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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집에 돌아오니, 거하게 한 상이 차려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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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딸, 가서 씻고 와서 앉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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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이렇게까지 차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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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보내준 돈에 이 엄마가 힘 좀 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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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C가 내 생각보다 훨씬 크게 흥행한 것부터 예상하긴 했지만, 기본 계약에 채 1년도 되지 않았음에도 계약금조로 따로 챙겨 받은 돈만 해도 무서울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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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이 아니라 서울에 구축 아파트 한 채는 살 수 있을 정도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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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그 돈을 가지고 있어 봐야 쓸데도 없어 고스란히 부모님에게 통장 자체를 넘겨 드리니 오늘 환대가 여러모로 화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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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우 갈비에 신선한 회, 그리고 온갖 손이 많이 가는 반찬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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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지간한 뷔페라도 지금 저 식탁 위의 음식들을 이기기란 요원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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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침이 싹 도는 저 음식들을 방치하는 건 사람이 할 짓이 못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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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익숙해진 몸을 이끌고 화장실로 가 샤워를 하고선 후다닥 방으로 달려가 침대 위에 준비된 뽀송뽀송한 잠옷을 입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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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도 다 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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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나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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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웅대는 드라이기와 부엌 환풍기 소리가 섞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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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드는 생각이지만, 머리카락을 말리는 시간은 너무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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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섬주섬 전보다 훨씬 길어진 검은 생머리를 묶고선 다시 방문을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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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딱 이십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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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 말리는 것만 아니었으면 반으로 줄었을 테지만, 그걸 감안해도 우리 장 여사 입장에서는 가공할 만한 속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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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뭐 하루 종일 씻더니, 요즘은 아주 빠릿빠릿해 우리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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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정 소화하려면 빨라져야 하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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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도 샤워를 오래 하는 성격이었고, 몸이 이렇게 된 뒤에는 그냥 보고만 있어도 신기해서 어쩔 수 없이 오랫동안 씻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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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숙소에 들어가서 스크림이니 솔랭이니 하다 보니 시간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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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너 씻지도 않고 연습하는 건 아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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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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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머. 얘 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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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글서글했던 엄마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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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방이라도 내 볼을 양 손으로 잡고 쭈욱 늘릴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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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어쩔 수 없는 걸 어떡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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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ST2에서 가장 솔로 랭크를 오래 돌리는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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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 인한 늦잠으로 아침—물론 점심에 더 가깝다—에 일어나면 출근까지 시간이 부족한 터라 세수만 후딱 하고 나오는 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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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보따리 가져다준 화장품은 어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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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션 정도는 바르고 사니까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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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마저 안 하면 이 외모와, 외모를 물려준 부모님에 대한 모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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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션은 무슨. 얘. 요즘은 선수들도 얼굴이 자산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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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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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남자 선수들만 해도 유니폼 판매량이 하늘과 땅 차이니 말 다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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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내 유니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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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터 리그 유니폼이야 말할 것도 없고, 그랜드 리그로 콜업됐을 때 새로 낸 유니폼에 이제는 LOCK 유니폼까지 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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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합해서 얼마나 팔렸을지 퍽 궁금하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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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우리 장 여사는 선수 일정을 소화하면서 조금씩 짙어지는 다크서클을 보더니 말을 계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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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애가 진짜. 오늘 더 챙겨 줄 테니까 매일매일 엄마가 바르란 거 바르고, 씻을 때 쓰고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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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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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그렇듯, 자식에 대한 걱정은 끝이 없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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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저나 우리 딸, 힘들진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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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에서 조용히 갈비를 뜯던 아빠가 드디어 말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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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팀원들 욕하는 건 아니지만 힘들 거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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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야. 