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upy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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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학은 이미 코앞이었다.
며칠 남겨둔 시점.
공식적으로는 모든 교육과정이 끝났고, 성적도 모두 정리된 상태.
교정 곳곳에선 이미 짐을 싸고 떠나는 학생들도 보였지만, 대부분의 1학년은 남아있었다.
뭐, 사실 방학이라고 크게 다를 것은 없다.
멀리서 온 학생들을 위해 기숙사는 계속 개방된다.
무엇보다 이곳의 훈련 시설은 전국 어디에도 없는 최고 수준.
잔류하는 1학년이 많은 것은 당연했다.
그리고 일단, 나의 계획 역시 마찬가지.
현재 계획은 잔류다.
나갈 생각은 없었다.
“후….”
이른 아침, 나는 캠퍼스를 따라 러닝 코스를 돌고 있었다.
옆에는, 변함없이 유하나가 함께였다.
지난 한 학기 동안 이슈가 없는 이상 늘 뛰어왔다.
사실상 오래된 파트너처럼 호흡이 잘 맞는다.
아침 러닝을 하며 나는 자연스럽게 앞으로의 계획을 정리하려 했다.
우선 첫 번째 목표는 명확하다.
‘불가람.’
협회의 보상.
불가람(不伽籃)의 공방에 입장할 수 있는 권리를 행사해야 했다.
어떤 보상을 받게 될지는… 나도 정확히 알지 못한다.
워낙 성격이 특이하기 때문에.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하다.
이번 기회를 통해, 나는 반드시 더 강해질 것이다.
편린이 있는 나는 최소한의 조건을 달성한 셈이니까.
그리고 두 번째.
주요 등장인물의 편린 획득.
협회의 보상은 어쩌면 이 두 번째 목표를 위한 발판에 불과하다고도 볼 수 있겠다.
후보는 셋이지만….
우선 선별해둔 첫 번째 대상은, 바로 내 옆에서 땀을 흘리고 있는 유하나였다.
뜀걸음이 끝나고, 나는 천천히 숨을 고르며 유하나를 바라봤다.
땀방울이 그녀의 이마를 따라 반사되며 빛난다.
내 시선을 눈치챘는지 웃으며 묻는다.
“왜?”
나는 잠시 바라보다가, 말을 꺼냈다.
“그때 말했던 거, 기억해?”
“응?”
고개를 갸웃대는 그녀.
“여행. 방학 때 같이 가기로 했던 거, 혹시 일정 변화는 없지?”
나는 다시 물었다.
유하나도 워낙 바쁜 몸이다.
혹시나 일정에 차질이 있으면 안 됐으니까.
물론 가급적 어떻게든 데려갈 생각이다.
구슬리든… 아니면 끌고 가든.
“아… 그거어?”
조금 말을 늘리며, 이내 조심스레 내게 털어놓는다.
“그게 말이지….”
뭐지?
무슨 일이 있나.
“나… 이번 방학에 아버지께 승계받기로 했어.”
아.
이런.
승계.
승계는 유 가(家)의 전통 의식이었다.
가주가 소가주에게, 즉 다음 세대에게 공식적으로 가주의 자리를 넘기는 일종의 통과 의례.
몇 주간 가주와 소가주는 외부와 완전히 단절된 채, 공동(空洞)에 들어가 오로지 대련만 반복한다.
소가주가, 현 가주를 이길 때까지.
그녀에게 있어서는 상당히 중요한 이벤트다.
스스로 이겨내야 하는 이벤트기 때문.
보통은 2학년 무렵에나 치르는 게 일반적인데….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아무래도 유하나의 말도 안 되는 성장 속도를 알아챈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던 것 같다.
가주이자 아버지인 유무진 또한, 그 사실을 알아챈 듯하다.
유하나의 실력은 이미 예상을 훌쩍 넘어선 상태였다.
성장 곡선이 워낙 가파르니, 유무진 입장에서도 더 미룰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 미안, 실망했어?”
유하나가 내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응? 아니, 그런 건 아닌데.”
그런 건 아니었다.
다음 대상을 어떻게 할지가 고민일 뿐.
“가기 싫은 건 아니야. 절대로. 절대로.”
유하나는 몇 번이고 중얼거리며 같은 말을 반복했다.
절대로 가기 싫어서 그러는 게 아니라는 걸 강조하는 듯.
나는 슬쩍 웃었다.
“어, 알았어.”
