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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에서의 시간은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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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5시간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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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떠보니 다 지나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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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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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자리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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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력이 몸 깊숙이까지 파고들었던 탓인지, 평소보다도 훨씬 많은 양의 체력과 정신력을 소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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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건으로 목덜미를 닦아내던 순간, 등 뒤로 미세한 시선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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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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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돌리자, 저편에서 천여울이 똑바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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땀 한 방울 없이, 여전히 단정한 표정. 숨도 흐트러지지 않은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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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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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랑은 영 딴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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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왜 그렇게 뽀송뽀송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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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원래 뽀송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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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니 훈련 안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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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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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태연한 얼굴로 손끝을 들어 보였다. 얇고 길게 뻗은 손가락 위로, 작은 성법진 하나가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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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깜빡, 깜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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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드럽게 깜박이며 떠오르는 신성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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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나쁘진 않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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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벗어두었던 웃옷을 다시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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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멀리서 성지의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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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르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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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인 형제님. 성지의 시간이 종료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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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브를 정갈하게 걸친 신관이 조용히 다가와,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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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옆으로, 어느새 옷을 갈아입은 천여울이 다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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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세 번입니다. 성지 입장은, 앞으로 두 번 정도 가능하실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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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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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도면 감지덕지다. 교단 입장에서 성지를 개방하는 것 자체로 굉장히 부담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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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대로 만족하며 물통을 정리하던 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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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에서 천여울이 문득 고개를 돌린 채 툭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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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밖에 안 해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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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관의 어깨가 움찔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묘하게 그를 압박하는 기류가 스며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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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끔한 한마디에, 나는 고개를 살짝 돌려 그녀를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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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랑 있을 때는 실실 웃기만 해서 교단 내에서 잘하고 있나 싶었는데, 잘하고 있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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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관은 당황을 감추지 못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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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 교단 내에서의 조율 결과, 총 세 번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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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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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여울은 손끝으로 로브의 소매를 매만지며,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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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조율하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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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성녀님도 사용하셔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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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 몇 번 더 사용한다고 정식 성녀 될 수 있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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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티는 내지 않았지만, 속으로 천여울을 응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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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가 성장할 기회를 내게 양보하는 셈인데, 고맙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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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조금 더 논의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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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신관은 꼬리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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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조용히 입을 열어, 고맙다는 말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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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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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여울이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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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말을 잃은 얼굴로 내 소매를 움켜쥐고, 뺨에 홍조가 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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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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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에서 조심스레 말을 붙인 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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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외람된 말씀이지만, 두 분께서는 참… 잘 어울리시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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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을 들은 천여울은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홱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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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요? 진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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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까지 엄숙하게 교단을 조율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활기 넘치는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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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그렇긴 하죠? 네? 그렇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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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신관을 바라보다, 이내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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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가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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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개를 살짝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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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 대답하진 않았지만, 그녀는 그걸 긍정으로 받아들인 듯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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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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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매를 쥔 손끝에, 더 힘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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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톡, 톡, 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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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전된 집무실. 한 여성이 워치를 바라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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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 꺼진 방 안에 붉은 눈동자 하나가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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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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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치의 바늘이, 정확히 자정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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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아린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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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치를 꺼두고, 책상에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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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아주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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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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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인은 세심한 성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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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정이 넘으면 결코 메시지를 보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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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적으로 말하자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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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안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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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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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아린은 작게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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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이 작게 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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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최근 들어 이상함을 느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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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여울? 완료, 유하나도 완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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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최근 들어 교류전도 끝났겠다, 이제 윤채하도 방치될 차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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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천여울이 성지로 데려가긴 했다만, 어디까지나 발버둥일 뿐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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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슬슬 그녀의 차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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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아린의 차례가 다가오고 있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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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도 오래전부터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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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어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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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아무것도 안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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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아린의 손이 덜덜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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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그녀에게 제안할 것을 대비하여, 모든 플랜들을 세워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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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인이 뭘 원하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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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말하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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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A 안. 만약 그녀에게 줄 편린을 찾으러 가자고 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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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에 대비해, 펜타곤에 가기 위한 미국행 비행기 퍼스트 클래스 좌석으로 끊어놨다. 당연히 붙어있는 좌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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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탈을 타도 좋지만, 가끔은 비행기 안에서 오붓하게 대화하며 낭만을 즐기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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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B 안. 만약, 권갑을 얻기 위해 한라산의 던전을 가자고 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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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에 대비해 미리 한라산의 나무를 다 깎고 꽃을 심어놨다. 등산로 정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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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등정할 수 있도록, 또 풍경을 예쁘게 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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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C 안. 