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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페이지를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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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정된 세계: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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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딱한 학술적 용어들 사이로, 흥미로운 내용이 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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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제국이라는 세계의 근간을 이루는, 절대적인 법칙에 대한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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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이 곧 신분인, 귀족 중심의 계급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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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에 따르면, 제국에서 마법을 다룬다는 것은 재능이나 노력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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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족의 혈통으로만 이어지는 권리이자, 특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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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족만이 마력을 타고날 수 있으며, 그들은 태어나는 순간 귀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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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 못한 자들은 영원히 평민 계급에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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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가장 밑바닥에, 수인(獸人)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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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마법을 전혀 다루지 못하는 대신, 종족에 따라 강력한 신체 능력과 동물적인 감각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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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귀족에 편의와 중심으로 맞춰진 제국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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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귀족들은, 수인의 그 야만적인 힘을 유용하게 사용하면서도, 동시에 불결하다며 멸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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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인은 시민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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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쓸모 있는 도구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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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인한 수인들은 전장의 총알받이로, 혹은 투기장에서 귀족들의 유흥을 위해 싸우는 검투 노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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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첩하고 감각이 예민한 종족은 암살자나, 혹은 가장 가까이에서 시중을 드는 하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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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도 아니라 루나나 엘리스처럼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수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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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족들의 밤 여흥이 되어주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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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인은 절대 귀족이 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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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족은 그들을 경멸했고, 수인은 그런 귀족들을 증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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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그렇게 철저히, 도구로서 부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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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전이가 시작되고 나서 상황은 조금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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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긴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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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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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족과 수인의 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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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직접적으로 느끼는 바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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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지구에서는 제국의 신분이나 작위 따위는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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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귀족들의 혈통에 깃든 우수한 마법들은 여전히 강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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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헌터들이 그들에게 자문을 구하기도 했다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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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인류를 지키는 헌터라는 역할은, 수인들의 초월적인 신체 능력 또한 그에 못지않은 재능으로 대우받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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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모든 것은 실력으로 재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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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백 년간 이어져 온 제국의 잔혹한 계급 사회는, 이곳 지구에서 그렇게 허무하게 무너져 내렸다…가, 논문의 내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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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쾌하고 근거에 의한 논리적인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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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논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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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나는, 마지막 페이지를 덮는 순간 하나의 궁금증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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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은 명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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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인은 마법을 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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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이 아닌 생물학적 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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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루나는 명백한 수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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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소 허접일지언정 마법을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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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뒤가 전혀 맞지 않는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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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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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민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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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지금으로서 더 알 수 있는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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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을 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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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을 끊어내기 위해 책상 위에 흩어진 서류들을 다시 정리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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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치우고 진짜 인터넷 속 토끼굴에 들어가 볼 차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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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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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회에서 오늘 받아온, 아직 잉크 냄새가 채 가시지 않은 새하얀 종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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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시 새하얀 종이 일 수밖에 없는 그 더미 사이로, 누렇게 변색한 종이 한 장이 교묘하게 끼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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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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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 그 소름끼치는 상담일지가 적혀있던 종이와, 똑같은 재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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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이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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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떨리는 손으로 그 종이를 조심스럽게 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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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펜으로 직접 눌러쓴 듯한 빛바랜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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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타입: 수인. 그 생태에 대한 간단한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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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이번 제목은 조금 정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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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체나 문장의 형식으로 보아, 저번 그 사람이 맞는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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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에 앞서, 모든 과정은 실제 기록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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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논문 작성자의 직업이 상담사인 줄 알았는데… 아닐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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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의 개요는 상담하는 자의 기록이라기보다, 흥미로운 케이스를 분석하는 제3의 관찰자가 쓴 것에 가까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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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첫 장을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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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예상과 달리, 이 문서 역시 상담 기록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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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례 1-A: 이종족(수인)과의 관계 설정에 어려움을 겪는 헌터 K의 심층 상담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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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담자 K (C급 헌터)는 만성 우울증과 간헐적 공황장애로, 지속적인 상담을 받고 있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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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는 평범한 케이스였다. 