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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 서진혁 : 엑스포지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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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속력으로 달려 돌아온 다크엘프의 마을은 초토화가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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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용에게서 지켜낸 것이 무색할 만큼 처참한 광경이었다. 높이 솟아 있던 탑도 무너져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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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를 벗어난 상황에 심장이 쿵쾅거렸다. 나는 다급히 마력을 퍼트려 엘레노어를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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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상황은 지금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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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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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용이 다루던 가지를 그림자로 다시 엮어낸 듯한 검은 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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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의 등을 꿰뚫고 솟아나 있는 그것에선 기묘한 마력의 흐름이 느껴졌다. 어딘가 익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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쐐기는 저 멀리 알 수 없는 검은 덩어리로부터 뻗어나와 있었다. 덩어리는 꿈틀거리며 형태를 갖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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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라고 칭하기에는 다소 구성요소가 부족한, 너저분한 진흙 덩어리로 빚은 듯한 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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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죽지 않는다. 결코 멸하지 않는다.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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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인지 뭔지 모를 구멍에서 새어나오는 소리가 그것의 정체를 알려주었다. 그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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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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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형체가 쐐기를 뽑아냈다. 엘레노어는 휘청거리며 땅에 엎어졌다. 피가 흥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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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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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좀처럼 불러본 적이 없었던 엘레노어의 이름을 불렀다. 대답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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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겁지겁 인벤토리를 열어 포션을 꺼내고, 엘레노어의 상처에 들이부었다. 아직 살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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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명백하게 상태가 나쁘다. 출혈량이 너무 많다. 이건 상처가 아물어도- 아냐, 생각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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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 차려, 야, 네가 이렇게, 이런 식으로 죽으면 어쩌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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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다시 포션을 들이붓고, 그리고, 엘레노어의 상처를, 이걸, 어떡해야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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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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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가 흐릿하게 눈뜨며 나를 불렀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이어지는 다른 목소리에 묻히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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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모든 엘프의 왕, 별을 건너 새 엘프의 지도자가 될 자, 죽음과 멸망을 거부하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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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음과 뒤섞인 육성, 형태가 저런 꼴이라서 그런지 목소리가 유난히 귀에 거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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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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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절주절 떠드는 소리를 듣다 보니, 세게 악문 이빨이 이상한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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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욕망의 총체다, 누구나 꿈꾸는 불사의 소망을 대변하는 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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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리 닥쳐, 씨발 새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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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은 결코 쇠하지 않는다, 네놈 따위의 검은 내게 닿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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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거리는 추한 진흙덩이를 보며 검을 뽑았다. 놈은 촉수처럼 휘어지는 팔을 휘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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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속도며 기세가 모두 심상치 않았다. 나는 바로 [혼신]을 발동해 그것을 받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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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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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히 부딪히기만 했을 뿐인데, 어마어마한 충격이 몸에 닥쳐 뒤로 나동그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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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내려두었던 엘레노어의 몸 역시 그것에 휘말려 굴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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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을 쥐었던 손아귀가 찢어져 피가 흐르고 있다. 말도 안 돼, 이젠 월드 보스도 뭣도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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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왜 항상…왜 맨날, 왜 자꾸, 왜 너 같은 새끼가!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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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왜 나한테만 늘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새끼들이 나타난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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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든 보스고, 월드 보스고, 솔플로는 못 깨는 기믹 던전이고, 왜 죄다 내 앞에만 나타나고 지랄이냔 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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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강해졌는데도 항상 더 강한 놈이 나타나서 앞을 가로막는다. 언제나, 항상, 나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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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적당히 하라고, 이 씨발 새끼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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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에 반응해 마력이 요동친다. 파도치는 마력은 줄줄 새나갈 뿐, 아무런 힘도 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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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력강화만 할 수 있었으면, 펜던트가 아직 고장 나지 않았더라면, 그냥 내가 솔플러가 아니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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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기만 하면 어떻게든 할 수 있었을 텐데, 서진혁 이 병신같은 새끼는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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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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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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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또 한 번 쏘아진 촉수가 방패 위를 때리며, 어마어마한 충격이 몸에 닥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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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전처럼 나가떨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곁에 있던 엘레노어의 몸은 또다시 휘말려 밀려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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좆같다. 마력강화도 못 하는 상태로 이길 수 있는 놈이 아니다. 이 새끼도 뒤지게 세다, 씨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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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바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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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을 집어넣고 피를 흘리고 있는 엘레노어의 몸을 둘러업었다. 