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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14 21:31:5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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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은 가난하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싶겠지만 사실이다.

그 당시 나름 세계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던 조선의 왕조차 21세기 현대의 직장인만 못 한 삶의 질을 누린다.

중앙집권체제가 강력하게 자리잡아 왕의 권력과 나라의 재산이 왕실의 곳간으로 모이는 조선에서도 이렇거늘, 그보다 못 했던 유럽의 수많은 왕국들은 어떠했을까.

하물며 그 중세 유럽의 왕국들을 배경으로 삼은 로판 속 세상이라면?

‘당연히 가난해야 정상…… 이지만.

엔리는 주변에 모여든 기사들을 보며 속으로 헛웃음을 터트렸다. 수백이 넘는 기사가 모여 있거늘 이 중 절반이 왕실에 소속되어 월급 받고 일하는 궁정기사였다.

전국 각지에서 소집령을 내려 불러모은 병력의 절반 이상이 왕의 군대라는 게 무슨 의미인가. 왕의 군사력이 자신을 제외한 모든 귀족을 합친 것 이상이요, 왕이 굳이 귀족이나 기사에게 땅을 내주고 신하로 삼는 봉건제도를 유지할 필요가 없단 뜻이었다.

“─다들 모인 듯 하니, 슬슬 회의를 시작하지.”

왕실 제 2기사단의 기사단장. 로엔그람이 서두를 열자 서로를 관찰하며 기 싸움을 벌이던 기사들이 잠시 눈에 힘을 풀고서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로엔그람은 국왕에게서 내려받은 칙서를 펼치며 그 안에 적힌 내용을 읊기 시작했다.

“위대하신 국왕 폐하, 파라가일 그라시아 폐하께서 말씀하시길. ‘왕국 내에 불온한 종자들이 숨 쉬고 있도다. 나의 기사들은 내 신하가 보낸 기사들과 함께 녀석들을 뿌리 뽑고 잔당을 모두 없애도록 하라’ 라고 하셨다.”

여기서 말하는 잔당이 반왕국연맹이라는 사실을, 그들이 왕자의 납치를 시도했다가 실패하여 국왕이 무척이나 진노했다는 사실을, 그리하여 기어이 손해뿐인 토벌을 개최했단 사실을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안다.

동시에 여기저기서 한숨이 터져나온다. 반왕국연맹. 이미 수백년 전 초대 그라시아 국왕에 의해 쫓겨난 놈들이거늘, 바퀴벌레처럼 여기저기 숨어서 살아남은 놈들이다. 그것들을 모조리 쫓아내라는 건 하루이틀 일로 끝나지 않을 일이었다.

로엔그람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걱정하지 말라는 듯 말을 덧붙였다.

“물론 폐하께서 이리 말씀하시긴 했지만, 정말로 녀석들을 뿌리 뽑을 때까지 작전을 이어나갈 생각은 없다.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지. 잔당을 하나하나 뒤쫓는 건 기사가 아니라 병사가, 군대가 해야 할 일이다.”

“그럼 우리를 부른 이유가 뭐요?”

“간단하다.”

칙서에는 한 장의 지도가 겸해져 있었다. 열차 납치에 실패하고 체포당한 반왕국연맹의 일원들을 심문해 얻어낸 그들의 본거지가 적힌 지도가.

국왕이 소집령을 내려 기사들을 불러모은 이유는 바로 이것이었다.

“본거지를 쑥대밭으로 만든다.”

누가봐도 함정임이 분명한 마법사들의 본거지로.

지금부터 뛰어들어가야 했기 때문이다.


혹자는 말한다.

홀로 사람 수십 명을 베어내는 기사나 도시 하나를 쑥대밭으로 만들 수 있는 마법사가 있거늘 병사가 도대체 왜 필요하냐고.

그건 핵폭탄으로 도시를 날려버리고, 전략폭격으로 나라 하나를 초토화시킬 수 있는 현대에 보병이 왜 필요하냐는 질문과도 같다.

