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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14 21:31:5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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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화 사서 에른스트(Ernst) (11) - 가족으로서, 사제로서

마리크는 손을 덜덜 떨었다.

얼굴에서 느껴지는 통증.

남들이 보는 앞에서 망신을 당했다는 굴욕감.

애초에 인내나 도량 같은 단어와는 거리가 먼 마리크였기에, 분노는 너무나도 쉽게 임계점을 돌파했다.

‘죽인다.

예쁘장한 얼굴은 다치지 않게 조절한다든가, 적당히 상대하면서 굴복시킨다든가 하는 계획은 전부 폐기됐다.

이것이 어디까지나 모의전이며, 수많은 관객이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잊어버렸다.

어린애 같은 짜증과 충동에 몸을 맡긴 채, 마리크는 재차 주문을 전개했다.

-화르르르륵!

마리크의 옆, 불꽃으로 이루어진 검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에리스가 의도적으로 제약을 건 주문이 아닌, 마리크가 미리 카피해 두었던 주문은 아무런 문제 없이 주인의 마력을 흡수하며 그 기세를 키웠다.

‘그래, 이거야! 무슨 장난을 쳤는지 모르겠지만 이거라면!!

흥분과 함께, 마리크가 사람 크기만 한 불꽃의 대검을 발사했다.

에리스는 공기탄 같은 것을 쏘아 맞대응했지만, 그 크기도, 거기에 담긴 마력도, 마리크의 공격에 비하면 너무나 보잘것없었다.

이대로 반격과 함께 에리스를 꿰뚫으리라 마리크가 확신한 그 순간.

삐끗, 하고 대검의 궤도가 아주 약간 비틀렸다.

에리스를 명중하지 못한 채, 그 옆을 스쳐 지나가는 불꽃의 대검.

그 아슬아슬한 모습에, 몇몇 학생들이 짧은 비명을 내질렀다.

허나 마리크는 일절 개의치 않고서, 재차 다음 주문을 사용했다.

방금 내보낸 것보다 더 크게, 더 강하게, 더 많은 수로.

학생 수준에는 어울리지 않는 고위력 주문을 마구 난사하는 그 모습에, 학생은 물론이고 교수들마저 경악했다.

저만한 마력 소모는 그들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건만, 마리크는 마치 마력이 끝없이 샘솟기라도 하는 것처럼 공격에 공격을 연이어나갔다.

화려하고도 압도적인 마리크의 마법에 비해, 에리스의 대응은 언뜻 볼품없어 보였다.

그녀가 사용한 작은 주문들은 불꽃의 대검과 힘겨루기를 하지 못한 채 번번이 밀려 나갔고, 성과라고는 대검의 궤도를 살짝 비트는 것이 전부였다.

‘이건 이미 모의전 수준이 아니다! 개입해야 해!

심판이 그리 생각하며 앞으로 나서려 한 순간, 그의 어깨를 누군가가 붙들었다.

자기를 붙잡은 이의 얼굴을 확인한 심판이 다급히 외쳤다.

“무슨 일입니까, 메리 교수님! 이거 놓으십시오!”

“에리스의 얼굴을 잘 보세요.”

얼굴?

지금 얼굴 같은 걸 볼 때인가?

그리 생각하면서도, 심판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에리스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얼이 빠졌다.

거기에 있던 항거할 수 없는 재난을 앞두고 필사적으로 발버둥 치는 약자의 얼굴이 아니었다.

지극히 차분하고 침착한, 언뜻 사무적인 인상마저 드는 냉철함이 그곳에 있었다.

그제야, 심판은 마리크의 화려한 주문 난사에 가려져 제대로 보지 못했던 사실을 깨달았다.

공격이 맞지 않는다.

열기로 인해 피부가 붉게 달아오르고, 의복 일부가 흐트러졌지만, 그것뿐.

