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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14 21:31:5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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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화 사서 에른스트(Ernst) (6) - 녹색의 트라우마

기숙사 개인실.

에리스는 읽고 있던 책의 페이지를 다시금 눈으로 훑었다.

믿고 있던 동료의 배신으로 함정에 빠진 주인공.

기존의 아군들은 모두 쓰러지거나 다른 곳에 발목이 잡혀 있고, 주인공 본인도 거의 한계에 가까운 상황.

그야말로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과거 주인공이 쓰러트렸던 악당이 나타나 주인공을 구해낸다.

주인공을 한심하다는 듯이 비웃는 악당과 그런 악당에게 반발하면서 다시금 몸을 일으키는 주인공.

한때 서로를 겨누었던 두 명의 칼날이, 이번에는 같은 방향을 향한다.

그리고─

[─다음 권을 기대해 주세요!]

“아아아아악!!”

에리스는 머리를 움켜쥐고 절규했다.

평소 쿨하고 신비로운 분위기의 에리스만 알고 있던 학생들이 보면 눈을 의심할 광경이었다. 기숙사 개인실의 방음 효과가 뛰어난 것이 참으로 다행이었다.

에리스는 절망적인 얼굴로 한탄했다.

“대체, 대체 왜! 그 인간이 주는 책은 왜 다 이 모양인 거죠?!”

히로인이 고백하려는 순간에 자르거나!

주인공이 새로운 능력을 각성한 순간에 자르거나!

그동안 줄곧 호구처럼 당해왔던 주인공이 패악질을 일삼던 악당들에게 복수를 하기 직전에 자르거나!

매번 매번 절묘한 순간에 이야기를 툭툭 끊어대니, 읽는 입장에선 그야말로 속이 터지고 억장이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재미라도 없으면 그냥 집어 던지고 말겠지만, 재미는 있으니 더더욱 악질이었다.

“하아.”

한숨을 푹 내쉰 에리스는, 그대로 시선을 돌려 시계를 확인했다.

강습소 시작까지는 다소 여유가 남아 있지만, 그렇다고 잠들기는 애매한 시간.

어차피 마도서의 효과로 피로를 느끼지도 않았기에, 그녀는 조금 이른 시간에 준비를 끝마치고 기숙사를 나섰다.

“어머, 에리스. 빨리 나왔구나.”

강습소 입구.

온화한 분위기의 중년 여성이 에리스를 보고는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에리스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좋은 아침입니다. 위스턴 교수님.”

“아직 강습소 시작도 아니니 그냥 전처럼 메리 언니라고 불러도 돼. 이런 아줌마에게 언니 소리하는 게 싫다면 어쩔 수 없지만.”

격식 없으면서도 은근히 뼈가 있는 한마디에, 에리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메리 위스턴.

알드리지 강습소의 여러 교수 중 한 명이자, 에리스와 마찬가지로 대마법사 델피나리스의 밑에서 마법을 배운 제자 중 큰 언니 역할을 하던 인물이었다.

여러 이해관계로 얽힌 델피나리스의 제자들은 서로 간에 썩 사이가 좋다고 하기는 어려웠지만, 그런 그들도 메리 앞에서만은 다들 얌전하게 굴었을 정도.

에리스 역시 그 점에선 크게 다르지 않아서, 그녀는 순순히 백기를 들고는 말을 바꿨다.

“메리 언니.”

“그래, 그거면 되는 거야. 다른 애들은 하나같이 ‘이제 어린아이가 아니다’라면서 튕기는데 내가 얼마나 서운한지 아니?”

“남들 앞에서 쑥스러워서 그런 거겠죠. 아마 주변 시선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곳이면 반응이 다를 거예요.”

에리스의 말에, 메리 교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마치 놀라운 말을 들었다는 듯한 그 반응에, 에리스는 의아함을 느꼈다.

딱히 이상한 말을 한 것 같진 않은데 왜 그러는 걸까.

“에리스, 너 요즘 좀 바뀌었구나?”

“바뀌다니요?”

“예전 같으면 ‘그러게요, 정말 너무하네요.’라고 적당히 맞장구치고 그냥 넘어갔을걸? 남이 무슨 생각으로 어떤 반응을 하는지 같은 건 전혀 신경 안 썼을 텐데.”

