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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14 21:31:5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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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화 거지 그리츠(Gritz) (10) - 축제 준비

벨라리아 전역을 들썩이게 할 대형 축제.

이는 현장에서 온갖 자질구레한 준비를 이행해야 할 실무자들에게도 괴로운 일이었지만, 그들에게 지시를 내려야 할 기획자들 입장에서도 편한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 대체 축제 구성을 어떻게 해야 하지?”

대개 기념행사라는 건 일종의 절차가 존재하는 법이다.

뭔가를 화려하게 불태우며 축제의 개막을 알린다든가, 무대 위에서 높으신 분이 연설을 한다든가, 참가자들이 단체로 노래를 부른다든가, 뭐 그런 것들.

만약 이게 역사와 전통을 갖춘 행사였다면, 기획자들은 딱히 고민할 게 없다.

그냥 옛 어르신들이 하던 걸 그대로 따라 하거나, 시대 상황이나 기타 조건에 따라 약간씩 세부 흐름만 바꾸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헌데 이번엔 그런 게 없다.

애초에 행사 그 자체가 새로 생겨난 건데 전통이고 나발이고 뭐가 있겠는가.

“그냥 대충 개회식이랑 폐막식 정도만 챙기고, 나머지는 알아서 하라고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어차피 다들 먹고 마시는 게 목적일 텐데요.”

“그건 안 됩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수호신님이 엮여 있는 행사인데, 너무 간략하고 성의 없이 했다간 자칫 수호신님의 권위까지도 모욕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면 가능한 한 화려하고, 엄숙하게 진행하면 되겠군요. 사람들이 권위를 느낄 수 있도록, 절차도 복잡하게 하고요.”

“아니, 아니, 다들 잘못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번 축제의 동기가 뭡니까? 무녀님께서 수호신님 곁으로 가는 걸 기념하는 행사 아닙니까? 그 말은 앞으로 무녀가 나타날 때마다 이걸 반복해야 한다는 뜻인데, 너무 과한 축제를 기획했다간 앞으로 엄청난 부담이 될 겁니다.”

너무 성의가 없어 보이면 안 된다.

많은 사람들이 관심과 흥미를 보일 만큼 위엄 있고 화려하고 구성이 꽉꽉 차 있어야 하지만, 그러면서도 주최 측의 부담은 최소화해야 한다.

몇 차례의 토론 끝에, 기획자들은 이내 그들 기준으로 아주 합리적이고 만족스러운 결론에 도달했다.

“그러면 축제 내에서 무녀님의 비중을 최대한 높이면 되겠군요.”

그 결론이란, 그냥 무녀를 최대한 굴리면 된다는 것.

사람들 앞에서 노래도 시키고, 춤도 추게 하고, 악수회 같은 것도 연다.

명분도 그럴듯하다.

무녀와 수호신을 기념하는 행사에서 수호신은 사람들과 교류할 수 없는 존재이니, 그만큼 무녀에게 스포라이트를 비추겠다는데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

물론 주최 측이 편한 만큼 무녀는 그 무지막지한 스케쥴 앞에서 체력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갈려 나가겠지만, 그거야 기획자들이 고민할 문제는 아니었다.

그들이 불합리한 스케쥴을 강요한다고 해서 무녀가 뭘 할 수 있지?

어차피 무녀니 뭐니 해도 일단 수호신 곁으로 떠나면 다신 얼굴 안 볼 사이 아닌가?

기획자들은 자신들이 떠올린 완벽한 플랜에 만족하며 기분 좋게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무녀가 진화하면 수호신이 됩니다!’라는 충격적인 소문이 벨라리아에 떠돌기 시작했다.

기획자들, 그러니까 카닐리안 가문의 중진들은 처음 소문을 들었을 때만 해도 자못 여유로웠다.

그들을 일개 가문의 가신이라고 무시해선 안 된다.

카닐리안의 가주는 이름만 영주일 뿐, 사실상 벨라리아라는 땅의 왕에 가깝다.

