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upy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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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연락 줘.”
“응. 꼭 줄게.”
강아린의 배웅과 함께 문이 닫혔다.
그녀와의 대화는 결과적으로는 좋게좋게 풀렸다.
뭐 중간중간 정조의 위협이 있긴 했지만.
조사를 보낸 팀들에게서 결과가 도착하면 내게 바로 알려준다고 하더라.
이러면 나쁘지 않다.
나도 잠시, 숨을 돌리며 기다리면 될 것 같았다.
나는 비틀거리는 발걸음으로 2층의 방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 철컥.
문을 닫고 그대로 거실 소파 위로 몸을 던졌다.
푹신한 쿠션이 긴장으로 굳어 있던 내 몸을 부드럽게 받아주었다.
그때였다.
- 우우웅, 우우웅.
워치에서 저장되지 않는 번호의 전화가 걸려왔다.
통화창에는 번호만 떠있었다.
“… 누구지?”
나는 업무적이든 사적이든 반드시 연락처를 저장해 놓는 편이다.
그러나 내가 아는 번호는 아니었다.
“누구세요?”
전화를 받았다.
“… 하하, 해인 학생! 접니다! 이사장입니다!”
수화기 너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이사장이었구나.
내가 이 사람 번호를 저장을 안 해놨었나.
나는 자세를 살짝 고쳐잡고 대답했다.
“아, 이사장님 죄송합니다. 제가 워치를 바꿔서요.”
물론 바꾼 적은 없다.
“하하, 아닙니다. 다름이 아니라 저번 가온 모델 건에 대해서 얘기를 하고 싶어서 전화를 했습니다.”
“네. 무슨 일이시죠?”
얘기할 게 있나.
혹시 비고에서 너무 많이 꺼내갔다고 화를 내는 건… 나는 잠시 긴장했다.
“제가 아주 좋은 아이디어가 하나 떠올랐지 뭡니까? 요즘 시대는 남성 영웅 혼자서는 임팩트가 부족하죠. 그래서 말인데, 여학생 모델을 더 발탁해서 이렇게 같이 찍으면 좋지 않을까 해서요.”
뭐 일리는 있는 말이다. 원래 가온에서도 광고를 할 때 남, 녀 모델로 구성하니까.
그래서 영웅인 여성 모델은 구한 줄 알았는데….
역시 아니었나 보다. 생각해 보니 여성 모델도 학생으로 하고 싶어진 듯해 보였다.
애초에 영웅 모델료는 남성보다 여성이 훨씬 비싸니까.
“그래서 말인데, 해인 학생. 혹시 같이 찍고 싶은 여학생이라도 있습니까? 파트너니까 학생 의견을 최우선으로 들어드리겠습니다! 하하하!”
그런 게 있을 리가.
사실 나는 이미 비고에서 뽕을 뽑을 대로 뽑은 상태라, 빨리 사진 몇 방 찍고 이 계약을 끝내고 싶을 뿐이었다.
“아무나 상관없습니다.”
그런데 아마 천여울과 강아린은 안될 거다.
둘은 이미 단체에 소속되어 있어서 초상권이 묶여있을 게 뻔하거든.
“아무나 상관없습니다. 이사장님의 안목을 믿겠습니다.”
나는 그렇게 귀찮은 선택을 그에게로 넘겼다.
“하하! 알겠습니다! 내일까지 연락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렇게 이사장과의 통화는 끝났다.
나는 그대로 소파에 누웠다.
오늘은 가온의 홍보 모델 촬영이 있는 날이었다.
수업이 끝나고도 약속한 시간까지는 꽤 남아있었기에, 나는 윤채하와 시간을 보냈다.
바로, 보드게임 동아리에서.
사뭇 달라진 동아리실의 풍경은 아직도 적응이 되지 않았다.
방의 구조도 최첨단, 게임들도 최첨단, 의자와 테이블도 최신식이었지만….
나와 윤채하가 하고 있는 게임만큼은 다소 클래식했다.
“그러니까 내 룩이 이렇게 하면… 체크인가?”
윤채하는 반짝이는 눈으로, 체스판 위의 말들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물었다.
윤채하는 내게서 체스를 배우고 있었다.
