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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14 21:31:5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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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화 마검 포르테(Forte) (19) - 되풀이

“머저리 같은 것들.”

결국 끝까지 병력 지원에 대해서는 확답을 피한 채 도주한 전령들을 향해 현자가 내뱉은 말이었다.

피나는 그런 현자를 달랬다.

“저분들도 사정이 있을 거예요.”

“사정은 무슨 얼어 죽을 사정. 나는 나서기 싫으니까, 누군가 다른 놈이 대신 나서서 해결해 주면 좋겠다. 딱 그 심보일 텐데. 개중에는 다른 놈들이 마왕과 싸워서 힘을 빼면 그 뒤통수를 치고 이득만 쏙 빼먹고 싶은 놈들도 있을 테고.”

이제는 피나 역시 현자라는 인물에 대해 어느 정도나마 알게 되었다.

인간 혐오. 인간 불신.

그는 인간을 무척이나 싫어하고, 그들의 추악함을 경멸하며, 그들의 행동을 냉소했다.

“용사야, 이건 다 부질없는 짓이야. 우리가 이렇게 피똥 싸가며 싸운다고 해도 그 보상이나 제대로 받을 수 있을 것 같으냐?”

“딱히 보상받자고 이러는 건 아닌데요.”

“그게 병신 같은 생각이라고! 챙길 건 전부 챙겨야지, 왜 알아서 호구 짓을 하냔 말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렇게 인간을 싫어하면서도 현자가 피나의 곁에서 떠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현자 본인은 그저 관찰을 위해서라고 단언했지만, 피나는 무언가 다른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정말로 관측만을 위해서라면 굳이 이런저런 수단으로 피나를 도울 이유가 없을 테니까.

현자는 식물, 암석 등 자연에 존재하는 것들을 다루는 주문에 능했는데, 이는 전투에서도 우수했지만, 그에 못지않게 생활면에서 유용함이 많았다.

지팡이로 바닥을 탁, 치면 즉석에서 오두막이 생겨나고, 길게 뻗은 나뭇가지에서는 하나만 먹어도 하루 종일 배가 고프지 않은 열매가 열렸다.

제대로 된 거점 하나 없이 마왕이 점령한 영지를 떠돌아다녀야 하는 처지였던 만큼, 현자가 없었으면 피나의 생활은 몇 배는 힘겨워졌으리라.

허나, 아무리 현자가 유능하고 피나의 검술이 날카롭다고 한들, 한계는 존재했다.

그들은 치고 빠지기로 마왕의 병력들을 쓰러트렸지만, 이런 작전이 가능한 건 외곽 지역뿐.

마왕의 거점에 직접 쳐들어가 전쟁을 끝내기에는, 근본적인 머릿수의 차이가 너무나 압도적이었다.

이를 바꾸기 위해서는 이쪽 역시 군대의 힘이 필요했지만, 중부의 여러 국가들은 여전히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출병을 늦추었다.

현자의 불평과 한탄은 날이 갈수록 커졌지만, 피나는 싸움을 멈추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상황은 더욱 나빠졌다.

처음에는 피나와 현자의 활약에도 국경의 작은 소란이라 여겨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았던 마왕군이었지만, 그 피해가 점점 커지니 슬슬 본격적인 군세를 보내 두 사람을 잡아 없애려 했기 때문이다.

이대로라면 정말로 위험하다고 생각한 그때였다.

“용사님. 오래 기다리시게 해서 정말로 죄송합니다.”

성녀.

과거 조금만 더 시간을 달라고 요청했던 여인이 이번에야말로 두 사람에게 합류했다.

그것도 혼자가 아니라, 적지 않은 군세를 이끌고서.

“이분들은 대체…?”

“여러분과 함께 싸우기를 원하는 분들입니다.”

성녀의 대답에 호응하듯이, 그녀의 뒤에 있는 군세가 저마다의 방식으로 피나와 현자에게 예를 표했다.

그들의 갑옷과 무기는 통일되지 않고 제각각이었는데, 정규군의 갑옷을 입은 이가 있는가 하면 사냥꾼 복장을 한 이, 사제복을 입은 이, 아예 평범한 농부 옷에 낫이나 쟁기 따위를 든 이들조차 뒤섞여 있었다.

처음에는 의아해했던 피나는, 이내 성녀와 함께 찾아온 이들 중 낯익은 얼굴이 적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피나와 현자가 마왕군에 맞서 싸우며, 그들에게서 구해낸 피난민들.

나라를 잃고 집을 잃고 너덜너덜한 모습으로 도망치던 그들이, 결의에 찬 얼굴로 다시금 나타난 것이다.

“허어. 멸망한 왕국의 병사들. 만신전의 사제들. 그리고 피난민 언저리. 아주 오합지졸들만 모아놨군.”

현자의 말투는 냉소적이었지만, 피나는 느낄 수 있었다.

