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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14 21:31:5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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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화 거지 그리츠(Gritz) (13) - 왕도적인 클리셰

주민들의 인식을 이용해 수호신의 자리를 강탈한다.

이 작전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우선 그레이스가 수호신의 능력을 활용하는 모습을 사람들 앞에서 선보일 필요가 있었다.

‘수호신이 죽은 뒤에 힘을 이어받을 후보자’와 ‘이미 수호신의 능력을 가진 예비 수호신’은 전혀 다른 존재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이 작전은 절대로 장기전을 상정해서는 안 되는 작전이었다.

수호신이 아무리 수동적인 성향이 강하다고 한들, 자신의 힘을 직접적으로 빼앗기는 상황에서까지 얌전히 있어 주리라는 건 너무 낙관적인 사고였으니까.

고로, 그리츠와 그레이스가 짜낸 작전의 순번은 다음과 같았다.

우선은 은은한 소문, 그러니까 이런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식으로 사람들에게 그레이스가 어쩌면 차기 수호신이 될지도 모른다는 떡밥만 깔아둔다.

그리고 가장 사람이 많이 모인 순간, 예를 들면 축제의 마지막 날 같은 순간 수많은 이들이 보는 앞에서 성대한 쇼를 벌인다.

본격적으로 불을 붙이기 전에 일단 마른 장작과 기름부터 깔아두는 작전은 성공적이었고, 그레이스가 선보인 기적의 소문은 놀라우리만큼 빠르게 영지 전체를 불태웠다.

이제 남은 공정은 하나.

자기 재산이 실시간으로 줄어드는 모습을 보며 미쳐 발광할 수호신을 잠재우는 것뿐.

“이쪽입니다.”

달빛조차 흐릿한 어두운 밤.

수호신을 모시는 신전을 향해 길을 안내하는 카닐리안 가주의 얼굴은 긴장과 초조로 인해 잔뜩 경직되어 있었다.

신전으로 향하는 길은 오직 역대 가주만이 알고 있는 비밀이지만, 그저 그것뿐이라면 가주가 직접 길잡이 역할을 자처할 필요는 없었다.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하기 전에 그리츠에게 미리 길을 알려준 뒤, 본인은 집안에서 대기만 해도 충분했으니까.

허나 가주는 본인이 직접 나서기를 택했다.

그건 어차피 그리츠와 그레이스에게 꿇어야 한다면 확실하게 꿇는 편이 낫다는 타산이기도 했고, 선조들이 만들어버린 괴물의 하수인 노릇은 그만하고 싶다는 절박함이기도 했다.

단 한 명의 침입자조차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이 웅장한 철문 앞에 선 가주가 품에 있는 열쇠로 그 문을 열자, 그 너머의 풍경이 세 사람을 맞이했다.

“흐헉.”

“윽.”

가주와 그레이스의 얼굴이 단숨에 일그러졌다.

신전은 카닐리안 가문에서 소유한 부지 중 일부를 특수한 철창으로 둘러싼 형태로 만들어져 있었기에, 그 자체가 거대한 건물 같은 구조는 아니었다.

딱히 실내와 실외로 구분된 것이 아니었으니, 공기가 다를 이유가 없었단 뜻이다.

헌데, 고작 문 하나를 넘었을 뿐인데도 두 사람은 갑작스럽게 숨이 멎을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다.

공기가 끈적했다.

기름으로 만들어낸 증기가 밀폐된 공간에 가득 들어차 있으면 이런 느낌이 들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이상 사태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푸, 풀이…!”

본디 신전 정문에서, 그 심부에 이르는 영역까지는 잘 포장된 돌길이 깔려 있었다.

허나 지금 돌길 사이사이에는 수많은 잡초가 자라나, 그 잎사귀를 너풀너풀 흔들고 있었다.

가주는 인상을 쓰면서 풀을 밀어내며 앞으로 나아가려 했지만, 그 시도는 곧장 좌절되었다.

서걱!

“흡!?”

신발을 사용해 바닥의 풀을 밀어내려 했건만, 오히려 그 잎에 닿은 신발이 그대로 잘려 나갔기 때문이다.

마치 가만히 있는 칼에다가 두부를 가져다 댄 것 같은 모양새였다.

