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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Authored-By: Claude Opus 4.5 <noreply@anthropic.com>
2025-12-14 21:31:5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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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색이 휴식기인 터라, 일단 집에 돌아왔다.

밥을 먹고 편하게 늘어져 아빠가 깎아주는 사과를 입에 오물거리고 있으니, 장 여사의 질문이 들어왔다.

“우리 딸, 그래서 어디 간다고?”

“프랑스랑 영국.”

이번 MSC—Mid Season Competition—는 총 2개국에서 열린다.

게임사 입장에서는 이번 시즌 록드컵을 개최할 영국 경기장을 미리 써보고 피드백을 해 두면 좋을 테니 딱히 이상한 선택은 아니었다.

물론 4강 이상이 아니라면 영국 쪽은 쳐다볼 필요도 없긴 하지만,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도록 하자.

“그럼 비자는 어떡하고?”

“저번에 프론트 쪽에서 국제전 때문에 여권 달라고 해서 줬더니 다 처리해 놓으셨던데?”

나는 그랜드 리그 관련 국제전 때문에 일찍 준비하나 싶었는데, 은근슬쩍 MSC 관련 처리도 해두셨던 모양이다.

“같이 가줄까? 우리 딸 해외여행은 처음이잖아.”

“걱정 안 해도 돼.”

십 년 넘게 국제전 개근을 하고 살았다.

이제 와서 비행기 타는 게 무섭다거나 현지 적응 문제가 있다거나 하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였다.

“그리고 아빠 휴가는 따로 쓸 데가 있어.”

부모님의 머릿속에 분명 갈고리가 수집되고 있겠지만, 진짜 그랬다.

기본적으로 각국 그랜드 리그들이 모여 개최하는 2부 리그의 국제전이 시즌 말에 있으니 일단 그걸 보러 휴가를 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록드컵.

이번 시즌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그 순간이 다가오고 있으니까.

물론 어쩌면 일어나지 않을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나만큼은 그 누구보다도 철저하게 준비하고 있어야 할 의무가 있었다.


출국 당일 새벽.

“우리 딸 잘 부탁드립니다.”

“실시간으로 연락드리겠습니다!”

이번 ST1의 조타수를 맡은 임현재 감독님은 ST의 사옥 앞에서 나를 데려다주러 오신 부모님께 정수리를 넘어 뒤통수가 보일 정도로 허리 숙여 인사했다.

“우리 애가 수더분해서. 그렇게까지 신경 안 써주셔도 됩니다.”

“저도 지켜봐서 잘 알죠. 록도 잘하고 착하고—”

그렇게 부모님과 보호자의 으레 있는 인사치레를 뒤로한 채, 트렁크에 짐을 넣고 ST 로고가 대문짝만하게 붙어 있는 버스에 탔다.

지난번에 LOCK를 뛰며 밴은 많이 탔는데, 이렇게 공항 가는 대형 버스는 이번 생에 처음이다.

“왔구나!”

들어가자마자 나를 반기는 건 ST1의 헌터 배성연이었다.

“오랜만에 뵙네요.”

“몇 달 만이지? 한두 달은 됐나?”

“아마 그쯤 됐을걸요.”

현 ST1에서 프라우드를 제외하면 가장 베테랑이자, 계약 마지막 시즌을 치르는 그는 퍽 반갑게 나를 맞이해 주었다.

“그, 뭐냐. 저번에는 못 믿어줘서 미안했다.”

“저라도 그랬을 텐데 뭐 어때요. 잊었어요.”

“그럼 나야 다행이고. 한 달 간 잘 부탁한다.”

“저도요.”

예전에는 은퇴한 인간들이 툭 하면 내 방송실로 난입해 허물없이 지냈는데, 이렇게 어색한 악수를 하려니 여러모로 신기한 기분이다.

그래도 다시 쌓아가는 관계도 나름 의미는 있으니, 향수에 지나치게 잠겨 있을 생각은 없었다.

“자리는 대충 원하는 데 골라서 앉으면 돼. 감독님이랑 코치님들 합쳐도 널널하거든.”

“대신 다섯째 줄은 빼고죠?”

“그건 또 어떻게 알아?”

내 말에 그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밴에서야 자리가 적으니 그렇다 쳐도, 프라우드의 대형 버스 자리까지 알고 있는 내가 퍽 신기한 모양이었다.

