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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화 황태자 알론드(Alondre) (5) - 인간, 악마, 황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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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보기는 좋지만, 막상 실속은 없는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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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벨로시아(Ravellocia) 왕국의 상인, 트래버스 브라운(Travers Brown)을 향한 주변의 평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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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어난 외모와 화려한 언변을 지닌 그는 사람들의 기대감을 부추기고 호의를 사는 데 능했고, 이 또한 상인으로서 나름 중요한 자질이긴 했지만, 딱 거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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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어난 물건이나 인재를 알아보는 능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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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의 흐름을 간파하고 거기에 올라타는 능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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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크를 감수해서라도 위험한 승부에 나서고, 그 판에서 승리를 얻어내는 능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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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국에서도 손꼽히는 거상이었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지니고 있었던 수많은 능력 대부분을 트래버스는 제대로 물려받지 못했고, 그렇다고 트래버스를 대체할 만한 다른 혈족이나 유능한 2인자가 있던 것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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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운 상회는 역대 상주들이 거의 원맨쇼로 끌어 나가던, 전통 아닌 전통이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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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회 자체의 체급이 크고, 대대로 쌓아온 여러 기반이 남아있기에 그럭저럭 버티고 있긴 했지만, 이대로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상황이 더욱 나빠질 것은 너무나도 뻔한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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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과 기대가 뒤섞인 주변의 시선에 고통스러워하던 트래버스의 꿈에, 수수께끼의 존재가 나타난 것은 바로 그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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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들어 보이네. 고민이라도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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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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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을 알 수 없는 어둠 너머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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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꿈이라고 생각해서였을까, 아니면 정체 모를 목소리가 너무나도 상냥하고 자애롭게 느껴져서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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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래버스는 푸념이라도 하듯이 고민을 털어놓았고, 목소리는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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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에서 깨어난 뒤, 트래버스는 이상한 꿈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딱히 불쾌감을 느끼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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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속으로 쌓아왔던 이야기를 토해내서인지, 일종의 후련함과 개운함마저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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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현상이 나타난 것은, 다름 아닌 그때부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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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회의 약점을 움켜쥐고 지속적으로 돈을 뜯어내던 범죄자 집단이, 내부 항쟁으로 자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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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칫거리가 사라진 것에 트래버스는 기뻐했고, 좋은 기분으로 잠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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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꿈속에서 수수께끼의 존재가 다시 한번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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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도움은 어때? 조금은 고민이 해결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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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래버스는 몽롱한 정신으로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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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움이 되었다. 덕분에 고민이 해결됐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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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가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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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그러면 좀 더 도와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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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래버스는 몽롱한 상태로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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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와주겠다는데 굳이 거절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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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에서 깨어난 뒤에는 조금 찝찝한 기분을 느꼈지만, 이내 바쁜 일상 속에서 잊어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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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며칠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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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래버스가 몇 번이고 찾아가 고개를 숙였는데도 납품을 거절하던 장인이, 제 발로 찾아와 계약을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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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날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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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래버스는 다시 한번 수수께끼의 존재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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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물은 마음에 들었니? 네 고민이 해결된 것 같아서, 나도 기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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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래버스는 질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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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누구고, 무슨 목적으로 나를 돕는 거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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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가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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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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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건 트래버스에게 ‘도움’이 필요한지 어떨지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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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때, 또 도와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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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하게 질문하는 목소리에게, 트래버스는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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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능적인 불길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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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한 거절의 말에도, 목소리는 키득거리며 웃을 뿐 화를 