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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 한 오피스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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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은 두꺼운 암막 커튼으로 가려져 있어 지금이 낮인지 밤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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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 안을 채우는 것은 오직 세 개의 모니터에서 뿜어져 나오는 희미한 빛과, 웅웅거리는 낮은 소음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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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니터의 빛이 혼란스러운 방 안을 비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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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 안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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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대 옆에는 포장을 뜯지도 않아, 무엇을 샀는지도 잊어버린채 쌓여있는 수많은 택배 상자들의 위태로운 탑이 세워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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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옆으로는 먹다 남은 배달 음식 용기들이 한 자리를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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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상 역시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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텅 빈 에너지 드링크 캔과 과자 봉지들이 어지럽게 널린 가운데, 고사양의 게이밍 키보드와 마우스만이 제자리를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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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혼돈의 중심 속에는, 한 소녀가 푹신한 게이밍 의자에 몸을 파묻은 채 반 쯤 누워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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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가위로 대충 자른 듯한 들쑥날쑥한 단발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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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한 푸른 색이 감도는 은발은 오랫동안 빗질을 하지 않은 듯 제멋대로 뻗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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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이 다 늘어난 낡은 후드티와 무릎 위로 한 뼘이나 올라오는 돌핀 팬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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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급 전격 마법사, 신세하는 멍한 눈으로 모니터 화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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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시선 끝에는 헌터 갤러리의 게시글 목록이 하염없이 스크롤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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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해서 F5로 새로고침을 연타하며 새로운 글이 올라오기만을 기다리는 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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띵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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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적을 찢는 날카로운 벨 소리에 세하의 어깨가 경기를 일으키듯 튀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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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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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마터면 의자째로 뒤로 넘어갈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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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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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밖에서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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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달부였다. 한 시간 전에 주문했던 마라탕이 드디어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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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씨… 문 앞에 두고 가라고 체크했는데…. 왜 매번 벨 누르고 지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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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으로 터져 나오는 욕설을 삼키며, 그녀는 마지못해 끙 하는 소리와 함께 의자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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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달 기사와 얼굴을 마주치는 찰나의 순간은 그녀에게 있어 하루 중 가장 큰 스트레스를 받는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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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하는 후드 모자를 눈썹 아래까지 깊게 눌러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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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레기들의 탑을 용케도 무너트리지 않고 소리 없이 걸어 현관까지 도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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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하는 인터폰으로 다가가, 거의 들리지 않을 목소리로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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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그냥 문 앞에 두고 가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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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수화기 너머에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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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달부가 세하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거나, 혹은 직접 전달해야한다는 규칙이라도 있는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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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시간이 지났지만 문밖의 인기척은 사라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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쾅쾅쾅. 오히려 문을 세게 두드리는 배달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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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씨발… 왜 안 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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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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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하는 다시 한번 후드 모자를 깊게 고쳐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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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문을 아주 살짝, 실눈처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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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달부의 얼굴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조금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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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틈새로 간신히 손만 뻗어 비닐봉지를 낚아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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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달부가 ‘맛있게 드세요’라는 인사를 말하기도 전에 문을 쾅 닫아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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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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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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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컴퓨터 앞으로 돌아온 세하는 마라탕 뚜껑을 열며 습관적으로 다른 갤러리를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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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하게 고정닉으로 로그인 후 마법사 갤러리에 접속. 스크롤을 쭉 내린 뒤 과거 글부터 천천히 읽어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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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의 맨 위에는 역시 요즘 가장 흥미롭게 보고있는 뉴비의 새 글이 올라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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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14층에서 수련했는데 개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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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ㅇㅇ(D44.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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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마나 농도가 밖이랑 차원이 틀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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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 안에서 명상만 해도 마나통이 막 늘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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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열매도 먹어봤는데 맛은 좆같아도 효과 직빵이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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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츄라이 츄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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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냉장고 : 그렇게 좋으면 혼자 다먹지 말고 좀 뿌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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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마법은화력 : 궁금한데 하나만 팔아봐. 넉넉하게 쳐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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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ㅇㅇ(D44.444) : 거래하러 또 부산오라고 할 거잖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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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마법은화력 : 이래서 눈치빠른 꼬맹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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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는 진짜 하루도 안 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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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하는 저도 모르게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띠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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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네임조차 없는 유동. 