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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14 21:31:5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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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이민재는 먼저 나가보겠다며 응급실을 나섰다.

발소리가 멀어지고, 다시 고요함이 찾아왔다.

나는 천천히 파란 창을 열었다.

그곳은 어떻게 되어 있을까.

아니나 다를까 갤러리는 이미 축제 분위기였다.

인기 글 목록 최상단에는 방금 전 내 몸을 빌려 썼던 장본인의 글이 버젓이 올라와 있었다.

==================

제목: 이승 구경 후기.txt

작성자: 메스의신

교통사고로 거의 죽어가던 양반 REBOA로 대동맥 틀어막아서 살리고 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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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글 밑으로는 온갖 댓글들이 달리고 있었다.

ㅇㅇ (210.94) : REBOA 하고 왔구나… 고생했다 ㅇㅇ.

수술실망령3 : 조오오오오오오온나 부럽다ㅏㅏㅏㅏ

심장내과망령 : 이걸 막네

뼈덕후88 : 그래서 뼈는? 골반 골절이라며. 뼈 사진 안 찍어옴?

나는 요란한 반응을 훑어내렸다.

하… 그래.

잘 하긴 했지.

부정할 수는 없다.

메스의신의 미친 짓이 아니었다면 그 환자는 이미 싸늘한 시신이 되어 영안실로 내려갔을 테니까.

헬조선노예1 : 그래서 나 이제 ㄹㅇ 어캄…? 징계위 또 가겠는데.

내 댓글에 잠시 동안 정적이 흘렀다.

ㄴ 메스의신 : 잠시만 ㄱㄷ

메스의신은 짧은 답글을 남기고 사라졌다.

나는 불안한 마음으로 화면만 쳐다봤다.

또 무슨 꿍꿍이지.

설마 ‘내가 다 책임지겠다’ 같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려는 건 아니겠지.

당신은 이미 죽었잖아 이 양반아.

그리고 잠시 후.

갤러리에 새로운 글이 하나 올라왔다.

==================

제목: 헬노예는 봐라 ㅇㅇ

작성자: 메스의신

==================

나는 마른침을 삼키고 글을 클릭했다.

화면 중앙에는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아주 조악한 그림판 실력으로 그려진 졸라맨 하나가 땅바닥에 머리를 처박고 있었다.

그랜절.

세상에서 가장 극적인 사과의 자세.

그리고 그 그림 밑에 짧은 세 줄의 글이 적혀 있었다.

==================

진짜 미안하다.

화이팅하길 바란다.

그래도 이번엔 반말 안 썼다.

==================

….

나는 그 화면을 보고,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아니면 저 그림판 졸라맨의 목이라도 비틀어야 할지.

반말 안 썼다고?

그랬지.

집중 좀 하게 조용히 하라고 했을 때 빼고는.

장족의 발전이다.

아주 눈물이 날 지경이네.

나는 허탈한 웃음과 함께 화면에 얼굴을 파묻었다.

마른세수를 하면서.

참 잘했어요 이 개새끼야….

나는 택시 뒷좌석에 시체처럼 몸을 싣고 집으로 향했다.

오피스텔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나는 양말도 벗지 않고 그대로 현관 바닥에 주저앉았다.

모든 것이 끝났다.

적어도 오늘 하루는.

띠링-

그때 주머니 속 핸드폰이 짧게 울렸다.

액정을 확인하는 순간 내 눈앞이 하얘졌다.

발신자는 교육수련부.

[교육수련부] 응급의학과 2년 차 전공의 한현재 선생님. 금일 발생한 응급실 내 인터벤션 시술 건 관련하여 내일 오전 10시 동관 14층 회의실에서 수련위원회가 열릴 예정이니 시간 엄수하여 참석 바랍니다.

…일자가… 내일?

아니 뭐야.

미친 거 아니야?

지난번에 배를 쨌을 때는 그래도 며칠의 유예 기간이라도 있었다.

경위서를 쓰고, 소문이 돌고, 마음의 준비라도 할 시간이 주어졌다고.

그런데 이번엔?

하루?

하루도 안 되는 시간 뒤에 바로 소환이라고?

지난번에는 약간의 유예를 주더니, 이번에는 이러는 이유가 뭘까.

설마 나를 반동분자(?)로 낙인찍고 이번에는 아예 보내버릴 작정인 건가?

그래, 나는 확신했다.

병원 측에서 작정하고 나를 조지기로 마음먹었다는 뜻인 거다!

두 번의 대형 사고.

상습범.

시한폭탄.

“으아아아악! 안 돼! 좆됐잖아!!!”

나는 현관 바닥에 머리를 박고 절규했다.

이대로 끝인가.

고작 2년 차에 이렇게 허무하게 막을 내리는 건가.

아니지.

아직 포기할 순 없다.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

그러려면…

나는 떨리는 손으로 다시 한번 창을 열었다.

내 유일한 희망.

헬조선노예1 : 야!!!! 메스의신 이 개새끼야!!!!! 당장 튀어나와!!!!! 나 내일 수련위원회 끌려간다고!!!!!

내 비상 호출에 메스의신이,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온갖 귀신들이 팝콘을 뜯으며 몰려들었다.

그렇게 밤새도록 메스의신과 자기방어를 준비했다.

나는 여러 조언들과 내 머리를 쥐어짜 만든 사정들로 어떻게든 살아남을 논리를 구축하려 애썼다.

잠은 단 한숨도 자지 못했다.

근육통과 불안감으로 범벅이 된 채 나는 그렇게 아침을 맞이했다.


다음 날 낮.

