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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색이 휴식기인 터라, 일단 집에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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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을 먹고 편하게 늘어져 아빠가 깎아주는 사과를 입에 오물거리고 있으니, 장 여사의 질문이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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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딸, 그래서 어디 간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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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랑 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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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MSC—Mid Season Competition—는 총 2개국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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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사 입장에서는 이번 시즌 록드컵을 개최할 영국 경기장을 미리 써보고 피드백을 해 두면 좋을 테니 딱히 이상한 선택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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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4강 이상이 아니라면 영국 쪽은 쳐다볼 필요도 없긴 하지만,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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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비자는 어떡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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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에 프론트 쪽에서 국제전 때문에 여권 달라고 해서 줬더니 다 처리해 놓으셨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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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랜드 리그 관련 국제전 때문에 일찍 준비하나 싶었는데, 은근슬쩍 MSC 관련 처리도 해두셨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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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가줄까? 우리 딸 해외여행은 처음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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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 안 해도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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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 년 넘게 국제전 개근을 하고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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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와서 비행기 타는 게 무섭다거나 현지 적응 문제가 있다거나 하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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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아빠 휴가는 따로 쓸 데가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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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의 머릿속에 분명 갈고리가 수집되고 있겠지만, 진짜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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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적으로 각국 그랜드 리그들이 모여 개최하는 2부 리그의 국제전이 시즌 말에 있으니 일단 그걸 보러 휴가를 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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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무엇보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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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드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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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시즌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그 순간이 다가오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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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어쩌면 일어나지 않을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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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큼은 그 누구보다도 철저하게 준비하고 있어야 할 의무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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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국 당일 새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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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딸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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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시간으로 연락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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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ST1의 조타수를 맡은 임현재 감독님은 ST의 사옥 앞에서 나를 데려다주러 오신 부모님께 정수리를 넘어 뒤통수가 보일 정도로 허리 숙여 인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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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애가 수더분해서. 그렇게까지 신경 안 써주셔도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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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지켜봐서 잘 알죠. 록도 잘하고 착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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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부모님과 보호자의 으레 있는 인사치레를 뒤로한 채, 트렁크에 짐을 넣고 ST 로고가 대문짝만하게 붙어 있는 버스에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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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에 LOCK를 뛰며 밴은 많이 탔는데, 이렇게 공항 가는 대형 버스는 이번 생에 처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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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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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자마자 나를 반기는 건 ST1의 헌터 배성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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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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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 만이지? 한두 달은 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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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그쯤 됐을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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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ST1에서 프라우드를 제외하면 가장 베테랑이자, 계약 마지막 시즌을 치르는 그는 퍽 반갑게 나를 맞이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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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뭐냐. 저번에는 못 믿어줘서 미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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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라도 그랬을 텐데 뭐 어때요. 잊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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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나야 다행이고. 한 달 간 잘 부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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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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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은퇴한 인간들이 툭 하면 내 방송실로 난입해 허물없이 지냈는데, 이렇게 어색한 악수를 하려니 여러모로 신기한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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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다시 쌓아가는 관계도 나름 의미는 있으니, 향수에 지나치게 잠겨 있을 생각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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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는 대충 원하는 데 골라서 앉으면 돼. 감독님이랑 코치님들 합쳐도 널널하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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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 다섯째 줄은 빼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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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또 어떻게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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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말에 그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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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에서야 자리가 적으니 그렇다 쳐도, 프라우드의 대형 버스 자리까지 알고 있는 내가 퍽 신기한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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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아는 법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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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인간이 매번 어디 앉는지 정도야 알아냈다고 말하기도 뭐한 상식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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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저나 다른 사람들은 어디 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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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주현이랑 재석이는 잠깐 음료수 들고 온다고 했고, 형이랑 근우는 지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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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간 사람들은 바텀 듀오고, 지각하는 사람들은 프라우드랑 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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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상체 하체 구분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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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나가고 나서도 지각비 많이 쌓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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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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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그 대화를 시작으로 큭큭 웃으며 자리에 앉아 근황 이야기를 좀 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선수들도 속속히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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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은설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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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 친구 것도 가져올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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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에 들어오자마자 시야 먼저 따는 게 일상화된 서폿, 신재석 선배가 나를 인지했고, 곧이어 원딜—민주현—께서 내 음료수를 가지러 ST 사옥으로 다시 들어가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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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나는 당연히 극구 사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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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옥에서 방송할 때면 모를까, 이런 때에 부탁할 정도로 염치가 없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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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얼마 안 가 탑신봉—병—자 그 자체인 ST의 탑, 최근우 또한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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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형 또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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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형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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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 말고 다른 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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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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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정한테 말하는 모습을 보니 역시 저번이랑 달라진 게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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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루였나?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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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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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탑의 인사까지 적당히 넘기고 조금 더 기다리고 있던 찰나, 사옥에서 익숙한 얼굴이 느긋하게 걸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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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리 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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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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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우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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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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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내게 짧게 말하고선 다섯 번째 줄에 앉아서 그대로 명상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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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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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의 문이 닫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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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주한 엔진 소리가 귓가를 때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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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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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식기라고 할지라도 수면 패턴이 휙휙 바뀌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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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11시는 되어야 일어나는 우리 프로게이머란 족속들은 새벽에 깬 여파로 인해 공항에 도착할 때까지 대화 따윈 없이 수면 시간을 보장 받기 위해 전투적으로 잠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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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도착했다 얘들아. 