이름도 얼굴도 성별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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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정말이지 자신과 닮은 구석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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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종일 갤러리에 상주하는 중독자. 세하는 익명의 그에게서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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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모든 것이 같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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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방구석에 처박혀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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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은 몇 개월째 파업 핑계로 탑을 오르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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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다고 자신에게 뭐라고 할 수 있는 사람도 몇 명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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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래보아도 신세하는 귀한 A급 마법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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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자괴감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신에 대한 자괴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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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와중에 저 겁없는 뉴비는 망설임 없이 탑을 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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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도 솔플로, 미지의 난이도인 익스트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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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하가 그런 뉴비를 보며 느끼는 것은 질투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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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세하는 대리만족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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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과 비슷한 사람. 하지만 자신과는 달리 계속해서 탑을 오르는 모습을 관찰하는 것은 그녀에게 묘한 쾌감을 가져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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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하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익숙하게 키보드를 두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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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p깟쮸 : 자랑했으면 햄부기라도 뿌려라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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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댓글을 남기고 얼얼한 마라탕 국물을 한 숟갈 떠먹으려던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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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우우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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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상 위에서 뒤집어둔 핸드폰이 요란한 진동과 함께 몸을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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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면에 발신인의 이름이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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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철 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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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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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의 헌터 파업을 주도하고 있는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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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하와 같은 A급 헌터이자 헌터 협회의 대표를 맡고 있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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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세하가 생각하기에는 S급이 없는 협회 주제에 무슨 대표성을 가지고 있나 싶긴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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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하는 즉시 통화 거절 버튼을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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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전화는 끈질기게 다시 울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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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두 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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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세 번째 전화가 걸려왔을 때, 세하는 결국 깊은 한숨을 쉬며 통화 버튼을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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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로 무시하면 분명 집까지 찾아올 위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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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몇 배는 더 끔찍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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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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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하 헌터님!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으십니까! 걱정했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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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화기 너머로 귀가 먹먹할 정도로 우렁찬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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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인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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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이긴요! 내일 있을 시위 말입니다! A급 헌터가 한 명이라도 더 참여해야 정부 놈들이 우리 말을 무시하지 못할 거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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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저는… 몸이 좀 안 좋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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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안좋으신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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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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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가 아프시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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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감기 몸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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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 A급 헌터가 감기 몸살 따위로 엄살을 부리시면 쓰나! 이건 우리 모두의 생존이 걸린 문제입니다. 신 헌터님이 꼭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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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저는 싸우고 그런 거는 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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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 걱정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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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철은 호쾌하게 웃었지만 그 웃음 소리에는 미묘한 압박이 실려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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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헌터님이 뭐 마이크 잡고, 싸우고 이러실 필요 전혀 없습니다. 허공에 번개만 한번 쫙쫙 뿜어주시면 됩니다! 그것만으로도 저희가 얼마나 든든하겠어요? 어려운 일도 아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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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계속 이렇게 빠지시면 모양새가 안좋아요. 저는 신 헌터님을 잘 아니까 괜찮지만! 다른 헌터들이 보면 무슨 생각을 하겠습니까? 왜 신세하 헌터만 나오지 않는 걸까, 정부와 거래라도 한 것이 아닐까…. 뭐 이런 흉흉한 소문이 돌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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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쯤 강압적인 압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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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시위라니. 생각만 해도 숨이 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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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인파, 터져 나오는 카메라 플래시,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수백 개의 눈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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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한가운데 서 있는 자신을 상상하자 손에 축축하게 땀이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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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설이는 세하를 향해 박성철이 결정타를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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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그러시다면, 제가 직접 찾아뵙고 설득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 사이에 오해는 풀고 가야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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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 찾아오겠다는 말에 세하의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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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방에 낯선 타인이, 그것도 저렇게 힘이 넘치는 남자가 들어온다는 상상만으로도 질식할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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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세하는 힘없이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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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 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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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을 끝으로 세하는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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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대화를 이어나갈 기력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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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한숨이 터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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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갤러리를 켰다. 