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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채하가 악신의 잔재를 홀라당 먹어 치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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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확인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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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기의 간섭이 있다면, 시스템에서 반드시 티가 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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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은 상호 합의 하에 서로의 시스템을 열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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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인을 해야 할 것 같아. 이게 조금 위험할 수도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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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상태 확인을 명목으로 대략적인 설명과 함께 윤채하에게 시스템 공개를 요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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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이런 요청은, 영웅에게 있어 자신의 모든 것을 내보이는 일이나 다름없기에 대부분 거절하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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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어도, 처음부터 선뜻 허락하는 경우는 드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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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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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어… 잠깐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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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채하는 순간 고개를 돌리더니, 귓불까지 붉어진 얼굴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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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뒤,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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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능: 아 프리오리 (A pri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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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꿰뚫는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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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 숨길 수도, 숨을 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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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선험적 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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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본질은 이미 정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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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허기의 탐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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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 있는 대로 먹어 치우고, 분석하고, 흡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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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번과 2번은 이미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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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채하 고유의 특성이고 이미 어렸을 적부터 개방한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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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3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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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지 이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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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에서 윤채하가 주인공과의 접선에 실패하면, 그녀는 벽에 부딪혀 3번째 하위 권능에 평생 도달하지 못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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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만약 접선에 성공한다면, 그녀는 주인공에게서 깨달음을 얻어 세 번째를 해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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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개방하게 될 하위 권능의 이름은 [인페르노(infer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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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속성과 잘 어울리는 작열하는 불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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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눈앞에 떠오른 이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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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기의 탐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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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이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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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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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문제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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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공의 시스템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나의 앞으로, 윤채하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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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빛은 말똥말똥했고, 숨결은 아슬하게 닿을 거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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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뒤로 물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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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고개를 갸웃하며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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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작게 숨을 들이켜며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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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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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랍게도 진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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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체지각과 진인(眞人)까지 총동원한 결과, 그녀 안에는 외부 간섭의 흔적이 전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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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히는 있었는데, 완전히 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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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껴지는 건 단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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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 안에 자리 잡은, 거대한 기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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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잘 받아들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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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까지 빠른 속도로 흡수할 줄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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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부터 중요한 건, 그 기운을 얼마나 잘 다루느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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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재의 기운은 크고, 또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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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더더욱, 완벽하게 조율하지 않으면 곧 폭주하거나 뒤엉켜버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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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조차도 파악할 수 없는 거대한 기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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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내 지식을 나눠주고 방향성을 제시하며, 그녀와 함께 단계적으로 해석하고, 흡수해 나가려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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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들여 천천히, 옆에서 오랜 기간 동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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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지금 상황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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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도움이 안될 수도 있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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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나와 같이 천천히 흡수한 것이면 모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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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단번에 윤채하 안에 자리 잡아버린 이 기운을 내 방식으로 컨트롤하겠다는 건 오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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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매하게 개입하면, 흐름을 망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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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손을 떼는 편이 더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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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알아서, 잘 해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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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채하의 방식대로. 윤채하의 속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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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적인 케어나 방향제시는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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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약과 장비, 물질적인 지원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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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적 사고에서는 그녀의 권능이 나보다 위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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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나의 방식으로 틀 안에 그녀의 마법적 창의력을 가둬둘 필요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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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나를 빤히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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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더니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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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별문제가 없다면… 앞으로도… 잘, 부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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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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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채하에 대한 방향성이 정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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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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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관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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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켜보되, 지금처럼 가까이서 하나하나 수정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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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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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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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의 최상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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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급스러운 조명이 천천히 내려앉는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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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은한 향이 감돌고, 투명한 유리 벽 너머로 도시의 야경이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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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강아린의 집무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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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기는 분위기 자체가 사람을 긴장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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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이곳에 불려 온 수많은 직원은 강아린의 싸늘한 눈빛 앞에서, 남몰래 눈물을 삼켜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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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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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흥~ ♪ 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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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여울과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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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유리 벽 앞을 빙그르르 돌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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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끝을 톡, 튀어 올리며 가볍게 한 바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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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아린은 소음의 근원지를 힐끔 쳐다보았다가, 서류 위로 시선을 다시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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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꺼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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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한 마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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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여울은 듣는 척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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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이곳에 온 이유는 명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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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목상으로는 협회의 보상 산정, 영광과의 협의 건으로 아르카디아 교단 대표로 참석한 것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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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깔 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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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아린은 눈을 가늘게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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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진 얼굴빛, 맑게 넘치는 성스러운 기운. 단번에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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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기려 해도 숨겨지지 않는다. 물론 숨기지도 않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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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이에게 뭔가 또 얻어 처먹은 게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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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잔뜩 긁을 심산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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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천여울은, 슬쩍 강아린의 책상 모서리에 엉덩이를 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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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종달새 같은 목소리로 지저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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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 다 보는 앞에서 직접, 손수, 왕관을 씌워주는데, 솔직히 나도 좀 놀랐거든? 이런 건 처음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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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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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또 막상 받으니까 기분은 좋더라고? 약간 내 거라고 선언하는 것 같기도 하고, 소유 당하는 기분이기도 하고… 하마터면 그냥 그 자리에서 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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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여울은 말하다 말고, 두 손을 꽉 쥐었다가 힘없이 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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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제한은 언제 풀리는 거야… 답답해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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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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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아린은 속이 천천히 뒤집히는 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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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꾹 참고, 조용히 서류를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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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그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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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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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십자가에 반지에 티아라까지 벌써 나한테만 몇 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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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여울이 의기양양하게 손가락을 하나씩 접으며 자랑하는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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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슬슬 방치당하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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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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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아린이 잔잔히 웃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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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여울의 웃음기가 서서히 걷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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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는 정색한 얼굴로 고개를 약간 갸웃하며 되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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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갑자기 무슨 소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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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소리긴. 