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dd 3 AI agents (writing, revision, story-continuity specialists) - Add 4 slash commands (rovel.create, write, complete, seed) - Add novel creation/writing rules - Add Novelpia reference data (115 works, 3328 chapters) - Add CLAUDE.md and README.md 🤖 Generated with [Claude Code](https://claude.com/claude-code) Co-Authored-By: Claude Opus 4.5 <noreply@anthropic.com>
159 lines
10 KiB
Markdown
159 lines
10 KiB
Markdown
|
|
조선이라는 나라는 내향형 인간은 살아남을 수 없는 국가다.
|
|
|
|
한양에 살아도 근처 이웃끼리는 서로 집안 수저가 몇 개인지도 알고 있고, 옆집 개똥이가 이혼해서 장가를 또 가니 마느니 하는 이야기도 다 알고 있다.
|
|
|
|
가난한 이들, 아니 양반들도 서로 돕지 않으면, 전근대 조선 사회를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
|
|
|
게다가 집에서 마누라랑 밤에 뜨거운 시간 보내는 것 말고도 딱히 여가라는 게 없으니...
|
|
|
|
어렸을 때부터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끼리 모이면 탁배기 들고 잡담부터 하는 게 조선의 기본상식이다.
|
|
|
|
이 당연한 풍경속에서 김만덕의 상단에 소속된 장돌이가 입을 열었다.
|
|
|
|
“아재, 아줌마들 그 소식 들었습니까?”
|
|
|
|
“그 소식이라고 하면 우리가 어떻게 알아? 설마 우리 배나무골 대표 노총각 덕만이가 장가간다는 소리 할 생각할 거면 접어두고.”
|
|
|
|
“그놈 장가간다는 소식은 진해현 사람들이 다 알텐데, 입 아프게 왜 그 이야기를 합니까? 평상시에는 그렇게 짠돌이처럼 굴던 덕만이 놈이 저한테도 와서 장가간다고, 시장에서 새로오신 사또께서 만든 국밥인가 뭔가를 한 그릇 턱턱 사더라니까요?”
|
|
|
|
“아이고, 사람이 평생 못 갈것 같던 장가를 가니... 덕만이 놈도 사람이 되었구만.”
|
|
|
|
덕만이 여기 있었으면 노총각이 장가가는 게 뭐가 그렇게 신기하냐면서 한바탕 화를 낼 이야기였다.
|
|
|
|
자기가 여태까지 인심이 박하다는 소리는 안 들을지언정 짠돌이처럼 굴었다지만, 평생 못 갈 것 같던 장가를 가서 사람이 되었다는 소리를 한다는 건...
|
|
|
|
자신이 죽어도 장가를 못 갈 것 같은 노총각으로 보여진다는 것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
|
|
|
비겁하게 사실에만 근거해서 자기 속을 박박 긁는 걸 참을 수 없기는 했다.
|
|
|
|
“그러면 뭔데?”
|
|
|
|
“양반 나리들이 우리 백성들을 생각해서 공납을 그 땡중놈들이 있었을 때랑 똑같이 낸답니다. 대신에 저희처럼 가난한 놈들이 내는 공납의 양을 그만큼 줄여준답니다.”
|
|
|
|
공납을 더 줄여준다는 말에 장돌이 주변에 있는 이들이 귀를 기울였다.
|
|
|
|
아니, 근처에서 장사하고 있던 이들까지 쪼르르 달려왔다.
|
|
|
|
다른 이야기라면 모를까, 자기들에게 부담이 되는 세금 줄여준다는 이야기인데 관심이 안 갈 수가 없었다.
|
|
|
|
“저번에 뒈진 정학소 그놈 빼고는 양반 나리들이 아주 박하지는 않은 분들이기는 한데... 저분들이 우리 공납까지 대신 내주실 정도로 선량한 분들은 아니지 않나?”
|
|
|
|
조선 팔도 어디를 가나 자기 마을 양반댁 제삿날은 곧 마을 잔칫날이 된다.
|
|
|
|
양반이라는 작자가 제사를 지내는데 마을에 사는 이들 모아서 맛있는 음식을 잔뜩 안 먹여주면, 마을 내부에서 평판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
|
|
|
평판이 떨어지고, 떨어지다 보면 고을 양반 사회에서도 양반 취급을 안 해주기 때문에 울며불며 제삿날에는 수백 명에 달하는 마을 사람들이 먹고도 남을 잔칫상을 벌인다.