끔찍한 현실을 잊게 해줄 유일한 안식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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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뉴비가 새 글을 올린 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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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슬슬 가지러 가볼까… S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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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냉장고 : 아오 일단 A부터 찍고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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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마법은화력 : 근데 S급 인증은 어떻게 받는거임? 이것도 층이 기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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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풍뎅이 : 출력기준. S급은 인증 빡빡해서 세계협회 가야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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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풍뎅이 : S급 인증은 테스트 받으러 가기만 해도 시선이 너무 쏠리는 시스템이라 별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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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ㅇㅇ(F44.444) : 너무 좋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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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냉장고 : 돌겠네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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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급 헌터가 되는 것에 대한 막연한 기대를 담은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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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급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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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하는 자신도 모르게 책상 한쪽에 놓인 먼지 쌓인 액자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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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속에는 지금보다 머리가 훨씬 길었던 과거의 자신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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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급 헌터 인증서를 손에 들고, 세상 전부를 가진 것처럼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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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각성했을 때는 세상 모든 것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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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의 정상에 서고, 모두에게 인정받을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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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처럼 불 꺼진 방구석에 틀어박혀 배달 음식이나 시켜 먹는 히키코모리가 될 줄은, 그 누구도, 심지어 자기 자신조차도 몰랐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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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하는 다시 뉴비를 떠올렸다. 자신과 같은 갤러리 중독자에 관심종자.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고 나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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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모할 정도의 추진력과 압도적인 재능. 세하는 부러우면서도 어딘가 위안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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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사람이라면 정말 S급이 될지도 모른다. 주저앉은 자신과는 다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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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하는 차갑게 식어버린 배달 음식을 한입 떠먹으며, 다시 한번 댓글을 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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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p깟쮸: …바보냐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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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가지 의미가 담긴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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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하는 한참 동안이나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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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안에는 다시 키보드를 딸깍 거리는 소리만이 간간히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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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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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간의 수련을 마치고 나는 15층에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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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세번째 마주한 보스 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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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제 와서 중간 보스 따위가 두려울 리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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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운 것은 다른 곳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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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깍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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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미치광이 노인을 다시 만나야 한다는 사실이 벌써부터 머리를 지끈거리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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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은 눈앞의 보스부터 처리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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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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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하게 스킬을 시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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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척이는 늪지대가 순식간에 메마른 모래밭으로 변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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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평소와 다른 점이 있었다. 사막화가 통하지 않는 구역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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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앞에는 평범한 늪과는 확연히 다른, 검은색의 늪이 기분 나쁜 김을 피워 올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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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찰안으로 보니 그곳은 다른 곳보다 몇 배는 짙고 악독한 독기로 가득 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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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글의 독기가 모두 이 늪에서 나오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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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뿐만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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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휴, 냄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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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를 찌르는 역한 악취. 저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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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빨리 나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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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늪의 한가운데를 향해 모래 탄환 몇 발을 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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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검붉은 늪의 표면이 격렬하게 끓어오르더니, 거대한 형체가 솟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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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층의 보스, 부패한 늪의 주인. 늪 슬라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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놈은 늪 전체를 자신의 몸처럼 부리는 몬스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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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에서 수십 개의 끈적한 촉수가 솟아오르더니 나를 향해 쏘아 보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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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 늪이 네놈의 영역이라 이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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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영역전개 대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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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늪을 경계선으로 내 뒤에 펼쳐진 사막을 보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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