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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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언제든 도움이 필요하다면 자기 전에 자신을 부르라고 말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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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조금 더 시간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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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래버스와 그가 이끄는 브라운 상회는 위기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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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롭게 부임한 관료가 영지 내에서 상행을 허가하는 대가로 무리한 뇌물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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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료의 요구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욱 커졌고, 트래버스의 고뇌 역시 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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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트래버스는 다시 한번 수수께끼의 목소리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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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구나. 고생이 많았네. 조금만 기다려보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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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 도움을 거절한 주제에 손바닥을 뒤집어 갑자기 도움을 요청했으니, 상대가 불쾌해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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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트래버스의 예상과 달리, 목소리는 무척이나 자상하고 배려 깊은 태도로 그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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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운 상회는 꿈쩍도 하지 않았는데 불구하고, 관료의 무리한 뇌물 요구에 고통받던 다른 피해자가 그 관료를 고발해 내쫓아 버렸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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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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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래버스가 도움을 요청하면, 목소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 부탁을 들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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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반복되면 반복될수록, 트래버스는 자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가 약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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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힘들게 고민하고 노력해서 무언가를 해결하는 것보다, 그냥 악마에게 부탁하는 편이 편리하고 안락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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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래버스가 하는 일마다 성공을 이루니 브라운 상회는 점차 그 위세를 키워갔고, 부하들은 유능한 상회주를 존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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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래버스는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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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어느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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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하지만 이제 가봐야할 것 같네. 앞으로는 도와줄 수 없을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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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가 내뱉은 말에, 트래버스는 딛고 있던 바닥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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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애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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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를 버리지 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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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발 떠나지 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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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내 되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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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처럼 대가 없이 도와줄 수는 없어. 그래도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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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래버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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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영광을, 이 행복을, 이 안락함을 계속해서 누릴 수만 있다면, 그는 어떤 대가든 치를 각오가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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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래버스의 말에, 목소리가 키득거리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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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래버스의 시야를 가리고 있던 어둠이 옅어지고, 그 너머에서 사람의 형상을 한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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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흑 같은 흑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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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옥 같은 붉은 눈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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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죽을 베이스로 한, 노출이 심한 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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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막이 달린 날개와 뿔, 기나긴 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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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너무나 아름다운 악마의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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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을 보는 것만으로 가슴 속에 황홀함이 차오르고, 눈길을 받는 것만으로도 몸이 덜덜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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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래버스. 트래버스 브라운. 나의 말을 잘 듣겠노라고. 내가 원한다면 무엇이든 하겠노라고. 맹세할 수 있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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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의 목소리에, 이전 같은 상냥함과 나긋나긋함은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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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목소리는 지극히 오만했고, 트래버스를 깔보고 하찮게 여기는 감정을 숨기려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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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도 트래버스는 감히 반발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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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불만을 품는 것조차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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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의 ‘선물’을 받으며 서서히 녹아내리던 그의 영혼은, 악마의 모습을 눈으로 인식한 그 시점에서 완전히 굴복해 버린 뒤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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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종과 충성을 맹세하는 트래버스의 모습을 악마는, 아니 대악마 루시드라는 따분한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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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인당하기 전이든, 다시 부활한 지금이든, 인간이란 크게 변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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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그녀는 라벨로시아 굴지의 대상회를 손에 움켜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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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제른 제국. 