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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으, 흠···.”
끙끙거리는 소리와 함께, 지누리가 체스판을 노려보고 있다.
“···.”
신아영은 다소 뾰로통한 눈길로 그걸 내려다봤다.
형세는 이미 그녀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탁—
얼마나 기다렸을까. 지누리가 신중하게 다음 수를 내려놓았다.
그걸로 끝이었다.
“체크메이트.”
신아영이 기물을 탁 내려놓으며 게임을 끝냈다. 실은 진작에 끝난 게임이었다.
“아.”
그러자 들려오는 단말마.
지누리는 말도 안 된다며, 벌떡 일어나 체스판 위를 이리저리 살폈다.
킹이 빠져나갈 길이 없나 고심하다가, 완전히 막혔다는 걸 확인한 후에서야 자리에 주저앉았다.
“···이걸로 몇 대 몇이더라?”
“5대 0.”
“와, 한 번을 안 봐주네···.”
옆에서 지켜보던 부부장과 부장. 두 사람이 조용히 속닥거렸다.
너무 일방적인 흐름에 할 말을 잃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다른 게임으로 한 판 더 해.”
지누리가 반달 같은 눈을 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선홍빛 입술은 꽉 다물려 있었다. 입술이 미묘하게 삐죽 튀어나와 있다.
미간은 중앙으로 팍 모였고, 눈망울은 올망졸망 떨리고 있었다.
진 게 그리 분한 걸까.
지누리는 보기보다 승부욕이 넘쳤다.
“그래. 원하는 거 아무거나 들고 와.”
신아영이 적당히 손을 흔들었다.
뭘 하든 질 자신이 없었다.
그야, 지누리가 생각 이상으로 게임을 못했으니까.
아니면, 이쪽이 잘하는 걸 수도 있고.
솔직히 재미는 없었다. 너무 쉽게 끝나버려서.
이승호랑 하면 하는 맛이라도 있는데.
“···.”
···또 걔 생각이네.
“에효.”
신아영은 상체에 힘을 빼며 등을 의자에 푹 기댔다.
지금 피시방이 아니라, 상담실에서 보드게임하는 건.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듀오의 재미를 알게 된 이후로, 혼자서 하는 게임은 어딘가 재미가 없어졌기에.
차라리 이렇게 다 같이 있는 게 나았다.
‘···꼭 피방이 아니더라도 괜찮은데.
보드게임도 괜찮았다.
다만, 이승호는 지금 여기에 없었다.
이솔이랑 단둘이 공부하러 간대서.
‘···흥.
신아영은 속으로 콧방귀를 뀌었다.
거 하루 놀아주는 게 어디 덧나나.
아무리 이승호에게 호감이 있다지만, 이솔도 너무했다.
···오늘 진짜 힘들었는데.
스트레스 좀 풀러 게임 좀 같이해달라는 게, 그리 못할 일이었냐고···.
“뭐 할래? 골라봐.”
지누리가 양손 가득 보드게임을 든 채로 물었다.
이번에야말로 이기겠다는 듯. 눈썹을 들썩였다.
“블루 마블도 있고, 과일 게임도 있고. 아니면 원 카드?”
“···어···.”
신아영이 그것들을 보며 슬쩍 눈을 좁혔다. 종류가 너무 다양했다.
“···뭔 상담부에 보드게임이 이리 많대···?”
한두 개 정도가 아니라, 반쯤 보드게임 카페를 차려도 될 정도다.
그 의문에.
박민지가 큼큼 헛기침을 내뱉었다.
“이래 보여도 다 상담에 필요한 것들인걸.”
저 많은 상자가 전부다?
상담과 보드게임이 무슨 연관이 있단 말인가.
“···상담. 보드게임···?”
상담.
그리고, 보드게임.
“···.”
신아영의 눈길이 ‘상담 신청서’가 놓인 곳으로 향했다.
“···.”
음.
입술을 꾹 다물었다. 한가지 번뜩이는 생각이 떠올랐다.
‘어떻게 하지.
신아영의 턱끝이 이리저리 비틀렸다.
조금 고민이 되었다. 이래도 되나 싶었다.
아무리 그래도, 시험기간에 바쁜 사람을 붙잡는 건···
“···.”
그렇지만 아직 한 달 반이나 넘게 남았고.
···하루 정도라면.
“···민지 언니, 상담 신청서 어떻게 써요?”
* * *
···갑작스럽게 닥친 상황.
나는 방에 들어온 이승아와 눈을 마주쳤다.
이승아는 이솔과 나를 둘러봤고.
이솔은 자신은 아무것도 모른다며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다.
“···.”
“···.”
그렇게, 이어지는 침묵.
이솔은 잠시 눈을 깜빡거리다가, 슬그머니 침대에서 내려왔다.
최대한 조용하고 자연스러운 동작이었다.
“···.”
“···.”
그리고, 또 이어지는 침묵.
“··· 간식 주러 왔다고?”
나는 그걸 보다가 참지 못하고 먼저 입을 열었다.
화제를 잠시 다른 곳으로 돌리고자 했다.
“응, 여기.”
이승아도 그걸 받아줬다.
쟁반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근데.”
나는 이승아가 들고 온 접시 위를 보고 눈을 좁혔다.
“왜 이것밖에 없냐?”
간식이라고 들고 온 것이.
쿠키 한 조각과 애매한 양으로 따라진 오렌지 주스 두 잔이 전부라.
“집에 먹을 거 다 떨어졌더라.”
팔을 으쓱 올리는 이승아.
저리 당당한 걸 보니, 정말 집에 남은 간식이 없었나보다.
— “···남은 쿠키 두 개 중, 하나 정도는 뭐···.”
이 와중에 하나를 먹은 모양이다. 이승아의 미니미가 혀를 낼름거렸다.
과자 부스러기가 입가에 묻어있었다.
“그렇게 먹고 싶으면 직접 가서 사던가. 편의점 바로 코 앞이잖아.”
이승아가 엄지로 현관을 가리켰다. 나는 팔뚝을 슥슥 긁었다.
“···네가 사 와주면 안 되냐?”
솔직히, 나가기 귀찮았다.
“돈 줄게. 가는 김에 니 꺼도 하나 사고.”
그런 딜을 걸어본다.
“음···상관없긴 한데.”
이승아가 총총 다가오더니, 고개를 귓가에 가까이 붙였다.
“?”
소름이 돋아서 고개를 뒤로 빼자.
이승아가 본인도 싫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내 어깨를 한 손으로 잡았다.
손등으로 입가를 가리며 소곤거렸다.
‘···혹시, 집에 둘만 있으시게요? 예?
“아.”
그 말에 정신이 확 들었다.
그건 미처 생각 못 했다. 이승아가 갑자기 들이닥친 게 내심 당황스러웠던 걸까.
“돈 줘 봐.”
이승아가 손을 내밀었다.
— “나야 상관없긴 한데······그러면, 잠깐만 나갔다 올까?”
이승아의 미니미가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웃음을 참고 있는 듯한 얼굴이었다.
“···내가 갔다 올게.”
나는 그걸 보다 못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지갑을 챙기고 밖으로 나설 채비를 하다가, 잠시 뒤로 돌았다.
“뭐 사 올까?”
“···나는 이거만 있어도 돼.”
이솔은 주스가 담긴 컵을 들어 올렸다.
맞다. 다이어트 중이라고 했지.
— “게다가, 괜히 시키기 미안하니까···.”
미니미가 인내심을 발휘하고 있다.
정말 필요 없는 모양새다.
“나는 매콤 감자칩 하나.”
이승아는 발을 쭉 뻗고 앉으며, 당당하게도 요구해 왔다. “아니다. 더 비싼 거 사 오라고 할까?”
녀석의 미니미는 쓸데없는 걱정을 하고 있었다.
어차피 안 사 올 거다.
“···.”
나는 말없이 서 있다가.
“···알아서 잘 적당히 해라.”
앉아 있는 이승아에게 한마디를 남긴 후, 편의점으로 나섰다.
* * *
“···.”
“···.”
이승호가 떠난 방 안.
이솔과 이승아.
단 두 사람만이 남은 이 공간은, 묘한 어색함만이 맴돌고 있었다.
평소라면, 이 침묵이 마음에 들었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이솔은 바닥에 앉은 채로 멈췄다. 숨이 막혔다.
“···.”
이솔은 왼편으로 눈을 힐끔 돌렸다.
“···.”
말없이 앉아 있는 이승아. 네일을 꼼지락거리며 보고 있는 옆모습이 보인다.
그 외견은 다시 봐도 예뻤다.
아직 소녀티가 남아있지만, 그건 그것대로 나이대에 맞는 청순함이 있었다.
쟤가 이승호의 여동생이구나.
그런 생각이 일어서.
괜히 목울대만 꼴딱꼴딱 넘어갔다.
머리는 화제를 떠올리려 끊임없이 굴러가고 있었다.
뭐가 없을까. 재밌게 할 법한 말이······
“···지난번에 공항에서 봤었죠?”
돌연 이승아가 고개를 치켜올리며 물어왔다.
“아. 응. 맞아.”
이솔은 그 동아줄을 냉큼 붙잡았다.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그, 이름이······.”
“이솔이야. 성이 ‘이’고, 이름이 ‘솔’.”
“이솔··· 이솔 언니···. 이름이 저랑 비슷하네요. 제 이름은—”
“승아. 이승아 맞지?”
이솔이 그리 묻자.
“···기억하고 계셨네요?”
이승아의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응, 지난번에 들었으니까.”
“아하.”
“···.”
···조아쓰.
이솔은 마음속으로 콧김을 훅 내뿜었다.
역시 외워두길 잘했다.
집에 동생 있다는 말에, 미리 인별로 찾아봐 둔 것이 큰 도움이 됐다.
“근데, 오늘은 다른 친구분들은 안 오셨네요?”
“응? 뭐가?”
이솔이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공항에서 봤던 다른 두 분 있잖아요. 그분들도 오빠 친구 아니에요? 되게 친해 보이던데.”
“아···.”
신아영과 지누리를 말하는 걸까.
“으음.”
이솔은 입술을 달싹였다.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하나.
두 사람을 빼놓고. 이승호와 둘이서 공부하는 이유라.
둘만 공부하는 게, 어떤 느낌일지 궁금해서···라고 말하기엔 좀 민망하다.
그렇다고 거짓말을 하기에도 그렇고.
“내가 공부를 잘하는 편은 아니라··· 오늘은 둘이서 하기로 했어. 승호가 잘 가르쳐주거든.”
이솔은 귀 끝에 미약하게 열이 올라오는 걸 느끼며, 변명 아닌 변명을 떠벌였다.
“네?”
그러자, 이승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의아한 눈빛을 보냈다.
“오빠가 공부 잘 가르치나 보네요?”
“···응? 승아 너한테는 한 번도 안 가르쳐줬어?”
“네.”
이승아는 그것이 서운하지도 않은지, 무덤덤한 표정이었다.
그냥 그런가 보다 하는 얼굴.
“남매지간이면 보통 그렇죠. 글고 저도 오빠한테 배우긴 싫거든요.”
“그렇구나.”
남매는 그게 보통이구나.
외동이라 그런 건 잘 몰랐다.
“···.”
이솔은 책상에 놓인 오렌지 주스를 빨대로 쭉 빨아 마셨다.
‘맛있네.
어깨가 아래로 내려간다.
달콤한 게 입에 들어오니, 차츰 긴장이 풀려갔다.
이승아도 나쁜 애는 아닌 것 같아서, 둘만 있어도 나름 안심이···
“언니.”
“왜에?”
“저희 오빠한테 호감 있어요?”
쿨럭···!
