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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님께서 밤늦은 시각 나를 보자고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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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그린 라이트인가? 아니다. 그린 라이트는 개뿔 몹시 안 좋은 신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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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밀히 말하자면, 출세하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이제 곧 진급을 위한 황금 동아줄이 떨어진다는 길조가 되겠지만... 나한테는 일폭탄이 떨어질 거라는 아주 안 좋은 징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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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나라를 위해, 백성을 위해 다시 일하겠노라 마음먹기는 했지만... 일 폭탄을 떠안고 싶다 이런 생각을 한 건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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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저 정시 출근에 정시 퇴근 가끔 조부모님 산소 돌보러 간다 핑계 대고 5~7일 정도 연차 써서 겨울이랑 나들이도 가고 그러고 싶을 뿐이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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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로 황희나 맹사성, 장영실처럼 ‘으아아, 사직시켜 줘.’ 이런 말을 계속하면서 굴림을 당하고 싶은 게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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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세종대왕님은 신하들을 그렇게 굴리려고 하시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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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세종대왕님은 서류로 된 문서 작업은 좋아하시지만 운동을 싫어하셔서 전혀 안 하신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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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아직 젊으시니 버티시는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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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조금 더 드시면 온갖 성인병이 세종대왕님을 덮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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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꼴이 나기 전에 세종대왕님을 억지로 운동시킬 방법도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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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위해, 백성을 위해 헌신하시는 것과는 별개로 돌아가실 때까지 정정하셔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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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정해진 시간에 운동하는 것이 건강에 좋을 테니, 정시 퇴근 시간에 맞춰 운동하시게 하면 참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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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나를 포함한 모든 관리들이 정시퇴근할 가능성이 올라갈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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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감을 억누르기 위해 잡생각을 하면서 걸음을 옮기다 보니, 어느새 내시가 나를 세종대왕님이 기다리고 계신 강녕전으로 데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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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찬 나리, 두 분 전하께서 나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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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두 분이라고 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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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두 분 전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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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원이랑 세종이 나를 같이 기다리고 있었다니, 대체 나한테 무슨 일을 시키려고 이러시는 거야. 이럴 줄 알았으면 청심환 하나 먹고 오는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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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장을 억누르고 안으로 들어가자, 세종과 이방원이 나를 아주 반갑게 맞아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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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분의 그윽한 미소를 마주 대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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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이, 오금이 살살 떨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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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얼마나 많은 업무 폭탄을 던질 생각에 저런 미소를 짓고 계신 거지? 상상이 안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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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원이 나를 바라보면서 씩 웃었다. 소름이 절로 돋는 미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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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수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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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태상왕 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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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왜 김 수찬 자네의 사직상소를 가납하고 낙향하는 것을 허락했는지 이유를 아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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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신은 잘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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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수찬 자네를 보면 내 소싯적이 떠올라서 허락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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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기만 해도 머리가 아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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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상왕 이방원이 세종이 보는 앞에서 ‘얘를 보니까 내 어렸을 적 모습이 떠오르더라.’라는 말을 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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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얼마나 흉참한 말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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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물 참게와 곶감을 한 상자씩 쌓아놓고, 자기 자식으로 양자역학 실험을 하는 어떤 왕이 떠오를 정도로 흉참하기가 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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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방원의 뜻은 갈려 나가는 내 입장에서만 흉참한 거고, 다른 사람이 듣게 되면 감격의 도가니탕이 되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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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뒤편에서 이야기를 듣고 계신 세종대왕님을 보면 각이 딱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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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겨울이를 볼 때 입꼬리가 귀에 걸리듯이 아주 방긋 웃고 계시는 세종대왕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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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인은 네가 과거에 입격(합격)한 것보다 1살 더 어린 나이에 병과 7등으로 과거에 합격하였다. 