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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험을 위해 또 다시 학교 운동장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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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아직 이른 새벽. 사람들이 눈을 뜨기엔 이른 시각. 눈치를 볼 필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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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하게 담장을 넘은 나는 다시 스킬의 설명을 읽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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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시브 스킬 : 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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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 : 눈을 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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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눈을 깜빡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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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은 변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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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털어 현실을 부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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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다. 꽝일 리가 없다. 이건 내가 처음으로 얻은 플래티넘 등급 스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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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진짜 강한 스킬은 설명이 짧고 간결한 법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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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드를 2장 뽑는다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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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을 던져 물리 피해를 입힌다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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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식의 간단한 설명이야말로 진짜배기라는 증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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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스킬도 분명 엄청나게 강한 스킬임이 틀림없었다. 그래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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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애써 불안감을 누르고, 의식을 집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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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킬은 이미 활성화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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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안으로 뜨인, 제3의 눈을 의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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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자가 눈을 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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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온몸의 감각이 폭발적으로 확장되는 듯한 충격이 덮쳐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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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달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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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는 그저 어렴풋한 감각으로만 느껴지던 마력의 흐름이, 이제는 눈앞에 명확한 형태로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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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시각적인 정보가 아니었다. 마나가 온몸으로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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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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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안구에 의존할 필요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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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 중에 떠도는 마나 입자들이 내 피부에 닿는 감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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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속 깊은 곳에서부터 거대한 강처럼 뿜어져 나오는 지맥의 에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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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모든 것이 나와 연결되는 듯한 기묘한 일체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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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감에 따라 가부좌를 틀고 숨을 들이쉬고, 내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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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에서 꿈틀거리던 작은 신이 몸을 부르르 떠는 것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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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 중과 땅에 흐르는 무한한 마나를 퍼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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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올린 마나로 신을 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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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가락만 했던 신의 크기가 주먹만 하게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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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눈을 반개하고 손을 앞으로 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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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 토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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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이 어두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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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림자 속에서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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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모습을 한 모래 거인이 그곳에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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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못 쓰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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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m 남짓한 모래 거인은 옷 따위는 입고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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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모래라지만, 내 엉덩이를 올려다보면서 싸우고 싶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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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에겐 더더욱 못 보여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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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거대한 모래 분신을 한숨과 함께 해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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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르르 무너져 내린 모래가 다시 바닥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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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다시 학교 담장을 넘어 집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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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한 새벽의 거리. 하지만 개안을 한 내게는 모든 것이 새롭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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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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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담벼락 아래에서 무언가 작게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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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둘기였다. 뚱뚱해서 날지도 못할 것 같은 비둘기가 멍청하게 고개를 까딱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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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도시에서는 고양이 아니면 비둘기 말고는 동물이 없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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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훠이, 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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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나 다를까, 발로 차는 시늉을 해봐도 꿈쩍도 하지 않는 닭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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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려는 시늉조차 하지 않는 게 정말 괘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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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같았으면 여기서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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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지금의 내 눈에는 다른 것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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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비둘기의 마력 흐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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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둘기의 몸 안에서, 작고 따뜻한 촛불 같은 것이 흔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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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렬하지도 강력하지도 않게, 천천히 닭둘기의 몸 안을 순환하는 불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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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본능적으로 이것이 생명을 살아 움직이게 하는 근원이라는 것을 이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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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한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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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잠시 발을 멈추고 비둘기와 눈을 맞췄다. 비둘기의 멍청한 눈에 빨려 들어가는 기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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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홀린 듯이 손을 앞으로 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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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앞에 작은 모래 새가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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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아주 조심스럽게 마력을 조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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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앞의 비둘기가 자연스럽게 하는 호흡을 흉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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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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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조금, 새의 머리가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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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만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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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눈앞의 살아있는 비둘기에 더 정신을 집중했다. 지금이라면 분명 할 수 있을 거란 직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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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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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드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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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둘기가 갑자기 날갯짓을 하더니 저 멀리 날아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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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동시에 내 집중이 깨지며 모래 새의 형상도 허물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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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닭둘기가 왜 하늘을 날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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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허망하게 서서 비둘기가 날아간 자리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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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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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 깨달음을 얻기 직전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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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혹시나 해 근처를 둘러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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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다른 닭둘기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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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다시 모래새를 만들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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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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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였다. 정신을 집중해보았지만 꿈쩍도 안 하는 모래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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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실망감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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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좀 전의 일은 운이 좋았던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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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능성이라도 확인한 게 어디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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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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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지개를 한번 펴고서는 집으로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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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에 오늘의 업적을 자랑할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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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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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그 시각 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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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장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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값비싼 도자기가 박살 나는 소리가 넓은 길드장실을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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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개자식들이…! 아직도 협조 못 하겠다고 뻗댄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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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에 찬 여성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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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이름은 정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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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연’의 길드장이자 대한민국에 단 아홉뿐인 A급 헌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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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다섯 명뿐인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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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랑이는 금발과 달리, 그녀의 얼굴 왼쪽은 끔찍한 화상 자국으로 뒤덮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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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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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앞에 선 부길드장은 묵묵부답으로 땅만 내려다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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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탑 붕괴까지 2주도 안 남았는데 어쩌자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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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강제로 끌고 가? 