“…….”

면전에서 대놓고 하기에는 상당히 직설적인 촌평에, 에리스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메리 교수의 말이 터무니없다고 생각해서는 아니었다. 오히려, 에리스가 생각하기에도 교수의 말은 꽤 정곡을 찌르고 있었다.

과거의 에리스였다면 다른 사람의 시점에서 그들을 이해하려는 시도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애초에 별다른 관심조차 가지지 않았겠지.

마법을 탐구하고 자기 실력을 키우는 것만으로도 정신없이 바쁜데, 그런 걸 신경 쓸 여력이 어딨냐면서.

그런데 지금의 에리스는 딱히 의식할 필요조차 없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들의 심리를 추측하고 변호하는 말을 내뱉었다.

어째서 그런 게 가능했는가?

‘…그야, 지겹도록 봐왔으니까.

소설이란 반드시 주인공 본인의 시점만으로 이야기가 진행되지는 않는다.

주인공의 발언을 타인이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객관적인 시점으로 표현해 주기도 하고, 아예 그 당사자의 시점으로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를 묘사하는 일도 흔하다.

그러니까 메리 교수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에리스는 별다른 고민조차 없이 생각한 것이다.

자기가 같은 입장이라면, 아마 그런 이유로 행동했을 거라고.

이건 에리스가 그동안 해왔던 학습과는 다소 별개의 영역이었다.

무언가를 열심히 배우고 두뇌에 집어넣기 위해 애를 쓴 결과가 아니라, 그냥 ‘누군가는 A라고 생각하고 저지른 일이 누군가에게는 B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구나’ 하고 무의식중에 받아들인 결과니까.

다소 멍해져 있는 에리스의 모습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메리 교수가 갑자기 넉살 좋은 웃음을 흘렸다.

“안 그래도 요즘 얼굴에 좀 더 생기가 생겼다고 느끼긴 했는데, 뭔가 좋은 만남이라도 있었니?”

“아뇨. 좋은 만남이라뇨. 그런 거 없었어요.”

에리스는 정색했다.

그 성격 더러운 사서와의 만남이 ‘좋은 만남’이라니,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불쾌한’ ‘소름 돋는’ ‘짜증 나는’이라면 몰라도, ‘좋은’이라는 건 절대로 어울리는 수식어가 아니에요.”

“후후, 그래, 그래. 알았단다.”

에리스가 생각하기에 메리 교수의 저 말은 아무리 봐도 빈말이었다.

왜냐하면 그녀가 봤던 로맨스 소설에서 본인의 감정을 강하게 부정하는 여주인공을 따스한 눈으로 바라보는 주변 인물의 반응이 딱 저런 느낌─

‘─아니, 잠깐 기다려! 여기서 그 예시를 쓰면 안 되잖아!!

에리스는 두 손으로 얼굴을 덮고 마른세수를 했다.

어째서인지 막 소리를 내지르고 싶고 허공에 주먹질과 발길질을 하고 싶은 충동이 쉴 새 없이 솟구쳤다.

자신의 지금 모습이 메리 교수에게 어떤 식으로 보일지를 객관적으로 인식하면 충동은 더욱 강해지고, 이를 억누르기 위해 몸을 웅크리면 지금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 새삼 자각하게 되는 어마어마한 악순환이었다.

아는 게 독이라는 말을 에리스는 지금 인생의 어느 순간보다도 절절하게 체감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메리 교수 역시 이 이상 방치했다간 같은 스승을 모시는 제자의 얼굴이 빨개지다 못해 폭발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다급하게 화제를 전환했다.

“어흠. 그보다 에리스, 다음 주 휴일에는 시간을 비워두렴.”

“시간… 이요?”

“스승님의 저택에 모일 거야. 새 제자를 들이신다고 하니, 전부는 아니어도 모일 사람은 모이는 게 예의 아니겠니?”

라벨로시아의 인간 국보로서, 델피나리스는 일정 주기마다 국내의 여러 유망주들을 제자로 받아들여 국가에 이바지하고는 했다.

