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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화 거지 그리츠(Gritz) (10) - 축제 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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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라리아 전역을 들썩이게 할 대형 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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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현장에서 온갖 자질구레한 준비를 이행해야 할 실무자들에게도 괴로운 일이었지만, 그들에게 지시를 내려야 할 기획자들 입장에서도 편한 일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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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대체 축제 구성을 어떻게 해야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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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 기념행사라는 건 일종의 절차가 존재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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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를 화려하게 불태우며 축제의 개막을 알린다든가, 무대 위에서 높으신 분이 연설을 한다든가, 참가자들이 단체로 노래를 부른다든가, 뭐 그런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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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이게 역사와 전통을 갖춘 행사였다면, 기획자들은 딱히 고민할 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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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옛 어르신들이 하던 걸 그대로 따라 하거나, 시대 상황이나 기타 조건에 따라 약간씩 세부 흐름만 바꾸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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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데 이번엔 그런 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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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행사 그 자체가 새로 생겨난 건데 전통이고 나발이고 뭐가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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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대충 개회식이랑 폐막식 정도만 챙기고, 나머지는 알아서 하라고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어차피 다들 먹고 마시는 게 목적일 텐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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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안 됩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수호신님이 엮여 있는 행사인데, 너무 간략하고 성의 없이 했다간 자칫 수호신님의 권위까지도 모욕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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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가능한 한 화려하고, 엄숙하게 진행하면 되겠군요. 사람들이 권위를 느낄 수 있도록, 절차도 복잡하게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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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아니, 다들 잘못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번 축제의 동기가 뭡니까? 무녀님께서 수호신님 곁으로 가는 걸 기념하는 행사 아닙니까? 그 말은 앞으로 무녀가 나타날 때마다 이걸 반복해야 한다는 뜻인데, 너무 과한 축제를 기획했다간 앞으로 엄청난 부담이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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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성의가 없어 보이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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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관심과 흥미를 보일 만큼 위엄 있고 화려하고 구성이 꽉꽉 차 있어야 하지만, 그러면서도 주최 측의 부담은 최소화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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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차례의 토론 끝에, 기획자들은 이내 그들 기준으로 아주 합리적이고 만족스러운 결론에 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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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축제 내에서 무녀님의 비중을 최대한 높이면 되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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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결론이란, 그냥 무녀를 최대한 굴리면 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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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 앞에서 노래도 시키고, 춤도 추게 하고, 악수회 같은 것도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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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분도 그럴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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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녀와 수호신을 기념하는 행사에서 수호신은 사람들과 교류할 수 없는 존재이니, 그만큼 무녀에게 스포라이트를 비추겠다는데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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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주최 측이 편한 만큼 무녀는 그 무지막지한 스케쥴 앞에서 체력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갈려 나가겠지만, 그거야 기획자들이 고민할 문제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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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불합리한 스케쥴을 강요한다고 해서 무녀가 뭘 할 수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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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무녀니 뭐니 해도 일단 수호신 곁으로 떠나면 다신 얼굴 안 볼 사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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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자들은 자신들이 떠올린 완벽한 플랜에 만족하며 기분 좋게 잠자리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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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무녀가 진화하면 수호신이 됩니다!’라는 충격적인 소문이 벨라리아에 떠돌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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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자들, 그러니까 카닐리안 가문의 중진들은 처음 소문을 들었을 때만 해도 자못 여유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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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을 일개 가문의 가신이라고 무시해선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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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닐리안의 가주는 이름만 영주일 뿐, 사실상 벨라리아라는 땅의 왕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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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은 가주 밑에서 일하는 가신들은 타국으로 따지자면 고위 귀족이나 다름없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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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그 높은 직위만큼이나 듣는 게 많았고, 보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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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녀가 수호신이 된다니, 그게 어디 말이나 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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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은 평안히 보내셨습니까, 그레이스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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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네,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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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런 그들의 확신은, 남들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무녀에게 대뜸 고개를 숙이는 가주의 모습을 본 순간 산산이 박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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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지한테 두들겨 맞은 걸로도 모자라 매일 같이 오크통의 표면을 닦고 기름칠하던 가주가 이젠 그냥 정신줄을 놓고 될 대로 되라 모드에 들어갔다는 걸 모르는 가신들 입장에서는, 그레이스에게 정말로 특별한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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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가신들의 머릿속에는 아주 간단한 퀴즈쇼가 개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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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만만해 보인다고 괴롭혔던 여자애가 사실 차세대 국가 통치자였다고 하네요. 어떻게 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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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쯧쯧, 그걸 믿음? 지능 수준 하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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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그런데 우리 회장님이 그 여자애한테 존댓말 쓰면서 고개를 박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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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시체가 말을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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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녀를 갈갈하려던 기존 계획은 모두 폐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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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가 ‘반드시’ 참가해야만 했던 일정들은 ‘내키면 참가하고 아니면 말고’ 식의 선택제로 바뀌었고, 그마저도 간접적인 강요로 보일까 두려워 전체적인 스케쥴 자체가 대폭 감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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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제 시작이 코앞으로 다가온 상황에서 갑자기 일정 변경 및 공백 채우기를 요구받은 실무자들은 기획자들을 저주했으나, 기획자들은 그 목소리를 무시했다. 