일단은, 여기서 벗어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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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상황인지 하나도 모르겠고, 이길 수 있는 상대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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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일단 엘레노어를 이대로 둘 수는 없었다. 이러다간 분명 휘말려서 죽고 말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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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대로 곧장 바깥을 향해 달렸다. 다행이게도 저놈의 공격은 그렇게 멀리까지 닿지 않는 듯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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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몇 번 공격이 스쳐서 위험했지만, 이동속도 역시 느린 모양인지 금방 거리를 벌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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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쾅! 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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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뒤쫓던 진흙 괴물은 다크엘프 마을을 마구잡이로 파괴하기 시작했고, 나는 그 틈에 더 멀리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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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빛이 자라는 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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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도달한 곳은, 언젠가 요정과 함께 춤추었던- 내 가슴에 묘한 울림을 만들었던 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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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추억이 깃들어 있다고도 말할 수 있는 그 장소에서, 나는 죽어가는 엘레노어를 품에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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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엘레노어는 느릿하게 눈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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꿰뚫렸던 자리가 조금은 아물었다. 하지만 완전히 나을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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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하다. 내가 몇 번이나 빈사에서 살아나올 수 있었던 건, 포션의 성능이 아니라 재생 능력 덕분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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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층 수준에서 구할 수 있는 포션은 결손 수준의 상처는 수복하지 못한다. 이렇게 큰 상처 역시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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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여, 왜 돌아왔나. 아직 퀘스트가 끝나지 않았던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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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개를 저었다. 에픽 퀘스트는 분명 완료되었다. 실제로 나는 층을 떠나기 직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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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 인사는 따로 하지 않기로 했을 텐데, 왜 돌아와서……또 다쳐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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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몸에 뻥 뚫린 구멍은 보이지도 않는지, 대수롭지도 않은 내 상처를 걱정하는 엘레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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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말에 뭐라고 대답할 수 없었다. 나도 내가 왜 돌아왔는지 모르겠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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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엘프 마을에 무슨 일이 생기건 이젠 내 알 바가 아니다. 어차피 퀘스트는 끝났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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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여기 있는 것들은 죄다 NPC니까, 자아 없는 깡통대가리에 불과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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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올 이유 따위는 전혀 없다고,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었는데- 몸이 멋대로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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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그렇구나…우리를 걱정해 준 거지? 가슴이 그대를 움직인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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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의 손이 내 가슴을 짚었다. 나도 같은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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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옛저녁에 내버리기로 해 놓고, 아직도 버리지 못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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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을 올라야 한다는 의지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마음이 내 발길을 돌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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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심하다, 한심해, 서진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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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욕을 봤으면서도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다니. 대체 몇 번을 더 겪어야 완전히 버릴 수 있는 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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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빌어먹을, 이쯤 되면 인정할 수밖에 없다. 자신을 속이는 일이란 왜 이렇게도 어려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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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것을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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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찮은 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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쌓인 습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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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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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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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주하는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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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버리고 또 버린 끝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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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후, 저 망령에게 감사해야겠는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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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해서도 버릴 수 없는 것만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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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준비했던 말을 그대에게 남길 기회가 생겼으니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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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는 죽음에 둘러싸이고 있음에도, 분명하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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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퍼하지 마라, 그대여. 나는 이미 오래전에 죽어 있었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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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웃음 앞에서, 아무 말도 꺼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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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간 침묵이 흐르고, 엘레노어는 천천히 내 뺨을 쓰다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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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히려 지금에 만족한다. 누구도 모르게 조용히 깡통이 되는 게 아니라, 이렇게 그대 품에 안겨서 떠나갈 수 있게 되지 않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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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의 손은 격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차갑기까지 했다, 이미 시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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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신세 한탄을 하려는 건 아니다. 그거라면 이미 충분히 했지. 그냥, 그대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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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가 산 자에게 무언가를 전할 수 있음이 기쁘다며, 엘레노어는 한 번 더 눈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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뺨을 쓰다듬는 손도, 힘겹게 지어 보이는 웃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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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나를 달래기 위한 몸짓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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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여기로 오면 안 됐어. 의지를 관철할 셈이었다면, 눈길도 주지 않고 다음 층으로 올라갔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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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는 뒤이어 내게 이유를 물었다. 