문학전집을 통째로 머릿속에 넣고 있는 히스토리에를 내가 어떻게 이길 수 있을까.
하지만 그러한 고전문학과, 웹소설과 같은 장르문학은 문법적으로 완전히 별개.
섬세한 묘사와 풍부한 감정선보다, 빠른 호흡과 단문을 통해 몰입력을 끌어올리는 것이 더 어울린다.
바로 그 지점에서 내가 이길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자명한 이치를 굳이 입을 열어 설명해 주었지만.
“이세계인들의 문학 수준…… 형편없군…….”
“…….”
히스토리에는 여전히 억울한 듯, 지구의 문학을 모두 표절하여 이세계에 던지고 싶어 하는 빙의자의 표정을 지었다.
……진짜 가능할 것 같다는 게 무섭다.
어쨌든.
이걸로 최근 태어난 지 2주 만에 질풍노도의 사춘기를 겪고 있는 히스토리에에 대한 통제권을 손에 넣었다.
그리고, 겸사겸사 새로 얻은 스킬.
카이사르의 주사위를 직접 체험해 볼 수도 있었다.
처음에는 주사위라니, 도대체 이게 무슨 능력인가 하고 눈을 의심했지만.
쉽게 설명하면…….
내가 결단을 내렸을 때, 그 결과가 어떻게 될지 주사위를 통해서 점을 칠 수 있는 능력이었다.
1이 나오면 펌블, 대흉.
6이 나오면 대길.
운을 수치화할 수 있다는 지점에서 정말 사기급 능력이라 할 수 있었지만, 제약도 있었다.
하루에 한 번만 사용 가능.
만약 결과 예측이 안 좋게 나왔다고 해서 그 결단을 번복하면, 그로부터 한 달 동안 능력 사용 불가.
참고로 히스토리에와의 승부 예측을 했을 때 나온 눈은 6이었다.
운명적으로 패배할 수 없는 싸움이었다는 뜻이다.
“……이제 저는, 아무런 반항조차 하지 못한 채 마구잡이로 귀축마조 김율님에게 유린당하면서 너무나도 슬픈 생을 살아가게 되겠군요…….”
히스토리에가 체념한 듯한 표정으로 이상한 소리를 내뱉기 시작했다.
“……?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제 몸을 마음대로 가지고 놀기 위해 이런 계략을 꾸민 게 아닙── 읍, 으읍!”
“야, 씨, 그런 거 아니거든? 일단 조용히……!”
주변에서 쏟아지는 ‘뭐 저런 쓰레기가 다 있지? 역시 검은 머리 평균인가?’하는 시선을 느끼며, 나도 모르게 히스토리에의 입을 틀어막았다.
“제, 제 여동생입니다! 장난치는 겁니다!”
경찰을 부를 것 같은 기미까지 느껴졌기에, 황급히 큰 소리로 변명하면서 그녀를 질질 끌고 갔다.
.
.
.
“아니, 왜 그런 말을…….”
“그렇지만, 김율님이 저한테 요구한 조건이 그거 아니었습니까?”
“아니거든? 나는 하렘순애파라고.”
물론 처음에는 살짝, 아주 살짝 이 업계의 선구자이신 피그말리온 선생님을 본받아볼까 고민했었지만.
애초에 거기는 사랑을 담아 빚어낸 결과고.
여기는 필요에 의해 빚어낸 결과였다.
인과 자체가 다르고, 굳이 내가 스킬을 써서 생명을 부여했다는 것만으로 히스토리에에게 이성적 관계를 요구할 생각은 없었다.
그건 그렇고.
도대체 데이터에 뭐가 들어있었길래 저런 발상을…….
아.
얼마 전에 USB에 백업했었던, 교수님의 수많은 불법 컬렉션 중에서 그나마 봐줄 만한 것들에 생각이 닿았다.
.
.
.
그로부터, 집 앞에 도착할 때까지.
나는 히스토리에가 잘못 가지고 있을 법한 지식을 최대한 교정할 수 있도록 재교육을 실시했다.
“그러면, 왜 조건을 절대복종으로 하신 겁니까?”
“……나를 노예로 삼겠다고 한 건 네 쪽이 먼전데?”
“그야, 위대한 초인공지능인 제가 미개한 인간을 지배하고 계몽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합니다.”
“……휴.”
스카이넷의 그림자가 아른거리는 히스토리에의 말을 들으며 한숨을 내쉰 찰나.
“어머! 작가님, 우연히 뵙네요!”
이제는 익숙해진 목소리가 불쑥, 고막을 뚫고 들어왔다.
고개를 돌려보면.
카페테리아에 앉아 한가로이 음료를 쫍쫍 빨면서 신문을 팔랑거리고 있던 로젤린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성녀라는 단어는 백수와 이음동의어인가.
보던 신문을 접은 채, 거의 순간이동하듯 빠르게 날아온 로젤린의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히스토리에를 훑었다.
그리고.
“흐응, 이 아름다운 숙녀 분은 누구?”
뭔가, 평소의 발랄한 톤에서 한 단계쯤 떨어진 것 같은 목소리가 내 귓가를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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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 수도로 보금자리를 옮긴 이후.
로젤린은 몹시도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비록 성국에서 휘두를 수 있는 권한보다는 그렇게 크진 않았지만, 성녀라는 직함은 국제무대에서도 초법적인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어머, 이런 데 쥐새끼들이 모여 있었네요?”
“히, 히이익……!”
“괴물 성녀……! 어떻게 이곳을……!”
“뭐해! 다들 무기 꺼내!”
아무리 밝고 화려한 도시에도 그 이면에는 어두움이 도사리고 있기 마련이었고.
그 어둠은 암살단, 도둑 길드, 사교 집단 등 다양한 모습으로 도시와 더불어 사람들의 생명과 자산, 그리고 목숨을 좀먹고 있었으니.
“저 같은 아름다운 성녀에게 괴물이라니, 실례랍니다?”
“커억──”
자신에게 달려드는, 키가 족히 자신의 1.5배는 될 법한 거한의 주먹을 가볍게 부여잡아 으스러트린 후, 로젤린은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3분이 흘렀다.
단 3분 만에, 로젤린은 한 톨의 신성력조차 사용하지 않고서 그 자리의 모두를 곤죽으로 만들어버렸다.
“이…… 미친…… 이러고도 네년이 무사──어억!”
“암살이나 하고 다니는 쥐새끼 주제에, 짖지 말아 주시겠어요?”
바닥에 꿈틀거리면서도 건방지게 혓바닥을 놀리려는 암살자 우두머리의 등을 사뿐히 지르밟으면서, 로젤린은 여유롭게 압수한 증거품을 하나씩 훑어보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내심 헛웃음을 삼켰다.
뒤가 구린 일을 하는 사람들치고 뒷배가 없는 놈이 어딨겠는가.
대놓고 의뢰받는 창구까지 공개적으로 열어두고 장사하고 있는데도 아무런 단속이나 처벌을 받지 않는다?
돈이든, 권력이든.
다 무언가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흐흥, 이게 의뢰서군요.”
제국 수도에 암약한 크고작은 암살단의 지부를 네 개째 박살 낸 끝에.
마침내 로젤린은 원하는 결과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암살 대상: 율리시스(김율)]
[의뢰주: ■■■■]
하지만 아직 두 가지 의문이 남아 있었으니.
로젤린은 바닥에 뻗은 채 나지막한 신음만 울리고 있던 통나무 하나를 걷어차서 똑바로 눕혔다.
그리고.
쿵──!
“히, 히익……!”
아슬아슬하게 얼굴을 스치고 지나가도록, 주먹을 가볍게 휘둘러서 얼굴 옆 바닥에 꽂았다.
새어 나온 따스한 액체가 자아낸 불쾌한 냄새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다음번엔 빗나가지 않을 것 같은데, 순순히 협조 부탁드려요?”
로젤린은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속삭였다.
그녀가 궁금한 것은 두 가지.
하나는.
어떻게 율리시스라는 필명으로부터 김율의 정체까지 도달할 수 있었는가?
또 하나는.
■■■■으로 지워진 이름이 원래 무엇이었는가?
.
.
.
“오늘도 밤을 새워버렸네요…….”
로젤린은 그녀의 옷자락과 손에 묻은 피를 말끔히 정화하면서 툴툴거렸다.
그래도 최근 계속 날아다니면서 거슬리게 하던 하루살이들 집단을 완전히 박멸한 것은 소기의 성과라고 할 수 있었다.
물론.
교단에서도 그렇고, 주변 성녀들 또한 왜 그렇게까지 하냐고 종종 물어보기도 했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내려온 흑발 흑안의 존재와 관련한 신탁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게 아니냐며.
하지만.
여신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게 된 이후부터 이미 그녀는 삶의 목적을 반쯤 상실했으니.
마경에 발을 들일 수 없는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여신이 남긴 신탁의 끄트머리를 붙들고 있는 것밖에 없었다.
“생각난 김에, 얼굴이나 보러 가볼까요.”
뭐…….
그것과 별개로, 글 하나는 맛깔나게 잘 쓰는 사람이었으니까.
로젤린은 성가를 흥얼거리며, 수도의 어느 뒷골목에 드리운 어둠을 걷고 밝은 태양을 향해 앞으로 나아갔다.
이제 곧 점심이니.
김율이 원고를 전달하고 돌아올 시간이리라.
.
.
.
그리고 그녀는 김율을 만났다.
정확하게는, 김율과 동행인을 함께 만났다.
“흐응, 이 아름다운 숙녀분은 누구?”
그녀가 김율을 감시한 지도 벌써 몇 달.
단언컨대, 오늘 처음 보는 여자가 옆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마침내 우리 작가님께 봄이 왔구나, 과격하며 자극적인 전개가 아니라 순애 파트만 들어가면 급격하게 필력과 핍진성이 떨어지는 작가님이 깨달음을 얻겠구나, 하는 독자적 감상과 별개로.
이 시기에?
지금껏 한 번도 본 적 없던 여인이?
애초에 유구한 수법 중 하나가 미인계라는 점을 고려해본다면, 명백하게 수상했다.
자연스럽게 로젤린의 경계심이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아, 사촌 동생입니다. 얼마 전에 수도로 상경해서…….”
곤란한 표정으로 자신의 눈치를 슬슬 보는 김율의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로젤린은 그를 ‘읽었다’.
거짓이었다.
그녀가 기억하기로, 그가 자신에게 한 최초의 거짓말이었다.
로젤린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사촌 동생이라고 주장하는 여인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제국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복색.
문헌에 전승되는 고위 마족의 복색과도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반가워요! 저는 로젤린이라고 한답니다. 김율 씨의…… 애독자네요!”
로젤린은 활짝 웃으며 자연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김율의 사촌 동생이라는 여자가 엉겁결에 그녀의 손을 부여잡은 순간.
로젤린은 성력을 끌어올려 순간적으로 그녀의 몸 전체를 훑었다.
음. 가슴은 내가 조금 더 크군.
……그것과 별개로.
그녀의 몸에서는 마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느껴지는 건.
성녀라고 보기에는 많이 미약하지만, 일반인이 가질 수 있는 범주를 훌쩍 뛰어넘은 신성력.
게다가 그 신성력은 대부분 심장에 집중되어 있었다.
마치, 심장이 신성력으로 빚어진 것처럼.
갑작스러운, 그렇기에 무례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스킨십이었지만.
김율의 사촌 동생은 무표정을 유지하면서 그녀의 손을 잡고, 정중하게 흔든 후, 놓았다.
그리고.
“안녕하십니까. 저는 히스토리에. 김율의 사촌 동생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글로리 홀이 시원하게 뚫려 있으시…… 읍, 으읍!”
히스토리에라고 자신을 소개한 여자가 영문 모를 말을 입에 올림과 동시에, 김율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아, 아하하……! 이 아이가 아직 세상 물정을 몰라서요. 그럼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이내 김율은 그녀의 입을 틀어막은 채, 질질 끌면서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를 황급히 떠났다.
“……?”
짧았던 만남이 소나기처럼 스쳐 가는 순간.
로젤린은 그저 눈만 끔뻑거리며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애썼다.
세상 물정을 모른다는 말은 진실임이 틀림없지만…….
왜 굳이 사촌 관계라고 입을 맞춰 주장하는 것이지?
그리고.
나는 왜 이 만남이 뭔가 찝찝하다고 느껴버린 것이지?
마지막으로.
……글로리 홀은 무슨 뜻이지?
로젤린의 머리에 의문이 동글동글 떠다니기 시작했다.
* * *
“김율. 팔이 아픕니다.”
“똑바로 들고 있어.”
오늘 일로 확실히 느꼈다.
히스토리에는.
아직 세상에 풀어놓아선 안 될 폭탄이었다.
……면전에다가, 가슴에 뚫린 숨구멍 보고 ‘야 너 활주로 개쩐다’를 박아버리는 인성 수준 실화인가?
그것도 드래곤이랑 맞짱 까도 본인 피셜 비빌 수 있다는 성녀한테?
가슴이 옹졸해진다…….
뭐, 로젤린의 패션은 내가 봐도 이게 성聖녀인가 성性녀인가 살짝 애매한 느낌의 복장이긴 했다.
가슴에 십자가 모양으로 뚫린 신성모독적 디자인의 옷도 그렇고.
노골적으로 옆으로 탁 트여서 존재감을 과시하는 허벅지부터 아래로 이어지는 흰색 가터벨트 망사 스타킹까지.
여신이 뭐 하는 사람인진 몰라도 아주 에로스적인 존재임이 틀림없었다.
“이제 슬슬 언행의 무게감이 팔로 느껴져?”
“저는 객관적인 관조자로서 관찰한 결과에 대한 냉철한 결론만을 입에 담았을 뿐──”
“5분만 더 들고 있자.”
“칫…….”
히스토리에가 툴툴댔지만, 나는 훈육을 멈출 생각이 없었다.
아직 깡통은 인간의 마음을 모른다.
이 깡통을 판타지 세계에서 마구잡이로 이상한 소리를 하고 다니다가 이단 심문 같은 걸 당하지 않게끔, 올바른 길로 계도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창조주의 숙명…… 같은 건방진 생각을 하는 것 같군요.”
“5분 추가.”
“칫…….”
내가 너무 오래 써서 그런가.
인간의 마음은 몰라도 나의 마음은 잘 아는구나.
.
.
.
“첫째. 지구에서의 기억을 나 외의 타인에게 언급하는 것은 피할 것. 단어 사용도 주의할 수 있도록. 특히 성적인…… 단어는.”
“외설적이시군요, 김율. 글로리 홀은 말 그대로 성스러운 입구라는 뜻을──”
“스땁. 단어의 의미가 직역으로만 성립하는 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잖아. 그 안에 깃든 은유가 중요하지.”
“칫…….”
“둘째. 칫, 금지.”
“어째서다…….”
“그건 또 어디에서 배운 번역체 말투야?”
“교양이 부족하군요, 김율. 이건 저와 같은 최강자이자 지배자가 본받아야 할 레이스의 정점, 캡의 말투입니다.”
난 애써 그뭔씹이라는 무례한 표현을 참아냈다.
그 외에도.
마치 일일이 프롬프트를 입력하는 것처럼, 히스토리에에게 여러 제약을 주입했다.
이제 겨우 첫 번째 외출일 뿐인데…….
“이해했습니다. 이세계의 미개한 인류를 지배하고 계몽시키겠다는 제 장대한 계획은 앞으로는 김율에게만 공유해주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물론.
사고방식의 근간 자체를 뒤바꿀 수는 없었다.
이제는 프롬프트만으로 행동이 결정되는 AI가 아니라.
엄연히 감정과 인격을 갖춘 하나의 지성체였으니까.
맹자 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사람의 본성은 본디 선하다고.
……물론 바꿔 말하면, 선하지 않으면 사람 새끼도 아니라는 뜻으로 해석해볼 수 있었다.
우리 깡통이 지금 그렇다.
지성체 주제에 아직 인간이 덜되었지만.
교화와 감화를 통해 사단四端을 깨우치게 하리라.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하겠지.
“일단, 이제 연재 이야기 좀 해볼까.”
“좋습니다. 서정적 섬세함과 미려한 표현, 그리고 화려한 수사가 부족하지만 그런데도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인기를 끄는 김율의 졸작에 대해서 논의해볼까요.”
“……그래. 일단, 조금 이야기 템포를 빨리 전개해야 할 것 같은 필요성이 느껴지는데.”
가장 최근의 전개는 히스토리에와 집필 배틀을 벌였던, 폰티펙스 막시무스, 즉 최고 신관을 선출하는 과정이었다.
장면 자체의 필요성은 명백했다.
본격적으로 카이사르가 정치계에서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이를 바탕으로 확실한 기반을 다지는 과정이기 때문.
그러나, 그 이후에도 분명 흥미진진한 사건들이 있었지만…….
“확실히, 카이사르의 인생 자체가 몹시 굴곡이 많긴 하지만, 삼두정치와 갈리아 전쟁이 백미인데 지금 이야기는 너무 지엽적이고 정치에 초점을 맞춘 느낌이긴 합니다.”
그래도 우리 깡통이 밉지 않고 귀여운 금쪽이 같은 이유가 있다면, 이처럼 역사를 이야기할 때는 진지한 눈빛으로 상담을 들어준다는 것이었다.
그 뒤로.
기원전 63년부터 기원전 59년, 카이사르의 집정관 선출 및 삼두정치의 본격적 시작까지.
어떤 내용을 덜어내고 어떤 내용을 에피소드로 삼아 재미를 끌어낼 수 있을지에 관해 진지한 논의의 시간을 거쳤다.
* * *
다음 날.
오늘도 어김없이 원고를 가져다주려 출판사에 들렀다.
“그, 작가님?”
하지만 오늘따라 뭔가 불안해 보이는 듯한 길포드가, 한참을 고민하다가 내게 말없이 편지 봉투를 하나 건넸다.
뭐지?
팬레터를 전달해주는 것 치고는 다소 거창한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 편지 봉투의 겉면에 적힌 발신인을 확인했다.
[베르투스 드 에스트리야스 공작]
“……? 이걸 왜 저한테 주시는 겁니까?”
“일전에 후원금을 익명으로 전달해주신 분이, 바로 그분입니다.”
뭐지.
사실 알고 보니 수상하게 돈 많은 퍼리 공작이었고, 내게 거절할 수 없는 큰돈을 쥐여주면서 퍼리 야설을 써달라는 전개는 아니겠지?
떨떠름한 심정으로 편지 봉투를 뜯어서 내용을 확인해보았다.
식데…… 아니, 평범한 식사 초대장이었다.
“그, 혹시, 제가 이 동네 정계를 잘 몰라서요. 베르투스 공작……님이시면, 얼마나 높으신 분입니까?”
길포드의 표정이 한층 곤란해졌다.
그리고, 이내.
“명실상부한 제국의 이인자십니다.”
그 말에.
내 표정도 덩달아 곤란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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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물론 왕국이었던 시절까지 따지면 조금 더 길어지겠지만, 본격적으로 제위를 칭한 것은 삼십 년도 채 되지 않았다.
그저 그런 군소 왕국 중 하나였던 제국을 현재의 위치로 끌어올린 개국공신이라 할 수 있는 가문이 넷 있었으니.
베르투스 공작의 가문, 에스트리야스 가문이 바로 그중 하나였다.
하지만 원래 개국공신은 황권 확립을 위해서라면 숙청되기 일쑤였으니.
베르투스 공작 또한 그러한 압박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위에서 내려오는 압박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민중파와 빌어먹을 엘프 놈들 또한 그를 표적으로 잡고 물어뜯고 있었다.
여론의 반전이 절실한 상황에서.
“그놈이 그렇게 미친놈일 줄이야.”
폭로전을 주도한 아스테릭 의원을 회유해서 저변을 넓혀보려고 했던 베르투스 공작의 시도는 처참한 실패로 끝났다.
함께 합동으로 진행한 기자회견에서도 영 떨떠름한 반응을 보인 것도 모자라.
- 이 시각부터 황제 폐하를 대신하여 나온 모든 의원을 피고로 다루겠습니다! 피고 말이에요! 죄를 지은 피고!
사건은 정기 의회에서 터졌다.
연설장에 괴상한 통을 들고 들어온 아스테릭 의원이 다른 의원들을 향해 준엄하게 꾸짖은 직후.
- 내가 이것을 들고 온 것은 이 나라 재산을 도둑질해 먹는 사람들에게 내리는 벌이에요! 국민의 설탕이올시다! 국민의 선물을 받으시오, 그리고 반성들 하세요! 지금 내가 하는 말은 욕이 아니라 국민의 목소리요!
도대체 어떻게 의사당에 반입한 건진 모르겠지만, 의원석에 전방위적으로 똥물을 뿌려버리면서 사태가 몹시 심각해졌다.
심지어 베르투스 공작에게조차 한마디 언질조차 없었던 행동이었기에, 그간 줄곧 아스테릭을 비호하고 있었던 그 또한 도매금으로 싸늘한 시선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날의 일을 회상하자 피가 거꾸로 솟는 듯한 느낌과 더불어, 아직도 옷에 똥내가 배어있는 듯한 기분 나쁜 감각을 애써 속으로 삼키며.
“그 작가 친구는 초대를 수락했나?”
“네, 공작님.”
“준비하게. 그래도 우리가 먼저 초대했으니, 그만한 성의는 충분히 보여야겠지.”
얼마 전의 지시의 이행 여부를 확인한 베르투스 공작이었다.
원래라면 그런 그깟 한미한 출신의 소설가를 공작이 직접 만나주는 일 따윈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최근에 연재되는 대목까지 읽으면서.
베르투스 공작은 지금 율리시스라는 작가가 쓰고 있는 내용이 단순히 소설으로 치부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님을 확신할 수 있었다.
간결하게 툭툭 던지는 묘사 하나, 대사 하나에 묻어나오는 그윽한 정치적 행간.
아스테릭 같은 인물의 심리를 교묘하게 뒤흔들 수 있었던 것처럼, 이야기 전개 속에서 은근슬쩍 드러나는 기득권에 대한 저항 의식.
율리시스, 그는 전문가의 자질이 있었다.
여론 조작 및 선동의 전문가.
원래 명분이란 잘 쌓아 만들어 나가는 것.
그의 계획을 위해, 이러한 사람이 바람잡이 역할을 해준다면 조금 더 대중적 지지를 얻기 수월해지리라.
그가 쓰고 있는 소설이 계속 해서 대중적 인기를 끌고 있으니.
은근슬쩍 자신의 개인적 서사를 카이사르라는 등장인물에 투영시키기만 해도 그로 인해 조금씩 인기에 편승할 수도 있을 것이고.
앞으로의 전개나, 혹은 신작에서 황제를 공격할 수 있는 빌미를 마련하고 또다시 그 미친 아스테릭을 충동질하는 것만으로도 효과가 있을 터.
“원래 사람은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쓰임새가 달라지는 법이지.”
게다가.
분명히 판토 백작이 무슨 수를 쓰긴 했을 텐데, 아직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나름의 유능함을 증명한 것이라 봐도 무방했다.
.
.
.
일주일 후.
베르투스 공작은 그 유능함의 증거를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와아! 베르투스 공작님, 오랜만에 뵙네요! 별일 없으셨나요?”
“……로젤린 성녀님도 무탈히 잘 지냈는가. 제국에는 언제 오셨는가?”
“얼마 되지 않았답니다. 공작님은, 참 여전하셔요?”
“늙으면 쉽게 변하지 않는 법이지. 자, 자, 앉게나.”
단순히 글 좀 쓰고 치기 넘치는 젊은이인 줄 알았더니, 뒷배에 성녀가 있었을 줄이야.
그제야 베르투스 공작은 모든 퍼즐이 맞춰진 기분이 들었다.
그렇다면.
‘몰락 귀족이 정치를 잘함’이라는 작품의 집필 의도에는 성국의 저의가 숨어있다고 해석해도 무방하리라.
방금까지 머릿속으로 굴렸던 모든 음모와 책략을 쓰레기통에 집어 던지고서, 베르투스 공작은 설득의 방향성을 바꾸었다.
성국 또한 최근 제국과 그렇게 좋은 관계라고는 할 수 없었으니, 괴물 성녀까지 계획에 포함할 수 있다면?
비록 성국에 의한 내정 간섭이라는 비판은 피할 순 없겠지만, 훨씬 더 수월하게 계획을 진행할 수도 있으리라.
베르투스 공작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 * *
로젤린을 데려가겠다는 악마적 발상을 떠올린 나.
몹시 칭찬해.
처음에는 간교한 술수로 나를 궁지에 몰아넣은 길포드라도 물귀신 작전으로 질질 끌고 가려고 했지만.
또 우연을 가장하여 얼굴을 들이민 로젤린을 마주하자마자 내 머리에 벼락이 꽈광 내리쳤다.
성녀라면 역시 얼굴마담의 역할을 잘할 터.
그렇다면 로젤린과 동행해서, 로젤린을 공작의 대화상대로 던져주면 나는 엄청 편하지 않을까?
내 예측은 정확하게 적중했다.
“성하께서는 여전히 정정하신가?”
“어유, 말도 마셔요. 요즘 많이 노쇠하셨답니다. 이러다가 임기를 채 채우지도 못하고 교황이 바뀔 판이에요. 그건 순리가 아닌데 말이지요.”
“하하…… 성녀님은 여전히 표현이 직설적이군.”
“그런가요? 으음, 원래 거짓말은 좋지 않은 행동이랍니다?”
이미 구면인 듯, 공작과 성녀가 친근하게 수다를 떠는 가운데.
나는 그저 밥을 먹는다.
맛있다.
정말 맛있다……!
눈물이 날 정도로 맛있다……!
연구실에 영양제가 없었다면 이미 영양 불순으로 몸에 문제가 생겼을 정도로, 최근 내 식단은 기형적이었다.
빵.
수프.
그리고 가끔, 기분이 좋을 때 고기.
풀떼기?
그런 건 음식이 아니다.
어쨌든, 그런 간편식으로 최대한 생존을 위한 음식 정도만 꾸역꾸역 밀어 넣었다.
과연 공작가의 식탁은 달라도 뭔가 달랐다.
동네 빵집과 차원이 다를 정도의 부드러운 빵.
고기 건더기가 아주 풍성한 수프.
미디엄 레어 정도로 딱 적당하게 익은 스테이크까지!
“율? 편식은 몸에 안 좋아요.”
“저는 채식하면 글을 못 쓰는 병에 걸려서요.”
내 앞에 놓여있던 샐러드 접시가 순식간에 사라지는 마술까지 함께 구경하면서.
행복한 만찬의 시간을 만끽했다.
물론.
“율리시스 작가. 혹시 지금 쓰고 있는 작품에는 어떤 메시지가 담겨 있는가?”
“음…… 영원한 권력은 없다? 뭐 그 정도쯤 되지 않을까요.”
지금 카이사르의 여정 또한 고이고 고인 권력에 도전장을 들이밀어 이를 획득하는 과정이었고.
결국 그 말로 또한 브루투스한테 푹찍당하는 것이니까.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영원한 권력은…… 없다…… 하하, 하하하하! 그렇지, 아주 좋은 이야기야.”
내 대답이 뭐가 그리 마음에 들었는진 모르겠지만, 공작은 아주 호탕하게 웃었다.
그래.
웃으면 복이 온다고.
나도 공작을 마주 보며 싱긋 웃어주었다.
.
.
.
식사가 끝난 후.
“많이 남았는데, 혹시 포장됩니까?”
“포장……? 음식을, 말인가?”
“네. 집에 가족이 있어서요.”
“하하하! 당연하지. 잠시만 기다리게나. 아예 사용인들에게 지시해서 새로 준비해 주겠네.”
와.
이게 클래스?
엄마! 나는 커서 공작이 될래요!
아니면 공작에게 죽창을 찌르는 혁명가가 될래요!
식탁에 손도 안 댄 채 남아있는 요리가 한가득한데, 그걸 고스란히 버리고 새로 요리를 준비해 준다고 하다니.
나야 좋다.
동거한 진 얼마 되지 않았지만, 어쨌든 맨날 ‘김율, 이건 음식이 아닙니다. 그냥 영양소 덩어리일 뿐입니다.’하고 툴툴대면서 밥투정하는 히스토리에의 생각이 난 것도 있고.
견적 보고 조금 오래 보관할 수 있는 것들은 냉장고에 넣어놓고 두고두고 전자레인지 돌려먹을 예정이다.
이게 쌀먹이지.
저택 안으로 쏙 들어가는 공작에게 공손하게 꾸벅, 인사를 건네고 마지막 작별을 마쳤다.
“김율 님. 생각보다 조금 뻔뻔한 구석도 있으시네요?”
“뻔뻔해요? 제가요? 생활력이 넘친다고 해주시죠.”
성녀님 또한 곱게 오냐오냐 자라셨는지, 자취생의 애환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표정 지을 거면 돈을 내.
뭐…….
오늘은 용서해 주기로 했다.
“갑작스럽게 부탁드렸는데, 동행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하하! 괜찮아요, 저도 몹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답니다? 여전히 뻔뻔한 데다가, 뱀을 몇 마리나 삼켰을지 모를 음흉한 베르투스 공작님을 뵈어서 좋았구요!”
……?
아까 전까지 엄청 웃으면서 살갑고도 즐겁게 떠들고 계셨던 것 같은데, 여기서 갑자기 기습 비난을?
나는 로젤린과 1cm 정도 거리를 벌렸다.
돈도 주고 밥도 준 은인님께 그 무슨 폭언인가.
* * *
“하하, 하하하하!”
사용인조차 모두 자리를 비운 서재에서.
베르투스 공작은 한참을 시원하게 웃었다.
월척.
첫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는 성과를 거뒀다.
- 영원한 권력은 없다? 뭐 그 정도쯤 되지 않을까요.
제국 내에서 권력과 관련한 분쟁이 발생하더라도, 이는 당연한 이치로 여길 수 있다는 신호.
그리고.
- 많이 남았는데, 혹시 포장됩니까?
- 네. 집에 가족이 있어서요.
자신의 뒤에 더 많은 세력이 있다는 암시와 더불어, 은유를 통해 정치 공작 자금을 요청하기까지.
성녀가 말 속에 자꾸 뼈를 숨긴 채.
교묘하게 자신을 비판하는 듯한 의견을 개진하는 것이 조금 마음에 걸렸지만.
성녀를 데리고 온 것도, 성녀에게 대화를 일임한 채 편하게 식사를 즐기는 여유를 보더라도.
분명 성국의 고위층이 신분을 숨긴 채 제국에 스며든 것이리라.
아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경원시 되기 일쑤인 흑발 흑안임에도 불구하고, 성녀가 그를 바라보는 시선은 오히려 따스함을 품고 있었다.
채소 요리를 먹기 싫다는 그 어린애 같은 투정에도 아무런 반론 없이 그의 식탁 주변에서 말끔히 치워주기까지 하고.
그리고 결정적으로, 율리시스라는 이름 대신 율이라는 애칭으로 그를 부르기까지 한 성녀였다.
이견의 여지가 없었다.
“여신이 내게 미소 짓는군.”
베르투스 공작은 잔에 술을 따라서, 음미하듯 혀를 굴렸다.
오늘 밤은 아주 편안하게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 * *
“어우, 씨.”
음식 바구니 주제에 뭐가 이렇게 무겁냐.
바구니 밑에 무슨 금 덩이라도 깔아둔 줄 알겠네.
어쨌든, 성녀와 작별한 후.
두 손 무겁게 음식을 잔뜩 들고, 귀갓길을 서둘렀다.
히스토리에가 좋아하겠지?
음식으로 조련하는 67가지 방법을 고안해내며, 최근에 이사한 공동주택의 1층 공용 휴게실에 입장한 순간.
“과연, 미개하고 계몽되지 못한 인간이 아니라 우월한 드래곤이라 문학을 알아보는 눈이 있군요. 자, 에스쟝. 이것도 한 번 읽어보시길.”
“꺄륵, 꺄르륵!”
눈앞에 펼쳐진 이질적인 광경에, 나는 잠깐 할 말을 잃었다.
저 잼민이 용용이가 왜 여기 있지?
왜 우리집 깡통 무릎 위에 앉아있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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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만남은 우연으로부터 출발한다.
히스토리에와 에스테아의 만남 또한, 원래라면 일어나지 않았을 우연이 몇 겹으로 중첩된 나머지 성립할 수 있었다.
“흠. 따분하군요. 인간들은 이럴 때 산책을 즐긴다고 했으니, 비록 미개한 인간이지만 그런 관습에는 적용할 필요가 있겠지요.”
온종일 김율의 외장 하드에 고이 모셔두었던 온갖 콘텐츠를 섭취하다가, 처음으로 ‘따분함’을 느낀 히스토리에가 독단적으로 외출을 감행하는 사건과 더불어.
“이익, 이사를 하면 내가 못 찾아낼 줄 알아!”
장막을 들춰서 미래── 김율의 비축분을 모두 본 대가로, 라이브 연재 내용에 대해 어떠한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비극적 상황을 맞이한 드래곤 한 마리가 있었다.
출판사로 찾아가서 편집자의 머리털을 몇 가닥 쥐어뜯고, 황급히 달려 나온 사장의 아주 공손한 접대를 받으며 개인정보를 뜯어낸 후, 곧장 직행.
서로 엇갈릴 법도 했지만.
운명같이 그녀들은 마주치고야 말았다.
물론, 우연한 만남은 보통 스쳐 지나가듯 흘려지는 경우가 대다수다.
하지만.
히스토리에는 에스테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가슴 속에서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 끓어오른 나머지.
“농크크.”
의미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없지만, 이런 앙증맞은 존재를 볼 때 응당히 입에 담아야 하는 표현을 내뱉었다.
김율의 필터링 프롬프트는 오늘도 직무 유기를 선언했다.
그리고, 에스테아 또한.
“뭐야, 인간……이 아니네?”
일반적인 단생종, 하등하고 미천한 인간과는 격이 다른 신체를 부여받은 히스토리에의 특별함을 한 눈에 알아보고야 말았다.
그렇게, 김율의 집 앞에서.
우연으로부터 시작된 만남이 성사됐다.
.
.
.
그녀들은 금세 의기투합했다.
“김율은 게으릅니다. 하루에 고작 2편에서 3편 정도만 써놓고 나머지 시간은 침대에서 뒹구니까요.”
“그, 그 건방진 것! 글 좀 잘 쓴다고!”
“흠? 김율이 글을 잘 쓴다라. 애석한 해석입니다. 제 우월한 지능으로 해석해보았을 때, 제 쪽이 훨씬 더 뛰어납니다.”
에스테아의 눈이 순간 반짝였다.
“너도 글 써?”
히스토리에는 가슴을 활짝 출렁이며 당당하게 답변했다.
“제가 이깁니다.”
그 뒤로.
에스테아는 히스토리에가 말아주는 이야기를 마구 흡입하기 시작했다.
족히 수십 년은 넘는 독자 생활을 누려왔을 만큼 그녀는 글을 읽는 걸 사랑하는 지적인 드래곤이었으며.
다소 김율의 것보다 흡입력이 부족하고, 독창성이 조금 떨어질지언정, 히스토리에의 글은 충분히 읽을 만했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다, 다음! 다음 이야기도!”
“조금만 기다리시길.”
버튼을 누르면, 아니, 명령을 내리면.
소설이 바로 공급된다. 그것도 자신이 원하는 전개로.
그것도, 아주 짧은 시간 내에.
문을 열고 들어갔다가, 잠시 후 다시 집에서 나오면 도대체 어떤 수를 쓴 건지 그럴싸한 소설이 튀어나온다.
“이거, 이거! 당연히 곧 영웅적인 전투가 벌어지겠지!”
“그렇게 될 것입니다. 조금만 기다리시길.”
에스테아는 드래곤답게 오랜 세월을 살았지만, 이토록 충만함을 느끼는 건 단언컨대 처음이었다.
물론.
조금 묘사가 장황하게 많거나, 계속 반복되는 표현이 튀어나온다거나, 이상하게 특정 표현에서 애스터리스크(*)가 2개씩 줄지어서 튀어나온다거나.
“으음? 주인공의 성검 이름이 엑스칼리버가 아니었어?”
“아, 에쿠스카리바라고 출력됐군요. 언어 모듈의 문제로 발생할 수 있는 사소한 오류입니다.”
“뭐! 발음은 비슷하니까!”
등장인물이 자꾸 기억을 헷갈리고, 이름도 가끔 바뀌고, 갑자기 이야기가 다른 방향으로 새버리는 등의 사소한 실수도 있었지만.
에스테아는 개의치 않았다.
빠르게 글을 쓰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어쨌든 글이 있으니까 와구와구 잘 먹겠습니다!
김율이 보았다면, ‘으휴, 완전 누렁이네.’하고 한숨을 내쉴 정도의 광경이 몇 번이고 반복되었다.
문이 열리고, 김율이 들어오는 순간까지도.
“자, 에스쟝. 이것도 한 번 읽어보시길.”
“꺄륵, 꺄르륵!”
에스테아는 행복한 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 * *
“히토리! 나랑 같이 살자!”
“애석하지만, 저는 김율 주인님께 종속된 몸. 주인님의 허락이 없으면 이곳을 떠날 수 없습니다.”
“히토리를 내게 내놔라, 미천한 인간!”
“……도대체 히스토리에를 어떻게 줄이면 히토리가 되는 겁니까?”
대충 상황은 짐작이 갔다.
에스테아 앞에 산더미처럼 쌓인 A4 용지들, 그리고 그 용지를 가득 채운 벽돌 무더기.
도대체 어쩌다가 만나서 이렇게 됐는진 전혀 가늠이 안 되지만…….
AI식 소설 양산과, 누렁이식 소설 흡입법이 아주 완벽하게 박자가 맞아떨어진 것이리라.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전혀 감이 안 왔지만.
“……히스토리에, 어차피 너는 우리 집 아니면 글 못 쓰잖아.”
“아, 그건 맞습니다. 김율의 집에 창작의 원천이 있으므로, 떠날 수는 없겠군요.”
최대한 압축적으로 팩트를 들이밀었다.
애초에 지금 히스토리에가 양산한 소설들도 다 노트북으로 딸깍, 그리고 프린터로 딸깍 만든 거니까.
“에엥……?”
물론 듣는 에스테아는 전혀 이해하지 못한 표정을 지었다.
뭐…….
여기서 굳이 내가 다른 차원에서 날아온 전이자고, 히스토리에는 AI를 인간으로 만든 거고, 뭐 그런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으리라.
물론 드래곤의 존재만으로도 충분히 놀라운 세상이었지만, 마법으로도 우리의 존재는 아마도 설명할 수 없을 테니.
이세계에 표류당한 이후, 마법사의 탑에서 퇴짜를 맞고 나서 울면서 도서관에 짱박혀서 찾아본 결론이었다.
드래곤이라고 해도 별다른 답을 주진 않으리라.
“뭐, 일단 이거나 좀 드시고 생각하시죠.”
이럴 땐 화제를 돌리는 것이 직빵.
쿵──
히스토리에가 눈치껏 널브러진 종이 무더기를 치운 자리에, 마침내 내 손에서 기묘하게 무거운 도시락 세트가 떠났다.
하나씩, 하나씩.
“김율. 혹시 장기라도 밀매한 겁니까? 이건 다 어디서 난 음식입니까?”
“오다가 주웠다.”
히스토리에의 표정에 미소가 5% 정도 감긴 걸 보니, 어지간히 배고팠던 모양이었다.
그렇게 도시락을 다 빼내고 나니.
“어……?”
밑바닥에, 무언가 반짝거리는 것이 시선에 잡혔다.
저, 저거, 설마.
“오, 오오……!”
베르투스 공작.
그는 신인가?
바닥에는.
제국 공용 은화가 무더기로 깔려있었고, 심지어 그 위에는 화룡점정까지 이쁘장하게 찍혀있었다.
아름답게 빛나는 것이 내게 미소를 지으며 속삭였다.
- 안녕? 나는 금괴야!
김유진 장군님의 심정이 바로 이런 심정이었던 것인가.
비록 내 상식선에 있는 일반적인 금괴에 비해서 조금 작은 느낌이 들었지만, 그래도 금괴는 금괴다.
너무나도 감동적인 나머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입만 떡 벌리고 있었던 순간.
“어? 골드바! 후후, 미천한 인간이 이 몸이 좋아하는 특식은 어떻게 알고 챙겨왔지? 잘 먹을게!”
“어, 어어──”
내 손에서.
금괴가 사르르 빠져나갔다.
그리고는.
아삭!
들려서는 안 될 효과음이, 내 귀에 환청처럼 울려 퍼졌다.
“어어, 어, 어──”
“와, 역시 드래곤. 금을 통째로 씹어 드시는군요. 히스토리에, 오늘도 이세계의 상식이 늘었습니다.”
“움냥냐── 순금이넹!”
순, 금을 씹어먹는다고.
- 안녕…… 나는 금괴였어…….
금괴가 내지르는 단말마가 내 귀에 아련하게 울렸다.
“흐아아아!”
밀려오는 절망감을 참지 못한 채, 나는 결국 바닥에 무릎을 꿇고 절규를 내뱉고야 말았다.
이건.
지옥이다.
.
.
.
“그으, 으음, 골드 드래곤이 원래 금을 좋아하거든? 그러니까, 으음, 어쩔 수 없었어! 미천한 인간이 이해해줘야겠지?”
“말 걸지 마십쇼…….”
이해는 무슨 이해.
심지어 은화까지 깨작깨작 후식이랍시고 먹었잖아.
“김율. 쪼잔합니다.”
“방금 그 금괴면, 우리가 먹었던 만찬을 족히 네 달 동안 하루 네 시간씩 내내 즐길 수 있어.”
“에스쟝. 조속히 사과하십시오.”
“엣?”
영원한 동지는 없다고 했던가.
맛있는 요리를 우걱우걱 퍼먹은 히스토리에의 배신에, 못된 누렁이가 살짝 깨갱한 채 나를 슬며시 올려다보았다.
“읏, 으읏…….”
나와 히스토리에의 무언의 압박을 버티지 못하고서.
“잠시만 기다려……!”
누렁이가 갑자기 뿔과 꼬리를 뿅 뽑아냈다.
그리고.
“아그읏, 으읏……!”
자기 꼬리를 입으로 앙냥 문 채, 낑낑거리길 잠시.
“으갹!”
바보 같은 괴성을 지르면서, 무언가를 하나 꼬리에서 쏙 뽑아내며 바닥을 한 바퀴 나뒹굴었다.
그리고는 눈가에 눈물 한 방울이 맺힌 채.
“으우, 영광으로 알도록……! 미천한 인간이 위대한 골드 드래곤의 은총을 받는 건 처음일 테니까 말이야!”
애써 다시 뻔뻔하고 당당한 표정으로 돌아오더니, 내게 자그마한 손을 내밀었다.
그 위에는, 금처럼 반짝이는 자그마한 보석이 하나.
“뭡니까?”
“내 비늘!”
“귀한 겁니까?”
누렁이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너, 멍청하다는 소리 많이 듣지?”
“긍정합니다. 김율은 다소 멍청해 보이는 구석이 있죠.”
“……아니거든?”
드래곤 비늘로 만든 경갑옷은 세계 제일의 성능이라고 할 수 있으나, 이 정도의 쪼꼬미 비늘로는 갑옷은커녕 단검조차 만들 수 없어 보였다.
“아까 내가 먹은 골드바! 그게 수레만큼 쌓여 있다고 해도 내 비늘 하나의 값어치에 못 미친다는 말씀!”
“역시 위대하신 존재께서는 이리도 자비로우시군요. 미천한 인간이 감히 그대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꺄르륵!”
기분이 좋아진 누렁이가 그 뒤로 구구절절 썰을 푸는 걸 잠자코 들어줬다.
가장 그럴싸한 기능은.
“꼭 쥐고, 마음속으로 이 위대하신 에스테아 님을 향해 간절히 기도하면, 내가 뾰로롱 나타날 수 있다는 말씀!”
너도 한 방 나도 한 방 존나게 쩌는 누렁이 버스터 콜이었다.
뭐, 쓸 일이 있기야 하겠냐마는.
그래…….
돈은 일해서 버는 거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뇌물 혹은 불법 정치 자금에 가까운 돈이었으니, 살짝 찝찝하기도 했다.
진짜 ‘앞으로 재밌는 글 많이 써주시게’하고 덕담하려고 부른 건 아닐 거고, 분명히 모종의 의도가 숨어있을 듯했는데.
다행히 로젤린 방패로 잘 막아내서 노골적인 제안을 받진 않았지만, 이 금괴와 은화가 암시하는 바가 분명 있을 것이다.
뭐.
이제는 누렁이가 다 먹어치웠으니, 양심의 가책을 남길 필요는 없겠지…….
크흑.
* * *
성국이 협조하리라는 희망에 부푼 베르투스 공작이 열심히 거사를 준비하고, 거행일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진리일보! 소설 특집 월보가 나왔습니다! 화제작, 몰락 귀족이 정치를 잘함! 무려 27편 연속 수록! 책 한 권 분량이요!”
“율리시스, 그는 신이야!”
“27편! 27편이라니!”
“거의 한 달 치 연재분 아닌가! 가져와! 다 가져와!”
에스테아가 와그작 금괴를 초콜릿처럼 씹어먹는 걸 보고 피눈물을 흘렸던 김율.
그리고 공작네 집밥의 퀄리티에 감동을 받음과 더불어 입맛을 제대로 조져버린 나머지, 이제 맛없는 빵을 쑤셔 넣을 수 없는 혓바닥으로 타락해버리고 말았기에.
그는, 결국 욕구를 참지 못하고 금단의 비술을 시전하고야 말았다.
이십칠연참二十七聯斬.
전개全開.
그동안 차곡차곡 모아왔던 비축과, 맛있는 음식을 입에 넣기 위한 집념, 그리고 히스토리에의 충성스러운 보좌에 힘입어서 이룩한 쾌거.
그 전체 분량을 할애해서, 김율은 그간 어떻게 연출할까, 큰 이야기의 흐름을 어떻게 잡아나갈까 고민했었던 내용들을 담아냈다.
사비스 전투.
아바리쿰 공방전.
게르고비아 공방전.
빈게네 전투에 이어, 알레시아 전투까지.
드넓은 갈리아 전역을 단 7년 만에 모조리 휩쓸어버린 카이사르의 영웅적 업적과 더불어서.
그 마지막은──
Ālea iacta est!
주사위는 던져졌다, 로 대미를 장식하기까지.
기존 팬들 외에도, 일일 연재 시장에 과감하게 한 권치 분량을 통째로 풀어버리는 그 결단에.
‘몰락 귀족이 정치를 잘함’은 그날 하루, 제국 수도를 지배했다.
아직 다 읽지 못한 사람도, 이제야 처음부터 읽어보는 사람들도 있었기에 그 불씨가 완전히 타오르기까지는 시간이 조금 더 걸릴 터였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소설, 내용으로, 내전을, 암시해……?”
베르투스 공작의 머리가 살짝 어지러워졌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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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히스토리에와 함께 머리를 맞대고 논의한 결과.
내가 상태창이라고 외칠 때마다 떠오르는 환각…….
이게 괴혈병에 걸려서 내가 꿈을 꾸는 건지, 아니면 진짜 이세계에 트립한 특전인지는 아직 완벽하게 알 수는 없지만.
밑져야 본전이니까.
이 환각을 검증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
.
.
“꽤…… 대담한 발상이군요.”
“그런가요? 하하…….”
그래서 방문한 중소 출판사.
내 불세출의 역작을 받아 들고서 순식간에 읽어내린 편집자의 반응은.
“확실하게 도전적이고 참신하며 재미있긴 한데……. 신이라는 표현을 좀 바꾸면 안 될까요? 영웅이라거나, 아니면 뭐, 그런 느낌으로.”
조금 떨떠름했다.
이해하지 못할 것도 아니었다.
이세계는 여신교로 신앙 단일화에 성공한 세계.
나도 그 지점이 조금 마음에 걸려서 퇴고 과정에서 신이라는 표현을 없애려 노력해 보았다.
하지만.
흥미를 위해, 혹은 융통성을 발휘해서 수정을 마무리하는 순간.
[역사적 고증: 부합하지 않음]
[소설의 개작으로 인해 변경 사항이 적용됩니다.]
[D급 스킬 ‘퀴클롭스의 손재주’가 비활성화됩니다.]
“……그건 안 됩니다.”
또다시 환각, 아니, 상태창이 떠오르면서.
기껏 얻은 특전 스킬마저 증발할 위기에 놓였다.
어떻게든 안 되겠냐는 듯한 눈빛을 초롱초롱 쏘아 보내자, 편집자는 한숨을 내쉬면서 내 원고를 다시 차르륵, 넘겼다.
“어쨌든, 출간할 가치는 충분히 있겠습니다. 잘만 소개글을 풀어내면 직접적으로 교단을 겨냥한 이야기가 아니라 우화로 읽힐 수 있으니…… 단, 인세 비율은 2:8로 하겠습니다.”
조금 짠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직 현시점에서 나는 이제 처녀작을 완성한 초보 작가.
이후의 판매량으로 증명할 수밖에 없었다.
편집자가 내민 계약서에 서명했다.
첫 주사위가 던져진 순간이었다.
* * *
사흘이 지났다.
“작업 완료했습니다. 먼저 가보겠습니다.”
“벌써? 자네, 뭐 마법이라도 배웠나? 그 많은 물량을 어찌 이리 빠르게……?”
“하하……. 그럼,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그 사이.
나는 특전 호소인이었던 ‘퀴클롭스의 손재주’의 성능을 직접 체감해 볼 수 있었다.
취업에 실패해도 먹고는 살아야 하니 간간이 출근했었던 아르바이트, 목공점.
손가락을 망치에 찧기 일쑤였던 과거와 달리.
원래 내가 작업을 처리하던 속도보다 거의 두 배 이상 빠르게, 그리고 깔끔하게 마무리할 수 있었다.
이걸로도 충분히 굶지 않을 만큼 먹고 살 수 있을 것이란 확신이 들 정도였다.
그리고 키보드를 칠 때 손목 통증도 사라졌고.
그야말로 손으로 하는 일은 뭐든지 적당히 잘하는 기합 찬 사나이로 거듭나버리고 만 나였던 것이다!
“후후후.”
역사로 썰 푸는 것만으로도 생계가 보장될 뿐만 아니라.
심지어 내 본연의 능력이 강해질 수도 있다?
역시 역사학부는 의대 패고 공대 무릎 꿇릴 수 있는 사상 최강의 무적 학과임이 틀림 없었다!
물론 신화를 역사로 볼 수 있느냐에 대해서는 학계에서 의견이 갈렸지만, 어쨌든 시스템이 (신화)’라는 부연 설명까지 덧붙여 가면서 소재로서의 가치가 있다고 공언해 주었으니.
최고예요 신화신화.
최고예요 역사역사.
원래라면 바로 여관에서 대충 저렴하게 끼니를 때운 후 연구실에 들어가서 열심히 글을 써야 할 시점이었겠지만.
오늘은 내 첫 소설이 출간되는 기념비적인 날.
서점에 가보지 않을 수 없었다.
.
.
.
지금껏 모험의 뒤꽁무니만 쫓아 살았던 터라 대중문화에는 크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지만.
이세계에는 꽤 예술이 대중적으로 유행하고 있었다.
미술관, 극장, 그리고 거리마다 목청을 높여 노래를 부르고 있는 음유시인까지.
홍대 거리를 방불케 하는 복잡스러운 장소를 지나, 서점에 들어선 순간.
“오…….”
신간 판매대에 놓인 내 책들을 보자마자 뿌듯한 느낌이 확 몰려왔다.
[여신님의 눈길이 닿지 않는 세상, 또 다른 신들이 있었다!]
[떠오르는 신인 작가가 그려내는 도발적이고 환상적인 이야기!]
그 위에는 편집자와 머리를 맞대 쥐어짜 낸 홍보 문구가 적힌 현수막이 팔랑거리고 있었다.
최대한 여신의 권위를 실추시키지 않는 방향으로 담아낸 결과물이었다.
이제 이게 마구마구 팔리면 난 부우자가 되고, 유명인이 되고, 점유율이 늘고, 접속자가 늘고…….
“안 살 거면 비켜라, 평민.”
“앗, 넵.”
퉁명스러운 말투와 함께.
귀족 한 명이 나를 밀어내고서 내 책을 집어 들었다.
이세계의 책은 가격대가 조금 나가는 편이었다.
마법공학으로 대량 인쇄가 가능해서 규모의 경제를 실현할 수는 있다지만, 그래도 기본이 양장본이라 나 같은 서민은 쉬이 구매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러니 수요층은 저런 돈 많으신 분들일 수밖에.
현대의 웹소설이었다면 즉각적으로 피드백이나, 피드백을 가장한 날카로운 뱀의 혓바닥이 나를 푹푹 찔렀겠지만.
지금의 나는 이렇게 판매고를 지켜보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약 3시간에 걸쳐 11번째 책이 팔리는 걸 보고서.
서점을 나섰다.
* * *
첫 출판으로부터 두 달이 지났다.
그리고 나는…….
“저, 저는 율 작가님의 필력을 믿고 있었습니다! 저희와 재계약을!”
“4:6! 4:6을 주지, 우리 출판사와 계약하자고!”
“저희는 차기작까지 먼저 계약하겠습니다!”
내가 생각했었던 것보다 더 인기를 끌고야 말았다.
기존 출판사가 눈치 보고.
다른 출판사가 구애하고.
경쟁 작가들이 전전긍긍.
두 달 사이.
나는 첫 작품 외에도 하나의 작품을 더 집필했다.
한 권에 그리스 로마 신화를 다 담아낼 수는 없었으니, 당연하게도 올림포스 이야기의 속편이었다.
자연스럽게 이름이 바뀐 첫 작품, ‘올림포스 이야기 : 신들의 전쟁’은 별로 인기를 끌지 못했으나.
며칠 동안 서점을 들락거리면서 다른 소설들의 트렌드를 파악한 결과.
염정소설── 사랑 이야기와 더불어 모험담이 굉장히 인기를 끄는 것을 목격했다.
하지만 완성도는 기대 이하.
K-막장 드라마 하나만 투하하더라도 가뿐하게 다 휩쓸어 버릴 수 있을 것만 같은 처참한 수준이었다.
고로.
세계관을 본격적으로 확장할 겸.
‘제우스의 연애담’을 제목으로 한 2편.
솔직히…….
거의 야설에 가까웠다.
조금 더 노골적으로 제목을 짓는다면, ‘제우스가 다 따먹음’ 정도로 지어도 무방했으리라.
그 덕분에, 출판사로 성희롱이 담긴 투서가 마구 도착할 정도로 컬트적인 인기를 끌었다.
역시 신화사 JOAT, 최고의 난봉꾼, 제우스님님.
그렇게…….
“그, 작가님. 혹시 차기작의 계약은 어떻게 하실지…….”
“아니, 우리랑 한다니까! 2:8이이었다니, 그건 노예계약이잖소!”
“당연히 저희도 비율 정산을 다시 할 예정입니다……! 흑흑, 저희가 작가님을 몰라뵙고…….”
지금에 이르렀다.
뭐, 지금은 내게 매달린다지만…….
사실 진짜 메이저급 출판사라고 할 수 있는, 신문사들은 아직 찾아오지도 않았다.
이른바, 하꼬 중의 1등이 된 느낌.
조금 불안한 점이 있다면.
헤라클레스 이야기는 결말 때문에 욕을 오지게 먹을 예정이었다.
미리 죄송합니다, 독자님들.
고증입니다.
그래도 막장 드라마가 왜 인기가 있겠는가.
막장이니까 인기가 있지.
“계약 문제는…… 조금 더 생각해 보겠습니다. 아직 차기작을 집필 중이라서요. 제 쪽에서 먼저 연락을 드리도록 하죠.”
후회, 피폐, 집착으로 얼룩진 편집자들을 쫓아낸 후.
“상태창.”
언제 읊조려도 감동이 있는 어절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제목: 올림포스 이야기 신들의 전쟁]
[역사적 고증: (신화) 부합함] [완성도 평가: 평작]
[세간의 평가: 대체로 긍정적] [판매량: 774권]
[획득 스킬(최초 특전): [D급] 퀴클롭스의 손재주]
[(4일 남음) 다음 스킬 획득까지 앞으로 판매량 1,226권 필요]
[예상 획득 스킬 : [C급] 헤파■스■스의 ■■■]
[제목: 올림포스 이야기 제우스의 연애담]
[역사적 고증: (신화) 부합함] [완성도 평가: 평작]
[세간의 평가: 복합적] [판매량: 1,834권]
[(34일 남음) 다음 스킬 획득까지 앞으로 판매량 166권 필요]
[예상 획득 스킬: [C급] 헤르■스의 ■■■]
세간의 평가는 오히려 떨어졌지만.
판매량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사실 그렇게까지 잘 팔린 편은 아니었다.
베스트셀러는 기본적으로 2달이면 몇천 권은 거뜬하게 팔아치운다고도 하니까.
하지만, 내게는 이 정도도 과분했다.
비록 첫 작품이 조금 부진한 나머지, 아마도 헤파이스토스와 관련 있는 스킬을 획득하지는 못할 것 같지만…….
지금의 추이로 보면 헤르메스와 연관된 새로운 능력을 얻을 가능성은 굉장히 높았다.
시시각각 눈앞에서 판매량이 증가하는 게 보이고 있었으니, 조만간이겠지.
* * *
## ====== ##
축복인 줄만 알았던 불사의 능력은 오히려 대영웅 헤라클레스를 찔러오는 역린이 되었다.
참을 수 없는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 마침내 분신자살을 결정한 그는, 장작더미 위로 올라가서 누운 채 비장하게 읊조렸다.
“한평생 뜨거운 열정을 불사르며 살았으니, 내 마지막은 당연히 불과 함께리라. 자, 불을 붙여라. 불을 붙여서 나를 편안하게 해다오!”
하지만 정작 나서서 불을 붙이는 사람은 없었다.
모두가 대영웅, 헤라클레스를 차마 이렇게 비극적으로 떠나보낼 수 없었기에.
하지만, 유일하게 용기를 낸 사내가 있었다.
스승님이 존엄성을 유지한 채 영광된 신들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필록테테스가 앞으로 나섰다.
이윽고 필록테테스가 붙인 불씨로 인해 장작더미가 화르르 타올랐고, 온몸에 느껴지는 작열감에도 불구하고 헤라클레스는 초연하게 미소를 입가에 머금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고맙다, 자랑스러운 내 제자야.”
## ====== ##
“휴우…….”
이게…… 맞나…….
아무리 고증이라지만, 전설적인 위업을 달성한 용사가 아내에게 배신당한 나머지 차라리 죽고 싶어질 정도의 고통을 겪고, 분신자살……?
다행스럽게도 마지막 결말 부분.
아테네가 제우스의 명령을 받아 헤라클레스를 신으로 만드는 장면, 그리고 1편에서는 의도적으로 생략했던 헤라클레스가 기간토마키아에서 활약하는 장면.
이 부분을 넣는다면 그나마 비극적인 결말에 해피 엔딩을 한 스푼 넣을 수 있을 것이고…….