델피나리스의 제자가 된 학생은 대개 1~2년 정도의 시간을 함께하며 대마법사의 가르침을 받고, 그 뒤에는 각지로 퍼져나가 본인의 길을 걷다가 지금처럼 큰 행사가 있을 때마다 한 번씩 모이는 식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델피나리스에게 거둬진 탓에 5년 이상 가르침을 받은 에리스에겐 유달리 익숙한 행사이기도 했기에, 참가하는 데 딱히 불만은 없었다.

최근 이론서를 연이어 독파한 덕에 부쩍 성장한 실력을 스승에게 뽐내고 싶은 기분도 있었고.

다만, 의문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은 제자를 받는 시기가 아니지 않나요?”

6위계의 실력자는 신체의 노화를 억제하고 육체의 상태를 전성기에 가깝게 유지할 수 있지만, 그런데도 순수한 수명 그 자체를 늘리는 데는 한계가 있다.

외법을 통해 리치가 되거나, 신이 직접 내리는 최고위 축복을 받는 등 특별한 수단을 사용하지 않는 한, 6위계라고 해도 한계 수명은 150년 정도.

물론 저건 어디까지나 사서에 남겨진 ‘최장 기록’이므로, 실질적인 수명은 저보다도 더 짧다고 보는 게 옳았다.

외관만 보면 눈앞의 메리 교수처럼 중년의 모습을 한 델피나리스였지만, 실제 연령은 이미 아흔을 넘어가는 상황.

죽을 날이 머지않았다는 건 과언이라 해도, 슬슬 인생의 마지막을 준비해도 이상하지 않은 시점이었기에, 라벨로시아의 대마법사는 날이 갈수록 새로운 제자의 수를 줄여나가고 있었다.

전처럼 눈에 띄는 아이들을 솔선수범해서 제자로 들이는 일은 거의 없고, 2년에 한 번, 왕실의 부탁에 따라 최소한의 제자를 받는 게 전부.

헌데 아직 제자 모집 시기가 아닌데도 새로운 제자를 받았다고 하니 에리스로선 의문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나도 신경 쓰여서 알아봤는데, 우리처럼 스승님 밑에서 함께 먹고 자고 하는 제자는 아닌 모양이야. 이미 강습소에 다니는 학생이거든. 아마 간간이 조언만 해주시는 정도라서, 별 부담 없이 받아들이신 거 아닐까?”

“그 새로운 제자, 어떤 사람인지 아시나요?”

“그림룬 백작님의 양자라고 하던 것 같은데? 그분이야 매해 영지 특산물을 선물로 보낼 만큼 스승님을 각별하게 대하시니까, 스승님도 더 신경 써 주신 걸지도 모르겠네.”

메리 교수의 말에는 딱히 큰 모순이 없었다.

아예 전담으로 맡아서 기르는 것과 어쩌다 한 번씩 조언만 건네는 건 부담이 다르다.

우호적인 귀족의 양자이니 더 신경 써줬다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에리스는 묘한 찝찝함을 저버릴 수 없었다.

그 찝찝함이 어디에서 온 건지 고민하던 에리스는 이내, 같은 강습소의 영애들이 떠들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그거 아시나요? 로우튼 강습소에 괴짜가 나타났다고 하네요.」

「괴짜요?」

「그림룬 백작님의 양자인데, 이론 수업은 바닥 중의 바닥인데 실기 수업은 아무도 못 따라온다고 해요. 그래서 이번 교류회 때 대표 중 한 명으로 나온다는 소문이 있어요.」

“…….”

뛰어난 실력의 괴짜.

그것도 어쩌면, 가까운 시일 내에 에리스 본인과 맞붙게 될지도 모를 인물.

그런 상대를, 경애하는 스승이 본래 예정을 깨트리면서까지 제자로 받아들였다.

지나친 의미 부여다.

그저 몇 가지 우연이 겹쳤을 뿐이다.

에리스의 이성은 그렇게 속삭였지만, 그녀의 마음속에는 본능적인 불쾌감과 경계심이 치솟았다.

그건 어린 시절 스승의 푸념을 들었을 때 마음속에 새겨진 상처이자 트라우마였다.

‘내가 질 것 같아?

에리스의 눈이 서늘하게 빛났다.

넓게 열렸던 시야는, 다시금 좁아진 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