동관 14층 교육수련부 회의실 앞 복도.

나는 어젯밤 밤새도록 다림질한 내 옷 중에서 가장 멀쩡한 세미 정장 차림으로 서 있었다.

손바닥은 땀으로 축축했고 심장은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두근두근.

“하아….”

숨을 고르는데 마침 회의실 문이 열렸다.

교육수련부 직원이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불렀다.

“한현재 선생님, 들어오세요.”

나는 마른침을 삼키고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회의실 안의 풍경은 작년과 놀라울 정도로 똑같았다.

길고 육중한 테이블.

그리고 테이블에 앉아 있는 여러 명의 교수.

중앙에는 여전히 무표정한 교육수련부장 오만석 교수.

그 양옆으로는 처음 보는 얼굴의 내과계, 외과계 교수들.

그리고 테이블 가장 끝 내 쪽 구석에는 이번에도 어김없이 우리 과 과장 박웅.

나는 테이블 앞에 섰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오만석 교수가 서류에서 눈을 떼고 나를 쳐다봤다.

“…한 선생. 우리 작년에도 비슷한 걸로 한번 보지 않았나?”

‘그러게요. 또 뵙게 돼서 아주 싸발적으로 영광입니다 교수님.

나는 최대한 공손하고 죄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깊이 허리를 숙였다.

“이런 일로 다시 뵙게 되어 대단히 송구스럽습니다. 교수님.”

나는 숨을 죽인 채 오만석 교수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입에서 나올 단어 하나하나가 내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었다.

정직? 감봉? 수련 정지? 해고?

오만석 교수는 서류 뭉치를 뒤적이기 시작했다.

대체 무슨 종이일까.

내가 보여달라고 하면 보여주려나.

오 교수는 엄청난 종이 뭉탱이를 하나하나 펴 확인하더니 안경을 고쳐 쓰고 입을 열었다.

“본 위원회는 응급의학과 전공의 한현재 선생의 REBOA 시술 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심의하였음을 알립니다.”

…?

잠시만요, 변론 기회도 안 주고 바로 이렇게 결론부터 시작하는 겁니까?

아니, 이런 게 어디 있어요.

이번엔 진짜로 병원이 날 보내버리려고 작정한 모양이다.

나는 체념한 표정으로 마른침을 삼켰다.

올 것이 왔다.

“첫째, 본원 내규 및 수련 세칙에 따르면 REBOA 시술은 외상소생술 과정의 일부로서 응급의학과 전공의가 임상강사 또는 스태프의 직접적인 감독하에 제한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규정되어 있습니다. 비록 2년 차 전공의가 주도적으로 시행하는 것은 극히 이례적이나, 규정상 완전히 금지된 행위는 아님을 확인했습니다.”

…네? 잠깐만요. 그런 규정이 있었다고?

잠시만, 뭔가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가는데?

빌드업인가?

나를 더 찰지게 때리기 위한 그런 빌드업?

“둘째, 당시 소생실에는 응급의학과 임상강사 이민재 선생이 팀 리더로서 현장을 총괄하고 있었으며, 따라서 해당 시술은 적법한 응급의학과 전문의 자격을 갖춘 임상강사의 감독하에 시행된 것으로 간주할 수 있습니다.”

나를 믿어주긴 했지만… 저걸 감독이라고 부를 수 있나?

아니 잠시만, 진짜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잖아.

“셋째, 시술의 가장 핵심적이고 위험한 단계. 즉 카테터의 최종 위치 선정과 벌루닝은 외상외과 전태정 교수팀이 도착한 이후 전 교수의 직접적인 집도하에 이루어졌습니다. 한현재 선생이 시행한 부분은 초기 혈관 접근 및 가이드와이어 삽입에 국한되며, 시술 전체 과정에서 전공의가 직접적으로 시술을 전담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아니, 잠깐만. 위치 잡는 것까지 메스의신이 다 했는데?

전태정 교수는 와이어만 넘겨받아서… 아니지, 그것도 메스의신이 알려준 대로 했잖아.

아니, 굳이 따지자면 전 교수님이 다 하신 게 맞긴 한…가.

머리가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수련위원회의 논리는 완벽했다.

규정, 감독, 책임 소재 분산.

뭔가 내 머리가 어질어질해지곤 있었지만.

오만석 교수는 마지막 서류를 확인하고 최종 판결을 내렸다.

“따라서, 상기 사유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전공의 한현재 선생의 행위는 비록 절차상 미숙하고 위험천만한 측면이 있었으나 규정을 명백히 위반했다거나 독단적으로 의료 행위를 시행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또한 결과적으로 환자의 생명을 구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점을 참작하여….”

오 교수는 잠시 말을 멈추고 나를 포함한 모든 위원들을 둘러봤다.

“본 수련위원회는, 금번 안건에 대해 불문으로 의결하겠습니다.”

그리고 이내 오 교수는 책상 위의 작은 의사봉을 들어 가볍게 테이블을 내리쳤다.

땅.

땅.

땅.

나는 내가 지금 뭘 들은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불문?

아무런 징계도 없이 그냥 없던 일로 하겠다고?

이게 이게 말이 돼?

고개를 들었다.

테이블 건너편 저 멀리 구석 자리에 앉아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고 있던 전태정 교수의 눈과 마주쳤다.

여전히 무표정이었지만 눈빛은 무언가 복잡하고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듯했다.

이번엔 빚졌다는 암묵적인 신호였을까. 아니면 다음번엔 국물도 없을 줄 알라는 경고였을까.

나는 그 시선의 의미를 알 수 없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