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upy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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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에서의 시간은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흘러갔다.
분명 5시간이었는데.
눈을 떠보니 다 지나있었다.
“하….”
나는 자리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다.
신성력이 몸 깊숙이까지 파고들었던 탓인지, 평소보다도 훨씬 많은 양의 체력과 정신력을 소모했다.
수건으로 목덜미를 닦아내던 순간, 등 뒤로 미세한 시선이 느껴졌다.
‘…?’
고개를 돌리자, 저편에서 천여울이 똑바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땀 한 방울 없이, 여전히 단정한 표정. 숨도 흐트러지지 않은 얼굴.
‘뭐야.’
나랑은 영 딴판이다.
“너 왜 그렇게 뽀송뽀송하냐.”
“나 원래 뽀송한데?”
“… 아니 훈련 안 했어?”
“했지.”
그녀는 태연한 얼굴로 손끝을 들어 보였다. 얇고 길게 뻗은 손가락 위로, 작은 성법진 하나가 떠오른다.
- 깜빡, 깜빡.
부드럽게 깜박이며 떠오르는 신성력.
“…뭐, 나쁘진 않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벗어두었던 웃옷을 다시 입었다.
그때. 멀리서 성지의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려왔다.
- 우르르….
“정해인 형제님. 성지의 시간이 종료되었습니다.”
로브를 정갈하게 걸친 신관이 조용히 다가와,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내 옆으로, 어느새 옷을 갈아입은 천여울이 다시 다가왔다
“총 세 번입니다. 성지 입장은, 앞으로 두 번 정도 가능하실 것으로 보입니다.”
나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정도면 감지덕지다. 교단 입장에서 성지를 개방하는 것 자체로 굉장히 부담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나름대로 만족하며 물통을 정리하던 찰나.
옆에서 천여울이 문득 고개를 돌린 채 툭 내뱉었다.
“그것밖에 안 해줘요?”
신관의 어깨가 움찔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묘하게 그를 압박하는 기류가 스며 있었다.
따끔한 한마디에, 나는 고개를 살짝 돌려 그녀를 봤다.
나랑 있을 때는 실실 웃기만 해서 교단 내에서 잘하고 있나 싶었는데, 잘하고 있었나 보다.
신관은 당황을 감추지 못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 예. 교단 내에서의 조율 결과, 총 세 번으로….”
“그럼."
천여울은 손끝으로 로브의 소매를 매만지며,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다시 조율하라 해요.”
“…하지만, 성녀님도 사용하셔야…”
“그거 몇 번 더 사용한다고 정식 성녀 될 수 있는 거예요?”
나는 티는 내지 않았지만, 속으로 천여울을 응원했다.
자기가 성장할 기회를 내게 양보하는 셈인데, 고맙긴 했다.
“예… 조금 더 논의해 보겠습니다.”
결국 신관은 꼬리를 내렸다.
나는 조용히 입을 열어, 고맙다는 말을 전했다.
‘고마워.’
천여울이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잠시 말을 잃은 얼굴로 내 소매를 움켜쥐고, 뺨에 홍조가 번졌다.
그때.
뒤에서 조심스레 말을 붙인 신관.
“이건… 외람된 말씀이지만, 두 분께서는 참… 잘 어울리시는 것 같습니다.”
그 말을 들은 천여울은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홱 돌렸다.
“정말요? 진짜요?”
방금까지 엄숙하게 교단을 조율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활기 넘치는 모습이다.
“역시 그렇긴 하죠? 네? 그렇죠?”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신관을 바라보다, 이내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런가 봐~”
나는 고개를 살짝 숙였다.
뭐라 대답하진 않았지만, 그녀는 그걸 긍정으로 받아들인 듯 보였다.
“히히.”
소매를 쥔 손끝에, 더 힘이 들어갔다.
- 톡, 톡, 톡….
암전된 집무실. 한 여성이 워치를 바라보고 있다.
불 꺼진 방 안에 붉은 눈동자 하나가 반짝였다.
[AM 12:00]
워치의 바늘이, 정확히 자정을 가리킨다.
강아린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워치를 꺼두고, 책상에 놓았다.
그리고 아주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
정해인은 세심한 성격이다.
자정이 넘으면 결코 메시지를 보내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오늘도, 안 왔다.
“… 뭐지?”
강아린은 작게 중얼거렸다.
심장이 작게 뛴다.
