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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안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곧바로 마도서를 손에 쥐었다. 부드럽게 안착한 재창조의 손길이 펄럭이며 열리고, 그가 눈앞에 떠오른 문자 위로 손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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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롭게 태어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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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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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동한 마법이 문자 배열에 간섭하여 글자를 일그러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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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였다. 무너져내린 글자는 다시 정상으로 돌아와 이안의 눈앞에서 깜빡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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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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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창조의 마법이 통하지 않는 최초의 상황. 이안은 왠지 모르게 등골이 서늘해지는 느낌을 받으며, 탁자 옆에 놓인 컵을 대상으로 마법을 사용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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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드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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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 우그러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컵의 형태가 단검처럼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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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마법 자체에 문제가 생겼다기보다는, 이 정체불명의 ‘상태창’이라는 괴이가 마법을 무시하는 것 같았다. 영향을 아예 안 받는 건 아닌 것 같다만, 그래도 단순 무식하게 죽일 수 없다는 건 확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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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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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안은 살짝 떨리는 손으로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물고 불을 붙이며 연기를 허공에 내뿜었다. 방 안에서의 흡연은 금지되어 있지만, 지금은 그런 것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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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니코틴과 타르가 폐를 적신 덕분인지 정신이 제법 맑아졌다. 그는 싸늘한 얼굴로 침대 끄트머리에 앉아 이 ‘상태창’이라는 놈을 조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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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적인 터치는…… 가능하군. VR 게임의 시스템을 조작하는 느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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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겜판이라고 부르는 장르가 있다. 게임 속으로 들어가 상태창과 함께 움직이는 장르의 소설을 말하는 데, 지금 광경이 꼭 그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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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혹시 나도 게임 속으로 끌려온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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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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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이안은 속단하지 않고 머리를 차갑게 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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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하지 못한 상황을 마주친 만큼 침착하게 움직일 필요가 있었다. 괜히 당황하며 날뛰면 시야만 좁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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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만 이런 변화가 생긴 건 아닐 거야. 이 크루즈에 탑승한 전원이 이상해졌다고 보는 게 맞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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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분하게 상황을 관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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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태창에 적힌 말에 따르면, 이안의 역할은 탐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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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런 근거도 없이 배정된 역할은 아닐 것이다. 아마 어제 하루 종일 사건의 실마리를 찾아 돌아다녔기에 이런 직업을 가지게 된 것일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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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증거로 어젯밤 카지노에서 도박하던 이서아는 도박꾼이라는 역할이 부여된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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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이들이라고 별반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선장은 진짜 선장일 거고, 사진작가나 형사 등은 아마 특정 트리거를 통해 얻어낸 직업일 가능성이 높았다. 실제 직업은 아닐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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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종의 역할극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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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전에 있었던 일을 토대로 분석하여 부여한 역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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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신비는 어제부터 은밀히 움직이고 있었던 모양이다. 탐지하지 못한 걸 보면 직접 행동하는 형태의 신비보다는 기생, 혹은 도구에 가까운 성격을 지녔을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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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쪽이든 성가시기 그지없었다. 이안은 짜증에 혀를 쯧 차며 테라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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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 낀 먹구름 탓에 해는 뜨지 않았다. 밤이 멀어지는 중이지만, 그리 밝은 아침은 아니었다. 수면 위로는 해무(海霧)가 짙게 깔린 상태였고, 그 아래에서 무언가 헤엄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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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물고기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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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수 없었다. 굳이 당장 확인해 보고 싶은 마음이 들지도 않았다. 지금은 때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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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안은 다 피운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꺼트리고, 빠르게 씻은 뒤 방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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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옆방에서 인기척이 느껴지는 걸 보면 아직 잠들어 있는 상태인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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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설이지 않고 전화를 걸어 그녀를 깨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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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응……? 왜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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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뜩 갈라진 목소리가 휴대폰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왔다. 이안은 돌려 말하는 것 없이,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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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상태창이니 뭐니 하는 거 보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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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상태창……? ……어, 시발 뭐야 이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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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깨끗이 바뀌었다. 이불이 스르륵 내려가는 소리와 함께 침대 스프링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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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왜 도박꾼이야. 나 마법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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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 도박으로 많이 벌어서 그런 거겠지. 