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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연락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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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꼭 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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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아린의 배웅과 함께 문이 닫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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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와의 대화는 결과적으로는 좋게좋게 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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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중간중간 정조의 위협이 있긴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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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를 보낸 팀들에게서 결과가 도착하면 내게 바로 알려준다고 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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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면 나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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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잠시, 숨을 돌리며 기다리면 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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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비틀거리는 발걸음으로 2층의 방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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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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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을 닫고 그대로 거실 소파 위로 몸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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푹신한 쿠션이 긴장으로 굳어 있던 내 몸을 부드럽게 받아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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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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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우웅, 우우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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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치에서 저장되지 않는 번호의 전화가 걸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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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화창에는 번호만 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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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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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업무적이든 사적이든 반드시 연락처를 저장해 놓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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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가 아는 번호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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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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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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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하, 해인 학생! 접니다! 이사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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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화기 너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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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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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장이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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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 사람 번호를 저장을 안 해놨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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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자세를 살짝 고쳐잡고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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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사장님 죄송합니다. 제가 워치를 바꿔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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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바꾼 적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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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 아닙니다. 다름이 아니라 저번 가온 모델 건에 대해서 얘기를 하고 싶어서 전화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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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무슨 일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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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기할 게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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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비고에서 너무 많이 꺼내갔다고 화를 내는 건… 나는 잠시 긴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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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아주 좋은 아이디어가 하나 떠올랐지 뭡니까? 요즘 시대는 남성 영웅 혼자서는 임팩트가 부족하죠. 그래서 말인데, 여학생 모델을 더 발탁해서 이렇게 같이 찍으면 좋지 않을까 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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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일리는 있는 말이다. 원래 가온에서도 광고를 할 때 남, 녀 모델로 구성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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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영웅인 여성 모델은 구한 줄 알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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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아니었나 보다. 생각해 보니 여성 모델도 학생으로 하고 싶어진 듯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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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영웅 모델료는 남성보다 여성이 훨씬 비싸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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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말인데, 해인 학생. 혹시 같이 찍고 싶은 여학생이라도 있습니까? 파트너니까 학생 의견을 최우선으로 들어드리겠습니다!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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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게 있을 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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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나는 이미 비고에서 뽕을 뽑을 대로 뽑은 상태라, 빨리 사진 몇 방 찍고 이 계약을 끝내고 싶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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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나 상관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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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아마 천여울과 강아린은 안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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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은 이미 단체에 소속되어 있어서 초상권이 묶여있을 게 뻔하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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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나 상관없습니다. 이사장님의 안목을 믿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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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렇게 귀찮은 선택을 그에게로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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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 알겠습니다! 내일까지 연락 연락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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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이사장과의 통화는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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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대로 소파에 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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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가온의 홍보 모델 촬영이 있는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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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이 끝나고도 약속한 시간까지는 꽤 남아있었기에, 나는 윤채하와 시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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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보드게임 동아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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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뭇 달라진 동아리실의 풍경은 아직도 적응이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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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의 구조도 최첨단, 게임들도 최첨단, 의자와 테이블도 최신식이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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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윤채하가 하고 있는 게임만큼은 다소 클래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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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내 룩이 이렇게 하면… 체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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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채하는 반짝이는 눈으로, 체스판 위의 말들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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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채하는 내게서 체스를 배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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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나도 잘 아는 건 아니었기에, 아는 만큼만 알려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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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턱을 괸 채, 그녀의 말을 묵묵히 들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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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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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배움의 천재답게 별것을 알려주지 않아도 게임의 본질을 꿰뚫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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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대답에 그녀는 자신이 만든 수에 감탄한 듯 아이처럼 환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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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히 내가 이긴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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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닐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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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채하는 자신의 나이트로 나의 주요 기물 두 개를 동시에 노리는, 포크라는 기술을 성공시켰지만 정작 자신의 가장 중요한 것을 지키는 데는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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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의 룩으로, 그녀의 진영 가장 깊숙한 곳에 숨어있는 왕을 공격하는 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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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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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입에서 아쉬운 탄식이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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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체스판을 이리저리 훑어보며 자신의 왕이 도망칠 길을 찾아보았지만, 이미 모든 길이 막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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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체크메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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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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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말에, 윤채하는 분하다는 듯 입술을 삐죽 내밀다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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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두는 것치고는… 나도 상당히 재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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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워치를 확인했다. 어느새, 약속 시간이 다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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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여기까지 할까? 나 슬슬 가봐야 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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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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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에서 일어나 체스 말을 정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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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윤채하는 동아리방에서 나와, 나른한 햇살이 내리쬐는 복도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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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숙사와 오늘 나의 촬영 약속 장소의 방향은 정반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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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내가 약속이 있어서, 먼저 들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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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나도 갈 곳이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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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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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채하는 내 옆을 따라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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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걷다가, 문득 그녀의 얼굴을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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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채하는 애써 앞만 보고 걸으면서도 입술을 씰룩거리며 터져 나오는 웃음을 필사적으로 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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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 또 무슨 꿍꿍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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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모습을 보고서도, 굳이 묻지 않은 채 계속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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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목적지인 가온의 중앙 도서관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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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장 말로는 가온의 거대한 지식의 보고를 배경으로 촬영하고 싶다나 뭐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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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구한 전통이 있는 촬영지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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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긴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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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은 명성에 걸맞게 압도적이었다. 