기사는 초인이지만, 그렇다고해서 결코 상대할 수 없는 무적의 존재는 아니다. 군대가 진을 짜고 쉴 틈 없이 압박한다면 병사만으로도 충분히 기사를 죽일 수 있다.

마법사는 손짓 한 방에 수백 명을 죽여버리는 강력한 포대였지만, 그 무지막지한 화력을 아무런 대가 없이 쏟아낼 수 있는 건 아니다. 준비와 시간이 필요했다. 평소에 훈련으로 쌓아올린 노력을 휘두르는 기사들에겐 군침흐르는 먹잇감이었다.

이런 식으로 먹고 먹히는 관계가 완성되었기 때문에 비로소 군대가 유지될 수 있고, 동시에 귀족정이 유지될 수 있었다.

이번 토벌 원정에서 병사가 하나도 없는 이유또한 그것이었다. 병사는 마법사의 먹잇감일 뿐이었으니.

“─그 말, 호르스 아닌가?”

“아, 예.”

“멋지군. 호르스의 주인이 나타났다곤 들었는데…… 그렇다면 자네가 엔리 경인가? 왕자님을 구했다는?”

멍하니 말을 타고 나아가던 그때, 선두에서 전열을 이끌던 로엔그람이 뒤로 다가와 말을 걸었다. 그 물음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엔리는 로엔그람의 눈동자가 옅게 빛나는 것을 보고 멈칫했다.

눈앞에 있는 이 기사가 왕국의 근위대장인 테오도르와 같은 족속이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눈치챘기 때문이다.

“대단하군.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자네가 테오도르 경과도 좋은 승부를 보였다는데 언제 한 번 나랑도 승부를─.”

‘왕실엔 이런 사람밖에 없나…….

질린다는 듯 표정을 굳히면서도 승낙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자, 로엔그람은 멈추지 않고 쉴 새 없이 말문을 열어대기 시작했다.

나이 먹은 아저씨들의 특징일까, 그게 아니라면 원래 그런 사람인 걸까. 로엔그람은 전생에 다니던 회사의 부장님을 떠오르게 만들 정도로 집요하게 잡담을 쏟아냈다.

“그땐 정말로 죽는 줄 알았지. 허나 당시엔 사랑스럽던 내 아내가 준 부적이 운 좋게 단검을 막아준 덕분에…….”

“로엔그람 대장님!”

“아, 이런. 가봐야겠군. 이야기는 나중에 이어서 하도록 하지.”

이야기를 마구 쏟아내던 와중, 앞에서 선두를 이끌던 기수가 목청 높이 소리쳤다. 부름을 들은 로엔그람이 앞으로 나아가자, 저 멀리 숲이 모습을 드러냈다.

반왕국연맹의 일원을 심문해 얻어낸 그들의 본거지였다.

숲의 입구에 도착한 로엔그람은 배낭 속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약물을 꺼내들더니, 조심스럽게 바닥에 흩뿌렸다. 수풀을 타고 줄줄 흘러내리던 액체가 땅 속 깊숙이 파고든 그 순간.

“과연, 정보는 사실이었나보군.”

숲 전체가 크게 빛나며 가득 깔린 마법진을 내보였다. 시약 반응이 나타나는 것을 확인한 로엔그람은 쓴웃음을 지으며 뒤로 슬쩍 물러섰다.

“이건…….”

“큰일날 뻔했네.”

기사는 마법사의 천적이었지만, 그렇다고 마법사가 마냥 무력하게 당하기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준비를 마친 마법사는 충분히 기사를 잡아 죽일 수 있는 존재였다.

그리고 이곳은 반왕국연맹의 본거지. 엘프 마법사들이 아주 오랜 세월 보강했을 마법의 숲. 이 숲 자체가 마법사의 공방이나 다름 없는 상태였다.