저토록 화려하고 요란한 공세에 휘말리면서도, 정작 그 중심부에 있는 에리스의 몸에는 어떤 상처도 나지 않은 상태였다.

“허.”

심판의 입에서 감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마리크가 쏘아대는 주문은, 검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그 본질은 불꽃이다.

화살 같은 것과는 달리 물리적으로 쳐낼 수 있는 공격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런데도 에리스는 공기의 굴절과 약간의 마력 유도만으로 그 공격 궤도를 완벽하게 제어하고 있었다.

아주 조금이라도 주문의 발동 타이밍이 어긋난다면.

아주 약간이라도 주문의 충돌 지점이 맞지 않는다면.

그 즉시 유도는 실패하고 에리스는 치명상을 입게 될 터.

헌데도 에리스에게서는 아무런 초조함도, 흔들림도 느껴지지 않으니, 교수이기 이전에 한 명의 마법사로서 심판은 감격을 금할 수 없었다.

“잔재주를!!”

마리크 역시 그것을 알아차렸는지, 크게 표정을 일그러트리며 새로운 주문을 자아냈다.

3위계 『칼바람을 일으키는 마법』

3위계 『냉기를 침투시키는 마법』

4위계 『대지의 가시를 불러내는 마법』

하나하나가 겨우 학생 수준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강력한 주문들이었지만, 에리스는 당황하지 않았다.

어느 것이든 그녀가 공부하고, 이해하고, 분석해 왔던 주문들이었기 때문이다.

‘저 주문은 사람 피부나 근육을 찢기에는 충분해도, 뼈까지는 절단하지 못해.

2위계 『옷을 단단하게 하는 마법』

아주 잠시, 철판 정도의 강도를 지니게 된 의복이 날카로운 바람을 막아냈다.

‘냉기는 호흡기로 들어가는 순간 입안이 얼어붙을 정도로 강렬하지만, 정작 퍼지는 속도가 느려.

2위계 『토끼처럼 날렵해지는 마법』

몸이 빨라진 에리스가 경기장을 크게 우회하며 다시 자리를 잡자, 냉기는 그녀를 붙잡지 못한 채 느릿느릿 퍼지다 그 효력을 다했다.

‘대지의 가시는 생성 지점의 토질에 따라 그 위력이 천차만별로 바뀌어. 단단한 암석 지대라면 몰라도, 이런 푹신푹신한 땅이라면.

2위계 『욕조를 가득 채우는 마법』

에리스의 가슴 앞에서 생겨난 대량의 물이, 아래로 추락하며 지면을 적셨다.

한발 늦게 완성된 가시가 에리스를 향해 솟구쳤지만, 그 가시는 마치 묽은 점토처럼 흐물거려 날카로움 따위는 찾아볼 수 없는 상태였다.

어떤 주문도 통하지 않는다.

무얼 쓰더라도 완벽하게 대처한다.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르게 흘러가는 상황에, 마리크가 아이처럼 발작했다.

“뭐야! 왜! 어째서 안 통하는 건데!!”

“통할 리가 없잖아요.”

“…뭐?”

에리스는 차가운 눈으로 마리크를 응시하며 말했다.

“주문이라는 건 그저 쓸 줄 안다고 끝나는 게 아니에요. 상대의 실력, 수단, 주변의 환경 등을 올바르게 파악하고, 적재적소에 사용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죠.”

만약 이곳에 있는 것이 마리크가 아닌, 마리크가 주문을 베낀 원주인들이었더라면 이렇게 되진 않았을 터였다.

주문 하나를 습득하기 위해 몇 번이고 책을 들여다보고, 그 주문을 제대로 사용하기 위해 몇 번이고 연습하고, 수없이 많은 시행착오를 거쳐본 이들이었더라면 에리스의 대책에도 곧바로 돌파법을 찾아내려 했겠지.

칼바람은 정직하게 정면에서 쏘는 것이 아니라 기습으로.