나는 계속해서 시선을 아래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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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회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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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담자 K]: (밝고 활기찬 목소리로) 선생님, 저 이제 괜찮아진 것 같아요! 요즘은 정말, 너무 행복합니다. 제 삶에 이런 축복이 찾아올 줄은 몰랐어요. 이제 상담사님을 더는 안 찾아와도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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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담사]: 정말 다행입니다, K님. 표정이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밝아지셨군요. 하지만 언제든, 문은 열려 있으니 부담 갖지 말고 찾아와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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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에는 역시 그렇듯, 빨간색 휘갈겨 쓴 첨언이 달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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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담자는 최근 같은 길드의 동료 수인과 연인 관계로 발전. 긍정적 애착 관계가 그의 기저질환(우울증, 공황장애)에 긍정적 변수로 작용하여, 증상이 호전된 것으로 판단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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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종종 있는 이야기다. 마음의 병을, 사람으로 치료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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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수만 있다면 연애만큼 효과적인 치료법도 드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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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그 관계가 끝났을 때의 후폭풍은 배로 돌아오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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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는 완벽한 해피엔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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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에 실려도 될 만큼 모범적인 상담 종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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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슬프게도 이대로 끝났다면 이 논문은 쓰이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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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회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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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담사]: 오랜만입니다, K님. 그런데… 표정이 좋지 않으시군요.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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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담자 K]: (오랫동안 침묵하다, 간신히 입을 열며)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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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담사]: 네 무슨 일이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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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담자 K]: 저는… 저는 여전히 그녀를 사랑합니다. 그 마음은 변치 않았어요. 그녀는 제 생명의 은인이고, 제 모든 것입니다. 하지만… 하지만, 선생님. 저는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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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담사]: 버틸 수 없다니요?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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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다음 기록은…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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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담자 K]: 그… 그 시기가 오면 그녀는 몇 날 며칠이고… 저를 탐합니다. 그리고 그 시간이 끝나면… 그녀는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제 입에 키스하며 다정하게 물어봐요. 왜 그렇게 피곤해하냐고. 저는… 저는 그 순진한 얼굴을 보는 게, 이제는 두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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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담사]: (긴 침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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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절박한 호소 아래, 어김없이 붉은 펜으로 쓴 첨언이 달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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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찰 기록: 내담자 K의 외관은 극도로 쇠약해 보였음. 눈 밑에는 다크서클이 짙게 깔려 있으며, 문을 열고 들어오는 짧은 순간에도 다리가 후들거리는 등, 명백한 체력적 한계를 노출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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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 이종족, 수인과의 연애에서 가장 큰 변수는 문화의 차이도, 언어의 장벽도 아니었다. 수인에게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본능 발현기다. 동물과 비슷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수인들은 이 시기. 종족 고유의 본능에 지배당한다. C급 헌터인 내담자의 신체 능력으로는 수인의 욕망을 감당하는 것에 한계가 있었던 것으로 판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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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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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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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지금 뭘 본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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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문화적 차이에서 나온 갈등일 줄 알았다. 그러나 이 상담은 다소 원초적인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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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상담사는 내담자에게, 용기를 내어 진솔한 대화를 나눠볼 것을 권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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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결과는, 다음 회차의 기록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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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회차 상담 기록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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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담사]: 오랜만입니다, K님. 안색이… 이전과는 또 다르군요. 그… 대화는, 잘 되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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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담자 K]: (오랫동안 침묵) …아니요. 하지만… 모든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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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담자 K]: 제가 그토록 괴로워했던 그녀의 그 본능은… 사실, 그녀가 저를 위해 필사적으로 억누른 모습이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러니까…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던 것이죠. (헛웃음) 그리고 그녀가 말해줬습니다. 그녀는 고양이 수인이고. 다른 수인들… 특히 토끼 수인은… 자신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훨씬… 훨씬 더 강한 본능을 가졌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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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담자 K]: 그래서 그냥… 사랑으로 포옹하고자 합니다…. 그녀도, 저를 배려하고 있었던 거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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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 내담자 K는 상대의 배려를 알게 된 후 종족 간의 생물학적 격차를 사랑으로 극복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이는 위태로운 결론이다. 특히 상대가 본능이 약한 축에 속하는 묘(猫) 수인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종족 간의 교제는 근본적인 한계를 명확히 시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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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멍하니, 문서를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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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맨 뒤 페이지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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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도 의문의 연구자가 남긴, 증거 불능의 연구 자료이기를 빌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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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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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기다리던 [증거 불능] 빨간 딱지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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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종이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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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은폐된 기록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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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띠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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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순간, 내 생각을 끊는 날카로운 알람 소리가 정적을 깨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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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돌리자, 컴퓨터 모니터에 알림창이 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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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가, 이 시간에, 온라인으로 내일 오전 상담을 신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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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직도 멍한 머리로, 기계적으로 마우스를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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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정상, 나는 대상 헌터의 신상 정보를 미리 확인할 수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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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딸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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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우스를 클릭하자 화면에, 익숙한 얼굴 하나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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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니온 길드의 공식 프로필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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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하는, S급 헌터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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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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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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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전, 내가 그토록 연구하던 한 마리의 하얀색 토끼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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