지금 현자가 그 나름대로 감탄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래도 말투가 나쁜 건 사실이었기에 한마디 쏘아붙이려 했는데, 그보다 먼저 성녀가 나섰다.

“네. 확실히 오합지졸일지도 모르지요. 저희는 마왕에게 패배했고, 보기 흉하게 도망칠 수밖에 없던 이들이니까요. 타국에서 찾아온 조력자분들도 계시지만, 그들 역시 하나의 세력이 아니라 일개 개인으로서 참전한 것일 뿐입니다.”

하지만, 하고 그녀가 덧붙였다.

“그래도 저희는 싸우고 싶습니다. 마왕에 맞서고 싶습니다. 이 이상 두 분에게 모든 걸 맡긴 채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건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피나는 성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여전히 그늘이 깃들어 있었다.

이 모든 사태를 일으킨 왕족의 하나로서 느끼는 죄책감. 언제 정체가 드러날지 모른다는 공포가 만들어낸 그늘이었다.

그녀는 여전히 본인의 신분을 드러내지 못했고, 그건 누군가에겐 ‘비겁’이라고 불릴만한 행동이었다.

그렇지만, 성녀는 이곳에 찾아왔다.

피나와 현자가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다는 걸 알면서, 그들이 그걸 밝히면 모든 게 끝이라는 걸 알면서, 그런데도 모든 걸 내던지거나 도망치지 않은 채, 그들과 함께 싸우기 위해서 찾아온 것이다.

누가 떠밀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의지로.

피나는 그것을 용기라고 생각했고, 현자 역시 혀를 차면서도 이전처럼 성녀를 비난하지 않았다.

그렇게, 이번에야말로 용사 파티와 그 조력자들이 모였다.

그 뒤로는 숨 가쁘게 바쁜 나날이 이어졌다.

어느 시점부터인가, 처음에는 관객의 입장과 배우의 입장을 오가던 피나는 자신이 오로지 배우의 역할로서만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더 이상 이야기는 이전처럼 장면과 장면을 건너뛰지도 않았고, 시간의 흐름이 급작스레 가속되지도 않았다.

‘용사’로서 보내는 하루하루는 너무나 농밀하고 현실감이 넘쳐서, 피나는 이것이 천공 학원이 만들어낸 허구라는 걸 알면서도 종종 확신을 잃을 정도였다.

자신은 발레스티아 가문의 피나일까?

아니면 수백 년 전 마왕을 쓰러트린 ‘용사’일까?

현자는, 성녀는, 지금 자신과 함께 싸우는 동료들은, 그들과 웃고 떠든 시간은 전부 허구에 불과한 것일까?

이토록 실감 나고, 이토록 강렬한 체험이, 정말로?

피나는 어떻게든 본래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이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용사로서 마왕과 맞서 싸우는 하루하루.

수많은 이들과 호흡을 맞추고, 필사적으로 발을 내딛고, 악전고투 속에서 발버둥 치는 나날이란 너무나 그 색채가 짙었다.

피나 발레스티아라는 소녀가 십수 년간 살아오며 겪은 고난이나 기쁨 따위는, 그 농도 앞에서 빛이 바랠 만큼.

《그것이야말로 놈의 노림수다.》

《계약자, 네가 본래의 자아를 잃어버리고 ‘용사’로 변하는 것. 너라는 인격에 용사를 덮어씌우는 것.》

《웃기는 소리지. 너의 인생이 용사의 삶보다 뒤떨어진다고, 누가 무슨 자격으로 단언한단 말인가.》

그리고 그녀가 손에 쥔 마검은, 피나의 그런 불안을 가볍게 일축했다.

용사의 삶 앞에서 기죽지 마라.

그들의 인생은 틀림없이 강렬하고도 찬란한 빛으로 빛나고 있지만, 그게 피나가 자신의 인생을 내어줄 이유는 되지 않는다.

《이 무대의 끝에 준비된 결말은, 아마도 비극일 것이다.》

《과거에 있었던 아픔을, 그 고통을 네가 자신의 것처럼 여기고 공감해야, 진정한 의미로 계승이 이뤄진다고 여길 테니까.》

《하지만 계약자여, 네가 거기에 어울려 줄 필요는 없다.》

《얼마든지 전개를 바꾸고, 과정을 왜곡하고, 결말을 뒤틀어라.》

그걸 위한 힘. 그걸 위한 마검이라고, 포르테는 주저 없이 단언했다.

그래서, 피나는 그렇게 했다.

“쯧쯧, 이 한심한 놈들. 지금 이딴 걸 거점이라고 지어놨냐?”

“여러분! 현자님이 자기가 건물 지을 테니 여러분은 쉬라고 하시니까, 잠시 비켜주세요!”

“뭐, 뭣, 야 이 새끼야! 뭘 마음대로 결정하고 있어!?”

“아, 쑥스러워하시는 것 같으니까 다들 눈하고 귀 좀 돌려주세요!”

“아니라고!!”

