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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14 21:31:5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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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페이지를 넘겼다.

[규정된 세계: 제국]

딱딱한 학술적 용어들 사이로, 흥미로운 내용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제국이라는 세계의 근간을 이루는, 절대적인 법칙에 대한 이야기였다.

‘마법이 곧 신분인, 귀족 중심의 계급 사회.

논문에 따르면, 제국에서 마법을 다룬다는 것은 재능이나 노력이 아니었다.

귀족의 혈통으로만 이어지는 권리이자, 특권.

귀족만이 마력을 타고날 수 있으며, 그들은 태어나는 순간 귀족이다.

그렇지 못한 자들은 영원히 평민 계급에 머물렀다.

그리고 그 가장 밑바닥에, 수인(獸人)이 있었다.

그들은 마법을 전혀 다루지 못하는 대신, 종족에 따라 강력한 신체 능력과 동물적인 감각을 가졌다.

모든 것이 귀족에 편의와 중심으로 맞춰진 제국의 삶.

제국의 귀족들은, 수인의 그 야만적인 힘을 유용하게 사용하면서도, 동시에 불결하다며 멸시했다.

수인은 시민이 아니었다.

그저 쓸모 있는 도구일 뿐.

강인한 수인들은 전장의 총알받이로, 혹은 투기장에서 귀족들의 유흥을 위해 싸우는 검투 노예로.

민첩하고 감각이 예민한 종족은 암살자나, 혹은 가장 가까이에서 시중을 드는 하인으로.

그것도 아니라 루나나 엘리스처럼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수인은….

… 귀족들의 밤 여흥이 되어주기까지 했다.

수인은 절대 귀족이 될 수 없었다.

귀족은 그들을 경멸했고, 수인은 그런 귀족들을 증오했다.

그들은 그렇게 철저히, 도구로서 부려졌다.

그러나, 전이가 시작되고 나서 상황은 조금 바뀌었다.

“그렇긴 하네.”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귀족과 수인의 격차?

내가 직접적으로 느끼는 바는 없었다.

이곳, 지구에서는 제국의 신분이나 작위 따위는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물론, 귀족들의 혈통에 깃든 우수한 마법들은 여전히 강력했다.

많은 헌터들이 그들에게 자문을 구하기도 했다 들었다.

하지만 인류를 지키는 헌터라는 역할은, 수인들의 초월적인 신체 능력 또한 그에 못지않은 재능으로 대우받기 시작했다.

결국 모든 것은 실력으로 재편되었다.

수백 년간 이어져 온 제국의 잔혹한 계급 사회는, 이곳 지구에서 그렇게 허무하게 무너져 내렸다…가, 논문의 내용이었다.

명쾌하고 근거에 의한 논리적인 분석.

좋은 논문이었다.

그런데 나는, 마지막 페이지를 덮는 순간 하나의 궁금증을 느꼈다.

논문은 명시했다.

‘수인은 마법을 쓸 수 없다.

재능이 아닌 생물학적 한계.

그러나 루나는 명백한 수인이다.

다소 허접일지언정 마법을 사용한다.

앞뒤가 전혀 맞지 않는 이야기였다.

뭐지?

나는 고민에 빠졌다.

그러나, 지금으로서 더 알 수 있는 것은 없다.

논문을 접었다.

생각을 끊어내기 위해 책상 위에 흩어진 서류들을 다시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제 치우고 진짜 인터넷 속 토끼굴에 들어가 볼 차례….

“… 어?”

협회에서 오늘 받아온, 아직 잉크 냄새가 채 가시지 않은 새하얀 종이들.

필시 새하얀 종이 일 수밖에 없는 그 더미 사이로, 누렇게 변색한 종이 한 장이 교묘하게 끼어 있었다.

“…….”

저번 그 소름끼치는 상담일지가 적혀있던 종이와, 똑같은 재질이었다.

설마, 이것도?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떨리는 손으로 그 종이를 조심스럽게 빼냈다.

누군가 펜으로 직접 눌러쓴 듯한 빛바랜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이방인 타입: 수인. 그 생태에 대한 간단한 고찰.]

다행히 이번 제목은 조금 정상적이었다.

필체나 문장의 형식으로 보아, 저번 그 사람이 맞는듯했다.

[논문에 앞서, 모든 과정은 실제 기록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음을….]

난 논문 작성자의 직업이 상담사인 줄 알았는데… 아닐지도 모르겠다.

문서의 개요는 상담하는 자의 기록이라기보다, 흥미로운 케이스를 분석하는 제3의 관찰자가 쓴 것에 가까워 보였다.

나는 첫 장을 넘겼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이 문서 역시 상담 기록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사례 1-A: 이종족(수인)과의 관계 설정에 어려움을 겪는 헌터 K의 심층 상담 기록]

[내담자 K (C급 헌터)는 만성 우울증과 간헐적 공황장애로, 지속적인 상담을 받고 있었음.]

여기까지는 평범한 케이스였다. 나는 계속해서 시선을 아래로 옮겼다.

[13회차]

[내담자 K]: (밝고 활기찬 목소리로) 선생님, 저 이제 괜찮아진 것 같아요! 요즘은 정말, 너무 행복합니다. 제 삶에 이런 축복이 찾아올 줄은 몰랐어요. 이제 상담사님을 더는 안 찾아와도 될 것 같습니다.

