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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밤의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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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밤이었지만, 카페 내부는 조용하게 붐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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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가로 돌아간 학생들도 있었지만, 아직 교내에 남아 기말고사를 준비하는 학생들도 적지 않았다.
 
기말고사의 전체 범위는 비공개.
 
그래서인지, 몇몇 학생들은 ‘뭐라도 해보자’라는 마음으로 이론서를 펼쳐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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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이월된 중간고사 성적과 합산하다 보니, 한방 역전을 노리겠다는 학생들도 많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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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조용한 카페의 분위기 속 중앙 테이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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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숨에 시선을 끌 만한 두 여학생이 마주 앉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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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발과 눈에 띄는 금발.
 
대비되는 두 머리칼이, 조명 아래서 묘하게 서로를 더 도드라지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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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명은 윤채하.
 
최근 교류전의 결승전에서 승리를 거머쥐며, 아카데미 내에서 최고 주가를 달리고 있는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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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맞은편에 앉은 건 하시온.
 
성적도 우수하고, 영웅으로서의 실력도 출중하다.
 
무엇보다 평소의 평판이 좋기로 유명한 학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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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부드럽고, 치근덕거리는 남자가 아닌 이상 항상 웃으며 친절하다고 유명한 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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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오늘은, 시온의 분위기가 평소와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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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들 사이에 은근한 수군거림이 번져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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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둘이 사이 안 좋아?
 
- 시온 표정 저런 거 처음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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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안, 조용한 클래식 음악이 깔리는 가운데 유독 그 테이블만 공기가 묘하게 서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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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채하는 커피를 사발을 들 듯 들이켰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벌써 3잔째였다.
 
속이 타는 건 얼음장같이 차가운 커피로도 해결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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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모습을 지켜보던 시온이 무심한 톤으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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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잔 더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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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채하는 그 말투가 더 얄밉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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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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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시온은 이 자리에 앉을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정해인의 기숙사 문 앞에서 윤채하를 마주쳤을 때만 해도, 그냥 못 본 척하고 조용히 빠져나갈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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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도 안 되는 바람.
 
​그건 어디까지나, 시온 혼자만의 희망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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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은 냉정했다.
 
그대로 붙잡혀 이곳까지 끌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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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채하는 커피잔을 내려놨다.
 
그리고 이마를 쓸어올리며, 눈 앞의 시온에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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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 좀 해줄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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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시선이 정면의 시온을 꿰뚫었다.
 
정작 시온은 땋은 머리칼을 매만지며 고개를 살짝 기울이고는 태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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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더 얄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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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거기서… 아니, 해인이 방에서 나온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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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채하는 뒷말을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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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묻고 싶은 건 그것도 맞지만, 전부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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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얼굴은 그렇게 빨갰으며.
 
왜 안에서는 이상하게 후끈한 열기가 흘러나왔고.
 
왜 목덜미에, 그렇게 땀이 맺혀 있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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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무슨 짓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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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끝까지 올라온 말은 쉽게 삼켜지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 윤채하는 참았다.
 
천천히, 깊게 숨을 들이쉬고 겨우 입술을 다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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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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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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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온은 어깨를 으쓱하며,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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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해인이랑 관계가 좀 깊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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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덧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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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부터 같이 컸고, 같이 살았어. 열 살 때부터인가? 그래서 해인이에 대한 모든 건 내가 다 알고 있어. 그리고 해인이도, 나에 대해서는 뭐든지 알고 있고. 몇년 전까지는 방도 같이 썼고.”
 
물론 시온이 혼자서 자기는 무섭다며 매달려서 가능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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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온은 커피잔을 들어 입술을 축였다.
 
그리고 천천히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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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뭐 잠깐 방에 들어간 것 정도야…. 우리 사이에는 아무것도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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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장이 뒤집히는 소리였다.
 
은근히 선을 긋는 말투. 윤채하는 이를 악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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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분이 있다는 점은 알고 있었지만, 저렇게 대놓고 유대감을 과시하는 것은 참기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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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윤채하는 냉정함을 잃지 않았다.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상대의 허점을 파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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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친한 사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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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채하의 목소리가 얼음처럼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녀는 상체를 테이블 쪽으로 살짝 기울이며 시온을 똑바로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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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문 열었을 때, 왜 그렇게 화들짝 놀란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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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을 활짝 연 그녀는 분명 놀란 눈치였다.
 
정해인의 방에 그렇게 드나드는 사이면, 놀랄 일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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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채하의 지적에 시온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 짧은 침묵이 윤채하에게 확신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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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둘이 사귀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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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채하가 조용히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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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아직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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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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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채하는 시온의 말을 뚝 끊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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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이라며? 네 입으로 말했잖아. 그만한 시간을 같이 있었는데도 아직 안 사귄다는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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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채하는 시온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또박또박 말을 이어갔다.
 
그녀의 입가에는 희미한, 그러나 분명한 조소가 걸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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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인은 너한테 털끝만큼도 관심 없는 거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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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채하는 알 수 있었다.
 
눈앞의 하시온 또한, 자신과 같은 감정을 품고 있다는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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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턴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오랜 시간 가지고 있는 건 확실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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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호재인 점은, 그 감정은 아직, 정해인에게 도달하지 않았다.
 
전해지지 않았고, 받아들여지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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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실이, 윤채하를 조금 안도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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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가족 같은 사이. 그런 거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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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깨달았다는 듯 손바닥으로 주먹을 톡 치며, 일부러 놀란 척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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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 그럼 해인이가 동생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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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채하의 말에 시온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순간 아득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오랜만이었다.
 
이런 노골적이고 뻔뻔한 견제를 받는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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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잊고 있었던 감각.
 