제아무리 강대한 기사라 할 지라도 여기에 들어서는 건 자살행위였다. 전국에서 수백 명의 기사를 모았다 하더라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로엔그람도 그 사실을 무척이나 잘 알고 있었다.

허나.

“작전을 시작한다.”

마법사의 공방이 괜히 숨겨져 있는 게 아니다. 이런 곳에 있다간 폐병 걸릴 거 같다는 생각이 드는 곳에 있는 이유가 별게 아니다.

겉으로 드러난 성은 튼튼하지만, 반드시 무너지게 되어 있다.

기사들이 각자 행낭에 달고 온 부품들을 내려놓고 차례차례 조합하기 시작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순식간에 대포 수십 정이 완성된다. 그 안에 들어가는 것은 화염 마법이 각인된 대포알이었다.

수십 번의 포성과 함께 백린탄을 연상케하는 화염이 숲 전체에 마구 흩뿌려진다. 숲이 활활 불타오르기 시작한 모습을 바라보며, 로엔그람이 소리쳤다.

“모두! 숲 주변을 포위하라! 기어나오는 쥐새끼들을 박멸하라!”

기사도라곤 일절 보이지 않는 철저한 실용 앞에서, 기사들은 각자 말을 박차고 튀어나갔다.

300의 전력으로 5000의 병력도 토벌할 수 있는 포위섬멸진의 완성이었다.


하나의 전공이라도 더 올리기 위하여 기사들이 엉덩이에 땀띠나도록 고삐를 후려치는 가운데, 엔리는 흑장미 기사단을 이끌고 천천히 이동했다. 작전 구역과는 상당히 떨어진, 동시에 사람들의 눈이 닿지 않는 장소까지.

그곳에 도착한 엔리는 지루하다는 듯 말 위에서 하품을 쩍쩍 내뱉어댔다.

“여기 맞지?”

“예, 단장.”

“우리 아가씨도 대단하다니까. 이런 건 대체 어떻게 아는 건지.”

엔리가 기사단을 이끌고 도착한 이곳은 이브가 미리 전달해준 반왕국연맹의 도주로였다. 정확히는 그들이 파놓은 땅굴이 최종적으로 이어지는 곳.

설마 엘프가 드워프마냥 땅굴을 팔 거라곤 생각하지 못 한 다른 이들은 꿈에도 모르는 장소였다. 엘프란 숲의 요정. 숲 속에서 항전을 했으면 했지, 설마 땅굴을 파고 추하게 도망치리라 생각하리란 그리 쉽지 않은 일이었다.

과연 얼마 지나지 않아 땅바닥이 요상하게 흔들리기 시작하더니, 갑자기 땅이 푸욱 꺼지기 시작했다. 그 안에서 전신에 흙을 덕지덕지 묻힌 엘프들이 하나 둘 기어나오기 시작했다.

“됐어, 이제 안전…….”

“─오래도 걸리네.”

“……무슨!?”

기어나오려던 엘프들이 땅굴 출구에서 태연하게 기다리는 엔리 일행을 보며 멈칫하는 가운데, 엔리는 귀찮게 설명할 필요 없다는 듯 엘프의 멱살을 잡고 키조개 뽑듯 쭈우욱 뽑아내었다.

그리 들어올린 엘프를 휙- 내던지자, 기다리고 있던 흑장미 기사단의 기사들이 그들을 포박하고 머리에 두건을 씌웠다.

엔리가 이 귀찮기 짝이 없는 작전에 참가한 이유는 반드시 참가하라는 이브 아가씨의 명령이 있었기 때문이요, 이브가 제 기사를 지원하면서까지 이곳으로 보낸 이유는 간단했다.

“─전원. 얌전히 투항하면 목숨만은 살려주마.”

갈 곳 없는 엘프를, 그것도 숙련된 마법사를 아무렇지 않게 구할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이다.

두려움에 떨던 엘프들은 도망치는 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것인지, 하나둘 땅굴에서 빠져나와 순순히 투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