그 단도직입적인 물음에. 이솔의 입이 스르르 벌어졌다. 하마터면 주스를 그대로 뿜을 뻔했다.
머릿속이 순간적으로 하얗게 변했다.
고개가 삐걱삐걱 옆으로 돌아갔다.
“···.”
이승아는 여전히 무덤덤한 표정이었다. 진지한 물음이었다.
그렇다면, 이건 뭐라 대답해야 할까.
아니라고 부정해야 할까.
혹은, 다른 말로 틀어볼까.
몇 가지 떠오르는 차선책에······
이솔은 억지로 눈을 부릅떴다. 그 탓에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
이솔은 입술을 앙다물고, 이승아를 똑바로 응시했다.
대답은 하지 않았다.
조금 붉어진 두 뺨이, 그걸 대신 말하고 있었으니까.
“···.”
이승아도 그걸 알아차렸는지, 눈을 살짝 크게 떴다.
“···혹시, 고백할 생각이에요?”
이승아가 슬그머니 물어왔다.
“어? 어···그건 아직··· 모르겠는데···.”
이솔의 목소리가 뒤로 갈수록 줄어들었다.
거기까지는 생각 안 해봤다.
“음. 그럼, 지금이 말하기 딱 좋겠네요.”
이승아가 고개를 작게 주억거렸다.
“···?”
이솔의 얼굴 위로 의문부호가 떠올랐다.
당최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었다.
“솔직히 말할게요.”
이승아가 이솔 쪽으로 몸을 틀었다.
정면으로 마주한 시선.
확연하게 진지한 표정으로.
“오빠한테 고백하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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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이승아의 시선은 변함이 없다. 농담이 아니라는 듯한 담대한 눈길.
그 눈망울은 정확히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솔은 목울대를 넘겼다.
“어어···.”
두 손은 어디에다 둬야 할지 몰라, 이리저리 움직이다. 치마 끝자락을 살짝 쥐었다.
그 혼란한 심정 속에서, 그녀가 한 말을 다시 곱씹어본다.
···오빠한테 고백하지 마세요.
고백하지 마라.
고백하지 마라?
“어, 어어···.”
입술이 슥 벌어졌다. 이솔의 얼굴 위로 멍한 표정이 점차 번져갔다.
내가 얘한테 뭔가 실수했던가.
그런 생각만 맴돌았다.
분명 그런 게 아니고선, 그런 말을 할 리가.
“어, 그···.”
입술을 뻐금거리던 이솔은, 눈매가 추욱 가라앉았다.
미움받았구나.
시무룩. 조금 우울한 표정이 되었다.
“아니아니···!”
그 모습을 본 이승아가 당황하며 양손을 저었다.
“아직, 고백하지 말라는 뜻이었어요···!”
“···아직?”
이솔은 다시 생기가 돌았다.
···그런데.
고백은 하라면 하는 것이고.
안 하려면 안 하는 것인데.
아직 하지 말라는 것은, 대체 무슨 소리일까.
“아직이라는 건···?”
“그게···.”
이승아는 곤란한 듯, 목덜미를 쓸어내렸다.
몸을 꾸물거리며 시선은 바닥으로 향하고 있다.
“후—”
반쯤 눈을 감은 이승아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내가 왜 이러고 있냐며, 불만 어린 어투로 중얼거리다가.
“···조금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는데. 그냥 빠르게 말할게요. 알았죠?”
미간을 확 찌푸리며, 이승아는 벽에 탁 손을 짚었다.
“으응.”
이솔이 그 기세에 끌려가듯이 끄덕였다.
“몇 년 전에 저희 오빠가 엄청 크게 아팠던 적이 있었거든요?”
이승아는 그 언젠가의 일을 떠올렸다.
분명. 그때가 이승호가 중학교 2학년이었을 거다.
원인도 모를 고열에 시달려서, 밤중에 응급실로 실려 간 적이 있었더랬다.
다행히 열은 금방 내렸지만······.
“아마, 그때쯤부터였을 거예요.”
이승아가 살짝 눈을 내리깔았다.
“그 이후로 저희 오빠는 연애 감정 같은 걸, 거의 못 느끼는 것 같거든요.”
이승아의 말에.
“···어?”
이솔의 행동이 그대로 멈추었다.
보통 일에도 놀라지 않을 만큼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이것만큼은 도저히 안 놀랄 수 없었다.
정확히는 놀랐다기보다. 현실감을 잃고 멍해졌다.
“···.”
“···.”
두 사람은 잠시 말없이 시선을 마주쳤다.
자신이 말하면서도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는 이승아였지만. 그 어투만큼은 진지했다.
적어도 거짓말하는 표정은 아니었다.
“···진짜로?”
“···.”
이승아가 말없이 끄덕였다.
“중학교 때 썸녀가 고백한 걸, 그대로 차 버렸거든요. 둘이 원래 되게 좋은 사이였는데··· 아무튼 그렇게 됐어요.”
그런 증언이 이어졌다.
이솔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약간이지만, 신경 쓰이는 화제라.
···일단, 지금은 잠시 넘겨두고.
“···아프면서 어디 문제 생긴 거야?”
“아뇨, 병원에서 그런 건 아니래요.”
이승아가 미묘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다른 건 또 멀쩡하거든요. 화날 때 화내고, 맛있는 거 먹으면 좋아하고.”
감정 자체는 크게 문제없다.
“단지··· 감정의 기준치가 높아졌다고 해야 하나··· 흐려졌다고 해야 하나··· 그 부분은 저도 잘 모르겠는데. 아무튼 그런 상황이라.”
그때 이후로 성향 자체가 뒤바뀐 느낌이라.
평소에 로맨스로 점철된 드라마도 잘 보던 사람이, 그날 이후로는 어딘가 재미없다며 영화를 선호하기 시작하더니.
중간 이하였던 성적은 갑자기 올라가고, 안 하던 운동도 하기 시작했다.
어딘가 만화에 나올법한 등가교환처럼.
무언가를 얻은 대가로, 감정의 한 부분이 흐릿해진 듯.
그는 그렇게 바뀌었다.
“그러니까 섣부르게 고백해 봤자. 좋은 답은 못 들을 거예요.”
이승아가 팔짱을 꼈다.
결국, 결론은 이거였다.
“웬만한 걸로는 꿈적도 안 할걸요?”
“···.”
“다른 사람이라면 언니랑 단둘이 약속 잡았을 때부터 호들갑 떨었을 텐데. 저 인간은 미동도 없잖아요.”
이솔이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건 그렇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학습지를 꺼내 들던 이승호다.
“그래서 고백하지 말라는 거예요.”
어차피 통하지 않을 테니.
“···.”
이솔은 대답이 없었다.
다소 갑작스러운 화제에 아직 머릿속이 정리되지 않은 탓이 컸다.
“전 사귈 상대로는 오빠는 추천 안 해요.”
이승아가 그런 조언을 꺼냈다.
“그 마음을 보답받을 거라는 보장도 없고. 언니도 아직 호감일 뿐이라면, 지금이라도 다른 사람을 찾는 편이—”
“승아야.”
이솔이 그녀의 이름을 나지막이 불렀다. 이승아의 목소리가 덮였다.
“···.”
이솔은 고개를 슬그머니 치켜들었다. 어딘가 차분하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천천히 입술을 뗐다.
“···.”
···요즘 들어서 알아차린 건데.
나는 이미 내린 선택에 다른 사람이 참견하는 걸. 별로 안 좋아하는 모양이라.
중간고사 때도 그렇고, 수학여행의 아쿠아리움에서도 그러했다.
그러니까.
“내가 알아서···.”
이솔은 한순간, 숨을 후— 들이키며. 내뱉을 말을 일부 정정했다.
그녀의 말대로, 이쪽에서 보낸 고백으로 잘 안될 거라면.
그 반대로 하면 되는 것이다.
이승호가 내게 고백하도록.
“···꼬실 거야.”
이솔은 머리끝을 손가락으로 꼬았다. 말하고 나니 열이 올랐다.
···그러니까.
그 이상은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았다.
왜냐하면, 자신은 점진적인 연애를 하고자 하기에.
* * *
홀로 남은 방 안. 이승아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 얼굴을 양손으로 쓸어내리고 있었다.
손가락 사이로 비치는 눈이 깜빡거렸다. 발가락이 꾸욱 접혔다.
“와우···.”
이승아의 표정이 부끄러움으로, 미약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정말, 보는 이쪽이 다 놀라서.
설탕 한 스푼을 그대로 퍼먹은 기분이었다. 오랜만에 로맨스 드라마가 굉장히 보고 싶어질 정도로.
“하, 참···.”
방금 전의 광경이 머릿속에서 다시금 재생된다.
아래로 살짝 떨어진 회색빛 머리카락. 그 사이로 보이는 동공으로 비치는 풋풋한 감정.
삐죽삐죽 튀어나오는 미묘한 음습함.
그 하나하나가 사춘기 소녀의 마음을 자극하기에 차고도 넘쳤다.
로맨스물 한 편 뚝딱이었다.
“···.”
그때.
현관에서 삑삑거리는 소음과 함께 문이 벌컥 열렸다.
“나왔다.”
이승호가 태연한 표정으로 걸어들어왔다. 한 손에는 흰 봉투가 들려있다.
“아.”
이승아의 표정이 순식간에 차분해졌다.
마치 혼자 애니메이션 보던 중, 부모님이 방에 들어온 기분이다.
그녀는 정색하며 그를 바라봤다.
“···복 받은 새끼. 넌 용돈 절반으로 줄여라.”
그를 보고 있자면, 그렇게 중얼거릴 수밖에 없다.
“···?”
이승호는 어이없다는 듯 의문 부호를 떠올렸다. 손가락 끝으로 이마를 긁적였다. 중지였다.
그는 사 온 봉투를 테이블 위에 올려뒀다.
“아.”
이승아는 그걸 보고 눈빛을 빛냈다.
저게 있었지.
“흠흠~”
이승아는 콧노래를 부르며 냉큼 그걸 열어젖혔다.
봉투에 든 간식이 이것저것 많았다. 뒤적거리다가 매콤 감자칩을 꺼내 들었다.
그래도 눈치껏 사 오긴 했다.
“···이솔은?”
집 안을 살피던 이승호가 물었다.
“공부에 집중 안 될 것 같다고, 먼저 돌아간대.”
이승아는 이솔을 떠올리며 쓰게 웃었다.
당당하게 말하던 그 모습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다시 뽀짝한 모습으로 돌아와선, 다다다 도망치듯이 집으로 돌아갔다.
“혹시 나가면서 안 마주쳤어?”
이승아의 물음에.
“안 보이던데.”
이승호는 간식을 선반 위에 정리하며 대꾸했다.
그렇다면, 일부러 다른 방향으로 돌아갔나 보다.
참 부끄러움이 많은 언니다 싶었다.
“···.”
가만히 선반을 정리하던 이승호가 떠보듯이 물었다.
“···말했냐?”
그의 시선은 여전히 선반 위를 향하고 있었다.
“말했지.”
이승아도 괜히 시선을 마주치지 않고 답했다.
그도 그럴게.
나중에 돼서 말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지금 내가 말하는 편이 더 낫잖아.”
그의 정신 상태에 대해.
고백받았을 때 이리저리 설명하며 거절하는 것보다는. 구차하게 이승호가 직접 말하는 것보단.
역시, 다른 사람이 말하는 편이 신빙성이 오를 테니까.
또 상처를 주진 않을 테니까.
“···.”
이승호도 동의한다는 듯 조용히 있었다. 무언의 긍정이었다.
“···.”
턱에 손을 괸 이승아가 헛웃음을 내쉬었다.
지금 생각해도 어이가 없다.
감정 중에 연애 감정만 흐릿하다니.