“다 아는 법이 있어요.”

그 인간이 매번 어디 앉는지 정도야 알아냈다고 말하기도 뭐한 상식일 뿐이었다.

“그나저나 다른 사람들은 어디 갔어요?”

“일단 주현이랑 재석이는 잠깐 음료수 들고 온다고 했고, 형이랑 근우는 지각.”

카페 간 사람들은 바텀 듀오고, 지각하는 사람들은 프라우드랑 탑이다.

역시 상체 하체 구분 확실하다.

“저 나가고 나서도 지각비 많이 쌓였어요?”

“그렇지 뭐.”

우리는 그 대화를 시작으로 큭큭 웃으며 자리에 앉아 근황 이야기를 좀 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선수들도 속속히 도착했다.

“어? 은설이 왔다.”

“아, 이 친구 것도 가져올걸.”

버스에 들어오자마자 시야 먼저 따는 게 일상화된 서폿, 신재석 선배가 나를 인지했고, 곧이어 원딜—민주현—께서 내 음료수를 가지러 ST 사옥으로 다시 들어가려 했다.

뭐, 나는 당연히 극구 사양했다.

사옥에서 방송할 때면 모를까, 이런 때에 부탁할 정도로 염치가 없지는 않다.

그리고 얼마 안 가 탑신봉—병—자 그 자체인 ST의 탑, 최근우 또한 도착했다.

“뭐야. 형 또 없어?”

“나도 형인데.”

“형 말고 다른 형.”

“......”

백정한테 말하는 모습을 보니 역시 저번이랑 달라진 게 없었다.

“트루였나? 반갑다?”

“어...네.”

아무튼 탑의 인사까지 적당히 넘기고 조금 더 기다리고 있던 찰나, 사옥에서 익숙한 얼굴이 느긋하게 걸어왔다.

“빨리 타요!”

“알겠어.”

프라우드다.

“잘 왔어.”

그는 내게 짧게 말하고선 다섯 번째 줄에 앉아서 그대로 명상을 시작했다.

곧.

버스의 문이 닫히고.

분주한 엔진 소리가 귓가를 때리기 시작했다.


휴식기라고 할지라도 수면 패턴이 휙휙 바뀌진 않는다.

보통 11시는 되어야 일어나는 우리 프로게이머란 족속들은 새벽에 깬 여파로 인해 공항에 도착할 때까지 대화 따윈 없이 수면 시간을 보장 받기 위해 전투적으로 잠에 빠졌다.

“자. 도착했다 얘들아. 짐 들고, 여권 안 잊어버렸나 체크하고. 알지?”

“에이. 감독님. 저희가 이걸 몇 번을 했는데.”

“그럼 은설이나 한 번 더 봐줘.”

“예이.”

나랑 가장 가까이 앉아있던 재석 선배는 서포터답게 내가 모든 걸 잘 챙겼는지 꼼꼼하게 한 번 더 같이 확인해주었다.

“해외 여행은 처음?”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죠.”

일단 지금 들고 있는 여권이 출입국 도장 없이 깨끗한 걸로 보아 이번 생은 첫 해외 여행이긴 했다.

다만 안대까지 끼고 긴장 없이 너무 편안한 상태로 있다가 풀어진 얼굴로 받은 질문이라, 곧이곧대로 대답하진 않았다.

없다고 하면 왜 이렇게 편안해 보이냐—로 시작하는 질문 세례를 받을 게 뻔하니까.

게다가 어차피 내 여권 펴볼 사람은 정해져 있는 터라 이 정도로 둘러대는 건 아무 문제 없기도 했고.

“어우. 얘들아 우리 빨리 나가야겠다.”

“왜요?”

“벌써 사람들 몰린다.”

그 말에 짙게 썬팅된 창문으로 바깥을 확인하니, 점점 몰려오는 하나의 붉고 검고 하얀 덩어리가 보였다.

“다 팬이에요?”

“그럴걸.”

혹시나가 역시나다.

전성기를 달리는 록과 선수들, 그중에서도 1군의 팬들이란 스케일부터 남달랐다.

“꺄아아아아악!”

“프라우드! 프라우드! 프라우드!”

“여기 한 번만 봐주세요!”

저걸 뚫고 지나갈 수 있긴 한가 싶다.

“트루! 트루! 트루!”