왜 여기로 달려왔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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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지와 상반되는 마음이 몸을 움직인 것이라고, 그 대답을 이미 제 입으로 말해 놓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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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떠듬떠듬 대답했다. 마음 때문이라고, 내 나약함이 끝내 버리지 못한 그것 때문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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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심한 인간쓰레기, 앰창인생 서진혁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기 때문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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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는 내가 토해내는 말을 듣고는 살짝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내 뺨을 살짝 두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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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손에 힘이 안 들어가는구나. 힘껏 때려 줄 셈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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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손은 다시금 내 뺨을 쓰다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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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 않다, 그대는 틀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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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망하고자 하는 이의 손길과 목소리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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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대의 기억과 심상을 모두 들여다보았어. 그래서, 지금 그대에게 어떤 말이 필요한 줄도 알고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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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는 그렇게 말하고는, 피를 뚝뚝 흘리는 몸을 억지로 일으켜- 내 어깨를 감싸고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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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잘못하지 않았어. 그대는 나약하지도, 한심하지도 않아. 무엇도 그대의 탓이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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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욱, 하고. 약하지만 확실하게, 엘레노어가 나를 안고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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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한 번도 죽음 따위를 원한 적이 없었다. 지금도 이렇게, 마음에 전해져 오는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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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이상했다. 속이 울렁거렸다. 그냥 몇 마디 말을 들었을 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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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할 것 같다. 힘겹게 침을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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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삼켜 내니, 다른 쪽에서 흘러나온다. 뺨이 뜨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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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용서받고 싶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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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것, 내가 가장 먼저 버린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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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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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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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고통 속에서도 쉽게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투명한 눈물이, 왜 지금 와서 모습을 보이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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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알아먹지도 못할 말에 눈물 따위가 흐르는지, 하나도 이해가 안 되고- 이해하지 못하는 자신이 한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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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는 그런 나를 천천히 토닥였다. 그러면서 조금씩 속삭였다. 네 잘못이 아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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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가, 뭐가…무슨 소리야, 그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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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힘겹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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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의 잘못이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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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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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잘못하지 않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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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물어도 대답해주지 않는다. 뭘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다. 하나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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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어머니를 죽이지 않았다. 그대의 잘못이 아니야. 그대가 나약하기 때문이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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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의 손이 이번에는 아물어 가는 내 상처를 쓰다듬었다. 따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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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의 기억을 모두 보았다고 했지 않나. 그대가 얼마나 자신을 괴롭히는지, 보지 못했다고 생각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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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는 내 몸 이곳저곳을 한 번씩 쓰다듬었다. 평소에 하던 추행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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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손을 댄 자리는 모두, 내가 내성을 키우기 위해 반복해서 자해했던 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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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을 받고 싶었겠지, 벌을 받고 나면 용서도 받을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대는 결코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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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겹게 눈을 돌렸던 진심이 눈앞에 들이밀어 졌다. 그건, 그건 분명 맞는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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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한 거 아닌가. 대체 누가 나를 용서해 줄 수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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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용서할 자격이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 그건 죽은 엄마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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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엄마를 죽였다. 나 때문에 엄마가 죽었다. 엄마가 죽을 때까지, 나는 핑계만 대고 아무것도 안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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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실을 세상에서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나다. 그렇기에, 나는 결코 나를 용서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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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결코 자신을 살필 수 없다. 돌아본다고 한들 보이는 건 ‘과거의 자신’이라는 타인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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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성하며 사는 이는 더욱 그렇다. 그런 이들은 언제나 자신을 돌아보고, 흠결을 찾아 고쳐내려 하니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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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감히 말하겠다. 그대의 그것은 결코 흠결이 아니야. 헷갈리지 마라, 그대의 행동은 정말 옳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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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가 말하는 내 행동이란 무엇일까. 곰곰이 고민해 봐도 좀처럼 답은 나오질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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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의 어머니는 무엇을 바라고 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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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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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가 자신을 괴롭히며, 죽음에 뛰어들기를 바라고 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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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는 내 과거를 보았다. 