어느 순간부터인가 생겨난, 저 이상할 정도로 기민한 눈치와 등가교환 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야. 어디 가냐.”
이승아가 제 방으로 들어가려는 이승호를 붙잡았다.
“? 왜.”
“아니, 뭘 당당하게 지나가냐고.”
이승아는 눈을 찌푸리며 그를 추궁했다. 당당하게 한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것도 있어야지. 도와줬으니까, 너도 나 좀 도와야지.”
“······원하는 게 뭔데.”
이승호는 잠시 침묵했다가, 주춤주춤 몸을 돌리며 물었다.
“크게 어려운 건 아니고.”
이승아가 휴대폰을 두들겼다.
“이거 봐봐.”
화면을 내밀었다.
그걸 본 이승호의 눈이 가늘게 떠졌다.
“···코믹 축제?”
“응, 다음 주 주말에 여기에 부스 열 생각이었거든.”
코믹 축제. 일정 기간마다 여는, 모든 오타쿠들의 오프라인 행사.
2차 창작물들을 사고팔거나, 코스프레를 볼 수 있는 이벤트 회장인 것이다.
듣기만 해도 가슴 뛰는 행사가 아닌가.
이승아는 일러스트레이터를 장래 희망으로 삼는 사람으로서 주기적으로 이곳에 참여하곤 했다.
“원래 오기로 했던 사람이 있었는데, 그분이 갑자기 입원해서.”
그런고로.
“이번에 행사 뛰는 거 도와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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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나는 세면대에서 미지근한 물로 얼굴을 헹구며 생각했다.
어제 있었던 일에 대해서다.
지금까지의 이솔의 행동과 생각을 종합해 보자면, 그건 이미 호감을 넘어선 무언가였다.
‘···왜지?
왜 호감을 느끼는 걸까.
그런 의문이 들긴 했다.
기억상으로 내가 뭘 한 적이 없어서.
굳이 떠올리자면, 중간고사 때 사소한 도움을 준 게 전부였다.
‘혹시···.
나는 거울 앞에서 얼굴을 슥 돌렸다.
···흠.
“···.”
지나가던 이승아가 이쪽을 보고선 가던 길로 지나갔다
— “아잇··· 왜 아침부터 지랄이지.”
미니미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총총 걸어간다.
“···.”
······이건 아닌가 보네.
나는 수건을 들고 얌전히 물기를 닦은 뒤, 화장실 밖으로 나왔다.
고민은 이어졌다.
‘···외모가 영향이 없는 건 아니겠지만.
그렇다고 잘생겨서 반했다고 하기엔 그렇다.
못생긴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연예인 뺨칠 정도로 생긴 건 아니라.
학교엔 나보다 잘생긴 애들이 많았다. 외모라는 건 언제나 상대적인 것이었다.
그런 거라면 이솔은 이미 사귀고 있는 사람이 있을 거다.
“아, 맞다.”
돌아다니며 빵을 우물거리던 이승아가 쩝쩝거리며 말했다.
“사람들한테 다 말해뒀으니까, 다음 주 행사 빠지면 안된다?”
“어.”
나는 적당히 끄덕였다.
왜 행사가 주말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알바비도 조금 준다니까. 크게 불만은 없었다.
“···?”
나는 시리얼을 접시에 붓다가 눈을 좁혔다. 반대편에 이승아가 떡하고 앉길래.
얘는 왜 여기서 먹지.
아침도 잘 안 먹는 애가 앉아 있으니, 더 이질감이 들었다.
뭐라 할 수도 없으니까, 일단 가만히 있자.
“오빠는 이상형 같은 거 없어?”
이승아가 돌연 그런 물음을 해왔다.
살짝 뿜을 뻔했다.
— “···혹시라도 있으면 나중에 솔이 언니한테 슬쩍 말해줘야겠다.”
녀석의 미니미가 입꼬리를 올리고 있다. 계략의 표정이다.
‘스읍··· 난 또 뭐라고.
얘는 가끔 말을 이상하게 끊어서, 사람 헷갈리게 만들 때가 있다.
나는 다시 시리얼을 향해 신경을 돌렸다.
여기서 내가 해야 할 대답은.
“존나 뜬금없네.”
생각이 안 들린다는 가정하에, 이게 가장 적당한 답이었다.
“···.”
이승아가 오물거리던 입술을 멈췄다. 무안한 듯 시선을 돌렸다.
— “쓰읍··· 너무 성급하게 꺼냈나?”
미니마가 턱을 쓸어내렸다.
아쉽다는 눈치였다.
“···쩝.”
나는 시리얼을 와그작 씹으며 생각했다. 슬슬 이승아의 관심이 부담스러울 지경이라.
어제도 그렇고, 오늘도 그렇고. 내게 신경 써주는 건 고마웠다.
‘고마운데······.
이쪽도 나름의 템포라는 게 있다.
다른 사람이 보기엔 느릴 거다.
그러한 관계에 벽을 쌓은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일부는 정말 그럴지도 모르고.
“···.”
나는 다른 사람보다 인간관계에 느리고, 조심스러웠기에.
상대의 생각이 들리기에.
역설적으로 관계 맺음이 어려웠다.
미니미를 처음 보게 됐을 때, 그동안 잘 지내왔던 친구들과 전부 멀어졌을 정도니.
중학교 시절 썸녀와는······.
됐다. 이건 생각하지 말자. 그리 좋은 기억도 아니다.
어느 정도 감정적 거리감을 두는 것.
이건 경험으로 몸에 밴 습관에 가까웠다. 잠깐의 시간으로 고쳐질 체질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
나는 이솔을 떠올리며 침묵했다.
몸을 비틀며 뭐라도 하고자 하는 녀석을 떠올리면.
“···음.”
아무래도.
조금은 바뀌고자 해야 하는 게 아닌가.
그런 위기감은 들었다.
* * *
이른 아침.
아이들이 하나둘 등교하는 시간대.
드라마 ‘흑색 세계’가 공개되고 나서 제일 크게 변화된 것이 있다면.
그건 아마, 신아영 주변으로 서 있는 사람들의 성비 변화일 것이다.
“···.”
신아영은 은밀히 주변을 둘러봤다.
여자애들은 멀리 떨어져서 자기네들끼리 대화를 나누고 있고.
“어제 하이라이트 뉴튜브에 올라온 건데—”
남자애들이 두런두런 말을 걸어온다.
사인 부탁은 언제부터인가 사라졌지만.
대신, 드라마 얘기를 핑계로 말을 걸어오는 남학생이 부쩍 많아졌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아영~ 이거 먹을래?”
지누리가 걸어들어오며 손에 들고 있던 과자 봉지를 내밀었다.
그러자, 남자애들이 자연스레 제자리로 돌아갔다.
지누리나 이솔이 오면 그들도 은근슬쩍 자리를 피했다.
누리는 은근히 눈치를 주고, 이솔은 대놓고 자기 자리에서 비키라고 하니까.
“그럼, 하나만.”
과자를 하나 집은 신아영은 내심 지누리를 반겼다.
그걸 먹자 조금은 참을 만해졌다.
···방과후까지 앞으로 약 9시간.
···9시간.
씁.
그래.
조금만 더 버티자.
* * *
전공 수업을 마치고 복도로 나오자.
나는 반대편 복도 끝에서 걸어오던 이솔과 딱 눈이 마주쳤다.
“···!”
이솔의 행동이 멈췄다. 덜컥 떨리는 것이 여기까지 보였다.
— “— — — — —”
똑같이 미니미도 행동을 멈췄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노이즈가 심해졌다.
뚝딱거리는 걸음걸이. 하루 종일 저 모습이었다.
“너 어디 몸 안 좋은 건 아니지?”
지누리는 눈썹을 구부리며 걱정 어린 표정을 지었다.
“···응.”
이솔이 삐걱삐걱 끄덕였다.
말과는 정반대다. 전혀 아닌 것 같다.
“괜찮—”
— “----------!”
미니미의 노이즈가 더 심해졌다.
나는 주춤 뒤로 물러났다.
중간중간 ‘쪽팔’ 이나 ‘민망’같은 단어가 섞여 새어 나왔다.
‘뭐지.
어제 이승아와 무슨 일이 있었던 게 분명한데.
그게 뭔지는 알 수 없었다.
“···.”
됐다.
이 상태로는 알아낼 도리가 없다.
“슬슬 가자.”
이제 동아리 시간이다.
나는 교실에서 가방을 챙겼다.
“나는 오늘도 연습 있어서. 솔아 이거 좀 부탁할게.”
지누리가 사유서를 이솔에게 건넸다.
“응.”
그녀가 주는 건, 또 멀쩡히 잘 받는다.
— “계속 빠지는 것 같아서 좀 그렇긴 한데······.”
지누리의 미니미가 작은 기타 케이스를 고쳐 매며 눈치를 봤다.
— “그래도 무대에서 연주하려면 시간이 촉박하니까.”
무대라니.
어디서 길거리 공연이라도 할 생각인가 보지.
“미안, 나 먼저 가볼게.”
“어.”
먼저 자리를 뜨는 지누리를 향해, 잘 가라며 적당히 손을 들었다.
그렇게 단둘이 남았다.
“우리도 갈까?”
“···.”
이솔이 말없이 끄덕였다. 가방을 쥔 손에 살짝 힘이 들어가는 것이 보인다.
저건 긴장감일까.
글쎄. 생각이 안 읽히니, 확신할 수는 없다.
···그렇게 거의 부실까지 다다랐을 무렵.
“··· 잠깐만.”
이솔이 먼저 부실로 들어가 보라며 몸을 틀었다.
그 방향을 보니 볼일이 급했던 모양.
“···.”
나는 끄덕이며 먼저 부실 문을 열었다.
드르륵—
안으로 들어서자, 카드 게임을 하고 있던 부장과 부부장이 보인다.
“어··· 왔냐?”
부장이 나를 힐끔 보더니, 다시 카드 뭉치로 눈을 돌렸다.
그러다가···.
“아, 맞아. 너한테 상담 들어왔어.”
부장이 그리 말했다.
“저한테요?”
“어.”
부장이 책상 위를 가리켰다. 그곳에 흰 봉투가 하나 놓여있다.
가끔 이런 일이 있다.
대면 상담을 하면 원하는 사람을 고를 수 있었다. 내담자가 상담 내용을 원하는 사람에게 말할 권리란다.
— “···뭐······승호라면 알아서 잘하겠지······으음······.”
게임에 집중하고 있는 탓인지, 미니미의 생각이 일부만 드문드문 읽혔다.
나머지는 카드 게임에 관련된 생각들이었다.
‘어디···.
나는 서약서를 쓴 후, 상담 신청서를 그걸 펼쳐봤다.
“···어. 이거 진짜예요?”
거기에 적힌 이름을 보자마자. 나는 의아함에 눈을 깜빡일 수밖에 없었다.
* * *
터덜터덜 아무도 없는 복도까지 온 신아영.
“후우···.”
한숨을 내쉬던 그녀는 벽에 등을 붙였다. 어느새 진이 다 빠졌다.
“···.”
얼굴을 쓸어내리다가. 정신 차리자며 볼을 가볍게 두들겼다.
그래, 조금만 더 참으면 된다.
오늘은 꾀병이나 핑계가 아니라, 합법적인 연유로 동아리도 빠졌으니까.
······
전공 수업이 마쳤다.
탁탁탁탁.
신아영은 여태까지와는 다른 빠른 발걸음으로 움직였다.
아무도 없는 계단을 토도도도 내려와서.
선생님 앞에서 살짝 속도를 줄이며 눈웃음을 지었다가.
배후로 들어온 순간, 빠른 경보로 걸어 나갔다.
목적지는 여느 때와 같았다.
