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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14 21:31:5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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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화 황태자 알론드(Alondre) (5) - 인간, 악마, 황태자

겉보기는 좋지만, 막상 실속은 없는 인간.

라벨로시아(Ravellocia) 왕국의 상인, 트래버스 브라운(Travers Brown)을 향한 주변의 평가였다.

뛰어난 외모와 화려한 언변을 지닌 그는 사람들의 기대감을 부추기고 호의를 사는 데 능했고, 이 또한 상인으로서 나름 중요한 자질이긴 했지만, 딱 거기까지.

뛰어난 물건이나 인재를 알아보는 능력.

돈의 흐름을 간파하고 거기에 올라타는 능력.

리스크를 감수해서라도 위험한 승부에 나서고, 그 판에서 승리를 얻어내는 능력.

왕국에서도 손꼽히는 거상이었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지니고 있었던 수많은 능력 대부분을 트래버스는 제대로 물려받지 못했고, 그렇다고 트래버스를 대체할 만한 다른 혈족이나 유능한 2인자가 있던 것도 아니었다.

브라운 상회는 역대 상주들이 거의 원맨쇼로 끌어 나가던, 전통 아닌 전통이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상회 자체의 체급이 크고, 대대로 쌓아온 여러 기반이 남아있기에 그럭저럭 버티고 있긴 했지만, 이대로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상황이 더욱 나빠질 것은 너무나도 뻔한 일.

불안과 기대가 뒤섞인 주변의 시선에 고통스러워하던 트래버스의 꿈에, 수수께끼의 존재가 나타난 것은 바로 그때였다.

「─힘들어 보이네. 고민이라도 있어?」

상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끝을 알 수 없는 어둠 너머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을 뿐.

단순한 꿈이라고 생각해서였을까, 아니면 정체 모를 목소리가 너무나도 상냥하고 자애롭게 느껴져서였을까.

트래버스는 푸념이라도 하듯이 고민을 털어놓았고, 목소리는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잠에서 깨어난 뒤, 트래버스는 이상한 꿈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딱히 불쾌감을 느끼지는 않았다.

아니, 속으로 쌓아왔던 이야기를 토해내서인지, 일종의 후련함과 개운함마저 느꼈다.

이상 현상이 나타난 것은, 다름 아닌 그때부터였다.

상회의 약점을 움켜쥐고 지속적으로 돈을 뜯어내던 범죄자 집단이, 내부 항쟁으로 자멸했다.

골칫거리가 사라진 것에 트래버스는 기뻐했고, 좋은 기분으로 잠에 빠졌다.

그리고, 꿈속에서 수수께끼의 존재가 다시 한번 나타났다.

「─내 도움은 어때? 조금은 고민이 해결됐어?」

트래버스는 몽롱한 정신으로 대답했다.

도움이 되었다. 덕분에 고민이 해결됐다고.

목소리가 물었다.

「그래? 그러면 좀 더 도와줄까?」

트래버스는 몽롱한 상태로 고개를 끄덕였다.

도와주겠다는데 굳이 거절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잠에서 깨어난 뒤에는 조금 찝찝한 기분을 느꼈지만, 이내 바쁜 일상 속에서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로부터 며칠 뒤.

트래버스가 몇 번이고 찾아가 고개를 숙였는데도 납품을 거절하던 장인이, 제 발로 찾아와 계약을 요구했다.

그리고 그날 밤.

트래버스는 다시 한번 수수께끼의 존재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선물은 마음에 들었니? 네 고민이 해결된 것 같아서, 나도 기쁘네.」

트래버스는 질문했다.

너는 누구고, 무슨 목적으로 나를 돕는 거냐고.

목소리가 대답했다.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트래버스에게 ‘도움’이 필요한지 어떨지라고.

「어때, 또 도와줄까?」

달콤하게 질문하는 목소리에게, 트래버스는 고개를 저었다.

본능적인 불길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강한 거절의 말에도, 목소리는 키득거리며 웃을 뿐 화를 내지 않았다.

그저 언제든 도움이 필요하다면 자기 전에 자신을 부르라고 말했을 뿐이었다.

그로부터 조금 더 시간이 흘렀다.

트래버스와 그가 이끄는 브라운 상회는 위기에 빠졌다.

새롭게 부임한 관료가 영지 내에서 상행을 허가하는 대가로 무리한 뇌물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관료의 요구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욱 커졌고, 트래버스의 고뇌 역시 깊어졌다.