내가 살아온 모든 과거, 그 긴 필름에 얼룩처럼 남아 있는 우리 엄마의 모습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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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내가 어딜 가서든 기죽지 않기를 바랐다. 엄마는 내가 항상 좋은 것만 보고, 좋은 것만 누리기를 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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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에 자신을 깎아, 모든 좋은 것을 내게 주었다. 내가 탑에 갇혀 썩어갈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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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나를 위해 백방으로 도움을 요청했고, 나를 위해 뛰다가, 과로로 죽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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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 그대를 원망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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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개를 저었다. 엄마가 그랬을 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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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방구석에 처박혀 아무것도 안 하는 백수 새끼여도, 엄마는 나를 미련할 정도로 사랑해줬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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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았다. 나를 용서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엄마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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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하면, 애초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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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나를 탓하지 않았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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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생각이 입 밖으로 나왔다. 말과 함께 눈물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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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말했다. 그만 자신을 용서해 주라고, 더 이상 자신을 괴롭히지 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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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러기에는 내 속에서 부글부글 끓는 이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다. 이걸, 나는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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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 봐라, 그대의 어머니는 과연 무엇을 원망했을까. 적어도 그대는 아닐 게 당연하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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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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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대는 이미 알고 있다. 공교롭게도, 나 역시 그것이 원망스럽구나.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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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를 스치는 단어가 하나 있었다. 내가 오래전에 시야에서 배제했던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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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대의 가슴 속에서 끓는 그 감정이, 처음부터 그것을 향해 있었다는 것도 알고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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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엘레노어는 나에게 그 감정의 이름을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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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로, 엘레노어는 보다 직설적으로 처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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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한 번 깨닫고 나니, 엘레노어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도 금방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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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슬슬……정말로 끝인 모양이다. 그래도 시간은 충분했구나, 평소에 단련해 두길 잘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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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의 생명이 한계에 달했음을 우리는 서로 느낄 수 있었다. 이 호수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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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트 엘프의 비술로 연결되었던 고리가, 감정을 공유하며 다시금 짙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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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눈물 자국은 이제 지우고- 옳지, 전보다 눈빛이 더 멋있어졌구나. 내 취향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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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말하는 엘레노어의 옅은 망설임이 느껴졌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잠시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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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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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능적인 농담을 툭툭 던져대던 모습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수줍은 입맞춤이 내 입술에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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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백하던 엘레노어의 얼굴이 살짝 붉게 물들었다. 그래, 뭐, 경험 많은 척해도 결국 그렇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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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부터 약혼자가 정해져서, 누굴 만날 자유도 없던 녀석이 연애를 따로 해 봤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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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마지막이니까…꼭 해보고 싶었다. 미안하구나, 그동안 나이도 한참 많은 게 집적거려서 귀찮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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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혀 그렇지 않다. 그동안 벽을 세웠던 이유가 그게 아니라는 것은,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을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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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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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하고 있는지는 생생히 느껴졌기에, 나는 곧바로 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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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노어의 목을 받치고, 조심스레 고개를 숙여- 이번에는 내 쪽에서 입을 맞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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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후, 역시 내가 고른 남자라니까. 마음에 쏙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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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유로운 척 말하고 있지만, 얼마나 쑥스러워하고 있는지도 잘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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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굳이 거창한 정신 연결 따위가 없어도- 저 새빨갛게 물든 표정을 보면 알 수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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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엘레노어의 손끝이 하얗게 물들기 시작했다. 몬스터가 죽을 때 나타나는 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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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딱 맞췄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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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서히 말단부터 사라져 가는 엘레노어는, 마지막의 마지막에- 살짝 눈물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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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이왕이면……키스 다음까지 진도를 빼 보고 싶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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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을 마지막으로, 엘레노어의 육체는 완전히 소멸하고- 그 혼도 어디론가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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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소원을 들어주지 못했다는 한탄 따위는 하지 않는다. 분명 마음을 통해 전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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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적 달성 :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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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거, 다음에 만났을 때 하면 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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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적 보상 ‘강철의 혼’ 을 획득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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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흙 덩어리처럼 생긴 하이엘프의 왕, 죽음에서 돌아온 망령은 아직도 마을을 헤집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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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검과 방패를 다시 착용하고, 차분한 걸음으로 놈이 날뛰고 있는 그곳까지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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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꽁지가 빠지게 도망치더니 새삼 실성했나, 어리석은 인간족 검사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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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사이에 다른 이들의 생명력을 빨아먹은 것인지, 전음에서 어마어마한 마력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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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번이나 하는 말이지만, 역시 9층의 스펙은 아득히 뛰어넘은 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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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놈은 과연 어떤 맥락에서 튀어나왔고, 어떤 배경설정이 있길래, 이런 스펙을 가진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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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관심은 없다. 