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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화 사서 에른스트(Ernst) (6) - 녹색의 트라우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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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숙사 개인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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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스는 읽고 있던 책의 페이지를 다시금 눈으로 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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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고 있던 동료의 배신으로 함정에 빠진 주인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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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의 아군들은 모두 쓰러지거나 다른 곳에 발목이 잡혀 있고, 주인공 본인도 거의 한계에 가까운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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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말로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과거 주인공이 쓰러트렸던 악당이 나타나 주인공을 구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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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을 한심하다는 듯이 비웃는 악당과 그런 악당에게 반발하면서 다시금 몸을 일으키는 주인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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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서로를 겨누었던 두 명의 칼날이, 이번에는 같은 방향을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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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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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권을 기대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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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아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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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스는 머리를 움켜쥐고 절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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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쿨하고 신비로운 분위기의 에리스만 알고 있던 학생들이 보면 눈을 의심할 광경이었다. 기숙사 개인실의 방음 효과가 뛰어난 것이 참으로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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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스는 절망적인 얼굴로 한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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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대체 왜! 그 인간이 주는 책은 왜 다 이 모양인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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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인이 고백하려는 순간에 자르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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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이 새로운 능력을 각성한 순간에 자르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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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줄곧 호구처럼 당해왔던 주인공이 패악질을 일삼던 악당들에게 복수를 하기 직전에 자르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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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번 매번 절묘한 순간에 이야기를 툭툭 끊어대니, 읽는 입장에선 그야말로 속이 터지고 억장이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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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재미라도 없으면 그냥 집어 던지고 말겠지만, 재미는 있으니 더더욱 악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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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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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숨을 푹 내쉰 에리스는, 그대로 시선을 돌려 시계를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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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습소 시작까지는 다소 여유가 남아 있지만, 그렇다고 잠들기는 애매한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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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마도서의 효과로 피로를 느끼지도 않았기에, 그녀는 조금 이른 시간에 준비를 끝마치고 기숙사를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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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 에리스. 빨리 나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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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습소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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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화한 분위기의 중년 여성이 에리스를 보고는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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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스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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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아침입니다. 위스턴 교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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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강습소 시작도 아니니 그냥 전처럼 메리 언니라고 불러도 돼. 이런 아줌마에게 언니 소리하는 게 싫다면 어쩔 수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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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식 없으면서도 은근히 뼈가 있는 한마디에, 에리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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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위스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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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드리지 강습소의 여러 교수 중 한 명이자, 에리스와 마찬가지로 대마법사 델피나리스의 밑에서 마법을 배운 제자 중 큰 언니 역할을 하던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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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이해관계로 얽힌 델피나리스의 제자들은 서로 간에 썩 사이가 좋다고 하기는 어려웠지만, 그런 그들도 메리 앞에서만은 다들 얌전하게 굴었을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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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스 역시 그 점에선 크게 다르지 않아서, 그녀는 순순히 백기를 들고는 말을 바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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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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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그거면 되는 거야. 다른 애들은 하나같이 ‘이제 어린아이가 아니다’라면서 튕기는데 내가 얼마나 서운한지 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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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 앞에서 쑥스러워서 그런 거겠죠. 아마 주변 시선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곳이면 반응이 다를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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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스의 말에, 메리 교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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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놀라운 말을 들었다는 듯한 그 반응에, 에리스는 의아함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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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히 이상한 말을 한 것 같진 않은데 왜 그러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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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스, 너 요즘 좀 바뀌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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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뀌다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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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같으면 ‘그러게요, 정말 너무하네요.’라고 적당히 맞장구치고 그냥 넘어갔을걸? 남이 무슨 생각으로 어떤 반응을 하는지 같은 건 전혀 신경 안 썼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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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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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전에서 대놓고 하기에는 상당히 직설적인 촌평에, 에리스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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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교수의 말이 터무니없다고 생각해서는 아니었다. 오히려, 에리스가 생각하기에도 교수의 말은 꽤 정곡을 찌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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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에리스였다면 다른 사람의 시점에서 그들을 이해하려는 시도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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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애초에 별다른 관심조차 가지지 않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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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을 탐구하고 자기 실력을 키우는 것만으로도 정신없이 바쁜데, 그런 걸 신경 쓸 여력이 어딨냐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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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지금의 에리스는 딱히 의식할 필요조차 없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들의 심리를 추측하고 변호하는 말을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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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 그런 게 가능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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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 지겹도록 봐왔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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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란 반드시 주인공 본인의 시점만으로 이야기가 진행되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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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의 발언을 타인이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객관적인 시점으로 표현해 주기도 하고, 아예 그 당사자의 시점으로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를 묘사하는 일도 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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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메리 교수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에리스는 별다른 고민조차 없이 생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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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가 같은 입장이라면, 아마 그런 이유로 행동했을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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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에리스가 그동안 해왔던 학습과는 다소 별개의 영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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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를 열심히 배우고 두뇌에 집어넣기 위해 애를 쓴 결과가 아니라, 그냥 ‘누군가는 A라고 생각하고 저지른 일이 누군가에게는 B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구나’ 하고 무의식중에 받아들인 결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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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소 멍해져 있는 에리스의 모습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메리 교수가 갑자기 넉살 좋은 웃음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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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그래도 요즘 얼굴에 좀 더 생기가 생겼다고 느끼긴 했는데, 뭔가 좋은 만남이라도 있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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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뇨. 