냉기는 상대가 도망갈 곳이 마땅치 않은 실내 환경에서.

가시는 화염 주문을 먼저 쓰는 걸로 환경을 갖춘 다음에.

하지만 마리크는 그러지 않았다.

아니, 그럴 능력이 없었다.

악마의 권능이 흉내 낼 수 있는 것은 오직 결과일 뿐.

그 결과에 도달하기까지 원주인들이 쌓아온 노력과 시행착오는 조금도 흉내 내지 못했으니까.

“당신의 주문은 마치 틀에서 찍어낸 것 같군요. 마력은 무조건 주문이 감당할 수 있는 한계까지. 조준은 무조건 상대의 몸 한가운데에. 발동 타이밍은 항상 최속. 모든 조건이 매번 똑같아요.”

그러니까 쉽게 읽힌다.

그러니까 쉽게 대처할 수 있다.

충분한 지식이 없으면 불가능한 대응법이지만, 적어도 에리스에게는 그것이 가능했다.

그리고 그것은, 어떤 대마법사가 평생 추구하며 가르쳐 왔던 ‘이상적인 마법사’의 모습 그 자체였다.

“아….”

관객석 한구석.

모습을 숨긴 채 언제라도 뛰쳐나갈 수 있도록 대기 중이던 델피나리스의 눈동자가 격하게 떨렸다.

우수하지만 그저 그것뿐인 아이라고 생각했다.

손녀딸처럼 사랑하지만, 그 애정으로 인해 과대평가를 해선 안 된다며 일부러 더 엄격한 기준을 들이밀었다.

이 아이로는 부족하다고, 자신이 바라던 지고의 경지에 오를 재목은 아니라고 멋대로 단정 지었다.

늙은 스승의 외면과 아집.

그 그늘 속에서 제자가 어떤 노력을 쌓아왔는지 모르는 채.

퍼엉! 화르르르륵! 파지지직!

델피나리스가 말문이 막힌 채 몸을 떠는 도중에도, 모의전은 점점 극한으로 치달았다.

처음에는 시합을 중지시켜야 하는 게 아니냐며 당황하던 이들도, 이제는 넋이 나간 채 그저 눈앞의 광경을 응시하기에 바빴다.

“우, 웃기지마! 이딴, 이딴 건 인정 못, 커억!”

성을 내던 마리크의 고개가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옆으로 돌아갔다.

둥글게 뭉친 물 덩어리가 그의 뺨을 신나게 후려친 결과였다.

마리크는 이를 악물며 반격을 시도했지만, 그 주문이 완성되기도 전에 날아든 물 덩어리가 이번에는 마리크의 고개를 반대로 꺾었다.

“죽여버리겠-”

퍽!

“이러고도 무사할 줄-”

퍽!

“자, 잠깐 기다려-”

퍽!

“수, 숨 좀-”

퍽!

마리크가 협박을 하든, 애걸을 하든, 에리스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가 주의를 기울이는 건 마리크의 값싼 말 따위가 아니라, 그의 손에 들린 지팡이와 그가 사용하는 주문들이었기 때문이다.

저벅, 저벅.

한 번의 합이 오갈 때마다 에리스는 점점 앞으로 나아갔고, 뒷걸음질을 반복하던 마리크는 볼품없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으, 으어….”

주저앉은 마리크가 에리스를 올려다보았다.

예전의 오만과 자신감은 어디로 갔는지, 그 눈빛에는 원초적인 폭력에 대한 두려움과 비굴함이 가득 차 있었다.

척!

마리크의 코앞에 에리스가 지팡이를 내밀었다.

모두가 숨을 죽인 와중, 에리스가 말했다.

“계속하실 건가요?”

“내, 내가 졌어.”

“졌‘어’?”

“졌습니다! 제가 졌습니다!!”

에리스의 말꼬리가 올라간 직후, 마리크가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말투를 바꿨다.