자칫했으면 발 그 자체가 그대로 잘려 나갈 뻔했던 상황에 가주는 창백한 얼굴을 했고, 그 모양새를 보던 그리츠가 말했다.

“네놈은 이만 돌아가 봐라. 안내는 여기까지 했으면 충분하니.”

“허, 허나.”

“두 번 말 안 한다. 문밖에서 괜히 엉뚱한 놈들이 휘말리지 않게 지키고나 있어.”

슬금슬금 눈치를 살피던 가주는 그리츠가 새 역할을 결정해 준 뒤에야 조금 안심한 기색으로 되돌아갔고, 문 안에는 그리츠와 그레이스만이 남겨졌다.

“너도 돌아가도 된다. 어차피 싸우는 건 나 혼자면 충분해.”

“싫어요.”

그레이스는 단칼에 거절했다.

“이건 앞으로 내 인생이 어떻게 될지 결정하는 싸움이잖아요. 근데 집에서 얌전히 기다리기나 하다가 떨어지는 떡고물이나 받아먹으라고요?”

“그렇다고 가봐야 구경밖에 더 하겠냐? 어차피 짐 덩어리 될 거 미리미리 빠져.”

“짐 덩어리가 될지 어떨지는 가봐야 아는 거고요.”

그리 말하며, 그레이스는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방금 가주가 걷어내려다가 발이 잘릴 뻔한 잡초를 주저 없이 짓밟았다.

본래라면 발 전체가 여러 살점으로 저며졌어도 이상하지 않았을 상황.

허나, 그레이스는 상처를 입지 않았다.

그녀의 신발은 멀쩡했고, 그레이스에게 짓밟힌 잡초는 방금까지의 날카로움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시들 대로 시들어 그대로 가루처럼 부스러졌다.

“봤죠? 나도 그냥 놀고먹은 게 아니라니까요?”

허리춤에 양손을 대고, 그레이스는 의기양양하게 가슴을 폈다.

“호오.”

그리츠는 나지막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비아냥이 아니라, 적지 않은 진심이 담긴 감탄이었다.

식물을 강화해 칼날 겸 함정처럼 만든 것은 수호신의 권능이다.

그리고 지금 그레이스는, 그 권능을 자신의 권능으로 상쇄한 뒤, 풀을 그대로 시들도록 만들었다.

그레이스가 신성력을 다루기 시작한 지가 고작 며칠 전이고, 그 힘이 본격적으로 커진 게 바로 오늘 오후였다는 걸 생각하면 가히 기가 막힐 정도의 성장 속도였다.

“전제조건이 까다로워서 그렇지, 역시 신성력이 좋긴 좋군. 검사나 마법사 놈들이 봤으면 사기 치지 말라고 울부짖었을 거다.”

“불만 있으면 자기들도 산 제물 후보가 되어서 두근두근 콩닥콩닥한 매일매일을 보내라고 하면 되죠 뭘.”

어깨를 가볍게 으쓱인 뒤, 그레이스는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끝까지 같이 가게 해줘요. 도움이 될지 어떨진 몰라도, 적어도 방해는 되지 않을 테니까.”

“흐음, 뭐, 마음대로 해라.”

그리츠는 그런 그녀의 결의를 무시하지 않았다.

사실 그리츠 역시 마지막 확인차 한 번 더 물어봤을 뿐 진지하게 그녀를 떼놓고 갈 생각은 없었다.

그랬다면 애초에 그레이스를 여기까지 데려오지도, 그녀에게 모든 계획을 설명하지도 않았을 터.

드르르륵. 오크통이 굴러가는 소리.

사박. 사람이 풀을 짓밟고 나아가는 소리.

서로 다른 소리와 함께, 두 명은 앞으로 나아갔다.

그럴수록 공기는 더욱 끈적해졌고, 식물의 형상이나 생태는 더욱 기괴해졌다.

그리고 마침내, 울타리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심부.

작은 집 한 채 정도 되는 크기의 석조 건물의 지붕 위.

‘그것’과 두 명의 시선이 교차했다.

