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upy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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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온의 훈련이 끝나고.
다시 내 훈련도 시작됐다.
나는 훈련장 중앙에 가부좌를 튼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온몸의 신경을 내면으로 집중한다.
파사현정(破邪顯正)은, 기본적으로 사한 것을 멸하는 마나를 가지고 있지만.
그게 내 본래의 마나와 완전히 합일한 것은 아니었다.
내가 원래 가지고 있는 마나에, 잉크를 덧대어 성질을 바꾸는 느낌이랄까.
만약 이 경계를 허물고, 나의 모든 마나를 편린의 성질로 완전히 바꿀 수만 있다면.
출력의 수준과 정교함이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달라질 것이다.
물론, 어디까지나 예상의 범주긴 하다.
해봐야 안다. 연구의 한 방향성일 뿐.
어쩔 수 없다.
확장 권능은 이렇게 맨땅의 헤딩을 해봐야 안다.
원작에서야 공략법이 있겠지만, 여기는 그런 건 없으니까.
직접, 길을 찾아보는 수밖에.
될 때까지 해보는 수밖에 없다.
그때, 등 뒤에서 나를 향한 집요한 시선이 느껴졌다.
굳이 눈을 뜨지 않아도, 그게 누구인지는 알 수 있다.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야?”
호기심이 가득 찬 목소리.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훈련복 차림의 시온이 내 옆에 쪼그려 앉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나 조율 중.”
내 대답에, 그녀가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
평소와 다른 행동을 하는 내 모습을 보고 궁금한 게 생겼는지, 자꾸 질문해왔다.
“응… 좀 조율이 필요해 보이긴 하네.”
나는 순간적으로, 내 귀를 의심했다.
“그걸 어떻게 알아?”
“눈에 보여.”
이게 보인다고?
웬만한 영웅들도 감지하기 어려운 영역이다, 그런데 시온이?
“진짜 보여?”
그녀는 내 질문에 어깨를 으쓱하며 당연하다는 듯이 답했다.
“응, 잘 보이는데. 내가 궁수라 그런지 눈이 좀 좋더라고.”
“어떤 식으로 보여?”
내가 멍하니 묻자, 그녀는 씩 웃으며 내 옆으로 다가와 앉았다.
찢어진 훈련복 틈새로 보이는 그녀의 하얀 허벅지가 시야에 들어왔지만, 지금은 그것에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그냥 보여, 되게 크고 뜨거운 거랑… 따뜻한 게… 뒤죽박죽 섞여 있는 거.”
그녀는 내 몸을 손가락으로 콕 찌르며 말했다.
나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거렸다. 추상적이긴 하지만 완전히 틀린 말은 또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그런 나를 보며,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혼자서는 힘들 것 같은데?”
그리고 담담히 제안을 건넨다.
“내가 도와줄까?”
“할 수 있어?”
“응, 할아버지가 알려줬어.”
영감은 뛰어난 영웅임과 동시에 영웅 육성의 귀재다.
그런 그가 시온에게 별걸 다 알려준 모양이었다.
나는 잠시 고민했지만,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시온이 이상한 짓을 할 리도 없고, 정보의 출처가 영감이라면 신뢰도는 확실하다.
“어떻게 하는 건데?”
내가 묻자, 그녀는 대답 대신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가부좌를 튼 채 앉아있는 내 등 뒤로, 소리 없이 다가왔다.
나는 그녀가 무엇을 하려는지 알 수 없어, 잠자코 그녀의 다음 행동을 기다렸다.
- 스르륵.
그녀가 내 등 뒤에, 마찬가지로 가부좌를 틀고 앉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 꽈악.
부드럽고 따뜻한 감촉이, 내 등 전체를 감쌌다.
하시온이, 나를 뒤에서 그대로 끌어안은 것이다.
“…!”
순간적으로 몸이 굳었다.
가느다란 팔이 내 가슴팍을 부드럽게 감싸고, 등에는 그녀의 부드러운 굴곡이 완전히 밀착해왔다.
내 어깨 위로 시온의 턱이 얹혔고.
귓가에는 뜨거운 숨결이 느껴진다.
코를 간질이는 은은한 샴푸 향기는 덤.
“힘 빼… 해인아.”
시온이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그러자 그녀의 양 손바닥에서부터, 이전에 느껴보지 못했던 종류의, 아주 맑고 따뜻한 기운이 몸 안으로 흘러들어왔다.
그런데, 분명 낯선 기운이어야 하는데. 이상할 정도로 익숙하다.
‘뭐지?’
제집을 찾은 것 마냥 시온의 기운이 자연스럽게 파고들어 몸 구석구석을 맴돌았다.
그리고 그 기운이 부드럽게 내부를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서로 따로 돌던 마나가 잠잠해진다.
완벽한 합일이 된 것은 아니지만, 상당히 운용이 편해졌다. 실마리를 잡은 느낌이랄까.
“후….”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긴가민가했는데, 시온의 조율은 진짜였다.
“고마워. 진짜 도움이 됐는데?”