만약, 그냥 함께 훈련하며 성장하는 것을 원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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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의 산하 길드 맹주의 프라이빗 훈련실을 개방할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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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이서, 최고급 시설로, 오붓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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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리오 A, B, 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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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준비가 끝났고, 계획까지 다 세워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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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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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뭘 고르든, 즉시 반응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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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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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락을 안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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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아린의 손이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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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상 위에 놓인 워치를 내려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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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저번 천여울과의 대화 이후 시간이 꽤 흐른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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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쯤이면 슬슬 연락이 오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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꺼진 화면 위로 강아린의 예쁜 얼굴이 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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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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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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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머릿속에, 불쑥 한 가지의 불길한 가능성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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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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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히 뱉은 한 마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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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치된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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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눈동자가 어두운 방 안에서 천천히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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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술을 꾹 다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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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이내, 억울한 듯 볼이 부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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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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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억울한 표정으로 작게 울먹이며 워치를 다시 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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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지의 기록을 다시 살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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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혹시라도, 놓친 메시지가 있을까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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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역시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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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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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아린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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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툭,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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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에서의 긴 밤이 끝난 다음 날 가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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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오전 강의는 자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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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말고사가 다가오고 있었고, 나 역시 복습할 시간이 필요하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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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전 과목은 몸이 기억해주지만, 이론은 그렇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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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놈의 머리는 계속해서 괴롭혀줘야 잊지를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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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조용히 교재를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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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르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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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강의실 앞문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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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적한 표정의 학생 한 명이 조용히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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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릿하게 걸어와 빈자리에 털썩 앉더니 말없이 책상 위에 고개를 푹 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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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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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까지는 모르겠지만, 어깨가 미세하게 떨리는 걸 보면 꽤 큰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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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강의가 자습으로 대체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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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당 교수와 상담을 하는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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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고사까지의 성적과 입학 순위를 기준으로, 담당 교수와 1:1로 마주 앉아 앞으로의 진로와 성장 방향에 대해 평가받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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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 입장에서는 이날, 길드의 오퍼 현황을 처음 접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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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찰전이든, 공식으로 온 오퍼든 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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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의 이름이 테이블 위에 얼마나 올라갔는지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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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교수는 그런 학생의 현황과 상위권 학생들의 현황을 노골적으로 비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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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위에 교수의 평가가 덧붙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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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 ~~길드까지는 갈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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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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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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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식으로, 학생의 현주소를 확실히 인지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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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에 따라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굉장히 냉정히 평가하는 편이기 때문에, 뭇 학생들은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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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했다는 말보다 이건 부족하다는 쪽에 무게가 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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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냉정함엔 이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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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입학 첫 학기이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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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평가가 끝은 아니니, 앞으로 남은 시간 동안 열심히 하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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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 잘 안됐나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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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에 앉아있던 천여울이 탄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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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녀가 펼쳐둔 마법서를 슬쩍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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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분 전이랑 보던 페이지가 똑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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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부터 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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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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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사실상 정식 성녀로 너무 잘하고 있었다. 따라서 뭐라 하기에는 또 애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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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보로만 보면, 기특하기 그지없는 수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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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걸 아는 건지, 천여울은 생긋 웃으며 나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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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꼬리를 길게 올린 그 표정이 묘하게 얄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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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살짝 손을 들어 딱밤이라도 날리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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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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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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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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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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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때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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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님인데 때려서 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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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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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개를 돌려 오른쪽에 앉은 윤채하를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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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나마나 졸고 있겠거니 했는데, 뜻밖에도 진지하게 노트에 뭔가를 열심히 적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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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짝 고개를 뻗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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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마법 필기 내용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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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 한가득, 무언가가 쓰여 있긴 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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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체 무슨 관계인ㅡ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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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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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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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더 뻗으려는 순간, 눈치챈 윤채하가 펄쩍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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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웃으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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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그렇게 적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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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냥.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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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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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닌 것 같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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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진로 상담 날이기도 하니, 좀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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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근데 졸업하면 어디 갈 거야? 조기 졸업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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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온은 유능한 예비 영웅들을 빠르게 사회로 내보내는 조기 졸업제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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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력만 된다면, 성적에 상관없이 길드와의 계약이나 기관의 스카우트를 통해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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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길 수 있는 연수는 최대 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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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말이 우수지 현실에선 적당한 성적만 되어도 빠르게 나가려는 학생들이 꽤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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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로, 최상위권 학생들이 되려 조기졸업을 안 하는 경우도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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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큰 기회를 보거나, 준비가 덜 됐다고 생각하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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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채하의 경우는 아무래도 마탑 쪽일 확률이 높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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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도 있고, 실력도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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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쪽에서도 이미 주목하고 있을 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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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생각이 좀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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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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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조용히 되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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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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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고민하는 듯하더니, 곧 작게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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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뱅퀴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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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뱅,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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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이가 없어 되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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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채하가 눈을 깜빡이며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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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에… 유칼? 그 사람이랑 얘기하는 것도 재밌었고. 책도 많고… 분위기 나쁘지 않았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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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마탑은 어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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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에 그녀는 잠깐 멈췄다가, 볼을 긁으며 작게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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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탑에는… 네가 없으니까… 재미가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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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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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가 웃기긴 한데, 나로서는 나쁠 게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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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채하라면 뱅퀴셔 입단은 꿈이 아니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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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마탑보다는 잘 케어 해줄 수 있으니 좋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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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온이 좋아하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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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또래 여자 친구가 생겼다고, 좋아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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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채하가 성격이 좀 이상하긴 해도, 시온은 착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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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이 친해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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