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왕은 가난하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싶겠지만 사실이다. ​ 그 당시 나름 세계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던 조선의 왕조차 21세기 현대의 직장인만 못 한 삶의 질을 누린다. ​ 중앙집권체제가 강력하게 자리잡아 왕의 권력과 나라의 재산이 왕실의 곳간으로 모이는 조선에서도 이렇거늘, 그보다 못 했던 유럽의 수많은 왕국들은 어떠했을까. ​ 하물며 그 중세 유럽의 왕국들을 배경으로 삼은 로판 속 세상이라면? ​ ‘당연히 가난해야 정상…… 이지만.’ ​ 엔리는 주변에 모여든 기사들을 보며 속으로 헛웃음을 터트렸다. 수백이 넘는 기사가 모여 있거늘 이 중 절반이 왕실에 소속되어 월급 받고 일하는 궁정기사였다. ​ 전국 각지에서 소집령을 내려 불러모은 병력의 절반 이상이 왕의 군대라는 게 무슨 의미인가. 왕의 군사력이 자신을 제외한 모든 귀족을 합친 것 이상이요, 왕이 굳이 귀족이나 기사에게 땅을 내주고 신하로 삼는 봉건제도를 유지할 필요가 없단 뜻이었다. ​ “─다들 모인 듯 하니, 슬슬 회의를 시작하지.” ​ 왕실 제 2기사단의 기사단장. 로엔그람이 서두를 열자 서로를 관찰하며 기 싸움을 벌이던 기사들이 잠시 눈에 힘을 풀고서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 로엔그람은 국왕에게서 내려받은 칙서를 펼치며 그 안에 적힌 내용을 읊기 시작했다. ​ “위대하신 국왕 폐하, 파라가일 그라시아 폐하께서 말씀하시길. ‘왕국 내에 불온한 종자들이 숨 쉬고 있도다. 나의 기사들은 내 신하가 보낸 기사들과 함께 녀석들을 뿌리 뽑고 잔당을 모두 없애도록 하라’ 라고 하셨다.” ​ 여기서 말하는 잔당이 반왕국연맹이라는 사실을, 그들이 왕자의 납치를 시도했다가 실패하여 국왕이 무척이나 진노했다는 사실을, 그리하여 기어이 손해뿐인 토벌을 개최했단 사실을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안다. ​ 동시에 여기저기서 한숨이 터져나온다. 반왕국연맹. 이미 수백년 전 초대 그라시아 국왕에 의해 쫓겨난 놈들이거늘, 바퀴벌레처럼 여기저기 숨어서 살아남은 놈들이다. 그것들을 모조리 쫓아내라는 건 하루이틀 일로 끝나지 않을 일이었다. ​ 로엔그람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걱정하지 말라는 듯 말을 덧붙였다. ​ “물론 폐하께서 이리 말씀하시긴 했지만, 정말로 녀석들을 뿌리 뽑을 때까지 작전을 이어나갈 생각은 없다.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지. 잔당을 하나하나 뒤쫓는 건 기사가 아니라 병사가, 군대가 해야 할 일이다.” ​ “그럼 우리를 부른 이유가 뭐요?” ​ “간단하다.” ​ 칙서에는 한 장의 지도가 겸해져 있었다. 열차 납치에 실패하고 체포당한 반왕국연맹의 일원들을 심문해 얻어낸 그들의 본거지가 적힌 지도가. ​ 국왕이 소집령을 내려 기사들을 불러모은 이유는 바로 이것이었다. ​ “본거지를 쑥대밭으로 만든다.” ​ 누가봐도 함정임이 분명한 마법사들의 본거지로. 지금부터 뛰어들어가야 했기 때문이다. ​ * * * ​ 혹자는 말한다. 