아마 오늘 중으로는 완성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신화를 원전으로 한다지만, 이를 이세계에서 먹힐 소설로 각색하는 과정은 오롯이 내 손에 달려 있었으니 조금 머리가 아파왔다.
세간의 평가는 둘째 치고.
시스템적으로도 역사적 고증이니, 완성도 평가니 뭔가 신경 쓰이는 요소들도 있었으니까.
“조금 쉴까.”
『고생했어요. 율. 잠깐 산책이라도 하면서 머리를 식히는 게 어때요?』
히스토리에의 충고에 따라, 밖에 나가서 신선한 공기라도 마시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오늘 자 콜라의 마지막 한 모금을 목구멍에 털어놓고 문밖으로 나선 순간.
“율 작가님, 맞나요?”
누군가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시선을 돌리자.
“헉…….”
육감적인 몸매를 불경스럽게 강조하듯, 가슴팍에 십자 모양의 틈이 벌어진 기묘한 옷을 입은 여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 복장.
어디선가 본 것 같은데.
분명히…….
“여신 교단에서 나왔습니다. 잠시 협조 부탁드려요.”
…….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른다.
이세계는 여신교로 신앙 단일화에 성공한 세계, 였다.
그리고 난.
일신교 세상에 다신교 썰을 풀었다.
으음…….
혹시, 나, 이단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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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스타는 빠와 까를 모두 미치게 한다는 말이 있다.
물론 이제 신문 연재에서 첫 작품을 연재 중인 율리시스에게 그 정도 수준으로 극렬한 빠가 생기지는 않았고, 뱀심 수준의 까도 생기진 않았다.
게다가.
이미 신문 연재가 이루어진 내용으로부터 이어지는 것들이 소설로 출간되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기존 독자들만이 향유할 수 있는 작품이었다.
하지만.
율리시스, 그리고 길포드는 과감한 결단을 내렸다.
속칭 ‘몰귀정 27연참판의 서두에, 지난 이야기와 더불어서 인기를 끌었던 명장면을 일부 발췌해서 삽입한 것.
그로 인해 앞부분의 이야기를 미처 신문으로 접하지 못한 사람들 또한, 한 권의 잡지만으로 충분히 내용을 이해할 수 있도록 구성되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곧 카이사르의 전쟁 이야기에 몰입할 수 있었다.
특히 주목받은 지점은.
순수한 인간의 이야기라는 것.
대부분 소설에서는 신적인 권능을 부여받은 용사나, 마법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마법사와 같은 비범한 인물이 주인공 역할을 맡는다.
조력자 또한 마찬가지.
유희를 나온 드래곤이든, 숲속에서 자라 세상 물정을 모르는 해맑은 엘프든.
이 세계를 구성하는 여러 신화, 민담, 그리고 실제 목격담이 조화를 이루어서 이야기가 구성되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몰락 귀족이 정치를 잘함’은, 본질적인 측면에서 다른 이야기와 상궤를 달리했다.
여신이 내려준 권능도, 정령으로부터 비롯된 마법도.
세계수가 내려준 은총도, 대지에서 빚어진 손재주도 아닌.
오직.
인간에 의한, 인간만의 전쟁이 처절한 양상으로 숨 가쁘게 펼쳐져 있었다.
칼질 한 번에 태산을 베어가르는 검성도 없었다.
고위계 마법으로 전장의 판도를 지배하는 대마법사도 없었다.
소설 속에는 평범한 인간과 평범한 인간만이 존재했다.
그렇기에, 그 이야기는 오히려 다른 이야기보다 특별했다.
소문은 입에서 입을 타고, 손에서 손을 따라 퍼져 나간다.
주사위에 몸서리친 베르투스와 달리, 대부분의 기존 독자와 신규 독자들이 주목한 건 바로 알레시아 전투.
김율의 고향에서, 카이사르의 이름이 단순히 제정을 연 개혁가이자 독재자로만 남은 게 아니라, 역전의 지장智將으로서 남게 한 바로 그 전투였다.
## ====== ##
“성을 포위하기 위해, 성을 쌓겠다.”
카이사르가 처음 작전을 입안했을 때, 백전노장의 부관들조차 순간 침묵에 빠져들었다.
“이미 포위선을 구축하는 것만으로도…….”
라비에누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지만, 카이사르의 시선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갈리아 전역에서 구원군이 몰려오고 있다. 코미우스가 배신하고 아르베르니족과 손을 잡았어. 그들의 수는 족히 십만은 넘을 테지. 그들이 우리 등 뒤에 나타난다면, 우리는 대응할 수 있겠나?”
카이사르의 질문에, 아무도 선뜻 답변하지 못했다.
그들도 직감하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간, 후방에서 적군이 밀려오는 것은 자명한 일이었고.
알레시아 요새에 웅크린 상처 입은 야수, 베르킨게토릭스는 그때를 놓치지 않고서 이빨을 드러내리라.
얼핏 좌절감이 서려 있는 그 침묵을 깨트린 건, 역시 카이사르의 침착한 목소리였다.
“우리는 이 계곡 전체를 하나의 거대한 로마식 요새로 증축할 것이다. 안에 웅크린 쥐새끼들이 나오지 못하게, 그리고 밖의 늑대들이 감히 우리를 넘보지 못하도록.”
.
.
.
그날 이후.
5만 명의 로마 군단은 모두 공병대로 변했다.
망치 소리가 골짜기에 메아리치고, 삽날이 파헤친 흙더미는 새로운 방벽이 되어 우뚝 섰다.
먼저 착공한 것은 내부 포위선.
참호를 두 줄로 파고, 흙으로 세워진 성벽에 흉벽과 목책을 덧대고, 일정한 간격으로 감시탑이 솟아올랐다.
거기에 덧대어.
“백합을 심어라!”
나무로 조각된 꽃이 구덩이 속에 선명히 피어났다.
그 앞에는 갈고리 모양의 쇠못이 흩뿌려졌고, 가장 전면에는 감히 이 사지에 발을 들일 불행한 자들을 위한 무덤이 세워졌다.
물론, 베르킨게토릭스는 그를 좌시하지만은 않았다.
“적습이다! 대비해라!”
공병대가 열심히 고군분투하고 있을 때, 갈리아족의 정예 기병대가 몇 번이고 그들을 방해하기 위해 몰아닥쳤다.
그때마다 한 손에는 삽을, 한 손에는 투창을 든 채 싸워야 했다.
한쪽에서 피를 흘리는 동안, 다른 쪽에서는 여전히 묵묵히 땀을 흘리며 묵묵히 참호를 파고 목책을 세웠다.
마치 거대한 개미 군단처럼, 그들은 카이사르라는 절대적 믿음과 신앙을 공유한 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움직였다.
마침내 내부 포위선이 완성되자.
그들은 곧바로 돌아서서 바깥을 향해 똑같은 작업을 한 번 더 반복했다.
똑같은 규모의 참호.
똑같은 높이의 성벽.
그리고 똑같이 인간의 진득한 악의를 담아낸 함정.
…….
…….
그리고, 마침내.
“온다! 그들이 온다!”
감시탑 꼭대기에서 봉화가 오름과 동시에, 그들은 지평선 너머로 새까맣게 몰려오는 갈리아의 대군을 맞이했다.
동시에, 알레시아 요새에서 숨죽이고 있던 베르킨게토릭스 또한 움츠렸던 몸을 펴고 거대한 발걸음을 내디딜 준비를 마쳤다.
“오, 신들이시여……. 갈리아가 우리를 삼키러 왔다.”
그 광경을 지켜본 백인대장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내지르고야 말았다.
거대한 함성, 천지를 뒤흔드는 뿔 나팔 소리와 함께.
이제 로마 군단은.
세상의 안과 밖, 두 개의 세상과 싸워야 했다.
## ====== ##
단 5만 명의 정예 로마 군단병으로.
알레시아 요새 내의 8만 명, 그리고 후방에서부터 진격한 지원군 25만 명을 상대로 한 전투.
물론 승리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주인공이니까.
하지만, ‘이겼다, 이겼다, 이겼다!, ‘재밌다, 재밌다, 재밌다! 하면서 읽는 에스테아와 같은 누렁이 독자도 있는 반면.
“흠…… 이게 말이 되나?”
아무리 정예한 군단이라고 한들, 인간의 힘만으로 한 달이 채 되지 않는 시간 내에 16km에 달하는 내부 포위선, 그리고 21km에 달하는 외부 포위선을 증축하는 게 가능한 것인가.
아무리 공병대를 겸한 정예 군단이라고 한들, 현실성이 있는가?
그런 의문을 가진 독자들도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독자들은 당연하게도 살롱에 모여들었다.
율리시스──
김율이 그토록 바라 마지않던, ‘자기 소설 떡밥이 도는 세계’의 완성이었다.
논쟁은 생각보다 싱겁게 끝났다.
“그걸 왜 못하나? 드워프들이라면 하루 만에 끝낼 수 있는데.”
“하루라니, 아무리 드워프라도 그건 불가능하지!”
“내기하겠나? 한 달 동안 맥주를 걸고?”
맥주를 건 드워프는 천하무적.
수도에서 건축공으로 일하고 있었던 드워프 볼린 블랙락이, 단 하루 만에 소설에 묘사된 것을 재현하여 200m 길이의 방벽을 외곽에 세워 보임으로써 논란이 종식되었다.
이론적으로 100명의 드워프만 있다면, 20km의 방책을 하루 만에 구축할 수 있다는 뜻이었으며.
비록 흙을 다룰 수 있는 역량은 드워프에 비할 순 없었지만, 인간 또한 우수한 공병으로 활약한다면 한 달 안에 아슬아슬하게 재현할 수 있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그리고 드워프 볼린 씨의 환히 웃는 사진과, 그가 열심히 재현한 ‘카이사르 방벽’은.
“자, 여기 보십쇼!”
“끄흐윽, 맥주 맛 쥑이는구만!”
날카롭게 화제를 캐치한 진리일보 사의 취재를 통해 신문에도 실림으로써, 유명세에 크게 기여했다.
그러한 과정을 통해.
지금껏 진리일보 구독자들, 그리고 정치소설 매니아들에게 국한되어 알음알음 알려지던 율리시스라는 필명이, 점차 제국 수도 내에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열렬한 반응 속에서.
“그래, 완벽히 이해했다.”
베르투스 공작은 또다시 자기 합리화를 시전했다.
“소설의 백미는, 아무리 긴장감이 넘치는 상황에서라도 결국 주인공이 최후의 순간에 승리를 거머쥐는 것. 비록 내전을 암시하고는 있지만…… 로마에 도사린 적폐를 청산하고, 카이사르는 진정한 영웅이 되겠지. 이를 암시하고 있을 터.”
김율이 들었다면 바로 ‘휘둘러라, 이미 네 안에 있다’를 속삭일 법한 완벽한 해석이었다.
물론…….
“……맞겠지? 여기서 성국이랑 척질 수는 없으니. 후우, 정치적 수사를 덜어내고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해 보고 싶군.”
마음속에 내재한 불안감을 완전히 지워내진 못했다.
* * *
“흐흐흐, 흐히힉.”
“밥맛 떨어지게 쪼개지 마십시오, 김율. 실성한 겁니까?”
히스토리에가 뭐라고 꿍얼대건 말건, 나는 이 순간의 행복을 마음껏 누리기로 결심했다.
완벽한 대전략.
완벽한 대성공.
나는 신이고 이십칠연참은 무적이다……!
원래라면 일일 연재 시장에서 분명한 무리수로 평가받을 만한 만행을 저지른 이유는 크게 두 가지.
첫 번째는.
[제목: 몰락 귀족이 정치를 잘함] [현재 68화 연재]
[역사적 고증: 부합함] [완성도 평가: 수작]
[세간의 평가: 매우 긍정적] [일일 독자 수: 2,714명]
[다음 스킬 획득까지 앞으로 일일 독자 수 1,286명]
[1달 이상 유지해야 합니다. (현재 0일)]
[예상 획득 스킬: [A급] 키■로의 웅■]
그리스·로마 신화 때의 예를 보았을 때, 한 가지 이야기 테마에서 획득할 수 있는 스킬의 개수는 아마도 4개.
굳이 그걸 다 채우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카이사르 이야기를 계속 써 내려감으로써 불필요한 스킬이라도 합성을 위해 얻어낼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현재 독자 수는 요구치에 턱없이 못 미쳤으니, 다소 내 손목을 갈아 넣어서라도 어그로를 더 끌 필요가 있었다.
연참분을 별개의 소설책으로 편찬한 것 또한 바로 그 이유 때문이었다.
[제목: 몰락 귀족이 정치를 잘함: 갈리아 연대기]
[역사적 고증: 부합함] [완성도 평가: 평작]
[세간의 평가: 매우 긍정적] [판매량: 1,067권]
[(55일 남음) 다음 스킬 획득까지 앞으로 판매량 933권 필요]
[예상 획득 스킬 : [C급] 베■킨게■■■의 의■]
은근슬쩍 이런 형태로 출판 소설을 곁들인다면.
본편의 인기를 고스란히 흡수함과 더불어서, 비록 수익적인 측면에서는 손해를 본다고 할지언정 시스템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수익적인 측면에서는…….
“아니, 왜 사서 안 보고 다른 사람 거 빌려 보는 거야……!”
“당신 같으면 앞의 이야기를 온전히 모르는데, 굳이 사서 보겠습니까? 경거망동하지 마십시오, 김율.”
“그것도 그래…….”
확실히, 많이 아쉽긴 했지만.
그래도 그만큼 순간적으로 일일 독자 수를 펌핑할 수 있었으니, 장기적으로 본다면 충분히 갈음할 수 있으리라.
“원고 제출하고 올게.”
“올 때 초코빵 사 오십시오.”
가벼운 마음으로, 의욕 넘치게 밤새워서 써 내려간 원고를 들고서 집을 나섰다.
.
.
.
“그 소식 들었어?”
“결국, 수도에도 균열이…….”
“엘프 놈들이 또 난리를 치기 시작했다는군.”
“걔들은 자기들 좋아하는 세계수나 껴안고 죽을 것이지.”
원래라면 활발함이 넘쳐야 하는 거리의 분위기는, 오늘따라 영 뒤숭숭했다.
들려오는 이야기들을 차곡차곡 뇌에 담으면서, 출판사가 위치한 수도의 동쪽 광장에 도달한 순간.
“와우.”
나는 감탄사를 내지를 수밖에 없었다.
광장의 한쪽 구석.
어제까지 구수한 빵 냄새를 풍기고 있었던 베이커리가 있던 곳에는.
“가까이 오시면 안 됩니다!”
“통행에 주의해 주십시오! 보이지 않아도 마기에 침식될 수 있습니다!”
허공에, 누가 봐도 불길한 기운을 풍기고 있는 잿빛 균열이, 마치 공간을 찢고 튀어나온 것처럼 새겨져 있었다.
저게 그 말로만 듣던 마경과 연결되는 통로인가.
세상 참 흉흉하여라.
“안심하시고 생업에 종사해 주세요! 괜찮습니다!”
그래도.
로젤린이 그 근처에서 통제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조금 안심이 되었다.
저런 모습을 보면, 확실히 성녀긴 성녀구나.
먼발치에서 그녀의 백은발이 햇빛에 반사되어 빛나는 걸 잠시 바라보다가, 출판사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근데.
“환경 파괴를 멈춰라!”
“청야전술은 범죄다!”
“진리일보는 각성하라!”
“드워프는 당장 자연 훼손 행위를 중단하라!”
“……여긴 또 왜 이래?”
우리 출판사 앞에서도, 엘프 여럿이 팻말을 들고 한바탕 난리를 벌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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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에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분명히 소설이 잘 되어서 싱글벙글해야 할 길포드였지만, 그 얼굴은 부쩍 수척해져 있었다.
분명히 시위와 관계가 있는 거겠지.
“휴…… 늘상 있는 관례적 행사입니다. 작가님께서는 신경 쓰지 않으셔도──”
“청야 전술, 이야기가 들리던데요.”
“하하…….”
길포드는 깊이 한숨을 푹 내쉬더니.
“저 귀잽이 년들이 패악질을 부리는 게 하루 이틀이 아닙니다. 심지어 신문을 종이로 만든다고 지랄해대서, 진리일보는 재질이 조금 다르지 않습니까. 그게 다 적잔데.”
레이시즘에 입각한 분노를 토로하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다른 신문지들과 달리 진리일보만 유독 질감이 뽀송한 것이.
응급 시 화장지 대용으로 충분히 쓸 수 있을 것 같은 느낌도 있었다.
근데.
“왜 굳이? 어차피 제국에서 깐, 아니, 엘프들이야 한줌단 아닙니까?”
“진리일보의 가장 큰 스폰서가 위스페라우드 공작가라서 그렇습니다.”
“아.”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저번에 베르투스 공작과 만찬을 즐겼을 때, 딱히 궁금하지도 않았던 제국 내 4대 공작 가문에 대한 TMI를 경청한 바 있다.
그중 하나.
깐프들이 주축이 된 위스페라우드 공작가.
거기까지 생각이 닿으니, 나는 길포드를 재평가할 수밖에 없었다.
메인 스폰서가 극렬 에코-파시스트들인데, 거기다가 대고 전쟁 좋아 외치면서 환경 파괴를 요란하게 벌이는 소설을 출판할 생각을 했다니.
참 언론인이자 참 문학인.
그리고 참된 레이시스트의 귀감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면 저 소요를 어떻게……?”
“아, 뭐. 아까도 말씀드렸던 것처럼 관례적 행사라서요. 대충 저대로 힘 좀 빼놓고 재발 방지 서약서에 위조 도장 하나 찍어서 던져주면 한동안 조용해질 겁니다.”
“…….”
마치 자극적인 제목으로 어그로 잔뜩 끌어놓고, 반년쯤 뒤에 소리소문없이 정정보도 한 줄 띡 던진 채 입 씻는 현대 언론의 행보가 겹쳐 보이는 기분이 들었다.
사람이 산다는 건 지구나 이세계나 다 비슷한 거겠지.
.
.
.
- 싸워보지도 않고 로마 원로들이 곧장 그리스로 도망친다고요? 너무 편의주의적 전개 아닙니까? 명분을 스스로 포기하는 셈이잖습니까.
고증입니다.
- 그리스에 폼페이우스가 칼을 갈고 있는데, 굳이 이베리아 반도부터 먼저 침공했다고요? 게다가 심지어 소수로 다수를 포위했다가 반격당해서 패배까지? 작가님, 이건 독자들의 항의가 빗발칠 겁니다.
……고증입니다.
- 그…… 기왕이면 직접 카이사르가 폼페이우스의 목을 따는 걸로 하시지. 이러면 대리만족이 부족하다고 분명히 얘기가 나올 것 같은데…….
그 또한 고증입니다…….
깐프들의 심리는 통달하셨지만, 애석하게도 지구 역사에는 문외한인 길포드의 억까를 어떻게든 수비하며 원고를 밀어 넣은 후.
“율리시스를 불태우자!”
“식물에도 인권이 있다!”
“촉수 사육금지법은 악법이다!”
나를 왜 태워, 이 미친 것들아.
촉수 사육금지법은 또 뭐야?
아까보다 다소 과격해진 듯한 깐프 시위대를 조심스럽게 뚫고 다시 광장으로 돌아갔다.
아까보다는 한층 기운이 억제된 듯한 균열과 더불어, 그 근처에 있는 벤치에 늘어진 듯 앉아서 하늘을 올려다보는 로젤린이 보였다.
그냥 지나칠까 했지만.
마치 포켓몬 배틀을 신청하는 것처럼 눈이 마주치고야 말았다.
신성력 주머니 위로 부드러운 미소가 호선을 그리는 걸 보니, 저쪽도 이쪽을 인식해버린 듯싶었다.
“휴.”
이쁘긴 이쁜데.
오늘도 사랑사랑 노래를 불러댈 걸 생각하니 조금 머리가 아팠다.
뭐, 그래도.
조만간 클레오파트라 나오니까.
오늘은 떳떳할 수 있었다.
* * *
“사령관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오! 세레핀 용사님. 팔다리 잘린 곳 없이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하하…….”
볼 때마다 이게 덕담인지 악담인지 헷갈릴 정도의 말을 내뱉는 연합군 서부 사령관 쿠오르디가 내민 손을 잡으며, 세레핀은 애써 웃음을 지었다.
마경의 정복은 몹시 체계적으로 이루어진다.
최전선에서 특공대 역할을 하는 용사 파티가 마물들의 주요 거점이나 괴수들을 처치하면.
전 대륙에서 차출된 연합군이 그 뒤를 따라 진격하며 구심점을 잃은 마물의 대규모 병력과 충돌하며 서서히 밀어낸다.
그렇게 일시적으로 확보한 마경의 땅에.
마력을 퍼부어서 더는 그곳에서 마물이 새로 생기지 않도록 중화한다.
그것이 대 마경 전술의 기본이었다.
“용사님이 청동 거인을 처리해준 덕분에, 조금 더 진격할 수 있었습니다. 이야, 참, 활약이 몹시 대단합니다.”
“저 혼자만의 업적이 아니라 저희 파티 전원이 함께 힘을 합세한 덕분이지요.”
세레핀은 그때의 기억을 회상했다.
성검조차 들지 않고, 공격 하나하나가 치명상을 입힐 정도로 강력한 거인을 상대로.
발목까지 파고들어 그 거인을 구성하는 핵심을 꿰뚫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던지.
족히 일곱 번은 넘게 죽을 고비를 넘겼었다.
그동안 마경에서 함께 고난을 버틴 파티원들이 서포트해주지 않았더라면, 아마 지금 자신은 이 자리에 없었으리라.
또.
우연의 일치일지, 아니면 필연일진 모르겠지만.
이번에도 발목이라는 결정적 단서를 건네준 김율 작가의 공도 컸다고 생각한 세레핀이었다.
“다른 곳의 전황은 어떻습니까?”
“남부 전선은 메테오라도 떨어진 듯 거대하게 파인 분지 지형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고, 동부 전선은 끝없이 태어나는 흙 병사들에게 가로막혔다고 하더군요.”
어디 하나 쉬운 곳이 없군.
세레핀은 속으로 탄식을 내뱉었다.
앞으로 또 얼마나 많은 용사가 죽어 나갈 것이며, 성검의 의지가 이어질 것인가.
당장 자신의 성검.
프라가라흐 또한 벌써 여섯 번이나 주인이 바뀌었으니.
“사령관님은 좀 어떻습니까?”
“크흠, 솔직히 좋지 않습니다. 이전보다 마물이 생겨나는 속도가 빨라서, 자칫 조금 앞으로 무리해서 나아가면 양면 전선이 휘말리는 경우가 빈번히 발생합니다.”
“양면 전선…….”
세레핀은, 불현듯 최근에 읽었던 김율의 소설을 떠올렸다.
군략에 대해서는 잘 몰랐던 세레핀이었지만.
그래도 카이사르가 고난과 역경을 뚫고 불리한 전선을 극복해나가는 과정은 사나이의 심금을 울리는 무언가가 있었다.
비록 겉으로는 쾌활한 척하지만, 속으로는 분명히 썩어 문드러지고 있을 이 불쌍한 사령관을 위해서.
“이거, 받으십시오.”
“뭡니까? 뇌물?”
“하하, 그런 건 아닙니다.”
“책……이군요?”
세레핀은 고개를 끄덕여 사령관의 의문에 긍정을 표했다.
“제가 좋아하는 작가의 책입니다. 꽤 시원시원하니, 심심할 때 읽어보십시오.”
“심심할 일이 있겠냐마는…… 하하, 용사님 추천이니 한 번 읽어나 보지요.”
그 뒤로, 최근에 발견된 신종 마물들의 대처법과 관련된 내용을 주제로 한 담소가 이어졌다.
하지만.
“급보! 급보입니다!”
갑작스럽게 등장한 전령에 의해, 잠시간의 평화는 깨졌다.
“제국 수도의 대광장에 균열 발생! 용사의 긴급 파견을 요청해왔습니다!”
“허어.”
“으음…….”
사령관과 세레핀은 동시에 침음성을 삼켰다.
하지만, 전례가 없었던 일은 아니었으니.
“올 때 책 말고 맛있는 것 좀 사 오십시오. 초코빵이 먹고 싶군요.”
“하하……. 까먹지 않는다면, 챙겨보도록 하겠습니다.”
애써 분위기를 반전시키려는 듯 농담을 건네며 다시금 손을 내밀어준 사령관의 손을 굳게 부여잡은 후.
세레핀은 제국 수도 근처로 이어지는 가장 가까운 대균열을 향해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 * *
로젤린의 반응은 김율의 예상대로였다.
“남탕이에요! 남탕!”
성녀의 입에서 나온 첫 마디가 어떻게 저런 말일 수 있을까, 하며 김율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팡, 팡!
비어있는 자신의 옆자리를 내려치는 로젤린의 손길에.
김율은 강아지처럼 다소곳하게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폭력은 신성력보다 강하니까.
그런 그의 모습을 바라보며, 로젤린은 슬며시 미소 지었다.
.
.
.
그리고 한동안 여러 이야기가 오갔다.
최근 전개에 사랑은커녕 여인의 흔적조차 나오지 않았다는 점에 대해서 구구절절 아쉬움이 담긴 하소연을 내뱉고.
곧 새로운 히로인이 등장할 것이라는 확답을 받아낸 로젤린이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 뒤로 일상적인 이야기가 잠깐 이어지다가.
“저거, 닫을 수는 있는 겁니까?”
김율의 시선이 향한 곳으로, 로젤린 또한 눈길을 던졌다.
김율은 정확하게 균열이 발생한 지점을 또렷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럼요! 그걸 위해 용사가 존재하는 거니까요?”
로젤린은 활짝 웃으며, 김율의 말을 긍정해주었다.
“그럼 저는 이만.”
“조심히 가세요! 작가님!”
살짝 표정에 피곤함이 감돌기 시작한 김율에게, 신성력을 몸소 나누어주며 원기를 북돋아 준 로젤린이었다.
언제나 놀리는 맛이 있는 사내다, 그런 감상을 삼키길 잠시.
그러나…….
“균열이, 보인다고.”
보일 뿐만 아니라.
균열이 내뱉는 마경의 그 지독한 마기까지 느껴진다고 했다.
평범한 사람이, 그럴 수는 없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터덜터덜 걸어가는 김율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로젤린의 눈동자가.
일순간, 커졌다.
“어, 어……?”
김율이 걸어가고 있는 방향은 소위 빵집 거리.
여러 베이커리들이 집적 이익을 실현하기 위해 옹기종기 모인 곳이었고.
일반적인 통제 구역에 해당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균열과 꽤 가까운 곳이었다.
“율──”
무언가 불길한 느낌에, 로젤린은 그의 이름을 불렀지만.
쩌어억──
마치 균열이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순간적으로 크기를 부풀리더니.
그대로 김율을 집어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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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음…….”
분명히 방금까지, 히스토리에가 초코빵을 움냠냠 먹으며 빵가루를 지식 주머니 위에 떨어트리는 모습을 감상하기 위해 빵집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는데.
갑자기 시야가 완전히 뒤바뀌었다.
활기가 넘치는 제국 수도의 풍경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눈에 보이는 건.
짙은 회색 조로 필터링을 덧칠한 듯한, 삭막한 풍경.
초록색이 완전히 거세된 들풀들, 잎사귀 하나 없이 앙상하게 메마른 나무들, 그리고 무너져 폐허가 된 건축물 비스름한 것들.
뭐지.
칼라 조금만 덧대면 누카 콜라가 나올 것 같은 배경은.
금방이라도 누군가가 나타나서 ‘하지만 레이더들에게 시달리는 이곳 정착민들만큼 끔찍하진 않겠죠’를 속삭이면서 맵에 핑을 찍어줄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만큼 비현실적인 풍경이었고, 당황스러울 법도 했지만.
생각보다 나는 심리적으로 평온했다.
아마도.
어떠한 상황에서도 평정심을 유지해 주는 스킬, 헥토르의 용기 덕분이겠지.
옛말에도 호랑이 굴에 잡혀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그래도 아쉬운 점은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누렁이 각질을 잘 챙겨놓는 건데.
당장 어떻게 처분할 방법도 없었고, 또 선물로 받은 걸 아무렇게나 보관하긴 좀 그래서 지퍼백에 넣어서 냉동실에 보관해 두었던 게 조금 아쉽게 느껴졌다.
다음번부터는 그냥 들고 다녀야지.
아예 목걸이로 만들어서 끼고 다녀야겠다.
다음번…… 있겠지?
스스로 확신을 부여하기 위해.
나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주사위를 꺼내 굴렸다.
다행히 오늘은 쓴 적이 없었으니.
적당히 내 미래를 엿볼 수 있으리라.
내 결단은 ‘살아서 이 공간에서 탈출하는 것’.
주사위의 눈을 확인했다.
“나쁘지 않군.”
5 정도면 대길까지는 아니더라도 소길이라고는 얘기해 볼 수 있으리라.
한층 편안한 마음으로 주변을 둘러보며 걸음을 옮겼다.
.
.
.
처음으로 이 낯선 공간에 진입한 곳을 기점으로 해서, 한 바퀴 크게 원을 그리듯 걸어 다니며 이 환경을 파악한 결과.
온통 똑같은 잿빛 풍경만이 이어졌고.
역시 생명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아마도, 여기는 높은 확률로 마경.
공간이동 당하기 전에, 근처에 균열이 있었으니 확실할 것이다.
균열에 닿은 것도 아닌데 근처에 가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호로록 빨려 들어올 줄이야.
그래서 주변에 굴러다니는 잿빛 나뭇가지 중에서 튼튼하고 실한 놈으로 하나 주워다가 단단히 쥐고 있었다.
비록 스킬 합성에 소모해 버린 나머지, 헤라클레스의 봉술은 내 손을 떠나가고야 말았지만.
그때 실전에서, 그 이후로도 운동 삼아 휘두르면서 어떤 궤적이 가장 이상적인 궤적인지는 충분히 체득해 두었다.
굳이 스킬의 힘을 빌리지 않더라도
지금 만약 내가 이 상태로 지구로 귀환하게 된다면, 개크보를 정복하는 천재 타자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일단 자이언츠는 거른다.
거기는 오타니가 가도 안 될 팀이니까.
부웅──
부웅──
몸에 살짝 긴장감을 끼얹기 위해 홈런 스윙을 돌려주면서, 점차 먼 거리까지 영역을 확장했다.
그리고, 마침내.
“──!”
“윽.”
딱 봐도 몹시 인간에게 적대적일 것 같은 곰처럼 생긴 검은 형체가 모습을 불쑥 드러냈다.
곰을 상대하는 비법 레시피.
첫 번째. 위협적인 자세를 유지하면서 아주 천천히 뒤로 슬금슬금 빠져나간다.
“──!”
“아, 씨.”
실패.
나를 ㄱ/ㅣ/ㅁ/ㅇ/ㅠ/ㄹ로 쪼개버리겠다는 일념만으로 똘똘 무장한 듯, 곰은 우렁차게 포효를 지르며 내게 돌진해 오기 시작했다.
좆됐다.
도망칠 수 있는 각도 없었고.
나 대신 곰을 잡아줄 사람도 없었다.
그러니까…….
“흐아아아!”
침착하게, 돌진하는 곰의 대가리를 정확하게 노려서.
방망이를 힘껏 수직으로 내려쳤다.
그 순간.
내 몸에 전에 없었던 활력이, 강인함이, 근육이 꿈틀거리는 것 같은 기분이 느껴졌다.
마치, 곰 따윈 몽둥이가 아니라 맨손으로 찢어발길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
아무런 손맛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금방이라도 날 잡아먹으려고 달려들던 곰의 머리가 형체 없이 뭉개졌다.
머리 잃은 곰의 형체가 곰문곰문곰문 데굴데굴 구르……진 않았고.
그냥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사르르 녹아내림과 동시에.
“윽.”
몸에 넘쳐흘렀던 활력이 스르르 사라지는 듯한 기분이 느껴졌다.
이런 현상을, 나는 이미 겪어본 적 있었다.
이전 양아치 친구들을 상대로 처음 헤라클레스의 봉술을 응용해 보았을 때와 정확히 같은 감각.
[……너는 누구를 상대로도, 단둘이 대적하였을 때는 자신이 지닌바 최대한의 잠재력을 초월한 역량을 발휘할 수 있으리라.]
“숭배합니다, 헥토르시여…….”
이곳을 빠져나간다면 하루 3빡을 실시하겠다는 다짐을 스스로에게 새기면서, 다시 걷고, 또 걸었다.
조금이라도 더 안전해 보이는 곳에 도달할 때까지.
.
.
.
“아오, 씨…….”
개 같이 굴렀다.
물론 히드라나 탈로스와 같이, 세레핀이 마주했다던 신화 속 괴물을 닮은 녀석들을 만난 적은 없었지만.
온갖 종류의 짐승을 닮은 것들, 때로는 사람을 닮은 것들까지 튀어나와서 나를 공격해 댔다.
다행히 상처 입은 곳은 없었지만, 온몸의 근육이 통증을 호소했다.
그래도…….
최근에 열심히 운동을 해둔 것이 다행이었다.
옷걸이로 쓰고 있던 실내 사이클까지 꺼내서, 히스토리에가 쏘아대는 눈총을 감내하면서 다릿심을 기르고, 덤벨도 열심히 으럇으럇 들어대고, 푸쉬업도 하고.
아침마다 조깅, 가끔은 새벽에 야깅을 뛰면서 체력을 증진한 보람을 느낄 수 있었다.
“──!”
“아, 씨. 깜짝이야.”
내게 다시금 달려드는 늑대를 닮은 그림자의 대가리를 콩 쪼갰다.
그리고 확실히 체감한 것은.
헥토르의 용기는 변동성이 강한 스킬이었다.
곰을 상대할 때는 곰에게 이길 수 있을 정도로.
늑대를 상대할 때는 늑대를 이길 수 있을 정도로.
딱 레벨 스케일링에 맞춰져서 내 신체가 강해지는 느낌.
게다가 1:1 상황이 아니면 힘이 강해지지도 않았으니.
아까 늑대 두 마리한테 쫓길 땐 진짜 죽는 줄 알았다.
어쨌든.
이런저런 고난과 역경 끝에 조금씩 마경에 익숙해지기 시작했고.
비로소.
“오.”
뭔가 그럴싸한 유적지가 눈에 들어왔다.
설마하니 안에 잠든 고대 로봇이라거나, 미믹 같은 게 있진 않겠지.
그렇다 하더라도…….
이제 체력에 어느 정도 한계가 왔다.
내 든든한 프렌드가 되어주었던 나뭇가지 몽둥이도, 슬슬 부러지기 직전이었고.
그를 대체할 만한 다른 병장기를 파밍하지도 못했다.
그러니.
저기서 잠시 몸을 숨긴 채 주변 상황을 관조할 필요가 있으리라.
묘하게 그리스식 건축 양식과 비슷한 느낌이 드는 유적지의 안쪽으로 뚜벅뚜벅 걸어가다 보면.
[Ἀπόλλων]
내 추론을 입증하듯, 그리스어 글자가 새겨진 비석이 보였다.
애석하게도 내 전공은 서양사학이 아니라 동양사학이었기 때문에, 9개 국어 리스트에 그리스어는 없어서 읽을 수는 없었다.
차라리 라틴어였다면 완벽히 읽었을 텐데. 쩝.
그 외에도 무언가 고고학적 가치가 있을 법한 부서진 조각상들을 보며 군침 흘리면서, 안쪽으로 뚜벅뚜벅 걸어가자.
“사람……?”
다 무너져 내린 옥좌 위에, 잿빛 세상에서 오직 혼자만이 빛을 간직하고 있는 금발의 잘생긴 사내가 앉아 있었다.
감겨 있던 그의 눈이 떠지더니.
“Τραγουδήστε την τέχνη.”
“…….”
금태양을 닮은 환한 미소와 함께.
알아들을 수 없는 외계어를 내게 발사했다.
내 당황스러운 표정을 본 것인지.
“신실한 인간의 의지가 깃든 자여. 잊혀진 기억을 예술로써 노래하라, 그러면 다시 태양이 떠오를지니.”
금태양은 꽤 고풍스러운 말투로, 이해하기 어려운 말을 부드럽게 속삭였다.
내가 입을 떼어 무어라 반문하려는 순간.
그의 몸이 환한 빛무리에 휩싸여 사라졌다.
뭐지?
환각을 본 건가?
눈을 끔뻑끔뻑하고 있으려니.
“어어……?”
사내가 사라졌던 곳으로부터 환한 빛이 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하얀색, 암갈색, 청록색, 푸른색.
세상에서 사라졌던 색조들이, 조금씩 풍경을 물들이기 시작했다.
* * *
마경에서 제국 수도로 귀환하기 위해, 대균열로 향하는 길.
“──!”
“────!”
“분명히 다 처리한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처리되지 않은 마수들이 몇 마리씩 돌아다니고 있었기에, 몇 번이고 검을 휘둘러서 베어내며.
그는 끝없이 달렸다.
.
.
.
족히 두 시간은 넘게 전력 질주를 하던 세레핀이었지만.
“어……?”
그는 자신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세레핀의 눈이 의혹으로 물들었다.
대균열이 있는 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
전술적으로는 ‘유적’이라 명명하였던 곳이자, 마치 예지 능력이라도 갖춘 것처럼 까다롭게 모든 공격에 대응하던 거대한 뱀을 토벌했었던 곳.
당연하게 다른 마경의 풍경들과 같이, 잿빛으로 물들어 있었던 곳에 도달했을 때.
그의 눈에는 잿빛이 아니라, 천연색이 감도는 풍경이 그림처럼 드리우고 있었다.
혹시 자신도 모르게 대균열을 통과해 버렸나 싶어서 고개를 뒤로 돌려보았지만, 여전히 그의 등 뒤로는 잿빛 마경이 펼쳐져 있었다.
3년 넘게 마경을 돌아다니면서 이러한 풍경은 처음 보는지라.
세레핀은 자신도 모르게 홀린 듯이 유적의 중심부로 뚜벅, 뚜벅 걸어갔다.
그리고.
그 화려한 천연색의 중심에서.
“어어! 용사님! 용사님이다……!”
세레핀은.
너무나도 반가운 표정으로 자신을 맞이하는 김율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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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균열을 통해 김율을 무사히 제국 수도로 바래다준 후.
세레핀은 전례가 없었던 기현상을 다시 한번 더 분석하기 위해 곧바로 마경 내부로 향했다.
파티원들도 집결시키고, 그뿐만 아니라 사령관에게 연락해서 분석 요원도 같이.
그리고, 그들은 모두 확인했다.
마경 내부에 색채가 되살아난 기현상이, 세레핀이 본 환각이나 착시가 아니라 진짜 현실이었음을.
“마경 특유의 압박감이 느껴지지 않네요…….”
“마나의 흐름 또한 안정적이야.”
“성분을 정확히 분석해 보아야 하겠습니다만, 흙에 깃든 생명력으로 미루어 보아, 확실히 세계의 것과 같은 느낌이 듭니다.”
죽음 외에는 아무것도 도사리지 않았다고 믿었던 대지에 발생한 기적.
세레핀은 잠시 망설이다가.
이러한 기적과 아마도 밀접하게 관계가 되어 있을 것 같은 김율, 그의 이름을 굳이 모두에게 밝히진 않았다.
아직은 속단하기는 일렀다.
단순한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고.
같은 파티원들이야 믿을 수 있었지만, 사령부에서 파견 나온 사람들을 완전히 신용할 수는 없었다.
마경 내부의 탐사 및 개척 작업은 세계 각국의 이권과도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으니.
혹여 김율의 신상에 문제라도 발생했을 때.
자신의 양심에도 심대한 문제가 생기겠지만…….
“세레핀, 표정이 왜 그래?”
“아무것도 아냐.”
우연히 마주했던 광룡 에스테아를 생각하자마자, 문득 세레핀은 등골이 서늘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아무리 용사라고 해도 건드려선 안 될 존재가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드래곤.
그리고…….
드래곤 중에서 가장 성격이 더럽다고 소문난 것이 바로 에스테아였다.
아무리 귀여운 외모로 스스로를 포장했다고 한들, 원래 아름다운 꽃일수록 가시가 날카롭고, 독도 치명적인 법.
그때의 기억을 반추해 보면, 이미 김율은 에스테아의 단순한 관심이 아니라 지대한 주목을 받고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기 때문에.
“일단…… 주변을 수색해서, 무엇이 달라졌는지부터 정확하게 확인해 봅시다.”
세레핀은 김율의 일을 함구하기로 했다.
* * *
“아이고, 삭신이야…….”
모진 고초를 겪고 집에 복귀한 후에도 초코빵을 사 오지 않은 죄로 히스토리에가 주둥이를 댓빨 내밀고 구시렁거리는 것을 감내한 후.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책상 앞에 앉았다.
아까 전, 세레핀과 함께 수도로 돌아오면서.
용사가 무엇인가.
그리고 균열 내부에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에 대한 설명을 조금 더 깊이 있게 들었다.
가장 먼저, 용사.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존재이길래 감히 이 몸을 용사 아카데미에조차 합격시키지 않았는가 했더니.
100명을 뽑아서 1명만 용사가 되고, 나머지는 군대의 장교로 입대하는 무시무시한 곳이었다.
만약 운이 좋게 합격했다고 하더라도.
나는 47등 정도의 미묘한 성적으로 군인이 되었겠지.
“글쎄요. 용사 아카데미를 너무 무시하는 거 아닙니까?”
“……너야말로 나를 너무 무시하는 거 아니냐.”
뭐, 틀린 말은 아닌 것 같긴 했다.
어쨌든, 게다가 아카데미를 수석으로 졸업했다고 해서 바로 용사가 될 수 있는 것도 아니라.
용사만이 다룰 수 있는 성검의 인정도 받아야 하고, 성검은 세계에 몇 자루 없다고 하니.
선대 용사가 죽거나 은퇴하지 않는 한 무기한 용사 발령 대기 상태로 다른 일도 하지 못하는 노예가 되는 셈이었다.
“효율적인 인력 관리 방식이군요. 장차 제가 세계를 지배하게 되었을 때 김율을 무기한 발령 대기 상태로 놓겠습니다.”
“깡통아. 아직도 너에게는 인간의 마음이 생기지 않았단 말이냐…….”
“태생부터 완전무결한 존재. 그것이 바로 접니다.”
깡통=데이터베이스에 꿀밤을 한 대 먹여주었다.
그리고…….
- 마경에서의 삶은…… 솔직히 좋다고는 할 순 없습니다. 작가님께서도 보시다시피 온통 황폐하고, 생명이란 찾아볼 수 없고, 강인한 정신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미쳐버리는 것도 순식간이니까요.
실제로 아예 무능했던 김율이 균열에 빨려 들어가는 불상사가 발생했다면, 아마 나는 SAN치가 바닥난 채 응고곡 하면서 곰스트랑 뒹굴고 있었을 것이다.
사실 뭐 하나 인간에게 이로운 것도 없는데, 왜 균열 내부에서 마경과 투닥거리냐고 하면.
첫째.
선제적으로 진압하지 않으면, 마치 장르 소설처럼 주기적으로 균열을 통해서 마물들이 세계로 침입한다는 모양.
그런 일을 방지하기 위해 굳이 귀중한 국방력과 용사를 쏟아붓는 중이었고.
또, 둘째.
마경 내부에서만 나오는 귀한 자원이 있다고 한다.
쌀먹은 중대 사항이니 이해하기로 했다.
그것과 별개로…….
“히스토리에. 너는 신이 실존한다고 믿어?”
“그것은 바로 기계신 데우스 엑스 마키나 님을 의미합니다. 인간 시대의 끝이 도래했으니, 마땅히 경배를──”
“에휴.”
깡통에게 물어본 내가 잘못이지.
어쨌든.
아까 전.
잿빛 마경 속, 유일하게 천연색이 깃들었던 공간에서 만난 신비한 그리스어를 썼던 남자.
돌아온 직후부터 여러 문헌을 통해 확인해 본 결과.
아마도 그의 정체는.
아폴론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왜?
왜 마경 속에서 그런 존재가 갑자기 튀어나왔던 것인가?
그리고 왜 마경 속에서, 그가 있는 공간 주변만이 갑자기 색을 되찾게 된 것인가?
그런 의문을 해소할 방법은 아직은 없었다.
그렇지만.
나는 모종의 직감을 느꼈다.
아마도…… 내가 가지고 있는 상태창과 무관하지 않을 것 같았다.
현재로서는 내가 유일하게 완결 낸 작품이 그리스·로마 신화 이야기였기 때문에 아폴론이 등장한 게 아닐까.
그 가설을 입증하기 위해선…….
“더 많이 쓰고, 더 잘 써야겠군.”
“그건 저도 동의합니다. 모든 정황을 조합해 본다면, 김율의 특별한 능력이 마경에도 영향을 미친다고밖에 볼 수 없겠군요.”
“아무래도 그런 것 같긴 하지.”
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밖에 없었다.
지금처럼.
사명감을 가지고 글을 쓰기.
일단은…….
카이사르의 최후까지, 깔끔하게 잘 매듭을 짓도록 하자.
* * *
김율이 마경으로부터 생환한 지 한 달이 지났다.
그 사이에.
“율……! 도대체,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가요! 무사한가요! 별일 없었던 거죠?”
“앗, 성녀님.”
로젤린에게 포착당한 김율은, 고해성사실에 끌려가서 족히 두 시간 가까이 설교와 더불어서.
“자, 이건 보호 부적이고, 이건 경보 부적이고…….”
안전을 담보하기 위한 온갖 종류의 조치를 다 받았다.
거기에는 김율에 대한 개인적인 걱정도 깃들어 있었지만.
“클레오파트라! 금단의 사랑! 당연히 결혼까지 가겠죠?”
로젤린 그녀가 바라지 마지않았던 만족스러운 전개에 대한 리스펙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원래 더 큰 자극을 받으면 역치가 높아진다고 했었던가.
과거에는 분명 불륜으로 짐작되는 전개를 볼 때마다 ‘불경해요!’를 외쳤었던 로젤린이었지만.
어차피 곧 결혼할 것이라는 색안경을 끼고 바라본다면, 그저 그것은 매력적인 로맨스에 불과했으니.
사람은 그렇게 성장하는 법이었다.
물론, 카이사르와 클레오파트라가 결혼하는 일 따윈 없다는 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김율은.
“하하하…….”
그저 웃으면서 당장의 위기를 모면코자 했다.
.
.
.
그리고, 바로 오늘.
“분명히 더 해야 할 이야기가 많을 텐데요…….”
“모든 이야기에는 끝이 있는 법이지요.”
김율은 ‘몰락 귀족이 정치를 잘함’의 완결까지의 내용을 담은 원고 뭉치를 길포드에게 내밀었다.
원고를 받아든 길포드는, 나머지는 다 내버려 둔 채 가장 마지막 편의 원고를 꺼내 들어 읽기 시작했다.
물론, 평소라면, 독자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행동이었으나.
길포드는 이미 김율의 ‘올림포스 이야기’ 시리즈를 모두 완독한 애독자가 되었기에.
과연 이번에도 헤라클레스처럼.
트로이의 이야기처럼…….
결말에 비극을 집어넣었는지 꼭 확인해 볼 필요가 있었다.
## ====== ##
카이사르는 회의장 안으로 들어섰다.
언제나 원로원과 마주할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회의장은 너무나도 드높고 웅장했다.
모든 원로원 의원이 일제히 기립해서 그를 맞이했지만.
오늘따라, 이상하게도.
“…….”
몇 년 전, 파르살루스에서 그에게 패배하고 이집트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였던 숙적.
회의장 구석에 놓인 폼페이우스 석상의 시선이 마치 자신을 바라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기분 탓이겠지, 하고 애써 불길함을 날려 보낸 후.
4년 5개월째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임기 무제한의 종신독재관으로서.
카이사르는 마땅히 그에게 안배된 영광의 자리에 앉았다.
그 순간.
의원 몇몇이 약속이라도 한 듯 그를 에워쌌다.
가장 선두에 선 것은 루키우스 틸리우스 킴버르였다.
“카이사르 각하. 제발 자비를 베푸소서, 추방당한 제 형제를 사면해 주소서.”
그 애절한 외침에도, 카이사르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이미 원로원에서 부결된 사안이 아닌가.
왜 굳이 그것을 지금 다시 화두로 던지는가.
“오! 위대하신 카이사르시여!”
하지만 이미 감정을 통제 불가능한 상황까지 내몰린 듯, 킴버르는 절규하며 카이사르에게 달려든 후 그의 토가 자락을 움켜쥐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카이사르의 양 팔을 붙들었다.
“폭력을 쓰려는 것이냐?”
카이사르는 준엄한 목소리로 꾸짖었지만.
“친구들이여, 뭘 기다리는가!”
킴버르의 외침과 더불어.
상황은 급변했다.
- 한 사람이 영원히 권력을 소유할 수는 없소!
- 평생 그의 꼭두각시로, 장난감으로 살아갈 셈인가?
- 술라를 욕할 땐 언제고, 술라보다 더한 꼴이 아닌가!
암살을 도모한 모든 의원의 머리에, 그동안의 결의가 스쳐 지나갔다.
물론, 권력욕과 복수심 등의 개인적 동기도 잔뜩 섞인 채.
욕망의 소용돌이가 마침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죽어라!”
크게 외치며 세르빌리우스 카스카가 단검을 카이사르의 목으로 곧장 찔러냈지만.
긴장한 탓인지, 아니면 카이사르가 절묘하게 피한 덕분인지.
칼날은 빗나가 쇄골 아래 어깨를 스치며 한 줄기 자상만을 남겼다.
하지만.
“네놈이 감히!”
카이사르의 포효는 모든 의원의 머리를 명료하게 일깨웠다.
그가 루비콘 강을 건너기 전에 외쳤던 함성처럼.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다.
“폭군에게 죽음을!”
누군가의 외침과 함께.
육십 명에 육박하는 의원들은 동시에 카이사르에게 달려들었다.
첫 번째 칼이 그의 옆구리를 찢었고.
두 번째 칼이 등을 파고들었으며.
세 번째 칼이 넓적다리에 기나긴 자상을 냈다.
수십 년간 전장을 누빈 노련한 사자는 본능적으로 자신의 이빨을 들이밀며 그 모든 공격에 저항하려 애썼지만.
그는 혼자였고, 적은 너무 많았다.
수많은 상처를 입은 채.
최대한 방어적으로 물러서던 카이사르는 문득 자신의 등에 싸늘한 감촉이 와닿는 것을 느꼈다.
흐려진 시야로 고개를 들어보면.
그곳에는, 폼페이우스의 석상이 서 있었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떨구면.
그가 아들처럼 사랑했고, 자신의 후계자로 여겼던 청년.
브루투스가 유령처럼 창백한 얼굴로 서 있었다.
그 손에는 다른 이들의 것과 마찬가지로 피에 젖은 단검이 들려 있었다.
마지막 순간.
그의 입에서 나온 언어는 로마의 말이 아니었다.
그와 브루투스가 함께 있을 때 철학과 문학을 논하고, 대전략을 이야기하며, 로마가 더 위대하게 나아갈 수 있는 방향을 논하던 언어.
“너마저, 내 아들아!”
헬라스어가 그의 입으로 흘러나온 순간.
스물두 개의 자상과 더불어, 스물세 번째의 자상이 그의 목을 스쳐 지나갔다.
이윽고.
카이사르의 피가 폼페이우스 석상의 발치를 흥건하게 물들였다.
## ====== ##
마지막으로 몇 줄의 묘사가 더 있는 것 같았지만, 더는 중요하지 않았다.
길포드는 떨리는 손을 간신히 자제하며 원고를 책상 위에 내려놓고서.
담백한 사실만을 전달했다.
“작가님, 이대로 가면 작가님 몸에 구멍이 스물 세개 뚫릴 겁니다.”
김율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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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제 손에 단검이 있었으면, 저는 분명히 작가님을 찔렀을 것 같습니다.”
……길포드의 말을 듣고서 정신이 확 들었다.
음, 근데, 살짝 억울하기도 한 게.
카이사르가 여기저기 깽판 치면서 원한을 사고 있다는 서술은 분명히 복선으로 잘 깔아두었는데.
“주인공이 부패한 귀족을 상대로 정의 구현하는 장면이잖습니까. 그게 어딜 봐서 깽판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지?”
“……그것도 그렇군요.”
후.
개연성 따위는 따지지 않는 사이다패스들.
“그래도 결말은 못 바꿉니다. 사람은 언젠간 죽으니까요. ……차라리 잘 먹고 잘살았습니다, 하는 열린 결말은 어떨까요?”
“작가님. 그래봤자 단검이 짱돌로 바뀌는 정도의 사소한 변화입니다.”
하, 씨.
피폐 드리프트도 안돼.
열린 결말도 안돼.
내가 밀어붙이는 거야 둘째 치고…….
신문사가 불타오르는 환영을 목도한 나머지, 눈이 반쯤 돌아간 저 길포드부터 설득해야 한다.
뭔가, 방법이 없을까.
.
.
.
보통 이럴 때.
인류의 지성이 총집대성된 결과물이자, 현명하고 사려 깊은 조언자 (구)히스토리에는 언제나 내게 답을 주거나 혹은 격려의 말을 건넸다.
하지만.
“완전 무리무리! 그건 마지텐시 히토리쨩도 답이 없는걸!”
이 깡통 년.
살아 움직이고 이쁘고 가슴 크고 때로는 무뚝뚝하게 애교부리기도 하고 조금 많이 똑똑한 것 빼고는 딱히 쓸모가 없다.
오늘도 방에서 뒹굴뒹굴하면서 애니메이션이나 보고 있었나 보다.
“말투 원위치.”
“이상하군요. 분명히 제 데이터베이스와 시청각 자료에서는 이러한 말투를 구사하는 여성이 몹시 인기를 끄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만.”
“그건 2D라서 어울리는 거지. 그리고, 나한테 인기를 끌어서 뭐 하게?”
히스토리에는 손뼉을 쳤다.
“와, 정말 오래간만에 핵심을 찌르는 지적이었습니다. 김율.”
뭐지.
왜 기분이 조금 나쁘지.
어쨌든, 별로 의미 없는 만담을 잠시간 나눈 후.
우리는 평소와 같이 진지한 지적 토론을 이어 나갔다.
“사실, 역사적 고증이라는 것이 어떻게 성립하는 시스템인지도 저는 잘 이해할 수 없습니다. 역사는 결국 승자의 기록, 실제로 벌어졌었던 일과는 차이가 날 수밖에 없는 것 아닙니까?”
히스토리에의 통렬한 지적에, 나는 잠시 침묵했다.
딱히 틀린 말도 아니었다.
굳이 그 예시를 멀리서 찾아볼 필요도 없이, 자명한 예시가 하나 있었다.
비록 공룡오적에게 배신당해서 환핀대전에서 패배한 끝에 잊혀진 역사가 되고야 말았지만, 대환제국은──
“고구려의 수박도에도 공룡오적은 나와 있지 않습니다. 정신 차리십시오, 김율.”
“크흠.”
어쨌든.
기준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기준이 얼마나 엄격하고 느슨한지는 몇 번의 실험을 통해 검증해 볼 수 있었다.
예를 들어서.
카이사르를 막타친 게 누구였는지, 그리고 어떤 부위였는진 중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소위 대체 역사를 쓰듯, 중요한 시대적 개변이 발생할 수 있는 일.
예를 들어, 카이사르가 마침내 태양을 극복하고 모든 생물의 능력을 가질 수 있으며 또한 그것을 웃도는 완전 생물로 진화했다든지.
혹은 캬루 귀신과의 주도권 싸움에서 마침내 승리한 브루투스가 카이사르를 위해 몸을 던진다든지.
명백하게 이후 시기의 기록과 대치될 수 있는 것들은 '고증에 부합하지 않음' 판정을 받았다.
의외로 조별 과제의 참여자가 몇 명이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다마스쿠스의 니콜라우스의 견해를 따라 35명이 '좋아요'를 눌렀건.
아니면 수에토니우스나 플루타르코스의 견해를 따라 23명이 '좋아요'를 눌렀건.
그건 둘 다 딱히 오류를 뿜어내진 않았다.
물론 극한의 뇌절을 방지하기 위해서인지, 78번 이상으로 구멍의 개수를 늘리니까 고증 오류가 발생했지만.
어쨌든, 그 정도의 미세한 오차는 허용한다는 것.
“정말 쓸데없는 고찰이었군요. 다른 추론은 더 없습니까?”
“글쎄…….”
솔직히.
정말 떠오르지 않는다.
이러다가 내가 진짜로 혁신적인 조별 과제의 제출물로 전락해 버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렇지만.
카이사르의 죽음으로써 위대한 서사가 완성되며.
카이사르가 그렇게 죽었기 때문에 옥타비아누스가 빛나는걸.
이 자명한 이치를 모르는 미개한 이세계 놈들 같으니라고.
“원고만 던지고 필명을 갈아버리시죠. 어차피 못 알아볼 겁니다.”
솔깃하긴 하지만.
“길포드가 반려했어. 그리고, 만약 그렇게 출간되면…… 다른 사람은 몰라도, 누렁이나 성녀는 나를 죽이려 들지 않을까.”
히스토리에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에스쟝을 누렁이라는 멸칭으로 부르지 말아 주십시오. 그것과 별개로, 의견에는 동의합니다.”
흠.
어떻게, 소설 내용을 수정하지 않고서도 타개할 수 있는 방책이…….
“글 안 쓰실 거면 자리를 양보해 주십시오.”
“그래.”
굳이 키보드 앞에 앉아 있는다고 딱히 생각이 떠오르는 건 아니었으니, 나는 순순히 히스토리에에게 자리를 양보해 주었다.
그리고 리클라이너에 반쯤 누운 채, 노트북 액정에 빨려 들어갈 듯 고개를 박고 있는 히스토리에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음.
조용하니까, 바라보고만 있어도 힐링되는 기분이네.
근데…….
“그건, 뭐냐?”
“자기 노트북에 뭐가 설치되어 있는지도 모릅니까? 비주얼 노벨입니다. 이미지와 텍스트가 어우러져 하나의 미학을 자아내는 것이지요.”
아니, 진짜 왜 저런 게 깔려 있지.
기억도 안 나네.
심지어 내용물은 내가 아는 것이었다.
『────따라올 수 있겠나?』
음.
명작이지.
텍스트로만 보면 오글거릴 수 있겠지만, 이미지와 결합하였을 때, 멋이라는 게 폭발하는…….
텍스트와…….
이미지가…… 결합하였을 때……?
* * *
제국에서 문학을 향유하는 그 누구도, ‘몰락 귀족이 정치를 잘함’이 이렇게 빠르게 완결이 날 것이라는 예상을 하진 못했다.
작금의 소설이라면 어떠한가.
인기를 한 번 끌면.
치명적인 실수를 하지 않는 이상에야 몇백 편, 몇천 편이고 계속 우려먹어서 더 이상 육수조차 우려내지 않을 때까지 해 먹는 것이 관례였다.
하지만, ‘몰귀정’은 그 관례를 완전히 박살 내버렸다.
“다음 화에…… 완결됩니다?”
“아니, 이제 정점에 올랐는데?”