아무튼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우리가 우리도 모르는 사이 신비에 휘말렸다는 게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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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도에 기대어 서며 주변을 둘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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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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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멀리, 모퉁이 너머로 비척거리며 다가오는 한 여자의 모습이 보인다. 이안은 품에 넣어둔 리볼버의 차가운 감촉을 느끼며 입술을 달싹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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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리 나와. 30분 안에 안 나오면 문 부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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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겠어. 금방 준비해서 나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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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아는 불평하는 대신 빠르게 답하며 통화를 끊었다. 이안이 한 손으로 휴대폰을 조작하여 GPS 앱을 실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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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위치: 안개 해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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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도 보도 못한 지역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이안이 미간을 콱 찌푸리며 지도를 축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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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어진 세계 지도. 그 한복판에 찍힌 붉은색 점이 남미와 북미 사이 바다에 자리 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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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뮤다 삼각지대잖아, 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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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히 이안이 타국의 해안에 그리 박학다식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지금 이곳이 버뮤다 삼각지대라고 부르는 대서양의 한쪽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워낙 유명한 곳이라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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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갖 음모론과 미스터리에 휩싸인 곳. 그러나 전부 가짜라고 밝혀진 게 몇 년 되지 않은 일인 것 같은데, 이리 갑자기 전이한 걸 보면 이 또한 관리국에서 시행한 정보 은폐인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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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실 자체는 그리 놀랍지 않았다. 중요한 건, 한국의 영해에서 하룻밤 사이에 아메리카 대륙까지 날아왔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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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에 있는 지역이니 공간형 괴이에 갇힌 건 아닐 거야. 말 그대로 순간 이동을 한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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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이동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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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혀 현실감 없는 단어지만, 신비가 엮인 이상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이안은 숨을 길게 토해내며 멀리서 다가오는 여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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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어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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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에 푹 젖은 듯한 몰골. 풀린 동공 사이에선 누런 고름과 진물이 떨어지고, 세 갈래로 찢어진 오른쪽 다리 사이로 푸른색 촉수가 꿈틀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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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딜 어떻게 보아도 정상적인 몰골은 아니었다. 이안은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고, 주머니 속 과도를 꺼내 그대로 투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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쐐애애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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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르게 날아간 과도가 그대로 여성의 허벅지를 스치며 떨어진다. 여성은 아무런 비명도, 반응도 보이지 못하고 그대로 안개가 되어 흩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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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에에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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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사라진 자리 위로 자그마한 푸른 지렁이 3마리가 떨어졌다. 놈들은 아가리를 쩍 벌리며 괴성을 질러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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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기생충이라고 하기엔 지나칠 정도로 징그러운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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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안은 그대로 쏴 죽이기 위해 리볼버를 꺼냈지만, 그가 방아쇠를 당기는 것보다 지렁이들이 말라비틀어지는 속도가 더욱 빨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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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이이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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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수분이 빨린 것처럼 쪼그라든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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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렁이들은 아무런 공격도 하지 못한 채,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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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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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안은 겨눴던 리볼버를 빠르게 거두고, 주변에 목격자가 있는지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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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복도 한중간에 CCTV가 있기는 했지만, 이서아랑 동행한 상황이니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다. 직접적인 목격자만 어떻게 처리하면 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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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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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안은 숨을 길게 토해내며 담배 끄트머리에 불을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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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이서아가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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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크롭티와 후드집업, 그리고 긴 바지만 걸친 그녀가 담배를 피우는 이안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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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선 흡연 금지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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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그럴 걸 따질 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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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안이 가볍게 그녀의 지적을 넘기며 몸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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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뭔 괴물 같은 걸 하나 봤다. 갈라진 다리에서 촉수가 뻗어 나오는 익사체 같은 모습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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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한 괴이네. 다른 특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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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며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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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었을 때 안개가 되어 흩어졌다. 그리고 아직 인간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어서 그런지, 아니면 본래 인간이어서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여전히 영장류 취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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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 칼로 죽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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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복도 한복판에 떨어진 식칼을 주워들었다. 