금운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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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오, 라벨로시아 왕국이라. 직접 가본 적은 없지만, 이야기로 들은 바로는 꽤 좋은 곳이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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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크기로 따지면 비르카보다 작았던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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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토의 넓이는 중요하지만, 절대적인 건 아니라네. 라벨로시아는 크기는 작아도 정치적으로는 상당히 안정되어 있고, 치안이나 전반적인 교육 수준도 높다고 하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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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능한 통치로 인해 뛰어난 잠재력을 제대로 살리지 못했던 비르카 왕국과는 반대로, 국토 자체는 좁은 편이나 준수한 통치자에 의해 안정된 번영을 꾸려나가는 나라. 그것이 황태자가 알고 있는 라벨로시아라는 국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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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다음 분신은 뭐로 하려고? 왕국 최강의 기사가 돼서 용이라도 썰 거야? 아니면 흑막 귀족이 되어서 나라를 갈아엎을 거야? 그것도 아니면 전설의 암살자 포지션으로 국왕 목이라도 벨래? 어지간한 신분은 위조할 수 있을 만큼 기반을 만들어놨으니까, 뭐든 말해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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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드라의 질문에, 황태자가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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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 너무 도파민에 찌든 것 같군. 그렇게 자극적이고 격렬한 것만이 취미 생활이 아니라네. 가는 곳마다 평지풍파를 일으켜서야 주변에 민폐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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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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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드라는 눈을 끔뻑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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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헤벌쭉 입을 벌린 채, 뭐라 대꾸조차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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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귀로 들은 저 무시무시하고 어처구니없는 말을 해석하고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뇌의 처리 능력을 다른 곳에 돌릴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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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자극적인 것만이 좋은 게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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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곳마다 평지풍파가 뭐가 어쩌고 어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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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에게 채식 요리에 관한 설법을 듣는 듯한 상황에 루시드라가 굳어버린 사이, 황태자는 태연스레 말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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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게는 가끔 자신의 길을 돌아보는 작업이 필요하지. 그런 의미에서, 나는 조금 반성하고 있다네. 모험가는 순수한 동경심으로 선택했고, 집사는 취미와 의무감이 적절한 밸런스를 이루었지. 허나 괴도는 의무감 쪽이 취미를 앞섰던 것 같네. 머릿속에 꿈꾸던 ‘괴도’의 이미지와 현실의 괴리로 인해 분신의 행동 방향성이 다소 흔들리기도 했고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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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적으로 달리아라는 영웅의 씨앗을 만났기에 일이 좋게 풀리기는 했으나, 도팽 그 자체의 행적만으로 따진다면 여러모로 아쉬움이 남는 황태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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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로, 이쯤에서 다시 한번 초심을 되찾을까 하네. 의무감이 어쩌고 하는 건 전부 내려놓고, 순수하게 평온한 일상을 즐기기로 말이야. 라벨로시아 왕국이라면 마침 적당하군. 비르카 정도로 문제가 많은 곳이 아니니, 힐링에는 딱 좋은 느낌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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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이라면서 다 갈아엎는 건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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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했지만, 나는 기본적으로 규율과 질서를 존중하는 타입이라네. 의도적으로 그걸 무시하는 캐릭터를 잡지 않은 이상은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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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드라가 보기에 신뢰성이라고는 쥐뿔도 없는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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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이 도심 한복판에서 얌전히 정좌하고 있는다고 도시 사람들까지 평온할 리가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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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 광경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으면 꽤 재미있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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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어도 시시한 인간들 상대로 늘 하던 타락 유도나 반복하는 것보단 즐거울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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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근한 기대로 눈을 빛내며, 루시드라가 질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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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무슨 신분이 필요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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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가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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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긋하게 책을 읽을 수 있는 입장이면 좋겠군. 황태자로서 읽는 건 기본적으로 필요에 의한 게 많으니까. 여러 가지 잡학에 손을 뻗기 위한 지식을 쌓고 싶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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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사서? 이건 일을 해야 하니까 안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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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나쁘지 않은 발상이네. 책이란 혼자 읽는 것도 좋지만, 감상을 누군가와 나누는 것도 즐거운 법이니까. 자연스럽게 책을 찾는 이들과 교류할 수 있는 직업은 좋은 포지션이라고 할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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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는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이내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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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알드리지(Aldridge)라는 도시 쪽으로 알아봐 줄 수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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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뭐 아는 사람이라도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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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법 스승 중 한 분의 고향이 그곳이거든. 말로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었지만, 이왕이면 직접 눈으로 보고 싶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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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알아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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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드라는 별 고민 없이 수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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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고생은 그녀가 하는 게 아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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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은 정해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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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른스트(Ernst)로 하지. 성은 현지 상황에 맞춰 바꾸기로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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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서 에른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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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분신이 결정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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