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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눈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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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 안은 칠흑같이 어둡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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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막 커튼을 죄다 닫은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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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를 보기도 전에 느낌부터 이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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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쾌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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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곤은커녕, 몸이 가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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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눈을 비비며 습관처럼 워치를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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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7시. 7시간도 채 안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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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더 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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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처럼 푹 자기로 했는데, 얼마 자지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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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몸을 뒤척이다가, 문득 어딘가 싸한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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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워치를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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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엔 시간 앞에 있는 글자를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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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M 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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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할 정도로 상쾌한 몸은, 기분 탓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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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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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내가 생각했던 시간보다 12시간은 더 지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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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7시간이 아니라, 19시간을 내리 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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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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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한 번도 안 깨고 이 정도로 잘 수가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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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쌓인 피로가 상상 이상이었던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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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급하게 몸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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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메세지를 가볍게 톡톡, 하나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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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다시 눕자마자, 눈이 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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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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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나는 31시간을 자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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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과 밤은 맞춰야 했으니, 어쩔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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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람의 공방이라는 큰 산을 겨우 넘긴 했지만, 방학은 길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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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놓고 쉴 틈도 없이, 나는 빠르게 다음 스텝을 밟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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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먼저 떠오른 건, 천여울이었다. 어제 잠깐 일어나서 메세지를 보내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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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lief_]: 천여울씨 내일 낮에 좀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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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_y]: 어??? 어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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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내가 위치도 시간도 안 보내줬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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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그녀에게는 여행 권유도 못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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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학에 특별한 일정이 없는 건 확인했지만, 혹시라도 일정이 생길지도 몰라 마음이 조급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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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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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웅적 입지도 많이 올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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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인이라는 이름을 이제 하나둘씩 알아가는 시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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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문득 걸리는 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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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여울. 그녀는 성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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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만큼 무게가 실리지는 않고, 관념은 많이 퇴색됐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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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라는 단어는 여전히 신성하고, 금기와 정결의 상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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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남성과의 관계에서는 더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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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그녀에게 성인 남성이 먼저 여행을 제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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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쩔 수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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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양보의 영역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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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드시 끌고 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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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띠리리리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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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워치로 전화가 걸려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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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여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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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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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언제 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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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한 12시 쯤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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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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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천여울도 바쁜 몸이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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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한 맞추는 것이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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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몇시? 오늘 바쁘면, 다음에 만나도 괜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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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 앞이야. 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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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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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반사적으로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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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튼을 걷자, 거리 쪽 가로등 아래, 정말로 천여울이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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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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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 위에 걸친 얇은 베이지 색 가디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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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정하게 빗어 넘긴 머리에 하얀색 헤어밴드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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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봐도 대충 나온 복장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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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방 나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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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대충 씻고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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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을 열자마자,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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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크를 쓰고 있었지만, 그 특유의 눈매는 단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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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눈이 마주친 순간, 그녀는 마스크를 아래로 살짝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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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면서, 내게 장난스럽게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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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 유명인 아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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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너만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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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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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웃으며 내 어깨를 손끝으로 톡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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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오늘 왜 불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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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할 이야기는 아니고. 카페라도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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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 할 공간이 좀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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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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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개를 돌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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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나란히 걸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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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은 적당히 따뜻하고,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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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는 집에서 가장 가까운 곳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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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지는 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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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히 사람이 많으면, 피곤해질 수도 있을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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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병이 아니다. 내 얘기가 아니라, 천여울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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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진짜' 유명 인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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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착한 곳은 아담한 2층짜리 카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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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구 옆에 덩굴이 자라고 있는, 로컬 느낌이 짙은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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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시온이 끌고 오던 곳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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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온이 여기 생크림 롤을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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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괜찮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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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분위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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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여울이 작은 감탄을 내뱉으며 안으로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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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시선이 천천히 실내를 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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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가 자리는 운 좋게도 비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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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조용히 주문을 마치고, 그 자리로 가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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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뒤, 딸기 라떼와 아메리카노 그리고 화이트 롤이 각자 앞에 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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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떼 위에는 생딸기가 반 잘린 상태로 예쁘게 장식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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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여울은 컵을 받아들고 향을 맡더니 화이트 롤을 작게 잘라 입에 집어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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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눈꼬리가 살짝 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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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응~ 맛있다. 이런 데는… 어떻게 알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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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가 알려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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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일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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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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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이걸로 답이 됐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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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여울은 킥 하고 웃더니, 손에 쥔 컵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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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생 많았어… 공방, 많이 더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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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람의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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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여울이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으며 내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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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개를 저으며 가볍게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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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았어. 