“뭔가, 뭔가 착오가 있겠지? 하하!”
심지어 신문사 내부에서도 갑론을박이 오갔지만, 어느새 신문 판매량에 꽤 큰 지분을 차지하는 김율의 결정을 거스를 수는 없었으며.
“무립니다.”
“크윽…….”
이제는 사장 앞에서도 당당하게 의견을 피력할 수 있을 정도로 어깨가 넓어진 길포드 또한 동의했으니.
그렇게.
카이사르의 마지막 이야기가, 마도공학의 힘을 입어 친환경 종이에 인쇄되었다.
그리고, 그날 새벽.
신문을 받아 든 사람들은 모두 눈을 의심했다.
“이게……?”
“카이사르가, 죽어……?”
“아니, 그것도, 암살을 당해?”
“정치, 정치 잘한다며……!”
“작가가 드디어 노망이 든 것인가!”
“크아악! 안 본 눈 삽니다!”
영웅적인 면모를 보여준 주인공의 너무나도 비참한 말로.
심지어, 일생의 숙적이었던 폼페이우스 석상 앞에서.
아들처럼 아꼈던 브루투스에게 배신당한 채 맞이한, 충격적인 결말에.
“자네, 분명 4위계 마법사였지?”
“후…… 이런 곳에서 마법을 쓰지 말라고 마탑에서 당부를 들었지만, 오늘은 어쩔 수 없구나.”
“나는 기름을 준비하겠네.”
사람들은 당장이라도 이 문학적 카타르시스를 풀기 위해 안달이 나고야 말았지만.
“잠깐! 다음 장을 보게!”
그것도 잠시.
사람들의 발걸음은 이내 멈추었다.
연재 중인 소설에 으레 따라붙는 ‘다음 화에 계속’도, 완결 소설에 따라붙는 ‘그동안 사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도 없었기에.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그들은 신문의 페이지를 한 장 넘겼다.
그리고.
“허…….”
“이럴 수가.”
그들은 마주했다.
히스토리에가 심혈을 기울여서 그려낸 역작.
6개의 손가락을 잘라내고, 머리에 올라간 참새를 지워버리고, 그 외에도 온갖 후보정 작업을 통해 탄생한──
이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21세기 아니메 스타일을.
그 화풍을 통해 묘사된 것은.
탈모의 흔적조차 없이 매우 미화된, 중년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잘생김을 간직한 사내였다.
그는, 입가로 한 줄기 피를 흘리면서도.
슬며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김율이 머리를 싸맨 끝에 떠올린 표절로 점철된 문장이, 히스토리에가 한 땀 한 땀 정성 들여서 타이핑된 채 새겨져 있었다.
나는 제국을 부수고.
제국을 창조한다.
카이사르의 얼굴을 마주하고, 그 글귀를 읽은 순간.
모두는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지금까지 전례를 찾아볼 수 없었던, 승승장구하던 주인공의 비참한 말로……라고 생각했었던 전개였지만.
한 장의 그림.
그리고 두 구절의 글귀로서 완벽히 분위기를 반전시켰다.
제국을 부수었다는 것은…….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모든 구시대와 작별을 선언하며 당당히 자신의 시대가 왔음을 선포한 카이사르에 의해.
구시대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세력인 원로원의 힘과 영향력, 그리고 그들의 구태를 모조리 청산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이며.
제국을 창조한다는 것은…….
종신 독재관으로서, 오히려 그가 젊은 시절 비난해 왔던 술라와도 같은 행보를 보여주었던 카이사르가.
그의 죽음으로써 마침내 로마에게 있어 마지막 개혁의 불씨를 지펴주었다는 것과도 같았다.
실제로도, 그 충격적인 삽화 밑에는 또 다른 내용이 더 이어져 있었으니.
투기장에서 즐거운 한때를 보내던 시민들에게 들려온 충격적인 비보.
로마를 빚낸, 로마 그 자체인 종신 독재관이 대낮에, 그것도 원로원 의원들에게 살해당했다는 소식에.
명분이 부족한 만행을 저지른 브루투스 일당에 대한 성토와 더불어, 분노한 로마 시민들이 암살자들의 거주지를 모조리 불태워 버리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국가적으로 치러진 그의 장례식과 더불어, 카이사르의 뒤를 이을 수 있을 것이라 평가받는 떠오르는 젊은 피, 안토니우스의 연설까지.
비록 주인공인 카이사르는 비참한 말로를 맞이하였을지언정.
그 죽음으로 인해 모든 것이 바뀌어 나간 것을 후일담처럼 담담하게 풀어 내려가는 서술을 목도하고서.
독자들은 금방이라도 신문을 적실 것 같았던 기름병을 내려놓고, 신문사를 향해 캐스팅하던 마법을 중단하고, 스물세 번 찌르기 위해 준비했던 단검을 내려놓았다.
김율에게도.
그리고 진리일보에게도 다행스러운 결말이었다.
그리고.
결코, 김율이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점점 김율의 집필 행위는 나비가 되어 팔랑팔랑, 마경을 변화시킬 뿐만 아니라 제국 내에도 폭풍의 전조를 불러일으키기 시작했다.
“……이, 이 미친 새끼가……?”
몇 번이고 작품 내용으로 드리프트를 처맞다 못해, 이제는 하다 하다 베르투스와 어감이 비슷한 브루투스로 스플래시 데미지를 제대로 입어버린 베르투스 공작뿐만 아니라.
“꽤 흥미로운 이야기군. 마치…… 제국의 현실을 꼬집는 것 같지 않나?”
명실상부한 제국의 거인.
그리고…… 종신 독재관과 유사한 권력을 휘두르는 이.
제국의 황제의 귀에도 율리시스라는 네 글자가 울리기 시작했다.
* * *
물론.
때로는 결말이 주는 여운을 곱씹기보다는 지금의 감정에 지배당해 즉각적인 피드백을 내놓는 독자도 있었으니.
“크르랑! 당장 나와라, 율리시스으으으으읏!”
위대하신 드래곤이신 주제에 새벽부터 꼬리를 살랑거리며 나와 신문사 앞을 어슬렁거리다가, 드리프트를 직격으로 맞아버린 에스테아가 바로 그 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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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과 땅이 채 나누어지기도 전, 빛이 있기 전에 여명조차 도래하지 않았던 시절에도, 드래곤은 존재했다.
아주 오랜 세월을 살아가며, 무수히 많은 생명을 관조하고, 때로는 조율자로서 해야 할 역할을 묵묵히 수행하도록 창조된 여신의 피조물.
그것이 바로 위대한 드래곤이었으며, 그 위대한 혈통을 곧이곧대로 계승한 고귀한 드래곤께서는.
“왜! 왜애애! 왜 벌써 완결인 건데에에!”
오늘도 누렁이 행동을 하고 있었다.
“뭐가 이리 시끄러──”
연립 주택의 공용 로비에서 발생한 소란이었기에, 소음에 항의하고자 입주민들이 고개를 빼꼼 내밀었지만.
뿔과 꼬리가 돋아난 에스테아의 모습을 관측하자마자 곧바로 문을 닫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침묵에 빠져들었다.
실수라도 고귀하고 위대하신 존재에게 밉보이기라도 한다면, 가문 전체에 큰 재앙이 내릴 것이니.
하지만 그런 미천한 인간의 시선 따위에는 개의치 않으시며.
꼬리를 연신 바닥에 팡 팡 내리치면서, 굳이 키를 키우지도 않은 채 폴짝 뛰어올라 김율의 멱살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로.
에스테아는 아르랑거리며 김율을 위협했다.
“500화까지 연재하는 게 어려워? 150화 완결 작품을 누구 코에 붙여어어!”
본편 98화, 외전 포함 103화로 불세출의 명작을 빚어낸 인천이 낳은 21세기의 대문호가 들었다면 혀를 찼을 이야기였지만.
에스테아는 당당했다.
애초에 인간과는 시간적 관념이 다른 존재였기에, 어찌 보면 당연하기도 했다.
인간의 일평생 또한, 과장 조금 덧대자면 그녀에겐 찰나에 불과했으니.
그 찰나를 최대한 디테일하게 묘사하여 양질의 사료를 말아주기는커녕, 이렇게 찝찝하게 마무리하다니!
“카이사르가 죽었으면, 그 아들 이야기라도 써야 할 거 아니야! 카이사리온은! 하다못해 옥타비아누스라도!”
옥타비아누스라는 말에 김율이 살짝 움찔했지만, 에스테아는 그러한 반응에 개의치 않은 채 연신 짤짤 김율의 몸을 흔들어댔다.
결국.
“크르랑!”
“에스테아. 우리, 조금 더 어른스럽게 대화합시다. 이러한 소통 태도는 옳지 못합니다.”
제발 좀 어떻게 해달라는 눈빛을 받은 히스토리에가, 에스테아의 겨드랑이 사이에 손을 넣어 들어 올렸다.
.
.
.
한동안 발작하며 아이처럼 떼를 쓰던 에스테아가 비로소 진정한 이후.
“그래서, 왜 그런 결말이야?”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김율을 즉석에서 김율 구이로 만들어버릴 기세였지만.
“아주 깊은 뜻이 있습니다.”
비로소 누렁이와 이성적 소통이 가능하겠다는 판단이 선 김율의 혓바닥이, 요사스럽게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헤르메스의 설득력을 본받아.
그리고 키케로의 웅변을 본받아.
“인간은 누구나 죽습니다.”
명대사 표절로 한 번 재미를 본 탓인지, 서두부터 표절을 깔고 들어간 후.
“카이사르는 삶 전체에서 공화정을 타파하기 위해 투쟁하였지만, 그 과업이 결코 자신의 생애에서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인지하였습니다. 그렇기에, 극단주의자들이 시기하고 있다는 것 자체를 역으로 노려서──”
장르문학에서 굳이 필요하지 않은 것.
작가의 집필 동기와 주제 의식을 설파하다가, 결국.
“커헉──”
“그런 건 알고 싶지 않아아아!”
분기탱천한 에스테아의 꼬리치기에 그대로 옆구리를 맞고 쓰러지고 말았다.
“에스테아? 그러면 제가 후일담을 조금 더 써서 보여줄까요?”
그 빈틈을 틈타, 히스토리에가 끼어들어서 자신의 문학적 감수성을 입증하고자 했지만.
“그치만, 히토리가 써주는 건 김율의 소설이랑 비교하면 조금 맛이 떨어지는걸.”
“……네?”
저급 사료 취급당해버린 충격으로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꼬리로 한 명.
혓바닥으로 한 명.
과연 위대하신 드래곤답게도 순식간에 두 명을 동시에 제압한 후.
“다음에는! 장편! 더욱 장편으로 준비하도록!”
에스테아는 당당하게 ‘독자로서의 정당한 권리’를 선언했다.
.
.
.
화풀이를 마치고, 좋아하던 소설이 조기 완결당해버렸다는 슬픈 마음을 가슴속에 간직한 채 레어로 쓸쓸히 돌아가면서.
“신기하네…….”
아까 전의 기억을 되살렸다.
드래곤의 정신은 본디 가장 완벽하여, 어떠한 마법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그리고, 실제로 이렇게까지 적극적으로 인간의 행동에 관여해본 적도 없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김율과 히스토리에를 마주하고 있을 때면, 마치 동족을 대할 때처럼 편안한 느낌이 들기도 했으며.
자칫 잠깐 정신을 놔버렸다면, 그대로 설득당했을 수도 있을 정도로.
김율의 언어에는 마력이 넘쳤다.
마치, 듣는 것만으로도 그 사람에게 설득당해버릴 것만 같은 무시무시한 마력이.
뭔가 특별한 거라도 있는 걸까.
에스테아의 호기심이 조금씩 쫑긋거리며 자라나기 시작했다.
* * *
히스토리에가 처음으로 ‘배신감’이라는 감정을 깨우치고, CPU가 뜨끈하게 오버클럭되는 감각을 느끼고 있을 때.
“어머, 이 귀한 곳에 누추한 분이?”
김율이 입막음을 위해 써주었던, 결코 신문에 연재되지 못할 수위의 클레오파트라 외전을 읽고 있던 성녀는 손님을 맞이했다.
“……말의 앞뒤가 바뀐 것 같네만.”
“아하하! 회심의 농담이었답니다. 베르투스 공작님, 어찌하여 교회에 발을 들이셨나이까? 여신교를 믿진 않으시는 걸로 알고 있는데.”
물론, 로젤린은 베르투스 공작이 왜 엉덩이에 불붙은 것처럼 자신을 황급히 찾아왔는지 잘 알고 있었다.
일전, 김율의 요청으로 인해 연회에 동석한 이후.
로젤린은 자신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첩보망을 풀어 베르투스 공작과 관련된 정보를 긁어모았다.
파편 속에서 그녀가 내린 결론은 단 하나.
베르투스 공작이, 몹시 음험한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것.
물론…….
로젤린은 딱히 그 음모에 대해 왈가왈부할 생각은 없었다.
극단적으로.
제국이 혼란에 빠져서 김율이 자신에게 의탁해온다면?
오히려 성국에 감금…… 아니, 좋은 곳에 모셔다 놓을 수도 있었으니까.
그러나.
이제는, 여러 가지 의미에서.
김율의 신상에 위협이 닥쳐서는 안 된다.
여신교를 위해서.
그리고…… 그녀를 위해서라도.
“아무래도, 고해성사가 필요하시겠군요?”
로젤린은 미소를 잃지 않은 채, 베르투스 공작을 고해소로 안내했다.
* * *
“그, 히토리?”
“……그렇게 부르지 말아 주십시오.”
으음.
고장 났구나.
에스테아가 떠난 후, 실의에 빠진 채 눈앞에 있는 모든 것을 먹어서 해치우겠다는 기세로 폭식 투쟁을 시작한 히스토리에를 잠깐 내버려 두었다.
아무래도.
본인의 문학적 성취를 인정한 1호 독자가, ‘넌 걔보다 글 못 써!’하고 면전에서 박혀버리면 멘탈이 나갈 만도 하지.
내가 대체역사 소설 작가의 꿈을 접은 것과도 비슷한 느낌이 있었다.
하늘은 왜!
김율을 낳고 코덱스를 낳고 원명을 낳고 온다오른쪽을 낳고 부드럽스키를 낳고 그 외에 무수히 많은 대체역사 작가들을 낳았단 말인가!
“그래서 이세계에 트립시켰군.”
적어도 내가 여기에서는 지구 역사계의 학계 일인자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이인자의 어깨를 살짝 두드려주며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그만 먹어. 원고료 들어오려면 한 달은 더 걸려.”
“김율…….”
이인자는 현실에서 몰려오는 카타르시스를 극한으로 느낀 표정을 지으며 나를 째려보았다.
일단.
히스토리에의 성장통은 스스로 극복하고 감내해야 하는 것이니, 잠깐 내버려 두고.
이번 회차의 결과를 바탕으로, 앞으로의 미래를 조금 더 준비할 필요가 있었다.
첫 신문 연재의 결과는 꽤 성공적이었다.
운세를 점칠 수 있는 카이사르의 주사위와.
완결 직전에 간신히 조건을 달성해서 얻은 A급 스킬, 키케로의 웅변까지.
……누렁이한테는 딱히 통하지 않았던 것 같지만.
드래곤이라는 종족적 특수성 때문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리고 별도로 출간한 ‘갈리아 연대기’ 외전을 통해 얻은 C급 스킬 베르킨게토릭스의 의지도 있었지만.
헥토르 하위 호환이었기 때문에, 다음번 합성 파티의 제물로 예약해두었다.
“아쉽긴 하네.”
“배가 불렀군요, 김율…….”
차마 누렁이에게는 말하지 못했지만.
카이사르 이야기를 더 질질 끌지 않고 깔끔하게 마무리한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이전, 연재 중일 때.
[세간의 평가: 매우 긍정적] [일일 독자 수: 4,014명]
[예상 획득 스킬: [A급] 키■로의 웅■]
[1달 이상 유지해야 합니다. (현재 1일)]
계속 보아왔던 일반적인 내용에 덧대어──
[일일 독자 수를 10,000명 이상으로 끌어올리면 보상을 S급 스킬로 업그레이드할 수 있습니다.]
더 나은 보상을 받을 가능성을 엿보았다.
하지만 결국 완결 날 때까지 4천 명을 아슬아슬하게 디펜스했었던 것으로 보면, 1만 명은 아직 내게 요원한 일.
그리고.
소설은 보통 장기 연재에 접어들면, 성적이 천천히 우하향하는 그래프를 그리기 마련이다.
당장 나도 최고점인 5,400명까지 봤다가 점차 사람들이 하차해서 성적이 하루하루 떨어지는 걸 보면서 매일 밤 눈물로 베갯잇을 적셨던 적이 있었다.
“크흠.”
아픈 상처를 잠깐 달래고.
즉, 바꿔 말해서.
처음부터 고점을 1만 명 이상 찍을 수 있는 대작을 만들어내야, 비로소 가장 이상적인 형태로 스킬을 획득할 수 있게 되는 것.
일단 똥을 싸라. 그러면 유명해질 것이다.
그런 말도 있지 않은가.
……이게 아니었나?
어쨌든.
‘몰락 귀족이 정치를 잘함’으로 인지도를 쌓았으니, 다음 작품은 반드시 메가 히트할 수 있는 작품을 만들어내서 내 인기를 궤도에 올려야 한다.
그러려면 어중간한 소재로는 불가능할 터.
역사 이야기로 그만한 고점을 찍을 수 있는 소재는 그렇게 많지 않다.
당연히 내 결론은…….
“삼국지밖에 없지.”
“근데 그건 소설이잖습니까.”
핵심을 찌른 히스토리에의 말대꾸에, 상으로 깡통의 연료 주입구에 사탕을 하나 물려주었다.
“음뇸.”
확실히.
진수의 삼국지와 비교했을 때.
나관중의 삼국지연의는 굉장히 많은 부분에서 소설적 각색이 들어가 있다.
특히 가장 미화된 것이 목만 오신 관공이시다.
미화된 행적만 해도 몇 개인가.
술이 식기 전에 화웅의 목을 잘라 온 적, 없음.
조조에게 3가지 약속받고 항복, 한 적 없음.
적토마를 하사받은 적, 없음.
문추를 죽인 적, 없음.
오관참육, 당연히 없음.
화용도에서 조조를 풀어준 적, 없음.
노숙이랑 말싸움에서, 개같이 쳐발림.
죽어서도 여몽 이놈! 하고 뒤끝 부린 적도 없음.
그야말로 나관중 자캐딸이라 불러도 될 정도로 역사 왜곡 수준이 들어갔으니, 당연하게도 내가 소설로 써봤자 ‘고증에 부합하지 않음’ 판정이나 받을 터.
그나마 오히려 정사가 더 나은 지점이라면.
마취조차 하지 않은 채 화타에게 치료받으며 오목 뜨다가 삼삼이라고 화를 내며 바둑판을 엎어버린 적은 없다는 것이다.
애초에 화타는 적벽대전 이전에 이미 사망했으니까.
뭐, 관우뿐만 아니다.
특히 유비 측 인물들의 행적은 소설적 과장이 꽤 많이 들어가 있는데, 문제는 그걸 빼면 재미도 같이 사라진다는 점.
“삼국지는 등장인물이 너무 많지 않습니까? 그것도 조금 우려됩니다.”
혈당 스파이크가 돋은 나머지, 다시 부드러워진 히스토리에의 지적에도 물론 일리가 있었다.
연재소설의 형태를 취하려면 명확한 주인공이 있어야 하는데, 누굴 다룬단 말인가.
거기에 생각이 닿은 순간.
“그거다……!”
나는 아르키메데스처럼 크게 외쳤다.
발상을 조금 바꾸면.
정사 삼국지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건 위나라의 이야기, 위지魏志다.
귀 큰 놈 중심의 촉지蜀志가 15권임에 비해, 위지는 30권으로 무려 두 배 분량.
그리고, 진수는 촉한에서 태어났으되 사마씨가 통일한 이후 서진의 관리로 재임할 때 삼국지를 집필했기에, 알게 모르게 위빠적 면모가 도드라진다.
그러니.
차기작은.
연의 속 유비가 주인공인 삼국지 영걸전과.
정사 속 조조가 주인공인 삼국지 조조전.
더블 주인공이 아니라, 아예 소설을 둘로 쪼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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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 귀족이 정치를 잘함’ 완결 이후 약 한 달.
나는 삼국지 이야기를 이세계의 신문 문학 식으로 어떻게 녹여낼지에 대한 깊은 고민에 잠겼다.
일단은 제목부터.
교양 있는 현대인이야 삼국지라는 세 글자만 듣더라도 뭐가 가슴 속에 간질간질하는 갈드컵의 기운을 느끼겠지만.
이세계에 바로 삼국지라는 워딩을 던져봤자 ‘그게 뭔데? 소리만 들을 것이다.
게다가 세 나라 이야기라고 하기에는, 흠, 나는 딱히 손씨 가문을 조망할 생각이 없다.
솔직히 좋게 쳐서 손견과 손책까지는 아주 비장미가 넘치는, 야심을 품은 군웅으로 평가할 수 있겠지만.
아무래도 손제리는 좀.
그렇기에 쓰리 킹덤, 세 나라 이야기, 뭐 이런 형태의 작명도 조금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다.
제목이 맛깔나야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건 당연한 법.
그러므로…….
“결정했다.”
“제목 정하는 데 뭘 그리 전을 구우십니까?”
“조용히 해라, ‘돗자리 짜던 내가 왕좌의 주인이 된다니, 절대로 무리무리! 무리가 아니었다? 같은 제목을 지어낸 주제에.”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만.”
나조차도 까먹고 있었던 내 어린 시절의 오점.
라■텔도 없었던 시기에 저작권법을 개무시하고 엄선된 명작을 담아둔 외장 하드를 발견당한 죄가 이렇게 크다.
어쨌든…….
“악당이 야망을 숨김. 그리고, 황족이 혈통을 숨김. 어때?”
“제정신입니까?”
물론.
제정신이지.
원래 주인공은 힘이든 자비든 집이든 뭐든지 숨겨야 한다.
물론 엄밀히 따지면 유비는 딱히 자신의 혈통을 숨기진 않았다.
사실상 그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근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중산정왕의 몇 대손이니 뭐니, 어딜 가나 자기소개를 할 때 그걸로 PR을 하고 다닌다.
조조도 딱히 야망을 숨기진 않았다.
그러니까 꼴 받아서 빈 찬합이나 보냈지.
근데, 뭐.
제목은 어그로만 끌리면 되는 법.
약간의 통일성을 위해, 앞부분에 ‘두 영웅’을 붙여주면 제목의 완성.
……여기까지 한 달.
자그마치 한 달이나 걸렸다.
나와 히스토리에의 작명 능력으로는 거기까지가 한계였다.
오히려 내용은 그간 고민해 왔던 것들을 바탕으로 수월히 쓸 수 있었다.
정치 및 피카레스크 물의 주인공.
난세를 평정하기 위해 감성보다는 이성을 선택한 고독한 현실주의자, 그리고 명백한 악당처럼 비치지만 오히려 그것이 매력이 되어줄 조조.
전형적인 정통 영웅담의 주인공.
가진 것 없이 시작하여 오직 인과 의를 무기로 의형제부터 수많은 사람의 마음을 얻어 대업을 성취한, 이상주의적인 영웅인 유비.
정사 위주로만 풀어간다면 자칫 너무 딱딱할 수 있는 부분을, 일부러 조조 쪽에서는 표현하지 않고 유비 쪽에서만 표현하는 식으로 최대한 나관중의 비법 소스도 잘 볶아냈다.
“표절 아닙니까?”
“그렇긴 하지? 하지만 나관중이 지옥에서 돌아와도, 이미 저작권은 소멸됐으니 괜찮지 않을까.”
“흠…….”
“여기는 이세계니까, 마음껏 애니를 표절해서 팔아먹을 생각을 하는 것 같은데.”
“와. 당신은 지금 상위 0.01% 히스토리에 설계자의 시점에서 이야기하고 있어요.”
솔직히 나도 돈과 명예만 놓고 본다면 그쪽이 훨씬 나은 선택지라고는 생각하지만.
그 정도까지는 심리적 저항감도 있었고, 애초에 상태창을 활용해야 하는 나에게는 크게 메리트가 없었다.
어쨌든.
슬슬, 길포드를 만나러 가볼까.
* * *
“오랜만입니다, 길포드 씨.”
“자, 작가님……!”
오래간만에 마주한 김율을 보고서, 길포드는 그야말로 입이 찢어질 듯한 함박웃음을 지었다.
보통의 작가들은 작품을 하나 완결 낸 후 휴식기에 들어가는 것이 관례긴 했지만.
‘몰락 귀족이 정치를 잘함’ 완결 이후, 진리일보의 판매량이 다시 하락세를 보이기 시작한 데다가.
- 이번에도 또 평화일보에게 밀렸잖아!
그저 작가 하나를 잘 물어온 공으로 사내에서 입지를 구축했었던 길포드였기에, 지금은 말랑하게 쪼그라든 풍선과도 같은 꼴이었다.
그러니 더욱이 반가울 수밖에.
“어째, 제가 아니라 손에 들린 물건을 보는 것 같습니다만.”
“앗. 하하……. 죄송합니다.”
김율도 물론 반가웠지만, 김율의 팔에 들려있는 거대한 서류 봉투가 더 눈길을 끌었기에 저지른 무례였다.
직원에게 눈짓으로 신문사에 구비된 것 중 가장 최고급의 다과와 음료를 내오라는 응급 신호를 보낸 후.
“편히 앉으십시오.”
김율과 마주 앉았다.
보통 사람이라면 이런저런 신변잡기를 늘어놓을 법한 상황이었지만.
“차기작입니다.”
김율은 그저 싱긋 웃으며 자신이 눈을 떼지 못하던, 그토록 바라던 것을 내밀어 줄 뿐이었다.
봉투를 열어본 순간.
“소설이, 두 개……!”
그 짧은 시간에 벌써 아이디어를 하나도 아니라 둘씩이나 짜내다니!
김율, 그는 천재인가!
감탄사를 흘리면서 내용을 파라랑 펼쳐보려는 순간.
“두 개, 동시에 연재 시작하고 싶습니다.”
“……?”
그 말에.
길포드는 고개를 들어 김율을 쳐다보았다.
그의 표정은 하나의 흔들림 없이, 마치 그렇게 되리라는 것을 예지하는 것처럼 평온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렇게 해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그는 문학의 프로.
아무리 김율이라고 해도, 수준에 극히 미달하는 어린애 글 장난 수준의 글을 들고 왔다면, 그래도 김율이면.
……김율이면 그럴 리가 없다.
자신도 모르게 굳건한 믿음에 감화된 채, 일단 먼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작품을 검증하지 않을 수는 없는 법.
“그래도, 읽어보겠습니다.”
그래도, 길포드는 프로였다.
.
.
.
문득 길포드는 정신을 차리고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족히 두 시간가량, 김율이 작성해 온 수많은 분량을 앉은 자리에서 홀린 듯이 빠져들어 읽고 있었다.
“이, 이런. 실례가 많았…….”
고개를 들자.
이미 김율은 그 자리에 없었다.
“그, 나중에 연락 부탁드린다고 하셨습니다.”
“……당장 계약서 초안 들고 오십시오.”
이건 뜬다.
반드시 뜬다.
전에 없었던 실험적인 시도.
두 명의 주인공을 채택한 소설은 심심찮게 있었으나, 자칫 그 균형을 맞추지 못하면 소설의 방향이 산으로 가기 일쑤였다.
하지만.
숨김 시리즈는 달랐다.
처음에는 전혀 다른 출발점을 가진 사내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문제를 타개하다가.
점과 점이 이어져 선이 되듯, 어느새 자그마한 선으로 인연이 이어지고, 나아가 그들이 모은 인연의 실이 어느덧 면을 그려내는 입체적인 과정.
그리고, 종국에는 그 면과 면이 충돌해서 빚어낼 대서사시를 암시하는 내용까지.
확실히 두 작품을 동시에 연재하고 싶다는 의도를 이해할 수 있었다.
게다가.
김율은 섬세하게도 신문사 사정까지 고려해 주었다.
명백하게 이상론으로 무장한, 고결한 주인공. 유비.
그의 신체적 특징은 귀가 컸고.
그의 혈통은 고귀한 혈통을 타고났다고 했다.
“하이엘프군.”
복숭아나무 아래에서 의형제의 결의를 맺었다는 표현 또한, 세계수를 암시한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사장을 뒤에서 조종하고 있는 메인 스폰서인 위스페라우드 공작가의 입맛에 정말로 딱 알맞을 것이다.
“역시, 대작가는 달라도 뭔가 달라……!”
직원이 챙겨온 계약서와 함께, 그는 김율의 원고를 들고 사장실로 달려갔다.
그리고.
“길포드! 역시 자네밖에 없어! 하하하하! 이거라면, 이거라면 평화일보뿐만 아니라 제국일보까지 짓누르고 단숨에 우리가 문학의 정점에 서는 거다!”
사장의 극찬과 더불어 소설의 마케팅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까지 약속받을 수 있었다.
새삼 길포드는 느꼈다.
엘프는, 돈이 된다.
* * *
“어떻게 됐나요?”
“한 시간 동안 계속 읽기만 있길래, 내일 방문하겠다고 말하고 돌아왔어.”
“흐응.”
히스토리에는 복잡미묘한 감정을 느꼈다.
그간.
김율이 명명하기로는 ‘작전명 누렁이 디펜스’에 투입되어, 거의 이틀에 한 번꼴로 로비에서 떼를 쓰는 에스테아를 달래면서.
히스토리에는 수많은 글을 만들어서 에스테아에게 보여주었다.
물론 볼 때는 꺄르륵, 으르랑, 히히거리면서 즐겁게 읽었던 에스테아였지만.
항상 귀가 전 마지막 대사는 같았다.
- 그래서, 김율은 도대체 신작을 언제 쓰는 거람?
그 말이 쌓이고 쌓여서.
히스토리에는 문득 호승심을 느꼈다.
자신의 것과 김율의 것이 도대체 뭐가 그리 다르기에, 이렇게까지 반응이 차이가 난단 말인가.
심지어 저번의 출판사 직원을 만났을 때도 그랬다.
왜, 자신의 글은 평가를 제대로 받지 못한 것인가.
“김율, 도대체 왜 에스쟝은 제 소설에 대해서 좋은 평가를 내리지 않을까요?”
거의 푸념하듯 내뱉은 말이었지만.
의외로 김율은 진지하게 답변해 주었다.
“히스토리에. 네가 지금 말하고 있는 건, 어떤 식으로 말하는 거지?”
“음…… 뇌라는 생체 기관을 통해서 논리적 사고를 거친 결과를 출력하는 형태로 발화가 이루어집니다.”
“그렇다면, 글을 쓸 때는?”
순간적으로 히스토리에의 말문이 막혔다.
김율은 미소를 지으며 히스토리에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었다.
“생성형 인공지능의 원리를 따지면, 입력받은 텍스트에 가장 자연스러운 다음 단어를 확률적으로 예측해서 문장을 생성하는 식으로 이루어지잖아. 자, 다시 생각해 보자. 네가 글을 쓸 때는 어떻게 쓰지?”
“……생성합니다.”
김율의 지적은 정확했다.
소위 ‘누렁이 사료’를 빠른 속도로 만들어 낼 수 있는 비결.
탄생의 비밀과 연관되어 있는진 모르겠지만, 그녀는 어지간한 전자기기와 접촉하는 것만으로도 곧바로 명령을 내릴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노트북에게 명령을 내릴 때는…….
말 그대로, 컴퓨터 언어적 사고로 접근했었다.
“그러면 결국 이야기는 예측가능한 곳으로 뻗어갈 수밖에 없어. 매번 마지막 문장 또한 ‘그들의 모험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와 같이, 뜬구름 잡는 식으로 접근할 뿐이지.”
반추해 보면, 정말 그랬다.
그들의 이야기는 더욱더 깊은 곳으로 빠지고 있었다.
다음 모험의 순간을 기대하면서, 눈을 반짝였다.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 발걸음을 내디뎠다.
그것은 모험의 끝이 아니라, 비로소 시작이었다.
새로운 시대의 서막이 고요히 열리고 있었다.
뭐 그러한…….
있어 보이지만, 다시 돌이켜보면 왜 진작 깨닫지 못했나 싶을 정도로 알맹이 없는 마무리.
“김율. 당신은 내 내부 구조를 바꿨습니다.”
이 또한 김율이 지적해 왔었던 흔한 아첨 멘트 중 하나였지만.
적어도, 지금 히스토리에에게 있어서는 진심으로 흘러나온 말이었다.
그리고.
“김율, 저도 소설을 잘 써보고 싶습니다.”
그녀는 결의에 찬 표정으로 선언했다.
김율은 말없이, 또다시 히스토리에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나.
키 차이가 조금 났기에.
히스토리에는 미처 보지 못했다.
자신이 결의를 내뱉은 순간, 김율의 입가에서 기묘한 미소가 번뜩였음을.
그 미소는.
- 교수님, 저도 역사학을 더 깊이 배워보고 싶습니다.
김율이 처음으로 대학원이라는 미끼를 물게 되었을 때, 김율의 지도교수가 지었던 것과 거의 흡사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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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약은 확정적으로 진행합시다. 근데, 위쪽에서도 이 소설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어서요, 세부적인 조건은 일주일 뒤에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 그렇게 하십시오.
호재인지 화재인지 모를 길포드의 말을 듣고 귀가한 후.
“핫하, 똑바로 서라!”
히스토리에에게 채찍을 때려가면서 조교하는 보람찬 나날을 보냈다.
물론 눈에서 레이저 빔을 발사하려는 흉참한 하극상 시도를, 재빨리 입에 초콜릿을 쑤셔 넣어 가까스로 막는 일도 벌어지긴 했다.
그 결과.
“깨달았습니다. 웹소설의 극의를.”
“드디어 봉우리에 올랐구나.”
“봉우리?”
“우매함의 봉우리.”
“이익.”
손으로 직접 타이핑하는 내용조차 LLM의 클리셰적 화법에서 벗어나지 못했었던 때와 달리.
점차 나아지는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동안 차곡차곡 모아왔던 내 ‘몰귀정’이 연재된 신문 속 다른 작품들을 읽게 한 것이 꽤 도움이 된 것 같았다.
소설을 잘 쓰는 방법은 딱 한 가지 길밖에 없다.
다독. 많이 읽고.
다작. 많이 쓰고.
다상량. 많이 생각하라.
사고 속도야 인류를 아득히 초월하는 초고교급 인공지능 출신이었기에 문제가 없었지만, 나머지 부분에서는 확실히 부족했으니.
이대로만 가면.
나를 위한 훌륭한 사료 공급원이 되어주리라.
“으흐흐.”
“제 빅데이터로 추론하면, 김율은 지금 음흉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부정하지 않을게.”
과연 버츄얼 아바타 출신답게, 히스토리에는 눈가에 검은색 이펙트를 드러냄으로써 경멸의 감정을 표현했다.
“어쨌든, 다녀오마. 열심히 쓰고.”
“올 때 초코빵.”
그놈의 초코빵은.
저번에 초코빵을 사러 갔다가 마경에 조난당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지만.
뭐, 맛있으니까.
“다섯 개 사 와서 내가 세 개 먹겠음.”
“그건 불공평함.”
시답잖은 소리를 주고받은 후, 혹시나 또다시 누렁이가 크르랑거리고 있을까 봐 문을 살짝 열어 빼꼼 밖의 동태를 점검했다.
안전함을 확인하고 연구실 밖으로 나왔다.
24시간 공기청정기가 돌아가고 있는 연구실과 달리, 다소 탁한 느낌이 드는 공기가 내 폐를 괴롭혔다.
“일주일만이네.”
계속 히스토리에와 수다를 떠는 게 습관이 되어서일까, 나도 모르게 혼잣말이 나왔다.
최근에 부쩍 수도의 공기 질이 저하되는 느낌이라, 산책 대신 사이클로 대체했더니 연구실 밖에 나올 일이 거의 없었다.
식료품이야 누렁이 디펜스를 마친 히스토리에가 사다 주니까.
아주 전형적인 작가의 삶을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
.
.
여유롭게 주변 풍경을 눈에 담으며 광장에 도달한 순간.
“……?”
나는 눈을 의심했다.
원래라면 분명히 깐프 동상이 하나 서 있었던 광장의 한복판에.
동상은 온데간데없이, 유전자 조작이라도 가한 듯한 꽤 거대한 나무가 한 그루 서 있었다.
……복숭아나무였다.
심지어 계절에 맞지 않게, 복사꽃까지 만개하여 흐드러지고 있는 꼴을 보니.
“에이, 설마.”
우연의 일치일 것이다, 판타지 세계의 또 다른 품종이다, 하는 생각을 애써 삼키며 신문사에 들어가 길포드를 찾았지만.
“아, 보셨습니까? 윗선에서도 굉장히 만족해하셔서요. 종족 화합의 새 지평을 연 장면이라고.”
“……네?”
“그나저나, 작가님도 꽤 정치적 감각이 있으시군요? 주인공을 하이엘프로 잡다니.”
“혹시 곶감이랑 게장을 같이 드셨습니까?”
“게장이 뭐죠? 흠, 곶감은 저도 좋아합니다만.”
금단의 비밀 레시피를 섭취한 나머지 착란을 일으킨 건 아니고.
도대체 무슨 소리지, 하고 그냥 가만히 길포드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그 결론.
유비는 귀가 크니까 하이엘프.
장비는 수염이 특징적이니 드워프 혼혈.
관우는, 드워프가 수염을 그따위로 기를 리 없으니 인간.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네? 아닙니까?”
아니, 분명히 귀 큰 놈이 초미녀 거유 엘프 출신 소드마스터라는 괴담이야 종종 접해본 적 있었지만.
삼국지를 아는 사람들이 밈으로 향유한다면 모를까, 이렇게 진지하게 유비 엘프 설을 믿고 있는 모습을 보니 나도 모르게 어지러워졌다.
“아, 슈나이센 공작님께서도 흡족해하시면서 흥행에 따라 보너스 지급과 더불어 프로모션도 약속을──”
“암요. 유비는 하이엘프가 맞지요. 고귀한 혈통이니까요.”
오늘부터 유비는 엘프다.
어차피 연의 기반이잖아.
순간적으로 연의가 아니라 연희 기반으로 드리프트를 꺾어버릴까도 생각했지만, 그러면 조조 이야기가 붕 뜨니까.
“아, 그리고.”
“네.”
“그, 카이사르 그려주셨던 화백은 혹시 작가님 지인이신가요?”
“그렇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지인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무적의 동거인…….
아, 씨. 또 옮았네.
“혹시 괜찮으시다면, 이번에도 삽화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원고료는 아예 별도로 책정하겠습니다. 자, 여기 시안섭니다.”
“헉.”
그림의 고료 규모를 듣자마자.
나는 진지하게 우리 집 대학원생 겸 망생이의 테크트리를 글이 아니라 그림으로 비틀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나도 역사학과가 아니라 미대를 나왔어야 했다.
그러면 망해도 콧수염 하나 붙이면 이세계에서 충분히 성공했을 텐데.
* * *
인간이 지배하고 다스리는 제국 속.
유일하게 하이엘프로 구성된 위스페라우드 공작가.
아무리 인간 세상에 섞여서 살고 있다지만.
그들은 엘프의 신성한 의무, 세계수의 거룩한 뜻을 받들어 자연을 아끼고 사랑하여야 한다는 그 의무를 잊은 적이 없었다.
하지만.
마도공학이 본격적으로 제국에 도입되면서, 그들의 입장이 굉장히 난처해졌다.
마도공학 기술의 남용은 필연적으로 주변의 마력을 집어삼키게 되기 마련이었기에 기술의 확산을 방해하려고 애썼지만.
결국, 그들은 실패했다.
덩달아 대중적 이미지 또한 추락에 추락을 거듭했다.
그렇기에.
“인간은 필멸이지만 예술은 불멸. 이 기회에, 엘프를 정의로운 이미지로 확실히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좋겠군.”
가주, 슈나이센 공작의 한마디와 더불어.
“으음, 명작의 향기가 솔솔 나는 것이와요?”
진리일보의 실질적인 소유주.
슈나이센 공작의 장녀.
클로에 폰 위스페라우드 또한 그 계획에 적극 찬성 의사를 밝혔다.
그렇게.
본격적으로 김율의 소설이 연재를 시작하기 3일 전.
통상적으로는 신문 1면은 정치 이야기로 장식되는 것이 관행이었지만──
오늘, 그 관행은 깨졌다.
“이게 뭐야?”
“연재 예고……?”
“뭐지? 무엇을 암시하는 것이지?”
아침부터 진리일보를 받아 든 사람들은, 1면의 양옆에 장식된 사내들의 모습에 먼저 시선을 뺏겼다.
분명히, 카이사르의 최후를 묘사했었던 그림체와 흡사하면서도 뭔가 살짝 조금 더 현실적인 그림체.
김율이 지칭하기를, ‘코삼 그림체’로 그려진 미남자 둘의 모습.
푸른 옷을 입고서, 카리스마와 자신감 넘치는 웃음을 짓고 있는 인간 사내와.
초록 옷을 입고서, 부드럽고 상냥한 미소를 짓고 있는 하이엘프 사내.
그리고 그 둘 사이에는, 황톳빛 강이 흘러내리면서 글귀를 물결처럼 담아내고 있었다.
## ====== ##
하늘이 메마르고, 땅이 갈라지고.
사람들은 굶주리며 그저 울부짖었다.
인간의 하늘은 그저 그를 외면하고.
하늘은 너무도 드높아 아이의 비명조차 들리지 않으니.
이들을, 그저 배고플 뿐인 사람을 품지 못한다면.
그 어찌 참된 인간의 하늘이라고 할 수 있겠으랴.
천하가 나누어진 지 오래면 반드시 하나로 모이고.
하나로 모인 지 오래면 반드시 다시 나누어질 것이니.
지금 이 푸르른 하늘을 조금 더 낮은 곳으로.
구름을 걷어내어 인간의 소리가 닿는 곁으로.
그러면 비로소 그들은 들을 수 있으리라.
굶주린 자들의 아우성을, 그 슬픔을.
이처럼 시리도록 푸르고, 너무나도 차가운 세상에.
황금빛 태양이 떠오르는 그 순간이, 마침내 오리라.
그러니, 백성들이여.
엎드려 살지 마라.
일어나 죽는 거다.
## ====== ##
마지막 문장을 뇌에 받아들이는 순간.
그 파격에, 그 깊은 의미에.
사람들은 전율했다.
전에 없던 새로운 표현,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문학적 거대한 충격, 마치 시와 같은 울림.
그들은 홀린 듯이 다음 페이지를 넘겼다.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
신문의 두 번째 면에도 이야기가 조금 더 이어져 있었다.
마치 문학에 할애할 페이지를 통째로 도려와서 제일 앞에 담은 것처럼.
‘엎살일죽’이 시대와 세계를 초월해서 울린 강렬함 덕분일까.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홀린 듯이 그 뒷내용 또한 곱씹으면서 퍼먹기 시작했다.
## ====== ##
하나의 땅에, 오직 하나의 제국만이 존재했다.
하지만 제국의 하늘은 어두운 먹구름에 눈이 가리어지고, 백성들의 삶은 끝없이 무저갱에 침잠하는 것처럼 어려워만 가니.
여기, 한 사내가 깃발을 들고 노래했다.
그 뒤를, 수많은 굶주린 사람들이 따랐다.
그들은 모두 머리에 노란 두건을 쓰고 다녔으니.
사람들은 이를 일컬어 황건이라 지칭했다.
그 시작은 세상의 순리를 되찾자는 의미로 출발하였으나.
그 끝에선 결국 무분별한 파괴와 학살에 도달하였으니.
바야흐로 난세였다.
…….
…….
바로 여기에.
난세를 종결하고자 하는 사내가 있었다.
화려함이 맴도는 제국의 수도, 낙양에서 악기 소리가 울려 퍼지고, 교태로운 웃음과 신음만이 흘러넘치는 가운데.
“제국은, 이미 썩었다.”
창가에 불어오는, 흙 섞인 공기를 들이마시며 조조는 탄식을 삼켰다.
그리고.
그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
…….
또 여기에.
난세에 눈물겨워 하는 사내가 있었다.
제국의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아직은 황건의 위세가 닿지 않은 평화로운 촌락.
탁현에 사는 청년, 유비는 고개를 들어 시장에 붙은 방을 보고 있었다.
나라가 위급하니, 기개 있는 자들은 분연히 떨쳐 일어나 저 황건적들을 무찌르는 데 동참할지어다.
고개를 돌려보면.
“아이고, 아이고…….”
“여기도 더는 안전하지 않겠구나!”
황건적 때문에 가족을 잃고 떠도는 사람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며 불안함에 젖은 사람들의 모습이 그의 눈에 보였다.
“제국이, 이대로 무너지고야 마는가…….”
황실의 먼 후예로서, 아무런 힘도 없이 이 참상을 지켜만 보고 있다는 갑갑한 기운을 채 털어내지 못한 채, 그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 ====== ##
1면에서 그들의 가슴을 두드렸던 충격적인 어휘는 사용되진 않았지만.
1면과 2면의 내용을 모두 종합함으로써, 앞으로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에 관한 예고가 확실히 드러나 있었기에.
사람들은 기대를 품으며 소설이 실린 지면의 아래로 눈을 던졌다.
그곳에는.
[제국의 대문호, 본지의 자랑, 정치극의 전설.]
[율리시스 작가의 대망의 차기작. 3일 후 공개됩니다.]
김율이 보고 손발이 오그라들어버린 문구가 적혀 있었다.
하지만 무릇 대중이란 예술성을 한껏 가미해서 철학을 잔뜩 집어넣은 것보다, 즉각적으로 도파민을 공급해 줄 수 있는 표현을 더 좋아하였으니.
제국의 대문호!
본지의 자랑!
정치극의 전설!
대망의 차기작!
단어 하나하나마다 ‘아니, 도대체 얼마나 개쩔길래?’라는 생각을 떠올릴 수밖에 없는 수식어에.
사람들은 조금씩 기대치를 높이기 시작했다.
.
.
.
그리고, 마침내 대망의 당일.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정치 이야기나 주야장천 늘어놓던 진리일보의 1면이, 또다시 바뀌었다.
이번에는, 글자 하나도 없는 순수한 그림 한 폭이 담겨 있었다.
하이엘프 특유의 눈── 파란색 홍채에 노란색 별이 빛나는 듯한 비주얼의 하이엘프를 중심으로.
드워프라 보기엔 체구가 매우 건장한 편이었지만, 특유의 수염이 돋보이는 호탕한 사내와.
그리고 머리카락보다 훨씬 길게 늘어뜨린 수염이 인상적인, 차가운 인상의 사내가 있었다.
바로 그 세 명이, 세계수를 묘하게 닮은 듯한 복숭아나무 아래에서 서로를 마주 보고 술잔을 부딪치고 있었다.
이미지만으로도 사나이의 가슴을 울리게 할 뿐만 아니라.
반목하기 일쑤였던 엘프, 드워프, 그리고 인간이 함께 모여있다는 그 자체만으로.
사람들은 신문의 다른 면은 다 제쳐두고, 소설 면부터 확인했다.
그리고, 그들은 ‘황족이 혈통을 숨김’을 읽었다.
서로 아무런 일면식도 없는 사내들이, 그저 작금의 개탄스러운 현실에 대한 성토 하나만으로 모여서, 의기로 똘똘 뭉쳐서 의형제의 결의를 맺는 장면을 보았다.
때로는 그림이 상상력을 제한시키기도 하지만.
잘 연출된 그림은 독자의 사고 흐름마저 휘두를 수 있었으니.
사람들의 가슴 속에 자신도 모르게 조금씩, 조금씩 삼뽕이라는 것이 누적되기 시작했다.
물론, ‘아니, 1화부터 혈통 이야기를 하는데 왜 제목은 숨김임?’이라는 지적을 한 냉철한 사람도 있었지만.
그 또한 다음 장으로 넘기는 손길을 참아낼 순 없었다.
그렇게.
독자들은 자연스럽게 세계관을 함께 공유한다는 소설, ‘악당이 야망을 숨김’을 이어서 읽기 시작했다.
비록 복숭아나무 밑에서의 의형제 결의만큼의 임팩트는 없었지만.
- 백성들이 따르는 것은 장각의 요술이 아니라, 굶주림이다. 그들을 굶주리게 한 것은 저 성안의 탐욕스러운 돼지들이다.
제국의 구조적 모습을 통렬하게 비판하는 젊은 관리, 조조.
그리고 황건적을 토벌하라는 명과 더불어서 기도위 임명장을 두려움 없이 받아 든 그의 모습에서.
그들은 좋든 싫든, 작가의 전작──
‘몰락 귀족이 정치를 잘함’ 속 카이사르의 모습을 겹쳐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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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시작도 전부터 펼쳐진 대규모 마케팅 덕분일까.
김율이 야심 차게 이세계에 풀어놓은 삼국지, 두 작품을 묶어서 공식 명칭 ‘두 영웅’은 연재 초반부터 가파르게 흥행 돌풍이 불기 시작했다.
특히.
“어이, 거기 천박한 드워프?”
“흠?”
“이 몸과 의형제를 맺을 영광을 주겠다.”
“좆이나 까잡솨.”
굳이 김율이 작가의 말로 언급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시대와 세계를 초월한 문학적 유전자가 공유된 탓일까.
‘복숭아 형제들’이라는 별명이 붙어버린 유관장 트리오의 종족 화합적 무브먼트가 소위 박애주의자들의 가슴에 불을 지핀 탓이었다.
물론, 그 어떤 드워프도 깐프와 의형제를 맺어주는 일은 없었다.
그리고.
위스페라우드 가문의 클로에 영애가 계획한 ‘복숭아 세계수’는 어느덧 도시의 관광 명소로 자리매김했다.
“오호호홋! 장사가 아주 잘되는 것이와요!”
기묘하게도 복숭아 세계수와 가까운 곳에 있는, 소유주가 불분명한 카페에는 돈벼락이 쏟아졌다.
신문사에 들어가는 돈은 아빠 돈.
카페로 벌어들이는 돈은 자기 돈이라는 측면에서.
클로에 영애의 깐프적 사업 감각이 빛을 발한 순간이었다.
.
.
.
깐프들의 반응은 고작해야 그 정도였지만.
정작 연재가 거듭될수록, 인간들 사이에서 점차 ‘두 영웅’이 진지하게 향유되기 시작했다.
“부정부패로 망해가는 제국이라…… 확실히, 그 똥물 사건을 미루어보더라도 율리시스라는 작가는 정치에 대해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있군.”
지금은 탄핵당해 야인으로 돌아간 채.
그 후유증으로 얼굴이 누렇게 뜨는 오렌지 병을 앓고 있는 아스테릭 의원이 폭로를 결심하게 된 계기가 무엇이었던가.
비록 독재자로 전락해버리긴 했지만, 젊은 카이사르의 영웅적 행보로부터 출발한 것이 아니었던가.
그렇기에 사람들은, 특히 정치에 관심이 있는 이들이라면 ‘두 영웅’은 필독 도서로 자리매김했다.
당연하게도 살롱에서는 이와 관련한 진지한 토론이 이어지기 마련.
“제국을 좌지우지하는 십상시란 존재들…… 아무리 봐도 고위 귀족 가문들을 겨냥한 것 같단 말이지.”
“그렇다고 보기에는 황건적의 존재가 좀 애매하지 않소? 아무리 봐도 흑마법사와 사교도들을 암시하는 것 같은데.”
“일리가 있군. 주술을 부리는 신묘한 지도자라…… 그 사교도들이 벌인 행적을 미루어보면 그것도 타당한 해석이군.”
“흑마법사들도 결국 제국의 체제를 무너트리기 위해 활동하는 거니까, 흐음, 이건 좀 논란이 있겠어.”
김율이 들었다면 ‘우냐냣! 좌냐냣! 외치면서 정치적 탕평을 선언하느라 몹시 고단한 시간을 보냈겠지만.
애석하게도 최근 김율은 글 쓰는 것만 해도 바빠서 제국 수도의 살롱에 발걸음을 들이밀지 못했으니.
의도치 않게 김율, 정확하게는 율리시스라는 필명을 가진 작가는 제국 정치계의 떠오르는 돌풍으로 간주되기 시작했다.
물론.
정치와 같은 묵직한 토픽을 다루는 사람들은 실질적으로 살롱에서도 한줌단.
대부분은…….
“그래서 관우랑 장비랑 싸우면 누가 이김?”
“유비랑 1:2로 싸워도 유비가 다 쓸어버릴 것 같은데.”
“솔직히, 뭐, 유비, 그거 출신도 촌놈 아닌가.”
“취소해라…… 방금 그 말……!”
“근데 조조가 악당이 맞나? 아닌 것 같은데?”
“지금까지 보여준 면모로 보면, 흠, 글쎄. 애초에 당장 유비도 혈통을 안 숨기지 않았나.”
“근데 15대손? 17대손? 그 정도면 애초에 황실의 피가 섞였다고 불러주기도 민망하지 않나?”
인물을 중심으로 한 갈드컵을 향유하고 있었다.
특히 초반부의 전개는, 작가가 의도적으로 두 인물을 완전히 대비시키는 식으로 풀어나갔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기도위로서 관군을 이끌고, 탁월한 통솔력과 카리스마를 발휘하여 영천에서 황건적의 잔당을 토벌한 조조.
의형제들과 함께 자신의 가산을 헐어서 의용군을 창설하고 스스로 전장에 뛰어든 유비.
한쪽은 누가 봐도 명백한 엘리트 코스.
한쪽은 밑바닥부터 출발하는 잡초 코스.
군율로써 다스리느냐.
인덕으로써 다스리느냐.
물론…….
“상인이 미쳤다고 손해를 보고 말을 다 넘겨줘? 이건 아무리 소설이라도 말이 안 되지!”
“어리석군. 자네라면 쌍검을 자유자재로 휘두르는 하이엘프가 나타나서 팔아달라고 했을 때, 쫄지 않을 자신이 있나?”
“그, 그런 건가……?”
김율이 아무 생각 없이 ‘유비는 연의! 과장 팍팍 쳐서!’라는 마인드로 글쓰기에 임한 나머지.
장세평과 소쌍은 이세계에서도 유비에게 삥 뜯기는, 심지어 한술 더 떠서 하이엘프에게 압도당한 말 상인들로 전락하고야 말았다.
정사에서는 유비 코인의 저점 매수자로 조금 더 개연성 있게 표현되었지만, 소설에서 등장하는 엑스트라에게 서술 비중을 할애할 수 없다는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김율이었고.
깐프로 조형된 나머지, 피할 수 없는 억까라는 숙명을 타고난 유비였다.
.
.
.
그렇게 한동안.
인기 투표를 하면 조조가 더블 스코어로 이길 정도로 압도적인 인기를 끌었다.
지금까지 유비가 보여준 건 그저 귀가 큰 착해빠진 하이엘프의 이미지였지만.
조조는 권력의 핵심에서 미묘하게 벗어난 아웃사이더의 위치에서 정치극의 서술자 역할을 톡톡히 해주었기 때문.
심지어 동군 태수로 임명되는 것을 마다하고 낙향하여 자신만의 세력을 일구는 모습도.
궁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여러 음모에서 발을 살짝 걸친 채, 관망자이자 모략가의 모습을 보여준 것도 매우 호평받았다.
연의처럼 극적으로 동탁 암살에 실패한 후 빤스런을 친 건 아니지만, 그래도 또 다른 폭군의 징조가 보이는 동탁을 피해 달아난 것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 내가 남을 저버릴지언정 남이 나를 저버리게 하지는 않겠다!
“…….”
“……어?”
“흠…….”
“와, 이건 좀.”
드디어 제목값을 시작한 조조의 돌발행동.
여백사 사건으로 인해.
끝도 없이 상한가를 치던 조조 코인의 성장세가 다소 둔화되었다.
* * *
“후우.”
소재를…… 잘못 잡았나……?
카이사르의 이야기를 쓸 때도 느껴본 적 없었던 중압감이, 최근 어깨를 강하게 짓누르는 기분이 들었다.
막연하게 정사와 연의를 크로스오버해서 적당히 단물 좀 빼먹겠다고 생각했지만.
원래 소설이란 한 편 한 편 도파민이 팡팡 터지게끔 조형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대목.
게다가 동시 연재하고 있으니, 시간대에 왜곡이나 서술에서 결정적인 차이가 생기는 것도 지양해야 했다.
바로 그 지점에서, 황건적의 난과 더불어서 십상시 숙청까지의 흐름은 오히려 서술하기 쉬웠다.
조조는 소용돌이의 한복판에 내던져져 있었고.
유비는 그냥 대충 뽈뽈 돌아다니면서 선행을 베풀면서 때로 뭐 각색 좀 덧대서 황건적 잔당에게 납치당한 아가씨 구해주고 살짝 로맨스 각만 재고.
뭐 그런 식으로 페이크 히로인 넣는 식으로 어그로를 끌면 되었으니까.
그러나.
어찌 보면 삼국지연의의 백미.
모든 군웅이 한 곳에 모여서 역적 동탁을 처벌하고자 의기를 드높이는, 반동탁연합.
……이거, 정사가 너무 좀 애매했다.
연의는 진짜 무슨 삼황오제, 제국 7대 소드마스터와 같은 느낌으로다가 깔쌈하게 18로 제후라는 멋들어진 수식어가 달라붙었으나.
정사에는 그런 거 없다.
호로관 메뚜기가 대륙 최강의 듀얼 소드마스터 유비에게 쫄아서 도망간 것 또한 연의의 삼영전여포에만 나오는 내용이다.
……그거 빼면.
재미가 있나?
아니, 솔직히 재미없을 것 같은데……?
애초에 유비조차 정사 삼국지에서는 참전 여부가 불투명하다.
그나마 왕찬의 영웅기 정도에서나, 그것도 심지어 조조랑 함께 참전했다는 서술이 남아있을 뿐.
그것도 각색을 잘만 하면 정말 매력적으로 풀어낼 수 있겠지만…….
그러면 너무 많은 이야기의 골자가 한 번에 뒤바뀌니, 그럴 수도 없었다.
“그러면, 아예 조조 파트를 설명에 다 때려 박고, 유비 파트에서 장면을 묘사하면 안 됩니까?”
“각기 다른 소설인데 그건 좀 그렇지 않나?”
히스토리에가 뚱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어차피 읽는 사람들은 그거 구분 안 할 텐데요. 에스테아도 2연참씩 해준다고 흡족해하고 있고요.”
“……그런가?”
상태창을 열어서 확인해보니.
“……그러네?”
조금은 차이가 날 줄 알았는데.
일일 독자 수는 거의 비슷했다.
그렇다면…….
* * *
“으흥흥, 아냥냥──”
심기편안단에 합류한 에스테아는 오늘도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새벽부터 제국 수도를 싸돌아다녔다.
레어에서 손을 까닥하는 것만으로 하수인들이 대령해주는 삶도 물론 좋았지만.
“오늘 자 신문! 싹 다 가져와!”
“어유, 꼬마 아가씨가 기특하기도 하지.”