홀로 사람 수십 명을 베어내는 기사나 도시 하나를 쑥대밭으로 만들 수 있는 마법사가 있거늘 병사가 도대체 왜 필요하냐고. ​ 그건 핵폭탄으로 도시를 날려버리고, 전략폭격으로 나라 하나를 초토화시킬 수 있는 현대에 보병이 왜 필요하냐는 질문과도 같다. ​ 기사는 초인이지만, 그렇다고해서 결코 상대할 수 없는 무적의 존재는 아니다. 군대가 진을 짜고 쉴 틈 없이 압박한다면 병사만으로도 충분히 기사를 죽일 수 있다. ​ 마법사는 손짓 한 방에 수백 명을 죽여버리는 강력한 포대였지만, 그 무지막지한 화력을 아무런 대가 없이 쏟아낼 수 있는 건 아니다. 준비와 시간이 필요했다. 평소에 훈련으로 쌓아올린 노력을 휘두르는 기사들에겐 군침흐르는 먹잇감이었다. ​ 이런 식으로 먹고 먹히는 관계가 완성되었기 때문에 비로소 군대가 유지될 수 있고, 동시에 귀족정이 유지될 수 있었다. ​ 이번 토벌 원정에서 병사가 하나도 없는 이유또한 그것이었다. 병사는 마법사의 먹잇감일 뿐이었으니. ​ “─그 말, 호르스 아닌가?” “아, 예.” “멋지군. 호르스의 주인이 나타났다곤 들었는데…… 그렇다면 자네가 엔리 경인가? 왕자님을 구했다는?” ​ 멍하니 말을 타고 나아가던 그때, 선두에서 전열을 이끌던 로엔그람이 뒤로 다가와 말을 걸었다. 그 물음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엔리는 로엔그람의 눈동자가 옅게 빛나는 것을 보고 멈칫했다. ​ 눈앞에 있는 이 기사가 왕국의 근위대장인 테오도르와 같은 족속이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눈치챘기 때문이다. ​ “대단하군.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자네가 테오도르 경과도 좋은 승부를 보였다는데 언제 한 번 나랑도 승부를─.” ‘왕실엔 이런 사람밖에 없나…….’ ​ 질린다는 듯 표정을 굳히면서도 승낙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자, 로엔그람은 멈추지 않고 쉴 새 없이 말문을 열어대기 시작했다. ​ 나이 먹은 아저씨들의 특징일까, 그게 아니라면 원래 그런 사람인 걸까. 로엔그람은 전생에 다니던 회사의 부장님을 떠오르게 만들 정도로 집요하게 잡담을 쏟아냈다. ​ “그땐 정말로 죽는 줄 알았지. 허나 당시엔 사랑스럽던 내 아내가 준 부적이 운 좋게 단검을 막아준 덕분에…….” “로엔그람 대장님!” “아, 이런. 가봐야겠군. 이야기는 나중에 이어서 하도록 하지.” ​ 이야기를 마구 쏟아내던 와중, 앞에서 선두를 이끌던 기수가 목청 높이 소리쳤다. 부름을 들은 로엔그람이 앞으로 나아가자, 저 멀리 숲이 모습을 드러냈다. ​ 반왕국연맹의 일원을 심문해 얻어낸 그들의 본거지였다. ​ 숲의 입구에 도착한 로엔그람은 배낭 속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약물을 꺼내들더니, 조심스럽게 바닥에 흩뿌렸다. 수풀을 타고 줄줄 흘러내리던 액체가 땅 속 깊숙이 파고든 그 순간. ​ “과연, 정보는 사실이었나보군.” ​ 숲 전체가 크게 빛나며 가득 깔린 마법진을 내보였다. 시약 반응이 나타나는 것을 확인한 로엔그람은 쓴웃음을 지으며 뒤로 슬쩍 물러섰다. ​ “이건…….” “큰일날 뻔했네.” ​ 기사는 마법사의 천적이었지만, 그렇다고 마법사가 마냥 무력하게 당하기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준비를 마친 마법사는 충분히 기사를 잡아 죽일 수 있는 존재였다. ​ 그리고 이곳은 반왕국연맹의 본거지. 엘프 마법사들이 아주 오랜 세월 보강했을 마법의 숲. 