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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흐를수록, 참가자들은 게임 속 인물과 점점 구분이 어려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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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아린이 경고했던 대로, 리미트가 해제된 더 루트는, 단순한 보드게임 그 이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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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자신을 캐릭터에 완벽히 투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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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 감정, 욕망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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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과 가상이 뒤섞인 듯한 감각 속에서, 어느새 그들은 진짜 삶을 즐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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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건, 정해인도 예외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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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스스한 농가의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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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방 마을 대 농부의 저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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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지만 따뜻한 안방 창문으로 햇살이 들이치며, 침구 위로 부드럽게 스며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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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인은 천천히 눈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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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설지 않은 체온과 은은한 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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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능처럼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 그녀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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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났어요 여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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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른한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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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여울이 눈을 살짝 비비며 몸을 뒤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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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이 그녀의 어깨 위로 내려앉고, 흩어진 머리칼 너머로 환히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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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해 마지않는 아내. 어제는 부부의 정을 나눈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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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상 매일 매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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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실제로 그랬다는 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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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용 게임이라고 해도 나름의 수위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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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정을 나눴다는 설정과 함께 아침을 맞는 연출이 있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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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적인 묘사는 전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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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성인용 게임이라는 설정이 확실히 드러나는 지점은 그녀의 복장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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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이 비치며, 그녀 위로 햇빝이 내려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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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여울은 완벽한 나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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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불 아래, 아무런 장식도 걸치지 않은 나신의 실루엣이 스르륵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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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인은 잠시 숨을 들이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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봐도 봐도 익숙해지지 않는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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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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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고 없이 천여울이 몸을 기울여 그의 뺨에 입을 맞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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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술이 닿은 자리에 따뜻한 열기가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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흘러내린 머리카락 너머, 목덜미에는 밤새 남겨진 붉은 자국들이 은근히 드러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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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짝 고개를 숙이자, 그 흔적이 스르르 이불 아래로 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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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일어나요? 밥 해놓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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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말한 후, 그녀는 옷을 걸치며 조심스레 문을 열고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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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이 닫힌 뒤에도, 그녀의 향은 방 안에 잔잔히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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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인은 그 잔향을 가만히 들이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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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그 온기를 느끼며 눈을 감았다가, 이윽고 천천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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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한 지 어느새 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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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깨가 쏟아지는 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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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 가득한 아침 식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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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은 나란히 앉아 대화를 나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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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바쁘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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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좀 늦게 들어올 거야. 먼저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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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산물인 블루베리의 수요는 날이 갈수록 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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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확한 작물을 갖다 줄 차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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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심도시까지 가고, 물량도 전부 팔아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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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하루는 바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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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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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여울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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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은 부끄러운 얼굴로,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그의 눈을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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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중요한 날이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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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인의 손이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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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생각하더니, 곧 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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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나눈 횟수도 분명 많았고, 서로를 아끼는 마음에도 거리낌이 없었지만, 부부에게는 아직 축복이 찾아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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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 사이엔… 아직 아이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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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천여울이 계산한 중요한 날에는 반드시, 하늘이 무너져도, 정을 나누기로 약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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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실제로는 주사위 두 개의 합이 12를 넘지 않았기 때문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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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히 몰입한 이들이 그 사실을 알 길이 없었으니, 부부 모두 근심이 차오를 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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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를 마치고, 정해인은 블루베리 하나를 입에 넣은 뒤, 천여울의 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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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눈을 감고, 손끝의 감촉을 조용히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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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녀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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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심히 다녀오세요, 여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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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짧은 인사가 끝나고, 정해인은 외투를 걸치고 집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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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기찬 하루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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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전혀 활기차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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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장면을 맨정신으로 지켜보고 있는 한 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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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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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채하는 그녀가 할 수 있는 가장 강한 수위의 욕설을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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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윤채하가 주사위를 굴릴 차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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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기대감 따위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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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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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방 안에 있는 여섯 명 중 다섯 명은 이미 게임 속 캐릭터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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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부 완전히 몰입해버렸다. 윤채하만 제외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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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다 자기가 그 삶을 사는 것처럼 행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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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윤채하는 불가능하다, 일정 수준의 몰입은 가능해도 그녀의 눈이 그것을 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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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눈은 윤채하에게 ‘진실’만을 보여줬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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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뮬레이션에 극도로 몰입하는 것을 방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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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윤채하는 천여울과 정해인의 염장질을 맨정신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지켜봐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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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을 차린 것은 그녀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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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저 촌극을 지켜본 것도 그녀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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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리 끝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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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다시 주사위를 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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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이 게임을 빨리 끝낼 생각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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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심 도시의 한복판, 정오의 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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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인은 여느 때처럼 블루베리 상자를 내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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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심 도시의 도매상과 계약이 성사되며, 하루 정도 직접 돕기로 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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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자 뚜껑을 열자, 탐스럽게 익은 푸른빛 열매들이 햇살을 받아 윤을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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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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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양산 하나가 천천히, 인파를 가르며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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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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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는 깔끔하게 정리됐고, 드레스는 소박했지만, 테가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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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으로는 간소한 옷차림이지만, 감춰지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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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눈에 봐도 평민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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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 귀족들은 얼굴에 쓰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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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귀한 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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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녀는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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얌전한 표정, 억지로 평범한 말투를 연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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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리 속에 섞이려는 듯 귀족이 아닌 척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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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인은 그 사실을 단박에 알아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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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기고 있었지만, 숨겨지지 않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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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테이블 위에 쌓인 블루베리 상자를 유심히 바라보다, 슬쩍 한 알을 들어 정해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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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거, 정말 피부에 좋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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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 확인해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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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인이 미소 지으며 대답하자, 하시온은 얼굴을 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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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시온은 공작가의 금지옥엽, 막내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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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지금쯤 집안이 뒤집혔을 것이다. 