그 말은 가주 밑에서 일하는 가신들은 타국으로 따지자면 고위 귀족이나 다름없다는 뜻이다.

그들은 그 높은 직위만큼이나 듣는 게 많았고, 보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무녀가 수호신이 된다니, 그게 어디 말이나 되겠는가?

“어젯밤은 평안히 보내셨습니까, 그레이스 님.”

“아, 네, 뭐.”

그리고 그런 그들의 확신은, 남들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무녀에게 대뜸 고개를 숙이는 가주의 모습을 본 순간 산산이 박살 났다.

거지한테 두들겨 맞은 걸로도 모자라 매일 같이 오크통의 표면을 닦고 기름칠하던 가주가 이젠 그냥 정신줄을 놓고 될 대로 되라 모드에 들어갔다는 걸 모르는 가신들 입장에서는, 그레이스에게 정말로 특별한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자 가신들의 머릿속에는 아주 간단한 퀴즈쇼가 개최됐다.

Q. 만만해 보인다고 괴롭혔던 여자애가 사실 차세대 국가 통치자였다고 하네요. 어떻게 해야 할까요?

A. 쯧쯧, 그걸 믿음? 지능 수준 하고는.

Q. 그런데 우리 회장님이 그 여자애한테 존댓말 쓰면서 고개를 박는데요?

A. 시체가 말을 하네.

무녀를 갈갈하려던 기존 계획은 모두 폐기되었다.

그레이스가 ‘반드시’ 참가해야만 했던 일정들은 ‘내키면 참가하고 아니면 말고’ 식의 선택제로 바뀌었고, 그마저도 간접적인 강요로 보일까 두려워 전체적인 스케쥴 자체가 대폭 감소했다.

축제 시작이 코앞으로 다가온 상황에서 갑자기 일정 변경 및 공백 채우기를 요구받은 실무자들은 기획자들을 저주했으나, 기획자들은 그 목소리를 무시했다. 아무튼 수호신님에게 찍히는 것보다는 아랫것들에게 원망 사는 게 더 나으니까.

“흐음. 어쩌지.”

한편, 그레이스는 그레이스대로 마냥 즐거워하지는 못했다.

그녀가 무녀로서의 일을 너무너무 사랑해서 그런 건 당연히 아니었고, 그냥 물리적으로 즐거워할 만한 여건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3분.

그레이스가 별다른 호위 없이 거리에 나갔다가, 그녀를 둘러싼 인파 탓에 오도 가도 못하고 망부석이 될 때까지 필요한 시간이었다.

욕망으로 눈을 번들거리며 기름진 손으로 뇌물을 내미는 이들은 차라리 상대하기 편하지, 흙먼지가 잔뜩 묻은 손으로 꽃을 내미는 어린아이나 눈가에 물기가 촉촉한 상태로 말없이 고개를 숙이는 어르신들을 상대로 나 몰라라 도망칠 수도 없는 노릇.

그렇다고 호위를 주변에 쫙 깔아두고 움직이자니, 그건 그것대로 그레이스 취향이 아니었다.

우락부락한 떡대 아저씨들이 근처에서 눈을 부릅뜨고 있는데 축제를 어떻게 즐기란 말인가.

“…그러면 그냥 얌전히 집에 있으면 되는 것 아니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사람은 집안에만 있으면 죽는다고요?”

“?”

수많은 집돌이와 집순이들을 단숨에 적으로 돌린 그레이스는, 오크통 위에 털썩 걸터앉은 채 푸념을 이어 나갔다.

“이거 일단 따지고 보면 제 이름 걸고 시작한 축제잖아요? 그런데 그 축제를 제가 즐기지 못한다니 이런 불합리가 있나요?”

“엉덩이 안 치우냐.”