이 숲 자체가 마법사의 공방이나 다름 없는 상태였다. ​ 제아무리 강대한 기사라 할 지라도 여기에 들어서는 건 자살행위였다. 전국에서 수백 명의 기사를 모았다 하더라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로엔그람도 그 사실을 무척이나 잘 알고 있었다. ​ 허나. ​ “작전을 시작한다.” ​ 마법사의 공방이 괜히 숨겨져 있는 게 아니다. 이런 곳에 있다간 폐병 걸릴 거 같다는 생각이 드는 곳에 있는 이유가 별게 아니다. ​ 겉으로 드러난 성은 튼튼하지만, 반드시 무너지게 되어 있다. ​ 기사들이 각자 행낭에 달고 온 부품들을 내려놓고 차례차례 조합하기 시작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순식간에 대포 수십 정이 완성된다. 그 안에 들어가는 것은 화염 마법이 각인된 대포알이었다. ​ 수십 번의 포성과 함께 백린탄을 연상케하는 화염이 숲 전체에 마구 흩뿌려진다. 숲이 활활 불타오르기 시작한 모습을 바라보며, 로엔그람이 소리쳤다. ​ “모두! 숲 주변을 포위하라! 기어나오는 쥐새끼들을 박멸하라!” ​ 기사도라곤 일절 보이지 않는 철저한 실용 앞에서, 기사들은 각자 말을 박차고 튀어나갔다. ​ 300의 전력으로 5000의 병력도 토벌할 수 있는 포위섬멸진의 완성이었다. ​ * * * ​ 하나의 전공이라도 더 올리기 위하여 기사들이 엉덩이에 땀띠나도록 고삐를 후려치는 가운데, 엔리는 흑장미 기사단을 이끌고 천천히 이동했다. 작전 구역과는 상당히 떨어진, 동시에 사람들의 눈이 닿지 않는 장소까지. ​ 그곳에 도착한 엔리는 지루하다는 듯 말 위에서 하품을 쩍쩍 내뱉어댔다. ​ “여기 맞지?” “예, 단장.” “우리 아가씨도 대단하다니까. 이런 건 대체 어떻게 아는 건지.” ​ 엔리가 기사단을 이끌고 도착한 이곳은 이브가 미리 전달해준 반왕국연맹의 도주로였다. 정확히는 그들이 파놓은 땅굴이 최종적으로 이어지는 곳. ​ 설마 엘프가 드워프마냥 땅굴을 팔 거라곤 생각하지 못 한 다른 이들은 꿈에도 모르는 장소였다. 엘프란 숲의 요정. 숲 속에서 항전을 했으면 했지, 설마 땅굴을 파고 추하게 도망치리라 생각하리란 그리 쉽지 않은 일이었다. ​ 과연 얼마 지나지 않아 땅바닥이 요상하게 흔들리기 시작하더니, 갑자기 땅이 푸욱 꺼지기 시작했다. 그 안에서 전신에 흙을 덕지덕지 묻힌 엘프들이 하나 둘 기어나오기 시작했다. ​ “됐어, 이제 안전…….” “─오래도 걸리네.” “……무슨!?” ​ 기어나오려던 엘프들이 땅굴 출구에서 태연하게 기다리는 엔리 일행을 보며 멈칫하는 가운데, 엔리는 귀찮게 설명할 필요 없다는 듯 엘프의 멱살을 잡고 키조개 뽑듯 쭈우욱 뽑아내었다. ​ 그리 들어올린 엘프를 휙- 내던지자, 기다리고 있던 흑장미 기사단의 기사들이 그들을 포박하고 머리에 두건을 씌웠다. ​ 엔리가 이 귀찮기 짝이 없는 작전에 참가한 이유는 반드시 참가하라는 이브 아가씨의 명령이 있었기 때문이요, 이브가 제 기사를 지원하면서까지 이곳으로 보낸 이유는 간단했다. ​ “─전원. 얌전히 투항하면 목숨만은 살려주마.” ​ 갈 곳 없는 엘프를, 그것도 숙련된 마법사를 아무렇지 않게 구할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이다. ​ 두려움에 떨던 엘프들은 도망치는 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것인지, 하나둘 땅굴에서 빠져나와 순순히 투항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