|
|
|
|
거기에 흉년이 들면 자기 집 창고 열어서 공짜로 곡식을 나눠주기도 한다.
|
|
|
|
저 사람들의 인간적인 면모도 있지만, 안 그랬다가는 배고픈 백성이라는 호랑이에게 물려죽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
|
|
|
그래서 고을 사람들에게 양반은 제사 지낼 때 참 고마운 분들 정도로만 여겨지고 있었는데... 그런 분들이 갑자기 백성들을 위해 헌신한다? 조금 많이 수상했다.
|
|
|
|
"장돌이 네 녀석이 잘못 들은 거 아녀?"
|
|
|
|
장돌이 들은 사실은 100% 사실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저 말을 널리 퍼뜨리라고 한 사람은 무려 자기 상회 대방인 김만덕이니까.
|
|
|
|
그리고 김만덕이 누구인가? 장돌이 본 사또 중에서 가장 백성을 많이 어루만지는 사또가 직접 발걸음을 옮겨 조언을 구할 정도로 대단한 상인이다.
|
|
|
|
조선 팔도 어디를 가도 관료가 뇌물 받으러 온 게 아니라 조언 구하러 오는 상인은 자기 대방 나리밖에 없을 터.
|
|
|
|
'그렇지만 이걸 밝히지는 말라 하셨지.'
|
|
|
|
"내 사촌의 매제 딸이 지금 호방 나리 첩으로 들어간 거 알죠?"
|
|
|
|
"그걸 누가 몰라. 그래서 내 사촌도 땅 한 결을 받았다고 입 째지게 자랑한 게 어제 일 같은데. 생각만 해도 배가 아프네."
|
|
|
|
"우리 사촌 형님한테 직접 들은 내용입니다. 사촌 형님이 우리 사또께서 양반 나리들을 다 불러 모으고 친히 그분들을 설득하고 교화하시니, 양반 나리들께서 자발적으로 공납을 더 부담하겠다고 하셨더랍니다."
|
|
|
|
양반들이 세금을 자발적으로 더 내겠다고 하는 불가사의한 현상.
|
|
|
|
그러나 이미 이 고을 백성들은 현감 김대붕이 한다고 하면, 무슨 일이든 그대로 이뤄지리라 믿는 지경에 이르렀다.
|
|
|
|
공납도 절반으로 깎아버리고, 땡중들이 횡령한 쌀도 백성들에게 돌려주고, 시장을 세워서 구경거리도 주고 밥 벌어먹을 거리까지 줬으니... 그럴 만도 했다.
|
|
|
|
"그리고 이야기 들어보니까, 그것만이 아니던데요."
|
|
|
|
"또 뭔가 하셨나?"
|
|
|
|
"동천이랑 서사천에 보(저수지)를 여러 개 만든다고 합니다. 거기에 참여하면, 일당만큼 환곡도 깎아준다고 하더라고요."
|
|
|
|
"...... 역(공공근로)을 하는데 환곡을 깎아준다고?"
|
|
|
|
"심지어 일하는 사람들 배고프지 말라고 새참이랑 저녁도 준다고 합니다. 양반 나리들이 내시는 세금으로 말이죠."
|
|
|
|
이 말을 들은 이들은 현기증을 느꼈다. 자기들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를 연달아서 들었기 때문이다.
|
|
|
|
원래 역이라는 건 사또가 하겠다고 하면 무보수로 동원하는 게 당연하고, 식사는 알아서 준비해야만 하는 것이다. 경복궁을 지을 때도 그랬고, 창덕궁을 지을 때도 그랬다.
|
|
|
|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처럼 당연한 상식인데, 이 사또는 노역을 시키면 '환곡'을 깎아준다고?
|
|
|
|
자신들의 머리로는 도저히, 그 어떠한 방법을 써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
|
|
|
"농번기라면 몰라도 농한기에나, 시간 날 때는 꼭 나가야겠는데?"
|
|
|
|
"보가 잔뜩 만들어지면 흉년이 들 일도 줄어들 거 아니야."
|
|
|
|
성벽 쌓는 건 자기들에게 당장 도움이 되는 일이 아니라지만, 강에 보 쌓는 건 흉년이 올 일도 줄여주고...
|
|
|
|
농경지 개간하기도 좋아져서 내 땅을 개간해서 가지게 되는 것도 훨씬 수월해질 것이다.