아티펙트 덕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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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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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다행이라는 듯, 그녀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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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안에서 별일은 없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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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별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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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일이라 할 것은 많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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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것 하나 평범하지는 않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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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아니, 그냥.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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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여울은 뭔가 말하려다, 그냥 삼켜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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컵을 들고 물을 한번 마시더니, 나와 눈을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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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오늘 왜 만나자고 한 거야? 아, 이유가 없어도 괜찮긴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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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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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본론으로 들어갈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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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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쓴맛이 혀끝을 감쌌지만, 정신이 살짝 또렷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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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한테 여행 제안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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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인, 네가 간이 배 밖으로 나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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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울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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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눈을 깜빡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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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컵을 테이블 위에 조심히 내려두고, 등을 살짝 앞으로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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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 등받이에서 등을 살짝 뗀 체, 시선을 맞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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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에… 방학 때 시간 나냐고 물었던 거, 기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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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눈동자가 살짝 커졌다. 곧바로 고개를 마구 끄덕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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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지. 당연히 기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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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빛이 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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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컵을 내려놓고 말을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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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이 여행 갈래? 위치는… 바티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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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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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에, 그녀의 표정이 잠깐 굳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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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람, 낯섦이 표정에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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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침묵이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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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너무 갑작스러웠나. 그래도 반드시 데려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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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학 동안 최소한 한 명이라도 편린을 얻어놓기로 계획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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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릿속으로 설득의 말들을 떠올리려던 찰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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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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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내 정적을 깨고 그녀가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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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말 바꾸면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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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흔쾌한 대답에 미소가 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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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거리가 하나 사라지는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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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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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낙장불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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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웃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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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여울은 고개를 기울이더니, 반짝이는 눈동자로 물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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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언제 가는데? 얼마나 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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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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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르면 빠를수록 좋겠지만, 아쉽게도 바티칸은 관광객들과 함께 개방할 때만 들어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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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예정된 날짜 중 가장 빠른 날짜를 고르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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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찾아둔 가장 빠른 날짜는 아마… 3주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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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주 뒤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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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주? 으흐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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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여울의 어깨가 미세하게 움찔움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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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최대한 앞당겨보려고 했는데, 절차가 까다롭더라고. 관광객 입장이 정해진 날짜에만 가능해서. 그게 내가 찾은 날짜 중에선 가장 빠른 날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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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그럼 바로 갈 수만 있으면… 언제든지 가능한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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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턱을 괜히 한번 만지더니, 다시 눈을 반짝이며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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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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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쉽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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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티칸의 오르디눔 교단은 은근히 까탈스러운 부분이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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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내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워치를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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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한 손놀림으로 화면을 내리더니, 바로 통화창을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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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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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묻기도 전에, 통화 연결음이 짧게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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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곧, 상대가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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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e la luce di Terna ti guidi. Chi siete voi in questa not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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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르나 님의 빛이 당신을 인도하길. 이 밤에 누구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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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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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소리야 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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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에는 하나도 안 들어오는데, 억양만 들어도 감이 잡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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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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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ona sera, Santità. Tutto bene? Sono io, la Santa d'Arca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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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밤이에요, 교황님. 잘 지내셨죠? 아르카디아의 성녀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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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천여울이 유창한 발음으로 이탈리아어를 구사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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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에 상대방의 언어와 목소리가 확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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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오, 여울 양. 오랜만이로군요. 아르카디아의 성녀께서 이렇게 직접 전화를 주시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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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교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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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는 교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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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티칸을 관리하는 오르디눔 교단은 용사와 성녀를 중심으로 한 아르카디아와 달리, 교황이 가장 높은 권력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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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르디눔과 아르카디아는 자매 교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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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기는 신 테르나와 에리엘은 자매신이고, 교단 간에도 언어를 공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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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둘은 매우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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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직접 전화를 걸 상대는 아니라고 볼 수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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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맞나? 그녀도 이제 정식 성녀가 됐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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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실례되는 시간은 아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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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엘 님과 테르나님의 축복 아래에 있는 이 시간에 실례란 없지요. 마침 예배를 마치고 내려오던 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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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옆에서 멍하니 그녀를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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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이 아니라 할아버지랑 안부 통화라도 하는 듯한 분위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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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쪽도 웃고 있고, 여울이도 말끝마다 살짝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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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조심스럽게 본론으로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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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름 아니라… 바티칸으로 잠시 방문하고 싶은데요…. 제가 동행하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요. 가능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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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가 짧게 숨을 고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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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이죠. …혹시 동행자는 아르카디아의 용사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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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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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로는 마치 손녀가 할아버지에게 부탁하는 톤으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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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위기가 부드럽게 풀리더니, 이내 통화가 마무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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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그럼 조만간 뵈어요~ 좋은 밤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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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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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화가 종료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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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여울은 천천히 워치를 내리고,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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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별일 아니라는 듯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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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됐어. 내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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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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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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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나를 바라보다가, 해맑게 웃으며 내 팔을 덥석 붙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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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바꾸기 없는 거… 맞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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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나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한마디 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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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 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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