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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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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재는 먼저 나가보겠다며 응급실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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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소리가 멀어지고, 다시 고요함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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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천천히 파란 창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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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은 어떻게 되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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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나 다를까 갤러리는 이미 축제 분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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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기 글 목록 최상단에는 방금 전 내 몸을 빌려 썼던 장본인의 글이 버젓이 올라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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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이승 구경 후기.t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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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메스의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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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사고로 거의 죽어가던 양반 REBOA로 대동맥 틀어막아서 살리고 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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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글 밑으로는 온갖 댓글들이 달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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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ㅇ (210.94) : REBOA 하고 왔구나… 고생했다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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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술실망령3 : 조오오오오오오온나 부럽다ㅏㅏㅏ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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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내과망령 : 이걸 막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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뼈덕후88 : 그래서 뼈는? 골반 골절이라며. 뼈 사진 안 찍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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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요란한 반응을 훑어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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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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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하긴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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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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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스의신의 미친 짓이 아니었다면 그 환자는 이미 싸늘한 시신이 되어 영안실로 내려갔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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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조선노예1 : 그래서 나 이제 ㄹㅇ 어캄…? 징계위 또 가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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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댓글에 잠시 동안 정적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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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메스의신 : 잠시만 ㄱ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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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스의신은 짧은 답글을 남기고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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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불안한 마음으로 화면만 쳐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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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무슨 꿍꿍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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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내가 다 책임지겠다’ 같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려는 건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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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이미 죽었잖아 이 양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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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잠시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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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에 새로운 글이 하나 올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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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헬노예는 봐라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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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메스의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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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마른침을 삼키고 글을 클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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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면 중앙에는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아주 조악한 그림판 실력으로 그려진 졸라맨 하나가 땅바닥에 머리를 처박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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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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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극적인 사과의 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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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그림 밑에 짧은 세 줄의 글이 적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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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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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팅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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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이번엔 반말 안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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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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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화면을 보고,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아니면 저 그림판 졸라맨의 목이라도 비틀어야 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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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말 안 썼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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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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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 좀 하게 조용히 하라고 했을 때 빼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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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족의 발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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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눈물이 날 지경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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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허탈한 웃음과 함께 화면에 얼굴을 파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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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른세수를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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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잘했어요 이 개새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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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택시 뒷좌석에 시체처럼 몸을 싣고 집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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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스텔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나는 양말도 벗지 않고 그대로 현관 바닥에 주저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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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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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어도 오늘 하루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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띠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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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주머니 속 핸드폰이 짧게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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액정을 확인하는 순간 내 눈앞이 하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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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신자는 교육수련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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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수련부] 응급의학과 2년 차 전공의 한현재 선생님. 금일 발생한 응급실 내 인터벤션 시술 건 관련하여 내일 오전 10시 동관 14층 회의실에서 수련위원회가 열릴 예정이니 시간 엄수하여 참석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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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자가… 내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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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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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거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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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에 배를 쨌을 때는 그래도 며칠의 유예 기간이라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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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위서를 쓰고, 소문이 돌고, 마음의 준비라도 할 시간이 주어졌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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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번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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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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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도 안 되는 시간 뒤에 바로 소환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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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에는 약간의 유예를 주더니, 이번에는 이러는 이유가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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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나를 반동분자(?)로 낙인찍고 이번에는 아예 보내버릴 작정인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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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나는 확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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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 측에서 작정하고 나를 조지기로 마음먹었다는 뜻인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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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의 대형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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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습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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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한폭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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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아아아악! 안 돼! 좆됐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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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현관 바닥에 머리를 박고 절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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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로 끝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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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작 2년 차에 이렇게 허무하게 막을 내리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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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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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포기할 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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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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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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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떨리는 손으로 다시 한번 창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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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유일한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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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조선노예1 : 야!!!! 메스의신 이 개새끼야!!!!! 당장 튀어나와!!!!! 