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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화 황태자 알론드(Alondre) (6) - 용량이 많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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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뒷일은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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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요, 암요. 아무런 걱정 마시고 부디 편히 가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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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른스트의 인사에, 브라운 상회에서 파견 나온 남자는 매우 공손하고도 굽실거리는 태도로 그를 마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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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그 무슨 일이 있어도 불손한 태도를 보이지 말고, 정중히 눈앞의 남자를 대하라는 상회주 트래버스 브라운의 엄명이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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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서 빠져나온 뒤, 에른스트는 그대로 말없이 걷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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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고 또 걸어, 마침내 도시 바깥. 사람의 인기척이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숲에 도착했을 무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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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른스트는 가슴 쪽에 있는 작은 주머니에서 구슬 하나를 꺼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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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투명한 구슬의 표면에는 온갖 종류의 글귀 같은 것이 빼곡하게 가득 차 있었는데, 그 글자 중 일부가 움직여 간격이 벌어지는 듯하더니, 이내 그 안에서 원념에 가득 찬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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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쓰레기 같은 인간 놈! 네가 감히…! 감히 내 몸을 그딴 것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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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의 주인은 에른스트를 향한 짙디짙은 살의를 내뿜고 있었는데, 이는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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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을 뽑혀 이 작디작은 구슬에 봉인당하고, 본래 몸은 웬 마도서를 만드는 데 재료로 들어가는 꼴을 보았으니 어찌 원한이 없을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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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 발자레스는 에른스트를 위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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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당장 나를 여기서 꺼내라!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네가 상상하는 그 어떤 일보다도 끔찍한 결말을 맞이하게 해줄 터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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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레스의 말에, 에른스트가 고개를 갸웃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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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는 꽤 친근하고 유쾌한 말투를 사용하셨던 것 같습니다만. 이제는 때려치우신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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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조롱하는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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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을 조롱으로 이해하신다니, 심상이 많이 꼬여있는 분 같으시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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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늘 하나 들어갈 것 같지 않은 에른스트의 태도에, 발자레스는 이를 아득바득 간 후 이내 한숨을 푹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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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조금 힘이 빠진 말투로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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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봐, 친구. 네가 인간치고는 상당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걸 인정하지. 하지만, 그래 봐야 그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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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아이라도 달래듯이 부드럽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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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주군이신 『기만』께서는 마계의 수많은 악마를 지배하는 왕 중의 왕이시지. 너 정도의 능력으로는 그분의 발끝조차 따라가지 못해. 아니 그분께서 나설 것도 없이, 주군의 휘하에는 나보다 강력한 악마가 얼마든지 있다고. 그중 하나만 너를 찾아와도 네 인생은 무척이나 고달파질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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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라도 이해할 수 있듯이 차근차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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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나약한 육신은 갈기갈기 찢어져 삼두견들의 먹이가 될 테고, 그 영혼은 소멸하는 순간까지 노예로서 부림을 받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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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력을 부추기듯이 구체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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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신전(萬神殿)의 신들은 그 수가 크게 줄어 예전처럼 위세를 뽐내지 못하고, 지상의 초월자들은 자신만의 영역에 틀어박혀 외부에는 관심이 없으며, 인간종의 수호자인 용사는 사라진 지 오래지. 이런 상황에서 악마들이 작정하고 너를 노린다면, 그걸 감당할 수 있겠나?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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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이라도 물어뜯을 것처럼 은은한 살기를 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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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라도 나를 놓아주면 돼. 그리고 내 육체를 다시 본래대로 돌려주면, 우리는 친구가 될 수 있어. 과거의 악연 같은 건 잊어버리고, 새롭게 시작하자고,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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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에른스트가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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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힘들 것 같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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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내 말이 이해하기 어렵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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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께 드린 선물이 당신의 육체를 일부 활용한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그게 당신의 몸 그 자체인 건 아닙니다. 그러면 악마의 흔적이 그대로 남을 텐데, 그래서야 선물이라기보단 함정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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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악마의 기운을 감지할 수 있는 이들이 드물다고 해도,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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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이들이 에리스가 지닌 마도서를 보고 그녀를 추궁한다면 그녀 자신도 난감하고 선물한 입장에서도 여러모로 뻘쭘해지는 상황이 생기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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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로, 에른스트는 재료의 특성 그 자체는 최대한 활용하되, 거기서 악마를 떠올릴만한 성분들은 모조리 제거한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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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당신이 이 구슬을 빠져나가봤자, 그녀의 책으로 돌아가진 못할 겁니다. 이미 연결 고리가 남아 있지 않을 테니까요. 그러니 육체를 돌려주는 건 불가능합니다. 뭐, 새로운 마도서를 만들어서 깃들게 하는 건 가능할지도 모릅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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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 발자레스의 인내심은 거기까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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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천한 인간 따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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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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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레스를 가둔 구슬에 금이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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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슬 표면에 새겨진 문자가 빠른 속도로 지워지며, 구슬 표면으로 검은 안개 같은 것이 새어 나와 발자레스의 형상을 갖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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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다! 그렇다면, 네 놈의 육체를 가져가면 되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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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레스의 예리한 감각은, 지금 에른스트가 가진 힘이 형편없이 낮은 수준이라는 걸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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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도서관 안에서만 6위계의 힘을 발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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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에른스트의 능력을 정확히 파악하진 못했어도, 지금 에른스트가 일반인 수준의 힘밖에 없다는 것 정도는 감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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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슬에 새겨진 글귀가 사라지면 사라질수록 발자레스를 가둔 봉인은 점점 약해졌고, 이윽고 발자레스의 형상이 완전해지려는 그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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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액, 빼액 시끄럽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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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에선가 들려온 목소리와 함께, 하얀 손가락이 발자레스가 담긴 구슬을 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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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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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레스는 당황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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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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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발과 적안. 