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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14 21:31:5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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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라는 나라는 내향형 인간은 살아남을 수 없는 국가다.

한양에 살아도 근처 이웃끼리는 서로 집안 수저가 몇 개인지도 알고 있고, 옆집 개똥이가 이혼해서 장가를 또 가니 마느니 하는 이야기도 다 알고 있다.

가난한 이들, 아니 양반들도 서로 돕지 않으면, 전근대 조선 사회를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집에서 마누라랑 밤에 뜨거운 시간 보내는 것 말고도 딱히 여가라는 게 없으니...

어렸을 때부터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끼리 모이면 탁배기 들고 잡담부터 하는 게 조선의 기본상식이다.

이 당연한 풍경속에서 김만덕의 상단에 소속된 장돌이가 입을 열었다.

“아재, 아줌마들 그 소식 들었습니까?”

“그 소식이라고 하면 우리가 어떻게 알아? 설마 우리 배나무골 대표 노총각 덕만이가 장가간다는 소리 할 생각할 거면 접어두고.”

“그놈 장가간다는 소식은 진해현 사람들이 다 알텐데, 입 아프게 왜 그 이야기를 합니까? 평상시에는 그렇게 짠돌이처럼 굴던 덕만이 놈이 저한테도 와서 장가간다고, 시장에서 새로오신 사또께서 만든 국밥인가 뭔가를 한 그릇 턱턱 사더라니까요?”

“아이고, 사람이 평생 못 갈것 같던 장가를 가니... 덕만이 놈도 사람이 되었구만.”

덕만이 여기 있었으면 노총각이 장가가는 게 뭐가 그렇게 신기하냐면서 한바탕 화를 낼 이야기였다.

자기가 여태까지 인심이 박하다는 소리는 안 들을지언정 짠돌이처럼 굴었다지만, 평생 못 갈 것 같던 장가를 가서 사람이 되었다는 소리를 한다는 건...

자신이 죽어도 장가를 못 갈 것 같은 노총각으로 보여진다는 것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비겁하게 사실에만 근거해서 자기 속을 박박 긁는 걸 참을 수 없기는 했다.

“그러면 뭔데?”

“양반 나리들이 우리 백성들을 생각해서 공납을 그 땡중놈들이 있었을 때랑 똑같이 낸답니다. 대신에 저희처럼 가난한 놈들이 내는 공납의 양을 그만큼 줄여준답니다.”

공납을 더 줄여준다는 말에 장돌이 주변에 있는 이들이 귀를 기울였다.

아니, 근처에서 장사하고 있던 이들까지 쪼르르 달려왔다.

다른 이야기라면 모를까, 자기들에게 부담이 되는 세금 줄여준다는 이야기인데 관심이 안 갈 수가 없었다.

“저번에 뒈진 정학소 그놈 빼고는 양반 나리들이 아주 박하지는 않은 분들이기는 한데... 저분들이 우리 공납까지 대신 내주실 정도로 선량한 분들은 아니지 않나?”

조선 팔도 어디를 가나 자기 마을 양반댁 제삿날은 곧 마을 잔칫날이 된다.

양반이라는 작자가 제사를 지내는데 마을에 사는 이들 모아서 맛있는 음식을 잔뜩 안 먹여주면, 마을 내부에서 평판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평판이 떨어지고, 떨어지다 보면 고을 양반 사회에서도 양반 취급을 안 해주기 때문에 울며불며 제삿날에는 수백 명에 달하는 마을 사람들이 먹고도 남을 잔칫상을 벌인다.

거기에 흉년이 들면 자기 집 창고 열어서 공짜로 곡식을 나눠주기도 한다.

저 사람들의 인간적인 면모도 있지만, 안 그랬다가는 배고픈 백성이라는 호랑이에게 물려죽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을 사람들에게 양반은 제사 지낼 때 참 고마운 분들 정도로만 여겨지고 있었는데... 그런 분들이 갑자기 백성들을 위해 헌신한다? 조금 많이 수상했다.

"장돌이 네 녀석이 잘못 들은 거 아녀?"

장돌이 들은 사실은 100% 사실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저 말을 널리 퍼뜨리라고 한 사람은 무려 자기 상회 대방인 김만덕이니까.

그리고 김만덕이 누구인가? 장돌이 본 사또 중에서 가장 백성을 많이 어루만지는 사또가 직접 발걸음을 옮겨 조언을 구할 정도로 대단한 상인이다.

조선 팔도 어디를 가도 관료가 뇌물 받으러 온 게 아니라 조언 구하러 오는 상인은 자기 대방 나리밖에 없을 터.

'그렇지만 이걸 밝히지는 말라 하셨지.'

"내 사촌의 매제 딸이 지금 호방 나리 첩으로 들어간 거 알죠?"

"그걸 누가 몰라. 그래서 내 사촌도 땅 한 결을 받았다고 입 째지게 자랑한 게 어제 일 같은데. 생각만 해도 배가 아프네."

"우리 사촌 형님한테 직접 들은 내용입니다. 사촌 형님이 우리 사또께서 양반 나리들을 다 불러 모으고 친히 그분들을 설득하고 교화하시니, 양반 나리들께서 자발적으로 공납을 더 부담하겠다고 하셨더랍니다."

양반들이 세금을 자발적으로 더 내겠다고 하는 불가사의한 현상.

그러나 이미 이 고을 백성들은 현감 김대붕이 한다고 하면, 무슨 일이든 그대로 이뤄지리라 믿는 지경에 이르렀다.