몰래 나온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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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한 아버지 밑에서 자랐기에, 이렇게 직접적으로 남성의 미소를 받는 것은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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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인은 블루베리를 섬세하게 닦아, 하시온에게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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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시온은 얼굴을 붉히며,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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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맛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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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갖 산해진미를 다 경험해본 그녀였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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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맛은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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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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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인이 미소 지으며 묻자, 하시온은 그를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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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민의 말투였지만, 알 수 없는 자신감과 따뜻한 여유가 배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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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시온은 스스로에게 타이르며, 고개를 돌리려 했지만 시선은 자꾸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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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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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분명 평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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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부터 자유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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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과는 어울릴 수 없는 신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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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도, 어째서인지 마음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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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손이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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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상자만 주세요.… 아, 두 상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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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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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건을 들어 상자를 닦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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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꺼운 손가락, 힘줄이 도드라진 손목, 굳은살이 박인 손바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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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시온은 그 손을 바라보다가, 한 번 더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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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잣말처럼 작고 느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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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냥 여기 있는 거 다 주세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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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주변에 있던 상인들이 고개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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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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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전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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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시온의 얼굴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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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사랑에 눈이 먼 귀족 소녀는, 블루베리를 전부 구매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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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정작 그 남성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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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리 돌아가면 좋아하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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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집에 빨리 돌아갈 생각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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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 유하나는 지난 1년 동안의 원정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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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록부터 시작해, 군단장… 그리고 결국 마왕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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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부 그녀의 검 아래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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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궁에서는 그녀를 최고 기사로 임명하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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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녀는 거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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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하나는 지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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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열심히 달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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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사람으로서의 삶이 그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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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듯 숨 쉬고, 아침이 되면 햇살을 느끼고, 밤이면 조용히 불을 끄고 잠드는 그런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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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왕궁의 최고 기사 자리도 거절하고, 그녀는 지방 마을의 영주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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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만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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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은 황폐하고, 좋지 않은 땅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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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예상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 그녀를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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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칠고 황량할 줄 알았던 땅은 풍요로웠고, 사람들은 인상도 인심도 부드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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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베리 아저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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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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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순간, 저 멀리 아이들 수십 명이 무리를 지어 한 사람에게 달려드는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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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았어 이 녀석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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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장한 체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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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릿빛 피부에 탄탄한 팔뚝, 우수한 외모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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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장 없이 말하면, 제국에서도 손꼽힐 외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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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런 남자는, 아이들 틈에서 한 알 한 알 블루베리를 나눠주며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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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그 모습을 유심히 지켜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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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아무리 소란을 피워도, 그는 한 번도 피곤하거나 짜증 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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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마를 태워주고, 낯선 노래를 불러주며 장난을 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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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하나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아주 오랜만에 느끼는 따뜻한 감정에 가슴이 조용히 일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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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속 상처가… 치유가 되는듯한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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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어느새, 해가 기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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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하나둘씩 집으로 돌아가고 나서야, 유하나는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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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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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웃으며 고개를 돌려 유하나를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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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안녕하세요. 처음 뵙는 얼굴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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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유하나의 복장을 힐끗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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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빛이 잠시 이채를 띠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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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더니, 아무렇지 않게 손바닥을 바지에 슥 닦고는 정중히 손을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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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인입니다. 마을에서 농장 하나 운영하고 있어요. 잘 부탁드립니다, 영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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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하나는 살짝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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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영주가 올 것이라 안다 해도, 이 옷차림만으로 단번에 알아채는 건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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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치도 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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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점,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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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기는 건 무의미해 보였기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악수를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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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끝으로 느껴지는 감각은 너무나도 단단하고, 따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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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도 잘 부탁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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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하나는 그렇게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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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인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주변을 흘긋 둘러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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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시간이 괜찮으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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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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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하나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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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를 대접해드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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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투는 여전히 정중했고, 미소에는 여유가 담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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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의 농부인 정해인으로써는 신임 영주에게 잘 보여야 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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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는 집으로의 초대를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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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더니 곧바로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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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다른 의도는 아닙니다. 