하얀 피부와 색기 있는 몸체를 지닌 한 여인이, 자신이 봉인된 구슬을 무슨 사탕이라도 쥔 것처럼 손가락 사이에 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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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큐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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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의 외형을 본 발자레스가 그리 중얼거렸지만, 여인, 루시드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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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시선이 에른스트를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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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필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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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 지상에서 뭘 꾸미는지 구체적인 계획 정도는 듣고 싶었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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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만 알면 돼? 남은 건 상관없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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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어차피 다른 곳으로 옮기기도 애매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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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딴소리하기 없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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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을 완전히 무시한 채 이어지는 대화에, 발자레스는 기가 막힌 나머지 말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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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야 뭐 그렇다 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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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왜인지 그 힘이 크게 줄어든 것 같지만, 어쨌든 발자레스 그 자신을 정면에서 꺾어버린 상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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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레스 앞에서 오만함을 뽐내도 인정할 만한 실적이 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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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여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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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년, 어느 일파냐. 감히 저급한 몽마 따위가 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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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큐버스가 어떤 존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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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계에 존재하는 여러 종족 중에서도, 밑에서 세는 게 빠를 만큼 나약하고 천한 이들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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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껏해야 강대한 악마들의 첩실 노릇을 하거나, 인간들 상대로 정기나 빨아먹는 한심한 족속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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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이가 위대한 군주로부터 직접 명령을 받는 자신을 무시하고 있으니, 그야 발자레스로서는 어이가 없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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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먹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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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거나 말거나, 루시드라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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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발자레스가 뭐라고 지껄이든 무시한 채 그의 영혼이 담긴 구슬을 입안에 넣어 그대로 삼켜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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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구슬 바깥으로 빠져나왔던 발자레스의 모습이, 다시 안개처럼 흩어지며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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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구멍 안쪽으로 떨어지는 감각을 느끼며, 발자레스는 실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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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안 통할 만큼 멍청한 계집이군. 하지만 잘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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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는 다른 영혼을 먹음으로써 그 힘을 늘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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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나 그건 자기보다 훨씬 약한 존재에게 시행했을 때나 의미가 있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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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치게 거대하거나 많은 먹이를 먹은 포식자가 배가 터져 죽어버리듯이, 본인이 감당할 수 없는 영혼을 억지로 먹어봐야 흡수하는 건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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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오히려, 내부에 침입한 영혼에게 반대로 잡아먹힐 공산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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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로 이 어리석고 멍청한 서큐버스를 역으로 흡수하고, 그대로 그 에른스트인지 뭔지 하는 시건방진 사서까지도 죽여버리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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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생각하며 역습을 준비하던 발자레스는, 이내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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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인 서큐버스의 그릇이란 기껏해야 물 한 잔을 담을 수 있는 컵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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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수영장만큼의 격과 마력을 지닌 발자레스를 흡수하려고 하면 필연적으로 깨져버리거나, 도리어 수영장에 매몰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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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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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지, 이 그릇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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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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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도 지나치게 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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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레스가 기감을 펼치고 또 펼쳐도, 그 끝을 알 수 없을 만큼 방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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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지금은 그 그릇의 내용물 상당 부분이 비어 있지만, 용량 자체만을 따진다면 어지간한 상급 악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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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아니, 그걸 넘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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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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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군주, 마계에 존재하는 단 셋뿐인 절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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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만』에 필적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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퐁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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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물웅덩이에, 발자레스의 영혼이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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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푸! 헉! 사, 살려주십시오! 살려주십시오! 주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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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필사적으로 발버둥을 치고 절규했지만, 웅덩이는 잠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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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덩이의 규모에 비하면 그 소란은 너무나 작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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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슬이, 그 주변으로 새어나온 발자레스의 형상이, 마치 기름에 녹인 물감처럼 흐물흐물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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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기억이, 마력이, 권능이, 존재가, 전부 녹아 웅덩이의 일부로 흡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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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마침내, 고요가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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