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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화 마검 포르테(Forte) (19) - 되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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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저리 같은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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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끝까지 병력 지원에 대해서는 확답을 피한 채 도주한 전령들을 향해 현자가 내뱉은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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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나는 그런 현자를 달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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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분들도 사정이 있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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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정은 무슨 얼어 죽을 사정. 나는 나서기 싫으니까, 누군가 다른 놈이 대신 나서서 해결해 주면 좋겠다. 딱 그 심보일 텐데. 개중에는 다른 놈들이 마왕과 싸워서 힘을 빼면 그 뒤통수를 치고 이득만 쏙 빼먹고 싶은 놈들도 있을 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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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피나 역시 현자라는 인물에 대해 어느 정도나마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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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혐오. 인간 불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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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인간을 무척이나 싫어하고, 그들의 추악함을 경멸하며, 그들의 행동을 냉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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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야, 이건 다 부질없는 짓이야. 우리가 이렇게 피똥 싸가며 싸운다고 해도 그 보상이나 제대로 받을 수 있을 것 같으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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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히 보상받자고 이러는 건 아닌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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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병신 같은 생각이라고! 챙길 건 전부 챙겨야지, 왜 알아서 호구 짓을 하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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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러니한 것은, 그렇게 인간을 싫어하면서도 현자가 피나의 곁에서 떠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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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자 본인은 그저 관찰을 위해서라고 단언했지만, 피나는 무언가 다른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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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도 그럴 것이, 정말로 관측만을 위해서라면 굳이 이런저런 수단으로 피나를 도울 이유가 없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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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자는 식물, 암석 등 자연에 존재하는 것들을 다루는 주문에 능했는데, 이는 전투에서도 우수했지만, 그에 못지않게 생활면에서 유용함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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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팡이로 바닥을 탁, 치면 즉석에서 오두막이 생겨나고, 길게 뻗은 나뭇가지에서는 하나만 먹어도 하루 종일 배가 고프지 않은 열매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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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 된 거점 하나 없이 마왕이 점령한 영지를 떠돌아다녀야 하는 처지였던 만큼, 현자가 없었으면 피나의 생활은 몇 배는 힘겨워졌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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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나, 아무리 현자가 유능하고 피나의 검술이 날카롭다고 한들, 한계는 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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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치고 빠지기로 마왕의 병력들을 쓰러트렸지만, 이런 작전이 가능한 건 외곽 지역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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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의 거점에 직접 쳐들어가 전쟁을 끝내기에는, 근본적인 머릿수의 차이가 너무나 압도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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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바꾸기 위해서는 이쪽 역시 군대의 힘이 필요했지만, 중부의 여러 국가들은 여전히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출병을 늦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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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자의 불평과 한탄은 날이 갈수록 커졌지만, 피나는 싸움을 멈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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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상황은 더욱 나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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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피나와 현자의 활약에도 국경의 작은 소란이라 여겨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았던 마왕군이었지만, 그 피해가 점점 커지니 슬슬 본격적인 군세를 보내 두 사람을 잡아 없애려 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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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로라면 정말로 위험하다고 생각한 그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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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님. 오래 기다리시게 해서 정말로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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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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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조금만 더 시간을 달라고 요청했던 여인이 이번에야말로 두 사람에게 합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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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도 혼자가 아니라, 적지 않은 군세를 이끌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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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분들은 대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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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과 함께 싸우기를 원하는 분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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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의 대답에 호응하듯이, 그녀의 뒤에 있는 군세가 저마다의 방식으로 피나와 현자에게 예를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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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갑옷과 무기는 통일되지 않고 제각각이었는데, 정규군의 갑옷을 입은 이가 있는가 하면 사냥꾼 복장을 한 이, 사제복을 입은 이, 아예 평범한 농부 옷에 낫이나 쟁기 따위를 든 이들조차 뒤섞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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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의아해했던 피나는, 이내 성녀와 함께 찾아온 이들 중 낯익은 얼굴이 적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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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나와 현자가 마왕군에 맞서 싸우며, 그들에게서 구해낸 피난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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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잃고 집을 잃고 너덜너덜한 모습으로 도망치던 그들이, 결의에 찬 얼굴로 다시금 나타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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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어. 멸망한 왕국의 병사들. 만신전의 사제들. 그리고 피난민 언저리. 아주 오합지졸들만 모아놨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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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자의 말투는 냉소적이었지만, 피나는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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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현자가 그 나름대로 감탄하고 있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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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말투가 나쁜 건 사실이었기에 한마디 쏘아붙이려 했는데, 그보다 먼저 성녀가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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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확실히 오합지졸일지도 모르지요. 저희는 마왕에게 패배했고, 보기 흉하게 도망칠 수밖에 없던 이들이니까요. 