뭐, 설령 나랑 가기 싫다고 해도, 내가 유하나를 놔줄 생각이 없었다.
승계만 아니었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데리고 갔을 거다.
이로써, 유하나는 한 차례 밀려났다.
이제, 나는 급하게 다음 대상을 찾아야 했다.
‘누구로 할까.’
강아린, 천여울.
둘 중 한명을 골라야 할 차례였다.
유하나는 등교 전, 기숙사 침대에서 일어나지를 못했다.
심장이 아직도 쿵쾅거리며 뛰었다.
‘어떡해… 결국 해버렸어.’
유하나는 정해인의 제안을, 한 번 더 고심 끝에 거절했다.
하지만 그건, 결코 사적인 욕망이나 거짓된 핑계로 밀어낸 게 아니었다.
진짜로 아버지가 승계 의식을 앞당겨 잡아 제안한 것은 사실이었고.
마침 유하나가 미치도록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타이밍이 좋았다. 결국 그녀는 못 이기는 척, 미친 척하고 받아들였다.
순간, 마음 한 켠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지만 이상하게도 그 불안은 금세 달콤한 쾌감으로 변했다.
심장은 아직도, 쉴 새 없이 두근거렸다.
이로써 그녀는 정해인의 두 번째가 될 것이다.
편린이든, 마음이든… 더 나아가 혹시나 몸이든.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사실이 두렵기보단 오히려 온몸이 들뜨게 했다.
달콤한 죄책감과, 짜릿한 금지의 설렘이 뒤섞인다.
이걸 단순히 게임 후유증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아니다.
이제 와서 부정한다고 달라질 것도 없다.
그냥 그녀의 취향과, 관념이 망가졌음을 온몸으로 체감하고 있었다.
- 토독토독.
유하나는 톡방에 메시지를 남겼다.
이 소식에 누구보다 환장할 사람들.
OnE: 여행 안 가기로 했어.
그리고 워치를 닫았다.
워치를 덮으니, 불이 붙은 듯 미친 듯이 메시지가 쏟아진다.
앞으로 벌어질 일들이 눈에 훤하다.
방금 막 깨달은 척.
열심히 훈련하다 깨달은 척.
우연히 습득한 척.
이제부터 그녀들은 정해인에게 편린의 자격을 보이기 위해 미친 듯이 노력할 것이다.
저마다의 방식으로.
알람이 연달아 울려대는데도, 그녀는 슬쩍 웃으며 눈을 감았다.
심장은 아직도, 미칠 듯이 뛰고 있었다.
저번에 방문했었던 성지.
오늘은 두 번째 입장이 허락된 날이었다.
누누히 말하지만, 가온에서는 뭐 할 게 없었다.
훈련 좀 하다가.
바둑으로 윤채하 좀 괴롭히다가.
밥 좀 먹다가.
또 윤채하 좀 괴롭히다가.
그러다 보니, 성지 방문이 더더욱 기다려질 수밖에 없었다.
‘좋아.’
간만에 양질의 훈련을 할 수 있을 테니까.
몸이 근질근질하다.
그때, 워치에 메시지가 떴다.
[1000_y]: 나 영약 챙겨가?
천여울이었다.
기말고사 보상으로 모두에게 지급된 영약.
잠시 생각했지만… 오늘은 아니다.
아직 그럴 때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belief_]: 오늘은 괜찮아.
더 적절한 타이밍이 있을 것이다.
아 맞다.
[belief_]: 오늘은 옷 좀 제대로 입고와.
저번에는 피부가 공기에 닿는 면적이 옷보다 많았다.
물론 그때의 나는 돌부처였기에 상관없었지만.
이제는 좀 다를 것 같다.
자신이 없다.
[1000_y]: )
아.
천여울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었다.
워치 알림을 닫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성지로 향했다.
교단의 입구에 다다르니, 내부는 차가운 새벽 공기와는 사뭇 달랐다.
안쪽에서 은근히 퍼져나오는 온기와 신성력이, 몸 구석구석을 조금씩 녹여내는 듯했다.
커다란 대리석 문이 눈앞에 닿을 즈음, 나는 잠시 주위를 둘러봤다.
그러나, 어딜 봐도 천여울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근처에 대기 중이던 사제에게 조용히 물었다.
“걔는요?”
사제는 미묘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미리 입장해 계십니다.”
이미 입장한 모양.