그거 해도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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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우면 집으로 찾아오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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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와도 무슨 염치로 찾아왔냐면서 샌드백으로 쓸 거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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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한 거 아니냐고 할 수 있겠지만, 나라면 해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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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경기부터 어떤 일이 벌어질지 이미 예상되는 만큼 더더욱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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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히 잘하던 친구들인데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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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프라우드 돌아오면 다시 잘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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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확고한 대전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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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ST3에서 팀을 주무른 것처럼, 프라우드는 유형적인 오더나 무형적인 영향력으로나 ST1에 거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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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내가 예전 데뷔할 때에 비해 말도 안 되는 실력을 가지고 있다지만, 최소 사 년을 같이한 프라우드가 사라진 빈자리를 전부 메꿀 수준은 못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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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히는 그런 오더는 할 수 있어도, 그들은 나를 믿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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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약간의 주저함이 프로씬에서 치명적인 것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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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딸이 뭐가 부족해서 그 녀석들은 말을 안 듣는지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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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여사는 한숨을 푹푹 내쉬면서 내게 갈비에서 대를 빼고 살만 쏙 발라 밥 위에 얹어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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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하얀 쌀밥에 양념이 기가 막히게 밴 고기를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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뼈와 살을 나누던 막은 이미 부들부들해져 질기지 않고 쫄깃함만이 느껴지고, 검갈색 표면을 한 입 베어 무니 기름지다는 말로도 부족한 육즙이 터져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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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즙은 그대로 흘러내려 밥알 사이사이 스미고, 그것이 혀에 닿을 때가 되자 고기는 어느새 녹아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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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입가심으로는 겨울에 담아 아삭하고도 잘 익은 빨간 김치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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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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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옥에서 주는 밥보다 훨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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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사와 셰프분들께는 약간 죄송하지만, 원래 집밥은 못 이기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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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들도 이해해주시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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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먹어. 요즘 바빠서 집에도 많이 못 오잖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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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같아서는 이 아빠라도 좀 자주 찾아가고 싶은데, 선수들 방해될까 봐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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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 맨날 와도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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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선수들이 생활하는 구역이랑 관계자들이 돌아다니는 구역, 그리고 일반인들이 구경할 수 있는 구역은 각각 완전히 나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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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무엇보다도 이제 고등학생 올라가는 딸이 합숙하고 있는데—물론 방은 별개지만—걱정되서 찾아온다는 아버지를 막을 매정한 사람은 ST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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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어도 CEO 아저씨한테 말하면 며칠 안 가서 사라질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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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그렇게 오래간만에 아무 걱정 없이 밥을 들이키듯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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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거한 한 상이 사라진 뒤 아빠가 후식으로 먹자며 사과를 깎으며 내게 물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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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고등학교는 어떻게, 생각해 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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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자동 배정으로 집 근처 일반 고등학교에 배정이 된 걸로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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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루크 녀석도 같은 곳이었던가 그랬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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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다닐 시간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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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LOCK 경기가 주중에 있어 오후 시간을 써야 하는 문제도 있거니와 괜히 선수들이 사옥에서 씻고 자고 하는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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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에도 스크림이니 뭐니 하면서 바쁜 와중에 학교에 얼굴 비칠 시간이라도 있을지 의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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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엄마는 개인적으로 설령 중퇴하더라도 이름이라도 올려두면 좋겠다 싶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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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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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교복은 입어봐야지 않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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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내가 일상적인 생활과 동떨어지는 걸 걱정하시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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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도 틀린 말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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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의 나도 한 번 비슷한 생각을 했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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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딱 입학식 가고, 시간 남을 때 한 번씩 출석하려고 노력까진 해 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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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그리고 정 안 되면 중퇴라는 카드가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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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게이머들이 으레 그렇듯, 성공의 충분 요소인 고등학교 중퇴 타이틀을 얻기 위해서라도 고등학교에 이름은 올려두는 편이 좋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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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잘 생각했어, 우리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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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여사는 그렇게 말하면서 나를 꼭 껴안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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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이에 내 입에 사과를 넣어준 아빠는 덤이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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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집이 최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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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까 