타국에서 찾아온 조력자분들도 계시지만, 그들 역시 하나의 세력이 아니라 일개 개인으로서 참전한 것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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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하고 그녀가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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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저희는 싸우고 싶습니다. 마왕에 맞서고 싶습니다. 이 이상 두 분에게 모든 걸 맡긴 채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건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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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나는 성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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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는 여전히 그늘이 깃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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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사태를 일으킨 왕족의 하나로서 느끼는 죄책감. 언제 정체가 드러날지 모른다는 공포가 만들어낸 그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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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여전히 본인의 신분을 드러내지 못했고, 그건 누군가에겐 ‘비겁’이라고 불릴만한 행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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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성녀는 이곳에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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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나와 현자가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다는 걸 알면서, 그들이 그걸 밝히면 모든 게 끝이라는 걸 알면서, 그런데도 모든 걸 내던지거나 도망치지 않은 채, 그들과 함께 싸우기 위해서 찾아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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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떠밀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의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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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나는 그것을 용기라고 생각했고, 현자 역시 혀를 차면서도 이전처럼 성녀를 비난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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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이번에야말로 용사 파티와 그 조력자들이 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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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로는 숨 가쁘게 바쁜 나날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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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시점부터인가, 처음에는 관객의 입장과 배우의 입장을 오가던 피나는 자신이 오로지 배우의 역할로서만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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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이야기는 이전처럼 장면과 장면을 건너뛰지도 않았고, 시간의 흐름이 급작스레 가속되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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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로서 보내는 하루하루는 너무나 농밀하고 현실감이 넘쳐서, 피나는 이것이 천공 학원이 만들어낸 허구라는 걸 알면서도 종종 확신을 잃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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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은 발레스티아 가문의 피나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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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면 수백 년 전 마왕을 쓰러트린 ‘용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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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자는, 성녀는, 지금 자신과 함께 싸우는 동료들은, 그들과 웃고 떠든 시간은 전부 허구에 불과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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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실감 나고, 이토록 강렬한 체험이, 정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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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나는 어떻게든 본래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이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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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로서 마왕과 맞서 싸우는 하루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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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이들과 호흡을 맞추고, 필사적으로 발을 내딛고, 악전고투 속에서 발버둥 치는 나날이란 너무나 그 색채가 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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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나 발레스티아라는 소녀가 십수 년간 살아오며 겪은 고난이나 기쁨 따위는, 그 농도 앞에서 빛이 바랠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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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야말로 놈의 노림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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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자, 네가 본래의 자아를 잃어버리고 ‘용사’로 변하는 것. 너라는 인격에 용사를 덮어씌우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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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기는 소리지. 너의 인생이 용사의 삶보다 뒤떨어진다고, 누가 무슨 자격으로 단언한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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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녀가 손에 쥔 마검은, 피나의 그런 불안을 가볍게 일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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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의 삶 앞에서 기죽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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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인생은 틀림없이 강렬하고도 찬란한 빛으로 빛나고 있지만, 그게 피나가 자신의 인생을 내어줄 이유는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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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무대의 끝에 준비된 결말은, 아마도 비극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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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 있었던 아픔을, 그 고통을 네가 자신의 것처럼 여기고 공감해야, 진정한 의미로 계승이 이뤄진다고 여길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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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계약자여, 네가 거기에 어울려 줄 필요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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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든지 전개를 바꾸고, 과정을 왜곡하고, 결말을 뒤틀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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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걸 위한 힘. 그걸 위한 마검이라고, 포르테는 주저 없이 단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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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피나는 그렇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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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쯧쯧, 이 한심한 놈들. 지금 이딴 걸 거점이라고 지어놨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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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현자님이 자기가 건물 지을 테니 여러분은 쉬라고 하시니까, 잠시 비켜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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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뭣, 야 이 새끼야! 뭘 마음대로 결정하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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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쑥스러워하시는 것 같으니까 다들 눈하고 귀 좀 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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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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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일은 잘하면서도 꼭 말로 미움을 사는 현자의 언행을 적절하게 번역해 일행들을 웃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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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용사님. 실례가 아니라면, 저기 저 고기랑 가죽 덩어리는 뭔지 물어도 괜찮을까요? 