조율이 끝났으니, 나는 당연히 그녀가 몸을 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등 뒤의 감촉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감싸 안은 시온의 팔에 아주 미세하게 힘이 더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놓아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 시온?”
- 스윽.
시온의 한 손이 내 몸을 떠나 천천히 내 턱으로 향했다.
부드러운 손가락이 내 턱을 감싸고, 거부할 틈도 없이, 내 얼굴을 옆으로 부드럽게 돌렸다.
이제 내 시선은, 내 어깨에 턱을 얹은 그녀와 정면으로 마주쳐 있었다.
숨결이 닿을 정도로, 아주 가까운 거리.
눈동자에는 장난기라고는 없었다.
알 수 없는 무언가가 그 속에서 일렁인다.
시온의 붉은 입술이, 내 귓가에 닿을 듯 말 듯 한 거리에서 아주 천천히 열렸다.
“근데, 해인아.”
나지막한 속삭임.
“내가 아직도… 그냥 동생 같아?”
아예 틀린 말은 아니었다.
10살 때 시온과 처음 만난 그 순간부터.
나는 그녀를 동생으로밖에 생각할 수 없었으니까.
지켜줘야 하고, 보살펴야 하는.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애써 무시하고 있는, 지금 내 등 뒤의 이 감촉은 절대 무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밀착한 시온의 몸이 더 가까워지는 게 느껴진다.
뜨거운 숨결이 귓가에 자꾸 맴돈다.
지난 10년의 세월이 나를 막아서지만, 시온이 내 등을 떠미는 듯한 기분이 든다.
'한 발짝 더.'
라고.
결국 마른침을 삼키고, 아주 천천히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잠겨있다.
“… 아니.”
나는 짧게 부정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이제는 아니야.”
“흐히.”
그 말에, 내 등 뒤에서 만족스러워하는 웃음소리가 들린다.
나를 옭아매던 시온의 팔이 스르륵, 풀렸다.
나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시온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살짝 붉어진 얼굴로 나를 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
“그럼, 됐어.”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훈련장 출구를 향해 걸어갔다.
“…….”
이제, 확실해졌다.
시온은 더 이상 내가 알던 착한 동생이 아니었다.
- 첨벙첨벙.
정해인은 텅 빈 세면실에서, 흐르는 물에 얼굴을 박고 정신없이 찬물 세수를 하고 있었다.
머릿속을 식혀야 했다. 열이 오른 머리로는, 제대로 된 사고를 할 수가 없었으니까.
정신 좀, 차려야 할 것 같아서.
그에게 있어 그저 지켜줘야 할 아이였던 하시온.
그녀는 어느새, 다른 의미로 너무나도 많이 성장해 있었다.
찬물에 젖은 얼굴을 들어, 정해인은 거울 속의 자신을 마주했다.
물방울이 맺힌 그의 얼굴 위로, 다른 여성들의 얼굴이 겹쳐 떠오르기 시작했다.
바티칸 호텔 방에서, ‘그 다음.’을 속삭이던 천여울의 열기로 가득했던 눈빛.
그리고 조금 전 훈련장에서 보았던, 하시온의 눈빛도, 결국 그와 비슷한 성질의 눈빛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경매장에서 내게 시종일관 보이던 강아린의 눈빛까지.
알고 보면 모두가, 똑같은 눈을 하고 있었다.
그나마 유하나와 윤채하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이제 와서는 이것 또한 확신하기가 어려웠다.
나와 천여울이 지금 어떻게 됐는지를 생각해보면….
‘… 미친.’
다른 이들도 어떻게 될지는 명약관화해 보였다.
- 첨벙!
정해인은 다시금 얼굴을 문지르며, 찬물에 머리를 박았다.
그 시각, 하시온.
방으로 돌아온 그녀는, 침대 위로 쓰러지듯 머리를 박았다.
얼굴은 터질 듯이 붉어져 있고, 심장은 터져 나올 것처럼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처음이었다.
이렇게까지 저돌적으로 갖다 박고, 또 도발한 것은.
처음에는 그저 확장 권능을 도와주기 위한 마음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순수한 의도뿐이었던 조율.
그러나, 결국 폭주해버렸다.
‘어떡해….’
천여울과 정해인이 함께 돌아온 그날부터, 그녀는 조바심과… 또 뭐, 패배감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저지른 행동이었다.
하지만 그 대담했던 행동의 결과로 하시온은 희망을 보았다.
하시온은 방금 전의 순간을 되감았다.
평소의 정해인이라면, 내가 그런 질문을 던졌을 때, 틀림없이 여유롭게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을 것이다.
‘당연하지.’
분명 이렇게 말하며, 선을 쫘악ㅡ 하고 그었을 터였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못했다.
그녀가 뒤에서 그를 껴안았을 때, 그의 등 근육은 미세하게 굳어 있었다.
당황으로 점철된 그의 표정이.
심리적 장벽이 무너졌음을 증명한다.
'천여울의 말이 맞았어.'
정말, 남은 것은 단 하나뿐이다.
그 마지막 관문만 넘는다면 이제 막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