해인이 성격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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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아린은 펜을 내려놓고 고개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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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천여울과 정확히 눈을 맞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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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하나 봐. 동백검 받고 신나서 검술 뽐내다가, 클 만큼 큰 줄 알고 지금 방치당하고 있잖아. 아주 죽으려고 하던데, 당분간은 그럴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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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걔는 걔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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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여울은 입술을 깨물며 애써 미소를 지어 보이며 반박했지만,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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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아린은 어깨를 으쓱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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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식으로 성녀 임명도 받으셨겠다, 신성력도 채웠겠다. 어머? 성녀님 이제 버려지실 차례만 남으신 건 아니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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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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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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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울이 작게 책상 모서리를 손바닥으로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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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순간 대화의 주도권이 강아린에게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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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그 반응이 재미있다는 듯, 책상 위에 양손을 올리고 턱을 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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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럴 줄 알고 아직 아무것도 안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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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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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여울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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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지금껏 정해인에게 어떤 것도 받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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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배려한 행동이기도 했고, 스스로 지켜온 선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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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다른 돼지 년들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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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그녀도 양보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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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아린은 기쁜 듯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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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내가 해인이한테 이쁨받을 차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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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는 입꼬리를 천천히 올리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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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류전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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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오랜만에 평소보다 조금 일찍 눈을 떴다. 머리가 개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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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상 위에 덩그러니 놓인 검은 표지의 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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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걸 무심히 펼쳤다. 간만의 생각을 정리하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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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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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는 당분간은 신경 쓸 것이 줄어든다. 사람이든, 사건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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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슬, 다음 인물의 성장을 챙겨야 할 때가 온 것 같은 기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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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하나는 검술을 착실하게 연마하고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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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여울은 성녀로 거듭났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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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채하는 잔재를 흡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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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한 단계씩 도약했고, 그걸 발판 삼아 나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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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노트가 마지막으로 가리키는 이름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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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아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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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히 이름을 되뇌며, 나는 펜을 든 채 노트 한 귀퉁이에 그녀의 이름을 적어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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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가 좀 어렵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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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강아린에게도 줄 수 있는 게 분명히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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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그녀를 위해 준비한 계획이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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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문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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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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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약을 주려 하면, 이미 본인이 알아서 마셨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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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비를 주자니, 그건 더더욱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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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의 귀중한 자제다. 못 입고 다닐 리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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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내가 그녀에게 제공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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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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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가치 있고, 가장 희귀한 자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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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건 지금 당장은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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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분을 더 곰곰이 생각해봤지만, 현시점에서 내가 강아린에게 해줄 수 있는 건 많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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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처음부터 알아서 잘하는 스타일이며, 무엇보다 너무 똑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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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이건, 조금 더 고민이 필요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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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노트를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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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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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학교에 갈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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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온은 슬슬 교류전을 맞이하기 위해 부지를 정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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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목상으론 축제였고, 실제로 참가자가 아닌 이들에겐 그저 즐거운 구경거리일 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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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교실 뒷문을 조용히 열고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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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늘 그렇듯, 내 전용석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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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자리에는 천여울이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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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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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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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내 인사를 받으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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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수업이 거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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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교류전에 앞서 준비운동 겸 간단한 훈련을 할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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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조용히 자리에 앉아, 교관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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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중, 옆자리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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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해인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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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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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망설이는 듯한 말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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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을 보니, 천여울이 나를 조심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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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이번에 진짜 성녀가 됐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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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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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이제 아르카디아의 정식 성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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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언론에 보고되지는 않았지만 그건 시간문제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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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성녀에게만 허락되는 성법을 배웠는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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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잘됐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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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좋은 소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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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성녀 전용 성법은 많이 어렵긴 하겠지만, 반드시 익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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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여울은 말을 잇기 전, 살짝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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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그게 너무 어려워서… 혹시 좀 알려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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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곧장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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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하지. 지금 그거 펼쳐봐. 교관 오기 전에 잠깐 보면 되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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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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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얼굴이 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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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손이 바쁘게 가방 속을 뒤졌고, 곧 고급 재질의 두루마리를 꺼내 들려던 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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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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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순간, 멈칫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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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 내가 알려주는 게 맞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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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려줄 수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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얕지만, 기본적인 지식은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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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방향성 정도는 제시해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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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고등 성법부터는 그저 성법을 펼친다고 끝나는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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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기술로 치부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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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히 사용하기 위해서는 그 자체를 완벽히 이해해 받아들이고, 자기 것으로 녹여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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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서부터 차이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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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내가 손을 대 빠르게 이해시켜버린다면, 그녀는 그 깊이를 체득하지 못한 채 껍데기만 익히게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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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위력을, 내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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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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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절대 안 된다. 나중이면 모르겠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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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성녀로서 내딛는 첫걸음만큼은, 반드시 스스로 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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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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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손을 뻗어, 그녀가 꺼내려던 두루마리에 조심스레 손끝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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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여울이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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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두루마리를 살짝 눌러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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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너 알아서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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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려줄 수 있는 게 있고, 없는 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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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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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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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쉽게도 그건 후자에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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