혹시 마왕군이 쉽게 접근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위협용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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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그게 다들 과일만 먹어서 질려하시는 것 같길래, 요리를 해보려 했는데, 그게,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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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돕겠습니다. 사실 어릴 때 주방에 몇 번 숨어 들어가서 해봤거든요. 그리고 용사님. 먹는 고기는 대검으로 썰면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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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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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어설픈 솜씨로나마 사냥과 요리를 해 사람들의 입을 즐겁게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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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드라다! 평범하게 목을 베면 그 자리에 머리 두 개가 자라나지! 어이, 가짜 성녀! 용사가 베어낸 직후에, 단면을 축복으로 태워버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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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생, 안 하는 것 같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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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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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마검님…이 아니라, 마검의 힘으로 해결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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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본래 수많은 인명 피해를 냈을 괴수를 단숨에 토벌해 죽을 이들을 살려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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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원군을 보내달라고? 우리가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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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을 이대로 방치하면 대륙 전체가 환란에 휩싸이고 말 겁니다. 그땐 폐하와 아이제른 제국 역시 적지 않은 피해를 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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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이니 뭐니 거창하게 떠들지만 그래 봐야 악마 하나 아닌가. 뭐, 성녀라고 했던가? 네가 하는 걸 봐선 특혜를 베풀 수도- 커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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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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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지원을 빌미로 성녀에게 음흉한 제안을 건네는 제국의 황제를 칼집으로 두들겨 패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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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나 혼자서 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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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피나에게는 포르테가 함께하고 있었고, 강력하고 다재다능한 마검의 보조에 힘입어 그녀는 수많은 비극을 희극으로 덮어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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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마침내, 그들은 마왕의 성에 도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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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님들, 부디 무운을 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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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저희에게 맡기고, 안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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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뒤에서 들려오는 창칼 소리를 멀리하며 안쪽으로 나아가기를 얼마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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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는 한때 자신이 살았던 성의 변모한 모습에 얼굴을 창백하게 했고, 현자는 다가올 싸움에 긴장한 듯이 몇 번이고 혀를 차는 소리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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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뜩 긴장한 기색으로, 피나는 조용히 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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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깊고도 높은 곳에 있는 옥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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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 마왕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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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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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부터 발끝까지를 감싼 갑옷의 색도 그러했고, 투구 아래로 넘실대는 마력의 색 또한 그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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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어둠 그 자체가 형태를 지닌 채, 갑옷을 입고 사람 행세를 하는 듯한 외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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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나는 그 모습에서 형용하기 어려운 위화감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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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알고 있는 용사의 이야기 속에서 묘사된 마왕이란 사악의 결정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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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은 폭력과 살육을 사랑했고, 인간들의 비명과 고통을 안주 삼아 향락을 즐기는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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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은 용사들의 모험을 조롱했고, 간악한 말로 용사들을 유혹하며 타락시키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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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나, 지금 피나의 눈앞에 있는 마왕은 그들에게 어떤 흥미도 없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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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도 자신의 계획을 방해했다며 분노를 표하지도, 노력이 가상하다며 비웃지도, 강적의 존재에 환희를 드러내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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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기질적이고도 차가운 시선의 본질을, 피나는 막연하게나마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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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숫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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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을, 통치를, 그로 인해 죽어 나가는 수 없는 생명 하나하나를, 그저 서류 위의 숫자로밖에 보지 않는 자의 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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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에 그 대악마를 칭하는 개념은 『학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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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이 몸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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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다음 순간, 피나의 목이 잘려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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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글빙글 어지럽게 도는 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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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과 마찬가지로 마왕의 일격조차 버티지 못하고 쓰러지는 동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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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으로 잠겨 드는 시야 속에서, 신뢰하는 마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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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연극의 내용을 뜯어 고친 게 어지간히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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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주의 마지막 발버둥이다. 무엇을 보더라도 흔들리지 마라, 계약자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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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은 승리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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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가 동료들을 향해 자신만만하게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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