짐 들고, 여권 안 잊어버렸나 체크하고. 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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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 감독님. 저희가 이걸 몇 번을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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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은설이나 한 번 더 봐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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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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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랑 가장 가까이 앉아있던 재석 선배는 서포터답게 내가 모든 걸 잘 챙겼는지 꼼꼼하게 한 번 더 같이 확인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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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여행은 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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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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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지금 들고 있는 여권이 출입국 도장 없이 깨끗한 걸로 보아 이번 생은 첫 해외 여행이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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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안대까지 끼고 긴장 없이 너무 편안한 상태로 있다가 풀어진 얼굴로 받은 질문이라, 곧이곧대로 대답하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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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다고 하면 왜 이렇게 편안해 보이냐—로 시작하는 질문 세례를 받을 게 뻔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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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어차피 내 여권 펴볼 사람은 정해져 있는 터라 이 정도로 둘러대는 건 아무 문제 없기도 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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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우. 얘들아 우리 빨리 나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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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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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사람들 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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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에 짙게 썬팅된 창문으로 바깥을 확인하니, 점점 몰려오는 하나의 붉고 검고 하얀 덩어리가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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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팬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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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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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나가 역시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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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기를 달리는 록과 선수들, 그중에서도 1군의 팬들이란 스케일부터 남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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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꺄아아아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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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우드! 프라우드! 프라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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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한 번만 봐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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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걸 뚫고 지나갈 수 있긴 한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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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루! 트루! 트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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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나 사인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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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황 MSC 파이티이이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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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그 많은 함성 속에서 내 닉네임도 간간이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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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애들아 곧 정리될 거 같으니까 사인은 인터뷰 끝나고 입국 심사대 들어가기 전에 일괄적으로 해 주는 거다. 알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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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님의 말씀과 함께 버스 문이 열리고 아까와는 비교를 불허하는 환호성이 버스에 들이닥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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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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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소리를 듣고 있자니 뒤에서 프라우드가 목베개로 나를 살짝 밀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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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봐. 경기장이랑은 다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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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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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런 기대가 무서워 주저하기에는, 이미 겪은 게 너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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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렇게 천천히 버스 계단을 내려 어느새 만들어진 작은 길을 걸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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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당일도 아니고, 팬미팅을 한다고 정해둔 장소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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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우리를 보기 위해 이 꼭두새벽에 온 사람들이 보내는 함성과 열기는 새벽의 추위를 데우기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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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게 마련된 기자회견 단상이지만, 그 앞을 채운 카메라 수와 인파는 절대 장난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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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표는 당연히 우승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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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님과 프라우드는 이번 대회 목표를 묻는 질문에 그렇게 답했고, 관중이 된 인파는 우리에게 열띤 박수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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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슬슬 인터뷰가 끝나려던 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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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트루 선수, 이번에 식스맨으로 국제전에 참여하게 되셨는데, ST에서 2군이 식스맨으로 참여하게 된 건 바튼 라르센 선수 이후 두 번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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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기자의 질문에 감독님이 내게 귓속말로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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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기자 악질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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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레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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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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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에 대답하면 한 부분을 과장하거나 부풀리고 왜곡하는 부류의 글러먹은 인간 군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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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쪽에 속한 인간이 들러붙은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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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기자는 감독님의 굳은 표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내게 마이크를 들 것을 촉구하며 말을 계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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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라르센 선수는 이미 국제전에서 증명이 끝난 선수였고요. 그런 의미에서 이 드문 상황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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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질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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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물음 하나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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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인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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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나를 뽑아준 ST 또한 돌려서 모욕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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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넘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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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요. 답변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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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님은 ‘네가 왜 이 자리에 있냐’고 묻는 무례한 질문에 적당히 인터뷰를 끊으려 했지만, 나는 그저 살짝 미소지으며 마이크에 입을 가져다 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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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런 부류의 인간들은 인터넷이든 현실이든 가릴 거 없이 많이도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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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 당연히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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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섭다고 대답을 주저할 이유 따윈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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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선수가 있을 곳은 ST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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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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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에 답하는 내 모습에는 수많은 이들의 인정이 전제되어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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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곳에 서 있는 것 자체가 증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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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질문에 대한 내 대답은 스스로뿐만 아니라 나를 믿어주는 모두에 대한 것이기도 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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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만큼 프라우드의 자리라면 몰라도, 식스맨으로 선정되는 것까지 왈가왈부 당할 생각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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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지금 이 자리에 있을 자격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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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이 최고의 선수라는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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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드 리그에서 저보다 뛰어난 선수가 있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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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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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스맨은 코치를 넣을 게 아니라면 1군을 제외한 선수들 중에서 종합적으로 고려해 선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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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나는 그 어떤 잣대를 들이대든 여유롭게 통과할 자신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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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선수의 뒤를 받칠 최소한의 선수로서는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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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답한 나는 오히려 역으로 질문한 기자에게 되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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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기자님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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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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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이 예에요? 참 특이하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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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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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뒤끝 없다고는 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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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 편이 많을지 한 번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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