사실 나도 잘 아는 건 아니었기에, 아는 만큼만 알려주고 있었다.
나는 턱을 괸 채, 그녀의 말을 묵묵히 들어주었다.
“어.”
그녀는 배움의 천재답게 별것을 알려주지 않아도 게임의 본질을 꿰뚫고 있었다.
내 대답에 그녀는 자신이 만든 수에 감탄한 듯 아이처럼 환하게 웃었다.
“히히 내가 이긴 것 같은데.”
“아닐걸.”
윤채하는 자신의 나이트로 나의 주요 기물 두 개를 동시에 노리는, 포크라는 기술을 성공시켰지만 정작 자신의 가장 중요한 것을 지키는 데는 실패했다.
나는 나의 룩으로, 그녀의 진영 가장 깊숙한 곳에 숨어있는 왕을 공격하는 데 성공했다.
“아….”
그녀의 입에서 아쉬운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녀는 체스판을 이리저리 훑어보며 자신의 왕이 도망칠 길을 찾아보았지만, 이미 모든 길이 막혀 있었다.
“… 체크메이트.”
“응.”
내 말에, 윤채하는 분하다는 듯 입술을 삐죽 내밀다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처음 두는 것치고는… 나도 상당히 재밌었다.
나는 워치를 확인했다. 어느새, 약속 시간이 다 되어 있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할까? 나 슬슬 가봐야 해서.”
“알았어.”
자리에서 일어나 체스 말을 정리했다.
나와 윤채하는 동아리방에서 나와, 나른한 햇살이 내리쬐는 복도를 걸었다.
기숙사와 오늘 나의 촬영 약속 장소의 방향은 정반대였다.
“오늘 내가 약속이 있어서, 먼저 들어가.”
“음… 나도 갈 곳이 있어서.”
“아 그래?”
윤채하는 내 옆을 따라걸었다.
나는 걷다가, 문득 그녀의 얼굴을 봤다.
윤채하는 애써 앞만 보고 걸으면서도 입술을 씰룩거리며 터져 나오는 웃음을 필사적으로 참고 있었다.
얘 또 무슨 꿍꿍이지.
나는 그 모습을 보고서도, 굳이 묻지 않은 채 계속 걸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목적지인 가온의 중앙 도서관에 도착했다.
이사장 말로는 가온의 거대한 지식의 보고를 배경으로 촬영하고 싶다나 뭐라나.
유구한 전통이 있는 촬영지라고 한다.
‘좋긴 하네.’
도서관은 명성에 걸맞게 압도적이었다. 돔 형태의 건물과 도서관 가운데에는 심신을 편안하게 하는 거대한 나무가 심어져있다.
사실 나도 여기 온 건 처음이다.
자료란 자료는 이미 옛날에 조사했던지라 올 일이 없었기 때문.
나는 옆에서 여전히 웃음을 참고 있는 윤채하에게 말했다.
“나는 여긴데. 너도 갈 곳 있다며.”
내 말에, 그녀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아하하,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바로 그때였다.
“오, 해인 학생! 채하 학생! 두 사람 다 와 있었군요!”
도서관 2층에서 이사장이 신이 난 목소리와 함께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두 사람…?’
설마.
이사장이, 계단을 내려와 우리 앞에 섰다.
“하하 연락을 한다는 게 조금 늦었군요. 마침 잘 됐습니다. 바로 파트너를 소개하려고 했는데….”
그는 윤채하를 손바닥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이번 가온의 새로운 모델이자, 해인 학생의 파트너는 여기 있는 윤채하 학생으로 결정되었습니다! 불가람의 공방 건으로 두 학생의 시너지는 이미 증명되지 않았습니까? 이보다 더 완벽한 조합은 없다고 내부 회의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되었지요.”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윤채하를 바라봤다.
윤채하는 승리의 V자를 그리며 내게 윙크를 날렸다.
“바로 촬영 시작하시죠!”
이사장이 손뼉을 치며 이야기했다.
촬영은... 생각보다 훨씬 단순했다.
정확히는, 잡지사의 화보 촬영과, 연예부 기자의 인터뷰가 뒤섞인 아주 기묘한… 형태였다.
