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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시간이 한창인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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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똑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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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상담소의 문을 누군가 아주 조심스럽게 두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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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한 번 더 문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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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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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문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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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다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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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고리 아래 바닥에 작고 예쁘게 포장된 샌드위치 상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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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상자 위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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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ᐢ ›_‹ 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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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 모양의 귀여운 스티커가 또 붙여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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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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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웃음을 터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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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고마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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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루나가 샌드위치를 사다 준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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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지 않아도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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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에 또 맛있는 빵이나 과자를 만들어드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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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웃는 얼굴로 샌드위치 상자를 들어, 안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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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루나의 샌드위치를 허겁지겁 해치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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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았던 점심시간은 그렇게 끝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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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담소는 다시, 찾아온 수만은 인파들로 북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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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없이 오후의 상담을 이어가다 보니, 어느새 창밖에는 희미한 노을빛마저 사라져 어둠이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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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시간이 다가왔다는 뜻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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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제 거의 텅 비어버린 커피포트의 마지막 남은 한 방울까지 쥐어짜 내 입안으로 들이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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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인터폰의 버튼을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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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내담자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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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똑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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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답 대신 방의 문이 두드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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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들어오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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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너덜너덜해진 서류 더미에서 새로운 종이를 꺼내들며 오늘의 마지막이 될 내담자를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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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안으로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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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개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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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게 누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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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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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는 얼굴이 서 있었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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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정하게 빗어 넘긴 갈색 단발머리. 동그랗고 선한 눈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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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녀의 등 뒤에 희미하게 빛나는 나비 모양의 마나 날개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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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에 내가 몸담았던 길드, 해태의 A급 서포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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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시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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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은 씨가 여기는 어쩐 일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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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백시은은 의뭉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아주 자연스럽게 내 맞은편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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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오늘 내담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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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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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담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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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드에서 해맑고 친절하기로 유명한 그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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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과는 거리감이 좀 있는 캐릭터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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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의 이야기는 뭐, 아무도 모르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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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고민이 좀 생겨서. 모르는 사람한테 이야기하기는 부담스럽고… 그래도, 아는 사람이 하면 낫겠지 싶어서 와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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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그녀가 진짜 고민이 있어 방문한 것은 맞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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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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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녀 입장에서야 아는 사람을 찾아올 수 있지만, 나의 경우에는 입장이 반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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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담사가 내담자를 이미 아는 사이라면 이중 관계의 위험이 높고, 사적인 감정이 객관적인 진단을 방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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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가능하면 피하고 다른 상담사로 연결하는 것이 원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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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녀는 이제 전 직장 동료일 뿐. 관계의 밀도가 높지 않고 현재의 연결점 또한 전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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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확실하게 인지만 하고 있다면 괜찮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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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구나. 잘 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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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서랍에서 깨끗한 새 진단 기록지를 꺼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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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텅 비어있던 오늘의 마지막 상담 칸에 펜으로 그녀의 이름을 적어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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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시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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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을 내려놓고 그녀를 마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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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고민이 있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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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차분한 물음에 백시은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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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말을 고르는 듯하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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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제 고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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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어. 아니 정확히는 좋아한 지 꽤 오래됐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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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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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보다 의외인 이야기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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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일단 잠자코 그녀의 말에 집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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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잘 안되네. 진척도 없고 앞으로는 더 멀어질 것 같은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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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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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사랑, 관계의 불확실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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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도의 가벼운 상담이야 어렵지 않았다. 서로에게 호감이 있는 것인지, 아니면 짝사랑인지는 차차 알아보면 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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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군요 그렇다면 우선 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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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녀가 아주 해맑은 미소와 함께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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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냥 집에 가둬버릴까, 생각도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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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대로 움직임을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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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잘못 들었나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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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가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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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다시 백시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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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여전히 해맑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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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로 방금 그 말을 한 건지 아닌지도 구분이 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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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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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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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재빠르게 상담사로서의 매뉴얼을 전부 지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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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지한 표정으로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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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은아, 진심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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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백시은은 약간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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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진심 맞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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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잠시 말을 고르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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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조심스럽게 자신의 진짜 고민을 꺼내놓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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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몰랐어. 내가 이런 사람인 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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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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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계에 오기 전에는 누군가를 좋아해 본 적이 없었거든, 그런데 여기서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니까 알겠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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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시은은 잠시 내 눈을 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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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본능에도 살던 세계의 풍습이 깊게 남아있었다는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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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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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시은의 출신 세계가 어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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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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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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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재빠르게 옆에 있던 컴퓨터를 켜고, 헌터 협회의 이방인 데이터베이스에 접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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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색창에 그녀의 이름을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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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시은… 출신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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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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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정된 세계: 헤스티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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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이름을 마음속으로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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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아래에 첨부된 세계의 개요를 읽어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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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지구와 삶의 방식은 크게 다르지 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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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이사항: 극도의 성비 불균형. 