그녀는 최근 들어 이상함을 느끼고 있었다.
천여울? 완료, 유하나도 완료.
게다가 최근 들어 교류전도 끝났겠다, 이제 윤채하도 방치될 차례였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천여울이 성지로 데려가긴 했다만, 어디까지나 발버둥일 뿐이고.
이제, 슬슬 그녀의 차례.
강아린의 차례가 다가오고 있다고 생각했다.
준비도 오래전부터 되어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왜 아무것도 안 해.”
강아린의 손이 덜덜 떨렸다.
그가 그녀에게 제안할 것을 대비하여, 모든 플랜들을 세워놨었다.
정해인이 뭘 원하든.
무엇을 말하든.
첫 번째 A 안. 만약 그녀에게 줄 편린을 찾으러 가자고 하면?
그것에 대비해, 펜타곤에 가기 위한 미국행 비행기 퍼스트 클래스 좌석으로 끊어놨다. 당연히 붙어있는 좌석으로.
포탈을 타도 좋지만, 가끔은 비행기 안에서 오붓하게 대화하며 낭만을 즐기고 싶었다.
두 번째 B 안. 만약, 권갑을 얻기 위해 한라산의 던전을 가자고 하면?
그것에 대비해 미리 한라산의 나무를 다 깎고 꽃을 심어놨다. 등산로 정비다.
쉽게 등정할 수 있도록, 또 풍경을 예쁘게 하기 위해서.
세 번째 C 안. 만약, 그냥 함께 훈련하며 성장하는 것을 원한다면?
영광의 산하 길드 맹주의 프라이빗 훈련실을 개방할 생각이었다.
둘이서, 최고급 시설로, 오붓하게.
시나리오 A, B, C.
모든 준비가 끝났고, 계획까지 다 세워놨다.
완벽하게.
그가 뭘 고르든, 즉시 반응할 수 있었다.
근데 왜.
“연락을 안 하지…?”
강아린의 손이 떨렸다.
책상 위에 놓인 워치를 내려다본다.
이미 저번 천여울과의 대화 이후 시간이 꽤 흐른 상태였다.
지금쯤이면 슬슬 연락이 오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꺼진 화면 위로 강아린의 예쁜 얼굴이 비쳤다.
잠깐.
설마.
그녀의 머릿속에, 불쑥 한 가지의 불길한 가능성이 떠올랐다.
“나. 설마.”
조용히 뱉은 한 마디.
“방치된 건가…?”
붉은 눈동자가 어두운 방 안에서 천천히 흔들렸다.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러다 이내, 억울한 듯 볼이 부풀었다.
“아니… 왜…?”
그녀는 억울한 표정으로 작게 울먹이며 워치를 다시 켰다.
메시지의 기록을 다시 살폈다.
정말 혹시라도, 놓친 메시지가 있을까 싶어서.
그러나, 역시 없었다.
“아……….”
강아린은.
고개를 툭, 숙였다.
성지에서의 긴 밤이 끝난 다음 날 가온.
오늘 오전 강의는 자습이었다.
기말고사가 다가오고 있었고, 나 역시 복습할 시간이 필요하긴 했다.
실전 과목은 몸이 기억해주지만, 이론은 그렇지 않다.
이놈의 머리는 계속해서 괴롭혀줘야 잊지를 않는다.
나는 조용히 교재를 펼쳤다.
- 드르륵.
그때, 강의실 앞문이 열렸다.
울적한 표정의 학생 한 명이 조용히 들어왔다.
느릿하게 걸어와 빈자리에 털썩 앉더니 말없이 책상 위에 고개를 푹 묻었다.
‘어이구.’
눈물까지는 모르겠지만, 어깨가 미세하게 떨리는 걸 보면 꽤 큰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오늘 강의가 자습으로 대체된 이유.
담당 교수와 상담을 하는 날이었다.
중간고사까지의 성적과 입학 순위를 기준으로, 담당 교수와 1:1로 마주 앉아 앞으로의 진로와 성장 방향에 대해 평가받는 시간.
학생 입장에서는 이날, 길드의 오퍼 현황을 처음 접하게 된다.
입찰전이든, 공식으로 온 오퍼든 전부.
본인의 이름이 테이블 위에 얼마나 올라갔는지까지.
그리고 교수는 그런 학생의 현황과 상위권 학생들의 현황을 노골적으로 비교한다.