결국 트래버스는 다시 한번 수수께끼의 목소리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그랬구나. 고생이 많았네. 조금만 기다려보렴.」

이전에 도움을 거절한 주제에 손바닥을 뒤집어 갑자기 도움을 요청했으니, 상대가 불쾌해할지도 모른다.

그런 트래버스의 예상과 달리, 목소리는 무척이나 자상하고 배려 깊은 태도로 그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브라운 상회는 꿈쩍도 하지 않았는데 불구하고, 관료의 무리한 뇌물 요구에 고통받던 다른 피해자가 그 관료를 고발해 내쫓아 버렸기 때문이다.

이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트래버스가 도움을 요청하면, 목소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 부탁을 들어주었다.

그것이 반복되면 반복될수록, 트래버스는 자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가 약해졌다.

그가 힘들게 고민하고 노력해서 무언가를 해결하는 것보다, 그냥 악마에게 부탁하는 편이 편리하고 안락했기 때문이다.

트래버스가 하는 일마다 성공을 이루니 브라운 상회는 점차 그 위세를 키워갔고, 부하들은 유능한 상회주를 존경했다.

트래버스는 행복했다.

그러던 어느 날.

「미안하지만 이제 가봐야할 것 같네. 앞으로는 도와줄 수 없을 것 같아.」

목소리가 내뱉은 말에, 트래버스는 딛고 있던 바닥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그는 애원했다.

자기를 버리지 말라고.

제발 떠나지 말라고.

목소리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내 되물었다.

「전처럼 대가 없이 도와줄 수는 없어. 그래도 괜찮아?」

트래버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이 영광을, 이 행복을, 이 안락함을 계속해서 누릴 수만 있다면, 그는 어떤 대가든 치를 각오가 되어 있었다.

트래버스의 말에, 목소리가 키득거리며 웃었다.

트래버스의 시야를 가리고 있던 어둠이 옅어지고, 그 너머에서 사람의 형상을 한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칠흑 같은 흑발.

홍옥 같은 붉은 눈동자.

가죽을 베이스로 한, 노출이 심한 복장.

피막이 달린 날개와 뿔, 기나긴 꼬리.

그것은 너무나 아름다운 악마의 모습이었다.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 가슴 속에 황홀함이 차오르고, 눈길을 받는 것만으로도 몸이 덜덜 떨렸다.

「트래버스. 트래버스 브라운. 나의 말을 잘 듣겠노라고. 내가 원한다면 무엇이든 하겠노라고. 맹세할 수 있겠니?」

악마의 목소리에, 이전 같은 상냥함과 나긋나긋함은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다.

그녀의 목소리는 지극히 오만했고, 트래버스를 깔보고 하찮게 여기는 감정을 숨기려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트래버스는 감히 반발하지 못했다.

아니, 불만을 품는 것조차 하지 못했다.

악마의 ‘선물’을 받으며 서서히 녹아내리던 그의 영혼은, 악마의 모습을 눈으로 인식한 그 시점에서 완전히 굴복해 버린 뒤였기 때문이다.

굴종과 충성을 맹세하는 트래버스의 모습을 악마는, 아니 대악마 루시드라는 따분한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

봉인당하기 전이든, 다시 부활한 지금이든, 인간이란 크게 변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면서.

그렇게, 그녀는 라벨로시아 굴지의 대상회를 손에 움켜쥐었다.


아이제른 제국. 금운궁.

“호오, 라벨로시아 왕국이라. 직접 가본 적은 없지만, 이야기로 들은 바로는 꽤 좋은 곳이었지.”

“그래? 크기로 따지면 비르카보다 작았던 것 같은데.”

“영토의 넓이는 중요하지만, 절대적인 건 아니라네. 라벨로시아는 크기는 작아도 정치적으로는 상당히 안정되어 있고, 치안이나 전반적인 교육 수준도 높다고 하더군.”

무능한 통치로 인해 뛰어난 잠재력을 제대로 살리지 못했던 비르카 왕국과는 반대로, 국토 자체는 좁은 편이나 준수한 통치자에 의해 안정된 번영을 꾸려나가는 나라. 그것이 황태자가 알고 있는 라벨로시아라는 국가였다.