그냥… 인사도 드릴 겸. 마을이 아직 익숙하지 않으실 테니까요. 몇 군데 소개도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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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하나는 그 말을 들으며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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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이득을 위해서겠지만, 유하나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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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아 넘어갔다는 느낌이 드는데도… 이상하게 기분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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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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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인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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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이쪽입니다. 길이 조금 울퉁불퉁하니까 조심하시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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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걷는 그의 등을 바라보다, 유하나는 무심코 속으로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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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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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분 뒤 도착한 곳은, 보기보다 훨씬 큰 농가 저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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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 나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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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한마디에, 유하나는 무심결에 멈칫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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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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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선가 아쉬움이 스멀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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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집 안은 조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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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인은 문 안을 들여다보며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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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하러 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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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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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여울은 정해인이 늦게 올 것을 예상해 교회에서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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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부부에게 축복을 내려주세요.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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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이군요. 사실, 요리는 제가 조금 더 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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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인은 별일 아니라는 듯 웃으며 방 안으로 그녀를 안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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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지나지 않아, 식탁에는 갓 만든 음식들이 하나둘 차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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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두 사람은 마주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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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빛이 맴도는 담금주를 따라 들며, 대화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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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아끼는 거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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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인은 웃으며 유리잔을 살짝 들어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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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 너머로 그녀를 보는 눈빛은 따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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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하나는 대화할수록 그에게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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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느꼈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을 편안한 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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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동시에, 그에게 아내가 있다는 사실은 그녀의 마음 어딘가를 계속 두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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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투심이… 점점 커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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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두 사람의 취기가 천천히 올라갔고, 밤은 깊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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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용사인 유하나는 능히 견뎌낼 만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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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취한 건, 마음 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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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정해인은 거의 만취의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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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술버릇은 없었다. 더욱 젠틀해질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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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저도 고민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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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심스러운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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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눈빛은 흐려졌고, 목소리는 한층 낮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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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에 담아둔 이야기를 영주인 유하나에게 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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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전부 제 탓이겠죠.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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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의 부부생활. 아무런 소식이 없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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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그의 고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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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인은 허공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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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하나는 그 말에 귀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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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모든 탓을 자신에게 돌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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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를 배려하는 세세한 부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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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 어딘가가 묘하게 간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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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점점 선을 넘고 싶은 충동이 피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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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하나는 취기가 오를 대로 올랐고, 그녀는 욕심이 많은 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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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조용히, 의미심장하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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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농사가 잘되기 위한 조건이 뭐가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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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러운 질문이었지만, 정해인은 아무렇지 않게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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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눈은 순수했고, 농사 이야기를 할 땐 더없이 진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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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앗이 좋아야죠… 햇빛도, 물도… 그래도 결국, 제일 중요한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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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가락을 하나씩 펴며 나열하던 그는, 결국 마지막에 손을 모으듯 움켜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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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결국엔… 밭이 좋아야합니다. 영양분 많은, 건강한 밭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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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하나는 작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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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그의 손을 천천히 감싸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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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끝이 닿자, 정해인은 눈을 살짝 깜빡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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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고민의 원인은 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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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꼬리를 더 올리며, 유하나는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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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밭이 안 좋은 게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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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하나는 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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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따지자면… 인류 최고의 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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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녀는 갖고 싶은 게 있으면 반드시 가져야 하는 성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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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매력적인 남성 곁에 아내가 여럿 붙어 있는 건 흔한 일이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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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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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정해인은 마지막 말은 듣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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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로 곯아떨어진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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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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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하나는 그 얼굴을 말없이 내려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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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관없었다. 밤은 길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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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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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길은 선반으로 옮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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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엔 액자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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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인과 그의 아내가 작은 텃밭 앞에서, 서로를 바라보며 웃고 있는 사진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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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닦는지 먼지 하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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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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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말없이 일어나, 손수건 하나를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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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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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액자 위에 조용히 덮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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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자수 장식이 박힌 고급 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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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상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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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보, 으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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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인이 무의식중에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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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꼬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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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하나는 조용히,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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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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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천천히 그에게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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