드르륵— 문을 열고 상담실 안으로 들어섰다.
“안녕하세요. 저 왔어요.”
“···어, 왔어~?”
부부장인 박민지가 제일 먼저 그녀를 맞이했다. 그 말에 부실에 앉아 있던 이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이승호도 있고, 그 옆에 부장도 보인다.
지누리는 연습한다고 안 온 것일 테고······
웬일로 이솔이 안 보였다.
그것에 잠시 의문을 가진 순간.
“···.”
뒤에서 드르륵 거리는 소리와 함께 이솔이 들어왔다.
앞머리가 살짝 젖어있다. 어디서 세수라도 하고 온 걸까.
“···어, 왔었구나?”
이솔은 그녀를 보고 눈썹을 들썩이고선 살짝 스쳐 지나갔다.
“···.”
이승호의 맞은편에 털썩 주저앉았다. 평소보다는 조금 어색한 몸짓이었다.
“···오늘은 어디서 공부할 거야?”
“그게, 오늘은 안 될 것 같아.”
“어?”
이솔의 표정이 멍해졌다. 이건 예상치도 못했다는 듯 엉덩이가 들썩였다.
“신아영이랑 상담이 잡혀서.”
“으응?”
이솔의 눈이 이전보다 더 커졌다. 방울만 해졌다.
“고민거리가 생겨서···. 오늘 상담 받기로 했거든.”
신아영은 미안하다는 듯 양손을 모으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
이솔은 눈을 좌우로 굴렸다. 평소보다 조금 초조해진 듯 입술을 뗐다.
“그럼 나도—”
“1대1 상담이야.”
“어··· 그러면 내가—”
“상담은 승호 얘가 더 잘할 것 같아서.”
신아영이 이솔의 어깨를 부드러운 손길로 짚었다. 가볍게 선을 따라 쓸어내렸다.
“그리고 솔이 너는 공부해야 하잖아.”
기말고사가 한 달 하고도 반밖에 안 남았지 않았는가.
지금부터 착실히 해둬야지.
“···.”
이솔의 입술이 앙 다물렸다.
“대신, 공부는 민지 언니가 봐주신대.”
신아영이 시선으로 옆을 슬쩍 가리켰다.
박민지는 카드 게임을 하는 와중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
이솔의 대답은 없었다.
‘음.
신아영은 이솔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이걸 방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거다.
어쩌면··· 그래, 그게 맞을지도 모르지.
“들어가자.”
신아영은 이승호를 데리고 안쪽 상담실로 들어갔다.
미닫이식 문을 조용히 닫았다.
그 틈새 사이로 이솔의 벙찐 얼굴이 살짝 엿보였다.
신아영은 그 모습을 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좀 미안하네.
그렇지만, 이쪽도 열심히 기다렸으니까.
하루니까.
딱 하루만 스트레스 풀려고 하는 거잖아.
그러니까.
······솔아, 이 정도는 이해해 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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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후···.”
문을 닫은 신아영은 고개를 숙였다. 두 눈망울이 달달 떨리고 있었다.
저질렀다.
결국은 저질러 버렸다.
쿵쿵. 심장이 뛰었다. 이마가 축축했다.
이건 이솔에 대한 미안함일까, 아니면 저지른 행위에 대한 일탈감일까.
···어쩌면.
둘 다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들었다.
“스읍··· 후우···.”
신아영은 가슴 부근을 살살 쓸어내렸다.
진정하자.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기껏 일탈을 저지르며 그를 데려왔으니.
“우리 뭐 할래?”
신아영은 상담실 안쪽, 책상 밑에 있는 사물함을 열었다.
안에 수북이 쌓여있는 상자들을 둘러봤다. 그것들을 하나씩 탁자 위로 올렸다.
“보니까 할 건 이것저것 많아.”
“둘만으로 할 게 있어?”
이승호가 귀를 문지르다가.
“···기왕 할 거면 사람 많은 게 더 재밌지 않나?”
의자에서 슬쩍 몸을 일으켰다.
···일으키려고 했다.
단지 그 동작은 끝까지 완수되진 못했다. 신아영이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아.”
신아영은 짧은 단말마를 내뱉었다. 저도 모르게 나온 행동이었다. 제가 한 행동에 스스로 놀란 듯 눈을 떨었다.
“···다들 공부한다고 바쁠 거야.”
그런 변명을 붙여본다.
게다가.
“개인 상담이잖아.”
신아영은 그의 어깨를 지그시 눌렀다.
지금은 상담에 집중했으면 했다.
“···.”
이승호의 대꾸는 없었다.
말없이 신아영의 주변을 슥 살피다가.
“그래.”
곧 힘을 풀고 도로 앉았다.
“···근데, 괜찮겠어?”
“뭐가···?”
그의 물음에 신아영이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신경을 집중했다.
“아니, 상담이니까.”
이승호는 책상 위에 올려진 보드게임을 하나씩 옆으로 정리하며 말을 이어 나갔다.
“진지한 내용이라면 선생님이 더 잘할 거고, 상담 자체는 민지 선배나 부장이 더 수월할 테니까.”
이승호가 재잘재잘 말을 전달했다. 신아영은 그 말에 어깨에 힘을 풀었다.
또 뭐라고.
되게 별거 아닌 내용이었다.
“동갑이니까 오히려 신청한 거야.”
신아영은 주억거렸다.
그래, 그런 것이다.
때로는 부장이나 부부장에게 말하기 어려운 일이 있을 수도 있지 않은가.
상담부에 다니는 동갑이라 해봐야. 이승호, 지누리, 이솔··· 이렇게 세 사람뿐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다른 두 사람한테는 좀···.”
이솔은 공부 때문이라도 바쁠뿐더러.
지누리는 그리 상담을 잘할 것 같은 성격은 아니었다. 오히려 상담이랍시고, 그 원인을 제거하는 쪽에 가깝지 않을까.
“음···.”
이승호도 무슨 말인지 알겠다는 듯 침묵을 유지했다.
“···.”
게다가.
두 사람만 있어서 게임이 재미없을까 봐 그런 거라면.
“보드게임도 생각보다 둘이서 할 수 있는 거 많은데? 카드 게임도 있고, 블록 게임도 있고···.”
신아영은 이런저런 보드게임을 꺼내 들었다.
이럴 줄 알고 미리 알아봤다.
“아. 여기 있네.”
벽면에 세워져 있던 상자를 집어 들었다.
“이 둘 중에 뭐? 하나는 블록 게임이고 이쪽은 카드 게임.”
신아영은 쫑알거리며 박스를 위로 들어 보였다.
“음··· 난 오른쪽?”
“오케, 그럼 이걸로.”
신아영은 그가 고른 보드게임을 책상 위에 올려두고선. 나머지 박스들은 모조리 안쪽으로 차곡차곡 집어넣었다.
“···근데, 이런 게임도 있었나?”
그걸 내려다보던 이승호가 의문 어린 표정을 지었다.
“이건 이번에 들여놓은 거야.”
“···뭐야, 네가 어떻게 알아.”
“내가 민지 언니한테 추천한 게임이니까.”
새로운 게임을 살지 고민하길래 말해두었다. 보니까 재밌을 것 같길래.
와르르—
신아영은 박스에서 부품을 밖으로 쏟아부었다.
바둑과 테트리스를 합쳐 놓은 것 같은 게임이었다. 게임이 끝난 시점에서 더 많은 땅을 차지한 사람이 이기는 게임.
룰을 숙지하기도 쉽고, 블록도 알록달록 예뻤다.
“내기?”
그리 말하며 신아영은 은은한 미소를 띠었다.
“무슨 내기.”
“아이스크림.”
“그러던지.”
툭. 툭. 툭.
정갈한 소리와 함께 블록이 차곡차곡 놓였다.
게임을 하는 와중에 이승호가 블록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근데, 니가 보드게임 좋아하는 줄은 몰랐는데.”
“응?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피방을 더 좋아하지 않나?”
이승호의 말에 신이영이 입을 꾹 다물었다.
“아닌데? 보드게임도 좋아하는데?”
“···.”
이승호는 답이 없었다. 그냥 말없이 반달 같은 눈을 뜰 뿐이다.
“···왜, 뭐.”
신아영은 찔린 듯 목소리를 키웠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까지 피방을 좋아하진 않는다.
“···보드게임 vs 룰.”
“어?”
“하나둘셋—?”
숫자까지 빠르게 세기 시작하자.
“···룰.”
신아영은 느릿하게 진실을 토로했다.
“···.”
이승호가 그럴 줄 알았다며 끄덕였다.
툭. 블록을 내려놓았다.
“아니, 보드게임도 좋아한다고.”
신아영은 변명을 해봤지만, 이미 그에게는 들리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툭. 블록만을 내려놓았다.
그리고선 그는 슬쩍 물었다.
“보드게임, 평소에도 하는 편이야?”
“평소라면··· 뭐, 집에서?”
“어.”
“잘 안 하지. 같이 할 사람도 없고. 최근에 상담실 오면서 하게 된 거야.”
원래는 별생각 없었는데.
하다 보니까 이것도 이것 나름의 재미가 있었다. 온라인 게임과는 또 다른 재미였다.
툭.
신아영이 블록을 내려놓았다. 이걸로 마지막.
“아.”
이승호가 단말마를 내뱉었다. 게임이 끝났다.
블록 수를 세어보니 신아영이 먹은 땅의 개수가 더 많았다.
“뭐야~? 왜 이렇게 못해. 혹시 상담이라고 봐 주는 거 아니지?”
신아영이 눈을 가늘게 뜨며 실실 웃었다.
“···스읍.”
이승호는 숨을 들이켰다.
그러고는 돌처럼 움직이지 않다가.
슬그머니 눈을 미묘하게 좁히더니, 일자로 닫혀있던 입술을 천천히 열었다.
* * *
······상담에 있어서 ‘미니미’는 확실히 도움이 되는 능력이다.
어쩌면 특화되어있다고 볼 수 있다.
생각이 읽힌다는 시점에서부터 그렇다.
상대가 말하지 않는 것까지 알 수 있으니, 가벼운 상담에 있어서 큰 도움이 된다.
하지만, 내담자의 상태가 나쁘다면.
상담 내용이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그 이점은 사라졌다.
······이것 보라.
— “--------겠지만.”
신아영의 미니미는 드문드문 끊어지는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아까부터 쭉— 이런 상황이었다.
생각을 좀처럼 제대로 들을 수 없었다.
전보다야 작게 줄어든 상태였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
이건, 신아영의 스트레스 해소가 거의 안 되고 있다는 뜻이다.
본인 딴에는 보드게임으로 해결해 보려 한 듯하나.
‘···안 될 것 같은데.
잘 안된다.
이건 피시방 게임을 하러 가도 마찬가지일 거다.
미약한 도움은 될지 몰라도. 큰 변화를 노리기엔 무리가 있어 보였다.
게다가 그 방법이.
‘룰이면···.
···더 그렇겠지.
잘못하면 스트레스를 더 받을 수도 있지 않을까.
고무줄을 늘이면 늘릴수록 그 탄성을 점차 잃어가는 것처럼.
그녀의 심리적 부담은 그즈음에 도달한 게 아닐까.
단순히 게임으로 해결하기엔 무리처럼 느껴졌다.
“스읍.”
나는 턱을 쓸어내렸다.
“······우리 다른 게임 할까?”
신아영이 방금까지 하던 보드게임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마치 내 행동에 눈치를 보는 듯한 태도였다.
— “----재미 없었--------는-----.”
미니미가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터덜터덜 다른 보드게임을 뒤적거렸다.
“···.”
계속 봤는데.
역시 이건 안 되겠다.