나 내일 수련위원회 끌려간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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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비상 호출에 메스의신이,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온갖 귀신들이 팝콘을 뜯으며 몰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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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밤새도록 메스의신과 자기방어를 준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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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러 조언들과 내 머리를 쥐어짜 만든 사정들로 어떻게든 살아남을 논리를 구축하려 애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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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은 단 한숨도 자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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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육통과 불안감으로 범벅이 된 채 나는 그렇게 아침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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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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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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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관 14층 교육수련부 회의실 앞 복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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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젯밤 밤새도록 다림질한 내 옷 중에서 가장 멀쩡한 세미 정장 차림으로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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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바닥은 땀으로 축축했고 심장은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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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근두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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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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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을 고르는데 마침 회의실 문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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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수련부 직원이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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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현재 선생님, 들어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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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마른침을 삼키고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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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실 안의 풍경은 작년과 놀라울 정도로 똑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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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고 육중한 테이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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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테이블에 앉아 있는 여러 명의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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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에는 여전히 무표정한 교육수련부장 오만석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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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양옆으로는 처음 보는 얼굴의 내과계, 외과계 교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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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테이블 가장 끝 내 쪽 구석에는 이번에도 어김없이 우리 과 과장 박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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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테이블 앞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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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가 후들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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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석 교수가 서류에서 눈을 떼고 나를 쳐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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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선생. 우리 작년에도 비슷한 걸로 한번 보지 않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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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게요. 또 뵙게 돼서 아주 싸발적으로 영광입니다 교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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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최대한 공손하고 죄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깊이 허리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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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일로 다시 뵙게 되어 대단히 송구스럽습니다. 교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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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숨을 죽인 채 오만석 교수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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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에서 나올 단어 하나하나가 내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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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직? 감봉? 수련 정지? 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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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석 교수는 서류 뭉치를 뒤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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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무슨 종이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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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보여달라고 하면 보여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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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교수는 엄청난 종이 뭉탱이를 하나하나 펴 확인하더니 안경을 고쳐 쓰고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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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위원회는 응급의학과 전공의 한현재 선생의 REBOA 시술 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심의하였음을 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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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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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만요, 변론 기회도 안 주고 바로 이렇게 결론부터 시작하는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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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이런 게 어디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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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엔 진짜로 병원이 날 보내버리려고 작정한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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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체념한 표정으로 마른침을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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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것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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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본원 내규 및 수련 세칙에 따르면 REBOA 시술은 외상소생술 과정의 일부로서 응급의학과 전공의가 임상강사 또는 스태프의 직접적인 감독하에 제한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규정되어 있습니다. 비록 2년 차 전공의가 주도적으로 시행하는 것은 극히 이례적이나, 규정상 완전히 금지된 행위는 아님을 확인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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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잠깐만요. 그런 규정이 있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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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만, 뭔가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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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드업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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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더 찰지게 때리기 위한 그런 빌드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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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당시 소생실에는 응급의학과 임상강사 이민재 선생이 팀 리더로서 현장을 총괄하고 있었으며, 따라서 해당 시술은 적법한 응급의학과 전문의 자격을 갖춘 임상강사의 감독하에 시행된 것으로 간주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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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믿어주긴 했지만… 저걸 감독이라고 부를 수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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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잠시만, 진짜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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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시술의 가장 핵심적이고 위험한 단계. 즉 카테터의 최종 위치 선정과 벌루닝은 외상외과 전태정 교수팀이 도착한 이후 전 교수의 직접적인 집도하에 이루어졌습니다. 한현재 선생이 시행한 부분은 초기 혈관 접근 및 가이드와이어 삽입에 국한되며, 시술 전체 과정에서 전공의가 직접적으로 시술을 전담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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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잠깐만. 위치 잡는 것까지 메스의신이 다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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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정 교수는 와이어만 넘겨받아서… 아니지, 그것도 메스의신이 알려준 대로 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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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굳이 따지자면 전 교수님이 다 하신 게 맞긴 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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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가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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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련위원회의 논리는 완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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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정, 감독, 책임 소재 분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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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내 머리가 어질어질해지곤 있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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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석 교수는 마지막 서류를 확인하고 최종 판결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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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상기 사유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전공의 한현재 선생의 행위는 비록 절차상 미숙하고 위험천만한 측면이 있었으나 규정을 명백히 위반했다거나 독단적으로 의료 행위를 시행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또한 결과적으로 환자의 생명을 구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점을 참작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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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교수는 잠시 말을 멈추고 나를 포함한 모든 위원들을 둘러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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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수련위원회는, 금번 안건에 대해 불문으로 의결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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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내 오 교수는 책상 위의 작은 의사봉을 들어 가볍게 테이블을 내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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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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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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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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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지금 뭘 들은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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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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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런 징계도 없이 그냥 없던 일로 하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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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이게 말이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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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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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블 건너편 저 멀리 구석 자리에 앉아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고 있던 전태정 교수의 눈과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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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무표정이었지만 눈빛은 무언가 복잡하고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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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엔 빚졌다는 암묵적인 신호였을까. 아니면 다음번엔 국물도 없을 줄 알라는 경고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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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시선의 의미를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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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대체 무슨 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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