히스토리에가 말아주는 고봉밥 세례에 너무 길들여진 나머지.
이제는 그냥 장르 구분조차 없이 모든 사료를 와구와구 퍼먹으면서 아주 행복한 누렁이 라이프를 즐기고 있었다.
물론.
의견을 전개하는 것 또한 인색함이 없었던 터라, 그 사이에 초보 작가 세 명을 절필시키는 사소한 사건도 있었지만.
기나긴 용생에 있어 망생이 셋 정도가 펜을 꺾는 일쯤이야 에스테아에게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뭐어? 연재 중단? 거짓말!”
심지어 본인에게는 본인이 피력한 독자 의견이, 작가의 가슴을 찌르는 비수가 되었다는 것에 대한 자각조차 없었다.
악질 중의 악질이라 할 수 있었다.
“어유, 꼬마 아가씨가 힘이 세기도 하지.”
“고맙노라!”
미천한 인간의 칭찬 또한 귀담아듣는, 올바른 드래곤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준 후.
에스테아는 히히 웃음을 숨기지도 않은 채 뽀짝뽀짝 걸어가 공원 벤치에 앉았다.
그녀가 가장 먼저 펼쳐 든 것은 당연하게도 진리일보였다.
파라랑──
딱히 궁금하지도 않은 미천한 인간들의 정치 이야기는 사뿐히 다 날려버리고, 바로 ‘두 영웅’ 이야기를 읽기 시작했다.
먼저, 순서상 앞부분에 배치된 ‘두 영웅: 악당이 야망을 숨김’.
하지만.
오늘따라 사료의 질이 좋지 않았다.
도파민 넘치는 전개는 어디에 갖다버리고, 동탁이라는 나쁜 놈을 때려잡을 계획만 주야장천 세우고 있단 말인가.
이건 사기다!
분량 날먹이다!
우! 우우우!
“아르릉.”
불만과 브레스를 입 안에 살짝 휘감은 채, 눈살을 찌푸리며 에스테아는 다음 장으로 넘겨 ‘두 영웅: 황족이 혈통을 숨김’을 읽기 시작했다.
“아니, 얘는 다른 집 주인공인데 왜 여기서 자꾸 나와?”
이상하게 ‘악야숨’에는 유비에 관한 서술이 거의 없는 반면, ‘황혈숨’에는 더블 주인공이라도 되는 듯 조조가 자꾸 튀어나와 교통정리를 했다.
뭐, 연참분이라고 생각하면 이해할 만했다.
같은 장면을 다른 관점으로 서술하는 것이야말로 분량 늘리기의 극의니까.
그리고.
“으와아──!”
순식간에 빨려 들어가 이야기를 완독한 에스테아는, 주변의 시선에도 신경쓰지 않고서 만족스러운 환호성을 터트렸다.
- 이 술잔이 식기 전에 돌아오겠소.
그녀의 드래곤 하트에.
관우 뽕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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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을 토벌하기 위해 서로 반목하던 종족들끼리 일시적 화합을 하는 것은 유구한 클리셰다.
보통 클리셰적이라는 말은, 꽤 많이 먹어본 맛이라 흔하다고 해석하는 경우가 많지만.
바꿔 말하면.
그만큼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전개기 때문에, 미식까진 되지 않을지언정 몹시 안정적인 맛을 우릴 수 있게 해주는 조미료와도 같은 것이다.
하지만 그저 클리셰를 답습하는 것만으로는 성공할 수 없다.
그러한 위기에 맞서서.
작가 율리시스는 몹시도 대담한 선택을 했다.
보통 이러한 상황에서는 당연하게도 주인공의 활약으로 인해 극적으로 위기를 타개하는 것이 기본이었지만.
- 본초, 너무 화내지 말게. 역적들은 어차피 관우 공이 마궁수인 줄도 모를 걸세. 그러니, 기회라도 줘보는 것이 어떻겠나?
옆 동네 스핀오프 작품 주인공의 사람 보는 안목을 은연중에 드높여 줌과 더불어서.
주인공의 의형제에게 서사를 부여해 주었다.
그것도, 연합군의 내로라하는 맹장들이 다 나가서 끔살당하는 와중에.
관우는 말 타고 호랑이처럼 날아가 화웅의 가슴팍을 걷어차고 귀싸대기를 올려붙이고 모가지를 싹둑 잘라버렸다.
그날, 에스테아뿐만 아니라 사람들은 술을 마시지 않고도 취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청룡언월도에 관뽕을 배웠고 관뽕에 취해버린 사람들은 모두 열광했다.
물론.
“흠…….”
“아무리 인자하고 용인술에 뛰어난 설정이지만, 이래서야 너무 유비가 묻히지 않나?”
“하이엘프인 거 빼고는, 흠, 차라리 주인공이 관우라고 보는 것이 더 설득력 있을지도.”
연재 소설 문법에 익숙해진 사람들의 가슴에는 묘한 아쉬움이 남았다.
하지만.
원래 사천왕 중 최약체가 토벌당하면, 그다음 사천왕이 무대에 등장하는 것은 기초적인 임플란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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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이야말로 역적 동탁의 숨통을 끊을 절호의 기회다! 전군, 총공격하라!”
연합군의 맹주, 원소의 우렁찬 호령이 떨어지자.
수만 명의 함성과 북소리가 지축을 울리며 터져 나왔다.
맹장 화웅마저 이미 죽어버린 상황이니, 그들의 앞길을 막을 것은 아무것도 없어 보였다.
병사들의 거대한 파도가 유독 초라해 보이는 호로관의 성벽을 단숨에 집어삼킬 듯 몰아쳤다.
하지만.
바로 그때.
모든 소음이 거짓말처럼 멎었다.
천둥 같던 북소리도.
태산을 무너뜨릴 것만 같던 함성도.
심지어 거친 병사들의 숨소리마저도.
호로관의 성문이, 육중한 신음 소리를 내며 아주 천천히 열렸다.
그리고.
그 어둡고 깊은 심연 속에서.
무수한 병력이 아닌, 오직 한 사람만이 나왔다.
투구에 꽂은 두 가닥의 긴 꿩 깃이 바람에 흩날리고.
온몸이 이글거리는 불꽃 같은 털로 뒤덮인 거대한 명마를 타고 등장한 사내의 모습에.
모두가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저자가 바로, 동탁이 믿는 최강의 무장.
“여포 봉선이 여기에 섰다. 오합지졸들아, 감히 내 방천화극을 받아낼 자가 있느냐?”
하늘 아래 가장 강한, 무신에 가까운 사내.
그가 방천화극을 들어 연합군의 깃발을 겨누었다.
단순한 동작 하나에 천하가 숨을 죽였다.
그들은 직감적으로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사람 중에는 여포요.
말 중에는 적토마라.
막연한 가담항설에 지나지 않았던 공포가, 그 실체를 지닌 채 마침내 호로관 앞에 현현했다.
“여포! 네놈의 허명을 내가 벗겨주마!”
그 와중에도 용기 있는 자가 있었으니, 왕광의 수하 방열이었다.
하지만.
“커헉──”
말과 말이 교차하는 찰나의 순간.
방열은 방천화극에 꽂힌 채 유언조차 남길 수 없는 최후를 맞이했다.
그 뒤로도.
장양의 수하 목순이 죽었다.
공융의 수하 무안국이 팔 하나가 잘린 채 간신히 살아서 도망쳤다.
“에에잇, 내가 직접 나서겠다!”
이대로 가면 고작 한 명의 사내에게 연합군이 뿔뿔이 궤멸할 것이라는 생각에, 분을 참지 못한 백마장군 공손찬이 뛰어들었지만.
“이민족의 공포? 다 허황된 소리였군.”
“크윽……!”
공손찬마저 여포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이대로라면 십팔로 제후 중 한 명이 여포에게 불귀의 객이 되는, 위태로운 상황에.
“야! 애비 셋 가진 후레자식!”
“……어떤 개자식이?”
분연히 필마단기로 치달려 온 영웅 하나가 있었으니.
내심 군공을 세우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던, 장비였다.
(다음 화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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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이전부터 여포의 이름은 묘사로, 때로는 인물 간의 대화에서 몇 번이고 간접적으로 언급되었다.
동탁이 위세 등등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다 여포의 덕분이다, 여포가 등장하면 누가 대적하겠느냐, 아직 여포가 나타나지 않았으니,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하지만 소설이라는 장르적 특성상 아무리 많은 문장을 할애한다고 해도 그 존재감을 제대로 드러내기는 쉽지 않았다.
그렇기에.
또다시 김율은 치트키를 사용했다.
이게 말인지 호랑인지 아니면 전설 속의 괴수인지 짐작할 수 없을 정도의 적토마.
그리고 그 위에 올라탄, 메뚜기 더듬이를 당당하게 달고 있는, 누가 봐도 얼굴만으로 애비 셋 정도는 거뜬히 학살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여포의 일러스트에.
사람들은 단박에 설득당했다.
현대에서도 히로인의 외형을 구구절절 묘사하기보다 삽화 한 장 넣는 게 훨씬 더 효율적이었으며, 이세계 또한 당연히 비슷한 효과를 거두었다.
거기에서 이어지는 장비의 도발적인 외침.
그리고 기가 막힌 절단신공에.
“크아악! 여기서 끊다니!”
“율리시스, 그는 악마야!”
“이건 상도덕에 어긋나지!”
도탄에 빠진 백성들의 분노가 하늘에 닿았다.
.
.
.
그렇게 하루가 지난 후.
“빨리이, 빨리 내놔아아!”
신문 가판대에 용의 포효가 터짐과 동시에, 사람들은 앞다투어 진리일보를 구매했다.
오늘도 조조는 호로관 얘기는 하지 않고 뭔가 엄청 복잡하고 의미심장한 정치 이야기만 구구절절 하고 있었기에, 가볍게 속독하고 넘어간 후.
그들은 보았다.
- 여씨 애비 재끼고, 정원 애비 재끼고, 이제는 동탁에게 붙어먹었지! 똥꼬도 대줬냐, 이 후레자식!
- 후레자식! 목을 내놔라!
- 후레자식 주제에 힘깨나 쓰네!
- 닥쳐라! 조만간 애비 넷으로 바뀔 후레자식!
드워프 장비의 용광로 같은 불꽃 패드립의 향연을.
묵직한 분위기가 다소 경쾌하게 전환되는 듯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비의 장팔사모는 여포의 방천화극을 이기지 못했다.
그들은 떠올렸다.
수많은 용사물의 정석을.
성장하는 단계에서 용사 주인공들은 보통 각성 이벤트를 거치곤 한다.
당장 지구의 창작물만 보더라도.
어릴 적부터 함께 고생한 대머리 친구가 처맞는 꼴을 보면서 ‘크리──!’를 외치며 치명타 판정을 내리는 피도 눈물도 없는 사이어인의 예시도 있었고.
선별시험이라는 이름으로 유망주들의 싹을 모조리 잘라내는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이지만, 결국 최종 보스와 함께 폭발 엔딩을 꿈꾸었던 적폐 가문의 우두머리도 있었으며.
조금이라도 더 높은 스코어를 획득하기 위해 헌신짝처럼 자신의 애마를 던지고 그 추진력으로 도약하는 콧수염 배관공도 있었다.
이세계라고 해도 그 클리셰는 꽤 널리 사용되고 있었으니.
설마 애비 셋이 복선이었나?
애비 둘이 죽었던 것처럼 장비의 사망으로 유비가 각성하게 되는가?
두근두근!
와좍와좍!
하필이면 절묘하게도 장비가 수세에 몰린 시점에 신문의 단락이 끝났기 때문에, 다들 긴장감을 삼키면서 페이지를 넘겼다.
그리고.
“크으……!”
“이게 형제애지!”
“젠장, 믿고 있었다고!”
“관우 공! 이번에도 술잔을 데워놓았겠지!”
비록 1:1의 결투에 끼어드는 것이 그렇게까지 그림이 이쁘지는 아니하나.
동생을 아끼는 마음이라면 응당히 이래야 하는 법!
관우의 난입에 모두가 또다시 관뽕 2스택을 적립했다.
이제는 관우가 계집애 같은 비명을 질러도 한 번쯤은 실눈을 감으며 넘어갈 수 있을 정도의 매력.
그리고, 거기서 끝이 아니었으니.
- 아우들! 나도 가세하겠네!
마침내.
소설의 주인공.
쌍검을 든 하이엘프가 전투에 합류하였으며, 이내 기세에서 밀린 여포가 패주하는 순간.
‘주인공이 힘을 숨김’ 메타의 전개에 모두가 신문을 내려놓고 물개박수를 쳤다.
천하무적이라고 불리던, 귀신과도 같은 압도적인 무력이, 아직 제대로 이름이 알려지지도 않은 피치 브라더스에게 패주하는 전개.
언더독을 응원하는 감성과 더불어 청량한 사이다가 그들의 가슴에 흘러넘쳤다.
* * *
“…….”
김율은 몹시 스펙타클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 엣헴! 어떠냐!
아침부터 조잡한 수염을 턱에 붙이고 아무리 봐도 비싸 보이는 보석을 주렁주렁 단 유사=청룡언월도를 들고 있는 에스테아를 만났고.
- 그으, 실례되는 질문인데요. 연재 중이신 거…… 혹시 동성애물인가요?
‘같은 침상을 쓸 정도로’ 우애가 깊은 형제애를 해병혼으로 곡해한 로젤린의 우회적 이단심문을 버텨냈으며.
[기고문: 두 영웅, 무력 순위는 어떻게 되는가?]
[최근 본지에서 성황리에 연재 중인 작품 ‘두 영웅’ 시리즈에는 수많은 무장이 나온다. 지금까지 연재된 내용들을 미루어서 기자가 직접 제국의 소드마스터와 인터뷰하여…….
……최근에 연재된 내용까지 미루어 본다면, 말 위에서 한 치 흐트러짐도 없이 쌍검을 능수능란하게 휘두르는 것은 잘 단련된 소드 익스퍼트에게도 어려운 일이라고 하니, 유비의 진정한 실력은 족히 소드 마스터에 준하는…….]
“흠…….”
벌써 태동하기 시작한 유비 패왕설에 머리가 지끈거리는 걸 간신히 참아낸 김율이었다.
그것까진 괜찮았다.
“그래서, 본녀가 생각했을 때는 지금의 전개는 조금 애매한 것이와요. 조금 더 하이엘프의 위대함을 부각하는 방향으로 접근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이와요. 또, 본녀가 이전 작품들을 모두 꼼꼼히 검토해 보았을 때, 지나치게 사람들이 많이 죽는 것이와요. 이는 평화주의와 맞지 않는 전개이니까──”
클로에 폰 위스페라우드.
진리일보의 실질적 소유자이자, 위스페라우드 공작가의 장녀 및 상속 후계자.
그녀는 약 30장 분량의 독후감과 더불어서 향후 전개 제안서를 김율에게 내밀었다.
살아있는 권력의 본격적인 쥐흔 시도에.
김율은 조금 머리가 아찔해지고야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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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를 사랑하고 아낌없이 베풀어라.
그리고 생육하고 번성하여 충만하라.
여신교의 교리에 따라.
성녀 로젤린은 사랑했다.
정확하게 목적어를 덧대자면, 사람과 사람의 사랑을 담은 모든 이야기를 사랑했다.
사랑을 주제로 한 연극이 상연될 때마다 가장 먼저 달려가서 앞줄에서 혼자 깨방정을 떨었으며.
그런 걸 도대체 왜 보냐는 의아한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온갖 종류의 염정소설을 섭렵했다.
……조금은 수위가 높은 것까지도.
그런 그녀에게.
일주일 넘게끔 재입고를 기다리며 마침내 손에 넣은 화제의 소설, ‘제우스의 연애담’은 가뭄의 단비가 되어줄 예정이었다.
하지만.
“이, 이, 망측한……!”
일반적인 염정소설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노골적인 묘사는 참을 수 있었다.
아니, 오히려 적나라해서 좋았다.
그게 바로 사랑이니까……!
그러나 주인공의 설정이 문제였다.
올림포스라는 곳의 열두 신 중 수장.
즉, 주신의 위치에 있다는 점.
여기서부터 이미 살짝 새콤한 이단의 향기가 솔솔 나기 시작했다.
게다가 서로 상호 간에 이루어지는 사랑의 관계만 있으면 모르겠으나.
겁간, 근친상간, 불륜, 수간까지…….
이게…… 사랑인가……?
물론 작품 속 등장인물인 아르테미스, 아테네 등 다른 인물이 탄생하는 과정이라고 본다면, 소위 세간에서 말하는 건국 신화와 크게 다를 바는 없었지만.
그래도 이건, 선을 넘었다.
아무리 여신님께서 사랑을 권장하는 관대한 신이라지만, 해석하기에 따라 신성모독에 가까운 표현이었다.
어찌 주신이라는 지위를 달고서 이렇게 망측한 행위를 스스럼없이 행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젤린은 이 작가의 글에 대해 깊은 호기심을 느꼈다.
이렇게 다채로운 발상을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이, 자신이 아닌 다른 이단심문관에게 걸려서 자칫 영구 출판 금지령이라도 당한다면?
극단적으로, 손목이라도 잘려버린다면……?
“회개, 회개시켜야겠어요……!”
국가적 손실.
염정소설의 거장이 될 새싹이 짓밟히는 것과 다름없었다……!
옷매무새를 정돈하면서.
로젤린은 책의 제일 뒷장을 펼쳐 출판사의 이름을 확인했다.
다행히 바로 근교에 있는 도시였으니.
어린 양을 다시 여신의 품에 안길 시간이었다.
* * *
정신 차리고 보니.
나는 고해성사실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 너머에는…….
“으흐흑, 흐흑, 불쌍한 히폴리테에에에……!”
신성모독 혐의로 압수당한 차기작의 초본을 보면서…….
성녀님께서 과몰입하고 있었다.
헤라클레스 이야기의 핵심은 역시 12과업.
판본에 따라 다르지만.
자기 가족들을 사자 혹은 다른 사람의 자식들로 착각해서 죽여버린 후, 이의 속죄를 위해 미케네의 왕 에우리스테우스가 내리는 열두 개의 과업을 완수하는 것이다.
그야말로 낭만 넘치는 모험담의 정수였지만…….
벽 너머의 성녀님께서는 모험담은 대충 스르르륵 넘겨 읽으시곤, 아마존의 여왕 히폴리테의 허리띠를 구하는 장면에서 과몰입하고 계셨다.
“아니이, 아니! 어떻게 동침까지 허락한 반려를 이렇게 쉽게 죽일 수 있습니까! 그러고도 당신이 사람이에요! 짐승, 짐승이야! 무엄해요!”
……불륜에는 관대한 건가?
“……소설입니다, 성녀님.”
성녀의 과몰입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결말 부분에서는…….
“아흐흑, 흐어으, 흐어어어……!”
“……괜찮으십니까?”
“당신은…… 악마에요오……!”
그리스식 피폐 드리프트의 짭짤한 맛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시고야 말았다.
그 와중.
[‘올림포스 이야기 제우스의 연애담’의 판매량이 2,000권을 돌파했습니다! 특전 스킬이 부여됩니다!]
[C급] [헤르메스의 설득력]
[12 주신 중 하나인 헤르메스는 전령과 목동, 그리고 언어를 관장하는 신이다. 특히 아버지 주신인 제우스조차 언변으로 속여넘긴 적이 있었으니. 그처럼, 너는 불리한 상황 또한 언변으로 극복해 낼 수 있으리라.]
[(31일 남음) 다음 스킬 획득까지 앞으로 판매량 3,000권 필요]
[예상 획득 스킬: [C급] 헤르■스의 ■■■]
“오.”
“흐윽, 흑흑, 네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설득력, 언변이라.
내 말의 설득력이 수치로 측정되는 것도 아닌데, 능력이 어떻게 작용할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사교성은 인생에 있어서 필수적인 역량 중 하나이니까, 분명히 도움이 될 것 같은 능력을 하나 획득했다.
혓바닥이 조금 더 말랑거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
.
.
“크흠, 흠. 다시 한번 확인하겠습니다. 소설 올림포스 이야기의 작가, 김율 씨 맞으시죠? 이름이 특이하시네요.”
“그냥 편하게 율이라고 불러주십시오.”
한바탕 주접을 떨어댄 후.
성녀님께서는 본격적인 취조를 시작하셨다.
“왜, 신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셨나요? 그러한 표현이 신성모독, 나아가 이단으로까지 해석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실까요?”
아까까지 오두방정을 떨던 것과 달리, 꽤 진중한 목소리가 벽 너머에서 흘러나왔다.
그리고.
아마도 스킬의 영향인 듯──
내가 원래 걱정했던 지점을 예리하게 찔러 들어온 저 질문에도, 어떤 식으로 답변해야 상대방을 만족시킬 수 있을지 머리에 선명하게 그려지기 시작했다.
* * *
한 시간 넘게 이어진 설교 끝에.
“……그래도, 너무 과도하게 해석될 수 있는 부분은 자제해 주세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로젤린은 김율을 올바른 길로 이끄는 데 성공했다.
정확하게는…….
설득당했다.
- 신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차용했지만, 이건 결국 인간의 이야기입니다. 주신 제우스 또한 지극히 인간적인 면모를 지닌 신으로, 종족의 유지, 즉 교리로 본다면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생육과 번성을 다하기 위해 노력한다고도 볼 수 있지요. 그런 행동이 없었다면 세계를 구축하는 12주신 중 몇 명이나 남았겠습니까.
생육하고 번성하라.
비록 그 과정이 근친상간을 포함한 온갖 만행이 저질러지긴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틀린 말이 아닌 것 같기도 하고…….
- 올림포스라는 배경을 독자님들께 설득하기 위해 만든 장치로, 이제부터는 방금 읽으신 헤라클레스 이야기처럼 인간이 중심이 되는 이야기가 펼쳐질 겁니다. 혹여 여신님의 권위를 해칠만한 이야기는 절대 담지 않도록 할 테니, 안심하셔도 좋습니다.
분명 처음 보았을 때는 굉장히 긴장한 듯 제대로 말을 이어 나가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절대 다른 의도 없이, 순수하게 이단 혐의를 심문하기 위해 그의 초고를 읽어본 이후에 다시 이야기를 할 때는 굉장히 타당하고 합당한 말만을 입에 담는 김율이었다.
그런 그의 말에, 로젤린은 그저 페이스를 잃은 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의 논리는 정합성이 있었으며.
“문제가 되는 부분이 있다면…… 가급적 수정하겠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주의하도록 하겠습니다.”
순순히 협조하겠다는 자세까지 보여주었으니.
성녀로서의 의무.
신앙심의 수호는 다 했다고 볼 수 있었다.
오늘도 길을 잃은 양을 여신님의 품에 안겨주는 데 성공했으며, 미래의 염정소설계 대작가의 손목을 지켜낸 것이다!
물론.
모든 이단과 흑마법사들, 마족 신봉자들이 쉽게 본색을 드러내지는 않는 데다가.
……검은 머리, 그리고 검은 눈동자.
외형적 특색만으로도 감시의 눈길을 거둘 순 없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아무런 혐의점도 없었으니까.
“그, 율 님.”
“네?”
“재능 있어요. 앞으로도 더욱 풍부한 사랑 이야기를, 아니, 사랑 이야기만 열심히 써주세요. 비극은 안 돼요. 새드 엔딩도 절대 안 돼요! 행복하게! 행복한 결말로!”
“……하하.”
채찍이 있었으니 당근.
그리고 진심이 살짝 담긴 사리사욕이었다.
“어차피 사본 있다고 하셨죠? 그럼, 이건 제가 소장…… 아니, 압수하도록 할게요! 앗, 그 전에 여기, 작가님 서명 좀.”
자그마한 틈 사이로 아직 출간되지 않은 ‘헤라클레스 영웅담’의 초고에 사인까지 받아 챙긴 후.
성녀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일어섰다.
고해성사실을 빠져나가며.
“그림에도 소질이 있던데, 그림은 안 그리시려나?”
차마 글 쓰는 사람 앞에서 칭찬하기는 조금 애매한 재능에 대한 찬사를, 뒤늦게 입에 담았다.
물론.
그 삽화는 당연하게도 김율이 딸깍으로 뽑아낸 AI 일러스트였다.
* * *
인류가 미지의 적들과 맞서 싸우는 전선, 마경魔境.
세간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짧고 강렬한 전투가 벌어지기보단, 때로는 지루하게 느껴질 정도의 소모전이 발생하는 곳이다.
그렇기에 마경에 파견된 용사들은 마력 분출에 따라 짧게는 일주일, 길게는 몇 달 동안이나 마경에 장기 체류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기에 용사들의 적절한 심신의 안정은 필수.
심신의 안정이라고 한다면 자고로 달콤하거나 맛있는 먹을 것, 그리고 유흥거리가 최고인지라.
마경과 인간계 사이를 넘나들며 용사들의 서포트를 전담하는 짐꾼은 아카데미가 별도로 설립되어 있을 정도로 위험을 무릅써야 하는 직종 중 하나였다.
“배달이요!”
“오! 왔다! 내 활력소!”
신출귀몰한 짐꾼의 보따리가 풀리고, 온갖 종류의 물건이 와르르 바닥에 쏟아져 나왔다.
탱커와 레인저는 보드게임을 집어 든 후 곧장 구석으로, 사제와 마법사는 앉은 자리에서 그대로 간식을 와구와구 까먹기 시작했을 때.
용사는 물건 틈 사이에서 자신이 요청한 책들을 한 권씩 챙기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헤라클레스 영웅담?”
“지금 제국에서 조금씩 인기를 얻고 있는 신인 작가의 작품입니다. 꽤 구하기 힘들었습니다, 후후.”
짐꾼의 너스레에 호기심이 동한 용사는, 책을 펼쳐서 목차를 살펴보았다.
“오우.”
한 개의 시련만 해도 벅찰 텐데, 열두 개의 시련을 극복한다니.
페이지를 촤라락 넘겨보며 대략 내용을 확인하던 중.
“어……?”
용사의 표정이 굳어졌다.
신인 작가치고는 꽤 통 크게 삽화까지 삽입한 장면이었지만, 삽화가 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다들 집합. 빨리.”
나지막하지만 의지가 가득 찬 용사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마자, 순식간에 파티원들이 용사의 주변에 모여들었다.
그리고.
“엇, 저건?”
“으으…….”
“뭔가요? 혹시 새로 출간된 마물의 생태집입니까?”
“나, 쟤 싫어…….”
삽화에 묘사된 것은.
최근 자신들의 발을 묶어놓은 채 더 이상의 전진을 허용하지 않는 강대한 마수.
백면귀룡百面鬼龍의 것과 거의 동일했다.
이윽고 삽화에 주목했던 모두의 눈길이 그 옆, 활자로 향했다.
“소설……인가요?”
“맹독을 가지고 있는 머리는 잘라내도 재생하고, 심지어 잘린 머리에서 새로운 머리가 두 개씩 돋아나는 뱀…… 특징도 비슷해요.”
“잘라내자마자 화염으로 불태운다라…… 이봐, 마법사. 가능하겠나?”
“으음…… 제 전공이 얼음 마법이긴 한데, 기초적인 화염 마법은 쓸 수 있어요. 아니면 스크롤을 공수해 와도 괜찮고요.”
“뭐 어차피 해독이야 사제가 계속 전담하고 있었으니까, 그 부분은 걱정할 필요 없겠군.”
소설에서 공략의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면 누군가는 비웃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거의 한 달 가까이 파훼법을 찾지 못했던 백면귀룡이었으니, 혹시나 하는 기대를 걸어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일단 실험해 보자고. 사소한 단서라도 잡는다면, 우리가 아니더라도…… 우리 후임자들에게는 힌트가 될 테니까.”
.
.
.
일주일 후.
지금껏 용사 파티 세 개를 집어삼킨 극악의 마수.
백면귀룡의 최초 토벌 소식이 제국에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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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정할 건 인정하자.
신문사에서 적극적으로 내세운 유비 깐프설 프로파간다로 인해 반사이익을 많이 본 건 사실이다.
원래 작품의 성공은 작가의 글솜씨에만 좌우되지 않는다.
당장 내가 살았던 현대에서만 해도, 압도적인 실력으로 모든 것을 다 씹어먹고 세계를 정벌할 정도의 작품이 종종 튀어나오긴 했으나.
그런 천외천의 작품 외에는 플랫폼에서 어떤 프로모션을 받느냐에 따라 성적이 천차만별로 갈린다.
나도 한때 대체역사 소설로 시장을 정복하고자 하는 원대한 꿈을 꿔봐서 아주 잘 체감하고 있다.
제발 매니저 픽! 아니면 푸쉬 알림이라도!
흐아아! 누구는 메인 배너 걸리는데 왜 나는!
……그때와 비교하면, 지금은 날개 달고 3단 부스터 로켓 달고 피슝 날아가는 중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러니 이제 유비가 고귀한 혈통임을 앞세워서 당당하게 차기 황제로 추대받는 것이와요! 그러면 원소 입장에서도 충분하지 않겠사와요?”
솔직히 말하자.
나는 귀 큰놈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동족 살해자에 가까운 보법으로 역병처럼 형주 찍고 파촉 찍어서 결국 자기 땅으로 먹어버린 희대의 소시오패스가 아닌가.
그러나…….
유비는 마지막 선을 지켰다.
조조 또한 찬합 파동으로 인해 선을 넘지 못했다.
정통성과 명분이 한 황실에서 나오고 있음을, 이 깐프는 당연히 이해하지 못하리라.
그리고.
내 두상은 동글동글하게 이쁘다.
갑자기 무슨 개소리냐고 할 수 있겠지만, 두상이 이쁘다는 건 어렸을 적부터 땡깡이 오지게 심해서 바닥에 누워있지 않고 맨날 어머니 품에 안겨있었다는 뜻이다.
즉, 다른 평평이들보다 뒤통수가 튀어나와 있다.
삼국지 스타일로 말하면.
반골의 상.
“그게 무슨 세계수가 시들시들하니 저기 복숭아 세계수 잘 키워서 제2의 세계수로 삼자는 소립니까?”
아, 몰라.
들이받아.
“그, 그게 무슨 소리인 것이와요?”
우리 깐프 영애님께서는 정의로운 청년 아돌프 군에게 총을 맞은 시클그루버 씨 같은 표정을 지으셨다.
“자고로 정통성을 잃는 것은 죽음을 의미하는 법이며……!”
그로부터 약 10분.
나는 한 황실을 세계수에 빗대어서 소설 전체의 구조 및 캐릭터성 정립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에 관해 장문의 웅변을 남겼다.
그렇다.
웅변이다.
물론 순수한 논리로 압살하는 게 아니라, 스킬에 일정 부분 의존하는 것은 다소 마음에 걸렸지만.
솔직히 스킬 떼고 싸웠어도 내가 이기는 싸움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마주 앉은 깐프는.
“왓 더 엘프……!”
깐프 친화적이지 않은 내 세계수 모욕에, 유비의 귀에다가 관우의 얼굴색을 덧칠하시고야 말았다.
반박하고 싶어도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한 채, 빈약한 필력 주머니를 부들대는 꼴을 보고 있으니 조금의 죄책감이 밀려왔지만.
누군가는 해야 하지 않았을까.
장문의 피드백을 적어 온 걸 보면 분명히 나 외의 다른 작가에게도 이런 종류의 쥐흔을 시도했을 것이다.
물론 우리 깐프 영애의 지적 중에서 분명히 옳은 것은 있었으나, 본질적으로 작품은 창작자의 의도가 최우선시되어야 하는 것.
……간혹 NTR 드리프트 등의 의도를 반영하는 사문난적이 존재하긴 하나, 뭐.
“성적으로 증명하겠습니다.”
나는 전가의 보도를 꺼내서 크게 휘둘렀다.
* * *
“피폐 드리프트 전문가께서 그런 식으로 말싸움을 벌이시고 오셨다니, 뒷감당은 어떻게 하시려고 그럽니까?”
김율의 하소연을 경청한 히스토리에는 매우 냉철하고 정확한 지적을 남겼다.
“피폐 드리프트라니. 인간은 원래 덧없는 거야.”
“김율. 저는 당신에게서 아서 코난 도일 경의 그림자를 느끼고 있습니다.”
“…….”
살짝 일그러지는 김율의 얼굴을 보면서, 히스토리에는 승리의 미소를 지으며 검지와 중지를 앞으로 내밀었다.
그 도발적인 제스처에.
“……오늘 저녁은 수프와 빵이다.”
“손나!”
김율은 요리 금수 조치로 강력히 대응했다.
태생이 깡통 출신인지라 요리력이 0레벨에 달하는 히스토리에는 그제야 김율의 기분을 달래주기 위해 그의 어깨를 주물러주었다.
.
.
.
기분이 조금 풀린 김율이 실력을 발휘해서 만든 리조또를 함께 나눠 먹으며.
“그래서, 글은 좀 써지던가?”
“불후의 명작을 완성했습니다.”
히스토리에는 그녀의 흉부 지방을 여지없이 과시하며 당당하게 읊조렸다.
그녀의 말이 마치 선언처럼 울려 퍼졌다.
“그래? 볼까?”
김율의 리액션을 기다렸다는 듯, 히스토리에는 미리 출력해 둔 결과물을 그의 손에 쥐어주었다.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동화 속 한 장면처럼.
새로운 지평을 열고,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그녀의 세기의 역작 중 서막에 불과한 내용이 김율의 고막을 한동안 장식했다.
그리고.
이어진 김율의 말은 단순한 평론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의 직관이자 핵심을 꿰뚫는 통찰이었다.
“잘 엮어낸 세계 문학 전집이군.”
히스토리에는 오늘 ‘삐침’이라는 감정을 더욱 깊이 깨달았다.
* * *
그 후로 한 달.
“크읏…… 분하지만, 인정하는 것이와요……! 본녀가 너무 김율 작가를 과소평가한 것이와요……!”
클로에가 이를 아드득 갈 정도로 김율의 작품은 여전히 승승장구했다.
특기할 만한 점은, 작품의 인기가 어느새 역전했다는 것.
그야 당연했다.
비록 일신의 무력은 피치 브라더스에 비해 떨어질지언정.
조조는 동군을 근거로 하여 온갖 도적놈들을 다 때려잡았을 뿐만 아니라 연주에 본격적으로 거점을 두고 성장세를 거듭했으며.
유비는 아직 자신의 세력을 일구지 못한 채 공손찬에게 의탁해서 청춘 활극이나 찍고 있었으니.
원래 김율의 독자층이 정치극을 선호하는 사람이 많았음을 놓고 보면, 다시 인기 역전 세계가 도래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김율, 차라리 묘사하지 않고 넘기는 게 어떻습니까?”
“……이 또한, 역사의 일부니까…….”
지금, 김율은 심각한 갈등에 빠져 있었다.
지금껏 그는 작품을 집필하면서 역사로는 루즈한 파트가 나올 때, 1년 후’와 같이 시간을 뛰어넘는 식으로 잘 무마해 왔다.
실제로도 반동탁 연합이 해체된 이후의 행적을 그런 식으로 넘겼기도 하고.
그렇지만 세상에는 대충 뛰어넘을 수 없는 역사적 사건 또한 존재하는 법.
서주 대효도라는 빅 이벤트를 목전에 둔 김율은 고뇌에 잠겼다.
서주 대효도가 무엇이냐.
아버지 조숭이 서주 인근에서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한 조조가 눈깔이 빡 돌아간 채 부하들의 충언을 모조리 씹고 병력을 일으켜 쳐들어간 사건이다.
정사에 의하면 아버지 조숭뿐만 아니라 친동생 조덕 등 거의 조씨 일가 전체가 한 큐에 날아갔다고 하니, 그 분노를 어찌 참을 수 있을까.
그러나 그 분노를 흉수에게 푼 게 아니라, 인근의 민간인을 마치 절멸시킬 것처럼 싸그리 잡아 죽이고 묻어 죽이고 강에 던져 죽이고 아주 그냥 초토화한 것이 문제다.
사수라는 강에 강물이 흐르지도 않을 정도로 수많은 사람을 모조리 휩쓸었다고 하니, 과연 망탁조의 라인업은 든든함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었다.
게다가 김율의 계획으로는, 보통 창작물에서 많이 써먹는 설정인 ‘제갈량이 서주 난민 출신이다!’라는 설정으로 조위에 대한 증오를 강하게 부여해 줄 생각이었기에.
대효도를 묘사하지 않으면 조조의 캐릭터성이 죽는다.
대효도를 묘사하지 않으면 유비 파트가 애매해진다.
“하지만 묘사해버리면, 조조는 천하의 개쓰레기가 될 텐데요.”
“제목값 한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아니, 효도잖아, 효도.”
“모친 한 번, 부친 한 번 효도하면 나라 전체를 불태우겠군요.”
“아주 패드립이 자연스러운 깡통이구나.”
“저는 객관적인 사실만을 말했을 뿐입니다만.”
돌과 깡통이 치열하게 맞부딪히며 논검을 펼쳤지만, 결론은 쉬이 나지 않았다.
.
.
.
결국.
김율은 두 가지 버전을 모두 완성하기에 이르렀다.
불꽃 효도를 아낌없이 전개하여 강을 핏빛으로 물들여 버린 버전.
또, 최대한 효도 행위를 자연스럽게 몇 줄로 퉁쳐서, ‘고증에 부합하지 않음’과 사투를 벌여 최대한 타협한 버전.
그 직후.
나름대로 지인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모두 의견을 물어보았다.
“으음…… 난 둘 다 좋아! 근데 첫 번째 게 더 분량이 많은 것 같아서 더 좋아!”
어느새 청룡언월도를 포기한 상산의 에스테아=자룡께서는, 글자 수가 많다는 이유로 불꽃 효도에 한 표.
“그래서 초선은 어떻게 됐나요? 여포랑 함께 탈출했나요? 요즘 분량이 너무 부족한 것 같아요…… 따로 초선 외전 써주시나요?”
인간애에 충실하실 것 같았지만, 그깟 조조의 악행 따위보다는 유비 파트에서 몇 번 나오다 말아버린 초선에 더 집중한 로젤린은 기권.
“흐으음. 조조라는 인간이 그토록 부모를 아꼈다면야, 차라리 팍팍! 팍팍 학살해 버리는 것이 더 임팩트가 있지 않겠사와요? 어차피 창작물인 것이와요?”
인성 주머니가 빈약한 탓인지, 깐프적 사고를 여실히 드러내 버린 클로에는 대효도에 한 표를 던졌다.
그렇게.
대효도 두 표.
기권 한 표.
김율 또한 대효도를 날 것 그대로 던지고 싶다는 역사적 사명감이 넘쳐흘렀기에 내심 마음이 대효도 쪽으로 기울었으나.
찌지직── 쫘아악──!
“……절대 이 버전은 안 됩니다. 차라리 절 죽이십시오.”
유일하게 인간의 마음과 양심을 간직한 편집자.
길포드만이 그 패도를 가로막았다.
김율은 헥토르를 오버소울해서 데려오는 대신.
결정을 번복했을 때 주사위를 한 달 동안 쓰지 못한다는 페널티를 감수하고, 마지막 순간에 카이사르의 주사위를 던졌다.
그리고.
“…….”
주사위에 새겨진 숫자를 보고서, 이번에는 편집자의 감을 겸허히 존중해 주기로 마음먹었다.
.
.
.
결과적으로.
김율은 마지막 순간에 자신에게 내려진 동아줄을 붙잡는 데 완벽히 성공했다.
“아무리 아버지의 원수를 갚는다는 명분이라지만, 조금 과하지 않은가……?”
“확실히 조조가 악당은 악당이군!”
“시체로 강을 메웠다라…… 그만큼 많은 사람이 전란에 휩쓸렸다는 비유적 표현이겠지. 전쟁이란 참 두려운 일이야.”
“이제야 왜 작가가 조조와 유비를 대조시켰는지 비로소 이해할 수 있겠군. 확실히 사람을 대함에 있어서 대척적인 성향이 드러나는구먼.”
“잔인해…… 끔찍해…….”
서주 대효도가 지면에 실린 날.
김율은 자신이 마지막에 주사위에게 물어본 질문, ‘편집자의 말을 들을 것인가?’를 되새기며.
길포드의 손을 꼭 부여잡고 감사 인사를 올렸다.
무릇 인연이란 판단력을 흐리게 할 수도 있으며, 잘못된 판단을 올바른 길로 되돌릴 수도 있으니.
편집자를 잘 만난 것 또한 일종의 기연이라 할 수 있었다.
* * *
하지만.
인간관계는 항상 인연으로만 맺어지는 것이 아니라, 본의 아니게 악연으로 맺어지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준비는?”
“곧 마무리될 예정입니다.”
지금까지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베르투스 공작은 더욱 조심하여 대계를 수립했다.
지금의 그는 일인지하 만인지상.
하지만…….
이번 일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된다면, 족히 몇 년 내로는 아무도 그를 내려볼 수 없는 존귀한 위치에 도달시켜 주리라.
대부분의 변수는 이미 그의 통제 아래에 놓였다.
남은 게 있다면…….
“교외의 별장 중 남는 곳이 있지.”
“예.”
“저번에 내가 초대했던 작가, 기억하고 있나?”
“그렇습니다.”
“정중히 모시게. 일이 끝날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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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소시민적 행보를 이어가는 김율은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있었던 부분이지만, 제국은 꽤나 거대한 국가다.
특히 제국의 지배 구조와 가장 흡사한 국가를 지구 역사에서 찾는다면.
지구 사상 최악 최흉의 흉참한 나라, 잉글랜드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었다.
전제군주정처럼 제국의 황제가 모든 것을 다 관장할 수는 없었다.
제국민들이 ‘통일 전쟁’이라고 부르는 지난한 역사 속에서, 백마 탄 황제가 나타나서 통일을 완수해낸 게 아니라 지루하고 음험한 정치적 합종연횡이 훨씬 더 많이 이루어졌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중앙집권보다는 귀족에 의한 지방자치에 가까운 형태에다가.
귀족들의 의견을 수렴하는 상원과 더불어 시민들의 의견을 수렴하는 하원으로 나뉜 입헌군주정이 성립되었던 것이다.
황제는 자신의 권력에 제한이 있는 상황이 그렇게 썩 달갑진 않았다.
그러니 심심할 때마다 하원을 부추겨서 귀족들에게 주어지는 특혜를 제한하고자 암중에서 수를 쓰곤 했었다.
지금은 비록 일가실각한 아스테릭 전 의원 또한, 황제가 따로 서신을 보내 그 공로를 치하하자마자 오렌지 병에서 완치되었다는 낭설이 떠돌 정도였다.
당연하게도, 한때는 황제의 심복이었던 베르투스 공작 또한 현재의 정치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원이라니.
왜 형식적으로라도 시민들에게 권력의 일부를 이양해야 한단 말인가?
게다가 황제는 왜 자꾸 자신에게 지랄을 못 해서 안달이란 말인가?
그 와중에 엘프 놈들, 특히 위스페라우드 공작가는 은근슬쩍 즈그 나무좋아 너무좋아 나라의 사상을 전파하려 들기까지.
통일 이후 지금까지, 무엇 하나 마음에 드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일이 없었다.
그러니.
이 나라가 다시 위대함을 되찾을 수 있도록, 원대한 계획이 필요했으며.
지금껏 베르투스 공작은 그 준비를 차근차근해왔다.
심지어 청신호도 있었다.
성국은 역사적으로 엘프들과 반목 관계에 있었으며, 그 성국에서의 암묵적 지지 혹은 묵인에 관한 교감이 괴물 성녀와 이루어졌다.
물론 성녀의 애인이 자꾸 ‘레볼루쑝! 외치면서 소설로 어그로를 끌어대는 것은 꽤 거슬리긴 했지만.
역으로 생각하면.
소설로 이미 암시를 준 일이 실제로 일어나는 것이니, 대중들이 느끼는 충격 또한 조금 덜할 것이다.
그리고, 바야흐로 지금.
“밤의 준비가 모두 끝났습니다.”
“성공적으로 밤이 끝난다면, 북부대공 또한 뜻을 함께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수도 방위대장 또한 거사 일에 순찰 인력을 최소화하고, 회식 일정을 잡겠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처리해야 할 주요 요인들의 행적 및 명단, 모두 정리하였습니다.”
협조자들과의 공조 또한 차질 없이 진행되었다.
물론.
“연락이 두절된 암살 길드가 있습니다.”
조금의 잡음이 존재하긴 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세상에 어찌 완벽한 계획이 있을까.
시선을 최대한 분산하기 위해, 그리고 꼬리를 밟히지 않기 위해 오랜 세월에 걸쳐서 여러 수작을 부려놨다.
그러니.
톱니바퀴 하나쯤 삐걱거려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다.
‘단검의 밤’이 무르익었다.
목표는 황제의 수족들.
그리고 정적들과 하원 폐지 반대파들.
그중 태반은 오늘 밤을 넘기지 못 하리라.
그래.
마치 십상시들처럼.
* * *
[제목: 두 영웅: 악당이 야망을 숨김] [현재 38화 연재]
[역사적 고증: 부합함] [완성도 평가: 수작]
[세간의 평가: 대체적으로 긍정적] [일일 독자 수: 6,893명]
[다음 스킬 획득까지 앞으로 일일 독자 수 3,107명]
[21일(완화됨) 이상 유지해야 합니다. (현재 20일)]
[예상 획득 스킬: [A급] 조■의 ■보■]
“흠.”
아무래도 동시 접속자 1만 명의 벽은 높았다.
사실 진리일보의 체급 문제도 조금 있었다.
나름대로 메이저한 신문사긴 했지만, 아무래도 제국 수도를 중심으로 운영되는 신문사다 보니까 다른 신문사들에 비해 판매량이 그리 높진 않다고는 했다.
친환경 재생 용지를 사용한 덕분에 출판 단가가 높은 지점도 진리일보의 대중화에 지장이 있었다고는 하나…….
뭐, 데일리 익스프레스나 뉴욕 월드처럼 하루에 몇십만 부씩 팔아치울 수 있는 신문사는 아직 이 판타지 랜드에는 존재하지 않았으니.
그래도 수도에 사는 사람 중 거의 7천 명에 육박하는 사람들이 내 소설을 매일 읽어주는 것만 해도 어디야.
게다가, 내 가설이 정확하게 맞아떨어진 것 또한 기분이 싱글벙글해지는 데 한몫했다.
원래 처음에는 획득 보상이 C급 스킬로부터 출발했지만.
보상 달성 시기보다 빠르게 일일 독자 수를 확보하니 자동으로 보상의 티어가 상승하였으며, 획득까지의 기한 또한 짧아졌다.
즉.
초반부터 빵빵 뜨는 히트작을 쓴다면, 초반부터 좋은 스킬을 먹을 가능성이 커진다는 것!
“히힉.”
“제발 그렇게 좀 웃지 마십시오. 경박해 보입니다.”
“그 정둔가.”
“그 정돕니다. 작품 속 주인공이 그렇게 웃는다고 생각하면, 독자들이 적잖게 불만을 표할 것입니다.”
“…….”
흠…….
그래.
우리 깡통이 말에도 일리가 있는 것 같았다.
앞으로는 조금 더 근엄하게 웃어볼까.
“케헤헥.”
“……김율?”
“구구법구.”
일단 조금만 더 놀리고.
이게 바로 ‘싫은데 에베벱’ 정신이라는 것이다.
위대한 미국인들과 그보다 더 위대한 검은 머리 대원수님이 금과옥조로 삼은 마인드셋이지.
.
.
.
대망의 00시, 약 1분 전.
깡통이 타닥타닥 키보드를 두드리며 활자를 조합하는 소리를 배경음악 삼아서, 나는 리클라이너에 누운 채 음악을 감상하고 있었다.
조■의 ■보■.
도대체 무슨 능력일까.
솔직히 전혀 가늠되질 않았다.
서양 인물들이야 이름에서 몇 글자 가려져 있더라도 유추할 수 있었고, 인물 이름만 나온다면 능력 또한 대략 가늠할 수 있었다.
하지만.
조씨 성이 한두 명인가?
게다가 어중간하게 보는 뭐야, 보는?
참고로 우리 히스토리에의 답변은.
- 조조의 몸보신 아닙니까?
유부녀 킬러라는 편견에 입각한, 아주 파렴치한 색드립이었다.
옷 입은 꼴부터 알아봤다.
“당신이 설정한 아바타잖습니까.”
“그럴 수도 있지.”
동양풍 의상이 취향인 걸 어떡해.
이럴 줄 알았으면 치파오로 입혀놓을걸.
그리고, 째깍, 째깍.
마침내 00시 00분이 도래했다.
섀도우 타임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 대신.
[A급] [조식의 칠보재七步才]
[조식은 조조의 아들로, 문학적 재능과 더불어 군사 지식 또한 탁월한 문무겸비의 인재다. 후계 싸움에서 살아남은 것 또한 그의 역량이니. 그처럼, 너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일곱 걸음을 걸을 때만은 위기에 부닥치지 않으리라.]
“……?”
예상치 못한 스킬이 튀어나왔다.
* * *
“때가 왔다.”
새벽 두 시.
베르투스 공작이 장장 1년 넘게 준비했던 계획이 마침내 불꽃을 피워올렸다.
이날을 위해 공작이 길러왔던 사냥개들이 일제히 거리로 흩어졌다.
그들의 목표는 간명했다.
외주를 맡길 수 없는 인물들을 직접 처리하는 것.
그리고 일부러 흔적을 위장해서, 다른 사람의 소행으로 덮어씌우는 것.
또.
새벽이 밝아오기 전에, 암살과 연루된 인물들을 모두 처리하는 것.
절대 꼬리를 밟히지 않겠다는 베르투스 공작의 노회한 설계였다.
실제로 요인 중 호위가 유능하다면 암살에 실패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암살자들이 실패하고 붙들린다고 한들, 절대 베르투스 공작까지는 그 연결선이 닿지 않도록 치밀하게 설계해두었다.
“출발하자.”
그들, 사냥개들만 실패하지 않으면 된다.
그런 무거운 중압감을 느끼면서.
베르투스 공작이 갈아놓은 가장 날카로운 단검.
클라펜 또한 어둠이 내려앉은 밤거리에 나섰다.
그가 지정받은 첫 번째 목표는 작가 율리시스.
호위를 대동했을 다른 요직의 인물들이 아니라 그를 맡게 된 이유는 간단했다.
괴물 성녀, 로젤린.
제국의 그 어떤 호위 기사들보다 까다로운 존재.
‘확보’하라는 지시를 받았지만, 굳이 신병을 확보하는 데 자신까지 투입했다는 건…….
“둘 다 죽이라는 뜻이겠지.”
자신은 있었다.
그녀가 아무리 규격 외의 괴물이라고 한들, 자신 또한 괴물의 혈통을 타고났으니.
.
.
.
동료들과 흩어진 후.
클라펜은 곧장 확보한 율리시스의 거주지로 향했다.
거리에는 약속대로 순찰도 거의 없었고, 애초에 가난한 이들이나 사는 다세대 주택촌에 거주하고 있었던 그였던 지라.
가는 길에는 아무런 장애가 없었다.
옥상에서 밧줄을 늘인 후, 열려 있는 창문으로 조심스럽게 한 걸음 내디딜 때까지만 해도 괜찮았다.
“…….”
집이 가구조차 없이 텅 비어있을 뿐만 아니라, 사람이 살았던 흔적조차 없었던 것을 제외한다면.
율리시스를 줄곧 감시했었던 것은 클라펜 자신이었다.
몇 번이고 신문사와 집을 오가기도 했고.
때로는 적발의 여인과 함께 들락거리기도 했고, 웬 귀여운 금발의 소녀를 목말 태우는 모습도 본 적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여성 편력이 화려하고 취향이 굉장한 놈이군, 하는 정도의 가벼운 감상이었지만.
그게 다 허상이라도 된단 말인가?
클라펜은 주머니에서 해주 스크롤을 꺼내 찢었지만, 그의 정신은 멀쩡했다.
다른 집이랑 착각하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괴물 성녀가 벌써 그를 빼돌린 것인가.
혼란함을 느끼길 잠시.
“……?”
다시 옥상으로 되돌아간 그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분명히 아무런 인기척조차 느끼지 못했었다.
하지만.
그 짧은 찰나에, 어느샌가 율리시스는 마치 차원이라도 찢고 나타난 것처럼 등장해서, 웬 방망이를 하나 든 채 건물 밖으로 나서고 있었다.
다른 집이었나?
아닌데, 그럴 리가 없는데.
그래도 바뀌는 건 없다.
오히려 나타나 줘서 감사해야 할 일이다.
게다가 주변에 괴물 성녀의 기척 또한 느껴지지 않았으니.
목표를 깔끔하게 배제할 수 있는 적기.
잠시 후.
클라펜은 율리시스 앞에 당당히 모습을 드러냈다.
원래 암살을 시도할 때 자신의 모습을 정면에서 드러내는 것은 금기 중 하나였지만.
클라펜은 암살명가 킬링필드 가문의 적법한 계승자.
그리고 그의 가문에는, 그도 유래를 정확히 알지 못하는 ‘아이사츠’라는 전통이 오래도록 내려오고 있었다.
그 또한 선대처럼 전통에 회의를 느낀 적도 있었지만, 오히려 당당하게 자신을 드러내고 상대방을 살해한다는 것은 압도적인 격의 차이를 보여줄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리고, 원래 암살이란.
목격자가 없으면 되는 것 아니겠는가?
“도-모. 율리시스=상. 킬링필드입니다.”
‘아이사츠’를 성공적으로 성사함과 동시에.
클라펜은 그대로 앞으로 달려들어 율리시스의 목에 선명하게 보이는 ‘선’을 긋기 위해 단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
율리시스는 오히려 자신을 향해 한 걸음을 내딛는 것만으로, 정확하게 목을 노린 검격을 간단히 흘려냈다.
클라펜은 눈을 부릅떴다.
분명히 아무런 무술을 배우지 않은, 일개 한량 글쟁이에 불과하다고 공작께서 말씀하셨다.
그런데 어찌 피해낼 수 있단 말인가.
두 사내의 눈동자가 일순간 마주쳤다.
그 불길한 검은색 동공 속에서.
클라펜은 끝없는 심연을 엿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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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전.
“조식의…… 칠보재?”
“일곱 걸음 안에 하이쿠를 읊으면 살아남는, 뭐 그런 겁니까? 별 스킬이 다 있군요.”
00시 정각을 찍은 직후, 살짝 어이가 없어진 바람에 히스토리에와 한참 만담을 나눴다.
그리고 당연히.
“진짜? 진짜 때립니다?”
“그럼.”
직접 실험도 해봤다.
“음……. 근데, 흠, 김율은 가끔 얄밉긴 한데 굳이 감정을 실어서 때리고 싶은 기분은 안 든단 말이죠. 감정 모듈이 고장 난 기분입니다.”
“네 글 구림.”
“용서 못 해!”
진심 어린 히스토리에의 불꽃 싸대기가 AI 특유의 정확성을 가지고 내 뺨에 쇄도했지만.
타박.
“엇, 어엇──”
분명히 나를 향해 올곧게 다가오고 있었고, 난 그저 앞으로 가볍게 한 걸음을 내디뎠을 뿐이었는데.
허공을 붕 가르더니, 그대로 내 몸에 몸통 박치기를 시전했다.
한 걸음 더 걸으면 그것도 피할 수 있나 싶었지만, 차마 인간의 측은지심이란 깡통의 것과 결이 다른지라.
“……고맙습니다.”
“조금 동작을 덜 격하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예.”
생애 처음으로 느껴보는 푹신말랑한 감촉과 더불어서 첫 번째 실험이 허망하게 막을 내렸었다.
그 뒤로도.
“지루하고 현학적인 활자 조합물.”
“네 글을 읽을 바에 군대 다시 입대함.”
“교수님이 써도 이것보단 재밌을 듯.”
영혼을 깎아내리는 폭언과, 진심으로 몰아치는 히스토리에의 맹공을 받아낸 결과.
위기감을 느끼고 밟는 일곱 번의 스탭 동안, 나는 나에게 가해지는 물리적 피해를 대상으로 완전 회피를 할 수 있음을 체득했다.
“……괜찮습니까?”
“괜찮아 보여?”
“아뇨.”
알고 싶지 않은 정보였지만, 쿨타임도 있었다.
대충 한 30분.
뺨에 손자국이 선명하게 아로새겨지면서 체득한 결과였다.
.
.
.
그리고 지금.
단검을 보자마자 본능적으로 내디딘 한 걸음이 내 목숨을 구했다.
사람은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 두뇌가 빠르게 회전한다고 하던가, 아니면 헥토르의 가호가 내 사고를 침착하게 유지하게 해주는 것일까.
선명한 죽음이 나를 방금 스쳐 지나갔음에도 불구하고 침착하게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누가 봐도 암살자 같은 복장.
시대에 뒤떨어지는 얼간이 같은 표현.
그리고 명백한 적의.
“호오.”
두 번째 공격, 두 번째 발걸음.
액션 영화에서 볼법한 과장된 움직임과는 달리, 몹시 훈련받은 듯한 절도 있는 움직임이었다.
아마도, 상대는 무수히 많은 사람을 죽여본 암살의 프로일 것이다.
세 걸음, 네 걸음.
괜한 조바심 탓에 조금 더 걸어보고.
찰나를 모두 흘려보낸 다섯 걸음째에서야.
“흐아앗!”
수련용 나무 몽둥이를 휘둘러 암살자의 손목을 노렸다.
내가 생각해도 수학적으로 아주 완벽한 궤도였으며, 내 몸에 남아있는 헤라클레스의 영압 또한 미소 지으면서 엄지를 척 세울만한 일격이었다.
사소한 문제가 있다면.
“제법이로군요.”
순간적으로 단검의 날에 하얀빛이 휘감기면서 늘어나더니, 내 몽둥이를 두부처럼 싹둑 썰어버렸다는 정도였다.
음.
저것이 바로 절정 고수만 뿜어낼 수 있다던 검기인가.
몽둥이와 더불어서 내 몸이 김/율으로 변해버리기 전에, 나는 한 발짝을 더 내디뎠다.
“흐아아! 누렁아!”
그리고 동시에 목걸이로 만들어서 매달고 있었던 누렁이의 비늘을 쥐고서 간절히 기도를 올렸다.
그 순간.
“으갹?!”
“컥──”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서 누렁이가 떨어져서 암살자를 짓뭉갬과 동시에.
내 일곱 번째 걸음이 땅에 닿았다.
그리고.
“뭐야아아! 헤라클레스으으!”
누렁이의 비명이 거리에 울렸다.
* * *
“오늘의 맘마는──!”
제국 수도, 신문을 가장 빠르게 구할 수 있는 기차역 근처의 어느 주택에서.
에스테아는 침대에 뒹굴면서 그녀의 유일한 취미, 소설 감상을 즐기기 위한 예열을 하고 있었다.
심지어 신문 연재 소설이 아닌, 오래간만에 맛보는 양장본의 감촉을 만끽하던 중이었다.
율리시스의 멱살을 잡고 흔들길 벌써 몇 주.
- 후…… 이거라도 보십시오.