구석에서 개입할 기회만 엿보고 있던 심판이, 후다닥 달려와 선언했다.

“모의전 종료!! 승자! 알드리지 강습소 대표, 에리스!”

와아아아아아아!

관객석이 환호성으로 가득 찼다.

알드리지 강습소는 물론이고, 본래 경쟁 상대일 로우튼 강습소 측의 학생들까지도 순간 자기 소속을 잊어버린 듯 열광했다.

화려하기는 해도 실속은 없었던 마리크와 최소한의 마력 소모로 최고의 결과를 끌어낸 에리스.

누가 봐도 모의전의 범주를 넘어 거친 언동과 살의 섞인 공격을 내보낸 마리크와 처음부터 끝까지 침착한 태도로 모의전의 격식을 지킨 에리스.

그림으로 그린 듯한 선명한 대비가 젊은 학생들의 마음에 불을 질렀다.

몇몇 여학생들은 얼굴을 붉힌 채 몽롱한 눈으로 에리스를 바라볼 정도였다.

덧붙여, 그 환호성의 중심에 있는 에리스의 상태는 겉보기와는 달리 제법 만신창이였다.

‘…힘들어 죽을 것 같네.

마력이든, 체력이든, 정신력이든, 뭐 하나 멀쩡한 게 없었다.

한 번이라도 삐끗하면 그대로 치명상으로 이어지는 줄타기를, 시합 내내 지속한 대가였다.

어찌어찌 우등생 같은 외관과 우아함을 연기하고는 있지만, 솔직히 말하면 체면이고 뭐고 그냥 바닥에 누워서 냉큼 자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나쁘지 않아.

주변에서 들려오는 환호성이, 몸은 괜찮냐고 물어오는 교수들의 격려와 걱정이, 무엇보다도 저 콧대 높은 가짜 천재의 콧대를 눌러버렸다는 사실이, 에리스의 지친 몸과 마음에 끝없는 활력을 불어넣어 주고 있었다.

혹시나 싶어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에리스는, 이내 기대했던 사서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걸 깨닫고 눈을 찡그렸다.

‘이 인간은 진짜 안 왔네.

「어차피 결과가 뻔한데 보러 가서 뭐 합니까. 저는 일로 바쁩니다.」

에리스가 패배하는 결과 따윈 만에 하나라도 없다는 듯한 단언이었다.

그 확고한 믿음에 은근히 기분이 좋아지면서도, 아무리 그래도 진짜 안 오냐는 섭섭함 역시 없지 않았다. 소녀의 마음은 복잡했다.

그러다가 문득, 에리스의 눈이 관객석에 있던 델피나리스와 마주쳤다.

흠칫, 하고 동시에 몸을 떠는 스승과 제자.

허나, 이윽고 결심을 굳힌 얼굴로, 델피나리스가 에리스를 향해 다가왔다.

환영 주문으로 인해 델피나리스의 존재를 깨닫지 못하던 이들이 사태를 알아차리고 소란을 피웠지만, 두 사제는 개의치 않았다.

에리스의 머릿속에 수많은 문구가 떠올랐다.

스승에게 이 승리를 어떻게 어필해야 할까.

나는 부족한 제자가 아니라고, 더 나은 존재를 찾을 필요는 없다며, 어떤 식으로 주장해야 할까.

혹시 아끼던 막내에게 지나치게 심한 짓을 했다고 스승이 화를 내기라도 한다면?

“스승님, 저는, …어?”

에리스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델피나리스가 에리스의 몸을 덥석 끌어안았기 때문이다.

“…미안하구나, 내가 정말로, 미안해….”

물에 젖은 듯한 스승의 목소리를 들은 순간, 에리스의 머릿속에 존재하던 온갖 계산이 백지처럼 사라졌다.

목이 메었다.

눈가가 촉촉해졌다.

에리스는 아무런 말도 없이, 그저 스승을 마주 안았다.

그걸로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