영의정 류정현이 너를 괴롭혔듯이, 나도 관직에 있을 때는 전조 고려의 권문세족들에게 괴롭힘을 많이 당했었다. 그래서 네가 남처럼 느껴지지 않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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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원의 얼굴 표정을 보아하니 그의 말은 다 진심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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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전히 당분간만 관직에 머무르다가, 적절한 시점을 찾아 사직을 하고 은퇴 라이프를 즐길 생각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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왠지 저 미소를 보고 있으니, 나도 '황희', '장영실' 당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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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죄지은 것도 없는데, 대체 무슨 명분으로 죽을 때까지 갈아 넣겠다는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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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전조 고려에서 관직 생활을 하면서 때로는 권문세족들의 면신례가 혹독하여 남몰래 눈물을 훔친 적이 있었고, 상관들이 무신 집안 아들이 소년등과(젊은 나이에 과거에 합격함)하였다고 무시하였을 때 견디는 것이 쉽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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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 되니 살짝, 아니 조금 많이 무섭다. 대체 나한테 무슨 일을 시키려고 이런 포석을 까시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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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내가 올린 상소 말미에 적은 내용이 그거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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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악한 관원들이 도량형을 속여서 세금을 횡령하고, 은결(세금 안 내려고 토지 장부에 기록하지 않은 토지)을 악용하며, 조운선을 가짜로 침몰시키는 등의 문제가 발생할 것이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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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저런 것들을 잡아내기 위해서... 어어, 세종대왕님께 어떤 제도를 실시해야 한다 했었는데. 알고 있지만 떠올리기가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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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머릿속이 불안한 예감으로 꽉 차 있거나 말거나 이방원의 말은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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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번이고 관직을 그만두고 낙향하여 동북면(함경도)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하였지만, 내가 과거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듣고 누구보다 기뻐하시던 태조대왕을 생각하면서 끝까지 버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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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에 따르면 태조 이성계는 이방원의 과거 합격 소식을 듣고서 누구보다 기뻐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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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기쁜 나머지 과거 합격증에 적힌 내용을 사람 시켜서 몇 번이나 읽게 하였고, 고려 궁궐이 있는 방향을 향해서는 절을 올렸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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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도 그러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잠시 낙향하는 것을 허락했던 것이다. 그리고 너는 내 기대처럼, 낙향하고서도 백성을 위하고자 하는 마음에 방원법을 시행하는 데 걸림돌이 될 일들을 미리 예견하여, 상소를 올려오지 않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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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신은 그저 종묘사직을 받들고, 전하의 품으신 큰 뜻을 받들기 위해 부족하나마 최선을 다할 뿐이 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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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과 이방원이 껄껄 웃었다. 웃는 모습이 묘하게도 이공계 박사과정 학생들을 하루 14시간 연구와 공부로만 몰아넣는 교수님들과 똑같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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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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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아바마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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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슬 본론을 꺼내도록 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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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이 손짓을 하자, 교지와 유척(조선 도량형 표준 측정기), 마패를 비롯한 물건들을 든 내시가 내 쪽으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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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걸 보자마자 나는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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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분위기로 봐서는 내가 소리를 지르는 불경죄를 범한다 해도, 이방원이랑 세종은 쿨하게 용서해 줄 것 같기는 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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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고, 불경죄를 범했으니 원래대로라면 죽여도 할 말이 없어. 하지만 우리는 관대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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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를 지었으면 더 열심히 황희처럼 일하면 그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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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말하면서 나를 마른걸레 쥐어짜듯이 혹사 시킬 것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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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생각을 하면서 저 끔찍한 '암행어사 풀세트'를 보니 비명 지르는 것을 참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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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님이 분위기를 잡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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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인이 연치 어리고, 능력이 부족하여 방원법이 과연 백성들을 골고루 이롭게 하는지 살피기에 부족함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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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극에 보면 왕이 맨날 자신을 과인이라고 칭하기 바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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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조선의 실제 기록에서 왕이 자신을 '과인'이라고 칭하는 경우는 딱 두 가지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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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나게 화가 나서 '아이고, 내가 덕이 부족하니 확 죽어버려야겠다.'