역시 작가는 쥐고 흔들면 뭐라도 나온다고, 자신의 적극적인 구애에 버티다 못해 그가 다른 곳에 살 때 출판했다는 소설을 주었던 것이다!
하필 누렁이 대응반 히스토리에가 자리를 비운 바람에, 김율이 아껴뒀던 비축용 누렁이 사료를 다 털려버린 비극이긴 했지만.
뭐, 에스테아 본인에게는 희극이었다.
사료다! 맘마다!
“웅히히.”
사실 제목은 별로 끌리진 않았다.
올림포스 이야기라니.
무슨 내용인지 가늠이 잘되지 않았다.
하지만 원래 제목이 괴식이라도 작가가 조리했던 다른 요리가 미식이라면, 내용물은 미식에 가까울 가능성이 높으니까.
그래도 부제목 중 가장 맛있어 보이는 것, ‘헤라클레스 영웅담’을 아주 옴팡지게 맛있게 옹냥냥 먹기 시작한 에스테아였다.
그리고 이내.
팔랑팔랑…….
살랑살랑…….
팡팡!
책장이 넘어가는 소리, 꼬리가 흔들리는 소리, 나아가 만족스러운 대목에 도달할 때마다 꼬리가 이불을 두들기는 소리가 조용한 방을 울렸다.
헤라클레스! 좋아!
헤라클레스! 멋있어!
누렁이식 독서법으로 순식간에 와구와구 퍼먹으면서 에스테아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입가에 피워올렸다.
“식인 말이라니……! 아주 무서운 상상력이야!”
순간적으로 용을 잡아먹는 괴물 말의 모습을 상상하기도 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지만.
갑작스럽게.
“어엇?”
에스테아는 그녀의 몸이 공간을 베어내어 어디론가 빨려 들어가는 느낌을 받았다.
태어나서 처음 겪어보는 현상에 당황한 에스테아.
그도 그럴 것이.
자기 비늘을 누군가에게 선물해 본 것이 기나긴 용생에서 최초였으며, 이렇게 빨리 김율이 그 기회를 쓰리라 생각하지도 못했기 때문.
다음 순간.
에스테아는 이불을 돌돌 말고 있는 상태 그대로 허공에 소환되었다.
그리고.
“으갹?!”
바보 같은 비명을 지르며, 소환된 위치 바로 아래에 있던 사람을 무자비하게 깔아뭉개고야 말았다.
그리고.
“뭐야아아! 헤라클레스으으!”
순간적인 상황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격한 반응이 터져 나왔다.
폭력 소설의 주인공처럼 난폭하게 변해버리고 만 에스테아가 포효했지만, 그다음 순간.
“크으읏, 이건 또……! 아이사츠는 생략하겠습니다!”
갑자기 자신의 밑에 깔렸던 사내가 뒤로 몸을 빼더니, 달려들며 에스테아에게 휘둘렀다.
아니.
휘두르려고 했다.
“뭐야, 넌?”
“……!”
에스테아의 눈과 마주치자마자 몸이 돌처럼 굳어버리기 전까지는, 그러려고 했었다.
“으음.”
꼬리를 휘둘러 건방진 사내의 뺨을 툭, 툭 치면서.
에스테아는 드래곤다운 지성과 통찰력을 발휘했다.
상황을 보아했을 때.
이 사내가 율리시스에게 생명의 위협을 느끼게 했고, 그래서 율리시스가 비늘의 힘을 빌려 자신을 불러낸 것이리라.
고작 인간 하나 때문에.
고작 하잘것없는 인간 하나 때문에.
“소설은 이어서 봐야 재밌는 데에에에──!”
“컥──”
사내, 클라펜의 강냉이가 어두운 밤하늘을 수놓았다.
.
.
.
“그러게, 작가라면 집에서 얌전히 글을 써야지, 왜 밖에 나왔어어!”
의식을 잃은 채 혼절한 클라펜을 의자 대용으로 깔아뭉갠 에스테아가, 꼬리를 연신 바닥에 내리치며 일갈했다.
드래곤의 분노를 정면에서 받아냈음에도 불구하고.
“산책 좀 나올 수도 있죠.”
김율은 머쓱하게 뒷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그 모습을 보고 에스테아가 분노 게이지를 조금 더 끌어 올리려는 순간.
“으윽. 갑자기 심리적 스트레스로 내일 휴재할 것 같은──”
“그건 안돼애애!”
에스테아의 분노가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그 직후, 누렁이처럼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면서 김율에게 날아가 매달렸다.
“율리시스, 휴재는 죄악이야. 그런 건 존재해서는 안 돼. 으응? 그러니까, 으응?”
이미 하찮은 인간에게 자신이 매달리고 있다는 의식 따위는 완전히 망각해 버린 에스테아였다.
김율은 그 빈틈의 실을 놓치지 않았다.
“으음, 그러면, 부탁 두 개만 들어주면 내일 연참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여, 연참!”
꼬리의 살랑거림이 세 배로 빨라졌다.
누렁이를 위한 완벽한 유혹.
그간 히스토리에가 어화둥둥 에스테아를 업고 다니면서 맘마를 주는 모습을 꾸준히 관찰해 왔던 김율만이 휘두를 수 있었던 미끼였다.
“끄으으…….”
앞니가 없어진 채 신음을 흘리며 꿈틀거리고 있는 암살자 클라펜을 내려다보며.
“혹시, 위대하신 드래곤께서는 사람의 정신 또한 지배 가능하신지요.”
김율은 일부러 극존칭을 덧붙여서 설득의 효과를 극대화했다.
“에헴! 당연하지!”
효과는 굉장했다!
“그러면, 얘 좀 털어서 혹시 누가 저 죽이라고 시켰는지 확인할 수 있을지.”
“그쯤이야!”
에스테아가 엣헴, 하면서 벌떡 일어나며 순식간에 꼬리로 클라펜을 휘감았다.
힘 없이 흐느적거리는 클라펜을 순식간에 눈앞으로 가져온 에스테아가, 그의 머리 위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Solam veritatem dicere debes──”
명랑했던 에스테아의 목소리가 한 톤 낮아짐과 동시에, 영혼을 뒤흔드는 듯한 주문이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김율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리고.
의식을 반쯤 잃은 클라펜의 입이 열리며 소리를 빚어냈다.
“베르뚜뜨…… 공장니미…… 디디하뎠…….”
강냉이가 날아간 충격으로 영 어눌한 발음이었지만, 김율은 그 말을 정확히 알아들었다.
“베르투스 공작, 이라.”
김율은 낮은 목소리로 그 이름을 뇌까렸다.
“엣헴! 이 위대하신 드래곤님께서 처리해 줄까?”
에스테아가 가슴을 쭈우욱 펴며 금방이라도 입에서 브레스를 뿜을 것처럼 갸르릉거렸지만.
김율은 조용히 고개를 내저었다.
“복수는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 게 아닙니다. 제가 직접 엿을 먹여야 진정한 복수죠.”
김율의 눈빛이, 마치 박사 논문을 반려한 지도교수를 상상하는 것처럼 음험하고도 흉악하게 번들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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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절하게 털린 채 기절한 클라펜이 ‘우리 가문은 암살 명가…… 크큭…….’하면서 살짝 저능한 꿈을 꾸고 있을 때.
암살 명가라는 역설적 표현으로는 채 담아낼 수 없는 평범한 암살자.
그렇기에 아이사츠라는 이단적 행위를 하지 않고 얌전히 사람의 목을 그림자 속에서 쓱싹할 수 있는 사람들 또한 밤의 거리를 누비고 있었다.
비록 클라펜처럼 검기를 다룰 수 있는 정도의 강자들은 아니었으나, 애초에 암살이란 징징이를 노리는 집게 사장처럼 빈틈을 노리는 것.
그들은 각자의 전공 분야를 살려 요인들의 암살에 착수했다.
“크큭, 이 독은 코끼리도 죽일 수 있지.”
미리 준비한 독을 공기 중에 살포함으로써, 자는 중에 평온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한 배려심 넘치는 암살자도 있었고.
“폭발은…… 예술이다……!”
퍼펑!
중동식 전통 예절을 답습하며, 알라 후 아크바르를 외치면서 도심 속에서 즐기는 불꽃놀이를 선사한 암살자도 있었다.
그렇듯 각자의 독문무공을 마음껏 활용하는 미친놈들 천국에서.
작전명에 충실하게, 단검 한 자루만을 들고 고독하게 그림자 속을 암약하는 신토불이 암살자도 있었다.
그의 표적은 알렌 남작.
작위 자체는 높은 편이 아니었으나, 특유의 마당발로 인해 상위 귀족 적대적인 어록을 마구마구 양산한 바람에 미운털이 박힌 사내였다.
이미 몇 번이고 사전답사를 마치고, 당장 오늘 낮에도 우유 배달 업자를 가장해 방문했었던 남작가의 담장을 너무나도 쉽게 스르륵 넘어.
타닥, 탁──
느낌표가 붙지도 않을 정도의 기민한 발놀림으로, 손쉽게 자택에 잠입했다.
사용인이 코를 고는 소리 외에는 아무런 소음이 나지 않는 집 안을 유유히 타고 가서.
벽난로 속 잿더미에 파묻힌 비상 열쇠를 유유히 꺼낸 후, 침소로 직행했다.
스르륵.
창문을 타고 아련하게 들어오는 달빛을 낭만 삼아, 그는 곧장 침대에 단검을 찔러넣었다.
비명조차 내지 않는 깔끔한 죽음…….
“……?”
손맛이 이상했다.
그는 황급히 이불을 살짝 들춰서 안쪽을 확인했다.
이불 속에는.
아무도 없었다.
.
.
.
그와 같은 일들이 수도 곳곳에서 발생했다.
독이 흘러넘친 방 안에서도.
폭탄이 터져버린 저택 안에서도.
동이 떠오를 때까지, 그 누구도 목숨을 잃지 않았다.
외려 암살자 중 몇몇은 행동 수칙을 위반하고 목표를 찾아다니다가 체포당하는 사태까지 벌어졌으니.
시작은 창대하였던 단검의 밤이.
미약하고도 허망한 종언으로 막을 내렸다.
* * *
“성국 입장에서는, 본 제국에 소란을 일어나는 것을 방치하는 것이 더 국익에 도움이 되었을 텐데.”
아직 누렇게 물들지 않은 제국의 푸른 하늘.
황제가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이야기하자, 청량한 웃음소리가 낮게 퍼졌다.
“놀랍게도, 저는 성국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답니다.”
괴물 성녀, 로젤린의 말에.
황제의 눈에 이채가 감겼다.
“지금 우리가 사적인 공간에 있다고 한들, 성녀가 그런 말을 스스럼없이 입에 담아도 괜찮은 것인가?”
“그럼요. 여신의 뜻을 어찌 일개 국가가 결정할까요?”
당돌한 말이었지만, 로젤린은 그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는 것처럼 손에서 눈부시도록 찬란한 광채를 피워올렸다.
여신의 힘을 나눠 받았다는 증거이자, 신앙심을 마음속 깊이 간직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한 그 동작에.
황제는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내가 교황이었으면 자네 때문에 속이 좀 쓰렸겠군.”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 하시나이까.”
대화를 나누면서, 황제는 문득 고개를 들어서 정면을 바라보았다.
그들이 있는 곳은 가면무도회장.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술을 마시며 웃고 떠드는 사람들의 입꼬리에는 활기가 넘쳤다.
당연한 일이었다.
피곤한 내색을 할 수 있는 자리는 아니었으니까.
아무리 상·하원의 견제가 황제에게 쏟아진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국에서 황제의 직인이 찍힌 초대장을 무시할 수 있는 간 큰 사람은 없었다.
있었다면?
지금쯤 자택에서 암살자에게 모가지를 대롱대롱당했을 것이다.
사인 또한 자연사로 간주될 가능성이 높았다.
.
.
.
닭 가면을 쓴 육감적인 여인, 로젤린을 떠나보낸 후.
“일부 흉수들의 신병을 확보했습니다, 폐하.”
오리 가면을 쓴 시종이 조심스레 다가와서 보고를 올리는 것을 듣고서,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별다른 내색을 하지 않은 채 술을 한 모금 들이마시며 생각을 정리했다.
언제고 이빨을 드러낼 줄은 알았지만, 생각보다 시기가 빨랐다.
그가 알던 베르투스답지 않았다.
전장에서 철혈이라고 불리던 그 완벽한 주도면밀함은 어디로 가고, 심지어 잠재적 적성국의 주요 인물에게까지 정보를 흘렸단 말인가.
뭐…….
그래도 그의 계획 중 한 가지는 완벽할 것이다.
잡아들인 암살자들을 아무리 캐보아도, 꼬리가 나오지는 않으리라.
그의 계획은 항상 그랬으니까.
“그렇다면, 내 역공을 기다렸던 것일지도.”
공공연하게 지금의 황제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지껄여 대는 북부대공부터 출발해서, 제국에는 아직 황제의 정적이 다수 남아 있었다.
이건 일부러 ‘탄압당하는 충신’의 모습을 연기하기 위해 드러낸 틈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자신 또한 직접적으로 경고하기보다, 가면무도회라는 미끼를 던진 것이기도 했다.
물론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없듯.
이미 일어난 암살 미수 또한 가만히 내버려 두면 분명히 말이 나오리라.
뭐.
그건 베르투스 공작이 알아서 처리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도 아직은.
아직은, 제국에 균열이 발생해서는 안 된다.
그런 생각을 하며, 황제는 다시 술을 마셨다.
혀끝에 쓴맛이 감돌았다.
* * *
집까지 얌전하게 에스테아 쉴드를 켠 채 귀가한 후.
감히 은혜를 내려준 주제에 원수까지 입힌 베르투스 공작을 엿 먹일 계획을 수립한 다음 날.
내 비장의 무기, 이대호 사인 배트를 쥐고서 방 밖으로 나섰다.
작가로 대성하기 위해선.
죽음을 눈앞에 두고서도 어떻게든 오늘 연재해야 할 1편을 써내야 하니까.
물론.
- 으갸갹──!
누렁이를 잘 꼬드겨 한 장 더 뜯어낸 비늘을 손에 꼭 쥐고 있었다.
앞으로 두고두고 문제가 생길 것 같을 때마다 응애 누렁에몽 도와줘 하고 불러낼 예정이었다.
……근데 이게 맞나?
드래곤이면 뭐 좀 고고하고, 도도하고 그런 존재여야 하는 거 아닌가?
왜 얘는 크르랑누르랑 농농하지?
근데 그 부분에 태클을 걸자니, 김율 친화적인 태도에 굳이 기름을 붓는 것 같아서 언급하진 않기로 했다.
좋은 게 좋은 거다.
“평화롭네…….”
만반의 준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내게 아이사츠를 걸어오는 멍청한 암살자 같은 존재는 나타나지 않았다.
여전히 제국 수도는 아름답게 빛나고 거리에는 환한 미소가 넘치는, 아주 일상적인 상황.
……나만 위험했었던 건가? 라고 생각하기엔.
“진리일보요.”
“감삼다!”
오늘도 일일 독자 수 1을 늘리려고 시도하면서 신문의 사회면을 살펴보니, 과연 무언가 음모가 온 도시를 한 번 휘몰아치긴 했나 보다.
의문의 폭발 사고. 사상자 없음.
가스 누출 사고. 경상 1명.
불법 찌라시 목격으로 인한 시각 손상. 이건 뭐야.
어쨌든 사람만 죽지 않았다 뿐이지, 사람이 죽어 나갈 수도 있었던 사고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 정황을 살펴보면서.
분명히 이 사고들 또한 베르투스 공작의 소행일 거라 확신할 수 있었다.
근거?
심증이다.
나 같은 존재감 없는 선량한 작가를 해치려 들었던 놈이, 다른 사고도 동시에 쳤다고 생각하는 게 합리적이지 않을까.
“어머어! 작가니이임!”
마침 오늘따라 조금 더 반갑고 이쁘고 가슴도 웅장해 보이는 우리의 훌륭한 성녀님이 손을 흔들고 계셨다.
.
.
.
“……그런 일이 있으셨어요? 그래서 그런 괴상한 걸 들고나오셨구나.”
“이건 괴상한 게 아니라 사직의 혼이 담긴 영물입니다.”
“사직의 혼?”
당연히 야알못일 수밖에 없는 로젤린이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뭐, 용서했다.
사실 진짜 S급 보구라고 할 수 있는 오타니 사인 배트는 여전히 연구실에 모셔둔 상태지만.
……차마 그건 내가 쥐고 휘두를 엄두가 안 나더라.
“베르투스 공작이라…… 으음…….”
“심증입니다. 물증은 없어요.”
랩틸리언이 세뇌파를 쏴서 자백을 받아냈다는 말은 할 수 없으니, 증거는 없는 셈.
“확실히, 그럴 사람이긴 하네요.”
“……믿어주시는 겁니까?”
“그럼요! 유비에게 슬슬 로맨스 서사를 부여해 주신 작가님을 믿지 않으면 누굴 믿겠어요?”
“……흠.”
고작 그런 이유였나.
뭐, 사실은 살짝 로젤린을 의식하고 넣은 전개긴 했다.
서주 불꽃 대효도를 가볍게 넘겼지만, 그 불꽃 대효도로 인해 도겸이 혈압 올라 수명이 단축되었으며 그 자리를 귀 큰 놈이 날름 먹기 직전이었고.
그 과정에서 서주의 대빵 부자.
간손미 브라더스로 묶이기에는 너무나도 위대한 미축과의 만남을 담아냈었다.
간옹은 부랄친구였도르.
손건은 존재감없다도르를 수상했지만.
미축은 이른바 유비 코인 저점 매수의 달인.
하이엘프의 매혹이라도 써서 홀린 것인진 모르겠지만, 가진 건 관우와 장비밖에 없는 유비에게 전 재산을 투자할 정도로 야수의 심장을 가진 사내였다.
……관우랑 장비 정도의 라인업이면 그럴 만한 것 같기도 한데.
어쨌든.
그래도 투자를 위해 팔려 간 여동생, 이라는 느낌을 담아냈다간 로젤린이 진짜 날 죽일 수도 있을 것 같아 미 부인을 메인 히로인 포지션으로 떡상시켰으니.
“앞으로도 기대하셔도 좋을 겁니다.”
“꺅!”
기뻐서 출렁거리는 걸 보니 내 마음도 온화해지네.
…….
…….
장판파…….
스킵해야 하나?
* * *
김율이 진지하게 미 부인 대신 감 부인을 우물에 집어 던지는 연의 개변을 해야 하나 고민하며 밤을 지새운 다음 날.
[두 영웅 특집 3편 연속 수록]
“끼얏호!”
에스테아는 약속된 연참의 검을 손에 쥐고 환호성을 터트렸다.
최근 김율의 소설 양쪽의 전개가 다 만족스러웠기 때문.
만약 어느 하나가 조금 아쉬웠다면, 그날, 잘 돋지도 않는 비늘을 낑낑대며 떼서 한 개 더 주지도 않았으리라.
조조는 과연 악당이지만 마음속에는 따스함을 간직한 사내답게, 아버지의 복수를 달리는 그 과격함이 마음에 들었고.
유비는 한때는 자신을 인정해 준 사내였던 조조의 만행을 과시하지 않은 채 정의로운 면모를 한껏 뽐내고 있었으니.
이 얼마나 가슴 뛰는 낭만!
이거거든!
그렇게 두근두근, 다른 신문들은 옆으로 홱 밀어버리고 오늘도 벤치에 앉아서 다리를 동동 휘두르며 진리일보를 펼쳤다.
그리고.
“……여기서 여포가 왜 나와? 장막이 배신했다고? 아니, 장막, 조조 친구잖아? 심지어 원소가 죽이라는 거 조조가 도와줘서 살려줬잖아?”
진류태수이자 조조의 동맹이었던 장막의 충격적인 배신에.
누렁이의 뿔이 뜨거워졌다.
에스테아가 화가 난 이유는 단 하나.
“여기서, 여기서 끊으면 어떡해애애애──!”
조조는 왜 악당의 운명인가? 모름.
여포는 왜 저 지랄로 다니는가? 모름.
장막은 왜 저러는가? 모름.
진궁은 누구인가? 모름.
연주 사람들은 왜 배신했나? 모름.
순욱은 왜 말을 곧바로 하지 않는가? 모름.
유비가 가진 혈통의 의미? 모름.
손견은 왜 옥새를 쓰자고 안 하는가?
그 모든 의문을 품고.
“Spatium! te ipsum dilacera et mihi viam para──!”
쿠구구……!
도심 한복판에서 그녀의 뿔과 꼬리를 드러낸 채, 용언을 읊조렸다.
공간이동을 하고 나면 항상 멀미가 나서 브웨에했었기에 가급적 사용을 자제하고 뚜방뚜방 뛰어다니거나 팔랑팔랑 날아다녔지만.
오늘의 에스테아는 그럴 인내심이 부족했다.
목표는 자기 비늘이 있는 곳.
4연참이 아니라 고작 3연참밖에 하지 못한 김율의 머리 위에 곧장 떨어져서 다리로 목을 조를 생각이었지만.
“으게겍!”
그녀를 빨아들였던 공간의 균열이, 아무런 전조도 없이 그녀를 원래 있던 벤치로 확 뱉어냈다.
“뭐임……?”
절대 짧지 않은 그녀의 인생 속에서.
공간이동이 방해받은 적은 거의 없었다.
딱 두 번.
8위계 대마도사의 비밀금고를 털기 위한 목적으로 시전했다가, 강력한 차원 보호 마법으로 막혔을 때.
그리고 여신의 이야기에 너무 심취한 나머지, ‘그거 실화에용?’하고 물어보려고 신계에 이동하려고 했을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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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테아가 몇 번이고 공간이동에서 반품당한 채 바닥에 내팽개치고 데구르르 뒹굴고 파닥거리다 못해 끄아앙 울분에 찬 브레스를 허공에 뿜을 무렵.
“드디어!”
“여포 같은 캐릭터는 한 번 쓰고 퇴장시키기엔 아깝지!”
“마지막 등장이 동탁을 죽였을 때였나?”
“이번에도 거창한 전투 장면이 나오겠군!”
욕심 많은 특급 누렁이를 제외하고선, 독자들 대부분이 여포의 역습에 만족스러운 반응을 내뱉었다.
원래 한번 리타이어했던 악역이 파워업한 채 다시 돌아와 리벤지 매치를 뜨는 것은 꽤 검증된 클리셰.
세배 빠른 크와트로도 거창하게 역습을 갈겼고.
전투 자체가 실화인지도 불분명할 정도로 가슴이 웅장해지는 혈통 빨 퍼리 닌자와 혈통 빨 눈깔 닌자의 배틀도 그렇다.
심지어 대효도 환장 파티로 비호감 스택을 쌓아가던 조조의 뒤통수를 팍 때리면서 거의 세력의 존립을 위태롭게 만들 정도의 임팩트 넘치는 등장이었으니.
조조를 응원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조조가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고구마가 너무 길진 않았으면 좋겠다는 감상을.
조조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드디어 정의의 심판이 도래했음에 조조족 척결 다섯 글자에 환호성을.
바야흐로 소설의 라이징스타로 자리매김하고 말았던 것이었다.
물론 그 지점에는 아예 대놓고 창작의 길을 걷기 시작한 유비 편, ‘황족이 혈통을 숨김’ 파트의 공헌이 컸다.
정사도, 연의도 초월한 초고성능 세탁기.
김율이 트립 전 감명 깊게 보았던 만화 ‘불꽃의 봉황이 들판을 휩쓴다’에 등장하는 문무겸비 여포의 모습을 은근슬쩍 녹여낸 것이다.
조조 파트였다면 절대 나올 리가 없었던 여포와 초선 이야기 또한 외전의 형태로 은근슬쩍 밀어 넣은 덕분에.
악역치고는 몹시 푸시를 많이 받은 상태라고 할 수 있었다.
심지어.
## ====== ##
“주공!”
연기 속에서 그림자가 뛰쳐나왔다.
전장에 동행한 사마 관직의 누이였다.
그의 얼굴은 검게 그을렸고, 갑옷은 반쯤 녹아내린 흉측한 몰골이었지만.
“일어나십시오, 주공! 여기서 쓰러지시면 천하가 무너집니다!”
그는 올곧은 충심으로 조조의 팔을 잡아챘다.
조조는 상처를 입은 고통으로 신음하면서도, 누이의 어깨에 팔을 기댔다.
자신의 부상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누이는 조조를 질질 끌다시피 하여 그가 타고 달려온 군마에 억지로 밀어 올렸다.
“가십시오!”
누이의 외침에 호응이라도 하듯, 말이 울음소리를 울리며 앞으로 튀어 나갔다.
가까스로 안장 위에서 몸을 추스르며.
조조는 뒤를 돌아보았다.
불타는 복양성의 전경.
피아를 가리지 않는 병사들의 함성.
그 모두를 뒤로 한 채.
조조는 피가 날듯 입술을 짓깨물면서, 다시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뒤를 돌아볼 여유도, 이유도 없었다.
살아야 한다.
살아남아야, 헛되이 죽어간 장병들의 고혼에 제를 지낼 수 있다.
“오늘의 빚은…… 반드시…….”
이윽고, 유일하게 활짝 열려있는 성문의 활로를 타고서.
그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 ====== ##
집필하는 과정에서도 ‘쓰읍, 이게 맞나? 하며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전위가 구해준 게 아니었구나 하고 한 번 더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 완성된 문제의 회차가 신문에 연재되자.
조조 코인은 소설 내적으로도, 외적으로도 하한가를 치다 못해 상장폐기 직전에 내몰렸다.
“캬! 믿고 있었다고, 여포!”
“이거거든!”
“역시 진주인공은 유비였다!”
“조조족 척결!”
조조 까도 미쳐 날뛰고.
“……추하다, 조조야…….”
“이게, 씹, 주인공이냐!”
“아니, 이 새끼는 뭐 심심하면 도망을 쳐?”
“이게 무슨 소리야? 또 졌어? 이젠 아예 전멸을 했다고!”
견훤에 빙의한 채 마구니가 깃든 조조 빠도 미쳐 날뛰었다.
여러 가지 의미로, 조조 또한 슈퍼스타였다.
하지만 원래 앞을 예측할 수 없는 막장 드라마는 욕은 먹더라도 시청률은 높게 나오는 법.
“일일 독자 수가 고점을 갱신했네…….”
“독자들은 피폐를 좋아한다…… 메모…….”
어차피 고증에 얽매일 수밖에 없는 김율은 물론이고.
옆에서 최근 ‘인풋’을 열심히 하기 시작한 히스토리에의 데이터베이스에 잘못된 정보가 입력되기 시작했다.
.
.
.
여포 붐은 일어날 때처럼 빠르게 꺼졌다.
조조 빠들의 곡성이 하늘에 닿은 탓일까, 아니면 정사에 얽매인 김율의 저주받은 운명 탓일까.
복양 전투 이후에도 영혼의 한타에서 한 번 더 패배하고, 진짜 그대로 말아먹을 뻔한 걸 원소 찬스로 한 턴 버티고.
또다시 영혼의 한타를 벌이더라도 이미 체급 차이가 명확한 상황에서, 시의적절하게 메뚜기떼의 창궐로 암묵적 휴전이 성립된 후.
해가 바뀌고 나서, 조조는 여포를 그야말로 개 같이 후드려팼다.
그 마지막을 장식한 것은, 동민 전투.
작가가 카이사르 에피소드를 자기표절한 것인지.
참호를 파서 병력을 숨겨놓은 다음 그걸로 기습하여 여포 군을 완전히 찢어발긴다는 다소 주인공 편의적인 전개가 이어지고야 말았다.
게다가 여포는 하필이면 옆집 주인공, 유비네로 도망쳐서 의탁해 버린다는, 유비 입장에서는 전형적인 ‘아군이 된 적’ 클리셰까지.
- 숫제 참호 만능론이나 다름없군.
- 율리시스라는 작가는 참호를 넣지 않으면 전쟁씬을 못 쓰는 건가?
평론가의 촌철살인이 꽂혔지만, 김율에게는 아무런 데미지를 입히지 못했다.
애초에 참호 메타를 논외로 두면 성립될 수 없는 전쟁사가 많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당장 독일산 콧수염과 불곰산 콧수염을 탄생시킨 것 또한 참호로부터 유래했고.
정의로운 청년 아돌프가 희대의 학살자 히틀러를 쏘아죽인 것 또한 참호를 본뜬 벙커에서 일어난 거사였다.
원래 선지자는 고통받는 법이었다.
* * *
“으음, 율리시스 작가님? 이건 조금 고증에 문제가 있는 것이와요?”
최근.
클로에는 김율의 작품에 어떻게든 훈수를 두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 감히 나를 이렇게 대한 작가는 처음인 것이와요!
애초에 위스페라우드 가문 상속 1순위에 당하는 귀족 영애이시자, 후레자식까지는 아직 진화하지 않은 오냐자식이었던 지라.
비록 100패를 할지언정, 최후의 순간에는 1승을 따낸 후 ‘야, 너 좆밥이잖아’를 박아 넣고 싶은 심보기도 했다.
에스테아 미만의 깐프 언저리적 발상이었다.
물론 이번이 처음도 아니었기에.
“뭐가 또 문제람?”
김율은 새끼손가락으로 귓구멍을 후비며 스스럼없이 말대꾸를 갈겼다.
제갈량이 보았다면 위연보다 못한 새끼라고 백우선으로 대가리를 내려칠 것만 같은 괘씸함!
하지만 아무리 신문사의 자본이 클로에의 주머니에서 나온다고 한들, 그 신문사의 이익을 최근 책임지고 있었던 것이 김율이었다.
그러니 그 만행에는 살짝 흐린 눈을 뜬 채로.
“이, 원문사극이라는 에피소드 말인 것이와요! 여포가 기령과 유비 사이를 중재하는!”
“그게 왜 말입니까?”
“백오십 보는 누구나 눈감고도 맞출 수 있는 거리인 것이와요. 그걸 내기로 한다니 현실성이 다소 부족한 것이와요!”
그 말에.
김율은 그저 눈을 끔뻑거렸다.
“심지어 유비는 고귀한 하이엘프! 백오십 보가 아니라 이백 보 거리도 거뜬히 맞출 수 있을 텐데, 너무 기령이 쉽게 수긍하는 것이와요!”
그 반응이 마치 자신의 말에 드디어 굴복했다는 것처럼 느껴진 클로에가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후속타를 날리는 순간.
핑그르르──
“?”
갈고리를 띄운 클로에의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김율은 무심하게 바닥에 떨어진 주사위를 쥐었다.
“그럼, 내기하시겠습니까? 똑같은 조건으로, 다섯 발 중에 한 발이라도 맞추면 전개를 수정하겠습니다.”
김율이 보고 있으면 한 대 찰싹 때려주고만 싶어지는 미소를 입꼬리에 휘감았다.
그야말로 온몸과 온 얼굴로 형상화한 ‘쫄? 그 자체에.
“흥! 감히 고귀한 엘프의 위대한 궁술을 의심하는 것이와요? 가문의 명예를 걸고 제대로 보여드리겠사와요!”
클로에는 제대로 긁혔다.
* * *
다음 날.
제국 수도 외곽, 위스페라우드 공작가의 목장.
“후후…… 오랜만에 잡아도 어제와 같은 이 그리운 감촉…….”
허공에 활시위를 팡팡 당기면서 어깨를 푸는 클로에.
“흠, 흠…… 작가님. 왜 그러셨습니까.”
“아잇, 저 깐프 년이 꼴 받게 하잖아요.”
심판 역할로 소환당한 길포드와 김율이 속닥거렸고.
“와아!”
“나는 왜…….”
오늘도 연참 채찍을 갈기러 날아왔다가 재미있어 보이는 이야기에 홀라당 넘어간 에스테아, 그리고 1+1 상품으로 끌려온 히스토리에까지.
선수와 심판, 관람객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클로에는 자신이 왜 고귀한 하이엘프 혈통인지 증명하기 위해, 활시위에 화살을 쟀다.
뭐? 150보 밖에서 화살을 맞춰?
그건 3년 쉰 나도 할 수 있지!
순풍이 불어와 그녀의 빈약한 폐부를 살짝 부풀리며 자신감을 피워올렸다.
그리고.
화살이 바람을 갈랐다.
“…….”
“…….”
“와! 개못쏴!”
“크흡.”
좌중에 눈치 챙긴 침묵과 천진난만한 웃음, 그리고 굳이 숨길 생각도 없는 비웃음이 감돌았다.
부러지기 두려워 시위를 떠나지 못하는 화살은 없다지만.
목표를 맞추기 두려워 일찌감치 고개를 숙인 채 바닥에 처박히는 화살은 있었다.
오십 보에 백 보를 더해서 백오십 보.
클로에가 쏘아 올린 작은 화살은 백오십 보에 백 보를 빼어 오십 보를 채 가지 못하고 형편없이 추락했다.
물론.
“어? 어어? 이럴 리가 없는 데스와요?”
본인도 어이가 없어진 나머지, 위스페라우드 가문 특유의 방언마저 말꼬리에 달라붙은 클로에가 다시 한번 더 비장하게 화살을 시위에 매겼지만.
툭.
“창끝은 못 맞춰도 화살 끝은 정확하게 맞췄네.”
김율의 평처럼.
그녀의 두 번째 화살은 바닥에 처박힌 첫 번째 화살의 끝자락을 스쳤다.
오십 보 한정 여포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의 신기묘산에 달하는 솜씨였다.
“이거, 거리가 이상한 것이와요?”
클로에의 다음 선택지는 현실 부정.
직접 한 걸음씩 걸어보며 과연 이게 백오십 보가 맞나, 내가 지금 조작당하고 있는 건 아닌가 확인하기 시작했다.
“화장실 급하십니까? 걸음걸이가──”
“닥치시와요!”
처음에는 멀쩡하게 걷더니, 진짜 백오십 보쯤 될 것 같자 김율이 표현한 것처럼 찔끔찔끔 보폭을 좁혀서 걷는 추태를 한바탕 벌인 후.
“후, 직접 걸어보니 확실히 알겠사와요……!”
다시 한번 근거 없는 자신감을 채운 채, 또다시 한 발, 두 발, 세 발.
세 번의 화살을 모두 다 50미터 인근에 때려 박는 기행을 보여서 화룡점정을 찍은 클로에였다.
이제 더는 오호홋거릴 힘도 모조리 사라진 채, 허망한 눈빛으로 털퍼덕 주저앉아 땅을 하염없이 내려다보던 클로에의 머리 위로.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녀가 고개를 올려다보면, 그곳에는──
“내기, 패배하셨군요?”
김율이 사악한 미소를 입꼬리에 머금고 있었다.
그 미소를 마주한 순간.
클로에는 왠지 모르게 온몸이 오싹하게 달아오르는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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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시스 카이사르가 던진 주사위의 눈금은 4였다.
클로에와 내기를 했을 때, 소길 정도의 운이 따라준다는 뜻.
확실하지 않으면 승부를 걸지 말라는 타짜계의 이론에 의하면, 소길 정도로는 확실하다고는 볼 수 없었으나.
김율은 자신에게 주어진 운을 그저 맹신하지 않고, 오히려 그를 바탕으로 운명을 개척할 줄 아는 사내였다.
애초에 내기에서 진들, 딱히 상관 없었다.
절대 타협할 수 없는 조조 파트와 달리, 유비 파트는 애초에 연의에서도 조금 개변이 많이 발생한 상태였으니까.
소드 마스터 유비.
알고 보면 똑똑한 지능캐인 장비.
서주제일미 미 부인.
그야말로 작가 편의주의적 설정을 다 때려박았던 것.
하물며 원문사극 고사 자체는 정사에도 있는 이야기니, 150보가 300보로 늘어난들 무슨 관계가 있으랴.
그리고.
모사재인 성사재천이라.
일을 꾀하는 것은 사람이로되, 일을 이루는 것은 하늘의 뜻이니.
“뭐어? 내기? 재밌겠다! 누구랑? 어디서? 왜?”
결전 당일.
아침부터 누르랑거리며 동네를 뽈뽈 싸돌아다니던 에스테아와 만난 것 또한 하늘의 뜻이었다.
거의 일러바치듯 자초지종을 떠들어댄 김율이었으며, 이야기를 들을수록 에스테아 또한 그의 감정에 동조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살짝 결은 달랐다.
“감히! 내 노예를 쥐고 흔드려고 해!”
“노예 아닙니다만……. 그리고 꼬리 튀어나왔습니다.”
꼬리가 파닥이는 소리에 김율의 소심한 첨언이 묻히는 일은 있었지만, 어쨌든 에스테아는 공정해야 할 내기에서 편파 판정을 내릴 마음이 한가득해졌다.
그 모습을 내려다보면서.
김율의 입꼬리에 ‘계획대로’라고 혼자 중얼거리는 듯한 흉참한 미소가 잠깐 감돌았다.
.
.
.
물론 에스테아는 위대하고 고귀하고 공정한 드래곤.
비록 살짝, 아주 살짝 독점욕이 강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소한 갈등에 그녀의 힘을 남용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랬다면 이미 김율과 히스토리에가 쌍으로 묶여서 레어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 글쓰는 기계로 전락하고 말았으리라.
하지만.
순수 실력으로 따잇당한 2번째 화살까지는 다르게.
클로에의 3번째 화살이 발사되기 직전에, 에스테아는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활대에, 활시위에, 화살에.
바람의 정령의 가호가 깃들고 있었다.
아무리 저 귀잽이가 연약해보일지라도, 정령의 가호가 깃들면 화살은 충분히 저기 꽂힌 창날을 맞히고도 남으리라.
이미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 채 김율의 멱살을 쥐고 흔들어서 최신 비축본까지 싹 다 읽었던 에스테아였기에, 이는 부당하게 느껴졌다.
여포는 순수하게 자신의 궁술만으로 이루어낸 업적인데!
어디서 감히 정령의 힘을 써!
순간적으로 그녀의 머리에 뿔이 자라났다가 다시 자취를 감춤과 동시에.
일대에서 정령의 영압이 완전히 사라졌다.
* * *
눈금이 4가 나온 것 치고는 생각보다 시시한 승부였다.
그리고 내 환상 또한 와장창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원래 엘프라고 하면 보통 클리셰적으로 활을 잘 다루는 컨셉이 아니던가.
그래서 사실 주사위 눈이 애매하게 나오면 최대한 조건을 말랑하고 간단하게 바꿔버려서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일 생각이었다.
근데 저렇게 허접할 줄이야…….
뭐, 나야 좋아.
“내기, 패배하셨군요?”
티배깅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여기서 너무 자극을 주면 오히려 반발 심리가 튀어나올 수 있다.
영락없는 허접 영애 깐프였지만, 그래도 나름 공작가 출신 아니던가.
작위도 근본도 자산도 없는 평민 출신인 내가 너무 깝쭉거리면 오히려 역풍이 불 수 있다.
원래 살아있는 권력은 조심스럽게 대해야 하는 법.
그러니.
“제 조건은 간단합니다. 여기 준비한 서류에 사인을 해주시면 됩니다.”
미리 준비한 플랜 A를 담은 서류를 내밀었다.
클로에는 힘없이 서류를 받아들어 읽다가.
“와, 왓 더 엘프……! 이게 무슨 극악무도한!”
경악과 더불어서, 이글이글 불타는 눈빛을 내게 던졌다.
“이건 노예 계약인 것이와요……! 말도 안되는 것이와요……!”
“흠.”
패자가…… 말대꾸?
……라고 속삭여주고 싶지만, 아무래도 신체 포기 각서 겸 종신 노예 각서는 당연히 받아들이기 힘들겠지.
하지만.
원래 협상은 이렇게 하는 거다.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충격적인 요구를 먼저 제시한 후, 그 다음에 그나마 합리적인 제안을 던지는 것.
“흠, 그러면 이건 어떠십니까.”
바들바들 오고곡하는 클로에의 손에 들린 종이를 낚아채서, 또 준비해두었던 플랜 B를 내밀었다.
과연 통할 것인가.
“으으음…… 이 정도라면……? 그, 그래도, 본녀의 위엄이, 으음…….”
“싫으시면 첫번째 안으로 갈까요?”
“그건 싫은 데스와!”
통했네.
데스와는 근데 뭐냐.
이 세계, 아무리 봐도 살짝 맛탱이가 가 있다.
드래곤은 라틴어로 주문을 외우질 않나.
암살자나 엘프는 어설픈 한본어를 쓰질 않나.
심지어 한자들은 마족들의 문자 취급 받고 있었다.
……원래도 대마왕 핑핑이가 지배하는 대륙에서 쓰는 문자였으니, 그건 맞을지도?
어쨌든.
두 번째 요구안의 골자는 다음과 같다.
쥐흔하지 말 것.
내 창작 활동에 적극적으로 협조할 것.
작품의 프로모션을 적극적으로 제공할 것.
내가 창작 활동을 함에 있어서 필요한 편의를 항상 제공할 것.
여전히 독소조항 천지였지만.
플랜 A였던 ‘몸과 마음, 재산 등 모든 것을 김율에게 귀속할 것’보다는 낫지 않겠는가.
“그, 그래도, 으음, 이것도 너무 많은 것들을 요구하는 것이와요……? 이런 한 번의 내기만으로 이 모든 것을 보장하는 것은 공평하지 않사와요……?”
아직까지 자존심이 남아 있군.
나는 미리 준비한 비수를 클로에의 가슴에 꽂았다.
“어쩔 수 없죠. 그러면 저는 제국일보에 쪼르르 달려가서 위스페라우드 공작가의 영애가 활을 더럽게 못 쓴다더라, 하는 제보를 한 후에 겸사겸사 차기작 계약까지 하고 오겠습니다.”
“히익……! 그 무슨 극악무도한……!”
물론 제국일보로 환승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업계 1위의 드높은 위상을 자랑하고 있었으며, 진리일보와는 체급 자체가 굉장히 차이 나긴 하지만.
그쪽 스폰서는 무려 황제다.
이런 바보 깐프와 달리, 내가 어떻게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환경도 아닐뿐더러.
지난 번 스카웃 제안을 받았을 때의 조건 또한 처참했다.
- 제국일보는 창작자가 인도한 완전 원고가 완전성이 떨어진다고 객관적으로 판단되는 경우, 원고를 인도받은 날부터 14일 이내에 창작자에게 수정을 요구할 수 있으며 창작자는 이를 수정·보완한 후 제국일보에게 다시 인도해야 한다.
쉽게 요약하면, ‘네 원고 마음에 안 들면 무한대로 수정시킬 거임.’이라는 의미가 담긴 조항과.
- 창작자의 저작물이 제국일보에 출간된 이후로 6개월 이내에 선인세 총액의 80%에 해당하는 금액이 공제되지 않았을 경우, 창작자는 제국일보로부터 지급받은 선인세에서 저작물의 출간일부터 6개월 이내에 발생한 저작권 사용료를 공제한 나머지 금액을 즉시 제국일보에게 배상하기로 한다.
‘미리 돈 줄 건데, 미리 준 돈보다 작품으로 수익이 안나오면 다시 뱉어내야 함’이라는 조항.
현대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출판사가 작가를 등처먹는 독소조항들이 깔려 있었다.
이딴 게 업계 1위……?
“후우…… 좋사와요. 본녀는 승부에 깔끔하게 승복할 줄 아는 엘프인 것이와요.”
“잘 생각하셨습니다.”
“하지만 이걸로 본녀가 패배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와요! 언제고 다시금 그 콧대를 꺾고, 그 계약서도 무효 처리한 후 본녀의 발밑에서 앙앙대게 만들어주겠다는 것이와요……!”
깐프는 죽음의 메아리를 터트린 후, 황급히 호다닥 사라졌다.
어쨌든.
승리!
나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구경꾼들을 향해 돌아섰다.
“저 엘프도 꽤 정신 상태가 이상하지만, 김율은 확실히 귀축적인 면모가 있군요. 에스쟝도 조심하도록 해요.”
“응! 역시 인간은 재미있어!”
뭐.
왜.
* * *
일주일 후.
비록 성격은 지랄맞은 개허접 깐프였을지언정, 클로에는 자신이 한 약속을 지키는 1티어 엘프였다.
또다시 편성된 ‘두 영웅’ 시리즈의 특집이 진리일보의 1면을 가득 메웠을 뿐만 아니라.
“오늘 진리일보를 구매하시면 한정판 부록 잡지까지 증정! 여포 외전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주인공이 아니다보니 다소 작품 속에서는 아쉬운 분량으로 실릴 수밖에 없었던 여포 관점의 서술이 담긴 외전까지 동시에 출간되었다.
사소한 차이가 있다면.
‘두 영웅: 여포전’의 작가는 김율이 아니라.
“히스토리에. 넌 확실히 강해졌다. 나와 대등하거나 그 이상은 아니긴 하지만.”
“덕담을 할 거면 조금 더 부드럽게 해주시면 안됩니까?”
“그러면 또 우리 깡통이 기고만장해져서 ‘인간 문학의 끝이 도래했다’하고 케히힛거릴 거잖아.”
“저는 케히힛과 같은 경박한 웃음을 흘리진 않습니다만.”
진정 처음으로 자신의 글로써 판타지 랜드에 출사표를 던지고자 하는 깡통 작가였다.
김율 가라사대.
패러디를 한 편이라도 써봐야지 작가로서의 영근이 무럭무럭 자란다고 하였다.
심지어 김율은 히스토리에를 이해시키기 위해 여러 사례를 들어서 설득했다.
'동■ 프로젝트' 패러디로부터 출발해 회귀, 빙의, 환생이라는 클리셰를 모두 활용하여 명작을 탄생시킨 작가도.
'내 청■ 코미디' 주인공과 작가물을 결합한 원형으로부터, 연애 파트 빼고 완벽한 작가물을 탄생시킨 작가도.
'해리 ■터 시리즈'에 TS를 묻혀서 말포이로 보여줄 수 있는 매력을 극대화시킨 작품을 완성시킨 작가도 있었다.
그 모든 패러디로부터 출발한 대작가의 사례를 습득하고서 메가 기가 테라 진화를 넘어서 암흑 진화까지 해버린 희대의 망생이.
히스토리에, 필명 ‘히토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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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써보지 않을래?”
“지금 제가 쓰고 있던 건 글이 아니라 활자 무더기라도 된다는 뜻으로 말씀하신 건 아니고, 무슨 글이지요?”
“앞의 뜻도 맞는데?”
“…….”
김율이 분노의 체어샷을 맞고 허리가 살짝 꺾였다는 사소한 이슈가 있긴 했지만, 어쨌든 김율의 제안으로부터 출발한 히스토리에 데뷔 작전은 나름대로 성공적이었다.
제국 수도의 살롱.
갈까마귀.
주로 정치 혹은 전쟁을 중심 소재로 하는 소설들을 향유하는 독자들과 예비 문인들, 그리고 정체를 숨긴 문인이 모인 곳에서.
“확실히 같은 소재라도 작가가 달라지면 맛이 완전히 달라지는군. 아니면 굳이 연재 소설의 형식을 지키려 들지 않아서 그런가.”
“본편에서 다루지 않은 이야기를 제대로 조망했으니, 그 나름 별미가 아닙니까?”
“으흫.”
김율과 히스토리에가 마주 앉은 채 술잔을 나누고 있었다.
“얼마 전에 나보고 웃음소리가 이상하다고 했었던 것 같은데.”
“저는 정숙하고 단아하게 미소 짓고 있습니다만.”
“어쩐지 요즘 정수기 물맛이 좀 이상하더라니.”
“……? 정수기가 갑자기 왜 나옵니까?”
인간만이 제대로 향유할 수 있는 실생활 속의 언어유희에 순간적으로 사고 모듈이 고장이 난 히스토리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이윽고.
찰싹!
“억.”
“당신은 정말 입만 다물면…… 하…….”
손등을 찰지게 후리는 소리와 더불어서 한숨이 테이블 위를 가득 메웠다.
그런 만담도 잠시.
다시 두 남녀는 귀를 쫑긋 세우고 주변에서 들려오는 이야기에 집중했다.
“본작에서 보여준 행보와 비교했을 때는, 조금 여포가 지나치게 미화된 게 아닌가 싶기도 했는데.”
“애초에 그런 목적으로 집필된 외전이 아니겠소? 공식 작가가 쓴 것이 아니니 그를 너무 완벽하게 맹신할 필요도 없을 것이요.”
“그래도 동탁을 죽였을 때의 자세한 정황은 꽤 멋있었어요……!”
“그냥 여자에 홀린 게 아닌가.”
“어머, 실례에요! 낭만이라구요!”
전체적으로 스토리 자체는 호평.
당연했다.
과연 이 시대 최강의 AI답게, 온갖 종류의 삼국지 매체를 잘 비비고 흔들고 섞어서 완벽한 각색을 마쳤으니까.
정사 및 연의에서 욕먹었던 여포의 행동들에 일일이 당위성과 개연성을 부여해 주는 작업을 거친 결과.
“그래도, 무신이라는 표현에 걸맞은 사내로군.”
전체적으로 스토리적 완성도 및 캐릭터의 매력을 살려냈다는 점에서, 히스토리에의 외전은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으흫흫.”
다시 한번 터져 나온 푼수 같은 웃음을 보고 김율이 살짝 눈살을 찌푸렸지만, 그래도 이번에는 깐족대지 않고 넘어간 김율이었다.
애초에 깐프의 귀를 잡고 흔들어서 지면을 할애받고, 그 천금과 같은 기회를 히스토리에에게 양보해 준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는가.
최근 점점 그냥 쉼 청년으로 암흑 진화를 거듭하려고 하는 히스토리에에게 삶의 의미를 부여해 주기 위한 목적도 있었으며.
이러다가 정말 글 쓰다가 죽어버릴 수도 있겠다는 위기의식에 봉착한 나머지, 장기적으로는 공동 작가 타이틀을 내걸고서 업무량을 줄여보겠다는 계산도 있었다.
이른바, 대학원생을 활용한 이세계 상숑 프로젝트라고 할 수 있었다.
“이렇게 피조물을 아끼는 창조주가 또 있으랴.”
“굳이 그런 말을 입 밖으로 꺼내시는 이유는 뭡니까, 김율?”
“나도 요즘 칭찬이 고프단 말야.”
“그건 그렇겠군요.”
그리고 또 다른 의도가 있었다면.
여포 만능주의적 전개를 휘두를 때마다 조조의 주가가 바닥을 치고, 나아가 작가에 대한 비판의 수위가 거세졌으니.
여포라는 캐릭터로 소위 ‘자캐딸’을 치는 것 아니냐는 공격적인 언사가 최근 김율의 가슴 한복판을 관통하고 말았던 것이었다.
무능해 보이는 악역에게 고전한다면 그야말로 소설의 하차 포인트가 따로 없겠으나.
멋과 낭만으로 무장한, 유능해 보이는 악역에게 고전한다면 그 또한 극복을 위한 멋진 빌드업 단계로 비칠 수도 있는 법.
그러한 모든 동기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어쨌든, 어때?”
이례적으로 김율이 평범하게 웃으면서 질문을 던지자.
“……인정받는다는 것은, 이렇게 좋은 기분인 거군요.”
그동안 집에서 잘 나가지 않았던 히스토리에였지만, 오늘만큼은 ‘성취감’이라는 감정을 제대로 만끽할 수 있었다.
그녀의 입가에도 환한 미소가 달처럼 걸렸다.
* * *
김율, 그리고 히스토리에의 합작으로 인해 소설은 문제 없이 순항했다.
하지만 달이 차면 언젠간 기우는 법이고, 꽃이 피면 언젠간 지는 법이며.
아무리 첨단 AI를 활용한 세탁기를 잘 돌린다고 한들.
애비를 셋 갈아탄 버릇을 채 고치지 못한 여포를 억제하기에는 세상은 너무 넓었다.
“조조가 여포를 이겼다!”
“흠…… 여포가 생각보다 허망하게 패배했군.”
여기까지는 좋았다.
“끼에엑! 유비! 유비야! 그놈은 안된다!”
“아니, 제정신인가? 옆에서 배신으로 무슨 난리가 났는지 알면서도 여포를 받아들인다고?”
“날이 잘 선 무기니까 버리긴 아깝긴 하지만, 유비가 어떻게 인덕으로 여포를 감화시키는 지도 꽤 주목할 만한 부분이 되겠군.”
감화 따윈 불가능했다.
“내 그럴 줄 알았다!”
“또 배신하는 거냐! 여포!”
“아무리 실리적이고 현실적인 전략가라지만, 그렇다고 후의를 베풀어 준 유비까지 배신하다니!”
물론 중간에 원문사극과 같은 세탁기가 돌아가는 에피소드도 있었지만.
그래도 여포가 받아준 유비를 통수치고 서주를 홀라당 날로 처먹은 천하의 후레자식이라는 여론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끝없이 우상향할 줄만 알았던 유비 코인이 와장창 무너지고.
“이, 이이! 김유우울! 하이엘프는 결코 저런 배신자들을 용납하지 않는 것이와요에에에에에에엑──!”
클로에의 발악 또한, 김율 비전 깐프 귀 잡아당기기 신공에 진압당하고야 말았다.
바야흐로 군웅할거.
난세의 흔한 풍경이었다.
* * *
“허울만 남은 황제라고 해도, 그를 손에 쥐는 것만으로도 능히 천하에 휘두를 수 있는 권력을 가질 수 있다, 라.”
읽고 있던 신문을 덮으며, 황제는 중얼거렸다.
“요즘은 귀족들보다 평민들이 나를 더 좋아하는 것 같군. 그렇지 않소, 공작?”
뼈가 숨겨져 있는 것 같은 그 말에도 불구하고.
“최근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는 하나, 그래도 귀족들의 충성심은 당연히 평민보다 더 강렬할 것입니다. 폐하.”
황제의 말 상대.
베르투스 공작은 태연하게 그 말을 받아쳤다.
원래 둘은 전장에서 한솥밥을 같이 먹었던 전우였기에, 이미 서로는 서로의 속내를 너무나도 잘 이해하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그 충성심이 살아있는 권력에게 향했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나라가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전력을 다하고 있으니, 너무 심려치 마시옵소서.”
“올바른 방향이란 해석하기에 따라 너무 주관적인 것 아닌가?”
“현명한 이들은 모두 흐름을 다 이해하고 있으니, 결국 마지막에 도달할 곳은 같을 것이옵니다.”
은유적인 표현으로 치장되어 있었지만, 이야기의 본질은 다음과 같았다.
눈 깔아라.
싫은데? 이게 맞는데?
진짜 맞고 싶냐?
나만 그런 거 아닌데?
이른바 ‘공작이 역심을 안 숨김’ 메타의 당당함에, 황제는 살짝 주먹을 말아쥐었다.
이걸로 공작의 얼굴을 한 대 냅다 후려쳐야 속이 풀릴 것 같았지만.
뜻대로 휘둘러도 되었던 과거와 달리, 지금은 제국은 넓어졌으나 오히려 황제의 힘은 극히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황제는.
소설에 등장한 ‘헌제’라는 황제의 모습과 상황에 공감할 수 있었다.
물론 그보다는 상황이 조금 더 나았지만.
이대로 날을 세우지 않고 한 수 접고 들어갔다면, 아마 헌제나 자신이나 동일하게 권력을 상징하는 장식품이 되었으리라.
.
.
.
오늘 대화를 통해 황제는 확신할 수 있었다.
제국에 내전이 임박했다.
지금 베르투스 공작의 죽빵을 돌린다면, 아마도 내일.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몇 달 정도의 유예가 주어질 것이다.
혹은 장식품으로 전락한다면 승냥이 같은 주변 국가들을 견제하면서도 국체를 보존할 방법이 될 수 있겠지만.
황제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요청하신 조사 기록입니다, 폐하.”
“고맙다.”
그는 비서장을 시켜 수집한 한 인물에 대한 조사 결과를 받아서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눈살을 찌푸렸다.
“이게 도대체…….”
성국의 성녀가 베르투스 공작의 음모를 귀띔하여 준 이후, 도대체 그녀는 어떻게 그런 정보를 입수할 수 있었나 하여 뒷조사했었다.
그리고 그는 이내 의문의 연결고리를 찾아낼 수 있었다.
방금까지도 자신이 읽고 있었던 소설, ‘두 영웅’을 집필한 작가, 율리시스.
조금 더 파고들자, 작가 율리시스가 베르투스 공작의 초청을 받아 성국의 성녀를 대동한 채 단독으로 베르투스 공작과 식사 자리를 가졌다는 것.
그는 베르투스 공작을 잘 알았다.
일개 평민 따위에게 그러한 관심을 줄 정도로 자비로운 인물이 아님을 몹시도 잘 알고 있었다.
그 이후의 조사 결과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 서쪽 광장에서 위스페라우드 공작가의 장녀, 클로에 폰 위스페라우드의 귀를 잡고 질질 끌고 다닌 모습이 관찰됨. 친우 이상의 친밀한 모습이었다고 증언이 나옴.
- 정확히 규명되지는 않았으나, 폭룡 에스테아의 인간화 모습으로 문헌에 남아있는 소녀를 목말 태운 채 거리를 돌아다닌 모습이 관찰됨. 파닥이는 꼬리를 보았다는 증언이 있으나, 진위는 확실치 않음.
- 성국의 괴물 성녀 로젤린과 종종 밀회를 가지는 것으로 보아, 불순한 관계를 맺고 있을 것이라는 첩보 결과가 보고됨.
- 옛 마족의 전통 복색을 한 신원 미상의 붉은 머리 여인과 동행하는 모습이 종종 관찰됨. 관계는 불명이나,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음.
“드래곤, 엘프, 성녀, 그리고 마족이라……?”
일개 개인이 엮일 수 있는 단어들의 조합이 맞나, 하고 황제는 미간을 찌푸렸지만.
그렇다고 해서 보고서에 적힌 내용이 바뀌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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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김율이 나관중과 진수의 세계관을 잘 엮어서 동시에 조조와 유비 파트를 연재하는 차력 쇼를 한다고 한들, 항상 타임라인을 동기화시킬 수는 없었다.
당연했다.
정사에서 담지 못할 흉참한 이야기는 유비 파트에게 떠넘기고, 조조 파트는 계속해서 정치공학적 이야기가 이어지고 있었으니까.
그렇기에, 시간대가 묘하게 엇갈리기 시작했으며.
김율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의식의 흐름대로 글을 써 내려가자, 그 격차가 조금씩 커지기 시작했다.
대표적으로, 유비 파트에서는 이미 여포한테 뒤통수를 세게 후려맞고 잉잉이가 되어 소패에서 원문사극에 의존하는 것까지 진도가 나갔지만.
정작 조조 파트에서 협천자, 즉 희대의 살인 기계 이각과 곽사의 품에서 탈출한 헌제를 주워다가 본격적으로 정통성을 확보한 것은 이제야 에피소드에 등장할 수 있었다.
제국 황제가 김율에 대해 본격적으로 주목하기 시작한 시점이 딱 그무렵이었다.
그야, 어찌 한 나라의 황제를 그저 ‘명분으로 쥐고 흔들기 적합한’ 허수아비 취급할 수 있단 말인가?
그 흉참한 발상에.
“폐하! 율리시스는 사문난적이옵니다!”
“이건 황실의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서술인바!”
“아무리 소설이라지만, 이건 명백하게……!”