때로는 일은 잘하면서도 꼭 말로 미움을 사는 현자의 언행을 적절하게 번역해 일행들을 웃게 만들었다.

“저기, 용사님. 실례가 아니라면, 저기 저 고기랑 가죽 덩어리는 뭔지 물어도 괜찮을까요? 혹시 마왕군이 쉽게 접근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위협용인지요?”

“…그, 그게 다들 과일만 먹어서 질려하시는 것 같길래, 요리를 해보려 했는데, 그게, 음.”

“……제가 돕겠습니다. 사실 어릴 때 주방에 몇 번 숨어 들어가서 해봤거든요. 그리고 용사님. 먹는 고기는 대검으로 썰면 안 됩니다.”

“넵.”

때로는 어설픈 솜씨로나마 사냥과 요리를 해 사람들의 입을 즐겁게 하기도 했다.

“히드라다! 평범하게 목을 베면 그 자리에 머리 두 개가 자라나지! 어이, 가짜 성녀! 용사가 베어낸 직후에, 단면을 축복으로 태워버려라!”

“재생, 안 하는 것 같습니다만?”

“뭐?”

“아, 마검님…이 아니라, 마검의 힘으로 해결했어요!”

때로는 본래 수많은 인명 피해를 냈을 괴수를 단숨에 토벌해 죽을 이들을 살려냈다.

“지원군을 보내달라고? 우리가 왜?”

“마왕을 이대로 방치하면 대륙 전체가 환란에 휩싸이고 말 겁니다. 그땐 폐하와 아이제른 제국 역시 적지 않은 피해를 보겠지요.”

“마왕이니 뭐니 거창하게 떠들지만 그래 봐야 악마 하나 아닌가. 뭐, 성녀라고 했던가? 네가 하는 걸 봐선 특혜를 베풀 수도- 커헉!?”

《음, 잘했다.》

때로는 지원을 빌미로 성녀에게 음흉한 제안을 건네는 제국의 황제를 칼집으로 두들겨 패기도 했다.

피나 혼자서 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피나에게는 포르테가 함께하고 있었고, 강력하고 다재다능한 마검의 보조에 힘입어 그녀는 수많은 비극을 희극으로 덮어씌웠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은 마왕의 성에 도달할 수 있었다.

“용사님들, 부디 무운을 빌겠습니다!”

“이곳은 저희에게 맡기고, 안쪽으로!”

등 뒤에서 들려오는 창칼 소리를 멀리하며 안쪽으로 나아가기를 얼마쯤.

성녀는 한때 자신이 살았던 성의 변모한 모습에 얼굴을 창백하게 했고, 현자는 다가올 싸움에 긴장한 듯이 몇 번이고 혀를 차는 소리를 냈다.

잔뜩 긴장한 기색으로, 피나는 조용히 문을 열었다.

가장 깊고도 높은 곳에 있는 옥좌.

그곳에, 마왕이 있었다.

검은 존재였다.

머리부터 발끝까지를 감싼 갑옷의 색도 그러했고, 투구 아래로 넘실대는 마력의 색 또한 그러했다.

마치 어둠 그 자체가 형태를 지닌 채, 갑옷을 입고 사람 행세를 하는 듯한 외형.

피나는 그 모습에서 형용하기 어려운 위화감을 느꼈다.

그녀가 알고 있는 용사의 이야기 속에서 묘사된 마왕이란 사악의 결정체였다.

마왕은 폭력과 살육을 사랑했고, 인간들의 비명과 고통을 안주 삼아 향락을 즐기는 존재였다.

마왕은 용사들의 모험을 조롱했고, 간악한 말로 용사들을 유혹하며 타락시키려 했다.

허나, 지금 피나의 눈앞에 있는 마왕은 그들에게 어떤 흥미도 없어 보였다.

잘도 자신의 계획을 방해했다며 분노를 표하지도, 노력이 가상하다며 비웃지도, 강적의 존재에 환희를 드러내지도 않았다.

그 무기질적이고도 차가운 시선의 본질을, 피나는 막연하게나마 깨달았다.

그것은 숫자였다.

전쟁을, 통치를, 그로 인해 죽어 나가는 수 없는 생명 하나하나를, 그저 서류 위의 숫자로밖에 보지 않는 자의 눈이었다.

그렇기에 그 대악마를 칭하는 개념은 『학살』이었다.

마왕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다음 순간, 피나의 목이 잘려 날아갔다.

빙글빙글 어지럽게 도는 시야.

자신과 마찬가지로 마왕의 일격조차 버티지 못하고 쓰러지는 동료들.

어둠으로 잠겨 드는 시야 속에서, 신뢰하는 마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가 연극의 내용을 뜯어 고친 게 어지간히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로군.》

《극단주의 마지막 발버둥이다. 무엇을 보더라도 흔들리지 마라, 계약자여.》


"우리들은 승리할 거다."

'용사'가 동료들을 향해 자신만만하게 선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