여보 교복은 어디다 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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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에 쓰고 안방 장롱에 있을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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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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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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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에는 택시 타고 ST 사옥으로 돌아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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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외로 나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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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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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짧고도 행복한 하루가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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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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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행복은 언제나 계속되지 않기에 소중한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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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BDRX, 이거 밴픽이 뭔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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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놓고 트루 선수 저격입니다. 정확히는 어지간한 미드 챔피언은 상관 없으니까, 후반 캐리롤이 되는 챔피언만 집중적으로 잘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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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블람, 야쇼, 갈레온, 아제르, 크샨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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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반 캐리와 더불어 이동 속도나 스킬을 활용해 내 피지컬을 극한으로 활용할 수 있는 챔피언들이 전부 닫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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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드 밴의 극한을 보여주는 라인업과 더불어 상대가 픽한 조합은 브이—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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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명만 후벼파면 된다는 생각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모습이었지만, 이걸 어떻게 카운터쳐야 하냐고 묻는다면 답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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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문제는 밴픽 단계가 아니라, 인게임 상황에서 터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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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이러면 어떻게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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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산이 미호 상대로 그나마 괜찮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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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우리 그렇게 가져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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딜러진들이 제대로 못 크면 궁으로 5초 버티고 도망치는 게 다인 챔피언이지만, 어느 정도 팀 게임이 된다면 어그로 핑퐁부터 상대 스킬 빼는 것까지 가능한 메이지 챔피언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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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믿어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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딜러진을 담당하는 원딜은 당당하게 후반 캐리 챔피언 중 하나인 제레를, 서포터는 발빠르게 돌아다니며 시야를 잡아 브이의 갑작스런 공격을 막을 수 있도록 바든을 골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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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 서포터가 딜보다는 유틸성에 치중된 챔피언이라 딱히 나쁜 선택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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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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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그렇듯 이론과 협곡에서 벌어지는 일은 하늘과 땅만큼 차이 날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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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아악! 미호를 바든 궁으로 멈춰세운 건 좋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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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다가 왜 오름 궁에 녹튼 궁까지 쓰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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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녹튼은 조금 늦게 썼으면 돌진은 안 했을 텐데 바든 궁 때문에 에레가 돌진한 의미가 완전히 사라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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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면 녹튼의 지원이 없는 게 확정이라 아래에서 BDRX의 합류를 막던 트루가 역으로 고립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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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적 상태가 된 채로 멈춘 미호에 스킬을 전부 쏟아붓는 우리 팀원들을 보고 있자니 참 슬플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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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막전의 눈물겨운 쇼로 무언가 바뀌었을 거라 생각한 내 실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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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DRX Snake -> ST Tru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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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어그로 핑퐁을 위해 궁을 쓰며 네 명을 붙들고 있던 나는, 궁극기 시간이 끝나기 무섭게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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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 반해 바든의 궁 덕에 모든 스킬을 한 대도 맞지 않은 상대 미호는 궁극기를 시전하며 우리에게서 벗어나더니, 다른 팀원들과 함께 재진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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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호를 멈춰놨으면 내가 어그로를 끈 상태에서 스킬이 다 빠진 상대를 잡든가, 아니면 확실히 미호를 끝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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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더도 제대로 했는데 저러는 건 내가 행사할 수 있는 영향 밖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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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면 전부 잡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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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그로 핑퐁이 아예 안 되고! 교환이 안 된 상태에서 그나마 버텨주던 트루 선수가 죽어버렸는데 이거 어떡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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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여기서 뒷텔! 이거 싸먹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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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떠오르는 상대의 킬로그와, 강가에 쌓여가는 팀원들의 시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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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할 수 있는 건 유일하게 살아남은 에레에게 화를 목구멍으로 꾹꾹 눌러 담으며 차분히 브리핑을 해주는 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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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그렇게 오더한다고 해서 이미 갈 대로 가버린 게임은 돌아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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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작 몬스터를 잡고 우리 진영으로 돌진해오는 상대를 막을 여력은 더 이상 우리에게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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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BDRX가 LOCK에서도 ST를 잡아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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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의 넥서스 터지면서—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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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갈 길이 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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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많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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