좋은 만남이라뇨. 그런 거 없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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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스는 정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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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성격 더러운 사서와의 만남이 ‘좋은 만남’이라니,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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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쾌한’ ‘소름 돋는’ ‘짜증 나는’이라면 몰라도, ‘좋은’이라는 건 절대로 어울리는 수식어가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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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후, 그래, 그래. 알았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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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스가 생각하기에 메리 교수의 저 말은 아무리 봐도 빈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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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하면 그녀가 봤던 로맨스 소설에서 본인의 감정을 강하게 부정하는 여주인공을 따스한 눈으로 바라보는 주변 인물의 반응이 딱 저런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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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잠깐 기다려! 여기서 그 예시를 쓰면 안 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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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스는 두 손으로 얼굴을 덮고 마른세수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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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인지 막 소리를 내지르고 싶고 허공에 주먹질과 발길질을 하고 싶은 충동이 쉴 새 없이 솟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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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지금 모습이 메리 교수에게 어떤 식으로 보일지를 객관적으로 인식하면 충동은 더욱 강해지고, 이를 억누르기 위해 몸을 웅크리면 지금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 새삼 자각하게 되는 어마어마한 악순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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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게 독이라는 말을 에리스는 지금 인생의 어느 순간보다도 절절하게 체감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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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메리 교수 역시 이 이상 방치했다간 같은 스승을 모시는 제자의 얼굴이 빨개지다 못해 폭발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다급하게 화제를 전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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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흠. 그보다 에리스, 다음 주 휴일에는 시간을 비워두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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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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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님의 저택에 모일 거야. 새 제자를 들이신다고 하니, 전부는 아니어도 모일 사람은 모이는 게 예의 아니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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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벨로시아의 인간 국보로서, 델피나리스는 일정 주기마다 국내의 여러 유망주들을 제자로 받아들여 국가에 이바지하고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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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피나리스의 제자가 된 학생은 대개 1~2년 정도의 시간을 함께하며 대마법사의 가르침을 받고, 그 뒤에는 각지로 퍼져나가 본인의 길을 걷다가 지금처럼 큰 행사가 있을 때마다 한 번씩 모이는 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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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부터 델피나리스에게 거둬진 탓에 5년 이상 가르침을 받은 에리스에겐 유달리 익숙한 행사이기도 했기에, 참가하는 데 딱히 불만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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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이론서를 연이어 독파한 덕에 부쩍 성장한 실력을 스승에게 뽐내고 싶은 기분도 있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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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의문이 없는 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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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지금은 제자를 받는 시기가 아니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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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위계의 실력자는 신체의 노화를 억제하고 육체의 상태를 전성기에 가깝게 유지할 수 있지만, 그런데도 순수한 수명 그 자체를 늘리는 데는 한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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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법을 통해 리치가 되거나, 신이 직접 내리는 최고위 축복을 받는 등 특별한 수단을 사용하지 않는 한, 6위계라고 해도 한계 수명은 150년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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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저건 어디까지나 사서에 남겨진 ‘최장 기록’이므로, 실질적인 수명은 저보다도 더 짧다고 보는 게 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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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관만 보면 눈앞의 메리 교수처럼 중년의 모습을 한 델피나리스였지만, 실제 연령은 이미 아흔을 넘어가는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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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을 날이 머지않았다는 건 과언이라 해도, 슬슬 인생의 마지막을 준비해도 이상하지 않은 시점이었기에, 라벨로시아의 대마법사는 날이 갈수록 새로운 제자의 수를 줄여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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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처럼 눈에 띄는 아이들을 솔선수범해서 제자로 들이는 일은 거의 없고, 2년에 한 번, 왕실의 부탁에 따라 최소한의 제자를 받는 게 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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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데 아직 제자 모집 시기가 아닌데도 새로운 제자를 받았다고 하니 에리스로선 의문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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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신경 쓰여서 알아봤는데, 우리처럼 스승님 밑에서 함께 먹고 자고 하는 제자는 아닌 모양이야. 이미 강습소에 다니는 학생이거든. 아마 간간이 조언만 해주시는 정도라서, 별 부담 없이 받아들이신 거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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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새로운 제자, 어떤 사람인지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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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룬 백작님의 양자라고 하던 것 같은데? 그분이야 매해 영지 특산물을 선물로 보낼 만큼 스승님을 각별하게 대하시니까, 스승님도 더 신경 써 주신 걸지도 모르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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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교수의 말에는 딱히 큰 모순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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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예 전담으로 맡아서 기르는 것과 어쩌다 한 번씩 조언만 건네는 건 부담이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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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호적인 귀족의 양자이니 더 신경 써줬다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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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어째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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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스는 묘한 찝찝함을 저버릴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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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찝찝함이 어디에서 온 건지 고민하던 에리스는 이내, 같은 강습소의 영애들이 떠들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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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그거 아시나요? 로우튼 강습소에 괴짜가 나타났다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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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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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룬 백작님의 양자인데, 이론 수업은 바닥 중의 바닥인데 실기 수업은 아무도 못 따라온다고 해요. 그래서 이번 교류회 때 대표 중 한 명으로 나온다는 소문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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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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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어난 실력의 괴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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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도 어쩌면, 가까운 시일 내에 에리스 본인과 맞붙게 될지도 모를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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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상대를, 경애하는 스승이 본래 예정을 깨트리면서까지 제자로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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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친 의미 부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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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몇 가지 우연이 겹쳤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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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스의 이성은 그렇게 속삭였지만, 그녀의 마음속에는 본능적인 불쾌감과 경계심이 치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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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어린 시절 스승의 푸념을 들었을 때 마음속에 새겨진 상처이자 트라우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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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질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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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스의 눈이 서늘하게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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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게 열렸던 시야는, 다시금 좁아진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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