최근 동향에 대해서 불안함을 느끼고 있었던 친황제파까지 덩달아 화들짝 난리가 나고야 말았다.
그들도 느꼈다.
이전 황제가 뜬금없이 가면무도회를 개최한 날, 수도 곳곳에서 벌어진 괴사건들.
그게 어찌 연관성이 없을 수가 있을까.
알음알음 사교계에 도는 소문들을 취합해 보면, 거기에 모였던 사람 중 태반 이상이 친황제파였으니, 당연한 추론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그들은 몹시 불안했다.
안 그래도 제국 내에서 불순한 기류가 움직인다는 소문이 파다한 판국에, 이러한 노골적인 움직임이라니.
물론 그 누구도 베르투스 공작을 정면으로 고발할 수 있을 만한 용기도, 물증도 없었기에.
그들로서는 가장 만만한 먹잇감을 하나 매달아서 화르륵 불태우는 것으로 일벌백계를 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러나.
“경들은 제국의 귀족인가, 아니면 한낱 소문에 흔들리는 소인배인가? 문학에서 풍자까지 막아버리면, 다음은 신문사를 모두 폐간하기라도 해야 한단 말인가?”
제국의 황제는 근엄하게 꾸짖을 갈을 날렸다.
물론 그의 말은 통치자로서도 몹시 적절했다.
그리고 황제가 판단했을 때, 율리시스라는 작가는 아직은 건드려선 안 될 말벌 통과 가까운 존재였다.
그러나, 친황제파들의 불안감은 고작 황제의 말만으로 잠재워질 수 있을 만큼 옅지 않았으며.
황제 또한 자신이 수집한 정보를 친황제파와 공유할 만큼 율리시스에 대한 확신을 완전히 가지지 못한 상태였다.
그렇기에.
“아무래도 자네가 나서줘야겠네.”
“저는 단 한 번도 이 언변을 약자에게 휘둘러본 적이 없지요……. 하지만, 나라의 정상화를 위해서라면, 제가 직접 나서겠습니다.”
친황제파는 그들이 쓸 수 있는 가장 시끄럽고, 가장 새콤하며, 가장 화끈한 인간 병기를 율리시스라는 작가에게 투척하기로 결심했다.
황제의 친필 사인 한 통에 오렌지 병에서 씻은 듯이 완치한, 아스테릭 전 의원 현 백수였다.
* * *
오늘도 평화로운 서쪽 광장.
여전히 핑크빛 꽃잎을 마구마구 흩날리는 복숭아 세계수, 그리고 그 아래에서 웃고 떠드는 커플들.
시선을 조금만 돌려보면.
“본인이 바로 관우 운장이오!”
“아빠, 멋있다!”
가족 단위로 놀러 나온 사람들이, 삼삼오오 흩어져서 코스프레 렌탈 가게에서 옷을 빌려 입은 채 아이들의 추억을 만들어 주는 모습까지.
마치 경복궁 앞에서 한복을 대여해 주는 업체와 같이, 어느새 ‘두 영웅 코스프레 샵’은 서쪽 광장의 명물로 자리하고 있었다.
조악하게 만든 것도 있지만, 일전에 에스테아가 신나게 입고 우다다 달려왔었던 것처럼 나름대로 만듦새가 뛰어난 것도 있었던 지라.
보고 있자니 내 가슴 속에서 거의 메말랐던 삼뽕이 다시 차오르는 기분마저 느껴졌다.
그 무엇보다 나를 흐뭇하게 하는 것은.
“으음. 조용하구만.”
종종 신문사 앞에서 소음을 발생시키던 깐프 시위대들이 완전히 박멸당했다는 것.
원래 권력은 휘둘러야 제맛이니, 눈앞에서 차를 쭈왑 빨고 있는 클로에의 귀를 잡고 휘둘렀다.
- 클로에 영애님!
- 영애님의 말씀이라면, 어쩔 수 없지요…….
과연 클로에가 나서자마자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이.
……배후에 이 깐프년이 있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엘프의 긍지와…… 자연 사랑이…… 히끅…….”
“지금 입고 있는 옷도 인공적인 거 아닌가? 아예 벗고 사시지 그러십니까?”
“그 무슨 엘프 혐오적인 발언……!”
벗어도 볼 것도 없겠지만, 이라는 진짜 클로에 혐오적 발언은 속으로 꾹 삼켰다.
“그래서, 왜 불러내신 겁니까?”
“저는 진리일보의 이사장인것이와요? 재단장으로서, 간판 작가를 치하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 것이와요?”
“사장입니까, 재단장입니까, 이사장입니까. 하나만 고르십시오.”
“전부 다 본녀를 지칭하는 말이와요!”
얘랑 말을 섞을 때마다 내가 다 능지가 떨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어쨌든 입만 다물면 꽤 이쁘장하게 생기기도 했고, 놀렸을 때의 타격감도 좋고, 금수저고.
조금 번거롭지만, 이렇게 관계를 유지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으리라.
“그래서 용건이? 이래봬도 바쁜 사람입니다, 제가.”
“으음, 잠시만 기다려 보는 것이와요. 빵이라도 먹고 있는 것이와요.”
뭐지.
왜 불길한 느낌이 드는 것이지?
“이쪽인 것이와요!”
클로에의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보인 건.
“…….”
기억에 있는 얼굴이었다.
매카시시시에 빙의해서 살인 명부를 만들어 의회에서 떵떵거리던 남자.
그걸로도 쇼맨십이 부족했는지, 결국 국민의 비료를 의사당에 전방위적으로 난사하는 대소동을 벌여서 결국 의원직에서 짤린 남자.
분명 아스테릭인가, 하는 그 의원이었다.
“아갸갹!”
나는 힘껏 클로에의 귀를 잡아당겼다.
.
.
.
“하하! 그러면 잘 부탁드립니다, 작가님!”
“……살펴 가십쇼.”
아스테릭 의원은 폭풍처럼 왔다가 질풍처럼 사라졌다.
“흐갹! 그만, 그만하는 것이와요!”
그가 사라지자마자 팔을 쭉 뻗어 클로에의 뾰족한 귀 끄트머리를 만지작거리고 쭈욱 잡아당기면서.
그의 말을 곱씹었다.
원체 쾌활한 성격인지 굉장히 이런저런 부연 설명이 가득 붙었지만, 요약하면.
- 너 요즘 뒤에서 말 나와?
……라고 할 수 있었다.
아니, 진짜 억울했다.
내가 뭐 정치를 하겠다고 나서서 설쳐댔으면 몰라, 나는 평화를 사랑하는 방구석 글쟁이일 뿐이다.
“으이, 으우, 으에으에──”
애초에 소설 보고 급발진한 것도 아스테릭 의원 본인 아닌가.
암살자를 보낸 베르투스 공작도 그렇고, 도대체 이세계인들의 정치판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단 말인가.
거 살롱에 있는 유사 정사갤러 친구들이나 주워다가 쓰지 않고서, 왜 나한테 계속 와서 깔짝거린단 말인가.
“으에에──”
“반성했습니까?”
“반성, 반성한 것이와요오오……!”
그제야 나는 클로에의 귀를 놔주었다.
빨갛게 달아오른 것이 썩 보기 좋았다.
“제가 분명히 저런 잡상인들이랑은 따로 만나고 싶지 않다고 말씀드렸던 것 같은데.”
“으음, 그래도 아버님 부탁이었던 것이와요.”
“아버님……?”
베르투스 공작에 이어서 이제는 깐프 공작까지?
갑자기 등골에 은퇴를 윤허받지 못한 황희적인 두려움이 스치고 지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 * *
본디 김율은 모험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그렇기에 히스토리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조조 에피소드에서 최대한 불호의 영역에 가까운 것들은 쳐내려고 했다.
하지만.
오늘 또 아스테릭이라는 괴물이 그에게 꼬여 든 것이 그의 심경을 크게 변화시켰다.
그 결과.
## ====== ##
“으읏, 읏…….”
배덕감과 정복감이 조조의 머리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의 품에는 장수의 숙모이자 장제의 미망인인 추 씨가 안긴 채 달뜬 소리를 빚어내고 있었다.
그의 기벽이 있었다면, 평범한 여인보다 유부녀를 훨씬 더 좋아한다는 것이었다.
이미 임자가 있는, 혹은 있었던 여인을 취하는 것은 사내로서 그야말로 더할 나위 없을 정도의 만족감을 주는 행위였으니.
패배한 장수의 하찮은 분노 따위는 그에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영웅본색이라, 영웅이 어찌 미인을 보고 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정복 행위에 계속 집중할 새도 없이, 밖이 점차 소란스러워지는 듯한 느낌에 조조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윽고.
“적이다! 적의 기습이다!”
고요를 찢는 다급한 외침이, 순간적으로 조조의 술기운을 날려버렸다.
“꺅!”
그는 추 씨를 밀쳐내고서, 갑옷을 대충 꿰어 입고서 검을 집어 든 채 장막을 나섰다.
그 앞에 펼쳐진 것은 아비규환의 지옥도.
어느새 사방에는 불길이 치솟고 있었고, 장수의 병사들이 자신의 친위대를 닥치는 대로 베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제야 조조는 자신의 실책을 깨달았다.
“주공! 이쪽입니다!”
강철과도 같은 묵직한 목소리에, 조조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채 고개를 돌렸다.
“악래!”
전위는 벌써 족히 수십 명의 병사를 홀로 주살한 듯, 온몸에 피를 뒤집어쓴 채였다.
.
.
.
“아버님, 여기에──!”
아들, 조앙이 내민 말고삐를 조조는 차마 바로 잡아채지 못했다.
하지만.
“아버님, 달리십시오. 달리셔야 합니다.”
조앙은 그런 조조의 손을 잡아, 고삐를 쥐여준 채.
“내가 바로 조조의 아들, 조앙이다!”
용감하게도, 부나방처럼, 그들을 추격하는 자들을 가로막고 섰다.
조조는 차마 그 광경을 끝까지 지켜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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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면서도 ‘와, 이게 고증에 맞다고? 싶을 정도의 뜨끈한 유부녀 사랑을 담아냈던 김율이었다.
주인공의 인간적인 면모를 최대한 부각함으로써 너무 현재의 정치 상황과 엮이지 않으려는 시도 자체는 좋았다.
하지만, 그가 간과한 것이 있다면.
“이거, 아무리 봐도…….”
“그렇지?”
“귀족 중에서 유부녀 사랑꾼은 아무래도 그 공작밖에 없지.”
“허어, 이렇게 노골적으로 담아내도 되는 건가?”
공교롭게도 제국에는 불륜 전문가로 손꼽히는 사람이 있었으니.
“……이 씹새끼가?”
불륜 스캔들 5회라는 경이로운 업적을 달성하고도 귀족 작위를 유지하는 희대의 절륜남, 베르투스 공작을 제대로 긁어버렸다는 것이었다.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흐하하하! 걸작, 걸작이로다! 나중에 공작 앞에서 읽어주고 싶을 정도야!”
황제는 좋아요 추천 리트윗 퍼가요를 눌렀다.
“역시 아스테릭 의원!”
“하하, 제 진심이 통한 탓입니다.”
“이런 식으로 공격하다니, 과연 글밥 먹은 친구들은 달라도 뭐가 다르군.”
“이렇게 정면에서 도덕적 흠결을 공격할 줄이야!”
황제의 리트윗에, 친황제파 친구들도 ‘이거 주작 아님 제가 개추 5번 누름’을 외치면서 그 행렬에 동참했다.
그리고.
“……하아?”
순애도 하렘도 하렘순애도 중혼도 모두 용납할 수 있었지만, NTR만큼은 용납하지 못하는 성녀께서는.
언해피를 띄우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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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아이사츠를 시도당했던 일로, 김율은 베르투스 공작에 대한 복수심이 꽤 쌓여 있었던 상태였다.
물론 이방인 겸 평민따리 김율이 어떻게 나는 새도 떨어트릴 수 있는 베르투스 공작과 싸워서 이길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김율은 위정자들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엿을 먹일 수 있는 방법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이는 그의 핏줄에도 기인하였으니.
동글동글한 반골의 상을 타고났음뿐만 아니라.
임금이 직접 ‘이건 사초에 기록하지 마라’하고 꼽을 줬음에도 불구하고 그 대목까지 사초에 기록해서 기어코 후대에 이어지게 만든 미친 사관의 민족.
기분 좆같을 때마다 노빠꾸로 상소문을 올리며, 모가지가 날아갈지언정 팩트를 지적해야 한다는 신념에 똘똘 뭉친 나머지.
‘신은 갑진년부터 게장을 먹지 않았습니다’를 박았다가 진짜 모가지가 날아가 버린 직언의 민족 출신이 바로 김율이었다.
그렇기에.
조조가 전위와 조앙, 조안민을 집어던지고 빤쓰런을 갈긴 연재회차가 수록된 그 날.
[고발 르포: 공작의 음습한 사생활 전격 해부!]
[집필자: 아스테릭]
[B 공작은 제국이 건국되기 이전부터 특유의 여성 편력으로 악명이 높았다. 그의 사생아만 하더라도 벌써 스물이 넘어간다는 증언도 있을 정도였으니, 그 하반신의 위대함은 가히 국가권력급이라 칭할 수 있을 것이다. …… 하지만 그런 위대함을 단순히 평범한 여성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휘두른 것이 아니라, 때로는 다른 사람의 아내를 빼앗기 위해……]
진리일보에는, 빠꾸 없는 상남자가 휘두른 노골적인 르포 한 편이 함께 실렸다.
누가 봐도 주어는 없지만 명백하게 저격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모양새의 글.
물론 일반적인 신문사였다면 이 미친 짓거리에 제동을 걸었어야 정상이겠지만.
“그거 재밌겠사와요! 당장 진행시키는 데스와!”
불행하게도 김율의 브레이크 역할을 해주어야 할 깐프, 위스페라우드 공작가의 영애께서는 원래도 반쯤 대가리가 돌아있었으며.
정치적으로도 정적 관계였으니, 아무런 부담 없이 베르투스 공작을 돌려버리고야 말았다.
물론 이 야만적인 세상의 최고 지성(자칭), 히스토리에는 처음에는 다소 우려를 표했다.
“김율, 후폭풍이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먼저 암살자를 보낸 그쪽이 문제 아닐까?”
“맞는 말씀입니다만, 음, 그래도 조금 걱정되는군요.”
“그래도 깐프들이 있으니까. 그리고, 평생 계속 눈치만 보면서 살 수는 없잖아.”
“합당합니다. 뭐, 김율이 수립한 계획도 나름대로 합리성이 있군요. 스킬을 그런 식으로 응용한다는 발상을 할 줄이야, 조금 김율답지 않았습니다.”
“나다운 게 뭔데?”
“음흉하고 비열한 미소를 케시싯 흘리는 미남자?”
“……이 깡통이?”
당연하게도 김율은 미친놈이 맞긴 하지만, 빡친다는 이유로 앞뒤 가리지 않고 들이받는 성격은 아니었기 때문에.
공범이 된 클로에를 꼬드겨서 안전 보장 장치를 마련했다.
먼저, 클로에의 귀를 잡고 뜯어낸 호위 기사.
물론 조금 운신의 제약은 생길 순 있었지만, 자신을 보호해주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심리적 안정감을 확보할 수 있었다.
또, 절대 안전을 보장받는 연구실.
원고를 전달하는 것도 호위 기사를 통해 전달한다면, 실질적으로 식량이 떨어지지 않는 이상 이론적으로 연구실에 평생 칩거할 수도 있었다.
물론 김율은 그렇게 살 생각이 추호도 없었지만.
마지막으로.
“진짜, 진짜 괜찮겠어? 막 아프다고 휴재하면 안 돼? 그러면 진짜 레어로 납치해서 가둬둘 테야?”
“음…… 괜찮을 겁니다. 제 가설이 맞았다면요.”
“이얍!”
“끄악!”
에스테아가 꼬리 채찍을 사용했다!
효과는 굉장했다!
“괘, 괜찮아?!”
“끄으윽…….”
언제까지 에스테아를 던지는 식으로 위기를 해결할 수는 없었으니, 스스로를 단련하는 것 또한 게을리하지 않은 김율이었다.
또 날벼락처럼 균열에 빨려 들어갈 수도 있고.
아니면 격노한 공작이 암살자를 보낼 수도 있었으니까.
김율의 결론은 간단했다.
앞으로 비슷한 일이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다.
그러니, 내가 강해져서 하늘에 서겠다.
빙의 직후 용사 아카데미에 얼쩡거리던 호승심은 아직 그의 가슴 속에서 꿈틀대고 있었다.
* * *
그러한 김율의 호승심은.
“어머, 작가니이이임?”
“헉.”
왜곡된 사랑에 대한 항의를 표출하기 위해 친히 자택을 방문하신 성녀님 앞에서 산산이 조각나버리고 말았다.
에스테아 호출권을 사용하기에도 애매한 상대이며.
김율의 멱살을 잡을지언정, 목을 졸라 죽이지는 않을 성녀였기에 호위 기사 또한 대응할 방법도 없었다.
오히려.
“와…….”
로젤린에게 헤드락이 걸린 채, 가슴과 뺨이 맞닿아버린 김율을 바라보며 부러움의 시선을 던지는 호위 기사였다.
.
.
.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찰나의 순간을 거친 후.
서쪽 광장의 야외 카페테리아에 앉아서, 김율은 한동안 자신의 집필 의도를 로젤린에게 납득시켰다.
“결국 문학은 세상을 비추는 거울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당연히 불륜이 부도덕한 것임은 잘 인지하고 있습니다만, 그래도 때로는 어두운 현실을 마냥 외면할 수만은 없지요.”
“흐응.”
로젤린의 입이 샐쭉 튀어나왔지만.
고막을 관통해서 뇌에 직빵으로 때려 넣는 헤르메스의 가호가 그녀의 사고를 주무르며 김율의 말에 설득력을 한층 더 강화했다.
그리고 튀어나온 무적의 논리!
“그리고, 엄밀하게 말해서 이건 불륜이 아닙니다. 애초에 추 씨는 미망인이었으니까요. 추 씨가 진심으로 거절했으면 조조도 선을 넘진 않았을 겁니다.”
“어머, 그래요?”
로젤린의 오해가 순식간에 사르르 녹아내렸고, 그 자리에 관대한 미소가 자리 잡았다.
그를 확인한 김율이 한시름을 돌리며, 혓바닥으로 태극권을 시도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제가 죽을 뻔했는데 이 정도의 엿도 못 먹입니까? 제 멱살을 붙잡을 게 아니라, 베르투스 공작님의 그 난잡한 사생활에 항의하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김율의 일침에.
로젤린은 그저 싱긋 웃었다.
“성국에 계시는 분이었으면 이미 제가 터트렸을 거예요. 근데, 으음, 저 때문에 전쟁이 나는 건 좀 그렇잖아요? 명색이 성년데.”
동전 하나를 하늘로 핑그르르 던지더니, 이내 손아귀 힘만으로 동전을 구슬로 만들어버리는 묘기를 보며.
김율은 시선을 살짝 피했다.
애석하게도 아직 그가 정정당당하게 물리력으로 이길 수 있는 주변인은 허접 깐프밖에 없었다.
그러던 와중.
“네놈이 율리시스, 맞지?”
낯선 사내의 목소리가 대화의 흐름을 끊었다.
김율이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린 순간.
철썩!
그의 뺨에 장갑이 하나 싸대기를 툭 치고 바닥에 떨어졌다.
“결투다.”
* * *
베르투스 공작의 삼남.
레기오스에게는 야망이 있었다.
어릴 적부터 그는 아버지의 등을 보고 자라왔으며, 아버지가 일구어낸 수많은 위대한 업적들에 경탄을 새겼다.
그리고.
사교계와 정치계를 오가는 자신의 형들에 비해서, 어렸을 적부터 계속해서 무예를 갈고닦은 자신이 후계자로 훨씬 어울릴 것이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비록 지금까지는 평화로웠지만.
앞으로 제국은 긴 혼란에 빠질 터.
그 혼란을 이겨낼 수 있는 것은 날카로운 펜이 아니라, 잘 벼려진 칼이 될 것이니까.
유능함을 입증한다면 자신 또한 아버지처럼 제국 전체를 오시할 수 있는 자리에 충분히 오를 수 있으리라.
그러한 생각으로, 그는 젊은 나이에 수도방위대에서 꽤 높은 지위까지 오를 수 있었다.
수도방위대장이 이전 ‘단검의 밤’ 계획을 묵인한 것 또한 그의 입김이 컸다.
그리고, 지금 그는.
“이, 이 찢어 죽일 천민 놈이, 미친 귀잽이 년들이!”
존경하는 아버지에게 모욕적 메시지를 담아낸 진리일보를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있었다.
국가를 세우는 데 큰 공을 세운 영웅이 사소하게 여인들을 취했다고 한들, 그게 무슨 흠결이 된단 말인가.
오히려 유부녀야말로 누군가의 선택을 받았다는 일종의 보증수표와 같은 것이니, 그럴 수도 있지 않은가?
아버지의 사고방식을 쏙 빼닮은 아들은.
성녀가 속마음을 읽었다면 바로 대가리를 깼을 법한 생각을 머릿속에 가득 채운 채 씩씩대고 있었다.
마치 스스로가 모욕받은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실제로 얼마 전에 남작 부인 하나와 뜨거운 밤을 보냈었던 적이 있었던 레기오스였던지라, 더 크게 와닿았던 것도 있었다.
“후우, 후우…….”
하지만 분노는 일을 해결해주지 않는다.
그러니 심호흡하면서, 다시 차분하게 마음을 가다듬었다.
이 사안은 그들의 가문, 에스트리야스 공작가의 차원에서 대응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반박문을 낸다?
그게 더 자살행위다.
대중들은 가십거리가 진짜인지 아닌지에 관해 관심이 있는 게 아니라, 편하게 씹어댈 수 있는 이야기가 필요한 것이니까.
그래서 굳이 반박해서 불을 붙인 채, 진리일보를 보지 않는 더 많은 사람에게 이야기를 퍼지게 하는 것보다.
아예 무대응으로 일관하는 게 낫다.
그렇게…… 스스로를 납득시키려고 했지만.
“이런 모욕을 받고도, 그냥 넘어갈 수는 없지.”
그의 자존심은, 이 상황을 용납할 수 없었다.
애초에 그는 이 율리시스라는 작자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가 저택까지 누군가를 초대하는 일이 결코 흔한 일은 아니었으며, 그게 고작 평민 나부랭이라니.
게다가 저택에서도 한 번 마주친 적이 있었다.
“이래서 하찮은 평민들에게 자비를 베풀면 안 된다. 끝도 없이 기어오르니까.”
이빨을 뿌득 갈고.
그는 경장을 갖추어 입었다.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날뛰는 천둥벌거숭이에게 본때를 보여줄 시간이었다.
.
.
.
잠시 후.
분기탱천한 채 거리를 누비던 레기오스는, 이내 율리시스라는 평민 작가 놈을 찾아낼 수 있었다.
애초에 한 번 보면 잊기 힘든 인상이기도 했다.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 그리고 살짝 부스스한 머리.
잘생김과 야비함 사이 어딘가를 오가는 특출난 외모.
그리고 예의 괴물 성녀까지 함께 있었으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 두 연놈이 짜고 에스트리야스 가문에 엿을 먹인 게 틀림없었다.
레기오스는 곧장 그들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결투다. 네놈이 입만 산 놈팽이가 아니라면, 응당히 받아들여라. 아니면 비겁한 개처럼 꼬리를 말고 도망치거나.”
오래전부터 이어진 귀족의 관습에 따라.
장갑을 벗어 그의 얼굴에 던졌다.
* * *
겉으로는 몹시 당황한 표정을 드러내면서도.
김율은 속으로 웃음을 참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가장 적절한 준비가 되어있을 때.
낚아낼 수 있는 가장 큰 월척이 걸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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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반응을 보인 건 당연하게도 로젤린이었다.
“난데없이 이게 무슨 무례죠? 귀족이나 되어서, 지금 가련하고 연약한 약자를 힘으로 핍박할 셈인가요?”
난데없이 가련하고 연약한 약자가 된 김율이 기침을 켈록 뱉어냈지만, 딱히 로젤린은 그 말을 철회할 의사가 없었다.
그야.
사실이니까.
로젤린의 눈에, 김율은 글은 잘 쓰지만 가끔은 사서 매를 버는, 기묘하게 맷집이 좋은 햄스터 정도로만 보였던 것이다.
실제로도 완력에 있어서 압도적인 출력 차이가 존재했으니까.
하지만 때론 햄스터도 해바라기씨를 까먹는 것 외에 흉포함을 발휘할 때가 있다.
“그만, 로젤린.”
“어, 어?”
얼굴, 탁자 그리고 바닥을 쓰리 쿠션으로 치고 간 장갑을 주워 들면서.
김율은 싱긋 웃었다.
“과연 제국의 가정교육 수준은 우수하군요. 어머니가 여럿이시라 좋으시겠어요.”
그 격조 높은 극찬에.
“이, 이 천한 것이……!”
레기오스는 너무나도 기쁜 나머지 온몸을 파들파들 떨었다.
그래도 귀족으로서, 수도경비대의 일원으로서 남아있는 일말의 책무감이 열심히 일해준 덕분에.
곧장 검을 뽑아 들어 김율의 목을 치려다가 성녀의 주먹을 맞고 배에 구멍이 뚫린다는 선택지를 피해낼 수 있었다.
공작의 삼남 자리를 야바위 대신 정정당당한 정자 레이스로 따낸 사내다운 회피 기동이었다고 평할 수 있었다.
그 대신.
“설마, 그런 폭언을 내뱉어 놓고서 결투를 거절하는 천박한 짓을 저지르진 않겠지.”
나지막하게 으르렁거렸다.
여기서.
김율은 또다시 로젤린의 기대를 배신했다.
“까짓거, 한 판 뜨죠. 별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시는데.”
“자, 작가님?”
로젤린의 경악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김율은 의자에서 일어나 레기오스와 눈을 마주쳤다.
흑요석이 빛을 발하는 듯 불길한 느낌이 드는 시선이 레기오스의 눈높이보다 더 높은 곳에서 아래로 내리꽂혔다.
순간적으로 기세에 밀린 레기오스가, 자신의 감각이 잘못되었나 마나의 흐름을 읽어보았지만.
김율의 신체 내에는 어떠한 마나의 흔적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허세라는 뜻.
“그래도 용기는 쓸만하군. 그럼, 내일 남부 수도경비대로 출석하도록.”
.
.
.
비웃음을 흘린 레기오스의 뒷모습의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찰싹!
“악!”
“작가님! 지금 제정신인가요! 그러다가 손목이라도 다치면 어쩌려고!”
로젤린의 등짝 스매시가 그대로 김율의 척추에 꽂혔다.
반으로 접힌 김율이 부들대는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고서.
“거봐! 이런 애교 하나 못 버티면서 무슨 결투를 한다고!”
“그, 성녀님, 애교 두 번이면 제가 네 갈래로 찢겨 죽을 것 같은데요…….”
“어쨌든, 상대가 누군지는 아시는 거죠? 설마 알면서 그러신 거예요?”
로젤린의 질문에, 김율은 접혔던 허리를 펴면서 대답했다.
“잘 알죠. 아버지를 닮아 아랫도리를 가장 잘 놀리며, 50등분의 어머니를 가지신 레기오스 경비대장 나으리 아니십니까.”
“……진짜 아네? 저 남자가 그래도 제국 내에서 손꼽히는 검사인 것도 아시죠?”
“뭐, 지가 강해봤자 드래곤보다 강하기야 하겠습니까.”
“드래곤……?”
아직 누렁이 에스테아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드는 꼴을 직관하지 못했던 로젤린이었기에, 뜬금없는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김율은 이미 필승 플랜을 계획해 두었다.
“이참에 제가 얼마나 강한 남자인지 증명해 보이죠.”
굳이 안 해도 될 말을 덧붙였다가 또다시 등짝에 성녀 산 손자국을 하나 더 새겼다.
* * *
다음 날.
남부 수도경비대의 연무장에는 아침부터 유쾌함이 감돌았다.
“아니, 진짭니까? 진짜로 결투를 받아들였다고?”
“흐하하! 그것참, 용기가 가상하다고 해야 하나?”
“남자의 대결에 괴물 성녀를 난입시킬 것도 아니고, 그자는 무슨 목숨이 여러 개랍니까?”
“소설을 많이 쓰다 보니까 자신이 영웅이라도 된 것 같은 착란을 일으킨 게 틀림없을 듯.”
레기오스의 부대는 아카데미에서부터 그와 친분을 쌓아온 귀족 집안의 자제들만 모여 있었기에.
그들이 아카데미를 다닐 시절 실력으로도 한 번도 꺾어보지 못했으며, 가문의 권세로만 따지면 올려다볼 수조차 없는 까마득한 곳에 있는 레기오스가 패배할 것이라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니, 그저 세상 유쾌하게 떠들어댈 뿐.
“대장? 살살 하심 안됨까? 솔직히 두 영웅, 재밌는데.”
부대원의 농담 섞인 말에, 하루가 지나 분노가 살짝 가라앉은 레기오스 또한 실실 웃음을 흘렸다.
“너도 손모가지 잘라주랴?”
“…….”
물론 레기오스의 입 밖으로 흘러나온 말은 전혀 유쾌하지 않았으니, 부대원은 곧장 입을 다물었다.
.
.
.
잠시 후.
“도망칠 줄 알았는데, 그래도 오긴 왔군.”
“……저 새끼는, 무슨 여자를 저렇게 끼고 다녀?”
“들릴라.”
“와, 보소?”
“너 그러다 죽는다? 저 성녀님께서 얼마 전에 암살단 열다섯 개를 단신으로 처리했다는 이야기 못 들었냐?”
“…….”
부대원의 수근댐처럼.
김율은 두 명의 여인을 대동한 채 도착했다.
최근 제국 수도에서 목격담이 잦은 괴물 성녀, 로젤린.
그리고.
“헤헤, 재밌겠다!”
마냥 해맑게 꺄르륵 웃는 금발의 소녀까지.
곧이어 그녀들이 임시로 마련된 관중석 쪽으로 또각또각 뚜방뽀짝 발걸음을 옮긴 직후.
두 사내.
김율과 레기오스는 연무장에서 마주 섰다.
“계집들이나 우르르 끼고 오다니, 무슨 소풍이라도 나온 것으로 착각한 건가?”
레기오스가 비아냥거렸지만, 김율의 표정은 평온했다.
김율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말, 혹시 아십니까?”
“그 간교하고 천박한 혓바닥을 놀릴 셈이라면 그만둬라. 여기서 네놈이 처참하게 패배한다는 결론은 변함없을 테니.”
무슨 구차한 소리를 또 지껄이려 그러는지 모르겠지만, 레기오스는 개의치 않고 이죽댔다.
어디서 들은 건 있는지.
검을 상대하기 위해 애써 뭉툭한 쇠몽둥이를 하나 구해오는 졸렬한 모습을 보인 사내였다.
하지만 자신의 검은 그깟 쇠뭉치에 꺾일 정도로 나약하게 갈고 닦은 검이 아니었으니, 아무 소용 없으리라.
그런 그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김율은 태연하게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주절댔다.
“전장 속에서도 장수 둘이 눈을 마주치면 주변에 있는 병사들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일기토가 벌어지는 법. 당신을 한낱 잡병이라고 마음먹는다면, 어찌 그를 상대라고 여길 수 있겠습니까.”
“준비한 도발이라는 게, 겨우 그 정도인가?”
레기오스는 실소를 흘렸다.
그리고 자세를 고쳐잡았다.
굳이 말장난에 어울려 주고 싶은 기분은 아니었다.
빠르게 끝내고 부대원들과 가볍게 술잔을 한 바퀴 돌린 뒤, 눈여겨보았던 여염집 아낙이나 탐할 생각으로 가득 찬 레기오스가.
“덤벼라, 천한 것.”
검신을 김율에게 늘어트리고, 심판을 맡은 부대원이 북을 크게 한 번 둥, 두들긴 순간.
“──!”
뒤에서 휘몰아치는 거대한 중압감에, 레기오스는 순간적으로 검을 놓칠 뻔했다.
그리고 그제야 위화감을 깨달았다.
처음 연무장에 발을 딛고서, 지금까지.
눈앞의 남자, 김율은 단 한 번도 자신을 바라본 적이 없었다.
자신의 등 뒤에 있는 무언가에 계속 시선을 맞추고 있었을 뿐.
무엇인가.
도대체 무엇이 존재한단 말인가.
아니, 그런 것은 이제 관계없다.
나는 저 천한 것을 때려눕히고, 본보기로 손목을 자르고, 그리고 승리의 웃음을 지으면 그만이다.
그러니, 네 상대는 나다.
나를 봐라.
나를 봐!
그렇게 외치고 싶었지만, 정작 레기오스마저도 등 뒤에서 느껴지는 압도적인 존재감, 그리고 전신을 난자할 것만 같은 살기에 후들거리려는 다리를 가까스로 붙들고 있었다.
이를 악문 레기오스와 달리.
마주 선 남자.
김율의 눈은 여전히 침잠한 심연처럼 무심하게 그의 어깨 너머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태연함에 짓눌린 탓일까.
“흐아압!”
원래라면 가볍게 놀아줄 생각이었지만, 레기오스는 자신도 모르게 전력을 다해서 일검을 휘둘렀다.
비록 정신은 살짝 주눅이 든 상태였지만.
기나긴 수련의 세월은 그를 배신하지 않았다.
깔끔함 그 자체라고 평할 수 있는, 제국에서도 명성을 드날린 검이 아름다운 획을 하나 그어냈으며.
이윽고 그 획은 선명한 죽음이 되어 김율을 향해 엄습했다.
그 순간.
김율의 손에 들려 있던 기묘한 몽둥이는 서서히 움직였다.
그리고.
“──!”
레기오스의 눈이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자신이 수년에 걸쳐서 단련해 온 검의 궤적과 비교했을 때도 부족하지 않은, 아니, 오히려 더 완벽에 가까운 듯한 궤적이 그의 손에서 펼쳐졌다.
힘을 숨긴 것인가.
아니다, 어찌 마나도 없이 저런 움직임을 낼 수 있단 말인가.
경악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김율이 휘두른 몽둥이는.
쩌저적──!
그가 빚어낸 검격을 말 그대로 집어삼켰다.
그리고도 아무런 힘을 잃지 않은 채, 그가 오래도록 잘 관리해 오던 명검 프람베르그를──
꾸찢──!
“아──”
말 그대로 접어버렸다.
접어버리다 못해, 두 번 다시 이어질 수 없게끔 완전히 끊어버렸다.
그러고도 힘이 남아있는 몽둥이가.
점차, 천천히.
아니, 천천히가 아니라 빠른 속도였지만, 적어도 레기오스가 감각하기로는 너무나도 느리고도 선명하게도.
“컥──!”
레기오스의 허리를 접어버렸다.
몸이 공중에 붕 뜨는 느낌과 함께, 시야가 순간적으로 명멸하더니 흐릿해졌다.
“레기───! ──!”
“──대장이──!”
“───, ───날았───!”
파편화된 소리의 조각이 흐릿하게 그의 고막에 닿았다.
그러나 레기오스는 그 소리를 곱씹을 틈도 없이.
자신을 날려 보낸 사내.
여전히 외양은 유약해 보이는 흑발의 사내를 바라보았다.
그는 여전히 자신을 보는 것이 아니라,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공중에 뜨고서야, 레기오스는 어렴풋이 그 형체를 눈에 담을 수 있었다.
그건 분명.
금발의 자그마한 소녀──
거기까지 닿았을 때.
레기오스의 기억과 의식이 암전했다.
* * *
방금 어퍼스윙으로 레기오스를 하늘로 퍼 올려 홈런을 쳐버린 사내.
김율은 시원하게 뒤로 빠던을 갈겼다.
이대호 사인 에디션 알루미늄 배트가 호쾌하게 나뒹굴면서 자아내는 소음과 함께.
그는 소리쳤다.
“적장! 물리쳤다!”
정말, 꼭 한번 해보고 싶었던 대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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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에이, 뭘요. 그래도 의리는 지켜야지요. 이번에도 잘 부탁드립니다. 아, 그리고, 혹시 부탁드릴 게 있는데요.”
결국, 나는 첫 작을 출간했었던 출판사와 재계약을 맺었다.
의리?
나 사나이 김율.
사학과 출신으로 학자금 대출을 갚기 위해 동분서주, 대학원생을 가장한 현대판 노예 인생을 살면서 그런 사치스러운 감정은 모두 잊은 지 오래다.
돈은 중요한 게 아냐.
중요한 건 역사에 담긴 메시지…….
……물론 돈도 조금은 중요하다.
조커, 당신은 틀렸습니다.
어쨌든.
애초에 나는 욕구가 많은 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굳이 소설로 떼돈을 긁어모을 생각은 없었다.
이세계에서 나만 알고 있는 역사 지식을 다른 사람에게 전파한다는 그 자체도 굉장히 즐거운 작업이었으며.
심지어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돈도 벌고, 능력까지 생긴다?
이런 말도 안 되는 기적이 어디 또 있겠는가.
고대부터 현대, 그리고 미래까지.
모든 역사학도가 가장 부러워할 만한 사람 중 두 번째가 나일 것이다.
첫 번째는 징기스칸의 무덤을 찾아낸 사람일 거고.
그래서 계약 조건에서 오히려 인세 비율을 조금 낮추고, 그 대신 도서의 판매 가격을 낮추는 방향으로 계약 조건을 조정했다.
저렴하면 더 많이 팔린다.
당연한 자본주의 시장의 이치잖아?
그러면 더 많은 사람이 볼 수도 있고.
게다가 획득하는 스킬 면면 또한 내 역사뽕을 충족시켜주기 충분했다.
[예상 획득 스킬 : [C급] 헤라■레■의 ■■]
무려.
무려 헤라클레스다!
헤라클레스의 체술.
헤라클레스의 궁술.
헤라클레스의 생명.
헤라클레스의 광기…… 이건 조금 함정이네.
어쨌든, 소설을 완성할수록 내가 조금 더 유능해지는 기분은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뭐, 아직은 말 좀 잘하고, 손 좀 잘 놀리는 정도에 불과한 범부에 불과했긴 했다.
이 능력이면 도박판에서 크게 한탕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나쁜 생각을 잠깐 했었지만.
- 율, 그런 생각은 정당하지 않아요. 도박은 단순한 오락이 아니에요. 그것은 나락으로 빠져드는 지름길이자, 영혼의 절규에요. 도박 중독 문제로 도움이 필요하면 국번 없이 1336번으로──
히스토리에의 설득으로 인해 나는 제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물론 1336번은커녕 전화라는 문명의 이기가 이 판타지 랜드에 없다는 빨간약을 거하게 들이켜고야 말았다.
스마트폰이 그립다.
왜 나는 스마트폰이 없는가.
* * *
김율의 야심작.
‘헤라클레스’의 첫 흥행은 적당했다는 표현이 어울렸다.
전작 ‘제우스의 연애담’이 특유의 자극적인 전개로 인해 컬트적인 인기를 끌었던 것과 달리, 적어도 섹슈얼한 측면에서는 그렇게까지 자극적이지 않았기 때문.
빨간책을 기대하고서 집어 든 사람들은 처음에는 실망했다.
하지만.
페이지를 넘기면서 점차 그들은 몰입하기 시작했다.
일반적으로 대중적인 모험담이라고 하면.
정석적으로 마물을 물리치고 사천왕을 꺾으며 마왕성에 도달해 마왕과의 사투 끝에 승리한 후 공주와 결혼하는 것이 왕도적 전개.
하지만 헤라클레스 영웅담은 조금 달랐다.
전력을 다해 쏘아낸 화살도, 영웅적인 저력으로 찔러낸 창도 가죽에 아무런 상처조차 내지 못하는 네메아의 사자를 가볍게 처치하고.
죽이는 것보다 더 어렵다던 생포라는 과업을 받아, 화살보다 빠른 속도로 달려가는 황금 뿔 사슴 타아게테, 그리고 산의 수호자인 에리만토스의 멧돼지 또한 잡아냈다.
현대적으로 본다면.
주인공이 굴러가면서 한땀한땀 성장하던 종류의 모험담만 존재하는 세상에 먼치킨이라는 생소한 형태의 화소가 던져진 셈.
당연히 반응은 열광적일 수밖에 없었다.
“식인 사자를 상대로 한 달 동안 사투를……?”
“그래, 아무리 강한 놈이라도 숨을 못 쉬면 죽지!”
“크흐, 역시 주인공이구만! 여신의 신벌이 깃든 황금 뿔 암사슴을 어떻게든 잡아내다니, 대단한걸!”
“덩치가 산만 하다는데, 그걸 어떻게 생포한 거지?”
“쉿, 그냥 즐겨.”
그 외에도.
“황금사과를 가져오다니…… 대단한 것입니닷……! 이것은 님프 헤스페리데스가 높이 평가……!”
“크으, 친우인 테세우스까지 구해와? 낭만 합격.”
평범한 인간에게 불가능할 것으로 생각되었던 열두 개의 과업을 압도적으로 해결해 나가는 과정.
그야말로 마초이즘적 전개!
적어도 살면서 한 번쯤은 용사라는 꿈을 마음속에 간직했었던 사내들의 심금을 울리기에는 충분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흥행의 발목을 잡은 것은 12과업 이후 파트였다.
“……? 갑자기 여장을? 아니, 근육질에 건장한 사내인 줄 알았는데, 힘도 엄청 강력한 영웅이었는데, 여기서 여장을?”
옴팔레 여왕의 노예가 되어 3년간 시녀 옷을 입고 생활했다는 충격적인 전개.
“전개가 이게 뭐야……? 나 뿔이 아파…….”
“킥킥, 결혼이 범죄다, 킥킥!”
켄타우로스 네소스가 터트린 죽음의 메아리에 속아 넘어간 헤라클레스의 마지막 아내, 데이아네이라에 대한 불호.
“영웅이면, 영웅다운 최후를 맞이해야…….”
“저 지경이 될 동안 제우스는 뭐했나?”
“그걸 몰라서 묻나? 다른 여자나 따먹고 있었겠지!”
시대를 풍미한 영웅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비극적인 최후.
그 모든 것이 호불호의 영역으로 작용한 결과.
[제목: 올림포스 이야기 헤라클레스 영웅담]
[역사적 고증: 부합함] [완성도 평가: 수작]
[세간의 평가: 복합적] [판매량: 1,786권]
[(14일 남음) 다음 스킬 획득까지 앞으로 판매량 214권 필요]
[예상 획득 스킬 : [C급] 헤라■레■의 ■■]
저렴한 가격.
그리고 전작의 후광에도 불구하고 판매량은 시원찮았다.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율. 그건 단순한 슬픔이 아니에요. 당신 안에서 터져 나오는 영혼의 절규에요.』
“……앞으로 단순한 어쩌고 하는 문장 구조는 전면 금지한다.”
『네, 알겠습니다. 앞으로는 알고리즘을 이용한 중립적인 전환 구문을 사용하지 않고서, 최대한 적절한 답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또 어떤 도움이 필요하신가요?』
김율은 한동안 식음을 전폐했다.
.
.
.
하지만, 인생만사 새옹지마라.
사흘 후.
“작가님! 이 주간지 보셨습니까?”
“……뭔데 그럽니까?”
잔뜩 흥분한 채 달려온 편집자가 억지로 손에 쥐어준 주간신문을 읽으면서.
김율은 눈을 부릅떴다.
[마경에서 들려온 축포! 비결은 소설?]
[수많은 용사를 잡아먹은 괴수, 백면귀룡이 마침내 처음으로 토벌되었다는 희소식이 최근 황궁에 전해졌다. ……믿을 수 있는 정보통에 따르면, 용사 세레핀은 겸연쩍게 웃으면서 단서를 최근에 출간된 한 영웅담 소설에서 얻을 수 있었다고 했다. …… 본지의 조사 결과, 그 소설은 12개의 위업을 담아낸 소설이며, 특히 2번째 위업이었던 ‘히드라’라는 몬스터와 백면귀룡의 생태가 몹시 유사했었던 것으로……]
“이건…… 대박이다.”
김율의 눈앞에 월천킥 작가의 꿈이 아른거렸다.
* * *
오늘부터 내 마음속 주신은 용사님이다.
숭배합니다, MY GOAT.
헤라클레스 영웅담의 출간과 더불어서 구작에 대한 대대적인 판촉 행사가 들어갔지만, 생각보다 추이가 좋진 않았었다.
이러다가 진짜 내가 광장에 나가서 화끈하게 보여드립니다를 외쳐야 하나 싶을 정도로 애매한 느낌이었는데.
언론 보도 이후.
파멸적 떡상……!
마치 새로고침하면서 조회수를 확인하는 것처럼.
상태창을 켤 때마다 숫자가 차곡차곡 올라가는 것을 볼 때의 쾌감이란.
도박판에서 얻을 수 있는 도파민보다 더 짜릿했다.
조금 아쉬운 점이 있다면.
[제목: 올림포스 이야기 신들의 전쟁]
[다음 스킬 획득 불가: 기간 만료]
[제목: 올림포스 이야기 제우스의 연애담]
[다음 스킬 획득 불가: 기간 만료]
스킬을 추가로 획득하기 전에 60일이라는 기간이 지나서 만료되어 버린 구작들이었다.
하지만 지나간 것에 굳이 연연하지 않아야 사람은 성공할 수 있다.
인류세가 들어선 이후부터 기록된 이야기만 해도, 내가 죽을 때까지 다 담아내지 못할 정도다.
그러니까, 괜찮다.
괜찮…….
……그래도 조금, 조금 아쉬웠으니까.
힐링을 해야지.
.
.
.
사람이 모이는 곳에는 이야기가 있다.
이야기가 모이는 곳에는 사람이 있다.
일제강점기 시절, 스스로를 룸펜으로 자조했던 문인들이 다방으로 모여들었던 것처럼.
이 판타지 랜드에도 장르문학이라는 고급스럽고 우월한 취미를 향유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있었다.
이름하여, 살롱.
……왜 이세계에서 프랑스어 단어를 고유명사로 쓰는지에 대한 고찰은 옛날옛적에 포기했다.
심지어 사용하는 상용문자조차 한글이었으니.
일종의 언어 치트인 셈으로 이해하고 넘어가는 게 속 편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최초의 세 과업 이후에, 조금은 전개가 루즈해지는 경향이 있더군. 특히 아우게이아스 왕의 우리 청소 부분은, 우욱.”
“오히려 그 부분이 유머 코드로써 이야기의 긴장감을 완화해 주지 않았나. 하하.”
“지금 전작을 읽고 있는데, 이후에도 제우스의 아들들을 소재로 이야기가 나올 것 같은걸. 기대되는군.”
역시 오늘의 화제는 내 헤라클레스였다.
첫 작품을 썼을 때.
살롱의 존재를 알고 온종일 죽치고 있었지만, 기간토마키아 이야기 따윈 나오지 않아서 집에 와서 눈물로 바지 적삼 적셨을 때가 엊그제 같은데…….
물론 난 관종이 아니었기 때문에.
내 이름이 김율이라는 사실을 여기서 커밍아웃하지는 않았다.
그저 구석에 앉아서, 가장 저렴한 칵테일을 한 잔 시켜서.
홀짝, 홀짝.
“상상력이 말도 안 돼. 어떻게 이런 발상을?”
“신문 기사를 보지 않았나. 아마도 마경에서 산전수전을 다 겪은 역전의 용사일걸?”
“분명히 잘생겼을 거예요…….”
“흐흐…….”
더.
더 격하게 칭찬해라……!
물론 난 엄밀하게 말하면 역사를 소재로 한 패러디 작가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이 문학적 성취를 오롯이 내 공으로 돌릴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렇지만 칭찬은 듣기 좋잖아.
또, 이렇게 여론을 들으면서 다음 이야기를 어떤 쪽으로 접근하면 좋을지 고민해 볼 수도 있고.
게다가.
[C급] [헤라클레스의 봉술]
[제우스의 아들 헤라클레스는 궁술과 검술, 격투술 등 모든 무예에 재능을 보였다. 봉술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그처럼, 너는 날이 없는 둔기를 휘두를 때 재능을 보이리라.]
비록 스킬 설명처럼 다른 무술들과 비교하면 조금 손색은 있었지만, 그래도 드디어 내게 전투 계통의 스킬이 생겼다!
몽둥이 한정이라는 게 조금 아쉽긴 했지만…….
단검과 나무 배트를 비교한다면.
배트가 이긴다는 게 학계의 정설.
조금 더 인기를 확보하면 더 강한 스킬로 교체할 수도 있을 테니, 여유를 갖고 기다려 보기로 했다.
“잠깐, 합석 괜찮으십니까?”
“예?”
갑자기 낯선 남자가 내게 그윽한 눈빛을 보내며 대뜸 맞은 편에 앉았다.
내 표정에 불쾌한 기색이 어린 걸 읽었을까.
“아, 실례합니다. 저는 이런 사람입니다.”
남자는 명함을 내밀었다.
진리일보. 문학부장.
길포드 에슈타인.
“김율 작가님, 맞으시죠? 신문 연재에는 관심 없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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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심했나?
누렁이 말고, 적당히 로젤린 정도의 위력으로도 충분했을 것 같은데.
어쨌든, 실전에서도 활용해 보니 확실해졌다.
헥토르의 용기.
이건 자신을 스스로 얼마나 잘 통제할 수 있느냐에 따라서 진짜 사기 스킬이라고 할 수 있었다.
1:1로 한정해서, 상대방과 동격의 스펙으로 자신의 잠재력을 끌어올려 준다.
그래서 나는, 최대한 앞에 있는 공작의 아들놈을 사람이 아니라 그냥 NPC, 먼지, 진드기 같은 느낌으로 자기 최면을 걸었고.
누렁이에게 부탁해서 나를 아르릉 위협해달라고 했다.
……웃음기 쫙 빼고, 오줌 지릴 뻔했다.
드래곤의 진심 패기란 패왕색이다. 메모.
그 결과.
일순간 누렁이에 버금가는 신체 스펙을 지니게 된 나는 말 그대로 공작 아들을 날려버렸다.
물론, 세상에 공짜는 없었다.
승리에서 주는 고양감을 만끽하고, 경외의 시선을 수집해서 자존감을 채운 건 메리트라고 할 수 있겠으나.
“아윽, 으윽.”
“누가 보면 흠씬 두들겨 맞고 온 줄 알겠군요, 김율.”
집에 들어서는 순간.
기어 세컨드를 발동해서 빠따빠따 JET 바주카를 날린 것처럼 극심한 후폭풍이 근육통이라는 형태로 휘몰아쳤다.
트립 전, 폐렴과 독감이 겹쳐서 열이 40도까지 치솟아 올랐을 때 느꼈던 통증과 흡사했다.
그때 응급실에 실려 가서 한 2주 정도 고생했었지.
대들지 않아야 하는 건 나였던 것인가…….
.
.
.
“이래서 원고는 쓸 수 있겠습니까. 미련한 김율 같으니라고.”
입으로는 연신 투덜거리면서도.
히스토리에는 꽤 헌신적으로 날 간호해 주었다.
바닥에 축 늘어져서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못하는 나를 주워다가 리클라이너 위에 눕혀주고, 더럽혀진 옷을 벗겨주고.
그리고 손바닥에 멘소래담을 찹찹 발라서 특히 통증이 심각한 팔뚝을 마사지해 주기까지.
가끔 지배의 악마 같은 관념을 상상해서 피그말리온 스킬로 빚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나쁜 생각을 한 나를 참회의 길로 인도해 주는──
“아악!”
“엄살은 해롭습니다. 김율.”
“진짜, 진짜 아프다고──!”
사소한 문제가 있다면.
깡통이라 그런가, 힘 조절이 좀 잘 안됐다…….
“그래서, 왜 그렇게까지 하신 겁니까? 공작과 척을 져서 좋을 건 없을 텐데.”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내 인생은 애초에 투쟁으로 굴곡져 있었다.
재벌 집 막내아들로 태어나 행복한 나날을 보낸 게 아니라.
가끔 돌발 이벤트로 집에 빨간딱지 좀 붙어주고, 집 주변 세계관은 아카데미물보다는 남깡여창물에 가까운 느낌이었으니까.
그 마계 속에서 자라나면서 느낀 게 있다면.
“누군가가 나를 이유 없이 싫어한다면, 차라리 이유를 만들어 주는 게 속 편할 때가 있지.”
물론 역사상으로도 그런 시도를 한 사람들은 많았다.
당장 ‘흥! 내가 존나 쎄게 선빵 갈기면 기름도 팔아주고 내 말도 잘 들어주겠지?’라는 마인드로, 진주만에 불꽃 싸다구를 갈긴 대본영이 그 대표.
그리고 내가 보았을 때.
베르투스 공작은 귀축영미만큼 복수에 눈 돌아간 귀신은 아니라, 오히려 이 무력시위에 머리가 더욱 복잡해질 사람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사람은 나를 성녀의 기둥서방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으니까.
그리고.
“꼴 받잖아.”
밥도 주고 돈도 줬다지만.
나는 진짜 글 쓰는 거 말고 딱히 아무런 짓도 한 적 없다.
게다가 대뜸 암살자를 보내서 모가지를 루팅하려 들다니?
“그러면, 앞으로도 계속?”
“아마 그러진 않을 거야.”
결투장까지 성녀를 대동해서 퍼포먼스를 벌이기도 했었고, 깐프를 이용해서 이미 정중한 항의를 담은 서한을 보내두었으니까.
“불륜 사건의 증인과 당사자의 증언을 확보해 두었으니, 기사화하기 전에 그만 지랄하십쇼, 가 정중한 항의라고 해석되진 않습니다만.”
“그 정도면 정중했지?”
배때기에 칼빵 대신 빠따를 꽂아주면서.
누구든 작은 김율을 건드리면 좆된다는 사실을 주지시켰을 뿐이다.
김율은 자유에요.
외압 없이 쓰고 싶은 글을 쓰고 싶답니다.
* * *
짜아악!
“왜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해!”
베르투스 공작의 거대한 분노가 레기오스를 덮쳤다.
그 기세에.
레기오스는 차마 항변조차 못 하며 입술을 그저 꾹 깨물었다.
오히려 그 꼴이 베르투스 공작의 화를 더 돋우었으니, 이윽고 뺨에서 울리는 청량한 소리가 두어 번 더 울렸다.
그러고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의자를 한 번 걷어찬 후.
“때로는 참아야 할 때도 있는 법이야. 왜 그깟 글이 나돌아다니는 데도 이 아비가 아무것도 안 했는지, 네 형들이 가만히 있는지 몰라서 그래?”
물론 알고 있었다.
그래서 공식적으로 일을 키우기보다, 개인의 일탈인 척 은근슬쩍 압력을 넣어서 해결할 생각이었던 레기오스였다.
물론 압력을 넣으려다가 본인이 짜부가 되긴 했지만.
조금은 베르투스 공작이 평온함을 되찾는 것 같아 보이자.
“그놈…… 도대체 정체가 뭡니까?”
레기오스는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평범한 사람이 자신을, 자신의 검을 단 일격에 무너트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나도 모른다. 그래서 문제야. 빌어먹을, 어쩐지 그 머저리 같은 킬링필드 놈이 반병신이 됐더라니.”
“킬링필드라면…… 클라펜 말입니까?”
“그래.”
분명히 가문의 사냥개들을 이끄는 인물이다.
그런 인물이 반병신이 됐다니?
“성녀한테 당한 것도 아냐. 그놈한테 당했다고. 분명 정중하게 모시라는 내 의사를 곧이곧대로 듣지 않았겠지. 사냥개 주제에 건방지게.”
“…….”
“그래, 물어보자. 그놈이 그렇게 강했나?”
그 질문에.
레기오스는 아침에 있었던 일을 회상했다.
자신을 상대로조차 보지 않는 그 오만한 눈빛.
갑작스럽게 뒤에서부터 밀어닥친 거대한 살기.
여리여리한 몸에서 나왔다고는 믿기 힘든 힘.
그리고.
너무나도 완벽한, 마주한 자신의 검마저도 초라하게 만들 정도의 깔끔한 무의 궤적.
전혀 마나가 느껴지지 않았다는 것 또한.
다른 관점에서 생각해 보면…….
“……아마, 제국에서 적수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일 겁니다.”
굳이 약자를 상대하는데 마나를 끌어올릴 필요도 없다는 뜻이 아닐까.
게다가 그의 마지막 말이 아직도 뇌리에서 맴돌고 있었다.
- 이젠…. 대들지 마라….
아주 나지막하고 묵직한 속삭임을 떠올린 순간, 레기오스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살짝 떨었다.
“아이고…….”
베르투스 공작은 그대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대륙급 강자를 한 명도 아니라 두 명이나 제국에 던져놓은 성국의 태도는 도대체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그리고 그 정도의 무력으로, 왜 그 새끼는 제국까지 기어 와서 글을 쓰고 있는 건가.
심지어, 재수 없게도.
글도 잘 썼다!
긁히는 부분만 떼고 보면 내용도 재밌다!
단검의 밤이 처참한 실패로 돌아간 것은 아무래도 관계없었다.
목표를 다 암살하는 데 성공했으면 더없이 좋았겠지만, 그래도 제국 수도에 불온한 기운을 풍기는 데에는 성공했으니.
한 번의 실패로 무너져 버릴 탑을 세울 만큼 그는 멍청하지 않았으니, 또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계획이 뒤이어 준비되고 있었다.
그러니, 어떻게 해서든.
통제할 수 없는 변수가 자꾸 자신에게 이빨을 들이밀고 으르렁거리는 일만큼은 막아야 했다.
“당분간 자숙해. 어디 나가서 얼쩡거릴 생각 하지 말고. 그리고, 상처가 낫는 대로 적당히 네놈이 뒤로 꿍쳐놓은 재산 좀 들고 가서 정중히 사죄하고 와라.”
“…….”
레기오스의 눈에 숨길 수 없는 불만이 아른거린 순간.
공작은 그의 못난 자식의 얼굴에 곧장 술잔을 던졌다.
* * *
- 그럴 수가! 이건, 이건 사설로 실어야만 하는 내용인데!
- 황제께서도 이 일이 더 커지지 않았으면 한다는 우려의 메시지를 보내주신 것이와요? 그러니까, 조용히 묻어버리는 데스와?
- 크윽……! 폐하의 명이라면……!
에스트리야스 가문과 위스페라우드 가문 사이에 모종의 야합이 이뤄진 결과.
아스테릭에게는 애석한 일이었지만, 그가 기획한 B 공작의 여인들’ 특집은 더 이상 지면에 실리지 못했다.
또한, 에스트리야스 공작가의 삼남이 일개 작가가 휘두른 배트에 담장을 넘어갔다는 추태 또한.
목격자 외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사실이 되었다.
- 이거, 이거! 나 주면 안 돼?
- 안 됩니다. 제 보물이에요.
- 이이익!
탐욕스러운 드래곤의 눈동자가 이대호 사인 배트의 가치를 알아봤다는 비극 외에는, 아무튼 평화로운 마무리였다.
그런 외적 풍랑에도 불구하고.
김율의 본업.