“가뜩이나 팔자에도 없는 신 노릇을 하게 돼서 영 뒤숭숭한데, 이젠 평범하게 길거리도 못 걷는 신세가 되어버리다니. 원래 미인은 좀 불행해야 때깔이 고와진다고 하지만, 제 미모는 이미 충분히 고우니까 굳이 불행 속성까지 추가할 필요는 없단 말이죠.”

“위에서 비키라고 이 년아.”

“아, 그나저나 수호신 쪽은 괜찮은 거예요? 애초에 바깥에는 별 관심도 없는 존재고, 가주님이 열심히 눈가림을 하고 있다고 하니 그냥 기다리고 있기는 한데, 솔직히 불안해서.”

“…….”

그리츠에게서 말이 없어진 순간, 그레이스는 오크통에서 즉각 내려온 뒤 방구석으로 몸을 피했다. 쓸데없이 재빠르고 경쾌한 몸놀림이었다.

옆으로 누운 오크통 입구에서 슬그머니 고개를 내밀다가 다시 안쪽으로 되돌아가는 지팡이를 보고는, 그레이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동시에 생각했다.

‘역시 안쪽이 안 보여.

그레이스가 그리츠와 어울린 지도 그럭저럭 시간이 흘렀다.

물리적인 기간으로 따지면 아직 2주도 안 됐지만, 다른 사람과 친해지는데 5분이면 충분한 그녀에게는 충분히 긴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 긴 시간 동안, 그레이스는 단 한 번도 그리츠의 본모습을 보지 못했다.

아니, 그냥 물리적으로 오크통 안쪽을 관측한 적이 없었다.

오크통이 완전히 밀폐된 구조인 건 아니었다. 애초에 그런 거였으면 팔이 불쑥불쑥 튀어나오거나 지팡이를 팔다리처럼 다루는 것도 불가능했겠지.

오크통의 한쪽 입구는 분명히 열려 있다.

하지만 그 구멍을 통해 내부를 들여다보려고 하면, 어째서인지 결과는 실패뿐.

시야각이 안 맞는다든가, 엄폐물에 가려진다든가, 그늘에 뒤덮여 보인다든가, 심지어 갑작스러운 태양 빛이나 사물의 반사광 때문에 포착 기회를 놓치는 일도 빈번했다.

‘역시 신기한 사람이야.

맨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이 오크통의 괴인은 그녀에게 낯설고 기이하고 재미있는 이방인 그 자체였다.

예전에는 울적함을 잊어버리기 위해서 그 정체를 탐구했다고 한다면, 이제는 그냥 그레이스라는 개인이 그리츠에 대해서 좀 더 알고 싶었다.

그녀가 이전보다 더욱 적극적으로 치근덕대고 시시콜콜한 잡담을 떠들어대는 이유이기도 했다.

“그래서, 뭔가 좋은 방법 같은 건 없는 거예요?”

“죽을 날만 기다리던 년 살려놨더니 이젠 놀거리까지 내놓으라고 하는군. 양심을 아주 내다 버렸어.”

“에이, 보답은 보답이고 이건 이거죠. 도움을 받았다고 남은 인생 전부를 그걸 갚기 위해서만 우중충하게 살면 그게 산 거예요? 그냥 죽는 형태만 바뀐 거지?”

“…흐음.”

어째서일까, 그레이스는 지금 그리츠의 입꼬리가 한껏 말려 올라갔으리라고 직감했다.

아무래도 방금 대화가 그의 기준에서 제법 유쾌했던 모양.

“좋아. 어차피 본격적으로 결판이 나는 건 축제가 끝난 뒤가 될 테니, 그때까지는 잠깐 숨돌리기를 해도 나쁠 게 없겠지.”

“오, 뭔가 방법이 있는 거예요?”

“그래. 잠깐 준비를 해올 테니 기다려라.”

“네!”

그레이스는 얼굴에 화색을 드러내며 웃었다.

그리고 약, 세 시간 후.

그녀는 자기 앞에 놓인 오크통 Mk.2를 바라보며 웃는 얼굴 그대로 석고상처럼 굳었다.

“오크통에 타라, 그레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