탁탁—
나는 책상을 살짝 두드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밖으로 나가자.”
“···어?”
신아영이 의문 부호를 띄웠다.
당황한 어조로 물었다.
“혹시 재미없었어? 역시 이거 말고—”
“아니, 그게 아니라···.”
나는 말끝을 살짝 흐렸다.
이걸 어떻게 말해야 하나···.
“···어쨌든 상담하러 온 거잖아. 여기서는 잘 안될 것 같아서 나가자고.”
“아.”
신아영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응. 그렇지.”
어설프게 고개를 끄덕였다.
— “------었지. 상담--지.”
미니미가 큼큼거리며 눈을 굴렸다.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어째 잊고 있었다는 반응이다.
신아영이 쭈뼛거리면서 물었다.
“그런데 우리 그래도 되는 거야? 막 밖으로 나가고···.”
“야외 상담한다고, 부장한테 말해놓으면 괜찮을 거야.”
상담이라고 해서 은밀한 장소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꼭 앉아서 해야 하는 건 아니니까.
그리 자주는 아니지만 밖에서 행해지는 상담도 있다.
“여기서는 집중 안 될 것 같으니까.”
보드게임으로는 스트레스가 풀릴 것 같지도 않고.
더군다나.
— “---------!”
상담실 밖에서 들려오는 노이즈가 내 고막을 때렸다.
바깥에서 들리는 건, 아마··· 이솔.
안에서는 신아영.
양쪽에서 들려오는 잡음에 진짜 정신 나갈 것 같다.
먼저 신아영부터 해결하고보자.
“···나가서 바람이라도 쐬자. 괜찮지?”
나는 이마를 지그시 누르며 일어나, 의자를 책상 아래로 밀어 넣었다.
우선 여기서 벗어나는 게 먼저일 것 같다.
“···.”
그 말에 신아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그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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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학교를 빠져나오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정말 이승호의 말대로 부장한테 말하기만 하면 됐다.
뚫어져라 바라보던 이솔의 신경이 쓰이긴 하는데···.
“···.”
신아영은 고개를 털었다.
그건 나중에 생각하자.
“골랐냐?”
“아직.”
이승호의 물음에 신아영은 고개를 작게 저었다.
내기에서 이겼기 때문에. 본격적으로 이동하기 전 잠시 편의점에 들린 상황.
아이스크림을 고르고 있던 중이다.
“···빨리 골라라.”
“으음···.”
신아영은 냉동고를 내려다보며 고민에 잠겼다.
이승호는 기다리다 못해, 편의점을 둘러보며 아이 쇼핑을 이어갔다.
“···.”
신아영은 슬그머니 그를 향해 눈을 굴렸다.
“음···.”
여태까지 이승호는 자신의 상담에 관해서 묻지 않았다.
한 번쯤은 물을 법도 한데.
무슨 고민인지, 내가 직접 말하기를 기다리는 걸까.
그도 아니라면, 상담은 명분에 불과하다는 걸 눈치채고 안 꺼내는 걸까.
둘 중 뭐가 되었든, 고마운 일이었다.
자신을 신경 써주고 있다는 이야기니까. 그래서 이승호와 같이 다니는지도 모르겠다.
얘랑 있으면 편하니까.
“···.”
신아영은 짧은 고민 끝에 초코바를 꺼냈다.
제일 싼 아이스크림이었다.
“이걸로 할게.”
* * *
“감사합니다. 또 오세요—”
“···.”
나는 편의점에서 나오며 아이스크림을 한입 베어 물었다.
주변에서 들려오는 노이즈가 하나밖에 없으니, 그나마 정신이 맑아진 느낌이다.
“잘 먹을게~”
신아영은 희희낙락한 얼굴로 포장지를 뜯었다.
— “--니까 맛--네.”
아이스크림을 사 먹은 것 때문인지. 이전보다는 노이즈가 차츰 줄어들었다.
이제 미니미의 말을 대략 해석할 수준은 됐다.
저건 아마. ‘맛있네’ 정도의 말이 아닐까 싶다.
‘그건 그렇고···.
나는 힐끔 신아영의 어깨 위를 살폈다.
—“----”
그 위에 앉은 미니미가 우물우물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다.
다만 표정이 어딘가 멍했다.
스트레스는 여전히 남아있었다.
‘일단 나오긴 했는데···.
얘를 어디로 데려가야 하나 싶다.
원초의 목적을 다시 되짚어보자면···.
그녀가 받는 스트레스를 해소해, 들려오는 노이즈를 없애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아영이 받는 스트레스는 어디에서 오는가.
내가 생각하기로는 크게 두 가지가 아닐까 싶다.
하나는 외부의 과도한 시선.
남은 하나는 그러한 시선을 의식한, 연예인 딸로서의 이미지 유지.
그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그녀는 게임을 선택했다.
아무리 실수를 해도 주변의 신경을 쓸 필요가 없기 때문에.
그러나, 지금 그게 잘 안되고 있는 시점에서 더 나은 방안이 없을까 궁리해야 했다.
‘이럴 때는 몸 쓰는 게 제일이긴 한데.
달리면 스트레스가 풀린다는 사람도 있지 않은가.
이솔 같은 부류에게는 하면 안 되겠지만, 신아영에게는 은근 통할 듯싶다.
뭔가 근처에서 할 만한 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우리는 어느새 버스 정류장까지 도착해 있었다.
“근데, 우리 어디 가는 거야?”
아이스크림을 한입 베어 문 신아영이 그제야 의문을 표했다.
음···.
“···너 스케이트 잘 타냐?”
고민을 조금 더 이어가다가 신아영에게 물었다.
“···아이스링크?”
“어.”
“탈 줄은 알지.”
— “---어렸-- 때 몇 번-----으니까 괜--것 같--.”
미니미의 말을 알아듣기 위해 집중했다. 어렸을 때 몇 번 타서 괜찮다는 것 같다.
잘 타는 건 아닌 모양인데.
이러면 오히려 좋다. 신아영은 조금 더 본연의 모습에 익숙해지는 게 필요했으니.
“아이스링크 가게?”
“네가 싫으면 다른 데로 가도 되고.”
그렇다고 강요할 생각은 없었다.
상담은 어디까지나, 내담자의 의견이 중요하기에.
“아냐아냐. 괜찮아.”
신아영이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정말로 괜찮은 건지, 아니면 눈치를 살피는 건지 모르겠다.
“이렇게 바로 가도 되나 싶어서. 아무것도 없잖아.”
“교복은 미리 갈아입었고, 장갑은 가서 사지 뭐.”
그럴 줄 알고 체육복으로 갈아입은 상태다.
오후에 체육 교과가 든 날은 체육복으로 하교할 수 있으니까.
* * *
···버스를 타고 이동한 끝에.
나는 신아영과 함께 아이스 링크 건물로 들어섰다.
공기부터 달랐다. 차가운 냉기가 숨 쉴 때마다 느껴졌다. 어딘가 겨울 냄새였다.
“평일이라 그런가 널널하네.”
나는 주위를 둘러봤다. 사람이 그리 많지는 않다.
어른들은 그다지 없고, 대부분이 초등학생들이었다.
인파가 몰리는 걸 별로 선호하지 않는 나로서는 기분 좋은 일이었다.
“와아··· 진짜 오랜만이다.”
신아영이 뒤따라 들어오며 눈을 빛냈다.
“여기 자주 오는 편이야?”
“자주는 안 오지. 재작년인가 한 번 탄 적 있긴 한데···. 넌?”
“어렸을 때 이후로는 처음.”
그래서 그런가.
신아영의 눈매가 호선을 그렸다. 한편으로는 그게 조금 씁쓸한 미소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부모님이 연예인인 탓에, 가족끼리 이런 곳에 자주 오지는 못한 모양이라.
“내가 낼게.”
매표소에 도착하자, 신아영이 빠르게 카드를 꺼내 긁었다.
뭐라 하기도 전에 속전속결로 끝냈다.
그렇게 표를 끊고, 다음은 스케이트 대여소였다.
나는 신아영에게 물었다.
“사이즈 몇이야?”
“어··· 한 250 정도 될걸?”
“250?”
“아니네. 240이야.”
신아영이 뒤꿈치를 들어 발바닥을 살피더니 정정했다.
“260 하나. 240 하나 주세요.”
“네—”
직원분이 빠르게 스케이트 두 켤레를 꺼내 왔다.
“여기, 260 하나. 이게 240입니다.”
“감사합니다.”
나는 그걸 받아 들고 앉을 곳을 찾아 움직였다.
지나가는 길에 비치 되어있는 헬멧도 챙긴 후. 장갑도 하나 사고.
자판기 옆의 비어 있는 적당한 자리를 찾았다.
거기서 신발을 스케이트화로 갈아신었다.
“바로 들어갈래?”
“좋아.”
신아영이 어색한 걸음으로 뒤뚱뒤뚱 걸어갔다. 미니미도 따라 뒤뚱거렸다.
어째 좀 웃긴 광경이다.
“···!?”
신아영이 빙판 위에 발을 내디딘 순간, 몸이 기우뚱거렸다.
나는 비틀거리는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넘어질 듯이 떨리던 중심이 차츰 안정되어 갔다.
“탈 줄 안다며.”
“···오, 오랜만에 타니까 적응 안 돼서 그래.”
신아영은 눈썹을 찌푸리며 괜스레 목소리를 높였다.
귀 끝은 붉었다.
“그래?”
“자, 잠깐만 놓지 말아봐···!”
붙잡은 손에 힘이 꽉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신아영의 눈이 당황한 듯이 떨렸다.
두 허벅지는 갓 태어난 기린처럼 안으로 구부려졌다.
“···천천히 일로와봐.”
나는 그녀를 벽면으로 조심스럽게 이끌었다.
그녀는 난간에 몸을 지탱했다.
“후우···.”
신아영은 그제야 한숨을 돌렸다.
“괜찮겠어?”
“···오랜만이라 당황한 거라니까···.”
그녀는 호기롭게 난간에서 손을 놓았다.
옛 기억을 떠올리는 것인지, 발을 세차게 뒤로 밀었다.
“꺅!”
신아영이 그대로 미끄러져서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시원하게 바닥을 짚었다.
뒤따라가던 나는 곧바로 벽으로 붙었다.
“···괜찮냐?”
“···.”
신아영의 눈이 주변을 휙휙 살핀다.
본인의 상태를 돌아보는 것보다. 그걸 은연중에 우선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이상하게 쳐다보지 않을까 걱정하는 눈치.
뭐든 잘해야 한다는 강박이었다.
“자.”
나는 그녀의 손을 붙잡고, 천천히 일으켜 세웠다.
상당히 쪽팔렸던 것인지.
미니미의 표정이 우울함을 넘어, 눈동자가 물방울처럼 일렁거렸다.
···단지.
주변 사람들은 그녀를 별로 신경 쓰지 않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선.
경직되어 있던 미니미의 표정이 차츰 풀려나갔다.
아이스링크에서 넘어지는 건, 일상이나 다름없는 일이라.
미숙함은 이곳에서는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
···한 번 자신감이 붙은 이후로는 금방이었다.
신아영은 중심을 잘 잡고선,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빠르다고 할 수준은 아니지만, 제법 탄다고는 말할 정도는 되었다.
역시 배우는 게 빨랐다.
“···.”
날 보던 신아영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 “흐흥.”
미니미가 날 바라보며 의기양양하게 가슴을 폈다.
노이즈는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성취감으로 인한 해소인지, 주변 시선을 신경 쓸 필요가 없어졌다는 걸 깨달았는지.
그게 어느 쪽이든 잘된 일이었다.
“어때, 괜찮지?”
“···.”
그 물음에, 나는 말없이 끄덕였다. 짝.짝. 박수 쳐줬다.