아무튼 수호신님에게 찍히는 것보다는 아랫것들에게 원망 사는 게 더 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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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음. 어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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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그레이스는 그레이스대로 마냥 즐거워하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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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무녀로서의 일을 너무너무 사랑해서 그런 건 당연히 아니었고, 그냥 물리적으로 즐거워할 만한 여건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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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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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가 별다른 호위 없이 거리에 나갔다가, 그녀를 둘러싼 인파 탓에 오도 가도 못하고 망부석이 될 때까지 필요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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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으로 눈을 번들거리며 기름진 손으로 뇌물을 내미는 이들은 차라리 상대하기 편하지, 흙먼지가 잔뜩 묻은 손으로 꽃을 내미는 어린아이나 눈가에 물기가 촉촉한 상태로 말없이 고개를 숙이는 어르신들을 상대로 나 몰라라 도망칠 수도 없는 노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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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호위를 주변에 쫙 깔아두고 움직이자니, 그건 그것대로 그레이스 취향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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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락부락한 떡대 아저씨들이 근처에서 눈을 부릅뜨고 있는데 축제를 어떻게 즐기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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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그냥 얌전히 집에 있으면 되는 것 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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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사람은 집안에만 있으면 죽는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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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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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집돌이와 집순이들을 단숨에 적으로 돌린 그레이스는, 오크통 위에 털썩 걸터앉은 채 푸념을 이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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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일단 따지고 보면 제 이름 걸고 시작한 축제잖아요? 그런데 그 축제를 제가 즐기지 못한다니 이런 불합리가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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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덩이 안 치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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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뜩이나 팔자에도 없는 신 노릇을 하게 돼서 영 뒤숭숭한데, 이젠 평범하게 길거리도 못 걷는 신세가 되어버리다니. 원래 미인은 좀 불행해야 때깔이 고와진다고 하지만, 제 미모는 이미 충분히 고우니까 굳이 불행 속성까지 추가할 필요는 없단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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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비키라고 이 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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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나저나 수호신 쪽은 괜찮은 거예요? 애초에 바깥에는 별 관심도 없는 존재고, 가주님이 열심히 눈가림을 하고 있다고 하니 그냥 기다리고 있기는 한데, 솔직히 불안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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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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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츠에게서 말이 없어진 순간, 그레이스는 오크통에서 즉각 내려온 뒤 방구석으로 몸을 피했다. 쓸데없이 재빠르고 경쾌한 몸놀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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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으로 누운 오크통 입구에서 슬그머니 고개를 내밀다가 다시 안쪽으로 되돌아가는 지팡이를 보고는, 그레이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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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동시에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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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안쪽이 안 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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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가 그리츠와 어울린 지도 그럭저럭 시간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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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적인 기간으로 따지면 아직 2주도 안 됐지만, 다른 사람과 친해지는데 5분이면 충분한 그녀에게는 충분히 긴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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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 긴 시간 동안, 그레이스는 단 한 번도 그리츠의 본모습을 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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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냥 물리적으로 오크통 안쪽을 관측한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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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크통이 완전히 밀폐된 구조인 건 아니었다. 애초에 그런 거였으면 팔이 불쑥불쑥 튀어나오거나 지팡이를 팔다리처럼 다루는 것도 불가능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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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크통의 한쪽 입구는 분명히 열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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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 구멍을 통해 내부를 들여다보려고 하면, 어째서인지 결과는 실패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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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야각이 안 맞는다든가, 엄폐물에 가려진다든가, 그늘에 뒤덮여 보인다든가, 심지어 갑작스러운 태양 빛이나 사물의 반사광 때문에 포착 기회를 놓치는 일도 빈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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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신기한 사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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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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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오크통의 괴인은 그녀에게 낯설고 기이하고 재미있는 이방인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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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울적함을 잊어버리기 위해서 그 정체를 탐구했다고 한다면, 이제는 그냥 그레이스라는 개인이 그리츠에 대해서 좀 더 알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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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이전보다 더욱 적극적으로 치근덕대고 시시콜콜한 잡담을 떠들어대는 이유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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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뭔가 좋은 방법 같은 건 없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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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을 날만 기다리던 년 살려놨더니 이젠 놀거리까지 내놓으라고 하는군. 양심을 아주 내다 버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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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 보답은 보답이고 이건 이거죠. 도움을 받았다고 남은 인생 전부를 그걸 갚기 위해서만 우중충하게 살면 그게 산 거예요? 그냥 죽는 형태만 바뀐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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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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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일까, 그레이스는 지금 그리츠의 입꼬리가 한껏 말려 올라갔으리라고 직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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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방금 대화가 그의 기준에서 제법 유쾌했던 모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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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 어차피 본격적으로 결판이 나는 건 축제가 끝난 뒤가 될 테니, 그때까지는 잠깐 숨돌리기를 해도 나쁠 게 없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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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뭔가 방법이 있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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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잠깐 준비를 해올 테니 기다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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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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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는 얼굴에 화색을 드러내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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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약, 세 시간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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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자기 앞에 놓인 오크통 Mk.2를 바라보며 웃는 얼굴 그대로 석고상처럼 굳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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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크통에 타라, 그레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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