조금 더 기다리니, 거대한 대리석 문이 묵직하게 열렸다.
- 쿵.
입장과 동시에 문은 곧장 천천히 닫혀버린다.
정면을 바라보니, 넓고 맑은 공간 한가운데.
천여울이 다소곳이 서 있다.
오늘은 확실히, 성지 안임에도 불구하고 평소보다 단정한 옷차림이다.
“왔어?”
천여울이 먼저 입을 열었다.
“어.”
우리는 인사를 나누고 각자의 자리로 이동했다.
성지 안은 묘하게 무겁고, 동시에 차분하다.
뭔가 불경한 생각이 들지 않게끔 한달까.
곧이어 훈련이 시작됐다.
숨이 차오르다 못해 부족할 때까지 분위기에 이끌려 몸을, 마음을 모두 혹사시키는 훈련.
“아오….”
몇십 분이 지나자, 몸 여기저기가 비명을 질렀다.
간만이라 무리했더니, 아주 피곤해 죽을 노릇이다.
나는 결국 녹초처럼 누워서 고개를 들었다.
‘슬슬….’
오늘의 큰 목적 중 하나는 천여울의 관찰이었다.
혹시 그녀가 편린을 받아들일 만한 상황인지를 확인했어야 하니까.
나는 숨을 고르며, 조심스럽게 천여울을 바라봤다.
유하나와는 다르게, 천여울의 임계점은 뚜렷하다.
‘듀얼 태스킹.’
성법과 마법을 동시에 다루는 그녀의 독자적인 경지.
그 기술의 파편이라도, 설령 초입이라도, 실마리만 붙잡는다면 충분했다.
오히려 그렇기에 그녀의 순서는 미뤄질 가능성이 높았다.
너무나도 고차원적인 영역의 기술이었으니까.
빨라야 2학년?
아무래도, 아직은 힘들 것이다.
그때 천여울이 조용히 숨을 내뱉고, 왼손을 앞으로 뻗었다.
침묵 속에서 그녀의 왼손 위로 법진이 하나가 떠올랐다.
맑고, 정결한 빛.
우수한 성법(聖法)의 빛이었다.
‘좋은데?’
성법진을 전개하는 것은 이미 숙달이 된 모양이었다.
이것만으로도 우수하다.
그러나, 다음 순간 천여울이 오른손을 번쩍 들었다.
“…?”
나는 의아하게 그 모습을 바라봤다.
그러더니.
- 파지지지지직.
차갑고 날카로운 마법이 공기 중에 일렁거렸다.
그녀는 얼굴을 찡그리며 성법을 펼치는 동시에 파란색 마법진을 형성하려 했다.
“… 어?”
나는 나도 모르게 조용히 중얼거렸다.
“듀얼 태스킹…?”
명백히 듀얼 태스킹이었다.
이게, 말이 되나?
천여울은 극도로 집중한 채,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손끝이 바들바들 떨리고, 두 법진이 동시에 흔들린다.
- 파지지지지직!!
결국, 빛이 튀며 두 법진이 동시에 해체됐다.
실패였다.
천여울은 잠깐 멍하니 서 있다가, 작게 입을 삐죽 내밀었다.
“으응….”
미련이 남는 듯, 아쉬운 눈빛으로 손을 털어낸다.
나는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
“방금, 뭐야?”
천여울은 내가 지켜보고 있었다는 걸 그제야 알아챘는지, 순간 당황스러운 듯, 금세 밝게 웃었다.
“아… 이거?”
그녀가 부끄러운 듯 머리를 긁적였다.
“저번에… 티아라 쓰고 나서 성력이 늘어났거든… 그래서 뭔가 번뜩였달까? 요즘 계속 연구하고 있었어. 아직 잘 안되긴 하는데….”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생각해보면.
강아린, 유하나, 천여울.
셋 중 가장 많은 보조와 지원을 받았던 게, 바로 천여울이었다.
이아노의 십자가부터 티아라까지.
양질의 아티팩트를 흡수했고, 그 막대한 양의 성력과 마나를 전부 흡수했다.
어쩌면, 나는 천여울을 과소평가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멍하니 보고 있자, 천천히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많이 집중했는지 온 몸이 땀에 젖어있었다.
천여울이 땀에 젖은 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숨을 가다듬으며 내게 물었다.
“… 왜? 혹시 나한테 할 말 있어···?”
나는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봤다.
아무래도, 여행의 대상은 정해진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