신아영의 입술이 부루퉁해졌다.
녀석은 놀리지 말라며 내 어깨를 툭툭 때렸다.
“나, 이제 좀 타지 않아?”
“아까보다는.”
아까 후들거리던 걸 진짜 동영상으로 남겨야 했는데.
그건 좀 아쉽다.
상담부 사람들이 봤으면 빵 터졌을 텐데.
“허, 참.”
내 대답이 불만이었던 걸까.
신아영은 조금 더 빠르게 달려보겠다며, 빙상 위에서 속도를 높였다.
어쩐지 좀 불안—
“···!”
아.
나는 빠르게 앞으로 내달려, 신아영의 팔을 붙잡았다.
넘어지지 않고, 옆으로 자연스럽게 미끄러지도록 부드럽게 몸을 틀었다.
벽으로 빠진 순간.
삭— 사사삭——!
동시에 빠른 속도로 스쳐 지나가는 아이들.
자기네들끼리 논다고, 앞도 제대로 안 보고 달리고 있었다.
삑—! 삐빅!!
곧 안전요원이 호루라기를 불며 나타나 두 아이를 제지했다.
“휴, 놀래라···.”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혀를 찼다.
위험하게 뭐 하는 걸까.
평일이라 애들이 많을 때부터 좀 조심했어야 했는데.
“씁···.”
나는 아이들이 끌려가는 걸 지켜보다가, 신아영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어디 삐끗하진 않았지?”
“···.”
굳은 얼굴로 있던 그녀는 날 보며 눈을 깜빡이다가.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빙상 위였기에 아주 부드러운 움직임이었다.
— “---”
상당히 놀랐는지.
미니미에게선 짤막한 노이즈가 작게 울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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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즈는 금방 잦아들었다. 신아영의 미니미는 숨을 후후 들이마셨다.
— “···까, 깜짝 놀랐네···.”
다친 곳은 없어 보이는데, 상당히 놀랐는지 눈동자가 작아졌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벽에 붙어있었다.
— “아, 씨···쪽팔려. 괜히 신내다가···.”
미니미가 울상을 지으며 얼굴을 붉혔다.
“잠시 나갈까?”
마음을 추스를 겸 밖으로 나가볼까 싶었는데.
“아냐, 진짜 괜찮아.”
신아영은 고개를 저었다. 빨리 따라오라는 듯 손을 흔들었다.
오히려 씩씩하게 앞으로 움직였다.
···근데.
그 몸짓이 묘하게 경직되어 있어서.
진짜 괜찮을는지 걱정이 되긴 했다.
······
“슬슬 나갈까?”
“응?”
부드럽게 빙판 위를 나아가던 신아영이 스르르륵 벽으로 붙었다.
이제 제법 익숙해진 동작이었다.
“벌써 나가게?”
그녀는 시선을 뒤로 돌리며 눈썹을 위로 들썩였다.
— “왜 그러지···? 좀 더 타면 안 되나?”
미니미는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빙판 위를 툭툭 발로 찼다.
···그렇지만.
벌써라고 말하기엔.
“이제 곧 여섯 신데.”
나는 벽에 붙어 있는 전자시계를 가리켰다. 시간이 꽤 많이 지나있었다.
이제 나가서 밥도 먹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돌아가는 시간도 있고.
“어?”
신아영의 눈이 휘둥그레 변했다.
— “···진짜네? 벌써 그렇게 됐어?”
잘 즐기고 있던 모양이다. 시간의 흐름도 깜빡할 정도라니.
그건 뿌듯한 일이다.
그렇지만.
꼬르륵—
공복 음이 울렸다. 그건 내 배에서 난 소리였다.
나는 민망함에 크흠— 헛기침을 내뱉었다.
어쩔 수 없었다. 움직였더니 상당히 허기졌다.
“···.”
그 소리를 신아영도 들은 건지. 둥그런 눈매 위로 웃음기가 떠올랐다.
— “···배고팠나보네.”
미니미가 옅은 웃음을 흘렸다.
“그래, 이제 나가자.”
신아영이 먼저 앞장섰다. 빙판을 한 바퀴 돌아 출구로 나왔다.
지면에 내딛자 부드럽게 나아가던 얼음 위와 달리, 삐뚤거리는 감각이 이상했다.
잡아두었던 자리까지 걸어가던 그때.
“아···!”
신아영은 헬멧을 벗다 말고, 머리 위로 도로 내려놓았다.
눈을 데구루루 굴려서 주변을 살폈다.
머리가 땀 때문에 헝클어진 모양이다.
— “으아··· 완전 땀 범벅이야··· 냄새 안 나려나?”
제 머리를 만지던 미니미가 울상을 지었다. 찝찝한 것인지 눈썹이 움찔거렸다.
“잠시만?”
신아영이 눈치를 보며 자리를 피했다.
“어.”
알겠다며 적당히 끄덕였다.
그녀가 펭귄처럼 뒤뚱뒤뚱 화장실로 향했다. 스케이트화를 벗는 것도 잊고 급하게 걸어갔다.
나는 그 사이, 운동화로 갈아신었다.
무거운 족쇄를 벗은 듯이 몸이 가벼워졌다.
동시에 신아영의 노이즈도 해결했겠다. 마음이 더 홀가분해졌다.
······
‘늦네···.
뭘 하는 건지. 신아영이 도통 보이지 않았다.
기다리다 지쳐 자판기에서 음료를 뽑아 홀짝이고 있을 때.
“다녀왔어.”
신아영이 다시 나타났다.
헬멧을 옆구리에 끼고, 헝클어졌던 머리는 뒤로 묶은 상태였다.
탈취제라도 뿌린 건지, 시원한 비누 향이 났다.
···이상하게 화사해진 상태였다.
학교 가방에 이것저것 많이 챙겨다니다보다.
— “후- 급한 대로 해결했으니까, 이 정도면 되겠지.”
미니미가 묶을 머리를 뒤로 찰랑 넘겼다.
방금까지 제 상태에 동요하더니, 지금은 자신감을 되찾은 모습이다.
“가자.”
밖으로 나오자. 조금 어둑해진 하늘이 우리를 맞이했다.
“좀 애매한데···.”
나는 시간을 확인하고,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으며 중얼거렸다.
지금 집으로 돌아가면 7시가 훌쩍 넘는다.
가뜩이나 움직인 뒤라 허기가 졌기에, 웬만하면 여기서 사 먹고 싶은데······
그래도, 물어보는 게 맞겠지.
“어떻게 할래?”
나는 신아영에게 의견을 구했다.
“근처에서 밥 먹고 갈래? 지금 버스 타면 늦게 도착할 것 같은데.”
“···어? 그럴 생각 아니었어?”
신아영이 고개를 기울였다.
배가 고픈 것은 신아영도 마찬가지였던 걸까.
애초에 그럴 생각이었던 듯하다.
그럼, 이다음 질문이다.
“뭐 먹을래? 따로 먹고 싶은 거 있어?”
근처에 식당은 많았다.
조금만 둘러봐도 무엇을 말해도 바로 찾아갈 수 있었다.
“음··· 팍 생각나는 게 없네. 나는 아무거나 잘 먹긴 해.”
신아영이 팔짱을 끼며 생각에 잠긴 듯 침묵했다.
— “진짜 뭐 먹지··· 얘는 어떤 거 좋아하더라···?”
미니미가 나를 힐끗거리며 고민에 빠졌다.
이쪽을 신경 쓰는 모양인데.
그러는 나도 당장 생각나는 게 없긴 했다.
···이럴 때 좋은 방법이 있긴 하다.
“그러면 하나씩 읊어볼 테니까 괜찮은 거 짚어봐.”
나는 고개를 들어 거리를 둘러봤다.
길을 따라 세워져 있는 표지판의 메뉴를 하나씩 입에 담았다.
“보자··· 당장 보이는 건. 햄버거, 떡볶이, 김밥··· 저기에 파스타집이 있고···.”
“음···”
신아영이 말을 끌었다.
— “···애매하네··· 그걸로는 배가 안 찰 것 같은데··· 얘 배고픈 거 아니었나?”
미니미가 턱을 쓸어내렸다.
신아영이 좋아할 만한 걸 말했는데. 영 시큰둥하다.
“저쪽에는 돈코츠 덮밥도 있고 닭갈비랑···.”
— “···!”
미니미가 허리를 빠짝 세웠다. 어깨를 들썩였다.
닭갈비 부근에서 반응한 것 같다.
“···.”
다만, 신아영의 입은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 “아. 어. 이거. 괜찮으려나?”
미니미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눈치를 살폈다.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입을 뻐금거렸다.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 눈치라.
“닭갈비?”
나는 마지막 메뉴를 되물었다.
“나는 이거 괜찮은 것 같은데.”
이거라면 나도 좋아하는 메뉴라서.
더군다나 밥을 먹고 싶기도 했고.
“응응, 닭갈비 좋다.”
냉큼 끄덕이는 신아영. 낯빛에 화색이 돌았다.
결정이 내려졌으니.
우린 곧바로 닭갈비 집으로 들어갔다.
딸랑—
“어서 오세요~ 몇 분이세요?”
“두 명이요.”
“네, 이쪽으로 오세요.”
직원분은 방긋 웃으며 우리를 자리로 안내했다.
아주 친절한 미소였다.
— “하아··· 좋을 때다···.”
그 직원의 미니미가 피곤함에 찌든 표정으로 뻐근한 목을 이리저리 꺾었다.
속으로는 툴툴거리면서도, 겉으로는 친절히 인도했다.
이게 직업정신일까.
우리는 직원이 안내한 자리에 마주 보고 앉았다.
“뭐 먹을까? 따로 먹고 싶은 거 있어?”
신아영이 그리 물었다.
나는 중앙에 놓인 메뉴판을 보며 고민했다.
“나는 기본이면 될 것 같은데.”
“그럼 나도 그걸로. 주문은 기본 두 개로 한다? 사리 먹을 거야?”
“어, 사리 추가.”
결정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배고픈 탓에 뭘 먹어도 다 맛있을 것 같았다.
“저기요~?”
신아영이 손을 들어 올리며 직원을 불렀다. 여기는 키오스크가 없나보다.
“네에— 갑니다—!”
직원이 후다닥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어떤 거 주문하시겠어요?”
“저희 기본 닭갈비 2인분에다가 라면 사리 추가로 넣어주세요.”
“맵기는 어느 정도로 해드릴까요?”
“어엄······.”
신아영은 그 질문에 고개를 기울이다가, 내게로 시선 돌리며 묻는다.
“보통?”
“응.”
“보통으로요.”
내 말을 그대로 전달했다.
직원은 계산표 위에 글자를 끄적이더니 되물었다.
“기본 닭갈비 2인분에 라면 사리 추가 맞으시죠?”
“네네.”
“금방 내드릴게요.”
“감사합니다~”
신아영은 방긋거리는 미소를 짓다가, 직원이 완전히 사라지자.
“···하암~”
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하품을 내쉬었다.
아이스링크장에서 격하게 움직인다고 피곤했던 모양.
그러다 눈썹을 움찔 움직였다.
— “···못 봤겠지···?”
미니미가 내 쪽을 살폈다.
나는 자연스럽게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못 본 척해줘야 할 분위기였다.
* * *
식탁 아래로 다리를 은근히 뻗었다. 쭈욱 펴진 허벅지가 부르르 떨렸다.
“후우···.”
작게 스트레칭을 끝낸 신아영은 작게 숨을 내쉬었다.
몸은 피로했지만, 정신은 무거운 잡념이 사라지고 말랑말랑해진 상태였다.
아이스링크라길래 처음에는 어떤가 싶었는데.
다녀오길 잘한 것 같다.