그러나, 다시금 피가 도는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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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지금 이 시각, 순진한 해인이를 독점하고, 희롱하며 가장 즐기고 있는 건 천여울일텐데.
 
뭣 하러 이러나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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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시온은 스스로 생각하기에 넷 중 최약체다.
 
들쑤시는 꼴을 보아하니 분명, 그녀가 직접 나서지 않더라도 머지않아 다른 여성들에게 잘못 걸려 호되게 당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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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생각도 잠시 스쳤지만, 그렇다해서 눈앞의 이 도발을 그냥 넘길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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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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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온은 장난스럽게 검지 손가락을 자신의 입술에 가져다 대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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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였다.
 
하얀 블라우스의 소매가 흘러내리며, 시온의 손목이 드러났다.
 
거기엔 두 개의 팔찌가 채워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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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는 검은색 흑요석 팔찌고, 다른 하나는 달빛을 받아 은은하게 빛나는 푸른색 보석 팔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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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 모의전 때 해인이가 너무 세게 제압해서 미안했다며 상냥하게 준 선물이었다.
 
궁수에게 도움이 되는, 근력 성장 옵션이 달려있다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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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온은 팔찌를 가볍게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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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이가, 준 거야. 둘,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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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하나는 해인이 준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건 말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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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채하에겐 확인할 길이 없었으니까.
 
시온의 목소리는 나른했고, 표정은 덤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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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고개를 살짝 숙이며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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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가족 같은 사이라 그런지, 그건 알아. 해인이가 싫어하는 여자 스타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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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윤채하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아내며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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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이는, 기 센 여자는 안 좋아해. 말은 그렇게 해도, 못 받아줘. 자기주장 강하고, 땍땍거리는 스타일 있잖아. 자기도 모르게 피곤해하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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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꼬리를 천천히 올린 그녀는 조용히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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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애. 응, 살짝 너 같은… 애들? 그런 애들보다는 순종적이고 착한 쪽을 더 좋아하거든….”
 
​
 
진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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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리가.
 
해인이는 너무나도 상냥하기에, 절대 사람을 나누는 기준을 두지 않는다.
 
오히려 그 순한 미소로, 누구든 곁에 들여놓는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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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좀 가리면 좋긴 하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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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혹시 해인이 좋아하는 건 아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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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온의 말이 이어질수록 윤채하의 손이 달달 떨렸다.
 
그녀도 모르게 발산하는 열기가, 잔 내부의 얼음을 모조리 녹이기 시작했다.
 
윤채하는 숨기기 위해 커피잔을 살짝 더 움켜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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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온은 그 모습을 힐끗 보고는, 피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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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가족이라 했었나? 맞아.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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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마주한 채, 천천히 입을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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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와이프도… 가족인 건 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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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온이 던진 마지막 말에.
 
윤채하는 순간 숨을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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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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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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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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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여울은 훈련을 하는 척만 하고 있다.
 
진짜 그녀의 시선은, 오로지 정해인을 향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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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뻤다.
 
그가 자신을 이렇게까지 의식하고 있다는 사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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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마주친 이후, 그의 시선은 자꾸만 이쪽으로 머물렀고.
 
그가 그녀를 생각하는 것 자체로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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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어떤 사람인지 안다.
 
욕망을 숨기고, 감정을 억누르려는 태도.
 
​
 
‘입길 잘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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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을 위해 준비한 복장이었다.
 
신성력 흡수를 명분으로 한 얇고 효율적인, 그러나 분명한 의도를 담은 야릇한 디자인.
 
​
 
효과는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 이상 다가서지 않았다.
 
​
 
그는 지금 훈련 중이다.
 
자신의 시간을, 자신의 성장을 위해 쓰는 중이다.
 
천여울에게 있어 그걸 방해하는 건 신성모독에 가까운 행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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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요 이상으로 그에게 다가갈 수 없다.
 
순진한 그의 반응을 보며 즐기는 것이, 지금의 최선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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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성지 개방은 교단 내부 전원이 반대한 사안이었다.
 
용사 파야 그렇다 쳐도, 성녀 쪽도 달가워하는 느낌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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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오직 성스러운 자들만의 공간. 함부로 열릴 수 있는 곳이 아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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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큼 이 장소는, 교단이 목숨처럼 여기는 성역이었다.
 
신성한 땅. 역사와 기적이 살아 숨 쉰다는 교단의 최심부.
 
​
 
‘개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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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한 땅?
 
역사와 기적이 흐른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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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이 땅은 그저, 신성력이 짙게 깔린 한 평의 효율 좋은 훈련장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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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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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반드시 정해인을 이곳에 데려오고 싶었다.
 
그래서 주장했다. ‘정식’ 성녀의 권한을, 전면으로 내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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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비’ 용사 따위는 논의에서 지워졌다.
 
그리고 결국, 그를 데려오는 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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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앞의 정해인은 어느새 훈련에 완전히 몰두하고 있었다.
 
허겁지겁 신성력을 빨아들이며, 착실히 성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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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정해인의 매력이었다.
 
어떤 욕망도, 욕구도 절대 그를 지배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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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란, 인간에게 화와 복을 내린다고 믿어지는 존재를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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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의미에서 정해인은, 천여울에게 있어 진짜 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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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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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한 은혜를 내리는 신.
 
세상을 등져도 아깝지 않을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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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그녀가 그의 신이 되어주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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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맞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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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그곳에 있기 때문에.
 
그가 호흡하고, 눈을 감고, 가끔씩 그녀를 바라보기 때문에.
 
신이 있는 장소가 성지가 아니라면, 무엇이 성지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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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여울은 조용히 입꼬리를 올렸다.
 
그 모든 것이 그녀에게는 일종의 의식이자, 예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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