“좋아! 정해인 학생은 나무에 등을 기대고 시크하게! 윤채하 학생은 그 앞에 앉아서 책 들고, 올려다보는 순수한 동경의 눈빛으로!”
요란한 감독의 외침과 함께, 나는 지시에 따라 나무에 등을 기댄 채 무표정을 유지했다.
내 발치에 앉은 윤채하는 그녀는 정말로, 순수하고 반짝이는 동경의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거 연기 맞겠지?
-번쩍, 번쩍!
카메라의 플래시가 터지는 사이사이에, 가온 홍보팀의 직원이 우리에게 질문을 던졌다.
“정해인 학생! 묵귀라는 영웅명으로 활동하시다가, 가온에 입학한 특별한 계기가 있으신가요?”
“가온의 교육을 통해 더 성장하고 싶었습니다.”
나는 미리 준비된, 영혼 없는 답변을 내뱉었다. 직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이번에는 윤채하에게 물었다.
“윤채하 학생은 칼로스의 천재 마법사라는 명예를 버리고 가온으로 전학 온 이유가 궁금합니다!”
그 질문에, 윤채하는 나를 한번 힐끗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모든 스태프들이 들을 수 있는, 아주 맑고 또렷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얘 때문에요.”
“…….”
순간 촬영장의 공기가 멈췄다.
감독과 스태프, 그리고 이사장의 얼굴에 ‘오오오’ 하는 감탄사가 떠올랐다.
이거 약간 잘못된 방향으로 갈 것 같은데….
아니나 다를까, 그 이후로 나에게는 어떤 질문도 오지 않았다.
“어머나! 그럼 정해인 학생의 어떤 점에 이끌려서 오시게 된 건가요?”
“… 그냥 멋있어서….”
“두 분 불가람의 공방에서도 함께 계셨는데, 혹시 연인 사이인가요?”
윤채하는 그 대답에는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담담히 답했다.
“… 그런 건 아직 아니고, 얘가 저를 키우고 있어요.”
“…….”
이렇게 대답할 거였으면 차라리 연인 사이라 했으면 좋겠다.
“… 네?”
가온의 홍보부 팀원이 되물었다.
키운다는 말에 촬영장은 오해의 구렁텅이로 점점 들어갔다.
그렇게 미묘한 분위기 속, 몇 번의 촬영이 더 이어지고, 감독은 만족했다는 듯 박수를 치며 외쳤다.
“오케이! 좋습니다! 인터뷰는 이 정도로 하죠! 두 학생, 결과물이 바로 나왔는데, 한번 확인해 보시죠!”
나는 그냥 도망치고 싶었지만.
이사장이 내 어깨를 꽉 붙잡고 거대한 홀로그램 스크린 앞으로 나를 이끌었다.
스크린에는, 방금 전 촬영한 화보의 A 컷들이 떠 있었다.
“오….”
“와….”
스태프들은 다들 감탄하며 사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괜찮긴 하네.’
나도 내심 감탄하고 있었다.
나야 뭐 그렇다 쳐도.
윤채하는 원판이 워낙 사기적인 데다, 전문가의 카메라 마사지를 좀 받으니 아예 차원이 다른 그림이 나왔다.
“잘 나왔는데?”
나는 감탄하며, 옆에 있을 윤채하에게 말을 걸려 했다. 그녀도 분명 만족스러워할 사진들이라.
그러나.
“이것도… 이것도 주세요… 이거!! 이거 좋아요! 저기 멍 때리고 입 벌리고 있는 사진도…!”
윤채하는, 정작 내 옆이 아니라 사진 기사의 옆에 딱 붙어 있었다.
그녀는 사진 기사의 어깨너머로, 그의 모니터에 떠 있는 모든 사진들을 가리키며 외쳤다.
“네 전부주세요! 여기 제 이메일….”
“뭐해.”
나는 그녀의 등 뒤로 다가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윤채하의 뒷목을, 마치 어미 고양이가 새끼 고양이의 목덜미를 물듯 가볍게 잡아끌었다.
“응엑.”
“바쁘실 텐데 방해하지 마.”
나는 당황한 사진 기사에게 가볍게 목례를 하고, 버둥거리는 윤채하를 질질 끌고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