라는 말을 할 때와 엄청나게 큰 문제가 생겨서 반성하는 티를 팍팍 내야 할 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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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상황은 전자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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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임금이 저런 말을 하고 싶을 만큼 세종대왕님 속을 태울 나쁜 놈의 나쁜 짓이 널렸다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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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김대붕 네가 과인을 대신하여 경기도 11개 군현을 순찰하며, 혹여 간악한 수령이 백성들을 착취하는지를 널리 살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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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명을 받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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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방원과 세종에게 가지고 있는 불만은 딱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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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하들을 너무 부려 먹는다는 것.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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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 말고는 딱히 불만이 없다. 과장 조금 보태자면 저 둘이 하고자 하는 바는 곧 내가 목숨을 걸고서라도 해내고 싶은 일이기도 하다는 뜻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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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방원법은 내가 목숨을 걸고서라도 해내야만 한다고 꽤 전부터 생각해 온 일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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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만든 농기구가 제대로 생산되어 농민에게 잘 쓰이고 있는지도 살필 것이며, 방전법으로 토지를 측량하는데 간악한 양반과 아전의 농간이 있는지도 살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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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전법의 위대함은 말로 할 필요가 없다. 1804년에 황해도 일부 지역에서 방전법을 써서 시범으로 3개 고을만 땅을 측량한 적이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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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세, 궁방전, 둔전(관아 소유의 밭)의 면적이 측량 전 대비 최소 2배 이상 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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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던 땅이 갑자기 생겨난 건 당연히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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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큼 정확하게 측량할 수 있는 뛰어난 방법이라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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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시가 나에게 교서와 마패, 유척을 비롯한 물건들을 건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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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문 밖으로 나가서 교서를 열어보도록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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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내용 스포일러를 다 하셨기에, 교서 안에 써진 내용이 뭔지는 안 읽어도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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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그러면 싫든 좋든 선택의 여지가 없는 나는 이제부터 암행어사 노릇을 하러 가봐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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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움을 줄만 한 사람부터 찾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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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방송에서는 암행어사를 무슨 극한 직업으로 아니 목숨 내놓고 하는 직업으로 잘못 묘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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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행어사 생존율이 30% 미만이라고 묘사한 것을 봤는데, 이는 터무니 없는 헛소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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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전체에 암행어사가 파견되었다고 적힌 것이 총 613회이고, 이 중에서 실제로 어사가 사망한 사건은 3번밖에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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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사또들은 암행어사가 온다는 사실을 모르면 몰라도, 알게 될 경우 '온갖 방법'을 써서라도 암행어사가 무사히 자기 고을에 올 수 있게 에스코트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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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사가 죽어버리면 최악의 경우 반란으로 간주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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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되면 사또는 삼족이 멸해지고, 아전들은 참수형을 당하며 그 고을 양반들은 평생 과거도 못 치르는 신세가 되어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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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비리 저지른 기록이나 문제가 될 만한 기록은 증거 인멸 및 약간의 기록 바꿔치기라는 방법을 써서 사전에 없애기는 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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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가는 길에 암살당할 걱정 같은 건 안 해도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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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내가 누군지 관심도 없으면서 나를 죽이려고 드는 산적과 조선의 마스코트인 거대 고양이(호랑이) 등등으로부터 내 몸을 지켜야 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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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 수많은 부정의 정황을 파악하여 증좌를 모으는 데 도움을 줄 인력을 확보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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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도할 때 잡일 할 이들이야 역참에 가서 마패를 보여주면 어느 정도 수를 채울 수 있겠지만, 행정 서류를 보고 감찰해 줄 이를 구하는 것은 아주 시급한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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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럴 때는 역시 그거밖에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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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는 물보다 진하고, 가족 관계는 웬만한 상황에서 믿을 수 있다는 증거가 되는 조선 시대이니 내 장인어른과 마찬가지인 김만덕을 찾아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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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히 좋은 사람을 소개해 줄 거다. 내가 크게 되어야 그 양반도 크게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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