‘처음에는 좀 그랬는데···.
미끄러졌을 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엉덩이가 시큰거렸다.
곧잘 타게 되었을 때는 어딘가 신이 났고······
어린 애들이 쌩쌩 지나갔을 때. 이승호가 확 잡아끈 것에 놀랐다.
신아영이 그걸 떠올리며 가만히 턱을 괴었다.
“···.”
···엄청 휙 끌려갔었지.
도와준 거였다지만, 그렇게 간단히 끌려갈 줄은 몰랐다.
신아영이 팔뚝을 작게 쓸어내렸다. 그가 붙잡았던 부위다.
“···큼.”
그걸 떠올리자니 왜인지 민망해졌기에.
땀에 찬 손바닥을 체육복 위로 슥슥 쓸어내렸다.
“여기.”
어느 틈에 앞치마를 들고 온 이승호가 둘 중 하나를 건넸다.
“아. 고마워.”
신아영은 그걸 조심스레 받아서 들었다.
그러다 보니, 서 있는 이승호를 살피게 됐다.
고개가 위로 들렸다. 조금 각도가 가파른 것 같았다.
뭔가······.
얘···.
“키 좀 큰 거 아냐?”
다시 유심히 살피니, 확실히 그랬다.
새 학기 때의 기억과 비교하자니 커진 게 눈에 들어왔다.
왜 그걸 지금 알아봤는지 모를 정도로.
“···그래?”
그 물음에 이승호가 자리에 도로 앉으며 헛기침을 내뱉었다.
눈썹이 은근히 들썩였다. 입꼬리가 삐죽거렸다.
아닌 척 물을 삼키고 있다지만, 내심 좋아하고 있는 게 보였다.
“···.”
신아영은 그걸 보며 은근한 눈웃음을 지었다. 그 반응이 어딘가 재밌었다.
“무슨 운동이라도 하는 거야? 되게 빨리 큰다?”
“···헬스 정도.”
“응응. 그리고?”
신아영은 그의 표정을 가만히 눈으로 좇았다.
어쩐지 시선이 향해서.
한동안 그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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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녀왔습니다.”
나는 현관문을 열며 집으로 들어왔다. 안쪽에서 TV 소리가 들려왔다.
거실로 들어서자, 이승아가 소파에 앉아 있다.
큰 화면으로 애니를 보던 녀석은 힐끔 이쪽을 살피더니.
도로 고개를 돌렸다.
“···뭐야, 운동하고 왔냐? 솔이 언니랑 공부하다 온 거 아니었어?”
“상담 때문에 오늘은 안 했어.”
“그래···?”
이승아도 별로 관심은 없었던 것인지, 온 신경이 TV로 이어진 것처럼 보였다.
나도 대화를 더 이어갈 생각은 없었다.
지금은 쉬고 싶은 기분이 더 컸다.
나는 대충 가방을 방 안에 벗어던지고 교복을 갈아입었다.
“흐아—”
곧장 씻고 와 침대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후우···.”
이제 한숨 돌렸다.
오랜만에 스케이트를 탔더니, 이것도 체력 소모가 제법 되었다. 눈꺼풀이 깜빡깜빡 무겁게 느껴졌다.
이 상태로는 오늘은 운동 못할 것 같다.
깜짝하면 곧 잠들 느낌이었다.
“···.”
그래도 할 건 해야겠다 싶어서, 나는 침대 위를 구르며 휴대폰을 들었다.
‘일단 신아영은 수습했는데···.
그녀의 노이즈는 해결했다. 당분간은 괜찮을 터다.
단지, 아직 남은 사람이 있었다.
이솔.
여전히 노이즈를 내뿜을 녀석이다.
“···.”
조금 전의 일을 떠올렸다. 학교에서 나올 때 그 노이즈는 더 거세졌었기에.
지금은 괜찮을는지 모르겠다.
급하게 나온다고 그 뒤로는 연락을 못 했는데.
‘···어떡할까.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천장 방향으로 들어 올린 기기가 무겁게 느껴졌다.
이솔의 노이즈는 명백히 신아영의 것과는 다른 종류다.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여전히 고민되는 와중이라.
가벼운 연락을 하는 것도 망설여졌다.
···뭐라도 하긴 해야 하는데.
선뜻 손이 안 갔다.
* * *
집은 좋다. 그곳에 누워있는 건 더더욱 좋다.
이솔은 집에 있는 것을 누구보다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밥 먹는 개를 건드리지 않는 것처럼.
잠든 사람은 괜히 깨우지 않는 것처럼.
누웠을 때만큼은, 집에 있는 이 순간은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된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다시 말하면 아무런 갈등도 피로도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솔은 집이 좋았다.
···단지.
오늘만큼은 아니었다.
자신이 왜 집에 있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
이솔은 거실 소파 위에 엎드려 쿠션 위로 턱을 올렸다.
“푸우······.”
내뱉은 한숨은 쿠션에 맞닿아, 부르륵—거리는 진동음이 되었다.
작은 화면을 가만히 들여다봤다.
휴대폰을 휙휙 넘겼다. 그에 따라 올망졸망한 눈동자도 따라 돌아갔다.
‘피방에 간 것도 아니고···.
두 계정 전부 전적이 그대로다.
부계정이 있는 게 아닌 이상. 피시방에는 가진 않은 듯하다.
‘대체 뭐냐고···!
이솔은 제 회색 머리카락을 북북 긁었다.
울컥울컥 신아영에 대한 배신감이 올라왔다.
도와준다고 했으면서···!
“···.”
···아니.
수학여행 때 알아서 할 테니까, 안 도와줘도 된다고 했긴 했지만.
그게 방해하라는 뜻은 아니지 않은가.
“으윽···.”
등 쿠션을 끌어안았다. 그 위에 얼굴을 파묻었다.
소파를 뒹굴뒹굴 구르다가, 축 늘어진 상태가 되었다.
“···?”
방금까지 씻고 있었던 어머니가 머리를 털면서 화장실에서 나오더니.
그녀를 보고선 우뚝 발걸음을 멈추었다.
조금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머리를 털던 수건을 잠시 내려놓고선.
“···혹시 학교에서 무슨 일 있었니···?”
어머니가 조심스레 물어왔다.
무표정한 얼굴 아래에 은밀한 걱정이 담겨있다.
“···.”
이솔은 괜스레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별일 없었어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정말 별일 아니었다.
그래, 어차피 하루 정도인걸.
“···그렇구나아···?”
이솔의 어머니는 어색한 표정이 되었다.
어쩐지 방으로 들어가지 않고, 거실을 서성거리다가.
부엌 앞의 식탁에 앉았다.
띠링—.
휴대폰이 작게 알람음을 울렸다.
“?”
이솔은 화면을 들어 뭔지 확인해 봤다.
혹시 신아영이 전화 온 거라면. 그냥 그대로.
[이승호]
“···!”
눈썹이 들썩였다. 이승호에게서 먼저 연락이 와 있었다.
곧바로 확인해 보려다가.
손을 떨며 멈추었다.
‘이러면 기다린 것처럼 보이잖아.
바로 확인하면 마치, 자신이 계속 문자를 기다렸다는 것처럼 보이지 않을지 염려되었다.
‘···그럼, 한 2분만 기다렸다가 보자.
이솔은 휴대폰을 소파 위에 얌전히 올려두었다.
팔짱을 끼고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그렇게 1분··· 하고 2분.
“···.”
눈썹을 의도적으로 좁히며 잠금화면을 해제했다.
화면 상단에 떠올라 있는 문자를 눌렀다.
— 이승호 : 잘 들어갔냐?
— 이승호 : 오늘 공부 어떻게 됨?
“흥.”
그걸 본 이솔의 작은 입술 사이로 바람이 새었다.
그래도 신경은 쓰였나보다.
— 이솔 : (바닥에 벌러덩 넘어지는 햄스터 이모티콘)
— 이솔 : 민지 언니가 도와주긴 했는데.
— 이솔 : 어려웠어.
이솔은 그렇게 답변을 보냈다.
“···.”
턱을 괴었다.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입술을 매만졌다.
좀처럼 답이 오지 않았다.
— 이승호 : 그럼.
그런 문자가 날아왔다.
— 이승호 : 내일 스터디 그룹 하자.
“···.”
이솔이 눈을 깜빡였다.
“···흥.”
새침한 숨을 내뱉었다. 억지로 표정을 가라앉혔다.
통통통.
와중에 정강이는 번갈아 움직이며 소파 위를 두드리고 있었다.
그 순간.
“···.”
“···.”
이솔은 어머니와 눈이 마주쳤다.
“···왜요?”
슬그머니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헛기침하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아니··· 좋은 일 있었나 해서···?”
“···별일 없었어요.”
정말이다.
* * *
다음날. 햇살이 학교 창틈 사이로 살며시 들어왔다.
평소보다 일찍 등교한 이솔이 책상 자리에 앉아서 반쯤 졸고 있을 때였다.
“솔아.”
신아영의 목소리다.
천천히 눈을 뜨자, 가방을 내려놓으며 자리에 앉고 있었다.
“자, 받아.”
신아영이 작은 박스를 내밀었다.
“···이게 뭔데?”
“어제 나 때문에 공부 방해된 것 같아서. 너 이거 좋아하지?”
그녀가 준 것을 다시 살피니, 리본에 묶인 초콜릿 상자였다.
제법 고급품으로 보이는 물건.
“그래, 잘 먹을게.”
구태여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이솔은 그걸 받아들었다.
어제와는 상황이 다르다.
그야 신아영의 고충을 이해했으니까.
“음.”
이솔은 초콜릿을 하나 집어 먹으며 속으로 끄덕였다.
신아영도 드라마 때문인지 시선이 하도 많이도 몰렸으니. 그동안 스트레스가 쌓인 거겠지.
어제의 행동도 그러한 연유의 결과라 볼 수 있었다.
원래 상담부라는 게 그럴 때 가는 거고.
그런 거라면.
한 번은 괜찮았다. 이해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자신은 이해심이 넓은 여자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솔이 그녀의 책상을 두들겼다. 이목을 이리로 돌리게 만들었다.
그것과 별개로.
조금 궁금하긴 했다.
“어제 나가서 둘이 뭐 했어?”
“으응?”
이솔의 물음에 신아영의 동작이 느려졌다.
“···.”
그래, 별건 아니고.
그냥 궁금한 것뿐이다.
그도 그럴게.
“···피방 간 건 아닌 것 같길래.”
“···.”
그 물음에 신아영은 잠시 침묵했다.
새끼손가락으로 제 머리를 돌돌 말았다.
어딘가 곤란하다는 듯이···.
“으음··· 그냥··· 이것저것? 별로 대단한 건 안 했어.”
대충 말을 돌렸다.
“그래?”
그것이 마음에 조금이나마 걸리긴 했으나.
크게 별것 아니겠다 싶어서, 이솔은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렸다.
“···.”
대화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이솔은 다시 따스한 햇살을 이불 삼아 나른함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아.”
신아영의 단말마에 살짝 눈을 뜨자.
“승호 하이~”
신아영이 뒷문에서 들어오는 이승호를 향해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어, 좋은 아침.”
그는 그 인사를 받으며 제 자리에 앉았다.
“승호승호.”
신아영이 그를 부르며 앞자리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어깨를 톡톡 건드렸다.
“이따가 매점 갈래? 아침에 보니까 매진됐던 간식 채우고 계시더라고.”
“그래?”
“그거 뭐였더라? 지난번에 네가 먹어보려 했던 거.”
“과일 아이스크림···?”
“어, 맞아. 그것도 몇 개 들어왔더라.”
···뭐지.
“···으음?”
그 대화를 지켜보던 이솔의 눈이 가늘어졌다.