내 불주먹 맛 좀 보여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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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가겠다고 가장 완강하게 버티는 게 힐러진이라 답이 없습니다, 길드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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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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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연은 마른세수를 하며 욕설을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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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파티의 생존을 책임지는 가장 중요한 포지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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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파업의 선봉에 선 이상, 강제로 공략을 재개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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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 모드로 깬 쫄보 새끼들 아니랄까 봐…. 그래서, 다른 탑 상황은 어때? 거기도 마찬가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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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여전히 전국적으로 모든 길드가 공략을 중단한 상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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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저희에게 공략을 최대한 미뤄달라고 압박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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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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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화연 길드가 이번 파업에 동참해야 정부와의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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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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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드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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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연은 원목 의자의 팔걸이를 맨손으로 으스러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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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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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길드장은 짧게 목례를 하고 서둘러 길드장실을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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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남은 정태연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감정을 억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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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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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마음을 진정시킬 것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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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책상 서랍을 열어 어릴 적부터 모아온 만화책 한 권을 꺼내려다 멈칫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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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이 주체가 되지 않을 때면, 가끔 몸의 일부가 의지와 상관없이 불꽃으로 변해버리는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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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절판되어 세상에 몇 권 남지도 않은 소중한 만화책을 태워버릴 수는 없었다. 그것은 인류 전체의 손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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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 그녀는 컴퓨터를 켜고 익숙하게 갤러리에 접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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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접속할 갤러리는 헌터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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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에 끓어넘치는 울분을 글로 풀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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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진짜 다들 제정신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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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마법은화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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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탑 붕괴가 코앞인데, 보상 올려달라고 파업하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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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들 그러다 탑 무너지고 나라 망하면 다 같이 죽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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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가 있어야 헌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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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니들 목숨 구해주는 군인들 봐라. 그 사람들은 뭐 보상이 좋아서 38선에서 목숨 걸고 싸우는 줄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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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숨만 나온다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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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업 그만하고 다들 이번 공략에 참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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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문의 비판 글을 올리자마자 댓글이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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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이건 무슨 템플릿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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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엄벌기 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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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애국 틀딱 쉰내난다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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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꼬우면 너 혼자 가세요 ㅋㅋ 누칼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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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씨발, 비애국자 매국노 새끼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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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는 가라앉기는커녕 활화산처럼 타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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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연은 울분을 토해내기 위해 마법사 갤러리를 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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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하 파업 진짜 빡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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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마법은화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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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 터지려고 하는데 돈 몇 푼 때문에 파업이나 하고 있고, 한심한 새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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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자식들 때문에 나라가 망할 위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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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들도 파업에 동참할 건 아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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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글을 올리자, p깟쮸가 기다렸다는 듯이 댓글을 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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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p깟쮸 : 헌갤에 글 쓰고 욕먹으니 마갤왔다에요. 뿌에엥 마갤에몽~ 도와줘~~ 추하다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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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마법은화력 : 야, 말이 심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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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마법은화력 : 그리고 너도 A급 법사면 전장에 나와서 탑을 밀어야지, 몇 개월째 방구석에서 뭐 하는 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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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p깟쮸 : 알빠냐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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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마법은화력 : 오냐. 조만간 인천으로 찾아가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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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냉장고 : 둘 다 그만해. 좀. 맨날 싸우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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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장고의 중재 댓글을 마지막으로 갤러리는 침묵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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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명뿐인 갤러리. 두 명만 싸워도 대화는 끊기고 정적만이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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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마법사 갤러리의 일상적인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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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뉴비가 들어오기 전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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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뉴비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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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적을 깨고 새로운 글 하나가 올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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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처럼, 갤러리의 분위기를 바꾸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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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뉴비 드디어 플래티넘 등급 스킬북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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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ㅇㅇ(F4F.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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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층 깨니 레벨업하고 스킬 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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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스트림 클리어랑 랭킹 1등 보너스 받으니까 실버가 플래티넘으로 바뀜 ㅋㅋㅋ 개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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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스킬은 [개안]이라는 패시브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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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 ㄹㅇ 딸랑 한 줄로 “눈을 뜹니다.” 박혀있어서 어이 털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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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인터넷에도 정보 없던데 아는 사람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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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냉장고 : 원래 상위 등급일수록 정보가 없음. 이렇게 내부 커뮤니티가 없으면, 답이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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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네임 마법은화력, 정태연은 그 글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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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하게도, 들끓던 분노가 거짓말처럼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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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으며 타자를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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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마법은화력 : 좋은 거 먹었네. 축하한다. 그거 엄청 귀한 스킬이야. 우리 S급 씨도 그거 가지고 있을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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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풍뎅이 : 야 국가기밀을 그렇게 막 말해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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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마법은화력 : 어차피 설명해줄 거였잖아. 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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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풍뎅이 : …맞긴 한데, 내가 설명하고 싶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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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ㅇㅇ : 그래서 효과가 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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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마법은화력 : 마력 증가랑 MP증가. 근데 증가폭이 사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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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풍뎅이 : 야, 내가 설명할 거야. 그거 말인데, 추가 스탯이 계속해서 증가해. 성장형 스킬인 셈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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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풍뎅이 : 언제 증가하는지는 아직 조건을 모르겠어. 하지만 탑에서 필드가 바뀌면 팍 오르는 느낌이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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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ㅇㅇ : 아, 이거 그냥 호흡으로 마나 빨아들이면 되는 거 같다. ㄳ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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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풍뎅이 : 호흡? 그건 또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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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알 수 없는 말을 써대던 호감 가는 뉴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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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을 오르는 것에도 누구보다 열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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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왠지 자신과 취미도 겹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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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그가 도전하는 난이도는 아무도 가본 적 없는 미지의 영역, 익스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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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20층을 돌파하고 정식 헌터로 등록할 때쯤이면, 어지간한 A급은 가뿐히 뛰어넘는 실력자가 되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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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자신보다 강해질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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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S급이 될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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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정태연은 그 사실이 전혀 불쾌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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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가슴이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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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에게는, 아니 한국에는 이 뉴비가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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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도와 탑을 공략하고, 이 답답한 상황을 끝내줄 사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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