돔 형태의 건물과 도서관 가운데에는 심신을 편안하게 하는 거대한 나무가 심어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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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나도 여기 온 건 처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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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란 자료는 이미 옛날에 조사했던지라 올 일이 없었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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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옆에서 여전히 웃음을 참고 있는 윤채하에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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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긴데. 너도 갈 곳 있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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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말에, 그녀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아하하,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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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그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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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해인 학생! 채하 학생! 두 사람 다 와 있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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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2층에서 이사장이 신이 난 목소리와 함께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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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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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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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장이, 계단을 내려와 우리 앞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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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 연락을 한다는 게 조금 늦었군요. 마침 잘 됐습니다. 바로 파트너를 소개하려고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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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윤채하를 손바닥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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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가온의 새로운 모델이자, 해인 학생의 파트너는 여기 있는 윤채하 학생으로 결정되었습니다! 불가람의 공방 건으로 두 학생의 시너지는 이미 증명되지 않았습니까? 이보다 더 완벽한 조합은 없다고 내부 회의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되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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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윤채하를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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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채하는 승리의 V자를 그리며 내게 윙크를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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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촬영 시작하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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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장이 손뼉을 치며 이야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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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영은... 생각보다 훨씬 단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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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히는, 잡지사의 화보 촬영과, 연예부 기자의 인터뷰가 뒤섞인 아주 기묘한… 형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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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 정해인 학생은 나무에 등을 기대고 시크하게! 윤채하 학생은 그 앞에 앉아서 책 들고, 올려다보는 순수한 동경의 눈빛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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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란한 감독의 외침과 함께, 나는 지시에 따라 나무에 등을 기댄 채 무표정을 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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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발치에 앉은 윤채하는 그녀는 정말로, 순수하고 반짝이는 동경의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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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연기 맞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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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쩍, 번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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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의 플래시가 터지는 사이사이에, 가온 홍보팀의 직원이 우리에게 질문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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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인 학생! 묵귀라는 영웅명으로 활동하시다가, 가온에 입학한 특별한 계기가 있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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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온의 교육을 통해 더 성장하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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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미리 준비된, 영혼 없는 답변을 내뱉었다. 직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이번에는 윤채하에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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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채하 학생은 칼로스의 천재 마법사라는 명예를 버리고 가온으로 전학 온 이유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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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질문에, 윤채하는 나를 한번 힐끗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모든 스태프들이 들을 수 있는, 아주 맑고 또렷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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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 때문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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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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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촬영장의 공기가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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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과 스태프, 그리고 이사장의 얼굴에 ‘오오오’ 하는 감탄사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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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약간 잘못된 방향으로 갈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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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나 다를까, 그 이후로 나에게는 어떤 질문도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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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나! 그럼 정해인 학생의 어떤 점에 이끌려서 오시게 된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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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냥 멋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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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분 불가람의 공방에서도 함께 계셨는데, 혹시 연인 사이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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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채하는 그 대답에는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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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담히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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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 건 아직 아니고, 얘가 저를 키우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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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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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대답할 거였으면 차라리 연인 사이라 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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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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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온의 홍보부 팀원이 되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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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운다는 말에 촬영장은 오해의 구렁텅이로 점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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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미묘한 분위기 속, 몇 번의 촬영이 더 이어지고, 감독은 만족했다는 듯 박수를 치며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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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케이! 좋습니다! 인터뷰는 이 정도로 하죠! 두 학생, 결과물이 바로 나왔는데, 한번 확인해 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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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냥 도망치고 싶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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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장이 내 어깨를 꽉 붙잡고 거대한 홀로그램 스크린 앞으로 나를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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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린에는, 방금 전 촬영한 화보의 A 컷들이 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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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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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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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태프들은 다들 감탄하며 사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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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긴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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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내심 감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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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야 뭐 그렇다 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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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채하는 원판이 워낙 사기적인 데다, 전문가의 카메라 마사지를 좀 받으니 아예 차원이 다른 그림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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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나왔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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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감탄하며, 옆에 있을 윤채하에게 말을 걸려 했다. 그녀도 분명 만족스러워할 사진들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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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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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도… 이것도 주세요… 이거!! 이거 좋아요! 저기 멍 때리고 입 벌리고 있는 사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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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채하는, 정작 내 옆이 아니라 사진 기사의 옆에 딱 붙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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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사진 기사의 어깨너머로, 그의 모니터에 떠 있는 모든 사진들을 가리키며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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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전부주세요! 여기 제 이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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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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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녀의 등 뒤로 다가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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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채하의 뒷목을, 마치 어미 고양이가 새끼 고양이의 목덜미를 물듯 가볍게 잡아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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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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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쁘실 텐데 방해하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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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당황한 사진 기사에게 가볍게 목례를 하고, 버둥거리는 윤채하를 질질 끌고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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