“그래서, 다음 분신은 뭐로 하려고? 왕국 최강의 기사가 돼서 용이라도 썰 거야? 아니면 흑막 귀족이 되어서 나라를 갈아엎을 거야? 그것도 아니면 전설의 암살자 포지션으로 국왕 목이라도 벨래? 어지간한 신분은 위조할 수 있을 만큼 기반을 만들어놨으니까, 뭐든 말해봐.”

루시드라의 질문에, 황태자가 대답했다.

“자네, 너무 도파민에 찌든 것 같군. 그렇게 자극적이고 격렬한 것만이 취미 생활이 아니라네. 가는 곳마다 평지풍파를 일으켜서야 주변에 민폐가 아닌가.”

“…….”

루시드라는 눈을 끔뻑거렸다.

그녀는 헤벌쭉 입을 벌린 채, 뭐라 대꾸조차 하지 못했다.

방금 귀로 들은 저 무시무시하고 어처구니없는 말을 해석하고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뇌의 처리 능력을 다른 곳에 돌릴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뭐? 자극적인 것만이 좋은 게 아니야?

가는 곳마다 평지풍파가 뭐가 어쩌고 어째?

사자에게 채식 요리에 관한 설법을 듣는 듯한 상황에 루시드라가 굳어버린 사이, 황태자는 태연스레 말을 이어갔다.

“사람에게는 가끔 자신의 길을 돌아보는 작업이 필요하지. 그런 의미에서, 나는 조금 반성하고 있다네. 모험가는 순수한 동경심으로 선택했고, 집사는 취미와 의무감이 적절한 밸런스를 이루었지. 허나 괴도는 의무감 쪽이 취미를 앞섰던 것 같네. 머릿속에 꿈꾸던 ‘괴도’의 이미지와 현실의 괴리로 인해 분신의 행동 방향성이 다소 흔들리기도 했고 말이야.”

결과적으로 달리아라는 영웅의 씨앗을 만났기에 일이 좋게 풀리기는 했으나, 도팽 그 자체의 행적만으로 따진다면 여러모로 아쉬움이 남는 황태자였다.

“고로, 이쯤에서 다시 한번 초심을 되찾을까 하네. 의무감이 어쩌고 하는 건 전부 내려놓고, 순수하게 평온한 일상을 즐기기로 말이야. 라벨로시아 왕국이라면 마침 적당하군. 비르카 정도로 문제가 많은 곳이 아니니, 힐링에는 딱 좋은 느낌이겠지.”

“…힐링이라면서 다 갈아엎는 건 아니고?”

“말했지만, 나는 기본적으로 규율과 질서를 존중하는 타입이라네. 의도적으로 그걸 무시하는 캐릭터를 잡지 않은 이상은 말이지.”

루시드라가 보기에 신뢰성이라고는 쥐뿔도 없는 말이었다.

태풍이 도심 한복판에서 얌전히 정좌하고 있는다고 도시 사람들까지 평온할 리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그 광경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으면 꽤 재미있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

적어도 시시한 인간들 상대로 늘 하던 타락 유도나 반복하는 것보단 즐거울 터였다.

은근한 기대로 눈을 빛내며, 루시드라가 질문했다.

“그래서, 무슨 신분이 필요한데?”

황태자가 대답했다.

“느긋하게 책을 읽을 수 있는 입장이면 좋겠군. 황태자로서 읽는 건 기본적으로 필요에 의한 게 많으니까. 여러 가지 잡학에 손을 뻗기 위한 지식을 쌓고 싶네.”

“그러면 사서? 이건 일을 해야 하니까 안 되나?”

“아니, 나쁘지 않은 발상이네. 책이란 혼자 읽는 것도 좋지만, 감상을 누군가와 나누는 것도 즐거운 법이니까. 자연스럽게 책을 찾는 이들과 교류할 수 있는 직업은 좋은 포지션이라고 할 수 있겠지.”

황태자는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이내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혹시 알드리지(Aldridge)라는 도시 쪽으로 알아봐 줄 수 있나?”

“왜? 뭐 아는 사람이라도 있어?”

“내 마법 스승 중 한 분의 고향이 그곳이거든. 말로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었지만, 이왕이면 직접 눈으로 보고 싶군.”

“뭐, 알아볼게.”

루시드라는 별 고민 없이 수긍했다.

어차피 고생은 그녀가 하는 게 아니었으니까.

“이름은 정해놨어?”

“에른스트(Ernst)로 하지. 성은 현지 상황에 맞춰 바꾸기로 하고.”

사서 에른스트.

새로운 분신이 결정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