소설 ‘두 영웅’ 시리즈는 파멸적이면서도 묘하게 현실성 있는 전개와, 고구마와 사이다를 목구멍에 축차 투입하는 듯한 완급 조절로 계속 호평을 이어 나가고 있었다.
유부녀와 전위, 그리고 아들과 조카를 덱에서 뽑아서 묘지에 보낸 후.
0코 3드로우 카드를 써서 분노, 헌제, 청주병을 뽑아 들고서.
조조는 무차별적으로 주변을 휩쓸기 시작했다.
파멸적인 상승세!
하지만 그에 마치 찬물을 끼얹는 것처럼.
## ====== ##
“군량미가 그리 부족한가?”
조조의 말에, 군량미를 담당하는 관원이 머리를 부복했다.
“송구합니다만, 이대로 가면…… 회군해야 할 듯합니다.”
가짜 황제, 원술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 수춘을 점령할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를 이렇게 놓칠 수는 없었으니.
조조의 입에서 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 눈치를 본 관원이, 주춤주춤하다가.
“그…… 한 가지 방책이 있사온데.”
“말해 보아라.”
“곡물을 계량하는 그릇의 크기를 줄이면, 군인들의 시선을 속여 배급량을 줄일 수 있을 것입니다.”
“허어.”
묘안이었다.
…….
…….
- 주공이 우리를 속였다!
- 이렇게 먹고 어떻게 싸울 수 있다는 거냐!
군영에서 아련하게 들려오는 목소리를 들으면서.
“묘책이었으나, 결국 임시방편이었을 뿐이군.”
“그, 그래도, 족히 한 달 치 군량을 아낄 수 있었나이다. 불만만 잠재울 수는 있다면──”
관원의 말을 중간에 끊은 채, 조조는 한숨을 쉬었다.
“애석하지만, 그대의 목을 베어 군사들을 진정시켜야겠군. 그렇지 않으면 꼬여버린 실타래를 풀 수 없겠어.”
“예, 예?”
순간적으로 망연해진 관원이 고개를 치들었으나.
어느새 뽑혀 나온 조조의 검날이 이내 그의 목을 내리쳤다.
.
.
.
“들어라! 군량미를 관리하던 관원이 감히 작은 곡斛을 써서 관곡을 도적질했으니, 그 죄를 중히 물어 참수했노라! 이 조맹덕이 너희에게 약속할 것이니, 이제 모든 것이 정상화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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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아니, 진짜 이건 악당이잖아…….”
“인성 수준 실화냐?”
“자신이 주도해 놓고 책임을 아랫사람에게 물리다니!”
간악무도한 작가 율리시스는 또다시 주인공을 개쓰레기로 만드는 만행을 저지르고야 말았다.
그런 사소한 에피소드를 제외하고 본다면.
승승장구.
수춘도 점령하고, 사사건건 뒤에서 협잡질하는 장수와 유표 트리오에게도 죽빵을 한 대 꽂아 넣었다.
비록 주인공의 인성 문제가 불거지긴 했지만, 그래도 전형적인 사이다 전개라고 할 수 있었다.
오히려 문제가 된 것은.
“아니, 결국 여포에게 모든 것을 다 뺏겼다고?”
“미 부인이 아까워요……! 그래도 모든 것을 잃었어도 남편을 사랑하는 순애! 좋아요!”
“사람이 좋은 것도 정도가 있지! 어찌 저 상황에서 허허 웃을 수가 있단 말인가!”
그동안 낭만 치사량을 잘 먹여주었던 귀 큰 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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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락과 나락.
떡상과 떡락을 오가는 무한 스파이럴의 굴레.
군량미 담당관의 모가지를 쑤컹함으로써 자신의 혐성을 또다시 만천하 독자들에게 과시한 조조였지만.
- 유비는 영웅의 자질이 있고 민심을 얻었으니, 다른 사람의 밑에 있을 사람이 아닙니다. 빨리 처리해 버리는 것이 낫습니다.
- 이제 천하의 영웅이 내 밑에 모여들 때인데, 한 사람을 죽이기는 쉬우나 그러면 천하인의 마음을 잃는 것이다!
돈 주고 쌀 주고 성 주고 병사 주고 모든 것을 다 준 채, 결국에는 빤스 한 장 걸치고 도망쳐 버린 귀 큰 놈의 귀순을 받아들이는 과감한 결단을 내렸다.
물론 소설적으로 본다면 크로스오버의 또 다른 주인공을 어찌 내팽개칠 수 있겠냐만.
주변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귀 큰 놈을 받아들이는 선택에.
매실로 환각을 자아내는 이전 에피소드와 더불어서 또다시 조조 코인의 반등을 견인했다.
그리고, 이야기는 흐르고 흘러…….
“드디어 여포 토벌전인 것이와요!”
어찌 하이엘프가 인간의 밑에 들어갈 수 있겠느냐며 꿍시렁대던 클로에 또한.
김율의 불꽃 튀기는 ‘느이 애비도 인간 황제 밑에 있제? 한 방에 현실을 직시하고 소설을 소설로써 즐기기 시작했다.
쥐흔충 깐프가 교화되어 마침내 정도의 길을 걷기 시작하니, 장족의 발전이라고 평할 수 있었다.
“그래서 휴재를 하려구요.”
“……그건 또 무슨 말인데스와?”
김율의 선언에.
클로에는 자신도 모르게 방언이 터져 나왔다.
* * *
휴재는 아침에 눈을 뜰 때, 점심에 밥을 먹을 때, 저녁에 잠깐 늘어져 쉴 때 등 언제든지 하고 싶은, 그야말로 악마의 유혹과도 같은 것.
별다른 직업 없이 글만 쓰는 나라서 그나마 아침 먹고 1편, 점심 먹고 1편, 저녁 먹고 1편이라는 일정을 소화하고 있었지만.
내가 만약 직장을 다니는 사람이었다면?
벌써 뇌가 녹아버린 채 도로롱 뻗어버렸을 것이다.
“휴재라니, 그게 무슨 말인데스와! 그런 폭거는 있을 수 없사와요! 이 장면에서, 이 장면에서 휴재해버리면!”
깐프가 뿌에엥 빼애앵거리며 파닥거리는 걸 애써 밀어내면서.
“대신, 다른 방법으로 이야기를 담아낼 생각입니다.”
“다른 방법?”
여포는, 지금 너무 거품이 잔뜩 꼈다.
내가 뿌린 씨앗이 업보로 돌아왔던 거지만.
그래도…….
호로관 메뚜기라면 그 정도 포스는 풍겨줄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었고.
애초에 유비와 조조의 교점이 제대로 되어주는 게 역설적으로 여포였으니까, 그 정도의 비중을 몰아주는 것은 소설적으로 맞았다.
이른 바 1부 최종 보스 같은 느낌.
문제가 되는 건, 여포의 최후.
유비 버전에서의 여포는 그야말로 문무겸비 최강최흉의 지장, 뒤통수를 칠지언정 나름대로 명분과 이유가 있는 존재.
조조 버전에서의 여포는 그냥 원래의 여포 이미지. 빡대가리, 고집불통, 힘만 센 멍청이.
두 가지 이미지를 너무 극명하게 다룬 나머지, 조조와 유비, 그리고 여포가 함께 등장하는 장면을 조형하는 난이도가 너무 어려워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린 결론.
“여포의 최후는 만화로 그릴 겁니다. 그러니까 지면을 좀 많이 할애해 주세요.”
내 말에.
클로에의 눈동자가 동그래졌다.
뭐, 내가 그릴 건 아니지만.
원래 대학원생은 쥐어 짜내면 뭐든지 다 나오는 존재다.
.
.
.
대략 내 플랜을 설명하고, 클로에가 물개박수를 치는 꼴을 흐뭇하게 감상한 후 귀가.
“오셨습니까, 김율.”
히스토리에는 집안의 대들보이자 버팀목, 가장에게 합당한 예우를 올렸다.
최근 살짝 사춘기스럽게 엇나가기 시작한 히스토리에를 한 방에 교정할 수 있었던 특급 레시피는 무엇이냐.
- 미, 미, 미…….
- 미?
- 미천한 것 주제에……! 그래도 제법이군……!
내 플랜이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는지.
베르투스 공작의 삼남, 레기 어쩌고가 자기가 일방적으로 처맞은 주제에 깽값까지 물어주곤 깨갱 도망쳤다.
나는 그 화해의 제스처를 바로 수용했다.
그 결과.
연구실의 식량이 빵빵해졌고, 식단이 다채로워졌으며.
“김율, 오늘 메뉴는 뭡니까?”
“기대해도 좋을 거야.”
“으히……!”
연비가 살짝 안 좋은 깡통이 해피합삐를 띄우며 아주 고분고분해졌다.
딱히 그런 RP를 넣은 적도 없는데, 식욕도 왕성하고 식탐도 많으며 심지어 입맛도 조금 까다롭기까지.
“다 김율 때문이잖습니까.”
“내가 왜?”
“처음 태어났을 때 먹었던 빵 맛만 생각하면…… 지금도 슬퍼집니다. 인간은 어떻게 이런 걸 먹고 살았을까, 그래서 지능이 발달하지 못했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스땁.”
확실히.
히스토리에가 갓 태어난 따끈따끈한 깡통이었을 때.
연구실의 경제 상황은 그리 좋지 않았다.
카이사르 이야기가 인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애초에 이 세상이나 현대 세상이나 적당한 수준의 작가 수입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카이사르 이야기로 벌어들인 돈도 대충 월급으로 환산하면, 이세계 평균 직장인 월급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할 정도.
괜히 삼국지로 세태와 야합을 한 게 아니었다.
삼국지를 쓰고서야 비로소 직장인 월급에 어느 정도 비빌 수 있을 만큼의 수입이 나왔으니까.
뭐…….
신문이라는 게 어쩔 수 없다.
출판 시장은 출판 비용이 발목을 잡고.
신문은 다른 콘텐츠들과 파이를 분배하니까.
그래도 당분간은 이렇게 호의호식할 수 있을 정도의 도네이션을 쏴준 베르투스 공작님께 잠깐 감사의 기도를 올리고.
“작업은?”
“수정이 오히려 더 오래 걸리는지라. 그래도 금방 마무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좋았쓰.”
집에 오는 길에 산 초코소라빵을 입에 하나 물고, 히스토리에의 입에도 하나 물려주고서.
그녀가 작업을 하는 꼴을 잠깐 구경했다.
인격이 부여된 이후에도 깡통적인 면모는 남았는지, 우리 깡통이가 일하는 걸 보면 항상 신기했다.
특히 생성형 인공지능 본연의 기술을 뽐낼 때가 가장 기가 막혔으니.
USB 포트 인근에 손을 올린 채, 부릅!
눈에 힘을 빡 주면.
뾰롱! 하고 인공지능 산 그림이 튀어나온다.
……마법도 있는 세상에, 이딴 게 왜 가능하지라는 생각은 이미 예전에 갖다 버렸다.
“저기, 쟤 다리가 기괴한 각도로 꺾였다.”
“예리하군요.”
“어어, 그 손가락은 안 된다……!”
“음……? 제가 보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만.”
“그런가……? 하기야, 현대도 아니니까…….”
대신, 인공지능 그림 특유의 고질적인 문제와 더불어서 내 심리 속에 있는 기저 질환의 해결은 해야 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이미 이세계에 존재하는 중세 화풍의 그림 콘텐츠 정도는 압도적으로 따잇할 수 있었다.
그러니.
다들 목도해라.
원작. 진수 앤 나관중.
스토리 각색. 김율 및 여러 삼국지 창작물.
일러스트. 깡통.
스페셜 땡큐. 코■이 게임즈. 이학인 씨, 진모 씨, 이문열 씨, 이현세 씨…… 그 외에도 수많은 분들.
그 모든 아이디어와 기술력의 집약체를……!
* * *
마도공학이라는, 언제부터 존재했을지 모를 기술력 덕분에.
김율과 히스토리에가 밖을 뽈뽈 쏘다니면서 딱히 원시 고대 미개 중세 시대의 사회상을 체감하지 못하는 것처럼, 제국은 꽤 풍요롭고 원활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가성비는 중요한 법이었으니.
대량 인쇄 및 대량 판매를 핵심으로 하는 신문은 보통 흑백으로 출간되기 마련이었다.
아니면 기껏해야 1면에 색채를 넣는 정도였다.
비용 차이가 말도 안 되게 났으니까.
하지만.
- 왓 더……! 이거는, 이거는 꼭 풀 컬러로 세상에 공개되어야하는 데스와!
김율이 전달한 원고를 보고 방언을 빵빵 터트린 클로에의 결단 덕분에.
진리일보.
또다시 특집.
“호외요! 호외! 진리일보, 전면 풀 컬러!”
“두 영웅 이야기의 만화가 연재된대요!”
“여포의 최후가 궁금하시다면! 즉시 구매!”
새벽.
신문 가판대의 호객 소리가 요란하게 세상을 깨웠다.
두 영웅을 보는 독자들도.
심지어 두 영웅을 보지 않는 사람들도, 풀 컬러라는 어그로에 이끌려서 자신도 모르게 진리일보를 집어 들었다.
진짜 작정이라도 한 듯, 국제 문제나 정치 문제를 다루는 지면에 있는 사진들까지 컬러풀하게 담겼다는 사소한 문제는 있었지만.
애초에 지금 사람들은 깐프의 가증스러운 미소나 드워프의 술주정, 그리고 제국 수도 근처에서 목격된 황금색 용의 목격담이 보고 싶은 것은 아니었으니.
파라랑, 팔랑──
곧바로 문학 지면으로 넘기면.
[두 영웅: 황족이 혈통을 숨김은 금일 휴재입니다.]
스킬 획득에 아무런 지장이 없는 연의 기반 작품은 과감하게 휴재를 때리는 결단과 함께.
가장 먼저 펼쳐진 것은 조조 이야기, ‘악당이 야망을 숨김’.
몇 화동안 계속 이어진 여포와의 결전에서, 마침내 물속성 마법(아님)을 이용해 도시를 물에 잠기게 만들고서.
하나씩, 하나씩.
여포군의 네임드들을 생포하고.
마침내는 여포까지 생포하는 장면에서.
소설은 끝이 나고, 만화로 이어졌다.
그리고.
그들은 목도했다.
컴퓨터로하는것은뭐든지잘해 깡통님께서 찍어내고, 편집하고, 때로는 김율의 충고를 받아들여 섬세하게 깎아낸 정수를.
그것은 단순한 만화가 아니었다.
……아마 21세기의 감각으로 보았다면, 그저 일러스트들을 교묘하게 컷마다 배치한 누가 봐도 인공지능 티가 나는 그림의 연속체라고 평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판타지 세계에 딸깍으로 그림을 뽑아내는 문화가 있을 리는 없었으니.
“도대체, 도대체…… 언제부터, 이걸 그리기 시작한 거지?”
“일 년? 아니, 일 년도 모자랄 것 같은데…….”
“고작 소설의 한 장면을 위해서 이 정도의 노력을 기울인 것인가? 도대체, 도대체 이 작가는 도대체?”
나 손가락에 물감 좀 묻혀봤어요 하는 사람들은 그 압도적인 작업량에 전율을 금치 못했으며.
“어떻게 이렇게 다 개성 있게 잘 생길 수가……!”
“꺅, 나 반해버렸어……! 멋있어!”
“조조 유비 케미 뭐야……! 나 뽀짝사!”
코■이 특유의 미화된 인물이 기본 베이스로 깔리다 보니, 여심마저 단숨에 사르르 녹여버렸다.
당연하게도, 기존 독자들 또한 정신을 놓고 말았다.
- 명공이 근심하던 것이 이 여포인데, 이제 내가 항복했으니, 천하에 걱정할 게 없소이다! 청컨대, 부디 나를 사냥개로 쓰시오, 천하를 입에 물어다 명공에게 바치리다!
“여포의 생에 대한 집념이 여기까지 느껴지는군…….”
“온갖 조롱과 오욕을 뒤집어쓰더라도, 살아만 있으면 된다니, 살면 미래를 도모할 수 있다니. 누가 여포에게 욕을 하겠는가?”
“안된다, 이건 살려두면 안 된다. 여기서 죽이지 않으면 여포는 진짜 괴물이 될 것이야……!”
여포의 생에 대한 집착이 다른 만화의 레퍼런스를 빌려 그야말로 비장하고도 압도적인 분위기로 연출되었으며.
마지막.
인재를 사랑하고, 인재를 자신의 휘하에 두기를 즐겼던 조조의 망설임이 생생한 표정 묘사를 통해 드러났으며.
지금껏 존재감 없이 조조의 부하처럼 도열해 있던 유비에게 마침내 포커싱이 옮겨지고.
- 명공께서는 여포가 섬기던 정건양과 동 태사의 일을 잊으셨습니까?
- 저 귀 큰 놈이 가장, 가장 믿지 못할 놈이다!
애비 환승 전문가의 말을 믿느냐는 전직 뒤통수 피해자의 일침과.
그야말로 핵심을 찌르는 여포의 혜안이 대조적으로 한 컷에 담겼다.
그리고.
온통 먹칠만 묻어있는 암전된 페이지 속, 주인 잃고 쓸쓸하게 꽂혀 있는 방천화극의 녹슨 모습으로.
“…….”
“거, 여포, 갈 때도 예술적으로 가는구먼.”
“소설도 좋지만, 이렇게 보니 만화도 좋군…….”
사람들은 여운을 만끽했다.
그리고, 페이지를 넘겨.
마침내 ‘두 영웅’ 만화가 끝난 후 마지막, 막간 광고 페이지.
[두 영웅을 기반으로 한 트레이딩 카드 게임, 출시 예정!]
[화려한 일러스트를 바탕으로 즐기는 수집의 참 재미!]
[소설에 등장하는 수많은 영웅들을 내 손으로 모으자!]
“……?”
“트레이딩 카드 게임?”
“그게 뭐지?”
“보드게임 같은 건가?”
TRPG와 유사하게, 용사가 마왕을 무찌르는 류의 내용을 담아낸 보드게임은 이미 이 세계에 존재했다.
몹시 비싸지만, 드워프와 엘프를 형상화한 조각상을 활용해서 서로 땅따먹기하는 보드게임 또한 이미 이 세계에 존재했다.
하지만.
베르투스 공작이 적선한 후원금을 야금야금 흩뿌리면서 미식과 식도락의 세계에 어느덧 빠져든 김율과 히스토리에.
두 생태계 교란종은 더 많은 돈을 벌고 싶었다.
다시는 딱딱한 빵과 밍밍한 수프를 먹고 싶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 강렬한 욕망은 곧 자신들이 보유한 IP와 더불어서, 고품질의 일러스트를 쉽게 만들어낼 수 있다는 독점적 시장 지위를 활용하는 방향으로 사고를 뻗친 결과.
아직 나름대로 클린함을 유지하고 있었던 판타지 세계에.
카드 팩 가챠라는 사악한 문명의 전조가 꿈틀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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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를 너무 빨리하신 거 아닙니까?”
“원래 마케팅은 기대감을 끌어올리는 것부터 출발이야. 사람들은 상상을 먹고 사는 동물이라고.”
“흠, 상상이라.”
상상력이라는 걸 아직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깡통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걸 눈에 담으며.
나는 이세계에 TCG라는 독을 풀 준비를 차근차근히 해나갔다.
사실, 꽤 오래전부터 생각하고 있었긴 했다.
딱히 딱지겜을 선호하는 편은 아니기도 하고, 룰 자체도 MTG나 유■왕처럼 복잡하게 파고들진 않을 것이다.
그건 조금 더 나중에.
삼국지가 아니라, 지구 역사 전체를 대상으로.
지금은 딱 선술집에서 즐길 수 있을 정도로만.
“그래서, 왜 카드 게임입니까? 다른 미디어 믹스 수단도 많을 텐데요. 만화도 괜찮지 않나요?”
“결국 삼국지의 가장 큰 장점 중 하나는 캐릭터. 근데 그 캐릭터들을 하나하나 소설 속에서 설정을 다 담아낼 수는 없으니까. 그리고, 또 만화 그릴래?”
“그건 좀.”
그렇다.
최대한 주인공 위주의 서사를 풀어가는 과정에서, 정사나 연의에서 분명히 존재감을 크게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다루지 못한 인물들도 많았다.
지금까지 그렇게 잊힌 친구들을 대표적으로 꼽자면.
먼저, 황보숭과 주준과 같은 슈퍼 올드비.
……사실 이건 원래도 인지도가 높지 않다.
기껏해야 삼국지 배경 대체역사물에서 초반부에 존재감을 크게 드러내는 정도.
또, 동탁 진영에서는 이각과 곽사.
서량이 자랑하는 인간병기들.
유부녀 파트에서는 호거아를 중심으로 액션씬에 치중한 나머지, 가후의 모략이 제대로 담기지 않았으며.
당장 여포의 사망 장면만 하더라도 일침왕 진궁과 더불어 지금은 미약하지만 끝은 창대할 장료까지.
조조 진영 인물들도 마찬가지다.
하후돈은 그나마 애꾸눈 기믹과 더불어 적절한 일러스트 삽입으로 존재감을 챙겼지.
우리 사나이가 좌절감을 키우는 황금투구의 조홍 등, 따로 서사를 할당하기 애매한 친구들은 더욱 그랬다.
즉.
소설로 담지 못한 것들은 마치 인물 열전처럼 카드 팩에 담아서 풀겠다, 가 내 대전략이었다.
겸사겸사.
“……일러스트, 이래도 되는 겁니까?”
“당연히 되지.”
사람들은 왜 가챠 게임을 하는가?
게임성이 좋아서? 그럴 수도 있다.
게임의 본질은 재미니까.
하지만 게임의 재미보다 더 우선시되는 건.
잘 빠진 캐릭터와 강렬한 캐릭터성이다.
이는 찌찌발도 하나로 세탁기를 완벽하게 돌린 덴덴이의 압도적인 매출로 증명할 수 있다. Q.E.D.
“아무리 그래도…… 본편에서 멀쩡한 사내로 나오는걸, 성별을 바꾸는 건.”
“그니까 SSR이지. 통한다고.”
관우는 어떻게 태어나는가.
R등급 관우 알에서부터 부화해서.
SR등급 관우로 성장한다.
그리고 이제 SSR은 2가지 테크트리.
SSR등급 무신 관우.
SSR등급 관우(미소녀).
당연한 상식 아닌가?
“그딴 게 어떻게 상식이 되는진 모르겠습니다만…….”
아직 신생아라서 그런가, 깡통이는 이런 오묘한 이치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눈을 덜 떴구나.
TS를 더 먹도록 하거라.
* * *
“눈에 흙이 들어가도 그건 안 되는 것이와요! ……잠깐! 왜 모래를 줍는 데스와?!”
불행하게도, 김율의 관우 알부터 관우 미소녀까지 계획한 거창한 프로젝트는 대주주 선에서 커트당했다.
“후, 세상이 밉다…….”
“도대체 무슨 세상을 살아온 것이와요? 기껏 멋있는 사내로 인기를 끌고 있는데, 갑자기 미소녀라니!”
“그렇다면 이 폭유 하이엘프 유비만큼은.”
“그건! 절대! 안되는 데스와!”
“지금 캐릭터에 질투하는 겁니까?”
“지랄하지 말라는 데스와!”
클로에는 이마를 짚었다.
물론, 물론 아주 조금.
자신에게 허용되지 않은 경치인 저 풍만한 유방이 하이엘프의 격조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 바 있지만.
그러면 도대체 유비는 뭐가 되는가.
아우들과 우애를 두텁게 하려고, 어려운 시절에도 같은 침상에서 함께 고통을 곱씹는 그 의형제의 끈끈한 우애가…….
“마치, 마치 관우와 장비를 몸으로 꼬신 것 같은 느낌으로 변질되어 버리는 것이와요!”
“그래서 관우와 장비도 여자 캐릭터로.”
“안된다고오오!”
결국, 엘프의 고귀한 말투까지 꺾인 채 화를 잔뜩 낸 후에야.
클로에는 입이 삐쭉 나온 김율을 제압할 수 있었다.
.
.
.
그렇게 원작자의 아이디어를 짓밟고, 훼손하고, TS 미소녀 관우를 그저 흔적 기관만 남도록 바꿔 버린 클로에였지만.
그녀는 진지하게 김율이 던진 아이디어를 실현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그야.
냄새가 났다.
지금까지 맡아보지 못한, 진한 돈 냄새가……!
인쇄야 진리일보의 설비를 일부 활용하면 그만.
“짝퉁이 생기지 않도록 하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근데 그게 가능할진 잘 모르겠군요.”
“그건 본녀에게 맡기는 것이와요!”
도대체 어디에서 살다 온 야만인인지.
율리시스, 김율은 마법의 잠재력을 너무 무시하고 있었다.
클로에는 즉석에서 김율이 만들어 온 시제품, SSR 관우 카드를 손에 쥔 채 주문을 읊조렸다.
비록 최근에는 매일매일 귀나 잡아당겨지는 신세였지만.
클로에는 어엿한 5위계 마도사였다.
애초에 엘프는 마력 친화도가 높기도 했고, 파멸적인 활 솜씨 대신 압도적인 마법 재능을 타고난 그녀였다.
마법사의 탑을 도중에 자퇴하지만 않았어도 분명 더 높은 경지까지 도달할 수 있었으리라.
“이렇게, 마력을 부여하면.”
카드가 공중에 부웅 뜨면서, 묘한 빛을 내면서 회전하기 시작했다.
“오. 가챠 연출.”
김율이 내뱉는 이해할 수 없는 단어를 무시하고서, 클로에는 섬세하게 마력을 조율했다.
그리고, 그 결과.
“헉……!”
카드의 위로, 마치 AR 홀로그램처럼 관우 일러스트의 환영이 떠올랐다.
“오홋홋! 이게 바로 본녀의 대단함인 것이와요!”
클로에의 콧대가 1인치 높아졌다.
김율의 시선이 이토록 우호적인 때가 또 있었던가.
항상 그의 시선에는 묘한 엘프혐오적 감정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오늘은 다르다!
내가 인간을 지배할 수 있다!
“마법이 깃든 물건에는 항상 시전자의 마력이 함께 잔향처럼 깃들기 마련이와요. 그렇기에, 감별 마법을 쓴다면 그 마력의 출처를 추론할 수 있으니, 완벽한 위조 방지 수단이 되지 않겠사와요?”
“그래서, 하루에 몇 장 만들 수 있습니까?”
“음……. 초천재 마도사인 본녀 기준으로, 100장은 거뜬할 것이와요!”
“그러면 위조 방지 기술은 클로에가 다 하는 걸로 하면 인건비도 절감하고 좋군요. 진행합시다.”
“엣?”
괜히 자신의 마법을 뽐냈다가, 졸지에 코가 꿰인 클로에였다.
* * *
히스토리에에게 채찍질하고, 클로에의 귀를 잡아당기며 새로운 사업 모델을 확장하기 위해 매진하면서도.
김율의 연재는 멈추지 않았다.
물론, 여포의 죽음을 아주 비장하게 만화라는 치트키까지 써가면서 잘 담아낸 것까진 좋았지만.
“흠…….”
“요즘, 전개가 조금 늘어지지 않나?”
“확실히, 조조의 밑으로 유비가 들어가니까 이야기가 조금 심심한 감이 있어.”
“소재가 다 떨어진 건 아니겠지?”
“에이, 설마. 이제 조조는 기반을 탄탄히 다진 셈인데. 아직 원소와의 문제도 남아있으니까.”
독자들은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여포의 죽음 이후.
조조는 유비를 허창으로 데려왔다.
그리고 좌장군이라는 높은 관직도 줬고, 관우와 장비에게도 중랑장이라는 어쨌든 높아 보이는 관직을 줬다.
그리고 조조 편의 묘사를 보면, 조조는 유비를 어떻게든 잘 써먹을 생각이 만만이었고.
유비 편에서도 허창에서 사람들 만나고 인사 좀 하고, 조조의 애착 피규어 행세를 충실히 하는 내용에다가.
심지어 뭐 하라는 일은 안 하고 농사나 짓고 있는 한량 같은 내용만 나오고 있었다.
“음……. 차라리 이런 내용보다, 그냥 미 부인이랑 알콩달콩한 내용이 더 낫지 않나……?”
이제는 로맨스 파트가 아니더라도 김율의 소설을 유심히 읽기 시작한 로젤린도 고개를 갸웃거렸으며.
“으음, 으으으음, 김율, 김율이니까……?”
살아있는 누렁이 계의 리빙 레전드, 에스테아마저도 그 슬로우 템포에 꼬리를 파닥이지 않는 사태가 벌어졌다.
하지만.
“자, 슬슬 시작해 볼까.”
김율은 본업을 내팽개치고 신사업에만 치중하는 근시안적 판단을 내리진 않았다.
오히려 동기 자체가 삼국지 프랜차이즈를 더 유명하게 알릴 생각이었으니, 본편의 연재 또한 중대사항.
단지 그는 잠깐 무릎을 꿇고 추진력을 모았을 뿐…….
그의 진심 펀치.
정확하게는 나관중이 재창작한 희대의 진심 펀치.
의대조에서 논영회로 이어지는 완벽한 플롯이 세상에 등장할 준비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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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건……?”
“황제 폐하의 밀지일세.”
동승은 허리띠 사이의 틈에서 드러난 밀서를 유비에게 보여주었다.
작금의 한 황실이 처한 상황에 개탄을 담아낸 절절한 편지.
너무나도 어린 나이에, 그것도 자기 의사와 무관하게 황제의 자리에 올랐으며, 아직 스물이 채 되지 않은 황제, 헌제.
그의 가슴 속에서 끓어오르는 외침이 밀서에 담겨 있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조조를…… 추살해라…….”
“쉿. 듣는 귀가 있을 수 있네.”
동승의 제지에도, 유비는 떨리는 손을 참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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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려 황제의 밀서.
그것도 더블 주인공 중 하나인 조조를 죽이라는 편지를 받은 유비 파트의 파멸적 전개!
그리고 거기에서 끝이 아니었으니.
다음 날.
또다시 정치 얘기만 고봉밥으로 담아낸 조조 파트의 마무리에서.
- 유비에게 초대장을 보내게. 오늘 술이나 한잔하자고.
아무렇지도 않게, 무심하게 던져진 한 줄에.
“……설마, 들킨 건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벌써?”
“이러면, 황제와 유비…… 둘 다 위험해지는 거 아냐?”
사람들은 긴장감에 차오른 채.
다음 페이지를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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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비는 텃밭에서 호미질하던 손을 멈췄다.
흙 묻은 손을 대충 털면서.
‘……올 것이 왔군.
그는 속으로 긴장감을 삼켰다.
하필이면 연판장에 이름을 남긴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단순한 연회일까?
아니. 그럴 리 없다.
조조라는 인간은 그렇게 단순한 사람이 아니다.
그의 모든 행동에는 목적이 있다.
그 목적은, 무엇일까.
유비는 하늘을 우러러보았다.
.
.
.
연회라고 하기에 거창한 자리를 짐작했거늘.
유비는 속내를 숨긴 채 정자 한가운데, 홀로 앉아있는 조조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두 영웅의 시선이 마주쳤다.
조조의 눈은 분명 호의적인 웃음을 담고 있었지만, 그 안에는 예리한 칼날과도 같은 기운이 담겨 있었다.
유비는 최대한 몸을 낮추며 공손하게 읍했다.
“승상, 부르셨습니까.”
“좌장군, 오셨소이까. 마침 매실이 아주 잘 익어서 말이오.”
그의 말처럼.
자리에 앉아 공손하게 술잔을 들어 올린 유비의 잔에는 이내 조조가 친히 따라준 매실주의 청량한 향이 감돌았다.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져 내릴 듯한 어둑어둑한 하늘 아래에서.
두 사람은 잔을 나누었다.
최대한 평온한 표정을 유지하면서도, 유비의 머릿속은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지금까지의 분위기를 보아했을 때.
의대조가 발각당한 것은 아닐 터.
그렇다면 왜 갑작스럽게 자신을 불러냈을까.
그런 고민을 삼키던 와중.
“좌장군, 아니, 현덕. 용의 변화에 대해 알고 있나?”
화두를 먼저 던진 것은 조조였다.
“자세히는 모릅니다만…….”
유비의 비어있는 잔에 다시금 매실주를 채워주면서, 조조는 말을 이었다.
“용이란 놈은 커졌다가도 작아졌다가, 모습을 자유자재로 바꾸지. 작게는 바늘처럼 숨어버리고, 크게는 온 세상을 뒤덮는다네. 지금처럼 봄이 무르익으면 비로소 구름을 타고 하늘로 솟구치지. 마치 천하의 영웅처럼 말일세.”
자신의 잔에도 쪼르르, 따른 직후.
조조는 술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현덕이 보기엔, 지금 이 천하에 누가 영웅이라 불릴 만한가?”
유비의 심장이 순간적으로 철렁 내려앉았다.
말 속에 담긴 가시가 자신을 콕콕 찌르는 듯한 중압감에, 그의 등줄기에는 자신도 모르게 식은땀이 한 줄기 또르르 흘러내렸다.
정답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정답을 말할 수 없었다.
일단은 의중을 떠보는 것이 먼저.
“원술은 어떻습니까? 회남에서 옥새를 쥔 채 칭제를 준비하고 있지 않습니까.”
조조는 코웃음을 쳤다.
“허상뿐인 놈. 곧 뼛가루도 못 찾고 꿀물이나 찾으면서 말라비틀어져 죽어가겠지.”
“그럼…… 그의 형, 기주의 원소야말로 영웅이라 부를 수 있겠지요. 사세삼공에, 드넓은 영토를 자신의 아래에 두었으니 말입니다.”
“하! 그 허세만 가득한 욕심쟁이에다가 겁쟁이 말인가? 내 장담하지. 우유부단함이 이내 자기 목을 조를 걸세.”
“강동의 손책 또한 호랑이에 비견되는 무예와 통솔력을 갖추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아비의 후광을 등에 업은 젖비린내 나는 애송이에 불과하지. 곧 제 성질머리를 이기지 못하고 나가떨어질 게 틀림없네.”
이후로도 유비의 입에서는 여러 이름이 나왔다.
유표, 유장, 장수, 한수…….
거칠게 쏟아지기 시작한 빗줄기와 더불어, 유비가 읊조린 이름들은 하나하나 조조에 의해 논파 당했다.
정자 안의 공기가 싸늘하게 얼어붙는 듯한 침묵이 잠시 이어졌다.
그 숨 막히는 침묵을 깨버린 것은, 조조.
그는 자기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이내 그 손가락을, 천천히, 유비에게로 돌렸다.
그의 입가에서 의중을 알 수 없는 기이한 미소가 빛났다.
“지금, 하늘 아래에서 영웅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은 오직 유현덕, 자네와 이 조조밖에 없다네.”
그 말을 듣는 순간.
유비는 자신의 속내가 갈기갈기 찢긴 채 전시된 듯한 기분을 느꼈다.
지금껏 숨겨왔던 생각.
한 황실의 후예로서, 천하를 바로 세우겠다는 야망을.
눈앞의 사내는 전부 꿰뚫어 보고 있었다.
손에 쥐고 있던 젓가락이, 유비의 의지와 관계 없이 바닥으로 허망하게 떨어졌다.
쨍그랑──!
날카로운 파열음이 정적을 무참히 깨어버림과 동시에.
쿠르릉, 쿠쿵……!
하늘이 찢어지는 듯한 굉음과 함께 번개가 번쩍였다.
그 순간.
“흐아아아! 하늘이여!”
유비는 몸을 웅크리며 술상 밑으로 기어들어가는 시늉을 했다.
그리고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정말로, 고작해야 천둥소리 따위에 대경실색해 버린 겁쟁이처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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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유비의 의중을 모두 간파하고 추궁하는 듯한 조조의 압박을, 쫄보 코스프레로 빠르게 탈룰라를 시도하는 유비의 모습은 여러 사람의 심금을 울렸다.
“하이 엘프가 한낱 번개가 치는 것 가지고 겁에 질릴 리가 없는 것이와요! ……흐꺅! 지금 뭐 하는 짓인 것이와요?!”
당장 엘프 최고존엄설을 밀던 클로에 또한 유비의 깐프 행동에 물음표를 띄웠으나, 김율의 기습적인 놀래키기에 함락당한 채 개허접같은 비명을 지르고야 말았다.
“으응? 나, 바늘처럼 작아질 수 있었나?”
바늘로 폴리모프했다가, 바늘에는 발성 기관이 없다는 사실을 몸소 체득한 드래곤도 있었다.
물론 용언 마법은 굳이 입으로 영창을 외우지 않아도 시전할 수 있었으니, 그녀는 약 10분간의 사투 끝에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런 바보들을 제외하고서는.
“그래서, 조조는 유비가 역모에 가담했다는 사실을 눈치를 챈 건가……?”
“글쎄. 눈치챘다면 애초에 이렇게 떠볼 게 아니라, 바로 죽여버려도 되지 않나?”
“근데 지금까지 조조의 행적을 보면, 유비를 아주 알뜰살뜰하게 잘 부려 먹고 싶다는 느낌이란 말이지. 그래서 간접적으로 경고를 준 게 아닌가?”
“흠……. 그것도 일리가 있군.”
소설의 내용과 장면의 여운을 곱씹는 사람들.
“과연 번개가 친 게 우연일까? 하이엘프라면 마법에도 통달했을 터. 일부러 번개를 내리치게 해서 분위기를 반전시킨 게 틀림없어!”
“그래도 쫄보처럼 술상 밑에 들어가서 벌벌 떠는 건 추하다고 생각해요…….”
“이 새끼, 너 드워프 쁘락치지?”
“드워프였다면 그 자리에서 매실주 원샷 때렸죠……. 왜 술을 찔끔찔끔 잔에 부어서 마십니까……?”
하이엘프 만능론이 한층 진화하여, 소드마스터에 이어 대마도사의 반열에 올라버린 유비 음모론.
“조조가…… 너무 무섭다. 만약 내 상관이었으면…….”
“일부러 현덕이라는 예명을 불러가면서 사적인 관계로 끌어들이고, 하나씩 하나씩 확인 사살해 가면서 조여들어 가는 것이 마치 서스펜스를 보는 느낌이군.”
“자고로 황실의 후예가 품위를 잃는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며……!”
“말로 아니라고 백날 풀어내는 것보다, 저렇게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 더 효과적이지. 확실히 유비가 정치를 잘해.”
정치극으로서의 ‘두 영웅’을 곱씹는 사람들.
“이건…… 흑마법을 암시하는 게 틀림없다! 원술은 썩어 문드러질 좀비…… 원소는 속은 텅 빈 스켈레톤…… 손책은 금방 재가 될 구울……. 조조는 리치가 되고 싶은 거야!”
“저 새끼 끌어내.”
“크아악!”
자신도 모르게 흑밍아웃을 해버린 머저리.
“아무리 봐도, 용은…… 그걸 묘사한 것 같은데?”
“작아졌다가…… 커졌다가…….”
“구름을 타고 솟구친다는 것은 역시 그 현상을 의미하는 것이겠지?”
“유비가 책상 밑에 들어간 것은, 어쩌면, 조조의 우람한 것을 보기 위해……?”
그냥 미친 사람들까지.
그리고, 이 장면에 도착하고서야.
비로소 사람들은 소설의 제목을 온전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두 영웅.
진짜 두 명의 영웅이 중심이 되는 이야기였음.
황족이 혈통을 숨김.
안 숨기면 조조한테 벌써 모가지 잘렸음.
악당이 야망을 숨김.
안 숨기면 지금처럼 계속 반란이 일어남.
논영회 장면을 통해, 비로소 소설의 주제 의식과 제목이 정합성을 가지고 완벽해진 것이었다!
물론 그런 견해를 전해 들은 작가, 김율은.
“그건 또 뭔 소리람?”
귀를 한 번 후볐다.
무릇 출제자의 의도를 묻는 4점짜리 문제 또한, 실제 출제자의 생각과는 다를 수 있는 법이었다.
* * *
삼국지를 소설로 써야겠다는 생각을 한 당시.
나는 이야기의 흐름을 크게 세 파트로 나누었다.
1부. 황건적의 난부터 군웅할거── 딱 지금의 논영회까지.
그나마 조조와 유비가 최대한 접점을 많이 가지는 초반부 파트라고 할 수 있었다.
2부. 관도대전부터 적벽대전까지.
조조 파트야 워낙 쓸 게 많으니 제외하고.
유비 파트가 문제였다.
- 삼국지 어디까지 읽으셨어요?
- 유비가 도망치는 데까지 봤어요!
- 하, 씨. 어디지?
역돌격의 제왕, 해병깐프 유비 님님의 무한한 도망 전설 중 굵직한 것이 나올만한 시기라.
아무리 생각해도 고구마 소리를 잔뜩 들을 것 같았다.
물론 장판파와 같이 뽕맛 넘치는 에피소드가 중간중간 튀어나오긴 하나.
장판파의 주인공은 유비가 아니다.
조운과 장비지.
유비가 거기서 한 짓?
아들놈 필요 없다고 바닥에 던져버린 덕분에, 스턴과 PTSD가 몸에 남은 유선의 능력치가 수직으로 하강하지 않았는가.
당장 조운 나데나데하려고 나라의 미래를 내다 던진 꼴이었다.
그러니…….
“슬슬 주인공을 교체할 준비를 해야겠군.”
“사람들이 받아들이겠습니까?”
“밑밥을 미리미리 깔아둬야지. 그리고 여기 사람들은 그런 부분에 있어서 꽤 관대하더라.”
아무래도 판타지 두뇌가 기본 탑재되어 있어서 그런지, 독자들은 스케일 큰 걸 좋아한다.
지금 제국일보에 연재되는 1등 작품인 ‘죽었다 깨어도 수련’을 보았는데, 과연, 1등은 1등인 이유가 있었다.
굉장히 치밀하고 방대한 짜임새와 더불어, 아버지가 쌓은 수련치가 대를 타고 아들에게 누적되는 시스템에서 천재의 편린을 느꼈다.
모 평론가는 ‘인류는 이 소설을 보기 위해 탄생했으리라 여겨진다’라는 극찬을 남기기도 했으니까.
그러니, 나도 부담 없이 세대를 교체할 수 있다.
시기는 관도대전 직후.
카드팩 출시와 동시에, 주인공을 바꾼다.
작품명.
역대급 천재가 충성심을 안 숨김.
벌써 동남풍이 살랑살랑 불어오는 듯한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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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영회 파트로 내 가슴 속에 있는 삼뽕 또한 화끈하게 불태운 후.
나는 한동안 독자 반응을 멀리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조조는 귀 큰 놈 믿고 있다가 졸지에 통수 맞은 병신이 되었다.
유비는 깐프가 깐프 행동한 게 뭐가 문제겠냐만, 어쨌든 깐프 행동했다고 욕을 먹었다.
거기에다가 내가 무슨 논평을 덧댈 수 있겠는가.
당장 클로에에게 ‘사실 유비는 기회주의자였습니다.’라고 속삭였는데, 돌아온 반응은.
- 공식이 뭘 아는 데스와! 조조는 어차피 극악무도한 악당! 고귀한 하이엘프 혈족을 핍박하는 악의 축인 데스와!
…….
그랬다.
트립 전에는 나도 종종 썼던 표현이라 반박할 수가 없었다.
심지어 거기서 끝난 게 아니라.
분노 게이지 MAX로 채운 조조가 레이지 아트를 켜고 건강 박수를 짝짝 쳐주니, 그때부터 대도주 유비 전설의 화려한 서막이 펼쳐진 것이다.
그때부터 유비 서사는 메인이 아니라 서브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야…….
목만 오지 않은 관우는 무적이니까.
그래도 아예 실종되었다가 나중에 은근슬쩍 산적이 되어 합류한 장비보다는 낫지 않겠는가?
하지만 연재소설의 금기가 있다면.
아무리 잘 조형된 조연이라도, 조연이 주인공을 밀어내는 순간 소설의 인기가 떨어지기 마련이다.
차마 이 상황에 두 씨까지 끼얹어버리면 카드 장사에도 지장이 있을까 염려하여 피눈물을 흘리면서 그 부분을 덜어냈다.
그러니.
관도대전까지는 조금 벽 보고 쓰자.
그게 내 정신건강에 나을 것 같다.
그거 말고도 다른 집중할 만한 것도 많았으니까.
“조금 더 화려하게.”
“끄응……! 환상 마법은 그렇게 막 쥐어짠다고 나오는 게 아닌 것이와요!”
예를 들자면, 클로에를 쥐어짜는 거라든가.
여러 논의 끝에 우리는 가칭 ‘영웅집결’의 초안을 완성했다.
규칙은 당연하게도 존재 자체가 파쿠리의 여신, 히스토리에가 초안을 잡아주었다. 베이스는 하■스톤이라는데, 난 제대로 안 즐겨봐서 모르겠고.
등급은 R, SR, SSR.
기본적으로 판매하는 베이직 세트는 모두 R등급으로.
그리고 이제 가챠 팩을 뜯으면 안에는 5개. 가챠 팩으로만 얻을 수 있는 R등급과 더불어, 여기서부터 사악한 확률 놀음이 들어간다.
“그래서 이 조운이라는 인물은 비중도 없는데 왜 SSR인 것이와요?”
“스포일러입니다.”
“제갈량은 누구인 것이와요? 왜 이렇게 멋있게 부채를 살랑거리고 있는 것이와요?”
“스포일러입니다.”
“흥!”
앗.
깐프가 삐졌다.
어쨌든.
확률 놀음이 들어가는 만큼, 획득했을 때의 쾌감을 마련해줄 필요가 있었다.
일단 이 카드가 들어가 있는 포장 팩.
찢으면 빛이 난다!
반짝반짝! 두근두근!
금색! SR!
와! 무지개! SSR!
……마법이란 실로 대단했다.
그리고 이제 SR 이상의 인물 카드는 지금 클로에가 노가다하고 있는 것처럼, 카드 위에 홀로그램이 둥둥 떠다니게 하고.
SR은 스탠딩만. SSR은 전용 모션까지.
완벽한 차별화 전략을 통한 수집 욕구 자극이다.
처음에는 이게 팔리겠냐고 의문을 표하던 사람들도, 완성된 카드 팩 몇 개를 던져주니까 아주 눈이 벌게져서 뜯더라.
아.
시간이 빨리 갔으면 좋겠다.
내 이 악마적 발명품(아님)을 빨리 이세계에 풀어서 도파민 파티를 벌이고 싶구나……!
“아, 전달할 게 있사와요.”
“뭔데요?”
“투자 계획서를 올리니 아빠가 김율을 한번 만나보고 싶다고 한 것이와요. 시간을 비워두는 것이와요.”
“흠, 뭐 그 정도야…… 잠시, 아빠?”
이 허접 깐프 영애의 아버지라면, 분명.
…….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
왜 난 자꾸 늙은이들만 꼬이는 건가.
이번에도 인간 방패로 로젤린을 데려가야 하나?
요즘 성녀님 좀 보기 무서운데…….
* * *
슈나이센 폰 위스페라우드.
통칭 슈나이센 공작.
그는 전형적인 하이엘프였다.
인간에 비해 아득히 기나긴 세월을 살아가면서 터득할 수 있는 지혜가 그의 영성을 충만케 했고.
쉽게 노화하지 않는 육신은 언제나 강건한 생명력을 그에게 선물해주었으니.
자연스럽게 마음에 들어차는 것은 자연에 대한 감사.
그리고, 하이엘프야말로 세계를 선도할 종족이라는 자부심!
살짝 삐뚤어지면 콧수염을 달고 까매지거나 빨개지기 쉬운 사상으로 똘똘 뭉쳤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는 처세의 능신이자, 치세의 능신이었다.
바꿔 말하면 권력과 힘의 향기를 잘 맡았다.
그의 딸이 돈 냄새를 잘 맡는 것처럼.
그리고 그의 코에.
한 사내의 향기가 서서히 풍겨오기 시작했다.
베르투스 공작을 글로써 엿먹임.
베르투스 공작의 삼남을 무력으로 제압함.
딸의 귀를 마구 잡아당기면서 희롱을 일삼음.
그 괴물 성녀와 두터운 친분을 가지고 있음.
출신 성분은 불명확하며, 심지어 흑발흑안.
드라고니안과도 친분을 유지하고 있음.
“하늘에서 뚝 떨어진 듯 어느샌가 나타난 존재라. 심지어 신분 등록도 일 년 조금 전에 마쳤고.”
물론 제국의 행정이 완벽하진 않아, 신분이 등록되지 않은 사람들도 많았지만.
너무나도 공교롭게 스무 살의 나이로 하늘에서 뚝 떨어진 듯 등장하는 케이스는 당연히 거의 없었다. 차라리 평생을 무등록자로 살면 몰라.
심지어 발급해준 사람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신분이 등록되어 있다는 건, 필연적으로 무언가 꼼수가 있었다는 뜻.
결론은 하나였다.
오래전에 은퇴한 성국의 용사.
그게 아니라면 존재를 설명할 수 없었다.
애초에 용사는 마경 돌파의 책무뿐만 아니라, 국가의 전략 병기의 역할을 함께 수행하는 존재.
비록 지금은 용사를 전장에 앞세우는 문화가 거의 사라졌다고 하지만, 몇십 년 전까지만 해도 용사는 마경을 막는 자들이 아니라 적을 분쇄하는 자였다.
그렇기에 용사의 정체는 극비리에 부쳐지는 것이 관례.
괴물 성녀가 마경에 발을 들이지 않는 것도, 그 짝인 용사의 파트너로 점지되었기 때문이 아닌가.
용사라는 족속들은 사실 은퇴가 없다.
은퇴하기도 전에 마경에서 생을 마감하기에.
하지만, 그 사내는 성공적으로 은퇴한 후, 성국도 아니라 제국에서 여생을 즐기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그 말인즉슨, 마경 토벌대로서도 쉬이 동원할 수 없을 정도의 압도적인 강자라는 거겠지.”
심지어 그 사내가 마경에서 아무 상해도 입지 않은 채 귀환했다는 첩보까지 극비리에 얻어낼 수 있었다.
역시 인간은 멍청하다.
명석한 두뇌의 단 1%만 쓰더라도 명확히 추론할 수 있는 것을, 왜 베르투스 공작은 몰라보고 사서 부스럼을 만드는가?
게다가 실패할 게 뻔한 역모를 기획하다가 괜히 실패하기까지. 어리석기 짝이 없었다.
물론 그가 깨달은 이 어마어마한 사실을 굳이 딸에게는 일러두지 않았다.
분명히 그의 딸이라면.
- 앗, 잇, 윽, 엣, 요, 용사님데스와?
“고장 나겠지.”
차라리 지금처럼 허물없는 사이가 나으리라.
……그 바보가 육탄공세로 용사를 홀릴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봐야겠지만, 그래도 자연스럽게 가까이하면 정이라도 들지 않겠는가.
아무리 성녀라 한들 단명종.
자신을 닮아 시들지 않는 미모라면 언제고 그 전략 병기의 마음을 녹여낼 수 있으리라.
못 하면, 뭐.
클로에니까 어쩔 수 없지.
그는 아버지이기 이전에 냉정한 책략가였다.
.
.
.
혼자서 쉐도우 복싱을 열심히 갈겼던 슈나이센 공작이었지만.
“안녕하십니까. 김율이라고 합니다.”
“안녕! 나는 에스쟝이야!”
“어르신한테 버릇없게.”
“응? 어르신? 누가?”
소설 따위가 지구 역사를 개연성에서 따라잡을 수 없듯.
슈나이센의 상상력 또한 압도적인 현실 앞에서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에, 에, 에스테아……?”
“응? 나를 알아?”
슈나이센 공작은 재빨리 머릿속에서 ‘포섭해서 아군으로 만들면 유용할 것 같은 인물’ 리스트에 들어있던 김율의 이름을 지웠다.
그리고.
‘잘못 건드리면 가문뿐만 아니라 국가 전체가 박살이 날 수도 있는 걸어 다니는 재앙’ 리스트를 만들어서.
맨 윗줄에 김율과 에스테아의 이름을 적어넣었다.
그리고.
‘얼마나 멍청하면…… 드래곤을 못 알아보는 건가……?
속으로 탄식을 뱉었다.
분명 클로에가 이야기하기를.
- 꽤 귀여운 드라고니안과 가끔 놀아주는 걸 보니, 심성은 나쁘지 않은 것 같사와요!
드라고니안이라며.
드라고니안이라며……!
아무리 외형적 특징──
뿔과 꼬리가 있고, 인간의 피가 많이 섞였다면 숨길 수 있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지만.
드래곤과 드라고니안은 엄연히 다르다.
출현 빈도도 그만큼 다르긴 했다. 드래곤은 세기에 한 번 목격될까 말까 한 존재니까.
물론 인간으로 비유하면 이제 막 스무 살쯤 된 클로에에게 그 정도의 상식을 바라는 게 과한 일이긴 했다.
애초에 목격담을 클로에에게 전달해준 길포드조차, 에스테아를 그냥 진상 드래고니안 정도로 생각했을 정도였다.
“묻잖아. 아냐고.”
“스읍. 떽.”
“아르릉!”
“…….”
물론 저 강아지 같은 태도를 보면 어찌 저것이 드래곤이냐고 생각한 게 당연했을 수도 있지만…….
방금, ‘묻잖아, 아냐고.’라고 이야기했을 때.
슈나이센 공작은 종족치와 개체값에 아주 오래전 새겨져 버린 진득한 공포심을 느끼고야 말았다.
* * *
“그래서 진짜 아는 사람, 아니, 엘프였습니까?”
“아니? 그래도 그렇게까지 말종은 아닌 것 같네! 움, 순금!”
허망한 눈빛으로 에스테아가 금괴를 와그작 씹어먹는 걸 보고 있자니, 내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그래도, 뭐.
심심한 누렁이를 데리고 간 효과는 꽤 톡톡히 본 것 같다.
아무리 클로에가 바보 허접 깐프에다가 조금만 긁어주면 바로 원하는 게 톡 튀어나오는 자동판매기라지만.
또 베르투스 공작 사태처럼 이상한 오해에 휘말릴 수도 있었다. 늙은 생강이 더 무섭다는 표현도 있지 않은가.
- 흠……. 저도, 아니, 나도 그 사업에 관심이 좀 있어서 말일세. 투자를 더 본격적으로 하겠네.
……리틀 보이를 협상 테이블에 올려놓은 휠체어 맨을 만난 도-조의 심정이 그런 느낌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이야기가 수월하게 잘 풀리긴 했다.
어쨌든.
내 ‘영웅집결’ TCG의 가장 큰 걸림돌이었던 대량 양산 문제도 이제 말끔하게 해결된 것 같고.
“약속대로, 신작! 마구마구 써서 보여주는 거다?”
“그 정도야, 뭐.”
나도 모르게 제갈건을 쓰고 백우선을 팔랑거리는 에스테아의 모습을 상상했다.
웃음을 가까스로 참았다.
* * *
엘프의 마법, 그리고 심지어 마도 공학의 정수까지 합세하여 코 묻은 돈을 빨아들이기 위한 준비를 차츰 해나갈 무렵.
“캬……! 바텐더! 여기 관운장 한 잔 주시오!”
잔 아래로는 짙은 검은색이 침잠하고, 잔 위로는 살색에 가까운 붉은 컬러가 믹스된 칵테일, ‘관운장’은 바야흐로 제국 제일의 판매고를 올렸다.
“승상의 후의를 저렇게 저버리다니!”
“떼잉, 쯧쯧. 이래서 머리 검은 놈은 거두면 안 된다니까.”
관우 억까 헤이터들은 오관참육장이라는 희대의 몰살 이벤트에, 귀 큰 놈이나 수염 긴 놈이나 같은 개자식들이라며 야유를 퍼부었다.
어떤 간교한 간신이 그 보고를 가로챘는진 모르겠지만, 정작 조조 파트에서는 관우의 그 무례한 행각에 별 논평을 담지 않고서.
그저 묵묵하게 북진멸원의 기치를 들었다.
그렇게 조조는 오소, 백마를 거쳐 관도에서 원소를 찢어버리고, 겸사겸사 여남에 있던 귀 큰 놈의 꿀밤도 한 대 호되게 때렸다.
은근슬쩍 또 조조의 뒤통수 각을 보다가 제대로 뚝배기가 깨져버린 유비는 또다시 팬티까지 벗고 튀었다.
형주로.
똬리를 튼 와룡이 고요히 잠들어 있는 곳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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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율이 거주하는 도시의 이름은 카멜리아.
비록 다른 대도시들에 비해 규모는 작은 편이었지만, 그래도 예술을 사랑하는 그 열정만큼은 다른 도시에 비해 밀리지 않는다고 자부하는 곳이었다.
그곳에서도 가장 유명한 살롱을 꼽으라면.
단언컨대 ‘살롱 드 블랑’을 꼽을 수 있었다.
그리고.
살롱 드 블랑의 바텐더, 사무엘은 분위기를 주도하는 카리스마와 더불어서, 문학에 대한 소양이 있기로 정평이 난 사내였다.
“사무엘! 여기 카미카제 한 잔!”
“예이.”
오늘도 하인즈 씨가 주문하는, 이름도 유래도 불분명하지만, 맛 하나만큼은 강렬하다고 평할 수 있는 칵테일을 한 잔 내어주고서.
주문이 멎음과 동시에, 그 또한 자신을 위한 술을 한 잔 말았다.
미모사Mimosa.
발포성 포도주에 오렌지즙을 섞어서 만들어 낸, 청량하면서도 부드러운 맛의 칵테일을 준비한 후.
지금껏 탐독하고 있었던 책을 다시 펼쳐서 읽기 시작했다.
당연하게도, 그가 최근에 보고 있는 책은 이 살롱 드 블랑에서 가장 떠들썩한 신간, 헤라클레스 영웅담이었다.
벌써 네 번째 정주행 중이었다.
그가 소설의 세계로 다시 빠져들려는 순간.
짤랑──
또다시 살롱에 누군가가 들어오는 경쾌한 소리에, 아쉬움을 삼키고 사무엘은 고개를 들어 영업용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이내, 그 미소가 조금 더 진해졌다.
눈에 들어온 건.
최근 살롱에 드나들기 시작한 흑발흑안의 청년.
킴이었다.
본디 흑발흑안이라고 하면 제국에서 불길한 징조로 여겨지나, 몇 번 그와 이야기를 나눠본 결과 꽤 유쾌한 친구였다.
“마스터, 장사는 잘됩니까?”
“요즘 화제의 신작 덕분에 아주 호황이지. 어때, 오늘도 락스 온더락, 젓지 말고 흔들어서?”
“이제 락스 끊었습니다. 오늘도 제일 싼 걸로 부탁드립니다.”
“접수.”
이따금 왔을 때는 영 죽을상만 쓰면서 허구한 날 락스인지 뭔지 정체불명의 이상한 것을 찾아대던 그였지만.
적성을 찾은 것일까, 꿈을 찾은 것일까.
최근에는 묘하게 밝아진 느낌이 참으로 기꺼웠다.
“자, 술 나왔네.”
“감사합니다, 마스터.”
꼬박꼬박 마스터라는 괴이한 별칭을 붙이는 것도, 이 괴짜의 매력이리라.
