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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14 21:31:5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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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화 황태자 알론드(Alondre) (6) - 용량이 많은

“그러면, 뒷일은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암요, 암요. 아무런 걱정 마시고 부디 편히 가십시오.”

에른스트의 인사에, 브라운 상회에서 파견 나온 남자는 매우 공손하고도 굽실거리는 태도로 그를 마중했다.

절대, 그 무슨 일이 있어도 불손한 태도를 보이지 말고, 정중히 눈앞의 남자를 대하라는 상회주 트래버스 브라운의 엄명이 있었기 때문이다.

도서관에서 빠져나온 뒤, 에른스트는 그대로 말없이 걷기 시작했다.

걷고 또 걸어, 마침내 도시 바깥. 사람의 인기척이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숲에 도착했을 무렵.

에른스트는 가슴 쪽에 있는 작은 주머니에서 구슬 하나를 꺼내 들었다.

반투명한 구슬의 표면에는 온갖 종류의 글귀 같은 것이 빼곡하게 가득 차 있었는데, 그 글자 중 일부가 움직여 간격이 벌어지는 듯하더니, 이내 그 안에서 원념에 가득 찬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이 쓰레기 같은 인간 놈! 네가 감히…! 감히 내 몸을 그딴 것에!!》

목소리의 주인은 에른스트를 향한 짙디짙은 살의를 내뿜고 있었는데, 이는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영혼을 뽑혀 이 작디작은 구슬에 봉인당하고, 본래 몸은 웬 마도서를 만드는 데 재료로 들어가는 꼴을 보았으니 어찌 원한이 없을 수 있겠는가.

악마, 발자레스는 에른스트를 위협했다.

《지금 당장 나를 여기서 꺼내라!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네가 상상하는 그 어떤 일보다도 끔찍한 결말을 맞이하게 해줄 터이니!》

발자레스의 말에, 에른스트가 고개를 갸웃했다.

“전에는 꽤 친근하고 유쾌한 말투를 사용하셨던 것 같습니다만. 이제는 때려치우신 겁니까?”

《나를 조롱하는 것이냐!!》

“질문을 조롱으로 이해하신다니, 심상이 많이 꼬여있는 분 같으시군요.”

바늘 하나 들어갈 것 같지 않은 에른스트의 태도에, 발자레스는 이를 아득바득 간 후 이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 조금 힘이 빠진 말투로 입을 열었다.

《이봐, 친구. 네가 인간치고는 상당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걸 인정하지. 하지만, 그래 봐야 그뿐이야.》

어린아이라도 달래듯이 부드럽게.

《내 주군이신 『기만』께서는 마계의 수많은 악마를 지배하는 왕 중의 왕이시지. 너 정도의 능력으로는 그분의 발끝조차 따라가지 못해. 아니 그분께서 나설 것도 없이, 주군의 휘하에는 나보다 강력한 악마가 얼마든지 있다고. 그중 하나만 너를 찾아와도 네 인생은 무척이나 고달파질걸?》

바보라도 이해할 수 있듯이 차근차근.

《너의 나약한 육신은 갈기갈기 찢어져 삼두견들의 먹이가 될 테고, 그 영혼은 소멸하는 순간까지 노예로서 부림을 받겠지.》

상상력을 부추기듯이 구체적으로.

《만신전(萬神殿)의 신들은 그 수가 크게 줄어 예전처럼 위세를 뽐내지 못하고, 지상의 초월자들은 자신만의 영역에 틀어박혀 외부에는 관심이 없으며, 인간종의 수호자인 용사는 사라진 지 오래지. 이런 상황에서 악마들이 작정하고 너를 노린다면, 그걸 감당할 수 있겠나? 응?》

당장이라도 물어뜯을 것처럼 은은한 살기를 담아.

《지금이라도 나를 놓아주면 돼. 그리고 내 육체를 다시 본래대로 돌려주면, 우리는 친구가 될 수 있어. 과거의 악연 같은 건 잊어버리고, 새롭게 시작하자고, 어때?》

그리고, 에른스트가 입을 열었다.

“그건 힘들 것 같군요.”

《…아직도 내 말이 이해하기 어렵나?》

“손님께 드린 선물이 당신의 육체를 일부 활용한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그게 당신의 몸 그 자체인 건 아닙니다. 그러면 악마의 흔적이 그대로 남을 텐데, 그래서야 선물이라기보단 함정 아닙니까.”

아무리 악마의 기운을 감지할 수 있는 이들이 드물다고 해도,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런 이들이 에리스가 지닌 마도서를 보고 그녀를 추궁한다면 그녀 자신도 난감하고 선물한 입장에서도 여러모로 뻘쭘해지는 상황이 생기지 않겠는가.

고로, 에른스트는 재료의 특성 그 자체는 최대한 활용하되, 거기서 악마를 떠올릴만한 성분들은 모조리 제거한 상태였다.

“어차피 당신이 이 구슬을 빠져나가봤자, 그녀의 책으로 돌아가진 못할 겁니다. 이미 연결 고리가 남아 있지 않을 테니까요. 그러니 육체를 돌려주는 건 불가능합니다. 뭐, 새로운 마도서를 만들어서 깃들게 하는 건 가능할지도 모릅니다만….”

악마 발자레스의 인내심은 거기까지였다.

《이 천한 인간 따위가!!》

빠직!

발자레스를 가둔 구슬에 금이 생겨났다.