[상담사]: 정말 다행입니다, K님. 표정이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밝아지셨군요. 하지만 언제든, 문은 열려 있으니 부담 갖지 말고 찾아와 주세요.

밑에는 역시 그렇듯, 빨간색 휘갈겨 쓴 첨언이 달려 있었다..

[내담자는 최근 같은 길드의 동료 수인과 연인 관계로 발전. 긍정적 애착 관계가 그의 기저질환(우울증, 공황장애)에 긍정적 변수로 작용하여, 증상이 호전된 것으로 판단됨.]

실제로 종종 있는 이야기다. 마음의 병을, 사람으로 치료하는 것.

할 수만 있다면 연애만큼 효과적인 치료법도 드물다.

물론, 그 관계가 끝났을 때의 후폭풍은 배로 돌아오겠지만.

여기까지는 완벽한 해피엔딩이다.

교과서에 실려도 될 만큼 모범적인 상담 종결.

그러나, 슬프게도 이대로 끝났다면 이 논문은 쓰이지 않았을 것이다.

[14회차]

[상담사]: 오랜만입니다, K님. 그런데… 표정이 좋지 않으시군요.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내담자 K]: (오랫동안 침묵하다, 간신히 입을 열며) …선생님.

[상담사]: 네 무슨 일이십니까?

[내담자 K]: 저는… 저는 여전히 그녀를 사랑합니다. 그 마음은 변치 않았어요. 그녀는 제 생명의 은인이고, 제 모든 것입니다. 하지만… 하지만, 선생님. 저는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습니다.

[상담사]: 버틸 수 없다니요?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다음 기록은…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내담자 K]: 그… 그 시기가 오면 그녀는 몇 날 며칠이고… 저를 탐합니다. 그리고 그 시간이 끝나면… 그녀는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제 입에 키스하며 다정하게 물어봐요. 왜 그렇게 피곤해하냐고. 저는… 저는 그 순진한 얼굴을 보는 게, 이제는 두렵습니다.

[상담사]: (긴 침묵)

그의 절박한 호소 아래, 어김없이 붉은 펜으로 쓴 첨언이 달려 있었다.

[관찰 기록: 내담자 K의 외관은 극도로 쇠약해 보였음. 눈 밑에는 다크서클이 짙게 깔려 있으며, 문을 열고 들어오는 짧은 순간에도 다리가 후들거리는 등, 명백한 체력적 한계를 노출함.]

[결론: 이종족, 수인과의 연애에서 가장 큰 변수는 문화의 차이도, 언어의 장벽도 아니었다. 수인에게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본능 발현기다. 동물과 비슷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수인들은 이 시기. 종족 고유의 본능에 지배당한다. C급 헌터인 내담자의 신체 능력으로는 수인의 욕망을 감당하는 것에 한계가 있었던 것으로 판단되었다.]

“…….”

나는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내가 지금 뭘 본거지?

당연히 문화적 차이에서 나온 갈등일 줄 알았다. 그러나 이 상담은 다소 원초적인 문제였다.

결국 상담사는 내담자에게, 용기를 내어 진솔한 대화를 나눠볼 것을 권유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다음 회차의 기록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15회차 상담 기록 발췌]

[상담사]: 오랜만입니다, K님. 안색이… 이전과는 또 다르군요. 그… 대화는, 잘 되셨습니까?

[내담자 K]: (오랫동안 침묵) …아니요. 하지만… 모든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담자 K]: 제가 그토록 괴로워했던 그녀의 그 본능은… 사실, 그녀가 저를 위해 필사적으로 억누른 모습이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러니까…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던 것이죠. (헛웃음) 그리고 그녀가 말해줬습니다. 그녀는 고양이 수인이고. 다른 수인들… 특히 토끼 수인은… 자신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훨씬… 훨씬 더 강한 본능을 가졌다고요.

[내담자 K]: 그래서 그냥… 사랑으로 포옹하고자 합니다…. 그녀도, 저를 배려하고 있었던 거니까요.

[결론: 내담자 K는 상대의 배려를 알게 된 후 종족 간의 생물학적 격차를 사랑으로 극복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이는 위태로운 결론이다. 특히 상대가 본능이 약한 축에 속하는 묘(猫) 수인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종족 간의 교제는 근본적인 한계를 명확히 시사한다.]

나는 멍하니, 문서를 덮었다.

그리고 맨 뒤 페이지를 열었다.

이번에도 의문의 연구자가 남긴, 증거 불능의 연구 자료이기를 빌면서.

그러나.

내가 기다리던 [증거 불능] 빨간 딱지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종이일 뿐이었다.

즉, 은폐된 기록이 아니다.

  • 띠링!

그 순간, 내 생각을 끊는 날카로운 알람 소리가 정적을 깨뜨렸다.

고개를 돌리자, 컴퓨터 모니터에 알림창이 떠 있었다.

누군가가, 이 시간에, 온라인으로 내일 오전 상담을 신청했다.

나는 아직도 멍한 머리로, 기계적으로 마우스를 움직였다.

규정상, 나는 대상 헌터의 신상 정보를 미리 확인할 수 있었으니까.

  • 딸깍.

마우스를 클릭하자 화면에, 익숙한 얼굴 하나가 떠올랐다.

유니온 길드의 공식 프로필 사진.

차가운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하는, S급 헌터의 모습.

거기에는.

“…….”

조금 전, 내가 그토록 연구하던 한 마리의 하얀색 토끼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