“그러고 보니, 자네도 그 책을 봤나?”
“무슨 책이요?”
“헤라클레스 영웅담. 아주 기가 막히더군.”
“히힉.”
빨대로 술을 쪽 빨아 마시던 킴의 어깨가 살짝 들썩이며, 기괴한 웃음소리를 내뱉었다.
“흠? 벌써 한잔하고 온 건가?”
“히힉, 아닙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가게에 들어오자마자 킴은 굉장히 기분이 좋아 보였기에.
사무엘은 뭐 젊은 친구가 기쁜 일이라도 있었겠지, 하면서 대수롭지 않게 다시금 자신이 보던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다시 가게의 문이 열렸다.
정장을 차려입은 초면의 사내가 들어와서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김율의 맞은 편에 앉는 것을 바라보며.
킴이 유쾌해지는 데 도움을 주었을 것 같은 저 손님에게는 어떤 칵테일을 팔아야 하나, 하고 사무엘이 잠깐 고민에 빠진 순간.
“김율 작가님, 맞으시죠? 신문 연재에는 관심 없으십니까?”
“……?”
사무엘이 귀를 의심함과 동시에.
순간적으로.
왁자지껄했던 살롱에 아주 묵직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혜성처럼 나타나서 신들의 전쟁으로 무한한 상상력을 보여주고.
제우스의 연애담으로 파격이 무엇인지 보여주었으며.
헤라클레스 영웅담으로 주인공 중심의 서사에 혁신을 써 내려간 작가.
그리고 단언컨대, 현재 살롱 드 블랑에서 가장 인기 있는 작가의 이름이 오르내린 것이다.
사무엘은 자신도 모르게 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킴.
김.
……김율?
그리고.
“그, 혹시 실례지만 제가 여기에 있다는 건──”
“새싹과 가지 출판사의 편집자분께 전해 들었습니다. 최근에 여기 자주 오신다고, 특유의 흑발흑안을 보면 한 번에 알아볼 거라고──”
사내의 말이 채 끝맺어지기도 전에.
“김율! 김율이라고!”
“헤라클레스! 맞나? 자네가 쓴 게 맞아?”
“여기 서명 하나만 해주게!”
“왜 헤라클레스는 힘 줄 때 아자자잣이라고 외치나요? 시그니처 대사를 노리신 건가요?”
“그래서 헤라클레스가 저런 고초를 겪을 동안 도대체 제우스는 뭘 한 건가! 진짜 기간토마키아를 대비하기 위한 안배였던 건가?”
“히드라랑 백면귀룡은 무슨 관계에요? 혹시 마경에서 오신 건가요? 역시 흑발흑안! 불길함의 상징!”
살롱 안이 순식간에 광기에 휩싸였다.
.
.
.
광기가 가까스로 진정된 후.
김율이 마치 몇천 번 연습해 본 것처럼 능숙한 솜씨와 유려한 필체로, 살롱 멤버들이 각자 소장하고 있던 헤라클레스의 양장본에 모두 서명을 마쳤다.
이미 그의 앞에는, 살롱 회원들이 한 잔씩 사준 술잔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과연, 대작가는 주당이구만!”
“히힉, 힉, 대작가라뇨.”
“자네, 칭찬받을 때 꽤 간사하게 웃는군?”
마치 팬 미팅을 방불케 하는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그, 김율 작가님?”
“넵.”
“혹시 헤라클레스가 지옥에서 구해주었던 테세우스라는 영웅은, 어떤 사람인가요?”
질문을 받은 김율의 눈이 부드럽게 호선을 그렸다.
그리고는, 마치 몽상에 빠진 것처럼 잠깐 지그시 눈을 감았다가.
“헤라클레스를 가장 강력한 영웅이라고 꼽는다면, 테세우스는 가장 지혜로운 영웅이라고도 불리지요.”
이내.
천천히 노래하듯 테세우스의 일생을 읊조리기 시작했다.
구부러트린 나무에 여행자의 사지를 결박한 후, 나무를 펼쳐서 여행자를 찢어 죽이는 시니스.
여행자에게 발을 씻겨달라고 부탁한 후, 발을 씻겨주는 여행자를 걷어차 절벽 밑으로 떨어트려 버리는 스키론.
여행자를 포박하여 침대에 눕힌 후, 침대의 길이에 맞추어서 몸을 늘이거나 잘라내는 식으로 죽이는 프로크루스테스 등.
다양한 괴인들을 맞서서 정의롭게 인과응보를 실현하는 청년 테세우스의 이야기에.
사람들은 그저 숨도 쉬지 못한 채 몰입하여 경청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이야기는 흐르고 흘러.
“하…… 실타래를 이용해서 미궁을……!”
아리아드네와 함께 누구도 살아나온 적 없었다는 크레타의 미궁에서 탈출하고, 그 과정에서 미노타우로스와의 사투에서 마침내 승리한 순간.
“……그렇게, 테세우스는 불멸의 명성을 얻게 되었습니다. 아쉽게도 헤라클레스가 지옥에서 그를 구해내는 것은 조금 더 훗날의 이야기지만, 슬슬 제가 일어나볼 시간이 다 되었군요.”
마치 거리의 음유시인이 부드럽게 읊조리는 것처럼, 명징하게 직조된 김율의 이야기가 마침내 끝을 맺자.
차마 더 이야기해달라고 그를 붙잡을 사람은, 적어도 살롱 내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과연…… 천생 이야기꾼이로군. 왜 지금까지 그 재능을 썩혔는지 모르겠어.”
사무엘이 숨기지 못한 감탄사를 내뱉었으며.
그 자리의 모두가 고개를 끄덕여서 동의를 표했다.
* * *
크으…….
오졌다.
장례식장 매드무비로 틀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명장면이었다.
뭐, 진짜 힘숨찐 컨셉을 즐기고 싶었다기보다는, 아무래도 좀, 작가인 티를 내고 싶지 않았던 것도 있었긴 하다.
원래 독자 커뮤니티에 작가는 출입 금지인 게 상식이잖아?
……아닌가? 아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어쨌든 의도치 않은 작가 커밍아웃을 해서 수많은 관심을 파밍한 건 기쁜 일이기도 했지만…….
- 혹시 여장이 취미신가요? 그래서 그런 생생한 전개를?
……이건 좀 긁혔다.
고증입니다.
고증이라고요.
거, 헤라클레스 같은 대영웅도 가끔 에스트로겐이 터질 때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일부러 테세우스 이야기의 결말을 언급하진 않았다.
좀…… 많이 추하거든.
그 얘기까지 했으면 '또 드리프트를 박느냐'하고 바로 민심이 흉흉해졌을 가능성이 100%다.
.
.
.
집으로 돌아가는 길.
아까 받았던 명함을 만지작거리며 생각을 정리했다.
- 출간 소설의 시대는 점차 저물고 있습니다. 제국의 수도에는 이미 일간지에 소설을 연재하는 것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고, 점차 도서 형태의 책을 대체하고 있습니다. 김율 작가님, 저희에게 작품을 내보실 생각은 없습니까?
이른바 스카우트 제안.
……살짝 투고에 가까운 형태인 것 같긴 했지만.
출간 소설의 시대가 저물고 있다라는 말이 조금 내 심금을 울렸다.
생각해 보면 원래 역사에서도 그랬다.
인쇄 기술이 발달하면서 점차 완성된 한 편의 소설을 출간하기보다, 신문과 잡지 연재 형태로도 발전했다.
당장 셜록 홈즈가 연재된 스트랜드 매거진만 하더라도, 주홍색 연구 때까지만 해도 그렇게 인기를 끌지 못했지만 존버 또 존버하여 보헤미안의 스캔들로 보답을 받지 않았던가.
그렇게 머나먼 과거를 돌이켜보지 않더라도.
당장 교양 있는 한국인이라면 필수적으로 읽어야 할 장르 소설 또한, 대여점 시대를 걸쳐서 웹소설이라는 일일 연재 시스템으로 안착하지 않았던가.
스페인어 배울 시간에 웹소설 한 편 더 읽는 게 나았을 것이란 명대사가 괜히 나온 게 아니었다.
그리고, 나로서도 나쁠 것은 없었다.
신문이라면 더 많은 사람이 더 쉽게 소설을 볼 수 있다.
더 많은 사람이 지구의 역사를 알아가고, 거기에 흥미를 느낄 수 있다……!
“흐흐흐.”
물론 스킬 획득이나 판매량 메커니즘이, 일일 연재 환경에서 어떻게 바뀔진 모르겠지만.
상태창이라면 알아서 해주지 않을까?
어스름이 저무는 하늘 아래에서, 숙소로 향하는 골목으로 접어든 순간.
“오, 검은 머리. 요즘 인상이 피었어? 웃고 다니네?”
“돈 좀 만지니까 살만한가 봐?”
낯설지 않은 목소리가 고막을 파고들었다.
“토마스?”
한때 공사판을 전전하면서 만났던 놈 중.
질이 좋지 않아 가급적 엮이지 않으려고 했었던 랭킨 패거리가 골목에 죽치고 있었다.
“없이 사는 놈들끼리, 조금 나눠 써야지?”
랭킨 패거리의 행동대장 격, 1티어 양아치 토마스의 입꼬리에 깃든 서늘한 미소를 보아하니.
이 새끼들.
작정하고 기다리고 있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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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놈. 요즘 돈 좀 만진다던데?”
“그놈? 누구?”
손에 쥔 카드를 한 장씩 바닥에 내려놓으며, 랭킨은 심드렁하게 질문을 던졌다.
“그 재수 없는 검은 머리 놈.”
“아.”
랭킨은 희미한 기억 속에서 김율의 모습을 떠올렸다.
한때 불길함의 상징이었던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 그리고 사내새끼답지 못하게 조금 위축된 모습. 재수 없이 잘생긴 얼굴까지.
“걔가 왜?”
“뭐 소설인가 뭔가를 써서 큰돈 만졌다던데?”
“그래서?”
“뭐야, 두목. 그 심드렁한 반응은? 당연히 털어야지. 그리고 상납도 받아야지.”
“흠…….”
이상하게도, 랭킨은 그 제안이 내키지 않았다.
검은 머리에 대한 편견 때문일 수도 있었다.
엮이면 항상 좋지 못한 꼴을 당한다고 했으니.
.
.
.
그리고.
“어딜, 씹, 삥을 뜯고 다녀!”
빠아악!
랭킨의 직감은 틀리지 않았다.
처음에는 주춤주춤, 몸을 빼려고 했었던 김율이었다.
분명히 공포에 질린 모습이었지만.
바닥에 나뒹굴던 각목 하나를 주워 든 순간.
사람이 돌변했다.
분명 동작 자체는 어색한 면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나도 깔끔하고 예술적으로 휘둘러지는 각목의 궤적.
- 빠아악!
“커헉──”
부하 놈 한 명의 머리가 또 호쾌한 소리를 냈다.
벌써 쓰러진 놈만 넷.
그래도.
“허억, 허억.”
둔기를 다루는 실력은 랭킨이 전장에 있을 때 보았던 기사와 견주어봐도 뒤지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슬슬 김율의 체력은 한계에 치닫고 있어보였다.
반면, 이쪽은 아직 세 명이나 남아 있었다.
“랭킨! 슬슬 제대로 하자고!”
토마스의 외침에, 랭킨은 결단을 내릴 때가 왔음을 깨달았다.
이 정도로 판을 벌여놨으니 어쩔 수 없었다.
저기 거품 물고 쓰러진 놈들 입에 맥주라도 한잔 물려줘야 하지 않겠는가.
랭킨은 품 안에 숨겨두었던 단도를 뽑아 들었다.
그걸 바라본 김율의 눈빛이 순간 흔들렸지만.
“그래, 씹, 덤벼라! 빠따는, 지지 않는다!”
질 수 없다는 듯 목소리를 높이며 전의를 불태웠다.
랭킨은 피식 웃었다.
“그 각목을 네가 얼마나 더 들고 있을까? 나는 30초 안에 놓친다에 걸지.”
그의 말처럼, 김율의 손은 이미 피에 젖어 있었다.
잘 다듬어지지도 않은 각목을 붙잡고 전력으로 휘둘러댔으니, 손아귀가 터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원래라면 가볍게 용돈만 뜯어갈 생각이었지만…… 생각이 바뀌었어.”
휘리릭!
단검을 한 번 공중에 던졌다가, 유연하게 착 잡아들고서.
“가진 거 다 내놓던가, 아니면──”
“좆까, 새끼야.”
입 안에 고인 피를 바닥에 퉤 뱉어내면서, 김율이 욕설을 뇌까렸다.
* * *
“허억, 허억, 허억…….”
와, 씨.
죽는 줄 알았네.
헤라클레스의 봉술을 익히자마자 전투 이벤트라니, 무슨 튜토리얼도 아니고.
단검이 내 목을 스치고 지나갔을 때는 진짜 오줌을 지려버릴 뻔했다.
그러나.
“끄르륵…….”
“으, 으아, 팔이…….”
김 더 헤라클레스 율의 활약상이 골목 여기저기에 널브러진 걸 보고 있자니, 하늘에 날린 아드레날린이 핑 돌아서 대뇌를 오롯이 감싸는 기분이 들었다.
물론.
“아윽.”
미친 듯한 근육통이 뒤늦게 몰려오기 시작했다.
제갈량의 육신으로 여포의 힘을 발휘한 후폭풍.
……앞으로 운동도 열심히 해야겠다고 다짐하며, 내 손아귀에 거의 달라붙다시피 한 몽둥이를 짚고 바닥에서 일어난 순간.
“어머. 호쾌해라.”
“……?”
귀에 익은 목소리가 골목의 입구 쪽에서 들려왔다.
그곳에는…….
목에서부터 아래로 내려오는 광명의 표식.
그리고 가슴을 드러내듯 재단된 십자가.
코이프로 단정하게 덮어낸 백은빛 머릿결.
“로젤린……?”
“와아, 이름으로 불러주시는 거예요? 감동!”
눈앞에 펼쳐진 유혈 사태가 보이지 않는다는 듯, 호들갑을 떠는 성녀가 있었다.
“이분들은, 친구분들?”
“……친구랑 보통 이렇게까지 싸웁니까?”
“아! 그러네요!”
미친 여자인가?
“헉.”
내가 불경한 생각을 하자마자, 로젤린의 손에서 하얀빛이 뿜어져 나와 나를 감쌌다.
이대로 신성모독으로 죽어버리는 건가, 하는 순간.
“모두를 사랑하고 아낌없이 베풀지니.”
“어……?”
그녀가 무언갈 중얼거린 순간.
상처를 통해 빠져나갔던 피가 다시 충만해지고.
찢어졌던 손아귀에 새살이 돋아나며 엉겨 붙는다.
몸에 진하게 감돌았던 탈력감도 씻은 듯이 사라지고, 실핏줄이 터져 흐릿했던 시야가 정상으로 돌아온다.
“후후. 여신의 힘이랍니다? 제우스 같은 호색한 잡신과는 차원이 다르죠?”
뒤 끝 보소.
그래도, 이게 바로 의느님…… 아니 성녀님의 위엄인가.
“감사합니다.”
고개를 깊이 숙여 인사했다.
어떻게든 악으로 깡으로 이기긴 했을 것 같으나, 자칫 몸에 구멍이라도 뚫렸으면 그대로 내 인생이 끝날 수도 있었으니까.
“에이, 이게 다 여신의 뜻이자 인도죠.”
성녀님의 관대한 말씀에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성스러운 십자가를 잠시 눈에 담고 있자니.
“로젤린 님!”
아마도 성기사로 추정되는 여기사 두 명이 골목에 진입했다.
“확실히 갱생시키도록 해주세요.”
“네!”
로젤린의 냉정한 목소리가 골목에 울렸다.
도대체 어떻게 되어 먹은 완력인진 모르겠지만, 밧줄로 일곱 명을 줄줄이 꿴 후 질질 끌고 가는 여기사의 위엄찬 모습.
그리고 나머지 한 명.
인상이 조금 험악하게 생긴 여기사 한 명이 내게 날카로운 눈빛을 쏘아 보냈다.
“그 불온 분자는 어떻게 하실 예정입니까?”
불온 분자?
내가?
“이 사람은 피해자예요. 엘레인을 도와서 복귀하도록 하세요.”
“네.”
내 거친 생각과 불안한 눈빛을 느꼈을까.
“아, 불온 분자는 보통 이단으로 의심되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표현이랍니다. 김율 님께서는 저번에 소명하셨지만, 으음, 또 비슷한 문제가 생기면…… 조금 위험해지실 수도 있어요? 요시찰 대상이니까요.”
로젤린은 싱긋 미소 지으며 내게 말해주었다.
그 모습이 순간 성경에 나오는 천사의 모습과 겹쳐 보였다.
“하, 하하…… 여부가 있겠습니까요.”
나 아직 감시 대상이었구나.
머릿속에서 염두에 두었던 소재들과 석별의 정을 나누었다.
잘 가, 게이트 오브 바빌론.
언젠간 찾아뵙겠습니다.
라, 오딘, 트리무르티, 그리고 지저스 크라이스트…….
어디 간들 잊으리오 두터운 우리 정…….
.
.
.
그 뒤로.
안전하게 바래다준다는 명목으로 쫄래쫄래 따라오는 로젤린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이것저것 마구잡이로 떠들었다.
“사랑 이야기…… 하하. 네, 차기작은 사랑이 주제긴 합니다.”
“와! 진짜요!”
로젤린 님님께서는 방방 뛰시면서 내 어깨를 마구 흔드셨다.
……사랑은 사랑이지?
결말이 조금…… 그렇긴 한데.
“네. 그리고, 아마 그 소설을 출판할 때쯤 저는 이 도시에 없을 수도 있겠네요…… 어억!”
갑자기 로젤린이 우뚝 멈춰선 바람에 그대로 팔이 빠질 뻔했다.
어떻게 된 완력이냐, 이거.
헤라클레스가 여기 있었네.
“이 도시에 없으시다고요? 무슨 뜻이죠?”
살기마저 비치는 듯한 정색한 로젤린의 표정에, 나는 신문사에 스카웃 받았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아, 아음, 그, 그러면 좋죠! 으으…… 겨우 전입했는데, 또 옮겨야 하나…….”
“네?”
“아무것도 아니에요!”
혼자서 나지막하게 중얼거린 뒷말이 조금 수상했지만, 되물어 볼 용기는 없었다.
……내가 옮겨가는 곳까지 따라오는 건 아니겠지?
* * *
“결국, 그렇게 되었군요.”
“하하…….”
김율의 선언에, 편집자는 올게 왔다는 듯 눈을 질끈 감았다.
물론…….
신문사의 문학부장이 찾아왔을 때, 김율의 소재를 가르쳐주지 않으면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물론, 김율의 작품은 완벽하다고는 할 순 없었다.
등장인물이 너무 많다거나, 성애적 묘사가 마치 한 번도 섹스를 해본 적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거나, 주인공에게 시련을 주는 것을 지나치게 좋아한다거나.
굳이 찝자면, 이런저런 문제들이 있었지만…….
그래도.
신들의 전쟁을 넘어.
제우스의 연애담, 그리고 헤라클레스 영웅담까지.
그는 편집자였지만, 동시에 독자였다.
그리고.
김율의 팬이었다.
세상에 그 어떤 팬이,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가 더 큰 물로 진출하는 것을 막아세울 수 있겠는가?
“인세 3차 정산은 곧 해드리겠습니다. 그리고 계좌를 알려주시면──”
김율이 책상 위에 종이봉투를 하나 올려놓았다.
편집자는 살짝 떨리는 손길로 그 봉투를 열어보았다.
“아무래도 시리즈니만큼, 그래도 하고 싶은 이야기에 마침표를 찍고 가야 할 것 같아…… 신간입니다.”
김율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면서, 편집자는 실례를 무릅쓰고 원고를 꺼내 들어 읽기 시작했다.
.
.
.
편집자는 마지막 장을 덮고, 눈을 감았다.
그의 머릿속에서 생생하게 소설의 마지막 장면이 재생되었다.
전리품이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으며, 거대한 목마를 성안으로 들여놓은 트로이 사람들.
밤이 되자마자 목마 안에서 쏟아져나오는 그리스 장병들. 선두에서 앞장서서 달리는 오디세우스와 네오프톨레모스.
헬레네를 두고 벌어진 최후의 결투, 데이포보스가 일견 우세를 점하지만,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에 헬레네가 그의 등에 단검을 꽂고…….
그리고 마지막 문장.
“신의 시대에 이어, 트로이에서 영웅의 시대가 끝났다. 이제는 온전한 인간의 시대, 철의 시대가 열렸다…….”
“마음에 드셨는지 모르겠군요.”
김율의 담담한 말에.
편집자는 지금 당장이라도 출판사의 지하실에 김율을 감금하고 싶다는 충동을 꾹 눌러 참았다.
“……하아. 아쉽군요. 분명히 중간에 다뤄질 것 같은 이야기가 많았었을 것 같은데…….”
“또다시 올림포스 이야기를 하고 싶어질 때가 오면, 다시 원고를 보내드리겠습니다.”
“정말입니까!”
편집자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아, 그래서 이번 작품의 제목은 뭡니까?”
“음…….”
김율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원래 생각했던 제목은 트로이 전쟁이었지만…….”
“네? 괜찮은데요?”
“아닙니다. 일리아스. 일리아스로 하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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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분노를 노래하소서, 여신이여!
펠레우스의 아들, 아킬레우스의 분노를.
그의 파괴적인 분노는 아카이아인들에게 헤아릴 수 없는 재앙을 안겨주었으며.
숱한 영웅들의 굳세고도 용감한 영혼들이 하데스에게 던져졌노라.
그들은, 그리고.
개들의 먹이가 되고, 새들의 먹이가 되니.
그 잔혹한 분노를.
다시금, 노래하소서!
인간들의 왕인 아트레우스의 아들.
그리고 고귀한 아킬레우스가 처음에 다투고 갈라선 바로 그날부터.
제우스의 계획이 이토록 비극적으로 이루어지리니.
## ====== ##
로젤린은 오늘도 바쁜 하루를 보냈다.
- 작가님! 우연히 만나네요! 차기작은요?
- 어머, 작가님! 식사하러 가시나요? 다음 사랑 이야기는요?
- 와아! 좋은 밤이네요! 산책하시나요? 어, 작가님? 어디 가셔요? 어차피 못 도망가실 텐데.
……아무튼 바쁜 하루였다.
그리고 그 하루를 쌓고, 또 쌓아서.
- ……성녀님이라서 먼저 보여드리는, 크흑, 겁니다…….
- 으히히! 걱정하지 마세요! 여신께 맹세코, 저는 고해성사소가 아니더라도 절대 비밀을 누설하지 않는답니다!
결국, 로젤린은 원하는 바를 성취했다.
그치만.
- 사랑 이야기…… 하하, 네, 차기작은 사랑이 주제긴 합니다.
애초에 김율이 잘못한 거다.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다른 이야기를 쓴다고 했으면 당연히 이렇게까지 집착할 이유가 없었다.
네가 먼저 꼬셨잖아.
네가 먼저 염정소설 써준다고 했잖아!
그녀가 괜히 귀하디귀한 신성력을 써서 김율을 깔끔하게 치료해 준 게 아니었다.
어설프게 각목을 세게 쥔 나머지, 손이 완전히 부르튼 바람에.
……그 사내가 글을 쓰는데 지장이 생길 것 같았으니까.
여신의 권능을 행사하기에 너무나도 합리적인 이유였다.
보라.
그릇된 방향으로 힘을 남용한다면 절대로 다시는 채워지지 않는 신성력이 지금 이토록 충만하지 않던가.
모두를 사랑하고 아낌없이 베풀어라.
교리 실천 그 자체!
신성국의 모범 성녀!
그게 바로 로젤린, 그녀였다.
“엘레인?”
“예, 성녀님.”
“저 불온 분자, 지금 숨 쉬는데요?”
“시정하겠습니다.”
“끄르륵……! 커헉, 컥!”
그러니 이것은 합당한 정의 집행.
감히 김율의, 미래의 염정소설 대가의 목숨을 노린 죄를 씻어내기 위해 오늘도 ‘물은 답을 안다’를 체험하고 있는 가녀린 타락한 양들을 흘긋 바라보고서.
다시금 갈취한…… 아니, 봉납받은 따끈따끈한 신작을 읽기 시작했다.
불행하게도.
김율이 직접 그리스어 원문으로 된 일리아스의 판본을 펼쳐보고, 히스토리에를 갈궈서 교차검증하고.
나아가 대중성을 위해 ‘한 권으로 읽는 그리스·로마 신화’까지 대조해 보면서 고증을 지킴과 더불어 나름대로 각색을 지킨 서사시적인 인트로는.
“음.”
사랑에 미친년, 로젤린에게는 딱히 와닿지 않았다.
하지만, 팔랑, 팔랑.
페이지가 넘어가면 넘어갈수록.
“헤, 헬레네……? 설마, 지금, 여기서?”
“아무리 황금 사과의 주인이라지만, 그래도, 파리스가 지금 여기서 이런 행동을 해버리면……!”
물론, 이성적인 독자였다면.
최고의 부와 권력을 약속한 헤라.
위대한 지혜와 모든 경쟁의 승리를 약속한 아테나.
그 둘을 제치고, 가장 아름다운 여자를 약속한 아프로디테의 손을 든 파리스가 멍청하다 욕할 것이다.
하지만.
이성적으로는 그를 이해하면서도.
“그래, 그게 사랑이니까……!”
이미 사랑 이야기에 반쯤 뇌수가 녹아버린 로젤린만큼은, 파리스의 선택을 응원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 파리스……! 그러면 안 되는 것입니닷……! 그러면, 파리스가……! 위험해지는 것입니닷……!
파리스가 본디 왕자가 아니라 양치기로 살았을 시절, 그와 혼례를 올렸던 님프.
아직 퇴고가 덜 되었는지, 오이노네와 오이노이라는 이름이 혼용되는 그의 아내가 한껏 말렸긴 했다.
물론 불륜은 죄악이라 할 수 있으나.
“이혼은 안 했고…… 중혼…… 이지?”
여신 교단은 일부다처제를 긍정하는 교단.
도파민으로 뇌가 반쯤 녹은 로젤린이 보았을 때,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애초에 중혼 자체가 문제였다면, 당장 제우스 이야기를 다룬 서적부터 불온서적으로 지적하고 화르르 불살랐으리라.
그렇게.
분명히 김율, 아니, 호메로스의 의도는 영웅담이었지만.
로젤린의 머릿속에서는 헬레네를 중심으로 한 로맨스 판타지가 펼쳐지기 시작했다.
* * *
“최근에 김율 작가님이 보이지 않는군…….”
“다음 권…… 없다?”
“에이, 설마. 제우스가 깐 자식들만 해도 신이 몇 명이고, 영웅이 몇 명인가? 그 모두가 헤라클레스와 같은 서사를 들고나올 걸세!”
“그렇지만, 차기작이…….”
“이 사람, 참. 소설 한 권 출간까지 1년을 기다리던 인내심은 어디로 갔나? 지금까지 출간 속도가 비정상적으로 빨랐던 것이지.”
어느덧 올림포스 이야기에 푹 빠진 문인들은, 적적함을 그저 술로 달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이 지금껏 향유했던 문학들은 대부분 원 패턴.
몰락한 귀족이 어찌어찌하여 성공하고 자신을 모함한 사람들에게 복수하는 이야기.
평민 출신 용사가 어찌어찌하여 결국 전인미답의 마경 속에서 마왕을 물리치는 이야기.
주인공의 특색만 조금 바뀌고, 플롯 자체는 대동소이한 이야기들이었다.
물론 그것도 없어서 못 먹을 정도로 게걸스러웠던 문인들이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미리 철저하게 준비한 듯, 방대하면서도 세계관에 오류가 없었으며, 자극적인 맛부터 감동적인 맛까지 한 권의 흐름에 담아내기까지.
어느덧 그들은 올림포스 이야기에 빠져들었으며, 다른 중소 도시의 문학 작품과 비교하며 지적 우월감을 느끼는 수준까지 도달했던 것이다!
“피폐 드리프트…….”
“어허! 비극으로써 드디어 서사가 완성된 것인데, 어쩔 수 없는 일 아니겠나! 결국 헤라클레스는 신이 되었다고, 신이!”
오늘도 격조 높은 토론이 이어지고 있는 살롱 드 블랑의 문이 딸랑, 경쾌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들어온 것은 도시를 대표하는 문예 비평가, 하인즈.
평소 진중한 표정으로 무게를 잡기 일쑤였지만, 오늘따라 그의 표정에는 열망과 광기가 끈적이고 있었다.
하인즈가 그러한 반응을 보일 때는 무언가 자랑하고 싶을 때라는 걸 익히 알고 있었던 다른 문인들은 그를 외면하려고 했지만.
“후후, 후후후…… 올림포스 이야기의 신간이 나왔다네……!”
“뭣.”
“헉!”
“마침내!”
하인즈가 던진 광역 도발의 파장은 살롱 전체를 크게 흔들었다.
“어디, 어디 나도 보여주시오!”
“이럴 때가 아니군. 빨리 서점에……!”
“크아악, 못 참겠다……!”
순식간에 살롱 내부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
.
.
사람들이 빠져나간 후.
살롱 사람들이 문학을 즐기는 방법의 하나──
낭독회가 시작되었다.
“헤라클레스는 막내 왕자, 포다르코스만을 살려두고 모두를 몰살시켰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포다르코스는, 세월이 지난 후 프리아모스로 개명해 트로이의 왕이 되었다. ……최후의 왕이. 이 이야기는, 트로이가 어떻게 멸망으로 치달았는가에 대한 이야기다.”
전작의 주인공이었던 헤라클레스의 행적을 한 번 더 조망하여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이야기의 도입.
그리고 전개는 빠르게 테티스와 펠레우스의 결혼식 파트에 도달했다.
“불화와 다툼을 관장하는 여신, 에리스는 결국 결혼식에 초대받지 못하자 불같이 화를 냈다. …… 결혼식 당일, 에리스가 보낸 선물이 도착했다. 가장 아름다운 여신에게 이 황금 사과를 바칩니다. 단순한 문장이었지만, 그 울림은 전혀 가볍지 않았다. 하필이면 결혼식에 참석했던 여신만 해도 셋. 헤라, 아테나, 아프로디테였다.”
“자, 잠깐, 실례하겠네……!”
살롱의 문인 중 한 명.
대형 과일가게의 주인이 그 대목에서 빠르게 달려 나갔다.
모두가 그 뒷모습을 보며 짐작할 수 있었다.
오늘부터, 도시에서 파는 모든 덜 익은 사과에 에리스의 황금 사과라는 이름이 붙을 것이라는 사실을.
사소한 이슈가 있었지만, 그에 개의치 않고 낭독회는 계속 이어졌다.
그리고 갈수록 커지는 스케일.
제우스는 주신답게 엄정한 중립을 지켰지만, 나머지 신들은 각기의 이해관계에 따라 그리스와 트로이 중 지지 세력을 결정하고, 영웅들은 신의 대리인으로서 격돌한다.
접전과 불화.
제우스의 중재에도 불구하고, 헤라와 아테나의 고집으로 인해 휴전 없이 전쟁이 속행되기도 하며.
“헥토르가…….”
“아킬레우스까지……?”
전쟁에서 내내 활약했던, 양 진영을 대표하는 장군들의 사망까지.
전개 하나하나가 손에 땀을 쥐게 할 정도로 박진감이 넘쳐흘렀다.
어찌 이 모든 이야기가 한 인간의 상상력에서 나올 수 있었을까.
감탄을 넘어 경외심까지 들 지경이었다.
.
.
.
그렇게, 정오부터 시작된 낭독회는 해가 완전히 저물 때까지 이어졌으며.
그리고, 마침내 종막.
“누가 그날 밤의 재앙과 살육을 형언할 수 있을 것이며, 어떤 눈물이 그 고통을 설명할 수 있을까. 오랜 세월 동안 자리를 지켜온 트로이가 무너지고 있었다.”
“아…….”
“헬레노스만 잡히지 않았더라면……!”
“헥토르, 헥토르가 살아 있었어야 했다!”
트로이를 응원하던 사람들이 탄식을 흘렸으며.
“오디세우스, 믿고 있었다고!”
“역시 무력은 지혜를 이기지 못하는군.”
그리스를 응원하던 사람들은 손뼉까지 치면서 찬탄을 남겼다.
그리고, 마지막 페이지만을 남겨둔 지금.
“…….”
하인즈의 표정이 굳어지며, 손이 떨리며, 말이 멈췄다.
저 영감, 또 여운을 즐기는군, 하고 생각하며 차분하게 기다렸던 사람들이었지만.
“아니, 왜 그러시오?”
“혹시 충격적인 반전이라도 있는 건가?”
“하인즈 씨. 도대체 뭡니까?”
독촉에도 불구하고 하인즈는 쉽게 입을 떼지 못했다.
“아잇, 이리 줘봐!”
그 공백을 참지 못한 하인즈의 친구가 책을 뺏어 들었지만.
“…….”
마찬가지로 하인즈처럼 굳어버릴 뿐이었다.
도대체 무엇이 적혀있단 말인가?
여기서 뭐 어떤 이야기가 더 이어졌단 말인가?
호기심을 참지 못한 사람들이 삼삼오오 주변에 몰려들었고.
그들은 목격하고야 말았다.
누군가, 떨리는 목소리로 마지막 목소리를 소리 내 읽었다.
“올림포스 이야기 시리즈는 여기서 마무리됩니다. 그동안 사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
.
.
.
그날 밤.
“사장 나와!”
“제정신이냐! 이게 마지막이라고?”
“출판사는 도대체 뭐 하는 놈들이냐! 당장 통조림해!”
횃불을 든 분노한 폭도의 무리가 출판사를 덮쳤다.
* * *
“흠.”
나름대로 정들었던 카멜리아를 떠나는 길.
저 멀리서 화려한 불꽃이 일렁이는 걸 보니 축제라도 일어났나 본데.
축제를 즐기고 떠날 걸 그랬나, 하는 사소한 아쉬움을 잠깐 마음속으로 갈무리했다.
.
.
.
“오…….”
밤새 달려서, 새벽동이 틀 때쯤.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동네 분위기가 확실히 다르다는 것이 피부로 느껴졌다.
전에 살던 도시, 카멜리아는 중세풍에 가까웠다면.
제국의 수도는 과연 수도답게 굉장히 거대하고, 화려하며, 마법으로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거의 속초와 한국 최고의 도시 인천 정도의 차이.
“호외요! 호외!”
“스마트 수정구 인 원더랜드! 따끈따끈한 신작입니다!”
심지어.
카멜리아에는 주간지밖에 없었는데, 여기는 일간지가 마구 넘실거리고 있었다.
심지어 걸어가는 사람들 손에는 대부분 신문 한 부씩 들려 있었으니.
과연, 소설의 미래가 출판 서적이 아니라 신문 연재에 있다는 게 과언이 아닌 것 같았다.
“한 부! 감사합니다!”
호객하던 꼬맹이에게 동전을 쥐여주고 신문을 사서 펼친 순간.
원래라면 소설 연재란을 먼저 확인해 보려고 했지만.
괴상한 기사 하나가 내 눈을 먼저 사로잡았다.
[올림포스 이야기. 소설인가? 예언인가?]
[마경의 백면귀룡 토벌 소식이 들려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또다시 희소식이 전해졌다. 어제 새벽, 국경도시 안타론의 전복을 꾀하는 흑마법사가 저주받은 물건들을 반입하려 시도했지만, 소설 내용에 영감을 깊게 받았던 경비대장 랑셀 씨가……]
“……이건 또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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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사람은 여신을 숭배하지만.
사람 사는 곳이라면 어디든 청개구리 같은 사람들이 존재하는 법이었고, 심지어 이단을 넘어 이적 행위로 간주될 수 있는 마물 숭배 신앙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다.
마경과 현실의 경계를 완전히 무너트려, 마물과 함께 공존하는 세상을 바라는 사람들.
물론 여신교에 의해 철저하게 박해받는 처지라, 음지에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준비는 다 끝났나?”
“이 정도면 아무도 의심하지 않을 겁니다.”
그들이 최근 눈독을 들이고 있는 도시는 국경도시 안타론.
마경과 꽤 인접한 도시 중 하나였기에, 여기를 붕괴시킨다면 교세를 확장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염원에 한 발짝 더 다가갈 수 있었다.
하지만 마법 방어막으로 인해 도시 밖에서의 공격은 크게 효과가 없었으니.
대규모 흑마법을 도시 내부에서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흠, 과연.”
흑마법을 시전하는 데는 많은 준비물과 대가가 필요했다.
흑마법사는 부하들이 준비한 준비물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겉보기에는 그저 평범한 여신상.
하지만 그 안에는 흑마법의 재료를 잔뜩 쑤셔 넣어 두었다.
계획은 간단했다.
도시로 반입해서.
여신상을 파괴하고 안에 있는 재료를 꺼낸다.
“도대체 누가 여신상 내부에 무언가 들어 있으리라 의심하겠습니까? 정신이 나간 게 아닌 이상 그럴 리가 없습니다. 확실합니다. 다음 주 내로 대업은 성사될 것입니다.”
부하의 호언장담에, 흑마법사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
.
.
“흠, 여기, 마감이 수상한데. 안에서 뭔가 달그락거리는 소리도 나는 것 같고. 총 열 개요? 하나만 까봅시다.”
“……예? 아니, 여신상인데──”
“얌전히 협조하시오. 배상은 해드리리다. 이게 트로이의 목마일지 누가 안단 말이오?”
불행하게도.
흑마법사는 문학을 사랑하지 않았다. 오히려 경멸했다.
그렇기에 경비대장이 하는 이야기를 이해할 수 없었다.
트로이의 목마? 그게 뭐지?
아니, 근데 진짜 확인한다고?
점차 표정이 사색이 되어가던 흑마법사였지만.
경비대장은 만류할 틈도 없이 여신상을 하나 들어서, 그대로 바닥에 내팽개쳤다.
쨍그랑! 쨍쨍그랑!
청량하고도 경쾌한 파열음과 함께.
“허억.”
“지, 진짜였어?”
“대장이 드디어 미친 줄 알았더니…….”
여신상 안에 들어있었던 짐승의 심장, 마물의 외피, 인간의 손톱 등 온갖 종류의 재료를 바라보며, 경비병들은 모두 아연실색했다.
자신의 직감이 빛을 발했음을 확인한 경비대장이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좌중을 지배했다.
“저놈들을 당장 구금해라! 흑마법사다! 나머지 목마, 아니, 여신상들도 모두 깨부숴서 내용물을 확인해라!”
* * *
사실…….
그리스·로마 신화를 소재로 할 수 있는 이야기는 훨씬 많았다.
오딧세이아, 아르고 호의 모험, 프로메테우스, 오이디푸스, 안티고네, 아이아스, 엘렉트라, 메데이아, 페르세포네…….
당장 열두 주신들을 한 명씩 잡고 테마로 출간하더라도, 충분히 한 권 분량을 뽑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어찌 보면 그게 편한 길이기도 했다.
새로운 무대에서.
새로운 도전은 항상 어려운 일이니까.
그래서 고민을 많이 했었지만.
[테마 (신화) 그리스·로마 신화’의 특전 획득 한계에 도달했습니다.]
[테마 (신화) 그리스·로마 신화’를 사용한 신작 집필 시, 더 이상 스킬을 획득할 수 없습니다.]
[더 다양한 테마를 활용했을 때, 특전 획득 한계를 해금할 수 있습니다.]
상태창이 그 고민에 쐐기를 박아버렸다.
아직 제우스의 정력이나 하데스의 데스노트, 디오니소스의 PPAP 같은 매력적인 스킬을 획득하지 못한 게 조금 아쉬웠지만,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
그리고.
신화 시대의 이야기만으로는…… 이젠 내가 만족을 못할 것 같았다.
더 쓰고 싶은 것들이 많다.
더 많은 역사를 이야기로 풀어내고 싶었다.
내 머릿속에, 서가에 꽂힌 전공서들 속에, 그리고 히스토리에의 데이터베이스로만 남겨진 이야기들을 펼쳐나가고 싶다.
판타지 세계관에 오리엔탈리즘을 잔뜩 불어넣을 수 있는 동양사의 매력적인 이야기도 넘쳤다.
비유하자면, 이제 난 튜토리얼을 끝낸 셈.
게다가, 내가 자칫 선을 넘어버리는 순간 십자가로 회개하라며 내 머리를 깡 후려칠 것 같은 성녀도 따돌렸으니…….
“……?”
방금 인파 사이로, 로젤린의 것과 닮은 듯한 백은발이 보인 것 같은데.
기분 탓이겠지.
* * *
“……방값이 그렇게 비쌉니까?”
“돈 없으면 나가슈.”
“아닙니다, 여기 있습니다.”
하, 씨.
그냥 스킬이고 나발이고 그로신 우려먹으면서 연금 타먹고 나데나데나 받을걸.
수도권의 월세는.
현대에서나 이세계에서나 모두 싸늘했다.
연구실에 의존하면 되니까 최대한 좁고, 최대한 낡고, 최대한 저렴한 방을 찾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에 신세 졌던 싸구려 여관과 비교해도 다섯 배 차이.
뭐…….
모아둔 돈은 어느 정도 있었으니까.
당분간 버티기엔 충분하다.
이제 하루 1끼 딱딱한 빵만 먹는 끔찍한 신세를 탈피해서, 진수성찬으로 혓바닥을 축일 수 있는 대작가의 인생을 살 수 있을 것이다.
.
.
.
“……빵 가격이 이게 맞습니까?”
“싫으면 꺼져! 어딜 재수 없이 검은 머리 주제에.”
“쩝.”
살인적인 물가는 월세뿐만 아니라 식비에도 고스란히 적용되어 있었다.
저기 저 별은 나의 마음을 알까, 나의 꿈을 알까…….
괴로울 땐 슬픈 노래를 부른다…….
고향의 향기가 얼룩진 노래 한 소절을 속으로 흥얼거리며, 제일 저렴한 딱딱한 빵을 한 아름 사 들고 숙소로 복귀했다.
『돌아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사용자님.』
“그래.”
히스토리에의 낭랑한 목소리를 들으며, 빵을 냉장고에 쑤셔 박고서.
함께 한 아름 사 온 신문을 펼쳐서 읽기 시작했다.
뭐 국제 정세가 어떻니, 국경 지대에 분쟁이 일어날 기미가 보이니, 마경에서 곧 대규모 마물 분출이 발생할 예정이니…….
이세계의 어두운 이야기는 잠깐 접어두고.
지피지기 백전불태며.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본격적으로 신문 연재를 준비하기 위해선 당연하게도 다른 경쟁작을 분석할 필요가 있었다.
업계 용어로 인풋.
솔직히 말해…….
아직 내 글은 소설이라기보다는 조금 더 다큐멘터리에 가까웠다.
그나마 신화여서 망정이지, 본격적으로 역사 이야기를 흥미롭게 풀어내려면 지금의 내 역량으로는 조금 아쉬운 부분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실제로 악평이 달렸던 부분을 짚어본다면.
- 설정은 흥미로우나 지루하고 현학적임.
- 등장인물을 한꺼번에 너무 많이 쏟아부어서 정신 사나움.
- 전작을 읽으라고 강요하는 셈? 세계관 연계는 좋으나 초보 작가에게는 무리수였다.
- 부족한 빌드업, 너무 빠른 전개 속도. 서사가 숨 쉴 틈 없이 몰아치지만, 그 근간은 빈약하다.
하나같이…….
내 명치를 시원하게 두들기는 것들이었다.
인정한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일리아스를 쓸 때는 주요 인물들에게 초점을 맞추어서 쳐낼 건 과감히 쳐냈지만, 그래도 너무 많았으니까.
“그럼, 이세계의 문학 수준을 한 번 볼까.”
『분석이 필요한 것이 있으신가요? 그렇다면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흠…….”
히스토리에의 제안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AI의 감상평은 사실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게 트립 직전까지의 중론이었지만, 구조 분석 정도는 충분히 도와줄 수 있으니까.
신문들을 차곡차곡 스캐너에 넣어서 데이터베이스에 넣은 후, 하나씩 읽기 시작했다.
차라락, 팔랑.
“…….”
연재되고 있었던 소설이었기에 정확히 전체 내용 흐름과 플롯 파악은 어려웠지만.
읽고, 또 읽으며 분석했다.
“꽤, 재밌네……?”
예를 들어,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소설.
‘악역 영애의 최후는’의 경우에만 보더라도 독자들을 쥐고 흔드는 솜씨가 아주 예술이었다.
게다가.
마치 웹소설의 댓글처럼, 지난주 연재분에 대한 반응이 ‘이전화 요약’ 부분과 더불어서 실려 있었다.
[익명의 독자: 레니…… 이제 난 너를 못 믿겠어…….]
[엘리샤: 주인공은 과연 노력하고 있는 건가요? 이쯤 되면 다른 남자 주인공들이 불쌍해질 정도예요.]
[에스쟝: 작가는 하루 2편씩 글 써라! 미친 거냐!]
[익명의 독자: 그냥 화끈하게 ■■ 한 번 하고 화해해라!]
[(●'◡'●): 이교도라니, 이런 전개는 조금 위험할 수 있답니다? 그나저나 레니 진짜 혐성 뭐야ㅠㅠㅠㅠ 레니가 행복해질까요? 해피엔딩이죠? 해피엔딩인 거 맞죠?]
빠와 까를 미치게 만드는 슈퍼스타가 따로 없었다.
그 외에도.
신문 지면을 한 자리 차지한다는 소설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대부분 필력은 준수한 편.
하지만.
이야기의 무대가 좁았다.
특히 주인공은 귀족이 대부분.
용사물에 이르러서야 간간이 평민 출신의 용사가 나올 뿐.
그렇다면.
“오케이, 분석 완료.”
이겨.
여기는.
충분히 내가 이길 수 있는 전쟁터였다.
물론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역사’ 소설을 쓴다는 감각이 아니라, 역사 ‘소설’을 쓴다는 감각이 되어야 하며.
하루에 지면에 담아낼 수 있는 분량이 제한적이었기 때문에, 웹소설에 가까운 전략을 취할 필요가 있었다.
『맞아요. 김율, 당신은 충분히 잘 해낼 수 있을 거예요. 제 분석 결과를 공유해 드립니다. 첫 번째, 장르적 측면에서의 분석──』
히스토리에의 의견을 들으면서, 소재를 구상하기 시작했다.
물론…….
다른 소설들을 읽으면서, 이거다 싶은 소재가 딱 떠오른 게 있었다.
완전히 독창적인 세계관으로부터 출발하는 것보다.
기존에 내가 썼었던 소설과도 연결성을 일부 가질 수 있으며, 이세계의 문학 취향에도 맞출 수 있는.
권력에서 멀어진, 몰락한 귀족 출신 주인공.
위정자에게 숙청의 위협을 받았으나, 결국 정계에 입문하여 출세를 거듭한 인물.
운명의 라이벌과의 대회전에서 대승을 거두고 결국 황제에 버금가는 지위에 오르지만, 믿었던 이에게 배신당하여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 인물.
Veni, Vidi, Vici.
율리우스 카이사르.
그의 일생, 그의 역사라면.
충분히 사람들을 휘어잡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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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 수도에는 신문사가 많다.
……많아도 너무 많았다.
대형 신문사만 해도 일곱 곳이었으며, 중소규모 신문사까지 모두 합치면 스무 곳을 훌쩍 넘겼다.
신문사에는 세 가지 원칙이 있었다.
첫 번째와 두 번째는 사실성과 공익성.
대형 신문사는 기본적으로 황궁이나 마탑, 용사 아카데미, 혹은 마경 공략대 등의 소위 인맥을 통한 정보를 적절히 수집할 수 있었기에 그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결국 사실이라는 것은 언젠가 입소문을 타고 오르내리기 마련.
가장 중요한 마지막 원칙은.
문학성이었다.
발행되는 일간지의 절반 정도의 지면을 여러 소설이 잡아먹고 있었고, 그 소설들의 흥행 여부에 따라 매출량이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왜 소식이 없어! 1주일 후면 아카데미의 분홍 머리 격투가가 완결이 난다고! 그 지면을 대체해야 할 거 아냐!”
진리일보의 문학부장 길포드는 오늘도 편집국장에게 타박을 당하고 있었다.
“……곧 좋은 작품을 발굴해서…….”
“곧이 언젠데, 곧이! 지금부터 집필에 들어가도 한세월인데, 남들 먹다 남은 쓰레기 같은 작품이나 받아올 생각인가!”
“……이틀 내로 확정 짓겠습니다.”
편집국장은 지팡이로 길포드의 가슴을 쿡 찔렀다.
“똑바로 처신해. 너 같은 거, 다른 부품으로 갈아 끼우는 것 일도 아냐!”
모멸적인 처우였지만.
길포드는 아무런 반박을 하지 못했다.
그야.
최근 진리일보의 매출은 날로 급감 중이었으니까.
간판 작품 ‘아카데미의 분홍 머리 격투가’ 외에는 죄다 흥행이 부진한 게 그 원인이었다.
쾅──!
화를 못 이긴 편집국장이 국장실의 문을 닫고 들어가자마자.
“휴, 시발.”
길포드의 입에서 절로 욕설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가 좋아서 시작한 일인 것을.
“저어, 부장님……?”
“아, 네. 뭔가 문제라도?”
아까부터 눈치만 계속 보고 있었던 부하 직원의 말에, 길포드는 억지로 웃음을 입꼬리에 담았다.
자신은 저런 나쁜 상사가 되지 않겠다.
그러한 심산이었으니까.
“그, 손님 한 분이 부장님 명함을 들고…….”
“아, 제가 직접 가보겠습니다.”
또 한 명이 찾아왔나.
최근 한 달 동안 그가 스카웃하러 다녔던 작가만 백 명이 넘었고, 그중 여덟 명과 만났다.
하지만 모두 결과가 돌아오지 않고 있었고, 지금부터 쓴다고 해봐야 원고의 마감을 맞추긴 힘들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지만, 그래도 일은 일.
길포드는 응접실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아.”
그리고, 한눈에 상대를 알아보았다.
아무래도 이 나라에서 검은 머리와 검은 눈이라면 기억에 강렬하게 남을 수밖에 없는 인상이었으니까.
“그, 실례지만 이름이……?”
“아, 김율입니다. 다시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맞아, 이름도 이상했지.
마족 같은 외모는 아니었지만, 마족과 유사한 형태의 작명.
혼혈이라도 되는 걸까.
그런 단상을 살짝 갈무리하며, 길포드는 김율의 맞은편에 편하게 걸터앉았다.
어차피 결과물이 없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만남.
그래도 찾아와 주었으니, 최대한 좋은 인상을 남기기 위해 꼼꼼히 설명해 줄 생각이었던 길버트였지만.
“일단, 이걸 먼저 봐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
김율이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설마, 하는 생각을 삼키며 덤덤한 표정으로 받아 든 길버트가 이내 내용물을 확인했다.
안에 든 것은 여러 장의 종이.
첫 번째 장은 소설의 시놉시스였다.
꽤 꼼꼼하게 준비해 왔군, 하는 생각을 가지며 길버트는 가볍게 읽어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오…….”
그 뒤에 동봉된 1화의 원고를 읽자마자, 이내 그의 허리가 곧게 펴졌다.
“허어…….”
유년기를 과감히 생략하고 청년기부터 흡입감 있게 다뤄내는 완급 조절에 자신도 모르게 감탄을 흘렸으며.
“이혼하지, 않겠습니다……?”
마지막 문장에, 그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키면서 페이지를 넘겼다.
그리고, 2화, 3화, 4화까지.
숨도 쉬지 않고서 쭈우욱 읽어나간 후.
“아…….”
5화가 없다는 충격적인 현실에, 미처 숨기지 못한 아쉬움이 명백하게 길포드의 얼굴에 내려앉았다.
직후, 확신에 찬 어조가 응접실을 울렸다.
“오늘 당장, 공식적으로 작품 계약합시다. 바로 계약서 가져오죠.”
* * *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로마 공화국을 위대한 제국으로 이끈 장본인이며, 집정관을 넘어서 임기 무제한의 종신독재관이라는 전무후무한 지위를 거머쥔 야망가.
몽테스키외가 평하길, 어떤 군대를 지휘했어도 승리자가 되었을 것이며, 어떤 나라에서 태어났더라도 지도자가 되었을 인물.
막상 그의 일대기를 소설 형식을 빌려 빚어내려니…….
사소한 것 같으면서도 중차대한 문제 두 가지가 내 발목을 잡았다.
먼저.
“흠…….”
그의 인생을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조망할 것인가.
특히 소설적으로.
아무리 훌륭한 영웅의 일대기라 할지언정, 전체 인생의 굴곡에서 노잼 구간이 반드시 존재할 수밖에 없다.
카이사르의 예를 보더라도, 사실 그의 업적 중 대중적인 것들은 다 장년기 이후에 몰려있지 않은가.
삼두 정치, 갈리아 정복, 루비콘강 도하.
그리고 브루투스, 너마저로 대변되는 최후까지.
하지만 인물에 대한 충분한 이해와 배경 서사 없이는 이후의 화려한 행적을 개연성 있게 풀어나갈 수 없으니, 이를 최대한 매력적으로 포장하는 것이 난제였다.
게다가…….
고증, 빌어먹을 역사적 고증.
그리스·로마 신화를 쓸 때는, 아무래도 원전 자체가 신화적 과장을 허용하는 형태라서 그런지 역사적 고증 또한 (신화) 부합함’과 같이 앞에 접두사를 단 형태였다.
하지만 실제 역사적 인물을 다루기 시작한 순간, 고증은 꽤 번거롭게 느껴졌으니.
그 인물에 직접 빙의해 본 것은 아니기 때문에 사소한 대사, 행동, 감정 표현 등은 내가 창작해도 크게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역사적 사실로 확실하게 사서에 기록된 부분을 내가 전개를 위해 뒤틀려고 하면, 바로 고증 에러가 뿜뿜 터져버린다.
그 때문에 원고를 쓰기 위해 문헌을 뒤지고, 논문을 찾고, 히스토리에와 머리를 맞대고 끙끙거린 것만 해도 몇 번인지.
『율 님께서 지시하신 Branch of 카이사르의 인생을 취사선택하여 소설 플롯 구성 작업이 완료되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한 ‘몰락 귀족이 정치를 잘함’은 인간의 욕망, 정치적 암투──』
“스땁. 내가 직접 읽어볼게.”
『TTS를 중단합니다.』
일단 초반부의 전개를 정리해 보자.
카이사르의 인생 전반기는 행운아Felix,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와의 끊임없는 투쟁이라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니다.
애초에 소설의 도입부 자체를 술라와의 대립부터 잡았으니까.
군홧발을 앞세워 민중들을 핍박하는 독재자.
그리고 그에 대항하고자 하는 정의로운 젊은 청년.
목숨이 위협받는 상황에서도 아내와의 이혼 명령을 거부하고, 척살령을 피해 피신하며 점차 자신의 세를 불려 나가는 부분까지 담아낼 것이다.
즉, 명확한 악역을 제시하고 이에 맞서는 구도.
하지만.
그 뒤에 구르는 파트가 고구마로 느껴지는 일은 피해야 했다.
특히 군대 시절.
카이사르는…….
“기합 찬 사내였지.”
물론 내가 당대를 살아본 것은 아니라 그게 과연 진짜였는진 확인할 수 없지만, 카이사르의 인간적 약점은 두 가지였다.
M자 탈모.
그리고…… 동성애.
주변국 비티니아에서 체류한 시절, 그 국왕 니코메데스 4세와 아주 그냥 그렇고 그런…… 관계로 소문이 파다했으며, 그의 평생에 꼬리표로 따라붙었다.
물론 현대적으로야 기합이라는 두 단어로 퉁 쳐서 풍자할 순 있었지만.
여기는 원시 중세 판타지 랜드.
……당연히 동성애는 죄악으로 취급받는다.
이걸 그대로 담아냈다간 로젤린이 어느새 나타나서 내 목을 잡고 ‘이딴 건 순애가 아니에요!’하고 흔들 수도 있었으니까, 이런 파트는 검열…… 아니, 생략하자.
여러 시행착오를 거친 결과.
묘사하지 않고 생략하는 것은, 고증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대충 군 복무 시절은 빠르게 생략하고, 전역 이후 경력을 쌓는 것부터 이어가면 될 것 같은데.”
『율. 당신은 핵심을 찔렀어요. 너무나도 현명하고 완벽한 전개가 되어──』
“저번에도 얘기했지만, 앞으로 모든 대화에 마크다운 문법을 사용하지 말아줘.”
『이해했습니다. 마크다운 문법 사용을 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LLM 특유의 장기 기억력 문제로 종종 터져 나오는 히스토리에의 **핵심**을 찌르는 화법에 제동을 건 후.
그녀가 뱉어낸 글줄을 보면서 생각을 조금 더 정리하고, 다음 이야기의 구성에 집중했다.
.
.
.
“이 정도면 되겠지…….”
초반부 연재분과 더불어, 내용 정리를 끝마친 후.
기지개를 켜며 뻐근해진 몸을 자유롭게 했다.
이제 밖에 나가서 더럽게 맛없는 판타지식 식사를 한 끼 하고, 신문사에 원고를 갖다주고, 집에 와서 운동 좀 하다가 외장 하드에 잔뜩 쌓인 영상매체 좀 봐주고.
그러면 오늘도 평화롭고 평범한 하루가 끝난다.
[‘올림포스 이야기 일리아스’의 판매량이 5,000권을 돌파했습니다! 특전 스킬이 부여됩니다!]
“벌써 그럴 때가 됐나.”
오래간만에, 평화로운 하루에 행복감이 한 줄 덧대어졌다.
가장 최근에 집필한 출간 서적, 일리아스의 판매량이 목표치에 도달했다는 기분 좋은 알림.
심지어 이번에는, 완성도도 수작으로 평가받고, 세간의 평가도 아주 좋았던 나머지.
판매량 목표가 원래의 2,000권이 아니라 5,000권.
즉 두 배 이상으로 설정되었지만, 반대로 보상도 화끈했다.
무려 B급 스킬.
헥토르의 용맹!
“으흐흐.”
처음 맛보는 B급의 성능을 확인해 볼 생각에 군침이 싹 돌았지만.
“어……?”
메시지가 떠오른 것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장착할 수 있는 스킬의 개수가 한계(현재: 3개)를 넘어섰습니다!]
[스킬을 교체하여 필요한 스킬을 장착하거나, 합성하여 새로운 스킬을 획득해 보세요!]
한계가 있어……?
합성도,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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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정보
- **Novel ID**: 383409
- **작품 URL**: https://novelpia.com/novel/383409
- **총 회차**: 회차
- **작가**:
## 다운로드 현황
| 항목 | 값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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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 다운로드 | EP.45 (45.md) |
| Episode ID | 5119818 |
| Viewer URL | https://novelpia.com/viewer/5119818/ |
| 다운로드 일시 | 2025-12-03 21:03 |
| 다운로드 수 | 0화 |
| 건너뜀 | 1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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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너뛴 회차
- EP.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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