구슬 표면에 새겨진 문자가 빠른 속도로 지워지며, 구슬 표면으로 검은 안개 같은 것이 새어 나와 발자레스의 형상을 갖추었다.

《좋다! 그렇다면, 네 놈의 육체를 가져가면 되겠군!!》

발자레스의 예리한 감각은, 지금 에른스트가 가진 힘이 형편없이 낮은 수준이라는 걸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오직 도서관 안에서만 6위계의 힘을 발휘한다.

그런 에른스트의 능력을 정확히 파악하진 못했어도, 지금 에른스트가 일반인 수준의 힘밖에 없다는 것 정도는 감지한 것이다.

구슬에 새겨진 글귀가 사라지면 사라질수록 발자레스를 가둔 봉인은 점점 약해졌고, 이윽고 발자레스의 형상이 완전해지려는 그 순간.

“빼액, 빼액 시끄럽네.”

어디에선가 들려온 목소리와 함께, 하얀 손가락이 발자레스가 담긴 구슬을 집었다.

《뭐?》

발자레스는 당황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발견했다.

흑발과 적안. 하얀 피부와 색기 있는 몸체를 지닌 한 여인이, 자신이 봉인된 구슬을 무슨 사탕이라도 쥔 것처럼 손가락 사이에 둔 것을.

《서큐버스?》

여인의 외형을 본 발자레스가 그리 중얼거렸지만, 여인, 루시드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이 에른스트를 향했다.

“이거, 필요해?”

“흠. 지상에서 뭘 꾸미는지 구체적인 계획 정도는 듣고 싶었습니다만.”

“그것만 알면 돼? 남은 건 상관없는 거지?”

“예. 어차피 다른 곳으로 옮기기도 애매하니까요.”

“나중에 딴소리하기 없기다?”

본인을 완전히 무시한 채 이어지는 대화에, 발자레스는 기가 막힌 나머지 말을 잃었다.

인간이야 뭐 그렇다 치자.

지금은 왜인지 그 힘이 크게 줄어든 것 같지만, 어쨌든 발자레스 그 자신을 정면에서 꺾어버린 상대다.

발자레스 앞에서 오만함을 뽐내도 인정할 만한 실적이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 여자는?

《네년, 어느 일파냐. 감히 저급한 몽마 따위가 감히!!》

서큐버스가 어떤 존재인가.

마계에 존재하는 여러 종족 중에서도, 밑에서 세는 게 빠를 만큼 나약하고 천한 이들 아닌가.

기껏해야 강대한 악마들의 첩실 노릇을 하거나, 인간들 상대로 정기나 빨아먹는 한심한 족속들.

그런 이가 위대한 군주로부터 직접 명령을 받는 자신을 무시하고 있으니, 그야 발자레스로서는 어이가 없을 수밖에 없었다.

“잘 먹겠습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루시드라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그녀는 발자레스가 뭐라고 지껄이든 무시한 채 그의 영혼이 담긴 구슬을 입안에 넣어 그대로 삼켜버렸다.

모처럼 구슬 바깥으로 빠져나왔던 발자레스의 모습이, 다시 안개처럼 흩어지며 사라진다.

목구멍 안쪽으로 떨어지는 감각을 느끼며, 발자레스는 실소했다.

‘말이 안 통할 만큼 멍청한 계집이군. 하지만 잘됐어.

악마는 다른 영혼을 먹음으로써 그 힘을 늘릴 수 있다.

허나 그건 자기보다 훨씬 약한 존재에게 시행했을 때나 의미가 있는 이야기.

지나치게 거대하거나 많은 먹이를 먹은 포식자가 배가 터져 죽어버리듯이, 본인이 감당할 수 없는 영혼을 억지로 먹어봐야 흡수하는 건 불가능하다.

아니 오히려, 내부에 침입한 영혼에게 반대로 잡아먹힐 공산이 크다.

이대로 이 어리석고 멍청한 서큐버스를 역으로 흡수하고, 그대로 그 에른스트인지 뭔지 하는 시건방진 사서까지도 죽여버리리라.

그리 생각하며 역습을 준비하던 발자레스는, 이내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일반적인 서큐버스의 그릇이란 기껏해야 물 한 잔을 담을 수 있는 컵에 가깝다.

그래서 수영장만큼의 격과 마력을 지닌 발자레스를 흡수하려고 하면 필연적으로 깨져버리거나, 도리어 수영장에 매몰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뭐지, 이 그릇은?

넓다.

그것도 지나치게 넓다.

발자레스가 기감을 펼치고 또 펼쳐도, 그 끝을 알 수 없을 만큼 방대하다.

비록 지금은 그 그릇의 내용물 상당 부분이 비어 있지만, 용량 자체만을 따진다면 어지간한 상급 악마.

아니, 아니, 그걸 넘어서.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그의 군주, 마계에 존재하는 단 셋뿐인 절대자.

『기만』에 필적하는─

퐁당.

거대한 물웅덩이에, 발자레스의 영혼이 빠졌다.

《어푸! 헉! 사, 살려주십시오! 살려주십시오! 주군!》

그는 필사적으로 발버둥을 치고 절규했지만, 웅덩이는 잠잠했다.

웅덩이의 규모에 비하면 그 소란은 너무나 작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구슬이, 그 주변으로 새어나온 발자레스의 형상이, 마치 기름에 녹인 물감처럼 흐물흐물해졌다.

그의 기억이, 마력이, 권능이, 존재가, 전부 녹아 웅덩이의 일부로 흡수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고요가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