“누나 사인해 주세요!”

“트황 MSC 파이티이이잉!”

한편, 그 많은 함성 속에서 내 닉네임도 간간이 들려왔다.

“자, 애들아 곧 정리될 거 같으니까 사인은 인터뷰 끝나고 입국 심사대 들어가기 전에 일괄적으로 해 주는 거다. 알겠지?”

감독님의 말씀과 함께 버스 문이 열리고 아까와는 비교를 불허하는 환호성이 버스에 들이닥쳤다.

—툭.

잠시 소리를 듣고 있자니 뒤에서 프라우드가 목베개로 나를 살짝 밀어주었다.

“가봐. 경기장이랑은 다를 테니까.”

“가야죠.”

저런 기대가 무서워 주저하기에는, 이미 겪은 게 너무 많았다.

나는 그렇게 천천히 버스 계단을 내려 어느새 만들어진 작은 길을 걸어 나갔다.

경기 당일도 아니고, 팬미팅을 한다고 정해둔 장소도 아니다.

오직 우리를 보기 위해 이 꼭두새벽에 온 사람들이 보내는 함성과 열기는 새벽의 추위를 데우기 충분했다.


작게 마련된 기자회견 단상이지만, 그 앞을 채운 카메라 수와 인파는 절대 장난이 아니었다.

“목표는 당연히 우승입니다.”

감독님과 프라우드는 이번 대회 목표를 묻는 질문에 그렇게 답했고, 관중이 된 인파는 우리에게 열띤 박수를 보냈다.

그렇게 슬슬 인터뷰가 끝나려던 찰나.

“마지막으로 트루 선수, 이번에 식스맨으로 국제전에 참여하게 되셨는데, ST에서 2군이 식스맨으로 참여하게 된 건 바튼 라르센 선수 이후 두 번째입니다.”

한 기자의 질문에 감독님이 내게 귓속말로 속삭였다.

“저 기자 악질인데.”

“기레기요?”

“비슷해.”

질문에 대답하면 한 부분을 과장하거나 부풀리고 왜곡하는 부류의 글러먹은 인간 군상이 있다.

그쪽에 속한 인간이 들러붙은 모양이었다.

한편, 기자는 감독님의 굳은 표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내게 마이크를 들 것을 촉구하며 말을 계속했다.

“그리고 라르센 선수는 이미 국제전에서 증명이 끝난 선수였고요. 그런 의미에서 이 드문 상황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그 질문은.”

단순한 물음 하나가 아니다.

선수인 나.

그리고 나를 뽑아준 ST 또한 돌려서 모욕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냥 넘길까?”

“괜찮아요. 답변할게요.”

감독님은 ‘네가 왜 이 자리에 있냐’고 묻는 무례한 질문에 적당히 인터뷰를 끊으려 했지만, 나는 그저 살짝 미소지으며 마이크에 입을 가져다 댔다.

저런 부류의 인간들은 인터넷이든 현실이든 가릴 거 없이 많이도 봤다.

“그야 당연히ㅡ”

무섭다고 대답을 주저할 이유 따윈 없었다.

“최고의 선수가 있을 곳은 ST니까요.”

이 순간.

질문에 답하는 내 모습에는 수많은 이들의 인정이 전제되어 있으니.

내가 이곳에 서 있는 것 자체가 증명이다.

저 질문에 대한 내 대답은 스스로뿐만 아니라 나를 믿어주는 모두에 대한 것이기도 했으니까.

그런 만큼 프라우드의 자리라면 몰라도, 식스맨으로 선정되는 것까지 왈가왈부 당할 생각은 없었다.

“전 지금 이 자리에 있을 자격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본인이 최고의 선수라는 겁니까?”

“그랜드 리그에서 저보다 뛰어난 선수가 있었나요?”

“......”

식스맨은 코치를 넣을 게 아니라면 1군을 제외한 선수들 중에서 종합적으로 고려해 선발한다.

그리고 나는 그 어떤 잣대를 들이대든 여유롭게 통과할 자신이 있었다.

“위대한 선수의 뒤를 받칠 최소한의 선수로서는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답한 나는 오히려 역으로 질문한 기자에게 되물었다.

“근데 기자님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예?”

“이름이 예에요? 참 특이하시네.”

“......”

내가 뒤끝 없다고는 안 했다.

누구 편이 많을지 한 번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