이서아가 수호령을 CCTV 내부로 흘려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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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도 못 하고 죽었으니 확실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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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나 해서 하는 말이지만, 만약 우리가 환각을 겪는 거라면? 네가 죽인 대상이 사람이고, 이 상태창인지 뭔지 하는 게 전부 거짓이라면? 그런 가설은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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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능한 일이야. 방금 죽인 게 인간이라면 사라진 게 환각이라고 한들 시체가 남아야 한다. 하지만 우린 아무런 장애도 없이 복도를 걸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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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안이 뻥 뚫린 복도를 슬쩍 돌아보며 엘리베이터 호출 버튼을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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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환각은 아닐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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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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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동의해. 환각은 많이 겪어봐서, 구분 정도는 쉽지. 소거법을 위해 한 말이니까 너무 신경 쓰지는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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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텅 빈 뼛가루 병을 이안에게 내밀며 그를 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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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내가 어제 줬던 뼛가루 병. 아침에 일어나니까 발동되어 있더라. 일단 여기 있는 신비가 정신에 간섭한 건 확실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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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아직 멀쩡하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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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안이 떨떠름한 얼굴로 처음 받았을 때와 똑같은 상태인 유리병을 꺼내 들었다. 이서아는 잠깐 멈칫했지만, 그의 코트 사이로 보이는 마도서를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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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마도서가 정신 방벽을 구축해 준거겠지. 제법 사랑받는 편인가 봐. 외신의 사랑이 좋은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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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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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안은 새삼 놀랍다는 표정으로 가방에 담긴 마도서를 의식했다. 두 권의 책이 그의 시선 느끼고 짧게 진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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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나 잘했지?’하고 묻는 듯한 떨림. 그는 쓰게 웃으며 마도서의 표지를 손으로 쓰다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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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문제는 없을 거다. 아무튼, 정신 계열이라면 일단 첫 번째 공격은 피한 건가? 너나 나나 돌아버린 것 같지는 않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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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그럴 거야. 난 기억의 혼선 같은 거 없거든. 너도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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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어. 배운 마법도 전부 머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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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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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를 나누는 사이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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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강기 내부에는 젊은 부부가 하나 타 있었다. 그들은 두 사람의 시선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벽에 딱 붙어 격렬하게 입을 맞추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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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그들의 머리 위로 글자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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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혼부부 이태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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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혼부부 김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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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게임 NPC 같은 이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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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안과 서아는 자신들의 머리 위에는 그런 것이 뜨지 않는다는 걸 확인한 후, 승강기에 탑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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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골적인 키스 소리가 울려 퍼졌지만, 서아는 단 한 조각의 민망함도 느끼지 않은 채 주머니 속 송곳을 꽉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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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기세는 부부가 허튼짓이라도 하면 곧바로 목을 찔러버릴 정도로 살벌했다. 이안이라고 별반 다르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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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웅, 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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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있어,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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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강기가 내려가는 동안 두 사람은 그 말만 지속적으로 반복해 댔다. 심지어 움직임도 똑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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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딜 어떻게 봐도 정상적인 인간의 모습은 아니었다. 차라리 명령이 입력된 기계라고 보는 게 더욱 신빙성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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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아먹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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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아가 신혼부부를 슬쩍 응시하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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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할에 잠식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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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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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 공격은 저런 식으로 이루어지는 것 같아. 만약 우리가 당했다면, 나는 도박꾼. 너는 탐정처럼 행동했겠지. 진짜 게임 속 NPC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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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다로운 놈이군. 게임을 현실에 덮어씌우는 신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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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모르겠지만, 만약 그렇다면 해결 방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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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딩을 보는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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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안이 세 번째 담배를 피우며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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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 연기가 엘리베이터의 천장에 닿았다가 이내 흩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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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순간, 엘리베이트가 자동으로 멈추더니 식당이 있는 층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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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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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쾌한 소리와 함께 승강기 문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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