버려두고 떠나도 상관없는 적이지만, 나는 맞서기를 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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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고 약한 인간족이여, 그 가냘픈 검으로 나를- 불사의 욕망을 죽일 수 있을 것 같으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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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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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호라, 무언가 각오를 다진 모양이지. 각오 따위 무한한 욕망 앞에서 하찮은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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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령은 주절주절 계속해서 떠들었다. 어디 그 각오를 한번 말해보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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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낀 것은 많았지만, 새삼스레 거창한 각오 같은 걸 다지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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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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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탑에 들어온 이후로- 항상 무언가에 화가 나 있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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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가 향하는 방향은 그때그때 조금씩 달랐고, 그 이유도 조금씩 달랐으며, 개중 분명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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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지금은 확실히 알 수 있다. 내 분노가 진정 무엇을 향하고 있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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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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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검을 뽑았다. 눈앞의 적을 바라보았다. 무척이나 강한 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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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까지 만난 그 어떤 적보다 강할지도 모른다. 마력강화를 쓸 수 없는 상태에서 맞설 수 있을만한 상대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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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마력강화를 발동시켜주는 펜던트는 완전히 망가져 힘을 잃었다. 하지만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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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그런 건 필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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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르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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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마력이 폭발하며 막혀 있던 길을 질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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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력은 주인의 감정과 의지에 크게 영향받기에, 내 모순된 마음으로는 마력강화를 쓸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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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더 이상은 아니다. 이제는 헷갈리지 않는다. 엘레노어가 가르쳐 준 것이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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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괴롭게 만드는 것, 엘레노어를 속박하는 것, 우리 엄마를 죽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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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는 환경과 타인을 탓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탓에,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던 나의 진정한 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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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련의 탑 그 자체야말로, 나의 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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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방법을 써야 하는지는 모르겠다. 방법이 존재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가능한 일인지 아닌지조차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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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어쨌든 할 거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빌어먹을 탑을 깨부수고, 모든 대가를 치르게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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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지는 화살이고, 마음은 불꽃이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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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탑을 쳐부수고 그 너머로 나아갈 그날까지 절대 멈추지 않겠다. 이게 나의 화살, 스스로 맹세한 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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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내 화살에 힘을 실어줄 불꽃은- 저놈이 묻고 있는 각오 따위가 아니라 가벼운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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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거유 미녀 다크엘프랑 키스 다음까지 진도를 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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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거세했던 욕망이 불꽃이 되었고, 이제 내 마음과 의지는 같은 방향을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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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려면 너 같은 좆밥한테 막히면 안 되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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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력으로 이룬 마력강화의 힘으로, 날아드는 망령의 공격을 모조리 쳐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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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미 어지간한 저층 랭커 이상까지 성장했지만, 이 탑 자체가 목표인 이상 그걸로는 부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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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보다 훨씬 더 강해져야 한다. 그걸 위한 방법은 이미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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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설이지 않고 끊임없이 나아간다. 자신을 학대하며 뒤따라오는 성장의 쾌감만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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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쾌감을 쫓아, 누구도 따라오지 못할 만큼 가장 앞으로, 그리고 가장 높은 곳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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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과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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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휘두른 검에서 방출된 마력이 망령의 좌반신을 통째로 으깨버리는 것을 보며,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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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탑의 천장을 꿰뚫고, 그 너머까지 솟아오르는 불화살이 되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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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스트 완료 : 다크엘프의 서 - 최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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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행상황에 따라 랭크 및 보상을 결정합니다……평가 완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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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크 : S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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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픽 아이템 : ‘엘레노어의 영혼’을 획득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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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아이템은 당신에게 영구히 귀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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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련의 탑이 당신을 부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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