신아영의 얼굴을 보니 어딘가 위화감이 들었다. 언젠가 봤었던 느낌이라.
“···.”
이솔은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그 표정을 더욱 유심히 살폈다.
신아영은 머리칼을 옆으로 귀 옆으로 쓸어내렸다. 그 눈길이 유독 한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걸 본 이솔의 입술이 천천히 벌어졌다.
“너희들도 갈 거지?”
돌연 그녀가 시선을 돌리며 이솔과 지누리. 두 사람에게 물었다.
지누리는 이어폰을 한 짝 빼며 말했다.
“너가 사주면 갈게.”
“좋아, 누리는 안 가고.”
신아영은 시선을 왼편으로 돌렸다. 이솔이 있는 방향이었다.
“솔이 넌?”
“···.”
이솔이 의자를 뒤로 밀며 몸을 일으켰다.
손을 뻗어 신아영의 소매를 툭툭 끌어당겼다.
“응? 왜?”
의아함이 그녀의 눈에 서릴 때.
“···잠깐 나랑 얘기 좀 해.”
이솔은 어색하게 굳은 표정으로 그녀를 밖으로 불러냈다.
어쩐지.
여기서 더 가면, 위험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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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신아영은 이솔의 말에 천천히 허리를 폈다. 의아한 듯 교실 앞의 시계를 가리켰다.
“···조금 있으면 수업 시작하는데?”
“금방 끝나.”
이솔의 어조는 단호했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는 표현이었다.
“···그래, 알았어.”
신아영은 마지못해 몸을 틀었다.
두 사람은 그렇게 교실 밖으로 사라졌다.
“···진짜 갑자기 뭐지···?”
두 사람이 사라지고 남은 자리.
지누리는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며 눈을 좁혔다.
“···너 혹시 아는 거 없어?”
지누리가 소곤거리며 내게 물었다.
— “얘라면 뭐 알지 않으려나? 둘이랑 한동안 같이 있었고.”
지누리의 미니미는 똘망거리는 눈빛으로 날 응시했다.
탐정과도 같은 확신이다.
“아니.”
나는 고개를 저었다. 대답하지 않았다.
— “아, 뭐야.”
미니미가 실망에 빠져 책상 위에 주저앉았다.
재미없다며 툴툴거렸다.
“···.”
그렇게 반응해도 말할 수 있는 게 없다.
그야 정말 모르니까.
이솔의 미니미는 아직도 노이즈가 섞여 있었고. 신아영 쪽은···.
어제 이후로, 기분이 좋다는 것 이외에는 다른 생각을 내뱉지 않았다.
확신할 수 있는 게 없을뿐더러. 그걸 곧이곧대로 말할 리도 없다.
“음···.”
예상이 가는 게 있다면.
이솔은 어제의 일로 신아영을 부른 게 아닐까 싶다는 것뿐이었다.
공부할 시간도 없는데 하루를 날려버렸지 않은가.
— “···진짜 뭐지···.”
지누리의 미니미가 책상 위를 뒹굴거리며 중얼거렸다. 옹졸한 발끝을 까딱거렸다.
고민이 끝이 없었다.
참 호기심이 많은 녀석이었다.
* * *
뚜벅뚜벅—
이솔은 복도를 거닐었다.
서너 발자국 떨어진 뒤편에서는 신아영이 뒤따라 걸어왔다.
“···.”
“···.”
오가는 대화는 없었다.
이솔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고.
신아영은 이상한 기류를 느낀 것인지, 의문스럽게 눈썹을 기울일 뿐. 좀처럼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향하는 방향은 인적이 드문 복도 끝. 꼭대기 층 계단.
사람이 잘 오가지 않는 곳이기에, 거기에서는 마음 놓고 대화를 나눌만한 장소였다.
그곳까지 다다르자. 이솔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
신아영도 어느 정도 떨어진 거리에 섰다.
그렇게 묘한 대치가 이어지던 순간.
“···먹을래?”
이솔은 주머니 속에서 작은 박스를 꺼냈다. 방금 신아영에게 받은 초콜릿 상자다.
“생각해 보니까 다이어트 중이었어.”
“···.”
신아영은 그걸 내려다보며 잠깐 고민하다가, 선뜻 손을 뻗었다.
“···그럼, 조금만?”
“자. 괜찮으니까, 다 먹어도 돼.”
이솔은 박스를 통째로 그녀에게 넘겼다.
“···시험 준비는 어때?”
“시험?”
“응.”
그녀의 손으로 다시 돌아간 초콜릿을 보며, 이솔은 대화의 포문을 열었다.
“곧 체육 대회인데···. 그거 지나고 나면 얼마 안 남았잖아.”
“······갑자기?”
신아영이 기웃거렸다.
이솔은 나름대로 분위기를 풀어보려 한 것이었는데.
다소 뜬금없는 화제였던 걸까.
“그냥. 너는 어떤가 해서.”
“으음···.”
신아영은 고민하더니 작게 웃으며 답했다.
“나름대로 그럭저럭하고 준비하고 있어. 공부는 평소에도 꾸준히 하니까. 크게 문제없지 않을까.”
“응··· 그렇구나.”
이솔은 소매 끝자락을 매만졌다. 행동이 느려졌다.
누구는 이렇게 오래 걸리는 일을, 누구는 간단히 해버리는구나 싶었다.
···그렇지만 괜찮다.
그것은 이제 와서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다.
조금 허탈한 것은 사실이나.
그것에 대해서 시샘할 생각은 없었다. 그 덕분에 도움받지 않았는가.
“솔이 너는? 어제는 민지 언니가 가르쳐줬었잖아. 언니도 되게 공부 잘 하지 않아?”
역으로 날아온 질문.
“으음···.”
그것에 이솔은 침묵했다. 목을 돌리며 곰곰이 생각해 봤다.
“못 가르치는 건 아닌 것 같은데···.”
확실히 못 가르치는 것은 아니다.
공부를 잘한다는 말은 틀린 말은 아니었다.
잘 가르친다면 잘 가르치는 편이겠지. 웬만한 사람들은 그녀의 설명만으로 성적을 올릴 수 있을 거다.
단지.
“나한테는 어려웠어.”
이솔. 그녀에게는 맞지 않았다.
공부하는 내내 그랬다.
이승호라면 더 쉽게 가르쳐주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맴돌아서.
오히려 혼자 할 때보다 집중이 더 안 되는 느낌을 받았다.
따지자면, 사이즈가 맞지 않는 고급 의류였다.
비싸기만 하고 거추장스러울 뿐인.
“어···그래?”
“공부를 잘한다고 누구나 다 잘 가르치는 건 아니니까.”
“···.”
신아영은 멋쩍은 듯이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그것은 어쩌면 눈치를 살피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어제 일이 확실히 미안하기는 했나 보다.
“괜찮아.”
이솔이 고개를 저었다.
그럴 필요 없다.
그것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됐다.
그도 그럴게.
“오늘은 승호가 공부하는 거 봐주기로 했으니까. 앞으로 계속 그러지 않을까···?”
그러니까 괜찮다고.
어느 정도는 떠보는 듯한 물음에.
“으응. 그렇구나···.”
신아영은 이전보다 더 어색해진 눈길로 호응했다.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 멋쩍게 복도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다.
‘···뭐야.
이솔은 그 표정을 보곤 이전보다 더 확신에 차올랐다.
평소라면 그저 싱긋싱긋 미소를 지어 보였을 텐데.
웬만큼 깨지지 않는 내면의 얼굴이 겉으로 드러난 것이.
좀처럼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그래서··· 무슨 일로 부른 거야?”
신아영은 시간을 확인하고선 물었다. 빨리 이 대화를 끝내고 싶어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뭐, 나한테 할 말 있던거 아냐?”
“···.”
이솔은 입술을 달싹였다. 할 말이야 있었다.
‘뭐라고 할까.
여기까지 걸어오면서 쭉 재고하던 것들을 떠올렸다.
이승호와 잘 되게 해달라고 도와달라고 말해볼까.
그리 말한다면 그녀는 선뜻 도와주겠지.
그야. 얘는 다른 사람의 부탁을 좀처럼 거절하지 못하니까.
그렇게 생각하다가도···.
‘···아니.
아닌 것 같다.
지난번의 일이 생각났다.
이솔은 속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의도적이든 아니든, 도와준다고 했으면서 은연중에 방해할지 모를 일이라.
그것을 떠올려보니, 그 말은 꺼내지도 못하겠다.
‘···꼭 그게 아니더라도.
지금의 신아영에게는 도와달라니.
그건 못 하겠다.
“···.”
이솔은 신아영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 표정은 평범했고.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다른 이들이 봤다면 언제나의 그녀일 거다.
단지.
이승호의 앞에서의 신아영과 현재의 미묘한 표정 변화를.
이솔은 보자마자 알아차렸다.
그야 알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상태의 그녀에게까지 차마 도와달라고는 못할 것 같았다.
···대신.
다른 할 말이 있었다.
“···그때 있잖아.”
이솔은 축 늘어뜨린 넥타이 끝을 툭툭 건드리며 말했다.
조금 긴장이 됐다.
“네가 지난번에 물어봤었잖아. 혹시 기억나?”
“지난번··· 언제?”
신아영이 입술을 구부렸다. 의문을 표정으로 표현했다.
“수학여행 때. 숙소에서.”
기억을 떠올리려면, 아직도 생생하다.
수학여행 첫날밤. 신아영은 갑작스럽게 그런 질문을 해왔었다.
스스로 아무런 짐작도 하지 못했던 그때.
아무런 예고도 없이 말이다.
“···승호한테 호감 있냐고. 그렇게 물었었잖아.”
“어?”
신아영의 표정이 경직되었다. 그 화제를 꺼낼 줄 몰랐다는 듯 동공이 확장되었다.
그 표정을 보면서도 이솔은 말을 계속 이어 붙였다.
지금 말하지 않으면, 더 못할 것 같았다.
천천히 편지를 낭독하듯이. 속에 있었던 생각들을 바깥으로 끄집어냈다.
“나는 그때 신경 쓰이는 정도라고 말했었고.”
“어··· 응, 그랬었지···?”
신아영은 조금 쭈뼛거리며 이솔의 입술을 쳐다봤다. 뒤꿈치가 주춤거렸다.
“근데, 지금은······.”
지금은.
—하고, 이솔의 말문이 턱 막혔다.
“···.”
이솔은 제 손등을 볼에 살짝 가져다댔다. 데일 듯이 뺨이 뜨거웠다.
꼴딱꼴딱 숨이 넘어가는 듯했고.
머리로 피가 쏠렸다.
고작 신아영 앞에서 말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리도 힘들었다.
스스로가 이렇게 부끄러움이 많은 사람이었다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그것이 좀처럼 새로웠다.
그러나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후으···.”
이솔은 한 줌 정도 되는 숨을 머금고선.
고개를 삐걱거리며 들어 올렸다.
주저함보다 먼저, 행동을 실행시키기로 했다.
“지금은.”
단순히 신경 쓰이는 게 아니라.
호감이 아니라.
“···좋아··· 한다고 생각해···.”
끝내.
말을 뱉어냈다.
왜 이런 감정이 드는지.
호감이 아니라 좋아함인지.
스스로조차 그 이유를 말로 형용할 수 없지만.
형용할 수 없다고 이 감정이 거짓이라는 뜻은 아니기에.
“······.”
도와달라고 부탁 안 한다.
알아서 할 수 있다.
신아영이 혹여나 가지게 될 감정을 어떻게 할 생각도 없었다.
그건 그녀 본연의 감정이니까.
···근데.
내가 걔를 먼저 좋아했다고.
그것만.
신아영이 알고 있었으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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