그것은 언뜻 보면 금색과 녹색의 옷과 수많은 장신구를 두른 사람처럼 보였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것의 상반신 절반은 아름다운 인간의 형상이었으나, 나머지 반신은 녹색의 잎사귀와 금색의 이삭이 빽빽하게 모여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것의 오른쪽 날개는 하얀 깃털을 지닌 새를 닮아 있었으나, 왼쪽 날개가 있어야 할 자리에는 수많은 식물의 줄기와 뿌리가 촉수처럼 뻗어 있었다.

그것에게는 하반신이 존재하지 않았으나, 대신 상반신 아래에는 수많은 인골(人骨)이 서로 뒤얽힌 채 달라붙어 있었다.

“──.”

그레이스는 무심코 숨을 삼켰다.

솔직히 말해서, 그녀는 가주의 태도를 여태껏 잘 이해하지 못했었다.

수호신이 그토록 껄끄러웠다면 은밀히 병사들을 모아서 퇴치를 하든 뭘 하든 하면 되었을 텐데, 가주는 그런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

이미 시도를 해봤다 실패한 거라면 몰라도, 아예 시도조차도 하려고 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이렇게 두 눈으로 신을 보고 나니 알 수 있었다.

이것은 괴물이었다.

그러나 신이었다.

역겨웠으나 아름다웠고, 모독적이었으나 신성했다.

-늦었구나, 무녀야.

그것이 입을 열었다. 수호신이 말했다. 괴물이 그레이스를 응시했다.

-네가 잔꾀를 부린 것을 안다. 그것이 패역(悖逆)임을 안다. 허나 용서하마.

-인간이란 무릇 어리석은 아이와 같아, 자신이 잘 모르는 것을 무작정 두려워하며 악이라 여긴다.

-너의 무지가 너에게 우행을 택하게 했으니, 이 땅의 어버이 되는 자로서 이를 어찌 꾸짖을 수 있겠느냐.

-자, 아직 늦지 않았다. 나의 앞에 다가와 기도하라, 내 품에 안겨라, 너의 선배들이 너에게 해야 할 일을 알려줄 것이다.

수호신의 목소리는 지극히도 자애로웠다.

그 눈빛은 마치 보자기에 감싸인 어린아이를 보듯 상냥했다.

문득, 그레이스는 머릿속이 달콤한 꿀로 가득 차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수호신의 얼굴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친부모처럼 느껴졌고, 그의 하반신에 달린 인골들은 어느새인가 아름다운 여인들의 모습으로 뒤바뀐 채 그레이스에게 어서 오라며 손짓을 하고 있었다.

그레이스는 반쯤 무의식적으로 수호신을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수호신과 선대 무녀들의 미소가 한층 더 깊어졌다.

짜아아악!

“싫어. 나는, 당신의 무녀 따윈 사절이야.”

허나, 미혹에 홀렸던 것은 단 한 걸음 뿐.

자신의 뺨을 두들겨 정신을 되찾은 그레이스는, 그대로 수호신을 노려보며 선언했다.

그레이스는 신성력을 끌어올렸다.

수호신의 금색 신성력과는 대비되는, 은과 재의 신성력이 그녀의 몸을 감싸자, 그녀의 눈을 현혹하던 환상이 바로잡혔다.

자애와 선성으로 가득하던 수호신의 얼굴은 온갖 감정이 사라진 무표정으로 그레이스를 응시하고 있었고, 막냇동생을 맞이하듯 친절함과 환호로 가득하던 선대 무녀들의 얼굴은 피눈물을 흘리며 질투와 원념에 찬 눈빛을 향하고 있었다.

“하하하! 거, 본인이 한 말은 아주 잘 지키는군!”

그리츠가 유쾌하다는 듯이 박장대소를 터트렸다.

그것이 적어도 방해는 되지 않겠다던 자신의 말을 뜻한다는 걸 깨닫고, 그레이스의 입가에도 미소가 맺혔다.

그리츠가 들어 있는 오크통이 제자리에서 빙그르르 회전했다.

주변 일대의 모든 숲은, 수호신이 내뿜은 금색의 신성력으로 가득 차 있었다.

수백을 우습게 넘는 세월 동안 차곡차곡 누적해 온 신앙의 힘.