그 위에 교수의 평가가 덧붙여진다.
‘대충 ~~길드까지는 갈 수 있겠다.’
혹은.
‘못 가.’
이런 식으로, 학생의 현주소를 확실히 인지시킨다.
교수에 따라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굉장히 냉정히 평가하는 편이기 때문에, 뭇 학생들은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잘했다는 말보다 이건 부족하다는 쪽에 무게가 실린다.
하지만 이 냉정함엔 이유가 있다.
아직 입학 첫 학기이기도 하고.
지금의 평가가 끝은 아니니, 앞으로 남은 시간 동안 열심히 하라는 뜻이다.
“어머… 잘 안됐나 봐.”
옆에 앉아있던 천여울이 탄식한다.
나는 그녀가 펼쳐둔 마법서를 슬쩍 봤다.
30분 전이랑 보던 페이지가 똑같다.
‘너부터 잘해.’
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그녀는 사실상 정식 성녀로 너무 잘하고 있었다. 따라서 뭐라 하기에는 또 애매했다.
행보로만 보면, 기특하기 그지없는 수준.
그걸 아는 건지, 천여울은 생긋 웃으며 나를 바라본다.
입꼬리를 길게 올린 그 표정이 묘하게 얄미웠다.
나는 살짝 손을 들어 딱밤이라도 날리려다….
“어휴.”
그냥 말았다.
“… 어?”
“왜.”
“안 때려…?”
“성녀님인데 때려서 쓰나.”
“…….”
나는 고개를 돌려 오른쪽에 앉은 윤채하를 바라봤다.
보나마나 졸고 있겠거니 했는데, 뜻밖에도 진지하게 노트에 뭔가를 열심히 적고 있었다.
살짝 고개를 뻗어봤다.
그런데 마법 필기 내용은 아니었다.
노트 한가득, 무언가가 쓰여 있긴 한데….
- 대체 무슨 관계인ㅡㅡㅡ
관계?
“왁!”
고개를 더 뻗으려는 순간, 눈치챈 윤채하가 펄쩍 뛰었다.
나는 웃으며 물었다.
“뭘 그렇게 적어?”
“아니, 그냥. 공부.”
“공부?”
아닌 것 같았는데.
그런데 진로 상담 날이기도 하니, 좀 궁금해졌다.
“넌 근데 졸업하면 어디 갈 거야? 조기 졸업할 거야?”
가온은 유능한 예비 영웅들을 빠르게 사회로 내보내는 조기 졸업제도가 있다.
실력만 된다면, 성적에 상관없이 길드와의 계약이나 기관의 스카우트를 통해 할 수 있다.
당길 수 있는 연수는 최대 1년.
물론, 말이 우수지 현실에선 적당한 성적만 되어도 빠르게 나가려는 학생들이 꽤 많다.
반대로, 최상위권 학생들이 되려 조기졸업을 안 하는 경우도 있고
더 큰 기회를 보거나, 준비가 덜 됐다고 생각하는 거다.
윤채하의 경우는 아무래도 마탑 쪽일 확률이 높겠는데.
배경도 있고, 실력도 있으니까.
그쪽에서도 이미 주목하고 있을 테고.
그래서, 생각이 좀 궁금해졌다.
“나…?”
그녀가 조용히 되묻는다.
“어.”
잠깐 고민하는 듯하더니, 곧 작게 대답했다.
“… 뱅퀴셔.”
“뱅, 뭐?”
나는 어이가 없어 되물었다.
윤채하가 눈을 깜빡이며 말을 이었다.
“저번에… 유칼? 그 사람이랑 얘기하는 것도 재밌었고. 책도 많고… 분위기 나쁘지 않았어서….”
“그럼 마탑은 어쩌고?”
질문에 그녀는 잠깐 멈췄다가, 볼을 긁으며 작게 중얼거렸다.
“마탑에는… 네가 없으니까… 재미가 없어···.”
“허.”
이유가 웃기긴 한데, 나로서는 나쁠 게 없었다.
윤채하라면 뱅퀴셔 입단은 꿈이 아니기도 하고.
나도 마탑보다는 잘 케어 해줄 수 있으니 좋고.
‘시온이 좋아하겠네.’
드디어 또래 여자 친구가 생겼다고, 좋아할 것 같았다.
윤채하가 성격이 좀 이상하긴 해도, 시온은 착하니까.
둘이 친해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