남녀의 성비가 약 1:57에 달하는 극여초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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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적으로 남성의 출생률이 매우 낮아, 남성은 종족 보존을 위한 최우선 보호 대상으로 여겨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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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성인이 된 남성을 차지하기 위한 여성 간의 경쟁이 매우 치열하며,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물리적 충돌 및 약탈혼과 유사한 형태의 강제적 구애를 일부 고위 여성들에게는 제도적으로 허용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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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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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야 기억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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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스티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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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서야 그녀가 방금 뱉은 말이 어느 정도 이해가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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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그녀가 살았던 세상에서는 보편적인 이야기였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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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여기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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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모니터에서 그녀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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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상담사로서 또 그녀의 옛 동료로서 진지하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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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은아 이해했어. 네가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도 알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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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말에 그녀의 얼굴에 희미한 안도의 빛이 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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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마지막 희망을 잘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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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여기는 헤스티아가 아니라 지구야. 이곳에서는 그건 범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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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오랫동안 말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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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마침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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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 체념한 사람의 씁쓸한 끄덕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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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이해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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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시은은 희미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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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나도 그래서 찾아온 거야. 머릿속에서는 그 사람이 싫어할 걸 아는데, 자꾸 갈팡질팡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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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내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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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네가 이렇게 딱, 잘라 말해주니까. 오히려 마음이 좀 편해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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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런 그녀의 고백에 조금 안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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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는 백시은이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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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상담사로서, 또 옛 동료로서 그녀를 다독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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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 헷갈릴 수밖에 없지. 다른 세상에서 평생을 살아왔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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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건 네가 그게 잘못됐다는 걸 알고, 그걸 멈추기 위해 여기까지 찾아왔다는 거야. 그것만으로도 너는 충분히 대단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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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위로에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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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예전의 해맑은 모습으로 돌아와 의자에서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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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워 선우야. 조금 후련해졌어. 어떻게 해야 할지 정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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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답으로 내가 저녁 살게. 밥이나 먹으러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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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녀의 그 제안에 잠시 망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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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지금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딱딱한 상담이 아닌 편안한 식사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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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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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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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시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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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태 길드 본부의 최심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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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 트레이닝룸의 공기는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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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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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세아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땀에 흠뻑 젖은 훈련복 소매로 턱 끝에 맺힌 땀을 닦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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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이닝 룸 밖으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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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에는 길드의 멤버들이 제각기 다른 모습으로 쓰러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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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공략이 코앞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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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서의 작은 실수 하나는, 곧 죽음으로 이어질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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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다들 훈련에 매진하는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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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 어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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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세아는 맹물처럼 느껴지는 이온 음료를 들이켜며 옆에 서 있던 트레이닝 코치에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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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 경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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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기쁜 눈으로 엄지를 치켜세울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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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세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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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쓰러진 동료들을 확인하기 위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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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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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세아의 눈이 희미하게 가늘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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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가 비어 있다. 분명, 전부 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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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입에서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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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시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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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명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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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의 유일한 서포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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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시은 헌터는 서포터이기도 하고 오늘 약속이 있어서 먼저 조퇴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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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치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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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세아는 그 대답에 고개를 휙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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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약속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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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까지는… 저도 잘 모르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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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세아의 머릿속에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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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시은은 진세아가 가장 주시하고 있었던 인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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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길드 내부에서만 집중하면 됐었는데, 선우가 해태에서 나간 이후에는 그게 더 어려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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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가끔 어쩔 수 없는 공백이 발생하고는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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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훈련을 하러 들어간 그 공백의 시간에 백시은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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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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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세아는 자신의 감각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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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번에도 맞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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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두 번이, 아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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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훈련은 끝났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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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아, 네 그렇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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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세아는 땀에 젖은 수건을 빨래통에 아무렇게나 던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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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밖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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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이 마주 앉은 고깃집 별실은 바깥의 소란스러움이 닿지 않는 아늑하고 조용한 공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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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글지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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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판 위에서 붉은 소고기가 맛있는 소리를 내며 익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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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하! 진짜? 위재완 팀장님이 그랬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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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시은은 내가 들려준 옛날이야기에, 웃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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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나보고 헌터 그만두고 상담사나 하라고. 손님 물어다 주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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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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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구나… 그래서 그만둔 거였어…. 위재완 팀장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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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태의 다른 헌터들은 정확한 내부 이야기까지는 몰랐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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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내가 정확히 어떤 이유로 그만두게 됐는지에 대해 물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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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잘 익은 고기 한 점을 그녀의 앞접시에 놓아주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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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고마워’라고 말하며 자연스럽게 그것을 받아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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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울 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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얻어먹는 입장이니, 고기라도 열심히 구워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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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그렇게 한참 동안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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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나간 이후 길드에서 있었던 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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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료들의 근황 같은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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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이 일은 혼자서만 하면 되니까 그건 편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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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긴 하겠다… 나도 요즘 팀원들 때문에 고민이 좀 많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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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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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시은은 내가 알기로 팀 내에서 사이가 나쁜 사람은 한 명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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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누구와도 원만하게 지내는 좋은 편에 가까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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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고민할 게 뭐가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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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진심으로 궁금해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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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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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질문에 백시은의 얼굴에 걸려 있던 해맑은 미소가 희미하게 옅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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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도 될까, 말아야 할까, 망설이는 듯 젓가락으로 불판 위의 버섯만 뒤적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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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녀가 말을 꺼낼 때까지 묵묵히 기다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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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그녀가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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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잖아 선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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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그냥, 내 생각일 수도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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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내 눈을 똑바로 마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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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아가… 나를 별로 안 좋아하는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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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진세아에 대한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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