비록 그 거대한 수조에 파이프를 연결해 내용물이 빠져나올 길을 만들었다고 해도, 신성력을 모조리 빼 내오기까진 아직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렇다면, 해야 할 일은 명확했다.

“어이.”

“네년보단 좋은 호칭이긴 한데, 그래도 이왕이면 이름으로 불러주면 더 좋겠는데요.”

“됐고, 열심히 기도나 해라. 아니, 명상? 정신력 싸움? 뭐 아무래도 좋으니, 저놈에게서 흘러오는 신성력의 기세를 더 빠르게 해서 쪽쪽 빨아들여 버리란 말이다. 이왕 이렇게까지 가까이 왔으니, 관객보단 승리의 주역이 더 재미있지 않겠냐.”

“알겠는데, 그걸 그렇게 저거 앞에서 대놓고 말해도 돼요? 혹시 나를 미끼로 쓰려는 고도의 전략인가요?”

“왜, 못 믿겠냐?”

그레이스는 피식 웃고는, 그대로 제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정좌한 채 두 손을 모았다.

무언가를 향해 기원을 바치는 듯한, 어떤 의미로는 지극히 무방비한 자세.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레이스의 몸 주변에서 흘러나오던 은색과 잿빛이, 주변을 가득 메운 황금색을 조금씩 침식하기 시작했다.

-우둔하고, 또 우둔하도다.

수호신의 선언과 동시에, 그의 몸에 날개처럼 달려 있던 식물 줄기, 아니 촉수라 불러야 할 무언가들이 그레이스를 향해 쇄도했다.

공격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주변 숲에서 흩날리는 나뭇잎이 수리검처럼 날아들었다.

꽃가루는 독성과 악의를 품고 호흡기를 향해 전진했다.

지면 아래의 뿌리가 창처럼 솟아났고, 식물을 말라붙게 하는 해충들이 날개짓을 했다.

그것은 신의 위업이었다.

꾸준한 신앙과 뛰어난 자질을 지닌 제물들을 제 일부로 만들며 쌓아온 힘은 평범한 분신으로선 상대할 수 없을 영역까지 도달해 있었다.

격렬한 저항도 허무하게, 그레이스를 보호하던 오크통이 먼저 부서졌다.

촉수가 오크통을 꿰뚫고, 그 파편이 무참히 흩날렸다.

단숨에 방해꾼을 제거한 수호신은, 그대로 그레이스를 향해 재차 촉수를 뻗었다.

불길한 파열음을 들었을 텐데도, 그레이스는 눈을 감고 양손을 모은 자세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것이야말로, 그리츠를 향한 회색 소녀의 신뢰였다.

촉수가 그녀의 목을 꿰뚫으려 한 그때.

“─동감이야. 실로 우둔하군.”

빛이 있었다.

충격이 있었다.

그리고, 소리가 가장 나중에 따라왔다.

퍼버버버버버버버벅!!

촉수가, 칼날 같은 나뭇잎이, 독성을 품은 꽃가루가, 창을 흉내 낸 뿌리가, 악질적인 독충이, 단 한순간에 분쇄되며 뒤로 밀려났다.

수호신의 눈이 반개했다.

그것은, 인간이라면 경악이라고 불리울 감정이었을지도 모른다.

흩날리는 먼지 속, 금싸라기 같은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하지만 나는 우둔한 이를 좋아한다네.”

오크통의 파편을 마치 가면처럼 뒤집어쓴 남자는, 묘하게 기꺼운 듯한 목소리로 그리 내뱉었다.

수호신의 이지가 경종을 울렸다.

눈앞의 존재는 방금과는 다른 이였다.

말투가, 몸짓이, 분위기가, 무엇보다도 그 존재감이, 이전과는 별개의 영역에 있었다.

눈앞에 있는 이것은, 신이 아무렇게나 짓밟을 수 있는 미개한 생명이 아니었다.

그것이 말했다.

“그나저나 자네, 거지와 왕자의 아주 유서 깊고도 왕도적인 클리셰를 아는가?”

수호신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해할 수 없는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고로, 수호신은 대답 대신 새로운 공격을 퍼부었다.

남자 역시 그에 대응했다.

오직 하나, 눈을 감은 관객만이 존재하는 무대에서 전설의 영역에 이를 싸움이 펼쳐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