|
|
|
|
아무리 따져봐도 좋은 점만 있지, 나쁜 구석이 하나도 없는 정책이다.
|
|
|
|
"사또께서 양반 나리들을 잘 설득하셨네. 그런데 말이여, 사또 가시면 끝장 아냐?"
|
|
|
|
"그게 또 뭔 개소리야?"
|
|
|
|
사또가 가면 끝이라는 이야기를 한 아재가 장돌이에게 따지듯 물었다.
|
|
|
|
"사또께서 양반 나리들을 잘 설득해서 지금은 이렇게 한다지만, 다른 사또께서 오시면 이게 계속 이어질 거 같냐?"
|
|
|
|
장돌이는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는 걸 겨우 숨겼다.
|
|
|
|
김만덕이 모든 직원들에게 백성들을 선동, 아니 설득해서 송덕비를 세우게만 하면 쌀 반 섬을 주겠다고 했는데.
|
|
|
|
자기가 여기 있는 사람들 설득해서 송덕비를 세우면 쌀 반 섬을 거의 꽁으로 얻는 셈이었으니까.
|
|
|
|
"그러면 송덕비라도 세우는 게 어떻겠습니까?"
|
|
|
|
"송덕비?"
|
|
|
|
"양반 나리들이 우리 같이 가난한 백성들과 고을을 위해서 친히 재물을 아끼지 않고 베푸셨으니, 저희도 감사한 마음을 담아서 글 좀 써달라 하고 세워버리죠."
|
|
|
|
"너 장돌이 맞냐? 왜 이렇게 똑똑해졌어?"
|
|
|
|
"그게 뭐가 중요합니까?"
|
|
|
|
저들이 아는 장돌이는 김만덕 상회에서 잡일하면서 먹고 사는 놈이지, 이렇게 똑똑한 인간이 아니었다. 그래서 조금 수상하다고는 생각했지만...
|
|
|
|
지금은 그런 것보다 양반 나리들이 세금을 잔뜩 내셔서 자기들 공납도 줄고, 농한기에 보 쌓는 일을 해서 환곡 갚을 걱정을 안 해도 된다는 게 더 중요했다.
|
|
|
|
농한기에 일을 하면 갚을 환곡도 줄고, 밥도 주면... 이게 바로 쌀이 저절로 새끼를 치는 거나 다를 게 없다.
|
|
|
|
"중요한 건, 송덕비를 세워서 우리가 양반 나리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드러내면... 양반 나리들도 '송덕비'까지 세워진 일을 그만둘 수 없다는 거 아니겠습니까?"
|
|
|
|
장돌이가 왜 이렇게 똑똑한 말을 하는지에 대한 의심은 '그만둘 수 없게 된다.'라는 말 한마디에 싹 사라졌다.
|
|
|
|
세금이 줄어들고, 자기들 사는 게 좋아졌다. 그걸 오래 유지할 방법이 장돌이 입에서 나오는데, 그놈 뒤에 누가 있은들 어떠하겠냐 하는 심정이 들었기 때문이다.
|
|
|
|
"양반 나리들은 쓸데없이 후세에 이름 남기는 좋아하잖어. 그러니 우리가 송덕비 세워서 양반 나리들께 고맙다고 하면 지금처럼 계속하실걸?"
|
|
|
|
"고을 백성들이 모아서 하면 얼마 들지도 않을 거 같은데."
|
|
|
|
"양반 나리들이 세금 더 내주시겠다는 데 그 정도는 못할 것도 없지."
|
|
|
|
여론이 이렇게 모아지자, 여기서 이야기 하고 있던 이들도 슬슬 흩어졌다.
|
|
|
|
장사도 해야하고, 집에 돌아가서 마누라 궁둥이 두드리러 가든, 아니면 텃밭을 일구러 가든 해야할 일을 해야했기 때문이다.
|
|
|
|
그리고 저들은 곧장 곳곳으로 흩어져서 소문을 냈다.
|
|
|
|
"내가 들었는데 말이야... 사또께서 우리를 위해서 양반들을 설득해서 공납을 우리 대신 좀 내주게 하셨다네?"
|
|
|
|
"양반 나리들 덕분에 세금이 줄었으니 송덕비 하나는 세워줘도 되지 않겠어?"
|
|
|
|
"저 사람들도 맨입으로 하는 것보다는 고맙다는 말 한 마디 듣고 하는 게 낫지..."
|
|
|
|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고을에는 양반들의 덕을 찬양하는 송덕비가 세워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