공납도 절반으로 깎아버리고, 땡중들이 횡령한 쌀도 백성들에게 돌려주고, 시장을 세워서 구경거리도 주고 밥 벌어먹을 거리까지 줬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리고 이야기 들어보니까, 그것만이 아니던데요."

"또 뭔가 하셨나?"

"동천이랑 서사천에 보(저수지)를 여러 개 만든다고 합니다. 거기에 참여하면, 일당만큼 환곡도 깎아준다고 하더라고요."

"...... 역(공공근로)을 하는데 환곡을 깎아준다고?"

"심지어 일하는 사람들 배고프지 말라고 새참이랑 저녁도 준다고 합니다. 양반 나리들이 내시는 세금으로 말이죠."

이 말을 들은 이들은 현기증을 느꼈다. 자기들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를 연달아서 들었기 때문이다.

원래 역이라는 건 사또가 하겠다고 하면 무보수로 동원하는 게 당연하고, 식사는 알아서 준비해야만 하는 것이다. 경복궁을 지을 때도 그랬고, 창덕궁을 지을 때도 그랬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처럼 당연한 상식인데, 이 사또는 노역을 시키면 '환곡'을 깎아준다고?

자신들의 머리로는 도저히, 그 어떠한 방법을 써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농번기라면 몰라도 농한기에나, 시간 날 때는 꼭 나가야겠는데?"

"보가 잔뜩 만들어지면 흉년이 들 일도 줄어들 거 아니야."

성벽 쌓는 건 자기들에게 당장 도움이 되는 일이 아니라지만, 강에 보 쌓는 건 흉년이 올 일도 줄여주고...

농경지 개간하기도 좋아져서 내 땅을 개간해서 가지게 되는 것도 훨씬 수월해질 것이다.

아무리 따져봐도 좋은 점만 있지, 나쁜 구석이 하나도 없는 정책이다.

"사또께서 양반 나리들을 잘 설득하셨네. 그런데 말이여, 사또 가시면 끝장 아냐?"

"그게 또 뭔 개소리야?"

사또가 가면 끝이라는 이야기를 한 아재가 장돌이에게 따지듯 물었다.

"사또께서 양반 나리들을 잘 설득해서 지금은 이렇게 한다지만, 다른 사또께서 오시면 이게 계속 이어질 거 같냐?"

장돌이는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는 걸 겨우 숨겼다.

김만덕이 모든 직원들에게 백성들을 선동, 아니 설득해서 송덕비를 세우게만 하면 쌀 반 섬을 주겠다고 했는데.

자기가 여기 있는 사람들 설득해서 송덕비를 세우면 쌀 반 섬을 거의 꽁으로 얻는 셈이었으니까.

"그러면 송덕비라도 세우는 게 어떻겠습니까?"

"송덕비?"

"양반 나리들이 우리 같이 가난한 백성들과 고을을 위해서 친히 재물을 아끼지 않고 베푸셨으니, 저희도 감사한 마음을 담아서 글 좀 써달라 하고 세워버리죠."

"너 장돌이 맞냐? 왜 이렇게 똑똑해졌어?"

"그게 뭐가 중요합니까?"

저들이 아는 장돌이는 김만덕 상회에서 잡일하면서 먹고 사는 놈이지, 이렇게 똑똑한 인간이 아니었다. 그래서 조금 수상하다고는 생각했지만...

지금은 그런 것보다 양반 나리들이 세금을 잔뜩 내셔서 자기들 공납도 줄고, 농한기에 보 쌓는 일을 해서 환곡 갚을 걱정을 안 해도 된다는 게 더 중요했다.

농한기에 일을 하면 갚을 환곡도 줄고, 밥도 주면... 이게 바로 쌀이 저절로 새끼를 치는 거나 다를 게 없다.

"중요한 건, 송덕비를 세워서 우리가 양반 나리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드러내면... 양반 나리들도 '송덕비'까지 세워진 일을 그만둘 수 없다는 거 아니겠습니까?"

장돌이가 왜 이렇게 똑똑한 말을 하는지에 대한 의심은 '그만둘 수 없게 된다.'라는 말 한마디에 싹 사라졌다.

세금이 줄어들고, 자기들 사는 게 좋아졌다. 그걸 오래 유지할 방법이 장돌이 입에서 나오는데, 그놈 뒤에 누가 있은들 어떠하겠냐 하는 심정이 들었기 때문이다.

"양반 나리들은 쓸데없이 후세에 이름 남기는 좋아하잖어. 그러니 우리가 송덕비 세워서 양반 나리들께 고맙다고 하면 지금처럼 계속하실걸?"

"고을 백성들이 모아서 하면 얼마 들지도 않을 거 같은데."

"양반 나리들이 세금 더 내주시겠다는 데 그 정도는 못할 것도 없지."

여론이 이렇게 모아지자, 여기서 이야기 하고 있던 이들도 슬슬 흩어졌다.

장사도 해야하고, 집에 돌아가서 마누라 궁둥이 두드리러 가든, 아니면 텃밭을 일구러 가든 해야할 일을 해야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저들은 곧장 곳곳으로 흩어져서 소문을 냈다.

"내가 들었는데 말이야... 사또께서 우리를 위해서 양반들을 설득해서 공납을 우리 대신 좀 내주게 하셨다네?"

"양반 나리들 덕분에 세금이 줄었으니 송덕비 하나는 세워줘도 되지 않겠어?"

"저 사람들도 맨입으로 하는 것보다는 고맙다는 말 한 마디 듣고 하는 게 낫지..."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고을에는 양반들의 덕을 찬양하는 송덕비가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